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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07-01)

 


지혜와 유혹 사이에서 사는 지혜

잠언 7장 1-9절


강의를 할 때마다 묵상은 말씀을 기가 막히게 해석하는 기교나 기발하게 적용하는 기술이 아니라 말씀에 대한 태도라고 강조하곤 합니다. 방법이 아니라 마음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마음과 태도를 묻고 도전하고 있습니다.

 

지혜를 담고 있는 아버지의 명령을 눈동자처럼 귀하게 여기며 지켜야 합니다. 이것이 생활화될 때 우리의 삶에 진정한 생명력이 넘치게 됩니다. 지혜는 내가 생애를 같이 보내야 할 동반자입니다. 지혜를 가까이하고 사랑하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다면 지혜가 우리를 음녀와 같은 악인으로부터 또한 우매로부터 보호하고 지켜줄 것입니다.

 

아버지 강연(10) : 아버지의 가르침을 지켜라(1-9)

말씀을 소중히 여기며 가까이해야 합니다. 말씀으로부터 지혜가 임하기 때문입니다. 지혜가 없는 삶은 그 자체로 어둠의 삶이고 죽음의 삶입니다. 항상 말씀으로 자기 마음의 동기와 행동을 점검하며,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새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 쉽게 어둠의 길을 선택하여 갈 수 있습니다.

 

1내 아들아 내 말을 지키며 내 계명을 간직하라 2내 계명을 지켜 살며 내 법을 네 눈동자처럼 지키라 3이것을 네 손가락에 매며 이것을 네 마음 판에 새기라 4지혜에게 너는 내 누이라 하며 명철에게 너는 내 친족이라 하라 5그리하면 이것이 너를 지켜서 음녀에게, 말로 호리는 이방 여인에게 빠지지 않게 하리라 6내가 내 집 들창으로, 살창으로 내다 보다가 7어리석은 자 중에, 젊은이 가운데에 한 지혜 없는 자를 보았노라 8그가 거리를 지나 음녀의 골목 모퉁이로 가까이 하여 그의 집쪽으로 가는데 9저물 때, 황혼 때, 깊은 밤 흑암 중에라(1-9)

 

지혜를 외면할 때 유혹이 찾아옵니다. 말씀이 떠난 자리에 욕망이 대신 자리할 것입니다. 죄를 은밀하게 즐기면서 하나님과 친밀히 교제할 수 없듯이 지혜와 음녀를 동시에 사랑할 수 없습니다. 또 말씀을 우습게 생각하면 자신을 잃고 탐욕이 부리는 대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경외’와 ‘말씀 사랑’은 오래된 집착과 그릇된 탐닉에서 우리를 건져줄 것입니다.

 

(1) 음녀에게서 구원해줄 지혜(1-2)

본문인 잠언 7:1-9은 1-9장에서 ‘내 아들(들)아’로 시작하는 강연 중 마지막인 열 번째 강연에 해당하는 7:1-7의 일부로서, 유혹하는 여자를 조심하라는 주제를 다룹니다. 음녀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와 경고는 잠언 1-9장에서 네 번, 즉, 둘째(2:16-19), 여덟째(5:1-23), 아홉째(6:20~35), 열째(7:1-27) 강연에 등장합니다. 또한, 다섯째 강연이자 막간(Interlude)에 해당하는 9:13-18에서는 ‘음녀’라는 말이나 묘사는 없으나 음녀와 밀접하게 관련 있는 미련한 여인이 소개되었으므로 위의 네 강연과 함께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7장의 구조와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면, 이 장은 “내 말을 간직하라”는 아버지의 조언(1-5)으로 시작하여 “음녀의 길을 피하라”는 아버지의 조언(24-27)으로 끝나며, 그 중간(6-23)에는 아버지 눈으로 관찰한 음녀의 등장과 젊은이를 유혹하는 음녀의 기술 그리고 유혹에 넘어간 젊은이에 대해 중점적으로 기술합니다.

다른 강연에서와 마찬가지로 아버지는 아들을 부르며 주의를 환기시키고 “내 말을 지키라”라는 권고를 유사한 표현으로 재차 반복합니다. 2절의 ‘내 명령을 지켜서 살며’라는 명령은 4:4에서도 나오는데 이 명령은 ‘내 명령을 지키며 살라’ 또는 ‘내 명령을 지키면 살리라’로 번역이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이 부분은 아버지의 명령을 생활화하라는 의미와 명령을 순종한 결과가 생명이라는 이중적인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특히 ‘생명’은 마지막 27절에서 아버지의 말을 따르지 않은 결과로 맞게 될 ‘사망’과 대조를 이룹니다. 여기서 생명과 사망은 육체적인 면만이 아니라 신앙적, 도덕적, 사회적으로 다방면에서의 삶과 죽음을 암시합니다. 아버지는 자기의 훈계를 듣느냐 안 듣느냐가 생명과 죽음을 결정한다는 것을 부각하며 아들로 하여금 자기의 말을 눈동자를 귀히 여기고 보호하듯 지키고(신 32:10) 신중하게 받아들이도록 촉구합니다.

 

(2) 아버지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겨라(3-5)

아버지의 가르침을 지키라는 권고는 이제 3-5절에서 그 가르침을 마음에 새겨 내면화하라는 권고로 연결됩니다. 3절의 “명령을 손가락에 매고 마음판에 새기라”는 말은 단순히 그 명령을 적어 몸에 지니거나 암기하는 소극적인 행동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 무엇보다도 가까이 두고 기억해서 항상 그의 말씀을 따라 살라는 적극적인 행동을 요구하는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끌어내실 때 그들을 위해 애굽에서 행하신 기적과 구원의 일을 기억하라는 뜻에서 유월절과 무교절을 지키라고 명하셨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자녀에게 이를 가르치고 그것을 손이나 이마에 표를 삼으라고 덧붙이셨습니다(출 13:9, 16), 또한 40년이 흘러 곧 가나안 땅에 들어갈 이스라엘의 새로운 세대에게 하나님 말씀을 마음에 두고 손목과 이마에 표를 삼고 자녀에게 가르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신 6:6-9; 11:18-20). 이 모든 명령의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진정한 경외심을 갖고 순종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4절에서 아버지의 가르침은 ‘지혜’로 대치되며 여자, 특히, ‘신부’나 ‘아내’로 의인화됩니다. 아버지는 지혜를 ‘누이’로 또는 ‘친족’으로 부르라 명합니다. 이때 ‘누이’는 아내나 신부를 지칭할 때 사용되는 단어(아 4:9; 5:1)이며, 친족은 ‘친밀한 친구’란 뜻으로 둘 다 ‘아내’를 의미합니다. 아버지가 여기서 지혜를 특히 ‘아내’로 의인화한 것은 이제 곧 5절부터 등장하게 될 ‘음녀’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말에 순종하여 아들이 지혜를 아내로 맞아 사랑하면, 그 지혜가 그를 음녀의 유혹으로부터 구해줄 것입니다. 음녀로부터 구해내는 지혜의 역할은 2:16이나 6:24에서도 이미 언급되었습니다. 이 여인의 특출한 기술은 매끄러운 말로 상대방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 유혹하는 데 있습니다. 이 여인은 문맥상 이방 여인이라기보다는 ‘낯선 여자’, ‘남의 여자’, ‘음란한 여자’를 지칭하며 사회의 어떤 관습이나 도덕적 제약 밖에 있는 여자를 가리킵니다. 2:16-19에서 이런 여인은 젊은 시절의 자기 남편을 버리고 하나님께 맹세한 결혼 서약을 깬 자로서 아첨하는 말로 남자를 유혹하는 여인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여기서도 비슷하게 이 여인은 창녀처럼 행동하며 남편을 두고도 남편이 여행을 떠난 틈을 이용하여 스스럼없이 간음을 저지르는 뻔뻔한 여인으로 묘사됩니다(10-20). 이처럼 ‘음녀’는 4절의 ‘누이’나 ‘친족’으로 불리는 ‘아내’와 대조됩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충실하고 헌신된 여인이지만 음녀는 어느 누구에게도 충성하거나 헌신하지 않고 자기 멋대로 사는 여인입니다. 음녀는 어느 남자에게나 매끄러운 말로 속이려 들지만, 아내는 정직과 의를 바탕으로 신뢰의 말을 쌓아갑니다. 이와 같이 인간인 ‘음녀’와 ‘아내’의 대조는 신붓감을 찾는 젊은이로 하여금 유혹하는 음녀의 실체를 미리 알아차려 그녀의 유혹 손짓에 반응하지 않고 진정한 신붓감을 찾도록 돕습니다. 이미 결혼한 남자에게는 결혼 서약을 깨고 간음을 행하는 일의 위험성을 알리고 자신의 아내에게만 집중하고 사랑하도록 권면합니다. 한편, ‘음녀’와 ‘아내’는 ‘우매’와 ‘지혜’라는 추상적인 실체로도 대조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음녀의 달콤한 속삭임처럼 우매는 우리의 입과 눈과 귀에 즐거움을 주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지혜가 추구하는 여호와 경외와 정의와 정직과 같은 속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음녀의 말이 지혜롭게 들릴 수 있고 지혜의 말도 미련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3) 아버지의 관찰(6-9)

지혜 없는 젊은이는 자기 힘을 믿다가 그럴듯한 말에 잘 속아 넘어갑니다. 지혜가 없으면 젊음은 축복이 아니라 재앙입니다. 이상은 높지만 자기 욕망을 절제하는 법을 몰라서 어이없게도 음녀의 뒤를 따라갑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음녀에 대한 경고하기 위해 자신이 집 창문을 통해 직접 목격하고 관찰한 사건을 6-23절까지 들려줍니다. 6-9절에서는 젊은이의 등장을, 10-20절에서는 음녀의 등장(10-13)과 음녀의 유혹(14-20)을 묘사합니다. 21-23절에서는 젊은이에게 다시 주목하여 음녀의 꾐에 넘어간 파국적인 모습을 그립니다. 아버지는 창문을 통해 길거리를 내려다보다 한 젊은이를 보았습니다. 이 젊은이는 ‘어리석은 자’, ‘젊은이’, ‘지혜 없는 자’로 소개됩니다(7). 미성숙하고 판단력이 없는 자로서 잘 속아 넘어가는 자이며 아버지의 훈계 따위는 관심을 두지 않는 미련한 자입니다. 이 젊은이는 마을의 거리를 지나 음녀가 사는 골목을 따라 음녀의 집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음녀의 집을 찾아가는 이런 모습은 그가 음녀를 우연히 만난 것이 아니라 이미 음녀를 알고 있었고 뿐만 아니라 그녀의 집까지 알고 있었음을 드러냅니다. 거리와 골목 모퉁이를 지나 음녀의 집에 이르기까지 순조롭게 이어지는 방문은 이것이 젊은이의 자의적인 방문임을 알려주고 그 과정에 주저함 없는 단호함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경험 있고 현명한 아버지의 눈으로 봤을 때 이 젊은이의 발걸음은 죽음의 길을 자처하는 발걸음(22-23)이며, 이는 어리석고 지혜가 없는 자입니다. 한편, 이 젊은이가 음녀를 찾아간 때는 어둡고 캄캄한 밤입니다. 이 말은 문자 그대로 범죄가 일어나는 때가 사람의 눈을 피하기 쉬운 밤중임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죄짓는 자의 영적 상태가 밤과 같이 어둡고 죄에 대해 예민하지 못하다는 뜻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지키면 그 말씀이 우리를 지켜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향한 말씀이 들리지 않을 때만큼 자신의 영혼이 위험한 상황은 없습니다. 때로는 직접적인 교훈으로, 때로는 완곡한 이야기로 세상의 악함과 우리의 지혜 없음을 일깨우실 때 어떻게 반응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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