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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16-01)


바울의 2차 선교 사역을 위한 준비

사도행전 15장 36절-16장 5절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일꾼들은 획일적이지 않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매우 다양합니다. 다양한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지으신 그대로 각자의 달란트를 따라 다양한 일꾼들을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은 주신 은사와 특성을 하나님 나라에 귀하게 쓰임 받아야 합니다.

 

  •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송한 유다와 실라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지만, 그들이 가져온 예루살렘 편지는 안디옥 교회를 거쳐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으로 전달되었습니다. 그 지역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면에서 모범적으로 보였던 안디옥 교회가 예상치 못한 아픔을 겪게 됩니다. 마가 요한의 일로 바울과 바나바가 서로 갈라선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결별(36-41)

 

하나님의 사역을 해나갈 때, 마음에 맞지 않으면 서로 결별하는 것도 좋습니다. 갈등이나 결별 자체가 문제를 안고 계속 불편한 상태로 지속하기보다는 서로 각자의 사명을 따라 분리되어 사역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반드시 같이해야 선한 것만은 아닙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가 안정을 찾아오자 2차 선교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36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37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38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39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40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41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36-41)

 

예루살렘에서 온 유다와 실라는 돌아가고, 안디옥 교회는 할례에 대한 문제가 해결되고 안정적으로 성장합니다. 얼마간 시간이 흘렀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상당한 기간을 머물면서 교회와 성도들을 세웠습니다(행 14:28). 바울은 바나바에게 자신들이 1차 선교 여행 때 세웠던 교회들과 형제들을 방문하여 돌아보고 양육하러 방문하자고 제안합니다. 즉, 2차 선교 여행을 준비하자고 요청합니다.

 

(1) 바울과 바나바의 결별(36-39)

 

하나님의 선한 사역임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발생합니다. 문제는 바나바가 그의 조카 마가 요한(골 4:10)을 동참시키자고 주장한 것으로부터 논쟁이 시작됩니다. 하지만 바울은 마가를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을까에 대해 신뢰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반대합니다.

 

바울이 다툼이 일어날 정도로 마가를 반대하게 된 이유는, 사도행전 13장에서 바울 일행이 선교 사역이 한참일 때로 돌아갑니다. 구브로 바보에서 밤빌리아를 통해 아시아 지역에 복음을 전하려고 할 때, 마가는 갑작스럽게 일방적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아마 그는 이 사역이 힘든 것을 생각했기 때문에 혼자만의 결정으로 돌아 가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생각에는, 마가가 동참하였다가 2차 선교 여행 도중에 어려운 일이 발생하면, 또 포기할 가망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지난번 마가의 당황스러운 행동이 선교 일행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일이 또 반복되면 선교 사역에 동력을 잃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마가를 동참시킬 수 없다고, 바나바는 한 번 실수는 용서하고 동참시키자고 사로 강력하게 주장한 것이 다툼으로 비화했을 것입니다.

39절의 ‘심히 다투었다’는 표현은 바울과 바나바가 도저히 의견 일치를 이루 수 없는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음을 의미합니다. 최후에는 더 이상 대화가 불가능한 상황에 이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계속해서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상대방과의 소통을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결과만 놓고 평가하지 않습니다. 결과와 과정을 모두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성숙함입니다.

 

아쉽게도 누가는 바울과 바나바 두 사람이 결별한 채 각자의 길을 갔다고만 기록합니다. 바나바는 자신의 고향 구브로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그의 행적은 더 이상 거론되지 않습니다. 먼 훗날 바울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마가를 향해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장면을 다른 성경의 기록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을 뿐입니다(딤후 4:11).

 

(2) 바울이 실라를 선택(40-41)

 

결국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과 맞는 동역자들을 선택한 후에 서로 다른 지역으로 선교여행을 떠납니다. 바울은 실라를, 바나바는 누가를 선택합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결별은 초대교회의 입장에서는 매우 안타까운 사건이지만, 누가는 이 사건에 크게 비중을 두지 않습니다.

오늘날 이 사건을 대하는 독자들에게는 상당히 당혹스러울 수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결별을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이 이야기를 통해서 몇 가지 교훈을 찾는 것도 유익하다고 생각됩니다. 첫째, 열정에는 어려움이 따른다는 점입니다. 만약에 바울이 선교지를 다시 방문하려는 열정이 없었다면, 바울과 바나바에게는 문제가 생길 이유가 없었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바울의 열정은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바울은 마가라는 실패자를 오랜 시간 바라보며 참아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충분히 예상되는 위험을 감수할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바울의 결정은 예상치 못한 또 다른 어려움에 직면했습니다. 바로 바나바의 결별 선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의 열정을 그다지 긍정적으로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열정은 어려움을 극복하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바울은 여러 가지 어려움들을 잘 극복하고 나중에는 인격적으로 성숙하게 됩니다.

둘째, 영적 훈련은 멈출 수 없다는 점입니다. 초대교회의 훌륭한 영적 지도자들이었던 두 사람 사이에 불화가 존재했다면, 일반 성도들로 이루어진 오늘날의 교회에서 신자들 상호간에는 불화가 발생할 가능성이 훨씬 높습니다. 성도들 사이에 불화가 생긴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특히 한 쪽의 일방적인 고집으로 인해 타협점을 찾는 것이 쉽지 않은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자 하다’라는 뜻을 가진 ‘에불레토’가 미완료시제인 것은 바나바가 계속해서 바울과 소통하려고 했던 흔적을 보여줍니다.

 

혹자는 바울과 바나바의 결별이 선교팀을 한 쌍에서 두 쌍으로 늘어나게 했기에 긍정적이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섭리하심을 통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결과적으로 바울의 사역은 성공적이었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40-41). 그렇더라도 공동체에서 발생한 분열을 정당화하기는 어렵습니다. 누가는 어느 누구의 편을 들지 않습니다. 누가의 이후 기록이 바울을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누가가 바울을 옹호했다고 보는 것은 무리입니다. 누가는 다만 지도자들의 분열과 연약함을 그대로 묘사하면서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구원에 초점을 맞출 뿐입니다. 이는 복음 전파가 사람의 능력과 재능에 따라 그 성패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임을 강조하려는 누가의 의도일 것입니다.

 

바울의 새로운 동역자 디모데(16:1-5)

사역자에는 따뜻한 가슴과 더불어 단호한 결단도 필요합니다. 진리의 문제는 양보할 수 없지만, 그 외 문제는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사역자에게는 일반 성도들보다는 좀 더 높은 기준을 가져야 합니다. 바울은 그런 부분에서 마가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런 기준에 맞는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만한 일꾼을 보내십니다.

 

1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2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3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4여러 성으로 다녀 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이 작정한 규례를 그들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5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가니라(1-5)

 

하나님의 사역을 진행하는 과정에 구성원은 매우 중요합니다. 바울은 많은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디모데를 선택하여 동역자로 세워갑니다. 이 단락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디모데가 바울의 선교팀에서 새로운 일원이 되는 것(1-3)과 바울의 선교팀이 예루살렘 교회의 결정을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들에게 전달한다는 것(4-5)입니다.

 

(1) 디모데를 선한 바울(1-3)

 

누가는 바울이 디모데를 선택한 이유를 형제들에게 칭찬을 받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기록합니다(2). 마가로 인해 바나바와 결별한 바울이 새로운 동역자의 기준으로 삼은 것이 ‘사람들의 평판’이었다는 점은 흥미롭습니다. 또한 그는 말씀으로 잘 교육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외할머니 로이스와 유대인 어머니 유니게에게 성경을 배웠던 사람입니다(딤후 1:5, 3:15). 성경을 기초해서 하나님의 복음을 확신 있게 증거 할 수 자질이 준비되었습니다.

특히 바울은 이방-그리스도인들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유대주의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디모데에게 할례를 시행하면서까지 그를 선교팀의 구성원으로 선택했다는 점은 아주 놀랍습니다. 이는 바울의 입장에서 검증된 사람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강했는지 알게 해주는 대목입니다. 바울은 선교사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측면에서 모험과 가능성을 우선적인 가치로 두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동역자로 디모데를 선택한 기준은 ‘검증된 사람’이었습니다. 마가와 관련한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일종의 트라우마가 생긴 것이라고 해석하기에는 바울의 행동이 충분히 납득되지 않습니다. 차라리 바울이 바나바와의 결별 사건을 기회로 삼아서 선교사 선발에 대한 객관적인 기준을 제시한다고 보는 것이 더 설득력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하게 합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이미 이방인이 하나님을 믿기로 작정했을 때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결정 한 봐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가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하게 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크게 두 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 선교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디모데가 평판이 좋았지만 그는 혼혈 유대인이었습니다. 더구나 할례를 받지 않았다면 다른 유대인들에게 그는 결코 유대인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의 회당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했던 바울의 선교 패턴을 고려했을 때, 디모데의 무할례는 적대적인 유대인들의 집중적인 공격 대상이 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바울은 선교 전략상 디모데가 할례를 받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할례의 시행 여부는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바울의 모습은 복음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의 고집과 생각을 버리고 조절할 수 있다는 유연성을 갖춘 선교사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둘째, 목양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무척이나 아꼈던 것 같습니다. 디모데가 차세대 지도자로 성장하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흔히 바울은 업무 중심적이었고 바나바는 사람 중심적이었다고 평가하지만, 적어도 디모데와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바울의 성품은 업무 중심적이지 않습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효율적으로 사역할 수 있도록 최대한 배려하였습니다. 무엇이 디모데에게 필요하고 유익한지 바울은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함으로써 그의 영적 부담을 덜어주려고 하였습니다. 결국 선교는 사람을 얻고 사람을 세우는 일입니다. 사람을 무시하거나 잃으면, 올바른 선교의 모습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2) 두 번째 갈라디아 교회 방문(4-5)

 

결론적으로 갈라디아의 교회를 방문했던 바울의 사역은 매우 성공적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정한 규례를 교회들에게 잘 전달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방문을 통해 교회들은 믿음에 더욱 굳건해졌고 성도들의 숫자가 날마다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질적 성장과 양적 성장이 동시에 일어나는 건강한 교회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바울의 갈라디아 지방 사역이 성공적이었던 이유는 그의 전략적 선택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요한 마가 대신에 검증된 일꾼 디모데를 선택한 전략, 디모데의 약점을 보완해주었던 전략이 주효한 것입니다. 비록 바나바와의 결별이 아쉬움으로 남게 되었지만, 바울은 성공적인 선교의 모델을 오늘날의 교회들에게 하나의 지침으로 제공합니다. 복음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검증된 사역자들, 그리고 실제적인 전략은 언제 어디서나 꼭 필요한 필승 조합입니다.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성향이 다르다고 믿음이 다른 것은 아닙니다. 스타일이 다르다고 다른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동일한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사람을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하십니다. 서로를 존중하고 상대방을 나보다 낫게 여기면서 하나님을 섬겨 나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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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15-03)


권위를 존중하는 공동체

사도행전 15장 22-35절


 

예루살렘 교회의 성숙함이 드러나는 본문입니다. 모교회로서 안디옥 교회에 찾아온 교리적인 혼선을 지혜롭게 해결하는데, 회의 결과를 통보하는 장면에서도 성숙함이 묻어납니다. 우리 교회도 이렇게 성숙하고 뭄위 있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 예루살렘 교회는 야고보의 제안을 한마음으로 받아들였고, 이 결정을 전달하기 위해 유다와 실라를 선택하여 안디옥으로 보냅니다. 이들은 특사의 자격으로 예루살렘 교회의 결정 사항이 담긴 편지를 가지고 수리아 지역의 교회들을 방문합니다. 안다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의 결정을 기쁨으로 받아들인다. 복음으로 인한 평안의 교제가 이루어지고 유대주의자들 때문에 어려웠던 안디옥 교회는 제자리를 찾습니다.

 

안디옥 교회에 대표자를 보냄(22)

살면서 판단하고 선택해야 하는 상황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진 가치관과 인생관에 따라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바로잡기 위해 시시비비를 가리기를 선합니다. 그러다 보면 관계는 깨지고 공동체는 혼란 가운데 분열됩니다. 왜 이와 같은 시도가 안 좋은 결과를 낳겠습니까? 사도들은 정죄보다 위로와 격려로 교회를 세워 갔습니다.

 

22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들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결정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22)

 

예루살렘 교회는 야보고의 제안인 이방인들에 대해 어떠한 유대인들과 구별 없이 받아 들리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을 안디옥 교회에게 전달하기 위해 사절단을 보내는 과정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사도행전 15:4은 바울과 그 일행이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고 기록합니다. 사도행전 15:6은 이방인의 율법 준수와 관련된 문제를 사도와 장로들이 중심이 되어 논의했다고 알려줍니다.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안디옥 교회로 보낼 사람을 선택하고 결정했음에 대해 언급합니다. 종합하면, 누가의 기록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의사결정 구조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알려줍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회중과 지도자의 역할이 잘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22절은 예루살렘 교회가 대표단을 선출하는 과정이 안디옥 교회가 선교사를 세워서 파송했던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는 사실을 알게 합니다. 이는 예루살렘 교회가 전체 회중의 의견을 최대한 수렴하려고 노력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를 논의함에 있어서 회중의 역할은 어느 정도 제한되고 있었다는 점 또한 흥미롭습니다. 23절에서 안디옥 교회로 편지를 보내는 주체는 사도와 장로로 제한됩니다. 이런 의사결정 구조를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이었습니까? 서로에 대한 신뢰가 그 바탕에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일반 회중이 지도자를 신뢰하지 못하거나 지도자의 권위에 순종하지 않으면 이러한 결정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반대로 지도자들이 회중을 존중하고 배려하지 않으면 진행하기 힘든 의사결정 구조입니다. 초대교회는 공동체의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갈등이 생겼을 때 그 갈등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알려줍니다. 각자의 역할에 충실했음을 보여줍니다. 교회의 아름다움은 여기에 있습니다. 부르심을 따라서 알맞게 순종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모일 때 교회는 본연의 모습을 갖게 됩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교회 안에서 영향력이 있는 인물들을 택하여 안디옥 교회로 보냅니다. 그곳에서 야고보의 권위를 사칭하는 자들을 상대하려면 인격적으로, 영적으로, 사회적으로도 준비된 지도자들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누가는 그들을 일컬어서 정확히 인도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22절에서 갑자기 새롭게 등장한 단어지만, 예루살렘 교회에서 영향력을 가진 사람을 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예루살렘 교회는 안디옥 교회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마무리 짓고 안디옥교회와 그곳의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려고 합니다. 이 일을 위해 인도자들 가운데서 사람들을 택하여 파송합니다.

 

이방인들을 향한 편지(23-29)

모세의 율법과 하례 문제를 두고 베드로와 야고보는 인간적, 정치적 판단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하나님의 뜻과 성령의 인도하였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찾아 문제를 해결한 것입니다. 그들이 표준으로 삼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3그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 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24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지시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하기로 25-26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며 우리가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노라 27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그들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 28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29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23-29)

 

유대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아직까지도 유대교처럼 할례와 율법 준수를 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주장에 대해 24절이 시사하고 있는 바는 매우 큽니다. 개역개정이 ‘마음을 혼란하게 하다’라고 번역한 구절의 원어적인 의미는 ‘영혼을 약탈하다’입니다. 이는 유대주의자들에 의한 공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어떤 의미에서 유대-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열심과 열정을 따라 복음을 이해하고 가르쳤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의 열정은 이방-그리스도인들이 영혼을 약탈당하는 것 같은 고통을 겪도록 만들었습니다. 진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어떤 태도로 사람들의 영혼에 접근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줍니다. 할례를 지키고 유대교 전통을 따르라는 요구가 큰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안디옥 교회와 유대주의자들의 논쟁은 얼마 되지 않은 초대교회의 기초를 뒤흔들 수도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24절은 누가가 유대주의자들의 위협에 대해 매우 강경한 어조로 책망하는 장면입니다.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지시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하기로.’

 

24-26절은 예루살렘 교회의 매우 성숙한 태도를 보여줍니다. 첫째, 형제 교회의 어려움이 자신들로 인한 것임을 알게 된 후에 예루살렘 교회가 보이는 태도는 매우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적어도 예루살렘 교회는 안디옥 교회에 대해 어느 정도의 책임감을 가졌던 것으로 보입니다(24). 둘째, 예루살렘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후하게 평가함으로써 안디옥 교회를 존중하고 있음을 충분히 보여줍니다. 바울과 바나바를 생명을 아끼지 않은 사람으로 묘사합니다(26). 셋째, 예루살렘 교회는 ‘만장일치’로 야고보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만장일치는 원어적인 표현이라기보다는 의역에 가깝습니다. ‘마음을 같이했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는 유대주의자들을 지지하는 소위 바리새파에 속한 유대-그리스도인들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회중이 야고보의 결정에 동의하고 따르기로 결정한 것은 참으로 성숙한 결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8절은 이런 성숙한 태도의 원인이 ‘성령’이심을 말한다. ‘성령과 우리’라는 표현에 주목해봅시다. 이는 그들이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성령이 역사하셨음에 대한 고백이기도 합니다. 물론 사도행전 15:6-21까지 진행된 회의의 진행과정에서 성령에 대한 언급이 전혀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독자의 입장에서 약간 당혹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성령이 이 모든 과정에 개입하여 함께하셨다고 선언합니다. 초대교회가 직면한 신학적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성령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이 있었고, 이에 대한 지도자들과 성도들의 순종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교회였다는 증거는 안디옥 교회를 배려하는 그들의 마음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28절의 요긴한 것들이라 부득이한 혹은 불가피한이란 의미입니다. 이는 예루살렘 교회가 안디옥 교회에 아무 짐도 지우지 않기를 원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안디옥 교회를 최대한 배려하고 있음을 알게 해줍니다. 비록 그늘이 네 가지 금지조항을 정해서 안디옥 교회에 전달했지만, 그것은 형제 된 안디옥의 그리스도인들을 배려하려는 의도였습니다. 금지 조항들은 적극적 인 요구사항이라기보다는 이방-그리스도인들의 부담을 최소화하는 동시에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다독여주는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편지를 받은 안디옥 교회(30-35)

잘못 적용된 말씀은 교회와 성도들에게 아픔이 되기도 하지만, 올바로 선포된 말씀은 교회를 하나 되게 하고 성도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회복시킵니다. 유대주의 그리스도인들로 어수선해진 초대교회가 예루살렘의 선한 결정으로 질서를 잡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결정된 결정문을 가지고 이방인 중심인 교회 안디옥교회로 내려가서 위로해 줍니다.

 

30그들이 작별하고 안디옥에 내려가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니 31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 32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 33얼마 있다가 평안히 가라는 전송을 형제들에게 받고 자기를 보내던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되 34(없음) 35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유하며 수다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니라(30-35)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송한 바울과 바나바, 유다와 실라는 안디옥에 도착합니다. 먼저 그들은 안디옥에 내려가 안디옥 그리스도인들에게 예루살렘에서 결정된 내용이 담긴 편지를 읽어 주었습니다. 오늘날처럼 통신이 발달되었다면 즉시 알았겠지만, 그런 상황도 아닌 데, 그 동안 안디옥 그리스도인들은 회의 결과를 얼마나 노심초사 기다리고 있었겠습니까! 아마 큰 병인 줄 알고 검진 받고, 담당 의사가 검진 결과를 발표해 주는 날 환자의 긴장보다 더 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회의 결과에 편지가 열릴 때, 그들은 숨이 머질 정도로 긴장했을 것입니다.

그 결과가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유대인과 동등하다는 결과가 읽혀지는 순간, 이 소식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뛸 듯이 기쁜 소식이 이었고,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31). 이제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데 용이하게 되었습니다. 이 결과의 편지는 안디옥을 거쳐 다른 수많은 이방 교회에게 전해질 것입니다.

 

누가는 예루살렘 교회가 보낸 편지를 안디옥 교회가 읽고 그것을 위로로 받아들였다고 기록합니다. 이런 해석은 몇 가지 의미를 갖습니다. 첫째, 예루살렘 교회가 우월적인 위치에서 안디옥 교회를 대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둘째, 비록 네 가지 금지 조항들에도 불구하고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이 옳지 않은 것으로 증명되었다는 점입니다. 셋째, 이 모든 과정이 안디옥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기쁨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32절은 어려움을 겪은 형제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유다와 실라는 ‘여러 말’로 안디옥의 형제들을 권면하고 굳게 하였습니다. 여기서 ‘여러 말’이란 하나님의 말씀, 즉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이 이루신 모든 사역을 의미할 것입니다.

누가는 유다와 실라를 ‘선지자’라고 소개합니다. 그의 부연 설명은 그들의 말이 단지 인간의 위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게 해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려움 가운데 있는 성도들의 마음을 견고하게 만듭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유대주의자들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던 안디옥의 그리스도인들을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했다는 사실은 시사한 바가 큽니다. 그들은 모든 사역을 마치고 파송된 예루살렘 교회로 돌아갑니다(33).

 

그리고 안디옥에 남은 바울과 바나바는 그곳에서 수다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계속해서 주의 말씀을 가르치고 전파합니다(35). 신학적인 걸림돌이 제거된 후 교회가 복음 전파에 힘을 얻었음을 보여 줍니다. 그들은 이제 이방인들에게도 유대인들과 동등하게 더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파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아름다운 교회와 성숙한 사도들로 빚어냅니다. 예루살렘 사도들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준 정직함과 겸손함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녹여주는 결과였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뜻을 바르고 정화하게 분별하며, 더욱 더 방황하는 형제들에게 위로를 전할 수 있는 성도로 더욱 성장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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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15-02)

 


새 시대를 여는 공동체의 결정

사도행전 15장 12-21절


 

요즘 네비게이션은 기능과 성능이 좋아서 길을 벗어나면, 바로 검색해서 새로운 길을 가르쳐 줍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업그레이드를 시키지 않으면 오래된 길을 가르쳐준 경우가 있습니다. 새로운 길로 가면 계속해서 끝까지 옛길만을 가르쳐줍니다. 많은 성도들이 오래된 네비게이션처럼 이러한 실수를 범합니다.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옛날 습관에 젖어서 자기 고집대로 잘못된 길을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새로운 조언을 해주면 싫어합니다. 하지만 지혜로운 성도들은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내려놓고, 항상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구하고 날마다 새로운 길을 따라 살아갑니다. 초대교회는 새로운 전기(轉機)를 마련해서 복음 사역의 넓은 길로 들어서고 있습니다. 바로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려야 하느냐는 문제였습니다.

 

 

  • 베드로의 연설 이후,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 앞에서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는지를 보고합니다. 교회는 잠잠히 그들의 보고를 들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야고보가 나섰습니다. 그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된 것이 선지자 아모스의 예언과 일치함을 강조합니다. 동시에 이방인들이 최소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불편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함으로써 이 논쟁을 끝내려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보고(12)

하나님 나라의 역사나 개인의 역사에서 빠져서는 안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에 대한 기억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하나님께서 순간순간마다 동행하고 일하시고 계시다는 임재의식과 동행의식이 꼭 필요합니다. 자신이 주인이 되어 행할 일에만 집중하고, 사람들의 찬사와 사람의 시선만 집중하면 하나님께서 소외되십니다.

 

12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듣더니(12)

 

앞에서 바리새파 그리스도인이 주장을 듣고 난 후, 베드로가 반박했습니다. 그에 대한 결론적으로 ‘10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11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고 책망했습니다.

 

베드로의 연설은 예루살렘 회중을 잠잠하게 만들었습니다. 본문에 청중들이 ‘가만히 있어’라는 의미는 ‘말하기를 멈추다’ 혹은 ‘침묵하다’라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논쟁적인 회중을 침묵하도록 만듭니다. 서로가 날카롭게 대립하는 심각한 논쟁에서 적절한 대응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논쟁 당사자들의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이후에 회중이 바울과 바나바의 간증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던 이유는 베드로의 연설 때문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연설에는 성령께서 역사한 일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이어 이제 바나바와 바울은 이 기회를 포착해서, 1차 선교여행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방인 가운데 성령께서 행하신 일들의 증거를 제시 합니다. 그것이 표적과 기사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기들로 말미암아’라고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행하신 사역을 보고합니다. 이러한 보고까지도 예루살렘 회의 참석자들은 모두 조용히 이 이야기를 경청하였습니다. 아마 바나바와 바울의 보고 중에는 유대인들이 얼마나 적대적이었으며 교만하고 악했는지에 대해서도 말했을 것입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방인들의 마음을 여시고 그들에게 복음의 능력을 나타내셨는지에 대해서도 보고했을 것입니다.

본문은 바울과 바나바의 간증과 보고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그들의 간증은 베드로의 간증과 거의 일치했을 것이며, 베드로가 이미 내린 결론에 대해 보충하는 역할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3장 이후로 유일하게 바나바의 이름을 바울 앞에 둡니다. 이는 아마도 예루살렘 교회에서 바나바의 위치와 영향력 때문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선교의 장벽을 허무는 것은 소통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 회의에서 ‘이방인 선교’를 보고합니다. 그리고 보고를 받은 유대인 성도들은 하나님이 이방인을 얼마나 아끼시는지 잘 알게 되었습니다. 소통하지 않으면 선교의 상승효과를 높일 수 없습니다. 어렵고 힘든 문제일수록 더욱 소상하게 공동체와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공동체와 함께 소통해야 할 선교 사역의 현안들은 무엇입니까?

 

야고보의 연설(13-21)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공동체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한 형제 공동체라는 의미는 서로 의견이 달리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근근거로 합의를 이루어가며, 서로 합의되어진 뜻은 서로 수용하고 협력해서 사역해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13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이르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14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것을 시므온이 말하였으니 15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일치하도다 기록된 바 16이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17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8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19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20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라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21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라 하더라 (13-21)

 

이 본문은 세 가지 장면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장면은 논쟁에 개인하는 야고보의 출현합니다. 야고보는 베드로의 연설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나타내면서 자신의 견해를 제시할 준비 합니다. 두 번째 장면은 야고보의 구약 인용이고, 세 번째 장면은 야고보가 첨예한 논쟁의 종지부를 찍으면서 결론을 내리는 부분입니다.

 

⑴ 베드로를 지지하는 야고보(13-14)

 

바나바와 바울의 보고가 끝나자 바로 예수님의 형제인 야고보 사도가 등장합니다. 그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비중 있는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예루살렘 박해가 심해서 사도들까지도 모두 피했을 때, 예루살렘 교회를 지키며 성도들을 양육하면서 지도자로 부상했을 것입니다. 그는 회의를 결론짓는 듯한 권위 있는 발언을 합니다.

 

야고보가 베드로의 연설 내용만을 언급하는 것은 매우 지혜로운 행동입니다. 예루살렘 교회 안에는 이방인들의 율법 준수와 관련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대척점(對蹠點)에 서 있는 성도들이 상당수 있었습니다(5). 게다가 바울과 바나바는 이 논쟁의 당사자들이었습니다.

 

야고보는 먼저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형제들아’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어떤 결론이 나더라도 형제 공동체라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논쟁의 당사자들을 직접적으로 지지하기보다 예수의 수제자로서 존경받는 베드로의 입장을 회중에게 상기시킵니다. 이는 다른 입장에 있는 성도들을 배려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교회의 지도자로서 최대한 중립적인 입장에 있음을 알리려는 행동으로 보입니다. 야고보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배려하여 매우 지혜롭게 행동합니다.

 

야고보는 고넬료 사건을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것’라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전에도 이방인은 구원을 받았지만, 초대교회에서 고넬료에게 성령이 임한 사건은 공식적으로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자기 백성으로 취하신 사건이었습니다. 이방인 중에서 늘 선택 받은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이제 이방인이 선택 받았습니다.

 

이방인이 선택 받은 이유는 ‘자기 이름을 위할’이라고 소개합니다. 즉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이방인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돌보셨다’는 ‘심방하였다’라고 직역할 수 있습니다. 고넬료 사건은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심방하신 사건입니다.

 

야고보가 이 문제를 어떤 관점에서 보고 있는지를 잘 설명해줍니다. 야고보는 회중에게 하나님이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장면을 떠올려보라고 도전하고 있습니다.

 

⑵ 구약을 인용한 야고보(15-18)

 

야고보는 베드로의 주장에 동의하면서 구약 아모스 9장 11-12절까지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이는 최종적인 결정에 앞서 성경의 권위에 호소하는 ‘엘람머비누’ 방식으로 보입니다.

 

11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 그것들의 틈을 막으며 그 허물어진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12그들이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아모스 9:11-12)

 

야고보는 베드로에게 일어난 사건들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약속의 성취임을 강조합니다.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참여하게 되는 것은 이미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하신 내용들이었습니다. 야고보는 구약을 인용함으로써 베드로의 경험과 자신의 결정이 성경과 일치하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야고보의 모습은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 속한 지도자의 자격입니다. 지도자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진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고 성경을 통해 문제를 해석하고 적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⑶ 야고보의 최종 제안(19-21)

 

마지막 부분에서 야고보는 자신의 의견을 정리하여 결론을 제시합니다. 야고보는 ‘내 의견에는’라고 말했지만, 단순히 자신의 생각만 말한 것이 아니라, 자신은 최종 결정권자는 아니었기 때문에 의견과 판결 사이에 강한 주장을 한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통해 초대교회 안에서 어떻게 리더십이 작동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나중에 사도들과 장로들이 서로 상의해서 결정하는 것을 보면, 어느 한 사람의 의견에 따라서 좌지우지 되는 상황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야고보나 베드로의 말이 권위 있게 다가오는 것은 보면, 누구나 인정하는 권위 체계는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영적인 리더십이 있어야만 공동체는 건강할 수 있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야고보의 결론은 베드로와 견해와 같습니다. 야고보의 지혜로운 표현은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19)라는 구절입니다. 야고보는 이방인들의 입교 시에 유대인의 전통을 요구하는 것을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히는 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고보는 어느 정도 절충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제시합니다. 또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만 위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상실감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적어도 비방인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준수할 네 가지를 준수하도록 제안 합니다. 그 네 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상숭배’와 ‘음행’, ‘목매어 죽인 것’과 ‘피 자체를 멀리할 것’입니다.

 

야고보가 요구한 네 가지의 금지 조항은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정결의식과 관련된 정체성의 문제였지만, 이방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야고보는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절충점을 찾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문을 활짝 열었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따라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요구됩니다. 따라서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당연히 지난날의 방식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야고보는 이 점을 분명히 했던 것입니다.

 

야고보의 금지 조항 네 가지가 윤리적 삶의 개선과 관계되어 있다는 분석은 야고보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더 정확히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우상숭배는 이방 신전에서 이루어졌고 음행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원인이었습니다. 또한 목매어 죽이는 방식의 도축으로 인해 피가 고기 안에 남아있던 당시의 풍습을 생각할 때, 피를 멀리하는 것은 적어도 동물에 대한 윤리적 소비를 요구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야고보의 제안은 이렇게 해석될 수 있다. ‘우상숭배, 음행, 살해를 삼가고 다른 사람들에게 받기 싫은 대접을 너도 다른 사람들에게 하지 말라.’ 야고보는 할례와 다른 유대교의 의식들을 지키는 대신에 윤리적 명령을 요구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삶의 방식에 있음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조건들이 자신을 우월하게 만들거나 다른 사람을 차별하고 정죄하는 이유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초대교회가 서로 다른 생각을 모아가는 과정을 보면서, 자신의 교회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교회는 서로 다른 생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실천하는 공동체입니다. 말씀이 분명하게 가르치는 것은 말씀을 통해, 말씀이 다루지 않는 것은 성숙한 회의를 통해, 주님의 뜻이 성취해 가야 합니다. 생각이 달라도 한 형제와 자매로 좋은 하나님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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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15-01)

 


갈등을 지혜롭게 극복한 초대교회

사도행전 15장 1-11절


 

교회는 성장하는 과정에서 많은 문제점들이 발생합니다. 외부적인 문제를 통해 합심하여 기도하면서 부흥의 기회로 삼습니다. 내부적인 문제는 스스로 감당 못하는 경우들을 볼 수 있습니다. 내부적인 어려움은 대부분 사사로운 것에 대한 다른 의견으로 시작하여 갈등으로 성장합니다. 갈등은 성장을 방해하는 것이 아닌가 잘못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잘 관리하면 해결 시키면 더 성장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숙한 교회는 갈등을 피하지 않고 인내하며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 나갑니다.

 

  • 사도행전 15장은 사도행전의 정중앙에 위치합니다. 구조적인 측면뿐 아니라 내용에 있어서도 중요합니다. 이 단락은 예루살렘 공회가 모이게 된 과정과 베드로의 연설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방인 신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모세의 율법을 준수해야 하는지에 대한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은 심각한 질문에 직면하게 됩니다.

 

유대주의자들의 도전(1-2)

 

이단은 물론이고, 교회 안에서도 예수님께서 그리스도 구속의 충족성과 완전성을 훼손하려는 주장들이 있습니다. 그 주장 중에는 교리의 옳고 그름보다 삶이 중요하다는 논리로 주장합니다. ‘관대함’을 요구하며 진리를 상대화하려는 시도가 끊이지 않습니다. 진리는 관용적으로 대할 수 없습니다. 오직 진리는 하나이기 때문에 타협할 수 없습니다.

 

1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2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1-2)

 

성공적이었던 1차 선교여행을 마친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안디옥 성도들을 모아서 하나님께서 함께 행하신 일들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였습니다(사도행전 14:27). 하지만 아직까지 구체적으로 이방인의 회심과 구원에 대해 예루살렘 교회에는 아직 보고하지 않는 상태였습니다. 안디옥에서 휴식을 취하며 충전하고 있을 때, 안디옥 교회 안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 했습니다. 교회가 확장되면서 예기치 못했던 문제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⑴ 구원에 대한 문제 제기(1)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많은 시간을 지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난 후에 안디옥 교회는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소위 ‘유대로부터 내려온 어떤 사람들’이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주장은 안디옥 교회에 심각한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도대체 그들의 정체에 대해 누구인지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여러 가지 견해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문맥을 통해 그들의 정체성에 관해 추정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먼저 이런 문제를 야기한 사람들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갈라디아서 2:4)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을 소위 이단들로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도 이들과 같은 의견을 가진 ‘어떤 믿는 사람들’, 즉 유대교를 믿다가 기독교로 회심한 자들일 것입니다. 비록 그들이 예루살렘 교회에 속해 있었고, 야고보 사도의 권위 아래 있는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인들(사도행전 15:24)이었다고 하더라도, 바울의 입장에서 그들은 거짓 형제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⑵ 구원에 대한 논쟁(2a)

 

유대에서 온 사람들은 동기와 의도의 진정성과 관계없이 그들의 행위가 복음을 왜곡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주장은 기독교는 유대교를 개혁한 것일 뿐 유대교를 버린 것이 아니고, 더 나가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방인들이 하나님 나라와 구성원이 되려면 유대인 밑으로 들어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의 엉터리 주장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격렬한 다툼과 토론을 벌렸습니다. 이 사실은 기독교의 근간을 흔드는 것이었기 때문에 한발도 물러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단호하게 맞섰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이 문제를 초대 교회 공동체 전체의 문제로 받아들였습니다.

 

⑶ 문제를 해결 방법(2b)

 

안디옥 교회는 매우 중요한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모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와 사도들 드리고 선배 장로들이 있었기 때문에, 함께 이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정합니다. 이로써 이 논쟁은 단순히 안디옥 교회만의 내부적 문제가 아니라, 초대교회 전체가 반드시 다루어야 하는 중요한 신학적 문제로 부각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안디옥 교회가 보여준 모습은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첫째, 안디옥교회는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수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복음의 핵심적 가치를 지키려는 수고를 기꺼이 감내하였습니다. 둘째, 안디옥 교회는 소위 유대주의자들로 밝혀진 사람들이 제기한 신학적 문제를 교회 공동체 전체의 논의를 통해 함께 해결하려고 시도하였습니다. 결코 교만하거나 독단적으로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충분히 자체적으로 이 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장로들의 권위를 존중하고 그들의 의견을 경청하려는 수용적인 자세를 보여주었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이런 모습은 교회 운영의 바람직한 모델을 제공합니다.

교회의 하나 됨은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자세에서 시작됩니다. 배려와 존중은 교회와 교회들 사이의 모임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어야 할 가치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함(3-5)

하나님의 일꾼들은 사역에 대해 할 말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자랑거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셨던 일들을 자랑하고 소개합니다. 그들은 소식을 전함으로 성도들에게는 뜨거운 열정을 전합니다. 이런 불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이어가실 것입니다. 바울도 가슴에 하나님의 뜨거운 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했던 것입니다.

 

3그들이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니며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4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5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3-5)

 

유대주의자들은 논쟁에서지지 않았습니다. 그들 위에는 유구한 역사와 전 세계 유대인들의 율법과 선전에 대한 일반인이 이해할 수 없는 헌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 또한 그들의 압박에 저항하고 전혀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여정(3)

 

바울과 안디옥 교회의 대표들이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여정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바울과 그 동료들은 남쪽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베니게와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길을 택합니다. 이 길은 안디옥에서 거의 일직선으로 예루살렘에 이르는 약 400km에 달하는 긴 여행길이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의 본질을 다루는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긴 여정의 중간에 바울과 그 일행들은 지나가는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을 방문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나누고 함께 기뻐하면서 그들을 격려합니다. 각 지역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 선교의 열매들(행 8:5-25; 11:19)이었기 때문에 바울 일행은 그들 역시 격려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3절에 ‘다니다’라는 뜻을 반복적으로 계속된 행위를 나타냅니다. 바울과 그 일행이 베니게와 사마리아 지역의 성도들을 만나기 위해 계속해서 돌아다녔음을 의미합니다. 바쁘고 힘든 여정 속에서, 특히 앞으로 신학적으로 골치 아픈 문제를 다룰 것인데, 그 영적인 긴장감 속에서도 바울은 목회자의 면모를 잃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⑵ 예루살렘에 도착(4)

 

드디어 바울과 일행은 예루살렘에 도착합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과 장로들과 함께 문안하면서 그 동안 있었던 사역의 보자기를 풀어놓습니다. 바울과 일행은 각자 자신의 의견을 예루살렘 교회 앞에 의견을 제시합니다. 바울과 그 일행들에게는 이방-그리스도인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보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으로 충분하다는 자신들의 믿음과 확신이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님을 한 번 더 확인하는 시간이 되었을 것입니다. 비록 유대-그리스도인들이 요구하는 조건을 충족하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⑶ 반대자들의 반론(5)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따라 사는 사람에게는 환대와 냉대가 교차합니다. 백성이 된 성도들과 이 동역자들의 만남은 양쪽 모두에게 큰 위로와 소망이 되었을 것입니다. 특히 예루살렘에서 환대와 냉대를 동시에 맛보아야 했던 것입니다.

 

바울 일행이 예루살렘 교회 앞에서 그 동안 이방인 지역에서 있었던 사역을 보고한 후에, 개종해지만 아직까지 유대교의 떼를 벗지 못한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반론을 제기합니다.

 

공동체의 사랑의 연합은 그 삶을 살아가게 하는 중요한 원동력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삶을 배우고 훈련해야 합니다. 갈라디아 교회를 향한 바울의 교훈인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 5:15)는 말씀을 다시 떠올리게 됩니다.

 

베드로의 연설(6-11)

초대교회는 거짓된 가르침과 교리에 맞서 훌륭한 싸움을 하였습니다. 사도들은 거짓된 가르침에 조금도 미혹되지 않고 복음 위에 교회를 굳게 세웠습니다. 그들은 복음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좇았습니다. 날마다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좇아갑니다.

 

6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7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8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9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10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11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6-11)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은 양 측의 주장을 듣고 모였습니다. 이 모임을 후대 사람들은 ‘예루살렘 회의’ 또는 ‘예루살렘 공회’라고 말합니다. 이 단락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과 장로들이 의논하는 장면, 그리고 베드로의 연설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눌 수 있습니다.

 

⑴ 예루살렘 공회의 모임(6)

 

먼저 예루살렘 교회가 이 문제를 얼마나 진지하게 다루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사도와 장로들이 모여서 의논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이 함께 모여 머리를 맞댄 것입니다. ‘사도와 장로들’에 대한 언급은 2절과 4절과 6절에 연이어 나옵니다. 4절에는 바울과 그 일행을 환영하는 상황에서 ‘교회’가 함께 언급되고 있지만, 2절과 6절에는 교회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이는 이방인들의 입교에 대한 문제를 교회의 지도자들이 먼저 논의했음을 보여줍니다. 반면에 바울의 일행을 환영할 때는 온 교회가 동참한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역할 분담이 잘 되고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모두가 함께 해야 할 일과 지도자들이 해야 할 일을 분명히 구분한 것입니다.

 

⑵ 베드로의 연설(7-11)

 

이처럼 베드로는 고넬료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선 자신을 따로 선택하셔서 복음을 전하게 했는지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베드로 연설의 첫 번째 부분이며(7-9), 여기에는 그의 경험에 대한 진술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는 이방인들에게 유대교의 율법을 요구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데, 그 이유를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원하는 하나님의 도구로 자신이 사용된 경험 때문입니다. 그는 이것이 하나님의 오랜 계획 가운데 이루어진 일이라고 합니다. 바울도 자신을 이방인의 사도로 표현하였지만, 베드로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이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신다고 확신한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이방인들도 구원하기 원하신다는 사실을 성령의 임재를 통해 확인하였습니다.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이 임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과도 함께하신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차별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이방인들의 회심은 하나님이 주도하신 일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듣게 하셨으니 아무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는 것이 베드로의 결론입니다.

다음으로 베드로는 자신의 논지를 더욱 강력하게 전개합니다(10-11). 이방인들에게 다시 율법 준수를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며, 유대인들도 메지 못하는 멍에를 지우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베드로 연설의 요지는 구원이 오직 예수 그리스로의 은혜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이제 율법과 복음은 양립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초대교회는 서로 다른 의견들을 조율해 가는 모습을 통해서 성숙한 성도와 교회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영적 성숙함이란 예배 시간과 더불어 회의 시간에 자주 들어납니다. 서로 의견이 다를 때, 자신의 의견만 최고라고 충돌하지 않습니다. 서로를 존중하며 함께 하나님의 뜻을 최우선으로 찾아갑니다. 이렇게 성숙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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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14-02)


1차 선교 여행을 마친 바울

사도행전 14장 19-28절


 

텔레비전 ‘안녕하세요?’라는 프로그램에 결혼한 젊은 여성이 출현한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녀는 결혼해 자녀를 낳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모든 일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남편에게 모든 것을 물어야만 일을 해나갈 수 있었습니다. 아마 성장할 때, 주변 사람들이 모두 해주어서 스스로 할 수 없었던 ‘결정 장애’로 성장한 것입니다. 복음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성숙시킵니다. 마치 한 알의 씨앗과 같습니다. 이 씨앗이 땅에 떨어지면 싹을 내고 자라서 큰 나무로 자라고, 성장한 나무는 시절을 따라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습니다. 이처럼 복음의 씨앗이 심령 안에 떨어지면 그 사람을 성장시키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도록 성장시킵니다.

 

 

  •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선교여행은 이제 마무리 단계에 접어듭니다.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아 거의 죽을 뻔한 일도 있었지만, 복음 전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울과 바나바는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고 교회를 든든히 세우는 일에 헌신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안디옥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유대인들의 원정 핍박(19-21a)

 

하나님 나라가 확장하면 할수록 사단의 왕국이 무너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단은 하나님의 복음이 확장되어 가는 것을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복음이 전파되지 못하도록 방해를 합니다. 때로는 유혹으로 또 때로는 폭력으로 방해하지만, 절대로 복음은 멈추지 않습니다.

 

19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20제자들이 둘어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21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19-21a)

 

본문에서는 선교 현장에서 만날 수 있는 극적인 장면을 보여줍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열광하던 무리들이 급변하여 바울을 향해 돌을 던진 모습을 소개합니다. 다음 장에 있는 지도는 바울 일행의 1차 전도 여행 과정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⑴ 돌에 맞아 죽은 바울(19)

 

바울 일행들이 복음을 전하자 루스드라 사람들이 복음을 잘 이해했겠습니까? 그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대대적으로 열광했던 것만큼 하나님을 열광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또한 바울과 바나바의 복음 전파를 집요하게 추격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루스드라에는 유대인들이 그렇게 많은 살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바울을 핍박하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안디옥과 이고니온에 살던 유대인들이 루스드라에 있는 바울 일행을 찾아왔습니다.

 

유대인들이 루스드라까지 찾아온 것은 바울이 전한 복음은 유대교를 흔들 만큼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그들을 바울 일행을 가만히 두면 유대교가 위태로울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안디옥과 이고니온에 온 유대인들은 루스드라 시민들에게 유대인뿐만이 아니라 이방인들까지도 충동질을 했습니다. 어떤 방법으로 했는지 자세하게 나와 있지는 않지만, 아무튼 사람들을 성공적으로 현혹시켰습니다. 아마 바울을 박해할 때, 간섭하지 말라고 설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들이 이미 이고니온에서 바울과 바나바를 돌로 쳐 죽이려고 계획했다가 실패했었습니다(5). 먼 이곳까지 달려온 것은 사전에 철저하게 준비하며 각오를 다졌을 것입니다. 전에 실패한 일을 성사시키려 왔습니다.

 

결국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은 바울을 돌로 쳐 죽인데 성공했습니다(19). 이것은 사법적인 형벌을 받은 것이 아니라 불법적인 형벌이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신으로 추앙하던 사람을 오늘은 돌을 던지고 있습니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미리 빼돌리지 않으셨습니다. 스데반이 돌아 맞아 죽을 때 외면하셨던 하나님, 그 자리에 있었던 바울, 바울은 스데반을 향해 돌을 하나쯤은 던졌을 것입니다. 이제 바울이 동족 유대인들에게 돌을 맞고 있습니다. 단순히 경고하려고 던진 돌이 아니라 죽이려고 작정하고 던진 돌이었습니다.

얼마나 심하게 맞았던지 이미 죽은 줄 착각하고 성 밖으로 끌어냈습니다. 이전에 바울 자신도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해서 끌어냈습니다. 마치 스데반 집사가 거짓 증인들에 의해 성 밖으로 끌려가 돌에 맞아 죽은 사건을 본 듯합니다(사도행전 7:58). 이제 바울도 죽도록 맞은 후, 죽은 줄 알고 밖으로 끌려 나갔습니다. 다시 한 번 예수님의 십자가의 삶에 동참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보호하십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 모두가 바울처럼 돌에 맞는 것도 아니고, 혹 돌에 맞는 것과 같은 핍박을 받더라도 바울처럼 모두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경험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바울의 생명을 지켜주신 것으로 해석합니다(19).

만약 유대인 대적자들이 죽은 것으로 착각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바울은 정말로 죽음에 이르렀을 수도 있는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을 사용하셨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바울을 육체적 고통과 아픔으로부터 벗어나게 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분명히 바울은 육체적 고통에 몸부림쳤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을 돌로 칠 만큼 미워했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대해 적개심을 품은 것입니다.

 

바울에 대한 유대인들의 적개심이 극에 달했음을 알려줍니다. 이런 상황은 회심하기 전 바울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유대인들이 보여주는 적개심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다메섹까지 쫓아갔던 바울의 잘못된 열심과 거의 흡사합니다(사도행전 9:1-2). 적대적인 유대인들의 잘못된 열심으로 인해 돌에 맞아 죽음의 문턱까지 갔을 때, 바울은 어떤 생각을 했겠습니까? 끔찍했던 바울의 경험은 바울의 소명 의식을 더욱 강하게 했을 것입니다.

 

⑵ 회복된 바울 다시 루스드라(20)

 

사도 바울을 수습해준 것은 제자들이었습니다. 사람들에 의해 죽은 줄 알고 던져진 바울을 제자들은 극진하게 간호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깨어나길 위해 간절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이곳에서 ‘제자’라는 표현은 이미 루스드라에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생겼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돌을 맞을 때는 나서지 못할 만큼 소수였습니다. 하지만 바울을 극진히 간호하자 바울이 일어났습니다. ‘일어났다’는 것은 죽었던 바울이 부활한 것같이 그의 행동을 묘사합니다.

 

기력을 회복한 바울은 놀랍게도 다시 루스드라 성으로 들어갔다고 소개합니다(20). 루스드라 성에는 그가 마무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바울의 결정은 무모해 보입니다. 아마도 바울은 밤중에 조용히 루스드라로 돌아간 것으로 보입니다.

죽음의 위협이 남아 있지만, 반대로 돌아봐야할 성도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비록 죽음을 면하기는 했지만, 형제들의 도움이 절실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죽으면 죽이라는 각오로 복음 사역에 헌신했던 것입니다. 그가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사도행전 20:24)라고 고백한 것과 맥락을 같이 합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바울이 돌에 맞아 죽을 상황에 놓였는데 바나바는 무사했다는 사실입니다. 왜 바나나가 핍박과 돌에 맞음을 피할 수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앞장서서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주된 목표가 되었을 가능성도 있고, 유대인들이 바울을 공격했을 당시에 바나바가 그 장소에 없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⑶ 더베에서 복음 사역(21a)

 

바울의 복음 사역에 대한 열정은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루스드라에서 사역을 마친 후,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떠났습니다. 아마 돌에 맞은 상처가 온전하게 낫지 못한 상태로 떠나갔을 것입니다.

 

바울 일행이 도착한 더베에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7). 이곳에서의 사역은 다행히 박해가 없었던 것으로 기록합니다. 아마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루스드라로 찾아왔던 유대인들은 바울이 죽은 줄 알고 돌아갔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곳에서 바울 일행의 복음 사역은 성공적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했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어느 누가 바울의 열정을 막을 수 있었겠습니까? 바울은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온몸이 불타오른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런 바울도 바나바가 필요했습니다. 바나바는 바울의 좋은 위로자요 동역자였을 것입니다. 바나바는 돌에 맞아 육체적으로 힘들어하는 바울을 도왔을 것이며, 거절당하는 아픔과 수모를 겪은 바울에게 분명 따뜻한 위로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동역하는 선교의 아름다운 모델이 된다. 하나님도 삼위가 함께 서로 동역하십니다. 독불장군처럼 어느 누구의 도움도 필요치 않다고 거절하는 것은 좋은 선교의 모델이 될 수 없습니다. 바울의 아픔과 고통에 바나바가 좋은 위로자와 동역자가 되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함께 세워가는 것입니다.

 

선교지 다시 방문(21b-23)

복음은 그 복음의 능력을 체험한 사람들에게 더 강력한 능력으로 작용합니다. 그 체험된 능력은 복음의 메시지로 확신 가득 찬 능력으로 역사합니다. 그러한 메시지가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키며 강력하게 전달되어집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의 능력을 체험해야 합니다. 그러면 능력 있는 복음자가 될 것입니다.

 

21…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22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23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21-23)

 

이 본문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바울과 바나바가 새로 태어난 교회들을 돌보는 내용(21-22), 교회의 지도자들을 세우는 장면(23), 그리고 바울과 바나바가 다시 수리아의 안디옥으로 돌아가는 내용(24-28)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⑴ 새로운 교회들을 돌봄(21b-22)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다시 돌아가는 부분입니다. 이 도시들에는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했던 사람들이 여전히 건재했을 것입니다. 특히 루스드라에서 바울은 돌에 맞아 죽을 뻔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과 바나바는 새로 태어난 교회를 돕기 원했고, 그 도시들의 제자들을 방문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의 안위보다 새로 태어난 교회가 견고하게 세워지는 것에 더 관심을 기울인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신생 교회의 제자들을 어떻게 도왔는지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①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함

‘굳게 하다’는 사도행전에만 나온데(15:32,41; 18:23), ‘용기를 북돋아주다’, ‘격려하다’라는 뜻으로 모두 교회를 견고하게 하고 사람의 마음을 확고하게 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바울이 당한 핍박에 대한 소식은 제자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요하는 제자들의 마음을 바울은 굳게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죽음의 상황을 벗어났던 바울의 격려는 제자들에게 큰 위로와 도전이 되었을 것입니다.

 

②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고 권고

새로운 신자들에게는 믿음 안에 견고하게 남아있는 것이 요구되었습니다. ‘머물다’라는 표현은 요한복음 15:1-7을 생각나게 합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머물다’라는 신약성경에서 22절을 포함해 4회 나타납니다. (εμμε vo)는 신약성경에서 22절을 포함해 4회 나타납니다(행 14:22; 28:30; 갈 3:10; 히 8:9). 지속적으로 한 장소에 꾸준히 머물러 있는 상태를 묘사하는 단어입니다. 믿음이 가지는 꾸준함과 지속성을 바울이 강조한 것입니다. 믿음은 순간적 혹은 일시적인 열정이 아니다 끝까지 머물러 있는 신앙을 가지는 것이 믿음입니다.

 

③ 환난에 대해 경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 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바울과 바나바는 이 구절에서 복음에 뒤따르는 환난의 필연성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많은 환난을 통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고난과 환난을 통과해야만 비로소 주어지는 선택적 복이라는 점을 깨닫게 하고 있습니다. 은혜는 선물이지만 하나님 나라는 거저 주어지지 않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인내를 통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으로 준비되기 때문입니다.

 

⑵ 교회의 지도자들을 세움(23)

 

사실 바울과 바나바가 초신자들에게 믿음에 대한 요구를 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에게는 그들을 구체적으로 도울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습니다. 바울은 그 일을 위해 장로들을 택하여 세웁니다. 바울이 장로를 택한 방식은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로부터 따로 세움을 받았던 방식과 동일합니다. 바로 기도와 금식입니다. 어쩌면 이 방식은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회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성도들로 구성된 공동체에서 신뢰할 만한 지도자를 세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바울과 바나바는 이 일을 위해 금식하며 기도했고, 최종적으로는 그들을 주께 위탁했습니다. ‘위탁하다’는 ‘다른 사람 앞에 누군가를 세우다’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사도행전에서 이 단어는 모두 4회 나타납니다(행 14:23: 16:34: 17:3; 20:32), 이 단어는 바울이 에베소의 장로들을 주의 말씀에 부탁하는 장면에서도 사용되었습니다. 교회의 주인 되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1차 선교 여행 마무리(24-28)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연약해 보이는 지도자를 세워 교회를 돌보시고 인도하십니다. 경험이 적어보이는 교회의 불완전한 지도들을 통해 자신의 교회를 온전하게 하십니다. 이 믿음이 있었기에 바울과 바나바는 장로들을 주께 맡기고, 자신들이 세운 교회를 가슴에 품고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습니다.

 

24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서 밤빌리아에 이르러 25말씀을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26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 곳은 두 사도가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27그들이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고 28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24-28)

 

바울과 바나바는 각 교회에 세운 장로들을 자기들의 영향력 아래 두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직접적인 돌봄도 필요하지만 하나님께 위탁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자신을 파송한 안디옥으로 돌아옵니다.

 

⑴ 안디옥으로 돌아가는 과정(24-26)

 

이제 바울과 바나바는 비시디아 지역을 통과해서 밤빌리아의 버가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항구 동시 앗달리아로 내려갔습니다(24-25). 버가와 앗달리아는 그들이 구브로의 바보에서 처음 도착했던 곳입니다. 아마도 이 두 지역에서 복음을 증거하지 않고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올라갔던 것으로 보입니다. 25절에는 두 사람이 두 지역 중 버가에서 복음을 전했다는 기록이 처음으로 나옵니다. 그들은 앗달리아 항구에서 안디옥 쪽으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그들에게 복음 전파 사명을 맡기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그들을 위탁했던 곳입니다. 이제 그들은 그 사명을 다 이루고 약 5년 만에 안디옥 교회로 돌아간 것입니다.

 

⑵ 안디옥에서 선교 보고(27-28)

 

이제 1차 선교 여행의 종착지인 수리아 안디옥으로 향합니다. 서사에서 돌아가는 여정은 조금 단순해졌지만, 그들은 복음 전하기를 쉬지 않았습니다. 그 동안 이룬 사역이 하나님의 은혜였으며 더 나가 하나님의 은혜가 곧 목적이었음을 의미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으로 돌아와서 지금까지의 선교에 관한 경과와 앞으로의 기대에 대한 보고를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역을 대단하게 자랑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 행하신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설명했습니다. 이 선교 보고가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 믿음의 문을 여셨다는 점이었습니다.

한 편, 안디옥 교회는 이방인 중심으로 이루어진 교회이기 때문에 두 복음 전도자들이 소아시아 지역에서 얼마나 많은 이방인 개종자를 얻었는지에 대해 관심이 많았을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의 관심을 반영해서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돌아온 사실을 구체적으로 설명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선교는 이방인들만 영접한 것이 아니라 적지 않는 유대인들도 구원을 받았습니다(행 13:43; 14:1). 하지만 많은 이방인의 개종을 중심으로 한 그들의 선교 보고는 다음 장에서 심각하게 다루게 될 할례와 이방인의 구원 문제를 준비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28).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될수록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큰 논쟁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 문제는 15장에서 핵심적으로 다루게 될 ‘이방인의 구원에 대한 문제’입니다. 그들이 안디옥에 머물고 있을 때 문제가 불거진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십리의 일환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 선교 사역에 엄청난 영향을 줄 이 문제가 완전하게 해결된 후에 그들이 2차 선교 여행을 떠나도록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의 복음이 사람에게 들어오면 그 사람을 변화시키고 성숙시키는 능력이 있다고 했습니다. 성장하는 속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죄인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의 변화가 일어나고, 더욱 자라서 다른 이를 돌볼 수 있는 성숙한 믿음으로 성장합니다. 그리고 성숙한 사람들의 삶이 단순해집니다. 바울처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을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당신은 어느 수준까지 성장했습니까? 오직 사명을 따라서 다른 성도들을 돌아볼 만큼 성숙한 성도들이 되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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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14-01)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전한 복음

사도행전 14장 1-18절


사람들은 자랑하는 것을 좋아하며, 다른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을 갈구합니다. 더불어 이들은 자신의 영광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능력이나 기적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영광과 칭송을 구할 까닭이 없습니다. 그것 또한 하나님의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성공적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충돌질해서 핍박함하게 만들어 그곳을 떠나게 되고 이고니온에 도착합니다. 그들은 전과 동일한 방식으로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합니다. 청중의 반응도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와 비슷했습니다. 허다한 무리가 믿기도 했지만, 적대적인 그룹들도 표적과 기사를 보고도 바울과 바나바를 돌로 치려합니다. 결국 바울과 바나바 일행은 루스드라로 이동하여 복음을 전합니다.

 

이고니온에서의 복음 전파(1-7)

복음이 전해질 때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납니다. 그것은 환영과 핍박입니다. 복음 증거의 현장에는 은혜와 감격뿐만 아니라 핍박의 역풍도 존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꾼들은 핍박과 방해에도 굴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담대히 구원의 복음을 전합니다. 바울 일행이 이고니온에서 복음을 전할 때도 이러한 현상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납니다.

1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2그러나 순종하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3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 4그 시내의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따르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따르는 자도 있는지라 5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리들이 두 사도를 모욕하여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6그들이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방으로 가서 7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1-7)

바울과 바나바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박해를 받지만, 박해 때문에 복음은 멈추지 않습니다. 이제 복음은 다른 곳으로 이동합니다. 이번에 그들이 들어간 곳은 안디옥에서 약 140km로 떨어진 이고니온 지역입니다. 앞 본문을 통해서 복음을 선명하게 전할 때, 반응이 환대와 반대가 있음을 살폈습니다. 본문에서도 그와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⑴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이고니온(1-4)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이고니온Iconium으로 이동합니다. 이 지역은 물이 풍부하고 땅이 비옥해 부유한 지역이었습니다. 이 도시의 명성과 위엄은 로마 통치 시대에 크게 성장했습니다.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는 이 도시에 특별한 호의를 베풀어 자기 이름을 따서 이 도시를 클라우디코니움(Claudiconium)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곳에는 원주민 브리기아인과 셀레우코스 통치 기간(주전 312-65년)에 이주해 온 헬라인과 유대인, 그리고 최근 물려온 로마 식민주의자들이 뛰셖여 살았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고니온에 도착하여 ‘함께’ 유대인의 회당으로 들어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함께’로 번역된 헬라어는 ‘카타 토 아우토(κατα τα αυτο)’입니다. ‘함께’라고 번역할 수도 있지만 ‘평소와 같이’(NIV: as usual)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1절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다시 유대인의 회당을 찾은 것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유대인들의 완악함으로 인해 바울은 이미 이방인들에게로 선교의 방향을 바꾸었습니다(행 13:46). 그런데 지금 바울이 다시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는 모습을 누가는 보여줍니다. 이는 바울이 아직도 동족 유대인들을 향한 기대와 마음을 완전히 포기한 것이 아님을 알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이에 대해 바울과 바나바의 사역으로 인해 유대인과 헬라인의 허다한 무리가 주 예수님을 영접하는 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1).

하지만 반대로 바울과 바나바는 순종하지 않은 유대인 무리와도 맞닥뜨립니다. 그들은 극한 반대로 이방인들의 마음까지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에게 악감을 품게 했습니다(2). 바울과 바나바는 반대에도 불구하고 ‘오래 있어’ 복음을 전했습니다. ‘오래 있어’(멘 운, μεν αυν)라는 표현은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적인 열정을 보여줍니다. 유대인들의 핍박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고니온에 계속해서 머물고,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담대하게 복음 전하는 일을 계속했습니다. 때로는 발에서 티끌을 떨어버리기도 했지만, 바울과 바나바에게는 근본적으로 영혼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과 바나바를 통해 일하셨던 방식은 그들이 전하는 말에 신빙성을 더 해주기 위한 ‘표적과 기사’를(세메이아 카이 테라타 σεμεια και τερατα) 행하셨습니다(4). 신약성경에서 ‘기사’(τερατα)는 항상 ‘표적’과 함께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역에 개입하셨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누가가 이고니온에서 일어났던 ‘표적과 기사’의 내용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록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표적과 기사’로 나타날 수 있음을 결코 소홀히 취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표적과 기사’가 일어났다는 사실보다 ‘표적과 기사’가 두 사도들이 입으로 전했던 복음의 내용을 증언하는 역할을 했다는 점에 무게를 둡니다. 초자연적 현상 자체를 복음의 능력으로 해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표적과 기사가 말씀의 권위를 뒷받침하는 기능을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태도 역시 필요합니다.

또 한 가지 주목해볼 것은 바울과 바나바를 ‘사도’라고 지칭합니다(1,4).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가 이 두 사람을 ‘사도’라고 부르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저자는 지금까지 ‘사도’라는 칭호를 예수님의 열두 제자에게만 제한적으로 사용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예수님의 직전 제자들이 아닙니다. 좁은 의미에서 그들은 사도가 될 수 없었습니다. 특히 바울의 사도권에 대한 논쟁은 끊임없이 제기된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바울과 바나바를 ‘사도’라고 부릅니다. 사도행전 13:1에 의하면, 바울과 바나바는 ‘선지자 혹은 교사’였습니다. 이제 그들은 사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설명과 관계없이 분명한 것은 초대교회의 직제가 명확하게 구분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아마도 초대교회는 정확하게 구분되어 있는 직제(office)보다 기능(function)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럼에도 ‘사도’로 부르고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바울과 바나바를 열두 사도 속에 포함시키려고 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지금까지 제한적으로 사용해 왔습니다. 이러한 관행을 깨고 처음으로 바울과 바나바를 사도라고 부른 것은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3)라고 표현한 것은, 바울과 바나바가 주 예수님의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는 합법적인 증인임을 분명히 해줍니다. 그러므로 이들을 영접하는 것은 예수님을 영접한 것이고, 배척하는 것은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입니다.

복음에 대한 반응은 언제나 두 가지입니다. 복음에 사로잡히지 않으면 복음을 대적하게 됩니다. 이고니온에서 무리가 나뉘었다고 말합니다(4). 표적과 기사가 일어났는데도 여전히 유대인들 편에서 바울과 바나바를 대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놀랍습니다. 이로써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 결코 자연스럽지 않은 일임을 상기시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복음 앞에 순종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기적과 표적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사람의 마음을 녹이고 무너뜨립니다.

(2)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이고니온(5-6)

복음을 들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은 많은 사람들이 믿었지만, 믿지 않은 유대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을 선동해서 약감을 품게 하였습니다. 복음을 대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적극적이고 적대적인지를 보여줍니다(5). 그들은 사도들을 모욕했을 뿐만 아니라 돌로 치려했습니다. 이처럼 빛은 어두움을 몰아내지만, 어둠에 있는 자들은 반대로 빛을 끄려고 합니다.

이것을 통해 바울과 바나바에 대한 박해를 예수님의 고난과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은 사건과 연결시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예언대로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실 때 모욕을 당하셨습니다(눅 18:32; 22:63; 23:35,39). 즉 바울과 바나바가 당하는 고난을 통해 예수님의 사역이고, 이 고난은 곧 예수의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의 음모를 알고 즉시 루가오니아의 두 도시 루스드라와 더베Lystra and Derbe의 인근 지방으로 피신했습니다(6). ‘루스드라’는 이고니온에서 남쪽으로 약 29km, 더베는 동남쪽 방향으로 약 74km 각각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인근 지역에서 복음을 계속 전패했습니다.

(3)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7)

바울과 바나바 일행은 복음 전하는 일 때문에 생명을 위협하는 일까지 있었지만, 그들은 그러한 일에 굴하거나 위축되지 않고 오래 있으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오히려 더 많은 곳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루스드라에서의 치유 사역과 대소동(8-18)

사역자에게 있어서 박해만큼이나 위험한 것은 자기우상화의 유혹입니다. 자기우상화의 유혹은 복음 증거자들을 넘어뜨리는 사탄의강력한 무기이기 때문입니다. 사역자들의 눈을 가리고 귀를 어지럽게 하는 과도한 칭찬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헤롯은 자신을 신적인 존재로 추앙하는 백성의 거짓 환호에 교만하여 죽음의 심판을 받았지만(행 12:23), 바울과 바나바는 하나님만 누리실 수 있는 영광을 조금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8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9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10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 11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12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 13시외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14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 15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16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임하셨으나 17그러나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 하고 18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8-18)

바울과 바나바는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성 근처에서 복음을 전했다고 기록했지만, 여기서 행한 선교 사역에 대해서는 주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이 본문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못 걷는 자를 고친 이야기(8-10), 루스드라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섬기려 했던 이야기(11-15a), 그리고 이에 대한 바울과 바나바의 반응을 소개하는 이야기(15b-18절)로 나눌 수 있습니다.

⑴ 못 걷는 사람을 고친 바울(8-10)

루스드라에서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는 초자연적 치유 사역으로 시작됩니다. 하지만 ‘표적과 기사’는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을 전하기 위한 보조적 도구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의 기적은 의도적으로 계산된 선교 방식이었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했던 사람이 마음에 가지고 있었던 구원에 대한 열망에 바울이 적극적으로 반응했을 뿐입니다. 그가 가졌던 믿음은 어디로부터 온 것입니까? 7절은 작은 실마리를 던져줍니다. 비록 문맹률이 높고 미신적 환경에 쉽게 노출되어 있었지만, 복음은 듣는 사람들에게 구원 얻을 믿음을 갖게 하였습니다. 더 분명하게 표현해서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적어도 그 사람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이해할 수 있는 헬라어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루스드라에서도 치유의 기적에 우선하여 복음 선포가 있었습니다(7). 그곳에서 일어난 기적의 배경에는 나면서부터 걸어본 적이 없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바울의 설교를 듣고 있었습니다(9). 바울은 이 사람에게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있음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라고 명하여 그 사람을 고쳐주었습니다. 이 사건은 중풍병자가 들것에 실린 채 지붕에서 내려졌을 때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믿음을 보고 죄 사함을 선포하고 치유하신 사건을 상기시켜 줍니다(눅 5:19-20). 또한 사도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명령한 후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행 3:7). 바울은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고만 했을 뿐 그를 돕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즉시 일어나 걷게 되었습니다.

⑵ 루스드라 사람들의 반응(11-15a)

바울이 행했던 기적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루스드라 사람들이 기적을 행한 바울과 바나바를 보면서,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11)라고 외쳤습니다. 그들을 인간의 형상으로 내려온 두 신들의 이름으로 바나바는 ‘제우스’라고, 연설자 바울은 ‘헤르메스’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에게 제우스는 신과 인간의 아버지요, 허메는 제우스의 아들이자 동시에 신들의 사자였습니다. 성문 밖에 있는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은 급히 황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화서 무리와 함께 두 사람에게 제사하려고 한 것입니다. 루스드라 사람들이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를 질렀다고 기록합니다(11).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생겨난 이유에 대한 작은 설명이 될 수 있습니다. 루가오니아 지역은 아나톨리아 원주민들의 거주 지역으로 헬라어가사되지 않던 곳이다. 반면에 바울과 바나바는 지금까지 헬라어가 통용되던 지역에서 선교사역을 해왔습니다. 당연히 바울의 복음 선포는 헬라어로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이런 전도의 결과로 나면서부터 걷지 못했던 사람은 치유의 기적을 경험했지만, 반대로 헬라어를 모르는 사람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사람의 모습을 한 신들의 방문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들의 이상한 행동에 몹시 당황한 바울과 바나바는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면서 외쳤습니다(14). 바울과 바나바의 반응은 매우 신속하고 적절했습니다. 그들은 옷을 찢으며 무리 가운데로 뛰어들어 그들을 제지했습니다. 그리고 치유의 능력은 자신들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분명히 설교합니다.

⑶ 바울과 바나바의 반응(15b-18)

루스드라 사람들의 어처구니없는 행동은 오히려 바울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에 대해 다시 한 번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기회를 갖도록 하였습니다. 14-18절에 기록된 바울의 설교는 사도행전 17:22-31과 매우 비슷한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아니라 이방인들을 향한 바울의 메시지가 어떻게 전달되었는지를 알게 해주는 최초의 설교입니다.

루스드라 사람들 가운데 뛰어든 바울과 바나바는 일차적이 목적은 원주민이 그들에게 제사 드리는 것을 막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한 것입니다(15). 그리고 최종적인 목적은 루스드라 원주민이 돌이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데 있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을 향해 자신들이 하는 일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15)고 권합니다. 그들이 섬기는 제우스와 헤르메스 같은 신들을 버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만물을 만드셨을 뿐만 아니라, 아직도 역사와 자연의 현상 속에 섭리하고 ㄱ역사하시는 주권자입니다.

바울은 이 하나님께서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임하셨으나’라고 설명합니다(16). 이것은 사도행전 17:30의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라고 말씀과 같은 의미입니다. 이것은 각 종족아 자기 뜻대로 우상을 섬겨도 죄 없는 것으로 허용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방인 역시 자연의 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으므로 하나님을 몰라서 경배하지 못했다고 변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롬 1:20-21). 하나님께서는 끈질긴 인내로 참아 오셨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는 17:30에 ‘알지 못하던 시대’였으며, 본문 16절의 ‘지나간 세대’입니다. 이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 이전의 구약 시대를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 사건 이전에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에게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신 것은 이방 나라들로 하여금 각기 제 길로 가게 방임하신 시대가 지나가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모든 민족에게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십자가와 부활 사건으로 인해 옛 시대가 끝나고 모든 열방이 하나님께 돌아와야 하는 새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입니다(마 28:19-20; 눅 24:47; 행 1:8).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 새 시대의 도래를 온 세상에 공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건을 통해 이제 각 나라가 그들의 우상에서 떠나 살아 계신 하나님과 구주 예수님께 돌아와야 한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이제 열방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었습니다(17; 17:30).

17절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한 증거를 열방 나라에 남겨 놓으셨다고 말합니다. 땅에 비가 내려와 사람들이 풍부한 곡식을 거두고 기쁨으로 음식을 나누는 가운데 얻는 마음의 만족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친히 베푸시는 자신에 대한 증거였습니다. 비를 통한 각종 식물의 결실과 추수, 이것을 향유하는 인간의 삶은 하나님이 만물을 붙들고 인간의 유익을 위해 선한 손길로 사랑을 베풀어 주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처럼 하나님의 자연 섭리를 이용해 그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권고한 것입니다. 바울이 유대인 회당에서 성경을 활용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했던 것과는 근본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복음의 사람은 외유내강(外柔內剛)의 사람들입니다. 겉으로는 약해보이지만, 내적으로는 매우 강합니다. 또한 강력해져야만 합니다. 어떤 어려움에도 이겨내고, 어떤 유혹도 이겨내고, 그러나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이겨야 합니다. 그래야만 승리하는 복음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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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13-04)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사역한 결과

사도행전 13장 44-52절


 

복음을 전하는 길은 어떤 길이 있습니까? 순탄하게 복음을 받아드리는 사람들도 있지만, 항상 좋은 길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 험하고, 힘겨운 길도 만날 것입니다. 하지만, 복음을 전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행복을 만나는 길입니다.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에서 복음을 전할 때, 많은 사람에게 영적 호기심을 주었습니다. 대부분 시민들이 다음 안식일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회당에 모여들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담대히 복음을 전하여 이방인의 회심자들을 얻었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유대인들의 시기심아 질투심을 자극하게 되어 사역을 방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안디옥에서 쫓겨납니다. 하지만 이에 복음은 믿음으로 반응한 이방인들에게로 넘어갑니다.

 

말씀에 대한 유대인의 반응(44-45)

신앙에 있어서 시기심은 독약입니다. 버려야 할 독버섯입니다. 그래서 시기심은 버려야합니다. 유대인들은 복음을 들으려고 몰려드는 많은 사람들을 보고 시기심에 불탔습니다. 바울의 사역을 비방하고 방해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이 자신과 똑같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44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45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거늘(44-45)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일행들은 계속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사역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 결과 안디옥 사람들은 다음 안식일에도 다시 전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다음 안식일에 안디옥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복음을 듣기 위해 회당으로 모여들었습니다.

44절에 기록된 유대인들은 아마도 유대인 지도자들을 의미할 것입니다. 적어도 그들에게는 이 상황이 전혀 달갑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그들이 바울에게 적대적이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누가는 그들의 적대적인 태도를 45절부터 구체화합니다. 유대인 지도자들의 적대적인 반응이 바울이 전한 메시지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전체적인 흐름을 볼 때, 누가는 유대인 지도자들이 적대적으로 바뀐 이유에 대해 본문 안에서 간단하지만 명확하게 기록합니다.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45).

유대인 지도자들은 수많은 이방인 무리가 바울의 설교를 듣기 위해 회당으로 나온 것을 보자 심한 질투심에 사로잡혔고, 바울의 설교에 대해 비방하기 시작했습니다. 헬라어 ‘가득하다’는 ‘에플레스데산’입니다. 흥미롭게도 이 단어는 사도행전 13:52에서 제자들이 기쁨과 성령으로 충만했다고 표현할 때 사용된 단어 ‘에플레룬토’와 의미상 매우 유사합니다. 누가는 성령으로 충만하다고 표현할 때에 이 동사를 함께 사용합니다. 누가는 바울과 바나바에게 유대인 지도자들과 이방인들의 모습을 대비시킵니다. 적대적인 유대인 지도자들은 시기로 가득한 모습을 보였고 겸손함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받아들인 비시디아 안디옥의 회심한 이방인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충만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세속적인 욕심으로 충만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유대인 지도자들이 시기심에 사로잡혔다는 사실은 그들 역시 유대교를 전하려는 열심을 가지고 이방인들과 접촉하고 있었음을 가정하게 합니다. 그들은 이방인들 중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을 얻기 위해 많은 노력과 헌신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 그들 눈에 바울과 바나바는 동역자가 아니라 그들이 수고하여 얻은 결과물을 한순간에 빼앗아 간 자들로 보였을 것입니다. 결국 시기심에 사로잡힌 유대인 지도자들은 복음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복음의 걸림돌이 되는 어리석은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열정 그 자체만으로 모든 것이 정당화되지 않습니다. 열심은 있었지만, 그들은 지식이 없어 망하게 되었습니다(롬 10:2).

 

말씀에 대한 유대인의 반응(46-49)

위기는 두려움이 찾아오기도 하지만, 새로운 소명의 눈을 뜨게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들에게 절망은 없습니다. 하나님꼐서 세상을 주관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막에 물을 흐르게 하시고 길을 여시며 꽃을 피우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용해 당신의 뜻을 이루어가십니다.

46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47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48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49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46-49)

이에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된 소식을 유대인들이 스스로 거부했기에 그들 대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유대인이 거부한 복음은 안디옥을 넘어 그 지방 방방곳곳에 두루 퍼졌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방인들이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며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이 때문에 안디옥 전역에 두루 복음이 퍼졌습니다.

(1) 이방인 선교의 정당성을 주장함(46-47)

비시디아 안디옥의 유대인들은 과거 조상들의 잘못을 되풀이합니다. 그들은 이미 바울의 설교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한 유대인들의 무지와 교만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었는지를 들었습니다. 그 결과 복음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이방인들에게로 확장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복음을 거절하였습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자신들이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들임을 자처하는 것입니다(46). 이에 대한 바울과 바나바의 반응은 아주 단순하고 명료합니다. 그들은 이사야 49:6을 인용하면서 이제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수혜자가 되었음을 선언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복음이 이방인에게로 향하게 되는 이유가 유대인의 태도에 있다고 말합니다. 이후에도 바울은 계속해서 유대인들로부터 거절당하고 이방인 선교를 위해 나아가는 패턴을 따릅니다(행 18:8; 28:28). 이제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사도요 선교사로 활동합니다. 이사야 49:6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사람을 통해 하나님이 일하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신학적으로 이사야 49:6은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구원을 얻는 메시지를 포함합니다. 사도행전 13:47의 상황에서 그 ‘한 사람’은 ‘바울과 바나바’입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가로막는 것처럼 보였지만, 한 사람 바울과 바나바의 순종을 통해 이방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옵니다.

(2) 복음을 듣고 회심하는 이방인들(48-49)

바울과 바나바의 선포에 대한 이방인들의 반응은 유대인들의 반응과 대조를 이룹니다. 그들은 기뻐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고 회심합니다. 그들을 통해 주의 말씀은 계속해서 그 지역의 다른 사람들에게로 퍼져나갑니다. 가장 이상적인 선교의 모델입니다. 복음을 듣고 회심한 사람이 또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고 멋있는지! 여기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지만, 누가가 이 이야기에서 예정론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이 표현을 통해 누가는 하나님의 주권에 근거한 구원을 나타내려 했던 것 같습니다. 유대인들의 거절 앞에서 하나님은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의 문을 여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훗날 유대인들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전략이 될 것입니다.

 

이고니온으로 이동하는 선교사들(50-52)

우리가 죄사함의 감격과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받는 은혜의 복음 속에 머물러 있으며 자연스럽게 이 기쁨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이 기쁨은 세상의 여건에 의해 빼앗길 수 없습니다. 이 기쁨은 하나님게서 우리 영혼의 깊은 곳에서 일으키시는 신적 축복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50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시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내니 51두 사람이 그들을 향하여 발의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52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50-52)

유대인 지도자들의 반응은 매우 실망스럽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만 망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들까지도 멸망으로 인도하는 최악의 부류입니다. 누가는 그들이 취한 두 가지의 비열하고 어리석은 방식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첫째, 유대인 지도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선동하고 이용했습니다. 특히 그들은 여인들의 감정을 자극하고 이용했습니다. ‘선동하다’라는 ‘누군가의 감정을 자극한다’는 의미입니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자극할 때 진실을 그대로 알리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각종 비방과 거짓 정보를 이용하여 사람의 감정을 자극합니다. 유대인 지도자들은 경건한 이방인 귀부인들에게 거짓 정보를 흘리고 그들의 감정을 선동적으로 자극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방인 귀부인들을 속임으로써 그들이 직접 나서지 않고도 바울 일행에게 타격을 가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죄질이 아주 나쁩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경계해야 할 모습입니다.

둘째, 유대인 지도자들은 행정 관리들을 움직였습니다. 유대인 지도자들은 한 지역의 질서를 유지해야 하는 책임을 맡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사회적 위치와 지위를 이용하여 행정 관리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경건한 귀부인들’은 이방인들 가운데 유대교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로서, 그 지역의 유지들을 남편으로 두고 있는 여인들이었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대교 지도자들이 ‘경건한 귀부인들’을 선동하고 그녀들의 남편들을 움직여 어떤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 했다고 추정하게 됩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행해진 종교와 세속 정치의 야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영적 지도자들이 자기들의 욕심을 이루기 위해 세속 지도자들을 이용한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유대교 지도자들의 비열한 모습에 단호하고도 분명한 태도로 맞섭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발의 티끌을 떨어버리고 이고니온으로 향합니다(51). 51-52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이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도록 힘과 은혜를 더하시는 상황을 요약적으로 보여줍니다. 누가는 기둥과 같은 영적 지도자들인 바울과 바나바가 비시디아 안디옥을 떠났지만, 남아 있는 제자들이 오히려 기쁨과 성령으로 충만하다고 기록합니다. 52절의 제자들은 새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비록 이제 막 복음을 받아들인, 영적으로 갓 태어난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였지만 그들에게는 성령으로 인해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누가는 사도행전 8:8에서 복음이 전해진 결과로 큰 기쁨이 있었음을 이미 언급한 바 있습니다. 복음이 선포된 결과는 기쁨과 담대함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유대인의 방해와 핍박으로 좌절하거나 낙담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반대와 핍박은 있기 마련입니다. 복음에 대한 반대와 박해를 두려워하지 맙시다. 우리가 아무리 열악한 조건 속에 갇혀 있어도 하나님의 일은 지체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우리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셔서 당신의 뜻을 이뤄 가십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장중에 붙들려 기쁨과 성령의 충만을 경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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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13-03)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선교사역을 진행

사도행전 13장 32-43절


복음은 지속해서 반복해서 전파되어야 합니다. 이미 믿는 자에게도 예수님에 대한 소식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시지만, 하나님께서 누구인지, 그분이 행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지속적으로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을 존귀하신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울타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어떤 분이십니까?

 

바울은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에 모인 유대인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설교합니다. 그는 구약의 약속을 통해 선조들에게 하셨던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이었는지를 설명합니다. 동시에 약속을 성취하러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사람들이 죽였지만, 하나님께서 다시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키셨다고 선포합니다. 바울은 더 나가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다시 돌이키도록 선포합니다.

 

약속의 성취(32-37)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성육신과 사역은 우연이나 우발적인 사역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을 통해 예수님을 약속하셨고, 때가 차매 그 약속을 이루셨는데, 그 성취를 신약에 기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수백 년, 천 년의 간격을 두고 구약과 신약으로 기록되었지만, 그 자체가 우리 신앙의 확실성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32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 33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34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이르시되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며 35또 다른 시편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 36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37하나님께서 살리신 이는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였나니(32-37)

지금 바울은 비시디아 안디옥에 있는 어느 한 회당에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는 ‘언약과 약속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를 이야기했습니다. 바로 이 시점에서 바울의 연설은 부활 증언으로 바뀝니다. 그가 전한 복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메시아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역사 속에서 태어난 새로운 역사를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새로운 역사’인 부활은 이미 성경(시편, 선지서)에서 증언한 바 있습니다.

바울은 그와 그의 동료들이 예루살렘에서 활동하는 사도들과 동일하게 ‘복음을 전한다’라고 말합니다(31). 그 내용은 ‘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한다는 것입니다(32), 그 ‘복음’의 내용은 그들의 ‘조상들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인데, 하나님께서 ‘이 약속을 그들의 [조상들의] 자녀들에게 이루셨다’(32-33a)고 소개합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은 바로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그 약속이 무엇이었는지, 그 약속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를 본문에서 구체적으로 제시합니다. 그런데 33-37절까지의 내용을 잘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주셨던 약속의 성취를 바울이 복음으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유대인들에게 ‘복음’에 대해 처음 듣는 이야기 때문에 이해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님을 통해 실현되었음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과연, 복음과 부활이 무슨 연관성이 있다는 말입니까? 그래서 이곳에서 두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여기서 말하는 ‘약속’은 무엇입니까?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어떻게 이 약속의 성취가 될 수 있습니까? 하는 것입니다.

먼저 이 약속은 ‘다윗에게 한 약속’을 말합니다(참조 23).

12…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13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14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삼하 7:12-14)

그러면 이 약속과 부활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다른 말로 표현하면, 부활이 이 약속의 어느 곳에 위치합니까?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따라’ 다윗의 자손으로 나신 것으로써(23; 참조 롬 1:3) 약속이 성취된 것으로 봅니다. 만일 그랬다면, 그리스도의 ‘육신적 나심’은 이전 왕들의 탄생과 다름이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스라엘 왕을 나열하지 않고 더 근본적인 하늘의 선언을 지적합니다. 부활은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키시는 일입니다. 이미 구약에서 부활에 대한 약속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구약 성경 세 곳에 나와 있는 본문을 인용합니다. 시편 2편과 이사야 55장 그리고 시편 16편입니다.

① 시편 2편 인용

시편 2편 7절에서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너를 낳았도다’라는 것이 어떻게 부활시킨 것이 될 수 있습니까? 시편 2편은 이스라엘 왕을 기름 부음 받은 자(메시아)로 등극하게 하면서 선언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낳았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선언이므로, 분명 생물학적인 출생을 가리키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지상의 한 인간, 이스라엘 총회의 한 형제가 하나님의 메시아로 ‘높아짐’ 또는 ‘영화롭게 됨’을 의미합니다. 여기에 부활의 새로운 개념이 있습니다. 즉 바울은 부활을 영화(승귀)와 유기적 통일체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왜 시편 2:7을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증거로 보는지 이유가 드러납니다. 그것은 앞서 바울이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부분에서 출애굽부터 다윗 왕조까지의 역사를 ‘왕의 오심’으로 시작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또한 이것은 세례 요한이 ‘내 뒤에 오시는 이’를 자신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존귀한 존재로 소개하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왕이시요. 통치자이십니다. 그런데 어떤 왕이십니까? 그리스도는 부활, 생명의 나라, 율법과 시편과 선지자 이후에 올 새 시대의 통치자로 ‘나신’ 것입니다.

② 이사야서 55장 인용

이어서 바울은 이 부활이 다윗에게 한 약속의 궁극적인 모습이며 근본적으로 새로운 질서의 출현이라는 것을 설명합니다. 즉 성경은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일으키는데, 그가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을 것을 하나님께서 이미 가르쳤다고 말합니다(34). 바울에 따르면, 이것을 이사야와 다윗이 증언합니다.

3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니라(사 55:3)

따라서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는 다윗에게 약속한 확실한 은혜를, 썩음을 당하지 않을 주의 거룩한 자는 다윗이 아니라 부활한자를 가리킵니다. 바울은 이와 같은 사실을 역사로부터 증명합니다. 다윗은 분명 자기 시대를 섬기다가 죽어 묻히고 썩음을 당하였습니다.

만일 이사야의 예언이나 시편의 예언이 다윗을 가리킨 것이었다면, 그 예언들은 맞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참조, 29절). 그러므로 구약에서 ‘거룩한 것’ 또는 ‘거룩한 자’는 다른 이를 가리켜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그의 후손 예수. ‘주의 거룩한 자’, ‘하나님이 살리신 이’를 가리킵니다(37).

③ 시편 16편 10절 이용

10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시편 16:10)

바울은 사도행전 13:16-31가지의 설교에서 이미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주어졌던 약속이 예수그리스도의 오심을 통해 성취되었다고 선포한 바 있습니다. 사람들이 무지하여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아가 예수였음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오심은 이미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다는 증거였습니다. 바울은 이제 그 약속이 유대인뿐만 아니라 비시 디아 안디옥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된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바울은 구약성경에서 세 개의 구절들(시 2:7: 16:10: 사 55:3)을 인용합니다. 모두가 메시아에 대한 약속을 담고 있는 구절들입니다.

그 가운데 시편2:7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약속이지만, 나머지 두 구절들(시 16:10; 사 55:3)은 예수의 부활에 대한 약속입니다. 바울은 메시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의 부활을 통해 성취되었다고 설교합니다. 바울 설교의 핵심은 예수의 부활이었습니다. 그 어떤 것보다 놀라운 약속의 성취가 부활이라고 바울은 생각한 것이다. 신실하게 약속을 지키셨을 뿐만 아니라 죽음의 권세를 무너뜨리신 그 하나님을 어떻게 믿지 않을 수 있겠냐고 바울은 도전합니다. 적어도 바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간의 모든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었다. 바울은 이 기쁜 소식을 가능한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기 원했습니다.

바울의 설교는 처음으로 듣는 이야기입니다. 그 청중들이 얼마나 당혹스러우면서도 감격적이었을지 상상해보시길 바랍니다. 회당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는 이방인들도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는 유대인으로 개종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여전히 이방인으로서 유대교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유대교의 율법을 지켜야만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제 그들도 역시 아브라함의 약속에 해당되는 사람들임을 밝힙니다(32). 하나님께서 성취하신 약속의 혜택이 모든 사람들에게로 확대될 수 있음을 바울은 선언합니다.

 

복음으로의 초대와 반응(38-41)

다른 사람이 하나님을 힘입어 일어날 수 있도록 돕는 말씀의 사람이 되길 원한다면, 먼저 자신이 말씀에 힘입어 일어날 때, 말씀으로 누군가에게 힘을 줄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위로하는 것은 자신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함께 말씀을 보며 힘을 내자고, 함께 기도로 길을 찾자고 권면하는 그 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38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39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40그런즉 너희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 너희에게 미칠까 삼가라 41일렀으되 보라 멸시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놀라고 멸망하라 내가 너희 때를 당하여 한 일을 행할 것이니 사람이 너희에게 일러줄지라도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 하였느니라 하니라(38-41)

바울은 설교를 듣는 사람들을 복음으로 초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죄 사함을 얻을 기회입니다. 이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죄로부터의 자유를 줄 것입니다. 복음은 율법으로 절망하던 자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소망을 약속합니다. 특히 바울은 ‘모세의 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39)과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을 대조해서 설명합니다. 율법의 무능함과 믿음의 효력을 서로 비교하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나가 복음에 반응하는 사람들에 대해 보여주는 태도 역시 좋은 모델입니다. 그들은 복음에 관심 보이는 사람들과 더불어 말하였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어떤 말을 청중과 나누었을까? 아마도 바울의 설교는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을 것입니다. 그들은 궁금한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과 더불어, 대화를 계속했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들은 청중의 질문에 대답했을 것입니다. 이는 이 시대의 목회자들에게 필요한 바른 모습입니다. 성도들과 소통하면서 그들의 영적 필요를 채우려는 노력과 헌신이 목회자들에게 요구된다. 무조건적인 믿음을 요구하는 것은 올바른 기독교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성도들이 가질 수 있는 영적 궁금증들에 대해 꾸준하면서도 따뜻한 태도로 성실하게 답하려는 자세가 이 시대의 목회자들에게 필요합니다.

바나바의 헌신에 주목하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설교는 바울이 했으며, 청중의 관심도 바울에게 집중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청중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청중을 격려하고 도전하는 일에는 두 사람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어느 순간 바울의 일행 중 한 사람으로 격하되어버린 바나바였지만,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기꺼이 동역하고 있습니다. 동역자로 산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누구의 설교에 은혜를 받고 감동이 되었든지, 예수 그리스도적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최선의 모습는 것이 증인의 모습이다. 아마도 이런 바나바의 모습은 바울에게 큰 도전이 되었을 것이다. 안타깝

바울은 하박국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설교를 끝맺습니다. 바울이 인용한 하박국 1:5은 선지자의 경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이 바벨론을 사용하셔서 그들을 심판하셨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선지자는 이런 이스라엘 민족의 어리석음에 대해 신랄하게 경고하였습니다. 바울이 하박국 1:5절을 인용한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 있는 사람들에게 경고하려 함입니다(40). 즉, 같은 실패를 되풀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복음의 초대에는 항상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은혜와 거절하는 자에게 임할 진노라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바울의 설교에 많은 사람들이 반응을 보였습니다. 사도행전 13:26-27에 나타난 유대인들의 반응과는 정반대로 청중들의 반응은 긍정적이었습니다. 그들은 다시 바울의 설교를 듣길 원했다. 혹은 강력하게 권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단어로서, 회중의 마음 상태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진심으로 바울의 설교에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심지어 그들 가운데는 바울과 바나나를 따르는 코루쎄오dKOAcukko)사람들까지 생겨났습니다. 여기서 따르는 사람들까지 생겨났습니다. 여기서 따른다는 의미는 제자가 스승을 따른다는 의미와 같다(마 9:9; 막 1:18; 눅 5:11).

바울과 바나바는 청중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기를 권면했습니다. 설교 사역이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임을 두 사도들이 잊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의 열광적인 반응은 설교자들을 종종 위험에 빠트립니다. 청중의 긍정적인 반응을 마치 자신의 성공으로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는 설교자들에게 좋은 모범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말씀을 깨닫지도 순종할 수도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동시에 청중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 아래 순종하기를 가르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복음에 반응하는 사람들에 대해 보여주는 태도을 보이는 사람들과 더불어 말하였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어떤 말을 청중과 나누었습니까? 아마도 바울의 설교는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을 것입니다. 그들은 궁금한 것이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과 더불어, 대화를 계속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들 은 청중의 질문에 대답했을 것입니다. 이는 이 시대의 목회자들에게 필요한 바른 모습입니다. 성도들과 소통하면서 그들의 영적 필요를 채우려는 노력과 헌신이 목회자들에게 요구된다. 무조건적인 믿음을 요구하는 것은 올바른 기독교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성도들이 가질 수 있는 영적 궁금증들에 대해 꾸준하면서도 따뜻한 태도로 성실하게 답하려는 자세가 이 시대의 목회자들에게 필요합니다.

바나바의 헌신에 주목하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설교는 바울이 했으며, 청중의 관심도 바울에게 집중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청중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청중을 격려하고 도전하는 일에는 두 사람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어느 순간 바울의 일행 중 한 사람으로 격하되어 버린 바나바였지만,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기꺼이 동역하고 있습니다. 동역자로 산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누구의 설교에 은혜를 받고 감동이 되었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최선을 다하는 것이 증인의 모습입니다. 아마도 이런 바나바의 모습은 바울에게 큰 도전이 되었을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바울은 2차 선교여행 직전에 바나바와 크게 다투고 서로 다른 선교팀을 꾸리게 됩니다. 그러나 빌립보서 1:15-18에 나타난 바, 빌립보 교회를 향한 바울의 마음은 바나바의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 기뻐하리라’(빌립보서 1:18). 누가 주목을 받느냐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전파되는 것이 그리스도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결론부 (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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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13-02)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사역을 시작

사도행전 13장 13-31절


세상에 쉽게 되는 일은 없습니다. 사람들이 성공하려고 노력하지만, 성공적인 사람들은 5% 안에 있다고 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어려움 앞에서 좌절하고 넘어지고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성공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목표를 향해 끝까지 달려간 결과로 성공을 이룹니다. 하나님의 사역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쉽게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여러 가지 난관들이 많습니다. 그것을 돌파하고 일어서는 것이 성공적인 목회를 이룬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구브로 바보에서 성공적으로 사역을 마친 뒤, 바울의 일행은 버가에 도착합니다. 그곳에서 마가 요한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바울과 바나바는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들어가서 회당에 찾아서 설교할 기회를 얻게 되고,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이심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메시아의 오심은 성경에 기록된 약속의 성취임을 설교합니다.

 

선교사역을 떠난 요한(13-15)

하나님의 사역이라도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모든 사역이 성령의 인도와 도우심으로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비롯하여 숱한 변수를 감수해야 하고, 때로는 절망적인 환경에 직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명확한 확신과 성령의 동행, 투철한 사명이 없었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13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14그들은 버가에서 더 나아가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15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에 회당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만일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 하니(13-15)

바나바와 함께 구브로에 도착한 바울은, 구브로 ‘바보’Paphos에서 주술적인 악령으로 총독 바기오를 잡고 있던 거짓 선지자 바예수를 물리칩니다. 그는 이제부터 선교 현장에서 주도적인 인물로 등장합니다. 그들은 ‘바보’ 항구에서 배를 타고 서북쪽으로 진행하여, 지금 터키의 남쪽 항구인 안탈리아Antalya인 ‘버가’Perga에 도착합니다.

(1)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요한(13)

버가에 도착한 후, 바울과 함께 전도여행에 동참했던 마가 요한은, 어떤 이유인지를 모르겠지만, 선교 여행의 중요한 시점에 선교를 포기하고 그것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이는 두 선교사에게 적지 않는 충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이때부터 바울의 불신은 상당한 시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나중에 다시 요한이 바울의 선교여정에 합류하려고 할 때, 바울이 그의 사역에 동참하려는 것을 강력하게 반대합니다(행 15:37-39). 추측해 보기는, 아마 요한은 선교의 여정에 힘든 것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둔듯합니다.

(2) 계속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선교(14-15)

요한은 떠났지만,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 사역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들은 버가에서 출발하여 북쪽으로 약 200km 떨어진 ‘비시디아 안디옥’Pisidian Antioch에 이릅니다. 그 길은 산맥을 통과하는 험준한 길이었습니다. 갑작스런 폭우로 황폐해진 경우가 많았고, 산악지형이기 때문에 로마 군인들도 통제가 안 되어서 강도들이 출몰한 지역이었습니다.

이 ‘비시디아 안디옥’은 해발 1,080m 고지에 위치해 있는 곳입니다. 이곳은 로마 지방에 속한 남부의 주요 도시로 로마로부터 지방 자치권과 세금 감면 혜택을 부여받았습니다. 이곳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정착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바울의 선교 전략은 먼저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 안식일 예배에 참석했습니다(14).

(3) 설교를 권하는 회당장(15)

바울의 선교 방법은 먼저 회당이 있는 지역을 방문하고, 먼저 회당을 방문하고 그곳 사람들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도 바울은 그런 방법으로 복음을 전합니다. 선교 전략에 따라 바울과 바나바는 안식일에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집회를 참석합니다. 이때 회당장들은 지정된 율법서와 선지서의 낭독이 있은 후, 사람을 보내어 바울과 바나바에게 ‘형제들아 만일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15)고 청합니다. 안디옥 회당장들은 아마도 바울과 그 일행이 어떤 말로 권면할지 몰랐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회당장들은 바울과 그 일행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아마도 바울은 회당에서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회당에 모인 사람들에게 적대적이거나 공격적인 방식으로 접근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야만 회당에서 말씀을 전할 기회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회당장들은 바울과 그 일행을 향해 ‘형제들’이라고 부를 정도로 친근해졌던 것입니다.

복음을 전한 사람의 태도는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명확한 확신과 성령의 동행, 철저한 사명이 없었으면 복음을 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 전할 기회를 얻고, 청중의 마음을 열기 위해 전하는 사람은 기도하는 마음, 신중하며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전한 복음(15-31)

복음에는 사람을 전적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을 통해 역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세상이 복음 사역자들을 가두든 풀어 놓든 상관없이 일하십니다. 제자들은 이런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매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역했습니다. 우리 또한 제자들처럼 하나님만 의지하며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바울과 일행은 마가 요한이 떠난 후에도 실망하지 않고, 계속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핵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6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17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 18광야에서 약 사십 년간 그들의 소행을 참으시고 19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기까지 약 사백오십 년간이라 20그 후에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 21그 후에 그들이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22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23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24그가 오시기에 앞서 요한이 먼저 회개의 세례를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전파하니라 25요한이 그 달려갈 길을 마칠 때에 말하되 너희가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으니 나는 그 발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26형제들아 아브라함의 후손과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 27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그들 관리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 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28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으나 빌라도에게 죽여 달라 하였으니 29성경에 그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후에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 30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신지라 31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간 사람들에게 여러 날 보이셨으니 그들이 이제 백성 앞에서 그의 증인이라(16-31)

바울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설교할 기회를 얻었을 때, 그것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의 메시지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첫째, 구약에 익숙한 유대인 청중을 고려해서 족장들부터 세례 요한에 이르기까지 하나님 나라의 역사가 소개합니다(17-25). 다음으로 그 나라의 언약을 성취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명쾌하게 증거 합니다(26-37). 마지막 부분, 설교의 결론이자 적용으로서 예수님을 믿으라고 권고하면서 불신앙을 경고합니다(38-41). 먼저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1) 설교의 서론(16)

이 구절은 바울의 영감(靈感)이 서려 있는 설교의 서론입니다. 바울은 비시디아 안디옥의 회당에서 첫 설교를 시작합니다. 설교할 때,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이미 바울은 회당 안에 있는 청중 분석을 끝냈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의 회당에는 두 부류였습니다. 대부분 유대인들이 있었을 테지만, 그중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16,26).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유대교에 호의적이었던 특정 이방인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비록 할례를 받지 않았지만, 회당 예배에 참석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유대인과 같이 율법의 교훈대로 살아가는 자들이었습니다. 누가는 바울이 ‘하나님 경외자들’을 자신의 청중으로 충분히 고려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동시에 바울은 청중이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합니다.

바울은 그들을 향해 손짓함으로써(16) 설교에 집중하라고 환기시키고 모든 회중이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합니다. 첫 설교라고 보기 어려울 만큼 너무나 자연스럽고 효과적입니다.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배운 수사학도 매우 유익하게 쓰였을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재능과 경험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효과적으로 전달한 것입니다.

(2) 하나님의 구속 역사(17-25)

바울의 설교는 출애굽 사건을 설명하면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기를 거부한 사사 시대 및 다윗과의 약속을 언급합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이시며, 세례 요한에 의해 메시아로 확증되었다고 말합니다.

바울의 메시지는 베드로의 설교(행 2:14-36) 및 스데반의 설교(행 7:1-53)와 비교됩니다. 바울의 설교와 다른 두 설교의 차이점은 매우 뚜렷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강조점을 둡니다. 단순히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언급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패역한 이스라엘을 어떻게 사랑하시고 인도하셨는지를 설명하는 데 많은 관심을 쏟습니다. 이 단락에서 가장 핵심적인 표현은 ‘큰 권능으로’(17)입니다. 정확히 번역하자면 ‘높은 팔로’입니다. 이 표현은 출애굽으로부터 다윗 왕조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인도해 오셨는지를 알게 합니다. ‘큰 권능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하나님은 참으십니다(18). 그리고 대적을 멸하시고(19) 땅과 사사들과 왕을 주십니다(19-21). 최종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십니다(22).

17-22절에서 동사들의 주어는 모두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생존 배경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자신의 백성을 위해 행하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설명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라고 선포합니다.

(3) 약속에 대한 무지(26-30)

이제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약속을 성취하시기 위해 보내신 구원자 예수님을 알아보기 못했다고 말합니다. 말씀을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그들을 거침없이 책망합니다. 그들은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말씀으로 약속한 구원을 성취하셨습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무지와 완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약속대로 모든 것을 이루셨다고 강조합니다. 인간의 방해와 훼방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반드시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지켜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신지라’(30)라고, 하나님의 최종 승리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지를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류의 모든 죄에 대한 하나님께서는 궁극적인 승리를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이야기의 정점입니다.

(4) 부름 받은 증인의 사명(31)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사람들에게 보이셨습니다. 먼저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간 사람들’이라고 소개합니다.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여러 날 동안 나타나신 이유가 제자들을 증인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요한복음 21장에 기록된 부활하신 주님과 베드로의 만남에서 ‘내 양을 먹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장면은, 바울의 이러한 설명과 부합합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에게 주어진 사명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에 대한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도 역시 그 사명을 위해 부름 받았음을 알립니다.


복음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통해서도 예수님의 생명의 복음이 누군가에게 흘러가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항상 복음 전파에 대한 영적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복음을 전할 기회가 있어도 전하지 못하고, 당황할 수 있습니다. 영적 준비를 위해 이렇게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담대함을 주시고 전할 말을 잘 준비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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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13-01)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세운 안디옥 교회

사도행전 13장 1-12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증거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는 자들은 누구나 복음을 증거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지만 복음을 증거하는 삶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의 선배들 또한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전도 활동을 할 수 있었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본문은 사도행전의 새로운 전환점이 시작됩니다. 복음이 전파된 안디옥 교회는 건강하게 성장합니다. 건강한 안디옥 교회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바나바와 바울을 선교사로 파송합니다. 그들이 처음으로 도착한 선교지는 바나바의 고향인 구브로였습니다. 그곳에서 복음을 방해하던 바예수는 심판을 받고, 총독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건이 발행합니다.

 

이방인 선교를 준비한 안디옥 교회(1-3)

선교(宣敎)는 사람의 결단으로 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안디옥 교회를 통해 새로운 선교가 시작됩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을 떠나서 복음을 전하는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선교였습니다. 이 선교는 안디옥교회가 계획한 것처럼 보이지만 성경은 성령이 지시하신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1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2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3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1-3)

바나바와 바울은 부조를 마치고 시리아 안디옥으로 돌아왔을 때, 새로운 일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성령님께서 세계 선교를 위해 그들을 먼 먼 곳으로 보내실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고 기대하지도 않았던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생각을 넘어 일하시고 계획하십니다.

(1) 안디옥교회의 구성원(1)

하나님께서는 먼저 바나바와 바울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바나바는 바울을 불렀고, 함께 안디옥 교회를 섬겼으며, 예루살렘 교회에 부조하는 일도 함께했습니다. 이제 성령님께서 두 사람을 선교사로 세우십니다.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에 일어난 핍박으로 인해 흩어진 성도들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입니다(행 11:19-21). 지역적으로 안디옥은 국제적인 도시로서 다양한 인종과 계층의 사람들로 구성되었습니다. 당연히 안디옥 교회도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함께 하는 교회였지만, 유대인보다 이방인 중심으로 형성된 교회였습니다.

안디옥 교회 안에 ‘선지자’와 ‘교사’가 존재했다고 언급합니다(1). 그들을 부활하신 주님을 예배하고 금식했다고 소개합니다. 성령의 감동과 지도를 받은 교사들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의 말씀을 회중에게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고린도 교회와 에베소 교회를 향한 권면에서도 바울이 선지자의 존재를 언급한 바 있기에(고전 12:28-29; 엡 4:1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가 있었다는 사실이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누구인가입니다. 누가는 사도행전 11:27에서 일단의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내려왔다고 언급하였습니다. 그들의 정체가 무엇이고, 그들이 누구였는지는 궁금합니다. 분명한 것은 안디옥 교회 안에 선지자와 교사들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과 그들이 함께 예배하고 교회를 섬겼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이방인들이 구원받은 사실은 이전에 베드로가 로마 백부장 고넬료의 가정에서 복음 전함으로서 이방인도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확인되었지만(행 10:1-16),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함께 예배하는 교회는 안디옥 교회가 처음이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출신과 인종적 배경과 신분이 다른 다양한 일꾼들이 모든 차이를 넘어서 복음을 위해 함께 기도하고 같은 비전을 품고 사역하였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장차 세계 선교를 위해 주도적인 역할을 할 것에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교회였습니다(행 11:29-30; 12:25). 이런 의미에서 안디옥 교회는 열린 마음을 가진 교회였고 세상을 품을 만한 교회였습니다.

(2) 바나바와 바울을 선교사로 세움(2-3)

안디옥에도 믿는 이방인 성도들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에 들렸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관심을 가지고 바나바를 안디옥 교회로 파송하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송 받은 바나바와 바울은 1년 동안 안디옥에서 성도들을 교육하였습니다.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금식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노력한 교회입니다. 성령께서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2)고 말씀하셨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성령께서 말씀하신 것을 듣고 바로 순종했습니다. 겨우 1년밖에 안 된 교회가 가장 크게 의지하던 핵심 사역자 바나바와 바울을 선교사로 파송한 것은 절대 순종이요 희생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더 중요한 것은 자신들의 유익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었고, 자기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사역이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이 말씀에 순종하여 바나바와 바울에게 안수하고 그들을 이방인 지역 선교사로 떠나보냈습니다.

 

이방인 지역에서 시작된 복음(4-7)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이라면, 그 일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도 함께 주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계서 주신 능력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을 힘입어야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4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5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행원으로 두었더라 6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이르러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인 마술사를 만나니 7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으니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4-7)

안디옥 교회는 매우 건강하고 균형 잡힌 선교모델을 보여줍니다. 성령님께서는 사람을 세우시고 보내십니다.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들 가운데서 바나바와 바울을 따로 세워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발길을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합니다. 지금 당신이 서 있는 자리가 성령께서 보내신 자리임을 믿어야 합니다.

(1) 구브로에 도착한 바나바와 바울(4-5)

누가는 바나바와 바울의 선교 사역을 간략하게 기록합니다. 그들은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구브로로 향합니다. 그들의 첫 목적지가 왜 구브로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 바나바의 고향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파송 받은 바나바와 사울은 실루기아를 거쳐 구브로 섬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먼저 아우구스투스 이후 상업적인 중심지로 유대인이 많이 모여 살았던 살라미에 도착해 그곳 회당에서 사역을 시작했습니다(5). 그들의 선교사역에 요한이 조력자로 동행했습니다(5). 그들은 다른 사역과 달리 안디옥 교회로부터 파송 받아 장기적인 이방인 사역을 했다는 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행전 13장은 이방인 전도의 분기점이 됩니다.

(2) 구브로에서 바나바와 바울의 사역(6-7)

‘바보’는 구브로 섬의 서쪽 끝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이곳에서 하나님의 대리자와 사탄의 대리자가 대결을 벌립니다. 바울은 거짓 선지자이자 마술사인 ‘바예수’와 대결한 것은 베드로가 사마리아에서 마술사 시몬과 대결한 사건(8:4-25)과 유사합니다. ‘바예수’는 마술사 ‘엘루마’로도 소개합니다.

 

바예수 엘루마와 영적 전투(8-12)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에게 사역을 맡기십니다. 인도하심을 받은 사람들은 어떤 일이든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가장 잘 아시고 사랑하시기 때문에 사역을 맡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언제나 성령의 인도를 구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8이 마술사 엘루마는 (이 이름을 번역하면 마술사라) 그들을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 9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10이르되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11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둠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12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놀랍게 여기니라(8-12)

하나님의 사역이지만 그렇게 만만치 않았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시작된 전도 여행이었지만 고난은 있습니다. 항상 어두움의 세력은 빛을 저항하려 합니다. 그러나 어두움이 아무리 강할지라도 빛 앞에서 물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구브로 섬의 ‘바보’라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성령 충만한 바울은 엘루마를 향해 선포합니다.

(1) 바예수의 사역 방해(9)

구브로 ‘바보’를 총괄하고 있던 총독 서기오 바울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바울과 바나바는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바예수’라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인 마술사 바예수에게 방해를 받습니다(9).

(2) 영적으로 승리한 바나바와 바울(10-11)

성령에 충만한 바울이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이 사람 배후에 마귀가 있음을 분별하였습니다. 바울은 성령에 의해 그가 앞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자 엘루마는 즉시 눈이 멀게 되었습니다(10). 바예수는 총독을 인도하던 자에서 인도를 받는 신세가 됩니다(11). 이처럼 복음의 현장에서는 영적 전쟁이기 때문에 항상 사탄의 방해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바나바와 바울은 모든 악조건을 이기고 승리했습니다.

(3) 서기오 바울의 믿음(12)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에 서기오 바울이 충격을 받습니다. 사탄은 ‘바예수’(구원의 아들)를 통해 예수님의 복음이 총독 바울에게 들어가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오랫동안 영적 어두운 소경으로 살았던 총독 바울에게 새로운 빛인 복음을 듣고 하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영인 성령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본 것입니다. 총독은 지체없이 복음을 받아들입니다(12). 거절과 방해 중에도 성령님께서는 실수 없이 자기 백성을 부르실 것을 믿으면서, 꼭 전해야 할 때 꼭 전해야 할 말씀을 꼭 전합시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모든 것은 이루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선교의 현장에 인도하시는 성령님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뜻을 순종하는 안디옥 교회가 있었고, 복음을 위해 자신을 바친 바나바와 바울이라는 신실한 일꾼이 있었습니다. 오늘도 복음을 위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는 신실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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