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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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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인도하심을 따른 다윗

사무엘하 2장 1-11절

 
인생은 하나님의 시간표가 어떻게 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방법대로 일하지 않습니다. 어떤 자리가 비였다고 곧바로 채우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데 하나님께서 인정하셨다고 사람들도 인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움직일 수 있어야 합니다.
 
다윗이 사울과 요나단의 장례식이 끝난 뒤에 처음으로 시작한 행보는 하나님께 길을 묻는 것이었습니다. 왕권을 향해 나아가는 첫걸음부터 하나님의 안내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 안에 세워진 다윗 왕권과는 반대되는 인간의 욕망으로 세워진 이스보셋의 정권도 있었습니다.
 

헤브론으로 옮긴 다윗(1-4a)

이스라엘의 진정한 통치자는 하나님이시며, 사람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시행하는 종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아 순종해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따르는 자는 그의 삶이 형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기 종을 대우하는 것처럼 막대하지는 않습니다. 다윗은 왕으로 가는 첫 발걸음부터 먼저 왕의 왕이신 하나님께 묻고 떠나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1그 후에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아뢰되 내가 유다 한 성읍으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올라가라 다윗이 아뢰되 어디로 가리이까 이르시되 헤브론으로 갈지니라 2다윗이 그의 두 아내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을 데리고 그리로 올라갈 때에 3또 자기와 함께 한 추종자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다윗이 다 데리고 올라가서 헤브론 각 성읍에 살게 하니라 4유다 사람들이 와서 거기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유다 족속의 왕으로 삼았더라(1-4a)

이스라엘의 첫 왕인 사울이 죽었습니다. 사무엘에 의해 기름 부음을 받은 다윗이 왕위에 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군사를 모집하여 곧바로 이스라엘의 왕위를 취하기 위한 시도를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다윗은 한발 물러나서 하나님께 먼저 묻고,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과정을 겪으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움직였습니다.

(1) 다윗의 기도(1)
당시 다윗은 블레셋 지역 시글락에 있었지만, 사울 왕이 죽음으로 더 이상 이 시글락에 머무를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유다의 한 성으로 올라가기를 원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다윗을 기름 부으신 뜻이 성취되어야 할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수하가 되기 위해 베냐민, 갓, 유다, 므낫세 지파로부터 많은 용사가 시글락으로 왔다는 점도 다윗이 왕권을 향하여 움직이도록 만들었을 것입니다(대상 12:1-22).
하지만 다윗은 왕이 되는 과정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른 것입니다.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하나님께 여쭈어보고 있습니다. 사울이 실패하였던 이유가 그가 하나님께 묻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결정했던 것과는 대비됩니다(삼상 13:10; 14:19,37; 28:6).
다윗은 하나님께 “내가 … 올라가리이까?”, “어디로 가리이까?”라고 어디로 가야 할지 묻습니다. 이러한 다윗에게 하나님께서는 “헤브론으로 갈찌니라”(1)라고 응답해주십니다. 그는 하나님의 지시대로 순종하면서 온 가족을 데리고 헤브론으로 올라갔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삶의 기반을 옮긴 것입니다. 헤브론은 유다 지파의 중심 도시며, 족장들의 무덤이 있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 도시입니다. 헤브론은 예루살렘에서 남서쪽으로 30km 떨어져 있으며, 해발 900m가 넘는 높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분의 지시에 순종하는 다윗의 모습은 사울 왕이 그의 통치 기간에 보여준 모습과 대비됩니다(삼상 13:10; 14:19,37; 28:6).

(2) 헤브론으로 이주(2-3)
다윗은 가족들을 데리고 헤브론으로 이주했습니다. 당시 다윗의 두 아내는 이스르엘 사람 아히노암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입니다. ‘이스르엘’은 갈릴리 호수 아래의 이스르엘 평원이 아니라 유다 산지의 구릉지대에 속한 땅으로 여겨집니다(수 15:56). ‘갈멜’ 역시 헤브론 남동쪽의 유다 구릉지대에 속한 지역입니다(수 15:55).
사무엘상 25장은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과 다윗의 결혼에 관해 자세히 설명하고 아히노암과의 결혼에 대해서도 짧게 언급합니다(삼상 25:42-43). 다윗이 이주할 때,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으므로, 그들은 헤브론과 그 주변 여러 성읍에 흩어져 거주했습니다.

(3) 유다 지파의 왕으로 즉위(4a)
다윗이 헤브론으로 옮겨온 사실이 유다 사람들에게 알려졌습니다. 유다 사람들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다윗을 유다 왕으로 세웠습니다. 그동안 다윗은 유다 지파의 나발에게 무시당하면서 자신이 왕이 되려면 더 적극적으로 유다 지파에게 호감을 사야 한다는 점을 심각하게 인식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글락에 거주하는 동안 헤브론을 포함하여 여러 성읍에 선물을 보냈습니다(삼상 30:26-31). 다윗의 헤브론 이주는 이러한 자신의 노력이 상당한 결실을 보았다는 확신에 근거하였을 것입니다. 한편 사울의 왕국이 아브넬과 이스보셋의 통치 아래 여전히 존재하는 상황에서 블레셋은 다윗의 즉위를 묵인하거나 허용했을 것입니다.
다윗은 이미 소년 시절 하나님께 선택되어 선지자 사무엘에게 이스라엘 왕으로써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삼상 16:13). 이제 헤브론에서 백성들에 의해 유다 사람의 왕으로 추대를 받았습니다. 기름 부어서 왕으로 세우는 의식은 기름을 붓는 주체인 백성이 기름 부음을 받는 사람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의미입니다. 아직 불안전한 왕이긴 하지만 유다 한 지파의 왕이 된 것입니다.
 

유다 사람들의 왕인 다윗(4b-7)

왕으로 선택받은 다윗이 실제 왕이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하지만, 그 시간은 결과적으로 좋은 왕이 되기 위한 훈련과 준비의 과정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당신에게 주신 꿈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이루어 가는데도 다윗처럼 시간이 많이 필요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서두르지 않습니다. 당신이 좋은 믿음의 사람으로 선한 일꾼이 되기까지 인도하실 것입니다.

4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말하여 이르되 사울을 장사한 사람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니이다 하매 5다윗이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전령들을 보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너희 주 사울에게 이처럼 은혜를 베풀어 그를 장사하였으니 여호와께 복을 받을지어다 6너희가 이 일을 하였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은혜와 진리로 너희에게 베푸시기를 원하고 나도 이 선한 일을 너희에게 갚으리니 7이제 너희는 손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할지어다 너희 주 사울이 죽었고 또 유다 족속이 내게 기름을 부어 그들의 왕으로 삼았음이니라 하니라(4b-7)

다윗은 하나님의 뜻으로 유다 지파의 왕이 되었는데도, 유다 지파를 제외한 나머지 열한 지파에게는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다윗은 이제 남은 열한 지파를 품는 일의 첫걸음을 내딛습니다. 그가 맨 처음 손을 내민 곳은 사울의 시신을 수습해준 길르앗 야베스였습니다. 그들은 사울의 은혜를 목숨 걸고 깊은 충신들이었습니다.

(1) 야베스 사람들의 선행(4b)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택받은 사람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가운데 하나인 유다의 왕 노릇을 한다는 것은 매우 미미한 시작일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이런 과정을 통해 이스라엘 전체를 다스리는 진정한 왕으로 더 잘 훈련되고 준비될 수 있었습니다.
왕위가 계승될 때 왕의 죽음을 기록한 후, 새로운 왕의 등극을 기록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왕상 2:10-12; 11:43). 다윗은 사울의 계승자로서 왕위에 오르지 않았으므로, 이와 같은 보통의 상황에 해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다윗의 즉위를 기록하는 본문에 사울의 죽음과 관련된 언급이 나타납니다. 즉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사울을 장사지냈다는 기록입니다. 야베스 사람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사울과 요나단의 시체를 장사하였던 것은 사울이 그들에게 베푼 은혜에 대한 보답이었습니다.
이렇게 유다 지파의 왕이 된 다윗은 사울을 장례를 치러주었던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격려했습니다. 이처럼 다윗의 전 생애를 통해 보면, 다른 사람을 탓하거나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고 세워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2) 다윗의 축복(5-6)
다윗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전령을 보냅니다. 그리고 “너희가 너희 주 사울에게 이처럼 은혜를 베풀어 그를 장사하였으니 여호와께 복을 받을지어다”(5)라고 축복을 전합니다. 비록 전쟁에서 패하여 죽은 사람이지만, 야베스 사람들은 사울에게 은혜(헤세드)를 베풀어 그를 장사하였던 일을 언급하면서, 야베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복 받기를 기원합니다.
히브리어 ‘헤세드’는 언약에 근거한 사랑, 즉 조건 없는 사랑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이제 야베스 사람들의 헤세드에 대한 보답으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은혜(헤세드)와 진리(에메트)를 베푸실 것입니다. ‘헤세드’와 ‘에메트’는 흔히 쌍으로 등장합니다(창 24:49; 47:29: 출 34:6; 수 2:14; 삼하 2:6; 15:20 등).
다윗 자신도 “너희가 이 일을 하였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은혜와 진리로 너희에게 베푸시기를 원하고 나도 이 선한 일을 너희에게 갚으리니”(6)라고, 자신도 야베스 사람들에게 행하겠다고 은혜를 행하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여기서 “이 선한 일”은 야베스 사람들이 베푼 ‘헤세드’를 가리킵니다.

(3) 다윗 왕권의 정당성 주장(7)
다윗은 야베스 사람들에게 “이제 너희는 손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할지어다”(7)라고 권면합니다. ‘손을 강하게 함’은 용기 내는 것을 가리키는 관용적 표현입니다. 다윗이 이처럼 야베스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우는 이유는 사울의 죽었고 자신이 유다 지파의 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유다 지파가 다윗에게 기름 부은 것은 이스라엘을 분열시키는 행동이었고, 결국 나라는 혼란에 빠질 것이 분명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윗은 야베스가 이스보셋이 아니라 자신의 편에 서기를 호소하고 있습니다.
 

11지파의 왕인 이스보셋(8-11)

작은 일에 충성하면 큰일까지 맡아서 일할 수 있습니다. 큰일을 할 수 없다고 원망이나 불평하고 있으면, 작은 일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온 지파의 왕이 아니라 한 지파의 왕으로 세움을 입었지만,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신 만큼 유다 지파부터 잘 다스렸습니다. 그의 충성스러움은 나중에는 이스라엘 온 지파들이 다윗에게 달려와 왕이 되어 달라고 부탁합니다.

8사울의 군사령관 넬의 아들 아브넬이 이미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데리고 마하나임으로 건너가 9길르앗과 아술과 이스르엘과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더라 10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이스라엘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사십 세이며 두 해 동안 왕위에 있으니라 유다 족속은 다윗을 따르니 11다윗이 헤브론에서 유다 족속의 왕이 된 날 수는 칠 년 육 개월이더라(8-11)

다윗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여 세우신 유다의 왕이었지만,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은 아브넬이 주도하여 사람들이 세운 왕이었습니다. 이스보셋이 더 많은 지파, 더 넓은 땅을 다스리는 왕으로 세움을 입었지만, 그의 왕위의 정통성에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그 시작이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1) 아브넬의 역할(8-9)
아브넬은 사이 사촌이며 아비엘이 그들의 할아버지입니다(삼상 9:1, 2; 14:51). 아브넬은 사울의 통치 초기부터 군사령관의 지위에 있었으며, 사울 왕국의 이인자였습니다.
그는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요단 동편 마하나임으로 데려가 왕으로 삼았습니다. 이스보셋(‘수치의 사람’)은 에스바알(‘바알의 사람’)이라고도 불리는 사울의 넷째 아들입니다(대상 8:33). 사무엘상 14장에서 이스보셋의 이름이 소개되지 않은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삼상 14:49). 그의 나이가 아직 어렸기 때문이거나, 그의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처럼, 그가 인정받지 못하는 아들이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여겨집니다.
이스보셋 왕국의 수도가 된 마하나임은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하지만, 얍복강의 북편 둑에 위치한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스보셋은 유다 지파를 제외한 ‘온 이스라엘’을 다스렸는데, 길르앗과 아술과 이스르엘, 에브라임, 베냐민이 그 왕국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아술은 므낫세 땅의 성읍 아셀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수 17:7).

(2) 이스보셋과 다윗의 통치 기간(10-11)
이스보셋이 40세에 왕이 되어 2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다윗이 7년 6개월 동안 헤브론에서 유다 지파를 통치하였음을 생각한다면, 이스보셋이 왕이 되기 전 몇 년 정도 아브넬이 군사령관으로서 사울 왕국을 다스렸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나가는 말

다윗의 형통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형통한 삶을 살길 원한다면, 다윗처럼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해나가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을 주실 때, 순종하며 나가시길 바랍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지금 당신이 순종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시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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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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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용사를 위한 다윗의 ‘슬픈 노래’

사무엘하 1장 17-27절

 

희망이 있는 곳에서는 누구나 희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희망이 있을 때 부른 노래는 진정한 희망의 노래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모든 희망이 사라지고 절망만 남아 있을 때 만일에 거기에서 희망을 노래할 수 있다면 그것이 진짜 희망의 노래가 아니겠습니까! 쓰레기 더미에서 부르는 노래가 진정한 희망의 노래, 생명의 노래입니다. 우리는 그 노래를 통해, 그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나 만든 사람의 마음을 느끼게 됩니다. 다윗은 활의 노래에 어떤 마음으로 만들었겠습니까?

 

다윗은 자신의 야망에 사로잡힌 지도자가 아니라,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생각한 지도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사울 왕과 요나단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듣고 매우 슬퍼합니다. 그들의 죽음을 위해 슬픈 노래를 짓고 부릅니다.

 

사울과 요나단 죽음을 슬퍼함(17-18)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마음을 맞는 사람만 보내 주신 것이 아니라 때로는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을 보내주시기도 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는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을 같이 미워하기보다는, 다윗처럼 영적으로 성숙하는 도구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더욱 성숙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가야 합니다. 그러면 다윗처럼 자신을 미워한 사람이라고 장점과 업적을 칭찬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합니다.

17다윗이 이 슬픈 노래로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을 조상하고 18명령하여 그것을 유다 족속에게 가르치라 하였으니 곧 활 노래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었으되(17-18)

본문은 다윗의 애가(哀歌.슬픈 노래)에 대한 서문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이 패전하고 사울과 요나단이 전쟁터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애가를 부르고 있습니다.

(1) 다윗의 애가(17)

다윗은 아말렉 청년을 통해 사울과 요나단이 전쟁터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 족속에게 패한 것은 매우 가슴 아픈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매우 슬퍼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추모하는 애가를 지었습니다.

이 애가의 제목을 ‘활의 노래’라고 번역하였지만, 원문의 제목은 ‘활’입니다. 이 활은 요나단을 가리킵니다. 이 노래는 ‘활의 노래(lament of the bow)’로 야살의 책에 기록되었습니다. 이 시의 두 주인공은 사울과 요나단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노래 제목이 ‘활’이라는 것은 사울과 요나단 중에 요나단을 좀 더 중심적인 인물로 본 것입니다. 애가에서 특별히 한 주절을 사용했다는 사실에서 더 잘 들어납니다.

(2) 활의 노래(18)

다윗은 이 애가를 백성들에게 가르쳐 유다 백성들이 모두가 사울과 요나단을 추도하도록 명령합니다. 그들은 수많은 전쟁에서 이스라엘을 구한 용사요, 이스라엘의 영광이었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싸우다 죽은 그들의 왕과 왕자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의 죽임에 대한 추모 노래를 만들 때, 자신을 사랑한 요나단만을 위해 짓지 않았고, 자신을 죽이려고 그렇게 쫓아다녔던 사울까지도 위해서 지었습니다. 사울을 향해 용사요, 이스라엘의 영광이라고 표현합니다. 다윗을 향한 공격은 자신을 절망과 원망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숙하게 만들었습니다.

 

두 영광의 죽음 애도(19-24)

자신을 세우기 위해 다른 사람의 업적을 무너뜨리는 행동은 치졸한 행동입니다. 오늘날은 이러한 일들이 곳곳에서 비일비재합니다. 성도들은 개인적인 원한에 따라 반응하는 치졸하게 행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으로 원수까지 사랑할 줄 알며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판단할 줄 아는 소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19이스라엘아 네 영광이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 20이 일을 가드에도 알리지 말며 아스글론 거리에도 전파하지 말지어다 블레셋 사람들의 딸들이 즐거워할까, 할례 받지 못한 자의 딸들이 개가를 부를까 염려로다 21길보아 산들아 너희 위에 이슬과 비가 내리지 아니하며 제물 낼 밭도 없을지어다 거기서 두 용사의 방패가 버린 바 됨이니라 곧 사울의 방패가 기름 부음을 받지 아니함 같이 됨이로다 22죽은 자의 피에서, 용사의 기름에서 요나단의 활이 뒤로 물러가지 아니하였으며 사울의 칼이 헛되이 돌아오지 아니하였도다 23사울과 요나단이 생전에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자이러니 죽을 때에도 서로 떠나지 아니하였도다 그들은 독수리보다 빠르고 사자보다 강하였도다 24이스라엘 딸들아 사울을 슬퍼하여 울지어다 그가 붉은 옷으로 너희에게 화려하게 입혔고 금 노리개를 너희 옷에 채웠도다 25오호라 두 용사가 전쟁 중에 엎드러졌도다 요나단이 네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26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도다 27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으며 싸우는 무기가 망하였도다 하였더라(19-27)

본문 19-27절은 다윗 애가의 본문으로 화자 시점을 1인칭으로 다윗 자신이며, 따라서 애가에는 다윗의 관점과 다윗의 감정이 잘 나타납니다. 애가의 시작은 이스라엘을 부르면서 시작합니다. 형식면에서 19-27절은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로 시작하고 마침으로써 노래를 통합하고 있고, 25절에서도 애곡의 대상을 사울과 요나단에서 요나단 한 사람으로 바꿀 때에도 이 구문을 후렵구로 사용하여 전체적으로 시에 통일성을 주고 있습니다.

(1) 사울의 죽음을 슬퍼함(19-24)

다윗은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알리면서 너희 영광이 산 위에서 죽임을 당했다고 알리면서 애곡을 시작합니다. 고대 사회에서 왕은 흔히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존재로 묘사됩니다(시 45:2; 사 33:17). 그러므로 ‘영광’은 이스라엘의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용사인 사울(과 요나단)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이 용사가 죽은 장소를 ‘산’이라 번역하지만, 원문에는 ‘높은 곳’입니다. “두 용사”로 번역된 깃보림은 문자적으로 ‘(다수의) 용사들’을 의미입니다. 이 단어는 이 시에서 모두 다섯 번 사용되는데, 22절을 제외하면 사울과 요나단 두 사람을 가리킵니다(1:19,21,22,25,27). 한글 성경의 ‘오호라’는 ‘예크(איך)’의 번역입니다. 이 단어는 대부분의 영어 번역처럼 ‘어찌하여’(how)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습니다. 따라서 19절 후반부는 ‘어찌하여 용사들이 엎드러졌는가?’가 됩니다. 이는 전쟁에 패하였음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다윗은 전쟁의 패배를 알리는 이 문장을 세 번 사용하면서 본문의 틀을 만들고, 시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형성합니다(1:19, 25, 27).

20절에서는 온 이스라엘을 불러 두 용사의 죽음을 알리는 19절과 대조적으로 알리지 말라고 합니다. 20절은 4개의 행이 나오는데, 두 행이 서로 평행을 이루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앞의 두 행은 명령이고 뒤의 두 행은 그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알리지 말라 가드에서 / 전하지 말라 아스글론의 거리에서 / 블레셋의 딸들이 즐거워하지 못하도록 / 무할례자의 딸들이 개가를 부르지 못하도록, 20절 전반부에서 다윗은 사울의 죽음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가드와 아스글론은 블레셋의 모든 지역을 가리키는 일종의 제유법(synecdoche)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후반부는 블레셋 사람의 딸들과 할례받지 못한 자의 딸들에 관해 말합니다(“할례받지 못한 자의 딸들이 개가를 부를까 염려로다”). 후반부는 히브리 시의 전형적인 평행법으로 표현되었는데, 할례받지 못한 자의 딸은 블레셋 사람의 딸을 달리 표현한 것입니다. 아들이 아니라 딸을 언급한 이유는 이들이 대외 활동이 적어 주변 소식에 가장 어두운 집단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조차 사울의 죽음을 알고 기뻐한다면, 모든 블레셋 사람이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블레셋은 그들의 승전 소식을 모든 블레셋 땅으로 전파했습니다(삼상 31:9). 다윗이 이처럼 불가능한 일을 소원하는 것은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그의 마음이 간절함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22-24절은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블레셋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 것을 명한 다윗은 전쟁의 상황 속에서 들어난 두 사람의 무용(武勇) 칭송합니다. 22절은 그들이 전쟁터에서의 용감함을 보여줍니다. 구문은 20절처럼 두 행씩 평행을 이룹니다. 이런 형태는 사울과 요나단을 동등하게 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합니다. “죽은 자”(할랄)와 “용사”(깃보림)는 19절에서 모두 사울을 가리키는 표현이었습니다. 죽은 용사가 된(19) 사울은 과거 자신의 칼을 사용하여 요나단과 함께 수많은 ‘죽은 용사’를 만들었습니다(22). 본문은 이미 죽은 사울의 현재 모습과 무적이었던 과거의 모습을 비교하면서, 사울의 비참한 운명을 더욱 부각하고 있습니다. 사울의 용맹과 위대함은 그가 요나단과 함께 있었기에 더욱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 사울과 요나단은 함께 싸울 때 무적이었습니다. 비록 부친의 잘못된 결정 때문이었지만, 부친을 위해 자신이 죽겠다고 말하던 요나단이 실제 부친과 함게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습니다(삼상 14:43). 서로를 향한 두 사람의 사랑과 신뢰가 죽음의 순간에 더욱 빛납니다.

장례식에서 여인들이 애곡하는 관습에 따라 다윗은 여인들에게 사울의 죽음을 슬퍼하여 올라고 합니다. 전쟁은 남자들의 영역이지만 패배를 슬퍼함은 여자들의 영역입니다. 특별히 사울 왕은 이스라엘의 여인들이 풍족하고 화려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만든 사람입니다. 여인들은 사울의 치세 동안 화려하고 붉은 옷을 입었고, 금으로 만든 장신구를 옷에 달고 다녔습니다. 그러므로 여인들이 사울을 위해 슬퍼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2) 요나단을 기억함(25-27)

다윗은 이제 요나단에게로 관심을 돌립니다. 19절에서 사용된 단어와 문장이 25절에서 반복됩니다. 전쟁의 패배를 탄식하는 문장(“오호라 용사들이 엎드러졌도다”)이 19절에 이어 다시 사용되면서 새로운 단락이 시작됨을 알립니다.

이스라엘의 영광(=사울)이 산 위에서 죽은 것처럼(19), 요나단 역시 산 위에서 죽었습니다(25). 다윗은 요나단을 “내 형”이라 부릅니다. 이는 다윗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요나단을 따랐음을 보여줍니다. “아름다움이라”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나엠’이며, 이는 23절에 사용된 나임(?)의 동사형입니다. 이 단어는 외모의 아름다움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명랑하고 정이 넘치는 성품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26절에서 다윗은 ‘내가 당신을’ 혹은 ‘당신이 나를’이란 표현을 3번이나 반복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요나단과의 친밀한 관계를 강조합니다. 특히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가슴이 쥐어짜지듯이 괴롭다며 가슴 아파하였습니다. ‘그대는 나의 기쁨입니다’라는 말은 다윗이 요나단을 매우 좋아하였고 소중히 여겼다는 고백입니다. 그뿐 아니라 요나단의 사랑은 ‘기이하다’(팔라)라고 표현하는데, 다윗에 대한 애정이 남녀 간의 사랑보다 더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다윗에게 이유 없이 분에 넘치는 사랑을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용사들의 죽음을 세 번째 언급함으로써 자신의 시를 끝맺습니다. 본문의 ‘망하다’는 히브리어 ‘아바드’의 번역입니다. 이 단어는 흔히 사람의 죽음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됩니다(민 17:12). 그러므로 본문에서 싸우는 무기, 즉 (문자적으로) 전쟁 무기는 앞 문장의 용사들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용사들이 엎드러지는 것과 전쟁 무기가 망한 것은 히브리 시의 평행법에 해당합니다.

 

나가는 말

다윗의 애가는 한 편의 추도사입니다. 진한 안타까움도 아쉬움도 묻어 있습니다. 다윗은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고 끝까지 사랑했습니다. 이제 자신의 인생은 어떻게 기억되겠습니까? 기억되고 싶습니까?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기대에 부흥하는 인생, 실추된 주의 명예를 회복하고 수세에 몰린 하나님 나라의 반격을 도모하는 다윗의 인생을 꿈꿔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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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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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다윗 왕국을 위한 서막

사무엘하 1장 1-16절

 

연극이나 뮤지컬을 보면, 1막이 끝나면 막을 내리고, 잠시 무대를 정리할 시간을 가졌다가 다음 막을 위해 다시 막을 올리면서 또 다른 내용의 연극을 시작합니다. 이처럼 ‘사무엘상’ 막을 내리고, 이제 ‘사무엘하’ 막을 올리고 있습니다. 원래 사무엘 상하는 한 권의 책이었습니다. 많은 분량으로 상하로 나눈 것뿐입니다. 사무엘 상하의 분기점은 사울의 죽음입니다. 그래서 사무엘하는 ‘사울이 죽은 후’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사울의 시대가 지나가고 다윗 통치의 새 시대가 왔다는 선언입니다.

 

이 단락은 다윗이 사울의 죽음에 관해 알게 되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다윗이 시글락에 머물고 있을 때, 사울의 병사 중 한 명이었던 아말렉 청년이 다윗을 찾아왔습니다. 아말렉 청년은 전쟁 중 중상을 입은 사울 왕의 부탁을 받아 그를 죽인 뒤, 그의 왕관과 팔찌를 벗겨 다윗에게 가져왔다고 보고했습니다. 다윗은 이 보고를 듣고 크게 슬퍼하며 울고 금식하였습니다. 또 다윗은 자신이 사울을 죽였다고 말하는 그 청년을 수하를 시켜 죽이게 하였습니다.

 

아말렉 청년의 보고(1-5)

우리와 함께하신 하나님께서는 위대하고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이라도 큰 일꾼으로 쓰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서 쓰임을 받기 위해서는 자리를 탐내기 전에 자신을 합당한지 먼저 돌아보아야 합니다. 공동체는 지도자를 잘 만나고, 지도자가 누구인가가 중요합니다.

1사울이 죽은 후에 다윗이 아말렉 사람을 쳐죽이고 돌아와 다윗이 시글락에서 이틀을 머물더니 2사흘째 되는 날에 한 사람이 사울의 진영에서 나왔는데 그의 옷은 찢어졌고 머리에는 흙이 있더라 그가 다윗에게 나아와 땅에 엎드려 절하매 3다윗이 그에게 묻되 너는 어디서 왔느냐 하니 대답하되 이스라엘 진영에서 도망하여 왔나이다 하니라 4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일이 어떻게 되었느냐 너는 내게 말하라 그가 대답하되 군사가 전쟁 중에 도망하기도 하였고 무리 가운데에 엎드러져 죽은 자도 많았고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도 죽었나이다 하는지라(1-4)

성도의 태도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특히 사울의 죽음을 알려온 아말렉 소년을 죽이는 사건을 통해, 다윗 왕국은 이 세상의 욕심과 성공의 방법으로 발붙일 곳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주권을 따른 사람들이 살아가는 나라임을 보여줍니다. 사건이 발생한 시간이나 장소를 기록하는 것은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됨을 알리는 표시입니다.

(1) 시간과 장소(1)

사무엘하의 이야기는 “사울의 죽은 후라”(1)라고 시작합니다. 이 의미는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의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왕 다윗의 시대가 시작됨을 함축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다윗은 그 무렵 아말렉과의 전쟁을 마치고 시글락으로 돌아온 지 이틀이 지났습니다.

사울이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죽은 후에(삼상 31:1-6), 다윗이 공식적으로 행한 첫 번째 일은 아말렉 사람을 죽이는 일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앞으로 펼쳐질 다윗 왕국은 사울의 왕국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울은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였지만, 다윗은 아말렉을 심판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성경은 아말렉 족속을 에서의 후손으로 소개합니다(창 36:12; 대상 1:36). 이들은 유다 남부 광야지대나 시내 반도에 거주하는 유목민으로 등장합니다. 히브리 민족과 아말렉 사이의 적대 관계는 출애굽 직후에 형성되었으며, 사울 왕이 아말렉을 진멸함으로써 그 적대 관계가 대부분 청산되었습니다(출 17:8-16; 삼상 15장). 그 후에도 아말렉이 여전히 존속하였는데, 다윗이 한동안 머물렀던 성읍 시글락을 약탈했던 무리가 아말렉이었습니다(삼상 30:1-2). 다윗은 아말렉을 추격하여 그들을 살육하고, 사로잡혔던 가족을 되찾고 많은 재물을 빼앗았습니다(삼상 30:16-20). 그후 다윗은 시글락으로 돌아와 머물렀습니다. 시글락은 아마도 브엘세바에서 죽쪽으로 약 30km 떨어진 곳에 해당합니다.

(2) 아말렉 청년의 모습(2)

다윗이 아말렉은 도륙하고 시글락에 돌아와 쉬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한 소년이 사울의 진영에서 나왔습니다. 그의 모습은 엉망이었습니다. 옷이 찢어져 있었고, 머리에 흙이 있었습니다(2). 그는 죽은 자를 애도하거나 전쟁에서 패배했음을 슬퍼하는 사람의 모습이었습니다(창 37:34; 수 7:6; 삼상 4:12; 삼하 13:31; 시 35:13). 그가 다윗 앞에 와서 땅에 엎드려 절했습니다.

(3) 아말렉 청년의 보고(3-4)

이 아말렉 청년은 이스라엘 진영에 있다가 도망한 자였습니다. 다윗에게 블레셋과 전투에서 있었던 사울 왕과 요나단의 죽음을 보고 합니다. 다윗은 그에게 전쟁의 결과에 관해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전쟁 도중에 도망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 역시 죽었다는 사실을 보고했습니다.

사울왕의 죽음은 결국 이스라엘의 패배로 끝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패한 것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는 인간적인 방법으로 전전긍긍하다 결국 패하고 전사하게 된 것입니다.

 

다윗의 질문(5-10)

진실을 외면하고 자신의 이익을 먼저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가 공을 세운 것처럼 가장하여 칭찬과 상급을 받으려는 얄팍한 잔꾀는 스스로를 멸망시킵니다. 자신의 이익을 우리가 밝혀야될 진실보다 자신에게 유리한 거짓을 꾸미고 있지는 않습니까? 인간의 얄팍한 꾀는 오히려 자승자박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고 진실을 왜곡하는 거짓된 삶을 격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5다윗이 자기에게 알리는 청년에게 묻되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이 죽은 줄을 네가 어떻게 아느냐 6그에게 알리는 청년이 이르되 내가 우연히 길보아 산에 올라가 보니 사울이 자기 창에 기대고 병거와 기병은 그를 급히 따르는데 7사울이 뒤로 돌아 나를 보고 부르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한즉 8내게 이르되 너는 누구냐 하시기로 내가 그에게 대답하되 나는 아말렉 사람이니이다 한즉 9또 내게 이르시되 내 목숨이 아직 내게 완전히 있으므로 내가 고통 중에 있나니 청하건대 너는 내 곁에 서서 나를 죽이라 하시기로 10그가 엎드러진 후에는 살 수 없는 줄을 내가 알고 그의 곁에 서서 죽이고 그의 머리에 있는 왕관과 팔에 있는 고리를 벗겨서 내 주께로 가져왔나이다 하니라(5-10)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놀라운 소식을 들은 다윗은 소년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합니다.

(1) 다윗의 질문(5)

다윗은 아말렉 소년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려고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느냐고 다시 질문합니다. 본문에서는 ‘어떤 사람’으로 불리던 정보 전달자를 처음으로 ‘청년’(나아르)이라 부릅니다. 히브리어 ‘나아르’는 청년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어린 나이의 소년을 의미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하지만 이 단어는 신분이 낮은 사람이나 초보자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여기서 ‘나아르’라는 칭호는 그의 보고가 신뢰하기 힘들다는 다윗의 인식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방인으로 보이는 어린 나이의 병사, 나아르가 이스라엘 왕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에 관해 정확히 알고 있다는 점이 다윗에게 의구심을 불러일으켰을 것입니다.

(2) 아말렉 청년의 보고(6-9)

아멜렉 청년은 사울을 만난 것은 우연이라고 강조합니다. 자신이 길보아 산에 우연히 올라갔다고 말합니다. 그가 말한

‘길보아 산’은 이스르엘 평원의 동쪽 끝부분에 있으며, 이 산의 높이는 해발 500미터 정도입니다. 그는 자신이 두 눈으로 본 것을 말하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 ‘보라’라는 뜻의 ‘힌네’를 사용하여 설명합니다.

청년은 사울이 자기 창에 기대 있었고, 기병과 병기가 사울을 추격하여 매우 가까이 와 있음을 보았습니다(6). 자신이 사울 왕을 볼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사울 왕이 고개를 돌려 아말렉 청년을 보고서 불렀습니다(7). ‘네가 누구냐?’ 하고 묻는 사울의 질문에 그는 자신이 아말렉 사람이라고 답했습니다(8). 그러자 사울은 자신의 목숨이 아직 완전히 있어서 고통스러우니 자신을 죽이라고 그에게 지시했습니다. 목숨이 완전히 있다는 것은 ‘콜-오드 나프쉬’의 번역입니다. 이 번역은 사울이 마치 건강한 상태로 있었음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콜(모든)은 뒤에 나오는 오드(여전히)를 강조하는 역할을 하며, 생명이 완전함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드는 생명이 소멸되지 않고 여전히 이어지고 있음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콜-오드 나프쉬’는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상태를 표현합니다. 고통으로 번역된 ‘샤바츠’는 성경에서 단 한 번 사용되었으며(hapax legomenon), 의미가 불분명합니다. 칠십인역은 이 단어를 ‘스코토스 데이논’, 즉 ‘공포스러운 흑암’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단어는 벗어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을 가리킬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고통 중에 있나니’(9)는 ‘내가 절망적인 상황에 부닥쳤으니’라는 뜻입니다.

사울 왕은 창에 기대고 있었고, 그의 뒤를 병거와 기병이 급하게 쫓아오고 있는 다급한 상황이었는데, 이때 사울이 뒤돌아보고 자신을 불러서 그에게 갔다고 합니다. 소년은 사울과 만난 장면을 매우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3) 아멜렉 청년의 행동(10)

아말렉 청년은 사울이 기력을 소진한 뒤 쓰러지면 생명을 잃을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울의 지시대로 사울을 죽이고, 그의 면류관과 팔찌를 취하여 다윗에게 가져왔습니다. 여기서 ‘면류관’(네제르)은 왕이 야외에서 착용하는 간편한 형식의 왕관을 가리킬 것입니다. 또 ‘팔찌’(에츠아다)는 팔꿈치 위쪽에 착용하는 형태로 여겨집니다. 이 청년은 자신이 칭찬받으리라고 생각하여 이처럼 말했을 것입니다.

다윗은 먼저 사울의 사망에 대한 경위를 살펴보면, 자신이 우연히 길보아 산에 갔었는데 부상당한 사울 왕을 만났고 말했습니다. 부상이 심한 사울 왕은 자신에게 죽여 달라고 원했었고, 그래서 자신은 사울을 죽인 후에, 사울의 징표인 왕관과 팔찌를 증거로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소년의 보고는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 점들이 있습니다. 그 말씀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3사울이 패전하매 활 쏘는 자가 따라 미치니 사울이 그 활 쏘는 자를 인하여 중상한지라 4그가 병기 든 자에게 이르되 네 칼을 빼어 나를 찌르라 할례 없는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하나 병기 든 자가 심히 두려워하여 즐겨 행치 아니하는지라 이에 사울이 자기 칼을 취하고 그 위에 엎드러지매 5병기 든 자가 사울의 죽음을 보고 자기도 자기 칼 위에 엎드러져 그와 함께 죽으니라(삼상 31:3-5)

사울은 활 쏘는 자에게 쫓기고 있었지만(삼상 31:3), 여기서는 병거와 기병에게 쫓기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또 사울은 병기 든 자에게 자신을 죽여 달라고 부탁하다가 자신이 자살해 죽지만(삼상 31:4), 여기서는 아말렉 소년은 자신에게 부탁해서 자신이 고통을 덜해 주기 위해 죽였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다윗의 원수 사울 왕을 죽였기 때문에, 다윗을 위한 일등공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다윗이 세울 새로운 나라의 공신으로 세워달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출세를 위해 거짓된 공적을 꾸며서 유리하게 거짓 보고한 것입니다.

 

다윗의 반응(11-16)

무엇에 기뻐하고 슬퍼하는지를 보면 무엇을 가장 열망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앞서지 않는 판단이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평생 따라다니면서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원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대부분 사람들은 기뻐할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11이에 다윗이 자기 옷을 잡아 찢으매 함께 있는 모든 사람도 그리하고 12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과 여호와의 백성과 이스라엘 족속이 칼에 죽음을 인하여 저녁때까지 슬퍼하여 울며 금식하니라13다윗이 그 소식을 전한 청년에게 묻되 너는 어디 사람이냐 대답하되 나는 아말렉 사람 곧 외국인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14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냐 하고 15다윗이 청년 중 한 사람을 불러 이르되 가까이 가서 그를 죽이라 하매 그가 치매 곧 죽으니라 16다윗이 그에게 이르기를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갈지어다 네 입이 네게 대하여 증언하기를 내가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죽였노라 함이니라 하였더라(11-16)

평생 칼갈이 다윗을 위협하던 사울은 건재했습니다. 기름 부음 받은 자 사울의 생명을 하나님께 맡긴 그의 판단은 옳았습니다. 그리고 이 판단을 거스른 아말렉 소년을 처형합니다. 하나님보다 앞서지 않는 판단이 우리를 지켜줍니다.

(1) 슬퍼하는 다윗(11-12)

다윗은 자신의 목숨을 끈질기게 노리던 사울 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기뻐하기보다는 매우 슬퍼하였습니다. 다윗과 부하들은 모두 자기 옷을 찢고 저녁까지 금식하면서 그들의 죽음을 위해 금식하였습니다.

한 번도 사울을 원수로 여긴 적이 없었습니다. 사울 왕의 죽었다는 소식은 다윗은 개인적인 감정과 욕심을 떠나서 하나님이 세운 이스라엘 왕의 죽음을 슬퍼했습니다. 그의 슬픔은 결코 정치적 위선이 아니라 안타까운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의 아픔과 슬픔에는 쉽게 동참할 수 있지만, 자신을 힘들게 하는 사람의 슬픔에 동참하기란 전혀 쉽지 않습니다. 성도들은 모든 일들을 하나님 나라의 거시적인 차원에서 살펴가야 합니다.

(2) 처형당하는 아말렉 청년(13-16)

다윗은 사울을 죽였다고 자랑스럽게 거짓 보고하며, 큰 상을 기대했던 아말렉 소년을 죽이라고 다윗은 명령합니다. 그를 죽이라는 이유를 “네가 어찌하여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냐?”(14)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아말렉 소년을 심판한 것입니다. 아말렉 소년이 생각한 것처럼, 다윗은 결코 사울 왕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다윗은 그를 징계하고 죽임으로써 하나님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에 대한 다윗의 변함없는 태도를 말합니다.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입은 사람을 죽이는 것은 큰 죄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거역을 나타내며,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세상적인 방법으로 왕관을 취하려는 삶을 결코 원치 않았습니다. 결국 원수의 죽음을 기뻐하리라는 생각과 그것을 이용해서 성공하려는 아말렉 소년의 꿈은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습니다.

거짓은 반드시 그 대가를 치룹니다. 아말렉 소년은 뛰어난 연기와 능숙한 말솜씨로 다윗을 속이는데 성공할 수 있었지만, 그의 거짓된 행동은 자신의 죽음을 불러왔습니다. 우리들도 야망을 위해 거짓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버려야 합니다. 진실한 삶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나가는 말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들을 행할 때,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대로 순종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일을 새롭게 시작하는데, 하나님의 중심과 방식대로 순종하면서 시작한 것입니다. 욕심이 아닌 말씀을 따라 반응하게 하시고, 어떤 상황에서도 거짓이 아닌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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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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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을 쌓은 방법을 가르친 예수님

마태복음 616-34

 

사람들은 자신의 선행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이러한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게 칭찬과 상급을 받아버리면, 그들은 이미 상급을 받았기 때문입니다(마태복음 6:2,6). 하나님께서 주실 상급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선행을 드러내고 싶을 때 그 충동을 하나님 앞에 절제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 믿는 성도들이 하늘나라 시민의 정체성을 가지고 세상과 구별되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매우 실제적으로 소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하늘나라의 시민들의 삶을 소개합니다. 본 단란은 제자들의 새로운 삶의 방식에 대한 추가적 가르침입니다. 특별히 재물과 염려의 문제를 다룹니다. 이 둘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재물을 땅에 쌓으며 재물을 좇다 결국 재물의 노예가 되어 삽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재물이 아닌 하나님만을 섬기며, 그분께 전적으로 삶을 의탁합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돌봄 아래 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삽니다. 그러므로 전혀 염려할 게 없습니다.

 

금식에 대한 가르침(16-18)

하나님께 자시의 간절한 마음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 금식입니다. 유대인들에게 구제와 기도와 더불어 금식은 경건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간절한 마음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 금식입니다. 금식은 육체적 욕구를 끊고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6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17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18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16-18)

금식은 바리새인들뿐만 아니라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도 경건생활에 아주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했습니다. 또 종교적 경건성을 대변해 주는 신앙적인 행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금식의 위선에 대해서 경고를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자신의 경건함을 드러내기 위해 금식할 때 일부러 초췌한 모습으로 다녔습니다. 그러나 금식도 앞서 말한 구제와 기도와 같이 하나님께 하는 것이기에 사람에게 보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금식에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연약하고 안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아름다운 금식도 신앙과 경건을 자랑하는 수단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원래 구약에서는 금식할 때 베옷을 입고 티끌을 쓰고 자신을 단장하지 않는 것이 정상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며 회개한다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도리어 기름을 바르라고 하십니다. 결국 슬퍼하며 자신을 은근히 자랑하느니 차라리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금식을 자신의 자랑거리로 삼는 것을 하나님이 얼마나 혐오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금식은 곡기를 끊고 기도함으로써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구하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식음을 전폐한 채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금식마저 사람의 영광을 위한 도구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보다 사람의 시선을 더 의식하며 행동하는 것이 외식적인 행동입니다. 사람보다 하나님의 시신을 더 의식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재물에 대한 자세(19-24)

성도가 외식하는 이유는 하나님만 섬기려는 마음이 다른 것으로 분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으려는 모습으로 전락하기 때문입니다. 구제, 기도, 금식의 세 가지 외식(6:1-18)이 사람들을 의식함으로 인해 마음이 분산된 상태를 보여 준다면 본문은 물질로 인해 마음이 분산된 것을 보여 줍니다.

19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20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21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22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23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24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19-24)

사람들은 재물이 쌓아지면 그것을 땅에 쌓아두기 위해 부동산, 주식이나 투자가치가 있는 것들에 투자합니다. 그러나 땅에 쌓아둔 보물은 결코 안전하지도 영원하지도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빼앗아갑니다. 예수님께서는 보화, , 종이라는 다른 소재를 사용해서 재자가 가져야 할 재물에 대한 태도에 초점을 맞춥니다.

(1) 하늘에 쌓는 보문(19-21)

먼저 예수님께서는 보물을 하늘에 쌓도록 가르치십니다(19-21).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자신을 위해 보물을 쌓는 행위를 중단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집 안에나 집 마당을 파서 보물을 숨기곤 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다양한 방법으로 보관하더라도 여러 가지 이유로 없어질 수 있습니다.

은 일종의 벌레로 땅의 것을 파괴하는 존재를 상징합니다. 고대 사회에서 특별히 옷감은 귀중한 보물 중 하나였으므로 좀은 이런 보물을 해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동록(銅綠)’먹어 치움’, ‘폭식함등을 뜻하므로 막 먹어 치우는 벌레를 가리킵니다. 이런 벌레는 귀중품이 들어 있는 목재 보관함을 뜯어 먹었을 것입니다. 보관함이 망가지면 보물도 손상됩니다. 또한 보물을 도둑이 훔친다는 그림은 모아둔 보물이 안전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이 보물을 쌓아야 하는 하늘만이 안전한 곳이며(20), 보물을 쌓아 두는 장소는 마음의 방향을 드러냅니다(21).

(2) 밝은 영안을 가져야 함(22-23)

제자들은 성한 눈을 가져야 합니다(22-23). 몸의 등불은 눈이며, 눈이 건강하면 온몸이 밝아집니다(22). 그런데 생리적으로 보면 밝은 눈이 사람을 안전하게 인도하는 역할을 하지만, 예수님은 빛이 몸 밖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몸을 밝게 만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윤리적인 목적을 위해 눈의 개념을 사용하십니다. 윤리적인 관점에서, 밖을 보는 눈이 밝으면 그 사람 자체가 윤리적으로 선하게 됩니다. 흔히 성하다로 번역되는 하플루스(πλούς)는 건강한 눈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단어는 한 방향의’, ‘단순한등의 뜻으로서 단일성(또는 일체성) 혹은 온전함을 의미하며, 관대하고 후하게 베푸는 것을 뜻합니다. 한쪽을 보는 것은 두 마음을 품는 것과 반대의 개념으로(야고보서 4:8)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향하는 것을 뜻하며(신명기 6:45), 하나님만을 향하는 눈의 사람은 타인을 위해 너그럽게 베풉니다. 다시 말해서, 시선이 분산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 곧 긍휼을 다른 사람들에게 베푸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건강한 눈과 달리 눈이 악하면, 온몸이 어두울 것입니다(23). ‘나쁜혹은 악한으로 번역되는 포네로스나쁘다또는 악하다의 뜻으로 마태복음에서는 윤리적으로 나쁘거나 악한 상태를 가리킵니다(5:11,37,39,45; 6:13). 악한 눈은 탐심으로 남의 소유를 쳐다보는 눈, 남을 저주하고 시기하는 눈이라는 개념에서 온 것입니다. 악한 눈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필요에만 관심을 두기 때문에 타인에게 후히 베풀지 못하는 이기적인 행동을 보입니다. 탐심으로 가득 찬 사람은 자신의 필요만 생각하기 때문에 베푸는 것에 인색할 수밖에 없으며, 하늘에 보물을 쌓지 못합니다. 결국 어둠이 이런 눈을 통해 들어와 온몸이 어두워져 세상을 밝히지 못합니다. 반면 관대하게 베푸는 사람의 밝은 몸은 세상을 밝히고(4:16),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3) 겸하여 섬길 수 없음(24)

누구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듯이 하나님과 돈을 동시에 섬길 수 없습니다(24). 왜냐하면 이 사람을 사랑하고 저 사람을 미워하거나 이 사람에게 헌신하고 저 사람을 무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왕권에 대적하는 물질주의를 경고하십니다. 하지만 문제는 많은 사람이 부자 청년처럼 재물을 사랑하면서도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재물은 같이 섬길 수 없습니다.

19-24절을 한 묶음으로 읽으면, ‘한 방향의또는 단순한눈을 가진 사람은 하늘에 보화를 쌓는 사람이며,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깁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의 필요를 채우시는 긍휼의 성품을 갖고 계시지만 맘몬은 철저히 계산적입니다. 냉정하고 냉혹한 자본의 원리를 들어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의존해서 살아가는 동정의 사람은 세상을 따뜻하게 회복하는 역할을 하는 반면, 맘몬의 종은 속물처럼 행동하고 사회적 정의보다는 맘몬을 자랑하는 것으로 즐거워합니다. 돈이 안전을 보장한다고 여기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불신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일차적으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만 드려야 할 사랑과 헌신(신명기 6:4-5)을 돈에게 쏟을 때 돈처럼 냉혹하게 변해서 사람들을 물질로 대합니다. 무엇보다 질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심판으로 우상숭배에 반응하십니다. 악의 눈, 곧 탐심과 인색함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이 섬기는 보물은 언젠가 사라질 것이며, 인생은 어둠으로 채워질 것이며, 염려로 세월을 보내는 날을 맞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길은 긍휼로 자녀를 돌보시는 하늘 아버지를 신뢰하며 그의 나라와 의를 먼저 추구하는 것입니다. 맘몬이 아니라 하늘의 아버지를 경배하는 것이 자신(또는 교회)이 사는 길이며 이웃을 회복하는 길입니다.

재물()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그 재물이 우리의 주인이 되거나 우리 삶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재물을 사랑하지 말고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용해야 합니다. 이방 사람들은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지 않기에 생활에 대한 불안과 걱정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재물이 우선순위가 되는 것입니다.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물질에 대한 염려와 불안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실제적인 필요를 채워주신다고 믿고 하나님 나라를 최우선 순위에 두고 살아갈 때, 진정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삶의 우선순위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돈은 우리가 정말 믿는 대상이 누구인지 드러내는 가장 실제적인 잣대입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필요를 따라 삶을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마음을 두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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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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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밀한 중에 살피시는 하나님

마태복음 61-15

 

사람들은 영적인 부분은 볼 수 없기 때문에 보이는 것만 전부로 생각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들은 보이는 부분만 위해서 많은 것을 투자하고 수고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도 다 보고 계실 뿐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이 보이지 않다고 무관심한 부분을 더 지켜보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거나 이익을 얻으려는 선행에 대해 경고하십니다.

 

예수님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하나님 앞이 아닌 사람 앞에서 사람으로부터 의로움을 인정을 받는 세 가지 효과적 방식이 구제, 기도, 금식입니다. 참된 경건을 위한 구제, 기도, 금식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그 기준은 누구 앞에서하느냐입니다. 사람들이 알도록 드러내느냐, 하나님께서 보시도록 은밀히 행하느냐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참된 경건의 태도와 방식을 명령하십니다.

 

구제에 대한 가르침(1-4)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선한 일을 이루어 갔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행동들이 자신의 자랑하는 수단으로 바꿔 버리는 모습을 봅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얼마나 악한지를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람을 의식해서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상을 받지 못합니다.

1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2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3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4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1-4)

사람들은 작은 선행을 행한 후 자신의 선행에 대해 자랑스러워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길 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모든 행동들을 금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들에게서 인정과 칭찬을 받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구제에 대해서도 예수님께서는 주는 사람 입장에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받는 사람 입장에서 실시하라고 합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의를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행하지 말아야 합니다.

(1) 경건 행위에 대한 가르침(1)

유대인들이 자신의 경건 생활을 위해 구제에 힘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구제행위에 여러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먼저 그들의 잘못된 행위는 사람들에게 보여주려 했고, 사람들에게 인정과 영광을 얻으려 했습니다. 경건의 핵심은 하나님 앞에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결코 사람을 향해 경건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에게 보여주려는 신앙생활은 경건 행위나 예배가 아니라 연극과 같습니다. ‘위선(僞善)’이 당시의 연극의 용어로 쓰인 것을 고려하면, 하나님 앞에서가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나팔을 불고, 길게 기도하고, 대중 앞에서 연설을 하는 모습은 연극배우가 관객 앞에서 연기를 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앞에서 경건 행위를 해야 합니다. 참된 경건은 의인들에게 상을 주실 하늘의 아버지께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2) 자선에 대한 교훈(2-4)

제자들은 자선을 베풀 때마다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자선 행위를 보여주는 위선자들과 달리 나팔을 불지 말아야 합니다.

당시 구제를 시작할 때, 구제를 받아야할 사람이 빠지지 않도록 성전에서 구제를 시작한다는 나팔을 불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점점 사람들에게 이목이 중심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자기 의로움을 과시하기 위해서 나팔을 불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경건을 인정받으려는 선전일 뿐입니다. 위선적인 구제 행위를 하는 것은 가난한 사람을 이용해서 자기 영광을 얻으려는 악한 태도입니다. 자선 행위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으면 더 이상 하나님에게서 받을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자선을 베풀 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합니다.

구제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은밀하게 해야 할 이유는 첫째, 구제를 받은 사람에게 자존심 상하여 상처를 주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둘째로, 사람들 앞에서 공공연하게 나팔을 불지 않아도 하나님은 이미 다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가 바르게 세워진 사람들은(5:21-48), 사람들과의 수평적인 관계도 바르게 세워집니다(6:1-18). 사람들과의 태도에서 서로 돕길 위해 의를 행할 때 세상 사람들과 다릅니다. 외식적인 사람은 남에게 보이려고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듯 은밀히 행합니다.

구제에 대한 바른 태도는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하는 섬세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들도 마땅히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의만 나타내야 합니다. 그래서 정말 아름다운 구제의 행위는 아무도 모르게 즉 은밀하게 행해져야 합니다. 연약한 사람들의 궁핍함과 절박한 필요를 도움을 주는 것이 구제입니다.

 

기도에 대한 가르침(5-13)

기도는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 나라와 뜻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권능으로 주의 이름을 높이고 주의 나라를 이루시기를 갈망하는 기도, 제자들도 순종의 삶을 통해 이 하나님의 통치와 뜻의 구현에 참여하기를 간청하는 기도가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모든 기도보다 앞서야 하고 이러한 기도가 기본적인 원리가 되어야 합니다.

5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7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8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9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12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3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5-13)

예수님께서는 사람들과의 관계(구제)에서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기도)에서도 위선(僞善)을 금하셨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외식하는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거짓으로 연구하는 영화배우와 같습니다.

(1) 은밀한 기도(5-6)

제자는 위선을 피하고 은밀히 기도해야 합니다. 위선자들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사람들의 눈길을 의식하면서 기도합니다. 그들은 회당이나 길모퉁이에 서서 손을 들고 기도하기를 좋아하였습니다. 본문에서 큰 거리 어귀는 갈릴리의 헬라식 도시 세포리스에 있었던 주랑(기둥)이 세워진 거리를 가리킵니다. 사람들의 칭찬을 받으려고 연극배우처럼 기도를 연기하는 사람은 사람들의 칭찬으로 보상을 이미 받은 것이 됩니다.

기도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위선자들은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하지만, 그들의 마음에는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께만 집중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행동과는 대조적으로 제자들은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라고 문을 닫고 기도하듯이 은밀히 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아무도 모르게, 오직 아버지만 아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골방은 칭찬과 존경을 표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 한 분만으로 초대해서 친밀하게 만날 수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초대해 기다리고 계시는 방입니다.

기도는 하나님만을 대화의 상대로 삼고 친밀함 가운데서 골방에서 하는 것이므로 당연히 사람들의 칭찬이나 존경과는 거리가 멉니다. 이렇게 은밀히 기도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며 갚아주십니다.

(2) 기도에 대한 기준(7-13)

예수님께서는 이방 사람들의 기도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그들처럼 주문을 외우듯이 같은 말을 되풀이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에게 가장 좋은 기도의 모범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기도문입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잘못된 기도를 언급하십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두지 않은 이방인의 중언부언은 잘못된 기도입니다(7). 이방인들은 말을 반복하고 많이 내뱉음으로써 말이 가진 힘을 중대해서 신들이 관심을 갖도록 만들었습니다. 기도는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자녀 간의 대화이기에 중언부언하는 것은 대화의 태도로 옳지 않았습니다. 자녀는 아버지에게 필요한 것을 말할 때 확신에 찬 마음으로 명료하게 필요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8절에서는 올바른 생각을 언급하고 나서, 9-13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정형화된 기도의 모본을 제시하셨습니다. 기도의 시작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부르는 것입니다.

첫째 청원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둘째 청원은 당신의 나라, 곧 하늘나라 내지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영광스럽게 되기를 바라는 기도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드러나고 실현되기를 기대하는 것과 연결됩니다. 셋째 청원은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 하나님의 계획과 목표를 가리키며, 제자는 자신의 뜻이나 사탄의 의도가 아니라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실현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위의 세 청원이 하나님과 그의 나라와 관련된 기도라면 이어지는 세 청원은 자녀의 필요를 위한 것입니다.

넷째 청원은 빵, 즉 인간의 기본적인 필요를 위한 것입니다. ‘오늘의 땅에서 하나님께서는 멀리 계시는 것 같고, 나의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으시는 것 같고, 나의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으시는 것 같고, 세상의 무거운 짐이 오늘의 나를 짓누르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부의 딸과 아들은 하늘을 향해 아버지라고 불러야 합니다. 이제의 아버지는 오늘도 아버지로서 자녀의 필요를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청원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를 지은 자들에게 용서를 베푼 것처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용서하는 신자는 하늘 아버지를 향해 자신의 죄를 고하면서 자비를 구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악의 결속력이 약화되고 긍휼이 땅에서 순환됩니다. 여섯째 청원은 자신의 약함과 한계를 인정하면서 인생의 위기에서 구해달라는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권능으로 주의 이름을 드높이고 주의 나라를 이루시기를 갈망하는 기도, 제자들도 순종의 삶을 통해 이 하나님의 통치와 뜻의 구현에 참여하기를 간청하는 기도, 자기 부인을 통해 내 나라를 버리고 주의 나라만 서기를 구하는 기도, 하루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양식부터 죄 용서와 악한 자로부터 건져주시는 일까지 내 생명과 삶이 모든 영역을 하나님께 의탁하는 기도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합당한 기도입니다.

 

용서에 대한 가르침(14-15)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사람의 외형적으로 나타는 것은 용서하는 삶으로 나타난다고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14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15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14-15)

참된 기도는 용서하는 삶으로 입증됩니다. 경건 생활의 상호성을 강조하는데, 주의 기도가 영원한 요구이듯 용서하고 용서받는 방식의 일어나야 합니다. 이전 단락에서 보복과 원수 사랑도 용서와 연결됩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용서하셨듯이 하늘나라 제자라면 하나님을 닮은 자로서 먼저 타인을 용서해야 합니다.

 

나가는 말

사람에게 보이려는 목적으로 를 행하지 말아야 합니다. 종교지도자들의 위선을 본받지 말고 은밀하게 구제하고 하나님 앞에서만 기도하고 금식해야 합니다. 제자들의 착한 행실 구제 기도 금식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동기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당신은 하나님만 아셔도 은밀하게 구제하고 있습니까? 혹시 기도와 금식을 자신의 경건과 믿음을 선전하는 도구로 여기고 이용하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목적이 하나님과 관계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사람들 속에서 드러나기 위한 것인지 신앙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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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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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사랑을 가르치신 예수님

마태복음 533-48

 

언제 홈쇼핑 채널에서 필요한 제품을 판매하고 있었습니다. 계속 보는데, 그 호스트는 열을 내가면서 오늘만 이 최저 가격으로 준다.’고 하면서 다음에는 이런 기회가 절대로 없을 것이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유명한 연예인도 곁에서 말을 거들면서 이 가격이 절대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번 기회를 놓친다면 다시는 그 가격에 살 수 없을 것 같아서 물건을 주문했습니다. 그런데 물건을 구입하고 며칠 후, 또 그 제품을 방송하는데 구입한 가격보다 더 싸게 판매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방송을 보는 순간, 그 동안 이미지 좋았던 연예인이 신뢰가 무너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보훈을 통해 진정한 복이 무엇인지 가르치셨습니다. 이제는 나머지 세 주제인 맹세, 보복, 이웃 사랑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이어집니다. 헛된 맹세를 금하여 맹세한 것은 철저히 지키라는 율법에 예수님께서는 어떤 맹세도 하지 말 것을 명령합니다. 동해보복법에 대해서는 보복 자체를 금하십니다. 이웃과 원수를 사랑과 마음의 대상을 확실히 구분했던 사고에는 원수까지 사랑하고 핍박을 가하는 대상을 위해 기도하라 명령하십니다. 그것이 하늘나라의 삶입니다.

 

맹세에 대한 가르침(33-37)

자신의 말이 진실하다고 생각할 때 맹세를 합니다. 그것도 모자라 그것을 보증하기 위해 어떤 사람이나 사물을 수단으로 해서 약속합니다. 자신의 말이 진실하다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어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맹세를 남용했고, 거짓 맹세를 자주하고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맹세에 대한 교훈을 하였습니다.

 

33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35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36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37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33-37)

율법을 성취하고 더 나은 의를 보여주는 네 번째 예는 맹세에 대한 것입니다. 옛 사람들은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맹세한 것을 지켜야 한다는 계명을 들었습니다(19:12; 23:21-23; 30:2; 50:14). 서원과 맹세는 같은 개념이며(50:14), 1세기 당시 유대교에서 맹세는 서원 또는 서약과 구별되지 않았습니다.

(1) 거짓 맹세를 금함(34-36)

예수님께서는 지킬 마음이 있건 없건 상관없이 맹세 자체를 하지 말라고 권고하십니다(34). 이스라엘은 감히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않았지만, 하늘이나 땅, 또는 예루살렘, 머리를 두고 맹세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도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진실을 입증하기 위한 수단으로 하나님과 관련된 것을 사용하지 않도록, 그 어떤 것을 두고도 절대로 맹세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당시에 잘못된 언어 습관에 대해 예수님께서 헛맹세를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맹세란 단어는 사람들이 쓸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은 맹세할 만큼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만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은 주로 재판하는 과정에서 증인이나 피고인에게 맹세를 하게 했습니다. 거짓 명세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나님께 하는 맹세에만 적용시켰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하늘이나 땅 등을 걸고 맹세하고 난 후에는 이를 억여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맹세를 쉽게 하는가 하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맹세하는 일도 빈번히 일어났습니다.

유대인들은 맹세에 효력이 있는 경우와 없는 경우를 따졌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성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은 효력이 없지만 성전 금고의 금으로 맹세하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 재단을 두고 맹세한 것은 효력이 없지만, 그 위에 있는 예물을 두고 맹세하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참고, 23:16-22). 이런 맹세들은 기회만 있으면 자신의 거짓을 정당화시키려는 악의 증거가 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나 땅으로도 맹세하지 말라고 그리고 예루살렘으로도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땅은 하나님의 발판으로서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35). 예루살렘은 위대하신 왕, 하나님의 도시이므로 인간이 사용할 권한이 없습니다(48:2). 자신의 머리라고 해서 맹세에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역에 속한 것이므로, 인간은 자신의 머리를 걸고 무엇을 맹세할 정도로 능력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2) 정확한 의사표현(37)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므로 율법이 요구하는 맹세를 반대하지 않으십니다. 새 백성은 과거의 옛 언약 백성이 맹세의 수단으로 자신의 진실을 확보하려 했던 시도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맹세를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진실을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하늘나라의 새로운 백성들은 옳은 것은 옳다’, 아닌 것은 아니라는 것으로 대답하라고 하셨습니다. 겸손하게 낮아져서 함부로 거짓 맹세를 남발하지 말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따라 사는 성도임을 고백해야 된다고 하셨습니다.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는 진실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진실한 말과 삶이 맹세에 대한 율법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더 나은 의는 맹세하는 대상을 사용해서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아니오라는 말로 진실을 실천하면 구약의 율법을 성취하게 됩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일과 미래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또한 항상 자신의 행동이나 말에 책임지기가 힘듭니다. 그러므로 당신 역시 크고 작은 일에 쉽게 맹세하거나 장담하는 일이 없도록 항상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겸손하게 있는 모습 그대로 살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구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을 대할 때 자신을 과시하지 않고 정직하고 진실하게 살 수 있습니다. 종종 내 이름의 명예를 걸고 맹세한다.’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이름이 자신을 지켜주신 못합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를 합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에는 위기를 모면하고 책임을 회피하고자 하는 동기일지 모르지만, 당사자는 사람들에게 신뢰를 잃어버린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맹세하지 않아도 될 만큼 항상 진실하게 말하고 행동하기를 강조하신 것입니다. 맹세보다 진실한 마음이 중요하다고 가르치십니다. 항상 진실하게 말하고 행한다면 맹세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또 진실한 마음이 없다면 아무리 맹세를 한들 아무 소용없을 것입니다.

 

보복에 대한 가르침(38-42)

우리들이 사는 세상은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아야할 세상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쳤으면 그에 상응한 배상을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불의한 방법으로 행동했으면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율법에도 그런 내용이 서술되어 있었습니다.

38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38-42)

다섯 번째 예는 보복(報復)’에 대한 주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갚으라는 동해보복법(38; 21:24; 24:20; 19:21)과 대조해서 보복하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38).

동해보복법(同害報復法)’은 개인의 보복 행위를 금하도록 주어진 공식 규정으로서, 보복의 악순환을 막기 위한 법입니다. 이 법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은 악으로 악을 갚지 말라는 의미와 같습니다.

구약 율법에도 사람들이 잘못하거나 해를 끼쳤을 때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으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법칙은 지금도 중동지방에 여전히 존재합니다. 하지만 이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극단적으로 눈을 상처 입었을 때, 상대방에게 눈을 헤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타인에게 실수를 범한 사실에 대해 반드시 대가를 지불할 것을 의미합니다. 절대로 개인적인 복수의 규모나 범위가 더 커지는 것을 막고 공정한 심판을 위한 하나님의 조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율법을 다시 해석하시면서, 심판해야 할 상황에도 자비를 베풀라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하셨습니다. 더 나가서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악을 대적하지 말고 오히려 선으로 대하라고 하셨습니다. 오른편 뺨을 치면 외편 뺨까지, 속옷을 달라면 겉옷까지도 그리고 억지로 가자고 하면 더 많이 가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이성적이나 감정적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육신이 원하는 것과는 정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가능할 수 있을까 반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하나님의 자비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할 수 있는 것을 요구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친히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그러한 삶을 살기 위해 오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반하고 불순종한 죄인들이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는 저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들의 죄를 자신에게 돌려달고 기도하면서 돌아가셨습니다. 이렇게 악한 죄인들을 위해 선으로 갚기 위해 십자가 위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열매가 바로 부활(復活)’입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들이 죽을 때, 승리의 부활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죄악을 따라서 하는 삶과 선을 위한 삶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23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6:23)

죄의 결과는 사망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의 죽음은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길을 따라 살아가는 성도들은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자신의 이익을 챙겨가면서, 절대로 손해를 않고자 산다면 삶 가운데 부활의 열매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성도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자신이 죽어야만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고 당신을 핍박했던 사람을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원수에 대한 가르침(43-48)

악한 것을 정당히 그와 비슷한 수준으로 막을 수 없습니다. 악을 막기 위해서는 그보다 더 큰 힘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힘으로 막으면 어느 순간에 균형이 잃어지면 다시 무너집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으로 변화를 이루어집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지 않는 사람들과 달라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43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46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8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43-48)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은 세상에서 보여 준 인본주의적인 사랑이나 박애주의적인 사랑 그 이상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같은 사랑을 행하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만이 온전한 참 사람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는 계명을 들었습니다. 이웃 사랑에 대한 당시의 해석과 달리 예수님께서는 원수들을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십니다(44). 기도는 진심으로 소망하는 표현이므로 결코 쉽게 행할 수 있는 태도가 아닙니다. 구약에도 원수를 잘 대하라는 내용이 나오지만(23:4-5; 24:17; 25:21), 원수를 사랑하는것은 이런 구절보다는 훨씬 급진적이고 사실상 구약과 유대교에서는 전례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주고받는 개념이 아니라, 돌려받을 것을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주는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랑을 온전하게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가 온전하신 것과 같이 자녀인 우리들도 온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나의 감정에 따라 복수하거나 앙갚음을 하려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이 아닙니다. 그 속에는 자아 중심적인 삶 그리고 세상이 주는 유혹을 따르는 삶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에게 해를 끼친 사람들을 위해 용서할 뿐 아니라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웃을 위해 사랑하는 것은 결국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30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12:30-31)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48)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온전해지기 위해 노력하면 할수록, 분명히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도 있다는 것을 압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늘의 아버지께 의지해야 합니다.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하나님께 나아 가아야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심으로 능히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말씀하셨던 대로 그런 삶을 실천하셨습니다. 적을 물리칠 힘과 능력이 있었지만, 십자가에 고난을 당하시고 돌아가시면, 자신의 가르침대로 실천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영향력 있는 삶은 그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할 때 존경하고 따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으로부터 존경 받고 영향력을 발휘해서 세상 사람들의 수준보다 훨씬 높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세상을 감동시킬 수 있습니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온전하신 것처럼 자녀들인 제자들도 온전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것을 보고 우리도 이웃에게 그대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가리지 않고 자비를 베푸시는 것처럼 세상에 비친 제자들도 선인과 악인을 가리지 말고 모든 사람을 착한 행실로 성결하라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것은 완전함이 아니라 온전함, 성숙함입니다. 날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으로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살아가는 성도들, 성숙한 성도로 살아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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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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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을 완성시키신 예수님

마태복음 521-32

 

묵상에는 선악 간에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으로 하는 묵상이 있고, 죄악에 대한 묵상을 통해서 은밀히 죄악을 즐기는 묵상이 있습니다. 하지만 두 묵상에는 반드시 열매가 맺습니다. 그 열매는 매우 큰 차이를 보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묵상은 성령의 열매를 맺지만, 죄악은 또 다른 죄악의 열매를 맺습니다. 당신의 경우에는 무슨 묵상을 많이 하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성취하신 분으로서 제자들에게 천국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더 나은 의를 요구하셨습니다. 48절까지 여섯 개의 주제에 대한 대조구문이 등장합니다. 본 단락은 살인, 간음, 이혼이렇게 세 가지 주제를 다룹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인하지 말라는 물리적 살인에 대한 율법의 이해를 분노하는 것도 살인과 동등하다고 의미와 적용을 확장하며 새로운 계명으로 말씀하십니다. 간음에 대해서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조차 동일한 간음이라고 확대 적용하십니다. 이혼 문제도 율법의 본질을 파고 들며 부패한 전통과 관습을 꼬집으십니다.

 

살인에 대한 가르침(21-26)

율법의 내면을 외면한 채 외형만 준수하였던 서기관과 바리새인 수준에 머물러 있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의 는 진정한 의미에서 의가 아니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의 충실한 언약 관계에 있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만약 바른 관계가 이루어졌다면 예수님을 알아보고 경배했을 것입니다.

21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23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25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26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21-26)

예수님께서는 모세의 율법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여기며 살던 제자들에게 그보다 훨씬 더 높은 기준을 제시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직접적으로 살인이나 간음과 같은 행위를 하지 않으면 계명을 지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계명의 준수의 차원을 행위와 차원에서 마음의 차원으로 높이시며 화를 내고 미워하는 마음을 품은 것이 곧 살인이고, 음란한 생각으로 이성을 바라보는 것이 곧 간음이라고 하셨습니다.

(1) 분노도 살인(21-22)

더 나은 의를 보여주는 첫 번째 예는 살인에 대한 해석입니다(5:21-26). 옛 사람들은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을 들었습니다(21). 살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형제에게 화를 내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될 거라고 선언하십니다(22). 형제에게 골빈 놈이라고 하는 자마다 공의회에 보내질 것이고 멍청이이라고 말하는 자마다 불타는 지옥에 넘겨질 것입니다. 형제에 대한 분노는 타인의 생명을 부당하게 빼앗는 것인 살인과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더 나은 의는 주관적인 판단으로 작게 여길 수 있는 죄를 심각하게 인식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의 백성은 살인하지 말라는 법을 어기지 않은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상대방을 존중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상대방에 대한 존중은 23-26절에서 구체적인 예로 강조됩니다.

 

(2) 형제와 화목(23-24)

다음으로 경고한 심판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화해입니다(22). 첫 번째는 예물을 바치는 것보다 화해가 중요한 점을(23-24), 두 번째는 즉시 화해를 실행해야 하는 점을 언급합니다(25-26).

예물을 바치러 가다가 형제가 자신 때문에 뭔가 문제를 안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면, 예물을 제단 아래에 두고 바로 형제에게 가야 합니다(23-24). 산상설교가 주어지는 갈릴리에서 예루살렘 성전까지 가는 데 일주일가량 소요되므로, 멀리 있는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제단에 제물을 올리지 않고 돌아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만큼 화해를 강조하십니다. 깨어진 인간관계를 회복하고 나로 인해 상처를 받은 사람과 화해하는 것은 예배 행위보다 먼저 해결해야 할 정도로 중요합니다.

 

(3) 고발하는 자와 화목(25-26)

화해가 즉시 이뤄져야 함을 묘사합니다. 화해는 빨리 이뤄져야 하며, 그렇게 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입니다(26).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지 않는 것에 머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분노를 주체할 수 없어서 비아냥거리거나 협박과 저주에 가까운 언어 폭력을 사용하면서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나는 아무 꺼릴 것이 없다고 생각하면 자신을 심각하게 오해하는 태도입니다. 자신의 입장에서 작게 보이는 무시와 성처가 지옥에 갈 정도로 심각하고 예배보다 더 먼저 해결해야 될 문제임을 깨닫고 실천해야 합니다. 죄에서 자유케 된 제자는 죄에 대해 무감각해지는 사람이 아니라 더욱 민감해지는 사람입니다.

형제를 향해 분노로 심판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을 가져야 합니다. 건전한 신학과 교류가 중요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형제를 향해 심판과 관련된 욕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형제를 향한 분노가 최초의 살인으로 나타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분노를 품고 있으면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도 온전하게 진전될 수 없습니다. 마음이 온통 두 마음으로 나뉘어서 결국 미움은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데까지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깨어진 관계에 있을 때 웬만한 사람은 정상적인 삶을 이어갈 수 없습니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속에서 계명을 단순히 문자적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 계명 안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순종하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간음에 대한 가르침(27-30)

하늘나라의 백성들은 남의 여인과 간음하지 않은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새 백성은 이성을 음욕의 대상으로 여기거나 희롱의 방식으로 대하지 않고 온전히 깨끗한 마음으로 자매에게 하듯 해야 합니다. 눈을 빼고 손을 자르라는 명령처럼 단호하게 엄격하게 절제해야 합니다.

27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29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30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27-30)

예수님께서는 여섯 번째 계명인 살인 금지에 이어서, 다음으로 간음과 관련된 일곱 번째 계명을 언급하십니다(20:14; 5:18).

(1) 음욕도 간음(27-28)

구약에서 간음(姦淫)은 유부녀가 남편 외의 다른 남자와 성관계를 맺는 것을 가리킵니다. 율법에서 간음 행위는 실체로 드러난 음행을 가리키며, 반드시 법의 판단을 받아야 했습니다(20:14; 5:18).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이 율법을 주신 원래 의미를 밝히십니다. 여자를 음행의 목적으로 보는 것도 간음입니다. 이곳에서 여자는 이미 결혼한 여자’, ‘타인의 아내를 의미합니다(20:17; 5:21). 남의 아내를 간음할 목적으로 기회를 엿보는 것은 이미 간음의 죄를 지은 것입니다. 마음과 몸(, 간음의 마음으로 본 눈)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의 일부가 실족하게 만든다면 차라리 그것 없이 지옥의 형벌을 피하는 것이 낫다고 경고하십니다(29-30). 눈은 의도, 손은 행위와 관련된 표현으로, 남의 아내를 탐욕으로(10계명) 본 죄의 대가로 눈이 뽑혀야 합니다. 눈이나 손이 잘리는 것이 지옥에 보내지는 비극보다 낫습니다.

이런 표현은 과장법이므로 문자적으로 적용하지 말아야 하지만, 그만큼 하늘나라의 자녀는 마음의 의도까지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고 싶어야 할 것을 예수님께서는 강조합니다. 그냥 넘기기 쉬운 마음의 죄 역시 심각한 것입니다. 인간 법정을 피할 수 있으나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제7계명을 인정하시면서 법의 적용 범위를 마음에까지 넓히십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계명을 주신 원래의 의도를 밝혀주심으로써 제7계명을 성취하시고 더 나은 의를 가르십니다.

 

이혼에 대한 가르침(31-32)

율법은 이혼 증서를 써주기만 해도 이혼이 성립되게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음행하는 일과 같은 정당한 사유 없이 이혼하는 것을 금하십니다. 배우자를 버리거나 이혼하지 않는 것을 넘어 아끼고 사랑하는 모습이야말로 새 백성이 보여야 할 더 나은 의의 모습입니다.

31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32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31-32)

더 나은 의를 위한 세 번째 예는 이혼(離婚)’입니다. 이혼은 앞의 간음과 연결되는 주제이므로 이 위치에 놓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혼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근거로 아내를 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아무리 법적으로 합당하다고 할지라도 그 속마음과 의도가 옳지 않다면 그것은 죄이며 금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은 신명기 24:1-4을 배경으로 하며, 마태복음 19:3-9에서 자세히 설명될 것입니다. 옛 사람들은 아내와 이혼하는 자는 그녀에게 이혼증서를 주라는 명령을 들었습니다(31). 이혼증서를 써 주라는 부분은 신명기 24:1을 배경으로 합니다. 남자가 이혼 증서를 써주는 것은 고대 사회의 가정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가졌던 남편의 힘을 제한해서 여자와 여자의 가정에 대해 책임성 있는 행동을 하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 이혼 장려가 아니라 여자를 보호하는 목적으로 이혼증가서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음행의 경우 외에 그의 아내와 이혼하는 자마다 그녀로 하여금 간음하게 만들고, 이혼한 여자와 결혼하는 자마다 간음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남자가 아내와 이혼을 하게 되면, 아내로 하여금 간음을 하게 만들고, 이 여자와 결혼하는 자는 간음을 범하게 됩니다.

재혼과 관련해서, 합법적으로 이혼한 사람은 재혼할 수 있었고 이혼증서는 재혼할 수 있다는 권한이고 여자를 보호하는 기능을 했기에 재혼이 금지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남자가 아내가 음행을 했기 때문에 이혼했고, 그 다음 다른 여자와 재혼하는 것은 간음이 아닙니다. 여자가 남편의 간음으로 이혼 당한 경우나 여자가 간음 외의 문제로 이혼을 당했을 경우에는 재혼이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만일 여자가 음행을 하지 않았는데, 남편에 의해 이혼을 당했을 경우에, 이 여자와 결혼을 하는 사람은 간음을 한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음행의 이유가 아닌데도 부부가 이혼을 하면, 하나님의 시간에는 여전히 이 둘이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여자와 결혼하는 자는 남의 여자와 사는 것이므로 간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전해진 이혼의 율법을 부정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신명기 241-4절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알리면서, 이 본문이 쉬운 이혼의 근거로 사용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신명기의 이혼은 인간의 완악함 때문에 허락된것이지 결혼제도를 만드신 창조주의 원해 의도가 아닙니다(2:24). 제자들은 하늘나라의 백성이며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를 넘어서야 하므로, 마음이 완악한 자들에게 허락하신법을 지키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원래 의도하신법에 순종함으로써 결혼과 이혼에 대한 법을 성취합니다.

결혼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영원한 관계를 이루도록 의도됐으므로, 이혼은 하늘나라의 제자들이 선택할 사항이 아닙니다. 재혼에 대해 간음에 연루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핵심은 이혼이 틀린 것임을 강조하는 데 있습니다. 하늘나라의 제자는 언약 관계인 결혼을 파기하는 행위를 간음으로 간주하고 창조 때의 이상적인 결혼을 지켜야 합니다. 특히, 제자는 자신의 욕심 때문에 이혼의 원인을 제공하는 사람의 위치에 서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의 속뜻을 살피고 그 뜻을 살아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몇 개의 율법 조항을 수정하거나 강화하는 데 그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모세의 하나님이시며 새 언약의 주님이십니다. 그분과 연합하여 살아가는 그 나라의 백성은 세상 사람들보다 더 탁월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의인은 악한 일을 하지 않는 차원의 만족하는 의가 아닙니다. 말씀에 담긴 주님의 속뜻을 헤아려 살아간 삶을 의미합니다. 더 나은 의라고 하는 원리는 모든 삶의 영역에서 적용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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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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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을 완성시키신 예수님

마태복음 513-20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행위를 마음의 동기를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사람들은 같은 행동을 취했지만, 마음에 따라 죄명이 상해죄가 아닌 살인죄로 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보시는 기준은 줄곧 마음을 강조하십니다. 행위보다 마음이 먼저이고, 겉만 아니라 속까지 의로워지는 것이 더 나은 의라고 주님께서는 행위의 법을 마음의 법으로 심화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제시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율법에 대해 보이신 태도는 사람들로 율법을 폐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패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성취하러 오셨습니다.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했던 시대는 끝나고 그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하는 시대가 이른 것입니다.

 

소금과 빛인 성도(13-16)

세상에 똑같이 숨을 쉬고 있다고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영생을 누리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영생을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라고 부릅니다. 이 복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 보면 과연 그들이 추구하는 것이 복일까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가시적으로 보여지는 것을 복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영적으로 성숙해져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은 복입니다.

13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13-16)

예수님의 산상 설교는 계속됩니다. 팔복의 내용을 보면, 어쩌면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세상에서 바보 같이 맞고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팔복의 원리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밝힙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으로 소금과 빛으로 말씀하셨습니다.

(1) 세상의 소금과 빛(13)

본문에서 너희는 제자들을 의미하며, 11-12절에서는 예수님 때문에 핍박받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강력한 비유를 통해 제자들의 정체성을 공개합니다.

먼저 소금으로 비유하십니다. 땅에는 마음이 오만하고 불의를 행하는 사람들, 무자비하고 순수하지 않고 싸우기를 좋아하고 핍박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이들은 땅을 더럽히는 사람들입니다. 제자들은 땅에 소금입니다. ‘소금이라 말씀하실 때 소금의 어떤 역할을 염두에 두셨겠습니까? 고대에는 소금을 여러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짠맛일 텐데, 그 짠맛이 가져오는 영향과 결과가 무엇이냐는 다양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소금은 음식의 맛을 돋우거나 부패를 방지하고 보존하는 것이었습니다. 정결이나 언약 등 다양한 기능과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만 고집할 필요는 없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의 소금이라고 칭하신 것은 세상을 위한 소금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어떤 역할이든 소금은 세상을 살리고 세상을 위한 일이 됩니다. 소금이 그 효과를 발휘하는 과정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의 희생과 섬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소금이 맛을 잃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 안에 불순물이 너무 많으면 소금의 가치를 상실합니다. 소금이 맛을 잃는다는 것은 일어날 수 없는 현상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맛을 잃다라고 번역된 원어는 어리석게 되다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의 정체가 소금이라는 것은 땅에서 어리석지 않고 현명한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앞서 팔복 중 마음의 청결과 유사합니다. 마음이 더러워지고 정체성이 혼탁해지면 세상을 위한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짠 맛은 소금이라야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소금인 제자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아무도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맛 잃은 소금 덩어리, 다량의 불순물이 함유된 소금은 아무짝에도 쓸데없어 사람들은 길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히는 돌덩이처럼 됩니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에서 목적어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세상을짜게 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까? ‘소금을짜게 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까? 동사 할리스떼세타이(λιαθσεται)는 미래 수동형입니다. 그것이 세상소금중 무엇을 목적어로 취하는지가 관건입니다. 동사에 가까이 있는 단어가 소금이며, 수동태라는 점을 고려하면 후자일 가능성이 큽니다. 직역하면, ‘무엇으로 짜게 되겠느냐?’가 됩니다. 무엇이 소금을 짜게 하겠느냐입니다(9:50도 이를 뒷받침한다).

소금이 짠맛을 잃어버린 일은 불가능하므로 어리석은 제자는 짠맛을 내지 못함으로써, 즉 어리석은 삶으로 참 제자가 아님을 드러냅니다. 또는 어리석은 소금은 소금의 맛을 여전히 지니고 있으나 그 영향력이 약해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소금은 땅에서 제 맛을 유지하지 못해 이물질이 가득한 흙과 뒤섞여서 더러운 취급을 받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구별된 정체성을 따라 살지 못하면, 영향력을 상실해서 땅의 사람들처럼 어리석은 이생에 빠지고 맙니다. 제자들은 땅에 소금으로써 땅에서 살도록 부름을 받습니다. 소금은 매우 적은 양에도 큰 영향력을 끼치고, 적지만 필수적인 물질인 것처럼 제자는 이런 정체성을 인식하고 경고과 격려를 함께 받고 있습니다.

두 번째 비유인 도 소금과 비슷한 이해가 요구됩니다. 빛의 기능이 다양하지만, 소금처럼 세상의 빛으로 정의됩니다. 산위에 세워진 도성은 숨겨질 수 없습니다.

세상의 빛은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자들을 가리키며, 이런 사상은 이사야에 종의 노래에 근거합니다(참고 사 42:1-9). 이사야서에서는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을 열방의 빛으로 표현됩니다. 특히 이사야 본문에서 열방을 비추는 사역은 여호와의 종이 수행하는 사명이므로 세상의 빛으로 부름받은 자들은 종의 정체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마태복음 416절에서 예수님께서는 흑암에 앉은 백성과 그늘에 앉은 자들의 큰 빛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호와의 종으로서 이사야가 예언한 최고의 빛이며 빛의 사명이 예수님에게서 제자들에게로 위임됩니다.

빛은 그 자체를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빛은 무엇을 밝히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도시의 빛이 있는 목적은 그 도시를 밝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등불을 켜서 그것을 밑에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둡니다. 그래야 집안에 있는 모든 것을 비출 수 있습니다. 어둠을 밝힐 목적으로 준비한 등불을 준비하고는 그 빛을 막으려고 숨기는 것은 모순입니다.

그 빛의 기능은 어둠을 밝히는 것입니다. 소금처럼 어둠을 밝히는 것은 빛뿐입니다. 빛이 비치면 어둠은 사라지고 밝히 드러납니다. “산 위의 동네는 어디를 상징합니까? ‘예루살렘의 은유로 보기도 하지만, 본문은 상징적 의미를 해석할 추가 정보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는 부분은 소금이 맛을 잃는 것과 대조해 빛은 가려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빛이 빛을 잃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도 작은 불꽃 하나를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빛이 어떤 물체에 둘러싸이면 가려져 비출 수 없게 됩니다. 사람들은 등불을 말() 아래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둡니다. 예수님께서 빛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것은 초대교회의 중요한 이해였습니다(1:49). 예수님 안에서 제자들은 빛입니다(참조고후 4:6; 5:8; 살전 5:5). 어떤 것에도 가려지지 않고 세상 사람들 앞에 생명의 빛을 비추는 존재들입니다.

(2) 착한 행실(14-16)

소금이 맛을 내고 빛이 빛을 주는 것은 구체적인 행동을 동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행동을 제자들의 착한 행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에 맛을 내고 빛을 주는 그 행위 가운데 하나님께서 임재하실 것이고, 세상은 비로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보며 영광을 돌립니다.

좋은 행실은 앞에 팔복더 나은 의’(5:17)와 직결됩니다. 빛이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제자들도 세상을 위해 존재합니다. 빛과 소금은 제자들의 존재와 역할을 선언합니다. 제자들은 세상에 반드시 필요한 자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소금과 빛이 된 제자들이 구현할 착한 행실은 과연 어떤 것들입니까? 산상수훈의 본론이 시작될 텐데, 제자들의 신앙윤리에 대한 예수님의 명료한 가르침들이 상세히 소개될 것입니다. 제자들은 세상에 반드시 필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소금이 있어야 음식을 보존할 수 있고, 맛을 낼 수 있습니다. 빛이 있어야 도시의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듯이, 이 땅에 소금과 세상에 빛인 제자들은 반드시 세상에 존재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소금과 빛임으로 착한 행실을 행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산상 설교의 가르침에 순종해서 사는 인생은 어리석지 않으며, 즉 맛을 잃지 않으며 세상을 밝히는 가치를 발휘하게 됩니다. 성도로서 부름받은 순간부터 세상을 밝힐 뿐 아니라 세상에 노출됩니다. 은밀하게 선한 행실을 한 것은 세상을 비추는 빛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반면 아무리 숨어서 죄를 지어도 반드시 드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가립니다. 세상이 교회들이 본연의 모습을 찾도록 걱정하는 시대에 성도들은 삶으로 존재를 입증해야 합니다.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17-20)

예수님의 가르침은 기존 가르치는 방식에서 전혀 다른 방법들을 쏟아 놓았습니다. 이것은 전통적인 율법 교훈을 깨뜨리는 것이 많았습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행동에 우려를 자아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율법의 전통을 파괴하는 사람이라고 비난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17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18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20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17-20)

본문은 율법을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대한 원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이나 선지자를 무효하거나 취소하려 온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십니다.

(1) 율법의 완전성과 영원성(17-18)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율법이나 선지자를 패하러 온 것이 아님을 선언합니다. “율법이나 선지자는 구약을 의미하는 전문적인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들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러 오셨습니다. ‘폐하다완전하게 하다가 대조를 이룹니다. 구약의 율법을 파괴하고 새로운 법을 세우려 하심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에 대해 오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앞서 마태는 예수님의 탄생부터 그의 오심이 선지자들의 예언의 성취였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율법을 완전하게 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입니까?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을 이루며 그것을 가능하게 할 메시아 시대가 도래했음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은 윤리적 차원이 아니라 구원사적 차원을 갖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구원사를 완성하시는 메시아라는 점에서 율법은 그로 말미암아 완전해집니다. 율법은 구약 역사에서 끝이 아니라 메시아가 가져온 천국에서 완성을 맛봅니다. 율법의 완성은 곧 예수님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그 율법은 일점 일획도 사라지거나 파괴되지 않습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오신다고 율법의 가장 작은 부분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가치 있게 존재합니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이라는 표현은 일종의 강조어법으로 절대로, 결코 아니다를 뜻합니다. 즉 가장 작은 알파벳에까지 깃든 하나님의 뜻을 반드시 다 이루실 것을 강조합니다.

(2) 새 계명: 더 나은 의(19-20)

지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적용하고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 자신이 율법을 파괴하지 않고 완전하게 하시고, 또 그 온전한 율법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도 소금과 빛이 되어 세상 가운데서 예수님께서 주신 온전한 율법의 일점일획도 파괴해서는 안 되고, 더욱이 그렇게 율법을 경시하는 태도로 누군가를 가르쳐서도 안 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주시는 새 계명에 대한 제자들의 신실한 태도를 강조하십니다. 하늘나라에서 작다또는 크다일컬음을 받는다는 표현이 인상적입니다. 개역개정의 번역 천국은 맞는 번역이지만 천국에 대한 왜곡된 선입견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즉 장차 죽어서 갈 천국으로만 여겨 나중에 작다 또는 크다고 일컬음을 심판 차원에서 받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여기 하늘나라는 예수님께서 가져온 나라로서 현재성이 다분합니다. 제자들은 이미 그 나라 안에 들어온 상태입니다. 계명에 대한 태도 역시 하늘나라에서 행해지는 현재적 삶입니다.

마지막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18절에서 사용했던 익숙한 문구를 다시 사용하십니다. 그리고 꺼내신 주제가 입니다. 산상수훈 서론의 방점을 로 찍으셨다는 것은 본론에서 이 주제가 차지할 비중을 가늠케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의를 두고 종교지도자들과 제자들을 대조하십니다. 종교지도자들이 생각했던 란 무엇입니까? 향후 예수님과 많은 충돌을 일으킬 주제이지만, 율법주의가 낳은 자기 의입니다. 하지만 예수님 안에 들어온 제자들의 는 문자적 준수가 아닌 관계적 준수입니다. 율법적 준수가 아니라 믿음의 준수입니다. 의로움을 얻기 위한 준수가 아닌, 의로움 안에서의 준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종교지도자들보다 더 많은 양의 율법 준수를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지도자들이 추구하는 의와 전혀 다른 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더 나은 의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 곧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새 계명으로 선언된 의로서 예수님 안에 있는 자만이 확보할 수 있는 입니다. 하늘나라는 바로 그 가 아니고서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제자들은 이미 하늘나라에 들어와 있고, 그 나라에서 선포되는 새 계명을 삶의 원리로 듣습니다. 그 계명을 준수하며 사는 것이 그들의 소금과 빛 된 의로운 정체성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빛과 소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소금과 빛이 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세상에 소금이요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했다면, 그리스도에게는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부르심과 역할을 이미 줬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있고, 이 세상의 교회가 존재해야 될 이유가 있습니다. 존재론적 요구가 실천적 요구보다 앞서야 되는 이유는 소금과 빛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우리 안에서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빛과 소금이신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께서 주신 능력과 그 능력을 우려 안에서 실행하시는 성령님의 도움 없이는 세상을 이길 수 없고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이 세상에 빛과 소금이라는 정체성을 잊지 말고 예수님과 온전한 관계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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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05-01)

 

 

산상보훈에서 팔복을 말씀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51-12

 

사람들은 누구나 다 행복해지길 소망합니다. 하나님께서도 당신의 자녀된 성도들이 행복하게 살길 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생각하는 행복의 기준과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복의 기준은 조금은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복의 기준은 물질적이고 세속적이며 한시적이지만,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영원하고 변함없는 행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실 행복을 누리려 한다면, 하나님께서 제시한 행복의 원리를 잘 이해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본문에 팔복의 말씀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압축된 행복의 비밀들이 소개가 되고 있습니다. 당신을 행복의 세계로 초대합니다.

 

앞선 단락에서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과 현상을 포괄적으로 진술했다면, 이제부터 본격적인 사역이 소개됩니다. 마태는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하늘나라를 가져오신 메시아임을 선언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새 나라에 걸맞은 새 백성의 삶을 규정하는 새 질서를 선포하십니다. 팔복이 그 선포의 첫머리를 장식합니다.

 

천국에 대한 교육(1-2)

현재 누리는 복과 미래에 온전해질 복만이 이 가치에 헌신하고 이 변혁에 참여할 동력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새로운 가치관을 수용하고 그것에 따라서 삶의 방향을 정하는 사람들입니다. 구언의 조건이 아니라 그 나라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1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1-2)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자, 많은 무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예수님 곁으로 모여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으로 올라가 앉으셨습니다. 그들에게 천국 백성의 삶의 원리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새로운 모세로서 산에서 가르친 것과 같습니다.

(1) 산에 오르신 예수님(1a)

예수님께서 오르신 은 높은 산이 아니라 고도가 완만하게 경사진 언덕 정도일 것입니다. 마태가 의도적으로 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만한 마태적인 신학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모세가 율법을 받을 때, 시내산에 올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 사실과 대비하면서, 예수님께서 모세가 받은 율법을 폐하려 오신 분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려 오신 분임을 설명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낮은 언덕이지만 굳이 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2) 말씀을 전파하신 예수님(1b-2)

산상설교의 마지막 부분에서까지 실천하도록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하늘 백성으로 부름 받은 자녀들은 어떻게 하면 복을 누리를 수 있는지를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실천해야할 것을 가르치기 전에, 하늘나라에 속한 자의 복을 8가지로 선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8가지 복은 세상에 말하는 기준과는 전혀 다른 기준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좇는 사람들 중에는 두 가지로 분류 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좇는다고 해서 모두 주님의 제자가 아닙니다. ‘무리와 제자의 주된 관심이 달랐습니다. 무리는 예수님의 능력에만 관심을 기우렸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마음을 두었습니다.

 

천국 시민으로서 자세(3-12)

세속적으로 가득 찬 사람들에게는 하나님 나라가 들어설 여지가 없습니다. 의지할 만한 소유가 없어 하나님께만 호소하는 심령,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탈취당하고 슬퍼하는 자, 억압과 착취로 가진 것이 없어 하나님만 겸허히 바라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이미 천국에 들어온 자이고 죄와 고통이 제거된 세상에서 위로를 얻고,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누릴 것입니다.

3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7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3-12)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보고 산에 올라 가르치십니다(1). 산상설교의 말미에서 예수님께서는 가르침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는 모래 위에 집을 쌓은 어리석은 사람처럼 무너진다(7:24-27)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산상설교는 실천하도록 주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 백성이 실천해야 할 일을 가르치기 전에 하늘나라에 속한 자의 복을 여덟 가지로 선언하십니다.

(1) 심령이 가난한 자(3)

첫째, 심령이 가난한 자들은 복됩니다(3). 예수님께서는 심령이를 붙여서 마음의 상태나 태도가 가난한 것을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가난한 상태는 고통을 겪는 자들의 낮아진 모습, 자신을 낮추는 겸손의 태도를 의미합니다. 이사야 61:1의 가난한 사람들은 마음이 부서지고, 갇히고, 애통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마음이 파산한 상태에서 하나님 앞에 서서 겸손하게 오직 주의 도움에만 의존합니다. 우리는 첫 번째 복을 구약에서 복음을 묘사하는 이사야 61장의 성취라는 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삶의 어려움 가운데서도 메시아의 오심을 기다린 그들은 결국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복된 사람들입니다. 땅의 관점에서는 자신의 안전을 보장해줄 수 있고 목표를 이룰 만한 재화를 보유하고 있을 때 복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부와 지식(학벌)과 권력과 같은 것을 가지면 복된 사람으로 사회가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일로 마음이 무너진 상태에서 겸손히 하늘 아버지께 의존하는 사람은 복되다 하늘나라가 아들을 통해 왔고 이 나라는 겸손한 자들의 것이기 때문에 이들은 하늘나라를 얻습니다.

(2) 애통하는 자(4)

둘째, 애통하는 자들은 복됩니다(4). 두 번째 복도 이사야 61장과 연결됩니다. ‘애통하는 자들은 이사야 61:2슬픈 자들’, ‘애통하는 자들입니다.

이사야 61:2-3에서 애통하는 사람들은 슬픔을 안겨다 준 고통의 세월을 보낸 포로 생활에서 귀환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두 번째 복은 하늘나라의 도래와 관련이 있습니다. 포로 상태에서 하나님의 도움만을 간절히 구하면서 애통하던 조상들이 하나님의 구원(또는 귀환하게 하심으로 위로를 받은 것처럼,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리면서 울던 자들은 예수님 안에서 위로를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면 주의 배성이 복된 소식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이사야의 약속(이사야 40:1-2; 57:18; 61:2; 66:13)이 예수님께서 가지고 오신 하늘나라를 통해 성취됩니다. 하나님의 도움만을 애통하며 기다린 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위로입니다. 이 땅에는 고통이 있고, 그래서 애통할 수밖에 없는 일이 생깁니다. 권력 앞에서 무력하거나, 소중한 사람이나 무엇을 잃어버렸거나, 자신의 죄를 깨달을 때 고통을 겪습니다. 땅의 관점에서 애통하는 사람들은 부러움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애통하는 자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것이 기에 복됩니다.

(3) 온유한 사람(5)

셋째, 온유한 사람들은 복됩니다(5). 그리스-로마문화에서 온유는 친절하거가 신사적인 태도를 의미했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신적 속성을 반영하는 사람으로서 존경과 칭찬을 받았고 위대한 교사는 친절을 겸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온유로 번역된 세 번째 복의 프라위스를 구약과 유대적 배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온유한 자들은 유순한, 온유한 성품의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서 겸손한 낮은 자세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팔복의 구조에 따르면 첫 네 가지 복은 사람과 사람의 수평적인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의 수직적인 관점에서 복된 상태와 관련이 있습니다. 세 번째 복의 구약 배경인 이사야 61:1-2, 시편 37:11, 모세의 온유를 언급한 민수기 12.3을 분석하면 아나브의 의미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측면에서의 겸손한 태도를 가리킵니다. 온유한 자들이 땅을 얻게 된다는 말씀의 배경은 시편 37:11입니다. 시인은 악인이 잘되는 것과 비교해서 조바심을 내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가르칩니다(3,4,5,7,34,39).

악인이 칼을 빼고 활을 당겨’(14) 선한 사람들을 괴롭히며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지만 여호와를 의뢰하고(3), 여호와를 기뻐하고(4), ‘네 길을 여호와께 맡겨야합니다(5). 악인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모든 유혹의 짐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을 신뢰하는(3) 사람은 잠잠히 기다릴 수 있습니다(7; 참조. 시편 62:1,5). 말하자면, 온유한 자들은 자기주장에 의존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를 신뢰하면서 인내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뜻과 통치에 복종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주실 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11; 이사야 58:4, 22:26, 27:10). 예수님 당시의 쿰란 공동체도 시편 37편의 온유를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성품으로 이해했습니다. 덧붙여서, 흔히 모세의 온유함을 세 번째 복의 근거로 삼는 경우가 있습니다. 민수기 12장의 문맥에서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비참하게 낮아진 존재입니다. 그는 자기 백성에게서 끊임없이 공격받고 이제는 형제와 자매에게서 비난을 받는 안타까운 처지에 이릅니다. 지상의 누구보다도 낮아진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불쌍하고 낮아진 모세의 태도는 하나님을 향해 겸손하고 의지하는 태도가 됩니다. 정리해보며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낮아지고 가난하고(불상하고) 무력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런 사람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식으로 결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주변 여건이 자신의 기대와 다르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인내하며 하나님의 간섭과 섭리에 인생을 맡깁니다. 세상에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온유한 사람을 보고 복되다고 평가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온유하게 인생을 맡기는 사람은 약속을 얻게 될 것입니다!

(4) 의를 배고파하고 목말라하는 자(6)

넷째, 의를 배고파하고 목말라하는 자들은 복됩니다(6). 여기서 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3:15, 6:33),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뜻합니다. 배고픔과 목마름은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하는 표현입니다. 의로운 백성은 주리거나 목마르지 않게 해주실 긍휼의 하나님께 구원과 해방의 소망을 두었습니다(이사야 49:10; 65:13; 참조. 아모스 8:11; 잠언 9:5). 불의의 세상에서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의 개입을 갈망하는 사람은 복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5) 긍휼을 베푸는 자(7)

다섯째, 긍휼을 베푸는 자들은 복됩니다(7). 긍휼은 율법의 정신으로서 하늘나라 복음의 특징입니다(9:13; 12:7). 긍휼을 베풀어 야 하는 대상은 공동체 내부(18:23-34)와 소외되고 죄 많은 외부인들(9:10-13)을 포함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긍휼을 베푼 손길을 반드시 기억하고 보상하십니다. 종말론적으로 최후의 심판 장면에서 심판의 잣대는 긍휼을 베푼 여부이므로 긍휼을 베푼 이들은 긍휼을 얻습니다(25:39-40). 특히 자신의 어려운 형편에서도 불쌍히 여기는 인생을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그런 삶이 옳다고 인정하십니다.

(6) 마음이 깨끗한 자(8)

여섯째, 마음이 깨끗한 자들은 복됩니다(8). 마음의 청결이나 순수는 진실함, 곧 거짓과 반대되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8절의 배경인 시편 24:4-6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성전을 향해 올라가는 자는 손을 깨끗하게 하고 마음을 청결하게 해야 합니다. 이는 이웃을 순수하고 신실하게 대하는 것을 뜻합니다. 다른 사람을 선하게 대하면 하나님을 만날 것이 기에 복됩니다.

(7) 화평케 하는 자(9)

일곱째, 분쟁과 갈등이 끊이지 않는 땅에서 화평케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들로 불릴 것이 기에 복됩니다(9). ‘-의 아들은 어떤 대상의 성품이나 성향을 공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태복음 8:12; 9:15; 13:38; 23:31). 평화는 하나님의 성품이기 때문에(레위기 26:6; 민수기 6:26; 시편 28:11; 34:14). 평화의 사람은 최고의 영예인 하나님의 자녀로 불립니다.

(8) 핍박을 받는 자(10)

여덟째, 하늘나라의 자녀로 사는 자들에게는 예수님 때문에 땅의 세력이 주는 핍박이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핍박은 현재 하늘나라에 소속돼 있다는 증거이기에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라는 표현이 뒤따릅니다. 11-12절은 여덟 번째 복의 확장으로서 13절과 연결시킵니다.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은 제자들의 아버지가 되시고 현재의 질서가 역전될 것이기에 그들은 복 있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세상과 다른 복을 추구하는 자들입니다. 기독교가 기복주의로 치닫는 현실을 보며 안팎으로 자성과 비난의 소리가 커지고 있는 세상입니다. 기복주의는 종교적 명분을 가장한 세속주의의 또 다른 얼굴입니다. 하지만 원래 기독교는 복을 추구하는 종교입니다. 문제는 복의 내용이지 복을 주관하는 그 자체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팔복은 세상 나라 사람들이 추구하는 복과 다른 이 세상 나라의 가치를 정복하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추구하는 복을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누리는 이 복은 이 세상 나라 가치관과 질서에 대한 철저한 부정이요, 뒤바뀜이며 인간의 죄가 낳는 부당한 고통과 억압에 대한 도전인 것입니다. 이 세상이 추구하는 복을 따라가지 않고 하나님께서 말하는 복을 살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말하는 이 팔복의 의미가 이 땅의 가치가 아니라 저 하늘나라 가치란 것을 깨닫고 이 땅과 다른 삶을 살아가기를 결단해야 합니다. 그런 자만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복을 누리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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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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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제자들을 부르신 예수님

마태복음 412-25

 

성실하게 농사를 짓고 있던 농부가 있었습니다. 매일 작은 일에도 소월하지 않고 즐겁게 농사를 지으면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어떤 중년 남자가 지나가면 농사의 모습을 한참 지켜보면서 농사가 힘들고 돈도 안 되는 농사가 그렇게 즐겁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농부는 돈보다는 농작물이 자식처럼 자라가는 것을 보면 정말 행복하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어느 날 그에게 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대기업 중책(重責)을 맡아보지 않겠느냐?’는 제의였습니다. 지난번에 물었던 중년 남자는 대기업 총수였던 것입니다. 대기업 총수는 이 정도 성실한 사람이라면 회사에서도 충성할 수 있다.’는 것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 영향력 없던 어부들을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중요한 사역하는 제자로 부르십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은 당시에 가장 어둡고 소외된 가버나움에서부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첫 메시지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해변에서 네 제자들을 부르시고 하나님 나라의 일군으로 삼으셨습니다. 또한 갈릴리에 두루 다니시면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12-17)

세상의 이치 중에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물이 흐르다가 막히면 가장 낮은 곳을 찾아서 흘러내려 갑니다. 복음의 흐름도 이와 같습니다. 복음이 전파되다가 높은 장벽을 만나면 멈춘 것이 아니라 그곳을 피해서 낮은 곳을 찾아 들어갑니다. 예수님의 사역도 사람들의 방해로 멈춘 것이 아니라 감당할 만한 사람을 찾아서 역사합니다.

 

12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13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14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15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16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17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12-17)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은 다음과 같습니다.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사건은 메시아로서 공생애를 시작하는 취임식과 같았습니다. 그 이후에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금식기도하고 있을 때, 세례 요한은 헤롯 왕에게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이 잡혔다는 소식은 이제 예수님의 사역에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과 같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소식에 두려워하거나 위축되지 않고 갈릴리로 가셔서 공생애를 시작합니다. 오히려 자신의 때가 임하였음을 아셨습니다. 회개를 외치던 선지자는 사라졌지만, 용서와 회복을 여는 왕이 등장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예루살렘 성전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또 예수님의 고향 나사렛에서도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고향 나사렛을 떠나 같은 갈릴리 지역이지만 호수 북서쪽에 위치한 가버나움으로 가셔서 그곳에서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가버나움은 구약 선지자인 나훔의 고향이란 뜻을 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곳을 초기 사역의 본부로 삼으셨습니다. 당시 이 지역은 이방의 갈릴리라고 불리던 영적으로 아주 어두웠던 곳입니다. 이곳에서부터 세상의 빛으로 사역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 했습니다.

1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2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이사야 9:1-2)

고향 갈릴리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척했지만, 가버나움 이방 사람들은 달랐습니다. 이사야의 예언대로 가버나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말씀을 듣기 위해 몰려들었습니다. 가버나움이 바로 이사야가 말한 스불론과 납달리 땅이었습니다. 이곳을 그 당시 사람들은 가버나움을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은 자들로 어두운 죽음의 땅이라고 했습니다. 이 땅은 예루살렘과 멀리 떨어져 있었고, 이방인들이 많이 거주했으며, 오랫동안 이방인들이 차지한 땅으로서 진리의 빛이 없는 지역으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빛이신 예수님께서는 이 어두운 땅에 복음의 빛을 비추셨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당시 종교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지 않으셨습니다. 화려한 비단 옷을 입을 사람들을 중심으로 역사하지 않으셨습니다. 율법적인 지식이 뛰어난 사람들의 동의를 얻어서 시작한 것도 아닙니다. 이처럼 소외된 변방에서부터, 소외된 사람들을 중심으로 점점 예루살렘 중심으로 전진해 들어갔던 것입니다. 가장 소외된 곳에 가장 먼저 복음의 빛을 받는 영광스러운 곳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전반적인 사역이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잘 들러나 있습니다. 선포한 복음은 세례 요한이 외쳤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 왔느니라.”(17)와 동일했습니다. 천국은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임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그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회개를 통해서 들어가는 것입니다. 나라를 소유하려면 누구든지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켜 주며, 그 결과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왕과 백성의 관계로 만들어 줍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긍극적인 목적은 죄인들을 하늘나라의 백성으로 입성시키시는 일입니다. 그곳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죄인들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함으로 입성되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도우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악 많은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을 거부했던 이 세상에 하나님의 통치를 회복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세상이 죄악으로 가득하다고 인정합니다. 하지만 막상 그 세상에 대해서는 어떤 대안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먼저, 빛이 되신 예수님 앞에 자신을 조명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건강한 삶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두운 세상에 하나님의 작은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그래서 어두움에 헤매고 있는 영혼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중국의 성현이었던 공자(孔子)어둡다고 불평하기 보다는 작은 촛불 하나라도 켜는 것이 낫다.”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을 부르신 예수님(18-22)

새로운 삶을 살아가려면 과거의 삶을 포기해야 합니다. 두 가지 삶을 한꺼번에 누릴 순 없습니다. 무엇인가 한 가지를 포기하지 않으면 새로운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에 특혜를 얻었지만 그들은 과거의 것들을 버려야 할 것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18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9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20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21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22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18-22)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언하시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이 있었습니다. 먼저 예수님과 동역하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함께 할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셨을 때,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았고 갈릴리고 가셨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교육을 받아서 똑똑하고 지혜로운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자신의 동역자를 찾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에게 버림 받고 소외 받은 갈릴리 해변에서 자신의 제자들을 찾으셨습니다. 그 중에서도 첫 번째 부르심은 어부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초대에 처음으로 반응하여 천국의 백성이 된 네 명의 제자들을 소개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심의 장소들은 각자 삶의 현장 속으로 찾아가서 제자들을 불러주셨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일을 열심히 감당하는 현장 속에서 부르셨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소명을 들을 수 있는 장소는 열심히 일하는 삶의 현장입니다. 그들에게는 자격이나 조건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의 조건은 순종이었습니다.

먼저 그물을 던지는 어부 베드로와 안드레에게 찾아가셨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가 고기를 잡고 있을 때, 예순님께서는 열심히 일하고 있는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이에 베드로와 안드레는 반응합니다. 즉시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이어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셨을 때 그들 역시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릅니다(21). 제자들이 예수님과 무슨 관계라든지 이런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부름을 받았을 때 모든 소유를 버려 뒤로하고 즉시 순종했다는 사실만 소개합니다.

그들을 부르시는 목적은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셨습니다(19). 예수님께 첫 제자 그룹을 어부로 선택하셨겠습니까? 그들이 결단 있는 성격이기 때문만 아닙니다. 쉽게 모든 것을 성격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잘할 수 하던 일에서 방향만 바꾸어 하나님의 사역으로 시키신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물고기를 낚는 어부였지만, 이제부터는 사람을 인도하는 어부로 변화시켜 주신 것입니다. 어부들은 밤을 새워가면서 한 마리의 고기를 잡는데 얼마나 많은 수고를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한 생명이 태어날 때까지 한 마리의 고기를 잡는 것과 같은 헌신과 수고가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들은 직감적으로 자신들이 어떤 일을 해야 할 지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은혜스러운 부르심에 제자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버림떠남그리고 따름이 필요합니다. 버려야할 것들을 아무 미련이 없어야 합니다. 그것들을 아까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을 버리지 않고 예수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어부의 밑천이라고 할 수 있는 그물과 배 그리고 부모까지도 버렸습니다. 우리도 세상과 예수님께서는 동시에 섬길 순 없습니다. 우선순위를 예수님께 두셨다면 세상에 즐기던 것들을 내려놓으시고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시길 바랍니다.

단순히 직업과 가족을 버린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세웠던 자신의 모든 삶과 목표들을 버린 것입니다. 제자들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의 태도를 통해서, 오늘날 우리들도 제자의 삶은 완전히 버리고 철저히 순종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임을 가르쳐 줍니다.

그들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부르심에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미련 없이 예수님을 즉시 따랐습니다. 이들은 버릴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영적 권위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오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명령 속에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권세가 있었습니다. 이 세상의 권위처럼 군림하는 권위가 아니라 사람들을 이끌 수 있는 권위가 있었습니다. 메시아의 권위를 가지고 제자들을 부르시는 음성이 들릴 때,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대단한 은혜가 있습니다. 당시 갈릴리 해변에 수많은 어부들이 있었지만, 베드로 및 다른 제자들을 선택하시고 부르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와는 무관하고 학식에 무식한 어부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킬 수 있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들의 삶은 완전히 변화되어서 가장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당신도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길 원한다면 이전에 즐기던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물과 부르심을 같이 가지고 예수님을 따라 갈 순 없습니다. 여호수아가 죽음을 앞에 두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만 따를 것을 결단 시켰습니다.

15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여호수아 24:15)

이 여호수아의 결단을 촉구하는 말씀에 당신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분명한 신앙의 결단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세속적인 것들을 모두 내려놓고 예수님께서 부르신 제자로 거룩한 순종이 있길 바랍니다.

 

새롭게 사역을 시작한 예수님(23-25)

예수님의 사역은 제자들을 부르신 사역만 하신 것이 아니라 모든 갈릴리를 다니시면 가르치시고 치유하신 사역들을 하셨습니다. 이곳에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셨던 세 가지 중요한 사역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23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24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25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23-25)

예수님께서는 부르셨던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전 지역을 다니시면서 천국의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세하게 풀어서 가르치셨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는 선포적인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병자들과 연약한 자들을 찾아가 주셔서 치유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이처럼 세 가지 형태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천국에 대해 귀로 듣게 하셨고, 눈으로 보게 하셨고, 몸으로 경험하도록 하셨습니다. 전인격적으로 생명이 살아나는 역동적인 구원을 맛보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역들은 모두 성공적이었고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결과, 갈릴리뿐 아니라 점차적으로 동서남북 사방에 천국 복음이 널리 전파되었습니다. 수많은 무리가 데가볼리 그리고 심지어는 예루살렘과 유대와 베레아와 같은 모든 지역으로부터 와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오늘날 예수님께서 우리의 부르셨고, 말씀을 가르치시고 연약한 것들을 고치셨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배우고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는 것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어두움에 덮어있는 이 땅에 예수님의 가르침과 전도와 치유 사역을 이어가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꾸준히 그 사명을 감당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방향에 우리 삶의 방향을 일치시켜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핵심은 하나님의 통치이기에 그 통치를 거스르는 이들에게는 회개가 요구됩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사랑과 용서를 통해 이루어지는 정의와 평화의 통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하나님의 진리로 통치를 받으며 진리를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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