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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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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예수님

마태복음 3장 11-17절

 
예수님의 행적은 옛 이스라엘 백성이 걸었던 길을 재현하며 새로운 이스라엘의 창조로 이어집니다. 애굽으로부터의 귀환과 세례, 광야의 시험, 산상수훈의 말씀 선포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은 새 나라의 설립과 새 백성 창조라는 하나님 나라의 여정을 표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나라의 왕으로 입성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메시아로서의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두 사건을 통해 마태는 예수님께서 어떤 하나님의 아들인지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에 동참한 사건은 죄인들의 자리까지 자신을 낮추신 것을 의미합니다. 이어서 순종하는 겸손의 아들로서 광야의 시험을 받게 되고(4:1-11), 이 시험에서도 순종하는 아들로서 자신에게 맡겨진 사역을 수행할 것을 입증하실 것입니다.
 

메시아와 그분의 사역(11-12)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합당한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회개에는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거짓 회개는 있을 수 있지만, 거짓 회개는 열매가 없이 쭉정이만 가득합니다. 경건의 상징인 종교 지도자의 지위와 율법에 대한 지식과 세례, 심지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선민의식도 회개의 열매를 대신하지 못합니다(롬 9:6-8). 회개와 절대복종으로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자에게는 심판만 있을 뿐입니다.
 
11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12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11-12)

세례 요한은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3:2)라고 초청하였습니다. 왕의 행차 앞에 외치는 전령처럼 새로운 왕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하라고 외쳤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지도자인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요한의 초청과 경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10절에서 말한 경고한 것입니다.
 
(1) 메시아의 위치(11)

요한은 그들에게 그들이 맞이할 새로운 왕을 설명합니다. 먼저 자신의 위치와 오실 메시아의 위치를 분명히 구분합니다. 자신의 사역은 어디까지나 메시아의 사역을 준비하고 예배하는 단계로 제한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 등장할 분은 자신보다 훨씬 더 강하다고 표현합니다(11). 그는 뒤에 오실 분의 신발 끈을 풀 신분도 못 된다고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합니다. 주인의 신발을 풀어주는 행위는 너무 천해서 종이 하는 일이었고 히브리 종에게도 맡길 수 없을 정도의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요한 뒤에 오는 이는 신분 면에서 요한과 비교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2) 메시아의 사역(12)

더 강한 분인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베풀 것인데, 물이 아니라 불과 성령을 사용하실 것입니다. 요한의 세례는 가시적인 물세례이지만, 뒤에 오시는 메시아의 세례는 보이지 않는 성령과 불을 통한 세례가 될 것입니다. 성령을 통한 세례는 구약에서 종종 등장한 개념입니다(사 11:2; 겔 36:25-27; 욜 2:28).
요한은 오실 메시아의 사역을 또 하나의 그림 언어로 추가 설명합니다. 바로 추수 때 농부가 키를 들고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는 이미지입니다(13:24-30; 36-43). 이것은 예수님 사역의 특징과 목적을 암시하는 비유로서 마지막 심판 때를 강조합니다.
열매는 인간의 행위를 가리킵니다(참조 7:21-23; 25:31-46). 열매 맺지 않는 자들은 즉각 회개해야 합니다. 나무뿌리가 도끼에 잘려 나가면 나무는 살 수 없고 더 이상 싹이나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농부는 타작마당에서 알곡을 곳간에 모으려고 키질을 해서 필요 없는 쭉정이를 따로 모아 불에 태울 것입니다(12).
 

예수님의 등장(13-17)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새로운 지도자가 세워질 때는 매우 성대하게 예식을 거행합니다. 새로운 왕이 직위에 오르는 것을 ‘즉위식’이나 ‘대관식’으로 불렀습니다. 유럽 문화권에서, 한 국가의 왕 또는 황제가 직위에 오를 때 거치는 행사로 왕관을 최고위 성직자가 왕 또는 황제의 머리에 얹어서 정식으로 왕위에 올랐음을 모든 사람 앞에서 공표하였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즉위식은 그렇게 화려하지 않았습니다.
 
13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 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니 14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15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16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17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13-17)

예수 그리스도의 대관식은 화려하지 않지만, 아름답게 등장합니다. 세례 요한에게 처음에는 불특정 다수의 무리가 사방으로부터 몰려왔고, 뒤이어 종교 지도자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인공인 예수님께서 모습을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 공식적인 즉위식 행사는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므로 시작합니다.
 
(1) 요한과 예수 그리고 세례(13-15)

요한은 자기 뒤에 오는 자가 와서 세례를 줄 것이라고 예고했으나, 세례 주는 자인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기 위해 요한에게 오십니다(13). 세례는 종말의 해방을 상징하는 행위이므로,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의 도래를 상징하는 행위이므로,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의 도래로 해방과 회복이 실현될 것을 예고하는 요한의 세례에 참여하십니다.
요한은 자기 뒤에 오는 분을 종말의 구원과 심판을 주실 분으로 생각했으므로 자신이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14). 특히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온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를 회개한 점을 고려하면(3:6),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러 온 자가 요한에게 죄인처럼 세례를 받는다는 것을 요한이 수용하기 어렵습니다.
요한이 세례를 줄 수 없다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이제 허락하라’라고 명령하십니다(15).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세례를 베푸는 것은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루다’ 혹은 ‘정취하다’는 한 경우(3:15)를 제외한 열 다섯 군데에서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1:22, 2:15,17,23; 4:14; 5:17; 8:17; 12:17; 13:35; 21:4, 26:54,56; 27:9). 15절의 의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위해 세우신 뜻 혹은 (구원의) 계획을 뜻합니다. 요한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비교조차 할수 없이 존귀한 분으로서 구원과 심판을 집행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겠다고 하십니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죄인이 아닌데도 죄인이 회개의 받아야 하는 세례에 참여함으로써 자신을 죄인들과 동일하십니다.
 
(2) 세례 때 일어난 현상(16-17)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였고, 하늘로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16). 성령님은 새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신호이며 그 시대를 가능하게 하는 능력(예. 불과 성령의 세례)이 되십니다(이사야 32:15:44:3 36:25-27을 2:28-32). 그리고 하늘에서 한 소리가 들립니다(17).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17)

하늘이 열려 이 땅에 전해진 비밀이란 바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들이라는 사실입니다(참조. 17:1-8; 27:51-53). 마태복음은 시편 2:7과 이사야 42:1 두 본문을 결합하여 하나님의 아들의 정체를 밝힙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는 시편 2:7의 (너는 내 아들이라'를 암시한다. 구약과 유대교 배경에서 왕이 하나님의 아들로 불렸기 때문에(시 2:7; 89:27), 예수님의 세례는 왕의 대관식입니다. 그리고 ‘내 기뻐하는 자라’는 순종하는 아들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입니다(시편 44:3; 149:4, 이사야 42:1; 62:4). 예수님께서는 왕의 역할을 ‘종’의 삶으로 수행하실 것입니다.
세례 장면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밝힙니다. 하늘의 비밀을 깨닫는 사람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서 하늘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되는 이야기가 앞으로 마태복음에서 펼쳐질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은 순종하는 종의 태도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구원을 이루실 것입니다. 아들이 죄인들을 대표해서 세례를 받으시는 것은 대속적 죽음(20:28, 26:28)을 예고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높은 분이지만 가장 낮아지는, 그래서 결국 대속의 죽음을 맞이하는 길을 선택하신다. 예수님의 희생적인 삶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 또는 구원의 계획을 성취하게 됩니다. 세례와 시험 장면은 하나님의 아들이 순종하는 종으로서 아버지의 뜻을 성취할 것임을 보여줍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 42장 1절, 시편 2편 7절을 반응하고 있는 것으로 공생애를 시작하는 예수님에 대해 다윗과 같은 왕이요 메시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자 백성들의 대표자로 고난 받으신 종이라는 사실을 강력하게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 일어난 이러한 사건은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새로운 왕으로 취임하신 하나님 나라의 왕의 대관식과 같은 장엄한 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통해서 메시아로 오신 공적 사역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이제는 어두운 죄악의 나라가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나라가 시작된 것입니다.
 
 
회개라는 말이 불편하고 낯선 시대입니다. ‘회개 없는’ 복음과 구원, 신앙이 난무하면서 신앙의 진위를 가려내기 어렸습니다.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여 있다고 해도 경각심이 없습니다. ‘이미’ 놓여 있지만 ‘아직’ 회개할 기회는 있습니다. 어서, 도시의 소음을 뒤로 하고 광야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새로운 왕을 영접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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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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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증인인 세례 요한

마태복음 31-10

 

하늘나라는 곧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삶의 방식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의 방식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과거에는 죄악된 삶에서 거룩한 삶으로 변화되어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로 회개입니다.

 

예수님께서 등장하시기 전에 유다 광야에서 살고 있던 세례 요한이 먼저 등장합니다. 그의 사역은 이사야 예언처럼 주의 길을 곧게 하는 사역입니다. 그래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역인 그리스도를 충실하게 증거 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보내신 뜻, 곧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에 앞서 그 길을 예비하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합니다.

 

주의 길을 준비(1-4)

과거의 죄를 고백하고 돌이키는 회개는 새로운 왕을 영접하기 위한 필수적인 준비 과정입니다. 그래서 회개 없는 천국 입성은 없습니다. 항상 자신의 삶의 주인은 누구인지, 그리고 무엇으로부터 어떻게 돌아서야 하는지 살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백성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고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회개하라고 선포하십니다.

 

1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2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3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4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1-4)

마태는 수 그리스도의 시작에 앞서서 그의 길을 여는 세례 요한의 사역에 관해 설명합니다. 그는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났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자신의 역할과 사명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유대 광야에서 주의 길을 선포하는 사명을 충실하게 수행합니다.

 

(1) 주의 길을 준비하는 요한(1-2)

요한의 사역 시작을 그 때에(1)라고 소개합니다. 1-2장의 주인공인 메시아 예수님께서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시점이 드디어 임했음을 알립니다. 그 시점은 세례 요한의 등장으로 시작됩니다. 네 복음서가 모두 이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누구보다 구약 예언 성취에 강조점을 둔 마태에게 세례보다 구약 예언 성취에 강조점을 둔 마태에게 세례 요한은 더더욱 중요한 인물입니다.

세례 요한은 유대 광야에서 선포하는 사명을 수행합니다. 그는 천국이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고 말합니다(2). 천국, 곧 새로운 질서가 열릴 것이기 때문에 회개하고 이 나라에 들어가도록 촉구합니다. 마태는 세례 요한의 사역을 이사야 40:3을 통해 구약의 예언의 성취된 것으로 설명합니다. 이사야 본문에서, 애굽을 탈출한 백성을 맞이하러 광야로 오셨던 는 하나님이셨습니다.

3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40:3)

세례 요한은 자신의 사명을 분명히 하고 정확하게 사명을 감당하였습니다. 자신의 사명을 광야의 소리로 인식하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며 평탄케 하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이 메시지를 전하는 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었고 그의 허리에 가죽 띠를 했습니다. 그의 음식은 메뚜기와 야생 꿀이었습니다. 마태는 요한의 모습을 엘리야 선지자와 연결합니다(참조. 11:14; 17:12). 위에서 본 것처럼 요한은 구약에서 다시 올 것으로 예고하고 기대한 엘리야의 역할을 수행합니다(왕상 19:13,19; 왕하 1:8;2:8, 13:14). 그때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주변 온 지역 사람들이 그에게 나아오고 있었습니다(5).

자신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그것에 걸맞은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역할을 알고 분수를 지킬 줄 안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어디서든지 자신의 신분과 분수를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29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30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3:29-30)

예수님께서는 결혼식장의 주인공 신랑으로, 요한 자신은 신랑의 들러리에 비유했습니다. 인간의 질투, 경쟁의식들을 버리고 자신의 역할이 정확하게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세례 요한의 역할은 사람들을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니라.”라고 외쳤습니다. 만약 아주 유명한 석학이 강연회를 한다면, 그를 소개할 다른 사람이 필요합니다. 스스로 자신을 소개하고 강연을 시작하진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소개하고 사역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사역을 소개하고 준비하는 사람이 세례 요한입니다. 그는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오셔서 펼치실 그 구원의 사역을 미리 준비함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천국으로 돌아오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미리 증언하는 사람이었으며, 그의 설교 중심은 회개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요한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회개해야 한다고 설교했습니다. 이는 당시의 유대인들에게는 너무나 큰 충격적인 내용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조건이 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율법을 지키는 행위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2) 주의 길을 준비하는 자세(3-4)

마태는 세례 요한을 메시아가 가져올 천국의 도래를 선포한 선구자라로서 이사야가 예언한 바로 그 선지자로 소개합니다. 앞서 처녀의 잉태와 임마누엘’(7:14) 예언처럼 이사야 40:3 인용도 현재성과 미래성을 동시에 갖습니다. 네 복음서 기자들이 공히 인용하는 이 본문은 일차적으로 이스라엘의 포로귀환과 회복을 약속했고 성취되었지만, 종말에 있을 메시아 대망과 그의 회복의 사역을 내포합니다.

마태는 그 때가 세례요한이 출현한 지금 성취되었음을 알리기 위해 이사야 예언을 인용합니다. 그러므로 그가 이스라엘에 촉구한 회개와 베푼 세례는 새 시대와 새 질서를 준비하는 행위입니다. 그 다음 이어지는 요한에 대한 마태의 묘사는 구약의 또 다른 선지자 엘리야를 연상케 합니다(참조, 왕하 1:8; 13:4;4:5). 나중에 예수님께서는 요한을 엘리야에 비유할 것입니다(11:14). 그의 메시지만큼이나 외모와 삶의 방식도 충격적입니다. 낙타털 옷에 가죽 띠를 차고, 메뚜기와 야생 꿀을 양식으로 삼는 광야의 기행적 삶은 철저히 구별된 자의 삶입니다. 그의 출생에서 암시하듯 나실인의 운명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참조. 1:15-17).

하지만 당대 종교지도자들에게는 세례 요한의 선포가 달갑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세례 요한을 따랐습니다. 그는 언제나 자신보다 예수님을 더 큰 분으로 전했습니다. 그는 이 사역을 위해 세상의 모든 세속의 사치와 안일을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온전히 의지하는 단순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회개의 세례(5-10)

 

큰 능력을 지니신 예수님께서는 성령과 불로 자신을 영접한 백성을 정결하게 정화하시고, 순종의 열매가 없는 위선적인 종교인들을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불로 정결케 된 자들만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설 수 있습니다.

 

5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6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7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9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10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5-10)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어서 하나님 나라를 맞이할 준비를 하게 도와줍니다. 그들의 마음에 메시아를 왕으로 모시려면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요한의 메시지는 당시에 새로운 소식이 전달되는 방향과는 정반대로 광야에서 유대교의 심장부인 예루살렘으로 울려 퍼졌습니다.

 

(1) 요단강 물세례(5-6)

세례 요한이 하나님 나라에 입성하기 위해서는 회개하라는 촉구의 메시지를 들은 많은 사람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부근, 즉 모든 부분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요한에게 나아가 죄를 자백하며 회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놀라운 것은 사방에서 몰려든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그들은 죄를 자복했습니다. 요한의 회개의 메시지를 올바로 들었던 것입니다. 직설적인 메시지에 반응도 직접적으로 반응했습니다.

그들의 자복에 이어 곧바로 세례 받음을 소개합니다. 요한의 메시지와 사역이 유대 전반에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킨 점은 분명하나, 그것이 전부 긍정적이지 않았습니다. 몰려든 사람들의 자복은 다만 개인 차원을 넘어 이스라엘 공동체 차원도 포함되었습니다. 그들은 오랜 세월 정치적 세속성과 종교적 형식에 화석화된 성전 유대교에 신물을 느꼈을 것입니다.

 

(2) 회개에 합당한 열매(7-8)

일반 사람들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경건함을 갖추었다고 인정받았던 바리새인들과, 주로 고위 제사장으로 이루어진 사두개인들도 세례 요한에게 찾아왔습니다. 요한은 그들을 광야로 몰려든 사람 중에서 그들을 구별합니다.

하지만 그들을 본 요한은 매우 거칠고 부정적이었습니다. 이들은 향후 예수님을 대적할 대상들에 대한 복선일 것입니다. 그들은 앞선 무리와 다른 태도로 요한에게 나왔을 것입니다. 그들이 나왔지만, 세례를 받으러 온 것인지 여부를 모호하게 합니다.

요한은 스스로 의인이라고 여기던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사람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불렀습니다(7). 예수님께서도 이 무리를 향해 이러한 같은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12:34; 23:33; 참조 사 14:29). 그래서 요한은 그들에게 회개하지 않으면 징벌을 면하지 못하리라고 경고합니다. 요한의 질책은 곧, 구체적인 삶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8). 스스로 이 정도면 되었다고 생각하는 종교적인 자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요한이 선포한 회개의 메시지에는 구원과 심판의 양면성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회개하며 메시아를 받아들이면 구원을 받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심판이 임합니다. 천국을 가져오실 메시아의 도래가 임박한 것과 같이 구원과 심판도 임박했습니다. 이 진노의 심판을 피할 유일한 길은 회개하는 것입니다. 회개 없이 진노를 피할 수는 없습니다.

 

(3)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9-10)

요한이 말하는 회개는 단회적 행위나 태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나오는 자의 합당한 삶의 열매를 포함합니다. 종교지도자들이 특히 회개를 거부한 까닭은 습관처럼 지키는 율법과 정결 예식을 통해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확신과 신념의 가장 중요한 근거는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선택과 특권일 것입니다. 그들은 혈통이 운명을 결정한다고 믿었습니다. 자신들의 영적 안전이 보장된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회개 이외에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한 것이 없다고 단언합니다. 요한은 그런 아브라함의 자손의 그릇된 특권과 신념을 깨부수듯, 돌들을 예로 듭니다. 누가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입니까? 그 사람은 도래할 하나님 나라에 허락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혈통적 차원이 아닌 믿음의 차원이 요구됩니다. 세례 요한에게 믿음의 차원은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 오실 메시아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나무뿌리에 놓인 도끼라는 구약에서 익숙한 말씀이 등장합니다(10:33-34; 11:19; 17:1-4). 심판의 임박성을 강조하는 비유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박했다는 것은, 곧 베어질 나무 아래 나무꾼의 도끼가 놓여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합당한 반응이 요구되고 반응에 실판한 사람을 요한은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로 표현합니다. 그들은 베어질 것이고 불에 던져져 불에 탈 것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것을 요구했는데, 회개란 단순한 뉘우침이 아니라 죄를 범하던 삶에서 완전히 돌아서는 것입니다. 혹시 거짓 회개는 있을지라도 그 회개는 열매가 없는 회개일 것입니다. 경건의 상징인 종교지도자의 지위와 율법에 대한 지식과 세례, 심지어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선민의식도 회개의 열매를 대신하지 못합니다(9:6-8). 회개와 절대 복종으로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자에게는 심판만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열매를 기대하십니다. 좋은 열매란 죄에서 돌아서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회개는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서는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감정적 차원의 후회에서 그치지 않고 반드시 삶의 변화로 이어집니다. 당신은 최근에 회개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의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회개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회개의 진실성은 고백 뒤에 따르는 모습, 즉 열매를 통해 증명됩니다. 요한은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고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내세우며 임박한 진노를 모면하려는 회개를 가장하는 이들을 무섭게 책망하며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촉구했습니다. 회개는 마음과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것이기에 반드시 그에 따른 변화와 열매가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회개하며 회개 후 어떤 변화가 나타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부심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입니다. 회개란 말이 불편하고 낯선 시대입니다. 사람들이 구미에 맞는 회개 없는 복음, 회개 없는 구원, 회개 없는 신앙이 난무하면서 유사 그리스도인들이 우후죽순처럼 양산되고 있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가 임박한 지금 거침없는 광야의 소리가 더욱 절실합니다. 더 늦기 전에 열매 없는 쭉정이 허위를 벗어버리고 진실한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가는 백성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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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02-02)

 

 

나사렛 사람인 예수 그리스도

마태복음 213-23

 

하나님의 사랑은 능력이 있습니다. 세상의 어떠한 권력과 권세가 그 사랑은 막는다고 할지라도 주님의 사랑은 낮은 더 낮은 곳으로 흘러가서 우리의 인생을 적시며 회복시켜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 속에서 자신의 사랑을 이끌어 가시며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그 능력을 함께 살필 수 있겠습니다.

 

요셉이 다시 전면에 등장합니다. 그의 두 번째 꿈과 주의 사자의 두 번째 현몽입니다. 헤롯이 박사들을 이용해 조용히 아기를 처리하려 했지만 실패로 돌아가자 즉시 다음 계획을 실행합니다. 지체없이 애굽으로 피신하라는 명령에 요셉은 가족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신합니다. 박사들에게 속은 헤롯은 두 살 미만 사내아이들을 전부 죽이는 광기 어린 살인을 저지릅니다. 헤롯이 죽자 요셉 가족은 돌아와 나사렛에 정착합니다.

 

에굽으로의 피신(13-15)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길은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걷지만,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걸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실 삶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삶의 궤적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가 이스라엘의 실패를 극복하고 새 이스라엘의 대표로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러 오신 분임을 보여주시는 행보로 인도하셨습니다.

 

13그들이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14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15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13-15)

당시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있던 왕은 헤롯입니다. 그는 자기의 지혜로 왕의 자리까지 올랐습니다. 유대인이 아니면서 유대인의 왕이 된 것은, 그만큼 정치적인 수완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로 그는 항상 두려워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 수없이 자기 왕비와 자녀들까지 수없이 죽였습니다.

헤롯 왕은 동방에서 온 박사들에게 유대인의 왕을 찾으면 자신에게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헤롯은 동방박사들을 속여 예수님을 찾으면 그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난 아이를 죽이려고 했습니다(8). 오히려 자기가 속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 경배한 동방박사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다른 길로 돌아갔습니다(12). 자신이 속은 사실을 알고 매우 화를 내며, 베들레헴 주변의 두 살 아래의 남자 아이들을 죽이는 끔찍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떠난 후에 주의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 아기를 죽이려 하는 헤롯을 피해 애굽으로 피난하도록 지시합니다(13). 주의 천사가 다시 나타날 때까지 세 명의 가족은 애굽에 있어야 했습니다.

요셉은 꿈에서 천사의 지시를 받자마자 그날 밤에 아기와 마리아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신했습니다. 요셉, 마리아, 아기 예수님께서는 헤롯이 죽기까지 애굽에 살게 됩니다(15).

하나님께서는 헤롯왕의 악한 계획을 천사가 요셉에게 이 사실을 미리 알려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일행은 애굽으로 피신했기에 아기 예수님께서는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 또한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예언한 바를 성취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새 출애굽, 즉 종말론적 회복과 귀환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게 합니다. 특히, 호세아서 문맥에서 11:1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표현합니다. 한편, 호세아서에서는 애굽에서 나온 아들은 순종적이지 않았으나, 예수님께서는 순종하는 아들이며 백성을 대신해서 고난을 받습니다. 한 사람 아들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의 회복이 선물로 주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천사를 통해 요셉에게 지시하고 인도하심으로써 헤롯의 살해 명령에서 예수님을 보호 하셨을 뿐 아니라, 예언자들을 통해 하신 말씀을 이루셨습니다.

 

유아를 살해한 헤롯(16-18)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하지 않으려는 곳에는 평안이 없습니다. 살인과 계략이 무성할 것입니다. 그러고 불안과 두려움에 몸서리치며 애매한 피해자들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또한 가상의 적들을 상정하여 분노를 조장할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무고한 아이들까지 죽이고 천년만년 살 것처럼 행동한 헤롯을 볼 수 있습니다.

 

16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17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18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16-18)

헤롯은 동방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분노합니다. 헤롯은 사람들을 보내 박사들이 별을 관찰하기 시작한 시점을 기준으로 두 살 이하의 남자아이들을 살해하도록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왕위를 위협할 메시아적 인물을 제기하려고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마태는 이에베들레헴과 인근 지역에서 일어난 유아 살해를 라마에서 라헬이 애곡한 내용을 담고 있는 예레미야 31:15로 해석합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로 제시합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간섭으로 자신의 계획에 차질이 생긴 것을 깨달은 헤롯은 그의 포악한 성품을 엿보게 해주는 엄청난 조치를 취합니다. 곧 베들레헴과 그 주변 지역에 사는 두 살 아래의 모든 남자 아이를 살해한 것입니다(16). 세상 권력에 집착한 사람의 극단적인 모습이 어떠한지를 실감합니다.

악한 계획은 실패합니다. 헤롯은 왕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죽이려고 많은 아이들을 살해했지만, 결국 예수님을 죽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먼저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모든 계획은 악할 뿐 아니라 반드시 실패합니다.

 

나사렛에서 자라심(19-23)

 

예수님께서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되십니다. 예수님께서 돌아온 갈릴리 나사렛에 정착하십니다. 그 땅은 로마의 지배와 예루살렘 유대교로부터 배척받던 무지와 가난의 땅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으로 인해 생명과 구원의 빛이 가득한 땅이 될 것입니다.

 

19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20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하시니 21요셉이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니라 22그러나 아켈라오가 그의 아버지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23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19-23)

요셉은 즉시 순종합니다. 예수님과 부모는 어떻게 애굽을 나와 나사렛에 거주하게 됐는지를 설명합니다. 천사가 예수님을 죽이려던 헤롯이 죽은 후에 하나님의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서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했습니다(19). 주의 천사는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기 때문에 아기와 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고 지시합니다(20). 천사의 지시를 받은 요셉은 아기와 아기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갑니다(21). 그런데 요셉은 헤롯 대왕의 아들인 아켈라오가 유대를 통치한다는 소식을 듣고 유대로 가서 머무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22).

작은 동네 베들레헴에 아이가 돌아온 사실이 알려지면 예수님의 목숨이 위태했을 것입니다. 요셉은 꿈에서 천사의 지시를 받고 갈릴리 지방으로 떠납니다(22). 이후 예수님 자족은 갈릴리의 나사렛이라는 동네에 살게 됩니다(23).

마태는 이 사건을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는 예언의 성취로 해석합니다. 마태는 예수님을 다윗의 아들을 상징하는 이새의 가지혹은 과 연결시킵니다(이사야 11:1). 여기서 가지의 히브리어 네쩨르의 자음과 나사렛의 자음이 동일합니다(이사야 11:1; 53:2; 60:21). 이사야 11:1은 구약에 나타난 대표적인 메시아 본문 중 하나입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런데 마태는 23절에서 선지자를 복수형으로 사용합니다. 이는 특정 본문이 아니라 여러 선지자들이 나사렛 사람으로 불리는 것을 예언했음을 뜻합니다.

나사렛은 구약에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마을인데, 어떻게 예수님께서 나사렛 사람으로 불릴 것이라는 예언이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 나오는 것이 가능합니까? 이는 이사야 11:1가지와 같은 개념이 복수의 본문에 등장한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23:5; 33:15; 3:8; 6:12).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나사렛에 정착하게 된 것은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이새(다윗의 아버지)의 가지, 즉 다윗 계통의 왕임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또한 나사렛은 바위 언덕에 있었고 무명의 마을이었으므로 나사렛 사람으로 불린 것은 예수님의 겸손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의 거주민들이 포로에서 해방되고 나서 그곳 이름을 나사렛’, 자기 마을로 지은 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주닙하는 신실한백성이 되기 위함이었습니다.

나사렛 예수(26:71; 18:37; 18:5,7; 19:19; 2:22; 3:6; 4:10; 6:14; 22:8; 26:9)를 따르는 나사렛 사람들(24:5)은 신실한 백성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불의와 공포 속에서 신음하는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소동과 난리 속에서 그리고 죽음과 공포 속에서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자기 백성을 구원할 구원자는 메시아 예수님께서는 걸음마를 떼고 말을 배우기도 전에 그 목에 현상금이 걸린 떠돌이 나그네 신세가 되었습니다. 세상이 난리와 공포 속에 있는데, 그 속에 있는 백성을 구할 메시아가 평화롭게 등장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와 하나님께서 불의와 죽음의 공포 가운데 있는 우리를 건지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의 비참한 자리까지 내려오신 것입니다. 성도들은 어떤 상황과 자리에서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예수님을 찬양하고 의지하는 백성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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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02-01)

 

전북 정읍시 쌍화차 거리 초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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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배 받기 합당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21-12

 

유명인이나 정치인들 주변에는 많은 사람이 따릅니다. 인기 있는 사람은 한 번이라도 직접 만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만나려는 동기가 서로 다릅니다. 정말 존경스러워 만나려는 사람들도 있는가 하면, 반대로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이용하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소식에 동방박사들 뿐 아니라 헤롯왕도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려는 동기가 완전히 달랐습니다. 당신이 예수님을 만나려는 동기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임마누엘로 세상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본문에는 이방인 동방의 박사들은 만왕의 왕으로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는데, 놀랍게도 예루살렘 사람들은 그분의 탄생 소식에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거짓 왕인 헤롯은 참 왕이신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지만, 동방박사들은 기쁨으로 왕께 경배합니다.

 

동방에서 온 박사들(1-3)

기독교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성경에 관심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많은 지식을 찾습니다. 그렇지만, 성경 지식을 많이 안다고 구원을 성취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환영하기 위해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찾아옵니다.

 

1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2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3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1-3)

구약 성경의 예언대로 예수님께서는 유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동방에서 별을 연구하던 박사들은 특이한 별을 발견하고 유대인의 왕곧 메시야가 태어난 것을 짐작했고, 구체적으로 탄생 장소나 방법을 알지

 

(1) 유대인의 왕을 찾는 동방박사들(1-2)

동방박사들은 페르시아에서 별을 연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특이한 별을 통해 놀라운 사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범상치 않은 왕의 탄생을 알려주는 예사롭지 않는 특별한 별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별의 인도하심을 따라 유대에 태어날 왕께 경배하기 위해서 먼 길을 따라서 예루살렘까지 도착했습니다. 그 거리를 온 시간은 대략 3-6개월 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탄생한 후에 얼마나 흘렀는지는 모릅니다. 동방박사들이 유대의 수도인 왕이 거하는 장소는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예루살렘 지도자들에게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2)고 물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이들은 동방에서 자신들을 인도하는 별을 따라 예루살렘에까지 왔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유대인이라면 유대인의 왕이 태어난 것을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헤롯왕과 예루살렘 사람들은 깜작 놀랐습니다.

 

(2) 헤롯의 반응(3)

당시에 유대인의 왕은 헤롯이었고 그의 칭호였으므로, 예수님의 탄생은 헤롯과의 갈등을 예고합니다. 헤롯은 유대인의 왕이 태어난다는 말을 듣고 혼란스러웠습니다.

위대한 왕의 탄생했다는 소식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특히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헤롯왕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표현에 불안감과 열등감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헤롯의 아버지는 본래 에돔 사람이었다가 유대인으로 귀화했습니다. 어렵게 얻은 왕권을 자녀들에게 유산으로 물려주지 못하고 빼앗길 상황이 발행했기 때문입니다.

온 예루살렘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기다려 왔던 그리스도의 탄생 소식에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3). 그 동안에 그들은 그리스도를 기다리긴 했지만 진실하게 맞이할 준비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에 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왕이십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여 살아계신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그 분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스리실 때, 그 통치에 복종하여 하나님의 자녀와 백성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한 나라에서 두 왕은 같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성도들이 하나님도 사랑하고 세상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왕이십니다.

 

말씀을 살피는 예루살렘(4-8)

하나님 나라는 세상의 통념을 깨는 의외성과 급진성을 띨 것입니다. 힘과 외형, 중심만을 욕망하고 주목하는 시대에, 성도들은 세상의 논리를 거부하고 천국의 가치를 구현해야 합니다. 새로운 왕에 대한 소식은 헤롯에게는 큰 위기가 찾아왔던 것입니다. 그 아이를 찾아 죽이려 합니다.

 

4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5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6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7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8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4-8)

선지자들의 예언대로 유대인의 왕으로 이스라엘의 목자로 오셨습니다. 하지만 이방인 박사들의 방문은 예수께서 유대인만의 왕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처럼 모든 열방의 경배를 받기 위해 오셨음을 보여줍니다. 이 소식으로 예루살렘에는 환영보다는 혼돈이 일어났습니다.

 

(1) 헤롯왕의 질문과 대답(4-6)

헤롯왕은 급히 예루살렘에 있는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소집했습니다. 그리고 헤롯은 그들에게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4)라고 묻습니다. 동방박사들처럼 같은 질문이지만 그 동기는 달랐습니다. 거짓 왕인 헤롯은 참된 왕을 죽이려고 찾았던 것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그리스도가 태어나실 곳을 성경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살펴본 결과, 세상의 통념을 깨뜨린 출현이었습니다. 성전이 있는 중심 예루살렘이 아니라 다윗의 고향인 변방 베들레헴에서 나셨습니다.

미가 선지자를 통해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미가 5:2)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탄생하신 메시아의 사역은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사무엘하 5:2)라는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 하신대로 만왕의 왕이신 베들레헴에 탄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신실하게 지켜 주셨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은 목자의 심령으로 백성을 돌보실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탄생으로 목자와 왕의 모습으로 올 메시아에 대한 기대가 성취됐음을 밝힙니다(6). 실제로 마태복음 전체에서 예수님의 사역은 무리를 불쌍히 여기는 목자로 표현됩니다.

 

(2) 아기 정보를 요청하는 헤롯(7-8)

헤롯 왕은 종교지도자들에게 들은 대답은 동방박사들에게 알려주었습니다. 헤롯은 그들에게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 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8)고 부탁합니다. 헤롯왕의 의도는 동방박사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들을 이용해서 예수님이 계신 정확한 곳을 알아내려고, 거짓 왕권으로 참된 왕을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또한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은 헤롯왕과 함께 예수를 죽이려는 음모를 도울 뿐, 예수를 경배하는 데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기다렸던 그리스도가 베들레헴에 탄생했다고 한다면, 사실여부를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달려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소동할 뿐입니다.

이미 예언된 일이고 태어나실 곳까지 알고 있었지만, 기쁨으로 환대하기는커녕 두려워 떨며 혼란에 빠진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하나님께서 들어갈 만큼의 자리가 없습니다. 평상시 하나님을 가장 섬기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질적으로 자신의 의를 세워 유익을 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현실은 그러한 일들이 발행되지 않기를 간절히 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항상 마음이 향하고 있다면 예수님의 탄생을 받아 들렸을 것입니다.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릅니다. 성경 전제를 마스터한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은 그리스도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실 것을 알았지만, 그들은 알고 있는 내용을 믿음으로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중심의 삶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탄생을 믿지 않았고 베들레헴으로 달려가지 않았습니다.

 

동방박사들의 경배(9-12)

메시아의 약속에 관한 예언을 알고 있는 자들이 메시아를 환영하기보다는 두려워 떨며 어쩔 줄 모릅니다. 왕의 출현 소식은 사실 내가 왕이 되기를 멈추고, 요구하는 거북하고 불편한 소식입니다. 교만의 보좌에서 내려온 이들에게만 복음이 됩니다. 내 나라를 포기하고 그분께 경배하며, 순종하려고 예수를 찾고 있습니까?

 

9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 10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11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12그들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9-12)

동방박사들에게 동방에서 인도했던 별들이 다시 나타났습니다. 그들을 예수님께서 계신 베들레헴으로 인도했습니다. 위대한 왕이 탄생하신 곳은 큰 중심이 되고 모든 것이 시작되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세상의 통념을 깨고 탄생하신 것입니다. 화려한 왕궁이 아닌 초라한 마구간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오랫동안 그리스도를 기다려 왔던 예루살렘 사람들은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지만, 그리스도께 대한 성경 지식이 없던 이방인 동방박사들은 예루살렘의 반응과는 다르게 계속적으로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왕으로 경배 받으실 분입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예물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진실함으로 경배했습니다. 예배 때마다 이러한 자세로 예배에 참석해야 합니다.

마구간에 들어간 박사들은 아기 예수님께 무릎 꿇고 경배 드리며 세 가지를 예물로 내놓았습니다. 그 예물은 전통적으로 왕권을 상징하는 황금, 신성을 가리키는 유황 그리고 고난의 대속적인 죽음을 예고하는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예물을 통해 하나님의 기름 부름을 받은 왕이시고, 인간의 몸을 입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인간의 구속을 이루신 구세주이심을 확실히 보여주는 예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인 동방박사의 예수님께 경배를 통해 유대인의 왕으로서 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만왕의 왕으로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선언합니다.

그리스도를 만나길 간절히 갈망하며 하나님의 인도에 민감했던 동방박사들은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아기 예수님께 겸손한 태도로 예물을 드렸습니다. 당신은 모든 존기와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예수님께 마땅한 경배와 찬양을 드립니까?

 

동방박사들은 하나님의 역사에 민감했습니다. 그 인도하심에 순종하며 먼 길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에는 현실에 너무 집착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에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습니다. 온 세상의 왕이신 예수님을 찬양하며 평생 예수님을 경배하고 높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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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01-02)

 

전북 완주군 운암면 옥정호 주변

순종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

마태복음 118-25

 

새로운 결정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현재에 대한 안정적인 삶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쉽사리 결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결단이 없으면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새로운 인생을 원하지만 새로운 결단을 하지 않습니다. 오늘 결정해야 할 사항에 대해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께 맡기고 새로운 복된 결정이 하시길 바랍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님의 부모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그들이 뛰어나거나 위대해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 앞에 자신의 뜻을 내려놓은 결정과 순종이 그들을 위대한 인물을 만든 것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족보에 이어서 예수님의 탄생 과정을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던 때의 구체적 정황을 소개합니다.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는 아직 그와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아이를 잉태합니다. 이 사실은 안 요셉은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마리아와 파혼하고자 합니다. 그때 주의 사자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 모든 정황을 알립니다. 사자의 진술 속에 마리아가 잉태한 아이가 누구인지 정확히 공개됩니다. 요셉은 사자의 명령에 순종했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 아이를 낳을 때까지 동침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탄생(18-19)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무거운 것은 영적인 부담감입니다. 사명을 감당하는 데는 언제나 부담이 따릅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된 사건에 마리아가 어떻게 반응했는지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지 않습니다.

 

18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9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18-19)

1-17절 부분을 통해 예수님의 족보, 기원을 이야기했다면,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잉태가 성령으로 된, 즉 예수님의 심적인 기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자들은 마리아의 성령 잉태도 믿지 못합니다. 성령 잉태의 사실은 예수님께서는 신성을 가지신 주권자가 되시며 선재하신 그리스도라는 의미입니다.

 

(1) 마리아의 잉태(18)

마태는 마리아의 잉태가 성령으로된 것이라는 단도직입적 설명을 덧붙이며 서사의 전재를 빠르게 가져갑니다(18). 이 일이 성령으로 말미암았다는 사실을 적시하며, 예수님의 기원이 사람이 아닌 하나님임을 강조합니다. 마리아에게 일어난 놀라운 일을 알게 된 요셉의 태도와 대응이 이어집니다. 약혼 기간에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머니 마리아와 요셉이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라고 소개하면서 성령으로 잉태되었음을 소개합니다. 동정녀 탄생은 그 일을 감당해야 했던 마리아에게 엄청난 부담이었을 것입니다. 결혼을 앞둔 여인이 잉태한 것은 정결함을 지키지 못한 결과입니다.

 

(2) 요셉의 반응(19)

마리아에게 일어난 놀라운 일을 알게 된 요셉의 태도와 대응을 소개합니다. 요셉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요셉조차도 처음에는 결혼을 파기하려 했습니다. 요셉은 약혼녀가 임신한 사실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을 공개적으로 들어내지 않고 마리아를 생각해서 조용히 정리하려 했던 것입니다. ‘남편 요셉이란 표현은 주후 1세기에 약혼은 법적으로 혼인과 같은 효력을 지녔기에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간음은 약혼을 파기하는 사유였고, 약혼 기간에 저지른 간음에 대한 형벌은 투석형이었으나(신명기 22:13-21), 로마 치하에서 유대인들에게는 사형 판결권과 집행권을 주지 않았습니다.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라는 것은 긍휼과 배려심이 많다는 뜻보다는 법 또는 하나님의 뜻을 철저히 지킨다는 의미입니다. 아내의 음행을 확인한 남편이라면 마리아의 사건을 공적으로 드러내고 이혼을 택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가만히’(1:19; 2:7; 5:33) 이혼하려고 했습니다. 아무도 알지 못하게 비밀리에 처리하는 것을 묘사합니다(참조, 27; 11:28; 16:37). 요셉은 법적인 아내에게 공적인 수치를 주지 않고 은밀히 이혼하려고 했습니다. 요셉은 율법을 지키는 의인이었지만, 동정심으로 인해 공적인 수치를 주지 않고 개인적으로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요셉은 의인됨과 동정심의 조화를 보여주며, 요셉의 태도는 마태복음 전체에서 의와 동정심(또는 긍휼)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실현되고 교회를 통해 행해져야 한다는 교훈을 미리 보여줍니다.

 

예수 탄생을 설명하는 천사(20-23)

하나님께서 죄인된 몸으로 오시기 위해 거쳐야 했던 일들은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처녀의 몸으로 잉태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생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성령 안에서 기적적으로 잉태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처녀 잉태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일하신 놀라운 역사입니다.

 

20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1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2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23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20-23)

마리아가 남자의 동거하지 않은 상태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잉태되었습니다. 이는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구약의 예언을 성취한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는 받아 들을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남편 요셉은 마리아와 조용히 헤어지려고 했습니다. 요셉의 시나리오가 실행되기 전, 마리아의 운명에 개입하셨던 하나님께서 요셉에게도 찾아오셨습니다.

 

(1) 성령으로 잉태된 사실을 고지(20)

마리아가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 요셉은 매우 번민하고 괴로웠을 것입니다. 그가 이 일에 대해 조용히 헤어지려고 행동을 생각하고 있을 때, 번민하는 요셉에게 주의 사자가 꿈 속에 나타납니다. 그 사자는 요셉을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고 부릅니다. ‘다윗의 자손이란 칭호는 예수님 외에 다른 사람에게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께서 다윗의 계보로 들어오는 데 있어 요셉의 역할이 매우 중요함을 강조합니다.

주의 사자인 천사는 요셉에게 마리아를 데려오기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때 마리아를 네 아내라고 부른 것은 앞선 배경을 고려할 때 의아해할 일은 아닙니다. 요셉이 가만히 정리하려 한 심리적 배경에는 두려움이 깔려 있습니다. 이를 간파한 주의 사자는 그에게 두려워하지 말라며 그 이유를 말합니다. 마리아의 임신은 성령으로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예수님의 탄생은 구약의 성취(21-23)

요셉에게 나타난 사자는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고지합니다. 또한 그 아이의 이름을 예수(Ιησούς)’라고 지으라고 전합니다(1:31). ‘예수’(21)1, 16, 18절에 이어 네 번째로 나오는 이름입니다. 마태는 21절에서 구원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예수님의 사역을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것으로 규정합니다. 21절은 백성에게는 구원이 필요하며, 죄에서 구원받는 백성은 이스라엘과 이방인들로 구성된 새 백성’(내러티브가 전개되면서 교회로 드러남)인 사실을 암시합니다. 죄는 하나님과 백성을 분리하고 속박 가운데 갇히게 합니다.

포로 상태가 된 이스라엘의 희망은 죄 문제를 하나님께서 해결하시는 것뿐입니다(40:1-2; 31:31-40; 36:24-25,28). 예수님께서는 대속의 고난과 죽음으로 백성을 구원하실 것입니다(20:28; 26:28). 그가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의 피를 흘리는 그림은 이사야 53장에 있는 고난 받는 종의 그림과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왕의 모습과 달리,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죄에서 그들을 구원하실 것입니다(21).

세상의 문제는 죄입니다. 죄는 인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이 죄 문제를 해결하십니다. 죄는 모든 민족의 문제이므로,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을 통해 복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은 죄 용서를 통해 성취됩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다스리셔서 나라를 회복하기 시작하셨다는 소식입니다(52:7). 회복된 나라가 온 증거로 그리스도는 죄인들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합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탄생 소식은 복음입니다.

 

22-23절은 마태복음에 나오는 열 개의 성취 공식 중 첫 번째 것으로,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마태의 설명입니다. 마태는 마리아의 잉태를 이사야 7:14의 성취로 해석합니다. 명확히 처녀를 지칭하는 베툴라가 아니라 결혼 적령기의 젊은 여자를 가리키는 알마가 사용됩니다. ‘알마베툴라처럼 처녀에 주로 초점을 맞추지는 않지만 처녀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알마가 처녀성의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70인역에서 알마파르쎄노스(παρθενος)’로 번역한 것으로 보입니다.

 

임마누엘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구약의 남 유다가 가장 어려운 시절에 처녀의 몸에서 태어난 아기는 임마누엘’, 곧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알리는 표적이었습니다.

임마누엘의 의미를 두 가지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임마누엘은 하나님께서 구원을 위해 세상에 개입하시는 방식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과 함께하시는 것으로 그들을 구원하십니다. 이제 아기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고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구원 행위가 시작되었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절정에 이르렀다는 뜻입니다. 특히 암울한 시기에 유다에게 임마누엘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계보가 암시된 내용처럼 포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가장 어려운 시기, 즉 포로 상태에 있는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임마누엘이 태어나셨습니다.

둘째, 임마누엘은 구원의 목적입니다. 죄인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함께하십니다.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은 마태복음 전체를 아우르는 핵심 주제로서(18:20; 28:20; 참조 14:26; 17:17; 26:29),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으로 밝혀집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안에서 백성과 함께하심으로써 구원하시고, 구원받은 백성들과 함께하십니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죄인들과 함께 계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죄인들과 함께 계시는 것이 구원과 해방을 베푸는 방식이기에, 예수님께서는 고난 받는 종으로서 십자가에 달리는 수치를 겪으면서도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하실 때도 우리와 함께하시지만, 구원받은 백성과도 영원히 함께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은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의 몸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상황적으로 볼 때는 마리아는 개인적, 사회적으로 억울한 누명에 시달려야만 하는 불명예였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에는 어려움이 따르지만, 태에서부터 키워 낳아 기르는 일은 역사에 남는 영광이었습니다.

 

성령 탄생한 사건에 대한 요셉(24-25)

신앙생활을 잘하다가도 이따금 의심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꼭 우리의 믿음이 참되지 않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의심이 들 때는 믿음이 성숙한 사람들과 솔직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뢰할 수 있는 친구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조언자가 필요합니다. 공동 예배에 정기적으로 참여하고 죄를 죽이려고 힘써 노력하면,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했다는 확신이 더욱 견고해질 것입니다.

 

24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25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24-25)

마태의 설명이 끝나고, 21절에 있었던 탄생 이야기는 24-25절에 이어집니다. 요셉이 잠에 일어났다는 표현은 환상을 본 자가 순종할 때 하는 행동입니다(2:1-2; 8:27; 1:39). 요셉의 순종은 마리아를 아내로 받아들이고, 아들을 낳기까지 아내와 동침하지 않고, 아이의 이름을 예수로 짓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요셉은 꿈에서 깬 다음 꿈의 메시지를 매우 엄중하게 받아들입니다. 18절에서 설명한 언급한 것처럼, 마리아를 집으로 데려오는 행위는 결혼이 공적으로 완료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때부터 공식적으로 부부 생활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요셉은 마리아와 동침하지 않음으로써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태어난 사실을 확증하는 일에 기여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탄생은 초자연적인 사건입니다. 마태는 요셉을 의로운 사람으로 묘사했는데(19), 의로운 요셉의 순종에 초점을 맞춥니다(24-25). 마태복음에서 의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은혜)과 이 은혜에 대한 순종, 즉 하나님의 행위(하나님은 약속에 의로우시다!) 둘 다를 의미합니다. 요셉은 이사야 7:14의 예언을 성취하는 일에 순종합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모든 의를 성취하기 위해 세례를 받는 것처럼(3:15), 요셉의 순종으로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주신 예언이 성취됩니다. 임마누엘의 탄생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 것이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요셉의 순종이 사용되었습니다.

사명을 받은 사람의 헌신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는 통로가 됩니다. 약혼녀 마리아의 임신 소식은 큰 고통을 느껴야만 했습니다. 분노와 배신감을 느끼면서도 조용히 정리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일을 생각하고 있을 때, 꿈속에서 하나님의 사자가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20)도 계시하십니다.

요셉의 의로운 결정에는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이 있었습니다. 새로운 결정이나 결단을 하는데 성령의 도우심이 있습니다. 사람의 의지로는 할 수 없는 상황들을 성령을 결정하도록 도와줍니다. 오늘 우리들도 신앙적으로 결단하기 어려운 문제들을 성령의 도우심으로 놀라운 결단이 있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언자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처녀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하여 태어나셨습니다. 이사야는 예수님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예언하였는데, 이 이름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입니다(24).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임마누엘이란 이름으로 불리신 적은 없지만, 그분의 역할이 성전보다 더 크신 분’(12:6)으로서 그 역할을 감당하셨습니다.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계획은 은혜의 소식’, 복음입니다. 이 계획은 순종하는 의인을 통해 이 땅에 실현됩니다. 마태복음 전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와 뜻에 대한 순종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시고 사람의 반응을 사용하십니다. 의로운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순종하며, 이러한 순종은 사랑의 계명에 순종하는 열매를 맺습니다. 의로운 행위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순종하며, 이러한 순종은 사랑의 계명에 순종하는 열매를 맺습니다. 의로운 행위는 소자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나며(18:21-35; 25:31-46), 마리아에 대한 요셉의 태도도 이런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탄생 기사의 요셉은 마태복음의 중요한 주제인 에 대해 예고하는 인물입니다. 요셉과 마리아의 순종으로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셨던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 그들은 대단한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예수님으로 하여금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사회적, 법적 가정으로 울타리가 되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모세가 죽은 후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지도자 여호수아와 같은 이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눈에 보이는 압제자의 통치로부터가 아니라 죄의 통치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니라 예수님의 백성입니다. 아직도 우리를 얽매이고 짓누르는 죄는 무엇입니까? 그 모든 죄로부터 우리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예수님을 찬양하며 그분의 통치를 받는 주의 백성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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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01-01)

 

전남 강진군 신전면 주작산에 바라본 강진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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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마태복음 11-17

 

얼마 전에 족보를 조작하여 만든다는 소식을 접한 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자신의 가문을 미화하는 작업일 것입니다. 족보는 자신이 속한 뿌리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바로 그 메시아일 뿐 아니라, 모든 민족과 모든 사람들의 메시아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증명해 줍니다.

 

마태는 유대인이면서도 동족에게 천대를 받는 세리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으로 변화시켜 동족을 위해 전도자로 사용하셨습니다. 구약에서 예언하고 있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며, 그분이 메시아이심을 알리기 위해 마태복음을 썼습니다. 그는 혈통과 족보를 중시하는 유대인으로 마태복음을 예수님의 족보 이야기로부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이스라엘을 위한 그리스도이시며, 다윗의 자손이로서 왕적 그리스도이심을 밝힙니다.

 

마태복음의 제목(1)

역사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순종으로 언약이 희미해져갈 때, 주의 섭리하신 때를 좇아 아들 예수님을 보내셔서 첫 언약을 뛰어 넣고 첫 이스라엘을 뛰어넘는 새로운 시작을 여셨습니다. 마태복음 1장은 하나님께서 약속을 성취하신 것에 대한 예수님의 족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1)

마태복음의 첫 포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고, 예수님의 긴 족보로부터 시작합니다. 더욱이 첫 절은 책의 제목으로서 마태복음 전체의 주제를 포괄하며, 동시에 1장의 내용을 요약하는 역할 합니다.

 

(1) 그리스도의 세계(1)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그의 시대가 열리고, 그 분이 다시 오실 때 새 시대’(19:28)가 시작될 것입니다. 탄생할 아이의 이름인 예수님께서는 주께서 구원하셨습니다, 혹은 미래적으로 주께서 구원하실 것이다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Xριστός)기름 부음 받은 자를 뜻하는 히브리어 메시아의 헬라어 칭호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날 당시에 유대인들의 메시아 기대 사상은 다윗의 후손이 나라를 다스릴 것이라는 구약의 예언에 근거했습니다(. 49:10, 24:17; 2, 89; 3:4,5; 삼하 7, 11; 30:8,9; 34,37; 5:2). 그들은 군사력을 동원해서 이스라엘을 해방할 수 있는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2) 다윗의 아들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아들이십니다. 다윗의 아들은 유대인들이 가장 익숙하게 사용하고 기다린 메시아 칭호로서 마태복음(1:1; 9:27, 12:23; 15:22, 20:30,31, 21:9,15, 22:42, 43; 참조 22:45)에서 특히 강조됩니다. 다윗의 아들이 오는 것은 구원 역사가 절정에 이르렀음을 알립니다. 특히 다윗의 아들은 낮은 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긍휼, 치유하시는 모습을 강조합니다(9:27; 12:23; 15:22; 20:30,31; 21:14-17).

 

(3) 아브라함의 아들

예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아들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믿었기에, 이 칭호는 예수님께서 유대 혈통인 것을 강조합니다. 무엇보다도, 이 칭호는 온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목표가 예수님의 탄생으로 이뤄지기 시작한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 즉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복을 받게 될 것(창세기 12:1-3; 18:18)과 아브라함의 씨를 통해서 천하 만민이 복을 받는 것(창세기 22:18)을 성취하실 것입니다.

마태는 족보를 개관하면서 예수님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임을 강조합니다. 혈통적 기원과 더불어 아브라함과 다윗과 맺은 언약을 성취하시는 분임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성경의 모든 예언과 언약은 한 분이신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언약 이야기로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2-17)

의심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에 관한 기록들이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라 예수님을 미화하기 위한 창작물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마태복음은 예수님에 관한 기록들이 모두 역사적인 사실임을 처음부터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2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3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4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5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6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7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8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9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 10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몬을 낳고 아몬은 요시야를 낳고 11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들을 낳으니라 12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13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은 아소르를 낳고 14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을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15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16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17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2-17)

이 계보는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오랜 역사를 통해 기대되어 왔던 이스라엘을 위한 그리스도이심을 보여줍니다. 마태는 이러한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그분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제시할 뿐 아니라, 세 단락으로 구성된 전환점들을 연관시킵니다. 마태는 하나님 백성의 역사를 세 개의 기간으로 구분해서 제시합니다. 예수님의 계보에서 몇 가지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습니다.

 

(1) 이스라엘 역사의 축소판

첫째, 마태복음의 계보는 이스라엘 역사의 축소판으로, 하나님의 약속과 목적을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압축하면 17절의 내용과 같이 아브라함다윗바벨론 포로다윗의 아들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구원의 역사이며, 구원은 하나님의 개입(또는 섭리)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중개자들을 통해 백성을 구원하시는데, 왕의 역할이 특히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 보내신 다윗의 아들, 곧 왕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탄생으로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열방이 구원으로 초대받게 될 것입니다.

 

(2) 다윗의 후손인 예수

둘째 마태는 계보의 초점을 다윗에게 맞춥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우연히 또는 갑자기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오랜 계획에 따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다윗의 후손을 왕으로 보내겠다는 약속에 담겼기에, 예수님의 탄생은 이 약속의 성취입니다. 마태는 다윗의 음가인 14를 사용해 다윗에게 약속된 하나님의 계획이 다윗의 아들인 예수님을 통해 성취된 사실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런데 계보에 나타난 구원 역사의 중심인물이 다윗이라면, 중심 사건은 바벨론의 포로생활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날 당시 이스라엘은 여전히 바벨론의 포로처럼 로마의 압제 하에 살았습니다. 다윗의 아들은 바벨론의 속박 가운데 살아가는 백성을 구원하는 일을 위해 성육신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소식은 이사야 선지자가 선언한 복음이며(이사야 52:7),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 통치하시므로 예수님의 탄생이 곧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왕(-다윗의 아들)으로서 다스리시는 나라는 자유와 회복의 나라입니다.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하는 속박된 상태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복음은 예수님께서 해방과 자유를 위해 성육신하셨다는 소식입니다.

 

(3) 네 여인이 등장한 족보

셋째, 예수님의 계보에는 네 명의 여자가 등장합니다. 네 여자의 공통점은 이방 출신이라는 것입니다. 이방 출신 여자들이 메시아의 계보에 들어간 것은 온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이미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들어 있었음을 알립니다.

또한 네 여인은 일반적이지 않은 임신과 출산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여호와의 날개 아래 거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모친 마리아도 당시의 관습에서 수용하기 어려운 임신과 출산을 했으나,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적극 참여하는 길을 선택 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계보는 선교하시는 하나님을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민족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기 위해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 특히 이방인들을 치유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개인이나 교회도 예수님의 계보가 강조하는 선교를 위해 부름 받습니다. 계보에서 의미하는 선교는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는 소식이므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포로(계보에서는 바벨론’)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회복을 경험하거 됩니다. 성도와 교회에게 세상은 싸워야 할 대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할 긍휼의 대상입니다. 교회는 언제나 모든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열망을 기억해야 합니다.

 

(4) 하나님 교회에 대한 정체성

넷째, 예수님의 계보는 하나님의 백성 또는 교회의 정체성을 가르칩니다. 예수님의 계보에 기록된 인물 중에 유다와 여고냐에게만 형제들이라는 단어가 붙습니다. 유다는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의 넷째 아들입니다. 그는 며느리와의 관계를 통해 쌍둥이를 낳은 나쁜 사람입니다. 얼핏 보기에 영화나 이야기책의 주인공으로 자주 등장하는 요셉이 예수님의 계보에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메시아의 조상으로 선택하신 유다는 죄와 비참함을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희생해서 형제들을 구하려고 한 인물입니다.

유다는 막내 베냐민을 대신해서 자신을 종으로 삼으라고 간청합니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이 약 사백 년 동안 이집트의 종살이를 하게 되는 시점에 일어났으므로, 유다의 형제애는 노예 백성이 인내할 수 있게 만든 힘이었습니다. 바벨론 포로로 살았던 유대 인들은 이스라엘(유대의 왕이었던 여고냐가 자신을 희생해서 항복함으로써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고 도성이 도륙당하는 것을 막았다고 평가했습니다.

따라서 유다와 여고냐는 동족과 민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사람들입니다. 이는 자연스럽게 예수님과 그의 형제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형제(참조 18:21,35: 23:8; 25:40; 28:10)로 부르며 그들을 위해 목숨을 주기까지 희생하셨습니다. 겟세마네 기도에서도 예수님의 시선은 제자들을 향했습니다(26:36-46), 부활하신 예수님의 관심은 내 형제들’(28:10)을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기독교의 정신은 낮아짐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형제들을 살릴 수 있고, 그런 형제애가 둘 이상이 모인 모임들을 복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아무개와 그의 형제들이야말로 갑과 을의 관계에 익숙한 우리 시대가 진정으로 갈망하는 표현이 아닙니까? 살아가면서 권한과 책임을 맡을 기회는 얼마든지 우리에게 찾아올 수 있습니다. 나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겸손과 헌신이 그들을 나의 형제들로 만듭니다.

 

족보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그분의 언약에 신실하셨는지를 보여줍니다. 나아가 다윗의 후손이신 예수님께서 세우신 나라가 얼마나 영광스럽고 은혜가 충만한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영광스런 왕의 백성이며 충만한 은혜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 주님의 통치 아래 살 때 천국을 유업으로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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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강진군 칠량면 장미농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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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개론

구원 받은 후에 성경을 읽지만, 그 성경이 원하는 내용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마태복음은 초대교회 시절부터 교회가 가장 애용하던 복음서입니다. 초대 교부들의 설교집이나 변증서에는 다른 어떤 복음서보다 더 많은 마태복음 구절들이 인용되었습니다. 또한 다른 어떤 복음서보다 더 많은 주석들이 현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태복음의 간결한 형태가 인용하기 쉬웠던 점도 있지만, 그 내용이 교회의 정체성을 규명하는데, 아주 적합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은 신약성경의 첫 번째 책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구약을 마무리하고, 신약을 들어가는 관문이라고 말합니다. 60회에 걸친 구약의 인용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 하듯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약속대로 오심으로부터 말씀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제목

현존하는 헬라어 신약 사본들 중에 가장 오래된 사본에는 제목을 마태에 의하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흠정역에 나타나는 성 마태에 의한 복음이란 표제는 비교적 후기의 사본들에서 다수가 발견되는데, 단지 (Saint)”이 빠진 채로 나타납니다. 성경에서 복음”(헬라어, euaggelion)이란 용어는 좋은 소식즉 예수의 생애와 교훈에 나타난 구속의 복된 소식을 의미합니다.

 

마태복음의 저자

실질적으로 누가 썼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가장 오래된 전통에 따르면 기독교 저술가들은 이구동성으로 한결같이 사복음서 중의 첫째 복음서를 세리이자 사도 중의 한 사람인 마태 사도가 기록했다고 봅니다. 사실 그 내용이 마태복음에도 등장합니다.

내적인 증거 : 분명히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에 의하여 기록되었음을 보여줍니다. 그 사람은 바로 마태였습니다(마태복음 9:9; 마가복음 2:14). 사도로 부르심을 받기 전에는 세리였던 마태였습니다. 자기 자신을 세리로 매우 겸손히 언급한 사실(마태복음 9:10; 누가복음 5:29)은 요한(요한복음 21:24)과 어쩌면 마가(마가복음 14:51,52)가 자신들에 대하여 언급한 방법과는 대조를 이룹니다. 이것 또한 마태복음이 그의 저술이라는 간접적인 증거가 됩니다.

외적인 증거 : 로마의 클레멘트, 폴리캅, 터툴리안, 오리겐 같은 많은 교부들도 마태가 저자라고 주장합니다. 주후 140년경에 히에라폴리스의 파피아스는 유세비우스가 기록한 인용문에서 마태복음을 마태가 기록했다고 진술합니다. 그리고 반세기 뒤에 이레내우스는 유세비우스가 기록한 인용문에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역사적 배경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기록된 책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메시아는 예언자 이사야로부터 700년을 이어져 내려온 유대인 최고의 대망이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나타나면 바벨론이나 로마 제국과 같은 강대국들을 몰아내고 세계 제일의 유대인 국가를 이룰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과 예수가 기다리던 메시아인 줄 알고 비상한 관심을 쏟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기대에 메시아로서 충족되지 않자 오히려 예수를 십자가에 죽여 버렸습니다.

 

마태복음의 기록 연대

주후 50-70년경입니다. 사도들은 약 30-40년 동안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목격담과, 그들이 기억하고 있는 기억하던 예수님의 가르침을 덧붙여 기록하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의 유대인 기독교도들의 분산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주후 50년 이후, 예루살렘 멸망이 있은 주후 70년 이전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저작 장소에 대해선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전통적 견해는 본서에 유대적 색채가 짙은 점과 유대의 관습에 대한 설명이 없다는 점을 들어 팔레스타인을 저작 장소로 추정합니다.

 

마태복음의 기록 목적

마태가 그의 복음서를 기록한 주요 목적은 유대인 독자들에게 예수님이 그들의 메시아이심을 입증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첫째는 예수가 마태는 무엇보다도 구약에 예언된 그 메시아임을 증명하기 위하였습니다. 둘째는 예수님이 그의 삶과 사역을 통해 어떻게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셨는가를 보여 주었습니다. 또한 마태는 예수님의 혈통을 아브라함으로부터 밝히고 있으며(1:1-17), 다윗의 자손으로서의 예수님의 역할을 강조하였습니다(1:1; 9:27; 12:23; 15:22; 20:30-31; 21:9,15; 22:41-45). 더 나아가, 마태는 예수님의 부활의 역사적 사실성을 은폐시키려는 유대인들의 사도에 대항하여, 부활의 사실성을 힘주어 강조하였습니다(27:62-66; 28:11-15).

 

마태복음의 특징

마태는 예수님에 대한 모든 이야기들을 수집하고 배열하여 씨줄과 날줄로 천을 직조한 것처럼 예수님에 대한 어떤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 이 마태복음을 구성했습니다.

(1) 신학적인 특징

다른 복음서들과 비교해 볼 때, 마태복음이 지닌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이 복음서의 체계적인 구성과 신학적인 특성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마태는 자료들을 배열함에 있어서, 매우 신중한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잘 알려진 바대로, 마태복음에는 다섯 가지의 강화(講話)가 들어 있습니다.

그것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산상 보훈(5:1-7:27) 열 두 제자들에 대한 선교 파송 설교(10:1-42) 천국 비유(13:1-52)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의 삶의 원리(18:1-35) 감람산 강화(24:1-25:46). 위의 다섯 가지 강화는 그 내용의 근본적인 성격에 있어서도 뚜렷하게 구별되고 있습니다. 각각의 강화는 (1) 윤리적인 특성 (2) 선교적인 특성 (3) 복음 선포적(Kerygmatic)인 특성 (4) 교회적인 특성 (5) 종말론적인 특성을 띠고 있습니다.

(2) 예언을 성취한 메시야

보다 중요한 특징은 마태복음의 신학적인 관심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마태는 메시야에 관한 구약의 예언들이 어떻게 예수님의 생애를 통해 성취되었는지에 그의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이를 입증하기 위해 구약을 자주 인용 했습니다(복음서들이 구약 성경을 인용한 횟수는 마태복음 93, 마가복음 49, 누가복음 80, 요한복음 33). 이것은 더 나아가 예수님에 의해서 율법이 폐지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된 것이라는 사실도 보여주는 것입니다(5:17-20).

마태복음은 계속해서 예수님을 메시아, 다윗의 자손으로 나타냅니다(이 말은 마태복음에서 모두 여덟 번 사용되었다). 단지 영광스러운 부활 사건 이후가 아니라, 예수님은 수난의 순간에도 메시야로서의 권리를 지니신 분으로 묘사됩니다(참조. 28:18; 26:53). 그러나 동시에, 예수님이 인류의 연약함을 대신 짊어지시며(8-17), 사람들을 자비로움과 온유함으로 대하시는(12:17-21) ‘여호와의 종이라는 사실도 명백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태는 옛 계약(Old Covenant)과 새 계약(New Covenant)의 관점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구속 계획에서 차지하는 이중적인 지위를 조명해 줍니다.

(3) 이방인을 향한 메시야

여호와의 종(메시아 즉 예수님)은 이방 민족들에게 공의를 선포할 것이며, 그들은 그의 이름을 바랄 것입니다(12:17-21),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최후 명령은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것입니다(28:19-20), 하나님의 옛 백성은 그들의 불신앙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특권을 빼앗길 것이며, 그 특권은 이제 새 백성(영적 이스라엘, 곧 신약 교회)에게로 넘겨질 것입니다(21:43). 따라서 마태복음은 교회에 대하여 매우 강조하고 있는 것이 하나의 특징입니다. 사실, ‘교회’(. 에클레시아)라는 용어는 마태복음에만 나옵니다. 이 같은 이유에서, 저자 마태는 그리스도 공동체의 권위와 질서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나태내고 있습니다(16:17-19, 18:15-18).

(4) 기적에 대한 강조점

마태복음의 또 다른 특징은, ‘기적에 대한 강조점입니다. 물고기 입에서 동전을 얻는 이야기(17:24-27)는 마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5) 예수님의 재림과 종말

또한 마태복음에는 예수님의 재림 혹은 종말(, ‘파루시아에 대한 많은 가르침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재림’(. ‘파루시아’-‘다시 오심’, ‘임하심’)이란 표현도 복음서에서는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것이 특징입니다(24:3,27,37,39). 마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많은 비유들도 대체로 이 주제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13:24-30, 36-43, 4750, 25:1-46)

 

마태복음의 분해

. 탄생, 영아기, 유년기 1:1-2:23

1. 예수의 탄생 전 1:1-25

2. 예수의 유년 시절 2:1-23

. 봉사를 위한 준비(A.D. 27) 3:1-4:11

1. 세례자 요한의 봉사 3:1-12

2. 세례 3:13-17

3. 시험 4:1-11

. 갈릴리 봉사(A.D. 29-30) 4:12-15:20

1. 초기 갈릴리 봉사 4:12-25

2. 산상 설교 5:1-8:1

3. 질병, 자연, 마귀에 대한 예수의 권능 8:2-9:34

4. 전도 방법에 대한 교훈 9:35-11:1

5.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온 파견단 11:2-30

6. 바리새인들과의 갈등 12:1-50

7. 해변에서의 설교: 천국에 관한 비유 13:1-52

8. 갈릴리에서 공적 봉사를 마침 13:53-15:20

. 공중 봉사에서 물러나심(A.D. 30) 15:21-18:35

1. 갈릴리 경계 지방에서의 봉사 15:21-39

2. 바리새인과의 또 다른 갈등 16:1-12

3. 십자가를 내다봄 16:13-17:27

4. 인간관계에 있어서의 겸손의 문제 18:1-35

. 페레아 봉사(A.D. 30-31) 19:1-20:34

1. 페레아에서 가르치고 치료하심 19:1-20:16

2. 마지막 예루살렘 여행 20:17-34

. 예루살렘 봉사를 마치심(A.D. 31) 21:1-27:66

1. 서기관들 및 바리새인들과의 갈등 21:1-23:39

2.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교훈 24:1-25:46

3. 체포와 심문 26:1-27:31

4. 못박힘과 장사 27:32-66

. 부활과 그 후의 나타나심 28: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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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에 소속된 강진샘교회의 담임목사 박상규 입니다. 청년 시절부터 약 40년 동안 성경을 묵상해 오면서 그동안 작성된 묵상 말씀을 설교로 작성해 오고 있습니다. 작성된 설교를 모두에게 나누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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