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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24-02)


총독 벨릭스 앞에서 변호하는 바울

사도행전 24장 10-23절


 

복음을 전하는 길은 꽃길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때를 얻던지 못얻던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유대인은 복음을 전하는 바울을 모함하고 무고했습니다. 없는 사실을 만들고 증거를 왜곡하고 조작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 가해지는 박해는 교묘하고 악랄합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한 죄로 고소당했습니다.

 

  • 거짓 변호사 더둘로는 사도 바울을 벨릭스 총독 앞에서 짜맞추기식 고소의 모든 내용이 끝났습니다. 바울은 더둘로의 발언 구조를 따라 차분하면서도 논리정연하게 사실이 아님을 변론합니다. 고소 내용에 대한 증거나 증인도 없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 변증합니다. 벨릭스는 천부장이 올 때까지 재판을 연기합니다.

 

세 가지 고소에 대한 반박(10-20)

「나는 정직한 자의 형통을 믿는다」란 책에 보면, ‘정직하면 항상 손해 본다. 그러나 결국 정직 때문에 흥한다.’라는 글이 있습니다. 당신은 살아가면서 정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복음 증거자들은 억울한 일을 만날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왜곡된 사실로 모함을 당할 때, 간사한 불의 앞에 좌절하지 말고 바울처럼 당당한 태도로 변호하시길 바랍니다.

 

10총독이 바울에게 머리로 표시하여 말하라 하니 그가 대답하되 당신이 여러 해 전부터 이 민족의 재판장 된 것을 내가 알고 내 사건에 대하여 기꺼이 변명하나이다 11당신이 아실 수 있는 바와 같이 내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간 지 열이틀밖에 안 되었고 12그들은 내가 성전에서 누구와 변론하는 것이나 회당 또는 시중에서 무리를 소동하게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13이제 나를 고발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그들이 능히 당신 앞에 내세울 것이 없나이다 14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그들이 이단이라 하는 도를 따라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15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 16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 17여러 해 만에 내가 내 민족을 구제할 것과 제물을 가지고 와서 18드리는 중에 내가 결례를 행하였고 모임도 없고 소동도 없이 성전에 있는 것을 그들이 보았나이다 그러나 아시아로부터 온 어떤 유대인들이 있었으니 19그들이 만일 나를 반대할 사건이 있으면 마땅히 당신 앞에 와서 고발하였을 것이요 20그렇지 않으면 이 사람들이 내가 공회 앞에 섰을 때에 무슨 옳지 않은 것을 보았는가 말하라 하소서(10-20)

 

총독 벨릭스 앞에서 재판은 계속 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재판에서 유대인들의 고발에 적극적으로 대처합니다. 그의 증언에는 변호사 더둘로와 반대로 일체의 아첨이나 간사함이 없습니다. 사실을 논리적으로 대처하고 있습니다.

 

(1) 소요와 선동에 무고함을 변증함(10-13)

 

예루살렘에 가이샤라로 후송해 온 후, 예루살렘에서 고소했던 사람들이 내려와서 정식 재판이 이루어집니다. 총독 벨릭스는 유대인들은 유대인 측 변호사 더둘로로부터 바울에 대한 고발 내용을 모두 들었습니다. 고소 내용을 모두 듣고 난 후에, 이제 바울에게 신호하여 변론을 듣기 원합니다.

바울은 총독 벨릭스의 허락을 받아 변론하기 시작합니다. 그의 변론하는 모습은 변호사 더둘로와 같이 아첨이나 장황한 거짓말로 총독의 환심을 사려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짧지만 예의를 갖춰 ‘당신이 여러 해 전부터 이 민족의 재판장 된 것을 내가 알고 내 사건에 대하여 기꺼이 변명하나이다’라고 인사합니다(10). 실제로 벨릭스는 약 서기 52년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 유대 총독으로 파견되어 유대-시리아 전체 주 총독으로 5년을 다스렸습니다. 그는 총 8-9년 동안 유대 민족의 사안을 다루었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시간 동안 유대를 통치하면서 유대에서 일어난 일들은 많이 재판했기 때문에 공정하게 재판할 것이란 정도 인사를 전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고발한 사람들에 대해 흥분하지 않고 매우 절제된 언어로 진실에 입각하여 변론을 시작합니다. 바울은 벨릭스 통독과 무리 앞에서 자신의 무죄를 증명합니다. 그는 자신을 향한 고소가 사실이 아닌 증거들은 담대하게 피력합니다.

 

첫째 증거는, ‘내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간 지 열이틀밖에 안 되었고’(11)라며,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간 지 12일이란 기간 동안 소요를 조직하기에 부족한 시간입니다. 7일 동안 나실인의 결례를 행하고 있었고, 나머지 5일은 로마군 구금되어 있었습니다. 더 나가서 자신을 고발한 유대인들 중에 자신이 누군가와 변론하거나 회당 또는 성내에서 무리를 소동케 하는 것을 목격한 증인이 없다고 합니다(12). 그들이 고발한 대로 불법을 행하거나 공중을 선동하지 않았으니 재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유대인들이 고소 사유에 대한 증거를 제시할 수 없다고 항변합니다(13). 여기까지 더둘로의 고소 항목 중 소요 선동죄에 대한 반박이었습니다. 이것은 천부장 글라우디오 루시아가 편지에 써 보낸 내용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그들의 고소가 거짓됨을 증명했습니다. 그는 거짓 증언에 감정적으로 대처하지 않았습니다. 이성적으로 냉철하게 대처했습니다.

 

(2) 바른 신앙을 소유함(14-16)

 

다음으로 바울은 신앙적인 부분으로 이어갑니다. 이 말 중 ‘이단’이란 말만을 취하고 나머지는 매우 긍정적으로 확장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그들이 이단이라 하는 도를 따라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라고 당당하게 고백합니다. 그는 이단이라고 하는 그 도를 믿고 있다고 주저 없이 말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믿고 있는 신앙은 유대인들과 조상들이 믿었던 하나님과 다른 것이 아니라, 동일한 성경, 같은 신앙이라고 강조합니다(14). 만일 한 하나님과 한 성경을 믿는다면, 한 신앙의 내용을 가질 것입니다. 그 조상이 믿었던 메시아, 그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 그리스도란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을 가리키는 그림자였던 구약과 율법 그리고 선지자들이 전한 말을 다 믿고 지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욱 ‘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15)라고 구약에서도 부활이 있을 것이라고 약속했는데, 이제 예수님을 통해 의인과 악인의 부활, 그리고 그 후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의 날을 자신도 기다린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바로 열두 사도들과 바울의 일관된 주장입니다(17:18; 눅 24:26-27, 44).

바울은 이것을 ‘그들이 이단이라 부르는 도를 따르는 것’이라고 말하며 복음이 새로운 ‘길’에 대한 계시인 것을 암시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과 원리, 즉 잃어버렸던 길이요, 율법과 죄로 덮인 정통 신의 회복이라는 주장입니다.

 

그의 결론은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라는 것입니다(16). 나아가 그는 자신에게 주신 계시, 하나님을 섬기는 새로운 길, 이스라엘의 소망에 대해 ‘하나님과 사람을 향해 항상 다치지 않는 양심으로 노력한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로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는 자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노력한다’(ασκέω)라는 말은 ‘수고하고 분투한다’라는 의미입니다. 이제 바울은 하나님을 향한 이 온전한 양심의 분투 중 가장 최근 일을 소개합니다.

 

(3) 성전 모독죄에 대한 반박과 역고소(17-20)

 

바울은 자기 민족 유대인의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사람이 아니라 유익을 주는 사람입니다. 그 증거는 바울이 예루살렘에 방문한 목적이었습니다. 그는 ‘여러 해 만에 내가 내 민족을 구제할 것과 제물을 가지고 와서 18드리는 중에 내가 결례를 행하였고 모임도 없고 소동도 없이 성전에 있는 것을 그들이 보았나이다’라고 말합니다(17b-18). 바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한 목적은 전체 이방인 교회에서 모금한 구제금을 전달하기 위해서였습니다(20:1-4; 고전 16:1-4). 그는 이방인 교회들에게 오해를 받으면서라도 구제헌금을 모아서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려고 왔습니다. 바울 서신들을 보면, 헌금하는데 잡음이 안 날 수 없습니다. 자기 쓰려고 헌금을 모은다고 하는 비난을 들으면서 까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비를 모금해서 찾아왔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했던 일은 구제 헌금을 전달하고 결례를 행한 것뿐이었습니다. 성전에서 아무런 소동 없이 결례만 행한 것을 그들도 보았습니다.

물론 바울이 방문한 목적인 내적으로는 이방인과 유대인 교회가 ‘하나 됨’이라는 신학적 목표가 있었지만, 기근에 처한 유대 교회를 구제하는 일이 일차적인 목적이었습니다. 그는 신학을 객관적인 사실에 담았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한 벌 더 나가서 사건의 발단은 아시아에서 온 어떤 유대인들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그러나 아시아로부터 온 어떤 유대인들이 있었으니 19그들이 만일 나를 반대할 사건이 있으면 마땅히 당신 앞에 와서 고발하였을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이 사람들이 내가 공회 앞에 섰을 때에 무슨 옳지 않은 것을 보았는가 말하라 하소서’(18b-20)라고 말합니다. 진짜로 고소 내용을 들어야할 사람들은 고발한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란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소동케 하려고 했던 일이 있다고 하는데, 그들이 직접 이곳에서 와서 증언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없고,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이 증거나 증인도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발한 사람들이 고소해 놓고 재판에 출두하지 않은 것을 문제 삼아 항의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당당한 사람은 아무도 이길 수 없습니다. 폭행을 하고 구금을 하고 협박할 수 있지만, 이길 수는 없습니다. 세상에서 힘을 사용해서 겁박하는 것 밖에 할 수 없는 사람은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유대 지도자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것은 고소를 포기하거나 취소하는 것으로 ‘데스티소치오’라고 불렀습니다. 로마법은 고소를 포기하는 원고에게 엄격했습니다. 아시아계 유대인 고소자들이 법정에 출두하지 않는 것은 고소 철회를 뜻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소요죄와 성전 모독죄로 고소당했는데, 고소인은 성전 모독죄에 대해서는 입증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아시아계 유대인들이 소송을 철회했을 때, 바울은 확실히 제시할 수 있는, 법률상 성립하는 반론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역고소입니다.

 

소송 처리를 연기함(21-23)

우리는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고 믿습니다. 죽음 후에는 영생 혹은 영벌이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이 믿음에 근거해 이 땅에서의 삶을 신중히, 거룩하게 살려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성경적 가치관과 다른 것을 맹렬히 비난하고 파괴하는 기독교 근본주의는 우리가 지양해야 할 태도입니다.

 

21오직 내가 그들 가운데 서서 외치기를 내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오늘 너희 앞에 심문을 받는다고 한 이 한 소리만 있을 따름이니이다 하니 22벨릭스가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 고로 연기하여 이르되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오거든 너희 일을 처결하리라 하고 23백부장에게 명하여 바울을 지키되 자유를 주고 그의 친구들이 그를 돌보아 주는 것을 금하지 말라 하니라(21-23)

 

바울은 이방인 교회들에게서 구제 헌금을 모아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 왔습니다. 성전에서 소요를 일으킬 어떤 동기도 없습니다. 소동은 흥분한 율법주의자들과 유대주의자들이 일으킨 것입니다.

 

(1) 바울이 심문을 받는 이유(21)

 

바울은 결론적으로 ‘오직 내가 그들 가운데 서서 외치기를 내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오늘 너희 앞에 심문을 받는다고 한 이 한 소리만 있을 따름이니이다 하니’라고 말합니다(21). 총독 벨릭스는 바울이 무슨 내용인 부활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총독은 예루살렘과 유대에서 화제가 되는 사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곳곳에 다니면서 전하고 있다는 정보는 이미 보고 받아서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 공회에서 ‘나는 죽은 자의 부활로 인해 오늘 너희 앞에서 심문받는다!’라고 외친 것을 원고인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몇몇 장로들도 이미 들었습니다. 이것은 1-2차 변증의 요약이요. 바울 변증의 뼈대입니다. 바울은 죽은 자들의 부활 때문에 재판을 받고 있으며, 따라서 그의 변증은 부활에 대한 증거입니다.

 

(2) 재판을 연기하는 총독 벨릭스(22-23)

 

총독 벨릭스는 여기까지 듣다가 심문을 중단합니다. 그리고 ‘연기’합니다(22). 이 ‘연기’는 법적 결정을 연기하는 일을 뜻하는 전문용어입니다. 그러면서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오면 너희에 관한 일을 처결하리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통해 루시아의 증언이 필요한 것 외에는 바울의 혐의가 무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풀어주어야 마당한데도 대수의 유대인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최대한 시간을 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총독 벨릭스는 바울이 소요를 선동했는지 여부를 루시아가 증언할 것으로 기대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벨릭스 치하에서 후속 재관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총독 벨릭스는 바울을 예우했고, 친구들이 바울의 편의를 돌보는 것을 허용했습니다. 형이 확정되지 않는 로마 시민의 합당한 대우를 받은 것입니다.

이런 표현들을 하나님께서 바울을 계속적으로 도와주시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수이지만 죄수가 아닙니다. 그는 로마까지 미결수 신분으로 갈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전략이었습니다. 복음 앞에서 당당한 사람,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양심을 깨끗하게 지킨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지키시고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사명자의 삶에도 무수한 위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명자를 돌보시는 하나님이 동행하시고 함께 하는 동료가 있고, 하나님의 뜻을 우선하여 결단하는 마음이 있다면 마침내 사명을 완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사명을 완수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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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24-01)

 


총독 벨릭스 앞에 선 바울

사도행전 23장 31절-24장 9절


 

어둔 세상은 진리의 빛을 미워합니다. 어둠은 어둠의 방법과 과정으로 또 하나의 어둠을 만들어 냅니다. 바울을 고소하는 자들도 증거와 증인들 대신에 거짓과 선동에 능한 자를 데려왔습니다. 그들이 바울을 고소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은 무엇입니까?

 

  • 로마 경비대의 경호를 받은 바울은 무사히 가이사랴에 도착합니다. 천부장의 편지를 받은 총독 벨릭스는 바울에게 출신지를 묻고 분봉왕국 출신이 아님을 확인 후 바울의 기소 사건을 맡기로 결정하고 바울을 헤롯 궁에 구금할 것을 명령합니다. 닷새 후 재판이 시작되고 대제사장 측 변호사 더둘로는 총독 앞에서 바울을 기소합니다. 그러나 그의 기소는 지나치게 아부적인 발언만 넘쳐날 뿐 바울의 혐의를 입증할 만한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하지 못합니다.

 

바울이 가이사랴에 도착(31-35)

때로는 우리가 걷고 있는 길의 마지막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당장에는 재앙이나 시련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돌아가며 막히는 듯 보이는 길일지라도, 하나님께서 반드시 당신께서 원하시는 길에 우리를 인도하실 것을 믿고 항상 주님만을 의지하여 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31보병이 명을 받은 대로 밤에 바울을 데리고 안디바드리에 이르러 32이튿날 기병으로 바울을 호송하게 하고 영내로 돌아가니라 33그들이 가이사랴에 들어가서 편지를 총독에게 드리고 바울을 그 앞에 세우니 34총독이 읽고 바울더러 어느 영지 사람이냐 물어 길리기아 사람인 줄 알고 35이르되 너를 고발하는 사람들이 오거든 네 말을 들으리라 하고 헤롯 궁에 그를 지키라 명하니라(31-35)

 

천부장의 지시로 시작된 로마 군대의 바울 호송작전을 준비했습니다(23). 준비된 작전이 이제 31절에서 다시 재개됩니다. 누가는 백부장 두 명에게 야밤에 출발할 경비대를 준비하라는 천부장의 지시를 언급한 후 여섯 절을 할애해 천부장이 벨릭스 총독에게 보내는 편지의 내용을 기록합니다(25-30).

 

(1) 안디바드리에 도착함(31-32)

 

해가 저물고 밤 9시경(밤 제 삼 시) 예루살렘을 출발한 경비대는 다음 날 아침 안디바드리에 도착한 것으로 보입니다. 안디바드리는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60킬로미터 떨어진 도시입니다. 목적지까지는 절반을 넘게 갔습니다. 밤에 신속하게 행진을 강행했다면 불가능하지는 않는 거리입니다. 보병들이 예루살렘의 위험한 지역을 벗어난 후에 영내로 되돌아왔을 것이라 추정한다면 큰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안디바드리는 가이사랴에서 남쪽으로 약 40킬로미터 거리에 위치했습니다. 그러니까 목적지까지 절반 넘게 간 것입니다. 안디바드리에서 보병은 다시 예루살렘 영내로 되돌아오고 가아사랴까지 나머지 40킬로미터 정도는 기병이 바울을 호송하기로 했습니다. 이 지역은 이방인들이 거주하는 곳이므로 음모자들의 공격으로부터 안심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1:8-17에 의하면 약 2주 전 바울과 그 일행은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적이 있습니다. 누가도 이 여행의 동행자였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그 여정에서 지금과 동일한 길을 이용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온 바울 일행이 이제는 밤에 그 길을 다시 가이샤라까지 내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길은 단지 피신하여 간 길이 아닙니다. 이 길은 로마로 가는 긴 여정의 시작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바울은 그 길이 로마행이 될 것이란 것을 몰랐습니다.

 

(2) 가이사랴에서 바울이 총독을 대면함(33)

 

가이사랴에 도착한 기병은 바울을 안전하게 총독 벨릭스에게 넘겨주었고 천부장의 서신도 함께 전달해 주었습니다. 천부장의 편지를 읽은 벨릭스는 바울에게 로마 제국의 어느 속주(개역개정은 ‘영지’) 출신인지를 묻습니다.

만약 바울이 시리아 혹은 아나톨리아 지방의 분봉왕국 출신이었다면 벨릭스 총독은 그 지방의 분봉왕에게 먼저 자문을 구해야만 했습니다. 그것이 외교적으로 올바른 절차였습니다. 이와 같이 유다 지방의 총독이었던 본디오 빌라도 역시 나사렛 예수가 갈릴리 출신인 것을 알고 갈릴리 지방의 분봉왕이었던 헤롯 안티파스에게 그를 보낸 바 있습니다(눅 23:6-12).

 

그러나 바울은 로마 제국의 속주인 길리기아 출신으로 로마 제국의 총독인 벨리스가 이 사건을 외부 자문 없이 직접 다룰 권한을 갖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벨릭스는 바울을 기소하는 고소인들이 도착하면 고소 사건을 공식적으로 다루겠다고 말합니다. 그동안은 바울을 헤롯 궁에 구금할 것을 명령합니다.

 

(3) 바울이 헤롯 궁에 갇힘(34-35)

 

‘헤롯 궁’은 헤롯 대왕이 본래 자기 자신을 위해 가이사랴에 지은 왕궁이었지만, 지금은 로마 총독의 관저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바울은 유대인의 손에서 벗어나 로마 총독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성난 유대교 열성분자들과 자기들의 책임을 면하려는 로마인들 사이에서 바울이 이토록 차분하고 담대한 모습을 보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누가는 우리의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사도행전 23:11에 기록한 것 같습니다.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사도 바울처럼 상황은 비록 어려울지라도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확신과 위로가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총독에게 기소(1-9)

하나님의 뜻을 알면 여러 가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담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삶을 해석하는 안경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오늘 우리의 인생을 판단하는 기준도 하나님의 부르심인 소명입니다. 그 소명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행복이고 삶의 의미입니다. 그것보다 더한 것이 있다면, 아마 우리는 것을 위해 살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과 죽음을 나누어 놓을 것입니다.

 

1닷새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어떤 장로들과 한 변호사 더둘로와 함께 내려와서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발하니라 2바울을 부르매 더둘로가 고발하여 이르되 3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으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로 개선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크게 감사하나이다 4당신을 더 괴롭게 아니하려 하여 우리가 대강 여짜옵나니 관용하여 들으시기를 원하나이다 5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6그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 7(6하반-8상반 없음) 8당신이 친히 그를 심문하시면 우리가 고발하는 이 모든 일을 아실 수 있나이다 하니 9유대인들도 이에 참가하여 이 말이 옳다 주장하니라(1-9)

 

세상은 우리보다 항상 강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자신들이 원하는 데로 그리스도인들을 잡을 수도 있고, 괴롭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은 상상 외로 빈약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적인 것을 보지 못하면 힘 있는 자들에게 아부할 수 있습니다. 더둘로는 총독에게 잘 보이려고 상투적인 인사를 전하고 있습니다.

 

(1) 더둘로가 바울을 기소함(1-2)

 

이제 바울이 구금된 지 닷새 만에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일부 산헤드린 공회원과 더둘로라 하는 변호사 한 명을 대동하고 가이사랴에 도착했습니다(1). 오늘날 법정의 모습과 마찬가지로 그들을 대변해 변호사 더둘로가 발언을 시작합니다.

누가는 더둘로의 기소 내용을 매우 간략하게 기술합니다. 그러나 더둘로는 당시의 관례를 따라 아부성이 다분한 발언을 적절하게 섞어가면서 총독에게 좋은 인상을 얻어내려고 노력합니다. 그는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평화를 누린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더둘로의 아부적 발언과는 정반대로 벨릭스 총독은 유대 사회에 심각한 불안을 초래했습니다. 권력자들만 누리고 있는 나라인데, 총독이 잘해 주었다고 마음에도 없는 치사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총독으로 재임하는 기간 동안 로마 제국과 유대인들 간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유대는 불안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와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한결같이 벨릭스 총독의 무능한 통치에 대해 기록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둘로는 로마가 베푸는 평화를 바울이라는 작자가 해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기소 내용을 간략하게 하겠다는 표현을 비롯해 재판관의 관용을 구한다는 발언 역시 당대 법정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내용 중 하나였습니다.

 

(2) 더둘로의 기소 내용(3-9)

 

3-4절에서 지나치게 긴 아부적 발언을 한 변호사 더둘로는 5절에서 바울에 대한 기소 내용을 간략하게 세 가지로 제시합니다. 첫째, 바울은 전염병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바울을 상습적으로 법을 어기며 공공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로 묘사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기소는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사역을 할 때 받은 고소 내용과 흡사합니다(행 17:6-7).

당시에는 로마 황제에 대한 반역죄 혐의가 구체적으로 제시되었다면, 이번에는 암시적으로 나타납니다. 누가가 이 사실을 두 번에 걸쳐 반복적으로 기록하는 이유는 바울뿐만 아니라 당시 일반 그리스도인들에게 제시된 반역죄 혐의가 얼마나 사실과 동떨어진 것인지를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둘째, 바울은 로마 제국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을 선동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 기소보다 내용이 더 구체적이긴 하지만, 그 근거는 역시나 매우 빈약합니다. 예를 들어 최근 유대인이 많이 거주하는 알렉산드리아와 로마에서 민란이 일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바울이 그 민란을 주도했다는 근거는 제시하지 못합니다. 물론 때로는 바울이 방문한 도시의 유대인 공동체 안에서 소동이 벌어지곤 했던 것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면 남부 갈라디아와 데살로니가, 고린도, 에베소 등에서 이러한 소동이 벌어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떤 정치적인 의도를 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셋째, 바울이 나사렛파 우두머리라는 것입니다. 벨릭스 총독이 더둘로의 이 표현을 얼마나 잘 이해했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앞의 두 기소 내용과 함께 유대인 공동체 안에서 소동을 일으키는 조직의 우두머리 정도로 이해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여기서 개역개정이 ‘나사렛 이단’으로 번역한 헬라어 단어 ‘나자라이오스’는 신약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예수를 묘사하는 데 사용되지만, 여기서는 유일하게 예수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됩니다.

 

더둘로의 기소 내용 중에서 가장 구체적이며 중요한 내용은 6절에 나옵니다. 그가 예루살렘에서 성전을 더럽히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소도 단지 소문에 의한 것이지 입증할 만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서방 사본에는 6b절과 8a절 사이에 천부장 루시아를 향해 불만을 표출하는 내용이 추가로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율법대로 재판하려고 했으나 천부장 루시아가 와서 그를 우리 손에서 강제로 빼앗아 갔나이다. 그러고는 그를 고발하는 사람들에게 각하께 가라고 명하였나이다.’

그러나 이 내용은 비록 역사적으로는 사실일 수 있지만, 사본학적 근거는 매우 빈약합니다. 후대 필사자가 본문의 의미를 분명하게 하려고 추가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만약 이 추가 내용이 원문에 속했다면 8절의 ‘당신이 친히 그를 심문하시면’은 ‘루시아를 심문하시면’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총독이 더둘로의 발언 이후에 바울의 발언을 들으려 한 것으로 보아 ‘바울을 심문하시면’의 뜻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더둘로의 말에 유대인들은 확실히 제시할 만한 증거도 없으면서 자기들의 주장을 밀어붙이려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러한 모습들은 독자들에게 상당히 부정적인 모습으로 비칠 것입니다.


거짓을 드러내기 위해 거짓을 사용한다면 과연 그 의도를 신뢰할 수 있습니까! 어둠의 세상은 진리를 거짓으로 만들기 위해 갖은 수단을 다 쓰고 있습니다. 진리가 살게 한다고 믿기보다는 진리에 의해 자신의 거짓이 폭로되지 않아야 산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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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23-02)


바울을 죽이려는 유대 열성분자들

사도행전 23장 12-30절


 

세상은 자신이 맞고 타인이 틀려서가 아니라, 타인이 제거되어야 자신이 산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타인을 죽이려고 합니다. 생명이 생명답게 살아가는 것이 싫은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남을 험담하고 비판하고 책임을 전가하는 사람, 그리하여 남을 죽이려는 사람, 그래야 속이 시원한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유대인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 바울을 잡은 데 실패한 일부 유대교 열성분자들은 바울을 살해하려는 음모를 꾸밉니다. 그들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을 찾아가 바울을 영외로 유도할 것을 요청하고, 자신들은 매복해 있다가 바울을 죽이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그러나 그들의 음모는 바울의 조카의 귀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사실을 전해 들은 천부장은 바울을 로마 총독 벨리스에게 회부하기로 결정하고 삼엄한 경비대와 함께 그를 가이사랴로 보냅니다.

 

살해 음모를 꾸밈(12-15)

악인들은 생각하는 것이 죄악입니다. 하루 종일 죄악을 모의하며 죄악을 꿈꾸는 사람들입니다. 나름 그들은 자신의 생각이 훌륭해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그런 오만한 자리에 안자서 악을 도모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해야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12날이 새매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 맹세하되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 하고 13이같이 동맹한 자가 사십여 명이더라 14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가서 말하되 우리가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기로 굳게 맹세하였으니 15이제 너희는 그의 사실을 더 자세히 물어보려는 척하면서 공회와 함께 천부장에게 청하여 바울을 너희에게로 데리고 내려오게 하라 우리는 그가 가까이 오기 전에 죽이기로 준비하였노라 하더니(12-15)

 

바울은 공의회에서 일어난 큰 다툼 때문에 로마군이 주둔하고 있는 병영으로 옮겨져 보호받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말씀을 받은 밤이 지나고(11) 다음 날 아침이 되었습니다.

바울을 아쉽게 놓치게 되자 유대인들 가운데 일부 열성분자들은 그를 다시 살해할 기회를 얻기 위해 음모를 꾸밉니다. 개역개정은 ‘당을 지어’라고 번역하지만, ‘음모를 꾸며’가 더 정확한 표현입니다. 이들은 40여 명이 넘는 유대인이 바울을 죽이려고 ‘암살단’을 조직했습니다. 지난 밤 주님께서 하신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이 음모는 성공하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것은, 이렇게 많은 유대인이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음식을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맹세할 만큼 사태가 심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결단이 종교적인 신념에서 나오는 극단적인 경건의 표현이었다는 데 그 심각성이 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든 바울을 빨리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맹세에 참여한 자들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을 찾아가 협조를 부탁합니다(14-15). 이 부분에서 ‘서기관들’은 언급되지 않습니다. 서기관들은 대부분 바리새인들이었는데 아마도 이 열성분자들은 산헤드린 공회원 가운데 자기들의 음모를 좀 더 흔쾌히 받아줄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아간 것으로 보입니다. 나름대로 하나님을 위한 열정이고 율법을 수호하기 위한 결의입니다. 아무리 순수해도 그릇된 지식이 낳은 열정이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줍니다. 바른 지식과 분별력이 없는 순수함은 사탄의 손쉬운 먹잇감이 되고, 자기애에 사로잡힌 인간은 항상 선한 의도로 불의한 과정을 정당화할 수 있습니다. 관계를 깨뜨리고 진리를 거스르는 열정은 아닌지 돌아봅시다.

 

그들이 산헤드린 공회의에 바울을 죽이기로 맹세한 사실을 알리면서 공회가 바울에 대해 조사할 일이 있으니 바울을 보내 달라고 천부장에게 부탁하면 그들이 매복하고 있다가 단숨에 그를 제거하겠다고 공모한 것입니다(15). 이틀 전에 공회에서 있었던 바울에 대한 심문은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의 분열과 다툼으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산헤드린 공회가 바울을 좀 더 철저히 조사하겠다는 것은 그럴 뜻한 명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후대 랍비 문헌에 의하면, 산헤드린 공회는 어떤 음모에도 공조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와 현실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누가는 그들이 바울을 죽이기 전까지는 식음을 전폐할 것을 맹세했다는 표현을 두 번 반복해 기록하면서 그들의 강한 의지를 강조합니다(12,14). ‘맹세하다’는 단순히 맹세의 의미를 넘어서 ‘저주를 받다’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이 음모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도 마땅하다는 강한 의지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15절은 열성분자들의 구체적인 음모 내용이 나옵니다. 그들의 음모는 산헤드린 공회가 바울을 영외로 유도하면, 몰래 잠복해 있다가 그를 살해해버리겠다는 일종의 테러 작전입니다.

 

살해할 음모가 탄로 남(16-22)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계획이나 일을 막을 수 있는 권력이나 음모는 세상에 없습니다. 악인들이 음밀한 계획을 세우고 주도면밀하게 작전을 세운다고 할지라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눈은 속일 수 없습니다. 유대 열성분자들이 은밀하게 바울을 암살 계획했지만, 단 한번 등장하지 않았던 바울의 조카에게 발각되면서 계획이 들어나게 됩니다.

 

16바울의 생질이 그들이 매복하여 있다 함을 듣고 와서 영내에 들어가 바울에게 알린지라 17바울이 한 백부장을 청하여 이르되 이 청년을 천부장에게로 인도하라 그에게 무슨 할 말이 있다 하니 18천부장에게로 데리고 가서 이르되 죄수 바울이 나를 불러 이 청년이 당신께 할 말이 있다 하여 데리고 가기를 청하더이다 하매 19천부장이 그의 손을 잡고 물러가서 조용히 묻되 내게 할 말이 무엇이냐 20대답하되 유대인들이 공모하기를 그들이 바울에 대하여 더 자세한 것을 묻기 위함이라 하고 내일 그를 데리고 공회로 내려오기를 당신께 청하자 하였으니 21당신은 그들의 청함을 따르지 마옵소서 그들 중에서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기로 맹세한 자 사십여 명이 그를 죽이려고 숨어서 지금 다 준비하고 당신의 허락만 기다리나이다 하니 22이에 천부장이 청년을 보내며 경계하되 이 일을 내게 알렸다고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고(16-22)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은밀한 음모가 놀랍게도 바울의 조카에게 탄로가 나게 하셨습니다(16). 열성분자들이 꾸민 이 음모의 내용이 바울의 조카 귀에 들어갑니다. 이 조카가 어떻게 이 음모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고 어떻게 영내에 있는 바울에게까지 가서 알릴 수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바울의 조카가 이렇게 손쉽게 영내에 들어갈 수 있었다면, 바울을 살해하려던 자들은 왜 들어가지 못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감옥 상황에 대해 알려진 바에 의하면, 친인척들은 수감자가 먹을 음식이나 필요한 물건들을 비교적 자유롭게 전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단순히 하나의 우연한 일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 일이 바울의 조카에게 알려지게 된 것은 흔히 말하는 우연(偶然)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번 일에 직접 개입하셔서 그분의 계획 하에 모든 일이 진행되는 필연(必然)임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바로 누가가 이 단락에서 보여주려는 요지이고 독자들에게 전달하려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을 통해 하나님께서 기적적인 일을 통해 병자를 고치시고 베드로를 옥에서 구해내시고, 바울과 실라를 옥에서 풀어주시는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이루려 하실 때 언제나 이러한 기적적인 방법이나 비상한 방법만을 사용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이번 경우와 같이 매우 자연스러운 방법을 사용해 자신의 뜻을 성취하기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하늘에 나는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씀은 참 진리입니다. 들에 핀 백합화도 친히 가꾸시고 기르시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자녀 삼아주신 우리의 삶 속에서도 동일하게 역사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참된 믿음의 삶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사도행전의 추후 이야기를 통해 알게 되겠지만, 사실 이들의 살해 음모가 바울의 조카에 의해 발각되었기 때문에 바울이 궁극적으로 로마 호위대의 보호를 받고 로마까지 가게 되고, 거기서 복음을 자유롭게 전하는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이로 인해 열성분자들의 음모가 바울에게까지 전해지고, 더 나아가 천부장의 귀에 까지 전달되어 집니다(17-21). 천부장은 바울의 조카를 조용한 곳으로 데리고 가서 ‘내게 할 말이 무엇이냐?’(19)라고 묻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바울이 백부장에게 지시를 내리거나 천부장이 바울의 조카를 손잡고 데리고 가는 모습이 과연 역사적으로 신빙성이 있는 것인지 의구심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아마 그는 은밀히 할 말이 있다는 말에 그는 착각했을 수 있습니다. 바울이 그의 조카를 이용해서 바울을 석방하기 위한 뇌물을 주지는 않을까하는 생각으로 조용한 장소로 갔을지 모릅니다. 또 한 가지는 이와 같은 살해 음모가 로마 군대의 지도부에게 중대한 사안일 수 있음을 감안한다면, 이 사실을 입수한 로마 군대가 이 사안을 신중하면서도 신속하게 처리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의 조카는 천부장에게 자신이 들었던 바울을 죽이려 했던 음모를 자세하게 전합니다(20-21). 바울의 조카는 그들의 음모를 꾸구체적으로 밝히면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요청을 결코 들어주어선 안 된다고 당부했습니다(21). 개역개정의 20절 번역은 다소 어색합니다. 이 구절은 ‘유대인들이 그(바울)에 대하여 더 자세한 것을 알아보기 위함이라고 하면서 내일 그를 공회로 데려와 달라고 당신에게 청하자고 합의했습니다.’과 같이 번역이 가능합니다.

 

생각 밖에 바울의 조카로부터 유대 열성분자들의 음모를 전해들은 천부장의 반응과 그의 지시를 서술합니다. 먼저 자신에게 소식을 알린 청년에게 이 사실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경계하며 보냈습니다(22).

당시 로마 속주에 주둔해 있는 로마 군대의 주된 임무는 공공질서를 유지하는 것이었으며 피의자를 사법 처리할 수 있는 권한을 소유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천부장은 조카의 말을 들으면서 이 사건을 상부기관으로 회부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그는 바울을 자기 선에서 석방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바울의 신변에 위협이 될 만한 상황임을 감지하고 그를 보호하기 위해 즉각적인 행동을 취했습니다. 이것은 정말 하나님의 은밀한 섭리의 결과였습니다.

 

천부장이 신속하게 결정하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자신이 바울을 석방하게 되는 경우에는 두 가지 어려운 일에 직면하게 됩니다. 첫째는, 분노에 찬 유대인들의 불만이 자기에게로 향할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바울은 로마시민권자인데, 로마시민을 자신의 잘못된 선택으로 죽게 되면 그 책임을 면할 길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의 문제는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을 안전하게 감금하는 편을 선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자신의 책임을 면하기 위해 바울의 신병을 직속상관에게 무사히 보내기로 결정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바울의 신변을 철저하기 보호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의 음모가 발각된 사실도 숨겨야 했습니다.

 

바울을 통독 벨릭스에게 보내기로 함(23-24)

사람들은 자신의 욕심이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악한 계획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 계획일수록 철저하게 비밀스럽게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방법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반대로 사용하시여 하나님의 선한 사역을 이루어 가십니다. 열성분자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했던 것은, 결국에 바울을 로마로 가도록 하는 길을 열어 주는 결과를 맺습니다.

 

23백부장 둘을 불러 이르되 밤 제 삼 시에 가이사랴까지 갈 보병 이백 명과 기병 칠십 명과 창병 이백 명을 준비하라 하고 24또 바울을 태워 총독 벨릭스에게로 무사히 보내기 위하여 짐승을 준비하라 명하며(23-24)

 

천부장은 이제 신속하게 바울을 가이사랴에 후송하기 위한 작전에 돌입합니다. ‘밤 제삼 시’는 오늘날로 하면 밤 9시를 가리킵니다. 그는 어두움을 틈타 바울을 가이사랴에 있는 총독부까지 무사히 보내야 합니다.

이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보병 200명과 기병 70명과 창병 200명, 도합 470명이라는 경호부대가 동원되었습니다. 이 숫자는 거의 예루살렘에 주둔하는 부대의 절반에 가까운 숫자입니다. 죄수 한 명, 아니한 명을 호송하기 위해 과연 이렇게 많은 군인이 동원되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제기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일부 병력은 가장 위험한 예루살렘을 벗어나는 지점까지만 동행하고 다시 병영으로 복귀했다면, 병력의 과잉 동원과 관련한 의구심은 어느 정도 해소된다고 생각됩니다.

천부장의 입장에서 그는 바울이 체포될 당시에 로마시민을 무참히 구타한 실수를 범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뜨거운 잠가를 신속하고 안전하게 후송하는 것 상책이라고 생각했던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의 악행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고 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바울은 이제 로마로 출발하고 있습니다(11).

 

천부장이 벨릭스에게 서신을 보냄(25-30)

하나님께서는 악한 음모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분입니다. 항상 우리 곁에 계시며 안전하게 지켜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시면 됩니다. 악인들의 계획은 결코 하나님의 계획을 이길 수 없습니다. 바울을 죽이려는 유대인들의 은밀하고도 치밀한 계획이 실패한 이유는 바울이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계획 때문이었습니다.

 

25또 이 아래와 같이 편지하니 일렀으되 26글라우디오 루시아는 총독 벨릭스 각하께 문안하나이다 27이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잡혀 죽게 된 것을 내가 로마 사람인 줄 들어 알고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였다가 28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그를 고발하는지 알고자 하여 그들의 공회로 데리고 내려갔더니 29고발하는 것이 그들의 율법 문제에 관한 것뿐이요 한 가지도 죽이거나 결박할 사유가 없음을 발견하였나이다 30그러나 이 사람을 해하려는 간계가 있다고 누가 내게 알려 주기로 곧 당신께로 보내며 또 고발하는 사람들도 당신 앞에서 그에 대하여 말하라 하였나이다 하였더라(25-30)

 

25절을 보면 그는 죄수와 함께 편지 한 장이 전달됩니다. 신약성경에 기록된 유일무이한 세속적인 편지입니다. 물론 누가는 이 편지를 읽어본 적이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누가는 그 당시의 역사적 정황을 참작하고 당시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던 공문 형식을 따라 로마 천부장이 작성했을 법한 문체로 편지의 내용을 작성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26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천부장의 이름을 알게 됩니다. ‘글라우디오’는 그가 로마 시민권을 취득하면서 당시 황제의 이름을 따라 지은 로마 이름이고, ‘루시아’는 그의 본래 헬라 이름일 것으로 보입니다.

 

26절의 전형적인 인사말에 이어 27절부터 30절까지 편지 내용이 서술됩니다. 편지 내용은 얼핏 보면 천부장이 이번 사건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사실은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는 나중에 바울이 로마 시민임을 알게 되어 그를 구해준 것임에도 불구하고, 편지에서는 마치 바울이 로마 시민이었기 때문에 보호해준 것처럼 쓰고 있습니다. 또한 그의 편지가 대부분 일인칭 단수로 되어 있다는 점은 그가 얼마나 이 편지를 자기중심적으로 썼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아직 이 사건의 전말이 확실히 밝혀진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편지의 내용은 천부장이 내린 일차적인 결론을 알려줍니다. 즉 이 사건이 형사법에 의해 처벌받아야 할 만큼 중대한 사안이 아니라 단지 쌍방 간의 신학적 견해차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천부장의 결론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처음 유대인들이 바울을 기소할 때 바울에게 적용되었던 혐의는 이방인을 성전에 데리고 들어가는, 곧 당대 법에 따라 사형에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혐의는 사라지고 오로지 종교적인 문제만 남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아직 미결수이기 때문에 어떻게 로마에 갈 수 있는 길을 알 수 없습니다. 그는 어떠한 결정도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로마 제국의 공권력을 도움으로 생명의 안전을 보장받도록 역사하시며, 로마까지 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십니다. 얼마나 놀라운 큰 그림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향한 계획도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의뜻에 순종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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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23-01)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의 증언하는 바울

사도행전 22장 30절 - 23장 11절


 

‘공평(公平)’은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입니다. 모든 일을 공의롭게 이뤄나가십니다. 그런데 세상은 타락하여 이기적인 탐욕과 죄악으로 공의롭지 못해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공의롭지 못한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재판장들을 세우셨습니다. 따라서 재판장은 하나님의 공의와 공평을 세상에 심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재판정(裁判廷)하는 곳은 공평을 만드는 기관입니다. 모든 사람은 법 아래에서 공평하다는 것입니다. 불공정한 재판은 나라는 혼돈스러워지고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못할 경우가 많습니다. 불공정한 재판은 공평한 세상을 파괴하며 불이익을 당한 사람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일입니다.

 

  • 바울이 산헤드린 공회에서 자신의 소명을 증언하는 내용입니다. 바울이 양심에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고 말한 것으로 인해 대제사장과의 충돌이 야기됩니다(1-5). 바울은 자신이 심문받는 이유가 부활에 관한 이슈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로 인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신학적인 이유에서 크게 충돌합니다(6-9). 예수님은 병영에 갇힌 바울 곁에 서서 바울이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함을 알리십니다(10-11).

 

산헤드린 공의회에 선 바울(22:30-23:9)

오늘날 인문학들은 인간의 ‘죄’를 죄로 인정하지 않고 ‘질병’이라고 어린 시절의 상처로 발생한 실수라고 합니다. 그래서 범죄한 후에 회개하기보다 억울함을 토로합니다. 그 결과로 죄를 해결 받지 못한 사람들은 두려움 속에 살아갑니다. 진실로 양심에 거리낌 없이 담대하길 원한다면 먼저 자신의 죄를 인정해야 합니다.

 

22:30이튿날 천부장은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고발하는지 진상을 알고자 하여 그 결박을 풀고 명하여 제사장들과 온 공회를 모으고 바울을 데리고 내려가서 그들 앞에 세우니라 30:1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2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명하니 3바울이 이르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니 4곁에 선 사람들이 말하되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 5바울이 이르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 6바울이 그 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7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어지니 8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9크게 떠들새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어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냐 하여(22:30-23:9)

 

바울이 성벽에서 말한 변론을 듣고 있는 유대인들은 더욱 분노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죽이고 서야 가라앉힐 것 같았습니다. 천부장은 바울이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 그것도 자신과는 달리 태어나면서부터 시민권을 가진 것을 알고는 바울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이전까지는 이 소요의 모든 책임을 바울에게 전가시키려고 했습니다. 바울한 사람만 제거하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될 것으로 여겼습니다. 문제에는 관심이 없고 조용해지기만 기다렸던 것입니다.

 

(1) 바울의 증언과 대제사장 반응(22:30-23:5)

 

바울의 기소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천부장은 먼저 유대 군중이 격하게 반응한 이유를 파악하려고 합니다(행 22:30). 천부장은 바울에 대한 의심을 풀고 있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이 고발한 바울의 죄목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려고, 정식적으로 예루살렘 공의회를 열어 바울을 그들 앞에 세우고 심문하도록 허락하였습니다. 유대인이 중심이 된 정식 재판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무죄 판결을 받기 위해 재판에 참석한 것이 아닙니다.

 

이제 바울과 회집한 사람들이 모여 주고받는 공방은 사적인 영역이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 정치 지도자들, 그들의 대표들이 듣고 반응하는 역사적인 현장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소요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밝히기 위한 것입니다.

 

천부장의 요청을 받은 유대 지도자들은 바울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부각하려 합니다. 바울은 공회 앞에 서서 참석자들을 당당하게 바라보면서 그들의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그러고는 자신이 항상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을 회고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온 바울의 행위는 선한 양심에 따른 것이며 유대인들이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전에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고 확신했지만, 오히려 그때의 삶이 하나님 보시기에 바르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선한 양심으로 살아간다고 해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즉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서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후 하나님의 참된 계시를 깨닫게 되자 이전의 핍박하는 삶이 아니라, 그 이후의 고난 받는 삶이 양심에 따른 행위였음을 강조합니다. 그러자 바울의 말을 듣고 있던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옆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그의 입을 때리라고 명령합니다(2). 주후 47-59년에 대제사장직을 수행한 아나니아는 바울이 하늘의 환상을 통해서 계시를 받았다는 것과 그의 선교 활동이 선한 양심에 따라 하나님을 섬긴 것이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아나니아를 ‘회칠한 담’(참조, 마 23:27)으로 부르면서 하나님께서 그를 치실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이는 예수가 마태복음 23:27-28에서 율법 교사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경고하셨던 내용입니다. 아나니아는 자신이 율법에 따라서 심판한다고 하였지만, 바울은자신을 치라고 하는 것이 곧 율법을 어기는 것이라고 꾸짖습니다. 이는 바울이 아나니아의 위선을 책망하는 표현입니다. 바울의 눈에는 모세의 율법을 철저히 지킨다고 확신하는 산헤드린의 구성원들, 특히 모세의 자리에 앉은 사람처럼 명령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어떤 점에서 율법을 어겼습니까?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자 라고 두둔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며”(레 19:15). 모세의 법에 따르면 법을 어긴 것으로 고소당하더라도 죄가 입증되기 전까지는 죄인으로 취급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나니아와 함께 있는 사람들은 바울이 대제사장을 모욕했다고 반응합니다(4). 그러자 바울은 그가 대제사장인 줄 몰랐다고 말합니다. 천부장의 요청으로 산헤드린 공회가 비공식적으로 모였기 때문에 아나니아는 대제사장의 의복을 입지 않았을 것이고, 바울은 그가 미처 누구인지 식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쨌든 대제사장을 모욕하는 행위는 율법을 어기는 것이었으므로(출 22:28), 바울은 자신이 알지 못하고 그런 말을 했다고 인정합니다. 이는 바울이 유대의 율법과 관습을 여전히 존중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바울이 분노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바울이 분노한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판단한다고 권위를 행사하는 사람들의 위선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위선에 대해 분노하셨습니다. 위선은 영광을 얻으려고 경건한 사람처럼 보이는 행동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자신이 잘 알며 순종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태도, 즉 ‘자기기만’까지 포함합니다. 대제사장과 산헤드린은 자기기만에 빠져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바울을 도리어 하나님의 뜻을 모욕하는 사람으로 정죄합니다. 우리는 바울의 담대함을 통해서 위선에 맞서는 용기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위선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얼마나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는지 분별하고 위선에 대해 분노할 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신앙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지도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자신의 지위에 스스로 속지 말고,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을 도리어 고통스럽게 하지는 않았는지 늘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바울의 분노를 통해서 위선이야말로 신앙공동체의 가장 큰 위협 중 하나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2) 심문받는 이유가 부활이라고 주장하는 바울(6-9)

 

바울에게는 이것 역시 복음을 전할 기회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바울을 통해 전해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다시 한 번 듣고 믿을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로 구성된 사실을 알고 자신은 바리새인이며 바리새인의 아들이기에,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 때문에 심문받는다고 외칩니다(6). 누가는 바울이 변호의 전략으로 부활을 사용한 것이라 묘사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유대적인 신앙이 바리새 전통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바리새인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통해 밝힙니다(참조. 행 26:5; 빌 3:5).

 

바울이 부활을 언급하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서로 싸웁니다(7). 사두개인은 부활과 천사와 영의 존재를 믿지 않은 반면, 바리새인은 이 모두의 존재를 믿었습니다. 바리새인 중에서 서기관 몇 명은 바울에게 문제가 없다고 평가합니다(8). 그들은 천사나 영이 바울에게 말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서기관들은 부활한 예수를 인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바울이 다메섹과 성전에서 천사나 영의 음성을 들은 것일 수는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바울의 주장을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바울이 말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사명을 받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부활의 예수가 바울을 부르셨기에 부활은 소명의 이유가 됩니다. 이는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에 해당합니다. 약속된 메시아이자 구원자이자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하나님께서 신원하신 사건이 예수의 부활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교회는 주님이 오실 때까지 예수의 부활을 증언해야 합니다.

 

유대인들 앞에 변론하는 바울(23:10-11)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자기 양심에 떳떳해야 합니다. 온갖 고난에도 바울이 담대히 맞설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 앞에서 선한 양심을 가지고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혹시 양심에 거리끼는 일이 있다면 회개하고 하나님께 나가시길 바랍니다.

 

10큰 분쟁이 생기니 천부장은 바울이 그들에게 찢겨질까 하여 군인을 명하여 내려가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 가지고 영내로 들어가라 하니라 11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10-11)

 

바울이 전한 복음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부활신앙은 서로의 구속자가 되어 하나님의 공동체를 만들어가도록 힘을 부여합니다. 부활신앙은 하나님께서 죄와 시망의 세력을 이기신 것을 믿고 전진하는 것입니다.

 

두 진영 사이에 분쟁이 심해지자 천부장은 군인들에게 명령해서 바울을 영내로 데려가도록 합니다(10). 그리고 그날 밤 주님이 바울 곁에 서십니다. 11절의 ‘주’는 바울이 다메섹으로 갈 때 찾아오셨던 부활의 ‘주’를 가리킵니다.

‘담대하라!’ 바울이 선포한 대로 부활하신 주님은 지금 살아 계셔서 위로하기 위해 그의 곁에 오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현재 명령형(동작의 계속을 강조)을 사용하여, 계속되는 시련을 겪고 있는 바울에게 용기를 갖도록 격려하십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바울이 주의 일을 증언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하게 될 것을 알리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바울에게 ‘예루살렘에서 증언한 것 같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가 예루살렘에서 지금까지 고난을 겪은 것처럼, 로마에서도 고난 가운데 예수님에 대한 내용을 증언하게 될 것이라 암시하십니다.

 

바울은 고난의 시기를 거쳐 자신이 로마에서 예수님을 증언하게 될 것을 알게 됩니다. 일찍이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있던 바울에게 오셔서 예루살렘을 떠나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루살렘을 떠나기 전에 세상의 권세에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예루살렘을 거쳐서 로마에 가길 소원했으나 동족에게 얻어맞고 로마 군인들에 의해 구금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바로 옆에서 ‘담대하라!’고 말씀하시고 격려하시며, 로마에서 바울이 증언하게 될 것을 약속하십니다. 결국 바울은 체포된 몸으로 로마에 가게 될 것입니다. 증인 옆에 예수님께서 계시므로 고난은 섭리의 수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증인으로 부르신 사람을 찾아오시고 격려하시고 섭리로 이끌어 가십니다. 이 사실이 성도들의 소망입니다.


‘세상보다 못한 교회’는 복음의 공공성이 주는 힘과 영광을 표현하지 못합니다. 성경에 충실한 구별된 삶과 윤리가 없다면 교회의 선교는 힘을 잃게 됩니다. 상식과 양심을 통한 선한 행실과 복음은 제국의 문턱을 넘어 새로운 나라의 실체를 증거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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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22-02)


영내 성벽에서 복음을 전하는 바울

사도행전 22장 12-29절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 제 사명(부르심)은 무엇입니까? 제가 어디에 있어야 합니까?’ 시류에 떠밀려 살아가는 삶만큼 고달프고 무의미한 시간은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보냄을 받았고 선교적인 정체성을 갖고 있습니다.

 

  • 바울은 아나니아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신 부르심을 설명합니다(12-21). 다메섹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바울은 성전에서 예수를 만나는 신비한 체험을 합니다(17-21). 예수님은 바울을 이방인들에게 보내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이방인이라는 말을 들은 유대인들은 바울을 죽이려 했고, 천부장과 로마 군인들은 바울이 로마 시민인 사실을 듣고 두려워했습니다(22-29).

 

아나니아와 바울의 새 인생(12-16)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의지와 뜻으로 복음의 일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대로 사람을 부르시고 일꾼으로 세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굴레에 빠져 있던 바울을 부르셔서 복음의 일꾼으로 세우셨습니다.

 

12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13내게 와 곁에 서서 말하되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하거늘 즉시 그를 쳐다보았노라 14그가 또 이르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그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15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네가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16이제는 왜 주저하느냐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12-16)

 

예수님께서는 앞을 보지 못하는 바울을 다메섹에 사는 아나니아에게로 보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만난 아나니아가 어떤 사람인지 먼저 소개합니다(12). 사도행전 9:10에는 아나니아가 예수님의 제자로 소개되지만, 바울은 유대 청중을 생각해서 아나니아가 율법에 따라 경건하게 살았고 다메섹의 유대인들에게서 칭찬을 받던 사람인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렇게 경건하고 존경받는 사람이 바울의 경험을 인정한 것은 청중에게서 신뢰를 얻을 수 있는 대목입니다. 아나니아는 바울 곁에 와서 ‘형제’라고 부르며 그를 동료 그리스도인으로 환대합니다(13).

아나니아가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라고 말하자 바울이 시력을 회복해서 즉시 아나니아를 볼 수 있게 됩니다. 사도행전 9:17에서는 비늘 같은 것이 벗겨졌다고 기록합니다. 큰 빛의 영광을 보고 시력을 잃었던 바울이 아나니아의 말로 시력을 회복했으므로, 바울은 아나니아가 앞으로 말하는 것 역시 주께서 주시는 메시지로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을 택하신 분을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으로 부릅니다. 아나니아와 바울은 구약의 하나님을 섬기는 종들이며 기독교인들은 구약의 진정한 상속자들입니다. 아나니아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바울을 택하신 목적을 세 개의 부정사(~을 위하여)로 알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깨닫게 하려고, 그 의인을 보게 하려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려고 바울을 택하셨습니다. 바울은 이제부터 부활하신 예수를 모든 사람들 앞에서 증언하는 증인, 목격자의 인생을 살게 됩니다(15). 모든 사람은 유대인과 이방인(행 22:17-21)을 모두 포함합니다. 근접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에게 적대적으로 반응하는 유대인들(행 23:11)과 이방인 통치자들(24-26장) 앞에서 예수를 증언합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부르고 세례를 받아 죄를 씻으라고 지시합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을 의미하며, 세례는 죄를 씻음 받은 사건(참조. 고전 6:11; 엡 5:26; 딛 3:5; 히 10:22), 곧 구원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롬 6:3-11; 고전 6:11: 갈 3:27), 바울은 박해자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주로 믿고 있음(‘주의 이름을 불러’)을 공적으로 표현해야 합니다. 또한 세례는 교회의 교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택하셨고(14) 예수가 파송하신(15, 17-21) 사도입니다. 예수님은 보고 들은 것을 사람들 앞에서 전하도록 바울을 구원해서 증인으로 보내십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 즉 예수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으며, 예수님을 만났고 그의 음성(또는 말씀)을 들은 사람입니다(14).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자신의 죄를 씻음 받은, 곧 은혜를 아는 사람입니다. 이 모든 것이 보냄 받은 자가 증언하고 전달할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예수를 만나고, 회심의 은혜를 간직한 사람이 참된 증인의 역할을 수 할 수 있습니다.

 

성전에서 환상을 경험하는 바울(17-21)

 

부르심을 받은 일꾼들은 저마다 자신이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일꾼은 주님이 명령하시는 대로 순종하여 섬기면 됩니다. 그 사명은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가르치고 그 사명 앞에 순종하도록 지도하는 것이 건강한 영적 성장을 돕는 최선의 길입니다.

 

17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18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그들은 네가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 19내가 말하기를 주님 내가 주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20또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그들도 아나이다 21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17-21)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자기 동족에게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까 고민했을 것입니다. 그는 그동안의 습관으로 성전에서 올라가 기도했습니다. 기도던 중에 황홀경 상태에 들어갔습니다.

이 시기는 다메섹의 경험이 있은 지 3년 후로 보입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사건은 베드로가 환상을 통해 예수님을 만난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행 10:10; 11:5). 구약에서 사무엘(삼상 3:1-18)이나 이사야(사 6:1-9)는 환상을 경험했습니다. 바울은 황홀경 상태에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듣습니다.

다메섹 사건에서 ‘주’는 예수였기 때문에 본문의 ‘주’를 예수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예수님은 바울에게 예루살렘을 나가라고 명령하십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예수님께 대해 증언해도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듣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핍박을 받으면서 이전에 성전에서 예수님이 경고하신 내용을 떠올립니다. 바울의 핍박은 이미 예수님께서 예고하신 것이며, 바울은 이제 예루살렘을 떠나 이방인들을 향해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바울의 부르심이 명확히 언급됩니다. 바울은 예수님에 대해 증언하는 인생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소명이 성전에서 주어진 장면은 특별히 이사야 6장에 자세히 묘사된 이사야의 환상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사야가 전하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듣지 않았던 것처럼, 지금 유대인들은 바울을 통해 전달되는 하나님의 뜻을 듣지 않을 것입니다(참조. 28:24-28의 사 6:9-10). 이사야 6장과 본문을 연결해서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서에 나타난 전능하신 하나님의 권위로 바울에게 명령하십니다.

 

바울은 자신의 이전 행적을 말하면서 예루살렘에 있어도 위험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바울이 주를 믿는 사람들을 투옥했고 회당에서 때렸고 주의 증인인 스데반을 죽일 때 찬성했을 뿐만 아니라. 그를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20). 그러나 주님은 바울을 멀리 이방인에게 보내십니다(행 13:46 18:6; 롬 11:13; 갈 2:2.7). 예루살렘에서 멀리 떠나갈수록 이방인들은 많아지고 유대인들은 적어집니다. ‘내가 너를 보낼 것이다’라는 표현은 다시 한 번 이사야 6:9을 떠올리게 합니다.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참여할 정도로 하나님의 율법에 열정적이었던 바울이 이방인들을 향해 멀리 가게 된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하나님의 개입하심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주신 소명을 바울이 거부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유대 청중 중 그 누구도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율법에 열심이었던 자를 부르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 하나님의 개입하심으로 일어났음을 담대히 증언합니다.

예루살렘에 돌아왔으나 다시 이방인들에게 보내집니다. 선지자 이사야처럼 부름 받은 종은 하나님의 손에 맡겨진 인생입니다. 하나님은 목적을 갖고 사람을 부르시며, 그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알게 하십니다. 이런 점에서 바울의 예배와 기도는 자신을 향한 예수의 뜻을 깨닫는 통로였습니다.

 

유대인들의 부정적인 반응과 로마 시민인 것을 밝히는 바울(22-29)

특정 프레임에 갇히면 그것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은 율법주의와 유대주의라는 편견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프레임 속에 예수님을 통한 진리를 거절할 뿐 아니라 예수님을 이단자로 정죄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입니다. 그 생각은 변함없이 바울에게도 적용하고 있습니다.

 

22이 말하는 것까지 그들이 듣다가 소리 질러 이르되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 하여 23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니 24천부장이 바울을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고 그들이 무슨 일로 그에 대하여 떠드는지 알고자 하여 채찍질하며 심문하라 한대 25가죽 줄로 바울을 매니 바울이 곁에 서 있는 백부장더러 이르되 너희가 로마 시민 된 자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 하니 26백부장이 듣고 가서 천부장에게 전하여 이르되 어찌하려 하느냐 이는 로마 시민이라 하니 27천부장이 와서 바울에게 말하되 네가 로마 시민이냐 내게 말하라 이르되 그러하다 28천부장이 대답하되 나는 돈을 많이 들여 이 시민권을 얻었노라 바울이 이르되 나는 나면서부터라 하니 29심문하려던 사람들이 곧 그에게서 물러가고 천부장도 그가 로마 시민인 줄 알고 또 그 결박한 것 때문에 두려워하니라(22-29)

 

유대인들은 바울을 성전에 이방인을 동반하여 더럽힌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방인에게 율법을 전하는 그를 이단자로 단정하고 폭행했습니다. 그들은 죽을 지경에 이르게 폭행했습니다. 로마 천부장에 의해 겨우 영내로 끌려 들어간 바울은 영내 성벽에서 자기 동족에게 변명을 하게 됩니다.

 

(1) 유대인들의 부정적인 반응(22-23)

 

유대인들은 바울이 하는 말을 듣다가 ‘멀리 이방인에게로’라는 말에 인내심을 잃었습니다(21). 이 말까지 들은 청중은 일제히 소리를 질렀습니다. 더구나 바울의 입에서 나온 이방인이라는 말에 더욱 흥분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방금 전에 이방인으로 성전에 더럽혔다고 생각해서 폭행했는데, 또 이방인을 두둔하는 말에 더 이상 그들은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더욱이 이러한 전반적인 일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방인을 위해 부르신 분이 하나님이라고 하자, 유대인들은 소리를 지르면서 저런 자는 세상에서 없애야 한다고 외칩니다(22). 유대 청중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위해 바울을 보내셨다고 말하자 분노하면서 더 이상 말을 못하게 막습니다. 군중은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립니다(23).

 

(2) 로마 시민인 것을 밝히는 바울(24-29)

 

군중이 광분하자 그 자리에 있던 천부장은 몹시 놀랍니다. 군중이 더욱 소리를 지르며 바울을 죽여야 한다고 소란을 피웠습니다. 천부장은 자기 휘하의 군인들을 동원해 바울을 영내로 데려가도록 명령합니다(24). 천부장은 부하를 시켜 군중을 자극한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바울을 채찍으로 때려서 심문하라고 명령합니다. 채찍질로 심문하는 것은 사실을 파악하려고 외국인에게 가하는 고문의 형식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천부장의 부당한 대우에 맞서 자신이 로마 시민임을 백부장에게 분명히 알렸습니다(25). 그리고 그에 걸맞은 대우를 요구하였습니다. 백부장은 천부장에게 바울이 로마 시민인 사실을 알리면서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묻습니다. 천부장은 바울에게 로마 시민이 맞는지 직접 확인합니다.

천부장은 자신은 많은 돈을 사용해서 로마 시민권을 샀다고 말합니다(28). 심문하려던 군인들은 바울이 로마 시민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물러갑니다(29). 천부장도 로마 시민을 보호하지 못하고 도리어 결박한 것 때문에 염려합니다. 로마 시민이라고 할지라도 공공의 질서를 침해하는 것으로 보이면 체포해서 결박할 수 있지만, 공개적으로 수치를 당하도록 만드는 것은 합법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로마 군인들이 정의를 행하도록 자신의 시민권을 밝힙니다.

지금도 많은 신자들이 불의한 권력의 희생자가 되고 있습니다. 불의한 정치 질서는 선량한 사람들을 부당하게 대하도록 만듭니다. 예수의 제자는 바울처럼 공의가 실현되도록 자신에게 있는 권리를 활용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보냄을 받은 신자는 세상의 정의가 실현되는 것도 하나님의 뜻에 포함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는 부름을 받아 사명을 갖고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가 가치와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존재입니다. 폐쇄적이고 닫힌 공동체는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교회의 자기중심적 내향화는 교회를 안으로부터 썩게 만들 것입니다. 부르심과 사명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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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22-01)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에게 간증

사도행전 22장 1-11절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일을 하다가 중도에 포기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귀한 일을 계획해도 노력하지 않으면 아무런 열매가 없습니다. 끈기가 없는 사람들은 무엇을 하다가 중단합니다. 그리고 변명을 늘어놓거나 주변 탓할 때가 많습니다. 귀한 일을 계획하는 자는 그 계획에 따른 희생을 각오해야 합니다(눅 14:28). 바울은 희생을 각오하고 복음 전파를 포기하지 않은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복음 전하는 일에 전력투구했습니다.

 

  • 바울이 무리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는 내용입니다. 여기에서 누가는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한 이야기까지 다룹니다. 박해자로 지냈던 시절과 회심한 사건을 설명합니다. 바울은 신실한 유대인이며, 자신을 이끄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임을 강조합니다.

 

바울의 유대교 시절(1-5)

성도들에게는 열정도 필요하지만 그 방향이 예수의 뜻에 맞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열정이 다른 사람들을 해치게 되고 결국 자신도 망가뜨립니다. 예수를 향한, 성령이 주시는 열정은 사람을 회복하고 살리고 하나님을 향한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는 열정의 사람이 되도록 기도하면서, 동시에 우리의 열정이 공동체와 이웃을 살리는 쪽으로 향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1부형들아 내가 지금 여러분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2그들이 그가 히브리 말로 말함을 듣고 더욱 조용한지라 이어 이르되 3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4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5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그들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1-5)

 

유대인들에게 심하게 폭행을 받던 바울은 로마 군대들에 의해서 로마 군인들이 주둔한 영내로 들어갑니다. 끌려가고 있던 바울은 천부장의 허락을 얻어 성벽 위에서 자신을 폭행했던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향해 아람어로 이야기합니다. 바울이 자신들이 사용하고 있는 아람어로 유창하게 말하는 것을 들은 유대인들은 조용해지고 바울의 말을 청종합니다.

 

(1) 바울의 말을 청종한 유대인들(1-2)

 

바울은 동족을 향해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겠다고 말합니다(1). 바울은 허락을 받아 ‘부형들아!’라고 부르며 변호를 시작합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을 아버지와 형제로 부름으로써 자신을 핍박했던 유대인들을 향하여 여전히 한 가족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말을 듣고 있는 유대인들은 바울이 유창한 아람어를 말하자 귀 기울려고 더욱 조용히 듣습니다. 그들은 이미 바울이 손짓할 때 크게 조용해진 상태였지만(행 21:40) 그가 자기들의 언어인 아람어로 말하자 더욱 조용해졌습니다.

 

(2) 과거 자신의 모습을 설명한 바울(3-5)

 

바울은 동족을 향해 과거에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명학하게 밝힙니다(3-5). 자신의 출신, 교육, 신앙에 대해 변증합니다. 바울이 제시한 증거들은 그가 얼마나 정통적인 유대인인지를 입증해 주었습니다.

 

① 태생적인 유대인으로 성장한 바울(3)

 

첫째, 바울은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난 유대인입니다(행 9:11; 21:39). 둘째, 바울은 유대인인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아마 유대인으로 정통 교육을 받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와서 자랐습니다. 3절의 ‘이 성’은 다소가 아니라 예루살렘을 가리킵니다. 셋째,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가말리엘에게서 조상들의 율법을 철저하게 배웠습니다(행 5:34). 바울은 자신의 유대교 신앙이 디아스포라 유대교가 아니라 팔레스타인 유대교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립니다. 곧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 청중에게 자신의 신앙이 정통적인 유대교에 입각하고 있음을 알립니다. 특히 가말리엘은 바리새파의 율법 교사였고 산헤드린 공회에 속했으며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았습니다(행 5:34). 또한 바울은 자신을 공격한 유대인들처럼, 율법에 열성을 보인 유대인들처럼, 자신도 하나님에 대해 열심을 보였다고 증언합니다(참조. 롬 10:2; 갈 1:14; 빌 3:4-7). 그래서 빌립보서에서 바울은 자신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라고 밝힙니다(빌 3:5). 나중에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고 천명합니다(행 23:6).

 

② 정통적인 유대인으로 살아온 바울(4-5)

 

이어서 바울은 자신이 율법을 엄격하게 교육받고 하나님을 향한 열심을 보인 증거를 제시합니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이 도’, 즉 그리스도의 복음을 박해했음을 고백합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남자들과 여자들을 체포해서 옥에 넘겼습니다. 바울이 이 정도 수준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려 했다면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모임을 알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유대 군중을 향해 자신이 유대교의 고위 관계자들을 알고 있음을 밝힙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서 다메섹으로 보내는 공문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이 자신의 열심을 입증할 수 있는 증인들이라고 밝힙니다. 그가 다메섹에 간 이유 역시 ‘이 도’를 믿는 사람들을 체포하고 예루살렘으로 끌고 와서 벌을 내리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열정과 질투심으로 바울은 비느하스처럼 하나님의 율법을 철저히 준수하는 데 헌신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 모든 유대인에게 있는 열심과 자신의 열심을 비교할 수 있다고 바울은 외칩니다(3). 바울이 이전에 하나님을 향한 열심을 가졌으나, 그 열심은 바른 지식에 따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바른 지식을 얻게 되자 박해를 위해 사용되던 열정이 복음을 전하는 열정으로 뒤바뀝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바울(6-11)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진리에 이를 수 없습니다. 유대인은 율법주의에 빠져 진리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바울을 율법의 속박에서 건져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구원은 우리를 먼저 찾아오시고 불러 주시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있음을 기억합니다.

 

6가는 중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 7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8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9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10내가 이르되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네가 해야 할 모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11나는 그 빛의 광채로 말미암아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6-11)

 

6-11절은 다메섹 경험에 대한 두 번째 이야기(참조.19:1-18; 26:13-18)로서, 바울이 자신의 언어와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6절부터 바울은 어떻게 자신이 예수를 믿게 됐는지 설명합니다(6-16). 그는 다메섹에 도착할 즈음에 예수를 만났습니다(행 9:1-19). 9장에 묘사된 사건을 바울은 1인칭으로 설명합니다.

 

바울은 정오 무렵에 하늘로부터 비친 큰 빛을 보았습니다. 태양이 가장 밝게 보이는 시간에 태양보다 훨씬 밝은 빛은 초자연적인 빛입니다. 그는 그 빛 때문에 한동안 앞을 볼 수 없었습니다(11). 큰 빛을 본 바울은 땅에 쓰러졌습니다. 쓰러진 바울은 하늘에서 들린 음성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바울은 ‘주님 누구시이니까?’라고 묻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다’라는 음성이 들립니다. 바울이 들은 음성은 부활하신 예수의 음성이었습니다. 예수는 제자들에 대한 박해를 자신에 대한 박해로 여기셨습니다. 예수의 이 말씀은 예수와 제자들, 예수와 교회가 동일시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예수는 고난 중에 있는 신자들과 함께하시기 때문에(참조, 눅 10:16; 마 25:40) 그들을 핍박하는 것이 곧 예수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함께 있었던 사람들도 바울에게 비친 빛을 보았지만 예수의 소리는 듣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9:7에 따르면, 동행하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것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었습니다. 9절은 그들이 하늘에서 들린 어떤 소리(sound)를 들었으나 그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의미에서, 말씀하시는 분의 음성(voice)을 듣지 못했다고 묘사합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어떤 사건이 일어난 것을 목격했지만 바울이 이해한 것처럼 알아들을 수 있는 예수의 말씀, 즉 음성의 내용을 듣지는 못했습니다.

 

이때 바울은 예수를 주로 부릅니다(10). 바울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가 부활해서 살아 계시는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권위로 말씀하시는 것을 받아들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자신이 따라야 할 대상으로 믿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는 쓰러져 있는 바울에게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다메섹으로 가면 어떤 사람이 그가 해야 할 모든 것을 알려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울은 빛 때문에 앞을 볼 수 없었고, 그와 동행하던 자들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에 들어갔습니다.

 

바울은 예수의 음성을 들었지만 함께 다메섹으로 가던 유대인들은 내용을 파악하지 못한 채 소리만 들었습니다. 이는 마치 같은 말씀을 들어도 그 의미를 깨닫는 사람이 있고 그저 지나치는 소리로만 느끼는 사람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여러 경로와 방법으로 우리에게 들립니다. 우리가 단지 소리로만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된다면 이는 큰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은 사람은 무엇을 해야 했습니까? 바울과 같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의미 없이 우리를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슴에 머물러 우리의 행동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며,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묻고 또 물어야 합니다. 이 질문들에 대한 바른 답을 얻어 그 답에 합당하게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실 것입니다. 바울이 예수님과의 첫 만남에서 던졌고, 일생 동안 반복했던 그 질문을 우리 인생의 화두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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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21-03)


예루살렘 성전에서 체포되는 바울

사도행전 21장 27-40절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일을 하다가 중도에 포기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귀한 일을 계획해도 노력하지 않으면 아무런 열매가 없습니다. 끈기가 없는 사람들은 무엇을 하다가 중단합니다. 그리고 변명을 늘어놓거나 주변 탓할 때가 많습니다. 귀한 일을 계획하는 자는 그 계획에 따른 희생을 각오해야 합니다(눅 14:28). 바울은 희생을 각오하고 복음 전파를 포기하지 않은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복음 전하는 일에 전력투구했습니다.

 

  •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성전 주변에 있던 사람들을 선동해서 바울을 붙잡고 죽이려합니다. 유대인들은 여론몰이를 통해 바울을 죽이려 하지만, 천부장과 군인들이 출동해서 바울을 체포하고, 영내로 데리고 갑니다. 바울은 천부장에게 요청해 허락을 받아 백성 앞에서 말할 기회를 얻어 히브리 말로 말합니다.

 

성전에서 일어난 폭동(27-30)

성령의 사람들에게는 ‘시기’와 ‘질투’하는 모습이 없어야 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있으면, 조금만한 흠이 발견되면 크게 부풀려 업혀 씌우는 모습을 봅니다. 슬프기는 믿은 사람들 가운데서 가끔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바울을 체포하기 위한 유대인들은 거룩한 성전에서 거룩함은 사라지고 혈기가 가득했습니다.

 

27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28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 29이는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이러라 30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27-30)

 

바울은 정결례를 위한 7일을 끝나기도 전에 또 다른 고난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 찾아왔습니다. 결박을 당하고 고초를 당합니다. 그들은 바울에 대한 소문이 진실인지 물어보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1)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의 고소(27-28)

 

정결례를 위한 7일을 마칠 무렵,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바울을 붙잡고 무리 앞에서 외칩니다. 공개적으로 고소한 것입니다. 고소 내용은 유대 민족, 율법, 성전을 비방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은 누구입니까? 전 세계에 흩어졌던 유대인들이 오순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오는데, 이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아마도 바울이 3차 전도 여행 중 고린도에서 시리아로 가려 할 때, 바울과 고린도 또는 겐그리아에서 마주친 유대인들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들은 거기서 바울을 암살하려 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려던 유대인들이 그들과 같이 시리아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가려는 바울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과 복음, 유대인과 율법이 당시 얼마나 첨예한 갈등을 겪고 있었는지, 나아가 바울이 전한 복음이 유대교의 근간인 율법과 성전, 유대인(언약 백성)의 정체성을 흔들고 불안하게 했는지 보여 줍니다. 이들이 바울을 고소한 내용은 유대인이 스데반을 고소했던 내용과 유사합니다(6:11-13).

 

(2) 고소 이유(29)

 

유대인들이 고소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오해 때문입니다. 누가는 그들이 바울과 에베소인 ‘드로비모’Trophimus가 함께 성전 안에 있는 것을 보고, 바울이 이방인인 그를 데리고 성전에 들어왔다고 섣불리 결론을 내려 버렸습니다. 진실 여부를 확인하려도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진실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오직 한 가지, 바울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바울을 죽이려는 결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설명을 하고 변명을 하여도 그들의 마음에는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그들은 ‘그 전에 보았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성전에 있기 전부터 바울과 그가 함께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과 함께 성전에 있는 드리비모는 당연히 바울이 그를 성전으로 데리고 왔을 것이라는 추측한 것입니다. 드리비모는 본문에서는 에베소 사람으로 나오는데, 20장 4절에 따르면 그는 아시아 출신이라고 소개합니다. 누가는 아시아와 에베소를 동일하게 보고 있습니다. 에베소는 너무나 특출한 도시임으로 아시아를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종교적인 정의라는 이름으로 바울을 정죄합니다. 예수님을 그렇게 해서 십자가에 처형했듯이, 바울도 그러한 모습으로 정죄한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바울을 죽이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어떤 죄목을 붙여서라도 죽이고 싶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스데반을 죽일 때와 똑같이 바울을 향해 몰려들어 폭행을 가했던 것입니다.

 

(3) 소요의 발발(30)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의 선동은 소요로 이어졌습니다. 온 예루살렘 도시가 요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극도로 흥분한 군중은 바울을 성전을 이방인의 더러운 발걸음으로 유린한 범죄자라고 단정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죽이기 위해 성전 밖으로 끌어내자마자 즉시 성전 문이 닫힙니다. 이것은 성전 내에서 추가적인 소요를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군중심리에 휩싸이면 누구든 이성이 마비됩니다. 그래서 폭력성을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일 때도 군중심리를 이용했습니다. 악한 세력이 자주 사용하는 요소가 바로 군중심리입니다. 다수가 모였다고 해서 진리를 결정하고 진행한 것은 아닙니다.

 

체포를 당하는 바울(31-36)

우리에게 위기가 닥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어떤 위기 가운데서도 우리를 지키고 건져 주십니다. 전혀 생각지 못한 방법으로 역사하시기도 합니다. 우리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을 인도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손길을 믿을 때 주의 뜻에 순종하며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31저희가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의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32저가 급히 군사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저희가 천부장과 군사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 33이에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고 누구며 무슨 일을 하였느냐 물으니 34무리 가운데서 어떤이는 이 말로, 어떤이는 저 말로 부르짖거늘 천부장이 소동을 인하여 그 실상을 알 수 없어 그를 영문 안으로 데려가라 명하니라 35바울이 층대에 이를 때에 무리의 포행을 인하여 군사들에게 들려가니 36이는 백성의 무리가 그를 없이 하자고 외치며 따라 감이러라(31-36)

 

사실도 따져보지도 않고 군중심리에 휩쓸린 예루살렘의 군중들은 바울을 성전 밖으로 끌어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오순절 명절이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장면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찬성하며 동조하고 있었습니다. 이 소요는 점점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1) 천부장을 파송한 로마군(31-32)

 

바울은 성전에서 유대인들에게 체포되어 이유 없는 매를 맞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를 죽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이 일로 예루살렘이 요란해졌습니다. 큰 소동은 예루살렘 치안을 담당하고 있는 안토니아 성채에 들어갔습니다. 이곳은 예루살렘에 일어나는 소요를 통제하기 위해 로마군 수비대가 주둔하는 곳이었습니다. 이 안토니아 성채는 높이가 약 25미터로, 성전보다 높이 있어 성전 안을 잘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나아가 성전 북쪽, 바깥뜰과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바로 군대를 투입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로마군에서는 소요가 난 곳에 천부장을 급파했습니다. 천부장은 도시의 치안도 맡고 있었기 때문에 급하게 군대를 거리고 그곳에 파송되었습니다. 군사들이 내려오는 것을 보고 바울을 치는 것을 멈추었습니다(32).

 

(2) 바울을 체포한 천부장(33-34)

 

천부장은 성난 군중의 손에서 바울을 건져 냈습니다. 그는 바울을 두 사슬로 결박했고, 바울의 신분과 소요의 경위를 보사하려고 물었습니다. 군중들이 흥분한 채로 말하므로 천부장은 진상을 알아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바울을 막사로 데려가도록 명령합니다(34).

 

(3) 몸을 가눌 수 없는 바울(35-36)

 

바울은 군중의 폭행으로 큰 상처를 입어 스스로 올라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군인들이 그를 들고 가야 했습니다. 바울과 군인들의 뒤로는 ‘그를 제거하라!’(22:23)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누가는 바울의 체포를 예수님께서 체포당하신 모습을 투영시키고 있습니다. 즉 바울이 당하는 핍박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매를 맞고 찢기고 결박을 당합니다. 그의 삶은 따라가고 싶지 않는 삶을 살아갔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행 26:29)라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진실된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정으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고난을 넉넉히 이기도 남는 열정이 안에 있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이 아닌 천부장을 보내어 구원합니다. 하나님은 바울이 그 자리에서 생명을 마치게 두지 않으시고 그를 구원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렸습니다. 그는 급하게 군사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갔습니다. 바울을 때리고 있던 사람들은 군사들을 보고 멈추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맞고 있는 바울을 체포해서 영문 안으로 데려가고 명합니다. 그리고 그를 포박해서 층계 위로 올라갑니다. 사람들은 로마 군대의 천부장 앞에서는 예수님 때와 마찬가지로 ‘그를 없애라!’라고 쉬지 않고 외쳤습니다. 진리에서 멀어져 복음을 대적하는 인간은 악하고 어리석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신들이 소리를 질러 진상을 파악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의 군대에 끌려가게 되었지만, 사실상 그를 죽이려 하는 군종으로부터 보호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전도자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섭리 가운데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음을 믿고 전도자의 사명을 감당하시길 바랍니다. 천부장은 바울을 잡아 쇠사슬로 결박하고 어떻게 된 일인지 일의 시작과 끝을 물었습니다.

 

복음을 위한 열정(37-40)

고난 속에서도 예수님의 삶과 비슷한 삶을 살아감으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바울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채찍에 맞고 계속적으로 똑같은 과정을 거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바울 주변에는 돌을 든 군중들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난과 어려움 중에서도 끝까지 복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의연하게 선포한 모습이 닮은 모습입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분들이었습니다.

 

37○바울을 데리고 영내로 들어가려 할 그 때에 바울이 천부장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냐 이르되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 38그러면 네가 이전에 소요를 일으켜 자객 사천 명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인이 아니냐 39바울이 이르되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이니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 하니 40천부장이 허락하거늘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 백성에게 손짓하여 매우 조용히 한 후에 히브리 말로 말하니라(37-40)

 

바울 사도는 심하게 매를 맞고 간신히 목숨은 건졌지만, 여전히 곁에는 아무도 변호해줄 사람이 없는 위급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유창한 헬라어로 로마 천부장의 주의를 환기시킵니다.

자신은 애굽(이집트)인 반란군 지도자가 아니라는 의혹을 벗기는 놀라운 기지를 발휘합니다. 하지만 그는 오해를 풀고 위기를 벗어난 데 만족하지 않고 좀 더 적극적으로 방금 전까지 가기를 죽이려 했던 자기 민족, 그것도 흥분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할 기회를 달라고 요청합니다.

 

사도 바울은 “부형들아!”(22:1)라고 층계에 올라선 바울은 자신을 때렸던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열정이 아니면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자신에게 매우 위협적인 상황에서도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쇠사슬에 맺어가면서도 천국 복음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종교적인 체험을 고백함으로써 하나님의 존재를 증언하는 것을 간증이라고 합니다. 간증은 변화된 나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변화시킨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언제나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바울은 사람들의 폭행을 피해 군인들에게 들려가면서도 복음 전파의 기회를 엿보는 바울을 발견합니다. 바울과 같은 복음에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에게 불리할지라도 목격한 것을 진실하게 고백합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복음을 전하도록 비둘기 같이 정결함과 뱀 같은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자신의 유익보다 진리가 드러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죽음도 그를 포기하게 말들 수 없습니다.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 복음의 용사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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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21-02)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의 사역

사도행전 21장 17-26절


 

사람들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살아가면서 그 다양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옳고 그른 일은 개인의 차원은 넘어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관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믿음이 연약한 자를 배려할 줄 알아야 합니다. 로마서에서는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만물이 다 정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 21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롬 4:20-21)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덕을 위해 배려하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믿음의 행동입니다.

 

  • 드디어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은 야고보와 장로들에게 그동안 선교 여행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를 낱낱이 보고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후에, 바울에게 율법을 파괴한다는 유대인들의 오해를 풀기 위한 일을 위해 정결례에 동참하길 제안합니다. 바울의 그 제안에 순종해서 정결례를 진행합니다.

 

선교 보고와 예루살렘의 반응(17-20a)

영적인 부분이 자신의 신앙과 다른 사람을 만날 때, 그들을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 때마다 인위적인 판단으로 정죄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심이 무엇인지를 깊이 살펴야 합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온 것은 유대 지도자들이 이방인들은 한 형제로 받아들이느냐에 대한 중요한 기로에 서 있었습니다. 다행이도 그들은 바울의 사역을 받아 들렸고, 이방인 지역에서 이루어진 역사에 대해 하나님께 찬양했습니다.

 

17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18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 19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말하니 20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17-20a)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 가면 환란과 결박이 기다리는 여러 사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 예루살렘에 도착합니다. 바울은 사명에 대해서는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고 고백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복음 전파를 위한 사명은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 바울을 환대하는 예루살렘(17)

 

바울은 마음 한편에 우려를 가지고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이방인 지역 사역에 대한 반응에 따라 복음의 역사가 중요한 기로에 처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예루살렘 공의회(행 15장)에서 공식적으로 이방인들에게 복음 전함은 공인(公認)되었지만, 실제적으로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 성도들이 이방인 성도들을 형제로 받아들이느냐는 매우 중요한 기로에 서 있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예루살렘 형제들이 바울 일행을 환대했습니다. 의례적인 환영이 아니라 기꺼이 환영했습니다. 이것은 바울 신학과 바울이 전한 복음을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전한 역사(役事)에 대해 성령의 역사로 인정한 것입니다. 만약 인정받지 못한다면. 지금까지 이방인 지역에 사역했던 모든 일들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바울의 우려와는 다르게 예루살렘 유대 성도들은 예루살렘에 입성한 바울은 흔쾌하게 환영하며 받아 주었습니다.

 

(2) 바울의 선교보고(18-19)

 

이튿날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자격인 야보고를 만나로 갑니다. 그리고 야고보와 장로들이 다 모여 있는 자리에서 선교 여행의 놀라운 결과를 보고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 하신 일’을 낱낱이 고했습니다. 지금까지 이방지역에서 이루어진 사역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이라고 보고한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저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 받았음을 강조합니다. 온갖 핍박을 겪으면서 사명을 성공적으로 감당한 사람이 이렇게 고백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작은 공로도 드러내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청지기의 자세가 어떤 것인지 잘 보여 주었습니다.

 

(3) 예루살렘 교회의 반응(20a)

 

바울의 3차에 걸친 이방 지역의 선교 보고에 대해 예루살렘의 유대 장로들의 반응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사역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로 인정한 것이었습니다.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20b)

종종 교회의 분열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 분열의 근원은 대부분 견해 차이로부터 시작합니다. 다른 사람은 인정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이 자신의 주장만이 옳다고 주장함으로부터 분열이 시작됩니다. 하지만 성도들이 이 세상에 살 동안 ‘화평케 하는 자들’이란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영적 공동체 구성원들이 서로 이해하고 양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동체가 하나 되기 위해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20b…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심 있는 자라(20b)

 

바울의 우려하는 마음과는 달리,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 성도들은 바울이 지금까지 이방인 지역에서 선교 사역에 대한 보고를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바울의 우려는 예루살렘에는 개종한 유대인들이 수만 명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유대인으로서 선민의식으로 가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지만, 아직 유대교의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럼으로 바울의 사역을 오해를 하고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바울의 사역에 대해 부정적인 소문이 항간에 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방 지역에서 모세의 율법을 배반하고 할례를 행하지 말며, 관습을 지키지 말라고 주장했다고 것입니다. 이런 내용은 사실이 아니라 오해로 퍼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주장한 것은 이방인 성도들이 굳이 할례를 받고 율법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 유대인들에게 할례와 율법을 금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유대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기꺼이 율법을 준수한 사람입니다.

 

복음의 보편성이 충분하게 이해되지 못한 과도기의 초대 교회에는 구약 율법과의 연속성을 놓고 신학적 대립이 심각했습니다(10~11, 14~15장). 복음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게 된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상당수의 유대인 신자들은 야고보를 자신들의 지도자로 여겼고, 반대 입장에서 있던 바울은 율법 파괴자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신학적 대립 가운데서도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통해 진리를 발견해 나가게 됩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일행과 함께 유대의 전통 결례를 행하기를 했습니다. 야고보의 제안에 따라 이 모든 오해를 풀고 불필요한 갈등을 예방하기 위해 나실인 서원을 했던 네 명의 유대인과 함께 정결을 위한 율법의 예(禮)를 행합니다. 또한 그들을 위한 엄청난 제물 비용(민 6:13~21)을 감당해 주었습니다. 이는 구원과는 상관없이 연약한 성도들을 위한 배려였습니다. 예루살렘 지도자들은 다양성에 대한 이해를 갖고 지혜로운 접근을 했습니다.

 

오늘날도 이러한 지혜가 필요합니다. 교회 안에 서로 다양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모든 성도들이 획일적으로 같은 모양을 가질 순 없습니다. 각자의 개성과 달란트를 인정하고 그것의 특색에 따라 교회를 섬길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 안에 분파가 생기고, 더 나가서 분열되는 아픔을 겪게 됩니다.

 

연약한 자들을 위한 배려(21-26)

교회 안에서 생활하면서, 당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라면 상대방의 의견을 들어주고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자신의 의견과 다르다고 판단하거나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겸손히 좋은 점을 수용하십시다. 당신은 교회의 제안이나 권고에 겸손하게 순종합니까? 믿음이 연약한 지체들을 위해 당신이 포기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았습니다.

 

21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그들이 들었도다 22그러면 어찌할꼬 그들이 필연 그대가 온 것을 들으리니 23우리가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24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25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느니라 하니 26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그들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 기간이 만기된 것을 신고하니라(21-26)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한 이방인 지역에서 행하신 일에는 관심도 없습니다. 다만, 바울에 관한 나쁜 소문에만 촉각을 곤두세웠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성도들까지도 아직까지 율법에 대한 닫힌 사고를 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로, 바울이 이방 지역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했다는 거짓 소문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성도들까지 오해를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1) 세평에 대한 우려(21)

 

바울은 이방 지역에 대한 모든 3차 선교 사역을 보고를 들은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것은 야고보와 예루살렘 장로들이 하나님께서 바울을 이방인들 가운데 사도직을 행하게 하시고, 복음의 열매를 거두게 하셨다고 인정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예루살렘 공회가 열렸을 때도 이방인 사역에 대한 보고가 있었습니다(15:12; 갈 2:8-9). 그들은 영광을 돌리면서도 한편으로 바울에 대한 잘못된 세평을 우려합니다. 당시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성도들까지도 바울의 사역에 대해 오해가 있었습니다.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기도 전에 잘못된 소문만으로 판단한 것을 참으로 큰 실수를 범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오해한 바울에 대한 악평은, 이방 각 지역에서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모세의 율법을 배척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며 유대인 관습도 지키지 말라고 가르친다는 잘못된 소식이었습니다. 이 소식은 악평이 점점 더해지면서 예루살렘까지 전해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지도자들은 반신반의하면서 바울의 사역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을 모함하는 자들은 악평을 더해 갔던 것입니다. 만일 바울이 그렇게 유대교와 율법을 파괴하면서 가르쳤다면, 이는 엄청난 문제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어디에도 유대인에게 그렇게 가르친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율법을 폐한 것이 아니라 잘못된 ‘율법주의’를 따르지 않아도 된다고 한 것입니다. 바울을 모함하는 죄는 유대인에게는 다가오는 세계, 즉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심각한 죄였습니다.

 

(2) 장로들의 정결례 제안(22-25)

 

바울에 악평 때문에 유대인들은 계속적으로 기회만 있으면 바울을 제거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마침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감진한 유대인들은 그를 제거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여행한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는 움직임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바울에 대한 소문이 헛소문임을 증명하기 위해 바울에게 나실인의 정결례를 제안합니다. 정결례를 통해 율법을 파괴하는 사람이 아님을 보여 주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나실인의 정결례는 단순하게 머리만 깎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과 유대 문헌에는 나실인에 대한 규정과 서원을 마칠 규정은 민수기 (6:13-21)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정결례를 행하려면, 숫양 두 마리와 암양 한 마리, 소제물과 전제물들이 필요했습니다(민 6:14-15). 그만큼 상당히 많은 비용이 지불되어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루살렘 교회 안에 있던 네 사람들도 비용 때문에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야고보와 장로들은 바울에게 권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적인 방법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유대인들 앞에서 사도 바울이 정결례를 행한다는 것은 율법을 준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권고는 인간의 두려움에서 유대인들의 마음을 달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교회의 제안을 겸손하게 따릅니다. 바울이 서원을 기다리는 네 사람의 비용까지고 지불할 것을 제안에 대한 받아들입니다. 반드시 해야 할 이유는 없었지만,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위해 유대 율법주의자처럼 율법을 성실히 행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사실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도 새 시대가 열린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방인들에게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은 것과 음행을 파하라고 결의하고 편지를 보냈습니다(15:20). 유대인의 율법의 기준이 아니라 새 시대에 맞는 새로운 방식의 삶을 이해하고 시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연약한 자들을 위해 율법의 결례를 행하도록 한 것은 모두를 배려한 행동이었습니다. 이러한 지혜로운 권면에 바울은 적극적으로 순종했습니다.

 

(3) 정결례를 마침(26)

 

바울은 정결례의 제안을 받아들여 7일을 보냈습니다. 그 다음날 예루살렘 교회 장로들이 제안한 네 사람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 정결례를 온전히 행하고 정결례의 절차에 따라 마쳤다는 것을 알렸습니다. 이것은 이미 정결례를 마친 후 보고라기보다는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완결하기 직전의 보고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민 6:13-14).

바울은 정결례를 행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장로들의 제안을 받아 들렸던 것입니다. 이방인들을 위해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바쳤던 바울은 이제 유대인들을 얻고자 유대인의 모습을 보이며,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고전 9:19-20). 바울은 교회의 하나 됨을 위해 자기 시간과 재물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오늘날도 연약한 자들을 위한 배려가 있어야 합니다. 자신만의 신앙의 잣대로 다른 사람을 정죄할 수 있습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 단점을 보안해주며 세워주는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바울은 연약한 성도들에게 배려함으로 분란을 잠재우도록 노력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정결례를 행함으로 주위와의 마찰을 없애고 복음만 증거되도록 철저히 헌신했습니다. 믿음은 사랑 안에서 표현입니다. 연약한 자들도 섞여 있으므로 그들을 기억하고 지혜롭게 행동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동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적극적으로 배려하는 성도들이 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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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21-01)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는 두로 성도들

사도행전 21장 1-16절


 

여행을 할 때, 고난의 길을 즐겨 가려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서는 고난의 길일지라도 감수해야 합니다. 고난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믿음의 각오가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을 보면, 고난의 길을 없애 달라고 기도하는 것보다 독수리 날개 치며 올라가는 힘을 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본문은 하나님 앞에 가치 있는 인생을 위해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말해 주고 있습니다.

 

  • 본문에서 성령의 감동을 받은 두로의 성도들이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권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예루살렘을 향해 떠납니다. 가이사랴에서는 선지자 아가보의 예언 때문에 성도들이 바울을 만류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굳은 각오를 밝히고 떠납니다.

 

밀레도에서 두로까지의 여정(1-6)

믿음이 무엇입니까? 어떤 어려운 환경이 닥쳐왔을 때, 그것에 대한 반응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시련과 고난이 닥쳐왔을 때, 당신이 어떻게 반응하는가가 믿음의 실체입니다. 믿음의 본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평상시에는 잘 믿고 있는 것 같지만, 어려운 고난의 폭풍이 다가왔을 때는 하나님께 원망하는 반응이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순종하기로 작정하는 믿음이 있습니다.

 

1우리가 그들을 작별하고 배를 타고 바로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도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다라로 가서 2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가다가 3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항해하여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의 짐을 풀려 함이러라 4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5이 여러 날을 지낸 후 우리가 떠나갈새 그들이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6서로 작별한 후 우리는 배에 오르고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니라(1-6)

 

본문은 바울 일행이 밀레도에 2차 선교 여행을 결산하는 과정을 소개합니다. 에베소 교회 장로들과 작별한 바울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1) 밀레도에서 바다라까지(1-3)

 

밀레도를 떠난 바울 일행은 곧바로 고스Cos를 경유해서 다음 날 로드Rhodes를 거쳐 고로 성 바다라Patara에 이릅니다. 그들은 해변을 따라 이동하는 작은 배를 탄 것으로 보입니다. 작은 배는 수심이 얕고 암초가 많은 지역에서 참으로 편리한 수단이었습니다.

배는 로도 섬을 거쳐 루기아 지방의 항구 바다라에 도착했습니다. 이 항구는 지중해 여러 지역을 운행하는 대형 무역선들이 정규적으로 정박하는 곳이었습니다. 바다라는 애굽의 알렉산드리아 항구와 정반대 편에 있어서 애굽에서 곡식을 수입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 큰 항구에서는 지중해 여러 지역으로 가는 배를 타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2) 두로에서 7일간 머묾(4-6)

 

바울 일행은 여기서 베니게, 곧 돌레마이로 가는 배에 탔습니다(2,7). 이 배는 당시 거의 모든 배와 같이 화물선이었기 때문에 중간 기착지 두로에 도착해 왼편에 두고 수리아 방향으로 향해해 두로에 상륙했습니다(3). 배는 두로 항에 정박해 화물을 하역하고 새로운 화물을 선적하면서 7일간 머물게 되어 있었습니다(4a). 배의 항해 계획에 따라 바울 일행 역시 이 기간 동안 이곳에 머물렀습니다. 그들은 수소문하여 두로 지역에 있는 제자들을 찾아 그들과 함께 머물렀습니다(4a). 두로는 바울이 한 번도 사역 기간 동안 방문한 적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곳 제자들은 아마도 여러 경로를 통해 바울에 대해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두로에 있는 형제들은 바울 일행을 환대하고 그들에게 숙식을 제공했습니다.

 

두로의 제자들은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4)고 바울에게 말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예루살렘에서 닥칠 환난을 알게 되었습니다.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바울의 예루살렘 행을 막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인간의 정에 끌리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갑니다. 그는 정한 뜻을 돌이키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을 통해 로마까지 복음을 전파하고 싶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두로 성도들에게 바울의 고난당할 것을 보여주신 때는 바울의 사역을 못하도록 방해라고 주신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 사도 바울의 사역을 위해 기도하고 준비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마음으로 바울과 동행하라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닥칠 것이라는 상황에서 바울의 신앙은 확실했습니다. 그는 어떤 고난이 닥쳐올지라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계획대로 복음 증거하는 일을 실천할 것을 작정합니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갈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예수께서 순종하며 예루살렘의 십자가를 향해 가셨듯이(눅 18:31) 바울도 핍박과 고난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을 피하지 않습니다(20:22~23).

 

믿음은 아름다운 반응입니다. 두로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바울을 배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배에 오르고 그들은 집으로 돌아갑니다(6). 결연한 심정을 공유하는 이들은 배에 오르기 전에 같이 무릎을 꿇고 서로를 위해 기도합니다. 배를 타는 사람이나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나 한결같이 주님과 교회를 위해서 자신들의 사역 현장으로 향하는 것입니다. 아마 그것이 두로 바닷가에서 같이 올린 기도의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가이사랴에서의 예언(7-11)

현실 때문에 사명을 갈등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길입니다. 아무리 무거운 짐과 같은 사명이라 할지라도 각오한 사람에게는 오히려 가볍게 다가옵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세미하게 당신에게 들립니다. 갈등은 사단이 주지만 평안은 성령의 도우심입니다. 지금 당신에게 하나님을 위해 충성스러움이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7두로를 떠나 항해를 다 마치고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 8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 9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10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11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7-11)

 

가이사랴에 도착한 바울은 빌립 집사의 집에 머뭅니다. 빌립 집사의 넷 딸도 성령 충만한 딸들이었습니다. 처녀들이지만 하나님의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도 바울이 당할 고난을 구체적으로 환상으로 보게 되어 집니다.

사도행전 11장에서 ‘천하에 크게 흉년이 들리라’(28)고 예언했던 아가보까지 이제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11)고 말합니다. 가이사랴에서 빌립의 집에 머무는 동안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고난 받을 것을 예언합니다. 구체적으로 선지자 아가보가 바울이 체포되어 로마 당국의 손에 넘어갈 것이라는 좀 더 구체적인 예언을 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시련을 주시는 까닭은

오직 나의 믿음을 자라게 하기 위함이다

- 허드슨 테일러 -

 

이런 모습을 보고 바울의 동행자들과 빌립의 가족들도 합세해서 그의 예루살렘 가는 것을 막으려합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두 번씩이나 이런 예언이 나온 것이기 때문에 가지 말라는 것으로 인식했을 것입니다. 바울의 마음을 충분하게 약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의지는 요지부동입니다. 마음은 아프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중심에 심어 두신 섭리의 의지가 확고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들은 최종 결론에 도달합니다.

 

사도 바울의 결심(12-14)

살아가면서 삶의 기준을 어느 곳에 맞추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당신의 뜻과 맞지 않는 주변 사람들의 뜻으로 갈등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당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12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곳 사람들로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13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14저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12-14)

 

바울은 주 예수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 순교할 각오까지 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울의 깊은 믿음의 확신이며 철저한 사명감입니다. 이것이 바울을 사도로 기름부고 이방인에게로 보내게 된 귀중한 이유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태도에 사람들은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반응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인간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을 통해서 그의 사명에 충실한 모습을 닮기를 원합니다. 복음을 위해서는 고난을 각오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들어야할 음성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 잡고 싶은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겠다는 의지적 결단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것에 매달려 있을 때에 ‘너의 헛된 생각을 포기하라’고 말씀합니다. 주님 뜻대로 나의 삶이 이루어지길 원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바울의 믿음을 통해 바울과 같은 믿을 가져야 합니다. 바울이 중요한 선택을 할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결정했던 것처럼, 우리들도 그러한 결정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안일함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고난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사랑을 생각하면서 성도들은 살아있는 믿음의 반응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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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20-03)


말씀으로 듣든히 서 가는 교회

사도행전 20장 28-38절


요즘 사람들에게 관심 있는 것은 ‘리더십’입니다. ‘리더십’은 ‘영향력’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고, 악한 나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지도자들은 성도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진 공동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시고 말씀 자체이십니다. 따라서 지도자들이 말씀 위에 든든히 세어질 때 교회 안에 모든 사람들에게 말씀의 영향력을 미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 사도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마지막 권면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감독자로서 교회를 잘 지킬 것을 당부합니다. 그리고 이단들의 출몰에 대해 경고하고 물질에 대한 교훈을 이야기합니다. 에베소 장로들은 크게 울며 바울을 전송합니다.

 

장로들의 역할(28)

교회는 하나님의 공동체이지만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사람들과 관 속에서 속상한 일이 있거든 바울과 같은 태도를 취하시길 바랍니다. 그들을 향하여 무엇을 얻을 것인가가 아니라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언약한 성도들을 위해 수고하고 있습니까? 그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고 있습니까?

 

28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28)

 

바울은 이별을 고하며 에베소 장로들에게 교회의 감독자로서 어떻게 행해야 할지 권면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이 모습은 건강한 리더십이 무엇인지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교회에 닥칠 위기를 말하기 전에 교회가 어떤 존재이며 교회의 책임자들에게 어떤 역할이 주어졌는지 가르칩니다. 첫째, 교회는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의 피로 사신 것입니다. 헬라어 본문에서 의미하는 ‘자신의 것’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사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제물로 주셨습니다. 주의 만찬에서 예수님께서는 잔을 가리키며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눅 22:20). ‘사다’라는 용어는 칠십인역 이사야 43:21에서도 사용됩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를 칠십인역은 ‘내가 산 나의 백성’으로 번역합니다. 이와 같이 바울은 속죄의 의미를 경제적 개념을 사용해서 설명합니다.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백성과 마찬가지로 교회는 하나님께서 사신 하나님의 재산입니다. 교회는 희생제물인 예수의 피로 사신 것이기 때문에 값을 매길 수 없으며, 하나님의 재산이기에 장로들이 좌지우지 할 수 없습니다.

둘째, 장로들의 임무는 양 무리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토록 값비싼 가치를 지니고 있으므로 성령은 교회를 지키는 감독자들을 세우십니다. 이들은 목자가 양을 지키듯이 교회를 보호해야 합니다(29). 소중한 교회를 위한 사역을 완수하기 위해 바울은 자신의 목숨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교회에서 책임을 부여받은 리더는 교회가 하나님의 소유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아들의 피로 사신 공동체이므로 우리는 교회를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로 생각해야 하고, 교회를 보호하는 일에 쓰임 받는 것을 영광으로 여겨야 합니다.

 

사나운 이리를 조심하라(29-32)

교회를 다니면서 말씀의 가르침을 제대로 받지 못해 영적 갈증을 해소하지 못한 나머지 이단 교리에 빠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안타까운 일들이 벌어지지 않도록 교회는 말씀을 가르치고, 성도는 배우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말씀에 대한 갈망과 영적 진리에 대한 목마름으로 우리에게 소망의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언제든지 진리의 말씀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29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30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31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32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29-32)

 

바울은 자신이 떠난 후에 사나운 늑대들이 양 떼를 해치려고 교회 안에 들어올 것이라고 경고합니다(참조, 마 7:15; 눅 10:3), 교회가 늑대의 공격을 받는 양 떼이기 때문에, 바울은 28절에서 성령이 교회를 보호하고 목양하시도록 감독자를 세우셨다고 말했습니다. 늑대들은 교회의 존귀함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을 따르도록 만들려고 진리를 왜곡해서 가르치는 거짓 교사들입니다. 이들은 바울이 가르친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것을 가르칩니다.

 

장로들이 늑대들의 거짓 가르침에서 벗어나 양 떼를 보호하려면 바울을 본받아야 합니다. 31절의 헬라어 문장에서는 ‘기억하라’라는 단어 앞에 ‘깨어 있어라’ 혹은 ‘주의하라’라는 명령이 나옵니다. 거짓 교사들의 출현을 주의해야 합니다. 바울이 밤낮으로 쉬지 않고 교회의 각 사람을 눈물로 훈계한 장면을 떠올리고 그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이는 목자가 양 떼를 보호하는 모습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지도자들이라고 해서 자신들의 힘으로 교회를 보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들을 주(=하나님)와 그의 은혜의 말씀에 맡깁니다. 하나님께 맡기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에 맡긴다는 뜻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의 말씀으로 교회를 보호하시고 성숙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인내하는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유업을 받게 됩니다. 유업은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는 사람들이 경험하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지도자들은 바울이 가르쳐준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함으로써 하나님의 보호와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거짓 교사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 진리를 왜곡하고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에서 이탈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교회의 가치를 모르는 거짓 교사들은 시대마다 교회 안에 있는 약점을 파고듭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아무리 많은 설교를 전한다고 할지라도 은혜의 말씀을 정확하게 가르치지 않는다면, 거짓 교사들의 유혹에 교회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이 했던 것처럼 교회의 지도자들은 은혜의 말씀을 정확하게 가르쳐야 하고 성도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대화하시고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혼탁한 시대에 제대로 살아갈 통찰력과 능력을 가져다줍니다. 말씀의 부흥이 진정한 교회의 부흥입니다.

 

돈을 탐내지 말라(33-35)

바울은 인간의 죄성을 알고 있었습니다. 인간은 가만히 나누면 자연스럽게 죄로 흘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육신이 편한 곳으로 택하기 되어 있고, 귀에 좋은 말을 택하게 되어 있습니다. 깨어 있지 않으면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는 죄성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말씀을 가지고 깨어서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33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34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35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33-35)

 

거짓 교사들의 출현 외에도 교회 지도자들의 그릇된 모습들이 교회에 위기를 가져다줄 수 있습니다. 지도자들이 탐욕을 추구할 때 교회는 위기에 빠집니다. 위기의 원인은 교회 내부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위기를 막아야 할 사람은 위기를 만들기 가장 쉬운 자리에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어떻게 교회를 섬겼는지 설명하면서 교회가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합니다. 바울은 누구의 은이나 금이나 옷도 탐내지 않았습니다. 돈과 옷을 거론하는 것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가르치신 내용과 비슷합니다(눅 12:13-34; 16:1-15). 바울의 삶은 그리스-로마 세계의 순회 철학자들과 종교사기꾼들이 가르침의 대가로 부를 축적한 모습과 대조됩니다. 바울은 탐내기보다 직접 일해서 자신과 동료들의 필요를 채웠습니다(34).

 

교회의 지도자들은 바울의 삶을 따라서 약한 사람들을 지원해야 합니다. 약한 사람들은 재정적으로 궁핍한 형편에 있는 사람들을 지칭합니다.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행위는 탐심에 끌려가는 것을 막아줍니다. 따라서 타인을 위한 자선은 자신을 구하는 길입니다. 교회가 궁핍한 사람들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다면, 엉뚱한 목적을 위해 돈을 축적하는 길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바울의 삶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삶에 근거합니다(35). 이 말씀은 복음서에 기록된 내용이 아니지만, 바울과 에베소 장로들과 여러 초기 교회들에 알려진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 베푸는 인생이 복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물론 생활의 궁핍함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는 삶을 낮게 평가하는 것은 아닙니다. ‘약한 사람들’이란 재정적으로 궁핍한 형편에 처한 사람들로서, 타인의 도움에 의존해야만 생활할 수있는 자들입니다. 바울은 궁핍한 사람들을 위해 직접 노동에 참여했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할용해서 탐심을 채울 위험성을 차단해야 합니다. 이때 바울의 삶은 그러한 위험성에 경종을 울리는 하나의 좋은 예입니다.

 

눈물의 작별 인사(36-38)

교회 안에서 나누는 교제를 돌아봅시다. 성공적인 인간관계를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당신이 떠날 때 바울과 같이 서로 안고 눈물을 흘리는 성공적인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지체가 아파할 때 당신의 가슴도 아픕니까? 지체들을 위해 얼마나 간절히 기도합니까? 지금 당신의 손이 필요한 사람은 없습니까?

 

36○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니 37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38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말미암아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36-38)

 

바울은 설교를 마치고 나서 무릎을 꿇고 장로들과 함께 기도합니다. 장로들은 크게 울면서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며 작별 인사를 나눕니다. 특히 장로들은 다시 바울을 볼 수 없을 것이라는 말 때문에 더욱 근심하고 배를 타는 곳까지 바울을 전송합니다.

 

바울과 장로들 간의 작별 인사는 진정한 감동과 우정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어떻게 이토록 아름다운 장면이 그려질 수 있습니까?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서 교회를 사랑한 바울의 삶 때문입니다. 바울은 눈물 없이 딱딱하고 건조한 방식으로 지도하는 선생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깨달은 자의 반응이었고, 그의 헌신은 박해자를 구원하신 예수의 은혜에 대한 반응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향한 그의 가르침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와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바울의 삶과 가르침을 목격하고 경험한 지도자들은 에베소 교회를 대표해서 눈물로 작별 인사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는 탐심을 채우기 위해 교묘히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노동을 해서라도 궁핍한 사람을 도왔던 바울, 존귀한 교회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은 바울의 삶이 재현될 때, 교회는 감동의 친교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에 근거한 사랑은 건강한 교회를 만듭니다.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 연약한 자들을 돌아보아 줌으로 성도들이 세워지고 교회가 하나 되어 부흥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수고를 통해 얻은 것으로 연약한 사람들을 돌보고 섬기는 심령들에게 은밀히 갚아 주십니다. 그러한 사람은 많은 사람들을 주께로 돌아오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성도들에게 존경을 받은 지도자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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