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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08-04)


에디오피아 내시를 전도한 빌립

사도행전 8장 26-40절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복음은 생명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항상 성장해 나갑니다. 이제 복음은 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어 아프리카 대륙을 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빌립 집사를 통해 복음을 위해 수고할 사람의 발걸음보다 앞서 걷고 있습니다. 복음 전도자들 혼자가 아닙니다. 빌립의 사역은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주의 사자로부터 빌립은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명령을 따라 광야로 간 빌립은 길에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는 에디오피아 내시를 만남입니다. 이사야서의 내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내시는 빌립에게 그 말씀의 의미를 묻습니다.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은 빌립은 그에게 예수에 관한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풉니다. 이 모든 과정은 하나님의 섬세한 인도와 섭리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길에서 내시를 만남(26-28)

목회자가 수많은 성도들이 있는 규모 있는 교회를 사임하고 성도들이 몇 명 있는 작은 교회로 옮긴다면, 주변 사람들이 그분을 이상하게 바라볼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신 곳이라면 이미 하나님께서 예비해 두신 많은 영혼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습니다. 물속에 빠져 허덕인 것처럼 구원해 달라고 아우성칠 것입니다. 무슨 말씀을 전해도 스펀지처럼 말씀을 사모하며 받을 영혼이 있을 것입니다.

26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27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28돌아가는데 수레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26-28)

복음 전도의 출발은 순종이고 간절함입니다. 복음을 전하라는 말에 상대방이 들을 건인지 제는 성도가 아니라 무조건 순종하는 종이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니면 절대 채울 수 없는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전도자의 마음에 많은 영혼보다 한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⑴ 새로운 지역으로 떠남(26)

빌립 집사는 사마리아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큰 부흥을 경험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많은 기적들도 나타났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나가고 병든 자가 낫게 되는 놀라운 표적들이 나타났습니다. 조금만 더 사역하면 사마리아 성에 더 큰 복음의 부흥이 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성공적인 사마리아의 사역하던 빌립 집사에게 성령께서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빌립은 아직도 사마리아에도 할 일이 많았습니다. 교회를 세우고, 일꾼을 양육해서 든든한 교회를 세우려면 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도 성령께서는 사역지를 내려놓고 광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광야는 말 그대로 황폐한 땅입니다. 사람이 찾아오지 않는 땅입니다. 빌립은 성령의 말씀에 의지하여 성공적인 사역 현장을 내려놓고 떠납니다.

⑵ 에디오피아 내시를 만남(27-28)

빌립 집사는 말씀에 순종하여 가사로 내려가는 광야에서 수레를 타고 가는 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는 이방인이었으며 내시였습니다. 에디오피아 간다게 여왕의 국고를 맡은 고위 관리를 만나게 됩니다. 그는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이라고 소개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기는 유대교 개종자(proselyte) 혹은 에디오피아 지역에서 태어난 유대인으로 추정됩니다. 국가의 중요한 직책을 받고 있었지만, 유대 공식적인 절기인 유월절을 참여할 정도로, 하나님께 예배 드리고자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집고 넘어가야할 것은 모세오경에서는 내시는 하나님의 성전을 출입할 수 없었습니다(신명기 23:1). ‘내시’로 일반적으로 거세한 고자를 가리킵니다. 그 내시는 이사야 선지자 이사야 56:3-8을 읽을 신실한 유대인입니다. 그러나 누가는 구약에 익숙한 독자들로 하여금 이사야 56:3-8의 성취로 읽도록 하려고, 이 단어를 의도적으로 기록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어쨌든 이 에디오피아 내시는 요한복음 12:20에 나오는 헬라인들처럼 이스라엘의 절기 기간에 예루살렘을 방문해 예배를 드린 후 귀국하는 길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이 에디오피아 고관으로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에디오피아 내시는 하나님을 열심히 사랑하고 예루살렘 예배에 참여하는데도,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갈 수 없었습니다. 항상 허전한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을 성경을 가르쳐 준 사람도 없고, 성전에서도 넘어서 성전의 중심으로 갈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가 얼마나 열정 있고 독실한 믿음의 사람이었는지는, 돌아가는 길에 수레에 탄 채로 소리 내어 성경을 잃으면서 가는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빌립이 개인적으로 찾아다녀도 만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때 마침 성령께서 립빏 집사와 만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것도 왕궁이나 성전이 아닌 광야에서 말입니다. 그는 수레에서 말씀을 읽고 있었습니다. 이 소리가 빌립에게 들렸습니다. 성령께서 빌립에게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광야에서 내시를 만난 빌립(29-35)

신실한 성도들이라면 진리를 추구하는 마음, 진리를 향해 열린 마음, 진리를 수용하는 마음이 항상 마음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말씀이 마음을 만지시고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을 보는 관점을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빌립에게 복음을 들은 에디오피아 내시는 복음을 수용하고 자신에게 세례를 줄 것을 요구합니다.

29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30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냐 31대답하되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하고 빌립을 청하여 수레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32읽는 성경 구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33그가 굴욕을 당했을 때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말하리요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34그 내시가 빌립에게 대답하여 말하되 청컨대 내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냐 자기를 가리킴이냐 타인을 가리킴이냐 35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29-35)

빌립 집사는 에디오피아 내시를 만나게 되는 과정의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섬세한 손길을 봅니다. 그 하나님의 손길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⑴ 내시를 만난 빌립(29)

에디오피아 내시는 내려가는 동안 열심히 수레에서 두루마리에 적힌 말씀을 열심히 읽고 있었습니다. 성령께서는 빌립에게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나아가라고 명했습니다. 빌립 집사는 그곳에서 수레를 발견했을 때, 다시 한 번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았습니다. 여기서는 ‘주의 사자’대신 ‘성령’이란 단어가 등장합니다. 내시가 타고 가던 수레는 황소가 끄는 수레라 빌립이 따라잡기에는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고대 시대의 관습대로 내시는 성경을 소리 내어 읽고 있었습니다. 성령께서 빌립 집사에 수레로 가까이 나가라고 하셨습니다. 빌립 집사는 수레 가까이 다가가니 성경을 읽는 소리가 크게 들렸습니다.

⑵ 내시와 빌립의 대화(30-35)

빌립은 에디오피아 내시가 읽고 있는 성경의 내용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내시에게 철통 경호를 뚫고 나가는 것은 어려웠을 것입니다. 신분상으로 감히 근접할 수 없었지만, 성령께서는 에디오티아 내시를 변화시키고 싶었던 것입니다. 빌립은 담대히 나갔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관심사인 그가 읽고 있던 성경에 대해 ‘읽는 것을 깨닫느냐?’라고 물었습니다. 빌립의 질문은 대화를 이어가려는 유도 질문입니다. 이에 내시는 답답한 마음을 담아서 주저 없이 반응합니다. 참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라고 반문합니다.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말한 이유는 아마도 빌립이 입은 옷차림새나 그의 말투에서 그가 유대인인 것을 감지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으리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내시는 빌립에게 수레에 올라 같이 앉으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빌립은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예수가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에게 하셨던 것처럼(누가복음 24:25-27, 44-47) 구약의 내용을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관점에서 설명해줄 기회를 얻게 됩니다. 에디오피아 내시가 읽고 있던 본문은 이사야서였습니다. 그가 읽고 있던 구약성경 본문이 바로 이사야 53:7-8이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7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8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이사야 53:7-8)

이 이사야 53장 7-8절은 고난 받는 여호와의 종에 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시에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속적인 죽음을 당하면서 성취된 말씀을 읽게 하셨던 것입니다. 선지자 이사야 자신도 이 본문의 말씀을 기록할 때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이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했을 것입니다(베드로전서 1:11). 그도 그럴 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친히 이 예언을 성취하기 이전에는 그 누구도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을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에디오피아 내시가 이 말씀을 읽고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이 이사야의 예언을 연상시킬 만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가복음 10:45) 이사야의 고난 받는 종과 유대인이 고대하던 메시아를 동일 인물로 본 전례를 기독교 이전의 유대교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예수의 수난 예고를 가장 잘 설명해줄 수 있는 말씀은 다름 아닌 이 이사야의 고난 받는 종 본문(이사야 52:13-53:12)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 두 인물을 자신의 인격과 사역으로 성취하신 분입니다. 에디오피아 내시는 ‘선지자 이사야가 말하는 사람이 누구냐? 자기 자신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이냐?’라고 묻습니다. 빌립이 이 성경으로 시작하여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전했다라고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지만, 사실 빌립은 예수님에 관해 더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을 것입니다. 내시가 물이 있는 곳에서 수레를 멈추고 세례를 받으려 한 것을 보아도 빌립은 복음에 대해 전반적으로 소개한 것으로 보입니다.

 

각자 제 길을 감(36-40)

준비된 지도자는 이 시대의 필요와 도전을 예리하게 파악해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말씀으로 전하고,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고 건강한 공동체의 지체로 세워가는 사역자, 복음의 증인으로 자신을 준비시켜야 합니다. 빌립은 간다게의 영적 갈증을 간파하고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36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그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 37(없음) 38이에 명하여 수레를 멈추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베풀고 39둘이 물에서 올라올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간지라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40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36-40)

내시는 길을 가다가 물이 있는 곳을 발견하고 나서 빌립에게 세례를 받을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 빌립은 수레를 멈추고 물로 내려가서 내시에게 세례를 베풉니다. 그런데 36절과 37절 사이에 초기 필사자(주후 2세기경)가 추가한 것으로 추정되는 내용이 서방사본에서 발견됩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빌립이 이르되 네가 마음을 온전히 하여 믿으면 가하니라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줄 믿노라.’ 사본학자들은 누가의 기록이 에디오피아 내시의 진정한 믿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하지 못하다고 생각한 어떤 초기 필사자가 여기에 이 내용을 추가한 것이라 판단했습니다(개역개정은 ‘없음’으로 처리). 헬라어 원문은 두 사람이 물에서 올라올 때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간지라’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이 문장은 이 단락의 이야기를 급작스럽게 마무리한다는 인상을 줍니다. 여기서도 사본들 간의 이문이 존재합니다. 다른 사본에 보면 그들이 물에서 올라올 때 성령이 내시위에 임했는데 주의 사자가 빌립을 잡아챘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사본학자들은 필사자들의 실수로 성령(프뉴마 하기오스)을 가리키는 단어 중 하기오스부터 주의 사자(앙겔로스 퀴리우)의 ‘앙겔로스’까지의 내용이 필사자의 실수로 탈락되었을 것이라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 긴 문장이 원본의 내용을 반영한다면, 내시가 세례 받은 직후 성령이 그에게 내려왔다는 말이 되어 본 절이 자연스럽게 읽힙니다. 사본학적으로는 현재의 원문이 우세하지만, 긴 본문이 원본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이제 빌립을 통해 인종과 지역과 역사와 문화의 경계를 넘어 전해지고 있습니다. 오늘도 수많은 사역자들이 희생을 감수하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는 선교사’뿐만 아니라 ‘보내는 선교사’도 중요합니다. 선교사들의 구체적인 형편을 살피고, 함께 기도하며, 물질로 섬겨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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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08-03)


사마리아에도 임한 성령

사도행전 8장 14-25절


하나님께서 사역을 맡기실 때, 먼저 달란트를 주시고 사용하심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역보다 변화를 더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쓰시려는 사람은 참 생각이나, 참 공의의 길을 갈 때도 혹독한 시련을 겪지만, 성숙하게 변화된 사람만이 어디서도 쓰임새가 있습니다. 가정이나 직장, 감옥이나 심지어는 전쟁터도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들이 있어야할 자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가장 필요로 하는 모순과 악이 극에 달하는 지옥 같은 곳이며, 거기서 그의 존재는 더욱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성숙한 이는 그런 곳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닮는 변화, 그것은 우리의 목적이고 인간 최고의 행복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이 복음을 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예루살렘 교회는 베드로와 요한을 ‘진상 조사단’으로 파견합니다. 두 사도가 사마리아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고 안수했더니, 그들이 성령을 받았습니다. 두 사도가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하게 하는 것을 본 시몬은 사도들에게 돈을 주며 자기도 다른 사람에게 성령의 능력을 베풀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합니다. 베드로는 그의 잘못된 동기와 생각을 보고 강한 어조로 경고의 말을 선포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사마리아 방문(14-17)

예수님께서는 산상보훈에서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할 일은 평화를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성령을 받은 순간부터 이기주의를 버리고 이타적으로 인종, 나라, 사상을 초월해서 하나됨을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14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15그들이 내려가서 그들을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16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더라 17이에 두 사도가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14-17)

예루살렘 박해를 통해 빌립 집사는 사마리아로 내려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믿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다는 사마리아의 이야기가 마침내 예루살렘에 있는 사실이 사도들에게 들어갑니다. 그들은 이 소식을 접하면서, 예수님께서 하셨던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1:8)고 하셨던 약속이 기억났을 것입니다. 이제 사마리아에도 복음의 문이 열리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사마리아로 진상 조사단을 파견합니다.

⑴ 베드로와 요한을 보냄(14)

당시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지역에 복음이 선포된 일은 매우 특별한 일이었습니다. 사도들은 회의를 소집하고, 베드로와 요한을 조사단으로 뽑아서 파견해서 확인하도록 합니다. 사마리아에 대한 제자들의 시각은 누가복음 9장 54절을 참고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방에서 사역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고 할 때, 사마리아 땅을 통과해서 이동 경로를 선택하셨을 때, 당시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의 일행이 사마리아를 통과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여기에 분노한 두 명의 제자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 ‘하늘의 불을 내려 사마리아 성을 불태워 버리자’고 제안 합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께 꾸중을 듣고는 예수님의 일행은 사마리아가 아닌 다른 경로를 이용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이처럼 사마리아를 불살라 버리자고 했던 제자들이 이제 조사단을 꾸며 그곳을 조사하려 갑니다. 누가는 사도들이 두 사도를 어떤 의도로 보냈는지 밝히지 않습니다. 다만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사마리아인들이 복음을 받았다는 소식을 사도들이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아직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이 유대인들만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수백 년 동안 내려온 사상이 하루아침에 바뀐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이 일을 신중하게 처리하기 위해 두 명으로 구성된 진상 조사단을 파견합니다. 모든 교회들은 사도들의 터 위에 세워져야 했기에, 사도들은 이것이 성령의 역사인지 아닌지 점검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가서 보고는 이것이 성령께서 하신 역사라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야 했습니다. 예루살렘에만 머물렀던 복음이, 이제 이방지역으로 여겨졌던 사마리아 지역에도 퍼졌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다른 형제들도 그 동안 원수로 여기고 부정한 자로 여겼던 사마리아 사람들을 한 형제로 맞아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⑵ 사마리아인들을 위한 기도(15-16)

누가의 말에 의하면, 사마리아로 내려간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위하여 성령 받기를 위해 간절히 기도도 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미 빌립의 전도를 통해 복음은 믿었습니다. 빌립에게 물세례를 받았지만, 아직 성령은 받지는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들을 위해 두 사도들이 성령을 받기 위해 안수 기도하니깐 놀랍게 성령이 그들에게도 임했습니다. ‘설마’하는 마음으로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기도는 해주었지만, 매우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사마리아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은 사람들인데, 이렇게 하나님의 성령이 임해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 것은 매우 대단한 사건입니다. 사도들은 이제 성령을 받은 놀라운 현장에 증인들이 되기도 합니다. 누가복음에서 야고보와 요한이 제자들의 부끄러운 수준을 들어냈던 증인이었다면, 본문의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의 역사를 살아내고 있는 사도들의 모습을 확인시킨 증인들의 모습입니다. 처음에는 다른 유대인처럼 사마리아와 유대를 분리하는 사도들이었지만, 나중에는 원수처럼 여겼던 사람들까지도 교회의 한 지체, 한 몸이 되게 하는 연결자들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며 성령의 역사입니다.

⑶ 사마리아인들에게도 성령 임재(17)

예루살렘에서 회심한 사람들은 모두 성령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에는 회심한 것까지만 성령께서 역사하시고 그것을 가시적으로 보여줄 만한 성령의 역사가 없었습니다. 이제 두 사도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시고 계십니다. 만약 빌립이 복음을 전할 때에 성령께서 임하셨다면, 그는 사도가 아니기 때문에, 이 역사를 성령의 역사인지 악령의 역사인지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후에, 사도들의 안수기도를 통해서 성령이 임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형상은 사마리아를 넘어서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될 때도 나타납니다. 이방인의 회심에도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의 대표인 베드로를 통해 고넬료의 가정에 성령이 임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사도행전 10:1-48). 초대교회에서 모두들 부정한 이방인들을 한 형제로 인정해야할 것인지를 격론이 일어날 때, 베드로가 일어나서 자신의 경험을 통해 결론 짓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사도행전 15:). 성령이 아니면 일어날 수 없는 통일에 역사, 하나됨의 역사가 사마리아에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사도들의 기도로 말미암아 사마리아 인들에게 성령이 임재 하는 순간이 사마리아 전도의 결정적인 순간입니다. 성령이 임재함으로 사마리아의 회심자들은 마지막 의심마저 버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에 완전히 헌신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모든 것이 다 잘 되어 가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미 사도 베드로를 통해 ‘너희는 너희의 죄 사함을 위하여 회개하고 각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 그렇게 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게 될 것이다’라(사도행전 2:38)고 말한바 있습니다. 이 선언은 초대교회의 전형적인 회개와 결단의 메시지를 함축적으로 소개됩니다. 초대교회의 사상을 규범적으로 제시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이야기는 이와 상반되는 듯한 모습을 보줍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입니까? 왜 사마리아인들은 복음을 믿고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을 받지 않았던 것입니까? 이 질문에 관한 답은 16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은 사마리아인들의 성령 사건을 설명하기 위해 누가는 15절과 17절 사이에 ‘설명’을 삽입합니다. 16절을 헬라어 원문에 가깝게 번역하면 ‘왜냐하면 그들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을 뿐, 아직 그들 중 아무에게도 (성령이)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가는 무엇을 설명하기 위해 사도행전 2:38과 상반되는 구절을 이곳에 추가한 것입니까? 이 구절은 실제적으로 성도들이 예수를 영접하고 물세례를 받았다 하더라도 재차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증거본문으로 사용되곤 합니다. 특히 오순절 신학계통의 신학자들에 의해 증거본문으로 사용됩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 구절을 통해 물세례와 성령 세례가 항상 동시에 일어나지 않는다는 증거를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 해석이 합리적인 것입니까? 이 구절을 어떤 교리를 지지하는 증거본문으로 사용하기 전에, 역사적인 관점을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즉, 왜 이 사건에서 사마리아인들의 회심 및 물세례와 동시에 성령이 내리지 않았는지를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누가는 이 사건을 기록하면서 소위 사마리아 신자들에게 내린 ‘성령 세례’가 두 사도가 올 때까지 지연된 사실을 정상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았음에 틀림없습니다.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라는 누가의 강조적인 표현 안에는 이미 사도행전 2장 38절에 제시된 ‘성령 세례’에 관한 규범적 선언과 대치되는 인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는 신자의 회심과 함께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과 성령을 받는 것을 누가가 두 개의 서로 분리된 사건으로 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대변해줍니다. 당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오랜 반목과 질시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포로로 잡혀간 이후 앗수르의 정책에 의해 주변 민족과 혼혈 관계를 맺으며 순수한 민족적 혈통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또한 사마리아인들은 주전 400년경 그리심 산에 모여 자신들만을 위한 성전을 세웠고, 모세오경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했습니다. 구약성경 중에서 모세오경만을 경전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마리아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보수적인 예루살렘 교회에 신학적 걸림돌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그 장애물을 제거해주신 것입니다. 또한 중요한 사실은, 베드로가 나중에 고벨료 사건에서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임하심을 2장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과 동일한 사건으로 간주했다는 점입니다(사도행전 11:17). 이런 사실을 감안하면, 누가는 예루살렘의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과 사마리아의 성령 사건과 고넬료의 이방인 성령 사건을 종말론적 사건으로 묘사하고 있는 셈입니다. 말세에 만인에게 주기로 하신 약속이 이제 선포된 복음 안에서 성취되고 있는 것입니다. 요컨대, 누가는 사도행전 2:38을 초대교회의 회심과 성령에 관한 규범적 선언으로 제시하고, 유대인, 사마리아인, 이방인에게 각각 내리신 성령강림 이야기를 서술적인 진술로 묘사합니다.

 

베드로와 마술사 시몬(18-25)

사단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높아질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잘 될 때, 바로 그 순간이 사단이 역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사단은 기회를 타서 흔들어버립니다. 겸손하지 않는 사람들은 모든 것이 잘되면, 스스로 능력 있는 것처럼 교만하고, 사단의 유혹에 쉽게 넘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항상 겸비한 자를 찾아서 그의 일군으로 사용하십니다.

18시몬이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19이르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20베드로가 이르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21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된 것도 없느니라 22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23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여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 24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위하여 주께 기도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내게 임하지 않게 하소서 하니라 25두 사도가 주의 말씀을 증언하여 말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갈새 사마리아인의 여러 마을에서 복음을 전파하니라(18-25)

누가는 앞서 성령이 오심으로써 사마리아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긍정적인 이야기를 서술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 단락에서는 앞 단락의 내용을 발단으로 하여 일어나게 된 부정적인 사건 하나를 소개합니다.

⑴ 육적인 생각으로 가득한 시몬(18-19)

사도들이 안수하여 기도하자 성령이 사람들에게 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마술사였던 시몬은 종교로 큰 장사를 했던 옛날 생각이 났습니다. 멋진 사업 아이템을 발견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사도들의 가진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 빌립이 하고 있는 장사보다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빌립은 성령의 능력을 받게 하는 능력이 없으니, 자기가 그것을 가지면 빌립에게 빼앗겼던 손님을 찾아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시몬은 사도들의 안수함을 보고 돈을 주면서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라고 말합니다. 시몬은 회심했지만, 아직까지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완전히 안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혼합주의자가 되었습니다. 기독교를 하나의 종교로 둔갑시켰습니다. 그는 성령은 인격적인 하나님이시고, 사람들 마음대로 소유하고 나누어줄 수 있는 에너지가 아니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 성령을 부리는 능력이 사도들에게 있고, 그 능력은 자신이 돈만 주면 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자신은 빌립보다 더 튀어난 종교 전문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아볼로를 보고 경쟁심이 일어났듯이, 시몬도 빌립을 보면서 존경스러웠지만, 경쟁심이 불일 듯 일어났던 것입니다. 사단이 이 마음을 놓치지 않습니다. 오늘날 ‘성직매매(聖職賣買)’를 영어로 ‘사이모니(Simony)’라고 부릅니다. 본문에서 유래된 단어입니다. 시몬은 사도들의 기도와 능력을 오해했습니다. 사도들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였습니다. 사도들은 십자가를 자랑하고 십자가의 능력으로 자신을 부정하는 능력이었습니다. 자신은 죽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서 역사하시게 하는 능력이었습니다. 하지만 시몬은 거듭나지 못한 육적 생각으로 그 사건에서 대박 공식만 보았습니다.

⑵ 베드로의 책망(20-23)

사도 베드로는 이런 시몬에게 단호하게 경고합니다. 순간적인 실수가 아니라 오랫동안 품어온 경쟁심과 시기심이 들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시몬에게 ‘너는 악독이 가득하여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성령의 충만한 사람의 모습과 다릅니다. 그는 빌립을 통해 배우기보다는 경쟁심만 키웠던 것입니다. 빌립의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에 대해 순종하는 법을 배우지 않았습니다. 이대로 라면, 이 복음과는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 되고, 돈과 함께 망하게 될 것입니다. 이 책망은 물질만능주의 시대의 신인 ‘맘몬(Manmon)신’에게 사로잡힌 우리 시대를 향한 경고처럼 들립니다. 성령을 살 수 있기를, 그리하여 자신도 성령의 능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합니다. 시몬은 단순히 자신도 성령 받기를 원한 것이 아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엇나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성령을 줄 수 있는 강력한 능력을 갖게 되길 원했습니다. 이에 20절에 기록된 베드로의 대답은 거의 저주에 가까운 강력한 경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돈으로 하나님의 선물을 사려고 하는 생각은 하나님과 성령을 심각하게 오해한 결과다. 따라서 베드로는 그에게 회개를 촉구합니다(22). 5장의 아나니아의 경우와는 달리 시몬에게는 회개의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시몬은 베드로의 경고를 듣고 베드로의 말이 자신에게 임하지 않게 해달라고 간청합니다. 이 본문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교리적인 차원에서 시몬이 '중생을 경험했느냐, 안 했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그릇된 동기와 방법으로 성령의 능력을 소유하려는 욕망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그리고 아무리 심각한 죄를 범한 자에게도 용서의 문이 항상 열려 있다는 교훈에 본문의 강조점이 있습니다.

⑶ 시몬의 대답과 사역 정리(24-25)

사도 베드로의 책망에 마술사 시몬은 회개했겠습니까? 그는 ‘나를 위하여 주께 기도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내게 임하지 않게 하소서’라고 대답합니다. 회개인지 알 수 없으나, 자신이 기도해도 되는데, 사도들에게 기도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아직도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사람을 의지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도 그렇게 인정받는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노릇을 대신하려고 할 것입니다. 시몬은 직적 회개하고 직접 용서를 구하는 법을 몰랐습니다. 즉 이것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섬기는 법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사람인 사역자들에게 도움을 받지만, 거만해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들의 수고가 자신의 수고를 대신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사도들은 시몬에게 말씀으로 깨우치도록 가르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에 사마리아 여러 마을을 방문해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당신은 종교 기술자입니까? 진정한 믿음의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를 의지하며 살아갑니까? 아니면 사람의 힘이나 돈의 힘을 의지하여 살아갑니까?


성령의 역사는 교회를 세우기 위합니다. 은사와 능력을 주시는 것도 교회를 세우기 위합니다. 빌립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이방인처럼 취급되던 사마리아 지역에 복음이 증거 되었고, 놀라운 사역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그 말씀을 따라 순종함으로 사마리아 지역에 복음의 능력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교회를 위해 한 사람을 부르시고 삶을 인도하시며 진리를 가르치시고 사랑을 주시며 기쁨과 위로를 베푸십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은혜를 따라 아름다운 교회를 세워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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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08-02)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한 빌립 집사

사도행전 8장 4-13절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세상에 하나님의 제사장과 대사로 세우셨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의 대표로서 모든 삶에 하나님의 향기를 발하며 살아가도록 요구하십니다. 그 결과, 성도는 환경에 의해 영향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영향을 끼치는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외부환경에 따라 쉽게 들뜨며 낙심합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요동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성도들에게 기적을 일으키시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의 순교하고 난 뒤에 초대교회에는 말할 수 없는 큰 박해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그 핍박을 피하여 성도들은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그들은 흩어진 곳곳에서도 계속 복음을 전합니다.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빌립은 사마리아로 내려가 복음을 전하고 귀신을 쫓아내며 병든 자들을 치유합니다. 빌립이 전하는 복음을 들은 사마리아인들은 그 복음을 믿고 세례를 받으며, 영향력 있던 마술사 시몬도 빌립이 전한 복음을 믿고 빌립을 따라다니게 됩니다.

 

빌립의 사마리아 전도(4-8)

성령 충만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서로 모여 합력하라고 하십니다. 함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은 은혜를 받은 사람들끼리 받은 은혜를 나누고만 있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받은 은혜를 가지고 흩어지라고 하십니다. 세상으로 흩어져 받은 은혜를 증거 하라고 명하십니다.

4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5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6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7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8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4-8)

하나님께서는 핍박 받은 성도들을 가만히 두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나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길 원하셨습니다. 스데반 집사의 순교와 함께 촉발된 예루살렘 교회는 큰 박해의 광풍이 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도들은 큰 슬픔으로 스데반을 장사지냈습니다. 박해를 통해 몇몇 성도들만 사방 각지로 흩어졌습니다.

⑴ 사방에 흩어진 성도들(4)

각 지역으로 흩어진 성도들은 다니는 곳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빌립의 사마리아 전도 과정을 상세하게 다릅니다. ‘그 흩어진 사람들’(4)은 예루살렘 교회에 일어난 큰 박해로 인해 사방으로 흩어진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 새’로 시작합니다. 정든 집을 떠나야 했고, 가족이든 교회든 많은 성도들이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복음을 전했습니다. 성도들의 흩어짐은 패잔병들의 도망이 아니었습니다. 흩어진 사람들은 곳곳을 두루 다니며 그것에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의 흩어짐은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핍박을 피해 도망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사역지를 이동시킨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도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하지만 한 번도 복음이 전해지지 않는 곳에 전해질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당연히 말이 통하는 유대인들이 있는 곳으로 흩어졌을 것입니다.

⑵ 빌립 집사의 등장(5)

누가는 본 단락을 일곱 일꾼 중 한 사람인 빌립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유독 빌립만 다른 유대인 성도들과는 다른 행보를 보였습니다. 누가는 그에게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일곱 집사였던 빌립은 사마리아 땅으로 내려가서 복음을 전파합니다. 독특한 이유는 다른 성도들은 동족 유대인들에게만 전할 때, 짐승처럼 취급받던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향했던 것입니다. 그는 스데반처럼 헬라파 유대인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뽑았던 일곱 집사 중 한 명입니다. 그 역시 스데반처럼 집사로 뽑히기 전부터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주의 사자가 직접 그에게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8:26)고 들을 만큼 신령한 영적 소통 능력을 구비한 인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도들을 흩으신 것은 예삿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1:8)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도들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지만, 일반 성도들 중에서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증거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먼저 사도들이 사마리아에 증거 한다면 따라가겠지만, 흩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빌립은 탁월한 영적 감각과 소통 능력으로 이 때가 바로 사마리아에 들어갈 때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는 사도들까지 예루살렘만 머물고 사마리아에는 들어가지 않았는지 궁금할 것입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는 오랜 갈등이 남아 있었습니다. 사실 이 갈등의 뿌리는 가나안 정복 시절 유다가 다른 지파들과 분리되었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신명기 33:7). 포로 시절 이후 사마리아인들이 예루살렘 성전 재건축에 동참하기를 거부하고 그리심 산에 따로 성전을 건축하면서 이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집니다. 하지만 앗수르가 사마리아를 침공했을 때, 그리심 산에 세워진 성전을 완전히 파괴합니다. 그 이후 주전 63년 로마가 팔레스타인을 점령하면서 사마리아는 유대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되지만, 두 지역 간의 갈등은 신약성경과 요세푸스의 글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듯이 더 깊어집니다. 유대인들과 사마리아 사람들의 심각한 갈등 상황에서 빌립이 사마리아에 내려가 복음을 전했다는 사실은 매우 담대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복음에 대한 열정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방인들과 같이 취급했습니다. 자신들은 자격 없는 자들에게 주신 사랑을 받았지만, 그래서 성령께서 이 큰 장벽을 큰 박해라고 하는 방법으로 치신 것입니다. 빌립은 사마리아 성으로 내려갑니다. 박해 때문에 신자들이 흩어지는 것은 고통과 고난을 의미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리스도의 복음이 더 광범위하게 전해지는 도구가 된다는 점에서 유익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사용하신 방법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초대교회에서 복음이 예루살렘 밖으로, 곧 비유대인에게 전해지도록 하는 데 박해라는 도구를 사용하셨습니다. 누가는 이제 그 심한 박해로 인해 복음이 예루살렘과 유대 지역을 넘어 다른 지역으로 확산하는 과정을 그립니다.

⑶ 사마리아에 일어난 부흥(6-8)

빌립 집사는 박해를 피해 사마리아 성으로 내려갔습니다. 그곳에 내려가서 가만히 있지 아니하고 계속적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습니다. 이방인들과 같았던 사마리아 사람들이 영접한 것은 정말 유대인들에게는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① 빌립의 사역(6-7)

여기에 언급된 빌립은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이 아닙니다. 6장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돌보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선출된 일곱 집사 중의 한 사람입니다. 누가는 6-7장에서 그 일곱 집사 중의 한 사람인 스데반의 행적과 죽음을 소개했습니다. 이제 8장에서는 빌립 집사의 행적을 소개하려 합니다. 그러나 빌립이 사마리아의 어느 도시에서 복음을 전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공관복음서 저자 중에서 누가만 예수가 사마리아인들과 접촉한 이야기를 다룹니다(누가복음 9:52; 10:30-37: 17:11-19). 이러한 사실은 예수가 직접 사마리아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이야기를 소개하는 요한복음과 맥을 같이합니다(요한복음 4:4-42). 또한 이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복음이 모든 인류에게 허락되었음을 강조하는 누가의 신학을 부각합니다. 누가는 빌립이 사마리아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했다고 말합니다. 사마리아인들도 ‘타헵’ 혹은 ‘회복자’로 알려진 장차 올 구원자를 고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빌립이 전하는 그리스도에 관심을 보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들과 달리 모세오경만을 성경으로 인정했습니다. 따라서 신명기 18장 15-19절에서 모세가 말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오랫동안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빌립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모세가 말한 이 선지자가 이미 오셨고, 그 선지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전했습니다. 빌립이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하나님께서는 그가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치는 많은 기적들을 행하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중풍병자였던 자들이 일어나고 못 걷던 사람들이 걸을 수 있게 되는 것을 실제로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기적이 눈요기로서만 기적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실제 하나님 나라가 사마리아에도 임했다는 것을 볼 수 있을 만큼 규모가 켰고 지속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마리아 사람들은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라고 표적보다 말씀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사역한 내내 말씀에 집중했을 보여줍니다.

② 사역의 결과(8)

하나님께서는 빌립을 통해서, 그가 전한 복음을 진리임을 사마리아인들 앞에서 귀로 듣게 하시고, 눈으로 보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전도방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고 또한 기적으로 확인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기적들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구원의 기쁨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박해 때문에 울었던 예루살렘 성도들이, 흩어져서 부정한 귀신에 사로잡혀 있던 우상숭배의 도시 사마리아에 큰 해방의 기쁨, 치유와 구원의 기쁨을 주었습니다. 성령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가 있는 곳에 큰 기쁨이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복음의 큰 기쁨이 항상 머무는 가정과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으로 변화된 마술사 시몬(9-13)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여러 가지로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전화위복으로 역사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겪는 고통을 사용하셔서 이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바꾸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상상하지 못할 만큼 큰 기쁨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오늘도 소망을 품고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주님의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9그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하니 10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따르며 이르되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더라 11오랫동안 그 마술에 놀았으므로 그들이 따르더니 12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그들이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13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9-13)

엇뜻 보기에 교회는 세상에 비해 힘이 없어서 세상의 폭력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 교회는 세상의 힘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권능을 갖고 있습니다. 복음은 세상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그 질서를 뒤엎습니다. 세상은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이에 반목과 분열을 해결할 수 없었지만,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함으로써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장벽이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⑴ 사마리아의 대표인 시몬(9-11)

지금까지 사마리아 백성을 사로잡았던 마술사 ‘시몬’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빌립이 오기 전까지는 사마리아 백성에게 신적인 존재, 즉 이 땅에 나타난 하나님과 같은 존재였습니다(9-10). 누가는 시몬은 이렇게 소개합니다. 자칭 자기를 ‘큰 자’ 즉, ‘위대한 자’라고 말하면서 마술을 통해 사람들을 매혹시키던 사람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의 마술에 속아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칭송하며 그를 따랐습니다. 이 사람에 대해 신약성경은 본문에 기록된 것 외에 다른 정보를 전혀 제공해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를 마술을 행하는 자로 소개함으로써 후대 전승은 그에게 ‘마술사 시몬’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습니다. 종교가 모든 것을 지배하던 시대에 모든 사마리아 사람들은 시몬의 말에 좌우되었습니다. 그가 사마리아의 성직자는 아니었지만, 그 이상으로 영향을 떨치고 있었습니다. ‘마술사(마고스)’라는 단어는 나중에 이 구브로 섬 바보에서 만난 ‘바예수’라고도 하고 ‘엘루마’라고도 하는 자를 소개할 때도 사용됩니다(행 13:6,8). 한편, 마태복음 2장에 등장하는 동방으로부터 온 ‘마고스’(흔히 ‘동방박사’로 부름)는 마술사라기보다는 점성가로 보는 것이 맞습니다. 시몬이라는 인물은 후대 교부 문헌에서는 영지주의자의 아버지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순교자 유스티 누스는 그가 사마리아뿐만 아니라, 클라우디우스 황제 재임 시절 로마에 가서도 추종자들을 얻은 이야기를 소개한다. 누가는 이 사람이 자신의 마술로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많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기록합니다. 시몬이 자기 자신을 어떤 인물로 소개했는지 알 수 없지만, 자신을 메시아로 소개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누가가 시몬의 과거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소개한 이유는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었던 시몬이라는 인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도자 빌립이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함으로 시몬에게 쏠렸던 관심이 이제는 빌립에게 향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누가는 빌립이 사마리아 인들에게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할 때에 그들이 믿었다고 기록합니다. 예루살렘은 성령을 통해 사람과 인생관이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동안, 사마리아는 시몬의 마술을 통해 현혹하고 지배했던 것입니다. 그는 마술을 통해 사람을 놀라게 했습니다. 빌립 집사는 진짜 기적을 통해 사람들을 큰 기쁨을 진정한 회복의 기쁨을 주었던 것과는 다르게, 거짓 마술로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이 시몬을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불으면서 신적인 존재로 따르고 있었습니다.

⑵ 빌립을 통해 변화된 시몬(12-13)

‘사마리아의 신’인 시몬이 빌립의 역사를 보고는 회심합니다. 시몬은 어느 날부턴가 자신을 찾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이유를 알아보니,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 빌립에게 간 것을 알게 됩니다. 빌립을 찾아왔습니다. 빌립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전했던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한’ 복음 앞에서, 거짓의 종교인 시몬의 무능력함은 그 실체를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이 세례를 받고 자신의 인생을 그리스도에게 헌신하는 것을 보고, 시몬도 항복했습니다. 이전에는 자신을 주목하게 만들었던 자가, 이제는 성령의 큰 역사 참다운 능력을 보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전까지 거짓 기적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던 그가 이제 성령을 통한 진짜 능력을 보고 놀라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다른 사람들을 따르게 하던 자가, 이제는 빌립을 따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12절의 주석적 의미에 대해 학자들의 해석은 엇갈립니다. 일부 학자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빌립을 믿은 것이지, 그가 전한 복음이나 혹은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이 해석을 뒷받침하기 위해 문법적인 근거를 제시합니다. ‘믿었다’는 의미에서 믿는 대상이 여격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피스테오 동사에 여격이 뒤따를 경우, 어떤 대상을 마음으로 믿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에 대한 지적 동의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주장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누가는 16:34과 18:8에서도 이와 유사한 구문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두 개의 구문 모두 단순한 지적 동의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을 기술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의 질문은 다른 차원으로 옮겨갑니다. 누가가 ‘빌립을 믿었다’라고 말할 때 사마리아인들의 불완전한 믿음을 말하려고 한 젓인가, 아니면 온전한 믿음을 말하려고 한 것인가? 바로 이어지는 문장은 후자의 해석에 타당성을 부여한다. 사마리아인들이 빌립이 전한 복음을 마음으로 믿었고, 그 믿음에 대한 외적 표징인 세례를 받았다고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입니다. 물론 누가는 사마리아인들의 회개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누가가 사마리아인들의 회심을 전제하고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이라고 그 문맥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빌립의 복음은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의 이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 복음은 예수가 지상에서 선포하신 메시지와 다르지 않습니다. 단지 예수의 죽음과 부활과 승귀와 성령강림 이후 메시지의 강조점이 바뀌었을 뿐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한 분이 이제는 선포된 복음 그 자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이제 예수의 대속적인 죽음 때문에 예수의 이름으로 선포되는 형태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대한 초대교회의 이해가 한 단계 더 성숙하고 발전을 거듭한 셈입니다.


지금도 이 복음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복음은 사람을 치유하고, 복음이 사람을 거듭나며, 복음으로 양육시켜서,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증인이 되도록 합니다. 복음은 변화를 일으키고, 세계를 뒤바꾸고, 왜곡된 질서를 바로잡습니다. 충실하게 복음 안에 깊이 뿌리내릴 때, 새로운 창조를 위한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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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08-01)


스데반의 설교(Ⅳ) : 스데반의 순교

사도행전 7장 54절-8장 3절


좋은 습관은 성공적인 인생을 만들지만, 잘못된 습관은 실패한 인생을 만듭니다. 그래서 습관은 ‘제2의 천성’이며, ‘습관은 그 사람의 운명을 좌우한다.’라고 말합니다. 성도는 일반적인 습관도 있지만,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게 영적인 습관이 있어야 합니다. 거룩하고 좋은 습관이 몸에 배일 때까지 최선을 다 해 복종하고 연습해야 합니다. 영적인 좋은 습관이란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항상 기도하고, 어디서나 담대하며 그리고 끝까지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날마다 영적으로 성장하면서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예루살렘에 종교 지도자들과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분노하며 스데반에 대해 이를 갑니다. 그들은 스데반을 성 밖으로 끌어내어 돌로 쳐 죽여버립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이 순간에도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그는 자신의 영혼을 예수님께 맡긴다는 기도와 함께, 그 사람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말라는 간구하며 숨을 거둡니다.

 

모세의 이야기(54-57)

어두움 가운데 있는 자들은 빛에 있는 자들을 싫어합니다. 같은 말이지만, 불의한 자들은 의로운 자들을 싫어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어두운 행동들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결국 자신의 어두운 모습을 감추려고 빛을 싫어하게 된 것입니다. 더 어두운 곳으로 깊숙이 빠져 들어갑니다.

54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55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54-57)

스데반의 순교는 사도행전에서 큰 전환점이 되는 사건입니다. 이 사건과 맞물려서 사울이 사도행전에 처음 등장합니다. 이제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격분한 청중은 스데반을 성 밖으로 끌어내어 돌로 쳐 죽입니다. 영적인 부분에서 스데반 순교를 기점으로 사역이 이전에는 사도들을 중심으로 순교했지만, 이제 모든 성도들에게로 확장되어 갑니다. 스데반의 긴 설교는 사도행전 7장 2절에서 시작하여 53절에서 마쳤습니다. 이제는 그 설교를 들은 청중들의 반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구속된 상태이기 때문에 재판받는 법정에서 살아남으려면, 상식적으로는 자신을 변호하고 자신의 유리함을 증명해야 마땅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변호하고 증언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율법과 성전을 완성하셨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잘못은 그리스도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를 죽인 자들에게 있다고 주장하며,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의 자부심이나 영광을 소개한 것이 아니라 수치와 불순종 그리고 반역의 역사를 나열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불순종으로 이방에 포로로 끌려간 것이라고 역사를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 패망의 역사를 가지고 온 불순종한 이스라엘의 후예인가? 아니면 그 패망을 경고하다가 죽임을 당한 수많은 선지자의 후예인가?’라고 묻습니다. 더 나가서 산헤드린 공회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모든 선지자를 죽인 불순종한 이스라엘의 후예들이며, 광야에서 모세를 대적하던 완악한 자손들이라고 지적합니다.

⑴ 산헤드린 공회의 반응(54)

스데반 집사의 설교를 들은 산헤드린 공회원들의 반응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회고하는 부분에서는 상당히 관심을 가지고 들었습니다. 설교의 결론이 어느 쪽으로 날지 궁금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논점이 자신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방향으로 향하는 것이 점점 분명해지면서 그들의 분노는 쌓여 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보낸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죽였고 언약 백성으로서 순종하라고 주신 율법을 지키지 않은 장본인이 자신들이라는 지적에 마음이 찔렸지만,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스데반의 말이 맞았지만, 자신들의 신앙을 들키고 싶지 않은 아킬레스건을 건드린 스데반을 죽여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도행전의 기록자인 ‘누가’는 스데반의 설교를 듣던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마음에 격분하여 ‘그를 향해 이를 갈았다.’라고 표현하면서, 그들이 나타낸 감정적인 반응을 생생한 언어로 묘사합니다. 개역개정은 ‘마음에 찔려’라고 번역하지만, 이는 마치 그들이 양심에 가책을 받고 회개했다는 인상을 줍니다. 하지만, 이 표현은 그들의 격분한 모습을 나타내는 표현이지 회개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들은 스데반의 말을 듣고 회개하기는커녕 마음에 분노가 가득 찼습니다. 스데반을 향한 저주가 군중 여기저기서 뛰어나왔을 것입니다. ‘이를 간다’는 표현은 칠십인역에서도 자주 등장합니다. 그들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는 또 다른 은유적 표현입니다(욥 16:9; 시 35:16; 37:12; 112:10; 애 2:16). 이 두 가지 표현을 통해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스데반의 말을 듣고 얼마나 격분했는지를 생동감 있게 보여줍니다.

⑵ 천국을 바라본 스데반(55-56)

하나님 나라와 가까운 사람들은 산헤드린 공회원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세상에 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격분한 감정을 외부로 표출하는 상황에서도 스데반 집사는 대조적으로 침착한 모습을 보입니다.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야수같이 으르렁 거렸지만, 스데반은 성령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행 6:5).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또다시 새롭게 성령 충만함을 받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누가는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보며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예수를 보게 되는 경험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는 또한 하나님이 스데반의 편에 계심을 간접적으로 시사 합니다. 스데반은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본다고 말합니다. 신약에서 예수가 인자로 묘사되는 경우는 사복음서 외에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인자라는 기독론적인 칭호는 예수가 친히 즐겨 사용하신 칭호였습니다. 예수도 지금 스데반이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그들의 심문을 받으며 매우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막 14:62). 그들은 예수의 이 말씀을 신성모독으로 간주하고 그의 죄가 사형에 해당한다는 판결을 내린 바 있습니다. 스데반은 같은 장소에서 예수가 하신 말씀이 진실이었음을 증언합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예수가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신 모습을 본 것이 아니 라 서 계신 모습을 봅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겠습니까? 학자들은 이 질문에 대해 다양한 견해를 제시합니다. 그중 가장 설득력 있는 해석은 예수가 지상에 계실 때 하셨던 말씀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어 보입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눅 12:8). 그렇다면 예수는 하나님 우편에 서서 자신을 주로 시인하고 목숨까지 아끼지 아니한 스데반을 대변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할 것입니다. 스데반이 순교하는 마지막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것처럼 그를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도 부활의 소망이 있음을 확실히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스데반의 순교(57-60)

항상 성령의 사람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지만, 성령을 거슬렸던 사람들은 자기 육신의 원하는 대로 살아갑니다. 그들은 인격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동물적인 약육강식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야수성을 들어내고 격렬하게 폭력을 자행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끝까지 인격적인 모습을 잃지 않습니다.

57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58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59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57-60)

스데반의 마지막 증언을 듣고 청중이 보인 반응을 누가는 매우 간략하게 기술합니다(57-58). 그들은 스데반의 말을 더 이상 들어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자신들의 귀를 막았으며 일제히 스데반에게 달려들었습니다. 그리고 스데반을 성 밖으로 끌어내 돌로 쳐 죽였습니다. 그들은 스데반이 거짓말을 하였고 신성모독죄에 해당하는 죄를 범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역사적인 질문이 하나 제기된다. 스데반은 과연 공식적인 사법 절차를 거쳐 합법적으로 사형을 당한 것입니까? 아니면 그들이 자신들의 분을 절제하지 못한 나머지 어떤 절차를 거치지 않고 스데반을 불법적으로 살인한 것입니까? 전자의 경우가 사실이라면, 로마의 지배 아래 있던 유대인들이 죄인을 사형에 처할 권한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듭니다. 유대인들이 빌라도에게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다’라고 말한 요한복음 18장 31절과 상충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요한복음의 진술을 얼마나 역사적 사실로 간주할 수 있는지는 논쟁의 대상입니다. 산헤드린 공회가 당시 사형 권한을 소유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문제는 쉽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어쨌든 사도행전의 행간이 드러내는 뉘앙스는 스데반의 죽음이 공식적인 사법 절차를 거친 사형 언도가 아니라 참석자들의 분노에 의한 우발적인 살해였음에 추정의 무게를 실어줍니다. 스데반은 ‘폭도’들에게 붙잡혀 성 밖에서 돌로 쳐 죽임을 당합니다. 유대 문헌인 미쉬나에는 돌로 쳐 사치하는 형벌에 관한 공식 절차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후 1세기에도 그 절차에 따라 사형이 집행되었는지는 정확히 단언할 수 없습니다. 누가는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 장면에서 증인에 대해 언급합니다.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증인에 관한 언급으로 보아 가장 최소한의 합법 적인 절차는 지켜진 것으로 보인다. 구약성경에는 신성모독으로 인해 사형에 처할 경우 증인에 관한 규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레 24:14). 증인들이 옷을 벗은 것은 자신들이 이 일에 대해 증인임을 밝히는 행위입니다. 사울은 사도행전에서 여기서 처음 등장하지만,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사울도 스데반을 대항하던 길리기아 회당 소속이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행 6:9). 하지만 사울은 돌로 치는데 동참하지는 않았습니다. 스데반은 청중이 던지는 돌을 맞으면서도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고 자기 자신의 생명을 맡기는 기도를 드립니다. 이 기도는 예수님께서 친히 십자가에서 죽기 직전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라고 하나님께 드린 기도를 연상케 합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께 자신의 영혼을 의탁했다면, 스데반은 자기 영혼을 예수께 부탁했다는 미세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미세한 차이점은 놀랍게도 커다란 기독론적 함의를 갖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실은 초대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한 존재로 여기는 고-기독론이 매우 이른 시기에 이미 형성되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박해와 성도의 흩어짐(8:1-3)

항상 세상 권세는 하나님 권세가 성장하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는 성도들도 방해를 받습니다. 하지만, 세상 권세를 이길 수 있는 것은 혈과 육이 아닙니다. 성도들이 세상을 향해 성령으로 덧입고 기도로 복된 공격을 가하면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역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어 가는 것입니다.

1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2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3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1-3)

본문은 짧은 단락은 사도행전 6:8에서 시작된 스데반 집사의 이야기를 마무리합니다. 스데반 순교 이후 교회는 큰 변화를 겪습니다. 이 변화는 사도행전 8-12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제 사울이 본격적으로 무대 위로 등장해 교회를 박해하는 활동에 돌입했음을 보여줍니다.

(1) 스데반의 장례 이후(1-2)

7장에서 스데반의 죽음만 언급한 저자는 교회에 대한 핍박과 함께 스데반의 장례를 소개합니다. 경건한 사람들이 행한 스데반의 장례와 큰 애곡을 중심에 두고 양쪽에 사울의 핍박을 기술합니다. ‘그 날에’라는 표현을 통해 스데반의 부당한 죽음과 교회의 큰 박해를 연결합니다. ‘그 날’은 바로 스데반이 순교한 날입니다. 예루살렘에 대한 박해는 스데반의 순교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중요한 사실은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교회’를 복수가 아니라 단수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가정 단위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단수로 표현한 것은 큰 박해가 예루살렘 교회 전체에 임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럼으로 저자는 모든 성도들이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고 밝히면서, 예루살렘 성도들은 곳곳으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성도들은 인접한 이 두 지역뿐만 아니라, 멀리 소아시아 지역까지 흩어졌습니다(11:19). 그들이 흩어진 영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도행전 1:8에서 언급된 순서대로 예루살렘, 유대, 그리고 사마리아 순서로 교회에 임한 핍박이 오히려 교회로 하여금 주님의 지상 명령에 충실하도록 도왔음을 보여 줍니다.

(2) 사울의 등장과 핍박(3)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그를 위해 크게 애곡한 사실을 전해 줍니다.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크게 애곡했다는 사실은 스데반의 죽음이 얼마나 부당한지를 단편적으로 보여 주는 강력한 메시지였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이러한 메시지에 주목하지 않고 오히려 교회 핍박의 현장에 출현하여 교회를 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스데반의 죽음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저자는 9장에서 사울의 극적인 회심 이야기를 다룰 것입니다. 그 이야기에 앞서서 사울이 그간 얼마나 초대교회를 비참하게 박해했는지를 간략하게 소개합니다. 스데반을 죽음으로 몰고 간 자들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광범위하게 예루살렘 교회를 박해하기 시작합니다. 이에 초대교회 신자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지키며 목숨을 보호하기 위해 박해자들의 손을 피해 피신합니다. 사실 2절의 내용이 1절의 내용보다 역사적으로 먼저 일어났다고 봐야 합니다. 그런데 누가가 이 단락의 서술순서를 뒤집어서 하고 있는 이유는 아마도 2절의 초대교회의 애도하는 분위기와 3절의 박해의 분위기를 대조하기 위함인 것으로 보입니다. 사울은 남녀 성도들을 끌어다가 옥에 가두었습니다. ‘잔멸하다’라는 동사는 본문에서만 사용되었습니다. 이 동사는 사나운 들짐승들이 몸을 물어뜯어 죽이는 행동을 가리킵니다. 이는 사울의 행동이 얼마나 짐승처럼 사납게 행동했는지 보여주는 단어입니다. 사울은 각 집을 수색했는데, 수색한 각 집은 가정 교회였을 것입니다. ‘끌다’(3)는 사람들을 억지로 질질 끌고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도들은 이렇게 사울에게 질질 끌려가 공식적인 제판 전 구류되는 장소에 갇혔습니다. 사울은 이와 같이 엄청난 핍박을 행했습니다. 예루살렘 모든 성도들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흩어지면서도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쉬지 않았습니다(4). 예루살렘 지도자들과 사울은 이런 일을 기대하지도, 예상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핍박을 통해 더 확산되어 가는 양상을 보여줍니다.


스데반은 죽었지만, 절대로 죽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죽었지만,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품에 들어갔을 뿐입니다. 스데반은 순교하는 순간에도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며 예수님의 제자로서 진정한 본을 보여주었습니다. 스데반처럼 적대와 박해 그리고 순교가 기다리는 자리로 두려워하지 않고 나아가는 것이 바로 참 신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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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07-02)


스데반의 설교(Ⅱ): 모세와 이스라엘

사도행전 7장 17-36절


‘교회(敎會)’의 정의를 하면, 건물이나 프로그램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령과 말씀을 받은 사람들의 아름다운 공동체입니다. ‘가정(家庭)’, 또한 집이 아니라 가족 구성원입니다. 요즘은 기업도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사람을 귀중하고 아름답단 것을 설명합니다. 세상에서 사람이 제일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 어디서든지 하나님의 합당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하나님과의 사람과 함께 하시며, 그들에게 은혜를 주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십니다.

 

본문은 계속해서 스데반 집사의 설교 중에 한 부분인 모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의 메시지 중에서 모세에 관한 부분이 가장 많이 설명합니다. 특별히 모세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사역을 소개합니다. 하나님께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모세를 부르셔서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계획하고 성취해 가십니다. 스데반의 의도는 모세와 그 시대의 이야기하면서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서 유사성을 발견하도록 유도합니다.

 

모세를 준비시키신 하나님(17-29)

사람들은 미래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우선 눈에 보기 좋은 것을 선택하려고 합니다. 대부분의 선택은 편안함과 안락함을 추구해서 실패한 경우가 많습니다. 안타까워 눈물 흘리며 고통스러워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아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은 빈틈이 없기 때문에 실수하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의 실수와 잘못이라도 그것까지라도 사용하셔서 최선의 길을 만드시고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17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번성하여 많아졌더니 18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애굽 왕위에 오르매 19그가 우리 족속에게 교활한 방법을 써서 조상들을 괴롭게 하여 그 어린 아이들을 내버려 살지 못하게 하려 할새 20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의 아버지의 집에서 석 달 동안 길리더니 21버려진 후에 바로의 딸이 그를 데려다가 자기 아들로 기르매 22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 23나이가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나더니 24한 사람이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 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 죽이니라 25그는 그의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통하여 구원해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그들이 깨닫지 못하였더라 26이튿날 이스라엘 사람끼리 싸울 때에 모세가 와서 화해시키려 하여 이르되 너희는 형제인데 어찌 서로 해치느냐 하니 27그 동무를 해치는 사람이 모세를 밀어뜨려 이르되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 28네가 어제는 애굽 사람을 죽임과 같이 또 나를 죽이려느냐 하니 29모세가 이 말 때문에 도주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 되어 거기서 아들 둘을 낳으니라(17-29)

스데반 집사는 아브라함과 요셉까지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모세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해 나갑니다. 모세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이며, 그의 생애를 통해 일하셨던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스데반의 메시지 중에 모세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깁니다. 그 이유는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스데반을 고발한 상태였습니다. 그는 의도적으로 모세의 이야기를 길게 나열함으로써 자신이 모세와 그 율법을 반대하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존경하며 인정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내비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이며, 모세에 대한 스데반의 깨달음과 선포가 스데반을 고발했던 유대인들보다 귀하고 훌륭하고 옳은지를 충분하게 설명합니다. 성전과 율법 그리고 모세까지도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임을 깨닫지 못했던 유대인들에게 스데반은 모세를 통해 일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차분하게 설명해 준 것입니다. 스데반은 모세의 일생을 세 부분을 나누어서 가르쳐 줍니다. 그 구분을 자세하게 나누어 보겠습니다. 첫 부분은 죽음의 위기를 넘어서 애굽 공주의 아들로 입양되는 과정입니다(20-22). 두 번째 부분은 사십 세가 되어 애굽의 왕자로 있을 때, 동족을 돕기 위해 나섰다가 화가 되어 미디안 땅으로 도망가 살게 된 과정이며(23-29), 마지막 부분은 다시 사십년이 지나서 팔십 세가 된 모세를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한 지도자로 세워 사용하신 일(30-36)에 대해 담담하게 이야기해갑니다. 모세의 생애를 잘 살펴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모세의 성장과 소명 과정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점점 모세가 성장하는 과정을 통해 이스라엘의 구원자인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모든 인류를 위해 오신 구원자이심을 보여 줍니다.

⑴ 모세의 성장기(17-22)

스데반 집사는 아브라함과 요셉을 불러 구원을 실행하신 하나님께서 또 한 사람을 세우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로 합니다. 그가 바로 모세입니다. 모세의 어린 시절부터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애굽에 큰 경제적 부흥을 이끌었던 요셉도 시간이 흐르자 죽었습니다. 그가 죽고 나서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 이때 모세가 태어났습니다. 그는 위기 상황 가운데 태어났습니다. 낮선 타국에서 태어났지만 하나님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당시 애굽 왕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짐승처럼 비참하게 다루었습니다. 더욱이 이스라엘 백성, 히브리인들은 후손들이 왕성해져 갔습니다. 바로에게는 위기였습니다. 바로는 히브리인들이 출산해서 남자 아이들가 태어나면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이 시기에 모세가 태어났습니다. 모세는 자기 아버지 집에서 3개월을 키워지다가 나일강에 갈대상자에 담아 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극적으로 애굽의 바로의 딸인 공주에 의해 발견됩니다. 그 아이를 공주는 양아들로 받아드려졌고 왕궁에서 양육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그 누나 미리암의 도움으로 모세는 생모의 젖을 먹고 자라게 됩니다.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아이가 부활한 것입니다. 요셉을 구원하셨던 하나님께서 모세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모세의 성장과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모세가 애굽의 훌륭한 학문을 전수 받아 언변과 행동이 뛰어난 인물로 성장했음을 부각시킵니다. 이는 앞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 땅에서 구원해 약속의 땅으로 인도할 지도자로서 준비되었음을 암시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적의 한 가운데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지도자를 양육하신 것입니다.

⑵ 모세의 장년기(23-29)

스데반은 모세에 대한 연약함과 실수도 감추지 않습니다. 모세가 자신의 열심을 의지했을 때, 그는 도망자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담대하게 나갔을 때, 애굽의 노예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낸 지도자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① 이스라엘의 구원자라고 생각한 모세 애굽의 왕궁에서 모든 것을 배우고 익히면서 성장한 모세의 나이가 40세가 되었습니다. 점점 그는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고 고민하였습니다. 어쩌면, 그는 400년 전에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자신의 시대에 구원을 이루신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용하실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② 구원자들은 거부하는 이스라엘 모세는 항상 자기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을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하루는 자기 이스라엘 백성을 무고히 괴롭히는 애굽 관리를 보고 그를 쳐 죽이게 됩니다(24). 모세는 애굽의 왕자이면서도 자기 동족 이스라엘 편에 서 있었습니다. 그가 기대한 것은 자기 동족들이 자신의 손을 통하여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뜻밖에도 이런 모세의 기대는 이튿날 깨집니다. 다음날 모세가 지나가고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끼리 싸우고 있었습니다. 모세가 화해시키려고 중재하려고 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동족으로 여기지 않고 무시하면서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고 거절하였습니다. 그들은 모세를 자신의 구원자로 인정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자를 이스라엘이 거부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유보다 안정되게 빵만 먹으면 상관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인 언약에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③ 미디안 광야로 도망한 모세 결국 모세는 애굽을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미디안 광야로 갑니다. 단지 한 사람 죽인 것이 발각되어 도망한 것이 아닙니다. 애굽의 왕자는 신적인 존재인데, 파리 목숨 같은 애굽 사람 한 명 죽였다고 도망간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가 도마한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시키려고 애굽을 반란할 계획이 들통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도망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밀고한 것은 다름 아닌 자기 동족이었습니다. 미디안 광야에 살고 있는 모세는 양치기에 불과한 무능력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친히 다듬으시고 훈련하셨습니다. 장차 민족을 구원할 위대한 지도자 모세를 준비시키셨습니다. 다만 그는 자신의 동족 이스라엘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그리고 궁극적으로 온 인류를 구속하시려고 영원한 경륜에 따라 모세를 준비시키시고 연단시키신 것입니다. 스데반은 모세가 동족인 이스라엘을 구원할 구원자로 일어셨지만, 그들에게 거절당했고, 이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했던 잘못된 행동을 설명합니다. 아마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모세 당시 사람들이라면 자신들을 그렇게 하지 안했을 것이라고 비난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스데반의 설교를 듣는 당시에 유대인들이 선조들처럼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버렸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유대인들의 행동을 질책하고 있었습니다. 스데반에 대한 모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큰 위로와 힘을 얻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큰 지도자였던 모세도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실패가 될 수 없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실수 했어도 하나님께서는 실수하지 않으셨습니다. 모형이었던 모세의 실체로 이 세상에 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증명해 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적절한 방법과 필요한 것들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을 이루어 가십니다.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모세에게 사명을 주신 하나님(30-36)

하나님의 통치와 섭리는 예루살렘 성전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닙니다. 모든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서 역사하신 분입니다. 우르에서 애굽까지 고대 시대의 비옥한 지역인 고대 시대의 모든 나라, 모든 민족들에게 펼쳐졌습니다. 그러므로 그 모형들의 실체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스라엘 땅에 오신 것입니다.

30사십 년이 차매 천사가 시내 산 광야 가시나무 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 31모세가 그 광경을 보고 놀랍게 여겨 알아보려고 가까이 가니 주의 소리가 있어 32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신대 모세가 무서워 감히 바라보지 못하더라 33주께서 이르시되 네 발의 신을 벗으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 34내 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 받음을 내가 확실히 보고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그들을 구원하려고 내려왔노니 이제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하시니라 35그들의 말이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며 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나무 떨기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으로 관리와 속량하는 자로서 보내셨으니 36이 사람이 백성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고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사십 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느니라(30-36)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문명의 발생지였던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불러 유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셨듯이, 애굽 땅 핍박의 시절을 살고 있었던 유대 민족을 구원해 내기 위해 모세를 불러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⑴ 하나님께서 임재한 광야 성전(30-33)

미디안에서의 모세 40년은 엄청난 훈련과 연단의 기간이었습니다. 모세의 나이 80세, 애굽을 떠난 지 40년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찾아가셨습니다. 그 때까지 미디안 땅에서 무의한 것처럼 결혼하고 자녀 둘을 낳고 나그네처럼 정처 없이 살았습니다. 시내산 광야에서 가시나무 떨기가 불꽃 가운데 천사의 모습으로 모세에게 나타나셨습니다(30). 그의 인생에 하나님의 부르심 가운데 새로운 사명자로 다시 태어날 것임을 보여주셨습니다(31-33). 그리고 이후에 모세는 애굽에서 노예로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을 인도하였습니다. 40년간 광야 생활 가운데 그들을 이끌면서 하나님의 수많은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습니다. 그 기간이 끝난 후,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모세에게 임재 하셨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곳이 ‘광야 성전’이 되었습니다. 이 광야 성전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네 발의 신을 벗으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방금 전까지 모세가 양을 기르던 광야가 하나님의 거룩한 땅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임재하는 땅이기 때문입니다. 화려한 건물이 있어야만 성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신 곳과 하나님의 임재에 어울리게 신을 벗고 경배하며, 그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백성이 있는 곳이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건물 성전만을 중요하게 여겼고, 정착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밀고하고 거부하였듯이 하나님께서 보낸 사람들을 거절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가로 막았습니다.

⑵ 새로운 말씀이 전해진 광야 성전(34-36)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에는 하나님의 임재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입니다. 광야 성전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모세에게 자신이 나타난 이유를 “내 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 받음을 내가 확실히 보고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그들을 구원하려고 내려왔노니 이제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고 밝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보내신 이유와 동일합니다. 우리의 괴로움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입니다. 스데반은 모세 시대의 바로, 모세 시대의 선한 의도를 의심했던 동족들,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자기 지식 안에 가두어 놓고 이해했던 종교 지도자들 그리고 모세를 거절하던 유대 민족과 악한 권력자들까지 스데반은 모세와 그 시대의 역사를 가져다가 예수님을 거절하는 자기 동족과 종교 지도자들 그리고 정치 권력자들을 고발합니다. 율법과 성전을 소유하고 있어도 하나님의 신실함과 그 섭리의 역사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지 않는다면 율법과 성전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모세의 여정처럼 인생의 굴곡진 길을 걸어가 살게 되겠지만, 모세에게 일하셨듯이 우리에게도 신실하게 일하실 하나님을 기대해야 합니다. 가장 적절한 때에 가장 합당한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불러 준비하신 일을 맡겨주실 것입니다. 모세의 침묵이 하나님의 침묵이 아닌 것처럼, 모세의 공백이 하나님의 일하심의 공백이 아닌 것을 고백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동족에게 거절당한 모세를 사명자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일꾼은 세상의 관점과 다른 인물임을 분명히 보여주시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모세처럼 신발을 벗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믿음과 결단이 있을 때 하나님께 놀랍게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모세를 통해 예수님께서 세상의 구원자로 오셨음을 증거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일꾼을 부르신 과정은 세상적인 관점에서 위대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쓰임에 합당한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모세가 유대인들에게 거절당했지만 하나님께 쓰임을 받은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당신도 사람들이 제대로 볼 수 있겠지만, 하나님께 쓰임 받기에 함당한 일꾼이 되시길 바랍니다. 모세를 불러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던 것처럼, 이제 당신을 불러서 죄악에 물든 영혼들을 구원하는 위대한 도구로 사용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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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07-01)


스데반의 설교(Ⅰ):믿음의 조상

사도행전 7장 1-16절


설교는 어머니의 젖과 같습니다. 성도들은 어떤 설교를 듣느냐에 따라서 색다른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목회자들은 설교를 준비하면서 다양한 자료들을 준비합니다. 그 준비된 재료들로 요리하듯이 설교를 만들어갑니다. 자료뿐만 아니라 주변에 비판, 찬사, 성도의 필요와 시련, 그리고 본문의 자료들이 첨가됩니다. 그러나 영향을 받지 말아야 한 한 가지 있는데, 바로 잘못된 통념입니다. 가끔 올바른 사고를 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잘못된 메시지를 준비하여, 설교하지 못한 것만도 못한 경우가 있습니다. 설교자는 항상 진리 위에서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선 스데반은 유대인들의 고발하는 내용이 사실인지를 묻는 대제사장의 질문에 답변할 기회를 얻습니다. 스데반은 답변의 일환으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갑니다. 곧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조상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어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으로 주신 이야기로부터 시작해 애굽으로 팔려갔다가 온 가족을 구원한 요셉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대제사장의 질문(1)

사람들이 선택하고 결정한 것을 스스로 결정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철저하게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모든 것을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이 가야할 길을 가게 하시고, 해야 할 일들을 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스데반의 길도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신 길이었습니다.

1대제사장이 이르되 이것이 사실이냐(1)

사도행전 6장에서 살펴본 대로 초대교회가 일곱 집사를 택한 동기는 원래 구제 사업을 돕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단순히 교회의 구제 사업을 위한 봉사자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또 다른 초대교회의 지도자들로서 12사도들과 똑같이 복음을 증거 하는 일에 헌신한 소중한 믿음의 일꾼이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이런 믿음의 일꾼들 덕택에 교회를 핍박하던 제사장들 가운데서도 복음의 결실이 맺힐 정도로 크게 성장했습니다. 이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스데반이었습니다.
스데반에 대한 대제사장의 심문은 사도행전 6장 11,14절을 근거한 것입니다. 헬라파 유대인들 중심으로 운영된 회당에서 스데반과 논쟁했던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말문이 막혔습니다.
또한 스데반이 담대하게 나사렛 예수를 증거하는 모습은 성전 당국자들을 긴장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거짓 증인들을 매수하여 헬라파 유대인들로 하여금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고소를 당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스데반이 메시아로 믿는 ‘예수’라는 자가 성전을 헐고 모세의 율법을 고친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거짓 증인들이 스데반을 고소한 내용은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고 성전과 율법을 거슬러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산헤드린 공회가 열리고 의장인 대제사장은 스데반에게 사람들이 고소한 내용이 ‘사실이냐?’고 묻습니다. 이제 산헤드린 공회에서 스데반의 긴 변론을 시작합니다. 스데반이 당한 일은 예수님께서 잡히셨을 때, 당하신 일과 매우 흡사합니다.
이에 스데반이 산헤드린 공회원들 앞에서 답변할 기회를 얻습니다. 만약 스데반이 ‘그렇다’고 대답했다면, 신성모독죄로 판결 받았을 것이며, 그가 ‘아니다’고 부정했다면, 증인들이 있었기 때문에 신성모독죄에 위증죄까지 더하여 처벌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고소 내용에 대해 일일이 자신을 위한 반박 형식으로 변론을 하지 않습니다. 대제사장의 질문에 직접적으로 변론하는 대신 답변적인 긴 설교를 시작합니다. 유대인들이 모두 알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과 역사를 되짚어 가는 방식을 취합니다. 이는 자신이 유대인들과 동일한 신앙을 갖고 있다는 것과 하나님과 율법을 거스른 것은 정작 유대인들임을 선언할 목적이었습니다.

 

스데반의 답변(2-16)

인간의 죄, 불의, 수많은 환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약속대로 아브라함의 후손을 세워 가십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의 힘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세워 나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단 한 명의 아들만을 주셨지만, 그 자손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의 기초가 세워진 과정이 소개됩니다.

2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3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4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5그러나 여기서 발 붙일 만한 땅도 유업으로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그와 그의 후손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6하나님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후손이 다른 땅에서 나그네가 되리니 그 땅 사람들이 종으로 삼아 사백 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하시고 7또 이르시되 종 삼는 나라를 내가 심판하리니 그 후에 그들이 나와서 이 곳에서 나를 섬기리라 하시고 8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더니 그가 이삭을 낳아 여드레 만에 할례를 행하고 이삭이 야곱을, 야곱이 우리 열두 조상을 낳으니라 9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셔 10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사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시매 바로가 그를 애굽과 자기 온 집의 통치자로 세웠느니라 11그 때에 애굽과 가나안 온 땅에 흉년이 들어 큰 환난이 있을새 우리 조상들이 양식이 없는지라 12야곱이 애굽에 곡식 있다는 말을 듣고 먼저 우리 조상들을 보내고 13또 재차 보내매 요셉이 자기 형제들에게 알려지게 되고 또 요셉의 친족이 바로에게 드러나게 되니라 14요셉이 사람을 보내어 그의 아버지 야곱과 온 친족 일흔다섯 사람을 청하였더니 15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가 자기와 우리 조상들이 거기서 죽고 16세겜으로 옮겨져 아브라함이 세겜 하몰의 자손에게서 은으로 값 주고 산 무덤에 장사되니라(2-16)

스데반의 설교는 사도행전에서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사도행전에서 매우 중요한 설교 중 하나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설교 목적은 무엇입니까? 왜 구약 역사를 길게 나열합니까? 스데반의 답변은 일차적으로 거짓 증인(사도행전 6:11,13-14)에 대한 변호인 것이 맞지만, 그의 설교에는 두 가지 중요한 주제가 얽혀 있습니다. 곧 ‘율법’과 ‘성전’입니다. 첫째, 스데반은 자신이 율법을 거슬러 말하지 않았다고 강변합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정작 유대인들이 말씀을 어기고 우상숭배를 했으며, 하나님께서 보낸 선지자들을 죽이고 불순종했습니다. 둘째,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부터 옮겨 다니는 성막을 가지고 있었고 나중에는 솔로몬 성전이 있었지만, 성전 자체를 지나치게 중요하게 여긴 나머지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우상숭배에 빠졌고(사도행전 7:39-43) 하나님께서는 성전에만 거하시는 것을 잘못 생각했다는 주장입니다(사도행전 7:44-50).

⑴ 아브라함의 이야기(2-7)

스데반의 설교는 산헤드린 공회에 정면으로 맞서서 큰 그림을 그려 나갑니다. 그는 당시 많은 유대인들이 하던 대로 오랜 성경의 전통에 따라 이 연설을 했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를 회고하는 형식으로 시작합니다. 먼저 이스라엘의 시조인 아브라함으로 시작해서 예수 그리스도까지 구속의 역사를 나열합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여 전체 여정을 살펴야만 예수님이 누구신지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먼저 스데반은 하나님께서 믿음의 시조인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부르신 내용부터 시작합니다. 아브라함을 불러 내셔서 가나안 땅으로 이끄신 역사를 되새깁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곳은 아브라함이 메소보다미아에 있었을 때, ‘영광의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였다고 소개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에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다고 말합니다. 잠깐, 스데반의 이야기와 창세기 11:31-12:1의 이야기를 비교해서 읽어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은 때와 장소가 다른 듯 보입니다. 창세기는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난 것을 데라의 결정에 의한 것으로 말하고, 하란에 거할 때 하나님의 명령을 들은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들은 곳은 메소보다미아(갈대아 우르)라고 합니다. 스데반이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까? 창세기 15:7에서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과 느헤미야 9:7에서 ‘옛적에 아브람을 택하시고 갈대아 우르에서 인도하여 내시고’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하란에서 들은 부르심을 하란으로 떠나기 전, 갈대아 우르에서도 들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동 시대 유대인 저자인 필론과 요세푸스도 이와 동일한 해석을 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스데반도 당시 유대교의 해석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계시한 장소를 스데반이 구체적으로 메소보다미아라고 밝히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곳은 거룩한 하나님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방 땅, 즉 부정한 땅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곳에도 임재 하셨습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임재한 땅이 메소보다미아라고 언급한 이유는 약속의 땅과 성전을 지나치게 강조하며 자랑하는 당시 유대 지도자들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약속의 땅 가나안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가나안에서만 자신을 계시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성전에만 계시지 않는 분임을 말하기 위해 메소보다미아 계시를 언급한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영광의 하나님’으로 언급한 것도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손으로 만든 성전에만 거하지 않는다는 초월성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이 조상 아브라함의 이야기까지 거슬러 올라간 데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중요하게 여기던 시내산 율법 수여 이전에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이미 언약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함입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단순히 하나님께서 조상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을 넘어섭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계시하신 곳이 현재 유대인들이 살고 있는 약속의 땅 가나안도 아니며, 거룩한 성전도 아니었음을 우회적으로 암시한 것입니다. 그의 연설 후반부에서 강조될 것이지만, 스데반은 설교 초반부터 하나님께서는 유대 지도자들이 그렇게 강조하던 성전에서만 자기 자신을 계시하시는 분이 아님을 이미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스데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갈대아 우르를 떠나, 먼저 하란에 정착했고, 아버지 데라가 죽은 후에 가나안 땅으로 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여기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최종 목적지로 보낸 지역을 지금 너희들이 살고 있는 ‘이 땅’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너희들’은 스데반의 연설을 듣고 있는 산헤드린 공회원들을 포함해 지금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 말의 배후에는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어 지금 그의 후손들이 약속의 땅에서 살고 있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이 부각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은 아직 약속의 땅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발 붙일만한 땅도 유업으로 주지 아니하시고’라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신명기 2:5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일평생 나그네의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생전 아브라함에게 실제적으로 땅을 주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위대한 것은 자기가 의존하고 기댈 만한 것, 가시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고 살기보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만을 믿고 행동에 옮기는 믿음의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실제적으로 땅을 소유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후손이 타국(다른 땅)에서 400년 동안 나그네로 살면서 종살이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후에 그늘이 나와서 이곳에서 나를 섬길 것을 약속하십니다. 이와 관련된 칠십인역 출애굽기 3:12은 ‘네가 나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면 너희들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것이다’라고 기록합니다. 하지만 스데반은 ‘이 산에서’ 대신에 ‘이곳에서’ 나를 예배할 것이라고 수정합니다. 지금 그의 후손들이 이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이 그대로 성취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과거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 기간에도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그들과 함께 하셨음을 뜻합니다.

⑵ 아브라함에서 요셉으로 전환(8)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 모세의 이야기로 바로 진행하지 않습니다. 중간에 요셉의 이야기로 전환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증표로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행하게 하셨습니다(창세기 17:11). 할례의 언약은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맺은 언약에 대한 외형적인 표증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모든 이야기가 점점 출애굽 이야기가 등장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 줍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와 언약을 맺으신 것과 더불어 출애굽기는 유대인 정체성의 본질이며 스데반이 말하고자 한 핵심이기도 했습니다.

⑶ 요셉의 이야기(9-16)

9절부터는 스데반 연설의 두 번째 부분에 해당하는 요셉 이야기의 시작합니다. 스데반은 요셉이 이 땅이 아닌 애굽에서 하나님과 동행했으며, 거기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집중할 사실은 ‘애굽’은 이방인의 땅인 동시에 고난의 장소이자 하나님의 나라와 대조되는 영역을 상징합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용하셔서 바로의 집안과 애굽 전체를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형들이 먹을 것이 필요해서 찾아간 사람은 그들이 질투해서 버렸던 그 사람이었습니다. 다행히 그는 형들을 자비롭게 대했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었습니다. 스데반은 애굽으로 내려간 요셉의 가족 수가 ‘일흔다섯 명’이라 언급합니다. 그런데 이 숫자는 창세기 46장 27절과 출애굽기 1장 5절에 기록된 칠십 명과 차이를 보입니다. 스데반은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따르기보다는 칠십오 명으로 되어 있는 칠십인 역을 따릅니다. 칠십인 역은 야곱과 요셉을 제외하고 요셉의 아홉 명의 아들 중 나머지 일곱 명을 추가한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스데반은 요셉이 세겜 땅에 장사된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청중이 유대인들임을 감안한다면, 증오의 대상이던 사마리아인들의 땅을 강조한 것은 특이합니다. 유대 땅만이 조상들이 장사될 만큼 특별한 장소가 아님을 말하려 한 것입니다. 약속의 땅에 관한 유대인들의 편협한 지리적 개념을 넌지시 겨냥한 것입니다.



스데반은 예루살렘과 유대 땅, 그리고 예루살렘 성과 그 안에 세워진 성전을 신앙의 대상으로 여기던 유대인들에게 전정한 신앙의 대상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이야말로 우리 믿음의 대상이고, 그 말씀을 믿는 사람들이야 말로 우리가 가장 귀하게 여겨야 할 가치라는 사실을 다시금 기억해야 합니다. 나와 우리 교회는 혹시 신앙의 본질이 아닌 것을 거룩하게 여기며 섬기는 오류를 법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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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06-01)


사역을 위해 선택된 일곱 집사들

사도행전 6장 1-15절


교회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주인이시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지상에 있는 교회 중에는 문제가 없는 교회는 없습니다. 문제의 발단과 갈등은 어디에서 시작됩니까? 대부분 말씀과 기도보다 사역이 앞설 때 문제가 시작됩니다. 사단은 영혼보다 사역에 집중하는 곳, 하나님보다 사람을 의지하는 곳에서 역사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갈등은 어떻게 해결할 수 있습니까? 또 그 이후에 어떻게 성장해야 합니까?

 

복음은 몇몇 사도에게서 시작하여(2-5장) 모든 평신도들까지 활발하게 타올랐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성장함으로 구제 문제가 발생하지만 잘 해결합니다. 사도들은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성도들에게 추천을 받아 일곱 집사를 세웁니다. 그들에게 가난한 자를 돕는 일을 맡기고,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 사역에 전념함으로 교회는 더욱 성장합니다. 그리고 일곱 집사 중의 하나인 스데반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대항하는 자들로부터 고발을 당해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서게 됩니다.

 

일곱 집사를 선출하게 된 사건(1-7)

하나님 나라는 언제나 위기 속에서 더 확장되어 왔습니다. 역사적으로 교회들이 핍박 속에서 부흥했고, 고난 속에서 성장해 왔습니다. 그러나 성장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닙니다. 초대교회는 폭풍처럼 성장하면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에 빠져 들고 있었습니다. 그 문제는 개인이 아닌 교회 구조적인 문제였습니다.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 초대 교회에게는 크나 큰 위기에 빠질 수 있었습니다.

1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2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3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4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5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6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7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1-7)

기도할 필요조차 없이 평안하고 아무 탈이 없는 삶은 축복이 아닐 수 있습니다. 어느 때든지 한계를 인정하며,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경험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때로는 고난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고난은 영적인 각성제와 같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 안에서 박해를 통해 예수님의 몸된 교회를 질식시키려던 사단은 완전히 실패합니다. 핍박을 받으면 받을수록, 초대교회는 더 강하게 성장하고 더 굳센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⑴ 문제의 발단(1-2)

본 단락은 누가가 자주 사용하는 ‘그 때에’와 함께 새로운 단원으로 시작함을 알려줍니다. 지금까지는 예루살렘 교회가 세워지고 예수님을 전하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외부적인 박해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초대교회 안에서 내부적인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문제의 발단은 믿는 자들이 더해 감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박해 속에서 고난 받는 일에 부끄러워하기보다 예수님의 남은 고난(골 1:24-25)에 동참한다고 생각하면서 기뻐했습니다. 더나가서 그들은 날마다 성전 있든지 집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길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로 성령으로 초대교회는 성도들이 급속히 많아졌습니다(7). 그러나 급성장하는 것이 반드시 은혜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잘 준비되지 않는 조직은 급성장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또 다른 문제들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초대 예루살렘교회는 성도들이 많아지자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성도들이 많아졌다는 것은 그만큼 해야할 일과 대상이 많아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마도 갑자기 믿은 자들이 많아짐으로 규모에 맞는 조직과 행정을 구성해야 했지만, 당시 지도자인 사도들은 습관적으로 계속 같은 사역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성도들과 재정적으로는 많아졌지만, 반대로 돌봐야 할 사람들 또한 많아졌습니다. 그만큼 사도들의 업무도 늘어났습니다. 점점 그들은 사역의 한계점이 이르고 있었습니다. 사단이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초대교회는 사도행전 2장과 4장에서 보았듯이, 예수님의 제자들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공유하고 나누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으로 부름을 받았고, 그리스도의 희생을 따라서 모든 성도들은 자기 가진 것을 함께 나누기 위해 사도들 앞에 드렸습니다. 사도들은 그것을 통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서 나누어 주는” 구제 사역을 했습니다(4:35). 본문에서는 그 사역을 ‘매일의 구제’(1)이라고 소개하는데, 하루에 한 끼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극빈자들에게 교회에서 매일 나누어 주는 음식이나 금전을 의미합니다. 당시 예루살렘 초대교회 안에는 두 부류 유대인들이 존재했습니다. 팔레스틴 지역에 태어나고 자란 ‘히브리파 유대인들’과, 또 다른 부류는 외국에서 흩어져 살다가 돌아와서 예루살렘에서 사는 유대인들, ‘헬라파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을 또 다른 이름으로 ‘디아스포라(diaspora) 유대인’이라고 했습니다. 노년에 돌아왔기 때문에 혼자된 과부가 많아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이 대부분 있었습니다. 반면에 ‘히브리파 유다인’들은 연고지가 팔레스틴이기 때문에 어렵다고 할지라도 외국 태생 ‘헬라파 유대인들’보다는 조금 나은 편이었습니다. 두 부류 모두 의지 때가 없어서 초대교회에서 실행한 구제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점점 성도들이 많아져 갈수록 교회 지도자들에게는 모든 사람들을 돌볼 만한 충분한 여력이 없었습니다. 점점 ‘헬라파 유대인들’에 대해서 소홀하게 되었습니다. 자연스럽게 도움을 받지 못하자 소외감을 느끼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헬라파 유대인들’은 불만이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도들은 고의로 소홀한 것이 아닙니다. 이때까지 만해도 헬라파 과부들의 실상을 파악하고 지원하는 사람이 적었습니다. 사도들은 이 문제를 직감하고 비밀스럽게 사적으로 해결하지 않습니다. 근본적인 문제를 찾기 시작했고, 문제점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서 공식적으로 모든 성도들을 모아 회의를 열었습니다(2). 사도들은 그 자리에서 문제점을 부인하거나 감추지 않고 문제가 있었다고 발표했습니다. 문제의 해결책을 찾아가기 시작합니다. 그 내용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2)라고 말합니다. 개역개정은 사도들의 말을 다소 퉁명스럽게 번역함으로써 독자들의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래서 쉽게 번역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하고 자선 사업에만 몰두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현대어 성경)라는 의미입니다. 사도들의 의도는 가난한 자를 돕는 일이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단지 사도들이 전념해야할 소명은 기도와 말씀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구제하는 일은 누구든지 할 수 있지만, 말씀 전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없는 사역입니다. 성도들이 많아짐으로 구제 사역이 많아짐으로 점점 자신도 모르게 구제 사역에 치우치다 보니, 정작 중요한 기도와 말씀 전하는 사역을 소홀하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⑵ 해결 방안 제시(3-4)

초대교회가 성도들이 적었을 때는 사도들이 모든 것을 도맡아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점점 성장하면서 사도들은 시간과 사역을 조절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사도의 근본적인 사역인 기도와 말씀의 사역을 소홀했던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은 사도들의 제안을 통해 문제점과 고충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사도들은 문제 해결할 방법으로 우선순위를 구제 사역에서 기도와 말씀 사역에 집중하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교회 사역을 맡아서 수고할 일곱 사람을 선택해서 집사로 세울 것을 제안합니다. 집사의 자격을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3). 집사의 자격에 ‘성령 충만한 사람’은 자기 안에 그리스도께서 내주하심을 알며, 성령의 열매로 채워져 있음을 인식한 사람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주인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각으로 가득한 사람만이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지혜가 충만한 사람’은 분별력 있고 통찰력이 있으며 판단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칭찬 듣는 사람’은 좋은 소문이 들리며 선한 증거를 지니고 좋은 평판을 받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집사의 자격은 영적인 자질과 성숙한 성품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들이 세워진 목적은 영적인 지도자들이 기도와 말씀의 사역에 전념하도록 그들의 짐을 덜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고 선언했습니다(4). 사도들은 근본적인 사역인 기도와 말씀 사역에 전념하겠다는 선언합니다. 기도와 말씀 사역 외에 모든 것들은 부차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사역자들은 이 두 가지 사역에 전념해야 하며, 여기에서 빗나가거나 다른 과심을 돌려서는 안 됩니다. 복음을 전하는 데, 사도들이 말한 ‘기도와 말씀’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여기서 ‘말씀 사역’으로 번역된 ‘διακονία του λόγου’는 직역하면 ‘말씀 섬김’이라는 의미인데, 이는 ‘매일의 구제’(1)에 사용된 ‘디아코니아’와 같은 단어입니다. 이는 두 가지 사역이 모두 성도를 섬기는 일임을 보여줍니다. 즉, 업무 분담의 문제이지 업무의 중요성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제 사업을 맡을 사람들이 갖추어야 할 필요조건은 열두 사도의 조건(사도행전 1:21-22)과는 달리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신앙과 삶이 분리될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신앙과 삶이 일치하는 사람을 일꾼으로 쓰시기를 원하셨습니다.

⑶ 일곱 집사를 선출함(5-6)

모든 성도들은 사도들의 제안인 집사 일곱을 선택하여 그들로 인해 구제 사역을 맡기고자 제안을 모든 성도들이 기쁘게 수용합니다. 그동안 피해를 보았던 헬라파 유대인들도, 히브리파 유대인들도 사랑과 겸손으로 기쁘게 응답했습니다(5). 일곱 집사를 뽑는 일에 관하여는 열두 사도가 제안했지만, 실제적으로 일곱 집사 선출은 모든 성도들이 했습니다. 그 결과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성도들에 의해 선출된 일곱 집사들이 성출되었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였습니다. 일곱 집사의 이름은 놀랍게도 모두 헬라어 이름인 것으로 미루어 보아, 예루살렘 본토 출신보다는 디아스포라 출신을 중심으로 선출된 것입니다. 이들의 선출은 초대교회의 사역이 ‘헬라파 유대인들’의 모든 요구를 포용할 수 있는 사역을 할 수 있었습니다. 또 다른 하나님의 뜻은 예루살렘을 넘어서 전 세계로 흩어질 핍박의 날을 위해 교회의 사역자들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8:1-4). 그들은 헬라의 교육 받고 성장했기 때문에 어떤 이방 세계일지라도 언어와 훈련과 문화적인 면에서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스데반’과 ‘빌립’ 외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스데반’과 ‘빌립’의 이름이 먼저 언급된 이유는 6-8장에 전개될 그들의 전도활동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선출된 그들을 위해 안수함으로 최초의 집사들이 세워진 것입니다(6). 일꾼을 세움에 기도하고 안수하는 예식은 민수기 2:15-23에서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를 뽑을 때와 아주 흡사합니다. 안수를 하는 행위는 이 사역에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며, 기도는 성령의 능력이 그들에게 임하도록 하나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⑷ 지속적으로 성장한 교회(7)

일곱 집사가 세워지자 초대교회는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합니다. 이제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 사역에 전적으로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세움을 받은 일곱 집사들은 사역에 충성했습니다. 놀라운 열매가 맺어졌습니다. 그 결과를 짧게 요약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더 왕성하여’라고 소개합니다. 사도들이 본연의 기도와 말씀 사역에 전적으로 헌신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말씀이 왕성하도록 복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유례없이 제자의 수도 많아졌으며, 많은 제사장들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음을 기술합니다. 교회는 점점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초대 교회의 문제와 갈등을 세속적인 방법으로는 해결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다수의 폭력 그리고 인기투표식의 방법이 아닌, 모든 성도들이 합심하여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을 받는 사람들을 집사로 세웠습니다. 실질적으로 구제에 빠지고 있는 ‘헬라파 유대인들’을 위해 헬라파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집사를 세웠습니다. 이것은 성숙한 예루살렘 초대 교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는 더 강력한 하나님의 능력이 발휘하고 부흥과 성장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산헤드린 앞에 서게 된 스데반(8-15)

초대교회의 가장 큰 재산은 바로 사람들이었습니다. 열두 사도가 그렇고, 선출된 일곱 집사들이 그렇습니다. 이들은 정말로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이자, 본받을 만한 신앙의 모델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사명을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으로 충성스럽게 감당했습니다. 우리도 교회를 섬길 마음만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동일하게 각양 은사를 주실 것입니다. 스데반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겸손하게 교회를 섬기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8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9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 새 10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11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12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13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이르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14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15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8-15)

초대교회는 일곱 집사를 선출해 교회 내에 구제 사업을 맡기는 이야기를 소개했다면, 이 단락에서는 선출된 집사들이 맡은 사역에 대해 소개로 넘어갑니다. 그런데 누가는 정작 그들에게 맡겨진 사역을 소개하기보다 일곱 명 중 두 명인 ‘스데반’과 ‘빌립’의 사역을 소개합니다. 사역하는 과정에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박해(迫害)입니다. 성도들의 박해는 두려운 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⑴ 유대 지도자들과 논쟁한 스데반(8-9)

이제까지 사도들 중심으로 기사와 표적이 나타났습니다. 이제 대열에 사도가 아닌 평신도 지도자인 집사들도 등장합니다. 가장 먼저 ‘스데반’이 합류합니다. 누가의 관심은 구제 분야가 아니라 복음 증거 사역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강력한 복음 증거를 위해 일반적인 기대를 뛰어넘어 사용하셨습니다. 스데반의 복음 사역을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했다”(8)라고 소개합니다. 이 사역은 사도들과 동일한 연장선상에서 진행되었습니다. 때문에 사도들처럼 큰 기사와 표적을 행할 수 있었습니다(사도행전 2:43; 5:12; 6:8). 성령님이 이끄는 사역이 사도들의 범위를 넘어 신실한 평신도 지도자들에게까지 더 확장된 것입니다. 기존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은 교회를 핍박하면 그 세력이 힘을 잃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반대로 성령의 역사는 오히려 더 강력하게 확장되어 갔습니다. 하지만, 정작 스데반의 기사는 구체적으로 소개되지 않습니다. 그는 큰 기사와 이적을 행했습니다(8). 그러면서 ‘자유민들의 회당’에서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자유민들’라고 표현된, 아시아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 중심으로 모이는 회당에서, 즉, 헬라어를 사용하는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9). 당시 예루살렘에 약 480개 회당이 있었는데, 그 중에 디아스포라 출신 헬라 유대인 회당도 상당 수 있었습니다. ‘자유민들’의 회당은 각각 구레네, 알렉산드리아, 길리기아, 그리고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었습니다(9). 주후 10년경에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는 로마에서 모든 유대인들을 추방하였습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갔으며, 일부는 예루살렘에 살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통상적인 언어와 문화로 인해 그들은 함께 모였으며, 특히 예배드리는 곳, 즉 헬라파 출신 중심 회당에서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스데반도 기독교로 개종하기 전에 이 ‘자유민들’ 헬라파 회당 소속이었습니다. 그는 자신과 동일한 헬라파 유대교인들을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예수님이나 사도들과 동일하게 그는 병자들을 고쳐 주고 귀신을 내쫓는 기사를 행했던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해가 되는 일이 아니고 오히려 유익이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도 복음 전하셨을 때 그랬듯이(요 10:32), 또 베드로, 요한 등 사도들과 같이, 스데반 역시 ‘예수님 판박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 충만으로 기사와 표적을 행하실 때, 유대인들과 논쟁하시며 그 입을 다물게 하신 것처럼(눅 4-6장), 자유인라고 불린 헬라파 회원들은 스데반에게도 크게 격분하여 논쟁을 펼쳤습니다. 스데반의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연장선상에 있음을 간접적으로 증명해 보여준 것입니다.

⑵ 스데반을 고발한 유대인(10-14)

스데반은 자유인인 헬라파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사역을 하면서 설교를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 중에 일부 사람들이 스데반과 논쟁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외국에 사는 동안 그들은 그들의 유대 종교에 충실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는 그들과 종교에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스데반의 설교를 이해할 수 없고, 당연히 스데반을 반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헬라의 영향을 받아 철학이나 수사학적인 토론에 익숙했지만,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는 스데반에게는 능히 당할 수 없었습니다(10). 예상과 달리 스데반을 굴복시키지 못한 헬라파 유대인들은 분노에 휩싸였습니다. 그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지만, 스데반을 굴복시키기로 작정합니다. 비열하게 사람들을 은밀하게 선동하여 그를 대적하게 만들었습니다(11). 정당한 방법이 통하지 않으니 부정적인 방법을 동원합니다. 사람들을 돈으로 매수하여 거짓 증인으로 산헤드린 공회에 세워 고발합니다. 매수된 자들은 마치 스데반이 직접 한 말을 들은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그 결과 일반 백성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스데반에게 몰려왔습니다(12). 이 고소는 온 백성에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였는지 사람들이 몰려온 것으로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매수된 자들은 스데반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직접 들었다고 고소와 법정에서 거짓 증언을 했습니다(13). 그들이 스데반을 고발한 내용은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이르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14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13-14)입니다. 이 증언의 앞부분은 그들의 해석이고, 그 해석을 뒷받침하는 말로서 스데반이 말한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는 말은 직접 들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고발 내용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그들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레위기 24:11-16에 따르면,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고 저주하는 자는 돌로 쳐 죽이는 처벌을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둘째, 율법에 대한 모독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율법이란 서기관의 법, 즉 성경에 대한 모든 주석과 해석을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 나사렛 예수가 모세가 진해준 율법을 뜯어 고치겠다는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는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라는 표현을 통해 이러한 고발 내용들이 모두 거짓된 것임을 밝힙니다(13). 이 단락에서 소개하는 스데반 이야기는 사실 예루살렘 교회에 불어 닥친 박해의 절정에 해당하는 사건입니다. 4장에서는 베드로와 요한이 경고와 함께 풀려났고, 5장에서는 사도들이 채찍질을 맞고 석방되었습니다. 이제 스데반의 이야기는 그의 순교적 죽음으로 끝나게 될 것입니다(사도행전 7:60). 복음서에서 제자들이 성령의 도움과 지혜를 구하면 도와주시겠다는 예수의 약속을 기록한 바 있습니다(누가복음 12:12; 21:15). 그런데 이제 사도행전에서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라고 말합니다. 곧 예수님께서 하신 약속이 제자들의 삶에서 성취되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⑶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선 스데반(15)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모두 스데반을 주목했을 것입니다. 자기변호를 위해 공회 앞에 선 스데반의 모습을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둘러싸인 위대한 영적 교제의 사람이었습니다. ‘천사의 얼굴’과 같다고 묘사합니다. 이 표현은 당시로서는 아주 이례적입니다. 심문 받고 있는 스데반을 이렇게 묘사한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스데반을 다시 한 번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는 사람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스데반을 고소하는 자들의 얼굴과 대조적으로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았습니다. 이미 부활의 영광 가운데 계신 예수님을 그가 닮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비록 억울한 고소를 당해 고통을 받고 있지만, 표정만 보아도 진정한 승리자가 누구인지 확신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종교 지도자들과 백성의 지지를 얻어 스데반을 고소한 유대인들이 승리자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진정한 승리자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한 스데반이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정리해 보면, 스데반은 교회의 사역을 위해 세워진 일곱 집사 중에 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탁월하며 성령 충만한 복음 전도자였습니다. 또한 참된 신앙인으로 자신을 모함하는 세력 앞에서도 참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성령 충만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성령께서 참된 승리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사단이 틈 탄 갈등은 도리어 교회를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교회가 겸손하게 잘못을 인정했을 때, 교회는 자신의 연약함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이전보다 훨씬 더 단단하고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있었습니다. 가장 기본인 말씀과 기도로 교회가 돌아왔을 때, 갈등 대신 부흥이 찾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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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05-03)


꺾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열정

사도행전 5장 27-42절


성도들이 영적 전쟁을 할 때 홀로 서있는 느낌이 들 때가 많습니다. 사단은 이런 느낌을 악용해서 ‘네가 힘들 때 어느 누구도 돕지 않는다. 그러니까 포기해!’라고 조롱합니다. 하지만 포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임마누엘 되신 하나님께서 언제 어디서나 자기 백성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전쟁에서 성도들이 반드시 승리할 수 있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과 함께 하시므로 이미 승리한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영적 전쟁에서 담대하게 싸워 나가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사도들을 산헤드린 종교 재판장에 세웁니다. 재판을 받는 이유는 사도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호응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이런 사실이 종교 지도자들에게 더욱 시기 나게 해서 사도들을 당장 죽이려고 재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숨겨놓은 사람을 통해 그들이 풀려나도록 하십니다. 사도들은 중단하지 않고 이 능욕을 오히려 기뻐하며 계속적으로 중단하지 않고 복음을 전합니다.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27-32)

고난과 고통을 통해 우리에게 주는 많은 유익이 있습니다. 고난은 삶의 목적과 비전 그리고 믿음을 확고하게 만듭니다. 또한 각자에게 있는 믿음이 참과 거짓으로 분별됩니다. 고난과 위기 앞에서도 사도들은 사람의 권위보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겠다고 하는 위대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27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28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29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30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31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32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27-32)

 죽음 앞에서라면 담대한 증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일이 예수님의 명령으로 알고 순종했습니다(행 1:8). 성령을 체험한 사람들은 세상의 어떤 권세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훔 1:6). 사도들은 이미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의 권위보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어떤 권세의 위협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⑴ 대제사장의 심문(27-28)

사도들은 다시 산헤드린 공회에 서서 2차 심문을 받습니다. 공회원들은 사도들에게 그들이 사역한 기적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전한 예수님의 부활이 문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은 기적은 인정하지만, 부활의 복음은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들뿐만 아니라 성도들에게 사람들을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했던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제자들에게 심문한 내용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심문 내용은 전도 금지령에 관한 것이고(28a), 다음 심문은 예수의 죽음에 대한 자신들의 책임에 관한 것(28b)이었습니다. 첫째 심문에서는 대제사장은 사도들에게 심문하면서 1차 때에 주어졌던 복음 전도 금지령을 상기시킵니다. 금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런 일을 했는지 문책합니다. 대제사장은 훈계하면서 “이 이름으로”와 “이 사람의 피를”이라고 예수의 이름을 입에 담는 것조차 거부합니다. 그만큼 자신들에게 크나큰 골칫거리를 안겨주는 사도들과 그의 스승인 예수를 얼마나 증오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사도들이 담대하게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23,36)라고 전하면서, 예수를 죽인 책임은 로마제국만이 아니라 유대 지도자들과 모든 유대인들에게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하지만,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는 로마의 정치범으로 죽었는데, 예수에 대한 죽음의 책임을 자신들에게 돌린다고 비난합니다. 하지만 이미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자신들이 책임지겠다고,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마태복음 27:25)라고 장담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사도들이 책임을 지적하자 발끈합니다. 따라서 대제사장의 이와 같은 말의 배후에는 유대 지도자들이 이스라엘이 고대했던 메시아를 로마 당국과 공모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장본인이며,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마땅히 유대 지도자들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이었습니다.

⑵ 사도들의 답변(29-32)

제자들은 종교 지도자들의 억압에도 조금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전도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사도들과 예루살렘 교회는 더욱 힘썼습니다. 죽음이 무서워서 달아났던 제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에게 무서울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피고로 선 사도들은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의 위협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의 산헤드린 앞에서도 담대하게 전했습니다. 그들은 믿음의 선배들처럼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 받는 것을 기뻐했습니다(히브리서 11:26).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사도들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갈릴리 어부가 아닌 복음의 사역자로 변해 있었습니다.

① 사도들의 첫 반응(29)

먼저 베드로와 사도들은 담대하게 순종해야 할 대상은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29)고 합니다. 이 대답은 베드로가 1차 심문을 받을 때 했던 말과 맥을 같이 합니다(사도행전 4:19). 어떤 경우에도 인간의 권위보다도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첫 번째 순종의 대상은 언제나 하나님이십니다. 초대교회의 신앙은 사람의 말을 따르기보다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삶이었습니다(행 5:20-21).

② 사도들의 메시지(30-31)

대제사장의 두 번째 지적에 대해, 사도들은 짧지만 강력한 대답을 합니다. 자신들의 목숨을 주관할 수 있는 권력자들 앞에서 자신들을 변호하거나 변명하기 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데 집중합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저주 받은 자라는 의미로 십자가에 달아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신 21:22-23). 하지만 사도들은 직접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을 통해, 하나님의 우편에 앉힘으로써 만물의 통치자로 세우신 것이라고 담대하게 전했습니다. 직언도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라고 서슴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당연히 예수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십자가의 형벌을 받은 거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예수를 다시 살리셔서 그가 메시아이심을 확증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유대교의 저주 관념에서 ‘나무에 달아’(신 21:22-23)라고 소개하였습니다. 이것은 인류가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 짊어지신 대속의 의미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주인공은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지금까지 자신들이 행했던 기적적인 사역들과 구약의 기적들을 연결시켜 하나로 묶습니다. 그래서 구약에 여러 가지 기적적으로 역사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역을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③ 증인으로 삶(32)

사도들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구주로 세우신 일에 자신들이 증인이라고 선포합니다. 모든 삶으로 예수님께서 구주이심을 증거하는 사람이 증인입니다. 사도들의 사명은 증인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이것을 증거한 사역은 사도들과 예수님을 영접한 모든 사람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오순절 성령 임재하신 주된 이유도 ‘예수님께서 주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 해서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오직 사람들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사명을 따라 가겠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사람만 증거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증거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이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두려움 없이 단호하게 하나님의 사명을 선택합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일에 쉬지 않고 계속할 것이라고 고백하며,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순종하며, 자신들을 심문하는 현장을 복음 전파의 현장으로 만듭니다.

사도들의 담대한 변론은 모든 성도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동참한 사람들은 어느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되어야 합니다. 복음을 방해하는 대적들 앞에서도 두려워 할 것 없이 담대하게 증거 해야 합니다. 자신이 무기력해 보여 전할 말이 없는 것 같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을 통해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눅 12:12).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 담대하게 전파해야 합니다.

 

율법교사 가말리엘의 도움(33-39)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많은 어려움들이 있습니다. 어떤 때는 포기해야할 상황까지 처하는 경우가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라고 한다면, 그분은 반드시 그 뜻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그래서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때로는 돕는 사람들을 세우십니다.

33그들이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새 34바리새인 가말리엘은 율법교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깐 밖에 나가게 하고 35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지 조심하라 36이 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선전하매 사람이 약 사백 명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져 없어졌고 37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 38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 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39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33-39)

산헤드린 지도자들은 사도들의 전한 내용을 들었습니다. 대부분 이스라엘 백성들은 산헤드린 공회의 권위 앞에 두려워 떨면서 순복했습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하나님의 뜻을 받든다고 하면서 두려워하지도 않으며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⑴ 사도들을 죽이려는 산헤드린(33)

사도들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마음이 찔림을 받은 것과는 매우 대조적인 반응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화가 났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것처럼 사도들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실상은 산헤드린 공회의 결의에 순종하지 않으면 최고 형벌(刑罰)인 출교(黜敎)는 시킬 수 있어도 사형은 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분노는 불법에 불법을 더하는 것으로서 저들이 완악하고 강퍅한 심령을 가지고 있다는 단편적인 사실입니다. 그들의 분노는 하나님께 믿음의 제사를 드린 아벨을 향한 가인의 분노와 같습니다(창세기 4:5-8). 자신들의 분노를 살인까지 연결시키려 한 점들에서 동일했습니다.

⑵ 가멜리엘이 자제 요청(34-39)

분노한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사도들을 죽이려하자 하나님께서 숨겨둔 사람으로 하여금 역사하도록 합니다. 바로 바리새인이며 교법사(敎法師)인 가말리엘Gamaliel 을 인도하십니다. 모든 백성에게 존경받는 지도자입니다. 믿음이 있어서 사도들을 변호해 준 것이 아닙니다. 사두개인 중심으로 성급한 살해 결정에 제동을 걸었습니다. 사도들이 율법에 크게 어긴 일이 없었기 때문에 사도들을 처리할 때는 상식적이고 신중하게 일을 처리하려고 한 것 같습니다.

① 가말리엘의 등장(34-35)

가말리엘은 사도들을 공회 밖으로 보낸 후에 비공개로 공회원들에게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지 조심하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조언에는 고집불통 산헤드린의 분노를 완화시키고 사나운 박해를 저지시켰습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사도들이 하는 일이 사람의 조작으로 시작했으면 금방 무너질 것이고,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면 아무도 이를 무너뜨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② 가말리엘의 제안(36-37)

그는 역사의 두 인물을 예로 들었습니다. 첫 번째는 ‘드다Theudas’라는 사람의 경우를 들어서 설명해 나갑니다. 요세푸스는 ‘드다’라는 사람은 추측하기를 ‘맛디야’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그는 헤롯의 성전 기둥에 설치한 황금독수리 상을 파괴하고 동시에 폭동을 일으킨 사람으로 백성들이 잠시 현혹되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 체포되었고 화형을 당했던 사람입니다. 그가 사형되자 추종자들이 흩어졌습니다. 다음으로 갈릴리 ‘유다’에 대한 반란 사건에 설명입니다. 당시 아구스도 황제의 명령에 따라 과세 책정을 위해 호적을 정리했습니다. 유다는 가이사에게 세금을 수납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의 도리가 아니며 하나님께 반역하는 것이 된다고 역설하면서, 민족주의적 운동을 주도했습니다. 이 반란 또한 로마군에 의해 진압되었고, 그 추종자들도 흩어져 버렸습니다. 그의 논증은 지도자인 예수가 죽었기 때문에, 만일 사도들의 활동이 사람들의 조작(造作)에 의한 것이라면 ‘드다’와 ‘유다’의 경우처럼 결국 무산될 것이라는 생가하면서, 사도들을 석방(釋放)한다고 유대 사회가 혼돈스럽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③ 가말리엘의 조언(38-39)

가말리엘이 우려한 것은, 만약 사도들이 하나님께로 나왔다면, 사도들을 통해 이룬 사역에 대한 대적자들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그는 그럴 가망성이 있다고 본 것입니다. 바울의 스승 가말리엘이 변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유대교적인 사람을 통해 유대교를 이기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제자 바울이 나중에 회심할 것을 미리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이제 산헤드린 공회는 그의 말에 대해 옳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의 조언을 따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로마서 8:28). 하나님께서는 위기 속에서 가말리엘을 사용해서 사도들을 풀어 주십니다. 주님 뜻은 인간의 위협으로 무너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셨기 때문에 사도들이 풀려나는 기적을 체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로 풀러남(40-42)

운동선수들은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서는 많은 어려운 고비를 넘겨야 합니다. 땀만큼 성적은 맺게 되어 있습니다. 고난은 고통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고난 뒤에 더 큰 축복이 있습니다. 고난을 통한 축복의 가치를 알 때, 얼마든지 핍박과 능욕을 받을 수 있습니다.

40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41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42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40-42)

가말리엘의 제언에 산헤드린 공회원들 특히 사두개인들까지도 그의 말에 공감대를 형성하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법대로 불순종에 대해 태형(笞刑)으로 사도들을 처벌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태형의 최고형은 ‘사십에 하나를 감한 매’(신 25:3)를 가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 사도들에게 최고형으로 때리면서 그들에게 함구령(緘口令)을 내렸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산헤드린의 무법성과 야만성을 다시금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경고를 받았지만 사도들은 어디서나 예수의 복음을 전합니다. 고난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이 그들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태형으로 맞고 풀려난 사도들은 산헤드린 공회와 정반대로 기뻐합니다. 상식적인 것과는 다르게, 안전이 아니라 고난이 그들이 하나님의 증인이었음을 입증 합니다. 사도들이 당한 고난을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고난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감당할 수 있는 자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매우 기뻐합니다. 고난조차 기뻐하는 사도들의 모습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전적인 신뢰하는 것임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믿음은 어느 것으로도 막을 수 없습니다. 모두 다 고난은 싫어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에 대해 예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잡히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20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 21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를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라(요 15:20-21)

2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요 16:2)

이러한 예언은 대부분 성도들에게 달가운 약속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약속은 다른 예언만큼이나 확실하게 이루어졌으며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자신들이 당한 고난을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달갑게 받아 들린 것입니다.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동참한 것임을 생각하면서 반대로 감사합니다. 무서운 위협의 산헤드린의 함구령에도 불구하고 석방된 사도들은 날마다 성전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이 전한 복음의 핵심은 오직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요, 주가 되신다는 것을 전파했습니다. 이 사실을 전파하는데 자신의 목숨조차도 아깝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핍박과 협박을 받으면서도 사도들은 기뻐했습니다. 이렇게 고난을 받으면서도 기뻐할 수 있는 것은 복음의 가치와 천국에서 상급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미래에 주어질 영광을 기억하기에 복음을 위해 치르는 비용을 아까워하지 않은 것입니다(로마서 8:18). 감춰진 보화를 발견해 모든 재산을 팔아 밭을 산 것처럼 오히려 그 일이 기쁨이 되고 최우선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죽음과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쁘게 여기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거침없이 선포되어 전파되고 있습니다. 도도하게 흘러가는 말씀은 아무도 막을 수 없습니다. 이 흐름을 거역하지 말고, 흐름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사명을 감당하는 동안, 어려움과 괴로움까지도 하나님께서 감당할 수 있도록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어려운 일들에 대해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죽도록 충성한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주실 상급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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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05-02)


핍박에서도 진행된 하나님의 사역

사도행전 5장 12-26절


역사적으로 기독교는 동서고금에서 해방과 자유를 성취해 왔습니다. 다른 나라에게 억압 받던 나라에게 해방을 주었고, 노예와 같은 인격의 사각지대에 있던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진정한 목표가 해방과 자유뿐이라면, ‘생명의 종교’가 아니라 ‘이데올로기’로 전락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남아메리카 같은 경우에는 억압과 수탈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겠다고 하는 ‘해방신앙’이 태동합니다. 고통을 자신으로부터 찾기보다는 사회적인 구조악에서 찾으려고 하여 계급투쟁, 사회주의 혁명, 정치적 의식화 양상을 보이면서, 평화적인 방법보다 과격한 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합니다. 그 결과로 폭력성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하고, 국가는 더 혼란상태로 전락한 결과를 맺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폭력을 이용한 적이 없습니다. 본문에서는 폭력적으로 복음을 억압하려는 것을 볼 수 있지만, 하나님의 사역은 그것을 초월하여 나타납니다.

 

산헤드린 공회의 엄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의 사역을 통해 지속적으로 표적과 기사를 일으키십니다. 이에 시기로 가득한 사두개인들은 사도들을 다시 잡아 옥에 가둡니다. 그러나 다시 투옥된 사도들은 밤중에 주의 사자의 도움으로 다시 기적적으로 풀러나게 되고, 주의 사자의 지시대로 성전에서 말씀을 담대하게 전합니다.

 

사도들의 표적과 기사(12-16)

오늘날도 성도들에게 부활의 능력이 나타난다면, 그것이 물질적인 풍요나 육체적인 치유뿐만이 아닙니다. 성도들이 가지고 있던 세계관이 전격적으로 가치관이 변화가 일어난다면, 부족한 성도들을 통해서도 믿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할 수 있습니다.

12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13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14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15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누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의 그림자라도 누구에게 덮일까 바라고 16예루살렘 부근의 수많은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12-16)

본문은 사도행전 2장 42-47절과 4장 32-35절처럼 다음 단락과 연결하기 위해서 삽입된 누가의 요약에 해당합니다. 요약의 일부는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을 다시 요약 정리하는 기능을 수행하기도 합니다(12b-14). 이 본문의 주요 기능은 다음 단락을 소개하기에 앞서 왜 사두개인들이 시기로 가득하게 되었는지, 왜 사도들을 다시 잡아들이게 되었는지를 설명해주는 것입니다.

⑴ 사도들을 통한 많은 기적(12a)

사도들은 예루살렘에서 많은 기적과 기사를 행하고 있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하나님 나라가 점점 더 세상에 존재감을 분명히 들어내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로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왔습니다. 이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 기간하셨던 사역들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의 선포대로 살아서 하늘 보좌에서 다스리고 계심을 증명합니다.

⑵ 기적에 대한 세 가지 반응(12b-14)

본문에서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12) 소개합니다. 사도들의 기적 행함과 성도들의 솔로몬 행각 모임을 일종의 인과관계로 묶습니다. 하지만 원문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누가는 12a절에서 사도들이 산헤드린 공회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공개적으로 표적과 기사를 일으킴을 명료하게 기술하고(12a), 12b-14절에서 산헤드린 공회의 경고와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에 대한 서로 다른 세 가지 반응을 소개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① 믿는 사람들의 반응(12b)

예루살렘 성도들은 예전처럼 넓은 공간을 제공하는 솔로몬 행각에서 집회를 갖곤 했습니다(12b). 이렇게 공개적인 장소에서 집회를 알 수 없었던 것은, 아마 다락방 같은 곳에서 이렇게 많은 성도들을 수용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복음을 증언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공개적인 공간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성도들은 날마다 모였고, 한 마음과 한 뜻으로 모였습니다.

② 믿지 않는 사람들의 반응(13a)

예루살렘 사람들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그 나머지’(13)라고 표현합니다. 이들은 성도들을 보고 두려워합니다(13a). 성도들이 그들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성도들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이 두려워한 이유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영향 때문에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기득권 세력의 눈 밖에 나고 싶지는 않아서 성도들과 역기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③ 칭찬을 받는 성도들(13b-14)

또한, 세상은 성도들을 인정하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성도들이 자신의 소유를 팔아서 궁핍한 자들을 섬기는 사랑이나, 사도들이 병든 자들과 귀신 들린 자들을 회복시키는 능력을 보면, 예루살렘 사람들은 칭송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중에 많은 남자와 여자들이 그렇게 상종하지 않다가 점점 믿는 사람들의 무리 속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들어오면 지속적으로 주님을 믿고 따르게 됩니다(13b-14). 이것은 15-16절과 함께 사두개인들이 왜 시기가 가득하여 사도들을 다시 잡아들이게 되었는지(17-18) 그 원인을 제시해줍니다. 더 나아가서 사도행전 4장 30절의 제자들의 간구가 그대로 응답되었음을 보여주는 역할을 합니다.

⑶ 사도들의 치유 사역(15-16)

본문에서는 사도들, 특히 베드로의 치유 사역이 부각됩니다. 구체적으로 사도들의 기적과 표적의 사역은 믿는 사람의 수가 늘었을 뿐만 아니라 지리적으로도 예루살렘 전 지역까지 확대되고 있었습니다. 참 복음은 치유와 소생, 갱생과 부활의 에너지를 발산하였습니다. 형식주의로 각질화 되고 냉랭해진 유대교의 성전 체제를 근본적으로 세차게 뒤흔드는 사건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베드로의 그림자가 자신들의 몸에 덮여서라도 치유 받기를 기대합니다. 이것은 당시 고대인들이 그림자에 어떤 신비한 능력이 있다는 미신을 믿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누가는 베드로를 비롯한 초대교회가 그런 미신을 동일하게 믿었다고 말하기 위해 이 내용을 소개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 내용을 통해 베드로를 향한 사람들의 인기를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예루살렘 부근에 사는 사람들이 병든 자들과 귀신 들린 자들을 사도들에게 데리고 왔습니다. 이것은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이 아직 예루살렘에 남아서 복음 사역을 감당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그들은 차후 여러 지역을 돌며 순회 사역에 돌입합니다. 사도행전을 읽는 현대의 독자들은 초대교회의 행적에 대해 감동하며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누가는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할 때 그들의 복음에 대한 열정과 순종을 강조하면서도 항상 이 모든 행적의 배후에 하나님의 손이 있음을 잊지 않습니다. 12a절에서도 누가는 ‘사도들이 민간에 많은 표적과 기사를 일으켰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났다’고 기록합니다. 이 두 진술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전자는 사도들이 주동자인 반면, 후자는 비록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사도들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널리 전파되도록 하시는 하나님이 주동자인 셈입니다. 지금도 동일하게 개인과 공동체의 삶의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장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눈에 보이는 기적을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유휴 가운데서도 불의를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며 좁은 길도 마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반응(17-18)

언제나 성도들은 신앙생활하면서 안팎으로 어려움을 겪습니다. 어두움의 세력인 사단은 지금도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시도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들이 능력을 강력하게 나타날 때는 무력화(無力化)하려 시도하고, 능력 없이 무기력할 때는 조롱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어떤 환경에서든지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야만 흔들리지 않습니다.

17대제사장들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18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17-18)

사도들을 통해 ‘기적과 표적’이 예루살렘 안에서 나타났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제자들에게도 지속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 소식은 급속도로 예루살렘과 유다에 펴지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는 죽어있던 신앙에 생명을 공급해 주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살기 위해 새로운 영적 산소와 같은 복음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 동안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종교 지도자 역할을 했던 자들은, 자신 중심적인 방법이 아니므로 옳고 그름을 떠나서 무조건 반대하기 시작했습니다.

⑴ 지도자들의 시기(17)

누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부하는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을 몇몇 부류들을 거론합니다. 그중에 ‘대제사장’과 ‘사두개인의 당파’들을 있었다고 소개합니다. 그들은 그동안 예루살렘에서 종교적인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새롭게 급속도록 부상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향력은 그들에게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모두 시기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특히 ‘사두개인’을 기록한 것은 그들은 대제사장 가문에 속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종교적인 의사결정을 한 ‘산헤드린 공회’에서 수적으로도 우세해서, 예루살렘에서 그들의 종교적인 영향력은 대단했습니다. 그리고 유대교를 중심으로 한 유다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자들입니다. 그들의 신앙은 부활이나 천사와 같은 영적인 존재를 믿지 않았습니다. 본문으로 돌아와서, 그들의 마음은 편치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역자인 사도들을 투옥시킨 동기를 설명해주는 어구인데, 여기서 ‘시기’로 번역된 ‘젤로스’는 ‘질투’ 혹은 ‘시기’를 나타내기도 하고, 종교적 ‘열정’으로 나타내기도 합니다. 따라서 첫째, ‘그들이 시기로 가득하여서’로 번역할 수도 있고. 그리고 ‘그들의 종교적 열정이 발동하여’로도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전자가 하늘 높이 치솟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기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시기가 발동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동안 자신들의 유대교의 신앙과 전통을 지키기 위한 종교적 열심히 발동했던 것입니다. 종교적인 기득권으로 그 동안 잘 누려왔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등장은 자신들 누려온 신앙과 전통에 위협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들의 방법 외에는 어떤 것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⑵ 사도들을 투옥시킴(18)

예루살렘에 있던 종교 지도자들은 사도의 활동에 대해 위협을 느꼈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 동안 자신들을 향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도들이 일어남으로 배움도 없는 사도들을 향하는 것을 보면서, 경쟁심이 발동한 것입니다. 이제 종교 지도자들은 사도들을 가만히 두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감옥에 가두면 모든 것이 조용해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말씀까지도 가둘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결과적으로, 자신들의 범죄로 인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특히 예수의 부활도 없게 될 것이라고 어리석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다고 합니다.

 

풀어주시는 하나님의 능력(19-26)

다른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기사와 기적’만 보면 그것에만 부러워하고 의기소침한 성도들이 있습니다. 매우 짧고 소극적인 생각입니다. 넓게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역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나라를 이루어 가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큰 그림을 바라볼 때, 하나님의 능력이 모든 성도들에게 각각 자신의 달란트대로 나타날 것입니다.

19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이르되 20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21그들이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와서 공회와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을 다 모으고 사람을 옥에 보내어 사도들을 잡아오라 하니 22부하들이 가서 옥에서 사도들을 보지 못하고 돌아와 23이르되 우리가 보니 옥은 든든하게 잠기고 지키는 사람들이 문에 서 있으되 문을 열고 본즉 그 안에는 한 사람도 없더이다 하니 24성전 맡은 자와 제사장들이 이 말을 듣고 의혹하여 이 일이 어찌될까 하더니 25사람이 와서 알리되 보소서 옥에 가두었던 사람들이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더이다 하니 26성전 맡은 자가 부하들과 같이 가서 그들을 잡아왔으나 강제로 못함은 백성들이 돌로 칠까 두려워함이더라(19-26)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이 사도들을 자신의 힘으로 감옥에 투옥시켰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무력행사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하나님께서는 증명해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누가는 19-26절의 내용을 아주 유머러스하게 기술합니다.

⑴ 기적적으로 탈옥된 사도들(19)

당시 예루살렘에 있는 지하 감옥을 탈옥할 수 있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겹겹이 둘러싼 경비병들을 따돌리고 사도들이 다 빠져 나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죽음을 이기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능력인 것입니다. 이 사건 역시 하나님께서 배후에서 행하시는 기적으로 묘사합니다. 본문은 ‘주의 사자’라고 천사를 통한 하나님 자신의 개입하심을 소개합니다. 당시 사두개인들은 천사의 존재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천사를 통한 하나님의 개입은 그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⑵ 다시 사명을 받은 사도들(20)

하나님의 개입하심으로 사도들은 탈옥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사도들이 체포당했던 바로 성전으로 돌아가라고 하십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주의 사자가 안전하게 지켜주시거나 예루살렘을 떠나 도망치도록 도와야 하신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성전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생명의 말씀을 모든 백성에게 말하라는 지시를 받습니다(20). 이곳에서 ‘백성’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므로 ‘백성에게 말하라’는 말은 전도의 대상이 아직까지는 유대인들에게 국한되어 있음을 시사 합니다. 이 생명의 말씀은 구원을 주는 메시지입니다. 이 짧은 구절에 세 개의 명령어, 곧 ‘가서’, ‘서서’, ‘말하라’가 나옵니다. 이는 산헤드린 공회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이 구원의 메시지를 끈기와 담대함으로 전하라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나중에 보면, 사도들은 붙잡혀 혹독한 채찍형을 당합니다. 예수님의 생명 있는 사도들에게는 이제 감옥 안에 있던지 밖에 있든지 그것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축복은 자신의 어떤 처지에서든지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이 생명을 살리는 말씀을 전하려고, 쉬지도 않고 새벽에 성전으로 향했습니다.

⑶ 순종하는 사도들(21a)

옥에서 풀려나면 멀리 도망가서 숨으려 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지시를 말씀하신 바, 그대로 실행에 옮깁니다(21,26). 성령 충만한 자들의 모범이며 순종의 모습입니다. 밤에 천사에 의해 옥문이 열리고 사도들이 탈옥하는 기적이 너무나도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다는 점을 거론하며, 이 사건을 누가의 상상력에 의한 창작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간략한 서술이라 하여 저자의 순수한 창작이라 취급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누가가 이 사건을 자세하게 소개하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이와 유사한 사건이 나중에 다시 한 번 등장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야기의 중복을 피하기 위한 누가의 기획 의도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⑷ 새벽에 산헤드린 공회가 소집(21b-25)

유대인들에게 새벽은 바쁜 시간입니다. 그들은 동틀 무렵 경배하고 기도하려고 성전으로 올라왔습니다. 사도들을 가둔 지도자들은 아직까지 주의 사자가 한 일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재판하려고 밤새 가두어두었던 사도들을 잡아오라는 명령이 내려집니다(21b). 감옥에 가보고서야 감옥이 비어 있다는 것을 그들은 그때서야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여 무덤이 텅 비어 있었듯이, 사도들을 가두어놓은 감옥도 텅 빈 감옥이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도들이 투옥되었던 잠긴 채로 나왔기 때문에 옥문은 여전히 감겨 있었습니다. 옥문이 잠긴 채로 빠져 나오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의 부활의 몸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도들은 잠시라도 천사들을 통해 부활의 몸을 경험한 것입니다. 부활의 몸이었기 때문에, 경비병들이 잠자지 않고 서 있는 가운데, 무사히 빠져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감옥 문지기들은 아직까지 이 사실을 모르고 서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들을 데리려 갔던 사람들이 사도들이 사라진 사실을 보고합니다. 그러자 성전 맡은 자와 제사장들이 의혹하면서 “이 일이 어찌 될까?”(24)라고 합니다. 사도들의 탈옥이 성전 경비대원들의 방조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닌지 의심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다른 사람이 또 다른 보고를 합니다. 감옥에 가두었던 사람들이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친다는 보고가 들어옵니다(25).

⑸ 다시 잡힌 사도들(26)

사도들은 잡힐 것이 뻔한데, 순종하며 성전으로 갔습니다. 예루살렘 산헤드린 회의에서는 즉시 잡아오도록 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백성들 때문에 사도들을 함부로 다루지 못합니다. 사도들이 지도자들에게는 시기의 대상이지만, 백성들에게는 존경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모호하게 함부로 죽였지만, 사도들은 함부로 다룰 수 없었습니다. 이 사건 전반에 걸쳐서, 산헤드린 공회원들과 성전 경비대장, 경비대원들이 서로 우왕좌왕하는 모습과 이런 상황 속에서도 태연하게 대처하는 사도들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묘사합니다. 그러나 사도들이 감옥에 투옥되고, 다시 탈출되어지며, 그리고 다시 체포되어지는 사건을 통해, ‘탈출’은 하나님 말씀의 권능을 증명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하려는 목적으로 꼭 필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자유를 얻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유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창조하시고 다시 다스리시는 분에게 속하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살아갈 때 가능합니다. 진정한 진리 안에 거할 때 자유 할 수 있습니다. 자유 자체를 얻는다고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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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05-01)


거룩한 교회를 위한 헌신들

사도행전 4장 36절 - 5장 11절


예수 그리스도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기 때문에 거짓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거짓을 밥 먹듯 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거짓은 다른 거짓을 낳고, 점점 거짓이 사실처럼 됩니다. 점점 진리보다는 거짓으로 자신을 꾸미고 사는 것이 편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어두움의 자식들의 특징입니다. 하지만 빛이 어두움을 몰아낸 것처럼, 거짓은 진리 앞에서 힘을 잃습니다. 진리 안에 있으면 자연스럽게 거룩한 진리의 삶을 인도합니다. 신앙에 치명적인 요소는 위선과 거짓입니다. 위선과 거짓은 성도들에게 허영심(虛榮心)과 공명심(功名心)에 살도록 합니다. 그러므로 결국 거짓은 영원한 사망으로 인도합니다.

 

초대교회의 성령 충만한 성도들은 헌신적으로 변했습니다. 서로 물건을 통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에 바나바는 참된 헌신으로 재산을 내놓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사단의 거짓 헌신을 통해 비참한 죽음을 맛보게 됩니다.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교회는 성령충만으로 거룩해야할 것을 교훈합니다.

 

열납 되는 참된 헌신(36-37)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불안전함 때문에 두려워합니다. 안정적인 미래를 살려면 많은 물질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을 위해 물질을 모으는데 집착합니다. 하지만 성령 충만한 사람은 모든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맡깁니다. 그의 인도하심을 따라 평안하게 살아갑니다.

36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하니 37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36-37)

초대교회는 은혜스럽게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요셉Joseph도 있었습니다. 지중해 구브로Cyprus 출신이면서 레위 지파 사람이었습니다. 사도들은 그를 ‘바나바’Barnabas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많은 제사장들이 개종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을 것입니다(행 6:7). 그는 레위 지파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근처에 밭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레위인은 땅을 재산으로 소유할 수 없었습니다(민 18:20-24; 신 10:9). 그럼에도 레위인이 밭을 소유하다는 것은, 당시 얼마나 영적으로 타락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약속을 따라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성령 임재를 통해 많은 사람이 변화되었습니다. 바나바도 그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Zacchaeus 처럼 회복되었습니다. 그동안 자신만 위해 모으던 재산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당시 초대교회 다른 성도들을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변화된 삶은 주변 사람들에게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바나바에 대해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훌륭한 믿음을 가진 그이지만, 사도행전 11장 24절에서 간단하게 소개합니다. 원래 이름은 요셉인데 사도들이 ‘바나바’로 불렀는데, ‘위로의 아들’란 뜻입니다. 그는 성품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좋은 성품을 가진 사람에게 성령께서 임하니, 아주 아름다운 성도가 된 것입니다. 그는 변화되어 말씀대로 살길 원했습니다. 자신의 재산을 하나님께서 드렸고 또한 남은 인생을 수많은 영혼을 위해 복음을 증거하며 살았습니다. 그의 아름다움은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변화되는 사건에서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바울의 변화를 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바나바는 바울을 받아주었고, 다른 사람까지도 설득하였습니다(행 9:26-27). 후에는 바울과 함께 1차 전도 여행을 동참하게 됩니다(행 13:1-5). 평생 동안 이름도 빛도 없이 헌신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바나바의 헌신에 대해 소개하지 않습니다. 당시 바나바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물질적으로 헌신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바나바를 언급된 이유는 그가 얼마나 헌신적인 삶을 살았는지 단편적으로 보여 준 것입니다. 성경은 사람을 찬양하거나 미화하지 않습니다. 오직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만 돌리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시간과 재물이 필요합니다. 진정한 삶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보다 재물에만 집착합니다. 성령 충만하면 주인이신 하나님을 깨닫습니다. 바나바처럼 성령 충만한 삶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살아가야 합니다.

 

어두움이 가득한 그림자(1-2)

인생은 보이지 않는 전쟁터와 같다고 합니다. 특히 성도들은 삶의 전쟁뿐만 아니라 더 치열한 영적 전쟁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사역이 진행되는 곳에는 사단 또한 역사하여 강력하게 방해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거룩한 삶을 살길 원하시지만, 사단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리 떨어뜨려 놓고 죄악된 삶을 살도록 노력합니다.

1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2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1-2)

성령의 역사로 시작된 초대교회는 그 어느 시대의 교회보다 한마음 한뜻되었던 공동체였습니다. 그들은 서로의 물건을 통용하고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믿는 자 중에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던 공동체였습니다. 이런 초대교회는 은혜스러운 중에 잘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도행전 5장에 들어서 한 사건으로 분위기가 반전합니다. 모든 사람들을 긴장시키고 성장하던 교회에 급제동을 건 사건입니다.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 것은 아나니아Ananias와 삽비라Sapphira 부부입니다. 이 사건은 신약 성경 중에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 부부는 초대교회의 은혜스러운 분위기에 바나바처럼 자신의 밭을 팔아서, 그 값을 사도들 앞에 드렸습니다. 바나바에서 시작한 아름다운 나눔과 헌신이 다른 성도들에게 펴져 나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것을 나눈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지만,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은 드리고도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심각한 문제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아나니아 부부는 밭을 팔아서 드렸지만 전부를 드리지 않고 일부를 감추고 드렸습니다(2). 모두 드린 것처럼 속였습니다. 그들은 바나바와 같이 자신의 소유를 팔아 사도들에게 바침으로 가나안 이웃을 돕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그들의 마음에는 가난한 이웃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아니라 탐심과 그릇된 교만이 가득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나니아 부부는 자신의 소유를 전부를 드린 것처럼 행동하면서 자신들도 바나바와 같이 다른 성도들에게 인정과 존경 받고자 했던 것입니다. 전부를 드리긴 아깝고 다른 사람에게 칭송받고 싶다 보니, 그들 나름대로 방법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들은 사람을 속이는 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속이려는 것을 몰랐습니다. 모든 죄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짓는 것입니다. 어쩌면 아나니아는 재물을 ‘다’ 바치는 사람이 ‘큰’ 믿음이라고 착각했던 것입니다. 남들에게 인정받으려고 자신의 믿음을 부풀렸는지 모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실천하는 믿음입니다. 자신의 믿음을 부풀리는 것은 거만한 마음으로 성령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아나니아는 믿음 생활에 허세가 들어갔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재물을 드리는 데 많고 적음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초대교회에서 드린 것을 절대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믿음의 분량대로 하면 될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를 망치는 것은 불순한 동기를 가진 사람들 때문입니다. 교회 생활하면서 교회를 이용하여 재정적인 이익을 얻고자 하는 상인들, 세상에서는 아무런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모든 성도를 지배를 추구하는 권력 지향하는 사람, 모든 사람들이 자신만 애지중지하게 보살핌을 받고자 하는 자기중심적 사람, 거룩한 행위를 통해 사람들에게 주목받고 인정받길 원하는 명예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마지막 범주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적게 드리고 많은 칭찬을 받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거짓 헌신 속에 숨은 사단(3-10)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소한 것까지 합치면 평균 10분에 3번 이상은 거짓말한다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거짓말은 그 거짓말을 감추기 위해 또 다른 거짓말을 합니다. 계속 거짓말을 하다보면, 거짓이 진실인지 진실이 거짓인지 자신도 혼돈스럽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신이 하는 말이 진실이지 거짓말인지도 모르는 상황에 빠져 버립니다. 거짓말은 나중에는 죄책감도 없게 만들어 버립니다.

3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4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5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6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7세 시간쯤 지나 그의 아내가 그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8베드로가 이르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이르되 예 이것뿐이라 하더라 9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하니 10곧 그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의 남편 곁에 장사하니(3-10)

아나니아 부부는 존경 받는 바나바를 부러워했습니다. 그들도 바나바처럼 헌신해서 사람들에게 존경 받길 원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이 부부에게 헌금하라고 강요하지 않았는데, 스스로 결정해서 드린 것입니다. 그들의 시작한 동기가 무엇인지 자세하게는 알 수 없지만, 바나바처럼 나눔의 동기를 통해 칭송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나니아와 바나바의 헌신에는 차이점이 있었습니다. 바나바는 온전히 드렸지만, 아나니아 부부는 밭을 판매한 값에서 얼마를 감추었습니다. 이 부부는 좋은 일을 하려는 순간, 사단이 속에 들어갔습니다. 전부를 내놓기보다 적당히 내놓은 것처럼 속기로 작정 했습니다. 차라리 가만히 있는 것이 더 좋은 일이었습니다. 거짓된 헌신을 드린 것이 오히려 화를 불러일으킨 어리석은 일이 되었습니다. 그 부부는 일부를 숨긴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으려는 명예욕으로 앞섰습니다. 밭을 판돈을 만졌을 때 사단이 틈을 탔습니다. 현금을 보니,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모르는 땅값의 일부분을 적당한 선에서 들여도 된다고 착각했던 것입니다. 금액의 일부를 감추고 전부인 것처럼 속여 사도들의 발 앞에 드렸습니다. 드린 순간 모든 사람들은 매우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을 속일 수 있듯이 하나님을 속일 수 있으리라고 착각을 했던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자리에서 성령 충만함을 지켜야 합니다. 성령 충만이 변질되면 사단이 틈탑니다. 그리고 종교적인 형식적인 헌신되어 자기의 이를 자랑하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습니다.

아나니아 부부의 기대와는 달리, 성령으로 충만한 베드로는 이런 모든 사실을 간파하고 차단시켰습니다. 성령에 의해 베드로는 거짓말하는 아나니아를 책망합니다. 정말 심각하게 책망합니다.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3)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5)

베드로의 책망을 듣던 아나니아는 그 책망을 듣자 그 자리에서 엎어지고 말았습니다. 진리의 빛 앞에서 어두움은 쉽게 무너졌습니다. 거짓으로 진리를 속일 순 없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얼마를 감춘 사건은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누가가 사도행전을 기록하면서, ‘감추었다’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점령할 때, 아간Achan이 도둑질한 물건을 감추었을 때 사용한 단어는 칠십인경(LXX/Septuagint)에 나온 동일한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만큼 아간과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은 동일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간의 도둑질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패로 몰아갔습니다(수 7장). 이들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아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가나안 땅에 입성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공동체를 도둑질이라는 행동으로 첫 번째 물을 흐린 사람입니다. 또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지고 난 후, 첫 번째로 성령을 속이려고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죄에 대한 결과로 죽임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시는 분으로 행위의 목적을 보시는 분입니다. 아나니아가 밭을 판값의 일부를 감추고 전 재산을 바친 것처럼 속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우상화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나바가 모든 재산을 바치므로 사람들에 의해 칭송을 받았습니다. 아나니아 부부도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고 싶고, 대단한 믿음의 사람처럼 보이기 위함이었습니다. 3시간 쯤 지난 뒤에, 아나니아의 아내 삽비라가 남편에게 무슨 일이 생긴지도 모르고 나타났습니다. 또 다시 베드로가 그녀에게 “삽비라야, 땅 판 값이 이것 뿐이냐?”고 공범자(共犯者)인지를 물었습니다. 삽비라도 남편처럼 “네, 이것 뿐입니다. 이게 전부입니다.”라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 강퍅한 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베드로가 “너희가 어찌 함께 괴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드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곧 너를 메어내 가리라”고 말하자, 삽비라도 그 자리에서 영이 떠나고 말았습니다. 삽비라는 남편 아나니아가 땅을 판 돈의 일부를 감춘 사실을 알았지만, 남편과 똑같은 거짓말을 해서 똑같이 죽음에 이릅니다. 이들은 불의한 일을 꾀하고 하나님의 영을 시험하려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은 하나님에서 얼마나 많이 멀어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것입니다(출 17:1-2;신 6:16) . 이 부부의 거짓말은 삐뚤어지고, 이기적이고, 교회를 파괴시키는 크나 큰 죄악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초대교회를 순수하게 지키길 원했습니다. 거룩한 초대교회 안으로 마귀가 비집고 들어오는 틈새를 막아내길 원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기엔 안쓰러운 일이지만,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를 통해서 초대교회의 거룩성을 방어해내고 있습니다.

 

헌신에 대한 반응(11)

사람들은 하나님의 강한 능력을 요구하지만, 능력보다는 하나님의 마음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다보면 어느새 그분이 원하는 성품이 형성됩니다. 역경에 대한 인내력이 더 강해집니다.

11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11)

사도행전에서 ‘교회(敎會)’ 라는 단어가 첫 등장하는 말씀입니다. 교회 안에 성도들은 아나니아 부부에게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보고 듣는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교회 안에 죄가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하시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새로운 거룩한 바람이 일어났습니다. 복음 가진 성도가 흔들리지 않으면 더 큰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 일 후에도 사도들의 손을 통해 표적과 기사는 많이 일어났습니다. 남녀의 큰 무리가 믿고 주께로 나아왔습니다. 베드로를 통하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을 받는 사람들이 다 나음을 얻는 더 큰 응답이 왔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거룩해야 합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목격한 사람들이 두려워했던 것처럼, 우리들도 하나님의 교회를 향한 태도를 바르게 해야 합니다. 교회의 주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거룩한 자신의 교회에 거니시고 계십니다(계 2:1) . 그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교회를 보호하심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섬기는 교회가 거룩하길 위해 수고하시고 기도한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주신 거룩한 비전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이 시대는 교회들이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해 몸부림쳐야 합니다. 기도와 전도 그리고 예배의 불이 타올라야 합니다. 모이기를 힘쓰고, 기도에 힘쓰고, 전도에 힘써야 합니다. 이럴 때 우리 모두는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같이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지나친 개인적인 행동은 교회 공동체를 망치는 행동입니다. 성령을 시험하는 행동들은 교회 발전에 저해요인이 됩니다. 우리 모두 거룩한 교회로 만들어 갑시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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