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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12-02)


교만한 인생을 심판하신 하나님

사도행전 12장 18-25절


강한 자를 무너뜨리는 건 더 강한 자가 아닌, 강한 자 속에 숨어있는 약한 본성일 때가 많습니다. 자신을 결정적으로 무너뜨리는 덫은 자기 안에 있습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하하던 혜롯에게서 왕복을 벗긴 건 교만이 있습니다.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면 언제든 최약자로 전략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천사의 베드로가 천사의 도움으로 기적적으로 탈옥한 사실을 모르고 있던 군인들은 헤롯 아그립바왕에 의해 사형에 처하게 됩니다. 자신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것에 실망한 아그립바는 가이사라로 내려가 연회를 베풉니다. 그의 연설을 듣던 백성은 그에게 신성모독에 해당하는 아부를 합니다. 헤롯은 그 말을 거부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가로챈 헤롯에게 즉각적으로 심판의 손을 드십니다.

 

파수꾼을 사형시킨 아그립바(18-19)

변화를 허락하지 않는 사람은 성장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성장시켜려 하지만 불편하게 느껴지는 사람들을 제거하려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그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항상 자신을 성찰하고 변화를 위해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자신을 맡기는 사람은 하나님의 놀라운 작품으로 변화되어갈 것입니다.

18날이 새매 군인들은 베드로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여 적지 않게 소동하니 19헤롯이 그를 찾아도 보지 못하매 파수꾼들을 심문하고 죽이라 명하니라 헤롯이 유대를 떠나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머무니라(18-19)

새로운 아침이 밝았습니다. 간밤에 마가라는 요한의 집이 베드로의 출현으로 소동이 일어났지만, 감옥에서는 베드로의 탈출로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베드로가 천사의 도움으로 기적적으로 탈출에 성공한 것을 헤롯의 간부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날이 밝자 그 영문을 알지 못한 채 그들 사이에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베드로를 지켰던 경비병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벌인 후, 그의 탈출이 어떤 음모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하고 그들에게 사형을 집행하도록 명령을 내립니다. 로마법에 의하면, 죄수의 탈출을 허용한 경비병은 탈옥수가 받아야 했던 동일한 형벌을 받게 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아그립바 왕이 이 로마법을 반드시 그대로 따라야 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아그립바 왕은 그들에게 사형 명령을 내린 후, 이제 절기가 다 끝나면서 행정 수도 가이사랴로 내려갔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큰 절기인 유월절과 무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보냈습니다. 로마의 총독과 함께 예루살렘의 치안을 감당하기 위해서 자기 군대를 거느리고 올라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내려가는 길은 베드로를 놓친 아쉬운 마음을 안고 갔을 것입니다. 그는 야고보를 죽일 수 있었고 베드로를 투옥시킬 수 있었겠지만, 동시에 베드로를 감옥 안에 계속 둘 수 없었습니다. 죽일 수도 찾을 수도 없었습니다. 아무 힘없는 자기 부하들이나 죽여서 화풀이하는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거나 뜻 밖에 결과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며, 모든 것을 자신의 통제 아래 둘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바로 헤롯이었습니다.

여기서 언급된 ‘유대’는 좁은 의미에서 유대인의 땅을 의미합니다. 반면 가이사랴는 정치적으로는 유대 지방에 속해 있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유대인의 땅이 아닙니다. 가이사랴는 헤롯 대왕이 도시를 설립한 때로부터 시작해 대체적으로 이방인들이 거주하던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누가가 아그립바 왕이 유대에서 가이사랴로 내려갔다고 언급한 것은 다음 이어지는 장면이 그곳에서 일어난 일임을 말하기 위한 서술적 장치입니다.

 

교만한 아그립바를 심판하심(20-23)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께 기도하고 복음을 선포하며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책임져 주십니다. 반대로 자기 주제도 모르고 교만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있다면 한 나라의 왕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용납하지 않습니다.

20헤롯이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대단히 노여워하니 그들의 지방이 왕국에서 나는 양식을 먹는 까닭에 한마음으로 그에게 나아와 왕의 침소 맡은 신하 블라스도를 설득하여 화목하기를 청한지라 21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단상에 앉아 백성에게 연설하니 22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하거늘 23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20-23)

헤롯 아그립바 왕이 가이사랴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내용을 다룹니다. 그러나 누가는 왜 그런 죽음을 맞게 되었는지 그 경위를 먼저 설명합니다.

⑴ 주변 나라를 통한 왕권의 위세(20-21)

헤롯 왕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주변 나라들을 제사하면서 성경은 말해줍니다. 본문에서는 대표적으로 두로와 시돈을 나타납니다. 두로와 시돈은 해변에 위치했기 때문에 식량의 많은 부분을 갈릴리와의 무역을 통해 조달해왔습니다. 그래서 헤롯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사는 것이 필요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그때로부터 대략 천 년 전 히람과 솔로몬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열왕기상 5:9-12).

무슨 영문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두로와 시돈 사람들과 헤롯 아그립바 왕이 분노하고, 그 지역들과 외교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습니다.  아그립바 왕의 이러한 이상 기류를 감지하고 그들은 화친 정책을 펼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에 이 두 도시의 외교관들은 헤롯 아그립바 왕의 침소를 맡은 고관인 블라스도를 매수해서 왕의 마음을 살려는 기회를 마련했습니다. ‘왕의 침소를 맡은 신하’는 일반적으로 왕이 가장 신뢰하는 사람 중 한 사람입니다.

⑵ 사람들의 경배를 통한 위세(22)

두로와 시돈은 헤롯 왕의 마음을 달려고 시도하다가 좋은 기회가 왔습니다. 가이사랴 지역에 축제가 있었습니다. 이 축제가 가이사랴 설립 기념일에 열렸는지 황제의 생일인 44년 8월 1일에 열렸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전자의 경우라면 베드로의 탈옥 사건은 거의 1년 전 유월절 때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 날 헤롯 왕은 어의(御衣)을 입고 단상에 앉아 백성들에게 연설을 했습니다.

헤롯 왕의 연설을 들은 백성들이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고 아부합니다. 이것은 헤롯 왕이 기대하던 이상의 반응이었습니다. 헤롯은 항상 정통성이 없는 왕이라는 핸드캡(handicap) 때문에 좌불안석이었습니다. 언제 유대인들이 자신에게 등을 돌릴지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유대인을 길들이기 위해서 때로는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애를 쓰다가도 또 때로는 모질게 대하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왕권을 잘 지키고 싶었습니다.

그런 배경 속에서 백성들이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고 하니 흥분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사람도 받아서는 안 되는 찬사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침상을 맡은 신하 블라스도가 꾸민 일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외교적인 사안을 상소하기 위해서는 헤롯의 기분이 좋을 때에 내놓으려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돈으로 사람을 매수해서 그처럼 환소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할 때도 거짓 증인들을 고용하여 재판정에서 ‘바나바를 살리고 예수를 죽이라’고 소리치게 만들었었습니다.

⑶ 교만한 자에게 내린 심판(23)

이러한 꼼수는 사단의 패배와 교회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헤롯 왕은 하나님께 돌아갈 영광을 자기 몫으로 돌렸습니다. 그 결과 우상숭배자들에게 임하는 결과가 똑같이 임했습니다.

본문에는 ‘주의 천사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라는 표현합니다. 헤롯 왕의 죽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말해줍니다. 신이라고 불리던 사람이 벌레에게 먹히고 맙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벌레만도 못한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저자 누가는 혜롯의 죽음이 벌레가 아니라 교만이라고 말합니다. 주의 사자가 심판을 집행합니다. 천사가 실제적으로 나타났다는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바는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찬탈하는 신성모독적인 행동을 할 경우,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셔서 그를 엄벌하신다는 점입니다. 앞에서 헤롯의 손에서 베드로를 구원하셨는데, 이번에는 그분이 헤롯을 심판하셨습니다.

이 기록된 내용은 역사가 요세푸스의 글에도 기록된 사건입니다. 요세푸스는 동일하게 아그립바 왕이 단순히 사람이 아니라 신과 같다는 칭송을 받았지만, 그 신성모독적인 아부를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인 점을 지적합니다. 당시 정황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이와 관련된 요세푸스의 글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헤롯은 가이사의 안녕을 위한 축제라고 생각하며 그를 기념해 연회를 열었다. 여기에는 많은 지역 관리들과 다른 고위 인사들도 참석했다. 연회 둘째 날 아그립바는 완전히 은으로 만든 예복을 입고 동이 틀 무렵 연회장에 들어섰다. 그때 그의 은색 옷은 태양의 첫 빛줄기에 비쳐 아름답게 빛났고 그 빛의 찬란함은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두려움과 떨림을 안겨주었다. 이에 거기 모인 사람들은 그에게 아부하며 그를 신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라고 외쳤다. ‘지금까지 우리는 당신을 인간으로서 존경했지만, 이제부터 당신은 인간 이상임을 고백합니다.’ 그는 그들을 질책하지 않았고, 그들의 불경한 아부도 거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눈을 들어 자기 머리 위에 있는 밧줄에 부엉이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것을 보는 순간, 그는 부엉이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것을 보는 순간, 그는 즉시 이것이 악의 메신저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갑자기 강한 슬픔이 그의 마음을 찔렀다. 이와 동시에 심한 통증이 그의 내장을 사로잡았고, 그 통증의 강도는 빠르게 올라갔다 … 그는 황급히 왕궁으로 옮겨졌으며…배의 통증이 5일간 지속된 후 그는 그의 생애 쉰네 번째 되는 해, 왕위에 오른 지 7년째 되는 해에 사망하고 말았다.”(요세푸스,「유대고대사』19:343-350)

누가의 기록과 요세푸스의 기록은 서로 독립된 기록이지만, 그 핵심 내용은 일치합니다. 단지 새로운 내용이 있다면 두로와 시돈 사람들과의 외교 관계에 관한 내용일 것입니다.

학자들은 아그립바 왕의 사인(死因)에 관해 여러 가지로 추측합니다. ‘벌레에게 먹혀’라는 표현은 의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복막염이나 장폐색, 혹은 비소 중독 등으로 추정이 가능합니다. 누가의 표현을 문자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와 같은 표현은 고대에 여러 저자들이 악독한 독재자들을 포함해 불행한 최후를 맞아 마땅하다고 생각되는 자들의 죽음을 가리킬 때 종종 했던 표현입니다(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17:168-170에 기록된 헤롯 대왕의 죽음 묘사를 참조하라). 헤롯 아그립바 왕이 죽은 후 유대는 다시 로마 총독부의 관할로 넘어가게 됩니다. 사도행전에는 아그립바 왕의 세 자녀인 헤롯 아그립바 2세와 그의 누이동생 버니게(행 25:13), 막내 딸 드루실라(행 24:24)가 등장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과 견주다가 벌레만도 못한 인간이 될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을 인정하여 영광스러운 인생이 될 것인지 선택하도록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함(24-25)

사단은 사람들을 미혹시켜 하나님께 도전하도록 만드는 자입니다. 역사적으로 조상 아담과 많은 사람들을 미혹했지만 그는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발악해서 하나님을 도전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능력만을 증거 하는 역할만합니다. 그리고 누가 역사의 진정한 주인인지 증명해주고 맙니다.

24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25바나바와 사울이 부조하는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니라(24-25)

사도행전 12장은 헤롯 왕이 야고보를 죽이고 수제자 베드로를 시작했지만, 마지막은 말씀이 더 해졌다고 끝을 맺고 있습니다. 본문은 궁극적으로 승리자라는 것을 아래 같이 표현합니다.

⑴ 여전히 부흥하는 초대교회(24)

본문에서는 헤롯의 핍박을 받은 후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라’(24)라고 소개합니다. 인간의 능력은 헤롯 왕의 죽음과 함께 힘을 잃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쇠하지 않고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초대교회가 외부로부터 박해를 받고 어려움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즉 사도 야고보가 아그립바 왕에 순교를 당하고 사도 베드로가 예루살렘 교회를 떠나가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굳건하게 세워져 나갔음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환난의 상황 속에서 더욱 흥왕하여 더 넓은 지역으로 확대되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지금까지 사도행전 이야기의 큰 단락이 마무리될 때마다 초대교회의 부흥을 간략하게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라고 요약해왔습니다(사도행전 6:7; 12:24; 19:20).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이 지속적으로 흥왕했음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초대교회가 단순히 수적인 부흥을 이루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초대교회가 고난과 박해 가운데에서도 여전히 그리스도의 복음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사정은 다르지 않습니다. 양적이고 비본질적인 성장 그 자체만으로 교회의 가치를 평가하려는 시도에서 아무런 의미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⑵ 계속 되는 하나님의 사역(25)

사도 야고보의 순교는 하나님의 무능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을 입증한 사건이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은 이 모든 일을 예루살렘에서 보았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흉년으로 고통 겪고 있었지만, 설상가상으로 박해까지 만났지만, 믿음이 약해지지 않고 말씀이 더 흥왕해졌습니다. 사도행전 11:30에서 안디옥 교회의 구제 헌금을 들고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바나바와 사울은 헌금 전달을 마치고 다시 안디옥으로 돌아옵니다.

예루살렘에서 돌아올 때 그들은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돌아온다. 이 표현은 12절에서 이미 언급된 바 있습니다. 여기에 언급된 마가는 골로새서 4장 10절에서 바나바의 사촌으로 언급되는 마가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따라서 이 두 사람의 친척 관계는 왜 바나바와 사울을 따라 안디옥에 오게 되었으며, 나중에 그들과 함께 1차 선교여행을 떠나게 되었는지를 잘 설명해줍니다.


당신은 이런 하나님의 말씀의 권능을 신뢰하십니까? 벌레 같은 존재임을 인정하지 않는 교만 때문에 벌레에 죽은 헤롯처럼 인물이 되지 않도록 말씀에 자신을 비추어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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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12-01)

 


야고보의 순교와 베드로의 투옥과 탈옥

사도행전 12장 1-17절


베스트셀러 책으로 조엘 오스틴 목사의 ‘긍정의 힘’란 책이 있었습니다. 내용은 성공한 한 사람이 하와이로 여행을 떠나면서 시작합니다. 꿈꾸는 만큼 이루어진다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인생은 꿈꾸는 데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책을 읽고 긍정의 힘을 얻을 수 있었지만, 상상하는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의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야고보와 베드로를 통해서 역사하심을 볼 때, 사람의 계획대로가 아닌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끌어 가심을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정치적 지지를 얻기 위해 헤롯 아그립바 왕은 야고보 사도를 죽이고, 베드로까지 공개 처형할 방도를 모색하고 있었습니다. 성도들은 베드로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주의 사자’를 통해 극적으로 베드로를 탈출시킵니다. 이 일은 베드로를 위해 기도했던 성도들마저 믿기 어려울 정도의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야고보의 순교함(1-2)

지금까지 우리는 예배당 안에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것을 부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부흥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정립해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반대로 많은 성도들이 흩어져서, 곳곳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것을 부흥이라고 합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끼리만 예배드리는 것을 부흥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흩어져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주되심을 증거하는 것을 부흥이라고 합니다.

1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2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1-2)

초대교회는 엄청난 부흥을 맛보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교회 위에 엄청난 핍박을 주십니다. 교회는 어려움 가운데 처하고 성도들은 핍박 때문에 세계로 흩어져야만 했습니다. 흩어진 곳에서 겨우 목숨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흩어진 곳에서 목숨만 부지한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도 복음을 더 힘차게 증거 했습니다.

본문에는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1)라고 초대교회에 검은 구름이 몰려옵니다. 그 시기는 ‘그때에’라고, 바나바와 사울이 후원금을 자기고 예루살렘에 올라간 시점을 의미합니다(행 11:30). 이 시점은 유대 절기로 말하면, 유월절 전후 기간이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유월절 직전에 순교를 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헤롯은 베드로를 죽이려고 체포했을 때는 이미 유월절이 진행 중이었습니다.

초대교회를 박해하는 데는 ‘헤롯’이란 인물이 계속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도 헤롯 왕이고, 본문에도 헤롯 왕이 나옵니다. 이것은 한 사람이 아니라 ‘헤롯 가문’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탄생 시에는 ‘헤롯 대왕’이며, 본문에 나타난 헤롯 왕은 그의 손자인 ‘헤롯 아그립바 1세’입니다. 하지만, 헤롯 아그립바 1세라고 소개하지 않고, ‘헤롯’으로만 소개하는 것은 헤롯 가문이 여전히 하나님의 복음 전파를 방해하고 있음을 전달하려는 의도입니다.

헤롯 가문의 출신지는 유대인이 아니라 ‘에돔’이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그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유대인의 종교를 지키는 척했고, 유대인들이 미워하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을 핍박해서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려고 했던 것입니다.

헤롯 또한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교회를 핍박했던 것입니다(1). 그 결과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2)라고, 야고보 사도의 순교에 대한 소식을 전합니다. 열두 사도 중에서 첫 순교자가 나온 것입니다. 헤룻의 정치적인 야심 때문에 초대교회 중요한 지도자 한 사람을 잃었습니다. ‘야고보’는 요한의 형제요, 중요한 순간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함께 챙기셨던 바로 그 사도입니다. 이 사건은 헤롯 아그립바 왕이 죽은 해로 알려진 주후 44년에 일어난 일입니다(12:23). 그는 야고보를 살해한 것도 이와 같은 정치적인 계산에서 나온 것이 분명합니다.

야고보를 살해한 후, 유대인들에게 호감을 받은 헤롯 아그립바는 이제 더 초대교회의 최고 지도자인 베드로까지 죽이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베드로의 투옥와 탈옥(3-17)

세상은 자신의 능력 아래 멍에와 모든 것을 결박시키고 구속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꽁꽁 결박하고 구속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말씀 한마디로 그 수많은 멍에와 결박을 썩은 새끼줄처럼 결박을 푸십니다. 사람들에 의해서 감옥에 갇힌 베드로는 사람의 능력을 넘어서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 자유의 몸이 됩니다.

3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 기간이라 4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인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 내고자 하더라 5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6헤롯이 잡아 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인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수꾼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 7홀연히 주의 사자가 나타나매 옥중에 광채가 빛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이르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8천사가 이르되 띠를 띠고 신을 신으라 하거늘 베드로가 그대로 하니 천사가 또 이르되 겉옷을 입고 따라오라 한대 9베드로가 나와서 따라갈새 천사가 하는 것이 생시인 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 10이에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시내로 통한 쇠문에 이르니 문이 저절로 열리는지라 나와서 한 거리를 지나매 천사가 곧 떠나더라 11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들어 이르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 하여 12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 13베드로가 대문을 두드린대 로데라 하는 여자 아이가 영접하러 나왔다가 14베드로의 음성인 줄 알고 기뻐하여 문을 미처 열지 못하고 달려 들어가 말하되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섰더라 하니 15그들이 말하되 네가 미쳤다 하나 여자 아이는 힘써 말하되 참말이라 하니 그들이 말하되 그러면 그의 천사라 하더라 16베드로가 문 두드리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그들이 문을 열어 베드로를 보고 놀라는지라 17베드로가 그들에게 손짓하여 조용하게 하고 주께서 자기를 이끌어 옥에서 나오게 하던 일을 말하고 또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 하고 떠나 다른 곳으로 가니라(3-17)

사도행전 5장에서 사도들이 옥에 갇혔다가 주의 사자가 밤에 기적적으로 옥문을 열어 풀려났던 일을 소개할 때와는 달리 누가는 이번 베드로의 구출 과정을 아주 상세하게 기술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놀랍게 베드로를 구출해내셨는지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1) 베드로의 투옥(3-5)

헤롯에 의해 야고보가 순교를 당하자 유대인들은 기뻐했습니다(3). 유대인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헤롯은 매우 격양됩니다. 빌라도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유대인들의 반응 때문입니다. 헤롯도 야고보의 죽음을 기뻐한 것을 보고, 유대인들에게 인기를 얻기 위하여 이제 베드로로 잡으려고 합니다(3).

헤롯은 더 나가서 베드로를 잡아 투옥합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즉시 처형했지만, 베드로는 바로 처형하지 못한 것은 무교절 절기 때문입니다. 투옥된 때 7일 동안 진행되는 무교절이 시작되는 시기였습니다. 사실 7일간의 무교절은 유월절 바로 다음 날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보통 이 두 절기를 거의 하나의 명절로 간주하곤 했습니다. 무교절 기간에는 죄수를 사형하지 않습니다. 어찌 보면 지금 이 상황은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붙잡으려 했던 상황과 매우 비슷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유월절 이전에 해치우려 했고 베드로는 무교절이 끝난 후에 공개 처형하려 했습니다. (‘백성 앞에 끌어내고자 하더라’). 죄수의 탈옥을 경계해 '군인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철통 경비를 세운 것은 역사적으로 신빙성이 매우 높은 진술이다(4). 이는 야간 경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는 당시 로마 군대가 야간 보초 시간을 사등분해서 돌아가며 보초를 서게 했음을 말해줍니다.

베드로는 유월절 기간에는 죽일 수 없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유월절 기간, 즉 명절에 돌아가심으로 인해 기독교가 확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도 유월절에 잘못 죽이게 되면, 그 전처를 밟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베드로를 즉시 죽이지 않고 잠시 살려준 된 것입니다.

베드로가 갇혀 있는 시간에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베드로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5).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모습을 묘사할 때 사용된 단어로 성도들의 간절함을 표합니다(눅 22:44). 예루살렘 교회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강청하는 기도(눅 11장)와 포기하지 않는 기도(눅 18장)처럼 간청했던 것입니다.

(2) 베드로가 기적적으로 탈옥함(6-11)

베드로가 임시로 갇힌 곳은 성전의 북서쪽 구석에 위치한 안토니아 요새로 추정됩니다. 이곳에 예루살렘에 주둔하는 로마 군대가 머물러 있던 곳입니다. 이 요새 지하에는 많은 감옥이 있었습니다. 아마 베드로도 이 감옥 중 한 곳에 갇혀 있었습니다. 6절에 보면, 두 명의 군인이 베드로의 양 옆에서 지키고 다른 두 명의 군인이 옥문을 지킨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철통 경비에 대한 누가의 자세한 묘사는 베드로의 출옥이 얼마나 기적적인 사건이었는지를 극대화합니다.

이에 베드로가 수일간 투옥 되어 있는 동안 예루살렘 교회는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베드로의 모습은 놀랍습니다. 이 밤이 지나면 야고보처럼 순교의 제물이 될 텐데, 베드로는 어쩌면 그렇게 태평하게 자고 있습니다(6).

바로 이 순간 베드로를 구출하기 위한 하나님의 작전이 개시되었습니다. 저자는 베드로의 구출 작전을 주목을 끌기 위해 ‘보라’(7)라는 구절을 사용합니다. ‘보라’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모두 34회 등장하는데, 독자들의 주목과 관심을 끌기 위한 표현입니다. 독자들에게 이제 곧 일어날 일을 주목하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입니다. 천사가 나타나자 캄캄한 지하 감옥에 빛이 비쳤습니다(7). 이때 베드로를 감시하던 군사들이 어떻게 행동했는지에 대해서 저자는 침묵합니다. 그를 감시하던 군사들이 베드로의 행방이 대해 큰 소동이 있었다는 18절의 기록을 보아 이들은 갑작스럽게 잠에 빠져 있다가 날이 샌 후에야 비로소 깬 것으로 보입니다.

갑자기 천사가 나타나 베드로에게 ‘옆구리를 쳐 깨워’라는 표현합니다. 미루어 보건대, 베드로는 이튿날 자신에게 닥칠 운명을 걱정하기는커녕 천하태평하게 깊은 잠에 빠져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베드로는 천사의 지시를 따르면서도 지금 일어나는 일이 꿈인지 생시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이전에도 주의 천사를 통해 옥에서 구출 받은 경험이 있었습니다(행 5:18-20). 하지만 너무나 놀라운 시간에 눈앞에 전개되고 있었기에 자신도 쉽게 믿기 어려웠습니다. 천사가 자신을 구출하는 것을 환상으로 착각할 정도였습니다(9). 그가 시내로 통하는 철문 앞에 도착하자 놀랍게도 문은 자동문처럼 저절로 열렸습니다(10). 베드로가 옥에서 완전히 벗어나 시내의 거리 하나를 지나자 천사가 즉시 떠나갔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모든 것이 실제 상황임을 깨닫고, 베드로는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11)라고 고백합니다.

(3) 베드로가 탈옥 사실을 알림(12-17)

기적적으로 옥에서 탈출한 베드로는 성도들이 모여 기도하고 있는 마리아의 집으로 갑니다(12). 누가는 이 집 주인의 이름을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로 소개합니다(12). 학자들은 이 사건을 비롯해 초대교회의 여러 이야기들의 출처가 바로 이 장소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사도행전 1장에 나오는 다락방도 이 마가의 어머니 집의 다락방일 것이라 추론합니다. 마가는 곧이어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에 구제금을 전달하고 안디옥으로 향할 때 그를 데리고 오는 장에서 다시 등장합니다(25). 이 집은 아주 큰 대문과 작은 정원과 같은 앞뜰이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마리아의 집에 도착하니, 꽤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신자들이 모여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감옥에서 탈출하여 대문을 두드렸습니다. 마리아의 집에 문지기 역할을 했던 로데라는 여자 아이가 영접하려 나갔다가 그의 음성을 알아차렸습니다(13). 로데는 너무 반가운 나머지 문도 열주지 않고 집안 성도들에게 달려가서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섰더라”고 외쳤습니다(13). 이때 사람들은 한결같이 ‘네가 미쳤다’고 성도들은 베드로의 탈옥을 믿지 못했습니다. 아마 베드로의 구출은 불가능하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로데는 정말 베드로가 대문 밖에 있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15). 오히려 그들은 베드로가 맞다고 주장하는 로데의 말을 부정하면서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베드로의 천사일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이는 당시 유대인들이 사람마다 각자의 수호천사가 하늘에 존재한다고 믿었던 민속 신앙을 반영합니다(참조. 마 18:10). 당시 유대인은 수호천사들이 각기 보호하는 사람과 동일한 모습을 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일부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즉시 그 사람의 수호천사가 나타난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베드로의 수호천사가 그의 곁에 있지 않고 문을 두드리고 있다면 그것은 베드로의 죽음을 알리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집안에서 이렇게 실랑이가 일어날 때 베드로는 밖에서 문을 두드리고 있었습니다(16). 로데를 정신 나간 사람으로 취급했는데, 그녀의 말이 사실로 드러난 것입니다.

집안에 들어온 베드로는 손짓하여 놀란 사람들을 조용하게 한 후, 주님이 자신을 어떻게 옥에서 건져 내셨는지 상세하게 설명했고, 베드로는 이 사실을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알려 주라고 하면서 다른 장소로 급히 피신했습니다(17). 여기서 나오는 ‘야고보’는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를 말합니다. 그는 베드로, 요한과 함께 예루살렘 교회의 3대 기둥 가운데 하나였습니다(갈 2:1-10). 예수의 부활에 관한 목격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고전 15:7). 그는 이른 시기부터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 중 하나로 부상하게 되었고,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는 베드로를 대신해 수장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그는 경건한 삶으로 인해 심지어 믿지 않는 유대인에게도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회의에서 의장의 역할을 감당했습니다(행 15장). 그는 사도행전 12장 이후부터 예루살렘 교회의 핵심 지도자로 등장합니다.

베드로의 구출 사건은 사도행전에서 예루살렘 교회에 관한 마지막 기록을 장식합니다. 모여서 기도하던 성도들은 베드로의 구출 사건을 야고보와 형제, 즉 장로들뿐만 아니라 다른 성도들에게도 전함으로 과연 주님께서 주권적인 섭리에 따라 그의 교회와 종들을 보호하셨음을 확인시켜 주었을 것입니다. 사도 야고보는 순교를 당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직 할 일이 많은 베드로를 살려 주심으로 교회에 큰 위로와 안위를 허락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유일하게 남았던 베드로가 다른 곳으로 갔다는 언급은 사도행전 후반부의 기록이 더 이상 예루살렘 교회를 중심으로 전개되지 않을 것임을 예고합니다. 이제 13장부터 저자는 안디옥 교회와 바울을 중심으로 초대교회 선교 사역 이야기를 전개할 것입니다.


언제든지 우리는 위기와 어려움에 노출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위기와 어려움이 찾아오더라도 복음의 길 위에 서 있는 한, 하나님께서는 길을 여시고 새 길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막연한 믿음이 아닌 믿음의 좌표가 분명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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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11-02)

 


복음이 결실되어 가는 성숙한 교회

사도행전 11장 19-30절


미국 MIT공대 기상학자 에드워드 N. 로렌츠(Edward N. Lorenz)가 처음으로 발표한 이론으로 ‘나비효과’입니다. 이 이론은 작고 사소한 사건 하나가 나중에 커다란 효과를 가져온다는 의미입니다. 브라질에 있는 나비의 날갯짓이 미국 텍사스에 토네이도를 발생시킬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과학이론에서 발전했으나 점차 경제학과 일반 사회학 등에서도 광범위하게 쓰이게 되었습니다. 믿음에서도 믿음으로 살겠다는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의 결단하고 실천하는 나비효과를 통해서 작은 믿음의 날갯짓이 나중에는 큰 영향을 주게 됩니다.

 

스데반에 시작된 작은 날갯짓은 전 세계로 복음을 전파하는 큰 역사를 낳았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으로 온 지역으로 흩어졌던 헬라파 유대-그리스도인들은 수리아의 수도 안디옥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에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를 파견합니다.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사울을 다소에서 데리고 옵니다. 안디옥 교회는 지역 사회에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사람들부터 ‘그리스도인’이라는 별칭을 얻게 됩니다.

 

안디옥 교회의 설립됨(19-21)

교회의 존재하는 목적은 주의 능력이 역사하여 많은 사람들을 주께 돌아오도록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구성원은 모이던지 흩어지든지 어디에 있든지 주와 함께 하면서 사역해 가는 일군들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그러한 신실한 일군들을 통해 하나님의 사역을 이루어 가시기 원하십니다. 

19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20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21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 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19-21)

앞 사도행전 11장 1-18절에서 이방인인 백부장 고넬료와 그 가족, 친구 그리고 친척들이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는 과정과, 예루살렘 교회는 그들을 하나님 나라의 가족으로 인정하는 과정을 소개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수많은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는 과정과 안디옥 교회가 세워지는 과정을 소개합니다. 이것은 13장에서 사도 바울과 그의 선교팀을 통해 복음이 이방인 지역으로 들불처럼 확산되는 것으로 더 발전할 것입니다. 안디옥 이방인을 위한 복음 사역으로 백부장 고넬료의 가정에서부터 복음이 시작된 후, 얼마나 시간이 경과되었는지 모릅니다.

(1)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함(19)

예루살렘에서 흩어진 성도들은 아직까지도 자기 동족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했습니다. 아마 성경에 대한 기초를 알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익숙한 것을 좋아합니다. 그들은 아직도 자신들이 예루살렘에 흩어진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땅끝까지 이르러 모든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고난과 핍박에는 하나님의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해답을 쉽게 찾을 없고, 빠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고난과 핍박을 통하여 자신이 변화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생각과 가치관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신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2)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복음(20-21)

스데반의 일로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특히 교회 지도자급에 속한 자들이 예루살렘에 머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다른 복음 전도자들도 베니게와 구브로 그리고 안디옥으로 각자 흩어졌습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신자가 되기 위해 할례를 받거나 율법을 지키지 않았으며, 교회 내에서도 수적인 면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유대교와 관련한 율법의 문제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온 ‘할례에 속한 자들’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아직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갈 2:11-14). 베드로처럼 복음 전도자들이 안디옥에 헬라인들에게 ‘주 예수를 전파하는’ 전파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에서는 그들이 구브로 출신이고, 그레데 출신들이 안디옥에서 전도자로 일했다고 소개합니다. 이들을 통해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세워졌습니다. 안디옥에 교회가 세워진 일은 상당히 의미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영향력이 지리학적으로 확장되어 나갈 뿐만 아니라 이방인 선교에 있어서도 초대교회는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됩니다. 본문에는 복음을 받은 자들을 ‘헬라인’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헬라인들’은 순수한 이방인들이 아니라 고넬료처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이방인들이었을 것입니다. 복음 전도자들은 어떤 계기로 그들과 대화하게 되었고, 그들에게 그 메시아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라고 소개했을 것입니다.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을 기뻐하시고 이방인에게도 성령으로 세례를 주셨던 주님께서 복음 전도자들 속에 역사 하셨습니다. 흩어진 자들은 먼저 베니게에서 복음을 전했고 일부는 배를 타고 구보로로 건너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구브로는 오늘날의 키프로스로 바나바의 고향입니다(사도행전 4:36). 구브로는 또한 나중에 바나바와 바울이 1차 선교여행을 떠날 때 가장 먼저 전도한 곳이기도 합니다(사도행전 13:4-12), 적어도 주전 2세기부터는 유대인들이 많이 모여 살았던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마카비 1서 15:23). 또한 이들 중에는 수리아의 수도인 안디옥에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안디옥은 로마와 북아프리카의 알렉산드리아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인구 50만의 대도시였으며, 당시 그곳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본문에서는 안디옥에서 일어난 사건이 앞 단락에서 소개된 고넬료의 회심 사건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뉘앙스를 전혀 남기지 않습니다. 이로 미루어보건대, 복음 전파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독립적 현상이었습니다. 아울러 그들의 복음 전파를 ‘주 예수를 전파하니’라는 말로 요약합니다. 이제 유대인을 넘어 이방인에게도 예수를 주(퀴리오스)로 소개하는 새로운 선교 전략이 도입된 것입니다. 이는 초대 교회에서도 선교 대상에 따라 복음의 강조점을 달리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라는 말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과정에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다시 말해 전하는 자의 뛰어난 말솜씨보다는 그들과 ‘주의 손’이 함께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치유와 이적이 함께 나타난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의 선교 활동 배후에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이방인들에게는 말씀보다 이러한 사역이 더 호소력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역으로 인해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맺었습니다. 몇 사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돌아왔습니다. 이것을 주께서 하셨다고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방인 안디옥 교회의 성장(22-30)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지칭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따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비극입니까? 그리스도인인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명성만큼 아름다운 삶을 이루어가시기 바랍니다. 한 두 명의 이방인으로 시작한 안디옥 교회는 점점 능력 있는 교회로 성장해갑니다.

22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23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믿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24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25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26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22-30)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와 접촉해서 세례를 주었던 일이 신속하게 전파되었듯이, 안디옥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회심 사건 역시 예루살렘 교회까지 보고되었습니다. 그들은 베드로를 통해 이미 예방 주사를 맡은 사람들이었습니다.

(1) 바나바를 파송하는 예루살렘 교회(22-24)

이에 예루살렘 교회는 다시 정비되어 본부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신속하게 바나바를 안디옥으로 파송합니다. 사마리아가 주의 복음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파송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바나바를 보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바나바를 선택해 안디옥으로 보낸 이유는 그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한 의구심, 혹은 거부감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은 유대교 전통을 중시하는 소위 보수 성향의 유대-그리스도인들의 지나친 우려를 진정시키기 위해 바나바를 파견한 듯합니다. 바나바라는 인물을 선택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러한 추측을 합리적인 것으로 보이게 합니다. 바나바는 비록 구브로 출신인 디아스포라 출신 유대인이었지만, 그 동안 예루살렘 교회 신자들로부터 두터운 신뢰를 받아왔습니다. 관계 중심적으로 ‘위로의 사람’이란 별명처럼 바나바는 회심한 사울을 예루살렘 공동체와 연결해준 사람입니다. 그래서 공동체 안에서도 히브리파 신자들과 헬라파 신자들을 중재하는 역할을 잘 감당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나바의 드러난 성품 또한 그가 이번 일의 적임자임을 말해줍니다. 안디옥 교회의 가능성을 본 바나바는 자신과 함께 동역할 사람을 생각합니다. 그가 바로 옛 친구 사울 바로 바울이었습니다. 그를 부르기 위해 다소까지 내려갑니다. 고향에서 있던 시간이 승승장구하던 사울에게는 유배 생활처럼 느껴졌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10여년의 기간 동안, 이후에 이방인 지역에서 사역하기 위한 온갖 모든 것들을 준비하였던 것입니다. 사울을 경쟁자로 생각하지 않고 환상의 콤비였습니다. 바나바는 사랑이 많은 관계 중심 사람이었고, 사울은 성경과 신학에 능한 훌륭한 교사였습니다. 두 사람은 1년 동안 로마 제국에서 3번째로 큰 도시인 안디옥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갔습니다.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라’는 말은 일 년간 교회(건물)에서 모였다는 의미가 아니라 성도들과 함께 모였다는 의미입니다. 전자는 교회(에클레시아)를 장소로 보는 것이고, 후자는 교회를 성도들의 모임으로 보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이라 인정받은 성도(25-26)

안디옥에 도착한 바나바는 집단적인 회심 사건이 ‘주의 손’이 하신 일인지, 예루살렘 교회가 인정할 만한 회심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회심한 이방인들을 만나서 물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라고 결론을 맺었습니다. 공동체 안에 새로 믿게 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믿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고, 굳건한 마음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지킬 것을 당부합니다. 이러한 당부와 지도는 이방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 안디옥 교회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깨달은 바나바의 영적 통찰력 때문이었습니다. 돌아온 자들이 성숙해지자 안디옥 교회는 부흥이 찾아왔습니다. 이로써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의 부흥과 성장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됩니다.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이 말은 초대교회의 긍정적인 측면을 강조할 때 자주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이제 복음을 받은 자들 대신에 바나바의 가르침을 받은 자들이, 다른 복음 전도자들로 성장한 것입니다. 제자가 제자들을 낳은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바나바를 ‘착한 사람’라는 표현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누구에게도 사용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바나바의 영적 상태를 표현하는 데 ‘착한 사람’이라는 표현에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는 언급을 덧붙입니다. 그는 안디옥 교회의 큰 부흥을 이끈 구브로 출신의 복음 전도자들과 잘 협력해서 예루살렘 교회의 입장을 전달하고 성도로 양육하는 일에 협력하기 적합한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와 사울이 함께 한 사역으로 안디옥 교회는 든든하게 서 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도들을 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성숙하게 성장했는지에 대해 다음 성경에서 말합니다.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라는 말에서 ‘그리스도인’(크리스티아노이)라는 표현은 본래 헬라어가 아니라 라틴어이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일컬음을 받았다’는 말은 안디옥의 일반 시민들이 성도 공동체를 가리켜 만들어낸 신조어였을 가능성을 높여줍니다. 안디옥 시민들이 성도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긍정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조롱과 조소의 의미도 들어 있었습니다(사도행전 26:28; 베드로전서 4:16).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제자’나 ‘성도’, 혹은 ‘형제’로 불리기를 더 좋아했습니다.

 

이방인 안디옥 교회의 선교(27-30)

성숙해진다는 것은 시간이 흐르면서 완숙되어 가지만, 성장해가면서 능력의 성장도 동반되어야 합니다. 환난 가운데서도 기쁨으로 이겨낼 수 있어야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면서 자신만이 아닌 다른 사람들도 돌아보기 시작합니다. 안디옥 교회는 아름답게 성장하여 이제 어머니 교회와 같은 예루살렘 교회의 어려움을 돌아보기 시작합니다.

27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28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29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30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27-30)

성도들이 그곳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일컬음을 받을 정도로 안디옥 교회는 구별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성장하여 점점 다른 사람들을 돌아볼 정도로 성장했습니다. 당시에 전 세계적으로 닥친 흉년이 오리라는 아가보의 예언을 듣고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로한 것도 이를 증명하는 예일 것입니다.

(1) 아가보가 천하에 큰 흉년을 예언(27-28)

안디옥 교회 성도들이 얼마나 성장했는지가 시험해 볼 수 있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속한 선지자들 중에 어떤 사람들이 안디옥에 도착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지자’는 순회 사역을 하던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이들의 사역은 말씀을 가르치기도 하고, 때로는 장차 일어날 일을 예언하기도 했습니다. 그 중에 아가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아무도 하나님께서 내리시겠다는 흉년을 막을 수 없어도 대비할 수는 있었습니다. 그런데 흉년이 들자, 안디옥 교회는 자신들의 안위를 걱정한 것이 아니라 어머니와 같은 예루살렘 교회를 돌아보기 시작합니다. 이들이 왜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그중 한 사람인 아가보가 천해온 로마 제국에 걸쳐)에 큰 흉년이 들것을 예언했는데, 그 예언이 글라우디오 황제 때 성취되었다고 기록합니다. 로마의 역사가 수에토니우스는 당시 여러 차례 흉년이 있었다고 전하고, 요세푸스도 주후 46년경 유대 지방에 흉년이 있었다고 전합니다. 누가의 관심사는 단순히 아가보의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점에 있지 않습니다. 안디옥 교회가 보인 성숙한 신앙과 형제들을 향한 사랑의 모습을 부각하는 데 누가의 관심이 있습니다.

(2) 예루살렘 교회에 구제 헌금(29-30)

안디옥 교회는 점점 성숙해져 어려움 중에 있는 형제들을 돌아보기 시작합니다. 안디옥 교회는 자발적으로 예루살렘 교회를 도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들은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라고, 유대 예루살렘에 사는 형제들을 위해 구제 헌금을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결정한데로 구체적으로 행동에 옮겼습니다. 이 구제헌금을 전달할 사람으로 바나바와 사울을 선택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안디옥 교회를 지도하고 바나바와 같은 좋은 지도자를 보내 줌으로서 영적인 도움을 안디옥 교회에게 주었다면, 안디옥 교회는 이에 구제헌금으로 화답한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의 모든 사역은 사람의 힘만으로도 성령의 역사만으로도 안 됩니다. 성령의 역사와 사람들의 믿음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들도 이렇게 세워집니다. 안디옥 교회의 성숙한 신앙의 모습은 이전에 예루살렘 교회가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행 2:45; 4:35) 물건을 나누었던 모습과 맥을 같이 합니다. 안디옥 교회가 성장해 가는 모습을 오늘날의 우리 한국교회도 닮아가야 할 좋은 모본입니다.


스데반으로부터 시작된 복음의 작은 날갯짓이 예루살렘을 넘었습니다. 유다와 사마리아를 넘었고, 이제는 이방 지역인 안디옥으로까지 확장되어 갔습니다. 오늘도 성실한 자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계획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자신에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동안 성심과 성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워 가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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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11-01)

 


유대인의 경계를 넘어 포용한 교회

사도행전 11장 1-18절


성령의 역사는 어떻게 나타납니까? 능력이 나타나서 ‘기적’과 ‘방언’으로 ‘치유’ 등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외적인 증상만 나타나는 것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성령에 가장 중요한 사역은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사역입니다. 하나님을 찾아오도록 하는 역사,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회개의 역사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백성으로 아름답게 살아가는 능력의 역사 등이 있습니다. 가이사랴의 백부장 고넬료와 그 가족들이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 소식이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에게 들렸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과 교제하고 돌아온 베드로를 정죄하고 비난했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이 일에 대하여 자세히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 구원하시기 위한 역사들, 즉 자신이 보았던 환상과 고넬료의 집에서 일어난 성령의 역사들을 설명합니다. 이 사건은 복음이 유대인의 한계를 넘어 이방인들에게 공식적으로 전파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합니다.

 

할례자들에게 비난을 받는 베드로 (1-3)

사람들은 기존에 가지고 있던 가치관과 습관을 벗어 버리기 쉽지 않습니다. 성도들은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살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가치관이 변해야 합니다(롬 12:2). 자연스럽게 변할 수도 있겠지만, 성령에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방인에 대한 가치관의 혼돈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1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2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3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1-3)

이방인 고넬료의 회심 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이제 네 번째 장면으로 넘어갑니다. 이 사건은 이방인 복음 전파에 매우 중요한 한 획이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예수님을 영접한 성도들이긴 하지만, 아직까지 유대교 종교 풍습에 집착한 할례자들에게 비난을 받고, 베드로는 이 사건의 전말에 대해 예루살렘 교회 앞에 설명합니다. 이 장면을 통해 이방인 고넬료의 회심 이야기를 완성해줍니다. 기록자인 누가는 고넬료 사건은 초대교회에 이방인 선교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 사건이 미친 영향에 대한 내용이 누락된 상태에서 온전한 이야기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서술해 나간 듯합니다.

(1) 이방인과 교제한 베드로 소식(1)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의 초청으로 그의 집에 방문하고 ‘함께 머물렀다’는 사실이 예루살렘 교회에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소식은 그만큼 큰 이슈를 일으킬 사건이었습니다. 이 소식이 ‘유대 전역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까지 퍼졌습니다. 이 사실은 ‘사도들’과 일반 성도인 ‘형제들’에게 전해졌다는 것과 예루살렘 교회를 중심으로 그 주변에 흩어져 있는 모든 성도들에게까지 전해졌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에 대해 유대인들이 보인 반응이 이제 앞으로 전개될 초대교회의 신학적 논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2) 베드로의 행동을 비난한 유대 성도들(2-3)

이방인들의 기독교로 회심한 소문은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이전에 먼저 전해졌습니다. 하지만 유대인인 베드로가 이방인 집에서 함께 교제한 사실은 아직까지 유대교의 전통을 중요하게 생각한 사람들에겐 매우 쇼킹한 사건입니다. 그것도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가 이러한 일을 했으니, 예루살렘 교회에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은 이방인들과 교제한다고 지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앞서서 비난하는 사람들을 ‘할례자들’이라고 표현합니다. 물론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구원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아직은 변화의 과도기였기 때문에, 과거에 종교적 전통과 관습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잠재되어 있는 이방인의 구원에 대한 논쟁이 불씨로 남아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성도들 중, 특히 ‘할례자들’이라고 지칭한 사람들은 베드로가 이방인의 집에 간 사실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은 더 놀라운 사실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그들이 하나님 백성이 되었다고 선언한 베드로의 소식을 듣고 크게 놀랐습니다. 이방인이 구원받은 역사는 유대인이 생각하지 못한 대단한 사건입니다. 지금까지 아무도 그런 일들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역이 문제가 아니라 이방인들과 함께한 베드로의 태도를 비난했습니다. 그래서 ‘할례자들’은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베드로에게 어떤 자초지정 이야기를 듣기도 전에 감정적으로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 함께 교제한 일들에 대해 비난부터 쏟아 붙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들은 베드로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것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보다는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는 점을 비난한 것입니다. 이들의 반응을 전혀 이해 못할 만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대대로 지켜오던 유대인의 종교적인 관습이,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함께 교제를 나누고 이방인들이 회심했다고 하여서 하루아침에 생각이 뒤바뀔 수는 없습니다. 이 사안은 단번에 해결될 성격의 사안이 아니었습니다. 갈라디아서 2:11-14에서 기록된 바, 베드로 또한 이방인들과 식사를 하다가 다른 유대인들이 온다는 소석에 그 자리에서 도망친 실수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부정적인 반응을 하는 것은 그들의 마음 저변에 깔린 생각이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율법을 파괴하는 사람들로 인식되어 스데반 집사처럼 비난과 박해를 받을 수 있다는 두려운 생각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예루살렘의 성도들이 들은 소식은 두 가지였습니다. ‘이방인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말과 ‘베드로가 이방인의 집에서 함께 먹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역을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이란 것을 몰랐습니다. 예루살렘 성도들은 들은 내용에 대한 묘사가 매우 특이합니다. 그들이 들은 소문을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라는 문장으로 요약합니다. 바로 앞 단락에서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자들에게 내려오셨다’(행 10:44).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랐다’(45),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다’(47) 등등으로 다양하게 이방인들에게 나타난 성령을 묘사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11장에 들어와 그 사건을 한마디로 요약할 때는 성령을 언급하기보다 단순히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라고 기록합니다. 왜 ‘이방인들도 성령 세례를 받았다’라든가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을 부어주셨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은 것입니까? 누가의 언어 선택을 통해 고넬료 회심 사건의 외형적인 모습에 집중하기보다는 이 사건의 본질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누가의 의도를 어렴풋이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누가는 여기서 좀 더 자극적이며 선정적인 표현을 선택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누가는 꽤나 중립적인 표현들을 선택함으로써, 이 사건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드러내려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회심했다는 의미를 물론 포함합니다. 아울러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이방인들이 순종하는 삶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음을 말하려 합니다. 이러한 측면을 강조하기 위해 14절에서 ‘구원 받을 말씀’이라는 표현과 ‘생명 얻는 회개’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상황을 설명한 베드로(4-18)

모든 세대의 모든 믿는 자들에게 동일한 명령이 주어졌습니다. 믿는 자들은 구별치 말아야 합니다. 즉 복음을 전파하는 데 있어 차별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이 사실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고발하는 것이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가난한 자를 멀리합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른 인종과 가른 사회계층의 사람들에게 접근하지 않으려 합니까!

4베드로가 그들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 5이르되 내가 욥바 시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환상을 보니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이 네 귀에 매어 하늘로부터 내리어 내 앞에까지 드리워지거늘 6이것을 주목하여 보니 땅에 네 발 가진 것과 들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보이더라 7또 들으니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8내가 이르되 주님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거나 깨끗하지 아니한 것은 결코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 하니 9또 하늘로부터 두 번째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 하더라 10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에 모든 것이 다시 하늘로 끌려 올라가더라 11마침 세 사람이 내가 유숙한 집 앞에 서 있으니 가이사랴에서 내게로 보낸 사람이라 12성령이 내게 명하사 아무 의심 말고 함께 가라 하시매 이 여섯 형제도 나와 함께 가서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13그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천사가 내 집에 서서 말하되 네가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14그가 너와 네 온 집이 구원 받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하거늘 15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16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17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18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4-18)

언제나 교회 안에서는 지도자의 사역을 이해하지 못해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감정적으로 대하기보다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포용하고 문제를 신앙적이면서 이성적으로 해결해 나가야 합니다. 베드로도 ‘할례자들’의 비난을 듣고서 감정적으로 대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비난을 접한 후에 베드로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그들에게 이론적이고 순서적으로 설명합니다. 고넬료의 환상 이야기보다 자신이 본 환상부터 시작하여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차분히 모든 일의 자초지정을 설명했습니다.

(1) 베드로에게 역사하신 성령(4-10)

베드로는 논쟁하는 자들에게 다가가서 그가 할 수 있는 한 명백하고 솔직하게 설명했습니다. 그는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만 나누었습니다. 그가 말한 전체적인 줄거리는 그 체험을 돌이켜 보기에 충분했습니다(행 10:1-48). 먼저 이 일이 일어나게 된 욥바에서의 환상에 대해 자세히 말합니다. 할례자들의 비난으로 인해 베드로는 자신이 본 환상과 고넬료가 본 환상을 다시 언급합니다. 그는 성령이 이방인들에게 임한 현상은, 하나님이 이방인들은 그분의 백성으로 받아들이신 증거하고 주장합니다. 4-10절까지 사도행전 10장에서 이미 기술한 내용을 다소 압축적으로 설명합니다. 다만 거기서 생략되었던 한두 가지의 내용이 여기에 추가로 포함됩니다. 예를 들면, 5절과 6절에서는 사도행전 10:11-12에 기록된 내용보다 훨씬 더 생생한 언어로 하늘로부터 내려온 큰 보자기에 들어있던 내용물들이 묘사됩니다. 또 사도행전 10:12에서 세 종류의 짐승들이 등장했다면, 이 단락의 6절에서는 창세기의 창조 기사에서 나열된 젓처럼 네 종류의 짐승들이 등장합니다. 8절에서 베드로가 부정한 음식을 거부하며 그런 음식은 ‘결코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라고 했던 말도 사도행전 10:14에 기술된 내용보다는 에스겔서 4:14에 나오는 진술에 더 가깝습니다.

(2) 고넬료에게 역사하신 성령(11-17)

세 번의 환상이 나타난 직후 가이사랴에서 세 사람이 도착하고 베드로는 성령으로부터 아무런 차별을 두지 말고 가라는 음성을 듣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욥바에 사는 유대인 신자 여섯 명과 함께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갑니다. 여기서 ‘그 사람’은 당연히 고넬료를 가리킵니다. 13절에서는 고넬료가 어떻게 천사를 보게 되었는지가 아주 간략하게 언급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지 당시 자기의 말을 듣던 사람들에게 한 것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독자들은 주의 사자가 고넬료에게 약속한 말씀의 내용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너와 네 온 집이 구원 받을 말씀’입니다. 천사는 이미 초대교회에서 복음을 선포할 때 사용되던 ‘구원을 받다’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이미 구약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기 때문에 하나님 경외자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표현이었습니다. 15절에서 베드로는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했다고 말합니다. 사도행전 10장에서는 어느 정도 설교를 했을 때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두 내용이 서로 모순됨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15절에 기록된 베드로의 말을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베드로가 말하려는 바는 자기가 전하려고 한 메시지를 다 전하기도 전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방인들에게 임한 성령이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했다라는 표현입니다. 여기서 ‘처음’은 오순절 다락방 사건을 말한다. 즉, 베드로는 여기서 이방인들의 성령 체험을 오순절 다락방의 성령강림 사건과 비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가의 서술적 관점에서 볼 때, 이 사건은 이방인들을 위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방인이라고 해서 이류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똑같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베드로는 이 사건이 예수가 사도행전 1:5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결론을 유추해낼 수 있습니다. 첫째, 이방인들이 성령 받은 사건은 성령 세례이며, 이는 그들이 복음을 믿을 때,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예수가 하신 약속의 성취로 일어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과 동류의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이방인들이 성령 세례를 받다면(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면 혹은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했다면), 그들도 역시 물세레를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17)를 ‘우리가 … 믿은 후에’라고 변역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비로소 성령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3) 베드로의 소명에 대한 반응(18)

베드로의 설명을 들은 유대인 성도들은, 이방인들에게 임한 것을 보고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기억났다고 말합니다(행 1:4-5). 누가 능히 주님이 하시는 일을 막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합니다. 이러한 할례자들은 동의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향해 구원의 문을 활짝 여셨습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쉽게 판단하기 전에 먼저 그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볼 수 있는 영적인 통찰력이 있어야 합니다. 종종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는다고 먼저 비난부터 하는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비난이 정말 다 맞겠습니까? 사람이 표준이 아니기 때문에 틀릴 수 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일지라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신속하게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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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10-03)


유대인의 경계를 넘어선 복음

사도행전 10장 34-48절


‘이제 실화냐?’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어난 일이 믿지 못할 정도로 놀라운 일이거나 큰 일일 때 묻는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역사하시는 일은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을 이루어가십니다. 이러한 사역에 대해서는 절대로 허구는 없습니다. 예수님도 복음도 성령도 모두 하나같이 실화입니다. 이제 기독교는 이방지역의 역사에까지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이방인들 앞에서 베드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그를 경외하며 의롭게 사는 자들을 모두 하나님의 백성 삼으신다고 선언합니다. 예수를 미든 사람들이 모두 죄 사함을 받는다는 복된 소식을 전하자. 거기에 모인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합니다. 이에 베드로와 동행한 유대인 성도들은 이 광경에 놀랍니다. 베드로는 그들이 성령 받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세례를 베풉니다.

 

복음을 전하는 베드로(34-43)

그 누구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거절할 떼 변명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디든지 다니며 전파하셨으며, 그분은 모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화제 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변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날 복음을 들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변명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34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35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36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37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38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39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가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그들이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40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41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42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 43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34-43)

고넬료의 환대에 대해서 베드로가 어떻게 반응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성령께서는 베드로에게 고넬료에게 전해야 할 말을 주셨습니다. 고넬료에게만 특별히 주신 말씀이 아니라 모든 죄인들에게 필요한 복음을 주셨습니다. 이 복음은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에게 각자 다른 복음이 없습니다.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에게 전해야할 복음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었습니다.

⑴ 외모를 취하지 않으신 하나님(34-35)

이방인 고넬료의 가족과 친척과 친구들 앞에 선 베드로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여기서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 표현은 매우 중대한 발언을 소개할 때 사용하는 어구로, 34-35절에 베드로의 발언은 수백 년 동안 스스럼없이 행해져 왔던 유대인 중심의 사상과 인종 및 종교적 차별을 단번에 무너뜨리는 선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고넬료를 만나면서 ‘깨달랐도다’라고 말합니다. 베드로가 깨달을 일은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이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선민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택한 성민인 자신들만이 구원을 받고 보호하심을 받고 그리고 자신들만이 성령을 받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다른 민족의 사람들은 ‘이방인’으로 여기며 그들을 깔보고 경멸하며 업신여겨 왔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차별하시는 분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차별하는 자’라는 의미의 헬라어 ‘프로소포렘프테스’(προσωπολημπτης)는 신약성경에서 유일하게 여기에만 나옵니다. 헬라 문헌을 통틀어 이곳에서 가장 먼저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얼굴을 들어 올리다’라는 의미의 히브리식 표현(나샤 파님)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으로서, 사람을 편애한다는 뜻입니다. 신약성경과 초대교회 교부들의 글에 자주 등장하는 ‘차별’ 혹은 ‘편애’라는 ‘프로소포렘프사이’(προσωπολημφια)는 이 단어에서 유래하였습니다(롬 2:11; 엡 6:9; 골 3:25; 약 2:1; 벧전 1:17).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라는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없이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베드로가 말하려는 의도는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처음부터 구원에서 배제시키거나 더 엄격한 구원의 조건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인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공로로만 구원 받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의 신학은 깊고 넓고 그리고 멀리까지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처럼 이방인들을 환대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베드로는 하나님께서는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모두 받으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본문에서 중요한 점은 ‘각 나라’와 ‘다’입니다. ‘각 나라’는 이스라엘을 포함한 모든 나라와, ‘다’ 또한 유대인도 포함한 모든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구원을 위해서 기대하신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분이나 민족의 문제가 아닌 마음이나 가치관의 문제였습니다. 유대인처럼 율법을 준수하도록 요구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자로 영접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입술로 고백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거나 의를 행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30-33절에 서술된 고넬료의 ‘간증’을 듣고 베드로는 자신이 욥바에 있을 때 깨닫기 시작했던 의미를 재확인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지, 그들의 특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베드로가 하나님의 뜻을 점진적으로 깨달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는 환상을 유대인들의 음식법에 관한 것으로 이해했다가, 나중에는 이방인들과의 교제에 대한 허락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이해하기에 이릅니다. 고넬료 집에 모인 무리가 하나님의 복음 듣기를 원한다는 것을 안 베드로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서 말씀을 전할 때 헬라어를 사용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베드로가 통역을 사이에 두고 그들에게 아람어로 복음을 전했을 것이라 추정합니다. 왜냐하면 본 단락에 기록된 베드로의 설교에는 사도행전 초반에 기록된 베드로의 이전 설교에 비해 아람어식 표현들이 더 자주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누가가 베드로의 설교를 창의적으로 구상한 것이 아니라, 어떤 전승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고 추론해볼 수 있습니다.

(2)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심(36-39)

36절은 구약의 두 구절을 암시적으로 인용합니다(시 107:20; 사 52:7). 베드로는 아주 특이하게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평화를 주시겠다는 구약의 약속을 예수님을 통해 성취하셨음을 밝히면서 설교를 시작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유에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 메시아라고 소개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유대인만의 메시아가 아니라 온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의 메시아입니다. 당연이 이제 예수님은 이방인들의 메시아도 됩니다. 그 분의 복음을 ‘화평의 복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원수 관계있던 죄인들을 화해시킨 복음입니다. 그간 원수였던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장벽을 허물고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가 되게 하는 평화의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만유의 주가 되시고 평화의 복음을 전하시는 분이라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직접 오셔서 행하신 일들로 증명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라고 소개합니다. 38절은 예수님께서 자신이 친히 사용했던 것처럼 이사야 61:1의 표현을 인용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의 지상사역을 묘사하면서 ‘선한 일을 행하시고’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사용된 동사 ‘유에르게테오’에서 ‘후견인’ 혹은 ‘자선가’라는 의미의 명사 ‘유에르게테스’가 유래했습니다. 당시 로마 황제를 비롯해 많은 통치자들은 자신들을 가리켜 ‘유에르게테스’라고 불렀습니다. 누가는 이 동사를 여기에 사용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와 세상 통치자들을 비교하며 예수가 진정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참된 평화와 구원을 줄 수 있는 분임을 보여줍니다. 사도들은 처음부터 예수와 동고동락한 자들로서 예수님께서 행한 모든 사역의 증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다른 설교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사도들이 예수의 부활에 대한 증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를 그들이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라는 표현은 신명기 21:23의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를 상기시킵니다. 원래 베드로는 유대인 앞에서 설교할 때 ‘너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장본인’이라고 강하게 질책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방인들 앞에서 베드로는 이 표현을 질책이 아니라 복음 증거의 구절로 활용합니다. 바울도 갈라디아서 3:13에서 이 구절이 예수를 통해 성취된 것으로 보았습니다.

(3)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40-42)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모든 사람들이 목격하도록 허락하지 않으시고 증인으로 택함 받은 자들만이 목격하게 하시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누가는 그들이 경험한 예수 부활의 확실함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부활하신 후 예수는 사도들에게 이 부활을 전하라 명령하셨고, 그 부활의 메시지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산 자나 죽은 자나 모든 사람들의 재판관이 될 것이라는 사실도 포함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가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그들이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40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41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라고 진술합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님께 부여하신 것은 재판 권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접한 자와 영접지 않는 자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4) 믿는 자는 죄 사람을 받음(43)

마지막으로 베드로는 구약의 선지자들이 한 예언대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모두 죄 사함을 받는다고 선언하였습니다. 베드로의 주장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과 일치합니다(눅 24:47). 여기서 베드로가 구약의 어느 본문을 언급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와 같은 말씀을 우리는 이사야 33:24; 53:4-6,11 그리고 예레미야 31:34; 다니엘 9:24 등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임함(44-48)

얼마나 영광스러운 증거입니까! 복음은 모든 인류, 즉 모든 세상을 위한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세상에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믿지 않으려는 자들에게는 충격적인 도전이 되어 집니다. 우리에게도 간절함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말씀과 그분의 구원에 대해 주리고 목말라할 정도로 하나님을 초청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44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45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46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47이에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요 하고 48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 하니라 그들이 베드로에게 며칠 더 머물기를 청하니라(44-48)

이방인 고넬료는 베드로가 전한 복음을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었겠습니까? 누가는 기록하지 않지만, 이미 베드로가 증거 하는 복음을 믿고 있었던 것을 설교를 듣고 있을 때, 성령이 임한 것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가 끝나지 않았는데도 듣고 있던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했습니다.

(1) 성령이 임재하심(44-46)

43절에서 베드로가 ‘그를 믿는 자는 다’라고 말했을 때, 그는 유대인들 중에서 예수님을 믿는 자를 가리킨다고 생각했습니까? 아니면 이방인도 포함된다고 생각했습니까? 아마 베드로는 그러한 구분 없이 이 말을 사용했을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그의 머릿속에 후자의 생각에 대한 확신이 있었는지는 의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이러한 복음 선언을 기록하고 있는 누가는 이 구절에서 ‘그를 믿는 자는 다’를 강조하며,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 없이 모든 인류에게 구원의 깊이 열려있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피려합니다. ‘그를 믿는 자마다 다’라는 어구는 헬라어 문장 맨 뒤에 나오면서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거기 모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정말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베드로의 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 복음을 듣는 모든 자들에게 성령이 임한 것입니다. 성령은 회개하고 예수를 믿는 자에게 임하는 것이기에(참조. 행 11:17-18) 우리가 여기서 유추할 수있는 결론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거기 모인 이방인들은 베드로가 전한 복음의 말씀에 믿음으로 응답했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회개와 예수에 대한 믿음을 받으시고 성령의 선물로 인을 치셨습니다. 이 시점에서 비로소 역사적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이 진정으로 하나가 되는, 곧 만인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베드로와 함께 온 욥바 출신 유대인들인 베드로의 수행원들은 오순절 예루살렘에 성령이 임한 것을 목격한 사람들입니다. 성령께서 오순절 120명의 제자 모두에게 내리신 것처럼 동일하게 이방인에게도 오신 것입니다. 아무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명백한 증거로 방언과 찬양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오순절에도 보았던 증거들입니다. 누가는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랐다’라고 전합니다. 이들은 욥바에서 베드로와 동행한 여섯 명의 신자들입니다(행 11:12). 누가는 이 사건에서 일어난 성령의 역사를 여러 가지 표현을 통해 묘사합니다. 성령이 ‘내려오시니’(44), ‘성령을 부어주심’(45), 성령을 ‘받았으니’(47) 등이 그러합니다. 다양한 표현을 사용하지만 동일한 성령의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이방인들도 방언을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찬양하였습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이방인들을 환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역사가 있을 때마다 방언의 역사가 따라와야 하는 것입니까? 이 사건에서는 방언이 함께 등장합니다. 이방인들에게도 예수님을 통해 죄 사함과 구원의 길이 열려 있음을 확실히 보여주는 중대한 사건이기에, 아마도 가시적인 증거가 더욱 필요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언제나 일어나야 하는 필연적이고 규범적인 요소는 아닙니다. 오히려 누가는 초대교회의 규범적인 선언을 베드로의 입을 통해 사도행전 2:38에서 분명하게 제시한 바 있습니다. 이는 베드로를 비롯해 동행한 유대인 신자들에게 아주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45). 그들은 성령의 선물이 이방인에게도 부어지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랐습니다. 45절에서 주목해야 할 세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1) 그들이 놀랐던 것은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부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 신자들은 이방인에게 성령의 선물이 주어질 것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2) 44절에는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왔다고 하지만, 45절에는 헬라어로 ‘성령의 선물’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습니다. ‘성령의 선물’이란 표현은 오순절 성령 강림 때 유대인들이 성령을 받은 것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습니다(행 2:38). 같은 성령의 선물이 말씀을 듣고 있던 이방인 모두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것입니다. (3) 45절의 동사 ‘부어 주다’(에크케오) 역시 유대인 신자들이 성령을 받은 사건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습니다(2:17-18,33). 그러므로 두 표현, ‘성령의 선물’과 ‘부어 주다’는 유대인 신자들이 성령을 받은 것과 이방인들이 성령을 받은 것에 차이가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라고 선언한 것입니다(47). 예루살렘에 유대인들과 순례자들을 환대하셨던 성령께서, 사마리아 성도들도 환대하시고, 이제 땅끝까지 환대하시려고 고넬료 가정부터 활짝 문을 여신 것입니다. 유대교가 환대한 것보다 훨씬 더 극진하게 차별 없이 환대하셨습니다.

(2) 베드로가 세례를 베풂(47-48)

이 성령의 역사를 베드로는 보고서는 더 이상 설교를 이어가지 못합니다. 다만 성령께서 이방인들은 자기 백성으로 인정하셨으니, 교회가 이제 한 가족 한 형제로서 인정하자고 제안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세례입니다. 베드로는 담대하게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요’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합니다. 한 가족이 된 가이사랴 공동체는 이제 베드로를 환대합니다. 베드로에게 설교를 더 듣길 위해서 몇 일을 더 머물기 청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기 힘들 때가 있습니다, 단지 머리로만 알 뿐 체득되지 못할 수 있고, 이기적인 욕망과 하나님의 뜻이 상충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피하거나 거부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뜻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 뜻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 뜻을 따라 기뻐하며 적극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혹시 하나님의 뜻을 거부해 왔다면, 지금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순종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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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10-02)


이방인을 성도로 받아들인 초대교회

사도행전 10장 17-33절


요즘 젊은 세대들은 존경할 인물이 없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동안 기성세대들이 어른으로 존경받지 못할 행동을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에 대한 평가는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로 시작됩니다. 아무리 가정 밖에서 인정받고 존경받아도 가장 가까이에 있는 가족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하나님과 사람들에 의한 평가가 일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도 사람들에게도 칭찬 받는다면 그처럼 훌륭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로마군대 백부장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시몬 집에 도착하여 베드로를 찾습니다. 성령이 베드로에게 주저하지 말고 함께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을 집으로 들여 하룻밤을 머물게 한 다음 베드로는 그들과 함께 가이사랴로 출발합니다. 가이사랴에 도착한 베드로는 어떤 목적으로 자신을 초대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고넬료로부터 직접 듣습니다.

 

욥바에 있는 시몬의 집에서(17-23a)

성도들은 자신의 영혼을 위해 분별력을 가지고 살아가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영적 지도자라고 하지만 의심스러울 때가 있으면 자세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무조건 영적 지도자라고 순종만 해서는 안 됩니다. 정말 올바르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산다면, 그 분이 비천한 사람이라도 배우고 순종해야 합니다.

17베드로가 본 바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아해 하더니 마침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 문 밖에 서서 18불러 묻되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 여기 유숙하느냐 하거늘 19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20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 하시니 21베드로가 내려가 그 사람들을 보고 이르되 내가 곧 너희가 찾는 사람인데 너희가 무슨 일로 왔느냐 22그들이 대답하되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그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당신을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 한 대 23베드로가 불러 들여 유숙하게 하니라(17-23a)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비장하게만 접근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게임이나 놀이입니다. 그 뜻을 알아가는 것이 하나님과의 교제인 것입니다.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의 도착은 우연이 아니라 모든 과정을 하나님께서 주관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하는 사건입니다.

⑴ 베드로를 찾아온 사람들(17-18)

기도 중에 환상을 보았던 베드로는 여전히 자기가 본 환상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환상의 의미를 쉽게 깨닫지 못합니다. 환상을 세 번씩이나 보여주셨다는 것은 매우 중대한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 환상이 무슨 의미인지 확실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스승 노릇을 해주십니다. 직접 모범답안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에게 환상과 전혀 상관이 없지만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건을 통해서 스스로 깨닫도록 안내해주십니다.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도착하는 방법이었습니다. 베드로가 방금 본 환상의 의미를 생각하며 머리를 갸우뚱거릴 때,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 밖에서 그를 찾고 있습니다. 그들은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 여기 유숙하느냐?’라고 묻습니다. 정말 기막힌 타이밍입니다. 환상에 대한 의미를 잡을 수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정답을 주신 것입니다.

⑵ 성령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심(19-20)

이번에는 성령께서 베드로에게 직접 말씀하십니다.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19b-20). 본문에는 ‘두 사람’이 베드로를 찾아왔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동행한 군인을 경호병으로 간주하고 고넬료가 보낸 사람을 실제적으로 세 사람이었습니다. 성령께서는 두 사람을 따라서 가이사랴로 가면, 그 환상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왜 그런 환상을 주셨는지,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 백부장이 집으로 가야할 것인지 알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명령은 환상 속에서 ‘잡아 먹으라’와 같은 명령입니다.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의 도착은 우연이 아니라 모든 과정을 하나님께서 주관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하는 사건입니다. 성령께서 다시 ‘의심하지 말고’ 가라고 하십니다.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라는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미리 환상을 보여주신 이유를 드러내십니다. 즉, 이 사람들의 방문을 미리 준비하라는 의미입니다. 이에 베드로는 옥상에서 내려와 자기를 찾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⑶ 고넬료의 말을 베드로에게 전함(21-22)

옥상에서 내려온 베드로는 그들에게 ‘내가 곧 너희가 찾는 사람인데 너희가 무슨 일로 왔느냐?’고 그들이 찾는 사람이 자신임을 밝힙니다. 그들이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묻습니다. 베드로는 욥바에서 온 사람들의 임무를 몰랐습니다. 하지만 전혀 모르고 하는 질문은 아닙니다. 다시 확인하고 싶었던 질문입니다. 욥바에서 온 사람들은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그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당신을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22)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기들을 보낸 주인 백부장 고넬료에 대해 베드로에게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이 말은 자기들을 보낸 사람은 로마 군대 백부장인데 선한 사람이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기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들이 주인을 이렇게 소개한 것은 단순히 주인에 대한 사실만을 전한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에게 주인에 대한 좋은 인상을 심어주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의인이라는 말은 그가 좋은 성품과 인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주인이 아랫사람으로부터 이러한 평가를 받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쉽지 않은 일입니다. 고넬료의 인품을 뒷받침해주는 설명이 바로 이어서 나옵니다.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이 말은 고넬료가 비록 로마 군대를 위해 백부장으로 봉직하면서도 식민지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며 살고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이는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2)와 일치하는 대목입니다. 게다가 그들은 여기서 ‘당신을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전개된 고넬료 이야기에서 처음 나오는 정보라 할 수 있습니다. 4-5절의 천사의 말에서나 8절의 고넬료의 지시에 이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인데, 그 생략된 정보를 누가가 이제 와서 독자들에게 제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는 내러티브의 생동감과 긴장감을 높이기 위해 무슨 목적으로 고넬료가 베드로를 초대한 것인지를 미리 발설하지 않고 이 대목에 이르러 비로소 소개합니다. 이와 같은 누가의 이야기 전개 방식은 독자들을 이야기 안으로 강하게 끌어들입니다. 베드로는 욥바에서 온 사람들의 말을 듣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본 환상과 고넬료가 본 환상이 정확히 맞아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 환상들과 이방인의 방문이 연결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넬료의 초청과 욥바로 가라고 하신 말씀이 연결되고 있었습니다. 이 이방인들이 환상 속에서 보았던 부정한 동물들이었습니다. ‘부정한 동물들을 먹으라’는 것은 ‘이방인들을 형제로 받아 들리라’는 뜻이었습니다. 이방인이 ‘당신을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고 초대합니다. 그리고 ‘천사가 명령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으니 오라고 초청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나중에 바울에게 환상 중에 건너오라고 초청했던 마게도냐 사람들의 환상과 버금가는 엄청난 복음의 역사, 교회 역사에 전환점을 가져다주는 초청이었습니다.

⑷ 시몬의 집에 유숙함(23a)

베드로는 처음부터 그들의 말을 경청해서 들었습니다. 그들의 말이 끝나자, 그들을 집 안으로 불러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합니다. 손님을 하루 대접하는 것이 대수롭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이방인들입니다. 이방인을 집안으로 들여보내고 집안에서 식사도 같이 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방인들을 향제로 맞아들이기로 한 것입니다. 그들은 아직 세례를 받은 것도 예수님을 영접한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그냥 이방인들입니다. 이제 베드로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과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기준이 상관없게 되었습니다. 불과, 오전에 베드로와 오후에 베드로, 욥바 고넬료로부터 온 사람들을 만나기 전과 후의 베드로는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고넬료가 보낸 이방인 방문객을 집에 유숙하게 했다면, 이제 그들을 따라가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닐 듯합니다. 그러나 유대인이 이방인을 자기 집에서 (율법의 범위 안에서) 접대하고 유숙하게 하는 것과 이방인의 집에 초대받아 들어가 접대를 받는 것은 당시로서는 엄연히 다른 문제에 속합니다. 후자는 집에서 어떤 음식을 제공받을지에 대한 권한이 방문객에게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이사랴의 고넬료의 집에서(23b-33)

성도들의 삶이 중요합니다. 복음을 위해 인생을 살려면 주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의롭고 경건하게 살아야 합니다. 항상 세상적인 욕심을 버리고 많은 것을 세상으로 흘려보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주 예수의 복음도 쉽게 흘려보낼 수 있습니다.

23…이튿날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갈새 욥바에서 온 어떤 형제들도 함께 가니라 24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25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26베드로가 일으켜 이르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 27더불어 말하며 들어가 여러 사람이 모인 것을 보고 28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29부름을 사양하지 아니하고 왔노라 묻노니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냐 30고넬료가 이르되 내가 나흘 전 이맘때까지 내 집에서 제 구 시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한 사람이 빛난 옷을 입고 내 앞에 서서 31말하되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 32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가 바닷가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느니라 하시기로 33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는데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23b-33)

이 단락은 고넬료의 회심 이야기에서 세 번째 장면에 속합니다. 베드로와 고넬료에게는 많은 장벽이 있었습니다. 유대인으로서 장벽, 점령군으로서 장벽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것이 무너졌습니다.

⑴ 가이사랴에 도착함(23b-24)

다음날 아침, 베드로는 ‘의심하지 말고 가라’는 성령의 음성을 따라서, 시몬의 집에서 하룻밤을 머문 그들은 이튿날 베드로와 함께 가이사랴로 출발합니다. 여기서 ‘욥바에서 온 어떤 형제들도 함께 가니라’라고 말하는데, 욥바 출신 성도들이었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베드로는 지혜롭게 욥바 출신 성도들이 함께 이 여전에 동행했습니다. 나중에 그들의 숫자가 여섯 명이었음이 밝혀집니다(행 11:12). 지금으로서는 그들의 동행이 큰 의미가 없어 보이지만, 이야기가 차츰 무르익어감에 따라 독자들은 그들이 목격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됨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이튿날 가이사랴에 도착합니다. 고넬료는 혼자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의 도착을 준비하며 그의 친척들과 가까운 친구들을 집에 초대하고 대기합니다. 그들은 대부분 이방인이었을 것입니다. 고넬료의 환상은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하실 것인지 예측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백부장으로서 베드로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를 청하라’는 하나님의 환상은, 바울에게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것 같은 충격적인 경험이었습니다. 또한 제자들이 여자들에게서 예수님의 무덤이 비었다는 보고와 같은 충격적인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고넬료가 알고 유대교와 메시아에 대한 알고 있었던 지식을 다시 해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하나님의 습격을 수용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고넬료와 대화를 나누며 집 안으로 들어간 베드로는 큰 기대를 가지고 기다리고 있던 고넬료의 친척과 친구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이방인의 집에서 이런 사람들과 만나게 될 줄은 미처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⑵ 베드로와 고넬료가 서로 인사(25)

베드로가 집에 도착하자 고넬료는 급히 달려 나갔습니다. 그리고 지배국 장교가 피지배국 백성인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려 상관에게 절하듯 절을 했습니다. 악수를 하거나 목례를 하는 정도가 아니라 마치 신적인 존재나 로마 황제를 대하듯 극진한 환영이며 두려움에 찬 환영이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그만큼 겸손했고 간절했습니다. 사실 고넬료는 로마 제국의 백부장으로 유대 나라를 지배하는 점령군의 지휘관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사도라고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갈릴리에서 물고기 잡던 어부에 불과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엎드려 절을 해야할 사람은 고넬료가 아니라 베드로였습니다. 그런데 로마 제국의 백부장인 고넬료가 이렇게 행동은 자신이 본 환상과 천사의 지시 때문입니다. 베드로를 보는 시선과 안목이 바뀌어서 둘 사이의 관계를 바꾸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을 맞이하는 예의를 표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보다 옆에 있는 사람들이 더 놀랐을 것입니다. 이전에 누구로부터도 이러한 예우를 받아본 적이 없는 베드로는 당황했습니다. 한 가지 베드로는 고넬료를 만져서 일으켜 세워주었습니다. 유대인이 이방인을 만지고 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고넬료의 예의에 ‘일어나세요. 저도 다 같은 사람입니다.’라면서 사양합니다.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린 고넬료는 베드로는 천사와 같은 존재였을 것입니다. 그는 베드로를 주 안에서 존경하는 형제가 아니라 경배해야할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것을 거절한 것입니다.

⑶ 베드로가 초청 이유를 물음(26-29)

베드로가 온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그들은 유대인들과의 접촉을 긴장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라고 말합니다. 이제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자의적으로 깨끗한 것과 부정한 것을 정하신 때가 있었습니다. 더 이상 그것이 허용되지 않는 새시대가 열렸다는 것을 베드로가 깨달은 것입니다. 베드로의 말을 개역개정으로 읽으면, 마치 베드로가 오기 싫은 곳에 억지로 할 수 없이 온 것처럼 매우 투명스런 어조로 말하는 것으로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헬라어 본문은 실제로 그렇지 않다. 베드로의 말을 가급적 현대적인 어투로 바꾸어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여러분은 유대인이 이방인과 교제하거나 가까이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느 누구도 부정하거나 깨끗하지 않다고 말하지 말 것을 내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이 저를 불렀을 때 전혀 사양하지 않고 왔습니다. 그러니 이제 어떤 유유에서 저를 부르셨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습니까?’ 베드로는 자기가 본 환상에서 특정 음식이 속되거나 깨끗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도, 곧 한 사람도, 부정하거나 불결하다’고 여길 수 없음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베드로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보여주신 음식에 관한 환상에서 '사람에 대한 새로운 적용 포인트를 발견한 것입니다.

⑷ 고넬료가 이유를 설명함(30-33)

고넬료의 독자들이 이미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일 것입니다. 고넬료는 베드로를 통하여 내려오게 한 것이 자신의 개인적인 관심사 때문이 아니라 천사의 지시에 따라한 것이라고 환상 중에 들은 것을 소개합니다. 베드로는 그의 하인들을 통해서 들은 바가 있습니다. 고넬료는 자신이 본 환상에 대해 마무리하면서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는데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사도행전 10:3의 ‘하나님의 사자’는 이제 고넬료의 입에서 ‘빛난 옷을 입은 한 사람’으로 표현됩니다. 고넬료는 사람들이 복음을 듣기 위해 모이면,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모이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차별과 소외의 복음이 아닌 공평과 포용의 복음입니다. 이러한 뜻이 잘 반영되어 나타난 것이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이었습니다. 능동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베드로와 고넬료를 통해서 하나님의 복음은 경계와 장벽을 넘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로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한계를 넘어서 진정한 복음의 역사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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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10-01)


이방인을 받아들인 초대교회

사도행전 10장 1-16절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고방식이나 견해가 과거와는 달리, 크게 변하는 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폴란드 천문학자 코페르니스가 1543년 지구가 자전축을 중심으로 정지해 있는 태양을 돌고 있다는 지동설(地動說)을 주장합니다. 이전까지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며 태양을 비롯한 모든 별들이 지구 중심으로 돈다는 천동설(天動說)을 믿고 있었을 때 그야말로 혁명적인 발언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상식과 고정관념을 깨는 특별한 생각들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욥바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기도 중에 있던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에게 환상 중에 나타나십니다. 그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었으니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불러오라는 지시였습니다. 이튿날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욥바에 도착할 즈음, 기도하러 올라간 베드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또 다른 환상을 보게 됩니다. 부정한 음식들을 보여주시면서 잡아먹으라는 환상입니다. 이런 일이 세 번 반복되고 환상은 사라집니다.

 

백부장 고넬료가 본 환상(1-8)

세상의 모든 분열과 갈등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에 의해 극복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모두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되고, 서로 소통하고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나아가 한 영혼이라도 버려지지 않고 구원 얻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한다면 우리에게 주신 복음 전파의 사명을 기쁨과 열정으로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1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2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3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니 4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 되었으니 5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6그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다 하더라 7마침 말하던 천사가 떠나매 고넬료가 집안 하인 둘과 부하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8이 일을 다 이르고 욥바로 보내니라(1-8)

사도행전 10장에서는 사도행전 9장의 베드로와는 확연하게 달라졌습니다. 과의 사도는 오늘의 사도와 다른 일군으로 변화되었습니다. 10장에서는 고넬료의 회심에 초점이 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베드로의 변화입니다. 사도행전 10장에서의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 이방인에게 성령이 임하는 사건 그리고 이방인의 세례 같은 하나님의 프로젝트가 있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통해 이방인에게도 복음이 전해지고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선포되어야 할 때가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유대인 교회에서 대표격인 베드로가 가장 먼저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10장에서 이방인 고넬료 회심보다 베드로의 회심을 더 중요하게 본 이유입니다.

(1) 경건한 이방인 고넬료(1-2)

하나님께서는 먼저 베드로를 룻다를 거쳐 욥바로 보내시고 무두장이 시몬 집에 머물게 하셨습니다(9:32-43).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울타리 밖에 있던 이방인들을 하나님의 공동체 안으로 불러드린 사역을 준비하십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유대-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복음이 유대인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고넬료의 회심 사건은 이러한 편협한 생각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문이 이방인에게도 열려있음을 결정적으로 깨닫게 합니다. 고넬료는 10-11장에 중요한 등장인물입니다. 그의 회심 사건은 크게 네 장면으로 이루어집니다. 첫 장면은 가이사랴에 있는 백부장 고넬료 이야기(10:1-8)로 시작하고, 두 번째는 욥바에 있는 베드로의 환상 이야기(10:9-23a), 세 번째는 고넬료와 베드로의 운명적인 만남과 고넬료 가정의 성령강림 이야기(10:23b-48)로 전개됩니다. 마지막 장면은 이방인의 회심 사건을 베드로가 예루살렘 교회에 보고하는 일(11:1-18)로 구성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을 향한 구원 계획을 철두철미하게 성취하시는 모습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감동을 선사합니다. 첫 번째 장면은 가이사랴에서 시작됩니다. 가이사랴는 헤롯 대왕이 새로 설립한 신도시로서 유대 속주를 다스리는 로마 총독부가 있던 곳입니다. 누가는 먼저 그 도시에 있던 고넬료라 하는 로마 군대의 백부장을 소개합니다. 그의 이름 코르넬리우스는 당시 흔한 이름 중 하나였습니다. 주전 82년에 코르넬리 우스 술라(Cornelius Sulla)라는 로마 장군이 만 명의 노예를 한 번에 해방시킨 적이 있었는데, 그 덕분에 자유민이 된 자들이 모두 그 이름을 얻게 되었고 그 후손들도 같은 이름을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단정할 수 없지만, 본문에 나오는 고넬료 역시 그 자유민 출신이거나 그러한 자들의 후손 중 한 명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고넬료는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었습니다. 그는 로마 식민지인 유대 지역에 파견된 로마 군대의 장교였습니다.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2)라는 말은 고넬료가 하나님 경외자였음을 시사합니다.

(2) 고넬료가 기도 중에 환상을 봄(3-6)

하나님 경외자는 당시 이방인들 중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들 은 할례를 받고 유대교로 개종하지는 않았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열정과 관심을 보이며 유대교 회당을 출석하였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다른 이방인들과 동일하게 취급했지만, 좀 더 개방적인 입장을 취하였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그들을 포용하고 받 본문에서 고넬료가 소개됩니다. 그는 가이사랴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헤롯이 건설한 아름다운 항구가 있는 곳에 로마의 유대 총독부 관저가 있었습니다. 이방인이 많고 유대인이 상대적으로 적은 도시입니다. 고넬료는 이달리아 부대 백부장이었습니다. 그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가정에도 충실해서 온 집안사람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란 유대교의 유일신을 믿고 유대교의 윤리적인 기준은 받아들이지만, 율법을 지킬 의무는 없는 개종자, 할례를 받지 않아서 유대인이 안 된 사람을 의미입니다. 그는 여전히 이방인이었고 언약에는 외인이었습니다. 유대인들과는 같이 식사할 수 없고, 합석할 수도 없는 존재였습니다. 성전에서는 이방인의 뜰까지만 갈 수 있었던 사람입니다. 이러한 고넬료의 마음을 열도록 하며 하나님의 세상으로 인도하려는 하나님의 방법은 환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는 그가 유대인의 기도 시간인 제 9시(저녁 번제 드리는 오후3시)에 기도할 때, 하나님의 사자를 보냅니다. 고넬료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는 질겁했을 것입니다. 두려웠지만 소리 나는 쪽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주여 무슨 일입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그에는 신이 자신의 잘못을 추궁하기 위해 임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반대였습니다. 주의 사자는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 되었으니 5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6그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다’라고 말합니다. ‘기도와 구제가 상달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고넬료의 마음을 알아주셨다는 뜻입니다. 이것들이 구원의 근거가 된 것은 아니지만, 그의 몸에 배인 기도가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주의 사자를 환상 중에 보내셨을 때, 그가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었습니다. 가이사랴에 욥바까지는 약 51km로 장정이 보도로 거는 시간만 8-9시간 걸린 거리였습니다. 고넬료는 환상을 통해 알아들은 것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환상을 따를 만한 사실인지에 대한 결정은 고넬료의 몫이었습니다. 하지만 꿈이라고 보기에는 정보가 너무 상세했습니다. 지명, 만나야 할 사람, 묵고 있는 숙소의 위치, 그 집 주인의 이름과 직업까지 너무 구체적으로 말해 주셨습니다. 특별히 베드로가 무두장이 집에 묵고 있다는 사실에, 고넬료는 어쩌면 그런 사람이면, 유대인이라도 이방인인 자기가 초대하면 응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천사는 고넬료에게 직접 복음을 전하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복음을 전할 수 있었지만, 어쩌면 누구보다 더 잘 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굳이 고넬료와 베드로를 만나게 하시고 계십니다. 베드로를 통해서 복음을 받고 세례를 받고 성령도 받게 하시고 계십니다.

(3) 고넬료가 욥바에 사람을 보냄(7-8)

군인인 고넬료는 단호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즉시 순종합니다. 그는 직접 가지 않고 하인 두 명과 경건한 군인 한 사람을 보냈습니다. 고넬료가 환상을 본 다음날, 이제 장면이 욥바에 있는 베드로에게로 옮겨집니다. 이 시간이면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욥바에 도착했을 시간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정오에 기도하려고 시몬의 지붕 위에 있는 평평한 곳으로 올라갔습니다. 정오가 되자 베드로는 출출해졌습니다. 하인들은 점심 식사를 준비하고 있고, 베드로는 기도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기도 중에 황홀경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 속에서 하늘이 열리고 그릇 하나가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늘이 열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임할 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베드로는 큰 그릇의 보자기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 안에는 세상에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정한 짐승도 들어 있지만, 유대인이라 하면 누구나 협오스러워 하는 짐승도 들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는 이렇게 뒤섞여도 괜찮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더 충격적인 것은 하늘에서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고 소리가 있었습니다. 당연히 베드로에게는 시험으로 들렸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토라를 통해 명령하셨던 것을 스스로 어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 다운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손색없는 대답을 합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랬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이 대답은 베드로가 가지고 있는 최고의 대답이었습니다. 이 고백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그는 깨지고 무너지고, 열려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의 시각을 넓혀 주시기 위해 또 같은 말씀을 세 번이나 말씀하십니다. 또 두 번째 소리가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두 번째 말씀하실 때는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라는 말이 더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정한 짐승이라도 깨끗하게 하셨다면, 더 이상 사람들이 속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철저한 율법 준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거절합니다. 자신의 생각이 옳은 줄 알았고,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줄 알았습니다. 이런 일이 세 번 있는 후, 그 그릇이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하지만 또 같은 일을 세 번이나 하셨을 때는, 이것은 시험이 아니라 명령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네가 날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와 비슷합니다. 이것은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물론 베드로는 아직까지 하나님께서 이런 환상을 주셨는지 몰랐을 것입니다. 환상이니 진짜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자신이 손수하신 율법을 부정하면서까지, 자신에게 환상 중에 이런 명령을 하시는지 알 리가 없었습니다.

 

베드로가 환상을 봄(9-16)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사람들이 볼 수 있는 부분과 볼 수 없는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육적인 사람들은 볼 수 있는 부분은 이성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므로 우연이나 기적으로 치부해 버립니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역을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이해함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이라고 신앙고백하고 영광을 돌립니다.

9이튿날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그 시각은 제 육 시더라 10그가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들이 준비할 때에 황홀한 중에 11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12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13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 하거늘 14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 대 15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16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려져 가니라(9-16)

베드로에게 일어난 일은 단순한 환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더 많은 일들을 이루시기 위한 사역이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영적으로 깨어서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으며, 그 환상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시고 싶은 일들을 이해하고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을 넘어 이방인들의 구원까지 역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1) 베드로가 기도함(9)

이제 다음 장면은 베드로가 머물고 있던 욥바로 바뀝니다. 다음 날 고넬료가 보낸 세 사람이 욥바에 가까이 이르렀을 즈음,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다른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시간은 ‘제 육 시’는 약 12시 정오를 가리킵니다. 아마도 습관을 따라 베드로도 정오쯤 기도하러 옥상에 올라갔습니다. 그는 하루에 세 번 하는 기도 중 두 번째 기도하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배고프다는 생각이 그의 기도를 방해하고 있었습니다. 낮 12시는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의 식사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보통 느지막하게 가벼운 아침식사를 하고 늦은 오후 시간에 충분한 식사를 하는 것이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식사 방식이었습니다.

(2) 기도 중에 환상을 본 베드로(10-16)

식사가 준비되기를 기다리면서 기도하던 중에 베드로는 황홀경에 빠져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게 됩니다. 베드로가 본 환상은 하늘이 열리고 네 귀를 메어 땅에 드리운 큰 보자기가 내여 왔습니다. 그 안에 담긴 세 가지 종류의 짐승들이 그릇에 담겨 있었습니다. 특이하게도 유대인들이 부정하다고 생각하는 온갖 짐승들이 가득했습니다. 이 짐승들은 레위기 11장에서 식용으로 금지된 부정한 짐승들이었습니다.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창세기 1:30에 따르면 이 음식들은 사람이 먹을 음식으로 주신 것들입니다. 베드로가 하늘에서 내려온 그릇에 담긴 것을 자세히 보고 파악했을 때, 곧이어 하늘에서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이와 같이 깨끗하지 않고 부정한 음식을 자기는 결코 먹을 수 없다며 손사래를 쳤습니다(14). 그러자 ‘하나님께서 깨끗하다고 규정하신 것을 네가 부정하다고 말하지 말라’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런 일이 세 번이나 반복되고 환상은 사라졌습니다(15-16). 이러한 반복은 이 이슈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그 이유는 이것이 오랜 세월 동안 견고하고 공고해진 편견과 인습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역사를 쓰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본 환상은 무슨 의미입니까? 베드로가 본 환상은 이제부터 구약에서 규정한 정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의 구별이 사라졌으며,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음식을 다 먹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이 환상의 의미는 다음 단락에서 더 깊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하나님께서 이러한 음식의 구별을 없애신 것입니까? 물론 간단한 대답은 하나님께서 이것을 선언하셨을 때부터라는 답변일 것입니다. 하지만 나중에 초대교회는 이 율법의 폐기는 예수님이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은 그렇지 않다(마가복음 7:15-16,19)라고 말씀하실 때 이루어졌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울도 로마서 14:14에서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다’라고 선언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수제자인 베드로에게 이러한 환상의 사역을 보여주신 이유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놓여 있던 종교적, 문화적 장벽은 이만큼이나 공고했습니다. 오래토록 고착화된 유대인만이 구원의 대상이라는 생각과 사상 그리고 종교를 깨뜨리기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구원의 역사는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아닌 이스라엘을 넘어 이방인에게까지 복음이 전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의 모든 분열과 갈등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에 의해 극복됩니다.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듯,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모두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되고, 서로 소통하고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나아가 한 영혼이라도 버려지지 않고 구원 얻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한다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음 전파의 사명을 기쁨과 열정으로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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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09-03)

 


전도자로 변한 박해자 바울

사도행전 9장 19b-31절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내가 갑자기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문제가 아니라 전혀 다른 시각을 갖는 문제입니다.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달라집니다. 우선순위가 바뀌고 의지하는 대상, 내가 투신하는 가치가 달라집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들마다 변화가 일어납니다. 건강을 되찾은 사울은 다메섹의 여러 회당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자가 오히려 복음을 전하는 모습에 사람들은 당황합니다. 사울을 암살하려는 음모 때문에 사울은 다메섹을 극적으로 탈출합니다. 예루살렘에서 바나바의 도움으로 사도들과 우호적인 유대 관계를 맺는 사울은 거기서도 담대히 복음을 전하지만 또다시 살해 음모 때문에 고향 다소로 돌아갑니다.

 

다메섹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울(19b-22)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은 그 사람의 신학과 가치관과 인생 목표 전체에 변화를 줍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전혀 다른 세계관을 수용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울은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변화된 삶을 주변에 보여주었습니다.

19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20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21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22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19b-22)

본 단락의 이야기를 갈라디아서 1장의 바울의 ‘자서전적' 기록과 나란히 놓고 읽으면 역사적 정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아나니아의 도움으로 시력과 건강을 되찾은 사울은 다메섹에서 며칠을 그곳의 신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여러 회당에서 복음을 전합니다(19b-20). 이 기간은 바울이 갈라디아서 1:16-17에서 말하는 아라비아로 가기 전의 일입니다. 그런데 그 편지에서 바울은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고 진술합니다. 그렇다면 이 진술은 누가의 사도행전 기록과 상충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바울의 진술을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해석하기보다는 바울이 말하려는 의도를 잘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강조하려는 바는 자기가 지금 전하고 있는 복음이 하나님의 직접 적인 계시로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곧 예루살렘이나 다메섹에서 그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았음을 말하려 합니다. 바울은 이제 기독교 박해자에서 기독교 전도자로 전향했습니다. 누가는 바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을 예수의 하나님 아들 되심으로 요약합니다. 이것은 특기할 만한 사항입니다. 사도행전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바울의 설교(행 13:33)를 제외하고는 예수에게 하나님의 아들, 칭호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바울서신에서 이 중요한 기독론적 칭호는 매우 중요하게 사용됩니다. 물론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주’와 ‘그리스도’ 칭호를 훨씬 더 자주 사용하지만, 예수의 정체성에 대해 매우 중대한 진술이 나올 때마다 ‘하나님의 아들’ 칭호를 등장시킵니다. 이 칭호는 갈라디아서 1:16절에서 자기가 받은 중대한 소명에 관해 이야기할 때도 등장하고, 로마서 1:1-4에서 자신이 그리스도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할 때도 빠짐없이 등장합니다. 갈라디아서 4:4에서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성육신’ 사건을 이야기할 때도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 언급합니다. 이 칭호는 예수가 유대인들이 고대하던 이스라엘의 메시아이며(사무엘하 7:14) 부활 이후 하나님 우편으로 고양하신 분(시편 2.7)임을 의미합니다.

 

사울이 다메섹에서 도주함(23-25)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환영 받는 것은 아니고, 모든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복음 전도자는 참 증인이 아니며 듣는 이들이 다 좋아하는 말씀은 진리가 아닐 수 있습니다. 변화된 사울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식은 모든 이들에게 소망을 주는 복음이지만, 그 소식이 모두에게 달가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23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24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그들이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25그의 제자들이 밤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 내리니라(23-25)

23절에서는 여러 날이 지났다고 말합니다. ‘여러 날’(직역하면·충분한 날들)은 ‘며칠’(19)보다 훨씬 더 긴 기간을 가리킵니다. 이 기간은 갈라디아서 1:18에서 바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하기 전의 기간을 말합니다. 따라서 23-25절은 바울이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온 이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이 아라비아에서 얼마 동안 머물렀는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다메섹의 유대인들은 사울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몄지만, 그 계획이 탄로 나는 바람에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사울을 광주리에 넣고 성 밖으로 탈출시킵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후서 11:32-33에서 이 일에 대해 언급합니다.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고관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켰으나 나는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여기서 아레다 왕은 나바트 왕국의 왕을 가리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1:17에서 언급하는 아라비아는 어느 지역을 가리키는 것일까? 흑자는 이 지역을 사막으로 간주하고 바울이 한적한 곳에 가서 하나님과 긴밀한 교제를 나누면서 구약성경을 연구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하지만 당시 아라비아는 팔레스타인 동부와 남부에 위치한 나바트 왕국을 가리키는 지명이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주님으로부터 복음을 전하는 소명을 받은 즉시 아라비아로 가서 복음을 전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도행전과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바울의 이동 장소를 연대기적으로 정리하면, 사울은 다메섹(사도행전 9:19-22)에서 아라비아(갈라디아서 1:17; 나바트 왕국)로 가서 얼마 동안 머물다가 다시 다메섹(사도행전 9:23-25: 갈라디아서 1:17)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사도행전 9:26-30; 갈라디아서 1:18-19)을 방문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사도들을 만남(26-29)

주변인에게 성도로서 변화된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몸소 주의 일꾼이 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자신을 통해 누군가를 세워주는 것입니다. 주변인들이 주의 일꾼이 되고, 은사를 발휘하고, 적절한 일과 자리를 찾아가도록 돕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바나바는 위로의 사람이라고 불릴 만큼 다른 사람을 세우는 일에 충성스러웠습니다.

26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27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28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29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26-29)

사울은 다메섹에서 극적으로 탈출한 후, 예루살렘으로 간 것으로 보입니다. 누가는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과 사귀고자’했다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제자들은 열두 사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울은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과 교제를 나누기 원했지만, 정작 그들은 사울이 저질렀던 ‘과거 행적’ 때문에 그의 회심(‘제자됨’)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예루살렘 성도들 중 어떤 이들은 자신들과 사귀려는 사울의 의도를 하나의 잘 기획된 ‘속임수’로 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 바나바가 등장합니다. 바나바는 사울을 사도들에게 데리고 가서 사울의 극적인 회심과 그에게 주신 사명과 그의 전도 활동에 대해 말해줍니다. 이를 통해 아직 사울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있던 사도들의 마음을 회유하고 사울의 ‘명예 회복’을 돕습니다. 곤란한 상황에 처한 형제에게 보여준 바나바의 따뜻한 배려는 사도행전에서 묘사된 그의 온유한 성품과 조화를 이룹니다. 물론 원문은 ‘바나바가 그를 데리고 사도들에게 갔으며 그가(사울이)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으며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것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로도 번역이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열두 사도를 만났다는 사도행전의 기록과 갈라디아서 1:18-19에서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라는 바울의 진술은 상충하는 것입니까? 성경의 다른 본문을 서로 비교할 때 유의할 점이 있습니다. 각 저자가 각각의 본문에서 말하려는 의도를 먼저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누가와 바울의 진술은 강조점의 차이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 누가는 바나바의 도움으로 사울이 예루살렘 교회의 열두 사도들과도 우호 적인 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려 했습니다. 반면에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자기가 전한 복음이 사람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받은 것임을 강조하려 했습니다. 사울은 예루살렘에 두 주밖에 머물지 않았으며 사도 중에서는 베드로와 야고보만 만났을 뿐입니다(갈라디아서 1:18-20).

 

사울이 다소로 돌아감(30)

30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30)

사도들과 우호적인 유대 관계를 맺은 사울은 예루살렘에서도 예수의 이름을 담대하게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헬라어를 주로 사용하는 유대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며 그들과 논쟁을 벌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사울을 살해하려는 음모를 꾸미게 되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성도들은 그를 가이사랴로 데리고 간 후, 다시 다소로 보냅니다. 가이사랴는 항구도시였습니다. 다소는 길리기아의 수도이며 학문이 발달한 도시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온 교회가 굳건하게 세워짐(31)

풀무불 같은 역경은 진짜 복음이 아니라 거짓 사상을 태웁니다. 세상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준다는 거짓 선동, 세상을 얻으면 성공한다는 허황된 풍조들 말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신앙을 순수하게 만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초기부터 어려움에 직면했던 초대교회는 여러 과정을 통해 더욱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31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31)

이제 사울은 사도행전 11:25에서 다시 등장하기까지 사도행전의 서사적 무대에서 잠시 동안(약 10년간) 사라집니다. 누가의 관점에서 볼 때, 9장까지의 이야기를 통해 이방 선교를 위한 사전 준비가 모두 끝난 것입니다. 따라서 누가는 31절에서 초대교회의 전반적인 진행 상황을 간략하게 요약하는 구절로 사도행전 6:8부터 서술한 초대교회의 복음 확장 이야기를 일단락 짓습니다.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는 팔레스타인 전체에 복음이 전파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누가는 여기서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성령의 임재는 공동체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입니다.


그리스도와의 만남으로 사울은 그리스도를 제거하려는 사람에서 그리스도 때문에 제거당하는 대상으로 전락했습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원수 관계이던 자들이 형제가 되고 형제이던 자들이 원수가 되었습니다. 원수이던 유대와 사마리아가 성령으로 하나가 되어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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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09-02)

 


준비된 사람 아나니아

사도행전 9장 10-19절


세계 제1차 대전이 끝난 후, 1919년에 미국 시카고에 있는 아파트 하나를 구해서 이사를 합니다. 그 집을 구입한 이유는 근처에 당시 위대한 작가인 ‘셔도우 앤더슨’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앤더슨과 글 쓰는 것을 배우기 위해서 이사를 했던 것입니다. 점점 가까워져 글 쓰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여러 가지 도움을 받아가며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 젊은이가 바로 그 유명한 ‘노인과 바다’를 쓴 ‘어니스트 헤밍웨이’입니다. 앤더슨은 헤밍웨이만큼 유명하지 않습니다. 유명인이 그렇게 되기까지 누군가 그를 세워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맨토링이란 주전 1200년 전 이야기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에게 나타나셨던 주님은 이제 다메섹에 살고 있는 아나니아에게 환상 가운데 나타나십니다. 주님은 아나니아에게 환상을 통해 사울을 만나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상세히 알리십니다. 사울의 과거 경력에 대해 알고 불안해하는 아나니아에게 주님은 그가 복음을 위해 선택된 사람임을 알려주셨습니다. 사울은 아나니아의 도움으로 시력을 다시 회복하고 건강을 되찾습니다.

 

아나니아가 본 환상(10-16)

위대한 리더가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위대한 지도자를 만들어내는 맨토도 중요한 사람입니다. 누구나 다 맨토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맨토에게는 요구되는 자격이 있는데, 특히 영적인 맨토는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절대로 되어서는 안 됩니다.

10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11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12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13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들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14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 15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6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10-16)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택한 그릇으로 사용하시기 위해 신중하고 아주 세밀하게 일하십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을 굴복시키셨던 하나님께서 이제 사울에게 주님께서는 이제 그를 부르셔서 소명을 주시기 위한 다음 단계를 준비하셨습니다. 신실한 아나니아를 준비하십니다.

⑴ 준비된 제자 아나니아(10)

훌륭한 일군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아나니아’라는 믿음의 사람을 소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나타나내고 이루시기 위해 아나니아를 택하십니다. 이 사람을 통해서 위대한 일군인 바울로 만들어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소개된 위대한 맨토 아나니아를 소개할 때, 많은 자격들이 있겠지만, 성경에서는 그를 주의 ‘제자’로만 소개됩니다. 주의 제자로 소개되는 아나니아는 다메섹에 거주하고 있던 유대인으로서 이미 예수를 영접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는 사울을 찾아가는 것 외에는 더 이상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소개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과 같이, 아나니아도 사울을 등장 시키고 자신은 역사 속으로 소리 없이 사라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는 아나니아를 ‘제자’라고 소개합니다. 그것은 아나니아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제자다운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나니아의 삶은 제자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누가는 나중에 바울의 입을 통해 그가 ‘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자’라고 소개를 덧붙인다(사도행전 22:12). 문학적 의도와 각 본문의 정황에 따라 새로운 정보를 추가하는 것은 누가의 집필 방식입니다. 주님은 환상 중에 ‘아나니아야!’라고 부르셨습니다. 이때 주님을 즉각적으로 알아보고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⑵ 사역을 가르쳐주신 예수(11-12)

하나님께서는 아나니아에게 해야 할 일을 상세히 알려주십니다. 한 영혼을 새로운 사람으로 빚기 위한 하나님의 세밀하고도 섬세한 계획이 그리스도에게 결박당하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합니다. 아나니아에게 전한 사역들은 ⑴ 찾아가야 할 집 주인의 이름과 ⑵ 그 집이 위치한 거리 이름과 ⑶ 찾아가 만나면 사울이 하고 있을 일과 ⑷ 사울이 기도하는 중에 보게 될 환상의 내용까지 모두 세밀하게 알려주십니다. 주님을 극적으로 만나는 사건과 관련해 사울은 모두 세 번의 환상을 통해 계시를 받습니다. 누가는 첫 번째 환상을 사도행전 9:4-6에서, 두 환상을 9:11-12에서 기록한다. 사도행전 22:17-21에서는 사울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에서 기도할 때 예루살렘을 속히 떠나라는 환상을 들은 것에 대해 기록합니다.

⑶ 머뭇거리는 아나니아(13-14)

사실 이러한 주님의 명령에 아나니아는 매우 부담스러운 명령이었을 것입니다. 이미 사울에 대한 소문은 아나니아의 귀에까지 들어갔습니다. 그에게 사울은 만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이미 예수를 따르는 신자들에게 얼마나 많은 해를 가했으며, 무슨 목적으로 다메섹까지 오게 되었는지에 대해 그는 여러 경로를 통해 들었을 것입니다. 사울은 살기가 등등하여 예수님을 믿고 따른 그리스도인들을 결박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던 사람으로 소문이 나있기 때문입니다. 포악한 사울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었다면 누구라도 그러한 반응을 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나니아는 하나님으로부터 명령을 받았을 때, 매우 놀랐을 것입니다. 이것은 아나니아는 자신의 생각을 숨기지 않고 하나님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들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라고 말씀 드립니다. 위협과 살기가 등등한 사울을 생각만 해도 두렵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에게 안수할 수 있겠냐고 반문한 것입니다. 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즉각 순종하기보다 머뭇거리며 반문한 이유일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행전의 문맥에서 사울에 대한 아나니아의 이러한 반응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누가는 아나니아의 입에서 나온 사울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와 바로 이어서 소개될 사울의 새로운 소명과 변화된 모습을 극히 대조적인 방식으로 독자들에게 보여 줍니다

⑷ 사역을 다시 확인시킴(15-16)

주저하는 아나니아에게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15-16). 주님은 아나니아의 입을 통해 앞으로 사울을 자기 종으로 부르셔서 어떠한 심오한 뜻을 펼쳐 나가실지 보여주십니다. 누가는 이후 이 이야기를 아나니아가 바울에게 직접 말해 주는 방식으로 기록합니다(사도행전 22:14-16). 부활하신 주님은 이미 다소 사람 사울을 눈여겨보셨고, 그에게 주실 어떤 위대한 사명을 이미 계획하셨습니다. 사울은 그리스도인들을 철저하게 박해 한 ‘전파’를 가지고 있었지만, 주님은 그의 이러한 죄과를 조금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그는 예수의 이름을 이방인들과 왕들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파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이라는 표현은 앞으로 사도행전에서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게 될 대상을 미리 보여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방인이 전도 대상 목록에서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은 그가 이방인의 사도가 될 것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이라는 표현은 앞으로 그의 복음 전도 사역이 그리 수월하지만은 않을 것임을 암시합니다. 주님이 환상 중에 아나니아에게 말씀하시는 한편, 또한 기도하고 있던 사울에게도 환상 중에 나타나셨습니다. 말씀하시는 방식으로 쌍방에게 자신의 뜻을 계시하십니다. 쌍방에게 환상을 보여주시는 주님의 특별한 계시 방법은 나중에 사도행전 10장에서 고넬료와 베드로에게 하셨던 것과 매우 유사합니다.

 

다시 보게 되는 사울(17-19a)

하나님의 사명을 받은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만을 최종적인 권위로 인정하고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바로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이고 일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그러한 일군을 찾으십니다.

17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18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19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17-19a)

아나니아는 주님의 말씀에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내려놓고 즉각적으로 순종하며 나아갑니다. 주님의 환상으로 보여준 지시를 따라 ‘직가(直街)’라는 거리에 있는 유다의 집으로 갑니다. 그러나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불안한 마음도 없지는 않았음 것입니다. 유다의 집에 들어간 아나니아는 주님의 지시에 따라 사울에게 안수를 합니다(12). 아나니아는 사울을 형제 사울이라고 부릅니다. 누가가 사용한 헬라어사울 아델페 Σα。ún αδελφε)를 보면,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히브리어나 아람어로 말한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형제는 예수 믿는 자를 부르는 호칭입니다. 예수를 믿는 신자들은 국적과 성별과 나이와 지위와 피부색을 막론하고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입니다. 이보다 따뜻한 호칭이 이 세상에서 또 어디에 있으랴! 사울을 만난 아나니아는 다메섹 도상에서 친히 나타나셔서 사울을 만나주신 예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예수가 사울의 시력을 다시 회복시키고 성령으로 충만케 하려고 자기를 보내셨음을 전합니다. 그러자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누가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사울은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 지니라,'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진 것은 그가 시력을 회복했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세례를 베풀었다는 것은 초대교회에서 세례가 사도들에 의해서 행해진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경험한 사건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좋을까?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사건을 유대교로부터의 ‘개종(conversion)’으로 이해해야 하는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명(call)으로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합니다. 전통적 인 견해는 이 사건을 대체적으로 유대교로부터의 회심/개종으로 이해합니다. 루터는 사울이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해 낙담하고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다메섹 도상의 경험을 통해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했다고 보았습니다. 즉, 사울이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후 행위를 강조하는 유대교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로 전향했다는 것입니다. 한편, 다른 학자들은 이 사건을 바울의 개종으로 해석하는데 반대합니다. 회심 이전의 바울의 모습에서 심각한 죄책감이나 유대교에 대한 불만을 나타내는 뚜렷한 구절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사울은 율법 앞에서 죄책감 없이 당당하게 살았습니다(빌립보서 3:4-6). 따라서 최근 몇몇 학자들을 중심으로 루터의 전통적인 견해가 반박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경험을 사울의 경험과 동일시하는 데에서 루터의 잘못된 견해가 비롯되었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당시 유대교의 구원관에 대한 오해도 잘못된 견해로 이어졌다고 지적합니다. 그들은 당시 유대인들이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고 이해했다는 사실을 부각합니다. 다시 말해, 당시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킨 목적이 구원에 들어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죄를 회개하면 다시 그 관계가 회복되고 율법에 규정된 제사를 통해 언약관계가 회복된다는 것이 당시 유대교의 율법 이해였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사울의 경험이 사도행전의 이야기가 강조하는 것처럼 유대교로부터의 개종이 아님을 강조하며, 하나님이 사울에게 새로운 소명을 주셨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부언하자면, ‘다메섹 사건이 개종인가 소명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결코 쉽게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 사건은 개종이자 소명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울은 눈을 떴습니다. 스스로가 아니라 기독교 공동체를 대표하는 아나니아를 통해 눈을 떴습니다. 그에게서 사명을 들었고, 공동체의 따스한 환대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용서였고 인정이었습니다. 회심을 새로운 공동체와 관계하는 일입니다. 그들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함께 사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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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09-01)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울

사도행전 9장 1-9절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결정하고 만들어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이 만나는 사람, 자신이 부딪치는 일들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으면서 살아갑니다. 그 중에 신앙생활은 가장 큰 영향을 줍니다. 결국 좋은 인생을 만들길 원한다면,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할 때 풍요로운 인생이 되어 집니다. 그리스도를 삶의 주인으로 받아드리고 생각과 말과 행동을 통해 그분을 공경하고 섬기는 한, 그 분이 인도하신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영적, 물질적 축복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가질 수 있습니다.

 

사울은 재제사장의 공무를 받아 살기등등하게 다메섹 원정길에 오릅니다.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오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다메섹 동상에서 그는 갑자기 하늘로부터 비추는 강한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박해하러 가던 사람들이 섬기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맞닥뜨리게 되었습니다. 동행하던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으로 돌아간 사울을 사흘간 앞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게 되었습니다.

 

다메섹으로 향하는 사울(1-2)

하나님을 믿는 것은 자기감정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충실합니다. 끝없이 올라오는 자기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살아가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그 뜻에 순종하는 삶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음’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십니다.

1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1-2)

사울의 회심과 소명 이야기는 사도행전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그래서 누가는 사울이 극적으로 변화된 사건을 세 번이나 소개합니다. 본 9장은 앞 장에서 박해자로 등장한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서 열정적인 전도자가 된 사건과 사도 베드로의 복음 사역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9장은 8장에서 다룬 주제의 확장입니다. 본 장의 핵심 요점은 하나님께서 사울의 변화를 통해 복음이 유대 지역을 넘어 땅 끝까지 확산되게 할 새로운 인물을 준비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10장의 로마 백부장 고넬료의 개종 사건과 13장부터 전개되는 바울의 선교 사역은 복음이 땅 끝으로 향해 나아가는 시대가 도래했음을 보여줍니다.

⑴ 혈안이 된 정통 유대인 사울(1)

당시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처형하고, 그 잔당들을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무리를 박해하면 없어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스데반 집사까지 죽였습니다. 박해 때문에 믿는 자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서 어려 지역과 나라로 흩어졌습니다. 박해를 피해 도망친 사람들이, 도망한 곳에서도 여전히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증거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소식이 예루살렘 종교지도자들에 들려고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적대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로 사울을 통해 그 감정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종교적인 열정으로 가득한 사울은 지나친 극렬한 박해자로 마치 먹기를 발견한 맹수처럼 그들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누가는 사울의 모습에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하다고 평합니다(1).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에게 예수는 여호와 하나님의 유일 신앙을 깨뜨리는 사악한 괴수였고, 그를 추종하는 무리는 어리석은 이단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초기 그리스도인들을 ‘그 도를 따르는 사람’으로, 표현은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표현으로 초기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아직까지 하나님께 대한 충분한 열정적인 헌신은 예수와 그를 따르는 이단자들을 없애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잘못된 열정으로 한 일은 결국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는 일이었습니다.

⑵ 종교적인 열정을 가진 사울(2)

잠시 사울이 어떤 사람인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인간적인 면을 다른 곳에서 살펴보았으니, 이곳에는 당시 종교적인 생각을 중점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사울의 종교적인 과격한 열정은 철두철미한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과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십자가에 처형된 나사렛 사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결코 수용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세상을 어지럽힌 이단을 추종하는 무리들은 모두 척결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사렛 사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결코 수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스데반과 같은 열정적인 성도들을 죽이는데 찬성했고, 숨은 성도들을 찾아 박해하는데 앞장섰습니다. 그 박해의 결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 밖으로 박해를 피해서 각 지역과 각 나라들로 흩어졌습니다. 그곳에서 잠잠한 것이 아니라 피신한 곳에서까지도 열심히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므로 그곳에서도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사단은 하나님 나라와 교회가 성장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참 진리를 모르고 열정만 있는 사람들을 선택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회를 박해합니다. 그 자격에 합당한 사람이 사울이었습니다. 아무도 열정 가득한 바리새인 청년의 질주를 막을 수 없어 보였습니다. 사울은 여호와 하나님의 종교를 바르게 지킬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를 추종하는 이단들을 척결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땅 끝까지라도 가서 모두 잡아 박해해면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를 추종하는 교회를 파괴하는 일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크게 기뻐하실 것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는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2a)라고 오늘날 체포영장 같은 공문을 대제사장에게 받으러 갔습니다. 당시 대제사장에게는 외국으로 도망친 범법자 유대인들을 강제 송환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에게 가서 공문을 받아 가지고 다메섹으로 향합니다. 당시의 대제사장은 가야바(주후 18-37년)였습니다. 도시 다메섹은 약대 상인들의 무역 교차로에 위치한 중요한 고대 도시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242km 떨어진 거리며 걸어서는 6일 정도 걸립니다. 유대 땅은 아니지만 수리아의 주요 도시로서 유대인들이 상당수 많이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사울은 다메섹에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고 길을 나섭니다. 아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에 대한 복음을 알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사울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자신의 행동에 유대인으로서 정당한 행동이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사울은 하나님의 율법 외에, 또 다른 신을 신봉하여 세상을 어지럽게 하는 일을 척결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3-7)

회사에서 신입 사원을 기용할 때는 많은 스펙과 훌륭한 능력 그리고 탁월한 사람들을 사용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기준과 다릅니다. 하지만 정말로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때로는 나와 같은 사람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실까 라는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쓰시면서 부족한 사람일지라도 회복시켜 주시고, 능력을 주시며 그리고 완전하게 사용하십니다.

3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4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6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7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3-7)

사울은 어떻게 하면 많은 사람을 보기 좋게 잡아올지 엄중한 마음으로 대제사장의 공문을 가지고 먼 길을 떠납니다. 상당수 무장한 사람들과 함께 다메섹으로 향했습니다. 나름 훌륭한 체포 작전을 무장한 사람들과 논의했을 것입니다. 오 일이나 육일 째인지 다메섹에 거의 도착할 어느 날, 때는 해가 중천에 걸린 정오쯤이었습니다. 갑자기 밝은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습니다. 밝은 빛은 영적으로 어둠 가운데 있는 그의 상태와 대조를 이룹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적으로 어둠 가운데 있던 그를 밝은 빛으로 비추셨습니다.

⑴ 뜻하지 않는 만남(3-4)

대제사장의 공문을 들고 다메섹으로 향하던 사울에게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사울에게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비추었습니다. 강렬한 빛에 사울은 땅에 엎드려지고 순간 눈이 멀었습니다. ‘하늘로부터 빛이 비추고 음성이 들렸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실 때, 자주 등장하는 방법이 바로 ‘빛’과 ‘음성’입니다. ‘밝은 빛’은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 자신의 제자들을 핍박하던 사울의 어두운 눈을 밝히시기 위해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라고 소리도 들려왔습니다. 사울의 이름을 두 번이나 부릅니다. 그만큼 절박하다는 것입니다. 위협과 살기가 등등한 사울에게 주님이 은혜의 빛을 비추셨습니다. 어둠 가운데 있던 사울에게 밝은 빛을 비추셨습니다. 그 소리는 저주 받아 죽은 줄 알았던 예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초자연적인 주님의 음성 앞에서 엎드러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분명 사울이 박해하고 있는 자들은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이었건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핍박을 받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믿음의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인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고난당할 때에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시고, 우리가 조롱당할 때에 예수님도 당하신 것입니다. 눈을 멀게 할 만큼의 영광과 극심한 고난을 동시에 한 몸에 가지고 계신 분이 사울이 만난 예수님입니다. 그것은 한 번도 생각해본 적도 없고 배워본 적도 없는 낮선 하나님이었습니다. 신앙은 열심만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열정이 남들보다 뛰어나다고 믿음이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부활하신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없고, 나의 삶의 주권을 주님께 맡기지 못하는 삶이라면 그 모든 것이 헛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른 믿음과 착한 행실을 통해 그리스도의 빛을 세상 속에 비추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⑵ 자신을 밝히신 예수(5-6)

사울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압도할만한 경험은 하나님께서 아니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신적인 사건이라는 것을 금방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주여 누구시니이까?’라고 묻습니다. ‘주여’라고 한 것은 그가 예수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신적인 존재라고 생각한 것은 분명합니다. 사울의 질문에 하늘에서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대답이 들려옵니다. 십자가에 죽은 수많은 사람들 중에 하나라고 생각했던 그 예수가 자신에게 신적인 모습으로 나타났으니, 순간 눈만 멀었던 것이 아니라 지적인 모든 부분이 마비가 되었을 것입니다. 모든 신학이 깨어지고 꿈이 깨어졌을 것입니다. 아니 그는 이 순간에 그는 진짜 주인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사울이 박해한 자로 소개합니다. 하지만 극열한 반대자를 포용하시고 구제 불능처럼 보이는 사울을 일꾼 삼으십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사울은 누구보다 율법에 해박했지만, 정작 율법이 지시하는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사울의 어두운 생각과 완고한 마음을 깨트리기 위해, 부활하신 주님이 친히 찾아와 사울을 만나신 것입니다. ‘참된 빛’ ‘참 생명 되신 그리스도’를 만나자 사울은 그리스도인을 결박하던 자에게서 그리스도에게 결박당하는 자로 변화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을 핍박하는 일에 누구보다 열심을 내었던 사울을 예수님께서는 만나주셨고,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6)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우리의 과거의 모든 삶을 용서받고,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됩니다. 사울은 결국 복음 앞에 그의 모든 것이 무너졌습니다.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아무것도 쓸모없는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급기야는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로 인한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여전히 내 안에는 자존심이 남아 있습니다. 우쭐거리는 마음과 시기와 질투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주님이 내 인생을 이끌어 가고 계심을 또한 세미한 계획들을 깨닫지 못하는 영적 소경의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복음 앞에서 내 모든 것들을 내려놓는 믿음이기를 소원합니다.

⑶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7)

놀라운 것은 정작 사울이 쓰러지고 눈이 먼 과정 속에서도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울과 같이 가던 사람들에게는 말씀하지 않으시고, 오직 사울 자신에게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한 사람에게 집중하십니다. 나에게 하늘의 놀라운 비밀을 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지금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비교의식 속에서 낙심하여 한숨만 내 쉬고 있습니다. 영적 무지함이 하늘의 비밀을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베섹으로 돌아간 사울(8-9)

회심은 자신을 이끄는 주인이 바뀌는 것입니다. 신앙은 열심만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열정이 남들보다 뛰어나다고 믿음이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없고, 나의 삶의 주권을 주님께 맡기지 못하는 삶이라면 그 모든 것이 헛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8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8-9)

의의양양하며 위풍당당하게 하나님을 위한 열정으로 다메섹으로 향하던 사울은, 이제 눈이 감기여 누군가에게로 갑니다. 그의 인생도 예수님께 매어서 그분이 이끄시는 대로 가게 됩니다. 회심은 자신을 이끄는 주인이 바뀌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인격적인 만남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신앙은 관념이 아니라 관계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주인이라고 하는 사실이 자신의 가치관과 삶을 변화시키길 축복합니다. 사울이 땅에서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갑니다(8). 살기가 등등하여 다메섹을 향하여 가던 그가 참으로 무기력하게 사람들의 손을 잡고 겨우 다메섹으로 들어갑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강한 힘을 지닌 핍박자가 아니라 복음 앞에서 무력한 인간에 불과한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비전을 향해 새로운 눈을 떠야 합니다. 그동안의 잘못된 나의 삶과 신앙에 대해서는 눈을 감아 버리고, 새롭게 인생을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이 열어 놓으신 길을 바라보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식음을 전폐한 사울의 그 모습이 변화와 부흥을 바라는 나에게 오늘 가장 필요한 신앙의 요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울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났습니까? 바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오늘 나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누가는 이미 사도행전 8:3에서 예루살렘 교회 신자들을 박해하던 사울의 모습을 간략하게 언급한 바 있습니다. 본 단락은 그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갑니다. 사울은 자기가 섬기는 하나님을 위해 아직 충분한 헌신을 다하지 못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는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아오기 위해 대제사장의 ‘편지’를 받아 다메섹으로 향합니다. 이 편지는 다메섹에서의 활동을 허락하는 공식 문서였을 것입니다(참조, 행 26:11). 마카비 1서 15:16-21에 나오는 로마 공문은 당시 로마 당국이 산헤드린 공회의 수장인 대제사장에게 탈주범을 추적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사실을 보여줍니다. 주전 47년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이 특권이 유대 민족을 대표하는 대제사장에게 있음을 재확인해줍니다. 어쨌든 누가는 흩어진 신자들이 다메섹에 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사이에 있고, 그들을 송환할 수 있는 권한이 대제사장에게 있음을 전제합니다. 누가는 2절에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을 ‘그 도를 따르는 사람들’로 표현합니다. ‘그 도’는 직역하면 여기서는 어떤 특정한 삶의 방식을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한자의 길 도(道)자에 있는 함의와 맥을 같이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초대교회가 자신들을 가리켜 이 도에 속한 자, 혹은 이 도를 따르는 자로 불렀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초기 기독교를 가리켜 그 도에 호도 스)라고 부르기도 하고(사도행전 19:9,23; 22:4; 24:14,22), 주의 도면 18:25-26) 혹은 ‘구원의 길’(사도행전 16:17)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명칭 사용은 초기 기독교인들의 정체성을 이해한 방식을 웅변적으로 보여줍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믿고 따르는 기독교의 진리를 일종의 합의된 교리의 집합체로 이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에 따라 살아가는 삶의 방식에 기독교의 참된 진리가 있음을 이해하였습니다. 그들이 이해하고 따랐던 기독교는 믿음(교리)과 삶(행위)이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믿음과 삶이 서로 분리 될 수 없는 믿음의 삶을 그들은 좇았다. 이 사실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의미하는 바가 큽니다.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사울은 갑자기 하늘로부터 빛을 보고 음성을 듣게 됩니다. 3절은 사울이 본 빛을 단순히 ‘하늘로부터 빛’이라고 말합니다. 사도행전 22:6은 ‘하늘로부터 큰 빛’, 26:13은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라고 말합니다. 사도행전 9:3과 22:6은 이 빛이 사울을 둘러 비추었다고 말하고, 26:13은 같이 가던 동행자들도 비췄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작은 변화는 단순히 성경 저자의 오류가 아닙니다. 누가가 의도한 문학적인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4절은 사울만 소리를 들었다고 말하는가 하면, 7절은 같이 가던 자들도 들었다고 말하고, 22:9은 동행자들은 듣지 못했다고 말하고, 26:14은 사울만 들었다고 기록합니다. 이것을 단순하게 누가의 실수나 성경의 오류로 보아야 합니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가가 사용한 ‘소리’라는 헬라어 ‘포네’의 용례입니다. 헬라어 명사 ‘포네’는 단순히 귀에 들리는 ‘소리’의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말하는 ‘음성’ 혹은 ‘말’의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세 본문이 말하려는 의도를 종합해본다면, 다메섹으로 가던 사람들은 하늘로부터 들리는 소리를 모두 들었지만, 그 ‘소리’ 혹은 그 ‘말’의 의미를 깨닫은 사람은 사울뿐이었습니다. 하늘로부터 빛이 비치고 음성이 들렸다는 것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계시하실 때 자주 등장하는 것이 바로 빛과 음성이다. 밝은 빛은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런 빛을 보고 눈이 멀게 된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나중에 사도행전 12장에서 주의 사자가 밝은 빛과 함께 나타난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참조, 마 17:5). 밝은 빛을 보고 땅에 엎드려진 사울은 하늘로부터 음성을 듣습니다. 음성도 신적 계시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출애굽기 3:1-6; 이사야 6:8; 누가복음 3:22; 9:35).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의 음성 대신 부활하신 예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사울은 나중에 아그립바 왕 앞에서 주님은 자기에게 아람어로 말씀하셨다고 고백합니다(26:14). 이 사실을 생생한 언어로 보여주려는 듯 누가는 하늘에서 부르는 사울의 이름 을 일반 내러티브에서 사용하던 ‘사울로스’ 대신 히브리어 음역을 사용합니다. 자기 이름을 부르는 음성을 듣고 놀란 사울은 엉겁결에 이 말을 하는 사람이 누군지 묻습니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것은 사울이 순간적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서 사용된 ‘주여’는 단순히 윗사람을 높이는 존칭어일 뿐이다. 이에 하늘에서 예수의 답변이 들려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이 순간 사울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가 살아계심을 깨닫게 되고, 그를 직접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물론 사울이 이 충격 적인 만남으로부터 그 의미를 깨닫는 데까지 꽤 시간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이 이 극적인 만남을 통해 매우 중요한 깨달음을 얻게 되었음은 분명합니다. 사울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해 애써왔던 과거의 열심과 삶이 전적으로 잘못되었고 오히려 하나님의 뜻과 어긋난 것임을 뼈아프게 깨달았을 것입니다. 사울은 나중에 이 순간을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내게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라고 회고합니다(갈 1:16), 사울은 또한 자기가 박해하던 그리스도가 부활하셔서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 살아계심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처럼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단순히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 구약의 예언이 성취된 사건임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예수의 부활을 통해 그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이심을 확신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사울은 또한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라는 질문을 통해 자기가 직접 예수를 박해한 적은 없지만, 그를 따르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것이 그분을 박해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7절은 사울의 극적인 경험이 그와 동행하던 자들에게도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음을 보여줍니다. 26장에서는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비치므로 그들도 땅에 엎드려졌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다시 일어나 말없이 서 있었다'라고 말합니다. 반면, 더 많은 충격을 받은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지만 앞을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목적지인 다메섹에 도착합니다. 그가 눈이 먼 것은 하나님의 형벌 때문이 아니라 예수를 정면으로 대적하던 자의 무력한 모습을 상징할 것입니다. 누가는 사울이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고 금식했다고 말합니다. 이는 과거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깨닫고 회개하기 위한 목적인 동시에, 아직 그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결과일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사울은 무너졌습니다. 그의 과거는 다 재정립되어야 했습니다. 스스로 주도하던 인생이 이끌려 가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빛으로 인도함을 받고, 새로운 사명을 부여 받아 살아야 했습니다. 자신의 과거가 죽고 무너질 때 그분이 새롭게 자신을 지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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