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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15-01)

 


욕심으로 반란을 일으킨 압살롬

사무엘하 15장 1-12절


 

공동체를 세우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반대로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입니다. 구성원들이 함께 깨어 공동체를 지키지 않으면 거짓과 미혹의 영은 순식간에 모두를 어둠에 빠트립니다. 공동체를 무너지게 하는 요인들에는 어떤 것이 있으며 어떤 점을 주의해야 합니까?

 

압살롬의 반란이 시작되었습니다. 압살롬은 오십 명의 친위부대를 조직한 뒤에 그 사람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특히 압살롬은 다윗 왕에게 재판을 받으러 오는 사람들을 가로채서 자신이 재판하고, 다윗 왕이 백성과 접촉하지 못하도록 가로막았습니다. 4년 동안 이렇게 하면서 백성들의 지지를 확보한 후에, 다윗의 허락을 받아 헤브론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반란을 일으키니, 많은 사람이 모이는데, 아히도벨도 합류하였습니다.

 

반역을 위한 준비 기간(1-6)

하나님의 공동체인 교회를 통해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인정받으려 하는 자를 경계해야 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심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자아 성취의 장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뜻을 이뤄 가는 그분의 몸입니다. 교회는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 하는 자를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한 자들을 지도자로 세우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1그 후에 압살롬이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말들을 준비하고 호위병 오십 명을 그 앞에 세우니라 2압살롬이 일찍이 일어나 성문 길 곁에 서서 어떤 사람이든지 송사가 있어 왕에게 재판을 청하러 올 때에 그 사람을 불러 이르되 너는 어느 성읍 사람이냐 하니 그 사람의 대답이 종은 이스라엘 아무 지파에 속하였나이다 하면 3압살롬이 그에게 이르기를 보라 네 일이 옳고 바르다마는 네 송사를 들을 사람을 왕께서 세우지 아니하셨다 하고 4또 압살롬이 이르기를 내가 이 땅에서 재판관이 되고 누구든지 송사나 재판할 일이 있어 내게로 오는 자에게 내가 정의 베풀기를 원하노라 하고 5사람이 가까이 와서 그에게 절하려 하면 압살롬이 손을 펴서 그 사람을 붙들고 그에게 입을 맞추니 6이스라엘 무리 중에 왕께 재판을 청하러 오는 자들마다 압살롬의 행함이 이와 같아서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압살롬이 훔치니라(1-6)

 

압살롬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 위해 철저한 반역을 준비했습니다. 그는 백성들의 애로사항을 잘 들어 주며, 만일 자기가 왕이 되어 재판장이 되면 이스라엘에게 공의를 베풀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심지어 자신 앞에 엎드려 경의를 표하는 자들의 손을 잡아 주고 입을 맞추기까지 하며 환심을 샀습니다.

 

(1) 친위 부대 조직(1)

압살롬은 다윗과 만나고 나서 왕권을 차지하기 위한 수순을 밟기 시작합니다. 비록 형식적인 만남이었고 자간의 관계를 회복한 것은 아니지만, 대외적으로 왕으로부터 사면을 받고 왕자의 지위를 회복한 것으로 보이게 행동합니다. 장자 암논이 죽었기에 그가 왕위 계승 서열 1위였습니다. 압살롬은 자신에게 왕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것과 왕자로서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 병거와 말들과 50명의 호위병을 앞세워 어디를 갈 때든지 대동하고 다녔습니다. 아버지의 지지를 받지 못할 것을 알았기에 백성의 지지를 받아 반역을 도모하려고 마음먹은 것입니다.

 

(2) 다윗에 대한 흑색선전(2-3)

압살롬이 반역을 위해 준비한 또 한 가지 일은 다윗에게 재판을 받으러 오는 사람들을 가로채는 것이었습니다. 압살롬은 일찍 일어나 성문 길가에서 서성이다가 왕에게 재판을 요청하러 오는 사람이 있으면 불러 어디 출신이냐고 물어본 뒤에 그 사람이 압살롬에게 대답하면 그 사람의 편을 들면서 다윗 왕은 그의 송사를 들을 사람을 세우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왕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전쟁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것이요, 또 하나는 백성의 송사를 지혜롭게 재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왕위에 오르자 하나님께 백성들을 잘 재판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그런데 압살롬은 다윗이 너무 바빠서 직접 재판할 수 없고 대신 재판할 다른 사람도 세우지 않은 상태라고 말함으로써 다윗이 재판관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암시를 주어 간접적으로 비난한 것입니다. 또 왕에게 가더라도 바빠서 제대로 옳고 그름을 판결할 수 없을 것이란 인상도 줍니다.

 

(3) 백성들의 친구가 된 압살롬(4-6)

이렇게 다윗을 험담한 뒤 4절부터는 자신에 대한 자랑을 시작합니다. 자신을 재판관으로 세우면 사람들이 재판을 받기 위해 올 것이고 자신은 그들에게 정의를 베풀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해서 아쉽다고 이야기합니다.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에게 당신이 옳다고 말해주어 자기편으로 삼은 뒤, 자신이 왕이 되면 당신이 옳다는 정의로운 판결을 내릴 것인데 왕이 아니어서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을 왕으로 지지해달라고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압살롬이 백성들에게 한 또 다른 행동이 있습니다. 사람이 가까이 와서 왕자인 그에게 절을 하며 예를 표하려고 하면 손을 뻗어 절을 하지 못하게 하고 오히려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절을 하는 것은 군신 간의 예를 표하는 것으로 압살롬은 이런 행동을 사양하고 대신 친구나 친척들 간에 친밀하게 나누는 인사인 끌어안고 입을 맞추는 행동을 함으로써 친근감을 준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행동을 한 번만 한 것이 아니라 왕에게 재판을 받기 위해서 오는 사람들에게 한결같이 하였고,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압살롬을 따르기 시작합니다. 압살롬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훔친 것입니다.

압살롬에게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만한 조건이 충분했습니다. 첫째, 그의 외모는 아름다웠습니다. 아름다운 외모는 사람들에게서 호감을 얻기에 유리한 조건이었다. 둘째, 그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송사하러 온 백성들의 편을 들어주고 왕자로서 거만하게 행동하지 않고 매우 친근하고 편안하게 다가갔습니다. 이런 행동들은 매우 계산되고 정치적인 것들이지만, 백성들에게 효과적이었고 결국 많은 사람들이 압살롬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압살롬이 백성들과 끌어안고 입을 맞춘 것처럼 다윗이 돌아온 압살롬을 친근하게 대했다면 압살롬이 다윗을 향해 반역을 일으켰을지 의문입니다.

 

헤브론으로 간 압살롬(7-9)

성도는 경건을 의익의 방도로 이용해서는 안 됩니다. 스스로 경건한 척하며 사람을 속이고 무언가를 얻어내려고 하는 것만큼 가증스러운 것도 없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하는 연기는 언젠가 연기처럼 다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그 어떤 위선과 가식도 통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정직한 자에 의해서 세워져야 합니다.

 

7사 년 만에 압살롬이 왕께 아뢰되 내가 여호와께 서원한 것이 있사오니 청하건대 내가 헤브론에 가서 그 서원을 이루게 하소서 8당신의 종이 아람 그술에 있을 때에 서원하기를 만일 여호와께서 반드시 나를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시면 내가 여호와를 섬기리이다 하였나이다 9왕이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하니 그가 일어나 헤브론으로 가니라(7-9)

 

자신의 힘으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싶은 압살롬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이스라엘의 왕 다윗을 속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속이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압살롬이 반역하려는 왕 다윗은 자신을 사랑하는 아버지였습니다. 다윗은 사랑하는 아들의 계략을 전혀 눈치재지 못했습니다.

 

(1) 압살롬의 요청(7-8)

이렇게 압살롬이 백성들의 마음을 훔치면서 예루살렘에서 4년을 지냈고 어느 정도 힘을 얻게 되자 압살롬은 반역을 위한 구체적인 행동에 들어갑니다. 먼저 다윗에게 헤브론에 가서 자신이 여호와께 서원한 것을 갚겠으니 보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술에 있는 동안 여호와께서 자신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시면 여호와를 섬기겠다고 서원하였다고 합니다.

이 서원의 내용에는 이중적 의미가 있는데, 첫째는 자신이 무사히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으니 서원을 갚을 의무가 있으며, 그것은 자신이 헤브론으로 가야 하는 강력한 이유가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자신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된 것은 요압이나 드고아 여인의 계획 때문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도우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압살롬은 자신이 돌아온 것이 여호와의 뜻이었다고 다윗을 설득하여 압살롬에 대한 부담과 불안한 마음을 내려놓게 한 것입니다. 이런 압살롬의 설득에 다윗은 평안히 가라는 승낙을 해주었으며, 압살롬은 헤브론으로 향합니다.

 

(2) 다윗의 허락(9)

이번에도 다윗은 암논 때와 마찬가지로 압살롬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에는 암이 목숨을 잃었다면 이번에는 다윗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번에도 어리석은 결정을 한 것입니다. 이렇게 다윗은 자식 문제에 있어서는 여전히 지혜로운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지 않으셨기 때문이며, 이것이 다윗에게 내려진 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벌하실 때는 소극적인 방법과 적극적인 방법을 모두 사용하십니다. 직접 개입하지 않고 악한 본성과 마음의 욕심대로 살도록 내버려 두실 때도 있고, 적극적으로 재앙을 내려서 벌하실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후자를 더 두려워하고, 어려움을 만나면 하나님의 벌일지 모른다고 여기며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더 무서운 벌은 우리의 어리석음을 따라 살도록 내버려 두시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때는 자신이 벌을 받고 있다는 사실도 모를 수 있으며, 회개할 기회마저 얻지 못하고 죄의 흐름에 따라 흘러가다 멸망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악한 행동을 하는데 아무 제재가 없다면 혹시 나를 내버리신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할 것입니다. 압살롬이 헤브론으로 간 것은 그곳이 유다 지파의 본거지이자 다윗이 처음 왕권을 얻었던 곳으로 다윗의 후계자로서의 모습을 부각시키기 좋은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헤브론에서 반역을 도모하는 압살롬(10-12)

교회의 기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교회는 말씀에 기초해 나가야 합니다. 압살롬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자신의 나라만을 생각하며 하나님 나라를 외면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열매인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떠나면 더 이상 하나님 나라와 상관이 없이 세상의 공동체가 되어 버립니다.

 

10이에 압살롬이 정탐을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에 두루 보내 이르기를 너희는 나팔 소리를 듣거든 곧 말하기를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다 하라 하니라 11그 때 청함을 받은 이백 명이 압살롬과 함께 예루살렘에서부터 헤브론으로 내려갔으니 그들은 압살롬이 꾸민 그 모든 일을 알지 못하고 그저 따라가기만 한 사람들이라 12제사 드릴 때에 압살롬이 사람을 보내 다윗의 모사 길로 사람 아히도벨을 그의 성읍 길로에서 청하여 온지라 반역하는 일이 커가매 압살롬에게로 돌아오는 백성이 많아지니라(10-12)

 

압살롬은 정탐을 보내 각 지파의 동향을 살피고 200명을 헤브론으로 데리고 가서 나라의 근간을 형성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모사인 아히도벨까지 데려왔습니다. 이처럼 압살롬은 사람들을 의지해서 모든 일을 진행했습니다. 압살롬이 세우려는 나라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사람의 나라였습니다.

 

(1) 선동하는 압살롬(10)

다윗의 허락을 얻은 압살롬은 온 이스라엘에 정탐꾼을 보내어 나팔 소리가 나면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다고 외치라고 합니다. 미리 사람들을 심어놓고 언론 플레이를 하여 자신이 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온 이스라엘에 재빨리 알리려고 준비한 것입니다.

 

(2) 초청받은 사람들(11)

헤브론으로 가면서 200명의 손님을 데리고 갑니다. 이들은 갈 때는 모르고 갔지만 후에 압살롬을 지지하게 되는데 예루살렘이 아닌 헤브론에서 압살롬의 군사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상태에서 압살롬에게 대항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압살롬은 이들을 볼모이자 지지 세력으로 삼기 위해 헤브론으로 데리고 간 것입니다.

 

(3) 모여드는 사람들(12)

마지막으로 그는 사람을 보내서 다윗의 참모인 길로 사람 아히도벨을 데려옵니다. 표면적으로는 제사에 손님으로 초청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모사로 부리려고 초청한 것입니다. 이에 아히도벨은 압살롬의 편에 서게 됩니다. 그런데 아히도벨은 밧세바의 할아버지이며 다윗과 인척 관계에 있는 사람인데, 왜 다윗을 버리고 압살롬의 편에 섰는지는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아히도벨의 등장으로 압살롬의 반란은 다윗이 밧세바와 간통하고 그녀의 남편 우리아를 죽인 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드러납니다. 아히도벨이 다윗의 반대편에 선 이유가 아히도벨은 다윗이 자신의 손녀 딸과 간통하고 손녀사위인 우리아를 죽인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은 아닌가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모사까지 얻은 압살롬의 반역이 구체화되었고, 그를 지지하는 백성들도 점점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주께서 피 값을 주고 사신 교회가 분란과 혼란에 빠지는 것은 애통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많은 교회들이 사탄에게 속아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는 미리 사탄의 계략을 분별하고, 거짓과 이간, 분열과 다툼으로부터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말씀 안에서 분별력을 길러야 합니다. 삶의 목적뿐 아니라 그것을 성취하는 방법도 하나님의 뜻에 거스르지 않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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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06-02)


영혼을 망치는 죄에 대한 지혜

잠언 6장 20-35절


현대 사회는 소위 중독 사회입니다. 우리 사회는 각종 중독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5대 중독 퇴치를 위한 범국민운동과 법 제정이 거론되고 있지만, 그것은 인간의 내밀한 욕망을 간파하지 못한 임시방편일 뿐 궁극적인 해법은 될 수 없습니다. 중독은 중독을 통해서 치유됩니다. 빛이 어둠을 몰아내듯, 선한 중독이 악한 중독을 몰아냅니다. 지금 나는 무엇에 취해 있고 무엇에 침잠되어 있습니까?

 

음녀의 아름다운 외모와 눈짓과 달콤한 말에 유혹을 받고 간음을 저지르는 자는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가는 것입니다. 간음의 끝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받게 될 수치와 능욕과 후회뿐입니다. 부모의 훈계를 저버리고 지혜로운 인도를 받지 않는다면 귀한 생명까지도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버지 강연(9) : 간음하는 여인을 피하라(20-35)

성경 없는 세상엔 의 기준도 없습니다. 이 성경을 묵상하지 않고서 유혹 많은 세상을 이길 길은 없습니다. 그러니 어떤 상황에서도 말씀을 붙드는 신실함이 우리를 시험에서 이기게 해주고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말씀을 폐부 깊은 곳까지 거하게 하십시오. 환경이나 조건이 아니라 말씀에 대한 자기 태도가 내 현재와 미래를 결정할 것입니다.

 

20내 아들아 네 아비의 명령을 지키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고 21그것을 항상 네 마음에 새기며 네 목에 매라 22그것이 네가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네가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네가 깰 때에 너와 더불어 말하리니 23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24이것이 너를 지켜 악한 여인에게, 이방 여인의 혀로 호리는 말에 빠지지 않게 하리라 25네 마음에 그의 아름다움을 탐하지 말며 그 눈꺼풀에 홀리지 말라 26음녀로 말미암아 사람이 한 조각 떡만 남게 됨이며 음란한 여인은 귀한 생명을 사냥함이니라 27사람이 불을 품에 품고서야 어찌 그의 옷이 타지 아니하겠으며 28사람이 숯불을 밟고서야 어찌 그의 발이 데지 아니하겠느냐 29남의 아내와 통간하는 자도 이와 같을 것이라 그를 만지는 자마다 벌을 면하지 못하리라 30도둑이 만일 주릴 때에 배를 채우려고 도둑질하면 사람이 그를 멸시하지는 아니하려니와 31들키면 칠 배를 갚아야 하리니 심지어 자기 집에 있는 것을 다 내주게 되리라 32여인과 간음하는 자는 무지한 자라 이것을 행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망하게 하며 33상함과 능욕을 받고 부끄러움을 씻을 수 없게 되나니 34남편이 투기로 분노하여 원수 갚는 날에 용서하지 아니하고 35어떤 보상도 받지 아니하며 많은 선물을 줄지라도 듣지 아니하리라(20-35)

 

첫 모음집의 아홉째 교훈은 다시 간음의 어리석음과 위험을 경고합니다. 음란한 여인은 아름다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생명을 악탈하는 사냥꾼에 불과하며, 그 유혹에 넘어가 간음하는 자는 참혹한 대가를 될 것입니다.

 

(1) 내 말을 들어라(20-21)

잠언 6:20-35는 1-9장에서 ‘내 아들(들)아’로 시작하는 강연 중 아홉째에 해당합니다. 이 강연은 2:16-19과 5:1-23에 이어 음녀에 대한 경고를 담고 있습니다. 20-24절은 훈계를 들으라는 명령과 그것의 유익을 안내하는 서론 부분으로 볼 수 있습니다. 25-33절은 간음하는 여인을 피하라는 조언이고, 34-35절은 그 조언을 듣지 않은 자들이 받을 심판에 관한 내용입니다. 아들을 불러 주목하게 하고 언급하는 아버지의 첫마디는 다른 강연에서와 마찬가지로 “내 말을 듣고 지키라 ”입니다. 여기 20절에서는 특히 1:8과 같이 아버지의 명령만이 아니라 어머니의 법을 함께 언급하며 자식을 훈계로 양육하는 것이 아버지만의 의무가 아니라 어머니와 공동 책임이 있음을 드러냅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부모가 주는 명령을 항상 마음에 새기고 목에 매라고 명령합니다. 이러한 명령은 잠언 3:1-3이나 7:1-3에서 나오는 명령과 유사합니다. 이 구절들은 지혜의 말씀을 마치 반지나 목걸이처럼 자신의 신체에 달고 다니면서 그 지혜의 조언을 떠올림으로써 궁극적으로 말씀대로 하는 삶을 살도록 종용합니다. 이처럼 말씀을 몸에 붙이고 다니면서까지 순종하라는 명령은 잠언의 새로운 명령이 아니며, 이미 신명기 6:6-9에서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 명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6절 바로 전에 나오는 4-5절의 말씀입니다. 4-5절의 말씀은 순종과 결부되어 있으며, 순종 이전에 하나님의 백성이 미리 깨닫고 행해야 할 부분입니다.

먼저 하나님이 한 분이신 여호와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삶의 우선순위에 두지 말라는 말이며, 하나님 명령이 인간이 따라야 할 최선이며 최고의 명령임을 내포합니다. 둘째로, 이런 하나님을 모든 마음과 모든 성품과 모든 힘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진정한 마음으로 내 모든 것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며 순종할 때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순종이 됩니다. 속 빈 강정이나 로봇처럼 진실한 마음과 태도 없이 기계적이고 형식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면 도리어 책망을 받을 것입니다(암 5:4-6; 미 6:-8).

위와 같이 하나님이 나 자신에게 어떤 분인지를 먼저 인식하고 그 하나님을 전적으로 사랑하며, 또 계속 사랑과 충성을 바칠 것을 다짐하며 6-9절의 말씀을 새겨들어야 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을 먼저 마음에 새겨 그 말씀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순종하려는 결단을 내리라고 격려하십니다. 자신이 먼저 그 말씀이 어떤 내용인지 알지 못하거나 행하지 않고서 자녀에게 가르친다면 그 가르침은 거짓이며 위선이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을 손목에 매거나 미간에 붙이고 집의 문설주와 대문에도 붙여 하나님의 말씀을 어디에서든 기억할 수 있도록 하라고 강조하십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집에서든 나가서든 누웠을 때든 일어났을 때든 부지런히 자녀에게 반복해서 말해야 합니다. 신명기 6:6-7에서 잘 나타나, 잠언 6:20의 자녀를 향한 부모의 명령은 단순히 부모의 지식과 경험의 전수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하신 말씀의 전수입니다. 부모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또한 자기 자녀들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도록 그것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부모의 의무이며 하나님에 대한 순종의 표현입니다.

 

(2) 훈계는 생명의 길이다(22-24)

아버지와 어머니의 훈계는 우리의 삶에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는 부모의 명령과 법이 여호와 경외를 근본으로 하는 지혜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낮에 활동할 때에는 훈계하며 바른 길로 인도받게 되며, 밤에 잘 때는 보호를 받고, 깨어 있을 때는 계속적으로 그 훈계를 되새김질할 수 있습니다. 부모의 이러한 훈계와 책망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녀의 삶 전체를 조명하고 규제하고 인도하는 등불과 빛이 되어 생명의 길로 인도하도록 한몫을 담당합니다. 여기서 아버지가 명령과 훈계를 등불과 빛을 넘어 생명으로 연결하는 이유는 이제부터 언급될 음행이나 간음의 결과가 생명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전하는 지혜로운 조언을 힘입는다면 아들은 악하고 음란한 여인의 부드럽고 매혹적인 말에 빠지지 않고 생명을 보존할 수 있게 됩니다. 6장의 음녀는 스스로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규제를 받지 않는 여자로서 자기의 악하고 음란한 성품을 이용하여 남자를 꾀는 자이며 신앙과 윤리를 버리고 간음을 자행하는 자입니다.

 

(3) 간음하는 여인을 피하라(25-33)

25-33절은 아버지의 강연 가장 핵심 부분으로서 ‘간음하는 여인을 피하라’는 명령을 중점적으로 다룹니다. 아버지는 먼저, 음녀의 겉모습을 보고 마음에 정욕을 품지 말라고 아들에게 경고합니다. 음녀는 부드러운 말로 상대의 비위를 맞출 뿐 아니라 아름답게 꾸민 모습과 매혹적인 눈짓으로 상대를 유혹합니다. 남자들이 여자의 이러한 육체적인 아름다움에 취약하므로 그런 모습에 쉽게 유혹되지 않도록 아버지는 아들에게 강한 어조로 말하고 있습니다.

26절에서 아버지는 창녀와 유부녀에 대한 대조를 통해 아들로 하여금 음행이나 간음에 빠지지 않도록 권고합니다. 이 구절은 두 개의 다른 번역이 가능하며 이에 따른 각각의 해석이 제시됩니다. 하나는 음녀의 유혹에 넘어간 자는 재산을 탕진하여 그에게 빵 한 조각만 남게 되고 유부녀와 음행을 저지른 자는 귀한 생명을 잃는다는 해석입니다. 다른 하나는 창녀에게 가는 자는 그녀에게 빵 한 조각만 지불해도 되지만 유부녀와 간음한다면 목숨을 대가로 지불해야 한다는 해석입니다. 두 해석 모두 음행과 간음의 심각성과 대가를 지적합니다.

불을 갖고 놀면 몸에 화상을 입거나 옷을 태우게 되듯이, 남의 아내와 간음을 저지르거나 그녀를 만지기만 해도 그 일로 인해 정죄를 당하고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됩니다. 앞서 5:7-14에서 음녀의 유혹에 빠진 자가 받는 피해를 설명하였듯이, 간음하는 자도 자신의 지위, 명성, 재물, 건강, 신앙 등에 타격을 입고 사회적으로도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 뻔합니다. 아버지는 간음한 사람을 도둑과 비교하여 그가 도둑보다 훨씬 어리석고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배가 고파서 물건을 훔치는 일은 어리석은 행동이며 죄인 것이 확실하지만, 사람들은 그 도둑에게 동정심을 느껴 그를 멸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간음하는 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사람들의 동정과 이해를 받을 길이 없습니다. 수치와 능욕과 패망과 죽음과 같은 치명적인 결과가 그를 기다릴 뿐입니다.

성경은 한 남자가 다른 남자의 아내를 취하는 행동이나 다른 여러 형태의 간음을 자신과 타인의 가정을 해치는 행위로 여깁니다. 첫째, 이는 후손을 생산할 권리와 땅을 적절한 후손에게 물려줄 권리를 해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출 20:14). 둘째, 간음은 당사자 모두를 정결에서 떠나 부정하게 만듭니다(레 18:20). 셋째, 간음은 개인만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사는 땅(공동체)을 부정하게 만드는 요인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의 여러 족속을 심판하려고 하신 이유 중에 간음을 비롯한 성적 문란도 포함되었습니다(레 18:24-25).

 

(4) 경고와 결론(34-35)

남의 아내와 간음한 자는 그녀의 남편 질투와 분노로 인해 어떤 용서나 이해도 받을 수 없습니다. 누구의 물건을 훔쳤다면 그에게 배상하거나 용서를 빌 수 있고 화난 사람에게는 선물을 주어 마음을 누그러뜨리기도 할 수 있지만 배신당하고 상처받은 남편의 분노를 진정시킬 길은 없습니다.

 


 

말씀의 지배를 받지 못하면 욕망의 지배를 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말씀의 유익과 욕망의 결과를 대조하여 무엇을 품고 살아야 하는지 도전하고 있습니다. 지금 말씀의 빛을 따라 거룩한 길을 걷고 있는지, 아니면 '욕망의 불을 품고 부정한 길을 가고 있는지 묻고 있습니다. 말씀을 대면할 때 우리가 피해야 할 길과 걸어가야 할 길을 제대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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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14-02)


다윗에게 화해하려고 시도하는 압살롬

사무엘하 14장 21-33절


 

결속력이 강한 공동체일수록 지도자의 카리스마가 돋보입니다. 공동체의 일치에 지도자의 역량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도자가 원하는 대로만 작동되면 부작용도 생길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부작용을 방지하기 위한 요소나 대책은 없겟습니까? 있다면 어떤 것이 필요하겠습니까?

 

암논이 죽은 지 3년 정도가 흐르자 다윗이 압살롬을 그리워하는 줄 안 요압은 드고아의 지혜로운 여인을 불러 왕 앞에서 연극을 하게 합니다. 다윗은 드고아의 여인 이야기가 사실인 줄 알고 살인한 아들의 죄를 용서해 주었고, 드고아의 여인은 이를 이용하여 압살롬을 용서하는 것에 대해 언급하며 용서가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다윗은 이 모든 계획이 요압에게서 나온 것인 줄 알았지만, 압살롬을 보고 싶은 마음에 못이기는 체하며 압살롬을 예루살렘으로 부릅니다.

 

압살롬의 예루살렘의 귀환(21-24)

사막을 지나던 낙타와 그 주인이 있었습니다. 추운 밤이 되자 텐트 안에 있는 주인에게 낙타가 춥다면서 텐트에 머리만이라도 집어넣으면 안 되겠느냐고 했습니다. 주인이 허락하자 이번에는 앞다리까지 들어가게 해 달라고 했고, 그것도 허락하자 결국은 낙타가 텐트 안으로 들어와 텐트가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정죄 받아야 할 압살롬의 복권을 허락했지만, 결국 이런 결정 때문에 왕국 전체가 위기를 맞고 맙니다.

 

21왕이 요압에게 이르되 내가 이 일을 허락하였으니 가서 청년 압살롬을 데려오라 하니라 22요압이 땅에 엎드려 절하고 왕을 위하여 복을 빌고 요압이 이르되 내 주 왕이여 종의 구함을 왕이 허락하시니 종이 왕 앞에서 은혜 입은 줄을 오늘 아나이다 하고 23요압이 일어나 그술로 가서 압살롬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오니 24왕이 이르되 그를 그의 집으로 물러가게 하여 내 얼굴을 볼 수 없게 하라 하매 압살롬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니라(21-24)

 

죄에 대해 임시방편으로 해결하려 하거나 모르는 척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다윗은 압살롬의 귀환을 허락했지만 그를 만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공의를 집행하지 않은 책임을 회피하려 했습니다. 지도자가 임시방편으로 일을 처리하다 보면 나중에 더 안 좋은 결과를 맞게 됩니다.

 

(1) 다윗의 명령(21)

다윗은 드고아 여인의 일이 요압의 계획이었다는 사실을 안 후 요압에게 어떤 책망이나 언급도 하지 않고 압살롬을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압살롬을 그만 용서하고 데리고 오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요압의 암묵적인 제안을 못 이기는 척하고 받아준 것입니다. 요압은 다윗의 가장 아쉬운 부분을 가장 효과적으로 챙겨준 셈입니다. 여기서 압살롬을 ‘나의 아들’이라고 부르지 않고 ‘소년’이라고 한 것은 압살롬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기 위한 것입니다.

 

(2) 요압의 감사(22)

다윗의 명을 받은 요압은 다윗에게 엎드려 절하며 감사의 인사를 하는데, 이것은 자신의 계략에 대해 화내지 않고 받아주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요압은 압살롬을 매우 그리워하는 다윗의 마음을 알고 있었기에 다윗이 자신의 계획대로 움직일 것이라는 예측을 하고 이런 일을 벌인 것일 뿐 다윗의 미움을 받을 각오를 하고 벌인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요압은 형식적으로 다윗이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어 압살롬을 데리고 오는 모양새를 갖추기 위해 자신의 요청을 받아주어서 감사하다고 인사합니다. 여기서 요압은 압살롬의 후견인을 자처하는 모양새를 보이고 있습니다.

 

(3) 예루살렘에 귀환(23-24)

다윗의 허락을 받은 요압은 그술로 가서 압살롬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다윗은 압살롬을 왕궁으로 오지 못하게 하고 보지도 않습니다. 암논을 죽인 죄는 용서하였지만, 왕자 지위를 회복시켜줄 생각은 없었던 것입니다.

 

압살롬에 대한 소개(25-27)

교회가 공의가 아닌 자기 이익을 추구할 때 오히려 손해 볼뿐만 아니라 전체에 타격을 줄 수 있습니다. 교회는 공의보다 자기 이익을 추구할 때 오히려 손해를 보게 됩니다. 사소한 이익을 얻으려는 자로 인해 교회의 정체성이 위협받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공의를 추구해야만 진정한 유익을 얻게 됩니다.

 

25온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압살롬 같이 아름다움으로 크게 칭찬 받는 자가 없었으니 그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음이라 26그의 머리털이 무거우므로 연말마다 깎았으며 그의 머리 털을 깎을 때에 그것을 달아본즉 그의 머리털이 왕의 저울로 이백 세겔이었더라 27압살롬이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딸의 이름은 다말이라 그는 얼굴이 아름다운 여자더라(25-27)

 

이 단락은 이제부터 사건의 중심이 되는 압살롬에 대해 설명합니다. 압살롬의 특징은 아름다운 외모와 긴 머리카락입니다. 온 이스라엘에서 압살롬과 비교될 자가 없었고, 바바락에서 정수리까지 어떤 흠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의 탁월한 외모는 딸 다말을 통해서도 드러날 정도였습니다.

 

(1) 압살롬의 인기(25)

25절에서 압살롬의 외모에 대해 이스라엘에서 가장 아름다운 남자라고 소개합니다. 여기서 압살롬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우 칭송을 받는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압살롬이 백성들에게 매우 매력적인 인물로 보였음을 의미합니다.

압살롬은 그의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전혀 흠이 없었습니다. 이 표현은 주로 제사장들이 몸에 아무런 흠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데 쓰이는데, 여기서는 압살롬의 완벽한 외모를 표현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구약에서 특별히 아름다운 외모를 말하는 경우는 본문에서 그 외모가 특별한 역할을 하는 경우입니다.

아비가일의 경우는 다윗의 호의를 얻는 데 유리한 역할을 하였고, 다말의 경우는 암논에게 강간당한 이유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여기서 압살롬의 아름다운 외모는 그가 백성들의 지지를 얻는 데 매우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합니다.

 

(2) 아름다운 머리카락(26)

압살롬의 외모 중 가장 특별한 것은 그의 머리카락입니다. 압살롬은 유난히 머리숱이 많고 긴 머리카락을 지녔는데 일 년 동안 자란 머리카락의 무게가 1킬로그램이 넘었습니다. 이것은 머리카락이 길고 숱도 많을 뿐 아니라 굵기도 굵고 아름다웠다는 것인데, 검고 숱 많은 머리가 압살롬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압살롬의 머리카락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는 것은 사무엘하 18:9에서 그가 풍성하고 긴 머리 때문에 죽게 되는데, 그 배경 지식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3) 압살롬이 자녀들(27)

압살롬은 자식도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두었는데, 그 딸의 이름은 다말이고 매우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습니다. 딸이 특별히 소개된 것은 이름과 외모가 암논에게 강간당한 다말과 같기 때문으로, 이것은 그가 불행한 누이를 기억하기 위해 붙인 이름으로 생각됩니다. 후에 사무엘하 18:18에서는 아들이 없다고 언급되고 있는데, 아마도 세 아들은 압살롬이 죽기 전에 죽은 것으로 보이며 딸 다말 만이 살아남아 그의 누이 다말의 불행을 기억하게 하였던 것 같습니다.

 

다윗과 만난 압살롬(28-33)

죄가 공동체에 들어오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죄를 보면서도 문책하지 않으면 결국 큰 혼란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해 임시방편으로 해결하려 하거나 모르는 척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지도자가 임시방편으로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안일하게 일을 처리하면 나중에는 더 안 좋은 결과를 맞이하기 때문입니다.

 

28압살롬이 이태 동안 예루살렘에 있으되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29압살롬이 요압을 왕께 보내려 하여 압살롬이 요압에게 사람을 보내 부르되 그에게 오지 아니하고 또 다시 그에게 보내되 오지 아니하는지라 30압살롬이 자기의 종들에게 이르되 보라 요압의 밭이 내 밭 근처에 있고 거기 보리가 있으니 가서 불을 지르라 하니라 압살롬의 종들이 그 밭에 불을 질렀더니 31요압이 일어나 압살롬의 집으로 가서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네 종들이 내 밭에 불을 질렀느냐 하니 32압살롬이 요압에게 대답하되 내가 일찍이 사람을 네게 보내 너를 이리로 오라고 청한 것은 내가 너를 왕께 보내 아뢰게 하기를 어찌하여 내가 그술에서 돌아오게 되었나이까 이 때까지 거기에 있는 것이 내게 나았으리이다 하려 함이로라 이제는 네가 나로 하여금 왕의 얼굴을 볼 수 있게 하라 내가 만일 죄가 있으면 왕이 나를 죽이시는 것이 옳으니라 하는지라 33요압이 왕께 나아가서 그에게 아뢰매 왕이 압살롬을 부르니 그가 왕께 나아가 그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어 그에게 절하매 왕이 압살롬과 입을 맞추니라(28-33)

 

다윗은 압살롬의 귀환을 허락했습니다. 요압에게 기만당한 것을 알고도 그를 엄중히 문책하지 않았습니다. 요압은 다윗이 압살롬의 귀환을 허락하자 그술 땅에 있는 압살롬이 돌아오는 것을 허락했지만 그를 보지 않겠다는 임시방편의 결정을 내렸습니다.

 

(1) 외면당한 압살롬(28)

압살롬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지 2년이 지나도록 아버지 다윗이 자신을 부르지 않자, 압살롬은 요압을 왕에게 보내어 자신을 만나달라고 요청하려고 하였지만, 압살롬을 만나는 것을 원치 않은 요압은 두 번이나 거절합니다. 압살롬을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한 것으로 자신의 역할은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요압이 압살롬을 예루살렘으로 부른 것은 압살롬의 지위를 회복시켜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다윗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서였기 때문에, 현재 다윗이 압살롬을 무시하는 상황에서 자신이 나서서 둘의 만남을 주선하여 왕의 심기를 거스를 필요가 없고 생각한 것입니다. 다윗은 압살롬이 그술에 있을 때는 압살롬을 많이 그리워했지만, 막상 압살롬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자 압살롬을 만나주지도 않았으며, 암논의 살인에 대해 하나님께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라고 권면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압살롬을 혼내거나 처벌하지도 않고 그냥 내버려 두었습니다. 다말이 강간당했을 때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은 것처럼, 이번에도 다윗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2년 동안 압살롬을 무시합니다. 그런데 이런 무시하는 다윗의 태도는 다윗에 대한 압살롬의 반감을 더욱 키웠고, 결국 2년이 지나면서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심한 것으로 보입니다.

 

(2) 요압을 만나는 압살롬(29-32)

압살롬이 요압에게 다윗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할 때는 이미 반란을 결심한 것으로 보입니다. 다윗을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자신이 다윗의 재판을 가로채서 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항상 자녀들이 일으킨 문제에 침묵하였고, 그 침묵은 다윗과 자녀들에게 최악의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다윗이 침묵한 이유가 자신도 암논과 같이 성적인 범죄를 저질렀고, 압살롬처럼 살인죄를 저질렀으므로 자식들의 죄를 처벌하기 어려웠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결국 다윗은 자신이 저지른 죄로 인해 자식들을 제대로 훈육하지 못했고, 집안에 비극이 이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내린 형벌이었습니다. 

압살롬은 자신을 만나주지 않는 요압을 강제적으로 만나기 위해 종들을 시켜 요압의 보리밭에 불을 지릅니다. 그러자 요압이 일어나 압살롬의 집으로 가서는 왜 자신의 밭에 불을 질렀느냐고 항의합니다. 요압은 다윗과 압살롬 사이를 더는 중재하고 싶지 않았지만, 압살롬이 계속해서 자기 밭에 불을 지르면 손해가 커질 수 있어서 부득불 압살롬의 집으로 온 것입니다. 압살롬은 자신의 집에 온 요압에게 자신이 이전에 종을 보내 요압을 만나려고 했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그를 부른 목적을 말합니다. 압살롬은 왕에게 자신의 말을 전해달라고 요압에게 부탁합니다. 압살롬이 다윗에게 하고 싶은 말은 무엇입니까? 왜 자신을 그술에서 돌아오게 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현재 처지를 생각하면 차라리 그술에 있는 것이 나았을 것이라는 말을 전해주길 원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으면서 다윗에게 외면당하고 없는 사람 취급당하는 상황이 도망자로 그술에서 살던 때보다 더 치욕적이고 힘들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요압에게 자신이 왕의 얼굴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합니다. 자신이 죄가 있다면 기꺼이 왕의 심판을 받고 죽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무시를 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만나서 다윗이 내린 처벌을 받고 죽는 것이 낫겠고, 그러려면 일단 다윗을 만나야 죽임을 당하든 용서를 받든 양단간에 결정이 내려질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압살롬은 속으로는 다윗이 자신을 죽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신을 죽일 만큼 미워하거나 심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예루살렘으로 부르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3) 다윗을 만나는 압살롬(33)

압살롬의 말을 들은 요압은 다윗에게 나아가 압살롬의 말을 전합니다. 그때서야 다윗은 압살롬을 궁으로 부릅니다. 압살롬은 다윗을 만났을 때 땅에 엎드려 절하였고, 다윗은 압살롬에게 입을 맞춥니다. 이들의 만남은 매우 형식적인 인사일 뿐 화해와 용서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본문에는 서로 간에 나눈 한마디 말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5년 만의 만남이 매우 냉랭하고 형식적이었음을 의미하며, 다윗은 아직도 압살롬을 용서하지도 않고 심판하지도 않는 어정쩡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결국 다윗과 압살롬의 만남은 둘 사이에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있다는 것만 확인한 것으로 이 만남 이후 압살롬은 반란을 일으킬 준비를 합니다.

 

 


사적인 관계에서부터 국가 간 공적인 관계에 이르기까지, 깨진 관계를 복원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다시 복원한다는 것은 많은 인내와 시간이 필요하며, 시의적절한 지혜와 노력이 요구됩니다. 힘들다고 포기하거나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 나라의 정신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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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01-01)

 


새로운 사역의 출발점에 선 제자들

사도행전 1장 1-11절


사도행전이라는 새로운 출발을 시작합니다. 현재 마음은 마치 마라톤 선수가 출발선에서 출발을 기다린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한편으로 거룩한 부담감이 밀려옵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으로 보내드린 후에 자기 스스로 사역해 나가야 했기 때문에 아마 제자들도 같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변함없이 그대로 지속하길 기도합니다. 의사이던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그리스도에 대해 자세히 소개합니다. 이 서신은 장문이기 때문에, 전편은 누가복음으로, 후편은 사도행전으로 둘로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전편은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복음을 위한 사역을 기록했고, 후편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부탁했던 사역을 어떻게 성취되어 가는지를 소개합니다. 제자들이 복음 사역하는데 홀로두지 않고, 성령님을 보내셔서 함께 사역하십니다. 이제부터 우리도 선배들의 발자취를 따라서 그들이 사역했던 길들을 살펴보며 따라가 보겠습니다.

 

본문은 사도행전 전체 중에 서론입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사명을 완수해 나가는 과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예수님 대신 오실 성령을 기다리고, 성령과 함께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후에 구름 타시고 승천하십니다. 특별히 8절은 사도행전의 주제를 다룬 핵심으로, 기독교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해서 유대와 사마리아와 로마까지 전파되는 과정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대한 서론(1-2)

사도행전은 예수님을 믿는 무리들이 복음을 전파했던 행적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스스로 움직인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움직이셨고, 제자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움직였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고도 부릅니다. 성령께서 움직이신 역사의 현장으로 출발하겠습니다.

 

1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2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1-2)

 

본문은 누가복음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누가가 누가복음과 같이 ‘데오빌로(θεοψιλε)’에게 바친 작품입니다. 이러한 형태는 당시 문학적인 관행을 따라 자신의 작품을 헌정하는 방식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누가가 기록한 사도행전은 당시 문학적인 저작물로서도 뒤지 않는 훌륭한 작품이라고 호평을 받아왔습니다.

누가복음에서도 거론한 적이 있지만, ‘데오빌로(θεοψιλε)’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역사적으로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 논란이 많았지만, 전통적으로 귀족으로 실존한 인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당시 유명한 사람에게 자신의 책을 헌정하는 관례가 있었음을 감안하고, 성경적으로 누가복음에서 ‘데오빌로’에게 ‘각하’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누가복음 1:4). 때문에 실제 인물로 보는 데는 어려움이 없습니다.

사도행전 도입인 이 단락은 누가복음의 마지막 부분 내용(누가복음 24:44-53)과 겹칩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성장과 사역과 부활 그리고 승천까지 기록했고, 이제 사도행전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승천 이후 사도들과 성도들에게 위탁한 복음 사역이 진행되는 과정을 소개합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사역들, 탄생, 사역, 죽음 그리고 부활 등을 ‘일(사건)’으로 표현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무고히 수난 당하신 사실들을, 당시 제자들은 ‘확실한 많은 증거’들이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유무에 대해 변론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된 가르침은 부활 이후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생전 지상 사역으로부터 시작한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입니다(누가복음 4:43). 그러므로 초대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 나라, 즉 구원 사역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증인들에 의해 기록된 구체적인 역사적 인물과 사건을 토대로 형성된 신앙공동체입니다. 말씀에 기초하지 않고, 경험이나 사상에 기초한 신앙은 굳게 설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행하심과 가르치심을 따르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역(3-5)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오셨다는 소식입니다. 세상의 주인은 세상의 권력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소식이, 예수님께서 살아 계서서 지금도 왕으로 다스린다는 소식이, 바로, ‘기쁜소식’인 ‘복음(福音)’입니다.

 

3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4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3-5)

누가는 누가복음에서는 고난 받으신 예수님을 기록한 후, 그리고 사도행전에서는 영광의 몸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내용을 소개합니다.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부활을 분명히 나타내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무덤에 장사지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무덤을 박차고 부활하셨습니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사건을 ‘고난’이라고 표현합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지만, 이 사실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 모두 믿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불신앙의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부활과 하나님 나라에 대해 설명하셨습니다. 누가는 사도행전을 통해 먼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셨던 사역들을 소개합니다.

 

⑴ 부활하신 예수님(3)

사도행전의 기록자인 누가는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부활 후 승천하시기 전까지 40일 동안 지상의 마지막 사역을 설명합니다.

① 부활에 대한 소개

사람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나타나면 모든 사람을 믿게 하기에 가장 좋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조용하게 제자들에게만 나타나셔서, 이것이 단순한 환생이 아니라 부활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 가시 전에 약속하신 것도 ‘부활’이지 ‘환생’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영으로만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몸으로 살아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많은 증거를 보여주셨습니다.

②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개

예수님께서 하신 또 다른 일은 장차 이 세상에 세워질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왕국’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완성시키기 위해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께서 통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왕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항상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멸망한 후, 눈에 보이는 왕으로서 대리 통치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선지자들은 그 왕을 하나님께서 보내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왕을 가리켜 ‘메시아’ 또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인 ‘그리스도’라고 부릅니다. 유대인들이라면 모두 그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가져 오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자 그 메시아 운동이 실패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생각지도 못했던 새로운 방식의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도래케 하셨고, 그 나라를 왕으로 다스리시며, 그 나라의 권능을 펼쳐 보이셨습니다.

 

⑵ 약속하신 것을 기다림(4)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신 후에, 제자들에게 즉시 나가서 전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전하기 전에 그들이 들어야할 명령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모아놓으시고 분부하셨습니다. 그것은 두 가지인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 것’과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릴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대신하여 보혜사 성령께서 오셔서 제자들과 함께 하실 때,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온전히 깨닫고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아버지의 약속’은 구약에서 이사야 32장 15절과 요엘 2장 28-32절에서 예언으로 약속되었습니다.

15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숲으로 여기게 되리라(이사야 32:15)

28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29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30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31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32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요엘 2:28-32)

특히 위에서 언급된 요엘서는 베드로가 설교할 때, 직접 언급되어 인용됩니다(사도행전 2:17-21).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사역을 제자들과 함께 하시면서, 이미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 것’과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릴 것’을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49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누가복음 24:49)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기다리고 있어야 할 일은, 당시에 상황에 따라 진행된 것이 아닙니다. 구약 시대부터 준비하신 약속이었습니다. 이러한 기다림의 순종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기 위한 다음 단계를 준비하셨습니다. 선생님의 죽음을 통해 절망과 실망 속에 빠진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목숨을 담보하고 있었습니다. 매우 두려웠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따라다닐 때, 제자들은 스스로 무엇인가를 성취하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자신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자신들에게 패배와 절망을 안겨준 자리이지만, 인간의 실패와 불순종과 한계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실패와 불순종 그리고 자신의 한계를 응시할 때, 성령께서는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⑶ 성령 세례를 기다림(5)

두려움 속에서도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 기다려야할 이유는, 세례 요한의 말(누가복음 3:16)을 인용하여 ‘아버지의 약속’은 ‘성령 세례’임을 깨닫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세례’는 물속에 담근다거나 물을 쏟아 붓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례는 정결을 위한 수단입니다. 그런데 세례가 성령과 연관되어 나올 때는 성령이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것을 말하며, 죄 사함과 연결됩니다(사도행전 2:38). ‘성령 세례’는 성경 전체에 두 번 등장합니다(사도행전 1:5; 11:16). 모두 세례 요한의 예언과 연관에 ‘성령을 받는다’, ‘성령이 임한다’, ‘성령의 부으심으로 받는다’ 등으로 표현합니다.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공생애 기간 동안 하나님 나라에 대해 배웠습니다. 하지만 영적인 지식으로 그들을 하나님 나라의 증인으로 만들어 주지 못했습니다. 성령이 임하셔서 권능을 주실 때, 온전히 담대하게 땅끝까지 증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성령 임재의 신앙(6-11)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서 성령이 임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기다림을 통해 장차 일어날 일이 무엇입니까? 성도들에게 성령이 임재하시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⑴ 제자들의 질문(6-8)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충분하게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의 질문을 들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성령이 임하면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나라가 임할 표적으로, 곧 이스라엘이 정치적으로 로마에서 해방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질문으로 새로운 장면을 시작합니다. 사도행전의 기록자인 누가는 제자들의 질문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6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7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8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6-8)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임하는 것은 무너진 ‘다윗 왕국’이 팔레스틴 지역에 새로운 유대인들만의 나라가 다시 세우진 것이라고 오해했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① 유대교적인 편협한 사상(6)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하나님 나라에 대해 줄곧 말씀하십니다(3).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라고 묻습니다. 이것을 직역하면, ‘주여, 지금이 나라를 이스라엘에게 회복하실 때입니까?’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정리해 보면, 그들은 예수님께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에 대해 물었습니다.

아직까지 제자들은 터무니없게도 유대교적 종말론의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 나라 성취를 민족주의적으로 이스라엘에게만 국한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아로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해방시킬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의 기준으로 제자들의 생각을 심판할 수 없습니다. 당시 유대인으로서는 당연한 생각이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과 관련해서 일어날 징조들에 대해 예언하셨습니다. 그들은 그 때 일어나는 현상으로 착각했던 것입니다.

15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숲으로 여기게 되리라 16그 때에 정의가 광야에 거하며 공의가 아름다운 밭에 거하리니 17공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18내 백성이 화평한 집과 안전한 거처와 조용히 쉬는 곳에 있으려니와 19그 숲은 우박에 상하고 성읍은 파괴되리라 20모든 물 가에 씨를 뿌리고 소와 나귀를 그리로 모는 너희는 복이 있느니라(이사야 32:15-20)

② 새로운 기독교적 종말론(7-8)

예수님께서는 유대주의적인 편협된 생각을 하는 제자들에게 ‘하나님나라’는 어떤 것인지를 말씀하셨습니다. 구체적으로 기록하지 않았지만, 그 제자들에게 장차 임할 성령의 역사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편협한 유대교적 종말론을 넘어 온 민족을 품는 새로운 기독교적 종말론으로 확장시켰을 것입니다(7-8).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두 가지를 강조하셨습니다. 첫째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시기는 아무도 모르고 예수님까지도 모릅니다. 다만 전적으로 하나님 아버지만 달려있다는 사실(참고 마가복음 13:32)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성취되는 시기를 말할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 나라의 성취는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을 통해 성취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역할이 강조된 것입니다. 제자들의 사역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 나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장 8절은 사도행전의 핵심 구절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8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8)

제자들의 사역은 이 말씀으로 집약됩니다. 앞으로 전개될 사도행전의 모든 사역들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은 후에,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해야 합니다. 누가는 성령이 임하면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예루살렘(사도행전 2:42-8:3)에서 복음을 전하고, 원수 같이 지내고 있는 유대(8:4-11:18)와 사마리아에게 평화의 복음을 전하고, 그리고 더 나가서 저주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이방인들이 거주하는 땅 끝(11:19-28:31)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팔레스틴의 경계를 넘고, 유대인의 경계를 넘어서 땅 끝까지 임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은 ‘아버지의 약속’(4)과 ‘성령 세례’(5)로 지칭하면서, 사도행전 2장에서 펼쳐질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예고합니다. 초대교회는 성령강림으로부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시면, 두 가지 현상이 일어날 것입니다. 첫째, ‘능력을 받고’, 둘째, 주님의 ‘증인’이 됩니다. 이 두 가지 현상은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초대교회 제자들에게서 일어났습니다.

 

⑵ 하나님의 관점(9-11)

성령이 임하시면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이 하나님적인 생각으로 변화됩니다. 제자들의 관심은 편협하게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이었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땅 끝까지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세상에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예루살렘 중심의 구심적 운동만 기대했던 제자들은 이제 성령을 받고 전 세계로 펴져 나가게 되었습니다.

11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10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11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9-11)

다른 복음서의 저자와의 달리 오직 누가만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에 대해 소개합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부활을 단순하게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사건으로만 이해하지 않고, 하나님 우편으로 승귀한 사건으로 보았습니다(사도행전 2:33-35).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을 마치시고 제자들이 본 가운데 ‘감람원’에서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승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본 그대로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재림하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이 다 알 수 있도록 재림하실 것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하늘만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성령을 의지하여 맡겨진 일을 따라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에 사로잡힌 자들은 하늘을 쳐다보는 자가 아니요, 하늘의 시각으로 온 땅을 쳐다보고 모든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발이 되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이 세상에서 충실한 모습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진실하게 기다리는 태도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라는 믿음은 역경을 이겨 내는 원동력입니다. 성령 충만해지면 소망을 품고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고난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모이기에 힘쓰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여기 이스라엘의 회복을 꿈꾸며 모인 사람들은, 지독히 많은 고난을 받은 민족이기에 그들에게 과연 소망이 있을지 의심이 들 정도입니다. 하지만 성령 충만으로 새로운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성령 충만하면 자기 일도 감당하지 못하던 사람들이 힘을 입습니다. 그리고 땅 끝까지 가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 수 있습니다. 땅 끝은 아직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미전도지를 의미합니다. 마지막 때에는 증인의 삶을 살지 못하면,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 부끄러운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교의 각오로 증인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제자들이나 사도들은 복음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존재합니다. 증인은 탄생한 것이 아니라 만들어집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이 성령으로 거듭나면, 자기를 부인하고 삶의 관점이 변합니다. 제자들은 예루살렘 중심의 구심운동(이사야 2:2-4)만 기대했지만, 이제 성령 임재를 체험하고 계급과 혈통과 영토를 넘어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 원심 운동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자기중심적으로만 살던 사람은 자아가 죽고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하나님 나라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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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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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제자를 임명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101-15


종종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떤 부분으로 사용답기에 합당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부분에서 사용되면 사용됐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한 번은 하나님께서 이런 부분에 사용하시면 좋을 것인데.’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쓰임 받기에 합당한 사람들이 되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전하는 천국 복음을 전파하도록 제자들을 선택하십니다. 그래서 열두 제자를 부르셔서 사도로 임명하신 후, 자신의 권능을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하나님 나라 복음을 선포하도록 파송하시며, 전도자의 자세와 필요한 것, 그리고 어떻게 전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열두 제자를 부르신 예수님(1-4)

진정한 제자는 예수님께 순종하고 그분의 뜻을 온전히 따르는 것입니다. 거짓 제자는 예수님을 자신의 목적과 이익을 위해 이용하려고 하면서 가룟 유다와 같은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원하든지, 원치 않는 길로 가라고 할지라도 순종하는 진실한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1예수께서 그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2열 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3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4가나안인 시몬과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1-4)

9:37-38에서 예수님께서는 추수할 것이 많은데 일꾼이 적다는 긴박한 상황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본 단락에서는 제자들을 일꾼으로 추수할 곳에 보내시는 장면입니다.

 

(1) 제자들에게 권능을 주심(1)

예수님의 제자를 열두 제자로 특정하신 것은 이곳이 처음입니다. 열둘을 세우신 것은 분명한 의도하신 바입니다. 하늘나라 새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상징한 것입니다(19:28). 지금껏 제자들은 예수님 곁에서 하늘나라 사역의 목격자로서 동행했습니다. 이제는 본인들이 직접 그 사역의 당사자들로 보냄을 받습니다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송 전에 그들을 세우시고, 자신이 보여주었던 귀신을 쫓고, 병을 치유할 수 있는 권능을 주십니다열두 제자에게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고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4:23;9:35;8:16) 권능을 부여하십니다(1). 예수님의 사역을 특정했던 가르치심은 등장하지 않습니다(4:23; 9:35). 예수님께서 주신 신적 권능으로 제자들은 그들 안에 있는 하늘나라의 실체를 경험합니다. 하늘나라를 방해하는 어둠의 세력, 사탄의 권세를 제압하며 죄 된 현실 속에 뒤틀린 육체와 영혼을 치유합니다. 제자들을 통한 권능의 사역은 곧 권능의 주체이신 예수님의 사역이 됩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권능은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계신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2) 열두 제자의 이름(2-4)

본 절에서는 열두 사도의 이름이 공개합니다. 한참 후에 일어날 가룟 유다의 배교까지 포함되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사도’(2)는 파송하는 주체인 예수님의 권위를 강조하고, 예수님의 임명을 받은 것이므로 제자들의 권위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맨 먼저 등장하는 네 명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일찍이 부르신 다섯 명 중에 초반 네 명입니다(4:18-22). 열두 제자의 명단에서 가장 먼저 시몬 베드로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때 함께 부름 받은 안드레, 야고보, 요한이 뒤를 잇습니다. ‘첫째를 뜻하는 프로토스는 베드로의 으뜸인, 특별한 위치를 의미합니다. 그는 12 제자들을 대표하고 대변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16:16-19). 베드로의 이름이 맨 앞에, 유다가 맨 뒤에 기록된 것은 의도적입니다. 시몬은 당시 팔레스타인에서 첫 번째로 선호하던 이름이었기에, 식별을 위해 반석을 뜻하는 페트로스게바라는 별명이 붙여졌습니다그리고 제자 목록에서 가룟 유다를 맨 끝에 둡니다. 유다가 제자들의 서열에서 열두째였다는 뜻이 아니라, 가장 불명예스러운 제자임을 의미합니다. 네 복음서의 목록은 공통적으로 베드로, 빌립, 야고보를 각 그룹의 맨 앞에 배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이미 보여주신 사역을 제자들에게 명령하심으로써, 제자의 사명은 예수님을 닮는 것임을 가르치십니다(1). 예수님께서는 8-9장의 핵심 주제인 권위를 긍휼을 베풀기 위해 사용하셨기 때문에 긍휼의 사역을 하도록 제자들을 부르시고 권위를 주셨습니다. 교회는 목자 없는 양처럼 낙담하고 지쳐 주저앉은 사람들과(9:36) 질병과 약하게 만드는 것으로 쓰러진 사람들(10:2,8)을 회복하는 일에 부름 받았습니다. 제자들이 파송 받을 때 사도’, 즉 보낸 자의 권위를 주신 것처럼, 예수께서 교회와 지도자들에게 치유하고 회복하는 사명과 권위를 위임하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제자들이 먼저 예수님께 나온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먼저 부르셨습니다. 부르심의 우선권은 예수께 있습니다. 제자들은 이렇게 할 권위를 부여받은 자들일 뿐, 그들에게 내재된 권위로 임무를 수행하는 자들이 아닙니다마지막으로, 사도인 제자들의 정체성은 그들을 보내신 예수님과 직접적으로 관련됩니다. 제자들의 주된 과제는 그들을 보내시는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1절의 명령을 수행하는 삶이 예수님을 배우는 삶입니다.

 

열두 사도의 파송과 사명(5-15)

보냄을 받은 자사도라고 합니다. 사도의 권위는 보내신 이의 뜻을 그대로 따르는데 있습니다. 그들은 보내신 이의 주권을 선포하기 위해 보내신 곳으로 나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다른 것을 의지할 것 없습니다. 다른 것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은 그만큼 책임지신다는 약속입니다.

 

5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6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7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8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9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10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 11어떤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가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12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13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14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15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5-15)

본문은 갓 부름 받은 사도들에게 예수님께서 선교 전반에 대한 지침을 제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어느 마을로 가든지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그 집에 머물라고 명하십니다. 무례해서는 안 되지만 당당함을 잃지 말라는 당부입니다. 어느 성이든지 영접하지 않으면,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고 떠나라고 명하십니다. 주께서 그 완악한 마을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1) 사역 범위(5-6)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보내시면서 주시는 명령의 말씀입니다. 가장 먼저 명령하신 내용은 전도 대상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대상자를 제한하고 특정하는 것이 놀랍니다먼저, 지역적으로는 갈릴리에 제한되는 모습입니다. ‘이방인의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마을에도 가지 말도록 하십니다(5). 분명히 이 범위는 유대인들에게 익숙한 삶의 경계일 것입니다그리고 제자들이 가야 할 길은 오직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명령하십니다(6). 마태복음에서 이스라엘은 대부분 부정적으로 묘사되기도 하는데(8:7;15:24,26), 여기서는 긍정적으로 묘사됩니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은 5절의 이방인들과 사마리아인들과 대조됩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먼저 하나님의 백성을 대상으로 삼는 것일 뿐, 이스라엘 외의 이방인들을 선교 대상에서 제외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질서의 회복을 고대하는 이방인들을 향합니다(12:17-21; 42:14). 제자들은 현 단계에서 이스라엘을 선교 대상으로 삼지만, 마태복음의 끝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모든 민족에게 보내십니다(28:19). 따라서 본문은 구원사의 시각에서 이해돼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 이전에 유대인들인 제자들이 사도로 세움을 받자마자 이방인들에게 갈 마음을 품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구원사의 관점에서 이방의 빛인 이스라엘(49:4-7)의 회복 창조 세계, 즉 열방의 회복을 위한 것입니다.

제자들의 첫째 지침은 소망 없이 살아가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부름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하늘나라의 복음을 들고 파송되는 사람들이 최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할 사명은 회복입니다. 회복의 대상은 구원사의 흐름에 따라 먼저 이스라엘이며, 다음에는 열방이 될 것입니다.

 

(2) 사역 내용(7-8)

예수님으로부터 권능을 이양 받은 제자들이 가서 전파해야 할 일은 확실했습니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고 각종 기적과 능력을 행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과 스승 예수님처럼 하늘나라가 가까이 온 것을 선포합니다(3:2; 4:17).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8-9장에서 보여주었던 동일한 능력을 행하라고 명령하시는 대목입니다. 제자들이 수행해야 할 일은 병자를 고치는 것, 죽은 자를 살리는 것,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는 것, 귀신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는 예수님께서 8-9장에서 행하신 기적에 해당하며(8:2-4, 14-17, 28-34; 9:18-26), 9:35-36과 연결해보면 제자들의 임무는 목자의 동정심에서 나온 결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죽은 자를 살리는 일(부활이 아니라 소생)은 구약에서 엘리야(왕상 17:17-24)와 엘리사(4:32-37) 외에는 하지 못한 일입니다.

제자들은 7-8a절의 사명을 수행하면서 대가를 받지 말아야 했습니다. 제자들에게 주어진 치유 능력은 자신들의 노력으로 생긴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거저 받은 선물이기 때문에, 이 능력을 행해서 사적인 이득을 취할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의 관심사가 아니라 그들을 보내신 예수,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관심사를 반영해야 합니다.

 

(3) 사역할 방식(9-10)

예수님께서는 선교 사명을 수행하는 제자들에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할 것을 가르치십니다. 전도여행의 채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전대, 배낭, 샌들, 자팡이와 같이 순회하는 선교 사역에서 꼭 필요한 것으로 간주 되는 것들을 지참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일꾼은 보내신 자가 모든 것을 책임지기 때문입니다(9:38).

사람들로부터 보상을 기대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움에 기대어 살아갈 때, 제자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신뢰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참조, 고전 9:11-12; 살전 2:9; 4:10-17). 제자들은 하나님을 믿도록 가르치는 사람들일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하나님의 섭리적인 돌보심을 믿고 살아가는 모본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삶을 사는 제자를 통해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4) 사명에 반응과 결과(11-15)

제자들은 성에 들어가서 가장 먼저 합당한 자를 찾아 그곳을 사역의 거점으로 삼아야 합니다. 즉 하늘나라 복음의 메시지를 환영하는 사람들의 가정에 머물러야 합니다(11). 제자들은 호의적으로 대하는 가정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복음을 영접한 가정에 가야 하는데, 이것은 가정들을 비교하여 더 잘 대해주는 곳에 묵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합당한 자의 집에 들어가서 평화를 빌어야 합니다(12). 평화를 비는 것은 예수님 안에서 시작된 하늘나라 복음(52:7)의 인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이 시작하시는 미래는 평화의 시대이며(8:23-97; 11:5-10; 66:25; 9:9-10; 3:23-24), 하늘나라의 평화는 갱신과 회복을 위해 부름 받은 제자들을 통해서 전해집니다. 만일 그 사람의 집이 합당하면 제자들이 빈 평안이 반응한 그들에게 선물로 가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제자들에게 돌아옵니다. 13절 내용은 이사야 55:11과 유사합니다(참조, 31:2; 45:23).

14-15절은 부정적인 반응에 대해 제자들이 보여야 할 자세입니다. 제자들은 복음에는 항상 영접과 거절이라는 두 가지 반응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제자들은 배척하는 사람들이 생긴다고 해서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배척하면 제자들이 평안을 빌 가능성 자체가 허락되지 않기에 그때는 발의 먼저를 털어버리라고 명령하십니다. 환대 거부는 개인의 수치를 넘어 마을의 수치를 안겨준 불명예스러운 일입니다(11:5-13). 발의 먼지를 털어버리는 것은 역시 당찬 거절 행위입니다제자들이 전한 평화는 사라지지 않고 자신들에게 그대로 돌아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람들의 반대와 배척은 제자들에게 책임이 있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파송을 받는 인생은 경제적으로 어렵고 사회적으로 소외되는 것처럼 보여도 결코 그것을 실패한 인생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복음은 언제나 수용과 거절의 선택을 요구합니다. 수용은 샬롬이고 거절은 심판입니다.

 


 

가치관이 무너지고 어디에 진리인지 몰라 기대야 할지 보이지 않는 세상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제자의 삶을 보고 복음이 진리라는 사실을 가늠하게 합니다. 제자의 삶과 태도가 복음으로 세상에 향기를 드러낼 때, 주의 복음이 더욱 힘 있게 세상으로 뻗어나갈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많은 일꾼을 찾으시고 제자를 부르십니다. 복음을 복음답게, 교회를 교회답게 하도록 부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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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09-03)


긍휼히 여기시는 목자이신 예수님

마태복음 9장 27-38절


‘불쌍함’이란 단어는 따뜻하면서도 불편합니다. 누군가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따뜻하지만, 그 수식어가 자신에게 달린다면 마음이 무거워질 것입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주님을 향하여 이 단어를 꺼냅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불쌍함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지금까지 마태복음 내용을 정리해 보면, 5-7장은 가르침과 8-9장은 치유하심 두 가지를 표현했습니다. 본문은 마태복음 8-9장을 통해 열 가지 이야기 중 마지막 두 가지를 소개합니다. 이 두 맹인의 치유와 귀신 들린 벙어리의 치유 사건은 예수님께서 다윗의 아들로서 세상에 오신 메시아임을 확신시켜 주는 사건들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메시아를 전할 추수할 일꾼의 필요성을 언급했습니다.

 

맹인을 고치신 예수님(27-31)

말씀과 믿음의 순종이 만들어낸 역사는 여태 가보지 못한 새로운 신앙의 지평으로 인도하고, 새로운 시선으로 나와 자기 삶의 여러 조건들을 볼 수 있게 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보지 못하는 자의 눈을 만져 믿음대로 눈을 뜨게 하십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병이나 고친 치유자로만 믿게 된다면,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습니다. 설익은 영적 흥분과 열정은 오히려 사역을 망치기 때문입니다.

 

26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 27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실새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28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맹인들이 그에게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29이에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 30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예수께서 엄히 경고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하셨으나 31그들이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퍼뜨리니라(27-31)

본문은 두 맹인을 치료하시는 예수님의 초월적인 권세가 소개됩니다. 죽은 자를 살리신 사건에 이어 맹인이 보게 되는 기적이 등장합니다. 맹인의 눈을 뜨게 한 본 사건은 마태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종말에 있을 하나님의 구원을 성취할 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1) 맹인의 간청과 예수님의 반응(27-28)

예수님께서 갈릴리 회당장 집에서 떠나자 맹인 두 사람이 따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27)라고 부르짖습니다. 당시에 앞을 못 본다는 것은 일반적 장애를 넘어 종교적 신념이 반영된 질병, 곧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로 생각했습니다. 당시에는 질병과 죄를 연관성 있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맹인들은 누군가의 잘못으로 장애를 얻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맹인이나 눈에 질병이 있는 사람은 제사장 직분을 수행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제사를 위해 나올 수 없었습니다. 맹인들이나 눈에 질병이 있는 사람은 질병과 관련 있는 사람이었고, 제사 제물을 오염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사 행사장에서 금지당했던 것입니다.

한편 구약에서 맹인들을 위한 배려도 언급됩니다. 맹인들 앞에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을 두지 말아야 하며 잘못된 길로 인도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 내용보다 훨씬 긍정적인 내용은 이사야 35장 5-6절에 등장합니다. 이사야는 맹인의 치유를 종말론적 회복을 보여주는 증거라 예언합니다. 두 맹인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종말론적 회복을 시작하고 계심을 믿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맹인들은 자신들에게 종말론적인 선물이 자신들에게 베풀어지도록 간구합니다. 맹인들의 외침에서 두 가지 중요한 특징을 발견합니다. 첫째,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 ‘다윗의 자손 예수!’라고 부릅니다. ‘다윗의 자손’이란 것은 공관복음에서 특히 마태복음에서 메시아를 부르는 칭호입니다. 즉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정확히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서 하신 사역은 죄인들을 불쌍히 여겨서 구속하는 일입니다. 둘째, 그들은 예수님께서 치료해달라고 구한 것이 아니라 긍휼히 여겨주심을 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원하시는 것은 ‘긍휼’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을 구원할 자(1:21) 메시야로서 예수의 치유 사역의 본질은 긍휼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이 두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긍휼입니다. ‘다윗의 아들’이라고 외친 맹인들은 예수님께서 무리를 떠나 집에 들어갈 때까지 따라갑니다. 상당한 거리를 뒤따르며 예수님의 머무는 숙소까지 따라올 만큼 절박했습니다. 맹인들의 외침에도 예수님께서는 모른 척 어느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맹인들의 외침에도 집에까지 들어가셨겠습니까? 정상적인 수많은 사람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계속적으로 따라가면서 그 맹인들이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 맹인들의 외치는 소리를 들으면서 예수님께서 ‘다윗의 자손이신 메시아’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무리가 없는 집안에서 예수님께서 맹인들에게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라고 묻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능력을 행하시기 전에 원하는 것은 믿음이었습니다. 이렇게 직접 믿음 여부를 물으신 것은 이곳이 유일합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단순히 기적의 가능성을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아로 너희들에게 역사할 수 있겠느냐?’라고, 그들의 믿음을 확신시키신 것입니다.

맹인들은 주저 없이 단호하게 “주여 그러하오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들의 부르짖음에 이미 그 믿음이 배어 있었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맹인을 보게 하신다고 하신 메시아의 약속을 성취하신 메시아이심을 증거 하는 역사입니다. 두 맹인들이 믿는 것은 예수님을 눈을 뜨게 해주 치료자로서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구원해주실 메시아로 믿는 것입니다.

 

(2) 치유와 경고(29-31)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실 때 보여주시는 치유의 행위도 다양합니다.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너희 믿음대로 되라!”(29)고 하셨습니다. 믿음은 예수님의 권능을 일어나게 하는 통로입니다. 마태복음에서 핵심적인 개념 가운데 하나로서 신뢰의 의미입니다. 신뢰의 모범은 이미 이방인 백부장(8:5-13)과 중풍병자를 데려온 사람들이 보여주었습니다(9:1-13).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도 가능하겠지만(8:8), 직접 만지심으로 긍휼을 베풀어주십니다. 메시아의 오심을 환영하는 자가 그의 긍휼을 맛봅니다. 결국, 그들의 믿음대로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눈이 밝아진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엄하게 경계하시면서 “삼가 아무에게도 알게 하지 말라”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경계하신 것은 기적적인 사건들로 구원을 일으킬 만한 믿음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전시 수단으로 사용되지 않았음을 분명히 해두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치유에 사건만 보면,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병이나 고친 마술사 정도로밖에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엄중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맹인들은 자신들이 받은 은혜에 대해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저희가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전파하니라”(31)

 

벙어리를 고치시는 예수님(32-34)

예수님의 동력은 긍휼입니다. 하늘 보좌로부터 낮은 땅으로, 길고 긴 역사 속에서 정확한 카이로스에 도시와 마을로 가서 한 영혼을 찾아내십니다. 목자 잃은 양들이 광야의 절벽에서 죽어가며 살려달라는 간절한 신음소리를 들으십니다. 그가 들으시고 찾아오셔서 고치십니다.

 

32그들이 나갈 때에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께 데려오니 33귀신이 쫓겨나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거늘 무리가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 하되 34바리새인들은 이르되 그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32-34)

세 번째 부분을 마무리 짓는 마지막 기적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이번에는 귀신이 들려 말 못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일행이 집에서 밖으로 나가자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데려왔습니다. 사람들은 하늘나라 복음의 혜택을 경험하도록 예수님의 도움이 절실한 사람을 데려옵니다. 예수님께서 머문 집에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고, 치유를 원하는 무리가 줄지어 있었을 것입니다. 이 사람이 말 못하는 것은 귀신 때문이었습니다. 두 맹인에게 하셨던 치유 행위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 사람의 치유는 하나님의 통치가 종말에 실현되는 증거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마태는 그가 예수님에게 오자마자 귀신이 쫓겨나고 언어를 회복했다고 소개합니다. 여기서 구체적인 치유 과정은 소개되지 않으나 귀신이 그 사람에게서 쫓겨났다는 사실은 분명히 합니다. 말 못하는 사람이 듣지 못하는 사람일 수 있겠으나, 중요한 것은 이 기적 역시 앞의 맹인이 보게 된 것과 함께 메시아 시대에 나타날 현상들이라는 점입니다.

이사야 35:5-6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과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 그리고 말 못하는 자의 혀가 노래할 것이 함께 등장합니다. 마태는 지금 이사야 본문을 염두에 두고 기적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치유해 주자, 이 기적을 목격한 무리들은 놀라며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서 이러한 일은 전무후무한 일이라 탄성을 지릅니다. 마태는 무리가 놀라는 모습을 8-9장 마지막에 배치함으로써 전체 기적에 대한 반응으로 사용합니다.

하지만 무리의 긍정적인 반응과 달리 그곳에 있던 바리새인들은 전혀 다른 반응을 내놓습니다. 그들은 “저가 귀신의 왕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낸다”(34)라고 비난합니다. 그들은 기적이 일어난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행위로 감동 받는 무리에게 경고할 목적으로 이런 말을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에 부정적으로 반응한 이들에 대한 평가는 11장과 13장에서 집중적으로 다룰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쫓으신 것이 귀신의 왕의 힘을 의지한 결과라고 궁색한 평가를 내린 것입니다. 나중에 이 주제에 동일한 입장을 가지고 심화된 논쟁을 벌일 것입니다(12:22-29). 그때 예수님께서는 귀신을 쫓아낸 힘이 “하나님의 성령에 힘 입은 것”이라고 강변하십니다(12:28). 이처럼 눈앞에서 메시아를 보고도 보지 못하며, 놀라운 기적에 노래하지 못하는 그들이야말로 맹인이요 말 못하는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지역에 가서 말 못하는 사람을 치유하는 사건은 종말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증거를 보여줍니다. 귀신을 쫓아내신 사건은 주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으며, 치유 사건보다는 사탄의 나라가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에 본문은 조금 더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선교해야 할 이유(35-38)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들만이 인간의 수고를 통해 ‘인간의 추수’가 아니라, 추수의 주권은 하나님께 돌리는 ‘하나님의 추수’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구원에 동참하느냐는 양적인 부분이 아니라 구원 받을 사람들만 구원하는 질적인 부분에 일꾼을 찾으십니다.

 

35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36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37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38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35-38)

본 단락은 8-9장의 기적 이야기 묶음의 전체적 결론이면서 새롭게 등장할 사역 이야기의 주체적 서론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일, 즉 메시아를 함께 전파할 일꾼을 보내달라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기도는 마태복음 10장에서 제자 파송 관련 가르침 단락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1) 사역의 요약(35)

마태는 5-9장까지 예수님의 사역을 요약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도시(9:1;10:11;11:1,20)와 마을을 두루 찾아다니며 ‘그들의 회당’(12:9; 13:54)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그리고 메시아이심을 나타내는 모든 질병과 모든 약한 고통을 치유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혼을 구원하는 사역은 세 가지였습니다. 먼저 천국에 대한 것들을 가르치시고, 다음으로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을 전파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병든 사람들을 치유하는 역사를 이루어 가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들이 천국에 대해 바르게 배우고, 제대로 순종하면, 자연스럽게 여러 가지 약한 부분에 바르게 고쳐지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심지어 육체의 질병까지도 고쳐질 것입니다. 마태는 산상수훈 이래 8-9장까지 예수님께서는 기적적인 사역 10가지를 선별적으로 소개하지만, 그 외에도 많은 사역이 있었다는 것을 결론적으로 압축해서 진술합니다. 지금까지 사역들에 최종적인 결론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영혼을 찾는 하나님의 마음을 기록했습니다. 사실 하나님 나라의 사역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2) 세상에 속한 영혼들(36-37)

예수님께서는 다음 사역을 위해 진행해 나가십니다. 그것은 목자 없는 영과 같이 고생하고 있는 기진한 무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36). 여전히 세상은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적극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십니다. 유대인들을 바라본 예수님의 시선이 매우 선명하게 소개됩니다. 마치 목자를 잃어버린 채 위험한 들판을 유리하다 기진맥진한 상태의 양과 같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생명의 꼴을 먹이며 평안의 길로 인도하는 목자가 되십니다.

마태가 유리하는 무리의 상태를 기록했습니다. ‘고생하다’는 ‘고통을 주다’, ‘압제하다’, ‘낙담하게 하다’의 의미입니다. 또한 ‘기진하다’로 ‘바닥에 버려진다’, ‘무력하게 주저앉다’의 뜻으로 절망적으로 풀이 죽어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내용은 목자가 없어서 고통을 겪는 장면을 묘사한 구약의 몇 본문을 암시합니다(민 27:17; 왕상 22:17; 대하 18:16; 겔 34:5; 슥 10:2). 예수님을 목자로 비유하는 것은 예수님의 탄생 내용에서 등장했고(2:6), 마태복음 전체에서 몇 차례 사용됩니다(10:6,16; 14:14; 15:24, 32; 18:12; 25:32). 목자 없는 양 떼의 모습은 지도자가 없어 고통당하는 백성의 모습을 의미합니다(겔 34:6,12; 렘 50:6).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백성에게 무거운 짐을 떠안겼습니다(마 23:4). 예수님께 있는 목자의 마음은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파하고 사람들을 고친 동기일 뿐만 아니라 제자들을 부르신 이유가 됩니다. 불쌍한 무리를 보신 예수님의 반응은 추수하는 일꾼들을 파송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추수할 것이 많지만 일꾼이 적기 때문에(37),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하라고 가르치십니다(38). 추수하는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38). 제자들은 추수에 참여하는 일꾼들이며, 추수에 참여하는 일꾼들이며, 추수할 다른 일꾼들을 보내달라고 하나님께 요청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명령에서 몇 가지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 종말론적 회복, 혹은 모으는 일이 현재 예수님의 권위를 통해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메시아의 시대가 온 것입니다. 다윗과 바벨론을 강조한 예수님의 계보에서 이미 예고한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바벨론의 포로 상태와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백성에게 오셔서 회복하는 사역을 하고 계십니다. 둘째, 불쌍한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메시아의 마음과 권위로 회복할 일이 더 많이 일어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성들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보면서 큰 추수가 일어날 것을 내다보십니다. 앞으로 하늘나라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 많은 사람이 하늘나라 안으로 들어오게 될 것을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일꾼이 많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셋째, 제자들의 임무는 예수님처럼 이스라엘 고통스러운 문제를 치유하시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 지도자들처럼 목자 일을 감당해야 하는 사람들이 직무를 유기하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일꾼들이 필요하며 이들은 예수님처럼 목자의 긍휼을 지녀야 합니다. 37-38절의 명령을 36절과 연결하면 추수는 목자가 긍휼의 마음으로 양 떼를 모으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종말론적인 심판은 제자들이 아니라 천사들의 몫입니다. 천사는 역사의 종말에 의인에게서 악인을 분리해 심판을 집행하겠지만, 제자들은 이미 도래한 하나님 나라의 회복에 참여하는 역할을 맡은 자들입니다. 넷째, 일꾼은 보내는 분이면서 수확을 가져오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일꾼들은 제자들이 하나님께서 일꾼으로 부르셨기에 주인이 아니며 곡식을 모으는 목적도 일꾼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추수의 일꾼들을 통해서 회복하신 공동체입니다. 교회와 성도는 세상에서 심지어 종교 생활에서 지치고 쓰러진 사람들을 회복하며 일꾼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추수하는 일꾼에게 요구되는 첫 번째 성품은 지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초창기 예수님의 많은 치유 사건 중에서 마지막 교훈입니다. 맹인과 벙어리를 고치신 것은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장차 오실 메시아의 표증이었습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메시아를 널리 전파해야 합니다. 오늘도 그러한 일꾼들을 찾으십니다. 고통을 당하는 자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파할 일꾼을 찾으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이 세상으로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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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14-01)


드고아의 여인을 통해 중재한 요압

사무엘하 141-20


살면서 다양한 문제들을 만납니다. 자신의 문제뿐 아니라 타인의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해 조언을 하거나 관여해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 문제를 악화시키지 않고, 합당하고 유익한 결과를 얻기 위해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와 지혜는 무엇입니까?

 

압살롬은 암논이 자신의 누이 다말을 강간한 후 다윗이 암논에게 아무런 처벌도 하지 않은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었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다가 2년이 지난 후에 양털 깎는 잔치에서 암논이 취한 틈을 이용해 암논을 죽이고 그술로 도망갑니다. 다윗은 암논의 죽음 소식을 듣고 애도합니다. 그리고 3년이 지난 후 다윗은 도망간 압살롬을 그리워하며 가슴 아파하였고 요압은 이런 다윗의 모습을 보고 압살롬이 돌아오게 할 계획을 세웁니다.

 

드고아 여인(1-3)

교회에도 하나님의 통치를 거역하고 악한 일을 도모하는 거짓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계획을 세우고 죄를 죄라고 여기지 않으며 하나님의 공의를 무시합니다. 오직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과 유익을 추구해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힙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거짓 지도자들과 그들의 악한 계획을 경계해야 합니다.

 

1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로 향하는 줄 알고 2드고아에 사람을 보내 거기서 지혜로운 여인 하나를 데려다가 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너는 상주가 된 것처럼 상복을 입고 기름을 바르지 말고 죽은 사람을 위하여 오래 슬퍼하는 여인 같이 하고 3왕께 들어가서 그에게 이러이러하게 말하라고 요압이 그의 입에 할 말을 넣어 주니라(1-3)

본문은 요압의 의도가 주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충성에서 나왔다고 평가합니다. 우리도 충성하기로 맘먹는다면 주인이신 예수님의 뜻을 더 잘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1) 요압의 결심(1)

드고아의 지혜 여성 이야기는 다말 이야기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다말을 강간한 암논에게 다윗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것에 대해 원한을 품은 압살롬이 암논을 죽인 후 도망간 사건 이후에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다윗은 압살롬이 암논을 죽이고 도망간 지 3년 정도가 지나면서 암논의 죽음에 대한 슬픔은 많이 흐려지고, 대신 도망간 압살롬에 대한 그리움이 커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심복 요압이 이 사실을 알고는 압살롬을 데리고 오기 위한 방책을 생각해냅니다. 그리고 이를 실행에 옮길 사람을 하나 섭외하는데, 바로 드고아의 여인입니다.

 

(2) 요압의 계략(2-3)

사무엘하 14:2에서 이 여인을 지혜로운 여인이라고 부릅니다. 요압은 그녀를 불러 왕 앞에서 할 행동과 말들을 알려줍니다. 요압은 그녀에게 상복을 입고 기름을 바르지 말며 죽은 사람을 위해 오랫동안 애곡한 여인처럼 보이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요압이 지혜로운 여인에게 명령하지 않고 정중하게 요청한 것을 보면 지혜로운 여인은 사회적 지위가 있는 인물로 보입니다.

3절에서 요압이 그의 입에 할 말을 넣어 주니라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요압의 말을 앵무새처럼 옮긴다는 의미가 아니라 요압은 대략적인 상황만 말하고 세부 사항들은 전적으로 드고아의 여성이 행했다는 뜻입니다.

 

드고아 여인의 아들(4-11)

죄의 심각성과 죄인의 비참한 처지를 감추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은 죽을 운명의 자리에 있는 죄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처지를 직시하게 하고 참된 회개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도록 인도합니다. 복음이 가리키는 진실을 덮는 거짓 복음이 무엇인지, 복음을 가감하고 왜곡하는 주장이 무엇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4드고아 여인이 왕께 아뢸 때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이르되 왕이여 도우소서 하니 5왕이 그에게 이르되 무슨 일이냐 하니라 대답하되 나는 진정으로 과부니이다 남편은 죽고 6이 여종에게 아들 둘이 있더니 그들이 들에서 싸우나 그들을 말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므로 한 아이가 다른 아이를 쳐죽인지라 7온 족속이 일어나서 당신의 여종 나를 핍박하여 말하기를 그의 동생을 쳐죽인 자를 내놓으라 우리가 그의 동생 죽인 죄를 갚아 그를 죽여 상속자 될 것까지 끊겠노라 하오니 그러한즉 그들이 내게 남아 있는 숯불을 꺼서 내 남편의 이름과 씨를 세상에 남겨두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니 8왕이 여인에게 이르되 네 집으로 가라 내가 너를 위하여 명령을 내리리라 하는지라 9드고아 여인이 왕께 아뢰되 내 주 왕이여 그 죄는 나와 내 아버지의 집으로 돌릴 것이니 왕과 왕위는 허물이 없으리이다 10왕이 이르되 누구든지 네게 말하는 자를 내게로 데려오라 그가 다시는 너를 건드리지도 못하리라 하니라 11여인이 이르되 청하건대 왕은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사 원수 갚는 자가 더 죽이지 못하게 하옵소서 내 아들을 죽일까 두렵나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 아들의 머리카락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하니라(4-11)

여인은 다윗 왕의 동정심을 자극하며 교묘하게 이야기를 꾸며 냈습니다. 한 아들이 다른 아들을 우발적으로 죽였는데, 남은 아들마저 처형하면 상속자가 끊어진다는 것입니다.

 

(1) 두 아들의 싸움(4-6)

드고아의 여인은 먼저 아들을 잃은 과부로 변장한 후 다윗에게 나아와 연극을 하기 시작합니다. 만약 그녀가 사회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것에 경험이 부족했다면, 그런 대담한 연극을 수행할 용기와 태도를 갖기 어려웠을 것입니다그녀는 먼저 다윗 왕 앞에서 땅에 얼굴을 대고 엎드리는 가장 겸손한 자세를 취하며 자신을 도와달라고 간청합니다. 이 모습은 아비가일이 다윗에게 자신의 가족을 살려달라고 부탁할 때와 유사합니다. 다윗이 무슨 일인지 묻자 드고아 여인은 자신을 진정한 과부로 소개하고 남편이 죽었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말합니다. 불쌍한 과부의 처지를 강조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두 아들이 들에서 서로 싸우다 말리는 사람이 없어 한 아들이 다른 아들을 쳐 죽였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두 아들이 들에서 싸우고 한 아들을 죽인 사건은 내막을 모르고 들으면 가인과 아벨 사건을 연상시키지만, 여기서 드고아 여인은 다윗의 두 아들 암논과 압살롬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친척들이 남은 아들을 죽여서 상속자를 끊어버리려고 모두 들고 일어나 자신을 핍박하고 있다고 상황을 설명하며 도와달라고 요청합니다.

 

(2) 사람들의 요구(7)

드고아 여인은 남은 아들을 남편의 이름과 후손을 이 땅에서 이어줄 유일하게 남은 숯불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숯불은 금방이라도 꺼질 듯 위태한 상황을 상징하며 다윗의 동정심을 유발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이 말을 들은 다윗은 사람들이 여인을 못 건드리게 할 테니 걱정 말고 가라고 문제를 해결해줍니다. 이런 다윗의 판결에 드고아 여인은 피의 대가를 반드시 치러야 한다는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것에 대한 벌은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담당할 죄이며, 다윗에게는 전혀 죄가 없다고 말합니다.

 

(3) 다윗의 결정(8-11)

일단 첫 번째 문제를 해결 받은 여인은 두 번째 문제를 들고 나오는데, 원수를 갚으려는 피의 보수자가 자신의 아들을 죽이지 못하게 해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다윗은 또다시 그 요청을 들어주어 아들의 머리카락 한 오라기도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합니다. 여기서도 다윗은 아비가일의 이야기에서처럼 어리석은 맹세를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다윗은 살인한 아들의 죄를 용서함으로써 피의 복수 문제를 너무도 쉽게 해결해버렸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이렇게 쉽게 드고아 여인의 아들의 죄를 용서한 이유는 그녀를 과부로 생각했고 남은 아들이 유일한 아들로 남편의 이름을 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아들(12-17)

하나님의 공의를 무시하고 죄악에 대한 심판을 말하지 않는 거짓 복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죄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는 온전한 복음을 배우고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그냥 넘어가지 않는 공의로우신 분입니다.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우리 죄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형벌을 받으셨음을 말해야 온전한 복음입니다.

 

12여인이 이르되 청하건대 당신의 여종을 용납하여 한 말씀을 내 주 왕께 여쭙게 하옵소서 하니 그가 이르되 말하라 하니라 13여인이 이르되 그러면 어찌하여 왕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대하여 이같은 생각을 하셨나이까 이 말씀을 하심으로 왕께서 죄 있는 사람 같이 되심은 그 내쫓긴 자를 왕께서 집으로 돌아오게 하지 아니하심이니이다 14우리는 필경 죽으리니 땅에 쏟아진 물을 다시 담지 못함 같을 것이오나 하나님은 생명을 빼앗지 아니하시고 방책을 베푸사 내쫓긴 자가 하나님께 버린 자가 되지 아니하게 하시나이다 15이제 내가 와서 내 주 왕께 이 말씀을 여쭙는 것은 백성들이 나를 두렵게 하므로 당신의 여종이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왕께 여쭈오면 혹시 종이 청하는 것을 왕께서 시행하실 것이라 16왕께서 들으시고 나와 내 아들을 함께 하나님의 기업에서 끊을 자의 손으로부터 주의 종을 구원하시리라 함이니이다 17당신의 여종이 또 스스로 말하기를 내 주 왕의 말씀이 나의 위로가 되기를 원한다 하였사오니 이는 내 주 왕께서 하나님의 사자 같이 선과 악을 분간하심이니이다 원하건대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과 같이 계시옵소서(12-17)

여인은 본론으로 들어가 다윗에게 자신의 의도를 밝히며 왜 압살롬을 용서하지 않느냐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인생은 죽을 수밖에 없으며, 하나님이 생명을 빼앗기보다 용서하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그 여인은 압살롬이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 회개하고, 그에게 공의가 집행되어야 할 상황을 왜곡한 것입니다.

 

(1) 여인의 책망(12-14)

여인은 자신을 당신의 여종이라고 다시 낮추면서 말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시기를 부탁했습니다. 다윗이 말하라고 허락하자, 그 여인은 다윗 왕을 은근히 책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왕은 백성들에게는 피의 복수를 하지 말라고 하면서 왕은 왜 내쫓긴 자 압살롬에 대해서는 죄인으로 여기고 그를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느냐고 묻습니다. 이 질문을 통해 드고아의 여인은 다윗을 꼼짝 못하게 만듭니다. 왜 다른 사람들의 죄는 용서하고 피의 복수를 못하게 막으면서 자신의 아들인 압살롬의 죄는 용서하지 않느냐며 다윗의 모순을 지적한 것입니다.

여인은 죽음에 대한 고대의 일반적인 지혜를 언급하며 "하나님은 생명을 빼앗지 아니하시고 방책을 베푸사 내쫓긴 자가 하나님께 버린 자가 되지 아니하게 하시나이다라는 말로 다윗을 설득합니다. , 모든 인생은 결국 죽을 수밖에 없고, 죽으면 되돌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산 사람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그 생명을 빼앗는 것 대신에 여러 방법으로 살려주시며, 하나님 백성의 기업에서 쫓겨나지 않게 하십니다.

하지만 드고아의 여인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두 사실을 왜곡하였습니다. 첫째, 드고아 여인이 설정한 상황에서 살인한 아들은 과부의 유일한 아들이기 때문에 다윗이 살려주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압살롬은 다윗의 유일한 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죄를 용서할 조건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사랑이 많으셔서 자신의 백성이 사는 것을 원하시지만 정의를 무너뜨리시는 분은 아닙니다. 다윗이 압살롬에 대해서 그리워하면서도 그를 다시 불러들일 수 없었던 이유도 바로 정의 부분에서 걸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다윗의 마음을 알고 있던 드고아의 여인은 이 부분을 고의적으로 누락하고 하나님의 자비만을 강조하면서 다윗의 고민에 면죄부를 준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 여성은 다윗이 피의 복수를 금지한 판단이 하나님의 사자가 선과 악을 지혜롭게 분별한 것같이 절대적으로 옳다며 적극적으로 다윗을 두둔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을 통해 다윗이 혹시 잘못 판단한 것은 아닐까 갈등할 여지를 없애줍니다. 드고아의 여인은 철저히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상황을 이끌어가면서 다윗이 압살롬을 불러들이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2) 여인의 희망(15-18)

다윗에게 따끔한 충고를 전한 희망을 피력합니다. 여인은 자신이 왕께 와서 이 말을 함은 백성이 그 여인을 두렵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여인은 다윗이 자신의 말을 듣고, 여인과 여인의 아들을 함께 죽이려 하는 사람의 손에서 여인을 구원해 주시기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실상 다윗이 자기 아들을 살려야 한다는 말의 우회적인 표현입니다. 여인은 다윗 왕의 말이 자신에게 위로(메누하)가 되기를 기원했습니다. 이러한 기대를 품을 수 있는 이유는 다윗 왕은 하나님의 천사와 같아서 선과 악을 잘 분별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천사는 사람의 행위를 심판한다고 여겨졌습니다. 여인은 하나님께서 왕과 함께 계시기를 기원하는 것으로 자신의 말을 끝냈습니다.

 

사건의 전말(18-20)

거짓을 분별하고 선악을 분명하게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도자가 명확하게 판단하지 못하면 거짓이 틈을 타고 들어옵니다. 거짓을 미온적으로 대처하면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거짓을 단호하게 대처하지 않으면 거짓이 진실로 여겨질 수 있으며 또 다른 악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18왕이 그 여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바라노니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내게 숨기지 말라 여인이 이르되 내 주 왕은 말씀하옵소서 19왕이 이르되 이 모든 일에 요압이 너와 함께 하였느냐 하니 여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주 왕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옵나니 내 주 왕의 말씀을 좌로나 우로나 옮길 자가 없으리이다 왕의 종 요압이 내게 명령하였고 그가 이 모든 말을 왕의 여종의 입에 넣어 주었사오니 20이는 왕의 종 요압이 이 일의 형편을 바꾸려 하여 이렇게 함이니이다 내 주 왕의 지혜는 하나님의 사자의 지혜와 같아서 땅에 있는 일을 다 아시나이다 하니라(18-20)

다윗이 이 일이 요압의 손에 의해 꾸며진 것을 다윗이 알아챘을 때, 드고아 여인은 그것을 순순히 인정하고 요압이 현재의 상황을 바꾸기 위해서 벌인 일이라고 이야기합니다. , 요압이 다윗의 마음을 살피고 그 마음을 편하게 하기 위한 충정에서 한 일이라고 요압의 편을 들어준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요압이 한 일이라는 것을 안 다윗의 지혜에 대해 하나님의 사자의 지혜로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며 칭송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선과 악을 구별하는 것도, 땅의 모든 것을 다 아는 것도 실패하고, 결국 압살롬을 예루살렘으로 불러들이는 매우 어리석은 결정을 하였습니다.

여기서 드고아 여인은 다윗에게 다말과 대조되는 역할을 합니다. 다윗은 지혜로운 다말의 부르짖음에는 귀 기울이지 않고 침묵하다가 드고아 여인의 속임수에 넘어감으로써 왕국을 위험에 빠뜨립니다. 이런 모습은 다윗이 옳고 그름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이것은 다윗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진 결과입니다.

 


선의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인간적 책략은 상황을 악화시킬 수 있습니다.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지 않고 상황을 무마하려 한다면 더 큰 위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형제를 도우려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나라의 원칙에 의거하여 문제에 접근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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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13-03)

 

 

 


암논에게 복수하여 살인한 압살롬

사무엘하 1323-39


사탄은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먹잇감을 찾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무너뜨릴 계교를 짜고, 틈이 보이면 순식간에 악한 마음을 충동질하여 공동체를 찢어 놓습니다. 주께서 피 값을 주고 사신 교회를 악으로부터 보존하고, 든든히 세워가려면 어떻게 행해야 합니까?

 

암논은 다말을 강간한 후 다말을 미워하여 집 밖으로 내쫓아버렸고, 다말은 자신의 채색옷을 찢고 고통과 억울함을 호소하며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하지만 친오빠 압살롬은 다말을 강간한 사람이 암논이라는 것을 안 순간 잠잠하라고 하였고, 다윗도 화낼 뿐 암논과 다말에게 어떠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피해자 다말만 가족과 공동체에서 고립된 채 외롭게 살아야 했고, 압살롬은 아무런 처벌도 없는 상황에 대해 암논과 다윗에게 분을 품으며 복수할 기회만 엿보게 됩니다.

 

암논의 죽음(23-29)

사랑이란 단어는 듣기만 해도 따뜻하고 벅차게 합니다. 하지만 잘못된 사랑도 있습니다. 사랑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잘못된 일들이 연일 뉴스를 통해 흘러나옵니다. 또한 정의와 사랑의 균형을 맞추는 일이 어렵습니다. 정의를 강조하면 비정해지고, 사랑을 강조하면 불공정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23만 이 년 후에 에브라임 곁 바알하솔에서 압살롬이 양 털을 깎는 일이 있으매 압살롬이 왕의 모든 아들을 청하고 24압살롬이 왕께 나아가 말하되 이제 종에게 양 털 깎는 일이 있사오니 청하건대 왕은 신하들을 데리시고 당신의 종과 함께 가사이다 하니 25왕이 압살롬에게 이르되 아니라 내 아들아 이제 우리가 다 갈 것 없다 네게 누를 끼칠까 하노라 하니라 압살롬이 그에게 간청하였으나 그가 가지 아니하고 그에게 복을 비는지라 26압살롬이 이르되 그렇게 하지 아니하시려거든 청하건대 내 형 암논이 우리와 함께 가게 하옵소서 왕이 그에게 이르되 그가 너와 함께 갈 것이 무엇이냐 하되 27압살롬이 간청하매 왕이 암논과 왕의 모든 아들을 그와 함께 그에게 보내니라 28압살롬이 이미 그의 종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제 암논의 마음이 술로 즐거워할 때를 자세히 보다가 내가 너희에게 암논을 치라 하거든 그를 죽이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너희는 담대히 용기를 내라 한지라 29압살롬의 종들이 압살롬의 명령대로 암논에게 행하매 왕의 모든 아들들이 일어나 각기 노새를 타고 도망하니라(23-29)

암논의 범죄한 후 2년이 흘렸습니다. 다말에게는 수치의 시간, 다윗에게는 분노의 시간, 압살롬에게는 복수의 날을 벼르는 시간이었습니다. 참담한 일이었지만,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이 일을 해석하거나 처리하지 않았습니다.

 

(1) 다윗을 초대(23-25)

암논이 다말을 강간한 사건이 벌어진 지 2년 후에 에브라임 곁 바알하솔에서 압살롬이 양털을 깎는 잔치를 벌였습니다. 바알하솔은 벧엘 동북쪽으로 8킬로미터 떨어진 중앙 산지의 울퉁불퉁한 지역입니다. 압살롬이 잔치 장소를 이곳으로 택한 이유는 암논을 죽인 후에 그슬로 도망가기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양털을 깎는 날은 일종의 추수를 하는 날로 양 떼의 주인은 많은 사람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벌이는 관습이 있습니다. 압살롬은 이 잔치에 왕의 모든 아들들을 초대합니다. 또한 압살롬은 다윗에게도 신하들을 데리고 자신의 잔치에 와달라고 칭합니다. 여기서 압살롬은 다윗에게 자신을 당신의 종이라고 부르고 다윗을 왕이여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다윗과의 관계를 부자 관계가 아닌 주종 관계로 설정하며, 자신이 왕의 충성스러운 신하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런 압살롬의 행동은 자신의 의도를 감추기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압살롬을 나의 아들이라고 친근하게 부릅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압살롬에게 부담을 주기 싫기 때문에 자신과 자신의 신하는 가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아들이 힘들 것을 염려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압살롬은 다윗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간청하였지만 다윗은 가기를 원치 않았고, 대신 압살롬 등에게 복을 빌어주는 것으로 대신합니다. 여기서 압살롬이 다윗을 초청한 것은 암논을 잔치에 초청하기 위한 포석이었습니다. 암논만 초대하면 다윗이 압살롬의 의도를 오해할 수도 있기에, 왕과 신하들과 함께 암논을 부른 것입니다.

 

(2) 왕자들을 초대(26-27)

다윗이 오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압살롬은 원래 목적대로 암논을 초청합니다. 여기서 압살롬은 암논을 나의 형이라고 친근하게 부르며 암논이 자신에게 오게 해달라고 다윗에게 요청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암논이 압살롬에게 가는 것에 대해서도 일단 거절합니다. 다윗은 다말 강간 사건을 잊지 않았고 압살롬이암논에게 좋지 않은 감정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압살롬이 다윗에게 간청하자 다시 거절하지 못하고, 암논과 왕의 모든아들들을 압살롬의 잔치에 보냅니다. 다윗은 자신의 명령으로 다말을 암논에게 보내어 강간당하게 한 것처럼, 이번에는 다윗 자신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암논을 압살롬에게 보내 압살롬이 암논을 죽이는 데 일조하게 됩니다.

 

(3) 암논을 죽인 압살롬(28-29)

28절은 압살롬이 왜 암논을 잔치에 초대했는지 이유를 설명합니다. 시점으로 보면 다윗과 암을 초대하기 위해 왕에게 부탁하기 전으로 압살롬은 이미 암논을 죽이기 위해 모든 준비를 마치고서 왕에게 간 것입니다압살롬은 자신의 종들에게 암논이 포도주에 취해서 즐거워할 때를 보다가 자신이 명령하면 암논을 죽이라고 미리 명령을 내린 상태였습니다. , 잔치가 무르익어 모두가 경계를 늦추고 술에 취하여 상황 파악을 빨리할 수 없는 그 순간에 암논을 급습하여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자신의 종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면서 자신이 내린 명령이니 담대하게 용사처럼 행동하라고 권면하기까지 합니다. 여기서 자신이 명령한 것이라는 말을 하는 것은 암논의 살인에 대한 모든 책임은 압살롬 자신에게 있으며, 자신이 모두 책임지겠다는 뜻입니다.

종들은 압살롬의 명령대로 암논을 죽입니다. 압살롬은 정말 자신이 계획한 대로 암을 죽인 것이다. 압살롬은 다말을 강간한 암을 죽이기 위해 2년 동안 상황을 살피고 준비하면서 아버지 다윗과 암논 앞에서 자신이 암을 죽이고 싶어 할 만큼 미워한다는 사실을 조금도 내색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압살롬이 공공연하게 암에 대한 미움과 다윗에 대한 불만을 드러냈다면, 다윗이 암논을 압살롬의 잔치에 보내지도 않았을 것이고, 암논도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압살롬은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본심을 철저히 숨기고 행동하였기에 암을 죽일 기회를 얻었고 마침내 실행에 옮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압살롬이 암을 죽인 것은 표면적으로는 다말의 강간 사건에 대한 복수이지만 이면적으로는 자신이 왕이 되는 데 걸림돌이 되는 왕위 계승 서열 1위를 제거한 것입니다. 압살롬은 다윗의 셋째 아들이며 위로는 암논과 길르압이 있지만, 길르압은 사무엘하 3:3에서 언급된 것 이외에는 등장하지 않는 것을 보면 어려서 죽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암논이 죽으면 압살롬이 왕위 계승 서열 1위가 됩니다. 이렇게 압살롬은 누이의 강간 사건을 자신이 왕이 되려는 욕망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압살롬이 암을 죽인 것을 본 다른 왕자들은 각각 노새를 타고 그곳에서 도망하였는데, 압살롬이 왕의 다른 아들들은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의 목표는 오로지 암논을 제거하는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노새는 수나귀와 암말 사이에서 이종교배로 태어난 짐승이며 이스라엘에서는 금지되어 있었지만(19:19), 왕가의 운송 수단으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왕자들의 귀환(30-36)

간교한 자에게서 감정, 공감, 동정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사랑의 감정은 없고, 팩트만 범람할 때 세상은 정말 비정해집니다. 모든 일을 꾸민 간교한 자가 왕의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다윗의 나라는 위태롭습니다. 능력이 출중할지라도 간교한 자는 멀리해야 합니다.

30그들이 길에 있을 때에 압살롬이 왕의 모든 아들들을 죽이고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다는 소문이 다윗에게 이르매 31왕이 곧 일어나서 자기의 옷을 찢고 땅에 드러눕고 그의 신하들도 다 옷을 찢고 모셔 선지라 32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 요나답이 아뢰어 이르되 내 주여 젊은 왕자들이 다 죽임을 당한 줄로 생각하지 마옵소서 오직 암논만 죽었으리이다 그가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욕되게 한 날부터 압살롬이 결심한 것이니이다 33그러하온즉 내 주 왕이여 왕자들이 다 죽은 줄로 생각하여 상심하지 마옵소서 오직 암논만 죽었으리이다 하니라 34○이에 압살롬은 도망하니라 파수하는 청년이 눈을 들어 보니 보아라 뒷산 언덕길로 여러 사람이 오는도다 35요나답이 왕께 아뢰되 보소서 왕자들이 오나이다 당신의 종이 말한 대로 되었나이다 하고 36말을 마치자 왕자들이 이르러 소리를 높여 통곡하니 왕과 그의 모든 신하들도 심히 통곡하니라(30-36)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을 속여 암논을 초대한 후, 다윗이 요압을 통해 우리아를 죽였듯이, 신복들을 통해 암논을 제거합니다. 다윗은 암논에게 속아서 딸이 겁탈당하는 것을 도왔는데, 이번에도 압살롬에게 속아서 암논의 죽음을 본의 아니게 돕고 맙니다.

 

(1) 다윗의 슬픔(30-31)

암논을 제외한 다윗의 아들들이 노새를 타고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즉 각자 자신의 집으로 도망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다윗에게는 압살롬이 모든 아들들을 죽였다는 허위보고가 들어갑니다. 여기에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는 말을 쓴 것은 모두 죽였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아직 아들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있어서 이들의 생사를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허위 보고를 한 것입니다이 소식을 사실로 믿은 다윗은 옷을 찢고 땅에 누워 아들들의 죽음을 애도합니다. 이것은 12:16-23에서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병에 걸렸을 때 했던 것과 동일한 행동입니다. 다윗은 범죄한 이후에 계속해서 아들을 잃는 괴로움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2) 요나답의 분석(32-33)

이번에는 지난번과 다르게 다윗의 신하들도 옷을 찢고 다윗의 곁에 서서 함께 애도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암논에게 간교한 계책을 알려준 요나답이 이 상황에 대해 합리적인 해석을 해줍니다. 그는 왕자들 모두 죽임을 당하지 않고 암만 죽었을 것이라고 예상하면서 암이 다말을 강간한 날부터 압살롬이 걸심하였던 것이라고 말한다. 요나답은 암이 말을강간하면 압살롬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임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요나답은 암논에게 다말을 강간할 방법을 알려준 것이다. 그러므로 이 본문에서 가장 약한 인물은 요나답이라고 볼 수 있다.

 

(3) 왕자들의 귀환(34-36)

요나답이 이야기하고 있는 사이에 파수꾼들이 뒷산 언덕길로 사람들이 오는 것을 발견합니다. 요나답은 그 소식을 듣고 자신의 말대로 왕자들이 살아 왔다고 다윗에게 보고하였습니다. 그리고 정말 왕자들이 도착하였고, 그들은 안도감과 반가움에 큰 소리로 울었고, 다윗과 모든 신하들도 같이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다윗은 한편으로는 안도감이 들었을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가장 사랑하는 아들 암논을 잃은 것에 대해 크게 상심하였을 것입니다.

 

압살롬의 도피생활(37-39)

사랑의 이름으로 잘못을 눈감아주지만, 깨진 관계가 회복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책임을 안 질 만큼만 참여하고, 이익을 얻을 수 있을 만큼만 참여했습니다. 사람이나 배려가 없는 지혜는 간교한 모략에 불과합니다.

 

37압살롬은 도망하여 그술 왕 암미훌의 아들 달매에게로 갔고 다윗은 날마다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슬퍼하니라 38압살롬이 도망하여 그술로 가서 거기에 산 지 삼 년이라 39다윗 왕의 마음이 압살롬을 향하여 간절하니 암논은 이미 죽었으므로 왕이 위로를 받았음이더라(37-39)

암논을 죽인 압살롬은 그슬로 도망합니다. 그의 외할아버지 달매가 그술의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그의 아들로 인해 날마다 슬퍼하였습니다. 여기서 그 아들이 누군지 언급되지 않지만 왜곡하다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을 보면 압논의 죽음에 대해서 상당히 오랫동안 애도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3년이 지나자 암논의 죽음을 애도하는 마음이 어느 정도 진정되었고 대신에 그술로 도망간 암살롬에 대한 마음이 간절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다윗은 한 아들을 잃고 또한 아들은 크지 못하는 불행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만일 암논이 다말을 강간한 직후 다말의 부르짖음을 듣고 암논에게 적절한 처벌을 내려 다말과 암살롬의 마음을 위로했다면 이런 불행한 사태는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악한 자의 계교로부터 공동체를 지킨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거짓과 미움, 분열의 영이 간계로 끊임없이 흔들어놓기 때문입니다. 구성원 모두가 깨어 이간과 속임을 분별하고, 간교한 자를 멀리하며 사랑의 신뢰와 용서로 결속할 때, 공동체를 지켜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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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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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늦기 전에 벗어나는 지혜

잠언 61-19


살아가면서 모르고 당한 일보다 알고도 당하는 일들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상대의 의도를 알면서도 쉽게 마음을 내주다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받기도 하고, 자신의 약함을 알면서도 버리지 못해 큰 곤경에 처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예측이나 예상은 늘 빗나가고, 그 파국을 알면서도 돌이키지 않는 것이 인간의 우매함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 본문은 자의든 타의든 자초한 위기 가운데서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지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음과 악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여기서 어리석음과 악은 단순히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영역만이 아니라 영적, 신앙적인 영역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같이 움직입니다. 하나님이 혐오하시는 태도와 언행을 떠나 선을 행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부록 : 어리석음과 악에 대한 네 가지(1-19)

온몸과 온 맘으로 악을 도모하며 싸움을 부추기고 공동체의 질서와 관계를 뒤틀고 뒤엎는 패역한 자에게 재앙이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삶의 기준을 멸시하고 악을 꾀하며 악한 일을 계속해 자행하는 자를 절대로 방관하지 않으시고 때가 되면 그의 교만과 속임과 방종에 대해 엄중히 심판하실 것입니다.

1내 아들아 네가 만일 이웃을 위하여 담보하며 타인을 위하여 보증하였으면 2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 3내 아들아 네가 네 이웃의 손에 빠졌은즉 이같이 하라 너는 곧 가서 겸손히 네 이웃에게 간구하여 스스로 구원하되 4네 눈을 잠들게 하지 말며 눈꺼풀을 감기게 하지 말고 5노루가 사냥꾼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스스로 구원하라 6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7개미는 두령도 없고 감독자도 없고 통치자도 없으되 8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9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누워 있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10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누워 있자 하면 11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 12불량하고 악한 자는 구부러진 말을 하고 다니며 13눈짓을 하며 발로 뜻을 보이며 손가락질을 하며 14그의 마음에 패역을 품으며 항상 악을 꾀하여 다툼을 일으키는 자라 15그러므로 그의 재앙이 갑자기 내려 당장에 멸망하여 살릴 길이 없으리라 16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 곧 그의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예닐곱 가지이니 17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18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19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이니라(1-19)

첫 모음집의 여덟째 교훈은 크게 네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처음 두 단락(1-11)이 개인의 신중하지 못하고 게으른 행동을 경고한다면, 나머지 두 단락(12-19)은 공동체에 불화를 초래하고 조화를 깨뜨리는 행동을 경고합니다.

 

(1) 담보와 보증에 대한 경고(1-5)

잠언 6장은 1-9장에서 지혜의 강연(1:20-33)과 지혜의 송가(3:13-20)에 이어 세 번째 등장하는 막간 형식의 부록으로 볼 수 있습니다.

첫 교훈인 1-5절은 담보나 보증을 하지 말라는 경고를 담고 있습니다. 남을 위해 담보하거나 보증을 서는 일은 내가 타인의 빚이나 책무에 대한 책임을 지는 행위입니다. 이런 일은 보통 사업 현장에서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거나 빚보증을 서는 양상으로 나타납니다. 잠언에서는 담보나 보증에 대해 여러 번 경고합니다. 누군가에게 빚을 졌으면 갚고, 채무자에게 이자를 추가하여 부담을 주거나 잘못된 빚보증을 서서 가산을 다 잃어버리지 않도록 주의를 줍니다(22:26-27). 남의 보증인이 되는 자는 지혜롭지 못한 자이며(17:18), 그런 자에게는 손해와 불안감이 따라오므로 보증을 서지 말고 평안을 찾으라고 격려합니다(11:15). 또한 타인(또는 타국인)을 위한 보증을 특히 주의하라고 합니다(20:16; 27:13).

1절의 네가 만일 이웃을 위하여 담보하며 타인을 위하여 보증하였으면이란 문장은 이웃타인이 동일 인물이냐 아니냐에 따라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습니다. 만약 이웃과 타인이 동일 인물이라면 아들이 자기의 이웃을 위해 보증을 선 경우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동일 인물이 아니라면 아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타인을 위해서 이웃에게 보증을 선 경우로 해석됩니다. 동일 인물일 경우는 아는 사람의 보증을 서지 말라는 일반적인 뜻으로, 동일 인물이 아닌 경우는 잘 아는 사람에게든 모르는 사람에게든 보증을 서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웃과 타인이 누구냐의 문제보다는 보증과 담보에 대한 경고가 더 중요합니다.

1절의 보증에 대한 경고는 2절에서 그로 인해 파생된 결과를 설명함으로써 계속됩니다. 고대의 보증은 문서로 남기기보다는 구두로 시행되고 서로 손바닥을 맞닿게 침으로써 성립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구두로 한 담보나 보증의 약속은 마치 덫이 새를 옭아매듯 당사자의 운명을 얽어매므로 쉽사리 빠져나올 수 없으며 혹 빠져나온다고 하더라도 상처를 입게 됩니다.

한편, 잠언 6장에 나오는 담보에 대한 경고는 잠언의 다른 곳에 나오는 구절과 비교했을 때 보증을 서지 말라는 경고만이 아니라 보증의 위기에서 벗어날 방법(3-5)을 제시한 점이 특별합니다. 아들이 이웃에게 빚을 진 경우 혹은 타인을 위해 이웃에게 담보가 된 경우, 이 문제에서 탈피하기 위해서는 찾아가서, 자신을 낮추고, 졸라야 합니다. 눈꺼풀에 졸음이 들지 않게 할 정도로 보증의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마치 노루나 새가 사냥꾼의 올무나 그물에서 나오려고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듯이, 설사 찢기고 상처가 나는 한이 있더라도 올무나 그물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네 자신을 구원하라 말이 3절과 5절에서 반복되어 스스로 위기에서 벗어나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보증 문제 해결이 급선무입니다.

 

(2) 게으름에 대한 경고(6-11)

보증에 이어 게으름에 대한 경고가 등장합니다. 잠언의 다른 부분에서도 게으름의 주제에 대해 종종 다루고 있습니다(10:26; 13:4; 15:19; 19:24; 22:13; 24:30-34; 26:13-16). 앞의 보충 문제는 본인과 다른 사람 간에 생겨난 문제로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쌍방의 합의가 필요하지만, 게으름은 자기로 인해 생겨난 문제이므로 본인이 나서서 이 일을 해결해야 합니다게으른 자는 밥그릇에 손을 얹고도 입으로 퍼 올리기를 싫어하고(19:24) 침대에서만 뒹굴며(26:14; 26:15) 잠만 재촉하므로(6:10-11; 24:33-34) 원하는 것이 있어도 얻지 못합니다(13:4). 이처럼 게으른 자는 분별력이 없는 자(24:30)이므로 개미에게서라도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종종 자연의 동식물을 통해 해야 할 행동과 피해야 할 행동을 배울 수 있습니다. 개미는 작고 힘이 없지만, 여름에 먹을 것을 예비할 줄 아는 작지만 지혜로운 생물 중의 하나로 꼽히는 곤충입니다(30:25). 지도자나 감독도 없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열심히 일해서 양식을 모으는 개미처럼 게으른 자도 무덥고 건조한 여름 동안에 일해야만, 보리와 밀의 수확기인 여름 추수기나 곡식과 과실의 수확기인 가을 추수기에 양식을 거둘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조언을 듣지 않고 계속 잠만 자고 일을 미룬다면 가난과 궁핍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더구나 가난은 강도나 무장한 군사처럼 뜻하지 않은 때 게으른 자를 습격하여 그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고 큰 곤경에 빠뜨릴 것입니다.

 

(3) 악인의 일곱 가지 특징(12-15)

보증이나 게으름과 같은 경제와 관련된 문제를 떠나, 12절부터는 사회적인 문제를 논합니다. 먼저 12-15절은 악인의 일곱 가지 특징을 입, , , , 마음 등 신체 기관과 관련하여 묘사하고 악인의 종국에 대해 선언합니다.

악인은 먼저 무익함(또는 죄악)과 불의의 사람으로 정의되었습니다. 그의 불의한 행동은 거짓을 말하고, 눈짓을 건네거나 발이나 손가락을 움직여 공모자와 악한 일을 도모하며, 마음에 패역을 품고 늘 악을 계획하고 다툼을 일으키는 데에서 나타납니다. 이런 악한 행동은 이미 아들을 꾀는 악한 남자(1:11-14; 2:13-15; 3:14-17)나 음녀(2:16-19; 5:3-14)의 행동에서 목격되었습니다. 게으른 자에게 갑작스러운 곤경이 임하듯(15), 불의한 자에게도 재앙이 갑자기 임하여 순식간에 망하게 됩니다. 또한, 그 재앙은 회복할 길이 없을 정도로 치명적입니다.

 

(4)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일곱 가지(16-19)

16-19절은 마지막 경구로서 하나님이 혐오하는 일곱 가지를 나열하였습니다. 위의 불의한 자의 행동 목록과 같이 여기에서도 7이란 숫자를 사용한 것은 악의 총체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혐오 목록은 악인의 목록과 마찬가지로 신체 기관과 관련지어 설명되고 마음의 태도, 거짓말, 그리고 행악이라는 세 가지 면에서 소개됩니다첫째, 마음의 태도는 교만한 눈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으로 표현됩니다. 악은 마음의 생각과 계획으로부터 시작하며 교만과 항상 함께합니다둘째, 거짓말에 대해서 거짓된 혀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을 언급합니다. 구약에서 자주 거짓 증인에 대한 경고가 나옵니다. 이는 법정에서나 일상에서 거짓말을 하거나 위증을 하는 것이 중죄임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기 위한 지침서인 십계명에서도 거짓 증거 하지 말라고 단호히 명령합니다(20:16). 셋째, 행악에 관련해서는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 형제 사이에 다툼을 일으키는 행동으로 표현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행동은 12-15절에서의 악인의 행동과 마찬가지로 신체 기관과 연결하여 설명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혐오 목록과 악인의 행동 목록이 서로 연결되는 것은 도덕적, 윤리적인 악이 영적, 신앙적인 영역과도 밀접히 연결된다는 점을 드러냅니다. 이 조언을 듣는 자는 불의의 길을 떠나 하나님이 인정하고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악을 꾀하지는 자는 멸망의 심판을 면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몸과 맘의 원초적인 악한 욕구를 만족시키려고 살기보다는 전인격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의와 선을 위해 헌신하도록 말씀의 지혜로 잘 절제하고 통제하고 관리해야 합니다. 때늦은 후회는 있어도 때늦은 회개는 없습니다. 때를 놓치기 전에 남을 탓하기 전에, 말의 실수이든 태도의 문제이든 악의 올무이든 얼른 스스로 자초한 위기에서 벗어나기를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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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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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대의 주인공이신 예수님

마태복음 914-26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새로운 지도자 한 사람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새로운 시대가 온 것입니다. 그 이전과 그 이후는 같을 수가 없습니다. 마치 한 나라가 무너지고 새로운 나라가 세워진 것이고, 그 새로운 나라가 제시하는 새로운 법과 문화 그리고 가치가 제시된 것입니다. 이제는 이전 방식대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이전에 중요하게 여겼던 것들이 이제는 중요하게 생각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새로운 시대에 맞게 살아가야 합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앞서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잔치를 벌인 것에 의문을 제기하며 금식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자신이 가져온 하늘나라의 생명을 누리며 기뻐할 때라고 말씀하십니다.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옛 시대와 새 시대를 옷과 포도주로 비유하십니다. 새 시대를 옛 시대가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런 대조는 이어지는 죽음과 생명의 이야기에서 심화됩니다.

 

바리새인들과의 금식 논쟁(14-17)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시대를 여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성령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율법이나 유대교의 종교 체제로 역동적인 새 시대를 담을 수 없었습니다. 전통만을 고수했다가 정신까지 잃어버리게 됩니다. 자신에게 익숙한 것만을 고집하면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를 가로막는 형식뿐인 신앙이 됩니다.

 

14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15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16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17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14-17)

하나님 나라는 새로운 시대를 가져왔습니다. 금식은 유익하지만, 지금은 금식의 시대가 아니라 신랑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실 희락의 시대입니다. 선지자들이 고대하는 그날이 왔기 때문입니다.

 

(1) 요한 제자들의 금식에 관한 질문(14-15)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께 와서 자산들과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는지 묻습니다(14). 예수님께서는 금식 자체를 반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누구 때문에 금식해야 하는지 가르치셨습니다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하늘나라 사역을 결혼으로 비유하면서 신랑과 함께 있는 사람들은 금식할 이유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결혼은 인생에서 가장 기쁜 순간이요 잔치이므로(19:6; 5:1; 61:10;62:5; 7:34;16:9;25:10;33:11; 2:1), 예수님의 하늘나라 운동을 결혼에 비유한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신랑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참조 22:1-14;25:1-13).

구약에서 혼인 잔치의 신랑은 하나님이지 메시아가 아니지만(5:1; 54:5-6; 62:4-5; 16:6-8; 2:19),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인 자신의 혼인 잔치임을 암시하십니다.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자들은 결혼식 잔치에 초대받은 친구들이나 손님들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자들은 금식하기보다 축하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구원 사역은 지금 잔치로 펼쳐지고 있으며, 하나님 아들의 권위를 인정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지금 마련하시는 잔치에 참여하게 됩니다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에는 금식하게 됩니다. 신랑을 빼앗긴다는 표현은 이사야 53:8의 이미지와 연결되며,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수난과 죽음을 암시하십니다. 잔치에서 손님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신랑이 제거됩니다.

 

(2) 옛것과 새것(16-17)

15절은 인생이나 생활의 중심은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결혼 이미지에 이어서 16-17절에서 자신이 수행하는 사역의 특성을 언급하십니다. 새 옷 조각은 세탁하지 않아 느슨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헌 옷에 붙인 다음 세탁을 하게 되면 헌 옷이 새 옷감의 당기는 힘을 이기지 못해 찢어지고 맙니다. 새 옷 조각을 붙이는 바람에 옷은 입을 수 없게 됩니다. 이전보다 상황이 악화된 것입니다. 특히 당시의 서민들에게 옷감은 귀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식으로 옷감을 붙이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헌 옷은 새 옷감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생 베 조각은 예수님께서 가지고 오신 하늘나라의 복음입니다. 헌 옷은 금식과 제사와 같은 옛 시대의 관습입니다.

새 포도주를 헌 부대에 넣으면 부대가 터집니다(17). 그러면 포도주도 허비하고 부대도 버려야 합니다. 헌 포도주 부대는 새 포도주를 제어하거나 담아낼 수 없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옷 조각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통해 확장하는 하늘나라의 복음입니다. 옛 부대는 유대교의 전통적인 틀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의혹은 토라의 의와 같은 행동 방식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당시의 유대교는 담을 수 없습니다. 둘은 양립할 수 없습니다.

하늘나라가 지금 임했기에, 이 나라를 준비하기 위해 수행했던 금식을 지금은 할 이유가 없습니다. 당연히 예수님께서는 개인의 경건 생활의 하나로 금식하는 것을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신랑이 고난을 받아 땅에서 사라지는 것은 잔치의 의미가 퇴색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잔치를 즐기는 자들을 위해 신랑이 희생당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본문은 8:17의 의미처럼 하늘나라의 복음은 메시아의 고난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임을 암시합니다. 잔치의 즐거움을 누리는 제자들은 예수님의 희생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역설적으로, 제자들은 하늘나라의 감격과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마음을 공유합니다예수님께서는 이어지는 두 비유(16-17)에서 금식으로 특징되는 유대교가 기쁨과 환희로 팽창하는 힘을 가진 예수님의 사역을 담을 수 없음을 의도하십니다. 포도주와 부대 둘 다 보존하기를 원하시는 예수님께서는 토라 혹은 율법을 버리거나 폐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하나님께서 의도하시고 기대하시는 것을 해석해서 이런 해석에 근거한 순종을 할 것을 강조하십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하늘나라의 가치에 합당한 삶 속에 하늘나라의 복음이 담길 수 있습니다. 공동체에 적용해 보면, 새 포도주 부대는 새 포도주에 맞춘 구조, 즉 예수님의 사역에 중심을 둔 공동체의 삶을 의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완전히 새로운 원칙과 삶으로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제사가 아니라 긍휼을 베풀고, 유대교의 정결법이 아니라 예수님의 환대하는 마음을 배우는 길이 새 옷감과 새 포도주에 적합합니다. 우리 시대에 감격의 복음을 담을 만큼 교회의 언어와 문화가 과연 새 부대 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율법주의, 권위주의, 근본주의 등이 교회 구성원의 인식을 장악하고 있다면 부대는 터지고 말 것입니다.

 

살리시고 고치시는 예수님(18-26)

새로운 시대는 율법에서 은혜로 변하여 역사가 일어납니다. 율법적으로 보면 죽은 사람을 만지는 것과 피를 흘리고 있는 여인을 만지지는 부정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모든 것들을 초월하셨습니다. 그리고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들을 살리셨습니다.

 

18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관리가 와서 절하며 이르되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하니 19예수께서 일어나 따라가시매 제자들도 가더니 20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21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22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 23예수께서 그 관리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떠드는 무리를 보시고 24이르시되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비웃더라 25무리를 내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 26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18-26)

본 단락은 두 사건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마가복음에서는 죽은 소녀 이야기 속에 혈루증 여인의 치유 사건이 샌드위치처럼 포함되어 있으므로(5:21-43), 한 묶음으로 읽도록 의도된 것입니다. 두 이야기는 혈루증 여인과 한 관리의 믿음을 강조합니다.

 

(1) 한 관리의 믿음이 있는 간구(18)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한 관리가 와서 무릎을 꿇고 방금 죽은 자기 딸을 살려 달라고 도움을 간청합니다. 관리의 부탁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제자들과 함께 그를 따랐습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도움을 호소하는 사람의 간구에 즉시 응답하시는 분임을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그 관리를 따라가셨습니다.

 

(2) 혈루증 여인의 믿음(19-22)

예수님의 일행이 이동하는 중에 혈루증 앓는 여인이 몰래 예수님의 옷깃을 만졌습니다. 환자는 피를 12년 동안 흘러 늘 생명의 위험을 안고 살아야 했습니다(15:25-30). 제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격리된다는 점에서 이 여자는 8장에 나병환자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마태는 열두 해를 문장의 앞에 배치함으로써 여인의 고통스러운 상태를 강조합니다. 여자는 수치스러운 문제인데도 구원받기 위해 예수님께 왔고(1:21),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믿음의 행위로 보시고 그녀를 고쳐 주셨습니다. 그 여인에게 안심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특히 그 여인을 이라고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의 믿음이 구원하였다고 격려하셨고, 즉시로 여자는 구원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회-종교적으로 격리된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시고, 그 여인을 딸이라고 부르심으로써 육체와 정신적인 부분까지 함께 치유하셨습니다.

 

(3) 관리의 딸을 살리신 예수님(23-26)

예수님께서는 12년 된 혈루증 여인을 치유해주시고, 한 관리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이미 관리의 딸은 죽어 장례식이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집안에는 장례를 준비하기 위해 피리 부는 자들과 소란스럽게 곡하는 무리를 보셨습니다. 당시에는 장례식에서 피리를 불고 곡하는 사람을 두는 것은 일반적인 풍습이었습니다(참고. 48:36; 5:38; 요세푸스 유대전쟁사 3.9.5). 이 사람들이 피리를 불고 큰 소리로 곡하고 있는 장면은 소녀가 죽었다는 사실을 확증합니다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집에 도착해서 집 안에서 장례를 준비하는 사람들을 나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소녀를 보면서 죽은 것이 아니라 자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비웃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소녀의 손을 잡았을 때 소녀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잡고 일으켜 세우신 모습은 도움이 간절한 사람을 위해 예수님께서 얼마만큼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도와주는지 보여줍니다본문은 의도적으로 보다 소녀의 손을 잡아주는 예수님의 동작에 초점을 맞춥니다. 예수님의 손은 그의 능력을 상징적으로 나타냅니다. 손길은 약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보호해주겠다는 의지, 환대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손 외에 구원의 방편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처럼 손을 붙잡아 주시는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고, 험한 인생을 견딜 수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님께서 손을 잡아 살려내신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의 존재 목적은 예수님처럼 약하고 아픈 사람의 손을 붙잡아 주는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도 약하고 힘든 사람들은 줄어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손을 사용해서 힘없이 주저앉은 사람이 일어서게 돕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딸을 살려달라고 소녀의 아버지의 요청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함께 가서 죽은 소녀를 살리십니다. 사람들이 죽은 소녀를 위해 애곡하는 것 밖에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아이를 깨우듯이 소녀를 일으켰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생명과 죽음을 주관하시는 창조주이심을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상황 속에서도 생명을 불어넣어 살리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자신의 어떠한 사항이 소망 없고 희망 없어 보입니까? 예수님을 의지하시길 바랍니다. 주님께 믿음으로 나아갈 때 다시 살아나게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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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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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를 제자로 부르신 예수님

마태복음 91-13


예수님께서는 아는 지식이 세상에서 가장 기쁘고 복된 지식입니다. 영어, 수학을 아는 지식도 우리에게 행복과 유익을 주지만, 주님을 아는 지식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더 깊이 알아가고, 더 정확히 알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분입니까? 하나님의 아들로서 죄를 용서할 권세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죄인인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병을 고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치료하고 구원하려 오신 의사이십니다.

 

가다라 지방에서 다시 가버나움으로 돌아온 예수님의 일행에게 한 중풍병자를 데려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행위를 믿음으로 보고 병자의 죄를 사해주십니다. 이것을 본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신성모독으로 생각했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죄 사하는 권세를 가진 임자임을 나타내십니다. 곧이어 세리 마태를 부르시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집에 방문해 함께 식탁의 교제를 나누십니다. 바리새인이 이를 보고 에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합니다.

 

중풍병자를 고치신 예수님(1-8)

 

예수님의 죄사함과 치유의 기적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이들의 믿음과 반응보다는 결국 죄사함의 권능이 주님께 있는 것을 알고 깨닫고 믿는 것이 더 중요한 사건입니다. 다만 두렵고 떨림으로 주께서 이루시고 선포하신 그 은혜 앞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나아가는 것이 가장 합당한 반응입니다. 오늘도 삶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치유하고 회복하고 고치시는 주님의 권능을 기대하며 주님께 영광이 되길 원합니다.

 

1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 2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3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 4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5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 6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7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 8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1-8)

예수님께서는 풍랑을 잠잠하게 하시고, 가다라의 귀신들린 두 사람을 해방시킨 기적을 행하신 후,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셨습니다(8:23). 이제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셨습니다.

 

(1) 중풍병자 치유와 죄사함(1-2)

가버나움에 돌아오자, 어떤 사람들이 침상에 누인 중풍병 환자를 데려왔습니다. 성장한 갈릴리 고향에서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중풍에 걸린 친구를 데리고 예수님께 나왔습니다(2;1-12, 5:17-26).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예수님께서 집에 계실 때, 지붕을 뚫고 침상에 누운 한 중풍병자 친구를 예수님께 보입니다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십니다. 환자가 믿었다는 설명은 없지만, 그에게 이미 믿음이 있었고 사람들의 도움으로 함께 나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심하라’(2)는 위험과 역경의 상황에도 용기를 잃지 않도록 격려하는 의미입니다한편, 유대인들은 죄와 병은 상관관계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병은 죄에서 온다고 여겼던 것처럼, 중풍병자는 자신의 병이 죄로 인해 생긴 것처럼, 중풍병자는 자신의 병이 죄로 인해 생긴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26:14-16; 28:21-22; 대하 21:15,18-19; 4:7; 5:14; 9:2; 고전 11:30; 5:15-16). 따라서 죄 용서로 중풍병이 치유된다는 논리는 유대 청중에게 낯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용서를 받는다라는 중풍병자의 죄가 용서받고 있다는 사실을 선언하십니다. 이 선언은 예수님의 선포로 죄가 용서받고 있다는 사실, 곧 그의 신적 권위를 강조합니다. 비슷한 수동태 용법이 929절에서 맹인들의 치유가 그들의 믿음대로 되라고 하신 예수님의 선언에도 사용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는 지금 자신의 말을 통해서, 즉 자신의 신적 권위로 죄가 사해졌다고 선언하며, 이 선언은 즉각 실행되고 있습니다. 죄를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의 고유 권한이라는 것은 구약과 유대교의 근본 신앙입니다(7; 34:6-7; 103:3;103:4; 43:25; 7:18).

대제사장은 1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 속죄제를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용서를 대행할 수 있었습니다(34:6-7; 103:3; 43:25; 7:18). 대제사장의 권위로 용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중간기 유대교에서 메시아가 죄를 용서할 것이라는 기대를 기록한 문헌은 없습니다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만이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권위를 갖고 계심을 의도적으로 선언하십니다특히 예수님께서는 다니엘 7:13-14의 인자로서 신적인 권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6). 서기관들은 예수께서 죄를 용서하는 권위를 행사하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갖고 계시는 권한을 침해하였다는 생각에 예수님을 정죄합니다.

 

(2) 서기관들과 예수님의 논쟁(3-6a)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의 이런 생각을 아시고 어찌하여 악한 생각을 하느냐고 책망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실제로 마비증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중풍병자가 아니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영적으로 마비되어 예수님께서 누구인지 알지 못하며 예수님께 나오지도 못합니다.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말과 중풍병자에게 자리를 들고 가라고 하는 말 중에서 어느 쪽 말을 하는 것이 더 쉬운지 묻습니다. 실제로는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죄 용서를 실행하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그러나 죄 용서를 받았다라고 말로 하는 것은 더 쉽습니다. 병이 나았다고 말했을 때는 치유가 나타나야 하는데, 죄 용서 선언은 눈으로 확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예수님께서는 더 어려운 말을 사실로 증명함으로써 죄 용서를 선언한 것이 빈말이 아니라 죄 용서가 실행되게 만드는 선포임을 밝히 십니다. 이를 통해 자신의 신적 권위를 분명하게 밝히시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의 권능(6b-8)

중풍병자가 일어나 집으로 가는 모습을 통해, 예수님께 죄를 용서하는 권위가 있다는 사실이 확인됩니다. 예수님의 죄 용서는 땅에서, 인자로서 행사하는 권위로 일어난 일입니다. 하늘에서는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시고, 땅에서는 하나님의 권위를 받으신 예수님께서 인자로서 죄를 용서하십니다이 경우에 인자는 나를 가리키는 관용적 표현이 아니라, 다니엘 7:13-14인자 같은 이를 가리킵니다. 중풍병자가 해결 받아야 할 문제는 마비 증상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서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육체의 질병이 아니라 죄 문제임을 분명히 하십니다. 그런데 중풍병자의 죄 용서와 치유는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신뢰를 통해 실현됩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하신다는 사실이 종교 권력자들에 의해 신성모독으로 정죄를 받았는데도, 죄 사하는 권세가 사람에게주어진 것을 두고 무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다는 사실은 충격적입니다. 제자 공동체, 즉 교회는 죄를 용서하는 공동체입니다(5:21-26; 6:12, 14-15; 18:15-35). 교회는 예수님의 죄 용서와 치유를 대행하여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는 통로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병 고치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 대단하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에게 죄를 용서할 권세까지도 가지고 계신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의도적으로 그렇게 행하신 것입니다. 죄를 용서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실히 보여 주셨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역사를 보고도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한 죄 용서함을 받으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정리하십니다.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고 죄 사함을 받았어야 합니다.

 

세리 마태를 부르신 예수님(9-13)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어떤 종교적, 제의적 행위들이 아니라 전심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길 원하십니다. 그런 가운데 사랑이 담긴 예배와 삶이라야 하나님께서 받으실 반한 예배요 예배자의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부르신 장면을 통해 하나님의 자비를 나타내십니다.

 

9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10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11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12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13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9-13)

세리와 죄인은 사회적 소외 계층으로, 특히 세리는 매국노나 배신자로 여겨지는 직업이었습니다. 높은 벽 뒤에 숨어 자발적으로 소외된 이들에게 굳이 물을 열고 들어가 함께 앉으시는 주님이십니다. 문이 없는 벽은 없습니다. 소외된 이에게 찾아가시는 주님은 곁을 내주시고 소명을 주십니다.

 

(1) 마태를 부르심(9-10)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세례 마태를 보았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여러 가지 소식을 듣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더러운 이익을 위해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노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었습니다. 마태 또한 자신을 스스로 죄인이라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동네를 지나가고 있을 때 예수님을 주목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나를 좇으라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순종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영접했던 것입니다.

부르심에 순종한 마태는 예수님과 일행을 자기 집으로 모셨습니다. 자신의 삶에 모신 것입니다. 자기 집에 들어오신 예수님께서는 감격 그 자체였습니다. 자신의 삶에 찾아오신 예수님께서는 영혼을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세리 마태는 자신과 같은 죄인에게 찾아오시고 예수님과의 만남을 감사하고 감격하면서 자기 집으로 영접했습니다.

마태도 변화의 삶으로 자신의 물질을 털어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집에 유하실 때, 구원의 기쁨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같은 처지에 있던 많은 세리들과 죄인들을 초대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게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 구원에 감격하고 있다면 삶의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것보다 구원이 가장 귀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들을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겠습니다.

 

(2) 바리새인과 예수님의 논쟁(11-13)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바리새인들은 용납할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어떻게 죄인들과 함께 어울려 식사를 할 수 있느냐에 비난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비난에 예수님께서는 호세아 66절을 인용해서 자신의 사명을 밝히십니다. 의사가 환저를 외면하지 않고 치료자가 더러운 병을 회피하지 않는 것처럼 이들과 같은 죄인들을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의()가 가득 찬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에 다른 사람들의 잔치가 이상하게 보였습니다. 아니 정죄의 사건으로 보였습니다. 눈앞에 의심에 안개로 가득합니다. 예수님을 순수하게 바라볼 수 없습니다. 왜곡된 눈으로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 볼 수 없고 자신을 구원할 메시아로 영접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치유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정결법의 전문가들에게 제사법을 주신 하나님의 동기가 긍휼에 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을 부르시고 그들과 함께 계시는 것은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행위를 설명할 목적으로 호세아 66절을 인용하십니다. 마태복음은 70인역에서 히브리어 헤세드를 번역한 헬라어 엘리오스를 사용합니다. 치유와 긍휼은 호세아 6장의 문맥에서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호세아 61절에서는 하나님을 치유하는 의사로 나타내는데, 66절에 더 넓은 문맥을 고려하면 하나님께서는 치유하시고 길을 헤매는 그의 백성을 위해 긍휼을 보여주시길 원하십니다. 호세아서에서 헤세드는 하나님을 향한 지속적인 헌신이면서 이웃을 향한 긍휼의 행위입니다. 헬라어 엘로우스는 이웃을 향한 긍휼의 가조점을 두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70인역 호세아 66절을 인용해서 긍휼의 마음으로 세리들과 죄인들을 대하는 태도를 정당화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지 않다라고 여기기 때문에 배우라고 책망하십니다. 긍휼의 마음이나 실천 없이 제의적인 규례에 집중하는 것은 성경과 하나님을 오해한 것입니다. 잘못된 해석이 잘못된 삶을 열매로 났습니다. ‘내가 왔다라는 예수님의 사명을 가리키는 진술입니다. 예수님께서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것은 긍휼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순종하는 아들로서 아버지를 향한 변찮은 사랑과 신실하심을 보여 주셨고, 몸값으로 자신을 내어주시는 것으로 사람들의 향한 긍휼을 입증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웃을 향한 긍휼을 베풀지 않으면서 여러 종교 행위로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메시아와 죄인들이 함께하는 잔치의 장면은 교회의 진정한 기쁨이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로 고통과 수치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복음을 경험하는 데서 온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믿음을 들여다보십니다.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침상에 누인 채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오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죄사함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사함과 구원의 은총을 베푸신 것은, 그들의 열심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육체적이든 영적이든 구원의 은혜는 오직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모든 병이 죄 때문은 아니지만, 이 중풍병자의 병은 죄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에게 죄사함을 먼저 선포하시고 그 후에 치유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를 향해 일어나 내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내 죄사함을 받았다라는 말만큼이나 황당한 명령입니다. 그분이하신 말씀이 다 진실이고 그분의 말씀은 곧 사건이고 역사라는 사실을 믿지 않으면 그 말에 반응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중풍병자는 일어나 돌아갑니다. 그 친구들과 중풍병자의 믿음이 그를 기적으로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서기관의 불신은 그 안에서 아무런 역사도 일으키지 못했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역사를 바라보며 오늘도 그분을 믿고 따르기로 결단하는 주의 백성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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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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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에게 버림받은 다말

사무엘하 1315-22


교회나 사회가 경건하여 악한 일들이 없으면 좋겠지만, 성폭력의 문제가 심심치 않게 발생합니다. 우리가 속한 곳을 포함하여 세상은 완벽한 안전지대는 없습니다. 만약 주변에 생각지 않은 일이 발생했다면, 우리는 이 일을 어떤 절차와 과정을 밟아 다루어야 합니까?

 

다윗의 맏아들 암은 압살롬의 아름다운 누이 다말에게 욕정을 품고 괴로워하던 중에 요나답의 간교한 조언을 듣고 다윗에게 요청하여 다말을 곁으로 부릅니다. 다말이 지혜로운 말로 자신을 강간하려는 것이 어리석은 범죄라는 것을 지적하며, 차라리 다윗에게 자신과 결혼시켜 달라고 요청하라고 제안하여 악행을 막아보려고 하였지만, 암논은 이 말을 묵살하고 다말을 강간하고 맙니다. 이로 인해 다윗 가문에 피의 비극이 시작됩니다.

 

다말을 쫓아내는 암논(15-19)

죄는 우리 문 앞에 엎드려 있으며 우리를 삼키길 원합니다(4:7). 사탄은 우리를 유혹해 넘어트리려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사탄의 강력한 속삭임입니다. 죄의 시작은 폭탄에 불을 붙이는 도화선이 되며, 마지막 시도는 죄에서 더욱 벗어나기 힘들도록 조이는 올가미가 됩니다. 딱 한 번만이라는 생각이 들 때, 오히려 그 한 번만 참으면 됩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 죄는 죽이는 시작이 됩니다.

 

15그리하고 암논이 그를 심히 미워하니 이제 미워하는 미움이 전에 사랑하던 사랑보다 더한지라 암논이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 가라 하니 16다말이 그에게 이르되 옳지 아니하다 나를 쫓아보내는 이 큰 악은 아까 내게 행한 그 악보다 더하다 하되 암논이 그를 듣지 아니하고 17그가 부리는 종을 불러 이르되 이 계집을 내게서 이제 내보내고 곧 문빗장을 지르라 하니 18암논의 하인이 그를 끌어내고 곧 문빗장을 지르니라 다말이 채색옷을 입었으니 출가하지 아니한 공주는 이런 옷으로 단장하는 법이라 19다말이 재를 자기의 머리에 덮어쓰고 그의 채색옷을 찢고 손을 머리 위에 얹고 가서 크게 울부짖으니라(15-19)

다말을 성폭행한 암논은 욕심을 채우자 심경이 변하여 극도로 마음을 표출합니다. 다말을 쫓아냄으로써 성폭행보다 더 큰 악행을 저지릅니다. 암논은 반성 대신 회피를 택하고, 과오를 외면한 채 무책임하게 향합니다. 치유와 회복의 시작은 인정과 사과와 작업장에서 시작됩니다.

 

(1) 다말을 쫓아내려는 암논(15)

다말이 간곡하게 만류했음에도 불구하고 암논은 다말을 강제적으로 범하여 자신의 욕망을 채우더니 이제 갑자기 다말에 대한 태도를 바꿉니다. 15절에서 미움과 증오란 단어를 네 번이나 반복하고, 그 미움이 전에 사랑한 것보다 더하다라고 말함으로써 암논이 다말을 끔찍하게 증오하였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런 암논의 태도를 보면 다말에 대한 그의 감정은 사랑이 아니라 단순한 욕망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차갑게 변한 암은 다말에게 일어나 나가라고 명령합니다.

 

(2) 거부하는 다말(16)

이런 태도에 다말은 또다시 암논의 행동이 옳지 않다고 지적합니다. 이렇게 자신을 쫓아내는 것이 강간한 것보다 더 큰 약이라고 지적합니다. 여기에 나온 다말의 말은 앞에서 그 마음이 전에 사랑한 것보다 더하다고 했던 말과 비슷한 말투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암논이 강간 전보다 강간 후에 더 악하게 행동했음을 강조하기 위한 어법입니다.

이런 다말의 지적에도 암논은 다말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구약 율법에 따르면 강간을 하면 그 처녀와 결혼을 하거나 아니면 그녀가 앞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보상을 해주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다말은 이에 근거하여암논에게 항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시종들에 의해 쫓겨나는 다말(17-18a)

하지만 암논은 다말의 지혜로운 말을 또 다시 묵살하고, 오히려 종을 불러 다말을 쫓아내고 문빗장을 지르라고 명령합니다. 여기서 암논은 다말을 이것’. ‘이 여자를 뜻하는 조트로 부르면서 거추장스러운 물건처럼 취급하는데, 이런 태도는 강간 직전에 다말을 나의 누이라고 부르던 것과는 완전히 대조적입니다. 이런 암논의 태도는 여성에게 가장 약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강간당한 젊은 처녀가 앞으로 감당해야 할 비극적인 삶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암논의 관심은 자신의 죄의 증거인 다말을 빨리 자신의 집에서 내쫓아 죄를 은폐하고 싶은 생각뿐이었습니다. 이런 암논의 모습은 자신의 죄를 은폐하기 위해 우리아를 죽인 다윗의 비정한 모습과 무척이나 닮았습니다. 이렇게 다윗과 닮은 암논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다윗의 죄를 기억하게 되고, 암논의 죄가 다윗의 죄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됩니다.

 

(4) 다말이 크게 부르짖음(18b-19)

여기서 갑자기 다말의 채색옷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채색옷은 결혼하지 않은 공주들이 입는 옷이라고 설명하는데, 이것은 공주들이 아직 처녀라는 표시로 채색옷을 입었다는 의미입니다.

쫓겨난 다말은 머리에 재를 뒤집어쓰고 공주의 옷인 채색옷을 찢고 손을 머리 위에 얹고 크게 부르짖으며 자신의 억울함과 분노와 괴로움을 표현하였습니다. 전체적으로 다말의 행동은 죽음을 애도하는 행동이지만, 큰 재난과 고난을 당했을 때도 이와 같은 행동을 하며 하나님께 도움을 구합니다. 다말을 특히 채색옷을 찢음으로 자신이 강간당하여 처녀로서의 명예를 잃었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부르짖다는 어떤 괴로움과 고난에 빠졌을 때,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하면서 주로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다말은 사람들과 하나님께 자신의 이런 부당하고 억울하고 비극적인 상황에 대해 공개적으로 부르짖으며 도움을 요청하고 정의를 실행해달라고 외쳤습니다. 그것도 한 번만 그런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외치면서 집으로 간 것입니다. 다말은 자신과 다윗의 집에 일어난 악한 일에 대해 정의로운 판결이 있기를 원해서 자신에게 일어난 수치스럽고 치욕스러운 일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 부르짖은 것입니다.

 

압살롬의 침묵과 다윗의 무대응(20-22)

공동체 내에서 죄를 범한 사람이 있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공동체의 이미지가 나빠질 것을 두려워해서 못 본 체하거나 덮어 버린 적이 있습니까? 형제가 죄를 범하면 우선 단 둘이 있을 때 잘못을 지적해야 합니다. 그래도 듣지 않을 경우 두세 증인 앞에서 말하고, 그래도 듣지 않는다면 교회 앞에서 잘못을 지적해 돌이키게 해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가 죄를 감싸거나 묵인한다면 그 죄는 반드시 똬리를 틀고 앉아 더 큰 문제를 만들어 냅니다.

 

20그의 오라버니 압살롬이 그에게 이르되 네 오라버니 암논이 너와 함께 있었느냐 그러나 그는 네 오라버니이니 누이야 지금은 잠잠히 있고 이것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라 하니라 이에 다말이 그의 오라버니 압살롬의 집에 있어 처량하게 지내니라 21다윗 왕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노하니라 22압살롬은 암논이 그의 누이 다말을 욕되게 하였으므로 그를 미워하여 암논에 대하여 잘잘못을 압살롬이 말하지 아니하니라(20-22)

다윗은 모든 일을 듣고 심적 노하지만 암논을 처벌하지 않습니다. 다윗의 이해할 수 없는 처사가 양상문의 복수심을 키웠습니다. 은혜라는 미명하에 드러난 문제를 덮는 것은 빠른 해결책이 아닙니다. 공의롭고 정당한 계절은 반드시 필요하며 용서는 그 이후의 문제입니다.

 

(1) 다말에게 말하는 압살롬(20)

하지만 아무도 지혜로운 다말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오빠인 압살롬은 이런 다말의 부르짖음에 상대가 다윗이 가장 아끼는 아들 암논이라는 것을 확인한 후에, 암논이 다말의 오빠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지금은 잠잠하라고 말합니다. 압살롬은 혹시라도 암논에 대한 처벌을 주장합니다. 다윗의 눈 밖에 날 것을 염려하여 이 일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지고 정당한 처벌을 요청하는 길을 택하지 않고 아버지인 다윗이 어떻게 처리할지 눈치를 보면서 다말에게 잠잠하라고 한 것입니다.

압살롬은 차기 왕권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 눈 밖에 나는 행동을 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다말의 아픔이나 정의 실현보다는 자신의 왕권에 대한 욕망이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이런 압살롬 때문에 다말은 압살롬의 집에서 다른 가족이나 공동체와 단절된 채 침묵을 강요받으며 외롭고 힘들게 지내야 했습니다.

 

(2) 다윗의 반응(21)

다윗 왕은 이 일을 듣고 크게 화를 냈지만, 강간을 저지른 암논에 대한 처벌이나 폭행을 당한 다말에 대한 위로나 보상 혹은 결혼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고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한 가정의 가장이자 한 나라의 왕으로서 법을 집행하고 질서와 도덕을 세울 의무가 있었지만, 어떤 처벌도 하지 않고 그냥 넘어간 것입니다. 이렇듯 손 놓고 사태를 방치한 이유는 왕위 계승자로 염두에 두고 있는 장남 암논에 대한 편애 때문이었습니다. 강간에 대한 책임을 공식적으로 묻게 되면 암논은 왕궁에서 쫓겨나거나, 쫓겨나지 않는다고 해도 왕궁에서 그의 입지가 좁아지고, 결국 왕위 계승 경쟁에서 밀려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의를 실현해 달라고 외치는 다말의 부르짖음에 다윗은 침묵하였고, 압살롬도 다윗의 이런 부당한 행동에 대해서 그리고 암논의 잘못에 대해서 계속 침묵하였습니다. 이렇게 다말의 억울함을 풀어주어야 할 보호자인 다윗과 압살롬은 모두 침묵하였고 결국 그녀는 매우 불쌍한 처지로 살아야 했습니다. 이것이 현재 다윗 왕궁의 모습입니다. 아무도 약하고 힘없는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정의를 요구하는 외침에 침묵을 강요하며,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꾸몄습니다. 피해자 다말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무시하는 이 왕궁의 모습은 다윗이 지금 영적으로 얼마나 무기력한 상태인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3) 속내를 감추는 암살롬(22)

22절을 보면, 비록 압살롬이 암논의 행동에 대해 아무 말도 안 했지만, 속으로 암논에 대해 증오하는 마음을 품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은 힘이 없어서 아버지의 눈치와 형의 눈치를 보며 침묵하고 있지만, 그의 마음속에 암논에 대한 미움과 증오조차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인간의 마음에 분노가 생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지도자이자 가장인 다윗의 역할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지혜를 가지고 암논의 죄를 처벌하고 다말과 압살롬을 위로하며 다말에게 적절한 보상과 함께 그녀의 불명예를 씻어주었다면, 다말이 외롭고 억울하게 살지 않았을 것이고, 압살롬이 암논과 아버지 다윗에 대한 증오를 키워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윗이 적절한 처벌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압살롬은 암논 뿐만 아니라 아버지 다윗에 대한 증오심까지 갖게 된 것입니다. 이런 압살롬의 암논과 다윗에 대한 증오심은 압살롬이 살인과 반역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다윗에게는 하나님의 지혜가 없었습니다. 다말의 지혜로운 말조차 무시하고 침묵을 강요하는 이런 모습은 다윗의 집에 내리신 하나님의 심판은 바로 이 지혜의 상실을 통해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원리를 따르지 않는 사랑은 욕심에 불과합니다. 암논은 왕과 다말의 순수한 마음을 이용하여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고 했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욕심의 노예가 됩니다.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온갖 속임수로 다말에게 다가갔습니다. 이런 욕심은 결국 그의 가정에 불행을 자초하게 됩니다. 우리도 탐욕과 욕심을 이루기 위해 온갖 술수를 다 펼치며 죄를 짓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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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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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말을 유혹하여 범죄한 암논

사무엘하 131-14


교회나 사회가 경건하여 악한 일들이 없으면 좋겠지만, 성폭력의 문제가 심심치 않게 발생합니다. 내가 속한 곳을 포함하여 완벽한 안전지대는 없습니다. 만약 주변에 생각지 않은 일이 발생했다면, 우리는 이 일을 어떤 절차와 과정을 밟아 다루어야 합니까?

 

압살롬의 반란이 일어나게 되는 첫 과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첫째 아들 암논이 병든 체하고 셋째 아들 압살롬의 누이인 다말을 자기 집으로 오게 했습니다. 암은 강제로 다말과 동침한 뒤, 곧 싫증을 느끼고 집 밖으로 쫓아냈습니다. 다말은 자기 오빠인 압살롬을 찾아가 그의 집에서 거주했습니다. 압살롬은 다말에게 당분간 조용히 지내라고 충고하면서,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은 채 암을 죽일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암논의 계략(1-6)

하나님의 법을 떠나서 범죄의 길을 가고 세상의 길을 가려면 여러 사람을 속여야 합니다. 은혜의 자리를 떠나려고 하면 거짓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죄악의 수렁에서 자기의 힘으로 헤쳐 나올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오직 성령께서 능력으로 덧입혀 주셔야만 죄악으로부터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항상 성령께서 은혜 가운데 인도하시길 간절히 구하시길 바랍니다.

 

1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 다윗의 아들 압살롬에게 아름다운 누이가 있으니 이름은 다말이라 다윗의 다른 아들 암논이 그를 사랑하나 2그는 처녀이므로 어찌할 수 없는 줄을 알고 암논이 그의 누이 다말 때문에 울화로 말미암아 병이 되니라 3암논에게 요나답이라 하는 친구가 있으니 그는 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이요 심히 간교한 자라 4그가 암논에게 이르되 왕자여 당신은 어찌하여 나날이 이렇게 파리하여 가느냐 내게 말해 주지 아니하겠느냐 하니 암논이 말하되 내가 아우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사랑함이니라 하니라 5요나답이 그에게 이르되 침상에 누워 병든 체하다가 네 아버지가 너를 보러 오거든 너는 그에게 말하기를 원하건대 내 누이 다말이 와서 내게 떡을 먹이되 내가 보는 데에서 떡을 차려 그의 손으로 먹여 주게 하옵소서 하라 하니 6암논이 곧 누워 병든 체하다가 왕이 와서 그를 볼 때에 암논이 왕께 아뢰되 원하건대 내 누이 다말이 와서 내가 보는 데에서 과자 두어 개를 만들어 그의 손으로 내게 먹여 주게 하옵소서 하니(1-6)

세상은 자신의 기지와 능력을 발휘해 악을 돕고자 하는 자들로 넘쳐납니다. 요나답은 암논의 불의한 욕망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간교한 자였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간교한 뱀이 접근을 허용함으로 범죄했듯이, 암논의 욕망은 간교한 자의 접근을 허용하면서 증폭되었습니다.

 

(1) 암논의 상사병(1-2)

암논이 다말을 강간한 사건은 다윗이 하나님 앞에 범죄한 뒤에 일어난 첫 사건으로 하나님의 심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1절에서 다말을 다윗의 아들 압살롬의 아름다운 누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암논이 그녀를 사랑하게 된 이유이며, 전에 다윗이 밧세바와 간통한 이유와 같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이유로 하나님 앞에 범죄한 것입니다또한 다말을 다윗의 딸이 아닌 다윗의 아들 압살롬의 누이로 소개하는데, 이것은 다윗이 다말에게는 무관심하다는 것을 보여주며 이와 대조적으로 암논이나 압살롬은 다윗의 아들로 소개함으로써 다윗의 애정이 아들들에게 한정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건은 암논이 배다른 누이 다말을 사랑하면서 시작됩니다. 하지만 이 사랑은 강간한 후에 급속히 식어버리는 육적인 욕망에 불과했습니다. 다말에 대한 암논의 욕망이 너무 강했지만 다말이 처녀라서 만날 방법이 없었습니다. 처녀의 경우 남자 형제가 늘 보호하고 있기 때문에 암논은 자신의 동생이자 경쟁자인 압살롬을 배제한 채 다말을 만날 방법이 없었습니다암논은 다말에 대한 채워지지 않는 욕망으로 심히 괴로워하였습니다. 하지만 본문은 다말을 그의 누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암논의 욕망이 잘못된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2) 요나답의 계교(3-5)

이때 암논의 사촌 요나답이 등장합니다. 개역개정에서는 요나답을 심히 간교한 자로 번역하고 있지만, 원문을 직역하면 매우 지혜로운 남자입니다. 여기서 지혜의 모티프가 등장합니다. 요나답은 암논을 보고 왜 그렇게 날마다 야위어 가느냐고 묻습니다. 암논은 다말에 대한 욕망을 채우지 못하여 괴로워하였고, 그런 모습이 다른 사람 눈에는 병이 난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이런 요나답의 질문에 암논은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솔직히 말합니다. 사실 암논은 욕망은 있었지만, 그것을 채울 지혜와 능력은 없었는데, 요나답이 암논에게 방법을 알려줌으로써 암논이 실제로 범죄를 저지르게 됩니다.

 

(3) 암논의 요청(6)

요나답은 왕인 다윗의 권위를 이용하여 다말을 그의 보호자인 압살롬에게서 떼어낼 방법을 알려줍니다. 침상에 누워 병든 체하고 있다가 다윗이 병문안을 오면 누이 다말이 만든 떡, 그것도 특별히 자신 앞에서 만든 떡을 먹고 싶다고 요청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이 암논을 매우 아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요나답이 아픈 암논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할 것임을 염두에 둔 계획입니다요나답은 자신의 지혜를 범죄에 악용하고, 결국은 암논을 죽음으로 내모는 데 일조합니다. 이런 그의 모습은 후에 암논의 잘못된 행동을 막으려고 했던 지혜로운 다말과 대조를 이룹니다. 그 말을 들은 암논은 요나답의 말대로 아픈 체하고 있다가 다윗이 병문안 왔을 때, 요나답이 알려준 대로 다윗에게 요청합니다. 여기서 암은 다말을 나의 누이라고 부르며 자신의 요청이 형제간의 우애인 것처럼 포장하며 자신의 욕망을 숨깁니다. 하지만 그녀의 손으로 자신을 먹여달라는 요청은 단순히 남매간의 우애로 보기에는 지나친 면이 있습니다.

 

다말과 동침한 암논(7-14)

죄란 결국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것입니다. 자기 욕심이 다른 사람을 해치는 것을 알면서도 기어코 그것을 채우고 싶어 하는 그릇된 열망입니다. 성도들은 욕망을 잘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듣기 좋은 간교한 말보다 옳은 말을 따라야 합니다. 자신의 욕망이 다른 성도들에게 끼칠 영향을 생각하며 삶을 살아야 합니다.

 

7다윗이 사람을 그의 집으로 보내 다말에게 이르되 이제 네 오라버니 암논의 집으로 가서 그를 위하여 음식을 차리라 한지라 8다말이 그 오라버니 암논의 집에 이르매 그가 누웠더라 다말이 밀가루를 가지고 반죽하여 그가 보는 데서 과자를 만들고 그 과자를 굽고 9그 냄비를 가져다가 그 앞에 쏟아 놓아도 암논이 먹기를 거절하고 암논이 이르되 모든 사람을 내게서 나가게 하라 하니 다 그를 떠나 나가니라 10암논이 다말에게 이르되 음식물을 가지고 침실로 들어오라 내가 네 손에서 먹으리라 하니 다말이 자기가 만든 과자를 가지고 침실에 들어가 그의 오라버니 암논에게 이르러 11그에게 먹이려고 가까이 가지고 갈 때에 암논이 그를 붙잡고 그에게 이르되 나의 누이야 와서 나와 동침하자 하는지라 12그가 그에게 대답하되 아니라 내 오라버니여 나를 욕되게 하지 말라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마땅히 행하지 못할 것이니 이 어리석은 일을 행하지 말라 13내가 이 수치를 지니고 어디로 가겠느냐 너도 이스라엘에서 어리석은 자 중의 하나가 되리라 이제 청하건대 왕께 말하라 그가 나를 네게 주기를 거절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되 14암논이 그 말을 듣지 아니하고 다말보다 힘이 세므로 억지로 그와 동침하니라(7-14)

다윗은 암논의 욕망 성취를 위한 연극에 속아 넘어갔습니다. 누구보다 자기 욕망 실현에 능수능란했던 다윗은 암논의 거짓말을 눈치채지 못한 영적으로 둔감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잘못된 욕망을 품고 있는 자, 그것을 부추기는 자, 모른 채 방임하는 자는 모두가 공범입니다.

 

(1) 과자를 준비한 다말(7-9)

이런 암논의 요구에 다윗은 다말에게 사람을 보내어 암논의 집에 가서 그를 위해 음식을 차리라고 명령합니다. 장자인 암논에게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던 다윗은 경우에 합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뭔가 미심쩍은 부분이 많은 암논의 요청을 받아들여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딸 다말을 암논의 손에 넘겨주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됩니다. 다윗의 이런 어리석은 모습은 밧세바와의 범죄 이후에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면서 주시던 지혜가 사라졌음을 암시합니다왕인 아버지 다윗의 명령에 따라 암논에게 간 다말은 아무것도 모르고 열심히 명령대로 과자를 만들어 암논이 먹게 차려 놓았습니다. 다말이 과자를 만드는 모습을 자세히 설명한 것은 그녀가 아버지의 명령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이런 성실한 다말의 모습은 독자들로 하여금 다가올 다말의 운명에 대해 더욱더 안타까운 마음이 들게 하며 암논과 다윗에 대해 더욱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합니다다말이 다 만든 음식을 암논 앞에 놓았지만 암논은 먹기를 거절하고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밖으로 내보냅니다. 그의 원래 목적은 음식이 아니라 다말을 강간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말이 음식을 다 준비하자 자신은 강간할 준비를 한 것입니다.

 

(2) 암논의 유혹(10-11)

암논은 다말에게 음식을 침실로 가져와서 자신에게 먹일 것을 명령합니다. 암논은 다말이 거절할 수 없게 매우 강압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말은 큰 오라버니의 말을 어길 수 없어서 방으로 음식을 들고 들어갑니다. 여기서 그의 오라버니 암논이란 표현을 사용한 것은 다말이 암논을 전혀 의심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한 것입니다.

 

(3) 암논의 다말을 강간함(12-14)

암논은 다말을 침실로 들어오게 하여 강제로 붙잡고 동침하자고 명령합니다. 이때 암논은 다말을 나의 누이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한편으로는 다말을 안심시키려고 하는 말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행동이 금지된 행동이라는 것을 표현합니다이런 암논의 말에 다말은 자신의 의사 표현을 확실하게 합니다. 그녀는 암논을 오빠로 부르면서 자신을 욕되게 하지 말라는 것과 어리석은 일을 행하지 말라고 강력하게 경고합니다. 욕되게 한다는 것은 다말에게 수치와 굴욕을 준다는 것으로 다말에게 해를 가하는 행동입니다. 그리고 어리석은 일을 하다라는 구문은 창세기 34:7과 사사기 19:23의 본문에서 공통적으로 강간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암논에게 해당하는 말로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강간은 중범죄로 다루었기 때문에 다말은 암논에게 강간을 하면 죄인이 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 것입니다.

이렇게 다말은 어리석은 행동의 결과로 다말 자신은 수치를 입게 되어 공동체에서 설 자리를 잃게 되고, 암논도 범죄자가 될 것이라고 말한 후 좀 더 지혜로운 조언을 하는데, 강간 대신에 결혼이라는 적법한 절차를 거쳐서 다말과 암논의 명예를 모두 지키자고 제안한 것입니다. 두 제안 다 아버지 다윗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지만, 다말은 간교한 요나답보다 훨씬 지혜로운 제안을 한 것입니다. 여기서 다말이 아버지를 통한 결혼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임기응변으로 보아야 합니다당시 이스라엘 법(18:9)에 따르면 이복 남매간의 결혼은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만일 암논이 다윗에게 다말과 결혼시켜달라고 말하더라도 다윗이 이 결혼을 허락할 가능성은 매우 적습니다. 강간에 대한 수치를 지고 평생을 사는 것보다는 암논과 결혼하는 것이 명예를 지킬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에 다말은 암에게 이런 제안을 한 것입니다하지만 욕정에 사로잡힌 암논은 다말의 말을 듣지 않고 그녀를 강간합니다. 결국 암논은 자신의 욕망에 이끌려 누이인 다말을 강간하여 다윗 가문에 피바람을 몰고 옵니다. 이는 밧세바와 간통할 때 그 일이 가져올 파장이나 여호와께서 보고 계신다는 생각하지 않았던 다윗과 매우 비슷합니다. 다윗의 악한 행실이 자녀들에게 악한 영향을 주었음을 보여줍니다. 이 상황에서 다윗도 지혜롭지 못하게 행동하여 아들이 범죄를 저지르는 데 일조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함께하며 그가 지혜롭게 행동하게 하셨으며 어리석은 일을 하려고 하면 다른 사람을 통해서 막으셨지만, 이번에는 전혀 개입하지 않으셨고, 지혜로운 말조차 묵살 되었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악한 본성이 하나님의 통제를 받지 않은 채 그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심판인 것입니다.

 


다말을 행한 암논의 사랑은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상대방을 소유하려는 왜곡된 사랑이었습니다. 이처럼 드러난 사건을 공동체가 해결하거나 치유하지 못하여 피해자의 아픔이 가중되는 경우가 흔합니다. 오히려 가해자를 두둔하고 감쌈으로써 교회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는 예도 있습니다. 교회를 거룩한 기관으로 보존하기 위해 성도는 지혜와 의지와 성찰로 행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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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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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징계를 통해 회복된 다윗

사무엘하 1215-31


사랑의 매란 것은 사랑하기 때문에 훈계하기 위해 매질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잘못했다 하더라도 사랑의 매는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징벌하는 사랑의 매는 감정적인 화풀이를 하는 경우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매는 영혼을 살리는 축복의 사인입니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자신이 저지른 간통죄와 살인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을 듣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살인죄에 대해서 다윗의 집안에 칼이 영원히 머물 것이라고 선언하시고 다윗의 간통죄에 대해서는 다윗의 아내들이 백주에 강간당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심판 선언에 다윗이 잘못을 회개하였지만, 여호와께서는 그의 목숨은 살려주시고 왕위는 지켜주시지만 태어날 아기가 죽을 것을 선언하십니다.

 

밧세바의 첫째 아들(15-23)

징계도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어떤 분은 징계가 무슨 축복이냐?’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는 줄을 마음에 생각하라’(8:5)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기 때문에 바로 되라고 채찍을 때리십니다.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아버지가 당신을 사랑하시니까 이렇게 징계하신 것입니다.

 

15나단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우리아의 아내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시매 심히 앓는지라 16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되 다윗이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 17그 집의 늙은 자들이 그 곁에 서서 다윗을 땅에서 일으키려 하되 왕이 듣지 아니하고 그들과 더불어 먹지도 아니하더라 18이레 만에 그 아이가 죽으니라 그러나 다윗의 신하들이 아이가 죽은 것을 왕에게 아뢰기를 두려워하니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아이가 살았을 때에 우리가 그에게 말하여도 왕이 그 말을 듣지 아니하셨나니 어떻게 그 아이가 죽은 것을 그에게 아뢸 수 있으랴 왕이 상심하시리로다 함이라 19다윗이 그의 신하들이 서로 수군거리는 것을 보고 그 아이가 죽은 줄을 다윗이 깨닫고 그의 신하들에게 묻되 아이가 죽었느냐 하니 대답하되 죽었나이다 하는지라 20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왕궁으로 돌아와 명령하여 음식을 그 앞에 차리게 하고 먹은지라 21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는 그를 위하여 금식하고 우시더니 죽은 후에는 일어나서 잡수시니 이 일이 어찌 됨이니이까 하니 22이르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거니와 23지금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하니라(15-23)

다윗은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난 아이가 죽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그 아이가 죽기 전까지는 사력을 다해서 기도합니다. 식음을 전폐한 채 아무 말도 듣지 않고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1) 아들을 위한 다윗의 기도(15-17)

나단은 다윗이 밧세바에게서 얻은 아이가 죽을 것이라고 선언하였고(12:14), 그 선고대로 밧세바가 낳은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셨고 병에 걸리게 하셨습니다. 밧세바를 우리아의 아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것은 밧세바가 다윗의 아이를 가졌을 때 우리아의 아내였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자신의 죄로 인해 아기가 병에 걸리자, 다윗은 하나님의 궤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 금식하며 땅에 엎드려 밤새 살려달라고 간구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할 때 종종 금식기도를 하였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간절히 기도하면 혹 하나님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아기를 살려주시지 않을까 기대한 것입니다. 이때 다윗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시편 32편과 51편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17절은 다윗이 얼마나 간절하고 강경하게 기도하였는지를 설명합니다. 왕궁의 노인들, 즉 중신들이 다윗을 일으키려고 하였지만, 다윗은 일어나려고 하지 않았고 식사도 하지 않았습니다.

 

(2) 아들의 죽음(18-19)

다윗의 이런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밧세바에게서 난 아이는 병에 걸린 지, 칠 일 만에 죽고 맙니다. 다윗의 신하들은 이 사실을 다윗에게 보고하기를 두려워했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금식하며 기도하였을 때, 그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신 경우가 거의 없었습니다. 히스기야의 기도도 들어주셔서 그의 생명을 연장해주셨고, 심지어 나봇을 죽인 아합도 겸비하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의 목숨을 살려주셨습니다. 니느웨도 금식하며 겸비할 때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간절한 기도는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회개에 목숨을 살려주는 것으로 용서하시고, 더 이상의 용서는 허락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죄를 심각하게 보셨고, 그 죄에 대해 책임지도록 심판을 면제해 주지 않으신 것입니다. 다윗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도 없지만, 회개했는데도 다윗처럼 철저하게 하나님께 벌을 다 받은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회개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죄에 대한 책임까지 모두 없애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자녀에서 끊어지지 않고 계속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안에 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안에서 우리의 죄에 대한 책임을 감당할 때, 더 성숙하고 성화된 모습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다윗이 간절하게 기도했는데도 아기가 죽자 신하들은 다윗의 상심이 극심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아이의 죽음을 다윗에게 알리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신하들이 수군거리는 것을 보고 아이가 죽은 것을 알게 되었고, 신하들을 통해 아이가 죽은 것을 확인합니다. 다윗은 아이가 죽은 것을 확인하자 일어나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 경배한 후 다시 식사하기 시작합니다. 아이가 죽자 다윗이 금식과 애도의 행동을 멈추고 일상적인 모습으로 돌아온 것에 대해 신하들은 어떻게 된 것인지 궁금해합니다. 이에 대해 다윗은 자신이 금식하고 울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불쌍히 여기시고 마음을 돌려 아이를 살려주지 않으실까 생각했는데, 이제 죽었으니 금식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요청하는 것이지만 그 기도를 들어주실지는 하나님만 결정하실 수 있습니다. 다윗이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지 누가 알겠느냐?’라고 말한 것은 모든 결과를 하나님의 손에 맡겼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는 밧세바와의 간통 이후에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았고 말씀에 순종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단을 통해 하나님 심판의 말씀을 들은 후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의 주권을 온전히 인정하게 되었고, 그 결과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이를 죽이신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솔로몬의 탄생(24-25)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매를 때리실 뿐 아니라 회복의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가장 혹독한 심판 가운데서도 자기 백성을 향한 주의 은총과 평안을 주시려는 자비는 중단하지 않습니다. 어려운 시기에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주십니다. 다윗과 밧세바가 가장 고통스러워했던 시기에 위로의 선물을 주십니다.

 

24다윗이 그의 아내 밧세바를 위로하고 그에게 들어가 그와 동침하였더니 그가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25선지자 나단을 보내 그의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이더라(24-25)

하나님께 징계를 받았다고 낙심에 빠져 있을 수 없습니다. 아픔을 딛고,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징계는 아프고 쓰라리나 우리를 새롭게 합니다. 그 손길을 겸허히 수용할 때, 한층 더 성숙함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새로운 선물을 안겨주십니다.

 

(1) 여호와의 사랑을 받은 솔로몬(24)

아이를 잃은 후에 다윗은 그의 아내 밧세바를 위로하였는데, 여기서 밧세바를 다윗의 아내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제 밧세바가 정식으로 다윗의 아내로 인정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정식으로 아내가 된 밧세바와 동침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새로운 아들을 주셨는데 그가 솔로몬’입니. 솔로몬이란 이름은 평화란 뜻의 샬롬에서 유래하였습니다.

 

(2) 여디디야(25)

여호와께서 솔로몬을 사랑하셔서 나단을 보내어 특별히 여디디야라는 이름을 주십니다. 여디디야는 여호와의 사랑을 받는 자라는 뜻으로, 이제는 다윗의 죄를 용서하신다는 표시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간통죄와 살인죄라는 끔찍하고 비열한 죄를 지은 다윗은 아이를 잃는 벌을 받았지만 새로운 아이를 하나님께 얻음으로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자로 회복하게 된 것입니다.

 

암몬의 랍바를 점령함(26-31)

징계 가운데 낙담하고 있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두려워하고 더 멀리하도록 우리를 징계하신 것입니다. 징계의 아픔을 딛고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다면 반드시 복된 날이 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결국 하나님은 가장 복된 결과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항상 순종하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6요압이 암몬 자손의 랍바를 쳐서 그 왕성을 점령하매 27요압이 전령을 다윗에게 보내 이르되 내가 랍바 곧 물들의 성읍을 쳐서 점령하였으니 28이제 왕은 그 백성의 남은 군사를 모아 그 성에 맞서 진 치고 이 성읍을 쳐서 점령하소서 내가 이 성읍을 점령하면 이 성읍이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을까 두려워하나이다 하니 29다윗이 모든 군사를 모아 랍바로 가서 그 곳을 쳐서 점령하고 30그 왕의 머리에서 보석 박힌 왕관을 가져오니 그 중량이 금 한 달란트라 다윗이 자기의 머리에 쓰니라 다윗이 또 그 성읍에서 노략한 물건을 무수히 내오고 31그 안에 있는 백성들을 끌어내어 톱질과 써레질과 철도끼질과 벽돌구이를 그들에게 하게 하니라 암몬 자손의 모든 성읍을 이같이 하고 다윗과 모든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니라(26-31)

간음과 살인의 죄는 다윗 생애에서 가장 지우고 싶은 치명적인 불명예스러운 행적입니다. 이는 앞으로 닥칠 연속적인 불행의 싸앗이었지만, 이 넘어짐은 다윗을 교만과 나태의 짐에서 깨워 다시 골리앗을 상대한 당시에 기도의 영성으로 회복시켜주십니다.

 

(1) 요압의 전공(26-28)

이 단락은 암몬과의 전쟁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10장에서 시작된 암몬과의 전쟁은 밧세바와 간통 사건을 일으킨 시기에도 계속되었고,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는 암몬과의 전투 중에 사망하였습니다. 이 부분은 시간적으로 우리아가 죽은 지 얼마 뒤에 일어난 일이지만, 대략 2년 이상 걸린 다윗의 간통 사건에 집중하기 위해 암몬과의 전쟁에 대한 기록을 잠시 미루어 두었다가 다윗의 간통 사건을 끝낸 후에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시간의 흐름으로 볼 때 회상에 해당합니다.

26절은 랍바 점령에 대한 요약 부분으로 요압은 암몬과의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암몬의 수도 랍바를 점령합니다. 요압은 랍바를 완전히 점령하기 전에 다윗에게 사람을 보내어 남은 군사를 모아 전쟁터에 나올 것을 요청합니다. 만일 다윗이 오지 않았는데 자신이 성읍을 점령하면 그 도성은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성을 취한 모든 공적이 요압에게 돌아간다는 의미입니다. 현재 요압은 다윗에게 매우 충성스러운 인물로 우리아를 죽이라는 다윗의 명령에 대해서도 이유를 묻거나 반대하지 않고 그대로 따랐는데, 여기서도 전쟁의 모든 공적을 다윗에게 돌리려 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는 다윗에게 충성하기 위해서라면 하나님 보시기에 의한 행동도 서슴없이 할 수 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2) 다윗의 참전(29)

다윗은 모든 군사를 이끌고 랍바로 갔습니다. 그곳을 쳐서 성공적으로 점령하였습니다. “모든 군사는 요압의 군대를 제외하고 남은 군사들을 가리킵니다. 다윗은 이미 요압에 의해 거의 점령된 랍바 성을 최종적으로 포위하고 공격하였을 것입니다. 그곳에서 많은 전리품을 얻었습니다.

 

(3) 전리품과 포로(30-31)

다윗은 왕관을 취하여 자신의 머리에 썼는데, 그 왕관은 금 한 달란트(대략 30kg)와 보석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평소에 쓰는 관이 아니라 왕권을 상징하는 상징물로 사용되는 것이었습니다. 머리에 썼다는 것도 암몬의 왕권을 폐하고 자신이 암몬을 다스리는 왕이 되었음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31절에서 다윗이 암몬 자손의 포로들에게 여러 가지 강제 노역을 시키는 것으로 우리 성경에서는 해석하고 있지만, 히브리어 본문을 직역하면 그들을 톱 아래 두었고 써레질과 철도끼질 아래 두었고 벽돌 가마로 지나가게 하였다로 다윗이 매우 끔찍한 방법으로 암몬 사람들을 죽인 것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는 이 해석을 많이 지지하였지만, 최근에는 다윗이 강제 노역을 시킨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적당하다는 견해가 더 많은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이후로 암몬은 다윗 왕국의 속국이 되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다윗은 모든 군사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사무엘하 8장의 전쟁과는 달리 다윗이 전쟁에서 얻은 노획물들을 여호와의 전에 드렸다는 말이 없습니다. 대신 가장 값진 노획물인 왕관을 다윗이 가졌다는 기록만 있습니다. 이것은 전쟁 당시 다윗의 영적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때 다윗은 승리의 영광을 여호와께 돌리지 않고 자신이 그 영광을 차지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윗처럼 사람은 성공을 하거나 어떤 지위에 오르면, 하나님을 쉽게 잊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모두 자신의 공적으로 돌리며 교만해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오늘 주신 것에 감사하고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며 기도하고 하나님과 늘 동행하며 살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때로 잘못을 징계하여 바로잡으십니다. 징계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들로 대하시는 대표적인 표징입니다(12:8). 어떠한 경우에라도 한결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 해주시길 원합니다. 죄를 회개하는 사람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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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05-01)


음행을 멀리하고 아내를 사랑하라

잠언 5장 1-23절


가정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자마자 세워주신 최초의 공동체입니다. 인간이 범죄하기도 전에 말입니다. 그래서 가정은 천국의 모형 또는 지상의 천국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런 말도 있습니다. 화성에서 온 남자하고 금성에서 온 여자가 만나 지구에서 사는 게 결혼이라고 말입니다. 부부의 결혼 생활이 만만치 않다는 뜻입니다. 지상의 천국이어야 하는 가정이 부부가 하기에 따라서 도리어 지상의 지옥이 될 수도 있는 겁니다
 
달콤한 말로 속삭이는 음녀에게 유혹되어 음행을 저지른 자들은 그들의 교만과 악행에 적합한 비참한 결과를 맞게 됩니다. 음녀의 부정한 행동은 그녀 자신을 파멸과 죽음으로 재촉하기 때문에, 그녀의 꾐에 넘어간 자들은 같은 운명에 처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혜 있는 자는 자신의 아내에게만 집중하여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아버지 강연(08) : 내 명철에 귀 기울여라(1-2)

꿀처럼 달콤하고 기름처럼 미끄러운 음녀의 입술을 조심하라고 합니다. 실은 쑥같이 쓰고 칼같이 날카롭기 때문입니다. 지혜에 주의하고 명철에 귀를 기울이고 근신을 지킬 때, 생명의 평탄한 길을 걸을 수 있지만, 음녀는 우리를 사지로 인도합니다.
 
1내 아들아 내 지혜에 주의하며 내 명철에 네 귀를 기울여서 2근신을 지키며 네 입술로 지식을 지키도록 하라(1-2)
잠언 5장은 ‘내 아들아’로 시작하는 아버지의 강연 중 여덟째로 ‘음녀를 피하고 아내를 사랑하라’라는 주제를 중점적으로 다룹니다. 음녀에 대한 경고는 잠언 1-9장에서 자주 언급되는 주제입니다(2:16-19; 5:1-23; 6:20~35; 7:1-27; 19:13-18). 음녀와 아내는 대부분 육체적 관계로 묘사되지만, 우매와 지혜의 의인화된 모습으로도 이해해야 합니다. 즉,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면으로 이해함과 동시에 영적이고 신앙적인 면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4장에서는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이라는 두 길의 특징과 그 최후를 제시하며 아버지가 아들에게 지혜와 우매 사이에서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 요구하듯, 5장에서는 ‘음녀’와 ‘여인’의 대조를 통하여 아들에게 같은 요구를 반복합니다. 아버지는 여느 강연에서처럼 ‘내 아들아’라고 부르며 아들이 자신의 말에 주목하기를 명합니다. 이때 아버지는 자신의 말을 지혜와 명철로 지칭하는데 이는 그의 말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의 말씀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지혜와 명철의 말을 들으면 판단력(근신)과 지식을 간직할 수 있게 됩니다. 근신과 지식을 지키는 것은 생명과도 같습니다(3:21). 올바른 판단력은 우리를 악한 사람들로부터 보호하고 구해줍니다(2:11-19).
한편 2절의 ‘입술로 판단력과 지식을 간직하게 된다.’라는 표현은 제사장이 지식을 간직하여 그 입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듯이(말 2:7) 아들도 바른 판단력과 통찰력을 가지고 지혜의 말을 선언해야 함을 나타냅니다.
 

음녀에 대한 묘사(3-6)

음행의 유혹을 경계해야 합니다. 음녀의 유혹은 매우 달콤해서 쾌락을 자극하고, 악으로 달려가는 발길을 합리화하게 하며, 바른 판단력을 마비시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쑥처럼 쓰고 두 날 가진 칼처럼 예리한 상처를 남길 뿐입니다.
 
3대저 음녀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며 그의 입은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4나중은 쑥 같이 쓰고 두 날 가진 칼같이 날카로우며 5그의 발은 사지로 내려가며 그의 걸음은 스올로 나아가나니 6그는 생명의 평탄한 길을 찾지 못하며 자기 길이 든든하지 못하여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느니라(3-6)
이제 다룰 3-20절은 5장의 본론이며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부분(3-14)에서는 ‘음녀를 피하라’는 내용을 음녀에 대한 묘사(3-6)와 음녀를 피하지 않았을 때 치러야 할 대가(7-14)를 설명함으로써 구체화합니다. 둘째 부분(15-20절)에서는 음녀의 유혹을 막아낼 대안으로써 ‘아내를 사랑하라’라고 충고합니다. 아버지는 먼저, 겉과 속이 다른 음녀를 묘사함으로써 아들이 그녀의 실체를 직시할 수 있도록 조언합니다. 아들을 유혹하는 음녀는 20절에서처럼 ‘이방 계집’으로도 불리며(2:16; 5:20; 7:5), ‘젊은 시절의 남편을 배반하고 결혼 서약을 깬 자’(2:17), ‘유부녀’(6:26[‘음란한 계집’으로 번역됨), ‘남의 아내’(6:29; 7:19~20), ‘창녀’(6:26[‘음녀’로 번역됨]: 7:10) 등으로 소개되었습니다. 문맥상에서 볼 때 음녀는 ‘낯선 여자.’ ‘남의 여자,’ ‘음란한 여자’로서 도덕적으로나 관습적 테두리 밖에 있는 여자를 지칭합니다.
특히, 5장에서 음녀의 특징은 신체 중 입술과 발과 관련하여 기술되었습니다. 첫째, 음녀는 상대방의 기분을 좋게 하는 말로 그 사람을 유혹합니다. 꿀을 떨어뜨리는 입술이나 기름처럼 미끄러운 입이란 음녀의 달콤하고 듣기 좋은 소리를 가리킵니다. 음녀의 입술에서 나오는 달콤하고 속이는 말은 2절의 아들의 입술에서 나오는 지혜의 말과 대조됩니다. 아들의 말은 분별력 있고 생명을 가져오는 말이므로 자신과 남에게 유익을 줍니다. 그러나 음녀의 말은 처음에는 꿀처럼 달콤하지만, 나중에는 쑥처럼 쓴맛을 내며 양날 달린 칼처럼 잔인하고 치명적이어서 상대에게 심각한 타격을 입힙니다. 둘째, 음녀는 상대방을 사지로 내몰고 죽음으로 이끕니다. 그러므로 음녀나 그녀를 따라가는 자는 생명의 길을 찾을 수 없고, 가는 길에 방황하더라도 그것을 깨달을 분별력이 없으므로 결국 음부에 이르고야 맙니다.
 

음녀를 피하라(7-14)

음행은 모든 것을 빼앗습니다. 음녀의 매력은 강력하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와 결심만 믿고 가까이하다가는 넘어지기 쉽습니다. 유혹이 다가올 때는 요셉처럼 단호하게 뿌리치고 그 상황을 벗어나야 합니다(창 39:12). 혹시 지금 음행의 유혹을 받을 수 있는 환경에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7그런즉 아들들아 나에게 들으며 내 입의 말을 버리지 말고 8네 길을 그에게서 멀리 하라 그의 집 문에도 가까이 가지 말라 9두렵건대 네 존영이 남에게 잃어버리게 되며 네 수한이 잔인한 자에게 빼앗기게 될까 하노라 10두렵건대 타인이 네 재물로 충족하게 되며 네 수고한 것이 외인의 집에 있게 될까 하노라 11두렵건대 마지막에 이르러 네 몸, 네 육체가 쇠약할 때에 네가 한탄하여 12말하기를 내가 어찌하여 훈계를 싫어하며 내 마음이 꾸지람을 가벼이 여기고 13내 선생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며 나를 가르치는 이에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던고 14많은 무리들이 모인 중에서 큰 악에 빠지게 되었노라 하게 될까 염려하노라(7-14)
사망으로 이끄는 음녀에게 절대 다가가지 말아야 합니다. 아버지는 겉으로 보이는 음녀의 모습과 그녀의 실체를 설명한 후, 1-2절과 유사하게 다시금 ‘아들들’을 불러 주의를 집중시킵니다. 그리고 자기 말을 명심하여 음녀를 피하라고 아들들에게 신신당부합니다.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음녀를 멀리하고 그 근처에 얼씬거리지도 말라”고 명합니다. 왜 음녀를 피해야 합니까? 그것은 음녀를 가까이할 때 입게 되는 피해가 치명적이고 돌이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그 피해를 세 가지 즉, 명예, 재물, 육체와 관련해서 조목조목 설명합니다.
첫째, 음녀를 따라가는 자는 존영과 수한을 빼앗깁니다. 존영과 수한은 평생 쌓아온 지위, 명예, 명성을 의미하는데, 이것들을 하루아침에 그것도 포악한 자들에게 다 빼앗길 수 있습니다. 둘째, 애써서 모은 소유와 재물을 잃게 됩니다. 그 재산은 이제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게 됩니다. 셋째,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쇠진할 것입니다. 이같이 음녀의 유혹에 넘어가는 자는 사회적, 경제적, 육체적 고통을 당하여 뼈저린 후회를 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야 이 모든 고통의 원인이 자신이 스승의 훈계를 싫어하고 가볍게 여기며 무시한 데서 비롯되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불순종과 교만과 미련함의 결과로 개인적인 수치만이 아니라 공동체로부터 수치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아내를 사랑하라(15-20)

음행에 빠지지 않는 가장 좋은 길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배우자를 뜨겁고 신실하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혼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성적인 즐거움을 누리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울타리를 부정하고 무분별하게 쾌락을 추구해나갑니다.
 
15너는 네 우물에서 물을 마시며 네 샘에서 흐르는 물을 마시라 16어찌하여 네 샘물을 집 밖으로 넘치게 하며 네 도랑물을 거리로 흘러가게 하겠느냐 17그 물이 네게만 있게 하고 타인과 더불어 그것을 나누지 말라 18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19그는 사랑스러운 암사슴 같고 아름다운 암노루 같으니 너는 그의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의 사랑을 항상 연모하라 20내 아들아 어찌하여 음녀를 연모하겠으며 어찌하여 이방 계집의 가슴을 안겠느냐(15-20)
아버지는 아무 대책 없이 음녀를 피하라고만 권면하지 않습니다. 실제적으로 음녀의 유혹을 이겨내고 치명적인 피해를 입지 않기 위한 대안으로 아내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맺으라고 조언합니다.
15-16절에 나오는 ‘우물’과 ‘샘’ 그리고 ‘샘물’과 ‘도랑물’은 모두 ‘아내’를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단어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우기와 건기로 나뉘고 강우량이 적어 우물이나 샘에서 물의 근원을 찾는 일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내를 우물이나 샘으로 비유하여 아내가 남편에게 이와 같이 귀중한 존재임을 암시합니다. 또한, 물을 마심으로써 갈증을 해소하듯이 아내를 통해서만 성적 충족감을 얻으라는 암시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젊어서 취한 아내를 사랑스러운 암사슴과 암노루에 비유하며 항상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로부터 만족감을 얻으라고 거듭 독려합니다. 동시에 “이런 아내를 두고 어찌 음녀를 탐하려느냐?”라고 다그치며 음녀의 유혹과 위험에서 철저히 벗어나기를 한 번 더 명령합니다.
이처럼 잠언 5장에서는 실제 인간인 아내와 음녀를 대조하여 설명하지만, 그 이면에는 여전히 여인으로 의인화된 지혜와 우매에 대한 대조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지혜는 평생 사랑하고 품어야 할 아내로 여기고 대해야 하며 우매는 미련하고 음란한 음녀와 같음을 알고 매 순간 유혹의 속삭임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악인의 최후(21-23)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삶의 여정을 감찰하십니다. 사람의 행위와 마음의 숨은 동기까지 헤아리시기 때문에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악을 숨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 자기 악에 걸리고 죄의 줄에 매이게 하셔서 그가 저지른 죄의 대가를 치르게 하십니다.
 
21대저 사람의 길은 여호와의 눈 앞에 있나니 그가 그 사람의 모든 길을 평탄하게 하시느니라 22악인은 자기의 악에 걸리며 그 죄의 줄에 매이나니 23그는 훈계를 받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죽겠고 심히 미련함으로 말미암아 혼미하게 되느니라(21-23)
‘길’로 비유된 사람의 모든 행위는 하나님 앞에 다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길을 하나하나 주목하고 세심히 살피시며 어떤 길인지에 따라 마땅한 심판을 내리십니다. 악인의 경우, 다른 사람 때문에 죄악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정욕과 욕심과 우매함으로 인해 죄에 묶임을 당합니다. 특히 22-23절에서 말하는 악인에는 위에서 언급한 ‘음녀를 피하라’는 경고를 무시한 미련한 자도 포함됩니다. 한편, 악인이 덫에 걸리고 줄에 묶이는 비유는 1:17-19의 경고를 기억하게 합니다. 새도 자기 눈앞의 위험을 알고 피할 줄 알지만, 악인은 경고를 듣고도 자처하여 덫으로 들어감으로써 목숨을 잃게 되는 미련한 자입니다. 이처럼 훈계를 듣지 않고 교만하고 방자하게 행하는 자들은 그로 인해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시편 말씀이 생각납니다. “여호와께서 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시 127:1). 가정은 하나님께서 세우고 지켜주셔야 안전하고 천국으로 가꿀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을 이끌어 가정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배우자는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사람 맞습니다. 이런 믿음이 중요합니다. 또한, 배우자가 하는 것 기다려봐서 사랑하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이 그러하듯이 배우자를 먼저 아껴주고 먼저 사랑할 때 가정이 천국이 되어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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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04-02)


의인의 길, 바른 길의 지혜

잠언 410-27


인생은 길을 걷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내가 길을 만들기도 하고, 이미 존재하는 길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숱한 길이 있지만, 성경은 양자택일만 제시합니다.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 지혜로운 길과 미련한 길,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입니다. 빨리 가는 것보다 제대로 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멋지게 가는 것보다 올바르게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길을 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인생에서 우리는 두 길 사이에서 끊임없는 선택을 요구 받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잠언 기자는 결코 겹칠 수 없는 두 길을 제시하고, 생명의 길을 선택하기 위해서 마음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 중에 어느 길로 갈 것입니까? 아버지의 훈계와 가르침을 통해 지혜의 길로 인도받으면 의와 정직을 기본으로 한 삶에 분별력과 통찰력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악인이 추구하는 불의와 폭력의 죄악에 빠지지 않습니다. 훈계를 듣고 무엇보다 마음을 주의 깊게 살피면서 생명을 주는 바르고 의롭고 지혜로운 길로 계속 전진해야 합니다.

 

강연(06) : 지혜로운 길로 가라(10-19)

정직하고 의로운 길을 가라 지혜로운 자가 걷는 길은 정직한 길이고 의로운 길입니다. 그 길을 걸을 때 곤고하지 않고 실족하지 않을 수 있기에 결국 길게 생명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의인의 길은 한낮의 광명 아래서 걷는 것과 같기에 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초행이지만 안내 표지판이 잘 갖춰져 있고 친절하고 노련한 가이드를 곁에 두고 가는 여행이 참으로 안전하고 즐거운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걸려 넘어질 일도 없을 것입니다.

 

10내 아들아 들으라 내 말을 받으라 그리하면 네 생명의 해가 길리라 11내가 지혜로운 길을 네게 가르쳤으며 정직한 길로 너를 인도하였은즉 12다닐 때에 네 걸음이 곤고하지 아니하겠고 달려갈 때에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13훈계를 굳게 잡아 놓치지 말고 지키라 이것이 네 생명이니라 14사악한 자의 길에 들어가지 말며 악인의 길로 다니지 말지어다 15그의 길을 피하고 지나가지 말며 돌이켜 떠나갈지어다 16그들은 악을 행하지 못하면 자지 못하며 사람을 넘어뜨리지 못하면 잠이 오지 아니하며 17불의의 떡을 먹으며 강포의 술을 마심이니라 18의인의 길은 돋는 햇살 같아서 크게 빛나 한낮의 광명에 이르거니와 19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걸려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10-19)

분별력이 모자라서 일을 그르치지도 않을 것입니다. 정직하고 의로운 길이 당장에는 에둘러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장 빠르고 가장 안전하고 가장 확실한 결과가 보장된 길입니다. 고난으로 인한 숱한 예외도 있지만, 이것만큼 보편적인 질서도 없습니다.

 

(1) 지혜로운 길로 가라(10-13)

잠언 4:1-9의 아버지의 다섯째 강연에 이어, 오늘 본문은 여섯째(10-19)와 일곱째(20-27) 강연을 수록하였습니다. 먼저 10-19절의 강연은 악인과 의인의 길을 소개하며 악인의 길을 피하고 의인의 길로 가라는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다른 강연에서와 마찬가지로 아버지는 아들에게 내 말을 받으라며 조언을 시작합니다. 받으라는 표현은 귀로 듣는 것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그 말을 받아들이라는 요구입니다.

아버지의 말을 수용할 때 듣는 이는 장수하는 선물을 받습니다. 장수는 축복의 대표적인 예로 사용되었습니다. 장수는 순종으로 인한 선물만이 아니라 지혜를 얻거나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주어지는 선물로도 언급되었습니다(3:2; 19:11; 10:27). 또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명령을 행할 때에 주어지는 대표적인 약속으로 소개되었습니다(4:40; 5:16, 33; 6:2; 12:25; 22:7). 그러므로 여기서나 잠언의 다른 부분에서 나오는 아버지의 말은 단순히 아버지의 입에서 나오는 명령이 아니라 여호와 경외를 바탕으로 하는 지혜를 담고 있는 말이며 하나님의 명령을 담고 있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의 말을 경청하는 행동이 장수의 약속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한편, 아버지는 훈계를 통해 아들에게 지혜로운 길과 정직한 길을 가르치고 그 길로 인도합니다. 여기서 지혜로운 길은 정직한 길과 동일한 길이며 의인의 길의 다른 표현입니다. 정직한 길은 또한 구부러진 길(2:15)과 반대되는 곧은길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길에서는 장애물이나 어둠으로 인해 발걸음이 비틀거리거나 잘못 디뎌 넘어지지 않습니다. , 의와 정직을 기본으로 하는 지혜의 삶을 살 때 분별력이 없어서 일을 그르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아버지에 의해 지혜의 길로 인도받았으므로, 아버지의 훈계를 꽉 붙들어서 놓치지 말고 소중히 지켜야 합니다. 지혜와 훈계는 그것을 얻은 자에게 생명이 되므로(3:22; 4:22; 8:35) 어둠과 사망으로 가는 길에서 구해줍니다.

 

(2) 악인의 길을 피하라(14-17)

의인의 길로 계속 가기 위해서는 악인의 길을 피해야 합니다. 아버지는 지혜의 길로 인도받은 아들에게 이제 그 길과 정반대인 악인의 길을 언급합니다. 아버지는 아들로 하여금 어떻게 해서든지 그 길을 피하도록, 여섯 차례나 다른 표현을 써가며 다음과 같이 명령합니다: 그 길로 들어가지 말라”, “다니지 말라”, “피하라”, “지나가지 말라”, “돌이키라”, “떠나라.” 아버지가 악인의 길로 가지 말라고 이토록 강조하는 이유는 악인의 사악한 행동 양식을 통해 밝혀집니다.

첫째, 악인은 악을 저지르지 못해 안달하며 악을 저지르는 데에 집착하는 자들입니다(16). 그들은 악을 행하고 사람들에게 해코지를 하지 않고서는 잠도 오지 않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미가 선지자가 신랄하게 비판했던 이스라엘의 권력자들에게서도 발견됩니다. 그들은 잠자리에서 사악한 일을 궁리하고 악을 꾀하다가 아침이 밝으면 남의 밭이나 집을 빼앗는 등 지난밤에 계획한 악을 실천합니다(2:1-2). 그런데 그들이 밤새 궁리한 악을 실행할 수 있었던 것은 소위 가진 자로서 자기들의 재물과 권세와 지위를 이용했기 때문입니다. 잠언이나 미가서에서 기술하는 이 악한 자들의 행위는 하나님의 성소를 짓기 위한 장소를 찾을 때까지 졸음이나 잠을 쫓겠다고 한 다윗의 행동과 대조됩니다(132:3-5).

둘째, 악인의 삶은 불의와 폭력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불의의 빵을 먹고 강포의 포도주를 마신다(17)는 말은 이중적인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 악인이 불의와 폭력을 밥 먹듯이 저지른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고 악인이 불의와 폭력으로 얻은 소득으로 번창한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습니다.

 

(3)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18-19)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 중에서 어느 길을 택할 것입니까? 두 길은 4:10-17에서 지혜와 곧은 길 또는 죄악과 폭력의 길로 소개되며 대조되었지만, 이 길들은 또한 각각 지혜의 길과 우매의 길입니다. 아버지는 이제 두 길에 대한 결론을 제시하며, 아들이 지혜로운 가르침을 받아 지혜의 길로 들어섰으므로 앞으로도 부단히 그 길로 가고 어떤 일이 있어도 죄와 우매가 가득한 악인의 길로 가지 않도록 격려합니다.

먼저, 의인의 길은 빛입니다. 의인은 인도와 보호를 받으므로 그들의 삶은 마치 해가 뜨기 시작하여 점점 그 빛이 환해지고 정점에 올라 세상에 따스함과 빛을 선사하듯 자기뿐 아니라 다른 자들도 의의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그에 반해, 악인의 길은 어둠입니다. 정직한 길을 저버리고 거짓과 불의와 불공평의 어두운 길로 들어갑니다 (2:13). 그는 자신의 악한 행동에 대해 눈이 가려지고 판단력을 잃어 자신의 악행으로 인해 멸망을 당해도 그 원인이 자기 자신에게서 온 것임을 모르고 하나님의 섭리와 심판에 의한 것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아버지 강연(07) : 내 말에 귀 기울여라(20-27)

마음을 지키라 의롭고 정직한 지혜의 길을 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악인으로부터 우리 전 존재를 지키는 것입니다. 눈과 귀와 마음과 입, 눈꺼풀과 발 등 우리 모든 감각이 악인들의 그릇된 주장에 현혹되지 않도록 지켜야 합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가장 예민하게 가장 마지막까지 철저히 지켜야 하는 것은 마음입니다. 그 마음에서 생명의 근원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20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내가 말하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21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하지 말며 네 마음 속에 지키라 22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의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 23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24구부러진 말을 네 입에서 버리며 비뚤어진 말을 네 입술에서 멀리 하라 25네 눈은 바로 보며 네 눈꺼풀은 네 앞을 곧게 살펴 26네 발이 행할 길을 평탄하게 하며 네 모든 길을 든든히 하라 27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네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라(20-27)

악인의 길에 들어가지 말라 의인의 길이 있다면 악인의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그의 법을 경시하는 미련한 자의 길입니다. 탐욕이 지배하고 경쟁이 이끌고 이기심에 사로잡혀 분별력을 잃어버린 자의 길입니다. 그런 길에는 들어서지 말고 피해야 하고 이미 그 길에 들어섰다면 속히 돌이켜 떠나야 합니다.

 

(1) 내 말에 귀 기울여라(20-22)

20-27절은 아버지의 일곱째의 강연으로서, 10-19절의 여섯째 강연에 이어 계속 길에 대해 조언합니다. 이 강연은 바른 길로 걸어라라는 주제로 요약됩니다. 이 강연의 특징은 귀, , 마음, , 입술, 눈꺼풀, 발이라는 일곱 가지의 신체 기관을 언급하며, 아들이 훈계를 따라 바른 길로 가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아버지는 10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아들에게 자신의 훈계를 따르라고 명합니다. 특히 귀와 눈과 마음으로 자신의 말에 집중하고 떠나지 말라고 강력히 말합니다. 13절에서도 언급했듯이 아버지는 자기가 전하는 훈계가 그것을 찾는 자에게 생명이 된다고 말합니다. 앞서 3:228:35에서는 지혜가 생명이 된다고 설명했으므로 아버지의 훈계와 지혜가 연결됩니다. 여기 4:22에서는 생명이 영적, 정신적 치유만이 아니라 육체적 치유도 가져다준다고 덧붙입니다. 이러한 육체적 치유와 활력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않고 오직 여호와만 의지하는 자에게 제공되는 선물로 설명되기도 하였습니다(3:8). 이런 관련성을 종합해 볼 때 아버지의 훈계는 여호와를 신뢰하는 데서 나오는 지혜로운 조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를 수용하는 자는 영적, 정신적, 육체적 회복을 경험할 것입니다.

 

(2) 생명의 근원인 네 마음을 지켜라(23)

아버지는 아들에게 그 어떤 것보다 네 마음을 지키라고 충고합니다. 여기서 동사 지키다보호하다’, ‘관찰하다’, ‘감시하다를 뜻하므로 우리 마음을 살피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이렇게 조심스레 지켜야 하는 이유는 마음에서 생명의 근원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3) 바른 길로 걸어라(24-27)

강연의 마지막 부분인 24-27절은 마음을 살펴 바른길로 걸으라는 조언입니다. 23절의 마음을 지키는 일은 24-27절에서 말과 행동으로 연결됩니다. 만약 우리가 선한 것을 마음에 쌓아둔다면 입, , 발 등을 통해 선한 말과 태도와 행동이 나옵니다. 바른 길로 가기 위해서는 가치 없는 것에 눈길을 주지 말고 도덕적으로 신앙적으로 방해가 되는 것을 제거하여 길을 평탄케 해야 합니다. 또한 오로지 앞만 보고 걸어 바른 길에서 벗어나는 어떠한 길로도 치우치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14-17절에서 언급된 죄악과 폭력으로부터 발길을 끊어야 합니다.

 


마음으로부터 다른 모든 감각 기관들이 영향을 받으며, 또 다른 감각기관들로부터 들어오는 정보를 판단하고 분별하는 것도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지혜에 의해 장악될 때 우리는 온 존재로,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질서를 따라 복을 누리며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고 오직 그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에게 평탄한 길이 열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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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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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단 선지자에게 책망 당한 다윗

사무엘하 121-14


 

완벽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완전한 사람이란,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동시에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실수하고 잘못했을 때 그것을 깨닫고 돌이킬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완전한 사람은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나단 선지자는 다윗의 행동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나단은 한 부자가 자기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가난한 사람의 어린 양을 빼앗았다는 이야기를 다윗에게 전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다윗은 맹세하면서 그 부자를 죽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나단은 바로 그 부자가 다윗이라고 말하면서 여호와의 심판을 전했습니다.

 

나단의 비유(1-6)

죄의 근원은 탐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의 핵심인 탐심을 드러내시며 성도가 죄를 회개하고 더 이상 탐심을 따라 죄를 짓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죄 가운데 숨어 있는 탐심이 드러나 이를 회개하고 경계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1여호와께서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시니 그가 다윗에게 가서 그에게 이르되 한 성읍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부하고 한 사람은 가난하니 2그 부한 사람은 양과 소가 심히 많으나 3가난한 사람은 아무것도 없고 자기가 사서 기르는 작은 암양 새끼 한 마리뿐이라 그 암양 새끼는 그와 그의 자식과 함께 자라며 그가 먹는 것을 먹으며 그의 잔으로 마시며 그의 품에 누우므로 그에게는 딸처럼 되었거늘 4어떤 행인이 그 부자에게 오매 부자가 자기에게 온 행인을 위하여 자기의 양과 소를 아껴 잡지 아니하고 가난한 사람의 양 새끼를 빼앗아다가 자기에게 온 사람을 위하여 잡았나이다 하니 5다윗이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노하여 나단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그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6그가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이런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 새끼를 네 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 한지라(1-6)

다윗은 욕망에 눈먼 순간 우정이나 명예를 헌신짝처럼 내던졌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깨뜨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보내셨다는 사실만으로 사랑의 손을 내밉니다.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자만이 아니라 잘못을 돌이킬 줄 아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1) 부자와 가난한 자의 비유(1-3)

본문에 나오는 가난한 자와 부자의 이야기는 비유로 다윗과 우리아를 빗대어 만든 이야기이며, 다윗을 옭아매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다윗의 행위를 보고 계셨던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다윗에게 보내십니다.

나단은 다윗에게 한 사건에 대한 판단을 부탁하는 것처럼 하며 가난한 자와 부자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한 성읍에 부자인 사람과 가난한 사람이 있었는데, 부자는 양과 소가 심히 많은 반면 가난한 사람은 아무것도 없고 오직 사서 기르는 작은 암양 새끼가 한 마리 있었습니다. 암양은 숫양보다도 더 값이 싼 가축으로 가난한 사람은 가장 값싼 가축 한 마리만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심히 많은 소와 양을 가진 자와 극명한 대조를 보여주기 위한 장치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그 어린 양 한마리를 자기와 자기 자식들과 함께 살게 하면서 자신의 작은 빵 조각을 나누어 주고, 자신의 물그릇에서 물을 먹게 하며 자신의 몸에서 자게 하였습니다. 가난한 자는 어린 암양을 가축으로 대한 것이 아니라 거의 가족치럼 딸처럼 키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여행자가 부자에게 찾아오자 자신에게 온 여행자를 접대해야 하는 부자는 자신의 그 많은 가축 중에서 한 마리를 잡는 것도 아까워하였습니다. 고대 근동의 중요한 관습 중에는 주인이 여행자를 잘 대접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이 여행자를 잘 대접한 좋은 예입니다. 그래서 부자는 가난한 자의 암양 새끼를 빼앗아 자신에게 온 여행자를 대접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책임져야 할 여행자를 가난한 자의 한 마리밖에 없는, 그것도 딸같이 여기며 애지중지하던 새끼 양을 잡아 대접한 것입니다. 이것은 부자가 가난한 자에게서 힘으로 어린 암양을 빼앗아 왔음을 암시합니다. 이런 부자의 모습을 보고 매우 인색하고 자비심이 없으며 비열한 인간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이 비유는 나단이 다윗에게 쳐놓은 일종의 덫입니다. 나단은 다윗의 악질적이고 비열한 행동을 부자가 가난한 자를 심하게 착취하며 악하게 행동하는 것에 비유하였습니다.

 

(2) 부자의 횡포(4)

여기서 나단이 부자의 모습을 심히 악질적이고 비열하게 묘사한 이유는 두 가지 때문입니다. 첫째는 다윗의 행위가 이 부자처럼 악질적이고 비열하다는 것을 다윗과 독자들에게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둘째는 다윗의 분노를 일으키기 위한 것으로 다윗이 부자에게 몹시 화를 내고 심한 처벌을 내릴수록 다윗은 자신의 죄의 심각성에서 빠져나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가 부자에게 심하게 화를 낼수록 그리고 심하게 처벌할수록 다윗의 죄는 더욱 심각하고 무겁게 다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드러내게 됩니다.

 

(3) 다윗의 반응(5-6)

나단 선지자의 말을 들은 다윗은 그 부자에 대해 매우 화를 냅니다. 그리고 이 일을 행한 사람에 대해 다윗은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며 죽어 마땅한 자라고 선언합니다.

다윗은 이 부자가 자신을 가리키는 줄도 모르고 천하에 죽일 놈이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한 것입니다. 이 표현은 사무엘상 20:31-32에서 사울이 다윗을 두고 한 말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사형을 선언하는 법정 용어가 아니라, 죽어 마땅할 만큼 악하고 해를 끼치는 인물이라는 뜻의 관용구입니다. 6절에서 다윗은 4절에서 자신의 것을 아끼느라 남의 것을 함부로 빼앗은 것을 지적하며 네 배로 배상해주라고 명령하는데, 이것은 출애굽기 22:1에서 양 한 마리에 양 네 마리로 보상하라고 한 법률을 따른 처결입니다.

다윗은 나단의 이야기가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자신의 범죄를 밝히기 위한 비유인 줄도 모르고 부자에 대해 분노하며 죽일 놈이라고 선언함으로써 나단이 쳐놓은 덫에 걸려들었습니다. 이렇게 나단이 곧바로 다윗의 죄를 지적하지 않고 부자와 가난한 자의 비유를 들어 다윗에게 덫을 놓은 이유는 다윗이 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직접적으로 간통과 살인죄를 지적하면 다윗이 인정하지 않고 사울처럼 변명하거나 나단을 죽여 입막음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다윗은 사울처럼 회개의 기회를 잃어버리게 되고 하나님께 용서를 받을 기회도 얻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이 자신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깨달아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회개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 이런 방법을 사용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심판(7-12)

죄의 근원은 구원과 모든 은사를 풍족히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얼마나 풍성하게 부족함 없는 은혜를 주셨는지를 기억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넘치게 허락하셨음에도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기억하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7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붓기 위하여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8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아내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 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9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냐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치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도다 10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11여호와께서 또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보라 내가 너와 네 집에 재앙을 일으키고 내가 네 눈앞에서 네 아내를 빼앗아 네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들이 네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12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온 이스라엘 앞에서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7-12)

나단은 비유를 통해 다윗이 죄를 깨닫고 회개하도록 유도합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사용하여 들을 귀 있는 자가 듣게 하셨습니다. 비유는 들을 귀하 없는 자는 깨닫지 못하는 반면, 듣고 깨닫는 자에게는 일반적 진술보다 몇 배의 충격을 가합니다.

 

(1) 여호와의 은혜(7-8)

나단은 다윗이 덫에 걸리자 곧바로 다윗을 옭아맵니다. 나단은 다윗에게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선언합니다. 다윗은 자신을 가난한 자와 동일시하고 부자의 죄에 대해 화를 내며 그에게 판결을 내렸을 것입니다. 당신이 죽일 놈이라고 선언한 그 사람이 바로 당신이라고 지적한 것입니다. 아마 다윗은 매우 당황스럽고 충격을 받았을 것이며 아무런 변명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필사적으로 숨기려 했던 죄를 나단 선지자가 알고 있다는 것에 당황했을 것입니다. 이런 다윗에게 나딘은 여호와의 말씀을 그대로 전합니다. 다윗을 왕으로 선택하고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사울의 모든 집과 아내들과 이스라엘과 유다를 주신 분이 바로 여호와라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 여호와 자신이 이스라엘과 다윗의 왕이심을 밝히십니다. 현재 다윗이 누리는 모든 지위와 힘과 재물은 모두 여호와께로부터 온 것이고 다윗은 여호와께서 세우신 종일 뿐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다윗에게 자신의 위치를 분명히 인식시켜주십니다.

 

(2) 다윗의 죄(9)

본문에서 다윗이 암몬 사람의 칼을 이용해 우리아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취하여 자신의 아내로 삼은 사실을 언급하시는데, 이것은 다윗이 필사적으로 숨기고 싶었던 모든 죄악들을 여호와께서 소상히 알고 계시며 다 보고 계셨다는 것을 다윗에게 알려주신 것입니다.

 

(3) 여호와의 심판(10-12)

이렇게 9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살인죄와 간통죄를 고발한 후에 10-12절에서 죄에 대한 심판을 하십니다. 첫째는 살인죄에 대한 심판으로 다윗의 집에서 영원히 칼이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다윗 왕가에 분란과 살인이 끊임없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으로 다윗이 우리아를 살해한 죄의 대가를 다윗의 집이 치르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간통죄에 대한 심판으로 여호와께서 다윗과 다윗의 집에 재앙을 일으키셔서 다윗의 치들을 다윗의 이웃들에게 주실 것이고, 그들은 대낮에 너의 차들과 동참할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다윗이 은밀하게 한 일에 대한 심판을 여호와께서는 모든 사람들 앞에 드러내놓고 하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다윗이 숨기려고 살인까지 한 것에 일침을 가하신 것입니다. 둘째 심판에서는 여호와께서 직접 분란을 일으키겠다고 말씀하시므로 이것은 더 심각한 심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살인과 간통에 대해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다윗의 회개(13-14)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오해한 채 즐겁지 않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종종 자신의 죄가 너무 크고 더러워 하나님께서 결코 용서하시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인하고 간음한 다윗을 용서하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 하나의 오해는 징계를 형벌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형벌하시면 그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13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14이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이 낳은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이다 하고(13-14)

다윗은 나단의 비유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 내용은 다윗의 범죄에 대한 엄혹한 징벌 예고였지만, 이에 다윗은 부정하지도, 가혹하다고 항의하지도 않았습니다. 다윗의 위대함이 여기에 있습니다.

 

(1) 회개와 용서(13)

하나님의 심판을 들은 다윗은 즉시 여호와께 범죄를 시인하며 용서를 구합니다. 이런 빠른 회개는 사울과 대조되는 것으로 사울은 죄를 지적받았을 때, 죄를 인정하지 않고 변명으로 일관하다가 용서의 기회를 놓쳤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즉시 죄를 시인하며 용서를 구하였고 여호와께서는 다윗을 용서하시어 다윗을 버리거나 죽이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다윗의 죄는 죽음으로 갚아야 할 죄인데, 하나님께서 다윗이 회개하므로 목숨은 살려주신 것입니다.

 

(2) 아들의 죽음 예고(14)

14절에서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다는 것은 다윗의 죄로 인해 여호와의 명성이 크게 훼손되었다는 것으로 다윗은 여호와의 종이기 때문에 다윗의 잘못된 행동은 왕이신 여호와의 명예에도 영향을 준다는 것입니다. 비록 다윗을 용서하셔서 살려주기는 하셨지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선언하신 심판들은 하나도 거두지 않으시고 다윗집에 하나하나 실현되기 시작합니다.

 


니체는 규범이나 관습, 책임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을 초인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 죄로부터 돌이키는 인간을 완전한 사람, 성숙한 인간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면에서 다윗은 신앙인의 귀감이 되며, 위대한 믿음의 조상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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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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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를 얻고 그것을 떠나지 말라

잠언 41-9


사사기는 다음세대가 다른세대가 되었다고 탄식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신앙의 유산이 전수되지 않고 세상의 문화와 가치관에 자녀들의 영혼이 점령당했습니다. 우리의 현실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젊은이와 어린이들을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을 보면 조국 교회에 있는가 싶은 생각마저 듭니다. 그 이유는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전수해주지 못했거나 전수해줄 신앙의 유산이 없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어떠한 대가를 지불해서 라도 명철을 얻어야 합니다. 지혜는 그 정도로 귀하고 소중합니다. 지혜는 사랑의 대상이므로 지혜와 지혜를 찾는 자 사이에는 상호적인 관계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아들이 애써 찾은 여인을 아내로 맞아 평생 사랑하고 충성하며 보호할 의지를 가져야 하듯, 지혜를 아내로 삼아 평생 친밀한 사랑과 주고받는 관계를 지속하며 살아야 합니다.

 

아버지의 훈계를 들어라(1-2)

부모들이 지혜의 삶을 산다면, 자식들에게 잔소리하지 않더라도 그들은 부모님 지혜의 삶을 물려받고 싶어 할 것입니다. 부모들이 여전히 세상적인 지혜를 통해 자식들이 세속적인 성공을 얻기만을 바란다면 앞이 캄캄합니다. 부모는 자식들에게 삶과 교육으로 하나님의 지혜를 교육해서 자식들도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이어가야 합니다.

 

1아들들아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명철을 얻기에 주의하라 2내가 선한 도리를 너희에게 전하노니 내 법을 떠나지 말라(1-2)

본 장은 자식들을 가르치기 위한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솔로몬은 구체적으로 훈계를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훈계에 집중할 것을 간곡히 당부합니다. 이 가르침은 개인적인 교훈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소개합니다.

잠언 4장은 1~9장에서 내 아들()로 시작하는 열 번의 강연 중 다섯째(1-9), 여섯째(10-19), 일곱째(20-27)에 해당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각 강연은 지혜를 얻고 사랑하라’, ‘악인의 길을 피하고 의인의 길로 가라’, ‘바른 길로 걸어라의 주제를 논합니다.

다섯째 강연에 해당하는 4:1-9은 다른 강연에서와 달리 내 아들아가 아닌 복수형의 아들들아로 시작합니다.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자신의 훈계를 듣고 명철을 얻는 데에 주의를 온전히 기울이라고 명합니다. ‘~하라혹은 ‘~하지 말라는 훈계는 잔소리처럼 들리기 일쑤라 아들이 이를 무시하고 싶을 것임을 아버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할아버지로부터 전수 받은 지혜의 교훈(3-9)

지혜는 가장 먼저 얻어야 할 가치입니다.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가르침의 골자는 지혜가 제일이기에 지혜를 얻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인생의 안전과 생명을 보장하며, 무엇보다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 어떤 대가를 지불한다 해도 반드시 얻어야 할 가치입니다.

 

3나도 내 아버지에게 아들이었으며 내 어머니 보기에 유약한 외아들이었노라 4아버지가 내게 가르쳐 이르기를 내 말을 네 마음에 두라 내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살리라 5지혜를 얻으며 명철을 얻으라 내 입의 말을 잊지 말며 어기지 말라 6지혜를 버리지 말라 그가 너를 보호하리라 그를 사랑하라 그가 너를 지키리라 7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네가 얻은 모든 것을 가지고 명철을 얻을지니라 8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9그가 아름다운 관을 네 머리에 두겠고 영화로운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하셨느니라(3-9)

자기의 훈계를 잘 듣고 명철을 얻으라고 조언하는 아버지는 자기가 아들들에게 전하는 이 훈계가 다름 아닌 자신의 아버지에게서 직접 들은 명령이었음을 밝힙니다. 이와 같은 대를 잇는 자식 교육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고 강론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습니다(4:9-10; 6:7). 또한, 자녀들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하신 일에 대해 부모에게 질문함으로써 계속적으로 교육을 받도록 격려되었ㅅ브니다(32:7). 부모가 자식을 훈육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키우는 전통은 이처럼 이스라엘 가정에서 계속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자신도 부모에게 아들이었고 더구나 그는 부모가 보기에 연약하여 애지중지 보살핌 받은 외아들이었다고 말합니다. 아버지의 이러한 표현은 첫째, 그 자신과 부모 사이에 연대감이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그와 같은 연대감은 이제 아버지가 된 자신과 자기 아들들 사이에서도 이미 형성되었습니다. 둘째, 아버지는 부모로부터 각별한 애정과 관심 속에서 지혜의 교육을 받았음을 알려줍니다. 부모가 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자기가 부모에게서 받았던 것과 같이 애정과 관심으로 그들을 교육하려고 합니다.

4절부터 아버지는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전수 받은 지혜의 교훈을 아들들에게 전합니다. 4-9절에 이르는 할아버지 말씀의 첫마디는 자신의 말들을 마음으로 단단히 붙들고 그 명령들을 지키고 살라는 훈계입니다. 내 말을 듣고 지키라는 말은 이제 부모가 된 아버지가 아들들에게 주는 조언의 첫마디가 되었습니다(1). 여기만이 아니라 1~9장 사이에 나오는 강연은 모두 이와 같은 내용의 명령으로 시작합니다(1:8; 2:1; 3:1; 4:1,10,20; 5:1;6:20; 7:1; 참고로 둘째 강연[2:1-22)은 조건절로 시작하지만 내용은 같다).

5-9절은 지혜를 얻고 사랑하라로 요약됩니다. 이 명령과 더불어 지혜를 얻은 결과로 따라오는 유익을 나열하여 듣는 이를 격려합니다. 먼저, 지혜를 얻으라 명철을 얻으라는 명령은 5절과 7절에서 반복되어 무엇보다 지혜를 꼭 얻으라는 간절함을 드러냅니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에게 이 명령을 잊지 말고 또한 여기서 벗어나지 말도록 경고합니다. 자신이 전해주는 귀중한 지혜의 유산을 아들이 늘 기억하여 그 말에서 떠나지 않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지혜를 얻으라는 명령은 지혜를 버리지 말고 사랑하라는 내용으로 이어집니다. 지혜는 단순히 얻어야 할 대상만이 아니라 사랑해야 할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를 찾는 자는 지혜를 얻어 일시적인 유의을 누리는 데서 끝내려 하지 말고 지혜를 열렬히 사랑하고 끝까지 지켜야 합니다. 그러면 지혜가 그의 사랑과 충성에 대한 응답으로 그를 보호하고 살피고 지켜줄 것입니다. 지혜가 지혜를 얻은 자를 악한 남자와 악한 여자로부터 지켜주고 바른 길로 인도한다고 예시한 2:11-22이 그런 예의 하나입니다.

이처럼 6-9절에서 지혜는 신부와 아내처럼 비유되었습니다. 이는 아들이 평생 함께할 신붓감을 찾는 일이 중요하고 그녀를 애써 찾아야 할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심혈을 기울여 신부를 찾고 그녀를 아내로 맞아 평생토록 사랑해야 하듯 지혜를 얻고 지혜를 끝까지 버리지 말고 사랑하라고 조언합니다. 이처럼 여자로 의인화된 지혜는 1~9장의 아버지의 강연(및 잠언) 전체에 걸쳐 나옵니다. 특히 4-7장은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훈계로서 지혜의 여인과 미련하고 음란한 여인에 대한 대조를 통해 지혜의 귀중함과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8-9장은 여인으로 의인화된 지혜가 여호와 하나님과 긴밀한 관계가 있음을 부각하고 우매에서 벗어나 지혜를 얻으려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찾아야 함을 보여줍니다.

한편, 6절의 지혜를 버리지 말라지혜가 너를 지키리라(보호하리라'로 번역됨)라는 문장은 각각 2절의 내 법을 버리지(‘떠나지로 번역됨) 말라4절의 내 명령들을 지켜라라는 문장에서 사용된 동사를 반복함으로써 아버지의 말씀이 지혜로운 말씀이며 아버지의 말을 지키면 지혜를 얻어 그 지혜가 아들을 지킬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와 같은 연결을 통해 아버지의 말씀이 지혜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강조합니다. 7절의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는 문장은 지혜의 시작(근본)’은 이것입니다. ‘지혜를 얻으라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지혜가 최상이며 동시에 기본이라는 이중적인 의미가 함축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혜가 제일이며 최고이고 지혜의 시작은 바로 지혜를 얻는 시도와 노력에서 비롯되므로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으로 명철을 얻어야 합니다. 마치 밭에 숨긴 귀한 진주를 발견한 상인이 그 진주를 얻기 위해 모든 소유를 팔아 밭을 산 것처럼(13:45-46) 어떠한 대가를 지불해서라도 명철을 얻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지혜를 돈으로 사라고 부추기거나 지혜를 돈으로 살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재물에 대한 관심이 많고 그 가치를 잘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지혜가 온갖 재물을 바꿔서 얻을 만할 정도로 귀하고 소중하다는 점을 강화하려는 의도입니다.

한편, ‘지혜의 시작(근본)’이라는 번역은 1:7이나 9:10을 상기시켜, 지혜를 얻는 데에 여호와 경외가 빠질 수 없음을 떠올리게 합니다. 또한, 위의 지혜를 얻는 방법과 관련하여,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데, 그 대가의 시작이 바로 여호와 경외입니다. 3장에서 잘 보여주듯이 여호와 경외를 바탕으로 하나님(3:1-12)과 이웃(3:21-35)을 사랑한다면 그 자가 바로 지혜를 얻은 자라고 불릴 것입니다.

지혜를 얻은 자는 신부를 사랑하듯 사랑하고 또 그녀를 높여주며 품에 안아주어야 합니다. 지혜를 높이라는 말은 지혜에 최고의 가치와 의미를 두며 지혜를 귀하게 여기라는 뜻입니다. 지혜를 품에 안으라는 말은 이제 지혜와 친밀하고 상호적인 사랑을 주고받으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6절에서처럼 지혜가 그의 사랑에 화답하여, 자기를 높여준 그를 높여주고 존경하여 영화롭게 해줄 것입니다. 마치 신부를 간절히 찾아 드디어 결혼이 성사되는 날 신랑이 영화로운 면류관을 수여 받듯이 지혜를 자신의 배우자로 얻은 자는 지혜로부터 아낌없는 사랑과 대접을 받을 것입니다. 9절의 아름다운 관이나 ;영화로운 면류관;이란 표현은 결혼식에서 신랑과 신부가 연합하는 것을 상징하는의미로 신랑의 머리에 관을 씌우는 전통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됩니다. 아름다운 관이나 면류관은 1:9에서 부모의 지혜로운 훈계를 듣는 자로 하여금 전쟁의 승리자에게 수여하는 화려한 승리의 관이나 새로이 직책을 맡은 관리에게 수여하는 금사슬을 상기시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부모의 가르침을 경청하는 자식이 형통하듯이 지혜를 평생의 배우자로 삼아 사랑하고 높이고 품는 자는 보호와 존귀와 영광을 얻게 됩니다.


지혜는 가장 먼저 얻어낼 가치입니다. 조상에게 물려받은 가르침에 골자는 지혜가 제일이기에 지혜를 얻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인생의 안전과 생명을 보장하며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가진 모든 것을 다 죽어서라도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이는 밭에 감춘 보물을 발견한 사람이 자신의 전 소유를 지불하여 보물을 얻는다는 비유로 떠오르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지혜로써 우리에게 진정한 안전과 생명을 가져다 주십니다. 당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녀들에게 세상의 돈이나 명예 권력 학식보다 하나님의 지혜를 얻는 것이 우리의 모든 것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가르치고 있습니까? 당신과 우리 가족이 가장 먼저 구해야 할 것이 지혜라는 것,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살아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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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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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아를 죽이고 밧세바를 아내로 삼는 다윗

사무엘하 1114-27


 

죄를 범하면 그 죄를 숨기려고 계속적인 죄가 뒤따라옵니다. 겉으로 죄악을 숨기고 거룩한 것처럼 보이려 노력했겠지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매우 악한 모습으로 점점 망가져 갑니다. 다윗은 간음한 이후에 자신의 죄를 감추려고 자신의 충신을 살인까지 죄를 범합니다. 잠언에서는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28: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은 요압과 그의 군사들이 암몬과 전쟁하는 사이 옥상에서 목욕하는 밧세바를 보고 데려다 동침하는 간음죄를 범합니다. 그런데 밧세바가 임신을 함으로써 다윗의 죄가 들통날 위기에 처하자, 그는 남편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불러내어 밧세바와 동침하게 하여 밧세바가 임신한 아이를 우리아의 아기로 만들려는 악한 시도를 합니다. 하지만 우리아의 충직함 때문에 다윗의 이런 시도가 실패하자, 본문에서 다윗은 또 다른 음모를 꾸밉니다.

 

우리아의 죽음(14-17)

죄는 은밀하고 점진적인 과정을 거칩니다. 처음에는 작은 충동으로 시작했던 죄가 점점 눈덩이처럼 무서운 죄로 불어납니다. 나중에는 헤어 나올 수 없을 정도로 커져 버립니다. 죄가 이처럼 죄를 감추려는 사람을 무서운 사람으로 만듭니다. 죄의 잔악함이 우리를 얼마나 비참한 모습으로까지 몰고 가는지 알 수 있습니다.

 

14아침이 되매 다윗이 편지를 써서 우리아의 손에 들려 요압에게 보내니 15그 편지에 써서 이르기를 너희가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에 앞세워 두고 너희는 뒤로 물러가서 그로 맞아 죽게 하라 하였더라 16요압이 그 성을 살펴 용사들이 있는 것을 아는 그 곳에 우리아를 두니 17그 성 사람들이 나와서 요압과 더불어 싸울 때에 다윗의 부하 중 몇 사람이 엎드러지고 헷 사람 우리아도 죽으니라(14-17)

다윗은 우리아를 죽여서라도 죄를 은폐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은폐하려고 할수록 더 많은 사람이 알게 됩니다. 요압을 시켜서 우리아를 궁지에 빠뜨려 죽이라고 시킵니다.

 

(1) 다윗의 편지(14-15)

다윗은 우리아를 자기 집으로 보내서 아내와 동침함으로 자신의 간통죄를 숨기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간밤에도 우리아는 자기 집에 가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는데도 멈추지 않습니다.

요압에게 쓴 편지를 우리아의 손에 들려 전쟁터로 다시 보냅니다. 그 편지 내용은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에 앞세워 두고 너희는 그만 남겨 두고 돌아와 적들에게 죽게 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우리아를 전장에서 적과 싸우다 전사한 것처럼 꾸며 죽이라고 한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간통죄를 덮기 위해 살인이라는 더 큰 죄를 계획하였습니다. 그 계획을 우리아 본인의 손에 들려서 요압에게 보내는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행동을 합니다. 구약 전체에서 가장 잔인한 살인 방법입니다.

이 편지를 받은 요압은 다윗의 의도를 분명히 알고, 확실하게 성공하기 위해 일부러 암몬 군사들 중에 가장 용맹한 군사들이 있는 곳을 알아내어 그곳으로 우리아를 보냈습니다.

 

(2) 우리아의 죽음(16-17)

암몬 사람들이 성에서 나와서 요압과 전쟁한 결과 다윗의 부하들 중에 몇 명이 죽었습니다. 그들 중에 우리아가 속해 죽었습니다. 우리아 한 명을 죽이기 위해 그와 같이 있던 다윗의 부하들도 목숨을 잃게 한 것입니다. 결국 신실하고 우직하게 다윗에게 충성하던 우리아는 다윗에게 아내도 빼앗기고 목숨까지 빼앗기는 가장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였고, 죄 없는 부하들도 살해당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 너무 많은 무죄한 피를 흘리게 하였습니다.

전에 다윗이 자신을 조롱한 나발을 죽이려고 할 때는 지혜로운 아비가일이 다윗을 막아 무죄한 피 흘리는 것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윗을 막는 사람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요압은 오히려 다윗의 계획을 실행해주면서 우리아뿐만 아니라 아무런 관계도 없는 다윗의 부하들까지 죽인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바라볼 때는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다윗이 죄짓는 것을 막아주셨지만, 다윗이 더 이상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채 자신의 욕망대로 행할 때,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개입하지 않고 내버려 두십니다. 그동안 다윗은 하나님께 은혜를 많이 받았고 이때는 인격적이고 모범적인 모습을 오래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진 지금의 다윗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여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살인도 서슴지 않는 잔인무도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런 다윗의 모습을 보면서 인간이란 존재가 기본적으로 얼마나 악한 본성을 지니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요압의 보고(18-25)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먹고 숨은 아담과 하와를 찾아오셨습니다. 또한 다윗에게도 찾아오셨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죄악을 해결해주시길 원하십니다. 죄인이 죄를 해결할 순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이 진리 앞에 섰을 때, 죄의 문제는 해결 받을 수 있습니다. 마음속에 무거운 짐들이 모두 해결 받고 매우 자유스러울 것입니다.

 

18요압이 사람을 보내 그 전쟁의 모든 일을 다윗에게 보고할새 19그 전령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전쟁의 모든 일을 네가 왕께 보고하기를 마친 후에 20혹시 왕이 노하여 네게 말씀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성에 그처럼 가까이 가서 싸웠느냐 그들이 성 위에서 쏠 줄을 알지 못하였느냐 21여룹베셋의 아들 아비멜렉을 쳐죽인 자가 누구냐 여인 하나가 성에서 맷돌 위짝을 그 위에 던지매 그가 데벳스에서 죽지 아니하였느냐 어찌하여 성에 가까이 갔더냐 하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왕의 종 헷 사람 우리아도 죽었나이다 하라 22전령이 가서 다윗에게 이르러 요압이 그를 보낸 모든 일을 다윗에게 아뢰어 23이르되 그 사람들이 우리보다 우세하여 우리를 향하여 들로 나오므로 우리가 그들을 쳐서 성문 어귀까지 미쳤더니 24활 쏘는 자들이 성 위에서 왕의 부하들을 향하여 쏘매 왕의 부하 중 몇 사람이 죽고 왕의 종 헷 사람 우리아도 죽었나이다 하니 25다윗이 전령에게 이르되 너는 요압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이 일로 걱정하지 말라 칼은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삼키느니라 그 성을 향하여 더욱 힘써 싸워 함락시키라 하여 너는 그를 담대하게 하라 하니라(18-25)

요압은 다윗의 명령에 충실히 이행하여 우리아를 죽게 합니다. 그는 다윗의 진정한 충신이었습니다. 왕이라도 잘못된 결정을 하면 목숨을 걸고 반대하고 막을 줄 알아야 충신입니다. 다윗에게 죄는 숨긴다고 감추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라도 남김없이 다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1) 요압의 지시(18-21)

우리아를 죽인 요압은 이 소식을 다윗에게 알립니다. 그 전령에게 전쟁의 모든 상황을 왕에게 보고한 후에 혹시 왕이 요압의 군대가 성에 너무 가까이 가서 전쟁에서 부하들이 죽은 일에 대해 화를 낼 경우 헷 사람 우리아도 죽었다는 말을 하라고 일러줍니다. 이것은 다윗의 목적이 달성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면 모든 잘못을 덮어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요압의 말을 종합해보면, 요압은 성문을 열고 나온 암몬과 전투하다가 우리아 부대에게 가장 위험한 곳인 성 바로 앞까지 쫓아가게 만들어놓고 자신의 부대는 회군해버리고, 결국 우리아와 우리아의 부대는 성에서 날아오는 화살과 창과 돌 등에 맞아 죽게 되었습니다. 요압은 일부러 우리아가 암몬 사람의 화살에 맞아 죽도록 성 바로 앞까지 보낸 것입니다.

21절에서 요압은 성 위에서 여자가 던진 맷돌에 맞아 죽은 여릅바알의 아들 아비멜렉의 예를 들면서 다윗이 화를 낼 것을 예상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여룹바알 대신 여룹베셋이라고 하였는데, 이 단어는 여기에 단 한 번 나오는 것으로 여룹바알에 대한 잘못된 표기인 것 같습니다. 여기서 아비멜렉은 성 가까이 다가갔다가 맷돌에 맞아 죽은 어리석은 인물의 예로 나타납니다.

 

(2) 전령의 보고(22-24)

전령이 다윗에게 와서 요압이 일러준 대로 보고하는데 전쟁의 상황이 세 번 반복되는 이야기 중에서 가장 자세하게 다루어지고 있으며, 우리아가 어떻게 죽었는지 자세하게 알 수 있습니다. 전령은 보고의 맨 마지막에 왕의 부하들의 죽음과 함께 우리아의 죽음을 알립니다. 우리아의 죽음을 들은 다윗은 전쟁에서 피해를 본 것에 대해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걱정하지 말라고 요압을 위로합니다. 그러면서 칼이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삼킨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다윗의 부하들의 죽음은 전쟁에서 항상 일어날 수 있는 병가지상사이니 크게 신경 쓸 필요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요압이 우리아를 죽이기 위해 다윗의 부하들까지 같이 죽인 것에 대해서 염려하지 말라는 위로의 말이며, 우리아를 죽어준 것에 대해 간접적으로 감사를 표현한 것입니다. 다윗은 전령에게 이제 힘을 다해 성을 함락시키라는 명령을 전달하라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를 담대하게 하라고 명령하는데, 이것은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고 전쟁에 온 힘을 다하라는 의미로, 요압이 우리아를 죽인 일에 대해 자신이 매우 만족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 것입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죽음 소식에 매우 만족해하며, 이 일로 목숨을 잃은 자신의 부하들에 대해서는 조금도 미안해하거나 애도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아의 장례(26-27)

우리가 알고도 죄를 짓는 것을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시고 결국 행한 대로 심판하시는 분임을 안 믿어서 그렇습니다. 믿음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 믿음을 어디에 쓸 것입니다. 우리아의 전사 소식을 들은 다윗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시길 바랍니다.

 

26우리아의 아내는 그 남편 우리아가 죽었음을 듣고 그의 남편을 위하여 소리내어 우니라 27그 장례를 마치매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를 왕궁으로 데려오니 그가 그의 아내가 되어 그에게 아들을 낳으니라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26-27)

우리아의 죽음에 대한 한줄평이 세 번 반복되는 동안 다윗은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일으키지 않습니다. 오직 완전범죄라고 여기며 안도할 뿐입니다. 이런 다윗에 대해 성경 저자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라는 한줄평으로 다윗에 대해 평가합니다.

 

(1) 곡하는 밧세바(26)

우리아가 죽었다는 사실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에게 알려졌고, 그녀는 남편을 위해 애곡하며 우리아를 위해 장례를 치러줍니다. 보통 이스라엘에서의 애곡의 기간은 7일이며, 다윗은 이 기간이 끝나자 바로 밧세바를 왕궁으로 데리고 와서 아내로 삼습니다.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서는 시간을 지체하면 안 되기 때문에 여기서도 다윗은 매우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런 다웠의 행동을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죽은 부하의 아내를 자신의 부인으로 삼아서 돌보아주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다윗에 대해 좋게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2) 결혼하는 밧세바(27)

마침내 다윗은 간통했다는 명예를 실추당하지 않고 자신의 계획대로 밧세바를 아내로 맞이하고 그녀를 통해 아들도 얻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아마도 자신의 죄를 잘 숨겨 명예를 지켜냈고 예쁜 아내와 아들까지 얻었다고 만족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27절 마지막에 화자는 다윗의 모든 행동을 지켜보고 계셨던 여호와의 평가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다윗이 행한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아무도 모르게 성공적으로 고비를 넘겼다고 생각하였지만, 여호와께서는 이런 다윗을 악하게 보시며 다윗이 저지른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실 준비를 하고 계셨습니다.

 


먼저는 죄악을 감출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지만, 하나님은 절대로 속일 수 없습니다. 다윗의 행동을 보시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악하다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다윗은 지금까지 자신의 권력으로 죄를 가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눈을 가릴 수 없었습니다. 다윗처럼 계획대로 죄를 감추는 것이 성공했다고 해서 다 되었다라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죄를 감추고 은닉하려고 애쓰지 말고 정직하게 회개하는 것이 우리가 살길이라는 것을 잊지 않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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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08-03)

 


흑암의 권세를 물리치신 예수님

마태복음 823-34


기독교 내에서 봉사하면 대단히 믿음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봉사한다 할지라도 믿음 없이 봉사할 수 있습니다. 마치 사회단체에서 봉사하는 것처럼 자신의 명예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역하는 목적에는 영혼을 구원하는데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에워싸는 무리를 피해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기 위해 먼저 배에 오르시고, 제자들도 뒤따릅니다. 제자들은 향해 도중 큰 풍랑을 만나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모습에 믿음이 적다 꾸짖으시며 풍랑을 잠잠케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은 가다라 지방에서 귀신 들린 두 사람을 고치실 때, 다시 한번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를 목격합니다. 하지만 그 지방 사람들은 오히려 예수님께 떠나 주시기를 요청합니다.

 

광풍을 잔잔케 하신 예수님(23-27)

이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지만, 말씀을 거역하여 무너졌습니다. 무너진 세상은 이제 창조주 예수님의 말씀으로 새롭게 창조되어 세상의 혼돈과 무질서와 어둠이, 질서와 채움과 빛으로 변할 것임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인정하고 그 분을 믿고 그 분과 연합될 때만 우리에게도 새로운 창조가 가능한 일입니다.

 

23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더니 24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25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26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27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23-27)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에 임하게 하셨다는 여러 가지 사건들을 보게 됩니다. 필연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이 세상 나라와의 영적인 전쟁을 가져 옵니다. 지금도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백성답게 살자고 하면, 반드시 이 세상 나라의 저항을 가져옵니다.

 

(1) 위기를 마주한 제자들(23-25)

혼돈과 죽음의 세력은 제자들을 두렵게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에게서 평안을 빼앗지는 못했습니다. 도리어 예수님께서는 귀신을 꾸짖듯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잔잔케 하셨습니다. 광풍을 잠잠하게 하신 사건은 8-9장에서 유일하게 자연에 대해 행하신 기적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배를 타고 동쪽을 향해 가던 중에 큰 광풍이 갑자기 몰아쳐 배를 뒤덮었습니다. 갈릴리 바다는 갑자기 광풍이 몰아치는 것으로 유명한 호수입니다. 예수님과 일행이 탄 배는 침몰 직전입니다. 하지만 배가 뒤집힐 상황인데도 예수님께서는 자고 계십니다.

 

(2) 위기를 해결해주시는 예수님(26-27)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우며 죽게 됐으니 구원해 달라고 외칩니다. 머리 둘 곳 없이 순회하며 사역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이 순간에도 피곤한 몸으로 배 위에서 자고 계십니다제자들이 두려워하는 모습은 잠을 자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과 대조적인데, 마태는 하나님께서 지켜주실 것을 믿고 평안 가운데 계신 예수님의 믿음을 강조하고 있습니까(3:35; 4:8)? 이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구약에서 잠은 깊은 신뢰와 관련이 있는 점을 고려할 때(11:18-19; 3:35; 3:24-26), 마태가 예수님의 평온과 제자들의 근심을 대조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27절에서 예수님의 권위에 충격을 받은 제자들이 고백한 말은 예수님의 신적 권위를 떠올립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자고 계신 것은 땅에서 머리 둘 곳 없이 사시는 그의 고난을 묘사하는 동시에, 역설적으로 그가 하나님만이 행하시는 권위를 갖고 계신 분임을 암시합니다. 누구도 예수님을 위협할 정도로 그분의 권위 위에 있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평안히 계십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두렵게 할 수 있는 존재는 없으므로, 가장 강한 자로서 편안하게 주무신 것입니다시편 121편은 하나님께서 주무시지 않는 분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정반대로 시편 44:23-24은 주무시는 하나님을 깨우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비슷한 내용은 시편 7:7; 35:23; 59:5-6에도 등장합니다. 특히 시편 44:23-24은 풍랑을 만난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면서 하는 말과 매우 유사합니다. 따라서 본 사건에서 강조하는 것은 예수님의 믿음이 아니라 제자들의 믿음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평안했던 예수님이 아니라 바다를 잠잠하게 만들 수 있는 신적 권위를 가진 예수님의 정체를 강조합니다. 물론 제자들의 호소가 시편의 내용을 떠올린다고 해서 그들이 예수님을 신적인 존재로 믿고 깨운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우면서도 이 순간에는 그의 정체를 정확히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는 어려움에 빠진 자녀가 대단한 재력가인 아버지의 실제 능력을 알지 못한 채 자신의 처지에 무관심한 것처럼 보여서 왜 자식의 어려움을 돌아보지 않는지 원망하는 투로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제자들이 온 바다가 진동하는 모습을 보면서 겁에 질리게 된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반응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책망을 받습니다. 자신들과 함께 계시는 예수님께서 자연을 통제하는 분임을 아직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제자들의 두려움은 예수님의 정체를 정확히 알지 못해서 생긴 것입니다. 제자들은 바다를 잠잠하게 만들 수 있는 하나님의 권능을 갖고 계신 것을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정제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이 믿음이 작은 상태이며, 믿음이 작을 때 두려움이 엄습하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겁에 질린 제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일어나 바다를 꾸짖으셨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바다를 꾸짖으시는 분입니다(18:15; 104:7; 106:9, 50:2; 1:4). 특히 구약과 유대교에서 바다는 혼돈의 세력이 나오는 출처로 인식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바다를 제압하는 주가 되십니다(89:8-11; 107:23-30; 참조 시 69:13, 30-36; 124; 1).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자연을 통제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위협하는 악의 세력을 제압하십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목격한 제자들은 놀라서 그가 누구이기에 심지어 바람과 바다도 그에게 복종하는지 묻습니다. 제자들은 폭풍과 같은 인생의 위기에서 예수님의 보호를 경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택하신 자들과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입니다. 임마누엘인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제자 공동체를 보호하신 것처럼, 시대의 끝까지 시대를 초월해서 교회에 긍휼을 베푸는 것으로 함께 하십니다.

죄로 무너진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말씀으로 새 창조되어 혼돈과 무질서와 어둠이 질서와 채움과 빛으로 변할 것임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주님으로 자신의 삶에 선장으로 모시고 살면 거칠고 험난한 인생 항해에서도 편히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귀신 들린 사람들을 치유(28-34)

귀신은 질서를 망가뜨리고 혼돈을 일으킵니다. 복음을 방해하기 위해 하나님의 사람들을 처참하게 죽음을 맞이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상인 인격을 철저하게 파괴시켰습니다. 사실 하나님을 떠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귀신에 붙들려 무덤 사이에서 사는 두 사람과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귀신은 예수님을 만나고 그의 권능 앞에 서게 됩니다.

 

28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그들은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지경이더라 29이에 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30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먹고 있는지라 31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하여 이르되 만일 우리를 쫓아 내시려면 돼지 떼에 들여 보내 주소서 하니 32그들에게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 33치던 자들이 달아나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 들린 자의 일을 고하니 34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28-34)

예수님께서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어두운 세력들로부터 사람들을 구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고 계셨습니다. 그들은 귀신 들린 자들이었습니다. 그분은 이제 자시가 악의 세력과 싸워 그들을 정복했다는 사실을 세상으로 하여금 알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1) 누구도 가지 않는 곳에 가심(28a)

예수님께서는 제자 일행과 함께 갈릴리 호수 동쪽에 위치한 데가볼리의 가다라 지방에 도착합니다. 이 도시는 유대인이라면 아무도 가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을 향해 감으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곳에서 처음 만난 사람은 귀신 들린 두 사람이었습니다. 두 명은 법정에서 증언할 수 있는 숫자의 개념입니다.

 

(2)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자(28b)

귀신 들린 사람들은 무덤에서 나와 예수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그들의 상태는 사람들을 몹시 폭력적이고 위험했기 때문에, 사람들을 해칠 수 있었습니다. 그 옆으로 지나갈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마을에서 쫓겨나서 무덤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당시 무덤은 우리나라처럼 평토장(平土葬)이 아니라 바위나 언덕에 동굴의 모습으로 사람이 충분히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이 됩니다.

 

(3) 악한 귀신의 최후에 심판을 귀신들(29-30)

귀신 들린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서 따지고 묻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29)라고 귀신은 예수님의 신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귀신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온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귀신들은 우리가 당신과 무슨 관계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서로의 관심이 다른데 왜 이곳을 찾아왔느냐는 의미입니다.

어둠의 권세 잡은 사단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온전히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이렇게 온전한 인간의 몸으로 오신 것은 십자가에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귀신 들린 자들이 예수님께서 때가 이르기 전에 왜 오셨는지 묻습니다. ‘는 귀신들이 형벌의 장소로 보내지는 시기로, 악인들과 함께 악한 천사들이 심판을 받는 최후 심판의 때를 의미합니다. 심판의 결과로 귀신들은 지옥의 형벌을 받습니다(25:31-46). 귀신은 자신들의 운명과 자신들의 마지막 때를 알고 있었습니다그들은 자신들을 괴롭히다라는 의미는 법정에서 육체적으로 고통을 준다또는 고문하다는 의미로, 극심한 고통을 묘사하는 동사입니다. 본문에서는 종말론적인 심판을 의미합니다. 귀신들은 자신들이 고통당할 때, 즉 최후 심판의 때가 있습니다. 아직 그 때가 오지 않았는데 굳지, 왜 예수님께서 벌써 자신들에게 왔는지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지 않자 귀신들은 자신들을 심판하러 온 것을 직감하고 멀리 있는 돼지 떼에게 들어가려고 쳐다보았습니다. 당시 로마가 집권하고 있는 헬레니즘 문화는 돼지를 부와 쾌락 신의 축복의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데가볼리 지역은 주전 63년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에게 협력하면서 자치와 통상, 면제의 특권을 부여받았고, 친 로마 성격으로 도시 동맹체 성경을 유지하며 로마식 제사를 통해 돼지를 잡아 드렸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유대인들은 이 지역을 배척했습니다주전 63년에 안티파스가 유대를 침공한 후에 예루살렘 성전을 훼파하고, 돼지를 성전 재단에 바쳤습니다. 로마 제국 입장에서 유대인들을 모독하기 위한 행위가 아닙니다. 이러한 종교 행위를 통해 헬레니즘 문화권의 영향력을 증험하는 행동일 뿐입니다. 데가볼리 지역은 돼지를 잡아 제사하는 것이 일상적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곳에서 돼지를 사육하고 2000마리 가까운 돼지를 사육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한 가지 큰 구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돼지를 이렇게 많이 사육하고 있었던 것은 단순하게 경제논리가 아니라 로마 황제를 숭상하는 행위들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보편적인 사람들의 인식에는 로마 황제는 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과 신의 아들의 대결이었습니다. 그러나 천지를 만드시고 세상의 주권을 소유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을 자신의 것이라고 오해하고 헬레니즘 문명이라는 미명 아래 점점 자신들의 세력을 확대해 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지역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상징적으로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사실을 제자들에게 보여줍니다.

자신들의 운명을 알아챈 귀신들은 돼지 떼에 들어갈 수 있게 허락해 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귀신들의 요청을 들어주십니다. 결국 돼지 떼는 물에서 몰사 합니다(32). 돼지들은 악하고 폭력적인 귀신들을 견디지 못해서 바다를 향해 달려가 죽습니다.

 

(4) 탐욕스러운 자들에게 거절당하심(33-34)

이 많은 돼지를 치던 자들의 보고하기 위해 시내에 들어갔습니다. 그 보고를 받은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려고 사건이 일어난 곳으로 달려왔습니다(33). 그리고 그들은 광경을 본 사람들은 예수님께 자신의 지방에서 떠나 달라고 요구합니다(34). 그들을 지배하고 있던 의식이 무엇입니까? 경제적인 이유로 예수님을 떠날 것을 요청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돈이 자신을 보호하고 안전하게 지켜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다시 찾아올 수 없는 복음의 유일한 기회를 내쳐 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치유보다 돼지를 더 중히 여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도시를 집으로 삼은 귀신들을 쫓아내심으로써 현재와 미래의 가장 큰 위험을 제거하셨으나, 주민들은 예수님의 행위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제자들을 태우고 바다를 건너서 본 동네로 가버립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하늘나라의 도래와 관련해서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귀신들이 들어온 돼지들이 죽은 장면은 귀신들의 운명도 지상에서 사라질 것을 암시합니다. 마태복음에는 무저갱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지 않지만, 귀신들이 돼지 떼와 함께 물속에 던져진 것은 귀신들이 최후 심판 전까지 물아래 심연 또는 무저갱에 갇혔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합니다. 병행 본문인 누가복음 8:26-3931절에서 귀신들이 무저갱에 던져 넣지 말아 달라고 간청합니다. 귀신들이 심연에 갇히는 그림은 하늘나라가 예수님의 권위로 강력하게 임했음을 증명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지고 오신 하늘나라의 공격을 받아 사탄의 나라가 무너지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예수님의 이동 경로를 통해서 사회에서 쓸모없는 인생을 위해 헌신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회에서 완전히 추방된 사람을 만나려고 바다 폭풍을 뚫고 이곳에 오셨고, 회복하고 다시 돌아가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제자들을 데리고 오셔서 긍휼을 가르치기 위해 현장 교육을 하신 것입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부정한 곳에서 부정한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은 치유할 가치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을 위해 사회에서 효용 가치가 높은 것을 희생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안 해서 낭비로 여깁니다. 그러나 제자는 죽어가는 사람을 회복하는 사명을 맡았습니다. 사람의 목숨은 천하보다 귀합니다. 낭비처럼 보일지라도 사람을 회복하는 일이라면 하늘나라의 사역입니다.

 


믿음이 작을 때 환경에 흔들리게 됩니다. 갈릴리 바다에 큰 물결이 일어나 배가 잠기게 되자 어부 출신 제자들조차 죽음에 두려움에 사로잡혀 예수님을 깨우며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잠에서 깨어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믿음이 작은 것을 책망하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창조주 만유의 주로 고백하고 함께하신다는 것을 믿고 있다면서도, 때로는 환경 때문에 쉽게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인생의 배에 누가 타고 있는지 기억하기 바랍니다. 우리 인생의 배에 우리가 저항할 수 없는 큰 풍랑이 일지라도 그 배에는 예수님께서 함께 계십니다. 우리 인생을 다스리고 주 대신 그 주님께 믿음의 눈을 들어 바라보며 폭풍 가운데도 평안을 누리는 주의 백성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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