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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20-02)

 


살아있어 능력 있는 복음

사도행전 20장 13-27절


 

엣날에 신문을 받아보면 많은 사람이 먼저 보는 것이 ‘오늘의 운세’였습니다. 그만큼 사람들은 자신들의 미래와 또 어떤 방향으로 나갈까 하는 궁금한 의문들이 다 있다는 것입니다. 당신에게 확실한 미래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우리는 다 죽습니다.’ 그리고 때문에 죽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관심은 어떻게 이 세상을 편하고 안락하고 멋있게 그리고 잘 살 것인지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삶은 그런 삶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삶을 살았기에 일반적인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았겠습니까?

 

  • 본문에는 사도 바울은 오순절이 되기 전에 예루살렘에 도착하려고 여행을 재촉합니다. 그는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초청하여 석별의 정을 나눕니다. 장로들은 에베소에서의 사역과 위험이 기다리는 앞날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사명에 대한 결의를 다지고 에베소 장로들에게 이별을 고합니다.

 

에베소에서의 목회를 회고하는 바울(17-21)

사명자로서 일생일대의 결단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중인입니다. 증인이 입을 다물고 있거나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은, 또 다른 죄입니다. 지금도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듣지 못해 죽어 가는 사람이 이곳저곳에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삶의 현장에 보냄을 받은 예수님의 증인들입니다.

 

17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18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19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20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21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17-21)

 

에베소에 가면 예상치 않은 일들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배가 출항하기까지 남은 시간에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밀레도로 불러서 권면하려는 계획을 세웁니다(17). 이를 위해 바울은 동역자 중 한 명을 에베소에 보냅니다. 장로들의 주된 역할은 교회를 목양하고 진리에 따라 성도들을 인도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아시아 지역에 도착한 첫날부터 어떤 태도로 목회했는지를 장로들에게 상기시킵니다. 바울은 이런 태도를 설교의 시작(18-21)과 마지막(31-35)에 배치함으로써 장로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모본으로 삼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19절에서 종으로서 주를 섬긴 것을 강조합니다. 종으로서의 사역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입니다(참조. 눅 22:26-27). 바울은 종으로서 복음을 증언하는 일(행 20:24)과 동료들의 필요를 채우는 섬김의 일(행 20:34)을 하였습니다. 섬기는 삶은 세 가지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곧 겸손과 눈물과 시험을 견디는 것입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시험으로 생긴 시련을 겪으면서도 처음부터 겸손과 눈물로 주를 섬겼습니다(행 13:50; 14:2–7,19; 17:5-9,13; 18:6,12-17; 19:9; 20:3).

 

바울이 헌신적으로 전한 메시지는 교회에 ‘유익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의 죄가 용서함을 받고, 믿는 자들은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게 되고, 다가올 심판에서 구원을 얻게 된다는 측면에서 복음은 매우 유익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복음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따라 살도록 인도하기 때문에, 즉 거룩하지 않은 세상에서 거룩한 인생을 살도록 돕기 때문에 모두에게 유익합니다. 복음이 이처럼 유익한 것이므로 바울은 침묵하지 않고 담대하게 복음을 있는 그대로 전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에서 장로들이 복음의 진리 전하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복음의 진리를 희석시킬 위험성이 있었습니다(참조, 고전 2:17: 4:2-5: 4:16).

21절은 20절과 평행을 이룹니다. 바울이 20절에서 공개적인 장소와 가정에서 물러서지 않고 담대히 전하고 가르친 ‘유익한 것’은 21절에서 ‘회개’와 ‘믿음’으로 표현됩니다. 말하자면, 회개와 믿음은 바울이 20절에서 말한 ‘유익한 것’을 요약하는 내용입니다. 회개는 방향의 전환, 즉 돌이키는 것을 의미하므로, 회개에는 떠나야 할 대상이 있으며 돌아가야 할 대상이 있습니다. 회개(행 17:30:26:18, 20)와 믿음(행 11:17; 14:23; 16:31; 20:21; 24:24; 갈 2:16; 3:26; 빌 1:29)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행 2:38; 3:19; 14:15; 17:30-31). 바울은 회개를 ‘하나님을 향한’ 것으로(개역개정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대상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밝힙니다. 회개는 의존하던 것에서 돌아서서 예수께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적대적인 방향(우상: 행 14:15; 17:30-31)에서 돌아선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습니다(행 13:38-41; 16:31; 17:2-3).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된 하나님을 향해 돌아와야(return) 하고 이방인들은 그들이 섬기던 신들에서 참 하나님을 향해 돌이켜야 합니다(turn). 이처럼 회개는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필요한 메시지로서(참조, 롬 3:19-4:25; 10:8-13), 바울은 성도들이 모인 가정과 믿지 않는 자들이 모이는 공개적인 장소에서 회개와 믿음을 전했습니다.

 

회개하고 예수를 믿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유익한, 곧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저마다 각기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의존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복음이 진정으로 유익한 것이라고 이들을 가르치려면, 겸손과 눈물과 시험을 견디는 것이 뒤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 외의 것이 유익한 줄 알고 그런 것에 의존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언제나 사람들에게 절대적으로 유익한 것은 예수님을 믿는 일이라는 확신을 갖습니다. 또한 성도들은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것으로부터 계속해서 돌이켜야 합니다. 그래서 회개와 믿음은 신자들에게도 불변의 명령입니다(참조, 롬 2:4; 고후 7:9-10; 12:21: 딤후 2:25-26). 그리스도인들의 관심은 언제나 진정으로 유익한 것을 겸손과 눈물과 참음으로 가르치는 데 있습니다.

 

미래를 하나님의 말씀에 맡겨진 바울(22-27)

오늘날 물질만능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인생을 즐기며 자신을 위한 삶을 살라는 유혹을 받습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이러한 분위기에 휩쓸려 인생을 낭비하지 말고 오직 성도의 길을 걸어가라고 가르쳐 줍니다. 주님이 주신 사명에 충성하여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 죽기까지 충성한 사도 바울의 본을 끝까지 따라가야 합니다.

 

22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25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26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27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22-27)

 

사도 바울은 거리낌 없이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복음에 유익한 것이라면 어디에 있든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복음 증거 때문에 목숨이 위태로울 때도 있었지만 그것이 사명이었기에 결코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1) 예루살렘에 있게 될 바울(22-24)

 

바울은 성령이 인도하시기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말합니다(21:4, 11). ‘매다’, ‘사로잡다’, ‘묶다’ 등의 뜻인 ‘데오(δεω)’의 수동태를 사용해서 자신의 계획과 뜻이 아니라 성령님에 의해 자신이 예루살렘에 가는 것임을 표현합니다. 아울러 완료형(데데메노스,δεδεμενος)을 사용하여 성령의 뜻이 이미 주어졌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성령의 뜻에 따라 예루살렘으로 향하지만, 그곳에서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 모른다고 말합니다(22b). 투옥되고 환난을 겪게 되는 것(23)은 분명하지만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합니다. 바울의 관심사는 자신의 목숨이 아닙니다. 운동장의 육상 선수처럼 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코스를 완주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고난이 있다고 하여 경주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끝내 로마까지 완주할 것을 결심합니다(19:21). 자신이 이 사명을 예수님께로부터 받았다고 증언합니다. 그는 자신이 예수님의 종으로서 주님의 사명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하고 이 사명을 마치는 것이 자신의 일임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마치 예수께 소속된 육상 선수와 같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목표, 곧 예수님께 받은 사명을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를 통해 죄를 용서받게 되고 새 생명을 얻게 된다는 사실은 참 은혜이며, 복음의 핵심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인생이란, 내 계획을 단순히 성령이 도와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엄밀히 말해, 성령의 인도하심에 내가 순종하는 것입니다. 내 계획대로 잘 풀리지 않거나 난관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믿는 신자는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조바심을 내며 묻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난과 역경이 찾아오더라도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코스를 완주할 용기를 주시도록 기도합니다.

 

(2) 과거 사역에 대한 확신(25-27)

 

바울의 에베소 사역은 ‘그 나라’, 즉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한 것으로 요약됩니다(행 19:8; 28:23,31). 복음이란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소식입니다(사 52:7).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 곧 하나님 나라를 전한다는 것은 복음을 전한다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목회에서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해 깨끗하다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해 깨끗하다는 표현은 에베소에서 영적으로 (영원히) 죽은 자들에 대한 책임이 자신에게는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에스겔 3:17-21에 있는 파수꾼과 같이 생각합니다. 만일 백성에게 경고하지 않아서 악인이 ‘죄악 중에서’ 죽게 되면, 선지자는 악인의 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겔 3:18). 그러나 파수꾼이 악한 자들에게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하나님은 선지자에게 악인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으십니다(19). 이와 같은 맥락에서 바울은 다가을 심판의 위험을 알려야 하는 영적인 파수꾼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든 뜻(계획)을 물러서지 않고 전했습니다(27). 만일 에베소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아 심판을 받는 운명에 처한다면, 그것은 바울의 책임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 나라, 즉 은혜의 복음을 선포하는 사역을 신실하게 수행했음을 확신합니다. 파수꾼의 역할은 하나님 나라(25), 즉 하나님이 통치하다는 소식(=복음)을 물러서지 않고(27) 증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소식만이 개인과 사회의 유일한 소망임을 담대히 전하지 않는 교회와 복음의 일꾼들하거나 그런 것을 열심히 가르치는 사람들이 받을 책에게 하나님은 책임을 물으십니다. 복음 아닌 것에 의존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복음 증거자는 복음에 대한 분명한 확신과 자기 인생에 대한 진지한 각오를 다져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바울 사도로부터 이러한 확신과 각오를 본받아야 합니다. 험한 세상에서 열매 맺는 인생이 되기 위해 일사각오의 믿음으로 달려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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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20-01)


환난 중에도 편만하게 확산된 교회

사도행전 20장 1-16절


 

복음의 능력은 단순히 전달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를 통해 나타나는 능력입니다. 성령은 복음의 증거를 위해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동역자들을 주시며,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복음의 열정이 가득할 때 그 만큼 시험도 가득합니다.

 

  • 3차 선교여행 중에 있는 바울과 선교팀은 마게도냐, 헬라, 드로아의 교회들을 격려합니다(20:1-12). 복음 증거에 따른 능력이 나타납니다. 사도 바울이 마게도냐, 헬라, 드로아로 이어지는 선교 여행을 수행합니다. 드로아에서는 바울의 강론을 듣던 청년 유두고가 졸다가 떨어져 죽는 사건이 발생하지만, 바울이 유두고를 다시 살리고, 교회는 이 사건으로 큰 위로를 받습니다.

 

중단할 수 없는 복음(1-3)

길이 순조로울 때든지 막힐 때든지 하나님을 더 깊은 뜻을 그때마다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경우든지 우리는 충성할 뿐이고, 하나님의 더 깊은 지혜를 신뢰하면서 막히면 낙담하기보다는 돌아가고 물러나고 멈추었다 가면 됩니다. 바울은 사역에는 여러 가지 난관이었습니다. 난관이 있을 때, 그곳을 피하여 새로운 길로 나갔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소요가 그치매 바울은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떠나 마게도냐로 가니라 2그 지방으로 다녀가며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헬라에 이르러 3거기 석 달 동안 있다가 배 타고 수리아로 가고자 할 그 때에 유대인들이 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하므로 마게도냐를 거쳐 돌아가기로 작정하니(1-3)

 

에베소에서 일어난 소요 사태는, 바울을 에베소를 떠날 시간이 되었다는 사인이었습니다. 서기장의 탁월한 개인으로 대소동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바울은 원래 의도대로 마게도냐로 떠나기로 했습니다. 그동안 소요로 두려움을 느꼈을 정들었던 제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마게도냐로 떠났습니다(1).

마게도냐에 도착한 바울은 목적지인 예루살렘(행 19:21)에 가는 도중에 2차 전도여행 때 세운 교회들을 방문하면서 제자들을 권면했습니다. 저자는 ‘그 지방으로 다녀가며’라 애매하게 기록하지만, 빌립보(행 16:11-40), 데살로니가 (행 17:1-9), 베뢰아(행 17:01-15) 등의 교회들을 방문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그곳에서 또한 제자들을 많은 권면을 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에 있을 때 디모데와 에라스도를 마게도냐로 먼저 보내 사전 준비 작업을 하게 했습니다. 이들이 미리 가서 준비한 대로 각 도시 방문을 추진했을 것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그리스, 아가야 지역에서 3개월 동안 머물렀습니다(주후 56-57년). 아덴(행 17:16-17,32-34), 겐그레아(롬 16:1; 참조. 행 18:18). 고린도(행 18:1-22)에 교회가 있었습니다. 권면과 격려는 바울의 사역과 설교에서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사도행전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마게도냐에서 바울은 고린도후서를, 그리스의 고린도에서는 로마서를 작성합니다(참조 롬 16:1,23). 바울은 언제나 자신의 안전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 곧 교회의 굳건함에 관심을 두고 이 일을 위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그 후에 바울은 배를 타고 수리아 지역으로 가려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3). 그곳에는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자신을 죽이려는 음모가 있었습니다. 원래 계획대로 되지는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의 여행 여정을 파악하고 배에서 은밀히 암살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여정을 바꾸어 다른 지역에서 사역을 계획합니다. 그 결과로 마게도냐로 돌아가서 드로아로 돌아온 것입니다. 간략하게 설명된 여정이지만, 부지런히 교회와 영혼을 돌보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모든 부분에서 열정의 지도자였습니다. 열정적인 전도자에게도 큰 시험거리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은 항상 그렇게 순조롭지 않습니다. 순조로울 때든지 막힐 때든지 하나님의 뜻을 완전하게 아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복음 증거는 결코 중단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 일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어떤 경우에든지 충성할 뿐이고, 하나님의 더 깊은 뜻을 순종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를 신뢰면서 나간다면 하나님의 뜻을 완전하게 성취할 것입니다. 복음 증거에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은 지치지 않도록 능력을 입혀 주십니다.

 

함께 사역하게 하는 복음(4-6)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기에 동역자를 보내 주십니다. 동역자들로 인해 복음 증거는 더욱 효과적으로 중단 없이 이뤄집니다. 여러분의 동역자는 누구입니까? 그와 함께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군들에게 동역자를 허락하셨습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 증거를 하는 동안 이처럼 선교한 지역 출신의 여러 사람들과 동행합니다(4). 바울에게는 그와 함께 전도자의 길을 가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울과 함께 움직였고, 최선을 다해 바울을 섬겼습니다.

 

4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 5그들은 먼저 가서 드로아에서 우리를 기다리더라 6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 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4-6)

 

바울 주변에는 돕는 동역자들이 많았습니다. 그중 몇몇은 다른 기록에도 나와 있듯이 바울의 제자로서 또는 돕는 사람으로서 여러 가지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복음의 증거는 힘든 일이지만 동역자가 있으면 외롭지 않습니다.

디모데와 에라스도는 먼저 마게도냐로 먼저 가서 바울을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헌금을 마련했습니다(사도행전 19:22). 그곳에서 이방인 성도들 중에 대표할 만한 일곱 명을 세워 드로아에서 바울을 기다립니다. 그들은 “우리”라고 표현된 바울의 측근들은 빌립보에서 무교절(유월절)을 지킨 뒤 배를 타고 그곳으로 건너갑니다.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찾아내는 바울의 모습은 참으로 대단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이방인을 제물로 바치는 복음의 제사장으로서(로마서 15:16), 이방인들과 유대인 사이의 장벽을 허무는 평화의 중재자로 알고(에베소서 2:13-15), 살기 가득한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향했습니다.

 

다시 살리는 두기고 사건(7-12)

우리들에게도 이러한 큰 시험거리들이 있습니다. 시험 앞에서 당신의 열정을 포기하지 마시고, 다시 일어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도울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 사역은 다른 영혼뿐 아니라 자신의 영혼도 살릴 것입니다. 복음은 사람을 살립니다.

 

7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8우리가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9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아 있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 층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 10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 하고 11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12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더라(7-12)

 

바울 일행은 드로아에서 일주일 동안 머물렀습니다. 그 기간에도 지역 성도들과의 고별의 만남을 가졌습니다(6). 사역을 멈추지 않고 계속적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떠나기 전날 바울의 일정 때문에 강론은 밤중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바울의 설교를 밤늦게까지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그곳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말씀을 듣기가 쉽지 않는 상황이 연출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큰 시련이 자신을 기다릴 줄 알았기 때문에 더 열정적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때 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창에 걸터앉아 있던 유두고라는 청년이 변을 당합니다. 바울의 길어진 설교를 견디지 못해 졸다가 그만 삼 층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말씀을 듣다가 창에서 떨어져 죽었습니다.

바울의 강론은 중단되었고 사람들은 두려움 가운데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것은 공동체에 큰 시험거리가 되었습니다. 열정에 사람이 열정적으로 말씀을 전하려하고, 그 말씀을 열심히 들으려고 했던 공동체가 큰 시험거리가 다가 온 것입니다.

 

바울이 강론 중단하고 죽은 청년의 몸을 안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10)라고 청중에게 말했습니다. 분명히 다른 사람들이 살펴 볼 때는 유두고는 죽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변에 비아냥거린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유두고는 다시 살아났고 강론은 진행되었습니다. 이 일로 사람들은 많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이 일이 일어난 시간은 “그 주간의 첫날”(7)이라고 소개합니다. ‘주일(主日)’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 모인 날입니다. 생명이 있어야할 날에 죽임이 있자, 공동체는 큰 시험에 빠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일에 부활의 예수님의 생명을 다시 유두고에게 주심으로서 그 공동체를 위로하신 것입니다.

 

드로아에서 밀레도에 도착하는 ‘우리’(13-16)

성도는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시간을 아끼고 충성해야 합니다. 성도에게는 하나님께 받은 사명과 계획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여유로운 여행이기보다 주님께 받은 사명을 이루기 위한 경주입니다(히 12:1). 바울에게는 속히 가야 할 곳이 있고, 마쳐야 할 사명이 있었습니다.

 

13우리는 앞서 배를 타고 앗소에서 바울을 태우려고 그리로 가니 이는 바울이 걸어서 가고자 하여 그렇게 정하여 준 것이라 14바울이 앗소에서 우리를 만나니 우리가 배에 태우고 미둘레네로 가서 15거기서 떠나 이튿날 기오 앞에 오고 그 이튿날 사모에 들르고 또 그 다음 날 밀레도에 이르니라 16바울이 아시아에서 지체하지 않기 위하여 에베소를 지나 배 타고 가기로 작정하였으니 이는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러라(13-16)

 

바울은 3차 선교 여행의 귀환 경로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13-15절에서 5개 도시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는 바울의 신속한 이동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서두른 이유는 오순절 이전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위해서였습니다.

 

13-16절은 드로아에서 밀레도까지 이어지는 선교팀의 여정을 기록합니다. 이 과정에서 선교 방식이 드러납니다. 첫째, ‘우리’, 즉 선교팀이 강조됩니다. 독자들은 14절에 다시 한 번 등장하는 ‘우리’라는 용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둘째, 여정의 계획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13-16절에 나타난 선교팀의 여정을 보면, 바울은 앗소에서 ‘우리’ 일행을 만났고, 모두가 배를 타고 미둘레네에 갔습니다. 미둘레네를 떠나 다음 날 기오(호머의 출생지)에 이르렀고, 다음 날에는 사모(피타고라스의 출생지)에, 다음 날에는 밀레도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모습은 세 달을 머문 헬라(행 20:2-3)와 일주일을 머문 드로아(행 20:6)의 경우와 다릅니다. 선교팀은 성도들이 있는 곳에서는 시간을 보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급히 이동했습니다. 물론 선교팀은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려고 급히 움직였는데, 이후에도 두로(행 21:4-6)와 가이사랴(행 21:10-12)에서 여러 날을 머물렀습니다. 이처럼 바울과 선교팀은 사람들을 가르치고 세우는 목적을 위해 시간을 집중했습니다. 선교와 목회의 최우선 과제는 사람을 살리며 회복하고 세우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시간을 아끼고 집중해야 합니다.

셋째, 설교뿐 아니라 형제애가 신자들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바울은 오순절(주후 57년 5월 29일)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위해 서둘렀습니다. 누가는 여기서 ‘에베소를 지나’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있는 에베소를 방문하고 싶었음을 암시합니다. 큰 도시인 에베소에 가면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하는 줄 알고 있는 바울은 에베소로 가지 않기로 결정합니다. 이방 교회들을 대표하는 일곱 명이 헌금을 직접 전달할 때 예루살렘 교회가 말할 수 없는 용기와 위로를 얻게 될 것이라 바울은 확신합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가족과 공동체에서 멀어져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예루살렘의 기근은 성도들의 삶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습니다(행 11:27-30). 바울은 이방 교회의 선물을 통해서 예루살렘 교회가 오순절이라는 명절에 기쁨의 순간을 맞이할 수 있도록 서둘렀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의 임재로 감격을 경험했던 교회(행 2:42-47)는 새로운 오순절에도 위로와 기쁨의 순간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유대 교회의 헌신으로 이방 교회가 개척됐고, 이제는 이방 교회의 헌신으로 유대 교회가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형제들이 마음으로 쏟는 헌신이 어려움 가운데 있는 형제에게는 엄청난 힘이 된다. 형제애를 통해서 헌신과 위로가 끊임없이 순환될 수 있습니다.


복음은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복음 증거는 사람이 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사람을 통해 전달됩니다. 복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쉼 없이 전하기 위해 동역해야 합니다. 이로써 잃어버린 영혼들이 구원받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은혜가 나타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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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19-03)

 


우상 장사 데메드리오에 의한 에베소 소동

사도행전 19장 23-41절


 

믿음 생활은 장애물 경주와 같습니다. 목표를 향해 달려갈 때 우리를 가로막는 장애물들이 있음을 예상해야 합니다. 달리면서 장애물을 뛰어넘는 것은 쉽지 않지만, 목표를 향해 가지 위해서는 필수적인 과정입니다. 한순간 한순간 힘차게 달려가면 장애물 하나 하나를 넘어서면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해 큰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 에베소에서 바울의 성공적인 선교 사역을 이루어가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막 에베소를 떠나려 할 시점에 큰 소동에 직면합니다. 바울의 사역 때문에 경제적인 위기를 느낀 은장색 데메드리오(Demetrius)는 사람들을 선동해 소요를 일으킵니다. 흥분한 무리가 바울의 동역자들을 붙잡고서 연극장에 모입니다. 하지만 일촉직발의 위험한 상황에서 에베소 관리인 중 한 사람 서기장의 지혜로운 발언으로 소요는 그치고 흩어집니다.

 

선한 결심의 장애물(23-27)

사람들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자신의 가치관을 따라 살아갑니다. 그 가치관이 공동체를 생각하는 것보다 더 자신의 이익을 대변할 때, 이기주의자라고 말합니다. 성도들은 성경의 가치관을 따라 살아갑니다. 자신의 이익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회피하거나 거부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일을 회피하기 위해 어떻게 자신을 합리화하곤 합니까?

 

23그 때쯤 되어 이 도로 말미암아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으니 24즉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 은으로 아데미의 신상 모형을 만들어 직공들에게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하더니 25그가 그 직공들과 그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풍족한 생활이 이 생업에 있는데 26이 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전 아시아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27우리의 이 영업이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신전도 무시 당하게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23-27)

 

바울은 에베소에서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가기로 작정하고 또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얼마간 에베소에서 잠시 머물면서 복음을 증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를 위한 바울의 원대한 계획은 뜻하지 않은 장애물에 부딪혔습니다. 에베소 내에 많은 사람이 우상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이것 때문에 경제적으로 타격을 입은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바로 그동안 우상을 만든 사람들이었습니다.

 

(1) 데메드리오에 의한 소동(23-24)

 

당시 에베소의 주요 사업은 아데미(Artemis)의 신상 모형을 파는 것이었습니다. 우상을 만들고 상업적인 수익을 얻던 사람들입니다. 그 중에 데메드리오 사람은 수익이 점점 감소 되자, 그는 같은 업종에 일하는 세공업자들을 충돌 질해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바울 때문에 이 사업에 지장이 생겼다면서 사람들을 선동해 에베소에 소동을 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에베소에서 생긴 소요는 다른 도시들에서 바울이 경험했던 위기나 어려움과는 다른 원인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의 폭동 원인이 지극히 종교적인 이유에서였다면, 에베소에서는 종교적인 색채로 위장한 경제적인 손실이 근본적인 이유였습니다.

 

(2) 소공품은 신이 아니다(25-26)

 

은 세공업자 대표인 데메드리오는 직공들과 판매업자들을 소집했습니다. 27절까지 이어지는 그이 연설은 바울의 기독교 선교 활동으로 인해 아데미와 관련된 종교적·문화적·경제적 영향력이 위축되고 있다는 위기를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데메드리오는 먼저 그들이 여기 모인 이유를 확인합니다. 그들은 모두 여신 아데미 숭배와 연관된 산업에 생활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활동은 이 산업에 막대한 타격을 주고 있습니다. 바울의 가르침에 감화되었다는 사실을 데메드리오는 알고 있습니다(10). 그는 바울이 사람들에게 아데미는 신이 아니라고 가르치는 것을 문제 삼았습니다(17:24-25, 29). 에베소와 아시아 속주민 중 이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은 은으로 만든 아데미 신상 혹은 신전 모형을 사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3) 바울의 사역이 가져온 변화(27)

 

데메드리오가 하는 말에 따르면, 바울의 선교 활동은 세 가지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첫째, 아데미 신상과 신전의 모형을 만드는 일의 가치가 폄하되고 직공과 판매업자 들의 생계도 위협받았습니다. 둘째, 에베소 시민과 각 속주에서 에베소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아데미 신전에 더 이상가고 싶어 하지 않게 됩니다. 이 또한 매출 감소로 이어질 것입니다. 셋째, 아데미에 대한 경외심이 빠른 속도로 사자집니다. 이로 인해 아데미를 도시의 신으로 모시고 있는 에베소의 영향력이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능력이고 살아 운동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능력을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악한 세력은 두렵고 놀라게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해 귀한 결심을 할 때 사탄의 공격이 뒤따릅니다. 바로 영적 전쟁의 시작입니다. 장애물이 나타난다고 해서 포기하면 안 됩니다. 선한 결심은 귀한 희생을 통해 열매를 맺습니다.

 

복음으로 인한 소동(28-32)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장애물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말씀에 의지한다는 것은 장애물을 넘어서는 결정할 때마다 말씀을 통한 결정을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당신의 결정권을 가질 때 주변 환경으로 경정하십니까? 군중심리에 의해 결정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결정합니까? 결정하는 방법은 당신의 인생의 가치관이 됩니다.

 

28그들이 이 말을 듣고 분노가 가득하여 외쳐 이르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니 29온 시내가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들어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 들어가는지라 30바울이 백성 가운데로 들어가고자 하나 제자들이 말리고 31또 아시아 관리 중에 바울의 친구된 어떤 이들이 그에게 통지하여 연극장에 들어가지 말라 권하더라 32사람들이 외쳐 어떤 이는 이런 말을, 어떤 이는 저런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28-32)

 

믿는 자들은 종종 세상의 반대를 경험합니다. 그것은 때로 우리를 낙심시키고 주눅 들게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복음의 능력과 그 실제적 도전을 방증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욕망과 무리의식에 사로잡힌 자들을 구원할 이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1) 아데미를 부르는 에베소 사람들(28-29)

 

데메드리오의 선동으로 에베소 사람들은 소동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28)라고 외치며 무서운 폭도로 변하기 했습니다. 이 외침에서 에베소 시민들이 지니고 있던 그 시에 대한 자긍심과 아데미에 대한 경외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아데미는 에베소를 세웠고 보호해 주는 수호신으로 여겨졌고, 그 신의 얼굴은 주화와 공문서에 그려져 있었습니다. 이 외침은 순전히 종교적 신앙을 독려하는 것만이 아니라 애국심을 자극하는 구호였습니다.

곧 온 시내가 요란해졌고, 군종들은 바울을 찾았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바울과 함께 다니던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고전 1:14)와 아리스다고(20:4; 27:2; 골 4:10; 몬 1:24)를 잡아 원형극장으로 끌고 갔습니다. 이 극장은 2만 명쯤 모인 곳입니다.

 

(2) 바울을 말리는 제자와 친구들(30-32)

 

바울의 동역자들이 죽게 될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광경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광란으로 변한 군중에게 들어가려 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이 만류했습니다. 그래서 ‘아시아 관리’인 그의 친구들도 바울을 만류했습니다. ‘아시아 관리’는 1세기 에베소의 고위 공무원을 의미합니다. 그만큼 바울의 영향력이 상류층까지 미쳤음을 사사합니다. 군중심리는 무섭게 난폭해졌고, 혼란 그 자체였습니다. 그들 중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했다”는 묘사는 이 모임의 혼란과 무질서를 짐작하게 합니다.

 

피할 길을 주는 하나님(33-41)

진리는 어두움을 방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어두움에 속한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자들은 자신의 이권을 방해하는 진리를 비난합니다. 진리에 속한 사람들은 진리를 위해 방어자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를 비난하고 공격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 어떤 생각이 듭니까? 그들이 아무리 기세등등해도 종국에는 꺾일 것을 확신합니까?

 

33유대인들이 무리 가운데서 알렉산더를 권하여 앞으로 밀어내니 알렉산더가 손짓하며 백성에게 변명하려 하나 34그들은 그가 유대인인 줄 알고 다 한 소리로 외쳐 이르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기를 두 시간이나 하더니 35서기장이 무리를 진정시키고 이르되 에베소 사람들아 에베소 시가 큰 아데미와 제우스에게서 내려온 우상의 신전지기가 된 줄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 36이 일이 그렇지 않다 할 수 없으니 너희가 가만히 있어서 무엇이든지 경솔히 아니하여야 하리라 37신전의 물건을 도둑질하지도 아니하였고 우리 여신을 비방하지도 아니한 이 사람들을 너희가 붙잡아 왔으니 38만일 데메드리오와 그와 함께 있는 직공들이 누구에게 고발할 것이 있으면 재판 날도 있고 총독들도 있으니 피차 고소할 것이요 39만일 그 외에 무엇을 원하면 정식으로 민회에서 결정할지라 40오늘 아무 까닭도 없는 이 일에 우리가 소요 사건으로 책망 받을 위험이 있고 우리는 이 불법 집회에 관하여 보고할 자료가 없다 하고 41이에 그 모임을 흩어지게 하니라(33-41)

 

복음은 우리 안에 있는 죄를 들춰내고 그것을 버리라고 요구합니다. 우리 안에 숨겨진 우상, 특히 돈에 대한 탐욕과 익숙한 죄의 습관들을 버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은혜와 영적 부요함을 더욱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1) 두 시간 동안의 외침(33-34)

 

군중 가운데에는 유대인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은 세공업자나 판매업자의 공동체에 고소된 사람들일 수도 있고, 단순히 거리에서 우연히 군중에 가담한 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 중 알렉산더라는 사람이 유대인의 대표자로 추천받아 나섰습니다. 이 이름은 바울이 에베소에 있던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들에 두 번 등장하고(딤전 1:20; 딤후 4:14), 그 중 두 번째 구절에 ‘구리 세공업자’라고 언급되지만, 그가 그리스도인인지 혹은 여기 사도행전에 언급된 알렉산더와 동일 인물인지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아마 추측건대, 동일 인물인 듯싶습니다.

알렉산더는 군중 앞에서 발언하려고 시도했지만, 군중은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라는 구호를 두 시간 동안 계속 외쳤습니다. 알렉산더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해쓴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마 바울이 전하는 도가 유대인들의 신앙과 다르며 에베소 시민들의 공공이익에 해가 된다는 주장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2) 서기장의 활약(35-41)

 

마침내 시정 당국의 대표자인 ‘서기장’이 나섰습니다. 그는 먼저 아데미의 ‘신전지기’로서 에베소의 특권을 상기시킵니다(35). 그렇게 군중의 공감을 얻고 난 후, 그는 당일 군중의 집회가 합당한 사유와 목적이 없는 경솔한 행동이며(36), 데미드리오가 대표하는 직공 공동체의 주장은 공식 재판을 통해 제출될 수 있다고 설득합니다(38). 만약 바울이 신전의 물건을 도둑질했거나 아데미를 공식적으로 비방했다는 증거가 없다면, 데메드리오와 그의 동료들의 주장은 법적 효력을 가지지 못합니다(37). 그는 책임 있는 공무원답게 이 소요 사건이 시 치안에 위험 요소라는 점도 지적합니다. 합당한 이유 없이 많은 사람이 모여 소란을 일으킨 일은 로마제국의 기준에서 불법 행위이기 때문입니다(40). 흥분한 에베소 군중은 이렇게 공권력의 개입으로 흩어졌습니다(41).


하나님을 향한 열심히 있다면 장애물을 두려워하지 말고 전진해야 합니다. 장애물이 아무리 크고 어려워 보여도 무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담대해 지시길 바랍니다. 믿음으로 전진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놀라운 방법으로 역사하셔서 그 장애물을 통과하게 해주십니다. 용기 있는 믿음의 사람은 마침내 목적지에 도달해 하나님이 주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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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19-02)

 


바른 신앙을 회복시킨 하나님

사도행전 19장 13-22절


 

유명한 명품일수록 가짜(짝퉁)가 많습니다. 위대한 인물일수록 거짓으로 흉내 내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가짜가 진짜의 진정성을 헤치기도 합니다. 복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진리를 왜곡하는 가짜 신앙이 오늘날도 독버섯처럼 곳곳에 자라고 있습니다. 그 가짜는 진리를 훼손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거짓 신앙으로부터 진정한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능력을 행하시자, 마술사의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이 바울과 예수의 이름을 빙자해 악귀를 쫓아내려 했습니다. 하지만, 악귀 들린 사람에게 봉변을 당합니다. 이 사건 때문에 마술을 행하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바울은 에베소를 떠날 계획을 세우고 동역자들을 먼저 마게도냐로 보냅니다.

 

예수를 빙자한 마술사들(13-16)

예수님의 이름은 마법으로 사용되는 이름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여 사용되는 이름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만이 그 능력을 온전하게 활용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이름만 빌려온 거짓 사역자를 거짓 아비인 마귀가 먼저 알아볼 것입니다. 거짓 신앙은 결국 벌거벗겨져 적나라한 불신을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13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삼아 악귀 들린 자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하더라 14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15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16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올라 눌러 이기니 그들이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13-16)

 

에베소 사역은 말씀 사역과 더불어 축사의 영역에서도 놀라운 열매를 맺었습니다. 사람들이 바울의 물건을 가져다가 병자의 몸에 얹기만 해도 치유가 일어나고 악귀가 떠나가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이 축사 사역은 또 다른 사역으로 인도했습니다. 바울과 같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사 사역을 시험 삼아 흉내를 내려는 사람들이 일어났습니다. 당시에 에베소는 교통의 중심지답게 헬라 문화와 종교의 중심지로 온갖 종교 장사꾼, 사기꾼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역사를 오용하려는 사람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1) 예수의 이름을 빙자한 사람들(13)

 

이제는 바울의 사역은 전도와 논쟁 같은 ‘말씀의 사역’뿐 아니라 ‘능력의 사역’을 포함했습니다. 바울의 능력은 하나님의 수단일 뿐입니다. 이곳에서 병든 자들이 낳았고, 심지어는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지고 병든 사람들이 낳았고 악귀는 떠났습니다(9:12). 이 일들은 소문이 나고, 에베소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2) 거짓 스게와 아들들(14-16)

 

바울의 치유 사역은 많은 사람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 사역을 보면서 에베소에게 종교적 마술하던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중 유대인 순회 ‘마술사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이방 종교와 마술에 심취한 유대인들인 듯합니다. 이들은 바울의 축사 사역을 모방하려고 악한 영을 지닌 사람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으로 시험 삼사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문처럼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명한다”라며, 예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명령했습니다. 바울과 예수님의 이름을 빙자했지만, 웃지 못할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유대인들 중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그런 일을 시도해보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있어야 할 제사장의 아들들이 속주 아시아의 수도인 에베소까지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지만, 제사장 가문의 사람들이 이런 일을 행하고 있다는 것은 유대교에 대한 배교(背敎)입니다.

 

악귀는 그들이 사기꾼임을 알아보았습니다. 악귀가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15) 라며, 그들이 예수님 및 바울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 그리고 바울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하나님의 참된 종이라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악귀 들린 사람은 스게와의 아들들에게 달려들었습니다. 그는 혼자였지만, 그들에게 올라가 눌러 이겼습니다. 그들은 물리적으로 제압할 수 있었습니다(16). 그들은 혼쭐이 나서 상처를 입고 벌거벗은 몸으로 집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원한다면, 예수님과 영적인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예수님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반응하는 에베소인들(17-20)

진정한 믿음의 삶이 아니라면 겉모습은 비슷해도 결과는 정반대입니다. 자기 육체를 위해 심는 자는 결국 썩어질 것만 거두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을 위해 심는 자는 영생을 거두게 됩니다(갈 6:8). 마귀를 이길 수 있는 힘이 당신에게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영적인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버려야 할 옛 습관이 있습니까?

 

17에베소에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18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알리며 19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20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17-20)

 

복음이 선포되는 현장에서 성령께서 하시는 사역 중 하나는 사람들의 마음에 회개를 불러일으키시는 것입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과 그의 능력을 보고 들은 사람 중에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능력에 굴복합니다.

 

(1) 두려워 자복하는 에베소인들(17-18)

 

이 일이 에베소 사람들에게 알려지자, 사람들은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단지 악귀 들린 사람의 초인적인 힘과 난동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누가 진짜인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의 능력이 그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 두려움은 자연스러운 반응으로 “주 예수의 이름을 높였다”(17) 라고 소개합니다. 이 표현은 회심을 의미하는 건 아니지만 사람들이 예수님의 능력을 인지하고 경외심을 갖게 된 것은 분명합니다. 그중에는 회심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예수님을 높이고 찬양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들의 ‘행한 일’을 공깨적으로 밝히면서 자복하기 시작했습니다(18).

 

(2) 불사르는 마술책들(19)

 

이 일은 우상에 찌들었던 에베소 사람 중에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분명히 깨닫게 되었고, 많은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회개의 고백은 말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이 마술과 관련된 책을 모아 불태웠습니다. 주술적 생각과 말, 행동은 에베소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에 스며들어 있었습니다. 당시에 다른 이들에게 악한 일이 일어나도록 저주하거나, 누군가가 자신과 사랑에 빠지도록 하거나, 불운을 액땜하기 위한 주문, 부적, 약의 제조법과 사용법이 기록된 책들이 많이 유통되고 있었습니다. 회심한 사람들이 불태운 마술책들의 가치는 오늘날 화폐 가치로 수십억 원에 달아는 ‘은 오만’에 달했습니다.

 

(3) 강력해진 주의 말씀(20)

 

기적과 이적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누가는 20절에서 기적 이야기를 기록한 자신의 의도를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지적과 이적이 필요한 이유는 말씀이 힘을 얻도록 하려 합니다. 바울과 관련된 이야기(행 19:11-12)와 스게와의 일곱 아들 이야기(19:13-16), 그리고 그로 인한 에베소 사람들의 영적 변화에 고나한 이야기(19:17-19)는 모두 20절로 요약됩니다.

에베소에서는 다시 한번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었다”(6:7;12:24)라고 소개합니다. 헬라어 원문을 직해하면, ‘주의 힘에 의해 말씀이 계속 자라났고 강해졌다’라는 직역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에 하나님의 말씀이 부흥이 일어났습니다(20). 큰 능력이 나타난 것은 주의 말씀 때문임을 강조합니다.

이 모든 일의 시작은 바울의 손을 통해 나타난 비상한 능력이었지만(11), 사도행전의 기록자인 누가는 그것을 바울에게 집중시키지 않고 ‘주의 힘’으로 돌리고 있고, 결과적으로 자라나고 강해진 것은, 바울의 사역이 아니라 주의 말씀이었다고 서술합니다.

 

새로운 선교 계획(21-22)

우리는 하나님의 사역할 때나, 개인의 일을 할 때, 위험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조금만 성공적이면 만족하고 안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항상 깨어서 하나님의 거룩한 사명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안주하는 순간, 위대한 하나님의 사명과 영적 능력은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주신 사명을 점검해보고 하나님의 일에 매진해야 합니다.

 

21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22자기를 돕는 사람 중에서 디모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마게도냐로 보내고 자기는 아시아에 얼마 동안 더 있으니라(21-22)

 

바울은 몇몇 지역에서 복음화되고 변화 받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만족하지 않고 항상 새로운 사명에 불타올랐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현세에 안주하지 않고 더 큰 비전을 안고 살아갑니다. 좀 더 성장하고 싶어 하는 열망이 있었습니다.

바울의 진정한 사역자의 모습은, 에베소에서 2년 3개월 동안 사역을 감당한 바울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에베소를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선교 여행을 계획합니다. 이 일을 계기로 마게도냐,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갔다가 궁극적인 목적지인 로마(참고 롬 15:22-25)까지 갈 것을 작정합니다(21). 이곳에서 ‘작정한다’를 직역하면 ‘그 영 안에 혹은 그 영을 통해 정했다’라는 할 수 있습니다. 여기 쓰인 ‘영’이라는 단어가 성령을 의미한다면, 바울이 로마로 가기로 한 결정은 스스로 한 게 아니라 성령의 작용에 따른 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아시아에서의 사역이 성장하고 안정되어 갈 때, 바울은 익숙한 곳을 떠나 새로운 경계로 나아갔습니다. 마게도냐로 떠나기 전 바울은 동역자 두 사람, 곧 디모데(고전 16:10; 빌 2:19-23)와 에라스도(롬 16:23; 딤후 4:20)를 먼저 보냈습니다. 이때 바울의 나이가 50대 중반쯤으로 추정됩니다. 적지 않는 나이에 비교적 안정된 에베소 사역을 내려놓고 새로운 사역으로 떠난 것은 절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열정은 사그라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열정은 사그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점점 더 뜨겁게 타올랐습니다. 그 불꽃이 이제 우리 가운데 활활 타올라야 합니다.


바울은 현실에 안주하고 작은 성공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선교 지역이 안정적으로 성장하면 자신이 손길이 필요한 곳으로 이동하였습니다. 더 새로운 큰 비전을 가지고 소아사이와 유럽을 돌며 전도한 후 당시 세계의 심장부인 세계의 심장인 로마를 전도 목표로 삼고 달려갔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에 효과적인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 인도하심을 받았습니다. 안주하는 삶에서 벗어나서 당신에게 맡길 하나님의 새로운 사역을 기대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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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18-02)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하는 바울

사도행전 18장 12-23절


유명인들은 모든 일정을 혼자 감당할 수 없으므로 도움을 수 있는 도우미 ‘매니저’나 ‘비서’를 동반합니다. 매니저나 비서는 그들의 스케줄을 관리하면서 삶이 꼬이지 않도록 인도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인 성도들에게도 매니저가 있습니다. 바로 그는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매니저가 되십니다. 바울에게도 성령님께서 삶을 인도하는 매니저였습니다.

 

  • 바울이 고린도에서 1년 6개월을 머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했습니다. 갈리오가 아가야의 총독이 되자 유대인들이 바울을 ‘국가 질서 파괴’ 혐의로 고소합니다. 하지만 갈리오는 유대 민족의 일로 여기고 이 재판을 묵살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더 머물다가 에베소로 가서 말씀을 전하고 안디옥으로 돌아옵니다. 얼마 후에 다시 3차 선교 여행을 준비하고 떠납니다.

 

갈리오 앞에 선 바울(12-17)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그 일을 실패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함께하시면 어떤 실패도 인생의 자산이 될 것입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자신을 신뢰하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새로운 도전하는 모든 것이 오직 자신을 위한 일이라면 그것은 성공해도 망하는 것이고 실패해도 망한 것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라고 말해도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12갈리오가 아가야 총독 되었을 때에 유대인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여 법정으로 데리고 가서 13말하되 이 사람이 율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 하거늘 14바울이 입을 열고자 할 때에 갈리오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너희 유대인들아 만일 이것이 무슨 부정한 일이나 불량한 행동이었으면 내가 너희 말을 들어 주는 것이 옳거니와 15만일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 나는 이러한 일에 재판장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고 16그들을 법정에서 쫓아내니 17모든 사람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법정 앞에서 때리되 갈리오가 이 일을 상관하지 아니하니라(12-17)

 

이제 고린도에 새로운 총독 갈리오가 부임해 옵니다(12). 고린도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은 새로운 총독에게 바울을 고소할 기회로 삼습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이 유대교가 아닌 로마법에 위배 되게 포교활동을 한다는 구실로 삼아서 고소합니다. 그 고소로 바울은 동역자 없는 가운데 혼자서 갈리오의 법정 앞에 서게 됩니다. 모든 사람들은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일제히 공격합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전혀 다른 어려움이 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각대로 되는 상황을 인도하지 않습니다. 어떤 어려운 상황 속에 들어가더라도 두려워 하지않고 담대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어려운 때에라도 복음을 전파할 때,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사실에 바울은 억울함을 느끼고 호소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자신을 위해 변명하기 위해 입을 열기도 전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바울이 말하려는 순간에 총독 갈리오의 입을 통해 이 환경들을 선하게 이끌어 가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갈리오의 마음을 들어서 대적하는 자의 송사를 꺾어버리신 것입니다.

 

총독 갈리오는 유대인들의 송사를 듣고, 그 송사가 언어와 명칭과 유대법에 관한 것은 재판할 수 없다고 지적했습니다(15). 당시에 총독들이 인종 내의 문화적, 종교적 문제들이 로마법에 위배되지 않는 한 간섭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바울에게서 로마법 위반의 사안을 찾지 못한 갈리오는 귀찮은 이 일에서 손을 떼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을 법정에서 쫓아내어 버립니다(16).

바울을 고발하려 했던 사람들은 바울을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게 했다는 이유로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서 재판 자리 앞에서 폭행함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17). 아가야의 질서를 위협하지만 않으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로마법에 의하면 오히려 아무 잘못 없는 바울을 고소한 유대인들을 무고죄로 처벌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총독 갈리오는 더 골치 아픈 일이 생기게 될까 봐 이러한 사실을 묵인하고, 그들을 쫓아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세속 권력의 속성입니다. 이러한 총독 갈리오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10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사도행전 18:10)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어떻게 지켜주시고, 해할 자가 없게 하신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총독 갈리오는 최소간섭주의 원칙과 기독교가 유대교에서 분파적 논쟁으로 오해함으로 로마 제국의 견제에서 벗어나 오랜 동안 자유롭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다니엘서에서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의 왕을 통해 역사를 이루어가셨습니다. 이방인의 왕인 고레스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시켜 주셨고(역대하 36:22; 스 1:1), 새로운 성전을 짓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니엘과 에스더 같은 사람들 주변에 이방에 권세자들을 들어서 사용하셨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의를 들어내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명을 받은 자는 하나님이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전하는 전도자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을 믿는 것은 당연합니다.

 

사명자는 끝없는 사역이 있습니다. 수많은 방해들이 있겠지만, 사람들은 어떻게 헤쳐 나가야할지 모르는 상황이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동행하심으로 대적의 계획을 무산시키고 보호하십니다. 우리들의 삶속에 하나님을 믿고 신뢰한다면,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모든 상황을 변호해주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사역 속에서 걱정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함께하십니다.

 

바울의 에베소 방문(18-21)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에 어떤 것에게도 매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 해야 합니다. 하지만 자유인으로서 모든 것이 가하지만, 연약한 자들 앞에서는 행동을 조심해야 합니다(고전 10:23-24). 바울은 이방인에게 율법으로부터 자유할 것을 말하면서도 자신은 유대인으로서의 율법에 충실했습니다. 왜 이러한 이중적인 행동을 했겠습니까?

 

18바울은 더 여러 날 유하다가 형제들을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바울이 일찍 서원이 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 19에베소에 와서 저희를 거기 머물러 두고 자기는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하니 20여러 사람이 더 오래 있기를 청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21작별하여 이르되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하고 배를 타고 에베소를 떠나(18-21)

 

고린도에서 소동 후에 바울은 곧바로 그곳을 떠난 것 같지 않습니다. 적어도 몇 개월을 더 있으면서 그곳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1약 1년 6개월 동안 고린도에서 사역한 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 위해 출발했습니다. 그는 겐그레아를 통해 에베소, 가이사랴, 예루살렘을 거처 2차 선교 여행을 시작했던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선교여행을 마무리 합니다. 그 여행에는 신실한 동역자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도 동참하였습니다.

 

(1) 겐그레아에서 삭발(18)

 

바울 일행이 겐그레아에 도착했을 때, 바울은 자발적으로 머리를 깎았습니다. 이는 그의 서원(誓願)이 종료되었음을 알리는 머리를 깎은 것입니다. 그의 서원이 무엇입니까? 사적인 서원이었습니다. 이는 바울의 서원이 감사와 관련된 것임을 암시합니다. 주후 1세기 당시에는 전통적인 방식의 감사 표현으로 서원이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실인 서원을 정리하면서 머리를 깎습니다. 특별한 계기로 일시적인 나실인의 서원이었을 것입니다(참고/민수기 6:2-5). 바울의 각오는 ‘내가 죽으면 죽으리라’는 나실인의 각오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생명을 다하여 복음을 전하고 주님 앞에 가리라는 서원이고 바울의 결단입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였기에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와 율법준수의 의무가 없다는 점을 강하게 주장하여 치열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본래 유대인으로서의 율법 준수 의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고전 9:19-23). 바울은 말씀을 가르치는 자가 범하기 쉬운 자기 합리화를 잘 극복한 것입니다.

 

(2) 에베소에세의 사역(19-21)

 

바울은 겐그레아에서 에베소로 이동합니다. 소아시아의 에베소에 들러 유대인들과 변론합니다. 그는 쉬지 않고 열심히 전도 여행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전에도 그랬듯이 회당을 찾아가 복음을 전합니다. 개역재정에는 바울이 유대인들과 ‘변론했다’라고 번역했지만, 정확하게 ‘강론했다’는 뜻으로 해석한 것이 좋습니다.

 

바울의 강론은 여러 사람들에게 관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에베소 사람들은 바울에게서 더 듣고 싶었습니다. 바울에게 더 머물러 달라는 요청했지만, 그는 거절합니다. 그가 거절하고 빨리 에베소를 떠나고 싶어싶던 이유는 서방 본문은 바울이 유대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가기 원했다고 전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빨리 움직여야 했을 것입니다. 배 운항이 제한되는 시기가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슨 이유로 바울은 에베소를 빨리 떠났는지는 정확히 알기 어렵습니다. 다만 누가는 바울이 지금 이 여행을 빨리 마무리 지으려 하고 있다고 전할 뿐입니다.

 

계속되는 바울의 선교여행(22-23)

사명을 맡은 사람들은 그 사명에 충실해야 합니다. 성경에서도 ‘맡은바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전 4:2)고 하셨습니다. 충성을 다하기 위해서는 환경이나 사람들에 움직이면 사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나가는데 무엇이 방해를 놓습니까? 사명보다 사람들의 말이 주관합니까?

 

22가이사랴에 상륙하여 올라가 교회의 안부를 물은 후에 안디옥으로 내려가서 23얼마 있다가 떠나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게 하니라(22-23)

 

한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도 고린도를 떠나 바울 일행과 함께 에베소를 방문합니다. 이 부부는 복음을 위해 바울의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을 통해 에베소 선교에 크게 기여합니다. 바울은 에베소를 다시 방문할 것을 소망하며 배를 타고 가이사랴, 예루살렘을 방문한 후 자신을 파송했던 안디옥 교회로 귀환합니다.

 

이 구절은 바울의 2차 선교 여행의 마지막과 3차 선교 여행의 시작을 구분 짓습니다. 이제 바울은 선교 여행의 보루였던 안디옥 교회를 떠나 다시 에베소로 향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3차 선교 여행을 떠난 것입니다. 그는 복음에 대한 열정 때문에 한곳에 눌러 앉아 있을 수 없었습니다. 가는 동안에 2차 선교 여행지인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지역을 방문합니다. 그곳은 2차 선교 여행에서 설립된 교회들을 돌아보면서 연약한 교회들을 세워가면서 3차 선교 여행을 시작합니다.

 

바울 사도의 마음은 항상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하나님의 교회를 바르게 세우고 그리고 성도들은 말씀으로 굳건히 서는 것이 있습니다. 주변에 사람들의 말과 상황에 따라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우선순위를 가지고 결단하고 행동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명자의 삶에도 무수한 위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명자를 돌보시는 하나님이 동행하시고 함께 하는 동료가 있고, 하나님의 뜻을 우선하여 결단하는 마음이 있다면 마침내 사명을 완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사명을 완수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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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18-01)

 


고린도에서 사역하는 바울과 일행

사도행전 18장 1-11절


 

사람들은 모두 사랑이 필요합니다. 사랑을 주고 받음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심령 가운데 두 개의 자루를 주셨습니다. 하나는 전능자인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자루이고, 또 하나는 피조물 되는 사람들끼리 채워줌으로 안정감을 누리는 자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변에 좋은 사람들을 붙여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함께 이루어가게 하십니다. 위대한 사람 바울에게도 친구가 필요했고, 동역자가 필요했습니다.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친구와 동역자를 붙여주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을 만나보시길 바랍니다.

 

  • 바울이 아덴을 떠나서 고린도에 이르러 복음을 전합니다. 아덴에서는 혼자 사역을 했지만 이곳에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납니다. 베뢰아에서 헤어졌던 실라와 디모데까지 다시 만납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하지만, 박해를 겪습니다. 하나님이 환상 중에 바울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고린도에 도착한 바울(1-3)

신앙생활을 해 나갈 때, 동역자들은 큰 힘이 됩니다. 어려울 때 기도를 부탁할 수 있고, 즐거운 일이 있을 때 같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당신과 함께 하나님의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어 갈 동역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셔서 당신에게 보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과 갈등 없이 잘 협력하며 사역을 감당해 나가야 합니다.

 

1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2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3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1-3)

 

비록 많은 열매를 맺지 못했지만, 성공적인 사역을 아덴에서 마치고 바울은 고린도에 이릅니다. 고린도는 당시 로마 제국의 3대 항구였습니다. 그만큼 물문과 교류가 활발했고, 외지에서 사람들이 유입되었습니다. 바울에게 그곳은 황금어장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세계복음화를 위한 중요한 전략지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혼자서 고린도에 도착했습니다. ‘고린도’라는 도시는 고대에 부의 상징으로 간주되면서 호머(Homer) 이후 그리스의 광채, 영광이라고까지 불렸습니다. 그러나 동방 종교와 그리스 종교가 만나는 십자로에 있었기에 종교적 혼합주의의 양상도 뚜렷했습니다. 항구 도시가 갖는 타고난 특성과 아프로디테 신전에서 행해진 성전 노예들의 성적인 제사 행위들은 이 도시가 문란한 곳으로 알려지게 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부터 쫓아온 유대인들을 피해 베뢰아에서 도망가듯이, 아덴으로 떠난 이후 바울은 계속 혼자였습니다.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서의 사역은 충분히 성공적이었지만, 바울은 적대적인 유대인들의 거센 반대와 핍박을 감수해야만 했습니다. 아덴에서는 홀로 아레오바고 언덕에 모여든 수많은 이방인 앞에서 복음을 변증했습니다.

 

사도행전 17:15에서는 바울이 실라와 디모데를 속히 만나고 싶어 했다고 말합니다. 그만큼 바울도 서로 격려하고 위로가 될 동역자가 필요했다는 뜻입니다.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 선교팀을 대신하여 하나님께서는 바울과 함께할 새로운 믿음의 동역자들을 예비하셨습니다(2). 그들도 글라우디오의 추방령에 로마로부터 쫓겨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부부였고 이름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였습니다. 그들은 로마에서 살던 사람들인데, 황제가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하라는 명령에 따라 고린도로 이주하여 살고 있었습니다.

3절에 보면, 절묘한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세심한 하나님의 배려가 나타납니다. 이는 바울의 직업과 부부의 직업이 서로 같다는 사실에서 확인됩니다. 바울처럼 그들은 천막 만드는 일을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이 노동하면서 선교하였다는 것은 그의 서신(고전 4:12)에도 나타납니다. 아마도 바울은 유대 랍비들이 당시의 율법 교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한 가지 전문 직종에 대한 훈련을 받았던 것입니다. 당시에는 로마 군사들이 주둔해 있는 곳곳마다 텐트들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텐트 만드는 일이 유망 직종이었을 것입니다. 그 일을 하면서 같이 일을 할 사람을 만났는데, 바로 이때 하나님께서 만나게 하신 사람이 아굴라와 브리스굴라입니다.

 

직업을 나타내는 ‘스케노포이오스’는 ‘천막 제조 및 피혁 노동자’를 의미합니다. ‘누구든지 아들에게 기술을 가르치지 않는 자는 도적이 되게 하는 것’이라는 어느 랍비의 경구(비록 주후 2세기의 글이지만)를 생각해볼 때, 아마도 바울이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 있을 때 그러한 기술을 습득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작업 환경을 선교의 장소로 인식하고, 노동의 현장에서 사람을 만나 대화하고 설득하고 토론을 하였습니다. 또 생계를 직접 해결함으로써 아무에게도 속박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사역하였습니다. 게다가 ‘일을 한다’라는 뜻의 ‘에르가제토’가 미완료 형태인 것을 볼 때, 바울이 부지런히 일을 계속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위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또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위해 바울을 준비하셨습니다.

 

고린도에서 얻은 회심자(4-8)

하나님의 택함을 입었으나 아직까지 하나님 말씀을 듣지 못하고, 그분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일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자신은 자신이 생각하는 일만 사역이라고 한정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더 큰 사역을 준비해 놓은 것은 무엇일까요? 그러한 모든 사역들을 기다리며 사역하는 사명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4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5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6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털면서 이르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7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경외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은 회당 옆이라 8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안과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많은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4-8)

 

바울은 혼자서도 계속적으로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4). 얼마 후 한동안 헤어졌던 실라와 디모데가 드디어 고린도로 합류했습니다(5). 그들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좋은 소식을 전해 주었고(살전 3:7-10), 빌립보 교회가 보낸 후원금도 가져왔습니다(고후 11:9, 빌 4:14-15).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일을 통해 바울을 격려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적극적으로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힘차게 사역하였습니다.

 

고린도에서의 바울의 사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바울은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함으로써 복음 전파에 나섰습니다(4). 평일에는 작업장에서 노동하며 사람을 만났고, 안식일에는 회당을 찾아 유대인과 하나님의 경외자를 대상으로 토론과 설득을 통해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런 선교 활동은 동료들이 도착한 이후로도 계속되었습니다(5). ‘말씀에 사로잡혀’에서는 ‘말씀’이 의인화되어 바울을 사로잡아 증언하게 한다는 강한 표현이 쓰였습니다. 이는 바울의 선교가 갖는 신적 기원과 복음에의 집착을 강하게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두 동역자가 도착하자 노동을 중단하고 말씀 전파에만 전념했다고 본 것입니다.

 

바울에게 적개심을 품은 유대인들은 예수가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바로 그 그리스도(메시아)라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바울을 비방하며 대적했습니다. ‘비방하다’(블레스폐메인)는 비난하며 모욕적 언사를 내뱉는 것을 뜻합니다. 바울은 심한 좌절과 모욕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바울의 태도는 매우 단호했습니다. 옷을 털어버리며 그들에게 심판이 이를 것이라 경고합니다. 이런 행동은 이미 비시디아 안디옥에서도 보여준 적이 있었습니다. 바울 일행은 일전에 유대인의 선동에 의한 폭력적 행위 때문에 추방되면서, 발의 먼지를 털어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갔습니다(행 13:51). 발의 먼지를 터는 것과 옷의 먼지를 터는 일은 유사합니다. 거부와 단절, 거리감과 항의를 뜻하는 상징적 행동입니다. 바울은 이제 자신이 이방인들에게로 가겠다고 선언합니다. 이런 강력한 의지는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라는 바울의 말에서 확인됩니다. 즉, 그들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강력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거기서 장소를 옮겨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 디도 유스도의 집에 들어갑니다(7). 그의 집은 회당 옆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디도 유스도는 아마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로 알려진 회당 주변의 우호적인 이방인 출신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갑자기 회당장 그리스보에 대한 언급이 이어집니다(18). 그와 그의 온 집안 식구가 믿었고, 그 밖의 많은 고린도 사람들이 바울의 말을 듣고 믿어 세례를 받기에 이릅니다. 이는 그의 고린도 사역이 적잖이 성공을 거두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라는 주님의 말씀과도 일치합니다(행 18:10). 누가는 바울의 고린도 사역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회당장 그리스보의 회심은 사도행전 안에서 특별합니다. 가말리엘(행 5:34-39)을 제외하고, 사도행전에서 유대지도자들 중에 바울의 복음에 우호적인 경우는 그가 유일하기 때문입니다. 또 이는 고린도전서 1:14과 16절에서 바울이 그리스보, 가이오, 스데바나의 집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는 진술과도 일치합니다.

 

바울의 고린도 사역에 언제나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반대자들이 훼방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적극적으로 복음에 전념하게 되었을 때, 여전히 복음을 훼방하는 세력도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빛이 어두움이 함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주의 뜻대로 살기로 결심하면, 힘들고 손해 보는 일들을 반드시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회당 중심 유대인 선교에서 이방인의 선교로 전환합니다. 이 결심은 바울이 이방인 선교에 중심하는 결정하는 계기가 됩니다. 이 후에 고린도 교회는 이방인들이 많이 합류해서 건강한 공동체를 이루게 됩니다. 놀라운 것은 회당을 떠나서 복음을 증거 했는데, 회당장이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린도의 많은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어 구원 받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세운 바울(9-11)

하나님의 사역을 하려고 한다면 하나님과 친밀해야 합니다. 시간마다 사역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사역하게 되면 놀라운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역에 즐거움을 느끼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습니까? 사역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심에 받기고 있습니까?

 

9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10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11일년 육개월을 유하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9-11)

 

바울이 복음을 증거할 때, 하나님께서 그의 길을 인도해 주셨습니다. 방해가 있기는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사역의 열매로 바울을 격려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일을 감당하려는 자들에게 인생길을 여시고 인도하십니다.

 

바울은 밤에 환상 가운데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9)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에게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므로 해할 자가 없다는 확신을 갖게 했습니다. 누가는 고린도에서 바울의 고난을 미리 준비시키기 위해 주님이 환상 중에 나타나 말씀하시는 내용을 싣고 있습니다. 바울과 관련해서 누가는 ‘환상’이라는 표현을 세 번 사용합니다. 사도행전 16:9-10에 두 번 나오는 것을 제외하면, 마지막으로 본문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6:9-10에서 환상은 답보 상태에 있던 바울 일행을 위로하고 다음 진로로 인도하는 방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도 바울을 위로하기 위한 방법으로 환상을 사용하십니다.

 

주님은 이 성에 하나님의 백성이 많다고 말씀하십니다(10). 그러니 이것은 그가 당할 고난이 많을 것이란 의미일 수도 있고, 그들을 돕기 위해 길게 체류해야 한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11절에서 그가 1년 6개월이나 고린도에 머물렀다는 언급을 구체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또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라고 명령하십니다. 이는 극한 반대가 닥칠 것임을 냅니다. 사역자가 침묵을 강요받는 상황을 예측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담대하게 복음을 계속 선포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이 지키셔서 그를 해할 자가 없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이 담대한 선교를 가능케 합니다. 믿는 고린도인들이 많기 때문에 그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양육하려면, 바울은 역경 속에서도 이 도시에 머물러야만 했습니다. 바울은 주님의 말씀대로 1년 6개월을 머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11). 복음 증거자에게는 하나님의 동행하심이 따릅니다. 이는 복음 증거자가 받는 축복 중 하나입니다. 세상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과의 동행은 우리가 영광중에 보호 받으며 인도함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인생이 누릴 최고의 복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파할 때, 고난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는 사명자들에게 감당할 수 있는 능력과 지혜를 주십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위로의 음성을 듣고 다시 일어섭니다. 그는 고린도에서 유대인으로부터 떠나 이방인들에게 전도할 때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열매들을 얻었습니다. 성도들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담대하게 일어서야 합니다. 고난을 축복으로, 좌절을 희망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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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17-02)

 


아덴 아레오바고에서 복음을 전한 바울

사도행전 17장 16-34절


 

수많은 우상을 섬기고 허탄한 논쟁과 사변에 심취해 있는 이들에게 바울은 분노합니다. 아무런 자유와 생명도 주지 못하면서 인간을 사로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지성의 심장이라는 아테네에 예수님과 부활을 전하여 생명을 위한 참 메시지를 던집니다.

 

 

  • ‘아레오바고의 설교’(행 17:22-31)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신학적으로는 타문화권 선교에 있어서 어떻게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지에 대한 좋은 모델입니다. 아덴 사람들이 자랑하던 철학을 통해 복음을 변증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설교는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던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을 넘나들면서 그들로 하여금 영적인 무지함을 스스로 깨닫게 하였습니다. 바울은 헬라적인 개념을 사용하면서 매우 조심스럽게 복음을 전달했습니다.

 

아덴에서 복음 전하는 바울(16-21)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최고의 지식입니다. 아테네 사람들은 다른 어떤 도시보다 지식을 사랑하고 높은 지식을 자랑했지만, 정작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지혜인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창조주와 주관자이심을 믿는다면, 우리는 어떤 자세로 공부하고 지식들을 활용해야 할까요?

 

16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17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18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19그를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20네가 어떤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21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16-21)

 

베뢰아를 떠난 바울 일행은 아덴(아테네)로 이동합니다. 실라와 디모데는 베뢰아에 남아서 그곳 성도들을 보살피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혼자서 아덴에 도착해서 아덴을 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전도를 하기 전에 전도 대상들과 풍속 그리고 종교 등을 살폈습니다. 당시에 아덴은 학문적으로 매우 발달한 지식이 있었지만, 영적인 상태는 바울을 분노케 합니다. 아덴 도시 전체가 우상들로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아덴을 철학의 본고장이며, 민주주의의 시장이라고 칭송하였지만, 복음의 측면에서 보면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 숭배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에 불과했습니다.

 

참담한 아덴의 영적 상황에 대한 바울의 분노는 복음을 전하는 열정으로 이어졌습니다(17). 바울은 여기서도 회당에 먼저 들어가 유대인들을 만나 설득하였습니다. 회당과 장터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만나서 날마다 변론하였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만나는 회당과 달리 광장에서는 ‘날마다’ 만났습니다. 그가 얼마나 선교에 전념하였는지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여기서 ‘변론하다’는 데살로니가, 고린도, 에베소, 드로아 등을 선교하는 장면에서도 나오는 단어입니다(행 17:2,17; 18:4,19; 19:8). 이것은 구약을 근거로 하여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바울의 논쟁 대상은 주로 에피쿠로스 철학자들과 스토아 철학자들이었습니다(18). 두 학파는 정반대의 주장을 하는 철학 사조로 알려졌는데, 바울은 그들의 자연관, 우주관, 신관 등 형이상학적인 문제들을 지적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려 하는가?’하고 바울에게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말쟁이’는 새가 모이를 주워 먹듯이 이야깃거리를 모으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자기도 모르는 말들을 떠들어대는 웅변가를 가리킵니다. 또 그들은 바울이 외국의 신들을 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는 소크라테스가 사형을 당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호기심 많은 그들은 바울과 논쟁한 후 그에게서 더 자세한 것을 듣기 위해 아레오바고로 데려갑니다(19-20). 이곳은 법정이 아니라 다양한 민간 활동이 멸쳐진 공의회 같은 곳이었습니다. ‘우리가 알 수 있겠느나?’ ‘알고자 하노라’ 같은 표현을 통해 강압적인 분위기보다 예의를 갖춰 바울을 대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새로운 교리, 즉 새로운 종교와 관련한 이야기를 하고 다니는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바울의 이야기를 ‘이상한 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20, 참조 행 2:12), 이는 아테비인들의 지적 호기심과 탐구심을 다소 긍정적으로 누가가 묘사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아테네인들의 호기심은 이어지는 21절에서도 확인되고, 그 호기심 때문에 바울의 아레오바고 설교가 전개될 수 있었습니다. 21절에는 아테네 사람들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바울의 설교에 단순한 호기심 차원을 넘어 탐닉하고 있었다고 누가는 평가합니다.

 

바울의 아레오바고 설교(22-31)

성도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구원에 만족시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세상의 학문이나 지혜를 공부하는 이유는, 그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음을 줄 알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모든 지식을 동원하여 세상을 하나님께 인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22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23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24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25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26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27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28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29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30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31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22-31)

 

바울의 설교는 다섯 부분으로 나뉩니다. 서언(22-23), 제사가 필요 없는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24-25), 사람들에게 계시 되신 하나님 (26-27), 우상숭배 금지(28-29). 종결부(30-31)가 그러합니다. 아레오라고 설교는 철학적이고 논리적이면서 감동적입니다. 아덴 사람들의 호기심에 대해 답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바울은 먼저 아덴 사람들이 가진 종교심을 칭찬합니다. 앞에서(16)는 그들의 종교성에 분노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청중의 호의를 이끌어내기 위한 일종의 수사법적인 전략일 것입니다. 이어서 그는 아테네에서 볼 수 있는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겨진 제단을 설교 전개의 실마리로 삼습니다. 이제 바울은 이방인들이 알지 못하고 섬기는 그 대상을 선포하여 알리려 합니다. 바울이 알게 하리라'(23)라고 한 단어는 직역하면 선포하다'(카탕겔로)의 뜻입니다. 이는 그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선포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바울의 설교는 세 단계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세상의 주인이십니다. 만물의 근원한 관심이 가득한 아덴 사람들에게 그 근원은 바로 하나님이심을 선언합니다. 둘째,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26). 바울은 인간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주관하심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셋째, 하나님과 사람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충분한 기회가 사람들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해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바울은 축구합니다. 모든 것을 만드는 신의 개념은 앞서 사도행전 4:24에 등장한 바 있습니다. ‘만드시는 분’이라는 개념도 사도행전 14:25에 나옵니다. 24절의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는 사도행전 7:48에 제시된 스데반 설교를 연상시킵니다. 여기서 바울이 묘사한 하나님은 만유와 만인의 하나님이지만, 유대인과 같은 특정 민족의 하나님으로 강조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포괄하는 보편적인 하나님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만유, 만인과 같이 ‘모든’이라는 헬라어 표현이 이 단락의 24, 25, 26, 30, 31절에서 나옵니다. 루스드라 설교(행 14:6-23)와 달리 이 설교에서 바울은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전혀 적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바울의 설교를 좀 더 객관화하고 보편적인 입장에서 이해시키려는 시도입니다. 이어서 25절에서는 하나님의 자기완결성과 완전함을 강조합니다. 26절에서 바울은 인간이 사는 시간적 연대와 공간적 영역을 결정한 분이 하나님이시라고 밝힙니다. 바울은 이런 창조의 목적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하려는 데 있다고 선포합니다(27). 뒤집어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셨다는 뜻입니다. 이어서 주전 6세기 시인 에피메니데스의 시구를 인용하여.우리는 신의 소생으로서 그 신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한다고 바울은 선언합니다.

 

이 설교의 결론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29) 바울은 이 구절에 자신이 섬기는 참 하나님을 그들이 바르게 인식하고 믿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습니다. 그들은 이 ‘하나님’을 ‘신’이라는 말로 들었겠지만, 바울은 여호와라는 뜻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30-31절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이 나란히 등장합니다. 과거 무지의 시대에 하나님은 지나치셨지만, 오늘은 회개하라고 명령하시며, 내일은 심판하실 것입니다. 심판의 확실한 근거로 바울은 예수의 부활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아덴 사람들의 반응(32-34)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자신을 알려주시고 보여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것으로 자신을 보여주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지으시고 주관하시는 분으로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 만물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더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을 찾고 있고, 알고 있습니까?

 

32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33이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매 34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32-34)

 

이 단락은 바울의 설교에 대한 아덴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반응은 둘로 나뉩니다. 부활에 대한 바울의 언급이 아덴 사람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고 바울은 그들에게 조롱을 당하였습니다(32).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이들 가운데 몇몇은 바울을 따라가 회심의 은혜에 동참하게 됩니다(34: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 가운데 아레오바고의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는 여인의 이름이 언급됩니다.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디오누시오는 후일 최초의 아덴 감독이 되었습니다.

아레오바고에서 행했던 바울의 설교는 성공과 실패를 떠나서 복음적인 설교를 준비하는 사람에게 큰 도전이 됩니다. 무엇보다 바울은 청중의 욕구를 잘 분석했습니다. 그 시대의 종교적인 면과 문화적인 면을 통합적으로 이해함으로써 청중과의 접촉점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고 하나님께로 그들을 초대하는 길을 보여주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전도자들은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할 뿐입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우상을 섬기는 이방인들을 더러운 존재로 여겼습니다. 만약 바울이 일반적인 유대인처럼 행동했다면 복음을 전하기보다는 어떻게든 그들과 멀리 떨어져 지내며 실라와 디모데가 도착하기만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우상을 숭배하는 저들에게까지 에수님의 부활을 전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우리는 내게 주어진 일상의 삶 가운데서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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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17-01)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서의 전도 여행

사도행전 17장 1-15절


 

같은 복음을 들어도 사람에 따라 복음을 받아들이는 방법이 다릅니다. 그런 이유는 말씀을 듣는 자세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바로 자세의 차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질 때,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거부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어떤 상황이든지 실망하지 말고 계속해서 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원동력은 사명 때문입니다.

 

  • 본문은 데살로니가(1-9)와 베뢰아에서의 사역(10-15)으로 다룹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관례대로 회당으로 가서 말씀을 강론하여 많은 회심자들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성공적인 사역은 전통 유대인들을 자극하였습니다. 결국, 바울은 베뢰아로 이동해서 사역해야만 했습니다. 베뢰아에서는 데살로니가에서보다 더 성공적이었지만, 데살로니가로부터 온 적대자들로 인해 다시 아덴으로 이동해야만 했습니다.

 

데살로니가의 사역(1-9)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 나라를 다스리신 왕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신앙생활의 본질은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분을 따라 순종하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를 건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합니까? 바울은 회당에서 구약의 말씀을 강론으로,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에 의해 고난 겪어 돌아가신 후에 다시 살아나는 것이 예정된 사실임을 증명합니다.

 

1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2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3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4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5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6발견하지 못하매 야손과 몇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7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8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9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석금을 받고 놓아 주니라(1-9)

 

본문 1-9절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에 도착하여 복음을 전하는 바울(1-4)과 그 사건으로 적대적인 유대인들에게 고난 당하는 바울(5-9)에 관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선교 전략에 바울의 전략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1)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하는 바울(1-4)

 

바울과 동료들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 데살로니가에 도착했습니다.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냐의 수도로 가장 큰 도시였습니다. 이곳은 알렉산더 대왕의 군대 최고 지휘관인 카산더(Cassander)에 의해 알렉산더가 죽은 후에 건설되었습니다. 당시 로마 점령하에 있던 이 도시는 로마에 충성한 대가로 자유 도시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자체 정부와 법률을 가지도록 인정되었습니다. 지리적으로 자연적인 항구가 있었고, 로마로 통한 에그나티아(Egnatia)가 놓여 있었습니다. 로마에서 출발한 큰 길은 아드리아해에서 중동까지 뻗어 있었습니다. 무역과 상업 외에도 대도시에 있던 사회의 제반 악들도 번성하였습니다.

 

바울은 이제 이 영광스러운 복음을 가지고 데살로니가로 들어온 것입니다. 이제 복음은 데살로니가를 통해 전 세계에 빠르게 퍼질 것입니다. 이때 바울과 동행한 사람은 실라(10)와 디모데(14)였습니다. 저자가 바울과 실라의 투옥 시점부터 주어를 ‘우리’ 대신 ‘그들’로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세 사람이 데살로니가로 왔을 때, 저자는 루디아의 가정에서 갓 시작된 빌립보 교회를 보살피기 위해 그곳에 남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나중에 바울 일행과 다시 합류합니다(행 20:6). 훗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바울과 드로아에서 다시 만나기까지 빌립보에 머무는데, 이 기간은 바울이 고린도에서 사역한 1년 6개월(행 18:11)과 에베소에서 사역한 2년 3개월(행 19:8-10)을 합산해 적어도 3년 9개월 이상이 될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에 도착한 바울은 ‘관례대로’ 회당으로 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누가는 이 단락에서 바울의 선교가 일상적인 방식대로 이루어졌다고 말하면서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방식과 내용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바울은 성경을 강론하는 방식으로복음을 전하기로 합니다.

 

바울의 강론은 두 과정으로 이루어집니다. 첫째, 뜻을 풀어서 성경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3). 이 구절은 누가복음 24:32에서 예수님께서 성경을 풀어 제자들이 깨닫게 하셨던 모습을 생각나게 합니다. ‘뜻을 풀다’라는 헬라어는 ‘활짝 열다’의 의미인데, 3절에서 사용된 동사의 형태가 분사이므로 ‘열면서’(opening)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습니다. 여기서 ‘열다’라는 동작을 단순히 성경을 펼치는 행동으로 제한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메시지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하나하나 보여주고 설명하였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즉, 바울의 강론이 성경에 기초한 것임을 암시합니다.

둘째, 성경의 내용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증언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앞에 혹은 옆에 놓다’입니다. 문자적으로는 ‘앞에 놓으면서’(setting before)를 뜻합니다. 무엇인가를 상대방의 눈앞에 가져다놓고 눈으로 확인하게 하는 행동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강론을 듣는 사람들의 눈앞에 기록된 말씀인 성경을 펼쳐놓았습니다. 바울의 강론이 결코 바울 자신의 생각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강론한 성경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바울이 풀어서 증언하면서 강론했던 복음의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셨다는 것과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야 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은 구약성경에 예언되었던 것들입니다. 그 예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된 것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고 선포합니다(3).

 

개역개정은 바울의 선포를 ‘전하는’(카탕겔로)으로 번역합니다. 그러나 이 단어는 사도행전에서 ‘선포하다’라는 의미로 빈번하게 사용되었습니다(행 3:24; 4:2; 13:5,38; 15:36; 16:17,21; 17:13,23; 26:23). 이는 바울의 강론이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동시에 강력한 영적 도전이었음을 암시합니다. 결론적으로 바울의 사역은 매우 성공적이었습니다. 경건한 헬라인(회당예배에 참석한 이방인들)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에 감동되었기 때문입니다(4). ‘권함을 받고 따른다’는 것은 설득당해 따른다는 뜻으로, 두 단어는 설득과 따름이 대단히 강력했음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귀부인들은 상류층 여인들로 일정한 권력과 부를 향유한 사람들입니다.

 

(2) 데살로니가에서 당한 어려움(5-9)

 

둘째 부분(5-9)은 바울과 실라에게 찾아온 고난에 대한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에게 가장 적대적인 그룹은 동족인 유대인들이었다. 유대인들이 바울 일행을 시기했다고 말합니다(5: 행 5:17; 참조. 행 13:45). 그들의 시기 이유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 경외자들을 바울 일행에게 빼앗긴 것 때문일 수도 있고, ‘복음을 믿지 않은’ 유대인들이 시기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불량한 사람들을 선동하여 소동을 일으키게 하고, 기어이 바울을 백성 앞에 세우려고 했지만 실패합니다. 다행스럽게도 야손의 집을 불량배들이 급습하기 전에 바울이 피하여 붙들리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울과 실라를 찾지 못하자 야손과 그의 형제들에게 위해를 가합니다. 여기서 ‘형제들’의 존재를 정확히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야손이 영접하고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한 것으로 보아 그 지역의 유력자들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6-7절에는 유대인들이 바울과 실라를 고소한 두 가지 이유가 나옵니다. 6절에서 유대인들은 바울 일행을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사람들’로 규정합니다. 그 구체적인 혐의가 7절에 나옵니다. 여기서 유대인들은 바울이 로마 황제 대신에 예수님을 ‘임금’(바실류스 Basties)이라는 호칭으로 불렀다고 고소합니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7). 야손과 형제들은 그것을 알면서도 그를 영접했기에 같은 혐의를 씌우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것과 가이사의 칙령을 어기는 것, 그리고 예수님을 임금이라고 부른 것은 모두 하나의 위반사항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는 빌립보에서 간수에게 ‘주(퀴리오스) 예수를 믿으라’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사실 이러한 고소는 다른 어떤 것보다 데살로니가행정관들 앞에서는 치명적일 수 있었습니다. 로마에 편재했던 황제숭배 사상은 로마 황제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 절대로 ‘왕’이라는 호칭을 사용할 수 없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두 번째 고소는 바울과 실라에게 매우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 나라’와 ‘다시 오실 왕’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전하는 것이 바울을 비롯한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 얼마나 위험한 일이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국 야손과 형제들은 보석금을 내고 풀려납니다. 그들이 결코 바울이 범한 죄와 무관하지 않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과 실라는 데살로니가를 떠나 베뢰아로 향해야만 했습니다.

 

베뢰아에서의 사역(10-15)

복음이 세상 권력을 쟁취하려는 운동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틀린 말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궁극적으로 세상의 가치관을 거부하고 힘을 숭배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세상 나라와는 달리 사랑과 자기 분인과 은혜의 나라라는 점에서, 세상의 폭압적인 질서를 교란하는 대안적인 세력이며 궁극적으로 모든 인류를 그리스도의 통치 앞에 복종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맞는 말입니다.

 

10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그들이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11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12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13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은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하게 하거늘 14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머물더라 15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그에게서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속히 오게 하라는 명령을 받고 떠나니라(10-15)

 

베뢰아 사람들은 말씀을 간절히 받고 날마다 성경을 통해 확증하고자 상고했습니다. 차분한 묵상이 없는 갈급함이나 열정은 거짓 목자의 노략물이 되기 쉽습니다. 묵상의 자리를 지킨 이들이 말씀 기갈의 시대를 감당할 해갈의 사명자가 될 것입니다.

 

(1) 베뢰아 사람들의 회심(10-12)

 

베뢰아는 데살로니가에서 서쪽으로 75km 이상 떨어진 베르미우스 산기슭에 있는 도시입니다. 바울은 에그아티아 도로를 계속 따라가는 여정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베뢰아에서도 유대인의 회당으로 맨 먼저 들어갔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의 반응은 데살로니가 사람들과는 현저하게 달랐습니다. 바울이 전한 말씀에 대한 반응은 세 가지로 나타납니다. 첫째,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습니다. 둘째,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습니다. 셋째, 믿는 자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도행전의 서사에서는 바울이 말씀을 전하면 사람들이 믿었다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베뢰아의 선교 보고에서만은 그들이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라는 언급이 덧붙여져 있습니다.

 

‘상고했다’는 단어는 '상세히 연구하면서 따져 물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바울이 강론했던 성경의 구절들이 정말 그런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지 꼼꼼하고 상세하게 연구하고 질문하는 자세를 가졌습니다. 자발적인 말씀 연구가 신앙 형성에 적극적인 역할을 했음을 보여줍니다. 또 진리에 대한 열정이 말씀을 향해 열린 자세를 갖고 생각하는 신앙을 품게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결과 믿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이 사람들은 당연히 유대인들을 가리킵니다. 데살로니가보다 호의적이었던 이유를 11절에서 그들이 ‘더 너그러워서’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특히 높은 신분의 헬라 여인들과 헬라 남자들이 믿음을 얻습니다(12). 이들이 상류층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은, 그들의 반응이 그것 자체로 기독교 신앙의 평가와 선교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초대교회에서 이런 상류층의 회심은 희소했고 이례적이었음을 반증합니다.

 

(2) 베뢰아에서 당한 어려움(13-15)

 

하지만 베뢰아에서의 복된 사역의 열매에도 불구하고 바울에게는 위험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데살로니가에 있던 유대인들이 베뢰아까지 찾아와서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베뢰아는 데살로니가에서 약 75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꽤 먼 거리임에도 유대인 적대자들은 바울의 일행을 추격하여 위협했습니다. 이미 사도행전 14:19에서도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 유대인들의 집요한 반대와 추적이 루스드라에까지 이어진 적이 있었습니다. 결국 바울은 아덴을 향해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적대자들의 서슬 푸른 위협을 피하는 것도 선교적인 방법이 될 수 있음을 바울은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면서 하나님 나라 복음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 현실이 참 아이러니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단순한 신학적 주제가 아닙니다. 구원과 신앙의 근본원리이며 토대입니다. 예수님께서 남의 삶 속에서 왕노릇 하신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주 구체적으로 묵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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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16-03)


빌립보 감옥에서부터 사역한 바울과 실라

사도행전 16장 27-40절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여러 가지 고난을 만나게 됩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 왜 이런 고통이 나에게 임하는지 의아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 안에서는 그분을 믿는 우리가 당하는 고난 중에 의미 없는 고난은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은 주님께서 당신의 넘치는 위로로 우리를 채워 주심으로써, 고난당하는 누군가를 위로하기 위한 주님의 통로로 우리를 사용하시려는 주님의 신비로운 인도하심입니다.

 

  •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에서 귀신 들린 여인에게서 귀신을 쫓아냄으로 많은 매를 맞고 감옥에 투옥되었습니다. 감옥에서 기도와 찬양을 드림으로 지진이 나며 차고가 풀리는 기적을 체험합니다. 이 일들을 통해 간수와 그의 가족이 구원을 받습니다. 새로운 아침이 밝았습니다. 바울 일행을 투옥시켰던 판사는 자신의 잘못된 판단을 생각하며 바울 일행을 풀어주려 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27-34)

복음 전파는 그 누구에게도 정죄 받을 일이 아니며, 그 누구도 복음 전파를 막을 수 없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박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세상은 복음 전파자를 정죄하지만 그 정죄는 옳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복음 전파로 인한 세상의 정죄에 요동하지 않습니다.

 

27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28바울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29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리고 30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31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32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33그 밤 그 시각에 간수가 그들을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어 주고 자기와 그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은 후 34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27-34)

 

옥문이 열린 것을 보고 간수는 죄수들이 도망했는지를 살피지도 않고 자결하기로 작정합니다(12:19). 베드로와 바울은 복음의 증언을 위해서 동일한 경험을 갖습니다. 간수의 행동을 목격한 바울은 큰소리로 “우리가 다 여기 있으니 몸을 상하게 하지 말라”라고 말합니다(28). 이처럼 전도자는 생명을 살리는 일을 맡은 사람입니다. 바울의 동정심과 폭력에 대한 저항은, 예수님이 체포되실 때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의 오른편 귀를 칼로 쳐서 떨어뜨린 것을 보고 예수님이 꾸짖으시고 다시 붙여 주신 모습을 기억나게 합니다(눅 22:49~51).

 

바울과 실라의 소리를 들은 간수는 그제야 횃불을 들고 옥으로 들어가서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립니다. 그는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며 찬송하는 것을 들었을 때 그것이 주문을 외우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간수는 자신이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 묻습니다. 이러한 반응은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를 들은 무리가 마음에 찔려 “우리가 어찌할꼬”(2:37)라고 말한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간수의 요청에 바울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라고 간단명료하게 답합니다(31). 감옥이라는 최악의 장소에서 복음 메시지를 이렇게 명료하고 간결하게 소개하는 장면은 가히 감동적입니다. 생명을 구원하는 직무는 장소나 시간이나 어떤 조건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언제나 복음의 메시지를 핵심적으로 선포해야 합니다. 장면이 바뀌어 바울과 실라를 통해 간수와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이 주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간수는 바울과 실라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복음에 대해 더 소상하게 들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로마 시민임을 밝힌 바울(35-37)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로 죄인 취급당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당하고 바울과 실라처럼 옥에 갇히기까지 할지라도 절대로 낙심하지 말라야 합니다. 예수님도 사람들에게 죄인으로 정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분이 걸어가신 길을 따라야 합니다.

 

35날이 새매 상관들이 부하를 보내어 이 사람들을 놓으라 하니 36간수가 그 말대로 바울에게 말하되 상관들이 사람을 보내어 너희를 놓으라 하였으니 이제는 나가서 평안히 가라 하거늘 37바울이 이르되 로마 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내보내고자 하느냐 아니라 그들이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 한 대(35-37)

 

전날 밤에 이루어진 사건을 뒤로하고 바울과 실라는 다시 옥으로 돌아온 것 같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두 전도자가 로마제국에 위해를 주는 위협적인 존재가 아님을 확인시켜 줍니다. 기적이 일어나 탈출할 수 있었지만 그들은 오히려 간수를 살렸을 뿐 아니라 그의 가족에게 복음을 증언하는 증인의 책무를 거뜬히 해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석방된 것은 이 점을 상관들이 확인하고 인정한 셈입니다.

 

다음 날 아침 상관(아마, 치안 판사)들은 법 집행관들을 보내 바울과 실라를 석방하라고 통보했습니다(35). 개역개정 성경에는 상관들이 보낸 사람이 한 명인 것처럼 번역되었지만, 실은 38절에서와 같이 여러 명이었습니다. 이들은 상관들의 판결에 따라 바울과 실라에게 체벌을 가했던 법 집행관이었을 것입니다(22-23).

 

상관들이 부하들을 보내, 바울과 실라에게 석방하라는 명령을 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간수는 “평안히 가라”라고 말합니다(36). 바울은 예상 밖에 강경한 반응을 보입니다. 이 제안에 수긍하지 않고 이의를 제기합니다. 재판을 받을 때는 잠잠했던 바울이 스스로 로마 시민이라고 당당하게 밝혔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나는 로마 시민이다’(Civis Romanus sum)라고, “로마 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내보내고자 하느냐?”고 더욱이 “그들이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라며 자기의 법적 권리를 주장했습니다(37). 로마 시민으로 특별대우를 받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과 실라는 부당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로마 사람인”이라는 문구입니다. 이를 보다 정확하게 번역하면, ‘로마 사람임에도 불구하고’입니다. 이는 점치던 여종의 주인들이 두 선교사에 대해 한 주장과 정반대입니다(20).

당시 상관들은 바울과 실라를 무리의 선동으로 고소가 적법하게 처리되거나 심리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불합리한 상태에서 부당하게 매질을 당하고 옥에 갇혔습니다. 로마법에 따르면, 로마 시민은 품위를 손상시키는 처벌에서 면제되었고 여러 특권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율리우스법(Lex Julia)은 로마 시민을 처벌할 때 채찍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때로 이 법은 잘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로마 시민임에도 불구하고 심한 체형을 당하기도 해 이 법의 적용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음을 시사 합니다. 그러므로 고대 기록에 따르면, 사도행전은 1세기 로마 속주의 법적인 상황을 잘 반영합니다. 실제로 바울과 실라가 채찍으로 맞고 감금되고 상관들이 석방시켜 줄 때까지 로마 시민임을 밝히지 않았다는 것은 어색한 면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명예와 수치라는 도식으로 볼 때, 바울과 실라는 복음을 위해서 속국의 국민으로 취급되는 수치까지도 기꺼이 참았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복음에 대한 열정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결단 때문에 신분이 추락하는 수치까지도 감수합니다. 그들은 수치를 당함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헌신합니다.

 

여기서 ‘로마 시민권’은 복음의 전달 매체로서, 수치를 명예로 반전시킵니다. 그들의 시민권은 수치를 끝까지 당하고 난 후 결정적인 순간에 복음의 수호자로 우뚝 서게 합니다. 그들의 명예는 이 세상이 제공하는 명예가 아니라, 하나님만이 허락하시는 천상의 명예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고 고백했습니다(빌 3:20), 그의 복음 증언 과정을 보면 세상의 시민권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에게는 복음을 증언하는 것만이 최고의 가치였습니다.

 

빌립보를 떠나달라는 요청(38-39)

복음 전파자는 세상을 해롭게 하는 죄인이 아닙니다. 세상을 이롭게 하기 때문에 쌍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당당해야 합니다. 성도들은 복음 전파가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사실을 확신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38부하들이 이 말을 상관들에게 보고하니 그들이 로마 사람이라 하는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 39와서 권하여 데리고 나가 그 성에서 떠나기를 청하니(38-39)

 

상관들에게 부하들은 바울의 주장을 보고했습니다(38). 즉 바울과 실라가 로마 사람이라 하는 말을 들은 상관들은 그들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성에서 떠나기를 요청합니다(39). 그들은 바울과 실라가 전도자이면서 선량한 로마 시민이라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물론 지난밤 간수의 집에서 이루어진 사건을 묘사한 후, 다음 날 아침 그들을 석방하는 장면은 어색한 측면이 없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바울과 실라는 이미 자유의 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상관들이 직접 와서 바울 일행을 호위하며 빌립보에서 떠나게 합니다. 관리들은 군중의 호응을 얻지 못한 이 전도자들을 보호할 책임이 없다고 느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처럼 로마 시민이라는 바울과 실라의 신분은 ‘우리 로마 사람들’(21)이 받지 못할 풍습을 전한다는 귀신 들린 여종의 주인들의 고발을 일거에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여기서도 분위기 반전과 역전이라는 누가-행전의 핵심 주제가 다시 확인됩니다. 로마 시민 신분을 드러낸 바울 일행을 통해 로마의 고위 계층과 시민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장면이 이제 펼쳐질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를 떠남(40)

복음을 전하는 것은 높임을 받아야 할 영광스러운 사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도자들이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아야 할 영광스러운 자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복음이 힘 있게 전달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세상 사람들이 전도자를 높이기는커녕 멸시하며 박해할지라고 언젠가는 이 땅에서 전도자를 높이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40두 사람이 옥에서 나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 보고 위로하고 가니라(40)

 

바울과 실라는 상관의 정중한 요청을 받고, 옥에서 나와서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 형제들을 만나 위로하고 떠납니다(40). 속주의 치안 담당자들에게 공식적인 사과를 요청한 바울과 실라는 자신들이 아니라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을 위해 사과를 요구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일로 빌립보의 그리스도인들이 보호 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빌립보 교회와 바울의 관계가 오래 지속되었다는 사실을 빌립보서는 확인시켜 줍니다. 특히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의 후원을 거절하지 않았습니다(빌 4:14-16).

바울과 실라는 선교후원자 루디아의 집으로 갑니다(40). 루디아는 그에게 후한 대접을 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친밀한 관계가 바울과 교회 사이에서 계속 이어졌습니다. 바울은 그곳에서 만난 형제들을 격려하고 빌립보를 떠납니다. 누가는 뒤에 남았다가 20장의 빌립보 장면에서 다시 등장합니다.


복음 전파는 정죄 받을 일이 아니며, 복음 전파자는 세상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녹녹치 않습니다. 세상을 해롭게 한다고 생각해서 핍박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복음 전파는 세상을 이롭게 하는 일이며, 우리는 복음을 전해 세상을 이롭게 해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복음 전도자를 귀하게 여기며 높여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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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16-02)


초대교회 빌립보 교회의 탄생

사도행전 16장 6-18절


일을 해나갈 때 나름대로 제일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지만, 때로는 전혀 엉뚱한 결과를 맺은 경우도 있습니다. 정말 당황스럽습니다. 지금 성도들 중에 어떤 분은 하나님과 자신의 뜻 사이에서 방황하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빨리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맡기시길 바랍니다. 그런 분들에게 오늘 성경은 분명한 대답을 해주고 있습니다. 어떤 방법을 선택해야 되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 하나님께서는 바울과 그 일행들을 마게도냐로 이끄십니다. 원래 바울의 목적지와는 달랐지만 바울의 선교팀은 성령을 통해 하나님게서 인도하시는 곳으로 향했으며, 순종은 곧 열매를 맺습니다. 빌립보에서 두아디라 성 출신의 루디아와 그 가족이 회심합니다. 또 귀신 들려 점치는 여종을 고쳐줍니다. 이제 2차 선교 여행이 분격적으ㅗ 시작됩니다.

 

2차 선교 여행의 시작(6-10)

사람은 자신의 이성의 한계에 갇혀 자신이 세운 계획이 최선이며 전부라 착각하여 이를 수행하기 위해 애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세운 계획이 최고가 아님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 인도하시는 계획은 우리 자신이 세운 계획보다 완전하고 유익한 계획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의심하지 말고 온전히 신뢰합시다.

 

6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7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8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9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0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6-10)

 

성령이 바울의 아시아 전도를 막으셨습니다. 성령이 함께하시면 항상 승승장구하는 줄로 알았지만 아닙니다. 바울 일행은 북부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을 거쳐 무시아 맞은편에 있는 비두니아로 가려고 했습니다. 이번에도 막으셨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일행은 실망하지 않고 순종하며 나갑니다.

 

(1) 성령의 인도하심(6-8)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선교팀을 그들의 계획과는 다르게 인도하셨습니다. 바울의 계획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바울과 그 일행은 아시아로 가려는 계획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 계획을 성령이 막으셨기 때문입니다(6).

이런 일은 7절에서도 반복됩니다. 무시아에서 비두니아로 가려고 했으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 위해 계속해서 기도했을 것입니다.

 

(2) 환상으로 인도하심(9-10)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른 곳으로 인도하신 이유는 9절에서야 밝혀집니다. 바울이 환상 중에 도움을 요청하는 마게도냐 사람을 보았던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마게도냐로 가야 했습니다.

이 단락은 성령이 자기 백성과 소통하시는 방식을 두 가지 형태로 보여줍니다. 첫째, ‘인도하심’이다. 누가는 성령이 바울의 계획에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관여하셨다고 기록합니다. 6절에서 성령은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도록 막으셨습니다. 7절에서 성령(예수의 영)은 바울이 비두니아로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10절에서는 하나님이 바울을 마게도냐로 부르셨습니다. 누가는 성령의 인도하심이 어떤 구체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졌는지에 대하여는 함구합니다. 다만 성령이 바울의 길을 인도하셨다고 기록할 뿐입니다. 물론 성령의 인도하심이 나타날 때 초자연적 방식을 동반했을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9절과 10절에서 ‘환상’이라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지만 앞선 구절들에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특정한 방식으로 제한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주목해야 할 것은 바울이 이런 방식의 인도하심에 익숙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는 점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움직이는 것을 누가는 전혀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방식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구체적인 방식에 대한 언급이 없는 성령의 인도하심은 사도행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행 4:31: 8:29,39: 10:44: 13:2,4). 누가의 표현과 기록들은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성령의 인도하심은 매우 익숙한 일이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인도하심에 대한 방식보다 중요한 것은 성령이 인도하시는 이유와 목적에 대한 깨달음과 반응입니다. 바울은 다만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했고 순종했습니다. 10절에 기록된 ‘힘쓰니’와 ‘인정함이러라’는 바울과 그 일행이 그들의 계획과 다른 인도하심에 대하여도 적극적으로 순종했음을 보여줍니다. 순종하지도 않으면서 인도하심을 기대하는 것은 이율배반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인도하심에 대한 기대는 순종을 전제로 합니다.

 

둘째, ‘환상이다’(9-10). 환상은 신비롭기에 아주 매력적이면서도 흥미로운 방식입니다. 비록 오늘날의 교회에 익숙하지는 않지만, 9절과 10절에 연속하여 기록된 ‘환상’을 초자연적 계시가 아니라고 부인할 근거는 없습니다. 환상을 언급하는 신약성경의 다른 용례들(행 7:31: 9:10; 10:3,17; 11:5; 16:9; 18:9)과 비교해볼 때, 이 단락에 나오는 ‘환상’이 초자연적 계시인 것은 분명합니다. 환상이란 단어가 이 단락에 두 번씩이나 나타나고 있는 점은 장면의 중요도를 높이는 효과를 갖습니다. 또 사도행전에서 이 단어가 쓰인 용례를 보면 모두 주요 지도자인 모세, 베드로, 바울에게만 적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드로아에서의 환상이 갖는 의의와 누가가 부여하는 중요성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이 단어가 신약성경에 열두 번 나오는데, 사도행전에서만 열한 번 사용됩니다. 이런 신적인 개입은 선교 동역자의 행선지 선택과 그들의 향로 결정이 목적 없는 우연이나 자의에 의하지 않고 하나님의 개입하심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보여줍니다. 즉 바울 일행의 활동은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며 또 하나님의 허락 아래 이루어졌습니다. 지리의 좌표 설정과 향로 결정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드로아에서의 환상은 오순절 설교에서 인용한 요엘의 예언, 곧 ‘너희 젊은이는 환상을 보고 늙은이는 꿈을 꾸리라’라는 말씀을 성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개입하심에 의한 진로 결정은 누가가 특별히 이 마게도냐 행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물론 이것은 복음이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건너갔기 때문이 아닙니다. 당시로 보면 여전히 그들은 그레코-로마 세계 안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문화권을 넘는 선교적인 도약을 했다고 보는 것은 시대착오적 인식일 수 있습니다.

 

빌립보에서의 사역(11-18)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의 예비하심의 역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 전도자와 사역을 홀로 두시지 않습니다. 복음 증거에 필요한 만남을 주시고 물질적 지원도 하십니다. 복음 증거자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이긴 싸움을 하는 것임을 기억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승리입니다.

 

11우리가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12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13안식일에 우리가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는데 14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15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 16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에게 큰 이익을 주는 자라 17그가 바울과 우리를 따라와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18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11-18)

 

빌립보에 도착한 바울에게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여인 루디아를 만나게 하십니다. 루디아의 마음을 여시어 그 가정을 빌립보 선교의 전진기지로 삼으십니다. 잘 준비된 전도자 바울을 통해 예비된 영혼 루디아를 바꾸셨듯이, 우리가 복음에 대한 확신과 말씀의 능력으로 구비될 때, 준비된 영혼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1) 루디아의 회심(11-15)

 

11-12절은 바울의 여행이 매우 신속하게 이루어졌음을 보여줍니다. 드로아에서 빌립보까지 약 240km의 여행을 거의 이틀 만에 끝냈습니다. 돌아오는 길이 오 일 정도 걸렸던 것에 비하면(행 20:6) 빌립보까지의 여행은 아주 빠른 속도로 이루어진 셈입니다. 드디어 바울의 선교팀은 마게도냐 지역의 첫 번째 도시였던 빌립보라는 선교지에 도착합니다. ‘첫 성’은 지리적인 위치를 가리키는 표현이 아니라 중요도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마게도냐의 행정 수도는 데살로니가였지만, ‘작은 로마’라고 불렸던 빌립보는 매우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물론 가장 큰 도시는 ‘암피폴리스’(Amphipolis)였습니다. 따라서 여기 ‘첫’이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한’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바울 일행은 먼저 기도처(프로쉬케)를 찾습니다(13). ‘여자만’ 모인 것을 볼 때 이곳이 회당일 가능성은 낮고 비교적 공식화된 기도처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빌립보에는 회당을 세울 수 있는 최소 단위인 유대인 남자열 명이 없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야외나 강가, 바닷가에 기도처를 마련하여 정기적인 모임을 갖는 것이 유대 관습이었습니다(스 8:15; 시 137:1). 이 단락에 나타나는 강가 기도처 또한 회당은 아니지만 회당의 기능을 수행한 유대인의 모임 장소였을 것입니다. 그만큼 빌립보는 매우 로마화한 도시였으며, 이것은 복음을 전하기에 녹록치 않은 현실을 반영합니다. 바울은 여건과 상관없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13절 ‘모여 앉아 말하다’에서 세 동사는 가르침과 배움, 즉 설교의 상황과 연결됩니다. 이 모임이 정기적인 모임이었을 것이라는 암시를 이 세 개의 동사를 통해서 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바울의 사역에 루디아의 회심으로 응답하셨습니다. 루디아는 이미 하나님을 공경하는 여인이었습니다(14). 그녀의 이름 ‘루디아’는 아마 자신의 출신지인 두아디라가 속했던 지역 ‘루디아’에서 유래하였을 것입니다. 이것이 이름이 아니라 ‘루디아 출신의 여인’이란 뜻일 수도 있습니다.

루디아는 이방인으로서 유대교에 관심을 가졌던 이른바 ‘하나님 경외자’였을 것입니다. 그녀는 집을 소유하고 있었고, 그 집에 바울 일행을 유숙시킬 만한 여유가 있었습니다. 나중에 ‘공중 모임’을 하는 것을 보면(행 16:40) 부유한 사업가였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바울은 루디아를 비롯한 하나님 경외자들을 일차적인 전도의 대상자로 삼았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했을 때 성령은 루디아의 가족들에게까지 전도의 열매를 맺게 하셨습니다(15). 이 여인은 이방(빌립보) 속에서도 이방(두아디라) 출신의 여인입니다. 그런 소외를 이기고 복음이 그녀에게 들어간 것입니다.

 

(2) 귀신 들린 여종을 고침(16-18)

 

16-18절까지는 귀신 들려서 점을 치는 한 여종을 고쳐주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3-15절까지의 루디아 회심 사건과 이 사건을 비교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입니다. 바울 일행은 루디아 집에 들어가서도 안락하게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기도를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16). 그들은 기도하러 가다가 귀신 들려 점치는 여종을 만났습니다. 이 여종은 점으로 사람들의 미래를 예언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귀신에 의한 역사였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능력에 주목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악한 악령의 역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악령의 목적은 사람을 마침내 파멸시키는 것입니다(요 10:10). 이런 귀신들의 역사를 대적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악령이라도 자신들의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합니다. 귀신 들린 여종은 바울 일행을 따라오며 소리치고, 괴롭히며 선교 사역을 방해했습니다(17). 아마도 바울 일행을 따라다니며 괴롭히면 필시 선교팀이 빌립보를 떠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귀신은 복음을 방해하며, 복음 증거자들을 괴롭힙니다. 그것은 귀신들이 영생의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귀신을 꾸짖어 여종에게서 나올 것을 명하였습니다(18b). 예수의 이름에 권세가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은 쫓겨납니다(막 16:17). 우리는 당당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약 4:7). 예수의 이름으로 악한 권세들을 이깁시다.

 

이 사건은 군사적인 목적으로 건설된 로마의 식민지 빌립보에서 일어난 기적입니다. 대표적인 이방 도시라고 할 수 있는 곳에서 의도치 않았지만 기적이 행해졌고 복음의 능력이 입증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바울 일행이 어려움을 겪기도 하지만, 이 사건이 빌립보에서의 선교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경외자였던 루디아의 회심에 말씀을 풀어서 해석하는 방식이 사용되었다면, 하나님에 대한 기본적 지식과 이해가 없는 도시의 사역에서는 기적이 사용되었습니다.


선교는 하나님께서 주도하시고 우리는 그분의 이끄심을 받아 순종할 뿐입니다. 어떤 상황도 이 하나님 앞에서는 장애물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니 사정이 어떠하든지 우리는 주님만 의지하여 세우신 자라에서 애쓰면서 주님의 인도에 주의를 기울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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