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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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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징계를 통해 회복된 다윗

사무엘하 1215-31


사랑의 매란 것은 사랑하기 때문에 훈계하기 위해 매질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잘못했다 하더라도 사랑의 매는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징벌하는 사랑의 매는 감정적인 화풀이를 하는 경우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매는 영혼을 살리는 축복의 사인입니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자신이 저지른 간통죄와 살인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을 듣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살인죄에 대해서 다윗의 집안에 칼이 영원히 머물 것이라고 선언하시고 다윗의 간통죄에 대해서는 다윗의 아내들이 백주에 강간당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심판 선언에 다윗이 잘못을 회개하였지만, 여호와께서는 그의 목숨은 살려주시고 왕위는 지켜주시지만 태어날 아기가 죽을 것을 선언하십니다.

 

밧세바의 첫째 아들(15-23)

징계도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어떤 분은 징계가 무슨 축복이냐?’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는 줄을 마음에 생각하라’(8:5)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기 때문에 바로 되라고 채찍을 때리십니다.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아버지가 당신을 사랑하시니까 이렇게 징계하신 것입니다.

 

15나단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우리아의 아내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시매 심히 앓는지라 16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되 다윗이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 17그 집의 늙은 자들이 그 곁에 서서 다윗을 땅에서 일으키려 하되 왕이 듣지 아니하고 그들과 더불어 먹지도 아니하더라 18이레 만에 그 아이가 죽으니라 그러나 다윗의 신하들이 아이가 죽은 것을 왕에게 아뢰기를 두려워하니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아이가 살았을 때에 우리가 그에게 말하여도 왕이 그 말을 듣지 아니하셨나니 어떻게 그 아이가 죽은 것을 그에게 아뢸 수 있으랴 왕이 상심하시리로다 함이라 19다윗이 그의 신하들이 서로 수군거리는 것을 보고 그 아이가 죽은 줄을 다윗이 깨닫고 그의 신하들에게 묻되 아이가 죽었느냐 하니 대답하되 죽었나이다 하는지라 20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왕궁으로 돌아와 명령하여 음식을 그 앞에 차리게 하고 먹은지라 21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는 그를 위하여 금식하고 우시더니 죽은 후에는 일어나서 잡수시니 이 일이 어찌 됨이니이까 하니 22이르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거니와 23지금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하니라(15-23)

다윗은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난 아이가 죽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그 아이가 죽기 전까지는 사력을 다해서 기도합니다. 식음을 전폐한 채 아무 말도 듣지 않고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1) 아들을 위한 다윗의 기도(15-17)

나단은 다윗이 밧세바에게서 얻은 아이가 죽을 것이라고 선언하였고(12:14), 그 선고대로 밧세바가 낳은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셨고 병에 걸리게 하셨습니다. 밧세바를 우리아의 아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것은 밧세바가 다윗의 아이를 가졌을 때 우리아의 아내였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자신의 죄로 인해 아기가 병에 걸리자, 다윗은 하나님의 궤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 금식하며 땅에 엎드려 밤새 살려달라고 간구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할 때 종종 금식기도를 하였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간절히 기도하면 혹 하나님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아기를 살려주시지 않을까 기대한 것입니다. 이때 다윗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시편 32편과 51편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17절은 다윗이 얼마나 간절하고 강경하게 기도하였는지를 설명합니다. 왕궁의 노인들, 즉 중신들이 다윗을 일으키려고 하였지만, 다윗은 일어나려고 하지 않았고 식사도 하지 않았습니다.

 

(2) 아들의 죽음(18-19)

다윗의 이런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밧세바에게서 난 아이는 병에 걸린 지, 칠 일 만에 죽고 맙니다. 다윗의 신하들은 이 사실을 다윗에게 보고하기를 두려워했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금식하며 기도하였을 때, 그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신 경우가 거의 없었습니다. 히스기야의 기도도 들어주셔서 그의 생명을 연장해주셨고, 심지어 나봇을 죽인 아합도 겸비하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의 목숨을 살려주셨습니다. 니느웨도 금식하며 겸비할 때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간절한 기도는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회개에 목숨을 살려주는 것으로 용서하시고, 더 이상의 용서는 허락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죄를 심각하게 보셨고, 그 죄에 대해 책임지도록 심판을 면제해 주지 않으신 것입니다. 다윗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도 없지만, 회개했는데도 다윗처럼 철저하게 하나님께 벌을 다 받은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회개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죄에 대한 책임까지 모두 없애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자녀에서 끊어지지 않고 계속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안에 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안에서 우리의 죄에 대한 책임을 감당할 때, 더 성숙하고 성화된 모습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다윗이 간절하게 기도했는데도 아기가 죽자 신하들은 다윗의 상심이 극심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아이의 죽음을 다윗에게 알리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신하들이 수군거리는 것을 보고 아이가 죽은 것을 알게 되었고, 신하들을 통해 아이가 죽은 것을 확인합니다. 다윗은 아이가 죽은 것을 확인하자 일어나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 경배한 후 다시 식사하기 시작합니다. 아이가 죽자 다윗이 금식과 애도의 행동을 멈추고 일상적인 모습으로 돌아온 것에 대해 신하들은 어떻게 된 것인지 궁금해합니다. 이에 대해 다윗은 자신이 금식하고 울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불쌍히 여기시고 마음을 돌려 아이를 살려주지 않으실까 생각했는데, 이제 죽었으니 금식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요청하는 것이지만 그 기도를 들어주실지는 하나님만 결정하실 수 있습니다. 다윗이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지 누가 알겠느냐?’라고 말한 것은 모든 결과를 하나님의 손에 맡겼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는 밧세바와의 간통 이후에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았고 말씀에 순종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단을 통해 하나님 심판의 말씀을 들은 후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의 주권을 온전히 인정하게 되었고, 그 결과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이를 죽이신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솔로몬의 탄생(24-25)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매를 때리실 뿐 아니라 회복의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가장 혹독한 심판 가운데서도 자기 백성을 향한 주의 은총과 평안을 주시려는 자비는 중단하지 않습니다. 어려운 시기에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주십니다. 다윗과 밧세바가 가장 고통스러워했던 시기에 위로의 선물을 주십니다.

 

24다윗이 그의 아내 밧세바를 위로하고 그에게 들어가 그와 동침하였더니 그가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25선지자 나단을 보내 그의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이더라(24-25)

하나님께 징계를 받았다고 낙심에 빠져 있을 수 없습니다. 아픔을 딛고,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징계는 아프고 쓰라리나 우리를 새롭게 합니다. 그 손길을 겸허히 수용할 때, 한층 더 성숙함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새로운 선물을 안겨주십니다.

 

(1) 여호와의 사랑을 받은 솔로몬(24)

아이를 잃은 후에 다윗은 그의 아내 밧세바를 위로하였는데, 여기서 밧세바를 다윗의 아내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제 밧세바가 정식으로 다윗의 아내로 인정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정식으로 아내가 된 밧세바와 동침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새로운 아들을 주셨는데 그가 솔로몬’입니. 솔로몬이란 이름은 평화란 뜻의 샬롬에서 유래하였습니다.

 

(2) 여디디야(25)

여호와께서 솔로몬을 사랑하셔서 나단을 보내어 특별히 여디디야라는 이름을 주십니다. 여디디야는 여호와의 사랑을 받는 자라는 뜻으로, 이제는 다윗의 죄를 용서하신다는 표시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간통죄와 살인죄라는 끔찍하고 비열한 죄를 지은 다윗은 아이를 잃는 벌을 받았지만 새로운 아이를 하나님께 얻음으로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자로 회복하게 된 것입니다.

 

암몬의 랍바를 점령함(26-31)

징계 가운데 낙담하고 있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두려워하고 더 멀리하도록 우리를 징계하신 것입니다. 징계의 아픔을 딛고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다면 반드시 복된 날이 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결국 하나님은 가장 복된 결과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항상 순종하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6요압이 암몬 자손의 랍바를 쳐서 그 왕성을 점령하매 27요압이 전령을 다윗에게 보내 이르되 내가 랍바 곧 물들의 성읍을 쳐서 점령하였으니 28이제 왕은 그 백성의 남은 군사를 모아 그 성에 맞서 진 치고 이 성읍을 쳐서 점령하소서 내가 이 성읍을 점령하면 이 성읍이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을까 두려워하나이다 하니 29다윗이 모든 군사를 모아 랍바로 가서 그 곳을 쳐서 점령하고 30그 왕의 머리에서 보석 박힌 왕관을 가져오니 그 중량이 금 한 달란트라 다윗이 자기의 머리에 쓰니라 다윗이 또 그 성읍에서 노략한 물건을 무수히 내오고 31그 안에 있는 백성들을 끌어내어 톱질과 써레질과 철도끼질과 벽돌구이를 그들에게 하게 하니라 암몬 자손의 모든 성읍을 이같이 하고 다윗과 모든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니라(26-31)

간음과 살인의 죄는 다윗 생애에서 가장 지우고 싶은 치명적인 불명예스러운 행적입니다. 이는 앞으로 닥칠 연속적인 불행의 싸앗이었지만, 이 넘어짐은 다윗을 교만과 나태의 짐에서 깨워 다시 골리앗을 상대한 당시에 기도의 영성으로 회복시켜주십니다.

 

(1) 요압의 전공(26-28)

이 단락은 암몬과의 전쟁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10장에서 시작된 암몬과의 전쟁은 밧세바와 간통 사건을 일으킨 시기에도 계속되었고,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는 암몬과의 전투 중에 사망하였습니다. 이 부분은 시간적으로 우리아가 죽은 지 얼마 뒤에 일어난 일이지만, 대략 2년 이상 걸린 다윗의 간통 사건에 집중하기 위해 암몬과의 전쟁에 대한 기록을 잠시 미루어 두었다가 다윗의 간통 사건을 끝낸 후에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시간의 흐름으로 볼 때 회상에 해당합니다.

26절은 랍바 점령에 대한 요약 부분으로 요압은 암몬과의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암몬의 수도 랍바를 점령합니다. 요압은 랍바를 완전히 점령하기 전에 다윗에게 사람을 보내어 남은 군사를 모아 전쟁터에 나올 것을 요청합니다. 만일 다윗이 오지 않았는데 자신이 성읍을 점령하면 그 도성은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성을 취한 모든 공적이 요압에게 돌아간다는 의미입니다. 현재 요압은 다윗에게 매우 충성스러운 인물로 우리아를 죽이라는 다윗의 명령에 대해서도 이유를 묻거나 반대하지 않고 그대로 따랐는데, 여기서도 전쟁의 모든 공적을 다윗에게 돌리려 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는 다윗에게 충성하기 위해서라면 하나님 보시기에 의한 행동도 서슴없이 할 수 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2) 다윗의 참전(29)

다윗은 모든 군사를 이끌고 랍바로 갔습니다. 그곳을 쳐서 성공적으로 점령하였습니다. “모든 군사는 요압의 군대를 제외하고 남은 군사들을 가리킵니다. 다윗은 이미 요압에 의해 거의 점령된 랍바 성을 최종적으로 포위하고 공격하였을 것입니다. 그곳에서 많은 전리품을 얻었습니다.

 

(3) 전리품과 포로(30-31)

다윗은 왕관을 취하여 자신의 머리에 썼는데, 그 왕관은 금 한 달란트(대략 30kg)와 보석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평소에 쓰는 관이 아니라 왕권을 상징하는 상징물로 사용되는 것이었습니다. 머리에 썼다는 것도 암몬의 왕권을 폐하고 자신이 암몬을 다스리는 왕이 되었음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31절에서 다윗이 암몬 자손의 포로들에게 여러 가지 강제 노역을 시키는 것으로 우리 성경에서는 해석하고 있지만, 히브리어 본문을 직역하면 그들을 톱 아래 두었고 써레질과 철도끼질 아래 두었고 벽돌 가마로 지나가게 하였다로 다윗이 매우 끔찍한 방법으로 암몬 사람들을 죽인 것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는 이 해석을 많이 지지하였지만, 최근에는 다윗이 강제 노역을 시킨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적당하다는 견해가 더 많은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이후로 암몬은 다윗 왕국의 속국이 되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다윗은 모든 군사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사무엘하 8장의 전쟁과는 달리 다윗이 전쟁에서 얻은 노획물들을 여호와의 전에 드렸다는 말이 없습니다. 대신 가장 값진 노획물인 왕관을 다윗이 가졌다는 기록만 있습니다. 이것은 전쟁 당시 다윗의 영적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때 다윗은 승리의 영광을 여호와께 돌리지 않고 자신이 그 영광을 차지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윗처럼 사람은 성공을 하거나 어떤 지위에 오르면, 하나님을 쉽게 잊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모두 자신의 공적으로 돌리며 교만해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오늘 주신 것에 감사하고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며 기도하고 하나님과 늘 동행하며 살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때로 잘못을 징계하여 바로잡으십니다. 징계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들로 대하시는 대표적인 표징입니다(12:8). 어떠한 경우에라도 한결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 해주시길 원합니다. 죄를 회개하는 사람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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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05-01)


음행을 멀리하고 아내를 사랑하라

잠언 5장 1-23절


가정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자마자 세워주신 최초의 공동체입니다. 인간이 범죄하기도 전에 말입니다. 그래서 가정은 천국의 모형 또는 지상의 천국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런 말도 있습니다. 화성에서 온 남자하고 금성에서 온 여자가 만나 지구에서 사는 게 결혼이라고 말입니다. 부부의 결혼 생활이 만만치 않다는 뜻입니다. 지상의 천국이어야 하는 가정이 부부가 하기에 따라서 도리어 지상의 지옥이 될 수도 있는 겁니다
 
달콤한 말로 속삭이는 음녀에게 유혹되어 음행을 저지른 자들은 그들의 교만과 악행에 적합한 비참한 결과를 맞게 됩니다. 음녀의 부정한 행동은 그녀 자신을 파멸과 죽음으로 재촉하기 때문에, 그녀의 꾐에 넘어간 자들은 같은 운명에 처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혜 있는 자는 자신의 아내에게만 집중하여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아버지 강연(08) : 내 명철에 귀 기울여라(1-2)

꿀처럼 달콤하고 기름처럼 미끄러운 음녀의 입술을 조심하라고 합니다. 실은 쑥같이 쓰고 칼같이 날카롭기 때문입니다. 지혜에 주의하고 명철에 귀를 기울이고 근신을 지킬 때, 생명의 평탄한 길을 걸을 수 있지만, 음녀는 우리를 사지로 인도합니다.
 
1내 아들아 내 지혜에 주의하며 내 명철에 네 귀를 기울여서 2근신을 지키며 네 입술로 지식을 지키도록 하라(1-2)
잠언 5장은 ‘내 아들아’로 시작하는 아버지의 강연 중 여덟째로 ‘음녀를 피하고 아내를 사랑하라’라는 주제를 중점적으로 다룹니다. 음녀에 대한 경고는 잠언 1-9장에서 자주 언급되는 주제입니다(2:16-19; 5:1-23; 6:20~35; 7:1-27; 19:13-18). 음녀와 아내는 대부분 육체적 관계로 묘사되지만, 우매와 지혜의 의인화된 모습으로도 이해해야 합니다. 즉,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면으로 이해함과 동시에 영적이고 신앙적인 면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4장에서는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이라는 두 길의 특징과 그 최후를 제시하며 아버지가 아들에게 지혜와 우매 사이에서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 요구하듯, 5장에서는 ‘음녀’와 ‘여인’의 대조를 통하여 아들에게 같은 요구를 반복합니다. 아버지는 여느 강연에서처럼 ‘내 아들아’라고 부르며 아들이 자신의 말에 주목하기를 명합니다. 이때 아버지는 자신의 말을 지혜와 명철로 지칭하는데 이는 그의 말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의 말씀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지혜와 명철의 말을 들으면 판단력(근신)과 지식을 간직할 수 있게 됩니다. 근신과 지식을 지키는 것은 생명과도 같습니다(3:21). 올바른 판단력은 우리를 악한 사람들로부터 보호하고 구해줍니다(2:11-19).
한편 2절의 ‘입술로 판단력과 지식을 간직하게 된다.’라는 표현은 제사장이 지식을 간직하여 그 입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듯이(말 2:7) 아들도 바른 판단력과 통찰력을 가지고 지혜의 말을 선언해야 함을 나타냅니다.
 

음녀에 대한 묘사(3-6)

음행의 유혹을 경계해야 합니다. 음녀의 유혹은 매우 달콤해서 쾌락을 자극하고, 악으로 달려가는 발길을 합리화하게 하며, 바른 판단력을 마비시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쑥처럼 쓰고 두 날 가진 칼처럼 예리한 상처를 남길 뿐입니다.
 
3대저 음녀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며 그의 입은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4나중은 쑥 같이 쓰고 두 날 가진 칼같이 날카로우며 5그의 발은 사지로 내려가며 그의 걸음은 스올로 나아가나니 6그는 생명의 평탄한 길을 찾지 못하며 자기 길이 든든하지 못하여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느니라(3-6)
이제 다룰 3-20절은 5장의 본론이며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부분(3-14)에서는 ‘음녀를 피하라’는 내용을 음녀에 대한 묘사(3-6)와 음녀를 피하지 않았을 때 치러야 할 대가(7-14)를 설명함으로써 구체화합니다. 둘째 부분(15-20절)에서는 음녀의 유혹을 막아낼 대안으로써 ‘아내를 사랑하라’라고 충고합니다. 아버지는 먼저, 겉과 속이 다른 음녀를 묘사함으로써 아들이 그녀의 실체를 직시할 수 있도록 조언합니다. 아들을 유혹하는 음녀는 20절에서처럼 ‘이방 계집’으로도 불리며(2:16; 5:20; 7:5), ‘젊은 시절의 남편을 배반하고 결혼 서약을 깬 자’(2:17), ‘유부녀’(6:26[‘음란한 계집’으로 번역됨), ‘남의 아내’(6:29; 7:19~20), ‘창녀’(6:26[‘음녀’로 번역됨]: 7:10) 등으로 소개되었습니다. 문맥상에서 볼 때 음녀는 ‘낯선 여자.’ ‘남의 여자,’ ‘음란한 여자’로서 도덕적으로나 관습적 테두리 밖에 있는 여자를 지칭합니다.
특히, 5장에서 음녀의 특징은 신체 중 입술과 발과 관련하여 기술되었습니다. 첫째, 음녀는 상대방의 기분을 좋게 하는 말로 그 사람을 유혹합니다. 꿀을 떨어뜨리는 입술이나 기름처럼 미끄러운 입이란 음녀의 달콤하고 듣기 좋은 소리를 가리킵니다. 음녀의 입술에서 나오는 달콤하고 속이는 말은 2절의 아들의 입술에서 나오는 지혜의 말과 대조됩니다. 아들의 말은 분별력 있고 생명을 가져오는 말이므로 자신과 남에게 유익을 줍니다. 그러나 음녀의 말은 처음에는 꿀처럼 달콤하지만, 나중에는 쑥처럼 쓴맛을 내며 양날 달린 칼처럼 잔인하고 치명적이어서 상대에게 심각한 타격을 입힙니다. 둘째, 음녀는 상대방을 사지로 내몰고 죽음으로 이끕니다. 그러므로 음녀나 그녀를 따라가는 자는 생명의 길을 찾을 수 없고, 가는 길에 방황하더라도 그것을 깨달을 분별력이 없으므로 결국 음부에 이르고야 맙니다.
 

음녀를 피하라(7-14)

음행은 모든 것을 빼앗습니다. 음녀의 매력은 강력하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와 결심만 믿고 가까이하다가는 넘어지기 쉽습니다. 유혹이 다가올 때는 요셉처럼 단호하게 뿌리치고 그 상황을 벗어나야 합니다(창 39:12). 혹시 지금 음행의 유혹을 받을 수 있는 환경에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7그런즉 아들들아 나에게 들으며 내 입의 말을 버리지 말고 8네 길을 그에게서 멀리 하라 그의 집 문에도 가까이 가지 말라 9두렵건대 네 존영이 남에게 잃어버리게 되며 네 수한이 잔인한 자에게 빼앗기게 될까 하노라 10두렵건대 타인이 네 재물로 충족하게 되며 네 수고한 것이 외인의 집에 있게 될까 하노라 11두렵건대 마지막에 이르러 네 몸, 네 육체가 쇠약할 때에 네가 한탄하여 12말하기를 내가 어찌하여 훈계를 싫어하며 내 마음이 꾸지람을 가벼이 여기고 13내 선생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며 나를 가르치는 이에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던고 14많은 무리들이 모인 중에서 큰 악에 빠지게 되었노라 하게 될까 염려하노라(7-14)
사망으로 이끄는 음녀에게 절대 다가가지 말아야 합니다. 아버지는 겉으로 보이는 음녀의 모습과 그녀의 실체를 설명한 후, 1-2절과 유사하게 다시금 ‘아들들’을 불러 주의를 집중시킵니다. 그리고 자기 말을 명심하여 음녀를 피하라고 아들들에게 신신당부합니다.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음녀를 멀리하고 그 근처에 얼씬거리지도 말라”고 명합니다. 왜 음녀를 피해야 합니까? 그것은 음녀를 가까이할 때 입게 되는 피해가 치명적이고 돌이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그 피해를 세 가지 즉, 명예, 재물, 육체와 관련해서 조목조목 설명합니다.
첫째, 음녀를 따라가는 자는 존영과 수한을 빼앗깁니다. 존영과 수한은 평생 쌓아온 지위, 명예, 명성을 의미하는데, 이것들을 하루아침에 그것도 포악한 자들에게 다 빼앗길 수 있습니다. 둘째, 애써서 모은 소유와 재물을 잃게 됩니다. 그 재산은 이제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게 됩니다. 셋째,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쇠진할 것입니다. 이같이 음녀의 유혹에 넘어가는 자는 사회적, 경제적, 육체적 고통을 당하여 뼈저린 후회를 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야 이 모든 고통의 원인이 자신이 스승의 훈계를 싫어하고 가볍게 여기며 무시한 데서 비롯되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불순종과 교만과 미련함의 결과로 개인적인 수치만이 아니라 공동체로부터 수치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아내를 사랑하라(15-20)

음행에 빠지지 않는 가장 좋은 길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배우자를 뜨겁고 신실하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혼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성적인 즐거움을 누리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울타리를 부정하고 무분별하게 쾌락을 추구해나갑니다.
 
15너는 네 우물에서 물을 마시며 네 샘에서 흐르는 물을 마시라 16어찌하여 네 샘물을 집 밖으로 넘치게 하며 네 도랑물을 거리로 흘러가게 하겠느냐 17그 물이 네게만 있게 하고 타인과 더불어 그것을 나누지 말라 18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19그는 사랑스러운 암사슴 같고 아름다운 암노루 같으니 너는 그의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의 사랑을 항상 연모하라 20내 아들아 어찌하여 음녀를 연모하겠으며 어찌하여 이방 계집의 가슴을 안겠느냐(15-20)
아버지는 아무 대책 없이 음녀를 피하라고만 권면하지 않습니다. 실제적으로 음녀의 유혹을 이겨내고 치명적인 피해를 입지 않기 위한 대안으로 아내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맺으라고 조언합니다.
15-16절에 나오는 ‘우물’과 ‘샘’ 그리고 ‘샘물’과 ‘도랑물’은 모두 ‘아내’를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단어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우기와 건기로 나뉘고 강우량이 적어 우물이나 샘에서 물의 근원을 찾는 일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내를 우물이나 샘으로 비유하여 아내가 남편에게 이와 같이 귀중한 존재임을 암시합니다. 또한, 물을 마심으로써 갈증을 해소하듯이 아내를 통해서만 성적 충족감을 얻으라는 암시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젊어서 취한 아내를 사랑스러운 암사슴과 암노루에 비유하며 항상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로부터 만족감을 얻으라고 거듭 독려합니다. 동시에 “이런 아내를 두고 어찌 음녀를 탐하려느냐?”라고 다그치며 음녀의 유혹과 위험에서 철저히 벗어나기를 한 번 더 명령합니다.
이처럼 잠언 5장에서는 실제 인간인 아내와 음녀를 대조하여 설명하지만, 그 이면에는 여전히 여인으로 의인화된 지혜와 우매에 대한 대조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지혜는 평생 사랑하고 품어야 할 아내로 여기고 대해야 하며 우매는 미련하고 음란한 음녀와 같음을 알고 매 순간 유혹의 속삭임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악인의 최후(21-23)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삶의 여정을 감찰하십니다. 사람의 행위와 마음의 숨은 동기까지 헤아리시기 때문에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악을 숨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 자기 악에 걸리고 죄의 줄에 매이게 하셔서 그가 저지른 죄의 대가를 치르게 하십니다.
 
21대저 사람의 길은 여호와의 눈 앞에 있나니 그가 그 사람의 모든 길을 평탄하게 하시느니라 22악인은 자기의 악에 걸리며 그 죄의 줄에 매이나니 23그는 훈계를 받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죽겠고 심히 미련함으로 말미암아 혼미하게 되느니라(21-23)
‘길’로 비유된 사람의 모든 행위는 하나님 앞에 다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길을 하나하나 주목하고 세심히 살피시며 어떤 길인지에 따라 마땅한 심판을 내리십니다. 악인의 경우, 다른 사람 때문에 죄악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정욕과 욕심과 우매함으로 인해 죄에 묶임을 당합니다. 특히 22-23절에서 말하는 악인에는 위에서 언급한 ‘음녀를 피하라’는 경고를 무시한 미련한 자도 포함됩니다. 한편, 악인이 덫에 걸리고 줄에 묶이는 비유는 1:17-19의 경고를 기억하게 합니다. 새도 자기 눈앞의 위험을 알고 피할 줄 알지만, 악인은 경고를 듣고도 자처하여 덫으로 들어감으로써 목숨을 잃게 되는 미련한 자입니다. 이처럼 훈계를 듣지 않고 교만하고 방자하게 행하는 자들은 그로 인해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시편 말씀이 생각납니다. “여호와께서 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시 127:1). 가정은 하나님께서 세우고 지켜주셔야 안전하고 천국으로 가꿀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을 이끌어 가정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배우자는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사람 맞습니다. 이런 믿음이 중요합니다. 또한, 배우자가 하는 것 기다려봐서 사랑하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이 그러하듯이 배우자를 먼저 아껴주고 먼저 사랑할 때 가정이 천국이 되어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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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04-02)


의인의 길, 바른 길의 지혜

잠언 410-27


인생은 길을 걷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내가 길을 만들기도 하고, 이미 존재하는 길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숱한 길이 있지만, 성경은 양자택일만 제시합니다.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 지혜로운 길과 미련한 길,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입니다. 빨리 가는 것보다 제대로 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멋지게 가는 것보다 올바르게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길을 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인생에서 우리는 두 길 사이에서 끊임없는 선택을 요구 받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잠언 기자는 결코 겹칠 수 없는 두 길을 제시하고, 생명의 길을 선택하기 위해서 마음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 중에 어느 길로 갈 것입니까? 아버지의 훈계와 가르침을 통해 지혜의 길로 인도받으면 의와 정직을 기본으로 한 삶에 분별력과 통찰력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악인이 추구하는 불의와 폭력의 죄악에 빠지지 않습니다. 훈계를 듣고 무엇보다 마음을 주의 깊게 살피면서 생명을 주는 바르고 의롭고 지혜로운 길로 계속 전진해야 합니다.

 

강연(06) : 지혜로운 길로 가라(10-19)

정직하고 의로운 길을 가라 지혜로운 자가 걷는 길은 정직한 길이고 의로운 길입니다. 그 길을 걸을 때 곤고하지 않고 실족하지 않을 수 있기에 결국 길게 생명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의인의 길은 한낮의 광명 아래서 걷는 것과 같기에 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초행이지만 안내 표지판이 잘 갖춰져 있고 친절하고 노련한 가이드를 곁에 두고 가는 여행이 참으로 안전하고 즐거운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걸려 넘어질 일도 없을 것입니다.

 

10내 아들아 들으라 내 말을 받으라 그리하면 네 생명의 해가 길리라 11내가 지혜로운 길을 네게 가르쳤으며 정직한 길로 너를 인도하였은즉 12다닐 때에 네 걸음이 곤고하지 아니하겠고 달려갈 때에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13훈계를 굳게 잡아 놓치지 말고 지키라 이것이 네 생명이니라 14사악한 자의 길에 들어가지 말며 악인의 길로 다니지 말지어다 15그의 길을 피하고 지나가지 말며 돌이켜 떠나갈지어다 16그들은 악을 행하지 못하면 자지 못하며 사람을 넘어뜨리지 못하면 잠이 오지 아니하며 17불의의 떡을 먹으며 강포의 술을 마심이니라 18의인의 길은 돋는 햇살 같아서 크게 빛나 한낮의 광명에 이르거니와 19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걸려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10-19)

분별력이 모자라서 일을 그르치지도 않을 것입니다. 정직하고 의로운 길이 당장에는 에둘러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장 빠르고 가장 안전하고 가장 확실한 결과가 보장된 길입니다. 고난으로 인한 숱한 예외도 있지만, 이것만큼 보편적인 질서도 없습니다.

 

(1) 지혜로운 길로 가라(10-13)

잠언 4:1-9의 아버지의 다섯째 강연에 이어, 오늘 본문은 여섯째(10-19)와 일곱째(20-27) 강연을 수록하였습니다. 먼저 10-19절의 강연은 악인과 의인의 길을 소개하며 악인의 길을 피하고 의인의 길로 가라는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다른 강연에서와 마찬가지로 아버지는 아들에게 내 말을 받으라며 조언을 시작합니다. 받으라는 표현은 귀로 듣는 것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그 말을 받아들이라는 요구입니다.

아버지의 말을 수용할 때 듣는 이는 장수하는 선물을 받습니다. 장수는 축복의 대표적인 예로 사용되었습니다. 장수는 순종으로 인한 선물만이 아니라 지혜를 얻거나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주어지는 선물로도 언급되었습니다(3:2; 19:11; 10:27). 또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명령을 행할 때에 주어지는 대표적인 약속으로 소개되었습니다(4:40; 5:16, 33; 6:2; 12:25; 22:7). 그러므로 여기서나 잠언의 다른 부분에서 나오는 아버지의 말은 단순히 아버지의 입에서 나오는 명령이 아니라 여호와 경외를 바탕으로 하는 지혜를 담고 있는 말이며 하나님의 명령을 담고 있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의 말을 경청하는 행동이 장수의 약속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한편, 아버지는 훈계를 통해 아들에게 지혜로운 길과 정직한 길을 가르치고 그 길로 인도합니다. 여기서 지혜로운 길은 정직한 길과 동일한 길이며 의인의 길의 다른 표현입니다. 정직한 길은 또한 구부러진 길(2:15)과 반대되는 곧은길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길에서는 장애물이나 어둠으로 인해 발걸음이 비틀거리거나 잘못 디뎌 넘어지지 않습니다. , 의와 정직을 기본으로 하는 지혜의 삶을 살 때 분별력이 없어서 일을 그르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아버지에 의해 지혜의 길로 인도받았으므로, 아버지의 훈계를 꽉 붙들어서 놓치지 말고 소중히 지켜야 합니다. 지혜와 훈계는 그것을 얻은 자에게 생명이 되므로(3:22; 4:22; 8:35) 어둠과 사망으로 가는 길에서 구해줍니다.

 

(2) 악인의 길을 피하라(14-17)

의인의 길로 계속 가기 위해서는 악인의 길을 피해야 합니다. 아버지는 지혜의 길로 인도받은 아들에게 이제 그 길과 정반대인 악인의 길을 언급합니다. 아버지는 아들로 하여금 어떻게 해서든지 그 길을 피하도록, 여섯 차례나 다른 표현을 써가며 다음과 같이 명령합니다: 그 길로 들어가지 말라”, “다니지 말라”, “피하라”, “지나가지 말라”, “돌이키라”, “떠나라.” 아버지가 악인의 길로 가지 말라고 이토록 강조하는 이유는 악인의 사악한 행동 양식을 통해 밝혀집니다.

첫째, 악인은 악을 저지르지 못해 안달하며 악을 저지르는 데에 집착하는 자들입니다(16). 그들은 악을 행하고 사람들에게 해코지를 하지 않고서는 잠도 오지 않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미가 선지자가 신랄하게 비판했던 이스라엘의 권력자들에게서도 발견됩니다. 그들은 잠자리에서 사악한 일을 궁리하고 악을 꾀하다가 아침이 밝으면 남의 밭이나 집을 빼앗는 등 지난밤에 계획한 악을 실천합니다(2:1-2). 그런데 그들이 밤새 궁리한 악을 실행할 수 있었던 것은 소위 가진 자로서 자기들의 재물과 권세와 지위를 이용했기 때문입니다. 잠언이나 미가서에서 기술하는 이 악한 자들의 행위는 하나님의 성소를 짓기 위한 장소를 찾을 때까지 졸음이나 잠을 쫓겠다고 한 다윗의 행동과 대조됩니다(132:3-5).

둘째, 악인의 삶은 불의와 폭력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불의의 빵을 먹고 강포의 포도주를 마신다(17)는 말은 이중적인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 악인이 불의와 폭력을 밥 먹듯이 저지른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고 악인이 불의와 폭력으로 얻은 소득으로 번창한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습니다.

 

(3)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18-19)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 중에서 어느 길을 택할 것입니까? 두 길은 4:10-17에서 지혜와 곧은 길 또는 죄악과 폭력의 길로 소개되며 대조되었지만, 이 길들은 또한 각각 지혜의 길과 우매의 길입니다. 아버지는 이제 두 길에 대한 결론을 제시하며, 아들이 지혜로운 가르침을 받아 지혜의 길로 들어섰으므로 앞으로도 부단히 그 길로 가고 어떤 일이 있어도 죄와 우매가 가득한 악인의 길로 가지 않도록 격려합니다.

먼저, 의인의 길은 빛입니다. 의인은 인도와 보호를 받으므로 그들의 삶은 마치 해가 뜨기 시작하여 점점 그 빛이 환해지고 정점에 올라 세상에 따스함과 빛을 선사하듯 자기뿐 아니라 다른 자들도 의의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그에 반해, 악인의 길은 어둠입니다. 정직한 길을 저버리고 거짓과 불의와 불공평의 어두운 길로 들어갑니다 (2:13). 그는 자신의 악한 행동에 대해 눈이 가려지고 판단력을 잃어 자신의 악행으로 인해 멸망을 당해도 그 원인이 자기 자신에게서 온 것임을 모르고 하나님의 섭리와 심판에 의한 것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아버지 강연(07) : 내 말에 귀 기울여라(20-27)

마음을 지키라 의롭고 정직한 지혜의 길을 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악인으로부터 우리 전 존재를 지키는 것입니다. 눈과 귀와 마음과 입, 눈꺼풀과 발 등 우리 모든 감각이 악인들의 그릇된 주장에 현혹되지 않도록 지켜야 합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가장 예민하게 가장 마지막까지 철저히 지켜야 하는 것은 마음입니다. 그 마음에서 생명의 근원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20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내가 말하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21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하지 말며 네 마음 속에 지키라 22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의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 23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24구부러진 말을 네 입에서 버리며 비뚤어진 말을 네 입술에서 멀리 하라 25네 눈은 바로 보며 네 눈꺼풀은 네 앞을 곧게 살펴 26네 발이 행할 길을 평탄하게 하며 네 모든 길을 든든히 하라 27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네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라(20-27)

악인의 길에 들어가지 말라 의인의 길이 있다면 악인의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그의 법을 경시하는 미련한 자의 길입니다. 탐욕이 지배하고 경쟁이 이끌고 이기심에 사로잡혀 분별력을 잃어버린 자의 길입니다. 그런 길에는 들어서지 말고 피해야 하고 이미 그 길에 들어섰다면 속히 돌이켜 떠나야 합니다.

 

(1) 내 말에 귀 기울여라(20-22)

20-27절은 아버지의 일곱째의 강연으로서, 10-19절의 여섯째 강연에 이어 계속 길에 대해 조언합니다. 이 강연은 바른 길로 걸어라라는 주제로 요약됩니다. 이 강연의 특징은 귀, , 마음, , 입술, 눈꺼풀, 발이라는 일곱 가지의 신체 기관을 언급하며, 아들이 훈계를 따라 바른 길로 가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아버지는 10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아들에게 자신의 훈계를 따르라고 명합니다. 특히 귀와 눈과 마음으로 자신의 말에 집중하고 떠나지 말라고 강력히 말합니다. 13절에서도 언급했듯이 아버지는 자기가 전하는 훈계가 그것을 찾는 자에게 생명이 된다고 말합니다. 앞서 3:228:35에서는 지혜가 생명이 된다고 설명했으므로 아버지의 훈계와 지혜가 연결됩니다. 여기 4:22에서는 생명이 영적, 정신적 치유만이 아니라 육체적 치유도 가져다준다고 덧붙입니다. 이러한 육체적 치유와 활력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않고 오직 여호와만 의지하는 자에게 제공되는 선물로 설명되기도 하였습니다(3:8). 이런 관련성을 종합해 볼 때 아버지의 훈계는 여호와를 신뢰하는 데서 나오는 지혜로운 조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를 수용하는 자는 영적, 정신적, 육체적 회복을 경험할 것입니다.

 

(2) 생명의 근원인 네 마음을 지켜라(23)

아버지는 아들에게 그 어떤 것보다 네 마음을 지키라고 충고합니다. 여기서 동사 지키다보호하다’, ‘관찰하다’, ‘감시하다를 뜻하므로 우리 마음을 살피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이렇게 조심스레 지켜야 하는 이유는 마음에서 생명의 근원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3) 바른 길로 걸어라(24-27)

강연의 마지막 부분인 24-27절은 마음을 살펴 바른길로 걸으라는 조언입니다. 23절의 마음을 지키는 일은 24-27절에서 말과 행동으로 연결됩니다. 만약 우리가 선한 것을 마음에 쌓아둔다면 입, , 발 등을 통해 선한 말과 태도와 행동이 나옵니다. 바른 길로 가기 위해서는 가치 없는 것에 눈길을 주지 말고 도덕적으로 신앙적으로 방해가 되는 것을 제거하여 길을 평탄케 해야 합니다. 또한 오로지 앞만 보고 걸어 바른 길에서 벗어나는 어떠한 길로도 치우치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14-17절에서 언급된 죄악과 폭력으로부터 발길을 끊어야 합니다.

 


마음으로부터 다른 모든 감각 기관들이 영향을 받으며, 또 다른 감각기관들로부터 들어오는 정보를 판단하고 분별하는 것도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지혜에 의해 장악될 때 우리는 온 존재로,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질서를 따라 복을 누리며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고 오직 그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에게 평탄한 길이 열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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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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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단 선지자에게 책망 당한 다윗

사무엘하 121-14


 

완벽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완전한 사람이란,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동시에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실수하고 잘못했을 때 그것을 깨닫고 돌이킬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완전한 사람은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나단 선지자는 다윗의 행동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나단은 한 부자가 자기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가난한 사람의 어린 양을 빼앗았다는 이야기를 다윗에게 전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다윗은 맹세하면서 그 부자를 죽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나단은 바로 그 부자가 다윗이라고 말하면서 여호와의 심판을 전했습니다.

 

나단의 비유(1-6)

죄의 근원은 탐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의 핵심인 탐심을 드러내시며 성도가 죄를 회개하고 더 이상 탐심을 따라 죄를 짓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죄 가운데 숨어 있는 탐심이 드러나 이를 회개하고 경계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1여호와께서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시니 그가 다윗에게 가서 그에게 이르되 한 성읍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부하고 한 사람은 가난하니 2그 부한 사람은 양과 소가 심히 많으나 3가난한 사람은 아무것도 없고 자기가 사서 기르는 작은 암양 새끼 한 마리뿐이라 그 암양 새끼는 그와 그의 자식과 함께 자라며 그가 먹는 것을 먹으며 그의 잔으로 마시며 그의 품에 누우므로 그에게는 딸처럼 되었거늘 4어떤 행인이 그 부자에게 오매 부자가 자기에게 온 행인을 위하여 자기의 양과 소를 아껴 잡지 아니하고 가난한 사람의 양 새끼를 빼앗아다가 자기에게 온 사람을 위하여 잡았나이다 하니 5다윗이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노하여 나단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그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6그가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이런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 새끼를 네 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 한지라(1-6)

다윗은 욕망에 눈먼 순간 우정이나 명예를 헌신짝처럼 내던졌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깨뜨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보내셨다는 사실만으로 사랑의 손을 내밉니다.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자만이 아니라 잘못을 돌이킬 줄 아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1) 부자와 가난한 자의 비유(1-3)

본문에 나오는 가난한 자와 부자의 이야기는 비유로 다윗과 우리아를 빗대어 만든 이야기이며, 다윗을 옭아매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다윗의 행위를 보고 계셨던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다윗에게 보내십니다.

나단은 다윗에게 한 사건에 대한 판단을 부탁하는 것처럼 하며 가난한 자와 부자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한 성읍에 부자인 사람과 가난한 사람이 있었는데, 부자는 양과 소가 심히 많은 반면 가난한 사람은 아무것도 없고 오직 사서 기르는 작은 암양 새끼가 한 마리 있었습니다. 암양은 숫양보다도 더 값이 싼 가축으로 가난한 사람은 가장 값싼 가축 한 마리만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심히 많은 소와 양을 가진 자와 극명한 대조를 보여주기 위한 장치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그 어린 양 한마리를 자기와 자기 자식들과 함께 살게 하면서 자신의 작은 빵 조각을 나누어 주고, 자신의 물그릇에서 물을 먹게 하며 자신의 몸에서 자게 하였습니다. 가난한 자는 어린 암양을 가축으로 대한 것이 아니라 거의 가족치럼 딸처럼 키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여행자가 부자에게 찾아오자 자신에게 온 여행자를 접대해야 하는 부자는 자신의 그 많은 가축 중에서 한 마리를 잡는 것도 아까워하였습니다. 고대 근동의 중요한 관습 중에는 주인이 여행자를 잘 대접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이 여행자를 잘 대접한 좋은 예입니다. 그래서 부자는 가난한 자의 암양 새끼를 빼앗아 자신에게 온 여행자를 대접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책임져야 할 여행자를 가난한 자의 한 마리밖에 없는, 그것도 딸같이 여기며 애지중지하던 새끼 양을 잡아 대접한 것입니다. 이것은 부자가 가난한 자에게서 힘으로 어린 암양을 빼앗아 왔음을 암시합니다. 이런 부자의 모습을 보고 매우 인색하고 자비심이 없으며 비열한 인간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이 비유는 나단이 다윗에게 쳐놓은 일종의 덫입니다. 나단은 다윗의 악질적이고 비열한 행동을 부자가 가난한 자를 심하게 착취하며 악하게 행동하는 것에 비유하였습니다.

 

(2) 부자의 횡포(4)

여기서 나단이 부자의 모습을 심히 악질적이고 비열하게 묘사한 이유는 두 가지 때문입니다. 첫째는 다윗의 행위가 이 부자처럼 악질적이고 비열하다는 것을 다윗과 독자들에게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둘째는 다윗의 분노를 일으키기 위한 것으로 다윗이 부자에게 몹시 화를 내고 심한 처벌을 내릴수록 다윗은 자신의 죄의 심각성에서 빠져나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가 부자에게 심하게 화를 낼수록 그리고 심하게 처벌할수록 다윗의 죄는 더욱 심각하고 무겁게 다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드러내게 됩니다.

 

(3) 다윗의 반응(5-6)

나단 선지자의 말을 들은 다윗은 그 부자에 대해 매우 화를 냅니다. 그리고 이 일을 행한 사람에 대해 다윗은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며 죽어 마땅한 자라고 선언합니다.

다윗은 이 부자가 자신을 가리키는 줄도 모르고 천하에 죽일 놈이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한 것입니다. 이 표현은 사무엘상 20:31-32에서 사울이 다윗을 두고 한 말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사형을 선언하는 법정 용어가 아니라, 죽어 마땅할 만큼 악하고 해를 끼치는 인물이라는 뜻의 관용구입니다. 6절에서 다윗은 4절에서 자신의 것을 아끼느라 남의 것을 함부로 빼앗은 것을 지적하며 네 배로 배상해주라고 명령하는데, 이것은 출애굽기 22:1에서 양 한 마리에 양 네 마리로 보상하라고 한 법률을 따른 처결입니다.

다윗은 나단의 이야기가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자신의 범죄를 밝히기 위한 비유인 줄도 모르고 부자에 대해 분노하며 죽일 놈이라고 선언함으로써 나단이 쳐놓은 덫에 걸려들었습니다. 이렇게 나단이 곧바로 다윗의 죄를 지적하지 않고 부자와 가난한 자의 비유를 들어 다윗에게 덫을 놓은 이유는 다윗이 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직접적으로 간통과 살인죄를 지적하면 다윗이 인정하지 않고 사울처럼 변명하거나 나단을 죽여 입막음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다윗은 사울처럼 회개의 기회를 잃어버리게 되고 하나님께 용서를 받을 기회도 얻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이 자신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깨달아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회개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 이런 방법을 사용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심판(7-12)

죄의 근원은 구원과 모든 은사를 풍족히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얼마나 풍성하게 부족함 없는 은혜를 주셨는지를 기억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넘치게 허락하셨음에도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기억하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7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붓기 위하여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8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아내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 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9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냐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치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도다 10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11여호와께서 또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보라 내가 너와 네 집에 재앙을 일으키고 내가 네 눈앞에서 네 아내를 빼앗아 네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들이 네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12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온 이스라엘 앞에서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7-12)

나단은 비유를 통해 다윗이 죄를 깨닫고 회개하도록 유도합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사용하여 들을 귀 있는 자가 듣게 하셨습니다. 비유는 들을 귀하 없는 자는 깨닫지 못하는 반면, 듣고 깨닫는 자에게는 일반적 진술보다 몇 배의 충격을 가합니다.

 

(1) 여호와의 은혜(7-8)

나단은 다윗이 덫에 걸리자 곧바로 다윗을 옭아맵니다. 나단은 다윗에게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선언합니다. 다윗은 자신을 가난한 자와 동일시하고 부자의 죄에 대해 화를 내며 그에게 판결을 내렸을 것입니다. 당신이 죽일 놈이라고 선언한 그 사람이 바로 당신이라고 지적한 것입니다. 아마 다윗은 매우 당황스럽고 충격을 받았을 것이며 아무런 변명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필사적으로 숨기려 했던 죄를 나단 선지자가 알고 있다는 것에 당황했을 것입니다. 이런 다윗에게 나딘은 여호와의 말씀을 그대로 전합니다. 다윗을 왕으로 선택하고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사울의 모든 집과 아내들과 이스라엘과 유다를 주신 분이 바로 여호와라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 여호와 자신이 이스라엘과 다윗의 왕이심을 밝히십니다. 현재 다윗이 누리는 모든 지위와 힘과 재물은 모두 여호와께로부터 온 것이고 다윗은 여호와께서 세우신 종일 뿐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다윗에게 자신의 위치를 분명히 인식시켜주십니다.

 

(2) 다윗의 죄(9)

본문에서 다윗이 암몬 사람의 칼을 이용해 우리아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취하여 자신의 아내로 삼은 사실을 언급하시는데, 이것은 다윗이 필사적으로 숨기고 싶었던 모든 죄악들을 여호와께서 소상히 알고 계시며 다 보고 계셨다는 것을 다윗에게 알려주신 것입니다.

 

(3) 여호와의 심판(10-12)

이렇게 9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살인죄와 간통죄를 고발한 후에 10-12절에서 죄에 대한 심판을 하십니다. 첫째는 살인죄에 대한 심판으로 다윗의 집에서 영원히 칼이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다윗 왕가에 분란과 살인이 끊임없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으로 다윗이 우리아를 살해한 죄의 대가를 다윗의 집이 치르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간통죄에 대한 심판으로 여호와께서 다윗과 다윗의 집에 재앙을 일으키셔서 다윗의 치들을 다윗의 이웃들에게 주실 것이고, 그들은 대낮에 너의 차들과 동참할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다윗이 은밀하게 한 일에 대한 심판을 여호와께서는 모든 사람들 앞에 드러내놓고 하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다윗이 숨기려고 살인까지 한 것에 일침을 가하신 것입니다. 둘째 심판에서는 여호와께서 직접 분란을 일으키겠다고 말씀하시므로 이것은 더 심각한 심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살인과 간통에 대해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다윗의 회개(13-14)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오해한 채 즐겁지 않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종종 자신의 죄가 너무 크고 더러워 하나님께서 결코 용서하시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인하고 간음한 다윗을 용서하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 하나의 오해는 징계를 형벌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형벌하시면 그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13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14이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이 낳은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이다 하고(13-14)

다윗은 나단의 비유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 내용은 다윗의 범죄에 대한 엄혹한 징벌 예고였지만, 이에 다윗은 부정하지도, 가혹하다고 항의하지도 않았습니다. 다윗의 위대함이 여기에 있습니다.

 

(1) 회개와 용서(13)

하나님의 심판을 들은 다윗은 즉시 여호와께 범죄를 시인하며 용서를 구합니다. 이런 빠른 회개는 사울과 대조되는 것으로 사울은 죄를 지적받았을 때, 죄를 인정하지 않고 변명으로 일관하다가 용서의 기회를 놓쳤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즉시 죄를 시인하며 용서를 구하였고 여호와께서는 다윗을 용서하시어 다윗을 버리거나 죽이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다윗의 죄는 죽음으로 갚아야 할 죄인데, 하나님께서 다윗이 회개하므로 목숨은 살려주신 것입니다.

 

(2) 아들의 죽음 예고(14)

14절에서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다는 것은 다윗의 죄로 인해 여호와의 명성이 크게 훼손되었다는 것으로 다윗은 여호와의 종이기 때문에 다윗의 잘못된 행동은 왕이신 여호와의 명예에도 영향을 준다는 것입니다. 비록 다윗을 용서하셔서 살려주기는 하셨지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선언하신 심판들은 하나도 거두지 않으시고 다윗집에 하나하나 실현되기 시작합니다.

 


니체는 규범이나 관습, 책임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을 초인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 죄로부터 돌이키는 인간을 완전한 사람, 성숙한 인간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면에서 다윗은 신앙인의 귀감이 되며, 위대한 믿음의 조상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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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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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를 얻고 그것을 떠나지 말라

잠언 41-9


사사기는 다음세대가 다른세대가 되었다고 탄식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신앙의 유산이 전수되지 않고 세상의 문화와 가치관에 자녀들의 영혼이 점령당했습니다. 우리의 현실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젊은이와 어린이들을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을 보면 조국 교회에 있는가 싶은 생각마저 듭니다. 그 이유는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전수해주지 못했거나 전수해줄 신앙의 유산이 없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어떠한 대가를 지불해서 라도 명철을 얻어야 합니다. 지혜는 그 정도로 귀하고 소중합니다. 지혜는 사랑의 대상이므로 지혜와 지혜를 찾는 자 사이에는 상호적인 관계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아들이 애써 찾은 여인을 아내로 맞아 평생 사랑하고 충성하며 보호할 의지를 가져야 하듯, 지혜를 아내로 삼아 평생 친밀한 사랑과 주고받는 관계를 지속하며 살아야 합니다.

 

아버지의 훈계를 들어라(1-2)

부모들이 지혜의 삶을 산다면, 자식들에게 잔소리하지 않더라도 그들은 부모님 지혜의 삶을 물려받고 싶어 할 것입니다. 부모들이 여전히 세상적인 지혜를 통해 자식들이 세속적인 성공을 얻기만을 바란다면 앞이 캄캄합니다. 부모는 자식들에게 삶과 교육으로 하나님의 지혜를 교육해서 자식들도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이어가야 합니다.

 

1아들들아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명철을 얻기에 주의하라 2내가 선한 도리를 너희에게 전하노니 내 법을 떠나지 말라(1-2)

본 장은 자식들을 가르치기 위한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솔로몬은 구체적으로 훈계를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훈계에 집중할 것을 간곡히 당부합니다. 이 가르침은 개인적인 교훈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소개합니다.

잠언 4장은 1~9장에서 내 아들()로 시작하는 열 번의 강연 중 다섯째(1-9), 여섯째(10-19), 일곱째(20-27)에 해당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각 강연은 지혜를 얻고 사랑하라’, ‘악인의 길을 피하고 의인의 길로 가라’, ‘바른 길로 걸어라의 주제를 논합니다.

다섯째 강연에 해당하는 4:1-9은 다른 강연에서와 달리 내 아들아가 아닌 복수형의 아들들아로 시작합니다.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자신의 훈계를 듣고 명철을 얻는 데에 주의를 온전히 기울이라고 명합니다. ‘~하라혹은 ‘~하지 말라는 훈계는 잔소리처럼 들리기 일쑤라 아들이 이를 무시하고 싶을 것임을 아버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할아버지로부터 전수 받은 지혜의 교훈(3-9)

지혜는 가장 먼저 얻어야 할 가치입니다.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가르침의 골자는 지혜가 제일이기에 지혜를 얻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인생의 안전과 생명을 보장하며, 무엇보다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 어떤 대가를 지불한다 해도 반드시 얻어야 할 가치입니다.

 

3나도 내 아버지에게 아들이었으며 내 어머니 보기에 유약한 외아들이었노라 4아버지가 내게 가르쳐 이르기를 내 말을 네 마음에 두라 내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살리라 5지혜를 얻으며 명철을 얻으라 내 입의 말을 잊지 말며 어기지 말라 6지혜를 버리지 말라 그가 너를 보호하리라 그를 사랑하라 그가 너를 지키리라 7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네가 얻은 모든 것을 가지고 명철을 얻을지니라 8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9그가 아름다운 관을 네 머리에 두겠고 영화로운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하셨느니라(3-9)

자기의 훈계를 잘 듣고 명철을 얻으라고 조언하는 아버지는 자기가 아들들에게 전하는 이 훈계가 다름 아닌 자신의 아버지에게서 직접 들은 명령이었음을 밝힙니다. 이와 같은 대를 잇는 자식 교육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고 강론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습니다(4:9-10; 6:7). 또한, 자녀들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하신 일에 대해 부모에게 질문함으로써 계속적으로 교육을 받도록 격려되었ㅅ브니다(32:7). 부모가 자식을 훈육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키우는 전통은 이처럼 이스라엘 가정에서 계속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자신도 부모에게 아들이었고 더구나 그는 부모가 보기에 연약하여 애지중지 보살핌 받은 외아들이었다고 말합니다. 아버지의 이러한 표현은 첫째, 그 자신과 부모 사이에 연대감이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그와 같은 연대감은 이제 아버지가 된 자신과 자기 아들들 사이에서도 이미 형성되었습니다. 둘째, 아버지는 부모로부터 각별한 애정과 관심 속에서 지혜의 교육을 받았음을 알려줍니다. 부모가 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자기가 부모에게서 받았던 것과 같이 애정과 관심으로 그들을 교육하려고 합니다.

4절부터 아버지는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전수 받은 지혜의 교훈을 아들들에게 전합니다. 4-9절에 이르는 할아버지 말씀의 첫마디는 자신의 말들을 마음으로 단단히 붙들고 그 명령들을 지키고 살라는 훈계입니다. 내 말을 듣고 지키라는 말은 이제 부모가 된 아버지가 아들들에게 주는 조언의 첫마디가 되었습니다(1). 여기만이 아니라 1~9장 사이에 나오는 강연은 모두 이와 같은 내용의 명령으로 시작합니다(1:8; 2:1; 3:1; 4:1,10,20; 5:1;6:20; 7:1; 참고로 둘째 강연[2:1-22)은 조건절로 시작하지만 내용은 같다).

5-9절은 지혜를 얻고 사랑하라로 요약됩니다. 이 명령과 더불어 지혜를 얻은 결과로 따라오는 유익을 나열하여 듣는 이를 격려합니다. 먼저, 지혜를 얻으라 명철을 얻으라는 명령은 5절과 7절에서 반복되어 무엇보다 지혜를 꼭 얻으라는 간절함을 드러냅니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에게 이 명령을 잊지 말고 또한 여기서 벗어나지 말도록 경고합니다. 자신이 전해주는 귀중한 지혜의 유산을 아들이 늘 기억하여 그 말에서 떠나지 않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지혜를 얻으라는 명령은 지혜를 버리지 말고 사랑하라는 내용으로 이어집니다. 지혜는 단순히 얻어야 할 대상만이 아니라 사랑해야 할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를 찾는 자는 지혜를 얻어 일시적인 유의을 누리는 데서 끝내려 하지 말고 지혜를 열렬히 사랑하고 끝까지 지켜야 합니다. 그러면 지혜가 그의 사랑과 충성에 대한 응답으로 그를 보호하고 살피고 지켜줄 것입니다. 지혜가 지혜를 얻은 자를 악한 남자와 악한 여자로부터 지켜주고 바른 길로 인도한다고 예시한 2:11-22이 그런 예의 하나입니다.

이처럼 6-9절에서 지혜는 신부와 아내처럼 비유되었습니다. 이는 아들이 평생 함께할 신붓감을 찾는 일이 중요하고 그녀를 애써 찾아야 할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심혈을 기울여 신부를 찾고 그녀를 아내로 맞아 평생토록 사랑해야 하듯 지혜를 얻고 지혜를 끝까지 버리지 말고 사랑하라고 조언합니다. 이처럼 여자로 의인화된 지혜는 1~9장의 아버지의 강연(및 잠언) 전체에 걸쳐 나옵니다. 특히 4-7장은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훈계로서 지혜의 여인과 미련하고 음란한 여인에 대한 대조를 통해 지혜의 귀중함과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8-9장은 여인으로 의인화된 지혜가 여호와 하나님과 긴밀한 관계가 있음을 부각하고 우매에서 벗어나 지혜를 얻으려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찾아야 함을 보여줍니다.

한편, 6절의 지혜를 버리지 말라지혜가 너를 지키리라(보호하리라'로 번역됨)라는 문장은 각각 2절의 내 법을 버리지(‘떠나지로 번역됨) 말라4절의 내 명령들을 지켜라라는 문장에서 사용된 동사를 반복함으로써 아버지의 말씀이 지혜로운 말씀이며 아버지의 말을 지키면 지혜를 얻어 그 지혜가 아들을 지킬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와 같은 연결을 통해 아버지의 말씀이 지혜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강조합니다. 7절의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는 문장은 지혜의 시작(근본)’은 이것입니다. ‘지혜를 얻으라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지혜가 최상이며 동시에 기본이라는 이중적인 의미가 함축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혜가 제일이며 최고이고 지혜의 시작은 바로 지혜를 얻는 시도와 노력에서 비롯되므로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으로 명철을 얻어야 합니다. 마치 밭에 숨긴 귀한 진주를 발견한 상인이 그 진주를 얻기 위해 모든 소유를 팔아 밭을 산 것처럼(13:45-46) 어떠한 대가를 지불해서라도 명철을 얻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지혜를 돈으로 사라고 부추기거나 지혜를 돈으로 살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재물에 대한 관심이 많고 그 가치를 잘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지혜가 온갖 재물을 바꿔서 얻을 만할 정도로 귀하고 소중하다는 점을 강화하려는 의도입니다.

한편, ‘지혜의 시작(근본)’이라는 번역은 1:7이나 9:10을 상기시켜, 지혜를 얻는 데에 여호와 경외가 빠질 수 없음을 떠올리게 합니다. 또한, 위의 지혜를 얻는 방법과 관련하여,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데, 그 대가의 시작이 바로 여호와 경외입니다. 3장에서 잘 보여주듯이 여호와 경외를 바탕으로 하나님(3:1-12)과 이웃(3:21-35)을 사랑한다면 그 자가 바로 지혜를 얻은 자라고 불릴 것입니다.

지혜를 얻은 자는 신부를 사랑하듯 사랑하고 또 그녀를 높여주며 품에 안아주어야 합니다. 지혜를 높이라는 말은 지혜에 최고의 가치와 의미를 두며 지혜를 귀하게 여기라는 뜻입니다. 지혜를 품에 안으라는 말은 이제 지혜와 친밀하고 상호적인 사랑을 주고받으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6절에서처럼 지혜가 그의 사랑에 화답하여, 자기를 높여준 그를 높여주고 존경하여 영화롭게 해줄 것입니다. 마치 신부를 간절히 찾아 드디어 결혼이 성사되는 날 신랑이 영화로운 면류관을 수여 받듯이 지혜를 자신의 배우자로 얻은 자는 지혜로부터 아낌없는 사랑과 대접을 받을 것입니다. 9절의 아름다운 관이나 ;영화로운 면류관;이란 표현은 결혼식에서 신랑과 신부가 연합하는 것을 상징하는의미로 신랑의 머리에 관을 씌우는 전통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됩니다. 아름다운 관이나 면류관은 1:9에서 부모의 지혜로운 훈계를 듣는 자로 하여금 전쟁의 승리자에게 수여하는 화려한 승리의 관이나 새로이 직책을 맡은 관리에게 수여하는 금사슬을 상기시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부모의 가르침을 경청하는 자식이 형통하듯이 지혜를 평생의 배우자로 삼아 사랑하고 높이고 품는 자는 보호와 존귀와 영광을 얻게 됩니다.


지혜는 가장 먼저 얻어낼 가치입니다. 조상에게 물려받은 가르침에 골자는 지혜가 제일이기에 지혜를 얻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인생의 안전과 생명을 보장하며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가진 모든 것을 다 죽어서라도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이는 밭에 감춘 보물을 발견한 사람이 자신의 전 소유를 지불하여 보물을 얻는다는 비유로 떠오르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지혜로써 우리에게 진정한 안전과 생명을 가져다 주십니다. 당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녀들에게 세상의 돈이나 명예 권력 학식보다 하나님의 지혜를 얻는 것이 우리의 모든 것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가르치고 있습니까? 당신과 우리 가족이 가장 먼저 구해야 할 것이 지혜라는 것,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살아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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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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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아를 죽이고 밧세바를 아내로 삼는 다윗

사무엘하 1114-27


 

죄를 범하면 그 죄를 숨기려고 계속적인 죄가 뒤따라옵니다. 겉으로 죄악을 숨기고 거룩한 것처럼 보이려 노력했겠지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매우 악한 모습으로 점점 망가져 갑니다. 다윗은 간음한 이후에 자신의 죄를 감추려고 자신의 충신을 살인까지 죄를 범합니다. 잠언에서는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28: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은 요압과 그의 군사들이 암몬과 전쟁하는 사이 옥상에서 목욕하는 밧세바를 보고 데려다 동침하는 간음죄를 범합니다. 그런데 밧세바가 임신을 함으로써 다윗의 죄가 들통날 위기에 처하자, 그는 남편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불러내어 밧세바와 동침하게 하여 밧세바가 임신한 아이를 우리아의 아기로 만들려는 악한 시도를 합니다. 하지만 우리아의 충직함 때문에 다윗의 이런 시도가 실패하자, 본문에서 다윗은 또 다른 음모를 꾸밉니다.

 

우리아의 죽음(14-17)

죄는 은밀하고 점진적인 과정을 거칩니다. 처음에는 작은 충동으로 시작했던 죄가 점점 눈덩이처럼 무서운 죄로 불어납니다. 나중에는 헤어 나올 수 없을 정도로 커져 버립니다. 죄가 이처럼 죄를 감추려는 사람을 무서운 사람으로 만듭니다. 죄의 잔악함이 우리를 얼마나 비참한 모습으로까지 몰고 가는지 알 수 있습니다.

 

14아침이 되매 다윗이 편지를 써서 우리아의 손에 들려 요압에게 보내니 15그 편지에 써서 이르기를 너희가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에 앞세워 두고 너희는 뒤로 물러가서 그로 맞아 죽게 하라 하였더라 16요압이 그 성을 살펴 용사들이 있는 것을 아는 그 곳에 우리아를 두니 17그 성 사람들이 나와서 요압과 더불어 싸울 때에 다윗의 부하 중 몇 사람이 엎드러지고 헷 사람 우리아도 죽으니라(14-17)

다윗은 우리아를 죽여서라도 죄를 은폐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은폐하려고 할수록 더 많은 사람이 알게 됩니다. 요압을 시켜서 우리아를 궁지에 빠뜨려 죽이라고 시킵니다.

 

(1) 다윗의 편지(14-15)

다윗은 우리아를 자기 집으로 보내서 아내와 동침함으로 자신의 간통죄를 숨기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간밤에도 우리아는 자기 집에 가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는데도 멈추지 않습니다.

요압에게 쓴 편지를 우리아의 손에 들려 전쟁터로 다시 보냅니다. 그 편지 내용은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에 앞세워 두고 너희는 그만 남겨 두고 돌아와 적들에게 죽게 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우리아를 전장에서 적과 싸우다 전사한 것처럼 꾸며 죽이라고 한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간통죄를 덮기 위해 살인이라는 더 큰 죄를 계획하였습니다. 그 계획을 우리아 본인의 손에 들려서 요압에게 보내는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행동을 합니다. 구약 전체에서 가장 잔인한 살인 방법입니다.

이 편지를 받은 요압은 다윗의 의도를 분명히 알고, 확실하게 성공하기 위해 일부러 암몬 군사들 중에 가장 용맹한 군사들이 있는 곳을 알아내어 그곳으로 우리아를 보냈습니다.

 

(2) 우리아의 죽음(16-17)

암몬 사람들이 성에서 나와서 요압과 전쟁한 결과 다윗의 부하들 중에 몇 명이 죽었습니다. 그들 중에 우리아가 속해 죽었습니다. 우리아 한 명을 죽이기 위해 그와 같이 있던 다윗의 부하들도 목숨을 잃게 한 것입니다. 결국 신실하고 우직하게 다윗에게 충성하던 우리아는 다윗에게 아내도 빼앗기고 목숨까지 빼앗기는 가장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였고, 죄 없는 부하들도 살해당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 너무 많은 무죄한 피를 흘리게 하였습니다.

전에 다윗이 자신을 조롱한 나발을 죽이려고 할 때는 지혜로운 아비가일이 다윗을 막아 무죄한 피 흘리는 것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윗을 막는 사람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요압은 오히려 다윗의 계획을 실행해주면서 우리아뿐만 아니라 아무런 관계도 없는 다윗의 부하들까지 죽인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바라볼 때는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다윗이 죄짓는 것을 막아주셨지만, 다윗이 더 이상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채 자신의 욕망대로 행할 때,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개입하지 않고 내버려 두십니다. 그동안 다윗은 하나님께 은혜를 많이 받았고 이때는 인격적이고 모범적인 모습을 오래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진 지금의 다윗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여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살인도 서슴지 않는 잔인무도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런 다윗의 모습을 보면서 인간이란 존재가 기본적으로 얼마나 악한 본성을 지니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요압의 보고(18-25)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먹고 숨은 아담과 하와를 찾아오셨습니다. 또한 다윗에게도 찾아오셨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죄악을 해결해주시길 원하십니다. 죄인이 죄를 해결할 순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이 진리 앞에 섰을 때, 죄의 문제는 해결 받을 수 있습니다. 마음속에 무거운 짐들이 모두 해결 받고 매우 자유스러울 것입니다.

 

18요압이 사람을 보내 그 전쟁의 모든 일을 다윗에게 보고할새 19그 전령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전쟁의 모든 일을 네가 왕께 보고하기를 마친 후에 20혹시 왕이 노하여 네게 말씀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성에 그처럼 가까이 가서 싸웠느냐 그들이 성 위에서 쏠 줄을 알지 못하였느냐 21여룹베셋의 아들 아비멜렉을 쳐죽인 자가 누구냐 여인 하나가 성에서 맷돌 위짝을 그 위에 던지매 그가 데벳스에서 죽지 아니하였느냐 어찌하여 성에 가까이 갔더냐 하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왕의 종 헷 사람 우리아도 죽었나이다 하라 22전령이 가서 다윗에게 이르러 요압이 그를 보낸 모든 일을 다윗에게 아뢰어 23이르되 그 사람들이 우리보다 우세하여 우리를 향하여 들로 나오므로 우리가 그들을 쳐서 성문 어귀까지 미쳤더니 24활 쏘는 자들이 성 위에서 왕의 부하들을 향하여 쏘매 왕의 부하 중 몇 사람이 죽고 왕의 종 헷 사람 우리아도 죽었나이다 하니 25다윗이 전령에게 이르되 너는 요압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이 일로 걱정하지 말라 칼은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삼키느니라 그 성을 향하여 더욱 힘써 싸워 함락시키라 하여 너는 그를 담대하게 하라 하니라(18-25)

요압은 다윗의 명령에 충실히 이행하여 우리아를 죽게 합니다. 그는 다윗의 진정한 충신이었습니다. 왕이라도 잘못된 결정을 하면 목숨을 걸고 반대하고 막을 줄 알아야 충신입니다. 다윗에게 죄는 숨긴다고 감추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라도 남김없이 다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1) 요압의 지시(18-21)

우리아를 죽인 요압은 이 소식을 다윗에게 알립니다. 그 전령에게 전쟁의 모든 상황을 왕에게 보고한 후에 혹시 왕이 요압의 군대가 성에 너무 가까이 가서 전쟁에서 부하들이 죽은 일에 대해 화를 낼 경우 헷 사람 우리아도 죽었다는 말을 하라고 일러줍니다. 이것은 다윗의 목적이 달성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면 모든 잘못을 덮어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요압의 말을 종합해보면, 요압은 성문을 열고 나온 암몬과 전투하다가 우리아 부대에게 가장 위험한 곳인 성 바로 앞까지 쫓아가게 만들어놓고 자신의 부대는 회군해버리고, 결국 우리아와 우리아의 부대는 성에서 날아오는 화살과 창과 돌 등에 맞아 죽게 되었습니다. 요압은 일부러 우리아가 암몬 사람의 화살에 맞아 죽도록 성 바로 앞까지 보낸 것입니다.

21절에서 요압은 성 위에서 여자가 던진 맷돌에 맞아 죽은 여릅바알의 아들 아비멜렉의 예를 들면서 다윗이 화를 낼 것을 예상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여룹바알 대신 여룹베셋이라고 하였는데, 이 단어는 여기에 단 한 번 나오는 것으로 여룹바알에 대한 잘못된 표기인 것 같습니다. 여기서 아비멜렉은 성 가까이 다가갔다가 맷돌에 맞아 죽은 어리석은 인물의 예로 나타납니다.

 

(2) 전령의 보고(22-24)

전령이 다윗에게 와서 요압이 일러준 대로 보고하는데 전쟁의 상황이 세 번 반복되는 이야기 중에서 가장 자세하게 다루어지고 있으며, 우리아가 어떻게 죽었는지 자세하게 알 수 있습니다. 전령은 보고의 맨 마지막에 왕의 부하들의 죽음과 함께 우리아의 죽음을 알립니다. 우리아의 죽음을 들은 다윗은 전쟁에서 피해를 본 것에 대해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걱정하지 말라고 요압을 위로합니다. 그러면서 칼이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삼킨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다윗의 부하들의 죽음은 전쟁에서 항상 일어날 수 있는 병가지상사이니 크게 신경 쓸 필요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요압이 우리아를 죽이기 위해 다윗의 부하들까지 같이 죽인 것에 대해서 염려하지 말라는 위로의 말이며, 우리아를 죽어준 것에 대해 간접적으로 감사를 표현한 것입니다. 다윗은 전령에게 이제 힘을 다해 성을 함락시키라는 명령을 전달하라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를 담대하게 하라고 명령하는데, 이것은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고 전쟁에 온 힘을 다하라는 의미로, 요압이 우리아를 죽인 일에 대해 자신이 매우 만족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 것입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죽음 소식에 매우 만족해하며, 이 일로 목숨을 잃은 자신의 부하들에 대해서는 조금도 미안해하거나 애도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아의 장례(26-27)

우리가 알고도 죄를 짓는 것을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시고 결국 행한 대로 심판하시는 분임을 안 믿어서 그렇습니다. 믿음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 믿음을 어디에 쓸 것입니다. 우리아의 전사 소식을 들은 다윗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시길 바랍니다.

 

26우리아의 아내는 그 남편 우리아가 죽었음을 듣고 그의 남편을 위하여 소리내어 우니라 27그 장례를 마치매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를 왕궁으로 데려오니 그가 그의 아내가 되어 그에게 아들을 낳으니라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26-27)

우리아의 죽음에 대한 한줄평이 세 번 반복되는 동안 다윗은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일으키지 않습니다. 오직 완전범죄라고 여기며 안도할 뿐입니다. 이런 다윗에 대해 성경 저자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라는 한줄평으로 다윗에 대해 평가합니다.

 

(1) 곡하는 밧세바(26)

우리아가 죽었다는 사실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에게 알려졌고, 그녀는 남편을 위해 애곡하며 우리아를 위해 장례를 치러줍니다. 보통 이스라엘에서의 애곡의 기간은 7일이며, 다윗은 이 기간이 끝나자 바로 밧세바를 왕궁으로 데리고 와서 아내로 삼습니다.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서는 시간을 지체하면 안 되기 때문에 여기서도 다윗은 매우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런 다웠의 행동을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죽은 부하의 아내를 자신의 부인으로 삼아서 돌보아주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다윗에 대해 좋게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2) 결혼하는 밧세바(27)

마침내 다윗은 간통했다는 명예를 실추당하지 않고 자신의 계획대로 밧세바를 아내로 맞이하고 그녀를 통해 아들도 얻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아마도 자신의 죄를 잘 숨겨 명예를 지켜냈고 예쁜 아내와 아들까지 얻었다고 만족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27절 마지막에 화자는 다윗의 모든 행동을 지켜보고 계셨던 여호와의 평가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다윗이 행한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아무도 모르게 성공적으로 고비를 넘겼다고 생각하였지만, 여호와께서는 이런 다윗을 악하게 보시며 다윗이 저지른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실 준비를 하고 계셨습니다.

 


먼저는 죄악을 감출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지만, 하나님은 절대로 속일 수 없습니다. 다윗의 행동을 보시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악하다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다윗은 지금까지 자신의 권력으로 죄를 가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눈을 가릴 수 없었습니다. 다윗처럼 계획대로 죄를 감추는 것이 성공했다고 해서 다 되었다라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죄를 감추고 은닉하려고 애쓰지 말고 정직하게 회개하는 것이 우리가 살길이라는 것을 잊지 않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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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08-03)

 


흑암의 권세를 물리치신 예수님

마태복음 823-34


기독교 내에서 봉사하면 대단히 믿음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봉사한다 할지라도 믿음 없이 봉사할 수 있습니다. 마치 사회단체에서 봉사하는 것처럼 자신의 명예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역하는 목적에는 영혼을 구원하는데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에워싸는 무리를 피해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기 위해 먼저 배에 오르시고, 제자들도 뒤따릅니다. 제자들은 향해 도중 큰 풍랑을 만나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모습에 믿음이 적다 꾸짖으시며 풍랑을 잠잠케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은 가다라 지방에서 귀신 들린 두 사람을 고치실 때, 다시 한번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를 목격합니다. 하지만 그 지방 사람들은 오히려 예수님께 떠나 주시기를 요청합니다.

 

광풍을 잔잔케 하신 예수님(23-27)

이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지만, 말씀을 거역하여 무너졌습니다. 무너진 세상은 이제 창조주 예수님의 말씀으로 새롭게 창조되어 세상의 혼돈과 무질서와 어둠이, 질서와 채움과 빛으로 변할 것임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인정하고 그 분을 믿고 그 분과 연합될 때만 우리에게도 새로운 창조가 가능한 일입니다.

 

23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더니 24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25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26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27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23-27)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에 임하게 하셨다는 여러 가지 사건들을 보게 됩니다. 필연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이 세상 나라와의 영적인 전쟁을 가져 옵니다. 지금도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백성답게 살자고 하면, 반드시 이 세상 나라의 저항을 가져옵니다.

 

(1) 위기를 마주한 제자들(23-25)

혼돈과 죽음의 세력은 제자들을 두렵게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에게서 평안을 빼앗지는 못했습니다. 도리어 예수님께서는 귀신을 꾸짖듯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잔잔케 하셨습니다. 광풍을 잠잠하게 하신 사건은 8-9장에서 유일하게 자연에 대해 행하신 기적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배를 타고 동쪽을 향해 가던 중에 큰 광풍이 갑자기 몰아쳐 배를 뒤덮었습니다. 갈릴리 바다는 갑자기 광풍이 몰아치는 것으로 유명한 호수입니다. 예수님과 일행이 탄 배는 침몰 직전입니다. 하지만 배가 뒤집힐 상황인데도 예수님께서는 자고 계십니다.

 

(2) 위기를 해결해주시는 예수님(26-27)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우며 죽게 됐으니 구원해 달라고 외칩니다. 머리 둘 곳 없이 순회하며 사역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이 순간에도 피곤한 몸으로 배 위에서 자고 계십니다제자들이 두려워하는 모습은 잠을 자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과 대조적인데, 마태는 하나님께서 지켜주실 것을 믿고 평안 가운데 계신 예수님의 믿음을 강조하고 있습니까(3:35; 4:8)? 이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구약에서 잠은 깊은 신뢰와 관련이 있는 점을 고려할 때(11:18-19; 3:35; 3:24-26), 마태가 예수님의 평온과 제자들의 근심을 대조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27절에서 예수님의 권위에 충격을 받은 제자들이 고백한 말은 예수님의 신적 권위를 떠올립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자고 계신 것은 땅에서 머리 둘 곳 없이 사시는 그의 고난을 묘사하는 동시에, 역설적으로 그가 하나님만이 행하시는 권위를 갖고 계신 분임을 암시합니다. 누구도 예수님을 위협할 정도로 그분의 권위 위에 있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평안히 계십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두렵게 할 수 있는 존재는 없으므로, 가장 강한 자로서 편안하게 주무신 것입니다시편 121편은 하나님께서 주무시지 않는 분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정반대로 시편 44:23-24은 주무시는 하나님을 깨우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비슷한 내용은 시편 7:7; 35:23; 59:5-6에도 등장합니다. 특히 시편 44:23-24은 풍랑을 만난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면서 하는 말과 매우 유사합니다. 따라서 본 사건에서 강조하는 것은 예수님의 믿음이 아니라 제자들의 믿음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평안했던 예수님이 아니라 바다를 잠잠하게 만들 수 있는 신적 권위를 가진 예수님의 정체를 강조합니다. 물론 제자들의 호소가 시편의 내용을 떠올린다고 해서 그들이 예수님을 신적인 존재로 믿고 깨운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우면서도 이 순간에는 그의 정체를 정확히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는 어려움에 빠진 자녀가 대단한 재력가인 아버지의 실제 능력을 알지 못한 채 자신의 처지에 무관심한 것처럼 보여서 왜 자식의 어려움을 돌아보지 않는지 원망하는 투로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제자들이 온 바다가 진동하는 모습을 보면서 겁에 질리게 된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반응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책망을 받습니다. 자신들과 함께 계시는 예수님께서 자연을 통제하는 분임을 아직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제자들의 두려움은 예수님의 정체를 정확히 알지 못해서 생긴 것입니다. 제자들은 바다를 잠잠하게 만들 수 있는 하나님의 권능을 갖고 계신 것을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정제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이 믿음이 작은 상태이며, 믿음이 작을 때 두려움이 엄습하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겁에 질린 제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일어나 바다를 꾸짖으셨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바다를 꾸짖으시는 분입니다(18:15; 104:7; 106:9, 50:2; 1:4). 특히 구약과 유대교에서 바다는 혼돈의 세력이 나오는 출처로 인식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바다를 제압하는 주가 되십니다(89:8-11; 107:23-30; 참조 시 69:13, 30-36; 124; 1).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자연을 통제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위협하는 악의 세력을 제압하십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목격한 제자들은 놀라서 그가 누구이기에 심지어 바람과 바다도 그에게 복종하는지 묻습니다. 제자들은 폭풍과 같은 인생의 위기에서 예수님의 보호를 경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택하신 자들과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입니다. 임마누엘인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제자 공동체를 보호하신 것처럼, 시대의 끝까지 시대를 초월해서 교회에 긍휼을 베푸는 것으로 함께 하십니다.

죄로 무너진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말씀으로 새 창조되어 혼돈과 무질서와 어둠이 질서와 채움과 빛으로 변할 것임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주님으로 자신의 삶에 선장으로 모시고 살면 거칠고 험난한 인생 항해에서도 편히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귀신 들린 사람들을 치유(28-34)

귀신은 질서를 망가뜨리고 혼돈을 일으킵니다. 복음을 방해하기 위해 하나님의 사람들을 처참하게 죽음을 맞이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상인 인격을 철저하게 파괴시켰습니다. 사실 하나님을 떠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귀신에 붙들려 무덤 사이에서 사는 두 사람과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귀신은 예수님을 만나고 그의 권능 앞에 서게 됩니다.

 

28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그들은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지경이더라 29이에 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30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먹고 있는지라 31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하여 이르되 만일 우리를 쫓아 내시려면 돼지 떼에 들여 보내 주소서 하니 32그들에게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 33치던 자들이 달아나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 들린 자의 일을 고하니 34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28-34)

예수님께서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어두운 세력들로부터 사람들을 구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고 계셨습니다. 그들은 귀신 들린 자들이었습니다. 그분은 이제 자시가 악의 세력과 싸워 그들을 정복했다는 사실을 세상으로 하여금 알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1) 누구도 가지 않는 곳에 가심(28a)

예수님께서는 제자 일행과 함께 갈릴리 호수 동쪽에 위치한 데가볼리의 가다라 지방에 도착합니다. 이 도시는 유대인이라면 아무도 가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을 향해 감으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곳에서 처음 만난 사람은 귀신 들린 두 사람이었습니다. 두 명은 법정에서 증언할 수 있는 숫자의 개념입니다.

 

(2)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자(28b)

귀신 들린 사람들은 무덤에서 나와 예수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그들의 상태는 사람들을 몹시 폭력적이고 위험했기 때문에, 사람들을 해칠 수 있었습니다. 그 옆으로 지나갈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마을에서 쫓겨나서 무덤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당시 무덤은 우리나라처럼 평토장(平土葬)이 아니라 바위나 언덕에 동굴의 모습으로 사람이 충분히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이 됩니다.

 

(3) 악한 귀신의 최후에 심판을 귀신들(29-30)

귀신 들린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서 따지고 묻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29)라고 귀신은 예수님의 신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귀신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온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귀신들은 우리가 당신과 무슨 관계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서로의 관심이 다른데 왜 이곳을 찾아왔느냐는 의미입니다.

어둠의 권세 잡은 사단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온전히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이렇게 온전한 인간의 몸으로 오신 것은 십자가에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귀신 들린 자들이 예수님께서 때가 이르기 전에 왜 오셨는지 묻습니다. ‘는 귀신들이 형벌의 장소로 보내지는 시기로, 악인들과 함께 악한 천사들이 심판을 받는 최후 심판의 때를 의미합니다. 심판의 결과로 귀신들은 지옥의 형벌을 받습니다(25:31-46). 귀신은 자신들의 운명과 자신들의 마지막 때를 알고 있었습니다그들은 자신들을 괴롭히다라는 의미는 법정에서 육체적으로 고통을 준다또는 고문하다는 의미로, 극심한 고통을 묘사하는 동사입니다. 본문에서는 종말론적인 심판을 의미합니다. 귀신들은 자신들이 고통당할 때, 즉 최후 심판의 때가 있습니다. 아직 그 때가 오지 않았는데 굳지, 왜 예수님께서 벌써 자신들에게 왔는지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지 않자 귀신들은 자신들을 심판하러 온 것을 직감하고 멀리 있는 돼지 떼에게 들어가려고 쳐다보았습니다. 당시 로마가 집권하고 있는 헬레니즘 문화는 돼지를 부와 쾌락 신의 축복의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데가볼리 지역은 주전 63년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에게 협력하면서 자치와 통상, 면제의 특권을 부여받았고, 친 로마 성격으로 도시 동맹체 성경을 유지하며 로마식 제사를 통해 돼지를 잡아 드렸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유대인들은 이 지역을 배척했습니다주전 63년에 안티파스가 유대를 침공한 후에 예루살렘 성전을 훼파하고, 돼지를 성전 재단에 바쳤습니다. 로마 제국 입장에서 유대인들을 모독하기 위한 행위가 아닙니다. 이러한 종교 행위를 통해 헬레니즘 문화권의 영향력을 증험하는 행동일 뿐입니다. 데가볼리 지역은 돼지를 잡아 제사하는 것이 일상적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곳에서 돼지를 사육하고 2000마리 가까운 돼지를 사육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한 가지 큰 구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돼지를 이렇게 많이 사육하고 있었던 것은 단순하게 경제논리가 아니라 로마 황제를 숭상하는 행위들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보편적인 사람들의 인식에는 로마 황제는 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과 신의 아들의 대결이었습니다. 그러나 천지를 만드시고 세상의 주권을 소유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을 자신의 것이라고 오해하고 헬레니즘 문명이라는 미명 아래 점점 자신들의 세력을 확대해 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지역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상징적으로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사실을 제자들에게 보여줍니다.

자신들의 운명을 알아챈 귀신들은 돼지 떼에 들어갈 수 있게 허락해 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귀신들의 요청을 들어주십니다. 결국 돼지 떼는 물에서 몰사 합니다(32). 돼지들은 악하고 폭력적인 귀신들을 견디지 못해서 바다를 향해 달려가 죽습니다.

 

(4) 탐욕스러운 자들에게 거절당하심(33-34)

이 많은 돼지를 치던 자들의 보고하기 위해 시내에 들어갔습니다. 그 보고를 받은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려고 사건이 일어난 곳으로 달려왔습니다(33). 그리고 그들은 광경을 본 사람들은 예수님께 자신의 지방에서 떠나 달라고 요구합니다(34). 그들을 지배하고 있던 의식이 무엇입니까? 경제적인 이유로 예수님을 떠날 것을 요청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돈이 자신을 보호하고 안전하게 지켜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다시 찾아올 수 없는 복음의 유일한 기회를 내쳐 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치유보다 돼지를 더 중히 여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도시를 집으로 삼은 귀신들을 쫓아내심으로써 현재와 미래의 가장 큰 위험을 제거하셨으나, 주민들은 예수님의 행위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제자들을 태우고 바다를 건너서 본 동네로 가버립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하늘나라의 도래와 관련해서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귀신들이 들어온 돼지들이 죽은 장면은 귀신들의 운명도 지상에서 사라질 것을 암시합니다. 마태복음에는 무저갱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지 않지만, 귀신들이 돼지 떼와 함께 물속에 던져진 것은 귀신들이 최후 심판 전까지 물아래 심연 또는 무저갱에 갇혔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합니다. 병행 본문인 누가복음 8:26-3931절에서 귀신들이 무저갱에 던져 넣지 말아 달라고 간청합니다. 귀신들이 심연에 갇히는 그림은 하늘나라가 예수님의 권위로 강력하게 임했음을 증명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지고 오신 하늘나라의 공격을 받아 사탄의 나라가 무너지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예수님의 이동 경로를 통해서 사회에서 쓸모없는 인생을 위해 헌신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회에서 완전히 추방된 사람을 만나려고 바다 폭풍을 뚫고 이곳에 오셨고, 회복하고 다시 돌아가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제자들을 데리고 오셔서 긍휼을 가르치기 위해 현장 교육을 하신 것입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부정한 곳에서 부정한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은 치유할 가치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을 위해 사회에서 효용 가치가 높은 것을 희생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안 해서 낭비로 여깁니다. 그러나 제자는 죽어가는 사람을 회복하는 사명을 맡았습니다. 사람의 목숨은 천하보다 귀합니다. 낭비처럼 보일지라도 사람을 회복하는 일이라면 하늘나라의 사역입니다.

 


믿음이 작을 때 환경에 흔들리게 됩니다. 갈릴리 바다에 큰 물결이 일어나 배가 잠기게 되자 어부 출신 제자들조차 죽음에 두려움에 사로잡혀 예수님을 깨우며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잠에서 깨어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믿음이 작은 것을 책망하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창조주 만유의 주로 고백하고 함께하신다는 것을 믿고 있다면서도, 때로는 환경 때문에 쉽게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인생의 배에 누가 타고 있는지 기억하기 바랍니다. 우리 인생의 배에 우리가 저항할 수 없는 큰 풍랑이 일지라도 그 배에는 예수님께서 함께 계십니다. 우리 인생을 다스리고 주 대신 그 주님께 믿음의 눈을 들어 바라보며 폭풍 가운데도 평안을 누리는 주의 백성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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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11-01)

 


방심과 욕심이 불러온 범죄

사무엘하 11장 1-13절


다윗은 하나님께 인정받을 만큼 믿음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다윗도 한순간의 방심이 죄를 불러오게 하였습니다. 음욕으로 범죄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다윗보다 믿음이 약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금도 사단은 넘어질 자들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베드로전서 5:8)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독점하다시피 한 다윗은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승승장부 하였습니다. 그러나 잠깐의 방심으로 밧세바와 간음의 죄를 범하고, 급기야 밧세바의 남편을 살인하는 범죄까지 이르게 되는 내용입니다. 축복의 자리에 있을 때 죄를 범하지 않도록 더 조심해야 합니다.
 

다윗과 밧세바의 동침(1-5)

성도는 서 있는 곳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의 장소에 서 있어야 합니다. 다른 곳에 있을 때, 우리도 다윗 못지않게 위험한 자리에 서게 됨을 배웁니다. 유혹은 지역과 장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가장 평온한 시간, 가장 거룩해 보이는 사람에게도 우혹이 닥칩니다. 지금 우리가 서 있어야할 자리가 어디입니까?
 
1그 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에게 있는 그의 부하들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그들이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라 2저녁 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3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그가 아뢰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하니 4다윗이 전령을 보내어 그 여자를 자기에게로 데려오게 하고 그 여자가 그 부정함을 깨끗하게 하였으므로 더불어 동침하매 그 여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5그 여인이 임신하매 사람을 보내 다윗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임신하였나이다 하니라(1-5)
전쟁의 선두에서 백성을 보호하는 것이 왕의 사명인데(삼상 8:19) 다윗은 요압과 그 신복과 온 이스라엘 군대만 보내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습니다. 사명을 소홀히 하고 지도자 노릇을 중단한 상태에서 유혹이 찾아왔습니다.
 
(1) 배경 설명(1)
본문은 사건의 배경을 설명하는 부분으로 시간적 배경은 ‘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입니다. 이것은 전쟁할 때가 되었다는 의미로 우기가 끝나고 추수가 시작되는 봄이 되기 전의 시기를 가리킵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관습적으로 이 시기에 백성들을 소집하여 전쟁을 하였고 대개 왕들이 군대를 이끌고 나갔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왕이 출전해야 하는 것은 아니고, 왕궁의 정무나 외교적 일이 있으면 출전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다윗도 이번에는 요압과 그의 부하들만 전쟁에 보내어 암몬 자손을 치게 하였습니다. 이 전쟁은 10:14에 언급된 전쟁의 연장으로 요압은 군대를 이끌고 랍바로 도망한 암몬을 치기 위해 출전하였고, 암몬 자손을 친 다음에 랍바를 포위하였습니다. 요양은 암몬과의 두 번째 전쟁에서도 승리를 거두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암몬과의 첫 번째 전쟁(삼하 10:7)에서처럼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고, 화자는 다윗이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다고 보고합니다.
 
(2) 목욕하는 밧세바(2-3)
부하들이 전쟁터에 나가 있는 사이에 다윗은 한가한 저녁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낮잠을 자고 저녁에 일어나 시원해진 왕궁 지붕을 한가롭게 산책하였습니다. 그러다 한 여인이 옥상에서 목욕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그 여인은 매우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여인의 이름은 밧세바였습니다. 그녀는 시원해진 옥상에서 햇빛에 따뜻해진 물로 씻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녀가 옥상에서 목욕한 것을 두고 다윗을 유혹하기 위한 고의적인 행동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본문의 의도와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본문은 밧세바를 철저히 수동적인 인물로 그리고 있으며, 다윗이 모든 일을 주도한 것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목욕을 하고 있는 밧세바를 보았다는 것은 단지 일어난 사실을 언급한 것입니다. 이를 보고 다윗이 그냥 지나칠지 아니면 사람을 보내어 데리고 올지는 철저히 다윗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아름다운 밧세바가 목욕하는 모습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못하였고, 사람을 보내어 누구인지 알아보게 하였습니다. 이미 다윗의 마음에는 음욕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그녀가 엘리암의 딸이며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여기서 밧세바의 아버지 엘리암과 밧세바의 남편 헷 사람 우리아는 모두 다윗의 37명의 용사 중에 들어 있는 다윗 왕국에서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던 인물들입니다(삼하 23:34,39). 우리아는 헷 사람으로 다윗 당시에 히타이트 제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지만, 제국의 남은 자손들이 시리아에서 헷 족속의 형태로 생존하고 있었고 우리아는 여기 출신으로 이스라엘에 이주하여 살았던 인물입니다. 그의 이름 우리아는 ‘여호와는 빛이시다’라는 뜻의 이름으로 추측해 보건데 그는 이스라엘에서 태어났고 여호와를 믿는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3) 임신한 밧세바(4-5)
다윗은 밧세바가 전쟁터에 나가 있는 부하의 아내라는 사실을 알고도 사자를 보내어 그녀를 데려와 동침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때는 밧세바가 부정함에서 벗어나 정결 의식을 막 치른 때였기에 임신이 가능한 상태였습니다. 여기서 이것을 언급한 것은 밧세바가 임신한 아이가 우리아의 아기가 아니라 다윗의 아기라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기 위한 것입니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갑니다. 여기서 다윗은 매우 주도적으로 밧세바에 대해 알아보고 부르고 동침하고 있습니다. 밧세바는 이 장면에서 다윗이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매우 수동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본문이 다윗의 적극적인 모습을 강조한 것은 다윗의 간음 사건이 어쩌다 여자의 꼬임에 넘어가 실수로 벌어진 일이 아니라 다윗이 적극적이고 고의적으로 행한 범죄라는 사실을 말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렇게 다윗은 밧세바와 관계를 가진 후에 아무도 모르게 죄를 덮으려고 했지만. 5절에서 밧세바가 다윗에게 자신이 임신하였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간음죄는 덮기 어려운 심각한 문제가 되어버렸습니다. 여기서 밧세바는 유일하게 말을 하고 있는데, 이 말은 모든 비극의 시작이 되는 매우 결정적인 말이었습니다.
 

우리아의 소환(6-9)

거짓과 속임은 사람을 가리지 않습니다. 전쟁에 나가 있던 밧세바의 남편을 불러들여, 아내와 동침케 하여 자신의 허물을 덮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사는 사람도 언제든 순식간에 죄악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 줄로 생각하는 사람은 항상 넘어질까 조심하며, 악한 마귀가 틈타지 못하도록 늘 깨어있어야 합니다.
 
6다윗이 요압에게 기별하여 헷 사람 우리아를 내게 보내라 하매 요압이 우리아를 다윗에게로 보내니 7우리아가 다윗에게 이르매 다윗이 요압의 안부와 군사의 안부와 싸움이 어떠했는지를 묻고 8그가 또 우리아에게 이르되 네 집으로 내려가서 발을 씻으라 하니 우리아가 왕궁에서 나가매 왕의 음식물이 뒤따라 가니라 9그러나 우리아는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고 왕궁 문에서 그의 주의 모든 부하들과 더불어 잔지라(6-9)
무명의 목동 다윗은 블레셋의 위대한 거인 골리앗 장수를 물맷돌 다섯 개로 이겼지만, 통일 왕궁의 목자 다윗은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없는 가련한 한 여인에게 무너졌습니다. 욕정이 이끄는 대로 권력을 남용하여 부하의 아내를 취하고 말았습니다.
 
(1) 우리아 소환(6)
밧세바가 임신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다윗은 요압에게 사람을 보내어 우리아를 자신에게 보내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요압은 우리아를 다윗에게 보냅니다. 여기서 다른 설명은 일체 없이 사자를 보내고 우리아를 보내라고 명령하고 우리아를 보내는 것을 표현한 단순한 문장을 통해서 다윗이 매우 서둘러 우리아를 불러들였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2) 우리아의 보고(7)
다윗은 우리아가 오자 요압의 안부와 군사들의 안부와 전쟁의 상황을 물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전쟁의 상황을 알기 위해 우리아를 부른 것처럼 보이기 위한 행동입니다.
 
(3) 우리아의 불복종(8-9)
다윗의 진짜 속셈은 8절에 나타납니다. 그는 우리아에게 집으로 가서 ‘발을 씻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발을 씻으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여행자가 집에 왔을 때 발을 씻겨 줌으로써 환영의 표시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발’이란 단어는 남성성을 은유적으로 표현할 때도 사용하는 단어이기 때문에, 다윗은 일부러 ‘발’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아내와 관계를 가지라는 암시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즉, 다윗은 밧세바와의 간음죄를 감추기 위해 우리아를 밧세바와 동침하게 하여 자신의 아기를 우리아의 아기인 것처럼 속이려고 한 것입니다. 또 우리아의 수고를 치하하는 의미로 많은 하사품을 보내어 자신이 매우 좋은 왕인 것처럼 행동합니다.
하지만 우리아는 다윗의 생각과 다르게 집으로 가지 않고 왕궁 문에서 왕의 모든 부하들과 같이 잠을 잤습니다. 여기서 ‘그의 주인의 부하’라는 표현을 통해 우리아는 다윗을 자신이 충실하게 섬겨야 할 주인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런 우리아의 충직한 모습은 자신에게 충직한 부하의 아내를 탐내어 간통하고 그 결과를 뒤집어 씌우려는 다윗의 비열한 모습과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이렇게 우리아가 다윗의 계획과 다르게 행동함으로 다윗의 계획은 실패하게 됩니다.
 

우리아의 결심(10-13)

성도들은 항상 방심하거나 욕심을 부리지 않아야 합니다. 대신에 항상 성령으로 충만하게 깨어있어야 합니다. 죄를 감추지 않고 속히 회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죄악을 감춘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윗은 자신의 범죄를 감추려다가 오히려 더 죄를 키우고 말았습니다.
 
10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아뢰되 우리아가 그의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였나이다 다윗이 우리아에게 이르되 네가 길 갔다가 돌아온 것이 아니냐 어찌하여 네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11우리아가 다윗에게 아뢰되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야영 중에 있고 내 주 요압과 내 왕의 부하30들이 바깥 들에 진 치고 있거늘 내가 어찌 내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처와 같이 자리이까 내가 이 일을 행하지 아니하기로 왕의 살아 계심과 왕의 혼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나이다 하니라 12다윗이 우리아에게 이르되 오늘도 여기 있으라 내일은 내가 너를 보내리라 우리아가 그 날에 예루살렘에 머무니라 이튿날 13다윗이 그를 불러서 그로 그 앞에서 먹고 마시고 취하게 하니 저녁 때에 그가 나가서 그의 주의 부하들과 더불어 침상에 눕고 그의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니라(10-13)
다윗은 범죄를 은패하기 위해 우리아를 불러 아내와 동침하도록 시도합니다. 자신과 우리아 사이에 깨어진 ‘샬롬’을 감추려고 안달하는 자가 뻔뻔하게 요압과 군사와 싸움의 안무를 묻고 있습니다.
 
(1) 다윗의 질문(10)
다윗은 집으로 가지 않은 우리아를 불러 왜 먼 길에서 돌아왔는데 집에 가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다윗의 입장에서는 이런 우리아의 행동이 매우 마음에 안 들었지만, 우리아를 걱정하는 척하며 집으로 가지 않은 이유를 물은 것입니다.
 
(2) 우리아의 대답(11)
이에 대해 우리아는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야영 중에 있고 자신의 상사인 요임과 왕의 군대가 전쟁터에 있는데 어떻게 자신만 편안하게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아내와 잘 수 있냐고 말하며, 자신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을 왕의 목숨을 걸고 맹세합니다. 왕에게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충성 맹세를 한 것입니다.
우리아가 궤와 전쟁터와 아내와의 잠자리를 언급한 것은 전쟁을 수행할 때 진영에서 정결해야 하는 규범과 연결됩니다. 언약궤가 함께하는 진영은 여호와께서 함께하시는 거룩한 곳이기에, 여자와 자는 것이 금지됩니다. 남성이 설정하면 하루 동안 부정한 상태가 되어 진의 거룩성을 훼손하게 되기 때문입니다(레15:16-18).
물론 우리아는 지금 전쟁터에 있는 것도 아니고 진영으로 돌아가기 하루 전에만 조심하면 상관이 없는 상황이지만, 비록 예루살렘에 와 있어도 여전히 전쟁터에 있는 사람들과 연결된 것으로 생각하였고, 그래서 자신의 정결을 지키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혹시라도 자신이 부정하게 되어 전쟁터에 있는 다윗 진영의 거룩성이 훼손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정결법을 최대한으로 지키려고 노력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애를 쓰며 이스라엘 군대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노력하는 우리아의 모습은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도 죄로 느끼기는커녕 그 죄를 덮기 위해 노력하는 다윗의 모습과 대조를 이룹니다. 여기서 그동안 하나님 앞에서 가장 충성스럽고 의로웠던 다윗의 모습은 사라지고 자신의 죄를 덮기에 급급한 다윗의 모습만이 나타납니다.
 
(3) 우리아의 변함없는 태도(12-13)
다윗은 우리아가 자신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자, 다시 한 번 우리아를 집으로 보내어 밧세바와 자게 하려고 시도합니다. 다윗은 우리아에게 하루 더 예루살렘에 머물라고 하며 내일은 보내주겠다고 합니다.
본문에서 우리아가 그날과 그 다음 날 예루살렘에 머물렀다는 것은 다윗의 권고로 이틀 동안 예루살렘에 머물렀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왕이 충성스러운 신하를 배려하여 하루 더 쉬게 해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다윗의 진짜 속셈은 13절에 나오는데, 그날 우리아를 불러서 그와 함께 먹고 마시며 일부러 우리아를 취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아가 취하면 술김에 집으로 가서 아내와 동침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생각과는 달리 우리아는 술이 취한 상태에서도 집으로 가지 않고 어제처럼 부하들과 함께 잤습니다. 본문은 우리아가 집에 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언급하여 강조합니다. 우리아는 자신의 맹세를 매우 충실하게 지킨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우직한 충성심의 대가는 죽음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왕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욕망을 잡고 성문 앞에서 부하들과 밤을 보낸 우리아의 모습은 자기 욕망을 억제하지 못해 하나님에 대한 충성성을 저켜리고 부하에 대한 신의를 버린 다윗과 대조됩니다.
 


죄는 위장하고 감춘다고 해결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 우리아를 불러 밧세바와 동침하도록 하려고 했습니다. 처음 시도가 실패로 끝나자 다시 시도하였습니다. 하지만 다윗의 이러한 시도는 죄에 대한 근본적 해결책이 아니었습니다. 죄는 위장하고 감춘다고 해서 결코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아무도 모르게 비밀리에 죄를 지었지만, 죄의 결과는 결코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죄를 짓게 되면 반드시 흔적이 남게 됩니다. 죄의 결과가 금방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죄가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에게도 덮어둔 죄가 있지는 않습니까? 이제는 그 죄를 덮기 위한 헛된 위장술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지하여 하나님께 자복하고 해결 받는 주의 백성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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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10-01)

 


다윗에 대항하는 암몬

사무엘하 101-19


오해는 것은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동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할 때, 일어나는 반응입니다. 은혜를 기억하고 기회가 왔을 때 갚으려는 행동은 그 자체로 감동적입니다. 상대방의 진심으로 모르고 행동할 때, 얼마나 많은 잘못된 반응을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그로인해 자신만 손해 본 것이 아니라 주변과 모든 사람들이 본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다윗이 베푼 은혜를 받아들여 복을 누리게 된 므비보셋(9)과 달리, 다윗의 은혜를 오해하고 거절하는 하눈을 봅니다. 10장은 전쟁에서 패배하는 하눈 이야기입니다. 다윗은 암몬 왕 하눈에게 암몬 왕의 나하스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조문 사절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진심어린 사랑과 배려가 오히려 오해를 받아 모욕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은총을 배신을 갚은 암몬(1-5)

싸움이나 전쟁이 불가피할 때가 있습니다. 성도에게 싸움은 잘 어울리는 단어는 아니지만 때로는 불가피하게 불의와 싸워야 하고 세상과 싸워야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싸움의 현장에서도 형제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은총은 그들이 맺고 있는 모든 관계 속에 다 반영되어야 합니다.

 

1그 후에 암몬 자손의 왕이 죽고 그의 아들 하눈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 2다윗이 이르되 내가 나하스의 아들 하눈에게 은총을 베풀되 그의 아버지가 내게 은총을 베푼 것 같이 하리라 하고 다윗이 그의 신하들을 보내 그의 아버지를 조상하라 하니라 다윗의 신하들이 암몬 자손의 땅에 이르매 3암몬 자손의 관리들이 그들의 주 하눈에게 말하되 왕은 다윗이 조객을 당신에게 보낸 것이 왕의 아버지를 공경함인 줄로 여기시나이까 다윗이 그의 신하들을 당신에게 보내 이 성을 엿보고 탐지하여 함락시키고자 함이 아니니이까 하니 4이에 하눈이 다윗의 신하들을 잡아 그들의 수염 절반을 깎고 그들의 의복의 중동볼기까지 자르고 돌려보내매 5사람들이 이 일을 다윗에게 알리니라 그 사람들이 크게 부끄러워하므로 왕이 그들을 맞으러 보내 이르기를 너희는 수염이 자라기까지 여리고에서 머물다가 돌아오라 하니라(1-5)

은혜를 기억하는 다윗은 요나단과의 언약을 기억하고 므비보셋에게 은총을 베풀었는데, 이번에는 암몬이 베푼 은혜를 기억하고 보답하고 있습니다. 은총의 선순환이라는 하나님의 경제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베푸신 은총와 보호와 용납을 다시 이웃에게 돌려주는 나라입니다.

 

(1) 암몬 왕의 죽음과 하눈의 즉위(1)

암몬 왕 나하스가 죽고 그의 아들 하눈이 왕위에 오르자 다윗은 하눈에게 사절단을 보내어 평화조약을 맺으려고 하였습니다. 암몬 왕 나하스는 사무엘상 11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오른쪽 눈을 빼야 언약을 맺겠다며 협박하던 인물입니다. 이때 막 왕이 된 사울은 소 한 거리를 잡고 열두 조각을 낸 다음 이스라엘 각 지파에 보내어 이스라엘 백성을 소집하였고, 결국 이 전쟁에서 크게 승리하였습니다. 이 전쟁 이후에 나하스는 사울과 적이 되었기 때문에 사울을 피하여 도망 다니던 다윗과는 우호 관계를 맺게 되었고, 그것은 다윗이 왕이 된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2) 다윗의 사절단 파견(2)

다윗은 나하스가 죽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우호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새로 왕이 된 하눈에게 죽은 나하스를 조문하는 사절단을 파견하였습니다. 다윗이 사절단을 통해 하눈의 아버지가 내게 은총을 베푼 것처럼 자신도 하눈에게 은총을 베풀겠다고 말하는데, 은총으로 번역된 헤세드는 주로 언약적 관계에서 사용되는 단어로 나하스와 우호조약을 맺은 것처럼 하눈에게도 우호조약을 맺자고 말하는 것입니다.

 

(3) 모욕당한 사절단(3-5)

하지만 이런 다윗의 의도와는 다르게 하눈의 신하들은 다윗이 사절단을 보낸 것이 단순히 나하스를 공경하는 마음으로 조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성을 정탐하여 함락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오해합니다. 다윗이 승승장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도 공격할지 모른다고 걱정한 것입니다. 신하들의 말을 들은 하눈은 사절단에게는 호의를 베푸는 일반적인 관례를 깨고 그들의 수염 절반을 자르고 옷도 절반 길이로 잘라 엉덩이가 드러나게 만들었습니다. 수염은 고대 근동에서 남성의 상징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수염을 자른다는 것은 거세를 의미하는 매우 모욕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사절단에게 이런 모욕을 주는 것은 그들을 보낸 다윗을 모욕하는 행위로, 다윗이 제안한 우호조약을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전쟁을 하겠다고 도발한 것입니다. 이런 소식이 다윗에게 전해졌고, 다윗은 모욕을 당하고 돌아온 사람들을 맞이하고 위로하기 위해 사람들을 보냅니다. 그들에게 수염이 다 자라서 모욕의 흔적이 없어질 때까지 여리고에 머물면서 쉬라고 배려해줍니다. 예루살렘으로 바로 돌아오면 많은 사람들이 보고 될 것이고, 사절단 사람들이 창피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리고는 요단 동편에 있는 아람에서 요단 서편으로 넘어오는 관문이기 때문에, 사절단을 여리고에 머물라고 한 것입니다.

 

암몬과 아람의 공동 작전(6-14)

상대방의 선의를 의심할 때 갈등은 증폭되고, 때로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받을 계산을 하지 말고 사랑을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랑을 거부하며 싸우기를 작정한 자들에게는 싸움을 수 밖에 없습니다. 거룩한 싸움에는 누구도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이 모범을 보이셨듯이, 진정한 리더는 ‘나를 따르라!’고 외쳐야 합니다. 

 

6암몬 자손들이 자기들이 다윗에게 미움이 된 줄 알고 암몬 자손들이 사람을 보내 벧르홉 아람 사람과 소바 아람 사람의 보병 이만 명과 마아가 왕과 그의 사람 천 명과 돕 사람 만 이천 명을 고용한지라 7다윗이 듣고 요압과 용사의 온 무리를 보내매 8암몬 자손은 나와서 성문 어귀에 진을 쳤고 소바와 르홉 아람 사람과 돕과 마아가 사람들은 따로 들에 있더라 9요압이 자기와 맞서 앞뒤에 친 적진을 보고 이스라엘의 선발한 자 중에서 또 엄선하여 아람 사람과 싸우려고 진 치고 10그 백성의 남은 자를 그 아우 아비새의 수하에 맡겨 암몬 자손과 싸우려고 진 치게 하고 11이르되 만일 아람 사람이 나보다 강하면 네가 나를 돕고 만일 암몬 자손이 너보다 강하면 내가 가서 너를 도우리라 12너는 담대하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13요압과 그와 함께 한 백성이 아람 사람을 대항하여 싸우려고 나아가니 그들이 그 앞에서 도망하고 14암몬 자손은 아람 사람이 도망함을 보고 그들도 아비새 앞에서 도망하여 성읍으로 들어간지라 요압이 암몬 자손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니라(6-13)

하눈은 다윗의 조문단을 첩자로 간주했고, 그들에게 수치를 줌으로써 다윗을 모독했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선전포고나 다름없습니다. 그들은 다윗의 선의를 왜곡해서 전쟁을 초래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한 것입니다.

 

(1) 암몬의 용병이 된 아람 군대(6)

암몬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온 사절단을 모욕한 것 때문에 암몬에 대한 다윗의 적대 감정이 고조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전의 호의적 관계가 완전히 깨진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암몬의 하눈과 신하들은 자신들의 행동의 결과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다윗의 사절단을 모욕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전선의 형성(7-8)

하지만 다윗이 이 사건으로 분노하였고, 이에 따라 전쟁의 위협이 커지자 이에 대처하기 위해 이스라엘 북쪽에 있는 벨르홉의 아람 사람들과 소바의 아람 사람의 보병 이만 명과 마아가 왕과 그의 군인 천 명과 요단 동편의 돕 사람만 이천 명을 고용합니다. 돕은 작은 도시 국가로 갈릴리 바다 남동쪽에 위치합니다. 이스라엘 주변에 있는 많은 도시 국가들과 동맹을 맺고 용병을 고용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확장을 막기 위해 주변 나라들이 암몬에 협조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변 나라들이 위협을 느낄 만큼 다윗이 승승장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암몬이 군대를 소집했다는 소식을 들은 다윗은 이들을 상대하기 위해 요압과 군대를 보냅니다. 요압과 그의 모든 용사들을 보내는데, 그 규모가 얼마인지는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암몬과 아람의 연합군보다는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8절에서 암몬이 전쟁을 하기 위해 진을 친 곳이 성문 앞이라고 하는데, 암몬의 성읍인 랍바일 것입니다(삼하 11:1). 그리고 암몬을 돕기 위해 온 부대는 들판에 따로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요압의 군대를 가운데 두고 앞뒤로 포위하고 있는 상황을 말하는 것으로 요압의 군대가 다수의 적들에게 포위를 당하여 매우 위험한 상황에 놓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요압의 계책(9-12)

다윗의 신하 요압은 이렇게 앞뒤로 포위되자 부대를 둘로 나누어 아랍과 암몬을 각각 상대하는 전법을 세웁니다. 요압은 군사들 중에서 최정예 군인들로 한 부대를 만들어 아람과 싸울 부대를 구성하고 나머지 군사들은 아비새에게 맡겨 암몬을 상대하게 하였습니다. 요압이 아람을 상대하기 위해 정예 부대를 만든 것을 보면 아람의 군대가 암몬의 군대보다 더 위협적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면서 요압은 아비새에게 서로 불리하면 돕자고 약속하고, 우리 하나님의 성읍과 백성을 위해서 담대하자고 권면합니다. 여기 하나님의 성읍은 이스라엘이 차지하고 있는 요단 동편 지역 성읍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요압은 하나님의 성읍을 지키기 위해 담대해야 한다고 말하며, 여호와께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하시길 기원합니다. 여기서 요압은 매우 신실한 모습을 보이는데, 이런 모습은 매우 다윗을 닮았습니다. 수적으로 열세인 상황에서 다윗처럼 여호와를 의지하고 있습니다.

 

(4) 요압과 아비새의 승리(13-14)

요압과 그와 함께한 군대는 아람과 싸우기 위해서 다가갔고 아람 군대는 도망하였습니다. 암몬 군대는 아람 군대가 도망가는 것을 보고 아비새 군대와 싸울 생각을 하지 않고 성 안으로 들어가 숨습니다. 이렇게 요압과 아비새는 아람과 암몬을 이기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본문에서 요압의 군대가 어떻게 싸웠는지 그리고 여호와께서 어떻게 개입하셨는지는 언급되고 있지 않지만, 요압의 군대가 나갔고 아람 군대가 도망갔다고 간략하게 언급한 것은 여호와께서 요압의 믿음에 응답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비록 요압의 믿음이 일시적이고 한정되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요압의 이런 일시적인 믿음에도 응답하시고 전쟁에서 아람 군대를 물리치신 것입니다.

 

다윗이 아람과의 전쟁에서 이김(15-19)

상대방의 호의를 거절해야 할 때 수치심을 겪지 않도록 배려해야 합니다.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남을 대려하지 않고 사욕에 급급해서는 안 됩니다. 사욕을 위한 싸움은 추합니다. 우리의 싸움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한 싸움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싸움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의를 위한 싸움이라면 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15아람 사람이 자기가 이스라엘 앞에서 패하였음을 보고 다 모이매 16하닷에셀이 사람을 보내 강 건너쪽에 있는 아람 사람을 불러 내매 그들이 헬람에 이르니 하닷에셀의 군사령관 소박이 그들을 거느린지라 17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알리매 그가 온 이스라엘을 모으고 요단을 건너 헬람에 이르매 아람 사람들이 다윗을 향하여 진을 치고 더불어 싸우더니 18아람 사람이 이스라엘 앞에서 도망한지라 다윗이 아람 병거 칠백 대와 마병 사만 명을 죽이고 또 그 군사령관 소박을 치매 거기서 죽으니라 19하닷에셀에게 속한 왕들이 자기가 이스라엘 앞에서 패함을 보고 이스라엘과 화친하고 섬기니 그러므로 아람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다시는 암몬 자손을 돕지 아니하니라(15-19)

수치심이 관계의 파국을 초래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수치심을 회복할 시간과 장소가 필요합니다. 다윗은 조문단이 잃어버린 품위를 되찾을 시간과 공간을 제공해주었습니다.

 

(1) 아람 군대의 전격(15-16)

이스라엘에게 패한 뒤 아랍 사람들은 다 같이 모였고하닷에셀은 강 건너편에 있는 아람 사람들까지 전쟁을 위해 불러들였습니다. 이 강은 유브라데 강으로 사무엘하 8:3에서 하닷에셀이 유브라데로 보냈던 아람 군대를 이때 불러들인 것입니다. ‘헬람은 요단 동편 북쪽 지역으로 다메섹과 하맛 사이 지역으로 추측됩니다. 이 지역이 다윗 왕국과 멀지 않은 곳이기 때문에 다윗은 위협을 받고 이들을 물리치기 위해서 이스라엘 군대를 모아 요단강을 건너 헬람까지 진격합니다. 그리고 헬람에서 다윗은 아람군대와 싸웠고, 아람 군대는 또다시 이스라엘 앞에서 도망합니다. 아람 군대의 이런 모습은 요압과 싸웠을 때와 동일합니다.

 

(2) 다윗의 승리(17-18)

이렇게 다윗이 아람을 이긴 것은 사무엘하 8:14에서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다는 표현처럼 여전히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계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다윗은 매우 큰 성과를 얻어 아람의 병거 모든 사람 칠백 명과 마병 사만 명을 죽이고 군사령관 소박까지 죽입니다.

 

(3) 전쟁의 결과(19)

다윗이 이렇게 아람 군대에 치명타를 가하자 하닷에셀을 섬기던 도시의 왕들이 이스라엘에게 화친을 청하여 이스라엘을 종주국으로 섬기게 되었습니다. 다시는 암몬 자손을 돕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다윗이 어디를 가든 여호와께서 함께하시며 전쟁에서 이기게 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다윗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다윗을 통해 주변 나라들은 여호와의 살아계심과 위대한 능력을 알게 된 것입니다. 지도자 한 사람의 올바른 신앙은 그 공동체를 강하게 만들며 공동체 사람들과 그 주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바로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누군가 호의를 베풀었다고 다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거절할 때 상대방이 수치심을 느끼지 않도록 최대한 배려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인간이 수치심을 경험하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의심을 품게 되고, 자존감이 추락하고, 그 결과 서로의 관계가 심각하게 손상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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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09-01)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선대한 다윗

사무엘하 9장 1-13절


옛 어르신들은 ‘은혜를 모른 사람은 짐승만도 못하다.’라고 가르쳐왔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바르게 안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면서 살아갔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사람의 은혜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으로 다윗은 주변 나라들과의 전쟁에서 이기고 에돕과 다메섹을 속국으로 삼았습니다. 사울의 손자이며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에 관한 기록입니다. 다윗이 사울의 집에 남은 사람이 있는지 조사해보니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로드발 마길의 집에 있던 므비보셋을 예루살렘으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가 항상 왕과 함께 식사하게 하였으며, 그에게 사울의 땅을 되돌려주고, 사울의 종이었던 시바로 하여금 므비보셋의 땅을 관리하게 했습니다.
 

므비보셋 소개(1-5)

성도들은 세상의 법칙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관보다 더 고귀하고 고상한 천국 가치관으로 살아갑니다. 세상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할 때, 놀라운 구원의 은혜와 축복이 임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고, 그 은혜를 나누어주는 역사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1다윗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하니라 2사울의 집에는 종 한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시바라 그를 다윗의 앞으로 부르매 왕이 그에게 말하되 네가 시바냐 하니 이르되 당신의 종이니이다 하니라 3왕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없느냐 내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 하니 시바가 왕께 아뢰되 요나단의 아들 하나가 있는데 다리 저는 자니이다 하니라 4왕이 그에게 말하되 그가 어디 있느냐 하니 시바가 왕께 아뢰되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 있나이다 하니라(1-4)
사무엘하 8장에서 다윗은 정복 전쟁을 통해 대외적으로 주변 나라들을 차례로 정복하고, 대내적으로 행정 조직을 정비해 나가는 가운데 강력한 통일 이스라엘 왕국을 구현해 강해지고 주권적인 위치에 안정이 됐습니다. 이제 안정되어가면서 그동안 사람들과의 약속을 돌이켜 봅니다. 그중에 과거에 요나단과 맺은 언약을 충실하게 지키려고 합니다.
 
(1) 다윗의 조사(1)
통일 왕국을 효율적으로 통치할 관료 조직을 완비한 후, 정권이 안정됩니다. 그후에 다윗은 요나단과의 약속을 기억합니다. 그래서 사울의 가문에 아직 남아 있는 후손이 있는지를 물으며, 요나단과의 언약을 지키기 위해 남아 있는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겠다고 말합니다(1).
사무엘상 20:15에서 요나단은 다윗을 사울의 손에서 살려 보내면서 자신과 자신의 집에 인자함을 영원히 끊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였고, 다윗은 이에 대해 요나단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살려주고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요나단을 기억하고 정권이 안정되자 요나단과의 언약을 지키기 위해 그의 가족을 찾은 것입니다.
 
(2) 시바에 대한 소개(2)
여기서 ‘시바’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는 사울 왕조를 섬기던 신하였으며, 다윗의 신하들이 그를 찾아서 다윗에게 데리고 옵니다. 그는 아마도 사울 왕가에 속한 토지와 재산을 관리하던 인물이었습니다. 현재 그 토지와 재산은 다윗 왕가에 귀속되었습니다.
시바는 다윗에게 오자 자신은 ‘당신의 종’이라고 고백합니다. 과거에는 사울 왕조의 신하였지만, 이제는 다윗을 왕으로 섬기고 있다고 고백하여 다윗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하였습니다.
 
(3) 다윗과 시바의 대화(3-4)
다윗은 시바에게 지금까지 사울 집에 남은 사람이 없는지 물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기 위해 찾는다고 설명합니다. 자신의 의중은 그 후손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기 위해서 사울의 가문 사람을 찾는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하여 얼마나 진심으로 은혜 베풀기를 원하는지를 강조합니다.
이에 시바는 요나단의 아들이 한 명 남았는데, 다리를 저는 장애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다리를 저는 자’라는 표현에서 우리는 그가 사무엘하 4:4에서 언급된 므비보셋임을 알게 됩니다. 시바가 므비보셋이 다리를 전다는 사실을 먼저 알린 것은 그가 다윗에게 전혀 위험이 되지 않는 인물이라는 것을 암시적으로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요나단의 아들이 살아있다는 말에 다윗이 어디에 있는지 묻자, 시바는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 있다고 알려줍니다(4). 이것을 알고 있는 것을 보면 시바는 여전히 사올의 가문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로드발’은 한 때 이스보셋이 이스라엘의 수도로 삼았던 요단 동면 마하나임 근처의 도시이며, ‘마길’이란 이름은 구약에서 므낫세의 아들이 있었고 길르앗의 아버지였습니다. 이름과 지역으로 볼 때 암미엘의 아들 마길은 요단 동편에 살던 부유한 가문으로 사용 가문을 지지하던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므비보셋을 자신의 집에 거하게 한 것입니다. 므비보셋이 마길의 집에 거한 것은 사울과 요나단에게 속한 모든 재산이 다윗에게 귀속되어 거할 곳이 마땅치 않았고, 또한 다윗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다윗과 요나단 간의 언약을 모르는 므비보셋의 입장에서는 다윗을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사람으로 여길 수 있었습니다.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데리고 옴(5-8)

성도는 하나님께 복음과 사랑에 대한 큰 빚을 지고 있습니다. 그 빚은 다른 성도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으로 갚아야 합니다. 다른 성도들을 보살피고 선으로 대하고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과 섬김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만큼 다른 지체를 사랑하고 섬기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해 부지런히 알아가야 합니다.
 
5다윗 왕이 사람을 보내어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서 그를 데려오니 6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나아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매 다윗이 이르되 므비보셋이여 하니 그가 이르기를 보소서 당신의 종이니이다 7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버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할아버지 사울의 모든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을지니라 하니 8그가 절하여 이르되 이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하니라(5-9)
다윗은 자기 수하의 사람을 마길의 집으로 보냈습니다.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데리고 오기 위해서였습니다. 다윗을 만난 므비보셋은 그 앞에 엎드려 절합니다. 다윗은 요나단과 맺은 언약의 대상자인 므비보셋에게 은총을 베풀었습니다. 과거에 다윗이 요나단에게 먼저 은총을 받은 것처럼 말입니다.
 
(1) 다윗과 므비보셋의 만나(5-6)
종 시바를 통해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의 소식을 들은 다윗은 신하를 보내어 마길의 집에서 자기 앞으로 데려오도록 합니다. 역대기에서는 그의 이름을 ‘므립바알’로 소개합니다(대상 8:34; 9:40). 사무엘 저자는 ‘바알’대신에 ‘수치, 부끄러움’을 의미하는 ‘보셋’을 접어넣음으로써 ‘므비보셋’이라고 소개합니다. 본문에서 므비보셋을 소개할 때,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므비보셋이 요나단의 아들이면서 사울의 손자로 사울 가문의 적통이란 사실을 강조한 표현입니다.
다윗의 신하들은 왕의 명령을 받들어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 있던 므비보셋을 데리고 왕 앞으로 나아옵니다(5). ‘므비보셋은 왕궁에 있는 다윗에게 나아와 옆드려 절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당신의 종‘이라는 말로 낮추어 표현합니다(6). 어쩌면 므비보셋은 한때 할아버지 사울 왕의 경쟁자였던 다윗이 사울 가문의 생존자를 찾으려고 한 이유가 정적(政敵)을 제거하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내심 두려움에 사로잡혔을 수도 있습니다.
 
(2) 다윗과 므비보셋의 대화(7-8)
’므비보셋‘은 다윗을 보자 엎드려 절하여 최고의 공경심을 표현합니다. 다윗이 ‘므비보셋아!’하고 이름을 부르자 그는 자신을 ‘당신의 종’이라고 대답하여 그에게 복종하겠다는 의사를 표현합니다. 여기서 므비보셋은 최대한 자신을 낮추며 조심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자신을 왜 찾아서 데리고 왔는지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에 두려워하며 매우 조심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다윗은 그에게 무서워하지 말라고 안심시키며, 자신이 그의 아버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반드시 은혜를 베풀겠다고 약속합니다.
그 증거로 다윗은 두 가지 약속합니다. 첫째는 사울 가문이 가지고 있던 모든 밭을 돌려주겠다고 합니다. 사울이 죽고 다윗이 왕위에 오른 후에 사울 가문의 땅은 몰수되어 다윗 왕가에 귀속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다윗이 쉽게 므비보셋에게 사울의 땅을 돌려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땅을 돌려준다는 것은 이전에 사울이 누리던 부와 권세를 어느 정도 회복시켜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음으로 두 번째 약속은 므비보셋이 항상 다윗의 상에서 식사하도록 허락합니다. 이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사무엘상 2:8에 따르면 귀족이나 왕과 같이 식사를 하는 것은 대단히 명예로운 일로 평가됩니다. 이것은 다윗이 므비보셋에게 큰 호의를 베풀고 그를 존중했다는 뜻입니다. 둘째, 정치적인 관점에서 보면 비록 다리를 절지만 모비보셋은 죽은 사울의 피붙이며 손자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반란의 핵심 인물이 될 수 있는 위험한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사울의 땅이 있는 기브아로 보내지 않고 예루살렘 왕궁에 머물게 하여 므비보셋의 동향을 살리기 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9장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보면 정치적인 이유보다는 므비보셋에 대한 호의를 보여주기 위한 행동으로 볼 수 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은혜를 받은 므비보셋은 다시 한 번 절을 하여 감사되 자신을 죽은 개에 비유하며 무가치한 자신을 돌봐준 다윗에게 감사합니다. 죽은 개는 무가치한 것을 상징하는 표현으로(삼상 24:14) 므비보셋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자신을 선대하는 것에 대해 감격하여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다윗은 요나단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므비보셋을 찾았고, 또한 약속대로 므비보셋을 살려주고 선대하였습니다. 요나단과의 언약을 충실하게 이행하여 자신의 목숨을 여러 번 살려주고 자신을 사랑해준 요나단에게 보답하였습니다.
 

므비보셋을 선대하는 다윗(9-13)

섬기고 있는 교회에서 다른 성도들을 귀하게 여기고 있습니까?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 나라를 상속할 상속자들임을 인정하십니까? 이런 사실을 안다면 다른 성도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달라져야 합니다. 성도들을 비하하거나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도 그 위치와 명예를 존중해 함부로 대할 수 없는데, 하물며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게 될 성도에 대해서라면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9왕이 사울의 시종 시바를 불러 그에게 이르되 사울과 그의 온 집에 속한 것은 내가 다 네 주인의 아들에게 주었노니 10너와 네 아들들과 네 종들은 그를 위하여 땅을 갈고 거두어 네 주인의 아들에게 양식을 대주어 먹게 하라 그러나 네 주인의 아들 므비보셋은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으리라 하니라 시바는 아들이 열다섯 명이요 종이 스무 명이라 11시바가 왕께 아뢰되 내 주 왕께서 모든 일을 종에게 명령하신 대로 종이 준행하겠나이다 하니라 므비보셋은 왕자 중 하나처럼 왕의 상에서 먹으니라 12므비보셋에게 어린 아들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미가더라 시바의 집에 사는 자마다 므비보셋의 종이 되니라 13므비보셋이 항상 왕의 상에서 먹으므로 예루살렘에 사니라 그는 두 발을 다 절더라(9-13)
다윗은 언약의 대상자인 므비보셋을 마치 자기 아들처럼 대했습니다. 므비보셋을 왕자처럼 대우한 것입니다. 성도도 다윗처럼 새 언약 관계 아래서 한 몸이 된 다른 성도들을 귀하게 대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공로로 인해 그 성도도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1) 다윗의 명령(9-10)
다윗은 므비보셋에게 약속한 것을 바로 시행합니다. 원래 사울의 신하였던 시바를 불러 사울의 모든 재산과 땅을 주인의 손자에게 주었으니, 이제 시바와 시바의 아들들은 므비보셋을 위해 땅을 관리하고 경작하여 그에게 양식을 대라고 명령합니다. 다윗이 시바를 모비보셋의 재산 관리자로 임명하여 시바의 이전 신분도 회복시킨 것입니다. 시바의 입장에서 이런 신분이 그다지 달가웠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후에 사무엘하 16장에서 다윗 편에 붙어서 므비보셋을 모함합니다. 이것을 보면 시바는 결코 사울 가문의 충성스러운 종이 아니었고, 오히려 다윗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던 인물입니다. 므비보셋을 섬기라는 다윗의 명령을 받은 시바는 왕의 명령대로 충실하게 행하겠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시바는 다윗을 자신의 주인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10절에서 시바의 가문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데, 시바는 아들이 열다섯이고 종이 스무 명이었습니다. 므비보셋이 받은 땅을 관리하기에 충분한 인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므비보셋은 다윗의 말대로 왕의 궁전에서 왕자들과 같은 대접을 받으면서 살았습니다.
 
(2) 므비보셋을 환대(11-13)
여기서 므비보셋이 다윗의 상에서 식사했다는 것을 11절과 13절에서 반복적으로 이야기하는데, 이것은 다윗이 약속대로 므비보셋을 선대했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므비보셋의 어린 아들 미가가 소개됩니다. 다윗이 므비보셋뿐 아니라 요나단의 후손 모두를 선대하였음을 말하기 위한 것입니다. 다윗은 요나단과의 언약을 기억하고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선대하여 약속을 지키는 신실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울은 왕이 된 이후에 자신의 왕권을 위협할 위험이 있는 다윗을 죽이려고 하였지만, 다윗은 왕이 된 후에도 자신의 왕권을 위협할 위험이 있는 므비보셋을 살려주고 요나단과의 약속도 지켰습니다. 왕이 된 후에도 자신의 왕권을 지켜주시는 분은 여호와이시라는 것을 잘 알았기에 정적이 될 수도 있는 므비보셋을 선대한 것입니다. 요나단은 비록 자신은 죽었지만 므비보셋을 살릴 수 있었고 역대상 8:35-40과 9:41-44을 보면 손자 미가를 통해 많은 자손을 얻고 번성한 가문을 이루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다윗을 선대한 요나단에게 하나님께서는 자손들을 통해 복을 주신 것입니다. 선을 행한 자들에게 선으로 갚으시는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당장 눈앞의 이익을 따라 행동할 것이 아니라 손해를 보더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신한 일들을 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므비보셋이 말했던 것처럼 죽은 개와 같이 무의미한 존재였습니다. 그러한 무의미한 사람을 사랑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감사드리면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모든 사람들에게 베풀고 나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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