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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1-03)


세례 요한이 선포한 새 시대

마태복음 11장 20-30절


결혼식이나 대사가 있을 때, 잔치에 초대하는 청첩장이나 초대장을 보냅니다. 그 초대장대로 가면 잔치에 참석할 수 있습니다. 초대에 응하지 않으면 당연히 참여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보내는 천국의 초대장입니다. 이 초대장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응답하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고 거절하는 사람은 심판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베푼 일에 대해서 적절히 반응하지 않는 마을들과 가버나움을 정죄하시고 자신의 사역에 긍정적으로 반응한 사람들의 의외의 사람들이라는 것을 나타내십니다.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과 이에 대한 운명, 제자들의 반응과 이에 대한 운명을 대조적으로 설명합니다. 권능을 경험하고도 회개하지 않는 도시를 심판을 선포하십니다. 예수님의 권위를 어린이와 같은 이들에게 나타내심을 감사하며, 사람들을 안식으로 초대하십니다.

 

회개하지 않은 영혼들(20-24)

진정한 ‘안식(安息)’은 주님과 만남에서 시작합니다. 주님과의 만남이 삶에 지친 인생에게 진정한 안식을 선물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다 내게로 오라’고 명하십니다.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쉼을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21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22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23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2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20-24)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가장 많은 행했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꾸짖기 시작하셨습니다. 기적을 베푸신 갈릴리 도시들-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권능의 행위에 대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도시들이 심판을 받게 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능력의 행위에 대해 예수님께 기대하신 반응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세례 요한과 예수님께서 동일하게 요구한 것으로, 하늘나라가 임할 때 사람들이 보여야 하는 반응입니다(3:2; 4:17). 만일 이방 도시인 두로와 시돈에 사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기적을 보았다면, 그들은 요나의 메시지에 반응했던 니느웨 사람들처럼,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했을 것입니다. 가버나움이 회개하지 않은 문제는 소돔이 멸망한 이유보다 더 심각하여 가버나움의 불길한 운명이 예견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을 하늘나라 사역의 본부로 삼았고(마 4:13; 9:1), 많은 기적을 이곳에서 행하셨습니다(8:5-17; 9:1-34). 이는 이방의 갈릴리에 빛이 비친 것으로 예언의 성취를 의미했습니다(4:14-16; 9:1-2). 가버나움은 음부에 보내질 것입니다(23). 은유적으로 우주에서 가장 낮은 곳인 음부는 교만한 대상의 운명을 묘사하기에 가장 적절한 개념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의 운명을 위해 사용한 본문은 이사야 14:13-15입니다. 이 본문은 바벨론 왕(느부갓네살)의 운명으로 설명하는데, 구약 본문 역시 하늘과 음부를 수직적으로 배치해서 하늘에까지 올라가려고 할 만큼 교만한 바벨론이 음부(스올)에 떨어지게 될 운명을 강조합니다. 바벨론 왕은 하늘을 상징하는 높은 산에 오르려고 멸망했으나 깊은 구덩이로 떨어집니다. 가버나움은 바벨론 왕의 운명에 참여할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소돔과 고모라의 운명을 사용하십니다(24). 유대인들은 소돔 땅을 가장 악한 행위를 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곳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경고를 목적으로 소돔을 자주 활용했습니다. 유다서에서 소돔 사람들과 타락한 천사들은 창조 질서를 거스른 죄를 지은 것으로 불 심판을 받은 것으로 묘사됩니다(참조. 23). 메시아를 만난 특권을 가진 가버나움의 죄는 소돔의 죄보다 더 큽니다. 가버나움(과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알 수 있는 기적과 복음을 경험한 특권에도 불구하고 하늘에까지 높아지는 교만으로 예수님의 정체를 아는 데 실패했고, 높은 교만의 정반대 개념인 낮은 음부가 운명이 될 것입니다. 하늘나라가 이미 도래했기 때문에, 이 나라를 가지고 온 메시아에게 반응하지 않는 자들의 운명은 음부에 있는 자들과 같게 될 것입니다. 특권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기대된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이 교만입니다. 가버나움은 메시아를 드러내고 하늘나라의 도래를 알리기 위해 가장 많은 기적을 경험하고 복음을 듣는 특권을 얻었으나, 회개의 반응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버나움은 하늘나라의 현존을 경험한 특권을 누렸지만, 반응을 보이지 않아서 몰락한 것입니다.

 

제자들의 운명과 초대(25-30)

무거운 짐을 지고 지친 사람들에게 쉼을 주겠다고 약속하시며 초대하십니다. 예수님께 나아와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메자고 하십니다. 참된 쉼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나를 버리고 주님께 맡겨야 쉼이 있습니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께 배우고 도움을 받아 그 말씀에 순종할 때 말씀이 주는 자유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25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26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7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28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25-30)

예수님께서는 악하기를 소문난 세 도시 두로와 시돈 그리고 소돔과 비교하면서, 이 도시들이 당한 심판보다 더 크고 무거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의 운명과 달리 제자들의 운명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합니다(25). 하나님께서 계시를 슬기롭고 똑똑한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십니다. 이는 아버지와의 친밀한 신뢰 관계를 의미하고 하나님과의 예수님만의 독특하고 유일한 관계를 내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를 뜻하는 이 모든 것을 아들을 통해 제자들에게 계시하셨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슬기롭고 똑똑한 사람들이 어떤 것이든 잘 파악하고, 어린아이들은 어려운 내용을 알 수 없으나 예수님께서는 반대로 말씀하십니다. 제자들과 같이 자신들의 지식이나 선입견을 버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계시를 깨닫게 하십니다(예/18:14). 예수님께서는 소자들이 예수님의 사역을 깨닫게 된 것을 아버지의 기쁜 뜻으로 이해하십니다(26). 마태는 ‘보좌 앞의 회의’, 즉 ‘코람데오’를 묘사하려고 ‘당신 앞’을 사용합니다. ‘앞’은 하늘 법정(또는 회의)의 공간적 장면을 암시한다면, 본문에서 가리키는 ‘아버지 앞의 뜻’은 하늘 법정(회의)에서 선포된, 예정된 하늘의 뜻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예정된 목적 또는 뜻을 전달하는 것은(마 11:26) 예수님의 선재성을 의미합니다. 아들은 하늘에 숨겨진 ‘모든 지식’을 선언할 수 있는 모든 권세를 받았습니다(참조, 단 7:13-14). 아들은 하늘(법정 또는 회의)에 선재한 아들이요, 하늘의 하나님 옆에 앉아 있던 신적 지혜이기에, 하늘의 뜻을 전하는 예수님의 권위는 절대적이기 때문에, 아들을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를 알 수 없습니다. 제자 공동체는 어린아이들로서 이 지식을 알기에 구원의 공동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의 친밀하고 유일한 관계를 언급하고 나서 제자들을 초대하십니다(28). ‘내게로 오라’는 지혜를 향한 초대이며, 초대의 결과는 29절에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멍에를 메고 배우라고 하십니다. ‘멍에’는 두 마리의 짐승이 함께 일할 수 있도록 목에 설치하는 도구로 은유적으로는 순종, 섬김 등을 뜻합니다. 토라의 멍에(시락서 51:26)라는 표현을 고려하면, 예수님의 멍에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도록 돕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왜 예수님에게서 배워야 합니까? 첫째, 예수님께서는 온유하고 겸손하시기 때문입니다. ‘온유’는 친절한 성품이 아니라 겸손한 태도를 가리킵니다(5:5).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의 겸손한 모습도 온유로 표현됩니다(21:5). 이 단어는 ‘낮아진’ 예수님의 삶을 가리킵니다. 낮아진 예수님께서는 고난과 수치의 정점인 십자가에 달리는 길을 가십니다. ‘낮아진’(개역개정 ‘온유한’)은 이어서 나오는 ‘겸손한’과 같은 의미입니다. 구약의 몇 본문에는 ‘온유한’과 ‘겸손한’이 함께 등장합니다(이사야 26:6; 스바냐 3:12). ‘겸손한’은 낮춘다는 의미입니다. 18:4의 ‘낮춘다’는 수치를 겪는다는 의미에 더 가깝습니다. 예수님의 낮아짐은 그가 겪은 수치를 의미합니다. 둘째, 예수님의 멍에는 좋고 그의 짐은 가볍기 때문입니다. ‘쉬운’은 주인의 배려를 의미하는 ‘좋은’, ‘적합한 등의 뜻에 가깝습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제자의 인생에 가장 적합한 것이고 긍휼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짐은 실제로는 가볍지 않기 때문에(16:24), ‘가볍다’의 의미를 역설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자의 삶은 낮아지고 희생하신 예수님과의 관계에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의 짐은 쉽게 느껴집니다. 또한 예수님의 멍에(가르침)는 회복을 목적으로 주시는 것이기에 가볍습니다. 그의 쉼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진리를 깨닫고 행함으로써 얻는 만족이며, 종말론적으로는 영원한 나라에서 안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히 4:3). 특히 희생하시는 예수님과의 관계에 들어감으로써 얻게 되는 안식은 12:1-14에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육신하셔서 우리 개별 인생에 반드시 필요한 것을 가르치십니다. 그는 우리를 위해 낮아지고(온유하고) 낮아져서(겸손해서) 십자가에서 온갖 수치를 당하는 지경에 이를 정도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인생에서 지치고 해답이 보이지 않아 좌절할 때 유일하게 안식할 곳은 예수님의 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초청하십니다. 그는 우리를 쉴만한 물가와 푸른 초장으로 이끄시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요즘 자신의 몸과 마음이 어떤 상태입니까? 무겁게 그리고 무섭게 짓누르며 안심과 쉼을 누리지 못하게 만드는 짐은 무엇입니까? 우리를 안식으로 부르시는 주님의 초대에 응답하여 우리의 모든 짐뿐 아니라 자신을 주님께 맡기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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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20-02)


위기 때에 있어야 할 지혜

사무엘하 20장 14-26절


세상은 힘을 숭상하는 자들의 놀이터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원하는 대로 다 되었다면 공멸하였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세상이 유지되어온 것은 힘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가 세상을 살리고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주권자이심을 믿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맑은 날에는 우산의 필요성은 잘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평소에는 지혜의 필요성을 잘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 지혜는 그 힘을 발휘해서 많은 사람들을 살립니다.

 

다윗은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킨 세바를 잡기 위해 아마사에게 유다 사람들을 모아 군대를 소집하라고 명령하지만, 이것이 지체되자 아비새에게 세바를 잡으라고 다시 명령합니다. 아비새와 함께 기브아에서 아마서를 만난 요압은 아마사를 만나자 인사하는 척하며 아마사를 죽입니다. 그리고 군권을 장악한 요압은 세바를 추적하기 시작합니다. 그 사이에 세바는 온 이스라엘을 다니며 군사를 모아서 아벨 성읍에 진을 치게 됩니다.

 

요압이 아벨 성을 파괴하려고 함(14-15)

하나님꼐서는 충성된 일꾼을 세워서 교회를 지키십니다. 참된 성도라면 교회의 어려움을 수수방관해서는 안 됩니다. 그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애끓는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이고 애통 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자가 참된 일꾼입니다. 예레미야가 이스라엘의 고통을 보고 통곡하며 부르짖은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14세바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 두루 다녀서 아벨과 벧마아가와 베림 온 땅에 이르니 그 무리도 다 모여 그를 따르더라 15이에 그들이 벧마아가 아벨로 가서 세바를 에우고 그 성읍을 향한 지역 언덕 위에 토성을 쌓고 요압과 함께 한 모든 백성이 성벽을 쳐서 헐고자 하더니(14-15)

세바가 아벨과 벧마아가에 있는 성읍에 들어가 숨고 성문을 닫자 요압은 토성을 쌓아 성벽을 하려고 합니다. 그 성읍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반란군을 진압하여 다시 옛 세력으로 회복하려는 관심뿐입니다. 주님을 위한 일이라고 다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진화를 물으십니다.

(1) 세바 반란군의 동향(14)

요압이 개인적인 욕망을 위해 아마사를 죽이며 시간을 보내는 사이 세바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 지역 가운데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아벨과 벧마아가와 베림 온 땅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요압은 세바를 쫓아 아벨로 갑니다. 여기부터 세바를 상대하는 인물은 다윗이 임명한 아비새가 아닌 요압으로, 그는 아마사를 죽이고 동생 아비새를 대신하여 다윗 군대의 군권을 손에 쥔 것을 보입니다. 아벨은 홀레 호수에서 북쪽으로 약 20km 떨어진 성읍으로 여겨집니다. 벧마아가는 아람에 속한 마아가 왕국의 도시이면서 아벨과 매우 가까이 있었을 것입니다. 흔히 아벨 벧마아가로 두 성읍을 붙여서 부르기도 헸습니다(20:15; 왕상 15:20; 왕하 15:29). 베림은 한 지역의 이름일 것입니다. 이 지역 역시 아벨 주변일 것으로 추측되나, 정확한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2) 요압의 포위(15)

세바가 어떤 의도로 아벨 성으로 들어갔으며 아벨 사람들이 세바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합니다. 여기에 이르렸을 때는 사람들이 이미 상당수 모여서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요압의 군대는 아벨 벧마아가에서 세바르 가두고 성을 행햐 해자를 메우는 토성을 쌓았습니다. 요압과 함께 있는 모든 군사가 토성을 이용해 해자를 넘어가, 성벽을 쳐서 무너뜨리려 했습니다. 그는 세바를 잡기 위해 이스라엘 성 하나를 완전히 파괴하려고 한 것입니다.

 

아벨의 지혜로운 여인의 연설(16-19)

지혜의 말씀으로 세우시고 보호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의 검을 통해 교회를 수호하고 악한 세력을 무너뜨리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회를 세워 나가야 합니다. 교회는 진리의 말씀에서 떠나 세속적 가르침을 따를 때 무너집니다. 각종 이단이 교회 안에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피차 치열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가르치며 교회를 세워 나가야 합니다.

16그 성읍에서 지혜로운 여인 한 사람이 외쳐 이르되 들을지어다 들을지어다 청하건대 너희는 요압에게 이르기를 이리로 가까이 오라 내가 네게 말하려 하노라 한다 하라 17요압이 그 여인에게 가까이 가니 여인이 이르되 당신이 요압이니이까 하니 대답하되 그러하다 하니라 여인이 그에게 이르되 여종의 말을 들으소서 하니 대답하되 내가 들으리라 하니라 18여인이 말하여 이르되 옛 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아벨에게 가서 물을 것이라 하고 그 일을 끝내었나이다 19나는 이스라엘의 화평하고 충성된 자 중 하나이거늘 당신이 이스라엘 가운데 어머니 같은 성을 멸하고자 하시는도다 어찌하여 당신이 여호와의 기업을 삼키고자 하시나이까 하니(16-19)

요압의 무자비한 계획에 한 지혜로운 여인은 부드럽게 항거합니다. 자기 목적만 보고 밀어붙이는 요압의 혐의 정치가 여호와의 유업을 간직하고 평화를 갈망하는 한 무명 어머니의 목소리 앞에서 꺾입니다. 평화와 하나님의 유업을 짓밟는 세력에게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 것입니다.

(1) 요압과 만난 지혜로운 여인(16-17)

이렇게 아벨 성이 파괴될 위험에 처하게 되자 이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한 인물이 성읍을 대표하는 협상가로 등장합니다. 그 사람은 ‘지혜로운 여인’으로 표현된 한 이름 없는 여성입니다. 이 표현은 드고아의 지혜로운 여인과 동일한 표현입니다. 이 여인은 성읍에서 자신의 말을 들으라고 반복적으로 소리를 치며 요압에게 자신의 말을 듣기 위해 가까이 오라고 요청합니다. 이 모습은 잠언 8:6에서 지혜가 길 가의 높은 곳과 네거리에서 성문 결과 문 어귀와 여러 출입문에서 사람들을 부르며 자신의 말을 ‘들으라’고 외치는 것과 유사합니다. 그리고 요압은 이 지혜로운 여인의 외침을 듣고 그녀의 말을 따라 그녀에게로 다가갑니다. 아마도 지혜로운 여인은 성벽 위에서 외치고 있었고, 요압은 그녀의 말을 듣기 위해 성벽으로 다가간 것입니다.

(2) 지혜로운 여인의 질문(18-19)

이렇게 요압을 가까이 오게 한 지혜로운 여인은 자신을 ‘당신의 여종’으로 매우 겸손하게 표현하며 부드러운 말로 협상을 시작합니다. 이것은 아비가일이 다윗과 협상하기 위해 자신을 ‘여종’이라고 표현한 것과 유사합니다(삼상 25:24). 하지만 부드러운 시작과 달리 그녀의 말은 매우 논쟁적이며 훈계조입니다. 아벨의 여인은 네 가지 이유로 아벨을 공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데, 첫째 아벨이 유서 깊은 지혜의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아벨의 지혜로운 여인은 ‘아벨에게 가서 물을 것이라’라는 속담으로 말을 시작합니다. 아벨이 옛날부터 지혜 전이 있는 도시로 이곳에 지혜로운 조언을 듣기 위해 많이들 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일을 끝내었다는 말은 그곳에서 조언을 구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즉, 아벨이란 도시는 지혜가 매우 깊고 풍부하고 유용하며 이스라엘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여 아벨을 공격하는 것은 잘못임을 일깨웁니다. 둘째로, 자신은 충성되고 평화롭게 이스라엘의 통치를 받는 백성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자신이 현재 다윗 왕권을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천명한 것으로 다윗 왕권을 지지하는 자신들을 죽이는 것이 정당한지를 간접적으로 물은 것입니다. 셋째로, 이스라엘 중에 어머니 같은 성음을 파괴하려는지 묻습니다. ‘어머니 같은 성읍’은 ‘성읍, 즉 이스라엘 중에 어머니’라는 뜻으로 이것은 아벨이 이스라엘의 어머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의 어머니’로 불린 사람은 사사 드보라가 유일한데, 그녀는 선지자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신앙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을 올바로 재판하였으며, 또한 이스라엘을 적의 손에서 구원해낸 사사입니다. 드보라에게 와서 재판을 받았던 것처럼 문제가 생기면 아벨에 와서 물어보아 해결 받고 갔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어머니라는 것은 이스라엘을 지혜로 교육하고 조언하는 역할을 의미합니다. 넷째로, 아벨은 ‘여호와의 기업’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기업이라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에게 그곳에 살도록 주신 곳이므로 함부로 파괴하거나 빼앗거나 팔거나 해서는안 되는 장소다. 아벨의 지혜로운 여인은 아벨을 파괴하는 것은 여호와의 율법을 어기는 행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녀의 말은 여호와의 율법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은 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직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것에만 골몰하는 요압에게 그의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직언한 것입니다.

 

세바의 죽음(20-22)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말씀을 통해 세상의 핍박과 교회의 타락을 막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핍박과 어려움을 이겨 내야 합니다. 쭉 성경을 품에 안고 순교의 길을 걸었던 신앙의 선배들을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말씀의 능력이 세상을 이깁니다. 지혜로운 여인은 요압과의 담판에서 요압의 행동이 여호와의 기업을 삼키려는 행동이라고 호소함으로써 요압을 물러나게 만듭니다.

20요압이 대답하여 이르되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다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다 삼키거나 멸하거나 하려 함이 아니니 21그 일이 그러한 것이 아니니라 에브라임 산지 사람 비그리의 아들 그의 이름을 세바라 하는 자가 손을 들어 왕 다윗을 대적하였나니 너희가 그만 내주면 내가 이 성벽에서 떠나가리라 하니라 여인이 요압에게 이르되 그의 머리를 성벽에서 당신에게 내어던지리이다 하고 22이에 여인이 그의 지혜를 가지고 모든 백성에게 나아가매 그들이 비그리의 아들 세바의 머리를 베어 요압에게 던진지라 이에 요압이 나팔을 불매 무리가 흩어져 성읍에서 물러나 각기 장막으로 돌아가고 요압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왕에게 나아가니라(20-22)

세바가 여인의 지혜 앞에서 머리가 베입니다. 허망한 인생입니다. 세바는 다윗과 함께할 ‘분깃이 없다’고 한 자신의 말처럼 스스로 하나님 나라 분깃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유업을 기억하고 소중히 여긴 아벨 성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는 길을 보여주었습니다.

(1) 요압의 대답(20)

요압은 이제야 자신의 행동이 매우 심각한 죄라는 것을 인식하고 세 번이나 반복적으로 그런 의도를 가지고 행동한 것이 아니라고 강하게 부인합니다. 이런 반복적인 부인은 요압이 아벨의 여인의 공격에 당황했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아벨의 지혜로운 여인은 요압의 어리석은 생각을 깨닫게 한 것입니다.

(2) 요압의 제안(21)

요압은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후 단지 세바가 다윗에게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그를 잡으려고 하는 것이니 그만 넘겨주면 떠나겠다고 협상합니다. 무조건 공격하여 다 죽이려던 요압이 세바만 넘겨주면 물러가겠다고 한 발 물러선 것입니다. 압살롬과 아마사도 죽이는 등 다윗의 명령도 무시하던 요압이 아벨의 여인의 권위 있는 말에 승복하고 한발 물러선 것입니다.

(3) 지혜로운 여인의 설득(22)

이에 아벨의 여인은 요압의 협상을 받아들여 세바의 머리를 성벽에서 던져주겠다고 약속합니다. 그 여인은 지혜로 성읍 사람들을 설득하였고 마침내 세바의 머리를 베어 요압에게 던져주었습니다. 요압은 성읍에서 물러가고 아벨은 무사하게 됩니다. 여기서 나타나는 아벨의 지혜로운 여인의 모습은 그녀가 아벨의 지도자였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녀는 성읍을 대표하는 지도자로서 요압의 공격의 부당성을 폭로하며 협상하였으며, 요압의 말을 듣고 세바의 머리를 넘겨주는 결정을 내립니다. 그리고 자신의 결정을 관철하기 위해 아벨의 시람들을 설득합니다. 결국 모든 일이 그녀의 결정대로 이루어집니다. 아무도 제지하거나 거부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왕의 심복인 군대장관 요압조차도 그녀의 권위를 인정하고 따르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이스라엘 사회에서 여성 지혜자가 한 지역의 지도자 역할을 하는 전통이 있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아벨의 지혜로운 여인으로 인해 요압은 어리석은 행동을 멈추었고, 아벨은 전쟁과 살육과 파괴를 피할 수 있었으며, 다윗 왕은 자신의 백성을 학살하였다는 악평을 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다윗은 세바를 제거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제압하고 다시 다윗 왕권을 든든히 세우게 됩니다.

 

조직 개편하는 다윗(23-26)

성도는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은사를 사용해서 교회가 온전히 모습을 갖추도록 해야 합니다. 만약 가르치는 은사를 가졌다면 다른 사람이 말씀을 깨닫도록 가르치며 은혜를 나눠야 합니다. 다스리는 은사를 가졌다면 교회가 질서 가운데 움질여 가도록 힘써야 합니다. 공동체를 위해 쓰도록 주신 은사이므로 자신이 받은 대로 풍성히 나워야 합니다.

23요압은 이스라엘 온 군대의 지휘관이 되고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는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의 지휘관이 되고 24아도람은 감역관이 되고 아힐룻의 아들 여호사밧은 사관이 되고 25스와는 서기관이 되고 사독과 아비아달은 제사장이 되고 26야일 사람 이라는 다윗의 대신이 되니라(23-26)

이 단락은 다윗의 신하들의 명단으로 두 명의 군대 지휘관인 요압과 브나야, 두 명의 민간 관리인 아도람과 여호사밧, 그리고 두 명의 제사장인 사독과 아비아달이며 스와는 서기관으로, 이라는 대신으로 언급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요압이 군대 최고 책임자로 언급되어 있는 것으로 아마도 요압은 아마사를 죽이고 세바의 반란을 진압한 뒤 다시 다윗 부대의 군대장관로서 권력을 잡은 것으로 보입니다. 다윗 신하들의 명단은 압살롬과 세바의 반란으로 어수선했던 정국이 다시 정상화되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다윗 신하의 명단을 끝으로 다윗 왕의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21-24장은 부록으로 다윗이 다스리던 시대에 일어난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을 모아놓은 모음집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시작한 다윗 왕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큰 은혜를 입었지만, 그의 말년은 하나님께서 그와 동행하시는 모습이 거의 나타나지 않고 다윗도 하나님께 의지하는 모습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런 다윗의 모습을 보면서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이 끝까지 신실하게 하나님을 믿는 것이 쉽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다윗은 사울처럼 왕위에서 내쫓지 않으시고 후계자도 준비해주심으로 다윗에게 약속하신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셨습니다. 결국 인간이 의지할 것은 인간의 신실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합니다.


세바와 요압은 힘으로 모든 것을 이루려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힘의 남용으로 시작된 다윗 왕가의 비극을 회복하는 데 필요한 것은 다른 무자비한 힘이 아니었습니다. 피는 피를 부르고 같은 칼을 부르지만,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고 신뢰하는 한 여인의 지혜로 하나님의 유접은 보존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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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03-01)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한 의문점

로마서 3장 1-8절


사람들은 살아가면 많은 하나님의 역사와 기적을 체험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렇지만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 대해서 많은 질문과 의심을 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행동을 나무라지 않으십니다. 친절하게 하나하나 대답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분명하게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따라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은혜가 풍성하신 분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게 전달되길 축복합니다.

 

그 동안에 유대인들은 스스로 우월감에 빠져 있었습니다. 세상에 많은 민족들은 멸망해도 자기 민족만은 구원을 받는다는 어처구니없는 교만에 빠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들인 이방인은 물론이고 유대인들까지도 죄인임을 지적했습니다. 이것으로 유대인들에 대한 고정관념이 완전히 파괴 되었습니다. 이제는 유대인들의 지위를 영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말함으로서 몇 가지 반론들이 제시될 것입니다. 그 반론들을 대략적으로 논합니다.

 

유대인이 존재할 이유(1-2)

 

로마서는 ‘복음’에 대해 소개하지만, 처음부터 좋은 소식보다는 나쁜 소식을 먼저 소개합니다. 인간의 타락한 모습을, 겉으론 그럴싸해 보이지만, 속은 썩어서 냄새가 진동을 합니다. 특히 유대인들이 그런 모습입니다. 겉으로 하나님의 자녀라지만, 속에는 이방인들보다 더 탐욕스럽고 죄악으로 가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1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2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1-2)

 

앞에서 이방인들뿐만 아니라 유대인들도 죄와 심판 아래 있다고 언급하였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주장은 로마 교회 안에 있는 유대인 성들이나 이방인 성도들 모두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주장한 하나님께서 이방인들뿐만 아니라 유대인들까지도 심판하신다는 주장을 듣고, 제기될 세 가지 질문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방인과 비교했을 때, 유대인의 나은 점이 무엇인가?’, 다음으로 ‘우리가 불의해서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의가 들어난다면, 진노를 내리신 하나님이 불의하다고 할 수 있지 않는가?’, 그리고 ‘선을 이루기 위해서 악을 행해도 되는가?’ 등입니다.

 

⑴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인가(1)

첫 번째 질문인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입니다. 이 첫 번째 질문은 2장 17-24절 말씀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 동안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선택하시고 그들을 통해서 당신의 역사를 이루어 오셨습니다. 유대인들을 선택하신 하나님께서 실수하신 것이 아니냐고 그렇게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신 분이 아니다’고 반문합니다. 이러한 반문이 일어날 수 있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행합니다.

사도 바울의 주장은 할례나 혈통을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생각했던 유대인의 특권의식을 뿌리째 흔들어 놓았습니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원하는 하나님의 백성은 외형적인 유대인이 아니라 마음에 할례를 행한 사람들만이 주장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했던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진리라고 여겨왔던 내용이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스스로 질문하게 됩니다.

근본적으로 마음이 변하고 삶이 변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요구되는 것 일뿐, 몸에다 할례를 행하는 것만으로는 저절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⑵ 그에 대한 대답(2)

이제 이런 질문이 대두 될 수 있습니다.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냐?’는 자문에, 즉각적으로 ‘유대인의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그러니깐 ‘유대인으로 태어나는 것, 언약의 후손으로 할례 받은 것이 하나도 유익이 없느냐?’는 이런 질문입니다. 바울의 즉각적으로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고 대답합니다. 절대로 유대인 됨이나 할례 받음이 무익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율법과 할례가 구원을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니라, 더욱 큰 책임을 맡겨준 것입니다. 율법과 할례가 유대인들에게 구원을 보장해 줄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게는 유대인들이 소중한 존재라고 소개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특권’은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고 소개합니다. 유대인들의 유익한 하나님의 일은 많았지만,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 펼쳐 나가는 말씀의 통로이자 도구로 쓰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구약성경을 의미한 것일 수 있으나 여기서는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율법을 소유했다고 해서 저절로 율법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또 그 말씀에 순종했을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수 있는 유리한 점입니다.

언약을 맺을 때, 언약 당사자들은 서로에게 무엇인가를 서약합니다. 출애굽 19:5-8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삼겠다고 약속하셨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2:1-29에서 본 바와 같이 이스라엘은 언약의 약속에 신실하지 못했습니다. 원래 언약(계약) 관계에서는, 한편이 약속을 어기면 다른 편은 자동적으로 약속을 지킬 필요가 없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을 통하여 온 인류에게 주신 약속에 대하여 신실하심을 유지하십니다(참조 15:8). 사람은 다 거짓되지만, 하나님께서는 참되십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엔, 하나님의 신성 자체가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불성실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폐하지 못합니다.

유대인들인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지만 신실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한 번 약속하신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유지하고 전달하셨습니다.

 

유대인이 존재할 이유(3-4)

빛이 어두움 가운데서 더 밝게 빛을 발하는 것처럼, 인간의 불신실한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불순종에 대한 심판은 변명의 의지가 없고, 하나님의 지혜는 그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습니다.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결국 불순종하였음을 지적합니다.

 

3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 4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3-4)

 

유대인들의 유익 가운데 가장 큰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것’인데, 이것은 또 다른 질문을 일으킵니다. 그 질문은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3)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의미는 ‘하나님께서 본래 말씀을 통해 약속하셨던, 그 하나님의 나라인 아브라함을 통해 온 민족이 복을 얻는 계획은 사라지는 것이냐?’는 질문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유대인들 가운데 일부가 그 말씀을 받은 사명을 잘 감당치 못하여 신실하지 못한 행동을 했을 때 위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그들을 선택한 하나님의 신실함을 의심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지만 그 말씀을 따라지 않고 불순종하므로 하나님의 계획이 사라지는 것이냐 라는 지적합니다. 선민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하나님의 계획도 실패로 돌아가지 않는 상황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4a)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님의 신실함이 이스라엘의 불신실함 때문에 없어질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인간의 신실하지 못함이 하나님의 신실함을 무너뜨릴 수는 없으며, 인간이 아무리 약속을 깬다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신실하게 약속을 지키신다고 바울은 주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을 선택했을 때, 그 선택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신실치 못한 행동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방법대로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논리를 증명하기 위해서 구약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그가 인용하는 구절은 시편 51:4의 후반부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내용은 칠십인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4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시편 51:4)

 

시편 51편은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나서 회개하며 지은 시이며, 51:4은 다윗의 신실치 못함이 하나님의 신실함을 무너뜨리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더 쉬운 성경으로 살펴보면,

‘주님께만, 오직 주님께만, 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주의 눈앞에서, 내가 악한 짓을 저질렀으니, 주님의 유죄 선고가 마땅할 뿐입니다. 주님의 유죄 선고는 옳습니다.’(새번역성경)

하나님께서는 거짓말하는 분이 아닙니다. 즉, 하나님의 판단과 말씀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사실은 인간의 신실치 못함(다윗의 범죄)에 의해 뒤집히지 않으며, 오히려 하나님의 의를 드러낸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실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지만, 그 말씀에 대해 신실하지 못했습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사실로만, 그들을 거룩하게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신 것이 실수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스라엘은 신실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심을 확증시켜주는 것입니다.

 

복음을 변질시킨 궤변(5-8)

인간의 하나님의 모든 길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불순종하면 이방인들을 통해서 사역해 나갈 것입니다. 유대인들 입장에서 보면 상상도 못할 불경건한 생각이라고 할 것입니다.

 

5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6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7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어찌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8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그들은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5-8)

 

하나님께서 선택한 유대인들이 실패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실패한 이유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심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결코 폐하지 못합니다. 유대인들이 불의할수록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더욱 극명하게 대조돼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⑴ 불의하지 않는 하나님(5-6)

바울은 몇 가지 부가적인 질문으로 자기의 주장을 이끌어 나갑니다. 이번에는 ‘우리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신다면 하나님께서는 불의하시냐?’라고 묻습니다. 그는 즉시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라고 대답합니다.

만일 우리의 신실치 못함과 범죄한 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게 되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된 것이 아닙니까? 더 나아가 사람들의 불의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면, 더 악한 일을 해서 더 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겠다고 생각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까?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바울은 절대로 그렇게 될 수 없다고 대답합니다.

불의하시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세상을 심판하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 그럴 수 없습니다. 거짓말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면,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은 거짓말투성이가 될 것입니다. 그분이 범죄한 유대인들에게 진노를 내리시는 것은 절대로 불의하지 않습니다.

 

⑵ 예상 가능한 두 가지 반론(7-8)

바울은 질문과 대화식을 통한 교육 방법을 사용하여 유대인들로부터 제기될 만한 추가적인 질문들을 먼저 던집니다. 5절에서 ‘언약의 파트너인 유대인들의 신실하지 못함을 통해, 하나님의 의로움이 들어났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진노를 내리시는 것이 합당합니까?’, ‘유대인의 불신앙이 결과적으로는 하나님께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까?’를 질문에 파생되는 또 다른 질문들을 던집니다. 바울은 ‘나의 거짓말이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더 풍성히 드러내어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하나님께서 어찌 나를 죄인처럼 심판하겠느냐?’(7)입니다. 심지어는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8)라는 보았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직접 받았던 비방을 언급하고 있는데, 그 내용이 바로 바울이 그런 복음을 전하고 다닌다고 공격했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복음을 반대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바울의 설명한 복음은 악을 더 조장한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6:1,15). 이 단락에서 바울은 일단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불의할 수 없다’(5,6)는 강한 부정만을 남기고 추가적인 논의는 뒤 단락으로 넘깁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들은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8)고 경고합니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심판하신 분임을 다시 상기시킵니다(참고 6). 세상을 심판하실 분에게 불의가 있다면 그가 세상을 심판할 자격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 주제는 다음 3:29-30절에서 다룹니다.

 

29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30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롬 3:29-30)

 

사람의 신실함이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만나면 사람에게는 구원과 결실을 맺게 됩니다. 반대로 사람의 불의함이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만나면 진노의 심판으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죄과대로 심판하지 않습니다. 회개하고 돌아오면 용서하시고 의로움으로 회복시켜 주십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제기된 문제에 대해 자세하게 반박하기보다는 강한 부정을 하고 넘어갑니다. 왜냐하면 5:20-6:4에서 다시 이 문제를 자세히 거론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심으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손상시키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궤변으로 조롱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죄를 범함으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드러냈으니, 하나님의 선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더 악한 행동을 하는 것이 좋겠구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신들이 이방인처럼 심판을 받을 이유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궤변이요 억지입니다. 그리고 책임 회피에 불과하지 않았습니다.

 


2장에서 바울은 종말론적인 심판과 관련하여 유대인의 율법 소유와 할례의 특권을 박탈한 다음, 3:1-8에서는 유대인의 항의에 대하여 답변합니다. 3:1-4에서는 하나님의 언약적인 신실하심 안에 있는 유대인의 유익을 주장합니다. 그리고 3:5-8은 하나님의 의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는 방종주의의 위험을 취급합니다. 이스라엘의 불신성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나타내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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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01-05)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결과

로마서 1장 24-32절


현대인의 삶을 보면, 굶주린 하이에나 무리와 같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먹잇감을 찾아 헤매는 모습은 비슷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남녀노소 빈부귀천이 따로 없습니다. 죄악을 찾아 어슬렁거리며 헤맵니다. 아주 고상한 죄를 찾아서 죄악의 쓰레기통을 찾아다닙니다. 죄악만 들통나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쓰레기통을 뒤진 짐승들은 음식물 냄새가 배듯이, 말하지 않아도 삶의 악을 볼 수 있습니다.

 

앞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 좇아 나타난다”(1:18)고 했습니다. 본문은 특별히 하나님께서 진노를 나타내신 네 가지 방식에 대해 논하고 있습니다. 네 가지 방식 모두가 사람에게 임하는 심판에 관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의 경건치 않음과 불의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진노하심으로써, 그 진노가 사람에게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 중 세 가지는 현제적 심판이며, 이것들은 오늘날 우리의 삶에 일어나고 있습니다(24-31). 마지막 심판은 미래적인데, 사람에게 임할 최후의 심판이 될 것입니다(32).

 

더러움에 버려두신 하나님(24-25)

요즈음 문명이 발달하여 한겨울에도 싱싱한 채소를 먹을 수 있습니다. 인류는 비닐로 열을 보호하는 방법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겨울철에 강한 바람에 의해 비닐이 걷히면, 식물은 얼어 죽습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비닐하우스처럼 보호받습니다. 하나님 아래 있으면 항상 안전하게 살아갑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보호 손길을 거두시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쓰러집니다.

 

24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25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24-25)

 

‘복음’에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만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도 포함합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한동안 악을 심판하지 않으실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심판을 미루거나 악을 용인한 것이 아닙니다. 또한, 악에 대한 타협도 아닙니다.

 

⑴ 방치로 심판하신 하나님(24a)

이방인들의 죄를 지적한 바울은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가 임했다고 하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신성에서 벗어나고자 하나 벗어나려고 하지만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반대하고 어기는 자들은 자신들의 죄의 결과를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데, 바로 그 점에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 것입니다. 이 진노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내버려 두신’ 것으로 표현됩니다. 이 표현은 후렴처럼 세 번이나 반복되어 나타납니다(1:24a; 26a; 28b).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진노’라고 생각하면 하늘 날벼락 같은 혼쭐을 내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진노’는 사람들의 생각과 전혀 다른 방법으로 임합니다. 사람들이 우상숭배 할 때, 하나님의 반응은 ‘버려두심(방치)’의 법칙입니다. ‘내버려 두심(παραδιδωμι)’은 문자적으로 ‘넘겨주다(hand over)’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⑵ 방치된 인류(24b)

‘어떻게 ‘방치(放置)’ 또는 ‘유기(遺棄)’가 하나님의 진노가 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할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그대로 놓아두는 것에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방치한 것이 좋지 않으냐?’, ‘자유스럽게 사는 것이 얼마나 좋지 않으냐?’고 반문할 분도 있을 것입니다. 아직까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제대로 깨닫지 못한 질문입니다.

바울은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24b)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님께서 방치하신 이유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싫어하였기 때문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보호(保護)’하심을 ‘간섭(干涉)’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을 스스로 격리하여 마침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비극적인 상황에 빠져들어 가게 그냥 방치해 두셨습니다. 인간들은 자기가 의도한 대로 막대한 자유를 누리게 되었지만, 그것 때문에 자기 자신을 파멸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눈이 어두우니 하는 일마다 망할 짓이었습니다. 마치 청소년들이 부모의 간섭이 싫어서 가출한다고 전해듭니다. 부모의 보호로부터 떠난 순간부터 아이들은 스스로 자신을 보호해야하고, 자신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하며, 스스로 자신의 미래를 결정해야 합니다. 아직 삶을 결정할 수 없는 시기에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러니깐 대부분 가출 청소년들이 탈선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가장 무서운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부자 관계가 깨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부양의 의무를 책임지지 않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능력이 자녀들에게 공급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좋은 충전 전자기기는 점점 시간이 지나면, 그 전원이 소진되어 방전되면, 아무 소용없는 일도 할 수 없는 거추장스러운 물건에 불과합니다.

 

⑶ 진리를 거짓으로 변환(25a)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상태를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로마서 1:21)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들도 삶의 기준이 있습니다. 바울은 ‘더러운 정욕’이라고 소개합니다. 하나님의 보호를 받지 않는 인간의 마음은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가 되어버립니다. 브레이크 없는 차는 속도를 내면 낼수록 무서운 흉기로 변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범하는 죄의 정도에 따라 더욱 부패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두셨습니다.

가장 불쌍한 성도들은 어느 누구에게도 가르침을 받지 않으려는 사람입니다. 누구도 가르칠 수 없기 때문에, 아직 영적으로 성숙하지 않는데도,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해 나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삶은 얼마나 힘들고 어렵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강력하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16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8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갈라디아서 5:16-18)

성도들이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지 않을 방법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육신의 소욕을 이길 수 있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⑷ 인간들이 버리려는 하나님(24b)

바울이 부정적이고 무거운 교훈을 하다가, 잠시 밝은 분위기로 전환합니다. 그 내용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다시 짧게 설명합니다. 아무리 인간들의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거부하여도 인간이 어떠한 거짓 행위도 하나님의 고유하고 변하지 않는 영광을 손상시킬 수 없습니다. 절대로 하나님은 변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은 영원히 찬송을 받으실 분이시다’(25b)고 찬양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그분이 행하신 놀라운 일에 대하여 오직 찬양하는 방식으로만 하나님을 언급할 수 있습니다.

 

버려두심으로 진노하신 하나님(26-27)

뿌려진 씨앗은 언젠가는 싹이 날 환경이 알맞으면 납니다. 싹은 성장하고, 시간이 흐르면 열매를 맺습니다. 이것은 자연 순리의 ‘뿌려짐의 법칙’입니다. 사람의 행위도 그렇습니다. 선한 씨만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악한 씨도 뿌려면 반드시 그 열매가 맺습니다. 지금 당신은 무엇을 뿌리고 계십니까?

 

26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7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26-27)

 

하나님을 떠나서 살아간 인간들의 특징은 정욕을 따라 살아갑니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께서 대응하신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방탕한 삶에 ‘내버려두심’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자들을 무엇을 하든지 그대로 ‘내버려두심’, ‘방치’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가 이를 때까지 악 가운데 방치 하십니다.

 

⑴ 방치된 인간들(26-27a)

하나님을 떠나간 인간들에게 먼저 나타나는 현상은 ‘성적인 욕망’입니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성적인 욕망과 흥분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제어할 수 없는 발정난 암나귀와 같습니다(예레미야 1:24).

하나님께서 존재하지 않는 사회를 보면, 대부분 기본적으로 인간의 도리인 성적인 윤리를 벗어납니다. ‘불륜’도 부끄럽지만, 본문에서는 ‘동성애’까지 거론합니다. 그래서 ‘성적 타락’으로 가득합니다. 이것은 저보다 독자들이 더 잘 알 것입니다.

범죄한 사람들은 관계가 파괴됩니다. 첫 번째 관계 파괴는 ‘하나님과의 관계 파괴’되고, 다음으로 ‘사람들과 관계 파괴’가 됩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들을 순리대로 쓰려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버리신 처음 파괴된 예로 그들이 추구하는 것이 ‘동성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동성애’라는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반하여 ‘부자연스러운(역리)’ 행동을 하게 합니다. 인간들이 하나님 대신에 자기들이 만든 우상으로 바꿔치기 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 가운데 바울이 본보기로 보여주는 것이 ‘동성애’입니다. 당시에 망령된 문화는 ‘동성애’을 용인하고 심지어 높이 기리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부끄러운 죄인 줄 모르고 ‘동성애’가 합법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동성애’는 하나님께서 분명히 죄라고 명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동성연애’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거나 창조하신 뜻대로 사는 형태가 아니라고 보여줍니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이것이 죄 중에 가장 큰 죄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동성애’를 본보기로 사용하는 이유는 아마도 당시 이방인 상류사회에 널리 퍼져 있던 문화가 이방인의 죄성을 잘 보여주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말할 필요도 없이 ‘동성애’는 죄었습니다. 레위기 18:22-23에 이미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죄목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가장 큰 죄는 아니지만 죽어 마땅한 죄인 것이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은 개인의 모습에 관해서 무엇보다도 먼저 동성애를 들고 있습니다. 정욕으로 가득 찬 인간들은 동성애의 갈망으로 가득 찼습니다. 여자와 남자들이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서로를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였습니다(26,27).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입니다. 남성과 여성이 인격체로서 사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함께 살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수컷이 수컷의 관계로, 암컷과 암컷의 관계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⑵ 방치된 인간들의 결과(27b)

바울은 그들이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창조질서를 교란하고 무질서하게 한 ‘상당한 보응’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은 창조질서 가운데 있는 ‘관계 회복’에서 시작합니다. 하나님 구원의 파괴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부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뿐만 아니라 모든 것들과의 관계가 파괴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배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건강을 잃어갑니다. 다른 사람과 협력관계가 아니라 투쟁 관계가 형성합니다. 그리고 물질이 수고해도 열매를 제대로 먹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모든 만물과 관계 회복을 의미입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자신과의 바른 관계, 다른 사람과의 바른 관계 그리고 다른 피조물들과 관계에 대해 온전한 인격체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는 성적인 문란으로 인해 가정과 사회가 파괴되고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성도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서 바르게 섬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 멸망의 길로 달려가는 이 세대를 보며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심(28-32)

모든 시대의 유혹은 에덴동산에서 사단이 하와에게 유혹당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는 악의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했습니다. 유혹을 허락하는 것은 성문을 열어준 것입니다. 죄는 사단에게 틈을 줄 때 생각이 들어오고 죄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28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28-32)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길 싫어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방치하셨습니다. 방치되었기 때문에, 무너집니다. 어떤 사람은 한 순간에 무너진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점점 빈집처럼 퇴락해 갑니다. 바울은 그들의 열매들을 나열합니다.

 

⑴ 상실한 마음으로 방치(28b)

두 번째 진노는 진리를 거부하는 자들을 ‘상실한 마음으로 두셨다’(28b)라고 표현합니다. ‘상실한 마음’이란 올바른 도덕적 결정을 내리기에 부적격한 마음을 가리킵니다. 피조물의 마음은 하나님의 계시의 빛에 의존해야 적절하게 기능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떠난 마음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행동을 하기에 부적절한 마음입니다.

 

⑵ 산실한 마음의 결실(29-31)

바울은 본문을 통해 우리들에게 개념도 없던 악덕의 목록까지도 등장합니다. 성경에서는 비슷한 목록들을 소개합니다. 그 내용으로 참고할만한 성경들이 있습니다(로마서 13:13; 고린도전서 10-11; 고린도후서 12:20-21; 갈라디아서 5:19-21).

 

29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29-31)

 

이 제목들을 읽어가다 보면, 벌레가 가득한 재래식 화장실 내부를 바라보고 있는 느낌입니다. 그것에는 어떠한 질서나 구조도 없습니다. 하지만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그 목록에 열거되어 있는 악덕들이 대부분 인간관계를 파괴하는 ‘사회악’이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수많은 악행들이 사사로운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소한 행동들이 공동체 구성원들의 신뢰를 깨뜨리고 사회에 독을 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우상들을 숭배하는 것은 모든 악의 시작이고 근원입니다. 우상숭배는 악덕의 홍수를 가져옵니다. 그리하여 인간 사회를 파괴하고, 창조 세계를 무서운 혼란의 구렁텅이에 빠뜨립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지극히 이기적인 사람들이 되어 자기의 존재와 가치만 주장하다가 무차별하게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고 서로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⑶ 결론(32)

바울은 죄에 대한 결과로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32)라고 합니다. 그렇게 행동하는 인간들까지도 ‘하나님의 정하심’과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1:19). 그런데도 그들은 그런 일을 행합니다. 마치 아담이 하나님의 경고를 익히 알고 있으면서도, 거침없이 선악과를 따 먹은 것처럼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이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두둔해 줍니다. 이것은 인간의 죄가 단순히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순간적인 불복이 아니라, 아주 의도적이고 계산된 도적임을 의미합니다. 결과적으로 32절에서 21-31절까지의 모든 행위에 대한 최종적인 결과는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말합니다. 죄의 대가는 사망이라고 하였습니다(롬 6:23).

그래서 하나님도 무가치한 것으로 채워진 상태로 하나님을 싫어하는 인간들을 버려두십니다. 그들의 잔인성은 자신들뿐 아니라 타인들도 이 일들을 행하도록 부추기는 데 있습니다. 당신의 마음은 진실함으로 채워져 있습니까? 아니면 허망한 것으로 채워져 있습니까?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변덕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만한 것, 자신의 죄를 알 만한 것을 보내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거절하고 받지 않았습니다. 이제껏 인간은 갖은 수단을 동원하여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며 스스로 의롭다고 속여 왔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자초한 것입니다. 사랑에도 한계가 있고, 기다림에도 끝이 있습니다.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는 자는 무서운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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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20-01)


다시 일어나는 반란

사무엘하 19장 40절-20장 13절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충신입니까? 우상숭배와 참된 하나님 경배를 가르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중심이 누구를 향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권력이 있을 때가 아니라 권력이 없을 때, 혜택이 많을 때가 아니라 희생을 요구할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따라 갈립니다.

 

다윗이 압살롬의 반란을 진압하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때, 유다 지파를 자신의 측근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그들을 이후 왕국 운영의 중심 세력으로 인정하였습니다. 베냐민 지파를 포함하여 다른 지파들이 권력 구도에서 멀어지게 되자, 세바가 그들을 충동하여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이때 다윗은 아마사를 반란 진압군의 최고사령관으로 임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요압이 아마사를 죽인 후, 다윗의 모든 군대를 이끌고 세바를 추격하였습니다.

 

유다와 이스라엘의 분쟁(40-43)

성도는 세상 사람들처럼 기득권을 지키며 자기를 높이려는 욕망을 가지지 않도록 경계하고 싸워야 합니다. 먼저 교회에 출석했다고, 직분이 있다고, 많은 헌신을 했다고 해서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 생활한 지 얼마 안 되고, 많은 일에 동참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가볍게 생각하고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기득권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분의 자녀요 그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뿐입니다.

40왕이 길갈로 건너오고 김함도 함께 건너오니 온 유다 백성과 이스라엘 백성의 절반이나 왕과 함께 건너니라 41온 이스라엘 사람이 왕께 나아와 왕께 아뢰되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이 어찌 왕을 도둑하여 왕과 왕의 집안과 왕을 따르는 모든 사람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가게 하였나이까 하매 42모든 유다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에게 대답하되 왕은 우리의 종친인 까닭이라 너희가 어찌 이 일에 대하여 분 내느냐 우리가 왕의 것을 조금이라도 얻어 먹었느냐 왕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이 있느냐 43이스라엘 사람이 유다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는 왕에 대하여 열 몫을 가졌으니 다윗에게 대하여 너희보다 더욱 관계가 있거늘 너희가 어찌 우리를 멸시하여 우리 왕을 모셔 오는 일에 먼저 우리와 의논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나 유다 사람의 말이 이스라엘 사람의 말보다 더 강경하였더라(40-43)

다윗이 전쟁에서 이기자 얼마 전까지 압살롬에게 충성 경쟁하던 자들이 서로 다윗을 왕으로 추대하겠다고 겨룹니다. 유다 지파는 혈육이라고, 열 지파는 수가 많다고 하여 자신들이 자격 있다고 주장합니다. 참 꼴불견입니다. 다윗이나 하나님보다 자기 이익을 더 중시하는 자들입니다.

(1) 다른 지파들의 불만(40-41)

다윗은 이제 무사히 요단강을 건너 백성들이 모여 있는 길갈로 가게 되는데, 이곳에서 갈등이 다시 시작됩니다. 길갈에서 유다 백성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여 다윗을 맞이하였습니다. 하지만 유다 사람들이 다윗을 영접하러 나온 모습을 보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매우 불쾌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다윗에게 유다 지파 사람들이 왕과 왕의 집을 도둑질하여 요단강을 건너도록 했다고 불평합니다. 이것은 유다 사람들이 다윗과 그의 집을 예루살렘으로 모셔오는 데 적극적으로 나선 것에 대해 불만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윗이 먼저 유다 지파 사람들에게 연락하여 자신을 데리고 가라고 한 것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을 모셔 오기로 의논하는사이에 다윗에게 반역을 일으킨 유다가 다윗을 모셔오는 것을 선전하고, 측근처럼 행동하는 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눈에는 매우 거슬렸던 모양입니다.

(2) 유다 지파의 반박(42)

이에 유다 사람들은 자신들은 왕과 가장 가까운 친족이기 때문에 다윗을 모실 권리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유다 사람들의 말은 19:12에서 다윗이 유다 장로들에게 한 말입니다. 다윗이 유다 사람들을 회유하기 위해 한 말을 유다 사람들은 다윗과의 친밀한 관계를 표시하기 위해 사용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이 왕에 대한 권한을 더 많이 가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왕에 대해 열 몫을 가졌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현재 열 지파가 이스라엘로 모였기 때문입니다. 열 지파에는 베냐민 지파가 포함되고 유다 지파에는 시므온 지파가 흡수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3) 유다 지파와 다른 지파들 사이의 갈등(43)

이스라엘 왕국에서 열 지파가 모여 있는 이스라엘의 영향력이 더 강하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유다가 독단적으로 행동한 것을 자신들을 무시하는 행위로 간주하였습니다. 하지만 유다는 자신들의 혈연관계를 더욱 주장하였고, 이런 유다의 주장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배신감을 느끼게 됩니다. 결국 이 논쟁으로 분노를 느낀 이스라엘 사람들이 세바를 중심으로 다시 반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서로의 권리를 주장하며 싸우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은 원래 하나님과의 언약을 중심으로 열두 지파가 모인 공동체였으며, 하나님의 언약 아래 바로 서 있을 때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서로 한 형제로 여길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무너지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공동체 의식이 사라진 곳에는 서로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적들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세바의 선동으로 사람이 떠나감(1-3)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형제를 비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신의 의견을 관철하기 위해 교회의 정당한 권위에 불순종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도는 교회의 하나 됨을 위해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바른 말씀이 선포되고 행정이 정당하게 운영되기만 한다면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다 할지라도 직분 맡은 자를 함부로 비방하지 않아야 합니다.

1마침 거기에 불량배 하나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세바인데 베냐민 사람 비그리의 아들이었더라 그가 나팔을 불며 이르되 우리는 다윗과 나눌 분깃이 없으며 이새의 아들에게서 받을 유산이 우리에게 없도다 이스라엘아 각각 장막으로 돌아가라 하매 2이에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 따르기를 그치고 올라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따르나 유다 사람들은 그들의 왕과 합하여 요단에서 예루살렘까지 따르니라 3다윗이 예루살렘 본궁에 이르러 전에 머물러 왕궁을 지키게 한 후궁 열 명을 잡아 별실에 가두고 먹을 것만 주고 그들에게 관계하지 아니하니 그들이 죽는 날까지 갇혀서 생과부로 지내니라(1-3)

세바가 북쪽 지파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킵니다. 유다 지파에게 주도권을 빼앗긴 듯하니 다시 다윗에게 반기를 든 것입니다. 충성심은 없고, 오직 자신들만의 이익을 대변하는 열방의 왕을 원하는 자들일 뿐이었습니다.

(1) 세바의 선동(1)

이스라엘 사람들과 유다 사람들이 누가 다윗 왕국에서 더 큰 권리를 갖는가 하는 문제로 분쟁이 일어났을 때, 유다 사람들이 주장을 강하게 펼치자 이스라엘 사람들은 상당히 불쾌해 하였습니다. 이때 베냐민 사람 비그리의 아들 세바가 이런 혼란을 이용하여 반란을 일으킵니다. 그를 불량배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다윗의 입장에서 다윗을 대적하는 인물을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만을 하나님 나라인 이스라엘 왕으로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세바는 나팔을 불어 다윗에게 맞설 군대를 소집합니다. 그리고 연설을 통해 우리가 다윗과 나눌 분짓도 그에게서 받을 유산도 없다고 합니다. 이것은 다윗이 이제 자신들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에게 각자의 장막으로 돌아가라고 연설합니다. 여기서 각자의 장막으로 돌아가라는 말은 더 이상 다윗을 따르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런 세바의 선동에 불만에 가득 차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윗에게서 돌아서서 세바의 반란에 동참하기로 결심합니다.

(2) 분열된 왕국(2)

이런 상황에서 오직 유다 지파만 다윗을 따랐고, 결국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 모습은 다윗이 처음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모습과 대조를 이룹니다. 다윗은 처음에 헤브론에서 유다 사람의 지지를 받아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넬과 이스보셋의 죽음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고, 유다와 이스라엘 사람들의 지지 속에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였습니다. 하지만 압살롬의 반란 이후 상황은 바뀌어 다윗이 처음 왕이 되던 상황으로 돌아가 오직 유다 사람의 지지만을 받으며 예루살렘으로 쓸쓸하게 돌아왔습니다. 다윗이 이런 결과를 얻게 된 이유는 다시 왕으로 복귀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의견을 묻고 도우심을 구하는 과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분명히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반란군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압살롬의 죽음 이후 또다시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정치적 수완을 이용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려 하였고, 일부 성공을 거두는 듯하였습니다. 하지만 정치적 수완은 이해관계가 부딪히자 금방 한계를 드러내고 또다시 갈등과 반란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정치적 수완과 인간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 이런 한계에 부딪히게 됩니다.

(3) 다윗의 후궁들(3)

다윗이 예루살렘에 들어와 가장 먼저 한 일은 압살롬에게 강간당한 열 명의 첩을 감시가 붙은 집 즉 감옥같은 곳에 감금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녀들을 압살롬의 반란에 동조한 죄인들처럼 다루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녀들에게 먹을 것을 주면서 기본적인 부양은 하였지만 더 이상 아내로 여기지 않았고, 그들과 관계도 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가두어 두었습니다. 이런 모습에 대해 그녀들이 ‘생과부’가 되었다고 표현합니다. 이 표현은 구약에서 여기에 단 한번 나오는데 생과부는 다윗이 그녀들을 가혹하게 대했다는 것을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그녀들의 모습은 암논에게 강간당하고 압살롬의 집에서 외롭게 지내던 다말의 모습과 유사합니다. 남성들의 힘과 폭력에 의해 또 죄 없는 여성들이 희생당하게 됩니다. 다윗이 여성에게 매정하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운 이유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압살롬의 군대장관으로 반란에 앞장섰던 아마사까지 군대장관으로 등용한 반면 힘없는 여성들은 죄인 취급하며 가혹하게 대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다윗의 모습을 보면 그가 하나님의 인정받은 인물이라 해도 가부장적인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지는 못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다윗의 예루살렘으로의 귀환은 즐겁고 행복하고 축복이 넘치는 귀환이 아니었습니다.

 

군대를 파견하는 다윗(4-10)

 

교회가 지금 말씀을 올바로 가르치고 있습니까? 깨끗한 삶을 통해 세상의 불의를 드러내고 있습니까? 교회는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등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명백히 선포해서 의와 불의를 드러내야 합니다. 빛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세상에 거룩한 삶이 무엇인지 보여줘야 합니다. 만약 세상이 행하는 죄에 은근슬쩍 동참하며 살아가고 있다면 즉시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그것을 책망해야 합니다(엡 5:11). 모든 것을 아시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하나님을 마땅히 두려워 해야 합니다(딤후 4:1).

4왕이 아마사에게 이르되 너는 나를 위하여 삼 일 내로 유다 사람을 큰 소리로 불러 모으고 너도 여기 있으라 하니라 5아마사가 유다 사람을 모으러 가더니 왕이 정한 기일에 지체된지라 6다윗이 이에 아비새에게 이르되 이제 비그리의 아들 세바가 압살롬보다 우리를 더 해하리니 너는 네 주의 부하들을 데리고 그의 뒤를 쫓아가라 그가 견고한 성읍에 들어가 우리들을 피할까 염려하노라 하매 7요압을 따르는 자들과 그렛 사람들과 블렛 사람들과 모든 용사들이 다 아비새를 따라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뒤쫓으려고 예루살렘에서 나와 8기브온 큰 바위 곁에 이르매 아마사가 맞으러 오니 그 때에 요압이 군복을 입고 띠를 띠고 칼집에 꽂은 칼을 허리에 맸는데 그가 나아갈 때에 칼이 빠져 떨어졌더라 9요압이 아마사에게 이르되 내 형은 평안하냐 하며 오른손으로 아마사의 수염을 잡고 그와 입을 맞추려는 체하매 10아마사가 요압의 손에 있는 칼은 주의하지 아니한지라 요압이 칼로 그의 배를 찌르매 그의 창자가 땅에 쏟아지니 그를 다시 치지 아니하여도 죽으니라(4-10a)

아마사에게 군대장관 자리를 빼앗기고 전쟁의 지휘권도 동생에게 빼앗긴 요압은 다윗의 신임을 얻는 아마사를 비겁하게 속여서 죽입니다. 그에게 관심은 왕도 왕의 나라도 아닙니다. 자신의 안위와 권력뿐입니다. 세바가 외부의 떠들썩한 반란자라면, 요압은 내부의 은밀한 반란자였습니다.

(1) 진압군 조직(4-5)

예루살렘에 돌아온 다윗은 세바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합니다. 일단 아마사에게 유다 사람들 중에서 자원자들을 모아 자원군을 만들라고 지시합니다. 다윗은 아마사를 자신의 군대장관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에게 공을 세울 기회를 준 것입니다. 하지만 시일이 지체되자 자신의 군대를 파견하기로 결정합니다.

(2) 아비새의 지원 부대(6-7)

그는 아비새를 불러 군대를 이끌고 세바를 추적하라고 명령합니다. 출정이 더 늦어지면 세바가 든든한 성읍들을 점령하게 되고, 그러면 세바의 반란을 진압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반란을 빠른 시간 내에 제압해야 한다는 이런 계획은 아히도벨의 계획을 기억나게 합니다. 다윗이 요압이 아니라 아비새를 부른 것을 보면 요압의 지위가 강등되어 아비새 밑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윗은 최고 군대장관의 지위는 아마사에게 주었고, 요압의 군대는 아비새의 손에 주었습니다. 아마도 다윗은 후에 요압이 명령에 불복하고 압살롬을 죽인 것을알고 강등시킨 것으로 보입니다. 7절에서 아비새는 요압이 이끄는 정규군과 다윗의 친위 용병부대인 그렛 사람들과 블렛 사람들을 이끌고 세바를 쫓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출발합니다.

(3) 아마사를 죽인 요압(8-10a)

아비새가 이끄는 군대가 출발해서 기브온 근처에 있는 큰 바위에 이르자 그곳에서 아마스를 만나게 됩니다. 아마스는 아비새가 군대를 이끌고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에서 자신이 모은 군대와 함께 합류하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사를 본 요압은 허리에 찬 칼을 떨어뜨리고 아마사에게 다가가 인사하기 위해 입을 맞추는 체하면서 손에 들고 있던 칼로 아마사의 배를 찔러 죽입니다. 요압의 칼이 어디서 나타났는지 본문은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요압이 아마사를 죽인 장면은 사사기 3장에서 에훗이 에글론 왕을 죽인 장면과 유사합니다. 이런 유사성을 통해 아마사가 눈치 채지 못하게 요압이 왼손에 단검을 숨기고 있다가 왼손으로 단번에 아마사의 배를 찔러 죽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런 요압의 행동은 그가 아마사를 우발적으로 죽인 것이 아니라 죽일 기회를 엿보다 계획적으로 죽인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평화를 말하며 인사하는 척하다가 죽인 것은 아브넬을 죽일 때와 유사합니다. 요압은 자신과 적으로 싸웠던 아마사 때문에 군대장관에서 밀려난 것에 원한을 품고 아마사를 죽인 것이고, 이것은 다윗에 대한 항의의 행동입니다. 이렇게 요압은 점점 더 다윗이 통제하기 어려운 인물이 되어가고 있으며 다윗의 리더십에 치명적인 흠집을 내고 있습니다.

 

선동으로 재기하는 요압(10b-13)

 

성도는 고난을 받는 일이 생길지라도 불의에 대해 분명한 태도를 보여야 합니다. 특히나 교회 안의 범죄라면 죄의 경중에 따라 공정하게 치리하도록 교회에 요구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꿩 잡는게 매’라는 식의 사고방식은, 하나님께서 세운 말씀의 권위를 멸시하는 행동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따라 불의를 책망하고 공의로운 판단을 시행하도록 해야 합니다.

 

10…요압과 그의 동생 아비새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뒤쫓을새 11요압의 청년 중 하나가 아마사 곁에 서서 이르되 요압을 좋아하는 자가 누구이며 요압을 따라 다윗을 위하는 자는 누구냐 하니 12아마사가 길 가운데 피 속에 놓여 있는지라 그 청년이 모든 백성이 서 있는 것을 보고 아마사를 큰길에서부터 밭으로 옮겼으나 거기에 이르는 자도 다 멈추어 서는 것을 보고 옷을 그 위에 덮으니라 13아마사를 큰길에서 옮겨가매 사람들이 다 요압을 따라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뒤쫓아가니라(10b-13)

 

요압의 전형적인 비열한 수법(3:27: 삿 4:19-22)으로 아마사를 제거합니다. 아브넬을 죽이고 압살롬을 죽일 때처럼 자신의 야망을 거스르는 자를 제거하는 데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았고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세바가 외부의 반란자라면, 요압은 내부의 은밀한 반란자였습니다.

(1) 병사의 선동(10b-13)

요압은 아마사를 죽인 후 부대를 끌고 자신이 주도하여 세바를 쫓으러 출발합니다. 본문에서 요압과 그의 동생 아비새라고 표현한 것은 이제 부대의 주도권이 요압에게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압은 자신의 부하 하나를 아마사의 시체 곁에 남겨두고 아마사의 시체를 보고 놀라며 주저하는 유다의 군사들에게 요압 자신을 따르라고 선동합니다. 이미 아마사는 죽었기 때문에 이제는 요압을 따르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아마사는 유다 군대의 지휘관이었기 때문에 유다의 군사들은 아마사의 죽음을 보고 두렵고 혼돈에 빠졌을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본 요압의 부하는 아마사의 시체에 옷을 덮고 길에서 옮겨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2) 요압의 재기(12-13)

이렇게 요압은 또다시 다윗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살려준 인물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가차 없이 죽이고 자신의 권력을 다시 회복하였습니다. 한편으로 아마사의 비참한 죽음은 그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다윗 편에 서지 않고 압살롬 편에 서서 다윗을 대적한 하나님의 벌이었습니다.

요압은 다윗 왕국에서 다윗의 반대자를 심판하는 하나님의 칼 역할을 하였지만, 정작 요압 자신은 철저하게 자신의 이익을 위해 움직였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욕심을 위해 움직이는 요압의 손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자를 심판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하나님의 심판 도구로 사용된 요압도 후에 다윗의 유언에 의해 솔로몬의 손에 죽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분열과 다툼, 은밀한 죄악의 위험에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지키십니다. 유다 지파와 북쪽 열 지파 모두 다윗이나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보다 그가 차지한 권력을 더 동경했습니다. 결국 충성 경쟁에서 밀리자 북쪽 지파들은 세바와 반란을 일으킵니다. 요압은 어떻습니까? 전쟁 공로를 앞세워 교만해졌고, 그 권한을 사적 복수에 악용한 내부 반란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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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03-01)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있는 교회

사도행전 3장 1-10절


목회를 하면서 도박에 빠진 어떤 여성도와 상담한 적이 있습니다. 신앙 상담을 하면서 도박에 빠진 이유를 들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아이들도 모두 학교가고, 남편도 직장에 가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한 번 친구들과 만나서 장난삼아 고스톱을 하게 되었습니다. 도박을 심취하면서 시간도 잘 가는 줄 모르고 무료함이 없었다고 합니다. 점점 도박에 깊이 빠지게 되었습니다. 도박 장소인 ‘하우스’를 들어가는 날은 밤새는 줄 모르고 도박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자녀들은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밖으로 돌기 시작하고, 남편은 자녀들을 양육하지 못한다고 싸우는 날이 많아지기 시작했답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는 재산도 모두 탕진하고 신용불량자가 되었습니다. 가정은 붕괴 직전이 되었습니다. 하루는 세수를 하면서 거울에 미친 자신을 자세히 보게 되었습니다. 처참하게 망가진 자신을 보면서, 문뜩 ‘정말 인간답게 사는 것이 무엇이냐?’라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번개처럼 번트기면서 순간적으로 정신을 차리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목회자에게 심방을 요청했고, 2년 동안 도박의 삶을 떨어놓고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분은 이제 삶이 완전히 변했습니다. 완전히 옛 도박의 습관을 끊어버리고 빛의 자녀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모든 사람들에게 무의미한 한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항상 예루살렘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뜻밖에 사도 베드로와 요한을 만났습니다. 사도들은 기도하려 성전에 올라가던 중이었습니다. 그의 인생은 이 사도들을 만남으로 가치 있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무의미한 인생들(1-3)

병원 중환자실에 가보면 의식이 없이 수많은 호스로 연명하고 사람들을 봅니다. 이렇게만 살아가야할까 비참한 인생들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병원 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비참한 인생이 있습니다. 하루하루 귀한 시간을 살면서도 아무런 의미 없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이렇게 무의미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소망을 줄 수 방법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다.

 

1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2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1-3)

 

사도행전 3장부터는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 세워가는 교회와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를 보게 됩니다. 정말 세상을 살리고, 죄인들을 구원하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⑴ 성전에 오르는 두 제자(1)

오순절 이후 예루살렘은 오순절 축제의 분위기 속에 뜻하지 않는 사건들로 예루살렘은 뒤숭숭 했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사람들은 이상한 분위기와 상관없이 평상시 그대로 하루에 세 번씩(오전 9시, 오전 12시 그리고 오후 3시)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도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아무런 기대 없이 종교적인 습관대로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하루는 베드로와 요한이 제 9시(오후 3시)에 또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들은 올라가다가 성전 입구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는 걸인을 보았습니다.

 

⑵ 미문에 앉은 걸인(2)

성전 미문 앞에 앉아 있는 걸인은 태어나면서부터 선천적인 앉은뱅이 장애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날마다 친구나 가족들이 그를 매고 와서 미문에 두고 떠났습니다. 미문이 이름 모를 앉은뱅이의 직장이었습니다. 그 사람뿐만 아니라 많은 거지들이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의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앉은뱅이도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의 순서를 기다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태어나면서 앉은뱅이였기 때문에 아무런 소망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의 웃음이나 당하지 않길 원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루에 3번씩 기도하려 성전을 올라가면서 도와달라는 그의 구걸 행위를 보았을 것입니다. 날마다 그가 미문에 앉은 것은 미문이 그의 직장이었습니다. 하지만 유대교는 미문까지만 유효했습니다. 유대교는 그가 하루하루 연명하는 정도로만 유익했습니다. 그가 자립해서 그곳을 떠나게 하지 못했고, 더욱 태어날 때부터 죽은 다리를 고쳐주진 못했습니다. 어떤 제사장도 그 걸인을 돌보아 주지 않았습니다.

이 앉은뱅이는 감히 유대인들과 똑같이 제사를 들릴 수 없었습니다. 당시는 앉은뱅이라고 하면 부정한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성전은 앉은뱅이 걸인이 들어가기에 너무나 거룩해서, 일반 사람들이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에 참석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육적인 앉은뱅이뿐만 아니라 영적인 앉은뱅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에게 성전은 예배하는 곳이 아니라 구걸하는 직장뿐이었습니다. 날마다 성전으로 출근하면서도 하나님을 만나기보다 돈을 많이 버는 것을 기대한 사람이었습니다. 성전 미문 곁에 앉아서 제사를 지내려 오가는 사람들이 종교심에 조금 더 많은 자선을 베풀어줄 것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습관적으로 행동하면서 새로운 것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무의미하게 세월을 보내면서 자신의 갈증을 채워 줄 무엇인가를 찾고 있습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성경 요한복음 4장에서는 사마리아 지역에 예수님께서 들어가셨는데, 한 여인이 나옵니다. 영혼이 매우 갈증 난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을 다섯이나 바꾸어보았습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에게 욕만 먹었지 갈증을 채우질 못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을 만나서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앉은뱅이 걸인에게도 진정 예수님이 필요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 중에 하루하루를 허무하게 지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무의한 생활은 일반 믿지 않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있는 성도들도 그런 허무한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아무런 기대 없이 하루하루를 습관적으로 살아갑니다. 오늘을 무의미해서 목적도 없고 희망도 없습니다. 하루하루의 삶이 가치 없는 괴로운 삶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허무함을 달래기 위해 많은 방법을 찾습니다. 수다를 떨어볼 친구들을 찾습니다. 무료한 시간을 달래보려고 술이나 도박에 빠져서 점점 술중독, 도박 중독 그리고 인터넷 게임 중독이 되어봅니다. 과연 이러한 세상 것들이 우리에게 소망을 줄 수 없습니다.

 

⑶ 제자들을 만난 걸인(3)

제자들도 습관대로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다가 그 앉은뱅이 걸인을 만났습니다. 돈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이 다가간 것입니다. 사망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 다가간 것입니다.

두 제사들이 지나가다가 그 앉은뱅이 걸인 앞에 섰습니다. 앉은뱅이는 항상 하던 대로 자신에게 관심을 보인 사람들을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번 기회가 지나고 나면, 자신에게 누군가가 자선을 베풀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습관적으로 간절하고 불쌍한 눈빛을 보내면 제자들을 처다 보았습니다. 걸인에게는 단 한 가지 외에는 아무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저 어제보다 또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돈을 적선하길 원했던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습관적으로 더 적극적으로 불쌍한 자세를 취해 보였습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현실의 삶을 유지할 금과 은뿐이었습니다.

종종 생활 속에서 무료함에 빠져 있는 사람을 봅니다. 그래서 자신의 갈증을 채워줄 새로운 것을 찾아 갈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선한 무엇인가 자신의 삶을 새롭게 변화시켜 주질 원하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그들은 자신을 갈증이 성전 미문에 앉아서 걸인 앉은뱅이와 같다는 것을 모를 것입니다. 이것이 점점 습관이 됩니다. 나쁜 습관처럼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성도들은 세속적 습관을 버리고 거룩한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새롭게 변하는 인생들(4-8)

겨울철 죽은 가지와 같은 무의미한 인생에 봄철에 생기가 돋는 듯한 삶으로 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있지만 정말 가치 없는 인생을 갈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스스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으로 새로운 생명과 능력을 공급 받아서 새롭게 살아가야 합니다.

 

⑴ 걸인을 주목하는 제자들(4-5)

4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5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4-5)

 

무능한 성전에서 할 수 없었던 일이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로 일어납니다. 걸을 수 없었던 걸인은 금과 은을 원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그에게 필요한 것을 주셨습니다.

성전에 올라가던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고 있는 앉은뱅이를 주목하게 됩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앉은뱅이이기 때문에 아무런 희망도 없었습니다. 날이 새면 또 무의미하게 성전 미문으로 나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소망이라고 한다면, 어떤 좋은 사람을 만나서 많은 돈을 구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걸인에게 사도들이 다가갔습니다. 반대로 제자들이 다가선 만큼 앉은뱅이 걸인은 최대한 더 불쌍한 모습으로 있었습니다. 가까이 온 제자들은 걸인에게 “우리를 보라!”고 희망 섞인 말을 걸어주었습니다.

사도들은 앉은뱅이에게 영원한 것을 주기 위해 ‘우리를 보라!’라고 했던 것입니다. 아마 걸인은 사도들을 향해 흥분했을 것입니다. 그는 습관대로 제자들에게 ‘무엇을 얻을까’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바라보았습니다. 걸인에게는 사도들이나 일반인들이나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늘 하던 대로 돈만 구걸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영혼의 갈증으로 허덕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름철에 시원한 생수와 같이 것을 찾습니다. 세상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성도들에게도 갈증이 나긴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광야와 같은 세상에 오아시스와 같은 것을 찾아 헤맵니다. 하지만 모래 날리는 사막일 뿐이지 진정한 생수는 주지 못합니다. 순간적으로 채워줄지 모르지만, 또 다시 갈증이 나게 합니다. 궁극적인 것으로 채워주면 갈증 나지 않을 것입니다. 육신적이고 일시적으로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관심을 세상적인 것에서 점점 영적인 것으로 돌리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⑵ 인생에게 필요한 것(6-8)

6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7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6-8)

① 영적으로 줄 수 없는 것

앉은뱅이 걸인의 기대와는 다르게 사도들은 ‘은과 금은 내게 없다’고 말했습니다. 걸인은 절망했을 것입니다. 사도들이 줄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것은 금과 은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금과 은을 약속해 주신 분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육적으로 원하고 욕망하며 성취하고 싶은 것을 채워주신 분은 아닙니다. 그런 것을 채우려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도들이 꼭 필요한 것을 아시고 주시는 분이십니다. 바로 영원한 생명인 영생입니다.

사람들의 갈증은 지속해 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을 채우시는 분이 아니라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을 주길 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시는 것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을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2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3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한복음 4:13-14)

② 영적으로 줄 수 있는 것

사도 베드로가 ‘우리를 보라!’는 요구에, 앉은뱅이 걸인은 사도들을 주목해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분명한 어조로 그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명령했습니다.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앉은뱅이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났습니다. 기적은 은과 금으로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하루하루 목숨을 연명하는 길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수단일 뿐입니다.

사도들은 ‘은과 금’으로 만족을 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은과 금은 내게 없다’라며, 오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은과 금이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도들은 재물을 가진 부자가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은 경제적으로 곤궁한 생활을 했으나 영적으로는 부자였습니다. 그들은 풍족하게 만든 것은 세상의 물질이나 명예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은과 금은 없었지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조금 더 넉넉한 소유를 가진 것이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행복은 인생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이 길만이 인간다움을 회복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그것을 가르쳐 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에 은과 금이 있어도 할 수 없는 것을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에 은과 금이 없어도 그것을 가진 사람들보다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③ 믿을 추구한 베드로

사도 베드로의 사역을 잘 살펴봐야 합니다. 그는 앉은뱅이 걸인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일어나게 만든 것’이 아니라, ‘일어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걸인의 믿음을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걸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걸인의 내적으로 무슨 변화가 일어났는지 모릅니다. 베드로의 인도에 따라 걸인이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 일으켜 세웠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제 기능을 못했던 발과 발목에 힘이 들어갔습니다. 일어나 서서 뛰었습니다. 처음으로 걸어본 것입니다. 지금까지 집과 성전 미문 앞 두 곳이었는데, 이제는 가고 싶으면 어디든지 갈 수 있었습니다. 다른 세상이 걸인에게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가 영적인 지도자에게 예수님 대신 다른 것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한 요구 때문에 어리석인 지도자들은 예수님보다 세상적인 것을 채워주려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곳에서부터 교회들이 변질된 세속화 문화 속으로 빠져 들어간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변질된 교회는 은과 금은 많이 있지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가 없습니다. 은과 금으로 변화시키려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⑶ 변화된 인생(8b)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8b)

앉은뱅이의 치유는 다른 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당사자인 본인은 얼마나 더 놀라운 일이겠습니까! 그래서 앉은뱅이의 치유된 기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어둡던 삶이 변하여 정상적인 삶으로 변화 되었습니다. 주님은 앉은뱅이를 완전하게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제 앉은뱅이는 걸을 수 있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 동안 장애인이라는 조건 때문에 성전은 금단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 없었는데, 이제 일반인들처럼 성전으로 함께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주변 사람들 앞에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자신의 변화를 찬송했습니다. 평생 동안 앉은뱅이로 성전 근처에서 걸인으로 멍든 인생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변화된 그는 성전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찬양하며 예배하는 삶으로 변화 되었습니다. 변화된 삶을 통해 그는 하나님께 찬양을 돌렸습니다.

그는 단지 치유된 것뿐만 아니라 참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어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걷고 있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기저기 걸어도 보고 뛰어도 보았습니다. 그가 기뻐 찬송하는 자체가 복음 선포였고, 진리를 증명하는 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습관적인 성전 출입과 감흥도 없던 형식적인 예배일지 모르지만, 앉은뱅이에게는 간절히 바라고 원하던 것이었습니다. 앉은뱅이는 성전의 지도자들도 모르는 참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변화는 육체적인 변화만이 아니라 영적인 변화로 이어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죄까지도 용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죄인을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일을 목격한 사람들(9-10)

세상에는 예수님에 대해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단지 병을 고쳐 주는 분이나 이 세상에서 삶을 윤택해 주시는 분으로만 이해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이런 사역만 하려 오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온전하게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구원자이십니다. 우리들은 이 세상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하게 전해야 합니다.

 

9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10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9-10)

 

예수님의 부활 다음으로 또 놀라운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예수님만 제거하면 끝나버릴 것 같은 일이 여기저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나타나 버린 것입니다. 평생 동안 걷지 못하고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던 걸인이 치유되었습니다. 그는 성전으로 들어가서 감사하며 찬양하면서 뛰었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예루살렘 사람들은 매우 놀랐습니다.

그래서 기적 이면의 의미를 깨닫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앉은뱅이 치유 사건은 눈에 보이는 기적뿐만 아니라 이면에 예수 그리스도 부활의 능력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은 예수님의 죽음이나 승천으로 끝나버린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사도들을 통해 전달되어짐을 보여줍니다. 기적의 주체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는 또한 구원자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사도들을 통해 그대로 전달되었고, 지금도 우리에게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확실히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능력으로 담대하게 선포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 당신이 붙잡아 일으켜 주어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에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명령하시길 바랍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은과 금으로 넘치는 삶을 원합니다. 교회들은 화려한 예배당 건물과 세련된 예배 형식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으려고 합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변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금이나 은 같은 재산은 없을지라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로 기뻐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늘진 상처를 만져 줄 때,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 때부터 세상은 성도들이 전하는 말을 믿기 시작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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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10-01)

 


잘 사는 삶에 대한 지혜

잠언 10장 1-17절


 

서점에 가보면 삶의 기술을 가르쳐주는 다양한 실용서적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웰빙’이 우리 사대의 화도가 된 지도 꽤 오래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잘사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는 듯합니다. 그저 잘 먹고 편히 사는 것이 ‘웰빙’입니까? 잠언은 ‘잘 사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줍니다.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의인과 악인 혹은 지혜자와 우매자를 구분 짓는 기준 중 하나입니다. 입으로 지혜와 지식의 말을 전하는 사람은 안전함과 축복의 삶을 살며, 다른 사람을 치유하고 살리는 생명의 샘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입에 미련함과 폭력을 가득 채운 자는 채찍과 가난의 고통을 겪으며 결국 패망에 이릅니다.

 

지혜자의 입술(1-17)

하나님께서는 의인을 돌보시고 악인을 벌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과 악인, 불의와 공의를 눈여겨보시며, 공의를 지켜가십니다. 혹 불의의 재물로 자신의 미래와 안전을 보장받으려 하지는 않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필요를 채우시고 책임져주시는 사실을 믿고 힘써 이를 행해야 합니다.

 

1솔로몬의 잠언이라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를 기쁘게 하거니와 미련한 아들은 어미의 근심이니라 2불의의 재물은 무익하여도 공의는 죽음에서 건지느니라 3여호와께서 의인의 영혼은 주리지 않게 하시나 악인의 소욕은 물리치시느니라 4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 5여름에 거두는 자는 지혜로운 아들이나 추수 때에 자는 자는 부끄러움을 끼치는 아들이니라 6의인의 머리에는 복이 임하나 악인의 입은 독을 머금었느니라 7의인을 기념할 때에는 칭찬하거니와 악인의 이름은 썩게 되느니라 8마음이 지혜로운 자는 계명을 받거니와 입이 미련한 자는 멸망하리라 9바른 길로 행하는 자는 걸음이 평안하려니와 굽은 길로 행하는 자는 드러나리라 10눈짓하는 자는 근심을 끼치고 입이 미련한 자는 멸망하느니라 11의인의 입은 생명의 샘이라도 악인의 입은 독을 머금었느니라 12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 13명철한 자의 입술에는 지혜가 있어도 지혜 없는 자의 등을 위하여는 채찍이 있느니라 14지혜로운 자는 지식을 간직하거니와 미련한 자의 입은 멸망에 가까우니라 15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요 가난한 자의 궁핍은 그의 멸망이니라 16의인의 수고는 생명에 이르고 악인의 소득은 죄에 이르느니라 17훈계를 지키는 자는 생명 길로 행하여도 징계를 버리는 자는 그릇 가느니라(1-17)

 

지혜로운 자는 마음에 훈계를 간직하며 말과 행동으로 선과 사랑을 베푸는 자입니다. 그러나 미련한 자는 말과 행동으로 미련함과 폭력을 나타내며 자신과 다른 이에게 고통을 줍니다.

 

(1) 표제 및 서론(1)

잠언 1-9장에는 주로 내 아들아로 시작되는 10절 내외의 권면을 담은 강연이 모여 있습니다. 반면, 10-30장에는 대부분 두 문장의 짧은 금언(=경구)이 나타납니다. 문맥과 내용 및 주제를 살펴보면, 1-9장의 강연들은 특정한 문맥 안에서 주제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주제는 대부분 여호와 경외와 관련이 있으며, 내용으로는 아버지의 훈계를 비롯하여 지혜의 초청, 지혜의 여인과 음녀의 비교가 자주 언급됩니다. 이에 반해, 10-30장의 금언들은 대부분 특정한 문맥이 없고 독립적이며 반의적이거나 비교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금언은 지혜자와 우매자(또는 의인과 악인)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배열에 있어서는 전체적으로 공통된 규칙이 있지는 않지만 어떤 한 단어나 주제 등의 의미 또는 공통된 형식을 토대로 소수의 금언들이 모여있는 형태가 여기저기 나타납니다.

한편, 잠언 10-30장 중 10:1-22:16은 ‘솔로몬의 잠언’이라는 표제(10:1) 아래 한 단락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내용상 10-15장, 16-22장의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먼저 10-15장에서는 지혜자와 우매자에 대한 대조적인 내용의 금언들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상대적으로 말(언어)에 대한 경고가 빈번하게 나옵니다. 16-22장에서는 궁이나 사회생활에 있어서 지혜자와 우매자를 비교하는 금언들이 대부분이며, 계획과 실현, 정의, 사회성 등의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주제들은 가정과 사회와 국가라는 배경 안에서 지식적, 경기 사회적, 도덕적, 영적 교훈을 제공합니다.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서, 10장 또는 10-22장 단락의 첫 금언은 지혜로운 아들이 되어 부모에게 기쁨이 되라는 내용입니다. 자녀가 지혜롭고 의로운 삶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고 그런 삶을 실천하면 부모에게 기쁨을 줄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권고는 잠언 10-31장의 다양한 구절에서 나타납니다(15:20: 17:21,25; 19:13; 23:24–25; 27:11).

 

(2) 부와 가난(2-5)

‘솔로몬의 잠언’이란 표제 하에 가장 먼저 소개하는 주제는 부와 가난의 주제입니다. 이 주제는 재물과 의리, 의인과 악인,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처사, 게으름과 부지런함과 관련하여 설명되었습니다. 즉, 이 주제는 경제적, 사회적, 신앙적, 도덕적인 면에서 다루어졌습니다. 이 단락이 주는 교훈은 먼저, 악한 수단을 써서 얻은 재물은 죽음 앞에서 무익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재물은 사라지는 안개와 같고(21:6),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 마땅합니다(1:19; 19:16). 오직 의로움(‘의리’로 번역됨)만이 온갖 고난 속에서도 우리를 구해줍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종국에 의인과 악인에게 마땅한 상과 벌을 내리실 것입니다. 의인이 굶주리지 않고 죽음에서도 건짐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공급과 보살핌 때문입니다. 그러나 악인의 탐욕은 들어주지 않고 좌절시키십니다. 셋째, 근면하고 성실하고 장래를 대비해야 부하게 되며, 이런 자가 지혜로운 자입니다. 잠언에서 종종 게으름과 부지런함을 가난과 부로 직결시키는데 그 이유는 근면성을 함양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현재의 부나 가난이 그 사람의 근면과 성실함 또는 그가 지혜자인지 우매자인지를 측정하는 절대 기준은 아닙니다. 이와 같은 세 가지 교훈을 깨닫고 행하는 자는 지혜로우며, 1절에 언급되었듯이 이런 자식이 부모에게 기쁨이 될 것입니다.

 

(3) 의인의 언어와 악인의 언어(6-14)

위에서 언급했듯이 10-15장에서 빈번히 논의되는 주제는 ‘언어’입니다. 10장에서도 6-14절과 18-21절에 입, 입술. 혀 등의 단어가 등장하여 언어와 관련된 금언을 제시합니다. 언어생활을 통해 지혜자와 우매자, 악인과 의인이 구별됩니다. 먼저, 6절과 7절은 ‘의인’과 ‘악인’이란 단어뿐만 아니라 축복(각각 ‘복’과 ‘칭찬’으로 번역됨)이 공통으로 나와 서로 연결됩니다. 이 두 구절을 종합하면 의인은 사람들로부터 축복의 말을 듣지만, 악인은 입에 폭력과 저주의 말을 담고 있으므로 사람들로부터 저주의 말을 듣는다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8,10,13,14절은 공통적으로, 입에 지혜와 지식을 간직한 자와 입이 미련한 자들을 대조합니다. 먼저, 이 구절들은 입이 미련한 자가 그의 미련한 말 때문에 채찍과 멸망을 자초한다고 공통으로 말합니다. 특히, 10절은 입과 더불어 눈을 추가하며 악인의 행악이 개인뿐 아니라 사회에 미치는 영향까지도 설명합니다. 공모자에게 눈짓을 보내어 은밀하게 악한 계획을 주고받거나(6:13; 16:30) 입으로 미련한 말을 전달하는 미련한 자의 행동은 다른 이에게 근심을 끼치고 본인에게 멸망을 초래할 뿐입니다. 반면, 이들과 대조를 이루는 지혜로운 자는 8, 13, 14절에서 공통적으로 ‘명령’, ‘지혜’, ‘지식’을 마음과 입술에 가까이 두는 자로 묘사됩니다. 마음이 지혜로운 자는 다른 이의 명령을 받아들여 더 지혜로워지고, 지식을 소중히 간직하고 지혜로운 말을 하므로 멸망에서 멉니다. 특히, 이 지혜자가 간직하는 ‘지식’은 1-9장에서 여호와 경외나 여호와를 아는 지식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설명되었습니다(1:7,22,29,2:5;8:12-13 등), 이러한 설명이 1-9장에 충분하고 확실하게 제시되었으므로, 형식 면에서 전환을 이루는 오늘 본문 10장과 이후로는 지식을 직접적으로 여호와 경외나 여호와를 아는 지식과 연결하여 설명하기보다는 이 지식이 바로 지혜로운 자와 미련한 자를 구별하는 척도임을 나타내는데 언급됩니다(12:1, 23: 14:6, 7, 18: 15:2, 714: 17:27: 18:15: 19:2, 25, 27: 21:11: 22:12: 29:7 등). 한편, 9절은 완전함으로(‘바른 길’로 번역됨) 걷는 자와 자기길을 굽게 만드는 자를 대조합니다. 여기서 길은 삶의 여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은 앞의 8절과 연결하여 읽을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마음이 지혜로워 명령을 받은 자가 이제 그 명령을 실행함으로써 완전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격과 신앙의 완전함을 목표로 사는 자는 그 삶이 안전하지만, 왜곡되고 사악한 행위를 선택하며 사는 자는 그 불의한 행위가 다 드러나게 됩니다.

11,12절은 의인과 악인의 언어가 다른 이에게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 설명합니다. 의인의 말은 목마른 자의 갈증을 완전히 해소하며 생명을 소생시키는 샘처럼 듣는 이에게 삶의 활력과 기쁨을 줍니다. 또한, 허물을 가려주어 아픈 자리를 치유합니다. 그러므로 6-7절에서 언급하듯이 의인에게 축복이 임하며 의인은 축복의 말(칭찬)을 듣게 됩니다. 그러나 악인은 6절에서 언급되었듯 그 입에 폭력이 가득하므로 그의 폭언으로 인해 남에게 상처와 고통을 안겨줍니다. 폭언과 함께 그 내면에 자리 잡은 미움으로 인해 다툼을 불러일으킵니다.

 

(4) 부와 가난(15-16)

악인과 의인의 언어생활 뒤에 다시 부와 가난의 주제가 언급됩니다. 그러므로 15-16절에서는 지혜와 지식의 언어생활을 하는 자가 일을 통해 얻은 대가와 재물은 근심과 고통을 막아주는 견고한 성이 되며 생명을 줍니다. 그러나 미련하고 폭력적인 말을 하는 자는 불의의 소득을 얻으므로 심판을 받아 가난해지고 결국 패망에 이르게 됩니다.

 

(5) 훈계를 지키는 자와 버리는 자(17)

훈계나 징계를 지키는 자는 생명의 길로 가지만 그것들을 무시하고 버리는 자는 길을 잃어 방황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부와 가난, 언어생활을 중심으로 훈계를 들었으므로 이제 이를 삶에 실천하여 지식, 도덕, 신앙 면에서 생명을 지속하고 성장하며 나가야 합니다.

 


잘 살기 원하십니까? 성공적으로 사는 인생이고 싶습니까? 잠언에서 삶의 기술을 배우십시오. 잠언의 권면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잘 사는 기술이란 의롭게 사는 것이고, 의롭게 사는 것이 성공과 행복에 이르는 유일한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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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19-02)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얻는 다윗

사무엘하 19장 16-39절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람과 만나는 일은 괴롭습니다. 말의 숨은 의도를 파악해야 하는 관계는 피곤하기 그지없습니다. 맹세하지 말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맹세하지 않아도 그 말을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말의 진실성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다윗은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에 슬픔에 잠겨 압살롬의 이름을 부르면 큰 소리로 웁니다. 이런 다윗에 대한 이야기가 알려지게 되면서 다윗의 군대는 조용히 성으로 돌아옵니다. 이에 요압은 다윗에게 화를 내며 당장 일어나 나가서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하지 않으면 다윗을 버리겠다고 협박합니다. 이런 요압의 말에 다윗은 왕의 임무를 감당하였고, 백성들은 다윗을 다시 왕으로 모실 계획을 세웁니다.

 

다윗에게 용서를 비는 시므이(16-23)

용서는 다른 사람의 죄를 기억하지 않고 덮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용서했다고 하면서도 똑같은 상황이 생기면 과거의 실수와 죄까지 들취냅니다. 말로는 용서했다고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 사람의 잘못과 실수를 차곡차곡 쌓아 두는 것입니다. 또 용서했다고 하면서도 그 사람을 다시 만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용서와 화해가 이뤄지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죄를 모두 용서해 주셨고, 그것을 다시는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16바후림에 있는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급히 유다 사람과 함께 다윗 왕을 맞으러 내려올 때에 17베냐민 사람 천 명이 그와 함께 하고 사울 집안의 종 시바도 그의 아들 열다섯과 종 스무 명과 더불어 그와 함께 하여 요단 강을 밟고 건너 왕 앞으로 나아오니라 18왕의 가족을 건너가게 하며 왕이 좋게 여기는 대로 쓰게 하려 하여 나룻배로 건너가니 왕이 요단을 건너가게 할 때에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왕 앞에 엎드려 19왕께 아뢰되 내 주여 원하건대 내게 죄를 돌리지 마옵소서 내 주 왕께서 예루살렘에서 나오시던 날에 종의 패역한 일을 기억하지 마시오며 왕의 마음에 두지 마옵소서 20왕의 종 내가 범죄한 줄 아옵기에 오늘 요셉의 온 족속 중 내가 먼저 내려와서 내 주 왕을 영접하나이다 하니 21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대답하여 이르되 시므이가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를 저주하였으니 그로 말미암아 죽어야 마땅하지 아니하니이까 하니라 22다윗이 이르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너희가 오늘 나의 원수가 되느냐 오늘 어찌하여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사람을 죽이겠느냐 내가 오늘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을 내가 알지 못하리요 하고 23왕이 시므이에게 이르되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하고 그에게 맹세하니라(16-23)

 

시므이에 대한 다윗의 용서는 귀했으나 온전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왕 되심이 아니라 자신의 왕 됨으로 인한 용서였고, ‘오늘’이라는 단서가 붙은 용서였습니다. 시므이가 죽지 않으리라는 다윗의 맹세는 그가 사는 날까지만 유효했습니다. 결국 그 맹세는 시켜지지 않습니다.

 

(1) 요단으로 온 시므이(16-17)

다윗이 요단강으로 오자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급하게 다윗을 맞으러 나옵니다. 그는 이전에 다윗이 바후림을 지날 때 나와서 계속 저주하여 다윗 일행이 바후림에서 쉬지 못하게 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이제 다윗이 왕으로 되돌아오고 있기에 다윗에게 보복당할 것이 두려워 다윗을 영접하러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베냐민 사람 1,000명도 시므이와 동행하였습니다. 아마도 시므이뿐만 아니라 바후림과 그 부근에 거하던 베냐민 지파 사람들도 다윗을 지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성경은 베냐민 지파의 대표적인 인물인 시므이의 행동만을 기록했지만, 베냐민 사람들도 시므이와 함께 행동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에게 음식을 제공하며 므비보셋을 모함했던 시바는 이번에도 재빠르게 움직여 자신의 아들들과 종들을 대거 이끌고 나와 다윗을 환영합니다. 본문에서는 시바가 ‘다윗 앞에서 요단강으로 돌진하였다’고 표현하여 열광적으로 다윗을 환영하고 있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온몸으로 다윗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다윗을 위해 많은 식량을 준비한 것처럼 이번에는 배를 준비하여 다윗을 맞이하러 직접 요단을 건너가 다윗이 무사히 요단을 건널 수 있게 세심한 배려를 해줍니다. 이런 시바의 행동은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충성스럽고 믿을 만해 보이지만, 므비보셋의 신하로서는 전혀 신뢰할 수 없습니다. 그의 행동은 철저히 계산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면 므비보셋과 만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신이 므비보셋을 모합한 말이 거짓이었다는 것이 드러날 것입니다. 이것을 대비하여 다윗이 므비보셋의 말과 자신의 말 중에서 자신의 말을 믿게 하거나 혹시 믿지 않더라도 최소한 자신에게 주는 벌을 줄여보기 위해 다윗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노력은 보답을 받게 됩니다.

 

(2) 왕을 만난 시므이(18-20)

다윗이 요단을 건너오자 시므이는 다윗 앞에 엎드려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면서 자신에게 벌을 내리지 말아 달라고 간청합니다. ‘죄를 돌리지 마옵소서’, ‘기억하지 마옵소서’, ‘마음에 두지 마옵소서’라는 반복적인 말을 통해 매우 간절하게 다윗의 용서를 구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합니다. 하지만 시므이는 말로는 간절하게 용서를 빌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지파인 베냐민 사람 1,000명을 대동하고 와서 다윗이 자신을 용서하지 않을 수 없게 압박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1,000명의 베냐민 사람은 단순한 사람들이 아니라 언제든지 무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들로 겉으로 보기에는 다윗을 환영하는 인파 같지만 실제로는 여차하면 시므이의 보호막이 되어줄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런 시므이의 말과 행동의 괴리는 시므이의 사죄가 진심이 아님을 나타냅니다. 정말로 용서를 구하고자 한다면 혼자 와서 용서를 구하고 살리든 죽이든 처분에 맡기겠다고 하는 것이 진정한 사죄일 것입니다.

 

(3) 시므이를 용서한 다윗(21-23)

이런 상황에서 다윗의 충직한 신하인 아비새는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한 것을 언급하며 그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다윗을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라고 표현함으로써 다윗을 저주한 것이 다윗뿐만 아니라 다윗을 선택하신 여호와께 대한 불경죄임을 밝힘으로써 시므이를 죽일 정당한 죄목을 찾은 것입니다. 사람을 저주하거나 비방한 것은 죽을 죄가 아니지만, 여호와를 비방하거나 저주했다면 죽을죄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다윗은 아비새에게 이것은 개인적인 일이니 상관하지 말라고 말리면서, 오히려 아비새를 자신의 대적자(사탄)라고 말합니다. 다시 이스라엘의 왕이 된 이 좋은 날 사람을 죽이는 일을 행하지 않을 것이며 시므이를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합니다. 시므이의 사죄와 다윗의 용서는 진심 어린 사죄와 용서가 아니라 일종의 정치적인 행동들입니다. 시므이는 1,000명의 사람들을 끌고 와 세를 과시하며 자신을 용서하라고 말하고 있고, 힘에서 열세이며 더 이상 피 흘리는 싸움을 할 수 없는 다윗은 선택의 여지가 없기에 시므이를 용서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렇게 힘으로 사죄와 화해를 하는 것은 진정한 사죄와 화해가 아니며 또 하나의 폭력입니다. 다윗은 이때 당한 모욕을 잊지 못하고 후에 솔로몬에게 시므이를 편히 죽게 하지 말라고 유언합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은 시므이에게 당한 모욕을 용서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런 다윗의 행동에 대해 옳다 그르다 쉽게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자신의 화해의 손짓에 응해주는 사람에게는 용서와 자비를 보여주지만, 자신을 힘으로 누르며 화해를 강요하는 사람에게는 모욕감을 느끼는 다윗의 모습에서 우리 모습을 발견할 수 있고, 진정한 화해와 용서가 무엇인지 고민하게 합니다.

 

다윗을 마중 나온 므비보셋(24-30)

요즘 감사의 조건이 무엇입니까? 좋은 직장에 입사하고, 원하는 배우자를 만나고, 준비하던 일들이 잘 진행되는 것도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나 하박국의 말씀처럼(합 3:17) 감사해야 합니다. 사업이 망하고, 직장에서 쫓겨나고, 병들어 다시 회복될 가망이 없다 해도 죄인인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감사할 수 있습니다. 구원이 가장 큰 감사의 제목입니다.

 

24사울의 손자 므비보셋이 내려와 왕을 맞으니 그는 왕이 떠난 날부터 평안히 돌아오는 날까지 그의 발을 맵시 내지 아니하며 그의 수염을 깎지 아니하며 옷을 빨지 아니하였더라 25예루살렘에서 와서 왕을 맞을 때에 왕이 그에게 물어 이르되 므비보셋이여 네가 어찌하여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더냐 하니 26대답하되 내 주 왕이여 왕의 종인 나는 다리를 절므로 내 나귀에 안장을 지워 그 위에 타고 왕과 함께 가려 하였더니 내 종이 나를 속이고 27종인 나를 내 주 왕께 모함하였나이다 내 주 왕께서는 하나님의 사자와 같으시니 왕의 처분대로 하옵소서 28내 아버지의 온 집이 내 주 왕 앞에서는 다만 죽을 사람이 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나 종을 왕의 상에서 음식 먹는 자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내게 아직 무슨 공의가 있어서 다시 왕께 부르짖을 수 있사오리이까 하니라 29왕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또 네 일을 말하느냐 내가 이르노니 너는 시바와 밭을 나누라 하니 30므비보셋이 왕께 아뢰되 내 주 왕께서 평안히 왕궁에 돌아오시게 되었으니 그로 그 전부를 차지하게 하옵소서 하니라(24-30)

 

므비보셋은 돌아오는 다윗을 맞이하면서 초라한 행색을 유지합니다. 시바의 배반에 절뚝발이 므비보셋이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은 이렇게 해서라도 도주 중인 왕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뿐이었을 것입니다. 이로써 다윗과 오해를 풀고 화해하였다. 다윗은 왕좌만이 아니라 사람도 얻었습니다.

 

(1) 다윗을 만나러 온 므비보셋(24-25)

므비보셋과 다윗이 만난 장소가 어디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24절에서는 므비보셋이 요단으로 내려갔다고 하고, 25절에서는 예루살렘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사무엘하 20:2에서 예루살렘에 도착하였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요단에서 만난 것으로 보입니다. 므비보셋도 다윗을 영접하기 위해 요단으로 나옵니다. 본문은 므비보셋이 다윗이 성을 떠난 날부터 평안히 돌아오는 날까지 발을 피거나 발톱을 깎지 않았으며 수염도 깎지 않고 옷도 빨지 않은 상태로 지냈다고 설명합니다. 우리말에서 ‘발을 맵시 내지 않았다’라고 번역하였는데, 이것은 발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의미로 발을 씻거나 발톱을 깎거나 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행동은 애도의 표시로 므비보셋이 다윗이 성을 떠난 것에 대해 매우 슬퍼하며 애도를 표하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므비보셋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뒤에 나오는 므비보셋의 말이 진실하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2) 므비보셋의 거짓말(26-28)

다윗은 므비보셋을 보자, 제일 먼저 왜 자신과 함께 가지 않았느냐고 묻습니다. 이미 시바에게서 므비보셋이 다윗이 폐위된 것을 기뻐하며 반역을 일으킬 마음을 품고 있다는 말을 들어서 므비보셋을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분명히 므비보셋의 행색을 보고 시바의 말과 달리 므비보셋이 자신이 없는 동안 자신에 대한 애도의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의심을 거둘 수 없는 다윗은 므비보셋에게 이유를 물은 것입니다.

이에 대해 므비보셋은 자신은 분명히 나귀를 타고 왕과 함께 떠나려고 하였지만, 자신의 종이 속이는 바람에 그렇게 할 수 없었다고 말하고, 또한 자신의 종이 자신을 모함한 사실도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므비보셋이 말하는 좋은 ‘시바’를 가리킵니다. 이 부분에서 시바의 말과 므비보셋의 말이 달라집니다. 하지만 므비보셋은 더는 변명하지 않고 다윗의 처분에 맡기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미 사울의 왕권이 무너지고 다윗이 왕위에 오르면서 자신과 자신의 집은 죽어 마땅하지만, 왕의 호의를 받아 왕의 상에서 밥을 먹는 은혜까지 누리게 되었는데 어떻게 불공평하다고 말하며 억울하다고 말하겠냐고 합니다. 므비보셋은 다윗의 판단에 맡기면서 다윗이 ‘하나님의 사자’ 즉 천사와 같은 신적 지혜가 있는 사람이니 누가 옳은지 그른지 잘 판단할 것이라고 합니다.

 

(3) 다윗의 결정(29-30)

이런 므비보셋의 말에 다윗은 ‘왜 그렇게 말하느냐?’고 하면서 일단 누그러진 모습을 보여줍니다. 다윗은 일단 므비보셋의 말을 믿어준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다윗이 므비보셋의 원래 재산을 다 돌려주지 않고 시바와 나누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므비보셋의 말을 완전히 믿은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만일 므비보셋의 말이 다 옳다고 생각했다면 다윗은 자신의 주인을 모함한 시바에게 벌을 주거나 시바에게 준 모든 것을 빼앗아 므비보셋에게 주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을 보면 므비보셋의 말을 전적으로 믿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에게 계속해서 지원을 아끼지 않은 시바의 편을 들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의 말에 므비보셋은 다윗이 평안히 왕궁으로 돌아왔으니 재산은 모두 시바에게 주라고 합니다. 이것은 다윗이 자신보다 시바를 더 신뢰한다는 것을 눈치 챈 므비보셋이 자신의 진정성을 보이기 위해 한 말입니다. 이 말에 대한 다윗의 반응이나 결국 재산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나오지 않습니다. 이렇게 다윗과 요나단의 언약으로 베푼 므비보셋에 대한 은혜도 반역이라는 사건을 겪으며 흔들리고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바르실래와 만난 다윗(31-39)

대가를 기대하면서 인정을 받으려는 헌신은 진정한 헌신이 아닙니다. 이 정도 했으니 그 대가로 어느 정도 대우해 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런 방식으로 헌신한다면 어느 순간 교만해져 자신을 높이려 하고 당연하다는 듯이 하나님께 보상을 요구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무익한 종이라는 생각으로 헌신해야 합니다.

 

31길르앗 사람 바르실래가 왕이 요단을 건너가게 하려고 로글림에서 내려와 함께 요단에 이르니 32바르실래는 매우 늙어 나이가 팔십 세라 그는 큰 부자이므로 왕이 마하나임에 머물 때에 그가 왕을 공궤하였더라 33왕이 바르실래에게 이르되 너는 나와 함께 건너가자 예루살렘에서 내가 너를 공궤하리라 34바르실래가 왕께 아뢰되 내 생명의 날이 얼마나 있사옵겠기에 어찌 왕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리이까 35내 나이가 이제 팔십 세라 어떻게 좋고 흉한 것을 분간할 수 있사오며 음식의 맛을 알 수 있사오리이까 이 종이 어떻게 다시 노래하는 남자나 여인의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사오리이까 어찌하여 종이 내 주 왕께 아직도 누를 끼치리이까 36당신의 종은 왕을 모시고 요단을 건너려는 것뿐이거늘 왕께서 어찌하여 이같은 상으로 내게 갚으려 하시나이까 37청하건대 당신의 종을 돌려보내옵소서 내가 내 고향 부모의 묘 곁에서 죽으려 하나이다 그러나 왕의 종 김함이 여기 있사오니 청하건대 그가 내 주 왕과 함께 건너가게 하시옵고 왕의 처분대로 그에게 베푸소서 하니라 38왕이 대답하되 김함이 나와 함께 건너가리니 나는 네가 좋아하는 대로 그에게 베풀겠고 또 네가 내게 구하는 것은 다 너를 위하여 시행하리라 하니라 39백성이 다 요단을 건너매 왕도 건너가서 왕이 바르실래에게 입을 맞추고 그에게 복을 비니 그가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31-39)

 

길르앗의 바르실래는 음모와 모함과 배반으로 점철된 팍팍한 다윗의 일생에서 맘 놓고 편한 숨 내쉴 수 있는 오아시스 같은 존재였습니다. 변함없는 신뢰와 지원과 충성, 대가를 바라지 않는 헌신에서 다윗은 언약하신 것을 기필코 이뤄주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맛보았을 것입니다.

 

(1) 다윗을 배웅하려 온 바르실래(31-32)

이 단락은 바르실래에 관한 단락으로 시점은 요단을 건너가기 전입니다. 바르실래는 요단 동편에서 매우 부유하고 힘 있는 사람으로 다윗이 마하나임에 거하는 동안 다윗에게 필요한 물품을 제공해준 인물입니다.

 

(2) 다윗의 제안(33)

다윗은 요단으로 마중 나온 바르실래에게 예루살렘으로 같이 가자고 제안합니다. 자신이 그동안 받은 은혜를 예루살렘에서 갚겠다는 것입니다.

 

(3) 바르실래의 부탁(34-37)

하지만 바르실래는 자신의 나이가 80세로 너무 늙어서 왕이 제공하는 맛있는 음식의 맛도 모르고 흥겨운 노래도 잘 들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또한 자신은 자신의 묘실이 있는 이곳에서 죽기를 원한다면서 다윗의 제안을 사양합니다. 자신의 부모가 있는 묘실에 묻히는 것은 평안한 죽음을 의미하며 매우 명예로운 일입니다. 바르실래는 이런 평안함과 명예로움을 택한 것입니다. 대신에 바르실래는 김함을 데리고 가 달라고 부탁합니다. 본문에는 언급되지 않지만 김함은 바르실래의 아들로 추측됩니다.

 

(4) 왕의 허락(38-39)

이런 바르실래의 요청을 받아들여 다윗은 김함을 데리고 가겠다고 하며 또한 바르실래가 나중에라도 요청하는 것이 있으면 들어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이 약속은 죽으면서 솔로몬에게 바르실래의 자손들을 후대하라는 유언을 남김으로 대를 이어 지켰습니다.

바르실래에 대한 이야기까지 해서 19:9부터 시작된 압살롬 반란 사건에 대한 논공행상이 어느 정도 마무리됩니다. 다윗은 자신에게 투항하는 적에게 대해서는 화친 정책을 사용하였고 자신을 도운 사람에게는 상을 주었습니다. 신뢰하기가 애매한 므비보셋은 애매한 상태로 두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말은 우리 마음에 심긴 말씀에 대한 반영입니다. 우리의 말은 우리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인이 말의 진실성을 잃을 때, 우리 안에 있는 말씀도 힘을 잃습니다. 믿음에 있어 온전한 사람은 곧 말에 있어 온전한 사람입니다(약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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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02-03)


유대인의 불신앙

로마서 2장 17-29절

 


 

‘전문가적 변형’이란 말이 있습니다. 그 분야를 잘 알고 있는 전문가이기에 더 타락하기 쉬운 경향을 말합니다. 가령 의사이기에 환자의 고통에 더 둔감하고, 법조인이기에 위법이나 탈법, 편법에 능숙하고, 목사이기에 말씀을 더 소홀히 하는 경향을 말합니다. 율법을 맡은 유대인들도 그랬습니다.

 

바울은 율법과 할례를 언약 백성의 표지로 삼고 그것이 하나님 백성의 지위를 보장해준다고 여기는 유대인들의 통념을 비판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에 신실하게 반응하지 않았고 결국 그들의 소명을 완수하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이제 육신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를 받은 새로운 언약 백성이 출현하였음을 암시합니다.

 

백성의 지위를 보장하지 않는 율법(17-24)

신앙생활은 하다 보면 다양한 성도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중에는 성경 지식이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데 삶은 세속적인 상태로, 많은 영적 지식으로도 말씀대로 살지 않을 모습을 볼 때가 있습니다. 죽은 지식은 생명을 살릴 수 없습니다. 율법의 소유가 그들을 저절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주지 못합니다.

 

17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18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19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20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21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22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23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24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17-24)

 

이제 바울은 본격적으로 유대인의 문제를 다룹니다. 그 논증의 초점은 율법을 가진 유대인들도 전혀 핑계할 수 없이 하나님의 진노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로마서에서 언약 백성인 유대인들의 선민의식을 가장 잘 묘사한 소단락입니다.

 

⑴ 유대인의 자부심(17-20)

바울이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1)라고 지칭한 사람들 가운데는 도덕적인 이방인뿐 아니라 유대인도 포함되었습니다. 본문에서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17)라고 하면서, 이제 이야기 주제를 이방인에서 유대인으로 전환합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정죄하고 비난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하지만, 그들 역시 하늘로부터 계시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다고 지적합니다.

이곳에 등장한 세 가지 다른 표현들은 유대인들에게 사실상 동일한 의미입니다. 즉, ‘스스로를 유대인이라 부르는 것’, ‘율법에 의지하는 삶’, ‘그들과 언약을 맺은 하나님을 자랑할 수 있는 특권’은 옛 언약 속에서 살아가는 유대인들의 삶을 서로 다른 측면에서 묘사한 것들입니다.

본 단락의 핵심 단어는 ‘율법’입니다. 2:12에서 처음 등장한 단어 ‘노모스’를 통해, 바울이 정확하게 무엇을 가리키는지와 그가 그리스도를 통해 율법을 어떻게 재해석하게 되었는지는 오랜 논쟁의 대상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바울이 말하는 ‘노모스’가 유대인들의 토라, 즉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구체적인 규례들을 말한다는 점에 동의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율법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문서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에게(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언약과 마찬가지로 율법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합니다(갈라디아서 2:21을 보라. 바울은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오히려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려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변명합니다. 바울의 대적자들은 율법으로부터 자유한 복음을 전하는 바울이 오히려 하나님 은혜를 폐하려 한다고 공격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율법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최고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유대인 됨과 율법에 대한 의지는 하나님에 대한 자랑과 같은 말입니다.

18절에서 말하는 대로, 율법은 하나님의 뜻과 가치를 분간케 합니다. 바울은 17-20절 단락에서 율법에 대한 유대인들의 자세와 자기 정체성을 설명하다가 의도적으로 두 개의 분사구문을 사용합니다. 그것은 ‘율법의 교훈을 받아’(17)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지고서’(20)인데, 두 구절 모두 유대인들을 위한 절대적 삶의 기준으로서의 율법을 말합니다. 구속사 전체 속에서 볼 때, 율법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계시하시되, 그 뜻을 유대인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시대적, 문화적, 지리적, 인종적인 옷에 입혀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토라는 자연히 구속사 속에서 시대적인, 문화적인, 인종적인 한계를 지닌 계시의 도구였습니다. 그것이 모든 민족에게 보편적인 윤리로 주어지기 위해서는 유대적인 외피(外皮)를 벗겨내는 해석의 작업이 요청되었습니다.

19-20절은 이러한 율법을 소유한 유대인들의 선민의식을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19절에서 사용된 비유, ‘맹인의 인도자와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은 율법을 소유한 유대인들이 자기 정체성과 소명을 설명하기 위해 흔하게 사용하던 표현들입니다. 20절에서는 이를 더 직접적으로 ‘어리석은 자의 교사’와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풀어놓았습니다.

 

⑵ 유대인들을 통해 하나님의 모독 받으심(21-24)

21-24절은 율법과 이스라엘의 상태에 대해 달라진 바울의 이해를 보여줍니다. 한마디로 바울은 유대인이 이방인과 다를 바가 없다는 점을 말합니다. 21-22절은 율법으로 이방인을 가르치고 선도해야 할 유대인이 이방인과 동일한 도둑질, 간음, 이방 신전에 대한 도둑질 등의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모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율법을 범함으로 인해, 이방인들 가운데서, 오히려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다고 평가합니다(23-24). 유대인들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완전히 드러나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율법과 이스라엘의 현재 상태에 대한 바울의 평가는 분명 다메섹 이전의 그것과는 달라졌습니다. 다음 단락에서 바울은 율법을 범한다면 할례도 무익하며(25),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고 할례는 마음에 해야 할 것(28,29)이라고 과감하게 선포합니다. 사실상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으로부터 율법과 할례를 분리합니다.

자신들을 통해 이방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유대인들의 소명이 성취되지 않았다고 해서, 유대인들이 율법을 중심으로 하는 삶의 체계에 대한 확신을 포기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럴수록 율법에 대한 열심을 더욱 강조했습니다. 언약 안에 머무르기 위해서 유대인은 율법을 준수해야 하고, 율법은 그것을 지키는 자에게 생명을 약속합니다(레위기 18:5). 다메섹 이전의 바울도 자신이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빌립보서 3:6)라고 생각하고 동족들이 모두 자신과 같다면 하나님 나라가 곧 올 것이라고 확신했을 것입니다. 2:21 이하에서 바울이 율법과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 받으실 가능성을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결론적으로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능력과 의로움을 이미 나타내 보이셨다는 확신 때문입니다. 나아가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고 완성된 하나님의 이야기 전체 속에서 이스라엘과 율법이 가지는 구속사적 기능을 비로소 완전히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는 율법과 할례와 상관없이, 심지어 유대 민족 전체가 아니라 유대인 중 예수라는 한 사람만을 통해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셨습니다. 다메섹 경험 이후, 구속사의 놀라운 성취를 깨닫게 된 바울은 유대인과 율법에 대해서 이전에 알지 못했던 문제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인간의 문제(죄, 사망)를 해결하고,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종말적 계획을 이루기에는 율법이 턱없이 ‘연약한’ 도구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바울이 발견한 ‘율법의 연약함’(8:3)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다메섹 이전에는 알 수 없었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 성령의 오심을 통해서 주신 답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율법과 이스라엘이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의 실체를 깨닫습니다.

 

백성의 지위를 보장하지 않는 할례(25-29)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내면의 변화입니다. 할례 받지 못한 이방인이 율법의 정신을 따르면 참할례 받은 자처럼 됩니다. 육체가 아니라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손으로 하지 않고 성령을 따라 말씀에 순종할 때 영적인 유대인, 하나님의 새 이스라엘이 되는 것입니다.

 

25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는 무할례가 되느니라 26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27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 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겠느냐 28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29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25-29)

 

어떤 이유에서건 유대인들이 여전히 이해하지 못할까 봐 바울은 유대인의 종교적 유산 중에서 가장 개인적이고 친숙한 면인 할례를 거론합니다. 할례는 유대인들의 시조 때부터 유대인 남자들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에 참여한다는 상징이었습니다.

 

⑴ 진정한 할례(25-27)

25-26절에서 바울은 할례를 받은 유대인은 율법을 범하지만, 정작 무할례자인 이방인이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온전히 지키는 상황을 설정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상상도 할 수 없는 이 상황은 이후의 단락들에서 주어지는 바울의 설명 때문에 하나씩 풀려나갑니다. 로마서 5:12-21에서 바울은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이 죄와 사망의 종이 되었음을 밝히는데, 로마서 7장이 말하는 대로 그 노예 됨의 딜레마는 역설적이게도 율법을 소유하는 유대인에게 가장 극명하게 표출되었습니다. 결국,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해서 율법의 요구를 모두 이루셨고, 이것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차별이 없음을 밝혀나갑니다.

 

⑵ 내면적 유대인(28-29)

25-29절 단락도 다메섹 이후 바울의 선이해가 반영된 진술들입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들이 ‘율법의 요구’를 이룹니다(8:4).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할 것 없이, 그러한 자들이야말로 이면적 유대인이며 마음의 할례를 받은 자들입니다(28-29). 29절에서 바울은 마음의 할례가 ‘프뉴마’, 곧 성령의 사역에 달려 있다고 말하면서, 8장에서 다룰 성령의 사역을 미리 내다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할례를 받았는지의 여부 자체는 무의미합니다. 실제로 성령을 좇아 ‘율법의 요구’, 곧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을 온전히 이루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율법과 할례를 소유하고 있지만 정작 그리스도와 성령을 소유하고 있지 않은 유대인들은 마음의 할례를 받은 자들에 의해서 ‘판단’받게 될 것입니다(27). ‘판단’(27)과 함께 ‘칭찬’(29)은 종말적 심판대의 이미지를 떠올립니다. 누가 하나님의 백성인지 결정적으로 판가름할 마지막 심판을 이기게 하는 것은 육체의 할례가 아니라 성령의 인 지심에 있습니다.

2장 전체를 통해 바울은 이방인과 마찬가지로 유대인도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을 선포하는 동시에, 율법과 할례를 소유하고 있지 않은 이방인들이 오히려 ‘율법의 요구’를 이루고 하나님 백성의 자격을 갖추는 것이 성령을 통해 가능하다는 복음의 핵심을 제시하였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으로 장담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유대인에게 율법이 그러하였다면, 오늘 우리에게도 성경이, 교회가 아무 의미가 없을 수도 있겠습니다. 심지어는 ‘복음’마저도, 우리가 마음을 바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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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02-02)

 


유대인의 불신앙을 지적하는 바울

로마서 2장 9-16절


 

오래전 제주 모 지검장이 길거리에서 음란행위를 하다가 발각이 되어 사회적인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처럼 성숙해보인 사람들이 상식 이하의 범죄로 인해 충격을 주는 경우를 봅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로 존경 받을만한 분들이 신뢰와 존경을 잃은 행동을 봅니다. 일반인들은 사회지도층들의 이탈 행위에 대해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로마서 3:9-18)고 단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십니다.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사람은 율법을 듣는 자가 아니라 율법을 행하는 자입니다. 유대인이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졌다고 자랑하며 선생이라고 자처하면서도 스스로 율법을 범하는 것은 이방인 가운데 하나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행한 대로 받는 보응(9-11)

유대인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은 다른 민족에게 하나님을 드러내는 사명이 주어진 것이지, 배타적 지위를 얻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도라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잘못을 용납해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외모를 보지 않으시는 주님 앞에서 거룩한 길을 따르지 않으면서 불신자들과 다른 대우를 받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큰 착각입니다.

 

9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10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11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9-11)

 

9-10절은 7-8절의 내용을 다른 언어로 되풀이하면서, 특별히 이러한 원리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9절과 10절 모두에 등장하는 ‘먼저는 유대인에게요’라는 표현은 유대인들이 이 언약의 약속을 먼저 받은 자들이었음과, 유대인들이라고 해서 그들의 악행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음을 동시에 말해줍니다. 7절과 10절에서, 바울은 ‘선을 행하는 삶’이 ‘영광과 존귀, 썩지 않음과 평화’에 이르게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영광과 존귀’라는 표현은 시편 8편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허락한 종말의 약속을 떠올리게 합니다. 즉, 시편 8편의 약속이 ‘선을 행하는’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차별 없이 실현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신다’(11). 문제는 '선을 행하는 각 사람'이라는 조건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선한 행위'란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성령을 받은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삶의 열매입니다. 그런 점에서 ‘선한 행위’는 로마서 1:5의 ‘믿음의 순종’과 같은 개념입니다.

 

하나님 심판의 보편성(12-16)

 

말씀을 잘 가르치는 사람을 보면, 거룩하고 위대해 보입니다. 자칫 사람들에게 현혹되기 쉽습니다. 하지만 신령한 사람은 말씀의 유무가 아닙니다. 그 훌륭한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도할 때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는, 말씀을 들은 적이 없이 죽은 사람들의 구원에 관한 문제입니다.

 

12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13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14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15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16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12-16)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고 율법을 소유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들은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제외될 것이라 생각하는 유대인들을 향해 대화는 계속됩니다. 바울은 할례와 율법은 그저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해 주는 배지 역할을 할 뿐, 그것이 구원의 조건은 아니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1) 율법을 행하는 자(12-13)

바울은 로마서에서 2:12에 이르러서야 ‘노모스’(율법)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사용합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율법을 지닌 선민, 유대인’과 ‘율법이 없는 죄인, 이방인’이라는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구분을 벗어납니다. 2:1-11 단락, 나아가 1:18-32 단락에서도 중요하게 사용된 ‘범죄하다’와 ‘심판받다’라는 단어는 12절에서도 사용되면서 12-16절 단락을 앞 단락들과 연결시켜줍니다. 율법의 소유 여부와 상관없이, ‘범죄’한 자들은 모두 ‘망하고,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12절에서 사용된 동사 ‘하마르타노’(범죄하다)는 단순히 도덕적 기준을 어기는 행위를 넘어서서, 신의 뜻을 거역함으로써 그와의 관계를 깨뜨린다는 의미로 유대인들과 그리스-로마인들 모두에게 널리 사용된 단어입니다.

13절에서 바울은 율법 아래 사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말합니다. 의인, 곧 정상적인 하나님의 언약 백성은 단순히 율법을 듣는 자가 아니라 율법을 행하는 자입니다. 이것은 구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명기 28-30장이 말하는 대로, 하나님의 선택과 은혜를 받은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해서, 율법을 지킴으로써 스스로 생명과 복을 선택해야 할 책임마저 면제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 율법이 중심이 되는 언약 체계 속에서 신실하게 머물러 있어야 할 책임이 유대인들에게도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13절에서 사용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동사는 미래시제로 표현되어 있다. 그 의로움은 16절의 ‘최후의 심판’에 최종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2) 양심의 법(14-15)

14-15절에서 바울은 율법 없는 이방인이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행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이 이방인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복음을 듣지 못한 이방인을 가리키는가? 아니면 이방인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가? 만약 전자라면, 10절과 함께, 율법 없는 이방인 가운데에서도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행하여 구원에 이르는 사람이 있다는 의미로 들리는데, 신학적으로 그 설명이 쉽지는 않습니다. 10절뿐만 아니라 14-15절을 이방인 그리스도인에 대한 설명으로 보는 편이 좋겠습니다. 14절의 '본성으로'를 선행 구절과 연결해서 읽으면, ‘날 때부터 (본성으로) 율법 없는 이방인이 율법의 요구하는 바를 행할 때에는’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이것은 2:27에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이라는 구절과 평행을 이룹니다. 또한 로마서 전체에서 볼 때도, 바울은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율법 없이)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이루게 되었다는 점을 주장합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는데’(14), 이를 15절에서 추가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15절의 헬라어 원문은 이방인들이 ‘마음에 새겨진 율법의 행위를 나타낸다’는 구절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마음에 새겨진 율법의 행위’는 예레미야 31장의 새언약 백성에게 임할 성령의 역사를 상기시킨다. 이것은 14-15절에서 언급된 이방인이 새언약 백성임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이기도 합니다.

 

(3) 다가온 심판의 날(16)

15절의 내용은 16절의 최후 심판의 문맥에서 읽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스도를 재판관으로 세워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들이 율법의 요구를 이룬 것을 증거 합니다. 이 모든 논의를 통해 바울은 율법 없는 이방인들도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게 되었다는 점과, 율법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유대인들에게 더 이상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전달하려 합니다. 16절은 바울의 복음이 심판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율법과 양심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모든 사람이 불의로 진리를 막는 죄인들이 라는 사실을 고발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듣고 아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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