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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07-01)

 

공동체에 대해 가르치신 예수님

마태복음 7장 1-12절


가족이 서로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가정은 행복의 동산이 되기도 하고 불행의 터전이 되기도 합니다. 신앙 공동체도 예외는 아닙니다. 서로 쥐어짜 내려고 하는 공동체가 있는가 하면, 섬김과 환대 속에 따뜻한 은혜가 넘치는 공동체도 있습니다. 행복한 공동체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의 백성으로서 ‘더 나은 삶’에 대해 계속 가르칩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두 가지 교훈을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일반 생활에서 이웃에 대한 상호 태도를 가르치시고, 다음으로 상호성의 원리에 따라서 형제와 자매에 대한 태도를 가르치고 하늘 아버지의 돌보심을 강조합니다. 결론적인 황금률을 가르칩니다.


비판에 대한 가르침(1-6)

속담에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란 말이 있습니다. 자신의 행동은 생각지 않고 다른 사람의 실수를 나무란다는 의미입니다. 남을 정죄하려고 하기 전에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용서하고 판단한 대로 용서도 받고 정죄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남도 판단해야 합니다. 나만의 선입견과 제한된 지식으로 누군가를 정죄할 때 누군가에게 그리고 하나님께 판단을 받고 있습니다.

1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3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6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1-6)

예수님께서는 계속적으로 천국 백성들이 ‘더 나은 의’을 위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이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감에 있어서 다른 사람의 실수나 잘못을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인간관계는 상호성(相互性)의 원리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상호성이란 내가 다른 사람을 대한 그대로 대우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1) 비판에 대한 가르침(1-2)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공동체가 완전을 추구하면서도 형제와 자매의 허물과 실수를 해결할 지혜를 제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관계에서 비판받지 않으려면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는 상호성의 원리를 말씀하십니다.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것은 그 사람을 성급하게 평가하고 임의로 재판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심판받지 않으려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일 심판을 종말론적으로 이해하면 최후 심판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말하자면 심판하는 것은 최후 심판 때에 모든 것을 보고 아시는 하나님께서 하실 권한에 속한 것이므로(6:4,6,8,18,32; 참조. 13:36-43, 47-50) 하나님의 심판 또는 비난을 피하려면 타인을 비판(비난)하지 말라, 하나님의 역할을 흉내 내지 말라는 뜻입니다. 종말론적인 상황에서 제한하지 않는다면, 형제를 비판하는 것에 대해(하나님에 의해서든, 사람들에 의해서든) 최후 심판 이전에라도 이 세상에서 비판받게 될 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만일 비판하게 되면 비판받게 될 것입니다. 평가하는 기준에 따라 평가받게 될 것입니다(2). 여기서 ‘기준’ 혹은 ‘헤아림(μέτρον)’은 시장에서 곡물을 측정하는 도구로서 ‘평가의 기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을 평가하는 기준이 그날에는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 사용될 것입니다.

이곳에서 말한 ‘비판’은 ‘분별’이나 ‘판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만약 분별이나 판단까지 의미한다면, 교회 공동체 안에 잘못한 자들을 판단해서 권징하지도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 ‘비판’은 관계 안에서 자신을 더 낫게 보이려고 상대방의 흠을 찾아내려는 사사로운 분석과 평가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이어지는 말씀에서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2) 자신을 먼저 돌아본 백성(3-5)

예수님께서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5절의 비유는 1-2절의 교훈은 지원하고 우리가 심판하는 것 대신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가르칩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고 판단하면서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는 문제를 지적하십니다(3).

‘들보’는 건축물의 기둥이나 서까래와 같은 나무입니다. 반면 ‘티’는 작은 나무 작대기입니다. 눈에 통나무가 들어 있으면 당연히 사물을 볼 수 없습니다. 허물이 통나무처럼 커서 눈을 가리고 있는데도 형제의 행위를 평가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자신을 들어내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있는 ‘들보’는 무시하고, 상대방에 있는 ‘티’는 크게 부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비판이야말로 외식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주신 성도됨의 거룩함과 고귀함을 포기하는 행동입니다.

특히 3,4절에서 반복되는 형제는 하늘 아버지를 모시는 새 언약 공동체, 하늘나라의 공동체에 속한 구성원을 가리킵니다. 이중 잣대로 형제와 자매를 비난하고 재판해버리는 행위는 공동체에 엄청난 충격을 가할 수 있으며, 이런 태도를 취하는 사람은 1-2절과 연결해보면, 그 형제와 자매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의 심판 대상이 될 것입니다.

이처럼 3-4절은 심판하는 자신을 깊이 성찰할 것을 강조합니다. 자신의 더 큰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고 이웃의 작은 문제에 집착하는 것은 스스로 속고 있는 것이며, 자기기만이 바로 위선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5절에서 ‘위선자’라고 꾸짖으십니다. 장애물이 들어 있는 눈으로 타인의 문제를 크게 보고, 자신의 자랑거리를 크게 보면, 스스로 속게 되기 때문에 위선자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5절에서 형제의 눈 속에 티를 빼는 행위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자신의 관점이 과연 옳은가 하는 점입니다. 먼저 나의 눈을 깨끗하게 만들고 나서 형제의 눈을 보았는데 티가 있다면 티를 제거해줘야 합니다.

하늘나라는 형제를 심판하고 비난하는 나라가 아니라 사랑하고 환대하는 나라입니다. 자신의 허물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이웃의 문제를 다루는 사람은 먼저 자기 눈에 있는 통나무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본문은 진실하지 못한 비판자의 모순을 지적하는 비유이므로 형제의 잘못에 관심을 두지 말라는 뜻은 당연히 아닙니다. 하늘나라의 공동체에 속한 자들은 하나님을 하늘의 아버지로 모신 형제들과 자매들이기 때문에, 자신을 먼저 점검하고 나서 긍휼의 마음으로 형제를 위해 교정을 시도해야 합니다. 모두 한 가족으로서 하늘나라의 완성을 향해 순례의 길을 걸어가므로, 그것도 험한 길을 가게 되므로, 서로에 대해 긍휼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긍휼의 마음으로 상대방의 태도를 고치도록 하는데도 불구하고 공격할 태세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는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개처럼 적대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에게는 거룩한 것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거룩한 것’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삶의 제사와 같습니다. 상대방의 지적이 기분 나쁘게 들려도 하나님의 판단으로 겸손히 받아들이는 삶은 하나님께 거룩하게 드려집니다. 그러나 자신을 위한 평가를 거부하는 사람은 그런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조언이 얼마나 중요하고 가치 있는지 모르고 적대적으로 대응하는 사람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3) 가치 판단(6)

이런 점에서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6)라는 말씀은, 하늘나라의 제자들이 가져야 할 분별력에 대한 교훈입니다. ‘더 나은 의’를 행하는 삶의 열매를 맺는 것이 공동체를 향한 하늘 아버지의 뜻입니다. 그러나 완성의 나라가 오기까지 순례자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제자들은(7:13-14) 완전을 지향하지만(5:20), 현재는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형제들과 자매들에 의해 행동을 교정받으면서 서로 성장해가는 나라가 하늘나라입니다.

참된 성도라면 자신을 들어내기 위해 형제와 자매의 부족한 부분을 들추어내지 말아야 합니다. 남보다 자신을 낮게 여겨 쉽게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본성을 거슬러 예수님의 명령대로 자신보다 남을 낫게 여겨야 합니다. 물론 본성을 거슬러야 하는 일이기에 쉽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7-11)

구하기 전에 전제해야 할 것이 둘 있습니다. 하나는 응답하실 하나님의 선하심과 부요하심 입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보다 더 우리를 사랑하고 더 지혜로우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하늘 아버지께서 좋은 것을 주실 것을 믿고 진실하고 간절하게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합니다.

7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9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10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7-11)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열정적인 기도는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과 우리를 향한 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신뢰에서 나옵니다. 우리의 고집스러움에 대한 강조가 아니라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기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시고 있습니다.

(1) 구하고 찾는 기도(7-8)

예수님께서는 구하고, 찾고, 두드릴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기도하라는 명령이며, ‘왜냐하면’으로 시작하는 8절은 기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2) 좋은 것으로 응답하시는 하나님(9-11)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마다 얻고 찾고 문이 열리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응답의 확실성을 강조하기 위해 빵을 구하는 아들에게 돌을 생선을 구하는 아들에게 뱀을 줄 아버지가 없다는 일반적인 상식을 비유로 전하십니다(9-10).

아버지는 자녀를 위해 좋은 것을 구분해서 줍니다. 땅의 아버지에게는 많은 한계가 있지만, 이런 아버지도 자식에게 좋은 것으로 주려고 합니다. 한계가 없는 하늘 아버지께서 필요를 채워주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11). 그런데 하늘 아버지는 제자들이 구한다고 해서 모든 것을 자동적으로 주시는 분이 아니라, 가장 좋은 것, 기도하는 제자에게 필요한 것을 주십니다(누가복음 11:13).

제자들은 높은 수준의 윤리적 요구받지만, 언제나 기억해야 하는 진리는 하나님께서는 아버지라는 사실입니다. 기도의 핵심과 정의는 하늘 아버지와 자녀의 대화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땅에 있는 자녀 간의 대화입니다. 대화를 원하는 하나님의 마음은 기도를 격려하시는 데서 나타납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은 반응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행동이며,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결론-황금률(12)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는 삶이 ‘더 나은 의’를 추구하는 삶입니다. 이웃과 자신의 경계를 지우고 지체를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요구입니다. 자기 부정과 이타적인 사랑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이요,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입니다.

12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12)

예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황금률로 불리는 교훈을 가르치십니다. ‘그러므로’는 12절 앞 단락의 결론임을 알립니다. 7:12을 근접 문맥인 1-11절의 결론으로 보면 비판하든지, 분별(평가)하든지, 항상 다른 사람에게 대접받고 싶은 원칙(황금률)에 기초하라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을 가리키는 표현으로써 이미 5:17에 ‘율법이나 선지자’로 언급됐으므로(또한 11:13, 22:40),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라는 황금률이 구약이 요구하는 본질을 성취하는 행위와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웃 사랑은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대접하는 것입니다. 황금률(12)과 7-11절을 연결해보면, 하나님께서는 긍휼의 아버지로서 자녀의 필요를 채워주시기 때문에 제자들은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구하고 이웃에게는 요구하지 않고 오히려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리고 황금률(7:12)은 하늘나라의 의(5:17-7:12)를 실천하는 목표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임을 가르칩니다. 제자들은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하는 태도, 즉 내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 마음으로 이웃을 대함으로써 이웃에 대한 사랑을 표현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제자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다른 어떤 가치 판단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옳고 그름을 지혜롭게 판단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 하는 데까지 가서는 안 됩니다. 정죄하는 일은 하나님께 속해 있고 하나님 나라의 사람들은 모두 용서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형제를 비판하고 정죄한다면 같은 기준으로 자신도 정죄를 받을 것입니다. 잘못된 일은 용납하지 말해야 하지만, 잘못한 지체에 대해서는 긍휼과 자비로움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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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06-01)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려는 다윗

사무엘하 6장 1-11절


자동차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여 원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면 문명의 유익된 기계입니다. 하지만 브레이크가 고장 난 채로 굴러다니는 자동차는 문명의 흉기가 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이 품고 있는 ‘열심’은 어떠한 중요한 일을 이루는 중요한 에너지가 되지만, 적절히 통제되지 않고 사용될 때 오히려 잘못된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특별히 신앙적인 열심은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통해서 통제될 때, 큰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통일 왕국의 기초가 세워지고 안정과 번영이 찾아오자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셔야 함을 알았기에 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오기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궤’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계심과 동일한 의미가 있음을 인식합니다(민수기 10:35-36). 그러나 이 궤를 옮겨오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사람의 생각으로 행함으로 실수를 범합니다.


예루살렘으로 옮기려는 언약궤(1-5)

성도는 자신의 생각과 행동의 중심에 하나님 두기를 소망해야 하며 그것을 중요한 일로, 기쁨으로 여겨야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왕으로 모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과 행동의 중심에 하나님을 두는 것을 말합니다.

1다윗이 이스라엘에서 뽑은 무리 삼만 명을 다시 모으고 2다윗이 일어나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바알레유다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 하니 그 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라 3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 4그들이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싣고 나올 때에 아효는 궤 앞에서 가고 5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은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연주하더라(1-5)

예루살렘을 통일 왕국의 수도로 삼고 통치를 시작한 다윗은, 왕궁을 짓고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승리합니다. 어느 정도 안정된 다윗은 하나님을 향해 관심을 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 오려 했습니다.

(1) 다윗의 계획(1-2)

다윗은 이스라엘 지역이 블레셋의 지배에서 벗어나고 나라가 안정되자 하나님의 궤, 즉 언약궤를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으로 가져오려고 했습니다. 당시 궤가 있던 곳은 사무엘상 7장에 나와 있지만, 블레셋에 빼앗겼다가 돌아온 이후로 계속적으로 유다의 바알레(기럇여아림)에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 군사 30,000명을 모으는데 언약궤를 옮기는 것을 마치 대규모 군사작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매우 성대하게 거행합니다.

다윗이 바알레유다로 가는데 ‘바알레유다’라는 지명에 대해 학자들은 대부분 유다의 ‘바알라’로 보는 것에 동의합니다. ‘바알라’는 여호수아 15:9에서 ‘기럇여아림’으로 불리며, 여호수아 10:60과 18:14에서는 ‘기럇여아림’으로 불리며, 여호수아 15:60과 18:14에서는 ‘기럇바알’을 ‘기럇여아림’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알레유다와 바알라와 기럇여아림은 모두 같은 지명을 의미합니다. 기럇여아림은 예루살렘과 게셀 중간에 있으며, 이곳은 기브온 사람들의 중요 성읍이었습니다. 사무엘상 7:2에 따르면 블레셋에게 뺴앗겼던 언약궤가 돌아온 이후부터 20년 동안 이곳에 있었습니다.

2절에서 하나님의 궤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그룹들 사이에 계시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불리는 궤라고 합니다. 이것은 언약궤가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하는 물건이라는 의미입니다. 다윗은 현재 왕국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에 자신이 섬기는 여호와를 모셔둠으로써 예루살렘을 정치적 종교적 중심지로 굳건하게 세우려 하고 있습니다.

(2) 언약궤를 싣고 가는 수레(3)

다윗은 언덕 위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새로 만든 수례에 싣고 옮겼습니다. ‘산’이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언덕’정도의 나지막한 구릉입니다.

하나님의 궤를 옮기는 데 새 수레를 사용한 것은 어떤 부정한 것도 접하지 않은 정결한 상태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수레는 한 번도 사용하지 않고 오직 궤를 옮기기 위해 특별히 정결하게 만든 수레였습니다. 그리고 이 새 수레는 제사장 아비나답의 아들들인 웃사와 아효가 몰았습니다. 이것은 거룩한 언약궤를 정결한 방법으로 옮기려는 다윗의 배려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도 제사장 아비나답도 언약궤를 옮기는 정확한 방법을 몰랐습니다. 사무엘이 죽은 후 이스라엘에는 뛰어난 영적 지도자가 등장하지 않았고,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보다는 자신의 욕망을 따라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며,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제사장을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에 하나님을 바로 섬기지 않는 왕이 있는 동안 하나님의 말씀도 제대로 전수되거나 교육되지 않았으며, 제대로 지켜지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을 보면 지도자의 위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원래 언약궤는 출애굽기 37:5에 따르면 메도록 만들어졌으며 민수기 7:9에서는 고핫 자손에게 언약궤를 메는 임무가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방법을 무시하고 수레로 옮기려고 한 것입니다. 이들이 수레로 언약궤를 옮기려고 한 것은 블레셋 사람들의 방식을 따른 것입니다. 사무엘상 6장에서 블레셋 사람들이 궤를 돌려보낼 때 암소 두 마리가 이끄는 새 수레에 실어서 보낸 적이 있습니다. 이것을 기억하고 있던 사람들이 이 방식으로 언약궤를 운반하려고 한 것입니다. 제사법과 성막 관리의 전문가인 제사장도 언약궤를 옮기는 법을 제대로 모르고 있었을 만큼 다윗 시대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쳐지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3) 언약궤를 수행하는 행렬(4-5)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레에 언약궤를 싣고 나오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아비나답의 아들 아효는 그 궤 앞쪽에서 걸어갔고 다른 아들인 웃사도 수레 옆에서 걸어가고 있었고,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뒤를 따랐을 것입니다.

다윗과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당시에 사용되는 악기를 총동원하여 연주하며 흥겨워하였습니다. 언약궤 수레 뒤를 쫓아가며 연주하고 다윗과 백성들은 기뻐 춤추며 흥겨워하는 축제의 한마당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흥겨운 분위기를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은 다음 단락에 나오는 비극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언약궤를 만짐으로 웃사가 죽음(6-8)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며 죄인과 함께해 주셨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은혜를 구하며 살아갑니다. 그 은혜에 감사하며 자신의 뜻과 마음대로 살아가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은혜 속에 존재하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그 은혜를 알아 가야 합니다.

6그들이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7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 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8여호와께서 웃사를 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 곳을 베레스웃사라 부르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6-8)

다윗은 하나님의 법을 어긴 웃사를 치시는 여호와를 보면서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 오리요’하며 두려워했습니다. 이처럼 성도는 자신이 두려우신 하나님과 결코 함께할 수 없었던 불의하고 더러운 죄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죄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의 대상이었습니다.

(1) 언약궤를 붙잡은 웃사(6)

언약궤를 실은 수레와 무리들이 나곤의 타작마당까지에 왔을 때, 소들이 갑자기 움직여 언약궤를 떨어뜨릴 위기에 처했습니다. 소들이 왜 이렇게 움직였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지만, 아마 기럇여아림에서 예루살렘까지 가는 길이 주로 산지를 거치면서 평탄하지 못한 곳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수레 옆에서 수행하던 웃사는 언약궤가 크게 흔들리는 것을 보고 반사적으로 언약궤를 붙잡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웃사는 언약궤가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급한 마음에 언약궤에 손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웃사가 올바른 판단을 내렸다고 하더라도, 웃사가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침범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는 붙잡지 말아야 하는 언약궤를 붙잡았습니다.

(2) 하나님의 진노(7)

하나님께서 이런 웃사의 행동에 진노하셨습니다. 그곳에서 그를 죽이셨습니다. 웃사가 죽은 이유는 그의 부주의한 행동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웃사를 죽이신 것이 너무 가혹한 처벌이 아닌가라는 논란이 있습니다. 구약에서 제의적인 잘못으로 죽은 경우는 레위기 10장에서 나답과 아비후가 여호와께서 명하지 않은 불로 향을 피우다 그 자리에서 불에 타 죽은 일이 있었는데, 이 경우도 고의적이라기보다는 부주의한 행동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여호와의 성물을 만지거나 여호와께 제사를 지낼 때는 특별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이렇게 여호와의 거룩성을 침해한 제사장의 경우에는 다른 사람들보다 심한 처벌을 받았고, 제사장들은 늘 자신을 거룩하게 성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모든 제사와 행사를 수행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했습니다. 언약궤가 떨어지는 것을 그냥 두는 것이 옳은지 여부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언약궤가 떨어지게 만든 것도 하나님의 의지라고 해석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언약궤를 수레로 옮기는 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려주기 위해서 소들이 언약궤를 떨어뜨리는 행동을 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분명하게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이 다윗에게 주신 하나님의 경고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3) 다윗의 분노(8)

웃사의 죽음에 대한 다윗의 반응은 분노였습니다. 다윗은 여호와께서 웃사를 치신 것에 대해 분노하며, 그곳의 이름을 ‘베레스웃사’, 즉 ‘웃사에게 분을 발하신 곳’이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베레스’라는 단어는 5:20에서 물을 흩으신 것과 같이 블레셋을 흩으셨다고 하며, 그곳 지명을 바알브라심이라고 했는데, 바알브라심의 브라심과 동일한 단어 즉 블레셋에게 분을 발하신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웃사에게 분을 발하신 것입니다.

다윗이 여기서 분노한 것은 웃사가 여호와께 죽게 된 상황 때문입니다. 자신이 힘써 준비한 축제가 한순간에 공포의 자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언약궤를 오벧에돔의 집에 둠(9-11)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며 죄인과 함께해 주셨습니다. 성도는 날마다 그런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은혜를 구하며 살아갑니다. 그 은혜에 감사하며 자신의 뜻과 마음대로 살아가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9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 10다윗이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 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간지라 11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9-11)

여호와의 궤가 올라오다가 웃사의 사망 사고를 통해 다윗은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리고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간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와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약궤로 말미암아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신 것을 통해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1) 다윗의 두려움(9)

다윗은 하나님께서 웃사를 즉시 처벌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에 두려워합니다. 이렇게 무섭게 대하시는 하나님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는 늘 그의 편에서 지켜 주시고 보호해주시고 전쟁에서 앞서 싸워주시는 구원자이셨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좀 더 여호와를 가까이 모시기 위해서 연 행사에서 자신을 향해 분노하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다윗도 여호와에 대한 심한 두려움을 느낀 것입니다.

(2) 오벧에돔의 집으로 간 언약궤(10)

다윗은 조금 전과는 달리 여호와의 궤를 다윗 성 예루살렘으로 가져가기를 꺼려 하였습니다. 그리고 결국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두게 됩니다.

여기서 가드는 블레셋의 가드가 아닌 이스라엘의 한 지역 이름이며, 단 지파의 성읍 중 고핫 자손에게 할당된 가드림몬을 가리킬 것입니다(수 21:24). 역대상 15:17-19에서는 오벳에돔을 레위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오벧에돔은 가드 출신지이지만, 나곤의 타작마당 근처에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오벧에돔은 ‘에돔의 종’이라는 뜻인데, 여기서 에돔은 신명일 가능성이 큽니다. 역대기에 따르면 그는 고핫 족속의 레위인이며, 성전 문지기로 봉사했습니다(대상 15:18; 26:4-8).

(3) 오벧에돔의 집에 복을 주신 여호와(11)

여호와의 궤는 오벨에돔의 집에 석 달간 있었고, 여호와께서는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셨습니다. 이 복이 어떤 형태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복을 주셨다는 것은 오랜에돔이 여호와의 궤를 정중하게 잘 모셨고, 이제 여호와의 진노가 풀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를 통해 여호와의 궤가 두렵고 무서운 대상이 아니라 법도에 맞게 거룩하게 다루면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는 복의 근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런 언약궤의 모습은 여호와의 모습을 반영하는데, 우리가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면 여호와는 우리의 복의 근원이 되시지만, 여호와의 말씀을 거역하는 자들에게는 심판의 근원이 되시는 것이다. 이 사건을 통해서 다윗은 이러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좀 더 여호와를 잘 섬기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해나갈 때,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인간의 의지나 경험으로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법으로 순종해 나가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방법을 따라 하나님이 맡기신 일들을 잘 감당함으로 하나님께 복을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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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05-02)

 

하나님께서 친히 싸우시는 전쟁

사무엘하 5장 11-25절

 

“모사제인(謀事諸人) 성취제천(成就諸天)”라는 말은, 잠언에서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잠언 16:1)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계획은 사람이 하지만, 뜻을 이루는 분은 하늘(하나님)이다.’는 뜻입니다.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조치나 방법은 강구하는 것을 ‘작전’이라고 합니다. 작전을 잘 세우고 통해야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작전의 승리가 곧 전투의 승리입니다. 우리 인생의 최고의 작전을 세우는 분은 누구입니까?

 

다윗은 이스라엘 장로들의 요청으로 인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고 드디어 유다와 이스라엘은 통일왕국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직 쫓아내지 못한 여부스 족속이 살고 있던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그곳을 다윗 성이라 이름 붙이고 이스라엘의 수도로 삼게 됩니다. 다윗이 이렇게 승승장구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시기 때문으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상황을 통해서 다윗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을 왕도로 삼음(11-16)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도우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성취된 일들이 있다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허락해 주셨습니다. 좋은 가정, 좋은 직장, 동료 그리고 이웃까지도 허락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일이 잘되고 번창할 때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온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높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다윗처럼 계속 인도하고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11두로 왕 히람이 다윗에게 사절들과 백향목과 목수와 석수를 보내매 그들이 다윗을 위하여 집을 지으니 12다윗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세우사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과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그 나라를 높이신 것을 알았더라 13다윗이 헤브론에서 올라온 후에 예루살렘에서 처첩들을 더 두었으므로 아들과 딸들이 또 다윗에게서 나니 14예루살렘에서 그에게서 난 자들의 이름은 삼무아와 소밥과 나단과 솔로몬과 15입할과 엘리수아와 네벡과 야비아와 16엘리사마와 엘랴다와 엘리벨렛이었더라(11-15)

다윗이 유다와 이스라엘을 통일하고 명실상부한 통일왕국의 왕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안정과 번영을 가져오자, 두로 왕 히람이 다윗을 국제적인 파트너로 인정하고 왕궁을 짓는 데 필요한 재료와 기술자를 보내 다윗을 위한 왕궁을 지어 주었습니다.

(1) 왕궁 건축(11)

열왕기는 히람이 평생에 다윗을 사랑하였다고 기록합니다(왕상 5:1). 이 기록은 히람과 다윗의 관계가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되었음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그 관계는 다윗의 정복 전쟁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면서 그의 명성이 점차 높아지고 있을 때 시작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람이 다윗에게 백향목과 목수와 석수를 보낸 것은 예루살렘으로 왕궁을 옮긴 후 몇 년이 지났을 때로 여겨집니다. 이것은 히람이 빠른 속도로 힘을 키워가는 신생 국가의 왕 다윗과 앞으로 좋은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그에게 보내는 선물이었습니다. 히람이 보낸 사신들이 히람의 의도와 마음을 다윗에게 전달했을 것입니다. 한편 히람의 통치 연대는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요세푸스의 글에 따르면, 에베소의 메난더(Menander)는 히람이 34년 통치한 후 53세에 사망했다고 진술했습니다. 솔로몬의 즉위 24년, 즉 솔로몬의 성전과 왕궁 건축이 끝난 후에도 히람이 여전히 살아있었습니다(왕상 9:10-14). 그러므로 메난더의 진술이 옳다면, 기껏해야 히람은 다윗 통치의 마지막 10년 동안 다윗과 시대를 같이했을 것입니다. 결국, 다윗의 백향목 왕궁 건축은 다윗이 죽기 몇 년 전에 겨우 이루어졌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은 성경의 기록과 맞지 않습니다. 백향목 왕궁이 완공된 이후에 주어진 다윗 언약이 솔로몬의 출생을 미래에 있을 일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7:12; 대상 22:9). 이처럼 성경은 백향목 왕궁이 다윗 통치 전반기에 건축되었음을 말합니다. 카일-델리취 주석은 메난더의 진술을 신뢰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2) 여호와의 인도하심(12)

다윗은 오랜 역사를 지닌 부유한 왕국인 두로의 왕 히람이 자발적으로 도움을 베푼 것을 보고 여호와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여호와는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견고하게 세우셨고,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해 다윗의 왕국을 높이 드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의 왕국을 높이시는 목적은 다윗의 부귀영화가 아니라 여호와의 백성을 위함입니다.

(3) 예루살렘에서 태어난 아들들(13-16)

다윗이 예루살렘에서 첩과 아내들을 얻었는데, 그들에게서 자녀들이 태어났습니다. 본문은 열한 명의 아들을 기록합니다. 역대기에는 사무엘서의 목록 외에 노가와 엘벨렛(=엘리벨렛)의 이름을 추가하여 모두 열세 명의 아들을 기록합니다(대상 3:5-9; 14:3-7).

역대기에 따르면, 처음 네 명인 삼무아, 소밥, 나단, 솔로몬은 밧세바의 아들들입니다(대상 3:5). 출생 순서가 다소 불분명합니다. 사무엘서는 밧세바의 첫아들이 여호와의 치심을 받아 죽고 다음으로 태어난 아들이 솔로몬인 것처럼 기록하고 있습니다(12:24-25). 모세는 왕이 많은 아내를 두지 말아야 한다고 명령합니다(신 17:17). 하지만 고대 사회의 전제 군주는 여러 가지 이유로 많은 아내와 첩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예를 들어 왕은 지방 호족들과의 우호적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그들의 딸을 아내로 취했습니다. 그러므로 왕이 취한 아내들의 수가 국가의 힘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다윗의 아내와 자녀들에 관해 말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다윗을 이스라엘 왕으로 굳건히 세우셨고 그의 왕국을 부강하게 하셨다는 증거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신명기의 금지 조항은 아내들의 수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왕이 여인들로 인해 미혹받지 말아야 함을 강조합니다. 즉 신명기 17:17은 가운데 부분인 ‘그의 마음이 미혹되지 말아야 한다’를 강조하기 위해 미혹의 예로 아내와 금은의 축적을 금지합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은 단순히 아내가 많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그 아내들 때문에 미혹되었기 때문입니다(왕상11:1-8).

 

블레셋과의 첫 번째 전쟁(17-21)

하나님께서는 성령님을 보내셔서 구체적으로 인도하십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 인도하시기에 날마다 행할 바를 압니다. 승리가 보장되어 있으며 그 종착지까지 걸어갈 걸음을 인도받기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것이 모든 난관과 대적에도 교회가 부흥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17이스라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삼았다 함을 블레셋 사람들이 듣고 블레셋 사람들이 다윗을 찾으러 다 올라오매 다윗이 듣고 요새로 나가니라 18블레셋 사람들이 이미 이르러 르바임 골짜기에 가득한지라 19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내가 블레셋 사람에게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 손에 넘기시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말씀하시되 올라가라 내가 반드시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넘기리라 하신지라 20다윗이 바알브라심에 이르러 거기서 그들을 치고 다윗이 말하되 여호와께서 물을 흩음 같이 내 앞에서 내 대적을 흩으셨다 하므로 그 곳 이름을 바알브라심이라 부르니라 21거기서 블레셋 사람들이 그들의 우상을 버렸으므로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치우니라(17-21)

다윗을 중심으로 이스라엘이 통일 왕국을 수립했다는 소식은 주변 나라들에게 전해졌습니다. 두로 왕 히람은 축하사절단을 보내고 당대 최고의 건축자들과 건축 재료들을 보내어서 백향목 왕궁을 지어주었습니다. 사울 왕처럼 자기 교만이나 자랑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1) 블레셋의 첫 번째 공격(17-18)

다윗이 기름 부음을 받고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블레셋이 들었습니다. 블레셋 용병 출신이면서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아기스의 봉신으로 여겨지는 다윗이 헤브론에서 유다 지파의 왕이 되었을 때, 블레셋은 다윗이 이스보셋과 잘 싸우기를 바라면서 그를 방해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다윗이 사울의 왕국을 이어받고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블레셋은 어느새 다윗이 자신들의 주적이 되었음을 깨달았습니다. 르바임에서 블레셋과 싸운 두 번의 전쟁은 다윗이 예루살렘을 정복하기 전에 일어났을 것입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정복하기 위해 군사들을 이끌고 북쪽으로 가고 있을 때, 블레셋은 다윗을 잡으려고 예루살렘 근처 르바임 골짜기에 모였습니다. 르바임 골짜기는 예루살렘 남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힌놈의 아들 골짜기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블레셋이 사울 왕과 전쟁하듯 병력을 모아 다윗을 잡으려고 왔습니다. 블레셋 군대는 르바임 골짜기에서 가까운 베들레헴에 본거지를 두고, 르바임 골짜기에 군대를 흩어 놓았습니다. 다윗도 이에 대응하기 위해 요새로 내려갔습니다. 이 요새는 아들람 굴에 있는 요새일 것입니다(23:13-14). 다윗의 삼십용사 중 세 명이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에서 물을 가져온 일이 이때 있었을 것입니다(23:13-17).

(2) 하나님께 기도하는 다윗(19)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하며 자신이 블레셋과 싸워야 하는지 그리고 승리할 수 있는지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싸워서 승리하게 하겠다고 약속해주셨습니다. 블레셋을 다윗의 손에 넘겨주심은 완전한 승리를 보여줍니다. 다윗이 단순한 질문 여러 개를 던지는 것은 아마도 하나님의 계시가 찬성과 반대 형태로만 제시하는 우림과 둠밈을 통해 주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3) 다윗의 승리(20-21)

다윗이 르바임 골짜기에서 블레셋을 쳐서 무찌르고 그곳 이름을 바알브라심이라 했습니다. 이 이름의 뜻은 ‘파쇄의 주’일 것입니다. 물을 파쇄하듯 대적을 파쇄함을 뜻하는 이름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도주하면서 자기들의 우상을 버렸으므로 다윗과 그 부하들이 우상을 치웠습니다.

 

블레셋과의 두 번째 전쟁(22-25)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승리를 주시는 분입니다. 원수들을 백성들보다 먼저 휩쓸어버리시는 격파의 주님이십니다. 삶에 어려움들이 홍수처럼 밀려온다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대로 나가시길 바랍니다. 우리와 함께하셔서 그 모든 어려움들을 다 흩어버리시기 때문입니다. 요즘 겪고 있는 어려운 문제들과의 싸움이 ‘바알브라심’의 고백으로 바뀔 수 있기를 바랍니다.

22블레셋 사람들이 다시 올라와서 르바임 골짜기에 가득한지라 23다윗이 여호와께 여쭈니 이르시되 올라가지 말고 그들 뒤로 돌아서 뽕나무 수풀 맞은편에서 그들을 기습하되 24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들리거든 곧 공격하라 그 때에 여호와가 너보다 앞서 나아가서 블레셋 군대를 치리라 하신지라 25이에 다윗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행하여 블레셋 사람을 쳐서 게바에서 게셀까지 이르니라(22-25)

블레셋 사람들은 1차 실패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다윗을 공격하려고 올라옵니다. 블레셋이 르바임 골짜기를 가득 메웠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다윗은 또다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1) 블레셋의 두 번째 공격(22)

한 번 패배한 블레셋이 물러서지 않습니다. 다시 군대를 전열을 가다듬고 다윗을 치려고 르바임 골짜기로 올라왔습니다.

(2) 하나님께 기도하는 다윗(23-24)

블레셋 군대가 다시 쳐들어왔을 때, 다윗은 이전에 이겼던 전술로 응전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이전처럼 정면에서 맞붙지 말고 블레셋의 후미로 돌아가서 기습하라고 하시며 전혀 다른 전술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다윗 앞서 나가서 적군을 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24). 이는 전쟁을 다윗에게 맡기지 않고 승리를 결정지으신다는 뜻입니다.

(3) 다윗의 승리(25)

다윗이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대로 행하였습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쳐서 게바에서 게셀까지 이르렀습니다. 게바는 예루살렘 북동쪽이므로, 여기서 게바는 게셀로 가는 길목에 있는 기브온으로 읽어야 할 것입니다(대상 14:16). 게셀은 기브온에서 서쪽으로 30킬로미터 떨어진 블레셋 영토의 성읍입니다.

 

나가는 말

다윗처럼 매일 매순간 주님께 묻고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나가길 원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베푸시는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의 작전 시지를 잘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뜻에 따라 움직여 날마다 승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성도들의 승리의 비결은 뛰어난 처세술이나 활달한 인간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순종함에 있습니다. 위급하고 절박한 상황이라도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그러면 앞길에 승리를 보장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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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05-01)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다윗

사무엘하 5장 1-10절

믿음은 기다리는 힘입니다. 우리는 왜 기다린 것이 힘들겠습니까? 기다리는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기다린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만큼 적극적인 활동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다림은 하나님께서 하나님 되게 아름다운 신앙입니다. 본문은 그 아름다운 신앙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울의 집 이스보셋은 아브넬의 죽음으로 권력 기반이자 후원자를 잃게 됩니다. 그러자 그의 정예부대 지휘관이었던 베냐민 사람 바아나와 레갑이 이스보셋을 죽이고 권력과 재물을 얻으려고 그의 머리를 들고 다윗에게 찾아갑니다. 하지만 다윗은 이스보셋을 죽인 그들을 살인자로 규정하여 죽이고 사지를 잘라 헤브론 못에 걸어두는 극형에 처합니다. 왕을 잃은 이스라엘은 다윗에게 나와 왕이 되어달라고 요청합니다.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1-5)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지키시는 분입니다. 약속이 성취되는 과정에는 너무도 연단하신 시간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계획된 시간이 있습니다. 모든 성도에게도 하나님의 각자에게 계획하신 시간이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며 살아야 합니다. 자칫 서둘러서 하나님의 시간을 무시하고 자신의 생각대로 하는 것은 실패의 지름길입니다.

1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는 왕의 한 골육이니이다 2전에 곧 사울이 우리의 왕이 되었을 때에도 이스라엘을 거느려 출입하게 하신 분은 왕이시었고 여호와께서도 왕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며 네가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3이에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헤브론에 이르러 왕에게 나아오매 다윗 왕이 헤브론에서 여호와 앞에 그들과 언약을 맺으매 그들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니라 4다윗이 나이가 삼십 세에 왕위에 올라 사십 년 동안 다스렸으되 5헤브론에서 칠 년 육 개월 동안 유다를 다스렸고 예루살렘에서 삼십삼 년 동안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더라(1-5)

이제까지 사울의 집을 지지하고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섬기던 사람들이 헤브론에 있는 다윗에게로 돌아옵니다. 그들은 다윗에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자신들의 왕이 되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헤브론에서 다윗을 왕으로 추대했고,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그들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드디어 다윗이 온 유다와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입니다.

(1)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1-3)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죽은 후 얼마의 시간이 지난 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을 왕으로 섬기기로 결정하고,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있는 다윗에게로 옵니다. 이것은 사울의 집을 섬기겠다거나 따로 독립하여 다른 왕국을 만들겠다는 의견이 이스라엘에서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다윗이 왕이 되어야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첫째, 이스라엘과 유다가 같은 핏줄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집과 사울의 집으로 갈라지기 전에 이스라엘은 한 민족이었고 사울 시대에는 한 나라였습니다. 같은 피가 흐르는 한 민족이기에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둘째. 사울이 왕이던 시절에도 다윗은 이스라엘 지도자로서 군대를 이끌고 전쟁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왕의 주요 임무는 적의 침략을 막아내고 구원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사울 왕 때부터 블레셋이나 다른 적들과 전쟁을 하며 구원자 역할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셋째, 여호와께서 다윗을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목양하는 목자와 지도자로 지명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생각하는 왕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엿볼 수 있습니다. 둘째 이유가 세속적이고 일반적인 왕의 임무라면, 셋째 이유는 하나님과 관계된 이스라엘의 독특한 왕권개념입니다.

왕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여 세우십니다. 이스보셋처럼 인간이 선택하거나 세습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만이 왕이 될 수 있습니다. 왕의 임무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잘 먹이고 입히고 보호하는 목자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방 왕들처럼 백성들을 착취하고 억압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왕은 하나님의 백성을 잘 돌볼 의무를 지는 직책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모든 백성이 다윗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왕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다윗에게 왕이 되어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3절에서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들이 각 지파를 대표하여 헤브론에 모였습니다. 헤브론에서 여호와 앞에서 장로들과 함께 언약을 맺었고, 그들은 다윗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기 위해 기름을 붓습니다. 다윗은 총 세 번의 기름 부음을 받는데, 사무엘에 의해서 왕으로 선택받았을 때가 처음이며, 이 일은 비밀에 부쳐졌습니다(삼상 16:13). 두 번째는 유다 사람들이 다윗을 왕으로 세우며 기름을 부은 일이고(삼하 2:4), 이제 이스라엘 장로들이 이스라엘 왕으로 세우면서 기름을 붓고 있습니다(삼하 5:3). 다윗은 드디어 유다와 이스라엘 모두의 왕으로 세움을 받았고, 이스라엘은 다시 통일왕국이 되었습니다.

(2) 다윗 통치에 대한 요약(4-5)

이 부분은 다윗 통치 기간에 대한 전체 설명입니다. 다윗은 30세에 왕위에 올라 40년 동안 왕으로서 통치하였습니다.

이스라엘에서 30세는 남성이 성인으로서 인정받고 공식적인 사역을 시작할 수 있는 나이이며, 제사장직을 수행할 수 있는 나이입니다(민 4:3). 40년은 구약에서 한 세대를 나타내는 숫자이며, 성공적인 사사가 다스릴 때는 40년 혹은 80년이 평안하였습니다.

다윗은 소년이었을 때 왕으로 선택을 받았지만, 10여 년간 단련 받은 후 성인이 되어 공식적으로 왕위에 올랐고, 한 세대 동안 이스라엘을 평안하게 다스린 성공적인 왕이었던 것입니다.

5절은 다윗이 왕권을 잡은 과정을 보여줍니다. 헤브론에서 7년 6개월 동안 유다를 다스렸고, 예루살렘에서 33년 동안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습니다. 모두 40년 7개월로 다윗이 40년을 다스렸다는 것은 대략적인 숫자인 것입니다.

다윗이 유다 왕으로 등극한 후에 얼마 지나지 않아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도 이스라엘의 왕으로 2년을 다스렸습니다(삼하 2:10). 그러므로 이스보셋이 죽은 후 이스라엘 장로들이 다윗에게 와서 왕이 되어달라고 말할 때까지 대략 5년 정도가 흘렀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이스라엘을 통합한 것이 본문이 말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한 과정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본문은 결과만 말하고 있는데, 이는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을 정복한 다윗(6-10)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는 작은 틈새를 열어 승리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어린 목동에서 상상할 수 없는 왕권을 주셨고, 아무도 넘볼 수 없는 시온성에서 날로 강건해져 가는 나라를 출범하게 하십니다.

6 왕과 그의 부하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 땅 주민 여부스 사람을 치려 하매 그 사람들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결코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맹인과 다리 저는 자라도 너를 물리치리라 하니 그들 생각에는 다윗이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함이나 7다윗이 시온 산성을 빼앗았으니 이는 다윗 성이더라 8그 날에 다윗이 이르기를 누구든지 여부스 사람을 치거든 물 긷는 데로 올라가서 다윗의 마음에 미워하는 다리 저는 사람과 맹인을 치라 하였으므로 속담이 되어 이르기를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은 집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더라 9다윗이 그 산성에 살면서 다윗 성이라 이름하고 다윗이 밀로에서부터 안으로 성을 둘러 쌓으니라 10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6-10)

왕이 된 다윗은 가장 먼저 예루살렘을 정복해서 통일 이스라엘의 새로운 수도로 삼았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은 난공불락의 성이었습니다. 여부스 사람들은 다윗이 절대 자신들의 예루살렘 성을 빼앗지 못할 것이라고 큰소리쳤지만, 다윗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힘입어 이 성을 손쉽게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성의 이름을 ‘다윗성’이라 명명했습니다.

(1) 여부스 사람들의 조롱(6)

이 단락은 다윗의 예루살렘 정복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군사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에 가서 그 땅 주민인 가나안 민족 여부스 사람들을 몰아내고 예루살렘을 차지하려고 하였습니다. 사사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예루살렘과 전쟁하여 이긴 적은 있지만, 여부스 사람들을 몰아내고 예루살렘을 차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은 고대로부터 잘 발달된 도시이며 산꼭대기에 있어 수비하기에 좋은 성읍이었습니다. 다윗이 점령하려고 공격하자 여부스 사람들은 다윗의 군대를 우습게 여기고 그 군대가 절대 성읍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하였습니다. 심지어 다윗의 군대는 맹인과 다리 저는 자라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며 비아냥거렸습니다. 성이 워낙 튼튼하고 방비가 잘 되어 있어서 가장 약한 자들이라도 지킬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화자는 이들이 다윗을 비웃은 것은 실제로 다윗이 자신들의 성을 점령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해줍니다. 예루살렘은 여부스 사람들이 자부심을 가질 만큼 난공불락의 지형이었습니다.

(2) 예루살렘 점령(7-8)

7절은 다윗이 시온 산성을 빼앗았다고 한 줄로 말합니다. 이것은 여부스 사람들이 장담한 것과 달리 쉽게 점령하였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예루살렘을 시온 산성이라고 부르는데, 학자들에 따르면 시온은 예루살렘 남쪽 언덕의 지명이고 시온 산성은 그 언덕을 지키는 요새였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그러므로 시온 산성은 예루살렘에 속한 산성이며 후에 예루살렘과 시온은 같은 지역의 다른 이름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여기 시온 산성을 점령했다는 것은 예루살렘을 점령하였다는 것이고, 다윗은 그곳에 자기 이름을 붙여 ‘다윗성’이라고 불렀습니다. 다윗이 쉽게 예루살렘을 점령하였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셨고 그를 도우셨다는 의미입니다. 다윗은 여부스를 점령한 뒤 여부스 사람들이 한 말을 받아서 여부스 사람들은 전부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들이라고 비꼬며 이들을 쳐서 죽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다윗이 미워하는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들은 여부스 사람을 의미하는데, 여부스 사람들이 다리 저는 사람과 맹인으로도 다윗을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말한 것에 대해 자신과 싸우는 여부스인을 다리 저는 사람과 맹인에 비유한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해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은 집에 들어오지 못하리라’라는 속담이 생겼는데, 여기서 집은 다윗의 성을 의미하며 이 속담이 문자 그대로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다윗의 궁전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다만 여부스 사람들에 대한 조롱의 의미를 지닌 속담입니다. 후에 다리를 저는 므비보셋은 다윗 성에서 다윗과 같이 지냅니다.

(3) 예루살렘을 수도로 삼음(9)

산성을 점령한 다윗은 그곳에 거주합니다.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이주하고 그곳에 성벽을 든든하게 지어서 이스라엘의 수도를 정비하며 이스라엘 왕국의 기틀을 다집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으로 다윗은 점점 강해졌다고 마지막에 언급함으로써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예루살렘을 정복한 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함께하셨기 때문임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4) 여호와의 도우심(10)

다윗이 왕이 되는 과정에서 하나님은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손길로 다윗을 당신의 계획대로 이끄셨고 그와 함께하시며 그가 형통하도록 복을 주고 계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해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위기 상황이나 특별한 상황에서는 특별히 선지자를 통해서나 직접적인 방법으로 자신을 드러내시지만 일상의 상황에서는 보이지 않는 손길로 인도하시고 형통케 하시며 보호하시는 분입니다. 이런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고 감사하는 것이 신앙인이 가져야 할 삶의 자세입니다.

 

나가는 말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꿈이 있습니다. 그 꿈을 목표로 삼으시고, 인내하면서 필요한 훈련을 잘 받으시길 바랍니다. 다윗은 서두르거나 자신의 의지를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비록 더디고 힘들어도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말씀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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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04-01)

 

이스보셋의 최후

사무엘하 4장 1-12절

 

세상에는 과정이나 방법이야 어떻게 되든지 결과만 좋으면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불순하고 잘못된 방법을 사용해 좋은 결과를 얻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지 최종적인 결과는 아닙니다.

 

아브넬은 이스라엘을 다윗의 손에 넘긴다는 협약을 맺고 돌아가던 길에 요압에게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이 일로 다윗은 정치적인 어려움에 빠지게 되었고,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려고 최선을 다해 아브넬의 장례를 치러줍니다. 그 결과 다윗은 아브넬을 죽였다는 의심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한편 아브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이스보셋과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두 심하게 낙심하였는데, 아브넬이 이스라엘 권력의 핵심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보셋의 근황(1-3)

요즘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풀의 꽃처럼 사라져버릴 인생을 의지하다 어려운 일을 만나면, 이스보셋처럼 맥이 풀리고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상황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도울 힘이 없는 인생을 의지하고 살았던 사람들의 결과입니다. 시편에서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4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5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편 146:3-5)라고 하였습니다.

1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은 아브넬이 헤브론에서 죽었다 함을 듣고 손의 맥이 풀렸고 온 이스라엘이 놀라니라 2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에게 군지휘관 두 사람이 있으니 한 사람의 이름은 바아나요 한 사람의 이름은 레갑이라 베냐민 족속 브에롯 사람 림몬의 아들들이더라 브에롯도 베냐민 지파에 속하였으니 3일찍이 브에롯 사람들이 깃다임으로 도망하여 오늘까지 거기에 우거함이더라(1-3)

사울의 집에 중심이던 아브넬이 헤브론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 왕은 맥이 풀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1). 아브넬은 사울 집의 힘의 근원이었습니다. 그가 이스보셋을 왕으로 올리고 지금까지 이스라엘을 이끌고 지탱해 왔습니다. 그의 죽음은 이스보셋에게 더욱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이스보셋의 왕위는 국민들의 지지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아브넬의 힘에 의해 생겨나고 유지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2-3절은 이야기의 흐름을 끊고 새로운 인물들을 소개합니다.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군지휘관 바아나와 레갑입니다. 이들이 지휘하는 부대는 주로 습격과 약탈을 하는 왕의 정예부대이며, 이들은 이스보셋의 가장 중요한 지휘관들입니다. 또한 베냐민 지파 브에봇 사람 림몬의 아들들로 사용의 집과 같은 지파 사람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3절에서 브에롯 사람들의 혈통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설명이 나오는데, 브에롯은 원래 여호수아를 속이고 살아남은 기브온 사람들의 성읍이며, 베냐민 지파에 속하지만 가나안 사람의 성읍이었습니다.

그런데 2절 하반절에서 현재 브에롯은 베냐민 지파에 속하며 브에롯의 거주민들은 짓다임으로 도망갔다고 설명합니다. 사울 통치하에서 이곳 거주민을 쫓아내고 베냐민 사람들이 그곳을 점령하여 현재까지 거주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아마도 이 사건은 후에 사무엘하 21:1-14에서 기브온 사람들이 다윗에게 사울의 죄를 처벌해달라고 요구하는 이야기의 배경일 것입니다. 여기서 브에롯에 대한 설명을 하는 것은 바아나와 레갑이 브에룻 사람이지만 혈통적으로 베냐민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밝힘으로써 이스보셋이 같은 지파 사람의 손에 죽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요나단의 아들의 근황(4)

암투와 혼탁한 사건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보호하고 그의 집을 지키시고 세워나가십니다. 흑백을 가릴 수 없는 상황에서도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것을 따라 행동합니다. 자기 속도를 잃지 않으려면 달콤한 유혹을 이겨내고 하나님의 보폭을 따라 걸어야 합니다.

4사울의 아들 요나단에게 다리 저는 아들 하나가 있었으니 이름은 므비보셋이라 전에 사울과 요나단이 죽은 소식이 이스르엘에서 올 때에 그의 나이가 다섯 살이었는데 그 유모가 안고 도망할 때 급히 도망하다가 아이가 떨어져 절게 되었더라(4)

여기서 사건과 전혀 관계가 없는 한 인물이 소개됩니다. 이 인물을 소개하는 것은 이스보셋의 죽음 사건을 기록하기 전에 사울 가문에 아직도 생존자가 있으며, 바로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 임을 알리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이스보셋이 죽으면 사울 집의 계승자는 므비보셋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요나단에게 그의 집과 자손들을 살려주기로 언약을 맺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과 유다가 합병되면 므비보셋의 신변은 어떻게 될지 아직 알 수가 없습니다. 므비보셋은 요나단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죽었을 때 다섯 살이었고, 그때 유모가 데리고 도망하다가 떨어뜨려 다리를 절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아직 므비보셋이 10세 전후의 어린아이이고 다리가 불편하여 군인의 역할을 하기에는 약점이 있다는 뜻입니다. 결국 이스보셋 이후의 사울 집 왕위 계승자인 므비보셋은 사울 집을 계승하기에 적합한 인물이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스보셋 이후에 다윗을 왕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임을 말해줍니다.

 

신복에게 죽임을 당한 이스보셋(5-7)

모든 사람이 사회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상대방의 신뢰에 반하지 않도록 성의있게 행동할 것을 요구하는 법원칙이다. 상대방의 신뢰를 헛되지 않도록 성의있게 행동하여야 한다는 원칙을 말합니다. 신뢰를 깨는 일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기회주의자들에게 신의나 의리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직 모략과 술수가 난무할 뿐입니다. 나라가 부흥할 때는 좋다고 따라다니다가 나라가 망하게 되니깐, 왕의 머리를 출세의 도구로 삼는 자들을 볼 수 있습니다.

5브에롯 사람 림몬의 아들 레갑과 바아나가 길을 떠나 볕이 쬘 때 즈음에 이스보셋의 집에 이르니 마침 그가 침상에서 낮잠을 자는지라 6레갑과 그의 형제 바아나가 밀을 가지러 온 체하고 집 가운데로 들어가서 그의 배를 찌르고 도망하였더라 7그들이 집에 들어가니 이스보셋이 침실에서 침상 위에 누워 있는지라 그를 쳐죽이고 목을 베어 그의 머리를 가지고 밤새도록 아라바 길로 가(5-7)

므비보셋에 대한 설명 다음에 다시 이야기는 이스보셋과 부하들에게로 돌아갑니다. 이 단락은 이스보셋이 죽임을 당하는 장면으로 이스보셋의 신복들이 브롯에서 출발하여 이스보셋의 집에 가장 뜨거운 한낮에 도착하였고, 때마침 이스보셋이 낮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본문에서 바아나와 레갑이 사전에 계획하고 와서 살인한 것인지, 자고 있는 이스보셋을 발견하고 우발적으로 죽인 것인지는 분명히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전에 계획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좋습니다. 1절과 연결하여 볼 때 이들은 이스보셋의 후원자이자 힘의 근원이었던 아브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이스보셋의 왕위가 얼마 가지 못하고 다윗에게 넘어갈 것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낮잠을 자는 한낮에 이스보셋의 집에 도착하였고, 예상대로 이스보셋은 낮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이스보셋을 지키고 있는 호위병들을 속이고 집 안으로 들어가려고 밀을 가지러 온 듯 꾸몄습니다. 이스보셋이 자고 있는 사이에 집에 들어가려고 거짓말을 한 것은 이들이 사전에 이스보셋을 죽이기로 계획하고 왔다는 증거가 됩니다. 이들이 어떠한 해도 입힐 생각 없이 단순히 이스보셋을 만나러 온 것이라면 그가 깨어나길 기다리는 것이 더 자연스럽기 때문입니다.

6절과 7절은 같은 사건을 조금 다르게 설명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해석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6절은 이들이 이스보셋을 죽이고 도망가는 것을 간단하게 기술하고 있고 7절은 이것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6절은 이들이 집 안으로 들어가 배를 찔러 죽이고 도망갔다고 요약적으로 말하고 있는 반면에, 7절은 이들이 들어가서 본 상황, 즉 이스보셋이 침상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 상황을 설명합니다. 5절에서 이스보셋이 낮잠을 자는 장면은 화자가 설명하였습니다. 반면에 7절은 바아나와 레갑의 시선으로 본 모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7절에서 ‘쳐죽이다’는 6절의 배를 찔러 죽이는 행동을 설명한 것이고, 7절에서 이스보셋의 머리를 베었다는 것과 아라바 길로 갔다는 설명이 덧붙여지는데, 이것은 6절의 ‘도망갔다’는 말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한 것입니다. 이스보셋의 머리를 벤 것은 자신들이 이스보셋을 죽였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것으로 이것은 다윗에게 가기 위한 준비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보셋의 머리를 벤 것도 이들이 사전에 계획한 살인임을 증명해줍니다. 이들은 밤새 아라바 길을 걸어서 헤브론에 도착합니다. 마하나임에서 헤브론까지는 대략 100킬로미터 정도입니다. 그런데 다음날 헤브론에 도착한 것을 보면 이들이 매우 서둘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보셋의 왕국 안에서 살인자를 추적하는 손길을 피하려고 최대한 빨리 다윗의 집으로 들어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스보셋을 죽인 자들을 처형하는 다윗(8-12)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해쳐서는 안 됩니다. 레갑과 바아나는 이스보셋을 죽여 자신의 이익을 얻으려고 했지만, 그들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자신만 좋다면 그만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8헤브론에 이르러 다윗 왕에게 이스보셋의 머리를 드리며 아뢰되 왕의 생명을 해하려 하던 원수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머리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오늘 우리 주 되신 왕의 원수를 사울과 그의 자손에게 갚으셨나이다 하니 9다윗이 브에롯 사람 림몬의 아들 레갑과 그의 형제 바아나에게 대답하여 그들에게 이르되 내 생명을 여러 환난 가운데서 건지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10전에 사람이 내게 알리기를 보라 사울이 죽었다 하며 그가 좋은 소식을 전하는 줄로 생각하였어도 내가 그를 잡아 시글락에서 죽여서 그것을 그 소식을 전한 갚음으로 삼았거든 11하물며 악인이 의인을 그의 집 침상 위에서 죽인 것이겠느냐 그런즉 내가 악인의 피흘린 죄를 너희에게 갚아서 너희를 이 땅에서 없이하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12청년들에게 명령하매 곧 그들을 죽이고 수족을 베어 헤브론 못 가에 매달고 이스보셋의 머리를 가져다가 헤브론에서 아브넬의 무덤에 매장하였더라(8-12)

헤브론에 도착한 이들은 바로 다윗 왕에게 이스보셋의 머리를 보여주며 왕의 생명을 찾으려 했던 원수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머리가 여기 있다고 말합니다. 이들은 다윗이 사울을 원수로 생각하고 있으며, 그렇기에 그의 아들 이스보셋도 원수로 여길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또한 자신들의 행동은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행한 사울의 악행을 사울과 그의 자손들에게 되갚으신 정당한 행동이라고 말합니다. 이들은 이스보셋을 죽이면 다윗이 자신의 원수를 죽였다고 좋아할 줄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판이었습니다. 다윗은 이들에게 사울의 죽음을 좋은 소식인 줄 알고 전한 자를 죽였다고 말합니다. 즉 소식을 알린 사람도 죽인 마당에 침상에서 자고 있는 사람을 잔인하게 죽인 살인자들을 그냥 두겠냐는 것입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면서 이런 살인자는 반드시 죽이겠다고 한 후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재물과 권력을 가져다줄 줄 알았던 이스보셋의 머리는 그들의 살인을 증명하는 강력한 증거물이 되어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입니다. 이들의 수족을 자른 후 팔다리 없는 시체를 헤브론 못가에 매달았습니다. 이것은 매우 이례적인 처형입니다. 시체를 욕보이는 일은 이스라엘에서 잘 행하지 않는데, 다윗은 사울과 사울의 아들들이 모욕당했던 방법 그대로 이들에게 행함으로 이들이 사울 집에 행한 죄를 집행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이스보셋을 죽인 자들에 대해 이렇게 신속하게 처형하고 그들의 시체를 모욕한 것은 아브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이스보셋을 죽이라고 시켰다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이며, 사울 집에 속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한을 갚아주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인간들의 욕심과 원한과 살인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다윗이 전체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르는 데 가장 큰 걸림돌들이 제거되었고, 결국 다윗은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한 방법으로도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지만 악하고 욕심에 가득 찬 인간들이 판치는 세상에서는 그들의 악함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일을 이루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은 선으로 갚으시고 악은 악으로 갚으시면서 계획을 하나씩 이루어가십니다.

 

나가는 말

성도들은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좇으면서 올바른 방법과 과정을 지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로서, 하나님 나라를 잘 이해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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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03-03)

아브넬의 죽음을 애도하는 다윗

사무엘하 3장 27-39절

 

오늘날은 계산이 빠른 시대입니다. 느린 것도 못 참고 손해 보는 것은 더 못 참습니다. 하지만 신박한 속도와 정확한 계산만큼 시대는 서늘하고 관계는 삭막해져 가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계산이 빠른 사람과 계산하지 않은 사람이 등장합니다. 세상의 법칙과는 다르게, 전자는 결국 모든 것을 다 잃고 후자는 모든 것을 다 얻습니다.

 

미갈을 다윗에게 돌려보냄으로써 다윗과 아브넬의 밀약은 성사되었습니다. 아브넬은 약속대로 사울 집에 속했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베냐민 사람들을 설득하여 다윗을 왕으로 섬기기로 약속하게 됩니다. 모든 합의가 이루어지자 아브넬은 다윗과 최종 협상을 하기 위해 헤브론으로 왔고, 평화적으로 협상을 완결하고 돌아갑니다. 하지만 이 소식을 들은 요압은 다윗의 결정에 불만을 품고 아브넬을 다시 헤브론으로 불러들여 암살합니다.

 

아브넬을 죽여 동생의 원수를 갚는 요압(27-30)

믿음으로서의 기다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조건적인 소극성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때와 방법을 추구하는 능동적인 순종입니다. 믿음은 인간의 생각이 앞서지 않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림으로 하나님의 뜻이 완성됩니다. 자신들의 이익에만 급급한 인물들의 모략과 폭력 속에서 다윗은 묵묵히 환난에서 생명을 건져주신 여호와만 의지하였습니다.

27아브넬이 헤브론으로 돌아오매 요압이 더불어 조용히 말하려는 듯이 그를 데리고 성문 안으로 들어가 거기서 배를 찔러 죽이니 이는 자기의 동생 아사헬의 피로 말미암음이더라 28그 후에 다윗이 듣고 이르되 넬의 아들 아브넬의 피에 대하여 나와 내 나라는 여호와 앞에 영원히 무죄하니 29그 죄가 요압의 머리와 그의 아버지의 온 집으로 돌아갈지어다 또 요압의 집에서 백탁병자나 나병 환자나 지팡이를 의지하는 자나 칼에 죽는 자나 양식이 떨어진 자가 끊어지지 아니할지로다 하니라 30요압과 그의 동생 아비새가 아브넬을 죽인 것은 그가 기브온 전쟁에서 자기 동생 아사헬을 죽인 까닭이었더라(27-30)

본문은 요압이 아브넬을 죽인 내용입니다. 아브넬이 살해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다윗은 목 놓아 울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자신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선언합니다. 요압의 사사로운 복수심으로 상대편의 지도자인 아브넬을 죽임으로써 이스라엘에 더 큰 분열을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통일’이라는 역사적인 과업에 찬물을 끼얹은 것입니다.

(1) 요압의 복수(27)

요압이 전쟁에 승리하고 헤브론에 도착했을 때, 아브넬이 다윗을 만나서 언약을 맺은 후에, 그가 평안히 돌아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요압은 화가 났을 것입니다. 그는 사람을 보내어 아브넬을 다시 헤르본으로 돌아오게 합니다. 다윗이 할 말이 있다는 말로 속여서 데려왔을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 헤브론에서 요압의 권력이 상당했을 것입니다.

아브넬을 만난 요압은 비밀스럽게 말하기 위해 아브넬을 데리고 성문 안 외진 곳으로 들어갑니다. 아브넬은 요압을 다윗의 심복으로 생각하였기에 다윗의 말을 전달하기 위해 조용하고 외진 곳으로 데리고 간다고 생각하고 방심하고 있었습니다. 아브넬은 아사헬을 죽인 것이 전쟁 중에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요압이 자신에게 피의 복수를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요압이 자신의 왕인 다윗의 명령을 어길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않았기 때문에 의심하지 않고 따라갔을 것입니다. 그만큼 요압의 행동은 왕의 충성스러운 신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넬과의 부하들에게 이끌려 헤브론으로 돌아왔을 때, 요압은 아브넬을 성문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배를 찔러 죽였습니다. 이는 요압이 자기 동생 아사헬에 대한 복수를 실행한 것입니다(2:18-23). 하지만 아브넬은 전쟁터에서 아사헬을 죽였으므로 요압의 복수는 정당성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한편으로 요압은 아브넬이 다윗의 신하가 되면 자기보다 높은 지위를 차지하게 될 것을 두려워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2) 다윗의 저주(28-29)

다윗은 아브넬이 죽었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신속히 자신의 무죄함을 선포하면서 요압에게 살인의 책임을 돌렸습니다(28). 또 다윗은 아브넬을 살해한 일이 요압 개인 차원에서 벌어진 일이므로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왕국도 무죄하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요압이 다윗의 왕국에 속한 자가 아님을 암시합니다. 왜냐하면 다윗의 왕국이란 다윗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들로 구성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앞에 영원히 무죄하니”는 여호와께서 다윗의 증인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무죄를 강조하기 위해 여호와께서 영원히 증인이 되신다고 말했습니다.

아브넬이 다윗을 만난 직후에 헤브론에서 죽었다는 사실은 아브넬을 보낸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윗의 적으로 돌아서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과 유다의 통합을 간절히 바랐고, 미갈을 다시 데려오게 한 것도 통일 왕국에 대한 다윗의 열망을 보여준 것입니다.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소식을 전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일 것입니다. 아브넬과의 협상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면서 다윗의 열망이 거의 성취되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요압이 그 모든 노력을 허사로 만들었습니다.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켜 이스라엘과 유다의 갈등이 깊어졌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요압과 그의 가문을 “그 죄가 요압의 머리와 그의 아버지의 온 집으로 돌아갈지어다 또 요압의 집에서 백탁병자나 나병 환자나 지팡이를 의지하는 자나 칼에 죽는 자나 양식이 떨어진 자가 끊어지지 아니할지로다”라고 저주합니다. ‘백탁병(白濁病)’은 성병의 일종입니다. “지팡이를 의지하는 자”는 문자적으로 ‘물렛가락을 다루는 남자’를 뜻합니다. 이는 장애나 상처 혹은 질병이 있어서 바깥일을 하지 못하고, 집 안에서 여인들처럼 활동하는 남자를 가리킵니다. 다윗은 요압에 대한 자신의 증오에도 불구하고 이후 계속 요압을 이인자로 삼는데, 이는 어떤 이유에서든 스루야의 아들들의 권력이 대단했음을 보여줍니다.

(3) 요압의 형제들(30)

아브넬은 기브온 연못가 전투에서 자신을 뒤쫓아 오는 아사헬을 창으로 찔러 죽였었습니다. 그래서 요압과 아비새가 아사헬을 복수하기 위해 아브넬을 죽였습니다. 27절에서는 요압이 단독으로 아브넬을 죽인 것으로 기록되었으나, 30절에서는 아비새와 요압이 함께 아브넬을 죽인 것으로 기록됩니다. 요압이 아브넬을 죽일 때 아비새가 동조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도 요압과 아비새를 함께 비난합니다(3:39).

 

아브넬을 장사 지냄(31-35)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적개심과 분노가 가득한 마음에서 독소를 제거해야 합니다. 복수하려는 마음이 싹틀 것입니다. 복수하려 할 때, 복수에는 성공할 수 있겠지만,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길에 서 있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사사로운 감정에만 빠져 지내지 말아야 합니다.

31다윗이 요압과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띠고 아브넬 앞에서 애도하라 하니라 다윗 왕이 상여를 따라가 32아브넬을 헤브론에 장사하고 아브넬의 무덤에서 왕이 소리를 높여 울고 백성도 다 우니라 33왕이 아브넬을 위하여 애가를 지어 이르되 아브넬의 죽음이 어찌하여 미련한 자의 죽음 같은고 34네 손이 결박되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차꼬에 채이지 아니하였거늘 불의한 자식의 앞에 엎드러짐 같이 네가 엎드러졌도다 하매 온 백성이 다시 그를 슬퍼하여 우니라 35석양에 뭇 백성이 나아와 다윗에게 음식을 권하니 다윗이 맹세하여 이르되 만일 내가 해 지기 전에 떡이나 다른 모든 것을 맛보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라 하매(31-35)

다윗은 아브넬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고 매우 슬퍼하고 있습니다. 그는 아브넬을 위한 애가를 지어 부르고 성대하게 장례를 치러줍니다. 백성들은 강권했지만, 음식 먹기조차 거부하였습니다. 그제야 이스라엘은 다윗의 무죄함을 믿게 됩니다.

(1) 헤브론에 묻힌 아브넬(31-32)

다윗은 아브넬이 죽음에 대해 요압을 비롯한 모든 백성들에게 옷을 찢고 긁은 배를 띠고 아브넬을 애도하라고 명령합니다. 왕 다윗이 직접 아브넬의 상여를 따라갔는데, 이것은 다윗이 직접 아브넬의 장례를 주도하고 참여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 애도하는 다윗(33-34)

다윗은 또다시 아브넬의 무덤 앞에서 큰 소리로 백성들과 함께 통곡을 하고 하브넬의 죽음에 대한 애가를 지어 불러줍니다. 아브넬의 죽음이 어리석은 자의 죽음 같다고 탄식했습니다. 어리석은 자의 죽음은 허무한 죽음입니다. 자신의 지위와 명성에 적합한 죽음을 맞이하지 못하고, 어처구니없이 허무하게 죽어버린 것을 슬퍼하며 노래했습니다. 그의 손이 결박되지 않았고 그의 발이 차꼬에 묶이지 않았다는 것은 아브넬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음을 말하며, 아브넬의 죽음이 허무했음을 강조합니다. 불의한 자식 앞에 엎드러지는 것은 불의한 사람이 의로운 아브넬을 죽였다는 뜻이며, 요압에 대한 책망을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온 백성’이라는 표현은 아마도 다윗 왕궁에 출입하는 관리들일 것입니다.

(3) 금식하는 다윗(35)

장례가 끝난 후 모든 백성이 저녁에 다윗에게 와서 음식 먹기를 권했습니다. 동사 ‘바라’는 슬픔 속에서 허기를 때우는 것을 의미합니다(12:17). 다윗은 맹세하면서 해 질 때까지 떡이나 아무것도 맛보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고대에는 애도 기간에 금식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라”는 자기 저주의 형식으로, 맹세를 강조할 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참조, 3:9). 그는 해 지기 전까지 떡이나 어떤 것도 맛보지 않겠다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합니다.

 

백성들의 반응과 다윗의 한탄(36-39)

세상을 살아가는데, 진실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최선의 해결책입니다. 낙심하지 않고 진심을 다할 때 하나님께서는 위기마저도 우리를 온전하게 하실 기회로 삼으십니다. 다윗의 아브넬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함으로써 오해를 벗고 백성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습니다. 진실하신 하나님을 믿고 진실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변 사람들이 신뢰합니다.

36온 백성이 보고 기뻐하며 왕이 무슨 일을 하든지 무리가 다 기뻐하므로 37이 날에야 온 백성과 온 이스라엘이 넬의 아들 아브넬을 죽인 것이 왕이 한 것이 아닌 줄을 아니라 38왕이 그의 신복에게 이르되 오늘 이스라엘의 지도자요 큰 인물이 죽은 것을 알지 못하느냐 39내가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 되었으나 오늘 약하여서 스루야의 아들인 이 사람들을 제어하기가 너무 어려우니 여호와는 악행한 자에게 그 악한 대로 갚으실지로다 하니라(36-39)

요압의 아브넬 암살로 다윗은 궁지에 몰리지만, 다윗은 아브넬의 죽음에 진심 어린 애도에 백성의 의혹은 충성으로 바뀝니다. 다윗은 나약한 자신의 왕권에 대해 탄식하지만, 결국 모든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1) 백성들의 반응(36-37)

백성들은 다윗 왕이 애곡하며 금식하는 일련의 행동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진심으로 애도하는 것을 알고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그들은 다윗이 하는 모든 행동을 좋게 보았습니다. 이에 따라 모든 백성과 온 이스라엘은 아브넬의 죽음이 다윗과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윗의 진심 어린 행동이 또 한 번의 위기로부터 다윗을 벗어나게 했습니다.

(2) 아브넬 추모(38)

다윗은 자신에 대한 의심이 사라지고 오히려 백성들이 자기에게 호감을 느끼게 된 것을 알았습니다. 다윗은 이제 자신감을 가지고 아브넬을 위대한 장군이라고 높이면서 대조적으로 스루야의 아들들의 악함을 강조합니다. 한글 성경은 ‘사르 버가돌’을 ‘지도자요 큰 인물’이라 번역하였으나, 위대한 장군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습니다.

(3) 다윗의 한탄과 저주(39)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아 왕이 되었는데도 스루야의 아들들이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음을 지적하면서, 그들의 패역함을 강조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복수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제어하기가 너무 어려우니”는 문자적으로 ‘나보다 더 강하니’입니다.

 

나가는 말

위기나 역경의 때에도 성도들은 어떤 경우에도 진실하게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믿음과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사로운 감정을 잘 조절되어야 합니다. 자신을 선한 방법으로 절제뿐만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갈 용기도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의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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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03-02)

 

아브넬을 선대한 다윗과 요압의 반발

사무엘하 3장 17-26절

 

골프선수 최경주는 2002년 PGA tour에서 우승한 이후로 꾸준하게 활약해서 세계 랭킹 5위까지 올랐습니다. 그는 전남 완도의 작은 시골 마을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노력으로 세계에서 성공한 그의 뒷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일반 직장인들이 하루 8시간 일하듯, 성공한 후에도 하루에 8시간씩 연습하며 노력하였고, 골프를 자신의 천직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의 성실함은 모든 사람에게 선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다윗의 집이 번창하는 동안 사울의 집에서 아브넬과 이스보셋이 사울의 첩과 간통의 일로 분열이 일어납니다. 이에 격분한 아브넬은 다윗에게 사자를 보내 자신의 사울의 집과 이스라엘을 다윗의 손에 붙이겠다고 제안합니다. 다윗은 그 밀약을 받아들인 조건으로 사울의 딸 미가를 보내라고 요구합니다. 다윗과 아브넬의 협상이 성사되면서 아브넬은 이제 이스라엘을 다윗에게로 돌리기 위한 작업들이 시작합니다.

 

아브넬의 설득(17-19)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할 때, 우리는 때때로 그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과 전혀 다른 세속적인 사람들이 판치도록 내어줄 때가 있습니다. 야망과 복수심에 가득찬 아브넬과 요압과 같은 사람들이 지도자로 나설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의 사역이 잘못될 것 같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우리를 다양한 방법으로 인도해 나가십니다.

17아브넬이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가 여러 번 다윗을 너희의 임금으로 세우기를 구하였으니 18이제 그대로 하라 여호와께서 이미 다윗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종 다윗의 손으로 내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블레셋 사람의 손과 모든 대적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리라 하셨음이니라 하고 19아브넬이 또 베냐민 사람의 귀에 말하고 아브넬이 이스라엘과 베냐민의 온 집이 선하게 여기는 모든 것을 다윗의 귀에 말하려고 헤브론으로 가니라(17-19)

유다 지파를 제외한 열한 지파들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왕으로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질적인 통치는 군대장관 아브넬이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울 왕의 첩과 동침한 사건에 대해 이스보셋과 다툰 후, 이스보셋에게서 등을 돌립니다. 그리고 교활한 방법으로 자신의 살길을 찾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활한 아브넬을 통해 다윗 왕국을 세우도록 인도하십니다.

(1) 이스라엘 장로들과의 만남(17)

본문에서 아브넬이 다윗에게 약속을 받은 조건이 무엇인지 언급되지는 않습니다. 결국 아브넬의 죽음으로 이루어질 필요가 없는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브넬이 매우 적극적으로 이스라엘 장로들을 만나 사울의 집을 다윗의 손에 넘기기 위해 움직인 것을 보면 상당한 권력을 보장받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먼저 아브넬이 이스라엘 장로들을 만난 것은 사울의 딸 미갈을 데리러 가기 전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장로들과 베냐민 지파 백성들을 직접 찾아가서 다윗을 이스라엘의 통일 왕국의 왕으로 세우도록 설득하고 동의를 얻습니다.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너희가 여러 번 다윗을 너희의 임금으로 세우기를 구하였으니”(17)라고 말합니다. 그동안 너희들이 다스릴 왕으로 다윗을 계속 요구하였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이전에는 그들의 요구가 있었지만, 아브넬이 거부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사울의 집 이스라엘 편에서도 다윗을 왕으로 섬기려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을 묵살해 왔던 것입니다.

아브넬은 사울의 집 이스보셋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윗과의 밀약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계산이 되었습니다. 이제야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자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는 다윗을 왕으로 세우는 것이 여호와의 뜻이며, 블레셋과 모든 대적으로부터 다윗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참으로 교묘한 말입니다. 처음부터 여호와의 뜻이 아닌 줄 알았다면,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우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알면서도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운 것은,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권력과 욕망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부분을 감추고, 더 이상 이스보셋을 왕으로 섬기지 않으며, 다윗에게 더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을 왕으로 섬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말함으로써, 자신의 반역을 정당화합니다. 사실상, 아브넬에게는 다윗이 왕이 되는 것이 여호와의 뜻인지 아닌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 탐욕을 유지하기 위해 여호와의 이름만을 이용할 뿐입니다.

(2) 여호와의 약속(18)

아브넬은 이제 때가 되었으므로 이스라엘 장로들이 이전에 요구했던 바를 실천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근거로 제시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미 다윗에 관하여 ‘내가 내 종 다윗의 손으로 내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블레셋 사람의 손과 모든 대적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아브넬이 인용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에 대해 하셨던 말씀이 이와 비슷합니다(삼상 9:16). 아마도 아브넬이나 다른 사람들은, 다윗이 기름 부음 받았던 일을 기억하면서, 이스라엘을 다윗의 손으로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의 종’으로 불립니다. ‘종’이라는 칭호는 주인의 전폭적인 지지와 신뢰를 얻으면서 주인으로부터 중요한 사명을 받아 수행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모든 대적에 대해 말하기 전에 블레셋을 언급한 것은 당시 이스라엘의 가장 큰 대적이 블레셋이었음을 보여줍니다. 한글성경의 ‘벗어나게 하다’는 원문에 ‘구원하다’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블레셋과 다른 모든 대적을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3) 베냐민 사람들과의 만남(19)

특별히 베냐민 사람들을 설득하는데 베냐민 지파는 사울의 출신 지파로서 현재 사울 왕권의 최대 지지기반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욱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설득할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한 설득이 끝나자 아브넬은 다윗을 만나러 헤브론으로 툴발합니다. 다윗이 요구한 미가를 보냈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과 베냐민 사람들의 승낙도 자신의 손에 뒤고 있었습니다.

아브넬은 교활하게 양다리를 걸칩니다. 베냐민 사람들을 이스라엘과 구분하여 언급함은 베냐민 지파가 이스보셋 왕국의 중심 세력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울의 지파인 베냐민 족속도 다윗을 왕으로 모실 준비가 되었습니다. 아브넬의 이름이 두 번 언급되는데, 그 이름에는 각각 강조 어구 ‘감’(ם󰕂)이 선행하고 있습니다. 한글 성경은 ‘감’을 한 번만 ‘또’라고 번역합니다. 이는 아브넬에 대한 관심을 집중시키려는 저자의 의도를 반영합니다. 지금 모든 일을 추진하고 있는 사람은 아브넬입니다. 아브넬이 변화를 만들었고, 아브넬이 다윗에게 온 이스라엘을 이끌고 있습니다.

 

아브넬의 헤브론 방문(20-21)

성도들은 인생이 너무 순조롭게 진행될 때, 스스로 제동을 걸어 멈추고 제대로 가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순탄함이 항상 축복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늘이 없고 그림자가 없는 인생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 없는 오만의 내리막길은 가파를 뿐입니다. 아브넬은 헤브론 방문해서 다윗과 협상을 통해 좋은 결과를 받았지만, 피살로 뜻하지 않게 물거품이 됩니다.

20아브넬이 부하 이십 명과 더불어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가니 다윗이 아브넬과 그와 함께 한 사람을 위하여 잔치를 배설하였더라 21아브넬이 다윗에게 말하되 내가 일어나 가서 온 이스라엘 무리를 내 주 왕의 앞에 모아 더불어 언약을 맺게 하고 마음에 원하시는 대로 모든 것을 다스리시게 하리이다 하니 이에 다윗이 아브넬을 보내매 그가 평안히 가니라(20-21)

다윗의 성대한 환대에 아브넬이 충성을 맹세하고, 그의 충성에 대한 화답으로 다윗은 서둘러 안위를 보장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나눈 밀담은 하나님의 뜻을 위한 단합이 아니라 불순한 야합이었습니다.

(1) 아브넬을 위한 잔치(20)

베냐민 지파와 이스라엘 사람들을 설득하였습니다. 이 일이 끝나자 아브넬을 다윗을 만나려 헤브론으로 출발합니다. 아브넬을 다윗과 협상을 마무리하려고 신복 20명을 헤브론의 다윗에게 갑니다. 다윗은 잔치를 베풀어 주는데, 이 잔치는 다윗과 아브넬 간의 협상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는 뜻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조건이 오고 갔는지 언급되지 않지만, 아브넬은 다윗의 조건에 매우 만족한 것으로 보입니다.

19절에 이어 20절에서도 아브넬이라는 이름이 두 번 사용되면서, 아브넬에 대한 관심을 이끌고 있습니다. 다윗은 호의적으로 자신을 찾아온 그를 위해 잔치를 배설합니다. “잔치”는 ‘미쉬테’인데, 보통 술 마시는 잔치를 가리킵니다.

한글 성경은 아브넬과 함께 헤브론으로 왔던 사람들을 ‘부하’라고 칭합니다. 원문은 단순히 아나쉰(사람들)입니다. 이들이 각 지파의 대표거나 장로들이었다면 달리 표현되었을 것입니다. 아직 다윗의 태도를 확신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각 지파가 자신들의 대표를 보내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구약에서 ‘아나쉽’은 흔히 군인들을 가리킵니다(삼상 14:12;17:52). 따라서 이 사람들은 ‘무기 든 사람’이라 불리는 친위부대로서 아브넬을 수행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참조, 18:15). 다윗이 잔치를 베푼 것은 아브넬과 그 사람들에 대한 깊은 호의를 나타냅니다.

(2) 아브넬의 제안(21)

21절에서도 아브넬의 이름은 계속 언급됩니다. 그리고 아브넬은 다윗에게 “내가 일어나 가서 온 이스라엘 무리를 내 주 왕의 앞에 모아 더불어 언약을 맺게 하고 마음에 원하시는 대로 모든 것을 다스리시게 하리이다”라고 제안합니다.

자신이 다윗을 위해 할 수 있는 역할을 세 가지 방식으로 강조하며 설명합니다. 첫째, 1인칭 동사를 세 번 반복하여 사용합니다. ‘내가 일어나서’, ‘내가 가서’, ‘내가 모으겠습니다.’ 1인칭 연장형은 말하는 사람(아브넬)의 의지와 소원을 표현하는 형태입니다. 아브넬은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옹립하려는 자신의 의지가 확고하며, 자신이 이 일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려 함을 다윗에게 자랑하듯 말합니다. 둘째, 아브넬은 이미 다윗을 “내 주”(아도니)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셋째, 온 이스라엘 무리를 모으겠다고 말합니다. 이스보셋의 왕국에 참여한 지역과 지파들의 목록을 고려한다면, 아브넬이 이스라엘 전체를 모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아브넬은 온 이스라엘에 관해 말하고 있습니다. “언약을 맺게 하고”, 즉 이스라엘은 다윗과 언약을 맺을 것입니다. 이 언약은 다윗을 왕으로 모시는 충성의 서약일 것입니다. “마음에 원하시는 대로 모든 것을 다스리시게”는 왕의 권세와 의지를 존중하려 할 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나단이 다윗에게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행하소서”(7:3)라고 말한 것도 이와 같습니다.

아브넬은 다윗을 향하여 “내 주 왕”이라고 부릅니다. 이 호칭에서 아브넬이 이미 다윗을 자신의 왕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온 백성이 왕과 더불어 언약을 맺는다는 것은 여호와께서 모든 백성이 사울을 왕으로 삼은 사무엘상 11장 14-15절에 장면과 같은 행사를 치를 것을 의미합니다. 즉 공식적인 대관식을 통해 다윗은 그들의 왕이 되고 그들은 다윗의 백성이 되겠다는 언약을 맺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브넬은 자신이 다윗을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웠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온 이스라엘 왕으로 선택하시고 왕으로 삼으셨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아브넬은 자신이 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업적을 높인 것입니다. 이 때문에 자신을 섬김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인도하신 부분은 거의 절대적입니다. 사람들은 단지 돕는 자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모든 것을 주인으로 삼고 자기 공적을 자랑하며 자랑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일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합당하게 섬기지 아니하는 자입니다.

다윗은 아브넬과 협상을 성공적으로 맺은 후, ‘평안히’ 보내주었습니다. 아브넬은 평안히 돌아갑니다. 다윗은 아브넬을 해치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음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요압의 분노(22-26)

원한을 품고 있으면 결코 사물이나 사람을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런 원한이 있으면 하나님의 계획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믿음은, 하나님의 뜻과는 어긋나며 하나님의 평화는 크게 위협을 받을 것입니다. 요압은 아브넬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별것 아닌 것 같았지만, 이 일은 아브넬에게 치명적 비극을 가져왔습니다.

22다윗의 신복들과 요압이 적군을 치고 크게 노략한 물건을 가지고 돌아오니 아브넬은 이미 보냄을 받아 평안히 갔고 다윗과 함께 헤브론에 있지 아니한 때라 23요압 및 요압과 함께 한 모든 군사가 돌아오매 어떤 사람이 요압에게 말하여 이르되 넬의 아들 아브넬이 왕에게 왔더니 왕이 보내매 그가 평안히 갔나이다 하니 24요압이 왕에게 나아가 이르되 어찌 하심이니이까 아브넬이 왕에게 나아왔거늘 어찌하여 그를 보내 잘 가게 하셨나이까 25왕도 아시려니와 넬의 아들 아브넬이 온 것은 왕을 속임이라 그가 왕이 출입하는 것을 알고 왕이 하시는 모든 것을 알려 함이니이다 하고 26이에 요압이 다윗에게서 나와 전령들을 보내 아브넬을 쫓아가게 하였더니 시라 우물 가에서 그를 데리고 돌아왔으나 다윗은 알지 못하였더라(22-26)

본문은 아브넬과 다윗의 협상에 대해 반대를 보여줍니다. 이 단락이 앞부분과 장면이 완전히 바뀝니다. 이 장면은 전쟁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오는 다윗의 신하들과 요압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요압은 헤브론에서 아브넬이 다윗에게 다녀갔다는 소식과, 다윗이 그를 평안히 돌려보냈다는 소식에 매우 마음이 상했습니다. 요압이 보았을 때, 아브넬은 자기 동생 아사헬을 죽인 원수였기 때문입니다.

(1) 아브넬의 방문을 알게 된 요압(22-23)

전쟁에서 돌아온 다윗의 신하들은 다윗과 아브넬이 협상한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아브넬과의 협상은 다윗의 신하들, 특히 요압도 모르게 진행된 것입니다. 다윗은 아브넬이 요압의 동생인 아사헬을 죽인 일로 아브넬에 대한 요압의 감정이 좋지 않을 것을 예상하고, 요압을 배제한 채 협상을 마무리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다윗은 아브넬의 방문을 의도적으로 요압에게 알리지 않았고, 요압이 없을 때 맞춰서 아브넬을 불렀습니다. 이는 다윗이 요답과 아브넬의 적대적 관계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며, 이 기회에 요압을 쫓아내려 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신하들은 전쟁에서 돌아온 후에야 아브넬이 다윗과 협상하려고 막 다녀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요압과 다윗의 신하들은 헤브론에 도착한 후, 아브넬이 다윗을 만나려 왔다가 평안히 돌아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21절에 사용된 단어 ‘평안히’가 22절과 23절에 각각 다시 사용됩니다. 이는 아브넬의 평안한 귀환이 요압에게 큰 문제가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즉 요압의 입장에서 아브넬은 평안히 돌아갈 수 없는 존재인데, 왕이 그를 평안히 돌아가게 해줬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2) 다윗 왕을 질책하는 요압(24-25)

이 사실을 알게 된 요압은 화가 나서 다윗에게 나가서 왜 그렇게 했느냐고 이유를 물으면서, 다윗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말합니다. “잘(=확실히) 가게 하셨나이까?”라는 아브넬이 이미 떠나서 헤브론에 없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요압은 아브넬이 다윗에게 온 것은 왕을 속여서 정탐하기 위해 헤브론에 온 것이다고 주장합니다(25). 요압에 따르면, 아브넬은 다윗의 행동을 정탐한 뒤 다윗을 공격하려는 의도에서 헤브론을 방문했으리라는 것입니다. 요압은 아브넬이 다윗을 속인다고 주장합니다.

요압의 주장은 다윗과 아브넬의 밀약을 모르는 상황에서는 바른 주장일 수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다윗과 아브넬은 정적 관계이며, 계속해서 전쟁해오던 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아브넬이 다윗을 찾아온 것에 대해 의심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더불어 요압의 입장에서 아브넬이 동생 아사헬을 죽인 원수이기 때문에 의심과 적의가 더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3) 아브넬을 데려오는 요압(26)

다윗이 요압을 설득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지만, 요압이 다윗과 아브넬과의 협상 내용을 들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데도 요압은 다윗과 아브넬의 협상을 인정하거나 그를 평안히 보낼 생각이 없었습니다.

여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그는 아브넬처럼 왕을 쉽게 갈아치우는 사람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또한 아브넬이 다윗의 신하가 된다면 자신의 입지가 좁아질 것이라고 계산했을 것입니다. 아브넬은 군대 장관으로서, 다윗 왕국의 군사력을 책임지고 있는 요압과는경쟁 관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전쟁터에서 동생 아사헬을 살해한 것은 정당하고 살인죄로 기소될 수 없지만, 개인적으로 아브넬이 아사헬을 살해한 것에 대해 원한을 품고 있었습니다.

요압은 다윗에게 자신의 말만 외치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결국 요압은 다윗 모르게 사자를 보내어 아브넬을 다시 헤브론으로 돌아오게 만듭니다. 요압은 아브넬을 죽여 원수도 갚고 후한도 없애려는 결심입니다. 여기에서 요압은 다윗의 군사이지만 다윗에게 반발하여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을 처음으로 보입니다. 그후에도 요압이 다윗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경우가 나타나며 여호와께 대한 신뢰나 은혜 같은 덕목과는 거리가 먼 매우 세속적이고 잔인하며 권력 지향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요압의 관점에서 아브넬과 같은 정치 9단의 말들 듣고 움직이는 다윗이 어수룩해 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알고 있던 다윗의 입장에서는 아브넬의 행동은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브넬이 어떤 수술을 하든,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뜻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에 따라 다윗은 아브넬을 신뢰하는 위험한 행동을 택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 바로 그것이 다윗과 요압의 차이입니다.

요압의 신하들은 기분 좋게 돌아가는 아브넬을 시라 우물가에서 만나 데리고 돌아왔습니다. 다윗은 이러한 일이 벌어지는 줄 전혀 몰랐습니다. 그가 아브넬을 위해 잔치를 베푼 사실이나, 아브넬을 죽이려는 요압의 작전을 몰랐다는 사실은, 아브넬의 죽음에 관해 다윗에게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시라’는 헤브론에서 북쪽으로 약 4km정도 떨어진 곳으로 추정됩니다.

 

나가는 말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헛된 욕심과 복수심과 같은 악한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뜻대로 크게 생각하고 담대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특히 영적인 지도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인간적인 방법으로 행동하지 않도록 더욱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기 위해 기도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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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03-01)

 

점점 강성해지는 다윗 왕국

사무엘하 3장 1-16절

 

약해 보이던 것들이 점점 강해지는 것을 보면, 처음에는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지만 계속 성장하면 나중에는 커다란 차이를 낳습니다. 성도들은 처음 시작은 매우 미약하게 시작하지만, 나중에는 세상에 속한 사람들보다 능력 있는 모습으로 변해갑니다. 성도들은 마치 천국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마태복음 13:32)

 

사무엘하 3-4장은 이스보셋 왕국의 멸망에 관한 기록입니다. 특히 3장은 아브넹의 배반과 죽음에 관 기록인데, 본문(3:1-16)은 그 전반부에 해당합니다. 다윗이 헤브론에서 다스리는 동안 그에게서 여섯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한편 아브넬과 이스보셋은 사울의 첩 리스바의 문제에서 촉발된 심각한 갈등을 겪습니다. 결국 아브넬은 이스보셋을 떠나기로 하였습니다. 그는 전령을 보내 다윗과 은밀하게 접촉하고 언약을 맺었습니다.

 

성장하는 다윗의 왕국(1-5)

하나님께서는 때를 따라 은혜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눈에 보이는 큰 은혜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은혜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다윗의 집을 점점 부흥시켜 주시는 능력을 보면서, 다윗처럼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우리가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하나님께서 계속적으로 점점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1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 2다윗이 헤브론에서 아들들을 낳았으되 맏아들은 암논이라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의 소생이요 3둘째는 길르압이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의 소생이요 셋째는 압살롬이라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의 아들이요 4넷째는 아도니야라 학깃의 아들이요 다섯째는 스바댜라 아비달의 아들이요 5여섯째는 이드르암이라 다윗의 아내 에글라의 소생이니 이들은 다윗이 헤브론에서 낳은 자들이더라(1-5)

다윗의 집과 사울의 집인 이스보셋과 전쟁이 오래 계속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도 계속해서 다윗의 집에는 흥왕해 많은 자녀들이 태어난 것은, 다윗 왕조가 점점 성장해 가고, 다윗이 죽은 후까지도 계속 이어질 것을 바라보게 합니다.

(1) 다윗과 사울의 집 비교(1)

기브온 연못가에서의 충돌 이후, 다윗의 집과 사울의 집(이스보셋)은 양립할 수 없었습니다. 그 둘 사이에 항상 계속되는 전쟁 속에 있었습니다. 이스보셋의 통치 기간을 고려할 때, 최대 2년 정도의 내전을 겪었을 것입니다(2:10).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해져 가고 다윗의 집안을 따르는 세력들은 점점 강해졌습니다. 그리고 사울의 집안을 따르는 세력은 점점 약해졌습니다. 다윗의 통치하는 왕국 시대가 점점 힘을 얻어갈 것을 예견합니다.

(2) 다윗의 아들들(2-5)

다윗은 헤브론에서 7년 6개월을 통치하는 동안 2명의 아내 외에 4명의 아내를 더 얻습니다. 각각 다른 6명의 아내에게서 낳은 아들은 모두 다섯 명을 열거합니다. 하나님꼐서 그분의 뜻과 계획 가운데 기름 부어 왕으로 세우신 다윗의 집을 강하고 부유하게 하심으로 든든히 세워가고 계셨습니다.

첫째는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나의 형제는 기쁨을 준다’)의 소생 ‘암논’(‘신실하다’)입니다(삼상 25:43). 이 암논은 후에 압살롬에 의해 살해당합니다(13:28-29).

둘째는 아비가일의 소생 ‘길르압’인데, 역대기에서는 다니엘로 불립니다(대상 3:1). 다윗이 사울을 피해 다니던 중 결혼한 두 사람이 아히노암과 아비가엘입니다(삼상 25:42,43). 이 둘은 유다 산지 갈멜 출신입니다. 아비가엘의 소생 길르압에 관해서는 달리 알려진 바가 없고, 그는 어려서 죽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셋째는 ‘압살롬’(‘아버지는 평화이시다’)이며,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의 소생이었습니다. 그술은 아람에 속한 왕국으로, 갈릴리 호수의 북동쪽, 헬몬과 바산 사이 지역에 해당합니다. 압살롬은 후에 첫째 아들 암논을 죽이며, 반란을 일으켜 잠시 예루살렘을 차지하기도 합니다.

넷째는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입니다. 학깃(‘축제’)에 관해서는 다른 정보가 전해지지 않습니다. ‘아도니야’(‘여호와는 주님이시다’)는 솔로몬의 즉위에 반대하는 세력들을 이끌었으나, 결국 솔로몬에 의해 숙청당했습니다(왕상 2:25).

다섯째와 여섯째는 아비달(‘아버지는 보호이시다’)의 소생 ‘스바댜’(‘여호와께서 심판하셨다’)와 ‘에글라’(‘젊은 암소’)의 소생 이드르암(‘남은 백성’)입니다. 이들에 관해서는 다른 정보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에글라는 다윗의 아내라고 소개됩니다.

여섯 아내가 각기 한 아들을, 도합 여섯 명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 명단 외에 다른 아들들도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렇게 나열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 다윗에게 임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손의 번성과 더불어 다윗 왕국이 견고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망해가는 사울의 집(6-11)

하나님과 함께한 사람들은 점점 강해지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은 점점 약해집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사람의 편에 서는 사람입니까? 어느 편에 서느냐에 따라 당신의 미래가 결정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한 자를 통하여 당신의 역사를 이끌어 갑니다. 영적으로 교만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말씀으로 날마다 자신의 신앙을 경계하여 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6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있는 동안에 아브넬이 사울의 집에서 점점 권세를 잡으니라 7사울에게 첩이 있었으니 이름은 리스바요 아야의 딸이더라 이스보셋이 아브넬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내 아버지의 첩과 통간하였느냐 하니 8아브넬이 이스보셋의 말을 매우 분하게 여겨 이르되 내가 유다의 개 머리냐 내가 오늘 당신의 아버지 사울의 집과 그의 형제와 그의 친구에게 은혜를 베풀어 당신을 다윗의 손에 내주지 아니하였거늘 당신이 오늘 이 여인에게 관한 허물을 내게 돌리는도다 9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맹세하신 대로 내가 이루게 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아브넬에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라 10그 맹세는 곧 이 나라를 사울의 집에서 다윗에게 옮겨서 그의 왕위를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이스라엘과 유다에 세우리라 하신 것이니라 하매 11이스보셋이 아브넬을 두려워하여 감히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니라(6-11)

하나님의 말씀이 삶의 중심에 자리에 있을 때, 진정한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번성하는 다윗의 집과는 달리 사울의 집에서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습니다. 사울의 집은 군대장관 아브넬이 사울의 후궁과 잠자리를 한 문제가 일어납니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사울 집안의 실세인 아브넬과 왕인 이스보셋 간에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1) 아브넬의 권세(6)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있었음이 다시 언급됩니다. 전쟁은 군사령관 ‘아브넬’의 권세를 날이 갈수록 더욱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사울 집에서 꼭두각시 이스보셋 왕보다 군대장관 아브넬이 점점 권세를 잡아갔습니다. 이스보셋은 꼭두각시 왕으로서 왕직만 갖고 있을 뿐, 실제적인 통치권은 아브넬이 행하고 있었습니다.

(2) 이스보셋의 책망(7)

사울의 아내는 아히마아스의 딸 ‘아히노암’입니다. 아히노암이 사울의 네 아들과 두 딸을 낳았습니다. 한편 본문은 사울의 유일한 첩 ‘리스바’를 소개합니다. 리스바는 알모니와 므비보셋을 낳았습니다(21:8). 다윗이 흉년에 대한 책임을 물어서 사울의 자손을 죽일 때, 이 리스바의 두 아들도 죽임을 당했습니다(21:8-9).

점점 강한 힘을 갖게 된 아브넬은 사울의 첩 리스바와 동참하였습니다. 이는 전 왕의 부인을 자신이 취함으로써 왕권에 대한 욕심을 표현하는 행동일 수 있으나, 확실하진 않습니다. 그가 왕이 되기를 원했다면 더욱 직접적인 방법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스보셋이 아브넬의 이러한 행동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시했습니다. 하지만 이스보셋의 책망은 아브넬이 더 극단적인 행동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아브넬은 이스보셋의 말을 듣고, 왕국을 다윗에게 넘겨주겠다고 결심하고 협박하였습니다.

(3) 아브넬의 분노(8-10)

아브넬은 이스보셋의 책망에 “내가 유다의 개 머리냐?”(8)라고 분노합니다. 이스보셋의 적국인 유다와 비천한 동물인 개를 결합하여 멸시의 대상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특히 개는 성적으로 난잡함을 상징하는 동물이기도 합니다. 머리는 동물의 신체 중 먹지도 못할 가장 가치 없는 부분입니다.

아브넬은 “내가 오늘 당신의 아버지 사울의 집과 그의 형제와 그의 친구에게 은혜를 베풀어 당신을 다윗의 손에 내주지 아니하였거늘 당신이 오늘 이 여인에게 관한 허물을 내게 돌리는도다”(8b)라며, 자신이 이스보셋에게 그동안 베푼 도움과 선행을 나열하면서 이스보셋이 은혜도 모르고 행동한다고 분노하였습니다. 아브넬은 사울의 가족과 신하들에게 은혜를 베풀었으며, 이스보셋을 다윗의 손에 넘기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넬은 이스보셋이 리스바와 관련된 허물을 자기에게 돌리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자신이 베푼 은혜에 비하여 그 허물은 매우 작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맹세하신 것은 다윗을 왕이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9). 왕국을 사울의 집에서 빼앗아 다윗에게 주고, 다윗이 보좌에 앉아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리게 하는 것입니다(3:10). “하나님이 아브넬에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라”(3:9b). 이는 자기를 저주함으로써 자신의 말을 보증하는 일종의 맹세 구문입니다(룻 1:17). 단(재판)은 헬몬산의 기슭, 이스라엘 북쪽 경계선에 위치하는 성읍입니다. 브엘세바(‘일곱 개의 우물’ 혹은 ‘맹세의 우물’)는 헤브론 남서쪽 약 37km에 위치한 성읍입니다.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라는 표현은 이스라엘 전체 영토를 가리키는 일반적 표현입니다.

(4) 이스보셋의 반응(11)

이스보셋은 아브넬을 두려워하여 그에게 한마디도 대꾸하지도 못했습니다. 이스보셋은 아브넬을 비난받은 후, 분노하는 아브넬을 보면서 그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다윗에게 아브넬의 협상 제안(12-16)

지도자에게는 가장 필요한 것이 많은 사람을 인도하는 지도력입니다. 자신을 지지하고 따르는 사람들을 한마음으로 모을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지도자들에게는 지도자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세상의 보이는 것을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살아가는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런 지도자는 절대로 실패하지 않고,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다윗은 지도자로 그러한 능력이 뛰어난 사람입니다. 당신을 바른길로 인도하는 교회의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12아브넬이 자기를 대신하여 전령들을 다윗에게 보내어 이르되 이 땅이 누구의 것이니이까 또 이르되 당신은 나와 더불어 언약을 맺사이다 내 손이 당신을 도와 온 이스라엘이 당신에게 돌아가게 하리이다 하니 13다윗이 이르되 좋다 내가 너와 언약을 맺거니와 내가 네게 한 가지 일을 요구하노니 나를 보러올 때에 우선 사울의 딸 미갈을 데리고 오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고 14다윗이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에게 전령들을 보내 이르되 내 처 미갈을 내게로 돌리라 그는 내가 전에 블레셋 사람의 포피 백 개로 나와 정혼한 자니라 하니 15이스보셋이 사람을 보내 그의 남편 라이스의 아들 발디엘에게서 그를 빼앗아 오매 16그의 남편이 그와 함께 오되 울며 바후림까지 따라왔더니 아브넬이 그에게 돌아가라 하매 돌아가니라(12-16)

사울의 왕국에서 맘껏 권좌를 흔들던 아브넬과 그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이스보셋 사이에 권력 분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화가 아브넬은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이스보셋을 배반합니다. 이제는 더는 버틸 수 없다고 생각하고 사울의 왕국을 다윗에게 넘겨주기 위한 계획을 비밀리 진행합니다. 이것은 그가 사울의 집안에 충성스러운 일군이 아니었음을 다시 한번 증명합니다.

(1) 아브넬의 협상 제안(12)

아브넬은 자신이 이스보셋 앞에서 맹세한 것을 바로 시행합니다. 다윗과 협상하려고 전령들을 보냅니다. 자신이 이스라엘 땅을 다윗에게로 돌아가게 할 테니 자신과 언약을 체결하자고 제안하였습니다. 그는 ‘이 땅이 누구의 것이냐?’라는 수사학적 질문을 통해 이스라엘의 진정한 주인이 다윗이라고 돌려 말합니다.

이 언약에 따라 아브넬이 할 일은 왕국을 다윗에게로 돌리는 것이지만, 아브넬을 위해 다음 해야 할 일은 밝혀지지 않습니다. 아마도 아브넬을 이스라엘을 다윗에게 넘기는 대가로 자신의 안전과 권력을 보장하도록 요구했을 것, 즉, 왕국에서 이인자로 높이는 것이 다윗이 자신에게 줄 수 있는 보상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언약은 요압이 아브넬을 죽여야 했던 이유 중 하나일 것입니다.

(2) 다윗의 조건(13)

아브넬의 제안을 받은 다윗은 그 제안이 진심인지를 보여주려면 먼저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먼저 사울의 딸 미갈을 자기에게 데리고 오면, 그와 더불어 언약을 맺겠다고 말했습니다. 만일 아브넬이 미갈을 데리고 오지 않으면, 자신을 만날 수 없을 것이라고 강경한 어조로 말합니다. 여기서 다윗은 미갈을 ‘자신의 아내’가 아닌 ‘사울의 딸’이라고 표현합니다.

다윗은 사울의 집에 왕권을 주장하려면 사울의 사위라는 명목상의 지위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즉 개인적인 애정 때문이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미갈을 통해 사울의 왕국을 이어받을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습니다.

(3) 미갈과 발디엘(14-16)

다윗과 미갈은 이혼하지 않았으며, 다윗이 도망간 사이에 미갈은 아버지에 의해 강제로 결혼한 상태였기에 법적인 상태가 불분명합니다. 사울 왕은 다윗의 아내였던 미갈을 갈림 사람 라이스의 아들 ‘발디’, 즉 ‘발디엘’(‘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다’)에게 주었습니다(삼상 25:44), 갈림은 베냐민 지파의 성들에 속합니다. 다윗은 아브넬의 사신을 떠나보낸 후, 이스보셋에게 직접 사신을 보내 미갈을 돌려보내라고 요구했습니다. 다윗은 블레셋 사람의 포피 일백을 주고 미갈과 결혼했다는 점에서 미갈을 요구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14). 다윗은 실제로 포피 이백을 주었지만, 사울이 요구했던 것은 포피 일백이었습니다.

다윗의 요구를 거부하지 못한 이스보셋은 아브넬을 보내 발디엘에게서 미갈을 데려오게 했습니다(15). 이스보셋이 다윗의 요구를 들어주도록 아브넬이 영향력을 행사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미갈의 남편 발디엘이 미갈과 함께 걸어오는데, 울면서 바후림까지 따라왔습니다(16). 바후림은 감람산의 동북쪽 경사지에 있는 작은 마을로 추정됩니다. 다윗을 저주했던 게라의 아들 시므이의 고향이기도 합니다(왕상 2:8). 이 이별이 얼마나 비극적인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무도 미갈의 의사를 묻지도 않고 있고 미갈의 심정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남자들의 권력 다툼에 미갈이 희생양이 되었음을 암시합니다. 이스보셋은 밀약이 있는지도 므로는 상태에서, 다잇과 아브넬의 요구대로 미갈을 다윗에게 보내줍니다.

 

나가는 말

하나님의 선한 뜻을 더 잘 분별하고 따르면, 점점 더 강해지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다윗은 미갈을 요구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그를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나라는 강해져도 다윗의 영적 감감은 무너져고 있습니다. 우리는 결국에 깨어지고 무너질 세상의 나라를 위해서 헛된 힘을 낭비하지 않고, 영적인 지혜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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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02-02)

 

 

칼의 밭에서 일어난 비극

사무엘하 2장 12-32절

 

낮에 해가 둘일 수 없습니다. 이 말은 한 나라에 두 왕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두 왕을 모시고 있다면, 두 세력은 충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 우리 성도들은 믿지 않는 사람과 영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충돌에서 이기려면 무엇이 필요합니까?

 

본문은 이스라엘의 내전, 즉 이스보셋의 군대와 다윗의 군대가 싸우는 전쟁을 기록합니다. 아브넬이 이스보셋의 군대를 이끌고 나왔고, 요압이 다윗의 군대를 이끌고 나왔습니다. 먼저 각 군대의 대표 열두 명을 뽑아서 싸우게 하였는데, 모두 죽고 살아남은 자가 없었습니다. 이후 양측 군대 전체가 싸우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 아브넬은 뜻하지 않게 요압의 아우 아사헬을 죽이게 됩니다. 해가 졌을 때, 싸움을 그치고 아브넬의 군대는 마하나임으로, 요압의 군대는 헤브론으로 돌아갔습니다.

 

기브온 연못가의 전투(12-16)

 

한 지도자의 개인적인 야망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자신의 야망을 위해 왕으로서 신하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보다 개인의 야망을 위해 살아가면 비참한 희생이 따른 것입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일을 선택해야 합니다. 이 기브온 전투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어떤 명분이나 영적인 고민은 없었습니다.

12넬의 아들 아브넬과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신복들은 마하나임에서 나와 기브온에 이르고 13스루야의 아들 요압과 다윗의 신복들도 나와 기브온 못 가에서 그들을 만나 함께 앉으니 이는 못 이쪽이요 그는 못 저쪽이라 14아브넬이 요압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청년들에게 일어나서 우리 앞에서 겨루게 하자 요압이 이르되 일어나게 하자 하매 15그들이 일어나 그 수대로 나아가니 베냐민과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편에 열두 명이요 다윗의 신복 중에 열두 명이라 16각기 상대방의 머리를 잡고 칼로 상대방의 옆구리를 찌르매 일제히 쓰러진지라 그러므로 그 곳을 헬갓 핫수림이라 일컬었으며 기브온에 있더라(12-16)

우리들의 삶 속에서도 아무리 사소해 보이는 재미라도 악한 일을 멀리해야 합니다. 장난스럽게 시작한 작은 싸움이 큰 싸움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11지파의 실질적인 통치자 이스보셋의 군대장관 아브넬과 다윗의 부하로서 2인자인 군대장관 요압은 각각 군대를 이끌고 기브온에서 만납니다. 서로 기브온 연못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게 됩니다. 그들은 이상한 게임을 시작합니다. 이 게임은 제안은 아브넬이 합니다.

(1) 기브온으로 온 양측 군대(12-13)

아브넬은 이스보셋의 군대를 이끌고 마하나임에서 기브온으로 왔습니다. 기브온은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10km 떨어진 장소이며, 그곳의 산당에 모세의 성막과 번제단이 있었습니다(대하 1:3-6).

요압도 다윗의 군대를 이끌고 헤브론에서 기브온으로 왔으므로, 두 군대가 기브온 연못가에서 만났습니다. 당시 기브온은 다윗의 세력과 이스보셋의 세력이 만나는 접경 지대였을 것입니다. 요압의 어머니 스루야는 아비가일과 함께 나하스의 딸로 언급됩니다(17:25: 대상 2:16). 아마도나하스가 죽고 난 뒤, 그들의 어머니가 다윗의 아버지 이새와 결혼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2) 선발된 군사들의 대결(14-15)

아브넬과 요압은 본격적인 전쟁을 앞두고 각각 자기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려는 목적으로 병사 중 열두 명을 선발하여 경기하게 하자고 합의했습니다.

(3) 대결의 결과(16)

장난삼아 계획된 경기가 지나치게 과열되었습니다. 싸웠던 모든 병사가 각기 상대방의 머리를 잡고 그 옆구리를 칼로 찔러 함께 죽었으므로, 살아남은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곳의 이름을 ‘헬갓 핫수림’, 즉 ‘칼의 밭’이라 불렀습니다.

 

아비새의 죽음을 당함(17-23)

자신의 힘만 믿고 상대의 힘을 무시하다가 비참한 종말을 맞은 어리석음을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항상 믿음의 사람들은 자기 능력을 너무 과신하지 말고 다시 한 번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형들이 권했고, 두 번이나 자신을 돌아보고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한 것이 아쉽습니다.

17그 날에 싸움이 심히 맹렬하더니 아브넬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의 신복들 앞에서 패하니라 18그 곳에 스루야의 세 아들 요압과 아비새와 아사헬이 있었는데 아사헬의 발은 들노루 같이 빠르더라 19아사헬이 아브넬을 쫓아 달려가되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아브넬의 뒤를 쫓으니 20아브넬이 뒤를 돌아보며 이르되 아사헬아 너냐 대답하되 나로라 21아브넬이 그에게 이르되 너는 왼쪽으로나 오른쪽으로나 가서 청년 하나를 붙잡아 그의 군복을 빼앗으라 하되 아사헬이 그렇게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그의 뒤를 쫓으매 22아브넬이 다시 아사헬에게 이르되 너는 나 쫓기를 그치라 내가 너를 쳐서 땅에 엎드러지게 할 까닭이 무엇이냐 그렇게 하면 내가 어떻게 네 형 요압을 대면하겠느냐 하되 23그가 물러가기를 거절하매 아브넬이 창 뒤 끝으로 그의 배를 찌르니 창이 그의 등을 꿰뚫고 나간지라 곧 그 곳에 엎드러져 죽으매 아사헬이 엎드러져 죽은 곳에 이르는 자마다 머물러 섰더라(17-23)

결국 이 전투는 더 치열해져 전면전으로 펼쳐진 가운데, 이 전투에서 아브넬의 군대가 패배하고, 다윗의 부하들은 승리하게 됩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의 군대장관 아브넬은 기브온에서 퇴각하게 됩니다.

(1) 전쟁의 요약(17)

본문 “그 날에 싸움이 심히 맹렬하더니 아브넬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의 신복들 앞에서 패하니라.”(17)은 그날의 전쟁을 요약하여 설명합니다. ‘맹렬하다’로 번역된 ‘카쉐’는 ‘혹독하다’, ‘힘들다’를 의미하는 단어로, 여기서 전쟁의 양상이 극렬하였음을 표현합니다. ‘패하다’로 번역된 ‘나가프’는 ‘떼리다’, ‘치다’를 의미하는 단어인데, 이 동사의 니팔형은 흔히 전쟁에서의 패배를 가리킵니다(10:15,19; 대하 6:24).

(2) 요압의 형제들(18)

18-23절은 그날 치열하게 벌어진 전쟁 중 발생했던 중요한 사건, 즉 아사헬의 죽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먼저 18절에서 사건의 중심인물인 아사헬이 소개됩니다. 그는 스루야의 아들이며 요압의 동생이었는데, 노루처럼 빠르게 달릴 수 있었습니다. 히브리어 ‘처비’는 ‘영광’ 혹은 ‘노루’라는 의미를 지니는데, 다윗의 노래에서 사울을 상징하는 ‘영광’의 의미로 번역되었고(1:19) 본문에서는 아사헬의 날쌘 발을 상징하는 ‘노루’로 번역되었습니다. 전쟁 중에 죽은 두 사람, 사울과 아사헬이 ‘처비’라는 단어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3) 아사헬의 죽음(19-23)

이스보셋의 군대가 다윗의 군대에 패하여 도주하는 때에 아사헬은 적군의 대장 아브넬을 추격하였습니다. 한글 성경에서 ‘달려가되’라고 번역된 ‘라다프’는 ‘추격하다’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라는 표현은 아브넬을 반드시 죽이겠다는 아사헬의 집념을 표현합니다. 아브넬은 다윗 군대의 사령관인 요압과 그의 형제들에 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브넬이 자신을 끈질기게 뒤쫓는 자가 아사헬임을 알았을 때, 그는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아사헬에게 ‘좌우로 치우치라’고 충고했습니다. 아브넬은 이러한 표현을 통해 아사헬의 끈질긴 추격이 실제로는 어리석은 행동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브넬은 아사헬에게 병사 중 하나를 잡아 그 군복을 빼앗고 그것을 전공으로 삼는 게 나을 것이라 말해주었습니다. 군복으로 번역된 ‘할리차’는 성경에 단 두 번 사용된 단어이며, 군인들의 복장을 의미한다고 여겨집니다(삿 14:19; 삼하2:21). 명예욕에 붙잡힌 아사헬이 아브넬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아브넬은 자신이 그를 죽일 수도 있다고 경고했습니다(2:22). 아브넬은 아사헬의 형 요압을 생각하여 될 수 있으면 아사헬을 해치지 않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아사헬이 아브넬의 충고를 거절하고 계속 뒤쫓았고, 아브넬이 창으로 그를 찌르니 창끝이 배를 꿰뚫었습니다. 아사헬이 엎어져 죽었는데, 아사헬이 죽어 있는 것을 본 사람들이 그 자리에 멈춰 섰습니다.

 

기브온 전투의 결과(24-32)

하나님께서는 점점 하나님의 세우신 다윗의 나라를 이루어 가심을 보여준 것입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승리를 주십니다. 이스보셋의 나라를 인간이 인위적인 방법으로 세운 나라입니다. 그래서 처음 시작은 굉장하게 시작하지만 점점 시들해집니다. 하지만, 다윗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을 따랐기 때문에, 다윗을 따르는 유다 한 지파가 나머지 열한지파를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점점 다윗의 나라를 부흥시켜 주신 것입니다.

24요압과 아비새가 아브넬의 뒤를 쫓아 기브온 거친 땅의 길 가 기아 맞은쪽 암마 산에 이를 때에 해가 졌고 25베냐민 족속은 함께 모여 아브넬을 따라 한 무리를 이루고 작은 산 꼭대기에 섰더라 26아브넬이 요압에게 외쳐 이르되 칼이 영원히 사람을 상하겠느냐 마침내 참혹한 일이 생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언제 무리에게 그의 형제 쫓기를 그치라 명령하겠느냐 27요압이 이르되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무리가 아침에 각각 다 돌아갔을 것이요 그의 형제를 쫓지 아니하였으리라 하고 28요압이 나팔을 불매 온 무리가 머물러 서고 다시는 이스라엘을 쫓아가지 아니하고 다시는 싸우지도 아니하니라 29아브넬과 그의 부하들이 밤새도록 걸어서 아라바를 지나 요단을 건너 비드론 온 땅을 지나 마하나임에 이르니라 30요압이 아브넬 쫓기를 그치고 돌아와 무리를 다 모으니 다윗의 신복 중에 열아홉 명과 아사헬이 없어졌으나 31다윗의 신복들이 베냐민과 아브넬에게 속한 자들을 쳐서 삼백육십 명을 죽였더라 32무리가 아사헬을 들어올려 베들레헴에 있는 그의 조상 묘에 장사하고 요압과 그의 부하들이 밤새도록 걸어서 헤브론에 이른 때에 날이 밝았더라(24-32)

표면적으로는 다윗의 군대가 이겼지만, 아무도 상대방을 압도할 정도의 승리를 거두지 못한 채 각 진영으로 돌아갑니다. 360명을 잃은 아브넬의 북쪽 이스라엘과 19명의 정예 군사와 아사헬을 잃은 남쪽 다윗의 군대 모두 손실을 입었습니다.

(1) 전투 중단을 제안하는 아브넬(24-26)

요압과 아비새가 아브넬의 군대를 추격하다가 기브온 광야 길에 있는 ‘기아’ 맞은 편 ‘암마’ 산에 이를 때 해가 졌습니다. ‘기아’와 ‘암마’는 여기서만 나타나는 지명입니다. 해가 졌으므로 전투를 계속하기 힘들었습니다.

추격을 당하여 흩어졌던 베냐민 사람들이 아브넬에게 모여들어 한 무리를 이루었고, 한 언덕의 정상에 섰습니다. 여기서 베냐민 사람이라는 칭호는 아브넬의 병사들이 주로 베냐민 지파 사람으로 구성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아브넬이 요압을 불러 전쟁을 중단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칼이 영원히 사람을 상하겠느냐’(2:26). 여기서 ‘상하다’는 ‘아칼’이며 문자적으로는 ‘먹다’, ‘삼키다’를 뜻합니다. 칼이 삼킨다는 것은 전쟁에서 칼로 사람을 살육함을 가리킵니다. 아브넬은 칼이 사람들을 죽이도록 내버려 둔다면 아사헬이 죽은 것처럼 또 다른 참혹한 일이 생길 수 있으리라고 요압에게 경고했습니다. 이는 비참히 죽은 동생에 대한 복수심에 사로잡혀서 분별력을 상실하지 말라는 아브넬의 충고였습니다. 또 아브넬은 지금은 서로 적군이 되어 싸우지만 실제로는 한 형제이므로 지나치게 싸우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2) 요압의 답변(27-28)

아브넬의 제안에 답하기 전에 요압은 먼저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였습니다. 히브리어 ‘하이’(사시거니와)는 맹세를 나타내는 관용어구입니다. 그리고 요압은 아브넬이 애초에 선발된 병사들의 싸움을 제안하지 않았더라면 서로 싸우지 않고 아침에 이미 돌아갔을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요압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면서, 형제들 사이의 비참한 전쟁에 대한 책임이 아브넬에게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요압이 나팔을 불자, 병사들이 싸움을 멈추고 제자리에 서서 다시 싸우려하지 않았습니다.

(3) 아브넬 군대의 퇴각(29)

아브넬과 그의 군사들은 아라바를 지나 요단을 건넜고, 계속하여 비드론 온 땅을 지나서 마하나임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아라바는 사해 위쪽 요단강 서편 계곡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비드론은 요단강 동편의 계곡에 있는 어느 장소일 것입니다. 아브넬과 그 병사들이 전쟁터를 떠나 마하나임에 이르기까지 밤새도록 행진해야 했습니다.

(4) 요압 군대의 퇴각(30-32)

요압이 전쟁을 중단하고 병사들을 모으니, 아사헬과 병사 19명이 비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죽인 베냐민 사람과 아브넬의 부하들은 360명이었습니다. 아사헬은 베들레헴의 가족 묘지에 장사되었고, 요압과 병사들은 밤새 행진하여 해가 뜰 무렵에 헤브론에 도착했습니다.

 

나가는 말

영적 전쟁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죄를 멀리하고, 싸울 때와 멈출 때를 잘 알아야 합니다. 개인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맹목적인 싸움을 싸우느라고 힘 빼지 않고,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영적인 싸움에 일을 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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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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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순위에 대해 가르치신 예수님

마태복음 6장 25-34절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삶의 질을 물질에 따라 좌우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돈을 하나님과 지위에 겨룰 만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현대 성도들에게 돈과 물질 사용은 믿음의 진정성을 드러내는 잣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 가지 대조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물질을 다루어야 하는지 가르쳐주십니다.

 

본 단락은 제자들의 새로운 삶의 방식에 대한 추가적 가르침입니다. 특별히 재물과 염려의 문제를 다룹니다. 이 둘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재물을 땅에 쌓으며 재물을 좇다 결국 재물의 노예가 되어 삽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재물이 아닌 하나님만을 섬기며, 그분께 전적으로 삶을 의탁합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돌봄 아래 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삽니다. 그러므로 전혀 염려할 게 없습니다.

 

재물에 대한 가르침(25-30)

아이들이 염려하지 않는 것은 부모를 전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늘 아버지를 신뢰하는 자녀는 염려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먹고 사는 사는 문제에 대해서 너무 지나치게 염려하는 것은 믿음이 부족한 삶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5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28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25-32)

의식주는 인간의 기본적인 필수조건입니다. 의식주가 해결되어야 안정적이고 행복한 생활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것들조차도 하늘 아버지에 맞기고 염려하지 말 것을 강조하십니다. 제자들은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로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25).

생명이, 몸을 보호하는 옷보다 몸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하늘의 새와 들의 풀을 보면서 염려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생각해야 합니다(26-30).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는 새들도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는데 하물며 열심히 수고해서 일하는 제자들, 아버지와 아들 관계에 있는 제자들을 돌보지 않으시겠는가! 공중에 나는 새를 기르시고 들의 풀과 꽃을 아름답게 입히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하물며 사랑하는 자녀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먹이고 입히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는 들꽃보다 중요하고, 솔로몬보다 소중하므로, 아버지께서 자녀를 지극히 소중하게 여기시고 필요를 채워 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믿음이란 하늘 아버지께서 자녀를 위해 행하실 것을 신뢰하는 것이며, ‘믿음이 작은 자’는 아버지께서 자녀의 생존과 필요를 위해 제공하실 것을 신뢰하지 못해서 두려워하는 사람입니다. 제자들은 기본적으로 신뢰심이 있으나 이 신뢰심이 더 커져야 염려하지 않게 됩니다.

염려는 영적 문제와 직결됩니다. 염려의 배후에는 불신이 있습니다. 염려거리를 하나님 아버지의 기적이 예비된 일로 보는 믿음의 시각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믿음의 기도로, 감사함으로 구하시길 바랍니다(빌 4:6-7). 그러므로 하늘 아버지의 돌보심과 제공을 믿는 제자는 먹고 입는 문제로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31-32).

하늘 아버지는 자녀들의 모든 필요를 이미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나와서 믿음의 간구하길 원하십니다. 자녀들이 하나님께서는 간절히 나오기를 기다리십니다.

 

먼저 구해야 할 것들(33-34)

하나님께서는 필요한 모든 것을 아시고 공급해 주시는 하늘 아버지입니다. 따라서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섬기며 하나님의 나라와 뜻에 마음을 두고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에 어떤 것보다 더 먼저 구해야할 것을 가르쳐 주시고 계십니다.

33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32-33)

하늘의 아버지는 제자들에게 무엇이 요한지 알고 계십니다(6:8). 그러므로 제자들은 염려 대신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해야 합니다. ‘먼저’는 순서에서의 우선됨을 의미하는 ‘무엇보다도’, ‘특별히’의 뜻입니다. ‘먼저 … 구하라’는 나머지 일은 관심을 덜 가져야 할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다른 것도 중요하지만 아버지의 나라와 그의 의를 우선순위로(참조, 23:26) 여기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이 구해야 하는 하늘나라와 의가 무엇인지는 산상설교 전체에서 제시되었습니다. 제자는 자녀를 돌보시는 하늘 아버지의 나라를 먼저 구해야 합니다. 여기서 ‘하늘나라와 의’는 하나님의 선물 또는 은혜입니다. 하늘나라가 선물이며 은혜라면, 뒤에 나오는 하늘 아버지의 의는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염려하지 않고 하늘 아버지의 나라와 의에 우선권을 두었을 때 이 모든 것,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십니다. 하늘 아버지의 자녀라고 해서 건강과 행복과 번영을 보장받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 려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 때문에 찾아오는 고통도 있습니다(5:10-12; 10:16-39; 24:9-13). 그러나 괴로움과 고통 때문에 염려하기보다 오늘의 삶을 돌봐주시는 하늘 아버지의 손에 내일을 맡겨야 합니다(34). 제자들이 믿어야 하는 하나님께서는 동정심과 긍휼로 돌보시는 아버지이시며 내일을 주관하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제자들이 염려하지 말아야 하는 근거는 그들이 믿는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사실입니다. 하늘 아버지가 제자들이 오늘과 내일의 괴로움을 극복할 수 있는 원천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오늘과 내일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내일이 오늘이 되면 동일한 천부께서 제자들을 자녀로 돌보시기에, 내일 벌어질 괴로움을 미리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늘 아버지는 괴로움 자체를 없애주실 수도 있고 괴로움을 견디는 힘을 주실 수도 있습니다. 하늘 아버지는 자녀가 원하는 방식대로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늘 아버지는 제자들이 원하는 대로는 아닐지 라도 괴로움 가운데 있는 제자들의 필요를 아시 기에, 괴로움을 안고 있는 제자들을 돌보십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우리들은 하나님의 돌보심과 도우심을 믿습니다. 우리는 생활에 대한 염려와 불안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나가는 말

예수님의 제자들의 삶에 우선순위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와 의를 추구할 때 그에 필요한 모든 능력과 자원들을 허락하십니다. 우리는 단지 먹고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일을 통해 하나님의 의와 나라를 이루어갈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것을 구하기에 힘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주의 제자들 하나님 자녀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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