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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04-03)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초대교회

사도행전 4장 23-35절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마다 새롭게 변화됩니다. 변화된 모습이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합니다. 좀처럼 변할 것같이 않는 사람들이 변화되어 사람들에게 충격을 줍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만나서 변화된 사람들의 내용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상 숭배하던 아브라함이 믿음의 사람이 되고, 주인집에서 도둑하고 도망친 오네시모는 하나님을 만나 충성스런 일꾼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핍박하던 바울은 예수님을 만남으로 인생이 정반대로 변화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들마다 변화됩니다. 무엇이 그들을 변화시키겠습니까?

 

초대교회가 지속적인 성장 속에서 최초의 위기에 직면합니다. 이러한 난관을 이겨 내기 위해서 석방된 사도들과 모든 성도들은 합심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합니다. 기도의 결과로 점점 성령 충만해집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담대하게 전하며, 내면적인 삶이 변화가 일어나서 서로 나눔으로 아름다운 초대교회의 모습을 이루어갑니다.

 

간증을 통한 신앙고백(23)

하나님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평탄한 길보다는 더 많은 시험이 찾아옵니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하나님께서 그러한 시험을 충분히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성도들은 항상 승리하고도 남습니다. 하지만 그 능력 안에서도 믿음이 없으면 승리할 수도 없고 영적으로도 성장하지 못합니다.

23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료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알리니(23) 

나면서부터 못 걷던 앉은뱅이를 고친 베드로와 요한이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산헤드린 공회에 신문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담대함과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로 대답하자, 더 이상 그들을 잡아 놓을 수 없게 됩니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은 사도들을 위협과 협박한 후, 석방해 줍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석방했던 이유가 하나님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을 두려워해서 석방했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 사도들은 핍박을 받았지만, 제자들에게 영적인 담대함을 얻었습니다. 이제 사도들 뿐만 아니라 제자들은 모든 사람 앞에서 담대하게 선포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습니다. 이렇게 성장한 모습은 담대한 선포로 나타납니다.

19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20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19-20)

사도들은 세상의 권력 앞에서도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담대하게 전했습니다. 더욱답대해져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했던 것입니다(히 11:38). 석방된 사도들은 바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긴장하고 놀랐기 때문에 쉬고 싶었겠지만,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믿음의 성도들에게로 갔습니다(23). 성도들에게 지금까지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상세하게 보고합니다. 환란 가운데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됩니다. 핍박을 두려워하는 성도들에게 얼마나 많은 위로가 되었겠습니까!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과 달랐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억울한 일을 당하면, 힘이 없을 때는 한(恨)을 품고 그 자리를 피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힘이 비슷하면 대항하게 복수하려 할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의 사람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이 사건을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건으로 보았습니다. 오해와 공격을 받게 된 것도 하나님께서 다 준비해 놓으신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사도들과 성도들은 장차 당할 일들을 예견하고 영적인 준비합니다. 그것은 사탄과의 영적인 전쟁입니다. 영적 전쟁을 위한 준비는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함께 기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찬양 받으실 하나님(24-31)

성도들은 성경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분별하려고 노력합니다. 신앙의 위협과 어려움이 찾아올 때, 하나님의 권능과 뜻 안에 이뤄진 것임을 믿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가운데 있기에, 성경의 신실한 약속을 붙잡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더욱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한 사람들이라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24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 25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26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27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28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29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30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31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24-31)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부름 받아 세상 속에 존재합니다. 세상 속에 교회가 있지만 교회가 세상은 아닙니다. 교회는 세상 속에서 세상과 전혀 다른 공동체임을 분명하게 보여 주어야 합니다. 사도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하지 말라는 공회의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예수님을 전하고, 이 말을 동료들에게 전합니다.

(1)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함(24)

사도들이 풀려나자 믿음의 동료들에게 갔습니다. 그리고 모든 성도들에게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보고했습니다. 24-31절까지는 바로 그 기도의 내용입니다. 이 간증을 들은 사람들은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찬양하고 기도하였습니다. 모든 일련 사건을 영적으로 이해하던 것입니다.

(2) 시편 2편을 현실에 적용(25-28)

그 기도를 살펴보면 초대교회 성도들은 구약 성경과의 연속성을 가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기도의 내용은 시편 2편을 인용해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1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2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3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 4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시 2:1-4)

초대교회 성도들은 시편 2편 1-2절을 성령으로 하신 말씀으로 소개하며 이를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사건으로 이해하고 증거합니다. 그렇게 세상이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님을 거스른 것처럼, 이제 그 위협은 초대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권능과 뜻을 이루셨듯이 이제 교회와 주의 종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고 치유와 표적과 기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들어내고, 또한 예수님을 통해 교회에 나아갈 방향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교회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의 권력자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며 하나님의 공동체인 교회를 핍박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현실 앞에 우리가 초대교회와 같이 한마음으로 기도해야 할 것은,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들어내시기 때문입니다. 기도할 때, 다시 한번 그곳에 성령님께서 강력한 임재하시고, 성령님의 임재로 충만한 그들은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함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만방에 선포했던 것입니다.

(3) 사도들의 간구(29-30)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기도하는 기도문에서는 고난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거나 자기들을 박해하는 자들을 처벌해달라는 내용이 주를 이루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해달라는 신앙이 초대교회의 기도문에서 발견되는 괄목할 만한 내용입니다(29). 나아가 그 증거로서 하나님께서 직접 손을 펴 치료하시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표적과 기사들이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4) 성령에 임재를 체험(31)

초대교회의 간구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진과 같은 진동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이며, 기도가 응답 되었다는 신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또 그 결과로 그들은 성령 충만을 받았고,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성령 충만한 삶의 모습(32-35)

성령님께서 충만 임하시면 사람들은 변화를 일으킵니다. 하나님의 변화된 사람의 특징은 삶의 현장에서 변화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변화된 사람들의 특징은 소망이 이 세상에 있지 않고 하늘나라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재물을 쌓지 않고, 소유를 이웃과 함께 나누며 살아갑니다.

32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33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34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32-35)

본문에서 초대교회의 모습이 자세히 묘사되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초대교회 성도들을 위해 임하셨습니다. 그들에게 성령님의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누구도 그들에게 헌신된 생활을 강요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헌신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성도들은 그들 사이에 있던 모든 울타리가 사라지고 하나 된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들도 자기만의 울타리가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성령으로 충만해지자 그들은 울타리는 허물어지고 한마음과 한뜻의 공동체로 변화되었습니다. 더 이상 긴장하고 대립할 필요도 자기 몫을 챙기는 이유도 없었습니다. 평화로운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자신의 소유에 대한 태도까지 변합니다. 자기 소유를 주장하지 않고 서로 물건을 통용하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에 대해 이사야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예언했습니다. 6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7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8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9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 11:6-9) 다시 말해서 초대교회 성도들의 아낌없는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고 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초대교회의 모습은 성령 충만의 결과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은혜의 결과였습니다(33). 그들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모였고 또 성령의 역사로 흩어졌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초대교회의 두드러진 특징이었습니다. 성령의 역사와 하나님의 은혜는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모습으로도 드러나지만 서로를 돌아보는 사랑의 행위로도 드러납니다. 그 결과, 성도들 중에는 궁핍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교회에 가득 넘친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은 우리의 삶에 변화를 가져다줍니다. 주변 환경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넘어섭니다. 오직 자신의 사명을 열심히 뛰며 용기 있게 하나님의 복음을 준비하며, 어디서나 부활하신 주님의 복음을 담대하게 증거 하게 됩니다. 우리의 삶에서 아름다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자신에게 있는 모든 것을 주님의 것임을 알게 됩니다. 나눔으로 공동체의 아름다운 연합과 교제를 이루어 갑니다. 우리가 남이 아니라 가족임을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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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04-02)

 


보고 들은 것만을 말하는 사도

사도행전 4장 13-22절


우리는 때로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나 현상 또는 이미 자신이 알고 있는 이해나 경험으로인해 잘못된 판단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판단은 항상 옳을 수 없습니다. 또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종 쉽게 판단하거나 단정을 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새로운 사람이 된 제자들을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그들의 출신과 성분으로 단정 짓고 그러한 자기 판단에 사로잡혀서 제자들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똑바로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모습을 보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전 미문에 있던 앉은뱅이를 치유했었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과 동일하게 사도들에게까지 성령의 능력이 연결됨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이 사실이 두려움으로 임했습니다. 그들은 위협하면서 사도들의 사역을 방해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성령 충만한 제자들은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전했습니다.

 

복음의 확산(13-14)

보는 것과 듣는 것은 우리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눈에서 떠나게 하지 말고, 귀를 기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보고 들을 때 말씀이 우리 마음에 닿으면, 고백하고 자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13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14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13-14)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그 예수님께서 곁에 계시지 않는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골방에 숨어 지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무능력하게 두시지 않았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임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성령 충만해져 담대해졌습니다. 그리고 기회가 되는 데로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는 복음의 선포자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성령의 역사하심이 구체적으로 나타나 성전 미문 앞에서 앉아서 구걸하던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를 말씀으로 일으켜 걷게 하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이 놀라운 소식을 듣고 솔로몬 행각으로 몰려온 사람들에게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 합니다. 이러한 상황을 못마땅하게 여긴 산헤드린 지도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잡아 가두었습니다. 그 다음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모여 베드로와 요한을 심문합니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기준으로 베드로와 요한이 했던 사역을 판단했지만, 제대로 된 기준으로 평가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의 능력을 넘어선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이었기 때문이었기 때문입니다.

산헤드린 지도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아무런 권위나 능력이 없는 사람들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을 무시하여 함부로 대하고 심하게 심문했습니다. 사도의 신분은 귀족이나 부자도 아니고 특별한 학벌도 없는 갈릴리 어부 출신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권위 아래 권위적인 분위기만 잡기만 하면, 두 어부의 입을 막을 수 있으리라 착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그들의 협박과 신문에 오히려 성령이 충만하여 더욱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였습니다. 권세자들 앞에서 그들은 당당했습니다. 그들은 생각과는 다르게 앉은뱅이를 고치는 능력이 있었고, 전하는 내용은 무식한 말이 아니라 논리가 정연했습니다. 영적인 권위와 능력이 자신들보다 사도들이 훨씬 월등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에게 사람들이 더 많이 반응하고 따른 것을 보면서, 그들은 당황했습니다. 이러한 사도들의 모습을 본 산헤드린 지도자들은 놀랍고 이상하게 여깁니다. 몹시 편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 대부분이 별 볼일 없는 시골 나사렛 평범한 어부들에 불과한 줄 알았지만, 이들이 선포하는 복음의 메시지는 대단히 분명했고 무엇보다도 담대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경험과 지식에 사로잡혀 제자들 가운데 역사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힘으로 위협 당하는 복음(15-18)

사람의 손바닥으로 하늘 전체를 가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그렇게 해보려고 계속 시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절대로 하늘을 가려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사람들이 막으려면 할수록, 변경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 환란이 있지만 반드시 주께서 이기게 하실 것입니다.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낙심하거나 이상하게 여길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복음 전하는 사람들은 항상 성령을 힘입어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만이 흔들리지 않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5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16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그들로 말미암아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17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18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15-18)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선포하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기 시작하자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궁지에 몰리기 시작했고, 점점 당황했습니다. 그들은 큰 고민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현실로 나타났고, 그 증거들이 확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온 예루살렘 사람들은 이 기적을 보았고, 모든 사람에게 알려진 부인할 수 없는 유명한 표적으로 사도들을 칭송합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이 시점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도들이 행하는 명백한 표적을 공개적으로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예루살렘 있는 사람들이 인정한 증거를 억지로 거부하려 했습니다. 이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의 눈을 더 두려워한 것입니다.

‘영적 권위(靈的 權威)’에 대해 잠깐 살펴보면, 최고의 권위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절대 군림의 권위가 아니라 섬기는 종으로 겸손하게 하늘의 권위를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채찍을 사용하지 않고 용납의 사랑으로 모두를 품어주셨습니다. 그의 교훈은 ‘나를 따르라’가 아니라 ‘나의 삶을 따르라’라는 권위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성경 역사 속에서 이러한 권위를 잘못 사용한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권위자들에게 권위를 가질 수 있는 위치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권위를 잘못 사용한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본문에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스스로 많은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 당황스런 상황을 어떻게든지 모면하려고만 했습니다. 그들은 제자들을 잠시 공회 밖으로 나가 있으라고 하고, 어떻게 할 것인가를 자기들끼리 대책을 의논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신념과 종교 체제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들의 권위를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그 권위를 행사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묻거나 하나님이 뜻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만 의식해서, 사람들로부터 소리가 나지 않도록 정리만 하려고 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가장 큰 실수는 하나님께서 권위를 주셨다는 것을 잊고, 하나님의 영적 권위마저 사람들에 의해서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마음을 자신들로부터 흐트러지지 못하게 할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산헤드린에서 회의한 결론은 무엇이었습니까? 사도들이 복음과 기사가 더 퍼지지 않도록 제자들의 입을 막아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에게 다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거나 가르치는 것을 금지 시키기로 결의했습니다(17). 그리고 자신들의 힘으로 사도들의 입을 막으려고 협박했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에서는 권위 아래 힘을 가진 사람으로 명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으로 보면 그들도 불쌍한 영혼이요 회개해야 할 죄인일 뿐입니다. 구원 받아야 할 영혼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복음이 확산되는 곳에는 항상 함께 따른 것이 있습니다. 바로 사단의 훼방입니다. 성령의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사단은 다양한 방법으로 복음을 방해합니다.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부인할 수 없는 확실한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둠은 빛을 싫어하듯이 항상 반대에 직면합니다. 이러한 상황을 이상히 여지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한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상황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을 초월한 능력(19-20)

복음 전하는 사람들은 자세가 중요합니다. 항상 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며 세상의 소리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만 합니다. 세상의 유혹과 시험, 위협과 도전을 이길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뿐입니다. 날마다 성경을 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순종할 때 세상을 이기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19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20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19-20)

예루살렘 산헤드린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들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불러서 절대로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위협하면서 명령합니다. 이러한 그들의 명령에 사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19)라고 대답합니다.

사도들은 성령 임재를 통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으로 변했습니다(히 11:38). 단 한 번의 성령 임재를 통해 변화된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변화된 사람들은 사람의 시선(視線)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만 바라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공생애 때에는, 엉뚱한 행동들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알아듣지 못했고, 예수님께서 가장 힘들 때에도 부탁하신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는 부인하고 도망갔던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한심하기 짝이 없는 사도들을 보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묵묵히 기다리셨습니다. 그 결과, 이렇게 아름다운 제자들로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현재의 연약한 모습을 보신 것이 아니라, 장차 성령 체험을 통하여 변화될 미래의 모습을 보고 계신 분이십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산헤드린 경고에 대해 묵살합니다(19). 오히려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지 판단하라고 반문합니다. 사도들은 서슬 파란 산헤드린 공회원 앞에서도 그들의 말을 듣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다고 담대하게 선언합니다. 그들이 이렇게 변화된 것은 그 동안 예수님과 같이 다니면서 많은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고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그들은 이해하지 못한 일들도 많았지만, 성령께서 임하시니 이해하지 못했던 경험들이 풀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성령 임재로 능력의 사도들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들은 대적들의 경고와 위협 앞에서 전혀 굴하지 않고 더 담대하게 전합니다. 오히려 유대 지도자들에게 반문(反問)합니다. 이것은 상당히 위험한 발언입니다. 재판권을 가진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 ‘너희는 하나님 말씀을 반대하는 자들이다.’라고 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보고 들은 것, 곧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가르침을 전하지 않을 수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성령 충만한 그들은 담대하고 확신에 차 있었으며 용감했습니다.

 

모든 사역의 결과(21-22)

신앙 생활하면서 경험하고 배웠던 것은 모두 헛된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손이 터치하면 가나안 혼인 잔치의 물이 포도주가 된 것처럼 모든 경험과 지식이 아름답게 변화될 것입니다. 인간의 작은 경험이나 지식도 하나님의 능력을 만나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 되어집니다.

21관리들이 백성들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라 22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21-22)

유대 산헤드린 지도자들은 점점 고민이 깊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보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들의 눈을 두려워합니다. 사도들을 제어할 수 있는 해법이 없는 상황에서 그들은 계속 위협하고 협박합니다. 세상에 속한 자들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것들은 위협과 협박밖에 없습니다. 사도들을 감옥에 가두어도 보았습니다. 그들은 모여서 대책을 논의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에게 권위적인 명령도 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입니다. 사도들을 핍박함으로 자신들에게 반대로 피해가 올까 봐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위협하고 석방하기로 결정합니다. 결국 악인들의 훼방은 무기력하게 되었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상황을 초월해서 말씀에 순종하는 자를 통해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복음 전도자의 삶은 예수님께서 이미 승리하신 길을 따라 살아갑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권위로 위협해 봅니다. 하지만, 그 권위는 하나님의 권세를 어떻게 해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담대히 나아가면 됩니다. 앉은뱅이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것처럼, 당신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학문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성령 임재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도 예수님과 복음에 대해 담대하게 증거를 할 수 있었습니다. 당신도 모든 영적 경험들을 통해 세상에 복음을 담대하게 증거 하는 전도자들이 되길 바랍니다. 비록 당신이 부족해 보일지라도 성령이 임하신다면, 훌륭하게 변화되고 능력 있게 사용 받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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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04-01)


능력에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

사도행전 4장 1-12절


 

복음 전파는 그리스도인의 사명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 언제나 받아들임과 거절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납니다. 의외로 마음을 쉽게 열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아무리 두드려도 닫힌 문처럼 딱딱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이 전해주는 현장에는 언제나 긴장감과 긴박감이 있습니다.

 

성전 미문 솔로몬의 행각에 앉은뱅이가 치유된 기적 사건에 대한 결과를 기록합니다. 이튿날 산헤드린 공회가 소집되고 베드로와 요한은 공회원 앞에 서서 그들의 신문을 받게 됩니다. 사람들이 기적적 사건에만 관심 가졌지만, 사도들은 기적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특히 베드로는 담대하게 산헤드린 공회 앞과 종교 지도자들 앞에서 치유 사건에 주인공인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합니다.

 

핍박 가운데 복음의 열매(1-4)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한다고 모든 것이 순조롭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특히 선포하는 복음의 내용이 사람들에게 듣기 좋은 소리만 전파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당신은 죄인이다.’, ‘당신은 십자가에 못 밖은 예수님을 만나야만 한다.’, ‘회개하라!’라는 거북스런 내용도 전하기 때문입니다.

1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2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3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4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1-4)

사도행전 4장은 앞선 3장의 앉은뱅이 치유 사건과 베드로의 설교와 연결되지만, 그 대상이 달라집니다. 3장이 일반 백성들을 대상으로 하였다면, 4장은 복음을 거부하는 종교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전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앉은뱅이가 일어나서 찬양하는 사건을 보고 모여든 사람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이 전한 복음을 듣는 사람 중에는 마음이 불편한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1) 복음을 거부한 무리들(1)

사도들이 성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복음을 증언할 때,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 그리고 사두개인들이 다가왔습니다(1). 이미 이들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부정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도록 넘겨준 사람들입니다. ‘제사장들’은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칠 수 있는 합법적인 권한을 갖고 있었습니다. ‘성전 맡은 자’는 성전의 경비대장을 의미합니다. 그는 성전과 성전 주위 질서와 치안 유지를 책임지는 사람들입니다. ‘사두개인들’은 자극했던 두 가지는 선전에서 가르치는 것과, 예수 안에서 죽은 자들의 부활을 선포한 것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은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칠 때에도 참지 못했습니다(눅 20:1-8). 이런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분개하며 대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2) 예수님의 부활을 전한 사도들(2-4)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2)라는 말씀은 기본적으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으로 앞으로 죽은 자의 부활이 있을 것이란 의미를 지닙니다. 이 말씀은 또한 그 이상의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데, 맨 앞에 놓인 문구 “예수 안에”는 죽은 자들의 부활에 있어 예수님의 결정적인 역할을 강조합니다.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는 말은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죽은 자들이 부활하는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죽은 자들의 부활은 부활해 높아지신 예수님 때문에 이미 현재적인 실체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사두개인들에게 죽은 자들의 부활이 있음을 증명하셨습니다(마 22:31-32; 막 12:25-27; 눅 20:35-38).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죽은 자의 부활은 예수님의 구속 사건과 연결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은 자들의 부활에 어떤 점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겠습니까? 사두개인을 제외한 유대인들은 대개 죽은 자들이 미래에 부활할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에 담긴 결정적인 의의는 부활의 확실성을 입증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 안에서 죽은 자들이 부활하는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보였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복음이 선포되는 현시대가 바로 부활의 시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바로 그때 구약의 일부 성도들이 무덤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예수님의 부활로 부활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암시합니다(마 27:52-53).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해 죽은 자들의 부활을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고전 15:12-17). 바울의 주장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죽은 자들이 부활하는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시대는 옛 시대의 종말을 고하고 새 시대의 시작을 알립니다. 미래에 있을 성도들의 육체적 부활은 예수 안에서 이미 시작된 부활 시대의 절정이 될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소집된 산헤드린(5-7)

성도는 이중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천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지만 세상에 발을 붙이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갈등이 많습니다. 불신 세상에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갈 때, 상당히 많은 핍박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곤경에 빠질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한 복음의 증인으로 증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도의 정체성은 자신이 아닌 그리스도와 관계에 기반을 둡니다.

5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6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7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5-7)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은 앉은뱅이가 일어난 기적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이 감옥에 갇힌 다음 날, 당시 유대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하고 사도들에 대한 재판이 열렸습니다. 그 회의에는 예수님을 심문하고 처형시키는 데 앞장섰던 자들(눅 22:66)이 참석했습니다(5-6). 예수님께서 심문받으시던 자리에 사도들도 서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길, 십자가의 길을 그들도 따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7)라고 물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앉은뱅이의 새로운 인생이 아니라 오직 누구에 권세로 사역했냐는 것만 관심을 집중합니다. 그들은 누구 이름이 더 큰지가 관심이 있어서 누구에 이름으로 전하는지 추궁했습니다. 그들 중에 가장 높은 대제사장의 이름으로 사역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대제사장보다 더 높은 이름이 어디에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사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예수님을 전했지만, 그들의 판단 기준은 종교적인 권위였습니다. 물론 사도들은 산헤드린 공회의 허락 아래 증언한 것이 아닙니다. 이전에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님께 신성 모독죄를 뒤집어씌웠습니다(마 26:65).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언하는 사도들을 같은 신성 모독죄로 정죄하고자 했습니다. 이들은 앉은뱅이의 치유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정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성령 충만하게 선포한 베드로(8-12)

복음을 전할 때 논리로 설득하거나 논쟁하려 하지 말고 오직 성령의 능력을 의지해서 진리의 말씀을 담대히 선포해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을 의지해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께서 구원하기로 작정하신 영혼들이 그 복음을 듣고 구원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구원의 유일한 이름인 예수님의 이름을 담대히 전함으로 영혼들을 구원의 길로 이끌어야 합니다.

8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9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10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11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8-12)

성령께서는 위험에 처한 사도들을 도우셨습니다. 이미 복음 때문에 핍박받는 자들을 성령께서 도우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마 10:19-20). 복음을 전한 베드로는 성령 충만한 상태로 당당하게 대답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제자들이 핍박당할 때 성령이 마땅히 할 말을 가르쳐 주실 것이라는 예수님의 약속을 발견합니다(눅 12:11-12).

(1) 성령의 도우심을 입은 베드로(8)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베드로는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담대하게 대답했습니다(8). 베드로는 성령이 임재하기 전에는 여종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했던 나약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많은 종교지도자 앞에서도 담대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연약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의 변화는 성령께서 충만하게 임하심으로 베드로를 변화시킨 것입니다. 이제 성령 충만한 베드로는 당당하게 종교 지도자들 앞에서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심을 당당하게 선포했습니다. 그들이 죽인 예수님을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음을 단호하게 선포했습니다.

(2) 성령으로 충만한 메시지(9-12)

베드로는 공회가 사용한 “누구의 이름으로”란 문구에 맞추어 “나사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10)라고 대답합니다. 조금도 주저함 없이 나면서부터 못 걷는 자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쳤다고 선포했습니다. 자신들을 정죄하려는 자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습니다. 나아가 산헤드린 공회가 정죄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으로 이런 일을 행한다고 밝혔습니다(10).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고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음을 선포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과 산헤드린 공회에 버림을 받았으나 인류의 구원자가 되십니다(11: 시 118:22). 이 세상에 구원을 얻을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밖에 없음을 선포합니다(12).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께서 열어 주신 유일한 구원의 길이십니다. 그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막을 수 없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박해가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복음은 단지 좋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영적 전쟁에 적군인 사단의 나라에 공격하는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에게 큰 저항을 받을 수도 있는 강력한 초청의 메시지입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처럼 성령을 덧입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어떤 고난을 당하더라도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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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03-03)


이제라도 알아야할 영적 지식들

사도행전 3장 17-26절


중국에서는 마약을 소지하면 중벌입니다. 역사적으로 청나라 시대에 마약이 만연해서 나라를 피폐하게 만들었습니다. 마약을 금지로 영국과 ‘마약전쟁’이 발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중국은 마약에 대해 민감합니다. 지금도 마약을 소지하면 중죄로 다스린 것입니다. 2009년도에는 영국인이 마약 4kg를 소지하고 중국에 들어갔다가 구속되고 처형되었습니다. 지난번에 한국 여성이 중국 공항에서 마약 소지로 구속 되었습니다. 이유는 어떤 사람이 공항에서 짐을 한국공항까지 옮겨달라는 요구에 마약인 줄 모르고 옮겨주다가 구속된 것입니다. 그 여인은 중국 경찰에 상황을 이야기 했지만, 모르고 행한 일이기 때문에 상황은 참작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약을 소지했기 때문에 중죄인입니다.

 

본문은 베드로가 회중을 향해 회개하고 돌이켜 죄 사함을 받으라고 촉구합니다. 그리고 장차 예수님이 만유를 회복하기 위해 다시 오실 것이라 전합니다. 그 예수님은 모세와 사무엘과 모든 선지자를 통해 예언되고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복의 근원이십니다.

 

알지 못한 죄(17-18)

살다면서 자신의 행동이 무례한 줄 모르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이 지적해주면 긍정적으로 받아들고 자신의 행동을 수정합니다. 그러면 주변 사람들도 행복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리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 18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자기의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17-18)

사도 베드로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원인을 말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행동은 유대인들의 무지 때문이라고 진단했습니다(17). 계속해서 그는 더 나아가 관리들도 무지로 인해 예수님을 못 박았다고 진단했습니다. 관리들은 예수님에 대한 시기심으로 백성을 충동질하고 선동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지의 무서움을 깨닫게 됩니다. 때로 우리는 잘못했을 때 ‘몰라서 그랬다.’고 변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지만큼 무서운 죄는 없습니다. 몰랐기 때문에 법죄가 아닙니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믿지 않습니다. 나중에 심판 받을 때 ‘그때는 몰라서 그랬습니다.’라고 변명할 수 없습니다. 기회가 있을 때 영접해야 하고, 기회가 있을 때 봉사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변명한 사람들에 대해 말씀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로마서 1:19)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형상을 심어주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조금만 신경을 쓰면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기에 힘써야 합니다.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도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호세아 6:3)

하나님의 진리를 잘 깨달아야 합니다. 영적인 무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아는 것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실 것입니다. 진리를 우리를 자유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19-24)

사건에 범인에게 증거가 있으면 더 이상 변명할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무지해서 실수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변명할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그들의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20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21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22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의 모든 말을 들을 것이라 23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 하였고 24또한 사무엘 때부터 이어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 때를 가리켜 말하였느니라(18-24)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이미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려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구약 시대에 선지자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들이 선포한 예언의 주인공은 메시아였습니다. 메시아가 오셔서 백성을 구원할 것을 수 없이 선포하였습니다. 심지어는 창세기 3장에서부터 예언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세기 3:15)

뿐만 아니라 이사야서에는 샐 수도 없이 많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우리들이 잘 아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사야 53장을 보겠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7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이사야 53:5-7)

이렇게 거울 본 것처럼 구약 성경에 선명한 메시아에 대해 예언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은 몰라서 예수님을 내주었다고 변명할 수 없습니다. 조금만 성경을 신경 써서 읽으면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예언한 말씀은 예수님께서 초림과 십자가와 부활은 모두 예언대로 이뤄졌습니다. 특히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했습니다. “나 같은 선지자”(22)도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신명기 18:18)

사무엘 이후 모든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를 외쳤습니다. 역사적으로 선지자들이 많다는 그 당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에 나타납니다. 그 선지자들이 ‘회개하라!’라고 외친 것은 삶의 행실이 좋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해야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 백성으로 천국에 들어갈 합당한 준비를 하라고 외친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이 지명하고 있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십자가 그리고 부활을 가리켜 예언했습니다(24). ‘십자가의 도’에 대해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에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1:18)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도(道)’라는 의미는 ‘메시지’입니다. 즉 십자가에 메시지입니다. 이 메시지를 사람들이 거부하고 듣지 않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단순한 메시지를 목숨을 걸어가면서 전하기 때문에 미련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하였습니다. 그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전하는 사람들은 그 사람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계속 전파해야할 사명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듣다보면 미련하게 들렸던 말씀이 생명의 말씀으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무지하게 행동했습니다. 실수를 저지른 일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실수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계획을 성취한 것으로 이용하셨습니다. 그 무지에 대한 책임은 당연히 유대인 자신들이 감당한 것입니다.

 

이제라도 알아야 할 것(25-26)

‘늦었다고 후회할 때가 기회다.’란 말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깨달았을 때, 그 순간에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까?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 26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25-26)

유대인들은 이제라도 오순절 이후 여러 가지 사역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사역으로 조금이라도 인식한다면 돌아와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선지자들을 후손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그 이유를 돌이켜 악함으로 버리게 하므로 백성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26). 하나님은 일찍이 아브라함의 씨를 통해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씨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백성이 이제부터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하며, 늦었지만 회개하고 돌아와 죄 씻음을 받아야 한다고 선포했습니다.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멸망합니다. 그러나 순종함으로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오면 구원과 복을 얻을 것입니다. 주위에 그리스도를 모르는 무지한 자들이 있습니까? 그를 위해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누구나 몰라서 실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지에서 오는 실수가 사람을 파멸로 이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주되심을 모르면 치명적인 결과에 이르게 됩니다. 아직도 영적 무지가운데 있습니까? 예수님을 알고 나아와 구원의 복을 얻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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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03-02)


초대교회의 첫 간증

사도행전 3장 11-16절


두 번째 베드로 설교 - 사람들은 살아가면 큰 성공을 이룰 때 어려울 때 어떤 태도를 보입니까? 마음이 허전할 때는 돈을 의지하고, 명예를 의지하고, 권력과 배경을 의지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힘을 의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지 않는 큰일을 성취했을 때 스스로 교만해서 우쭐거릴 수 있습니다. 지도자들에게 실패했을 때보다 성공할 때 더욱 위험합니다. 성도들은 성공적이거나 실패한 삶을 살아갈 때도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 곳에도 흔들리지 않는 다니엘과 같은 성도들이 될 수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 임재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능력이 임했습니다. 그 결과 성전 미문에 있던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인 걸인을 고쳐 주었습니다. 이 사건은 오순절을 대표하는 사건입니다. 이 일후에 예루살렘 사람들이 솔로몬 행각에 있던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하기 시작합니다. 베드로는 자신에게 모여드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한 사건이 현실에 일어난 기적임을 설명합니다.

 

기적에 대한 반응(11)

세상 사람들은 생각지 못한 일들이 발생하면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일으킨 후에 예루살렘 사람들은 무슨 일인지 궁금해서 솔로몬 행각으로 모여 들었습니다. 그들의 반응을 볼 수 있었습니다.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불리우는 행각에 모이거늘(11)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던 앉은뱅이가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를 일어나서 걷게 하였습니다. 이 일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예루살렘 사람들이라면 그가 누군지 정확히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난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에 동안 그런 -귀신들이 나가고, 병든 자가 치유 받고, 죽은 자를 살리셨던- 역사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들에 대해서는 모두들 당연한 것처럼 인정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기적을 행한 사실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솔로몬 행각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주로 베드로와 요한은 평상시 ‘솔로몬의 행각’이라는 곳에 있었습니다. 이곳은 예루살렘 성전 외각인 이방인의 뜰에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항상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서기관들이 사람들을 가르치던 곳입니다(누가복음 2:46; 요한복음 10:23). 상인들은 성전에서 예물 드릴 물건을 팔기도 하고 성전 돈으로 환전해 주는 일들이 진행된 곳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솔로몬 행각 근처는 항상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습니다. 오순절 이후, 사도들은 사람들이 많이 있는 솔로몬 행각 근처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있었습니다. 일으킴을 받았던 앉은뱅이는 고마워서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더 이상의 은과 금을 넣는 깡통이 필요 없습니다. 자신에게 새로운 삶을 준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잡는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을 잡는 것이었습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사건은 성전 중심으로 있던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 거리였습니다. 관심사이기에 충분했습니다. 성경에서는 주변 사람들이 크게 놀랐다고 기록합니다. 점점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와 앉은뱅이 그리고 일행들을 중심으로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사역을 이룬 베드로와 요한만 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순식간에 인기가 충천한 슈퍼스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오늘날 영적인 은사자들에 대한 자세를 볼 수 있습니다. 수많은 성공적인 사역을 통해서 베드로와 요한처럼 사람들에게 관심이 집중될 수 있습니다. 성공적인 사역을 하면 많은 사람들이 주변으로 모여듭니다. 그들이 실수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께 도구로 사용 받은 사실입니다.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사람들의 시선을 자신에게 집중시킬 수 있습니다. 종종 사역자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정말 위험한 간증하는 것을 봅니다. 간증이 사역에 주인공이신 하나님을 간곳없고 사역자들만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할 것을 스스로 갈취한 모습을 볼 때 정말 가슴이 아픕니다. 이런 일은 사역자들에게 아주 위험한 순간입니다. 사역 초기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다가 점점 인기를 누립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집중하다보면 점점 그런 인기에 대한 중독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돌릴 영광을 스스로 가로 채는 것입니다. 사역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이 이런 모습입니다. 이 때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잠언을 통해 경고합니다.

도가니로 은을, 풀무로 금을, 칭찬으로 사람을 단련하느니라(잠언 27:21)

은사들이 있을 때나 큰일을 성취할 때 정말 조심해야 사항입니다. 그래서 선줄로 생각하거든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초대 왕인 사울은 이런 부분에서 넘어졌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신의 통치력 아래 있을 때 점점 부강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점점 부강하면서 사울 왕도 점점 교만해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태도가 매우 달랐습니다. 그들은 이미 교만해서 넘어져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만한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두 번째 설교(12-16)

앉은뱅이가 일어난 사건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몰려들었습니다. 베드로는 몰려온 군중들의 인기에 집중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기적을 일으킨 장본인을 소개합니다. 기적 사역의 주인공은 자신이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소개합니다. 베드로가 기적의 사역을 소개하는 장면으로 들어가면서 이것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기를 바랍니다.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13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그를 넘겨 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의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거부하였으니 14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15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16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12-16)

사도 베드로는 오순절 사건 이후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복음을 전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집중하고 있는 기적의 사건을 통해서 그들은 변함없이 복음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이 전한 복음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1) 사역의 진짜 주인공(12)

아마 오순절 사건 이전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베드로는 우쭐거리며 교만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베드로의 모습은 분명히 많이 변했습니다. 그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자신을 앞세우기보다 하나님을 앞세우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과거에 교만해서 실패한 경험도 있었기 때문에 이제 더 조심스럽게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이 아니라 성령의 도움이나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셨으면 자신은 예수님을 부인하고 도망가는 연약한 사람 밖에 되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더욱 그는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은 사역의 주인공이 아니다고 설명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전후해서, 그들은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이지만 많은 것을 경험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혀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에 의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삼 일 만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신 것을 직접 보았습니다. 그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사건인 오순절을 통해 약속하신 성령이 임재 하셨습니다. 이러한 모든 사역을 통해서 사역의 주인공은 자신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신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사역의 주인공인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히 소개합니다. 기적 중심에 있는 분은 자신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임을 많은 사람들에게 설교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2) 사역의 중심에 섰던 유대인들(13-15)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유대인들이 인정하는 조상들입니다. 베드로는 유대인의 조상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로서 영화롭게 하셨다고 증거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억울하게 십자가를 지심에 대해 설명합니다. 유대인들이 잘못된 자의적인 해석으로 잘못된 행동을 했다고 지적합니다. 유대인들은 거룩하고 의로우신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더욱 예수님을 빌라도의 손에 넘겨주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대신에 살인자 바라바의 모습으로 따라갔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살인자 바라바처럼 예수님을 저희들이 십자가에 죽였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모습은 담대했습니다. 사람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복음의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앉은뱅이 한 사람이 일어선 것을 가지고 관심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의 하나님, 역사(歷史)를 주관하신 하나님께서 앉은뱅이보다 더 놀라운 일을 이루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사건입니다.

(3) 회복시키시는 하나님(15-16)

예수님께서는 생명을 창조하신 주인이십니다.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도 계신 분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신 분입니다. 사람들을 살리시기도 하고 거두어가시기도 합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빌라도를 통해 십자가 위에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하지만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을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러한 모든 기적의 능력은 하나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의 반응과 상태와는 상관없이 주님의 역사는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전반적인 상황에 대해서 자신들이 증인이라고 말씀합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난 것에 관심 있어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심으로 그의 능력이 눈에 보이도록 현실적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를 일으키신 사건은 부활이라는 역사가 현실화 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회복시키는 역사는 지금도 우리 현실 속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부활과 같은 일들이 삶 속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죽은 자가 일어난 것이나 앉은뱅이가 일어난 것만 기적이 아닙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시름 거리던 건강이 회복되어지고, 깨어져가던 가정이 회복되어지고, 무너져가던 교회들이 부흥이 회복되어지고, 시기와 질투가 만연한 사회가 신용이 회복되어집니다. 십자가에 죽으셨던 예수 그리스도가 무덤에서 살아나듯이 무너져가는 현실 속에서 놀라운 회복의 역사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회복의 능력은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 아닙니다.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적으로 일어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12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13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요한복음 15:11-13)

 


이제 삶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같은 기적들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시길 바랍니다. 무슨 일들을 만나든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영광을 받을 수 있도록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신 일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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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03-01)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있는 교회

사도행전 3장 1-10절


목회를 하면서 도박에 빠진 어떤 여성도와 상담한 적이 있습니다. 신앙 상담을 하면서 도박에 빠진 이유를 들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아이들도 모두 학교가고, 남편도 직장에 가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한 번 친구들과 만나서 장난삼아 고스톱을 하게 되었습니다. 도박을 심취하면서 시간도 잘 가는 줄 모르고 무료함이 없었다고 합니다. 점점 도박에 깊이 빠지게 되었습니다. 도박 장소인 ‘하우스’를 들어가는 날은 밤새는 줄 모르고 도박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자녀들은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밖으로 돌기 시작하고, 남편은 자녀들을 양육하지 못한다고 싸우는 날이 많아지기 시작했답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는 재산도 모두 탕진하고 신용불량자가 되었습니다. 가정은 붕괴 직전이 되었습니다. 하루는 세수를 하면서 거울에 미친 자신을 자세히 보게 되었습니다. 처참하게 망가진 자신을 보면서, 문뜩 ‘정말 인간답게 사는 것이 무엇이냐?’라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번개처럼 번트기면서 순간적으로 정신을 차리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목회자에게 심방을 요청했고, 2년 동안 도박의 삶을 떨어놓고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분은 이제 삶이 완전히 변했습니다. 완전히 옛 도박의 습관을 끊어버리고 빛의 자녀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모든 사람들에게 무의미한 한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항상 예루살렘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뜻밖에 사도 베드로와 요한을 만났습니다. 사도들은 기도하려 성전에 올라가던 중이었습니다. 그의 인생은 이 사도들을 만남으로 가치 있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무의미한 인생들(1-3)

병원 중환자실에 가보면 의식이 없이 수많은 호스로 연명하고 사람들을 봅니다. 이렇게만 살아가야할까 비참한 인생들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병원 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비참한 인생이 있습니다. 하루하루 귀한 시간을 살면서도 아무런 의미 없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이렇게 무의미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소망을 줄 수 방법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다.

 

1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2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1-3)

 

사도행전 3장부터는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 세워가는 교회와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를 보게 됩니다. 정말 세상을 살리고, 죄인들을 구원하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⑴ 성전에 오르는 두 제자(1)

오순절 이후 예루살렘은 오순절 축제의 분위기 속에 뜻하지 않는 사건들로 예루살렘은 뒤숭숭 했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사람들은 이상한 분위기와 상관없이 평상시 그대로 하루에 세 번씩(오전 9시, 오전 12시 그리고 오후 3시)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도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아무런 기대 없이 종교적인 습관대로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하루는 베드로와 요한이 제 9시(오후 3시)에 또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들은 올라가다가 성전 입구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는 걸인을 보았습니다.

 

⑵ 미문에 앉은 걸인(2)

성전 미문 앞에 앉아 있는 걸인은 태어나면서부터 선천적인 앉은뱅이 장애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날마다 친구나 가족들이 그를 매고 와서 미문에 두고 떠났습니다. 미문이 이름 모를 앉은뱅이의 직장이었습니다. 그 사람뿐만 아니라 많은 거지들이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의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앉은뱅이도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의 순서를 기다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태어나면서 앉은뱅이였기 때문에 아무런 소망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의 웃음이나 당하지 않길 원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루에 3번씩 기도하려 성전을 올라가면서 도와달라는 그의 구걸 행위를 보았을 것입니다. 날마다 그가 미문에 앉은 것은 미문이 그의 직장이었습니다. 하지만 유대교는 미문까지만 유효했습니다. 유대교는 그가 하루하루 연명하는 정도로만 유익했습니다. 그가 자립해서 그곳을 떠나게 하지 못했고, 더욱 태어날 때부터 죽은 다리를 고쳐주진 못했습니다. 어떤 제사장도 그 걸인을 돌보아 주지 않았습니다.

이 앉은뱅이는 감히 유대인들과 똑같이 제사를 들릴 수 없었습니다. 당시는 앉은뱅이라고 하면 부정한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성전은 앉은뱅이 걸인이 들어가기에 너무나 거룩해서, 일반 사람들이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에 참석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육적인 앉은뱅이뿐만 아니라 영적인 앉은뱅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에게 성전은 예배하는 곳이 아니라 구걸하는 직장뿐이었습니다. 날마다 성전으로 출근하면서도 하나님을 만나기보다 돈을 많이 버는 것을 기대한 사람이었습니다. 성전 미문 곁에 앉아서 제사를 지내려 오가는 사람들이 종교심에 조금 더 많은 자선을 베풀어줄 것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습관적으로 행동하면서 새로운 것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무의미하게 세월을 보내면서 자신의 갈증을 채워 줄 무엇인가를 찾고 있습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성경 요한복음 4장에서는 사마리아 지역에 예수님께서 들어가셨는데, 한 여인이 나옵니다. 영혼이 매우 갈증 난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을 다섯이나 바꾸어보았습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에게 욕만 먹었지 갈증을 채우질 못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을 만나서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앉은뱅이 걸인에게도 진정 예수님이 필요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 중에 하루하루를 허무하게 지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무의한 생활은 일반 믿지 않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있는 성도들도 그런 허무한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아무런 기대 없이 하루하루를 습관적으로 살아갑니다. 오늘을 무의미해서 목적도 없고 희망도 없습니다. 하루하루의 삶이 가치 없는 괴로운 삶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허무함을 달래기 위해 많은 방법을 찾습니다. 수다를 떨어볼 친구들을 찾습니다. 무료한 시간을 달래보려고 술이나 도박에 빠져서 점점 술중독, 도박 중독 그리고 인터넷 게임 중독이 되어봅니다. 과연 이러한 세상 것들이 우리에게 소망을 줄 수 없습니다.

 

⑶ 제자들을 만난 걸인(3)

제자들도 습관대로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다가 그 앉은뱅이 걸인을 만났습니다. 돈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이 다가간 것입니다. 사망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 다가간 것입니다.

두 제사들이 지나가다가 그 앉은뱅이 걸인 앞에 섰습니다. 앉은뱅이는 항상 하던 대로 자신에게 관심을 보인 사람들을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번 기회가 지나고 나면, 자신에게 누군가가 자선을 베풀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습관적으로 간절하고 불쌍한 눈빛을 보내면 제자들을 처다 보았습니다. 걸인에게는 단 한 가지 외에는 아무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저 어제보다 또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돈을 적선하길 원했던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습관적으로 더 적극적으로 불쌍한 자세를 취해 보였습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현실의 삶을 유지할 금과 은뿐이었습니다.

종종 생활 속에서 무료함에 빠져 있는 사람을 봅니다. 그래서 자신의 갈증을 채워줄 새로운 것을 찾아 갈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선한 무엇인가 자신의 삶을 새롭게 변화시켜 주질 원하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그들은 자신을 갈증이 성전 미문에 앉아서 걸인 앉은뱅이와 같다는 것을 모를 것입니다. 이것이 점점 습관이 됩니다. 나쁜 습관처럼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성도들은 세속적 습관을 버리고 거룩한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새롭게 변하는 인생들(4-8)

겨울철 죽은 가지와 같은 무의미한 인생에 봄철에 생기가 돋는 듯한 삶으로 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있지만 정말 가치 없는 인생을 갈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스스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으로 새로운 생명과 능력을 공급 받아서 새롭게 살아가야 합니다.

 

⑴ 걸인을 주목하는 제자들(4-5)

4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5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4-5)

 

무능한 성전에서 할 수 없었던 일이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로 일어납니다. 걸을 수 없었던 걸인은 금과 은을 원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그에게 필요한 것을 주셨습니다.

성전에 올라가던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고 있는 앉은뱅이를 주목하게 됩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앉은뱅이이기 때문에 아무런 희망도 없었습니다. 날이 새면 또 무의미하게 성전 미문으로 나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소망이라고 한다면, 어떤 좋은 사람을 만나서 많은 돈을 구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걸인에게 사도들이 다가갔습니다. 반대로 제자들이 다가선 만큼 앉은뱅이 걸인은 최대한 더 불쌍한 모습으로 있었습니다. 가까이 온 제자들은 걸인에게 “우리를 보라!”고 희망 섞인 말을 걸어주었습니다.

사도들은 앉은뱅이에게 영원한 것을 주기 위해 ‘우리를 보라!’라고 했던 것입니다. 아마 걸인은 사도들을 향해 흥분했을 것입니다. 그는 습관대로 제자들에게 ‘무엇을 얻을까’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바라보았습니다. 걸인에게는 사도들이나 일반인들이나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늘 하던 대로 돈만 구걸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영혼의 갈증으로 허덕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름철에 시원한 생수와 같이 것을 찾습니다. 세상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성도들에게도 갈증이 나긴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광야와 같은 세상에 오아시스와 같은 것을 찾아 헤맵니다. 하지만 모래 날리는 사막일 뿐이지 진정한 생수는 주지 못합니다. 순간적으로 채워줄지 모르지만, 또 다시 갈증이 나게 합니다. 궁극적인 것으로 채워주면 갈증 나지 않을 것입니다. 육신적이고 일시적으로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관심을 세상적인 것에서 점점 영적인 것으로 돌리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⑵ 인생에게 필요한 것(6-8)

6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7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6-8)

① 영적으로 줄 수 없는 것

앉은뱅이 걸인의 기대와는 다르게 사도들은 ‘은과 금은 내게 없다’고 말했습니다. 걸인은 절망했을 것입니다. 사도들이 줄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것은 금과 은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금과 은을 약속해 주신 분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육적으로 원하고 욕망하며 성취하고 싶은 것을 채워주신 분은 아닙니다. 그런 것을 채우려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도들이 꼭 필요한 것을 아시고 주시는 분이십니다. 바로 영원한 생명인 영생입니다.

사람들의 갈증은 지속해 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을 채우시는 분이 아니라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을 주길 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시는 것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을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2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3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한복음 4:13-14)

② 영적으로 줄 수 있는 것

사도 베드로가 ‘우리를 보라!’는 요구에, 앉은뱅이 걸인은 사도들을 주목해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분명한 어조로 그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명령했습니다.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앉은뱅이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났습니다. 기적은 은과 금으로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하루하루 목숨을 연명하는 길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수단일 뿐입니다.

사도들은 ‘은과 금’으로 만족을 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은과 금은 내게 없다’라며, 오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은과 금이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도들은 재물을 가진 부자가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은 경제적으로 곤궁한 생활을 했으나 영적으로는 부자였습니다. 그들은 풍족하게 만든 것은 세상의 물질이나 명예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은과 금은 없었지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조금 더 넉넉한 소유를 가진 것이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행복은 인생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이 길만이 인간다움을 회복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그것을 가르쳐 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에 은과 금이 있어도 할 수 없는 것을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에 은과 금이 없어도 그것을 가진 사람들보다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③ 믿을 추구한 베드로

사도 베드로의 사역을 잘 살펴봐야 합니다. 그는 앉은뱅이 걸인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일어나게 만든 것’이 아니라, ‘일어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걸인의 믿음을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걸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걸인의 내적으로 무슨 변화가 일어났는지 모릅니다. 베드로의 인도에 따라 걸인이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 일으켜 세웠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제 기능을 못했던 발과 발목에 힘이 들어갔습니다. 일어나 서서 뛰었습니다. 처음으로 걸어본 것입니다. 지금까지 집과 성전 미문 앞 두 곳이었는데, 이제는 가고 싶으면 어디든지 갈 수 있었습니다. 다른 세상이 걸인에게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가 영적인 지도자에게 예수님 대신 다른 것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한 요구 때문에 어리석인 지도자들은 예수님보다 세상적인 것을 채워주려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곳에서부터 교회들이 변질된 세속화 문화 속으로 빠져 들어간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변질된 교회는 은과 금은 많이 있지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가 없습니다. 은과 금으로 변화시키려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⑶ 변화된 인생(8b)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8b)

앉은뱅이의 치유는 다른 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당사자인 본인은 얼마나 더 놀라운 일이겠습니까! 그래서 앉은뱅이의 치유된 기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어둡던 삶이 변하여 정상적인 삶으로 변화 되었습니다. 주님은 앉은뱅이를 완전하게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제 앉은뱅이는 걸을 수 있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 동안 장애인이라는 조건 때문에 성전은 금단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 없었는데, 이제 일반인들처럼 성전으로 함께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주변 사람들 앞에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자신의 변화를 찬송했습니다. 평생 동안 앉은뱅이로 성전 근처에서 걸인으로 멍든 인생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변화된 그는 성전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찬양하며 예배하는 삶으로 변화 되었습니다. 변화된 삶을 통해 그는 하나님께 찬양을 돌렸습니다.

그는 단지 치유된 것뿐만 아니라 참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어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걷고 있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기저기 걸어도 보고 뛰어도 보았습니다. 그가 기뻐 찬송하는 자체가 복음 선포였고, 진리를 증명하는 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습관적인 성전 출입과 감흥도 없던 형식적인 예배일지 모르지만, 앉은뱅이에게는 간절히 바라고 원하던 것이었습니다. 앉은뱅이는 성전의 지도자들도 모르는 참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변화는 육체적인 변화만이 아니라 영적인 변화로 이어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죄까지도 용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죄인을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일을 목격한 사람들(9-10)

세상에는 예수님에 대해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단지 병을 고쳐 주는 분이나 이 세상에서 삶을 윤택해 주시는 분으로만 이해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이런 사역만 하려 오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온전하게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구원자이십니다. 우리들은 이 세상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하게 전해야 합니다.

 

9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10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9-10)

 

예수님의 부활 다음으로 또 놀라운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예수님만 제거하면 끝나버릴 것 같은 일이 여기저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나타나 버린 것입니다. 평생 동안 걷지 못하고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던 걸인이 치유되었습니다. 그는 성전으로 들어가서 감사하며 찬양하면서 뛰었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예루살렘 사람들은 매우 놀랐습니다.

그래서 기적 이면의 의미를 깨닫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앉은뱅이 치유 사건은 눈에 보이는 기적뿐만 아니라 이면에 예수 그리스도 부활의 능력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은 예수님의 죽음이나 승천으로 끝나버린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사도들을 통해 전달되어짐을 보여줍니다. 기적의 주체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는 또한 구원자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사도들을 통해 그대로 전달되었고, 지금도 우리에게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확실히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능력으로 담대하게 선포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 당신이 붙잡아 일으켜 주어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에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명령하시길 바랍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은과 금으로 넘치는 삶을 원합니다. 교회들은 화려한 예배당 건물과 세련된 예배 형식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으려고 합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변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금이나 은 같은 재산은 없을지라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로 기뻐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늘진 상처를 만져 줄 때,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 때부터 세상은 성도들이 전하는 말을 믿기 시작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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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02-04)


능력 있는 아름다운 초대교회

사도행전 2장 37-47절


과테말라에는 인구 2만명의 알모롱가(Almolonga)라는 작은 도시가 있습니다. 이 도시는 범죄율이 매우 높았고 길거리에는 마약과 알코올 중독자가 넘쳤고, 그리고 우상숭배도 심했습니다. 하지만, 언제부터가 범죄율이 급격히 감소했고 중독자들도 거의 사라져 가고, 많은 가정이 회복되었습니다. 심지어는 언제부터인가 토양까지도 비옥해졌습니다. 그와 같은 변화에는 1974년부터 목숨을 걸고 기도하며 복음 사역을 시작한 마리아노 목사(알모롱가 갈보리교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협박과 생명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치열한 영적 전쟁을 벌였습니다. 이처럼 목숨을 건 치열한 영적 전쟁을 통해, 그 도시는 하나님의 강력한 역사를 경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알모롱가는 말 그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으로 변했습니다. 영적인 개인의 변화는 교회 공동체의 변화를 일으킵니다. 교회의 변화는 그 교회가 속한 지역 사회를 변화시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이후 베드로의 설교는 많은 사람들을 변화시켰습니다. 그 메시지로 변화된 사람들은 3,000명이며,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이 일로 초대교회는 불같이 부흥했습니다. 그리고 사역에 큰 힘을 얻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사도들을 중심으로 능력 있는 아름다운 교회 공동체를 이루어 갔습니다.

 

사람들의 반응(37-41)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듣는 사람들에게 반응을 일으킵니다. 말씀은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켜갑니다. 오순절 이후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예루살렘 사람들도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37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8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39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40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41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37-41)

 

오순절에 예루살렘 다락방에 모인 성도들에게 성령이 임재 하였습니다. 모든 성도들은 성령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또한 충만해져 오순절을 위해 예루살렘에 모인 유대인들에게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 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가이사의 복음이 아니라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었습니다. 유대인만의 복음이 아니라 만민을 위한 복음이 선포되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사람들을 향해 앞 강에서 보았던 것처럼 이렇게 외쳤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고 하는 약속을 성취하길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를 죽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나라와 왕이 아니라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나라와 왕을 거절했습니다. 그 순간 오직 하나님만 믿는다고 했던 사람들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고 가장 큰 대적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열심히 경배하고 찬미한 하나님은, 그들을 새롭게 창조하시고 구속하실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들이 고안해낸 우상에 불과 했다는 사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모두 들어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신앙의 깊이나 열정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에 대한 방향의 문제였습니다.

 

⑴ 예루살렘 사람들의 반응(37)

사도 베드로가 설교를 통해 예루살렘에 모든 사람들에게 강력하게 말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사람들에게 회개와 죄 사함을 호소하였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베드로의 메시지를 진리로 받아들이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분수령에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반응은 성경이 말하는 회심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들은 마음이 찔렸습니다. 이처럼 말씀은 마음을 찌르고 쪼갭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히브리서 4:12). 메시지를 통해 마음이 찔림을 받을 때, 할 일은 회개할 일입니다. 말씀을 통해 마음이 찔림을 받을 때 망설이지 말고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하지 않는 죄인’은 심판대 앞에서 주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회개는 죄인을 의인되게 만드는 필수적인 과정입니다. 예루살렘에 오순절 이후 3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되는 것의 중요한 원동력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유대인들에게는 듣는 귀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너희가 예수를 죽였다.’는 말에, 대부분 예루살렘에 없었기 때문에 얼마든지 변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가 잘 죽었다.’고 생각했고, 아무 저항 없이 허망하게 죽은 것을 보니, 율법에 저주를 받은 자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베드로의 메시지를 들으면서 자신들이 예수를 죽인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신들도 그 예수님의 처형 자리에 있었다면, ‘예수를 못 박으라!’고 소리쳤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찔렸습니다.

성령께서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임하셨습니다. 그들은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물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큰 죄를 어떻게 씻을 수 있을까?’라고 묻습니다. 가룟 유다도 마음에 찔렸지만, 그는 결국 자살을 선택했습니다. 가책을 받은 사람들은 베드로에게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물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메시지에는 반드시 반응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런 반응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의 선포에 반응하던 사람들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세례 요한이 회개를 외쳤습니다.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9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누가복음 3:7-10)

세례 요한의 메시지를 들었던 사람들도 찔림의 반응이 일어났었습니다. 무리들이 세례 요한에게 묻습니다.

 

무리가 물어 이르되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눅 3:10)

 

세례 요한은 회개하려는 요단강에 나온 그들에게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삶을 아름답게 살라고 권고했습니다. 아마 대부분의 세례에 참여한 사람들은 삶에 변화가 일어났을 것입니다.

 

(2) 사도 베드로의 권고(38-40)

사도 베드로도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들에게 영적인 권고합니다. 베드로는 진정한 회심이 무엇인지를 잘 설명해 줍니다. 회심은 ‘회개(悔改)’는 어디로부터 돌아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바른 삶으로 어딘가를 향해 가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회개는 성도의 과거를 다룬다면, 삶은 성도의 미래를 다룹니다. 진정한 회개는 두 가지가 떨 수 없습니다. 회개에 대한 구체적인 적용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미를 답고 있습니다. 평생 동안 성경 연구에만 힘썼던 유진 피터슨(Eugene H. Peterson)은 이 말씀을 다음과 같이 번역했습니다.

이 병들고 무감각한 문화에서 빠져나오십시오! 여러분이 할 수 있을 때에 어서 나오십시오!(Get out while you can; get out of this sick and stupid culture!)(40/Eugene 譯)

① 회개하는 것(38a)

‘회개’는 잘못된 방법으로 살아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신앙의 깊이와 열정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방향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잘못된 방향에서 바른 방향을 전환한 것입니다. 그 동안 하나님께 대한 모든 죄를 돌이키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촉구했습니다.

② 성령으로 사는 삶(38b)

‘회개’는 세상으로부터 돌아섰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가는 삶이 필요합니다. 잘못된 방향을 고쳐서 바른 방향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 동안 잘못된 방향이 바른 것처럼 살아왔던 것을, 더 이상 나아가지 말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③ 회개하는 영역(39-40)

사도 베드로는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혈통적인 선민주의가 얼마나 하나님 나라의 장애물이었으며, 폭격이었음을 회개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감히 인간이 훼손하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 모신 것이 진정한 회심이고 예배입니다. 베드로는 사도행전에 기록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설교로 그들을 권고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회심에 대해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고 권고합니다. 이것은 바로 회심을 하나님의 입장에서 다시 표현한 것입니다. 회개하고 성령을 받으라고 권고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당대 유대인들 만에 축복도 아닙니다. 이 약속은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모든 사람, 모든 세대 그리고 모든 지역에 필요한 사역이었습니다. 죄된 종의 삶으로부터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는 삶으로 돌아서는 것이 곧 구원입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천국 피켓을 얻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패역한 세대가 모든 영역에서 자신의 세계관을 주입하고 있습니다.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과거의 하나님을 떠난 모든 세계관으로부터 돌아서는 것이고, 새로운 하나님의 세계관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⑶ 예루살렘의 회개(41)

사도 베드로는 거절당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도록 결단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회개하기 위해서는 쉽고 간단한 싸구려 신앙고백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믿는다고 대충 입술의 고백이나 허술한 영접 기도 같은 것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가 전한 회개의 메시지를 들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앙 방법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의 메시지를 받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그 증표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를 받겠다는 사람들이 쇄도했습니다. 폭발적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일어났습니다. 다음 영적으로 무감각한 문화에서 빠져 나왔습니다. 그들의 삶은 놀랍게 변화되었습니다. 생활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오늘날도 메신저의 설교를 들으면서 반응이 나타납니다. 대체적으로 두 가지 반응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긍정적으로 흡족함을 느끼는 것과 다음으로 부정적으로 마음에 찔림을 받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삶이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지 않음으로 말씀을 통해 찔림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는 초대교회처럼 말씀대로 살길 원해 ‘내가 어찌할꼬?’하는 회개하고 돌아서야 할 것입니다.

 

균형 잡힌 교회(41-42)

폭팔적인 부흥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믿는 사람들이 변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세상에게 수치를 당할 만큼 어려워졌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탐욕을 위해 기독교가 동원되고, 교회가 이익 단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개인들이 말씀을 통해 회개하면, 다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부흥입니다. 베드로의 메시지를 통한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의 회개는 예루살렘 교회에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41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42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41-42)

 

사도 베드로의 메시지를 들은 예루살렘 사람들은, 말씀이 마음을 찔렀습니다. 그들은 베드로의 메시지를 통해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본 41-42절은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온 삶에 대해 요약한 구절입니다.

세례를 받은 사람들의 변화된 삶이 네 가지로 나타납니다. 첫째, 회심하고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먼저 사도들에게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가르친 내용은 예수님의 교훈, 행적,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에 대해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과 메시아이시고 그리스도이심을 들었습니다(사도행전 4:18, 5:28-31, 9:20-22). 둘째는 받은 말씀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과 서로 사랑하며 교제하게 됩니다. 여기서 교제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성도들의 영적 연합을 의미합니다. 더 나가서 다른 모든 사람들을 긍휼이 여기는 삶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소유를 팔아 궁핍한 자를 구제하는 일을 포함한 실천적인 교제까지 나누었습니다(사도행전 2:44-45, 4:32-37). 셋째로, 회심한 사람들은 서로 떡을 떼었습니다. 그래서 식탁의 친교를 나누었습니다. 오늘날도 이스라엘 유대인들은 자신과 동일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같은 식탁에서 밥을 먹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떡이란 단어에 ‘그 떡(τη κλασει)’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보아서 ‘주의 만찬’으로 의미한다고 보아야 합니다(사도행전 10:41, 누가복음 24:35). 마지막으로 그러한 변화된 삶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들은 오로지 기도에 힘썼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직전에 예수님의 사도들과 제자들 그리고 여성들이 기도에 힘을 썼습니다(사도행전 1:14).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 생겨난 새로운 공동체도 마찬가지로 기도에 힘을 썼습니다. 이러한 전반적인 변화의 삶은 아름다운 교회 생활로 나타납니다.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모이기에 힘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배와 기도와 말씀 생활 그리고 친교와 봉사에 균형을 이뤘습니다. 개인이나 교회 모두 신앙의 균형 감각이 필요합니다. 기도만 하고 말씀을 멀리하거나 그 반대로 말씀만 보고 기도하지 않는다면 안 됩니다. 그들은 어느 한 쪽으로 치우지지 않았습니다. 모여서 열심히 예배하면서 봉사하지 않는 것도 잘못입니다. 봉사는 하면서도 예배가 소홀하면 안 됩니다. 사람들도 영양소가 풍부한 음식을 골고루 먹어야 건강을 잃지 않습니다. 한쪽만 집중적으로 먹으면 ‘편식(偏食)’이라고 합니다. 편식하는 사람들은 영양결핍을 느낍니다. 항상 균형이 중요합니다. 영적인 부분에서도 같습니다.

영적으로 우리 교회들도 균형 잡힌 신앙 공동체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지금 한국 교회가 필요한 것은 균형 잡힌 조화로운 아름다운 신앙입니다.

 

칭찬 받고 부흥하는 교회(43-47)

참된 변화는 놀라운 부흥을 가져옵니다. 초대교회의 이런 영적인 균형은 결과적으로 교회의 부흥을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변화된 사람들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44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46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43-47)

 

변화된 예루살렘 성도들은 모든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변화가 개인적인 변화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의 변화는 초대교회의 신앙공동체의 변화를 이루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회심은 새로운 가족과 하나님의 공동체를 낳았습니다. 그래서 변화는 새로운 교회를 출산하게 된 것입니다. 사도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님의 사역을 계속 이어갔습니다.

변화는 이 하나님의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 일어났고, 그 교회를 통해 일어났습니다. 이 공동체의 나타난 현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각자의 소유를 공유하고 또 팔아서 궁핍한 사람들을 구제했습니다. 이런 일이 초대교회만 있었던 일은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성령이 임재 하는 곳이나 성령 임재가 강력하게 임했던 시대에는 비슷하게 일어났습니다. 다음으로, 그들은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아마 그 장소는 솔로몬 행각일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 장소는 예수님이 공생애 말기에 자주 가셔서 가르치시며 논쟁했던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 또한 사도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이곳에 모였을 것입니다(5:20,25,42). 이러한 변화된 모습은 다른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구원 받는 사람이 날마다 더해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초대교회의 성장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한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세상의 비난과 공격 앞에 직면해 있습니다. 물론 그 비판과 공격이 지나치거나 사실과 다른 것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 우리는 우리의 잘못에 대한 자책이 필요합니다. 한국 교회와 성도들이 사회로부터 칭송을 받고 그로 인해 복음이 널리 확산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패악한 세대에서 돌아섰고,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아들에게로 이동한 사람입니다. 이제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변화를 이루어가야 합니다.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좋은 성도가 될 때, 그 좋은 성도들을 통해 좋은 교회를 세워갈 수 있습니다. 좋은 교회를 찾아다니십니까? 당신은 좋은 교회의 일원인비다. 당신을 통해 좋은 교회가 만들어져 가는 것입니다. 가정과 교회 그리고 지역 사회가 당신 때문에 변화가 일어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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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02-03)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

사도행전 2장 22-36절


성령님은 오순절에 사모하고 기다린 무리들에게 임하셨습니다. 그들은 성령 임재에 대한 엄청난 영적인 경험을 했습니다. 성령님과의 만남을 통해 성령의 언어인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예루살렘에는 유월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 천하 각국으로부터 온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성령을 받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이상하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현상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 조롱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성령의 임재를 비방하던 예루살렘 사람들 앞에서 말씀을 담대하게 전합니다. 그는 앞 단락에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에 대한 성격을 설명했습니다. 이어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의 원인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과 연관 지어서 설명합니다. 오순절 사건과 예수님의 사역 즉 복음(福音)과 무슨 연관성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사역과 죽음(22-23)

오늘 말씀의 내용은 베드로의 설교입니다. 오순절에 성령 충만함을 받은 베드로는 사람들 가운데 일어서서 선포한 것입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위대한 설교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와 감동이 되었습니다. 그 설교의 주제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23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22-23)

 

베드로가 사람들 앞에 할 말은 많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한 과거의 경험에 대해 많은 할 말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핵심은 ‘나사렛 예수’에 대해 선포합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만 이야기합니다. 그의 중심에는 명예나 직위 그리고 외모도 아닙니다. 오직 나사렛 예수였습니다. 그도 한 때는 이러한 세상적인 것에 관심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임재를 통해 변화되었습니다. 그의 삶의 주인이 자기 자신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변화되었습니다. 이렇게 변화된 베드로의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서 좋아하셨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성령 강림 사건을 비방했던 사람들에게 이 사건을 설명하면서 사건 설명으로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더 나가서 이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와 깊은 연관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앞에서 성령임재 사실을 새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요엘 선지자를 통한 예언 성취된 명백한 하나님의 사역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 말씀하신 후에 이제 예수님에 대해 설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보내신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에 충성스러웠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당시 사람들은 소식을 들어서든지 직접 볼 수 있었던지 모두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이용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였다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당시 사람을 사형시킬 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이방인인 로마 지도자들을 통해 사형일 집행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을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합작품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의 사역은 하나님의 정하신 뜻 가운데 이루어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성령 임재를 통한 베드로의 변화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었습니다. 이기주의적인 삶에서 이타주의적인 삶으로 변했습니다. 그의 자랑은 자신의 자격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24-32)

우리들이 다른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소개할 때 베드로의 사례를 들어서 중요한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어느 한 쪽만 강조할 수 없습니다. 장조점이 죽은 예수님을 실패한 예수님이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죽음이 없는 예수님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두 가지 사역을 어떻게 적절하게 풀어나가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25다윗이 그를 가리켜 이르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26그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혀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도 희망에 거하리니 27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28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셨으니 주 앞에서 내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므로 29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30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31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32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25-32)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해서 죽으심을 소개했습니다(23). 이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사건을 설명해 나갑니다. 중요한 것은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연합해서 예수님을 십자가 죽으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를 사명의 고통에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베드로는 이제 구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이 성경적인 일임을 증명 합니다. 그가 다윗을 통해 설명을 이끌어나간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로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슴에게 영적 중심에 자리가 있습니다. 그들은 다윗의 후손으로 메시아가 나올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이사야 11:10)

 

유대인들은 영화로운 메시아를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윗을 통해 설명해 나간 것입니다. 그 내용은 다윗이 오실 메시아를 기대하면서 즐거워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정작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에 가장 강력한 왕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다윗은 대단한 왕입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다윗과 같이 능력 있는 왕으로 임하실 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사도 베드로는 다윗이 기다린 메시아를 유대인들에게 집중합니다. 이러한 유대인들이 기다렸던 메시아가 예수 그리스도란 사실을 증명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16편 8-11절을 통해 다윗이 메시아를 기다렸던 장면을 소개합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9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10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11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편 16:8-11)

 

베드로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들은 다윗이 그리스도를 기다리면서 느꼈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다윗은 항상 자신 앞에 계신 주님을 모시고 살았습니다(25). 주님을 마음으로 기뻐했고 입술로 찬양했습니다(26). 육체도 희망에 거할 것이라 했습니다. 주님이 보여 주시는 생명의 길로 인해 기쁨이 충만했습니다(28).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주님으로 모시고 사는 모든 사람에게 이런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이처럼 메시아를 기다리던 다윗은 정작 죽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다윗의 묘에 장사되어 있습니다. 그 당시까지 그리고 지금까지 예루살렘에 다윗의 묘가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이기고 3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만큼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보다 우월하신 분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증명은 정말 방법을 선택하였습니다. 예수님만이 구세주인 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는 구약의 말씀과 자신의 경험 그리고 예수님의 사건을 연결시켜서 정확하게 증명합니다. 예수님은 메시아입니다.

 

예수님의 승천(33-36)

본문을 읽고 있으면 베드로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로 가득 차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가득찬 사람들은 만지기만 하면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게 되어 있었습니다.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승천하신 사건까지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34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이르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35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36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33-36)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하심으로 주님이시고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하였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사신 것뿐만 아니라 부활 후에 승천하신 것을 설명합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다윗과 비교합니다. 단순한 비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증명합니다. 다윗의 시인 시편 110편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시편 110:1)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기뻐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후손이지만 ‘주’라고 불렀습니다. 당시에 다윗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윗을 왕으로 높였습니다. 이처럼 믿음의 조상인 다윗도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경배하였는데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더 증명합니다. 믿음의 조상인 다윗은 살아서 하늘나라에 올라가지 못했다고 소개합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셔서 하늘나라로 올라가셨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베드로의 말을 듣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마음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는 갈릴리의 어부였습니다. 정규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았던 무식하고 비겁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예전의 베드로가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그에게 임하셨을 때, 성령 충만해져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으로 가득찬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사람들에게 분명히 밝혀 주었습니다. 이러한 능력은 성령님께서 제공해주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베드로는 예루살렘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간단하면서도 명료하게 메시아에 대해 설명하였습니다. 이렇게 설명한 이유는 이제는 그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영접해야 한다고 촉구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 메시아입니다. 그분을 영접하시길 바랍니다.

 


오순절 성령 감림 사건은 하나님의 사람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비겁함에서 담대하게 변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확실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즉 죄인들을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것을 증명했습니다. 이를 통해 많은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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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02-02)

 


성령 임재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

사도행전 2장 14-21절


교회를 출석하는 성도들이 자주 사용하는 단어 중 하나가 ‘성령 충만’이란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세상에서는 들어볼 수 없는 단어입니다. 하지만, 성도라면, 성령 충만하게 살아가길 원합니다. 대부분 성도로서 ‘성령 충만’으로 행복한 신앙생활과 충성스러운 봉사를 하면서 살아가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성령 충만하길 위해 기도하면, 막상 무엇이 ‘성령 충만’인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성령 충만’이란 무엇입니까? ‘충만’은 원어적으로 물질이 ‘가득히 넘친다.’라는 의미보다 ‘돛단배를 잘 달리도록 하는 바람’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은 이상스런 체험적인 현상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함을 받아 순종하는 신앙이란 뜻입니다. 본문에서는 그것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오순절 성령임재로 변화된 성도들을 향해 조롱하는 사람들에게 오순절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예루살렘 사람들 중에는 성령 임재의 모습을 ‘새 술에 취했다.’고 비방했습니다. 베드로는 그들에게 새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하신 대로 이루어진 사건임을 설명합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성령 충만과 성도 인도하심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변화로 이끌어 가신 성령(14-15)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 변화는 사람이 사람다워진다는 뜻입니다. 피조물이 피조물의 자리를 지키고, 창조주를 인정하며, 그분의 마음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분이 만들고 싶어하는 나라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성령께서 임재하심으로 삶 속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14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15때가 제삼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14-15)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는 말씀을 하신 후, 성도들은 다락방에서 기도하며 기다렸습니다. 기다린 성도들에게 약속을 따라 성령이 임했습니다. 성령 임재를 통해 제자들에게서 각 나라의 언어로 말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큰 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과 하나님 나라의 소식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⑴ 조롱 받은 제자들

두 달 전부터 예수님의 사건 때문에 예루살렘은 소란스러웠습니다. 더욱 예수님의 부활은 예루살렘과 인근 주변에 놀라운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설왕설래(說往說來)하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변화되어 담대해졌던 것입니다. 죽으면 죽이리라는 각오로 변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건은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예수님 사건 다음으로 놀라운 일들이었습니다.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임재하신 사역이었기에,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 사실 때문에 제자들을 사람들에게 조롱당했습니다. 예전에는 제자들도 그들과 비슷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제자들은 완전히 변했습니다. 놀랄 정도로 변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어서, ‘새 술에 취했다.’고 조롱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변화된 사람들만이 다른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⑵ 변화된 제자들(14a)

성령 임재를 경험한 제자들은 옛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에 풀죽어 낙심하고, 목숨 부지하려고 도망 다니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메시아에 대한 기대가 잘못 되었고, 예수님을 오해 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을 새롭게 만났고, 구약에 소개된 메시아에 대한 말씀을 예수님 때문에 바르게 해석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모든 약속이 파괴된 것이 아니라 완전히 성취되었음을 알았습니다. 자신들을 낙심하게 했던 예수님의 죽음 사건이, 사실은 구원을 이루시는 가장 결정적이고 필연적인 사건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알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보았고, 직접 부활하신 예수님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예수의 영, 그리스도의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두려워하거나 세상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사시지 않고, 오직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만 사신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사는 존재로 변한 것입니다.

 

⑶ 베드로의 변호(14b-15)

사도 베드로는 다른 사도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에 있던 많은 사람들 앞에서 담대하게 외쳤습니다. 혼자만이 아닌 성령 충만한 열 한 제자들과 120명의 제자들이 베드로와 함께 서 있었습니다. 두려워서 도망하던 유대인의 무리들 앞에 당당하게 서 있었습니다. 조롱한 사람들에게 성도들이 하는 각 나라의 언어는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증언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보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하신 일을 분명하게 알려 주는 것이 제자들의 역할입니다.

이 설교는 베드로가 전한 전문이 아니라 요약하여 수록하고 있습니다. 제자들 중에서 처음으로 전한 유명한 설교입니다. 베드로가 얼마나 성령으로 변화되었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 변화는 단순한 변화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주신 약속된 사건임을 증명해 줍니다. 베드로의 설교 전문이 문자적으로 여기에 모두 그대로 기록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매우 이성적으로 메시지를 시작합니다. 일반적으로 술 취한 사람들은 술을 오후에 마시기 시작해서 저녁에 취해 돌아다닙니다. 오전에는 술 취해 돌아다닌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정신이 가장 밝을 때입니다. 그러면서 유대 시간으로 3시(현재 오전 9시)부터 술에 취해 다닌 사람들이 어디에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이런 시간에 술을 운운하는 사람들이 더 이상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도 알코올 중독자가 아닌 이상 일반적인 사람들은 오전 9시부터 술에 취해 돌아다닌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풍습에는 오전 9시에는 음식을 금하고 아침 기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는 ‘당신들의 말은 스스로 모순이 있다.’는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말도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거짓 경건은 이성적인 판단까지도 흐려 놓습니다.

성령 임재하심으로 또 다른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 스스로 놀라게 했습니다. 성령 임재 전에는 예수님이 재판 받는 빌라도의 뜰에서, 여종에게도 두려워 떨던 모습이, 이제 성령 임재하신 후에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해졌습니다. 이 변화는 성령 임재를 통해서 생사화복을 주장하신 분은 하나님이심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베드로와 제자들은 담대해졌고 숨어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있던 많은 사람들 앞에 서서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변화가 특징입니다. 타락한 상태인 자연적인 인간은 파괴적인 현상입니다. 감사할 것들도 많은데, 감사하지 않고 불평을 토로(吐露)합니다. 사도 바울은 타락한 인간들의 특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28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로마서 1:29-31)

 

하지만 성령 임재를 통해서 아름답게 창조하신 형상으로 변화됩니다. 그래서 삶이 변합니다. 그들은 자신을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아서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화목하게 했습니다(로마서 5:10). 그래서 성도들은 다툼이 있는 곳에서 화평케 하는 일을 합니다. 복음에 대해 전하길 주저하던 성도들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합니다.

죄악에 머물던 사람들이 결단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갑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도 삶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이상한 것입니다. 삶의 아름다운 변화들이 일어나길 바랍니다.

 

말씀대로 이루시는 하나님(16-18)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변화가 일어난다고 소개했습니다. 그 변화가 성경적으로나 일상적으로 증명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변화가 하나님의 사역임을 공감대를 얻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제자로서 더욱 힘차게 사역해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16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17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18그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16-18)

 

성령 임재를 술 취한 사람의 주정이라고 조롱하는 사람들을 향해, 이제 성경적으로 증명합니다. 구약 선지자 요엘에 의해 예언된 사실을 들어서 반박합니다. 지금 일어난 현상은 하나님의 역사인데, 이것을 조롱하는 것은 하나님을 조롱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29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30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31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32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요엘 2:28-32)

 

사도 베드로가 요엘의 예언을 인용해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설명한 이유는 구약에 익숙한 유대인들이 요엘의 예언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예언을 근거로 설교함으로써 성령 강림 사건을 쉽게 이해하도록 도와주고, 더 이상 그 사건에 대해 비난하거나 조롱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성령께서 임재함으로 일어나는 현상을 보아야 합니다. 모든 인류는 죄로 인해 하나님과 관계가 파괴 되어 멸망당할 육체였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심으로 그 관계와 신분이 회복되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이 멸망당할 죄인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들에게 놀라운 일들을 보여주시기 시작했습니다. 장차 이루어질 일들을 보여 주시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러한 요엘의 예언이 성령 강림으로 성취되어서 누구든지 영적인 일들을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하나님의 놀라운 비밀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녀들은 예언을 하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며, 늙은이들은 꿈을 꾼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현상을 보고도 비방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비방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이러한 역사를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당신은 성령 임재로 인해 꿈과 비전을 품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임재 이후에 당신의 삶에 가장 큰 변화는 무엇입니까? 세상 사람들에 변화를 보여줄 수 있는 성도가 되길 바랍니다.

 

장차 구원을 받을 사람(19-21)

베드로는 나타나는 현상만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구원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구원은 단 일회로 끝나지 않습니다. 구원은 항상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가는 사역입니다. 현재에도 계속 이루어져 가는 현재진행형이며 미래에도 진행할 미래진행형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들에게 구원의 기회에 대해 설명합니다.

 

19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20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21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19-21)

 

사도 베드로는 장차 이루어 가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대해 성경을 통해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임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은 비방하던 사람들이 지금까지는 바르게 알지 못했지만, 이제부터 장차 이루어질 일들을 보면서 구원의 기회를 놓치지 말고 잡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한 적용 원리 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심판이 하늘에서부터 땅에 이르기까지 전 우주적으로 일어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말세가 언제 시작되었는지 가늠할 수 있는 단서를 주고 있습니다.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20)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날에 일어났던 현상과 유사합니다. 그래서 말세가 예수님께서 죽임 당하신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참조 누가복음 23:44-45). 이러한 전반적인 현상을 살펴보면서 베드로는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20)라고 말씀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아직 기회가 있을 때 영접하라는 권고입니다. 성령 강림 사건은 베드로를 통해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에 이루어질 심판에 대해 언급하였습니다. 모든 시대에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방법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마지막 환난의 날이 임박하면 사람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나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이 있으므로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주로 고백한 우리는 그 두려운 심판에서 제외되는 은혜를 누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은혜에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전해야 합니다.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의 날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염두해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날이 아직 멀었다는 안일한 생각으로 살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불신자들은 기회 있을 때, 예수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믿는 사람들은 기회 있을 때, 성령 충만함을 받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충성해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가 우리에게도 있길 원합니다. 과거에는 체면과 이기심 때문에 죽어가는 영혼을 외면했지만 이제 성령 충만함으로 베드로처럼 담대하게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이제 성령 충만으로 죄에서 벗어나기를 원합니다. 베드로처럼 많은 사람들 앞에서도 증거할 수 있어야 하겠지만, 당신 곁에 다가온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담대하게 증거해야 합니다. 이제 성령의 능력을 간절히 구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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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02-01)


성령 임재로 세워진 교회

사도행전 2장 1-13절


약속(約束)은 사람이 사는 세상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어렸을 때는 엄마와 새끼손가락을 걸면서, 친구들과 변치 말고 약속한 아름다움도 있습니다. 작은 약속은 개인과 개인과의 거래약속도 있지만, 국가와 국가와의 약속인 조약(條約)이라고 합니다. 어느 때는 개인적으로 한 생명이 좌우될 때도 있지만, 국가적으로는 국가의 운명이 좌우할 때도 있습니다. 약속 때문에 싸움과 전쟁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약속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에게 구원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 약속을 통해 우리는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갈 수 있습니다.

 

본문에는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약속하신대로 성도들은 성령이 오실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성령께서 다락방에 오셨습니다. 첫 열매가 될 하나님의 성도들이 모여서 기도하는 곳에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마지막 때에 영적 열매를 거두기 위하여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서 사역하심으로 계속적으로 교회가 세워졌고, 성장해 나가게 되었습니다.

 

오순절에 오신 성령(1-4)

성령의 가정이 될 때, 그곳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십니다. 성령의 교회가 될 때, 그곳에 주님이 계십니다. 유명한 목사나 거대한 건물이나 많은 무리가 있는 곳이 아니라 성령께서 자유롭게 역사하실 수 있는 심령을 가진 심령들이 있는 곳에 주님을 기쁘게 거하시고 영광 중에 머무르십니다. 하나님께서 오순절 사건을 통해 새로운 성전을 이루어 가고 계십니다.

 

1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1-4)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령대로 예루살렘의 한 다락방에 모였습니다. 다락방에 있던 제자들은 가룟 유다를 대신할 맛디아를 새로운 사도로 뽑았습니다. 비로소 이스라엘의 12지파를 대신할 12사도가 준비되었습니다.

계속 예루살렘 다락방에 있던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약속하신 성령 임재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오순절 날이 이르매, 약속대로 다락방에 모인 사람들에게 각자 성령이 임하기 시작했습니다.

 

⑴ 오순절의 의미(1)

오순절에 성령이 임했는데, 많은 날 중에 성령께서 오순절에 임하였는지 의미가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잠시 오순절(五旬節, Pentecost)에 대해 살피고 가야겠습니다.

오순절은 모세오경에서 유대인의 중요한 세 가지 절기 중 하나입니다. 오순절은 유대인들이 유월절 이후 50일째 되는 날입니다. 이 시기는 겨울을 지내고 보리나 밀과 같은 맥류들을 추수를 마친 시기입니다. 그래서 오순절을 맥추절(출애굽기 23:16), 칠칠절(출애굽기 34:22) 또는 처음 익은 열매를 드리는 날(민수기 28:26)로 불렸습니다. 유월절은 종 되었던 애굽의 땅에서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축제라면, 오순절은 약속의 땅을 소유한 것을 기념하는 축제 절기입니다. 따라서 오순절 축제는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축제입니다. 오순절은 곳곳에 사는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서 즐거운 축제를 드린 날입니다.

오순절은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 계명을 받는 사건과 닮았습니다. 하늘에서 나는 소리와 불의 혀는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임하신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그래서 소리와 불과 사람들이 알아들을 말은 시내산에 있었던 특징들입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언약식이 있었듯이, 신약의 다락방에 성령이 임재하심으로 새로운 언약식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신약 교회가 탄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 시대에 오순절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주신 것에 축하하는 날입니다. 기독교적 오순절은 유대인의 날자 계산을 무시하고, 항상 부활절을 기준으로 오순절을 계산하여 주일에 지키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오순절 성령강림주일을 지키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주일에 있었다는 날짜와 일치하는 것입니다.

 

⑵ 오순절 성령임재(2-3)

다락방의 120명의 성도들은 예수님의 약속인 성령 강림을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성령께서 임재한 모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먼저 성령의 임재한 모습에 “홀연히”라고 설명합니다. 그들이 사모하는 시간이 아니라 생각지 않은 시간에 갑자기 임했습니다. 성령의 임재는 모든 사람들이 귀로 들을 수 있고, 눈으로 볼 수 있게 임하셨습니다. 먼저 하늘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처럼, 하늘로부터 강한 소리가 온 집에 임했습니다. 다음으로 성령의 임재의 모습은 불이 혀와 같이 갈라지면서 그곳에 있는 사람들 속으로 임하였습니다. 불처럼 임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의 모습(출애굽기 3:2)과 불로 정결케 하는 임재를 상징합니다(에스겔 1:13). 계시적인 하나님의 나타나심인 신현(神顯)으로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온 집에 가득하며”(2)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원래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성막과 성전에 임재 하셨을 때, 구름이 가득 찼던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성령께서 다락방 있는 120명의 성도들에게 가득 찼다는 의미는 성령이 충만한 성도들이 성전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제 하나님께 거하시는 성전은 건물이 아니고 성령이 충만한 성령의 공동체란 의미입니다. 성령으로 새롭게 창조된 피조물 안에 하나님께서는 즐거이 거하십니다. 말씀하실 때까지 기다리고 그의 뜻을 따라 살겠다는 열망하는 공동체를 하나님께서는 거처로 삼아서 주의 영광을 들어내실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3)라고 소개합니다. 성령은 누구에게는 필요하고, 누구에게는 필요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어떤 특정 사람들의 개인적인 소유물이 아닙니다. 모든 하나님의 성도들은 성령께서 임재하십니다. 성령이 없는 자는 죽은 자이고, 성령이 없는 자는 죽은 자입니다. 성령님은 성도라면 누구나 받을 수 있는 인격이십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주라 시인할 수 없습니다(고린도전서 12:3). 그 성령을 얼마나 의지하고 사느냐입니다. 성령의 임재를 통해 교회가 가족 같이 하나로 결속할 수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교회가 패쇄적이고 자기만족적인 집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요한의 물세례와 성령의 세례를 연관시킵니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하나님은 불로 세례를 주신 것입니다. 각 제자들에게 성령께서 불의 혀와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⑶ 성령 충만(4)

성령께서 임한 성도들은 성령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외적으로 성령 충만한 현상들이 자연스럽게 나타납니다. 자신들의 변화된 모습을 보고 스스로 놀랐을 것입니다.

성령 임재한 결과, 성령 충만한 성도들에게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강력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성령이 말하기 하심을 따라 각각 세상의 다른 언어로 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성도들이 말한 언어가 다른 사람들은 알아들을 수 없지만,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였습니다. 다른 나라의 언어를 구사한다는 것은 그 나라 사람이 되어가는 시작입니다. 이 언어를 가지고 다른 사람의 세계로 들어가란 의미입니다.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수용하라는 것입니다. 자신만 아는 언어로 자신의 지식을 과시하고 누군가를 소외시킨 사람은 성령의 사람이 아닙니다. 성령의 사람들은 누군가의 말을 문자적으로만 이해하지 않고 그 숨은 의미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다른 언어를 구사하게 하신 것은 성령이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유대 땅의 경계를 넘어 온 세상 땅 끝까지 전파될 것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성령을 통한 변화된 성도들은 눈에 보이지 않으신 성령을 세상 속으로 들러내는 중요한 장치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자신의 삶 속에 임한 성령의 능력을 당연히 들어내야 합니다. 성령의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른 가치관으로 말하고 전혀 다른 방식으로 말하는 자들입니다. 갈등과 분열, 파괴하는 언어가 아니라 세우고 고치고 붙들어 주는 언어를 사용한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의 놀라운 반응(5-11a)

구약 시대 하나님과의 언약식에는 이스라엘 백성들만 참석했지만, 신약 시대에는 많은 이방인들까지 참여하였습니다. 오순절 성령 임재는 새로운 언약식이었습니다. 새로운 언약식을 통해 전 세계로 복음이 뻗어 나갈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5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6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7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8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9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10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11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5-11a)

 

예루살렘 다락방에 있던 120명의 성도들이 각 나라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각자 자신이 깨달은 것을 자신이 구사할 수 있는 언어로 예루살렘에서 전했습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놀라운 광경을 목격합니다. 마침 예루살렘에는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세계 각 나라에서 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과 개종한 이방인들이 모였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살고 있는 지역의 언어로 말하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오순절에 모인 사람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공용어인 헬라어를 구사할 수 있었지만, 자기 나라에서는 자기 나라 언어를 사용했었습니다. 헬라어는 외국어였기 때문에 헬라어로 듣는 것보다 자기 나라 언어로 듣는다면, 훨씬 더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온 나그네들이 자기 나라 언어로 듣는 것은,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벨탑의 저주를 푸신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바벨탑 사건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하고 사람들이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해 한곳에 모이고 하늘까지 닫는 탑을 쌓은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셔서 온 세상으로 흩으셨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지려는 자들은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서로 소통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오순절에는 흩어져서 각 나라 언어로 말하는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성령께서 그들이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데도, 하나님께서 하신 큰 일을 하나 같이 듣게 하신 것입니다. 모두 하나님을 찬미하는 사람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바벨탑은 사람들이 하늘에 올라가려고 교만했지만, 오순절 사건은 하늘에서 땅으로 하나님의 영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언어를 사용하든지 성도들을 통해 각자 자신의 언어로 하나님의 크신 일들을 알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보혜사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그런 능력을 주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교만하여 바벨탑 사건으로 언어가 혼잡해 졌습니다(창세기 11:1-9). 그런데 오순절 사건은 하나님께서 언어를 통해 하나로 묶으신 놀라운 사건입니다. 죄로 파괴된 것을 회복시키는 사건입니다.

성령께서 예루살렘 다락방에 임함으로 새로운 언약이 체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백성들이 세워졌고, 새로운 나라인 하나님의 교회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원동력은 사람이 아니라, 바로 성령이십니다. 교회를 이끌어나가는 지도자들은 성령 충만해서 성령의 인도하신 방향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그럴 때, 교회는 원활해지고 교회 자체가 능력이 있습니다.

 

오순절 사건에 대한 반응(11b-13)

사람들은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상황만 받아들으려 합니다.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나타나게 되면, 크게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납니다. 그것은 받아들이는 긍정적인 반응과 받아들이지 않는 부정적인 반응으로 나누입니다. 당신은 어느 쪽을 선택하십니까?

 

11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12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13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11b-13)

 

오순절 사건을 통해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예루살렘 다락방에서 성령 임재를 체험한 성도들은 학문적으로 우수한 사람들이 아니지만, 그들은 세계 각 나라의 언어로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일반적인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많은 사람들은 신기하게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세계 각국에서 모인 사람들이, 자기 나라 언어로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며 당황했습니다. 특히 별 볼일 없던 갈릴리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보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긍정적인 반응과 부정적인 반응 두 가지로 나누어져 나타납니다. 먼저, 긍정적인 반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역임을 알고 찬양하는 반응이 나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큰 일 말함을 듣는 도다.’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의 차원에서는 설명할 수 없는 차원입니다. 그들은 어리둥절했습니다만,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편경에 사로잡혀 방언을 하는 사람들을 향해 새 술에 취했다고 조롱했습니다. 낮에 ‘새 술’에 취했다는 것은 패인에 가깝다는 의미로 매우 조롱하는 말입니다. 당시는 포도를 수확하기 전이기 때문에 ‘새 술’이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새 술’에 취했다는 것은 제자들에게 성령께서 이루신 역사를 조롱거리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성령께 붙들려 성령 충만한 사실을 마치 술 취한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었습니다.

진지하게 영적인 세계를 탐구하는 사람은 그렇게 반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정하는 것이 경건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상상할 수 없게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다른 사람의 성령의 역사나 능력을 어떤 자세로 받아들여야 하는 가를 가르쳐줍니다. 다른 사람의 변화를 무시하는 행위는 좋은 신앙의 태도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을 변화시키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 변화된 사람들에게 성령 충만할 수 있도록 중보해 주시길 바랍니다.

 


예루살렘 다락방에 있던 성도들은 여전히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오순절에 성령이 임재 함으로 그런 인간적인 조건은 더 이상 제약이 되지 않았습니다. 성령께서 임하시길 준비된 사람들은 더 이상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성전을 대신할 새로운 성전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언어와 영적인 안목을 얻어서 새로운 세계로 진입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성도들은 성령께서 다스리도록 내어드리고, 자기 의지가 아닌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거룩한 말과 행실로 세상을 다스리는 능력 있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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