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13-01)
재난과 심판 그리고 회개
누가복음 13장 1-9절
논농사를 보면 모내기하기 전에 물을 잡아놓고 논두렁 붙이는 작업을 합니다. 논두렁 주변을 삽으로 깝니다. 전년에 쥐나 뱀 그리고 곤충들이 논두렁에 구멍을 내놓은 것을 막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구멍 난 부분으로 물이 세기 시작해서 나중에 둑이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당신의 삶 속에 둑을 무너뜨리는 죄의 구멍은 없습니까? 죄가 크든 작든 주님께 회개하고 돌아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의 전체가 무너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 본문에서는 다른 사람의 불행을 그들의 죄악이라고 생각한 유대인들을 통해 회개의 기회를 설명합니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보면서 과원지기가 1년만 더 기회를 줄 것처럼 열매 없는 이스라엘이 회개할 기회는 제한됩니다. 그들의 상태는 안식일의 의미조차도 제대로 모른 상태였습니다.
최근에 일어난 비극적인 두 사건(1-5)
주변에서 갑자기 재난이나 사고로 어려움을 당한 소식을 듣습니다. 때로는 그 사람을 향해 죄의 대가로 심판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범죄했거나 더 큰 죄를 졌다고 금방 심판이 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 온전한 삶을 살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1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 2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3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4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5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1-5)
유대인들은 어떤 불행이나 급작스런 죽음을 그 사람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재앙이 닥치지 않거나 일이 잘 풀린다고 해서 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지적할 수 있는 것만으로 자신은 선한 사람이고, 또는 작은 잘못이기 때문에 넘어가려 할 수 있습니다. 2-3절은 갈릴리 사람들이 겪은 비국을, 4절은 예루살렘 사람들이 겪은 비극을 다룹니다.
(1) 갈릴리 사람들에게 일어난 비극(1-3)
‘그 때’(1)는 앞 장과 연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를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최근에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에 대한 해석을 요청합니다(1).
이 비극은 누가복음 외에는 신약의 다른 책과 유대 문헌에 기록되지 않은 것입니다. 총독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이 섞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로마 총독은 사마리아의 가이사랴에 머물다가 명절이 되면 치안을 위해 예루살렘의 안토니아 요새에 머물렀습니다. 요새에서 성전 뜰을 감시할 수 있었습니다. 제물은 예루살렘의 성전에서만 드릴 수 있었습니다. 유월절을 맞아 갈릴리에서 올라온 어떤 사람들이 성전 뜰에서 제물을 드리던 중 빌라도가 군인들을 시켜 살해한 사건으로 보입니다. 희생자들은 유월절의 희생 제물로 바쳐진 짐승들처럼 살육을 당했습니다. 예기치 못한 상태에서 갑자기 살해당했습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성전에서 제물을 드리던 중에 죽은 사건이므로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예수님께 질문을 던진 사람들은 희생자들과 자신들을 명확히 구분하면서 그들의 비극이 왜 일어났는지 해석을 요청합니다. 그들은 희생자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죄를 많이 지었기 때문에 그런 비극을 맞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욥의 친구들이 내린 결론과 같습니다(참조. 욥 4:7;8:20;22; 요 9:1-12).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과 다르게 해석하십니다. 희생당한 갈릴리 사람들이 다른 갈릴리 사람들에 비해 죄를 많이 지어 그런 비극을 맞이한 것이 아닙니다(2). 물론 자신의 잘못으로 비극의 대상이 되는 경우는 많습니다. 죄 때문에 살아 있는 동안 심판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의 희생자들의 경우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비극을 맞았다는 해석을 분명히 거부하십니다. 굳이 따지자면 식민지백성을 살육한 빌라도의 국가 폭력에 의한 비극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나머지 사람들이 회개하는 데 있습니다.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3). 회개하지 않을 때 맞이할 심판을 경고하십니다.
(2)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일어난 비극(4-5)
3절과 5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두 비극을 해석하면서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최근에 일어난 비극의 이야기를 활용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하도록 강조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번에 걸쳐 ‘모두’(2,3,4,5)를 언급하심으로써 회개하지 않을 때, 누구든지 심판을 받게 됨을 알리십니다. 갈릴리 사람이든 예루살렘 사람이든 상관없이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이 임할 것입니다. 심판이 내려지는 시기는 본문에 명시되지 않습니다. 두 비극이 갑자기 임한 것처럼 심판이 갑자기 다가오는 것은 분명합니다. 심판은 개인의 생애 가운데, 사후에, 인자의 재림 때 집행됩니다.
본문의 경고는 사후나 재림보다는 개인의 생애 가운데 갑자기 닥치는 심판을 의도하는 것 같습니다. 심판이 임하기 전에 결정적으로 회개해야 하고, 무화과나무가 지속적으로 열매를 맺는 것처럼 지속적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회개로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어야 하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날마다 관계를 회복하는 회개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예루살렘 사람들의 비극을 예로 들어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열여덟 명이 죽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4). 이 사건 역시 누가복음에만 기록됩니다. 실로암 연못 근처에 성벽이 있었고 벽이 만나는 곳에 망대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번 비극 역시 희생자들의 죄로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비극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은 단호합니다. 자동적으로 또는 습관적으로 비극의 원인을 희생자에게서 찾는 작업을 중단해야 합니다.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5). 예수님께서는 이 사건을 회개해야 하는 근거로 사용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사건의 해석을 통해 비극과 심판에 대한 교훈을 가르치십니다. 첫째, 비극은 더 많은 죄의 결과가 아닙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희생자의 죄를 비극의 첫째 원인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성전과 같은 종교 기관에서 일어난 비극의 경우 하나님의 징벌로 해석하기 쉽습니다. 자연재해를 당한 경우도 일반사람들보다 더 큰 죄가 비극을 초래한 것으로 단정하기 쉽습니다. 갈릴리 사람들과 예루살렘 사람들이 죽은 비극의 원인은 분명히 있겠지만, 희생자들의 죄가 사고를 당하지 않은 사람들 또는 생존한 사람들의 죄보다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의 두 사건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은 어떤 점에서 폭력과 인재에 의해 희생을 당했고, 그들의 유가족이 위로와 지원을 받아야 하는 경우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죄와 비극은 무관하다는 논리 역시 거부하십니다.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은 임합니다. 희생자들이 비극을 겪은 것처럼 비극은 언제든지 닥칠 수 있습니다. 가장 큰 비극은 회개하지 않은 죄 때문에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많은 기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언젠가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징계를 뜻하는 심판이 비껴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필수입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6-9)
다른 성도들이 불행한 일을 당하며 마치 상대방이 죄로 인한 심판으로 매도할 때가 있습니다. 대부분 자신의 실수는 작게 보고 다른 사람들은 크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잘못된 일들을 보면서 자신의 거울로 삼을 줄 알아야 합니다. 심판은 더 큰 죄인에게 먼저 임하는 것이 아니기에, 타인의 재앙이나 불행에서 그들의 죄를 찾기보다는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6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7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8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9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6-9)
1-5절에서 회개를 강조하신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로 주어진 시간 동안 회개의 열매를 맺도록 경고하십니다. 씨가 뿌려진 토양의 비유에서 좋은 땅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8:15) 회개는 열매와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해 회개의 필요성을 강조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사실로 비유는 시작합니다(6). 안타깝게도 주인은 무화과나무에서 기대했던 열매를 얻지 못했습니다. 주인은 포도원지기에게 3년 동안이나 무화과나무 열매를 구했으나 얻지 못했다고 말합니다(7). 3년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기간을 가리키는 숫자가 아닙니다. 충분한 기회를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주인은 나무에 대해 매우 관대한 사람입니다. 인내할 만큼 인내했으니 나무를 제거하고 땅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주인의 평가에 따르면 열매 맺지 못한 책임은 주인이나 포도원지기가 아니라 나무에 있습니다.
이 나무의 문제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과 토양을 망치는 것입니다. 무화과가 없는 무화과나무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잘라내는 것이 농부의 자연스러운 판단입니다.
그러나 포도원지기는 주인에게 올해 한 번 더 기회를 줄 것을 부탁합니다(8). 열매를 요구하는 기회가 영원한 것은 아닙니다. 3년에 비해 1년은 짧은 기간입니다. 포도원지기는 기간만 확보한 것이 아니라 나무둘레의 땅을 파서 토질을 부드럽게 만들고 거름을 주는 노력을 기울여 열매 맺는 나무로 만들려고 합니다. 그렇게 관리를 했는데도 열매가 맺히지 않으면 그때 나무를 제거해달라고 부탁합니다(9). 소망의 기회가 주어지고 동시에 심판의 경고가 주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시적으로는 징벌을 억제함으로써 긍휼로 행하실 것이지만, 심판의 지연은 무한정 주어지지 않습니다. 갈릴리 사람들과 예루살렘 사람들이 겪은 두 비극이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벌어진 것과 달리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회개의 기회를 충분히 줍니다. 기회를 얻고도 의도적으로 회개하지 않는 태도야말로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징벌을 내리는 데 관심을 두는 분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회개의 열매는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거나 회복하는 것이고 이웃을 향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회개는 예수님께서 실현하신 것처럼 회개하는 자신과 타인의 회복을 위한 방편입니다. 회개의 기회는 하나님의 관용과 인내를 대변합니다.
세상은 회개를 무시하고 교회는 회개의 방향을 타인으로 돌리곤 합니다. 쌍의 소리에 휘둘리지 말고 주님의 관점으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돌이킬 것에는 용기 있게 무릎 꿇고, 그분의 자비에 감사해야 합니다. 날마다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열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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