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마태복음(01-01)

 

전남 강진군 신전면 주작산에 바라본 강진만
마태복음(01-01).pdf
0.09MB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마태복음 11-17

 

얼마 전에 족보를 조작하여 만든다는 소식을 접한 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자신의 가문을 미화하는 작업일 것입니다. 족보는 자신이 속한 뿌리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바로 그 메시아일 뿐 아니라, 모든 민족과 모든 사람들의 메시아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증명해 줍니다.

 

마태는 유대인이면서도 동족에게 천대를 받는 세리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으로 변화시켜 동족을 위해 전도자로 사용하셨습니다. 구약에서 예언하고 있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며, 그분이 메시아이심을 알리기 위해 마태복음을 썼습니다. 그는 혈통과 족보를 중시하는 유대인으로 마태복음을 예수님의 족보 이야기로부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이스라엘을 위한 그리스도이시며, 다윗의 자손이로서 왕적 그리스도이심을 밝힙니다.

 

마태복음의 제목(1)

역사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순종으로 언약이 희미해져갈 때, 주의 섭리하신 때를 좇아 아들 예수님을 보내셔서 첫 언약을 뛰어 넣고 첫 이스라엘을 뛰어넘는 새로운 시작을 여셨습니다. 마태복음 1장은 하나님께서 약속을 성취하신 것에 대한 예수님의 족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1)

마태복음의 첫 포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고, 예수님의 긴 족보로부터 시작합니다. 더욱이 첫 절은 책의 제목으로서 마태복음 전체의 주제를 포괄하며, 동시에 1장의 내용을 요약하는 역할 합니다.

 

(1) 그리스도의 세계(1)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그의 시대가 열리고, 그 분이 다시 오실 때 새 시대’(19:28)가 시작될 것입니다. 탄생할 아이의 이름인 예수님께서는 주께서 구원하셨습니다, 혹은 미래적으로 주께서 구원하실 것이다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Xριστός)기름 부음 받은 자를 뜻하는 히브리어 메시아의 헬라어 칭호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날 당시에 유대인들의 메시아 기대 사상은 다윗의 후손이 나라를 다스릴 것이라는 구약의 예언에 근거했습니다(. 49:10, 24:17; 2, 89; 3:4,5; 삼하 7, 11; 30:8,9; 34,37; 5:2). 그들은 군사력을 동원해서 이스라엘을 해방할 수 있는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2) 다윗의 아들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아들이십니다. 다윗의 아들은 유대인들이 가장 익숙하게 사용하고 기다린 메시아 칭호로서 마태복음(1:1; 9:27, 12:23; 15:22, 20:30,31, 21:9,15, 22:42, 43; 참조 22:45)에서 특히 강조됩니다. 다윗의 아들이 오는 것은 구원 역사가 절정에 이르렀음을 알립니다. 특히 다윗의 아들은 낮은 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긍휼, 치유하시는 모습을 강조합니다(9:27; 12:23; 15:22; 20:30,31; 21:14-17).

 

(3) 아브라함의 아들

예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아들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믿었기에, 이 칭호는 예수님께서 유대 혈통인 것을 강조합니다. 무엇보다도, 이 칭호는 온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목표가 예수님의 탄생으로 이뤄지기 시작한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 즉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복을 받게 될 것(창세기 12:1-3; 18:18)과 아브라함의 씨를 통해서 천하 만민이 복을 받는 것(창세기 22:18)을 성취하실 것입니다.

마태는 족보를 개관하면서 예수님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임을 강조합니다. 혈통적 기원과 더불어 아브라함과 다윗과 맺은 언약을 성취하시는 분임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성경의 모든 예언과 언약은 한 분이신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언약 이야기로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2-17)

의심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에 관한 기록들이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라 예수님을 미화하기 위한 창작물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마태복음은 예수님에 관한 기록들이 모두 역사적인 사실임을 처음부터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2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3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4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5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6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7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8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9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 10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몬을 낳고 아몬은 요시야를 낳고 11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들을 낳으니라 12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13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은 아소르를 낳고 14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을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15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16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17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2-17)

이 계보는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오랜 역사를 통해 기대되어 왔던 이스라엘을 위한 그리스도이심을 보여줍니다. 마태는 이러한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그분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제시할 뿐 아니라, 세 단락으로 구성된 전환점들을 연관시킵니다. 마태는 하나님 백성의 역사를 세 개의 기간으로 구분해서 제시합니다. 예수님의 계보에서 몇 가지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습니다.

 

(1) 이스라엘 역사의 축소판

첫째, 마태복음의 계보는 이스라엘 역사의 축소판으로, 하나님의 약속과 목적을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압축하면 17절의 내용과 같이 아브라함다윗바벨론 포로다윗의 아들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구원의 역사이며, 구원은 하나님의 개입(또는 섭리)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중개자들을 통해 백성을 구원하시는데, 왕의 역할이 특히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 보내신 다윗의 아들, 곧 왕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탄생으로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열방이 구원으로 초대받게 될 것입니다.

 

(2) 다윗의 후손인 예수

둘째 마태는 계보의 초점을 다윗에게 맞춥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우연히 또는 갑자기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오랜 계획에 따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다윗의 후손을 왕으로 보내겠다는 약속에 담겼기에, 예수님의 탄생은 이 약속의 성취입니다. 마태는 다윗의 음가인 14를 사용해 다윗에게 약속된 하나님의 계획이 다윗의 아들인 예수님을 통해 성취된 사실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런데 계보에 나타난 구원 역사의 중심인물이 다윗이라면, 중심 사건은 바벨론의 포로생활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날 당시 이스라엘은 여전히 바벨론의 포로처럼 로마의 압제 하에 살았습니다. 다윗의 아들은 바벨론의 속박 가운데 살아가는 백성을 구원하는 일을 위해 성육신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소식은 이사야 선지자가 선언한 복음이며(이사야 52:7),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 통치하시므로 예수님의 탄생이 곧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왕(-다윗의 아들)으로서 다스리시는 나라는 자유와 회복의 나라입니다.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하는 속박된 상태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복음은 예수님께서 해방과 자유를 위해 성육신하셨다는 소식입니다.

 

(3) 네 여인이 등장한 족보

셋째, 예수님의 계보에는 네 명의 여자가 등장합니다. 네 여자의 공통점은 이방 출신이라는 것입니다. 이방 출신 여자들이 메시아의 계보에 들어간 것은 온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이미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들어 있었음을 알립니다.

또한 네 여인은 일반적이지 않은 임신과 출산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여호와의 날개 아래 거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모친 마리아도 당시의 관습에서 수용하기 어려운 임신과 출산을 했으나,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적극 참여하는 길을 선택 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계보는 선교하시는 하나님을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민족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기 위해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 특히 이방인들을 치유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개인이나 교회도 예수님의 계보가 강조하는 선교를 위해 부름 받습니다. 계보에서 의미하는 선교는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는 소식이므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포로(계보에서는 바벨론’)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회복을 경험하거 됩니다. 성도와 교회에게 세상은 싸워야 할 대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할 긍휼의 대상입니다. 교회는 언제나 모든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열망을 기억해야 합니다.

 

(4) 하나님 교회에 대한 정체성

넷째, 예수님의 계보는 하나님의 백성 또는 교회의 정체성을 가르칩니다. 예수님의 계보에 기록된 인물 중에 유다와 여고냐에게만 형제들이라는 단어가 붙습니다. 유다는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의 넷째 아들입니다. 그는 며느리와의 관계를 통해 쌍둥이를 낳은 나쁜 사람입니다. 얼핏 보기에 영화나 이야기책의 주인공으로 자주 등장하는 요셉이 예수님의 계보에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메시아의 조상으로 선택하신 유다는 죄와 비참함을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희생해서 형제들을 구하려고 한 인물입니다.

유다는 막내 베냐민을 대신해서 자신을 종으로 삼으라고 간청합니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이 약 사백 년 동안 이집트의 종살이를 하게 되는 시점에 일어났으므로, 유다의 형제애는 노예 백성이 인내할 수 있게 만든 힘이었습니다. 바벨론 포로로 살았던 유대 인들은 이스라엘(유대의 왕이었던 여고냐가 자신을 희생해서 항복함으로써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고 도성이 도륙당하는 것을 막았다고 평가했습니다.

따라서 유다와 여고냐는 동족과 민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사람들입니다. 이는 자연스럽게 예수님과 그의 형제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형제(참조 18:21,35: 23:8; 25:40; 28:10)로 부르며 그들을 위해 목숨을 주기까지 희생하셨습니다. 겟세마네 기도에서도 예수님의 시선은 제자들을 향했습니다(26:36-46), 부활하신 예수님의 관심은 내 형제들’(28:10)을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기독교의 정신은 낮아짐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형제들을 살릴 수 있고, 그런 형제애가 둘 이상이 모인 모임들을 복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아무개와 그의 형제들이야말로 갑과 을의 관계에 익숙한 우리 시대가 진정으로 갈망하는 표현이 아닙니까? 살아가면서 권한과 책임을 맡을 기회는 얼마든지 우리에게 찾아올 수 있습니다. 나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겸손과 헌신이 그들을 나의 형제들로 만듭니다.

 

족보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그분의 언약에 신실하셨는지를 보여줍니다. 나아가 다윗의 후손이신 예수님께서 세우신 나라가 얼마나 영광스럽고 은혜가 충만한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영광스런 왕의 백성이며 충만한 은혜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 주님의 통치 아래 살 때 천국을 유업으로 얻습니다.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