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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15-02)


압살롬을 피해 도망하는 다윗

사무엘하 15장 13-23절


이겨야 하는 싸움이 있고 피하는 것이 상책인 싸움도 있습니다. 상처만 남고 명분은 없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전혀 없는 싸움도 있습니다. 그러나 피하는 순간에도 절대로 잃지 말아야 할 품위가 있습니다. 다윗은 압살롬을 피해 도망가지만, 왕으로서의 품위를 어떤 식으로 지켜가고 있습니까?
 
압살롬은 다윗과 만난 뒤에 반역을 일으킬 준비를 해나가기 시작합니다. 우선 재판받으러 오는 백성들에게 다윗의 홀을 잡고 자신이 왕이 되면 더 잘할 수 있다고 말하고 백성들을 친근하고 겸손하게 대하여 그들의 마음을 삽니다. 이런 작업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자 압살롬은 신하 100명을 데리고 헤브론으로 가서 그곳을 근거지로 삼고 모사인 아히도벨까지 모셔 와서 점점 더 자신의 세력을 넓히기 시작합니다.
 

예루살렘에서 도망하는 다윗(13-17)

하나님 나라는 그 어떤 위협에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다윗 왕국이 반역으로 무너질 것입니까? 다윗은 예루살렘을 버리고 떠나야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고 함께 하시는 한 하나님 나라는 영원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무너뜨리려면 하나님을 대적해서 이겨야 합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 무엇도 감히 하나님을 대적할 수 없습니다.
 
13전령이 다윗에게 와서 말하되 이스라엘의 인심이 다 압살롬에게로 돌아갔나이다 한지라 14다윗이 예루살렘에 함께 있는 그의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일어나 도망하자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 중 한 사람도 압살롬에게서 피하지 못하리라 빨리 가자 두렵건대 그가 우리를 급히 따라와 우리를 해하고 칼날로 성읍을 칠까 하노라 15왕의 신하들이 왕께 이르되 우리 주 왕께서 하고자 하시는 대로 우리가 행하리이다 보소서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하더라 16왕이 나갈 때에 그의 가족을 다 따르게 하고 후궁 열 명을 왕이 남겨 두어 왕궁을 지키게 하니라 17왕이 나가매 모든 백성이 다 따라서 벧메르학에 이르러 멈추어 서니(13-17)
 
압살롬의 반역 소식에 다윗은 예루살렘을 떠나 피난 길로 섭니다. 승산 없어서 도피한 것일 수도 있지만, 아들과의 싸움을 피해야 한다는 판단 때문일 가능성이 더 큽니다. 싸워 이긴들 상처만 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싸움은 피해야 하고, 도피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입니다.
 
(1) 반란의 소식(13)
헤브론에서 압살롬이 얼마나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결국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다윗의 귀에까지 들어갑니다. 전령이 다윗에게 와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압살롬을 지지하고 따른다는 사실을 보고하였습니다. 다윗은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직감하고 급히 도망하려고 서두릅니다.
 
(2) 왕의 두려움(14)
다윗이 ‘빨리’라는 단어를 반복하고 ‘일어나라’, ‘서둘러라’ 등 명령법을 사용하여 서둘러 도망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됩니다. 또한 다윗은 압살롬이 예루살렘에 들이닥치면 사람들을 죽이고 성읍을 파괴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에 매우 당황하고 허둥대며 두려워하고 있음을 잘 보여줍니다. 다윗이 예루살렘 성을 버리고 이렇게 재빨리 도망하려는 이유는 첫째, 예루살렘 성과 왕궁이 파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전투가 일어나게 되면 아무래도 성이 파괴될 수밖에 없고 그러면 외부의 색을 방어하기에 불리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다윗이 현재 예루살렘에서 가지고 있는 전력으로는 압살롬의 군대를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요양이 이 장면에 등장하지 않는 것을 볼 때 다윗의 최강 부대인 요압의 부대는 현재 예루살램이 아닌 다른 지역에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윗은 후에 마하나임에 가서 그곳에 주둔한 부대와 자신이 이끈 부대를 합친 후에 압살롬과 싸울 태세를 갖춥니다.
 
(3) 왕을 따르는 왕궁 사람들(15-16)
다윗이 서둘러 도망하자 신하들도 다윗을 따르겠다고 나섭니다. 왕이 선택하는 대로 자신들도 따르겠다며 충성을 다짐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모든 가족을 데리고 가는데, 다만 후궁 열 명은 남겨두어 왕궁을 지키게 합니다. 다윗은 열 명의 후궁을 남겨둠으로써 자신은 비록 도망가지만 예루살렘이 여전히 자신의 집이라는 사실을 표시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결정은 열 명의 후궁에게는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처사였습니다. 열 명의 후궁은 압살롬이 예루살렘을 정복한 후에, 그가 예루살렘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도구로 사용되었고, 결국 하나님의 심판이 성취됩니다. 후에 다윗은 예루살렘을 탈환한 뒤에 이 힘없는 후궁들을 가두는데, 이들은 압살롬에게 강간당하고 다윗에게 버림받음으로써 다윗의 딸이자 압살롬의 누이인 다말과 같이 비참한 인생을 보내게 됩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과 압살롬은 힘없는 여성들을 권력을 획득하거나 유지하는 수단으로 이용한 점에서 서로 많이 닮았습니다. 다윗은 첫째 부인 미갈과 열 명의 첩을 이용하였고, 압살롬은 자신의 누이인 다말과 열 명의 첩을 이용하였습니다.
 
(4) 벧메르학(17)
다윗 왕이 예루살렘을 떠날 때 그를 따르던 백성들도 함께 따라 나섭니다. 그리고 제일 먼저 벧메르학에 도착하는데, 이곳은 예루살렘 외곽 끝에 있는 궁전이며, 문자적으로 ‘먼 집’이란 뜻입니다. 개역개정에서는 지명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영어 번역은 예루살렘에서 가장 마지막에 머물 수 있는 집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다윗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이곳에서 광야로 들어가기 전에 남아 있는 사람들과 군사를 점검하였습니다.
 

다윗을 따르는 신하들(18-23)

사람들은 어딘가에 소속되어 안정을 누리고자 합니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심지어 종은 국적을 얻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도는 이 땅의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어 안달하지 않습니다. 이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그 나라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도피하는 다윗을 따르는 사람들은 다윗의 인간적인 미를 끌린 것보다 왕이신 하나님께서 계시고 하나님을 따라가려고 한 것입니다.
 
18그의 모든 신하들이 그의 곁으로 지나가고 모든 그렛 사람과 모든 블렛 사람과 및 왕을 따라 가드에서 온 모든 가드 사람 육백 명이 왕 앞으로 행진하니라 19그 때에 왕이 가드 사람 잇대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도 우리와 함께 가느냐 너는 쫓겨난 나그네이니 돌아가서 왕과 함께 네 곳에 있으라 20너는 어제 왔고 나는 정처 없이 가니 오늘 어찌 너를 우리와 함께 떠돌아다니게 하리요 너도 돌아가고 네 동포들도 데려가라 은혜와 진리가 너와 함께 있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21잇대가 왕께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살아 계심과 내 주 왕의 살아 계심으로 맹세하옵나니 진실로 내 주 왕께서 어느 곳에 계시든지 사나 죽으나 종도 그 곳에 있겠나이다 하니 22다윗이 잇대에게 이르되 앞서 건너가라 하매 가드 사람 잇대와 그의 수행자들과 그와 함께 한 아이들이 다 건너가고 23온 땅 사람이 큰 소리로 울며 모든 백성이 앞서 건너가매 왕도 기드론 시내를 건너가니 건너간 모든 백성이 광야 길로 향하니라(18-23)
 
다윗은 압살롬의 반역으로 도피의 길을 떠날 때 신하들이 다윗을 따르겠다고 고백합니다. 상황에 따른 선택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약속을 끝까지 지키는 모습입니다. 그들이 다윗을 신뢰하고 따를 수 있ᄋᅠᆻ던 것은 그들 안에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해타산을 따라 결정하는 철새 정치가 판을 치는 현실에서 끝까지 자신의 철학과 신념을 고수하는 올곧고 우직해 보이는 모습이 돋보입니다.
 
(1) 블레셋 사람들(18)
다윗 곁에 있는 사람들의 명단입니다. 그렛 사람과 블레렛 사람들은 이스라엘 정규군이라기보다는 다윗을 섬기는 용병 집단입니다. 그렛 사람은 크레테 출신의 이민자들로 에게 해의 같은 지역 출신으로 보이는 블레셋 사람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지방인 가드에서 온 모든 가드 사람 육백 명은 다윗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조직한 육백 명의 군사와 동일한 숫자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다윗의 군대와는 다른 사람들로 가드에서 온 직업 군인들입니다. 가드는 다윗과 개인적 친분이 있는 곳으로 다윗이 왕이 된 후에도 가드와는 계속해서 친분을 유지한 것으로 보입니다. 다윗이 이끄는 호위대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으로 이루어진 군대가 아니라 이방 민족으로 이루어진 용병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현재 다윗은 비록 이스라엘의 왕이지만 이스라엘 백성의 호위를 받는 것이 아니라 이방 민족의 호위를 받고 있는 매우 서글픈 상황에 처한 것입니다.
 
(2) 잇대를 만류하는 다윗(19-20)
이 단락은 18절과 연결되어 가드 사람 잇대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 다윗은 자신을 따라온 가드 사람 잇대에게 왜 자신과 같이 가려느냐고 물으면서 이제 쫓겨난 신세가 되었으니 가드 왕에게 돌아가 그를 섬기라고 말합니다. 가드 사람들은 다윗에게 고용된 용병 집단으로 이들은 돈으로 자신들을 고용한 사람을 의해 싸울 뿐이지 누군가에게 충성심을 갖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다윗이 왕위에서 쫓겨나면서 다윗에게 고용된 이들도 이스라엘에서 쫓겨난 신세가 된 것입니다. 돈을 받고 싸우는 이들에게 현재 다윗이 충분한 대가를 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들에게 가드로 돌아가 가드 왕을 섬기라고 말한 것입니다. 다윗은 그들이 여기 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자신은 이제 정처 없이 돌아다녀야 하니 잇대에게 가드 사람들을 모두 데리고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은혜와 진리가 있기를 기원해주는데, 은혜와 진리, 즉 ‘헤세드’와 ‘에메트’는 여호와께서 언약 백성들을 신실하게 대하실 때 사용하는 용어이며, 다윗은 암시적으로 여호와의 축복을 빌어준 것입니다.
 
(3) 잇대의 충성(21-22)
이런 다윗의 말은 진심이 아니라 가드 사람 잇대를 시험하기 위한 것입니다. 다윗은 현재 아들에게 생각지도 못한 배신을 당한 상황이기 때문에 곁에 있는 자들의 충성심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자기 곁에 있다가 언제든 돌변하여 압살롬의 편을 들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다윗의 말에 잇대는 여호와의 살아계심과 왕의 살아계심을 두고 왕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사나 죽으나 함께하겠다고 맹세합니다. 이런 잇대의 맹세는 마치 룻의 맹세(룻 1:16-17)를 떠오르게 합니다. 모압 여인 룻은 자신의 시어머니와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고 시어머니가 죽어 묻히는 곳에 자신도 같이 묻히겠다고 여호와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였습니다. 그런데 블레셋 사람 잇대가 다윗을 위해 맹세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여호와의 이름이 이곳에 등장합니다. 다말의 강간 사건 이후 다윗의 입에서는 여호와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여호와께 대한 신앙을 잊고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그런데 블레셋 사람의 입에서 여호와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으며, 이스라엘 사람과 압살롬이 잊은 왕에 대한 목숨을 건 충성심도 이 블레셋 사람에게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잇대는 다윗에게 반역한 압살롬과 대조되는 인물로 등장하여 이스라엘의 신앙과 충성심이 소위 할례 받지 못한 블레셋 사람만도 못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블레셋 사람의 호위를 받는 다윗의 모습은 골리앗을 비난하던 사무엘상 17:25-26과 대조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를 잃거나 하나님을 잊게 되면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세상 속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잇대의 충성 고백을 들은 다윗은 잇대를 선발대로 보냅니다. 이제 잇대를 완전히 신뢰하고 그에게 자신의 앞길을 맡긴 것입니다. 잇대를 따라 다윗과 함께한 모든 사람들은 기드론 시내를 건너서 광야 길로 향하게 됩니다.
 
(4) 백성의 슬픔(23)
여기서 다윗과 함께한 사람들이 큰 소리로 울며 강을 건너는 것은 이들의 기 막히고 억울한 심정을 표현하였습니다. 이렇게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린 것 때문에 자신만 아니라 자신의 가족. 더 나아가 모든 백성들까지 전쟁에 내몰라는 비극적인 상황에 빠지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드 다윗은 여호와께 도움을 구하는 대신 이 상황에 대해 한탄만 하고 있습니다.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기술이 삼십육계 줄행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피하고 도망하는 것이 항상 비겁한 행동은 아닙니다. 어쩌면 줄행랑이 싸우는 것보다 더 큰 용기일 수 있습니다. 또한 위기의 순간에 같이 울고,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모든 것이 정상으로 회복될 때가 이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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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강해(01-01)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

로마서 1장 1-7절


사람들은 처음 만나면 명함을 나눠서 자기 소개합니다. 일부 명함에는 여러 직함을 빼곡하게 소개되어, 본업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약 거짓된 내용들을 기록했다면 그 사실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인정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로마서의 기록자인 바울은 먼저 자신을 소개하는데, 자신을 화려한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종 바울”이라고 합니다. 로마서를 따라가다 보면, 당신도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아름다운 명함을 만들 수 있습니다. 아마도 로마서가 마칠 무렵에는 멋진 명함을 갖게 될 것입니다. 한 번 기대해 보시길 바랍니다.

 

로마서는 성경 중에 성경이라고 하였습니다. 많은 그리스도들에게 영향을 주었던 책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로마서를 읽고 회심과 개종으로 거룩한 변화를 이루었습니다. 몇 가지 예로, 탕자였던 어거스틴(Augustine), 루터(Luther)에게 개혁의 불씨를 당겼고, 평범한 청년인 조지 휘필드(George Whitefield)에게 부흥의 열정을 불러일으킨 책입니다. 로마서를 집필할 당시에는 그토록 강력한 영향력이 있을지 예측할 수 없었지만 역사를 바꾼 강력한 책이었습니다. 로마서는 당신도 확실히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바울의 자기 소개(1,5)

로마서를 기록 당시에 ‘복음’을 의미하는 ‘유앙겔리온’은 새로운 황제가 등극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또한 새로운 왕조의 시작을 알리는 단어이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유앙겔리온’을 통해 새로운 왕국이 세워지고 있음을 설명합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 나가는 것입니다.

 

1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1)

 

바울은 당시 일반적으로 편지를 쓰는 방법을 따라서, 먼저 자신을 소개합니다. 그 내용은 매우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소개됩니다. 자신을 세 가지 직분으로 나열하며 설명합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다음으로 ‘부르심 받은 사도’라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은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1) 구체적으로 기록해야할 이유(1a)

바울은 로마서를 쓰면서 구체적으로 자신을 소개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출처가 불분명한 신앙을 독려하는 편지들이 많이 돌아다녔습니다. 이 문서들은 마치 위경이나 외경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한 거짓 또는 위작 문서들이었습니다. 이러한 문서에는 대부분 거짓된 주장과 이상한 교리들이 난무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지만 일반인들이 진리를 분별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출처가 불분명한 문서로 복음을 증거 하면, 복음의 내용 또한 불확실해져 버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신을 소개한 이유는 결국 자신이 전한 복음을 바르게 세우기 위함입니다. 또 다른 목적은 이 서신이 사람의 편지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드리도록 권고하기 위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로마 교회에 자신을 자세하게 소개한 이유는 로마 교회로부터 인간적인 대접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이 바르게 전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2) 구체적인 직분 내용(1b)

로마교회는 오순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왔던 디아스포라 로마 유대인들이 복음을 듣고 변화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로마로 돌아와서 로마에 교회를 세우게 됩니다. 교회가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황제 는 기독교들의 성장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므로 황제는 시민권이 없는 기독교인들을 로마에서 추방시킵니다. 로마에 있는 유대인이 아닌 로마인 중심으로 교회는 형성되었습니다.

로마교회는 남아있는 성도들은 복음에 대한 바울은 방문해 본적도 없는 로마 교회를 향해 자신을 소개합니다. 다른 편지들과는 달리 매우 격식을 갖추어 소개합니다. 그는 세상적으로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출생부터 엄청난 특혜를 가진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다소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났고(사도행전 22:25-28), 다소에서 성장하면서 아테네와 알렉산드리아 대학보다 명망 높은 다소 대학을 다녔고(사도행전 22:3), 그 후에 예루살렘으로 건너와서 유대인으로서 랍비 가말리엘의 지도 아래 율법을 정통으로 공부했습니다(사도행전 22:3). 그 결과로 예루살렘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인정받는 엘리트 집단인 바리새인으로서 살아갔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의 서신 속에서 단 한 번도 이렇게 많은 자랑거리를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➀ 예수 그리스도의 종

먼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하였습니다. 당시에 ‘종(δουλος)’이란 정말 혐오감을 일으키는 단어였습니다. 모든 세상적인 자랑거리를 버리고 혐오스러운 종으로 전환했던 사건이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이 변화된 사건을 사도행전 9장에서 살펴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는 그리스도다’라고 주장하는 말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핍박하였습니다. 스데반 집사와 같은 사람들을 돌을 들었고(사도행전 7:58-8:1), 다메섹(Damascus)에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러 가던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변화되었습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그는 삼층천 하늘에 올라가서 천국의 찬란함을 직접 보았던 것입니다(고린도후서 12:2-5).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 것들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모든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겨서 버렸습니다(빌립보서 3:8). 그래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기로 작정하고 변화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조차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세상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택정”되었다고 소개합니다.

➁ 사도로 부름을 받음

사도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목격하고(고린도전서 9:1), 그 분으로부터 직접 부르심을 받고, 복음 선포 사명을 평생토록 수행하라고 보내심을 받은 자를 말합니다(마태복음 28:16-20; 요한복음 20:21-23; 사도행전 1:8; 로마서 10:14-17). 따라서 사도는 특별한 권위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바울은 지상의 예수님의 공생애를 따라다녔던 제자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자신이 사도라는 주장은 공격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여러 곳에서 자신의 사도권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갈라디아서 1:1; 고린도전서 9:1-2; 15:9-11).

 

(3) 구체적으로 소개한 이유(1c)

바울이 자신을 분명히 소개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직분의 근원을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5)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전해왔던 복음이 인간적인 권고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거짓 사역자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차라리 사단들이 이단의 얼굴을 가지고 나오면 분별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가짜들이 진리보다 더 진리인 것처럼 포장합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성도들로부터 노략질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당신이 바르게 설 수 있는 것은, 먼저 당신의 참 모습을 발견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떤 신분을 가지고 있습니까? 올바른 자기 자신의 이해만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바르게 살 수 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나 복음 앞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습니까? 건전한 자아 형성할 때 자신의 삶 속에 확신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인격 형성은 한 순간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순간적으로 자신을 만들어간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마귀는 당신에게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하면서 당신을 유혹합니다. 다시 한 번 묻습니다. 하나님의 복음 앞에서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2-4,6)

사도 바울이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롭게 얻었던 것이 무엇입니까? 모든 열정과 생명까지 담보로 하면서 전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입니까? 모든 것을 버릴 만큼 정말 가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살펴보겠습니다.

 

2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3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2-4,6)

 

사도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헌신했습니다. 그가 전한 복음을 정리해 보면, 2절 앞과 4절 끝부분을 통해 “이 복음은 …… 예수 그리스도시니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즉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기독교의 주춧돌이며 복음의 중심 주제이고 이 땅 위에 많은 교회들이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구약 선지자들을 통해 미리 약속하셨습니다. 신약의 사도들은 이 이름을 전파하기 위해 땅 끝까지 보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전파되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복된 소식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는 흑암 속에 헤매는 자들에게 비취는 생명의 빛으로 오셨습니다(요한복음 8:12, 9:5). 죄악에 굶주린 자들을 위한 생명의 떡으로 오셨습니다(요한복음 6:48). 예수 그리스도는 기독교의 주춧돌이며 복음의 중심 주제이고 이 땅 위에 많은 교회들이 존재할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복음이라는 증거를 세 가지로 증명해 보여줍니다.

 

⑴ 오래전 하나님의 약속(2)

첫째는 이 복음인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오래 전에 약속하셨습니다. 성경의 시작인 창세기부터 가장 먼저 약속합니다.

 

15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 3:15)

 

그 후로도 수많은 예언을 하셨습니다.

다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가 있습니다. 육신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통해 다윗의 혈통에서 태어날 것을 예언 하였습니다(3). 구약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으로 직접적으로 350번, 간접적으로 100번 이상 예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것도 많은 예언을 하셨습니다. 대표적인 말씀은 소개하겠습니다.

 

6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7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이사야서 9:6-7)

 

이 약속에 근거하여 신약 성경의 첫 성경에는 마태복음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마 1:1)고 소개하면서 시작합니다. ‘다윗의 자손(혈통)’이라는 것은 다윗의 가문을 통해 메시야가 태어날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족보를 보면 예수님의 족보지만 다윗의 혈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족보를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네 번째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있습니다. 그것을 바울은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4)라고 소개합니다. 모든 세상 사람들은 죽음으로 막을 내렸지만,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능력을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구원 받은 성도들을 통해 증명되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6)고 말합니다. 성도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시인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2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3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요일 4:2-3)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단순히 사람들의 결단에 의해서 나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올바르게 대답한 사람들만이 그분과 인격적인 교제를 갖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십자가 그리고 부활하신 사랑의 부르심에 믿음으로 반응함으로 인격적인 교제가 시작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며, 그분을 주님으로 모시고 살아갑니다. 그분이 주시는 풍성한 삶을 누리고 살아갑니다. 종종 주변에는 예수님과 인격적인 만남이 없이 위대한 성인(聖人) 정도로 생각하는 불쌍한 사람도 있습니다.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는 세상에 있는 모든 이론과 학문 그리고 학설까지도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모든 지식과 경험 그리고 상식도 내려놓고 순종해야 합니다.

바울은 제시한 네 가지 증거들을 살펴봄으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또한 그리스도이심을 입증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예수는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일에 대해 망설이지 마시길 바랍니다.

 

이 서신을 받을 성도(7)

인생의 가장 큰 축복은 복음을 믿고 순종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고백한 순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를 향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7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7)

 

로마교회의 구성원들은 로마서를 읽어 내려가다 보면, 삶이나 모든 역영에서 문제투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들이 모든 것을 알고도 그들을 향해 ‘성도(saints)’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원하는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바울이 당시에 사용한 단어의 원어적인 의미를 조금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 ‘성도(하기오스)’란 단어는 ‘거룩한 예식을 위해 특별히 구별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교회 구성원에게 쓴 것은 ‘세상의 죄악들로부터 특별하게 구별한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본문을 통해 성도의 자격을 정의해 보면, 첫째 소유권은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며, 둘째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며,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모든 것이, 그들의 생명까지도 하나님의 소유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진정한 성도는 당신의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인정할 때,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삶에 주인 되시고, 당신의 모든 것을 책임지실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순종하는 삶을 살라고 권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어떻게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방법은 각 사람에 따라 다릅니다. 하지만, 영접하는 방법이 달라도 한가지만은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 말입니다. 우리들이 영접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은 은혜와 평강이라고 말합니다(7). ‘은혜와 평강’은 같은 의미인데, ‘샬롬(shallom)’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즉 ‘평강’이라는 의미입니다. 유대인들이 이 단어로 다른 이들에게 인사한 의미는, ‘약속의 가나안 땅과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되라’는 의미로, 하나님의 모든 약속 성취를 기원한 인사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도 동일한 말씀으로 말씀하셨습니다.

 

19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한복음 20:19-21)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들을 지극히 사랑하십니다.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언약 하셨던 것들을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비록 당신이 안고 있는 문제가 현실적으로 커 보인다 할지라도, 모든 근심과 걱정을 하나님께서 안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에게는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초청하신 것입니다. 당신의 모든 것, 생명까지도 주님께 맡김으로 인해 평강을 누리는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유대인인 바울은 자신을 소개하는 내용 속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부르심을 입은 사람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은 자신의 명함에 ‘예수 그리스도 종’과 복음 전하는 ‘사도’라는 직책을 동시에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는 사역에 대해 하나님의 사역임을 알고 열정적으로 뛰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전한 열정적인 사람을 부르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기쁘게 응답하시길 바랍니다. 당신의 명함에도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적어 넣을 수 있도록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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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개론《

 

기독교 신앙에서 로마서가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서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많은 기독교 신앙의 선배들-어거스틴, 루터, 웨슬리, 바르트 등등-이 로마서를 통해 변화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로마서를 언제부터가 정복해야할 큰 산으로 여기고 ‘어려운 서신’으로 인식 되었습니다. 그것은 로마서를 둘러싼 신학적인 논쟁들이 로마서를 근접하기 어려운 서신으로 만들었습니다. 로마서를 겸손하고 정직하게 접하면 ‘로마서’야말로 ‘하나님의 사랑의 서신’임을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로마서의 저자

이 로마서가 바울의 서신이란 것을 반대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바울이 로마에 있는 사람들을 기독교 신앙의 오묘한 진리로 이끌기 위해 로마서를 썼습니다.

⑴ 내적 증거 : 로마서는 바울이 기록자임을 로마서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1:1, 11:13, 15:15-20을 보면, 바울임을 알 수 있습니다.

⑵ 외적 증거 : 외증으로는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이그나티우스(Ignatius)의 편지, 폴리갑(Polycarp)의 편지, 히포리투스(Hippolytus)의 ‘이단비판’등에서 로마서를 많이 인용했습니다.

 

로마서의 저작 장소

주후 57년 겨울, 바울의 제3차 전도여행을 끝마칠 무렵인 고린도에 3개월간 체류하는 마지막 때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합니다(사도행전 20:1-6). 사도 바울이 겐그레아 출신의 집사인 뵈뵈를 추천하는 것을 보아서 고린도의 겐그레아 근처에서 글을 쓰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바울은 자기가 쓰고 있는 글로부터 교회 전체의 주인인 가이오의 문안인사도 함께 보내고 있는데, 가이오는 고린도에서 두드러진 성도였습니다(16:23). 서신을 쓰고 있을 때,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연보를 가지고 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57/58년의 겨울을 고린도에서 보냈고, 그곳에서 로마서를 기록했던 것입니다.

 

로마서의 수신인

본문에서 ‘로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성도’(1:6)로 보아서 수신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의 설립자는 아니지만, 1세기경 로마에는 유대인만 40,000-50,000명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중에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귀의한 것을 보고 바울사도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로마에는 누가 전도하지 않았는데 이미 교회가 있었습니다. 이는 사도행전 2:10에 따르면 오순절에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입니다.

 

로마서의 저작 연대

로마서의 기록 연대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57/58년 겨울이었습니다. 바울이 3차 전도 여행이 끝날 무렵 고린도에서 3개월 머무는 동안에 기록했습니다. 로마서를 기록할 당시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헌금을 전달하려는 중이었습니다(로마서 15:25-27). 바울은 이 헌금의 중요성을 고린도전후서에서 강조했었습니다. 그러므로 고린도후서를 기록한 후 얼마 안 되어서 로마서를 기록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로마서 기록 동기와 목적

루터의 제자 멜랑히톤은 로마서를 ‘기독교 교리의 요약’이라고 불렀습니다. 실제로 로마서는 바울의 복음에 대한 가장 체계적인 설명에 해당합니다. 로마서의 이러한 성격을 강조하는 이들은 서신의 가운데 단락인 1:16-11:36을 중요시 합니다. 한편, 점점 많은 학자들은 로마서가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특수한 목적을 위해 기록된 서신이라 점에 동의합니다. 여기에서는 1:1-15과 12-16장 단락이 강조되고, 그 배경 속에서 1:16-11:36을 이해하려 합니다. 언뜻 서로 상반되어 보여는 두 가지 입장은 충분히 조화가 가능합니다. 즉, 복음에 대한 체계적인 제시가 필요한 구체적인 상황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에 따르자면 그 구체적 상황은 세 도시, 즉 서바나, 로마, 예루살렘이 바울의 선교 계획 속에서 차지하는 의의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로마서의 신학적인 특징

로마서의 특징은 서신이라기보다 논문 같은 인식이 온다는 것입니다. 또한 구약성경을 많이 인용했습니다. 그리고 로마서는 罪(죄), 震怒(진노), 사망, 율법, 義(의), 稱義(칭의), 신앙, 생명, 소망, 할례, 이스라엘 등 신학적인 용어들이 나옵니다. 로마서는 바울의 서신 중 신학 논문에 가장 근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서신과 달리 어떤 직접적인 문제, 긴급한 환경, 현재의 잘못, 위협적인 위험 등 그가 편지하는 교회를 위협하는 문제들을 다루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는 직접적인 주위환경과 동떨어져서 바울자신의 신학적 입장의 조직적인 설명에 가까운 것입니다. 로마서의 제마는 1:16,17에서 말하듯이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5:1)입니다. 즉 로마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막론하고 모든 죄인을 위하여 율법행위가 아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입니다. 로마서에는 믿음, 율법, 모든 사람, 죄 등 사람들의 관심을 유발시키는 주요 단어들이 빈번하게 등장하지만, 이 모든 것을 종합하는 낱말은 ‘하나님의 의’입니다. 즉 로마서는 구원론에 대한 체계적인 설명인 바,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로 나오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의로 인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로마서의 내용 분해

제1부 : 하나님의 의의 계시/1:1-8:39

Ⅰ. 머리말/1:1-17

1. 인사말/1:1-7

2. 바울의 관심사/1:8-15

3.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1:16,17

 

Ⅱ. 정죄 : 하나님의 의의 필요성/1:18-3:20

1. 이방인의 죄/1:18- 32

⑴ 정죄의 원인/무지/1:18-23

⑵ 정죄의 결과/ 하나님의 유기/1:24-32

2. 유대인의 죄/2:1-3: 8

⑴ 진리에 따른 심판/2:1-5

⑵ 행위에 따른 심판/2:6-10

⑶ 공평한 심판/2:11-16

⑷ 율법을 지키지 않음/2:17- 29

⑸ 약속을 믿지 않음/3:1- 8

3. 전 인류의 죄/3:9-20

 

Ⅲ. 칭의 : 하나님 의의 전가/3:21-5: 21

1.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3:21-31

2. 의의 예증 : 아브라함/4:1-25

⑴ 행위와 무관함/4:1-8

⑵ 할례와 무관함/4:9-12

⑶ 율법과 무관함/4:13-15

⑷ 믿음에 의함/4:16-25

3. 의의 결과/5:1-11

⑴ 하나님과 화평/5:1,2

⑵ 환란 중에 기쁨/5:3-8

⑶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윈/5:9-11

⑷ 의와 정죄의 대조/5:12-21

 

Ⅳ. 성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남/6:1-8:39

1. 성화와 죄/6:1-23

⑴ 죄에 대해 죽음(원리)/6:1-14

⑵ 죄에 대해 죽음(실천) /6:15-23

2. 성화와 율법/7:1-25

⑴ 율법에 대해 죽음/7:1-6

⑵ 죄로부터 해방시키지 못하는 율법/7:7-25

3. 성화와 성령/8:1-11

⑴ 육의 권세에서 해방시키는 성령/8:1-11

⑵ 양자의 권세를 주시는 성령/8:12-17

⑶ 장래의 영광을 보증하는 성령/8:18-30

⑷ 승리를 보증하시는 성령/8:31-39

 

제2부 : 하나님의 의에 대한 변론/9:1-11:36

Ⅰ. 이스라엘의 과거 : 선택/9:1-29

1. 바울의 슬픔/ 9:1-5

2. 하나님의 주권/9:6-29

 

Ⅱ. 이스라엘의 현재 : 유기/9:30-10:21

1. 행위로 의를 추구함/9:30-33

2. 그리스도를 거부함/10:1-15

3. 선지자를 거부함/10:16-21

 

Ⅲ. 이스라엘의 미래 : 회복/11:1-36

1. 이스라엘의 부분적 유기/11:1-10

2. 이스라엘의 잠정적 유기/11:11-32

⑴ 유기의 목적/11:11-24

⑵ 회복의 약속/11:25-32

3.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찬양/11:33- 36

 

제3부 : 하나님의 의의 적용/12:1-16:27

Ⅰ. 하나님의 의와 성도의 의무/12:1-13:14

1. 하나님에 대한 의무/12:1,2

2. 교회에 대한 의무/12:3-8

3. 사회에 대한 의무/12:9-21

4. 권세에 대한 의무/13:1-7

5. 이웃에 대한 의무/13:8-14

 

Ⅱ. 하나님의 의와 성도의 자유/14:1-15 :13

1. 성도의 자유(원리)/14:1-23

2. 성도의 자유(실천)/15:1-13

 

Ⅲ. 맺는 말/15:14-16:27

1. 편지 쓴 목적/15:14-21

2. 여행 계획/15:22 33

3. 개인적 인사말/16:1-16

4. 끝맺는 교훈과 축복/16: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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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02-02)

 


성령 임재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

사도행전 2장 14-21절


교회를 출석하는 성도들이 자주 사용하는 단어 중 하나가 ‘성령 충만’이란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세상에서는 들어볼 수 없는 단어입니다. 하지만, 성도라면, 성령 충만하게 살아가길 원합니다. 대부분 성도로서 ‘성령 충만’으로 행복한 신앙생활과 충성스러운 봉사를 하면서 살아가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성령 충만하길 위해 기도하면, 막상 무엇이 ‘성령 충만’인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성령 충만’이란 무엇입니까? ‘충만’은 원어적으로 물질이 ‘가득히 넘친다.’라는 의미보다 ‘돛단배를 잘 달리도록 하는 바람’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은 이상스런 체험적인 현상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함을 받아 순종하는 신앙이란 뜻입니다. 본문에서는 그것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오순절 성령임재로 변화된 성도들을 향해 조롱하는 사람들에게 오순절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예루살렘 사람들 중에는 성령 임재의 모습을 ‘새 술에 취했다.’고 비방했습니다. 베드로는 그들에게 새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하신 대로 이루어진 사건임을 설명합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성령 충만과 성도 인도하심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변화로 이끌어 가신 성령(14-15)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 변화는 사람이 사람다워진다는 뜻입니다. 피조물이 피조물의 자리를 지키고, 창조주를 인정하며, 그분의 마음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분이 만들고 싶어하는 나라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성령께서 임재하심으로 삶 속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14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15때가 제삼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14-15)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는 말씀을 하신 후, 성도들은 다락방에서 기도하며 기다렸습니다. 기다린 성도들에게 약속을 따라 성령이 임했습니다. 성령 임재를 통해 제자들에게서 각 나라의 언어로 말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큰 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과 하나님 나라의 소식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⑴ 조롱 받은 제자들

두 달 전부터 예수님의 사건 때문에 예루살렘은 소란스러웠습니다. 더욱 예수님의 부활은 예루살렘과 인근 주변에 놀라운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설왕설래(說往說來)하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변화되어 담대해졌던 것입니다. 죽으면 죽이리라는 각오로 변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건은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예수님 사건 다음으로 놀라운 일들이었습니다.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임재하신 사역이었기에,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 사실 때문에 제자들을 사람들에게 조롱당했습니다. 예전에는 제자들도 그들과 비슷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제자들은 완전히 변했습니다. 놀랄 정도로 변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어서, ‘새 술에 취했다.’고 조롱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변화된 사람들만이 다른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⑵ 변화된 제자들(14a)

성령 임재를 경험한 제자들은 옛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에 풀죽어 낙심하고, 목숨 부지하려고 도망 다니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메시아에 대한 기대가 잘못 되었고, 예수님을 오해 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을 새롭게 만났고, 구약에 소개된 메시아에 대한 말씀을 예수님 때문에 바르게 해석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모든 약속이 파괴된 것이 아니라 완전히 성취되었음을 알았습니다. 자신들을 낙심하게 했던 예수님의 죽음 사건이, 사실은 구원을 이루시는 가장 결정적이고 필연적인 사건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알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보았고, 직접 부활하신 예수님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예수의 영, 그리스도의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두려워하거나 세상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사시지 않고, 오직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만 사신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사는 존재로 변한 것입니다.

 

⑶ 베드로의 변호(14b-15)

사도 베드로는 다른 사도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에 있던 많은 사람들 앞에서 담대하게 외쳤습니다. 혼자만이 아닌 성령 충만한 열 한 제자들과 120명의 제자들이 베드로와 함께 서 있었습니다. 두려워서 도망하던 유대인의 무리들 앞에 당당하게 서 있었습니다. 조롱한 사람들에게 성도들이 하는 각 나라의 언어는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증언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보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하신 일을 분명하게 알려 주는 것이 제자들의 역할입니다.

이 설교는 베드로가 전한 전문이 아니라 요약하여 수록하고 있습니다. 제자들 중에서 처음으로 전한 유명한 설교입니다. 베드로가 얼마나 성령으로 변화되었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 변화는 단순한 변화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주신 약속된 사건임을 증명해 줍니다. 베드로의 설교 전문이 문자적으로 여기에 모두 그대로 기록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매우 이성적으로 메시지를 시작합니다. 일반적으로 술 취한 사람들은 술을 오후에 마시기 시작해서 저녁에 취해 돌아다닙니다. 오전에는 술 취해 돌아다닌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정신이 가장 밝을 때입니다. 그러면서 유대 시간으로 3시(현재 오전 9시)부터 술에 취해 다닌 사람들이 어디에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이런 시간에 술을 운운하는 사람들이 더 이상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도 알코올 중독자가 아닌 이상 일반적인 사람들은 오전 9시부터 술에 취해 돌아다닌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풍습에는 오전 9시에는 음식을 금하고 아침 기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는 ‘당신들의 말은 스스로 모순이 있다.’는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말도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거짓 경건은 이성적인 판단까지도 흐려 놓습니다.

성령 임재하심으로 또 다른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 스스로 놀라게 했습니다. 성령 임재 전에는 예수님이 재판 받는 빌라도의 뜰에서, 여종에게도 두려워 떨던 모습이, 이제 성령 임재하신 후에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해졌습니다. 이 변화는 성령 임재를 통해서 생사화복을 주장하신 분은 하나님이심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베드로와 제자들은 담대해졌고 숨어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있던 많은 사람들 앞에 서서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변화가 특징입니다. 타락한 상태인 자연적인 인간은 파괴적인 현상입니다. 감사할 것들도 많은데, 감사하지 않고 불평을 토로(吐露)합니다. 사도 바울은 타락한 인간들의 특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28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로마서 1:29-31)

 

하지만 성령 임재를 통해서 아름답게 창조하신 형상으로 변화됩니다. 그래서 삶이 변합니다. 그들은 자신을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아서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화목하게 했습니다(로마서 5:10). 그래서 성도들은 다툼이 있는 곳에서 화평케 하는 일을 합니다. 복음에 대해 전하길 주저하던 성도들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합니다.

죄악에 머물던 사람들이 결단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갑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도 삶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이상한 것입니다. 삶의 아름다운 변화들이 일어나길 바랍니다.

 

말씀대로 이루시는 하나님(16-18)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변화가 일어난다고 소개했습니다. 그 변화가 성경적으로나 일상적으로 증명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변화가 하나님의 사역임을 공감대를 얻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제자로서 더욱 힘차게 사역해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16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17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18그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16-18)

 

성령 임재를 술 취한 사람의 주정이라고 조롱하는 사람들을 향해, 이제 성경적으로 증명합니다. 구약 선지자 요엘에 의해 예언된 사실을 들어서 반박합니다. 지금 일어난 현상은 하나님의 역사인데, 이것을 조롱하는 것은 하나님을 조롱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29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30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31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32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요엘 2:28-32)

 

사도 베드로가 요엘의 예언을 인용해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설명한 이유는 구약에 익숙한 유대인들이 요엘의 예언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예언을 근거로 설교함으로써 성령 강림 사건을 쉽게 이해하도록 도와주고, 더 이상 그 사건에 대해 비난하거나 조롱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성령께서 임재함으로 일어나는 현상을 보아야 합니다. 모든 인류는 죄로 인해 하나님과 관계가 파괴 되어 멸망당할 육체였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심으로 그 관계와 신분이 회복되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이 멸망당할 죄인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들에게 놀라운 일들을 보여주시기 시작했습니다. 장차 이루어질 일들을 보여 주시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러한 요엘의 예언이 성령 강림으로 성취되어서 누구든지 영적인 일들을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하나님의 놀라운 비밀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녀들은 예언을 하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며, 늙은이들은 꿈을 꾼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현상을 보고도 비방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비방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이러한 역사를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당신은 성령 임재로 인해 꿈과 비전을 품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임재 이후에 당신의 삶에 가장 큰 변화는 무엇입니까? 세상 사람들에 변화를 보여줄 수 있는 성도가 되길 바랍니다.

 

장차 구원을 받을 사람(19-21)

베드로는 나타나는 현상만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구원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구원은 단 일회로 끝나지 않습니다. 구원은 항상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가는 사역입니다. 현재에도 계속 이루어져 가는 현재진행형이며 미래에도 진행할 미래진행형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들에게 구원의 기회에 대해 설명합니다.

 

19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20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21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19-21)

 

사도 베드로는 장차 이루어 가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대해 성경을 통해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임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은 비방하던 사람들이 지금까지는 바르게 알지 못했지만, 이제부터 장차 이루어질 일들을 보면서 구원의 기회를 놓치지 말고 잡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한 적용 원리 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심판이 하늘에서부터 땅에 이르기까지 전 우주적으로 일어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말세가 언제 시작되었는지 가늠할 수 있는 단서를 주고 있습니다.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20)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날에 일어났던 현상과 유사합니다. 그래서 말세가 예수님께서 죽임 당하신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참조 누가복음 23:44-45). 이러한 전반적인 현상을 살펴보면서 베드로는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20)라고 말씀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아직 기회가 있을 때 영접하라는 권고입니다. 성령 강림 사건은 베드로를 통해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에 이루어질 심판에 대해 언급하였습니다. 모든 시대에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방법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마지막 환난의 날이 임박하면 사람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나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이 있으므로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주로 고백한 우리는 그 두려운 심판에서 제외되는 은혜를 누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은혜에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전해야 합니다.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의 날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염두해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날이 아직 멀었다는 안일한 생각으로 살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불신자들은 기회 있을 때, 예수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믿는 사람들은 기회 있을 때, 성령 충만함을 받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충성해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가 우리에게도 있길 원합니다. 과거에는 체면과 이기심 때문에 죽어가는 영혼을 외면했지만 이제 성령 충만함으로 베드로처럼 담대하게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이제 성령 충만으로 죄에서 벗어나기를 원합니다. 베드로처럼 많은 사람들 앞에서도 증거할 수 있어야 하겠지만, 당신 곁에 다가온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담대하게 증거해야 합니다. 이제 성령의 능력을 간절히 구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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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02-01)


성령 임재로 세워진 교회

사도행전 2장 1-13절


약속(約束)은 사람이 사는 세상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어렸을 때는 엄마와 새끼손가락을 걸면서, 친구들과 변치 말고 약속한 아름다움도 있습니다. 작은 약속은 개인과 개인과의 거래약속도 있지만, 국가와 국가와의 약속인 조약(條約)이라고 합니다. 어느 때는 개인적으로 한 생명이 좌우될 때도 있지만, 국가적으로는 국가의 운명이 좌우할 때도 있습니다. 약속 때문에 싸움과 전쟁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약속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에게 구원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 약속을 통해 우리는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갈 수 있습니다.

 

본문에는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약속하신대로 성도들은 성령이 오실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성령께서 다락방에 오셨습니다. 첫 열매가 될 하나님의 성도들이 모여서 기도하는 곳에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마지막 때에 영적 열매를 거두기 위하여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서 사역하심으로 계속적으로 교회가 세워졌고, 성장해 나가게 되었습니다.

 

오순절에 오신 성령(1-4)

성령의 가정이 될 때, 그곳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십니다. 성령의 교회가 될 때, 그곳에 주님이 계십니다. 유명한 목사나 거대한 건물이나 많은 무리가 있는 곳이 아니라 성령께서 자유롭게 역사하실 수 있는 심령을 가진 심령들이 있는 곳에 주님을 기쁘게 거하시고 영광 중에 머무르십니다. 하나님께서 오순절 사건을 통해 새로운 성전을 이루어 가고 계십니다.

 

1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1-4)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령대로 예루살렘의 한 다락방에 모였습니다. 다락방에 있던 제자들은 가룟 유다를 대신할 맛디아를 새로운 사도로 뽑았습니다. 비로소 이스라엘의 12지파를 대신할 12사도가 준비되었습니다.

계속 예루살렘 다락방에 있던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약속하신 성령 임재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오순절 날이 이르매, 약속대로 다락방에 모인 사람들에게 각자 성령이 임하기 시작했습니다.

 

⑴ 오순절의 의미(1)

오순절에 성령이 임했는데, 많은 날 중에 성령께서 오순절에 임하였는지 의미가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잠시 오순절(五旬節, Pentecost)에 대해 살피고 가야겠습니다.

오순절은 모세오경에서 유대인의 중요한 세 가지 절기 중 하나입니다. 오순절은 유대인들이 유월절 이후 50일째 되는 날입니다. 이 시기는 겨울을 지내고 보리나 밀과 같은 맥류들을 추수를 마친 시기입니다. 그래서 오순절을 맥추절(출애굽기 23:16), 칠칠절(출애굽기 34:22) 또는 처음 익은 열매를 드리는 날(민수기 28:26)로 불렸습니다. 유월절은 종 되었던 애굽의 땅에서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축제라면, 오순절은 약속의 땅을 소유한 것을 기념하는 축제 절기입니다. 따라서 오순절 축제는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축제입니다. 오순절은 곳곳에 사는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서 즐거운 축제를 드린 날입니다.

오순절은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 계명을 받는 사건과 닮았습니다. 하늘에서 나는 소리와 불의 혀는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임하신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그래서 소리와 불과 사람들이 알아들을 말은 시내산에 있었던 특징들입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언약식이 있었듯이, 신약의 다락방에 성령이 임재하심으로 새로운 언약식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신약 교회가 탄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 시대에 오순절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주신 것에 축하하는 날입니다. 기독교적 오순절은 유대인의 날자 계산을 무시하고, 항상 부활절을 기준으로 오순절을 계산하여 주일에 지키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오순절 성령강림주일을 지키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주일에 있었다는 날짜와 일치하는 것입니다.

 

⑵ 오순절 성령임재(2-3)

다락방의 120명의 성도들은 예수님의 약속인 성령 강림을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성령께서 임재한 모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먼저 성령의 임재한 모습에 “홀연히”라고 설명합니다. 그들이 사모하는 시간이 아니라 생각지 않은 시간에 갑자기 임했습니다. 성령의 임재는 모든 사람들이 귀로 들을 수 있고, 눈으로 볼 수 있게 임하셨습니다. 먼저 하늘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처럼, 하늘로부터 강한 소리가 온 집에 임했습니다. 다음으로 성령의 임재의 모습은 불이 혀와 같이 갈라지면서 그곳에 있는 사람들 속으로 임하였습니다. 불처럼 임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의 모습(출애굽기 3:2)과 불로 정결케 하는 임재를 상징합니다(에스겔 1:13). 계시적인 하나님의 나타나심인 신현(神顯)으로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온 집에 가득하며”(2)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원래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성막과 성전에 임재 하셨을 때, 구름이 가득 찼던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성령께서 다락방 있는 120명의 성도들에게 가득 찼다는 의미는 성령이 충만한 성도들이 성전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제 하나님께 거하시는 성전은 건물이 아니고 성령이 충만한 성령의 공동체란 의미입니다. 성령으로 새롭게 창조된 피조물 안에 하나님께서는 즐거이 거하십니다. 말씀하실 때까지 기다리고 그의 뜻을 따라 살겠다는 열망하는 공동체를 하나님께서는 거처로 삼아서 주의 영광을 들어내실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3)라고 소개합니다. 성령은 누구에게는 필요하고, 누구에게는 필요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어떤 특정 사람들의 개인적인 소유물이 아닙니다. 모든 하나님의 성도들은 성령께서 임재하십니다. 성령이 없는 자는 죽은 자이고, 성령이 없는 자는 죽은 자입니다. 성령님은 성도라면 누구나 받을 수 있는 인격이십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주라 시인할 수 없습니다(고린도전서 12:3). 그 성령을 얼마나 의지하고 사느냐입니다. 성령의 임재를 통해 교회가 가족 같이 하나로 결속할 수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교회가 패쇄적이고 자기만족적인 집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요한의 물세례와 성령의 세례를 연관시킵니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하나님은 불로 세례를 주신 것입니다. 각 제자들에게 성령께서 불의 혀와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⑶ 성령 충만(4)

성령께서 임한 성도들은 성령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외적으로 성령 충만한 현상들이 자연스럽게 나타납니다. 자신들의 변화된 모습을 보고 스스로 놀랐을 것입니다.

성령 임재한 결과, 성령 충만한 성도들에게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강력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성령이 말하기 하심을 따라 각각 세상의 다른 언어로 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성도들이 말한 언어가 다른 사람들은 알아들을 수 없지만,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였습니다. 다른 나라의 언어를 구사한다는 것은 그 나라 사람이 되어가는 시작입니다. 이 언어를 가지고 다른 사람의 세계로 들어가란 의미입니다.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수용하라는 것입니다. 자신만 아는 언어로 자신의 지식을 과시하고 누군가를 소외시킨 사람은 성령의 사람이 아닙니다. 성령의 사람들은 누군가의 말을 문자적으로만 이해하지 않고 그 숨은 의미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다른 언어를 구사하게 하신 것은 성령이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유대 땅의 경계를 넘어 온 세상 땅 끝까지 전파될 것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성령을 통한 변화된 성도들은 눈에 보이지 않으신 성령을 세상 속으로 들러내는 중요한 장치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자신의 삶 속에 임한 성령의 능력을 당연히 들어내야 합니다. 성령의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른 가치관으로 말하고 전혀 다른 방식으로 말하는 자들입니다. 갈등과 분열, 파괴하는 언어가 아니라 세우고 고치고 붙들어 주는 언어를 사용한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의 놀라운 반응(5-11a)

구약 시대 하나님과의 언약식에는 이스라엘 백성들만 참석했지만, 신약 시대에는 많은 이방인들까지 참여하였습니다. 오순절 성령 임재는 새로운 언약식이었습니다. 새로운 언약식을 통해 전 세계로 복음이 뻗어 나갈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5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6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7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8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9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10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11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5-11a)

 

예루살렘 다락방에 있던 120명의 성도들이 각 나라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각자 자신이 깨달은 것을 자신이 구사할 수 있는 언어로 예루살렘에서 전했습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놀라운 광경을 목격합니다. 마침 예루살렘에는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세계 각 나라에서 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과 개종한 이방인들이 모였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살고 있는 지역의 언어로 말하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오순절에 모인 사람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공용어인 헬라어를 구사할 수 있었지만, 자기 나라에서는 자기 나라 언어를 사용했었습니다. 헬라어는 외국어였기 때문에 헬라어로 듣는 것보다 자기 나라 언어로 듣는다면, 훨씬 더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온 나그네들이 자기 나라 언어로 듣는 것은,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벨탑의 저주를 푸신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바벨탑 사건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하고 사람들이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해 한곳에 모이고 하늘까지 닫는 탑을 쌓은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셔서 온 세상으로 흩으셨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지려는 자들은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서로 소통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오순절에는 흩어져서 각 나라 언어로 말하는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성령께서 그들이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데도, 하나님께서 하신 큰 일을 하나 같이 듣게 하신 것입니다. 모두 하나님을 찬미하는 사람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바벨탑은 사람들이 하늘에 올라가려고 교만했지만, 오순절 사건은 하늘에서 땅으로 하나님의 영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언어를 사용하든지 성도들을 통해 각자 자신의 언어로 하나님의 크신 일들을 알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보혜사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그런 능력을 주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교만하여 바벨탑 사건으로 언어가 혼잡해 졌습니다(창세기 11:1-9). 그런데 오순절 사건은 하나님께서 언어를 통해 하나로 묶으신 놀라운 사건입니다. 죄로 파괴된 것을 회복시키는 사건입니다.

성령께서 예루살렘 다락방에 임함으로 새로운 언약이 체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백성들이 세워졌고, 새로운 나라인 하나님의 교회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원동력은 사람이 아니라, 바로 성령이십니다. 교회를 이끌어나가는 지도자들은 성령 충만해서 성령의 인도하신 방향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그럴 때, 교회는 원활해지고 교회 자체가 능력이 있습니다.

 

오순절 사건에 대한 반응(11b-13)

사람들은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상황만 받아들으려 합니다.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나타나게 되면, 크게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납니다. 그것은 받아들이는 긍정적인 반응과 받아들이지 않는 부정적인 반응으로 나누입니다. 당신은 어느 쪽을 선택하십니까?

 

11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12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13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11b-13)

 

오순절 사건을 통해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예루살렘 다락방에서 성령 임재를 체험한 성도들은 학문적으로 우수한 사람들이 아니지만, 그들은 세계 각 나라의 언어로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일반적인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많은 사람들은 신기하게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세계 각국에서 모인 사람들이, 자기 나라 언어로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며 당황했습니다. 특히 별 볼일 없던 갈릴리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보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긍정적인 반응과 부정적인 반응 두 가지로 나누어져 나타납니다. 먼저, 긍정적인 반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역임을 알고 찬양하는 반응이 나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큰 일 말함을 듣는 도다.’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의 차원에서는 설명할 수 없는 차원입니다. 그들은 어리둥절했습니다만,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편경에 사로잡혀 방언을 하는 사람들을 향해 새 술에 취했다고 조롱했습니다. 낮에 ‘새 술’에 취했다는 것은 패인에 가깝다는 의미로 매우 조롱하는 말입니다. 당시는 포도를 수확하기 전이기 때문에 ‘새 술’이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새 술’에 취했다는 것은 제자들에게 성령께서 이루신 역사를 조롱거리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성령께 붙들려 성령 충만한 사실을 마치 술 취한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었습니다.

진지하게 영적인 세계를 탐구하는 사람은 그렇게 반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정하는 것이 경건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상상할 수 없게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다른 사람의 성령의 역사나 능력을 어떤 자세로 받아들여야 하는 가를 가르쳐줍니다. 다른 사람의 변화를 무시하는 행위는 좋은 신앙의 태도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을 변화시키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 변화된 사람들에게 성령 충만할 수 있도록 중보해 주시길 바랍니다.

 


예루살렘 다락방에 있던 성도들은 여전히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오순절에 성령이 임재 함으로 그런 인간적인 조건은 더 이상 제약이 되지 않았습니다. 성령께서 임하시길 준비된 사람들은 더 이상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성전을 대신할 새로운 성전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언어와 영적인 안목을 얻어서 새로운 세계로 진입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성도들은 성령께서 다스리도록 내어드리고, 자기 의지가 아닌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거룩한 말과 행실로 세상을 다스리는 능력 있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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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01-02)

 


예루살렘 다락방에 모인 사람들

사도행전 1장 12-26절


어떤 영화에서 출연 배우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세 가지 ‘금’을 주셨는데, 첫째는 ‘황금’, 두 번째는 ‘소금’,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금’을 주셨습니다. 당신은 어떤 금을 선택하겠습니까? 황금은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기 때문에 황금을 많이 택할 것입니다. 소금은 선택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소금은 몸에 필수적인 것이기 때문에 없으면 죽게 되는 필수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소금은 일반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가장 중요한 금은 ‘지금’입니다. ‘지금’이 없으면 ‘황금’도 필요 없습니다. ‘지금’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금’입니다. 지금 이 순간을 잘 살아가야 합니다. ‘지금’은 시간을 말합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나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를 후해도 돌아오지 않으며, ‘미래’는 아직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과거’를 만회하고 ‘미래’를 멋지게 만드는 것은 바로 ‘지금’입니다.

 

하늘로 승천하신 예수님을 배웅하고 제자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예수님의 승천을 지켜봤던 제자들은 예루살렘 한 다락방에 모여서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며 기도에 집중하기 시작합니다. 그 후에 베드로는 시편 두 구절을 제시하며 사도 직무를 저버린 가룟 유다는 대신할 사도를 선출합니다. 다락방에 모인 120여 명의 성도들은 가룟 유다를 대신해서 맛디아를 뽑아 열두 사도로 선출합니다.

 

예루살렘에 모인 사도들(12-14)

기도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사역하시기 시작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사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자신의 연약함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기도하면 새로운 가능성이 열립니다. 이제 예루살렘 다락방에 모인 사람들은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리며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12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13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14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12-14)

예수님께서 승천 후,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주님의 명령에 따라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본문을 통해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장소가 예루살렘 근처인 감람원(올리브 산)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곳은 예루살렘에서 안식일에 갈 수 있는 정당한 곳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이 안식일에 기도하러 가기 좋은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항상 쉬고 기도하신 곳입니다(누가복음 21:37).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성도들은 여전히 두려웠습니다. 그들은 제자들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특별한 장소로 모였습니다. 아마 이곳에서 예수님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던 다락방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났을 때, 모여 있던 장소일 것입니다. 두려움에 언제까지 숨어 지낼 수는 없지만, 지금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당’에 속한 괴수인 예수를 죽인 후에 힘을 받았습니다. 예수당에 속한 사람들을 모두 잡아 죽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 다락방 안에는 어디에선가 조용하고 나직막한 찬송이 울렸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하나둘 기도하기 시작하고, 점점 기도 소리에 힘이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기도하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아버지의 약속’이 생각하기 났습니다. 그 약속이 언제 임할지 알 수 없지만, ‘아버지의 약속’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누가는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을 소개합니다. 먼저 아래와 같은 그룹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안드레 

빌립, 도마, 바돌로매,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곱의 아들 유다 등

 

이제 예루살렘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은 누가복음 6장에서 소개되었던 명단과 동일합니다. 이들이 초대교회의 핵심 지도자 멤버였습니다. 그리고 다락방에는 제자들만이 아닌 다른 세 그룹의 성도들도 있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을 따르던 여자들도 있었습니다(누가복음 8:2-3; 23:49; 24:10). 그 여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갈릴리에서부터 예루살렘에 올라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에 대한 언급은 이곳에서 마지막입니다. 마지막으로 그곳에는 예수님의 동생들도 함께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으시기 전에는 메시아로 믿지 않았지만(마가복음 3:21,31-35; 요한복음 7:3-5),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승천 후에 영적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가장 두드러진 사람은 동생 야고보서를 기록한 야고보입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약 120여명 가량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여인들은 위기의 순간에 함께했습니다. 다락방에 모인 성도들은 오로지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에 전념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는 예수님을 잃은 슬픔 속에서 그들에게 성령의 임재와 권능이 간절히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하나님은 일하시기 시작합니다. 서서히 하나로 연합되어 갔습니다.

 

가룟 유다를 대신할 맛디아(15-26)

깊은 묵상과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기도는 지경이 넓히고, 경건의 능력을 지닌 성도로 만들어 갑니다. 제자들은 다락방에서 기도하면서 가룟 유다를 대신한 사도를 선택하길 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사역자인 완전한 수인 열두 사도를 채웁니다.

 

⑴ 가룟 유다에 대한 평가(15-20)

누가는 예수님의 승천과 오순절 성령 강림 사이에 일어난 사건을 하나 소개합니다. 가룟 유다를 대신할 사도를 선출하는 일이었습니다. 누가는 매우 중요하게 이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15모인 무리의 수가 약 백이십 명이나 되더라 그 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들 가운데 일어서서 이르되 16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17이 사람은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여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18(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 19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리어져 그들의 말로는 그 밭을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20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15-20)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성도들은 성령 충만해졌습니다. 수제자인 베드로는 예수님의 빈자리를 수습하기 위해 다시 전열을 가다듬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사역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문제점은 이스라엘 12지파를 근거한 12사도의 역할이었습니다. 가룟 유다 때문에 공석된 한 사도 자리를 선출함으로 12사도를 완성하여, 사역을 차질 없이 이루어나가는 일이었습니다. 눈여겨보아야 할 문장은 “모인 무리의 수가 약 백이십 명이나 되더라”(20)고 기록한 것입니다. 누가는 의도적으로 모인 수를 소개한 것입니다. 단순하게 모인 수를 소개한 것처럼 보이지만, 아마도 유대법에 자치위원회를 갖춘 하나의 공동체를 설립하려면 최소 남자 백 이십 명이 필요했었습니다. 결국 다락방에서 결정될 사항은 바른 결정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떠나보낸 후, 베드로는 수제자로서 남은 성도들을 인도하기 시작합니다. 그의 첫 임무는 가룟 유다가 떠난 공석을 채우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사도 베드로는 가룟 유대에 대해 말씀으로 풀어갑니다. 그는 다락방에 모인 성도들을 사랑으로 어우르면서 ‘형제들아!’라고 부릅니다. 비록, 피를 나눈 혈통 관계는 아니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한 가족임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16).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해서 팔았고, 불행하게도 회개할 기회마저 놓쳤습니다. 결국 자책감에 의해서 비극적으로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그 사건은 많은 성도들에게 너무나 큰 미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그의 모든 행동은 구약 성경에서 이미 예견되어진 사건이며, 구약 시편에서 구체적으로 예언하고 있습니다. 시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습니다.

 

9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시편 41:9)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에 대한 배반을 거론하시면서 시편 41편 말씀을 인용하실 때(요한복음 13:18), 베드로도 말씀을 마음에 담아 두었습니다. 성도들에게 이 가룟 유다 사건을 풀어갈 때, 예수님처럼 시편 41편 9절을 인용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시편의 말씀은 성령에 의해 다윗에게 전해진 말씀이기 때문에 그대로 성취되어졌다고 설명합니다. 가룟 유다에 관한 일들은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구역 성경의 예언이 성취된 사건이라고 표명합니다.

18-19절에서는 가룟 유다가 어떤 죽음을 맞이했는지에 부연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 )안에 넣어진 것은, 당시에는 다락방에 있던 사람들은 그 내용을 모두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마 베드로가 직접 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후대 독자들에게 이해를 돕기 위해 삽입한 내용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하고 판 돈으로 양심에 가책을 받아 성전에 헌금하고 목매어 자살해 죽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 성전 제사장들은 그 돈을 받지 않고, 그 돈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구입해서 나그네들을 위한 묘지로 구입했습니다. 나중에 그 땅의 이름을 ‘피의 밭’이라 부릅니다(마태복음 27:5-8).

 

누가는 다시 베드로에게 시선을 돌립니다. 베드로는 다락방에 있는 성도들에게 다윗의 시편 두 구절을 통해 가룟 유다에 대한 심판에 대해 설명합니다.

 

그들의 거처가 황폐하게 하시며 그들의 장막에 사는 자가 없게 하소서(시편 69:25)

그의 연수를 짧게 하시며 그의 직분을 타인이 빼앗게 하시며(시편 109:8)

 

베드로는 가룟 유다에 대한 심판에 시편 69편은 메시아를 대적하는 자를 향한 저주의 말이며, 시편 108편은 원수에게 연달아 저주를 퍼부으며 타인이 그의 직분을 빼앗기를 원하는 탄원입니다. 그의 죽음은 구약 성경에 나타난 악한 인물들과 동일하게 생각했습니다. 성도들에게는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별 큰 의미가 없었습니다.

구약 성경의 내용은 가룟 유다의 계승자를 지명하고 열 두 사도를 충원하는 성경적인 근거로 인용하고 있었습니다. 12사도는 새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12지파에 상응하는 완벽한 12제자를 충원하는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⑵ 사도의 자격(21-22)

사도 베드로는 가룟 유다의 죽음에 대한 정당성을 설명한 다음, 공석이 된 자리를 충원하기 위한 설명을 계속합니다. 그래서 보선될 사도가 갖추어야 할 요건과 자격을 제시합니다.

 

21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22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21-22)

 

보궐될 사도는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감당할 사람들입니다. 보궐될 사도로서 최소한의 조건을 설명합니다. 첫째, 예수님의 공생애 전 기간 동안 예수님과 동행한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까지 같이 다닌 사람이라야 자격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과 행하신 교훈을 직접 보고 들은 사람이어야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복음의 핵심인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후보자는 당연히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제자들 중에 나타났을 때 제자들과 함께 있었던 사람이어야 합니다. 즉 사도의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죽음, 부활 그리고 승천을 증언할 사람이어야 합니다.

 

⑶ 사도로 선출된 맛디아(23-26)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입니다. 모든 일의 결과는 성령의 인도하십니다. 많은 성도들 가운데 두 사람으로 대상의 범위가 좁혀졌습니다. 그들은 바로 ‘요셉’과 ‘맛디아’였습니다.

 

23그들이 두 사람을 내세우니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요 하나는 맛디아라 24그들이 기도하여 이르되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님께 택하신 바 되어 25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인지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26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그가 열한 사도의 수에 들어가니라(23-26)

 

다락방에 모인 성도들은 보궐할 사도로서 자격을 따라 맞는 후보자를 성정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항상 함께 있었단 사람이어야 했습니다(마가복음 3:14-15). 그래서 사도들은 예수님과 함께 항상 함께했던 사람들 중에서 선정하였습니다.

가룟 유다의 공석을 보궐할 때, 가장 적합한 두 사람이 천거됩니다. 첫 후보자는 ‘요셉’은 그의 별명은 ‘바사바’로, 그 의미는 ‘안식일의 아들’이었습니다. 라틴식으로 ‘유스도’라는 이름을 가졌습니다. 두 번째 후보자는 ‘맛디아’입니다. 그는 누가복음에서 언급된 적이 있습니다(누가복음 10:1). 맛디아에 대해서는 이후 더 이상 등장하지 않습니다. 역사가들에 의하면 나중에 그는 에디오피아 선교사로 나갔다고 전해집니다.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성도들은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의 습관에 따라 두 명 중에 한 명으로 ‘제비뽑기’로 선택했습니다. 둘 다 합당한 후보여지만, 자신들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제비뽑기’를 선택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이해관계와 탐욕을 방지하고자 선택한 방법이었습니다. 제비뽑기 선출방식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섭리하신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 두 사도를 선택하실 때처럼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었기 때문입니다(잠언 16:33). 그 모든 결정을 하나님께 맡기는 자세로 일꾼을 뽑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둘 중에서 ‘맛디아’를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누가는 맛디아 사건을 통해 누가 선택되었는가를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 나라 사역에 12사도의 부족한 수를 채웠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로서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위해 사역할 조직이 완벽하게 갖추어졌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세우시기 전에 하나님의 합당한 일꾼을 세우시고 공동체를 회복시키십니다. 예루살렘에 모인 다락방 공동체는 새로운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완성된 12사도는 새로운 이스라엘의 기초입니다. 새로운 시대를 위해 부름 받은 첨병(尖兵)으로서 세움을 받았던 것입니다.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성도들에게 예루살렘에서 기다리라하고 명하셨습니다. 기다림은 자기를 버리고 순종의 훈련입니다. 공허한 광야같이 보이지만, 그 시간 동안 하나님께서는 사역에 합당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합당한 일꾼들은 그 시간이 지루한 시간이 아니라 가장 귀한 시간임을 압니다. 자신의 사명을 깨닫고 합당한 일꾼으로 연단하는 시간으로 만듭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쓰임을 받을 때는 하나님 나라의 첨병으로 강력하게 쓰임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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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07-01)

 


지혜와 유혹 사이에서 사는 지혜

잠언 7장 1-9절


강의를 할 때마다 묵상은 말씀을 기가 막히게 해석하는 기교나 기발하게 적용하는 기술이 아니라 말씀에 대한 태도라고 강조하곤 합니다. 방법이 아니라 마음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마음과 태도를 묻고 도전하고 있습니다.

 

지혜를 담고 있는 아버지의 명령을 눈동자처럼 귀하게 여기며 지켜야 합니다. 이것이 생활화될 때 우리의 삶에 진정한 생명력이 넘치게 됩니다. 지혜는 내가 생애를 같이 보내야 할 동반자입니다. 지혜를 가까이하고 사랑하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다면 지혜가 우리를 음녀와 같은 악인으로부터 또한 우매로부터 보호하고 지켜줄 것입니다.

 

아버지 강연(10) : 아버지의 가르침을 지켜라(1-9)

말씀을 소중히 여기며 가까이해야 합니다. 말씀으로부터 지혜가 임하기 때문입니다. 지혜가 없는 삶은 그 자체로 어둠의 삶이고 죽음의 삶입니다. 항상 말씀으로 자기 마음의 동기와 행동을 점검하며,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새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 쉽게 어둠의 길을 선택하여 갈 수 있습니다.

 

1내 아들아 내 말을 지키며 내 계명을 간직하라 2내 계명을 지켜 살며 내 법을 네 눈동자처럼 지키라 3이것을 네 손가락에 매며 이것을 네 마음 판에 새기라 4지혜에게 너는 내 누이라 하며 명철에게 너는 내 친족이라 하라 5그리하면 이것이 너를 지켜서 음녀에게, 말로 호리는 이방 여인에게 빠지지 않게 하리라 6내가 내 집 들창으로, 살창으로 내다 보다가 7어리석은 자 중에, 젊은이 가운데에 한 지혜 없는 자를 보았노라 8그가 거리를 지나 음녀의 골목 모퉁이로 가까이 하여 그의 집쪽으로 가는데 9저물 때, 황혼 때, 깊은 밤 흑암 중에라(1-9)

 

지혜를 외면할 때 유혹이 찾아옵니다. 말씀이 떠난 자리에 욕망이 대신 자리할 것입니다. 죄를 은밀하게 즐기면서 하나님과 친밀히 교제할 수 없듯이 지혜와 음녀를 동시에 사랑할 수 없습니다. 또 말씀을 우습게 생각하면 자신을 잃고 탐욕이 부리는 대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경외’와 ‘말씀 사랑’은 오래된 집착과 그릇된 탐닉에서 우리를 건져줄 것입니다.

 

(1) 음녀에게서 구원해줄 지혜(1-2)

본문인 잠언 7:1-9은 1-9장에서 ‘내 아들(들)아’로 시작하는 강연 중 마지막인 열 번째 강연에 해당하는 7:1-7의 일부로서, 유혹하는 여자를 조심하라는 주제를 다룹니다. 음녀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와 경고는 잠언 1-9장에서 네 번, 즉, 둘째(2:16-19), 여덟째(5:1-23), 아홉째(6:20~35), 열째(7:1-27) 강연에 등장합니다. 또한, 다섯째 강연이자 막간(Interlude)에 해당하는 9:13-18에서는 ‘음녀’라는 말이나 묘사는 없으나 음녀와 밀접하게 관련 있는 미련한 여인이 소개되었으므로 위의 네 강연과 함께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7장의 구조와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면, 이 장은 “내 말을 간직하라”는 아버지의 조언(1-5)으로 시작하여 “음녀의 길을 피하라”는 아버지의 조언(24-27)으로 끝나며, 그 중간(6-23)에는 아버지 눈으로 관찰한 음녀의 등장과 젊은이를 유혹하는 음녀의 기술 그리고 유혹에 넘어간 젊은이에 대해 중점적으로 기술합니다.

다른 강연에서와 마찬가지로 아버지는 아들을 부르며 주의를 환기시키고 “내 말을 지키라”라는 권고를 유사한 표현으로 재차 반복합니다. 2절의 ‘내 명령을 지켜서 살며’라는 명령은 4:4에서도 나오는데 이 명령은 ‘내 명령을 지키며 살라’ 또는 ‘내 명령을 지키면 살리라’로 번역이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이 부분은 아버지의 명령을 생활화하라는 의미와 명령을 순종한 결과가 생명이라는 이중적인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특히 ‘생명’은 마지막 27절에서 아버지의 말을 따르지 않은 결과로 맞게 될 ‘사망’과 대조를 이룹니다. 여기서 생명과 사망은 육체적인 면만이 아니라 신앙적, 도덕적, 사회적으로 다방면에서의 삶과 죽음을 암시합니다. 아버지는 자기의 훈계를 듣느냐 안 듣느냐가 생명과 죽음을 결정한다는 것을 부각하며 아들로 하여금 자기의 말을 눈동자를 귀히 여기고 보호하듯 지키고(신 32:10) 신중하게 받아들이도록 촉구합니다.

 

(2) 아버지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겨라(3-5)

아버지의 가르침을 지키라는 권고는 이제 3-5절에서 그 가르침을 마음에 새겨 내면화하라는 권고로 연결됩니다. 3절의 “명령을 손가락에 매고 마음판에 새기라”는 말은 단순히 그 명령을 적어 몸에 지니거나 암기하는 소극적인 행동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 무엇보다도 가까이 두고 기억해서 항상 그의 말씀을 따라 살라는 적극적인 행동을 요구하는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끌어내실 때 그들을 위해 애굽에서 행하신 기적과 구원의 일을 기억하라는 뜻에서 유월절과 무교절을 지키라고 명하셨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자녀에게 이를 가르치고 그것을 손이나 이마에 표를 삼으라고 덧붙이셨습니다(출 13:9, 16), 또한 40년이 흘러 곧 가나안 땅에 들어갈 이스라엘의 새로운 세대에게 하나님 말씀을 마음에 두고 손목과 이마에 표를 삼고 자녀에게 가르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신 6:6-9; 11:18-20). 이 모든 명령의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진정한 경외심을 갖고 순종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4절에서 아버지의 가르침은 ‘지혜’로 대치되며 여자, 특히, ‘신부’나 ‘아내’로 의인화됩니다. 아버지는 지혜를 ‘누이’로 또는 ‘친족’으로 부르라 명합니다. 이때 ‘누이’는 아내나 신부를 지칭할 때 사용되는 단어(아 4:9; 5:1)이며, 친족은 ‘친밀한 친구’란 뜻으로 둘 다 ‘아내’를 의미합니다. 아버지가 여기서 지혜를 특히 ‘아내’로 의인화한 것은 이제 곧 5절부터 등장하게 될 ‘음녀’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말에 순종하여 아들이 지혜를 아내로 맞아 사랑하면, 그 지혜가 그를 음녀의 유혹으로부터 구해줄 것입니다. 음녀로부터 구해내는 지혜의 역할은 2:16이나 6:24에서도 이미 언급되었습니다. 이 여인의 특출한 기술은 매끄러운 말로 상대방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 유혹하는 데 있습니다. 이 여인은 문맥상 이방 여인이라기보다는 ‘낯선 여자’, ‘남의 여자’, ‘음란한 여자’를 지칭하며 사회의 어떤 관습이나 도덕적 제약 밖에 있는 여자를 가리킵니다. 2:16-19에서 이런 여인은 젊은 시절의 자기 남편을 버리고 하나님께 맹세한 결혼 서약을 깬 자로서 아첨하는 말로 남자를 유혹하는 여인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여기서도 비슷하게 이 여인은 창녀처럼 행동하며 남편을 두고도 남편이 여행을 떠난 틈을 이용하여 스스럼없이 간음을 저지르는 뻔뻔한 여인으로 묘사됩니다(10-20). 이처럼 ‘음녀’는 4절의 ‘누이’나 ‘친족’으로 불리는 ‘아내’와 대조됩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충실하고 헌신된 여인이지만 음녀는 어느 누구에게도 충성하거나 헌신하지 않고 자기 멋대로 사는 여인입니다. 음녀는 어느 남자에게나 매끄러운 말로 속이려 들지만, 아내는 정직과 의를 바탕으로 신뢰의 말을 쌓아갑니다. 이와 같이 인간인 ‘음녀’와 ‘아내’의 대조는 신붓감을 찾는 젊은이로 하여금 유혹하는 음녀의 실체를 미리 알아차려 그녀의 유혹 손짓에 반응하지 않고 진정한 신붓감을 찾도록 돕습니다. 이미 결혼한 남자에게는 결혼 서약을 깨고 간음을 행하는 일의 위험성을 알리고 자신의 아내에게만 집중하고 사랑하도록 권면합니다. 한편, ‘음녀’와 ‘아내’는 ‘우매’와 ‘지혜’라는 추상적인 실체로도 대조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음녀의 달콤한 속삭임처럼 우매는 우리의 입과 눈과 귀에 즐거움을 주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지혜가 추구하는 여호와 경외와 정의와 정직과 같은 속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음녀의 말이 지혜롭게 들릴 수 있고 지혜의 말도 미련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3) 아버지의 관찰(6-9)

지혜 없는 젊은이는 자기 힘을 믿다가 그럴듯한 말에 잘 속아 넘어갑니다. 지혜가 없으면 젊음은 축복이 아니라 재앙입니다. 이상은 높지만 자기 욕망을 절제하는 법을 몰라서 어이없게도 음녀의 뒤를 따라갑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음녀에 대한 경고하기 위해 자신이 집 창문을 통해 직접 목격하고 관찰한 사건을 6-23절까지 들려줍니다. 6-9절에서는 젊은이의 등장을, 10-20절에서는 음녀의 등장(10-13)과 음녀의 유혹(14-20)을 묘사합니다. 21-23절에서는 젊은이에게 다시 주목하여 음녀의 꾐에 넘어간 파국적인 모습을 그립니다. 아버지는 창문을 통해 길거리를 내려다보다 한 젊은이를 보았습니다. 이 젊은이는 ‘어리석은 자’, ‘젊은이’, ‘지혜 없는 자’로 소개됩니다(7). 미성숙하고 판단력이 없는 자로서 잘 속아 넘어가는 자이며 아버지의 훈계 따위는 관심을 두지 않는 미련한 자입니다. 이 젊은이는 마을의 거리를 지나 음녀가 사는 골목을 따라 음녀의 집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음녀의 집을 찾아가는 이런 모습은 그가 음녀를 우연히 만난 것이 아니라 이미 음녀를 알고 있었고 뿐만 아니라 그녀의 집까지 알고 있었음을 드러냅니다. 거리와 골목 모퉁이를 지나 음녀의 집에 이르기까지 순조롭게 이어지는 방문은 이것이 젊은이의 자의적인 방문임을 알려주고 그 과정에 주저함 없는 단호함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경험 있고 현명한 아버지의 눈으로 봤을 때 이 젊은이의 발걸음은 죽음의 길을 자처하는 발걸음(22-23)이며, 이는 어리석고 지혜가 없는 자입니다. 한편, 이 젊은이가 음녀를 찾아간 때는 어둡고 캄캄한 밤입니다. 이 말은 문자 그대로 범죄가 일어나는 때가 사람의 눈을 피하기 쉬운 밤중임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죄짓는 자의 영적 상태가 밤과 같이 어둡고 죄에 대해 예민하지 못하다는 뜻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지키면 그 말씀이 우리를 지켜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향한 말씀이 들리지 않을 때만큼 자신의 영혼이 위험한 상황은 없습니다. 때로는 직접적인 교훈으로, 때로는 완곡한 이야기로 세상의 악함과 우리의 지혜 없음을 일깨우실 때 어떻게 반응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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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15-01)

 


욕심으로 반란을 일으킨 압살롬

사무엘하 15장 1-12절


 

공동체를 세우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반대로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입니다. 구성원들이 함께 깨어 공동체를 지키지 않으면 거짓과 미혹의 영은 순식간에 모두를 어둠에 빠트립니다. 공동체를 무너지게 하는 요인들에는 어떤 것이 있으며 어떤 점을 주의해야 합니까?

 

압살롬의 반란이 시작되었습니다. 압살롬은 오십 명의 친위부대를 조직한 뒤에 그 사람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특히 압살롬은 다윗 왕에게 재판을 받으러 오는 사람들을 가로채서 자신이 재판하고, 다윗 왕이 백성과 접촉하지 못하도록 가로막았습니다. 4년 동안 이렇게 하면서 백성들의 지지를 확보한 후에, 다윗의 허락을 받아 헤브론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반란을 일으키니, 많은 사람이 모이는데, 아히도벨도 합류하였습니다.

 

반역을 위한 준비 기간(1-6)

하나님의 공동체인 교회를 통해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인정받으려 하는 자를 경계해야 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심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자아 성취의 장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뜻을 이뤄 가는 그분의 몸입니다. 교회는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 하는 자를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한 자들을 지도자로 세우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1그 후에 압살롬이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말들을 준비하고 호위병 오십 명을 그 앞에 세우니라 2압살롬이 일찍이 일어나 성문 길 곁에 서서 어떤 사람이든지 송사가 있어 왕에게 재판을 청하러 올 때에 그 사람을 불러 이르되 너는 어느 성읍 사람이냐 하니 그 사람의 대답이 종은 이스라엘 아무 지파에 속하였나이다 하면 3압살롬이 그에게 이르기를 보라 네 일이 옳고 바르다마는 네 송사를 들을 사람을 왕께서 세우지 아니하셨다 하고 4또 압살롬이 이르기를 내가 이 땅에서 재판관이 되고 누구든지 송사나 재판할 일이 있어 내게로 오는 자에게 내가 정의 베풀기를 원하노라 하고 5사람이 가까이 와서 그에게 절하려 하면 압살롬이 손을 펴서 그 사람을 붙들고 그에게 입을 맞추니 6이스라엘 무리 중에 왕께 재판을 청하러 오는 자들마다 압살롬의 행함이 이와 같아서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압살롬이 훔치니라(1-6)

 

압살롬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 위해 철저한 반역을 준비했습니다. 그는 백성들의 애로사항을 잘 들어 주며, 만일 자기가 왕이 되어 재판장이 되면 이스라엘에게 공의를 베풀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심지어 자신 앞에 엎드려 경의를 표하는 자들의 손을 잡아 주고 입을 맞추기까지 하며 환심을 샀습니다.

 

(1) 친위 부대 조직(1)

압살롬은 다윗과 만나고 나서 왕권을 차지하기 위한 수순을 밟기 시작합니다. 비록 형식적인 만남이었고 자간의 관계를 회복한 것은 아니지만, 대외적으로 왕으로부터 사면을 받고 왕자의 지위를 회복한 것으로 보이게 행동합니다. 장자 암논이 죽었기에 그가 왕위 계승 서열 1위였습니다. 압살롬은 자신에게 왕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것과 왕자로서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 병거와 말들과 50명의 호위병을 앞세워 어디를 갈 때든지 대동하고 다녔습니다. 아버지의 지지를 받지 못할 것을 알았기에 백성의 지지를 받아 반역을 도모하려고 마음먹은 것입니다.

 

(2) 다윗에 대한 흑색선전(2-3)

압살롬이 반역을 위해 준비한 또 한 가지 일은 다윗에게 재판을 받으러 오는 사람들을 가로채는 것이었습니다. 압살롬은 일찍 일어나 성문 길가에서 서성이다가 왕에게 재판을 요청하러 오는 사람이 있으면 불러 어디 출신이냐고 물어본 뒤에 그 사람이 압살롬에게 대답하면 그 사람의 편을 들면서 다윗 왕은 그의 송사를 들을 사람을 세우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왕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전쟁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것이요, 또 하나는 백성의 송사를 지혜롭게 재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왕위에 오르자 하나님께 백성들을 잘 재판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그런데 압살롬은 다윗이 너무 바빠서 직접 재판할 수 없고 대신 재판할 다른 사람도 세우지 않은 상태라고 말함으로써 다윗이 재판관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암시를 주어 간접적으로 비난한 것입니다. 또 왕에게 가더라도 바빠서 제대로 옳고 그름을 판결할 수 없을 것이란 인상도 줍니다.

 

(3) 백성들의 친구가 된 압살롬(4-6)

이렇게 다윗을 험담한 뒤 4절부터는 자신에 대한 자랑을 시작합니다. 자신을 재판관으로 세우면 사람들이 재판을 받기 위해 올 것이고 자신은 그들에게 정의를 베풀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해서 아쉽다고 이야기합니다.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에게 당신이 옳다고 말해주어 자기편으로 삼은 뒤, 자신이 왕이 되면 당신이 옳다는 정의로운 판결을 내릴 것인데 왕이 아니어서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을 왕으로 지지해달라고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압살롬이 백성들에게 한 또 다른 행동이 있습니다. 사람이 가까이 와서 왕자인 그에게 절을 하며 예를 표하려고 하면 손을 뻗어 절을 하지 못하게 하고 오히려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절을 하는 것은 군신 간의 예를 표하는 것으로 압살롬은 이런 행동을 사양하고 대신 친구나 친척들 간에 친밀하게 나누는 인사인 끌어안고 입을 맞추는 행동을 함으로써 친근감을 준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행동을 한 번만 한 것이 아니라 왕에게 재판을 받기 위해서 오는 사람들에게 한결같이 하였고,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압살롬을 따르기 시작합니다. 압살롬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훔친 것입니다.

압살롬에게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만한 조건이 충분했습니다. 첫째, 그의 외모는 아름다웠습니다. 아름다운 외모는 사람들에게서 호감을 얻기에 유리한 조건이었다. 둘째, 그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송사하러 온 백성들의 편을 들어주고 왕자로서 거만하게 행동하지 않고 매우 친근하고 편안하게 다가갔습니다. 이런 행동들은 매우 계산되고 정치적인 것들이지만, 백성들에게 효과적이었고 결국 많은 사람들이 압살롬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압살롬이 백성들과 끌어안고 입을 맞춘 것처럼 다윗이 돌아온 압살롬을 친근하게 대했다면 압살롬이 다윗을 향해 반역을 일으켰을지 의문입니다.

 

헤브론으로 간 압살롬(7-9)

성도는 경건을 의익의 방도로 이용해서는 안 됩니다. 스스로 경건한 척하며 사람을 속이고 무언가를 얻어내려고 하는 것만큼 가증스러운 것도 없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하는 연기는 언젠가 연기처럼 다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그 어떤 위선과 가식도 통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정직한 자에 의해서 세워져야 합니다.

 

7사 년 만에 압살롬이 왕께 아뢰되 내가 여호와께 서원한 것이 있사오니 청하건대 내가 헤브론에 가서 그 서원을 이루게 하소서 8당신의 종이 아람 그술에 있을 때에 서원하기를 만일 여호와께서 반드시 나를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시면 내가 여호와를 섬기리이다 하였나이다 9왕이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하니 그가 일어나 헤브론으로 가니라(7-9)

 

자신의 힘으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싶은 압살롬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이스라엘의 왕 다윗을 속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속이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압살롬이 반역하려는 왕 다윗은 자신을 사랑하는 아버지였습니다. 다윗은 사랑하는 아들의 계략을 전혀 눈치재지 못했습니다.

 

(1) 압살롬의 요청(7-8)

이렇게 압살롬이 백성들의 마음을 훔치면서 예루살렘에서 4년을 지냈고 어느 정도 힘을 얻게 되자 압살롬은 반역을 위한 구체적인 행동에 들어갑니다. 먼저 다윗에게 헤브론에 가서 자신이 여호와께 서원한 것을 갚겠으니 보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술에 있는 동안 여호와께서 자신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시면 여호와를 섬기겠다고 서원하였다고 합니다.

이 서원의 내용에는 이중적 의미가 있는데, 첫째는 자신이 무사히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으니 서원을 갚을 의무가 있으며, 그것은 자신이 헤브론으로 가야 하는 강력한 이유가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자신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된 것은 요압이나 드고아 여인의 계획 때문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도우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압살롬은 자신이 돌아온 것이 여호와의 뜻이었다고 다윗을 설득하여 압살롬에 대한 부담과 불안한 마음을 내려놓게 한 것입니다. 이런 압살롬의 설득에 다윗은 평안히 가라는 승낙을 해주었으며, 압살롬은 헤브론으로 향합니다.

 

(2) 다윗의 허락(9)

이번에도 다윗은 암논 때와 마찬가지로 압살롬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에는 암이 목숨을 잃었다면 이번에는 다윗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번에도 어리석은 결정을 한 것입니다. 이렇게 다윗은 자식 문제에 있어서는 여전히 지혜로운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지 않으셨기 때문이며, 이것이 다윗에게 내려진 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벌하실 때는 소극적인 방법과 적극적인 방법을 모두 사용하십니다. 직접 개입하지 않고 악한 본성과 마음의 욕심대로 살도록 내버려 두실 때도 있고, 적극적으로 재앙을 내려서 벌하실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후자를 더 두려워하고, 어려움을 만나면 하나님의 벌일지 모른다고 여기며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더 무서운 벌은 우리의 어리석음을 따라 살도록 내버려 두시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때는 자신이 벌을 받고 있다는 사실도 모를 수 있으며, 회개할 기회마저 얻지 못하고 죄의 흐름에 따라 흘러가다 멸망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악한 행동을 하는데 아무 제재가 없다면 혹시 나를 내버리신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할 것입니다. 압살롬이 헤브론으로 간 것은 그곳이 유다 지파의 본거지이자 다윗이 처음 왕권을 얻었던 곳으로 다윗의 후계자로서의 모습을 부각시키기 좋은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헤브론에서 반역을 도모하는 압살롬(10-12)

교회의 기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교회는 말씀에 기초해 나가야 합니다. 압살롬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자신의 나라만을 생각하며 하나님 나라를 외면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열매인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떠나면 더 이상 하나님 나라와 상관이 없이 세상의 공동체가 되어 버립니다.

 

10이에 압살롬이 정탐을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에 두루 보내 이르기를 너희는 나팔 소리를 듣거든 곧 말하기를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다 하라 하니라 11그 때 청함을 받은 이백 명이 압살롬과 함께 예루살렘에서부터 헤브론으로 내려갔으니 그들은 압살롬이 꾸민 그 모든 일을 알지 못하고 그저 따라가기만 한 사람들이라 12제사 드릴 때에 압살롬이 사람을 보내 다윗의 모사 길로 사람 아히도벨을 그의 성읍 길로에서 청하여 온지라 반역하는 일이 커가매 압살롬에게로 돌아오는 백성이 많아지니라(10-12)

 

압살롬은 정탐을 보내 각 지파의 동향을 살피고 200명을 헤브론으로 데리고 가서 나라의 근간을 형성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모사인 아히도벨까지 데려왔습니다. 이처럼 압살롬은 사람들을 의지해서 모든 일을 진행했습니다. 압살롬이 세우려는 나라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사람의 나라였습니다.

 

(1) 선동하는 압살롬(10)

다윗의 허락을 얻은 압살롬은 온 이스라엘에 정탐꾼을 보내어 나팔 소리가 나면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다고 외치라고 합니다. 미리 사람들을 심어놓고 언론 플레이를 하여 자신이 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온 이스라엘에 재빨리 알리려고 준비한 것입니다.

 

(2) 초청받은 사람들(11)

헤브론으로 가면서 200명의 손님을 데리고 갑니다. 이들은 갈 때는 모르고 갔지만 후에 압살롬을 지지하게 되는데 예루살렘이 아닌 헤브론에서 압살롬의 군사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상태에서 압살롬에게 대항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압살롬은 이들을 볼모이자 지지 세력으로 삼기 위해 헤브론으로 데리고 간 것입니다.

 

(3) 모여드는 사람들(12)

마지막으로 그는 사람을 보내서 다윗의 참모인 길로 사람 아히도벨을 데려옵니다. 표면적으로는 제사에 손님으로 초청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모사로 부리려고 초청한 것입니다. 이에 아히도벨은 압살롬의 편에 서게 됩니다. 그런데 아히도벨은 밧세바의 할아버지이며 다윗과 인척 관계에 있는 사람인데, 왜 다윗을 버리고 압살롬의 편에 섰는지는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아히도벨의 등장으로 압살롬의 반란은 다윗이 밧세바와 간통하고 그녀의 남편 우리아를 죽인 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드러납니다. 아히도벨이 다윗의 반대편에 선 이유가 아히도벨은 다윗이 자신의 손녀 딸과 간통하고 손녀사위인 우리아를 죽인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은 아닌가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모사까지 얻은 압살롬의 반역이 구체화되었고, 그를 지지하는 백성들도 점점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주께서 피 값을 주고 사신 교회가 분란과 혼란에 빠지는 것은 애통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많은 교회들이 사탄에게 속아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는 미리 사탄의 계략을 분별하고, 거짓과 이간, 분열과 다툼으로부터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말씀 안에서 분별력을 길러야 합니다. 삶의 목적뿐 아니라 그것을 성취하는 방법도 하나님의 뜻에 거스르지 않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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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06-02)


영혼을 망치는 죄에 대한 지혜

잠언 6장 20-35절


현대 사회는 소위 중독 사회입니다. 우리 사회는 각종 중독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5대 중독 퇴치를 위한 범국민운동과 법 제정이 거론되고 있지만, 그것은 인간의 내밀한 욕망을 간파하지 못한 임시방편일 뿐 궁극적인 해법은 될 수 없습니다. 중독은 중독을 통해서 치유됩니다. 빛이 어둠을 몰아내듯, 선한 중독이 악한 중독을 몰아냅니다. 지금 나는 무엇에 취해 있고 무엇에 침잠되어 있습니까?

 

음녀의 아름다운 외모와 눈짓과 달콤한 말에 유혹을 받고 간음을 저지르는 자는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가는 것입니다. 간음의 끝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받게 될 수치와 능욕과 후회뿐입니다. 부모의 훈계를 저버리고 지혜로운 인도를 받지 않는다면 귀한 생명까지도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버지 강연(9) : 간음하는 여인을 피하라(20-35)

성경 없는 세상엔 의 기준도 없습니다. 이 성경을 묵상하지 않고서 유혹 많은 세상을 이길 길은 없습니다. 그러니 어떤 상황에서도 말씀을 붙드는 신실함이 우리를 시험에서 이기게 해주고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말씀을 폐부 깊은 곳까지 거하게 하십시오. 환경이나 조건이 아니라 말씀에 대한 자기 태도가 내 현재와 미래를 결정할 것입니다.

 

20내 아들아 네 아비의 명령을 지키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고 21그것을 항상 네 마음에 새기며 네 목에 매라 22그것이 네가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네가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네가 깰 때에 너와 더불어 말하리니 23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24이것이 너를 지켜 악한 여인에게, 이방 여인의 혀로 호리는 말에 빠지지 않게 하리라 25네 마음에 그의 아름다움을 탐하지 말며 그 눈꺼풀에 홀리지 말라 26음녀로 말미암아 사람이 한 조각 떡만 남게 됨이며 음란한 여인은 귀한 생명을 사냥함이니라 27사람이 불을 품에 품고서야 어찌 그의 옷이 타지 아니하겠으며 28사람이 숯불을 밟고서야 어찌 그의 발이 데지 아니하겠느냐 29남의 아내와 통간하는 자도 이와 같을 것이라 그를 만지는 자마다 벌을 면하지 못하리라 30도둑이 만일 주릴 때에 배를 채우려고 도둑질하면 사람이 그를 멸시하지는 아니하려니와 31들키면 칠 배를 갚아야 하리니 심지어 자기 집에 있는 것을 다 내주게 되리라 32여인과 간음하는 자는 무지한 자라 이것을 행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망하게 하며 33상함과 능욕을 받고 부끄러움을 씻을 수 없게 되나니 34남편이 투기로 분노하여 원수 갚는 날에 용서하지 아니하고 35어떤 보상도 받지 아니하며 많은 선물을 줄지라도 듣지 아니하리라(20-35)

 

첫 모음집의 아홉째 교훈은 다시 간음의 어리석음과 위험을 경고합니다. 음란한 여인은 아름다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생명을 악탈하는 사냥꾼에 불과하며, 그 유혹에 넘어가 간음하는 자는 참혹한 대가를 될 것입니다.

 

(1) 내 말을 들어라(20-21)

잠언 6:20-35는 1-9장에서 ‘내 아들(들)아’로 시작하는 강연 중 아홉째에 해당합니다. 이 강연은 2:16-19과 5:1-23에 이어 음녀에 대한 경고를 담고 있습니다. 20-24절은 훈계를 들으라는 명령과 그것의 유익을 안내하는 서론 부분으로 볼 수 있습니다. 25-33절은 간음하는 여인을 피하라는 조언이고, 34-35절은 그 조언을 듣지 않은 자들이 받을 심판에 관한 내용입니다. 아들을 불러 주목하게 하고 언급하는 아버지의 첫마디는 다른 강연에서와 마찬가지로 “내 말을 듣고 지키라 ”입니다. 여기 20절에서는 특히 1:8과 같이 아버지의 명령만이 아니라 어머니의 법을 함께 언급하며 자식을 훈계로 양육하는 것이 아버지만의 의무가 아니라 어머니와 공동 책임이 있음을 드러냅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부모가 주는 명령을 항상 마음에 새기고 목에 매라고 명령합니다. 이러한 명령은 잠언 3:1-3이나 7:1-3에서 나오는 명령과 유사합니다. 이 구절들은 지혜의 말씀을 마치 반지나 목걸이처럼 자신의 신체에 달고 다니면서 그 지혜의 조언을 떠올림으로써 궁극적으로 말씀대로 하는 삶을 살도록 종용합니다. 이처럼 말씀을 몸에 붙이고 다니면서까지 순종하라는 명령은 잠언의 새로운 명령이 아니며, 이미 신명기 6:6-9에서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 명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6절 바로 전에 나오는 4-5절의 말씀입니다. 4-5절의 말씀은 순종과 결부되어 있으며, 순종 이전에 하나님의 백성이 미리 깨닫고 행해야 할 부분입니다.

먼저 하나님이 한 분이신 여호와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삶의 우선순위에 두지 말라는 말이며, 하나님 명령이 인간이 따라야 할 최선이며 최고의 명령임을 내포합니다. 둘째로, 이런 하나님을 모든 마음과 모든 성품과 모든 힘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진정한 마음으로 내 모든 것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며 순종할 때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순종이 됩니다. 속 빈 강정이나 로봇처럼 진실한 마음과 태도 없이 기계적이고 형식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면 도리어 책망을 받을 것입니다(암 5:4-6; 미 6:-8).

위와 같이 하나님이 나 자신에게 어떤 분인지를 먼저 인식하고 그 하나님을 전적으로 사랑하며, 또 계속 사랑과 충성을 바칠 것을 다짐하며 6-9절의 말씀을 새겨들어야 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을 먼저 마음에 새겨 그 말씀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순종하려는 결단을 내리라고 격려하십니다. 자신이 먼저 그 말씀이 어떤 내용인지 알지 못하거나 행하지 않고서 자녀에게 가르친다면 그 가르침은 거짓이며 위선이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을 손목에 매거나 미간에 붙이고 집의 문설주와 대문에도 붙여 하나님의 말씀을 어디에서든 기억할 수 있도록 하라고 강조하십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집에서든 나가서든 누웠을 때든 일어났을 때든 부지런히 자녀에게 반복해서 말해야 합니다. 신명기 6:6-7에서 잘 나타나, 잠언 6:20의 자녀를 향한 부모의 명령은 단순히 부모의 지식과 경험의 전수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하신 말씀의 전수입니다. 부모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또한 자기 자녀들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도록 그것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부모의 의무이며 하나님에 대한 순종의 표현입니다.

 

(2) 훈계는 생명의 길이다(22-24)

아버지와 어머니의 훈계는 우리의 삶에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는 부모의 명령과 법이 여호와 경외를 근본으로 하는 지혜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낮에 활동할 때에는 훈계하며 바른 길로 인도받게 되며, 밤에 잘 때는 보호를 받고, 깨어 있을 때는 계속적으로 그 훈계를 되새김질할 수 있습니다. 부모의 이러한 훈계와 책망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녀의 삶 전체를 조명하고 규제하고 인도하는 등불과 빛이 되어 생명의 길로 인도하도록 한몫을 담당합니다. 여기서 아버지가 명령과 훈계를 등불과 빛을 넘어 생명으로 연결하는 이유는 이제부터 언급될 음행이나 간음의 결과가 생명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전하는 지혜로운 조언을 힘입는다면 아들은 악하고 음란한 여인의 부드럽고 매혹적인 말에 빠지지 않고 생명을 보존할 수 있게 됩니다. 6장의 음녀는 스스로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규제를 받지 않는 여자로서 자기의 악하고 음란한 성품을 이용하여 남자를 꾀는 자이며 신앙과 윤리를 버리고 간음을 자행하는 자입니다.

 

(3) 간음하는 여인을 피하라(25-33)

25-33절은 아버지의 강연 가장 핵심 부분으로서 ‘간음하는 여인을 피하라’는 명령을 중점적으로 다룹니다. 아버지는 먼저, 음녀의 겉모습을 보고 마음에 정욕을 품지 말라고 아들에게 경고합니다. 음녀는 부드러운 말로 상대의 비위를 맞출 뿐 아니라 아름답게 꾸민 모습과 매혹적인 눈짓으로 상대를 유혹합니다. 남자들이 여자의 이러한 육체적인 아름다움에 취약하므로 그런 모습에 쉽게 유혹되지 않도록 아버지는 아들에게 강한 어조로 말하고 있습니다.

26절에서 아버지는 창녀와 유부녀에 대한 대조를 통해 아들로 하여금 음행이나 간음에 빠지지 않도록 권고합니다. 이 구절은 두 개의 다른 번역이 가능하며 이에 따른 각각의 해석이 제시됩니다. 하나는 음녀의 유혹에 넘어간 자는 재산을 탕진하여 그에게 빵 한 조각만 남게 되고 유부녀와 음행을 저지른 자는 귀한 생명을 잃는다는 해석입니다. 다른 하나는 창녀에게 가는 자는 그녀에게 빵 한 조각만 지불해도 되지만 유부녀와 간음한다면 목숨을 대가로 지불해야 한다는 해석입니다. 두 해석 모두 음행과 간음의 심각성과 대가를 지적합니다.

불을 갖고 놀면 몸에 화상을 입거나 옷을 태우게 되듯이, 남의 아내와 간음을 저지르거나 그녀를 만지기만 해도 그 일로 인해 정죄를 당하고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됩니다. 앞서 5:7-14에서 음녀의 유혹에 빠진 자가 받는 피해를 설명하였듯이, 간음하는 자도 자신의 지위, 명성, 재물, 건강, 신앙 등에 타격을 입고 사회적으로도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 뻔합니다. 아버지는 간음한 사람을 도둑과 비교하여 그가 도둑보다 훨씬 어리석고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배가 고파서 물건을 훔치는 일은 어리석은 행동이며 죄인 것이 확실하지만, 사람들은 그 도둑에게 동정심을 느껴 그를 멸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간음하는 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사람들의 동정과 이해를 받을 길이 없습니다. 수치와 능욕과 패망과 죽음과 같은 치명적인 결과가 그를 기다릴 뿐입니다.

성경은 한 남자가 다른 남자의 아내를 취하는 행동이나 다른 여러 형태의 간음을 자신과 타인의 가정을 해치는 행위로 여깁니다. 첫째, 이는 후손을 생산할 권리와 땅을 적절한 후손에게 물려줄 권리를 해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출 20:14). 둘째, 간음은 당사자 모두를 정결에서 떠나 부정하게 만듭니다(레 18:20). 셋째, 간음은 개인만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사는 땅(공동체)을 부정하게 만드는 요인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의 여러 족속을 심판하려고 하신 이유 중에 간음을 비롯한 성적 문란도 포함되었습니다(레 18:24-25).

 

(4) 경고와 결론(34-35)

남의 아내와 간음한 자는 그녀의 남편 질투와 분노로 인해 어떤 용서나 이해도 받을 수 없습니다. 누구의 물건을 훔쳤다면 그에게 배상하거나 용서를 빌 수 있고 화난 사람에게는 선물을 주어 마음을 누그러뜨리기도 할 수 있지만 배신당하고 상처받은 남편의 분노를 진정시킬 길은 없습니다.

 


 

말씀의 지배를 받지 못하면 욕망의 지배를 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말씀의 유익과 욕망의 결과를 대조하여 무엇을 품고 살아야 하는지 도전하고 있습니다. 지금 말씀의 빛을 따라 거룩한 길을 걷고 있는지, 아니면 '욕망의 불을 품고 부정한 길을 가고 있는지 묻고 있습니다. 말씀을 대면할 때 우리가 피해야 할 길과 걸어가야 할 길을 제대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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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14-02)


다윗에게 화해하려고 시도하는 압살롬

사무엘하 14장 21-33절


 

결속력이 강한 공동체일수록 지도자의 카리스마가 돋보입니다. 공동체의 일치에 지도자의 역량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도자가 원하는 대로만 작동되면 부작용도 생길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부작용을 방지하기 위한 요소나 대책은 없겟습니까? 있다면 어떤 것이 필요하겠습니까?

 

암논이 죽은 지 3년 정도가 흐르자 다윗이 압살롬을 그리워하는 줄 안 요압은 드고아의 지혜로운 여인을 불러 왕 앞에서 연극을 하게 합니다. 다윗은 드고아의 여인 이야기가 사실인 줄 알고 살인한 아들의 죄를 용서해 주었고, 드고아의 여인은 이를 이용하여 압살롬을 용서하는 것에 대해 언급하며 용서가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다윗은 이 모든 계획이 요압에게서 나온 것인 줄 알았지만, 압살롬을 보고 싶은 마음에 못이기는 체하며 압살롬을 예루살렘으로 부릅니다.

 

압살롬의 예루살렘의 귀환(21-24)

사막을 지나던 낙타와 그 주인이 있었습니다. 추운 밤이 되자 텐트 안에 있는 주인에게 낙타가 춥다면서 텐트에 머리만이라도 집어넣으면 안 되겠느냐고 했습니다. 주인이 허락하자 이번에는 앞다리까지 들어가게 해 달라고 했고, 그것도 허락하자 결국은 낙타가 텐트 안으로 들어와 텐트가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정죄 받아야 할 압살롬의 복권을 허락했지만, 결국 이런 결정 때문에 왕국 전체가 위기를 맞고 맙니다.

 

21왕이 요압에게 이르되 내가 이 일을 허락하였으니 가서 청년 압살롬을 데려오라 하니라 22요압이 땅에 엎드려 절하고 왕을 위하여 복을 빌고 요압이 이르되 내 주 왕이여 종의 구함을 왕이 허락하시니 종이 왕 앞에서 은혜 입은 줄을 오늘 아나이다 하고 23요압이 일어나 그술로 가서 압살롬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오니 24왕이 이르되 그를 그의 집으로 물러가게 하여 내 얼굴을 볼 수 없게 하라 하매 압살롬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니라(21-24)

 

죄에 대해 임시방편으로 해결하려 하거나 모르는 척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다윗은 압살롬의 귀환을 허락했지만 그를 만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공의를 집행하지 않은 책임을 회피하려 했습니다. 지도자가 임시방편으로 일을 처리하다 보면 나중에 더 안 좋은 결과를 맞게 됩니다.

 

(1) 다윗의 명령(21)

다윗은 드고아 여인의 일이 요압의 계획이었다는 사실을 안 후 요압에게 어떤 책망이나 언급도 하지 않고 압살롬을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압살롬을 그만 용서하고 데리고 오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요압의 암묵적인 제안을 못 이기는 척하고 받아준 것입니다. 요압은 다윗의 가장 아쉬운 부분을 가장 효과적으로 챙겨준 셈입니다. 여기서 압살롬을 ‘나의 아들’이라고 부르지 않고 ‘소년’이라고 한 것은 압살롬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기 위한 것입니다.

 

(2) 요압의 감사(22)

다윗의 명을 받은 요압은 다윗에게 엎드려 절하며 감사의 인사를 하는데, 이것은 자신의 계략에 대해 화내지 않고 받아주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요압은 압살롬을 매우 그리워하는 다윗의 마음을 알고 있었기에 다윗이 자신의 계획대로 움직일 것이라는 예측을 하고 이런 일을 벌인 것일 뿐 다윗의 미움을 받을 각오를 하고 벌인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요압은 형식적으로 다윗이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어 압살롬을 데리고 오는 모양새를 갖추기 위해 자신의 요청을 받아주어서 감사하다고 인사합니다. 여기서 요압은 압살롬의 후견인을 자처하는 모양새를 보이고 있습니다.

 

(3) 예루살렘에 귀환(23-24)

다윗의 허락을 받은 요압은 그술로 가서 압살롬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다윗은 압살롬을 왕궁으로 오지 못하게 하고 보지도 않습니다. 암논을 죽인 죄는 용서하였지만, 왕자 지위를 회복시켜줄 생각은 없었던 것입니다.

 

압살롬에 대한 소개(25-27)

교회가 공의가 아닌 자기 이익을 추구할 때 오히려 손해 볼뿐만 아니라 전체에 타격을 줄 수 있습니다. 교회는 공의보다 자기 이익을 추구할 때 오히려 손해를 보게 됩니다. 사소한 이익을 얻으려는 자로 인해 교회의 정체성이 위협받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공의를 추구해야만 진정한 유익을 얻게 됩니다.

 

25온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압살롬 같이 아름다움으로 크게 칭찬 받는 자가 없었으니 그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음이라 26그의 머리털이 무거우므로 연말마다 깎았으며 그의 머리 털을 깎을 때에 그것을 달아본즉 그의 머리털이 왕의 저울로 이백 세겔이었더라 27압살롬이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딸의 이름은 다말이라 그는 얼굴이 아름다운 여자더라(25-27)

 

이 단락은 이제부터 사건의 중심이 되는 압살롬에 대해 설명합니다. 압살롬의 특징은 아름다운 외모와 긴 머리카락입니다. 온 이스라엘에서 압살롬과 비교될 자가 없었고, 바바락에서 정수리까지 어떤 흠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의 탁월한 외모는 딸 다말을 통해서도 드러날 정도였습니다.

 

(1) 압살롬의 인기(25)

25절에서 압살롬의 외모에 대해 이스라엘에서 가장 아름다운 남자라고 소개합니다. 여기서 압살롬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우 칭송을 받는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압살롬이 백성들에게 매우 매력적인 인물로 보였음을 의미합니다.

압살롬은 그의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전혀 흠이 없었습니다. 이 표현은 주로 제사장들이 몸에 아무런 흠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데 쓰이는데, 여기서는 압살롬의 완벽한 외모를 표현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구약에서 특별히 아름다운 외모를 말하는 경우는 본문에서 그 외모가 특별한 역할을 하는 경우입니다.

아비가일의 경우는 다윗의 호의를 얻는 데 유리한 역할을 하였고, 다말의 경우는 암논에게 강간당한 이유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여기서 압살롬의 아름다운 외모는 그가 백성들의 지지를 얻는 데 매우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합니다.

 

(2) 아름다운 머리카락(26)

압살롬의 외모 중 가장 특별한 것은 그의 머리카락입니다. 압살롬은 유난히 머리숱이 많고 긴 머리카락을 지녔는데 일 년 동안 자란 머리카락의 무게가 1킬로그램이 넘었습니다. 이것은 머리카락이 길고 숱도 많을 뿐 아니라 굵기도 굵고 아름다웠다는 것인데, 검고 숱 많은 머리가 압살롬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압살롬의 머리카락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는 것은 사무엘하 18:9에서 그가 풍성하고 긴 머리 때문에 죽게 되는데, 그 배경 지식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3) 압살롬이 자녀들(27)

압살롬은 자식도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두었는데, 그 딸의 이름은 다말이고 매우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습니다. 딸이 특별히 소개된 것은 이름과 외모가 암논에게 강간당한 다말과 같기 때문으로, 이것은 그가 불행한 누이를 기억하기 위해 붙인 이름으로 생각됩니다. 후에 사무엘하 18:18에서는 아들이 없다고 언급되고 있는데, 아마도 세 아들은 압살롬이 죽기 전에 죽은 것으로 보이며 딸 다말 만이 살아남아 그의 누이 다말의 불행을 기억하게 하였던 것 같습니다.

 

다윗과 만난 압살롬(28-33)

죄가 공동체에 들어오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죄를 보면서도 문책하지 않으면 결국 큰 혼란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해 임시방편으로 해결하려 하거나 모르는 척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지도자가 임시방편으로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안일하게 일을 처리하면 나중에는 더 안 좋은 결과를 맞이하기 때문입니다.

 

28압살롬이 이태 동안 예루살렘에 있으되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29압살롬이 요압을 왕께 보내려 하여 압살롬이 요압에게 사람을 보내 부르되 그에게 오지 아니하고 또 다시 그에게 보내되 오지 아니하는지라 30압살롬이 자기의 종들에게 이르되 보라 요압의 밭이 내 밭 근처에 있고 거기 보리가 있으니 가서 불을 지르라 하니라 압살롬의 종들이 그 밭에 불을 질렀더니 31요압이 일어나 압살롬의 집으로 가서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네 종들이 내 밭에 불을 질렀느냐 하니 32압살롬이 요압에게 대답하되 내가 일찍이 사람을 네게 보내 너를 이리로 오라고 청한 것은 내가 너를 왕께 보내 아뢰게 하기를 어찌하여 내가 그술에서 돌아오게 되었나이까 이 때까지 거기에 있는 것이 내게 나았으리이다 하려 함이로라 이제는 네가 나로 하여금 왕의 얼굴을 볼 수 있게 하라 내가 만일 죄가 있으면 왕이 나를 죽이시는 것이 옳으니라 하는지라 33요압이 왕께 나아가서 그에게 아뢰매 왕이 압살롬을 부르니 그가 왕께 나아가 그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어 그에게 절하매 왕이 압살롬과 입을 맞추니라(28-33)

 

다윗은 압살롬의 귀환을 허락했습니다. 요압에게 기만당한 것을 알고도 그를 엄중히 문책하지 않았습니다. 요압은 다윗이 압살롬의 귀환을 허락하자 그술 땅에 있는 압살롬이 돌아오는 것을 허락했지만 그를 보지 않겠다는 임시방편의 결정을 내렸습니다.

 

(1) 외면당한 압살롬(28)

압살롬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지 2년이 지나도록 아버지 다윗이 자신을 부르지 않자, 압살롬은 요압을 왕에게 보내어 자신을 만나달라고 요청하려고 하였지만, 압살롬을 만나는 것을 원치 않은 요압은 두 번이나 거절합니다. 압살롬을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한 것으로 자신의 역할은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요압이 압살롬을 예루살렘으로 부른 것은 압살롬의 지위를 회복시켜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다윗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서였기 때문에, 현재 다윗이 압살롬을 무시하는 상황에서 자신이 나서서 둘의 만남을 주선하여 왕의 심기를 거스를 필요가 없고 생각한 것입니다. 다윗은 압살롬이 그술에 있을 때는 압살롬을 많이 그리워했지만, 막상 압살롬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자 압살롬을 만나주지도 않았으며, 암논의 살인에 대해 하나님께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라고 권면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압살롬을 혼내거나 처벌하지도 않고 그냥 내버려 두었습니다. 다말이 강간당했을 때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은 것처럼, 이번에도 다윗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2년 동안 압살롬을 무시합니다. 그런데 이런 무시하는 다윗의 태도는 다윗에 대한 압살롬의 반감을 더욱 키웠고, 결국 2년이 지나면서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심한 것으로 보입니다.

 

(2) 요압을 만나는 압살롬(29-32)

압살롬이 요압에게 다윗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할 때는 이미 반란을 결심한 것으로 보입니다. 다윗을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자신이 다윗의 재판을 가로채서 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항상 자녀들이 일으킨 문제에 침묵하였고, 그 침묵은 다윗과 자녀들에게 최악의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다윗이 침묵한 이유가 자신도 암논과 같이 성적인 범죄를 저질렀고, 압살롬처럼 살인죄를 저질렀으므로 자식들의 죄를 처벌하기 어려웠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결국 다윗은 자신이 저지른 죄로 인해 자식들을 제대로 훈육하지 못했고, 집안에 비극이 이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내린 형벌이었습니다. 

압살롬은 자신을 만나주지 않는 요압을 강제적으로 만나기 위해 종들을 시켜 요압의 보리밭에 불을 지릅니다. 그러자 요압이 일어나 압살롬의 집으로 가서는 왜 자신의 밭에 불을 질렀느냐고 항의합니다. 요압은 다윗과 압살롬 사이를 더는 중재하고 싶지 않았지만, 압살롬이 계속해서 자기 밭에 불을 지르면 손해가 커질 수 있어서 부득불 압살롬의 집으로 온 것입니다. 압살롬은 자신의 집에 온 요압에게 자신이 이전에 종을 보내 요압을 만나려고 했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그를 부른 목적을 말합니다. 압살롬은 왕에게 자신의 말을 전해달라고 요압에게 부탁합니다. 압살롬이 다윗에게 하고 싶은 말은 무엇입니까? 왜 자신을 그술에서 돌아오게 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현재 처지를 생각하면 차라리 그술에 있는 것이 나았을 것이라는 말을 전해주길 원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으면서 다윗에게 외면당하고 없는 사람 취급당하는 상황이 도망자로 그술에서 살던 때보다 더 치욕적이고 힘들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요압에게 자신이 왕의 얼굴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합니다. 자신이 죄가 있다면 기꺼이 왕의 심판을 받고 죽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무시를 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만나서 다윗이 내린 처벌을 받고 죽는 것이 낫겠고, 그러려면 일단 다윗을 만나야 죽임을 당하든 용서를 받든 양단간에 결정이 내려질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압살롬은 속으로는 다윗이 자신을 죽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신을 죽일 만큼 미워하거나 심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예루살렘으로 부르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3) 다윗을 만나는 압살롬(33)

압살롬의 말을 들은 요압은 다윗에게 나아가 압살롬의 말을 전합니다. 그때서야 다윗은 압살롬을 궁으로 부릅니다. 압살롬은 다윗을 만났을 때 땅에 엎드려 절하였고, 다윗은 압살롬에게 입을 맞춥니다. 이들의 만남은 매우 형식적인 인사일 뿐 화해와 용서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본문에는 서로 간에 나눈 한마디 말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5년 만의 만남이 매우 냉랭하고 형식적이었음을 의미하며, 다윗은 아직도 압살롬을 용서하지도 않고 심판하지도 않는 어정쩡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결국 다윗과 압살롬의 만남은 둘 사이에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있다는 것만 확인한 것으로 이 만남 이후 압살롬은 반란을 일으킬 준비를 합니다.

 

 


사적인 관계에서부터 국가 간 공적인 관계에 이르기까지, 깨진 관계를 복원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다시 복원한다는 것은 많은 인내와 시간이 필요하며, 시의적절한 지혜와 노력이 요구됩니다. 힘들다고 포기하거나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 나라의 정신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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