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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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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를 얻고 그것을 떠나지 말라

잠언 41-9


사사기는 다음세대가 다른세대가 되었다고 탄식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신앙의 유산이 전수되지 않고 세상의 문화와 가치관에 자녀들의 영혼이 점령당했습니다. 우리의 현실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젊은이와 어린이들을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을 보면 조국 교회에 있는가 싶은 생각마저 듭니다. 그 이유는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전수해주지 못했거나 전수해줄 신앙의 유산이 없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어떠한 대가를 지불해서 라도 명철을 얻어야 합니다. 지혜는 그 정도로 귀하고 소중합니다. 지혜는 사랑의 대상이므로 지혜와 지혜를 찾는 자 사이에는 상호적인 관계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아들이 애써 찾은 여인을 아내로 맞아 평생 사랑하고 충성하며 보호할 의지를 가져야 하듯, 지혜를 아내로 삼아 평생 친밀한 사랑과 주고받는 관계를 지속하며 살아야 합니다.

 

아버지의 훈계를 들어라(1-2)

부모들이 지혜의 삶을 산다면, 자식들에게 잔소리하지 않더라도 그들은 부모님 지혜의 삶을 물려받고 싶어 할 것입니다. 부모들이 여전히 세상적인 지혜를 통해 자식들이 세속적인 성공을 얻기만을 바란다면 앞이 캄캄합니다. 부모는 자식들에게 삶과 교육으로 하나님의 지혜를 교육해서 자식들도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이어가야 합니다.

 

1아들들아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명철을 얻기에 주의하라 2내가 선한 도리를 너희에게 전하노니 내 법을 떠나지 말라(1-2)

본 장은 자식들을 가르치기 위한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솔로몬은 구체적으로 훈계를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훈계에 집중할 것을 간곡히 당부합니다. 이 가르침은 개인적인 교훈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소개합니다.

잠언 4장은 1~9장에서 내 아들()로 시작하는 열 번의 강연 중 다섯째(1-9), 여섯째(10-19), 일곱째(20-27)에 해당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각 강연은 지혜를 얻고 사랑하라’, ‘악인의 길을 피하고 의인의 길로 가라’, ‘바른 길로 걸어라의 주제를 논합니다.

다섯째 강연에 해당하는 4:1-9은 다른 강연에서와 달리 내 아들아가 아닌 복수형의 아들들아로 시작합니다.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자신의 훈계를 듣고 명철을 얻는 데에 주의를 온전히 기울이라고 명합니다. ‘~하라혹은 ‘~하지 말라는 훈계는 잔소리처럼 들리기 일쑤라 아들이 이를 무시하고 싶을 것임을 아버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할아버지로부터 전수 받은 지혜의 교훈(3-9)

지혜는 가장 먼저 얻어야 할 가치입니다.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가르침의 골자는 지혜가 제일이기에 지혜를 얻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인생의 안전과 생명을 보장하며, 무엇보다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 어떤 대가를 지불한다 해도 반드시 얻어야 할 가치입니다.

 

3나도 내 아버지에게 아들이었으며 내 어머니 보기에 유약한 외아들이었노라 4아버지가 내게 가르쳐 이르기를 내 말을 네 마음에 두라 내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살리라 5지혜를 얻으며 명철을 얻으라 내 입의 말을 잊지 말며 어기지 말라 6지혜를 버리지 말라 그가 너를 보호하리라 그를 사랑하라 그가 너를 지키리라 7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네가 얻은 모든 것을 가지고 명철을 얻을지니라 8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9그가 아름다운 관을 네 머리에 두겠고 영화로운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하셨느니라(3-9)

자기의 훈계를 잘 듣고 명철을 얻으라고 조언하는 아버지는 자기가 아들들에게 전하는 이 훈계가 다름 아닌 자신의 아버지에게서 직접 들은 명령이었음을 밝힙니다. 이와 같은 대를 잇는 자식 교육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고 강론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습니다(4:9-10; 6:7). 또한, 자녀들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하신 일에 대해 부모에게 질문함으로써 계속적으로 교육을 받도록 격려되었ㅅ브니다(32:7). 부모가 자식을 훈육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키우는 전통은 이처럼 이스라엘 가정에서 계속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자신도 부모에게 아들이었고 더구나 그는 부모가 보기에 연약하여 애지중지 보살핌 받은 외아들이었다고 말합니다. 아버지의 이러한 표현은 첫째, 그 자신과 부모 사이에 연대감이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그와 같은 연대감은 이제 아버지가 된 자신과 자기 아들들 사이에서도 이미 형성되었습니다. 둘째, 아버지는 부모로부터 각별한 애정과 관심 속에서 지혜의 교육을 받았음을 알려줍니다. 부모가 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자기가 부모에게서 받았던 것과 같이 애정과 관심으로 그들을 교육하려고 합니다.

4절부터 아버지는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전수 받은 지혜의 교훈을 아들들에게 전합니다. 4-9절에 이르는 할아버지 말씀의 첫마디는 자신의 말들을 마음으로 단단히 붙들고 그 명령들을 지키고 살라는 훈계입니다. 내 말을 듣고 지키라는 말은 이제 부모가 된 아버지가 아들들에게 주는 조언의 첫마디가 되었습니다(1). 여기만이 아니라 1~9장 사이에 나오는 강연은 모두 이와 같은 내용의 명령으로 시작합니다(1:8; 2:1; 3:1; 4:1,10,20; 5:1;6:20; 7:1; 참고로 둘째 강연[2:1-22)은 조건절로 시작하지만 내용은 같다).

5-9절은 지혜를 얻고 사랑하라로 요약됩니다. 이 명령과 더불어 지혜를 얻은 결과로 따라오는 유익을 나열하여 듣는 이를 격려합니다. 먼저, 지혜를 얻으라 명철을 얻으라는 명령은 5절과 7절에서 반복되어 무엇보다 지혜를 꼭 얻으라는 간절함을 드러냅니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에게 이 명령을 잊지 말고 또한 여기서 벗어나지 말도록 경고합니다. 자신이 전해주는 귀중한 지혜의 유산을 아들이 늘 기억하여 그 말에서 떠나지 않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지혜를 얻으라는 명령은 지혜를 버리지 말고 사랑하라는 내용으로 이어집니다. 지혜는 단순히 얻어야 할 대상만이 아니라 사랑해야 할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를 찾는 자는 지혜를 얻어 일시적인 유의을 누리는 데서 끝내려 하지 말고 지혜를 열렬히 사랑하고 끝까지 지켜야 합니다. 그러면 지혜가 그의 사랑과 충성에 대한 응답으로 그를 보호하고 살피고 지켜줄 것입니다. 지혜가 지혜를 얻은 자를 악한 남자와 악한 여자로부터 지켜주고 바른 길로 인도한다고 예시한 2:11-22이 그런 예의 하나입니다.

이처럼 6-9절에서 지혜는 신부와 아내처럼 비유되었습니다. 이는 아들이 평생 함께할 신붓감을 찾는 일이 중요하고 그녀를 애써 찾아야 할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심혈을 기울여 신부를 찾고 그녀를 아내로 맞아 평생토록 사랑해야 하듯 지혜를 얻고 지혜를 끝까지 버리지 말고 사랑하라고 조언합니다. 이처럼 여자로 의인화된 지혜는 1~9장의 아버지의 강연(및 잠언) 전체에 걸쳐 나옵니다. 특히 4-7장은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훈계로서 지혜의 여인과 미련하고 음란한 여인에 대한 대조를 통해 지혜의 귀중함과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8-9장은 여인으로 의인화된 지혜가 여호와 하나님과 긴밀한 관계가 있음을 부각하고 우매에서 벗어나 지혜를 얻으려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찾아야 함을 보여줍니다.

한편, 6절의 지혜를 버리지 말라지혜가 너를 지키리라(보호하리라'로 번역됨)라는 문장은 각각 2절의 내 법을 버리지(‘떠나지로 번역됨) 말라4절의 내 명령들을 지켜라라는 문장에서 사용된 동사를 반복함으로써 아버지의 말씀이 지혜로운 말씀이며 아버지의 말을 지키면 지혜를 얻어 그 지혜가 아들을 지킬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와 같은 연결을 통해 아버지의 말씀이 지혜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강조합니다. 7절의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는 문장은 지혜의 시작(근본)’은 이것입니다. ‘지혜를 얻으라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지혜가 최상이며 동시에 기본이라는 이중적인 의미가 함축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혜가 제일이며 최고이고 지혜의 시작은 바로 지혜를 얻는 시도와 노력에서 비롯되므로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으로 명철을 얻어야 합니다. 마치 밭에 숨긴 귀한 진주를 발견한 상인이 그 진주를 얻기 위해 모든 소유를 팔아 밭을 산 것처럼(13:45-46) 어떠한 대가를 지불해서라도 명철을 얻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지혜를 돈으로 사라고 부추기거나 지혜를 돈으로 살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재물에 대한 관심이 많고 그 가치를 잘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지혜가 온갖 재물을 바꿔서 얻을 만할 정도로 귀하고 소중하다는 점을 강화하려는 의도입니다.

한편, ‘지혜의 시작(근본)’이라는 번역은 1:7이나 9:10을 상기시켜, 지혜를 얻는 데에 여호와 경외가 빠질 수 없음을 떠올리게 합니다. 또한, 위의 지혜를 얻는 방법과 관련하여,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데, 그 대가의 시작이 바로 여호와 경외입니다. 3장에서 잘 보여주듯이 여호와 경외를 바탕으로 하나님(3:1-12)과 이웃(3:21-35)을 사랑한다면 그 자가 바로 지혜를 얻은 자라고 불릴 것입니다.

지혜를 얻은 자는 신부를 사랑하듯 사랑하고 또 그녀를 높여주며 품에 안아주어야 합니다. 지혜를 높이라는 말은 지혜에 최고의 가치와 의미를 두며 지혜를 귀하게 여기라는 뜻입니다. 지혜를 품에 안으라는 말은 이제 지혜와 친밀하고 상호적인 사랑을 주고받으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6절에서처럼 지혜가 그의 사랑에 화답하여, 자기를 높여준 그를 높여주고 존경하여 영화롭게 해줄 것입니다. 마치 신부를 간절히 찾아 드디어 결혼이 성사되는 날 신랑이 영화로운 면류관을 수여 받듯이 지혜를 자신의 배우자로 얻은 자는 지혜로부터 아낌없는 사랑과 대접을 받을 것입니다. 9절의 아름다운 관이나 ;영화로운 면류관;이란 표현은 결혼식에서 신랑과 신부가 연합하는 것을 상징하는의미로 신랑의 머리에 관을 씌우는 전통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됩니다. 아름다운 관이나 면류관은 1:9에서 부모의 지혜로운 훈계를 듣는 자로 하여금 전쟁의 승리자에게 수여하는 화려한 승리의 관이나 새로이 직책을 맡은 관리에게 수여하는 금사슬을 상기시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부모의 가르침을 경청하는 자식이 형통하듯이 지혜를 평생의 배우자로 삼아 사랑하고 높이고 품는 자는 보호와 존귀와 영광을 얻게 됩니다.


지혜는 가장 먼저 얻어낼 가치입니다. 조상에게 물려받은 가르침에 골자는 지혜가 제일이기에 지혜를 얻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인생의 안전과 생명을 보장하며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가진 모든 것을 다 죽어서라도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이는 밭에 감춘 보물을 발견한 사람이 자신의 전 소유를 지불하여 보물을 얻는다는 비유로 떠오르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지혜로써 우리에게 진정한 안전과 생명을 가져다 주십니다. 당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녀들에게 세상의 돈이나 명예 권력 학식보다 하나님의 지혜를 얻는 것이 우리의 모든 것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가르치고 있습니까? 당신과 우리 가족이 가장 먼저 구해야 할 것이 지혜라는 것,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살아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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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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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아를 죽이고 밧세바를 아내로 삼는 다윗

사무엘하 1114-27


 

죄를 범하면 그 죄를 숨기려고 계속적인 죄가 뒤따라옵니다. 겉으로 죄악을 숨기고 거룩한 것처럼 보이려 노력했겠지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매우 악한 모습으로 점점 망가져 갑니다. 다윗은 간음한 이후에 자신의 죄를 감추려고 자신의 충신을 살인까지 죄를 범합니다. 잠언에서는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28: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은 요압과 그의 군사들이 암몬과 전쟁하는 사이 옥상에서 목욕하는 밧세바를 보고 데려다 동침하는 간음죄를 범합니다. 그런데 밧세바가 임신을 함으로써 다윗의 죄가 들통날 위기에 처하자, 그는 남편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불러내어 밧세바와 동침하게 하여 밧세바가 임신한 아이를 우리아의 아기로 만들려는 악한 시도를 합니다. 하지만 우리아의 충직함 때문에 다윗의 이런 시도가 실패하자, 본문에서 다윗은 또 다른 음모를 꾸밉니다.

 

우리아의 죽음(14-17)

죄는 은밀하고 점진적인 과정을 거칩니다. 처음에는 작은 충동으로 시작했던 죄가 점점 눈덩이처럼 무서운 죄로 불어납니다. 나중에는 헤어 나올 수 없을 정도로 커져 버립니다. 죄가 이처럼 죄를 감추려는 사람을 무서운 사람으로 만듭니다. 죄의 잔악함이 우리를 얼마나 비참한 모습으로까지 몰고 가는지 알 수 있습니다.

 

14아침이 되매 다윗이 편지를 써서 우리아의 손에 들려 요압에게 보내니 15그 편지에 써서 이르기를 너희가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에 앞세워 두고 너희는 뒤로 물러가서 그로 맞아 죽게 하라 하였더라 16요압이 그 성을 살펴 용사들이 있는 것을 아는 그 곳에 우리아를 두니 17그 성 사람들이 나와서 요압과 더불어 싸울 때에 다윗의 부하 중 몇 사람이 엎드러지고 헷 사람 우리아도 죽으니라(14-17)

다윗은 우리아를 죽여서라도 죄를 은폐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은폐하려고 할수록 더 많은 사람이 알게 됩니다. 요압을 시켜서 우리아를 궁지에 빠뜨려 죽이라고 시킵니다.

 

(1) 다윗의 편지(14-15)

다윗은 우리아를 자기 집으로 보내서 아내와 동침함으로 자신의 간통죄를 숨기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간밤에도 우리아는 자기 집에 가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는데도 멈추지 않습니다.

요압에게 쓴 편지를 우리아의 손에 들려 전쟁터로 다시 보냅니다. 그 편지 내용은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에 앞세워 두고 너희는 그만 남겨 두고 돌아와 적들에게 죽게 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우리아를 전장에서 적과 싸우다 전사한 것처럼 꾸며 죽이라고 한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간통죄를 덮기 위해 살인이라는 더 큰 죄를 계획하였습니다. 그 계획을 우리아 본인의 손에 들려서 요압에게 보내는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행동을 합니다. 구약 전체에서 가장 잔인한 살인 방법입니다.

이 편지를 받은 요압은 다윗의 의도를 분명히 알고, 확실하게 성공하기 위해 일부러 암몬 군사들 중에 가장 용맹한 군사들이 있는 곳을 알아내어 그곳으로 우리아를 보냈습니다.

 

(2) 우리아의 죽음(16-17)

암몬 사람들이 성에서 나와서 요압과 전쟁한 결과 다윗의 부하들 중에 몇 명이 죽었습니다. 그들 중에 우리아가 속해 죽었습니다. 우리아 한 명을 죽이기 위해 그와 같이 있던 다윗의 부하들도 목숨을 잃게 한 것입니다. 결국 신실하고 우직하게 다윗에게 충성하던 우리아는 다윗에게 아내도 빼앗기고 목숨까지 빼앗기는 가장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였고, 죄 없는 부하들도 살해당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 너무 많은 무죄한 피를 흘리게 하였습니다.

전에 다윗이 자신을 조롱한 나발을 죽이려고 할 때는 지혜로운 아비가일이 다윗을 막아 무죄한 피 흘리는 것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윗을 막는 사람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요압은 오히려 다윗의 계획을 실행해주면서 우리아뿐만 아니라 아무런 관계도 없는 다윗의 부하들까지 죽인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바라볼 때는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다윗이 죄짓는 것을 막아주셨지만, 다윗이 더 이상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채 자신의 욕망대로 행할 때,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개입하지 않고 내버려 두십니다. 그동안 다윗은 하나님께 은혜를 많이 받았고 이때는 인격적이고 모범적인 모습을 오래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진 지금의 다윗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여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살인도 서슴지 않는 잔인무도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런 다윗의 모습을 보면서 인간이란 존재가 기본적으로 얼마나 악한 본성을 지니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요압의 보고(18-25)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먹고 숨은 아담과 하와를 찾아오셨습니다. 또한 다윗에게도 찾아오셨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죄악을 해결해주시길 원하십니다. 죄인이 죄를 해결할 순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이 진리 앞에 섰을 때, 죄의 문제는 해결 받을 수 있습니다. 마음속에 무거운 짐들이 모두 해결 받고 매우 자유스러울 것입니다.

 

18요압이 사람을 보내 그 전쟁의 모든 일을 다윗에게 보고할새 19그 전령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전쟁의 모든 일을 네가 왕께 보고하기를 마친 후에 20혹시 왕이 노하여 네게 말씀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성에 그처럼 가까이 가서 싸웠느냐 그들이 성 위에서 쏠 줄을 알지 못하였느냐 21여룹베셋의 아들 아비멜렉을 쳐죽인 자가 누구냐 여인 하나가 성에서 맷돌 위짝을 그 위에 던지매 그가 데벳스에서 죽지 아니하였느냐 어찌하여 성에 가까이 갔더냐 하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왕의 종 헷 사람 우리아도 죽었나이다 하라 22전령이 가서 다윗에게 이르러 요압이 그를 보낸 모든 일을 다윗에게 아뢰어 23이르되 그 사람들이 우리보다 우세하여 우리를 향하여 들로 나오므로 우리가 그들을 쳐서 성문 어귀까지 미쳤더니 24활 쏘는 자들이 성 위에서 왕의 부하들을 향하여 쏘매 왕의 부하 중 몇 사람이 죽고 왕의 종 헷 사람 우리아도 죽었나이다 하니 25다윗이 전령에게 이르되 너는 요압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이 일로 걱정하지 말라 칼은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삼키느니라 그 성을 향하여 더욱 힘써 싸워 함락시키라 하여 너는 그를 담대하게 하라 하니라(18-25)

요압은 다윗의 명령에 충실히 이행하여 우리아를 죽게 합니다. 그는 다윗의 진정한 충신이었습니다. 왕이라도 잘못된 결정을 하면 목숨을 걸고 반대하고 막을 줄 알아야 충신입니다. 다윗에게 죄는 숨긴다고 감추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라도 남김없이 다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1) 요압의 지시(18-21)

우리아를 죽인 요압은 이 소식을 다윗에게 알립니다. 그 전령에게 전쟁의 모든 상황을 왕에게 보고한 후에 혹시 왕이 요압의 군대가 성에 너무 가까이 가서 전쟁에서 부하들이 죽은 일에 대해 화를 낼 경우 헷 사람 우리아도 죽었다는 말을 하라고 일러줍니다. 이것은 다윗의 목적이 달성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면 모든 잘못을 덮어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요압의 말을 종합해보면, 요압은 성문을 열고 나온 암몬과 전투하다가 우리아 부대에게 가장 위험한 곳인 성 바로 앞까지 쫓아가게 만들어놓고 자신의 부대는 회군해버리고, 결국 우리아와 우리아의 부대는 성에서 날아오는 화살과 창과 돌 등에 맞아 죽게 되었습니다. 요압은 일부러 우리아가 암몬 사람의 화살에 맞아 죽도록 성 바로 앞까지 보낸 것입니다.

21절에서 요압은 성 위에서 여자가 던진 맷돌에 맞아 죽은 여릅바알의 아들 아비멜렉의 예를 들면서 다윗이 화를 낼 것을 예상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여룹바알 대신 여룹베셋이라고 하였는데, 이 단어는 여기에 단 한 번 나오는 것으로 여룹바알에 대한 잘못된 표기인 것 같습니다. 여기서 아비멜렉은 성 가까이 다가갔다가 맷돌에 맞아 죽은 어리석은 인물의 예로 나타납니다.

 

(2) 전령의 보고(22-24)

전령이 다윗에게 와서 요압이 일러준 대로 보고하는데 전쟁의 상황이 세 번 반복되는 이야기 중에서 가장 자세하게 다루어지고 있으며, 우리아가 어떻게 죽었는지 자세하게 알 수 있습니다. 전령은 보고의 맨 마지막에 왕의 부하들의 죽음과 함께 우리아의 죽음을 알립니다. 우리아의 죽음을 들은 다윗은 전쟁에서 피해를 본 것에 대해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걱정하지 말라고 요압을 위로합니다. 그러면서 칼이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삼킨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다윗의 부하들의 죽음은 전쟁에서 항상 일어날 수 있는 병가지상사이니 크게 신경 쓸 필요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요압이 우리아를 죽이기 위해 다윗의 부하들까지 같이 죽인 것에 대해서 염려하지 말라는 위로의 말이며, 우리아를 죽어준 것에 대해 간접적으로 감사를 표현한 것입니다. 다윗은 전령에게 이제 힘을 다해 성을 함락시키라는 명령을 전달하라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를 담대하게 하라고 명령하는데, 이것은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고 전쟁에 온 힘을 다하라는 의미로, 요압이 우리아를 죽인 일에 대해 자신이 매우 만족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 것입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죽음 소식에 매우 만족해하며, 이 일로 목숨을 잃은 자신의 부하들에 대해서는 조금도 미안해하거나 애도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아의 장례(26-27)

우리가 알고도 죄를 짓는 것을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시고 결국 행한 대로 심판하시는 분임을 안 믿어서 그렇습니다. 믿음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 믿음을 어디에 쓸 것입니다. 우리아의 전사 소식을 들은 다윗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시길 바랍니다.

 

26우리아의 아내는 그 남편 우리아가 죽었음을 듣고 그의 남편을 위하여 소리내어 우니라 27그 장례를 마치매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를 왕궁으로 데려오니 그가 그의 아내가 되어 그에게 아들을 낳으니라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26-27)

우리아의 죽음에 대한 한줄평이 세 번 반복되는 동안 다윗은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일으키지 않습니다. 오직 완전범죄라고 여기며 안도할 뿐입니다. 이런 다윗에 대해 성경 저자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라는 한줄평으로 다윗에 대해 평가합니다.

 

(1) 곡하는 밧세바(26)

우리아가 죽었다는 사실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에게 알려졌고, 그녀는 남편을 위해 애곡하며 우리아를 위해 장례를 치러줍니다. 보통 이스라엘에서의 애곡의 기간은 7일이며, 다윗은 이 기간이 끝나자 바로 밧세바를 왕궁으로 데리고 와서 아내로 삼습니다.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서는 시간을 지체하면 안 되기 때문에 여기서도 다윗은 매우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런 다웠의 행동을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죽은 부하의 아내를 자신의 부인으로 삼아서 돌보아주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다윗에 대해 좋게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2) 결혼하는 밧세바(27)

마침내 다윗은 간통했다는 명예를 실추당하지 않고 자신의 계획대로 밧세바를 아내로 맞이하고 그녀를 통해 아들도 얻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아마도 자신의 죄를 잘 숨겨 명예를 지켜냈고 예쁜 아내와 아들까지 얻었다고 만족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27절 마지막에 화자는 다윗의 모든 행동을 지켜보고 계셨던 여호와의 평가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다윗이 행한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아무도 모르게 성공적으로 고비를 넘겼다고 생각하였지만, 여호와께서는 이런 다윗을 악하게 보시며 다윗이 저지른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실 준비를 하고 계셨습니다.

 


먼저는 죄악을 감출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지만, 하나님은 절대로 속일 수 없습니다. 다윗의 행동을 보시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악하다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다윗은 지금까지 자신의 권력으로 죄를 가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눈을 가릴 수 없었습니다. 다윗처럼 계획대로 죄를 감추는 것이 성공했다고 해서 다 되었다라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죄를 감추고 은닉하려고 애쓰지 말고 정직하게 회개하는 것이 우리가 살길이라는 것을 잊지 않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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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08-03)

 


흑암의 권세를 물리치신 예수님

마태복음 823-34


기독교 내에서 봉사하면 대단히 믿음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봉사한다 할지라도 믿음 없이 봉사할 수 있습니다. 마치 사회단체에서 봉사하는 것처럼 자신의 명예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역하는 목적에는 영혼을 구원하는데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에워싸는 무리를 피해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기 위해 먼저 배에 오르시고, 제자들도 뒤따릅니다. 제자들은 향해 도중 큰 풍랑을 만나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모습에 믿음이 적다 꾸짖으시며 풍랑을 잠잠케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은 가다라 지방에서 귀신 들린 두 사람을 고치실 때, 다시 한번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를 목격합니다. 하지만 그 지방 사람들은 오히려 예수님께 떠나 주시기를 요청합니다.

 

광풍을 잔잔케 하신 예수님(23-27)

이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지만, 말씀을 거역하여 무너졌습니다. 무너진 세상은 이제 창조주 예수님의 말씀으로 새롭게 창조되어 세상의 혼돈과 무질서와 어둠이, 질서와 채움과 빛으로 변할 것임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인정하고 그 분을 믿고 그 분과 연합될 때만 우리에게도 새로운 창조가 가능한 일입니다.

 

23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더니 24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25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26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27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23-27)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에 임하게 하셨다는 여러 가지 사건들을 보게 됩니다. 필연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이 세상 나라와의 영적인 전쟁을 가져 옵니다. 지금도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백성답게 살자고 하면, 반드시 이 세상 나라의 저항을 가져옵니다.

 

(1) 위기를 마주한 제자들(23-25)

혼돈과 죽음의 세력은 제자들을 두렵게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에게서 평안을 빼앗지는 못했습니다. 도리어 예수님께서는 귀신을 꾸짖듯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잔잔케 하셨습니다. 광풍을 잠잠하게 하신 사건은 8-9장에서 유일하게 자연에 대해 행하신 기적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배를 타고 동쪽을 향해 가던 중에 큰 광풍이 갑자기 몰아쳐 배를 뒤덮었습니다. 갈릴리 바다는 갑자기 광풍이 몰아치는 것으로 유명한 호수입니다. 예수님과 일행이 탄 배는 침몰 직전입니다. 하지만 배가 뒤집힐 상황인데도 예수님께서는 자고 계십니다.

 

(2) 위기를 해결해주시는 예수님(26-27)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우며 죽게 됐으니 구원해 달라고 외칩니다. 머리 둘 곳 없이 순회하며 사역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이 순간에도 피곤한 몸으로 배 위에서 자고 계십니다제자들이 두려워하는 모습은 잠을 자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과 대조적인데, 마태는 하나님께서 지켜주실 것을 믿고 평안 가운데 계신 예수님의 믿음을 강조하고 있습니까(3:35; 4:8)? 이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구약에서 잠은 깊은 신뢰와 관련이 있는 점을 고려할 때(11:18-19; 3:35; 3:24-26), 마태가 예수님의 평온과 제자들의 근심을 대조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27절에서 예수님의 권위에 충격을 받은 제자들이 고백한 말은 예수님의 신적 권위를 떠올립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자고 계신 것은 땅에서 머리 둘 곳 없이 사시는 그의 고난을 묘사하는 동시에, 역설적으로 그가 하나님만이 행하시는 권위를 갖고 계신 분임을 암시합니다. 누구도 예수님을 위협할 정도로 그분의 권위 위에 있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평안히 계십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두렵게 할 수 있는 존재는 없으므로, 가장 강한 자로서 편안하게 주무신 것입니다시편 121편은 하나님께서 주무시지 않는 분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정반대로 시편 44:23-24은 주무시는 하나님을 깨우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비슷한 내용은 시편 7:7; 35:23; 59:5-6에도 등장합니다. 특히 시편 44:23-24은 풍랑을 만난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면서 하는 말과 매우 유사합니다. 따라서 본 사건에서 강조하는 것은 예수님의 믿음이 아니라 제자들의 믿음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평안했던 예수님이 아니라 바다를 잠잠하게 만들 수 있는 신적 권위를 가진 예수님의 정체를 강조합니다. 물론 제자들의 호소가 시편의 내용을 떠올린다고 해서 그들이 예수님을 신적인 존재로 믿고 깨운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우면서도 이 순간에는 그의 정체를 정확히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는 어려움에 빠진 자녀가 대단한 재력가인 아버지의 실제 능력을 알지 못한 채 자신의 처지에 무관심한 것처럼 보여서 왜 자식의 어려움을 돌아보지 않는지 원망하는 투로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제자들이 온 바다가 진동하는 모습을 보면서 겁에 질리게 된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반응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책망을 받습니다. 자신들과 함께 계시는 예수님께서 자연을 통제하는 분임을 아직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제자들의 두려움은 예수님의 정체를 정확히 알지 못해서 생긴 것입니다. 제자들은 바다를 잠잠하게 만들 수 있는 하나님의 권능을 갖고 계신 것을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정제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이 믿음이 작은 상태이며, 믿음이 작을 때 두려움이 엄습하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겁에 질린 제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일어나 바다를 꾸짖으셨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바다를 꾸짖으시는 분입니다(18:15; 104:7; 106:9, 50:2; 1:4). 특히 구약과 유대교에서 바다는 혼돈의 세력이 나오는 출처로 인식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바다를 제압하는 주가 되십니다(89:8-11; 107:23-30; 참조 시 69:13, 30-36; 124; 1).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자연을 통제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위협하는 악의 세력을 제압하십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목격한 제자들은 놀라서 그가 누구이기에 심지어 바람과 바다도 그에게 복종하는지 묻습니다. 제자들은 폭풍과 같은 인생의 위기에서 예수님의 보호를 경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택하신 자들과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입니다. 임마누엘인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제자 공동체를 보호하신 것처럼, 시대의 끝까지 시대를 초월해서 교회에 긍휼을 베푸는 것으로 함께 하십니다.

죄로 무너진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말씀으로 새 창조되어 혼돈과 무질서와 어둠이 질서와 채움과 빛으로 변할 것임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주님으로 자신의 삶에 선장으로 모시고 살면 거칠고 험난한 인생 항해에서도 편히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귀신 들린 사람들을 치유(28-34)

귀신은 질서를 망가뜨리고 혼돈을 일으킵니다. 복음을 방해하기 위해 하나님의 사람들을 처참하게 죽음을 맞이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상인 인격을 철저하게 파괴시켰습니다. 사실 하나님을 떠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귀신에 붙들려 무덤 사이에서 사는 두 사람과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귀신은 예수님을 만나고 그의 권능 앞에 서게 됩니다.

 

28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그들은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지경이더라 29이에 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30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먹고 있는지라 31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하여 이르되 만일 우리를 쫓아 내시려면 돼지 떼에 들여 보내 주소서 하니 32그들에게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 33치던 자들이 달아나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 들린 자의 일을 고하니 34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28-34)

예수님께서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어두운 세력들로부터 사람들을 구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고 계셨습니다. 그들은 귀신 들린 자들이었습니다. 그분은 이제 자시가 악의 세력과 싸워 그들을 정복했다는 사실을 세상으로 하여금 알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1) 누구도 가지 않는 곳에 가심(28a)

예수님께서는 제자 일행과 함께 갈릴리 호수 동쪽에 위치한 데가볼리의 가다라 지방에 도착합니다. 이 도시는 유대인이라면 아무도 가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을 향해 감으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곳에서 처음 만난 사람은 귀신 들린 두 사람이었습니다. 두 명은 법정에서 증언할 수 있는 숫자의 개념입니다.

 

(2)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자(28b)

귀신 들린 사람들은 무덤에서 나와 예수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그들의 상태는 사람들을 몹시 폭력적이고 위험했기 때문에, 사람들을 해칠 수 있었습니다. 그 옆으로 지나갈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마을에서 쫓겨나서 무덤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당시 무덤은 우리나라처럼 평토장(平土葬)이 아니라 바위나 언덕에 동굴의 모습으로 사람이 충분히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이 됩니다.

 

(3) 악한 귀신의 최후에 심판을 귀신들(29-30)

귀신 들린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서 따지고 묻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29)라고 귀신은 예수님의 신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귀신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온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귀신들은 우리가 당신과 무슨 관계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서로의 관심이 다른데 왜 이곳을 찾아왔느냐는 의미입니다.

어둠의 권세 잡은 사단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온전히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이렇게 온전한 인간의 몸으로 오신 것은 십자가에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귀신 들린 자들이 예수님께서 때가 이르기 전에 왜 오셨는지 묻습니다. ‘는 귀신들이 형벌의 장소로 보내지는 시기로, 악인들과 함께 악한 천사들이 심판을 받는 최후 심판의 때를 의미합니다. 심판의 결과로 귀신들은 지옥의 형벌을 받습니다(25:31-46). 귀신은 자신들의 운명과 자신들의 마지막 때를 알고 있었습니다그들은 자신들을 괴롭히다라는 의미는 법정에서 육체적으로 고통을 준다또는 고문하다는 의미로, 극심한 고통을 묘사하는 동사입니다. 본문에서는 종말론적인 심판을 의미합니다. 귀신들은 자신들이 고통당할 때, 즉 최후 심판의 때가 있습니다. 아직 그 때가 오지 않았는데 굳지, 왜 예수님께서 벌써 자신들에게 왔는지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지 않자 귀신들은 자신들을 심판하러 온 것을 직감하고 멀리 있는 돼지 떼에게 들어가려고 쳐다보았습니다. 당시 로마가 집권하고 있는 헬레니즘 문화는 돼지를 부와 쾌락 신의 축복의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데가볼리 지역은 주전 63년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에게 협력하면서 자치와 통상, 면제의 특권을 부여받았고, 친 로마 성격으로 도시 동맹체 성경을 유지하며 로마식 제사를 통해 돼지를 잡아 드렸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유대인들은 이 지역을 배척했습니다주전 63년에 안티파스가 유대를 침공한 후에 예루살렘 성전을 훼파하고, 돼지를 성전 재단에 바쳤습니다. 로마 제국 입장에서 유대인들을 모독하기 위한 행위가 아닙니다. 이러한 종교 행위를 통해 헬레니즘 문화권의 영향력을 증험하는 행동일 뿐입니다. 데가볼리 지역은 돼지를 잡아 제사하는 것이 일상적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곳에서 돼지를 사육하고 2000마리 가까운 돼지를 사육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한 가지 큰 구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돼지를 이렇게 많이 사육하고 있었던 것은 단순하게 경제논리가 아니라 로마 황제를 숭상하는 행위들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보편적인 사람들의 인식에는 로마 황제는 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과 신의 아들의 대결이었습니다. 그러나 천지를 만드시고 세상의 주권을 소유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을 자신의 것이라고 오해하고 헬레니즘 문명이라는 미명 아래 점점 자신들의 세력을 확대해 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지역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상징적으로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사실을 제자들에게 보여줍니다.

자신들의 운명을 알아챈 귀신들은 돼지 떼에 들어갈 수 있게 허락해 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귀신들의 요청을 들어주십니다. 결국 돼지 떼는 물에서 몰사 합니다(32). 돼지들은 악하고 폭력적인 귀신들을 견디지 못해서 바다를 향해 달려가 죽습니다.

 

(4) 탐욕스러운 자들에게 거절당하심(33-34)

이 많은 돼지를 치던 자들의 보고하기 위해 시내에 들어갔습니다. 그 보고를 받은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려고 사건이 일어난 곳으로 달려왔습니다(33). 그리고 그들은 광경을 본 사람들은 예수님께 자신의 지방에서 떠나 달라고 요구합니다(34). 그들을 지배하고 있던 의식이 무엇입니까? 경제적인 이유로 예수님을 떠날 것을 요청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돈이 자신을 보호하고 안전하게 지켜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다시 찾아올 수 없는 복음의 유일한 기회를 내쳐 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치유보다 돼지를 더 중히 여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도시를 집으로 삼은 귀신들을 쫓아내심으로써 현재와 미래의 가장 큰 위험을 제거하셨으나, 주민들은 예수님의 행위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제자들을 태우고 바다를 건너서 본 동네로 가버립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하늘나라의 도래와 관련해서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귀신들이 들어온 돼지들이 죽은 장면은 귀신들의 운명도 지상에서 사라질 것을 암시합니다. 마태복음에는 무저갱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지 않지만, 귀신들이 돼지 떼와 함께 물속에 던져진 것은 귀신들이 최후 심판 전까지 물아래 심연 또는 무저갱에 갇혔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합니다. 병행 본문인 누가복음 8:26-3931절에서 귀신들이 무저갱에 던져 넣지 말아 달라고 간청합니다. 귀신들이 심연에 갇히는 그림은 하늘나라가 예수님의 권위로 강력하게 임했음을 증명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지고 오신 하늘나라의 공격을 받아 사탄의 나라가 무너지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예수님의 이동 경로를 통해서 사회에서 쓸모없는 인생을 위해 헌신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회에서 완전히 추방된 사람을 만나려고 바다 폭풍을 뚫고 이곳에 오셨고, 회복하고 다시 돌아가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제자들을 데리고 오셔서 긍휼을 가르치기 위해 현장 교육을 하신 것입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부정한 곳에서 부정한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은 치유할 가치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을 위해 사회에서 효용 가치가 높은 것을 희생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안 해서 낭비로 여깁니다. 그러나 제자는 죽어가는 사람을 회복하는 사명을 맡았습니다. 사람의 목숨은 천하보다 귀합니다. 낭비처럼 보일지라도 사람을 회복하는 일이라면 하늘나라의 사역입니다.

 


믿음이 작을 때 환경에 흔들리게 됩니다. 갈릴리 바다에 큰 물결이 일어나 배가 잠기게 되자 어부 출신 제자들조차 죽음에 두려움에 사로잡혀 예수님을 깨우며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잠에서 깨어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믿음이 작은 것을 책망하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창조주 만유의 주로 고백하고 함께하신다는 것을 믿고 있다면서도, 때로는 환경 때문에 쉽게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인생의 배에 누가 타고 있는지 기억하기 바랍니다. 우리 인생의 배에 우리가 저항할 수 없는 큰 풍랑이 일지라도 그 배에는 예수님께서 함께 계십니다. 우리 인생을 다스리고 주 대신 그 주님께 믿음의 눈을 들어 바라보며 폭풍 가운데도 평안을 누리는 주의 백성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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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11-01)

 


방심과 욕심이 불러온 범죄

사무엘하 11장 1-13절


다윗은 하나님께 인정받을 만큼 믿음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다윗도 한순간의 방심이 죄를 불러오게 하였습니다. 음욕으로 범죄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다윗보다 믿음이 약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금도 사단은 넘어질 자들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베드로전서 5:8)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독점하다시피 한 다윗은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승승장부 하였습니다. 그러나 잠깐의 방심으로 밧세바와 간음의 죄를 범하고, 급기야 밧세바의 남편을 살인하는 범죄까지 이르게 되는 내용입니다. 축복의 자리에 있을 때 죄를 범하지 않도록 더 조심해야 합니다.
 

다윗과 밧세바의 동침(1-5)

성도는 서 있는 곳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의 장소에 서 있어야 합니다. 다른 곳에 있을 때, 우리도 다윗 못지않게 위험한 자리에 서게 됨을 배웁니다. 유혹은 지역과 장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가장 평온한 시간, 가장 거룩해 보이는 사람에게도 우혹이 닥칩니다. 지금 우리가 서 있어야할 자리가 어디입니까?
 
1그 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에게 있는 그의 부하들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그들이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라 2저녁 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3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그가 아뢰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하니 4다윗이 전령을 보내어 그 여자를 자기에게로 데려오게 하고 그 여자가 그 부정함을 깨끗하게 하였으므로 더불어 동침하매 그 여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5그 여인이 임신하매 사람을 보내 다윗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임신하였나이다 하니라(1-5)
전쟁의 선두에서 백성을 보호하는 것이 왕의 사명인데(삼상 8:19) 다윗은 요압과 그 신복과 온 이스라엘 군대만 보내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습니다. 사명을 소홀히 하고 지도자 노릇을 중단한 상태에서 유혹이 찾아왔습니다.
 
(1) 배경 설명(1)
본문은 사건의 배경을 설명하는 부분으로 시간적 배경은 ‘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입니다. 이것은 전쟁할 때가 되었다는 의미로 우기가 끝나고 추수가 시작되는 봄이 되기 전의 시기를 가리킵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관습적으로 이 시기에 백성들을 소집하여 전쟁을 하였고 대개 왕들이 군대를 이끌고 나갔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왕이 출전해야 하는 것은 아니고, 왕궁의 정무나 외교적 일이 있으면 출전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다윗도 이번에는 요압과 그의 부하들만 전쟁에 보내어 암몬 자손을 치게 하였습니다. 이 전쟁은 10:14에 언급된 전쟁의 연장으로 요압은 군대를 이끌고 랍바로 도망한 암몬을 치기 위해 출전하였고, 암몬 자손을 친 다음에 랍바를 포위하였습니다. 요양은 암몬과의 두 번째 전쟁에서도 승리를 거두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암몬과의 첫 번째 전쟁(삼하 10:7)에서처럼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고, 화자는 다윗이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다고 보고합니다.
 
(2) 목욕하는 밧세바(2-3)
부하들이 전쟁터에 나가 있는 사이에 다윗은 한가한 저녁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낮잠을 자고 저녁에 일어나 시원해진 왕궁 지붕을 한가롭게 산책하였습니다. 그러다 한 여인이 옥상에서 목욕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그 여인은 매우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여인의 이름은 밧세바였습니다. 그녀는 시원해진 옥상에서 햇빛에 따뜻해진 물로 씻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녀가 옥상에서 목욕한 것을 두고 다윗을 유혹하기 위한 고의적인 행동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본문의 의도와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본문은 밧세바를 철저히 수동적인 인물로 그리고 있으며, 다윗이 모든 일을 주도한 것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목욕을 하고 있는 밧세바를 보았다는 것은 단지 일어난 사실을 언급한 것입니다. 이를 보고 다윗이 그냥 지나칠지 아니면 사람을 보내어 데리고 올지는 철저히 다윗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아름다운 밧세바가 목욕하는 모습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못하였고, 사람을 보내어 누구인지 알아보게 하였습니다. 이미 다윗의 마음에는 음욕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그녀가 엘리암의 딸이며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여기서 밧세바의 아버지 엘리암과 밧세바의 남편 헷 사람 우리아는 모두 다윗의 37명의 용사 중에 들어 있는 다윗 왕국에서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던 인물들입니다(삼하 23:34,39). 우리아는 헷 사람으로 다윗 당시에 히타이트 제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지만, 제국의 남은 자손들이 시리아에서 헷 족속의 형태로 생존하고 있었고 우리아는 여기 출신으로 이스라엘에 이주하여 살았던 인물입니다. 그의 이름 우리아는 ‘여호와는 빛이시다’라는 뜻의 이름으로 추측해 보건데 그는 이스라엘에서 태어났고 여호와를 믿는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3) 임신한 밧세바(4-5)
다윗은 밧세바가 전쟁터에 나가 있는 부하의 아내라는 사실을 알고도 사자를 보내어 그녀를 데려와 동침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때는 밧세바가 부정함에서 벗어나 정결 의식을 막 치른 때였기에 임신이 가능한 상태였습니다. 여기서 이것을 언급한 것은 밧세바가 임신한 아이가 우리아의 아기가 아니라 다윗의 아기라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기 위한 것입니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갑니다. 여기서 다윗은 매우 주도적으로 밧세바에 대해 알아보고 부르고 동침하고 있습니다. 밧세바는 이 장면에서 다윗이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매우 수동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본문이 다윗의 적극적인 모습을 강조한 것은 다윗의 간음 사건이 어쩌다 여자의 꼬임에 넘어가 실수로 벌어진 일이 아니라 다윗이 적극적이고 고의적으로 행한 범죄라는 사실을 말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렇게 다윗은 밧세바와 관계를 가진 후에 아무도 모르게 죄를 덮으려고 했지만. 5절에서 밧세바가 다윗에게 자신이 임신하였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간음죄는 덮기 어려운 심각한 문제가 되어버렸습니다. 여기서 밧세바는 유일하게 말을 하고 있는데, 이 말은 모든 비극의 시작이 되는 매우 결정적인 말이었습니다.
 

우리아의 소환(6-9)

거짓과 속임은 사람을 가리지 않습니다. 전쟁에 나가 있던 밧세바의 남편을 불러들여, 아내와 동침케 하여 자신의 허물을 덮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사는 사람도 언제든 순식간에 죄악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 줄로 생각하는 사람은 항상 넘어질까 조심하며, 악한 마귀가 틈타지 못하도록 늘 깨어있어야 합니다.
 
6다윗이 요압에게 기별하여 헷 사람 우리아를 내게 보내라 하매 요압이 우리아를 다윗에게로 보내니 7우리아가 다윗에게 이르매 다윗이 요압의 안부와 군사의 안부와 싸움이 어떠했는지를 묻고 8그가 또 우리아에게 이르되 네 집으로 내려가서 발을 씻으라 하니 우리아가 왕궁에서 나가매 왕의 음식물이 뒤따라 가니라 9그러나 우리아는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고 왕궁 문에서 그의 주의 모든 부하들과 더불어 잔지라(6-9)
무명의 목동 다윗은 블레셋의 위대한 거인 골리앗 장수를 물맷돌 다섯 개로 이겼지만, 통일 왕궁의 목자 다윗은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없는 가련한 한 여인에게 무너졌습니다. 욕정이 이끄는 대로 권력을 남용하여 부하의 아내를 취하고 말았습니다.
 
(1) 우리아 소환(6)
밧세바가 임신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다윗은 요압에게 사람을 보내어 우리아를 자신에게 보내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요압은 우리아를 다윗에게 보냅니다. 여기서 다른 설명은 일체 없이 사자를 보내고 우리아를 보내라고 명령하고 우리아를 보내는 것을 표현한 단순한 문장을 통해서 다윗이 매우 서둘러 우리아를 불러들였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2) 우리아의 보고(7)
다윗은 우리아가 오자 요압의 안부와 군사들의 안부와 전쟁의 상황을 물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전쟁의 상황을 알기 위해 우리아를 부른 것처럼 보이기 위한 행동입니다.
 
(3) 우리아의 불복종(8-9)
다윗의 진짜 속셈은 8절에 나타납니다. 그는 우리아에게 집으로 가서 ‘발을 씻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발을 씻으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여행자가 집에 왔을 때 발을 씻겨 줌으로써 환영의 표시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발’이란 단어는 남성성을 은유적으로 표현할 때도 사용하는 단어이기 때문에, 다윗은 일부러 ‘발’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아내와 관계를 가지라는 암시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즉, 다윗은 밧세바와의 간음죄를 감추기 위해 우리아를 밧세바와 동침하게 하여 자신의 아기를 우리아의 아기인 것처럼 속이려고 한 것입니다. 또 우리아의 수고를 치하하는 의미로 많은 하사품을 보내어 자신이 매우 좋은 왕인 것처럼 행동합니다.
하지만 우리아는 다윗의 생각과 다르게 집으로 가지 않고 왕궁 문에서 왕의 모든 부하들과 같이 잠을 잤습니다. 여기서 ‘그의 주인의 부하’라는 표현을 통해 우리아는 다윗을 자신이 충실하게 섬겨야 할 주인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런 우리아의 충직한 모습은 자신에게 충직한 부하의 아내를 탐내어 간통하고 그 결과를 뒤집어 씌우려는 다윗의 비열한 모습과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이렇게 우리아가 다윗의 계획과 다르게 행동함으로 다윗의 계획은 실패하게 됩니다.
 

우리아의 결심(10-13)

성도들은 항상 방심하거나 욕심을 부리지 않아야 합니다. 대신에 항상 성령으로 충만하게 깨어있어야 합니다. 죄를 감추지 않고 속히 회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죄악을 감춘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윗은 자신의 범죄를 감추려다가 오히려 더 죄를 키우고 말았습니다.
 
10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아뢰되 우리아가 그의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였나이다 다윗이 우리아에게 이르되 네가 길 갔다가 돌아온 것이 아니냐 어찌하여 네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11우리아가 다윗에게 아뢰되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야영 중에 있고 내 주 요압과 내 왕의 부하30들이 바깥 들에 진 치고 있거늘 내가 어찌 내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처와 같이 자리이까 내가 이 일을 행하지 아니하기로 왕의 살아 계심과 왕의 혼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나이다 하니라 12다윗이 우리아에게 이르되 오늘도 여기 있으라 내일은 내가 너를 보내리라 우리아가 그 날에 예루살렘에 머무니라 이튿날 13다윗이 그를 불러서 그로 그 앞에서 먹고 마시고 취하게 하니 저녁 때에 그가 나가서 그의 주의 부하들과 더불어 침상에 눕고 그의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니라(10-13)
다윗은 범죄를 은패하기 위해 우리아를 불러 아내와 동침하도록 시도합니다. 자신과 우리아 사이에 깨어진 ‘샬롬’을 감추려고 안달하는 자가 뻔뻔하게 요압과 군사와 싸움의 안무를 묻고 있습니다.
 
(1) 다윗의 질문(10)
다윗은 집으로 가지 않은 우리아를 불러 왜 먼 길에서 돌아왔는데 집에 가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다윗의 입장에서는 이런 우리아의 행동이 매우 마음에 안 들었지만, 우리아를 걱정하는 척하며 집으로 가지 않은 이유를 물은 것입니다.
 
(2) 우리아의 대답(11)
이에 대해 우리아는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야영 중에 있고 자신의 상사인 요임과 왕의 군대가 전쟁터에 있는데 어떻게 자신만 편안하게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아내와 잘 수 있냐고 말하며, 자신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을 왕의 목숨을 걸고 맹세합니다. 왕에게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충성 맹세를 한 것입니다.
우리아가 궤와 전쟁터와 아내와의 잠자리를 언급한 것은 전쟁을 수행할 때 진영에서 정결해야 하는 규범과 연결됩니다. 언약궤가 함께하는 진영은 여호와께서 함께하시는 거룩한 곳이기에, 여자와 자는 것이 금지됩니다. 남성이 설정하면 하루 동안 부정한 상태가 되어 진의 거룩성을 훼손하게 되기 때문입니다(레15:16-18).
물론 우리아는 지금 전쟁터에 있는 것도 아니고 진영으로 돌아가기 하루 전에만 조심하면 상관이 없는 상황이지만, 비록 예루살렘에 와 있어도 여전히 전쟁터에 있는 사람들과 연결된 것으로 생각하였고, 그래서 자신의 정결을 지키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혹시라도 자신이 부정하게 되어 전쟁터에 있는 다윗 진영의 거룩성이 훼손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정결법을 최대한으로 지키려고 노력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애를 쓰며 이스라엘 군대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노력하는 우리아의 모습은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도 죄로 느끼기는커녕 그 죄를 덮기 위해 노력하는 다윗의 모습과 대조를 이룹니다. 여기서 그동안 하나님 앞에서 가장 충성스럽고 의로웠던 다윗의 모습은 사라지고 자신의 죄를 덮기에 급급한 다윗의 모습만이 나타납니다.
 
(3) 우리아의 변함없는 태도(12-13)
다윗은 우리아가 자신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자, 다시 한 번 우리아를 집으로 보내어 밧세바와 자게 하려고 시도합니다. 다윗은 우리아에게 하루 더 예루살렘에 머물라고 하며 내일은 보내주겠다고 합니다.
본문에서 우리아가 그날과 그 다음 날 예루살렘에 머물렀다는 것은 다윗의 권고로 이틀 동안 예루살렘에 머물렀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왕이 충성스러운 신하를 배려하여 하루 더 쉬게 해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다윗의 진짜 속셈은 13절에 나오는데, 그날 우리아를 불러서 그와 함께 먹고 마시며 일부러 우리아를 취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아가 취하면 술김에 집으로 가서 아내와 동침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생각과는 달리 우리아는 술이 취한 상태에서도 집으로 가지 않고 어제처럼 부하들과 함께 잤습니다. 본문은 우리아가 집에 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언급하여 강조합니다. 우리아는 자신의 맹세를 매우 충실하게 지킨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우직한 충성심의 대가는 죽음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왕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욕망을 잡고 성문 앞에서 부하들과 밤을 보낸 우리아의 모습은 자기 욕망을 억제하지 못해 하나님에 대한 충성성을 저켜리고 부하에 대한 신의를 버린 다윗과 대조됩니다.
 


죄는 위장하고 감춘다고 해결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 우리아를 불러 밧세바와 동침하도록 하려고 했습니다. 처음 시도가 실패로 끝나자 다시 시도하였습니다. 하지만 다윗의 이러한 시도는 죄에 대한 근본적 해결책이 아니었습니다. 죄는 위장하고 감춘다고 해서 결코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아무도 모르게 비밀리에 죄를 지었지만, 죄의 결과는 결코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죄를 짓게 되면 반드시 흔적이 남게 됩니다. 죄의 결과가 금방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죄가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에게도 덮어둔 죄가 있지는 않습니까? 이제는 그 죄를 덮기 위한 헛된 위장술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지하여 하나님께 자복하고 해결 받는 주의 백성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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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10-01)

 


다윗에 대항하는 암몬

사무엘하 101-19


오해는 것은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동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할 때, 일어나는 반응입니다. 은혜를 기억하고 기회가 왔을 때 갚으려는 행동은 그 자체로 감동적입니다. 상대방의 진심으로 모르고 행동할 때, 얼마나 많은 잘못된 반응을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그로인해 자신만 손해 본 것이 아니라 주변과 모든 사람들이 본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다윗이 베푼 은혜를 받아들여 복을 누리게 된 므비보셋(9)과 달리, 다윗의 은혜를 오해하고 거절하는 하눈을 봅니다. 10장은 전쟁에서 패배하는 하눈 이야기입니다. 다윗은 암몬 왕 하눈에게 암몬 왕의 나하스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조문 사절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진심어린 사랑과 배려가 오히려 오해를 받아 모욕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은총을 배신을 갚은 암몬(1-5)

싸움이나 전쟁이 불가피할 때가 있습니다. 성도에게 싸움은 잘 어울리는 단어는 아니지만 때로는 불가피하게 불의와 싸워야 하고 세상과 싸워야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싸움의 현장에서도 형제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은총은 그들이 맺고 있는 모든 관계 속에 다 반영되어야 합니다.

 

1그 후에 암몬 자손의 왕이 죽고 그의 아들 하눈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 2다윗이 이르되 내가 나하스의 아들 하눈에게 은총을 베풀되 그의 아버지가 내게 은총을 베푼 것 같이 하리라 하고 다윗이 그의 신하들을 보내 그의 아버지를 조상하라 하니라 다윗의 신하들이 암몬 자손의 땅에 이르매 3암몬 자손의 관리들이 그들의 주 하눈에게 말하되 왕은 다윗이 조객을 당신에게 보낸 것이 왕의 아버지를 공경함인 줄로 여기시나이까 다윗이 그의 신하들을 당신에게 보내 이 성을 엿보고 탐지하여 함락시키고자 함이 아니니이까 하니 4이에 하눈이 다윗의 신하들을 잡아 그들의 수염 절반을 깎고 그들의 의복의 중동볼기까지 자르고 돌려보내매 5사람들이 이 일을 다윗에게 알리니라 그 사람들이 크게 부끄러워하므로 왕이 그들을 맞으러 보내 이르기를 너희는 수염이 자라기까지 여리고에서 머물다가 돌아오라 하니라(1-5)

은혜를 기억하는 다윗은 요나단과의 언약을 기억하고 므비보셋에게 은총을 베풀었는데, 이번에는 암몬이 베푼 은혜를 기억하고 보답하고 있습니다. 은총의 선순환이라는 하나님의 경제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베푸신 은총와 보호와 용납을 다시 이웃에게 돌려주는 나라입니다.

 

(1) 암몬 왕의 죽음과 하눈의 즉위(1)

암몬 왕 나하스가 죽고 그의 아들 하눈이 왕위에 오르자 다윗은 하눈에게 사절단을 보내어 평화조약을 맺으려고 하였습니다. 암몬 왕 나하스는 사무엘상 11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오른쪽 눈을 빼야 언약을 맺겠다며 협박하던 인물입니다. 이때 막 왕이 된 사울은 소 한 거리를 잡고 열두 조각을 낸 다음 이스라엘 각 지파에 보내어 이스라엘 백성을 소집하였고, 결국 이 전쟁에서 크게 승리하였습니다. 이 전쟁 이후에 나하스는 사울과 적이 되었기 때문에 사울을 피하여 도망 다니던 다윗과는 우호 관계를 맺게 되었고, 그것은 다윗이 왕이 된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2) 다윗의 사절단 파견(2)

다윗은 나하스가 죽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우호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새로 왕이 된 하눈에게 죽은 나하스를 조문하는 사절단을 파견하였습니다. 다윗이 사절단을 통해 하눈의 아버지가 내게 은총을 베푼 것처럼 자신도 하눈에게 은총을 베풀겠다고 말하는데, 은총으로 번역된 헤세드는 주로 언약적 관계에서 사용되는 단어로 나하스와 우호조약을 맺은 것처럼 하눈에게도 우호조약을 맺자고 말하는 것입니다.

 

(3) 모욕당한 사절단(3-5)

하지만 이런 다윗의 의도와는 다르게 하눈의 신하들은 다윗이 사절단을 보낸 것이 단순히 나하스를 공경하는 마음으로 조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성을 정탐하여 함락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오해합니다. 다윗이 승승장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도 공격할지 모른다고 걱정한 것입니다. 신하들의 말을 들은 하눈은 사절단에게는 호의를 베푸는 일반적인 관례를 깨고 그들의 수염 절반을 자르고 옷도 절반 길이로 잘라 엉덩이가 드러나게 만들었습니다. 수염은 고대 근동에서 남성의 상징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수염을 자른다는 것은 거세를 의미하는 매우 모욕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사절단에게 이런 모욕을 주는 것은 그들을 보낸 다윗을 모욕하는 행위로, 다윗이 제안한 우호조약을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전쟁을 하겠다고 도발한 것입니다. 이런 소식이 다윗에게 전해졌고, 다윗은 모욕을 당하고 돌아온 사람들을 맞이하고 위로하기 위해 사람들을 보냅니다. 그들에게 수염이 다 자라서 모욕의 흔적이 없어질 때까지 여리고에 머물면서 쉬라고 배려해줍니다. 예루살렘으로 바로 돌아오면 많은 사람들이 보고 될 것이고, 사절단 사람들이 창피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리고는 요단 동편에 있는 아람에서 요단 서편으로 넘어오는 관문이기 때문에, 사절단을 여리고에 머물라고 한 것입니다.

 

암몬과 아람의 공동 작전(6-14)

상대방의 선의를 의심할 때 갈등은 증폭되고, 때로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받을 계산을 하지 말고 사랑을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랑을 거부하며 싸우기를 작정한 자들에게는 싸움을 수 밖에 없습니다. 거룩한 싸움에는 누구도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이 모범을 보이셨듯이, 진정한 리더는 ‘나를 따르라!’고 외쳐야 합니다. 

 

6암몬 자손들이 자기들이 다윗에게 미움이 된 줄 알고 암몬 자손들이 사람을 보내 벧르홉 아람 사람과 소바 아람 사람의 보병 이만 명과 마아가 왕과 그의 사람 천 명과 돕 사람 만 이천 명을 고용한지라 7다윗이 듣고 요압과 용사의 온 무리를 보내매 8암몬 자손은 나와서 성문 어귀에 진을 쳤고 소바와 르홉 아람 사람과 돕과 마아가 사람들은 따로 들에 있더라 9요압이 자기와 맞서 앞뒤에 친 적진을 보고 이스라엘의 선발한 자 중에서 또 엄선하여 아람 사람과 싸우려고 진 치고 10그 백성의 남은 자를 그 아우 아비새의 수하에 맡겨 암몬 자손과 싸우려고 진 치게 하고 11이르되 만일 아람 사람이 나보다 강하면 네가 나를 돕고 만일 암몬 자손이 너보다 강하면 내가 가서 너를 도우리라 12너는 담대하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13요압과 그와 함께 한 백성이 아람 사람을 대항하여 싸우려고 나아가니 그들이 그 앞에서 도망하고 14암몬 자손은 아람 사람이 도망함을 보고 그들도 아비새 앞에서 도망하여 성읍으로 들어간지라 요압이 암몬 자손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니라(6-13)

하눈은 다윗의 조문단을 첩자로 간주했고, 그들에게 수치를 줌으로써 다윗을 모독했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선전포고나 다름없습니다. 그들은 다윗의 선의를 왜곡해서 전쟁을 초래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한 것입니다.

 

(1) 암몬의 용병이 된 아람 군대(6)

암몬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온 사절단을 모욕한 것 때문에 암몬에 대한 다윗의 적대 감정이 고조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전의 호의적 관계가 완전히 깨진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암몬의 하눈과 신하들은 자신들의 행동의 결과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다윗의 사절단을 모욕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전선의 형성(7-8)

하지만 다윗이 이 사건으로 분노하였고, 이에 따라 전쟁의 위협이 커지자 이에 대처하기 위해 이스라엘 북쪽에 있는 벨르홉의 아람 사람들과 소바의 아람 사람의 보병 이만 명과 마아가 왕과 그의 군인 천 명과 요단 동편의 돕 사람만 이천 명을 고용합니다. 돕은 작은 도시 국가로 갈릴리 바다 남동쪽에 위치합니다. 이스라엘 주변에 있는 많은 도시 국가들과 동맹을 맺고 용병을 고용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확장을 막기 위해 주변 나라들이 암몬에 협조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변 나라들이 위협을 느낄 만큼 다윗이 승승장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암몬이 군대를 소집했다는 소식을 들은 다윗은 이들을 상대하기 위해 요압과 군대를 보냅니다. 요압과 그의 모든 용사들을 보내는데, 그 규모가 얼마인지는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암몬과 아람의 연합군보다는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8절에서 암몬이 전쟁을 하기 위해 진을 친 곳이 성문 앞이라고 하는데, 암몬의 성읍인 랍바일 것입니다(삼하 11:1). 그리고 암몬을 돕기 위해 온 부대는 들판에 따로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요압의 군대를 가운데 두고 앞뒤로 포위하고 있는 상황을 말하는 것으로 요압의 군대가 다수의 적들에게 포위를 당하여 매우 위험한 상황에 놓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요압의 계책(9-12)

다윗의 신하 요압은 이렇게 앞뒤로 포위되자 부대를 둘로 나누어 아랍과 암몬을 각각 상대하는 전법을 세웁니다. 요압은 군사들 중에서 최정예 군인들로 한 부대를 만들어 아람과 싸울 부대를 구성하고 나머지 군사들은 아비새에게 맡겨 암몬을 상대하게 하였습니다. 요압이 아람을 상대하기 위해 정예 부대를 만든 것을 보면 아람의 군대가 암몬의 군대보다 더 위협적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면서 요압은 아비새에게 서로 불리하면 돕자고 약속하고, 우리 하나님의 성읍과 백성을 위해서 담대하자고 권면합니다. 여기 하나님의 성읍은 이스라엘이 차지하고 있는 요단 동편 지역 성읍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요압은 하나님의 성읍을 지키기 위해 담대해야 한다고 말하며, 여호와께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하시길 기원합니다. 여기서 요압은 매우 신실한 모습을 보이는데, 이런 모습은 매우 다윗을 닮았습니다. 수적으로 열세인 상황에서 다윗처럼 여호와를 의지하고 있습니다.

 

(4) 요압과 아비새의 승리(13-14)

요압과 그와 함께한 군대는 아람과 싸우기 위해서 다가갔고 아람 군대는 도망하였습니다. 암몬 군대는 아람 군대가 도망가는 것을 보고 아비새 군대와 싸울 생각을 하지 않고 성 안으로 들어가 숨습니다. 이렇게 요압과 아비새는 아람과 암몬을 이기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본문에서 요압의 군대가 어떻게 싸웠는지 그리고 여호와께서 어떻게 개입하셨는지는 언급되고 있지 않지만, 요압의 군대가 나갔고 아람 군대가 도망갔다고 간략하게 언급한 것은 여호와께서 요압의 믿음에 응답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비록 요압의 믿음이 일시적이고 한정되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요압의 이런 일시적인 믿음에도 응답하시고 전쟁에서 아람 군대를 물리치신 것입니다.

 

다윗이 아람과의 전쟁에서 이김(15-19)

상대방의 호의를 거절해야 할 때 수치심을 겪지 않도록 배려해야 합니다.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남을 대려하지 않고 사욕에 급급해서는 안 됩니다. 사욕을 위한 싸움은 추합니다. 우리의 싸움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한 싸움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싸움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의를 위한 싸움이라면 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15아람 사람이 자기가 이스라엘 앞에서 패하였음을 보고 다 모이매 16하닷에셀이 사람을 보내 강 건너쪽에 있는 아람 사람을 불러 내매 그들이 헬람에 이르니 하닷에셀의 군사령관 소박이 그들을 거느린지라 17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알리매 그가 온 이스라엘을 모으고 요단을 건너 헬람에 이르매 아람 사람들이 다윗을 향하여 진을 치고 더불어 싸우더니 18아람 사람이 이스라엘 앞에서 도망한지라 다윗이 아람 병거 칠백 대와 마병 사만 명을 죽이고 또 그 군사령관 소박을 치매 거기서 죽으니라 19하닷에셀에게 속한 왕들이 자기가 이스라엘 앞에서 패함을 보고 이스라엘과 화친하고 섬기니 그러므로 아람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다시는 암몬 자손을 돕지 아니하니라(15-19)

수치심이 관계의 파국을 초래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수치심을 회복할 시간과 장소가 필요합니다. 다윗은 조문단이 잃어버린 품위를 되찾을 시간과 공간을 제공해주었습니다.

 

(1) 아람 군대의 전격(15-16)

이스라엘에게 패한 뒤 아랍 사람들은 다 같이 모였고하닷에셀은 강 건너편에 있는 아람 사람들까지 전쟁을 위해 불러들였습니다. 이 강은 유브라데 강으로 사무엘하 8:3에서 하닷에셀이 유브라데로 보냈던 아람 군대를 이때 불러들인 것입니다. ‘헬람은 요단 동편 북쪽 지역으로 다메섹과 하맛 사이 지역으로 추측됩니다. 이 지역이 다윗 왕국과 멀지 않은 곳이기 때문에 다윗은 위협을 받고 이들을 물리치기 위해서 이스라엘 군대를 모아 요단강을 건너 헬람까지 진격합니다. 그리고 헬람에서 다윗은 아람군대와 싸웠고, 아람 군대는 또다시 이스라엘 앞에서 도망합니다. 아람 군대의 이런 모습은 요압과 싸웠을 때와 동일합니다.

 

(2) 다윗의 승리(17-18)

이렇게 다윗이 아람을 이긴 것은 사무엘하 8:14에서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다는 표현처럼 여전히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계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다윗은 매우 큰 성과를 얻어 아람의 병거 모든 사람 칠백 명과 마병 사만 명을 죽이고 군사령관 소박까지 죽입니다.

 

(3) 전쟁의 결과(19)

다윗이 이렇게 아람 군대에 치명타를 가하자 하닷에셀을 섬기던 도시의 왕들이 이스라엘에게 화친을 청하여 이스라엘을 종주국으로 섬기게 되었습니다. 다시는 암몬 자손을 돕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다윗이 어디를 가든 여호와께서 함께하시며 전쟁에서 이기게 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다윗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다윗을 통해 주변 나라들은 여호와의 살아계심과 위대한 능력을 알게 된 것입니다. 지도자 한 사람의 올바른 신앙은 그 공동체를 강하게 만들며 공동체 사람들과 그 주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바로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누군가 호의를 베풀었다고 다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거절할 때 상대방이 수치심을 느끼지 않도록 최대한 배려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인간이 수치심을 경험하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의심을 품게 되고, 자존감이 추락하고, 그 결과 서로의 관계가 심각하게 손상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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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09-01)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선대한 다윗

사무엘하 9장 1-13절


옛 어르신들은 ‘은혜를 모른 사람은 짐승만도 못하다.’라고 가르쳐왔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바르게 안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면서 살아갔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사람의 은혜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으로 다윗은 주변 나라들과의 전쟁에서 이기고 에돕과 다메섹을 속국으로 삼았습니다. 사울의 손자이며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에 관한 기록입니다. 다윗이 사울의 집에 남은 사람이 있는지 조사해보니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로드발 마길의 집에 있던 므비보셋을 예루살렘으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가 항상 왕과 함께 식사하게 하였으며, 그에게 사울의 땅을 되돌려주고, 사울의 종이었던 시바로 하여금 므비보셋의 땅을 관리하게 했습니다.
 

므비보셋 소개(1-5)

성도들은 세상의 법칙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관보다 더 고귀하고 고상한 천국 가치관으로 살아갑니다. 세상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할 때, 놀라운 구원의 은혜와 축복이 임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고, 그 은혜를 나누어주는 역사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1다윗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하니라 2사울의 집에는 종 한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시바라 그를 다윗의 앞으로 부르매 왕이 그에게 말하되 네가 시바냐 하니 이르되 당신의 종이니이다 하니라 3왕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없느냐 내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 하니 시바가 왕께 아뢰되 요나단의 아들 하나가 있는데 다리 저는 자니이다 하니라 4왕이 그에게 말하되 그가 어디 있느냐 하니 시바가 왕께 아뢰되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 있나이다 하니라(1-4)
사무엘하 8장에서 다윗은 정복 전쟁을 통해 대외적으로 주변 나라들을 차례로 정복하고, 대내적으로 행정 조직을 정비해 나가는 가운데 강력한 통일 이스라엘 왕국을 구현해 강해지고 주권적인 위치에 안정이 됐습니다. 이제 안정되어가면서 그동안 사람들과의 약속을 돌이켜 봅니다. 그중에 과거에 요나단과 맺은 언약을 충실하게 지키려고 합니다.
 
(1) 다윗의 조사(1)
통일 왕국을 효율적으로 통치할 관료 조직을 완비한 후, 정권이 안정됩니다. 그후에 다윗은 요나단과의 약속을 기억합니다. 그래서 사울의 가문에 아직 남아 있는 후손이 있는지를 물으며, 요나단과의 언약을 지키기 위해 남아 있는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겠다고 말합니다(1).
사무엘상 20:15에서 요나단은 다윗을 사울의 손에서 살려 보내면서 자신과 자신의 집에 인자함을 영원히 끊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였고, 다윗은 이에 대해 요나단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살려주고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요나단을 기억하고 정권이 안정되자 요나단과의 언약을 지키기 위해 그의 가족을 찾은 것입니다.
 
(2) 시바에 대한 소개(2)
여기서 ‘시바’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는 사울 왕조를 섬기던 신하였으며, 다윗의 신하들이 그를 찾아서 다윗에게 데리고 옵니다. 그는 아마도 사울 왕가에 속한 토지와 재산을 관리하던 인물이었습니다. 현재 그 토지와 재산은 다윗 왕가에 귀속되었습니다.
시바는 다윗에게 오자 자신은 ‘당신의 종’이라고 고백합니다. 과거에는 사울 왕조의 신하였지만, 이제는 다윗을 왕으로 섬기고 있다고 고백하여 다윗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하였습니다.
 
(3) 다윗과 시바의 대화(3-4)
다윗은 시바에게 지금까지 사울 집에 남은 사람이 없는지 물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기 위해 찾는다고 설명합니다. 자신의 의중은 그 후손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기 위해서 사울의 가문 사람을 찾는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하여 얼마나 진심으로 은혜 베풀기를 원하는지를 강조합니다.
이에 시바는 요나단의 아들이 한 명 남았는데, 다리를 저는 장애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다리를 저는 자’라는 표현에서 우리는 그가 사무엘하 4:4에서 언급된 므비보셋임을 알게 됩니다. 시바가 므비보셋이 다리를 전다는 사실을 먼저 알린 것은 그가 다윗에게 전혀 위험이 되지 않는 인물이라는 것을 암시적으로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요나단의 아들이 살아있다는 말에 다윗이 어디에 있는지 묻자, 시바는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 있다고 알려줍니다(4). 이것을 알고 있는 것을 보면 시바는 여전히 사올의 가문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로드발’은 한 때 이스보셋이 이스라엘의 수도로 삼았던 요단 동면 마하나임 근처의 도시이며, ‘마길’이란 이름은 구약에서 므낫세의 아들이 있었고 길르앗의 아버지였습니다. 이름과 지역으로 볼 때 암미엘의 아들 마길은 요단 동편에 살던 부유한 가문으로 사용 가문을 지지하던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므비보셋을 자신의 집에 거하게 한 것입니다. 므비보셋이 마길의 집에 거한 것은 사울과 요나단에게 속한 모든 재산이 다윗에게 귀속되어 거할 곳이 마땅치 않았고, 또한 다윗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다윗과 요나단 간의 언약을 모르는 므비보셋의 입장에서는 다윗을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사람으로 여길 수 있었습니다.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데리고 옴(5-8)

성도는 하나님께 복음과 사랑에 대한 큰 빚을 지고 있습니다. 그 빚은 다른 성도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으로 갚아야 합니다. 다른 성도들을 보살피고 선으로 대하고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과 섬김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만큼 다른 지체를 사랑하고 섬기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해 부지런히 알아가야 합니다.
 
5다윗 왕이 사람을 보내어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서 그를 데려오니 6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나아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매 다윗이 이르되 므비보셋이여 하니 그가 이르기를 보소서 당신의 종이니이다 7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버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할아버지 사울의 모든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을지니라 하니 8그가 절하여 이르되 이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하니라(5-9)
다윗은 자기 수하의 사람을 마길의 집으로 보냈습니다.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데리고 오기 위해서였습니다. 다윗을 만난 므비보셋은 그 앞에 엎드려 절합니다. 다윗은 요나단과 맺은 언약의 대상자인 므비보셋에게 은총을 베풀었습니다. 과거에 다윗이 요나단에게 먼저 은총을 받은 것처럼 말입니다.
 
(1) 다윗과 므비보셋의 만나(5-6)
종 시바를 통해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의 소식을 들은 다윗은 신하를 보내어 마길의 집에서 자기 앞으로 데려오도록 합니다. 역대기에서는 그의 이름을 ‘므립바알’로 소개합니다(대상 8:34; 9:40). 사무엘 저자는 ‘바알’대신에 ‘수치, 부끄러움’을 의미하는 ‘보셋’을 접어넣음으로써 ‘므비보셋’이라고 소개합니다. 본문에서 므비보셋을 소개할 때,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므비보셋이 요나단의 아들이면서 사울의 손자로 사울 가문의 적통이란 사실을 강조한 표현입니다.
다윗의 신하들은 왕의 명령을 받들어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 있던 므비보셋을 데리고 왕 앞으로 나아옵니다(5). ‘므비보셋은 왕궁에 있는 다윗에게 나아와 옆드려 절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당신의 종‘이라는 말로 낮추어 표현합니다(6). 어쩌면 므비보셋은 한때 할아버지 사울 왕의 경쟁자였던 다윗이 사울 가문의 생존자를 찾으려고 한 이유가 정적(政敵)을 제거하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내심 두려움에 사로잡혔을 수도 있습니다.
 
(2) 다윗과 므비보셋의 대화(7-8)
’므비보셋‘은 다윗을 보자 엎드려 절하여 최고의 공경심을 표현합니다. 다윗이 ‘므비보셋아!’하고 이름을 부르자 그는 자신을 ‘당신의 종’이라고 대답하여 그에게 복종하겠다는 의사를 표현합니다. 여기서 므비보셋은 최대한 자신을 낮추며 조심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자신을 왜 찾아서 데리고 왔는지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에 두려워하며 매우 조심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다윗은 그에게 무서워하지 말라고 안심시키며, 자신이 그의 아버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반드시 은혜를 베풀겠다고 약속합니다.
그 증거로 다윗은 두 가지 약속합니다. 첫째는 사울 가문이 가지고 있던 모든 밭을 돌려주겠다고 합니다. 사울이 죽고 다윗이 왕위에 오른 후에 사울 가문의 땅은 몰수되어 다윗 왕가에 귀속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다윗이 쉽게 므비보셋에게 사울의 땅을 돌려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땅을 돌려준다는 것은 이전에 사울이 누리던 부와 권세를 어느 정도 회복시켜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음으로 두 번째 약속은 므비보셋이 항상 다윗의 상에서 식사하도록 허락합니다. 이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사무엘상 2:8에 따르면 귀족이나 왕과 같이 식사를 하는 것은 대단히 명예로운 일로 평가됩니다. 이것은 다윗이 므비보셋에게 큰 호의를 베풀고 그를 존중했다는 뜻입니다. 둘째, 정치적인 관점에서 보면 비록 다리를 절지만 모비보셋은 죽은 사울의 피붙이며 손자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반란의 핵심 인물이 될 수 있는 위험한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사울의 땅이 있는 기브아로 보내지 않고 예루살렘 왕궁에 머물게 하여 므비보셋의 동향을 살리기 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9장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보면 정치적인 이유보다는 므비보셋에 대한 호의를 보여주기 위한 행동으로 볼 수 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은혜를 받은 므비보셋은 다시 한 번 절을 하여 감사되 자신을 죽은 개에 비유하며 무가치한 자신을 돌봐준 다윗에게 감사합니다. 죽은 개는 무가치한 것을 상징하는 표현으로(삼상 24:14) 므비보셋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자신을 선대하는 것에 대해 감격하여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다윗은 요나단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므비보셋을 찾았고, 또한 약속대로 므비보셋을 살려주고 선대하였습니다. 요나단과의 언약을 충실하게 이행하여 자신의 목숨을 여러 번 살려주고 자신을 사랑해준 요나단에게 보답하였습니다.
 

므비보셋을 선대하는 다윗(9-13)

섬기고 있는 교회에서 다른 성도들을 귀하게 여기고 있습니까?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 나라를 상속할 상속자들임을 인정하십니까? 이런 사실을 안다면 다른 성도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달라져야 합니다. 성도들을 비하하거나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도 그 위치와 명예를 존중해 함부로 대할 수 없는데, 하물며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게 될 성도에 대해서라면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9왕이 사울의 시종 시바를 불러 그에게 이르되 사울과 그의 온 집에 속한 것은 내가 다 네 주인의 아들에게 주었노니 10너와 네 아들들과 네 종들은 그를 위하여 땅을 갈고 거두어 네 주인의 아들에게 양식을 대주어 먹게 하라 그러나 네 주인의 아들 므비보셋은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으리라 하니라 시바는 아들이 열다섯 명이요 종이 스무 명이라 11시바가 왕께 아뢰되 내 주 왕께서 모든 일을 종에게 명령하신 대로 종이 준행하겠나이다 하니라 므비보셋은 왕자 중 하나처럼 왕의 상에서 먹으니라 12므비보셋에게 어린 아들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미가더라 시바의 집에 사는 자마다 므비보셋의 종이 되니라 13므비보셋이 항상 왕의 상에서 먹으므로 예루살렘에 사니라 그는 두 발을 다 절더라(9-13)
다윗은 언약의 대상자인 므비보셋을 마치 자기 아들처럼 대했습니다. 므비보셋을 왕자처럼 대우한 것입니다. 성도도 다윗처럼 새 언약 관계 아래서 한 몸이 된 다른 성도들을 귀하게 대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공로로 인해 그 성도도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1) 다윗의 명령(9-10)
다윗은 므비보셋에게 약속한 것을 바로 시행합니다. 원래 사울의 신하였던 시바를 불러 사울의 모든 재산과 땅을 주인의 손자에게 주었으니, 이제 시바와 시바의 아들들은 므비보셋을 위해 땅을 관리하고 경작하여 그에게 양식을 대라고 명령합니다. 다윗이 시바를 모비보셋의 재산 관리자로 임명하여 시바의 이전 신분도 회복시킨 것입니다. 시바의 입장에서 이런 신분이 그다지 달가웠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후에 사무엘하 16장에서 다윗 편에 붙어서 므비보셋을 모함합니다. 이것을 보면 시바는 결코 사울 가문의 충성스러운 종이 아니었고, 오히려 다윗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던 인물입니다. 므비보셋을 섬기라는 다윗의 명령을 받은 시바는 왕의 명령대로 충실하게 행하겠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시바는 다윗을 자신의 주인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10절에서 시바의 가문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데, 시바는 아들이 열다섯이고 종이 스무 명이었습니다. 므비보셋이 받은 땅을 관리하기에 충분한 인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므비보셋은 다윗의 말대로 왕의 궁전에서 왕자들과 같은 대접을 받으면서 살았습니다.
 
(2) 므비보셋을 환대(11-13)
여기서 므비보셋이 다윗의 상에서 식사했다는 것을 11절과 13절에서 반복적으로 이야기하는데, 이것은 다윗이 약속대로 므비보셋을 선대했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므비보셋의 어린 아들 미가가 소개됩니다. 다윗이 므비보셋뿐 아니라 요나단의 후손 모두를 선대하였음을 말하기 위한 것입니다. 다윗은 요나단과의 언약을 기억하고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선대하여 약속을 지키는 신실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울은 왕이 된 이후에 자신의 왕권을 위협할 위험이 있는 다윗을 죽이려고 하였지만, 다윗은 왕이 된 후에도 자신의 왕권을 위협할 위험이 있는 므비보셋을 살려주고 요나단과의 약속도 지켰습니다. 왕이 된 후에도 자신의 왕권을 지켜주시는 분은 여호와이시라는 것을 잘 알았기에 정적이 될 수도 있는 므비보셋을 선대한 것입니다. 요나단은 비록 자신은 죽었지만 므비보셋을 살릴 수 있었고 역대상 8:35-40과 9:41-44을 보면 손자 미가를 통해 많은 자손을 얻고 번성한 가문을 이루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다윗을 선대한 요나단에게 하나님께서는 자손들을 통해 복을 주신 것입니다. 선을 행한 자들에게 선으로 갚으시는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당장 눈앞의 이익을 따라 행동할 것이 아니라 손해를 보더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신한 일들을 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므비보셋이 말했던 것처럼 죽은 개와 같이 무의미한 존재였습니다. 그러한 무의미한 사람을 사랑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감사드리면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모든 사람들에게 베풀고 나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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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03-02)


지혜의 가치와 실천

잠언 3장 11-35절


길거리에 수많은 청소년이 지나갑니다. 그들 중에는 한 청소년이 교복을 입고 길거리에서 못된 짓을 하고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많은 어른이 지나면서 혀를 차지만, 그를 책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나가는 많은 어른 중에 유독 달려가서 책망하고, 심하게 꾸중하는 어른이 있다면 그 사람은 누군지 아십니까? 그 사람은 바로 아이의 부모이거나 보호자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혜를 얻은 사람은 얼마나 행복합니까! 세상의 보화나 어떤 귀중한 것도 지혜에 견줄 만한 것이 없습니다. 지혜의 유익이나 축복은 인간의 삶에 평강과 생명을 제공하는 것으로 나타날 뿐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 사역에도 그 영향력을 나타냈습니다. 이러한 유익을 주는 지혜를 얻은 자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돌보는 의무를 수행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장수와 부귀를 가진 지혜(11-18)

고난으로부터 속히 벗어나려고만 하지 말고 하나님의 메시지가 무엇인지 살피는 지혜도 필요합니다. 지혜가 주는 이익은 은이나 정금이나 진주보다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한순간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분별력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책망은 자녀를 기대하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책망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대하시기 때문에 주신 것입니다.
 
11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12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 13지혜를 얻은 자와 명철을 얻은 자는 복이 있나니 14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15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네가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도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16그의 오른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의 왼손에는 부귀가 있나니 17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의 지름길은 다 평강이니라 18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 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11-18)
하나님께서는 훈계와 책망을 통해 지혜를 가르치십니다. 마치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을 꾸짖듯 성도를 징계하십니다. 징계로 인한 고난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표현이며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식을 얻으며, 훈계와 책망을 통해 지혜를 얻게 됩니다.
 
(1) 여호와의 징계를 들어라(11-12)
3:1-12의 아버지의 강연 마지막 부분에 해당하는 단락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나님의 훈계나 꾸지람을 거절하지 말고 언짢게 여기지 말라고 조언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그를 징계하는 이유와 목적이 그를 사랑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완전함에 이르도록 이끄심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버지가 아들을 훈육하듯 사랑과 훈계로써 그의 백성을 양육하십니다.
 
(2) 지혜를 얻은 자의 행복(13-18)
‘내 아들아’로 시작하는 셋째 강연(1-12)이 끝나고, 넷째 강연(21-35)이 시작되기 전인 13~20절은 ‘지혜의 송가’로 불리며, 지혜에 대한 유익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송가는 지혜를 얻은 자는 얼마나 행복한가!'로 시작하며, 지혜가 금은보화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값어치가 높다고 설명합니다.
욥기 28에서도 세상의 어떤 진귀한 보석과도 비교할 수 없고 그 값을 제대로 매길 수도 없을 정도로 귀한 지혜의 가치를 찬양합니다. 시편에서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명령을 순금이나 수천의 금은보다 더 귀한 것으로 찬양하였는데(시 19:10; 119:72,127), 이로써 지혜와 말씀과의 밀접한 관련성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지혜가 왜 그렇게 값집니까? 지혜는 금은보화가 가져다줄 수 없는 장수, 부귀, 즐거움, 평강, 생명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금은보화 자체도 지혜가 주는 것과 같은 종류와 질은 아니더라도 사람들에게 기쁨과 안락한 생활을 제공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재물로 인해 불안, 욕심, 재앙, 분쟁, 죽음이 더 자주 일어납니다. 또한, 재물은 강제로 빼앗길 수도 있으며, 빼앗긴 후에는 재물이 가져다준 어떠한 유익도 남아 있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지혜는 아무에게도 빼앗길 염려가 없으며, 그 유익이 부귀영화를 뛰어넘어 삶에 평강과 생명을 공급해줍니다.
 

질서와 평강을 가진 지혜(19-26)

하나님께서는 지혜를 가진 사람들에게 이웃들과 화목하고 정직한 삶을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이러한 삶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임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이단에 빠진 자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가정과 이웃과의 관계를 파괴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를 발견하고 얻을 뿐 아니라, 그것을 지키고 행해야 합니다.
 
19여호와께서는 지혜로 땅에 터를 놓으셨으며 명철로 하늘을 견고히 세우셨고 20그의 지식으로 깊은 바다를 갈라지게 하셨으며 공중에서 이슬이 내리게 하셨느니라 21내 아들아 완전한 지혜와 근신을 지키고 이것들이 네 눈 앞에서 떠나지 말게 하라 22그리하면 그것이 네 영혼의 생명이 되며 네 목에 장식이 되리니 23네가 네 길을 평안히 행하겠고 네 발이 거치지 아니하겠으며 24네가 누울 때에 두려워하지 아니하겠고 네가 누운즉 네 잠이 달리로다 25너는 갑작스러운 두려움도 악인에게 닥치는 멸망도 두려워하지 말라 26대저 여호와는 네가 의지할 이시니라 네 발을 지켜 걸리지 않게 하시리라(19-26)
하나님께서는 지혜로 세상 모든 만물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세상의 기초를 놓고 만물에 질서를 부여합니다. 지혜는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의 근본적 원리이므로 이를 따라 사는 자는 생명과 안전이 보장됩니다.
 
(1) 창조에 나타난 지혜(19-20)
1장부터 계속해서 지혜의 유익과 축복이 인간에게 크게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는데, 3:19에 이르러서는 지혜가 창조질서를 이루는 데까지 사용되었음을 소개합니다. 지혜의 가치는 인간의 영역뿐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 사역의 영역에까지 미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지혜가 그토록 귀중하고 유익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세상의 창조주이신 여호와가 이미 그 지혜를 아셨고 그 지혜를 사용하여 세상 만물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땅과 하늘로 세상의 기초를 만드시고 심연에서 샘과 강을 터뜨려 내시며(창 7:11; 시 74:15) 사람들과 만물을 위하여 하늘로부터 이슬과 비를 제공하시는 등 하늘과 바다와 물의 질서를 세우셨습니다(시 104:2-9), 창조 사역에 있어 지혜의 역할은 잠언 8:22-31에서 더 풍성하게 기술됩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 역사에 적극적으로 참여되었듯이, 이제 그 지혜가 창조물 전체에게까지 스며들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혜 있는 자는 우주 만물이 살아 움직이며 돌아가는 데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주권 그리고 그의 전지전능하심을 인지하며 하나님을 드높일 수 있습니다. 지혜로운 삶은 하나님을 계속 닮아가고 창조질서에 순응하는 것입니다.
 
(2) 지혜가 주는 유익(21-26)
지혜의 송가가 끝나고 21절부터 ‘내 아들아’로 시작하는 아버지의 넷째 강연(21-35)이 시작됩니다. 아버지의 넷째 강연은 세 부분으로 나뉘었으며, 첫 부분인 21-26절에서는 아버지의 두 가지 명령과 지혜가 주는 유익을 설명합니다.
첫 명령은 완전한 지혜와 근신을 살펴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완전한 지혜와 근신은 사리분별력과 통찰력을 의미하며 지혜의 유익으로 설명되었습니다(2:7). 이처럼 지혜를 얻어 분별력과 통찰력을 가진 자는 깨어 활동할 때나 잠잘 때나 안전과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둘째 명령은 갑작스러운 두려움이나 악인의 심판을 보고 두려워 말라는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안전과 평안 또는 두려움과 심판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면 우리를 지켜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로서 ‘네 발을 거치지 않게 하겠다’(26)는 약속은 바로 지혜의 유익(23)과 같은 내용입니다. 이로써 지혜와 하나님의 밀접한 관계가 다시 수면 위에 떠오릅니다. 이는 22-24절에 기술된 지혜로 인한 유익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데서 비롯된다는 점을 시사해줍니다.
 

화목과 정직을 가진 지혜(27-35)

선택해야 할 두 길이 있습니다. 어느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길과 동행하는 축복된 길에서 무엇을 선택하길 원하십니까? 저주의 길과 축복의 길, 영광의 길과 수치의 길, 하나님의 비웃음을 사는 길과 은혜를 입고 살아가는 길이 있습니다. 당신은 어느 길에 선택하길 원하십니까?
 
27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며 28네게 있거든 이웃에게 이르기를 갔다가 다시 오라 내일 주겠노라 하지 말며 29네 이웃이 네 곁에서 평안히 살거든 그를 해하려고 꾀하지 말며 30사람이 네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였거든 까닭 없이 더불어 다투지 말며 31포학한 자를 부러워하지 말며 그의 어떤 행위도 따르지 말라 32대저 패역한 자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정직한 자에게는 그의 교통하심이 있으며 33악인의 집에는 여호와의 저주가 있거니와 의인의 집에는 복이 있느니라 34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35지혜로운 자는 영광을 기업으로 받거니와 미련한 자의 영달함은 수치가 되느니라(27-35)
지혜의 가치와 그로 인한 유익을 언급한 데 이어 지혜로운 자의 이웃에 대한 태도에 관한 교훈합니다. ‘...하지 말라’는 명령은 사람이 지켜야 할 하한선으로서, 여섯 번에 걸쳐 ‘말며’ 혹은 ‘말라’로 끝맺음 되는 31절까지의 훈계는 내용상 살펴볼 수 있습니다.
 
(1) 지혜자의 이웃에 대한 책임(27-31)
이제 아버지는 여섯 차례의 ‘~하지 말라’는 단호한 명령형을 이용하여, 하나님을 신뢰하며 지혜를 얻고 그 유익을 누리려는 자에게는 이웃을 돌보고 사랑해야 하는 책임이 뒤따름을 언급합니다.
명령의 내용은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나에게 재물, 힘, 능력 등 무엇인가 남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뭔가 부족하여 스스로 채우거나 해결할 능력이 없는 자에게 아낌없이 베풀어야 합니다. 둘째, 까닭 없이 이웃과 분쟁하거나 악한 일을 계획하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 폭력을 행사하는 악인을 부러워하거나 그가 하는 행위를 선택하지 말아야 합니다. 포학한 자란 바로 27-30절의 명령을 어기는 자인 셈입니다. 폭력은 말과 태도의 폭행과 신체적인 폭행을 모두 포함합니다. 언뜻에는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힘을 가진 것 같지만 대부분은 자기 내면의 약함을 방어하기 위해 언어나 물리적인 힘을 외면으로 표출하는 것입니다. 이런 행위를 보고 독려 받으면 나도 그런 행위에 빠지기 쉽습니다. 폭력자의 어떤 행위도 ‘선택하지 말라’(‘좇지 말라’로 번역됨)는 조언에서 말해주듯 이런 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결단과 순간의 지혜로운 선택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2) 악인과 의인의 대조(32-35)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악인과 의인의 대조적인 모습을 설명하여 아들로 하여금 의인의 길로 가도록 격려합니다. 이 구절들은 31절의 폭력자를 부러워하지 말고 어떤 행동이든 선택하지 말라는 명령에 대한 이유를 제시해줍니다. 동시에 진정한 지혜는 이웃을 돌보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과 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악인과 의인의 대조는 두 가지 양상으로 나타납니다.
먼저, 악인과 의인은 그들의 기본 됨됨이와 행동 양식에서 대조됩니다. 악인은 패역과 거만함을 특징으로 갖고 있는 자들이며 이들은 결국 미련한 자로 결론이 납니다. 반면, 의인은 정직과 겸손을 소유한 자들로서 지혜로운 자와 동일시됩니다. 이 대조를 통해 지혜자란 마음과 태도뿐 아니라 언행에 있어서도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정의와 사랑의 삶을 실천하는 자임이 부각됩니다. 다른 한 가지 대조적 양상은 악인과 의인 그리고 그들 각각의 집안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에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을 미워하고 비웃고 그들의 집을 저주하시며 그들의 미련함으로 수치를 당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의인과는 교제를 나누시고 그의 집에 복과 은혜를 베푸시며 하나님의 임재를 의인 자신만이 아니라 그 후손까지도 유산으로 누릴 수 있게 하십니다.
3장 전체를 통틀어 볼 때, 지혜자는 하나님과 건강하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자(1-12)임과 동시에 이웃과도 건강하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자입니다(21-35). 이런 사람은 지혜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고 지혜의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한 가치를 깨달은 자이며, 그 결과로 지혜가 주는 유의 누리는 자입니다(13-20).
 


징계와 책망을 받으면 즐겁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징계와 책망 앞에서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에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으로 나눕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잘 받아드리면 그 속에 질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 때문에 즐겁고 평안한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계와 책망, 그리고 지혜롭지 못한 행동함으로 이웃에게서 오는 징계와 책망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기쁘게 받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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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01-01)

 


부름받은 하나님의 군대

민수기 1장 1-54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해방되어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었다. 이제 하나님 나라를 향한 거룩한 여정을 시작해야 한다. 모세는 백성들을 하나님의 군대로 조직 편성하는 일부터 한다. 대항하는 적과 싸우며 주의 뜻을 성취할 준비를 한 것이다. 하나님은 신앙여정을 어떻게 준비하신는가?

인구의 준비(1-4)


첫 번째 인구조사에 대한 명령이 제2년 2월 1일에 회막에서 주어진다(1절). 여기서 우리는 잠시 서론에서 언급했던 출애굽 이후 시내산에서 있었던 사건들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요약해볼 필요가 있다.

민수기에서 인구조사 장면은 1장과 26장에서 두 번 나온다. 민수기의 구조적 특징을 잘 알려주는 장치이기도 하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나타내는 고백적 장치로서도 백성들의 숫자가 사용된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인구조사를 명령하심으로 시작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는 히브리어 첫 번째 표현은 히브리어에서는 새로운 단락을 알리는 가장 전형적인 문구 중 하나다. 첫 번째 인구조사를 시작하는 시간적 배경은 출애굽 이후 제2년 2월 1일이다(1). 출애굽은 첫해 1월 14일 유월절을 기점으로 시작되었고, 세 번째 달 첫째 날 즉 6주가 지난 다음 시내산에 도착했다. 성막이 완성된 것은 둘째 해 1월 1일이다(출 40:2), 민수기 9장에는 첫 번째 유월절을 준수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이후에야 1장에 나오는 인구조사가 시행된 셈이다. 인구조사가 둘째 달에 시작되었으니 논리적으로 보면, 레위기 율법이 선포된 때는 성막이 완성된 둘째 해 1월 한 달 동안이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시내산을 출발하기 전 준비 단계를 묘사하는 민수기 1-9장은 단순히 시간적인 순서대로 기록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다만 확실한 것은 둘째 해가 시작되고 2월 20일에 시내산을 떠나는 순간까지 율법 선포, 인구조사, 진영 배치와 행진 준비 등 모든 일이 아주 긴박하게 준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인구조사 명령의 장소적 배경은 두 가지로 묘사된다. 첫째는 시내산이다. 하나님께서 십계명과 율법을 베풀어주신 장소다. 시내산의 실제 위치가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수많은 논쟁이 있지만 아직 합의에 이르지 못한 상태다. 전통적으로 인정되는 곳은 시내 반도 남쪽에 있는 예벨 무사이지만 최근에는 이 지역에 대한 의문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또 다른 장소적 배경은 회막(The tent of meeting)이다. 대개는 성막(tabermacle)으로 불리는데, 성막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지상 성소의 의미가 강하다면, 회막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만나기 위해 특별히 지정하신 장소라는 의미를 강조한다.

첫 번째 인구 조사의 중요한 목적은 20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자들을 계수하는 데 있다.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고, 가나안 땅으로 향하면 곧 정복전쟁이 시작될 것을 예상했기에 준비하는 과정은 대단히 희망차고 밝은 분위기다. 종족과 가문에 따라 군사들의 수를 세었기 때문에 전체 지파는 물론이고 지파 안에서도 군대의 대형을 따라 씨족과 가족의 단위까지 구별하여 세밀한 조사가 이뤄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계수한다는 말은 단순히 숫자를 센다는 뜻이라기보다 각 지파별, 씨족별, 가족별로 전쟁에 나갈 군사들을 호출하고 임명한다는 의미다. 이제 인구조사를 실행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남은 일은 인구조사를 실제로 수행할 각 지파의 장을 선택하는 것이다.

각 지파의 우두머리 임명(5-16)


모세와 아론을 도와 각 지파에서 숫자를 셀 지도자의 명단이 주어진다. 르우벤, 시므온, 갓, 유다, 잇사갈, 스불론, 에브라임, 므낫세, 베냐민, 단, 아셀, 갓, 납달리 지파의 순서로 나타난다. 가장 먼저 레아가 야곱에게 낳았던 자식들이 언급되고(5-9절), 그 다음 라헬이 낳은 자녀들과 요셉이 애굽에서 낳은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이어진다(10-11절). 다음으로 레아의 몸종이었던 실바의 자녀들과 라헬의 몸종이었던 빌하가 낳은 자식들이 나온다. 다만 정확히 출생 순서를 따른 것 같지는 않다. 실제 실바는 갓과 아셀을, 빌하는 단과 납달리를 낳았다. 성경에서 열두 지파의 명단을 소개하는 예들이 많이 있지만, 명단의 순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아마도 각각의 문맥에서 명단이 주어지는 의도에 따라 다른 순서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 지파장이 임명되었지만 특정 인물들은 본문 외에는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는 사람들이다.

지파별 인구조사(17-46)


지파별로 그 수를 세는데, 본문에 등장하는 열두 지파의 순서와 규모는 다음과 같다. 민수기 1장과 26장에 나타난 출애굽 세대와 광야 세대의 인구조사를 함께 두고 비교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특별히 주목할 만한 것은 유다 지파의 두드러진 성장세다. 유다 지파는 두 번의 조사 모두에서 가장 큰 지파에 이름을 올렸다. 아마도 저자는 창세기 49장에서 주어졌던 약속이 실제로 성취되었음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다. 이로써 앞으로 유다 지파가 이스라엘 공동체의 중심 역할을 할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한다. 이에 비해 르우벤이나 시므온 지파 등은 놀랄 정도로 그 세력이 약화되었다. 시므온 지파는 첫 번째 조사에서 세 번째로 세력이 컸지만(59,300), 두번째 조사에서는 가장 약한 지파가 되었다(22,200). 이 또한 야곱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첫 번째 인구 조사에서 계수된 사람들의 총 숫자는 603,550명이었다.

인구조사 명단이 12회에 걸쳐 이름만 바꿔가면서 반복되는 것이 독자들이 읽기에는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 이해하면 자기 지파의 이름이 동일하게 호명됨으로 그들 각자가 이스라엘 백성 공동체의 일원임을 확인하는 중요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다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구조사 목적이 전쟁에 나갈 사람을 부르는 것이었기 때문에, 전쟁에 호출되지 않던 레위지파는 두 번 모두 계수에서 빠져 있다. 레위인들은 성막을 지키고 수종 드는 사람들로서 병역의 의무가 없었기 때문이다.


레위 지파의 계수와 임명(47-54)


레위 지파는 성막 봉사의 일로 온전히 헌신되었기 때문에 전쟁을 위한 계수에서는 빠지고 후에 따로 계수한다. 이들에 대한 언급은 민수기 3-4장에서 더 구체적으로 나타날 것인데, 여기서는 그들의 임무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소개한다. 레위 지파 사람들의 직무는 증거의 성막과 모든 기구와 부속품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이동할 때는 성막의 모든 기구와 부속품을 운반하고, 머무를 때는 성막에서 봉사하고, 성막 사방에 진을 쳐서, 성막과 열두 지파 회중들 사이에 완충 역할을 한다. 혹 부정한 사람이나 외인이 성막에 가까이함으로 죽임을 당하지 않도록 지키는 것이 그들의 책무였다. 모세는 여호와께서 명하신 그대로 순종했다.




교회는 죄와 불의에 대항하여 싸우고 의와 나라를 세우도록 하나님의 군대로 소집 명령을 받았다.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헌신하여 모집한 자를 기쁘시게 해야 한다. 함께 부름 받은 동료를 격려하며 힘을 내야 한다. 주님이 동행하여 힘을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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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03-01)

 


여호와를 경외하는 지혜

잠언 31-10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한결같이 오래 살고 성공하길 원합니다. 그렇다면 장수와 성공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역사 속에 가장 지혜로웠고 가장 많은 부와 명예를 누린 솔로몬은 자신의 아들에게 오래 살고 성공하는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지혜는 하나님과 나 자신의 관계를 정립해줍니다. 아버지의 지혜로운 조언을 따라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나 자신의 지혜와 능력이 있더라도 겸손하게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기대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는 지식이든 물질이든 내 삶의 모든 영역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자기를 신뢰하는 자에게 아낌없는 선물을 베푸시며 그를 아들처럼 사랑과 훈계로 이끄십니다.

 

아버지 강연(03) : 여호와를 신뢰하고 공경하라(1-10)

말씀을 기억하고 순종하는 자의 삶에 평강과 영생의 길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께 순종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하나님께서는 그 명령에 순종하는 자들에게 장수와 평강의 복을 허락해주십니다. 자신의 삶을 제어하고 속박하기 위해 명령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유와 번영의 복을 주시려고 오늘도 말씀으로 찾아오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깊은 묵상을 하시길 바랍니다.

 

1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2그리하면 그것이 네가 장수하여 많은 해를 누리게 하며 평강을 더하게 하리라 3인자와 진리가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4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5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6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7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8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를 윤택하게 하리라(1-8)

 

잠언 3장은 세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전반부와 후반부에 1-9장의 내 아들()로 시작하는 강연 중 셋째(1-12)와 넷째(21-35)에 해당하는 강연이 등장하고 그 중간에 막간처럼 지혜의 송가’(13-20)가 나옵니다.

내용상 셋째와 넷째 강연은 각각 여호와를 향한 태도와 이웃을 향한 태도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으므로 서로 연결됩니다. 중간에 위치한 지혜의 송가는 1장부터 계속해서 여기저기에 등장하는 지혜가 주는 유익을 다룹니다.

 

(1)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라(1-4)

잠언 3:1-12에 나타난 아버지의 강연은 내용에 따라 네 단락(1-4, 5-8, 9-10, 11-12)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4절은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라’, 5~8절은 여호와를 의지하라’, 9-10절은 첫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11-12절은 여호와의 징계를 들어라라는 명령을 담고 있습니다. 또한, 각 부분은 명령 자체뿐만 아니라 명령을 지킴으로써 받는 유익이나 이유를 공통적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먼저, 첫 단락인 1-4절에서 아버지는 앞의 두 강연(1:8-19; 2:1-22)에서와 마찬가지로 아들을 불러 주의를 집중시키고 내 말을 듣고 지키라는 내용의 조언을 던집니다. 특히 3:1에서는 나의 법나의 명령을 문장 맨 처음에 언급함으로써 아버지의 말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그 법과 명령을 잊지 말고 지키라고 명합니다. 잊지 말라는 부정문 형태의 훈계는 부정적인 언어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단지 기억하라의 또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바로 뒤에 나오는 긍정 명령의 지키라’(‘보호하라’, ‘관찰하라’, ‘간직하라의 뜻)와 짝을 이루어 아버지의 말에 순종하도록 독촉하는 것이 주된 목적입니다. 이처럼 같은 내용을 부정과 긍정의 두 가지 형태로 함께 표현하는 형식은 1~12절 사이에 계속 나타나 이 강연의 특색을 이룹니다(1,3,5,7). 아들이 아버지의 말을 기억하고 마음에 간직하면 그는 장수와 평강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솔로몬이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을 때도 하나님께서는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면 장수를 선물로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왕상 3:14). 그런데 순종의 선물로서의 장수나 평강과 같은 축복은 오늘 본문의 8절이나 10:27에서 여호와 경외에 대한 선물로도 소개됩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훈계와 그 훈계에 순종하는 것에는 기본적으로 여호와 경외가 그 밑바탕에 깔려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절에 이어 3절에서 아버지는 인자와 진리가 너를 버리지 않게 하라고 명합니다. 여기서 인자와 진리는 새로운 내용이 아니라 1절에서 아버지가 전하는 법과 명령을 가리킵니다. 왜냐하면, 인자와 진리가 바로 아버지의 명령을 대변하는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또한 인자와 진리를 목에 매고 마음 판에 새기라고 명합니다. 이 두 가지 긍정 명령은 앞의 부정 명령과 같은 의미로서, 인자와 진리를 목걸이를 매고 다니듯 일상에서 생활화하고 마음에 새겨 지워지지 않도록 기억하고 실행하라는 뜻입니다. 이 명령은 하나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가르치고 손이나 이마에 표로 삼고 문설주와 대문에 기록하라는 신명기 6:6-9을 상기시킵니다.

이와 같은 명령의 관련성을 보더라도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는 훈계는 부모의 경험이나 지식으로 자식에게 일러주는 처세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바탕으로 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밀접히 관련된 훈계임을 나타냅니다. 인자와 진리로 평가되는 아버지의 훈계를 간직하고 순종한다면 아들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좋은 평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성경 인물 중에서 하나님과 사람에게서 은총을 입은 사람의 예로 요셉이나 사무엘 또는 예수님을 들 수 있습니다(39:4, 22: 삼상 2:26; 2:52). 이들이 사람과 하나님 앞에서 은총을 입은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들과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2절과 더불어 4절에서 언급하는 순종의 선물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나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2) 여호와를 의지하라(5-8)

우리가 인생의 모든 길에서 하나님을 인정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길을 지도하셔서 우리의 길을 형통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형통한 길로 인도하십니다. 자기 힘이나 슬기를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한 일을 피할 때 우리의 길이 형통하게 될 뿐만 아니라 건강하게 됩니다.

 

둘째 단락인 5-8절은 한마디로 하나님을 신뢰하라로 요약됩니다. 이 단락은 앞의 1-4절 단락과 마찬가지로 다섯 가지의 명령이 부정과 긍정 형식으로 번갈아 가며 나오는데, 다만 긍정 형식으로 시작된 점이 다릅니다.

먼저, 5절의 두 가지 명령은 같은 의미로서 서로 의미를 풀이해줍니다. , 하나님을 온 마음으로 신뢰한다는 말은 자기 자신의 명철에 기대지(‘의지하지로 번역됨)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이성적 판단이나 경험이나 지식이 헛되고 쓸모없다는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성도들도 나름대로의 지능과 경험과 지식이 있으므로 어떤 상황이 벌어질 때 자신의 판단에 따라 예측하고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에도 하나님께서 내 삶의 주권자임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간섭과 인도를 그 어떤 것보다 더 우위에 두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말은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을 뜻합니다. 내가 가고 행하는 모든 길(6: ‘범사에로 번역됨)에서 나 자신이나 타인을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을 신뢰하여 그분의 절대적 주권이 그 길에 행사되고 있다는 점을 인지하면, 내가 가는 울퉁불퉁하고 다양한 길을 하나님께서 직접 평탄하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6: ‘지도하시리라로 번역됨).

 

7절의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네 눈에 보기에 지혜롭다 여기지 말라는 뜻으로, 5절의 네 명철에 기대지 말라와 같은 의미입니다. 이 말을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하나님을 신뢰하고 인정하고 또한 경외하라는 말입니다. 5절에서와 마찬가지로, 각자에게 있는 지능과 능력을 무시하라는 말이 아니라 자신의 지능과 능력이 최선이며 최고라고 여기는 교만한 태도를 삼가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태도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배제된 데에서 나오기 때문이며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스승인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신이 인생의 주인인 양 여기는 악으로부터 돌아서고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여 모든 일에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주권과 통치를 인정하라고 부단하게 강조합니다. 이와같이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지 않고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신뢰하면 하나님의 인도(6)와 더불어 몸과 뼈가 치유되며 활력을 공급받을 얻을 것입니다. 이 약속은 하나님과의 건강한 관계가 성립될 때 영적, 신앙적 유익뿐 아니라 육체적, 정신적 유익도 함께 누릴 수 있음을 나타냅니다.

 

(3) 첫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9-10)

자신의 지혜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을 인정하고 경외하는 사람은 자신의 모든 수확물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알기에, 감사와 공경의 표시로 수확의 일부를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다시 그 사람의 삶을 풍성하게 채우십니다. 작은 감사는 큰 감사를 불러옵니다.

 

9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10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9-10)

아버지는 아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인정하는 표현으로 하나님께 재물과 모든 소산의 첫 열매를 드리라고 조언합니다. 하나님께 소산의 처음 수확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며(34:26; 23:10-11) 하나님께서 모든 것의 주인임을 인정하고 고백하며 감사하는 표현입니다.

재물로 하나님을 공경하라고 명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지식이나 눈에 보이는 우리 몸의 수고와 대가의 소유주가 하나님임을 인정하고, 몸과 마음과 재물을 하나님께 바침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신뢰와 헌신을 나타내라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하나님께 첫 소산을 드리는 헌신을 보일 때 하나님께서는 한량없는 축복으로 응대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의 전부가 아니며 일부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창고와 포도주 통이 가득 차고 넘치는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이처럼 자비롭고 후하며 아낌없습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라! 하나님을 신뢰하라! 하나님을 공경하라! 이 세 명령 속에 지혜의 길이 담겨 있습니다. 이 세 명령을 따라 살 때, 존재의 원점으로 돌아와 인간됨의 본분을 지키며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는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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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서론

 

‘민수기’는 방랑을 기록한 책입니다. 이 책은 대부분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경험한 것들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발단부에서 이스라엘은 한 민족을 이루어 유아기를 보내고 있는데, 출애굽한지 고작 열세 달이 지났을 때였습니다. 민수기에서 이 민족은 시험과 성숙이라는 고통스런 과정을 겪게 되며, 이 과정 속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에게 배신과 무책임한 결정의 결과를 가르치십니다. 40년의 광야 경험은 이스라엘 백성을 탈출한 노예라는 꼬리표를 떼고 약속의 땅을 차지할 준비가 된 하나의 민족으로 변모시켰습니다.

 

민수기의 제목

◇ 성경의 네 번째 책의 이름을 ‘민수기(民數記)’라고 부릅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을 계수한 두 번의 사건에서 유래되었다. 처음에는 시내산(1장)에서 했고, 두 번째는 모압 평지(26:1-51)에서 했다. 유대인들은 본서의 명칭을 첫 머리에 나오는 “광야에 있어서”(뻬밑빨), “그리고 그는 말하였다”(외예댑 벨)이라는 말을 따라 불렀으며, 광야 생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성을 그린 책이라 하여 ‘The book of Murmuring’라 부르기도 하였다. 70인역(LXX)에서는 ‘민수기’(아라스모이)라 불렀다.

 

민수기의 저자

모세가 본서의 저자였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는 출애굽기와 레위기의 경우와 비슷하다. 민수기 만의 독특한 증거는 본서 자체의 증거이며(1:1; 33:2), 본서의 성격상 모세와 같이 광야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사람만이 제공할 수 있는 자세하면서도 정확한 목격 기사를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민수기의 기록연대

다른 오경의 책들과 마찬가지로 민수기가 언제 쓰여졌느냐 하는 문제는 간단하지가 않다. 그러나 민 36:13에 “이는 여리고 맞은편 요단가 모압 평지에서 여호와께서 모세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신 명령과 규례니라”고 했다. 이것은 광야 여행이 끝났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모세가 생존 시에 민수기를 기록하였기에, 모세의 사망을 출애굽한지 40년이 지난 주전 1406년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민수기의 기록 연대는 출애굽 이후 13개월이 지난 주전 1445에서 40년의 광야 생활이 끝나는 주전 1406년에 완성되었을 것이다. 출애굽 연대를 주전 1446년으로 잡는 것은 <왕상 6:1>을 근거로 한다. 여기에서 솔로몬이 즉위 제4년 즉 주전 966년에 성전을 건축하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이때가 출애굽한지 480년 후라고 기록하고 있다.

 

민수기의 배경

본서는 비교적 포괄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출애굽부터 가나안 도착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애굽을 탈출한 지 1년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에 관한 지시를 받기 위해 시내산에 모였다. 그리고 그들은 시내산에서 가데스바네아까지의 광야생활을 마치고, 마침내 모압 평지까지 이르게 되는 39년간의 방황에 대한 기록을 포함하고 있다.

 

민수기의 특징

본서에는 두 차례에 걸친 인구 조사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1차 인구 조사는 광야 행군의 효율성과 예상되는 각종 전투의 군대 조직 편성을 위한 기초 작업이었고, 2차 조사는 가나안 땅 정복의 수행과 땅 분배를 위한 준비 작업이었다. 가나안 정복이라는 거대한 사역을 앞둔 이스라엘은 보다 효율적인 기동력을 발휘하기 위하여 다시금 조직되었고 재정비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언제나 우리 자신을 재점검해 봄으로써 신령한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어야 함을 교훈받는다.

 

민수기의 목적

민수기는 이스라엘 민족의 시내 산에서 요단 강 접경까지의 여정에 대한 기록이다. 이 여정을 우리는 흔히 광야 생활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본서의 기록 목적은 광야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연단시키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구원의 은총을 알리기 위한 것이다. 즉 광야에서의 여정을 보여 줌으로써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보여 주며, 불순종에 따른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 줌으로써 순종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약속의 땅 점령과 분배 문제를 밝힘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준다.

 

민수기의 구조

Ⅰ. 약속의 땅을 상속할 구세대의 준비(1:1-10:10)

    1. 이스라엘의 조직(1:1-4:49)

       (1) 백성들의 조직(1:1-2:34)- 인구조사, 종족의 진배치

       (2) 제사장들의 조직(3:1-4:49) - 레위지파의 임무

    2. 이스라엘의 성화(5:1-10:10)

       (1) 구별을 통한 성화(5:1-31) - 의심의 소제

       (2) 나실인의 서약을 통한 성화(6:1-27)

       (3) 예배를 통한 성화(7:1-9:14) - 예물봉헌, 레위인에 대한 규율, 유월절

       (4) 하나님의 보호를 통한 성화(9:15-10:10) - 구름기둥

 

Ⅱ. 약속의 땅을 상속 받는데 실패한 구세대(10:11-25:18)

   1.가데스로 가는 길에서 실패한 이스라엘(10:11-12:16)

       (1) 시내산을 떠난 이스라엘(10:11-36)

       (2) 백성들의 실패(11:1-9) - 다베라에서 고기를 달라고 불평

       (3) 모세의 실패(11:10-15)

       (4) 하나님이 모세의 필요를 채우심(11:16-30) - 70인의 장로에게 하나님이 영이 임함

       (5) 하나님이 백성의 필요를 채우심(11:31-35) - 메추라기 떼가 내림

       (6) 미리암과 아론의 실패(12:1-16) - 모세를 비방

   2. 가데스에서 결정적으로 실패한 이스라엘

       (1) 약속의 땅을 조사함(13:1-14:45) - 12정탐꾼

       (2)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반역함(14:1-10) - 원망하는 백성들

       (3) 모세의 중재(14:11-19)

       (4)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심(14:20-38) - 정탐한 40일이 광야 40년으로

       (5)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심판에 반역함(14:39-45) -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가나안과 싸웠으나 패함

   3. 광야에서 실패한 이스라엘(15:1-19:22)

       (1) 제사에 대한 재검토(15:1-41)

       (2) 고라의 반역(16:1-40)

       (3) 이스라엘이 모세와 아론에게 반역함(16:41-50)

       (4) 제사장의 직무(17:1-19:22) - 아론의 싹난 지팡이, 소금언약, 정결법

   4. 모압으로 가는 길에서 실패한 이스라엘

       (1) 미리암의 죽음(20:1)

       (2) 모세와 아론의 실패(20:2-13) - 므리바 사건

       (3) 에돔이 이스라엘의 통과를 거절함(20:14-21)

       (4) 아론의 죽음(20:22-29)

       (5) 가나안 족속들에게 승리한 이스라엘(21:1-3) - 가나안과의 전쟁에서 승리, 불뱀

       (6) 이스라엘의 실패(21:4-9)

       (7) 모압으로의 여행(21:10-20)

       (8) 암몬에게 승리한 이스라엘(21:21-32)

       (9) 바산에게 승리한 이스라엘(21:33-35)

       (10) 모압 족속과 함께 실패(22:1-25:18) - 발람의 이야기, 축복의 산, 싯딤에서의 음행

 

Ⅲ. 약속의 땅을 상속할 신세대의 준비(26:1-36:13)

   1.이스라엘의 재정비(26:1-27:23)

       (1) 두 번째 계수(26:1-51) - 제2차 인구조사

       (2) 땅의 분배 방식(26:52-56)

       (3) 땅 분배에 대한 기대(26:57-27:11) - 슬로브핫의 딸들

       (4) 이스라엘의 새로운 지도자 임명(27:12-23) - 여호수아에게 안수

   2. 제사와 서원에 대한 규정(28:1-30:16)

       (1) 희생 제사에 대한 규정(28:1-29:40)

       (2) 서원에 대한 규정(30:1-16)

   3. 이스라엘의 정복과 분배(31:1-36:13)

       (1) 미디안에게 승리함(31:1-54)

       (2) 요단 강 동편의 분배(32:1-54)

       (3) 이스라엘의 여정 요약(33:1-49)

       (4) 요단 강 서편의 분배(33:50-34:29)

       (5) 가나안 땅의 도피성들(35:1-34)

       (6) 가나안 땅을 상속하는데 생긴 특별한 문제들(36:1-13) - 슬로브핫의 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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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08-01)


모든 대적으로부터 승리한 다윗

사무엘하 81-18


우리 삶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사람, 물질, 정신적인 것 등 다양합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에 대해 언제쯤 이 문제가 이해되고 해결될 것인지 궁금해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은 어떤 삶의 자세를 취해야 하며, 이런 고통의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습니까?

 

다윗이 여호와의 성전을 짓기 원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다윗 왕조를 세워주시고 다윗의 아들들을 양자로 삼아주시겠다는 언약을 주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약속에 다윗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에 감격하고 감사하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꼭 이루어주시길 기원합니다. 이렇게 다윗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 확고한 다윗 왕조를 세우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어디를 가든 동행하시며 승리를 주십니다.

 

전쟁에서 승리하는 다윗(1-6)

하나님께서 다윗의 집에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어디를 가든지 전쟁에서 승승장구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끊어 앉아 기도하여 경험한 힘이 이제 전쟁을 통해 승리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다윗의 힘으로 이기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승리하도록 하시는 삶을 자신의 경계를 넘어 국제관계 속에서까지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1그 후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을 쳐서 항복을 받고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메덱암마를 빼앗으니라 2○다윗이 또 모압을 쳐서 그들로 땅에 엎드리게 하고 줄로 재어 그 두 줄 길이의 사람은 죽이고 한 줄 길이의 사람은 살리니 모압 사람들이 다윗의 종들이 되어 조공을 드리니라 3르홉의 아들 소바 왕 하닷에셀이 자기 권세를 회복하려고 유브라데 강으로 갈 때에 다윗이 그를 쳐서 4그에게서 마병 천칠백 명과 보병 이만 명을 사로잡고 병거 일백 대의 말만 남기고 다윗이 그 외의 병거의 말은 다 발의 힘줄을 끊었더니 5다메섹의 아람 사람들이 소바 왕 하닷에셀을 도우러 온지라 다윗이 아람 사람 이만 이천 명을 죽이고 6다윗이 다메섹 아람에 수비대를 두매 아람 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어 조공을 바치니라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1-6)

 

이 단락은 다윗이 전쟁에서 이긴 민족들에 대한 이야기를 모아놓았습니다. 먼저 이스라엘을 지속적으로 괴롭혔던 블레셋이 성경에서 사라지는 시점입니다. 이후로는 성경 무대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게속될 것 같았던 고통의 문제가 해결되었고, 이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신 결과였습니다.

 

(1) 블레셋과 모압(1-2)

1절은 블레셋과의 전투에 대한 기록으로 다윗이 블레셋과 전쟁을 하여 항복을 받았고 블레셋의 손에서 메덱암마를 빼앗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다윗이 삼손 이후에 계속해서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블레셋을 굴복시키고 블레셋에 대한 지배권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2절은 다윗이 모압을 점령한 기록입니다. 다윗은 증조할머니 룻이 모압 사람인 관계로 자신의 부모를 모압 왕에게 부탁할 만큼 관계가 좋았었습니다(삼상 22:4). 그런데 다윗이 왕권을 잡고 난 이후 어느 시기부터 관계가 변한 것 같습니다. 여기서는 다윗이 모압을 점령한 후에 전쟁 포로를 처리한 방법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땅에 두 줄을 그어 놓고 두 줄 사이에 들어가는 사람은 살려주고 두 줄을 넘어가는 사람은 죽이는데, 이것을 대부분의 학자들은 삼분의 이를 죽이고 나머지 삼분의 일을 남기기 위한 방법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모압의 포로들을 죽인 이유는 당시 관습적으로 전쟁 포로는 노예로 삼는데, 아직 이스라엘의 경제 규모가 포로로 잡은 남자들을 이스라엘의 노예로 부릴 만큼 성장하지 못하였기 때문으로 봅니다. 전부 살려주자니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적이 될 가능성이 높고, 전부 노예로 부리자니 노예로 쓰기에도 숫자가 너무 많아 삼분의 일만 남겨두고 모두 죽여 인구수를 줄임으로써 이스라엘을 침입할 수 없도록 만들고, 그 후에 모압 사람들을 살려서 돌려보낸 것입니다. 대신에 다윗은 이들에게서 조공을 받기 시작하는데, 이때부터 모압은 이스라엘의 속국이 되었습니다.

 

(2) 소바 왕 하닷에셀(3-4)

3-8절은 아람과의 전쟁에 대한 이야기다. 르홉의 아들 소바 왕하닷에셀이 유브라데 강 유역에 대한 지배력을 회복하기 위해 전쟁을 시작하였습니다. 하닷에셀은 헬몬산 남쪽 끝에 있는 벤-르홉 출신으로 시리아의 강력한 정치 연맹 지도자로 추정되며, 소바는 레바논 맞은편 동쪽, 다메섹과 하맛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하닷에 이 북쪽으로 전쟁을 하러 간 사이 다윗이 소바를 공격하였고, 제대로 방어하지 못한 하닷에셀은 전쟁에서 지게 됩니다.

여기서 다윗은 마병 1,700명과 보병 20,000명을 사로잡는 큰 승리를 거둡니다. 다윗이 사로잡은 엄청난 숫자의 군인들은 하닷에셀의 군사력이 매우 강하였음을 알려줍니다. 다윗은 병거 100대의 말만 남기고 나머지 말의 힘줄을 끊는데, 이것은 병마를 많이 두지 말라는 신명기 17:16에 순종한 것으로 다윗은 자신의 군대에 많은 병거와 말을 두지 않았습니다. 말의 힘줄을 끊는 것은 말이 달리지 못하게 하여 더 이상 군사적 용도로 사용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으로 고대 사회에서 많이 사용한 방법입니다. 병거와 말은 고대 사회에서 가장 중요하고 강력한 무기인데, 이것들을 사용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전쟁이 인간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승리 소식에 소바와 주증 관계에 있던 다메섹의 아람 사람들이 하닷에셀을 돕기 위해 소바로 왔지만, 다윗은 오히려 아람 사람 22,000명을 죽이는 엄청난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3) 속국이 된 다메섹(5-6)

결국 다윗은 다메섹 아람에 수비대를 두어 다메섹을 자신의 속국으로 삼고, 아람 사람들이 이스라엘에 조공을 바치도록 하였습니다.

 

다윗의 전리품(7-12)

교회는 모든 승리의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려야 합니다. 우리의 죄가 어떻게 해졌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라는 권세를 갖게 되었습니까? 어떻게 예배할 수 있고 기도 응답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까? 어떻게 악한 자들이 건들지도 못하는 존재가 되었으며 유혹을 이기게 되었습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7다윗이 하닷에셀의 신복들이 가진 금 방패를 빼앗아 예루살렘으로 가져오고 8또 다윗 왕이 하닷에셀의 고을 베다와 베로대에서 매우 많은 놋을 빼앗으니라 9하맛 왕 도이가 다윗이 하닷에셀의 온 군대를 쳐서 무찔렀다 함을 듣고 10도이가 그의 아들 요람을 보내 다윗 왕에게 문안하고 축복하게 하니 이는 하닷에셀이 도이와 더불어 전쟁이 있던 터에 다윗이 하닷에셀을 쳐서 무찌름이라 요람이 은 그릇과 금 그릇과 놋 그릇을 가지고 온지라 11다윗 왕이 그것도 여호와께 드리되 그가 정복한 모든 나라에서 얻은 은금 12곧 아람과 모압과 암몬 자손과 블레셋 사람과 아말렉에게서 얻은 것들과 소바 왕 르홉의 아들 하닷에셀에게서 노략한 것과 같이 드리니라(7-12)

블레셋에 대한 다윗의 승리 원인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 함께하셨고 또한 다윗이 지켜온 정의와 공의의 실천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은 공평과 정의를 구현하는 대리자, 즉 하나님의 지상 대리자였습니다. 불의한 현실 속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1) 소바 왕 하닷에셀(7-8)

이렇게 다윗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당시 가장 강력한 무기인 병거들을 자신의 손으로 없었지만,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시며 구원해주셨기 때문에, 어디를 가든지 이길 수 있었습니다. 다윗에게 가장 강력한 무기는 바로 늘 함께하시는 여호와이신 것입니다.

블레셋, 모압, 아람과 승리한 것이 모두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기 때문이라고 결론 짓습니다. 다윗은 전쟁에서 승리한 후 금 방패와 많은 놋 등의 전리품들을 예루살렘으로 가져옵니다. 이 놋들은 후에 솔로몬이 열왕기상 18:8에서 놋바다와 성전 기물들을 만드는 데 사용됩니다.

이렇게 다윗이 많은 전리품들을 예루살렘으로 가져왔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점점 부강한 나라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윗과 이스라엘에게 큰 축복을 주셨음을 보여줍니다.

 

(2) 하맛 왕 도이(9-11)

하닷에셀과의 전쟁에서 크게 이긴 소문이 팔레스틴 지역에 퍼지자 소문을 들은 하맛 왕 도이가 화친의 사절단을 보냅니다. 하맛은 소바의 북쪽에 있는 지역으로 이 두 지역은 적대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하닷에셀을 이겼다는 소식에 하맛 왕 도이는 많은 선물과 함께 아들 요람을 보내어 화친을 청합니다. 사람 관계에서 적의 적은 친구라는 공식이 여기에서 적용되고 있습니다.

7-8절에서 요람이 찾아온 것은 하닷에셀을 이겼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이야기하며 강조하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좋은 소식들이 퍼지면서 고대 근동에서 이스라엘의 위상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합니다. 이제 다윗이 전쟁하지 않고도 스스로 화친을 청하며 많은 선물을 바치는 나라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요람이 가져온 선물은 은그릇과 금그릇과 놋그릇으로 다윗은 이들에게서 받은 선물을 여호와께 바친다.

 

(3) 다른 전리품들(12)

11절과 12절에서는 이것뿐 아니라 그동안 블레셋과 아람과 모압과 암몬 자손들과 아말렉과 하닷에셀에게서 얻은 전리품들도 여호와께 드렸다고 말합니다.

다윗이 모든 전리품을 여호와께 드렸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전쟁은 여호와의 손에 있기 때문에 여호와께 전리품을 바치는 것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올바른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은 여호와의 종으로서 여호와를 대신하여 싸운 존재일 뿐이며, 모든 영광은 여호와께서 받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자신은 여호와를 위한 성전을 지으라는 허락을 받지 못했지만, 대신에 성전을 지을 수 있는 물품들을 차곡차곡 준비한 것입니다. 후에 역대기는 다윗을 성전 건축을 준비한 사람으로 평가하는데, 이 평가는 다윗이 모든 전리품을 여호와께 드린 것을 근거로 합니다.

 

에돔을 정복한 다윗(13-14)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어디로 가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승리할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버거운 상대나, 뛰어난 전쟁 도구로 무장한 사람들과 상대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능히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내가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으로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이 있습니까?

 

13다윗이 소금 골짜기에서 에돔 사람 만 팔천 명을 쳐죽이고 돌아와서 명성을 떨치니라 14다윗이 에돔에 수비대를 두되 온 에돔에 수비대를 두니 에돔 사람이 다 다윗의 종이 되니라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 15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다스려 다윗이 모든 백성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할새 16스루야의 아들 요압은 군사령관이 되고 아힐룻의 아들 여호사밧은 사관이 되고 17아히둡의 아들 사독과 아비아달의 아들 아히멜렉은 제사장이 되고 스라야는 서기관이 되고 18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는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을 관할하고 다윗의 아들들은 대신들이 되니라(13-18)

다윗은 모든백성에게 정의와 공의를 실행했습니다. 특정 계층의 사람들에게는 잘 대해주고, 사회적 약자에게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서는 안 될 일입니다. 영토 확보를 위한 전쟁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의와 공의하고, 그것이 나라의 안정과 평화를 가져오는 결정적 계기가 됩니다.

 

(1) 에돔을 정복한 다윗(13-14)

이 단락은 에돔 정복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소금 골짜기는 사해 남쪽 지역을 가리키는데 에돔 지역에 있습니다. 다윗은 이곳에서 에돔 사람 18,000명을 죽이는 엄청난 전과를 기록하였고, 이 전쟁으로 인해 주변국에서 큰 명성을 얻습니다. 아마도 이 전투가 매우 크고 유명한 전투였고, 그로 인해 다윗의 명성이 팔레스틴 지역에 널리 퍼지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여기서는 전쟁을 통해 다윗이 명예를 얻은 것을 언급합니다.

14절은 후렴구처럼 6절과 동일하게 에돔이 종이 되었다는 것과 여호와께서 어디를 가든지 구원하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다윗이 얻은 명성 또한 여호와의 은혜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2) 다윗 왕국의 신하들(15-18)

15절에서 다윗이 이스라엘을 공의와 정의로 다스렸다고 평가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왕에게 바란 가장 이상적인 덕목으로, 왕은 전쟁을 통해 백성을 구원하는 역할도 해야 하지만 지혜로운 재판을 통해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실현되도록 해야 하는데 다윗은 그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다고 평가한 것입니다.

16절부터는 다윗 왕국의 신하들에 대한 설명입니다. 다윗을 도와 이스라엘을 다스린 인물들에 대한 소개입니다. 먼저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군사령관으로 소개됩니다. 제일 먼저 소개된 이유는 병권을 쥐고 있는 인물로 다윗 왕국의 이인자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사밧은 사관인데, 사관은 기억하다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단어로 국가의 여러 기록과 문서를 관리하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제사장은 아히둡의 아들 사독과 아비아달의 아들 아히멜렉이었는데, 사무엘상 22:20에 따르면 아비아달은 다윗을 계속해서 따라다니며 도왔던 인물로 아히멜렉은 그의 아들입니다. 다윗의 아들들은 대신들이 되었습니다. ‘대신으로 번역된 것은 제사장인데, 이들은 임시적인 직책으로 아히멜렉이나 사독의 제사장직과는 달랐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다윗 왕국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든든하게 세워져 갔습니다.

 


우리는 위축과 좌절의 시대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수적으로는 물론 권위와 존경에 있어서도 쇠약해져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는 데 집중함으로써 하나님이 주시는 승리를 경험하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다윗 시대의 영광이 우리에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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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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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대의 주인공 예수님

마태복음 814-22


 

옛날에는 제자가 선생님의 집에서 상당 기간 먹고 살면서 배우는 도제(徒弟)제도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진정한 제자는 선생님과 항상 살면서 선생님의 모든 것을 배우는 사람입니다. 당신은 예수님과 항상 함께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예수님과 모든 것을 함께 하고 누리고 있습니까?

 

마태복음 8-9장에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증거로 열 가지 기적을 기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집에서 열병에 누워 있는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십니다. 그날 밤 귀신 들린 자들과 각종 병든 자들이 몰려들었고, 예수님께서는 귀신을 쫓으시고 병을 치유해 주십니다. 무리를 강 건너편으로 보내실 때, 한 서기관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자처합니다. 또 한 제자는 아버지 장례를 치른 후 따르겠다고 합니다. 이 두 반응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참 제자도를 가르쳐주십니다.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신 예수님(14-15)

 

살아가면서 가장 힘든 순간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 순간일 것입니다. 그래서 인류의 가장 오래된 연구는 죽음을 정복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남기고 죽음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에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14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15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 들더라(14-15)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와 이방인 백부장에 이어서(1-13), 이번에는 유대 사회에서 소외의 대상인 여인을 고쳐 주셨습니다.

치유 받은 이들의 공통점은 배척당하는 이들, 소외된 이들로서 당시에 일반적인 생각으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이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들을 회복하여 천국 백성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가버나움에 있는 베드로의 집에 가셔서 열병을 앓고 있는 장모를 보셨습니다. 열병은 갈릴리 호숫가에 위치한 저지대에서 흔히 발행한 말라리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가버나움은 곡식, 어업, 무역 등으로 여건이 좋은 지역이었으나 말라리아의 위험이 늘 상존했습니다. 만일 장모의 열병이 말라리아였다면, 당시 의술로는 고치기 힘든 병으로 목숨이 위태로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환자에게 손을 대는 방식으로 고치십니다. 구체적인 치유 장면이 생략되어 있지만, 예수님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과 긍휼을 더욱 잘 보여줍니다. 그분의 긍휼과 능력의 손이 닿는 곳에 치유와 회복이 일어났습니다.

베드로의 장모는 예수님의 이 치유 기적에 대한 반응으로 예수님을 섬기기 시작합니다. 마가는 그들을섬겼다고 기록하는 반면에, 마태는 섬김의 대상을 예수님으로 좁히고 있습니다.

섬기다는 신약에서 교회에서의 섬김을 표현할 때, 집사를 가리킬 때 사용된 용어입니다(딤전 3:10,13).

마태는 예수님께서 베드로 장모의 손을 잡는 장면에 초점을 맞춥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치유할 때 반복해서 손을 잡으시는 것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표현합니다. 육신의 병은 마음의 병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거저 육체의 질병을 치유하는 것으로 만족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마음 아픔에 예수님의 시선은 그를 향하고 긍휼의 손을 그에게 대십니다.

치유에 대한 반응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장모는 열병으로부터 일어나서 예수님을 섬겼습니다. 누가복음에는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저희에게 수종드니라.’(4:39) 베드로의 장모는 일어나서 즉시 예수님과 그 일행을 섬겼습니다. 본문에서 보여주는 참된 믿음은 만왕의 왕으로서 예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장모는 치유에 대한 반응으로 예수님을 섬깁니다. 하늘나라의 일꾼이 섬겨야 할 대상은 예수님이며, 섬김의 동기는 예수님의 치유, 혹은 구원임을 보여줍니다.

교회는 예수님께서 먼저 베푸신 치유에 감사해서 예수를 섬기는 공동체이며, 교회의 직분 역시 예수님을 수종 드는 목적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수단과 목적을 뒤바꾸는 사람이나 공동체는 예수님께서 가져오신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는 대신에 그 사회를 오염시키고 악취를 풍기는 존재가 됩니다.

 

연약함을 담당하신 예수님(16-17)

 

예수님께서는 관객이 아니라 선수로, 관람객이 아니라 제자가 되길 원하십니다. 주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합당한 헌신과 결단이 뒤따르지 않을 때, 주님의 은혜는 값싼 은혜로 전략하고 맙니다. 주님의 고귀한 은혜에 합당한 섬김과 헌신이 필요합니다. 이제 마태는 예수님의 전반적인 사역에 대해 요약한 것을 소개합니다.

 

16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17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16-17)

본문은 1-15절의 치유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 나타난 치유와 축사 사역에 대한 전체를 요약하는 진술입니다.

저녁이 되자,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많은 사람이 귀신 들린 사람들과 병든 사람들, 그리고 약한 사람들을 데리고 찾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치유하는 방법은 말씀으로 고쳐 주셨습니다. 이는 앞에서 백부장이 예수님의 말씀만으로 종이 나을 수 있다고 말한 것과 연결됩니다.

마태는 치유에 대해 요약 후에 이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되어진 것이 성취되기 위함이니’(4:14;12:17)라는 성취 공식(1:22;2:15,17,23;13:14,35; 21:4;27:9)을 사용해서 이 치유가 이사야 534절의 성취임을 분명히 합니다. 이 치유는 81-15절의 세 가지 치유뿐만 아니라 16절에 나타난 모든 치유 행위를 포함합니다. 이사야 534절은 네 번째 종의 노래인 52:13-53:12에서 고난의 종을 묘사하는 본문에 속합니다(첫 번째부터 세 번째 종의 노래; 42:1-4;49:1-6; 50:4-9).

마태는 치유하시는 예수님의 사역을 고난의 종에게 부여된 사역을 성취하신 것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의 치유 지식에서 마태는 예수님의 권위와 능력을 강조했는데, 이제 정반대로 약한 것을 취하고 질병을 짊어지는 고난의 종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이나 열병과 같은 병을 대신 앓은 것이 아닌데도 고난의 종이라는 개념이 817절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질병의 속성은 고통에 있으며, 예수님께서는 환자들의 고통에 참여하시고 고통을 지고 가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129-13절에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셨는데, 이후 바리새인들이 그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밉니다(12:14-16). 이는 예수님의 치유 행위는 그의 고난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고난 없이 치유를 논할 수 없습니다. 치유의 사건들을 통해서 이사야 예언대로 예수님을 통해 말씀이 성취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의 종으로서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약한 자들을 치유하기 위해 권위를 사용하십니다. 치유는 이사야 53장의 종과 같이 예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짊어지신 질병을 떠맡기 위해 오신 메시아입니다. 귀신을 내쫓고 병자들을 고치시는 것을 통해 자신이 구약성경에 예언된 바로 그 메시아임을 증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바르게 따르는 법(18-22)

 

예수님께서 행하신 치유와 축귀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알리는 신호탄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신을 오해하여 인간적인 구원자로 기대하자 예수님께서는 그 자리를 떠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직 하나님께 집중해야 하며, 그분을 따르는 일보다 더 중요하고 우선적인 일은 없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18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싸는 것을 보시고 건너편으로 가기를 명하시니라 19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20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21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22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18-22)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건너편으로 갈 것을 명령하십니다. 갈릴리 바다의 건너편은 오른쪽에 위치한 시리아 지역이며, 여기에는 데가볼리도 포함됩니다. 마태는 참된 믿음을 설명하신 후에, 잘못된 믿음의 두 가지를 소개합니다.

 

(1)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서기관에 대한 평가(18-20)

첫 번째 잘못된 믿음의 종류는 한 서기관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서기관에게 적극적으로 잘했다고 칭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따를 때 치러야 하는 대가, 혹은 비용에 대한 내용입니다. 한 서기관(누가복음 9:57에는 어떤 사람으로 표현됨)이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든지 따르겠다고 말합니다. 토라의 전문가인 서기관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큰 관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라고 대답하십니다. 이 표현은 여우나 새는 고정된 장소에서 쉬거나 자는 반면, 예수님께서는 이곳저곳으로 이동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순회하는 여정 가운데서 치유하는 활동을 하셨기 때문에, 편안한 집에 거주하지 못하셨습니다(참조, 4:18-22,23). 순회하거나 집을 떠나 이동해야 하는 예수님의 인생은 태어나면서부터 예고된 것이었습니다(2:13-14; 12:14-15; 14:12-13; 15:12-14,21; 16:1-5). 무엇보다, 머리 둘 곳 없는 삶은 곧 십자가의 길입니다.

특히 인자’(20)는 다니엘 713-14절에 근거한 칭호로서 다니엘 7장의 인자는 하늘의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존재로서 이 땅에 섬기기 위해(20:28) 오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인자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하므로, 그는 머리 둘 곳이 없는 인생을 살아야 했습니다.

본문의 서기관도 인자인 예수님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사람이므로 예수님의 제자로 사는 의미를 알지 못합니다. 하늘에서 신적인 권위를 갖고 있는 인자(7:13-14)와 땅에서 고난의 길을 가는 인자의 삶은 매우 대조적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인자의 삶을 본받도록 부름받은 존재입니다. 당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어떤 기관에서 교육을 받은 것이 아니라 순회하는 예수님을 따라 순회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런 식의 삶에서는 자신의 소유를 유지할 수 없으며, 사회적 관점에서는 주변인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서기관의 의를 넘어서야 했습니다.

그 서기관은 예수님을 통해 유익을 얻으려는 욕심이 중심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길이 영광스러운 길이 아니라 집도 없이 다니는 고난의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2) 세상을 따르겠다는 제자에 대한 평가(21-22)

두 번째 잘못된 믿음은 예수님을 따르고 있던 제자 중에 한 사람이 말합니다. 이제 예수님의 다른 제자 한 명이 예수님께 와서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르고 나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합니다(21).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유대 사회에서 중요한 덕목이었으므로(20:12; 15:3-6) 이 사람의 요구는 합당합니다.

매장은 유대 세계에서 최고의 덕목 중 하나였습니다(50:5-6; 토빗서 4:3; 6:14), 제자가 말하는 장례는 첫 번째 장례가 아니라, 1차 매장 이후 남은 뼈를 모아서 가족 묘(동굴)에 있는 조상들의 뼈와 합치는 두 번째 매장입니다. 이 풍습은 이미 1세기 전에 많은 문화권에서 행해졌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아버지의 뼈를 모으는 것은 자식의 의무였습니다.

이 제자는 임종을 지켜보게 해달라고 요청한 것이 아니라, 두 번째 매장을 끝내고 아버지의 장례 절차를 마무리 한 다음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요청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아버지를 끝까지 보살피고 나서 따르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두 번째 매장의 날은 정해져 있기 때문에 그 시간까지만 따르는 것을 연기해달라는 부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나를 따르라 그리고 죽은 자들이 자신들의 죽은 자들을 매장하게 하라고 대답하십니다. 당연히 죽은 뼈들이 알아서 뼈를 정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예수님의 표현은 문자적 의미가 아닙니다. 죽은 자들은 무덤에 있는 죽은 자들 내지 조상들의 뼈를 의미합니다. 가족묘에 있는 다른 뼈들로 아버지의 뼈를 다시 매장하도록 두라는 뜻입니다. 당시에 어떤 경건 행위보다 중요했던 매장보다 더 긴급한 것은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해서 죽은 자들을 살리는 일입니다. 본문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더 본질적이고 긴급한 것임을 보여줍니다.

헌신하지 않고서는 예수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따르는 일을 가장 귀하고 우선적인 일로 여겨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기 위해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따르려면 떠나야 합니다. 지금 편리하고 익숙한 곳만 떠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안전을 지탱해주던 모든 조건으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자신이 우선순위로 삼았던 것에서 떠나야 합니다. 심지어 사회적 통념에서 떠나야 했고 기득권을 버려야 했습니다. 따름의 순종은 그렇기에 안주하는 이들에게 평면적이고 급진적이고 심지어 체제 정복적인 일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보기에 낯설고 불편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그 길만이 죽음을 기념하는 삶이 아니라 죽음을 넘어서 영생을 바라보는 삶을 잊지 않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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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07-02)

 


주의 응답에 대한 다윗의 찬양과 기도

사무엘하 7장 18-29절


찬양은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을 인정하고 고백함으로 하나님을 높여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는 하나님의 뜻과 약속을 확인하며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소원이니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도 거절당합니다. 중요한 것은 거절된 기도가 아니라 그 기도 앞에서 보인 다윗의 반응입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은혜로 평안을 얻자 여호와를 위한 성전을 지어 드리기를 원합니다. 여호와께서는 다윗이 성전을 짓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지만, 그 마음을 매우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다윗 왕조를 세워주시겠다는 약속과 다윗의 아들들을 하나님의 양자로 삼으시겠다는 영원한 언약을 주십니다. 다윗은 사울과 달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기에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왕조를 든든하게 세워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과거에 행하신 여호와의 일(18-21)

우리가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와 높이를 더 알게 될수록 감사의 깊이도 깊어질 것입니다(엡 3:18-19). 그러므로 우리는 주 앞에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여,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주님을 더 알게 하옵소서!” 우리가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믿음을 선물로 주셔서 구원받게 하신 것입니다.
 
18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 19주 여호와여 주께서 이것을 오히려 적게 여기시고 또 종의 집에 있을 먼 장래의 일까지도 말씀하셨나이다 주 여호와여 이것이 사람의 법이니이다 20주 여호와는 주의 종을 아시오니 다윗이 다시 주께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21주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주의 뜻대로 이 모든 큰 일을 행하사 주의 종에게 알게 하셨나이다(18-21)
선지자의 말에 다윗은 항의하거나 항변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앉아서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입니다. 다윗은 사울처럼 자기 뜻을 굽히지 않는 폭군이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그런데도 거절당합니다. 중요한 것은 거절된 기도가 아니라 그 기도 앞에서 보인 다윗의 반응입니다.
 
(1) 다윗의 겸손(18)
다윗은 나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신과 자신의 가문에게 주신 큰 은혜의 언약을 듣게 된 후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습니다. ‘여호와 앞’이라는 것은 다윗 성 휘장 안에 놓여 있는 여호와의 궤 앞입니다. 다윗은 여호와께서 주신 언약의 말씀에 감사하며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서 기도하였습니다.
 
(2) 작은 일(19-20)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제일 먼저 감사합니다. 또 자신이 무엇이며 자신의 집이 무엇이기에 지금까지 인도하셨는지 묻습니다. 이것은 수사 의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자신과 자신의 집에 주신 은혜에 대해 감사한 것입니다.
여기서 다윗은 여호와를 ‘나의 주’라고 부르는데, 여호와께서 다윗을 ‘나의 종’이라고 부른 것에 대한 응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제까지 인도하신 것도 작다고 여기시고 또다시 먼 미래의 종의 집일까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의 규범을 따라 왕조 언약을 주신 것에 대한 감사입니다. 그동안 하나님께서는 주변 나라들과는 달리 이스라엘에 왕을 세우지 않으시고 사사를 직접 선택해서 다스리셨습니다. 사울을 왕으로 세우실 때도 하나님께서 직접 선택하셨고 사울 대신 다윗을 선택하신 것도 하나님이셨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다윗은 여호와께서 자신의 왕조를 세워주겠다고 말씀하신 것에 대해 감사한 것입니다. 또한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잘 알고 계시기에 더 이상 하나님께 말을 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부족함을 잘 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하고 감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아직도 낮고 겸손한 자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3) 큰 일(21)
21절은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으로 자신에게 왕조를 주시는 일은 온전히 하나님의 뜻이며, 자신은 오직 하나님의 뜻을 알지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자신은 여전히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온전히 순종하고 따라가겠다는 의미로 감사로 시작하여 순종으로 단락을 마무리합니다.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유일성(22-24)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셨을 뿐만 아니라 쉴 만한 물가와 푸른 풀밭으로 인도해 주셨음을 기억하며 주 앞에 찬송을 올려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과거에 받은 주님의 은혜를 기억할 뿐만 아니라 때를 따라 도우시는 주님의 새로운 은혜를 사모하며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22그런즉 주 여호와여 이러므로 주는 위대하시니 이는 우리 귀로 들은 대로는 주와 같은 이가 없고 주 외에는 신이 없음이니이다 23땅의 어느 한 나라가 주의 백성 이스라엘과 같으리이까 하나님이 가서 구속하사 자기 백성으로 삼아 주의 명성을 내시며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주의 땅을 위하여 두려운 일을 애굽과 많은 나라들과 그의 신들에게서 구속하신 백성 앞에서 행하셨사오며 24주께서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세우사 영원히 주의 백성으로 삼으셨사오니 여호와여 주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22-24)
나단의 메시지에는 하나님을 주어로 하는 동사가 많습니다. 그 메시지를 듣고 다윗도 하나님을 ‘주’로, 자신의 ‘종’으로 부릅니다. 전에는 ‘나’로 가득했지만, 이제는 ‘하나님’으로 가득합니다. 주어의 변화는 주도권의 변화입니다.
 
(1) 여호와의 유일성(22)
이 단락은 여호와께 대한 송영으로 다윗은 여호와의 위대성을 찬양하며 단락을 시작합니다. 여호와 같은 분은 없으며, 여호와 이외에는 신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여호와가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유일한 신이라는 사랑은 신명기 3:24: 4:35과 연결되는 것으로 여호와서 다른 신들과 도저히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은 여호와의 장엄성과 능력과 창조성은 어느 신도 따라올 수 없는 독보적인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2) 이스라엘의 유일성(23)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구원을 이야기합니다. 다윗은 이스라엘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나라가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는데 여호와 같은 신이 없는 것처럼 이스라엘과 같이 특별한 나라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아 자신의 이름을 이스라엘에게 두기 위해서 직접 구속하셨기 때문이며, 애굽과 다른 민족들과 신에게서 구속하신 백성들을 위해 큰 일과 두려운 일들을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고백은 출애굽과 가나안 점령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직접 구속하신 것은 애굽에 어마어마한 재앙을 퍼붓고 애굽의 철병거를 홍해에 수장하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것을 말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가나안 땅을 주시기 위해 백성들 앞에서 여호와께서 전사로서 큰 기적들을 보여주시고 싸워주셨습니다.
다윗은 세상의 어느 신이 이렇게 자신의 백성을 위해 헌신적이며 세상의 어느 나라가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와 헌신을 받느냐고 말하며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특별한 관계를 강조합니다.
 
(3) 여호와와 이스라엘(24)
24절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우셨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셨다는 시내산 언약으로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를 마무리합니다. 하나님의 보호와 사랑의 모든 근원이 시내산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에서 다윗이 고백하듯이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는 자신의 백성을 너무나 헌신적으로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렇기에 결국 자신의 아들을 우리를 위해 보내주기까지 하셨습니다.
 

다윗의 기도(25-29)

우리는 먼저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시고, 뜻이 하늘에서 이뤄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뤄질 것을 위해 먼저 간구해야 합니다.
 
25여호와 하나님이여 이제 주의 종과 종의 집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을 영원히 세우셨사오며 말씀하신 대로 행하사 26사람이 영원히 주의 이름을 크게 높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 하게 하옵시며 주의 종 다윗의 집이 주 앞에 견고하게 하옵소서 27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의 종의 귀를 여시고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우리라 하셨으므로 주의 종이 이 기도로 주께 간구할 마음이 생겼나이다 28주 여호와여 오직 주는 하나님이시며 주의 말씀들이 참되시니이다 주께서 이 좋은 것을 주의 종에게 말씀하셨사오니 29이제 청하건대 종의 집에 복을 주사 주 앞에 영원히 있게 하옵소서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사오니 주의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 하니라(25-29)
다윗은 이제 성전 건축의 뜻을 철회하고 다윗의 집을 세우시겠다는 약속의 실현을 요청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자신의 소원이 되게 합니다. 기도의 마지막 단락은 간구입니다.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린 후에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신 약속을 이루어 달라고 간구합니다.
 
(1) 주의 말씀을 이루소서(25-26)
25절에서 다윗은 당신의 종과 종의 집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을 확실하게 해주시고 말씀하신 대로 행해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래서 영원히 여호와의 이름이 위대하게 되고 사람들이 ‘만군의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다’라고 외치게 해달라고 기원합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을 더욱더 부강하게 해달라는 말로 이스라엘이 부강하게 되면 주변 모든 나라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대하다고 칭송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부강을 위해서 기도한 다윗은 이제 가장 핵심적인 기도를 합니다. 당신의 종인 다윗의 집을 여호와 앞에서 굳건하게 세워달라고 기도합니다.
 
(2) 다윗의 집을 위한 기도(27)
27절에서 자신이 이런 기도를 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여호와께서 먼저 다윗에게 너를 위해 집을 세울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자신도 감히 이런 기도를 할 용기가 생겼다고 고백합니다. 본문에서 ‘주의 종의 귀를 여시고’로 번역된 것은 직역하면, ‘주의 종의 귀를 벌거벗기시다’입니다. 이것은 계시를 드러내셨다는 의미입니다. 즉, 여호와께서 나단을 통해 이런 계시를 주셨기 때문에 자신의 집을 굳건하게 해달라고 기도할 용기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26절과 27절에서 다윗은 여호와를 만군의 여호와로 부르는데, 이것은 하늘의 군대를 이끄시는 하나님이란 의미로 이스라엘과 다윗의 왕조를 적으로부터 지키시고 싸우시는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5:10에서도 만군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므로 다윗이 점점 강정해져 갔다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민군의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싸우셨다는 의미입니다.
 
(3) 복을 위한 기도(28-29)
28절에서는 하나님을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보증으로 삼습니다. 다윗은 여호와는 하나님, 즉 신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진실하기를 기원하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어주시길 기원한 것입니다. 여기서 ‘진실함’이란 뜻의 ‘에메트’는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하나님의 진실한 성품에 기대어서 확실하게 믿은 것입니다. 다윗은 마지막으로 왕조의 약속을 ‘좋은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언약’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왕조 언약을 주셨으니 종의 집에 복을 주시고 주의 앞에 영원히 있는 것을 기뻐해 달라고 기원하며, 다시 한 번 자신의 집이 영원히 하나님의 복을 받게 해달라고 하며 모든 기도를 마칩니다. 다윗의 기도를 보면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언약을 어마어마한 은혜라고 생각하고, 이에 대해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왕이 되고 나서 이스라엘에 평화를 주신 분이 여호와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고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은 왕이 된 이후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늘 불안해하며 살았던 사울의 모습과 대조됩니다. 과연 우리는 다윗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복에 감사하며 살고 있는지, 아니면 사울처럼 늘 우리가 가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해 불안해하고 불평하며 불행하게 살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윗처럼 늘 겸손하게 하나님을 섬길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이시고 우리에게 복을 주십니다.
 


거절된 응답에 다윗이 보인 첫 반응은 보좌에서 내려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하는 일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먼저라는 것을 알았고, 자신의 열망보다 하나님의 열망이 더 크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기도 가운데서 일어난 변화이자 기도의 첫 응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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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07-01)

 


성전을 건축하길 원하는 다윗

사무엘하 71-17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심과 신실하심으로 그분의 언약을 주권적으로 이루고 완성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그분이 지금까지 행하신 역사를 믿고 장차 행하실 역사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언약은 그것의 성취 여부를 부흥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언약은 반드시 성취됩니다.

 

다윗은 통일 왕국의 왕이 되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다윗 성을 지으면서 왕국의 기반을 다졌습니다. 그 후에 그는 자신의 하나님이신 여호와의 언약궤를 예루살렘에 있는 다윗 성으로 옮겨 오려고 하였습니다. 첫 번째 시도는 실패했지만, 그 후 언약궤를 어깨에 메고 옮겨 무사히 예루살렘 다윗 성에 안치하였고, 다윗은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며 온 백성과 축제의 기쁨을 나눕니다. 이렇게 예루살렘은 정치적 중심지가 되었고 이스라엘은 점점 강성해집니다.

 

성전을 건축하기 위한 소원(1-3)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이미 행하신 것을 믿고 그분이 행하실 것을 소망하는 것뿐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위해 수고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자신이 무엇을 하겠다는 비전보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이루실 일을 기대하며 나갑시다.

 

1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를 무찌르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살게 하신 때에 2왕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에 있도다 3나단이 왕께 아뢰되 여호와께서 왕과 함께 계시니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행하소서 하니라(1-3)

다윗의 인생을 살펴보면 얼마나 힘겨운 세월이었습니까? 황폐한 광야와 동굴에 버려진 것과 같은 삶에서, 이제 예루살렘 궁에서 평안한 태평성대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고생했기 때문에 안주할 만한데도, 다윗은 나단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성전을 새롭게 건축할 의사를 전합니다. 성전 건축은 하나님의 명령이 아닌 다윗의 소원에서 시작됩니다.

 

(1) 다윗의 상황(1)

다윗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에 있는 다윗 성으로 옮긴 후, 여호와께서는 주위의 모든 원수들을 물리쳐주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예루살렘 궁에서 평안하도록 해주셨습니다. 모든 위험과 갈등의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본문은 다윗이 누린 평안이 여호와께서 모든 적들의 손에서 구원해주셨기 때문임을 강조합니다.

 

(2) 다윗의 소원(2)

여호와께서 주시는 평화의 시대를 누린 다윗은 마음이 쉴 수가 없었습니다. 몸은 쉴 수 있는 환경이 되었지만, 그의 마음은 결코 쉴 수 없었습니다. 다윗의 마음은 불편했습니다.

선지자 나단을 불러서 자신의 마음을 전합니다. 다윗은 그 마음을 자신의 처소와 여호와의 처소를 비교하며 이야기합니다. 자신은 백향목 궁에 살고 있는데 여호와의 궤는 휘장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휘장이란 단어는 성막을 구성하는 천으로 성막은 여러 장의 휘장을 이어 만듭니다. 다윗이 여기서 장막이 아니라 장막의 일부분인 휘장이란 단어를 사용한 것은 자신의 백향목 궁과 좀 더 강한 대조를 하기 위한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모든 적에서 구원해주시고 이스라엘에 평화를 주신 여호와를 위해 이제 한 장소를 정하여 자신의 집보다 더 튼튼하고 아름다운 성전을 지어드리길 원했습니다.

 

(3) 나단의 동의(3)

본문에서는 이런 다윗의 마음이 표현되어 있지 않지만, 선지자 나단은 다윗의 마음에 감동하고, 흔쾌히 알고 승인합니다. 나단은 여호와께서 당신과 함께 계시니 당신의 마음대로 행해도 좋다라고 말합니다(3). 그는 다윗의 제안이 너무나 아름다워 보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나단 개인의 생각이었습니다.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늘 다윗과 함께 계시니 성전 짓는 일도 허락하실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나단 선지자는 여기 처음 등장하며, 후에 그의 두 아들이 왕의 중요한 관리가 됩니다(왕상 4:5). 그는 다윗이 예루살렘에 자리 잡은 후에 등장하며 다윗이 죽고 솔로몬이 왕이 될 때까지 오랫동안 왕실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전합니다.

 

여호와께서 나단을 통해 하신 말씀(4-17)

성도들은 아무리 좋은 생각이라 할지라도, 그 좋은 생각이 성숙한 신앙인에게서 나왔더라도 무조건 하나님의 뜻으로 간주해서는 안 됩니다. 때로는 그것이 인간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생각도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향한 성전 건축은 순수하고 좋은 생각이었지만,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그곳에 있지 않았습니다.

 

4그 밤에 여호와의 말씀이 나단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5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 6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까지 집에 살지 아니하고 장막과 성막 안에서 다녔나니 7이스라엘 자손과 더불어 다니는 모든 곳에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라고 명령한 이스라엘 어느 지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 8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와 같이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고 9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땅에서 위대한 자들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리라 10내가 또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곳을 정하여 그를 심고 그를 거주하게 하고 다시 옮기지 못하게 하며 악한 종류로 전과 같이 그들을 해하지 못하게 하여 11전에 내가 사사에게 명령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아니하게 하고 너를 모든 원수에게서 벗어나 편히 쉬게 하리라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12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13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14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15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는 아니하리라 16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17나단이 이 모든 말씀들과 이 모든 계시대로 다윗에게 말하니라(4-17)

다윗이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려고 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한 번도 아름다운 성전을 요구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건물 안에 갇힐 수 없는 자유로운 분이요, 왕에게 매력적인 백향목이 하나님에게도 매력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1) 다윗이 여호와의 집을 짓는 것에 대해 반대하심(4-7)

그날 밤에 여호와의 말씀이 나단에게 임하셨는데 여호와께서는 나단에게 나의 종 다윗에게 '가서 여호와의 말씀을 전달하라'(4)라고 하십니다. 여호와께서는 다윗을 나의 종이라고 부르시는데, 이 호칭은 이전에 모세와 여호수아만 받은 칭호로 다윗이 여호와를 매우 충실하게 섬긴 인물로 인정받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5)는 질문은 다윗이 성전을 짓겠다는 요청에 대한 거절을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을 짓는 것에 대한 거절 이유가 나오는데(6-7), 첫째는 이스라엘과 동행하기 위해서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애굽에서 나온 날부터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과 동행하기 위해 움직일 수 없는 성전이 아니라 움직일 수 있는 성막 혹은 장막에 거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성막은 그동안 완전하게 정착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살던 이스라엘과 동행하기에 가장 적합한 하나님의 거주지로 성막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어디에 가든지 늘 동행하시고 보호해주신다는 약속을 지키신 것입니다.

둘째는 성전을 짓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동안 이스라엘이 간 모든 곳에 동행하셨지만 한 번도 백향목 성전을 지으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여기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라고 명령한 이스라엘의 한 지파라는 말은 사사시대를 암시하는데, 이스라엘의 지파들에서 지도자를 세운 이유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이스라엘을 잘 돌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나라의 이방신들처럼 각 지역마다 신전을 지으라고 하실 수도 있었지만, 그걸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본질적인 것을 추구하시는 분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이나 웅장함보다는 백성들과 동행할 수 있는 간편한 장막을 원하셨고, 자신이 선택한 지도자들이 자기 백성을 잘 돌보는 것을 가장 기뻐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2)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안전을 약속하심(8-11a)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짓겠다는 다윗의 제안은 거절하셨지만, 하나님을 생각하는 진실한 마음은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에게 이전에 주신 것보다 더 큰 은혜의 약속을 주십니다.

이 단락은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8~9a절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해 과거에 해주신 일을 서술하고 있고, 9절 하반절 이하는 앞으로 해주실 일에 대한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다윗을 양치기에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은 것과 모든 전쟁에 함께하셔서 적들을 물리쳐주신 것을 상기시키십니다. 9절 하반절에서 새로운 축복을 더하여 주시는데, 다윗의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주겠다고 하십니다. 그것은 다윗을 주변 모든 왕들보다 강력하게 만들어주겠다는 것이며, 이스라엘에서도 역사적으로 길이길이 기념될 왕으로 만들어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두 번째는 이제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의 영원한 땅으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정하고 심고 거주하게 하고 다시는 옮기지 못하게 하다라는 표현들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동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또한 사사 때와는 다르게 적들의 침입이 없는 평화의 시대를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것은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고 살 때 누리는 약속이며, 다윗이 범죄하였을 때 다윗 왕국은 큰 어려움을 겪습니다.

 

(3) 여호와께서 다윗의 집을 세워주겠다고 언약하심(11b-17)

이 부분은 다윗의 언약으로 불리는 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위해 집을 지어주겠다는 특별한 언약을 해주십니다. 다윗의 언약은 왕조 하사와 양자 언약으로 구성됩니다. 여호와를 위한 집 대신에 하나님께서 다윗의 집을 지어주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다윗 왕조를 세워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다윗의 아들이 왕위를 계승할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다윗 왕조를 견고하게 세워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다윗을 대신해서 다윗의 아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위한 집을 건축할 것이며, 여호와께서는 그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세워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견고하게 세워주신다는 말을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왕조가 이어지려면 견고하게 서야 하기 때문 아들을 자신의 아들로 삼아주시고 자신은 그의 아버지가 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제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의 양자로 여호와의 종, 즉 여호와의 백성보다 더욱 친밀한 관계로 들어서게 되며, 이것은 만군의 여호와의 절대적인 지지와 보호를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 본문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단어는 영원히입니다. 다윗 왕조를 영원히 세워주고 보존해주시겠다는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합니다. 이것은 사울 집과 대조를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사울 집에서 은혜를 거둔 것처럼 다윗 집에서는 은혜를 거두지 않을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을 두는데, 왕이 범죄할 경우는 사람의 매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겠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사람의 매인생의 채찍은 평행법으로 동일한 의미를 비슷한 말로 반복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은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 죄에 대해서 징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것도 일시적이며, 절대 사울의 집을 버리신 것처럼 완전히 버리지는 않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므로 다윗 언약은 왕조를 주시겠다는 언약이며 양자 언약으로 또한 영원한 언약입니다. 사실 사울도 이런 약속을 받을 뻔하였습니다. 사무엘상 13:13에서 사무엘은 사울에게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였다면 여호와께서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울은 여호와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왕조를 세우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였기에 영원한 왕조를 하사받은 것입니다.

다윗의 언약은 구약의 마지막 부분으로 가면 이스라엘이 멸망함으로 희미해집니다. 하지만 이 약속은 신약시대에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살아났고 성취되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다윗의 열망은 순수하고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그 열망보다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열망이 훨씬 더 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소망을 품은 사람들에게 위대한 복을 허락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나라와 그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케 할 것을 약속하십니다. 다윗의 후손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아버지가 되어주시고, 그들을 지키고 돌보아 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다윗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하나 벅차고도 거대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소망을 품은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 안에도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소망이 임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복이 임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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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06-02)


기쁨으로 춤추는 예배자

사무엘하 612-23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은 사람의 제일 된 목적을 이렇게 진술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도 귀하지만, 우리 스스로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 또한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예배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왕국 안정된 후 다윗은 기럇여아림에 있던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시고 올 계획을 세웁니다. 이때 새 수레에 궤를 싣고 오다가 나곤의 타작마당에서 떨어지는 궤를 잡았던 웃사가 죽는 무서운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 일로 다윗은 법궤를 두려워하게 되었지만, 하나님께서 법궤를 두었던 오벧에돔의 집에 복을 주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서 다시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시고 올 계획을 세웁니다.

 

여호와의 궤를 모셔오는 행렬(12-15)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사 죄인인 우리에게 오셨는데, 그 은혜를 예수님의 십자가로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과 함께하시려면 죄를 해결하셔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죄를 해결하시고 의를 이루셨습니다. 오벧에돕의 집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사 복을 주셨듯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십니다.

 

12어떤 사람이 다윗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올라갈새 13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 14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15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오니라(12-15)

다윗은 나곤의 타작마당에서 일어난 웃사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오려던 계획을 중단하고 법궤를 오벧에돔의 집에 두게 됩니다. 그런데 오벨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가 여호와의 법궤로 인해 복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은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오려는 시도를 다시 하게 됩니다. 12절은 다윗이 오벧에돔의 집으로 가서 하나님의 궤를 다윗 성으로 가져왔다는 사실을 요약적으로 말하고 있으며, 13-15절은 법궤를 가져온 상황을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1) 다윗의 둘째 시도(12)

이번에는 여호와의 궤를 옮기는 규례를 따라 사람들이 법궤를 메었습니다. 다윗은 궤를 메고 여섯 걸음 걸었을 때 소와 살진 송아지로 희생제사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평안하게 법궤를 옮길 수 있게 해달라는 기원이 담긴 제사일 것입니다.

 

(2) 기뻐하는 다윗(13-14)

다윗은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법궤 앞, 즉 여호와 앞에서 온 힘을 다하여 춤을 춥니다. 다윗이 춘 춤은 원형을 만들어 빙글빙글 돌며 추는 층으로 다윗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춤에 참여하여 단체로 춤을 추었을 것입니다. 다윗도 여기에 참여하여 여호와의 궤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기쁨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때 다윗은 베로 만든 에봇을 입고 있었습니다. 에봇은 일반적으로 제사장이 입는 제의적 옷이며 세마포로 만든 에봇은 사무엘상 2장에서 사무엘이 입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세마포 에봇은 정식으로 제사장 임명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여호와를 섬기거나 제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아 참여할 때 입는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윗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제사를 드린 것과 에봇을 입은 것을 보면 그가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오는 것을 제의적 의식으로 여기고 있으며, 이 의식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여호와의 행진(15)

이렇게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은 기쁨으로 환호하고 나팔을 불며 여호와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 옵니다. 이전에는 많은 악기를 사용하여 웅장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면, 이번에는 신호를 보내기 위한 나팔만 사용했습니다. 대신에 여호와 앞에서 기뻐 춤추며 환호하는 백성들이 여호와의 궤를 환영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안치된 언약궤(16-19)

똑같은 구원의 복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는데 왜 우리는 다윗처럼 뛰놀며 춤추듯이 기뻐하지 않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가 받은 복과 우리가 받은 복이 다르지 않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백성인 것처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의 복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왔습니다. 이때 다윗 왕은 왕의 신분을 잊은 채 뛰놀며 춤을 추었습니다.

 

16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그를 업신여기니라 17여호와의 궤를 메고 들어가서 다윗이 그것을 위하여 친 장막 가운데 그 준비한 자리에 그것을 두매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니라 18다윗이 번제와 화목제 드리기를 마치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하고 19모든 백성 곧 온 이스라엘 무리에게 남녀를 막론하고 떡 한 개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 떡 한 덩이씩 나누어 주매 모든 백성이 각기 집으로 돌아가니라(16-19)

백성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는 다윗 기쁨은 나눌 때 배가 됩니다. 다윗은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을 온 백성과 함께 나눕니다. 남녀를 막론하고 떡과 고기에 건포도까지 얹어서 풍성한 선물을 나누었습니다. 거룩한 기쁨이 온 나라 온 백성에게 구석구석 퍼져 나갑니다. 이스라엘 온 땅이 거룩한 예배의 처소가 됩니다.

 

(1) 다윗의 모습을 업신여기는 미갈(16)

여호와의 궤가 예루살렘 다윗 성으로 들어오는 것을 온몸으로 기뻐하며 참여한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대조적으로 미갈은 성안에서 이 광경을 창밖으로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미갈을 다윗의 부인이 아닌 사울의 딸이라고 표현하는데, 이 본문에서는 항상 사울의 딸로 표현됩니다. 이것은 미갈이 다윗 궁전에서 다윗의 아내가 아닌 사울의 딸로서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사무엘하 3:13에서 다윗이 아브넬에게 미갈을 데리고 오라고 말할 때도 나의 처가 아닌 사울의 딸 미갈이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미갈을 자신의 처라고 부른 것은 이스보셋에게 미갈을 돌려달라고 말할 때가 유일한데, 이때는 미갈이 나의 처인 것이 들려달라는 이유였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아내가 아니라 사울의 딸로서의 미갈이 필요해서 강제적으로 데리고 온 것이기에 다윗 궁전에서 미갈의 위치는 편할 수 없었을 것이고, 다윗에 대해서도 이전처럼 사랑하는 마음을 갖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런 불편함이 다윗의 모습을 보는 미갈의 마음에서 드러납니다.

미갈은 창 너머로 다윗이 춤추는 모습을 보며 그런 다윗을 경멸합니다. 이런 상황은 미갈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쁨에 동참하지 못하고 철저히 소외되어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2) 법궤를 성막에 모시고 제사를 드림(17-19)

미갈의 마음과 관계없이 여호와의 꿰는 무사히 다윗이 준비한 장막에 잘 모셔집니다. 여기서 다윗이 여호와의 궤를 위해 만든 장막은 광야에서 모세가 만들었던 성막과 같은 종류의 것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여기서 장막은 여호와의 궤의 임시 처소로 사용된 것입니다. 다윗은 후에 여호와의 궤를 안치할 성전을 짓기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에 안착한 것에 감사하며, 이제 그곳이 제사의 중심지가 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립니다. 그러고 나서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들을 축복합니다. 일반적으로 백성들을 축복하는 것은 제사장의 임무인데(10:8), 여기서 다윗은 제사장과 유사한 역할을 하였고, 여호와의 선택받은 왕으로서 백성들을 축복하였습니다. 또 남자부터 여자까지 빠짐없이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빵 한 개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 떡 한 개를 주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언약식 후에 열리는 잔치와 같은 개념으로 여호와께서 다윗 성에 안주하신 것은 이제 여호와께서 다윗과 이스라엘과 함께하신다는 약속을 하신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언약의 잔치에 모든 백성이 참여한다는 의미로 모든 백성에게 음식을 나누어 준 것입니다. 이제 여호와께서는 다윗 성에서 이스라엘 가운데 임재하시며 다윗 왕권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신 것입니다.

 

다윗과 미갈의 갈등(20-23)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보다 눈에 보이는 궤에 대한 호기심이 더 켰던 것입니다. 이처럼 지적 호기심을 해소하기 위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서는 안 됩니다. 오직 경외하는 마음으로, 경배할 목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앞서려는 망므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이끄시는 만큼만 나아가며, 보여 주시는 만큼 순종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20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이르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 그의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하니 21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22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 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 23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그에게 자식이 없으니라(20-23)

다윗이 언약궤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것을 기뻐하며 모든 백성 앞에서 춤추는 것을 비난한 사울의 딸 미갈의 비난에, 다윗은 자신을 택하사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신 하나님 앞에서 경배하는 일이라면 이보다 더 낮아져서 천하게 보여도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1) 미갈의 비방(20)

다윗은 축제가 끝난 뒤에 자신의 가족을 축복하러 왕궁으로 들어옵니다. 이때 미갈도 다윗을 맞이하기 위해 나와서 아까 자신이 본 것에 대해 다윗을 비난합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지요?’로 시작하는 그녀의 말은 다윗의 모습이 왕으로서의 위엄과 영광이 전혀 없는 모습이라고 비꼬는 말입니다. 당신의 신복의 계집종은 천한 신분 중에서도 가장 비천한 신분의 사람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녀는 다윗이 옷이 펄럭거려 하체가 드러날 정도로 춤을 춘 것에 대해 가장 비천한 신분의 사람들 앞에서까지 몸을 드러내는 체통 없는 행동을 한 것이며, 이런 행동은 어리석은 자가 스스로 옷을 벗는 것과 같은 행동이라며 비난하였습니다. 다윗이 체통을 잃고 어리석게 행동했다는 것입니다.

 

(2) 다윗의 반박(21-22)

미갈은 다윗의 행동을 부정적인 시각에서 보고 판단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다윗은 미갈에게 자신의 행동은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라며 여종들 앞에서 한 것이라는 미갈의 말을 반박합니다. 다윗과 둘 다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춤을 춘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여호와는 네 아버지와 그의 온집보다 자신을 선택하셔서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신 분이기에, 그 여호와 앞에서 기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 자신을 왕으로 세우신 여호와께 감사하여 춤추는 것이 왜 부끄럽고 어리석은 일이냐는 것입니다. 여기서 미갈에게 노골적으로 여호와께서 네 아버지의 집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실을 말하며 미갈을 공격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더 낮아져서 자신의 눈에 천하게 보일지라도 여종들은 자신에게 영광을 돌릴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얼마나 영광스럽냐?’는 미갈의 비아냥에 대한 응수로 자신이 아무리 천하게 행동해도 자신이 이 나라의 왕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미갈의 비난에 매우 강하게 공격하며 비난하였습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춤춘 것을 비난한 것에 대해 매우 분노한 것입니다.

 

(3) 미갈의 불행(23)

그 결과 미갈은 죽는 날까지 자식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다윗은 이 사건 이후로 미갈을 다시는 찾지 않았고 그 결과 아이가 없었던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분명히 미갈이 다윗을 업신여겼고 비난하였기에 다윗이 미갈에게 화를 내는 것이 정당합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미갈과 다윗의 관계를 보면 미갈은 다윗을 사랑한 여인이고 다윗의 생명을 살려준 은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미갈을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이용하기 위해 10여 년을 같이 산 남편과 강제로 갈라놓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사울의 딸 미갈은 자손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사울 가문과 다윗 가문의 결합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사울의 가문은 다윗 왕국에서 어떤 자리도 차지할 수 없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굳건하게 서게 되었고, 사울 가문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예배는 근엄한 의식 이전에 하나님을 향한 진심 어린 기쁨입니다. 이 땅에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들이 많이 있지만, 그 무엇보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쁨이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나의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고, 그분으로 인해 행복한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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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02-02)

 


음녀에게서 건져줄 지혜

잠언 216-22

 


간통법이 폐지됐습니다. 이제 성인들의 지극히 사적인 성적 선택권을 존중하기 위해 법으로 통제하기를 포기한 것입니다. 이 세상의 변화를 생각하면 놀랄 일도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세상이 점점 성경적인 질서에서는 멀어지고 있고, 어느새 그것이 상식과 문화로 자리잡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 청소년들의 거의 50%가 동성결혼에 대해서 거부감을 보이지 않는다는 결과는 이전과 그리고 성경과는 전혀 다른 의식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지배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지혜를 찾는 자는 음녀에게서도 건짐을 받습니다. 음녀는 듣기 좋고 매혹적인 말로 나를 유혹할 수 있지만, 내 마음에 자리 잡은 지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면 지혜가 나에게 분별력을 주므로 나를 유혹하는 음녀에게서 건짐을 받아 사망이 아닌 생명의 길로 인도 받게 됩니다.

 

아버지 강연(02-2) : 지혜를 찾으라(16-22)

()”은 생명을 잉태하는 사랑의 수단으로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중한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혼 관계안에서 부부관계로 을 바르게 사용해야 합니다. 하지만 악한 자들은 육체적인 쾌락을 위해 무분별하게 사용하도록 부추깁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예수님)과 성도들의 관계를 부부관계로 많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과 성도들의 관계를 깨드리는 것을 부부 사이에서도 깨드려진 도구를 비유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지 않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16지혜가 또 너를 음녀에게서, 말로 호리는 이방 계집에게서 구원하리니 17그는 젊은 시절의 짝을 버리며 그의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린 자라 18그의 집은 사망으로, 그의 길은 스올로 기울어졌나니 19누구든지 그에게로 가는 자는 돌아오지 못하며 또 생명 길을 얻지 못하느니라 20지혜가 너를 선한 자의 길로 행하게 하며 또 의인의 길을 지키게 하리니 21대저 정직한 자는 땅에 거하며 완전한 자는 땅에 남아 있으리라 22그러나 악인은 땅에서 끊어지겠고 간사한 자는 땅에서 뽑히리라(16-22)

2장은 지혜를 찾으라는 주제의 강연인데, 1-4절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자신의 말을 듣고 지혜를 간절히 구하라고 호소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1) 음녀에게서 보호하는 지혜(16-19)

5-8절은 지혜를 찾은 결과로 영적인 유익을 얻게 되는데 먼저 여호와 경외를 깨닫게 되고 지혜의 소유자인 하나님으로부터 지혜와 보호를 선물로 받는다고 설명합니다. 9-11절은 도덕적이고 실제적인 삶의 유익에 대한 설명으로서 지혜를 얻으면 지혜의 주도 하에 선한 삶을 살며 기쁨을 누리고 지혜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12-19절은 지혜의 유익에 대한 연장된 설명입니다. 12-15절은 악한 남자(악인)로부터 건짐을 받는 유익을, 16~19절은 악한 여자(음녀)로부터 건짐을 받는 유익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결론 부분인 20~22절은 의인의 길로 가기를 촉구하며 의인과 악인의 최후를 땅과 관련지어 선언합니다.

오늘 본문의 첫 부분인 16-19절은 우리가 지혜를 찾고 얻으면 지혜가 음녀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여 사망에서 생명의 길로 인도한다는 점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16~19절의 음녀와 12-15절의 악인은 둘 다 속이는 말로 우리를 유혹하여 패역과 사망이 도사리는 길로 인도하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음녀에 대한 경고는 여기만이 아니라 5장전체, 6:20~35, 7장 전체, 9:13-18에도 나옵니다. 이와 같이 음녀에 대해 자주 집중적으로 다루는 이유는 아마도 현재 아버지가 아들에게 충고하면서 앞으로 배우자를 찾을 아들이 유혹하는 음녀를 구별하여 그 유혹을 뿌리치고 지혜로운 여자를 찾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들을 유혹하는 음녀는 음녀이방 계집으로 불리며(5:20; 7:5도 마찬가지), 6:26에서는 음란한 계집’, 7:1에서는 창녀로도 소개되었습니다. ‘음녀이방 계집은 둘 다 이방인의 뜻을 갖고는 있지만, 이방 여인이라기보다는 문맥상 낯선 여자’, ‘남의 여자’, ‘음란한 여자로서 도덕적, 관습적 제약 밖에 있는 여자를 가리킵니다. 이 여인은 젊은 시절의 자기 남편을 버리고 하나님께 맹세한 결혼 서약을 깬 자입니다. 남편을 버린 이 여인의 행동은 13절에서 악인이 정직한 길을 버린(‘떠나로 번역됨) 행동을 상기시키며, 자의적으로 올바른 길을 버리고 악을 선택했음을 말해줍니다.

음녀는 말로 아들을 유혹합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매끄럽고 매혹적인 말로 그에게 알랑거리고 기분 좋게 만들어 어떻게 해서든 그의 몸과 마음을 사로잡으려 합니다. 이 음녀의 말은 1:11-14에서 아들을 꾀는 강도의 말과도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강도의 말은 남자다운 힘과 의리와 공정함을 내세우는 듯 들리지만 실제로 그들에게는 게으름, 포악함, 뻔뻔함, 사악함이 가득 차 있습니다. 이와같이 이 여인의 접근과 수려한 말은 듣기에 기분 좋을 수 있으나, 이 여인은 이미 결혼 서약을 파기하고 남편을 배신한 자이고 수치를 모르는 뻔뻔한 자며 달콤한 말로 남을 꾀어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간교함을 가진 여자입니다. 그러므로 이 여인이 어느 남자에게는 정절과 충성을 다할 리 만무합니다.

더구나 음녀가 젊은이를 꾀어 인도하려는 목적지는 사망이며 죽은 자들의 영혼이 있는 곳(음부)입니다. 이 목적지는 1:11-19의 강도의 무리나 9:13-18의 우매한 여인의 유혹에 빠진 자들이 가게 될 목적지와 동일합니다(1:19;9:18). 그녀의 아첨하는 말은 듣는 그 순간에는 기쁨을 주는 말같이 들리나 실제로는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해를 끼치게 되는 함정입니다. 그러므로 솔깃하게 들리는 음녀의 말을 따라 그녀에게 들어가는 모든 자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죽음의 세계로 인도됩니다.

 

(2) 의인과 악인이 받는 땅의 약속(20-22)

세상에는 인간의 지혜가 뛰어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인간의 지혜로 살아가려는 사람은 자신의 한계성을 인정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 지혜가 인간의 악한 꾀를 만들어 간사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하나님의 약속 땅에서 누리는 것이 아니라면 사망에 이르는 지름길일 뿐입니다. 잠깐의 영광을 위해 영원한 영광을 버리는 어리석은 길에서 속히 떠나야 합니다.

20-22절은 2장 전체의 결론으로서 20절에서는 길에 초점을 두어 16-19절에 소개된 악인의 길과 대조되는 의인의 길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21-22절은 과 관련하여 각각 의인과 악인에게 적용될 약속을 선언합니다. 이러한 선언의 주된 목적은 독자가 지혜를 찾아 의로운 삶을 살도록 격려하는 데 있습니다.

먼저 과 관련하여, 16-19절의 음녀는 자신에게 온 자를 죽음으로 직행하는 길로 이끌지만, 지혜는 자기를 찾는 자들을 선하고 의로운 자들의 길로 인도합니다(20). 지혜를 찾고 지혜의 인도를 받는 자들은 정의, 공평, 정직 등 모든 선한 길을 깨달을 뿐 아니라 지혜의 보호를 받습니다.

그 결과 비뚤어지고 사악한 자들과 그들의 길에서 구원을 받고, 음부에 다다르는 길을 피하여 선과 정의의 길로 행하고, 결국 생명길을 얻게 될 것입니다(9-12,20).

둘째로 땅과 관련해서는, 지혜를 통해 정직과 완전함을 추구하는 의인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기업으로얻고 거기서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온전함으로 행하는 자들에게 방패가 되어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므로(7) 의인들은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땅에서 안전과 평안과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을 제대로 누려 대대손손 땅에 머물며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을 수없게 행동하는 악인들은 땅에서 끊어지고 땅에서 뽑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의 40년 방랑 생활을 마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면 앞으로 차지할 땅에서 뽑힐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28:63). 시편에서도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께 소망을 두는 사람은 땅을 차지할 것이라고 말합니다(37:9), 의인은 땅에 거하고 악인은 끊어지는 이유는 하나님이 공평을 사랑하시므로 하나님의 율법을 마음에 두고 사는 의인은 버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보호하시지만, 악인은 그리하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수 없고 대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끊어지게 됩니다(37:28-21). 이 약속은 단순히 의인과 악인 당사자만이 아니라 그의 후손에게까지도 미칩니다(37:28).

한편, 20-22절의 의인과 악인의 구분은 지혜를 얻은 자인지 아닌지 또는 정직과 완전함을 추구하며 사는 사람인지 아닌지에 따라 나뉩니다. 이처럼 잠언(및 성경 전체)에서는 지혜로운 사람과 의인을, 미련한 사람과 악인을 동일시합니다. 보통 의인은 도덕적으로 칭찬받을 만한 사람으로 악인은 큰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실제적으로 사람은 누구나 거짓말이나 불의한 언행을 자의로는 실수로는 하기 때문에 지금 의인과 지혜자로 여겨진다 해서 미래에도 자동적으로 의인의 삶과 연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실용적인 판단력과 통찰력을 가진 것에 앞서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여호와를 자기 삶의 주권자로 인정하여 그를 신뢰하고 그의 말씀에 따라 의와 선의 길로 행하는 의로운 자가 바로 지혜로운 자입니다. 악인은 여호와의 주권과 간섭을 인정하려 들지 않으며 훈계를 거부하고 자신의 지식과 판단을 의지하여 거리낌 없이 불의와 부정을 일삼는 자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지혜자와 우매자로 분리되는 것은 이러한 지식의 많고 적음이나 도덕적인 기준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기본적 신앙의 태도와 그 결단에 따라 사느냐에 달려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개인적인 교제를 나누며 살아야 그의 지혜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고 그의 뜻에 가깝게 살 수 있습니다.

 


지혜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본래 우리를 부르시면서 맺은 언약에 충실할 수 있게 해줍니다. 그것은 곧 관계의 존재인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 타인과의 관계, 그리고 피조물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질서와 성품을 반영하며, 거기서 나온 참된 축복을 누릴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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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02-01)


지혜가 주는 유익

잠언 21-15


사람에게는 사람의 길이 있고 자연에게는 자연의 길이 있습니다. 인간이 가장 인간답기 위해서는 그 길을 따르고 그 질서가 인간의 세계에 임해야 합니다. 그 질서에는 인간과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성품과 의지가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창조주를 의지할 때 우리는 가장 인간다운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온갖 혼돈과 무질서는 인간이 인간의 자리를, 피조물이 피조물의 자리를 떠나면서 생겼습니다. 그렇다면 구원은 바로 그 질서를 회복하는 일이요 인간됨을 되찾는 것을 말할 것입니다. 그 질서를 아는 것을 지혜라고 부르기에 인간다운 인간은 지혜로운 인간이 되는 여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 경외는 지혜의 출발점일 뿐 아니라 지혜를 얻는 목표가 됩니다. 지혜로운 조언과 명령을 따라 지혜를 간절히, 열심을 다해 구할 때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닫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알고 교제를 지속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지혜를 공급받고 보호하심을 입습니다. 또한, 마음에 자리 잡은 지혜를 통해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정의와 선을 추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아버지 강연(02-1) : 지혜를 찾으라(1-15)

지혜는 절로 인간에게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동안 사람들의 지혜가 하나님의 방법과 전혀 다른 세계관과 가치관에 노출되어 살아왔기 떄문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는 의지적으로 찾아야 하고 구해야 하고 간직해야 하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잠언은 그 지혜를 우리가 받고 간직하고(쌓아두고) 큰 소리로 불러서 초대해야 할 대상으로 묘사합니다.

1내 아들아 네가 만일 나의 말을 받으며 나의 계명을 네게 간직하며 2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 3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4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5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 6대저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심이며 7그는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며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 방패가 되시나니 8대저 그는 정의의 길을 보호하시며 그의 성도들의 길을 보전하려 하심이니라 9그런즉 네가 공의와 정의와 정직 곧 모든 선한 길을 깨달을 것이라 10곧 지혜가 네 마음에 들어가며 지식이 네 영혼을 즐겁게 할 것이요 11근신이 너를 지키며 명철이 너를 보호하여 12악한 자의 길과 패역을 말하는 자에게서 건져 내리라 13이 무리는 정직한 길을 떠나 어두운 길로 행하며 14행악하기를 기뻐하며 악인의 패역을 즐거워하나니 15그 길은 구부러지고 그 행위는 패역하니라(1-15)

첫 모음집의 다음 교훈은 하나님의 지혜를 찾아 구하라는 것입니다. 지혜를 구하는 자는 주님을 경외하는 길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으며, 지혜의 돌봄과 보호를 받게 됩니다.

 

(1) 내 말을 듣고 지혜를 찾으라(1-4)

1-4절은 만약 네가 내 말을 듣고 지혜를 찾는다면이란 내용으로 아버지가 아들의 주의를 거듭 집중시키며, 아버지의 말에서 발견되는 지혜를 찾으라고 조언합니다. 마음과 말과 행동으로 이 지혜를 얻으라고 가르칩니다.

첫째, 지혜를 얻기 위해서 아버지가 전하는 말을 받고 마음에 간직해야 합니다. 받고 간직하라는 의미는 아버지의 명령을 인정하고 미래나 안전을 위해 보물이나 물건을 쌓아두듯이 그 말을 중히 여기고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둘째, 귀와 마음을 지혜에 기울이고 집중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아버지의 이나 계명은 지혜를 얻는 통로가 아니라 지혜’, ‘명철또는 지식과 동일시됩니다. 또한, 아버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행동이나 손을 뻗듯 마음을 명철을 향해 펼치는 행동은 적극적인 경청과 순종의 의미를 내포합니다.

셋째, 지식과 명철을 향해 외쳐야 합니다. 마음과 귀로만이 아니라 이제는 입을 열어 지혜를 찾아야 합니다. 앞서 1:20-21에서 지혜가 사람들에게 열심히 소리치며 호소하는 모습을 그렸다면 여기서는 지혜를 얻으려는 자들이 지혜를 향해 열심을 다 해 외쳐야 함을 보여줍니다.

넷째, 값진 보물이나 숨겨진 보석을 찾듯 지혜를 찾아야 합니다. 욥기 28장에서도 지혜를 보석에 비유하면서, 사람들이 보석의 가치를 알므로 그것을 얻으려고 산이나 강이나 어두운 갱도나 가리지 않고 찾아다니고 목숨을 걸고 위험을 무릅쓰며 온갖 어려운 일을 하려 든다고 설명합니다(28:1-11). 이와같이 아들은 보석보다도 더 값진 지혜의 가치를 깨닫고 열성적으로 지혜를 구하고 찾아야 합니다.

 

(2) 지혜를 주시고 의인을 돌보시는 여호와(5-8)

1-4절의 만약 네가 내 말을 듣고 지혜를 찾는다면의 조건절이 다 끝나고, 그리하면으로 시작하는 5절부터는 그 결과로서 지혜가 가져다주는 유익을 설명합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말을 경청하여 지혜에 관심 두고 보물을 찾듯 지혜를 찾는다면, 그는 여호와 경외하는 법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 말은 내적, 외적 요소인 몸과 마음을 다 집중해 지혜를 추구하면 영적인 유익을 얻을 것임을 드러냅니다.

여기서 여호와 경외여호와를 아는 것, ‘그와 친밀한 관계를 지속하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이와 같은 정의는 9:10에도 나타나 강조됩니다. 그렇다면, 왜 지혜가 여호와 경외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습니까? 그 이유는 지혜를 주시는 주체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6).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지식과 명철이며, 지혜의 소유자로서 사람들에게 지혜를 부어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이 설명은 욥기 28장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세상의 어느 보물보다도 그 가치가 월등히 뛰어난 지혜가 사람들에게는 감추어졌지만, 하나님께는 그의 주권 아래 다 드러나 있습니다(28:23-27). 잠언 8장에서도 하나님께서 창조 이전에 이미 지혜를 만드셨다고 설명하며 하나님께서 지혜의 소유자임을 나타냅니다(8:22-31).

하나님께서는 그의 소유인 지혜를 정직하고 온전함으로 행하는 자들에게 베푸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소유하기 위해서는 먼저 지혜의 말씀에 귀 기울여 지혜를 찾는 수고가 필요합니다. 본문 1절의 아버지의 조언처럼 우리가 잠언에 기록된 아버지나 어머니의 말씀을 쌓아둔다면, 하나님께서 쌓아두신(7: 예비하시며로 번역됨) 사리 분별과 같은 지혜를 얻을 수 있게 됩니다.

둘째, 정직, 온전함, 공평 등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7절의 정직하고 온전함으로 행하는 자들(‘행실이 온전한 자로 번역됨)이란 죄가 없는 자들이라는 뜻이 아니라 모두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고결함을 지키는 자들이란 뜻입니다. 그런 자들이 정의와 공평의 길로 행하는 자들이며 하나님의 성도라 일컬음 받습니다. 이처럼 지혜는 단순히 지식의 축적이나 성공의 길이 아닙니다. 지혜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며, 하나님을 알고 그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며, 그가 주신 명령에 따라 정의와 공평을 추구하고 행함으로써 얻습니다. 욥기 28:28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을 악을 떠나는 것이라고 정의한 것과 일치합니다. 악을 떠나는 것은 시편 기자가 청년에게 충고하는 것처럼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두고 그 말씀에 따라 죄를 삼가는 것을 의미합니다(119:11-16).

하나님께서는 또한 그를 경외하는 공의로운 백성에게 지혜를 주시며 그들을 돌보시고 방패가 되어주십니다. 그들이 공평의 길 즉, 공평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갈 때 지켜보십니다. 때로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도 계속 정직과 공평의 길로 행할 수 있도록 보호하십니다. 정의의 하나님이시므로 세상의 정의와 공평을 보호하십니다.

 

(3) 지혜를 얻은 자의 유익(9-11)

지혜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의 의지가 지혜이고, 그분이 세상을 경영하는 방식이 지혜입니다. 따라서 그분과의 관계가 지혜를 결정하며, 지혜로워진다는 것은 하나님을 닮아가고 그분의 생각에 내 생각을 맞춰간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 즉 여호와를 여호와로 인정하고 그분의 주권과 능력과 성품을 인정하는 것이 지혜를 얻는 첫째 단계입니다.

1-4절의 만약 네가 내 말을 듣고 지혜를 찾는다면에 대한 귀결절은 5절뿐 아니라 9절에서 또 소개됩니다. 5-8절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유익을 소개하였고, 이제 9-11절에서는 지혜로부터 오는 유익을 소개합니다. 아버지의 지혜의 가르침은 의, 공평, 정직, 선을 깨닫게 해줍니다. 왜냐하면, 그의 가르침이 5-8절에 설명된 여호와 경외를 근본으로 이루어졌으며 하나님이 추구하시는 정직과 공평에 일치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혜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때 지혜가 마음에 들어와 자리 잡고 우리에게 즐거움을 줄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지혜가 우리에게 근신과 명철 즉, 판단력과 현명함을 주어 우리를 지키고 보호할 것입니다.

 

(4) 악인의 길로부터 보호하는 지혜(12-15)

지혜로운 자는 이제 자기중심적인 세계관을 버리고 하나님 중심적인 세계관, 이타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생각의 출발점부터가 여호와로부터 시작합니다.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들의 삶에는 공의와 정의가 있고 그들은 정직하고 선한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5절에 소개된 여호와 경외는 지혜의 출발점뿐 아니라 지혜를 찾는 목표가 됩니다. 지혜를 얻은 자는 여호와 경외를 깨달아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를 유지할 수 있고, 그의 보호를 누릴 수 있으며(5-8), 그 결과 지혜의 도움으로 도덕적이고 경건한 삶을 사는 법을 인지할 수 있습니다(9-11). 지혜는 지혜를 얻은 자를 악인의 길로부터(12-15) 그리고 음녀의 유혹으로부터(16-19) 구해줍니다.

지혜가 마음에 들어오면 판단력과 현명함이 생겨 악인의 길에서 건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악인은 12절에서 패역을 말하는 자로 설명되었는데, 진리를 왜곡하여 사람들을 악한 길로 유혹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 악인의 무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은 13-15절에서 로 비유되어 설명되는데, 이들의 길은 하나님으로부터 지혜를 선물로 받은 자들이 걷는 길과 뚜렷한 대조를 보입니다.

첫째, 지혜를 구하는 자들은 정직과 공평을 추구하여 온전함으로 행하지만, 악인의 무리는 스스로 정직과 공평의 길을 버리고 어둠의 길을 택하여 그 길로 행합니다. 둘째, 지혜를 얻은 자들은 지혜의 주도 하에 살게 되어 진정한 기쁨을 누리지만 악인들은 악을 행하기를 기뻐하며 비뚤어지고 사악한 행위(패역)를 즐거워합니다. 셋째, 지혜를 얻은 자의 삶은 의, 공평, 정직을 추구하여 모두 선한 길로 연결되지만 악인의 길은 구부러지고 비뚤어진 길입니다. 악인들에게는 근본적으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태도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혜 또한 이들에게서 아주 멉니다. 지혜는 이런 악인의 길에서 우리를 구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질서를 따라서 하나님의 리듬에 맞춰 걸어가는 길에는 즐거움이 있어서 고난 중에도 그 길을 고수할 힘을 얻게 됩니다. 반면에 지혜를 떠난 악한 자는 정직한 길을 떠나 흑암의 길을 걸으며 멸망으로 치달으면서도 그걸 모른 채 그 행악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혜자를 악인의 구부러지고 패역한 길에서 지켜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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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08-01)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신 예수님

마태복음 81-13


 

아무리 강력한 태풍이라고 할지라도 태풍 중심부에서 반경 10Km 이내에는 바람이 강하지 않습니다. 이 지역을 태풍의 눈이라고 합니다. 그 태풍의 눈은 주변은 강력하게 바람이 불지만 기상 현상이 매우 평온하다고 합니다. 아무리 강한 고난이라도 그 중심에는 예수님께서 계시면, 평안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 소식을 전파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지적이 소개됩니다(7-9). 이 열 가지 기적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중에 본문에서는 나병환자와 이방인 백부장 하인을 고친 사건이 나옵니다. 이것은 이론적으로 산상보훈에서 전하셨던 예수님께서 실질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주시는 내용입니다.


 

나병 환자를 고치신 예수님(1-4)

 

우리의 상처를 하나님께서 어루만지실 때,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상처와 치부를 숨기지 않고 주님 앞에 드러내는 용기가 치유를 가져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의 몸을 친히 만져 주시면서 치유하여 주셨습니다.

1예수께서 산에서 내려 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2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3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4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시니라(1-4)

예수님께서 권세 있는 말씀으로 산상보훈을 가르치시고 마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놀란 많은 무리가 그분을 쫓았습니다. 예수님 권세의 실제는 병을 고치시고 축사하시며 죽은 자를 살리는 대목에서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마태복음은 가장 비참한 처지에 놓인 인생이 회복되는 장면을 맨 앞에 배치해서 예수님께서 치유하시는 목적과 결과를 선명하게 드러내십니다.

(1) 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1)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의 말씀을 마치시고 산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때에 한 나병환자가 산에서 내려오시는 주님 앞에 나와서 엎드렸습니다. 당시 나병환자는 마을에서 추방되어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끊고 생활해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고 사람들과 같이 사는 것은 살인죄로 간주하여 돌로 쳐 죽였습니다. 레위기 13-14장 규정에 따라 나병환자들은 부정한 자들로 규정되었으므로 공동체 속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질병의 상태가 사라지면 제사장에게 검사를 받고 적합한 예물과 정결 예식을 거쳐서 정결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아야 공동체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나병환자는 정결한 공동체나 개인에게 접근할 수 없고 사람을 만나면 접촉이 불가능하도록 부정하다’, ‘부정하다를 소리쳐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죽음에 대한 위험을 무릅쓰고 용기는 내어 예수님께 다가왔습니다.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손을 뻗으면 다는 위치까지 온 것은 율법을 어긴 행위입니다. 여기서 나병환자가 보여준 믿음은 어떤 조건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권위를 믿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나병환자를 치유하신 예수님(2-3)

나병환자는 예수님의 치유하시는 권위를 확신했지만,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2)라고 치유하기를 원하시는지를 묻습니다. 예수님의 권세를 믿지 않았다면, 결코 그렇게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을 통해 참된 믿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참된 믿음은 자신의 요구에 의해서 받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데로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나병은 깨끗하게 되는 것으로 3번 반복해서 묘사됩니다. 그는 자신의 병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부정한 상태인 것을 압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을 뻗어 나병환자의 몸에 손을 대는 것으로 치유하기를 원한다는 뜻을 표현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정의 감염이 되지 않도록 도리어 거룩함을 전염시키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3)라고 응답하셨습니다. 즉시 오랜 저주에서 해방을 맛봅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만이 나병을 치유할 수 있었지만, 이제 예수님 자신이 치유할 수 있다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가 치유됨으로 제사장에게 가서 나은 몸을 보여주고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증거로 드리라고 지시합니다. 나병환자가 깨끗하게 된 후, 정결한 공동체에 들어가기까지는 8일이 소요됩니다. 레위기 14장에서 피부병에서 회복된 사람은 제사장에게 정결한 비둘기 두 마리를 들고 갑니다. 그 중 한마리를 잡아 피를 신선한 물과 혼합한 다음이 피를 백향목, 홍색실 우슬초를 사용해서 병에서 깨끗하게 된 사람에게 뿌립니다. 또 다른 새는 산채로 날려 보냈는데, 이는 사회와 사람을 괴롭힌 문제를 가져가게 하는 의미입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산상수훈을 통해서 더 나은 의와 그것을 행하는 의미를 말씀하신 후에, 나병환자가 치유 받는 사건을 배치함으로써 하늘나라의 의가 긍휼을 베푸는 것과 관련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가져오신 하늘나라는 회복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의 긍휼을 통해서 일그러진 형상이 회복되는 것이 하늘나라의 복음입니다.

깨끗하게 해달라고 간청하는 나병환자의 비참한 모습은 나병과 죄의 관련성을 떠올립니다. 사람의 모습을 일그러지게 만드는 죄에서 반드시 해방되어야 하며 구원을 받는 길은 예수님의 긍휼을 의존하는 것입니다.

덧붙여 땅에서 가장 부정한 자인 나병환자가 예수님의 능력에 대해 가졌던 신뢰와 확신은 마태복음에서 잃은 자들로 하여금 어떤 여건 속에서도 예수님의 권위에 의지해 나오도록 격려합니다. 부정한 나병환자는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왔고, 예수님께서는 그와 거리를 좁히십니다.

새 시대에는 하나님과 부정한 자 사이의 거리가 사라지고 예수님께 믿음으로 나오는 자는 정결한 백성이 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3) 침묵을 경고하신 예수님(4)

또한 예수님께서는 그 치유받은 사람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말라는 명령을 하십니다. 이 명령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단순히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으로 혹은 민족주의적 해방자로 인식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그의 사역에 대한 심각한 오해를 불러옴과 함께 원치 않는 인기를 얻을 수 있는 위험성을 알고 하신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제사장에게 율법이 규정해놓은 예물을 드리라고 나병환자에를 지도하는 예수님의 모습(14:10이하)은 그가 레위기 14장이 정해놓은 정결 규례를 따르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이방인 하인을 고쳐 주신 예수님(5-13)

믿음이란 예수님의 권위와 그 권위에서 나오는 능력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하늘나라를 상속 받는 조건입니다. 그 나라는 겸손한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본문은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을 통해 하늘나라에 들어갈 백성의 자격을 알 수 있습니다.

5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6이르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7이르시되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8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9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10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11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12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13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5-13)

하늘나라는 유대인들만 들어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그 나라에는 백부장과 같은 이방인들도 믿음으로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본문은 이제 또 다른 믿음의 사람인 이방인 백부장이 예수님 앞으로 나아간 사건입니다. 그는 이방인이었고, 자신의 문제도 아닌 하인의 병을 고쳐 달라고 호소하고 나왔습니다.

(1) 한 백부장과 만난 예수님(5-7)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자 한 백부장이 다가와 간청합니다. 100명의 보병 군사를 이끌었던 백부장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 로마인이었습니다.

백부장이 자기 종의 치료를 위해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예수님의 치유하는 권위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차례에 걸쳐 그의 믿음을 언급하십니다. 믿음이란 예수님의 능력과 권위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라고 응답하십니다. 백부장을 만나 주시고 소원을 이루어 주시려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곧 능력입니다.

(2) 백부장의 반응과 칭찬(8-10)

예수님께서 직접 방문하여 치유하시겠다고 반응하시자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오시는 것을 감당할 수 없으니 오지 말고, 말씀만 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말씀만 하셔도 종이 나을 것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백부장은 권위 있는 예수님을 맞이할 자격이 없으니 말씀만 해달라고 했습니다.

이는 그의 말인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9)라는 백부장의 말에서 증명됩니다. 그는 예수님의 권위와 능력을 절대적으로 믿었기에 예수님의 말씀이면 충분하다고 확신한 것입니다.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들어오지 않고 말씀만 하셔도 종의 병이 낫게 될 이유를 자신의 직업 경험을 통해 설명합니다. 권위 있는 예수님의 말씀이 치유의 능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의 말을 듣고 매우 놀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이 정도의 믿음을 본 적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3) 종의 치유하신 예수님(11-13)

본문에서는 이방인의 믿음과 그 나라의 아들들에게 있는 불신을 대조하면서 누가 하늘나라의 상속자들인지를 밝힙니다.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의 믿음을 보고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와서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식탁에 앉을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이 식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글허게 기대하는 것이며 그들은 메시아의 잔치에 참여해서 먹고 즐길 것이라 믿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이방인들이 아니라 흩어진 디아스포라를 모을 것이라는 기대를 했습니다.

11절에서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라고 하신 말씀에, 그곳에 올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모으신 종말론적 새 백성을 의미합니다. 이방인들이 유대인의 조상들과 함께 메시아의 만찬 자리에 앉게 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유대인들에게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동서로부터 와서 잔치에 참여할 것이지만, 본 나라 유대인의 자손들은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고 통곡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의 믿음을 계기로 구속사를 설명하십니다. 믿음은 이방인을 하늘나라의 잔치에 참여하게 만들고 이방인과 유대인들의 장벽을 무너뜨립니다. 혈통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해서 모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것이 아니며 백부장과 같이 오직 예수님의 권위를 믿는 자들이 하늘나라 잔치인 메시아 잔치에서 이스라엘 조상들과 함께 연회를 즐길 것입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권위와 능력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백부장 정도의 수준에 믿음에 이르러야 합니다. 기적을 일으키는 권위에 직접으로 같은 수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이웃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예수님께 있음을 확신하는 데까지 나아갈 때 참믿음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이 환자는 자신을 대신해서 간청한 주인의 믿음 때문에 치유하심을 받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치유를 경험한 백부장과 같은 사람들이 마태복음에서 이어진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말씀의 권위는 말씀하신 분에게서 나옵니다. 이방인 백부장은 자신의 권세에 비추어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를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서 종을 고쳐 주려고 하시자 백부장은 말씀만으로 자신의 종을 고쳐 주시길 예수님께 간청했습니다. 비록 직접 오시지 않아도 절대적인 말씀의 권위를 가지고 계시기에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면 질병이든 귀신이든 그 어떤 악한 세력도 즉시 떠날 것이라는 절대적인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우리도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우리의 믿음을 점검해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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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01-03)


지혜가 전하는 경고

잠언 120-33

 


인간의 지적인 수준과 문화생활 수준이 눈부시게 높아졌습니다. 넉넉한 예금 잔고, 으리으리한 고급 아파트, 번쩍거리는 외제 자가용, 각종 명품, 눈부신 학벌, 탄탄한 인맥 등등. 예전엔 억대 부자라는 말이 있었지만, 요즘은 억대 재산으로는 수도권에서 전셋집 하나도 얻을 수 없을 만큼 엄청난 돈이 도는 풍요로운 세상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바보들의 풍요에 익숙해지고 세상이 어리석은 자들의 낙원으로 변질되 가고 지식과 물질이 풍요로워졌지만 그럴수록 우리네 세상이 온통 도가니처럼 추하게 들끓는 이유는, 악한 본성에 젖어 사는 사람들이 참 지혜를 거부하고 지혜의 부름에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24-25)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근본적으로 여호와 경외하기를 거부하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여호와 경외를 기초로 한 지혜의 훈계에 동의하지 않고 오히려 그 훈계를 업신여깁니다. 지혜는 공공연하게 그에게 훈계를 외치지만 그가 지혜를 찾지 않으므로, 후에 지혜가 절실히 필요하여 찾을 때 그는 결코 지혜를 발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혜의 초청과 약속 잠언(20-23)

지혜는 길거리와 광장과 시끄러운 길목에서 크게 소리를 높입니다. 사람이 지혜를 따르지 않는 것은 지혜를 듣지 못해서나 몰라서가 아닙니다. 미련한 마음으로 고집 피우고 자기 마음대로 계속 행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지혜를 알고 싶어도 알 수 없다고 생각하며 지혜를 저 멀리 은밀한 곳에 숨겨진 것이라 여깁니다.

20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21시끄러운 길목에서 소리를 지르며 성문 어귀와 성중에서 그 소리를 발하여 이르되 22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 미련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니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23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며 내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20-23)

잠언 1:9-19에서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익을 탐하는 악인을 따르지 말라는 경고를 하였고, 이제 1:20-33에서는 지혜가 의인화된 여성으로 등장하여 사람들에게 나의 책망(지혜를 거절하지 말라)으로 돌이키라(23)고 경고합니다.

잠언에 지혜가 여성으로 의인화되어 자주 나오는데, 이는 지혜가 히브리어로 여성형 명사(호크마)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잠언에서 대부분 아버지가 아들에게 충고의 말을 전하며 아들이 사랑하고 찾아야 할 배우자로서 여성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에, 지혜가 여성으로 자연스럽게 의인화되어 나타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혜가 마을의 광장과 길거리에서 사람들에게 외치며 그녀의 말을 전합니다. 광장과 길거리는 마을의 지도자들이 모여 소송을 처리하는 곳(29:7; 4:11)이며 시장이 형성되어 사람들이 몰려(왕하 7:1) 북적이는 곳입니다. 지혜는 마을 사람들이 거의 다 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곳에서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소리를 질러가며 말을 전하고 있습니다. 젊은이가 이런 사회에 나와 적응하려 할 때, 두 목소리가 그를 사로잡아 그의 삶을 형성하려 든다. 한 목소리는 1:20-338~9장에 나오는 지혜의 목소리이며, 다른 하나는 1:10-14의 악인의 속삭임이나 5:36:24에 나오는 음녀의 유혹에서 발견되는 우매의 목소리입니다. 이런 두 목소리가 존재하는 사회 안에서 젊은이는 사리를 제대로 분별할 줄 아는 판단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배워야 합니다. 지혜가 외치는 곳은 바로 그의 삶의 중심부로서, 그가 그곳에서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며 살 때 어떤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충성을 다하느냐에 따라 자기 자신뿐 아니라 그가 속해 있는 사회가 흥왕하거나 망하게 됩니다(11:10-11).

오늘 지혜의 외치는 목소리는 공개적인 장소에서 모든 이의 귀에 들리고 있는데, 특히 어리석은 자들을 향한 훈계의 외침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란 지력이 모자라는 사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22절과 29-30절을 보면 이들은 자기의 어리석음을 사랑하되 지식을 미워하는 자들이고, 남을 비웃는 자들이며, 부모나 다른 이들을 통한 지혜로운 교훈과 책망을 거절하고 업신여기는 자들이고, 공통적으로 여호와를 두려움과 떨림으로 대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더구나 이들의 문제는 이러한 어리석고 뻔뻔한 행동을 오랜 기간 지속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는 대체 언제까지 어리석음을 좋아하고 책망을 듣지 않겠느냐?”(22)라고 외칩니다. 나의 책망으로 돌이키라(23)고 외치는 지혜의 명령은 책망의 말에 지혜가 들어 있으므로 그 책망을 무시하지 말고 책망에 반응하여 행동이나 태도를 변화시키라는 뜻입니다. 타인에게서 책망을 들으면 자신에 대한 수치와 굴욕감이 들어 자신을 방어하거나 그 사람을 공격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 쉽습니다. 그러나 감정에 치우쳐 나를 위해 변명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화풀이를 하기보다는 냉정하게 그리고 겸손하게 그 책망의 내용 자체를 곰곰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책망에서 드러난 자신의 약점, 무지, 실수, 죄 등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 지적받은 것을 고쳐 실천한다면 앞으로 그런 책망을 다시 받을 기회는 확연히 줄게 되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바라시는 성품에 더 가까이 나갈 수 있습니다.

지혜는 어리석은 자들에게 책망으로만 다가가지 않습니다. 지혜는 그녀의 신()을 부어주고 그녀의 말을 깨닫도록 해주겠다는 약속도 덧붙입니다. 이는 지혜가 지혜의 영을 그에게 주어 지혜가 원하는 생각과 말을 숨김없이, 아낌없이 제공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지혜가 이러한 약속을 제공하는 것은 어리석은 자들이 어리석음과 교만을 버리고 지혜를 수용하길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이와 같이 책망을 듣고 돌아서는 데에는 단순히 나의 이성적인 판단과 결단만으로 가능하지 않고, 지혜의 영인 하나님의 성령의 도우심과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지혜를 멸시한 미련한 자(24-25)

지혜가 부르는 소리와 내민 손을 무시했던 자들은 결코 핑계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지혜의 소리가 작아서 듣지 못한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교훈과 책망을 듣지 않은 사람이 맞게 되는 결과는 명확합니다. 그는 재앙을 피할 수 없습니다. 처음에는 자기 마음대로 살고 악의 유혹을 따라가는 것이좋아 보여도 결국 두려움과 근심이 악할 뿐입니다.

24내가 불렀으나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폈으나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25도리어 나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며 나의 책망을 받지 아니하였은즉(24-25)

지혜는 어리석은 자가 훈계에 귀를 기울이고 지혜의 약속을 받기 원하지만, 어리석은 자는 지혜의 외침을 듣고 관심을 가지라는 손짓을 보고서도 이를 거절하는 쪽을 택했습니다. 그는 지혜의 모든 책망과 교훈을 멸시하고 그 말씀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어리석은 자는 지혜의 훈계를 들을 기회가 없었던 자가 아니라 스스로 어리석음을 택하고 어리석음을 사랑한 미련한 자입니다(22).

 

미련한 자의 미래(26-31)

바다에서 멀리 큰 해일이 몰려오는 모습이 보이면 피하려고 하겠지만, 사람의 눈에 그 해일이 보일 때는 이미 늦습니다. 인생의 재앙도 그렇습니다. 사람의 판단으로 문제가 생겼다고 느껴지면 이미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미련한 사람은 경고를 무시하고 자신이 직접 보기 전에 믿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26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에 내가 비웃으리라 27너희의 두려움이 광풍 같이 임하겠고 너희의 재앙이 폭풍 같이 이르겠고 너희에게 근심과 슬픔이 임하리니 28그 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그래도 내가 대답하지 아니하겠고 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그래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니 29대저 너희가 지식을 미워하며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하며 30나의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나의 모든 책망을 업신여겼음이니라 31그러므로 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으며 자기 꾀에 배부르리라(26-31)

어리석은 자들이 지혜의 책망을 거절했으므로, 그 대가로 그들이 지혜를 필요로 할 때(26: 재앙을 만날 때’, ‘두려움이 임할 때) 지혜는 그들을 비웃고 대꾸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혜를 필요로 하는 때는 그들이 곤란에 처해 명료하고 효과적인 사고가 절실할 때입니다. 이런 시기는 광풍과 폭풍같이 예고 없이 그리고 엄청난 힘으로 불어닥치므로 어리석은 자는 근심과 더불어 심한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 지혜는 그들에게 닥친 재앙을 보고 비웃을 뿐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서 지혜의 비웃음은 무정함을 나타내는 표현이 아니라, 지혜를 비웃고 어리석음을 택하여 재앙을 자초한 어리석음에 대한 반응을 나타냅니다. 어리석은 자들은 뒤늦게 지혜를 부르고 부지런히 찾겠지만 그들은 결코 지혜를 찾을 수 없습니다.

지혜는 그동안 지속적으로 그들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지혜의 외침을 못 들어서 지혜를 얻을 기회가 없었다고 핑계 댈 수 없습니다. 지혜는 자기의 모든 유익을 주겠다는 약속까지 하며(23) 그들에게 지혜를 거절하지 말라고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들은 그 호소에 콧방귀도 뀌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절박하게 지혜를 필요로 할 때 그들은 지혜 대신 시련과 난관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지혜는 광장에서 오가는 사람들에게(또 현재 우리에게) 그들이 듣는 지식이나 교훈 또는 책망을 제대로 듣기 위해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필수라고 말합니다. 지혜는 이미 22절에서 미련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고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남을 비웃기를 즐긴다고 지적했습니다.

이제 29절에는 그 근본적인 이유가 그들이 여호와를 경외하기를 선택하지(29: 즐거워하지로 번역됨) 않기 때문임을 밝힙니다. 그들이 지혜의 교훈과 책망을 거부한 동기는 그만큼 자의적이고 의도적입니다. 귀에 들린 이 모든 말을 듣기 싫어하고 거절하는 이유는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하나님의 생각과 명령이 담긴 말보다 더 높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판단과 생각은 지혜를 배제하는 어리석음이며, 때가 이르면 그 행위에 대한 마땅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지혜를 듣는 자와 듣지 않는 자(32-33)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막고 사는 것은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사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지식이 넘치고 과학기술의 발단로 풍요가 넘치는 세상이, 하나님 없이 거만한 자세로 살아가는 죄인들에게 마치 낙원처럼 보이겠지만, 조금만 더 정직한 눈으로 이 도가니 같은 세상을 보면 곳곳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32어리석은 자의 퇴보는 자기를 죽이며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키려니와 33오직 내 말을 듣는 자는 평안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안전하리라(32-33)

잠언에 경고된 어리석은 자의 형벌은 그들의 악행에서 초래된 자연적인 결과입니다. 지혜를 거부하는 행동은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교만과 배교(퇴보)이며, 변화를 두려워하여 자기 안일과 만족에 머무는 행위입니다.

책망을 업신여겨 받아들이지 않고 책망 받을 행동을 계속하는 것이 그 당시 내 눈에는 지혜롭게 보일 수 있으나 그것은 착각입니다. 돌이키지 않는다면 그것이 초래하는 결과를 피할 수 없습니다. 그 결과는 멸망이며 불안이고 재앙입니다. 그러나 지혜를 듣는 자는 하나님의 보호 속에 안전과 평안을 누립니다(32:18).

 


순종할 때 인생길을 평안하고 안전하게 걸어갈 수 있습니다. 지혜의 말씀이 들릴 때 즉각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할 때 재앙을 피해 갈 수 있습니다. 항상 자신이 말씀에 비추어 봄으로 이것이 바로 우리가 평안하고 안전하게 인생길을 가는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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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01-02)


지혜와 영적 성장 관계

잠언 18-19


아기는 걸음마를 하기까지 무수히 넘어지기를 반복합니다. 그러다 잡고 일어서고, 잡고 걷다가 마침내 홀로 걸을 수 있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훈계와 법을 통해 시행착오를 거치며 잘못을 바로잡기 시작할 때, 그리스도인의 삶이 시작됩니다. 이런 영적인 훈련들을 무엇에 비유할 수 있습니까?

 

솔로몬은 아버지의 교훈을 통해 아들에게 강도와 살인과 같은 악한 계획을 꾸미는 자들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라고 훈계합니다. 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계획이 듣기에 솔깃하더라도 그 이면에 있는 폭력과 불의와 욕심을 간파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당한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은 결국 심판을 면치 못하며 자신들의 생명을 잃게 됩니다.

 

아버지 강연(01) : 부모의 가르침을 들어라(8-9)

하나님께서는 다음 세대를 부모나 스승들을 통해 바른 삶을 가르쳐 가십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 나라의 법을 가르치며 사랑으로 훈계하고 지도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부모나 스승에 대한 순종을 자신을 향한 순종으로 간주하십니다.

8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9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 사슬이니라 10내 아들아 악한 자가 너를 꾈지라도 따르지 말라 11그들이 네게 말하기를 우리와 함께 가자 우리가 가만히 엎드렸다가 사람의 피를 흘리자 죄 없는 자를 까닭 없이 숨어 기다리다가 12스올 같이 그들을 산 채로 삼키며 무덤에 내려가는 자들 같이 통으로 삼키자 13우리가 온갖 보화를 얻으며 빼앗은 것으로 우리 집을 채우리니 14너는 우리와 함께 제비를 뽑고 우리가 함께 전대 하나만 두자 할지라도 15내 아들아 그들과 함께 길에 다니지 말라 네 발을 금하여 그 길을 밟지 말라 16대저 그 발은 악으로 달려가며 피를 흘리는 데 빠름이니라 17새가 보는 데서 그물을 치면 헛일이겠거늘 18그들이 가만히 엎드림은 자기의 피를 흘릴 뿐이요 숨어 기다림은 자기의 생명을 해할 뿐이니 19이익을 탐하는 모든 자의 길은 다 이러하여 자기의 생명을 잃게 하느니라(8-19)

잠언의 서문(1:1-7) 이후부터 9장에 이르기까지 내 아들()로 시작하는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강연이 열 번(1:8-19; 2:1-22; 3:1-12: 3:21-35: 4:1-9; 4:10-19; 4:20-27; 5:1-23; 6:20-35: 7:1-27; Michael Fox에 따른 분류) 등장합니다.

아들을 향한 아비지 10가지 강연
(Michael Fox에 따른 분류)
1:8-19;
2:1-22;
3:1-12:
3:21-35:
4:1-9;
4:10-19;
4:20-27;
5:1-23;
6:20-35:
7:1-27;

이러한 강연들은 짧고 독립적인 수많은 금언이 등장하는 잠언 10-30장과는 달리, 10절 내외의 상당히 긴 권면의 내용을 담고 있으며 한 주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아들은 혈연관계의 아들만이 아니라 가르침을 받는 자로 적용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나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1) 훈계 듣고 떠나지 말라(8-9)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가르침의 첫마디는 네 아비의 훈계를 들어라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이 명령이 함축하는 바는 첫째, 아들이 그 부모의 가르침을 지켜야 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라는 것입니다. 이 명령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20:12)는 계명과도 직결됩니다. 둘째, 아버지의 훈계나 어머니의 법은 동일시됩니다(1:8; 6:20). 단어의 의미로 봤을 때 은 의무적이며 강제성을 띄는 반면 훈계는 선택할 수 있는 조건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여기서 훈계은 병행구로 소개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선택의 여지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듣는 자는 훈계이든 잘 듣고 반드시 그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셋째, 부모의 훈계나 명령은 여호와 경외(1:7)를 근본으로 삼아 전하는 말이며 지혜로운 말입니다. 만약 여호와 경외가 그들의 훈계령의 근간을 이루지 않는다면 그들의 훈계나 명령은 하나님 보시기에 어리석습니다. 이런 어리석은 자의 훈계를 듣는다면 어리석음 외에는 얻을 것이 없습니다(16:22). 넷째, 잠언에서 부모의 훈계와 명령은 하나님의 가르침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의 자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라고 명령하셨고(4:9-10; 6:7), 부모들이 이에 순종하여 자녀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훈계하기 때문입니다. 잠언 전체를 통틀어 보면, 잠언은 이스라엘의 한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르는 가르침으로 시작하여 르무엘 왕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전하는 가르침으로 끝납니다.

이처럼 잠언은 일반인의 자녀든 왕의 자녀는 부모로부터 전해지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으라고 촉구하며,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부모들을 통해 자녀들도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되길 격려합니다.

한편, 부모의 지혜로운 훈계와 명령은 이를 듣는 자에게 화관이나 금사슬(금목걸이)과 같습니다. 전쟁의 승리자가 화려하게 장식된 관을 수여 받으며 새로이 직책을 맡은 관리가 자기의 지위와 임무를 나타내는 금사슬을 수여 받듯이, 여호와를 경외하게 하는 부모의 가르침을 경청하는 자식은 형통하고 안정된 삶을 제공받습니다.

(2) 이익을 탐하는 악인의 무리를 따르지 말라(10-14)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는 오늘의 훈계는 이익을 탐하는 악인의 무라를 따르지 말라라고 합니다. 아버지의 조언은 10절과 15절에 다음과 같이 두 번의 ‘~하지 말라와 한 번의 ‘~하라는 명령형으로 나옵니다. ‘악한 자의 유혹을 받아들이지 말라’, ‘악인과 함께 가지 말라’, ‘악인의 길에서 네 발을 멀리하라.’ ‘악인은 원문의 죄인들의 번역이며, 여기서는 강도질과 폭력과 도적질을 일삼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아버지는 먼저 이 죄인들이 아들을 속여 유혹할 가능성이 있음을 경고하며 이들의 핌을 받아들이거나 동조하지 않도록 조언합니다. 아버지는 강도질과 폭력을 계획한 죄인들이 하는 말을 11-14절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설명합니다.

이 강도들은 우리와 함께 가자라는 말로 젊은이를 유혹하여 자기들이 하는 일에 합류하도록 초청합니다. 우리와 함께 그리고 가자라는 제안은 젊은이에게 동료의식을 불어 넣어주고 특별히 선택받았다는 느낌을 갖게 합니다. 그들의 계획은 자신들의 힘을 행사할 수 있는 통로이고(‘피를 흘리자’, ‘음부 같이 산 채로 삼키자’, ‘통으로삼키자’), 동료애와 협동심을 유발하며(‘우리와 함께’, ‘우리가’), 재산을 증식할 기회를 제공하고(‘온갖 보화’, ‘빼앗은 것’, ‘집에 채우리니’), 수익의 공정한 분배(제비를 뽑고)와 공동 재산을 추구(‘전대 하나만 두자’)하는 등 매력적인 요소를 갖고 있습니다. 강도들은 자신들의 책략을 하나하나 밝히며 위협적이면서도 수려한 언변으로 젊은이의 판단력을 흐리게 합니다.

그러나 친절한 웃음과 따뜻한 제안으로 젊은이에게 다가선 이들의 계획은 피비린내 나는 강도와 폭력을 행사하는 계획입니다. 그들은 이미 세밀하게 계획을 세웠으며, 이 젊은이를 유혹하는 것도 그 계획의 일부에 속합니다. 또한, 강도들의 계획 이면에는 비겁함, 불의, 부정, 폭력, 탐심 등의 요소가 깔려 있습니다.

첫째, 그들의 강도 방법은 몰래 숨어 있다가 사람을 해치고 돈을 빼앗는 비겁한 짓입니다. 둘째, 그들이 돈을 뺏고 목숨을 위협하는 대상은 무죄한 자입니다. 게다가 그들이 해코지할 대상을 고른 데에는 아무런 이유도 없습니다. 아무나 골라 묻지마식의 행각을 벌이려는 그들의 계획은 폭력적이며 무자비하고 불의와 불공평이 가득합니다.

셋째, 그들은 단순 강도 행각에서 끝내지 않고 사람을 무자비하게 죽이려 합니다. 이 살인은 우발적인 살인이 아니라 피를 위해서 매복하자(11)는 말에 나타나듯이 계획적인 살인입니다. 사람의 생명을 자기들 마음대로 빼앗는 말의 양심의 가책이나 두려움도 보이지 않습니다. 넷째, 그들은 자신들이 스올(음부)처럼 사람을 삼켜버릴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힘이 있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거리낌 없이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고 구렁텅이에 빠지게 하는 자들입니다. 다섯째, 그들은 사람들의 온갖 돈을 다 빼앗으려 합니다. 여기에서는 정정당당하게 일하여 돈 벌 생각을 하지않는 게으름과 한탕주의를 선호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여섯째, 그들은 빼앗은 돈으로 자신들의 배를 채우려 합니다. 그들의 부정과 탐욕스러움이 그대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밝히 보이시지만, 악한 사람들은 은밀하게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비열함으로 자기 이익을 도모하는 자들입니다. 부와 명예를 약속하며 변치 않는 의리를 강조하지만, 그 모든 것은 신기루처럼 사라질 공허한 것에 불과합니다.

(3) 악인을 따르지 말아야 하는 이유(15-16)

세상의 법칙은 뿌린 대로 거둘 것입니다. 악한 사람들은 선한 모습으로 유혹합니다. 거짓을 통해 잠시 쉽게 성공한 듯 보일 수 있습니다. 비겁하고 불의하고 부정하고 폭력적이고 탐욕적인 본심은 머잖아 들어냅니다. 그들이 판 함정에 스스로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10절에서와 마찬가지로 다시 한번 강도의 무리를 따르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특히 그들과 함께 가지 말라(15)고 명령함으로써 악인의 우리와 함께 가라(11)는 명령을 주저 없이 뿌리치도록 강경하게 경고합니다.

악인이 있는 곳을 되도록 피해야 하고 그와 그 무리를 따라가서는 안 되는 이유는 그들이 무고한 자의 피를 흘리고 악행을 서슴지 않기 때문입니다. 생각을 악으로 가득 채우고 손과 발과 입으로 죄를 짓고 불의를 행하고 다른 사람을 죽게 하는 일은 하나님한테서 점점 멀어지는 일이며 하나님에 대한 반역입니다. 이런 죄악의 길에 내가 있다면 내 앞에는 오로지 황폐와 파멸만이 기다릴 뿐입니다(59:1-21).

(4) 이익을 탐하는 자의 최후(17-19)

처음부터 악인들의 방법에 발을 들여놓지 않아야 합니다. 욕심에 눈먼 자는 재물을 얻으려는 조급함에 어리석게 행동하게 됩니다. 재물을 쉽게 얻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결국 더 강한 자의 사냥감이 될 뿐입니다. 부당한 이익을 탐하는 마음은 자신을 파멸과 죽음으로 몰아갈 뿐입니다. 강도들은 자신들이 저지르는 악행이 자기들을 파멸로 이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날아다니는 새도 자기 보는 데서 사람이 그물을 치면 그 그물을 피해갈 줄 아는 본능적인 인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악인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결국 자신들을 해치게 될 것이 뻔한데도 자기 발 앞에 그물을 치고 또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니 얼마나 어리석은 것 아닙니까! 악인들이 구체적인 계획을 갖고 사람의 피를 보려고 숨어 기다리지만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죄로 심판을 받고 자신들의 피를 흘리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악인들의 생활 방식을 추구하여 부당한 이익에 욕심을 내는 자는 다 이처럼 절대로 무죄하지 않으며 자기 생명 잃게 될 것입니다.

 


이익을 탐하는 모든 자의 길을 탐욕으로 멸망에 이르게 할 것입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해하는 어리석은 짓을 멈추려면 하나님의 법에 따라 욕심을 제어해야 합니다. 주어진 형편에 자족하는 소박한 마음으로 순종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영적인 허기는 타인의 소유를 강탈함으로써 채워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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