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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06-01)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려는 다윗

사무엘하 6장 1-11절


자동차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여 원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면 문명의 유익된 기계입니다. 하지만 브레이크가 고장 난 채로 굴러다니는 자동차는 문명의 흉기가 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이 품고 있는 ‘열심’은 어떠한 중요한 일을 이루는 중요한 에너지가 되지만, 적절히 통제되지 않고 사용될 때 오히려 잘못된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특별히 신앙적인 열심은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통해서 통제될 때, 큰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통일 왕국의 기초가 세워지고 안정과 번영이 찾아오자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셔야 함을 알았기에 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오기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궤’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계심과 동일한 의미가 있음을 인식합니다(민수기 10:35-36). 그러나 이 궤를 옮겨오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사람의 생각으로 행함으로 실수를 범합니다.


예루살렘으로 옮기려는 언약궤(1-5)

성도는 자신의 생각과 행동의 중심에 하나님 두기를 소망해야 하며 그것을 중요한 일로, 기쁨으로 여겨야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왕으로 모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과 행동의 중심에 하나님을 두는 것을 말합니다.

1다윗이 이스라엘에서 뽑은 무리 삼만 명을 다시 모으고 2다윗이 일어나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바알레유다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 하니 그 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라 3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 4그들이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싣고 나올 때에 아효는 궤 앞에서 가고 5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은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연주하더라(1-5)

예루살렘을 통일 왕국의 수도로 삼고 통치를 시작한 다윗은, 왕궁을 짓고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승리합니다. 어느 정도 안정된 다윗은 하나님을 향해 관심을 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 오려 했습니다.

(1) 다윗의 계획(1-2)

다윗은 이스라엘 지역이 블레셋의 지배에서 벗어나고 나라가 안정되자 하나님의 궤, 즉 언약궤를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으로 가져오려고 했습니다. 당시 궤가 있던 곳은 사무엘상 7장에 나와 있지만, 블레셋에 빼앗겼다가 돌아온 이후로 계속적으로 유다의 바알레(기럇여아림)에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 군사 30,000명을 모으는데 언약궤를 옮기는 것을 마치 대규모 군사작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매우 성대하게 거행합니다.

다윗이 바알레유다로 가는데 ‘바알레유다’라는 지명에 대해 학자들은 대부분 유다의 ‘바알라’로 보는 것에 동의합니다. ‘바알라’는 여호수아 15:9에서 ‘기럇여아림’으로 불리며, 여호수아 10:60과 18:14에서는 ‘기럇여아림’으로 불리며, 여호수아 15:60과 18:14에서는 ‘기럇바알’을 ‘기럇여아림’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알레유다와 바알라와 기럇여아림은 모두 같은 지명을 의미합니다. 기럇여아림은 예루살렘과 게셀 중간에 있으며, 이곳은 기브온 사람들의 중요 성읍이었습니다. 사무엘상 7:2에 따르면 블레셋에게 뺴앗겼던 언약궤가 돌아온 이후부터 20년 동안 이곳에 있었습니다.

2절에서 하나님의 궤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그룹들 사이에 계시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불리는 궤라고 합니다. 이것은 언약궤가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하는 물건이라는 의미입니다. 다윗은 현재 왕국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에 자신이 섬기는 여호와를 모셔둠으로써 예루살렘을 정치적 종교적 중심지로 굳건하게 세우려 하고 있습니다.

(2) 언약궤를 싣고 가는 수레(3)

다윗은 언덕 위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새로 만든 수례에 싣고 옮겼습니다. ‘산’이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언덕’정도의 나지막한 구릉입니다.

하나님의 궤를 옮기는 데 새 수레를 사용한 것은 어떤 부정한 것도 접하지 않은 정결한 상태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수레는 한 번도 사용하지 않고 오직 궤를 옮기기 위해 특별히 정결하게 만든 수레였습니다. 그리고 이 새 수레는 제사장 아비나답의 아들들인 웃사와 아효가 몰았습니다. 이것은 거룩한 언약궤를 정결한 방법으로 옮기려는 다윗의 배려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도 제사장 아비나답도 언약궤를 옮기는 정확한 방법을 몰랐습니다. 사무엘이 죽은 후 이스라엘에는 뛰어난 영적 지도자가 등장하지 않았고,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보다는 자신의 욕망을 따라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며,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제사장을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에 하나님을 바로 섬기지 않는 왕이 있는 동안 하나님의 말씀도 제대로 전수되거나 교육되지 않았으며, 제대로 지켜지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을 보면 지도자의 위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원래 언약궤는 출애굽기 37:5에 따르면 메도록 만들어졌으며 민수기 7:9에서는 고핫 자손에게 언약궤를 메는 임무가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방법을 무시하고 수레로 옮기려고 한 것입니다. 이들이 수레로 언약궤를 옮기려고 한 것은 블레셋 사람들의 방식을 따른 것입니다. 사무엘상 6장에서 블레셋 사람들이 궤를 돌려보낼 때 암소 두 마리가 이끄는 새 수레에 실어서 보낸 적이 있습니다. 이것을 기억하고 있던 사람들이 이 방식으로 언약궤를 운반하려고 한 것입니다. 제사법과 성막 관리의 전문가인 제사장도 언약궤를 옮기는 법을 제대로 모르고 있었을 만큼 다윗 시대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쳐지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3) 언약궤를 수행하는 행렬(4-5)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레에 언약궤를 싣고 나오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아비나답의 아들 아효는 그 궤 앞쪽에서 걸어갔고 다른 아들인 웃사도 수레 옆에서 걸어가고 있었고,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뒤를 따랐을 것입니다.

다윗과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당시에 사용되는 악기를 총동원하여 연주하며 흥겨워하였습니다. 언약궤 수레 뒤를 쫓아가며 연주하고 다윗과 백성들은 기뻐 춤추며 흥겨워하는 축제의 한마당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흥겨운 분위기를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은 다음 단락에 나오는 비극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언약궤를 만짐으로 웃사가 죽음(6-8)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며 죄인과 함께해 주셨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은혜를 구하며 살아갑니다. 그 은혜에 감사하며 자신의 뜻과 마음대로 살아가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은혜 속에 존재하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그 은혜를 알아 가야 합니다.

6그들이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7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 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8여호와께서 웃사를 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 곳을 베레스웃사라 부르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6-8)

다윗은 하나님의 법을 어긴 웃사를 치시는 여호와를 보면서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 오리요’하며 두려워했습니다. 이처럼 성도는 자신이 두려우신 하나님과 결코 함께할 수 없었던 불의하고 더러운 죄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죄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의 대상이었습니다.

(1) 언약궤를 붙잡은 웃사(6)

언약궤를 실은 수레와 무리들이 나곤의 타작마당까지에 왔을 때, 소들이 갑자기 움직여 언약궤를 떨어뜨릴 위기에 처했습니다. 소들이 왜 이렇게 움직였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지만, 아마 기럇여아림에서 예루살렘까지 가는 길이 주로 산지를 거치면서 평탄하지 못한 곳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수레 옆에서 수행하던 웃사는 언약궤가 크게 흔들리는 것을 보고 반사적으로 언약궤를 붙잡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웃사는 언약궤가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급한 마음에 언약궤에 손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웃사가 올바른 판단을 내렸다고 하더라도, 웃사가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침범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는 붙잡지 말아야 하는 언약궤를 붙잡았습니다.

(2) 하나님의 진노(7)

하나님께서 이런 웃사의 행동에 진노하셨습니다. 그곳에서 그를 죽이셨습니다. 웃사가 죽은 이유는 그의 부주의한 행동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웃사를 죽이신 것이 너무 가혹한 처벌이 아닌가라는 논란이 있습니다. 구약에서 제의적인 잘못으로 죽은 경우는 레위기 10장에서 나답과 아비후가 여호와께서 명하지 않은 불로 향을 피우다 그 자리에서 불에 타 죽은 일이 있었는데, 이 경우도 고의적이라기보다는 부주의한 행동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여호와의 성물을 만지거나 여호와께 제사를 지낼 때는 특별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이렇게 여호와의 거룩성을 침해한 제사장의 경우에는 다른 사람들보다 심한 처벌을 받았고, 제사장들은 늘 자신을 거룩하게 성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모든 제사와 행사를 수행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했습니다. 언약궤가 떨어지는 것을 그냥 두는 것이 옳은지 여부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언약궤가 떨어지게 만든 것도 하나님의 의지라고 해석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언약궤를 수레로 옮기는 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려주기 위해서 소들이 언약궤를 떨어뜨리는 행동을 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분명하게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이 다윗에게 주신 하나님의 경고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3) 다윗의 분노(8)

웃사의 죽음에 대한 다윗의 반응은 분노였습니다. 다윗은 여호와께서 웃사를 치신 것에 대해 분노하며, 그곳의 이름을 ‘베레스웃사’, 즉 ‘웃사에게 분을 발하신 곳’이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베레스’라는 단어는 5:20에서 물을 흩으신 것과 같이 블레셋을 흩으셨다고 하며, 그곳 지명을 바알브라심이라고 했는데, 바알브라심의 브라심과 동일한 단어 즉 블레셋에게 분을 발하신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웃사에게 분을 발하신 것입니다.

다윗이 여기서 분노한 것은 웃사가 여호와께 죽게 된 상황 때문입니다. 자신이 힘써 준비한 축제가 한순간에 공포의 자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언약궤를 오벧에돔의 집에 둠(9-11)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며 죄인과 함께해 주셨습니다. 성도는 날마다 그런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은혜를 구하며 살아갑니다. 그 은혜에 감사하며 자신의 뜻과 마음대로 살아가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9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 10다윗이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 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간지라 11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9-11)

여호와의 궤가 올라오다가 웃사의 사망 사고를 통해 다윗은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리고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간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와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약궤로 말미암아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신 것을 통해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1) 다윗의 두려움(9)

다윗은 하나님께서 웃사를 즉시 처벌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에 두려워합니다. 이렇게 무섭게 대하시는 하나님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는 늘 그의 편에서 지켜 주시고 보호해주시고 전쟁에서 앞서 싸워주시는 구원자이셨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좀 더 여호와를 가까이 모시기 위해서 연 행사에서 자신을 향해 분노하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다윗도 여호와에 대한 심한 두려움을 느낀 것입니다.

(2) 오벧에돔의 집으로 간 언약궤(10)

다윗은 조금 전과는 달리 여호와의 궤를 다윗 성 예루살렘으로 가져가기를 꺼려 하였습니다. 그리고 결국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두게 됩니다.

여기서 가드는 블레셋의 가드가 아닌 이스라엘의 한 지역 이름이며, 단 지파의 성읍 중 고핫 자손에게 할당된 가드림몬을 가리킬 것입니다(수 21:24). 역대상 15:17-19에서는 오벳에돔을 레위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오벧에돔은 가드 출신지이지만, 나곤의 타작마당 근처에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오벧에돔은 ‘에돔의 종’이라는 뜻인데, 여기서 에돔은 신명일 가능성이 큽니다. 역대기에 따르면 그는 고핫 족속의 레위인이며, 성전 문지기로 봉사했습니다(대상 15:18; 26:4-8).

(3) 오벧에돔의 집에 복을 주신 여호와(11)

여호와의 궤는 오벨에돔의 집에 석 달간 있었고, 여호와께서는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셨습니다. 이 복이 어떤 형태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복을 주셨다는 것은 오랜에돔이 여호와의 궤를 정중하게 잘 모셨고, 이제 여호와의 진노가 풀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를 통해 여호와의 궤가 두렵고 무서운 대상이 아니라 법도에 맞게 거룩하게 다루면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는 복의 근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런 언약궤의 모습은 여호와의 모습을 반영하는데, 우리가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면 여호와는 우리의 복의 근원이 되시지만, 여호와의 말씀을 거역하는 자들에게는 심판의 근원이 되시는 것이다. 이 사건을 통해서 다윗은 이러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좀 더 여호와를 잘 섬기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해나갈 때,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인간의 의지나 경험으로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법으로 순종해 나가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방법을 따라 하나님이 맡기신 일들을 잘 감당함으로 하나님께 복을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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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05-02)

 

하나님께서 친히 싸우시는 전쟁

사무엘하 5장 11-25절

 

“모사제인(謀事諸人) 성취제천(成就諸天)”라는 말은, 잠언에서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잠언 16:1)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계획은 사람이 하지만, 뜻을 이루는 분은 하늘(하나님)이다.’는 뜻입니다.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조치나 방법은 강구하는 것을 ‘작전’이라고 합니다. 작전을 잘 세우고 통해야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작전의 승리가 곧 전투의 승리입니다. 우리 인생의 최고의 작전을 세우는 분은 누구입니까?

 

다윗은 이스라엘 장로들의 요청으로 인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고 드디어 유다와 이스라엘은 통일왕국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직 쫓아내지 못한 여부스 족속이 살고 있던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그곳을 다윗 성이라 이름 붙이고 이스라엘의 수도로 삼게 됩니다. 다윗이 이렇게 승승장구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시기 때문으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상황을 통해서 다윗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을 왕도로 삼음(11-16)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도우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성취된 일들이 있다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허락해 주셨습니다. 좋은 가정, 좋은 직장, 동료 그리고 이웃까지도 허락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일이 잘되고 번창할 때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온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높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다윗처럼 계속 인도하고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11두로 왕 히람이 다윗에게 사절들과 백향목과 목수와 석수를 보내매 그들이 다윗을 위하여 집을 지으니 12다윗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세우사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과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그 나라를 높이신 것을 알았더라 13다윗이 헤브론에서 올라온 후에 예루살렘에서 처첩들을 더 두었으므로 아들과 딸들이 또 다윗에게서 나니 14예루살렘에서 그에게서 난 자들의 이름은 삼무아와 소밥과 나단과 솔로몬과 15입할과 엘리수아와 네벡과 야비아와 16엘리사마와 엘랴다와 엘리벨렛이었더라(11-15)

다윗이 유다와 이스라엘을 통일하고 명실상부한 통일왕국의 왕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안정과 번영을 가져오자, 두로 왕 히람이 다윗을 국제적인 파트너로 인정하고 왕궁을 짓는 데 필요한 재료와 기술자를 보내 다윗을 위한 왕궁을 지어 주었습니다.

(1) 왕궁 건축(11)

열왕기는 히람이 평생에 다윗을 사랑하였다고 기록합니다(왕상 5:1). 이 기록은 히람과 다윗의 관계가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되었음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그 관계는 다윗의 정복 전쟁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면서 그의 명성이 점차 높아지고 있을 때 시작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람이 다윗에게 백향목과 목수와 석수를 보낸 것은 예루살렘으로 왕궁을 옮긴 후 몇 년이 지났을 때로 여겨집니다. 이것은 히람이 빠른 속도로 힘을 키워가는 신생 국가의 왕 다윗과 앞으로 좋은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그에게 보내는 선물이었습니다. 히람이 보낸 사신들이 히람의 의도와 마음을 다윗에게 전달했을 것입니다. 한편 히람의 통치 연대는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요세푸스의 글에 따르면, 에베소의 메난더(Menander)는 히람이 34년 통치한 후 53세에 사망했다고 진술했습니다. 솔로몬의 즉위 24년, 즉 솔로몬의 성전과 왕궁 건축이 끝난 후에도 히람이 여전히 살아있었습니다(왕상 9:10-14). 그러므로 메난더의 진술이 옳다면, 기껏해야 히람은 다윗 통치의 마지막 10년 동안 다윗과 시대를 같이했을 것입니다. 결국, 다윗의 백향목 왕궁 건축은 다윗이 죽기 몇 년 전에 겨우 이루어졌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은 성경의 기록과 맞지 않습니다. 백향목 왕궁이 완공된 이후에 주어진 다윗 언약이 솔로몬의 출생을 미래에 있을 일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7:12; 대상 22:9). 이처럼 성경은 백향목 왕궁이 다윗 통치 전반기에 건축되었음을 말합니다. 카일-델리취 주석은 메난더의 진술을 신뢰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2) 여호와의 인도하심(12)

다윗은 오랜 역사를 지닌 부유한 왕국인 두로의 왕 히람이 자발적으로 도움을 베푼 것을 보고 여호와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여호와는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견고하게 세우셨고,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해 다윗의 왕국을 높이 드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의 왕국을 높이시는 목적은 다윗의 부귀영화가 아니라 여호와의 백성을 위함입니다.

(3) 예루살렘에서 태어난 아들들(13-16)

다윗이 예루살렘에서 첩과 아내들을 얻었는데, 그들에게서 자녀들이 태어났습니다. 본문은 열한 명의 아들을 기록합니다. 역대기에는 사무엘서의 목록 외에 노가와 엘벨렛(=엘리벨렛)의 이름을 추가하여 모두 열세 명의 아들을 기록합니다(대상 3:5-9; 14:3-7).

역대기에 따르면, 처음 네 명인 삼무아, 소밥, 나단, 솔로몬은 밧세바의 아들들입니다(대상 3:5). 출생 순서가 다소 불분명합니다. 사무엘서는 밧세바의 첫아들이 여호와의 치심을 받아 죽고 다음으로 태어난 아들이 솔로몬인 것처럼 기록하고 있습니다(12:24-25). 모세는 왕이 많은 아내를 두지 말아야 한다고 명령합니다(신 17:17). 하지만 고대 사회의 전제 군주는 여러 가지 이유로 많은 아내와 첩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예를 들어 왕은 지방 호족들과의 우호적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그들의 딸을 아내로 취했습니다. 그러므로 왕이 취한 아내들의 수가 국가의 힘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다윗의 아내와 자녀들에 관해 말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다윗을 이스라엘 왕으로 굳건히 세우셨고 그의 왕국을 부강하게 하셨다는 증거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신명기의 금지 조항은 아내들의 수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왕이 여인들로 인해 미혹받지 말아야 함을 강조합니다. 즉 신명기 17:17은 가운데 부분인 ‘그의 마음이 미혹되지 말아야 한다’를 강조하기 위해 미혹의 예로 아내와 금은의 축적을 금지합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은 단순히 아내가 많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그 아내들 때문에 미혹되었기 때문입니다(왕상11:1-8).

 

블레셋과의 첫 번째 전쟁(17-21)

하나님께서는 성령님을 보내셔서 구체적으로 인도하십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 인도하시기에 날마다 행할 바를 압니다. 승리가 보장되어 있으며 그 종착지까지 걸어갈 걸음을 인도받기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것이 모든 난관과 대적에도 교회가 부흥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17이스라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삼았다 함을 블레셋 사람들이 듣고 블레셋 사람들이 다윗을 찾으러 다 올라오매 다윗이 듣고 요새로 나가니라 18블레셋 사람들이 이미 이르러 르바임 골짜기에 가득한지라 19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내가 블레셋 사람에게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 손에 넘기시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말씀하시되 올라가라 내가 반드시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넘기리라 하신지라 20다윗이 바알브라심에 이르러 거기서 그들을 치고 다윗이 말하되 여호와께서 물을 흩음 같이 내 앞에서 내 대적을 흩으셨다 하므로 그 곳 이름을 바알브라심이라 부르니라 21거기서 블레셋 사람들이 그들의 우상을 버렸으므로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치우니라(17-21)

다윗을 중심으로 이스라엘이 통일 왕국을 수립했다는 소식은 주변 나라들에게 전해졌습니다. 두로 왕 히람은 축하사절단을 보내고 당대 최고의 건축자들과 건축 재료들을 보내어서 백향목 왕궁을 지어주었습니다. 사울 왕처럼 자기 교만이나 자랑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1) 블레셋의 첫 번째 공격(17-18)

다윗이 기름 부음을 받고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블레셋이 들었습니다. 블레셋 용병 출신이면서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아기스의 봉신으로 여겨지는 다윗이 헤브론에서 유다 지파의 왕이 되었을 때, 블레셋은 다윗이 이스보셋과 잘 싸우기를 바라면서 그를 방해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다윗이 사울의 왕국을 이어받고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블레셋은 어느새 다윗이 자신들의 주적이 되었음을 깨달았습니다. 르바임에서 블레셋과 싸운 두 번의 전쟁은 다윗이 예루살렘을 정복하기 전에 일어났을 것입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정복하기 위해 군사들을 이끌고 북쪽으로 가고 있을 때, 블레셋은 다윗을 잡으려고 예루살렘 근처 르바임 골짜기에 모였습니다. 르바임 골짜기는 예루살렘 남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힌놈의 아들 골짜기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블레셋이 사울 왕과 전쟁하듯 병력을 모아 다윗을 잡으려고 왔습니다. 블레셋 군대는 르바임 골짜기에서 가까운 베들레헴에 본거지를 두고, 르바임 골짜기에 군대를 흩어 놓았습니다. 다윗도 이에 대응하기 위해 요새로 내려갔습니다. 이 요새는 아들람 굴에 있는 요새일 것입니다(23:13-14). 다윗의 삼십용사 중 세 명이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에서 물을 가져온 일이 이때 있었을 것입니다(23:13-17).

(2) 하나님께 기도하는 다윗(19)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하며 자신이 블레셋과 싸워야 하는지 그리고 승리할 수 있는지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싸워서 승리하게 하겠다고 약속해주셨습니다. 블레셋을 다윗의 손에 넘겨주심은 완전한 승리를 보여줍니다. 다윗이 단순한 질문 여러 개를 던지는 것은 아마도 하나님의 계시가 찬성과 반대 형태로만 제시하는 우림과 둠밈을 통해 주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3) 다윗의 승리(20-21)

다윗이 르바임 골짜기에서 블레셋을 쳐서 무찌르고 그곳 이름을 바알브라심이라 했습니다. 이 이름의 뜻은 ‘파쇄의 주’일 것입니다. 물을 파쇄하듯 대적을 파쇄함을 뜻하는 이름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도주하면서 자기들의 우상을 버렸으므로 다윗과 그 부하들이 우상을 치웠습니다.

 

블레셋과의 두 번째 전쟁(22-25)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승리를 주시는 분입니다. 원수들을 백성들보다 먼저 휩쓸어버리시는 격파의 주님이십니다. 삶에 어려움들이 홍수처럼 밀려온다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대로 나가시길 바랍니다. 우리와 함께하셔서 그 모든 어려움들을 다 흩어버리시기 때문입니다. 요즘 겪고 있는 어려운 문제들과의 싸움이 ‘바알브라심’의 고백으로 바뀔 수 있기를 바랍니다.

22블레셋 사람들이 다시 올라와서 르바임 골짜기에 가득한지라 23다윗이 여호와께 여쭈니 이르시되 올라가지 말고 그들 뒤로 돌아서 뽕나무 수풀 맞은편에서 그들을 기습하되 24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들리거든 곧 공격하라 그 때에 여호와가 너보다 앞서 나아가서 블레셋 군대를 치리라 하신지라 25이에 다윗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행하여 블레셋 사람을 쳐서 게바에서 게셀까지 이르니라(22-25)

블레셋 사람들은 1차 실패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다윗을 공격하려고 올라옵니다. 블레셋이 르바임 골짜기를 가득 메웠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다윗은 또다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1) 블레셋의 두 번째 공격(22)

한 번 패배한 블레셋이 물러서지 않습니다. 다시 군대를 전열을 가다듬고 다윗을 치려고 르바임 골짜기로 올라왔습니다.

(2) 하나님께 기도하는 다윗(23-24)

블레셋 군대가 다시 쳐들어왔을 때, 다윗은 이전에 이겼던 전술로 응전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이전처럼 정면에서 맞붙지 말고 블레셋의 후미로 돌아가서 기습하라고 하시며 전혀 다른 전술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다윗 앞서 나가서 적군을 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24). 이는 전쟁을 다윗에게 맡기지 않고 승리를 결정지으신다는 뜻입니다.

(3) 다윗의 승리(25)

다윗이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대로 행하였습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쳐서 게바에서 게셀까지 이르렀습니다. 게바는 예루살렘 북동쪽이므로, 여기서 게바는 게셀로 가는 길목에 있는 기브온으로 읽어야 할 것입니다(대상 14:16). 게셀은 기브온에서 서쪽으로 30킬로미터 떨어진 블레셋 영토의 성읍입니다.

 

나가는 말

다윗처럼 매일 매순간 주님께 묻고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나가길 원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베푸시는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의 작전 시지를 잘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뜻에 따라 움직여 날마다 승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성도들의 승리의 비결은 뛰어난 처세술이나 활달한 인간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순종함에 있습니다. 위급하고 절박한 상황이라도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그러면 앞길에 승리를 보장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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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05-01)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다윗

사무엘하 5장 1-10절

믿음은 기다리는 힘입니다. 우리는 왜 기다린 것이 힘들겠습니까? 기다리는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기다린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만큼 적극적인 활동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다림은 하나님께서 하나님 되게 아름다운 신앙입니다. 본문은 그 아름다운 신앙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울의 집 이스보셋은 아브넬의 죽음으로 권력 기반이자 후원자를 잃게 됩니다. 그러자 그의 정예부대 지휘관이었던 베냐민 사람 바아나와 레갑이 이스보셋을 죽이고 권력과 재물을 얻으려고 그의 머리를 들고 다윗에게 찾아갑니다. 하지만 다윗은 이스보셋을 죽인 그들을 살인자로 규정하여 죽이고 사지를 잘라 헤브론 못에 걸어두는 극형에 처합니다. 왕을 잃은 이스라엘은 다윗에게 나와 왕이 되어달라고 요청합니다.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1-5)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지키시는 분입니다. 약속이 성취되는 과정에는 너무도 연단하신 시간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계획된 시간이 있습니다. 모든 성도에게도 하나님의 각자에게 계획하신 시간이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며 살아야 합니다. 자칫 서둘러서 하나님의 시간을 무시하고 자신의 생각대로 하는 것은 실패의 지름길입니다.

1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는 왕의 한 골육이니이다 2전에 곧 사울이 우리의 왕이 되었을 때에도 이스라엘을 거느려 출입하게 하신 분은 왕이시었고 여호와께서도 왕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며 네가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3이에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헤브론에 이르러 왕에게 나아오매 다윗 왕이 헤브론에서 여호와 앞에 그들과 언약을 맺으매 그들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니라 4다윗이 나이가 삼십 세에 왕위에 올라 사십 년 동안 다스렸으되 5헤브론에서 칠 년 육 개월 동안 유다를 다스렸고 예루살렘에서 삼십삼 년 동안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더라(1-5)

이제까지 사울의 집을 지지하고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섬기던 사람들이 헤브론에 있는 다윗에게로 돌아옵니다. 그들은 다윗에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자신들의 왕이 되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헤브론에서 다윗을 왕으로 추대했고,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그들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드디어 다윗이 온 유다와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입니다.

(1)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1-3)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죽은 후 얼마의 시간이 지난 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을 왕으로 섬기기로 결정하고,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있는 다윗에게로 옵니다. 이것은 사울의 집을 섬기겠다거나 따로 독립하여 다른 왕국을 만들겠다는 의견이 이스라엘에서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다윗이 왕이 되어야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첫째, 이스라엘과 유다가 같은 핏줄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집과 사울의 집으로 갈라지기 전에 이스라엘은 한 민족이었고 사울 시대에는 한 나라였습니다. 같은 피가 흐르는 한 민족이기에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둘째. 사울이 왕이던 시절에도 다윗은 이스라엘 지도자로서 군대를 이끌고 전쟁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왕의 주요 임무는 적의 침략을 막아내고 구원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사울 왕 때부터 블레셋이나 다른 적들과 전쟁을 하며 구원자 역할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셋째, 여호와께서 다윗을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목양하는 목자와 지도자로 지명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생각하는 왕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엿볼 수 있습니다. 둘째 이유가 세속적이고 일반적인 왕의 임무라면, 셋째 이유는 하나님과 관계된 이스라엘의 독특한 왕권개념입니다.

왕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여 세우십니다. 이스보셋처럼 인간이 선택하거나 세습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만이 왕이 될 수 있습니다. 왕의 임무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잘 먹이고 입히고 보호하는 목자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방 왕들처럼 백성들을 착취하고 억압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왕은 하나님의 백성을 잘 돌볼 의무를 지는 직책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모든 백성이 다윗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왕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다윗에게 왕이 되어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3절에서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들이 각 지파를 대표하여 헤브론에 모였습니다. 헤브론에서 여호와 앞에서 장로들과 함께 언약을 맺었고, 그들은 다윗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기 위해 기름을 붓습니다. 다윗은 총 세 번의 기름 부음을 받는데, 사무엘에 의해서 왕으로 선택받았을 때가 처음이며, 이 일은 비밀에 부쳐졌습니다(삼상 16:13). 두 번째는 유다 사람들이 다윗을 왕으로 세우며 기름을 부은 일이고(삼하 2:4), 이제 이스라엘 장로들이 이스라엘 왕으로 세우면서 기름을 붓고 있습니다(삼하 5:3). 다윗은 드디어 유다와 이스라엘 모두의 왕으로 세움을 받았고, 이스라엘은 다시 통일왕국이 되었습니다.

(2) 다윗 통치에 대한 요약(4-5)

이 부분은 다윗 통치 기간에 대한 전체 설명입니다. 다윗은 30세에 왕위에 올라 40년 동안 왕으로서 통치하였습니다.

이스라엘에서 30세는 남성이 성인으로서 인정받고 공식적인 사역을 시작할 수 있는 나이이며, 제사장직을 수행할 수 있는 나이입니다(민 4:3). 40년은 구약에서 한 세대를 나타내는 숫자이며, 성공적인 사사가 다스릴 때는 40년 혹은 80년이 평안하였습니다.

다윗은 소년이었을 때 왕으로 선택을 받았지만, 10여 년간 단련 받은 후 성인이 되어 공식적으로 왕위에 올랐고, 한 세대 동안 이스라엘을 평안하게 다스린 성공적인 왕이었던 것입니다.

5절은 다윗이 왕권을 잡은 과정을 보여줍니다. 헤브론에서 7년 6개월 동안 유다를 다스렸고, 예루살렘에서 33년 동안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습니다. 모두 40년 7개월로 다윗이 40년을 다스렸다는 것은 대략적인 숫자인 것입니다.

다윗이 유다 왕으로 등극한 후에 얼마 지나지 않아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도 이스라엘의 왕으로 2년을 다스렸습니다(삼하 2:10). 그러므로 이스보셋이 죽은 후 이스라엘 장로들이 다윗에게 와서 왕이 되어달라고 말할 때까지 대략 5년 정도가 흘렀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이스라엘을 통합한 것이 본문이 말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한 과정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본문은 결과만 말하고 있는데, 이는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을 정복한 다윗(6-10)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는 작은 틈새를 열어 승리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어린 목동에서 상상할 수 없는 왕권을 주셨고, 아무도 넘볼 수 없는 시온성에서 날로 강건해져 가는 나라를 출범하게 하십니다.

6 왕과 그의 부하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 땅 주민 여부스 사람을 치려 하매 그 사람들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결코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맹인과 다리 저는 자라도 너를 물리치리라 하니 그들 생각에는 다윗이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함이나 7다윗이 시온 산성을 빼앗았으니 이는 다윗 성이더라 8그 날에 다윗이 이르기를 누구든지 여부스 사람을 치거든 물 긷는 데로 올라가서 다윗의 마음에 미워하는 다리 저는 사람과 맹인을 치라 하였으므로 속담이 되어 이르기를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은 집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더라 9다윗이 그 산성에 살면서 다윗 성이라 이름하고 다윗이 밀로에서부터 안으로 성을 둘러 쌓으니라 10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6-10)

왕이 된 다윗은 가장 먼저 예루살렘을 정복해서 통일 이스라엘의 새로운 수도로 삼았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은 난공불락의 성이었습니다. 여부스 사람들은 다윗이 절대 자신들의 예루살렘 성을 빼앗지 못할 것이라고 큰소리쳤지만, 다윗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힘입어 이 성을 손쉽게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성의 이름을 ‘다윗성’이라 명명했습니다.

(1) 여부스 사람들의 조롱(6)

이 단락은 다윗의 예루살렘 정복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군사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에 가서 그 땅 주민인 가나안 민족 여부스 사람들을 몰아내고 예루살렘을 차지하려고 하였습니다. 사사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예루살렘과 전쟁하여 이긴 적은 있지만, 여부스 사람들을 몰아내고 예루살렘을 차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은 고대로부터 잘 발달된 도시이며 산꼭대기에 있어 수비하기에 좋은 성읍이었습니다. 다윗이 점령하려고 공격하자 여부스 사람들은 다윗의 군대를 우습게 여기고 그 군대가 절대 성읍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하였습니다. 심지어 다윗의 군대는 맹인과 다리 저는 자라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며 비아냥거렸습니다. 성이 워낙 튼튼하고 방비가 잘 되어 있어서 가장 약한 자들이라도 지킬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화자는 이들이 다윗을 비웃은 것은 실제로 다윗이 자신들의 성을 점령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해줍니다. 예루살렘은 여부스 사람들이 자부심을 가질 만큼 난공불락의 지형이었습니다.

(2) 예루살렘 점령(7-8)

7절은 다윗이 시온 산성을 빼앗았다고 한 줄로 말합니다. 이것은 여부스 사람들이 장담한 것과 달리 쉽게 점령하였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예루살렘을 시온 산성이라고 부르는데, 학자들에 따르면 시온은 예루살렘 남쪽 언덕의 지명이고 시온 산성은 그 언덕을 지키는 요새였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그러므로 시온 산성은 예루살렘에 속한 산성이며 후에 예루살렘과 시온은 같은 지역의 다른 이름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여기 시온 산성을 점령했다는 것은 예루살렘을 점령하였다는 것이고, 다윗은 그곳에 자기 이름을 붙여 ‘다윗성’이라고 불렀습니다. 다윗이 쉽게 예루살렘을 점령하였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셨고 그를 도우셨다는 의미입니다. 다윗은 여부스를 점령한 뒤 여부스 사람들이 한 말을 받아서 여부스 사람들은 전부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들이라고 비꼬며 이들을 쳐서 죽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다윗이 미워하는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들은 여부스 사람을 의미하는데, 여부스 사람들이 다리 저는 사람과 맹인으로도 다윗을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말한 것에 대해 자신과 싸우는 여부스인을 다리 저는 사람과 맹인에 비유한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해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은 집에 들어오지 못하리라’라는 속담이 생겼는데, 여기서 집은 다윗의 성을 의미하며 이 속담이 문자 그대로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다윗의 궁전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다만 여부스 사람들에 대한 조롱의 의미를 지닌 속담입니다. 후에 다리를 저는 므비보셋은 다윗 성에서 다윗과 같이 지냅니다.

(3) 예루살렘을 수도로 삼음(9)

산성을 점령한 다윗은 그곳에 거주합니다.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이주하고 그곳에 성벽을 든든하게 지어서 이스라엘의 수도를 정비하며 이스라엘 왕국의 기틀을 다집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으로 다윗은 점점 강해졌다고 마지막에 언급함으로써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예루살렘을 정복한 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함께하셨기 때문임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4) 여호와의 도우심(10)

다윗이 왕이 되는 과정에서 하나님은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손길로 다윗을 당신의 계획대로 이끄셨고 그와 함께하시며 그가 형통하도록 복을 주고 계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해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위기 상황이나 특별한 상황에서는 특별히 선지자를 통해서나 직접적인 방법으로 자신을 드러내시지만 일상의 상황에서는 보이지 않는 손길로 인도하시고 형통케 하시며 보호하시는 분입니다. 이런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고 감사하는 것이 신앙인이 가져야 할 삶의 자세입니다.

 

나가는 말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꿈이 있습니다. 그 꿈을 목표로 삼으시고, 인내하면서 필요한 훈련을 잘 받으시길 바랍니다. 다윗은 서두르거나 자신의 의지를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비록 더디고 힘들어도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말씀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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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04-01)

 

이스보셋의 최후

사무엘하 4장 1-12절

 

세상에는 과정이나 방법이야 어떻게 되든지 결과만 좋으면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불순하고 잘못된 방법을 사용해 좋은 결과를 얻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지 최종적인 결과는 아닙니다.

 

아브넬은 이스라엘을 다윗의 손에 넘긴다는 협약을 맺고 돌아가던 길에 요압에게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이 일로 다윗은 정치적인 어려움에 빠지게 되었고,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려고 최선을 다해 아브넬의 장례를 치러줍니다. 그 결과 다윗은 아브넬을 죽였다는 의심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한편 아브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이스보셋과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두 심하게 낙심하였는데, 아브넬이 이스라엘 권력의 핵심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보셋의 근황(1-3)

요즘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풀의 꽃처럼 사라져버릴 인생을 의지하다 어려운 일을 만나면, 이스보셋처럼 맥이 풀리고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상황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도울 힘이 없는 인생을 의지하고 살았던 사람들의 결과입니다. 시편에서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4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5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편 146:3-5)라고 하였습니다.

1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은 아브넬이 헤브론에서 죽었다 함을 듣고 손의 맥이 풀렸고 온 이스라엘이 놀라니라 2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에게 군지휘관 두 사람이 있으니 한 사람의 이름은 바아나요 한 사람의 이름은 레갑이라 베냐민 족속 브에롯 사람 림몬의 아들들이더라 브에롯도 베냐민 지파에 속하였으니 3일찍이 브에롯 사람들이 깃다임으로 도망하여 오늘까지 거기에 우거함이더라(1-3)

사울의 집에 중심이던 아브넬이 헤브론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 왕은 맥이 풀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1). 아브넬은 사울 집의 힘의 근원이었습니다. 그가 이스보셋을 왕으로 올리고 지금까지 이스라엘을 이끌고 지탱해 왔습니다. 그의 죽음은 이스보셋에게 더욱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이스보셋의 왕위는 국민들의 지지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아브넬의 힘에 의해 생겨나고 유지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2-3절은 이야기의 흐름을 끊고 새로운 인물들을 소개합니다.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군지휘관 바아나와 레갑입니다. 이들이 지휘하는 부대는 주로 습격과 약탈을 하는 왕의 정예부대이며, 이들은 이스보셋의 가장 중요한 지휘관들입니다. 또한 베냐민 지파 브에봇 사람 림몬의 아들들로 사용의 집과 같은 지파 사람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3절에서 브에롯 사람들의 혈통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설명이 나오는데, 브에롯은 원래 여호수아를 속이고 살아남은 기브온 사람들의 성읍이며, 베냐민 지파에 속하지만 가나안 사람의 성읍이었습니다.

그런데 2절 하반절에서 현재 브에롯은 베냐민 지파에 속하며 브에롯의 거주민들은 짓다임으로 도망갔다고 설명합니다. 사울 통치하에서 이곳 거주민을 쫓아내고 베냐민 사람들이 그곳을 점령하여 현재까지 거주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아마도 이 사건은 후에 사무엘하 21:1-14에서 기브온 사람들이 다윗에게 사울의 죄를 처벌해달라고 요구하는 이야기의 배경일 것입니다. 여기서 브에롯에 대한 설명을 하는 것은 바아나와 레갑이 브에룻 사람이지만 혈통적으로 베냐민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밝힘으로써 이스보셋이 같은 지파 사람의 손에 죽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요나단의 아들의 근황(4)

암투와 혼탁한 사건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보호하고 그의 집을 지키시고 세워나가십니다. 흑백을 가릴 수 없는 상황에서도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것을 따라 행동합니다. 자기 속도를 잃지 않으려면 달콤한 유혹을 이겨내고 하나님의 보폭을 따라 걸어야 합니다.

4사울의 아들 요나단에게 다리 저는 아들 하나가 있었으니 이름은 므비보셋이라 전에 사울과 요나단이 죽은 소식이 이스르엘에서 올 때에 그의 나이가 다섯 살이었는데 그 유모가 안고 도망할 때 급히 도망하다가 아이가 떨어져 절게 되었더라(4)

여기서 사건과 전혀 관계가 없는 한 인물이 소개됩니다. 이 인물을 소개하는 것은 이스보셋의 죽음 사건을 기록하기 전에 사울 가문에 아직도 생존자가 있으며, 바로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 임을 알리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이스보셋이 죽으면 사울 집의 계승자는 므비보셋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요나단에게 그의 집과 자손들을 살려주기로 언약을 맺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과 유다가 합병되면 므비보셋의 신변은 어떻게 될지 아직 알 수가 없습니다. 므비보셋은 요나단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죽었을 때 다섯 살이었고, 그때 유모가 데리고 도망하다가 떨어뜨려 다리를 절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아직 므비보셋이 10세 전후의 어린아이이고 다리가 불편하여 군인의 역할을 하기에는 약점이 있다는 뜻입니다. 결국 이스보셋 이후의 사울 집 왕위 계승자인 므비보셋은 사울 집을 계승하기에 적합한 인물이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스보셋 이후에 다윗을 왕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임을 말해줍니다.

 

신복에게 죽임을 당한 이스보셋(5-7)

모든 사람이 사회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상대방의 신뢰에 반하지 않도록 성의있게 행동할 것을 요구하는 법원칙이다. 상대방의 신뢰를 헛되지 않도록 성의있게 행동하여야 한다는 원칙을 말합니다. 신뢰를 깨는 일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기회주의자들에게 신의나 의리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직 모략과 술수가 난무할 뿐입니다. 나라가 부흥할 때는 좋다고 따라다니다가 나라가 망하게 되니깐, 왕의 머리를 출세의 도구로 삼는 자들을 볼 수 있습니다.

5브에롯 사람 림몬의 아들 레갑과 바아나가 길을 떠나 볕이 쬘 때 즈음에 이스보셋의 집에 이르니 마침 그가 침상에서 낮잠을 자는지라 6레갑과 그의 형제 바아나가 밀을 가지러 온 체하고 집 가운데로 들어가서 그의 배를 찌르고 도망하였더라 7그들이 집에 들어가니 이스보셋이 침실에서 침상 위에 누워 있는지라 그를 쳐죽이고 목을 베어 그의 머리를 가지고 밤새도록 아라바 길로 가(5-7)

므비보셋에 대한 설명 다음에 다시 이야기는 이스보셋과 부하들에게로 돌아갑니다. 이 단락은 이스보셋이 죽임을 당하는 장면으로 이스보셋의 신복들이 브롯에서 출발하여 이스보셋의 집에 가장 뜨거운 한낮에 도착하였고, 때마침 이스보셋이 낮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본문에서 바아나와 레갑이 사전에 계획하고 와서 살인한 것인지, 자고 있는 이스보셋을 발견하고 우발적으로 죽인 것인지는 분명히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전에 계획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좋습니다. 1절과 연결하여 볼 때 이들은 이스보셋의 후원자이자 힘의 근원이었던 아브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이스보셋의 왕위가 얼마 가지 못하고 다윗에게 넘어갈 것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낮잠을 자는 한낮에 이스보셋의 집에 도착하였고, 예상대로 이스보셋은 낮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이스보셋을 지키고 있는 호위병들을 속이고 집 안으로 들어가려고 밀을 가지러 온 듯 꾸몄습니다. 이스보셋이 자고 있는 사이에 집에 들어가려고 거짓말을 한 것은 이들이 사전에 이스보셋을 죽이기로 계획하고 왔다는 증거가 됩니다. 이들이 어떠한 해도 입힐 생각 없이 단순히 이스보셋을 만나러 온 것이라면 그가 깨어나길 기다리는 것이 더 자연스럽기 때문입니다.

6절과 7절은 같은 사건을 조금 다르게 설명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해석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6절은 이들이 이스보셋을 죽이고 도망가는 것을 간단하게 기술하고 있고 7절은 이것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6절은 이들이 집 안으로 들어가 배를 찔러 죽이고 도망갔다고 요약적으로 말하고 있는 반면에, 7절은 이들이 들어가서 본 상황, 즉 이스보셋이 침상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 상황을 설명합니다. 5절에서 이스보셋이 낮잠을 자는 장면은 화자가 설명하였습니다. 반면에 7절은 바아나와 레갑의 시선으로 본 모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7절에서 ‘쳐죽이다’는 6절의 배를 찔러 죽이는 행동을 설명한 것이고, 7절에서 이스보셋의 머리를 베었다는 것과 아라바 길로 갔다는 설명이 덧붙여지는데, 이것은 6절의 ‘도망갔다’는 말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한 것입니다. 이스보셋의 머리를 벤 것은 자신들이 이스보셋을 죽였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것으로 이것은 다윗에게 가기 위한 준비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보셋의 머리를 벤 것도 이들이 사전에 계획한 살인임을 증명해줍니다. 이들은 밤새 아라바 길을 걸어서 헤브론에 도착합니다. 마하나임에서 헤브론까지는 대략 100킬로미터 정도입니다. 그런데 다음날 헤브론에 도착한 것을 보면 이들이 매우 서둘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보셋의 왕국 안에서 살인자를 추적하는 손길을 피하려고 최대한 빨리 다윗의 집으로 들어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스보셋을 죽인 자들을 처형하는 다윗(8-12)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해쳐서는 안 됩니다. 레갑과 바아나는 이스보셋을 죽여 자신의 이익을 얻으려고 했지만, 그들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자신만 좋다면 그만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8헤브론에 이르러 다윗 왕에게 이스보셋의 머리를 드리며 아뢰되 왕의 생명을 해하려 하던 원수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머리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오늘 우리 주 되신 왕의 원수를 사울과 그의 자손에게 갚으셨나이다 하니 9다윗이 브에롯 사람 림몬의 아들 레갑과 그의 형제 바아나에게 대답하여 그들에게 이르되 내 생명을 여러 환난 가운데서 건지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10전에 사람이 내게 알리기를 보라 사울이 죽었다 하며 그가 좋은 소식을 전하는 줄로 생각하였어도 내가 그를 잡아 시글락에서 죽여서 그것을 그 소식을 전한 갚음으로 삼았거든 11하물며 악인이 의인을 그의 집 침상 위에서 죽인 것이겠느냐 그런즉 내가 악인의 피흘린 죄를 너희에게 갚아서 너희를 이 땅에서 없이하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12청년들에게 명령하매 곧 그들을 죽이고 수족을 베어 헤브론 못 가에 매달고 이스보셋의 머리를 가져다가 헤브론에서 아브넬의 무덤에 매장하였더라(8-12)

헤브론에 도착한 이들은 바로 다윗 왕에게 이스보셋의 머리를 보여주며 왕의 생명을 찾으려 했던 원수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머리가 여기 있다고 말합니다. 이들은 다윗이 사울을 원수로 생각하고 있으며, 그렇기에 그의 아들 이스보셋도 원수로 여길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또한 자신들의 행동은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행한 사울의 악행을 사울과 그의 자손들에게 되갚으신 정당한 행동이라고 말합니다. 이들은 이스보셋을 죽이면 다윗이 자신의 원수를 죽였다고 좋아할 줄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판이었습니다. 다윗은 이들에게 사울의 죽음을 좋은 소식인 줄 알고 전한 자를 죽였다고 말합니다. 즉 소식을 알린 사람도 죽인 마당에 침상에서 자고 있는 사람을 잔인하게 죽인 살인자들을 그냥 두겠냐는 것입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면서 이런 살인자는 반드시 죽이겠다고 한 후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재물과 권력을 가져다줄 줄 알았던 이스보셋의 머리는 그들의 살인을 증명하는 강력한 증거물이 되어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입니다. 이들의 수족을 자른 후 팔다리 없는 시체를 헤브론 못가에 매달았습니다. 이것은 매우 이례적인 처형입니다. 시체를 욕보이는 일은 이스라엘에서 잘 행하지 않는데, 다윗은 사울과 사울의 아들들이 모욕당했던 방법 그대로 이들에게 행함으로 이들이 사울 집에 행한 죄를 집행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이스보셋을 죽인 자들에 대해 이렇게 신속하게 처형하고 그들의 시체를 모욕한 것은 아브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이스보셋을 죽이라고 시켰다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이며, 사울 집에 속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한을 갚아주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인간들의 욕심과 원한과 살인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다윗이 전체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르는 데 가장 큰 걸림돌들이 제거되었고, 결국 다윗은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한 방법으로도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지만 악하고 욕심에 가득 찬 인간들이 판치는 세상에서는 그들의 악함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일을 이루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은 선으로 갚으시고 악은 악으로 갚으시면서 계획을 하나씩 이루어가십니다.

 

나가는 말

성도들은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좇으면서 올바른 방법과 과정을 지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로서, 하나님 나라를 잘 이해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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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03-03)

아브넬의 죽음을 애도하는 다윗

사무엘하 3장 27-39절

 

오늘날은 계산이 빠른 시대입니다. 느린 것도 못 참고 손해 보는 것은 더 못 참습니다. 하지만 신박한 속도와 정확한 계산만큼 시대는 서늘하고 관계는 삭막해져 가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계산이 빠른 사람과 계산하지 않은 사람이 등장합니다. 세상의 법칙과는 다르게, 전자는 결국 모든 것을 다 잃고 후자는 모든 것을 다 얻습니다.

 

미갈을 다윗에게 돌려보냄으로써 다윗과 아브넬의 밀약은 성사되었습니다. 아브넬은 약속대로 사울 집에 속했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베냐민 사람들을 설득하여 다윗을 왕으로 섬기기로 약속하게 됩니다. 모든 합의가 이루어지자 아브넬은 다윗과 최종 협상을 하기 위해 헤브론으로 왔고, 평화적으로 협상을 완결하고 돌아갑니다. 하지만 이 소식을 들은 요압은 다윗의 결정에 불만을 품고 아브넬을 다시 헤브론으로 불러들여 암살합니다.

 

아브넬을 죽여 동생의 원수를 갚는 요압(27-30)

믿음으로서의 기다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조건적인 소극성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때와 방법을 추구하는 능동적인 순종입니다. 믿음은 인간의 생각이 앞서지 않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림으로 하나님의 뜻이 완성됩니다. 자신들의 이익에만 급급한 인물들의 모략과 폭력 속에서 다윗은 묵묵히 환난에서 생명을 건져주신 여호와만 의지하였습니다.

27아브넬이 헤브론으로 돌아오매 요압이 더불어 조용히 말하려는 듯이 그를 데리고 성문 안으로 들어가 거기서 배를 찔러 죽이니 이는 자기의 동생 아사헬의 피로 말미암음이더라 28그 후에 다윗이 듣고 이르되 넬의 아들 아브넬의 피에 대하여 나와 내 나라는 여호와 앞에 영원히 무죄하니 29그 죄가 요압의 머리와 그의 아버지의 온 집으로 돌아갈지어다 또 요압의 집에서 백탁병자나 나병 환자나 지팡이를 의지하는 자나 칼에 죽는 자나 양식이 떨어진 자가 끊어지지 아니할지로다 하니라 30요압과 그의 동생 아비새가 아브넬을 죽인 것은 그가 기브온 전쟁에서 자기 동생 아사헬을 죽인 까닭이었더라(27-30)

본문은 요압이 아브넬을 죽인 내용입니다. 아브넬이 살해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다윗은 목 놓아 울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자신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선언합니다. 요압의 사사로운 복수심으로 상대편의 지도자인 아브넬을 죽임으로써 이스라엘에 더 큰 분열을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통일’이라는 역사적인 과업에 찬물을 끼얹은 것입니다.

(1) 요압의 복수(27)

요압이 전쟁에 승리하고 헤브론에 도착했을 때, 아브넬이 다윗을 만나서 언약을 맺은 후에, 그가 평안히 돌아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요압은 화가 났을 것입니다. 그는 사람을 보내어 아브넬을 다시 헤르본으로 돌아오게 합니다. 다윗이 할 말이 있다는 말로 속여서 데려왔을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 헤브론에서 요압의 권력이 상당했을 것입니다.

아브넬을 만난 요압은 비밀스럽게 말하기 위해 아브넬을 데리고 성문 안 외진 곳으로 들어갑니다. 아브넬은 요압을 다윗의 심복으로 생각하였기에 다윗의 말을 전달하기 위해 조용하고 외진 곳으로 데리고 간다고 생각하고 방심하고 있었습니다. 아브넬은 아사헬을 죽인 것이 전쟁 중에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요압이 자신에게 피의 복수를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요압이 자신의 왕인 다윗의 명령을 어길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않았기 때문에 의심하지 않고 따라갔을 것입니다. 그만큼 요압의 행동은 왕의 충성스러운 신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넬과의 부하들에게 이끌려 헤브론으로 돌아왔을 때, 요압은 아브넬을 성문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배를 찔러 죽였습니다. 이는 요압이 자기 동생 아사헬에 대한 복수를 실행한 것입니다(2:18-23). 하지만 아브넬은 전쟁터에서 아사헬을 죽였으므로 요압의 복수는 정당성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한편으로 요압은 아브넬이 다윗의 신하가 되면 자기보다 높은 지위를 차지하게 될 것을 두려워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2) 다윗의 저주(28-29)

다윗은 아브넬이 죽었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신속히 자신의 무죄함을 선포하면서 요압에게 살인의 책임을 돌렸습니다(28). 또 다윗은 아브넬을 살해한 일이 요압 개인 차원에서 벌어진 일이므로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왕국도 무죄하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요압이 다윗의 왕국에 속한 자가 아님을 암시합니다. 왜냐하면 다윗의 왕국이란 다윗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들로 구성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앞에 영원히 무죄하니”는 여호와께서 다윗의 증인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무죄를 강조하기 위해 여호와께서 영원히 증인이 되신다고 말했습니다.

아브넬이 다윗을 만난 직후에 헤브론에서 죽었다는 사실은 아브넬을 보낸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윗의 적으로 돌아서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과 유다의 통합을 간절히 바랐고, 미갈을 다시 데려오게 한 것도 통일 왕국에 대한 다윗의 열망을 보여준 것입니다.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소식을 전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일 것입니다. 아브넬과의 협상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면서 다윗의 열망이 거의 성취되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요압이 그 모든 노력을 허사로 만들었습니다.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켜 이스라엘과 유다의 갈등이 깊어졌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요압과 그의 가문을 “그 죄가 요압의 머리와 그의 아버지의 온 집으로 돌아갈지어다 또 요압의 집에서 백탁병자나 나병 환자나 지팡이를 의지하는 자나 칼에 죽는 자나 양식이 떨어진 자가 끊어지지 아니할지로다”라고 저주합니다. ‘백탁병(白濁病)’은 성병의 일종입니다. “지팡이를 의지하는 자”는 문자적으로 ‘물렛가락을 다루는 남자’를 뜻합니다. 이는 장애나 상처 혹은 질병이 있어서 바깥일을 하지 못하고, 집 안에서 여인들처럼 활동하는 남자를 가리킵니다. 다윗은 요압에 대한 자신의 증오에도 불구하고 이후 계속 요압을 이인자로 삼는데, 이는 어떤 이유에서든 스루야의 아들들의 권력이 대단했음을 보여줍니다.

(3) 요압의 형제들(30)

아브넬은 기브온 연못가 전투에서 자신을 뒤쫓아 오는 아사헬을 창으로 찔러 죽였었습니다. 그래서 요압과 아비새가 아사헬을 복수하기 위해 아브넬을 죽였습니다. 27절에서는 요압이 단독으로 아브넬을 죽인 것으로 기록되었으나, 30절에서는 아비새와 요압이 함께 아브넬을 죽인 것으로 기록됩니다. 요압이 아브넬을 죽일 때 아비새가 동조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도 요압과 아비새를 함께 비난합니다(3:39).

 

아브넬을 장사 지냄(31-35)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적개심과 분노가 가득한 마음에서 독소를 제거해야 합니다. 복수하려는 마음이 싹틀 것입니다. 복수하려 할 때, 복수에는 성공할 수 있겠지만,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길에 서 있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사사로운 감정에만 빠져 지내지 말아야 합니다.

31다윗이 요압과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띠고 아브넬 앞에서 애도하라 하니라 다윗 왕이 상여를 따라가 32아브넬을 헤브론에 장사하고 아브넬의 무덤에서 왕이 소리를 높여 울고 백성도 다 우니라 33왕이 아브넬을 위하여 애가를 지어 이르되 아브넬의 죽음이 어찌하여 미련한 자의 죽음 같은고 34네 손이 결박되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차꼬에 채이지 아니하였거늘 불의한 자식의 앞에 엎드러짐 같이 네가 엎드러졌도다 하매 온 백성이 다시 그를 슬퍼하여 우니라 35석양에 뭇 백성이 나아와 다윗에게 음식을 권하니 다윗이 맹세하여 이르되 만일 내가 해 지기 전에 떡이나 다른 모든 것을 맛보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라 하매(31-35)

다윗은 아브넬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고 매우 슬퍼하고 있습니다. 그는 아브넬을 위한 애가를 지어 부르고 성대하게 장례를 치러줍니다. 백성들은 강권했지만, 음식 먹기조차 거부하였습니다. 그제야 이스라엘은 다윗의 무죄함을 믿게 됩니다.

(1) 헤브론에 묻힌 아브넬(31-32)

다윗은 아브넬이 죽음에 대해 요압을 비롯한 모든 백성들에게 옷을 찢고 긁은 배를 띠고 아브넬을 애도하라고 명령합니다. 왕 다윗이 직접 아브넬의 상여를 따라갔는데, 이것은 다윗이 직접 아브넬의 장례를 주도하고 참여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 애도하는 다윗(33-34)

다윗은 또다시 아브넬의 무덤 앞에서 큰 소리로 백성들과 함께 통곡을 하고 하브넬의 죽음에 대한 애가를 지어 불러줍니다. 아브넬의 죽음이 어리석은 자의 죽음 같다고 탄식했습니다. 어리석은 자의 죽음은 허무한 죽음입니다. 자신의 지위와 명성에 적합한 죽음을 맞이하지 못하고, 어처구니없이 허무하게 죽어버린 것을 슬퍼하며 노래했습니다. 그의 손이 결박되지 않았고 그의 발이 차꼬에 묶이지 않았다는 것은 아브넬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음을 말하며, 아브넬의 죽음이 허무했음을 강조합니다. 불의한 자식 앞에 엎드러지는 것은 불의한 사람이 의로운 아브넬을 죽였다는 뜻이며, 요압에 대한 책망을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온 백성’이라는 표현은 아마도 다윗 왕궁에 출입하는 관리들일 것입니다.

(3) 금식하는 다윗(35)

장례가 끝난 후 모든 백성이 저녁에 다윗에게 와서 음식 먹기를 권했습니다. 동사 ‘바라’는 슬픔 속에서 허기를 때우는 것을 의미합니다(12:17). 다윗은 맹세하면서 해 질 때까지 떡이나 아무것도 맛보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고대에는 애도 기간에 금식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라”는 자기 저주의 형식으로, 맹세를 강조할 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참조, 3:9). 그는 해 지기 전까지 떡이나 어떤 것도 맛보지 않겠다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합니다.

 

백성들의 반응과 다윗의 한탄(36-39)

세상을 살아가는데, 진실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최선의 해결책입니다. 낙심하지 않고 진심을 다할 때 하나님께서는 위기마저도 우리를 온전하게 하실 기회로 삼으십니다. 다윗의 아브넬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함으로써 오해를 벗고 백성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습니다. 진실하신 하나님을 믿고 진실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변 사람들이 신뢰합니다.

36온 백성이 보고 기뻐하며 왕이 무슨 일을 하든지 무리가 다 기뻐하므로 37이 날에야 온 백성과 온 이스라엘이 넬의 아들 아브넬을 죽인 것이 왕이 한 것이 아닌 줄을 아니라 38왕이 그의 신복에게 이르되 오늘 이스라엘의 지도자요 큰 인물이 죽은 것을 알지 못하느냐 39내가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 되었으나 오늘 약하여서 스루야의 아들인 이 사람들을 제어하기가 너무 어려우니 여호와는 악행한 자에게 그 악한 대로 갚으실지로다 하니라(36-39)

요압의 아브넬 암살로 다윗은 궁지에 몰리지만, 다윗은 아브넬의 죽음에 진심 어린 애도에 백성의 의혹은 충성으로 바뀝니다. 다윗은 나약한 자신의 왕권에 대해 탄식하지만, 결국 모든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1) 백성들의 반응(36-37)

백성들은 다윗 왕이 애곡하며 금식하는 일련의 행동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진심으로 애도하는 것을 알고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그들은 다윗이 하는 모든 행동을 좋게 보았습니다. 이에 따라 모든 백성과 온 이스라엘은 아브넬의 죽음이 다윗과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윗의 진심 어린 행동이 또 한 번의 위기로부터 다윗을 벗어나게 했습니다.

(2) 아브넬 추모(38)

다윗은 자신에 대한 의심이 사라지고 오히려 백성들이 자기에게 호감을 느끼게 된 것을 알았습니다. 다윗은 이제 자신감을 가지고 아브넬을 위대한 장군이라고 높이면서 대조적으로 스루야의 아들들의 악함을 강조합니다. 한글 성경은 ‘사르 버가돌’을 ‘지도자요 큰 인물’이라 번역하였으나, 위대한 장군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습니다.

(3) 다윗의 한탄과 저주(39)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아 왕이 되었는데도 스루야의 아들들이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음을 지적하면서, 그들의 패역함을 강조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복수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제어하기가 너무 어려우니”는 문자적으로 ‘나보다 더 강하니’입니다.

 

나가는 말

위기나 역경의 때에도 성도들은 어떤 경우에도 진실하게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믿음과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사로운 감정을 잘 조절되어야 합니다. 자신을 선한 방법으로 절제뿐만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갈 용기도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의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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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03-02)

 

아브넬을 선대한 다윗과 요압의 반발

사무엘하 3장 17-26절

 

골프선수 최경주는 2002년 PGA tour에서 우승한 이후로 꾸준하게 활약해서 세계 랭킹 5위까지 올랐습니다. 그는 전남 완도의 작은 시골 마을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노력으로 세계에서 성공한 그의 뒷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일반 직장인들이 하루 8시간 일하듯, 성공한 후에도 하루에 8시간씩 연습하며 노력하였고, 골프를 자신의 천직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의 성실함은 모든 사람에게 선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다윗의 집이 번창하는 동안 사울의 집에서 아브넬과 이스보셋이 사울의 첩과 간통의 일로 분열이 일어납니다. 이에 격분한 아브넬은 다윗에게 사자를 보내 자신의 사울의 집과 이스라엘을 다윗의 손에 붙이겠다고 제안합니다. 다윗은 그 밀약을 받아들인 조건으로 사울의 딸 미가를 보내라고 요구합니다. 다윗과 아브넬의 협상이 성사되면서 아브넬은 이제 이스라엘을 다윗에게로 돌리기 위한 작업들이 시작합니다.

 

아브넬의 설득(17-19)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할 때, 우리는 때때로 그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과 전혀 다른 세속적인 사람들이 판치도록 내어줄 때가 있습니다. 야망과 복수심에 가득찬 아브넬과 요압과 같은 사람들이 지도자로 나설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의 사역이 잘못될 것 같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우리를 다양한 방법으로 인도해 나가십니다.

17아브넬이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가 여러 번 다윗을 너희의 임금으로 세우기를 구하였으니 18이제 그대로 하라 여호와께서 이미 다윗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종 다윗의 손으로 내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블레셋 사람의 손과 모든 대적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리라 하셨음이니라 하고 19아브넬이 또 베냐민 사람의 귀에 말하고 아브넬이 이스라엘과 베냐민의 온 집이 선하게 여기는 모든 것을 다윗의 귀에 말하려고 헤브론으로 가니라(17-19)

유다 지파를 제외한 열한 지파들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왕으로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질적인 통치는 군대장관 아브넬이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울 왕의 첩과 동침한 사건에 대해 이스보셋과 다툰 후, 이스보셋에게서 등을 돌립니다. 그리고 교활한 방법으로 자신의 살길을 찾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활한 아브넬을 통해 다윗 왕국을 세우도록 인도하십니다.

(1) 이스라엘 장로들과의 만남(17)

본문에서 아브넬이 다윗에게 약속을 받은 조건이 무엇인지 언급되지는 않습니다. 결국 아브넬의 죽음으로 이루어질 필요가 없는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브넬이 매우 적극적으로 이스라엘 장로들을 만나 사울의 집을 다윗의 손에 넘기기 위해 움직인 것을 보면 상당한 권력을 보장받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먼저 아브넬이 이스라엘 장로들을 만난 것은 사울의 딸 미갈을 데리러 가기 전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장로들과 베냐민 지파 백성들을 직접 찾아가서 다윗을 이스라엘의 통일 왕국의 왕으로 세우도록 설득하고 동의를 얻습니다.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너희가 여러 번 다윗을 너희의 임금으로 세우기를 구하였으니”(17)라고 말합니다. 그동안 너희들이 다스릴 왕으로 다윗을 계속 요구하였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이전에는 그들의 요구가 있었지만, 아브넬이 거부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사울의 집 이스라엘 편에서도 다윗을 왕으로 섬기려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을 묵살해 왔던 것입니다.

아브넬은 사울의 집 이스보셋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윗과의 밀약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계산이 되었습니다. 이제야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자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는 다윗을 왕으로 세우는 것이 여호와의 뜻이며, 블레셋과 모든 대적으로부터 다윗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참으로 교묘한 말입니다. 처음부터 여호와의 뜻이 아닌 줄 알았다면,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우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알면서도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운 것은,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권력과 욕망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부분을 감추고, 더 이상 이스보셋을 왕으로 섬기지 않으며, 다윗에게 더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을 왕으로 섬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말함으로써, 자신의 반역을 정당화합니다. 사실상, 아브넬에게는 다윗이 왕이 되는 것이 여호와의 뜻인지 아닌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 탐욕을 유지하기 위해 여호와의 이름만을 이용할 뿐입니다.

(2) 여호와의 약속(18)

아브넬은 이제 때가 되었으므로 이스라엘 장로들이 이전에 요구했던 바를 실천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근거로 제시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미 다윗에 관하여 ‘내가 내 종 다윗의 손으로 내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블레셋 사람의 손과 모든 대적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아브넬이 인용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에 대해 하셨던 말씀이 이와 비슷합니다(삼상 9:16). 아마도 아브넬이나 다른 사람들은, 다윗이 기름 부음 받았던 일을 기억하면서, 이스라엘을 다윗의 손으로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의 종’으로 불립니다. ‘종’이라는 칭호는 주인의 전폭적인 지지와 신뢰를 얻으면서 주인으로부터 중요한 사명을 받아 수행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모든 대적에 대해 말하기 전에 블레셋을 언급한 것은 당시 이스라엘의 가장 큰 대적이 블레셋이었음을 보여줍니다. 한글성경의 ‘벗어나게 하다’는 원문에 ‘구원하다’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블레셋과 다른 모든 대적을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3) 베냐민 사람들과의 만남(19)

특별히 베냐민 사람들을 설득하는데 베냐민 지파는 사울의 출신 지파로서 현재 사울 왕권의 최대 지지기반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욱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설득할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한 설득이 끝나자 아브넬은 다윗을 만나러 헤브론으로 툴발합니다. 다윗이 요구한 미가를 보냈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과 베냐민 사람들의 승낙도 자신의 손에 뒤고 있었습니다.

아브넬은 교활하게 양다리를 걸칩니다. 베냐민 사람들을 이스라엘과 구분하여 언급함은 베냐민 지파가 이스보셋 왕국의 중심 세력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울의 지파인 베냐민 족속도 다윗을 왕으로 모실 준비가 되었습니다. 아브넬의 이름이 두 번 언급되는데, 그 이름에는 각각 강조 어구 ‘감’(ם󰕂)이 선행하고 있습니다. 한글 성경은 ‘감’을 한 번만 ‘또’라고 번역합니다. 이는 아브넬에 대한 관심을 집중시키려는 저자의 의도를 반영합니다. 지금 모든 일을 추진하고 있는 사람은 아브넬입니다. 아브넬이 변화를 만들었고, 아브넬이 다윗에게 온 이스라엘을 이끌고 있습니다.

 

아브넬의 헤브론 방문(20-21)

성도들은 인생이 너무 순조롭게 진행될 때, 스스로 제동을 걸어 멈추고 제대로 가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순탄함이 항상 축복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늘이 없고 그림자가 없는 인생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 없는 오만의 내리막길은 가파를 뿐입니다. 아브넬은 헤브론 방문해서 다윗과 협상을 통해 좋은 결과를 받았지만, 피살로 뜻하지 않게 물거품이 됩니다.

20아브넬이 부하 이십 명과 더불어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가니 다윗이 아브넬과 그와 함께 한 사람을 위하여 잔치를 배설하였더라 21아브넬이 다윗에게 말하되 내가 일어나 가서 온 이스라엘 무리를 내 주 왕의 앞에 모아 더불어 언약을 맺게 하고 마음에 원하시는 대로 모든 것을 다스리시게 하리이다 하니 이에 다윗이 아브넬을 보내매 그가 평안히 가니라(20-21)

다윗의 성대한 환대에 아브넬이 충성을 맹세하고, 그의 충성에 대한 화답으로 다윗은 서둘러 안위를 보장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나눈 밀담은 하나님의 뜻을 위한 단합이 아니라 불순한 야합이었습니다.

(1) 아브넬을 위한 잔치(20)

베냐민 지파와 이스라엘 사람들을 설득하였습니다. 이 일이 끝나자 아브넬을 다윗을 만나려 헤브론으로 출발합니다. 아브넬을 다윗과 협상을 마무리하려고 신복 20명을 헤브론의 다윗에게 갑니다. 다윗은 잔치를 베풀어 주는데, 이 잔치는 다윗과 아브넬 간의 협상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는 뜻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조건이 오고 갔는지 언급되지 않지만, 아브넬은 다윗의 조건에 매우 만족한 것으로 보입니다.

19절에 이어 20절에서도 아브넬이라는 이름이 두 번 사용되면서, 아브넬에 대한 관심을 이끌고 있습니다. 다윗은 호의적으로 자신을 찾아온 그를 위해 잔치를 배설합니다. “잔치”는 ‘미쉬테’인데, 보통 술 마시는 잔치를 가리킵니다.

한글 성경은 아브넬과 함께 헤브론으로 왔던 사람들을 ‘부하’라고 칭합니다. 원문은 단순히 아나쉰(사람들)입니다. 이들이 각 지파의 대표거나 장로들이었다면 달리 표현되었을 것입니다. 아직 다윗의 태도를 확신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각 지파가 자신들의 대표를 보내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구약에서 ‘아나쉽’은 흔히 군인들을 가리킵니다(삼상 14:12;17:52). 따라서 이 사람들은 ‘무기 든 사람’이라 불리는 친위부대로서 아브넬을 수행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참조, 18:15). 다윗이 잔치를 베푼 것은 아브넬과 그 사람들에 대한 깊은 호의를 나타냅니다.

(2) 아브넬의 제안(21)

21절에서도 아브넬의 이름은 계속 언급됩니다. 그리고 아브넬은 다윗에게 “내가 일어나 가서 온 이스라엘 무리를 내 주 왕의 앞에 모아 더불어 언약을 맺게 하고 마음에 원하시는 대로 모든 것을 다스리시게 하리이다”라고 제안합니다.

자신이 다윗을 위해 할 수 있는 역할을 세 가지 방식으로 강조하며 설명합니다. 첫째, 1인칭 동사를 세 번 반복하여 사용합니다. ‘내가 일어나서’, ‘내가 가서’, ‘내가 모으겠습니다.’ 1인칭 연장형은 말하는 사람(아브넬)의 의지와 소원을 표현하는 형태입니다. 아브넬은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옹립하려는 자신의 의지가 확고하며, 자신이 이 일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려 함을 다윗에게 자랑하듯 말합니다. 둘째, 아브넬은 이미 다윗을 “내 주”(아도니)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셋째, 온 이스라엘 무리를 모으겠다고 말합니다. 이스보셋의 왕국에 참여한 지역과 지파들의 목록을 고려한다면, 아브넬이 이스라엘 전체를 모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아브넬은 온 이스라엘에 관해 말하고 있습니다. “언약을 맺게 하고”, 즉 이스라엘은 다윗과 언약을 맺을 것입니다. 이 언약은 다윗을 왕으로 모시는 충성의 서약일 것입니다. “마음에 원하시는 대로 모든 것을 다스리시게”는 왕의 권세와 의지를 존중하려 할 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나단이 다윗에게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행하소서”(7:3)라고 말한 것도 이와 같습니다.

아브넬은 다윗을 향하여 “내 주 왕”이라고 부릅니다. 이 호칭에서 아브넬이 이미 다윗을 자신의 왕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온 백성이 왕과 더불어 언약을 맺는다는 것은 여호와께서 모든 백성이 사울을 왕으로 삼은 사무엘상 11장 14-15절에 장면과 같은 행사를 치를 것을 의미합니다. 즉 공식적인 대관식을 통해 다윗은 그들의 왕이 되고 그들은 다윗의 백성이 되겠다는 언약을 맺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브넬은 자신이 다윗을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웠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온 이스라엘 왕으로 선택하시고 왕으로 삼으셨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아브넬은 자신이 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업적을 높인 것입니다. 이 때문에 자신을 섬김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인도하신 부분은 거의 절대적입니다. 사람들은 단지 돕는 자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모든 것을 주인으로 삼고 자기 공적을 자랑하며 자랑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일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합당하게 섬기지 아니하는 자입니다.

다윗은 아브넬과 협상을 성공적으로 맺은 후, ‘평안히’ 보내주었습니다. 아브넬은 평안히 돌아갑니다. 다윗은 아브넬을 해치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음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요압의 분노(22-26)

원한을 품고 있으면 결코 사물이나 사람을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런 원한이 있으면 하나님의 계획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믿음은, 하나님의 뜻과는 어긋나며 하나님의 평화는 크게 위협을 받을 것입니다. 요압은 아브넬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별것 아닌 것 같았지만, 이 일은 아브넬에게 치명적 비극을 가져왔습니다.

22다윗의 신복들과 요압이 적군을 치고 크게 노략한 물건을 가지고 돌아오니 아브넬은 이미 보냄을 받아 평안히 갔고 다윗과 함께 헤브론에 있지 아니한 때라 23요압 및 요압과 함께 한 모든 군사가 돌아오매 어떤 사람이 요압에게 말하여 이르되 넬의 아들 아브넬이 왕에게 왔더니 왕이 보내매 그가 평안히 갔나이다 하니 24요압이 왕에게 나아가 이르되 어찌 하심이니이까 아브넬이 왕에게 나아왔거늘 어찌하여 그를 보내 잘 가게 하셨나이까 25왕도 아시려니와 넬의 아들 아브넬이 온 것은 왕을 속임이라 그가 왕이 출입하는 것을 알고 왕이 하시는 모든 것을 알려 함이니이다 하고 26이에 요압이 다윗에게서 나와 전령들을 보내 아브넬을 쫓아가게 하였더니 시라 우물 가에서 그를 데리고 돌아왔으나 다윗은 알지 못하였더라(22-26)

본문은 아브넬과 다윗의 협상에 대해 반대를 보여줍니다. 이 단락이 앞부분과 장면이 완전히 바뀝니다. 이 장면은 전쟁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오는 다윗의 신하들과 요압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요압은 헤브론에서 아브넬이 다윗에게 다녀갔다는 소식과, 다윗이 그를 평안히 돌려보냈다는 소식에 매우 마음이 상했습니다. 요압이 보았을 때, 아브넬은 자기 동생 아사헬을 죽인 원수였기 때문입니다.

(1) 아브넬의 방문을 알게 된 요압(22-23)

전쟁에서 돌아온 다윗의 신하들은 다윗과 아브넬이 협상한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아브넬과의 협상은 다윗의 신하들, 특히 요압도 모르게 진행된 것입니다. 다윗은 아브넬이 요압의 동생인 아사헬을 죽인 일로 아브넬에 대한 요압의 감정이 좋지 않을 것을 예상하고, 요압을 배제한 채 협상을 마무리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다윗은 아브넬의 방문을 의도적으로 요압에게 알리지 않았고, 요압이 없을 때 맞춰서 아브넬을 불렀습니다. 이는 다윗이 요답과 아브넬의 적대적 관계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며, 이 기회에 요압을 쫓아내려 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신하들은 전쟁에서 돌아온 후에야 아브넬이 다윗과 협상하려고 막 다녀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요압과 다윗의 신하들은 헤브론에 도착한 후, 아브넬이 다윗을 만나려 왔다가 평안히 돌아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21절에 사용된 단어 ‘평안히’가 22절과 23절에 각각 다시 사용됩니다. 이는 아브넬의 평안한 귀환이 요압에게 큰 문제가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즉 요압의 입장에서 아브넬은 평안히 돌아갈 수 없는 존재인데, 왕이 그를 평안히 돌아가게 해줬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2) 다윗 왕을 질책하는 요압(24-25)

이 사실을 알게 된 요압은 화가 나서 다윗에게 나가서 왜 그렇게 했느냐고 이유를 물으면서, 다윗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말합니다. “잘(=확실히) 가게 하셨나이까?”라는 아브넬이 이미 떠나서 헤브론에 없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요압은 아브넬이 다윗에게 온 것은 왕을 속여서 정탐하기 위해 헤브론에 온 것이다고 주장합니다(25). 요압에 따르면, 아브넬은 다윗의 행동을 정탐한 뒤 다윗을 공격하려는 의도에서 헤브론을 방문했으리라는 것입니다. 요압은 아브넬이 다윗을 속인다고 주장합니다.

요압의 주장은 다윗과 아브넬의 밀약을 모르는 상황에서는 바른 주장일 수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다윗과 아브넬은 정적 관계이며, 계속해서 전쟁해오던 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아브넬이 다윗을 찾아온 것에 대해 의심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더불어 요압의 입장에서 아브넬이 동생 아사헬을 죽인 원수이기 때문에 의심과 적의가 더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3) 아브넬을 데려오는 요압(26)

다윗이 요압을 설득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지만, 요압이 다윗과 아브넬과의 협상 내용을 들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데도 요압은 다윗과 아브넬의 협상을 인정하거나 그를 평안히 보낼 생각이 없었습니다.

여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그는 아브넬처럼 왕을 쉽게 갈아치우는 사람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또한 아브넬이 다윗의 신하가 된다면 자신의 입지가 좁아질 것이라고 계산했을 것입니다. 아브넬은 군대 장관으로서, 다윗 왕국의 군사력을 책임지고 있는 요압과는경쟁 관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전쟁터에서 동생 아사헬을 살해한 것은 정당하고 살인죄로 기소될 수 없지만, 개인적으로 아브넬이 아사헬을 살해한 것에 대해 원한을 품고 있었습니다.

요압은 다윗에게 자신의 말만 외치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결국 요압은 다윗 모르게 사자를 보내어 아브넬을 다시 헤브론으로 돌아오게 만듭니다. 요압은 아브넬을 죽여 원수도 갚고 후한도 없애려는 결심입니다. 여기에서 요압은 다윗의 군사이지만 다윗에게 반발하여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을 처음으로 보입니다. 그후에도 요압이 다윗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경우가 나타나며 여호와께 대한 신뢰나 은혜 같은 덕목과는 거리가 먼 매우 세속적이고 잔인하며 권력 지향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요압의 관점에서 아브넬과 같은 정치 9단의 말들 듣고 움직이는 다윗이 어수룩해 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알고 있던 다윗의 입장에서는 아브넬의 행동은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브넬이 어떤 수술을 하든,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뜻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에 따라 다윗은 아브넬을 신뢰하는 위험한 행동을 택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 바로 그것이 다윗과 요압의 차이입니다.

요압의 신하들은 기분 좋게 돌아가는 아브넬을 시라 우물가에서 만나 데리고 돌아왔습니다. 다윗은 이러한 일이 벌어지는 줄 전혀 몰랐습니다. 그가 아브넬을 위해 잔치를 베푼 사실이나, 아브넬을 죽이려는 요압의 작전을 몰랐다는 사실은, 아브넬의 죽음에 관해 다윗에게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시라’는 헤브론에서 북쪽으로 약 4km정도 떨어진 곳으로 추정됩니다.

 

나가는 말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헛된 욕심과 복수심과 같은 악한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뜻대로 크게 생각하고 담대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특히 영적인 지도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인간적인 방법으로 행동하지 않도록 더욱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기 위해 기도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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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03-01)

 

점점 강성해지는 다윗 왕국

사무엘하 3장 1-16절

 

약해 보이던 것들이 점점 강해지는 것을 보면, 처음에는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지만 계속 성장하면 나중에는 커다란 차이를 낳습니다. 성도들은 처음 시작은 매우 미약하게 시작하지만, 나중에는 세상에 속한 사람들보다 능력 있는 모습으로 변해갑니다. 성도들은 마치 천국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마태복음 13:32)

 

사무엘하 3-4장은 이스보셋 왕국의 멸망에 관한 기록입니다. 특히 3장은 아브넹의 배반과 죽음에 관 기록인데, 본문(3:1-16)은 그 전반부에 해당합니다. 다윗이 헤브론에서 다스리는 동안 그에게서 여섯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한편 아브넬과 이스보셋은 사울의 첩 리스바의 문제에서 촉발된 심각한 갈등을 겪습니다. 결국 아브넬은 이스보셋을 떠나기로 하였습니다. 그는 전령을 보내 다윗과 은밀하게 접촉하고 언약을 맺었습니다.

 

성장하는 다윗의 왕국(1-5)

하나님께서는 때를 따라 은혜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눈에 보이는 큰 은혜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은혜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다윗의 집을 점점 부흥시켜 주시는 능력을 보면서, 다윗처럼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우리가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하나님께서 계속적으로 점점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1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 2다윗이 헤브론에서 아들들을 낳았으되 맏아들은 암논이라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의 소생이요 3둘째는 길르압이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의 소생이요 셋째는 압살롬이라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의 아들이요 4넷째는 아도니야라 학깃의 아들이요 다섯째는 스바댜라 아비달의 아들이요 5여섯째는 이드르암이라 다윗의 아내 에글라의 소생이니 이들은 다윗이 헤브론에서 낳은 자들이더라(1-5)

다윗의 집과 사울의 집인 이스보셋과 전쟁이 오래 계속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도 계속해서 다윗의 집에는 흥왕해 많은 자녀들이 태어난 것은, 다윗 왕조가 점점 성장해 가고, 다윗이 죽은 후까지도 계속 이어질 것을 바라보게 합니다.

(1) 다윗과 사울의 집 비교(1)

기브온 연못가에서의 충돌 이후, 다윗의 집과 사울의 집(이스보셋)은 양립할 수 없었습니다. 그 둘 사이에 항상 계속되는 전쟁 속에 있었습니다. 이스보셋의 통치 기간을 고려할 때, 최대 2년 정도의 내전을 겪었을 것입니다(2:10).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해져 가고 다윗의 집안을 따르는 세력들은 점점 강해졌습니다. 그리고 사울의 집안을 따르는 세력은 점점 약해졌습니다. 다윗의 통치하는 왕국 시대가 점점 힘을 얻어갈 것을 예견합니다.

(2) 다윗의 아들들(2-5)

다윗은 헤브론에서 7년 6개월을 통치하는 동안 2명의 아내 외에 4명의 아내를 더 얻습니다. 각각 다른 6명의 아내에게서 낳은 아들은 모두 다섯 명을 열거합니다. 하나님꼐서 그분의 뜻과 계획 가운데 기름 부어 왕으로 세우신 다윗의 집을 강하고 부유하게 하심으로 든든히 세워가고 계셨습니다.

첫째는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나의 형제는 기쁨을 준다’)의 소생 ‘암논’(‘신실하다’)입니다(삼상 25:43). 이 암논은 후에 압살롬에 의해 살해당합니다(13:28-29).

둘째는 아비가일의 소생 ‘길르압’인데, 역대기에서는 다니엘로 불립니다(대상 3:1). 다윗이 사울을 피해 다니던 중 결혼한 두 사람이 아히노암과 아비가엘입니다(삼상 25:42,43). 이 둘은 유다 산지 갈멜 출신입니다. 아비가엘의 소생 길르압에 관해서는 달리 알려진 바가 없고, 그는 어려서 죽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셋째는 ‘압살롬’(‘아버지는 평화이시다’)이며,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의 소생이었습니다. 그술은 아람에 속한 왕국으로, 갈릴리 호수의 북동쪽, 헬몬과 바산 사이 지역에 해당합니다. 압살롬은 후에 첫째 아들 암논을 죽이며, 반란을 일으켜 잠시 예루살렘을 차지하기도 합니다.

넷째는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입니다. 학깃(‘축제’)에 관해서는 다른 정보가 전해지지 않습니다. ‘아도니야’(‘여호와는 주님이시다’)는 솔로몬의 즉위에 반대하는 세력들을 이끌었으나, 결국 솔로몬에 의해 숙청당했습니다(왕상 2:25).

다섯째와 여섯째는 아비달(‘아버지는 보호이시다’)의 소생 ‘스바댜’(‘여호와께서 심판하셨다’)와 ‘에글라’(‘젊은 암소’)의 소생 이드르암(‘남은 백성’)입니다. 이들에 관해서는 다른 정보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에글라는 다윗의 아내라고 소개됩니다.

여섯 아내가 각기 한 아들을, 도합 여섯 명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 명단 외에 다른 아들들도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렇게 나열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 다윗에게 임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손의 번성과 더불어 다윗 왕국이 견고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망해가는 사울의 집(6-11)

하나님과 함께한 사람들은 점점 강해지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은 점점 약해집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사람의 편에 서는 사람입니까? 어느 편에 서느냐에 따라 당신의 미래가 결정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한 자를 통하여 당신의 역사를 이끌어 갑니다. 영적으로 교만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말씀으로 날마다 자신의 신앙을 경계하여 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6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있는 동안에 아브넬이 사울의 집에서 점점 권세를 잡으니라 7사울에게 첩이 있었으니 이름은 리스바요 아야의 딸이더라 이스보셋이 아브넬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내 아버지의 첩과 통간하였느냐 하니 8아브넬이 이스보셋의 말을 매우 분하게 여겨 이르되 내가 유다의 개 머리냐 내가 오늘 당신의 아버지 사울의 집과 그의 형제와 그의 친구에게 은혜를 베풀어 당신을 다윗의 손에 내주지 아니하였거늘 당신이 오늘 이 여인에게 관한 허물을 내게 돌리는도다 9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맹세하신 대로 내가 이루게 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아브넬에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라 10그 맹세는 곧 이 나라를 사울의 집에서 다윗에게 옮겨서 그의 왕위를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이스라엘과 유다에 세우리라 하신 것이니라 하매 11이스보셋이 아브넬을 두려워하여 감히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니라(6-11)

하나님의 말씀이 삶의 중심에 자리에 있을 때, 진정한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번성하는 다윗의 집과는 달리 사울의 집에서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습니다. 사울의 집은 군대장관 아브넬이 사울의 후궁과 잠자리를 한 문제가 일어납니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사울 집안의 실세인 아브넬과 왕인 이스보셋 간에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1) 아브넬의 권세(6)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있었음이 다시 언급됩니다. 전쟁은 군사령관 ‘아브넬’의 권세를 날이 갈수록 더욱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사울 집에서 꼭두각시 이스보셋 왕보다 군대장관 아브넬이 점점 권세를 잡아갔습니다. 이스보셋은 꼭두각시 왕으로서 왕직만 갖고 있을 뿐, 실제적인 통치권은 아브넬이 행하고 있었습니다.

(2) 이스보셋의 책망(7)

사울의 아내는 아히마아스의 딸 ‘아히노암’입니다. 아히노암이 사울의 네 아들과 두 딸을 낳았습니다. 한편 본문은 사울의 유일한 첩 ‘리스바’를 소개합니다. 리스바는 알모니와 므비보셋을 낳았습니다(21:8). 다윗이 흉년에 대한 책임을 물어서 사울의 자손을 죽일 때, 이 리스바의 두 아들도 죽임을 당했습니다(21:8-9).

점점 강한 힘을 갖게 된 아브넬은 사울의 첩 리스바와 동참하였습니다. 이는 전 왕의 부인을 자신이 취함으로써 왕권에 대한 욕심을 표현하는 행동일 수 있으나, 확실하진 않습니다. 그가 왕이 되기를 원했다면 더욱 직접적인 방법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스보셋이 아브넬의 이러한 행동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시했습니다. 하지만 이스보셋의 책망은 아브넬이 더 극단적인 행동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아브넬은 이스보셋의 말을 듣고, 왕국을 다윗에게 넘겨주겠다고 결심하고 협박하였습니다.

(3) 아브넬의 분노(8-10)

아브넬은 이스보셋의 책망에 “내가 유다의 개 머리냐?”(8)라고 분노합니다. 이스보셋의 적국인 유다와 비천한 동물인 개를 결합하여 멸시의 대상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특히 개는 성적으로 난잡함을 상징하는 동물이기도 합니다. 머리는 동물의 신체 중 먹지도 못할 가장 가치 없는 부분입니다.

아브넬은 “내가 오늘 당신의 아버지 사울의 집과 그의 형제와 그의 친구에게 은혜를 베풀어 당신을 다윗의 손에 내주지 아니하였거늘 당신이 오늘 이 여인에게 관한 허물을 내게 돌리는도다”(8b)라며, 자신이 이스보셋에게 그동안 베푼 도움과 선행을 나열하면서 이스보셋이 은혜도 모르고 행동한다고 분노하였습니다. 아브넬은 사울의 가족과 신하들에게 은혜를 베풀었으며, 이스보셋을 다윗의 손에 넘기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넬은 이스보셋이 리스바와 관련된 허물을 자기에게 돌리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자신이 베푼 은혜에 비하여 그 허물은 매우 작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맹세하신 것은 다윗을 왕이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9). 왕국을 사울의 집에서 빼앗아 다윗에게 주고, 다윗이 보좌에 앉아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리게 하는 것입니다(3:10). “하나님이 아브넬에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라”(3:9b). 이는 자기를 저주함으로써 자신의 말을 보증하는 일종의 맹세 구문입니다(룻 1:17). 단(재판)은 헬몬산의 기슭, 이스라엘 북쪽 경계선에 위치하는 성읍입니다. 브엘세바(‘일곱 개의 우물’ 혹은 ‘맹세의 우물’)는 헤브론 남서쪽 약 37km에 위치한 성읍입니다.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라는 표현은 이스라엘 전체 영토를 가리키는 일반적 표현입니다.

(4) 이스보셋의 반응(11)

이스보셋은 아브넬을 두려워하여 그에게 한마디도 대꾸하지도 못했습니다. 이스보셋은 아브넬을 비난받은 후, 분노하는 아브넬을 보면서 그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다윗에게 아브넬의 협상 제안(12-16)

지도자에게는 가장 필요한 것이 많은 사람을 인도하는 지도력입니다. 자신을 지지하고 따르는 사람들을 한마음으로 모을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지도자들에게는 지도자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세상의 보이는 것을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살아가는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런 지도자는 절대로 실패하지 않고,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다윗은 지도자로 그러한 능력이 뛰어난 사람입니다. 당신을 바른길로 인도하는 교회의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12아브넬이 자기를 대신하여 전령들을 다윗에게 보내어 이르되 이 땅이 누구의 것이니이까 또 이르되 당신은 나와 더불어 언약을 맺사이다 내 손이 당신을 도와 온 이스라엘이 당신에게 돌아가게 하리이다 하니 13다윗이 이르되 좋다 내가 너와 언약을 맺거니와 내가 네게 한 가지 일을 요구하노니 나를 보러올 때에 우선 사울의 딸 미갈을 데리고 오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고 14다윗이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에게 전령들을 보내 이르되 내 처 미갈을 내게로 돌리라 그는 내가 전에 블레셋 사람의 포피 백 개로 나와 정혼한 자니라 하니 15이스보셋이 사람을 보내 그의 남편 라이스의 아들 발디엘에게서 그를 빼앗아 오매 16그의 남편이 그와 함께 오되 울며 바후림까지 따라왔더니 아브넬이 그에게 돌아가라 하매 돌아가니라(12-16)

사울의 왕국에서 맘껏 권좌를 흔들던 아브넬과 그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이스보셋 사이에 권력 분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화가 아브넬은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이스보셋을 배반합니다. 이제는 더는 버틸 수 없다고 생각하고 사울의 왕국을 다윗에게 넘겨주기 위한 계획을 비밀리 진행합니다. 이것은 그가 사울의 집안에 충성스러운 일군이 아니었음을 다시 한번 증명합니다.

(1) 아브넬의 협상 제안(12)

아브넬은 자신이 이스보셋 앞에서 맹세한 것을 바로 시행합니다. 다윗과 협상하려고 전령들을 보냅니다. 자신이 이스라엘 땅을 다윗에게로 돌아가게 할 테니 자신과 언약을 체결하자고 제안하였습니다. 그는 ‘이 땅이 누구의 것이냐?’라는 수사학적 질문을 통해 이스라엘의 진정한 주인이 다윗이라고 돌려 말합니다.

이 언약에 따라 아브넬이 할 일은 왕국을 다윗에게로 돌리는 것이지만, 아브넬을 위해 다음 해야 할 일은 밝혀지지 않습니다. 아마도 아브넬을 이스라엘을 다윗에게 넘기는 대가로 자신의 안전과 권력을 보장하도록 요구했을 것, 즉, 왕국에서 이인자로 높이는 것이 다윗이 자신에게 줄 수 있는 보상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언약은 요압이 아브넬을 죽여야 했던 이유 중 하나일 것입니다.

(2) 다윗의 조건(13)

아브넬의 제안을 받은 다윗은 그 제안이 진심인지를 보여주려면 먼저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먼저 사울의 딸 미갈을 자기에게 데리고 오면, 그와 더불어 언약을 맺겠다고 말했습니다. 만일 아브넬이 미갈을 데리고 오지 않으면, 자신을 만날 수 없을 것이라고 강경한 어조로 말합니다. 여기서 다윗은 미갈을 ‘자신의 아내’가 아닌 ‘사울의 딸’이라고 표현합니다.

다윗은 사울의 집에 왕권을 주장하려면 사울의 사위라는 명목상의 지위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즉 개인적인 애정 때문이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미갈을 통해 사울의 왕국을 이어받을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습니다.

(3) 미갈과 발디엘(14-16)

다윗과 미갈은 이혼하지 않았으며, 다윗이 도망간 사이에 미갈은 아버지에 의해 강제로 결혼한 상태였기에 법적인 상태가 불분명합니다. 사울 왕은 다윗의 아내였던 미갈을 갈림 사람 라이스의 아들 ‘발디’, 즉 ‘발디엘’(‘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다’)에게 주었습니다(삼상 25:44), 갈림은 베냐민 지파의 성들에 속합니다. 다윗은 아브넬의 사신을 떠나보낸 후, 이스보셋에게 직접 사신을 보내 미갈을 돌려보내라고 요구했습니다. 다윗은 블레셋 사람의 포피 일백을 주고 미갈과 결혼했다는 점에서 미갈을 요구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14). 다윗은 실제로 포피 이백을 주었지만, 사울이 요구했던 것은 포피 일백이었습니다.

다윗의 요구를 거부하지 못한 이스보셋은 아브넬을 보내 발디엘에게서 미갈을 데려오게 했습니다(15). 이스보셋이 다윗의 요구를 들어주도록 아브넬이 영향력을 행사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미갈의 남편 발디엘이 미갈과 함께 걸어오는데, 울면서 바후림까지 따라왔습니다(16). 바후림은 감람산의 동북쪽 경사지에 있는 작은 마을로 추정됩니다. 다윗을 저주했던 게라의 아들 시므이의 고향이기도 합니다(왕상 2:8). 이 이별이 얼마나 비극적인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무도 미갈의 의사를 묻지도 않고 있고 미갈의 심정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남자들의 권력 다툼에 미갈이 희생양이 되었음을 암시합니다. 이스보셋은 밀약이 있는지도 므로는 상태에서, 다잇과 아브넬의 요구대로 미갈을 다윗에게 보내줍니다.

 

나가는 말

하나님의 선한 뜻을 더 잘 분별하고 따르면, 점점 더 강해지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다윗은 미갈을 요구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그를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나라는 강해져도 다윗의 영적 감감은 무너져고 있습니다. 우리는 결국에 깨어지고 무너질 세상의 나라를 위해서 헛된 힘을 낭비하지 않고, 영적인 지혜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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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02-02)

 

 

칼의 밭에서 일어난 비극

사무엘하 2장 12-32절

 

낮에 해가 둘일 수 없습니다. 이 말은 한 나라에 두 왕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두 왕을 모시고 있다면, 두 세력은 충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 우리 성도들은 믿지 않는 사람과 영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충돌에서 이기려면 무엇이 필요합니까?

 

본문은 이스라엘의 내전, 즉 이스보셋의 군대와 다윗의 군대가 싸우는 전쟁을 기록합니다. 아브넬이 이스보셋의 군대를 이끌고 나왔고, 요압이 다윗의 군대를 이끌고 나왔습니다. 먼저 각 군대의 대표 열두 명을 뽑아서 싸우게 하였는데, 모두 죽고 살아남은 자가 없었습니다. 이후 양측 군대 전체가 싸우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 아브넬은 뜻하지 않게 요압의 아우 아사헬을 죽이게 됩니다. 해가 졌을 때, 싸움을 그치고 아브넬의 군대는 마하나임으로, 요압의 군대는 헤브론으로 돌아갔습니다.

 

기브온 연못가의 전투(12-16)

 

한 지도자의 개인적인 야망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자신의 야망을 위해 왕으로서 신하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보다 개인의 야망을 위해 살아가면 비참한 희생이 따른 것입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일을 선택해야 합니다. 이 기브온 전투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어떤 명분이나 영적인 고민은 없었습니다.

12넬의 아들 아브넬과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신복들은 마하나임에서 나와 기브온에 이르고 13스루야의 아들 요압과 다윗의 신복들도 나와 기브온 못 가에서 그들을 만나 함께 앉으니 이는 못 이쪽이요 그는 못 저쪽이라 14아브넬이 요압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청년들에게 일어나서 우리 앞에서 겨루게 하자 요압이 이르되 일어나게 하자 하매 15그들이 일어나 그 수대로 나아가니 베냐민과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편에 열두 명이요 다윗의 신복 중에 열두 명이라 16각기 상대방의 머리를 잡고 칼로 상대방의 옆구리를 찌르매 일제히 쓰러진지라 그러므로 그 곳을 헬갓 핫수림이라 일컬었으며 기브온에 있더라(12-16)

우리들의 삶 속에서도 아무리 사소해 보이는 재미라도 악한 일을 멀리해야 합니다. 장난스럽게 시작한 작은 싸움이 큰 싸움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11지파의 실질적인 통치자 이스보셋의 군대장관 아브넬과 다윗의 부하로서 2인자인 군대장관 요압은 각각 군대를 이끌고 기브온에서 만납니다. 서로 기브온 연못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게 됩니다. 그들은 이상한 게임을 시작합니다. 이 게임은 제안은 아브넬이 합니다.

(1) 기브온으로 온 양측 군대(12-13)

아브넬은 이스보셋의 군대를 이끌고 마하나임에서 기브온으로 왔습니다. 기브온은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10km 떨어진 장소이며, 그곳의 산당에 모세의 성막과 번제단이 있었습니다(대하 1:3-6).

요압도 다윗의 군대를 이끌고 헤브론에서 기브온으로 왔으므로, 두 군대가 기브온 연못가에서 만났습니다. 당시 기브온은 다윗의 세력과 이스보셋의 세력이 만나는 접경 지대였을 것입니다. 요압의 어머니 스루야는 아비가일과 함께 나하스의 딸로 언급됩니다(17:25: 대상 2:16). 아마도나하스가 죽고 난 뒤, 그들의 어머니가 다윗의 아버지 이새와 결혼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2) 선발된 군사들의 대결(14-15)

아브넬과 요압은 본격적인 전쟁을 앞두고 각각 자기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려는 목적으로 병사 중 열두 명을 선발하여 경기하게 하자고 합의했습니다.

(3) 대결의 결과(16)

장난삼아 계획된 경기가 지나치게 과열되었습니다. 싸웠던 모든 병사가 각기 상대방의 머리를 잡고 그 옆구리를 칼로 찔러 함께 죽었으므로, 살아남은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곳의 이름을 ‘헬갓 핫수림’, 즉 ‘칼의 밭’이라 불렀습니다.

 

아비새의 죽음을 당함(17-23)

자신의 힘만 믿고 상대의 힘을 무시하다가 비참한 종말을 맞은 어리석음을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항상 믿음의 사람들은 자기 능력을 너무 과신하지 말고 다시 한 번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형들이 권했고, 두 번이나 자신을 돌아보고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한 것이 아쉽습니다.

17그 날에 싸움이 심히 맹렬하더니 아브넬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의 신복들 앞에서 패하니라 18그 곳에 스루야의 세 아들 요압과 아비새와 아사헬이 있었는데 아사헬의 발은 들노루 같이 빠르더라 19아사헬이 아브넬을 쫓아 달려가되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아브넬의 뒤를 쫓으니 20아브넬이 뒤를 돌아보며 이르되 아사헬아 너냐 대답하되 나로라 21아브넬이 그에게 이르되 너는 왼쪽으로나 오른쪽으로나 가서 청년 하나를 붙잡아 그의 군복을 빼앗으라 하되 아사헬이 그렇게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그의 뒤를 쫓으매 22아브넬이 다시 아사헬에게 이르되 너는 나 쫓기를 그치라 내가 너를 쳐서 땅에 엎드러지게 할 까닭이 무엇이냐 그렇게 하면 내가 어떻게 네 형 요압을 대면하겠느냐 하되 23그가 물러가기를 거절하매 아브넬이 창 뒤 끝으로 그의 배를 찌르니 창이 그의 등을 꿰뚫고 나간지라 곧 그 곳에 엎드러져 죽으매 아사헬이 엎드러져 죽은 곳에 이르는 자마다 머물러 섰더라(17-23)

결국 이 전투는 더 치열해져 전면전으로 펼쳐진 가운데, 이 전투에서 아브넬의 군대가 패배하고, 다윗의 부하들은 승리하게 됩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의 군대장관 아브넬은 기브온에서 퇴각하게 됩니다.

(1) 전쟁의 요약(17)

본문 “그 날에 싸움이 심히 맹렬하더니 아브넬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의 신복들 앞에서 패하니라.”(17)은 그날의 전쟁을 요약하여 설명합니다. ‘맹렬하다’로 번역된 ‘카쉐’는 ‘혹독하다’, ‘힘들다’를 의미하는 단어로, 여기서 전쟁의 양상이 극렬하였음을 표현합니다. ‘패하다’로 번역된 ‘나가프’는 ‘떼리다’, ‘치다’를 의미하는 단어인데, 이 동사의 니팔형은 흔히 전쟁에서의 패배를 가리킵니다(10:15,19; 대하 6:24).

(2) 요압의 형제들(18)

18-23절은 그날 치열하게 벌어진 전쟁 중 발생했던 중요한 사건, 즉 아사헬의 죽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먼저 18절에서 사건의 중심인물인 아사헬이 소개됩니다. 그는 스루야의 아들이며 요압의 동생이었는데, 노루처럼 빠르게 달릴 수 있었습니다. 히브리어 ‘처비’는 ‘영광’ 혹은 ‘노루’라는 의미를 지니는데, 다윗의 노래에서 사울을 상징하는 ‘영광’의 의미로 번역되었고(1:19) 본문에서는 아사헬의 날쌘 발을 상징하는 ‘노루’로 번역되었습니다. 전쟁 중에 죽은 두 사람, 사울과 아사헬이 ‘처비’라는 단어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3) 아사헬의 죽음(19-23)

이스보셋의 군대가 다윗의 군대에 패하여 도주하는 때에 아사헬은 적군의 대장 아브넬을 추격하였습니다. 한글 성경에서 ‘달려가되’라고 번역된 ‘라다프’는 ‘추격하다’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라는 표현은 아브넬을 반드시 죽이겠다는 아사헬의 집념을 표현합니다. 아브넬은 다윗 군대의 사령관인 요압과 그의 형제들에 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브넬이 자신을 끈질기게 뒤쫓는 자가 아사헬임을 알았을 때, 그는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아사헬에게 ‘좌우로 치우치라’고 충고했습니다. 아브넬은 이러한 표현을 통해 아사헬의 끈질긴 추격이 실제로는 어리석은 행동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브넬은 아사헬에게 병사 중 하나를 잡아 그 군복을 빼앗고 그것을 전공으로 삼는 게 나을 것이라 말해주었습니다. 군복으로 번역된 ‘할리차’는 성경에 단 두 번 사용된 단어이며, 군인들의 복장을 의미한다고 여겨집니다(삿 14:19; 삼하2:21). 명예욕에 붙잡힌 아사헬이 아브넬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아브넬은 자신이 그를 죽일 수도 있다고 경고했습니다(2:22). 아브넬은 아사헬의 형 요압을 생각하여 될 수 있으면 아사헬을 해치지 않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아사헬이 아브넬의 충고를 거절하고 계속 뒤쫓았고, 아브넬이 창으로 그를 찌르니 창끝이 배를 꿰뚫었습니다. 아사헬이 엎어져 죽었는데, 아사헬이 죽어 있는 것을 본 사람들이 그 자리에 멈춰 섰습니다.

 

기브온 전투의 결과(24-32)

하나님께서는 점점 하나님의 세우신 다윗의 나라를 이루어 가심을 보여준 것입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승리를 주십니다. 이스보셋의 나라를 인간이 인위적인 방법으로 세운 나라입니다. 그래서 처음 시작은 굉장하게 시작하지만 점점 시들해집니다. 하지만, 다윗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을 따랐기 때문에, 다윗을 따르는 유다 한 지파가 나머지 열한지파를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점점 다윗의 나라를 부흥시켜 주신 것입니다.

24요압과 아비새가 아브넬의 뒤를 쫓아 기브온 거친 땅의 길 가 기아 맞은쪽 암마 산에 이를 때에 해가 졌고 25베냐민 족속은 함께 모여 아브넬을 따라 한 무리를 이루고 작은 산 꼭대기에 섰더라 26아브넬이 요압에게 외쳐 이르되 칼이 영원히 사람을 상하겠느냐 마침내 참혹한 일이 생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언제 무리에게 그의 형제 쫓기를 그치라 명령하겠느냐 27요압이 이르되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무리가 아침에 각각 다 돌아갔을 것이요 그의 형제를 쫓지 아니하였으리라 하고 28요압이 나팔을 불매 온 무리가 머물러 서고 다시는 이스라엘을 쫓아가지 아니하고 다시는 싸우지도 아니하니라 29아브넬과 그의 부하들이 밤새도록 걸어서 아라바를 지나 요단을 건너 비드론 온 땅을 지나 마하나임에 이르니라 30요압이 아브넬 쫓기를 그치고 돌아와 무리를 다 모으니 다윗의 신복 중에 열아홉 명과 아사헬이 없어졌으나 31다윗의 신복들이 베냐민과 아브넬에게 속한 자들을 쳐서 삼백육십 명을 죽였더라 32무리가 아사헬을 들어올려 베들레헴에 있는 그의 조상 묘에 장사하고 요압과 그의 부하들이 밤새도록 걸어서 헤브론에 이른 때에 날이 밝았더라(24-32)

표면적으로는 다윗의 군대가 이겼지만, 아무도 상대방을 압도할 정도의 승리를 거두지 못한 채 각 진영으로 돌아갑니다. 360명을 잃은 아브넬의 북쪽 이스라엘과 19명의 정예 군사와 아사헬을 잃은 남쪽 다윗의 군대 모두 손실을 입었습니다.

(1) 전투 중단을 제안하는 아브넬(24-26)

요압과 아비새가 아브넬의 군대를 추격하다가 기브온 광야 길에 있는 ‘기아’ 맞은 편 ‘암마’ 산에 이를 때 해가 졌습니다. ‘기아’와 ‘암마’는 여기서만 나타나는 지명입니다. 해가 졌으므로 전투를 계속하기 힘들었습니다.

추격을 당하여 흩어졌던 베냐민 사람들이 아브넬에게 모여들어 한 무리를 이루었고, 한 언덕의 정상에 섰습니다. 여기서 베냐민 사람이라는 칭호는 아브넬의 병사들이 주로 베냐민 지파 사람으로 구성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아브넬이 요압을 불러 전쟁을 중단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칼이 영원히 사람을 상하겠느냐’(2:26). 여기서 ‘상하다’는 ‘아칼’이며 문자적으로는 ‘먹다’, ‘삼키다’를 뜻합니다. 칼이 삼킨다는 것은 전쟁에서 칼로 사람을 살육함을 가리킵니다. 아브넬은 칼이 사람들을 죽이도록 내버려 둔다면 아사헬이 죽은 것처럼 또 다른 참혹한 일이 생길 수 있으리라고 요압에게 경고했습니다. 이는 비참히 죽은 동생에 대한 복수심에 사로잡혀서 분별력을 상실하지 말라는 아브넬의 충고였습니다. 또 아브넬은 지금은 서로 적군이 되어 싸우지만 실제로는 한 형제이므로 지나치게 싸우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2) 요압의 답변(27-28)

아브넬의 제안에 답하기 전에 요압은 먼저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였습니다. 히브리어 ‘하이’(사시거니와)는 맹세를 나타내는 관용어구입니다. 그리고 요압은 아브넬이 애초에 선발된 병사들의 싸움을 제안하지 않았더라면 서로 싸우지 않고 아침에 이미 돌아갔을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요압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면서, 형제들 사이의 비참한 전쟁에 대한 책임이 아브넬에게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요압이 나팔을 불자, 병사들이 싸움을 멈추고 제자리에 서서 다시 싸우려하지 않았습니다.

(3) 아브넬 군대의 퇴각(29)

아브넬과 그의 군사들은 아라바를 지나 요단을 건넜고, 계속하여 비드론 온 땅을 지나서 마하나임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아라바는 사해 위쪽 요단강 서편 계곡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비드론은 요단강 동편의 계곡에 있는 어느 장소일 것입니다. 아브넬과 그 병사들이 전쟁터를 떠나 마하나임에 이르기까지 밤새도록 행진해야 했습니다.

(4) 요압 군대의 퇴각(30-32)

요압이 전쟁을 중단하고 병사들을 모으니, 아사헬과 병사 19명이 비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죽인 베냐민 사람과 아브넬의 부하들은 360명이었습니다. 아사헬은 베들레헴의 가족 묘지에 장사되었고, 요압과 병사들은 밤새 행진하여 해가 뜰 무렵에 헤브론에 도착했습니다.

 

나가는 말

영적 전쟁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죄를 멀리하고, 싸울 때와 멈출 때를 잘 알아야 합니다. 개인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맹목적인 싸움을 싸우느라고 힘 빼지 않고,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영적인 싸움에 일을 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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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06-03)

 

 

마태복음(06-03).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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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순위에 대해 가르치신 예수님

마태복음 6장 25-34절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삶의 질을 물질에 따라 좌우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돈을 하나님과 지위에 겨룰 만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현대 성도들에게 돈과 물질 사용은 믿음의 진정성을 드러내는 잣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 가지 대조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물질을 다루어야 하는지 가르쳐주십니다.

 

본 단락은 제자들의 새로운 삶의 방식에 대한 추가적 가르침입니다. 특별히 재물과 염려의 문제를 다룹니다. 이 둘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재물을 땅에 쌓으며 재물을 좇다 결국 재물의 노예가 되어 삽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재물이 아닌 하나님만을 섬기며, 그분께 전적으로 삶을 의탁합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돌봄 아래 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삽니다. 그러므로 전혀 염려할 게 없습니다.

 

재물에 대한 가르침(25-30)

아이들이 염려하지 않는 것은 부모를 전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늘 아버지를 신뢰하는 자녀는 염려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먹고 사는 사는 문제에 대해서 너무 지나치게 염려하는 것은 믿음이 부족한 삶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5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28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25-32)

의식주는 인간의 기본적인 필수조건입니다. 의식주가 해결되어야 안정적이고 행복한 생활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것들조차도 하늘 아버지에 맞기고 염려하지 말 것을 강조하십니다. 제자들은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로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25).

생명이, 몸을 보호하는 옷보다 몸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하늘의 새와 들의 풀을 보면서 염려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생각해야 합니다(26-30).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는 새들도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는데 하물며 열심히 수고해서 일하는 제자들, 아버지와 아들 관계에 있는 제자들을 돌보지 않으시겠는가! 공중에 나는 새를 기르시고 들의 풀과 꽃을 아름답게 입히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하물며 사랑하는 자녀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먹이고 입히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는 들꽃보다 중요하고, 솔로몬보다 소중하므로, 아버지께서 자녀를 지극히 소중하게 여기시고 필요를 채워 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믿음이란 하늘 아버지께서 자녀를 위해 행하실 것을 신뢰하는 것이며, ‘믿음이 작은 자’는 아버지께서 자녀의 생존과 필요를 위해 제공하실 것을 신뢰하지 못해서 두려워하는 사람입니다. 제자들은 기본적으로 신뢰심이 있으나 이 신뢰심이 더 커져야 염려하지 않게 됩니다.

염려는 영적 문제와 직결됩니다. 염려의 배후에는 불신이 있습니다. 염려거리를 하나님 아버지의 기적이 예비된 일로 보는 믿음의 시각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믿음의 기도로, 감사함으로 구하시길 바랍니다(빌 4:6-7). 그러므로 하늘 아버지의 돌보심과 제공을 믿는 제자는 먹고 입는 문제로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31-32).

하늘 아버지는 자녀들의 모든 필요를 이미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나와서 믿음의 간구하길 원하십니다. 자녀들이 하나님께서는 간절히 나오기를 기다리십니다.

 

먼저 구해야 할 것들(33-34)

하나님께서는 필요한 모든 것을 아시고 공급해 주시는 하늘 아버지입니다. 따라서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섬기며 하나님의 나라와 뜻에 마음을 두고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에 어떤 것보다 더 먼저 구해야할 것을 가르쳐 주시고 계십니다.

33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32-33)

하늘의 아버지는 제자들에게 무엇이 요한지 알고 계십니다(6:8). 그러므로 제자들은 염려 대신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해야 합니다. ‘먼저’는 순서에서의 우선됨을 의미하는 ‘무엇보다도’, ‘특별히’의 뜻입니다. ‘먼저 … 구하라’는 나머지 일은 관심을 덜 가져야 할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다른 것도 중요하지만 아버지의 나라와 그의 의를 우선순위로(참조, 23:26) 여기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이 구해야 하는 하늘나라와 의가 무엇인지는 산상설교 전체에서 제시되었습니다. 제자는 자녀를 돌보시는 하늘 아버지의 나라를 먼저 구해야 합니다. 여기서 ‘하늘나라와 의’는 하나님의 선물 또는 은혜입니다. 하늘나라가 선물이며 은혜라면, 뒤에 나오는 하늘 아버지의 의는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염려하지 않고 하늘 아버지의 나라와 의에 우선권을 두었을 때 이 모든 것,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십니다. 하늘 아버지의 자녀라고 해서 건강과 행복과 번영을 보장받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 려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 때문에 찾아오는 고통도 있습니다(5:10-12; 10:16-39; 24:9-13). 그러나 괴로움과 고통 때문에 염려하기보다 오늘의 삶을 돌봐주시는 하늘 아버지의 손에 내일을 맡겨야 합니다(34). 제자들이 믿어야 하는 하나님께서는 동정심과 긍휼로 돌보시는 아버지이시며 내일을 주관하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제자들이 염려하지 말아야 하는 근거는 그들이 믿는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사실입니다. 하늘 아버지가 제자들이 오늘과 내일의 괴로움을 극복할 수 있는 원천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오늘과 내일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내일이 오늘이 되면 동일한 천부께서 제자들을 자녀로 돌보시기에, 내일 벌어질 괴로움을 미리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늘 아버지는 괴로움 자체를 없애주실 수도 있고 괴로움을 견디는 힘을 주실 수도 있습니다. 하늘 아버지는 자녀가 원하는 방식대로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늘 아버지는 제자들이 원하는 대로는 아닐지 라도 괴로움 가운데 있는 제자들의 필요를 아시 기에, 괴로움을 안고 있는 제자들을 돌보십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우리들은 하나님의 돌보심과 도우심을 믿습니다. 우리는 생활에 대한 염려와 불안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나가는 말

예수님의 제자들의 삶에 우선순위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와 의를 추구할 때 그에 필요한 모든 능력과 자원들을 허락하십니다. 우리는 단지 먹고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일을 통해 하나님의 의와 나라를 이루어갈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것을 구하기에 힘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주의 제자들 하나님 자녀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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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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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인도하심을 따른 다윗

사무엘하 2장 1-11절

 
인생은 하나님의 시간표가 어떻게 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방법대로 일하지 않습니다. 어떤 자리가 비였다고 곧바로 채우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데 하나님께서 인정하셨다고 사람들도 인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움직일 수 있어야 합니다.
 
다윗이 사울과 요나단의 장례식이 끝난 뒤에 처음으로 시작한 행보는 하나님께 길을 묻는 것이었습니다. 왕권을 향해 나아가는 첫걸음부터 하나님의 안내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 안에 세워진 다윗 왕권과는 반대되는 인간의 욕망으로 세워진 이스보셋의 정권도 있었습니다.
 

헤브론으로 옮긴 다윗(1-4a)

이스라엘의 진정한 통치자는 하나님이시며, 사람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시행하는 종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아 순종해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따르는 자는 그의 삶이 형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기 종을 대우하는 것처럼 막대하지는 않습니다. 다윗은 왕으로 가는 첫 발걸음부터 먼저 왕의 왕이신 하나님께 묻고 떠나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1그 후에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아뢰되 내가 유다 한 성읍으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올라가라 다윗이 아뢰되 어디로 가리이까 이르시되 헤브론으로 갈지니라 2다윗이 그의 두 아내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을 데리고 그리로 올라갈 때에 3또 자기와 함께 한 추종자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다윗이 다 데리고 올라가서 헤브론 각 성읍에 살게 하니라 4유다 사람들이 와서 거기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유다 족속의 왕으로 삼았더라(1-4a)

이스라엘의 첫 왕인 사울이 죽었습니다. 사무엘에 의해 기름 부음을 받은 다윗이 왕위에 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군사를 모집하여 곧바로 이스라엘의 왕위를 취하기 위한 시도를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다윗은 한발 물러나서 하나님께 먼저 묻고,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과정을 겪으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움직였습니다.

(1) 다윗의 기도(1)
당시 다윗은 블레셋 지역 시글락에 있었지만, 사울 왕이 죽음으로 더 이상 이 시글락에 머무를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유다의 한 성으로 올라가기를 원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다윗을 기름 부으신 뜻이 성취되어야 할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수하가 되기 위해 베냐민, 갓, 유다, 므낫세 지파로부터 많은 용사가 시글락으로 왔다는 점도 다윗이 왕권을 향하여 움직이도록 만들었을 것입니다(대상 12:1-22).
하지만 다윗은 왕이 되는 과정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른 것입니다.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하나님께 여쭈어보고 있습니다. 사울이 실패하였던 이유가 그가 하나님께 묻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결정했던 것과는 대비됩니다(삼상 13:10; 14:19,37; 28:6).
다윗은 하나님께 “내가 … 올라가리이까?”, “어디로 가리이까?”라고 어디로 가야 할지 묻습니다. 이러한 다윗에게 하나님께서는 “헤브론으로 갈찌니라”(1)라고 응답해주십니다. 그는 하나님의 지시대로 순종하면서 온 가족을 데리고 헤브론으로 올라갔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삶의 기반을 옮긴 것입니다. 헤브론은 유다 지파의 중심 도시며, 족장들의 무덤이 있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 도시입니다. 헤브론은 예루살렘에서 남서쪽으로 30km 떨어져 있으며, 해발 900m가 넘는 높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분의 지시에 순종하는 다윗의 모습은 사울 왕이 그의 통치 기간에 보여준 모습과 대비됩니다(삼상 13:10; 14:19,37; 28:6).

(2) 헤브론으로 이주(2-3)
다윗은 가족들을 데리고 헤브론으로 이주했습니다. 당시 다윗의 두 아내는 이스르엘 사람 아히노암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입니다. ‘이스르엘’은 갈릴리 호수 아래의 이스르엘 평원이 아니라 유다 산지의 구릉지대에 속한 땅으로 여겨집니다(수 15:56). ‘갈멜’ 역시 헤브론 남동쪽의 유다 구릉지대에 속한 지역입니다(수 15:55).
사무엘상 25장은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과 다윗의 결혼에 관해 자세히 설명하고 아히노암과의 결혼에 대해서도 짧게 언급합니다(삼상 25:42-43). 다윗이 이주할 때,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으므로, 그들은 헤브론과 그 주변 여러 성읍에 흩어져 거주했습니다.

(3) 유다 지파의 왕으로 즉위(4a)
다윗이 헤브론으로 옮겨온 사실이 유다 사람들에게 알려졌습니다. 유다 사람들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다윗을 유다 왕으로 세웠습니다. 그동안 다윗은 유다 지파의 나발에게 무시당하면서 자신이 왕이 되려면 더 적극적으로 유다 지파에게 호감을 사야 한다는 점을 심각하게 인식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글락에 거주하는 동안 헤브론을 포함하여 여러 성읍에 선물을 보냈습니다(삼상 30:26-31). 다윗의 헤브론 이주는 이러한 자신의 노력이 상당한 결실을 보았다는 확신에 근거하였을 것입니다. 한편 사울의 왕국이 아브넬과 이스보셋의 통치 아래 여전히 존재하는 상황에서 블레셋은 다윗의 즉위를 묵인하거나 허용했을 것입니다.
다윗은 이미 소년 시절 하나님께 선택되어 선지자 사무엘에게 이스라엘 왕으로써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삼상 16:13). 이제 헤브론에서 백성들에 의해 유다 사람의 왕으로 추대를 받았습니다. 기름 부어서 왕으로 세우는 의식은 기름을 붓는 주체인 백성이 기름 부음을 받는 사람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의미입니다. 아직 불안전한 왕이긴 하지만 유다 한 지파의 왕이 된 것입니다.
 

유다 사람들의 왕인 다윗(4b-7)

왕으로 선택받은 다윗이 실제 왕이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하지만, 그 시간은 결과적으로 좋은 왕이 되기 위한 훈련과 준비의 과정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당신에게 주신 꿈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이루어 가는데도 다윗처럼 시간이 많이 필요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서두르지 않습니다. 당신이 좋은 믿음의 사람으로 선한 일꾼이 되기까지 인도하실 것입니다.

4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말하여 이르되 사울을 장사한 사람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니이다 하매 5다윗이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전령들을 보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너희 주 사울에게 이처럼 은혜를 베풀어 그를 장사하였으니 여호와께 복을 받을지어다 6너희가 이 일을 하였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은혜와 진리로 너희에게 베푸시기를 원하고 나도 이 선한 일을 너희에게 갚으리니 7이제 너희는 손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할지어다 너희 주 사울이 죽었고 또 유다 족속이 내게 기름을 부어 그들의 왕으로 삼았음이니라 하니라(4b-7)

다윗은 하나님의 뜻으로 유다 지파의 왕이 되었는데도, 유다 지파를 제외한 나머지 열한 지파에게는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다윗은 이제 남은 열한 지파를 품는 일의 첫걸음을 내딛습니다. 그가 맨 처음 손을 내민 곳은 사울의 시신을 수습해준 길르앗 야베스였습니다. 그들은 사울의 은혜를 목숨 걸고 깊은 충신들이었습니다.

(1) 야베스 사람들의 선행(4b)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택받은 사람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가운데 하나인 유다의 왕 노릇을 한다는 것은 매우 미미한 시작일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이런 과정을 통해 이스라엘 전체를 다스리는 진정한 왕으로 더 잘 훈련되고 준비될 수 있었습니다.
왕위가 계승될 때 왕의 죽음을 기록한 후, 새로운 왕의 등극을 기록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왕상 2:10-12; 11:43). 다윗은 사울의 계승자로서 왕위에 오르지 않았으므로, 이와 같은 보통의 상황에 해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다윗의 즉위를 기록하는 본문에 사울의 죽음과 관련된 언급이 나타납니다. 즉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사울을 장사지냈다는 기록입니다. 야베스 사람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사울과 요나단의 시체를 장사하였던 것은 사울이 그들에게 베푼 은혜에 대한 보답이었습니다.
이렇게 유다 지파의 왕이 된 다윗은 사울을 장례를 치러주었던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격려했습니다. 이처럼 다윗의 전 생애를 통해 보면, 다른 사람을 탓하거나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고 세워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2) 다윗의 축복(5-6)
다윗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전령을 보냅니다. 그리고 “너희가 너희 주 사울에게 이처럼 은혜를 베풀어 그를 장사하였으니 여호와께 복을 받을지어다”(5)라고 축복을 전합니다. 비록 전쟁에서 패하여 죽은 사람이지만, 야베스 사람들은 사울에게 은혜(헤세드)를 베풀어 그를 장사하였던 일을 언급하면서, 야베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복 받기를 기원합니다.
히브리어 ‘헤세드’는 언약에 근거한 사랑, 즉 조건 없는 사랑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이제 야베스 사람들의 헤세드에 대한 보답으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은혜(헤세드)와 진리(에메트)를 베푸실 것입니다. ‘헤세드’와 ‘에메트’는 흔히 쌍으로 등장합니다(창 24:49; 47:29: 출 34:6; 수 2:14; 삼하 2:6; 15:20 등).
다윗 자신도 “너희가 이 일을 하였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은혜와 진리로 너희에게 베푸시기를 원하고 나도 이 선한 일을 너희에게 갚으리니”(6)라고, 자신도 야베스 사람들에게 행하겠다고 은혜를 행하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여기서 “이 선한 일”은 야베스 사람들이 베푼 ‘헤세드’를 가리킵니다.

(3) 다윗 왕권의 정당성 주장(7)
다윗은 야베스 사람들에게 “이제 너희는 손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할지어다”(7)라고 권면합니다. ‘손을 강하게 함’은 용기 내는 것을 가리키는 관용적 표현입니다. 다윗이 이처럼 야베스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우는 이유는 사울의 죽었고 자신이 유다 지파의 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유다 지파가 다윗에게 기름 부은 것은 이스라엘을 분열시키는 행동이었고, 결국 나라는 혼란에 빠질 것이 분명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윗은 야베스가 이스보셋이 아니라 자신의 편에 서기를 호소하고 있습니다.
 

11지파의 왕인 이스보셋(8-11)

작은 일에 충성하면 큰일까지 맡아서 일할 수 있습니다. 큰일을 할 수 없다고 원망이나 불평하고 있으면, 작은 일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온 지파의 왕이 아니라 한 지파의 왕으로 세움을 입었지만,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신 만큼 유다 지파부터 잘 다스렸습니다. 그의 충성스러움은 나중에는 이스라엘 온 지파들이 다윗에게 달려와 왕이 되어 달라고 부탁합니다.

8사울의 군사령관 넬의 아들 아브넬이 이미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데리고 마하나임으로 건너가 9길르앗과 아술과 이스르엘과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더라 10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이스라엘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사십 세이며 두 해 동안 왕위에 있으니라 유다 족속은 다윗을 따르니 11다윗이 헤브론에서 유다 족속의 왕이 된 날 수는 칠 년 육 개월이더라(8-11)

다윗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여 세우신 유다의 왕이었지만,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은 아브넬이 주도하여 사람들이 세운 왕이었습니다. 이스보셋이 더 많은 지파, 더 넓은 땅을 다스리는 왕으로 세움을 입었지만, 그의 왕위의 정통성에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그 시작이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1) 아브넬의 역할(8-9)
아브넬은 사이 사촌이며 아비엘이 그들의 할아버지입니다(삼상 9:1, 2; 14:51). 아브넬은 사울의 통치 초기부터 군사령관의 지위에 있었으며, 사울 왕국의 이인자였습니다.
그는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요단 동편 마하나임으로 데려가 왕으로 삼았습니다. 이스보셋(‘수치의 사람’)은 에스바알(‘바알의 사람’)이라고도 불리는 사울의 넷째 아들입니다(대상 8:33). 사무엘상 14장에서 이스보셋의 이름이 소개되지 않은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삼상 14:49). 그의 나이가 아직 어렸기 때문이거나, 그의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처럼, 그가 인정받지 못하는 아들이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여겨집니다.
이스보셋 왕국의 수도가 된 마하나임은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하지만, 얍복강의 북편 둑에 위치한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스보셋은 유다 지파를 제외한 ‘온 이스라엘’을 다스렸는데, 길르앗과 아술과 이스르엘, 에브라임, 베냐민이 그 왕국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아술은 므낫세 땅의 성읍 아셀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수 17:7).

(2) 이스보셋과 다윗의 통치 기간(10-11)
이스보셋이 40세에 왕이 되어 2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다윗이 7년 6개월 동안 헤브론에서 유다 지파를 통치하였음을 생각한다면, 이스보셋이 왕이 되기 전 몇 년 정도 아브넬이 군사령관으로서 사울 왕국을 다스렸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나가는 말

다윗의 형통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형통한 삶을 살길 원한다면, 다윗처럼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해나가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을 주실 때, 순종하며 나가시길 바랍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지금 당신이 순종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시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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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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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용사를 위한 다윗의 ‘슬픈 노래’

사무엘하 1장 17-27절

 

희망이 있는 곳에서는 누구나 희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희망이 있을 때 부른 노래는 진정한 희망의 노래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모든 희망이 사라지고 절망만 남아 있을 때 만일에 거기에서 희망을 노래할 수 있다면 그것이 진짜 희망의 노래가 아니겠습니까! 쓰레기 더미에서 부르는 노래가 진정한 희망의 노래, 생명의 노래입니다. 우리는 그 노래를 통해, 그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나 만든 사람의 마음을 느끼게 됩니다. 다윗은 활의 노래에 어떤 마음으로 만들었겠습니까?

 

다윗은 자신의 야망에 사로잡힌 지도자가 아니라,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생각한 지도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사울 왕과 요나단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듣고 매우 슬퍼합니다. 그들의 죽음을 위해 슬픈 노래를 짓고 부릅니다.

 

사울과 요나단 죽음을 슬퍼함(17-18)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마음을 맞는 사람만 보내 주신 것이 아니라 때로는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을 보내주시기도 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는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을 같이 미워하기보다는, 다윗처럼 영적으로 성숙하는 도구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더욱 성숙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가야 합니다. 그러면 다윗처럼 자신을 미워한 사람이라고 장점과 업적을 칭찬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합니다.

17다윗이 이 슬픈 노래로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을 조상하고 18명령하여 그것을 유다 족속에게 가르치라 하였으니 곧 활 노래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었으되(17-18)

본문은 다윗의 애가(哀歌.슬픈 노래)에 대한 서문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이 패전하고 사울과 요나단이 전쟁터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애가를 부르고 있습니다.

(1) 다윗의 애가(17)

다윗은 아말렉 청년을 통해 사울과 요나단이 전쟁터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 족속에게 패한 것은 매우 가슴 아픈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매우 슬퍼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추모하는 애가를 지었습니다.

이 애가의 제목을 ‘활의 노래’라고 번역하였지만, 원문의 제목은 ‘활’입니다. 이 활은 요나단을 가리킵니다. 이 노래는 ‘활의 노래(lament of the bow)’로 야살의 책에 기록되었습니다. 이 시의 두 주인공은 사울과 요나단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노래 제목이 ‘활’이라는 것은 사울과 요나단 중에 요나단을 좀 더 중심적인 인물로 본 것입니다. 애가에서 특별히 한 주절을 사용했다는 사실에서 더 잘 들어납니다.

(2) 활의 노래(18)

다윗은 이 애가를 백성들에게 가르쳐 유다 백성들이 모두가 사울과 요나단을 추도하도록 명령합니다. 그들은 수많은 전쟁에서 이스라엘을 구한 용사요, 이스라엘의 영광이었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싸우다 죽은 그들의 왕과 왕자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의 죽임에 대한 추모 노래를 만들 때, 자신을 사랑한 요나단만을 위해 짓지 않았고, 자신을 죽이려고 그렇게 쫓아다녔던 사울까지도 위해서 지었습니다. 사울을 향해 용사요, 이스라엘의 영광이라고 표현합니다. 다윗을 향한 공격은 자신을 절망과 원망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숙하게 만들었습니다.

 

두 영광의 죽음 애도(19-24)

자신을 세우기 위해 다른 사람의 업적을 무너뜨리는 행동은 치졸한 행동입니다. 오늘날은 이러한 일들이 곳곳에서 비일비재합니다. 성도들은 개인적인 원한에 따라 반응하는 치졸하게 행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으로 원수까지 사랑할 줄 알며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판단할 줄 아는 소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19이스라엘아 네 영광이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 20이 일을 가드에도 알리지 말며 아스글론 거리에도 전파하지 말지어다 블레셋 사람들의 딸들이 즐거워할까, 할례 받지 못한 자의 딸들이 개가를 부를까 염려로다 21길보아 산들아 너희 위에 이슬과 비가 내리지 아니하며 제물 낼 밭도 없을지어다 거기서 두 용사의 방패가 버린 바 됨이니라 곧 사울의 방패가 기름 부음을 받지 아니함 같이 됨이로다 22죽은 자의 피에서, 용사의 기름에서 요나단의 활이 뒤로 물러가지 아니하였으며 사울의 칼이 헛되이 돌아오지 아니하였도다 23사울과 요나단이 생전에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자이러니 죽을 때에도 서로 떠나지 아니하였도다 그들은 독수리보다 빠르고 사자보다 강하였도다 24이스라엘 딸들아 사울을 슬퍼하여 울지어다 그가 붉은 옷으로 너희에게 화려하게 입혔고 금 노리개를 너희 옷에 채웠도다 25오호라 두 용사가 전쟁 중에 엎드러졌도다 요나단이 네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26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도다 27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으며 싸우는 무기가 망하였도다 하였더라(19-27)

본문 19-27절은 다윗 애가의 본문으로 화자 시점을 1인칭으로 다윗 자신이며, 따라서 애가에는 다윗의 관점과 다윗의 감정이 잘 나타납니다. 애가의 시작은 이스라엘을 부르면서 시작합니다. 형식면에서 19-27절은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로 시작하고 마침으로써 노래를 통합하고 있고, 25절에서도 애곡의 대상을 사울과 요나단에서 요나단 한 사람으로 바꿀 때에도 이 구문을 후렵구로 사용하여 전체적으로 시에 통일성을 주고 있습니다.

(1) 사울의 죽음을 슬퍼함(19-24)

다윗은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알리면서 너희 영광이 산 위에서 죽임을 당했다고 알리면서 애곡을 시작합니다. 고대 사회에서 왕은 흔히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존재로 묘사됩니다(시 45:2; 사 33:17). 그러므로 ‘영광’은 이스라엘의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용사인 사울(과 요나단)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이 용사가 죽은 장소를 ‘산’이라 번역하지만, 원문에는 ‘높은 곳’입니다. “두 용사”로 번역된 깃보림은 문자적으로 ‘(다수의) 용사들’을 의미입니다. 이 단어는 이 시에서 모두 다섯 번 사용되는데, 22절을 제외하면 사울과 요나단 두 사람을 가리킵니다(1:19,21,22,25,27). 한글 성경의 ‘오호라’는 ‘예크(איך)’의 번역입니다. 이 단어는 대부분의 영어 번역처럼 ‘어찌하여’(how)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습니다. 따라서 19절 후반부는 ‘어찌하여 용사들이 엎드러졌는가?’가 됩니다. 이는 전쟁에 패하였음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다윗은 전쟁의 패배를 알리는 이 문장을 세 번 사용하면서 본문의 틀을 만들고, 시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형성합니다(1:19, 25, 27).

20절에서는 온 이스라엘을 불러 두 용사의 죽음을 알리는 19절과 대조적으로 알리지 말라고 합니다. 20절은 4개의 행이 나오는데, 두 행이 서로 평행을 이루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앞의 두 행은 명령이고 뒤의 두 행은 그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알리지 말라 가드에서 / 전하지 말라 아스글론의 거리에서 / 블레셋의 딸들이 즐거워하지 못하도록 / 무할례자의 딸들이 개가를 부르지 못하도록, 20절 전반부에서 다윗은 사울의 죽음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가드와 아스글론은 블레셋의 모든 지역을 가리키는 일종의 제유법(synecdoche)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후반부는 블레셋 사람의 딸들과 할례받지 못한 자의 딸들에 관해 말합니다(“할례받지 못한 자의 딸들이 개가를 부를까 염려로다”). 후반부는 히브리 시의 전형적인 평행법으로 표현되었는데, 할례받지 못한 자의 딸은 블레셋 사람의 딸을 달리 표현한 것입니다. 아들이 아니라 딸을 언급한 이유는 이들이 대외 활동이 적어 주변 소식에 가장 어두운 집단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조차 사울의 죽음을 알고 기뻐한다면, 모든 블레셋 사람이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블레셋은 그들의 승전 소식을 모든 블레셋 땅으로 전파했습니다(삼상 31:9). 다윗이 이처럼 불가능한 일을 소원하는 것은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그의 마음이 간절함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22-24절은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블레셋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 것을 명한 다윗은 전쟁의 상황 속에서 들어난 두 사람의 무용(武勇) 칭송합니다. 22절은 그들이 전쟁터에서의 용감함을 보여줍니다. 구문은 20절처럼 두 행씩 평행을 이룹니다. 이런 형태는 사울과 요나단을 동등하게 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합니다. “죽은 자”(할랄)와 “용사”(깃보림)는 19절에서 모두 사울을 가리키는 표현이었습니다. 죽은 용사가 된(19) 사울은 과거 자신의 칼을 사용하여 요나단과 함께 수많은 ‘죽은 용사’를 만들었습니다(22). 본문은 이미 죽은 사울의 현재 모습과 무적이었던 과거의 모습을 비교하면서, 사울의 비참한 운명을 더욱 부각하고 있습니다. 사울의 용맹과 위대함은 그가 요나단과 함께 있었기에 더욱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 사울과 요나단은 함께 싸울 때 무적이었습니다. 비록 부친의 잘못된 결정 때문이었지만, 부친을 위해 자신이 죽겠다고 말하던 요나단이 실제 부친과 함게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습니다(삼상 14:43). 서로를 향한 두 사람의 사랑과 신뢰가 죽음의 순간에 더욱 빛납니다.

장례식에서 여인들이 애곡하는 관습에 따라 다윗은 여인들에게 사울의 죽음을 슬퍼하여 올라고 합니다. 전쟁은 남자들의 영역이지만 패배를 슬퍼함은 여자들의 영역입니다. 특별히 사울 왕은 이스라엘의 여인들이 풍족하고 화려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만든 사람입니다. 여인들은 사울의 치세 동안 화려하고 붉은 옷을 입었고, 금으로 만든 장신구를 옷에 달고 다녔습니다. 그러므로 여인들이 사울을 위해 슬퍼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2) 요나단을 기억함(25-27)

다윗은 이제 요나단에게로 관심을 돌립니다. 19절에서 사용된 단어와 문장이 25절에서 반복됩니다. 전쟁의 패배를 탄식하는 문장(“오호라 용사들이 엎드러졌도다”)이 19절에 이어 다시 사용되면서 새로운 단락이 시작됨을 알립니다.

이스라엘의 영광(=사울)이 산 위에서 죽은 것처럼(19), 요나단 역시 산 위에서 죽었습니다(25). 다윗은 요나단을 “내 형”이라 부릅니다. 이는 다윗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요나단을 따랐음을 보여줍니다. “아름다움이라”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나엠’이며, 이는 23절에 사용된 나임(?)의 동사형입니다. 이 단어는 외모의 아름다움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명랑하고 정이 넘치는 성품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26절에서 다윗은 ‘내가 당신을’ 혹은 ‘당신이 나를’이란 표현을 3번이나 반복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요나단과의 친밀한 관계를 강조합니다. 특히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가슴이 쥐어짜지듯이 괴롭다며 가슴 아파하였습니다. ‘그대는 나의 기쁨입니다’라는 말은 다윗이 요나단을 매우 좋아하였고 소중히 여겼다는 고백입니다. 그뿐 아니라 요나단의 사랑은 ‘기이하다’(팔라)라고 표현하는데, 다윗에 대한 애정이 남녀 간의 사랑보다 더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다윗에게 이유 없이 분에 넘치는 사랑을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용사들의 죽음을 세 번째 언급함으로써 자신의 시를 끝맺습니다. 본문의 ‘망하다’는 히브리어 ‘아바드’의 번역입니다. 이 단어는 흔히 사람의 죽음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됩니다(민 17:12). 그러므로 본문에서 싸우는 무기, 즉 (문자적으로) 전쟁 무기는 앞 문장의 용사들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용사들이 엎드러지는 것과 전쟁 무기가 망한 것은 히브리 시의 평행법에 해당합니다.

 

나가는 말

다윗의 애가는 한 편의 추도사입니다. 진한 안타까움도 아쉬움도 묻어 있습니다. 다윗은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고 끝까지 사랑했습니다. 이제 자신의 인생은 어떻게 기억되겠습니까? 기억되고 싶습니까?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기대에 부흥하는 인생, 실추된 주의 명예를 회복하고 수세에 몰린 하나님 나라의 반격을 도모하는 다윗의 인생을 꿈꿔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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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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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다윗 왕국을 위한 서막

사무엘하 1장 1-16절

 

연극이나 뮤지컬을 보면, 1막이 끝나면 막을 내리고, 잠시 무대를 정리할 시간을 가졌다가 다음 막을 위해 다시 막을 올리면서 또 다른 내용의 연극을 시작합니다. 이처럼 ‘사무엘상’ 막을 내리고, 이제 ‘사무엘하’ 막을 올리고 있습니다. 원래 사무엘 상하는 한 권의 책이었습니다. 많은 분량으로 상하로 나눈 것뿐입니다. 사무엘 상하의 분기점은 사울의 죽음입니다. 그래서 사무엘하는 ‘사울이 죽은 후’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사울의 시대가 지나가고 다윗 통치의 새 시대가 왔다는 선언입니다.

 

이 단락은 다윗이 사울의 죽음에 관해 알게 되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다윗이 시글락에 머물고 있을 때, 사울의 병사 중 한 명이었던 아말렉 청년이 다윗을 찾아왔습니다. 아말렉 청년은 전쟁 중 중상을 입은 사울 왕의 부탁을 받아 그를 죽인 뒤, 그의 왕관과 팔찌를 벗겨 다윗에게 가져왔다고 보고했습니다. 다윗은 이 보고를 듣고 크게 슬퍼하며 울고 금식하였습니다. 또 다윗은 자신이 사울을 죽였다고 말하는 그 청년을 수하를 시켜 죽이게 하였습니다.

 

아말렉 청년의 보고(1-5)

우리와 함께하신 하나님께서는 위대하고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이라도 큰 일꾼으로 쓰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서 쓰임을 받기 위해서는 자리를 탐내기 전에 자신을 합당한지 먼저 돌아보아야 합니다. 공동체는 지도자를 잘 만나고, 지도자가 누구인가가 중요합니다.

1사울이 죽은 후에 다윗이 아말렉 사람을 쳐죽이고 돌아와 다윗이 시글락에서 이틀을 머물더니 2사흘째 되는 날에 한 사람이 사울의 진영에서 나왔는데 그의 옷은 찢어졌고 머리에는 흙이 있더라 그가 다윗에게 나아와 땅에 엎드려 절하매 3다윗이 그에게 묻되 너는 어디서 왔느냐 하니 대답하되 이스라엘 진영에서 도망하여 왔나이다 하니라 4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일이 어떻게 되었느냐 너는 내게 말하라 그가 대답하되 군사가 전쟁 중에 도망하기도 하였고 무리 가운데에 엎드러져 죽은 자도 많았고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도 죽었나이다 하는지라(1-4)

성도의 태도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특히 사울의 죽음을 알려온 아말렉 소년을 죽이는 사건을 통해, 다윗 왕국은 이 세상의 욕심과 성공의 방법으로 발붙일 곳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주권을 따른 사람들이 살아가는 나라임을 보여줍니다. 사건이 발생한 시간이나 장소를 기록하는 것은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됨을 알리는 표시입니다.

(1) 시간과 장소(1)

사무엘하의 이야기는 “사울의 죽은 후라”(1)라고 시작합니다. 이 의미는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의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왕 다윗의 시대가 시작됨을 함축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다윗은 그 무렵 아말렉과의 전쟁을 마치고 시글락으로 돌아온 지 이틀이 지났습니다.

사울이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죽은 후에(삼상 31:1-6), 다윗이 공식적으로 행한 첫 번째 일은 아말렉 사람을 죽이는 일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앞으로 펼쳐질 다윗 왕국은 사울의 왕국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울은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였지만, 다윗은 아말렉을 심판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성경은 아말렉 족속을 에서의 후손으로 소개합니다(창 36:12; 대상 1:36). 이들은 유다 남부 광야지대나 시내 반도에 거주하는 유목민으로 등장합니다. 히브리 민족과 아말렉 사이의 적대 관계는 출애굽 직후에 형성되었으며, 사울 왕이 아말렉을 진멸함으로써 그 적대 관계가 대부분 청산되었습니다(출 17:8-16; 삼상 15장). 그 후에도 아말렉이 여전히 존속하였는데, 다윗이 한동안 머물렀던 성읍 시글락을 약탈했던 무리가 아말렉이었습니다(삼상 30:1-2). 다윗은 아말렉을 추격하여 그들을 살육하고, 사로잡혔던 가족을 되찾고 많은 재물을 빼앗았습니다(삼상 30:16-20). 그후 다윗은 시글락으로 돌아와 머물렀습니다. 시글락은 아마도 브엘세바에서 죽쪽으로 약 30km 떨어진 곳에 해당합니다.

(2) 아말렉 청년의 모습(2)

다윗이 아말렉은 도륙하고 시글락에 돌아와 쉬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한 소년이 사울의 진영에서 나왔습니다. 그의 모습은 엉망이었습니다. 옷이 찢어져 있었고, 머리에 흙이 있었습니다(2). 그는 죽은 자를 애도하거나 전쟁에서 패배했음을 슬퍼하는 사람의 모습이었습니다(창 37:34; 수 7:6; 삼상 4:12; 삼하 13:31; 시 35:13). 그가 다윗 앞에 와서 땅에 엎드려 절했습니다.

(3) 아말렉 청년의 보고(3-4)

이 아말렉 청년은 이스라엘 진영에 있다가 도망한 자였습니다. 다윗에게 블레셋과 전투에서 있었던 사울 왕과 요나단의 죽음을 보고 합니다. 다윗은 그에게 전쟁의 결과에 관해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전쟁 도중에 도망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 역시 죽었다는 사실을 보고했습니다.

사울왕의 죽음은 결국 이스라엘의 패배로 끝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패한 것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는 인간적인 방법으로 전전긍긍하다 결국 패하고 전사하게 된 것입니다.

 

다윗의 질문(5-10)

진실을 외면하고 자신의 이익을 먼저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가 공을 세운 것처럼 가장하여 칭찬과 상급을 받으려는 얄팍한 잔꾀는 스스로를 멸망시킵니다. 자신의 이익을 우리가 밝혀야될 진실보다 자신에게 유리한 거짓을 꾸미고 있지는 않습니까? 인간의 얄팍한 꾀는 오히려 자승자박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고 진실을 왜곡하는 거짓된 삶을 격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5다윗이 자기에게 알리는 청년에게 묻되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이 죽은 줄을 네가 어떻게 아느냐 6그에게 알리는 청년이 이르되 내가 우연히 길보아 산에 올라가 보니 사울이 자기 창에 기대고 병거와 기병은 그를 급히 따르는데 7사울이 뒤로 돌아 나를 보고 부르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한즉 8내게 이르되 너는 누구냐 하시기로 내가 그에게 대답하되 나는 아말렉 사람이니이다 한즉 9또 내게 이르시되 내 목숨이 아직 내게 완전히 있으므로 내가 고통 중에 있나니 청하건대 너는 내 곁에 서서 나를 죽이라 하시기로 10그가 엎드러진 후에는 살 수 없는 줄을 내가 알고 그의 곁에 서서 죽이고 그의 머리에 있는 왕관과 팔에 있는 고리를 벗겨서 내 주께로 가져왔나이다 하니라(5-10)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놀라운 소식을 들은 다윗은 소년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합니다.

(1) 다윗의 질문(5)

다윗은 아말렉 소년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려고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느냐고 다시 질문합니다. 본문에서는 ‘어떤 사람’으로 불리던 정보 전달자를 처음으로 ‘청년’(나아르)이라 부릅니다. 히브리어 ‘나아르’는 청년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어린 나이의 소년을 의미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하지만 이 단어는 신분이 낮은 사람이나 초보자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여기서 ‘나아르’라는 칭호는 그의 보고가 신뢰하기 힘들다는 다윗의 인식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방인으로 보이는 어린 나이의 병사, 나아르가 이스라엘 왕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에 관해 정확히 알고 있다는 점이 다윗에게 의구심을 불러일으켰을 것입니다.

(2) 아말렉 청년의 보고(6-9)

아멜렉 청년은 사울을 만난 것은 우연이라고 강조합니다. 자신이 길보아 산에 우연히 올라갔다고 말합니다. 그가 말한

‘길보아 산’은 이스르엘 평원의 동쪽 끝부분에 있으며, 이 산의 높이는 해발 500미터 정도입니다. 그는 자신이 두 눈으로 본 것을 말하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 ‘보라’라는 뜻의 ‘힌네’를 사용하여 설명합니다.

청년은 사울이 자기 창에 기대 있었고, 기병과 병기가 사울을 추격하여 매우 가까이 와 있음을 보았습니다(6). 자신이 사울 왕을 볼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사울 왕이 고개를 돌려 아말렉 청년을 보고서 불렀습니다(7). ‘네가 누구냐?’ 하고 묻는 사울의 질문에 그는 자신이 아말렉 사람이라고 답했습니다(8). 그러자 사울은 자신의 목숨이 아직 완전히 있어서 고통스러우니 자신을 죽이라고 그에게 지시했습니다. 목숨이 완전히 있다는 것은 ‘콜-오드 나프쉬’의 번역입니다. 이 번역은 사울이 마치 건강한 상태로 있었음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콜(모든)은 뒤에 나오는 오드(여전히)를 강조하는 역할을 하며, 생명이 완전함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드는 생명이 소멸되지 않고 여전히 이어지고 있음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콜-오드 나프쉬’는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상태를 표현합니다. 고통으로 번역된 ‘샤바츠’는 성경에서 단 한 번 사용되었으며(hapax legomenon), 의미가 불분명합니다. 칠십인역은 이 단어를 ‘스코토스 데이논’, 즉 ‘공포스러운 흑암’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단어는 벗어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을 가리킬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고통 중에 있나니’(9)는 ‘내가 절망적인 상황에 부닥쳤으니’라는 뜻입니다.

사울 왕은 창에 기대고 있었고, 그의 뒤를 병거와 기병이 급하게 쫓아오고 있는 다급한 상황이었는데, 이때 사울이 뒤돌아보고 자신을 불러서 그에게 갔다고 합니다. 소년은 사울과 만난 장면을 매우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3) 아멜렉 청년의 행동(10)

아말렉 청년은 사울이 기력을 소진한 뒤 쓰러지면 생명을 잃을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울의 지시대로 사울을 죽이고, 그의 면류관과 팔찌를 취하여 다윗에게 가져왔습니다. 여기서 ‘면류관’(네제르)은 왕이 야외에서 착용하는 간편한 형식의 왕관을 가리킬 것입니다. 또 ‘팔찌’(에츠아다)는 팔꿈치 위쪽에 착용하는 형태로 여겨집니다. 이 청년은 자신이 칭찬받으리라고 생각하여 이처럼 말했을 것입니다.

다윗은 먼저 사울의 사망에 대한 경위를 살펴보면, 자신이 우연히 길보아 산에 갔었는데 부상당한 사울 왕을 만났고 말했습니다. 부상이 심한 사울 왕은 자신에게 죽여 달라고 원했었고, 그래서 자신은 사울을 죽인 후에, 사울의 징표인 왕관과 팔찌를 증거로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소년의 보고는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 점들이 있습니다. 그 말씀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3사울이 패전하매 활 쏘는 자가 따라 미치니 사울이 그 활 쏘는 자를 인하여 중상한지라 4그가 병기 든 자에게 이르되 네 칼을 빼어 나를 찌르라 할례 없는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하나 병기 든 자가 심히 두려워하여 즐겨 행치 아니하는지라 이에 사울이 자기 칼을 취하고 그 위에 엎드러지매 5병기 든 자가 사울의 죽음을 보고 자기도 자기 칼 위에 엎드러져 그와 함께 죽으니라(삼상 31:3-5)

사울은 활 쏘는 자에게 쫓기고 있었지만(삼상 31:3), 여기서는 병거와 기병에게 쫓기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또 사울은 병기 든 자에게 자신을 죽여 달라고 부탁하다가 자신이 자살해 죽지만(삼상 31:4), 여기서는 아말렉 소년은 자신에게 부탁해서 자신이 고통을 덜해 주기 위해 죽였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다윗의 원수 사울 왕을 죽였기 때문에, 다윗을 위한 일등공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다윗이 세울 새로운 나라의 공신으로 세워달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출세를 위해 거짓된 공적을 꾸며서 유리하게 거짓 보고한 것입니다.

 

다윗의 반응(11-16)

무엇에 기뻐하고 슬퍼하는지를 보면 무엇을 가장 열망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앞서지 않는 판단이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평생 따라다니면서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원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대부분 사람들은 기뻐할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11이에 다윗이 자기 옷을 잡아 찢으매 함께 있는 모든 사람도 그리하고 12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과 여호와의 백성과 이스라엘 족속이 칼에 죽음을 인하여 저녁때까지 슬퍼하여 울며 금식하니라13다윗이 그 소식을 전한 청년에게 묻되 너는 어디 사람이냐 대답하되 나는 아말렉 사람 곧 외국인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14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냐 하고 15다윗이 청년 중 한 사람을 불러 이르되 가까이 가서 그를 죽이라 하매 그가 치매 곧 죽으니라 16다윗이 그에게 이르기를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갈지어다 네 입이 네게 대하여 증언하기를 내가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죽였노라 함이니라 하였더라(11-16)

평생 칼갈이 다윗을 위협하던 사울은 건재했습니다. 기름 부음 받은 자 사울의 생명을 하나님께 맡긴 그의 판단은 옳았습니다. 그리고 이 판단을 거스른 아말렉 소년을 처형합니다. 하나님보다 앞서지 않는 판단이 우리를 지켜줍니다.

(1) 슬퍼하는 다윗(11-12)

다윗은 자신의 목숨을 끈질기게 노리던 사울 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기뻐하기보다는 매우 슬퍼하였습니다. 다윗과 부하들은 모두 자기 옷을 찢고 저녁까지 금식하면서 그들의 죽음을 위해 금식하였습니다.

한 번도 사울을 원수로 여긴 적이 없었습니다. 사울 왕의 죽었다는 소식은 다윗은 개인적인 감정과 욕심을 떠나서 하나님이 세운 이스라엘 왕의 죽음을 슬퍼했습니다. 그의 슬픔은 결코 정치적 위선이 아니라 안타까운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의 아픔과 슬픔에는 쉽게 동참할 수 있지만, 자신을 힘들게 하는 사람의 슬픔에 동참하기란 전혀 쉽지 않습니다. 성도들은 모든 일들을 하나님 나라의 거시적인 차원에서 살펴가야 합니다.

(2) 처형당하는 아말렉 청년(13-16)

다윗은 사울을 죽였다고 자랑스럽게 거짓 보고하며, 큰 상을 기대했던 아말렉 소년을 죽이라고 다윗은 명령합니다. 그를 죽이라는 이유를 “네가 어찌하여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냐?”(14)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아말렉 소년을 심판한 것입니다. 아말렉 소년이 생각한 것처럼, 다윗은 결코 사울 왕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다윗은 그를 징계하고 죽임으로써 하나님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에 대한 다윗의 변함없는 태도를 말합니다.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입은 사람을 죽이는 것은 큰 죄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거역을 나타내며,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세상적인 방법으로 왕관을 취하려는 삶을 결코 원치 않았습니다. 결국 원수의 죽음을 기뻐하리라는 생각과 그것을 이용해서 성공하려는 아말렉 소년의 꿈은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습니다.

거짓은 반드시 그 대가를 치룹니다. 아말렉 소년은 뛰어난 연기와 능숙한 말솜씨로 다윗을 속이는데 성공할 수 있었지만, 그의 거짓된 행동은 자신의 죽음을 불러왔습니다. 우리들도 야망을 위해 거짓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버려야 합니다. 진실한 삶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나가는 말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들을 행할 때,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대로 순종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일을 새롭게 시작하는데, 하나님의 중심과 방식대로 순종하면서 시작한 것입니다. 욕심이 아닌 말씀을 따라 반응하게 하시고, 어떤 상황에서도 거짓이 아닌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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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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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을 쌓은 방법을 가르친 예수님

마태복음 616-34

 

사람들은 자신의 선행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이러한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게 칭찬과 상급을 받아버리면, 그들은 이미 상급을 받았기 때문입니다(마태복음 6:2,6). 하나님께서 주실 상급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선행을 드러내고 싶을 때 그 충동을 하나님 앞에 절제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 믿는 성도들이 하늘나라 시민의 정체성을 가지고 세상과 구별되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매우 실제적으로 소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하늘나라의 시민들의 삶을 소개합니다. 본 단란은 제자들의 새로운 삶의 방식에 대한 추가적 가르침입니다. 특별히 재물과 염려의 문제를 다룹니다. 이 둘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재물을 땅에 쌓으며 재물을 좇다 결국 재물의 노예가 되어 삽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재물이 아닌 하나님만을 섬기며, 그분께 전적으로 삶을 의탁합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돌봄 아래 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삽니다. 그러므로 전혀 염려할 게 없습니다.

 

금식에 대한 가르침(16-18)

하나님께 자시의 간절한 마음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 금식입니다. 유대인들에게 구제와 기도와 더불어 금식은 경건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간절한 마음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 금식입니다. 금식은 육체적 욕구를 끊고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6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17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18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16-18)

금식은 바리새인들뿐만 아니라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도 경건생활에 아주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했습니다. 또 종교적 경건성을 대변해 주는 신앙적인 행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금식의 위선에 대해서 경고를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자신의 경건함을 드러내기 위해 금식할 때 일부러 초췌한 모습으로 다녔습니다. 그러나 금식도 앞서 말한 구제와 기도와 같이 하나님께 하는 것이기에 사람에게 보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금식에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연약하고 안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아름다운 금식도 신앙과 경건을 자랑하는 수단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원래 구약에서는 금식할 때 베옷을 입고 티끌을 쓰고 자신을 단장하지 않는 것이 정상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며 회개한다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도리어 기름을 바르라고 하십니다. 결국 슬퍼하며 자신을 은근히 자랑하느니 차라리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금식을 자신의 자랑거리로 삼는 것을 하나님이 얼마나 혐오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금식은 곡기를 끊고 기도함으로써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구하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식음을 전폐한 채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금식마저 사람의 영광을 위한 도구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보다 사람의 시선을 더 의식하며 행동하는 것이 외식적인 행동입니다. 사람보다 하나님의 시신을 더 의식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재물에 대한 자세(19-24)

성도가 외식하는 이유는 하나님만 섬기려는 마음이 다른 것으로 분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으려는 모습으로 전락하기 때문입니다. 구제, 기도, 금식의 세 가지 외식(6:1-18)이 사람들을 의식함으로 인해 마음이 분산된 상태를 보여 준다면 본문은 물질로 인해 마음이 분산된 것을 보여 줍니다.

19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20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21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22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23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24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19-24)

사람들은 재물이 쌓아지면 그것을 땅에 쌓아두기 위해 부동산, 주식이나 투자가치가 있는 것들에 투자합니다. 그러나 땅에 쌓아둔 보물은 결코 안전하지도 영원하지도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빼앗아갑니다. 예수님께서는 보화, , 종이라는 다른 소재를 사용해서 재자가 가져야 할 재물에 대한 태도에 초점을 맞춥니다.

(1) 하늘에 쌓는 보문(19-21)

먼저 예수님께서는 보물을 하늘에 쌓도록 가르치십니다(19-21).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자신을 위해 보물을 쌓는 행위를 중단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집 안에나 집 마당을 파서 보물을 숨기곤 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다양한 방법으로 보관하더라도 여러 가지 이유로 없어질 수 있습니다.

은 일종의 벌레로 땅의 것을 파괴하는 존재를 상징합니다. 고대 사회에서 특별히 옷감은 귀중한 보물 중 하나였으므로 좀은 이런 보물을 해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동록(銅綠)’먹어 치움’, ‘폭식함등을 뜻하므로 막 먹어 치우는 벌레를 가리킵니다. 이런 벌레는 귀중품이 들어 있는 목재 보관함을 뜯어 먹었을 것입니다. 보관함이 망가지면 보물도 손상됩니다. 또한 보물을 도둑이 훔친다는 그림은 모아둔 보물이 안전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이 보물을 쌓아야 하는 하늘만이 안전한 곳이며(20), 보물을 쌓아 두는 장소는 마음의 방향을 드러냅니다(21).

(2) 밝은 영안을 가져야 함(22-23)

제자들은 성한 눈을 가져야 합니다(22-23). 몸의 등불은 눈이며, 눈이 건강하면 온몸이 밝아집니다(22). 그런데 생리적으로 보면 밝은 눈이 사람을 안전하게 인도하는 역할을 하지만, 예수님은 빛이 몸 밖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몸을 밝게 만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윤리적인 목적을 위해 눈의 개념을 사용하십니다. 윤리적인 관점에서, 밖을 보는 눈이 밝으면 그 사람 자체가 윤리적으로 선하게 됩니다. 흔히 성하다로 번역되는 하플루스(πλούς)는 건강한 눈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단어는 한 방향의’, ‘단순한등의 뜻으로서 단일성(또는 일체성) 혹은 온전함을 의미하며, 관대하고 후하게 베푸는 것을 뜻합니다. 한쪽을 보는 것은 두 마음을 품는 것과 반대의 개념으로(야고보서 4:8)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향하는 것을 뜻하며(신명기 6:45), 하나님만을 향하는 눈의 사람은 타인을 위해 너그럽게 베풉니다. 다시 말해서, 시선이 분산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 곧 긍휼을 다른 사람들에게 베푸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건강한 눈과 달리 눈이 악하면, 온몸이 어두울 것입니다(23). ‘나쁜혹은 악한으로 번역되는 포네로스나쁘다또는 악하다의 뜻으로 마태복음에서는 윤리적으로 나쁘거나 악한 상태를 가리킵니다(5:11,37,39,45; 6:13). 악한 눈은 탐심으로 남의 소유를 쳐다보는 눈, 남을 저주하고 시기하는 눈이라는 개념에서 온 것입니다. 악한 눈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필요에만 관심을 두기 때문에 타인에게 후히 베풀지 못하는 이기적인 행동을 보입니다. 탐심으로 가득 찬 사람은 자신의 필요만 생각하기 때문에 베푸는 것에 인색할 수밖에 없으며, 하늘에 보물을 쌓지 못합니다. 결국 어둠이 이런 눈을 통해 들어와 온몸이 어두워져 세상을 밝히지 못합니다. 반면 관대하게 베푸는 사람의 밝은 몸은 세상을 밝히고(4:16),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3) 겸하여 섬길 수 없음(24)

누구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듯이 하나님과 돈을 동시에 섬길 수 없습니다(24). 왜냐하면 이 사람을 사랑하고 저 사람을 미워하거나 이 사람에게 헌신하고 저 사람을 무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왕권에 대적하는 물질주의를 경고하십니다. 하지만 문제는 많은 사람이 부자 청년처럼 재물을 사랑하면서도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재물은 같이 섬길 수 없습니다.

19-24절을 한 묶음으로 읽으면, ‘한 방향의또는 단순한눈을 가진 사람은 하늘에 보화를 쌓는 사람이며,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깁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의 필요를 채우시는 긍휼의 성품을 갖고 계시지만 맘몬은 철저히 계산적입니다. 냉정하고 냉혹한 자본의 원리를 들어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의존해서 살아가는 동정의 사람은 세상을 따뜻하게 회복하는 역할을 하는 반면, 맘몬의 종은 속물처럼 행동하고 사회적 정의보다는 맘몬을 자랑하는 것으로 즐거워합니다. 돈이 안전을 보장한다고 여기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불신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일차적으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만 드려야 할 사랑과 헌신(신명기 6:4-5)을 돈에게 쏟을 때 돈처럼 냉혹하게 변해서 사람들을 물질로 대합니다. 무엇보다 질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심판으로 우상숭배에 반응하십니다. 악의 눈, 곧 탐심과 인색함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이 섬기는 보물은 언젠가 사라질 것이며, 인생은 어둠으로 채워질 것이며, 염려로 세월을 보내는 날을 맞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길은 긍휼로 자녀를 돌보시는 하늘 아버지를 신뢰하며 그의 나라와 의를 먼저 추구하는 것입니다. 맘몬이 아니라 하늘의 아버지를 경배하는 것이 자신(또는 교회)이 사는 길이며 이웃을 회복하는 길입니다.

재물()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그 재물이 우리의 주인이 되거나 우리 삶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재물을 사랑하지 말고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용해야 합니다. 이방 사람들은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지 않기에 생활에 대한 불안과 걱정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재물이 우선순위가 되는 것입니다.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물질에 대한 염려와 불안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실제적인 필요를 채워주신다고 믿고 하나님 나라를 최우선 순위에 두고 살아갈 때, 진정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삶의 우선순위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돈은 우리가 정말 믿는 대상이 누구인지 드러내는 가장 실제적인 잣대입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필요를 따라 삶을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마음을 두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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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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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밀한 중에 살피시는 하나님

마태복음 61-15

 

사람들은 영적인 부분은 볼 수 없기 때문에 보이는 것만 전부로 생각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들은 보이는 부분만 위해서 많은 것을 투자하고 수고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도 다 보고 계실 뿐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이 보이지 않다고 무관심한 부분을 더 지켜보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거나 이익을 얻으려는 선행에 대해 경고하십니다.

 

예수님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하나님 앞이 아닌 사람 앞에서 사람으로부터 의로움을 인정을 받는 세 가지 효과적 방식이 구제, 기도, 금식입니다. 참된 경건을 위한 구제, 기도, 금식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그 기준은 누구 앞에서하느냐입니다. 사람들이 알도록 드러내느냐, 하나님께서 보시도록 은밀히 행하느냐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참된 경건의 태도와 방식을 명령하십니다.

 

구제에 대한 가르침(1-4)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선한 일을 이루어 갔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행동들이 자신의 자랑하는 수단으로 바꿔 버리는 모습을 봅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얼마나 악한지를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람을 의식해서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상을 받지 못합니다.

1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2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3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4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1-4)

사람들은 작은 선행을 행한 후 자신의 선행에 대해 자랑스러워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길 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모든 행동들을 금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들에게서 인정과 칭찬을 받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구제에 대해서도 예수님께서는 주는 사람 입장에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받는 사람 입장에서 실시하라고 합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의를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행하지 말아야 합니다.

(1) 경건 행위에 대한 가르침(1)

유대인들이 자신의 경건 생활을 위해 구제에 힘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구제행위에 여러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먼저 그들의 잘못된 행위는 사람들에게 보여주려 했고, 사람들에게 인정과 영광을 얻으려 했습니다. 경건의 핵심은 하나님 앞에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결코 사람을 향해 경건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에게 보여주려는 신앙생활은 경건 행위나 예배가 아니라 연극과 같습니다. ‘위선(僞善)’이 당시의 연극의 용어로 쓰인 것을 고려하면, 하나님 앞에서가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나팔을 불고, 길게 기도하고, 대중 앞에서 연설을 하는 모습은 연극배우가 관객 앞에서 연기를 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앞에서 경건 행위를 해야 합니다. 참된 경건은 의인들에게 상을 주실 하늘의 아버지께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2) 자선에 대한 교훈(2-4)

제자들은 자선을 베풀 때마다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자선 행위를 보여주는 위선자들과 달리 나팔을 불지 말아야 합니다.

당시 구제를 시작할 때, 구제를 받아야할 사람이 빠지지 않도록 성전에서 구제를 시작한다는 나팔을 불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점점 사람들에게 이목이 중심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자기 의로움을 과시하기 위해서 나팔을 불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경건을 인정받으려는 선전일 뿐입니다. 위선적인 구제 행위를 하는 것은 가난한 사람을 이용해서 자기 영광을 얻으려는 악한 태도입니다. 자선 행위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으면 더 이상 하나님에게서 받을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자선을 베풀 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합니다.

구제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은밀하게 해야 할 이유는 첫째, 구제를 받은 사람에게 자존심 상하여 상처를 주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둘째로, 사람들 앞에서 공공연하게 나팔을 불지 않아도 하나님은 이미 다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가 바르게 세워진 사람들은(5:21-48), 사람들과의 수평적인 관계도 바르게 세워집니다(6:1-18). 사람들과의 태도에서 서로 돕길 위해 의를 행할 때 세상 사람들과 다릅니다. 외식적인 사람은 남에게 보이려고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듯 은밀히 행합니다.

구제에 대한 바른 태도는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하는 섬세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들도 마땅히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의만 나타내야 합니다. 그래서 정말 아름다운 구제의 행위는 아무도 모르게 즉 은밀하게 행해져야 합니다. 연약한 사람들의 궁핍함과 절박한 필요를 도움을 주는 것이 구제입니다.

 

기도에 대한 가르침(5-13)

기도는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 나라와 뜻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권능으로 주의 이름을 높이고 주의 나라를 이루시기를 갈망하는 기도, 제자들도 순종의 삶을 통해 이 하나님의 통치와 뜻의 구현에 참여하기를 간청하는 기도가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모든 기도보다 앞서야 하고 이러한 기도가 기본적인 원리가 되어야 합니다.

5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7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8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9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12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3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5-13)

예수님께서는 사람들과의 관계(구제)에서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기도)에서도 위선(僞善)을 금하셨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외식하는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거짓으로 연구하는 영화배우와 같습니다.

(1) 은밀한 기도(5-6)

제자는 위선을 피하고 은밀히 기도해야 합니다. 위선자들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사람들의 눈길을 의식하면서 기도합니다. 그들은 회당이나 길모퉁이에 서서 손을 들고 기도하기를 좋아하였습니다. 본문에서 큰 거리 어귀는 갈릴리의 헬라식 도시 세포리스에 있었던 주랑(기둥)이 세워진 거리를 가리킵니다. 사람들의 칭찬을 받으려고 연극배우처럼 기도를 연기하는 사람은 사람들의 칭찬으로 보상을 이미 받은 것이 됩니다.

기도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위선자들은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하지만, 그들의 마음에는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께만 집중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행동과는 대조적으로 제자들은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라고 문을 닫고 기도하듯이 은밀히 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아무도 모르게, 오직 아버지만 아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골방은 칭찬과 존경을 표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 한 분만으로 초대해서 친밀하게 만날 수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초대해 기다리고 계시는 방입니다.

기도는 하나님만을 대화의 상대로 삼고 친밀함 가운데서 골방에서 하는 것이므로 당연히 사람들의 칭찬이나 존경과는 거리가 멉니다. 이렇게 은밀히 기도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며 갚아주십니다.

(2) 기도에 대한 기준(7-13)

예수님께서는 이방 사람들의 기도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그들처럼 주문을 외우듯이 같은 말을 되풀이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에게 가장 좋은 기도의 모범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기도문입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잘못된 기도를 언급하십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두지 않은 이방인의 중언부언은 잘못된 기도입니다(7). 이방인들은 말을 반복하고 많이 내뱉음으로써 말이 가진 힘을 중대해서 신들이 관심을 갖도록 만들었습니다. 기도는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자녀 간의 대화이기에 중언부언하는 것은 대화의 태도로 옳지 않았습니다. 자녀는 아버지에게 필요한 것을 말할 때 확신에 찬 마음으로 명료하게 필요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8절에서는 올바른 생각을 언급하고 나서, 9-13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정형화된 기도의 모본을 제시하셨습니다. 기도의 시작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부르는 것입니다.

첫째 청원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둘째 청원은 당신의 나라, 곧 하늘나라 내지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영광스럽게 되기를 바라는 기도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드러나고 실현되기를 기대하는 것과 연결됩니다. 셋째 청원은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 하나님의 계획과 목표를 가리키며, 제자는 자신의 뜻이나 사탄의 의도가 아니라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실현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위의 세 청원이 하나님과 그의 나라와 관련된 기도라면 이어지는 세 청원은 자녀의 필요를 위한 것입니다.

넷째 청원은 빵, 즉 인간의 기본적인 필요를 위한 것입니다. ‘오늘의 땅에서 하나님께서는 멀리 계시는 것 같고, 나의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으시는 것 같고, 나의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으시는 것 같고, 세상의 무거운 짐이 오늘의 나를 짓누르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부의 딸과 아들은 하늘을 향해 아버지라고 불러야 합니다. 이제의 아버지는 오늘도 아버지로서 자녀의 필요를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청원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를 지은 자들에게 용서를 베푼 것처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용서하는 신자는 하늘 아버지를 향해 자신의 죄를 고하면서 자비를 구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악의 결속력이 약화되고 긍휼이 땅에서 순환됩니다. 여섯째 청원은 자신의 약함과 한계를 인정하면서 인생의 위기에서 구해달라는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권능으로 주의 이름을 드높이고 주의 나라를 이루시기를 갈망하는 기도, 제자들도 순종의 삶을 통해 이 하나님의 통치와 뜻의 구현에 참여하기를 간청하는 기도, 자기 부인을 통해 내 나라를 버리고 주의 나라만 서기를 구하는 기도, 하루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양식부터 죄 용서와 악한 자로부터 건져주시는 일까지 내 생명과 삶이 모든 영역을 하나님께 의탁하는 기도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합당한 기도입니다.

 

용서에 대한 가르침(14-15)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사람의 외형적으로 나타는 것은 용서하는 삶으로 나타난다고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14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15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14-15)

참된 기도는 용서하는 삶으로 입증됩니다. 경건 생활의 상호성을 강조하는데, 주의 기도가 영원한 요구이듯 용서하고 용서받는 방식의 일어나야 합니다. 이전 단락에서 보복과 원수 사랑도 용서와 연결됩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용서하셨듯이 하늘나라 제자라면 하나님을 닮은 자로서 먼저 타인을 용서해야 합니다.

 

나가는 말

사람에게 보이려는 목적으로 를 행하지 말아야 합니다. 종교지도자들의 위선을 본받지 말고 은밀하게 구제하고 하나님 앞에서만 기도하고 금식해야 합니다. 제자들의 착한 행실 구제 기도 금식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동기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당신은 하나님만 아셔도 은밀하게 구제하고 있습니까? 혹시 기도와 금식을 자신의 경건과 믿음을 선전하는 도구로 여기고 이용하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목적이 하나님과 관계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사람들 속에서 드러나기 위한 것인지 신앙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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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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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사랑을 가르치신 예수님

마태복음 533-48

 

언제 홈쇼핑 채널에서 필요한 제품을 판매하고 있었습니다. 계속 보는데, 그 호스트는 열을 내가면서 오늘만 이 최저 가격으로 준다.’고 하면서 다음에는 이런 기회가 절대로 없을 것이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유명한 연예인도 곁에서 말을 거들면서 이 가격이 절대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번 기회를 놓친다면 다시는 그 가격에 살 수 없을 것 같아서 물건을 주문했습니다. 그런데 물건을 구입하고 며칠 후, 또 그 제품을 방송하는데 구입한 가격보다 더 싸게 판매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방송을 보는 순간, 그 동안 이미지 좋았던 연예인이 신뢰가 무너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보훈을 통해 진정한 복이 무엇인지 가르치셨습니다. 이제는 나머지 세 주제인 맹세, 보복, 이웃 사랑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이어집니다. 헛된 맹세를 금하여 맹세한 것은 철저히 지키라는 율법에 예수님께서는 어떤 맹세도 하지 말 것을 명령합니다. 동해보복법에 대해서는 보복 자체를 금하십니다. 이웃과 원수를 사랑과 마음의 대상을 확실히 구분했던 사고에는 원수까지 사랑하고 핍박을 가하는 대상을 위해 기도하라 명령하십니다. 그것이 하늘나라의 삶입니다.

 

맹세에 대한 가르침(33-37)

자신의 말이 진실하다고 생각할 때 맹세를 합니다. 그것도 모자라 그것을 보증하기 위해 어떤 사람이나 사물을 수단으로 해서 약속합니다. 자신의 말이 진실하다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어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맹세를 남용했고, 거짓 맹세를 자주하고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맹세에 대한 교훈을 하였습니다.

 

33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35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36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37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33-37)

율법을 성취하고 더 나은 의를 보여주는 네 번째 예는 맹세에 대한 것입니다. 옛 사람들은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맹세한 것을 지켜야 한다는 계명을 들었습니다(19:12; 23:21-23; 30:2; 50:14). 서원과 맹세는 같은 개념이며(50:14), 1세기 당시 유대교에서 맹세는 서원 또는 서약과 구별되지 않았습니다.

(1) 거짓 맹세를 금함(34-36)

예수님께서는 지킬 마음이 있건 없건 상관없이 맹세 자체를 하지 말라고 권고하십니다(34). 이스라엘은 감히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않았지만, 하늘이나 땅, 또는 예루살렘, 머리를 두고 맹세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도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진실을 입증하기 위한 수단으로 하나님과 관련된 것을 사용하지 않도록, 그 어떤 것을 두고도 절대로 맹세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당시에 잘못된 언어 습관에 대해 예수님께서 헛맹세를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맹세란 단어는 사람들이 쓸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은 맹세할 만큼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만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은 주로 재판하는 과정에서 증인이나 피고인에게 맹세를 하게 했습니다. 거짓 명세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나님께 하는 맹세에만 적용시켰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하늘이나 땅 등을 걸고 맹세하고 난 후에는 이를 억여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맹세를 쉽게 하는가 하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맹세하는 일도 빈번히 일어났습니다.

유대인들은 맹세에 효력이 있는 경우와 없는 경우를 따졌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성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은 효력이 없지만 성전 금고의 금으로 맹세하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 재단을 두고 맹세한 것은 효력이 없지만, 그 위에 있는 예물을 두고 맹세하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참고, 23:16-22). 이런 맹세들은 기회만 있으면 자신의 거짓을 정당화시키려는 악의 증거가 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나 땅으로도 맹세하지 말라고 그리고 예루살렘으로도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땅은 하나님의 발판으로서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35). 예루살렘은 위대하신 왕, 하나님의 도시이므로 인간이 사용할 권한이 없습니다(48:2). 자신의 머리라고 해서 맹세에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역에 속한 것이므로, 인간은 자신의 머리를 걸고 무엇을 맹세할 정도로 능력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2) 정확한 의사표현(37)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므로 율법이 요구하는 맹세를 반대하지 않으십니다. 새 백성은 과거의 옛 언약 백성이 맹세의 수단으로 자신의 진실을 확보하려 했던 시도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맹세를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진실을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하늘나라의 새로운 백성들은 옳은 것은 옳다’, 아닌 것은 아니라는 것으로 대답하라고 하셨습니다. 겸손하게 낮아져서 함부로 거짓 맹세를 남발하지 말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따라 사는 성도임을 고백해야 된다고 하셨습니다.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는 진실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진실한 말과 삶이 맹세에 대한 율법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더 나은 의는 맹세하는 대상을 사용해서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아니오라는 말로 진실을 실천하면 구약의 율법을 성취하게 됩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일과 미래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또한 항상 자신의 행동이나 말에 책임지기가 힘듭니다. 그러므로 당신 역시 크고 작은 일에 쉽게 맹세하거나 장담하는 일이 없도록 항상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겸손하게 있는 모습 그대로 살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구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을 대할 때 자신을 과시하지 않고 정직하고 진실하게 살 수 있습니다. 종종 내 이름의 명예를 걸고 맹세한다.’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이름이 자신을 지켜주신 못합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를 합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에는 위기를 모면하고 책임을 회피하고자 하는 동기일지 모르지만, 당사자는 사람들에게 신뢰를 잃어버린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맹세하지 않아도 될 만큼 항상 진실하게 말하고 행동하기를 강조하신 것입니다. 맹세보다 진실한 마음이 중요하다고 가르치십니다. 항상 진실하게 말하고 행한다면 맹세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또 진실한 마음이 없다면 아무리 맹세를 한들 아무 소용없을 것입니다.

 

보복에 대한 가르침(38-42)

우리들이 사는 세상은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아야할 세상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쳤으면 그에 상응한 배상을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불의한 방법으로 행동했으면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율법에도 그런 내용이 서술되어 있었습니다.

38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38-42)

다섯 번째 예는 보복(報復)’에 대한 주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갚으라는 동해보복법(38; 21:24; 24:20; 19:21)과 대조해서 보복하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38).

동해보복법(同害報復法)’은 개인의 보복 행위를 금하도록 주어진 공식 규정으로서, 보복의 악순환을 막기 위한 법입니다. 이 법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은 악으로 악을 갚지 말라는 의미와 같습니다.

구약 율법에도 사람들이 잘못하거나 해를 끼쳤을 때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으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법칙은 지금도 중동지방에 여전히 존재합니다. 하지만 이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극단적으로 눈을 상처 입었을 때, 상대방에게 눈을 헤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타인에게 실수를 범한 사실에 대해 반드시 대가를 지불할 것을 의미합니다. 절대로 개인적인 복수의 규모나 범위가 더 커지는 것을 막고 공정한 심판을 위한 하나님의 조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율법을 다시 해석하시면서, 심판해야 할 상황에도 자비를 베풀라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하셨습니다. 더 나가서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악을 대적하지 말고 오히려 선으로 대하라고 하셨습니다. 오른편 뺨을 치면 외편 뺨까지, 속옷을 달라면 겉옷까지도 그리고 억지로 가자고 하면 더 많이 가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이성적이나 감정적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육신이 원하는 것과는 정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가능할 수 있을까 반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하나님의 자비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할 수 있는 것을 요구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친히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그러한 삶을 살기 위해 오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반하고 불순종한 죄인들이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는 저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들의 죄를 자신에게 돌려달고 기도하면서 돌아가셨습니다. 이렇게 악한 죄인들을 위해 선으로 갚기 위해 십자가 위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열매가 바로 부활(復活)’입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들이 죽을 때, 승리의 부활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죄악을 따라서 하는 삶과 선을 위한 삶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23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6:23)

죄의 결과는 사망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의 죽음은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길을 따라 살아가는 성도들은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자신의 이익을 챙겨가면서, 절대로 손해를 않고자 산다면 삶 가운데 부활의 열매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성도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자신이 죽어야만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고 당신을 핍박했던 사람을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원수에 대한 가르침(43-48)

악한 것을 정당히 그와 비슷한 수준으로 막을 수 없습니다. 악을 막기 위해서는 그보다 더 큰 힘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힘으로 막으면 어느 순간에 균형이 잃어지면 다시 무너집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으로 변화를 이루어집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지 않는 사람들과 달라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43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46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8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43-48)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은 세상에서 보여 준 인본주의적인 사랑이나 박애주의적인 사랑 그 이상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같은 사랑을 행하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만이 온전한 참 사람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는 계명을 들었습니다. 이웃 사랑에 대한 당시의 해석과 달리 예수님께서는 원수들을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십니다(44). 기도는 진심으로 소망하는 표현이므로 결코 쉽게 행할 수 있는 태도가 아닙니다. 구약에도 원수를 잘 대하라는 내용이 나오지만(23:4-5; 24:17; 25:21), 원수를 사랑하는것은 이런 구절보다는 훨씬 급진적이고 사실상 구약과 유대교에서는 전례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주고받는 개념이 아니라, 돌려받을 것을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주는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랑을 온전하게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가 온전하신 것과 같이 자녀인 우리들도 온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나의 감정에 따라 복수하거나 앙갚음을 하려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이 아닙니다. 그 속에는 자아 중심적인 삶 그리고 세상이 주는 유혹을 따르는 삶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에게 해를 끼친 사람들을 위해 용서할 뿐 아니라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웃을 위해 사랑하는 것은 결국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30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12:30-31)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48)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온전해지기 위해 노력하면 할수록, 분명히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도 있다는 것을 압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늘의 아버지께 의지해야 합니다.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하나님께 나아 가아야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심으로 능히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말씀하셨던 대로 그런 삶을 실천하셨습니다. 적을 물리칠 힘과 능력이 있었지만, 십자가에 고난을 당하시고 돌아가시면, 자신의 가르침대로 실천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영향력 있는 삶은 그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할 때 존경하고 따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으로부터 존경 받고 영향력을 발휘해서 세상 사람들의 수준보다 훨씬 높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세상을 감동시킬 수 있습니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온전하신 것처럼 자녀들인 제자들도 온전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것을 보고 우리도 이웃에게 그대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가리지 않고 자비를 베푸시는 것처럼 세상에 비친 제자들도 선인과 악인을 가리지 말고 모든 사람을 착한 행실로 성결하라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것은 완전함이 아니라 온전함, 성숙함입니다. 날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으로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살아가는 성도들, 성숙한 성도로 살아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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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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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을 완성시키신 예수님

마태복음 521-32

 

묵상에는 선악 간에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으로 하는 묵상이 있고, 죄악에 대한 묵상을 통해서 은밀히 죄악을 즐기는 묵상이 있습니다. 하지만 두 묵상에는 반드시 열매가 맺습니다. 그 열매는 매우 큰 차이를 보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묵상은 성령의 열매를 맺지만, 죄악은 또 다른 죄악의 열매를 맺습니다. 당신의 경우에는 무슨 묵상을 많이 하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성취하신 분으로서 제자들에게 천국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더 나은 의를 요구하셨습니다. 48절까지 여섯 개의 주제에 대한 대조구문이 등장합니다. 본 단락은 살인, 간음, 이혼이렇게 세 가지 주제를 다룹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인하지 말라는 물리적 살인에 대한 율법의 이해를 분노하는 것도 살인과 동등하다고 의미와 적용을 확장하며 새로운 계명으로 말씀하십니다. 간음에 대해서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조차 동일한 간음이라고 확대 적용하십니다. 이혼 문제도 율법의 본질을 파고 들며 부패한 전통과 관습을 꼬집으십니다.

 

살인에 대한 가르침(21-26)

율법의 내면을 외면한 채 외형만 준수하였던 서기관과 바리새인 수준에 머물러 있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의 는 진정한 의미에서 의가 아니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의 충실한 언약 관계에 있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만약 바른 관계가 이루어졌다면 예수님을 알아보고 경배했을 것입니다.

21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23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25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26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21-26)

예수님께서는 모세의 율법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여기며 살던 제자들에게 그보다 훨씬 더 높은 기준을 제시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직접적으로 살인이나 간음과 같은 행위를 하지 않으면 계명을 지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계명의 준수의 차원을 행위와 차원에서 마음의 차원으로 높이시며 화를 내고 미워하는 마음을 품은 것이 곧 살인이고, 음란한 생각으로 이성을 바라보는 것이 곧 간음이라고 하셨습니다.

(1) 분노도 살인(21-22)

더 나은 의를 보여주는 첫 번째 예는 살인에 대한 해석입니다(5:21-26). 옛 사람들은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을 들었습니다(21). 살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형제에게 화를 내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될 거라고 선언하십니다(22). 형제에게 골빈 놈이라고 하는 자마다 공의회에 보내질 것이고 멍청이이라고 말하는 자마다 불타는 지옥에 넘겨질 것입니다. 형제에 대한 분노는 타인의 생명을 부당하게 빼앗는 것인 살인과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더 나은 의는 주관적인 판단으로 작게 여길 수 있는 죄를 심각하게 인식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의 백성은 살인하지 말라는 법을 어기지 않은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상대방을 존중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상대방에 대한 존중은 23-26절에서 구체적인 예로 강조됩니다.

 

(2) 형제와 화목(23-24)

다음으로 경고한 심판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화해입니다(22). 첫 번째는 예물을 바치는 것보다 화해가 중요한 점을(23-24), 두 번째는 즉시 화해를 실행해야 하는 점을 언급합니다(25-26).

예물을 바치러 가다가 형제가 자신 때문에 뭔가 문제를 안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면, 예물을 제단 아래에 두고 바로 형제에게 가야 합니다(23-24). 산상설교가 주어지는 갈릴리에서 예루살렘 성전까지 가는 데 일주일가량 소요되므로, 멀리 있는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제단에 제물을 올리지 않고 돌아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만큼 화해를 강조하십니다. 깨어진 인간관계를 회복하고 나로 인해 상처를 받은 사람과 화해하는 것은 예배 행위보다 먼저 해결해야 할 정도로 중요합니다.

 

(3) 고발하는 자와 화목(25-26)

화해가 즉시 이뤄져야 함을 묘사합니다. 화해는 빨리 이뤄져야 하며, 그렇게 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입니다(26).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지 않는 것에 머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분노를 주체할 수 없어서 비아냥거리거나 협박과 저주에 가까운 언어 폭력을 사용하면서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나는 아무 꺼릴 것이 없다고 생각하면 자신을 심각하게 오해하는 태도입니다. 자신의 입장에서 작게 보이는 무시와 성처가 지옥에 갈 정도로 심각하고 예배보다 더 먼저 해결해야 될 문제임을 깨닫고 실천해야 합니다. 죄에서 자유케 된 제자는 죄에 대해 무감각해지는 사람이 아니라 더욱 민감해지는 사람입니다.

형제를 향해 분노로 심판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을 가져야 합니다. 건전한 신학과 교류가 중요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형제를 향해 심판과 관련된 욕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형제를 향한 분노가 최초의 살인으로 나타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분노를 품고 있으면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도 온전하게 진전될 수 없습니다. 마음이 온통 두 마음으로 나뉘어서 결국 미움은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데까지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깨어진 관계에 있을 때 웬만한 사람은 정상적인 삶을 이어갈 수 없습니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속에서 계명을 단순히 문자적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 계명 안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순종하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간음에 대한 가르침(27-30)

하늘나라의 백성들은 남의 여인과 간음하지 않은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새 백성은 이성을 음욕의 대상으로 여기거나 희롱의 방식으로 대하지 않고 온전히 깨끗한 마음으로 자매에게 하듯 해야 합니다. 눈을 빼고 손을 자르라는 명령처럼 단호하게 엄격하게 절제해야 합니다.

27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29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30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27-30)

예수님께서는 여섯 번째 계명인 살인 금지에 이어서, 다음으로 간음과 관련된 일곱 번째 계명을 언급하십니다(20:14; 5:18).

(1) 음욕도 간음(27-28)

구약에서 간음(姦淫)은 유부녀가 남편 외의 다른 남자와 성관계를 맺는 것을 가리킵니다. 율법에서 간음 행위는 실체로 드러난 음행을 가리키며, 반드시 법의 판단을 받아야 했습니다(20:14; 5:18).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이 율법을 주신 원래 의미를 밝히십니다. 여자를 음행의 목적으로 보는 것도 간음입니다. 이곳에서 여자는 이미 결혼한 여자’, ‘타인의 아내를 의미합니다(20:17; 5:21). 남의 아내를 간음할 목적으로 기회를 엿보는 것은 이미 간음의 죄를 지은 것입니다. 마음과 몸(, 간음의 마음으로 본 눈)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의 일부가 실족하게 만든다면 차라리 그것 없이 지옥의 형벌을 피하는 것이 낫다고 경고하십니다(29-30). 눈은 의도, 손은 행위와 관련된 표현으로, 남의 아내를 탐욕으로(10계명) 본 죄의 대가로 눈이 뽑혀야 합니다. 눈이나 손이 잘리는 것이 지옥에 보내지는 비극보다 낫습니다.

이런 표현은 과장법이므로 문자적으로 적용하지 말아야 하지만, 그만큼 하늘나라의 자녀는 마음의 의도까지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고 싶어야 할 것을 예수님께서는 강조합니다. 그냥 넘기기 쉬운 마음의 죄 역시 심각한 것입니다. 인간 법정을 피할 수 있으나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제7계명을 인정하시면서 법의 적용 범위를 마음에까지 넓히십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계명을 주신 원래의 의도를 밝혀주심으로써 제7계명을 성취하시고 더 나은 의를 가르십니다.

 

이혼에 대한 가르침(31-32)

율법은 이혼 증서를 써주기만 해도 이혼이 성립되게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음행하는 일과 같은 정당한 사유 없이 이혼하는 것을 금하십니다. 배우자를 버리거나 이혼하지 않는 것을 넘어 아끼고 사랑하는 모습이야말로 새 백성이 보여야 할 더 나은 의의 모습입니다.

31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32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31-32)

더 나은 의를 위한 세 번째 예는 이혼(離婚)’입니다. 이혼은 앞의 간음과 연결되는 주제이므로 이 위치에 놓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혼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근거로 아내를 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아무리 법적으로 합당하다고 할지라도 그 속마음과 의도가 옳지 않다면 그것은 죄이며 금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은 신명기 24:1-4을 배경으로 하며, 마태복음 19:3-9에서 자세히 설명될 것입니다. 옛 사람들은 아내와 이혼하는 자는 그녀에게 이혼증서를 주라는 명령을 들었습니다(31). 이혼증서를 써 주라는 부분은 신명기 24:1을 배경으로 합니다. 남자가 이혼 증서를 써주는 것은 고대 사회의 가정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가졌던 남편의 힘을 제한해서 여자와 여자의 가정에 대해 책임성 있는 행동을 하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 이혼 장려가 아니라 여자를 보호하는 목적으로 이혼증가서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음행의 경우 외에 그의 아내와 이혼하는 자마다 그녀로 하여금 간음하게 만들고, 이혼한 여자와 결혼하는 자마다 간음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남자가 아내와 이혼을 하게 되면, 아내로 하여금 간음을 하게 만들고, 이 여자와 결혼하는 자는 간음을 범하게 됩니다.

재혼과 관련해서, 합법적으로 이혼한 사람은 재혼할 수 있었고 이혼증서는 재혼할 수 있다는 권한이고 여자를 보호하는 기능을 했기에 재혼이 금지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남자가 아내가 음행을 했기 때문에 이혼했고, 그 다음 다른 여자와 재혼하는 것은 간음이 아닙니다. 여자가 남편의 간음으로 이혼 당한 경우나 여자가 간음 외의 문제로 이혼을 당했을 경우에는 재혼이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만일 여자가 음행을 하지 않았는데, 남편에 의해 이혼을 당했을 경우에, 이 여자와 결혼을 하는 사람은 간음을 한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음행의 이유가 아닌데도 부부가 이혼을 하면, 하나님의 시간에는 여전히 이 둘이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여자와 결혼하는 자는 남의 여자와 사는 것이므로 간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전해진 이혼의 율법을 부정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신명기 241-4절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알리면서, 이 본문이 쉬운 이혼의 근거로 사용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신명기의 이혼은 인간의 완악함 때문에 허락된것이지 결혼제도를 만드신 창조주의 원해 의도가 아닙니다(2:24). 제자들은 하늘나라의 백성이며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를 넘어서야 하므로, 마음이 완악한 자들에게 허락하신법을 지키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원래 의도하신법에 순종함으로써 결혼과 이혼에 대한 법을 성취합니다.

결혼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영원한 관계를 이루도록 의도됐으므로, 이혼은 하늘나라의 제자들이 선택할 사항이 아닙니다. 재혼에 대해 간음에 연루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핵심은 이혼이 틀린 것임을 강조하는 데 있습니다. 하늘나라의 제자는 언약 관계인 결혼을 파기하는 행위를 간음으로 간주하고 창조 때의 이상적인 결혼을 지켜야 합니다. 특히, 제자는 자신의 욕심 때문에 이혼의 원인을 제공하는 사람의 위치에 서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의 속뜻을 살피고 그 뜻을 살아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몇 개의 율법 조항을 수정하거나 강화하는 데 그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모세의 하나님이시며 새 언약의 주님이십니다. 그분과 연합하여 살아가는 그 나라의 백성은 세상 사람들보다 더 탁월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의인은 악한 일을 하지 않는 차원의 만족하는 의가 아닙니다. 말씀에 담긴 주님의 속뜻을 헤아려 살아간 삶을 의미합니다. 더 나은 의라고 하는 원리는 모든 삶의 영역에서 적용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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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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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을 완성시키신 예수님

마태복음 513-20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행위를 마음의 동기를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사람들은 같은 행동을 취했지만, 마음에 따라 죄명이 상해죄가 아닌 살인죄로 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보시는 기준은 줄곧 마음을 강조하십니다. 행위보다 마음이 먼저이고, 겉만 아니라 속까지 의로워지는 것이 더 나은 의라고 주님께서는 행위의 법을 마음의 법으로 심화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제시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율법에 대해 보이신 태도는 사람들로 율법을 폐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패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성취하러 오셨습니다.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했던 시대는 끝나고 그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하는 시대가 이른 것입니다.

 

소금과 빛인 성도(13-16)

세상에 똑같이 숨을 쉬고 있다고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영생을 누리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영생을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라고 부릅니다. 이 복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 보면 과연 그들이 추구하는 것이 복일까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가시적으로 보여지는 것을 복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영적으로 성숙해져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은 복입니다.

13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13-16)

예수님의 산상 설교는 계속됩니다. 팔복의 내용을 보면, 어쩌면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세상에서 바보 같이 맞고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팔복의 원리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밝힙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으로 소금과 빛으로 말씀하셨습니다.

(1) 세상의 소금과 빛(13)

본문에서 너희는 제자들을 의미하며, 11-12절에서는 예수님 때문에 핍박받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강력한 비유를 통해 제자들의 정체성을 공개합니다.

먼저 소금으로 비유하십니다. 땅에는 마음이 오만하고 불의를 행하는 사람들, 무자비하고 순수하지 않고 싸우기를 좋아하고 핍박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이들은 땅을 더럽히는 사람들입니다. 제자들은 땅에 소금입니다. ‘소금이라 말씀하실 때 소금의 어떤 역할을 염두에 두셨겠습니까? 고대에는 소금을 여러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짠맛일 텐데, 그 짠맛이 가져오는 영향과 결과가 무엇이냐는 다양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소금은 음식의 맛을 돋우거나 부패를 방지하고 보존하는 것이었습니다. 정결이나 언약 등 다양한 기능과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만 고집할 필요는 없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의 소금이라고 칭하신 것은 세상을 위한 소금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어떤 역할이든 소금은 세상을 살리고 세상을 위한 일이 됩니다. 소금이 그 효과를 발휘하는 과정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의 희생과 섬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소금이 맛을 잃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 안에 불순물이 너무 많으면 소금의 가치를 상실합니다. 소금이 맛을 잃는다는 것은 일어날 수 없는 현상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맛을 잃다라고 번역된 원어는 어리석게 되다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의 정체가 소금이라는 것은 땅에서 어리석지 않고 현명한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앞서 팔복 중 마음의 청결과 유사합니다. 마음이 더러워지고 정체성이 혼탁해지면 세상을 위한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짠 맛은 소금이라야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소금인 제자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아무도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맛 잃은 소금 덩어리, 다량의 불순물이 함유된 소금은 아무짝에도 쓸데없어 사람들은 길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히는 돌덩이처럼 됩니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에서 목적어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세상을짜게 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까? ‘소금을짜게 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까? 동사 할리스떼세타이(λιαθσεται)는 미래 수동형입니다. 그것이 세상소금중 무엇을 목적어로 취하는지가 관건입니다. 동사에 가까이 있는 단어가 소금이며, 수동태라는 점을 고려하면 후자일 가능성이 큽니다. 직역하면, ‘무엇으로 짜게 되겠느냐?’가 됩니다. 무엇이 소금을 짜게 하겠느냐입니다(9:50도 이를 뒷받침한다).

소금이 짠맛을 잃어버린 일은 불가능하므로 어리석은 제자는 짠맛을 내지 못함으로써, 즉 어리석은 삶으로 참 제자가 아님을 드러냅니다. 또는 어리석은 소금은 소금의 맛을 여전히 지니고 있으나 그 영향력이 약해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소금은 땅에서 제 맛을 유지하지 못해 이물질이 가득한 흙과 뒤섞여서 더러운 취급을 받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구별된 정체성을 따라 살지 못하면, 영향력을 상실해서 땅의 사람들처럼 어리석은 이생에 빠지고 맙니다. 제자들은 땅에 소금으로써 땅에서 살도록 부름을 받습니다. 소금은 매우 적은 양에도 큰 영향력을 끼치고, 적지만 필수적인 물질인 것처럼 제자는 이런 정체성을 인식하고 경고과 격려를 함께 받고 있습니다.

두 번째 비유인 도 소금과 비슷한 이해가 요구됩니다. 빛의 기능이 다양하지만, 소금처럼 세상의 빛으로 정의됩니다. 산위에 세워진 도성은 숨겨질 수 없습니다.

세상의 빛은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자들을 가리키며, 이런 사상은 이사야에 종의 노래에 근거합니다(참고 사 42:1-9). 이사야서에서는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을 열방의 빛으로 표현됩니다. 특히 이사야 본문에서 열방을 비추는 사역은 여호와의 종이 수행하는 사명이므로 세상의 빛으로 부름받은 자들은 종의 정체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마태복음 416절에서 예수님께서는 흑암에 앉은 백성과 그늘에 앉은 자들의 큰 빛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호와의 종으로서 이사야가 예언한 최고의 빛이며 빛의 사명이 예수님에게서 제자들에게로 위임됩니다.

빛은 그 자체를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빛은 무엇을 밝히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도시의 빛이 있는 목적은 그 도시를 밝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등불을 켜서 그것을 밑에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둡니다. 그래야 집안에 있는 모든 것을 비출 수 있습니다. 어둠을 밝힐 목적으로 준비한 등불을 준비하고는 그 빛을 막으려고 숨기는 것은 모순입니다.

그 빛의 기능은 어둠을 밝히는 것입니다. 소금처럼 어둠을 밝히는 것은 빛뿐입니다. 빛이 비치면 어둠은 사라지고 밝히 드러납니다. “산 위의 동네는 어디를 상징합니까? ‘예루살렘의 은유로 보기도 하지만, 본문은 상징적 의미를 해석할 추가 정보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는 부분은 소금이 맛을 잃는 것과 대조해 빛은 가려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빛이 빛을 잃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도 작은 불꽃 하나를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빛이 어떤 물체에 둘러싸이면 가려져 비출 수 없게 됩니다. 사람들은 등불을 말() 아래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둡니다. 예수님께서 빛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것은 초대교회의 중요한 이해였습니다(1:49). 예수님 안에서 제자들은 빛입니다(참조고후 4:6; 5:8; 살전 5:5). 어떤 것에도 가려지지 않고 세상 사람들 앞에 생명의 빛을 비추는 존재들입니다.

(2) 착한 행실(14-16)

소금이 맛을 내고 빛이 빛을 주는 것은 구체적인 행동을 동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행동을 제자들의 착한 행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에 맛을 내고 빛을 주는 그 행위 가운데 하나님께서 임재하실 것이고, 세상은 비로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보며 영광을 돌립니다.

좋은 행실은 앞에 팔복더 나은 의’(5:17)와 직결됩니다. 빛이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제자들도 세상을 위해 존재합니다. 빛과 소금은 제자들의 존재와 역할을 선언합니다. 제자들은 세상에 반드시 필요한 자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소금과 빛이 된 제자들이 구현할 착한 행실은 과연 어떤 것들입니까? 산상수훈의 본론이 시작될 텐데, 제자들의 신앙윤리에 대한 예수님의 명료한 가르침들이 상세히 소개될 것입니다. 제자들은 세상에 반드시 필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소금이 있어야 음식을 보존할 수 있고, 맛을 낼 수 있습니다. 빛이 있어야 도시의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듯이, 이 땅에 소금과 세상에 빛인 제자들은 반드시 세상에 존재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소금과 빛임으로 착한 행실을 행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산상 설교의 가르침에 순종해서 사는 인생은 어리석지 않으며, 즉 맛을 잃지 않으며 세상을 밝히는 가치를 발휘하게 됩니다. 성도로서 부름받은 순간부터 세상을 밝힐 뿐 아니라 세상에 노출됩니다. 은밀하게 선한 행실을 한 것은 세상을 비추는 빛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반면 아무리 숨어서 죄를 지어도 반드시 드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가립니다. 세상이 교회들이 본연의 모습을 찾도록 걱정하는 시대에 성도들은 삶으로 존재를 입증해야 합니다.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17-20)

예수님의 가르침은 기존 가르치는 방식에서 전혀 다른 방법들을 쏟아 놓았습니다. 이것은 전통적인 율법 교훈을 깨뜨리는 것이 많았습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행동에 우려를 자아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율법의 전통을 파괴하는 사람이라고 비난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17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18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20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17-20)

본문은 율법을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대한 원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이나 선지자를 무효하거나 취소하려 온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십니다.

(1) 율법의 완전성과 영원성(17-18)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율법이나 선지자를 패하러 온 것이 아님을 선언합니다. “율법이나 선지자는 구약을 의미하는 전문적인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들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러 오셨습니다. ‘폐하다완전하게 하다가 대조를 이룹니다. 구약의 율법을 파괴하고 새로운 법을 세우려 하심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에 대해 오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앞서 마태는 예수님의 탄생부터 그의 오심이 선지자들의 예언의 성취였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율법을 완전하게 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입니까?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을 이루며 그것을 가능하게 할 메시아 시대가 도래했음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은 윤리적 차원이 아니라 구원사적 차원을 갖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구원사를 완성하시는 메시아라는 점에서 율법은 그로 말미암아 완전해집니다. 율법은 구약 역사에서 끝이 아니라 메시아가 가져온 천국에서 완성을 맛봅니다. 율법의 완성은 곧 예수님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그 율법은 일점 일획도 사라지거나 파괴되지 않습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오신다고 율법의 가장 작은 부분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가치 있게 존재합니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이라는 표현은 일종의 강조어법으로 절대로, 결코 아니다를 뜻합니다. 즉 가장 작은 알파벳에까지 깃든 하나님의 뜻을 반드시 다 이루실 것을 강조합니다.

(2) 새 계명: 더 나은 의(19-20)

지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적용하고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 자신이 율법을 파괴하지 않고 완전하게 하시고, 또 그 온전한 율법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도 소금과 빛이 되어 세상 가운데서 예수님께서 주신 온전한 율법의 일점일획도 파괴해서는 안 되고, 더욱이 그렇게 율법을 경시하는 태도로 누군가를 가르쳐서도 안 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주시는 새 계명에 대한 제자들의 신실한 태도를 강조하십니다. 하늘나라에서 작다또는 크다일컬음을 받는다는 표현이 인상적입니다. 개역개정의 번역 천국은 맞는 번역이지만 천국에 대한 왜곡된 선입견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즉 장차 죽어서 갈 천국으로만 여겨 나중에 작다 또는 크다고 일컬음을 심판 차원에서 받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여기 하늘나라는 예수님께서 가져온 나라로서 현재성이 다분합니다. 제자들은 이미 그 나라 안에 들어온 상태입니다. 계명에 대한 태도 역시 하늘나라에서 행해지는 현재적 삶입니다.

마지막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18절에서 사용했던 익숙한 문구를 다시 사용하십니다. 그리고 꺼내신 주제가 입니다. 산상수훈 서론의 방점을 로 찍으셨다는 것은 본론에서 이 주제가 차지할 비중을 가늠케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의를 두고 종교지도자들과 제자들을 대조하십니다. 종교지도자들이 생각했던 란 무엇입니까? 향후 예수님과 많은 충돌을 일으킬 주제이지만, 율법주의가 낳은 자기 의입니다. 하지만 예수님 안에 들어온 제자들의 는 문자적 준수가 아닌 관계적 준수입니다. 율법적 준수가 아니라 믿음의 준수입니다. 의로움을 얻기 위한 준수가 아닌, 의로움 안에서의 준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종교지도자들보다 더 많은 양의 율법 준수를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지도자들이 추구하는 의와 전혀 다른 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더 나은 의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 곧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새 계명으로 선언된 의로서 예수님 안에 있는 자만이 확보할 수 있는 입니다. 하늘나라는 바로 그 가 아니고서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제자들은 이미 하늘나라에 들어와 있고, 그 나라에서 선포되는 새 계명을 삶의 원리로 듣습니다. 그 계명을 준수하며 사는 것이 그들의 소금과 빛 된 의로운 정체성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빛과 소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소금과 빛이 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세상에 소금이요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했다면, 그리스도에게는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부르심과 역할을 이미 줬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있고, 이 세상의 교회가 존재해야 될 이유가 있습니다. 존재론적 요구가 실천적 요구보다 앞서야 되는 이유는 소금과 빛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우리 안에서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빛과 소금이신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께서 주신 능력과 그 능력을 우려 안에서 실행하시는 성령님의 도움 없이는 세상을 이길 수 없고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이 세상에 빛과 소금이라는 정체성을 잊지 말고 예수님과 온전한 관계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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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05-01)

 

 

산상보훈에서 팔복을 말씀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51-12

 

사람들은 누구나 다 행복해지길 소망합니다. 하나님께서도 당신의 자녀된 성도들이 행복하게 살길 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생각하는 행복의 기준과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복의 기준은 조금은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복의 기준은 물질적이고 세속적이며 한시적이지만,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영원하고 변함없는 행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실 행복을 누리려 한다면, 하나님께서 제시한 행복의 원리를 잘 이해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본문에 팔복의 말씀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압축된 행복의 비밀들이 소개가 되고 있습니다. 당신을 행복의 세계로 초대합니다.

 

앞선 단락에서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과 현상을 포괄적으로 진술했다면, 이제부터 본격적인 사역이 소개됩니다. 마태는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하늘나라를 가져오신 메시아임을 선언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새 나라에 걸맞은 새 백성의 삶을 규정하는 새 질서를 선포하십니다. 팔복이 그 선포의 첫머리를 장식합니다.

 

천국에 대한 교육(1-2)

현재 누리는 복과 미래에 온전해질 복만이 이 가치에 헌신하고 이 변혁에 참여할 동력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새로운 가치관을 수용하고 그것에 따라서 삶의 방향을 정하는 사람들입니다. 구언의 조건이 아니라 그 나라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1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1-2)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자, 많은 무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예수님 곁으로 모여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으로 올라가 앉으셨습니다. 그들에게 천국 백성의 삶의 원리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새로운 모세로서 산에서 가르친 것과 같습니다.

(1) 산에 오르신 예수님(1a)

예수님께서 오르신 은 높은 산이 아니라 고도가 완만하게 경사진 언덕 정도일 것입니다. 마태가 의도적으로 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만한 마태적인 신학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모세가 율법을 받을 때, 시내산에 올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 사실과 대비하면서, 예수님께서 모세가 받은 율법을 폐하려 오신 분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려 오신 분임을 설명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낮은 언덕이지만 굳이 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2) 말씀을 전파하신 예수님(1b-2)

산상설교의 마지막 부분에서까지 실천하도록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하늘 백성으로 부름 받은 자녀들은 어떻게 하면 복을 누리를 수 있는지를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실천해야할 것을 가르치기 전에, 하늘나라에 속한 자의 복을 8가지로 선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8가지 복은 세상에 말하는 기준과는 전혀 다른 기준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좇는 사람들 중에는 두 가지로 분류 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좇는다고 해서 모두 주님의 제자가 아닙니다. ‘무리와 제자의 주된 관심이 달랐습니다. 무리는 예수님의 능력에만 관심을 기우렸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마음을 두었습니다.

 

천국 시민으로서 자세(3-12)

세속적으로 가득 찬 사람들에게는 하나님 나라가 들어설 여지가 없습니다. 의지할 만한 소유가 없어 하나님께만 호소하는 심령,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탈취당하고 슬퍼하는 자, 억압과 착취로 가진 것이 없어 하나님만 겸허히 바라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이미 천국에 들어온 자이고 죄와 고통이 제거된 세상에서 위로를 얻고,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누릴 것입니다.

3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7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3-12)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보고 산에 올라 가르치십니다(1). 산상설교의 말미에서 예수님께서는 가르침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는 모래 위에 집을 쌓은 어리석은 사람처럼 무너진다(7:24-27)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산상설교는 실천하도록 주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 백성이 실천해야 할 일을 가르치기 전에 하늘나라에 속한 자의 복을 여덟 가지로 선언하십니다.

(1) 심령이 가난한 자(3)

첫째, 심령이 가난한 자들은 복됩니다(3). 예수님께서는 심령이를 붙여서 마음의 상태나 태도가 가난한 것을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가난한 상태는 고통을 겪는 자들의 낮아진 모습, 자신을 낮추는 겸손의 태도를 의미합니다. 이사야 61:1의 가난한 사람들은 마음이 부서지고, 갇히고, 애통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마음이 파산한 상태에서 하나님 앞에 서서 겸손하게 오직 주의 도움에만 의존합니다. 우리는 첫 번째 복을 구약에서 복음을 묘사하는 이사야 61장의 성취라는 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삶의 어려움 가운데서도 메시아의 오심을 기다린 그들은 결국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복된 사람들입니다. 땅의 관점에서는 자신의 안전을 보장해줄 수 있고 목표를 이룰 만한 재화를 보유하고 있을 때 복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부와 지식(학벌)과 권력과 같은 것을 가지면 복된 사람으로 사회가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일로 마음이 무너진 상태에서 겸손히 하늘 아버지께 의존하는 사람은 복되다 하늘나라가 아들을 통해 왔고 이 나라는 겸손한 자들의 것이기 때문에 이들은 하늘나라를 얻습니다.

(2) 애통하는 자(4)

둘째, 애통하는 자들은 복됩니다(4). 두 번째 복도 이사야 61장과 연결됩니다. ‘애통하는 자들은 이사야 61:2슬픈 자들’, ‘애통하는 자들입니다.

이사야 61:2-3에서 애통하는 사람들은 슬픔을 안겨다 준 고통의 세월을 보낸 포로 생활에서 귀환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두 번째 복은 하늘나라의 도래와 관련이 있습니다. 포로 상태에서 하나님의 도움만을 간절히 구하면서 애통하던 조상들이 하나님의 구원(또는 귀환하게 하심으로 위로를 받은 것처럼,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리면서 울던 자들은 예수님 안에서 위로를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면 주의 배성이 복된 소식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이사야의 약속(이사야 40:1-2; 57:18; 61:2; 66:13)이 예수님께서 가지고 오신 하늘나라를 통해 성취됩니다. 하나님의 도움만을 애통하며 기다린 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위로입니다. 이 땅에는 고통이 있고, 그래서 애통할 수밖에 없는 일이 생깁니다. 권력 앞에서 무력하거나, 소중한 사람이나 무엇을 잃어버렸거나, 자신의 죄를 깨달을 때 고통을 겪습니다. 땅의 관점에서 애통하는 사람들은 부러움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애통하는 자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것이 기에 복됩니다.

(3) 온유한 사람(5)

셋째, 온유한 사람들은 복됩니다(5). 그리스-로마문화에서 온유는 친절하거가 신사적인 태도를 의미했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신적 속성을 반영하는 사람으로서 존경과 칭찬을 받았고 위대한 교사는 친절을 겸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온유로 번역된 세 번째 복의 프라위스를 구약과 유대적 배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온유한 자들은 유순한, 온유한 성품의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서 겸손한 낮은 자세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팔복의 구조에 따르면 첫 네 가지 복은 사람과 사람의 수평적인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의 수직적인 관점에서 복된 상태와 관련이 있습니다. 세 번째 복의 구약 배경인 이사야 61:1-2, 시편 37:11, 모세의 온유를 언급한 민수기 12.3을 분석하면 아나브의 의미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측면에서의 겸손한 태도를 가리킵니다. 온유한 자들이 땅을 얻게 된다는 말씀의 배경은 시편 37:11입니다. 시인은 악인이 잘되는 것과 비교해서 조바심을 내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가르칩니다(3,4,5,7,34,39).

악인이 칼을 빼고 활을 당겨’(14) 선한 사람들을 괴롭히며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지만 여호와를 의뢰하고(3), 여호와를 기뻐하고(4), ‘네 길을 여호와께 맡겨야합니다(5). 악인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모든 유혹의 짐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을 신뢰하는(3) 사람은 잠잠히 기다릴 수 있습니다(7; 참조. 시편 62:1,5). 말하자면, 온유한 자들은 자기주장에 의존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를 신뢰하면서 인내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뜻과 통치에 복종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주실 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11; 이사야 58:4, 22:26, 27:10). 예수님 당시의 쿰란 공동체도 시편 37편의 온유를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성품으로 이해했습니다. 덧붙여서, 흔히 모세의 온유함을 세 번째 복의 근거로 삼는 경우가 있습니다. 민수기 12장의 문맥에서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비참하게 낮아진 존재입니다. 그는 자기 백성에게서 끊임없이 공격받고 이제는 형제와 자매에게서 비난을 받는 안타까운 처지에 이릅니다. 지상의 누구보다도 낮아진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불쌍하고 낮아진 모세의 태도는 하나님을 향해 겸손하고 의지하는 태도가 됩니다. 정리해보며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낮아지고 가난하고(불상하고) 무력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런 사람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식으로 결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주변 여건이 자신의 기대와 다르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인내하며 하나님의 간섭과 섭리에 인생을 맡깁니다. 세상에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온유한 사람을 보고 복되다고 평가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온유하게 인생을 맡기는 사람은 약속을 얻게 될 것입니다!

(4) 의를 배고파하고 목말라하는 자(6)

넷째, 의를 배고파하고 목말라하는 자들은 복됩니다(6). 여기서 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3:15, 6:33),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뜻합니다. 배고픔과 목마름은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하는 표현입니다. 의로운 백성은 주리거나 목마르지 않게 해주실 긍휼의 하나님께 구원과 해방의 소망을 두었습니다(이사야 49:10; 65:13; 참조. 아모스 8:11; 잠언 9:5). 불의의 세상에서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의 개입을 갈망하는 사람은 복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5) 긍휼을 베푸는 자(7)

다섯째, 긍휼을 베푸는 자들은 복됩니다(7). 긍휼은 율법의 정신으로서 하늘나라 복음의 특징입니다(9:13; 12:7). 긍휼을 베풀어 야 하는 대상은 공동체 내부(18:23-34)와 소외되고 죄 많은 외부인들(9:10-13)을 포함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긍휼을 베푼 손길을 반드시 기억하고 보상하십니다. 종말론적으로 최후의 심판 장면에서 심판의 잣대는 긍휼을 베푼 여부이므로 긍휼을 베푼 이들은 긍휼을 얻습니다(25:39-40). 특히 자신의 어려운 형편에서도 불쌍히 여기는 인생을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그런 삶이 옳다고 인정하십니다.

(6) 마음이 깨끗한 자(8)

여섯째, 마음이 깨끗한 자들은 복됩니다(8). 마음의 청결이나 순수는 진실함, 곧 거짓과 반대되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8절의 배경인 시편 24:4-6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성전을 향해 올라가는 자는 손을 깨끗하게 하고 마음을 청결하게 해야 합니다. 이는 이웃을 순수하고 신실하게 대하는 것을 뜻합니다. 다른 사람을 선하게 대하면 하나님을 만날 것이 기에 복됩니다.

(7) 화평케 하는 자(9)

일곱째, 분쟁과 갈등이 끊이지 않는 땅에서 화평케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들로 불릴 것이 기에 복됩니다(9). ‘-의 아들은 어떤 대상의 성품이나 성향을 공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태복음 8:12; 9:15; 13:38; 23:31). 평화는 하나님의 성품이기 때문에(레위기 26:6; 민수기 6:26; 시편 28:11; 34:14). 평화의 사람은 최고의 영예인 하나님의 자녀로 불립니다.

(8) 핍박을 받는 자(10)

여덟째, 하늘나라의 자녀로 사는 자들에게는 예수님 때문에 땅의 세력이 주는 핍박이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핍박은 현재 하늘나라에 소속돼 있다는 증거이기에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라는 표현이 뒤따릅니다. 11-12절은 여덟 번째 복의 확장으로서 13절과 연결시킵니다.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은 제자들의 아버지가 되시고 현재의 질서가 역전될 것이기에 그들은 복 있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세상과 다른 복을 추구하는 자들입니다. 기독교가 기복주의로 치닫는 현실을 보며 안팎으로 자성과 비난의 소리가 커지고 있는 세상입니다. 기복주의는 종교적 명분을 가장한 세속주의의 또 다른 얼굴입니다. 하지만 원래 기독교는 복을 추구하는 종교입니다. 문제는 복의 내용이지 복을 주관하는 그 자체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팔복은 세상 나라 사람들이 추구하는 복과 다른 이 세상 나라의 가치를 정복하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추구하는 복을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누리는 이 복은 이 세상 나라 가치관과 질서에 대한 철저한 부정이요, 뒤바뀜이며 인간의 죄가 낳는 부당한 고통과 억압에 대한 도전인 것입니다. 이 세상이 추구하는 복을 따라가지 않고 하나님께서 말하는 복을 살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말하는 이 팔복의 의미가 이 땅의 가치가 아니라 저 하늘나라 가치란 것을 깨닫고 이 땅과 다른 삶을 살아가기를 결단해야 합니다. 그런 자만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복을 누리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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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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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제자들을 부르신 예수님

마태복음 412-25

 

성실하게 농사를 짓고 있던 농부가 있었습니다. 매일 작은 일에도 소월하지 않고 즐겁게 농사를 지으면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어떤 중년 남자가 지나가면 농사의 모습을 한참 지켜보면서 농사가 힘들고 돈도 안 되는 농사가 그렇게 즐겁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농부는 돈보다는 농작물이 자식처럼 자라가는 것을 보면 정말 행복하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어느 날 그에게 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대기업 중책(重責)을 맡아보지 않겠느냐?’는 제의였습니다. 지난번에 물었던 중년 남자는 대기업 총수였던 것입니다. 대기업 총수는 이 정도 성실한 사람이라면 회사에서도 충성할 수 있다.’는 것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 영향력 없던 어부들을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중요한 사역하는 제자로 부르십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은 당시에 가장 어둡고 소외된 가버나움에서부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첫 메시지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해변에서 네 제자들을 부르시고 하나님 나라의 일군으로 삼으셨습니다. 또한 갈릴리에 두루 다니시면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12-17)

세상의 이치 중에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물이 흐르다가 막히면 가장 낮은 곳을 찾아서 흘러내려 갑니다. 복음의 흐름도 이와 같습니다. 복음이 전파되다가 높은 장벽을 만나면 멈춘 것이 아니라 그곳을 피해서 낮은 곳을 찾아 들어갑니다. 예수님의 사역도 사람들의 방해로 멈춘 것이 아니라 감당할 만한 사람을 찾아서 역사합니다.

 

12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13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14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15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16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17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12-17)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은 다음과 같습니다.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사건은 메시아로서 공생애를 시작하는 취임식과 같았습니다. 그 이후에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금식기도하고 있을 때, 세례 요한은 헤롯 왕에게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이 잡혔다는 소식은 이제 예수님의 사역에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과 같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소식에 두려워하거나 위축되지 않고 갈릴리로 가셔서 공생애를 시작합니다. 오히려 자신의 때가 임하였음을 아셨습니다. 회개를 외치던 선지자는 사라졌지만, 용서와 회복을 여는 왕이 등장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예루살렘 성전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또 예수님의 고향 나사렛에서도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고향 나사렛을 떠나 같은 갈릴리 지역이지만 호수 북서쪽에 위치한 가버나움으로 가셔서 그곳에서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가버나움은 구약 선지자인 나훔의 고향이란 뜻을 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곳을 초기 사역의 본부로 삼으셨습니다. 당시 이 지역은 이방의 갈릴리라고 불리던 영적으로 아주 어두웠던 곳입니다. 이곳에서부터 세상의 빛으로 사역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 했습니다.

1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2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이사야 9:1-2)

고향 갈릴리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척했지만, 가버나움 이방 사람들은 달랐습니다. 이사야의 예언대로 가버나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말씀을 듣기 위해 몰려들었습니다. 가버나움이 바로 이사야가 말한 스불론과 납달리 땅이었습니다. 이곳을 그 당시 사람들은 가버나움을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은 자들로 어두운 죽음의 땅이라고 했습니다. 이 땅은 예루살렘과 멀리 떨어져 있었고, 이방인들이 많이 거주했으며, 오랫동안 이방인들이 차지한 땅으로서 진리의 빛이 없는 지역으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빛이신 예수님께서는 이 어두운 땅에 복음의 빛을 비추셨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당시 종교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지 않으셨습니다. 화려한 비단 옷을 입을 사람들을 중심으로 역사하지 않으셨습니다. 율법적인 지식이 뛰어난 사람들의 동의를 얻어서 시작한 것도 아닙니다. 이처럼 소외된 변방에서부터, 소외된 사람들을 중심으로 점점 예루살렘 중심으로 전진해 들어갔던 것입니다. 가장 소외된 곳에 가장 먼저 복음의 빛을 받는 영광스러운 곳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전반적인 사역이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잘 들러나 있습니다. 선포한 복음은 세례 요한이 외쳤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 왔느니라.”(17)와 동일했습니다. 천국은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임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그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회개를 통해서 들어가는 것입니다. 나라를 소유하려면 누구든지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켜 주며, 그 결과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왕과 백성의 관계로 만들어 줍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긍극적인 목적은 죄인들을 하늘나라의 백성으로 입성시키시는 일입니다. 그곳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죄인들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함으로 입성되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도우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악 많은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을 거부했던 이 세상에 하나님의 통치를 회복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세상이 죄악으로 가득하다고 인정합니다. 하지만 막상 그 세상에 대해서는 어떤 대안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먼저, 빛이 되신 예수님 앞에 자신을 조명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건강한 삶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두운 세상에 하나님의 작은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그래서 어두움에 헤매고 있는 영혼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중국의 성현이었던 공자(孔子)어둡다고 불평하기 보다는 작은 촛불 하나라도 켜는 것이 낫다.”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을 부르신 예수님(18-22)

새로운 삶을 살아가려면 과거의 삶을 포기해야 합니다. 두 가지 삶을 한꺼번에 누릴 순 없습니다. 무엇인가 한 가지를 포기하지 않으면 새로운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에 특혜를 얻었지만 그들은 과거의 것들을 버려야 할 것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18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9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20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21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22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18-22)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언하시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이 있었습니다. 먼저 예수님과 동역하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함께 할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셨을 때,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았고 갈릴리고 가셨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교육을 받아서 똑똑하고 지혜로운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자신의 동역자를 찾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에게 버림 받고 소외 받은 갈릴리 해변에서 자신의 제자들을 찾으셨습니다. 그 중에서도 첫 번째 부르심은 어부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초대에 처음으로 반응하여 천국의 백성이 된 네 명의 제자들을 소개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심의 장소들은 각자 삶의 현장 속으로 찾아가서 제자들을 불러주셨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일을 열심히 감당하는 현장 속에서 부르셨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소명을 들을 수 있는 장소는 열심히 일하는 삶의 현장입니다. 그들에게는 자격이나 조건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의 조건은 순종이었습니다.

먼저 그물을 던지는 어부 베드로와 안드레에게 찾아가셨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가 고기를 잡고 있을 때, 예순님께서는 열심히 일하고 있는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이에 베드로와 안드레는 반응합니다. 즉시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이어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셨을 때 그들 역시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릅니다(21). 제자들이 예수님과 무슨 관계라든지 이런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부름을 받았을 때 모든 소유를 버려 뒤로하고 즉시 순종했다는 사실만 소개합니다.

그들을 부르시는 목적은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셨습니다(19). 예수님께 첫 제자 그룹을 어부로 선택하셨겠습니까? 그들이 결단 있는 성격이기 때문만 아닙니다. 쉽게 모든 것을 성격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잘할 수 하던 일에서 방향만 바꾸어 하나님의 사역으로 시키신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물고기를 낚는 어부였지만, 이제부터는 사람을 인도하는 어부로 변화시켜 주신 것입니다. 어부들은 밤을 새워가면서 한 마리의 고기를 잡는데 얼마나 많은 수고를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한 생명이 태어날 때까지 한 마리의 고기를 잡는 것과 같은 헌신과 수고가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들은 직감적으로 자신들이 어떤 일을 해야 할 지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은혜스러운 부르심에 제자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버림떠남그리고 따름이 필요합니다. 버려야할 것들을 아무 미련이 없어야 합니다. 그것들을 아까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을 버리지 않고 예수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어부의 밑천이라고 할 수 있는 그물과 배 그리고 부모까지도 버렸습니다. 우리도 세상과 예수님께서는 동시에 섬길 순 없습니다. 우선순위를 예수님께 두셨다면 세상에 즐기던 것들을 내려놓으시고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시길 바랍니다.

단순히 직업과 가족을 버린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세웠던 자신의 모든 삶과 목표들을 버린 것입니다. 제자들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의 태도를 통해서, 오늘날 우리들도 제자의 삶은 완전히 버리고 철저히 순종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임을 가르쳐 줍니다.

그들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부르심에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미련 없이 예수님을 즉시 따랐습니다. 이들은 버릴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영적 권위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오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명령 속에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권세가 있었습니다. 이 세상의 권위처럼 군림하는 권위가 아니라 사람들을 이끌 수 있는 권위가 있었습니다. 메시아의 권위를 가지고 제자들을 부르시는 음성이 들릴 때,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대단한 은혜가 있습니다. 당시 갈릴리 해변에 수많은 어부들이 있었지만, 베드로 및 다른 제자들을 선택하시고 부르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와는 무관하고 학식에 무식한 어부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킬 수 있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들의 삶은 완전히 변화되어서 가장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당신도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길 원한다면 이전에 즐기던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물과 부르심을 같이 가지고 예수님을 따라 갈 순 없습니다. 여호수아가 죽음을 앞에 두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만 따를 것을 결단 시켰습니다.

15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여호수아 24:15)

이 여호수아의 결단을 촉구하는 말씀에 당신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분명한 신앙의 결단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세속적인 것들을 모두 내려놓고 예수님께서 부르신 제자로 거룩한 순종이 있길 바랍니다.

 

새롭게 사역을 시작한 예수님(23-25)

예수님의 사역은 제자들을 부르신 사역만 하신 것이 아니라 모든 갈릴리를 다니시면 가르치시고 치유하신 사역들을 하셨습니다. 이곳에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셨던 세 가지 중요한 사역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23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24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25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23-25)

예수님께서는 부르셨던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전 지역을 다니시면서 천국의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세하게 풀어서 가르치셨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는 선포적인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병자들과 연약한 자들을 찾아가 주셔서 치유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이처럼 세 가지 형태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천국에 대해 귀로 듣게 하셨고, 눈으로 보게 하셨고, 몸으로 경험하도록 하셨습니다. 전인격적으로 생명이 살아나는 역동적인 구원을 맛보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역들은 모두 성공적이었고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결과, 갈릴리뿐 아니라 점차적으로 동서남북 사방에 천국 복음이 널리 전파되었습니다. 수많은 무리가 데가볼리 그리고 심지어는 예루살렘과 유대와 베레아와 같은 모든 지역으로부터 와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오늘날 예수님께서 우리의 부르셨고, 말씀을 가르치시고 연약한 것들을 고치셨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배우고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는 것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어두움에 덮어있는 이 땅에 예수님의 가르침과 전도와 치유 사역을 이어가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꾸준히 그 사명을 감당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방향에 우리 삶의 방향을 일치시켜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핵심은 하나님의 통치이기에 그 통치를 거스르는 이들에게는 회개가 요구됩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사랑과 용서를 통해 이루어지는 정의와 평화의 통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하나님의 진리로 통치를 받으며 진리를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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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04-01)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던 예수님

마태복음 41-11

 

본인은 청년 시절에 한 선교단체에서 성경공부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았습니다. 성경이 진리라고 깨닫는 순간, 이 세상을 모두 얻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진리를 위해 평생 동안 헌신하기로 작정했고 목회자의 길을 들어섰습니다. 하지만 이 길은 순조롭고 평탄한 길은 아니었습니다. 다양한 시험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삶 속에는 많은 시험의 사건들을 만납니다. 이러한 시험 앞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께서는 광야로 성령에게 이끌려 40일 동안 지내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의 시험을 승리하심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시작합니다. 본문을 통해 마귀가 공격하는 방법과 수단은 무엇인지, 그리고 마귀를 물리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시험과 성령과의 말씀(1-2)

성도들은 많은 시험을 만납니다. 하지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영적으로 성숙하기 위해서 주시는 시험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마귀는 성도들을 넘어뜨리고 죽이기 위해서 시험합니다. 마귀가 예수님께 나와 시험합니다.

1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2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1-2)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에, 공적인 사역을 앞두고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나갑니다. 그 광야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40일 동안 금식 기도를 하셨습니다. 40일이 거의 끝나갈 무렵 마귀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주리고 지쳐 있을 때, 가장 힘들고 연약한 상황에 마귀가 나타나서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도록 말씀하셨습니다.

41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태복음 26:41)

지금도 마귀는 시험이 들 수 있을만한 사람들을 배고파 우는 사자와 같이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굳게 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마귀를 대적하기 위해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당하신 일을 통해 두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시험의 보편성입니다. 마귀의 시험은 누구에게나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일에는 반드시 시험이 있으며, 그것을 이겨내야만 하는 것이 이 땅에서의 현실입니다. 예수님도 예외 없이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시험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누가복음 22:40)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째, 시험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은 성령과 말씀의 힘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시험을 당하셨을 때 성령의 인도를 받으셨습니다(1). 시험의 순간마다 성령께서 예수님께 지혜를 주셨습니다. 성령께서 사용하시는 검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에베소서 6:17). 그러나 마귀도 혼돈을 주기 위해 말씀을 이용하기 때문에(6) 성령의 감동을 통한 올바른 해석과 적용이 필요합니다.

마귀는 성도들에게 언제든지 공격해 옵니다. 사람들이 가장 연약했을 때에 공격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항상 시험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갖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승리의 열매를 맺겠다는 각오를 다지시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의 성격(3-10)

시험을 받으신 예수님께서 시험에 본질을 파악하셨습니다. 마귀의 공격은 메시아의 역할과 하나님 나라의 건설 방법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명과 하나님 나라의 정체를 왜곡시키려 했습니다. 마귀가 공격했던 방법들을 살펴보겠습니다.

(1) 육신의 정욕(3-4)

3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4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3-4)

마귀가 예수님께 첫 번째 시험한 것은 돌로 떡을 만들라는 것입니다. 40일 금식하신 예수님께서 얼마나 주리셨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육신의 양식보다 영의 양식인 말씀을 의지하셨습니다. 마귀는 약점을 이용해서 예수님을 시험하였습니다. 주리신 예수님께 하나님의 뜻을 잊게 만들기 위한 도구가 바로 떡이었습니다.

예수님께 돌을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것입니다. 떡을 만드는 것만 가지고 시험에 드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마귀는 예수님께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떡을 만들어 보라는 것이란 단서를 붙임입니다. 마귀는 당신이 메시아라면 굶주린 고생을 할 필요가 없다. 이렇게 고생하지 않고도 기적으로 메시아가 될 수 있다.’라는 메시지입니다. 마귀는 친구처럼 헬퍼처럼 속삭입니다. 약점을 이용해서 하나님의 뜻을 잊게 만들고 굽은 길을 찾도록 유혹합니다. 떡을 만드는 것이 죄는 아니지만 하나님의 뜻을 고려하지 않고 마귀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돌로 떡을 만드실 수 있는 분에게 견디기 힘든 치욕적인 유혹이었을 것입니다.

마귀의 이 시험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우선순위의 문제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심히 주린 상태에 계셨기 때문에 자신의 육체적인 욕구를 먼저 생각하여 넘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선순위를 잃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의 시험에 빠지지 않고 마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4기록되었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4)

예수님께서는 가장 약해져 있는 순간에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되어 있었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의 생명을 염려하는 것처럼 다가 왔습니다. 그러나 마귀의 유혹에 말씀으로 승리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는 먹을 것을 해결하는 경제 왕국이 아닙니다.

(2) 안목의 정욕(5-7)

5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7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5-7)

두 번째 시험은 마귀가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뛰어 내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마귀는 더욱 간교해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해서 예수님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11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12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시편 91:11-12)

마귀는 성경에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대로 이루어 줄 것이라고 말합니다. 시편에서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천사들이 받들어 주겠다고 하지 않았느냐?’라고 반문한 것입니다. 그것은 그 기적을 본 순간, 성전에 모여 있던 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기적적인 행동을 보고 믿을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매우 타당성 있어 보입니다.

마귀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은 것처럼 말하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그대로 할 순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조롱하기 위한 태도입니다.

마귀가 데리고 간 곳은 성전 꼭대기입니다. ‘성전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곳이며, ‘꼭대기라는 것은 하늘에 가까운 곳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 가장 가까운 곳입니다. 이처럼 자신을 위험에 빠뜨려 하나님이 구원하실 수밖에 없도록 강요하는 행위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시험하는 행동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대답하셨습니다. 신명기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대답하였습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메시아이신 예수님께 다가온 두 번째 시험은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시험해 본 것입니다. 시험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 것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시험한 죄만 범할 뿐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를 신비적인 요행에 중독 시키는 종교적 기적의 왕국도 아닙니다.

(3) 이생의 자랑(8-11)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10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8-10)

세 번째 시험은 마귀가 예수님께 높은 산으로 올라가 만국의 영광을 보여줍니다. 자신에게 경배하면 자신에게 잠시 위임된 천하만국의 영광을 예수님께 주겠다고 유혹합니다. 마치 자신이 세상의 주인인 것처럼 행동 합니다. 하지만 온 천하는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소유일 뿐입니다. 마귀는 예수님께 아무 것도 줄 수 없습니다.

마귀의 속성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경배를 자신이 받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왕이 되는 것입니다. 마귀가 타락했던 이유는 모든 만물이 하나님께 드리는 경배를 빼앗아서 자신이 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타락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마귀의 본질입니다.

지금도 눈에 보이는 휘양 찬란한 세속적 것들로 탐스럽고 아름다운 것을 말합니다. 마귀는 자신에게 경배하면 주겠다고 속삭입니다. 일반 대중이 메시아에 대해 갖던 기대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기대를 넘으셔야 했고 그것이 만들어 내는 마음의 갈등도 극복하셔야 했습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는 세속 권력을 장악하는 정치 왕국 역시 아닌 것을 보여줍니다.

이 시험은 하나님의 사역을 해 가는데 있어서 목적의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자기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역을 하다보면 이 목적이 혼돈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으로 통해서 마귀의 시험을 단호하게 물리칩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타락은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을 때 일어났습니다. 타락한 삶이란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자신을 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만 섬기고 그를 경배하란 말씀으로 마귀의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4) 시험을 통해 배울 교훈

마귀가 예수님을 유혹한 세 가지 시험은 이 세상 모든 죄악들이 들어오는 경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시험했던 세 가지 제목들을 보면, 요한1216절에서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고 증명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그리고 이생의 자랑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세 가지 유혹은 마귀가 아담과 하와에게도 임했습니다. 당시에 가장 지혜로웠던 뱀의 모양으로 마귀가 나타났습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세기 3:6) 아담과 하와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런 실과를 먹고 유혹에 넘어졌습니다.

우리들이 죄악에 유혹을 받고 넘어지는 것들이 대부분 세 가지 안에 들어갑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넘어뜨리기 위해 세 가지 공격 무기를 사용했습니다. 얼마나 교묘하고 무서운 마귀의 전략입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시험에서 승리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들도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당신이 인간적인 기대로 말미암아 믿음의 본질에서 변질된 부분이 있다면 회개하고 다시 세워야 합니다.

시험에서 승리한 결과(11)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시험을 받고서 실패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광야에서 받은 시험을 받고서 모두 승리하셨습니다. 마귀의 세 가지 유혹을 받으면서도 예수님께서는 시험의 본질을 모두 파악하시고 승리하셨습니다. 말씀의 능력으로 승리하신 것입니다.

11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11)

마귀는 우리들이 가장 연약한 순간에 다가와 교묘한 말로 우리를 유혹하고 시험합니다. 당신에게 가장 약한 시험거리는 무엇입1니까? 그것을 마귀를 이길 수 있는 힘은 말씀에서 나옵니다.

성도에게 주신 영적인 공격용 무기는 말씀입니다. 영적 전쟁에서 하나님의 군사들이 갖추어야할 완전무장을 설명하던 사도 바울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6:17)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공격적인 무기로서 말씀이라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마귀의 유혹으로부터 지킬 수 있는 하나님의 강력한 무기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게 된 실수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과는 달리 하나님의 말씀을 놓쳤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라는 말씀하졌지만,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고 놓치지 말았습니다. 마귀가 결코 죽지 않으리라는 유혹에 넘어갔던 것입니다. 그들은 말씀에 대해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했고, 확실한 신뢰가 없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놓쳤기 때문에 실패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아는 것만 아니라 순종하는 것입니다. 말씀으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이를 위해서 항상 말씀으로 무장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넉넉히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으로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첫 아담은 실패했지만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기심으로 새로운 하나님 나라를 굳건히 세우신 것입니다.

 

마귀의 속성은 유혹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가장 연약하고 나약해져 있을 때 예수님을 공격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모든 시험들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말씀밖에 없습니다. 그 확실한 말씀을 놓쳐버리면 실패하지만 붙잡고 나가면 능히 승리할 수 있습니다. 날마다 말씀을 통해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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