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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14-02)


천국에 초대받은 사람들

누가복음 14장 15-24절


각국의 최고 지도자들은 취임식에서 외교 사절단의 참석을 통해 강대국으로서의 위상을 드러냅니다. 참석하지 않는 것은 해당 나라나 지도자에 대한 적대감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전 대통령 취임식에도 많은 외국 사절단이 참석합니다. 대통령은 이들을 초청하며, 특별한 대우를 제공합니다. 하지만 초대를 거부하는 것은 이 대통령에 대한 호의를 거절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부득이한 사정이 아닌 경우, 사소한 이유로 참석하지 않는 것은 적대적인 감정이 없이는 어렵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잔치에 참석해서 천국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잔치로 비유하십니다. 큰 잔치를 준비하고 초청합니다. 하지만, 초청받아서 참석하겠다고 했던 사람들이 핑계로 참석을 거절합니다. 그들 대신에 이 세상의 외면 받는 자들과 길과 산에 있는 이들을 불러 만찬 자리를 채운다는 이야기를 하십니다.

 

잔치에 초대하는 주인(15-17)

우리는 종종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세상의 일들에 더 많은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영적인 초대와 은혜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먼저 생각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으며, 이는 우리가 주변의 소외된 이들을 돌보아야 한다는 교훈을 줍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고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15함께 먹는 사람 중의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 16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17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15-17)

 

예수님께서 한 바리새인이 잔치를 배설하고 예수님을 초청하셨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대해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 있는 한 사람이 예수님께 말을 겁니다. 그는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라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먹게 될 모든 사람은 축복받은 사람들입니다.

 

(1) 이야기의 전환(15)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누구든지 복 받은 사람입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테이블에 기대어 듣고 있던 사람 가운데 한 명의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즉 이전 단락과의 연관성 속에서 누가는 이 이야기를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전 단락이 식사 장면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 식사 장면이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식탁 교제 장면으로 연결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더욱이 예수님께서는 14절에서 의인의 부활 시에 받게 될 상급에 대해서 언급했던 터라 식사 자리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서 떡을 먹게 되는 자가 복되다고 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연결이 됩니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이사야 26장의 배경 하에서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종말론적 축복을 메시아의 연회라는 개념으로 이해했습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이 종말론적 메시아적 연회의 자리에서 떡을 먹는 것, 즉 하나님의 종말론적 백성이 되는 축복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2) 큰 잔치 비유(16-17)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준비하고 많은 사람들을 초청했습니다. 바리새인의 식사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관점에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식사 자리에 대해서 언급한 것을 이어 받아서 예수님께서는 하나의 비유를 소개하시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한 사람은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들을 초청합니다. 이러한 이미지는 확실히 종말론적인 메시아적 연회라는 이미지와 매우 잘 부합합니다. 이 비유는 마태복음 22장에도 등장하는데 구체적인 부분에서 다소간 차이점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 비유는 초청받은 자들의 거부와 전혀 예상치 못한 하객들이라는 관점으로 하나님 나라를 설명해 나가게 됩니다. 팔레스틴의 (결혼)잔치는 초청장을 보내서 올 수 있는 사람들의 숫자를 미리 파악해두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그래야 그들을 위해서 음식을 비롯한 제반 구체적인 준비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사람이 잔치 시각이 되었을 때 자신의 종을 이미 청함 받은 자들에게 보냈다고 하는 것은 팔레스틴의 잔치 문화에서 생각해 보았을 때 이미 잔치에 참여하겠다고 긍정적인 응답을 했던 사람으로 간주해야 합니다. 결혼 잔치 청첩장을 보내고 잔치 당일까지 청첩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얼마나 잔치에 참여할 수 있을지 구체적으로 가늠할 수 없는 오늘날 우리의 문화와는 조금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청함을 받았던 자들이고 그들에게 확인을 위해서 재차 종이 보내진 것입니다.

 

잔치를 거절한 사람들(18-20)

삶의 우선순위는 하나님과 천국을 최우선으로 두는 것입니다. 세상과 물질을 포기하더라도 천국을 취할 자신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현실에 타협하려는 마음이 자꾸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러한 갈등이 저의 우선순위를 고민하게 만듭니다. 결국,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18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19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20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18-20)

 

본문에는 처음에 잔치 초대에 참석하겠다고 하던 사람들이 정작 음식을 장만하고 준비가 다된 후에는 종들을 보냅니다.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17)라고 권고합니다. 그러나 참석하겠다고 했던 사람들은 핑계를 댑니다.

 

(1) 경제적인 이유로 인한 거절(18-19)

 

원래 잔치에 참여하겠다고 긍정적으로 답했던 사람들은 잔치가 모두 준비되고 난 후 잔치의 주인이 종을 보내 잔치 자리에 참석해달라는 초청을 했을 때 모두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합니다. 마태복음 22장뿐만 아니라 도마복음서 64장에도 이와 유사한 비유가 소개되고 있는데 그곳에서도 일련의 변명들이 등장합니다. 첫 번째 사람은 자신이 밭을 구입했기 때문에 잔치에 참석할 수 없다는 변명을 제시합니다. 이 변명 자체는 그럴듯한 이유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밭을 구입한 자가 그 밭에 일하러 나간다고 하는 것은 이해하지 못할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의 초대가 이미 이루어졌고 이때 통상 잔치 날짜가 주어지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이 사람이 잔치 날을 몰랐다고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밭을 산 사람의 태도는 궁색한 변명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자신이 소 다섯 쌍을 구입 했기 때문에 구입한 소가 제대로 된 소인지를 점검하기 위해서 길을 나서고 있는 중이라고 변명거리를 대고 있습니다. 첫 번째 사람과 마찬가지로 두 번째 사람의 변명도 그럴듯합니다. 막 구입한 소를 점검하기 위해서 조치를 취하는 것은 얼마든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소를 열 마리(다섯 쌍)나 구입했다고 하는 것은 첫 번째 예와 마찬가지로 이 사람이 경제적으로 부유하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첫 번째 사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사람도 그럴듯한 변명을 내세우기는 했지만 그의 변명도 역시 궁색한 것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2) 결혼으로 인한 거절(20)

 

세 번째 사람의 변명은 결혼이었습니다. 앞선 두 차례의 상업적인 이유와는 다른 이유가 제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변명도 여전히 궁색합니다. 최근에 결혼했다고 하는 것이 자신이 참석하겠다고 의사를 (밝힌 결혼)잔치에 참석할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잔치를 누리는 사람들(21-24)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사랑과 구원의 의지를 분명히 하십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초대에 응답해야 함을 일깨워 줍니다. 세상의 유혹과 바쁜 일상 속에서도 그 초대를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초대받은 자로서 우리는 구원의 기회를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가장 큰 축복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늘 마음에 새기고 살아가야 합니다.

 

21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22종이 이르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 23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24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21-24)

 

하나님의 초대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지만, 거절하는 자들은 그의 은혜를 누리지 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초대에 응답할 때, 그분의 풍성한 잔치를 경험하게 됩니다.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조차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누구나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초대에 응답할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1) 화가 난 집주인의 뜻밖의 제안(21)

 

종의 보고를 받은 주인은 화가 났습니다. 주인이 화가 난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세 명의 초청받은 자들이 한 말은 나름대로 구실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이미 초청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긍정적으로 반응했던 사람들이 제시한 구실은 핑계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제시한 구실들은 잔치에 참여하지 못할 만큼 결정적인 이유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전혀 뜻밖의 사람들을 하객으로 초청하라고 종에게 지시합니다. 그들은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예수의 비유에 등장하는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바로 예수의 사역의 주된 대상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견지에서 이 비유는 원래 하나님 나라에 초청을 받았던, 그 나라의 백성이 될 것이라고 기대되었던 사람들의 거부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사람들의 초청이라는 반전을 보여주게 됩니다.

 

(2) 여전히 열린 가능성(22-23)

 

주인의 명대로 좋은 나가서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들을 초청해서 자리를 채웠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리가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초청에 대한 기회가 여전히 남아있음을 시사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렇고 누가 당시에도 하나님 나라의 초청은 여전히 열린 가능성으로 남아있음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의 놀라운 선언(24)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의 의미를 정리하시면서 원래 청함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맛보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을 던지십니다. 이것은 당시의 상황 속에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선언으로 보입니다. 원래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것이라고 예견되었던 사람들이 전격적으로 거부되고 전혀 그 잔치에 참여할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던 사람들이 참여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은 파격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을 읽는 독자들은 예수님의 이러한 선언이 예수님의 실제 사역 가운데 현실이 되고 있음을 목격하게 됩니다. 병행구절인 마태복음 22장도 동일한 가르침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초대가 모든 이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배웁니다. 초대받은 자들이 자신의 이유로 거절했지만, 하나님은 그 초대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그분은 모든 이에게 구원의 기회를 열어주십니다. 우리는 이 초대에 응답하고,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는 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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