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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07-02)

 


주의 응답에 대한 다윗의 찬양과 기도

사무엘하 7장 18-29절


찬양은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을 인정하고 고백함으로 하나님을 높여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는 하나님의 뜻과 약속을 확인하며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소원이니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도 거절당합니다. 중요한 것은 거절된 기도가 아니라 그 기도 앞에서 보인 다윗의 반응입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은혜로 평안을 얻자 여호와를 위한 성전을 지어 드리기를 원합니다. 여호와께서는 다윗이 성전을 짓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지만, 그 마음을 매우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다윗 왕조를 세워주시겠다는 약속과 다윗의 아들들을 하나님의 양자로 삼으시겠다는 영원한 언약을 주십니다. 다윗은 사울과 달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기에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왕조를 든든하게 세워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과거에 행하신 여호와의 일(18-21)

우리가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와 높이를 더 알게 될수록 감사의 깊이도 깊어질 것입니다(엡 3:18-19). 그러므로 우리는 주 앞에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여,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주님을 더 알게 하옵소서!” 우리가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믿음을 선물로 주셔서 구원받게 하신 것입니다.
 
18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 19주 여호와여 주께서 이것을 오히려 적게 여기시고 또 종의 집에 있을 먼 장래의 일까지도 말씀하셨나이다 주 여호와여 이것이 사람의 법이니이다 20주 여호와는 주의 종을 아시오니 다윗이 다시 주께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21주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주의 뜻대로 이 모든 큰 일을 행하사 주의 종에게 알게 하셨나이다(18-21)
선지자의 말에 다윗은 항의하거나 항변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앉아서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입니다. 다윗은 사울처럼 자기 뜻을 굽히지 않는 폭군이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그런데도 거절당합니다. 중요한 것은 거절된 기도가 아니라 그 기도 앞에서 보인 다윗의 반응입니다.
 
(1) 다윗의 겸손(18)
다윗은 나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신과 자신의 가문에게 주신 큰 은혜의 언약을 듣게 된 후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습니다. ‘여호와 앞’이라는 것은 다윗 성 휘장 안에 놓여 있는 여호와의 궤 앞입니다. 다윗은 여호와께서 주신 언약의 말씀에 감사하며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서 기도하였습니다.
 
(2) 작은 일(19-20)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제일 먼저 감사합니다. 또 자신이 무엇이며 자신의 집이 무엇이기에 지금까지 인도하셨는지 묻습니다. 이것은 수사 의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자신과 자신의 집에 주신 은혜에 대해 감사한 것입니다.
여기서 다윗은 여호와를 ‘나의 주’라고 부르는데, 여호와께서 다윗을 ‘나의 종’이라고 부른 것에 대한 응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제까지 인도하신 것도 작다고 여기시고 또다시 먼 미래의 종의 집일까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의 규범을 따라 왕조 언약을 주신 것에 대한 감사입니다. 그동안 하나님께서는 주변 나라들과는 달리 이스라엘에 왕을 세우지 않으시고 사사를 직접 선택해서 다스리셨습니다. 사울을 왕으로 세우실 때도 하나님께서 직접 선택하셨고 사울 대신 다윗을 선택하신 것도 하나님이셨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다윗은 여호와께서 자신의 왕조를 세워주겠다고 말씀하신 것에 대해 감사한 것입니다. 또한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잘 알고 계시기에 더 이상 하나님께 말을 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부족함을 잘 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하고 감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아직도 낮고 겸손한 자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3) 큰 일(21)
21절은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으로 자신에게 왕조를 주시는 일은 온전히 하나님의 뜻이며, 자신은 오직 하나님의 뜻을 알지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자신은 여전히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온전히 순종하고 따라가겠다는 의미로 감사로 시작하여 순종으로 단락을 마무리합니다.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유일성(22-24)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셨을 뿐만 아니라 쉴 만한 물가와 푸른 풀밭으로 인도해 주셨음을 기억하며 주 앞에 찬송을 올려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과거에 받은 주님의 은혜를 기억할 뿐만 아니라 때를 따라 도우시는 주님의 새로운 은혜를 사모하며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22그런즉 주 여호와여 이러므로 주는 위대하시니 이는 우리 귀로 들은 대로는 주와 같은 이가 없고 주 외에는 신이 없음이니이다 23땅의 어느 한 나라가 주의 백성 이스라엘과 같으리이까 하나님이 가서 구속하사 자기 백성으로 삼아 주의 명성을 내시며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주의 땅을 위하여 두려운 일을 애굽과 많은 나라들과 그의 신들에게서 구속하신 백성 앞에서 행하셨사오며 24주께서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세우사 영원히 주의 백성으로 삼으셨사오니 여호와여 주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22-24)
나단의 메시지에는 하나님을 주어로 하는 동사가 많습니다. 그 메시지를 듣고 다윗도 하나님을 ‘주’로, 자신의 ‘종’으로 부릅니다. 전에는 ‘나’로 가득했지만, 이제는 ‘하나님’으로 가득합니다. 주어의 변화는 주도권의 변화입니다.
 
(1) 여호와의 유일성(22)
이 단락은 여호와께 대한 송영으로 다윗은 여호와의 위대성을 찬양하며 단락을 시작합니다. 여호와 같은 분은 없으며, 여호와 이외에는 신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여호와가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유일한 신이라는 사랑은 신명기 3:24: 4:35과 연결되는 것으로 여호와서 다른 신들과 도저히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은 여호와의 장엄성과 능력과 창조성은 어느 신도 따라올 수 없는 독보적인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2) 이스라엘의 유일성(23)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구원을 이야기합니다. 다윗은 이스라엘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나라가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는데 여호와 같은 신이 없는 것처럼 이스라엘과 같이 특별한 나라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아 자신의 이름을 이스라엘에게 두기 위해서 직접 구속하셨기 때문이며, 애굽과 다른 민족들과 신에게서 구속하신 백성들을 위해 큰 일과 두려운 일들을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고백은 출애굽과 가나안 점령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직접 구속하신 것은 애굽에 어마어마한 재앙을 퍼붓고 애굽의 철병거를 홍해에 수장하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것을 말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가나안 땅을 주시기 위해 백성들 앞에서 여호와께서 전사로서 큰 기적들을 보여주시고 싸워주셨습니다.
다윗은 세상의 어느 신이 이렇게 자신의 백성을 위해 헌신적이며 세상의 어느 나라가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와 헌신을 받느냐고 말하며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특별한 관계를 강조합니다.
 
(3) 여호와와 이스라엘(24)
24절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우셨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셨다는 시내산 언약으로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를 마무리합니다. 하나님의 보호와 사랑의 모든 근원이 시내산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에서 다윗이 고백하듯이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는 자신의 백성을 너무나 헌신적으로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렇기에 결국 자신의 아들을 우리를 위해 보내주기까지 하셨습니다.
 

다윗의 기도(25-29)

우리는 먼저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시고, 뜻이 하늘에서 이뤄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뤄질 것을 위해 먼저 간구해야 합니다.
 
25여호와 하나님이여 이제 주의 종과 종의 집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을 영원히 세우셨사오며 말씀하신 대로 행하사 26사람이 영원히 주의 이름을 크게 높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 하게 하옵시며 주의 종 다윗의 집이 주 앞에 견고하게 하옵소서 27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의 종의 귀를 여시고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우리라 하셨으므로 주의 종이 이 기도로 주께 간구할 마음이 생겼나이다 28주 여호와여 오직 주는 하나님이시며 주의 말씀들이 참되시니이다 주께서 이 좋은 것을 주의 종에게 말씀하셨사오니 29이제 청하건대 종의 집에 복을 주사 주 앞에 영원히 있게 하옵소서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사오니 주의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 하니라(25-29)
다윗은 이제 성전 건축의 뜻을 철회하고 다윗의 집을 세우시겠다는 약속의 실현을 요청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자신의 소원이 되게 합니다. 기도의 마지막 단락은 간구입니다.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린 후에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신 약속을 이루어 달라고 간구합니다.
 
(1) 주의 말씀을 이루소서(25-26)
25절에서 다윗은 당신의 종과 종의 집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을 확실하게 해주시고 말씀하신 대로 행해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래서 영원히 여호와의 이름이 위대하게 되고 사람들이 ‘만군의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다’라고 외치게 해달라고 기원합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을 더욱더 부강하게 해달라는 말로 이스라엘이 부강하게 되면 주변 모든 나라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대하다고 칭송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부강을 위해서 기도한 다윗은 이제 가장 핵심적인 기도를 합니다. 당신의 종인 다윗의 집을 여호와 앞에서 굳건하게 세워달라고 기도합니다.
 
(2) 다윗의 집을 위한 기도(27)
27절에서 자신이 이런 기도를 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여호와께서 먼저 다윗에게 너를 위해 집을 세울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자신도 감히 이런 기도를 할 용기가 생겼다고 고백합니다. 본문에서 ‘주의 종의 귀를 여시고’로 번역된 것은 직역하면, ‘주의 종의 귀를 벌거벗기시다’입니다. 이것은 계시를 드러내셨다는 의미입니다. 즉, 여호와께서 나단을 통해 이런 계시를 주셨기 때문에 자신의 집을 굳건하게 해달라고 기도할 용기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26절과 27절에서 다윗은 여호와를 만군의 여호와로 부르는데, 이것은 하늘의 군대를 이끄시는 하나님이란 의미로 이스라엘과 다윗의 왕조를 적으로부터 지키시고 싸우시는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5:10에서도 만군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므로 다윗이 점점 강정해져 갔다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민군의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싸우셨다는 의미입니다.
 
(3) 복을 위한 기도(28-29)
28절에서는 하나님을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보증으로 삼습니다. 다윗은 여호와는 하나님, 즉 신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진실하기를 기원하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어주시길 기원한 것입니다. 여기서 ‘진실함’이란 뜻의 ‘에메트’는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하나님의 진실한 성품에 기대어서 확실하게 믿은 것입니다. 다윗은 마지막으로 왕조의 약속을 ‘좋은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언약’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왕조 언약을 주셨으니 종의 집에 복을 주시고 주의 앞에 영원히 있는 것을 기뻐해 달라고 기원하며, 다시 한 번 자신의 집이 영원히 하나님의 복을 받게 해달라고 하며 모든 기도를 마칩니다. 다윗의 기도를 보면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언약을 어마어마한 은혜라고 생각하고, 이에 대해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왕이 되고 나서 이스라엘에 평화를 주신 분이 여호와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고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은 왕이 된 이후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늘 불안해하며 살았던 사울의 모습과 대조됩니다. 과연 우리는 다윗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복에 감사하며 살고 있는지, 아니면 사울처럼 늘 우리가 가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해 불안해하고 불평하며 불행하게 살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윗처럼 늘 겸손하게 하나님을 섬길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이시고 우리에게 복을 주십니다.
 


거절된 응답에 다윗이 보인 첫 반응은 보좌에서 내려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하는 일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먼저라는 것을 알았고, 자신의 열망보다 하나님의 열망이 더 크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기도 가운데서 일어난 변화이자 기도의 첫 응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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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07-01)

 


성전을 건축하길 원하는 다윗

사무엘하 71-17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심과 신실하심으로 그분의 언약을 주권적으로 이루고 완성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그분이 지금까지 행하신 역사를 믿고 장차 행하실 역사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언약은 그것의 성취 여부를 부흥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언약은 반드시 성취됩니다.

 

다윗은 통일 왕국의 왕이 되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다윗 성을 지으면서 왕국의 기반을 다졌습니다. 그 후에 그는 자신의 하나님이신 여호와의 언약궤를 예루살렘에 있는 다윗 성으로 옮겨 오려고 하였습니다. 첫 번째 시도는 실패했지만, 그 후 언약궤를 어깨에 메고 옮겨 무사히 예루살렘 다윗 성에 안치하였고, 다윗은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며 온 백성과 축제의 기쁨을 나눕니다. 이렇게 예루살렘은 정치적 중심지가 되었고 이스라엘은 점점 강성해집니다.

 

성전을 건축하기 위한 소원(1-3)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이미 행하신 것을 믿고 그분이 행하실 것을 소망하는 것뿐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위해 수고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자신이 무엇을 하겠다는 비전보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이루실 일을 기대하며 나갑시다.

 

1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를 무찌르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살게 하신 때에 2왕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에 있도다 3나단이 왕께 아뢰되 여호와께서 왕과 함께 계시니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행하소서 하니라(1-3)

다윗의 인생을 살펴보면 얼마나 힘겨운 세월이었습니까? 황폐한 광야와 동굴에 버려진 것과 같은 삶에서, 이제 예루살렘 궁에서 평안한 태평성대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고생했기 때문에 안주할 만한데도, 다윗은 나단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성전을 새롭게 건축할 의사를 전합니다. 성전 건축은 하나님의 명령이 아닌 다윗의 소원에서 시작됩니다.

 

(1) 다윗의 상황(1)

다윗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에 있는 다윗 성으로 옮긴 후, 여호와께서는 주위의 모든 원수들을 물리쳐주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예루살렘 궁에서 평안하도록 해주셨습니다. 모든 위험과 갈등의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본문은 다윗이 누린 평안이 여호와께서 모든 적들의 손에서 구원해주셨기 때문임을 강조합니다.

 

(2) 다윗의 소원(2)

여호와께서 주시는 평화의 시대를 누린 다윗은 마음이 쉴 수가 없었습니다. 몸은 쉴 수 있는 환경이 되었지만, 그의 마음은 결코 쉴 수 없었습니다. 다윗의 마음은 불편했습니다.

선지자 나단을 불러서 자신의 마음을 전합니다. 다윗은 그 마음을 자신의 처소와 여호와의 처소를 비교하며 이야기합니다. 자신은 백향목 궁에 살고 있는데 여호와의 궤는 휘장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휘장이란 단어는 성막을 구성하는 천으로 성막은 여러 장의 휘장을 이어 만듭니다. 다윗이 여기서 장막이 아니라 장막의 일부분인 휘장이란 단어를 사용한 것은 자신의 백향목 궁과 좀 더 강한 대조를 하기 위한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모든 적에서 구원해주시고 이스라엘에 평화를 주신 여호와를 위해 이제 한 장소를 정하여 자신의 집보다 더 튼튼하고 아름다운 성전을 지어드리길 원했습니다.

 

(3) 나단의 동의(3)

본문에서는 이런 다윗의 마음이 표현되어 있지 않지만, 선지자 나단은 다윗의 마음에 감동하고, 흔쾌히 알고 승인합니다. 나단은 여호와께서 당신과 함께 계시니 당신의 마음대로 행해도 좋다라고 말합니다(3). 그는 다윗의 제안이 너무나 아름다워 보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나단 개인의 생각이었습니다.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늘 다윗과 함께 계시니 성전 짓는 일도 허락하실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나단 선지자는 여기 처음 등장하며, 후에 그의 두 아들이 왕의 중요한 관리가 됩니다(왕상 4:5). 그는 다윗이 예루살렘에 자리 잡은 후에 등장하며 다윗이 죽고 솔로몬이 왕이 될 때까지 오랫동안 왕실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전합니다.

 

여호와께서 나단을 통해 하신 말씀(4-17)

성도들은 아무리 좋은 생각이라 할지라도, 그 좋은 생각이 성숙한 신앙인에게서 나왔더라도 무조건 하나님의 뜻으로 간주해서는 안 됩니다. 때로는 그것이 인간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생각도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향한 성전 건축은 순수하고 좋은 생각이었지만,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그곳에 있지 않았습니다.

 

4그 밤에 여호와의 말씀이 나단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5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 6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까지 집에 살지 아니하고 장막과 성막 안에서 다녔나니 7이스라엘 자손과 더불어 다니는 모든 곳에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라고 명령한 이스라엘 어느 지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 8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와 같이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고 9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땅에서 위대한 자들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리라 10내가 또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곳을 정하여 그를 심고 그를 거주하게 하고 다시 옮기지 못하게 하며 악한 종류로 전과 같이 그들을 해하지 못하게 하여 11전에 내가 사사에게 명령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아니하게 하고 너를 모든 원수에게서 벗어나 편히 쉬게 하리라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12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13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14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15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는 아니하리라 16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17나단이 이 모든 말씀들과 이 모든 계시대로 다윗에게 말하니라(4-17)

다윗이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려고 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한 번도 아름다운 성전을 요구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건물 안에 갇힐 수 없는 자유로운 분이요, 왕에게 매력적인 백향목이 하나님에게도 매력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1) 다윗이 여호와의 집을 짓는 것에 대해 반대하심(4-7)

그날 밤에 여호와의 말씀이 나단에게 임하셨는데 여호와께서는 나단에게 나의 종 다윗에게 '가서 여호와의 말씀을 전달하라'(4)라고 하십니다. 여호와께서는 다윗을 나의 종이라고 부르시는데, 이 호칭은 이전에 모세와 여호수아만 받은 칭호로 다윗이 여호와를 매우 충실하게 섬긴 인물로 인정받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5)는 질문은 다윗이 성전을 짓겠다는 요청에 대한 거절을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을 짓는 것에 대한 거절 이유가 나오는데(6-7), 첫째는 이스라엘과 동행하기 위해서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애굽에서 나온 날부터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과 동행하기 위해 움직일 수 없는 성전이 아니라 움직일 수 있는 성막 혹은 장막에 거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성막은 그동안 완전하게 정착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살던 이스라엘과 동행하기에 가장 적합한 하나님의 거주지로 성막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어디에 가든지 늘 동행하시고 보호해주신다는 약속을 지키신 것입니다.

둘째는 성전을 짓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동안 이스라엘이 간 모든 곳에 동행하셨지만 한 번도 백향목 성전을 지으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여기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라고 명령한 이스라엘의 한 지파라는 말은 사사시대를 암시하는데, 이스라엘의 지파들에서 지도자를 세운 이유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이스라엘을 잘 돌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나라의 이방신들처럼 각 지역마다 신전을 지으라고 하실 수도 있었지만, 그걸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본질적인 것을 추구하시는 분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이나 웅장함보다는 백성들과 동행할 수 있는 간편한 장막을 원하셨고, 자신이 선택한 지도자들이 자기 백성을 잘 돌보는 것을 가장 기뻐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2)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안전을 약속하심(8-11a)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짓겠다는 다윗의 제안은 거절하셨지만, 하나님을 생각하는 진실한 마음은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에게 이전에 주신 것보다 더 큰 은혜의 약속을 주십니다.

이 단락은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8~9a절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해 과거에 해주신 일을 서술하고 있고, 9절 하반절 이하는 앞으로 해주실 일에 대한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다윗을 양치기에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은 것과 모든 전쟁에 함께하셔서 적들을 물리쳐주신 것을 상기시키십니다. 9절 하반절에서 새로운 축복을 더하여 주시는데, 다윗의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주겠다고 하십니다. 그것은 다윗을 주변 모든 왕들보다 강력하게 만들어주겠다는 것이며, 이스라엘에서도 역사적으로 길이길이 기념될 왕으로 만들어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두 번째는 이제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의 영원한 땅으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정하고 심고 거주하게 하고 다시는 옮기지 못하게 하다라는 표현들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동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또한 사사 때와는 다르게 적들의 침입이 없는 평화의 시대를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것은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고 살 때 누리는 약속이며, 다윗이 범죄하였을 때 다윗 왕국은 큰 어려움을 겪습니다.

 

(3) 여호와께서 다윗의 집을 세워주겠다고 언약하심(11b-17)

이 부분은 다윗의 언약으로 불리는 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위해 집을 지어주겠다는 특별한 언약을 해주십니다. 다윗의 언약은 왕조 하사와 양자 언약으로 구성됩니다. 여호와를 위한 집 대신에 하나님께서 다윗의 집을 지어주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다윗 왕조를 세워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다윗의 아들이 왕위를 계승할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다윗 왕조를 견고하게 세워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다윗을 대신해서 다윗의 아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위한 집을 건축할 것이며, 여호와께서는 그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세워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견고하게 세워주신다는 말을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왕조가 이어지려면 견고하게 서야 하기 때문 아들을 자신의 아들로 삼아주시고 자신은 그의 아버지가 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제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의 양자로 여호와의 종, 즉 여호와의 백성보다 더욱 친밀한 관계로 들어서게 되며, 이것은 만군의 여호와의 절대적인 지지와 보호를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 본문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단어는 영원히입니다. 다윗 왕조를 영원히 세워주고 보존해주시겠다는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합니다. 이것은 사울 집과 대조를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사울 집에서 은혜를 거둔 것처럼 다윗 집에서는 은혜를 거두지 않을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을 두는데, 왕이 범죄할 경우는 사람의 매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겠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사람의 매인생의 채찍은 평행법으로 동일한 의미를 비슷한 말로 반복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은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 죄에 대해서 징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것도 일시적이며, 절대 사울의 집을 버리신 것처럼 완전히 버리지는 않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므로 다윗 언약은 왕조를 주시겠다는 언약이며 양자 언약으로 또한 영원한 언약입니다. 사실 사울도 이런 약속을 받을 뻔하였습니다. 사무엘상 13:13에서 사무엘은 사울에게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였다면 여호와께서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울은 여호와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왕조를 세우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였기에 영원한 왕조를 하사받은 것입니다.

다윗의 언약은 구약의 마지막 부분으로 가면 이스라엘이 멸망함으로 희미해집니다. 하지만 이 약속은 신약시대에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살아났고 성취되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다윗의 열망은 순수하고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그 열망보다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열망이 훨씬 더 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소망을 품은 사람들에게 위대한 복을 허락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나라와 그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케 할 것을 약속하십니다. 다윗의 후손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아버지가 되어주시고, 그들을 지키고 돌보아 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다윗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하나 벅차고도 거대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소망을 품은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 안에도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소망이 임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복이 임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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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06-02)


기쁨으로 춤추는 예배자

사무엘하 612-23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은 사람의 제일 된 목적을 이렇게 진술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도 귀하지만, 우리 스스로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 또한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예배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왕국 안정된 후 다윗은 기럇여아림에 있던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시고 올 계획을 세웁니다. 이때 새 수레에 궤를 싣고 오다가 나곤의 타작마당에서 떨어지는 궤를 잡았던 웃사가 죽는 무서운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 일로 다윗은 법궤를 두려워하게 되었지만, 하나님께서 법궤를 두었던 오벧에돔의 집에 복을 주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서 다시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시고 올 계획을 세웁니다.

 

여호와의 궤를 모셔오는 행렬(12-15)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사 죄인인 우리에게 오셨는데, 그 은혜를 예수님의 십자가로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과 함께하시려면 죄를 해결하셔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죄를 해결하시고 의를 이루셨습니다. 오벧에돕의 집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사 복을 주셨듯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십니다.

 

12어떤 사람이 다윗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올라갈새 13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 14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15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오니라(12-15)

다윗은 나곤의 타작마당에서 일어난 웃사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오려던 계획을 중단하고 법궤를 오벧에돔의 집에 두게 됩니다. 그런데 오벨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가 여호와의 법궤로 인해 복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은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오려는 시도를 다시 하게 됩니다. 12절은 다윗이 오벧에돔의 집으로 가서 하나님의 궤를 다윗 성으로 가져왔다는 사실을 요약적으로 말하고 있으며, 13-15절은 법궤를 가져온 상황을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1) 다윗의 둘째 시도(12)

이번에는 여호와의 궤를 옮기는 규례를 따라 사람들이 법궤를 메었습니다. 다윗은 궤를 메고 여섯 걸음 걸었을 때 소와 살진 송아지로 희생제사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평안하게 법궤를 옮길 수 있게 해달라는 기원이 담긴 제사일 것입니다.

 

(2) 기뻐하는 다윗(13-14)

다윗은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법궤 앞, 즉 여호와 앞에서 온 힘을 다하여 춤을 춥니다. 다윗이 춘 춤은 원형을 만들어 빙글빙글 돌며 추는 층으로 다윗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춤에 참여하여 단체로 춤을 추었을 것입니다. 다윗도 여기에 참여하여 여호와의 궤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기쁨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때 다윗은 베로 만든 에봇을 입고 있었습니다. 에봇은 일반적으로 제사장이 입는 제의적 옷이며 세마포로 만든 에봇은 사무엘상 2장에서 사무엘이 입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세마포 에봇은 정식으로 제사장 임명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여호와를 섬기거나 제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아 참여할 때 입는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윗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제사를 드린 것과 에봇을 입은 것을 보면 그가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오는 것을 제의적 의식으로 여기고 있으며, 이 의식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여호와의 행진(15)

이렇게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은 기쁨으로 환호하고 나팔을 불며 여호와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 옵니다. 이전에는 많은 악기를 사용하여 웅장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면, 이번에는 신호를 보내기 위한 나팔만 사용했습니다. 대신에 여호와 앞에서 기뻐 춤추며 환호하는 백성들이 여호와의 궤를 환영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안치된 언약궤(16-19)

똑같은 구원의 복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는데 왜 우리는 다윗처럼 뛰놀며 춤추듯이 기뻐하지 않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가 받은 복과 우리가 받은 복이 다르지 않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백성인 것처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의 복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왔습니다. 이때 다윗 왕은 왕의 신분을 잊은 채 뛰놀며 춤을 추었습니다.

 

16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그를 업신여기니라 17여호와의 궤를 메고 들어가서 다윗이 그것을 위하여 친 장막 가운데 그 준비한 자리에 그것을 두매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니라 18다윗이 번제와 화목제 드리기를 마치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하고 19모든 백성 곧 온 이스라엘 무리에게 남녀를 막론하고 떡 한 개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 떡 한 덩이씩 나누어 주매 모든 백성이 각기 집으로 돌아가니라(16-19)

백성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는 다윗 기쁨은 나눌 때 배가 됩니다. 다윗은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을 온 백성과 함께 나눕니다. 남녀를 막론하고 떡과 고기에 건포도까지 얹어서 풍성한 선물을 나누었습니다. 거룩한 기쁨이 온 나라 온 백성에게 구석구석 퍼져 나갑니다. 이스라엘 온 땅이 거룩한 예배의 처소가 됩니다.

 

(1) 다윗의 모습을 업신여기는 미갈(16)

여호와의 궤가 예루살렘 다윗 성으로 들어오는 것을 온몸으로 기뻐하며 참여한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대조적으로 미갈은 성안에서 이 광경을 창밖으로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미갈을 다윗의 부인이 아닌 사울의 딸이라고 표현하는데, 이 본문에서는 항상 사울의 딸로 표현됩니다. 이것은 미갈이 다윗 궁전에서 다윗의 아내가 아닌 사울의 딸로서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사무엘하 3:13에서 다윗이 아브넬에게 미갈을 데리고 오라고 말할 때도 나의 처가 아닌 사울의 딸 미갈이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미갈을 자신의 처라고 부른 것은 이스보셋에게 미갈을 돌려달라고 말할 때가 유일한데, 이때는 미갈이 나의 처인 것이 들려달라는 이유였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아내가 아니라 사울의 딸로서의 미갈이 필요해서 강제적으로 데리고 온 것이기에 다윗 궁전에서 미갈의 위치는 편할 수 없었을 것이고, 다윗에 대해서도 이전처럼 사랑하는 마음을 갖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런 불편함이 다윗의 모습을 보는 미갈의 마음에서 드러납니다.

미갈은 창 너머로 다윗이 춤추는 모습을 보며 그런 다윗을 경멸합니다. 이런 상황은 미갈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쁨에 동참하지 못하고 철저히 소외되어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2) 법궤를 성막에 모시고 제사를 드림(17-19)

미갈의 마음과 관계없이 여호와의 꿰는 무사히 다윗이 준비한 장막에 잘 모셔집니다. 여기서 다윗이 여호와의 궤를 위해 만든 장막은 광야에서 모세가 만들었던 성막과 같은 종류의 것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여기서 장막은 여호와의 궤의 임시 처소로 사용된 것입니다. 다윗은 후에 여호와의 궤를 안치할 성전을 짓기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에 안착한 것에 감사하며, 이제 그곳이 제사의 중심지가 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립니다. 그러고 나서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들을 축복합니다. 일반적으로 백성들을 축복하는 것은 제사장의 임무인데(10:8), 여기서 다윗은 제사장과 유사한 역할을 하였고, 여호와의 선택받은 왕으로서 백성들을 축복하였습니다. 또 남자부터 여자까지 빠짐없이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빵 한 개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 떡 한 개를 주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언약식 후에 열리는 잔치와 같은 개념으로 여호와께서 다윗 성에 안주하신 것은 이제 여호와께서 다윗과 이스라엘과 함께하신다는 약속을 하신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언약의 잔치에 모든 백성이 참여한다는 의미로 모든 백성에게 음식을 나누어 준 것입니다. 이제 여호와께서는 다윗 성에서 이스라엘 가운데 임재하시며 다윗 왕권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신 것입니다.

 

다윗과 미갈의 갈등(20-23)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보다 눈에 보이는 궤에 대한 호기심이 더 켰던 것입니다. 이처럼 지적 호기심을 해소하기 위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서는 안 됩니다. 오직 경외하는 마음으로, 경배할 목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앞서려는 망므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이끄시는 만큼만 나아가며, 보여 주시는 만큼 순종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20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이르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 그의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하니 21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22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 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 23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그에게 자식이 없으니라(20-23)

다윗이 언약궤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것을 기뻐하며 모든 백성 앞에서 춤추는 것을 비난한 사울의 딸 미갈의 비난에, 다윗은 자신을 택하사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신 하나님 앞에서 경배하는 일이라면 이보다 더 낮아져서 천하게 보여도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1) 미갈의 비방(20)

다윗은 축제가 끝난 뒤에 자신의 가족을 축복하러 왕궁으로 들어옵니다. 이때 미갈도 다윗을 맞이하기 위해 나와서 아까 자신이 본 것에 대해 다윗을 비난합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지요?’로 시작하는 그녀의 말은 다윗의 모습이 왕으로서의 위엄과 영광이 전혀 없는 모습이라고 비꼬는 말입니다. 당신의 신복의 계집종은 천한 신분 중에서도 가장 비천한 신분의 사람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녀는 다윗이 옷이 펄럭거려 하체가 드러날 정도로 춤을 춘 것에 대해 가장 비천한 신분의 사람들 앞에서까지 몸을 드러내는 체통 없는 행동을 한 것이며, 이런 행동은 어리석은 자가 스스로 옷을 벗는 것과 같은 행동이라며 비난하였습니다. 다윗이 체통을 잃고 어리석게 행동했다는 것입니다.

 

(2) 다윗의 반박(21-22)

미갈은 다윗의 행동을 부정적인 시각에서 보고 판단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다윗은 미갈에게 자신의 행동은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라며 여종들 앞에서 한 것이라는 미갈의 말을 반박합니다. 다윗과 둘 다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춤을 춘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여호와는 네 아버지와 그의 온집보다 자신을 선택하셔서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신 분이기에, 그 여호와 앞에서 기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 자신을 왕으로 세우신 여호와께 감사하여 춤추는 것이 왜 부끄럽고 어리석은 일이냐는 것입니다. 여기서 미갈에게 노골적으로 여호와께서 네 아버지의 집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실을 말하며 미갈을 공격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더 낮아져서 자신의 눈에 천하게 보일지라도 여종들은 자신에게 영광을 돌릴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얼마나 영광스럽냐?’는 미갈의 비아냥에 대한 응수로 자신이 아무리 천하게 행동해도 자신이 이 나라의 왕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미갈의 비난에 매우 강하게 공격하며 비난하였습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춤춘 것을 비난한 것에 대해 매우 분노한 것입니다.

 

(3) 미갈의 불행(23)

그 결과 미갈은 죽는 날까지 자식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다윗은 이 사건 이후로 미갈을 다시는 찾지 않았고 그 결과 아이가 없었던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분명히 미갈이 다윗을 업신여겼고 비난하였기에 다윗이 미갈에게 화를 내는 것이 정당합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미갈과 다윗의 관계를 보면 미갈은 다윗을 사랑한 여인이고 다윗의 생명을 살려준 은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미갈을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이용하기 위해 10여 년을 같이 산 남편과 강제로 갈라놓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사울의 딸 미갈은 자손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사울 가문과 다윗 가문의 결합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사울의 가문은 다윗 왕국에서 어떤 자리도 차지할 수 없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굳건하게 서게 되었고, 사울 가문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예배는 근엄한 의식 이전에 하나님을 향한 진심 어린 기쁨입니다. 이 땅에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들이 많이 있지만, 그 무엇보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쁨이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나의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고, 그분으로 인해 행복한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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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02-02)

 


음녀에게서 건져줄 지혜

잠언 216-22

 


간통법이 폐지됐습니다. 이제 성인들의 지극히 사적인 성적 선택권을 존중하기 위해 법으로 통제하기를 포기한 것입니다. 이 세상의 변화를 생각하면 놀랄 일도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세상이 점점 성경적인 질서에서는 멀어지고 있고, 어느새 그것이 상식과 문화로 자리잡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 청소년들의 거의 50%가 동성결혼에 대해서 거부감을 보이지 않는다는 결과는 이전과 그리고 성경과는 전혀 다른 의식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지배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지혜를 찾는 자는 음녀에게서도 건짐을 받습니다. 음녀는 듣기 좋고 매혹적인 말로 나를 유혹할 수 있지만, 내 마음에 자리 잡은 지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면 지혜가 나에게 분별력을 주므로 나를 유혹하는 음녀에게서 건짐을 받아 사망이 아닌 생명의 길로 인도 받게 됩니다.

 

아버지 강연(02-2) : 지혜를 찾으라(16-22)

()”은 생명을 잉태하는 사랑의 수단으로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중한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혼 관계안에서 부부관계로 을 바르게 사용해야 합니다. 하지만 악한 자들은 육체적인 쾌락을 위해 무분별하게 사용하도록 부추깁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예수님)과 성도들의 관계를 부부관계로 많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과 성도들의 관계를 깨드리는 것을 부부 사이에서도 깨드려진 도구를 비유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지 않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16지혜가 또 너를 음녀에게서, 말로 호리는 이방 계집에게서 구원하리니 17그는 젊은 시절의 짝을 버리며 그의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린 자라 18그의 집은 사망으로, 그의 길은 스올로 기울어졌나니 19누구든지 그에게로 가는 자는 돌아오지 못하며 또 생명 길을 얻지 못하느니라 20지혜가 너를 선한 자의 길로 행하게 하며 또 의인의 길을 지키게 하리니 21대저 정직한 자는 땅에 거하며 완전한 자는 땅에 남아 있으리라 22그러나 악인은 땅에서 끊어지겠고 간사한 자는 땅에서 뽑히리라(16-22)

2장은 지혜를 찾으라는 주제의 강연인데, 1-4절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자신의 말을 듣고 지혜를 간절히 구하라고 호소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1) 음녀에게서 보호하는 지혜(16-19)

5-8절은 지혜를 찾은 결과로 영적인 유익을 얻게 되는데 먼저 여호와 경외를 깨닫게 되고 지혜의 소유자인 하나님으로부터 지혜와 보호를 선물로 받는다고 설명합니다. 9-11절은 도덕적이고 실제적인 삶의 유익에 대한 설명으로서 지혜를 얻으면 지혜의 주도 하에 선한 삶을 살며 기쁨을 누리고 지혜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12-19절은 지혜의 유익에 대한 연장된 설명입니다. 12-15절은 악한 남자(악인)로부터 건짐을 받는 유익을, 16~19절은 악한 여자(음녀)로부터 건짐을 받는 유익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결론 부분인 20~22절은 의인의 길로 가기를 촉구하며 의인과 악인의 최후를 땅과 관련지어 선언합니다.

오늘 본문의 첫 부분인 16-19절은 우리가 지혜를 찾고 얻으면 지혜가 음녀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여 사망에서 생명의 길로 인도한다는 점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16~19절의 음녀와 12-15절의 악인은 둘 다 속이는 말로 우리를 유혹하여 패역과 사망이 도사리는 길로 인도하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음녀에 대한 경고는 여기만이 아니라 5장전체, 6:20~35, 7장 전체, 9:13-18에도 나옵니다. 이와 같이 음녀에 대해 자주 집중적으로 다루는 이유는 아마도 현재 아버지가 아들에게 충고하면서 앞으로 배우자를 찾을 아들이 유혹하는 음녀를 구별하여 그 유혹을 뿌리치고 지혜로운 여자를 찾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들을 유혹하는 음녀는 음녀이방 계집으로 불리며(5:20; 7:5도 마찬가지), 6:26에서는 음란한 계집’, 7:1에서는 창녀로도 소개되었습니다. ‘음녀이방 계집은 둘 다 이방인의 뜻을 갖고는 있지만, 이방 여인이라기보다는 문맥상 낯선 여자’, ‘남의 여자’, ‘음란한 여자로서 도덕적, 관습적 제약 밖에 있는 여자를 가리킵니다. 이 여인은 젊은 시절의 자기 남편을 버리고 하나님께 맹세한 결혼 서약을 깬 자입니다. 남편을 버린 이 여인의 행동은 13절에서 악인이 정직한 길을 버린(‘떠나로 번역됨) 행동을 상기시키며, 자의적으로 올바른 길을 버리고 악을 선택했음을 말해줍니다.

음녀는 말로 아들을 유혹합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매끄럽고 매혹적인 말로 그에게 알랑거리고 기분 좋게 만들어 어떻게 해서든 그의 몸과 마음을 사로잡으려 합니다. 이 음녀의 말은 1:11-14에서 아들을 꾀는 강도의 말과도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강도의 말은 남자다운 힘과 의리와 공정함을 내세우는 듯 들리지만 실제로 그들에게는 게으름, 포악함, 뻔뻔함, 사악함이 가득 차 있습니다. 이와같이 이 여인의 접근과 수려한 말은 듣기에 기분 좋을 수 있으나, 이 여인은 이미 결혼 서약을 파기하고 남편을 배신한 자이고 수치를 모르는 뻔뻔한 자며 달콤한 말로 남을 꾀어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간교함을 가진 여자입니다. 그러므로 이 여인이 어느 남자에게는 정절과 충성을 다할 리 만무합니다.

더구나 음녀가 젊은이를 꾀어 인도하려는 목적지는 사망이며 죽은 자들의 영혼이 있는 곳(음부)입니다. 이 목적지는 1:11-19의 강도의 무리나 9:13-18의 우매한 여인의 유혹에 빠진 자들이 가게 될 목적지와 동일합니다(1:19;9:18). 그녀의 아첨하는 말은 듣는 그 순간에는 기쁨을 주는 말같이 들리나 실제로는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해를 끼치게 되는 함정입니다. 그러므로 솔깃하게 들리는 음녀의 말을 따라 그녀에게 들어가는 모든 자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죽음의 세계로 인도됩니다.

 

(2) 의인과 악인이 받는 땅의 약속(20-22)

세상에는 인간의 지혜가 뛰어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인간의 지혜로 살아가려는 사람은 자신의 한계성을 인정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 지혜가 인간의 악한 꾀를 만들어 간사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하나님의 약속 땅에서 누리는 것이 아니라면 사망에 이르는 지름길일 뿐입니다. 잠깐의 영광을 위해 영원한 영광을 버리는 어리석은 길에서 속히 떠나야 합니다.

20-22절은 2장 전체의 결론으로서 20절에서는 길에 초점을 두어 16-19절에 소개된 악인의 길과 대조되는 의인의 길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21-22절은 과 관련하여 각각 의인과 악인에게 적용될 약속을 선언합니다. 이러한 선언의 주된 목적은 독자가 지혜를 찾아 의로운 삶을 살도록 격려하는 데 있습니다.

먼저 과 관련하여, 16-19절의 음녀는 자신에게 온 자를 죽음으로 직행하는 길로 이끌지만, 지혜는 자기를 찾는 자들을 선하고 의로운 자들의 길로 인도합니다(20). 지혜를 찾고 지혜의 인도를 받는 자들은 정의, 공평, 정직 등 모든 선한 길을 깨달을 뿐 아니라 지혜의 보호를 받습니다.

그 결과 비뚤어지고 사악한 자들과 그들의 길에서 구원을 받고, 음부에 다다르는 길을 피하여 선과 정의의 길로 행하고, 결국 생명길을 얻게 될 것입니다(9-12,20).

둘째로 땅과 관련해서는, 지혜를 통해 정직과 완전함을 추구하는 의인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기업으로얻고 거기서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온전함으로 행하는 자들에게 방패가 되어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므로(7) 의인들은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땅에서 안전과 평안과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을 제대로 누려 대대손손 땅에 머물며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을 수없게 행동하는 악인들은 땅에서 끊어지고 땅에서 뽑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의 40년 방랑 생활을 마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면 앞으로 차지할 땅에서 뽑힐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28:63). 시편에서도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께 소망을 두는 사람은 땅을 차지할 것이라고 말합니다(37:9), 의인은 땅에 거하고 악인은 끊어지는 이유는 하나님이 공평을 사랑하시므로 하나님의 율법을 마음에 두고 사는 의인은 버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보호하시지만, 악인은 그리하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수 없고 대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끊어지게 됩니다(37:28-21). 이 약속은 단순히 의인과 악인 당사자만이 아니라 그의 후손에게까지도 미칩니다(37:28).

한편, 20-22절의 의인과 악인의 구분은 지혜를 얻은 자인지 아닌지 또는 정직과 완전함을 추구하며 사는 사람인지 아닌지에 따라 나뉩니다. 이처럼 잠언(및 성경 전체)에서는 지혜로운 사람과 의인을, 미련한 사람과 악인을 동일시합니다. 보통 의인은 도덕적으로 칭찬받을 만한 사람으로 악인은 큰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실제적으로 사람은 누구나 거짓말이나 불의한 언행을 자의로는 실수로는 하기 때문에 지금 의인과 지혜자로 여겨진다 해서 미래에도 자동적으로 의인의 삶과 연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실용적인 판단력과 통찰력을 가진 것에 앞서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여호와를 자기 삶의 주권자로 인정하여 그를 신뢰하고 그의 말씀에 따라 의와 선의 길로 행하는 의로운 자가 바로 지혜로운 자입니다. 악인은 여호와의 주권과 간섭을 인정하려 들지 않으며 훈계를 거부하고 자신의 지식과 판단을 의지하여 거리낌 없이 불의와 부정을 일삼는 자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지혜자와 우매자로 분리되는 것은 이러한 지식의 많고 적음이나 도덕적인 기준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기본적 신앙의 태도와 그 결단에 따라 사느냐에 달려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개인적인 교제를 나누며 살아야 그의 지혜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고 그의 뜻에 가깝게 살 수 있습니다.

 


지혜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본래 우리를 부르시면서 맺은 언약에 충실할 수 있게 해줍니다. 그것은 곧 관계의 존재인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 타인과의 관계, 그리고 피조물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질서와 성품을 반영하며, 거기서 나온 참된 축복을 누릴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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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02-01)


지혜가 주는 유익

잠언 21-15


사람에게는 사람의 길이 있고 자연에게는 자연의 길이 있습니다. 인간이 가장 인간답기 위해서는 그 길을 따르고 그 질서가 인간의 세계에 임해야 합니다. 그 질서에는 인간과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성품과 의지가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창조주를 의지할 때 우리는 가장 인간다운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온갖 혼돈과 무질서는 인간이 인간의 자리를, 피조물이 피조물의 자리를 떠나면서 생겼습니다. 그렇다면 구원은 바로 그 질서를 회복하는 일이요 인간됨을 되찾는 것을 말할 것입니다. 그 질서를 아는 것을 지혜라고 부르기에 인간다운 인간은 지혜로운 인간이 되는 여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 경외는 지혜의 출발점일 뿐 아니라 지혜를 얻는 목표가 됩니다. 지혜로운 조언과 명령을 따라 지혜를 간절히, 열심을 다해 구할 때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닫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알고 교제를 지속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지혜를 공급받고 보호하심을 입습니다. 또한, 마음에 자리 잡은 지혜를 통해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정의와 선을 추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아버지 강연(02-1) : 지혜를 찾으라(1-15)

지혜는 절로 인간에게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동안 사람들의 지혜가 하나님의 방법과 전혀 다른 세계관과 가치관에 노출되어 살아왔기 떄문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는 의지적으로 찾아야 하고 구해야 하고 간직해야 하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잠언은 그 지혜를 우리가 받고 간직하고(쌓아두고) 큰 소리로 불러서 초대해야 할 대상으로 묘사합니다.

1내 아들아 네가 만일 나의 말을 받으며 나의 계명을 네게 간직하며 2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 3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4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5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 6대저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심이며 7그는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며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 방패가 되시나니 8대저 그는 정의의 길을 보호하시며 그의 성도들의 길을 보전하려 하심이니라 9그런즉 네가 공의와 정의와 정직 곧 모든 선한 길을 깨달을 것이라 10곧 지혜가 네 마음에 들어가며 지식이 네 영혼을 즐겁게 할 것이요 11근신이 너를 지키며 명철이 너를 보호하여 12악한 자의 길과 패역을 말하는 자에게서 건져 내리라 13이 무리는 정직한 길을 떠나 어두운 길로 행하며 14행악하기를 기뻐하며 악인의 패역을 즐거워하나니 15그 길은 구부러지고 그 행위는 패역하니라(1-15)

첫 모음집의 다음 교훈은 하나님의 지혜를 찾아 구하라는 것입니다. 지혜를 구하는 자는 주님을 경외하는 길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으며, 지혜의 돌봄과 보호를 받게 됩니다.

 

(1) 내 말을 듣고 지혜를 찾으라(1-4)

1-4절은 만약 네가 내 말을 듣고 지혜를 찾는다면이란 내용으로 아버지가 아들의 주의를 거듭 집중시키며, 아버지의 말에서 발견되는 지혜를 찾으라고 조언합니다. 마음과 말과 행동으로 이 지혜를 얻으라고 가르칩니다.

첫째, 지혜를 얻기 위해서 아버지가 전하는 말을 받고 마음에 간직해야 합니다. 받고 간직하라는 의미는 아버지의 명령을 인정하고 미래나 안전을 위해 보물이나 물건을 쌓아두듯이 그 말을 중히 여기고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둘째, 귀와 마음을 지혜에 기울이고 집중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아버지의 이나 계명은 지혜를 얻는 통로가 아니라 지혜’, ‘명철또는 지식과 동일시됩니다. 또한, 아버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행동이나 손을 뻗듯 마음을 명철을 향해 펼치는 행동은 적극적인 경청과 순종의 의미를 내포합니다.

셋째, 지식과 명철을 향해 외쳐야 합니다. 마음과 귀로만이 아니라 이제는 입을 열어 지혜를 찾아야 합니다. 앞서 1:20-21에서 지혜가 사람들에게 열심히 소리치며 호소하는 모습을 그렸다면 여기서는 지혜를 얻으려는 자들이 지혜를 향해 열심을 다 해 외쳐야 함을 보여줍니다.

넷째, 값진 보물이나 숨겨진 보석을 찾듯 지혜를 찾아야 합니다. 욥기 28장에서도 지혜를 보석에 비유하면서, 사람들이 보석의 가치를 알므로 그것을 얻으려고 산이나 강이나 어두운 갱도나 가리지 않고 찾아다니고 목숨을 걸고 위험을 무릅쓰며 온갖 어려운 일을 하려 든다고 설명합니다(28:1-11). 이와같이 아들은 보석보다도 더 값진 지혜의 가치를 깨닫고 열성적으로 지혜를 구하고 찾아야 합니다.

 

(2) 지혜를 주시고 의인을 돌보시는 여호와(5-8)

1-4절의 만약 네가 내 말을 듣고 지혜를 찾는다면의 조건절이 다 끝나고, 그리하면으로 시작하는 5절부터는 그 결과로서 지혜가 가져다주는 유익을 설명합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말을 경청하여 지혜에 관심 두고 보물을 찾듯 지혜를 찾는다면, 그는 여호와 경외하는 법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 말은 내적, 외적 요소인 몸과 마음을 다 집중해 지혜를 추구하면 영적인 유익을 얻을 것임을 드러냅니다.

여기서 여호와 경외여호와를 아는 것, ‘그와 친밀한 관계를 지속하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이와 같은 정의는 9:10에도 나타나 강조됩니다. 그렇다면, 왜 지혜가 여호와 경외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습니까? 그 이유는 지혜를 주시는 주체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6).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지식과 명철이며, 지혜의 소유자로서 사람들에게 지혜를 부어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이 설명은 욥기 28장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세상의 어느 보물보다도 그 가치가 월등히 뛰어난 지혜가 사람들에게는 감추어졌지만, 하나님께는 그의 주권 아래 다 드러나 있습니다(28:23-27). 잠언 8장에서도 하나님께서 창조 이전에 이미 지혜를 만드셨다고 설명하며 하나님께서 지혜의 소유자임을 나타냅니다(8:22-31).

하나님께서는 그의 소유인 지혜를 정직하고 온전함으로 행하는 자들에게 베푸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소유하기 위해서는 먼저 지혜의 말씀에 귀 기울여 지혜를 찾는 수고가 필요합니다. 본문 1절의 아버지의 조언처럼 우리가 잠언에 기록된 아버지나 어머니의 말씀을 쌓아둔다면, 하나님께서 쌓아두신(7: 예비하시며로 번역됨) 사리 분별과 같은 지혜를 얻을 수 있게 됩니다.

둘째, 정직, 온전함, 공평 등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7절의 정직하고 온전함으로 행하는 자들(‘행실이 온전한 자로 번역됨)이란 죄가 없는 자들이라는 뜻이 아니라 모두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고결함을 지키는 자들이란 뜻입니다. 그런 자들이 정의와 공평의 길로 행하는 자들이며 하나님의 성도라 일컬음 받습니다. 이처럼 지혜는 단순히 지식의 축적이나 성공의 길이 아닙니다. 지혜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며, 하나님을 알고 그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며, 그가 주신 명령에 따라 정의와 공평을 추구하고 행함으로써 얻습니다. 욥기 28:28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을 악을 떠나는 것이라고 정의한 것과 일치합니다. 악을 떠나는 것은 시편 기자가 청년에게 충고하는 것처럼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두고 그 말씀에 따라 죄를 삼가는 것을 의미합니다(119:11-16).

하나님께서는 또한 그를 경외하는 공의로운 백성에게 지혜를 주시며 그들을 돌보시고 방패가 되어주십니다. 그들이 공평의 길 즉, 공평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갈 때 지켜보십니다. 때로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도 계속 정직과 공평의 길로 행할 수 있도록 보호하십니다. 정의의 하나님이시므로 세상의 정의와 공평을 보호하십니다.

 

(3) 지혜를 얻은 자의 유익(9-11)

지혜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의 의지가 지혜이고, 그분이 세상을 경영하는 방식이 지혜입니다. 따라서 그분과의 관계가 지혜를 결정하며, 지혜로워진다는 것은 하나님을 닮아가고 그분의 생각에 내 생각을 맞춰간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 즉 여호와를 여호와로 인정하고 그분의 주권과 능력과 성품을 인정하는 것이 지혜를 얻는 첫째 단계입니다.

1-4절의 만약 네가 내 말을 듣고 지혜를 찾는다면에 대한 귀결절은 5절뿐 아니라 9절에서 또 소개됩니다. 5-8절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유익을 소개하였고, 이제 9-11절에서는 지혜로부터 오는 유익을 소개합니다. 아버지의 지혜의 가르침은 의, 공평, 정직, 선을 깨닫게 해줍니다. 왜냐하면, 그의 가르침이 5-8절에 설명된 여호와 경외를 근본으로 이루어졌으며 하나님이 추구하시는 정직과 공평에 일치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혜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때 지혜가 마음에 들어와 자리 잡고 우리에게 즐거움을 줄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지혜가 우리에게 근신과 명철 즉, 판단력과 현명함을 주어 우리를 지키고 보호할 것입니다.

 

(4) 악인의 길로부터 보호하는 지혜(12-15)

지혜로운 자는 이제 자기중심적인 세계관을 버리고 하나님 중심적인 세계관, 이타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생각의 출발점부터가 여호와로부터 시작합니다.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들의 삶에는 공의와 정의가 있고 그들은 정직하고 선한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5절에 소개된 여호와 경외는 지혜의 출발점뿐 아니라 지혜를 찾는 목표가 됩니다. 지혜를 얻은 자는 여호와 경외를 깨달아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를 유지할 수 있고, 그의 보호를 누릴 수 있으며(5-8), 그 결과 지혜의 도움으로 도덕적이고 경건한 삶을 사는 법을 인지할 수 있습니다(9-11). 지혜는 지혜를 얻은 자를 악인의 길로부터(12-15) 그리고 음녀의 유혹으로부터(16-19) 구해줍니다.

지혜가 마음에 들어오면 판단력과 현명함이 생겨 악인의 길에서 건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악인은 12절에서 패역을 말하는 자로 설명되었는데, 진리를 왜곡하여 사람들을 악한 길로 유혹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 악인의 무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은 13-15절에서 로 비유되어 설명되는데, 이들의 길은 하나님으로부터 지혜를 선물로 받은 자들이 걷는 길과 뚜렷한 대조를 보입니다.

첫째, 지혜를 구하는 자들은 정직과 공평을 추구하여 온전함으로 행하지만, 악인의 무리는 스스로 정직과 공평의 길을 버리고 어둠의 길을 택하여 그 길로 행합니다. 둘째, 지혜를 얻은 자들은 지혜의 주도 하에 살게 되어 진정한 기쁨을 누리지만 악인들은 악을 행하기를 기뻐하며 비뚤어지고 사악한 행위(패역)를 즐거워합니다. 셋째, 지혜를 얻은 자의 삶은 의, 공평, 정직을 추구하여 모두 선한 길로 연결되지만 악인의 길은 구부러지고 비뚤어진 길입니다. 악인들에게는 근본적으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태도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혜 또한 이들에게서 아주 멉니다. 지혜는 이런 악인의 길에서 우리를 구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질서를 따라서 하나님의 리듬에 맞춰 걸어가는 길에는 즐거움이 있어서 고난 중에도 그 길을 고수할 힘을 얻게 됩니다. 반면에 지혜를 떠난 악한 자는 정직한 길을 떠나 흑암의 길을 걸으며 멸망으로 치달으면서도 그걸 모른 채 그 행악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혜자를 악인의 구부러지고 패역한 길에서 지켜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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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08-01)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신 예수님

마태복음 81-13


 

아무리 강력한 태풍이라고 할지라도 태풍 중심부에서 반경 10Km 이내에는 바람이 강하지 않습니다. 이 지역을 태풍의 눈이라고 합니다. 그 태풍의 눈은 주변은 강력하게 바람이 불지만 기상 현상이 매우 평온하다고 합니다. 아무리 강한 고난이라도 그 중심에는 예수님께서 계시면, 평안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 소식을 전파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지적이 소개됩니다(7-9). 이 열 가지 기적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중에 본문에서는 나병환자와 이방인 백부장 하인을 고친 사건이 나옵니다. 이것은 이론적으로 산상보훈에서 전하셨던 예수님께서 실질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주시는 내용입니다.


 

나병 환자를 고치신 예수님(1-4)

 

우리의 상처를 하나님께서 어루만지실 때,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상처와 치부를 숨기지 않고 주님 앞에 드러내는 용기가 치유를 가져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의 몸을 친히 만져 주시면서 치유하여 주셨습니다.

1예수께서 산에서 내려 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2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3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4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시니라(1-4)

예수님께서 권세 있는 말씀으로 산상보훈을 가르치시고 마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놀란 많은 무리가 그분을 쫓았습니다. 예수님 권세의 실제는 병을 고치시고 축사하시며 죽은 자를 살리는 대목에서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마태복음은 가장 비참한 처지에 놓인 인생이 회복되는 장면을 맨 앞에 배치해서 예수님께서 치유하시는 목적과 결과를 선명하게 드러내십니다.

(1) 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1)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의 말씀을 마치시고 산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때에 한 나병환자가 산에서 내려오시는 주님 앞에 나와서 엎드렸습니다. 당시 나병환자는 마을에서 추방되어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끊고 생활해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고 사람들과 같이 사는 것은 살인죄로 간주하여 돌로 쳐 죽였습니다. 레위기 13-14장 규정에 따라 나병환자들은 부정한 자들로 규정되었으므로 공동체 속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질병의 상태가 사라지면 제사장에게 검사를 받고 적합한 예물과 정결 예식을 거쳐서 정결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아야 공동체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나병환자는 정결한 공동체나 개인에게 접근할 수 없고 사람을 만나면 접촉이 불가능하도록 부정하다’, ‘부정하다를 소리쳐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죽음에 대한 위험을 무릅쓰고 용기는 내어 예수님께 다가왔습니다.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손을 뻗으면 다는 위치까지 온 것은 율법을 어긴 행위입니다. 여기서 나병환자가 보여준 믿음은 어떤 조건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권위를 믿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나병환자를 치유하신 예수님(2-3)

나병환자는 예수님의 치유하시는 권위를 확신했지만,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2)라고 치유하기를 원하시는지를 묻습니다. 예수님의 권세를 믿지 않았다면, 결코 그렇게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을 통해 참된 믿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참된 믿음은 자신의 요구에 의해서 받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데로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나병은 깨끗하게 되는 것으로 3번 반복해서 묘사됩니다. 그는 자신의 병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부정한 상태인 것을 압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을 뻗어 나병환자의 몸에 손을 대는 것으로 치유하기를 원한다는 뜻을 표현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정의 감염이 되지 않도록 도리어 거룩함을 전염시키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3)라고 응답하셨습니다. 즉시 오랜 저주에서 해방을 맛봅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만이 나병을 치유할 수 있었지만, 이제 예수님 자신이 치유할 수 있다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가 치유됨으로 제사장에게 가서 나은 몸을 보여주고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증거로 드리라고 지시합니다. 나병환자가 깨끗하게 된 후, 정결한 공동체에 들어가기까지는 8일이 소요됩니다. 레위기 14장에서 피부병에서 회복된 사람은 제사장에게 정결한 비둘기 두 마리를 들고 갑니다. 그 중 한마리를 잡아 피를 신선한 물과 혼합한 다음이 피를 백향목, 홍색실 우슬초를 사용해서 병에서 깨끗하게 된 사람에게 뿌립니다. 또 다른 새는 산채로 날려 보냈는데, 이는 사회와 사람을 괴롭힌 문제를 가져가게 하는 의미입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산상수훈을 통해서 더 나은 의와 그것을 행하는 의미를 말씀하신 후에, 나병환자가 치유 받는 사건을 배치함으로써 하늘나라의 의가 긍휼을 베푸는 것과 관련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가져오신 하늘나라는 회복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의 긍휼을 통해서 일그러진 형상이 회복되는 것이 하늘나라의 복음입니다.

깨끗하게 해달라고 간청하는 나병환자의 비참한 모습은 나병과 죄의 관련성을 떠올립니다. 사람의 모습을 일그러지게 만드는 죄에서 반드시 해방되어야 하며 구원을 받는 길은 예수님의 긍휼을 의존하는 것입니다.

덧붙여 땅에서 가장 부정한 자인 나병환자가 예수님의 능력에 대해 가졌던 신뢰와 확신은 마태복음에서 잃은 자들로 하여금 어떤 여건 속에서도 예수님의 권위에 의지해 나오도록 격려합니다. 부정한 나병환자는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왔고, 예수님께서는 그와 거리를 좁히십니다.

새 시대에는 하나님과 부정한 자 사이의 거리가 사라지고 예수님께 믿음으로 나오는 자는 정결한 백성이 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3) 침묵을 경고하신 예수님(4)

또한 예수님께서는 그 치유받은 사람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말라는 명령을 하십니다. 이 명령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단순히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으로 혹은 민족주의적 해방자로 인식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그의 사역에 대한 심각한 오해를 불러옴과 함께 원치 않는 인기를 얻을 수 있는 위험성을 알고 하신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제사장에게 율법이 규정해놓은 예물을 드리라고 나병환자에를 지도하는 예수님의 모습(14:10이하)은 그가 레위기 14장이 정해놓은 정결 규례를 따르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이방인 하인을 고쳐 주신 예수님(5-13)

믿음이란 예수님의 권위와 그 권위에서 나오는 능력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하늘나라를 상속 받는 조건입니다. 그 나라는 겸손한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본문은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을 통해 하늘나라에 들어갈 백성의 자격을 알 수 있습니다.

5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6이르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7이르시되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8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9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10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11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12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13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5-13)

하늘나라는 유대인들만 들어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그 나라에는 백부장과 같은 이방인들도 믿음으로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본문은 이제 또 다른 믿음의 사람인 이방인 백부장이 예수님 앞으로 나아간 사건입니다. 그는 이방인이었고, 자신의 문제도 아닌 하인의 병을 고쳐 달라고 호소하고 나왔습니다.

(1) 한 백부장과 만난 예수님(5-7)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자 한 백부장이 다가와 간청합니다. 100명의 보병 군사를 이끌었던 백부장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 로마인이었습니다.

백부장이 자기 종의 치료를 위해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예수님의 치유하는 권위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차례에 걸쳐 그의 믿음을 언급하십니다. 믿음이란 예수님의 능력과 권위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라고 응답하십니다. 백부장을 만나 주시고 소원을 이루어 주시려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곧 능력입니다.

(2) 백부장의 반응과 칭찬(8-10)

예수님께서 직접 방문하여 치유하시겠다고 반응하시자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오시는 것을 감당할 수 없으니 오지 말고, 말씀만 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말씀만 하셔도 종이 나을 것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백부장은 권위 있는 예수님을 맞이할 자격이 없으니 말씀만 해달라고 했습니다.

이는 그의 말인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9)라는 백부장의 말에서 증명됩니다. 그는 예수님의 권위와 능력을 절대적으로 믿었기에 예수님의 말씀이면 충분하다고 확신한 것입니다.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들어오지 않고 말씀만 하셔도 종의 병이 낫게 될 이유를 자신의 직업 경험을 통해 설명합니다. 권위 있는 예수님의 말씀이 치유의 능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의 말을 듣고 매우 놀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이 정도의 믿음을 본 적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3) 종의 치유하신 예수님(11-13)

본문에서는 이방인의 믿음과 그 나라의 아들들에게 있는 불신을 대조하면서 누가 하늘나라의 상속자들인지를 밝힙니다.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의 믿음을 보고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와서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식탁에 앉을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이 식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글허게 기대하는 것이며 그들은 메시아의 잔치에 참여해서 먹고 즐길 것이라 믿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이방인들이 아니라 흩어진 디아스포라를 모을 것이라는 기대를 했습니다.

11절에서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라고 하신 말씀에, 그곳에 올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모으신 종말론적 새 백성을 의미합니다. 이방인들이 유대인의 조상들과 함께 메시아의 만찬 자리에 앉게 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유대인들에게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동서로부터 와서 잔치에 참여할 것이지만, 본 나라 유대인의 자손들은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고 통곡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의 믿음을 계기로 구속사를 설명하십니다. 믿음은 이방인을 하늘나라의 잔치에 참여하게 만들고 이방인과 유대인들의 장벽을 무너뜨립니다. 혈통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해서 모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것이 아니며 백부장과 같이 오직 예수님의 권위를 믿는 자들이 하늘나라 잔치인 메시아 잔치에서 이스라엘 조상들과 함께 연회를 즐길 것입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권위와 능력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백부장 정도의 수준에 믿음에 이르러야 합니다. 기적을 일으키는 권위에 직접으로 같은 수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이웃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예수님께 있음을 확신하는 데까지 나아갈 때 참믿음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이 환자는 자신을 대신해서 간청한 주인의 믿음 때문에 치유하심을 받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치유를 경험한 백부장과 같은 사람들이 마태복음에서 이어진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말씀의 권위는 말씀하신 분에게서 나옵니다. 이방인 백부장은 자신의 권세에 비추어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를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서 종을 고쳐 주려고 하시자 백부장은 말씀만으로 자신의 종을 고쳐 주시길 예수님께 간청했습니다. 비록 직접 오시지 않아도 절대적인 말씀의 권위를 가지고 계시기에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면 질병이든 귀신이든 그 어떤 악한 세력도 즉시 떠날 것이라는 절대적인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우리도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우리의 믿음을 점검해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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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01-03)


지혜가 전하는 경고

잠언 120-33

 


인간의 지적인 수준과 문화생활 수준이 눈부시게 높아졌습니다. 넉넉한 예금 잔고, 으리으리한 고급 아파트, 번쩍거리는 외제 자가용, 각종 명품, 눈부신 학벌, 탄탄한 인맥 등등. 예전엔 억대 부자라는 말이 있었지만, 요즘은 억대 재산으로는 수도권에서 전셋집 하나도 얻을 수 없을 만큼 엄청난 돈이 도는 풍요로운 세상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바보들의 풍요에 익숙해지고 세상이 어리석은 자들의 낙원으로 변질되 가고 지식과 물질이 풍요로워졌지만 그럴수록 우리네 세상이 온통 도가니처럼 추하게 들끓는 이유는, 악한 본성에 젖어 사는 사람들이 참 지혜를 거부하고 지혜의 부름에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24-25)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근본적으로 여호와 경외하기를 거부하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여호와 경외를 기초로 한 지혜의 훈계에 동의하지 않고 오히려 그 훈계를 업신여깁니다. 지혜는 공공연하게 그에게 훈계를 외치지만 그가 지혜를 찾지 않으므로, 후에 지혜가 절실히 필요하여 찾을 때 그는 결코 지혜를 발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혜의 초청과 약속 잠언(20-23)

지혜는 길거리와 광장과 시끄러운 길목에서 크게 소리를 높입니다. 사람이 지혜를 따르지 않는 것은 지혜를 듣지 못해서나 몰라서가 아닙니다. 미련한 마음으로 고집 피우고 자기 마음대로 계속 행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지혜를 알고 싶어도 알 수 없다고 생각하며 지혜를 저 멀리 은밀한 곳에 숨겨진 것이라 여깁니다.

20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21시끄러운 길목에서 소리를 지르며 성문 어귀와 성중에서 그 소리를 발하여 이르되 22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 미련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니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23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며 내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20-23)

잠언 1:9-19에서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익을 탐하는 악인을 따르지 말라는 경고를 하였고, 이제 1:20-33에서는 지혜가 의인화된 여성으로 등장하여 사람들에게 나의 책망(지혜를 거절하지 말라)으로 돌이키라(23)고 경고합니다.

잠언에 지혜가 여성으로 의인화되어 자주 나오는데, 이는 지혜가 히브리어로 여성형 명사(호크마)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잠언에서 대부분 아버지가 아들에게 충고의 말을 전하며 아들이 사랑하고 찾아야 할 배우자로서 여성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에, 지혜가 여성으로 자연스럽게 의인화되어 나타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혜가 마을의 광장과 길거리에서 사람들에게 외치며 그녀의 말을 전합니다. 광장과 길거리는 마을의 지도자들이 모여 소송을 처리하는 곳(29:7; 4:11)이며 시장이 형성되어 사람들이 몰려(왕하 7:1) 북적이는 곳입니다. 지혜는 마을 사람들이 거의 다 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곳에서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소리를 질러가며 말을 전하고 있습니다. 젊은이가 이런 사회에 나와 적응하려 할 때, 두 목소리가 그를 사로잡아 그의 삶을 형성하려 든다. 한 목소리는 1:20-338~9장에 나오는 지혜의 목소리이며, 다른 하나는 1:10-14의 악인의 속삭임이나 5:36:24에 나오는 음녀의 유혹에서 발견되는 우매의 목소리입니다. 이런 두 목소리가 존재하는 사회 안에서 젊은이는 사리를 제대로 분별할 줄 아는 판단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배워야 합니다. 지혜가 외치는 곳은 바로 그의 삶의 중심부로서, 그가 그곳에서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며 살 때 어떤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충성을 다하느냐에 따라 자기 자신뿐 아니라 그가 속해 있는 사회가 흥왕하거나 망하게 됩니다(11:10-11).

오늘 지혜의 외치는 목소리는 공개적인 장소에서 모든 이의 귀에 들리고 있는데, 특히 어리석은 자들을 향한 훈계의 외침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란 지력이 모자라는 사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22절과 29-30절을 보면 이들은 자기의 어리석음을 사랑하되 지식을 미워하는 자들이고, 남을 비웃는 자들이며, 부모나 다른 이들을 통한 지혜로운 교훈과 책망을 거절하고 업신여기는 자들이고, 공통적으로 여호와를 두려움과 떨림으로 대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더구나 이들의 문제는 이러한 어리석고 뻔뻔한 행동을 오랜 기간 지속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는 대체 언제까지 어리석음을 좋아하고 책망을 듣지 않겠느냐?”(22)라고 외칩니다. 나의 책망으로 돌이키라(23)고 외치는 지혜의 명령은 책망의 말에 지혜가 들어 있으므로 그 책망을 무시하지 말고 책망에 반응하여 행동이나 태도를 변화시키라는 뜻입니다. 타인에게서 책망을 들으면 자신에 대한 수치와 굴욕감이 들어 자신을 방어하거나 그 사람을 공격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 쉽습니다. 그러나 감정에 치우쳐 나를 위해 변명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화풀이를 하기보다는 냉정하게 그리고 겸손하게 그 책망의 내용 자체를 곰곰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책망에서 드러난 자신의 약점, 무지, 실수, 죄 등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 지적받은 것을 고쳐 실천한다면 앞으로 그런 책망을 다시 받을 기회는 확연히 줄게 되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바라시는 성품에 더 가까이 나갈 수 있습니다.

지혜는 어리석은 자들에게 책망으로만 다가가지 않습니다. 지혜는 그녀의 신()을 부어주고 그녀의 말을 깨닫도록 해주겠다는 약속도 덧붙입니다. 이는 지혜가 지혜의 영을 그에게 주어 지혜가 원하는 생각과 말을 숨김없이, 아낌없이 제공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지혜가 이러한 약속을 제공하는 것은 어리석은 자들이 어리석음과 교만을 버리고 지혜를 수용하길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이와 같이 책망을 듣고 돌아서는 데에는 단순히 나의 이성적인 판단과 결단만으로 가능하지 않고, 지혜의 영인 하나님의 성령의 도우심과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지혜를 멸시한 미련한 자(24-25)

지혜가 부르는 소리와 내민 손을 무시했던 자들은 결코 핑계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지혜의 소리가 작아서 듣지 못한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교훈과 책망을 듣지 않은 사람이 맞게 되는 결과는 명확합니다. 그는 재앙을 피할 수 없습니다. 처음에는 자기 마음대로 살고 악의 유혹을 따라가는 것이좋아 보여도 결국 두려움과 근심이 악할 뿐입니다.

24내가 불렀으나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폈으나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25도리어 나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며 나의 책망을 받지 아니하였은즉(24-25)

지혜는 어리석은 자가 훈계에 귀를 기울이고 지혜의 약속을 받기 원하지만, 어리석은 자는 지혜의 외침을 듣고 관심을 가지라는 손짓을 보고서도 이를 거절하는 쪽을 택했습니다. 그는 지혜의 모든 책망과 교훈을 멸시하고 그 말씀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어리석은 자는 지혜의 훈계를 들을 기회가 없었던 자가 아니라 스스로 어리석음을 택하고 어리석음을 사랑한 미련한 자입니다(22).

 

미련한 자의 미래(26-31)

바다에서 멀리 큰 해일이 몰려오는 모습이 보이면 피하려고 하겠지만, 사람의 눈에 그 해일이 보일 때는 이미 늦습니다. 인생의 재앙도 그렇습니다. 사람의 판단으로 문제가 생겼다고 느껴지면 이미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미련한 사람은 경고를 무시하고 자신이 직접 보기 전에 믿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26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에 내가 비웃으리라 27너희의 두려움이 광풍 같이 임하겠고 너희의 재앙이 폭풍 같이 이르겠고 너희에게 근심과 슬픔이 임하리니 28그 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그래도 내가 대답하지 아니하겠고 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그래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니 29대저 너희가 지식을 미워하며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하며 30나의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나의 모든 책망을 업신여겼음이니라 31그러므로 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으며 자기 꾀에 배부르리라(26-31)

어리석은 자들이 지혜의 책망을 거절했으므로, 그 대가로 그들이 지혜를 필요로 할 때(26: 재앙을 만날 때’, ‘두려움이 임할 때) 지혜는 그들을 비웃고 대꾸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혜를 필요로 하는 때는 그들이 곤란에 처해 명료하고 효과적인 사고가 절실할 때입니다. 이런 시기는 광풍과 폭풍같이 예고 없이 그리고 엄청난 힘으로 불어닥치므로 어리석은 자는 근심과 더불어 심한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 지혜는 그들에게 닥친 재앙을 보고 비웃을 뿐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서 지혜의 비웃음은 무정함을 나타내는 표현이 아니라, 지혜를 비웃고 어리석음을 택하여 재앙을 자초한 어리석음에 대한 반응을 나타냅니다. 어리석은 자들은 뒤늦게 지혜를 부르고 부지런히 찾겠지만 그들은 결코 지혜를 찾을 수 없습니다.

지혜는 그동안 지속적으로 그들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지혜의 외침을 못 들어서 지혜를 얻을 기회가 없었다고 핑계 댈 수 없습니다. 지혜는 자기의 모든 유익을 주겠다는 약속까지 하며(23) 그들에게 지혜를 거절하지 말라고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들은 그 호소에 콧방귀도 뀌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절박하게 지혜를 필요로 할 때 그들은 지혜 대신 시련과 난관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지혜는 광장에서 오가는 사람들에게(또 현재 우리에게) 그들이 듣는 지식이나 교훈 또는 책망을 제대로 듣기 위해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필수라고 말합니다. 지혜는 이미 22절에서 미련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고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남을 비웃기를 즐긴다고 지적했습니다.

이제 29절에는 그 근본적인 이유가 그들이 여호와를 경외하기를 선택하지(29: 즐거워하지로 번역됨) 않기 때문임을 밝힙니다. 그들이 지혜의 교훈과 책망을 거부한 동기는 그만큼 자의적이고 의도적입니다. 귀에 들린 이 모든 말을 듣기 싫어하고 거절하는 이유는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하나님의 생각과 명령이 담긴 말보다 더 높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판단과 생각은 지혜를 배제하는 어리석음이며, 때가 이르면 그 행위에 대한 마땅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지혜를 듣는 자와 듣지 않는 자(32-33)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막고 사는 것은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사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지식이 넘치고 과학기술의 발단로 풍요가 넘치는 세상이, 하나님 없이 거만한 자세로 살아가는 죄인들에게 마치 낙원처럼 보이겠지만, 조금만 더 정직한 눈으로 이 도가니 같은 세상을 보면 곳곳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32어리석은 자의 퇴보는 자기를 죽이며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키려니와 33오직 내 말을 듣는 자는 평안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안전하리라(32-33)

잠언에 경고된 어리석은 자의 형벌은 그들의 악행에서 초래된 자연적인 결과입니다. 지혜를 거부하는 행동은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교만과 배교(퇴보)이며, 변화를 두려워하여 자기 안일과 만족에 머무는 행위입니다.

책망을 업신여겨 받아들이지 않고 책망 받을 행동을 계속하는 것이 그 당시 내 눈에는 지혜롭게 보일 수 있으나 그것은 착각입니다. 돌이키지 않는다면 그것이 초래하는 결과를 피할 수 없습니다. 그 결과는 멸망이며 불안이고 재앙입니다. 그러나 지혜를 듣는 자는 하나님의 보호 속에 안전과 평안을 누립니다(32:18).

 


순종할 때 인생길을 평안하고 안전하게 걸어갈 수 있습니다. 지혜의 말씀이 들릴 때 즉각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할 때 재앙을 피해 갈 수 있습니다. 항상 자신이 말씀에 비추어 봄으로 이것이 바로 우리가 평안하고 안전하게 인생길을 가는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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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01-02)


지혜와 영적 성장 관계

잠언 18-19


아기는 걸음마를 하기까지 무수히 넘어지기를 반복합니다. 그러다 잡고 일어서고, 잡고 걷다가 마침내 홀로 걸을 수 있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훈계와 법을 통해 시행착오를 거치며 잘못을 바로잡기 시작할 때, 그리스도인의 삶이 시작됩니다. 이런 영적인 훈련들을 무엇에 비유할 수 있습니까?

 

솔로몬은 아버지의 교훈을 통해 아들에게 강도와 살인과 같은 악한 계획을 꾸미는 자들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라고 훈계합니다. 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계획이 듣기에 솔깃하더라도 그 이면에 있는 폭력과 불의와 욕심을 간파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당한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은 결국 심판을 면치 못하며 자신들의 생명을 잃게 됩니다.

 

아버지 강연(01) : 부모의 가르침을 들어라(8-9)

하나님께서는 다음 세대를 부모나 스승들을 통해 바른 삶을 가르쳐 가십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 나라의 법을 가르치며 사랑으로 훈계하고 지도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부모나 스승에 대한 순종을 자신을 향한 순종으로 간주하십니다.

8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9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 사슬이니라 10내 아들아 악한 자가 너를 꾈지라도 따르지 말라 11그들이 네게 말하기를 우리와 함께 가자 우리가 가만히 엎드렸다가 사람의 피를 흘리자 죄 없는 자를 까닭 없이 숨어 기다리다가 12스올 같이 그들을 산 채로 삼키며 무덤에 내려가는 자들 같이 통으로 삼키자 13우리가 온갖 보화를 얻으며 빼앗은 것으로 우리 집을 채우리니 14너는 우리와 함께 제비를 뽑고 우리가 함께 전대 하나만 두자 할지라도 15내 아들아 그들과 함께 길에 다니지 말라 네 발을 금하여 그 길을 밟지 말라 16대저 그 발은 악으로 달려가며 피를 흘리는 데 빠름이니라 17새가 보는 데서 그물을 치면 헛일이겠거늘 18그들이 가만히 엎드림은 자기의 피를 흘릴 뿐이요 숨어 기다림은 자기의 생명을 해할 뿐이니 19이익을 탐하는 모든 자의 길은 다 이러하여 자기의 생명을 잃게 하느니라(8-19)

잠언의 서문(1:1-7) 이후부터 9장에 이르기까지 내 아들()로 시작하는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강연이 열 번(1:8-19; 2:1-22; 3:1-12: 3:21-35: 4:1-9; 4:10-19; 4:20-27; 5:1-23; 6:20-35: 7:1-27; Michael Fox에 따른 분류) 등장합니다.

아들을 향한 아비지 10가지 강연
(Michael Fox에 따른 분류)
1:8-19;
2:1-22;
3:1-12:
3:21-35:
4:1-9;
4:10-19;
4:20-27;
5:1-23;
6:20-35:
7:1-27;

이러한 강연들은 짧고 독립적인 수많은 금언이 등장하는 잠언 10-30장과는 달리, 10절 내외의 상당히 긴 권면의 내용을 담고 있으며 한 주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아들은 혈연관계의 아들만이 아니라 가르침을 받는 자로 적용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나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1) 훈계 듣고 떠나지 말라(8-9)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가르침의 첫마디는 네 아비의 훈계를 들어라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이 명령이 함축하는 바는 첫째, 아들이 그 부모의 가르침을 지켜야 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라는 것입니다. 이 명령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20:12)는 계명과도 직결됩니다. 둘째, 아버지의 훈계나 어머니의 법은 동일시됩니다(1:8; 6:20). 단어의 의미로 봤을 때 은 의무적이며 강제성을 띄는 반면 훈계는 선택할 수 있는 조건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여기서 훈계은 병행구로 소개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선택의 여지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듣는 자는 훈계이든 잘 듣고 반드시 그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셋째, 부모의 훈계나 명령은 여호와 경외(1:7)를 근본으로 삼아 전하는 말이며 지혜로운 말입니다. 만약 여호와 경외가 그들의 훈계령의 근간을 이루지 않는다면 그들의 훈계나 명령은 하나님 보시기에 어리석습니다. 이런 어리석은 자의 훈계를 듣는다면 어리석음 외에는 얻을 것이 없습니다(16:22). 넷째, 잠언에서 부모의 훈계와 명령은 하나님의 가르침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의 자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라고 명령하셨고(4:9-10; 6:7), 부모들이 이에 순종하여 자녀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훈계하기 때문입니다. 잠언 전체를 통틀어 보면, 잠언은 이스라엘의 한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르는 가르침으로 시작하여 르무엘 왕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전하는 가르침으로 끝납니다.

이처럼 잠언은 일반인의 자녀든 왕의 자녀는 부모로부터 전해지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으라고 촉구하며,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부모들을 통해 자녀들도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되길 격려합니다.

한편, 부모의 지혜로운 훈계와 명령은 이를 듣는 자에게 화관이나 금사슬(금목걸이)과 같습니다. 전쟁의 승리자가 화려하게 장식된 관을 수여 받으며 새로이 직책을 맡은 관리가 자기의 지위와 임무를 나타내는 금사슬을 수여 받듯이, 여호와를 경외하게 하는 부모의 가르침을 경청하는 자식은 형통하고 안정된 삶을 제공받습니다.

(2) 이익을 탐하는 악인의 무리를 따르지 말라(10-14)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는 오늘의 훈계는 이익을 탐하는 악인의 무라를 따르지 말라라고 합니다. 아버지의 조언은 10절과 15절에 다음과 같이 두 번의 ‘~하지 말라와 한 번의 ‘~하라는 명령형으로 나옵니다. ‘악한 자의 유혹을 받아들이지 말라’, ‘악인과 함께 가지 말라’, ‘악인의 길에서 네 발을 멀리하라.’ ‘악인은 원문의 죄인들의 번역이며, 여기서는 강도질과 폭력과 도적질을 일삼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아버지는 먼저 이 죄인들이 아들을 속여 유혹할 가능성이 있음을 경고하며 이들의 핌을 받아들이거나 동조하지 않도록 조언합니다. 아버지는 강도질과 폭력을 계획한 죄인들이 하는 말을 11-14절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설명합니다.

이 강도들은 우리와 함께 가자라는 말로 젊은이를 유혹하여 자기들이 하는 일에 합류하도록 초청합니다. 우리와 함께 그리고 가자라는 제안은 젊은이에게 동료의식을 불어 넣어주고 특별히 선택받았다는 느낌을 갖게 합니다. 그들의 계획은 자신들의 힘을 행사할 수 있는 통로이고(‘피를 흘리자’, ‘음부 같이 산 채로 삼키자’, ‘통으로삼키자’), 동료애와 협동심을 유발하며(‘우리와 함께’, ‘우리가’), 재산을 증식할 기회를 제공하고(‘온갖 보화’, ‘빼앗은 것’, ‘집에 채우리니’), 수익의 공정한 분배(제비를 뽑고)와 공동 재산을 추구(‘전대 하나만 두자’)하는 등 매력적인 요소를 갖고 있습니다. 강도들은 자신들의 책략을 하나하나 밝히며 위협적이면서도 수려한 언변으로 젊은이의 판단력을 흐리게 합니다.

그러나 친절한 웃음과 따뜻한 제안으로 젊은이에게 다가선 이들의 계획은 피비린내 나는 강도와 폭력을 행사하는 계획입니다. 그들은 이미 세밀하게 계획을 세웠으며, 이 젊은이를 유혹하는 것도 그 계획의 일부에 속합니다. 또한, 강도들의 계획 이면에는 비겁함, 불의, 부정, 폭력, 탐심 등의 요소가 깔려 있습니다.

첫째, 그들의 강도 방법은 몰래 숨어 있다가 사람을 해치고 돈을 빼앗는 비겁한 짓입니다. 둘째, 그들이 돈을 뺏고 목숨을 위협하는 대상은 무죄한 자입니다. 게다가 그들이 해코지할 대상을 고른 데에는 아무런 이유도 없습니다. 아무나 골라 묻지마식의 행각을 벌이려는 그들의 계획은 폭력적이며 무자비하고 불의와 불공평이 가득합니다.

셋째, 그들은 단순 강도 행각에서 끝내지 않고 사람을 무자비하게 죽이려 합니다. 이 살인은 우발적인 살인이 아니라 피를 위해서 매복하자(11)는 말에 나타나듯이 계획적인 살인입니다. 사람의 생명을 자기들 마음대로 빼앗는 말의 양심의 가책이나 두려움도 보이지 않습니다. 넷째, 그들은 자신들이 스올(음부)처럼 사람을 삼켜버릴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힘이 있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거리낌 없이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고 구렁텅이에 빠지게 하는 자들입니다. 다섯째, 그들은 사람들의 온갖 돈을 다 빼앗으려 합니다. 여기에서는 정정당당하게 일하여 돈 벌 생각을 하지않는 게으름과 한탕주의를 선호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여섯째, 그들은 빼앗은 돈으로 자신들의 배를 채우려 합니다. 그들의 부정과 탐욕스러움이 그대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밝히 보이시지만, 악한 사람들은 은밀하게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비열함으로 자기 이익을 도모하는 자들입니다. 부와 명예를 약속하며 변치 않는 의리를 강조하지만, 그 모든 것은 신기루처럼 사라질 공허한 것에 불과합니다.

(3) 악인을 따르지 말아야 하는 이유(15-16)

세상의 법칙은 뿌린 대로 거둘 것입니다. 악한 사람들은 선한 모습으로 유혹합니다. 거짓을 통해 잠시 쉽게 성공한 듯 보일 수 있습니다. 비겁하고 불의하고 부정하고 폭력적이고 탐욕적인 본심은 머잖아 들어냅니다. 그들이 판 함정에 스스로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10절에서와 마찬가지로 다시 한번 강도의 무리를 따르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특히 그들과 함께 가지 말라(15)고 명령함으로써 악인의 우리와 함께 가라(11)는 명령을 주저 없이 뿌리치도록 강경하게 경고합니다.

악인이 있는 곳을 되도록 피해야 하고 그와 그 무리를 따라가서는 안 되는 이유는 그들이 무고한 자의 피를 흘리고 악행을 서슴지 않기 때문입니다. 생각을 악으로 가득 채우고 손과 발과 입으로 죄를 짓고 불의를 행하고 다른 사람을 죽게 하는 일은 하나님한테서 점점 멀어지는 일이며 하나님에 대한 반역입니다. 이런 죄악의 길에 내가 있다면 내 앞에는 오로지 황폐와 파멸만이 기다릴 뿐입니다(59:1-21).

(4) 이익을 탐하는 자의 최후(17-19)

처음부터 악인들의 방법에 발을 들여놓지 않아야 합니다. 욕심에 눈먼 자는 재물을 얻으려는 조급함에 어리석게 행동하게 됩니다. 재물을 쉽게 얻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결국 더 강한 자의 사냥감이 될 뿐입니다. 부당한 이익을 탐하는 마음은 자신을 파멸과 죽음으로 몰아갈 뿐입니다. 강도들은 자신들이 저지르는 악행이 자기들을 파멸로 이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날아다니는 새도 자기 보는 데서 사람이 그물을 치면 그 그물을 피해갈 줄 아는 본능적인 인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악인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결국 자신들을 해치게 될 것이 뻔한데도 자기 발 앞에 그물을 치고 또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니 얼마나 어리석은 것 아닙니까! 악인들이 구체적인 계획을 갖고 사람의 피를 보려고 숨어 기다리지만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죄로 심판을 받고 자신들의 피를 흘리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악인들의 생활 방식을 추구하여 부당한 이익에 욕심을 내는 자는 다 이처럼 절대로 무죄하지 않으며 자기 생명 잃게 될 것입니다.

 


이익을 탐하는 모든 자의 길을 탐욕으로 멸망에 이르게 할 것입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해하는 어리석은 짓을 멈추려면 하나님의 법에 따라 욕심을 제어해야 합니다. 주어진 형편에 자족하는 소박한 마음으로 순종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영적인 허기는 타인의 소유를 강탈함으로써 채워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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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07-02)

 

참 제자의 자격을 가르치신 예수님

마태복음 7장 13-29절


선택은 자유로울 수 있지만, 어떤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도착지는 달라집니다. 마치 어떤 씨앗을 심느냐에 따라서 추수할 열매가 달라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또한 같은 건축 자제로 집을 건축할지라도 어디에 지었느냐에 따라 그 집을 오래토록 유지할 수 있고, 쉽게 무너질 수 있습니다. 성도들이 좋은 열매를 맺는 삶을 살긴 원한다면, 삶이 달라야 합니다. 산상보훈에서는 성도들이 세상의 삶의 법칙과 달라야 함을 강조합니다.

 

본문은 산상보훈의 결론부입니다. 공통적인 결론 주제는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설교를 마무리하시면서 세 가지 경고하십니다. 좁은 문과 넓은 문, 좋은 나무와 못된 나무를, 지혜로운 건축자와 어리석은 건축자의 비유로 참된 구원의 길과 멸망의 길을 대조하며 가르칩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보훈을 마무리 지으시며 참 제자가 누구인지 선명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두 종류의 길 :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13-14)

‘더 나은 의’를 추구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좁은 길을 걷는 것처럼, 이 세상이 그 가치를 모르고 거절하는 방식입니다.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그 길만이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더 나은 의’의 삶을 살펴보겠습니다.

13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13-14)

예수님께서는 하신 이 산상보훈의 말씀은 불신자들에 대한 교훈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찾아온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믿는다고 찾아왔지만, 너희들이 가짜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전하신 산상보훈의 결론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먼저, 길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은 어떻게 사는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을 통해 들어가라!’라는 말씀에 이어서, 좁은 문에 들어가야 하는 이유를 제시하는 두 문장이 나옵니다(13-14). 넓은 문을 통해 광활한 길로 가면 끝은 파멸이기 때문이고(13), 좁은 문을 통해 험한 길로 가면 그 끝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비단길이 아니라 순례자의 길에 들어선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그 길이 쉽고 편하고 대접을 받는 길이라면 모든 사람이 그 길로 나올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면 험한 길이 나오는데, 제자들이 겪는 어려움이나 환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하늘나라에 현재적 날까지 계속해서 걸어가야 하는데, 그 문은 좁습니다. 제자들이 하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삶의 방식에서 좁은 문과 험한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이미 좁고 험한 곳에 들어가 순례의 길을 가는 사람은 끝까지 같은 방식의 삶을 살아야 하며, 자신들의 규모가 작은 것으로 혼란스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제자들은 들어가는 사람들의 숫자를 보기보다 길의 끝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어려움을 겪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길이 너무 힘들어서 억지로 갈 수밖에 없는 삶은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여 그 나라의 복을 누리는 사람들이므로 그 힘으로 고난도 견디면서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두 종류의 나무 : 거짓 선지자들을 분별하라(15-23)

하나님 백성의 삶은 예수님께서 제시한 ‘더 나은 의’의 내용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살지 않으면 스스로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됩니다. 남을 속이기 전에 먼저 외적인 결과로 인해 자신을 속일 수 있습니다. 주의 뜻에 순종하는 것만이 ‘의’이고 다른 것은 다 ‘불법’입니다.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나무의 열매를 통해 교훈을 전하고 있습니다.

15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16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20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21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16-23)

두 번째 비유는 예수님께서는 가르침에 관련해서 나무의 열매에 비유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15)고 경고하십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정체를 분별하도록 경고하고 그들의 운명을 예고합니다. 첫째, 제자들은 거짓 선지자들을 분별해야 합니다(15-20). ‘너희에게 오는 자마다’는 거짓 선지자들이 외부에서 공동체 내부로 오는 것을 묘사합니다. 양 무리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상기시키며, 본문에서는 교회 혹은 새 언약 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늑대들은 교회 안에 와 있고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가르치는 선지자들의 역할을 수행하므로 기독교 지도자들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굶주린 늑대와 같은 이들이 양의 옷으로 위장하기 때문에 이들의 정체를 분별하기 어렸습니다. 양으로 변장한 것은 해를 끼치지 않는 양의 특징을 이용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양은 늑대와 같은 맹수의 먹잇감이지 포식자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양의 옷을 입는다는 것은 늑대가 양으로 위장해 양 무리 가운데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말하자면 거 짓 선지자들은 교회를 잡아먹으려고 순수한 모습으로 위장해서 교회를 포식의 대상으로 삼고 활보합니다. 늑대들은 하나님과 그분의 뜻에 대해서 선포하고 가르칠 것이지만, 실제로는 교회를 이득의 수단으로 삼는 포식자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삶의 문제를 ‘열매’라는 소재로 강조하십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그 실체가 반드시 열매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16, 20).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는 것이 자연의 법칙 이듯 영적인 세계에서도 법칙입니다. ‘나쁜’(17)은 ‘썩은’의 뜻입니다. 좋은 나무는 선한 선지자를 썩은 나무는 거짓 선지자를 뜻합니다. 거짓 선지자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열매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산상설교의 가르침에 따른 삶의 방식이 열매가 좋은지 나쁜지를 식별하게 해주는 잣대입니다. 19절은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의 운명을 다룹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찍혀 불에 던져집니다. 지옥 불에 던져질 운명을 묘사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5:22,29,30; 10:28; 18:9; 23:15,33).

따라서 제자들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그들의 가르침이 아니라 그들의 삶을 보고 분별해야 합니다. 공동체는 지도자들의 삶을 유심히 살피되, 그들의 위선에 속지 말고 그들의 삶이 산상설교의 가르침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있는지 분별해야 합니다. 성스러운 얼굴과 말에 속지 말라! 둘째 거짓 선지자들은 최후 심판대에 서게 될 것입니다(21-23).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주여, 주여’라고 부른다고 해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경고하십니다(21). ‘주’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이 가장 흔히 부르는 칭호입니다. ‘주’를 두 번 반복하는 것은 그 마음의 친밀함과 진지함을 대변합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해야 합니다.

삶이 수반되지 않는 신앙 고백은 구원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날에는 충격적인 장면이 연출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실패할 수 있습니다(22). 실패한 사람들은 최후 심판 때 하늘법정에서 선지자의 언어를 사용하고(10:41), 귀신을 내쫓은 일(10:8), ‘당신의 이름으로’ 곧 재판장(예수)의 이름으로 많은 능력들을 행한 것을 열거합니다. 이는 특히 기독교 지도자들이 어느 시대든지 자랑하는 언어입니다. 이들은 ‘진정성’과 ‘진실성’을 강조하기 위해 ‘예수님의 이름’을 각 행위를 주장할 때마다 붙이면서(10:22; 18:5,20; 19:29; 24:9) 자신들이 형벌이 아니라 하늘의 상을 받아야 한다고 항변합니다. 재판장이 자신들을 잘 알고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그러나 재판장은 그들을 모른다고 말하며 불법을 행한 자들로 규정합니다(23).

교회는 예수님의 경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거짓 선지자들의 운명에 동참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도자들이 예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지 여부는 세 가지 기적 혹은 능력과 같은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덧붙여서, 바로 앞의 내용(13-14)과 연결해 거짓 선지자들의 정체를 생각해보면, 이들은 험한 길로 가지 않고 넓고 광활한 길로 사람들을 유혹하는 자들입니다.

요즘 우리 주변에 많은 성도들과 교회들이 건강하지 못한 모습으로 세상에 지탄을 받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비난을 받는다고 해도 그렇다고 기독교를 부정하거나 신앙을 떠나는 일은 더 어리석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 이미 모두 다 온전하고 건강한 모습으로 설 수 없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두 종류의 집 : 지혜로운 사람이 되라(24-27)

탄탄한 기초가 건물 안정의 전체가 되듯이, 순종이 하나님의 백성 됨의 기초합니다. 믿음처럼 보이는 것들은 시련이 닥치면 그 진상이 드러납니다. ‘순종의 실천’만이 시련이나 유혹을 통한 시간의 시험 속에서도 든든한 반석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처소로 나와 우리 공동체를 세워줄 것입니다.

24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26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24-27)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실 뿐 아니라 들은 말씀대로 행하길 원하십니다.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을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에 비유하며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꾸짖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개의 대조적인 예로 평행을 이루는 구조로서 두 가지 상이한 운명을 묘사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집을 튼튼한 반석 위에 지으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입니다(24). 반면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홍수가 나면 지혜로운 인생과 어리석은 인생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홍수 또는 폭풍이 몰아치는 것은 구약에서 삶의 어려움이나(시편 8:7-8; 에스겔 38:22). 이 모습은 가을 우기에 말랐던 골짜기를 통해 물이 심하게 불어 밀려오는 것을 떠올리게 합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삶은 목우가 쏟아져도 무너지지 않는 집과 같습니다(참조, 잠언 10:25; 시사야 28:16).

예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듣지 않고 그 뜻에 따라 행하지도 않는(에스겔 33:32) 사람은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을 것입니다(26). 이런 사람이 어리석은 것은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닥치면 모래 위에 쌓은 집처럼 견디지 못하고 넘어지기 때문입니다. 비유의 심판 장면은 최후 심판의 때를 암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산상보훈은 마지막은 경고에 대한 강조로서 독자들이 종말의 운명을 두려움으로 되새기면서 인생의 기초를 무엇에 두고 있는지 돌아보게 합니다.

 

첫 번째 강화를 마침(28-29)

진정한 열매의 기준은 하나님을 ‘주여!’라고 부른 것도, 성공적인 종교 활동도, 사람들에게 끼친 좋은 영향력도 아닙니다. 이러한 것들이 자신을 위대한 제자라고 착각하게 만듭니다. ‘순종의 실천’만이 시련이나 유혹을 통한 시험과 고난에서도 끄떡없는 든든한 반석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성도들입니다.

28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29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28-29)

드디어 산상수훈이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마태복음에 나온 다섯 개 담화 중 하나가 마무리됩니다. 모든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라는 표현으로 마칩니다(7:28; 11:1; 13:53; 19:1; 26:1).

흥미로운 것은 산상수훈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 더해집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은 사람들은 매우 놀랍니다. 무리는 예수님의 가르치는 권세가 서기관들이 가르친 내용과 전혀 다른 것을 알고 놀랐습니다. 서기관들은 공인된 율법 교사들로서 그들의 가르치는 권위는 이전의 율법 해석이 전수한 전통에 근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라는 표현을 사용해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원래 의도를 확신 있게 밝히셨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전통에서 부여받은 것이 아니라 내재적인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권세는 이어지는 8-9장에서 기적 행위를 통해 강조되며,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권위를 제자들에게 부여하시고(10:1), 부활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얻어 제자들을 파송하실 것입니다(28:18).

무리는 예수님의 가르치는 권세에 놀라지만 아직 정체를 알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산상설교를 대하는 우리는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삶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지금까지 가르쳐 주신 뜻인 하나님 나라와 의를 추구하는 삶, 팔복의 삶, 빛과 소금의 삶, 더 나은 의를 추구하는 삶은 모든 가르침에 알맞은 길을 걸어가라고 하셨습니다. 그 삶은 불편하고 좁은 문이며 십자가의 길입니다. 어려운 길이기 때문에 찾는 사람들이 적습니다.

많은 사람은 오늘도 넓은 문과 쉬운 길을 찾아가지만, 그 결과는 멸망으로 향하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길은 좁고 험하지만, 구원과 생명으로 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난 후의 반응이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짓습니다. 똑같은 자리에서 똑같은 말씀을 들어도 지혜로운 자는 말씀을 행하고, 어리석은 자는 말씀을 행하지 않습니다. 순종이 곧 지혜이고 안전입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삶의 풍파에도 안전하지만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자는 삶의 풍파를 만나면 그 신앙이 무너져 버립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순종할 때 그 가르침은 우리 삶의 기초가 되고 그 가르침 위에 든든하고 무너지지 않는 인생을 세워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부지런히 말씀을 듣지만, 순종은 하지 않은 채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지 않은지 자신을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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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01-01)

 


지혜로운 사람입니까?

잠언 11-7

 

직장에서나 학교에서 참 지혜롭다.’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습니다. 반면에 어리석다는 말을 들으면 참 속상합니다. 그 차이가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지능지수가 높으면 머리가 좋고, 지능지수가 낮으면 머리가 나쁘다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지능지수가 높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반드시 지혜롭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낮은 수치에도 불구하고 지혜로운 이들이 우리 주변에 있기 때문입니다. 지혜는 순수하고 단순한 지성이 아닙니다. 지혜가 지성을 반드시 배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성에 초점을 맞추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지혜가 무엇을 아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법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잠언의 서문으로서 잠언의 목적과 그 유익을 서술하면서 지혜의 근본이 여호와 경외에 있음을 분명히 밝힙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교육과 습득의 기본이며 시작점입니다. 잠언은 여호와 경외를 근본으로 하는 다양한 형식의 글을 제공함으로써 듣는 자와 읽는 자로 하여금 지혜와 훈혜를 얻게 할 목적으로 두고 았으며 어리석은 자에게나 명철한 자 모두에게 유익을 제공합니다.


잠언의 표제(1)

인간의 타락한 본성대로 하려는 사람은 결코 바른길로 행할 수 없음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사사기를 통해 사람들이 각자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결과가 얼마나 끔찍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지혜와 지식이 많다는 것은 머리가 비상하거나 단순히 정보가 많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바른길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며, 그에 대한 훈계와 교훈을 잘 알아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1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1)

오늘 본문을 보기에 앞서 먼저 잠언 전체의 구조를 살펴볼 때, 1-9장은 서문으로, 마지막 31장은 결문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1-9장은 내 아들아로 시작하는 아버지의 긴 강연이 주로 나오며 훈계를 잘 듣고 지혜를 얻으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31(특히 10-31)은 지혜롭고 유능한 여인을 묘사하고 있는데, 무엇보다도 이 여인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을 살므로 칭찬을 받는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처럼 잠언의 처음과 마지막 부분에 여호와 경외를 반복함으로써 이 주제를 강조하며 독자에게 여호와 경외를 신신당부합니다.

덧붙여, 잠언 전체의 서문 역할을 하는 잠언 1-9장 내에서도 첫 부분인 1:1-7과 마지막 부분인 9:1-18이 공통적으로 여호와 경외에 대한 정의를 내림(1:7; 9:10)으로써 수미쌍관의 구조(단락 처음과 끝에 유사하거나 같은 내용이 나오는 구조)를 형성하고, 이런 문학적 기술을 이용함으로써 서문에서도 여호와 경외의 주제를 부각합니다.

1-9장의 서문 역할을 하는 1:1-7은 표제, 잠언의 목적(2-4), 유익(5-6), 요약(7)으로 구성됩니다. 1:1의 표제에서 잠언을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으로 소개합니다.

저자인 솔로몬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 지혜자로 알려졌습니다. 솔로몬은 왕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을 제대로 통치할 수 있도록 지혜롭고 분별력 있는 마음을 하나님께 구하였고,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지혜를 허락하셨을 뿐만 아니라 부와 영광도 주셨습니다(왕상 3:16-28; 대하 1:3-12).

솔로몬의 지혜는 동양과 애굽을 막론하고 가장 뛰어났으며, 그 지혜로 솔로몬은 수많은 잠언과 노래를 지었습니다(왕상 4:30-33). 잠언 1:1에서만이 아니라 10:125:1에서도 솔로몬의 저작을 알리며 솔로몬이 지혜의 왕이라는 전통을 지속합니다. 잠언은 솔로몬의 조언 외에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지혜자들(22:17; 24:23), 아굴(30:1), 르무엘의 어머니(31:1) 등의 지혜로운 조언을 담고 있습니다.

 

잠언의 목적(2-4)

잠언은 모든 사람에게 유익을 끼칩니다. 어수룩한 사람을 슬기롭게 하며, 분별력 없는 젊은이에게 바른 지식과 판단력을 줍니다. 지혜롭고 명철한 자는 잠언을 통해 학식과 지략을 더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잠언은 생각의 근육을 발달시켜줄 뿐 아니라, 민첩한 판단력을 증진 시켜줍니다.

2이는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3지혜롭게, 공의롭게, 정의롭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 하며 4어리석은 자를 슬기롭게 하며 젊은 자에게 지식과 근신함을 주기 위한 것이니(2-4)

잠언의 저자는 잠언에 관한 표제(1)를 소개한 후, 2-4절에서는 잠언의 목적과 목표하는 독자를 설명합니다.

(1) 지혜 잠언의 요지(2)

첫째,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먼저 저자는 이는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2a)라고 합니다. 지혜와 훈계라는 단어는 짝으로 사용되었으며 7절에서도 반복 사용함으로써 강조되었습니다.

지혜(호크마)라는 단어는 잠언에 40회 이상 등장하는 주요 용어로서 지각’, ‘재주의 뜻도 갖고 있습니다. 잠언에서 지혜는 하나님의 법을 좇아 도덕적인 함정을 피하며 삶을 살아가는 방법과 기술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지혜는 아버지의 조언, 지혜의 의인화, 대조적 금언 등의 다양한 형식과 내용에서 나타납니다. ‘훈계징계’, ‘교훈으로 번역할 수도 있으며, 지혜와 가장 밀접하게 관련된 단어로서 잠언에서 지혜의 대치어로 자주 사용됩니다. 잠언에서 훈계의 내용은 하라또는 하지 말라의 형식으로 자주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독자는 잠언의 다양한 형식과 내용을 통하여 지혜와 훈계가 과연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됩니다.

둘째, 명철의 말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다음으로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2b)라고 말씀합니다. 독자는 지혜가 무엇인지 훈계의 본질과 유익이 무엇인지 알 뿐 아니라 잠언에 기록된 명철한 조언을 듣고 조언이 의미하는 바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2) 지혜 잠언의 목적(3-4)

잠언은 현명하게 하는 훈계, 정의, 공평, 정직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2절에 이어 지혜롭게, 공의롭게, 정의롭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 하며”(3)라고 말씀합니다. 훈계2절에 이어서 또 반복되어 강조되었습니다. 아마 훈계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훈계의 목적은 그 사람을 괴롭히고 어리석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명하게 만들고 유익을 주기 위함입니다. 듣기에는 쓴소리지만 그 소리를 받아들이면 도덕적으로 신앙적으로 현명한 자가 될 것입니다. 훈계 뒤를 이어 나오는 정의’, ‘공평’, ‘정직은 훈계와 동등한 요소로 이해할 수도 있고 훈계의 내용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잠언은 부정하고 부당한 것을 통한 유익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잠언의 지혜와 훈계의 본질은 의롭고 공평하고 정직함에 있으며, 오로지 이 본질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유익을 추구합니다. 훈계의 의미를 깨달음에서 끝나지 않고 이를 본인에게 적용하여 삶에서 정의와 공평과 정직을 실천할 때 진정으로 지혜롭고 현명한 사람이 됩니다.

넷째, 우매한 자를 슬기롭게 하고 젊은이에게 지식을 주어 근신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4절에서 어리석은 자를 슬기롭게 하며 젊은 자에게 지식과 근신함을 주기 위한 것이니라고 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사리를 제대로 분별하거나 판단하는 능력이 적은 자로서 쉽게 설득당하며 미성숙하고 경험이 부족한 자입니다(9:4,16). 이런 자에게 적절한 지각과 판단력을 주는 것이 잠언의 목적입니다. 특히 미성숙하고 경험이 적은 젊은이들이 잠언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지식을 얻고 신중하고 슬기로운 삶을 꾸려나갈 수 있습니다.

잠언의 목적에서 알 수 있듯이 잠언은 세상이 갈구하는 재물이나 권력이나 명성을 얻는 데 그 목적을 두지 않습니다. 잠언은 우리에게 가정과 사회와 국가에서 성공적인 삶을 살도록 지혜를 얻으라고 권유합니다. 그러나 거짓말이나 속임수 등의 부정하고 불공정한 방법이 아니라 오로지 의롭고 공평하고 정직한 방법을 통해 얻으라고 충고합니다.

 

잠언의 유익(5-6)

잠언은 이미 세상 이치에 밝은 지혜가 있는 자에게는 학식을 더해줍니다. 이미 사리 분별을 잘하는 명철한 자에게는 지략을 더해줍니다. 머리로서의 지식이 아니라 가슴의 지식, 온몸의 지식, 삶의 지식을 알게 하여 더 깊은 비유와 오묘한 말을 깨달을 수 있게 해줍니다.

5지혜 있는 자는 듣고 학식이 더할 것이요 명철한 자는 지략을 얻을 것이라 6잠언과 비유와 지혜 있는 자의 말과 그 오묘한 말을 깨달으리라(5-6)

이제 5-6절에서는 잠언의 유익에 대해 기술합니다. 위에서 잠언의 목적 중 하나로 어리석은 자를 슬기롭게 하기 위함을 들었는데(4), 잠언은 어리석은 자에게만 유익이 이는 것이 아니라 지혜 있는 자에게도 유익합니다. 지혜자와 명철한 자는 학식이 늘어나고 지략을 얻고 잠언에 다양하게 나오는 비유와 수수께끼와 같은 오묘한 말을 깨닫는 유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잠언의 요약: 여호와 경외가 지혜의 근본(7)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십니다. 모든 질서와 조화를 만드셨으며 그것을 당신의 목적과 의도대로 운행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이 모든 선과 악의 기준이 되시며,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의미를 결정하십니다. 따라서 그분을 경외하고 인정할 때, 그분의 생각이 담긴 말씀에 순종할 때, 참 지혜를 얻게 됩니다.

7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7)

본문은 잠언 1:1-7이나 잠언 전체의 요약으로서 잠언이 제시하는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여호와 경외가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태도이며 지혜를 얻는 시작임을 알려줍니다.

여기서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두렵게 여겨 공포에 떤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과 각 사람의 주권자임을 알고 그를 우러러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과 행동을 의미합니다.

지식이란 뜻으로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를 알아갈 때 지식 또는 지혜(9:10)가 시작됨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위 2-6절을 비롯하여 잠언 전체에 기록된 지혜와 훈계의 말은 단순히 도덕적이고 실용적인 지식이 아니라 여호와 경외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그러므로 잠언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기대하고 원하시는 삶의 태도와 방식을 말해줄 것입니다.

한편, 1:7의 요약은 잠언의 첫 단락인 1-9장의 구조 내에서도 거듭 반복되고 강조되었습니다. 이 요약과 비슷한 내용이 3:7; 8:13; 9:10에도 나타나는데, 이때 1:79:10 그리고 3:78:13이 각각 수미쌍관의 구조로 등장함으로써 여호와 경외가 지혜를 교육하고 지혜를 습득하는 데 있어서 근본이며 시작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동시에 여호와 경외의 구체적인 의미를 제시합니다. 복잡한 삶 가운데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또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 알기 어려운 경우도 많은데, 그러한 때에 여호와 경외의 태도는 가장 적절한 길잡이가 되어줍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지 않는다면 누구든 악을 피하고 선을 추구하며 하나님의 성품에 더 가까운 선택을 할 것입니다. 그런 자가 하나님의 눈에 지혜로운 자며 잠언이 말하는 지혜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지혜롭게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지혜를 이용하여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려 할 뿐 지혜가 영원한 삶으로 이어지게 된다는 것은 잘 모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지혜를 배우고 실천하여 하나님의 선물인 영생을 누리는 복된 삶을 살아가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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