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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01-02)

 


예루살렘 다락방에 모인 사람들

사도행전 1장 12-26절


어떤 영화에서 출연 배우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세 가지 ‘금’을 주셨는데, 첫째는 ‘황금’, 두 번째는 ‘소금’,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금’을 주셨습니다. 당신은 어떤 금을 선택하겠습니까? 황금은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기 때문에 황금을 많이 택할 것입니다. 소금은 선택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소금은 몸에 필수적인 것이기 때문에 없으면 죽게 되는 필수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소금은 일반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가장 중요한 금은 ‘지금’입니다. ‘지금’이 없으면 ‘황금’도 필요 없습니다. ‘지금’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금’입니다. 지금 이 순간을 잘 살아가야 합니다. ‘지금’은 시간을 말합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나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를 후해도 돌아오지 않으며, ‘미래’는 아직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과거’를 만회하고 ‘미래’를 멋지게 만드는 것은 바로 ‘지금’입니다.

 

하늘로 승천하신 예수님을 배웅하고 제자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예수님의 승천을 지켜봤던 제자들은 예루살렘 한 다락방에 모여서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며 기도에 집중하기 시작합니다. 그 후에 베드로는 시편 두 구절을 제시하며 사도 직무를 저버린 가룟 유다는 대신할 사도를 선출합니다. 다락방에 모인 120여 명의 성도들은 가룟 유다를 대신해서 맛디아를 뽑아 열두 사도로 선출합니다.

 

예루살렘에 모인 사도들(12-14)

기도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사역하시기 시작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사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자신의 연약함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기도하면 새로운 가능성이 열립니다. 이제 예루살렘 다락방에 모인 사람들은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리며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12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13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14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12-14)

예수님께서 승천 후,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주님의 명령에 따라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본문을 통해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장소가 예루살렘 근처인 감람원(올리브 산)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곳은 예루살렘에서 안식일에 갈 수 있는 정당한 곳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이 안식일에 기도하러 가기 좋은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항상 쉬고 기도하신 곳입니다(누가복음 21:37).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성도들은 여전히 두려웠습니다. 그들은 제자들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특별한 장소로 모였습니다. 아마 이곳에서 예수님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던 다락방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났을 때, 모여 있던 장소일 것입니다. 두려움에 언제까지 숨어 지낼 수는 없지만, 지금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당’에 속한 괴수인 예수를 죽인 후에 힘을 받았습니다. 예수당에 속한 사람들을 모두 잡아 죽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 다락방 안에는 어디에선가 조용하고 나직막한 찬송이 울렸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하나둘 기도하기 시작하고, 점점 기도 소리에 힘이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기도하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아버지의 약속’이 생각하기 났습니다. 그 약속이 언제 임할지 알 수 없지만, ‘아버지의 약속’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누가는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을 소개합니다. 먼저 아래와 같은 그룹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안드레 

빌립, 도마, 바돌로매,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곱의 아들 유다 등

 

이제 예루살렘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은 누가복음 6장에서 소개되었던 명단과 동일합니다. 이들이 초대교회의 핵심 지도자 멤버였습니다. 그리고 다락방에는 제자들만이 아닌 다른 세 그룹의 성도들도 있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을 따르던 여자들도 있었습니다(누가복음 8:2-3; 23:49; 24:10). 그 여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갈릴리에서부터 예루살렘에 올라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에 대한 언급은 이곳에서 마지막입니다. 마지막으로 그곳에는 예수님의 동생들도 함께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으시기 전에는 메시아로 믿지 않았지만(마가복음 3:21,31-35; 요한복음 7:3-5),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승천 후에 영적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가장 두드러진 사람은 동생 야고보서를 기록한 야고보입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약 120여명 가량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여인들은 위기의 순간에 함께했습니다. 다락방에 모인 성도들은 오로지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에 전념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는 예수님을 잃은 슬픔 속에서 그들에게 성령의 임재와 권능이 간절히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하나님은 일하시기 시작합니다. 서서히 하나로 연합되어 갔습니다.

 

가룟 유다를 대신할 맛디아(15-26)

깊은 묵상과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기도는 지경이 넓히고, 경건의 능력을 지닌 성도로 만들어 갑니다. 제자들은 다락방에서 기도하면서 가룟 유다를 대신한 사도를 선택하길 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사역자인 완전한 수인 열두 사도를 채웁니다.

 

⑴ 가룟 유다에 대한 평가(15-20)

누가는 예수님의 승천과 오순절 성령 강림 사이에 일어난 사건을 하나 소개합니다. 가룟 유다를 대신할 사도를 선출하는 일이었습니다. 누가는 매우 중요하게 이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15모인 무리의 수가 약 백이십 명이나 되더라 그 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들 가운데 일어서서 이르되 16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17이 사람은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여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18(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 19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리어져 그들의 말로는 그 밭을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20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15-20)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성도들은 성령 충만해졌습니다. 수제자인 베드로는 예수님의 빈자리를 수습하기 위해 다시 전열을 가다듬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사역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문제점은 이스라엘 12지파를 근거한 12사도의 역할이었습니다. 가룟 유다 때문에 공석된 한 사도 자리를 선출함으로 12사도를 완성하여, 사역을 차질 없이 이루어나가는 일이었습니다. 눈여겨보아야 할 문장은 “모인 무리의 수가 약 백이십 명이나 되더라”(20)고 기록한 것입니다. 누가는 의도적으로 모인 수를 소개한 것입니다. 단순하게 모인 수를 소개한 것처럼 보이지만, 아마도 유대법에 자치위원회를 갖춘 하나의 공동체를 설립하려면 최소 남자 백 이십 명이 필요했었습니다. 결국 다락방에서 결정될 사항은 바른 결정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떠나보낸 후, 베드로는 수제자로서 남은 성도들을 인도하기 시작합니다. 그의 첫 임무는 가룟 유다가 떠난 공석을 채우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사도 베드로는 가룟 유대에 대해 말씀으로 풀어갑니다. 그는 다락방에 모인 성도들을 사랑으로 어우르면서 ‘형제들아!’라고 부릅니다. 비록, 피를 나눈 혈통 관계는 아니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한 가족임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16).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해서 팔았고, 불행하게도 회개할 기회마저 놓쳤습니다. 결국 자책감에 의해서 비극적으로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그 사건은 많은 성도들에게 너무나 큰 미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그의 모든 행동은 구약 성경에서 이미 예견되어진 사건이며, 구약 시편에서 구체적으로 예언하고 있습니다. 시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습니다.

 

9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시편 41:9)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에 대한 배반을 거론하시면서 시편 41편 말씀을 인용하실 때(요한복음 13:18), 베드로도 말씀을 마음에 담아 두었습니다. 성도들에게 이 가룟 유다 사건을 풀어갈 때, 예수님처럼 시편 41편 9절을 인용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시편의 말씀은 성령에 의해 다윗에게 전해진 말씀이기 때문에 그대로 성취되어졌다고 설명합니다. 가룟 유다에 관한 일들은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구역 성경의 예언이 성취된 사건이라고 표명합니다.

18-19절에서는 가룟 유다가 어떤 죽음을 맞이했는지에 부연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 )안에 넣어진 것은, 당시에는 다락방에 있던 사람들은 그 내용을 모두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마 베드로가 직접 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후대 독자들에게 이해를 돕기 위해 삽입한 내용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하고 판 돈으로 양심에 가책을 받아 성전에 헌금하고 목매어 자살해 죽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 성전 제사장들은 그 돈을 받지 않고, 그 돈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구입해서 나그네들을 위한 묘지로 구입했습니다. 나중에 그 땅의 이름을 ‘피의 밭’이라 부릅니다(마태복음 27:5-8).

 

누가는 다시 베드로에게 시선을 돌립니다. 베드로는 다락방에 있는 성도들에게 다윗의 시편 두 구절을 통해 가룟 유다에 대한 심판에 대해 설명합니다.

 

그들의 거처가 황폐하게 하시며 그들의 장막에 사는 자가 없게 하소서(시편 69:25)

그의 연수를 짧게 하시며 그의 직분을 타인이 빼앗게 하시며(시편 109:8)

 

베드로는 가룟 유다에 대한 심판에 시편 69편은 메시아를 대적하는 자를 향한 저주의 말이며, 시편 108편은 원수에게 연달아 저주를 퍼부으며 타인이 그의 직분을 빼앗기를 원하는 탄원입니다. 그의 죽음은 구약 성경에 나타난 악한 인물들과 동일하게 생각했습니다. 성도들에게는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별 큰 의미가 없었습니다.

구약 성경의 내용은 가룟 유다의 계승자를 지명하고 열 두 사도를 충원하는 성경적인 근거로 인용하고 있었습니다. 12사도는 새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12지파에 상응하는 완벽한 12제자를 충원하는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⑵ 사도의 자격(21-22)

사도 베드로는 가룟 유다의 죽음에 대한 정당성을 설명한 다음, 공석이 된 자리를 충원하기 위한 설명을 계속합니다. 그래서 보선될 사도가 갖추어야 할 요건과 자격을 제시합니다.

 

21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22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21-22)

 

보궐될 사도는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감당할 사람들입니다. 보궐될 사도로서 최소한의 조건을 설명합니다. 첫째, 예수님의 공생애 전 기간 동안 예수님과 동행한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까지 같이 다닌 사람이라야 자격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과 행하신 교훈을 직접 보고 들은 사람이어야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복음의 핵심인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후보자는 당연히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제자들 중에 나타났을 때 제자들과 함께 있었던 사람이어야 합니다. 즉 사도의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죽음, 부활 그리고 승천을 증언할 사람이어야 합니다.

 

⑶ 사도로 선출된 맛디아(23-26)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입니다. 모든 일의 결과는 성령의 인도하십니다. 많은 성도들 가운데 두 사람으로 대상의 범위가 좁혀졌습니다. 그들은 바로 ‘요셉’과 ‘맛디아’였습니다.

 

23그들이 두 사람을 내세우니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요 하나는 맛디아라 24그들이 기도하여 이르되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님께 택하신 바 되어 25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인지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26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그가 열한 사도의 수에 들어가니라(23-26)

 

다락방에 모인 성도들은 보궐할 사도로서 자격을 따라 맞는 후보자를 성정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항상 함께 있었단 사람이어야 했습니다(마가복음 3:14-15). 그래서 사도들은 예수님과 함께 항상 함께했던 사람들 중에서 선정하였습니다.

가룟 유다의 공석을 보궐할 때, 가장 적합한 두 사람이 천거됩니다. 첫 후보자는 ‘요셉’은 그의 별명은 ‘바사바’로, 그 의미는 ‘안식일의 아들’이었습니다. 라틴식으로 ‘유스도’라는 이름을 가졌습니다. 두 번째 후보자는 ‘맛디아’입니다. 그는 누가복음에서 언급된 적이 있습니다(누가복음 10:1). 맛디아에 대해서는 이후 더 이상 등장하지 않습니다. 역사가들에 의하면 나중에 그는 에디오피아 선교사로 나갔다고 전해집니다.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성도들은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의 습관에 따라 두 명 중에 한 명으로 ‘제비뽑기’로 선택했습니다. 둘 다 합당한 후보여지만, 자신들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제비뽑기’를 선택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이해관계와 탐욕을 방지하고자 선택한 방법이었습니다. 제비뽑기 선출방식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섭리하신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 두 사도를 선택하실 때처럼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었기 때문입니다(잠언 16:33). 그 모든 결정을 하나님께 맡기는 자세로 일꾼을 뽑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둘 중에서 ‘맛디아’를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누가는 맛디아 사건을 통해 누가 선택되었는가를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 나라 사역에 12사도의 부족한 수를 채웠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로서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위해 사역할 조직이 완벽하게 갖추어졌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세우시기 전에 하나님의 합당한 일꾼을 세우시고 공동체를 회복시키십니다. 예루살렘에 모인 다락방 공동체는 새로운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완성된 12사도는 새로운 이스라엘의 기초입니다. 새로운 시대를 위해 부름 받은 첨병(尖兵)으로서 세움을 받았던 것입니다.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성도들에게 예루살렘에서 기다리라하고 명하셨습니다. 기다림은 자기를 버리고 순종의 훈련입니다. 공허한 광야같이 보이지만, 그 시간 동안 하나님께서는 사역에 합당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합당한 일꾼들은 그 시간이 지루한 시간이 아니라 가장 귀한 시간임을 압니다. 자신의 사명을 깨닫고 합당한 일꾼으로 연단하는 시간으로 만듭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쓰임을 받을 때는 하나님 나라의 첨병으로 강력하게 쓰임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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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01-01)

 


새로운 사역의 출발점에 선 제자들

사도행전 1장 1-11절


사도행전이라는 새로운 출발을 시작합니다. 현재 마음은 마치 마라톤 선수가 출발선에서 출발을 기다린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한편으로 거룩한 부담감이 밀려옵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으로 보내드린 후에 자기 스스로 사역해 나가야 했기 때문에 아마 제자들도 같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변함없이 그대로 지속하길 기도합니다. 의사이던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그리스도에 대해 자세히 소개합니다. 이 서신은 장문이기 때문에, 전편은 누가복음으로, 후편은 사도행전으로 둘로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전편은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복음을 위한 사역을 기록했고, 후편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부탁했던 사역을 어떻게 성취되어 가는지를 소개합니다. 제자들이 복음 사역하는데 홀로두지 않고, 성령님을 보내셔서 함께 사역하십니다. 이제부터 우리도 선배들의 발자취를 따라서 그들이 사역했던 길들을 살펴보며 따라가 보겠습니다.

 

본문은 사도행전 전체 중에 서론입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사명을 완수해 나가는 과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예수님 대신 오실 성령을 기다리고, 성령과 함께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후에 구름 타시고 승천하십니다. 특별히 8절은 사도행전의 주제를 다룬 핵심으로, 기독교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해서 유대와 사마리아와 로마까지 전파되는 과정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대한 서론(1-2)

사도행전은 예수님을 믿는 무리들이 복음을 전파했던 행적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스스로 움직인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움직이셨고, 제자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움직였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고도 부릅니다. 성령께서 움직이신 역사의 현장으로 출발하겠습니다.

 

1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2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1-2)

 

본문은 누가복음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누가가 누가복음과 같이 ‘데오빌로(θεοψιλε)’에게 바친 작품입니다. 이러한 형태는 당시 문학적인 관행을 따라 자신의 작품을 헌정하는 방식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누가가 기록한 사도행전은 당시 문학적인 저작물로서도 뒤지 않는 훌륭한 작품이라고 호평을 받아왔습니다.

누가복음에서도 거론한 적이 있지만, ‘데오빌로(θεοψιλε)’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역사적으로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 논란이 많았지만, 전통적으로 귀족으로 실존한 인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당시 유명한 사람에게 자신의 책을 헌정하는 관례가 있었음을 감안하고, 성경적으로 누가복음에서 ‘데오빌로’에게 ‘각하’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누가복음 1:4). 때문에 실제 인물로 보는 데는 어려움이 없습니다.

사도행전 도입인 이 단락은 누가복음의 마지막 부분 내용(누가복음 24:44-53)과 겹칩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성장과 사역과 부활 그리고 승천까지 기록했고, 이제 사도행전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승천 이후 사도들과 성도들에게 위탁한 복음 사역이 진행되는 과정을 소개합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사역들, 탄생, 사역, 죽음 그리고 부활 등을 ‘일(사건)’으로 표현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무고히 수난 당하신 사실들을, 당시 제자들은 ‘확실한 많은 증거’들이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유무에 대해 변론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된 가르침은 부활 이후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생전 지상 사역으로부터 시작한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입니다(누가복음 4:43). 그러므로 초대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 나라, 즉 구원 사역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증인들에 의해 기록된 구체적인 역사적 인물과 사건을 토대로 형성된 신앙공동체입니다. 말씀에 기초하지 않고, 경험이나 사상에 기초한 신앙은 굳게 설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행하심과 가르치심을 따르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역(3-5)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오셨다는 소식입니다. 세상의 주인은 세상의 권력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소식이, 예수님께서 살아 계서서 지금도 왕으로 다스린다는 소식이, 바로, ‘기쁜소식’인 ‘복음(福音)’입니다.

 

3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4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3-5)

누가는 누가복음에서는 고난 받으신 예수님을 기록한 후, 그리고 사도행전에서는 영광의 몸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내용을 소개합니다.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부활을 분명히 나타내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무덤에 장사지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무덤을 박차고 부활하셨습니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사건을 ‘고난’이라고 표현합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지만, 이 사실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 모두 믿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불신앙의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부활과 하나님 나라에 대해 설명하셨습니다. 누가는 사도행전을 통해 먼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셨던 사역들을 소개합니다.

 

⑴ 부활하신 예수님(3)

사도행전의 기록자인 누가는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부활 후 승천하시기 전까지 40일 동안 지상의 마지막 사역을 설명합니다.

① 부활에 대한 소개

사람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나타나면 모든 사람을 믿게 하기에 가장 좋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조용하게 제자들에게만 나타나셔서, 이것이 단순한 환생이 아니라 부활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 가시 전에 약속하신 것도 ‘부활’이지 ‘환생’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영으로만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몸으로 살아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많은 증거를 보여주셨습니다.

②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개

예수님께서 하신 또 다른 일은 장차 이 세상에 세워질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왕국’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완성시키기 위해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께서 통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왕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항상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멸망한 후, 눈에 보이는 왕으로서 대리 통치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선지자들은 그 왕을 하나님께서 보내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왕을 가리켜 ‘메시아’ 또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인 ‘그리스도’라고 부릅니다. 유대인들이라면 모두 그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가져 오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자 그 메시아 운동이 실패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생각지도 못했던 새로운 방식의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도래케 하셨고, 그 나라를 왕으로 다스리시며, 그 나라의 권능을 펼쳐 보이셨습니다.

 

⑵ 약속하신 것을 기다림(4)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신 후에, 제자들에게 즉시 나가서 전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전하기 전에 그들이 들어야할 명령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모아놓으시고 분부하셨습니다. 그것은 두 가지인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 것’과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릴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대신하여 보혜사 성령께서 오셔서 제자들과 함께 하실 때,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온전히 깨닫고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아버지의 약속’은 구약에서 이사야 32장 15절과 요엘 2장 28-32절에서 예언으로 약속되었습니다.

15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숲으로 여기게 되리라(이사야 32:15)

28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29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30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31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32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요엘 2:28-32)

특히 위에서 언급된 요엘서는 베드로가 설교할 때, 직접 언급되어 인용됩니다(사도행전 2:17-21).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사역을 제자들과 함께 하시면서, 이미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 것’과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릴 것’을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49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누가복음 24:49)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기다리고 있어야 할 일은, 당시에 상황에 따라 진행된 것이 아닙니다. 구약 시대부터 준비하신 약속이었습니다. 이러한 기다림의 순종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기 위한 다음 단계를 준비하셨습니다. 선생님의 죽음을 통해 절망과 실망 속에 빠진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목숨을 담보하고 있었습니다. 매우 두려웠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따라다닐 때, 제자들은 스스로 무엇인가를 성취하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자신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자신들에게 패배와 절망을 안겨준 자리이지만, 인간의 실패와 불순종과 한계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실패와 불순종 그리고 자신의 한계를 응시할 때, 성령께서는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⑶ 성령 세례를 기다림(5)

두려움 속에서도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 기다려야할 이유는, 세례 요한의 말(누가복음 3:16)을 인용하여 ‘아버지의 약속’은 ‘성령 세례’임을 깨닫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세례’는 물속에 담근다거나 물을 쏟아 붓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례는 정결을 위한 수단입니다. 그런데 세례가 성령과 연관되어 나올 때는 성령이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것을 말하며, 죄 사함과 연결됩니다(사도행전 2:38). ‘성령 세례’는 성경 전체에 두 번 등장합니다(사도행전 1:5; 11:16). 모두 세례 요한의 예언과 연관에 ‘성령을 받는다’, ‘성령이 임한다’, ‘성령의 부으심으로 받는다’ 등으로 표현합니다.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공생애 기간 동안 하나님 나라에 대해 배웠습니다. 하지만 영적인 지식으로 그들을 하나님 나라의 증인으로 만들어 주지 못했습니다. 성령이 임하셔서 권능을 주실 때, 온전히 담대하게 땅끝까지 증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성령 임재의 신앙(6-11)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서 성령이 임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기다림을 통해 장차 일어날 일이 무엇입니까? 성도들에게 성령이 임재하시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⑴ 제자들의 질문(6-8)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충분하게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의 질문을 들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성령이 임하면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나라가 임할 표적으로, 곧 이스라엘이 정치적으로 로마에서 해방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질문으로 새로운 장면을 시작합니다. 사도행전의 기록자인 누가는 제자들의 질문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6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7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8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6-8)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임하는 것은 무너진 ‘다윗 왕국’이 팔레스틴 지역에 새로운 유대인들만의 나라가 다시 세우진 것이라고 오해했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① 유대교적인 편협한 사상(6)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하나님 나라에 대해 줄곧 말씀하십니다(3).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라고 묻습니다. 이것을 직역하면, ‘주여, 지금이 나라를 이스라엘에게 회복하실 때입니까?’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정리해 보면, 그들은 예수님께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에 대해 물었습니다.

아직까지 제자들은 터무니없게도 유대교적 종말론의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 나라 성취를 민족주의적으로 이스라엘에게만 국한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아로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해방시킬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의 기준으로 제자들의 생각을 심판할 수 없습니다. 당시 유대인으로서는 당연한 생각이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과 관련해서 일어날 징조들에 대해 예언하셨습니다. 그들은 그 때 일어나는 현상으로 착각했던 것입니다.

15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숲으로 여기게 되리라 16그 때에 정의가 광야에 거하며 공의가 아름다운 밭에 거하리니 17공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18내 백성이 화평한 집과 안전한 거처와 조용히 쉬는 곳에 있으려니와 19그 숲은 우박에 상하고 성읍은 파괴되리라 20모든 물 가에 씨를 뿌리고 소와 나귀를 그리로 모는 너희는 복이 있느니라(이사야 32:15-20)

② 새로운 기독교적 종말론(7-8)

예수님께서는 유대주의적인 편협된 생각을 하는 제자들에게 ‘하나님나라’는 어떤 것인지를 말씀하셨습니다. 구체적으로 기록하지 않았지만, 그 제자들에게 장차 임할 성령의 역사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편협한 유대교적 종말론을 넘어 온 민족을 품는 새로운 기독교적 종말론으로 확장시켰을 것입니다(7-8).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두 가지를 강조하셨습니다. 첫째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시기는 아무도 모르고 예수님까지도 모릅니다. 다만 전적으로 하나님 아버지만 달려있다는 사실(참고 마가복음 13:32)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성취되는 시기를 말할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 나라의 성취는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을 통해 성취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역할이 강조된 것입니다. 제자들의 사역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 나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장 8절은 사도행전의 핵심 구절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8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8)

제자들의 사역은 이 말씀으로 집약됩니다. 앞으로 전개될 사도행전의 모든 사역들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은 후에,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해야 합니다. 누가는 성령이 임하면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예루살렘(사도행전 2:42-8:3)에서 복음을 전하고, 원수 같이 지내고 있는 유대(8:4-11:18)와 사마리아에게 평화의 복음을 전하고, 그리고 더 나가서 저주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이방인들이 거주하는 땅 끝(11:19-28:31)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팔레스틴의 경계를 넘고, 유대인의 경계를 넘어서 땅 끝까지 임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은 ‘아버지의 약속’(4)과 ‘성령 세례’(5)로 지칭하면서, 사도행전 2장에서 펼쳐질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예고합니다. 초대교회는 성령강림으로부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시면, 두 가지 현상이 일어날 것입니다. 첫째, ‘능력을 받고’, 둘째, 주님의 ‘증인’이 됩니다. 이 두 가지 현상은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초대교회 제자들에게서 일어났습니다.

 

⑵ 하나님의 관점(9-11)

성령이 임하시면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이 하나님적인 생각으로 변화됩니다. 제자들의 관심은 편협하게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이었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땅 끝까지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세상에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예루살렘 중심의 구심적 운동만 기대했던 제자들은 이제 성령을 받고 전 세계로 펴져 나가게 되었습니다.

11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10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11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9-11)

다른 복음서의 저자와의 달리 오직 누가만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에 대해 소개합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부활을 단순하게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사건으로만 이해하지 않고, 하나님 우편으로 승귀한 사건으로 보았습니다(사도행전 2:33-35).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을 마치시고 제자들이 본 가운데 ‘감람원’에서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승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본 그대로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재림하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이 다 알 수 있도록 재림하실 것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하늘만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성령을 의지하여 맡겨진 일을 따라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에 사로잡힌 자들은 하늘을 쳐다보는 자가 아니요, 하늘의 시각으로 온 땅을 쳐다보고 모든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발이 되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이 세상에서 충실한 모습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진실하게 기다리는 태도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라는 믿음은 역경을 이겨 내는 원동력입니다. 성령 충만해지면 소망을 품고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고난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모이기에 힘쓰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여기 이스라엘의 회복을 꿈꾸며 모인 사람들은, 지독히 많은 고난을 받은 민족이기에 그들에게 과연 소망이 있을지 의심이 들 정도입니다. 하지만 성령 충만으로 새로운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성령 충만하면 자기 일도 감당하지 못하던 사람들이 힘을 입습니다. 그리고 땅 끝까지 가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 수 있습니다. 땅 끝은 아직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미전도지를 의미합니다. 마지막 때에는 증인의 삶을 살지 못하면,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 부끄러운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교의 각오로 증인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제자들이나 사도들은 복음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존재합니다. 증인은 탄생한 것이 아니라 만들어집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이 성령으로 거듭나면, 자기를 부인하고 삶의 관점이 변합니다. 제자들은 예루살렘 중심의 구심운동(이사야 2:2-4)만 기대했지만, 이제 성령 임재를 체험하고 계급과 혈통과 영토를 넘어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 원심 운동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자기중심적으로만 살던 사람은 자아가 죽고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하나님 나라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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