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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12-04)


새롭게 임할 하나님 나라를 준비

누가복음 12장 48-59절


 

성도의 삶은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주님의 뜻을 따르며,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와 자원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책임을 다함으로써 주님의 사역에 기여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이 가까워짐에 따라 더욱 경각심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결국, 우리의 삶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 경각심을 위해 미래의 심판(46-48)을 강조하신 예수님께서는 심판이 재림 이전에 ‘분리’로 나타날 것을 설명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러 오셨고 죽음의 세례 이후에 심판으로 인한 분리가 본격화될 것을 예고하십니다(49-50). 그분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구원과 심판을 받는 사람들 간에 분리가 일어날 것입니다(51-53). 심판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구원의 시대를 지금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54-59).

 

불을 던지러 오신 예수님(49-50)

신앙의 길이 때로는 어려움과 갈등을 동반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지키고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는 교훈을 줍니다. 또한, 우리는 예수님의 사명을 이해하고 그에 따른 준비가 필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 믿음의 여정은 불의 시험을 통해 더욱 단단해지는 과정임을 상기시킵니다.

 

49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50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49-50)

 

예수님은 앞 단락(46-48)에서 심판이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46) 임할 것을 예고하셨는데, 이제는 ‘불을 땅에 던지러’ 왔다고 선언하십니다(49). 이전 본문(3:9,17; 9:54)에서 불은 심판의 의미로 사용됐고, 구약의 여러 본문에서도 심판과 관련이 있습니다. 불은 심판과 더불어 정화하는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불이 땅에 던져지면 악인들과 의인들 간의 분리가 일어납니다(3:16-17). 악인들에게서 분리된 의인들은 불로 정화된 자들입니다. 정화된 의인들은 예수님이 전하신 복음에 긍정적인 태도로 반응하고 그를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역설적으로 불이 던져지면 악인들은 심판에 이르고, 죄인으로서 예수의 복음을 영접하는 사람들은 정화됩니다. 하지만 하늘에서 던져진 불이 온 땅을 태우기 시작하는 것과 같은 현상이 아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죽음의 세례(50)를 통해 땅에 심판이 주어질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난해 구절인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는 심판의 실현을 의미하기보다 심판(과 정화)에 대한 소망을 의미합니다. 이 심판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실현될 것이며, 예수께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에게는 정화, 곧 구원이 됩니다.

불의 이미지는 자연스럽게 50절의 ‘세례’로 이어집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서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3:16)라고 선포했는데, 불로 세례를 주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세례를 받으실 것입니다. 이 세례는 예수님의 죽음을 상징합니다. 십자가 죽음은 그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심판을, 그를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는 구원을 선포하는 두 가지 결과로 이어질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목표로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고 있다고 예고하셨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변모 사건에서는 ‘별세’(엑소도스= 출애굽),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야 하는 결심을 말씀하실 때는 죽음과 부활을 전제로 한 ‘승천’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예수님의 목표가 예루살렘에서의 죽음인 것을 알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뜻하는 세례에 대해 ‘그것이 이뤄지기까지’(직역)라는 표현에서 ‘목적’(텔로스)의 동사형(텔레오, 이루다)을 사용하십니다. 이는 십자가의 죽음이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준비하신 목적이고 우연한 사건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목적인 죽음을 이루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해 묵묵히 걷고 계십니다. 개역개정에 ‘답답함’으로 번역된 ‘쉬네코’는 ‘사로잡히다’ 또는 ‘집중하다’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예. 에스드라2서 16:10). 목표점을 향해 전진하는 예수님의 의지를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통을 알면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목표와 뜻에 집중하십니다. 왜냐하면 죽음의 세례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목표, 즉 구원의 목적이 성취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원의 길을 위해 목표점인 십자가를 향해 묵묵히 걸어가시고 목표를 완수하셨듯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십자가의 복음에 집중해야 합니다.

 

분리를 일으키러 왔다(51-53)

신앙인들이 현재의 상황을 올바르게 판단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우선시해야 함을 일깨워 줍니다. 믿음의 길은 때로 고난을 동반하지만, 진리를 따르는 것이 궁극적인 평화를 가져온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각자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실천하는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51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52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53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51-53)

 

51-53절은 예수님께서 가지고 오신 하나님 나라 복음에 대한 태도에 따라 분리가 일어날 것을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분리를 위해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분리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과 거부하는 자들의 분리를 말합니다. 믿는 자들은 구원의 선물을 받고, 믿지 않는 자들은 심판을 받습니다. 이미 시므온은 마리아에게 아들 예수님의 사역으로 이스라엘에 분리가 일어날 것을 예고했습니다(2:34).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훙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시므온 자신은 ‘주의 구원’을 보았고 예수님을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2:30-32)이라고 말했지만, 예수님을 배척하는 사람들과 자신처럼 구원의 빛을 보게 되는 사람들로 나뉠 것을 예언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에 대한 태도에 따라 심지어 가족도 분리될 것입니다(52-53). 가족은 가장 끈끈한 결속력과 친밀함을 유지하는 공동체입니다. 가족도 예수님에 대한 태도에 따라 양쪽으로 갈라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가지고 온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점 때문에 생기는 분리를 가장 기본적인 숫자인 다섯(52)과 셋(53)으로 강조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세 명과 두명, 두 명과 세 명이 맞서는 장면을 예로 드십니다. 다섯 손가락처럼 다섯 명의 가족 구성원은 결속력을 돋보이게 만드는 숫자입니다. 또한 결혼한 자녀를 포함하는 가족의 경우에는 부자, 모녀, 고부가 예수님 때문에 갈등하게 됩니다. 이처럼 아무리 결속력이 굳건하더라도 예수님에 대한 태도가 같을 수 없어 갈등이 생깁니다. 분리가 일어나는 시간과 관련해서 52절은 미래 시제(에손타이…디아메메리스메노이, 분리될 것이다)와 ‘이제부터’를 사용합니다. 누가복음에서 ‘이제부터’는 가까운 미래를 포함하고(1:48; 5:10; 22:18,69) ‘세례’(50)가 죽음을 의미하는 점을 고려하면,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 이후에 본격적인 분리가 땅에 일어날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사역 기간에도 분리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당연히 예수님의 복음이 분열을 조장하거나 분쟁을 촉구하진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위해 오셨고(1:79;2:14;7:50;8:48), 제자들의 주된 사명도 평화를 전하는 것입니다(10:5-6). 그럼에도 평화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만 예수님의 평화가 임합니다. 예수님의 평화는 모두가 아니라 믿는 자들만 경험하는 것이므로 양쪽의 분리가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분리의 고통은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이 겪는 삶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십자가의 죽음(세례)을 통해 주어지는 구원의 선물을 세상에 삶으로 변증함으로써 사람들을 분리의 건너편에 내버려 두지 않고 구원의 길로 초대하는 사명에 집중해야 합니다.

 

이 시대를 분간하지 못하느냐(54-59)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일상에서 영적 민감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이 있게 다루어야 합니다. 이러한 준비와 화해는 우리의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만듭니다. 갈등을 피하고 화해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 앞에서의 삶이 우리의 신앙을 강화하는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54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55남풍이 부는 것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 56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57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하느냐 58네가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그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 가고 재판장이 너를 옥졸에게 넘겨 주어 옥졸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59네게 이르노니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고서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하시니라(58-59)

 

사람들은 거주하는 지역에서 발생하는 기상 현상에 대한 상식을 알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에서 서풍은 지중해 지역에서 습기를 싣고 오기 때문에, 사람들은 구름이 서쪽에서 몰려오면 폭풍우나 소나기가 내릴 것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54). 남풍이 불어오면 남쪽에 위치한 네게브 사막에서 발생한 뜨거운 열기로 고생할 것을 예상합니다(55). 이처럼 팔레스타인에 사는 사람이라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지 않더라도 기상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가 예수님의 활동을 통해 나타나는 것을 해석하지 못합니다. 무리가 해석하지 못하는 원인은 예수님께서 ‘위선자들’로 칭하시는 부분에 암시됩니다. 기본적으로 위선은 불일치 또는 부조화를 의미하는 점에서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첫째, 무리는 날씨처럼 예수님의 행위와 말씀으로 임한 나라를 쉽게 분별할 수 있는데도 의도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둘째, 무리는 예수님께서 가지고 오신 나라를 스스로 해석할 수 있는데도 생각보다 무지합니다. 어느 경우든 간에 심판의 책임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분간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하느냐!’라며 결단을 촉구하십니다(57). 결단을 위해서도 앞의 경우처럼 상식적인 지식에 대해 언급하십니다. 만일 고발을 당한 경우 재판을 받기 전에 화해를 시도해야 합니다(58). 화해하지 못한 채 소송에서 지게 되면 한 푼도 남김없이 다 갚기 전에는 옥에서 나올 수 없습니다(59). 소송에서 패할 것이 예견될 때 먼저 화해를 시도해야 하는 것은 전문가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판단할 수 있는 상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심판을 집행하실 재판관이시기에, 무리는 형벌에 처해지기 전에 하나님과 화해하는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지금 하나님과의 화해를 거부하면 영원히 화해할 기회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책임과 자원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활용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이 구절은 우리가 각자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영적 민감성을 유지해야 함을 일깨워 줍니다. 갈등을 피하고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태도를 가지는 것이 필수적이며, 이를 통해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경고를 마음에 새기며 준비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이 되기를 기도하며, 이러한 삶이 믿음을 더욱 견고히 하는 기반이 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최우선으로 삼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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