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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15-01)


잃어버린 자들을 찾으시는 하나님

누가복음 15장 1-10절


 

사람들은 같은 사물이나 사건을 보더라도,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관점(觀點)’이라고 합니다. 관점은 사물이나 현상을 관찰할 때 보고 생각하는 태도나 방향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관점에 따라 달리 보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람들은 보이는 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보고 싶은 대로 보는 셈입니다. 예수님과 종교지도자들은 계속 충돌하는 이유도 관점에 차이 때문입니다.

 

  • 본문에서도 예수님과 종교지도자들은, 또 다시 관점에 차이를 분명히 들어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세리들과 죄인들을 환대하고 함께 식사를 하신 모습을 보고 불평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잃은 양 한 마리를 찾는 목자와 한 드라크마를 찾는 여인의 비유를 통해 진리를 가르쳐주십니다. 이 비유를 통해 죄인 한 사람을 찾으셨을 때의 기쁨을 말씀하셨습니다.

 

비난받는 예수님(1-2)∴(마태복음 18:12-14)

올바른 삶을 살다 보면, 때때로 잘못된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비난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며, 그 과정에서도 자신의 신념과 가치를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비난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통해 더 나은 자신을 만들어 가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1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1-2)

 

많은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죄인들을 환대하고 함께 식사를 하는지 설명하게 된 배경입니다.

당시에 ‘죄인’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율법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을 차갑게 했습니다. 유대인으로 율법을 준수해야 하는데, 율법을 준수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율법 준수는 매우 중대한 문제이며 주요 관심사였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죄인들과 함께 있는 예수님을 보면서 비난합니다. 그리고 이에 예수님께서 세리들, 죄인들과 함께 교제 하신다고 수군거렸습니다.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한다는 것은 ‘음식법’과 ‘정결 규례’를 파기하는 것이었습니다.

누군가와 식사를 한다는 것은 밥만 먹는다는 의미로 끝나지 않습니다. 교제와 친밀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를 한 것에 대해 종교지도자들은 문제 삼고 비난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비난을 조금도 계의치 않으셨습니다. 말씀을 들으려 예수님께 나오는 세리와 죄인들과, 예수님 뒤에서 수군대며 비난하는 바리새인과 율법 선생들과의 모습은 대조됩니다.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은 예수님을 비난하며 수군거리겠습니까? 그들은 죄인을 멀리하고 피해야할 대상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양과 동전의 비유 그리고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죄인을 찾으시며 잃어버린 영혼들을 얼마나 기다시리고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하십니다. 이 비유들에서 잃어버린 것들(양, 동전 그리고 아들)은 예수님이 식탁에서 함께 교제한 죄인들입니다. 예수님을 비난하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기쁨을 이해했다면 하나님의 기쁜 잔치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잃은 양을 되찾은 목자의 기쁨과 친구들과 이웃의 기쁨에 참여하는 것조차 거부하고 있습니다.

 

잃은 양의 비유(3-7)∴(마태복음 18:12-14)

하나님께서는 잃어버린 영혼을 소중히 여기셔서 그들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십니다. 마치 목자가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듯이, 하나님께서도 길 잃은 사람들을 찾아 그들을 다시 품으려 하십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과 용서를 베푸시며, 우리가 그의 곁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된 길을 걷고 있더라도 항상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열어두십니다.

 

3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4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5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7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3-7)

 

예수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흥분해서 비난하는지 정확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불편한 마음에 비유로 접근하십니다. 그 비유의 내용은 어떤 사람에게 백 마리의 양이 있었습니다. 목자는 한 마리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4). 양은 무리 지어 생활하는 짐승이어서 무리를 이탈한 양은 생존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상황을 잘 아는 목자는 한 마리를 찾으려고 아흔아홉 마리의 양 무리를 광야에 두고 잃은 양을 찾아 나섭니다. 나머지 양 떼를 광야에 둔 채 급히 떠나는 목자는 어리석은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만큼 잃어버린 한 마리 양에 대한 마음이 어떠한지 보여줍니다. 양 떼를 돌보는 목자의 그림은 구약에 자주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선한 목자이십니다(시 23; 80:1; 사 40:11). 비유 속 목자는 목자의 마음을 갖지 못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다릅니다(참조. 겔 34:1-10; 요 10:1-16). 비유를 듣고 있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백성을 인도해야 할 목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안식일에 가축은 배려해주면서도 18년 동안 몸을 펴지 못한 여자(13:10-17)와 수종병으로 온 몸이 부어오른 남자(14:1-6)의 치유를 격렬히 반대했습니다. 죄인들을 환대한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말하자면, 잃어버린 영혼들이 의인들의 공동체에 들어오는 것을 가로막고 반대했습니다. 이들과 달리 비유의 목자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에게만 집중합니다. 드디어 양을 찾으면 목자는 즐거워 양을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옵니다(5). 집에 와서는 친구들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잔치를 벌입니다(6).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목자는 찾은 자의 기쁨을 다른 사람들과 잔치로 나눕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의 의미를 설명하십니다. 죄인 한 명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 명 때문에 기뻐하는 것보다 더 기뻐합니다(7).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자를 죄인과 동일시하십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세리들과 죄인들을 부정한 자들로 정죄하고 멀리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잃어버린 자들로 이해하셨습니다. 그들과의 식사는 찾은 자의 기쁨을 나누는 자리였습니다. 6절과 7절을 연결해 보면 죄인들이 회개한 것은 목자가 잃어버린 양을 찾은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목자가 먼저 죄인을 찾으러 나섰고 죄인은 회개로 돌아왔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잔치를 망친 쪽은 예수님께서 아니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입니다.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8-10)∴

하나님께서는 잃은 자를 찾는 사랑과 열정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회복의 기쁨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은 한 영혼을 소중히 여기시며, 그 회복을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그와의 관계를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서로를 소중히 여기는 삶의 중요성을 배울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돌보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8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9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10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8-10)

 

본문도 비유(8-9)와 해설(10)로 구성됩니다.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 중 하나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8). 드라크마는 그리스 은전으로 시대와 장소에 따라 무게와 가치가 다르긴 했으나 1데나리온 또는 1/4세겔과 같은 가치로 하루치 품삯에 해당했습니다. 돌과 진흙 벽돌로 지어진 팔레스타인의 주택에는 창문이 없어서 실내가 어두웠습니다. 바닥은 돌이 아니라 흙이어서 어두운 곳에서 동전을 찾는 일은 대단히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여자는 등불을 켜고 바닥을 쓸며 열심히 찾았습니다. 드디어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았다. 여자는 잔치를 준비하고 이웃을 불러 모읍니다(9). 그런데 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하려면 잃었다가 찾은 돈보다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합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여자의 행동은 어리석습니다. 낭비처럼 보이는데도 여자가 잔치를 준비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나아 함께 즐기자!” 찾은 기쁨이 컸기 때문입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은 목자처럼 혼자 기뻐하기에는 기쁨이 너무 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의 의미를 해설하십니다.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10). 하나님의 천사들은 하늘에 하나님과 함께 있습니다. 7절의 해설과 마찬가지로 죄인의 회개는 하늘의 기쁨입니다. 잃어버린 동전을 찾는 것은 회개를 촉구하는 작업과 같고, 잃어버린 동전을 찾은 것은 한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온 그림과 같습니다. 비유와 10절을 연결해 보면, 한 사람의 회개는 찾는 작업에 따른 결과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열심히 찾은 결과로 죄인들이 돌아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비난을 감수하고 심지어 목숨을 잃으면서도 찾은 한 영혼 때문에 하늘의 존재들이 기뻐합니다. 물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죄인들은 격리 대상이므로 희생적으로 찾는 것은 사랑의 낭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한 영혼이 돌아온 기쁨을 가격으로 매길 수 없습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은 목자와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은 여자의 비유는 몇 가지 의미를 전합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을 확대하고 그들과 식사하는 이유를 보여줍니다. 세리들과 죄인들은 잃어버린 자들입니다. 규범을 지키고 하나님의 뜻을 따른 의인들과 다른 인생을 살고 있었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그들은 잃은 자를 찾으신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찾으신 결과로 죄인들이 회개로 반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소식은 죄인이 회개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땅에서 회개한 죄인들을 식사로 환대하시고, 하늘에서는 이 기쁨에 참여합니다. 둘째, 잃어버린 자를 찾는 과정과 찾은 결과에서 나타나는 모습은 어리석고 낭비처럼 보입니다. 목자는 아흔아홉 마리 양무리를 광야에 두고 떠납니다. 여자는 드라크마 하나를 당장 찾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어두운 방의 바닥을 열심히 훑습니다. 찾은 다음에는 찾은 것의 가치보다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해 잔치를 벌입니다. 잃은 자를 회복하는 비용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낭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낭비입니다. 영혼의 회복은 누군가의 낭비처럼 보이는 희생으로 가능합니다. 찾는 자가 없으면 잃은 것이 발견되는 일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목숨을 드리기까지 찾는 희생을 보여주셨기에 회개하는 길이 열렸습니다. 회개한 자에 대한 하늘의 기쁨이 너무 크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서는 아까운 낭비란 없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공동체는 잃어버린 자가 돌아온 것을 가장 큰 기쁨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사회적 약자들, 궁핍한 자들, 허물이 많은 자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기쁨에 교회는 참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쁨의 식사를 함께 나누자고 독자들을 초대하십니다.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잃은 자를 찾고 구원하는 사랑을 강조합니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소중히 여기시며, 특히 잃은 자를 찾는 데 열정적이십니다. 회개하는 한 영혼의 기쁨은 하늘에서 크며, 이는 하나님의 본성을 나타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도 잃은 것을 찾고 회복하는 과정이 중요하며,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돌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시며, 우리가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 잃은 자를 찾아 사랑으로 대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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