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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01-01)

 


새로운 사역의 출발점에 선 제자들

사도행전 1장 1-11절


사도행전이라는 새로운 출발을 시작합니다. 현재 마음은 마치 마라톤 선수가 출발선에서 출발을 기다린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한편으로 거룩한 부담감이 밀려옵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으로 보내드린 후에 자기 스스로 사역해 나가야 했기 때문에 아마 제자들도 같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변함없이 그대로 지속하길 기도합니다. 의사이던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그리스도에 대해 자세히 소개합니다. 이 서신은 장문이기 때문에, 전편은 누가복음으로, 후편은 사도행전으로 둘로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전편은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복음을 위한 사역을 기록했고, 후편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부탁했던 사역을 어떻게 성취되어 가는지를 소개합니다. 제자들이 복음 사역하는데 홀로두지 않고, 성령님을 보내셔서 함께 사역하십니다. 이제부터 우리도 선배들의 발자취를 따라서 그들이 사역했던 길들을 살펴보며 따라가 보겠습니다.

 

본문은 사도행전 전체 중에 서론입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사명을 완수해 나가는 과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예수님 대신 오실 성령을 기다리고, 성령과 함께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후에 구름 타시고 승천하십니다. 특별히 8절은 사도행전의 주제를 다룬 핵심으로, 기독교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해서 유대와 사마리아와 로마까지 전파되는 과정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대한 서론(1-2)

사도행전은 예수님을 믿는 무리들이 복음을 전파했던 행적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스스로 움직인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움직이셨고, 제자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움직였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고도 부릅니다. 성령께서 움직이신 역사의 현장으로 출발하겠습니다.

 

1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2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1-2)

 

본문은 누가복음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누가가 누가복음과 같이 ‘데오빌로(θεοψιλε)’에게 바친 작품입니다. 이러한 형태는 당시 문학적인 관행을 따라 자신의 작품을 헌정하는 방식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누가가 기록한 사도행전은 당시 문학적인 저작물로서도 뒤지 않는 훌륭한 작품이라고 호평을 받아왔습니다.

누가복음에서도 거론한 적이 있지만, ‘데오빌로(θεοψιλε)’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역사적으로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 논란이 많았지만, 전통적으로 귀족으로 실존한 인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당시 유명한 사람에게 자신의 책을 헌정하는 관례가 있었음을 감안하고, 성경적으로 누가복음에서 ‘데오빌로’에게 ‘각하’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누가복음 1:4). 때문에 실제 인물로 보는 데는 어려움이 없습니다.

사도행전 도입인 이 단락은 누가복음의 마지막 부분 내용(누가복음 24:44-53)과 겹칩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성장과 사역과 부활 그리고 승천까지 기록했고, 이제 사도행전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승천 이후 사도들과 성도들에게 위탁한 복음 사역이 진행되는 과정을 소개합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사역들, 탄생, 사역, 죽음 그리고 부활 등을 ‘일(사건)’으로 표현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무고히 수난 당하신 사실들을, 당시 제자들은 ‘확실한 많은 증거’들이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유무에 대해 변론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된 가르침은 부활 이후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생전 지상 사역으로부터 시작한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입니다(누가복음 4:43). 그러므로 초대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 나라, 즉 구원 사역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증인들에 의해 기록된 구체적인 역사적 인물과 사건을 토대로 형성된 신앙공동체입니다. 말씀에 기초하지 않고, 경험이나 사상에 기초한 신앙은 굳게 설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행하심과 가르치심을 따르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역(3-5)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오셨다는 소식입니다. 세상의 주인은 세상의 권력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소식이, 예수님께서 살아 계서서 지금도 왕으로 다스린다는 소식이, 바로, ‘기쁜소식’인 ‘복음(福音)’입니다.

 

3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4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3-5)

누가는 누가복음에서는 고난 받으신 예수님을 기록한 후, 그리고 사도행전에서는 영광의 몸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내용을 소개합니다.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부활을 분명히 나타내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무덤에 장사지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무덤을 박차고 부활하셨습니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사건을 ‘고난’이라고 표현합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지만, 이 사실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 모두 믿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불신앙의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부활과 하나님 나라에 대해 설명하셨습니다. 누가는 사도행전을 통해 먼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셨던 사역들을 소개합니다.

 

⑴ 부활하신 예수님(3)

사도행전의 기록자인 누가는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부활 후 승천하시기 전까지 40일 동안 지상의 마지막 사역을 설명합니다.

① 부활에 대한 소개

사람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나타나면 모든 사람을 믿게 하기에 가장 좋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조용하게 제자들에게만 나타나셔서, 이것이 단순한 환생이 아니라 부활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 가시 전에 약속하신 것도 ‘부활’이지 ‘환생’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영으로만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몸으로 살아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많은 증거를 보여주셨습니다.

②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개

예수님께서 하신 또 다른 일은 장차 이 세상에 세워질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왕국’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완성시키기 위해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께서 통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왕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항상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멸망한 후, 눈에 보이는 왕으로서 대리 통치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선지자들은 그 왕을 하나님께서 보내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왕을 가리켜 ‘메시아’ 또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인 ‘그리스도’라고 부릅니다. 유대인들이라면 모두 그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가져 오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자 그 메시아 운동이 실패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생각지도 못했던 새로운 방식의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도래케 하셨고, 그 나라를 왕으로 다스리시며, 그 나라의 권능을 펼쳐 보이셨습니다.

 

⑵ 약속하신 것을 기다림(4)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신 후에, 제자들에게 즉시 나가서 전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전하기 전에 그들이 들어야할 명령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모아놓으시고 분부하셨습니다. 그것은 두 가지인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 것’과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릴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대신하여 보혜사 성령께서 오셔서 제자들과 함께 하실 때,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온전히 깨닫고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아버지의 약속’은 구약에서 이사야 32장 15절과 요엘 2장 28-32절에서 예언으로 약속되었습니다.

15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숲으로 여기게 되리라(이사야 32:15)

28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29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30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31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32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요엘 2:28-32)

특히 위에서 언급된 요엘서는 베드로가 설교할 때, 직접 언급되어 인용됩니다(사도행전 2:17-21).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사역을 제자들과 함께 하시면서, 이미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 것’과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릴 것’을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49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누가복음 24:49)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기다리고 있어야 할 일은, 당시에 상황에 따라 진행된 것이 아닙니다. 구약 시대부터 준비하신 약속이었습니다. 이러한 기다림의 순종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기 위한 다음 단계를 준비하셨습니다. 선생님의 죽음을 통해 절망과 실망 속에 빠진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목숨을 담보하고 있었습니다. 매우 두려웠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따라다닐 때, 제자들은 스스로 무엇인가를 성취하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자신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자신들에게 패배와 절망을 안겨준 자리이지만, 인간의 실패와 불순종과 한계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실패와 불순종 그리고 자신의 한계를 응시할 때, 성령께서는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⑶ 성령 세례를 기다림(5)

두려움 속에서도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 기다려야할 이유는, 세례 요한의 말(누가복음 3:16)을 인용하여 ‘아버지의 약속’은 ‘성령 세례’임을 깨닫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세례’는 물속에 담근다거나 물을 쏟아 붓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례는 정결을 위한 수단입니다. 그런데 세례가 성령과 연관되어 나올 때는 성령이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것을 말하며, 죄 사함과 연결됩니다(사도행전 2:38). ‘성령 세례’는 성경 전체에 두 번 등장합니다(사도행전 1:5; 11:16). 모두 세례 요한의 예언과 연관에 ‘성령을 받는다’, ‘성령이 임한다’, ‘성령의 부으심으로 받는다’ 등으로 표현합니다.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공생애 기간 동안 하나님 나라에 대해 배웠습니다. 하지만 영적인 지식으로 그들을 하나님 나라의 증인으로 만들어 주지 못했습니다. 성령이 임하셔서 권능을 주실 때, 온전히 담대하게 땅끝까지 증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성령 임재의 신앙(6-11)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서 성령이 임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기다림을 통해 장차 일어날 일이 무엇입니까? 성도들에게 성령이 임재하시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⑴ 제자들의 질문(6-8)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충분하게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의 질문을 들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성령이 임하면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나라가 임할 표적으로, 곧 이스라엘이 정치적으로 로마에서 해방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질문으로 새로운 장면을 시작합니다. 사도행전의 기록자인 누가는 제자들의 질문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6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7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8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6-8)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임하는 것은 무너진 ‘다윗 왕국’이 팔레스틴 지역에 새로운 유대인들만의 나라가 다시 세우진 것이라고 오해했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① 유대교적인 편협한 사상(6)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하나님 나라에 대해 줄곧 말씀하십니다(3).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라고 묻습니다. 이것을 직역하면, ‘주여, 지금이 나라를 이스라엘에게 회복하실 때입니까?’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정리해 보면, 그들은 예수님께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에 대해 물었습니다.

아직까지 제자들은 터무니없게도 유대교적 종말론의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 나라 성취를 민족주의적으로 이스라엘에게만 국한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아로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해방시킬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의 기준으로 제자들의 생각을 심판할 수 없습니다. 당시 유대인으로서는 당연한 생각이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과 관련해서 일어날 징조들에 대해 예언하셨습니다. 그들은 그 때 일어나는 현상으로 착각했던 것입니다.

15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숲으로 여기게 되리라 16그 때에 정의가 광야에 거하며 공의가 아름다운 밭에 거하리니 17공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18내 백성이 화평한 집과 안전한 거처와 조용히 쉬는 곳에 있으려니와 19그 숲은 우박에 상하고 성읍은 파괴되리라 20모든 물 가에 씨를 뿌리고 소와 나귀를 그리로 모는 너희는 복이 있느니라(이사야 32:15-20)

② 새로운 기독교적 종말론(7-8)

예수님께서는 유대주의적인 편협된 생각을 하는 제자들에게 ‘하나님나라’는 어떤 것인지를 말씀하셨습니다. 구체적으로 기록하지 않았지만, 그 제자들에게 장차 임할 성령의 역사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편협한 유대교적 종말론을 넘어 온 민족을 품는 새로운 기독교적 종말론으로 확장시켰을 것입니다(7-8).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두 가지를 강조하셨습니다. 첫째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시기는 아무도 모르고 예수님까지도 모릅니다. 다만 전적으로 하나님 아버지만 달려있다는 사실(참고 마가복음 13:32)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성취되는 시기를 말할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 나라의 성취는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을 통해 성취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역할이 강조된 것입니다. 제자들의 사역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 나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장 8절은 사도행전의 핵심 구절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8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8)

제자들의 사역은 이 말씀으로 집약됩니다. 앞으로 전개될 사도행전의 모든 사역들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은 후에,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해야 합니다. 누가는 성령이 임하면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예루살렘(사도행전 2:42-8:3)에서 복음을 전하고, 원수 같이 지내고 있는 유대(8:4-11:18)와 사마리아에게 평화의 복음을 전하고, 그리고 더 나가서 저주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이방인들이 거주하는 땅 끝(11:19-28:31)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팔레스틴의 경계를 넘고, 유대인의 경계를 넘어서 땅 끝까지 임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은 ‘아버지의 약속’(4)과 ‘성령 세례’(5)로 지칭하면서, 사도행전 2장에서 펼쳐질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예고합니다. 초대교회는 성령강림으로부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시면, 두 가지 현상이 일어날 것입니다. 첫째, ‘능력을 받고’, 둘째, 주님의 ‘증인’이 됩니다. 이 두 가지 현상은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초대교회 제자들에게서 일어났습니다.

 

⑵ 하나님의 관점(9-11)

성령이 임하시면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이 하나님적인 생각으로 변화됩니다. 제자들의 관심은 편협하게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이었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땅 끝까지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세상에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예루살렘 중심의 구심적 운동만 기대했던 제자들은 이제 성령을 받고 전 세계로 펴져 나가게 되었습니다.

11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10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11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9-11)

다른 복음서의 저자와의 달리 오직 누가만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에 대해 소개합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부활을 단순하게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사건으로만 이해하지 않고, 하나님 우편으로 승귀한 사건으로 보았습니다(사도행전 2:33-35).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을 마치시고 제자들이 본 가운데 ‘감람원’에서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승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본 그대로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재림하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이 다 알 수 있도록 재림하실 것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하늘만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성령을 의지하여 맡겨진 일을 따라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에 사로잡힌 자들은 하늘을 쳐다보는 자가 아니요, 하늘의 시각으로 온 땅을 쳐다보고 모든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발이 되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이 세상에서 충실한 모습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진실하게 기다리는 태도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라는 믿음은 역경을 이겨 내는 원동력입니다. 성령 충만해지면 소망을 품고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고난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모이기에 힘쓰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여기 이스라엘의 회복을 꿈꾸며 모인 사람들은, 지독히 많은 고난을 받은 민족이기에 그들에게 과연 소망이 있을지 의심이 들 정도입니다. 하지만 성령 충만으로 새로운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성령 충만하면 자기 일도 감당하지 못하던 사람들이 힘을 입습니다. 그리고 땅 끝까지 가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 수 있습니다. 땅 끝은 아직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미전도지를 의미합니다. 마지막 때에는 증인의 삶을 살지 못하면,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 부끄러운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교의 각오로 증인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제자들이나 사도들은 복음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존재합니다. 증인은 탄생한 것이 아니라 만들어집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이 성령으로 거듭나면, 자기를 부인하고 삶의 관점이 변합니다. 제자들은 예루살렘 중심의 구심운동(이사야 2:2-4)만 기대했지만, 이제 성령 임재를 체험하고 계급과 혈통과 영토를 넘어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 원심 운동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자기중심적으로만 살던 사람은 자아가 죽고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하나님 나라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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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0-01)

마태복음(10-0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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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제자를 임명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101-15


종종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떤 부분으로 사용답기에 합당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부분에서 사용되면 사용됐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한 번은 하나님께서 이런 부분에 사용하시면 좋을 것인데.’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쓰임 받기에 합당한 사람들이 되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전하는 천국 복음을 전파하도록 제자들을 선택하십니다. 그래서 열두 제자를 부르셔서 사도로 임명하신 후, 자신의 권능을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하나님 나라 복음을 선포하도록 파송하시며, 전도자의 자세와 필요한 것, 그리고 어떻게 전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열두 제자를 부르신 예수님(1-4)

진정한 제자는 예수님께 순종하고 그분의 뜻을 온전히 따르는 것입니다. 거짓 제자는 예수님을 자신의 목적과 이익을 위해 이용하려고 하면서 가룟 유다와 같은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원하든지, 원치 않는 길로 가라고 할지라도 순종하는 진실한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1예수께서 그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2열 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3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4가나안인 시몬과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1-4)

9:37-38에서 예수님께서는 추수할 것이 많은데 일꾼이 적다는 긴박한 상황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본 단락에서는 제자들을 일꾼으로 추수할 곳에 보내시는 장면입니다.

 

(1) 제자들에게 권능을 주심(1)

예수님의 제자를 열두 제자로 특정하신 것은 이곳이 처음입니다. 열둘을 세우신 것은 분명한 의도하신 바입니다. 하늘나라 새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상징한 것입니다(19:28). 지금껏 제자들은 예수님 곁에서 하늘나라 사역의 목격자로서 동행했습니다. 이제는 본인들이 직접 그 사역의 당사자들로 보냄을 받습니다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송 전에 그들을 세우시고, 자신이 보여주었던 귀신을 쫓고, 병을 치유할 수 있는 권능을 주십니다열두 제자에게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고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4:23;9:35;8:16) 권능을 부여하십니다(1). 예수님의 사역을 특정했던 가르치심은 등장하지 않습니다(4:23; 9:35). 예수님께서 주신 신적 권능으로 제자들은 그들 안에 있는 하늘나라의 실체를 경험합니다. 하늘나라를 방해하는 어둠의 세력, 사탄의 권세를 제압하며 죄 된 현실 속에 뒤틀린 육체와 영혼을 치유합니다. 제자들을 통한 권능의 사역은 곧 권능의 주체이신 예수님의 사역이 됩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권능은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계신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2) 열두 제자의 이름(2-4)

본 절에서는 열두 사도의 이름이 공개합니다. 한참 후에 일어날 가룟 유다의 배교까지 포함되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사도’(2)는 파송하는 주체인 예수님의 권위를 강조하고, 예수님의 임명을 받은 것이므로 제자들의 권위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맨 먼저 등장하는 네 명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일찍이 부르신 다섯 명 중에 초반 네 명입니다(4:18-22). 열두 제자의 명단에서 가장 먼저 시몬 베드로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때 함께 부름 받은 안드레, 야고보, 요한이 뒤를 잇습니다. ‘첫째를 뜻하는 프로토스는 베드로의 으뜸인, 특별한 위치를 의미합니다. 그는 12 제자들을 대표하고 대변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16:16-19). 베드로의 이름이 맨 앞에, 유다가 맨 뒤에 기록된 것은 의도적입니다. 시몬은 당시 팔레스타인에서 첫 번째로 선호하던 이름이었기에, 식별을 위해 반석을 뜻하는 페트로스게바라는 별명이 붙여졌습니다그리고 제자 목록에서 가룟 유다를 맨 끝에 둡니다. 유다가 제자들의 서열에서 열두째였다는 뜻이 아니라, 가장 불명예스러운 제자임을 의미합니다. 네 복음서의 목록은 공통적으로 베드로, 빌립, 야고보를 각 그룹의 맨 앞에 배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이미 보여주신 사역을 제자들에게 명령하심으로써, 제자의 사명은 예수님을 닮는 것임을 가르치십니다(1). 예수님께서는 8-9장의 핵심 주제인 권위를 긍휼을 베풀기 위해 사용하셨기 때문에 긍휼의 사역을 하도록 제자들을 부르시고 권위를 주셨습니다. 교회는 목자 없는 양처럼 낙담하고 지쳐 주저앉은 사람들과(9:36) 질병과 약하게 만드는 것으로 쓰러진 사람들(10:2,8)을 회복하는 일에 부름 받았습니다. 제자들이 파송 받을 때 사도’, 즉 보낸 자의 권위를 주신 것처럼, 예수께서 교회와 지도자들에게 치유하고 회복하는 사명과 권위를 위임하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제자들이 먼저 예수님께 나온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먼저 부르셨습니다. 부르심의 우선권은 예수께 있습니다. 제자들은 이렇게 할 권위를 부여받은 자들일 뿐, 그들에게 내재된 권위로 임무를 수행하는 자들이 아닙니다마지막으로, 사도인 제자들의 정체성은 그들을 보내신 예수님과 직접적으로 관련됩니다. 제자들의 주된 과제는 그들을 보내시는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1절의 명령을 수행하는 삶이 예수님을 배우는 삶입니다.

 

열두 사도의 파송과 사명(5-15)

보냄을 받은 자사도라고 합니다. 사도의 권위는 보내신 이의 뜻을 그대로 따르는데 있습니다. 그들은 보내신 이의 주권을 선포하기 위해 보내신 곳으로 나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다른 것을 의지할 것 없습니다. 다른 것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은 그만큼 책임지신다는 약속입니다.

 

5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6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7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8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9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10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 11어떤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가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12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13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14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15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5-15)

본문은 갓 부름 받은 사도들에게 예수님께서 선교 전반에 대한 지침을 제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어느 마을로 가든지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그 집에 머물라고 명하십니다. 무례해서는 안 되지만 당당함을 잃지 말라는 당부입니다. 어느 성이든지 영접하지 않으면,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고 떠나라고 명하십니다. 주께서 그 완악한 마을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1) 사역 범위(5-6)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보내시면서 주시는 명령의 말씀입니다. 가장 먼저 명령하신 내용은 전도 대상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대상자를 제한하고 특정하는 것이 놀랍니다먼저, 지역적으로는 갈릴리에 제한되는 모습입니다. ‘이방인의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마을에도 가지 말도록 하십니다(5). 분명히 이 범위는 유대인들에게 익숙한 삶의 경계일 것입니다그리고 제자들이 가야 할 길은 오직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명령하십니다(6). 마태복음에서 이스라엘은 대부분 부정적으로 묘사되기도 하는데(8:7;15:24,26), 여기서는 긍정적으로 묘사됩니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은 5절의 이방인들과 사마리아인들과 대조됩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먼저 하나님의 백성을 대상으로 삼는 것일 뿐, 이스라엘 외의 이방인들을 선교 대상에서 제외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질서의 회복을 고대하는 이방인들을 향합니다(12:17-21; 42:14). 제자들은 현 단계에서 이스라엘을 선교 대상으로 삼지만, 마태복음의 끝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모든 민족에게 보내십니다(28:19). 따라서 본문은 구원사의 시각에서 이해돼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 이전에 유대인들인 제자들이 사도로 세움을 받자마자 이방인들에게 갈 마음을 품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구원사의 관점에서 이방의 빛인 이스라엘(49:4-7)의 회복 창조 세계, 즉 열방의 회복을 위한 것입니다.

제자들의 첫째 지침은 소망 없이 살아가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부름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하늘나라의 복음을 들고 파송되는 사람들이 최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할 사명은 회복입니다. 회복의 대상은 구원사의 흐름에 따라 먼저 이스라엘이며, 다음에는 열방이 될 것입니다.

 

(2) 사역 내용(7-8)

예수님으로부터 권능을 이양 받은 제자들이 가서 전파해야 할 일은 확실했습니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고 각종 기적과 능력을 행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과 스승 예수님처럼 하늘나라가 가까이 온 것을 선포합니다(3:2; 4:17).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8-9장에서 보여주었던 동일한 능력을 행하라고 명령하시는 대목입니다. 제자들이 수행해야 할 일은 병자를 고치는 것, 죽은 자를 살리는 것,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는 것, 귀신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는 예수님께서 8-9장에서 행하신 기적에 해당하며(8:2-4, 14-17, 28-34; 9:18-26), 9:35-36과 연결해보면 제자들의 임무는 목자의 동정심에서 나온 결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죽은 자를 살리는 일(부활이 아니라 소생)은 구약에서 엘리야(왕상 17:17-24)와 엘리사(4:32-37) 외에는 하지 못한 일입니다.

제자들은 7-8a절의 사명을 수행하면서 대가를 받지 말아야 했습니다. 제자들에게 주어진 치유 능력은 자신들의 노력으로 생긴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거저 받은 선물이기 때문에, 이 능력을 행해서 사적인 이득을 취할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의 관심사가 아니라 그들을 보내신 예수,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관심사를 반영해야 합니다.

 

(3) 사역할 방식(9-10)

예수님께서는 선교 사명을 수행하는 제자들에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할 것을 가르치십니다. 전도여행의 채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전대, 배낭, 샌들, 자팡이와 같이 순회하는 선교 사역에서 꼭 필요한 것으로 간주 되는 것들을 지참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일꾼은 보내신 자가 모든 것을 책임지기 때문입니다(9:38).

사람들로부터 보상을 기대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움에 기대어 살아갈 때, 제자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신뢰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참조, 고전 9:11-12; 살전 2:9; 4:10-17). 제자들은 하나님을 믿도록 가르치는 사람들일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하나님의 섭리적인 돌보심을 믿고 살아가는 모본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삶을 사는 제자를 통해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4) 사명에 반응과 결과(11-15)

제자들은 성에 들어가서 가장 먼저 합당한 자를 찾아 그곳을 사역의 거점으로 삼아야 합니다. 즉 하늘나라 복음의 메시지를 환영하는 사람들의 가정에 머물러야 합니다(11). 제자들은 호의적으로 대하는 가정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복음을 영접한 가정에 가야 하는데, 이것은 가정들을 비교하여 더 잘 대해주는 곳에 묵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합당한 자의 집에 들어가서 평화를 빌어야 합니다(12). 평화를 비는 것은 예수님 안에서 시작된 하늘나라 복음(52:7)의 인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이 시작하시는 미래는 평화의 시대이며(8:23-97; 11:5-10; 66:25; 9:9-10; 3:23-24), 하늘나라의 평화는 갱신과 회복을 위해 부름 받은 제자들을 통해서 전해집니다. 만일 그 사람의 집이 합당하면 제자들이 빈 평안이 반응한 그들에게 선물로 가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제자들에게 돌아옵니다. 13절 내용은 이사야 55:11과 유사합니다(참조, 31:2; 45:23).

14-15절은 부정적인 반응에 대해 제자들이 보여야 할 자세입니다. 제자들은 복음에는 항상 영접과 거절이라는 두 가지 반응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제자들은 배척하는 사람들이 생긴다고 해서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배척하면 제자들이 평안을 빌 가능성 자체가 허락되지 않기에 그때는 발의 먼저를 털어버리라고 명령하십니다. 환대 거부는 개인의 수치를 넘어 마을의 수치를 안겨준 불명예스러운 일입니다(11:5-13). 발의 먼지를 털어버리는 것은 역시 당찬 거절 행위입니다제자들이 전한 평화는 사라지지 않고 자신들에게 그대로 돌아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람들의 반대와 배척은 제자들에게 책임이 있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파송을 받는 인생은 경제적으로 어렵고 사회적으로 소외되는 것처럼 보여도 결코 그것을 실패한 인생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복음은 언제나 수용과 거절의 선택을 요구합니다. 수용은 샬롬이고 거절은 심판입니다.

 


 

가치관이 무너지고 어디에 진리인지 몰라 기대야 할지 보이지 않는 세상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제자의 삶을 보고 복음이 진리라는 사실을 가늠하게 합니다. 제자의 삶과 태도가 복음으로 세상에 향기를 드러낼 때, 주의 복음이 더욱 힘 있게 세상으로 뻗어나갈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많은 일꾼을 찾으시고 제자를 부르십니다. 복음을 복음답게, 교회를 교회답게 하도록 부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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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09-03)


긍휼히 여기시는 목자이신 예수님

마태복음 9장 27-38절


‘불쌍함’이란 단어는 따뜻하면서도 불편합니다. 누군가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따뜻하지만, 그 수식어가 자신에게 달린다면 마음이 무거워질 것입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주님을 향하여 이 단어를 꺼냅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불쌍함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지금까지 마태복음 내용을 정리해 보면, 5-7장은 가르침과 8-9장은 치유하심 두 가지를 표현했습니다. 본문은 마태복음 8-9장을 통해 열 가지 이야기 중 마지막 두 가지를 소개합니다. 이 두 맹인의 치유와 귀신 들린 벙어리의 치유 사건은 예수님께서 다윗의 아들로서 세상에 오신 메시아임을 확신시켜 주는 사건들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메시아를 전할 추수할 일꾼의 필요성을 언급했습니다.

 

맹인을 고치신 예수님(27-31)

말씀과 믿음의 순종이 만들어낸 역사는 여태 가보지 못한 새로운 신앙의 지평으로 인도하고, 새로운 시선으로 나와 자기 삶의 여러 조건들을 볼 수 있게 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보지 못하는 자의 눈을 만져 믿음대로 눈을 뜨게 하십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병이나 고친 치유자로만 믿게 된다면,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습니다. 설익은 영적 흥분과 열정은 오히려 사역을 망치기 때문입니다.

 

26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 27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실새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28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맹인들이 그에게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29이에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 30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예수께서 엄히 경고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하셨으나 31그들이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퍼뜨리니라(27-31)

본문은 두 맹인을 치료하시는 예수님의 초월적인 권세가 소개됩니다. 죽은 자를 살리신 사건에 이어 맹인이 보게 되는 기적이 등장합니다. 맹인의 눈을 뜨게 한 본 사건은 마태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종말에 있을 하나님의 구원을 성취할 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1) 맹인의 간청과 예수님의 반응(27-28)

예수님께서 갈릴리 회당장 집에서 떠나자 맹인 두 사람이 따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27)라고 부르짖습니다. 당시에 앞을 못 본다는 것은 일반적 장애를 넘어 종교적 신념이 반영된 질병, 곧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로 생각했습니다. 당시에는 질병과 죄를 연관성 있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맹인들은 누군가의 잘못으로 장애를 얻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맹인이나 눈에 질병이 있는 사람은 제사장 직분을 수행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제사를 위해 나올 수 없었습니다. 맹인들이나 눈에 질병이 있는 사람은 질병과 관련 있는 사람이었고, 제사 제물을 오염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사 행사장에서 금지당했던 것입니다.

한편 구약에서 맹인들을 위한 배려도 언급됩니다. 맹인들 앞에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을 두지 말아야 하며 잘못된 길로 인도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 내용보다 훨씬 긍정적인 내용은 이사야 35장 5-6절에 등장합니다. 이사야는 맹인의 치유를 종말론적 회복을 보여주는 증거라 예언합니다. 두 맹인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종말론적 회복을 시작하고 계심을 믿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맹인들은 자신들에게 종말론적인 선물이 자신들에게 베풀어지도록 간구합니다. 맹인들의 외침에서 두 가지 중요한 특징을 발견합니다. 첫째,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 ‘다윗의 자손 예수!’라고 부릅니다. ‘다윗의 자손’이란 것은 공관복음에서 특히 마태복음에서 메시아를 부르는 칭호입니다. 즉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정확히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서 하신 사역은 죄인들을 불쌍히 여겨서 구속하는 일입니다. 둘째, 그들은 예수님께서 치료해달라고 구한 것이 아니라 긍휼히 여겨주심을 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원하시는 것은 ‘긍휼’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을 구원할 자(1:21) 메시야로서 예수의 치유 사역의 본질은 긍휼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이 두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긍휼입니다. ‘다윗의 아들’이라고 외친 맹인들은 예수님께서 무리를 떠나 집에 들어갈 때까지 따라갑니다. 상당한 거리를 뒤따르며 예수님의 머무는 숙소까지 따라올 만큼 절박했습니다. 맹인들의 외침에도 예수님께서는 모른 척 어느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맹인들의 외침에도 집에까지 들어가셨겠습니까? 정상적인 수많은 사람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계속적으로 따라가면서 그 맹인들이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 맹인들의 외치는 소리를 들으면서 예수님께서 ‘다윗의 자손이신 메시아’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무리가 없는 집안에서 예수님께서 맹인들에게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라고 묻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능력을 행하시기 전에 원하는 것은 믿음이었습니다. 이렇게 직접 믿음 여부를 물으신 것은 이곳이 유일합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단순히 기적의 가능성을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아로 너희들에게 역사할 수 있겠느냐?’라고, 그들의 믿음을 확신시키신 것입니다.

맹인들은 주저 없이 단호하게 “주여 그러하오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들의 부르짖음에 이미 그 믿음이 배어 있었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맹인을 보게 하신다고 하신 메시아의 약속을 성취하신 메시아이심을 증거 하는 역사입니다. 두 맹인들이 믿는 것은 예수님을 눈을 뜨게 해주 치료자로서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구원해주실 메시아로 믿는 것입니다.

 

(2) 치유와 경고(29-31)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실 때 보여주시는 치유의 행위도 다양합니다.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너희 믿음대로 되라!”(29)고 하셨습니다. 믿음은 예수님의 권능을 일어나게 하는 통로입니다. 마태복음에서 핵심적인 개념 가운데 하나로서 신뢰의 의미입니다. 신뢰의 모범은 이미 이방인 백부장(8:5-13)과 중풍병자를 데려온 사람들이 보여주었습니다(9:1-13).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도 가능하겠지만(8:8), 직접 만지심으로 긍휼을 베풀어주십니다. 메시아의 오심을 환영하는 자가 그의 긍휼을 맛봅니다. 결국, 그들의 믿음대로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눈이 밝아진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엄하게 경계하시면서 “삼가 아무에게도 알게 하지 말라”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경계하신 것은 기적적인 사건들로 구원을 일으킬 만한 믿음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전시 수단으로 사용되지 않았음을 분명히 해두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치유에 사건만 보면,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병이나 고친 마술사 정도로밖에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엄중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맹인들은 자신들이 받은 은혜에 대해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저희가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전파하니라”(31)

 

벙어리를 고치시는 예수님(32-34)

예수님의 동력은 긍휼입니다. 하늘 보좌로부터 낮은 땅으로, 길고 긴 역사 속에서 정확한 카이로스에 도시와 마을로 가서 한 영혼을 찾아내십니다. 목자 잃은 양들이 광야의 절벽에서 죽어가며 살려달라는 간절한 신음소리를 들으십니다. 그가 들으시고 찾아오셔서 고치십니다.

 

32그들이 나갈 때에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께 데려오니 33귀신이 쫓겨나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거늘 무리가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 하되 34바리새인들은 이르되 그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32-34)

세 번째 부분을 마무리 짓는 마지막 기적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이번에는 귀신이 들려 말 못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일행이 집에서 밖으로 나가자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데려왔습니다. 사람들은 하늘나라 복음의 혜택을 경험하도록 예수님의 도움이 절실한 사람을 데려옵니다. 예수님께서 머문 집에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고, 치유를 원하는 무리가 줄지어 있었을 것입니다. 이 사람이 말 못하는 것은 귀신 때문이었습니다. 두 맹인에게 하셨던 치유 행위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 사람의 치유는 하나님의 통치가 종말에 실현되는 증거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마태는 그가 예수님에게 오자마자 귀신이 쫓겨나고 언어를 회복했다고 소개합니다. 여기서 구체적인 치유 과정은 소개되지 않으나 귀신이 그 사람에게서 쫓겨났다는 사실은 분명히 합니다. 말 못하는 사람이 듣지 못하는 사람일 수 있겠으나, 중요한 것은 이 기적 역시 앞의 맹인이 보게 된 것과 함께 메시아 시대에 나타날 현상들이라는 점입니다.

이사야 35:5-6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과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 그리고 말 못하는 자의 혀가 노래할 것이 함께 등장합니다. 마태는 지금 이사야 본문을 염두에 두고 기적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치유해 주자, 이 기적을 목격한 무리들은 놀라며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서 이러한 일은 전무후무한 일이라 탄성을 지릅니다. 마태는 무리가 놀라는 모습을 8-9장 마지막에 배치함으로써 전체 기적에 대한 반응으로 사용합니다.

하지만 무리의 긍정적인 반응과 달리 그곳에 있던 바리새인들은 전혀 다른 반응을 내놓습니다. 그들은 “저가 귀신의 왕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낸다”(34)라고 비난합니다. 그들은 기적이 일어난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행위로 감동 받는 무리에게 경고할 목적으로 이런 말을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에 부정적으로 반응한 이들에 대한 평가는 11장과 13장에서 집중적으로 다룰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쫓으신 것이 귀신의 왕의 힘을 의지한 결과라고 궁색한 평가를 내린 것입니다. 나중에 이 주제에 동일한 입장을 가지고 심화된 논쟁을 벌일 것입니다(12:22-29). 그때 예수님께서는 귀신을 쫓아낸 힘이 “하나님의 성령에 힘 입은 것”이라고 강변하십니다(12:28). 이처럼 눈앞에서 메시아를 보고도 보지 못하며, 놀라운 기적에 노래하지 못하는 그들이야말로 맹인이요 말 못하는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지역에 가서 말 못하는 사람을 치유하는 사건은 종말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증거를 보여줍니다. 귀신을 쫓아내신 사건은 주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으며, 치유 사건보다는 사탄의 나라가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에 본문은 조금 더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선교해야 할 이유(35-38)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들만이 인간의 수고를 통해 ‘인간의 추수’가 아니라, 추수의 주권은 하나님께 돌리는 ‘하나님의 추수’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구원에 동참하느냐는 양적인 부분이 아니라 구원 받을 사람들만 구원하는 질적인 부분에 일꾼을 찾으십니다.

 

35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36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37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38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35-38)

본 단락은 8-9장의 기적 이야기 묶음의 전체적 결론이면서 새롭게 등장할 사역 이야기의 주체적 서론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일, 즉 메시아를 함께 전파할 일꾼을 보내달라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기도는 마태복음 10장에서 제자 파송 관련 가르침 단락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1) 사역의 요약(35)

마태는 5-9장까지 예수님의 사역을 요약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도시(9:1;10:11;11:1,20)와 마을을 두루 찾아다니며 ‘그들의 회당’(12:9; 13:54)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그리고 메시아이심을 나타내는 모든 질병과 모든 약한 고통을 치유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혼을 구원하는 사역은 세 가지였습니다. 먼저 천국에 대한 것들을 가르치시고, 다음으로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을 전파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병든 사람들을 치유하는 역사를 이루어 가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들이 천국에 대해 바르게 배우고, 제대로 순종하면, 자연스럽게 여러 가지 약한 부분에 바르게 고쳐지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심지어 육체의 질병까지도 고쳐질 것입니다. 마태는 산상수훈 이래 8-9장까지 예수님께서는 기적적인 사역 10가지를 선별적으로 소개하지만, 그 외에도 많은 사역이 있었다는 것을 결론적으로 압축해서 진술합니다. 지금까지 사역들에 최종적인 결론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영혼을 찾는 하나님의 마음을 기록했습니다. 사실 하나님 나라의 사역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2) 세상에 속한 영혼들(36-37)

예수님께서는 다음 사역을 위해 진행해 나가십니다. 그것은 목자 없는 영과 같이 고생하고 있는 기진한 무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36). 여전히 세상은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적극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십니다. 유대인들을 바라본 예수님의 시선이 매우 선명하게 소개됩니다. 마치 목자를 잃어버린 채 위험한 들판을 유리하다 기진맥진한 상태의 양과 같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생명의 꼴을 먹이며 평안의 길로 인도하는 목자가 되십니다.

마태가 유리하는 무리의 상태를 기록했습니다. ‘고생하다’는 ‘고통을 주다’, ‘압제하다’, ‘낙담하게 하다’의 의미입니다. 또한 ‘기진하다’로 ‘바닥에 버려진다’, ‘무력하게 주저앉다’의 뜻으로 절망적으로 풀이 죽어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내용은 목자가 없어서 고통을 겪는 장면을 묘사한 구약의 몇 본문을 암시합니다(민 27:17; 왕상 22:17; 대하 18:16; 겔 34:5; 슥 10:2). 예수님을 목자로 비유하는 것은 예수님의 탄생 내용에서 등장했고(2:6), 마태복음 전체에서 몇 차례 사용됩니다(10:6,16; 14:14; 15:24, 32; 18:12; 25:32). 목자 없는 양 떼의 모습은 지도자가 없어 고통당하는 백성의 모습을 의미합니다(겔 34:6,12; 렘 50:6).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백성에게 무거운 짐을 떠안겼습니다(마 23:4). 예수님께 있는 목자의 마음은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파하고 사람들을 고친 동기일 뿐만 아니라 제자들을 부르신 이유가 됩니다. 불쌍한 무리를 보신 예수님의 반응은 추수하는 일꾼들을 파송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추수할 것이 많지만 일꾼이 적기 때문에(37),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하라고 가르치십니다(38). 추수하는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38). 제자들은 추수에 참여하는 일꾼들이며, 추수에 참여하는 일꾼들이며, 추수할 다른 일꾼들을 보내달라고 하나님께 요청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명령에서 몇 가지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 종말론적 회복, 혹은 모으는 일이 현재 예수님의 권위를 통해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메시아의 시대가 온 것입니다. 다윗과 바벨론을 강조한 예수님의 계보에서 이미 예고한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바벨론의 포로 상태와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백성에게 오셔서 회복하는 사역을 하고 계십니다. 둘째, 불쌍한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메시아의 마음과 권위로 회복할 일이 더 많이 일어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성들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보면서 큰 추수가 일어날 것을 내다보십니다. 앞으로 하늘나라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 많은 사람이 하늘나라 안으로 들어오게 될 것을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일꾼이 많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셋째, 제자들의 임무는 예수님처럼 이스라엘 고통스러운 문제를 치유하시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 지도자들처럼 목자 일을 감당해야 하는 사람들이 직무를 유기하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일꾼들이 필요하며 이들은 예수님처럼 목자의 긍휼을 지녀야 합니다. 37-38절의 명령을 36절과 연결하면 추수는 목자가 긍휼의 마음으로 양 떼를 모으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종말론적인 심판은 제자들이 아니라 천사들의 몫입니다. 천사는 역사의 종말에 의인에게서 악인을 분리해 심판을 집행하겠지만, 제자들은 이미 도래한 하나님 나라의 회복에 참여하는 역할을 맡은 자들입니다. 넷째, 일꾼은 보내는 분이면서 수확을 가져오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일꾼들은 제자들이 하나님께서 일꾼으로 부르셨기에 주인이 아니며 곡식을 모으는 목적도 일꾼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추수의 일꾼들을 통해서 회복하신 공동체입니다. 교회와 성도는 세상에서 심지어 종교 생활에서 지치고 쓰러진 사람들을 회복하며 일꾼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추수하는 일꾼에게 요구되는 첫 번째 성품은 지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초창기 예수님의 많은 치유 사건 중에서 마지막 교훈입니다. 맹인과 벙어리를 고치신 것은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장차 오실 메시아의 표증이었습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메시아를 널리 전파해야 합니다. 오늘도 그러한 일꾼들을 찾으십니다. 고통을 당하는 자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파할 일꾼을 찾으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이 세상으로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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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14-01)


드고아의 여인을 통해 중재한 요압

사무엘하 141-20


살면서 다양한 문제들을 만납니다. 자신의 문제뿐 아니라 타인의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해 조언을 하거나 관여해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 문제를 악화시키지 않고, 합당하고 유익한 결과를 얻기 위해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와 지혜는 무엇입니까?

 

압살롬은 암논이 자신의 누이 다말을 강간한 후 다윗이 암논에게 아무런 처벌도 하지 않은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었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다가 2년이 지난 후에 양털 깎는 잔치에서 암논이 취한 틈을 이용해 암논을 죽이고 그술로 도망갑니다. 다윗은 암논의 죽음 소식을 듣고 애도합니다. 그리고 3년이 지난 후 다윗은 도망간 압살롬을 그리워하며 가슴 아파하였고 요압은 이런 다윗의 모습을 보고 압살롬이 돌아오게 할 계획을 세웁니다.

 

드고아 여인(1-3)

교회에도 하나님의 통치를 거역하고 악한 일을 도모하는 거짓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계획을 세우고 죄를 죄라고 여기지 않으며 하나님의 공의를 무시합니다. 오직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과 유익을 추구해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힙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거짓 지도자들과 그들의 악한 계획을 경계해야 합니다.

 

1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로 향하는 줄 알고 2드고아에 사람을 보내 거기서 지혜로운 여인 하나를 데려다가 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너는 상주가 된 것처럼 상복을 입고 기름을 바르지 말고 죽은 사람을 위하여 오래 슬퍼하는 여인 같이 하고 3왕께 들어가서 그에게 이러이러하게 말하라고 요압이 그의 입에 할 말을 넣어 주니라(1-3)

본문은 요압의 의도가 주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충성에서 나왔다고 평가합니다. 우리도 충성하기로 맘먹는다면 주인이신 예수님의 뜻을 더 잘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1) 요압의 결심(1)

드고아의 지혜 여성 이야기는 다말 이야기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다말을 강간한 암논에게 다윗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것에 대해 원한을 품은 압살롬이 암논을 죽인 후 도망간 사건 이후에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다윗은 압살롬이 암논을 죽이고 도망간 지 3년 정도가 지나면서 암논의 죽음에 대한 슬픔은 많이 흐려지고, 대신 도망간 압살롬에 대한 그리움이 커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심복 요압이 이 사실을 알고는 압살롬을 데리고 오기 위한 방책을 생각해냅니다. 그리고 이를 실행에 옮길 사람을 하나 섭외하는데, 바로 드고아의 여인입니다.

 

(2) 요압의 계략(2-3)

사무엘하 14:2에서 이 여인을 지혜로운 여인이라고 부릅니다. 요압은 그녀를 불러 왕 앞에서 할 행동과 말들을 알려줍니다. 요압은 그녀에게 상복을 입고 기름을 바르지 말며 죽은 사람을 위해 오랫동안 애곡한 여인처럼 보이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요압이 지혜로운 여인에게 명령하지 않고 정중하게 요청한 것을 보면 지혜로운 여인은 사회적 지위가 있는 인물로 보입니다.

3절에서 요압이 그의 입에 할 말을 넣어 주니라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요압의 말을 앵무새처럼 옮긴다는 의미가 아니라 요압은 대략적인 상황만 말하고 세부 사항들은 전적으로 드고아의 여성이 행했다는 뜻입니다.

 

드고아 여인의 아들(4-11)

죄의 심각성과 죄인의 비참한 처지를 감추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은 죽을 운명의 자리에 있는 죄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처지를 직시하게 하고 참된 회개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도록 인도합니다. 복음이 가리키는 진실을 덮는 거짓 복음이 무엇인지, 복음을 가감하고 왜곡하는 주장이 무엇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4드고아 여인이 왕께 아뢸 때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이르되 왕이여 도우소서 하니 5왕이 그에게 이르되 무슨 일이냐 하니라 대답하되 나는 진정으로 과부니이다 남편은 죽고 6이 여종에게 아들 둘이 있더니 그들이 들에서 싸우나 그들을 말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므로 한 아이가 다른 아이를 쳐죽인지라 7온 족속이 일어나서 당신의 여종 나를 핍박하여 말하기를 그의 동생을 쳐죽인 자를 내놓으라 우리가 그의 동생 죽인 죄를 갚아 그를 죽여 상속자 될 것까지 끊겠노라 하오니 그러한즉 그들이 내게 남아 있는 숯불을 꺼서 내 남편의 이름과 씨를 세상에 남겨두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니 8왕이 여인에게 이르되 네 집으로 가라 내가 너를 위하여 명령을 내리리라 하는지라 9드고아 여인이 왕께 아뢰되 내 주 왕이여 그 죄는 나와 내 아버지의 집으로 돌릴 것이니 왕과 왕위는 허물이 없으리이다 10왕이 이르되 누구든지 네게 말하는 자를 내게로 데려오라 그가 다시는 너를 건드리지도 못하리라 하니라 11여인이 이르되 청하건대 왕은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사 원수 갚는 자가 더 죽이지 못하게 하옵소서 내 아들을 죽일까 두렵나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 아들의 머리카락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하니라(4-11)

여인은 다윗 왕의 동정심을 자극하며 교묘하게 이야기를 꾸며 냈습니다. 한 아들이 다른 아들을 우발적으로 죽였는데, 남은 아들마저 처형하면 상속자가 끊어진다는 것입니다.

 

(1) 두 아들의 싸움(4-6)

드고아의 여인은 먼저 아들을 잃은 과부로 변장한 후 다윗에게 나아와 연극을 하기 시작합니다. 만약 그녀가 사회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것에 경험이 부족했다면, 그런 대담한 연극을 수행할 용기와 태도를 갖기 어려웠을 것입니다그녀는 먼저 다윗 왕 앞에서 땅에 얼굴을 대고 엎드리는 가장 겸손한 자세를 취하며 자신을 도와달라고 간청합니다. 이 모습은 아비가일이 다윗에게 자신의 가족을 살려달라고 부탁할 때와 유사합니다. 다윗이 무슨 일인지 묻자 드고아 여인은 자신을 진정한 과부로 소개하고 남편이 죽었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말합니다. 불쌍한 과부의 처지를 강조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두 아들이 들에서 서로 싸우다 말리는 사람이 없어 한 아들이 다른 아들을 쳐 죽였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두 아들이 들에서 싸우고 한 아들을 죽인 사건은 내막을 모르고 들으면 가인과 아벨 사건을 연상시키지만, 여기서 드고아 여인은 다윗의 두 아들 암논과 압살롬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친척들이 남은 아들을 죽여서 상속자를 끊어버리려고 모두 들고 일어나 자신을 핍박하고 있다고 상황을 설명하며 도와달라고 요청합니다.

 

(2) 사람들의 요구(7)

드고아 여인은 남은 아들을 남편의 이름과 후손을 이 땅에서 이어줄 유일하게 남은 숯불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숯불은 금방이라도 꺼질 듯 위태한 상황을 상징하며 다윗의 동정심을 유발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이 말을 들은 다윗은 사람들이 여인을 못 건드리게 할 테니 걱정 말고 가라고 문제를 해결해줍니다. 이런 다윗의 판결에 드고아 여인은 피의 대가를 반드시 치러야 한다는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것에 대한 벌은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담당할 죄이며, 다윗에게는 전혀 죄가 없다고 말합니다.

 

(3) 다윗의 결정(8-11)

일단 첫 번째 문제를 해결 받은 여인은 두 번째 문제를 들고 나오는데, 원수를 갚으려는 피의 보수자가 자신의 아들을 죽이지 못하게 해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다윗은 또다시 그 요청을 들어주어 아들의 머리카락 한 오라기도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합니다. 여기서도 다윗은 아비가일의 이야기에서처럼 어리석은 맹세를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다윗은 살인한 아들의 죄를 용서함으로써 피의 복수 문제를 너무도 쉽게 해결해버렸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이렇게 쉽게 드고아 여인의 아들의 죄를 용서한 이유는 그녀를 과부로 생각했고 남은 아들이 유일한 아들로 남편의 이름을 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아들(12-17)

하나님의 공의를 무시하고 죄악에 대한 심판을 말하지 않는 거짓 복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죄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는 온전한 복음을 배우고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그냥 넘어가지 않는 공의로우신 분입니다.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우리 죄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형벌을 받으셨음을 말해야 온전한 복음입니다.

 

12여인이 이르되 청하건대 당신의 여종을 용납하여 한 말씀을 내 주 왕께 여쭙게 하옵소서 하니 그가 이르되 말하라 하니라 13여인이 이르되 그러면 어찌하여 왕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대하여 이같은 생각을 하셨나이까 이 말씀을 하심으로 왕께서 죄 있는 사람 같이 되심은 그 내쫓긴 자를 왕께서 집으로 돌아오게 하지 아니하심이니이다 14우리는 필경 죽으리니 땅에 쏟아진 물을 다시 담지 못함 같을 것이오나 하나님은 생명을 빼앗지 아니하시고 방책을 베푸사 내쫓긴 자가 하나님께 버린 자가 되지 아니하게 하시나이다 15이제 내가 와서 내 주 왕께 이 말씀을 여쭙는 것은 백성들이 나를 두렵게 하므로 당신의 여종이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왕께 여쭈오면 혹시 종이 청하는 것을 왕께서 시행하실 것이라 16왕께서 들으시고 나와 내 아들을 함께 하나님의 기업에서 끊을 자의 손으로부터 주의 종을 구원하시리라 함이니이다 17당신의 여종이 또 스스로 말하기를 내 주 왕의 말씀이 나의 위로가 되기를 원한다 하였사오니 이는 내 주 왕께서 하나님의 사자 같이 선과 악을 분간하심이니이다 원하건대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과 같이 계시옵소서(12-17)

여인은 본론으로 들어가 다윗에게 자신의 의도를 밝히며 왜 압살롬을 용서하지 않느냐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인생은 죽을 수밖에 없으며, 하나님이 생명을 빼앗기보다 용서하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그 여인은 압살롬이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 회개하고, 그에게 공의가 집행되어야 할 상황을 왜곡한 것입니다.

 

(1) 여인의 책망(12-14)

여인은 자신을 당신의 여종이라고 다시 낮추면서 말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시기를 부탁했습니다. 다윗이 말하라고 허락하자, 그 여인은 다윗 왕을 은근히 책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왕은 백성들에게는 피의 복수를 하지 말라고 하면서 왕은 왜 내쫓긴 자 압살롬에 대해서는 죄인으로 여기고 그를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느냐고 묻습니다. 이 질문을 통해 드고아의 여인은 다윗을 꼼짝 못하게 만듭니다. 왜 다른 사람들의 죄는 용서하고 피의 복수를 못하게 막으면서 자신의 아들인 압살롬의 죄는 용서하지 않느냐며 다윗의 모순을 지적한 것입니다.

여인은 죽음에 대한 고대의 일반적인 지혜를 언급하며 "하나님은 생명을 빼앗지 아니하시고 방책을 베푸사 내쫓긴 자가 하나님께 버린 자가 되지 아니하게 하시나이다라는 말로 다윗을 설득합니다. , 모든 인생은 결국 죽을 수밖에 없고, 죽으면 되돌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산 사람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그 생명을 빼앗는 것 대신에 여러 방법으로 살려주시며, 하나님 백성의 기업에서 쫓겨나지 않게 하십니다.

하지만 드고아의 여인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두 사실을 왜곡하였습니다. 첫째, 드고아 여인이 설정한 상황에서 살인한 아들은 과부의 유일한 아들이기 때문에 다윗이 살려주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압살롬은 다윗의 유일한 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죄를 용서할 조건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사랑이 많으셔서 자신의 백성이 사는 것을 원하시지만 정의를 무너뜨리시는 분은 아닙니다. 다윗이 압살롬에 대해서 그리워하면서도 그를 다시 불러들일 수 없었던 이유도 바로 정의 부분에서 걸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다윗의 마음을 알고 있던 드고아의 여인은 이 부분을 고의적으로 누락하고 하나님의 자비만을 강조하면서 다윗의 고민에 면죄부를 준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 여성은 다윗이 피의 복수를 금지한 판단이 하나님의 사자가 선과 악을 지혜롭게 분별한 것같이 절대적으로 옳다며 적극적으로 다윗을 두둔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을 통해 다윗이 혹시 잘못 판단한 것은 아닐까 갈등할 여지를 없애줍니다. 드고아의 여인은 철저히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상황을 이끌어가면서 다윗이 압살롬을 불러들이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2) 여인의 희망(15-18)

다윗에게 따끔한 충고를 전한 희망을 피력합니다. 여인은 자신이 왕께 와서 이 말을 함은 백성이 그 여인을 두렵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여인은 다윗이 자신의 말을 듣고, 여인과 여인의 아들을 함께 죽이려 하는 사람의 손에서 여인을 구원해 주시기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실상 다윗이 자기 아들을 살려야 한다는 말의 우회적인 표현입니다. 여인은 다윗 왕의 말이 자신에게 위로(메누하)가 되기를 기원했습니다. 이러한 기대를 품을 수 있는 이유는 다윗 왕은 하나님의 천사와 같아서 선과 악을 잘 분별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천사는 사람의 행위를 심판한다고 여겨졌습니다. 여인은 하나님께서 왕과 함께 계시기를 기원하는 것으로 자신의 말을 끝냈습니다.

 

사건의 전말(18-20)

거짓을 분별하고 선악을 분명하게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도자가 명확하게 판단하지 못하면 거짓이 틈을 타고 들어옵니다. 거짓을 미온적으로 대처하면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거짓을 단호하게 대처하지 않으면 거짓이 진실로 여겨질 수 있으며 또 다른 악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18왕이 그 여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바라노니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내게 숨기지 말라 여인이 이르되 내 주 왕은 말씀하옵소서 19왕이 이르되 이 모든 일에 요압이 너와 함께 하였느냐 하니 여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주 왕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옵나니 내 주 왕의 말씀을 좌로나 우로나 옮길 자가 없으리이다 왕의 종 요압이 내게 명령하였고 그가 이 모든 말을 왕의 여종의 입에 넣어 주었사오니 20이는 왕의 종 요압이 이 일의 형편을 바꾸려 하여 이렇게 함이니이다 내 주 왕의 지혜는 하나님의 사자의 지혜와 같아서 땅에 있는 일을 다 아시나이다 하니라(18-20)

다윗이 이 일이 요압의 손에 의해 꾸며진 것을 다윗이 알아챘을 때, 드고아 여인은 그것을 순순히 인정하고 요압이 현재의 상황을 바꾸기 위해서 벌인 일이라고 이야기합니다. , 요압이 다윗의 마음을 살피고 그 마음을 편하게 하기 위한 충정에서 한 일이라고 요압의 편을 들어준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요압이 한 일이라는 것을 안 다윗의 지혜에 대해 하나님의 사자의 지혜로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며 칭송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선과 악을 구별하는 것도, 땅의 모든 것을 다 아는 것도 실패하고, 결국 압살롬을 예루살렘으로 불러들이는 매우 어리석은 결정을 하였습니다.

여기서 드고아 여인은 다윗에게 다말과 대조되는 역할을 합니다. 다윗은 지혜로운 다말의 부르짖음에는 귀 기울이지 않고 침묵하다가 드고아 여인의 속임수에 넘어감으로써 왕국을 위험에 빠뜨립니다. 이런 모습은 다윗이 옳고 그름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이것은 다윗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진 결과입니다.

 


선의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인간적 책략은 상황을 악화시킬 수 있습니다.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지 않고 상황을 무마하려 한다면 더 큰 위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형제를 도우려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나라의 원칙에 의거하여 문제에 접근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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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13-03)

 

 

 


암논에게 복수하여 살인한 압살롬

사무엘하 1323-39


사탄은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먹잇감을 찾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무너뜨릴 계교를 짜고, 틈이 보이면 순식간에 악한 마음을 충동질하여 공동체를 찢어 놓습니다. 주께서 피 값을 주고 사신 교회를 악으로부터 보존하고, 든든히 세워가려면 어떻게 행해야 합니까?

 

암논은 다말을 강간한 후 다말을 미워하여 집 밖으로 내쫓아버렸고, 다말은 자신의 채색옷을 찢고 고통과 억울함을 호소하며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하지만 친오빠 압살롬은 다말을 강간한 사람이 암논이라는 것을 안 순간 잠잠하라고 하였고, 다윗도 화낼 뿐 암논과 다말에게 어떠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피해자 다말만 가족과 공동체에서 고립된 채 외롭게 살아야 했고, 압살롬은 아무런 처벌도 없는 상황에 대해 암논과 다윗에게 분을 품으며 복수할 기회만 엿보게 됩니다.

 

암논의 죽음(23-29)

사랑이란 단어는 듣기만 해도 따뜻하고 벅차게 합니다. 하지만 잘못된 사랑도 있습니다. 사랑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잘못된 일들이 연일 뉴스를 통해 흘러나옵니다. 또한 정의와 사랑의 균형을 맞추는 일이 어렵습니다. 정의를 강조하면 비정해지고, 사랑을 강조하면 불공정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23만 이 년 후에 에브라임 곁 바알하솔에서 압살롬이 양 털을 깎는 일이 있으매 압살롬이 왕의 모든 아들을 청하고 24압살롬이 왕께 나아가 말하되 이제 종에게 양 털 깎는 일이 있사오니 청하건대 왕은 신하들을 데리시고 당신의 종과 함께 가사이다 하니 25왕이 압살롬에게 이르되 아니라 내 아들아 이제 우리가 다 갈 것 없다 네게 누를 끼칠까 하노라 하니라 압살롬이 그에게 간청하였으나 그가 가지 아니하고 그에게 복을 비는지라 26압살롬이 이르되 그렇게 하지 아니하시려거든 청하건대 내 형 암논이 우리와 함께 가게 하옵소서 왕이 그에게 이르되 그가 너와 함께 갈 것이 무엇이냐 하되 27압살롬이 간청하매 왕이 암논과 왕의 모든 아들을 그와 함께 그에게 보내니라 28압살롬이 이미 그의 종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제 암논의 마음이 술로 즐거워할 때를 자세히 보다가 내가 너희에게 암논을 치라 하거든 그를 죽이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너희는 담대히 용기를 내라 한지라 29압살롬의 종들이 압살롬의 명령대로 암논에게 행하매 왕의 모든 아들들이 일어나 각기 노새를 타고 도망하니라(23-29)

암논의 범죄한 후 2년이 흘렸습니다. 다말에게는 수치의 시간, 다윗에게는 분노의 시간, 압살롬에게는 복수의 날을 벼르는 시간이었습니다. 참담한 일이었지만,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이 일을 해석하거나 처리하지 않았습니다.

 

(1) 다윗을 초대(23-25)

암논이 다말을 강간한 사건이 벌어진 지 2년 후에 에브라임 곁 바알하솔에서 압살롬이 양털을 깎는 잔치를 벌였습니다. 바알하솔은 벧엘 동북쪽으로 8킬로미터 떨어진 중앙 산지의 울퉁불퉁한 지역입니다. 압살롬이 잔치 장소를 이곳으로 택한 이유는 암논을 죽인 후에 그슬로 도망가기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양털을 깎는 날은 일종의 추수를 하는 날로 양 떼의 주인은 많은 사람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벌이는 관습이 있습니다. 압살롬은 이 잔치에 왕의 모든 아들들을 초대합니다. 또한 압살롬은 다윗에게도 신하들을 데리고 자신의 잔치에 와달라고 칭합니다. 여기서 압살롬은 다윗에게 자신을 당신의 종이라고 부르고 다윗을 왕이여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다윗과의 관계를 부자 관계가 아닌 주종 관계로 설정하며, 자신이 왕의 충성스러운 신하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런 압살롬의 행동은 자신의 의도를 감추기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압살롬을 나의 아들이라고 친근하게 부릅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압살롬에게 부담을 주기 싫기 때문에 자신과 자신의 신하는 가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아들이 힘들 것을 염려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압살롬은 다윗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간청하였지만 다윗은 가기를 원치 않았고, 대신 압살롬 등에게 복을 빌어주는 것으로 대신합니다. 여기서 압살롬이 다윗을 초청한 것은 암논을 잔치에 초청하기 위한 포석이었습니다. 암논만 초대하면 다윗이 압살롬의 의도를 오해할 수도 있기에, 왕과 신하들과 함께 암논을 부른 것입니다.

 

(2) 왕자들을 초대(26-27)

다윗이 오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압살롬은 원래 목적대로 암논을 초청합니다. 여기서 압살롬은 암논을 나의 형이라고 친근하게 부르며 암논이 자신에게 오게 해달라고 다윗에게 요청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암논이 압살롬에게 가는 것에 대해서도 일단 거절합니다. 다윗은 다말 강간 사건을 잊지 않았고 압살롬이암논에게 좋지 않은 감정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압살롬이 다윗에게 간청하자 다시 거절하지 못하고, 암논과 왕의 모든아들들을 압살롬의 잔치에 보냅니다. 다윗은 자신의 명령으로 다말을 암논에게 보내어 강간당하게 한 것처럼, 이번에는 다윗 자신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암논을 압살롬에게 보내 압살롬이 암논을 죽이는 데 일조하게 됩니다.

 

(3) 암논을 죽인 압살롬(28-29)

28절은 압살롬이 왜 암논을 잔치에 초대했는지 이유를 설명합니다. 시점으로 보면 다윗과 암을 초대하기 위해 왕에게 부탁하기 전으로 압살롬은 이미 암논을 죽이기 위해 모든 준비를 마치고서 왕에게 간 것입니다압살롬은 자신의 종들에게 암논이 포도주에 취해서 즐거워할 때를 보다가 자신이 명령하면 암논을 죽이라고 미리 명령을 내린 상태였습니다. , 잔치가 무르익어 모두가 경계를 늦추고 술에 취하여 상황 파악을 빨리할 수 없는 그 순간에 암논을 급습하여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자신의 종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면서 자신이 내린 명령이니 담대하게 용사처럼 행동하라고 권면하기까지 합니다. 여기서 자신이 명령한 것이라는 말을 하는 것은 암논의 살인에 대한 모든 책임은 압살롬 자신에게 있으며, 자신이 모두 책임지겠다는 뜻입니다.

종들은 압살롬의 명령대로 암논을 죽입니다. 압살롬은 정말 자신이 계획한 대로 암을 죽인 것이다. 압살롬은 다말을 강간한 암을 죽이기 위해 2년 동안 상황을 살피고 준비하면서 아버지 다윗과 암논 앞에서 자신이 암을 죽이고 싶어 할 만큼 미워한다는 사실을 조금도 내색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압살롬이 공공연하게 암에 대한 미움과 다윗에 대한 불만을 드러냈다면, 다윗이 암논을 압살롬의 잔치에 보내지도 않았을 것이고, 암논도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압살롬은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본심을 철저히 숨기고 행동하였기에 암을 죽일 기회를 얻었고 마침내 실행에 옮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압살롬이 암을 죽인 것은 표면적으로는 다말의 강간 사건에 대한 복수이지만 이면적으로는 자신이 왕이 되는 데 걸림돌이 되는 왕위 계승 서열 1위를 제거한 것입니다. 압살롬은 다윗의 셋째 아들이며 위로는 암논과 길르압이 있지만, 길르압은 사무엘하 3:3에서 언급된 것 이외에는 등장하지 않는 것을 보면 어려서 죽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암논이 죽으면 압살롬이 왕위 계승 서열 1위가 됩니다. 이렇게 압살롬은 누이의 강간 사건을 자신이 왕이 되려는 욕망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압살롬이 암을 죽인 것을 본 다른 왕자들은 각각 노새를 타고 그곳에서 도망하였는데, 압살롬이 왕의 다른 아들들은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의 목표는 오로지 암논을 제거하는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노새는 수나귀와 암말 사이에서 이종교배로 태어난 짐승이며 이스라엘에서는 금지되어 있었지만(19:19), 왕가의 운송 수단으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왕자들의 귀환(30-36)

간교한 자에게서 감정, 공감, 동정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사랑의 감정은 없고, 팩트만 범람할 때 세상은 정말 비정해집니다. 모든 일을 꾸민 간교한 자가 왕의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다윗의 나라는 위태롭습니다. 능력이 출중할지라도 간교한 자는 멀리해야 합니다.

30그들이 길에 있을 때에 압살롬이 왕의 모든 아들들을 죽이고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다는 소문이 다윗에게 이르매 31왕이 곧 일어나서 자기의 옷을 찢고 땅에 드러눕고 그의 신하들도 다 옷을 찢고 모셔 선지라 32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 요나답이 아뢰어 이르되 내 주여 젊은 왕자들이 다 죽임을 당한 줄로 생각하지 마옵소서 오직 암논만 죽었으리이다 그가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욕되게 한 날부터 압살롬이 결심한 것이니이다 33그러하온즉 내 주 왕이여 왕자들이 다 죽은 줄로 생각하여 상심하지 마옵소서 오직 암논만 죽었으리이다 하니라 34○이에 압살롬은 도망하니라 파수하는 청년이 눈을 들어 보니 보아라 뒷산 언덕길로 여러 사람이 오는도다 35요나답이 왕께 아뢰되 보소서 왕자들이 오나이다 당신의 종이 말한 대로 되었나이다 하고 36말을 마치자 왕자들이 이르러 소리를 높여 통곡하니 왕과 그의 모든 신하들도 심히 통곡하니라(30-36)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을 속여 암논을 초대한 후, 다윗이 요압을 통해 우리아를 죽였듯이, 신복들을 통해 암논을 제거합니다. 다윗은 암논에게 속아서 딸이 겁탈당하는 것을 도왔는데, 이번에도 압살롬에게 속아서 암논의 죽음을 본의 아니게 돕고 맙니다.

 

(1) 다윗의 슬픔(30-31)

암논을 제외한 다윗의 아들들이 노새를 타고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즉 각자 자신의 집으로 도망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다윗에게는 압살롬이 모든 아들들을 죽였다는 허위보고가 들어갑니다. 여기에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는 말을 쓴 것은 모두 죽였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아직 아들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있어서 이들의 생사를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허위 보고를 한 것입니다이 소식을 사실로 믿은 다윗은 옷을 찢고 땅에 누워 아들들의 죽음을 애도합니다. 이것은 12:16-23에서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병에 걸렸을 때 했던 것과 동일한 행동입니다. 다윗은 범죄한 이후에 계속해서 아들을 잃는 괴로움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2) 요나답의 분석(32-33)

이번에는 지난번과 다르게 다윗의 신하들도 옷을 찢고 다윗의 곁에 서서 함께 애도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암논에게 간교한 계책을 알려준 요나답이 이 상황에 대해 합리적인 해석을 해줍니다. 그는 왕자들 모두 죽임을 당하지 않고 암만 죽었을 것이라고 예상하면서 암이 다말을 강간한 날부터 압살롬이 걸심하였던 것이라고 말한다. 요나답은 암이 말을강간하면 압살롬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임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요나답은 암논에게 다말을 강간할 방법을 알려준 것이다. 그러므로 이 본문에서 가장 약한 인물은 요나답이라고 볼 수 있다.

 

(3) 왕자들의 귀환(34-36)

요나답이 이야기하고 있는 사이에 파수꾼들이 뒷산 언덕길로 사람들이 오는 것을 발견합니다. 요나답은 그 소식을 듣고 자신의 말대로 왕자들이 살아 왔다고 다윗에게 보고하였습니다. 그리고 정말 왕자들이 도착하였고, 그들은 안도감과 반가움에 큰 소리로 울었고, 다윗과 모든 신하들도 같이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다윗은 한편으로는 안도감이 들었을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가장 사랑하는 아들 암논을 잃은 것에 대해 크게 상심하였을 것입니다.

 

압살롬의 도피생활(37-39)

사랑의 이름으로 잘못을 눈감아주지만, 깨진 관계가 회복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책임을 안 질 만큼만 참여하고, 이익을 얻을 수 있을 만큼만 참여했습니다. 사람이나 배려가 없는 지혜는 간교한 모략에 불과합니다.

 

37압살롬은 도망하여 그술 왕 암미훌의 아들 달매에게로 갔고 다윗은 날마다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슬퍼하니라 38압살롬이 도망하여 그술로 가서 거기에 산 지 삼 년이라 39다윗 왕의 마음이 압살롬을 향하여 간절하니 암논은 이미 죽었으므로 왕이 위로를 받았음이더라(37-39)

암논을 죽인 압살롬은 그슬로 도망합니다. 그의 외할아버지 달매가 그술의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그의 아들로 인해 날마다 슬퍼하였습니다. 여기서 그 아들이 누군지 언급되지 않지만 왜곡하다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을 보면 압논의 죽음에 대해서 상당히 오랫동안 애도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3년이 지나자 암논의 죽음을 애도하는 마음이 어느 정도 진정되었고 대신에 그술로 도망간 암살롬에 대한 마음이 간절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다윗은 한 아들을 잃고 또한 아들은 크지 못하는 불행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만일 암논이 다말을 강간한 직후 다말의 부르짖음을 듣고 암논에게 적절한 처벌을 내려 다말과 암살롬의 마음을 위로했다면 이런 불행한 사태는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악한 자의 계교로부터 공동체를 지킨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거짓과 미움, 분열의 영이 간계로 끊임없이 흔들어놓기 때문입니다. 구성원 모두가 깨어 이간과 속임을 분별하고, 간교한 자를 멀리하며 사랑의 신뢰와 용서로 결속할 때, 공동체를 지켜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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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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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늦기 전에 벗어나는 지혜

잠언 61-19


살아가면서 모르고 당한 일보다 알고도 당하는 일들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상대의 의도를 알면서도 쉽게 마음을 내주다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받기도 하고, 자신의 약함을 알면서도 버리지 못해 큰 곤경에 처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예측이나 예상은 늘 빗나가고, 그 파국을 알면서도 돌이키지 않는 것이 인간의 우매함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 본문은 자의든 타의든 자초한 위기 가운데서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지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음과 악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여기서 어리석음과 악은 단순히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영역만이 아니라 영적, 신앙적인 영역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같이 움직입니다. 하나님이 혐오하시는 태도와 언행을 떠나 선을 행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부록 : 어리석음과 악에 대한 네 가지(1-19)

온몸과 온 맘으로 악을 도모하며 싸움을 부추기고 공동체의 질서와 관계를 뒤틀고 뒤엎는 패역한 자에게 재앙이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삶의 기준을 멸시하고 악을 꾀하며 악한 일을 계속해 자행하는 자를 절대로 방관하지 않으시고 때가 되면 그의 교만과 속임과 방종에 대해 엄중히 심판하실 것입니다.

1내 아들아 네가 만일 이웃을 위하여 담보하며 타인을 위하여 보증하였으면 2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 3내 아들아 네가 네 이웃의 손에 빠졌은즉 이같이 하라 너는 곧 가서 겸손히 네 이웃에게 간구하여 스스로 구원하되 4네 눈을 잠들게 하지 말며 눈꺼풀을 감기게 하지 말고 5노루가 사냥꾼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스스로 구원하라 6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7개미는 두령도 없고 감독자도 없고 통치자도 없으되 8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9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누워 있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10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누워 있자 하면 11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 12불량하고 악한 자는 구부러진 말을 하고 다니며 13눈짓을 하며 발로 뜻을 보이며 손가락질을 하며 14그의 마음에 패역을 품으며 항상 악을 꾀하여 다툼을 일으키는 자라 15그러므로 그의 재앙이 갑자기 내려 당장에 멸망하여 살릴 길이 없으리라 16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 곧 그의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예닐곱 가지이니 17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18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19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이니라(1-19)

첫 모음집의 여덟째 교훈은 크게 네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처음 두 단락(1-11)이 개인의 신중하지 못하고 게으른 행동을 경고한다면, 나머지 두 단락(12-19)은 공동체에 불화를 초래하고 조화를 깨뜨리는 행동을 경고합니다.

 

(1) 담보와 보증에 대한 경고(1-5)

잠언 6장은 1-9장에서 지혜의 강연(1:20-33)과 지혜의 송가(3:13-20)에 이어 세 번째 등장하는 막간 형식의 부록으로 볼 수 있습니다.

첫 교훈인 1-5절은 담보나 보증을 하지 말라는 경고를 담고 있습니다. 남을 위해 담보하거나 보증을 서는 일은 내가 타인의 빚이나 책무에 대한 책임을 지는 행위입니다. 이런 일은 보통 사업 현장에서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거나 빚보증을 서는 양상으로 나타납니다. 잠언에서는 담보나 보증에 대해 여러 번 경고합니다. 누군가에게 빚을 졌으면 갚고, 채무자에게 이자를 추가하여 부담을 주거나 잘못된 빚보증을 서서 가산을 다 잃어버리지 않도록 주의를 줍니다(22:26-27). 남의 보증인이 되는 자는 지혜롭지 못한 자이며(17:18), 그런 자에게는 손해와 불안감이 따라오므로 보증을 서지 말고 평안을 찾으라고 격려합니다(11:15). 또한 타인(또는 타국인)을 위한 보증을 특히 주의하라고 합니다(20:16; 27:13).

1절의 네가 만일 이웃을 위하여 담보하며 타인을 위하여 보증하였으면이란 문장은 이웃타인이 동일 인물이냐 아니냐에 따라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습니다. 만약 이웃과 타인이 동일 인물이라면 아들이 자기의 이웃을 위해 보증을 선 경우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동일 인물이 아니라면 아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타인을 위해서 이웃에게 보증을 선 경우로 해석됩니다. 동일 인물일 경우는 아는 사람의 보증을 서지 말라는 일반적인 뜻으로, 동일 인물이 아닌 경우는 잘 아는 사람에게든 모르는 사람에게든 보증을 서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웃과 타인이 누구냐의 문제보다는 보증과 담보에 대한 경고가 더 중요합니다.

1절의 보증에 대한 경고는 2절에서 그로 인해 파생된 결과를 설명함으로써 계속됩니다. 고대의 보증은 문서로 남기기보다는 구두로 시행되고 서로 손바닥을 맞닿게 침으로써 성립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구두로 한 담보나 보증의 약속은 마치 덫이 새를 옭아매듯 당사자의 운명을 얽어매므로 쉽사리 빠져나올 수 없으며 혹 빠져나온다고 하더라도 상처를 입게 됩니다.

한편, 잠언 6장에 나오는 담보에 대한 경고는 잠언의 다른 곳에 나오는 구절과 비교했을 때 보증을 서지 말라는 경고만이 아니라 보증의 위기에서 벗어날 방법(3-5)을 제시한 점이 특별합니다. 아들이 이웃에게 빚을 진 경우 혹은 타인을 위해 이웃에게 담보가 된 경우, 이 문제에서 탈피하기 위해서는 찾아가서, 자신을 낮추고, 졸라야 합니다. 눈꺼풀에 졸음이 들지 않게 할 정도로 보증의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마치 노루나 새가 사냥꾼의 올무나 그물에서 나오려고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듯이, 설사 찢기고 상처가 나는 한이 있더라도 올무나 그물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네 자신을 구원하라 말이 3절과 5절에서 반복되어 스스로 위기에서 벗어나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보증 문제 해결이 급선무입니다.

 

(2) 게으름에 대한 경고(6-11)

보증에 이어 게으름에 대한 경고가 등장합니다. 잠언의 다른 부분에서도 게으름의 주제에 대해 종종 다루고 있습니다(10:26; 13:4; 15:19; 19:24; 22:13; 24:30-34; 26:13-16). 앞의 보충 문제는 본인과 다른 사람 간에 생겨난 문제로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쌍방의 합의가 필요하지만, 게으름은 자기로 인해 생겨난 문제이므로 본인이 나서서 이 일을 해결해야 합니다게으른 자는 밥그릇에 손을 얹고도 입으로 퍼 올리기를 싫어하고(19:24) 침대에서만 뒹굴며(26:14; 26:15) 잠만 재촉하므로(6:10-11; 24:33-34) 원하는 것이 있어도 얻지 못합니다(13:4). 이처럼 게으른 자는 분별력이 없는 자(24:30)이므로 개미에게서라도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종종 자연의 동식물을 통해 해야 할 행동과 피해야 할 행동을 배울 수 있습니다. 개미는 작고 힘이 없지만, 여름에 먹을 것을 예비할 줄 아는 작지만 지혜로운 생물 중의 하나로 꼽히는 곤충입니다(30:25). 지도자나 감독도 없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열심히 일해서 양식을 모으는 개미처럼 게으른 자도 무덥고 건조한 여름 동안에 일해야만, 보리와 밀의 수확기인 여름 추수기나 곡식과 과실의 수확기인 가을 추수기에 양식을 거둘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조언을 듣지 않고 계속 잠만 자고 일을 미룬다면 가난과 궁핍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더구나 가난은 강도나 무장한 군사처럼 뜻하지 않은 때 게으른 자를 습격하여 그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고 큰 곤경에 빠뜨릴 것입니다.

 

(3) 악인의 일곱 가지 특징(12-15)

보증이나 게으름과 같은 경제와 관련된 문제를 떠나, 12절부터는 사회적인 문제를 논합니다. 먼저 12-15절은 악인의 일곱 가지 특징을 입, , , , 마음 등 신체 기관과 관련하여 묘사하고 악인의 종국에 대해 선언합니다.

악인은 먼저 무익함(또는 죄악)과 불의의 사람으로 정의되었습니다. 그의 불의한 행동은 거짓을 말하고, 눈짓을 건네거나 발이나 손가락을 움직여 공모자와 악한 일을 도모하며, 마음에 패역을 품고 늘 악을 계획하고 다툼을 일으키는 데에서 나타납니다. 이런 악한 행동은 이미 아들을 꾀는 악한 남자(1:11-14; 2:13-15; 3:14-17)나 음녀(2:16-19; 5:3-14)의 행동에서 목격되었습니다. 게으른 자에게 갑작스러운 곤경이 임하듯(15), 불의한 자에게도 재앙이 갑자기 임하여 순식간에 망하게 됩니다. 또한, 그 재앙은 회복할 길이 없을 정도로 치명적입니다.

 

(4)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일곱 가지(16-19)

16-19절은 마지막 경구로서 하나님이 혐오하는 일곱 가지를 나열하였습니다. 위의 불의한 자의 행동 목록과 같이 여기에서도 7이란 숫자를 사용한 것은 악의 총체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혐오 목록은 악인의 목록과 마찬가지로 신체 기관과 관련지어 설명되고 마음의 태도, 거짓말, 그리고 행악이라는 세 가지 면에서 소개됩니다첫째, 마음의 태도는 교만한 눈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으로 표현됩니다. 악은 마음의 생각과 계획으로부터 시작하며 교만과 항상 함께합니다둘째, 거짓말에 대해서 거짓된 혀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을 언급합니다. 구약에서 자주 거짓 증인에 대한 경고가 나옵니다. 이는 법정에서나 일상에서 거짓말을 하거나 위증을 하는 것이 중죄임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기 위한 지침서인 십계명에서도 거짓 증거 하지 말라고 단호히 명령합니다(20:16). 셋째, 행악에 관련해서는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 형제 사이에 다툼을 일으키는 행동으로 표현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행동은 12-15절에서의 악인의 행동과 마찬가지로 신체 기관과 연결하여 설명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혐오 목록과 악인의 행동 목록이 서로 연결되는 것은 도덕적, 윤리적인 악이 영적, 신앙적인 영역과도 밀접히 연결된다는 점을 드러냅니다. 이 조언을 듣는 자는 불의의 길을 떠나 하나님이 인정하고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악을 꾀하지는 자는 멸망의 심판을 면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몸과 맘의 원초적인 악한 욕구를 만족시키려고 살기보다는 전인격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의와 선을 위해 헌신하도록 말씀의 지혜로 잘 절제하고 통제하고 관리해야 합니다. 때늦은 후회는 있어도 때늦은 회개는 없습니다. 때를 놓치기 전에 남을 탓하기 전에, 말의 실수이든 태도의 문제이든 악의 올무이든 얼른 스스로 자초한 위기에서 벗어나기를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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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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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대의 주인공이신 예수님

마태복음 914-26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새로운 지도자 한 사람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새로운 시대가 온 것입니다. 그 이전과 그 이후는 같을 수가 없습니다. 마치 한 나라가 무너지고 새로운 나라가 세워진 것이고, 그 새로운 나라가 제시하는 새로운 법과 문화 그리고 가치가 제시된 것입니다. 이제는 이전 방식대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이전에 중요하게 여겼던 것들이 이제는 중요하게 생각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새로운 시대에 맞게 살아가야 합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앞서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잔치를 벌인 것에 의문을 제기하며 금식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자신이 가져온 하늘나라의 생명을 누리며 기뻐할 때라고 말씀하십니다.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옛 시대와 새 시대를 옷과 포도주로 비유하십니다. 새 시대를 옛 시대가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런 대조는 이어지는 죽음과 생명의 이야기에서 심화됩니다.

 

바리새인들과의 금식 논쟁(14-17)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시대를 여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성령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율법이나 유대교의 종교 체제로 역동적인 새 시대를 담을 수 없었습니다. 전통만을 고수했다가 정신까지 잃어버리게 됩니다. 자신에게 익숙한 것만을 고집하면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를 가로막는 형식뿐인 신앙이 됩니다.

 

14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15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16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17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14-17)

하나님 나라는 새로운 시대를 가져왔습니다. 금식은 유익하지만, 지금은 금식의 시대가 아니라 신랑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실 희락의 시대입니다. 선지자들이 고대하는 그날이 왔기 때문입니다.

 

(1) 요한 제자들의 금식에 관한 질문(14-15)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께 와서 자산들과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는지 묻습니다(14). 예수님께서는 금식 자체를 반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누구 때문에 금식해야 하는지 가르치셨습니다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하늘나라 사역을 결혼으로 비유하면서 신랑과 함께 있는 사람들은 금식할 이유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결혼은 인생에서 가장 기쁜 순간이요 잔치이므로(19:6; 5:1; 61:10;62:5; 7:34;16:9;25:10;33:11; 2:1), 예수님의 하늘나라 운동을 결혼에 비유한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신랑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참조 22:1-14;25:1-13).

구약에서 혼인 잔치의 신랑은 하나님이지 메시아가 아니지만(5:1; 54:5-6; 62:4-5; 16:6-8; 2:19),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인 자신의 혼인 잔치임을 암시하십니다.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자들은 결혼식 잔치에 초대받은 친구들이나 손님들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자들은 금식하기보다 축하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구원 사역은 지금 잔치로 펼쳐지고 있으며, 하나님 아들의 권위를 인정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지금 마련하시는 잔치에 참여하게 됩니다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에는 금식하게 됩니다. 신랑을 빼앗긴다는 표현은 이사야 53:8의 이미지와 연결되며,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수난과 죽음을 암시하십니다. 잔치에서 손님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신랑이 제거됩니다.

 

(2) 옛것과 새것(16-17)

15절은 인생이나 생활의 중심은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결혼 이미지에 이어서 16-17절에서 자신이 수행하는 사역의 특성을 언급하십니다. 새 옷 조각은 세탁하지 않아 느슨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헌 옷에 붙인 다음 세탁을 하게 되면 헌 옷이 새 옷감의 당기는 힘을 이기지 못해 찢어지고 맙니다. 새 옷 조각을 붙이는 바람에 옷은 입을 수 없게 됩니다. 이전보다 상황이 악화된 것입니다. 특히 당시의 서민들에게 옷감은 귀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식으로 옷감을 붙이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헌 옷은 새 옷감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생 베 조각은 예수님께서 가지고 오신 하늘나라의 복음입니다. 헌 옷은 금식과 제사와 같은 옛 시대의 관습입니다.

새 포도주를 헌 부대에 넣으면 부대가 터집니다(17). 그러면 포도주도 허비하고 부대도 버려야 합니다. 헌 포도주 부대는 새 포도주를 제어하거나 담아낼 수 없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옷 조각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통해 확장하는 하늘나라의 복음입니다. 옛 부대는 유대교의 전통적인 틀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의혹은 토라의 의와 같은 행동 방식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당시의 유대교는 담을 수 없습니다. 둘은 양립할 수 없습니다.

하늘나라가 지금 임했기에, 이 나라를 준비하기 위해 수행했던 금식을 지금은 할 이유가 없습니다. 당연히 예수님께서는 개인의 경건 생활의 하나로 금식하는 것을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신랑이 고난을 받아 땅에서 사라지는 것은 잔치의 의미가 퇴색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잔치를 즐기는 자들을 위해 신랑이 희생당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본문은 8:17의 의미처럼 하늘나라의 복음은 메시아의 고난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임을 암시합니다. 잔치의 즐거움을 누리는 제자들은 예수님의 희생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역설적으로, 제자들은 하늘나라의 감격과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마음을 공유합니다예수님께서는 이어지는 두 비유(16-17)에서 금식으로 특징되는 유대교가 기쁨과 환희로 팽창하는 힘을 가진 예수님의 사역을 담을 수 없음을 의도하십니다. 포도주와 부대 둘 다 보존하기를 원하시는 예수님께서는 토라 혹은 율법을 버리거나 폐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하나님께서 의도하시고 기대하시는 것을 해석해서 이런 해석에 근거한 순종을 할 것을 강조하십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하늘나라의 가치에 합당한 삶 속에 하늘나라의 복음이 담길 수 있습니다. 공동체에 적용해 보면, 새 포도주 부대는 새 포도주에 맞춘 구조, 즉 예수님의 사역에 중심을 둔 공동체의 삶을 의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완전히 새로운 원칙과 삶으로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제사가 아니라 긍휼을 베풀고, 유대교의 정결법이 아니라 예수님의 환대하는 마음을 배우는 길이 새 옷감과 새 포도주에 적합합니다. 우리 시대에 감격의 복음을 담을 만큼 교회의 언어와 문화가 과연 새 부대 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율법주의, 권위주의, 근본주의 등이 교회 구성원의 인식을 장악하고 있다면 부대는 터지고 말 것입니다.

 

살리시고 고치시는 예수님(18-26)

새로운 시대는 율법에서 은혜로 변하여 역사가 일어납니다. 율법적으로 보면 죽은 사람을 만지는 것과 피를 흘리고 있는 여인을 만지지는 부정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모든 것들을 초월하셨습니다. 그리고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들을 살리셨습니다.

 

18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관리가 와서 절하며 이르되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하니 19예수께서 일어나 따라가시매 제자들도 가더니 20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21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22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 23예수께서 그 관리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떠드는 무리를 보시고 24이르시되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비웃더라 25무리를 내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 26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18-26)

본 단락은 두 사건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마가복음에서는 죽은 소녀 이야기 속에 혈루증 여인의 치유 사건이 샌드위치처럼 포함되어 있으므로(5:21-43), 한 묶음으로 읽도록 의도된 것입니다. 두 이야기는 혈루증 여인과 한 관리의 믿음을 강조합니다.

 

(1) 한 관리의 믿음이 있는 간구(18)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한 관리가 와서 무릎을 꿇고 방금 죽은 자기 딸을 살려 달라고 도움을 간청합니다. 관리의 부탁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제자들과 함께 그를 따랐습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도움을 호소하는 사람의 간구에 즉시 응답하시는 분임을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그 관리를 따라가셨습니다.

 

(2) 혈루증 여인의 믿음(19-22)

예수님의 일행이 이동하는 중에 혈루증 앓는 여인이 몰래 예수님의 옷깃을 만졌습니다. 환자는 피를 12년 동안 흘러 늘 생명의 위험을 안고 살아야 했습니다(15:25-30). 제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격리된다는 점에서 이 여자는 8장에 나병환자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마태는 열두 해를 문장의 앞에 배치함으로써 여인의 고통스러운 상태를 강조합니다. 여자는 수치스러운 문제인데도 구원받기 위해 예수님께 왔고(1:21),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믿음의 행위로 보시고 그녀를 고쳐 주셨습니다. 그 여인에게 안심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특히 그 여인을 이라고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의 믿음이 구원하였다고 격려하셨고, 즉시로 여자는 구원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회-종교적으로 격리된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시고, 그 여인을 딸이라고 부르심으로써 육체와 정신적인 부분까지 함께 치유하셨습니다.

 

(3) 관리의 딸을 살리신 예수님(23-26)

예수님께서는 12년 된 혈루증 여인을 치유해주시고, 한 관리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이미 관리의 딸은 죽어 장례식이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집안에는 장례를 준비하기 위해 피리 부는 자들과 소란스럽게 곡하는 무리를 보셨습니다. 당시에는 장례식에서 피리를 불고 곡하는 사람을 두는 것은 일반적인 풍습이었습니다(참고. 48:36; 5:38; 요세푸스 유대전쟁사 3.9.5). 이 사람들이 피리를 불고 큰 소리로 곡하고 있는 장면은 소녀가 죽었다는 사실을 확증합니다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집에 도착해서 집 안에서 장례를 준비하는 사람들을 나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소녀를 보면서 죽은 것이 아니라 자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비웃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소녀의 손을 잡았을 때 소녀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잡고 일으켜 세우신 모습은 도움이 간절한 사람을 위해 예수님께서 얼마만큼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도와주는지 보여줍니다본문은 의도적으로 보다 소녀의 손을 잡아주는 예수님의 동작에 초점을 맞춥니다. 예수님의 손은 그의 능력을 상징적으로 나타냅니다. 손길은 약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보호해주겠다는 의지, 환대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손 외에 구원의 방편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처럼 손을 붙잡아 주시는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고, 험한 인생을 견딜 수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님께서 손을 잡아 살려내신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의 존재 목적은 예수님처럼 약하고 아픈 사람의 손을 붙잡아 주는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도 약하고 힘든 사람들은 줄어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손을 사용해서 힘없이 주저앉은 사람이 일어서게 돕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딸을 살려달라고 소녀의 아버지의 요청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함께 가서 죽은 소녀를 살리십니다. 사람들이 죽은 소녀를 위해 애곡하는 것 밖에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아이를 깨우듯이 소녀를 일으켰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생명과 죽음을 주관하시는 창조주이심을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상황 속에서도 생명을 불어넣어 살리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자신의 어떠한 사항이 소망 없고 희망 없어 보입니까? 예수님을 의지하시길 바랍니다. 주님께 믿음으로 나아갈 때 다시 살아나게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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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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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를 제자로 부르신 예수님

마태복음 91-13


예수님께서는 아는 지식이 세상에서 가장 기쁘고 복된 지식입니다. 영어, 수학을 아는 지식도 우리에게 행복과 유익을 주지만, 주님을 아는 지식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더 깊이 알아가고, 더 정확히 알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분입니까? 하나님의 아들로서 죄를 용서할 권세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죄인인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병을 고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치료하고 구원하려 오신 의사이십니다.

 

가다라 지방에서 다시 가버나움으로 돌아온 예수님의 일행에게 한 중풍병자를 데려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행위를 믿음으로 보고 병자의 죄를 사해주십니다. 이것을 본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신성모독으로 생각했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죄 사하는 권세를 가진 임자임을 나타내십니다. 곧이어 세리 마태를 부르시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집에 방문해 함께 식탁의 교제를 나누십니다. 바리새인이 이를 보고 에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합니다.

 

중풍병자를 고치신 예수님(1-8)

 

예수님의 죄사함과 치유의 기적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이들의 믿음과 반응보다는 결국 죄사함의 권능이 주님께 있는 것을 알고 깨닫고 믿는 것이 더 중요한 사건입니다. 다만 두렵고 떨림으로 주께서 이루시고 선포하신 그 은혜 앞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나아가는 것이 가장 합당한 반응입니다. 오늘도 삶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치유하고 회복하고 고치시는 주님의 권능을 기대하며 주님께 영광이 되길 원합니다.

 

1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 2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3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 4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5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 6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7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 8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1-8)

예수님께서는 풍랑을 잠잠하게 하시고, 가다라의 귀신들린 두 사람을 해방시킨 기적을 행하신 후,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셨습니다(8:23). 이제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셨습니다.

 

(1) 중풍병자 치유와 죄사함(1-2)

가버나움에 돌아오자, 어떤 사람들이 침상에 누인 중풍병 환자를 데려왔습니다. 성장한 갈릴리 고향에서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중풍에 걸린 친구를 데리고 예수님께 나왔습니다(2;1-12, 5:17-26).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예수님께서 집에 계실 때, 지붕을 뚫고 침상에 누운 한 중풍병자 친구를 예수님께 보입니다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십니다. 환자가 믿었다는 설명은 없지만, 그에게 이미 믿음이 있었고 사람들의 도움으로 함께 나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심하라’(2)는 위험과 역경의 상황에도 용기를 잃지 않도록 격려하는 의미입니다한편, 유대인들은 죄와 병은 상관관계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병은 죄에서 온다고 여겼던 것처럼, 중풍병자는 자신의 병이 죄로 인해 생긴 것처럼, 중풍병자는 자신의 병이 죄로 인해 생긴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26:14-16; 28:21-22; 대하 21:15,18-19; 4:7; 5:14; 9:2; 고전 11:30; 5:15-16). 따라서 죄 용서로 중풍병이 치유된다는 논리는 유대 청중에게 낯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용서를 받는다라는 중풍병자의 죄가 용서받고 있다는 사실을 선언하십니다. 이 선언은 예수님의 선포로 죄가 용서받고 있다는 사실, 곧 그의 신적 권위를 강조합니다. 비슷한 수동태 용법이 929절에서 맹인들의 치유가 그들의 믿음대로 되라고 하신 예수님의 선언에도 사용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는 지금 자신의 말을 통해서, 즉 자신의 신적 권위로 죄가 사해졌다고 선언하며, 이 선언은 즉각 실행되고 있습니다. 죄를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의 고유 권한이라는 것은 구약과 유대교의 근본 신앙입니다(7; 34:6-7; 103:3;103:4; 43:25; 7:18).

대제사장은 1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 속죄제를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용서를 대행할 수 있었습니다(34:6-7; 103:3; 43:25; 7:18). 대제사장의 권위로 용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중간기 유대교에서 메시아가 죄를 용서할 것이라는 기대를 기록한 문헌은 없습니다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만이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권위를 갖고 계심을 의도적으로 선언하십니다특히 예수님께서는 다니엘 7:13-14의 인자로서 신적인 권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6). 서기관들은 예수께서 죄를 용서하는 권위를 행사하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갖고 계시는 권한을 침해하였다는 생각에 예수님을 정죄합니다.

 

(2) 서기관들과 예수님의 논쟁(3-6a)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의 이런 생각을 아시고 어찌하여 악한 생각을 하느냐고 책망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실제로 마비증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중풍병자가 아니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영적으로 마비되어 예수님께서 누구인지 알지 못하며 예수님께 나오지도 못합니다.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말과 중풍병자에게 자리를 들고 가라고 하는 말 중에서 어느 쪽 말을 하는 것이 더 쉬운지 묻습니다. 실제로는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죄 용서를 실행하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그러나 죄 용서를 받았다라고 말로 하는 것은 더 쉽습니다. 병이 나았다고 말했을 때는 치유가 나타나야 하는데, 죄 용서 선언은 눈으로 확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예수님께서는 더 어려운 말을 사실로 증명함으로써 죄 용서를 선언한 것이 빈말이 아니라 죄 용서가 실행되게 만드는 선포임을 밝히 십니다. 이를 통해 자신의 신적 권위를 분명하게 밝히시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의 권능(6b-8)

중풍병자가 일어나 집으로 가는 모습을 통해, 예수님께 죄를 용서하는 권위가 있다는 사실이 확인됩니다. 예수님의 죄 용서는 땅에서, 인자로서 행사하는 권위로 일어난 일입니다. 하늘에서는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시고, 땅에서는 하나님의 권위를 받으신 예수님께서 인자로서 죄를 용서하십니다이 경우에 인자는 나를 가리키는 관용적 표현이 아니라, 다니엘 7:13-14인자 같은 이를 가리킵니다. 중풍병자가 해결 받아야 할 문제는 마비 증상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서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육체의 질병이 아니라 죄 문제임을 분명히 하십니다. 그런데 중풍병자의 죄 용서와 치유는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신뢰를 통해 실현됩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하신다는 사실이 종교 권력자들에 의해 신성모독으로 정죄를 받았는데도, 죄 사하는 권세가 사람에게주어진 것을 두고 무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다는 사실은 충격적입니다. 제자 공동체, 즉 교회는 죄를 용서하는 공동체입니다(5:21-26; 6:12, 14-15; 18:15-35). 교회는 예수님의 죄 용서와 치유를 대행하여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는 통로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병 고치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 대단하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에게 죄를 용서할 권세까지도 가지고 계신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의도적으로 그렇게 행하신 것입니다. 죄를 용서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실히 보여 주셨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역사를 보고도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한 죄 용서함을 받으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정리하십니다.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고 죄 사함을 받았어야 합니다.

 

세리 마태를 부르신 예수님(9-13)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어떤 종교적, 제의적 행위들이 아니라 전심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길 원하십니다. 그런 가운데 사랑이 담긴 예배와 삶이라야 하나님께서 받으실 반한 예배요 예배자의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부르신 장면을 통해 하나님의 자비를 나타내십니다.

 

9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10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11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12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13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9-13)

세리와 죄인은 사회적 소외 계층으로, 특히 세리는 매국노나 배신자로 여겨지는 직업이었습니다. 높은 벽 뒤에 숨어 자발적으로 소외된 이들에게 굳이 물을 열고 들어가 함께 앉으시는 주님이십니다. 문이 없는 벽은 없습니다. 소외된 이에게 찾아가시는 주님은 곁을 내주시고 소명을 주십니다.

 

(1) 마태를 부르심(9-10)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세례 마태를 보았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여러 가지 소식을 듣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더러운 이익을 위해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노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었습니다. 마태 또한 자신을 스스로 죄인이라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동네를 지나가고 있을 때 예수님을 주목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나를 좇으라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순종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영접했던 것입니다.

부르심에 순종한 마태는 예수님과 일행을 자기 집으로 모셨습니다. 자신의 삶에 모신 것입니다. 자기 집에 들어오신 예수님께서는 감격 그 자체였습니다. 자신의 삶에 찾아오신 예수님께서는 영혼을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세리 마태는 자신과 같은 죄인에게 찾아오시고 예수님과의 만남을 감사하고 감격하면서 자기 집으로 영접했습니다.

마태도 변화의 삶으로 자신의 물질을 털어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집에 유하실 때, 구원의 기쁨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같은 처지에 있던 많은 세리들과 죄인들을 초대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게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 구원에 감격하고 있다면 삶의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것보다 구원이 가장 귀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들을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겠습니다.

 

(2) 바리새인과 예수님의 논쟁(11-13)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바리새인들은 용납할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어떻게 죄인들과 함께 어울려 식사를 할 수 있느냐에 비난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비난에 예수님께서는 호세아 66절을 인용해서 자신의 사명을 밝히십니다. 의사가 환저를 외면하지 않고 치료자가 더러운 병을 회피하지 않는 것처럼 이들과 같은 죄인들을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의()가 가득 찬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에 다른 사람들의 잔치가 이상하게 보였습니다. 아니 정죄의 사건으로 보였습니다. 눈앞에 의심에 안개로 가득합니다. 예수님을 순수하게 바라볼 수 없습니다. 왜곡된 눈으로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 볼 수 없고 자신을 구원할 메시아로 영접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치유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정결법의 전문가들에게 제사법을 주신 하나님의 동기가 긍휼에 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을 부르시고 그들과 함께 계시는 것은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행위를 설명할 목적으로 호세아 66절을 인용하십니다. 마태복음은 70인역에서 히브리어 헤세드를 번역한 헬라어 엘리오스를 사용합니다. 치유와 긍휼은 호세아 6장의 문맥에서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호세아 61절에서는 하나님을 치유하는 의사로 나타내는데, 66절에 더 넓은 문맥을 고려하면 하나님께서는 치유하시고 길을 헤매는 그의 백성을 위해 긍휼을 보여주시길 원하십니다. 호세아서에서 헤세드는 하나님을 향한 지속적인 헌신이면서 이웃을 향한 긍휼의 행위입니다. 헬라어 엘로우스는 이웃을 향한 긍휼의 가조점을 두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70인역 호세아 66절을 인용해서 긍휼의 마음으로 세리들과 죄인들을 대하는 태도를 정당화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지 않다라고 여기기 때문에 배우라고 책망하십니다. 긍휼의 마음이나 실천 없이 제의적인 규례에 집중하는 것은 성경과 하나님을 오해한 것입니다. 잘못된 해석이 잘못된 삶을 열매로 났습니다. ‘내가 왔다라는 예수님의 사명을 가리키는 진술입니다. 예수님께서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것은 긍휼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순종하는 아들로서 아버지를 향한 변찮은 사랑과 신실하심을 보여 주셨고, 몸값으로 자신을 내어주시는 것으로 사람들의 향한 긍휼을 입증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웃을 향한 긍휼을 베풀지 않으면서 여러 종교 행위로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메시아와 죄인들이 함께하는 잔치의 장면은 교회의 진정한 기쁨이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로 고통과 수치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복음을 경험하는 데서 온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믿음을 들여다보십니다.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침상에 누인 채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오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죄사함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사함과 구원의 은총을 베푸신 것은, 그들의 열심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육체적이든 영적이든 구원의 은혜는 오직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모든 병이 죄 때문은 아니지만, 이 중풍병자의 병은 죄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에게 죄사함을 먼저 선포하시고 그 후에 치유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를 향해 일어나 내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내 죄사함을 받았다라는 말만큼이나 황당한 명령입니다. 그분이하신 말씀이 다 진실이고 그분의 말씀은 곧 사건이고 역사라는 사실을 믿지 않으면 그 말에 반응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중풍병자는 일어나 돌아갑니다. 그 친구들과 중풍병자의 믿음이 그를 기적으로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서기관의 불신은 그 안에서 아무런 역사도 일으키지 못했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역사를 바라보며 오늘도 그분을 믿고 따르기로 결단하는 주의 백성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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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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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에게 버림받은 다말

사무엘하 1315-22


교회나 사회가 경건하여 악한 일들이 없으면 좋겠지만, 성폭력의 문제가 심심치 않게 발생합니다. 우리가 속한 곳을 포함하여 세상은 완벽한 안전지대는 없습니다. 만약 주변에 생각지 않은 일이 발생했다면, 우리는 이 일을 어떤 절차와 과정을 밟아 다루어야 합니까?

 

다윗의 맏아들 암은 압살롬의 아름다운 누이 다말에게 욕정을 품고 괴로워하던 중에 요나답의 간교한 조언을 듣고 다윗에게 요청하여 다말을 곁으로 부릅니다. 다말이 지혜로운 말로 자신을 강간하려는 것이 어리석은 범죄라는 것을 지적하며, 차라리 다윗에게 자신과 결혼시켜 달라고 요청하라고 제안하여 악행을 막아보려고 하였지만, 암논은 이 말을 묵살하고 다말을 강간하고 맙니다. 이로 인해 다윗 가문에 피의 비극이 시작됩니다.

 

다말을 쫓아내는 암논(15-19)

죄는 우리 문 앞에 엎드려 있으며 우리를 삼키길 원합니다(4:7). 사탄은 우리를 유혹해 넘어트리려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사탄의 강력한 속삭임입니다. 죄의 시작은 폭탄에 불을 붙이는 도화선이 되며, 마지막 시도는 죄에서 더욱 벗어나기 힘들도록 조이는 올가미가 됩니다. 딱 한 번만이라는 생각이 들 때, 오히려 그 한 번만 참으면 됩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 죄는 죽이는 시작이 됩니다.

 

15그리하고 암논이 그를 심히 미워하니 이제 미워하는 미움이 전에 사랑하던 사랑보다 더한지라 암논이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 가라 하니 16다말이 그에게 이르되 옳지 아니하다 나를 쫓아보내는 이 큰 악은 아까 내게 행한 그 악보다 더하다 하되 암논이 그를 듣지 아니하고 17그가 부리는 종을 불러 이르되 이 계집을 내게서 이제 내보내고 곧 문빗장을 지르라 하니 18암논의 하인이 그를 끌어내고 곧 문빗장을 지르니라 다말이 채색옷을 입었으니 출가하지 아니한 공주는 이런 옷으로 단장하는 법이라 19다말이 재를 자기의 머리에 덮어쓰고 그의 채색옷을 찢고 손을 머리 위에 얹고 가서 크게 울부짖으니라(15-19)

다말을 성폭행한 암논은 욕심을 채우자 심경이 변하여 극도로 마음을 표출합니다. 다말을 쫓아냄으로써 성폭행보다 더 큰 악행을 저지릅니다. 암논은 반성 대신 회피를 택하고, 과오를 외면한 채 무책임하게 향합니다. 치유와 회복의 시작은 인정과 사과와 작업장에서 시작됩니다.

 

(1) 다말을 쫓아내려는 암논(15)

다말이 간곡하게 만류했음에도 불구하고 암논은 다말을 강제적으로 범하여 자신의 욕망을 채우더니 이제 갑자기 다말에 대한 태도를 바꿉니다. 15절에서 미움과 증오란 단어를 네 번이나 반복하고, 그 미움이 전에 사랑한 것보다 더하다라고 말함으로써 암논이 다말을 끔찍하게 증오하였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런 암논의 태도를 보면 다말에 대한 그의 감정은 사랑이 아니라 단순한 욕망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차갑게 변한 암은 다말에게 일어나 나가라고 명령합니다.

 

(2) 거부하는 다말(16)

이런 태도에 다말은 또다시 암논의 행동이 옳지 않다고 지적합니다. 이렇게 자신을 쫓아내는 것이 강간한 것보다 더 큰 약이라고 지적합니다. 여기에 나온 다말의 말은 앞에서 그 마음이 전에 사랑한 것보다 더하다고 했던 말과 비슷한 말투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암논이 강간 전보다 강간 후에 더 악하게 행동했음을 강조하기 위한 어법입니다.

이런 다말의 지적에도 암논은 다말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구약 율법에 따르면 강간을 하면 그 처녀와 결혼을 하거나 아니면 그녀가 앞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보상을 해주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다말은 이에 근거하여암논에게 항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시종들에 의해 쫓겨나는 다말(17-18a)

하지만 암논은 다말의 지혜로운 말을 또 다시 묵살하고, 오히려 종을 불러 다말을 쫓아내고 문빗장을 지르라고 명령합니다. 여기서 암논은 다말을 이것’. ‘이 여자를 뜻하는 조트로 부르면서 거추장스러운 물건처럼 취급하는데, 이런 태도는 강간 직전에 다말을 나의 누이라고 부르던 것과는 완전히 대조적입니다. 이런 암논의 태도는 여성에게 가장 약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강간당한 젊은 처녀가 앞으로 감당해야 할 비극적인 삶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암논의 관심은 자신의 죄의 증거인 다말을 빨리 자신의 집에서 내쫓아 죄를 은폐하고 싶은 생각뿐이었습니다. 이런 암논의 모습은 자신의 죄를 은폐하기 위해 우리아를 죽인 다윗의 비정한 모습과 무척이나 닮았습니다. 이렇게 다윗과 닮은 암논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다윗의 죄를 기억하게 되고, 암논의 죄가 다윗의 죄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됩니다.

 

(4) 다말이 크게 부르짖음(18b-19)

여기서 갑자기 다말의 채색옷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채색옷은 결혼하지 않은 공주들이 입는 옷이라고 설명하는데, 이것은 공주들이 아직 처녀라는 표시로 채색옷을 입었다는 의미입니다.

쫓겨난 다말은 머리에 재를 뒤집어쓰고 공주의 옷인 채색옷을 찢고 손을 머리 위에 얹고 크게 부르짖으며 자신의 억울함과 분노와 괴로움을 표현하였습니다. 전체적으로 다말의 행동은 죽음을 애도하는 행동이지만, 큰 재난과 고난을 당했을 때도 이와 같은 행동을 하며 하나님께 도움을 구합니다. 다말을 특히 채색옷을 찢음으로 자신이 강간당하여 처녀로서의 명예를 잃었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부르짖다는 어떤 괴로움과 고난에 빠졌을 때,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하면서 주로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다말은 사람들과 하나님께 자신의 이런 부당하고 억울하고 비극적인 상황에 대해 공개적으로 부르짖으며 도움을 요청하고 정의를 실행해달라고 외쳤습니다. 그것도 한 번만 그런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외치면서 집으로 간 것입니다. 다말은 자신과 다윗의 집에 일어난 악한 일에 대해 정의로운 판결이 있기를 원해서 자신에게 일어난 수치스럽고 치욕스러운 일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 부르짖은 것입니다.

 

압살롬의 침묵과 다윗의 무대응(20-22)

공동체 내에서 죄를 범한 사람이 있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공동체의 이미지가 나빠질 것을 두려워해서 못 본 체하거나 덮어 버린 적이 있습니까? 형제가 죄를 범하면 우선 단 둘이 있을 때 잘못을 지적해야 합니다. 그래도 듣지 않을 경우 두세 증인 앞에서 말하고, 그래도 듣지 않는다면 교회 앞에서 잘못을 지적해 돌이키게 해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가 죄를 감싸거나 묵인한다면 그 죄는 반드시 똬리를 틀고 앉아 더 큰 문제를 만들어 냅니다.

 

20그의 오라버니 압살롬이 그에게 이르되 네 오라버니 암논이 너와 함께 있었느냐 그러나 그는 네 오라버니이니 누이야 지금은 잠잠히 있고 이것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라 하니라 이에 다말이 그의 오라버니 압살롬의 집에 있어 처량하게 지내니라 21다윗 왕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노하니라 22압살롬은 암논이 그의 누이 다말을 욕되게 하였으므로 그를 미워하여 암논에 대하여 잘잘못을 압살롬이 말하지 아니하니라(20-22)

다윗은 모든 일을 듣고 심적 노하지만 암논을 처벌하지 않습니다. 다윗의 이해할 수 없는 처사가 양상문의 복수심을 키웠습니다. 은혜라는 미명하에 드러난 문제를 덮는 것은 빠른 해결책이 아닙니다. 공의롭고 정당한 계절은 반드시 필요하며 용서는 그 이후의 문제입니다.

 

(1) 다말에게 말하는 압살롬(20)

하지만 아무도 지혜로운 다말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오빠인 압살롬은 이런 다말의 부르짖음에 상대가 다윗이 가장 아끼는 아들 암논이라는 것을 확인한 후에, 암논이 다말의 오빠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지금은 잠잠하라고 말합니다. 압살롬은 혹시라도 암논에 대한 처벌을 주장합니다. 다윗의 눈 밖에 날 것을 염려하여 이 일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지고 정당한 처벌을 요청하는 길을 택하지 않고 아버지인 다윗이 어떻게 처리할지 눈치를 보면서 다말에게 잠잠하라고 한 것입니다.

압살롬은 차기 왕권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 눈 밖에 나는 행동을 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다말의 아픔이나 정의 실현보다는 자신의 왕권에 대한 욕망이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이런 압살롬 때문에 다말은 압살롬의 집에서 다른 가족이나 공동체와 단절된 채 침묵을 강요받으며 외롭고 힘들게 지내야 했습니다.

 

(2) 다윗의 반응(21)

다윗 왕은 이 일을 듣고 크게 화를 냈지만, 강간을 저지른 암논에 대한 처벌이나 폭행을 당한 다말에 대한 위로나 보상 혹은 결혼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고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한 가정의 가장이자 한 나라의 왕으로서 법을 집행하고 질서와 도덕을 세울 의무가 있었지만, 어떤 처벌도 하지 않고 그냥 넘어간 것입니다. 이렇듯 손 놓고 사태를 방치한 이유는 왕위 계승자로 염두에 두고 있는 장남 암논에 대한 편애 때문이었습니다. 강간에 대한 책임을 공식적으로 묻게 되면 암논은 왕궁에서 쫓겨나거나, 쫓겨나지 않는다고 해도 왕궁에서 그의 입지가 좁아지고, 결국 왕위 계승 경쟁에서 밀려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의를 실현해 달라고 외치는 다말의 부르짖음에 다윗은 침묵하였고, 압살롬도 다윗의 이런 부당한 행동에 대해서 그리고 암논의 잘못에 대해서 계속 침묵하였습니다. 이렇게 다말의 억울함을 풀어주어야 할 보호자인 다윗과 압살롬은 모두 침묵하였고 결국 그녀는 매우 불쌍한 처지로 살아야 했습니다. 이것이 현재 다윗 왕궁의 모습입니다. 아무도 약하고 힘없는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정의를 요구하는 외침에 침묵을 강요하며,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꾸몄습니다. 피해자 다말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무시하는 이 왕궁의 모습은 다윗이 지금 영적으로 얼마나 무기력한 상태인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3) 속내를 감추는 암살롬(22)

22절을 보면, 비록 압살롬이 암논의 행동에 대해 아무 말도 안 했지만, 속으로 암논에 대해 증오하는 마음을 품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은 힘이 없어서 아버지의 눈치와 형의 눈치를 보며 침묵하고 있지만, 그의 마음속에 암논에 대한 미움과 증오조차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인간의 마음에 분노가 생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지도자이자 가장인 다윗의 역할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지혜를 가지고 암논의 죄를 처벌하고 다말과 압살롬을 위로하며 다말에게 적절한 보상과 함께 그녀의 불명예를 씻어주었다면, 다말이 외롭고 억울하게 살지 않았을 것이고, 압살롬이 암논과 아버지 다윗에 대한 증오를 키워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윗이 적절한 처벌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압살롬은 암논 뿐만 아니라 아버지 다윗에 대한 증오심까지 갖게 된 것입니다. 이런 압살롬의 암논과 다윗에 대한 증오심은 압살롬이 살인과 반역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다윗에게는 하나님의 지혜가 없었습니다. 다말의 지혜로운 말조차 무시하고 침묵을 강요하는 이런 모습은 다윗의 집에 내리신 하나님의 심판은 바로 이 지혜의 상실을 통해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원리를 따르지 않는 사랑은 욕심에 불과합니다. 암논은 왕과 다말의 순수한 마음을 이용하여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고 했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욕심의 노예가 됩니다.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온갖 속임수로 다말에게 다가갔습니다. 이런 욕심은 결국 그의 가정에 불행을 자초하게 됩니다. 우리도 탐욕과 욕심을 이루기 위해 온갖 술수를 다 펼치며 죄를 짓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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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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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말을 유혹하여 범죄한 암논

사무엘하 131-14


교회나 사회가 경건하여 악한 일들이 없으면 좋겠지만, 성폭력의 문제가 심심치 않게 발생합니다. 내가 속한 곳을 포함하여 완벽한 안전지대는 없습니다. 만약 주변에 생각지 않은 일이 발생했다면, 우리는 이 일을 어떤 절차와 과정을 밟아 다루어야 합니까?

 

압살롬의 반란이 일어나게 되는 첫 과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첫째 아들 암논이 병든 체하고 셋째 아들 압살롬의 누이인 다말을 자기 집으로 오게 했습니다. 암은 강제로 다말과 동침한 뒤, 곧 싫증을 느끼고 집 밖으로 쫓아냈습니다. 다말은 자기 오빠인 압살롬을 찾아가 그의 집에서 거주했습니다. 압살롬은 다말에게 당분간 조용히 지내라고 충고하면서,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은 채 암을 죽일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암논의 계략(1-6)

하나님의 법을 떠나서 범죄의 길을 가고 세상의 길을 가려면 여러 사람을 속여야 합니다. 은혜의 자리를 떠나려고 하면 거짓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죄악의 수렁에서 자기의 힘으로 헤쳐 나올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오직 성령께서 능력으로 덧입혀 주셔야만 죄악으로부터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항상 성령께서 은혜 가운데 인도하시길 간절히 구하시길 바랍니다.

 

1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 다윗의 아들 압살롬에게 아름다운 누이가 있으니 이름은 다말이라 다윗의 다른 아들 암논이 그를 사랑하나 2그는 처녀이므로 어찌할 수 없는 줄을 알고 암논이 그의 누이 다말 때문에 울화로 말미암아 병이 되니라 3암논에게 요나답이라 하는 친구가 있으니 그는 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이요 심히 간교한 자라 4그가 암논에게 이르되 왕자여 당신은 어찌하여 나날이 이렇게 파리하여 가느냐 내게 말해 주지 아니하겠느냐 하니 암논이 말하되 내가 아우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사랑함이니라 하니라 5요나답이 그에게 이르되 침상에 누워 병든 체하다가 네 아버지가 너를 보러 오거든 너는 그에게 말하기를 원하건대 내 누이 다말이 와서 내게 떡을 먹이되 내가 보는 데에서 떡을 차려 그의 손으로 먹여 주게 하옵소서 하라 하니 6암논이 곧 누워 병든 체하다가 왕이 와서 그를 볼 때에 암논이 왕께 아뢰되 원하건대 내 누이 다말이 와서 내가 보는 데에서 과자 두어 개를 만들어 그의 손으로 내게 먹여 주게 하옵소서 하니(1-6)

세상은 자신의 기지와 능력을 발휘해 악을 돕고자 하는 자들로 넘쳐납니다. 요나답은 암논의 불의한 욕망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간교한 자였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간교한 뱀이 접근을 허용함으로 범죄했듯이, 암논의 욕망은 간교한 자의 접근을 허용하면서 증폭되었습니다.

 

(1) 암논의 상사병(1-2)

암논이 다말을 강간한 사건은 다윗이 하나님 앞에 범죄한 뒤에 일어난 첫 사건으로 하나님의 심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1절에서 다말을 다윗의 아들 압살롬의 아름다운 누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암논이 그녀를 사랑하게 된 이유이며, 전에 다윗이 밧세바와 간통한 이유와 같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이유로 하나님 앞에 범죄한 것입니다또한 다말을 다윗의 딸이 아닌 다윗의 아들 압살롬의 누이로 소개하는데, 이것은 다윗이 다말에게는 무관심하다는 것을 보여주며 이와 대조적으로 암논이나 압살롬은 다윗의 아들로 소개함으로써 다윗의 애정이 아들들에게 한정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건은 암논이 배다른 누이 다말을 사랑하면서 시작됩니다. 하지만 이 사랑은 강간한 후에 급속히 식어버리는 육적인 욕망에 불과했습니다. 다말에 대한 암논의 욕망이 너무 강했지만 다말이 처녀라서 만날 방법이 없었습니다. 처녀의 경우 남자 형제가 늘 보호하고 있기 때문에 암논은 자신의 동생이자 경쟁자인 압살롬을 배제한 채 다말을 만날 방법이 없었습니다암논은 다말에 대한 채워지지 않는 욕망으로 심히 괴로워하였습니다. 하지만 본문은 다말을 그의 누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암논의 욕망이 잘못된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2) 요나답의 계교(3-5)

이때 암논의 사촌 요나답이 등장합니다. 개역개정에서는 요나답을 심히 간교한 자로 번역하고 있지만, 원문을 직역하면 매우 지혜로운 남자입니다. 여기서 지혜의 모티프가 등장합니다. 요나답은 암논을 보고 왜 그렇게 날마다 야위어 가느냐고 묻습니다. 암논은 다말에 대한 욕망을 채우지 못하여 괴로워하였고, 그런 모습이 다른 사람 눈에는 병이 난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이런 요나답의 질문에 암논은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솔직히 말합니다. 사실 암논은 욕망은 있었지만, 그것을 채울 지혜와 능력은 없었는데, 요나답이 암논에게 방법을 알려줌으로써 암논이 실제로 범죄를 저지르게 됩니다.

 

(3) 암논의 요청(6)

요나답은 왕인 다윗의 권위를 이용하여 다말을 그의 보호자인 압살롬에게서 떼어낼 방법을 알려줍니다. 침상에 누워 병든 체하고 있다가 다윗이 병문안을 오면 누이 다말이 만든 떡, 그것도 특별히 자신 앞에서 만든 떡을 먹고 싶다고 요청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이 암논을 매우 아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요나답이 아픈 암논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할 것임을 염두에 둔 계획입니다요나답은 자신의 지혜를 범죄에 악용하고, 결국은 암논을 죽음으로 내모는 데 일조합니다. 이런 그의 모습은 후에 암논의 잘못된 행동을 막으려고 했던 지혜로운 다말과 대조를 이룹니다. 그 말을 들은 암논은 요나답의 말대로 아픈 체하고 있다가 다윗이 병문안 왔을 때, 요나답이 알려준 대로 다윗에게 요청합니다. 여기서 암은 다말을 나의 누이라고 부르며 자신의 요청이 형제간의 우애인 것처럼 포장하며 자신의 욕망을 숨깁니다. 하지만 그녀의 손으로 자신을 먹여달라는 요청은 단순히 남매간의 우애로 보기에는 지나친 면이 있습니다.

 

다말과 동침한 암논(7-14)

죄란 결국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것입니다. 자기 욕심이 다른 사람을 해치는 것을 알면서도 기어코 그것을 채우고 싶어 하는 그릇된 열망입니다. 성도들은 욕망을 잘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듣기 좋은 간교한 말보다 옳은 말을 따라야 합니다. 자신의 욕망이 다른 성도들에게 끼칠 영향을 생각하며 삶을 살아야 합니다.

 

7다윗이 사람을 그의 집으로 보내 다말에게 이르되 이제 네 오라버니 암논의 집으로 가서 그를 위하여 음식을 차리라 한지라 8다말이 그 오라버니 암논의 집에 이르매 그가 누웠더라 다말이 밀가루를 가지고 반죽하여 그가 보는 데서 과자를 만들고 그 과자를 굽고 9그 냄비를 가져다가 그 앞에 쏟아 놓아도 암논이 먹기를 거절하고 암논이 이르되 모든 사람을 내게서 나가게 하라 하니 다 그를 떠나 나가니라 10암논이 다말에게 이르되 음식물을 가지고 침실로 들어오라 내가 네 손에서 먹으리라 하니 다말이 자기가 만든 과자를 가지고 침실에 들어가 그의 오라버니 암논에게 이르러 11그에게 먹이려고 가까이 가지고 갈 때에 암논이 그를 붙잡고 그에게 이르되 나의 누이야 와서 나와 동침하자 하는지라 12그가 그에게 대답하되 아니라 내 오라버니여 나를 욕되게 하지 말라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마땅히 행하지 못할 것이니 이 어리석은 일을 행하지 말라 13내가 이 수치를 지니고 어디로 가겠느냐 너도 이스라엘에서 어리석은 자 중의 하나가 되리라 이제 청하건대 왕께 말하라 그가 나를 네게 주기를 거절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되 14암논이 그 말을 듣지 아니하고 다말보다 힘이 세므로 억지로 그와 동침하니라(7-14)

다윗은 암논의 욕망 성취를 위한 연극에 속아 넘어갔습니다. 누구보다 자기 욕망 실현에 능수능란했던 다윗은 암논의 거짓말을 눈치채지 못한 영적으로 둔감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잘못된 욕망을 품고 있는 자, 그것을 부추기는 자, 모른 채 방임하는 자는 모두가 공범입니다.

 

(1) 과자를 준비한 다말(7-9)

이런 암논의 요구에 다윗은 다말에게 사람을 보내어 암논의 집에 가서 그를 위해 음식을 차리라고 명령합니다. 장자인 암논에게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던 다윗은 경우에 합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뭔가 미심쩍은 부분이 많은 암논의 요청을 받아들여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딸 다말을 암논의 손에 넘겨주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됩니다. 다윗의 이런 어리석은 모습은 밧세바와의 범죄 이후에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면서 주시던 지혜가 사라졌음을 암시합니다왕인 아버지 다윗의 명령에 따라 암논에게 간 다말은 아무것도 모르고 열심히 명령대로 과자를 만들어 암논이 먹게 차려 놓았습니다. 다말이 과자를 만드는 모습을 자세히 설명한 것은 그녀가 아버지의 명령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이런 성실한 다말의 모습은 독자들로 하여금 다가올 다말의 운명에 대해 더욱더 안타까운 마음이 들게 하며 암논과 다윗에 대해 더욱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합니다다말이 다 만든 음식을 암논 앞에 놓았지만 암논은 먹기를 거절하고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밖으로 내보냅니다. 그의 원래 목적은 음식이 아니라 다말을 강간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말이 음식을 다 준비하자 자신은 강간할 준비를 한 것입니다.

 

(2) 암논의 유혹(10-11)

암논은 다말에게 음식을 침실로 가져와서 자신에게 먹일 것을 명령합니다. 암논은 다말이 거절할 수 없게 매우 강압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말은 큰 오라버니의 말을 어길 수 없어서 방으로 음식을 들고 들어갑니다. 여기서 그의 오라버니 암논이란 표현을 사용한 것은 다말이 암논을 전혀 의심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한 것입니다.

 

(3) 암논의 다말을 강간함(12-14)

암논은 다말을 침실로 들어오게 하여 강제로 붙잡고 동침하자고 명령합니다. 이때 암논은 다말을 나의 누이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한편으로는 다말을 안심시키려고 하는 말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행동이 금지된 행동이라는 것을 표현합니다이런 암논의 말에 다말은 자신의 의사 표현을 확실하게 합니다. 그녀는 암논을 오빠로 부르면서 자신을 욕되게 하지 말라는 것과 어리석은 일을 행하지 말라고 강력하게 경고합니다. 욕되게 한다는 것은 다말에게 수치와 굴욕을 준다는 것으로 다말에게 해를 가하는 행동입니다. 그리고 어리석은 일을 하다라는 구문은 창세기 34:7과 사사기 19:23의 본문에서 공통적으로 강간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암논에게 해당하는 말로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강간은 중범죄로 다루었기 때문에 다말은 암논에게 강간을 하면 죄인이 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 것입니다.

이렇게 다말은 어리석은 행동의 결과로 다말 자신은 수치를 입게 되어 공동체에서 설 자리를 잃게 되고, 암논도 범죄자가 될 것이라고 말한 후 좀 더 지혜로운 조언을 하는데, 강간 대신에 결혼이라는 적법한 절차를 거쳐서 다말과 암논의 명예를 모두 지키자고 제안한 것입니다. 두 제안 다 아버지 다윗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지만, 다말은 간교한 요나답보다 훨씬 지혜로운 제안을 한 것입니다. 여기서 다말이 아버지를 통한 결혼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임기응변으로 보아야 합니다당시 이스라엘 법(18:9)에 따르면 이복 남매간의 결혼은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만일 암논이 다윗에게 다말과 결혼시켜달라고 말하더라도 다윗이 이 결혼을 허락할 가능성은 매우 적습니다. 강간에 대한 수치를 지고 평생을 사는 것보다는 암논과 결혼하는 것이 명예를 지킬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에 다말은 암에게 이런 제안을 한 것입니다하지만 욕정에 사로잡힌 암논은 다말의 말을 듣지 않고 그녀를 강간합니다. 결국 암논은 자신의 욕망에 이끌려 누이인 다말을 강간하여 다윗 가문에 피바람을 몰고 옵니다. 이는 밧세바와 간통할 때 그 일이 가져올 파장이나 여호와께서 보고 계신다는 생각하지 않았던 다윗과 매우 비슷합니다. 다윗의 악한 행실이 자녀들에게 악한 영향을 주었음을 보여줍니다. 이 상황에서 다윗도 지혜롭지 못하게 행동하여 아들이 범죄를 저지르는 데 일조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함께하며 그가 지혜롭게 행동하게 하셨으며 어리석은 일을 하려고 하면 다른 사람을 통해서 막으셨지만, 이번에는 전혀 개입하지 않으셨고, 지혜로운 말조차 묵살 되었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악한 본성이 하나님의 통제를 받지 않은 채 그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심판인 것입니다.

 


다말을 행한 암논의 사랑은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상대방을 소유하려는 왜곡된 사랑이었습니다. 이처럼 드러난 사건을 공동체가 해결하거나 치유하지 못하여 피해자의 아픔이 가중되는 경우가 흔합니다. 오히려 가해자를 두둔하고 감쌈으로써 교회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는 예도 있습니다. 교회를 거룩한 기관으로 보존하기 위해 성도는 지혜와 의지와 성찰로 행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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