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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17-02)


목숨을 다해 헌신한 다윗의 사람들

사무엘하 17장 15-23절


 

사람들은 자신이 경배하는 대상을 닮아갑니다. 그 대상의 성품과 가치관과 삶의 목표가 자신의 것이 됩니다. 대상의 실패는 자신의 실패가 되고, 대상의 성공은 자신의 성공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그분의 뜻을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신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아히도벨은 압살롬에게 다윗을 죽일 매우 효과적이고 지혜로운 방법을 제시하였습니다. 하지만 압살롬은 그의 계획을 바로 받아들이지 않고 후새를 불러 그의 생각도 물어봅니다. 다윗을 구할 기회를 얻은 후새는 아히도벨의 계획이 좋지 못하다고 평가하고 더 좋은 방법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많은 군사를 모은 다음에 압살롬이 앞장서서 다윗을 죽이는 것이다.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좋은 계획 대신에 후새의 어리석은 계획을 선택하는 잘못을 범합니다.

 

추격을 피하는 다윗(15-20)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선하게 사용하십니다. 우리에게 큰 지식, 능력, 재산이 없더라도 순종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크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일의 결과는 우리의 조건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도구일 뿐입니다. 우리를 사용하신 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일상에서 지극히 평범한 일을 하더라도 성실하게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게 살아가면 됩니다.

 

15이에 후새가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에게 이르되 아히도벨이 압살롬과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이러이러하게 계략을 세웠고 나도 이러이러하게 계략을 세웠으니 16이제 너희는 빨리 사람을 보내 다윗에게 전하기를 오늘밤에 광야 나루터에서 자지 말고 아무쪼록 건너가소서 하라 혹시 왕과 그를 따르는 모든 백성이 몰사할까 하노라 하니라 17그 때에 요나단과 아히마아스가 사람이 볼까 두려워하여 감히 성에 들어가지 못하고 에느로겔 가에 머물고 어떤 여종은 그들에게 나와서 말하고 그들은 가서 다윗 왕에게 알리더니 18한 청년이 그들을 보고 압살롬에게 알린지라 그 두 사람이 빨리 달려서 바후림 어떤 사람의 집으로 들어가서 그의 뜰에 있는 우물 속으로 내려가니 19그 집 여인이 덮을 것을 가져다가 우물 아귀를 덮고 찧은 곡식을 그 위에 널매 전혀 알지 못하더라 20압살롬의 종들이 그 집에 와서 여인에게 묻되 아히마아스와 요나단이 어디 있느냐 하니 여인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들이 시내를 건너가더라 하니 그들이 찾아도 만나지 못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니라(15-20)

 

다윗과 다윗의 나라와 다윗의 하나님께 자기 목숨 아끼지 않고 충성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옳다고 믿는 가치를 위해 용감하게 주저 없이 행동합니다. 예루살렘 기득권이 주는 편안함과 그들이 보장하는 안전에 길들어지지 않고 광야의 다윗이 추구하는 대의를 위해 험한 삶을 감수합니다.

 

(1) 후새의 전언(15-16)

아히도벨의 계획을 알게 된 후새는 자신과 같이 예루살렘에 남아있던 사독과 아비아달에게 아히도벨과 압살롬과 그의 장로들이 논의한 모든 내용을 알려주고 아히도벨의 계획까지 전달합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에 만들어놓은 정보망이 제대로 발휘된 것입니다. 후새는 다윗에게 단순한 정보뿐만 아니라 대처 방안까지 알려줍니다. 그는 사람을 빨리 보내서 다윗에게 광야 나루터에 머물지 말고 오늘 밤 안으로 반드시 건너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몰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후새의 조언은 아히도벨이 계획한 것이 실행될 경우를 대비한 것으로 만일 아히도벨의 계획이 실행되면 현재 다윗과 그와 함께한 사람들은 매우 위험해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좀 과장된 면도 있습니다. 아히도벨은 다윗만을 죽이겠다고 했는데, 후새는 위험성을 강조하기 위해 다윗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한 모든 사람이 몰살될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2) 우물 속 요나단과 아히마아스(17-19)

17절은 당시 예루살렘과 그 근방에 있던 다윗의 정보원들이 어떤 상황에 있었고, 어떤 방식으로 정보를 전달하였는지를 설명합니다. 이때 다윗의 정보 전달원 역할을 한 사람은 사독과 아비아달의 아들 요나단과 아히마아스이며, 이들은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성 밖에 있는 로겔 생가에 머물렀습니다. 이들은 공식적으로는 다윗을 지지하여 예루살렘을 떠난 것으로 되어 있어야 다윗과 예루살렘 사이를 편히 오갈 수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못했던 것입니다. 물이 귀한 고대 근동 사회에서 샘가는 여행객들과 지나가는 사람들이 쉬면서 정보를 나누는 장소이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숨기가 예루살렘 성보다는 쉬웠습니다. 이렇게 요나단과 아히마아스가 예루살렘 성 바로 옆에 있는 로겔 샘 곁에 숨어 있으면 성에서 사독과 아비아달이 보낸 여종이 나와서 이들에게 정보를 전달하였고, 이들은 그 정보를 다윗에게 전달하는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여기서 여종이 중간 정보전달자의 역할을 한 것은 사람들 눈에 가장 띄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후새와 다윗을 지지하던 제사장들은 다윗을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도왔습니다. 정보원들이 한 청년에게 발각되었습니다. 청년은 로겔 샘 곁에 거하고 있던 요나단과 아히마아스를 알아보았고, 이들에 대해 압살롬에게 알립니다. 이 청년의 신분은 언급되고 있지 않지만, 압살롬의 부하로 생각됩니다. 이 일로 다윗에게 정보를 전달하기가 곤란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압살롬에게 들켰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들은 재빨리 로겔 샘을 떠나서 바후림의 한 집으로 들어갑니다. 바후림은 베냐민 지파 사람들이 거하는 지역으로 사울의 친척인 시므이가 사는 곳입니다. 시므이는 다윗이 바후림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다윗의 정보원들은 바후림에서 은신처를 찾으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이들이 들어간 집 뜰에는 우물이 있었고, 이들은 우물로 내려갑니다. 아마도 물이 적어서 잘 사용하지 않는 우물이었던 같습니다. 이들이 우물에 내려가자 그 집 여주인이 우물 덮개를 가져다 우물 입구를 덮고 그 위에 곡식들을 널어놓았습니다.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여주인이 기지를 발휘한 것입니다.

 

(3) 압살롬의 추격자들(20)

압살롬의 군사들이 이 여인의 집까지 찾아와서 아히마아스와 요나단이 어디 있는지 아느냐고 묻자, 여인은 그들이 시내를 건너갔다면서 이미 이곳을 지나갔다고 거짓말하였습니다. 이 말을 믿은 압살롬의 군사들은 그들을 뒤쫓았지만 찾지 못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아히마아스와 요나단을 도운 이 여인의 모습은 여호수아 2장에서 여리고 성에 들어온 두 이스라엘 정탐꾼을 도운 라합과 유사합니다. 둘 다 자신의 집에 숨겨주었고 좀 더 완벽하게 숨기기 위해 숨을 곳을 곡식으로 덮었습니다. 또 자신이 숨긴 사람을 찾는 사람들에게 거짓으로 도망간 방향을 알려주어 자신과 자신이 숨긴 사람들이 좀 더 안전해지게 만들었습니다. 이 여인은 정탐꾼을 도운 이유를 분명히 밝힌 라합과는 달리 베냐민 사람인 자신이 왜 다윗의 편을 들었는지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주목할 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돕기 위해 은밀하게 사람들을 준비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름 없는 여인들의 손을 통해 도움을 주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은 이제 하나님께서 다시 다윗에게 은혜를 베풀고 돌보기 시작하셨다는 징표입니다. 반대로 압살롬의 입장에서는 이번에도 그의 계획이 실패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하나님께서 그를 그냥 두셨을 때는 승승장구하는 것 같았는데, 하나님께서 개입하기 시작하면서 압살롬의 계획들이 자꾸 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요단을 건너는 다윗(21-23)

세상 사람들은 부와 권력을 가지면 평안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평안함이 임하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세상의 방식을 따르지 않아서 해를 당하게 되더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도는 세상 사람들이 행하는 방식, 유행, 상식에 동조하지 않고 의연하게 하나님의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21그들이 간 후에 두 사람이 우물에서 올라와서 다윗 왕에게 가서 다윗 왕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들은 일어나 빨리 물을 건너가소서 아히도벨이 당신들을 해하려고 이러이러하게 계략을 세웠나이다 22다윗이 일어나 모든 백성과 함께 요단을 건널새 새벽까지 한 사람도 요단을 건너지 못한 자가 없었더라 23아히도벨이 자기 계략이 시행되지 못함을 보고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일어나 고향으로 돌아가 자기 집에 이르러 집을 정리하고 스스로 목매어 죽으매 그의 조상의 묘에 장사되니라(21-23)

 

여리고의 기생 라합처럼 아비아달의 두 아들 아히마아스와 요나단을 숨겨준 여인의 활약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사람이고, 시대의 대세를 따르지 않는 의식 있는 여인이며, 목숨을 걸고 위험을 감수할 줄 아는 여인입니다. 우리는 그 이름을 몰라도 하나님께서는 기억하실 것입니다.

 

(1) 요나단과 아하마아스의 보고(21)

압살롬의 군사들이 지나간 후에 두 사람은 우물에서 올라와서 다윗에게로 갑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지만, 무사히 다윗에게 정보를 전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들은 다윗에게 서둘러 요단강 물을 건너라고 말하며 아히도벨의 계략을 알려줍니다. 이미 17:1-3에서 아히도벨의 계획을 언급하였기 때문에, 여기서는 반복하지 않고 단지 ‘이같이’라는 말로 생략하고 있습니다.

 

(2) 요단을 건너는 다윗(22)

예루살렘에서 온 정보를 들은 다윗은 후새의 말을 따라 요단 물을 건넜습니다. 여기서 ‘새벽까지 한 사람도 요단을 건너지 못한 자가 없다’라는 표현을 집어넣은 것은 아히도벨의 계획이 완전히 실패하였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아히도벨의 계획은 요단을 건너기 전에 다윗의 군대를 덮쳐서 군대를 해산시키고 다윗을 죽이는 것이었는데, 다윗의 군대가 모두 안전하게 요단을 건넜으니 더는 이 계획을 실행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3) 아히도벨의 죽음(23)

아히도벨은 자신의 계획이 실행되지 못하고 다윗과 그의 군사들이 무사히 요단강을 건너간 것을 알고는 압살롬의 반역이 실패할 것을 예감하였습니다. 아히도벨이 보기에 압살롬의 반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요압이 없는 틈을 이용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다윗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일을 요압의 군대가 오기 전에 단시간 내에 끝내야 하는 작전이었습니다. 그런데 압살롬이 후새의 화려한 말솜씨에 이가 다윗을 죽일 기회를 놓친 것을 보고 압살롬의 반역이 실패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실제로 요단을 건너 마하나임으로 간 다윗은 그곳에서 요압을 만나 압살롬을 칠 부대를 구성하고 전쟁을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아히도벨의 예측은 사무엘하 16:23에서 언급한 것처럼 정확하고 틀림없었습니다.

아히도벨은 압살롬의 실패를 예측하고 나귀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 집을 정리하고 스스로 목을 매 죽습니다. 아히도벨이 자살을 선택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압살롬이 지면 다윗이나 요압이 자신을 살려두지 않을 것이고, 매우 모욕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니 그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장사되어 치욕적인 죽음을 피하려고 한 것입니다. 둘째, 머리 좋은 아히도벨에게 가장 비참한 심판은 머리 좋은 자신이 선택한 왕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음으로 자기 계획이 실패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계획이 실패한 것이 하나님의 개입에 의한 것이며, 이것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왕을 배반한 자신에게 내려진 심판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자살한 것입니다.

아무리 머리가 좋고 탁월한 전술을 가졌다 할지라도, 인간이 하나님을 능가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인간의 지혜를 이룰 수 있어도, 하나님께서 막기로 작정하시면 인간의 어떤 지략도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히도벨의 천재적 지략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다윗의 투박하고 진솔한 기도에 무너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세상의 모든 지혜를 합친 것보다 더 큰 지혜를 가지고 계신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우리가 기도할 때 악한 자들의 권모술수가 모두 무너질 것임을 신뢰해야 합니다.

 

마하나임(24-29)

우리 힘의 원천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따라서 결과주의, 성공주의에 빠지지 않아야 합니다. 결과보다 동기를 중요하게 여겨야 하고, 성공을 위해 불의한 방법을 쓰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불의는 결코 용납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힘은 하나님 나라에 속한 공의와 사랑으로부터 나옵니다. 정직, 약속 준수, 순전, 긍휼을 행해야 합니다. 비록 손해를 보더라도 거룩한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불의한 자가 힘을 얻지만, 하나님께서는 불의 한 자를 심판하심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24이에 다윗은 마하나임에 이르고 압살롬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과 함께 요단을 건너니라 25압살롬이 아마사로 요압을 대신하여 군지휘관으로 삼으니라 아마사는 이스라엘 사람 이드라라 하는 자의 아들이라 이드라가 나하스의 딸 아비갈과 동침하여 그를 낳았으며 아비갈은 요압의 어머니 스루야의 동생이더라 26이에 이스라엘 무리와 압살롬이 길르앗 땅에 진 치니라 27다윗이 마하나임에 이르렀을 때에 암몬 족속에게 속한 랍바 사람 나하스의 아들 소비와 로데발 사람 암미엘의 아들 마길과 로글림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가 28침상과 대야와 질그릇과 밀과 보리와 밀가루와 볶은 곡식과 콩과 팥과 볶은 녹두와 29꿀과 버터와 양과 치즈를 가져다가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에게 먹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 생각에 백성이 들에서 시장하고 곤하고 목마르겠다 함이더라(24-29)

 

아히도벨은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자신의 전략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다윗이 요단강을 건넜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압살롬의 패배를 직감했고, 자신의 자리가 없을 것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는 자기 전부를 다해 압살롬에게 충성했고, 그의 실패와 죽음이 자기 몫이란 것도 알았습니다.

 

(1) 다윗을 뒤따르는 압살롬(24)

다윗이 마하나임에 도착하였습니다. 마하나임에서 이스보셋이 사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을 통치했었습니다(2:8-9). 그러므로 왕도(王都)로 가능했던 마하나임은 다윗이 이런 상황에서 사용하기에 적절한 규모와 성채를 갖추고 있었을 것입니다. 또 다윗이 마하나임에 도착한 때와 압살롬이 요단을 건넌 때 사이에는 어느 정도 시간이 소요되었을 수 있습니다. 다윗이나 압살롬이 자기들의 군대를 조직하고 정비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2) 압살롬의 군대(25-26)

압살롬이 최고사령관으로 임명한 사람은 ‘아마사’입니다. 아마사는 이스라엘 사람 이드라의 아들인데, 그의 어머니는 나하스의 딸이며, 스루야의 동생인 아비갈입니다. 역대기는 아비갈(=아비가일)을 스루야와 함께 이새의 딸로 언급합니다(대상 2:16-17). 나하스의 아내가 스루야와 아비같을 낳은 뒤 그 딸들을 데리고 이새와 재혼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나하스는 암몬 왕 나하스와 동일 인물일 수 있으나 확인할 수 없습니다.

아비갈의 남편인 이스라엘 사람 ‘이드라’는 역대기에서 이스마엘 사람 예델이라 불립니다(대상 2:17). 본문의 이스라엘은 이스마엘로 고쳐 읽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마사와 요압은 이종사촌이었습니다. 이스라엘과 압살롬이 길르앗에 진영을 설치했습니다. 압살의 이름이 이스라엘 뒤에 기록님은 압살롬이 군대를 이끄는 사람이 아니었음을 암시합니다. 주둔지가 길르앗의 어느 지역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마하나임이 길르앗의 남부 지역이므로, 압살롬의 군대가 마하나임의 북쪽에 진영을 설치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압살롬은 다윗과 싸우러 가는 동안 전체 이스라엘에서 군대를 소집할 수 있도록 군대의 행군 방향을 세겜을 경유하는 방향으로 잡고 북진하다가, 야베스 근처에서 요단을 건넜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3) 다윗을 돕는 사람들(27-29)

마하나임에 있는 다윗을 돕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을 소개합니다. 첫째는 나하스의 아들 ‘소비’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나하스 역시 람바에서 왕이었던 나하스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있으나, 왕이라고 언급되지 않은 것을 볼 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만일 암몬 왕 나하스를 가리킨다면, 이 소비는 다윗과 싸운 하늘의 형제이고 하늘이 죽은 뒤 암몬의 왕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소비 역시 왕이라고 불리지 않습니다. 나하스가 많은 사람들이 흔히 쓰는 이름일 수도 있습니다. 어편 경우든 소비는 큰 부자이며, 그 지역의 지도자였을 것입니다.

둘째는 로테발 사람 알미엘의 아들 ‘마길’입니다. 암미엘(-엘리암)은 밧세바의 부친 이름이 기도합니다(대상 3:5; 삼하 11:3). 하지만 이 둘이 동일 인물일 가능성은 매우 낮습니다. 본문의 마길은 므비보셋을 돌봐주었던 사람입니다(9:4). 로데발은 야베스 길르앗과 갈릴리 호수 중간에 있는 성읍으로 여겨지나 확실하지 않습니다.

셋째는 로글림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입니다. 로글임은 야베스 길르앗으로부터 북동쪽으로 20킬로미터 떨어진 곳의 성읍입니다. 이들은 생활필수품인 침상과 대야와 질그릇, 그리고 음식을 만들 밀과 보리와 밀가루와 볶은 곡식과 콩과 팔과 볶은 녹두와 꿀과 버터와 양과 소의 치즈를 가져왔습니다.

 


다윗 주변의 사람들은 자기 전부를 건 사람들입니다. 명분을 위해 충성을 위해 자신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압살롬의 사람 아히도벨도 끝까지 충성했습니다. 그 충성을 자진으로 표현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충성이 다 인정받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누구를 향한 충성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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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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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제자로서 진실한 자세

마태복음 10장 34-42절


당신은 복음의 가치를 어느 정도 알고 계십니까?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얼마나 소중한 분입니까? 소중한 것의 가치를 모르고, 헛된 것에 마음을 빼앗기면 소중한 것을 잃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혜 있는 자는 소중한 것의 가치를 알고, 마음을 다해 소중히 여길 줄 압니다. 이 시간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가 임하고 그 나라의 왕이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이 온 목적을 알려주시면서 이에 합당하게 행동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 어떤 것도 예수님을 따르고 사랑하는 것보다 앞서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들에게 새로운 가족 관계로 정체를 규정하시면서 그 밖의 모든 관계를 상대화하라고 요구하십니다. 마지막으로 합당하게 행동한 것에 대한 종말론적 결과가 언급됩니다.

 

평화보다 소중한 복음(34-39)

평화만큼 소중한 게 없고, 화목한 가정만큼 중요한 것도 없습니다. 평화는 소중하지만, 진정한 평화를 얻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 안에 진정한 평화가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참된 행복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평화와 행복을 주시길 원하십니다.

 

34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38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39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34-39)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과 결과를 알려주시면서, 제자들에게 정확하게 생각해야 할 부분을 언급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에 대해 ‘나는 ~하려고 왔다’라는 문장을 세 번이나 사용되고 있습니다.

 

(1) 검을 주시려 온 예수님(35-36)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는 땅의 평화가 아니라 검을 주려고 왔다고 말씀하십니다(34). 이 구절은 앞의 가르침과 배치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전하는 사명을 맡기셨고, 평화의 사람들이 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의 도래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새 시대가 온 것이므로 평화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가 완성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러나 아직’에 기간에는 여전히 하늘나라와 땅의 나라 사이에 충돌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하늘나라의 복음은 이 땅의 가치관과 충돌을 일으키고 제자들은 고난을 받겠지만 십자가의 길을 통해서 제자들은 승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35절은 34절의 내용을 구체화하며 검의 이미지를 가정해 적용합니다. 검의 이미지는 38-39절에 있는 핍박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오심으로 인해 가족 내 분리가 일어날 것을 지적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방식은 당연히 가족과 사회가 생각한 평화의 길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전하는 메시지가 주는 고통을 가슴아프게 느낄 수밖에 없음을 각오하고 예수님의 사명을 수행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가족만큼은 사명을 수행하는 자신을 이해하고 축복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가족의 반대는 하늘나라와 땅의 나라 사이에서 충돌에서 오는 당연한 결과일 뿐입니다. 반면에 긍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제자들은 가족의 원수가 되지만, 예수님의 가족이 된 사람들입니다.

 

(2) 제자들의 우선권(37-39)

예수님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사랑하는 자, 예수님보다 아들이나 딸을 사랑하는 자는 예수님께 합당하지 않습니다. 이기서도 예수님께서는 우선권을 강조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합당한’을 반복하여 강조하시면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합당하지 않다고 하십니다. 십자가의 길은 고통과 수치를 상징했으므로 제자로 사는 길은 위험하고 자신을 돌볼 수 없는 상태에 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자신의 목숨을 찾는 자는 멸망할 것이며 자기의 목숨을 멸하는 자는 목숨을 찾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 때문에’ 또는 ‘나를 위하여’를 사용해서 제자가 예수님 때문에 목숨을 잃을 가능성을 언급하십니다. 마태복음은 다른 본문에서도 고난의 이유가 예수님 때문임을 강조하기 위해 이 표현을 사용합니다. 하늘나라의 시민은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셨다는 것입니다. 제자는 이 신비를 하는 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덕에 명성을 얻으려 하거나 공동체에서 유익을 얻으려는 태도는 제자의 길이 아닙니다. 사람의 운명은 땅에서의 삶을 끝나지 않습니다. 새로운 세계에서의 종말론적 삶이 있습니다. 땅에서 예수님 때문에 목숨을 잃은 사람은 최후 심판 이후의 목숨을 얻고 예수님을 첫째 목적에 두지 않고 자신의 목숨을 찾는 사람은 비판받을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가 얻을 상(40-42)

제자들의 말과 삶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말과 삶이고, 그리스도는 곧 하나님의 현현이기 때문에, 제자들을 영접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영접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선지자나 의인이나 소자의 모습으로 복음을 전할 때 그 말씀을 믿고 제자들을 환대하면, 하나님께서는 냉수 한 그릇의 호의라도 잊지 않고 가차주실 것입니다.

 

40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41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42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40-42)

 

지금까지의 말씀을 통해 세상의 차가운 거절과 그것에 직면할 제자들이 치러야 할 제자도에 초점이 있었다면, 마지막 부분은 제자들이 경험할 긍정적인 반응으로 마무리 됩니다.

 

(1)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들(40)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영접하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며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24절과 같이 40절도 예수님과 파송을 받은 제자들 또는 선지자들의 일체성 내지 동질성을 보여줍니다.

40절에서는 ‘임마누엘’ 즉 ‘하나님의 현존과 임재’라는 개념이 나타납니다. 제자들을 환영함으로써 그들이 선포하고 보여주는 하늘나라의 도래를 경험하는 사람들은 ‘임마누엘’을 맛보게 됩니다. 파송 받은 자들이 머물러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임재로 인한 평화가 주어집니다.

 

(2) 영접한 자에게 줄 상급(41-42)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얻을 것입니다.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얻을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선지자와 의인을 짝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선지자와 의인은 비슷한 기능을 갖고 있는 직분입니다. 의인은 완벽을 추구하는 제자들을 일컫는 표현이며 그들의 의는 마지막 날에 들어날 것입니다. 선지자는 선포하는 사람이며 10장에서 선포되는 반복되는 소재입니다. 제자들은 과거 선지자들과 같은 사명을 맡은 위치에 있으며 선지자와 의인의 역할을 수행하는 자들입니다. 제자들을 선지자의 이름으로 영접하는 것은 그들을 선지자의 지위로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지자의 상은 선지자적 사명을 수행하는 결과로 하나님께 받게 될 보상을 가리킵니다. 구약에서 선지자들을 보내신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제자들을 보내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권위로 그렇게 하신 것이 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보내시고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권위를 가진 신분이었지만, 실제 현실은 소자로서 냉수 한잔이 절실한 신세가 됩니다. 유대교에서 소자들은 사회적으로 연약한 상태의 사람들 그리고 미성숙한 사람들, 경건한 사람들을 일컫는 표현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어린아이나 소자는 사회적 개념으로 낮은 지위에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당시에 사회적 관점에서 작은 자들, 낮은 자들이었습니다. 42절의 ‘소자들’은 예수님의 파송을 받아 순회하며 전도하는 제자들 또는 선교자들을 포함합니다.

40-42절은 제자들의 신분과 관련해서 몇 가지 의미를 전달합니다. 첫째, 보냄받은 자에게 보낸 자의 권위가 주어집니다. 보냄받은 자를 영접하면 보낸 자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보냄 받은 자들을 위해 작은 호의를 베푸는 사람은 하나님의 포상을 받게 됩니다. 둘째, 그만큼 그리스도의 존재 혹은 삶 자체가 중요합니다. 마태복음 10장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는 강화에는 제자들이 사명을 수행한 내용이 없습니다. 즉 어떻게 전도했는지 보고 내용이 없습니다. 마태복음은 제자들의 존재 자체가 전도 혹은 선교의 핵심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땅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 되므로 성도의 일거수일투족이 예수님과 예수님의 마음, 특히 긍휼을 보여줍니다. 복음은 예수님을 모범으로 삼아서 따라 행하는 제자들을 통해서 전파됩니다.

셋째, 권위를 부여받은 제자들의 모습은 소자와 같습니다. 선지자, 의인과 같은 직위를 가졌으나 사람들의 눈에는 소자로 보입니다. 예수님 당시 초기 교회에서 예수님의 보냄을 받은 제자들은 냉수 한잔이 절실할 정도로 낮은 삶을 살았습니다. 역설적으로 작아진 제자는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통로입니다. 본문을 확대한 마태복음 25장 31-46절에 양과 염소의 비유를 보면, 소자를 영접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더 높이 올라가고 더 많이 가져서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성립할 수 없습니다. 그런 모습이 예수님을 증언하는 길이었다면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제자들을 소자가 아니라 큰 자로 세우셨을 것입니다. 자신에게 있는 것이 많든 적든 상관없이 낮아진 모습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드러납니다.

넷째, 제자는 환대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줄 뿐 아니라 만나는 사람들 배후에 또는 그 사람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냉수 한잔을 받은 제자는 냉수 한잔을 줄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제자는 긍휼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스쳐 지나가는 소자를 향해 긍휼을 베푸는 사람입니다. 제자를 영접한 사람은 자제의 보상을 받게 되며, 제자 역시 소자를 환대라는 마음으로 대할 때 예수님을 만나는 경험하게 됩니다. 긍휼이 순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자신을 부인할 때 예수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자기 사랑은 욕망과 죄의 본질로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에게 자기 사랑을 못 받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진 희생과 섬김의 길을 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데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더욱 잘 따르기 위해서 버리고 내려놓아야 될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도 예수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걷기 위해 자신의 삶 가운데 자기 부인이 필요한 부분은 무엇인지 살펴보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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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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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이 세상을 살아갈 자세

마태복음 10장 24-33절


세상에는 많은 법칙과 규칙이 있습니다. 그 중에는 전쟁터에서 장군을 사병들이 자기 몸보다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장군은 그 군대를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법칙과는 반대로 실천하셨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보호 받기보다 제자들을 위해서 먼저 어려움을 감당하셨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희생의 법칙’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핍박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 가르치고 있습니다. 24-25절은 본 단락의 서론으로서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를 설정하고, 26-31절은 핍박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32-33절은 이 땅에서의 삶에 대한 종말의 결산을 묘사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24-25)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분이 걸어가신 길을 제자들도 걷는다는 의미입니다. 영광의 길이든 고난의 길이든 상관하지 않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스승보다 더 잘 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항상 스승을 닮고자 하는 마음은 품어야 합니다. 매 순간 제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24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25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24-25)

 

예수님께서는 22-23절에서 파송을 받은 제자들은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고 도망 다니는 시련을 겪을 수밖에 없다고 예고하셨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왜 제자들이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는지, 미움을 받는 이유와 근거를 설명하십니다. 그리고 어떻게 핍박을 대해야 할 것인지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와 스승’ 그리고 ‘종과 상전’을 대조하는 격언이 이어집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제자가 스승보다 높지 않고, 제자가 스승만 하다면 금상첨화라는 취지로 말씀하십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익숙한 스승 랍비와 제자 문하생의 관계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종과 상전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랍비와 제자와의 관계를 주종관계로 이해하기도 했으니 이 두 비유는 같은 의미를 갖습니다. 더욱이 예수님께서는 대부분 촌부인 열두 명을 제자로 부르셨고, 일꾼으로 파송하십니다. 제자가 스승보다, 또 종이 주인보다 높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제자와 종은 스승과 주인을 적극적으로 따르며 그 뜻에 복종해야 합니다. 그 목적은 스승처럼 되기 위해서입니다.

특별히 제자는 스승의 모든 것을 닮기를 애써야 합니다. 가르침은 물론이거니와 성품과 삶의 방식까지 닮는 일에 헌신해야 합니다. 스승은 그 목적을 가지고 제자를 선택합니다.  열두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스승이자 주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운명을 따르는 제자이며, 예수님께서 이루시려는 하늘나라의 일꾼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그들이 자신을 닮아 하늘나라 사역을 잘 감당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자신처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태복음에서 나타난 제자도의 핵심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에게 자신의 권능을 주심도 그런 차원에서입니다그 다음에 등장하는 집 주인과 그 집 사람들의 비유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특별히 집주인을 ‘바알세불’로 말씀하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스스로 바알세불로 비유하신 것이 아니라, 앞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대적하여 언급했던 표현입니다(9:34). 그들은 예수님이 ‘귀신의 왕’(바알세불)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난하고 폄훼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세상으로부터 ‘바알세불’이라 배척당하며 고난을 받을 것입니다. 스승이자 주인인 예수님께서 그렇게 당하셨다면, 그를 따르는 제자와 종 역시 당연히 고난을 받을 것입니다. 현재 문맥이 제자들을 향한 세상의 박해를 다루고 있기 떄문에 예수님께서는 지금 박해자들이 받는 고난을 제자들 역시 받을 것을 강조하십니다(요 12:20). ‘집주인’인 예수님꼐서 박해당하니 그 ‘집에 속한 사람들’이야 당연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기서 ‘집주인’과 ‘집사람들’의 설명을 덧붙인 것은 언어유희를 의도하셨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바알세불’이 히브리어로 ‘제불(집)’과 베엘(주인)의 합성어로 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사탄을 가리키는 바알세불로 불렀기 때문에, 제자들도 더 낫게 불릴 것이라고 기대할 여지는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반복해서 강조하시는 점은 예수(보내시는 분)와 제자들(보냄 받는 자들)의 관계와 권위입니다. 특히 마태는 ‘-처럼 되다’라는 표현을 사용해서 제자들의 소망이 예수님처럼 되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제자는 스승과 존재론적으로는 구분되지만, 스승처럼 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그분을 닮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사는 길에는 당연히 예수님께서는 겪으신 어려움이 올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닮아가는 삶, 이런 과정에서 예수님과 깊은 사귐을 갖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복됩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을 가진 예수님이 바알세불(귀신의 왕)이라는 조롱을 받았다면, 그 권능을 거저 받은 제자들 역시 그런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복음 때문에 당한 비난이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실패로 여기지도 말아야 합니다. 도리어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했으니 기쁘게 여겨야 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26-31)

예수님께서는 제한적으로 은밀하게 복음을 증거 하셨지만,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는 드러나고 알려질 것입니다. 자기 목숨보다 순종을 더 귀하게 여기고, 자기 명예보다 그리스도의 명예를 더 존중하며 땅보다 하늘에 재물을 쌓고 소망을 두는 사람을 예수님도 심판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사랑한 자’로 인정해주실 것입니다.

 

26그런즉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27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말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 28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29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30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31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26-31)

 

파송 받은 제자들이 가혹하고 적대 적인 대접과 핍박을 받게 될 것이라는 예고를 하신 예수님께서는, 26-31절에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보살핌을 언급하심으로써 위험에 빠질 제자들을 위로하십니다. 본 단락에는 세 번에 걸쳐 두려워하지 말라는 명령이 나옵니다(10:26,28,31). 각각의 명령에 이어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제시됩니ㅂ.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드러내실 것이기 때문에(10:26-27), 미래에 육체와 영혼을 모두 심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28), 하나님께서는 현재 주권적으로 보살피시기 때문에(20:29-31) 제자들은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요컨대, 제자들은 세 가지로 논증되는 하나님의 능력 때문에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1) 드러내시는 능력, 2) 심판하시는 능력, 3) 돌보시는 능력입니다.

첫째, 하나님은 숨겨진 것을 드러내시므로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합니다(26-27). 제자들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그들’은 핍박하는 자들입니다ㅂ. 사람들은 진리를 억압하고 하나님이 보내신 메신저들을 핍박할 것이지만, 마지막 날에 하나님은 그들의 모든 행위를 드러내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들이 비밀리에 들은 내용을 모두에게 선포하라고 명령하십니다(27). 27절은 숨겨진 것이 드러난다는 맥락에서 앞절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하늘나라의 비밀은 하늘에 숨겨진 비밀이었고, 이제 예수님을 통해 계시 됐습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에서 은밀하게 시작됐으므로 온 세상으로 퍼져 나가야 합니다. 제자들은 하늘에 감춰졌으나 하나님의 목적을 드러내기 위해 드러난 예수님의 오심과 하늘나라 복음을 공개적으로 전파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1:21-23; 4:17; 10:7-8). 제자들의 존재 목적은 하늘나라의 비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시작하신 하늘나라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은밀히 말씀하신 것을 제자들은 전파해야 합니다. 실제로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은밀하게 오고간 대화, 그 속에 감춰진 예수의 말씀은 복음서 기복과 전파를 통해서 알려지게 됐습니다. 공적인 선포는 공에다 대고 비밀을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이 비밀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며 28:20의 명령처럼 모든 민족을 향해 전파하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과 인간의 능력 차이가 있으므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28). 제자들은 어려움 가운데서도 몸을 죽이지만 영혼을 죽일 능력이 없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과 몸을 지옥에서 멸하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해야 합니다(참조, 눅 12:45), 오직 하나님만이 몸과 영혼 모두를 멸하실 수 있습니다.

셋째, 하나님이 돌보시므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29-31).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세상에서 활동하고 제자들을 특별하게 돌봐주는 아버지라는 사실을 설명하실 때,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전개하는 방식을 따라서 참새를 예로 들어 설명하십니다. 참새 한마리는 1/32데나리온(하루 품삯이 1데나리온)의 값이 칩니다. 매우 싼 참새 한 마리도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참새의 이야기를 사용해서 하나님께서 땅에서 벌어지는 일에 현재적으로 개입하시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너희 아버지’(5:16,45-46)는 제자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특징을 강조하는 표현으로서 가족 언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자들을 친밀하게 돌보는 아버지이십니다. 제자들의 운명은 하나님의 뜻에 따르고 있으며, 하나님의 손과 돌보심, 곧 섭리 가운데 있습니다ㅂ. 또한 제자들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은 제자들의 머리카락 수를 다 알고 계십니다(30). 머리카락의 수를 세는 일은 어떤 사람의 머리에 집중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참새 한 마리가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것에 비해서 머리카락 한 가닥이 바닥에 떨어지는 것은 당사자 자신도 감지하지 못하게 일어나므로, 하나님은 제자들이 느낄 수 없는 부분까지도 알고 계시며, 그만큼 친밀하게 돌보고 계십니다.

이와 같이, 30절의 핵심은 제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앎, 하나님의 지식입니다. 제자들이 핍박을 받고 죽음에 이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제자들을 잘 알고 계시고 불쌍히 여기며 보호하십니다. 그러므로 제자는 인생의 불행처럼 느껴지는 일들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좌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버지의 뜻 가운데 일어난 일이므로, 그 순간도 하나님이 보살피고 계신다는 사실을 신뢰해야 합니다.

 

제자들의 행위에 대한 종말의 결과(32-33)

세상 두려움을 이기려면 하나님을 향한 참된 두려움을 품어야 합니다.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분은 하나님이요,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 버림받는 것입니다. 진짜 두려움이 들어올 때, 거짓 두려움은 힘을 잃습니다. 모든 두려움이 자기 자리로 돌아갑니다.

 

32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33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32-33)

 

본문은 하늘 법정의 장면과 땅의 장면을 대조합니다. 하늘 의회 또는 하늘궁정이 종말에는 최후 심판을 집행하는 법정의 기능을 수행하게 될 것입니다. 하늘 법정을 암시하는 표현은 법정 용어와 전치사 ‘앞’입니다. 이 전치사는 하늘 법정에서 재판관과 하늘의회 구성원들 사이의 위치를 알려 주는 표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참조, 25:32, 다니엘 7:13). 다시 말해서, ‘앞’은 ‘하나님 앞에서’를 뜻하는 코람데오 정신을 떠올립니다. ‘지인하다’와 ‘부인하다’는 법정 용어들이며, 전치사 ‘앞’과 함께 결합돼 하늘(법정)과 지상(법정)을 대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두를 향한 내용으로 확대하기 위해서, ‘누구든지를 사용하십니다. 32-33절에는 경고의 분위기가 담겨 있습니다. 32-33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땅에서의 행위와 하늘 법정에서의 반응을 대조하며 종말론적인 시각으로, 현재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도록 가르치십니다. 모든 인간은 이 땅에서 행한 것에 대해서 하늘 법정에서 결산을 받게 됩니다. 이 사실을 얼마나 인식하고 있느냐에 따라 이 땅에서의 경외심이 달라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아시고 귀히 여기십니다. 그분은 크고 두려운 분이지만, 동시에 세밀하고 부드러운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의 크고 중요한 문제들 뿐 아니라 자꾸 사소한 일에도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혹시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제자가 되기로 결단하기는 쉬워도, 끝까지 제자의 삶을 살기란 쉽지 않습니다. 매 순간 자신이 주님의 제자임을 기억하고, 참 두려움으로 거짓 두려움을 이기는 제자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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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08-02)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의 능력

잠언 8장 22-36절


잠언은 성공과 부를 얻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책이 아닙니다. 잠언을 읽으면 머리가 좋아지고, 똑똑해져서 이 세상에서 성공하도록 도와주는 책이 아닙니다. 오히려 잠언은 악한 세상에서 그리스도로 살아가는 길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지혜는 창조와 인간 삶에 있어 질서와 원동력을 제공합니다. 지혜는 창조 이전부터 존재하여 하나님의 우주 창조 사역에 있어 명장 역할로 동참하였습니다. 이제 지혜는 인간의 삶의 모든 영역에도 침투하여 영향력을 미치고 우리와 긴밀한 상호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지혜의 강연(02) : 창조 전에 태어난 지혜(22-26)

하나님의 지혜는 절대적이고 완전하고 영원합니다. 지혜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과 구원의 근거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하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지혜이신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을 살 때 우리는 하나님 지혜의 능력을 매일의 삶 가운데 구체적으로 경험하며 살 수 있습니다.

 

22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23만세 전부터, 태초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받았나니 24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25산이 세워지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26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22-26)

 

본문 잠언 8:22-36은 지혜의 두 번째 강연에 해당하는 8:1-36의 후반부에 속합니다. 1-21절까지는 지혜의 초청과 유익, 지혜의 현재 속성과 통치 등을 기술하였습니다. 이제 22-31절은 내용상 두 부분으로 나뉘어, 창조 때의 지혜의 역할(22-31)과 지혜의 초청(32-26)을 묘사합니다.

이 단락에서 지혜는 하나님의 우주 창조에 관여한 하나님의 속성으로 소개됩니다. 지혜의 특별한 점은 지혜가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기 이전에 이미 존재했다는 데서 나타납니다. 이 점은 22-26절까지 무려 다섯 절에 걸쳐 나타날 정도로 강조되었습니다. 마치 어머니가 아이를 낳듯 지혜가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창세기 1:2에 따르면 창조 이전에 깊음(깊은 바다)이 이미 존재했음을 알 수 있는데, 지혜는 이 원시의 물보다 자기가 더 먼저 존재했음을 밝힙니다. 지혜는 시간상 영원 전부터 모습이 갖추어졌고, 산과 땅과 물 같은 피조물과 비교했을 때에도 그보다 먼저 태어났으며, 하나님께서 우주 창조를 시작하시기 전에 이미 존재했다고 설명하며 자신의 존재가 그 어느 피조물보다 앞섰음을 확실히 합니다. 지혜가 창조 전에 이미 존재했고 창조 때에 거기에 동참했다는 내용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묘사에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생기기 전에 자기가 하나님과 함께 계셨음을 언급했습니다(요 17:5).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으로서 태초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창조 때에 동참하셨음을 서술하였습니다(요 1:1). 바울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에게서 나신 하나님의 능력이며 지혜라고 설명하였습니다(고전 1:24,30; 골 2:3).

 

창조 때의 지혜(27-29)

지혜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원리이자 동역하는 존재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혜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이제 지혜로 말미암아 만물이 질서와 조화 가운데 보존되고 견고하게 됩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 가운데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과 지혜를 높이고 찬양하며 살아야 합니다.

 

27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을 해면에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28그가 위로 구름 하늘을 견고하게 하시며 바다의 샘들을 힘 있게 하시며 29바다의 한계를 정하여 물이 명령을 거스르지 못하게 하시며 또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에(27-29)

 

하나님의 어느 피조물보다 자신이 먼저 존재했음을 명백하게 밝힌 지혜는 이제,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살 수 있는 터전을 비롯하여 우주 전체를 창조하실 때 자기가 하나님과 함께하며 창조 사역에 동참했음을 주장합니다.

27-29절은 하나님의 천지 창조의 둘째 날과 셋째 날에 집중하여 하늘의 창조부터 시작하여 바다를 나누어 위의 구름 가득한 하늘과 아래의 강과 바다로 정하신 것 그리고 땅을 창조하셨음을 기술합니다. 특히 하나님이 세상을 형성하는 데 있어 하늘을 세우고, 깊은 바다에 테를 두르고, 하늘의 구름들을 견고하게 하고, 깊은 바다의 샘들을 확정하고, 바다의 경계를 정하고,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 지혜가 일일이 동참하였음을 두드러지게 묘사하였습니다. 욥기 28:24-26; 38:10-11이나 시편 104:1-9에서도 하나님께서 창조물이 각각 자기 위치를 지킬 수 있도록 일일이 경계를 정하시고 또 그것이 제대로 유지되도록 하셨음을 찬양합니다. 이와 같은 묘사는 하나님의 전능하신능력과 지혜를 드높입니다. 또한,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그 정한 위치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움직이는 것을 통해 하나님이 세상에 질서를 형성하시고 통치하시는 모습을 확실히 나타냅니다. 지혜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모든 영역에서 동참자였으며 증인이었습니다(28:27).

 

창조주와 지혜의 기쁨(30-31)

성도는 하나님의 지혜를 소유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와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지혜가 능력이며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지혜는 ‘숙련된 기술자’처럼 맡겨진 창조 사역을 완벽하게 수행했습니다. 지혜는 하나님의 뜻을 완벽하게 실현합니다. 우리가 그 지혜를 갖게 될 때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됩니다.

 

30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31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느니라(30-31)

 

27-29절에서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과 하나님 곁에서 그 사역을 거들며 일하는 지혜의 모습에 초점이 맞추어졌고, 30-31절에서는 지혜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참조 때 일하시는 하나님 곁에서 뛰놀며 즐거워하는 지혜, 사람을 기뻐하는 지혜의 모습에 초점이 맞춰졌습니다.

먼저, 30절은 하나님과 지혜가 서로 즐거워하는 모습을 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 때 옆에서 명장의 역할을 한 지혜를 기뻐하려고, 지혜도 자기 자신이 하나님 곁에 있음에 즐거워 웃고 뛰놀았습니다. 지혜는 하나님 곁에서 숙련공 창조주로 번역됨)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성막 축조 때의 숙련공이었던 브살렐과 오홀리압이 하나님으로부터 기술과 능력과 지식을 받아 지혜로운 사람으로 인정받았듯이(출 31:1-6), 숙련공은 지혜로운 자로 알려졌습니다. 여기서 지혜가 숙련공으로 지칭됨으로써 창조 사역에 있어 지혜의 기술과 역할이 부각되었습니다. 31절은 지혜가 피조물 중 특히 사람이 창조된 것을 보고 즐거워하고 기뻐하였음을 묘사합니다. 지혜가 하나님께 기쁨의 대상이었듯이, 이제 사람들이 지혜에게 있어 기쁨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지혜가 사람을 자기의 기쁨이라고 표현한 데에는 사람에 대한 지혜의 큰 관심과 애정뿐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 정점임을 은근히 드러냅니다(창 1:26-28). 또한, 인간도 지혜를 각자의 기쁨으로 삼도록 넌지시 권유합니다.

 

지혜로의 초대(32-34)

하나님의 지혜를 추구하며 사는 것이 인간의 삶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입니다. 지혜의 초청에 반응해 지혜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을 것이고, 지혜를 미워하고 거부하는 자는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성도는 지속적으로 지혜의 인도와 안내를 따라 그 교훈을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32아들들아 이제 내게 들으라 내 도를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33훈계를 들어서 지혜를 얻으라 그것을 버리지 말라 34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날마다 내 문 곁에서 기다리며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32-34)

 

32-36절은 8장의 서두 부분인 1-11절과 마찬가지로 지혜의 초청을 재차 언급하면서 독자들이 지혜를 얻도록 촉구합니다. 이때, 1-11절은 지혜가 성문이나 마을의 사거리 등 사람이 많이 있는 곳에서 그들을 기다리며 외치고 있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이에 반려 32-36절은 지혜를 얻을 자들이 지혜의 문과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고 지혜의 말을 귀담아 듣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결과적으로, 8장의 마지막 부분(32-36)인 ‘지혜의 초대에 대한 사람의 반응’은 첫 부분(1-11)의 ‘지혜의 초청’에 대한 화답이 됩니다. 중간 부분에 기록된 지혜의 현재와 과거의 역할과 유익(12-31)은 지혜의 초청을 들은 자들이 그 초청을 속히 수락하도록 촉구하는 구실을 합니다. 32-36절은 내용상 지혜의 초청(32-34)과 초청의 결과(35-36)로 구성되었습니다. 먼저, 32-34절은 ‘들어라’라는 명령이 세 번 반복되고, 시작과 끝에 “얼마나 행복한가!”(‘복이 있다’로 번역됨)라는 감탄 형식의 문장이 나와 한 단락을 형성합니다.

본문에서는 첫째, 지혜의 도를 듣고 지키는 자가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지혜는 아버지처럼 아들들을 흐리게 자신의 말을 들으라고 권합니다(시 119:1-2:128:1). 훈계와 지혜의 관련성은 이미 잠언의 목적과 요약에도 기술되었고(1:2.7), 여러 곳에서 반복되어, 지혜를 원한다면 훈계에 꼭 귀를 기울여야 함을 강조합니다.

 

둘째, 지혜의 말을 듣고 지혜가 거하는 곳 가까이에서 지혜를 기다리는 자는 행복합니다. 아버지의 말을 듣는 것은 곧 지혜의 말을 듣는 것과 같습니다. 기다리며 간절히 사모하고 적극적으로 찾을 때 지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지혜를 문 옆에서 기다리라’(34)는 명령은 ‘음녀의 집 문에도 가까이 가지 말라’(5:8)는 명령을 상기시킵니다. 음녀를 찾아 거리와 골목을 헤매다 그녀의 집에 들어간 우매한 젊은이에게는 형벌과 사망이 기다리고 있지만(5:22-23), 지혜 옆에서 기다리고 기다리는 자는 행복한 자입니다.

 

지혜를 찾은 자와 놓친 자(35-36)

지혜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생명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삶 가운데 우선적으로 실천해야 본질적인 가치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그 뜻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이 바로 진정한 지혜입니다. 지혜는 근본적으로 사람의 노력과 경험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35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36그러나 나를 잃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해하는 자라 나를 미워하는 자는 사망을 사랑하느니라(35-36)

 

지혜를 찾은 자와 놓친 자의 최후는 극과 극입니다. 지혜의 초청에 귀 기울여 지혜를 찾는 자는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은총을 얻게 됩니다. 하지만 지혜를 잡지 못하여 놓치거나 지혜를 미워하는 모든 자는 생명이나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기회를 잃고, 그 대신 사망의 위협을 받습니다. 이와 같이, 누구나 지혜를 얻느냐 못 얻느냐에 따라 생명과 사망이라는 극단의 결과를 맞으며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이게 됩니다. 여기서 생명과 사망은 육체적 죽음에 앞서 영적, 도덕적, 사회적 죽음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선언의 목적은 듣는 이로 하여금 지혜의 초대에 응하고 지혜의 집 문 가까이에 머물도록 촉구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호흡으로 창조된 존재입니다. 처음 창조에서 하나님의 호흡이 인간을 창조했다면, 그리스도인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창조되었습니다(고후 5:17).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그분께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복 받은 사람이요, 복을 나누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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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17-01)

 


다윗을 위한 계략을 선택한 압살롬

사무엘하 17장 1-14절


오래전부터 인생이 자신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더 좋은 계획이 항상 더 좋은 결과를 만들 줄 알고 착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의사결정 하나로 승패를 좌우하도록 만드십니다. 후새의 계략보다 아히도벨의 계략이 분명 좋았음에도 좌절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계획을 무위로 돌리는 변수는 무엇입니까?

 

다윗이 예루살렘에서 도망한 뒤에 압살롬이 자신을 지지하는 백성들과 군사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옵니다. 이때 다윗의 친구 후새는 압살롬을 지지하여 압살롬의 신하로 예루살렘에 머물 수 있게 됩니다.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조언을 따라 왕궁에 남아있던 다윗의 첩들을 공개적으로 강간하여 자신이 다윗을 폐위하고 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알립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내린 심판을 하나씩 이루어가고 계셨습니다.

 

아히도벨이 다윗을 추적하자고 제안함(1-4)

하나님의 교회가 악인의 간교한 계략으로 공격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계략을 막으시고 교회를 보호해주십니다. 간교한 계략을 세워 교회를 공격하는 것은 악인의 전형적인 방식입니다. 안익의 계략은 교회를 무너뜨릴 만큼 강력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의 보호 가운데 보존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붙잡고 계시기 때문에 안전합니다. 악인의 지혜는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에 견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1아히도벨이 또 압살롬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사람 만 이천 명을 택하게 하소서 오늘 밤에 내가 일어나서 다윗의 뒤를 추적하여 2그가 곤하고 힘이 빠졌을 때에 기습하여 그를 무섭게 하면 그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이 도망하리니 내가 다윗 왕만 쳐죽이고 3모든 백성이 당신께 돌아오게 하리니 모든 사람이 돌아오기는 왕이 찾는 이 사람에게 달렸음이라 그리하면 모든 백성이 평안하리이다 하니 4압살롬과 이스라엘 장로들이 다 그 말을 옳게 여기더라(1-4)

 

아이도벨은 피신한 다윗에게 재정비할 틈을 주지 않고 추적해 기습 공격하려는 계략을 세웁니다. 압살롬과 이스라엘 장로들도 이를 다 옳게 여겼습니다. 아히도벨은 이런 계략을 통해 백성을 빼앗아 다윗의 나라를 무너뜨리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계략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하나님께서 택하신 왕 다윗을 해하려는 악한 계략일 뿐입니다.

 

(1) 군사 소집(1)

다윗의 첩들을 강간하라고 제안했던 아히도벨은, 이번에는 압살롬에게 다윗을 죽이자고 제안합니다. 자신이 군사 12,000명을 소집하여 당장 오늘 밤에 다윗의 뒤를 추적하여 그가 피곤하여 대항할 힘이 없을 때 기습하면 다윗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도망갈 것이고, 다윗만 죽이면 모든 백성이 압살롬에게 돌아올 것이며, 왕국도 평안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아히도벨은 현재 다윗 무리의 상태를 정확히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2) 야간 기습(2)

오늘 밤에 추적하면 그가 피곤하고 힘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16:14에서 다윗이 매우 피곤하고 지쳤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때는 압살롬이 예루살렘으로 들어오기 얼마 전이거나 얼마 후일 것이며, 아히도벨이 예측한 그대로였습니다. 아히도벨은 많은 군대를 이끌고 가서 다윗 군대를 위협하면 다윗 옆에 있던 사람들이 무서워 도망갈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현재 다윗의 군대는 압살롬에 대항할 만한 전력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압살롬과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하는 중입니다. 그러므로 12,000명이라는 대군을 끌고 가서 위협하면 수적으로 너무 열세이기 때문에 굳이 싸우지 않고도 다윗만 죽일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다윗의 부대 상태와 규모를 정확하게 예측하고 세운 매우 좋은 전략입니다.

 

(3) 모든 백성의 단합(3-4)

추종하던 지도자가 없어지면 백성들은 자연스럽게 다른 지도자를 찾게 되어 있습니다. 아히도벨의 계획은 많은 희생을 치르지 않고도 효과적으로 정권을 잡을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이 방법에 대해 압살롬과 이스라엘 장로들도 모두 옳다고 여겼습니다.

 

아히도벨의 계획에 반대하는 후새(5-10)

교회를 보존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은 변경되거나 취소되지 않았습니다. 교회가 악인에게 공격당할 때 하나님께서는 충성된 일꾼을 세우셔서 악인의 계략을 물리치게 하시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하나님의 교회를 보호하십니다. 교회는 자신의 지혜를 좇는 자들에 의해 세워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기에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자를 통해 세워집니다.

 

5압살롬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도 부르라 우리가 이제 그의 말도 듣자 하니라 6후새가 압살롬에게 이르매 압살롬이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아히도벨이 이러이러하게 말하니 우리가 그 말대로 행하랴 그렇지 아니하거든 너는 말하라 하니 7후새가 압살롬에게 이르되 이번에는 아히도벨이 베푼 계략이 좋지 아니하니이다 하고 8또 후새가 말하되 왕도 아시거니와 왕의 아버지와 그의 추종자들은 용사라 그들은 들에 있는 곰이 새끼를 빼앗긴 것 같이 격분하였고 왕의 부친은 전쟁에 익숙한 사람인즉 백성과 함께 자지 아니하고 9지금 그가 어느 굴에나 어느 곳에 숨어 있으리니 혹 무리 중에 몇이 먼저 엎드러지면 그 소문을 듣는 자가 말하기를 압살롬을 따르는 자 가운데에서 패함을 당하였다 할지라 10비록 그가 사자 같은 마음을 가진 용사의 아들일지라도 낙심하리니 이는 이스라엘 무리가 왕의 아버지는 영웅이요 그의 추종자들도 용사인 줄 앎이니이다(5-10)

 

후세는 다윗 왕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아히도벨의 계략이 좋지 않다고 말하고 다른 계략을 제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후새를 사용하시며(15:31) 그를 통해 아히도벨의 계략을 무너뜨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보로하시며 그의 왕위가 지속되도록 하십니다.

 

(1) 압살롬의 질문(5-6)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계획을 이루지 못하도록 하십니다.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겼습니다. 압살롬이 아히도벨의 계획을 즉시 실행하는 대신에 후새의 의견도 들어보겠다고 그를 불러들인 것입니다.

이런 암살롬의 결정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16:23에서 언급했듯이 아히도벨의 말은 여호와께 신탁을 받은 것처럼 절대적으로 옳은 견해인데, 자신의 편인지 아닌지도 확실하지 않은 후새의 견해를 듣겠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부터 일이 엇나가기 시작합니다. 후에 이렇게 된 이유를 하나님께서 압살롬을 심판하기 위해서 하신 일이라고 설명합니다.

 

(2) 아히도벨 작전에 대한 평가(7)

압살롬은 후새를 불러 아히도벨의 계획을 이야기해주고 그의 생각은 어떤지 물었습니다. 이에 대해 후새는 이 계획은 좋지 않다고 반대합니다. 후새는 현재 다윗 편에 서서 아히도벨의 훌륭한 계획을 반대해야 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아히도벨의 계획이 좋을수록 그 계획이 실행되지 못하게 필사적으로 막았습니다.

 

(3) 다윗과 그 군대의 상태 예측(8)

후새는 아히도벨의 계획을 일단 반대한 후에 그 이유를 설명하는데, 다윗과 다윗의 용사들의 상태에 초점을 맞춥니다. 아히도벨의 계획은 압살롬이 가지고 있는 월등한 군사력에 초점을 둔 것이기 때문에, 후새는 시선을 다윗 쪽의 군사력으로 돌립니다. 그는 다윗과 다윗의 군사력이 만만치 않음을 강조합니다. 이들은 모두 전쟁에 능한 용사이며, 현재 새끼를 빼앗긴 암곰처럼 매우 흥분하고 화가 난 상태이기 때문에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4) 소규모 부대의 위험성(9-10)

현재 수적으로는 다윗의 부대가 훨씬 열세지만 매우 흥분한 상태이기 때문에 무척 위험하며, 따라서 압살롬의 군대가 도리어 당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아히도벨은 다윗의 군대를 피곤하고 힘이 없는 상태로 본 것과는 달리 후새는 왕위를 빼앗긴 것에 대해 매우 분노하여 위험천만한 상태라고 설득한 것입니다. 새끼를 빼앗긴 암곰의 비유를 한 것은 자신의 의견을 좀 더 강하게 주장하기 위한 수사적 기술입니다. 다음으로 다윗이 백성들과 같이 있을 것이라는 아히도벨의 주장에 대해, 후새는 다윗은 전쟁에 익숙한 사람이기 때문에 백성들과 같이 머물지 않고 아마도 굴이나 산속에 숨었을 것이며, 숨어 있다가 혹시 다윗이 몇 명이라도 먼저 죽이게 되면 압살롬의 군사들이 패했다는 소문이 돌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압살롬의 군사들은 반드시 낙심하게 될 것인데, 다윗은 영웅이고 그의 군사들도 용사들인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억해낸 것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는 사람들이 다시 다윗에게로 돌아설 수 있음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후세는 아히도벨의 전쟁 계획에 대해 급하게 전쟁하여 혹시라도 지게 되면 득보다 실이 많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후새는 새끼를 빼앗긴 암곰이라든지 사자의 심장과 같은 비유를 능숙하게 사용하여 효과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능력 있는 인물입니다.

 

후새의 계획을 채택한 압살롬(11-14)

성도들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의 지혜로 살아가야 합니다. 인간의 지혜는 아무리 뛰어나도 하나님의 지혜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고려하지 않은 계획은 우리를 좌절시킬 것입니다. 탁월한 지혜보다 지혜를 탁월하게 사용할 수 있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아히도벨이 계산에 넣지 않은 가장 치명적인 실수는 다수라는 허수고, 욕망이라는 무리 수도 아닌 하나님이라는 최대 변수였습니다.

 

11나는 이렇게 계략을 세웠나이다 온 이스라엘을 단부터 브엘세바까지 바닷가의 많은 모래 같이 당신께로 모으고 친히 전장에 나가시고 12우리가 그 만날 만한 곳에서 그를 기습하기를 이슬이 땅에 내림 같이 우리가 그의 위에 덮여 그와 그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을 하나도 남겨 두지 아니할 것이요 13또 만일 그가 어느 성에 들었으면 온 이스라엘이 밧줄을 가져다가 그 성을 강으로 끌어들여서 그 곳에 작은 돌 하나도 보이지 아니하게 할 것이니이다 하매 14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의 계략은 아히도벨의 계략보다 낫다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계략을 물리치라고 명령하셨음이더라(11-14)

 

다윗을 전면 공격해야 한다는 후새의 계략은 당시 정황으로는 아히도벨의 계략보다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의 사람들은 후새의 계략을 낫게 여깁니다. 압살롬은 반역을 일으키는 과정에서는 대단히 교활한 자였으나, 여기서는 어리석은 자에 불과합니다.

 

(1) 대규모 군대 소집(11)

아히도벨의 계획을 비판한 후새는 자신의 계획을 압살롬에게 이야기합니다.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모든 이스라엘에서 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군사들을 모아 이들을 데리고 전쟁터에 나가자고 말합니다.

 

(2) 적군의 진멸(12-13)

이렇게 많은 수로 다윗을 기습하면 그와 함께한 사람을 한 명도 남기지 않을 수 있고, 만일 성으로 도망하면 성을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파괴할 수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기습을 이슬이 땅에 내리는 것으로 비유하는데, 이는 절대적으로 많은 수를 이용해 다윗의 군대를 제압하지는 것이고, 성을 밧줄로 끌어 강에 집어넣자는 것은 과장법으로 이것도 군사가 많기 때문에 성을 파괴하는 것이 쉽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후새의 계획의 핵심은 많은 수의 군사를 모아 압살롬이 이들을 끌고 위풍당당하게 전쟁터에 나가서 다윗의 군사들을 손쉽게 이기자는 것으로 과장되고 화려하지만, 구체적인 방법은 결여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합리적이고 효율적이지만 멋있거나 화려하지 않은 아히도벨의 계획과 대조됩니다. 또 하나 대조되는 것은 아히도벨의 계획에서는 압살롬이 참여할 부분이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후새의 계획은 압살롬이 직접 수많은 군사를 데리고 나가 다윗을 제압한다면 압살롬의 위상이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후새가 수많은 사람을 모으자고 말한 것은 당장 쫓아가려는 아히도벨의 계획을 막아 다윗이 도망가거나 전력을 보충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한 것입니다.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온 이스라엘에서 군사들을 모으려면 여러 날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후새는 화려한 언변으로 압살롬을 주인공으로 세우는 멋진 계획을 말하고 있습니다.

 

(3) 압살롬의 평가(14)

이런 후새의 계획에 대해 압살롬은 물론이고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히도벨의 계략보다 후세의 계략이 더 낫다고 평가하였습니다. 효율적이고 소박한 계획보다는 과장되고 화려한 계획이 이들의 눈에는 더 좋아 보인 것입니다. 이런 화려함에 눈이 멀어 아히도벨의 계획은 항상 옳다는 사실을 잊어버렸습니다. 결국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계획 대신 후새의 계획을 따르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압살롬은 자신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를 잃게 되며 그의 반역은 실패하게 됩니다. 이에 대해 압살롬이 아히도벨의 좋은 계획을 물리친 이유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재앙을 내리기 위해 아히도벨의 계획을 부수라고 하셨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압살롬의 행동에 대해 침묵을 깨셨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는 압살롬의 행동에 개입하지 않으시고 그가 하는 행동을 지켜만 보고 계셨습니다. 압살롬의 행동을 통해 암몬과 다윗의 악함을 벌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압살롬에게 악한 행동을 하라고 일부러 지시하신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의 악한 행동을 막지 않으셨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기도에 응답하여 압살롬의 악한 행동에 대한 심판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악한 행동하지 못하도록 막으시는 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막지 않으시면 우리 인간은 악한 본성을 따라 살면서 죄 지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악한 본성을 따라 살지 않기 위해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인생에는 변수가 있다는 사실을 두렵지만 가슴 뛰는 일입니다. 더구나 그 변수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라면, 조금 돌아가는 길로 인도하실지도 실망스럽지 않습니다. 인생에 다채로운 변수를 두어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고 더 큰 신비의 그릇으로 만드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시길 바랍니다(잠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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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16-02)


악한 계략을 따르는 압살롬

사무엘하 16장 15-23절


 

타락한 지도자들도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몇 번의 소심한 타협과 자기 합리화가 시작이었을 것입니다. 교회를 무너뜨리는 사단의 전략은 노골적인 핍박이나 명백한 거짓으로 찾아오지 않습니다. 사이비보다 유사 복음이 해롭고, 세속적 교훈보다 거짓 영성이 위험합니다. 목숨을 다하기까지 충성한다고 해서 그것을 참된 충성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참된 충성은 항상 선한 목적이 전개되어야 합니다.

 

예루살렘을 떠나 본격적으로 도망가는 다윗은 후새와 사독과 아비아달을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내면서 정보를 알려달라고 부탁합니다. 길에서 므비보셋의 종 시바를 만나 양식을 얻지만, 므비보셋을 의심하여 그의 재산은 몰수합니다. 바후림을 지날 때는 베냐민 사람 시므이의 저주를 받으면서 쉬지도 못하고 어렵게 도주합니다. 그동안 압살롬은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였고 다윗의 친구 후새를 만나게 됩니다.

 

후새와 압살롬의 만남(15-19)

자신의 삶을 돌아볼 때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 중 어디에 속해 살고 있다고 생각되었습니까? 주님의 뜻에 굴복하는 하나님의 백성이길 원하십니까? 아니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하나님을 기대합니까? 후자의 마음이 강하다면 하나님을 자기 삶의 주인으로 섬기는 자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세상 사람들이 그러하듯 자신을 위한 종교가 필요했고 그 가운데 기독교를 택한 것일 뿐입니다.

 

15압살롬과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이르고 아히도벨도 그와 함께 이른지라 16다윗의 친구 아렉 사람 후새가 압살롬에게 나갈 때에 그에게 말하기를 왕이여 만세, 왕이여 만세 하니 17압살롬이 후새에게 이르되 이것이 네가 친구를 후대하는 것이냐 네가 어찌하여 네 친구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18후새가 압살롬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내가 여호와와 이 백성 모든 이스라엘의 택한 자에게 속하여 그와 함께 있을 것이니이다 19또 내가 이제 누구를 섬기리이까 그의 아들이 아니니이까 내가 전에 왕의 아버지를 섬긴 것 같이 왕을 섬기리이다 하니라(15-19)

 

아비새는 시므이를 죽이자고 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시므이의 저주를 하나님의 저주로 받아들입니다. 다윗은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인지 아닌지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이 순간에 그가 바란 것은 시므이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라 이 수치를 다 받아들이고 있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였습니다.

 

(1) 후새의 등장(15-16)

다윗이 비참한 모습으로 도망가는 것과 대조적으로 압살롬은 자신을 지지하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당당하게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합니다. 여기서 아히도벨이 압살롬과 동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부러 언급하는데, 이것은 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매우 중요한 인물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압살롬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갈 때 후새가 압살롬을 크게 환영합니다. 학자가 후새에 대해 다윗의 친구라고 설명한 것은 후새가 압살롬에게 충성을 맹세하지만 여전히 내면적으르는 다윗의 편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그는 압살롬을 마중하고 왕이여 만세 왕이여 만세'를 외치며 환영합니다.

 

(2) 후새의 충성 서약(17-19)

이런 후새의 모습에 후새가 다윗의 친구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압살롬은 이것이 당신의 친구 다윗에 대한 충성심이냐고 비아냥거리면서 왜 친구를 따라가지 않았느냐고 묻습니다. 여기서 압살롬은 의도적으로 ‘당신의 친구’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후새의 배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런 압살롬의 질문에 자신은 여호와와 이스라엘 백성이 선택한 자에게 속하였으며 그와 함께 있겠다고 하면서. 왕의 아버지를 섬긴 것처럼 왕 압살롬을 섬기겠다고 충성을 맹세합니다. 자신이 여호와께서 선택하신 자에게 속하였다고 한 것은 자신은 여전히 다윗의 사람이라는 것을 암시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은 압살롬이 아니라 다윗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재는 다윗의 부탁을 받았기 때문에 압살롬을 섬기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아버지를 섬긴 것처럼 자신을 섬긴다는 말을 들은 압살롬은 후새가 자신을 여호와께서 선택하신 사람으로 인정하였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후새는 다윗이 부탁한 대로 무사히 예루살렘에서 압살롬의 신하로 있을 수 있었습니다. 압살롬이 배신한 후새를 쉽게 받아들인 것은 자신이 아버지를 배신하였기 때문에 사람을 배신하는 일이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반란을 한 압살롬은 예루살렘에서 한 명이라도 더 지지자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학적으로 볼 때 이것은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이 압살롬이 지혜로운 선택을 하지 못하게 막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은 것으로 만들어달라고 기도했고, 마치 그 기도의 응답처럼 나타난 사람이 후새였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진행되고 있는 상황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기도를 이루어 가시는 과정이며, 압살롬이 의심 없이 후새를 받아들인 것은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히도벨의 모략을 따르는 압살롬(20-23)

세상의 방식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때때로 그 유혹에 넘어갈 때가 있습니까?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혹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지금 당장 불편해지거나 손해를 당하기 때문은 아닙니까? 정직하게 사는 자보다 남을 속이는 자가 흥왕하는 것을 보면서 잠시 일지라도 부러워한 적이 있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분명 근시안적인 삶이요, 영생을 바라보지 못하는 삶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20압살롬이 아히도벨에게 이르되 너는 어떻게 행할 계략을 우리에게 가르치라 하니 21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이르되 왕의 아버지가 남겨 두어 왕궁을 지키게 한 후궁들과 더불어 동침하소서 그리하면 왕께서 왕의 아버지가 미워하는 바 됨을 온 이스라엘이 들으리니 왕과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의 힘이 더욱 강하여지리이다 하니라 22이에 사람들이 압살롬을 위하여 옥상에 장막을 치니 압살롬이 온 이스라엘 무리의 눈앞에서 그 아버지의 후궁들과 더불어 동침하니라 23그 때에 아히도벨이 베푸는 계략은 사람이 하나님께 물어서 받은 말씀과 같은 것이라 아히도벨의 모든 계략은 다윗에게나 압살롬에게나 그와 같이 여겨졌더라(20-23)

 

후새는 다윗의 조언을 따라 압살롬에게 굴복한 척합니다. 압살롬의 승리를 여호와의 승리로 해석하고, 자신의 충성은 대를 이은 충성으로 포장합니다. 아히도벨은 압살롬에게 다윗의 후궁을 공개적으로 겁탈하게 함으로써 다윗 왕권의 종언과 새로운 왕의 등장을 상징적으로 알리라고 압살롬에게 조언합니다.

 

(1) 아히도벨의 첫 번째 계략(20-21)

후새를 신하로 받아들인 압살롬은 아히도벨에게 이제부터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계획을 말해보라고 합니다. 이 문장에서 히브리어 본문은 ‘너희’란 남성 복수형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비록 압살롬이 아히도벨에게 말하고 있지만, 그 옆에서 후새나 다른 신하들도 듣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런 압살롬의 물음에 아히도벨은 다윗이 남겨둔 후궁들과 동침하라고 제안합니다. 그러면 압살롬이 다윗의 미움을 받는다는 것을 다들 알게 될 것이고, 그러면 압살롬과 함께 있는 사람들이 더욱 힘을 얻을 것이라고 합니다. 전왕의 후궁들과 동침하는 것은 고대 근동에서 전왕을 폐위하고 자신이 새로운 왕으로 등극하여 전왕의 권력과 모든 재산을 차지했다는 상징적인 행동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에서 아버지의 첩을 취하는 것은 근친상간으로 간주하여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히도벨은 하나님의 율법보다는 고대 근동의 관행을 따라서 압살롬이 백성들에게 자신이 새로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줄 것을 조언하였습니다. 아히도벨은 또한 이런 행동을 다윗이 듣게 되면 압살롬을 미워하게 될 것이고, 압살롬과 다윗의 관계는 회복할 수 없는 지경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압살롬을 따르는 사람들은 더욱 긴장하고 힘낼 수밖에 없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 결과 압살롬을 따르는 사람들은 이제 다시 다윗에게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지고, 이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더욱 다윗과 강력하게 싸울 것이라고 계산한 것입니다. 아히도벨은 다윗의 첩을 취하는 행동을 통해 외부적으로는 압살롬이 다윗을 승계했다는 것을 알리고, 내부적으로는 결속을 다지는 기회로 삼으려고 한 것입니다. 아히도벨의 조언을 들은 압살롬은 그대로 시행합니다. 옥상에 천막을 치고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의 후궁들과 동침합니다. 후궁들을 ‘그의 아버지의 후궁들’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압살롬이 근친상간의 죄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압살롬이 천막을 친 옥상은 예전에 다윗이 목욕하고 있던 밧세바를 보고 음욕을 품었던 장소로 이 모든 일의 발단이 된 곳입니다. 옥상이란 장소를 통해 화자는 왜 다윗에게 이런 치욕스러운 일들이 벌어지게 되었는지 독자들로 하여금 떠올리게 합니다. 공개적인 장소에서 다윗의 첩들이 강간을 당하는 사건은 일차적으로 나단 선지자가 다윗에게 예언한 것이 성취된 것입니다. 나단은 다윗에게 ‘네가 네 눈앞에서 네 아내를 빼앗기고 네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들이 네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온 이스라엘 앞에서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라고 말씀을 전한 것이 문자적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온 이스라엘 앞에서’라는 단어가 두 부분에 공통적으로 사용되어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지금 하나님께 받는 벌을 통해 한걸음 한 걸음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죄에 대해 계속 선고대로 시행하고 계시며 사해주지 않고 계신 것입니다.

본문은 언급하지 않지만, 압살롬이 다윗의 첩들을 강간한 것은 암논이 다말을 강간한 것에 대해 다윗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에 대한 보복의 의미도 있습니다. 사실 다말이 암에게 강간당했을 때 다윗이 적절하게 조치를 취했다면, 압살롬이 반역을 하는 일도, 다윗의 첨을 강간하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다윗의 무책임함 때문에 다윗의 딸이 강간당한 일에서 시작된 비극이 다윗의 첩 열 명이 강간당하는 비극으로 확대된 것입니다. 여기서 힘없는 여성들이 강간당하는 모습은 현재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으며, 지도자들이 공의와 지혜로 이스라엘을 다스리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여성들이 강간당하는 상황은 항상 그 사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불의를 일삼을 때 일어납니다. 사사기 19장의 레위 첩, 다말, 다윗 첩들의 강간이 그렇습니다. 창세기 34장에서 디나의 강간 사건도 야곱 집의 영적 타락과 세겜의 불의함이 결합된 사건이었습니다. 이렇게 사회가 불의할수록 그 사회에서 가장 힘없는 사람들이 이용당하고 폭력의 희생자가 되며 이런 희생자들을 또한 무정하게 대합니다. 사회가 정의로울수록 그리고 정의롭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가장 힘없는 사람도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성들과 힘없는 자들의 희생을 강요하며 희생을 정당화하는 곳은 불의한 곳입니다.

 

(2) 암살롬의 실행(22-23)

23절에서 아히도벨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데 사실 이것은 사무엘하 15:31에서 아히도벨의 이름이 처음 나올 때 나왔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곳에 나온 이유는 17장에서 나올 아히도벨과 후새의 대결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아히도벨의 계략이 마치 사람이 하나님께 물어서 받은 말씀과 같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우림이나 둠밈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탁을 받은 것처럼 정확하게 들어맞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만큼 아히도벨의 지략은 뛰어났으며, 이런 아히도벨의 능력은 다윗도 압살롬도 전적으로 신뢰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아히도벨이 압살롬 편에 섰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심각한 위기감을 느끼고 하나님께 기도한 것입니다. 자신에게는 이런 아히도벨 같은 뛰어난 지략을 가진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다윗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거짓은 그것이 진리처럼 보이기에 강력합니다. 그 작은 간극을 무시하고 타협하면서 타락이 시작됩니다. 현대 교회를 향한 가장 큰 도전은 명백한 이단 사상이나 노골적인 핍박이 아닙니다. 진리처럼 보이는 거짓에 대한 분별 없는 타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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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16-01)


시바의 거짓말과 시므이의 저주를 듣는 다윗

사무엘하 16장 1-14절


잘못에서 비롯되었든 세상의 악함이 야기한 것이든, 고난은 우리를 지치고 힘들게 합니다. 고난의 상황에 매몰되면, 쉽게 분별력을 상실하고 성정이 날카롭게 변하며 관대함과 여유를 잃게 됩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신에게 닥친 시련을 보며 불평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그 속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뜻을 무엇인지를 겸손히 헤아립니다. 고통이 지속될 때, 성도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행동해야 합니까?

 

다윗은 압살롬의 반란을 막을 군사력이 없기 때문에 급히 예루살렘을 떠납니다. 이때 사독과 아비아달이 언약궤를 가지고 다윗을 따르려 하지만, 다윗은 이들을 돌려보냅니다. 그리고 자신을 따르려는 충성스러운 산하 후새도 돌려보냅니다. 대신에 이들에게 예루살렘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려달라고 부탁합니다. 다윗은 압살롬을 피해 도망하면서 비로소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도와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시바와 만나는 다윗(1-4)

성도는 다른 사람의 말에 잘못된 판단과 결정을 내릴 때도 있지만, 그 일을 통해서 그 사람만 탓한 것이 아니라 신중하지 못한 자신과 자신의 죄악에 대해서도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성장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습니다. 깨달음을 얻고 성숙해지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다윗이 시바에게 속아 잘못 판단하고 결정한 일을 나중에 알게 되었을 때, 그를 처벌하지 않습니다.

 

1그 후에 압살롬이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말들을 준비하고 호위병 오십 명을 그 앞에 세우니라 2압살롬이 일찍이 일어나 성문 길 곁에 서서 어떤 사람이든지 송사가 있어 왕에게 재판을 청하러 올 때에 그 사람을 불러 이르되 너는 어느 성읍 사람이냐 하니 그 사람의 대답이 종은 이스라엘 아무 지파에 속하였나이다 하면 3압살롬이 그에게 이르기를 보라 네 일이 옳고 바르다마는 네 송사를 들을 사람을 왕께서 세우지 아니하셨다 하고 4또 압살롬이 이르기를 내가 이 땅에서 재판관이 되고 누구든지 송사나 재판할 일이 있어 내게로 오는 자에게 내가 정의 베풀기를 원하노라 하고(1-4)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 도망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징계(12:9-12)로 인해서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징계받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들을 제공해 준 시바가 므비보셋에 대해 거짓말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을 때 그를 처벌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시바의 소유를 다시 므비보셋과 나누게만 했을 뿐입니다.

 

(1) 시바가 가져온 음식(1-2)

다윗이 감람산 마루턱을 조금 지났을 때, 므비보셋의 종인 시바를 만나게 됩니다. 시바는 안장을 지운 나귀에 떡 이백 개와 건포도 백 송이와 여름 과일 백 개와 포도주 한 부대를 싣고 다윗을 맞이합니다. 이런 시바의 모습을 본 다윗은 이것이 무엇인지 물었고, 시바는 다윗과 다윗의 가족과 수행원들을 위해 가져온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사무엘상 25:18에서 아비가일이 다윗의 병사들을 위해 준비한 음식과 유사합니다. 시바는 설명을 통해 자신이 매우 꼼꼼하게 다윗을 위해 양식을 준비했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다윗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합니다.

 

(2) 므비보셋의 말과 다윗의 선언(3-4)

그런데 다윗은 이런 시바의 설명이나 음식보다는 므비보셋의 행방에 더 관심을 갖습니다. ‘네 주인의 아들이 어디 있느냐’고 시바에게 물은 것입니다. 여기서 다윗은 여전히 시바를 사울의 신하로 간주하고 있는데,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시바는 더욱 다윗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한 것입니다.

다윗의 질문에 시바는 므비보셋은 여전히 예루살렘에 있는데, 그 이유는 이스라엘 족속이 자기 아버지의 나라를 자신에게 돌릴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이 도망간 사이에 다윗의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다윗과 같이 도망하지 않고 예루살렘에 남았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런 시바의 말에 대해 다윗은 더 알아볼 생각을 하거나 의심하지 않고 완전히 믿었고 화가 난 다윗은 므비보셋의 모든 재산을 빼앗아 시바에게 줍니다.

이에 시바는 다윗에게 감사의 절을 하고 왕의 신하가 되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내가 왕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는 이제 더 이상 사울의 신하가 아니라 다윗의 신하로 받아달라는 의미입니다. 시바는 이전부터 자신을 ‘당신의 종’이라고 칭하며 다윗의 신하가 되고 싶어 했지만, 므비보셋이 등장함으로 다윗의 신하가 되지 못하고 계속해서 사울의 집 신하로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 왕국에서 사울 집의 신하로 지내는 것은 더는 출세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출세를 원한 시바의 입장에서는 매우 불만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다 자신이 나설 기회가 생기자 재빨리 므비보셋을 배반하고 다윗에게 온 것입니다. 므비보셋이 정말 반역을 했는지 이 부분에서는 알 수 없지만, 사무엘하19:24-30에 가면 므비보셋은 다윗을 배반하지 않았고, 오히려 시바가 므비보셋을 배반하고 모함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현재 자신의 아들 압살롬에게 배반당한 상태이기 때문에 요나단의 아들이 배반했다는 소리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탐욕스러운 인간의 말을 그대로 믿고 므비보셋에게 주었던 모든 것을 빼앗아 그를 모함한 인간에게 줘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을 때는 요나단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일부러 므비보셋을 찾아 은혜를 베풀고 함께 지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진 지금 그는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서 요나단과 맺었던 언약까지 깨려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때 생긴 의심은 나중에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시므이의 저주(5-14)

예수님께서는 의인이셨지만 채찍질과 침 뱉음을 당하며 조롱과 멸시 가운데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분의 희생을 생각할 때 우리의 억울함은 너무나 미미한 것입니다. 성도는 억울한 일을 통해서도 깨닫음을 얻고 자신을 훈련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어떻게 그런 일을 허용하실 수 있는지에 주목하기보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그것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 아브라함과 이스보셋 등 사울 집안 사람들의 죽음에 책임이 없었습니다.

 

5사람이 가까이 와서 그에게 절하려 하면 압살롬이 손을 펴서 그 사람을 붙들고 그에게 입을 맞추니 6이스라엘 무리 중에 왕께 재판을 청하러 오는 자들마다 압살롬의 행함이 이와 같아서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압살롬이 훔치니라 7사 년 만에 압살롬이 왕께 아뢰되 내가 여호와께 서원한 것이 있사오니 청하건대 내가 헤브론에 가서 그 서원을 이루게 하소서 8당신의 종이 아람 그술에 있을 때에 서원하기를 만일 여호와께서 반드시 나를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시면 내가 여호와를 섬기리이다 하였나이다 9왕이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하니 그가 일어나 헤브론으로 가니라 10이에 압살롬이 정탐을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에 두루 보내 이르기를 너희는 나팔 소리를 듣거든 곧 말하기를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다 하라 하니라 11그 때 청함을 받은 이백 명이 압살롬과 함께 예루살렘에서부터 헤브론으로 내려갔으니 그들은 압살롬이 꾸민 그 모든 일을 알지 못하고 그저 따라가기만 한 사람들이라 12제사 드릴 때에 압살롬이 사람을 보내 다윗의 모사 길로 사람 아히도벨을 그의 성읍 길로에서 청하여 온지라 반역하는 일이 커가매 압살롬에게로 돌아오는 백성이 많아지니라 13전령이 다윗에게 와서 말하되 이스라엘의 인심이 다 압살롬에게로 돌아갔나이다 한지라 14다윗이 예루살렘에 함께 있는 그의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일어나 도망하자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 중 한 사람도 압살롬에게서 피하지 못하리라 빨리 가자 두렵건대 그가 우리를 급히 따라와 우리를 해하고 칼날로 성읍을 칠까 하노라(5-14)

 

다윗의 신복 아비새는 시므이를 죽은 재라고 하며 죽이게 해 달라고 다윗에게 청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시므이를 내버려 두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지금 자신이 겪는 고난을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징계로 여겼기 때문에 시므이의 저주를 기꺼이 감내했습니다. 자신의 원통함을 보시고 하나님이 갚아 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1) 시므이의 등장(5-6)

다윗이 바후림에 가까이 갔을 그곳에서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나왔는데, 그는 사울의 친척입니다. 바후림은 사울의 지파였던 베냐민 지파가 사는 지역으로 이곳에 사울의 친척들이 살고 있었고 그중 한 명이 시므이인 것입니다.

 

(2) 저주(7-8)

시므이는 압살롬에게 쫓겨 바후림으로 온 다윗을 보고 나가라고 소리칩니다. 그는 다윗을 ‘피의 사람’, ‘불량배’로 부르는데, 이 중에서 불량배는 이전에 나발을 부르던 표현으로 지금 다윗은 자신이 악하게 생각하던 나발과 같은 인간으로 취급받고 있는 것입니다.

시므이가 다윗을 ‘피의 사람’ 즉, 살인자로 표현한 이유는 다윗이 반란을 일으켜 사울 집안 사람들을 죽이고 왕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므이는 여호와께서 사울 집의 모든 피를 다윗에게 돌리셨고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나라를 넘기셨다고 말합니다. 압살롬의 반란으로 다윗이 이렇게 쫓겨나게 된 것은 다윗이 사울 집에 저지른 살인죄 때문에 여호와께 벌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시므이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하고 있지만 여호와에 대한 지식이 있거나 신앙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순히 인과응보의 대가를 치르게 하시는 분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울 집을 버리고 다윗을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거나 알면서도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3) 아비새와 다윗의 반응(9-12)

시므이가 저주하는 말을 들은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는 화를 내며 시므이를 죽은 개라고 욕하면서 자신이 그의 머리를 벨 수 있게 해달라고 다윗에게 요청합니다. ‘죽은 개’라는 표현은 사무엘하 9:8에서 므비보셋이 다윗 앞에서 자신을 낮추기 위해 사용한 표현으로 아무쓸모 없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아비새의 말에 다윗은 너희가 상관하지 말라고 합니다. 시므이가 저주하도록 여호와께서 허락하셨는데, 누가 그에게 뭐라 할 수 있겠나는 것입니다. 또한 아들도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데, 시므이가 자신을 저주하는 것이 무슨 대수냐고 하면서 반복하여 여호와께서 저주하게 하신 것이니 내버려 두라고 부하들을 말립니다. 그리고 혹시 여호와께서 저주받은 것 때문에 도리어 자신에게 선을 베풀어주실지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이런 다윗의 말은 이전에 자신이 사울을 죽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죽이지 않으면서 원수 갚는 것은 여호와의 손에 있기 때문에 자신의 손으로 원수 갚지 않겠다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이때도 다윗은 억울함을 토로하면서 하나님께서 선은 선대로 악은 악대로 갚아 주시길 기원했습니다.

 

(4) 감람산을 내려가 다윗(13-14)

이번에도 시므이가 저주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허락한 일이라고 말하지만, 만일 그렇지 않고 여호와께서 자신이 억울하게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직접 원수갚지 않은 것을 선하게 보시고 선을 베풀어주시길 원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에게 일어난 압살롬의 반란과 모욕들을 통해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께서 나단을 통해 주신 심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시므이의 저주도 하나님께서 내리신 벌 중 하나로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만일 시므이의 저주가 부당하다면 그것도 여호와께서 갚아 주실 것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이제 다윗은 점점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고 합니다. 이것은 그가 점점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다윗 일행은 시므이를 무시하고 자신의 길을 갔고 시므이는 산비탈로 따라오면서 계속해서 저주하고 돌을 던지고 흙을 뿌리며 괴롭혔습니다. 이것은 시므이의 행동이 지나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결국 시므이의 저주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행동임을 암시합니다. 다윗 일행은 시므이의 적대적 행동으로 인해 바후림에서 쉬지 못하고 계속 행군하였고, 결국 목마르고 배고픈 상태가 되었습니다. ‘피곤한’이란 뜻의 단어 ‘아예프’는 배고프고 목말라 지친 상태를 의미합니다. 다윗 일행은 바후림에서 쉬면서 물과 양식을 보급 받아야 했는데, 여기서 배척받았기 때문에 배고프고 목마르고 지친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들은 마침내 한 곳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쉬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압살롬에게 쫓겨 길을 헤매면서 그동안 왕궁에서 편안하게 살면서 잊었던 하나님을 찾게 되었고 만나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 하나님을 가장 의지하고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왕조를 하사하신 이후 그는 하나님을 잊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왕궁 밖으로 쫓아내시고 다시 하나님을 찾게 만드신 것입니다.

 


계속되는 시련에 몸도 마음도 지치기 마련입니다. 자존심이 상하고 억울한 상황도 발생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모든 판단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원통함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 시련의 시간이 지나갈 때 얼굴을 들게 하십니다. 시련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그 속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뜻을 찾고 따라야 합니다. 견디기 힘든 상황일수록 더욱 겸손하게 엎드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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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15-03)

 


끝까지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다윗

사무엘하 15장 24-37절


시공간 속에 사는 우리에게 상징물이나 예전, 공간은 하나님의 존재와 역사를 상기시키는 중요한 교보재가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항상 내 편이 되어 주셔서 좋은 상황 속에 있길 원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상황일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 스스로 그 유용함을 인정하시고 성전과 각종 제사와 절기를 주셨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 유용한 법궤를 돌려보냅니다. 어떤 마음으로 그런 결단을 내렸습니까?

 

본문에는 다윗의 피난길에서 예루살렘을 떠나 감람산 정상에 이르는 여정을 기록합니다. 다윗은 사독과 아비아달, 레위인을 만나서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가라 했습니다. 감람산을 올라가는 중 아히도벨이 압살롬의 반란에 동참했다는 말을 듣고 하나님께 그의 모략을 어리석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감람산 정상에서 아렉 사람 후새를 만나 아히도벨의 모략을 깨뜨리도록 압살롬에게 가서 거짓으로 그의 신하가 되라 했습니다.

 

언약궤를 예루살렘 성으로 돌려보냄(24-29)

성도는 자신의 계획과 노력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갑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보다 앞서지 않습니다. 매사에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 나라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세워져 갑니다.

 

24보라 사독과 그와 함께 한 모든 레위 사람도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어다가 하나님의 궤를 내려놓고 아비아달도 올라와서 모든 백성이 성에서 나오기를 기다리도다 25왕이 사독에게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궤를 성읍으로 도로 메어 가라 만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입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사 내게 그 궤와 그 계신 데를 보이시리라 26그러나 그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하시면 종이 여기 있사오니 선히 여기시는 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 하리라 27왕이 또 제사장 사독에게 이르되 네가 선견자가 아니냐 너는 너희의 두 아들 곧 네 아들 아히마아스와 아비아달의 아들 요나단을 데리고 평안히 성읍으로 돌아가라 28너희에게서 내게 알리는 소식이 올 때까지 내가 광야 나루터에서 기다리리라 하니라 29사독과 아비아달이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도로 메어다 놓고 거기 머물러 있으니라(24-29)

 

이 단락의 시점은 다윗이 성을 떠날 때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므로 23절보다 이전으로 생각됩니다. 아마 다윗이 예루살렘 성을 완전히 빠져나왔을 때로 보입니다. 다윗은 두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이 가져온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냅니다. 이 궤는 와권의 정당성을 상징하는 물건이지만, 그는 법궤를 이용하지 않고 하나님의 선한 길에 자신을 맡기기로 결정합니다.

 

(1) 사독과 아비아달(24)

본 절은 ‘보라’로 시작하는데, 이것은 다윗 일행이 예루살렘 성문을 지나서 나온 다윗이 본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것입니다. ‘보라’로 번역되는 ‘힌네’는 이야기가 진행되다가 화자의 시점에서 등장인물의 시점으로 바뀔 때 종종 사용되는데 여기서는 다윗의 시점으로 전환된 것입니다.

 

(2) 언약궤(25-26)

사독과 언약궤를 멘 레위인들이 언약궤를 내려놓은 상태로 있었고, 아비아달은 다윗을 맞이하기 위해 성문 앞으로 올라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언약궤를 가지고 다윗을 따라가기 위해서 미리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언약궤를 가지고 다윗을 따라가기 위해 미리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언약궤는 여호와의 임재를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종교적 상징으로 왕권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다윗도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유다와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하자 제일 먼저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시고 와서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백성들에게 널리 알리고,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공고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언약궤가 다윗을 따라간다는 것은 반역을 일으킨 압살롬이 아니라 여호와와 함께 있는 다윗이 진정한 왕이라는 징표가 되며, 이것은 백성들의 마음을 다시 다윗에게로 돌리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하지만 다윗은 언약궤 자체가 자신의 왕권을 보호해준다는 일반적인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언약궤를 다시 예루살렘의 원래 있던 곳으로 가져다 놓으라고 말합니다. 그는 왕권을 지키고 안 지키고는 전적으로 여호와의 손에 달렸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만일 내가 여호와의 은혜를 입으면 여호와께서 나를 돌아오게 하실 것이고, 그의 법궤와 그가 계신 곳을 보게 해주실 것이지만, 만일 하나님께서 나를 기뻐하지 않으시면 선히 여기시는 대로 내게 행하길 원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이런 다윗의 모습은 왕이 되기 이전에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울 왕에게 쫓기던 시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3) 아히마아스와 요나단(27-29)

하지만 다윗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사독과 아히마아스와 요나단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곳 사정을 정탐하고 알려달라고 부탁합니다. 제사장들을 이용해 예루살렘의 정보를 얻기 위한 정보망을 만들어놓은 것입니다. 여기서 이름이 거론된 두 아들이 다윗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연락책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이들이 전해준 정보를 듣기 위해 요단강을 건너가는 나루에서 기다리겠다고 말합니다.

임무를 받은 사독과 아비아달은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에 도로 가져갔고 자신들도 다윗의 명령대로 예루살렘에 머물렀습니다. 여기서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손에 맡기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신이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사람과 상황을 이용하는 다윗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상반되거나 모순되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인간이 노력하더라도 그 일을 성취하는 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자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하고 결과는 온전히 여호와의 손에 맡기는 것입니다.

 

아히도벨(30-31)

하나님 나라는 때로는 이 땅에서 극심한 위협을 당합니다. 사단은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기까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위협을 일삼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위협당하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간절히 기도합니다. 기도하는 자가 하나님의 백성이고, 기도하는 내용이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것이라면 아무것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30다윗이 감람 산 길로 올라갈 때에 그의 머리를 그가 가리고 맨발로 울며 가고 그와 함께 가는 모든 백성들도 각각 자기의 머리를 가리고 울며 올라가니라 31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알리되 압살롬과 함께 모반한 자들 가운데 아히도벨이 있나이다 하니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옵건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 하니라(30-31)

 

아히도벨은 다윗에게 충성을 다하였던 모사였습니다(삼하 15:12; 대상 27:33-34). 그가 베푸는 계략은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것으로 여겨졌을 정도니, 다윗이 그를 얼마나 신뢰하였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아히도벨의 배신은 다윗에게 매우 가슴 아팠을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도 다윗은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가 회복되고 다시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1) 감람산 오르막길(30)

다윗 일행은 예루살렘에서 나와 맞은편에 있는 감람산으로 올라가는 동안 머리를 가리고 울며 올라갔고, 특히 다윗은 머리를 가린 채 맨발로 울며 올라갔습니다. 이들은 다윗이 왕위를 빼앗기고 도망가는 수치스러운 상황에 대해 애곡하며 감람산으로 올라간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다말이 암논에게 강간당한 후 옷을 찢고 머리에 재를 쓰고 손으로 머리를 가리고 울부짖으며 집으로 돌아간 모습과 비슷합니다. 다윗은 다말이 당했던 수치를 동일하게 경험하며, 다말과 동일하게 쓰디쓴 아픔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2) 아히도벨(31)

다윗은 압살롬과 함께 반역을 일으킨 사람 중에 아히도벨이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다윗은 여호와께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만들어달라고 기도합니다. 이 기도는 다윗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회복하는 결정적인 부분으로 그는 다시 하나님을 의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무엘하 16:23에서 ‘아히도벨이 베푸는 계략은 사람이 하나님께 물어서 받은 말씀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런 설명처럼 아히도벨은 당대에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인정하는 모사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은 아히도벨이 압살롬을 돕는다는 정보를 듣고 상황이 더욱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아히도벨의 모략에서 자신을 구해주실 분은 오직 여호와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전적인 무능을 깨달은 순간 다윗은 다시 여호와께 의지하며 기도한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은 힘이 있고 높은 자리에 있으면 무슨 일이든 자기 생각과 힘으로 하려고 하며 실제로도 힘없고 가난한 사람보다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힘 있고 강한 자들은 점점 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지 않게 되며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지 않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가난한 자야말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사는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후새와 아히도벨의 대결(32-37)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모든 위기를 이겨내고 아름답게 완성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세우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세워나가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이 세워나가는 사람의 나라와 달리 하나님께서 세워 가시는 하나님 나라는 그 어떤 위기를 만나도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32다윗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루턱에 이를 때에 아렉 사람 후새가 옷을 찢고 흙을 머리에 덮어쓰고 다윗을 맞으러 온지라 33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만일 나와 함께 나아가면 내게 누를 끼치리라 34그러나 네가 만일 성읍으로 돌아가서 압살롬에게 말하기를 왕이여 내가 왕의 종이니이다 전에는 내가 왕의 아버지의 종이었더니 이제는 내가 왕의 종이니이다 하면 네가 나를 위하여 아히도벨의 모략을 패하게 하리라 35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이 너와 함께 거기 있지 아니하냐 네가 왕의 궁중에서 무엇을 듣든지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에게 알리라 36그들의 두 아들 곧 사독의 아히마아스와 아비아달의 요나단이 그들과 함께 거기 있나니 너희가 듣는 모든 것을 그들 편에 내게 소식을 알릴지니라 하는지라 37다윗의 친구 후새가 곧 성읍으로 들어가고 압살롬도 예루살렘으로 들어갔더라(32-37)

 

다윗은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을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내고, 역시 뛰어난 지략가이며 선견자이자 다윗의 친구인 후새 역시 다윗의 피신 행렬에 참여하려고 했지만, 다윗은 그 역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합니다. 이번에는 그가 압살롬의 충신인 척하면서 사독과 아비아달과 함께 자신을 돕도록 합니다.

 

(1) 후새(32)

 다윗이 기도한 후 하나님을 경배하는 제단이 있는 곳에 이르렀을 때, 그곳에서 후새를 만납니다. 후새는 옷을 찢고 머리에 흙을 뒤집어썼는데, 이는 다윗과 동일하게 애도하는 모습으로 후새가 다윗 편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후새가 이곳에 있는 것은 다윗과 함께 가기 위한 것이지만 다윗은 그를 보자 자신과 같이 가는 것이 오히려 자신에게 짐이 된다고 말하면서, 다시 돌아가서 압살롬에게 복종하는 것처럼 하면서 자신을 위해 아히도벨의 모략을 깨뜨려달라고 부탁합니다.

 

(2) 아히도벨과 대결(33-34)

다윗은 여호와께 기도한 후 후새를 만나는 순간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후새를 통해 아히도벨의 모략을 깨뜨려주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후에 하나님께서는 정말로 후세를 통해 아히도벨의 모략을 깨뜨리십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과 후새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다윗은 후대에게 예루살렘에 있는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이 자신의 편이라는 것을 알려주며, 어떤 정보가 생기면 이들을 통해 알려달라고 부탁합니다. 이렇게 다윗은 예루살렘을 떠나면서 믿을 만한 사람들에게 소식통 역할을 부탁하고 촘촘한 연락망을 짜놓습니다.

 

(3) 압살롬 동향 파악(35-37)

37절에서 ‘다윗의 친구’라고 표현하는데, 이것은 이후에 그가 압살롬 편을 드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의 진심은 다윗 편이라는 것을 미리 독자들에게 확실히 알려주기 위한 것입니다. ‘다윗의 친구’인 후새는 다윗의 요청을 받아들여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얼마 후 압살롬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들어왔을 때 후새는 다윗의 부탁을 충실히 이행합니다. 그는 정말로 다윗의 믿음직한 친구였던 것입니다.

결국 다윗은 아들 압살롬에게 예루살렘 성을 빼앗기고 계속해서 도망하는 신세가 됩니다. 하지만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찾고 조금씩 하나님을 의지하며 신앙을 회복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에게 내려진 심판과 비극은 한편으로는 형벌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축복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으로 인해 그의 자식들과 이스라엘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며,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 죄를 짓지 않는 것이 나와 가정과 사회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길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손수 마련하신 언약궤를 성전으로 돌려보낸 다윗에게서 우리는 어떤 신앙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언약궤를 곁에 두고 하나님을 기억하고 의지하는 것보다 그것없이도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것이 더 나은 믿음임을 보여줍니다. 그 상징물이 자칫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상황이 앞에 닥쳤을 때에도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 뜻을 따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이 필요하고, 그 뜻을 따라 순종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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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강해(01-02)

 


로마를 위해 기도한 바울

로마서 1장 8-15절


한 신학자가 기독교의 성격을 ‘사도 바울의 열정은 식고, 차가운 가슴만 남았다.’라고 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신학자의 주장에 동의합니다. 초대교회처럼 영적으로 뜨거운 분위기로 돌아 가야한다고 주장합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초대교회처럼 돌아갈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열정적인 길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으로 하나님의 말씀만 판단하고 것입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열정은 식고 냉철한 가슴만 남습니다. 복음의 맛본 사람들을 보면,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불타오르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할 사람들의 마음은 열정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바울을 통해 복음에 불타는 열정을 배워야 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복음에 대한 열정의 온도는 몇 도입니까?

 

바울은 공식적으로 자기소개를 마치자마자 그는 로마교회에 대한 자신의 감정과 소원을 표현합니다. 오래전부터 바울은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고 싶은 꿈을 꾸었습니다(행 19:21). 동시에 당장 로마에 달려가서 열정적으로 복음을 증거 하고 싶었지만, 당장은 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로마에 가는 대신에 편지로 복음 전하는 것을 돕고 싶었습니다. 본문은 복음에 대한 바울의 열정을 보여줍니다.

 

로마교회에 대한 감사(8)

모든 교회와 성도들은 세상에 확실한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그 헌신의 정도가 커서 모든 곳에 전파될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사회가 아무리 부도덕하고 비열하며 오염되고 부패하더라도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견고하게 서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어디에 있든지 우리는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8첫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8)

 

바울 당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말하며, 세계의 수도이며 세계의 심장과도 같았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에서 일어난 사소한 일까지도 모든 주변으로 펴졌습니다. 지리적으로 로마가 중요한 만큼 로마교회도 중요했습니다.

 

로마는 모두에게 살기 좋은 곳만은 아니었습니다. 권력과 물질을 가진 지배계급에는 살만한 곳이었지만, 일반인에게는 대부분 열약한 상황에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노예 생활하고 있었으며, 일반인은 대부분 노예이거나 종으로부터 자유를 얻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일반인은 자유로운 시간이 주어진 것도 아니고 식량도 충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곳곳에 생계형 범죄가 가득했습니다. 로마의 생활은 불안한 나날들이었습니다.

대부분 모두 고달픈 삶을 살았지만, 특히 로마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일반 사람들보다 더 고달픈 삶을 선택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믿음으로 굳건히 서 있었고 흔들림 없었습니다. 열악한 상황 속에서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로마 그리스도인들은 매우 힘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단순하게 명맥 상으로 신앙생활을 한 것뿐만 아니라 매우 신실해서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매우 훌륭했습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에서뿐만 아니라 로마의 영향력 아래 있는 모든 세상에서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그들은 열악한 상황에서도 환경에 구애받지 않고 성실하게 살았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좋은 영향력을 미치며 살고 있었습니다. 소문이 얼마나 퍼졌던지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곳에서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로마를 방문한 적도 로마 성도를 만난 적도 없었지만, 그들로 인해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도록 더욱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심장부로부터 성도들의 칭찬이 자자하니깐, 어디서나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복음 사역자라면 복음을 더 잘 전파할 수 있도록 도와준 사실에 매우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에 알려지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생활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최고 영적 지도자인 바울이 그들을 위해 위로의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바울의 격려 편지에 자신들을 위해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하고 있다는 소식은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2). 그것도 유명한 바울이 자신이 처한 모든 상황을 알고 칭찬합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에게도 하나님을 향한 열정은 어렵지 않습니다. 학문적으로나 학술적으로 많이 배울 필요는 없습니다. 간단하지만 우리 주변에 이름도 없이 선한 영적 전쟁하다가 지치고 넘어진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유명한 지도자가 아닐지라도 그들을 찾아가서 위로하고 격려하시길 바랍니다. 그 위로가 그들에게는 큰 격려와 힘이 될 것입니다. 당신의 위로에 한마디로 그들은 다시 일어설 것입니다. 그러한 수고들이 부흥의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로마교회를 방문할 목적(9-13)

믿는 사람은 온 몸과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성경은 매우 강력한 어조로 우리에게 명령합니다. 계속해서 기도해야만 하며, 전 세계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해야만 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하루에 몇 분만 하거나 친한 사람들만 국한되어서는 안 됩니다.

 

9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10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11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12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13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11-13)

 

바울은 로마교회를 방문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로마 그리스도인들을 잘 알 수 없었지만, 그들의 신실한 믿음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감사하며 중보기도를 멈추지 않습니다. 자신이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위하여 기도했는데, 그 기도의 제목은 무엇입니까?

 

⑴ 간절한 바울의 기도(9-10)

바울은 먼저 사역에 앞서 자신을 소개합니다. 이 사실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도 유명한 교회 지도자인 바울에 대해 소식을 듣고 조금은 알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사역과 복음을 전하는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개인적으로 복음 전하는 일에 매우 열심이었는데, 하나님께 그런 기회를 계속해서 달라고 기도할 정도였습니다. 이 사역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증인이시라고 말합니다(9). 그래서 그는 세계의 수도인 로마로 여행하여 그곳의 시민들에게도 그리스도를 전해줄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복음으로 인해 얼마나 큰 자극을 받았는지 주목해 볼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할 수만 있으면 로마에서도 복음을 전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10).

바울의 기도는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 항상 선교지에 대해 기도로 준비하였습니다. 각 교회인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엡 1:15-16)이나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빌 1:3-4)이나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살전 1:2-3) 등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또 다른 제목은 항상 로마로 나가길 원하는 제목으로 기도했습니다(10). 그의 마음은 끊임없이 세계의 수도인 로마를 향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로마로 나가는 길은 여러 번 시도했지만, 그 길이 막혔습니다. 어떤 방법으로 로마의 문이 열릴 것인지 몰랐습니다. 언제나 실망하지 않고 로마의 길이 열리길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간절하다 못해 뜨거운 기도의 제목이었습니다. 나중에 그의 소망은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은 바로 위대한 선교사의 모습이 아니란 죄수의 몸으로 로마를 방문하게 됩니다(행 28:16).

바울이 간절히 로마에 가고 싶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당시의 로마에 대해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했습니다. 당시 세계의 수도인 로마의 화려한 문명이 있으므로 도시 문화를 관광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소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함입니다. 그 명령이 무엇입니까?

 

18너희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19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8,19)

8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복음 전파의 사명을 평생 동안 충성스럽게 감당하길 원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사명을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택함을 받은 그릇이었습니다(행 9장). 평생 자신의 사명을 잊지 않고 순종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당시 땅끝인 서머나(현 스페인)까지 나가기 위해서는 로마를 통해서 나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증거하길 원했던 것입니다.

 

⑵ 로마 방문할 목적(11-13)

사도 바울이 로마교회 방문하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가 로마에 가고 싶은 목적이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낙심하고 있는 로마 성도들에게 “신령한 은사(spiritual gift)”를 나누어주길 원했습니다. 이 ‘신령한 은사’는 신비주의자들이 말하는 이상한 은사나, 성령에게서 나오는 초능력적인 어떤 능력도 아닙니다. 이는 자주 성령에 의하여 주어지는 특별한 은사들에 대한 언급하는 것입니다(롬 12:6-8). 그러나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은혜의 진리들을 의미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바울은 영적인 선물인 복음의 진리를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바르게 전해주길 원했던 것입니다(11).

다음은 하나님의 복음을 통해서 로마 성도들과 바울이 서로 안위(위로)를 주고받기 위합니다(12).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렇게 서로 위로의 말을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타인을 무시하는 말이나 경시하는 말은 삼가야 합니다. 말 한마디가 큰 위로를 주는 능력이 될 수 있고, 큰 실망을 안겨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전하는 목회자들이 성도들에게만 위로가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 복음을 듣고 성장하는 성도들을 볼 때마다 전하는 목회자들에게도 큰 위로가 되어집니다. ‘내가 바로 이 일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구나!’하는 성령의 위로가 넘칩니다.

마지막으로 그 결과로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이 복음을 통해 서로 위로를 받고, 그들에게 열매를 맺게 위함입니다(13). 이 열매는 외적으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외적으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내적으로 변화가 일어납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성령의 열매는 심령의 변화입니다(갈 5:22-23). 내적인 열매가 맺어지면 외적인 열매는 자연스럽게 맺는 것입니다. 믿음 가운데서 성장하여 순종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빌 1:22, 골 1:6).

변화된 당신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당신이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라고 물어 올 것입니다. 그때에 ‘난 하나님을 믿어서 변화가 되었습니다. 당신도 하나님을 믿으시면 변화될 수 있습니다! 믿어 보시죠?’라고 증거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변화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게 되고 당신처럼 믿게 되어 영적인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바울의 기도의 모습을 통해서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바울 사도는 주님의 명령을 따라서 수고했습니다. 당신은 주님의 명령을 따라서 무엇을 하시길 원합니까? 또한 당신이 지금 뜨겁게 기도하는 제목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복음에 대한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당신은 항상 선교지를 향한 기도합니까? 복음을 위해 수고하신 선교사님을 들을 위해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항상 영적인 승리를 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선교는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작은 일부터 시작합니다. 선교사님들을 돕는 방법을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작은 일같이 느끼겠지만, 선교사님들에게 목회에 관한 월간지나 사모님들에게 여성 월간지를 보낸다든지, 선교사의 자녀들에게 한국 방송을 녹화해서 보낸 것도 선교를 감당한 일입니다. 우리에게는 작은 수고이지만 그들에게는 큰 위로가 되어지는 일들입니다.

 

로마교회를 방문할 계획(14-15)

우리는 살아가는 힘을 어디서 얻고 있습니까? 세상 것들로부터 얻는다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야 할 이유와 목적을 세상에서 찾는다면, 세상에 영향을 끼칠 수도 없고 바꿀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으로부터 시작한다면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삶의 목적을 복음에서부터 찾았습니다. 그는 세상을 향해 복음의 빚진 자로서 절박한 생각이 그의 인생 전체를 이끌어 나가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14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15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14-15)

 

바울은 구원의 영광스러운 소식을 온 세계에 전파하는 빚진 자의 의식을 깊이 느꼈습니다. 복음으로 ‘빚진 자’의 심정과 모든 사람에게 나아가고자 하는 준비된 마음을 갖게 하였습니다. 매우 깊이 자신이 복음에 빚졌음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강렬했고 흔들림이 없었으며 꾸준하고 강력한 의식이었습니다. ‘빚진 자’의 의식은 바울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는 실제로 자신이 세계에 복음의 빚을 지고 있다고 느꼈습니다(14). 만일 그가 침묵하고 있다면, 그것은 역사상 가장 무서운 질병에 대한 치료법을 알고 있으면서도 말하지 않는 것보다 더 큰 죄를 짓는 것이 될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전 세계에 대해 자신이 복음에 빚졌다는 것을 어떻게 선언했는지 주목해 볼 수 있습니다. 그는 “헬라인이나 야만인”들을 대조하여 말하였습니다. 그는 모든 민족과 문화, 문명화되었든 되지 않았든, 산업화되었든 원시적이든, 부자든 가난한 자든 할 것 없이 지구상의 모든 족속에게 복음의 빚진 자라고 말했습니다(14). 그는 지혜로운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을 대조하여 말하였습니다. 그는 교육받은 자나 받지 못한 자, 학식 있는 자나 무식한 자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에게 복음의 빚을 지고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바울의 마음은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자발적 의지와 긴급성 느꼈습니다. “나는 할 수 있는 대로”라는 말을 주목해 보면, 바울은 자기의 모든 것을 취하여 그것, 즉 모든 에너지와 노력, 복음의 모든 진리와 지식을 사람들에게 부어주기를 원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그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복음을 전할 기회를 놓치는 일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 속으로 들어와 자신의 메시지에 영향을 주는 어떤 장애물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살아 계신 주님의 영광스러운 메시지를 전파하고자 하는 각오는 가득 차 있었습니다.

단순히 세계의 수도인 로마로 향해 가는 것이었습니다. 로마를 넘어서 당시에 땅끝이라고 생각했던 서버나(스페인)까지 나가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할 대상은 특정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에 예외일 순 없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라고 합니다(14). 사도 바울은 인간적으로 보면 그에게 로마인들은 유대인들을 침략한 조국 유대의 원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로마에 대한 선교의 열정을 품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주신 복음을 깨닫고, 자신에게 주신 사명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복음 전파에 대한 열정은 자신이 “빚진 자”라고 비유합니다. 그의 마음에는 항상 ‘빚진 자’의 심정으로 가득했습니다. 문화의 장벽, 인종의 장벽, 종교의 장벽, 국가의 장벽을 뛰어넘어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증거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가 복음에 대해 열정적인 빚진 자의 자세에 대해서 말합니다.

 

16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고린도전서 9:16)

 

이러한 선교의 자세는 자신의 어떤 조건들에 의해서 선택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되진 것을 알았습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은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디모데전서 1:16-17)

사도 바울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증거 할 때, 먼저 외적인 판단을 합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지 기회를 놓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나중에는 그 사람에게 복음을 증거 하지 못한 일이 후회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바울처럼 복음에 대한 간절함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능력이 당신을 통해서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지금 당신은 복음에 대한 열정이 온도가 몇 도나 되십니까? 현대인들이 회복해야할 것은 복음에 대한 열정입니다. 바울은 복음에 대한 열정이 깊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향해 미친 사람이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의 이러한 열정은 빚진 자의 심정으로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그는 로마의 원수까지라도 구분 없이 하나님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의 참 맛을 본 사람은 복음에 불타오르며 선교의 열정으로 가득 차게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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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02-03)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

사도행전 2장 22-36절


성령님은 오순절에 사모하고 기다린 무리들에게 임하셨습니다. 그들은 성령 임재에 대한 엄청난 영적인 경험을 했습니다. 성령님과의 만남을 통해 성령의 언어인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예루살렘에는 유월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 천하 각국으로부터 온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성령을 받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이상하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현상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 조롱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성령의 임재를 비방하던 예루살렘 사람들 앞에서 말씀을 담대하게 전합니다. 그는 앞 단락에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에 대한 성격을 설명했습니다. 이어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의 원인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과 연관 지어서 설명합니다. 오순절 사건과 예수님의 사역 즉 복음(福音)과 무슨 연관성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사역과 죽음(22-23)

오늘 말씀의 내용은 베드로의 설교입니다. 오순절에 성령 충만함을 받은 베드로는 사람들 가운데 일어서서 선포한 것입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위대한 설교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와 감동이 되었습니다. 그 설교의 주제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23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22-23)

 

베드로가 사람들 앞에 할 말은 많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한 과거의 경험에 대해 많은 할 말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핵심은 ‘나사렛 예수’에 대해 선포합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만 이야기합니다. 그의 중심에는 명예나 직위 그리고 외모도 아닙니다. 오직 나사렛 예수였습니다. 그도 한 때는 이러한 세상적인 것에 관심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임재를 통해 변화되었습니다. 그의 삶의 주인이 자기 자신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변화되었습니다. 이렇게 변화된 베드로의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서 좋아하셨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성령 강림 사건을 비방했던 사람들에게 이 사건을 설명하면서 사건 설명으로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더 나가서 이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와 깊은 연관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앞에서 성령임재 사실을 새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요엘 선지자를 통한 예언 성취된 명백한 하나님의 사역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 말씀하신 후에 이제 예수님에 대해 설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보내신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에 충성스러웠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당시 사람들은 소식을 들어서든지 직접 볼 수 있었던지 모두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이용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였다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당시 사람을 사형시킬 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이방인인 로마 지도자들을 통해 사형일 집행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을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합작품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의 사역은 하나님의 정하신 뜻 가운데 이루어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성령 임재를 통한 베드로의 변화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었습니다. 이기주의적인 삶에서 이타주의적인 삶으로 변했습니다. 그의 자랑은 자신의 자격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24-32)

우리들이 다른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소개할 때 베드로의 사례를 들어서 중요한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어느 한 쪽만 강조할 수 없습니다. 장조점이 죽은 예수님을 실패한 예수님이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죽음이 없는 예수님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두 가지 사역을 어떻게 적절하게 풀어나가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25다윗이 그를 가리켜 이르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26그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혀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도 희망에 거하리니 27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28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셨으니 주 앞에서 내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므로 29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30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31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32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25-32)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해서 죽으심을 소개했습니다(23). 이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사건을 설명해 나갑니다. 중요한 것은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연합해서 예수님을 십자가 죽으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를 사명의 고통에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베드로는 이제 구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이 성경적인 일임을 증명 합니다. 그가 다윗을 통해 설명을 이끌어나간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로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슴에게 영적 중심에 자리가 있습니다. 그들은 다윗의 후손으로 메시아가 나올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이사야 11:10)

 

유대인들은 영화로운 메시아를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윗을 통해 설명해 나간 것입니다. 그 내용은 다윗이 오실 메시아를 기대하면서 즐거워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정작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에 가장 강력한 왕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다윗은 대단한 왕입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다윗과 같이 능력 있는 왕으로 임하실 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사도 베드로는 다윗이 기다린 메시아를 유대인들에게 집중합니다. 이러한 유대인들이 기다렸던 메시아가 예수 그리스도란 사실을 증명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16편 8-11절을 통해 다윗이 메시아를 기다렸던 장면을 소개합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9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10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11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편 16:8-11)

 

베드로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들은 다윗이 그리스도를 기다리면서 느꼈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다윗은 항상 자신 앞에 계신 주님을 모시고 살았습니다(25). 주님을 마음으로 기뻐했고 입술로 찬양했습니다(26). 육체도 희망에 거할 것이라 했습니다. 주님이 보여 주시는 생명의 길로 인해 기쁨이 충만했습니다(28).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주님으로 모시고 사는 모든 사람에게 이런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이처럼 메시아를 기다리던 다윗은 정작 죽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다윗의 묘에 장사되어 있습니다. 그 당시까지 그리고 지금까지 예루살렘에 다윗의 묘가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이기고 3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만큼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보다 우월하신 분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증명은 정말 방법을 선택하였습니다. 예수님만이 구세주인 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는 구약의 말씀과 자신의 경험 그리고 예수님의 사건을 연결시켜서 정확하게 증명합니다. 예수님은 메시아입니다.

 

예수님의 승천(33-36)

본문을 읽고 있으면 베드로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로 가득 차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가득찬 사람들은 만지기만 하면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게 되어 있었습니다.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승천하신 사건까지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34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이르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35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36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33-36)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하심으로 주님이시고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하였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사신 것뿐만 아니라 부활 후에 승천하신 것을 설명합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다윗과 비교합니다. 단순한 비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증명합니다. 다윗의 시인 시편 110편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시편 110:1)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기뻐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후손이지만 ‘주’라고 불렀습니다. 당시에 다윗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윗을 왕으로 높였습니다. 이처럼 믿음의 조상인 다윗도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경배하였는데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더 증명합니다. 믿음의 조상인 다윗은 살아서 하늘나라에 올라가지 못했다고 소개합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셔서 하늘나라로 올라가셨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베드로의 말을 듣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마음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는 갈릴리의 어부였습니다. 정규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았던 무식하고 비겁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예전의 베드로가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그에게 임하셨을 때, 성령 충만해져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으로 가득찬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사람들에게 분명히 밝혀 주었습니다. 이러한 능력은 성령님께서 제공해주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베드로는 예루살렘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간단하면서도 명료하게 메시아에 대해 설명하였습니다. 이렇게 설명한 이유는 이제는 그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영접해야 한다고 촉구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 메시아입니다. 그분을 영접하시길 바랍니다.

 


오순절 성령 감림 사건은 하나님의 사람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비겁함에서 담대하게 변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확실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즉 죄인들을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것을 증명했습니다. 이를 통해 많은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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