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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30 정민아의 Amazing Grace 방송


네 손을 놓으라

김석년 서울 서초성결교회 목사


유럽에 가면 도시마다 중세 성주들이 살던 웅장한 성이 있습니다. 그 성의 중심에 하나님을 예배하던 채플이 있습니다. 당시 성주들은 세력을 확장하느라 자주 전투를 치렀습니다. 그럴 때면 먼저 성직자를 모셔 승리를 기원하는 예배부터 드렸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선 누구 편을 들어주실까요. 강자 편일까요, 약자 편일까요. 아니면 기도를 많이 한 편일까요, 적게 한 편일까요.

하나님께서는 그 누구 편도 안 들어주십니다. 욕심으로 인해 다투는 것이니 너희 마음대로 하라며 내버려 두십니다. 이것을 ‘폐기적 심판’이라고 합니다. 곧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내버려 두사 서로 욕되게 하시는 것”(롬 1)입니다. 맞습니다. 아무리 오래 많이 합심해서 기도할지라도 욕심 때문이라면 하나님께서는 듣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누구 편이 되실까요. 바로 하나님 뜻에 합당하게, 그 뜻대로 사는 자입니다. 이런 사람은 내 소원이나 욕심을 위해 기도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묻고, 그 뜻을 따라 나를 변화시켜 갑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나에게도) 이루어지이다.” 우리가 하나님 뜻대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실 것입니다.

출처 :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266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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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29 정민아의 Amazing Grace 방송


한 사람의 영향력

안광복 목사(청주 상당교회)


파키스탄 출신 여성 말랄라 유사프자이는 여성에 대한 교육을 금기시하는 탈레반 지배 지역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탈레반이 여성과 아동에 부당한 탄압을 하는 것을 방송을 통해 알렸습니다. 이에 탈레반의 표적이 된 그는 학교에 가던 길에 괴한으로부터 총을 맞았습니다. 두 발의 총알은 얼굴, 또 한 발은 어깨를 관통했지만 어려운 수술과 힘겨운 회복 과정을 통해 그는 기적처럼 살아났습니다. 사건 이후 말랄라를 향한 전 세계적인 응원이 터져나왔습니다. 유엔의 세계교육특사는 전 세계 모든 아동이 학교에 다닐 수 있게 하자는 탄원서를 제출했고 파키스탄에서는 최초의 교육권 법안이 비준됐습니다. 말랄라는 많은 인터뷰와 연설을 이어갔고 2014년 17세의 나이로 최연소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됐습니다.

한 사람이 이룬 업적과 영향력은 실로 위대합니다. 오병이어가 누구의 손에 들리느냐에 따라 엄청난 결과가 나타났듯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은 위대한 역사를 만들어 가십니다. 한 사람을 통한 기적은 오늘날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믿음을 가진 창조적 소수로 살아가십시오. 감동과 변화를 만드는 한 사람으로 살아가시길 축복합니다.

출처 : https://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304204&code=23111512&stg=wm_r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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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2-03)


성령을 모독하는 자에 대한 심판

마태복음 12장 22-30절


 

전쟁할 때, 교전국 사이에 병력을 투입하지 않고 그곳만은 싸우지 않기로 협정한 지역을 ‘중립지역(中立地域)’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사탄의 영적인 전투에는 중립지역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탄에게 속하든지 하나님께 속하든지 해야만 합니다. 항상 사탄은 타락한 영적존재이므로 자신을 인간에게 접촉하여 그 사람을 타락시켜서 자신의 도구로 사용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시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귀신의 왕 힘으로 쫓아냈다 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힘입어 귀신을 쫓은 것이면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이고, 성령 모독 죄는 사함을 얻지 못하며, 사람은 심판 날에 자기 말로 의롭다 함과 정죄함을 받는다고 반박 하십니다.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심(22-24)

믿기에는 아는 것이 너무 많고, 포기할 수 없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지식이 부족해서 또 받은 은혜가 모자라서 안 믿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모르면서 자신을 믿고, 하나님을 올라서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22그때에 귀신 들려 눈멀고 말 못 하는 사람을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말 못 하는 사람이 말하며 보게 된지라 23무리가 다 놀라 이르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24바리새인들은 듣고 이르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22-24)

예수님께서 공생애 시간 동안 수많은 사역을 하셨습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귀신 들려보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남자를 치유하십니다(22). 귀신 들린 자는 눈이 멀고 말을 하지 못합니다(참조. 9:27-31). ‘말을 못하는’은 9:33에 나온 용어로서 말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듣지 못하기 때문에 말을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가장 비참한 처지에 있는 한 사람을 예수님께로 데려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치유하십니다. 문맥의 흐름을 보면, 한 손 마른 자의 치유가 있었고(9-14), 마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종으로 밝혔고(15-21), 예수님께서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인생인 귀신 들린 자를 치유하십니다(22). 예수님께서는 종으로서 맹인을 치유할 것이라는 이사야 42:7의 역할을 성취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앞 장면과 마찬가지로 22절의 치유도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종으로 행하신 사건입니다. 무리는 놀라 예수님을 ‘다윗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다윗의 아들’은 치유에 이어서 나온 메시아 칭호입니다(9:27). 무엇보다도, 귀신을 쫓아내신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아들이며, 당시 유대인들이 치유자로 믿었던 솔로몬(-다윗의 아들)보다 더 큰 자입니다. 이제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다음 질문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약속된 다윗의 아들로서 성령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내신 것입니까? 아니면 악령의 능력으로 축귀를 행한 사람, 사탄과 한 패거리입니까? 귀신을 쫓아내 말을 못하고 듣지 못하는 사람을 살려주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종이고 다윗의 아들입니다. 복음서에서 귀신이 쫓겨나는 사건은 하나님 나라가 와서 사탄의 나라를 궤멸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축사(逐邪) 사건은 다른 치유와 마찬가지로 성경에 약속된 다윗의 아들이 드디어 와서 하늘나라를 실천하고 있는 증거입니다. 치유하는 다윗의 아들로 예수님의 정체를 드러내는 목적 중 하나는 그를 통해 이 땅에 실현되는 나라가 회복의 나라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한쪽 손 마른 자를 치유한 사건처럼 귀신 들린 자가 회복된 사건 역시 다윗의 아들은 회복을 실현하는 종으로 왔음을 입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통해 지금도 회복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십니다. 교회는 회복의 일에 쓰임 받아야 하며, 회복을 경험하지 못하고 확장하는 도구가 되지 못하는 교회는 성령의 사역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의 바알세블 논쟁(25-29)

귀신 들려 보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사람, 살았으나 즉은 것이나 다름없이 빛과 소리 없이 살아왔던 혼돈의 인생이 빛 되신 예수님. 말씀이신 예수님을 만나서 빛과 소리를 찾았습니다. 새롭게 창조되었습니다. 잃었던 하나님의 형상을 찾았고, 샬롬과 쉼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25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26만일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어떻게 그의 나라가 서겠느냐 27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되리라 28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29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25-29)

본 단락은 22-23절에서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신 사건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비난과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응으로 구성됩니다. 17-21절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받은 종이며 평화와 긍휼과 겸손으로 정의를 실현한 종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 정체성과 정반대의 평가를 내립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성령이 아니라 사탄의 힘을 사용하고, 예수님의 사역은 하늘나라가 아니라 사탄의 나라를 위한 것이라고 비난합니다. 이로써 이들의 평가는 구원의 가능성이 사라지는 수준에 이르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축사 사역이 귀신들의 왕인 바알세불의 힘으로 한 것이라고 비난합니다(24).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알고 서로 분쟁하는 나라나 도시나 집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말씀하십니다(25). 사탄의 졸개들인 귀신들을 사탄의 힘으로 쫓아낸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습니다(26). 26절에서 바알세불이 사탄으로 바뀝니다.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는 장면은 마치 사탄의 세력 안에서 벌어지는 내전과 같습니다. 사탄은 악의 세력을 통치하는데 통치자가 자기 나라에서 군대를 쫓아낸다는 것은 논리적 모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만일 자신의 축사가 바알세불의 힘으로 된 것이라면 ‘너희의 아들들’이 행한 축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 되물으십니다(27). ‘너희의 아들들’은 유대인들 또는 바리새인들을 가리킵니다. 유대 문헌에는 유대인들이 귀신들을 쫓아낸 기록이 나옵니다. 이들의 행위는 하늘나라가 온 증거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늘나라의 임함은 예수님을 통한 축사와 관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늘나라 또는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성령의 기름 부음 받은 자(메시아)를 통해서 통지하시는 나라이므로, 다윗의 아들인 예수님을 통한 회복의 나라가 하늘나라입니다. 그러므로 귀신이 쫓겨난 사건은 하늘나라가 온 것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28).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신 것은 성령의 힘으로(눅 11:20에는 ‘하나님의 손가락’) 일어났으며, 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사실을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종에게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라는 예언을 떠올리게 합니다(18; 사 42:1-4; 61:1).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신 사건은 성령의 능력으로 여호와의 종이 회복의 나라를 시작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참조, 사 44:3; 59:21). 여기서 ‘왔다’는 과거형으로 ‘임했다’는 뜻입니다. 이는 예수께서 행하신 축사 사역을 통해 실제로 하나님 나라가 임한 사실을 강조합니다. 마태복음의 전체 문맥을 고려하면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언하셨고(4:17; 10:7), 예수님의 축사가 바로 그 증거입니다(예, 4:24, 10:8).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메시아적 사역을 하고 있는 그 시대와 영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하늘나라의 임함을 보고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오히려 적대적으로 반응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귀신을 쫓아내신 사건은 강한 자인 사탄이 더 강한 자인 예수님에 의해 결박당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29). 사탄을 결박해야 사탄의 집에서 사람들을 구원해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구원하는 힐을 시작하신 것은 사탄이 결박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안식일의 치유 사건들(12:10-13, 15)과 마찬가지로 축사도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다는 증거입니다. 구원 역사의 측면에서 사탄이 결정적으로 결박되는 시기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승리하시는 때이지만, 예수님의 활동으로 사실상 사탄은 결박당하기 시작합니다. 주기도문의 내용처럼 예수님께서 땅에서 행하신 일(귀신 축출)을 통해서 하늘에 있는 뜻(사탄이 묶이는 것)이 성취됩니다. 이는 성령의 능력으로 된 것입니다. 특히 성령(=하나님의 영)의 능력으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예, 사 52:7)를 가지고 온 것은 이사야 61:1-3에서 주의 영이 주의 종에게 임해 희년을 실현한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자(30)

신앙의 중립지대, 완충지대, 회색지대가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사탄의 나라 사이에서 걸쳐 있을 곳은 없습니다.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으면 반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넘겨주신 것은 우리를 얻으려고 자신의 전부를 주신 사건입니다.

30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30)

예수님께서는 자신과 함께하지 않는 자마다 흩어질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30; 개역개정은 ‘나와 함께 모으지 않는 자마다 흩어진다’를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로 번역함).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는 사람들은 사탄의 편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자들은 예수님께서 모으신 자들이고 함께하지 않는 자들은 흩어진 자들입니다. ‘흩는 것’은 부정적인 의미입니다. 승리자가 정복당한 군대를 흩어버리듯이 원수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흩어버린 사건이 구약에 여러 번 묘사됩니다. 특히 마태복음은 앞의 내용에서 예수님을 여호와의 종으로 이해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예수님께서 치유하는 여호와의 종으로서 흩어진 백성(양 떼)을 모으러 오신 것은 이사야서에 나오는 종의 사명을 떠올리게 하며(사 49:5, 24-25), 이는 양 떼를 모으러 온 종의 사역에 참여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회복 혹은 구원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종으로서 이스라엘의 흩어진 자들을 모으러 오셨지만(사 49:5,24-25), 예수님에게 모이지 않으면 종을 통한 회복의 기회를 놓치고 용서 받을 기회를 잃는 비극에 처합니다(마 12:31).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대적하는 편에 서기 때문에 모이는 양 떼가 아니라 흩어지는 양 떼에 속합니다. 29절과 연결해 보면, 예수님은 양떼를 모으려고 사탄을 무너뜨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사탄의 집을 공격해서 양 떼를 살려내는(=모으는) 예수 편에 서야 하며, 예수께 반응하는 일에 있어서 중간 지대는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믿음이란 영적 전투에서 중립지대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과 함께하지 않는 자는 자신을 반대하는 자이며, 자신과 함께 모이지 않는 자는 흩어버린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다라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기로 결정하는 것과 같으며, 예수님의 통치를 받지 않을 때 우리는 결국 귀신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갑니다. 오늘 예수님 편에 서 있습니까? 아니면 예수님과 반대편에 서 있습니까?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예수님 편에 서서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따라가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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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도서(01-01)


살아 있는 교회에 대한 두 가지

디도서 1장 1-9절


우리나라 속담에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서로 협력하면 쉽게 해결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협력 공동체입니다. 어느 한 사람이나 몇몇 사람만 일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구성원 모두가 한 마음으로 교회의 목적을 향해 협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도에게 여러 장로들을 세우고 그들과 합력해서 일을 처리해 나갈 것을 부탁합니다.

 

사도 바울은 부족한 일을 바로 잡고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도록 디도를 그레데에 두고 떠났습니다. 서두에서 디도를 그레데에 남겨둔 이유를 설명하고, 장로이자 감독인 목회자의 자격에 관하여 권면합니다. 그 목적을 두 가지로 말하는데, 남은 일을 정리하는 것과 장로를 세우는 문제에 대해 지침을 주고 있습니다. 이 두 목적을 중심으로 디도서는 진행되고 있습니다.

 

인사말(1-4)

교회가 많아지고 교회 안에서 사역을 위해 참으로 분주합니다. 그런데도 교회를 향한 실망과 비난의 목소리도 높아집니다. 세상은 교회를 행해서 무엇을 기대하고 있겠습니까? 아니 성경은 교회가 교회다워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다고 말하겠습니까? 교회는 지도자가 바로 세워져야 합니다. 바울은 그레데에서 사역한 디도에게 서신을 통해 교회 바른 지도자들에 대해 권고하고 있습니다.

1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나 바울이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2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3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4같은 믿음을 따라 나의 참 아들 된 디도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1-4)

사도 바울은 그레데 섬에 디도를 두고 온 뒤, 그에게 편지를 씁니다. 그레데 섬에서 사역을 해야 하는 디도가 좀 더 효과적으로 사역을 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입니다. 디도서의 특징은 바울 서신의 서두에서 일반적으로 언급되는 감사와 기도의 내용이 나오지 않습니다. 본문은 서신의 발신자(1-3), 수신자(4a) 그리고 첫 인사(4b)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⑴ 발신자 바울(1-3)

먼저 발신자 바울은 편지를 쓰고 있는 디도에게 자신을 소개합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소개합니다. 자신의 사역은 선택 받은 하나님 백성들의 영생의 소망에 기초한 믿음과 지식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① 하나님의 종(1a)

‘하나님의 종’이라 칭호는 본 절에 특별히 나타납니다. 이 칭호는 구약에서 아브라함(시편 105:42), 모세(민수기 12:7), 다윗(사무엘하 7:8-9) 그리고 선지자들(예레미야 7:25; 다니엘 6:20; 아모스 3:7)에게 사용되는데, 하나님의 권위를 함축하는 표현입니다(민수기 12:5-8; 이사야 42:1-9). 바울은 이 칭호를 사용함으로 하나님의 종으로서 자신의 권위를 나타냅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사도가 되었다고 고백합니다(고린도전서 1:1; 고린도후서 1:1; 에베소서 1:1; 골로새서 1:1; 디모데전서 1:1; 디모데후서 1:1).

②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1:1b-3)

바울은 자신의 사도가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첫째는 바울의 사도직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의 믿음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은 구약의 이스라엘을 계승하는 하나님의 백성인데,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성도들입니다(디모데후서 2:10; 디도서 2:14). 이 구절에서 성도의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과 믿음에 근거한 것임을 시사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복음을 전함으로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들을 믿음으로 인도하는 것이 사도로서 자신의 사명임을 밝힙니다(참조. 고린도전서 1:17). 둘째, 그의 사도권은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을 위한 것입니다. ‘진리의 지식’은 그 진리를 아는 자들을 경건한 삶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경건함은 목회서신의 중심주제 중 하나입니다. ‘진리의 지식’은 그 진리를 아는 자들을 경건한 삶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경건함은 목회서신의 중심주제 중 하나입니다(디모데전서 2:2; 3:16; 4:7,8; 6:3,5,6,11; 디모데후서 3:5). 바울은 성도들로 하여금 경건한 삶으로 이끄는 진리의 지식을 얻게 하는 것이 그의 사도직의 한 목적이라고 밝힙니다(참조. 디모데전서 2:4). 셋째, 그의 사도직은 영생의 소망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영생을 약속하셨고 그것은 그의 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에 대한 소망을 가지는데, 바울은 이 소망을 선포하는 것이 사도로서 자신에게 맡겨진 사역임을 언급합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진리의 지식과 경건을 밀접하게 연결시켜 언급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단순한 지식의 축적이 아닙니다. 근본적인 인생관과 세계관의 변화로 인한 삶의 변화를 동반합니다. 그리하여 그 지식을 소유한 자들에게 경건의 능력을 부여합니다(디모데후서 3:5). 하나님을 가까이하여 그의 기뻐하시는 일에 적극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인도합니다.

⑵ 수신자 디도(4a)

바울은 수신자 디도에 대해 소개합니다. 디도를 향해 ‘참 아들’이라 부릅니다. ‘참아들’은 합법적인 아들의 의미인데 바울은 특별히 디모데와 디도에게 이 표현을 사용했습니다(참조, 디모데전서 1:2). 그만큼 바울과 디도의 관계가 유난히 각별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디도는 바울의 회심 후 예루살렘 방문 때에 바울과 동행하였습니다(갈라디아서 2:1). 바울의 복음 전파를 위한 첫 여정에 동행한 것입니다. 또한 그는 고린도 교회에 가서 바울의 심정으로 사역하였습니다(고린도후서 8:16-17). 그리고 바울의 최후 선교 여행에 동행하던 중 바울의 위임을 받고 그레데 선교 여행에 동행하던 중 바울의 위임을 받고 그레데 섬에 남아 사역을 감당하였습니다(디도서 1:5).

⑶ 첫 인사(4b)

바울이 디도에게 전한 첫 인사의 내용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라고 합니다. ‘은혜’는 당시 헬라인의 인사에 해당하고 ‘평강’은 히브리인의 인사에 해당합니다. 바울은 보편적으로 그의 서신의 사도에서 ‘은혜와 평강’의 인사를 전합니다(로마서 1:7; 고린도전서 1:3; 고린도후서 1:2; 갈라디아서 1:3; 에베소서 1:2; 빌립보서 1:2; 골로새서 1:2; 데살로니가전서 1:1; 데살로니가후서 1:2). 이 구절에는 바울서신의 사도에 일반적으로 나오는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칭호 대신에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라는 칭호가 특별히 나타납니다. ‘구주’라는 칭호는 디도서에서 구원의 교리와 관련하여 거듭 나오는데 예수께서 구세주이심을 강조합니다(2:10,13; 3:4,6). 이것으로 살펴보아서, 그레데 교회에 복음을 방해하는 사람들은 유대인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믿음을 굳게 하고, 또 성장하키기 위해 목회자들을 통해 도와주십니다. 그것은 교회를 세우는 일입니다. 이러한 사역은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에 최선을 다하는 목회자들과 함께 협력해야 합니다. 성도들의 협력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점점 바르게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를 세우는 사역(5-9)

하나님의 교회에서 평신도 지도자 즉, 장로님이나 권사님의 기준은 교회의 성장에 기여도나 재력 또는 사회적 명망 등을 중요시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직분은 감투나 명예직으로 전락되고 맙니다. 바울은 디도가 그레데 교회에 장로들을 세우는 일에서 장로의 자격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5내가 너를 그레데에 떨어뜨려 둔 이유는 부족한 일을 바로잡고 나의 명한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6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 하는 비방이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찌라 7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며 8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을 좋아하며 근신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9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5-9)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서 풀려난 후에 디도와 더불어 그레데 섬에 가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레데 섬을 떠나면서 디도를 남겨두어 목회사역을 감당하게 하였습니다(1:5). 후일에 바울은 디도에게 편지를 보내 목회와 관련된 여러 가지 권면을 하였습니다. 본문은 교회의 지도자인 장로 및 감독의 자격에 관한 권면입니다. 그 내용은 장로의 자격에 대한 권면(1:5-6), 감독의 자격에 관한 권면(1:7-9)으로 구성됩니다.

⑴ 디도의 사명(5a)

디도가 그레데에 존재한 이유는 첫째는 부족한 일, 즉 거짓 가르침을 바로 잡는 일입니다. 그의 사역은 집중적으로 1장 10절에서 3장 11절까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바른 가르침을 전할 장로들을 세우기 위해서였습니다(1:5-9). 경건한 백성을 날은 진리의 지식과 그것을 전할 온전한 지도자가 하나님의 교회에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줍니다.

⑵ 장로의 자격(5b-6)

먼저 디도에게 맡겨진 중요한 사역 중 하나는 각 성의 장로들, 즉 지도자들을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본문에서 지도자의 자격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언급합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바울은 디도에게 장차 세워야 할 장로의 자격에 대한 권면입니다. 6절은 장로의 자격에 관한 서술입니다. ‘책망할 것이 없고’라는 것은 장로의 자격에 대한 총체적인 표현인데, ‘고소당해 비난받을 일이 없다’라는 뜻입니다. 이 덕목은 이어서 언급되는 감독의 자격에서도 우선적으로 언급됩니다(1:7; 참조, 딤전 3:2). 바울은 다음으로 가정의 범주에서 장로의 자격을 말합니다. 장로는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하고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한다고 언급합니다(딤전 3:2,4-5). 교회의 지도자인 목회자는 먼저 가정의 지도자로서 신앙의 본을 보이고 목회자는 먼저 가정의 지도자로서 신앙의 본을 보이고 신실한 믿음의 가정을 이루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또한 바울의 권면에 의하면 장로는 방탕하거나 혹은 불순종한다는 비난을 받지 않는 자이어야 합니다. ‘방탕’이란 용어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행동을 포괄하는 문맥에서 나타납니다(엡 5:18; 벧전 4:4). ‘불순종하는’이란 형용사는 잘못된 교훈과 관련하여 사용됩니다(딤전 1:9; 딛 1:10).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방탕하거나 진리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자를 장로로 세우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⑶ 감독의 자격(7-9)

먼저,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 책망할 것이 없는 자이어야 합니다. ‘청지기’는 집을 배경으로 하는 단어인데, ‘집을 관리하는 자’를 말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교회를 하나님의 집으로, 지도자를 그 집을 세우는 자로 묘사합니다(고린도전서 3:9c-11). 5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권면은 감독의 자격에 대한 총체적인 표현입니다. 이어서 언급되는 내용은 감독으로 피해야 할 부정적인 자질과 추구해야 할 긍정적인 자질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7절에 감독이 피해야 할 자질로 완고함, 성마름, 술을 탐닉함, 난폭함, 부정한 이득을 탐함 등이 나열됩니다. ‘더러운 이득을 탐하는 것’은 다음 단락에서 거짓 교사들의 특징으로 언급됩니다(1:11). 8절은 추구해야 할 자질로 나그네를 대접함, 선을 좋아함, 자제함, 의로움, 거룩함, 절제함을 언급합니다. ‘나그네를 대접함’은 특별히 복음을 전하며 순회하는 복음과 직결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딤전 3:2; 참조. 요삼 1:9-10). ‘신중하며’는 건전한 마음으로 자제하며 근신하는 행동을 뜻합니다. 바울은 감독뿐 아니라 그레데 교회 성도들에게 전반적으로 이 덕목이 필요함을 강조합니다(2:2,5,6), 9절에서 감독은 신뢰할 만한 말씀의 교훈대로 행하여야 할 것을 권면합니다. 그리고 그 까닭을 건전한 교훈으로 권면하고 대적하는 자들을 책망하기 위함이 전파자들을 환대하는 것이라고 밝힙니다. 바울이 가정의 범주에서 목회자의 자격을 언급한 것은 주목한 만합니다. 그는 디모데전서에서 목회자는 자기 집을 잘 다스려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그리하여 ‘만약 어떤 자가 자기 가정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볼 수 있겠습니까?’라고 반문합니다(디모데전서 3:4-5). 목회자는 우선 한 가정의 신앙 리더로서 경건한 신앙의 본을 보여야 합니다. 디도에게 장로들을 세우는 이유는 장로들과 협력하여 교회 안에 잘못된 사역을 막고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잘못을 막는 사람들은 모범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움을 받는 장로들은 모든 면에서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먼저 모범을 보이지 않고서는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장로가 되기 위해서는 내면적인 성품과 외면적인 생활(특히 가정생활)이 일치해야 하며,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문제가 없어야 합니다.

 


 

교회는 바른 지도자와 그 지도자가 전하는 바른 교훈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상황일 때,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 세대에서 하나님 나라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안팎의 존경을 받고, 내외적인 자격을 갖춘 지도자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바른 가르침이 있을 때, 교회로서의 바른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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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24-02)


다윗의 제사와 하나님의 용서

사무엘하 24장 18-25절


요한은 예수님을 타작마당의 주인으로(마 3:12) 소개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죄를 타작하시고 순전하고 고운 믿음을 얻으십니다.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은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이삭을 드린 모리아 산이며, 다윗이 준비한 모든 것으로 성전이 세워집니다(대하 3:1). 주님께서는 그곳에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원래 사무엘 상하는 한 권이었습니다. 사무엘서의 시작은 한나의 기도로 시작해서, 마지막은 다윗의 기도로 마무리합니다.

다윗이 인구조사를 한 죄를 물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3일 동안 전염병이 돌게 하셨고 그로 인해 칠만 명이 죽습니다. 다윗이 계수한 사람에서 대략 20분의 1이 죽는 끔찍한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다윗은 이것을 보고 깊이 뉘우치며 죄 없는 백성들 대신에 자신과 자신의 집을 치시라고 요청합니다. 이 모든 과정을 겪으면서 다윗은 왕의 위치와 결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었고 왕은 백성을 지킬 임무가 있는 존재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하였습니다.
 

선지자 갓의 권면(18-19)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해 그냥 지나치실 수 없고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이것이 진노의 재앙을 완전히 멈추기 위해 희생 제사를 드려야 하는 이유입니다. 죄인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반드시 치러야 할 우리의 죗값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대신 지불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18이 날에 갓이 다윗에게 이르러 그에게 아뢰되 올라가서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으소서 하매 19다윗이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바 갓의 말대로 올라가니라(18-19)
주님은 다윗이 범죄했을 때 선지자를 통해 소통하십니다. 율례를 사랑하고 누구보다 주의 마음에 합하게 행해온 다윗이지만, 이 상황에서는 선지자를 통해 무언가를 깨달아야 했습니다. 주님은 죄를 범했을지라도 돌이킬 기회를 주시는 분이고, 다윗은 은혜를 알아차리고 즉시 올라갔습니다.
(1) 선지자 갓의 권면(18)
다윗이 자신의 선택이 어리석었다는 것을 깨닫고 차라리 자신과 자신의 집을 죽여 달라고 기도하자 여호와께서는 갓 선지자를 다시 다윗에게 보내십니다. 갓 선지자는 다윗에게 아라우나 타작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한 제단을 쌓으라고 명령합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다윗의 회개의 기도를 들으시고 용서해주실 것이니 제단을 쌓고 속죄의 제사를 드리라는 말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다윗이 자신은 희생하지 않고 백성들을 희생시킨 것이 왕으로서 올바른 자세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고 차라리 자신과 자신의 집을 죽여 달라고 말하며 회개한 것을 받아주신 것입니다. 여부스 사람들은 다윗이 예루살렘을 정복할 때 그곳에 거하던 주민들로 예루살렘을 점령한 이후에도 이들은 예루살렘에서 살았습니다. 제단을 쌓을 곳으로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을 지정한 이유는 재앙을 일으키던 여호와의 사자가 여호와의 명령을 받고 재앙을 멈춘 곳이기 때문입니다. 즉, 여호와께서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은 것에 가슴 아파하시며 용서와 자비를 베푸신 곳이며 인간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단을 쌓아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께 용서를 빌고 은혜를 받기에 가장 적당한 장소인 것입니다.
(2) 다윗의 순종(19)
이런 하나님의 명령에 다윗은 갓의 말을 따라 아라우나 타작마당으로 올라갑니다. 여기서 ‘말대로’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다윗이 하나님의 명령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아라우나 타작마당을 매입 다윗(20-24)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고 구원을 얻는 유일한 길은 오직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대가는 반드시 당사자가 치러야 합니다. 이것이 다윗이 한사코 값을 지불해 제사를 드리려 했던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화목제물로 죽으셨으며,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하고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됩니다.
20아라우나가 바라보다가 왕과 그의 부하들이 자기를 향하여 건너옴을 보고 나가서 왕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21이르되 어찌하여 내 주 왕께서 종에게 임하시나이까 하니 다윗이 이르되 네게서 타작 마당을 사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아 백성에게 내리는 재앙을 그치게 하려 함이라 하는지라 22아라우나가 다윗에게 아뢰되 원하건대 내 주 왕은 좋게 여기시는 대로 취하여 드리소서 번제에 대하여는 소가 있고 땔 나무에 대하여는 마당질 하는 도구와 소의 멍에가 있나이다 23왕이여 아라우나가 이것을 다 왕께 드리나이다 하고 또 왕께 아뢰되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을 기쁘게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 24왕이 아라우나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하고 다윗이 은 오십 세겔로 타작 마당과 소를 사고(20-24)
사랑한다면 줄 수 있어서, 받아주어서 고마울 뿐입니다. 죄로 인해 뵐 수도, 들을 수도 없었던 주님과의 거리가 가장 큰 고통이었습니다. 주님을 뵐 수만 있다면 가진 전부를 다 내어 값을 지불해도 좋았습니다. 주께 드리는 것이 희생으로 여겨진다면 사랑이 동기인지 자문해야 합니다.
(1) 아리우나의 영접(20)
자신의 집에 있던 아라우나는 창문으로 내다보고 있다가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자신의 집으로 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는 밖으로 나가 얼굴을 땅에 대고 왕에게 절합니다. 여부스 사람인 그는 다윗을 왕으로 인정하며 철저히 복종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다윗을 ‘내 주 왕’이라 부르고 자신을 ‘종’이라고 칭하면서 정중하게 왜 자신에게 왔는지 묻습니다. 왕이 자신의 부하를 이끌고 한 개인을 방문하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 아니기 때문에 아라우나는 혹시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기 위한 것은 아닐까 생각하고 긴장한 것입니다. 즉, 아라우나의 철저한 복종의 모습은 혹시라도 왕과 왕의 군사들이 해를 가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나온 행동으로 아비가일이 사무엘상 25장에서 다윗을 만났을때와 비슷한 행동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에 대해 다윗은 아라우나에게서 타작마당을 사서 여호와의 제단을 쌓고 백성들에게 내리는 재앙을 그치게 하려고 한다고 말합니다. 16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회개하고 제단을 쌓기 전에 이미 재앙을 멈추셨습니다. 오직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하나님의 심정을 모르는 다윗은 제사를 드리면 재앙이 멈출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서 지금 장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미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이것을 나중에 알게 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께 겸손히 나아갈수록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미 베풀어주신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2) 다윗의 목적(21)
하지만 이 사실을 모르는 다윗은 최선을 다해 여호와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는 제단을 쌓기 위해 먼저 아라우나 타작마당을 사려고 합니다. 제단은 한 번 쌓으면 계속해서 그곳에 있으면서 여호와의 이름을 기념하는 장소가 되기 때문에 다윗은 그곳을 빌리는 것이 아니라 아예 사서 여호와께 바치려고 한 것입니다.
(3) 아라우나의 헌신(22-23)
이런 다윗의 제안에 아라우나는 다윗이 원하는 대로 취하여 제사를 드리라고 하면서 번제를 드릴 소와 땔 나무를 제공하겠다고 먼저 제안합니다. 이것은 땅과 소와 땔 나무 모두를 제공하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다윗에게 땅을 거저 주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고대 사회에서 땅을 사고팔거나 협상을 할 때 하는 화법입니다. 창세기 23장에서 아브라함이 사라를 장사 지내기 위해 헷 족속에게서 막벨라 굴을 사려고 할 때도 처음에는 그냥 쓰라고 말합니다(11). 이것은 땅을 팔지 않겠다는 완곡한 표현으로 협상을 하기 위해 먼저 거절 의사를 표현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아브라함은 몸을 굽히고 정중하게 땅을 팔아달라고 요청하였고, 마침내 그들에게 400세겔을 주고 막베라 굴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라우나가 땅을 편히 쓰라는 말은 거저 주겠다는 말이 아니라 협상을 위한 표현인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아라우나는 여호와께서 다윗을 기뻐하시기를 원한다고 기원하며 여호와의 복을 빌어줍니다. 이것은 왕의 호의를 얻기 위한 일반적인 인사로 왕께서 소원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들어주시길 원한다는 의미입니다. 아라우나는 최대한 다윗의 호의를 얻은 상태에서 협상하기를 원한 것입니다. 사실 다윗은 왕이고 부하들을 데리고 왔으므로 힘으로 빼앗으려 한다면 얼마든지 빼앗을 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아라우나는 최대한 다윗의 호의를 얻어 땅을 일방적으로 빼앗기지 않기 위해 애쓴 것입니다.
(4) 다윗의 매입(24)
아라우나의 걱정과 달리 다윗은 거저 쓰라는 말에 절대 그럴 수 없다며 반드시 값을 주고 사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면서 값없이, 즉 공짜로는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일차적으로는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을 반드시 사겠다는 의미이지만, 이차적으로는 여호와께 드리는 제사는 자신이 큰 희생을 치르면서 드려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제사는 죄를 지은 사람이 소나 양이나 염소나 비둘기를 가져와 여호와께 바치는 것입니다. 내가 죄를 지은 것에 대한 대가로소 값이나 염소 값이나 비둘기 값 등 제물의 값을 치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자신이 값을 치러서 드려야 하는 것이지 남이 대신 드리거나 공짜로 드리면 안 됩니다. 현재 우리가 죄 사함 받는것도 공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림의 대가로 용서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 시대 제사의 대가는 구약 시대 제사의 대가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값비싼 대가를 치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림을 우리의 눈으로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마치 아무 대가 없이 죄 사함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여 죄와 용서와 회개에 대해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렇게 다윗은 자신의 죗값을 감당하고 계속해서 여호와의 이름을 기념하는 곳으로 만들기 위해 은 50세겔을 주고 타작마당과 소를 삽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여호와의 말씀대로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께 드립니다. 번제와 화목제는 속죄를 하는 기본적인 제사로 번제는 모두 태워서 바치는 제사이고 화목제는 지방과 내장은 여호와께 태워드리고 가슴살과 뒷다리 살은 제사장을 주고 나머지는 제사에 참여한 사람들이 나누어 먹는 제사로 감사와 교제를 나누는 제사입니다. 이렇게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자 여호와께서는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상 21:14에서 다윗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처럼 이번에도 기도를 들어주시고 이스라엘 위에 내린 재앙을 멈추어주셨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위에’라는 표현은 1절에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라는 구문과 연결됩니다. 재앙의 원인이 되었던 이스라엘에 대한 진노를 멈추셨다는 것입니다.
 

제사와 응답(25)

우리에게는 오직 믿음이 필요합니다. 성도는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죄에 대해 죽고 하나님께 대해 살아 있는 자임을 믿어야 합니다. 형식적인 종교 행위, 개인의 부단한 노력을 계산하며 구원에 대해 안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의 믿음이 참된 믿음인지 점검해야 합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교제를 경험하고 있습니까? 또한 삶의 목적과 태도, 일상속에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합니까?
25그 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25)
결국 인구조사로 인해 이스라엘에 내린 재앙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죄와 다윗의 죄를 모두 심판하신 것이며 여기서 왕인 다윗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왕정 시대에는 왕이 백성들의 대표가 되기 때문에 왕의 잘못된 선택이 백성들을 모두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고 왕이 잘하면 백성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사무엘서는 전체적으로 왕에 대한 이야기가 중심입니다. 왕을 세워달라는 요구와 이 요구를 실행한 사무엘과 첫 번째 왕 사울과 두 번째 왕 다윗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런 왕에 대한 이야기의 결론은 결국 이스라엘의 왕들은 여호와의 대리자일 뿐이며,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은 여호와 한 분뿐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왕은 여호와의 명령에 복종하며 하나님의 백성을 잘 인도해야 하는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전부를 드려 예배했던 사람입니다. 자신보다 주님을 더 사랑한 자로 기록됩니다. 위대한 성취를 이룬 왕의 이름이 아닌, 주님을 사랑하여 전부를 드린 사람으로 기록하면서 사무엘서는 막을 내립니다. 인생이 한 줄의 묘비명으로 기록된다면, 어떻게 기록되길 원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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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24-01)


다윗의 인구조사와 하나님의 재앙

사무엘하 24장 1-17절


별 생각 없이 기계적으로 고개만 끄덕이는 사람을 ‘버블헤드’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위대한 지도자란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인전하고 하나님 앞에 고개를 숙이는 사람입니다. 교만이라는 범죄는 한순간에 파고들지 않습니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교만은 은밀하게 마음에 침투해 들어옵니다. 교만한 마음에 사단은 틈타서 넘어지게 만듭니다.

본문은 결론의 마지막 부분인 인구조사에 대한 이야기로 21장의 기근 이야기와 쌍을 이룹니다. 두 사건 다 여호와의 진노가 임하여 이스라엘에 재앙이 일어나게 되는데, 21장에서는 진노의 대상이 사울이고 24장에서는 다윗입니다. 두 이야기 모두 여호와께 기도하였고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해 기도를 들으시고 재앙을 멈추십니다. 두 이야기 모두 왕이 재앙의 원인으로 나오면서 왕정 시대에 왕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인구조사를 명령하는 다윗(1-4)

사람들은 세상에 속한 것, 즉 재물이나 인맥을 의지하여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에 기대는 것은 영원한 생수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터진 웅덩이에서 물을 찾는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맡은 성도가 자기 자신이나 사람의 힘을 의지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싫어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그 은혜를 부정하는 것이므로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십니다.

1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그들을 치시려고 다윗을 격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2이에 왕이 그 곁에 있는 군사령관 요압에게 이르되 너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로 다니며 이제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인구를 조사하여 백성의 수를 내게 보고하라 하니 3요압이 왕께 아뢰되 이 백성이 얼마든지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백 배나 더하게 하사 내 주 왕의 눈으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런데 내 주 왕은 어찌하여 이런 일을 기뻐하시나이까 하되 4왕의 명령이 요압과 군대 사령관들을 재촉한지라 요압과 사령관들이 이스라엘 인구를 조사하려고 왕 앞에서 물러나(1-4)

이 단락은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시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이 구문은 사사기에서 ‘이스라엘이 다시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하여’라는 구문과 유사합니다. 반복적인 행위를 표현하는 것으로 여호와께서 여러 번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사무엘서 이야기에서는 여호와께서 사올이나 다윗에게 진노하신 이야기는 등장하지만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신 경우는 사무엘상 12장 사무엘의 고별 설교에서 이스라엘이 왕을 구한 것에 대해 진노하시고 비와 우레를 보내신 일 이외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다윗 시대에도 사사 때처럼 반복적인 이스라엘의 범죄가 있었고 그때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고 벌을 내리신 일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1) 다윗 마음의 충동(1)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의 범죄를 벌하시기 위해 다윗이 인구조사를 하도록 부추기셨습니다. 이것은 다윗의 마음에 원래 품고 있던 것을 행동으로 옮기도록 부추기신 것이지 순수한 마음에 악을 집어넣으신 것이 아닙니다. 다윗의 마음을 부추기시는 모습은 사사기 8:23에서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악한 명을 보내어 서로 싸우도록 하신 모습과 비슷한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즉,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이 모두 여호와께 범죄하였고 심판의 맥락에서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도구로 다윗을 쓰신 것입니다.

(2) 다윗의 명령(2)

다윗은 요압을 불러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해 인구조사를 하라고 명령합니다. 인구조사를 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군사를 징집하기 위한 것이고 둘째는 백성들에게 세금을 징수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행위는 여호와 보시기에 좋지 않은 것으로 세금을 많이 걷는 것은 왕이 은금을 많이 쌓기 위한 것이고, 군사를 징집하는 것은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군사의 숫자에 의지하여 전쟁을 하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사기 7:2에서 하나님께서 많은 수의 군인이 필요 없다고 하시면서 그 이유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고 말할 염려가 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수의 군인을 징집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원하는 전쟁 방식이 아닙니다.

(3) 요압의 반대와 다윗의 고집(3-4)

이런 다윗의 명령에 요압이 부정적인 견해를 내놓습니다. ‘이 백성이 얼마든지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백 배나 더하게 하사 내 주 왕의 눈으로 보게 하시길 원한다’고 기원합니다. 여기서 백 배는 과장법으로 많은 인구 주시기를 기원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왕은 어찌하여 인구조사 하는 것을 기뻐하냐고 묻습니다. 이것은 수사적 질문을 통해서 인구조사를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간접적으로 설득하는 것으로 요압은 다윗의 인구조사 명령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그는 여호와께서 백 배의 인구 주시길 원한다고 기원한 것은 여호와의 능력이 있으면 사람의 많고 적음이 문제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요압은 다윗보다 더 신앙적인 모습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그다지 신앙적이지 않은 요압이 보아도 다윗의 행동은 여호와 앞에서 옳지 않은 행동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하지만 인구조사에 대한 다윗의 주장은 완강했고 결국 요압과 사령관들은 다윗의 명령을 시행하게 됩니다.

 

인구조사의 결과를 보고함(5-9)

하나님의 일을 맡은 우리는 지금 무엇을 의지해 그 일을 수행하고 있습니까? 우리 눈에는 세상에서 통하는 원리가 금세 들어옵니다. 그런 방법을 사용하면 원하는 결과가 쉽게 손에 잡힐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은 하나님의 원리와 은혜로 감당해야 합니다. 현대 교회들이 사람의 힘을 의지하고 세상의 방법을 적용한 결과, 교회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5요단을 건너 갓 골짜기 가운데 성읍 아로엘 오른쪽 곧 야셀 맞은쪽에 이르러 장막을 치고 6길르앗에 이르고 닷딤홋시 땅에 이르고 또 다냐안에 이르러서는 시돈으로 돌아 7두로 견고한 성에 이르고 히위 사람과 가나안 사람의 모든 성읍에 이르고 유다 남쪽으로 나와 브엘세바에 이르니라 8그들 무리가 국내를 두루 돌아 아홉 달 스무 날 만에 예루살렘에 이르러 9요압이 백성의 수를 왕께 보고하니 곧 이스라엘에서 칼을 빼는 담대한 자가 팔십만 명이요 유다 사람이 오십만 명이었더라(5-9)

다윗은 세금을 징수하고 군을 정비하는 국가를 합리적으로 경영하려는 마음과 통치권을 자랑하고 강화하려는 두 마음이 같이 있었습니다. 하늘의 와과 관계없이 행하던 다윗은 죄의 결과가 급습해오기 전에 성찰하고 엎드립니다. 주님께서는 죄 중에서라도 겸손히 엎드리면 거절하지 않으시고 소통하십니다.

(1) 인구조사 과정(5-8)

다윗의 강한 주장으로 인구조사를 시행한 요압과 군대장관들의 여정은 먼저 요단 동편 지역에서 시작해서 아르논을 따라 나라의 동남쪽 끝 아로엘로 갔다가 그 다음에 북쪽 제일 끝인 단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북서쪽을 향해 시돈의 페니키아 해안에 이르고 그 다음에 남쪽으로 이동하여 나라의 주요 부분들을 통과하여 두로와 히위 사람들과 가나안 사람들이 사는 지역에 이르렀고 마지막으로 남쪽 끝인 브엘세바로 갑니다.

(2) 인구조사 결과(9)

이렇게 다윗이 당시에 다스리고 있던 지역을 전부 조사한 결과 이스라엘 사람이 팔십만 명이고 유다 사람이 오십만 명이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유다가 별도로 기록된 것은 각기 독립된 행정 조직과 군사 조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으로 여겨집니다.

 

다윗을 징계하신 여호와(10-17)

하나님께서 긍휼의 하나님이신 것을 믿는 자는 그 긍휼을 의지해 죄를 범했을 때에 회개합니다. 회개는 자기의 구체적인 죄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회개할 때만 보혈의 은총을 깊이 누릴 수 있다. 우리가 누리는 은혜의 핵심은 회개에 있습니다. 항상 같은 죄에 넘어져 또다시 회개하기 민망하더라도 회개를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회개를 다음 기회로 미루지 말라. 회개할 기회를 주셨는데 회개하지 않는 것은 매우 악한 일입니다.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운다는 것은 죄를 짓지 않는 것일 뿐만 아니라 회개하고 다시 일어서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10다윗이 백성을 조사한 후에 그의 마음에 자책하고 다윗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 11다윗이 아침에 일어날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다윗의 선견자 된 선지자 갓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12가서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게 세 가지를 보이노니 너를 위하여 너는 그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 내가 그것을 네게 행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 13갓이 다윗에게 이르러 아뢰어 이르되 왕의 땅에 칠 년 기근이 있을 것이니이까 혹은 왕이 왕의 원수에게 쫓겨 석 달 동안 그들 앞에서 도망하실 것이니이까 혹은 왕의 땅에 사흘 동안 전염병이 있을 것이니이까 왕은 생각하여 보고 나를 보내신 이에게 무엇을 대답하게 하소서 하는지라 14다윗이 갓에게 이르되 내가 고통 중에 있도다 청하건대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니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아니하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15이에 여호와께서 그 아침부터 정하신 때까지 전염병을 이스라엘에게 내리시니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백성의 죽은 자가 칠만 명이라 16천사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그의 손을 들어 멸하려 하더니 여호와께서 이 재앙 내리심을 뉘우치사 백성을 멸하는 천사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 하시니 여호와의 사자가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 곁에 있는지라 17다윗이 백성을 치는 천사를 보고 곧 여호와께 아뢰어 이르되 나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거니와 이 양 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하건대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을 치소서 하니라(10-17)

아무리 용서를 빌고 용서를 받아도, 왕이 행한 죄의 결과는 참담합니다. 가문마다 장자를 잃은 애굽에서의 애곡처럼 전국을 뒤덮었습니다. 죽음의 쓰나미 앞에서 다윗은 깨닫습니다. 제아무리 왕이라 해도 실은 자기 죄의 결과조차 책임질 수 없는 연약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1) 다윗의 회개(10)

이렇게 반대를 무릅쓰고 인구조사를 마친 후에 다윗은 이 일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마음에 걸렸다는 표현은 사울의 옷자락을 벤 것이 마음에 걸렸던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삼상 24:6). 이때 다윗은 자신이 사울을 죽이려는 마음을 먹은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다윗은 인구조사를 한 것이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는 군사력을 의지하려고 한 잘못된 행동이라는 것을 깨닫고 죄책감을 느낀 것입니다. 그리고 죄라는 것을 깨닫자 바로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고 죄를 사해달라고 요청하며 자기가 어리석었음을 고백합니다. 이 사건이 밧세바와 간통하기 이전인지 이후인지 알 수 없지만, 밧세바 때에는 나단의 지적을 받고서야 비로소 죄를 지었다는 것을 시인하고 용서를 구했지만, 이때는 스스로 잘못을 바로 깨닫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한 것을 보면 아직은 영적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신의 행동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지 그른지 분별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2) 여호와의 명령(11-14)

이렇게 다윗이 회개하는 모습에 하나님께서는 갓 선지자를 다윗에게 보내셔서 회개에 합당한 벌 세 가지를 제시하시고 이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게 하십니다. 회개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벌을 받는 모습은 밧세바 사건에서도 동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잘못을 용서하셔서 다윗을 버리지 않으시고 계속 그를 하나님의 자녀로, 이스라엘의 왕으로 두셨습니다. 하지만 그에 합당한 벌은 감당하게 하십니다. 세 가지 벌은 첫째는 이스라엘 땅에 7년 동안 기근이 오는 것이고, 둘째는 석 달 동안 왕위에서 쫓겨나는 것이고, 셋째는 3일 동안 이스라엘에 전염병이 도는 것입니다. 뒤로 갈수록 날수가 줄어드는 것은 재앙의 강도가 점점 약해지는 것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제안에 다윗은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신 분이기 때문에 자신이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사람의 손에 빠지기를 원치 않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반역자에게 석 달 동안 왕위를 빼앗기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재앙을 받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여기서 다윗이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긍휼이 크신 분이지만 권능도 크시다는 것입니다.

(3) 전염병의 창궐(15)

다윗의 선택대로 하나님께서는 다음 날부터 정한 때까지 전염병을 이스라엘에 보내셨는데, 그 때 죽은 자가 칠만 명이었습니다.

(4) 여호와의 천사(16-17)

이 기간은 3일을 다 못 채운 기간으로 16절에서 천사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손드는 것을 여호와께서 막으십니다. 마지막 날 예루살렘에 재앙을 내리려고 계획하셨지만, 너무나 많은 사람이 죽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마음이 편치 않으셨던 것입니다. 16절에서 ‘뉘우치다’로 번역된 단어는 ‘후회하다’. ‘유감스럽게 생각하다’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는 많은 백성의 죽음이 애석하시고 속상하신 것입니다. 처음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악 때문에 그들을 말하기 위해서 이런 계획을 하였고, 이스라엘과 다윗에 대한 별을 시행하토지만 막상 배성의 죽음에 마음이 아프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17절은 16절보다 시간적으로 이전으로 하나님 개서 멈추시기 전에 다윗은 전사가 재앙으로 백성들을 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로 인해 다윗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백성들이 죽어 나가는 것을 보면서 자신의 선책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뼈저리게 깨닫습니다. 여기서 다윗과 하나님께서 같은 마음을 품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을 책임지는 지도자가 가져야 할 마음입니다. 그리고 그는 백성을 대신해서 자신과 자신의 집을 발해달라고 요청합니다. 다윗은 왕으로 지낸 시간이 오래되자 왕의 본질이 무엇인지 잊고 권력에 심취해 있었고, 더 큰 권력을 갖고 싶은 욕망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인구조사를 통해 이스라엘의 권력의 핵심은 여호와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의 죽음을 통해 백성이 왕을 위한 존재인 것이 아니라 왕이 백성을 위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왕은 특성의 구원자이며 목자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해서는 안 됩니다. 다윗은 요압의 반대를 물리치고 인구 조사를 강행합니다. 칼을 빼는 자의 숫자를 센 것을 볼 때, 징병과 조세를 위한 조사였습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구원이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려있지 않음을 부정하고 자기 힘을 의지하려는 불신앙이며 열방의 왕과 귀족들이 백성을 억압적으로 통치하는데 사용한 수단이었습니다. 우리도 여호와의 힘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인간적 힘을 모으는데 몰두하고 있는 모습이 없는지 자신을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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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04-01)


값없이 주신 선물인 이신칭의

로마서 4장 1-12절


선물은 그 가치를 아는 사람에게 더욱 진가를 발합니다. 하지만, 다이어몬드와 같은 귀중한 선물을 받아도 그 가치를 모르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마 7:6)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에 대한 선물을 받았습니다. 당신은 구원의 위대한 가치를 깨닫습니까? 그리고 그 가치를 인정하십니까?

 

사도 바울은 믿음의 정의에 대해 아브라함을 통해서 정의합니다. 구약의 대표적인 인물인 아브라함을 통해 믿음에 대해 설명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조상 아브라함이 의롭다 인정을 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대해 행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수를 지적하면서 믿음은 하나님께서 먼저 의롭다 하심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 사실은 믿음의 법이 실효성 있다는 점을 강하게 보여줍니다.

 

믿음을 통해 의롭게 된 아브라함(1-3)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자신의 우월성을 주장하려 듭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을 보고 의롭다 하십니다. 바울은 이제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의롭게 되는지를 설명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자랑의 문제에 대한 답을 해주고 있습니다.

1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2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1-3)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복음의 원리를 설명합니다. 그는 아브라함을 통해 복음을 설명합니다. 아브라함을 예로 든 이유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혈통적으로는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 되고, 믿음으로는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인간의 역사 위로 들어 났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결과입니다. ‘의’는 약속이 잘 지켜지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고, ‘신실함’ 또는 ‘믿음’은 ‘그 약속을 잘 지키는 행동이나 태도’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언약을 전제로 한 표현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 언약을 지키시기 위해서 하나님 편에서 신실한 표현으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을 통해 구원으로 나타났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바울이 전하고 싶은 복음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모든 믿는 자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서 신실하게 하나님의 은혜에 화답하는 자들, ‘의롭다’고 만드실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세우기 전에, 반드시 하나님의 신실하신 표현으로서 ‘예수님의 신실하심’, ‘예수님의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 순서가 바뀌면 복음이 아닙니다. 이미 1:18절에서 3:20까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선언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많은 증거들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구약에서 의인 아브라함과 노아 그리고 엘리야가 존재할 수 있었겠습니까! 바울은 바로 ‘예수님의 믿음’, ‘하나님의 의’인 예수님의 신실하심 때문에 이런 믿음의 사람들이 나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설명을 하니, 세 가지 질문이 제기 될 수 있었습니다. 먼저 ‘믿음을 자랑할 수 있느냐?’입니다. 당연히 자랑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하심)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지켜서 얻어낸 의로움이 아니라 예수님의 신실하심에서 나오는 의로움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본문에서 더 자세히 풀어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⑴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부르는 근거 질문 제기(1)

사도 바울은 그 연장선상에서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라고 반문합니다. 이 문장을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 된 것이 육신을 따른 것이었다고 우리가 말하리요?’로 번역한 것이 좋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행위가 먼저가 아니라는 것을 아브라함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아브라함은 대단히 중요한 인물입니다. 이방인들은 구원의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을 베푸심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대부분 알고 인정합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에 대한 문제가 심각해졌습니다. 바울은 4장 전체에서 하나님께서 열방을 부르시는 방법이 처음부터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 있었다는 점을 논증하기 위하여 아브라함 이야기를 불러온 것입니다.

⑵ 믿음으로 의롭다 함 받은 아브라함(2-3)

이제 바울은 아브라함이 어떻게 의롭다 함을 받게 되었는지 묻습니다. 분명히 어떤 사람의 ‘행위’ 혹은 ‘일’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강조입니다. 그는 유대인들도 동일하다고 주장합니다. 유대인의 조상인 아브라함도 행위나 율법이 아닌 믿음을 통해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당시 유대 랍비들은 아브라함이 그의 후손들에게도 유효할 만큼 행위에 있어서 매우 의로웠다고 가르쳤습니다. 자신들은 믿음으로 위대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어떻게 의롭게 되었는지를 바로 알면, 유대인들도 복음에 수긍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만약 아브라함이 자기 믿음의 행위에서 의롭다 함을 받았으면, 자랑할 만한 것이 있을 것이라고 전제합니다. 3:30에서 바울은 이미 할례가 하나님 백성의 외적 표지가 아님을 천명하고, 다시 4:1에서 그 ‘육신의 표시’를 따라 우리가 아브라함의 후손되었는지 질문합니다. 이런 점에서,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행위’는 구체적으로는 할례를 지칭하는 바와 같이, 아브라함의 의롭게 된 ‘방법’은 결정적으로 그가 의롭게 된 ‘때’에 달려 있습니다. 즉, 할례 받기 ‘이전’에 그가 보인 믿음을 통해 이미 의롭다 함 받았다는 것입니다. 갈대아 우르에 있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의해서 선택되어 ‘땅’과 ‘자손’에 대한 약속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의지와도 어떤 ‘업적’이나 ‘일’과도 상관없이 주어진 선물이라는 점에서 ‘은혜’입니다. 이제 바울은 독자들이 인정하거나 물을 수 있는 권위의 문제를 언급합니다. 그래서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라고 묻습니다. 그는 창세기 15장을 언급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의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질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일반적인 은혜의 약속을 듣고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반응하였습니다. 창세기 15:6에 의하면, 이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여기셨습니다. 4장 전체에서 바울이 강조하려는 것은, 이 모든 일들이 아브라함이 할례 받기 전에 발생하였다는 점입니다. 창세기 15:6의 전후 문맥은 ‘의로움’이라는 단어의 이해에 도움을 줍니다.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의로움’이라는 단어는 창세기 15:6에서 처음 등장하지만, 그 순간이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관계가 시작된 순간은 아니라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창세기 12장에서 부름 받아 땅과 자손을 얻을 약속과 열방을 위한복의 통로가 될 것이라는 소명을 받은 아브라함은 이미 같은 장에서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창세기 12:4), 벧엘 근처에서 장막을 치고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창세기 12:8). (그리스도인들 중 상당수는 아브라함 이야기를 거꾸로 읽습니다. 즉, 창 15:6의 믿음을 통해 의로움을 얻는 구원의 첫 관문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고, 오히려 창 12장에서 아비 집을 떠나는 장면은 어려운 순종의 결단을 위한 말씀으로 사용합니다.) 그 증거로 3절에서는 창세기 15장 6절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을 근거로 들어서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곳의 ‘의로움’이라는 단어도 아브라함이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의 약속 안에 신실하게 머물러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하튼, 아브라함이 할례 받기 이전에 믿음으로 의롭다 함 받았다는 사실은, 로마서 3:28의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된다’는 선포를 아브라함 이야기를 통해 재확인한 것입니다. 이 내용에 전말은 아브라함은 아무리 기대려도 자녀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신에게 충성스러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양자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자손이 아브라함의 몸에서 난 아들을 통해서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질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의로운 모습이 있었기 때문에 약속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에 그것을 아브라함은 믿었다는 것입니다. 사역에 대한 주인이 바로 아브라함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에 대해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 바울의 요점은 하나님께서 열방을 부르는 방법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방법과 동일하다는 점입니다. 성도들 중에는 사람들과 비교해서 구원에 대한 우월성을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구원에 대한 자부심이 아니라 더 나가서 이 구원이 교만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절대로 구원은 우월한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구원을 받은 것뿐입니다.

 

믿음을 통해 죄인을 의롭게 하신 하나님(4-8)

사람들이 일하고 품삯을 받는다면 그것을 당연한 것이겠지만, 일을 하지 않았는데도 삯을 받았다면 그것은 분명 선물이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행함과는 관계없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의롭다고 안정해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값없이 죄 사함의 복을 선물해주십니다.

4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5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6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7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8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4-8)

사도 바울은 앞 절에서 인용한 말씀의 중요성을 이야기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서는 절대로 사람의 행함에 근거하지 않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부르심과 선택하심으로 의롭게 여기신다는 점을 부각시킵니다.

⑴ 불경건한 자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얻는 의로움(4-5)

사도 바울은 다윗의 경우를 들어 설명합니다. 선택받은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알 수 있도록 예를 들어 설명하십니다. 이제 4절에서 상업적 비유 하나를 듭니다. 어떤 일꾼이 일을 하고 상급(개역개정에 ‘삯’이라 번역)을 받았다면, 그것은 선물로 주어지는 은혜가 아니라 보수를 받은 것이라는 상식적인 이야기입니다(4). 재미있는 것은, 4절에서 바울이 ‘미스토스(μισθος)’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 단어는 창세기 15:1 칠십인역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과 자손이라는 상급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는 점입니다. 그 땅과 자손의 상급을 얻는 데 있어서 아브라함이 공헌을 하였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라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한 ‘대가’ 혹은 ‘보수’가 됩니다. 아브라함이 장차 받을 상급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였고, 아브라함은 그것에 ‘믿음’으로 반응하였을 뿐입니다. 5절은 4절의 상업적 비유와 바울의 요점을 연결시킵니다. 아브라함도 ‘일하지 않는 자’였습니다. 경건하지 않은 자, 또한 비유 속의 일하지 않는 자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자신들이 한 일에 대한 ‘대가’가 아니라 일방적인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대하는 방식임을 말하고자 합니다. 그 은혜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올바르게 반응하는 자를 하나님은 의롭다고 인정하십니다. 문맥의 흐름을 볼 때, ‘경건하지 않은 자’란 표현을 통해 바울은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을 염두에 두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바울의 요점은 이방인들에게뿐 아니라 아브라함에게도 하나님은 믿음이라는 반응만을 보시고 의롭다 여기셨을 뿐, 할례와 율법 때문에 의롭다 여기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⑵ 죄사함을 받은 자의 복에 대한 다윗의 고백(6-8)

사도 바울은 6절 이하에서, 이 동일한 진리를 시편 32:1-2에 기록되어 있는 다윗의 언어들을 통해서 더 보편화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다윗도 범죄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는 간음하고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 살인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께 단순하게 용서를 구할 때 용서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경험에 의해서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2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2)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아무런 수고 없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사람들을 가리켜 복이 있는 자들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어떠한 사전 행동이나 공헌 없이 은혜와 선물로 죄인을 당신의 백성으로 부르십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들의 복에 대해서 이미 다윗은 노래했습니다. 6절에서 우리가 눈여겨볼 것은 바울은 어떤 경우에도 ‘믿음’(신뢰이든, 신실함이든)을 (인간의) ‘일’에 포함시키지 않고, 하나님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 여기고 있을 뿐이라는 점입니다. 로마서 3:21-26에서 결정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통해 임한 죄 사함의 은혜를 선포한 바울은 4:1-8에서 오직 그 은혜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의로움의 지위가 주어진다는 사실을 아브라함 이야기와 다윗의 고백을 통해서 재확인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의로 여기셨던 것처럼 우리의 행위가 아닌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의롭게 여기십니다. 구원에 대해 아무 자격이나 공로도 없는 당신을 의롭다고 인정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리시길 바랍니다.

 

이방인이 받을 구원(9-12)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믿음으로 의롭다 하십니다. 유대인은 그들이 율법을 맡은 것을 자랑하며 유대민족의 우월성을 과시합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기 전에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이 구원은 할례 때문에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9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10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 11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2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니라(9-12)

아브라함이 이방인처럼 무할례자 신분에 있었을 때,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여김을 먼저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것은 믿음의 징표로써 할례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할례 자체가 아니라 믿음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⑴ 무할례시에 의롭다 함 받은 아브라함(9-10)

바울은 이미 3:30에서 할례가 하나님 백성의 외적 표지가 될 수 없음을 이야기했습니다(로마서 2:25-29;3:29-30). 로마서 4장에서 바울은 언약 백성의 표지가 오직 ‘믿음’임을 아브라함 이야기를 불러와서 본격적으로 논증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은 앞의 논의를 다시 정리한다(9). 아브라함도 할례 받기 전에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으므로, 할례와 무할례가 아니라 믿음의 소유 여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⑵ 믿음의 조상이 된 아브라함(11-12)

10-12절에서 바울은 이를 재미있는 논리로 설명합니다. 첫째,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은 할례 시가 아니라 무할례 시였습니다(10). 둘째, 할례의 표지를 받은 것은 무할례 시에 믿음으로 이미 받은 의로움을 인치기 위한 것일 뿐이었습니다(11). 셋째,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그가 보여준 믿음의 발자취를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믿음과 의로움의 조상이 되었습니다(12). 이상의 논리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당연하게 들릴지 모르나, 창세기 아브라함 이야기의 원래 문맥이나 구약성경 전체의 문맥 속에서 비추어 볼 때, 의문점이 생깁니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기 이전에 의롭다 인정받은 것은 분명하나, 창세기 아브라함 이야기 속에서 그 시간적 순서들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 자손의 자격으로 할례를 반드시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아브라함 자손의 모든 이야기가 그리스도를 통해 놀랍게 성취되고 완성되었다는 해석의 출발점에서 갈라디아서 3:16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브라함 자손은 그리스도 한 사람뿐입니다. 로마서 3:21-26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예수 그리스도가 아브라함 자손의 소명을 한 몸에 짊어지고 그의 언약적 신실하심을 통해 그 소명을 성취하셨다. 아브라함 자손의 이야기는 결국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자들이 아브라함 자손입니다. 이 사실은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들도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여겨진다는 점을 시사합니다(11). 결국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여김을 받습니다(12).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는 것이 중요하지, 믿을 때의 환경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할례가 아니라 믿음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현재 당신의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으며 그 표시로 할례를 받았습니다. 당신은 혹시 할례와 같이 외적인 종교적 의식이나 행위를 구원받은 백성의 표시로 삼고 나타내지 않습니까?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어느 정도 억울한 정서를 갖고 있습니다. 한 만큼 대접받지 못했다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만은 그런 말을 할 수 없습니다. 한 것이 없는데, 자격이 없는데 먼저 다가와 모든 것을 준비하여 상대해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성도들을 오직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이며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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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11-02)


생명나무 열매를 맺는 삶

잠언 11장 16-31절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심으신 포도나무나 무화과나무로 비유되었습니다(호 10:1; 시 80:8; 렘 24:1-3). 새 이스라엘인 교회도 접붙임을 받은 감람나무로 비유되었습니다(롬 11:17). 이는 은혜에 합당한 풍성하고 실한 열매를 기대하는 표현들입니다. 무릇 하나님의 백성들은 열매 맺는 삶을 살아야 하며, 이는 구원에 속한 확실한 증거입니다(히 6:9, 10).

 

외면의 아름다움이나 힘에 치중하는 것보다는 지혜와 은혜 등 내면의 고결한 성품을 키우는 것이 더 소중합니다. 또한, 재물을 의지하거나 인색하게 굴지 말고, 하나님이 재물의 주인이심을 인정하고 구제와 선을 쌓는 데 힘써야 합니다. 지혜와 인자한 성품, 너그러운 마음과 후한 손길은 자신과 타인을 이롭게 하며 하나님께 기쁨이 됩니다.

 

호의와 은혜를 베푸는 삶(16-22)

은혜의 사람, 인자한 사람은 영광을 얻고 자기 영혼을 이롭게 하지만 폭력적이고 잔인한 방법으로 재물을 모으는 사람은 도리어 자기 몸을 해롭게 합니다. 이는 악인의 재물은 바람같이 헛된 재물이 되며 악인의 끝은 사망이 되지만, 공의를 추구하는 의인은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 자신뿐만 아니라 자손까지도 하나님의 구원을 경허하게 될 것입니다.

16유덕한 여자는 존영을 얻고 근면한 남자는 재물을 얻느니라 17인자한 자는 자기의 영혼을 이롭게 하고 잔인한 자는 자기의 몸을 해롭게 하느니라 18악인의 삯은 허무하되 공의를 뿌린 자의 상은 확실하니라 19공의를 굳게 지키는 자는 생명에 이르고 악을 따르는 자는 사망에 이르느니라 20마음이 굽은 자는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행위가 온전한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 21악인은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나 의인의 자손은 구원을 얻으리라 22아름다운 여인이 삼가지 아니하는 것은 마치 돼지 코에 금 고리 같으니라(16-22)

잠언 11:1-15은 정직한 경제생활과 언어생활에 대한 금언이 주를 이루었고, 이제 16-31절에서는 의인과 악인의 보응, 은혜와 폭력의 사람, 구제, 재물을 의지하지 않는 삶에 관한 금언을 소개합니다. 특히 16-22절은 ‘유덕한 여자’로 시작하여 아름다운 여자로 마치며 그 중간에는 의인과 악인을 대조하는 금언이 들어있습니다. 23-31절은 재물을 의지하지 말고 구제하라는 조언과 의인의 보상에 대해 언급하는 금언이 대부분입니다. 먼저 16, 17절은 은혜와 인자가 있는 사람과 포악하고(근면한 남자로 번역됨) 잔인한 사람을 대조한 금언으로써, 서로 연결됩니다. 16절에서는 이들의 성품과 행동으로 남들에게서 얻는 반응을, 17절에서는 그것들이 자기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을 진술합니다. 은혜롭고 인자한 사람은 다른 이로부터 존경을 받고 영광을 얻게 되며, 자기 자신도 이롭게 합니다. 그러나 폭력적이고 잔인한 자는 재물을 손에 쥘 수는 있으나 스스로 화를 불러오게 됩니다. 16, 17절에서 ‘폭력적인 남자’, ‘잔인한 남자’와 ‘인자한 남자’가 서로 대조되었다면, 이제 21절의 ‘아름다운 여인’은 16절의 ‘은혜로운 여인’과 대조됩니다. 남자의 경우는 행동(힘)과 성품이 대조되며, 여자의 경우는 성품과 외모(아름다움)가 대조됩니다. 이 구절들을 종합하면, 첫째, 지혜와 인자한 성품을 가진 자가 본인과 남에게 선한 유익을 줍니다. 둘째, 아름다움과 힘이 있다 하더라도 분별력과 인자함이 없다면 그것은 마치 돼지 코에 금 고리를 달아주는 격이 됩니다. 그러므로 외면적인 수려함이 아닌 내면에 있는 지혜와 고결한 성품이 더 값지다는 것을 인식하고, 이와 같은 내면의 수려함을 키우고 계발하는 것이 더 바람직합니다. 18-19절은 의를 뿌리고 의를 확고히 지키는 자는 확실한 보상과 생명을 얻으나, 악을 뒤쫓는 자는 거짓 소득을 얻고 사망에 이르게 된다고 선언합니다. 즉, 삶에서 무엇을 추구하고 실행하는지에 따라 생명과 사망이라는 대조격인 결과에 이르게 된다는 뜻입니다. 20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마음이 비뚤어진 자를 혐오하시나 행위가 온전한 자는 기뻐하신다고 밝힘으로써 하나님과 의인, 하나님과 악인 사이의 관계를 요약합니다. 하나님의 혐오 대상과 기름의 대상을 언급하는 금언은 11:1; 12:22; 16:8에도 나오는데, 모두 정직과 온전함이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으로 소개되었습니다. 이런 성품은 바로 하나님을 대표하는 성품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이 자신의 성품을 닮으며 성장하기를 원하십니다.

 

재물을 의지하지 않는 삶(23-31)

지혜로운 자는 재물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알며 많고 적용과 관계없이 선물로 받았음을 인정합니다. 따라서 재물을 모으고 쓰는 일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소유권과 사용권을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인간적인 계산만으로 악착같이 모으면 많아지고 나누면 가난해진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나눔의 구제는 도리어 하나님의 풍요를 누리는 길이 됩니다.

23의인의 소원은 오직 선하나 악인의 소망은 진노를 이루느니라 24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25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 26곡식을 내놓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에게 저주를 받을 것이나 파는 자는 그의 머리에 복이 임하리라 27선을 간절히 구하는 자는 은총을 얻으려니와 악을 더듬어 찾는 자에게는 악이 임하리라 28자기의 재물을 의지하는 자는 패망하려니와 의인은 푸른 잎사귀 같아서 번성하리라 29자기 집을 해롭게 하는 자의 소득은 바람이라 미련한 자는 마음이 지혜로운 자의 종이 되리라 30의인의 열매는 생명 나무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 31보라 의인이라도 이 세상에서 보응을 받겠거든 하물며 악인과 죄인이리요(23-31)

23-31절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때 23-27절은 ‘선’으로 시작하여 선으로 마치며 그 중간에는 구제를 격려하는 금언이 소개되었습니다. 28-31절은 재물을 의지하지 말라는 조언과 의인이 받는 보상에 대한 금언이 기록되었습니다. 먼저 23, 27절에서는 의인과 악인이 삶에서 추구하는 대조적인 길과 그로 인한 결과를 언급합니다. 즉, 의인은 선을 기대하며 하나님의 은총을 얻지만, 악인은 악을 찾으므로 악과 하나님의 진노를 기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위와 같은 삶은 24-26절, 28-29절에서 특별히 재물과 관련하여 설명됩니다. 특히 24-26절은 구제에 대한 금언인데, 이 금언들은 구제에 있어 기본적인 원리, 바람직한 기본 정신, 구세의 올바른 방법과 결과를 설명합니다. 28-29절은 24-26절의 구제와 관리하며 재물을 의지하지 말라고 교훈합니다.

24절은 구제의 기본 원리로서 구제와 과도히 아끼는 행위가 각각 가난과 부를 불러오지 않는다는 것과 구제의 배후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음을 말해줍니다. 자신에게 있는 것을 남에게 너그러이 베풀어도 더욱 부하게 되기도 하지만, 당연히 쓸 것조차 억제하고 아껴도 궁핍해질 수 있습니다. 이제 25-26절은 ‘복’이란 공통단어로 서로 연결되며, 공통적으로 구제의 방법과 결과에 대해 설명합니다. 25절의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문자적으로 축복의 사람입니다. 이 같은 명칭은 남을 도와주고 구제하는 행위가 남을 축복하는 마음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물이 부족한 사람에게 물을 맘껏 마시게 해주거나 농경기에 물이 모자라는 자에게 자기가 모아둔 물을 풍족히 나누어주는(‘윤택하게 하는’) 관대하고 호의적인 행동이 필요합니다. 또한, 추수 때 곡식을 싸게 매점 매석하고 폭리를 취하려 들지 말고, 곡식을 필요한 때에 내놓고 적당한 가격에 팔아서(창 41:53-57) 이웃을 돌보며 바람직한 상거래 활동이 이루어지도록 힘써야 합니다. 이런 자는 그 결과로 본인도 건강과 풍요로움으로 살찌게 되고(24), 축복을 받아 차고 넘치도록 공급을 받게 되며(25). 백성들로부터 칭찬을 듣고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26). 반대로, 인색하게 굴고 이득만 보려는 사람은 자신도 가난해지고(24) 백성들로부터 원성을 들으며(26)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도 없습니다(25),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위의 금언들이 분수에 맞지 않게 무조건 퍼주기를 장려하거나 인색함 같은 어떤 특정한 행동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다만 물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일깨우고 재물을 의지하지 말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교훈은 28절의 “제물을 의지하면 망하지만(문자적으로 ‘떨어지다’), 하나님을 의지다면 나뭇잎에 싹이 돋는다”라는 금언에서 잘 나타납니다. 남을 구제할 때 나의 소유가 줄어든다는 생각은 이성적인 계산이지만, 여기에는 근본적으로 나 자신이 내 소유의 주인이지 주관자라는 인식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소유는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하나님께서 내 물길의 주인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내 재물을 주관하고 조종하실 수 있도록 맡겨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다른 방법으로 나를 축복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 6.38)라고 하시며 물질의 기본적 원리와 결과를 말씀하십니다. 29절은 ‘유산’(‘소득’으로 번역됨)처럼 재물과 관련 있는 단어가 나타나고 25절의 잎사귀와 대조적 비유인 ‘바람’(‘헛된 것’을 의미)이 나타나므로 23-28절과 관련해서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자기가 가진 재물이나 다른 것을 의지하여 집안에 괴로움을 가져오는 자는 바람과 같이 헛된 것을 유산으로 물려받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조차 구제할 수 없어 종의 신분으로 전락하여 지혜자의 종노릇을 하게 됩니다. 30-31절은 의인의 보응에 대해 말하며, 특히 30절은 28절에서처럼 의인을 나무로 비유하고 있으므로 서로 연결됩니다. 재물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가지와 잎사귀만 내는 나무가 아니라 열매를 맺는 생명 나무입니다. 의인은 자신의 성장과 번영을 이루는 것만이 아니라 다른 이에게도 활력과 위안과 치유를 제공합니다. 의인은 또한 지혜로운 사람이므로 다른 사람들을 지혜와 의로 이끕니다(단 1:23 고전 9:19-22: 약 5:20). 그러나 의인이라도 죄를 지으면 살아 있는 동안 그에 마땅한 징계와 심판을 받게 됩니다. 하물며 악인과 죄인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정의는 얼마나 더 하겠습니까?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는 것은 모두의 기도 제목이어야 합니다(빌 1:11; 골 1:10). 은혜에 합당한 열매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히 12:14). 열매 없는 무성한 나무가 말고, 견실하고 풍성한 열매를 맺어 주님의 기쁨이 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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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23-02)


다윗의 용사들

사무엘하 23장 18-39절


 

교회 생활하다 보면 다른 사람들 때문에 상처를 받아서 영적인 침체기를 겪고 있는 경우를 간혹 볼 수 있습니다. 열등감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는 말씀이 우리의 열등감을 부추기는 말씀입니까? 열등감을 방지하거나 극복하는 방법을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본문에는 다윗의 왕국 건설에 지대한 영향을 남긴 용사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무엘하 23:8-39은 다윗의 용사들의 명단으로 이들의 이름과 업적을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군대 지휘관인 세 용사는 각자 뛰어난 기량을 가진 전사들로 블레셋 군대를 훌륭하게 막아내는 전공을 세웁니다. 또한 30인 중에 세 용사는 다윗을 위해 블레셋의 잔을 뚫고 물을 길어 오는 충성심을 보여줍니다. 23:18-23에서는 이들 세 명 중 두 명의 이름과 각자의 업적이 소개됩니다. 그리고 24-39절은 30명의 용사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비새의 업적(18-19)

헌신을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비새와 브나야 두 사람의 업적과 처음 세 용사를 비교하고 있기에 이 사람들이 열등한 것처럼 비칩니다. 하지만 그들이 세운 공이 결코 작지 않습니다. 비교하면 열등감에 빠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헌신을 비교하시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기억하시고 칭찬하시는 분입니다.

18또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아우 아비새이니 그는 그 세 사람의 우두머리라 그가 그의 창을 들어 삼백 명을 죽이고 세 사람 중에 이름을 얻었으니 19그는 세 사람 중에 가장 존귀한 자가 아니냐 그가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나 그러나 첫 세 사람에게는 미치지 못하였더라(18-19)

아비새와 브나야 두 사람의 업적과 처음 세 용사를 비교하고 있기에 이 사람들이 열등한 것처럼 비칩니다. 하지만 그들이 세운 공이 결코 작지 않습니다. 비교하면 열등감에 빠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헌신을 비교하시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기억하시고 칭찬하시는 분입니다.

(1) 아비새의 용맹(18)

여기서 또다시 스루야의 아들이며 요압의 동생인 아비새의 업적이 나옵니다. 그는 21:17에서 다윗을 도와 블레셋 사람들을 죽인 용사로 언급되었는데, 여기서는 좀 더 용맹한 인물로 소개됩니다. 그는 13절에서 언급된 세 명의 용사 중 우두머리로 창으로 삼백 명을 죽이는 놀라운 전투력을 보여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 번 대세 영웅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고, 그들 중에서는 가장 뛰어난 인물입니다. 하지만 첫 번째 세 영웅에는 미치지 못하였는데, 첫 번째 영웅들은 혼자서 팔백 명을 죽이거나 다진 전쟁을 역전시키거나 혼자 들에서 블레 첫 군대를 상대하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첫 번째 영웅들은 직급도 높지만 전투에 있어서도 다윗 부대에서 가장 뛰어난 세 사람으로 평가해야 할 것입니다. 아비새가 속한 두 번째 세 영 그들은 그 다음으로 전투력이 뛰어난 영웅들입니다.

(2) 아비새의 지위와 명성(19)

이것을 보면 전투력에 있어서는 아비새가 요압보다 뛰어난 사이며 다윗에게 더 충성스러운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반면에 요압은 다윗의 용사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는데 그는 다윗에게 충성한 만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브나야의 업적(20-25)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한 자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전투에 혁혁한 공을 세운 부하들의 이름이 계속 이어집니다. 대다수의 이름이 낯섭니다. 하지만 굳이 그들의 이름을 지루하게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그들을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건강한 공동체는 헌신자들을 귀하게 여기고, 그들을 기억해 줌으로 세워집니다.

20또 갑스엘 용사의 손자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이니 그는 용맹스런 일을 행한 자라 일찍이 모압 아리엘의 아들 둘을 죽였고 또 눈이 올 때에 구덩이에 내려가서 사자 한 마리를 쳐죽였으며 21또 장대한 애굽 사람을 죽였는데 그의 손에 창이 있어도 그가 막대기를 가지고 내려가 그 애굽 사람의 손에서 창을 빼앗아 그 창으로 그를 죽였더라 22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가 이런 일을 행하였으므로 세 용사 중에 이름을 얻고 23삼십 명보다 존귀하나 그러나 세 사람에게는 미치지 못하였더라 다윗이 그를 세워 시위대 대장을 삼았더라(20-25)

전투에 혁혁한 공을 세운 부하들의 이름이 계속 이어집니다. 대다수의 이름이 낯섭니다. 하지만 굳이 그들의 이름을 지루하게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그들을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건강한 공동체는 헌신자들을 귀하게 여기고, 그들을 기억해 줌으로 세워집니다.

(1) 브나야의 용맹(20-21)

20-25절에서는 브나야의 업적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는 갑스엘에 거하는 용사의 후손으로 여호야다 아들이며 여러 가지 많은 일들을 한 사람입니다. 우리말에서는 ‘용맹스러운 일’이라고 하여 군사적인 부분만을 강조하여 번역하고 있지만, 직역하면 ‘많은 일’입니다. 이것은 그의 군사적인 일뿐만 아니라 그 외의 다양한 일들을 포함합니다. 다양한 일을 했다고 번역하는 것이 정당한 이유는 다른 용사들은 전쟁 이야기만 언급하고 있는 반면 나는 사자를 사냥한 일도 공적으로 언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브나야의 업적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뛰어난 모압 용사 둘을 죽인 것입니다. 아마도 일대일 대결을 통해 모압에서 아주 유명한 용사를 죽인 것으로 보입니다. 둘째, 눈 오는 날 사자를 죽인 것으로 눈 오는 날은 산이 미끄럽고 움직이기 힘든 데 이런 악천후에도 사자 사냥에 나섰고 사자를 몰아 구덩이에 빠뜨린 뒤에 사자를 직접 죽인 것입니다. 아무리 구덩이에 빠지고 그물에 걸려있다고 하더라도 구덩이에 들어가 화가 나서 으르렁거리며 몸부림치는 사자를 죽이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브나야의 업적에 기록된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사자를 염소 새끼 찢듯이 찢은 삼손의 힘과 비교됩니다. 첫 번째 세 용사 중 한 명은 홀로 팔백 명을 죽임으로 삼손과 비슷한 괴력을 보여주었지만, 두 번째 세 용사는 삼손의 힘에 훨씬 못 미친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업적은 용모와 풍채가 매우 좋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입니다. 이 업적은 일대일 결투에서 이룬 성과로 보입니다. 뛰어난 풍채를 가졌다는 것은 골리앗과 같이 큰 덩치를 가진 것을 의미합니다. 애굽인은 골리앗처럼 제대로 무기를 갖춘 반면 나는 막대기를 들고 나갑니다. 이런 모습은 완전 군장을 한 거인 골리앗 앞에 막대기와 물매만을 들고 나간 다윗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그리고 나야도 오히려 애굽인의 창을 빼앗아 그 창으로 애굽인을 죽입니다. 이런 연상은 물매만을 들고 나간 다윗을 도우셨던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나야와도 함께하셨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2) 브나야의 지위와 명성(22-23)

브나야가 이런 세 가지의 놀라운 업적을 이루었기에 세 용사의 명단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고 평가합니다. 23절에서 용사들의 등급을 정하는데, 가장 뛰어난 용사는 첫 번째로 언급된 영웅들이고, 그 다음이 두 번째로 언급된 용사들이고, 그 다음이 30명의 용사들입니다. 이렇게 다윗에게는 많은 영웅들이 있었고 다윗은 이들과 함께 전쟁하고 적들을 물리쳐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평화를 가져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왕으로 세우신 다윗에게도 많은 능력과 힘을 주셨지만 그를 돕는 많은 용사들과 함께 그 일들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다윗의 옆에 이렇게 훌륭한 용사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늘 도움의 손길이 있으며 함께할 동료들을 보내주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은 혼자서가 아니라 같이 해나가는 것이며 같이 해나갈 때 그 안에 사랑과 은혜가 더욱 넘치게 됩니다.

 

다윗의 30인 용사의 이름(24-39)

우리는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다윗의 충성스런 부하들 중 맨 마지막에 우리아가 언급됩니다. 우리아는 다윗의 연약한 모습을 상징하는 이름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의 이름을 기록함으로 다윗의 연약함을 인정합니다. 연약함은 감춘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인정할 때 당당해질 수 있습니다.

24요압의 아우 아사헬은 삼십 명 중의 하나요 또 베들레헴 도도의 아들 엘하난과 25하롯 사람 삼훗과 하롯 사람 엘리가와 26발디 사람 헬레스와 드고아 사람 익게스의 아들 이라와 27아나돗 사람 아비에셀과 후사 사람 므분내와 28아호아 사람 살몬과 느도바 사람 마하래와 29느도바 사람 바아나의 아들 헬렙과 베냐민 자손에 속한 기브아 사람 리배의 아들 잇대와 30비라돈 사람 브나야와 가아스 시냇가에 사는 힛대와 31아르바 사람 아비알본과 바르훔 사람 아스마웻과 32사알본 사람 엘리아바와 야센의 아들 요나단과 33하랄 사람 삼마와 아랄 사람 사랄의 아들 아히암과 34마아가 사람의 손자 아하스배의 아들 엘리벨렛과 길로 사람 아히도벨의 아들 엘리암과 35갈멜 사람 헤스래와 아랍 사람 바아래와 36소바 사람 나단의 아들 이갈과 갓 사람 바니와 37암몬 사람 셀렉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무기를 잡은 자 브에롯 사람 나하래와 38이델 사람 이라와 이델 사람 가렙과 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24-39)

다윗의 충성스런 부하들 중 맨 마지막에 우리아가 언급됩니다. 우리아는 다윗의 연약한 모습을 상징하는 이름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의 이름을 기록함으로 다윗의 연약함을 인정합니다. 연약함은 감춘다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인정할 때 당당해질 수 있습니다. 이 단락은 다윗의 30인 용사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용사들1(24-28)

24-29절에 언급된 사람들은 대부분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 근처의 사람들로 다윗을 지지하던 유다 지파 사람들과 베냐민 사람들이 먼저 언급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요압의 아우 아사헬입니다. 아사헬은 어린 나이에 죽은 요압의 아우로 발이 빠른 것이 장점이었지만, 그것을 믿고 백전노장인 아브넬을 죽이겠다고 뒤쫓다가 아브넬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요압은 아브넬을 죽였고 하마터면 유다와 이스라엘의 통일 왕국을 세우는 것이 물거품이 될 뻔하였습니다. 그 다음 사람은 베들레헴 도도의 아들 엘하난인데 그는 골리앗의 아우라흐미를 죽인 인물입니다(삼하 21:19). 발디 사람 헬레스는 갈렙 부족으로 추측하는데, 발디라는 지명은 유다의 최남단에 있는 벨렛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삼훗과 엘리가는 하룻 사람인데 하롯도 베들레헴 근처의 한 장소로 여겨집니다. 26절의 드고아는 베들레헴에서 북쪽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드고아의 지혜로운 여인이 이곳 출신입니다. 27절의 아나돗은 예레미야의 고향으로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약 5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합니다. 28절의 느도바도 베들레헴 인근 지역입니다.

(2) 용사들2(29-33)

30-39절은 이스라엘 전역에서 온 사람들과 이방인들의 명단으로 이 명단은 다윗이 유다뿐만 아니라 통일 왕국의 왕으로서 이스라엘 사람의 지지와 심지어외국인의 지지도 받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비라돈은 에브라임 지역(삿 12:15)이고, 32절의 사일본은 북쪽으로 이주하기 전 단 지파의 지역입니다.

(3) 용사들3(34-39)

34절에서 엘리암은 길로 사람 아히도벨의 아들인데, 아히도벨은 다윗의 모사로 있다가 압살롬의 반란 때 다윗에게 반역한 인물이며 밧세바의 아버지입니다. 그런데 그의 아들은 다윗에게 충성을 바쳐 다윗의 용사로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아마도 다윗은 아히도벨의 반역에 대해 아내인 밧세바와 아들인 엘리암에게 연좌를 시키지 않고 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다윗은 반란 뒤에 유다 사람들에 대해서도 화친 정책을 폈습니다. 35절의 갈멜은 북이스라엘의 갈멜인지 헤브론 남쪽에 있는 갈멜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39절에는 다윗의 마지막 용사로 헷 사람 우리아가 언급됩니다. 그는 다윗에게 매우 충성스러운 인물이었지만 다윗에게 아내와 목숨을 빼앗긴 비극의 주인공입니다. 우리아의 이름이 다윗의 용사 명단에 있는 것은 다윗의 범죄를 떠올리게 합니다. 우리아의 이름을 보는 순간 우리는 다윗이 밧세바와 간통한 사건과 그 죄를 덮기 위해 우리아를 죽인 사건을 기억하게 됩니다. 이것을 보면 사무엘서는 결코 다윗의 죄를 덮으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허물은 허물대로 보여주고 잘한 것은 잘한 대로 보여주면서 우리에게 어떤 모습으로 살 것인지 묻고 있습니다. 다윗이 우리아를 용사의 명단에 넣은 것은 우리아에 대한 사죄이며 그의 명예를 높이기 위한 것일 것입니다. 비록 자신의 죄로 죽임을 당했지만, 우리아는 다윗 왕국과 하나님의 나라에 충직한 용사였던 것입니다. 용사 명단 맨 앞의 아사헬과 마지막인 우리아는 모두 사무엘서 이야기에 등장하며 모두 죽임을 당한 인물들입니다. 아사헬은 자신의 욕심 때문에 죽은 인물이고 우리아는 무고하게 죽임을 당한 인물입니다. 이렇게 죽임을 당한 인물들을 명단의 앞과 뒤에 놓음으로써 이들의 죽음을 용사로서의 죽음으로 기억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상처를 받는 이유 중 하나는 열등감입니다. 열등감에 빠지지 않으려면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할 때 오히려 그 약점은 강점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헌신을 인정하는 태도 역시 비교에 의한 열등감을 방지하는 태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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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23-01)


다윗의 마지막 찬양:영원한 언약

사무엘하 23장 1-17절


사랑하면 서로 닮습니다. 세월을 견디며 나란히 걸어온 부부는 걸음걸이도, 보폭도 맞습니다. 사랑하기에 서로를 알아가고 맞추다 보면 어느새 취향도, 생각도, 결국 외모도 비슷해집니다. 다윗이 그랬습니다. 전부를 걸고 주님을 사모하더니 닮아버렸습니다. 다윗의 곁에는 그를 닮은 이들도 있습니다.
 
다윗의 사역에 대해 서서히 마감을 지어 가고 있습니다. 누구나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자신의 자녀나 후세대에게 유언을 남깁니다. 창세기 49장에서 야곱도, 신명기 33장에서 모세도 유언을 남겼습니다. 본문은 이제 다윗의 마지막 유언으로 장차 임할 메시아의 나라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마지막 찬양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깊은 뜻에 은혜를 받길 바랍니다.
 

다윗의 마지막 말(1-2)

하나님께서는 왕을 세우셔서 그 나라를 영광으로 이끄십니다. 하나님께서 왕으로 세우신 다윗은 참된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으로 모든 죄를 사하시고 그분의 백성을 불러 모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그분의 통치를 받는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1이는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함이여 높이 세워진 자, 야곱의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 하는 자가 말하노라 2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3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석이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4그는 돋는 해의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하시도다 5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같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나와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하게 하셨으니 나의 모든 구원과 나의 모든 소원을 어찌 이루지 아니하시랴 6그러나 사악한 자는 다 내버려질 가시나무 같으니 이는 손으로 잡을 수 없음이로다 7그것들을 만지는 자는 철과 창자루를 가져야 하리니 그것들이 당장에 불살리리로다 하니라(1-7)
다윗이 평생 갈망하던 한 가지(시 27:4)는 주의 집에서 주의 아름다움을 보며 주를 사모하는 것이었습니다. 빛 되신 주님을 사랑하더니 다윗도 빛을 발합니다. 다윗의 소원이 주님의 소원이 되고, 주님의 소원이 다윗의 소원이 되었습니다.
(1) 자기소개(1-2)
다윗은 자신을 이새의 아들, 높이 세워진 자, 야곱의 하나님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라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높이 세워짐은 비천한 신분에서 벗어나 이스라엘의 왕이며, 열방의 으뜸(머리)이 되었음을 뜻합니다(22:44). ‘기름 부음을 받은 자’(메시아)는 하나님의 철저한 보호와 지원 그리고 특별한 관계의 형성을 뜻하는 칭호입니다. 구약성경은 제사장이나 선지자를 향하여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고 불리는 사람은 왕입니다. 개역개정이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라고 번역한 ‘네임 저미로트 이스라엘’은 문자적으로 이스라엘의 노래(저미로트 중 아름다운(네임 ) 것을 )부르는 자'라는 뜻입니다. 1절에서 “말함이여”와 “말하노라”는 모두 ‘네움’의 번역입니다. 이것은 다윗의 마지막 말이 하나님의 계시로 받은 예언적 말씀인 것을 나타냅니다. 또 여호와의 영이 다윗을 통해 말씀하심 역시 다윗이 자신을 선지자로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다윗의 혀에 있습니다. 선지자들은 흔히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신다’라고 선언함으로써 자신의 예언을 시작합니다(7:5).
(2) 공의로 다스리는 자(3-4)
다윗은 이와 비슷하게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라는 말로 시작하였습니다. 또 다윗은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반석이라 부릅니다. 반석은 의지하고 피할 수 있는 장소이면서, 동시에 영원히 변화하지 않는 불변성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의 이상적인 왕은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고 하나님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야 한다. 공의와 경외함이 통치 원리가 됩니다(렘 23:5). 여기서 다스림은 ‘마샬’ 동사로 표현되었습니다. ‘마샬’은 해가 낮을 다스리고 달이 밤을 다스리듯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따라 지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창 1:16). 그리고 4절은 이상적인 왕이 일어날 때, 하나님의 백성이 누릴 은혜로운 상황에 관해 말합니다.
(3) 다윗의 집(5)
공의로 다스리는 왕이 있을 때, 이스라엘은 구름 없는 아침의 해가 떠오를 때 아침 빛이 비침 같고, 비 온 뒤 광채로 땅에서 나는 풀 같을 것입니다. 아침 빛은 맑고 순수하며 명랑합니다. 비온 뒤 자라난 풀은 윤택하며 상쾌합니다. 다윗은 자기 집이 하나님 앞에서, 즉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속에서, 이와 같다고 확신합니다(5). 다윗의 집에서 의로운 왕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해 영원한 언약을 세우셨으므로(7장), 다윗의 집이 모든 일에 준비되고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다윗의 모든 구원과 모든 소원을 풍성히 이루실 것입니다. 다윗 언약 속에 나타난 다윗의 소원인 성전 건축과 왕권의 영원한 보존입니다. 이루어질 것입니다.
(4) 악인(6-7)
6-7절은 공의로운 자와 대조되는 사악한 자의 운명에 대해 말합니다. “사악한 자”는 하나님의 질서를 따르지 않는 무도하고 불경한 자입니다. 모든 사악한 자는 내쫓아야 할 가시나무 같으니, 손으로 잡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손으로 잡을 수 없다’는 것은 포용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가시나무 같은 사악한 자와 접촉하는 사람은 철과 나무로 된 창을 많이 가져야 합니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반드시 불태워야 합니다. “당장에”는 문자적으로 ‘그 자리에서’입니다.
 

다윗의 용사들(8-17)

믿음의 용사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교회 안에 언약을 믿고 그리스도를 붙잡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들이 바로 하나님이 세우신 믿음의 용사들입니다. 교회는 그런 사람을 알아보고 마땅히 존중해야 합니다. 믿음의 용사들을 분별해 직분자로 잘 세워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쳐서 믿음의 용사를 적극적으로 길러내야 합니다. 다른 것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오로지 복음을 전할 때, 성령님이 그 복음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우리의 이름은 믿음의 용사들의 명부에 올라 있습니다.
8다윗의 용사들의 이름은 이러하니라 다그몬 사람 요셉밧세벳이라고도 하고 에센 사람 아디노라고도 하는 자는 군지휘관의 두목이라 그가 단번에 팔백 명을 쳐죽였더라 9그 다음은 아호아 사람 도대의 아들 엘르아살이니 다윗과 함께 한 세 용사 중의 한 사람이라 블레셋 사람들이 싸우려고 거기에 모이매 이스라엘 사람들이 물러간지라 세 용사가 싸움을 돋우고 10그가 나가서 손이 피곤하여 그의 손이 칼에 붙기까지 블레셋 사람을 치니라 그 날에 여호와께서 크게 이기게 하셨으므로 백성들은 돌아와 그의 뒤를 따라가며 노략할 뿐이었더라 11그 다음은 하랄 사람 아게의 아들 삼마라 블레셋 사람들이 사기가 올라 거기 녹두나무가 가득한 한쪽 밭에 모이매 백성들은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되 12그는 그 밭 가운데 서서 막아 블레셋 사람들을 친지라 여호와께서 큰 구원을 이루시니라 13또 삼십 두목 중 세 사람이 곡식 벨 때에 아둘람 굴에 내려가 다윗에게 나아갔는데 때에 블레셋 사람의 한 무리가 르바임 골짜기에 진 쳤더라 14그 때에 다윗은 산성에 있고 그 때에 블레셋 사람의 요새는 베들레헴에 있는지라 15다윗이 소원하여 이르되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누가 내게 마시게 할까 하매 16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의 진영을 돌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길어 가지고 다윗에게로 왔으나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 드리며 17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나를 위하여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는 목숨을 걸고 갔던 사람들의 피가 아니니이까 하고 마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니라 세 용사가 이런 일을 행하였더라(8-17)
앞에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이들이 다윗의 용사들의 이름입니다. 이 용사들은 다윗이 왕이 되는 과정에서 다윗을 도왔던 사람들입니다(대상 11:10). 주님이 그리워하시는 바를 다윗이 알았다면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주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할 수만 있다면 자기를 아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태도를 늘 지켜보던 부하들도 다윗의 목마름과 그리움을 채워주려고 자기 전부를 겁니다.
(1) 요셉밧세벳(8)
‘요셉밧세벳’이라는 이름의 뜻은 ‘그 자리에 거주하는 자’입니다. 7절 끝에 있던 밧쉐베트가 용사의 이름에 들어간 것은 사악한 자(벨리야알)를 죽이는 요셉밧세벳의 업적을 강조하려는 의도일 수 있습니다. 요셉밧세벳은 다그몬 사람이며, 에센 사람 아디노라고도 불립니다. 역대기에서처럼 다그몬은 학문으로 수정해야 할 것입니다(대상 11:11). 요셉밧세벳은 야소암이 본래 이름일 것입니다(참조, 대상 11:11 대상 272, 32). 아마도 7절 마지막 단어 밧쉐베트를 고려하여 야소브(요셉)-암을 요셉-밧세벳으로 수정했을 것입니다. 요셉밧세벳은 세용사의 두목이었으며, 한 번에 팔백 명을 죽였습니다.
(2) 엘르아살(9-10)
아호아 사람 도대(=도도)의 아들 엘르아살이 소개됩니다(9). 그는 다윗과 함께한 세 용사 중 하나였습니다. 역대기는 다윗이 용사들과 함께 있던 장소가 바스담밈이라 말합니다. 바스담밈은 골리앗이 등장했던 소고와 아세가 사이의 에베스담밈을 가리킬 가능성이 있습니다(삼상 17:1). 블레셋 사람들이 싸우려고 거기 모였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퇴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세 용사가 남아서 상대를 조롱하면서 싸움을 돋우었습니다. 그리고 엘르아살이 일어나서 블레셋을 치는데, 그의 손이 피곤해서 칼에 들러붙기까지 싸웠습니다. 그날 여호와께서 큰 구원을 베푸셨으므로, 백성들이 돌아와 그의 뒤를 따르며 노략질할 뿐이었습니다.
(3) 삼마(11-12)
하랄 사람 아게의 아들 삼마가 소개된다(11절). 블레셋 사람들이 무리(하야)를 지어 녹두나무가 가득한 한쪽 밭에 모이니, 이스라엘 백성이 도망하였다. 삼마가 그 밭 가운데 서서 그 밭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빼앗고(나찰 빼앗다), 블레셋 사람들을 죽였다. 여호와께서 큰 구원을 베푸셨다.
(4) 세 명의 용사(13-17)
이들은 30명의 용사 중 세 명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30명의 용사는 다윗의 핵심적인 군사들로 그 명단은 24-39절에 나옵니다. 그리고 여기서 세 사람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지만, 이들에 대해서는 18-23절에서 이들의 이름과 업적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다윗이 아둘람 굴 혹은 산성에 자리 잡고 있을 때로 다윗이 아직 왕이 되기 전 사울을 피해 아둘람으로 도망하였을 때의 일입니다. 30인의 두목 중 세 사람이 추수 때에 아둘람 굴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갔습니다. 이 세 사람은 앞서 언급한 요셉밧세뱃, 엘르아살, 삼마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세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때 블레셋 사람의 무리가 르바임 골짜기에 진 쳤습니다. 그때 다윗은 산성에 있었고, 블레셋 사람의 요새는 베들레헴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배치는 이 일이 사무엘하 5장의 전쟁 중에 일어났던 사건으로 생각하게 합니다(5:17-25). 베들레헴은 아둘람에서 동쪽으로 대략 2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고, 그 사이에 베들레헴으로 르바임 골짜기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즉, 아들람에서 베들레헴으로 가려면 르바임 골짜기에 진 치고 있는 블레셋과 마주치게 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다윗이 갈망하면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자기에게 마시게 할 자가 누구냐고 말했습니다. 다윗의 말이 고의성이나 강제성이 없었다는 것은 물을 받았을 때 그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다윗은 자기가 배들레헴에 거주할 때 마시던 물맛을 잊지 못하여 더 목이 말랐을 것입니다. 그러자 세 용사가 블레셋 진영을 뚫고 지나가 베들레헴 성문 겸 우물물을 길어왔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 물 마시기를 거절하고 여호와 앞에 부어드렸습니다. 그 물은 용사들이 목숨을 걸고 가져온 피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도저히 자신이 마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 음료를 바칠 때는 주로 포도주를 부어서 전제로 드리는데, 다윗은 물을 자신의 용사들의 피라고 여기고 그 피를 여호와께 바친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호와 앞에서 자신을 위해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합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할릴라’, 즉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할릴라’는 불경한 것, 즉 금기를 뜻하는 말이며, 금지 맹세를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다윗은 그 물이 목숨을 도외시하고 갔던 사람들의 피라고 말하면서, 그 물 마시기를 거부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만 남았습니다. 사랑하여 더 사랑하고 싶은 열기가 충만합니다. 자기의 욕구로 가득한 공간을 비워내고, 타자를 위한 공간을 내어주어 소중히 여기는 것, 교회의 존재 이유는 세상에서 목이 타는 이에게 물 한잔 내미는 것이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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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애가 서론

 


예레미야애가 서론

-주께로 돌이키소서!-


 

점점 세상이 어두워질수록 진리를 찾아보기란 쉽지 않습니다. 성도들은 진리가 아닌 세상에 집중하고, 영적 지도자들은 진리가 아닌 거짓 축복을 전합니다. 진리에서 더 점점 멀어집니다. 그러므로 시간이 지나면서 타락해져 가고 하나님의 진노를 쌓아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예레미야 시대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예레미야 시대처럼, 오늘날 한국교회와 성도들의 모습 속에서 비슷한 양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과거 예레미야 선지자가 이스라엘을 향해 ‘여호와께로 돌아가자!’고 외쳤던 것처럼, 오늘날도 한국교회를 향해 하나님께 돌아가자고 강력하게 외쳐야할 때입니다. ‘예레미야애가’는 죄에 대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보여주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진 결과에 대한 훌륭한 교훈입니다. 이제 한국교회 위에도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기 전에 함께 돌아가야 합니다.

 

예레미야애가의 제목

히브리어 성경에서 본 서의 제목은 비통함을 나타내는 첫 단어인 ‘아 어찌하여!’이고, 현재 표제는 랍비들이 사용한 ‘애가’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애가(哀歌)’의 유래는 헬라어 ‘큰 소리로 높여 운다.’라는 단어에서 시작했습니다. 한글 성경에서 ‘예레미야애가’라는 제목은 라틴어역 성경 ‘Threnoi’(비탄, 애가哀歌, 슬픔의 노래)에서 따른 것입니다.

 

예레미야애가의 저자

전통적으로 본서의 저자는 예레미야라고 전해져 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7km 정도 떨어진 시골 아나돗 출신입니다. 다윗 당시 대제사장직을 지냈던 아비아달의 후손입니다(열왕기상 2:26). 선지자 소명을 받던 날 그는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예레미야서 1:6)라고 고백했었습니다.

⑴ 내적 증거

예레미야서와 일관된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고, 내용면에 있어서도, 바벨론에 의해서 예루살렘 성이 파괴되고 이스라엘이 멸망당하는 관경을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본 서는 직접 목격한 사람에 의해 기록된 체험담임을 말해 줍니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직접 목격했으며,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뒤에도 남아 있었습니다.

⑵ 외적 증거

역대기에는 예레미야가 ‘애가’를 자주 지었다는 사실을 기록합니다(역대하 35:25). 특히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세밀한 묘사는 예레미야의 저작권에 대한 확신을 줍니다. 주전 3세기 작품인 70인역(LXX)에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가고 예루살렘이 황폐하게 된 후 예레미야는 앉아 울면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이 야가를 읊어 이르되 …’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벌게이트 역본에서 본 서의 저자를 예레미야로 언급하고 있으며, 유대교 전승과 교회의 전통 그리고 탈무드 탈무드 : 유대 랍비들의 교훈서 , 탈굼 탈굼 : 아람어로 번역된 구약 성경 에서도, 그리고 초대교부 오리겐을 비롯한 교부들과 칼빈까지도 저자가 예레미야임을 인정하였습니다.

 

예레미야애가의 기록연대

예레미야애가를 기록한 연대를 대부분 주전 586-585년으로 추정합니다. 앗수르의 강력한 왕 앗수르바니팔 사후 급속도로 부상한 바벨론은 마침내 앗수르를 점령했고, 이어 갈그미스 전투에서 애굽까지 패퇴시킴으로써, 근동에서 승자로 군림했습니다. 예레미야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유다 왕들은 국제정세를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계속해서 바벨론을 배척하고 애굽 만을 의존했습니다. 그 결과, 바벨론의 3차에 걸친 유다 침공으로 주전 586년 4월 9일에 결국 예루살렘 성은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같은 해 5월 7일에 성읍과 성전이 불탔습니다. 이러한 혼란 중에 본서를 주전 586년경에 예레미야는 기록하였습니다. 예루살렘 멸망에 관한 생생한 필체는, 본서가 예루살렘 함락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기록되었습니다. 아마 예레미야 선지자는 유다 예루살렘에서 성전의 파괴를 목도하며 애가를 부른 듯합니다. 후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며 눈물을 흘리신 것처럼 예레미야 선지자 역시 폐허가 된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며 비탄과 눈물의 애가를 기록했던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예레미야애가는 다섯 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애가’는 주의 깊게 작성된 문학 작품이며, 형식과 내용면에서 시편 74편과 79편과 매우 흡사합니다. 예레미야애가에서는 멸망한 시온의 황폐함과 이스라엘의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것에 대해 깊은 고통을 토로합니다. 그리고 황폐해진 예루살렘 성에 남겨진 사람들의 비참한 환경을 보면서 탄식합니다. 동시에 정의와 미래에 관한 몇 가지 중요한 문제들도 제시합니다. 예레미야애가의 시점은 전체적으로 예루살렘에 남겨진 사람들의 관점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레미야애가의 문학적 특징

예레미야애가의 두드러진 문학적 특징은 첫째, 모든 5개의 시들은 각 행의 첫 글자를 짜 맞추는 아크로스틱(acrostic)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즉, 각 절 앞에 22개의 히브리어 알파벳을 순서대로 배열하고, 첫 두 시는 각각 3행(行)으로 된 22연(聯)으로 이루어졌고, 각 연에 있는 첫 행에는 아크로스틱 형식을 따릅니다. 마지막으로 시는 첫 두 시의 형태와 같지만, 각 연이 2행으로 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세밀하고 계획된 구조를 통하여 예레미야는 메시지를 좀 더 논리적이고 뚜렷하게 전하려는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연대기적인 서술보다는 뚜렷한 틀과 시적 장르를 통하여 애가의 슬픔을 최대한으로 강화시켰습니다. 각 장은 다양한 태(voice)를 이용하여 예루살렘 함락에 관한 여러 시각의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어떠한 상황과 때를 그 누가 보더라도 언약을 저버림으로 패망을 당한 백성들의 처지가 얼마나 처절하고 비참한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가운데인 3장과 맨 끝인 5장에서는 유다의 멸망이 영원한 것은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회개와 회복을 향한 간절한 바람을 표현합니다. 즉, 예레미야애가의 문학적 구조는 우연한 것이 아니라, 메시지의 논리적 전달과 암기, 예루살렘 함락에 대한 다양한 시각의 애가, 절망 가운데서도 전해지는 위로와 소망의 기도를 구성하는 총괄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애가의 명명 배경

맛소라 사본(Masoretic Text)에서 ‘예레미야애가’는 선지서가 아니라 성문서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레미야애가’는 ‘다섯 두루마리’로 알려진 메길롯(Magillot/아가, 룻기, 예레미야애가, 전도서, 에스더)에 속해 있었으며, 특별히 ‘예레미야애가’는 금식절(성진 파괴의 슬픔을 기억하는 날)에 낭독되었습니다. 선지서가 예언자를 중심으로 묶인 것을 생각한다면, 마소라 사본은 이 책의 저자를 선지자 예레미야로 생각하지 않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은 예레미야애가의 저자를 예레미야로 간주해왔습니다. 예루살렘 함락에 대한 생생한 묘사를 고려할 때 저자가 멸망하는 것은 목격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애가를 ‘예레미야애가’로 부르기에 손색이 없습니다.

 

예레미야애가의 신학적 주제들

⑴ 언약적 저주와 죄의 고백

예레미야애가는 선악 간에 모든 것을 예정해 놓으신 하나님(3:37-39)께서 왕이시라고 전제합니다(5:19). 고난 가운데 탄식하지만 그것은 유다 죄에 대한 결과이며(1:18; 5:16b),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의 언약에서 저주들을 내리신 것을 인정합니다(2:17, 비고 신 28:15-68). 한가운데 나오는 찬양에서(3:39)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다시 자비를 베풀기 위해 돌아오시기 전에 먼저 심판의 때가 와야 한다고 말합니다.

⑵ 탄식과 모진 고난

자신의 죄를 인정하더라도 고난 받는 것이 힘듭니다. 죄를 인정했다고 해서 고통이 경감되거나 시운 것은 아닙니다. 선지자는 아무리 심판이 정당하더라도 견딜 만한 한계가 있음을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2:20; 5:11,14). 이 때문에 예레미야애가를 구약에서 가장 담대한 항의(抗議) 문학으로 간주하기도 합니다. 모진 경험의 심연을 관통하며, 인류가 비정한 잔인성에 굴복하지 말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줍니다(3:17; 5:15).

⑶ ‘여호와의 확고한 사랑’과 위로

예레미야애가는 탄식하는 선지자의 가장 심각한 두려움이 무엇인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은 우리를 아주 거절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대단히 진노하셨습니까?”(5:22)라고 질문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말로 부재하시고 우리를 영원히 버리셨는가?’하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 예레미야는, 먼저 3장에서 “여호와께서 영원하도록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3:31)라고 대답합니다.

⑷ 하나님을 기다림

예레미야애가는 기다림의 신앙을 강조합니다(3:25-26). 하나님의 본심은 이스라엘 백성을 심판하여 멸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 죄를 고백하고 심판을 마땅한 것으로 여겨 묵묵히 감수할 때 하나님의 자비의 때는 꼭 올 것이라 믿은 것입니다.

 

예레미야애가의 교훈

⑴ 절망 속에서 희망을

예레미야애가는 하나님의 심판을 말하고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를 역설한 후, 그들에게 소망을 가지고 담대히 나아가라고 가르칩니다. 처절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수 있는 신앙을 일깨워줍니다. 현재 황량함을 직시함으로써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역사와 언약을 맺으신 과거를 회상합니다. 선지자는 그 언약을 따라 징벌하시는 여호와의 모습에서 역설적으로 그분의 권능을 보았습니다. 만약 여호와께서 돌아오시면 이 비참한 상황마저 넉넉히 극복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임재와 구원을 간구합니다. 아무리 큰 잘못으로 무너졌더라도 다시 여호와께로 돌아갈 여지는 있습니다.

⑵ 죄에 대한 통감

예레미야애가는 온 예루살렘이 잿더미에 묻힌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미래 구원의 희망을 노래합니다. 그는 죄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고난에 대한 훈련을 감수합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절대주권 앞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변함없는 사랑에 감사합니다. 예레미야애가는 죄에 대한 깊은 회개와 결과에 대해 손쉬운 속죄의 요구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애가의 개요

1. 첫번째 노래 : 예루살렘의 황폐(1장)

① 예루살렘의 황폐와 적막(1:1-11)

② 황폐한 예루살렘으로 인한 슬픔(1:12-19)

③ 하나님의 긍휼을 간구함(1:20-22)

2. 두 번째 노래 : 심판 날의 참상(2장)

① 성소와 성곽의 훼파(2:1-10)

② 심판을 목격한 자의 애가(2:11-19)

③ 주의 진노의 날(2:20-22)

3. 세 번째 노래 : 고난 받는 선지자(3장)

① 고난당하는 예레미야(3:1-21)

② 성실하신 하나님(3:22-39)

③ 죄에 대한 고백의 권고(3:40-51)

④ 옥에 갇힌 예레미야(3:52-66)

4 네 번째 노래 : 고난당하는 시온의 백성(4장)

① 죄의 열매(4:1-11)

② 환난의 원인(4:12-20)

③ 에돔에 대한 징벌(4:21-22)

5. 다섯 번째 노래 : 탄식과 간구(5장)

① 서론적 간구(5:1)

② 패배한 자의 탄식(5:2-18)

③ 여호와 찬양(5:19) ④ 간구와 요구(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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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27 정민아의 Amazing Grace 방송


네 손을 놓으라 / 서울 예정교회 설동욱 목사


▲설동욱 목사(서울 예정교회 담임, 세계복음화협의회 대표회장, 목회자사모신문 발행인).

 

히말라야 근처에 위대한 성자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그의 제자가 스승을 찾아가 “고뇌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말했다. 그러자 스승이 “아직 때가 아니니 조금 더 기다리라”고 대답했다.

그럭저럭 10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어느 날 스승은 이제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제자를 데리고 숲속으로 갔다. “오늘은 너에게 고뇌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가르쳐 줄 테니 내 뒤를 따르라”고 하고선 함께 숲속으로 가더니, 커다란 아름드리나무를 끌어안고서는 제자를 향해 살려 달라고 소리를 쳤다. 제자가 달려가 아무리 스승을 나무에서 떼어내려고 해도 떨어지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까 스승이 그 나무를 움켜쥐고 놓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제자가 말했다. “스승님, 스승님께서 그 나무를 잡고 놓지 않고 있으시네요. 빨리 그 손을 놓으세요.”

그제서야 제자는 스승님의 가르침을 깨닫게 되었다. 고통은 내가 붙들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우리가 손을 놓는 순간 그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 있게 된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임에도, 우리는 문제를 놓지 않고 붙들고 있어서 자신을 어렵게 만든다. 이제 고통에서 손을 놓기를 바란다. 그리고 하나님을 바라본다면 틀림없이 고통의 환경에서 자유함을 얻게 될 것이다.

출처 :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266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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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22-02)


승리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다윗

사무엘하 22장 26-51절


 

하나님께서 다 하실 것을 믿기 때문에 그저 바라만 보면서 현실을 즐기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난이 찾아올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현실을 극복해 나가는 것이 올바른 자세이듯 평탄할 때도 그러해야 합니다. 다윗의 고백을 통해 건강한 신앙의 자세를 알아보시겠습니다.

 

본문은 다윗의 시 후반부이며, 다윗에게 승리를 주시는 여호와의 은혜를 노래합니다. 먼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는 여호와의 성품을 고백합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을 전진 속에서 지켜주심을 노래합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으로 모든 원수를 추격하고 공격하고 굴복시키게 하셨음을 말합니다. 끝으로 열방 가운데서 여호와를 찬송하며, 다윗과 그 후손에게 인자를 베푸시기를 확신하며 기도하고 찬양합니다.

 

공평하신 여호와(26-28)

공의를 따라 깨끗한 삶을 살아갑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에게는 성령이 선물로 부어집니다. 성령님은 성도가 하나님의 뜻과 공의를 행하고 깨끗한 삶을 살도록 인도하십니다. 믿음의 고백은 성령이 역사하시는 결과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성령의 내주하심과 역사와는 상관없이 입술의 고백으로 자신의 구원을 확신합니다. 성도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의 고백은 하나님의 공의를 따라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거룩한 삶을 살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구원의 은혜 안에 날마다 거해야 합니다.

26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27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악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시리이다 28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자를 살피사 낮추시리이다(26-28)

21-25절에서는 다윗이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보응해주시는 것에 대해 찬양하였다면, 26-28절에서는 개인의 경험을 확대하여 보편적인 하나님의 보응 원리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21-25절에서는 주어와 목적어로 ‘나’라는 일인칭이 주로 사용되었다면, 26-28절에서는 일반 사람들을 의미하는 3인칭이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26절에서 다윗은 일단 긍정적인 보응부터 시작합니다. 자비한 자에게 주께서 자비를 베풀어주신다는 말은 선을 선으로 갚으시는 하나님의 대표적인 모습으로 율법에서 가난한 자를 돌보는 의무 밑바탕에 깔린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출애굽기 22장에서 가난한 자들을 압제하지 말고 가난한 자들에게 돈을 꾸어주고 이자를 받지 말며 저당물로 받은 겉옷을 돌려주라고 말씀하시면서 27절에서 나는 자비로운 자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의 자비로운 성품을 닮아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신명기 15장에서 가난한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절대 그들의 필요를 외면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10절에서 ‘너희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말 것이니라. 이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26절 하반절에서 '완전함'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레위기의 제의 제도에서 제물은 반드시 흠이 없는 완전한 짐승을 드려야 하며 제사장도 흠이 없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도 완전하여 결함이나 실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하나님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불완전하고 결함투성입니다. 이런 인간은 하나님의 완전함과 비교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며 하나님 안에서 완전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부족한 자에게 완전함으로 갚아주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과부의 두 렙돈이 가장 큰 헌금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이 부분과 연결될 것입니다. 27절 상반절은 긍정적인 부분의 보응이고 하반절은 부정적인 보응입니다. 27절 상반절에서 ‘깨끗함’은 죄와 부정을 제거하는 것으로 죄를 완전히 짓지 않으며 완벽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지었을 때 그것이 죄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회개함으로 죄 사함을 받아 죄와 부정을 제거하였다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었을 때 회개하며 용서를 빌고 죄에 대해 책임을 지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죄를 용서하시고 정결하게 하셔서 다시 그 사람과 교제하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신 분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깨끗한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죄를 지어 부정하게 되면 그 사람은 더 이상 거룩하신 하나님 곁에 갈 수 없고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게 됩니다. 하지만 죄를 깨닫고 회개하여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받게 되면, 우리는 다시 정결한 상태가 되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게 됩니다. 구약에서는 동물 제사를 통해 죄 사함을 받았고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 사함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안 짓는 것도 중요하지만, 죄를 지었을 때 빨리 회개하는 것이 연약한 인간에게는 더욱 중요한 문제입니다. 27절 하반절은 상반절과 반대의 상황으로 ‘사악한 자’는 ‘뒤틀린 자’이며 여호와 앞에 죄를 범한 자들로 이들은 여호와 앞에 회개하지 않고 계속해서 엇나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회개하지 않고 계속해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엇나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도 엇나가게 행동하겠다고 하십니다. 회개하지 않는 자들을 용서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벌을 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27절 상반절과 하반절은 동일하게 죄의 문제를 다루지만, 죄를 깨닫고 회개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에 대한 하나님의 반대되는 반응을 말하고 있습니다. 28절은 27절과 같이 대조적 평행법을 사용하여 가난한 자를 높이시고 교만한 자를 낮추시는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데, 이것은 한나의 노래에서도 언급된 내용입니다. 28절의 핵심은 하나님은 얼마든지 상황을 역전시키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으로 가난하다고 낙심하지 말고 높이 있다고 교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부르짖는 약자를 위해 악한 상황들을 언제든지 전복하실 수 있는 분인 것입니다. 이것은 한나도 경험했고 다윗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자를 들어 쓰시기를 좋아하시며 교만한 자를 미워하시는 분입니다. 교만은 불신앙으로 교만한 자는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명기 17:19-20에서 율법을 읽어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고 교만을 행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호하시는 여호와(29-37)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어둠과 같은 전쟁터에서 하나님께서는 등불이 되십니다. 앞길을 환히 비추시는 하나님을 의지할 때, 그 어떤 적도 두렵지 않습니다. 적진 가운데로 힘차게 달려 나갈 때 적진의 성벽도 훌쩍 뛰어넘게 됩니다. 완전하고 진실한 약속의 말씀을 따라 굳건한 반석이신 하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을 가장 안전하게 지키시며 대적을 향해 싸울 수 있도록 모든 것을 가르치시며 적진을 향해 담대히 나아가 싸우게 하십니다.

29여호와여 주는 나의 등불이시니 여호와께서 나의 어둠을 밝히시리이다 30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진으로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벽을 뛰어넘나이다 31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진실하니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에게 방패시로다 32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냐 33하나님은 나의 견고한 요새시며 나를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시며 34나의 발로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며 35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니 내 팔이 놋 활을 당기도다 36주께서 또 주의 구원의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 37내 걸음을 넓게 하셨고 내 발이 미끄러지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29-37)

흑암의 장막이 다윗을 덮던 날들이 하루 이틀이었습니까? 길도 빛도 없는 광야에서 지새워야 했던 그 암담하고 외로운 밤마다 주님은 따뜻한 등불처럼 위로하시고 주의 자비와 완전함을 보이셨습니다. 어두운 심령에 찾아와 품어주는 그 빛, 그 아름다움을 찬송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1) 등불(29-30)

다윗은 이제 하나님을 의지하며 전쟁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는 나의 등불로서 어둠을 밝혀주시는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인생의 캄캄하고 막막한 길을 인도하시는 분이라는 뜻이고, 또 한편으로는 적들이 어디서 쳐들어올지 그리고 전쟁의 향방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저 하나님만 믿고 뛰어드는 30절의 모습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30절에서 자신의 앞길을 비춰주시는 하나님과 함께 그 빛을 따라 적진을 달리고 성벽을 뛰어넘습니다. 여기서 묘사된 군인은 주변의 모든 상황을 무시하고 오직 빛을 따라 칼 한 자루 손에 쥐고 적진으로 뛰어드는 매우 역동적이고 힘찬 모습을 보여줍니다. 다윗의 이 고백을 보며 과연 우리에게도 다윗과 같이 여호와를 위해 힘차게 뛰고 달리고 뛰어넘는 역동적인 모습이 있는지, 아니면 주변 상황만을 보고 두려워서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하거나 쭈뼛거리며 간신히 발걸음을 옮기는 것은 아닌지, 혹은 가고 싶지 않은 길을 무거운 발걸음으로 터벅터벅 걷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2) 피난처(31-34)

하나님 말씀의 완전성과 순수성을 고백한 다윗은 여호와께로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가 되어주신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하나님 말씀의 완전성과 순수성은 하나님의 언약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돌보고 지키겠다고 약속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피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32절에서 다윗은 오직 여호와만이 하나님이시라는 신앙고백을 통해 자신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고백합니다. 시내산에서 맺은 이스라엘의 언약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이고, 이스라엘 백성은 오직 여호와만을 하나님으로 섬기겠다는 것으로, 31절은 하나님 편에서의 언약을 32절은 인간 편에서의 언약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33절부터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인도를 묘사합니다. 33절에서는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시는 분으로, 34절에서는 자신의 발이 날렵한 암사슴의 발처럼 빠르게뛸 수 있게 힘을 주시는 분입니다.

(3) 훈련(35-37)

35절에서는 자신의 손에 싸움을 가르치시는 분으로, 36절에서는 방패를 주시는 분으로 묘사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이 전쟁할 수 있게 힘도 주시고 능력도 주시는 것을 마치 스승이 제자를 하나하나 가르치고 무장시키는 모습으로 묘사하였습니다. 이렇게 여호와의 인도를 받은 다윗은 빠른 발로 높은 곳에서의 전투에도 끄떡없는 체력과 민첩함을 얻게 되었고, 싸움을 배운 손은 무거운 무기인 놋활도 쏠 줄 알게 되었으며, 방패로 보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여호와께서 자신을 강하게 만드시고 승리를 주신 것을 하나님의 겸손함으로 보았습니다. 이것은 세상을 다 뒤엎을 힘과 능력을 가지신 분이 직접 싸움에 나서지 않고, 아무런 힘도 없는 자신을 가르치고 용사로 만들어 승리의 기쁨을 맛보고 승리의 영광을 누릴수 있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다윗의 고백 속에는 아무런 능력도 없던 자신이 전쟁터의 용사로서, 왕으로서 힘과 명예를 얻게 된 것에 대한 송구함과 겸손함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약간의 영광과 능력을 자신의 것인 양 착각하고 교만해지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광을 맛보게 하신 것이 겸손함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더욱 겸손해야 할 것입니다. 37절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아 발걸음도 힘찬 용감한 군사로 거듭난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이제 전쟁할 준비가 끝난 것입니다.

 

여호와의 다윗(38-46)

승리의 기쁨을 날마다 누리고 있습니까? 초대교회는 핍박과 고난 속에서도 주님이 십자가를 통해 이루신 승리를 날마다 맛보며 누렸습니다. 그들에게 이 십자가만이 유일한 자랑이고 기쁨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십자가 복음을 세상에 전함으로 영적 전쟁에서 날마다 승리했습니다. 교회는 십자가 복음을 알고 누리며 그것을 세상에 자랑함으로 주님의 승리를 날마다 경험하는 공동체입니다.

38내가 내 원수를 뒤쫓아 멸하였사오며 그들을 무찌르기 전에는 돌이키지 아니하였나이다 39내가 그들을 무찔러 전멸시켰더니 그들이 내 발 아래에 엎드러지고 능히 일어나지 못하였나이다 40이는 주께서 내게 전쟁하게 하려고 능력으로 내게 띠 띠우사 일어나 나를 치는 자를 내게 굴복하게 하셨사오며 41주께서 또 내 원수들이 등을 내게로 향하게 하시고 내게 나를 미워하는 자를 끊어 버리게 하셨음이니이다 42그들이 도움을 구해도 구원할 자가 없었고 여호와께 부르짖어도 대답하지 아니하셨나이다 43내가 그들을 땅의 티끌 같이 부스러뜨리고 거리의 진흙 같이 밟아 헤쳤나이다 44주께서 또 나를 내 백성의 다툼에서 건지시고 나를 보전하사 모든 민족의 으뜸으로 삼으셨으니 내가 알지 못하는 백성이 나를 섬기리이다 45이방인들이 내게 굴복함이여 그들이 내 소문을 귀로 듣고 곧 내게 순복하리로다 46이방인들이 쇠약하여 그들의 견고한 곳에서 떨며 나오리로다(38-46)

전쟁터의 다윗에게 다른 방패가 없었습니다. 사울의 갑옷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주님이 살리시면 살고 죽이시면 죽는다는 각오로 전쟁에 임했습니다. 주님이 지키셨기에 날 선 칼과 창끝도 다윗을 건들 수 없었습니다. 전심으로 주께 피하는 다윗에게 주님은 가장 강력한 방패가 되어주셨습니다.

(1) 원수를 굴복시킴(38-40)

이 단락에서는 하나님께 교육받은 다윗이 전투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윗의 모습은 매우 용감합니다. 적의 뒤를 쫓아가 전투하는데 그들을 무찌르기 전에는 후퇴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임전무퇴의 용감한 돌격 정신을 볼 수 있습니다. 39절은 그 결과로 적들을 완전히 괴멸해 버렸습니다. 39절 하반절에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였고, 자신의 발아래 모두 엎드러졌다고 표현함으로써 완전한 승리의 모습을 생생히 표현하고 있습니다. 40절부터 다윗은 다시 자신이 승리하게 된 은공을 여호와께 돌리고 있습니다. 띠를 띠운다는 표현은 33-36절까지의 교육을 한마디로 표현한 것입니다.

(2) 원수를 진멸함(41-43)

41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적들이 도망가게 하시고 근절할 수있게 해주셨다며 감사합니다. 42절은 여호와께서 자신만을 도와주신 것에 대한 감사입니다. 적들에게는 그들을 도울 자가 없었습니다. 이방신들은 여호와의 적수가 되지 못하기에 도울 수 없었고, 혹시라도 여호와를 부르는 자가 있더라도 여호와께서는 도와주지 않으셨다고 고백하며, 하나님과 자신의 특별한 관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43절은 적들이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완전히 이겼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3) 이방 사람들의 복종(44-46)

39-43절이 다윗이 싸운 일반적인 전쟁에서의 승리를 말하고 있다면, 44절은 이스라엘 안에서 사울과 사울 집과의 갈등 속에서 자신을 보호하셔서 자신을 왕으로 세워주신 것에 대한 감사하고 있습니다. 45-46절에서는 이방인들이 자신에게 굴복하고 자신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자발적으로 다윗에게 복종하는 모습을 그립니다. 암몬과 아람을 이긴 뒤 이들이 다윗에게 복종하며 조공을 바치고 두로의 히람이 화친을 청한 이야기를 반영한 부분입니다. 이 부분이 다윗 인생에서 가장 명예롭고 승승장구하던 때입니다.

 

구원의 반석이신 여호와를 찬양(47-51)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날마다 찬양하고 감사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수많은 찬양의 제목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드려야 할 가장 중요한 찬양 제목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신 구원의 큰 능력과 은혜입니다. 오직 교회만이 할 수 있는 이 감사와 찬양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거룩하심과 십자가로 이루신 구원의 은혜를 교회가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47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나의 반석을 찬송하며 내 구원의 반석이신 하나님을 높일지로다 48이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보복하시고 민족들이 내게 복종하게 하시며 49나를 원수들에게서 이끌어 내시며 나를 대적하는 자 위에 나를 높이시고 나를 강포한 자에게서 건지시는도다 50이러므로 여호와여 내가 모든 민족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이다 51여호와께서 그의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며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인자를 베푸심이여 영원하도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로다 하였더라(47-51)

광야의 절벽과 낭떠러지에서 발 디딜 곳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도망자 신세라면 더욱 마음이 급하여 순식간에 미끄러지고 떨어질 수 있습니다. 구원의 반석이신 주님 덕분에 다윗은 걸음을 넓혀 높은 곳으로 달리고 뛰어넘었습니다. 반석이신 주님이 매 순간 그의 발을 붙들어 인도해 주셨습니다.

(1) 구원하시는 여호와(47-49)

다윗은 다시 노래의 처음처럼 여호와를 자신의 반석이라고 부르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높이라고 외칩니다. 2절에서는 찬양하라는 부분이 없었지만, 47-51절의 핵심은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2) 감사와 찬양(50-51)

48-49절에서 다시 한 번 여호와를 찬양하는 이유를 밝힌 후, 50절에서 다시 감사와 찬양을 돌립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그 이름을 찬양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받은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며 여호와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큰 구원 사건이 있을 때 찬양이 등장하는 것입니다(출 15장; 삿 5장; 삼상 2장 등). 그러므로 은혜 받은 자는 감사하는 것과 여호와를 찬양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51절에서 왕에게, 즉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왕에게 그리고 다윗과 그의 후손들에게 영원토록 헤세드, 즉 언약의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기원하며 노래를 마치고 있습니다. 다윗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헤세드를 베풀어달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언약을 지켜달라는 기원입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이 언약을 신실하게 지켜주셨습니다. 비록 다윗이 범죄하고 하나님과 멀어졌을지라도 이 약속은 끝까지 지켜주셨습니다. 전체적으로 다윗의 찬송시가 지어진 시기는 다윗이 범죄하기 이전으로 보입니다. 이 시에서 다윗은 매우 겸손하며 죄를 짓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만을 따랐다고 고백하고 있으며,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함께하시므로 전쟁마다 승리한 것은 다윗이 범죄하기 전의 상황입니다. 하지만 다윗이 범죄한 이후 다윗의 이야기에 하나님은 거의 등장하지 않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모습도, 하나님께 의뢰하는 모습도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찬양시는 다윗이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다윗 성을 짓고 언약궤를 모셔오고 정치적 군사적으로 안정되었을 때 하나님께 감사하며 바친 노래입니다. 이렇게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며 감사하는 노래를 했던 다윗도 인간적인 영광에 도취 되면 한순간에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을 보면서 우리 인간이 얼마나 약하고 악한지 다시 한 번 경고를 받게 됩니다.


 

서로 기대어 같은 결의 마음을 빚어온 사이였습니다. 두 마음이 합해졌습니다. 우리에게도 주님은 가까이 오셔서 살피십니다. 겸손히 한계를 인정하고 기대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 구원을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은 신실하시고 겸손하고 온유하신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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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도서 개론


이 서신 전체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실질적인 지침을 전하고, 디도에게 정직하게 인도하도록 동기를 부여하고, 신자들에게 복음 메시지를 왜곡할 수 있는 거짓 가르침을 물리치라고 촉구하는 목회자의 마음을 목격합니다. 바울의 말은 그레데에 있는 신자들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 신앙 공동체에서 비슷한 도전과 씨름하고 있는 우리에게도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디도서의 제목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로마 감옥에 투옥된 후에, 출옥이 된 바울은 지중해 가운데 있는 그레데 섬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갔습니다. 사역을 마치고 그곳을 디도에게 남아서 사역하도록 했습니다. 본 서신은 헬라어 원전에서는 ‘프로스 티톤(προς Τιτον)’으로, 한국 성경들에서는 디도에게 전달될 편지라는 의미로 수신자 ‘디도’의 이름을 따라서 ‘디도서’라고 부릅니다.

 

저자와 기록

시기 본 서의 저자는 사도 바울입니다. 바울이라는 사실은 본서의 내적 증거(1:1-4)와 디도에 대한 바울의 친밀성(고린도후서 2:13; 8:23) 및 본서에 나타난 바울적 문체와 사상으로 보아 바울 저자가 분명합니다.

 

수신자 디도

본서의 서두에서 ‘디도’는 헬라인으로 그 이름은 ‘공경하다’란 뜨입니다(갈라디아서 2:2). 그의 인적사항은 거의 알 수 없는데, 그의 사역과 관련된 기록을 바울 서신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디도를 ‘같은 믿음을 따라 된 나의 참 아들’로 소개한 점으로 보아, 디도는 사도 바울의 전도를 받고 신앙을 갖게 된 듯합니다. 디도는 두 가지 면에서, 초대 기독교사에 큰 공헌을 했습니다. 그 한 가지는 예루살렘 총회에 바울과 함께 참석했다는 점이며(사도행전 15:2; 갈라디아서 2:1,3), 또 한 가지는 고린도 교회의 어려운 문제들을 수습해 주었다는 점입니다(고린도후서 7:6-7; 8:6, 16-23). 디도는 엄밀히 말해 현대적 의미의 ‘목회자들(Pastors)’과는 다릅니다. 디도는 사도 바울이 특수한 임무를 주어 파송한 사도의 대행인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 특수한 임무란 초대 사도 시대에만 해당되는 사역으로서, 여기저기 다니며 이미 사도 바울이 시작했던 교회 개척의 일을 진전시키며, 그 결과를 사도에게 보고하는 것이었습니다.

 

디도서의 메시지

본 디도서는 그레데 교회의 특별한 목회 상황을 반영한 서신입니다. 그래서 본 서신을 ‘목회서신’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서신의 주요 내용은 그레데 교회의 거짓 교사들과 그레데의 무질서한 사회 상황을 배경으로 따라서 본 서신은 그레데 교회의 상황에 어울리는 실제적인 권면이 주요 내용을 이룹니다. 디도서의 핵심 메시지는 바른 지도자를 세우는 것, 거짓 교사들에 관한 경계, 경건한 생활과 진리의 지식과 관련된 것입니다.

⑴ 바른 지도자상

디도에게 위임된 중요한 일은 각 성에 지도자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즉 장로 혹은 감독의 자격 요건에 관하여 자세하게 언급합니다. 바울 서신 중에서 디도서와 디모데전서는 지도자의 자질에 관하여 매우 구체적으로 서술합니다. 두 서신은 목회적인 관점에서 올바른 지도자상에 대한 내용을 제시합니다. 디도서는 특히 그레데 교회의 상황을 반영하여 지도자의 도덕적인 자질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지도자는 가르치는 것을 그대로 지켜 행함으로 권위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따라서 지도자의 도덕적 불감증이 팽배해지고 그 권위가 무너진 한국교회 현실에서 디도서가주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⑵ 거짓 교사들에 대한 경계

그레데 교회는 유대적인 거짓 교사들, 할례파에 속한 자들로 인하여 매우 혼란스러웠습니다. 특히 그들은 부도덕한 이익을 취하려고 가르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쳤습니다. 유대인의 족보 이야기와 율법 논쟁에 착념하여 분열을 일으키는 것을 좋아하였습니다. 이에 바울은 디도에게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으로부터 교회와 성도들을 보호하도록 권면합니다. 그들이 가르치지 못하도록 제재하고 강하게 책망할 것을 권면합니다. 디도서는 거짓 교사들의 교훈으로부터 교회를 보존하고 성도들을 지키는 것이 지도자들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임을 깨닫게 합니다.

⑶ 진리의 지식과 경건한 생활

디도서는 진리의 지식과 경건한 생활을 불가분리적으로 밀접하게 관련시켜 언급합니다. 바울은 그의 사도직에 관한 서술에서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을 언급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경건한 삶을 동반한다고 말합니다. 디도서에서 그의 실제적인 권면은 교리적인 진술에 근거함을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그리하여 본 서신은 건전한 교리가 경건한 생활의 밑바탕이 되고 경건한 신앙생활은 건전한 믿음의 교리로부터 출발하게 됨을 강조합니다.

 

디도서 개요

1:1-4 인사

1:5-9 로에 관한 훈령

1:10-16 이단에 1차 대한 경고

2:1-10 의무의 목록(교회 질서)

1-3 늙은 사람

4-8 젊은 사람

9-10 

2:11-3:8 그스도인의 생활을 위한 교훈

11-15 고백으로써 확인

3:1-2 개별적 권고(사회속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3-7 세례식 고백

강조된 권고

3:9-11 이단자들에 대한 2차 경고

3:12-15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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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2-02)


생명을 주시고 정의를 행하시는 예수님

마태복음 12장 14-21절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만왕의 왕의 모습으로 오신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보란 듯이 이방나라 특히 로마 제국을 꺾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높이 존경받는 백성들로 세울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종의 모습을 한 메시아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종인 당신은 오늘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안식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반박하지 못했던 바리새인들은 회당을 나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고쳐주십니다. 마태는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사역을 고난 받는 종에 관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42:1-4)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위험에 빠진 하나님의 종(14-16)

예수님의 말씀은 탁월했고, 권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귀신, 바람, 파도 그리고 각종 질병이 떠났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기다렸던 바로 그 메시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혁명가처럼 요란스럽게 떠들지 않았습니다. 황소처럼 묵묵히 자신의 길, 고난의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14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거늘 15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 많은 사람이 따르는지라 예수께서 그들의 병을 다 고치시고 16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고하셨으니(14-16)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손 마른 사람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하지만 이제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역에 대해 더 이상 논쟁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급기야 이 사건을 목격했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죽일 방법을 모의하기 시작합니다. 이 사실은 여러 가지로 충격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을 죽일 음모(14)

왜 이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겠습니까? 예수님께서 합당한 질문을 던지고 치유의 권세를 보여 그들의 말문을 닫게 말들어버리신 것은 바리새인들이 유지해 온 권위 체계에 대한 도전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율법 해석에 기초해서 매고 푸는 권세를 행사했으므로, 율법의 해석 또는 율법의 의미를 가르치는 일은 그들에게 독점적으로 주어진 것이었습니다(참조 16:18-19). 안식일 사건을 계기로 권위에 위협을 느낀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다른 이슈로 죽일 모의를 짜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안식일 사건은 바리새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죽여야겠다고 마음먹게 만든 계기가 됐습니다.

(2) 병 고치심과 경고(15-16)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음모를 아시고 물러나십니다(15; 예 4:12; 14:13; 15:21; 16:5). 물러나신 것은 피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안식일에 더 많은 사람을 치유하십니다. 15절의 사건이 일어난 장소는 회당이 아닌 곳이지만 요일이 바뀐 암시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안식일에 더 많은 사람들을 치유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인 긍휼을 실현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병을 치유하고 나서 자신을 드러내지 말 것을 당부하십니다(16).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행위를 선전하기 위해서 치유하지 않으셨습니다. 19절과 연결해 보면 예수님께서 침묵을 요구하신 것은, 주의 종의 겸손을 의미하고 승리주의와 반대되는 예수님의 성품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불필요한 소동을 피하고, 사람들의 잘못된 요구와 소망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병 고치는 메시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 메시아를 이루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람들이 잘못된 동기에 의해서 따르지 않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소망을 주시는 분입니다. 이스라엘뿐 아니라 모든 이방 사람들을 위해 오신 메시아이십니다. 우리를 치유하시고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을 찬양하시길 바랍니다. 아직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는 나라를 위해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민족들의 소망인 하나님의 종(17-21)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보라’고 외치십니다. 모든 종교적 위선과 죄악에 대한 심판이 이방에까지 알려질 것입니다. 자기를 나타내지 않으셨던 예수님, 하나님께서 택한 종의 이름을 이방인들이 바라볼 것입니다. 숨겨졌던 것을 환히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모략입니다.

17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18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19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20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21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17-21)

마태는 안식일에 일어난 두 사건과 많은 병자들을 고치신 사건을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신 것이 성취되기 위함이라고 선언합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치유 행위를 기초로 그를 여호와의 종으로 묘사하며, 예수님의 사역으로 이사야 42:1-4에 기록된 여호와의 종에 대한 예언이 모형론적으로 성취됐음을 강조합니다.

(1) 하나님께서 택한 종(17-18)

마태가 구약의 긴 구절을 인용한 목적은 단지 예수님께서 물러나신 이유나 침묵하라고 요구하신 이유를 설명하기 위함이 아니라, 안식일 치유 사건을 계기로 그리스도의 전체 모습을 묘사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독자는 ‘종 기독론’의 관점에서 예수님의 정체를 파악해야 합니다. 성령이 임한 종의 역할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는 것입니다. 개역개정에서 ‘심판’으로 번역한 ‘그리스시’는 ‘정의’에 가깝습니다. 억압받고 무거운 짐에 눌린 자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정의의 실현입니다. 또한 본문의 심판은 무질서 또는 혼돈을 질서로 바꾸는 것이기에, 이 용어는 잘못된 질서를 바르게 회복하는 것, 곧 불의의 현 시대에 정의를 실현하는 행위를 뜻합니다. 예수님의 정의는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열방을 향한 복음이므로(예, 1:1: 2:1-12; 3:9; 4:15-16; 8:5-13; 28:18-20), 회복을 가져온 메시아를 이방 나라들이 고대하게 됩니다(참조, 이사야 51:4): ‘내가 내 공의(미쉬파트)를 만민의 빛으로 세우리라.’ 그리고 성령의 임함은 선택 받은 종이 메시아적 사역을 수행할 수 있게 하는 목적일 뿐만 아니라 구원 역사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회복하는 시대가 열렸음을 의미합니다. 28절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라고 하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치유(축사 포함) 사역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회복의 일을 행하시고(8-9장의 기적) 12장에서 안식일에 대해 해석하시고 한쪽 손 마른 사람을 치유하신 사건을 통해 심판 곧 정의가 실현되고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성령의 부어짐과 관련된 예수님의 증언은 안식일의 치유와 16절의 치유와 같은 활동을 두고 사탄의 일이라고 비난하는 종교 지도자들의 생각과 정반대입니다.

(2) 겸손의 종(19-21)

19-20절은 예수님께서 종으로 보이신 낮아짐과 겸손을 묘사합니다. 싸우지 않고 외치지 않는 모습은 평화의 활동을 의미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싸우지 않으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전혀 논쟁도 하지 않고 싸움도 벌이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안식일 규례와 관련해서 논쟁을 벌였으나 그것은 다른 생명을 회복하고 변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거리에서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은 16절의 명령처럼 자신을 숨기는 속성, 곧 겸손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낮아짐과 겸손으로 정의를 선포하십니다(11:29). 그리고 정의로 승리할 때까지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실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이들은 세리들과 죄인들처럼 주변부의 사람들, 한쪽 손 마른 사람과 같이 바리새인들의 도구로 사용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초대하고 회복하시는 메시아입니다(11:28-30). 20절을 ‘그는 정의로 승리할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부러뜨리지 않으며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을 것이다’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회복, 곧 정의의 실현이 승리할 때까지 회복의 일을 하십니다. 종의 정의, 곧 평화와 긍휼과 겸손을 통한 활동은 결국 승리합니다. 하나님의 승리는 민족주의적인 열망이나 제국주의적인 폭력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종의 사역을 수행함으로써 정의의 승리를 실현한 메시아입니다. 예수님의 회복 사역은 모든 민족이 갈망하는 것입니다(21).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하나님이 이방 민족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마태는 이런 유대인들의 생각을 넘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열방의 소망이 될 것을 알립니다. 맛소라 본문의 이사야 42:4에 있는 ‘토라’를 70인역은 ‘이름’(όνομα)으로 번역합니다. 그 이름은 이사야 42장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써 회복의 나라를 가져오는 종입니다. 이 종은 임마누엘로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것입니다(1:21,23). 이방들이 그 이름을 바라는 일은 이제 이사야가 예언한 종을 통해서 일어납니다(참조 8:11-12; 21:43; 24:14; 28:19), 열방을 초대하는 선교는 하늘나라의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제자들을 통해 이어질 것입니다(24:14; 28:19-20).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아들/종입니다. 그는 무질서의 세상을 질서로 회복하는 일을 실현하기 위해 순종하는 종입니다. 아들은 종으로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합니다. 이미 예수님의 세례 장면에서 나왔던 그의 정체가 고난을 통해서 회복하는 활동으로 입증됩니다. 회복의 관점에서, 바리새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쪽 손 마른 자를 회복하시는 것은 안식일에 양을 구출하는 것이며(12:11-12), 이 행위는 종의 역할을 성취하는 것입니다(12:18-21=이사야 42:14, 참조 이사야 49:5). 회복하는 종의 사역은 한쪽 손 마른 자뿐만 아니라 12:22에서 맹인을 치유하는 사건으로 입증될 것입니다(이사야 42:7; 참조. 이사야 29:18; 35:5,6; 42:16,18,19; 43:8). 결국 아들은 십자가에 달려 죽는 순종을 통해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종의 역할을 수행하실 것입니다. 이처럼 아들/종이 정의를 실현하는 방법은 평화와 긍휼과 겸손입니다. 종의 낮아짐을 통해서 사람들은 회복되며, 이 회복은 열방의 소망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가져오시는 질서의 회복은 이스라엘뿐 아니라 열방으로 향하므로, 열방이 예수님을 통한 회복을 기대합니다.

본문의 기독론은 교회론과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평화와 긍휼과 겸손으로 승리하셨는데, 교회는 어떻게 승리할 것입니까? 하늘나라는 무력과 오만으로 오지 않았고 그런 식으로 확장하는 나라가 아닌데, 교회는 어떻게 내부와 외부를 향해 하늘나라를 구현할 것입니까? 예수님의 공동체는 오직 하나의 방식으로만 승리하도록 지시 받습니다. 아들이면서 종으로 낮아진 예수님의 삶, 세상에서 무가치 하게 보이는 사람들을 위해서 희생하는 종의 삶, 바로 이것이 교회가 승리를 위해 실천해야 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메시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모습은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는 메시아의 모습과는 달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가 승리할 때까지 인생들을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불도 끄지 않고 붙잡아 주실 것입니다. 심판의 날에 스스로 교만한 자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으로 주께 나아오는 자는 거두어 주실 것입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는 믿음 하나로 수년째 싸우는 이들이 있습니다. 진실을 감추려는 계략을 간파하고 그 죄악을 낱낱이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모략을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보다 자신을 나타내려는 욕망을 보시는 주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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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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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나 철학자들은 인류의 시작을 물, 불, 공기, 단백질 등등 다양한 근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인류의 기원이 최초 어떤 생명체로부터 진화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람이 동물로부터 진화했지만, 지금쯤은 원숭이이나 짐승이 종(種)이 다른 생명체를 변형 출산했다는 토픽이라도 들어봤어야 했습니다. 그러한 소식을 들어본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천지만물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특히 창세기에 소개된 천지만물의 시작은 이론(理論)이나 가설(假說)이 아니라 사실(事實)입니다. 창세기는 로마서, 계시록과 함께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책입니다. 창세기는 우리의 기원을 말하고, 계시록은 우리가 최종적으로 가야할 곳을 소개합니다. 또 로마서는 우리가 그곳에 가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믿음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면 만물에 하나님의 손길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창세기의 제목  

원래 구약 성경들은 이름 없이 두루마리로 존재했습니다. 점차 유대인들은 각 두루마리 성경의 첫 단어를 중심으로 이름을 불렀습니다. 창세기의 첫 단어는 ‘태초에’라는 뜻의 ‘베레쉬트’입니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창세기’는 70인역에서 ‘기원’이란 의미로 ‘톨레돗(toledoth)’를 사용하자, ‘게네세오스(Geneseos)’fh 변역하고 이를 명칭으로 정했습니다. 한문 성경에서는 ‘創世記’로 정했고, 한글 성경에서는 한문 성경의 영향을 받아서 ‘창세기’라고 부르게 됩니다.

 

창세기의 저자

유대인들은 앞의 다섯 성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을 ‘토라’로 부르고, 기독교는 ‘모세오경’으로 칭합니다. 예수님도 ‘모세의 글’이란 표현을 사용하여, 모세의 저작설을 지지했습니다. 신약 성경의 정경화 과정 속에서 ‘사도성’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처럼 모세의 권위는 모세오경을 이해는 기본 틀입니다.

⑴ 내적 증거

성경에서 모세가 작성했다는 자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출애굽기 17:14; 신명기 1:1; 여호수아 1:7; 열왕기상 2:3 등, 신약에서는 마태복음 8:4; 마가복음 12:26; 요한복음 7:19; 사도행전 26:22 등이 있습니다.  

⑵ 외적 증거

전통적으로 전승(傳承)들은 다섯 권은 모세가 기록한 것이라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비평적 의미에서 모세는 아닙니다. 신명기에 모세의 죽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른 면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와 같은 권위를 가진 사람이 창세기를 기록했을 것입니다. 누가 기록했던지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기 때문에 그것이 크게 문제되지 않습니다.

 

창세기의 기록

연대 창세기의 정확한 기록 연대를 추정할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출애굽으로부터 모세가 죽은 사이에 기록되었습니다. 출애굽 연대는 성경 연대에 근거하여 B.C. 1446을 출애굽 시기를 봅니다. 이 역사적 근거는 투트모세 3세(Thutmoses, B.C. 1504~1448)를 이스라엘의 탄압자로 보고 그 아들 아멘호텝 2세 (Amenhotep, B.C. 1450~1420)때 모세로 인해 출애굽 한 것으로 봅니다. 그러므로 모세 오경은 출애굽으로부터 가나안 입성 직전까지인 B.C. 1446-1407년 사이에 기록되었다고 봅니다.

 

창세기의 기록 목적

창세기의 기록 목적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왜 출애굽을 해야 했으며, 가나안으로 들어가야 하는지를 설명합니다. 애굽의 노예 생활에 익숙했던 이스라엘은 갑자기 주어진 자유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오히려 애굽으로 되돌아가 몸은 힘들지만 정신은 편한 상태가 되고 싶어 했습니다. 모세는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과 아들됨의 신분을 확인시켜주고, 노예가 아닌 자유자로서 살아가야할 정체성을 심어줍니다. 그를 위해 이스라엘이 섬기는 하나님께서 누구신지 알려 줍니다. 창조주이시며, 심판자이시며, 이스라엘이 조상인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는 분이십니다. 아담과 하아와를 창조했으나 타락했고, 그 후에 태어난 사람들은 타락하여 홍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결국 아브라함을 통해 새로운 언약을 맺으시고 새로운 민족과 나라를 약속하십니다. 그 후손들이 바로 지금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인 것입니다.

 

창세기의 특징

이 창세기의 천지창조는, 다른 여러 나라의 국민, 특히 바빌로니아의 개벽설화에 힘입은 바 많다고 합니다. 그 중심사상은 전혀 유대인 독특의 것으로서, 철저한 유일신교의 사상으로서 일관되어 있음을 봅니다. 또 극히 태고의 사실 중에, 신약의 기본이라고도 할 수 있는 깊은 세계관, 인생관, 사회관이 간직되어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 의미에 있어서, 창세기는 놀라울 만큼 하나님의 계시의 글(책)이라 할 것입니다. 또 족장사의 부분에 있어서는 그 전기가 보통의 영웅의 전기와는 전연 취이를 달리하여 정복자나 개선장군 같은 위훈(偉勳)도 없으려니와 정치적 경제적 활동에 있어서도 볼 것이 없고, 문학적 예술적 공적의 기술도 없이, 다만 오로지 유일신 하나님의 신앙사로서 시종하고 있음을 봅니다. 즉 하나님의 눈에 비친 선민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전편에 넘쳐있는 사상은 하나님에 대한 인류의 관계여하에 있는 것으로서, 그 의미에 있어서 본서를 읽는 경우에 비로소 본서의 뜻을 분명히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일관하는 사상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선택하여, 이를 훈련하시고, 이스라엘을 통하여 전 인류에게 축복을 주시는 일인 것으로서, 본서는 이에 그 단서를 이루고 있습니다.

 

창세기의 주요 내용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과 언약을 맺었지만 아담이 깨뜨렸습니다. 인간은 타락했고, 결국 다시 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타락한 인류의 번성은 오히려 저주가 되었고, 노아 때에 홍수로 멸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언약을 맺으십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의 기원이 됩니다. 창세기는 시작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창조의 시작, 역사의 시작, 타락의 시작, 이스라엘의 시작들이 담겨있습니다.

 

창세기의 구조

창세기의 구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1-11장까지는 창조시기로 분류하고, 12-50장까지는 족장 이야기로 분류합니다. 족장들의 이야기는 창조와 고대 세계 위에 서있습니다. 11장까지의 사람들은 보편적 사람이라면, 12장부터 등장하는 사람들, 즉 족장들은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1-11장까지가 토양이라면 12-50장까지는 나무와 같습니다. 족장들의 이야기는 고대 창조 시대의 설화에 뿌리는 내리고 있습니다.  

 

창세기의 분해  

Ⅰ. 천지 창조로부터 아브라함까지 1:1-11:32

천지와 만물을 및 인류의 창조 1:1-2:25

죄의 시작 3:1-5:32

홍수의 심판과 노아의 구원 6:1-9:29

노아로부터 아브라함까지 10:1-11:32

Ⅱ. 아브라함의 일생 12:1-25:34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심 12:1-20

아브라함과 롯이 거주지를 따로함 13:1-14:24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심 15:1-17:24

소돔의 멸망과 롯의 구원 18:1-19:38

이삭의 출생 20:1-21:34

아브라함의 믿음의 시험 22:1-24

이삭의 결혼과 두 아들 23:1-25:34

Ⅲ. 이삭과 야곱의 일생 26:1-36:43

이삭의 번영과 형의 축복을 가로챈 야곱 26:1-27:46

야곱이 라반으로 도망감 28:1-30:43

야곱이 하란 떠나 가나안으로 돌아옴 31:1-35:29

에서의 계보 36:1-43

Ⅳ. 요셉의 일생 37:1—50:26

요셉이 애굽으로 팔리워 감 37:1-36

유다와 다말의 사건 38:1-30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됨 39:1-41:57

요셉이 형제들을 만남 42:1-45:28

야곱이 애굽으로 이주함 46:1-49:33

야곱의 죽음 5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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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03-03)


이제 나타난 하나님의 의

로마서 3장 21-31절


한양을 가기 위해서는 심신산골길을 통해서 전라도에서 보름을 걸려서 갔습니다. 그런 다음에 새로운 ‘신작로(新作路)’라는 길이 생겼습니다. 한양까지 2-3일 만에 갈 수 있도록 생활이 정말 많이 편해졌습니다. 그러나 점점 다리가 놓아지고 새로운 길이 뚫렸습니다. 이제는 서울을 하루 만에 다녀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보가 아닌 이상 과거의 길을 선택하지 않을 것입니다. 새로운 길에 대해 해택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에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아직까지도 옛날 길 하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면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바울은 이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의 창조주와 심판자이신 한 분 하나님이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들 모두를 의롭게 하심으로 자신의 의로움도 나타내셨다는 복음의 진리를 다시 선포합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십자가 위에서 나타난 그리스도의 믿음과 신실함이 가지는 결정적인 중요성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세상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21-22)

멸망 앞에 있는 인류에게는 더 이상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에 대한 어떤 작은 희망도 없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소망이 있다고 소개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는 새로운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이 사실을 21-22절에서 요약합니다.

21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21-26)

바울의 고발은 강렬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죄의 권세 아래서 비참하게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1:18-3:20).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죄의 삯은 사망이요”(로마서 6:23)라고 단정합니다. 모든 인류를 자연 상태로 두면 아무런 소망이 없이 모두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해법을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⑴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의(21-22)

본문에서 바울은 ‘(그러나) 이제’(21)으로 결정적인 전환점으로 시작합니다. 1:18-3:20의 긴 단락을 할애하여,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가 죄 아래 있음을 논증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를 위한 구원을 자기고 오셨습니다. ‘이제’, ‘율법과 상관없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의로움’이 나타났습니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하나님의 의로움’은 자기 백성과 맺은 언약의 약속을 끝까지 이행하시며, 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언약적 사랑과 신실하심을 통해 나타납니다. 그래서 ‘의롭다’는 개념은 어떤 도덕적 기준에 부합하는 행동이나 상태를 포함하여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에게 신실함을 더하며 정상적인 관계 속에 머물러 있음을 표현하는 관계적인 개념입니다. 죄 아래 놓여 있는 인간들을 향해 나타난 하나님의 의로움은 그들이 먼저 파괴한 언약적인 관계를 회복하시는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21절에서 바울은 선지자들과 더불어(12) 율법도 복음에 대해 증거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의로움이 ‘율법과 상관없이’ 나타났다는 것은 율법과 그리스도의 복음이 서로 배타적인 관계에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참조 10:4). 이 단락의 31절에서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운다고 말합니다. 물론 31절의 율법은 구속사 전체 속에서 그리스도 사건을 통해 재해석된 율법입니다. 바울은 이제 이 하나님의 의로움이 어떻게 드러났는지를 구체적으로 밝힙니다. 그는 하나님의 의로움을 21절에 이어 22절에서도 재차 언급하며, 즉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하심’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의로움’이라고 한정적으로 말합니다. 바울은 여기에서 그리스도에 의해서 아브라함 언약이 성취되었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언약에 실패했지만, 유일하고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 하나님의 백성인 예수는 하나님을 향한 언약적 신뢰와 신실함 곧 ‘피스티스’를 보이셨습니다. 그것은 결정적으로 십자가 위에서 나타났습니다. 이 예수의 믿음/신실함을 통해 마침내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랑과 의로우심이 드러났습니다. 그 하나님의 의로움은 ‘모든 믿는 자에게, 차별 없이’ 미칩니다(22).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언약을 아브라함 자손을 통해 성취하시고, 열방에게 복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 이전에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언약적 믿음/신실함’이 먼저입니다. 즉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함에 근거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3:22에서나 갈라디서 2:16에서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함을 통해 의롭다함 받는 것을 알고,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라고 그 상호관계를 명시하고 있습니다. ‘피스티스 크리스투’ 구문을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으로 번역 때의 장점은, 그것의 결과로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 또한 배제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의로움과 우리의 의로움의 근거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만 두게 합니다.

⑵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23-26)

‘하나님의 의’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사심, 죽으심 그리고 부활 승하심으로, 즉 예수님의 사건을 통해서 들어났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구원의 길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

① 사람의 입장에서 설명(23-24)

바울은 다시 죄의 노예 되어 있는 인간의 현실과 그것으로부터 모든 인간을 해방시키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다룹니다. 바울은 1세기 사람들이 노예시장에서 흔하게 사용하던 속량이라는 상업용어를 사용하여 우리가 받은 구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인간은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에게 예비하신 그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습니다(23). 그리스도께서 노예인 우리의 몸값을 자신의 죽음으로 대신 지불하시고 우리를 노예 상태에서 해방해 주셨습니다. 이를 통해 다시 백성의 지위를 회복하였다는 의미에서 우리가 의롭게 되었습니다. 죄의 노예로 붙잡혀 있는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대신 그 몸값을 지불하셨다는 점에서 이것은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격 없는 죄인들을 위해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셨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은혜’(24)입니다.

② 하나님의 입장에서 설명(25-26)

바울은 그리스도를 통해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25절에는 몇 가지 중요한 주석적 난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먼저 ‘힐라스테리온’을 ‘화목제물’과 ‘속죄소’ 모두로 번역할 수 있음은 도움말에서 설명하였습니다. 또 25절에 등장하는 첫 부사구 두 개의 용법 또한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있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피스티스’가 누구의 믿음(신실함)인지에 따라서 그 의미가 달라집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화목제물 속죄소로 세우신 것’이 그의 피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입니까? 이것은 불가능한 해석은 아니지만,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예수가 화목제물/속죄소로 세워진다는 생각은 예수의 사역을 우리의 믿음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아무래도 여기서의 ‘피스티스’를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함)’으로 보는 편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을 통해 보여주신,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통해 그를 화목제물(속죄소)로 세우셨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통해 우리 죄를 사하심으로 스스로 우리와의 관계를 회복하시고 당신의 언약적 신실하심과 의로우심을 나타내셨습니다. 바울은 25절과 26절에 두 번이나 하나님께서는 스스로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셨다는 말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피스티스 예수로 말미암은 자들도 의롭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피스티스 예수’도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함)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제 그들도 예수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말이다. 동시에 ‘예수의 믿음(신실하심)으로 말미암는 자들’이라는 표현 속에는 ‘예수의 믿음(신실하심)에 의지하는 자들’이라는 의미와 함께, 그 ‘예수의 믿음/신실함을 공유하는 자들’이라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는 바울 신학의 중심인 그리스도와의 연합 개념과 연결되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아낌없는 헌신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배풀어 주신 사랑 외에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성경은 오직 예수님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세 가지 문제(27-31)

행한 대로 우리를 심판하는 율법이 말하는 원리대로라면 우리 중에 아무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율법은 그것을 말해줍니다. 그런 율법을 잘못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의롭게 되었다면 자랑할 만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직 은혜와 믿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27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29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30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31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27-31)

우리가 의로움을 얻고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한 것이, 21-26절에서 설명한 대로.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근거해 있다면, 그 어떤 인간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새로운 길을 설명할 때 나올 수 있는 세 가지 문제를 제시합니다. 그것은 구원에 대한 자랑의 문제(27-28), 유대인과 이방인의 문제(29-30), 율법의 기능에 대한 문제(31) 등을 들 수 있습니다.

⑴ 구원에 대한 자랑의 문제(27-28)

바울은 먼저 ‘자랑할 데가 어디냐?’라고 묻습니다. 유대인이 어떻게 자기들의 특별한 위치에 대해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17-20,23)? 바울은 ‘있을 수 없느니라!’고 단호하게 자문자답합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은(22,25-26) 은혜로만(3:24)가능하기 때문에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는 것은 배제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은 인류의 노력이나 수고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온 해결책이기에 사람들이 서로 자랑할 수 없습니다. 믿음의 법을 따른다면 자기를 중심으로 하는 자랑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스스로 자랑할 수 없습니다. 28절은 27절을 다시 확인합니다. 그는 ‘무슨 (율)법으로냐? 행위로냐?’라고 묻습니다. 율법이 의롭게 하는 것이 아니므로 행함이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율법은 그런 목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결론적으로 바울은 ‘그리므로 사람이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라고 대답합니다.

⑵ 유대인과 이방인의 문제(29-30)

여기에 제기된 질문은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29)라고 묻습니다. 이것은 다른 각도에서 본 유대인의 특징이라는 동일한 문제를 다룹니다. 이방인들이 거짓 신인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참되고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예레미야 10:10)만이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유대인만이 여호와를 알고 경배했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창조주이시며 만민을 주관하시는 여호와께서는 모든 사람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해(신명기 7:6)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을 선택하시기 전에는 모든 사람을 똑같이 취급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특별한 백성으로 선택하신 후에도 자신이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의 하나님이심을 부명하게 보이셨습니다(참고 요나서). 게다가 이제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어서(로마서 3:23) 그들 사이에 ‘차별’이 없고, 구원의 유일한 근거도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죽음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똑같은 토대 위에서 취급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십니다. 바울은 여기서 이스라엘의 ‘쉐마’를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신명기 6:4).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는 할례자든지 무할례자든지 배경에 관계없이 똑같은 믿음의 조건으로 그분께 나아가는 모든 자를 의롭다 하실 것입니다.

⑶ 율법의 기능에 대한 문제(31)

마지막으로 바울은 율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라고 묻습니다. 이 질문에 바울은 특징적인 감탄조로 ‘그럴 수 없느니라’고 답하고 난 뒤에,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고 했습니다. 율법은 개인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이끌었을 때(20;갈라디아서 3:23-25), 율법의 목적은 성취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전체 계획 가운데 그 위치가 확정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거듭 구원의 길이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라고 확언했습니다. 그는 로마서 3장 22-31절에서 ‘믿음’이라는 단어를 무려 여덟 번이나 사용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율법은 무기치한 것이 아닙니다. 율법의 기능에서 7장에서 자세하게 설명할 것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여기에서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전통적인 유대교의 고백을 재정의 합니다. 하나님의 유일성에 대한 유대인들의 신앙고백인 쉐마를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의 하나님이라는 의미로 재정의 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오직 믿음만을 통해서 열방을 차별 없이 부르십니다. ‘믿음의 율법’(27)이란 표현은 31절에서 다시 설명됩니다. 바울에게 율법은 그리스도의 믿음 혹은 성도들의 믿음에 의해서 성취됩니다. 구속사 속에서 율법은 이 믿음의 출현을 기다립니다(갈라디아서 3:23-25), 그런 점에서 믿음은 율법을 파기하지 않고, 오히려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드러냅니다. ‘율법을 굳게 세운다’(31)라는 말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인간의 노력이나 수고로는 구원의 길을 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길을 새롭게 열어 놓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롭게 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잘 깨닫고 흔들림 없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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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11-01)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지혜

잠언 11장 1-15절


어떤 사회학자의 말에 따르면, 아주 내성적인 사람일지라도 평생 동안 평균적으로 만 명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사는 자리에서 어떤 행태로든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인 우리는 세상에 어떤 영향력을 끼쳐야 합니까? 선한 영향력을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경제생활과 언어생활에 있어 정직함은 질서와 정의를 구성하는 필수 요소입니다. 모든 일에 정직과 온전함을 추구하고 실행하는 자는 그로 인해 평안과 안전을 얻습니다. 더구나 정직한 말과 행동은 이를 행하는 사람에게뿐 아니라 그가 속한 이웃과 사회와 국가에 즐거움과 평안을 가져다줍니다.

 

정직한 자와 사악한 자(1-8)

교만한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기에 저울을 속여서 부당한 이득을 취합니다. 하지만 진노하시는 날에 그 불의한 재물 때문에 수치를 당하고 망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악에 사로잡히고 구원의 소망이 사라질 것입니다. 반면에 겸손한 자는 지혜롭고, 정직하며 공의를 추구합니다

1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2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 3정직한 자의 성실은 자기를 인도하거니와 사악한 자의 패역은 자기를 망하게 하느니라 4재물은 진노하시는 날에 무익하나 공의는 죽음에서 건지느니라 5완전한 자의 공의는 자기의 길을 곧게 하려니와 악한 자는 자기의 악으로 말미암아 넘어지리라 6정직한 자의 공의는 자기를 건지려니와 사악한 자는 자기의 악에 잡히리라 7악인은 죽을 때에 그 소망이 끊어지나니 불의의 소망이 없어지느니라 8의인은 환난에서 구원을 얻으나 악인은 자기의 길로 가느니라(1-8)

잠언 10-31장에는 다양한 주제 속에 지혜자와 우매자를 대조적으로 묘사한 금언들이 나타나며, 이를 통해 여호와 경외를 근본으로 한 지혜로운 삶을 고양합니다. 그런데 이런 금언들이 일정한 규칙이나 순서에 따라 배열되지 않았기 때문에 각 장에서 주제와 내용을 위주로 논리적 구조를 나누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먼저 각 장이나 단락에서 상대적으로 빈번하게 언급되는 주제가 있는지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그 주제를 중심으로 읽어보면서, 그 주제가 어떤 특정한 삶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덧붙여 같은 주제라도 종종 다른 관점이나 결론을 제시할 수 있으므로, 그 부분들을 연결 시켜 보완하고 보충하여 좀 더 구체적인 결론에 이를 수 있습니다. 만약 한 절과 그 다음 구절의 내용이 서로 관련이 거의 없다면, 억지로 연결하기보다는 따로 떼어서 읽거나 비슷한 다른 구절과 비교하며 읽음으로 그 주제에 대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잠언 11장은 대체로 10장과 비슷한 주제인 재물, 구제, 언어생활, 의인과 악인의 대조적 삶과 보응 등에 대한 금언을 소개하면서도 무엇보다 정직한 삶과 재물을 의지하지 않는 삶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본문 중 1-8절의 금언들은 대부분 정직한 경제생활을, 9-15절은 정직한 언어생활을 도모합니다. 이 목적을 위해 정직한 자에게 평안과 구원이 약속됨을 선언하고 의인과 악인의 대조적인 결말을 선언합니다. 1절은 거짓과 부당한 상거래가 아닌 정직과 공정을 기초로 한 상거래 행위를 실천하도록 권면합니다(16:11; 20:10, 23). 거짓 저울과 저울추로 사람들을 속여 물건은 적게 주고 돈을 많이 벌려는 심사는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상거래에 있어서 길이, 무게, 양 등을 잴 때 부정을 저지르지 말고 오직 공평한 저울과 추 그리고 공평한 측정법을 사용하라고 이미 명령하셨습니다(레 19:35-36). 2절에서 교만한 자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이 최고인 양 착각하는 미련한 자이며 이런 자에게는 수치가 따라옵니다. 반면에 겸손한 자는 자신의 약함을 인지하고 마음으로 하나님을 인정하는 자(3:57)로서 지혜로운 자입니다. 이런 자에게는 칭찬과 축복이 임합니다(10:6-7). 2절과 1절을 연결해본다면 상거래 행위에 있어서 속임수를 쓰는 자들은 뻔뻔하고 남을 업신여기는 교만한 자들입니다. 거짓과 속임수로 얻은 그들의 재물이 증가함에 따라 그들의 수치와 다른 이로부터의 비판과 원한(10:7)도 함께 증가합니다. 3-6절에서는 ‘정직한 자’와 ‘속이는 자’(사악한 자로 번역됨)가 각각 3절과 6절에 나와 전체를 한 단락으로 묶어줍니다. 또한, 이 명칭들은 5절의 ‘완전한 자’, ‘악한 자’와 각각 연결됩니다. 전체 네 가지 금언은 ‘의인은 자신의 의로 구원을 얻고 악인은 자신의 악으로 멸망한다.’로 요약됩니다.

먼저 3, 5, 6절에서는 정직과 완전함이 강조되었습니다. 정직한 자나 완전한 자는 완전함(‘성실’로 번역됨)과 의를 추구하며 실천하므로 그들의 삶에서 걸려 넘어지거나 낭패를 보는 일없이 안전과 구원을 얻습니다(3:23, 26). 그러나 신의 없이 속이는 자는 그들이 갖고 있는 속임수나 사악함으로 삶을 꾸려가므로 자기들의 피와 행악으로 인해 넘어지고 패망하고 맙니다. 이처럼 아들의 삶의 대조적인 결과는 그들이 선택한 내면의 태도와 추구하는 삶의 방향에 따라 이미 결정 납니다. 4절은 경제생활에 대한 금언이며 의와 불의 그리고 이로 인한 심판을 다룹니다. 3, 5, 6절과 연결하여 볼 때, 거짓으로 얻은 재물의 무익함이 정직함으로 얻는 구원의 유익함과 대조됩니다. 이는 1-2절의 정직하고 겸손한 경제생활과 사회생활과도 연결해 생각할 수 있습니다. 4절의 금언에서는 재물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하시는 날 즉, 심판의 날에 무익하지만, 정의를 가진 사람은 그날에 구원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이와 유사한 금언이 10:2에도 나오는데, 이를 연결해보면 11:4에서 언급하는 재물은 불의의 재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위의 1-3절에서 정직을 강조하고 있으므로, 이때 불의의 재물이란 속임수와 거짓의 산물입니다. 이런 재물을 쌓은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정직과 정의를 실행하는 자는 이런 진노의 날에도 아주 해를 당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얻습니다. 7-8절은 의인과 악인의 심판 날에 어떤 결과가 기다리는지를 대조합니다. 의인은 그의 삶에 어려움과 환난이 찾아온다고 하더라도 죄가 없음이 밝혀져 구원을 얻습니다. 반면, 악인은 의인이 무죄로 밝혀진 그 일에 자기의 죄가 드러나 심판을 받게 됩니다. 또한, 악인이 죽을 때, 그가 가졌던 소망이나 재물은 그와 함께 다 사라질 것입니다(10:28).

 

의인의 언어와 악인의 언어(9-15)

의인의 지혜롭고 정직한 말은 자신을 구원할 뿐 아니라 이웃도 구원하며 더 나아가 온 성읍에 평안을 안겨줍니다. 그의 형통을 성읍이 즐거워하고 그의 축복의 말을 통해 성읍이 번영을 누리게 됩니다. 반면에 두루 다니며 험담하고 이웃의 비밀을 퍼뜨리는 악인의 말은 이웃을 망하게 하고 자기 자신도 무너뜨리며 성읍도 무너지게 됩니다.

9악인은 입으로 그의 이웃을 망하게 하여도 의인은 그의 지식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느니라 10의인이 형통하면 성읍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패망하면 기뻐 외치느니라 11성읍은 정직한 자의 축복으로 인하여 진흥하고 악한 자의 입으로 말미암아 무너지느니라 12지혜 없는 자는 그의 이웃을 멸시하나 명철한 자는 잠잠하느니라 13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신실한 자는 그런 것을 숨기느니라 14 지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여도 지략이 많으면 평안을 누리느니라 15타인을 위하여 보증이 되는 자는 손해를 당하여도 보증이 되기를 싫어하는 자는 평안하니라(9-15)

9-15절의 금언에는 내용 면에서 입, 축복, 침묵, 한담, 지략 등 언어와 관련 있는 단어나 주제가 나와 ‘언어생활’의 주제를 논합니다. 이 금언들은 정직하고 신실한 말을 하는 자에게 평안과 구원이 있음을 교훈합니다. 이 중 9-12절의 금언들은 형식면에서 모두 히브리어의 두 번째 자음인 ‘베트’로 시작하는 공통점이 있어 묶음을 강화합니다. 내용면에서, 1-8절이 경제생활의 정직을 강조한다면, 9-15절은 언어생활의 정직을 강조합니다. 또한, 1-8절이 의인과 악인의 삶 그리고 그 삶의 결과나 심판을 말한다면, 9-15절은 의인과 악인이 그들의 공동체인 이웃(9,12,13,15), 도시(10,11), 나라(14)에 끼치는 영향력을 언급합니다.

먼저, 9, 12, 13, 15절은 의인과 악인의 언어가 이웃에게 끼치는 영향을 말합니다. 특히 9절은 ‘악인의 언어’와 ‘의인의 지식’을 대조합니다. 이때 ‘악인’은 3, 6절의 신실하지 못한 자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을 저버린 자’, ‘불경건한 자’를 가리키므로. 여기서 ‘의인’은 특히 ‘하나님을 신뢰하는 경건한 자’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때 의인이 갖고 있는 ‘지식’은 여호와 경외를 기초로 하는 지식(17, 29; 2:5)이나 판단력을 뜻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떠난 불경건한 자는 말로 이웃을 망치지만, 의인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아는 지식을 기반으로 하는 판단력이 있으므로 지혜롭게 피할 수 있습니다.

12, 13절은 의인과 악인의 이웃에 대한 말에 대해 논합니다. 의인과 악인은 이웃을 대하는 태도가 다릅니다. 악인은 이웃을 멸시하는 데다 지각까지 없으므로 돌아다니며 이웃에 대해 중상모략을 일삼고 비밀을 누설합니다(10:18-19). 그러나 의인은 신실하므로 이웃을 음해하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또한, 분별력이 있어 입을 다물 때를 알고 이웃의 비밀을 덮어줍니다. 이처럼 의인의 혀는 이웃에게 생명의 샘과 같은 역할을 하지만 악인의 혀는 독을 머금어 해를 줍니다(10, 11). 그뿐 아니라 자기 자신들에게 영향을 미치므로 미련한 입은 수치와 허물을 벗어날 길이 없게 됩니다(10:19, 31). 15절은 보증에 대한 금언인데, 보증이 쌍방 간에 말로 합의를 본다는 점에서 위 구절들의 언어생활과 연결됩니다. 보증에 대한 경고는 이미 6:1-5에서 상세히 언급되었습니다. 즉, 빚보증을 서지 말고 혹 보증을 해준 경우 적극적으로 그 위험에서 벗어나도록 힘쓰라고 권합니다. 이제 10, 11절은 의인과 악인의 삶이 그들의 사는 마을이나 도시에 끼치는 영향을, 14절은 국가에 미치는 영향을 언급합니다. 성읍에서 의인이 형통하고 악인이 없어지면 그 성읍도 함께 즐겁고 번영하지만, 거짓과 한담하는 자가 있다면 성읍도 망하고 맙니다.


최근 우리 사회는 각종 비리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악하고 불의한 자들의 뇌물과 비리는 나라를 병들게 합니다. 악인이 끼치는 해악만큼이나 의인이 미치는 영향력 또한 큽니다. 공평하고 정의로운 사회, 누가 시작해야 합니까? 세상 속에 빛으로 남겨진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이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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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03-03)


이제라도 알아야할 영적 지식들

사도행전 3장 17-26절


중국에서는 마약을 소지하면 중벌입니다. 역사적으로 청나라 시대에 마약이 만연해서 나라를 피폐하게 만들었습니다. 마약을 금지로 영국과 ‘마약전쟁’이 발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중국은 마약에 대해 민감합니다. 지금도 마약을 소지하면 중죄로 다스린 것입니다. 2009년도에는 영국인이 마약 4kg를 소지하고 중국에 들어갔다가 구속되고 처형되었습니다. 지난번에 한국 여성이 중국 공항에서 마약 소지로 구속 되었습니다. 이유는 어떤 사람이 공항에서 짐을 한국공항까지 옮겨달라는 요구에 마약인 줄 모르고 옮겨주다가 구속된 것입니다. 그 여인은 중국 경찰에 상황을 이야기 했지만, 모르고 행한 일이기 때문에 상황은 참작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약을 소지했기 때문에 중죄인입니다.

 

본문은 베드로가 회중을 향해 회개하고 돌이켜 죄 사함을 받으라고 촉구합니다. 그리고 장차 예수님이 만유를 회복하기 위해 다시 오실 것이라 전합니다. 그 예수님은 모세와 사무엘과 모든 선지자를 통해 예언되고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복의 근원이십니다.

 

알지 못한 죄(17-18)

살다면서 자신의 행동이 무례한 줄 모르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이 지적해주면 긍정적으로 받아들고 자신의 행동을 수정합니다. 그러면 주변 사람들도 행복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리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 18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자기의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17-18)

사도 베드로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원인을 말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행동은 유대인들의 무지 때문이라고 진단했습니다(17). 계속해서 그는 더 나아가 관리들도 무지로 인해 예수님을 못 박았다고 진단했습니다. 관리들은 예수님에 대한 시기심으로 백성을 충동질하고 선동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지의 무서움을 깨닫게 됩니다. 때로 우리는 잘못했을 때 ‘몰라서 그랬다.’고 변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지만큼 무서운 죄는 없습니다. 몰랐기 때문에 법죄가 아닙니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믿지 않습니다. 나중에 심판 받을 때 ‘그때는 몰라서 그랬습니다.’라고 변명할 수 없습니다. 기회가 있을 때 영접해야 하고, 기회가 있을 때 봉사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변명한 사람들에 대해 말씀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로마서 1:19)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형상을 심어주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조금만 신경을 쓰면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기에 힘써야 합니다.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도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호세아 6:3)

하나님의 진리를 잘 깨달아야 합니다. 영적인 무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아는 것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실 것입니다. 진리를 우리를 자유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19-24)

사건에 범인에게 증거가 있으면 더 이상 변명할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무지해서 실수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변명할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그들의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20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21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22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의 모든 말을 들을 것이라 23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 하였고 24또한 사무엘 때부터 이어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 때를 가리켜 말하였느니라(18-24)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이미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려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구약 시대에 선지자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들이 선포한 예언의 주인공은 메시아였습니다. 메시아가 오셔서 백성을 구원할 것을 수 없이 선포하였습니다. 심지어는 창세기 3장에서부터 예언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세기 3:15)

뿐만 아니라 이사야서에는 샐 수도 없이 많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우리들이 잘 아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사야 53장을 보겠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7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이사야 53:5-7)

이렇게 거울 본 것처럼 구약 성경에 선명한 메시아에 대해 예언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은 몰라서 예수님을 내주었다고 변명할 수 없습니다. 조금만 성경을 신경 써서 읽으면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예언한 말씀은 예수님께서 초림과 십자가와 부활은 모두 예언대로 이뤄졌습니다. 특히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했습니다. “나 같은 선지자”(22)도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신명기 18:18)

사무엘 이후 모든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를 외쳤습니다. 역사적으로 선지자들이 많다는 그 당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에 나타납니다. 그 선지자들이 ‘회개하라!’라고 외친 것은 삶의 행실이 좋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해야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 백성으로 천국에 들어갈 합당한 준비를 하라고 외친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이 지명하고 있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십자가 그리고 부활을 가리켜 예언했습니다(24). ‘십자가의 도’에 대해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에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1:18)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도(道)’라는 의미는 ‘메시지’입니다. 즉 십자가에 메시지입니다. 이 메시지를 사람들이 거부하고 듣지 않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단순한 메시지를 목숨을 걸어가면서 전하기 때문에 미련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하였습니다. 그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전하는 사람들은 그 사람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계속 전파해야할 사명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듣다보면 미련하게 들렸던 말씀이 생명의 말씀으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무지하게 행동했습니다. 실수를 저지른 일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실수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계획을 성취한 것으로 이용하셨습니다. 그 무지에 대한 책임은 당연히 유대인 자신들이 감당한 것입니다.

 

이제라도 알아야 할 것(25-26)

‘늦었다고 후회할 때가 기회다.’란 말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깨달았을 때, 그 순간에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까?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 26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25-26)

유대인들은 이제라도 오순절 이후 여러 가지 사역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사역으로 조금이라도 인식한다면 돌아와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선지자들을 후손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그 이유를 돌이켜 악함으로 버리게 하므로 백성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26). 하나님은 일찍이 아브라함의 씨를 통해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씨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백성이 이제부터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하며, 늦었지만 회개하고 돌아와 죄 씻음을 받아야 한다고 선포했습니다.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멸망합니다. 그러나 순종함으로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오면 구원과 복을 얻을 것입니다. 주위에 그리스도를 모르는 무지한 자들이 있습니까? 그를 위해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누구나 몰라서 실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지에서 오는 실수가 사람을 파멸로 이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주되심을 모르면 치명적인 결과에 이르게 됩니다. 아직도 영적 무지가운데 있습니까? 예수님을 알고 나아와 구원의 복을 얻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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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22-01)

 


신뢰할 수 있는 분을 찬양하는 다윗

사무엘하 22장 1-25절


한나의 노래와 함께 한 시대가 열렸다면 다윗의 노래로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얼핏 한나, 사무엘, 사울, 다윗이 주인공인듯하나, 참된 주인공은 그들의 찬미에 등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의 후예들에게 참 이스라엘의 왕께서 통치와 리더십을 가르치는 책의 마무리에서 다윗은 그 왕이 어떤 분인지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용맹스러운 통치자로서의 모습일 뿐만 아니라 수금을 잘 타는 음악가요(삼상 16:18), 시인이기도 합니다. 본문은 모든 대적으로부터 구원받은 후, 다윗은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삶을 돌아볼 때, 파란만장한 삶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감사의 노래로 시편 18편과 흡사합니다. 그의 인생을 잘 요약한 시를 통하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묵상하길 바랍니다.

 

고백과 기도(1-7)

하나님만 계시면 세상 아무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아니면 어떤 방법으로든 통장에 잔고를 쌓고, 사람들과 연대를 맺고, 높은 권력과 명예를 얻으려 하면서 하나님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자신을 지키며 합니까?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사탄의 공격, 악한 세상의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 외에 세상 것은 곧 무너지고 없어집니다. 세상 어디에도 완벽하게 안전한 곳은 없습니다.

1여호와께서 다윗을 모든 원수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그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씀으로 여호와께 아뢰어 2이르되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위하여 나를 건지시는 자시오 3내가 피할 나의 반석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그에게 피할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폭력에서 구원하셨도다 4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받으리로다 5사망의 물결이 나를 에우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6스올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7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아뢰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1-7)

다윗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사망의 물결이 몰려오고 불의의 창수가 두렵게 하는 상황, 스올의 줄이 그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덮치는 상황에 처했기 때문입니다. 죽음에 이르는 듯한 환난 가운데 하나님께 부르짖자 성전에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에 대적과 원수로 인해 고통당하고 사망이 임박한 듯한 상황에서 부르짖을 때 그 모든 외침에 귀를 기울이고 들으십니다.

(1) 배경 설명(1)

다윗 시의 서론으로 다윗이 사울의 손과 모든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신 여호와께 드린 노래라고 합니다. 사무엘상 2장에서도 한나는 사무엘을 하나님께 바친 후에 자신의 서원을 들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찬양을 드렸고, 사사기 5장에서는 가나안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의 노래를 드렸습니다. 또한 출애굽기 15장에서도 홍해를 건넌 후 여호와의 크신 구원을 감사하며 용사이신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이렇게 내러티브 중간에 나오는 사들은 대부분 여호와의 크신 구원에 감사하며 부르는 찬양들입니다.

(2) 반석이신 여호와(2-3)

다윗은 제일 먼저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는 여호와를 반석, 요새, 자신을 건져주시는 분, 피할 반석, 방패, 구원의 뿔. 높은 망대, 피난처, 구원자로 묘사합니다. 이것은 모두 전쟁에서 방어를 위해 사용하는 용어들로 다윗은 수많은 전쟁과 사울의 살해 위협 속에서 오직 자신을 지키시고 도우신 분은 여호와이심을 알고 모든 방어의 용어들에 여호와를 붙이고 있습니다. 이렇게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보호자이심을 천명하며, 그 보호자께서 자신을 모든 폭력에서 구원하셨다고 고백합니다.

(3)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심(4-7)

4절에서 다윗은 이런 구원을 어떻게 받았는지 설명하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이 지금 찬송을 드리고 있는 여호와께 기도하면 여호와께서 자신을 원수의 손에서 구원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윗이 여호와를 철저히 신뢰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2절에 나오는 반석과 뿔이라는 단어는 사무엘상 2장의 한나의 노래에서도 동일하게 언급됩니다. 이 단락은 환란에 빠졌을 때의 모습을 노래한 것으로 다윗은 자신이 겪는 환란을 죽음으로 표현합니다. 사망의 급류, 스올의 줄, 사망의 올무는 다윗이 경험했던 수많은 죽음의 위협들을 묘사하는 단어들로 이런 단어를 통해 수많은 전쟁을 겪은 다윗이 전쟁 때마다 자신 앞에 놓인 죽음의 그림자를 느꼈고 두려워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무엘서의 이야기에서는 다윗이 전쟁을 앞두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 전쟁을 하면서 두려움을 느꼈는지에 대한 언급 없이 늘 용감하게 전쟁에 앞장서고 늘 승리하는 모습으로만 그려집니다. 이야기만 보면 다윗은 항상 두려움 없이 전쟁에 나가 이기고 돌아온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시를 통해 우리는 다윗도 전쟁에 나갈 때 두려움을 느꼈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원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두려울 때 여호와께 부르짖으면 여호와께서 자신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다고 고백합니다.

 

여호와의 진노(8-16)

원수를 향한 심판의 무서움을 아십니까? 지금은 악한 자와 대적이 득세며 그들이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의 삶은 고통 가운데 끝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대적의 머리 위에 숯불을 쌓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분의 자녀를 핍박하고 고통으로 몰아넣은 자들은 향해 진노를 쌓고 계십니다. 이러한 심판을 알기에 성도는 원수로 인한 애매한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믿음의 길을 온전히 걸어가야 합니다.

8이에 땅이 진동하고 떨며 하늘의 기초가 요동하고 흔들렸으니 그의 진노로 말미암음이로다 9그의 코에서 연기가 오르고 입에서 불이 나와 사름이여 그 불에 숯이 피었도다 10그가 또 하늘을 드리우고 강림하시니 그의 발 아래는 어두캄캄하였도다 11그룹을 타고 날으심이여 바람 날개 위에 나타나셨도다 12그가 흑암 곧 모인 물과 공중의 빽빽한 구름으로 둘린 장막을 삼으심이여 13그 앞에 있는 광채로 말미암아 숯불이 피었도다 14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우렛소리를 내시며 지존하신 자가 음성을 내심이여 15화살을 날려 그들을 흩으시며 번개로 무찌르셨도다 16이럴 때에 여호와의 꾸지람과 콧김으로 말미암아 물 밑이 드러나고 세상의 기초가 나타났도다(8-16)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 땅에 임하실 때 하늘에서 크고 놀라운 우렛소리를 내시며 목소리를 높이십니다. 그 누구도 피할 수 없게 화살을 날려 모든 대적을 흩으시며 번개로 무찌르셨습니다. 하나님의 꾸지람과 콧김으로 말미암아 바다 밑이 드러나고 세상의 기초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위엄하신 모습으로 이 땅에 임하실 때 천지 만물은 진동하며 떨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데적과 원수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1) 여호와의 진노(8-9)

이 단락은 여호와의 신현의 모습을 묘사하였는데, 다윗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돕기 위해 달려오시는 여호와의 모습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오실 때는땅과 하늘의 기초가 모두 흔들리고 진동합니다. 8절에서 ‘진동하다’, ‘떨다’, ‘요동하다’, ‘흔들리다’와 같이 비슷한 단어를 반복하여 여호와께서 오실 때 천지가 진동하는 모습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렇게 천지를 진동시키면서 오시는 이유는 분노하셨기 때문입니다. 분노하신 이유는 자신의 아들인 다윗을 원수들이 죽이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9절은 분노하신 모습을 표현하는데, 진노로 코와 입에서 불과 연기를 내뿜고 계십니다. 이런 신인동형론적인 표현을 통해 여호와의 격렬한 진노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2) 구름을 타시는여호와(10-11)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내려오시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빽빽한 구름을 타고 여호와를 호위하는 그룹을 타고 바람을 타고 장엄하게 내려오시는 여호와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비구름을 몰고 천지를 진동시키며 오시는 모습은 사사기 5:4-5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3) 어둠 속의 숯불(12-13)

12절에서 하나님의 장막이 흑암 즉, 많은 물과 빽빽한 구름으로 둘러싸인 것으로 묘사하는데 이것은 출애굽 시 광야에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나타나셔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13절에서 그 앞에 있는 광채로 말미암아 숯불이 타올랐다고 하는데 이것은 벼락 치는 모습을 묘사한 것입니다. 번쩍번쩍 벼락이 내리치고 여기저기 불길이 솟아오르고 이때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천둥소리까지 내십니다. 다윗은 천둥소리를 지존자의 음성으로 묘사합니다. 지진, 천둥 번개, 구름, 연기, 불이 모든 묘사는 모두 시내산에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나타나실 때 보여주셨던 것으로 창조주이시며 용사이신 여호와의 위엄을 나타냅니다.

(4) 여호와의 콧김(14-16)

15-16절에서 여호와의 공격 무기로 화살을 날리는 것은 하반절의 번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분노의 콧김을 날리셔서 물의 바닥을 드러내신다는 것은 강한 폭풍을 일으키시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 표현은 홍해를 가르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번개와 폭풍을 무기로 다윗의 원수들을 공격하시고 물리쳐주십니다. 8절부터 16절에 나타난 여호와의 장엄한 신현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닙니다. 첫째로, 여호와의 장엄한 신현은 인간을 두렵게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여호와를 경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시고 언약을 맺으실 때 두려운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은 인간들이 여호와를 두려워함으로 함부로 여호와의 율법을 어기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여호와는 가까이 다가가야 할 분이지만 한편으로 인간이 함부로 대하며 다가가서는 안 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인간이 여호와의 용사로서의 힘과 능력을 알게 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능력을 바로 알 때 우리가 어떤 강한 원수를 만나더라도 그보다 더 강한 용사이신 여호와를 의지하기에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강한 용사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천둥과 번개와 불을 뿜으면서 달려오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을 구원하신 여호와(17-20)

깊은 물 속에 잠긴 것과 같은 상황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생애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극한 고통을 찾아오면 어디에도 빛이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을 맛보게 됩니다. 이 어둠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치고 또 쳐 보지만 몸은 점점 더 깊은 물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됩니다. 모든 힘을 다 쏟고 이제 소망이 없다고 여겨질 때, 오직 죽음밖에 생각할 수 없을 때, 바다 끝에서 우리를 기뻐하시며 기다리고 품으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17그가 위에서 손을 내미사 나를 붙드심이여 많은 물에서 나를 건져내셨도다 18나를 강한 원수와 미워하는 자에게서 건지셨음이여 그들은 나보다 강했기 때문이로다 19그들이 나의 재앙의 날에 내게 이르렀으나 여호와께서 나의 의지가 되셨도다 20나를 또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시므로 구원하셨도다(17-20)

이 단락은 다윗을 구원하신 여호와를 찬양하는 부분으로 용사로서 오신 여호와께서 손을 내밀어 다윗을 불들어 주셨고 많은 물에서 건지셨습니다. 많은 물은 다윗을 둘러싼 강한 적들을 상징하며 여호와께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적들의 손에서 건져주셨고, 그들이 재앙을 가져와도 자신의 지지자가 되어주셨으며, 결국 자신을 깊고 거센 물에서 건져서 넓고 평탄한 길로 인도하시며 구원해주셨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더 이상 원수들에게 둘러싸이지 않는 안전하고 평화로운 곳으로 인도하셨다는 의미입니다. 다윗은 여호와께서 자신을 구원해주신 이유를 하나님께서 자신을 기뻐하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공평하게 대하시는 여호와(21-25)

공의를 따라 깨끗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에게는 성령이 선물로 부어집니다. 성령님은 성도가 하나님의 뜻과 공의를 행하고 깨끗한 삶을 살도록 인도하십니다. 믿음의 고백은 성령이 역사하는 결과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성령의 내주하심과 역사와는 상관없이 입술의 고백만으로 자신의 구원을 확신합니다. 성도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의 고백은 하나님의 공의를 따라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21여호와께서 내 공의를 따라 상 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따라 갚으셨으니 22이는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을 행함으로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23그의 모든 법도를 내 앞에 두고 그의 규례를 버리지 아니하였음이로다 24내가 또 그의 앞에 완전하여 스스로 지켜 죄악을 피하였나니 25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대로, 그의 눈앞에서 내 깨끗한 대로 내게 갚으셨도다(21-25)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공의를 따라 행하며 깨끗한 삶을 살았습니다. 여호와의 도를 따라 지키고 악은 행하지 않았으며 하나님 안에서 그분의 법도를 따라 의롭고 깨끗하게 행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다윗에게 주의 자비를 나타내시며 주의 완전하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1) 여호와의 길(21-23)

21절부터는 왜 하나님께서 자신을 기뻐하셨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서에 기록된 전쟁 중에 여호와께서 용사로 나타나신 전쟁은 사무엘상 7:10에서 우레를 발하여 블레셋 군을 몰아내신 미스바 전쟁과 사무엘상 14:15에서 블레셋의 진이 진동하고 땅이 흔들림으로 수많은 블레셋 군을 물리친 요나단의 전쟁이 있습니다. 이렇게 다윗은 자신이 사울의 손에서 살아남고 왕이 되어서도 많은 적들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어 다윗 왕국을 안정적으로 다스릴 수 있게 된 것을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이런 다윗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과연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얼마나 묘사할 수 있으며, 내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지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2) 의를 따라 보상하심(24-25)

다윗은 앞 단락에서 여호와께서 자신을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시고 평안한 곳으로 인도하셨다고 찬양하며 그 이유를 자신을 기뻐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21-28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기뻐하신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21절에서 다윗은 여호와께서 내 공의를 따라 갚아주시고 내 손의 깨끗함을 따라 갚으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특히 손이 깨끗하다는 것은 자신의 손으로 무죄한 피를 흘리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22절은 ‘왜냐하면’으로 시작하며 그 이유를 설명하는데, 여호와의 길을 걸으며 악을 행함으로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다윗은 악을 행하는 것을 여호와를 떠나는 행동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23절은 자신이 이렇게 여호와를 떠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법도를 늘 앞에 두고 하나님의 규례를 멀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다윗이 선지자의 말씀에 순종하고 제사장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살았다는 것이며, 신명기 17:18-19의 말씀처럼 여호와의 율법서를 기록하여 옆에 두고 읽으며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신명기에서 명령하신 왕에 대한 규례를 지키며 살아왔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24절에서는 율법을 지키는 것도 대충 지키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지키기 위해 악을 피하였다고 합니다. 악에 물들거나 유혹을 받지 않기 위해 다윗은 아예 악한 상황이나 악한 사람을 피하면서 자신을 지킨 것입니다. 잠언에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악한 음녀에게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네 길을 그에게서 멀리하라 그의 집 문에도 가까이 가지 말라’고 말합니다. 가능하면 악한 집단에는 들어가지 않는 것이 좋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이 어렵기 때문에 자신도 물들지 않기 위해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행동을 비추어 잘못된 행동이 있는지 분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또한 공동체 안에서 자신만 옳은 행동을 하려고 할 때 많은 어려움이 생기게 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우리의 선한 행위대로 갚으시는 여호와의 능력을 믿으며 선한 행동을 하기 위해 애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한 행동을 하다가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에게 분노하시고 폭풍을 몰고 구름을 타고 천둥과 번개를 뿌리며 달려오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선을 행하기 위해서 애쓸 때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한 번도 이런 하나님을 온전하게 의지하며 선한 일을 위해 몸을 던져본 일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하나님의 선한 일을 위해서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목숨을 걸고 행동한 적이 있기 때문에, 25절에서처럼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서 내 깨끗함을 따라서 갚아주셨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미 영원한 생명을 내어주신 구원자이시며, 심판 중에도 사랑과 긍휼을 잊지 않으시며, 다가올 미래에 상급 주시는 왕이심을 믿고, 마음을 다하고 마음을 합하여 신실하게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주님께만 구원과 통치와 상급이 있다는 것을 노래했던 다윗처럼, 우리의 삶에서도 주님은 동일한 찬양을 받으시기 합당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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