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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13-03)


좁은 길을 걷는 신앙의 여정

누가복음 13장 22-35절


신앙의 길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좁은 문을 통해 들어가야 하며, 이를 위해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기회를 소중히 여기고, 그에 맞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매일의 선택과 행동이 우리의 신앙을 반영하므로, 신중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신앙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도중에 사람들의 질문을 계기로 구원을 받는 기준과 심판을 받는 대상을 설명하십니다. 구원의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그 문은 좁기 때문에 모두가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22-24). 혈통으로 구원의 문을 보장받는 것은 아니며, 문으로 들어간 여부는 삶으로 입증됩니다(25-30). 선민의 도성인 예루살렘이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31-35).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22-24)

우리의 신앙은 일상의 선택과 행동에서 드러나며,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인내와 끈기가 필요합니다. 또한, 이 말씀은 구원의 기회가 제한적일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어진 기회를 소중히 여기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이 있게 발전시켜 나가야 합니다. 결국, 좁은 문을 통과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을 더욱 견고하게 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임을 깨닫게 합니다.

 

22○예수께서 각 성 각 마을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23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24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22-24)

 

예수님께서 각 도시와 마을을 순회하면서 가르치고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22). 예루살렘으로의 여행을 시작한(9:51-62) 이후 처음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내용이 언급됩니다. 길 위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적은 수만 구원을 받습니까?”라고 질문합니다(23). 구원받은 사람들의 수에 대한 질문은 당시의 관심을 반영합니다. 하나님께서 소수의 사람들을 구원하실 것인지 묻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예수님께서 앞에서 18년 동안 꼬부라져 있던 여자를 회복하고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로 하나님 나라가 놀랍게 성장한다고 가르친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나타난 의미처럼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을 것입니까? 아니면 당시 유대인들의 관심처럼 소수의 남은 자들이 구원을 받을 것입니까? 예수님의 대답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것입니다. 질문자의 추정과 달리 소수만 구원받도록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할당제가 아닙니다. 구원의 문은 활짝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문은 좁습니다.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니라”(24; 9:23; 12:33; 14:26-27). “힘쓰라”는 운동선수가 시합을 하거나 군인이 전쟁을 치를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구원의 문은 모두에게 열려 있고 제한이 없으나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길을 따르는 자들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문 안으로 들어가기를 원하지만 순종하지 않음으로써 실패하고 맙니다. 이런 점에서 30절도 적합한 대답이 됩니다. 지금 구원의 문에 들어갔다는 확신이 착각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 구원의 문에서 멀다고 생각하더라도 겸손히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25-30)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단지 이스라엘 백성에게 국한되지 않으며, 모든 민족이 포함된다는 메시지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포괄적인 사랑과 계획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 구절은 우리로 하여금 진정한 신앙의 길을 걸어가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이 있게 발전시킬 것을 촉구합니다.

 

25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26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의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27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 28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29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30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25-30)

 

구원의 문은 열려 있으나 항상 열려 있지는 않습니다. 문이 좁을 뿐 아니라 들어가는 기회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닫힙니다(25). 닫히기 전에 지금 반응해야 합니다. 내일로 연기해놓고 문이 닫힌 후에 열어달라고 간청해도 더 이상 기회는 오지 않습니다. 문제는 문이 닫힐 때 사람들이 억울해하는 점입니다. 그들은 문 안에 들어가 있는 줄 알았는데 문 밖에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는 주와 자신들의 관계를 말할 것입니다.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26).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 이유는 그들의 행위입니다(27). 예수님과 같은 공동체에 속하고 말씀을 들었다고 해서 구원받은 증거는 아닙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구원을 받습니다. 구원의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으나 그 문에 들어간 여부는 행위로 입증됩니다. 구원의 문은 특정 혈통을 위해 열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심판의 때가 오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을 것입니다(28). 28절의 ‘하나님 나라’는 문맥에서 최후 심판 이후에 주어지는 종말의 나라를 가리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사람들의 기쁨은 잔치에 참여하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그들의 조상들이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그들과 식사를 나눌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동서남북, 즉 열방에서 옵니다. 아브라함은 더 이상 혈통의 조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 사람들의 조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들(“오직 너희”)은 밖으로 쫓겨나고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28).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마태에 6회, 누가에 1회)는 지옥에 던져지는 자들의 고통을 표현합니다. 역사의 끝에는 사람들이 동서남북에서 와서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것입니다(29; 참조 사 59:19). 30절은 22절에 대한 답변입니다. 먼저 된 자들이 아니라 나중 된 자들이 동서남북에서 와서 잔치에 참여할 것입니다. 먼저 된 자들이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들이 먼저 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놀랄 것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31-35)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무한한 사랑을 나타내십니다. 그러나 불신과 거부는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잃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믿음을 지속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중요한 경고입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모든 민족에게 열려 있음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기회를 받아들이고 응답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31○곧 그 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32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33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34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35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31-35)

 

구원은 예루살렘 백성이라고 해서 보장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루살렘은 열린 문에 들어갈 기회를 놓치고 구원의 문 밖에 서서 울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르치고 계실 때 어떤 바리새인이 와서 위험을 알려줍니다. 예수님에 대해 적대적이지 않은 바리새인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헤롯이 죽이려고 찾는 중이므로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정보를 전달합니다(31). 예수님께서는 그의 정보를 계기로 예루살렘의 운명을 애가의 형식으로 전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저 여우”(헤롯)에게 경고를 전하라고 하십니다(32). 여우는 파괴적인 특징을 갖고 있으나 다른 맹수에 비해 위협적인 짐승은 아닙니다. 헤롯은 여우처럼 예수님을 위협하지만 그런 힘으로는 하나님의 목적을 수행하는 예수님의 길을 막을 수 없습니다.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32). “오늘과 내일”은 매일의 활동을 뜻합니다. “완전하여지리라”는 의도한 목표를 이룰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생활은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일로 채워집니다. 위협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지금 하는 일을 내일도 행할 것입니다. 죽음은 예수님께서 줄곧 걸어가고 있는 목적지인 예루살렘에서 맞이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자신에게 주어진 목표를 이루는 것이므로 비극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여우인 헤롯에게 죽지 않고 예루살렘에서 죽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사람들이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 따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라고 굳은 의지를 표명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선지자의 역할(4:24)을 예루살렘에서(9:31) 완성하실 것입니다(33). 전통적으로 예루살렘은 선지자들을 죽인 곳입니다.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 죽는 법이 없으므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죽음을 맞이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아를 거부하고 죽이게 될 예루살렘의 운명을 2인칭을 사용해 탄식하십니다(34-35). 예루살렘은 선지자들을 죽이고 그곳에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도시입니다. 구약에서 돌로 치는 행위는 신성모독(레 24:14,16,23)과 배교(레 20:2; 신 13:11)의 죄를 지은 자들에 대한 전형적인 처형 방식이었습니다. 역설적으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독하고 배교 행위를 한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합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 특히 종교지도자들이 자신들의 목표와 열정에 근거해 하나님의 목표를 수행하는 자들을 배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파송을 받은 메시아입니다(3:15-16; 7:18,22).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예루살렘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전하지만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대리자를 죽임으로써 하나님을 거부할 것입니다. 잘못된 확신과 목표로 하나님께 저항하는 예루살렘은 비극적인 운명을 자초할 것입니다.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으는 것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라고 탄식하십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께서 내민 구원의 손길을 원치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의 운명은 어떻게 되습니까?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35). 예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언어를 사용해 하나님의 목적에 맞게 살지 않은 예루살렘이 무너질 것을 예고하십니다(렘 12:7; 22:5).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뜻으로 세워진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반대하고 그의 대리자를 죽이는 것으로 황폐하게 될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을 대표하므로 이스라엘 전체가 망합니다. 예루살렘은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된 자와 같이 선민의식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메시아로 수용하는 것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입니다.


본문에서는 구원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합니다. 구원은 좁은 문을 통해 들어가야 하며, 이는 우리 각자의 노력과 결단이 필요함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에 대한 애정과 슬픔을 표현하며, 그들의 불신에 대한 경고를 전합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모든 민족에게 열려 있으며, 결국 그분의 뜻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희망을 제시합니다. 마지막으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삶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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