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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88-01)


극심한 절망 중에 드리는 기도

시편 88편 1-18절


 

하루하루를 살아갈 때마다 즐겁고 기쁠 때도 있지만, 사실은 우리 중심에서부터 절망에 빠지게 되고 모든 상황 속에서 희망이 비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사실 우리에게 계속되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그 상황 속에 눌려서 그 늪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다가 모든 시간을 버릴 순 없습니다. 이때 다시 한번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기를 원합니다.

 

  • 본 시의 저자를 ‘에스라인 헤만의 마스길’이라고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인 헤만은 다음 세대들이 읽고 또 배워야 할 내용을 시로 작성하였습니다. 하지만 시의 내용은 극심한 고난을 당한 시인은 하나님께 주야로 울부짖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은 없고 시인의 기력은 쇠락해갑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간구하기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는 시인(1-2)

우리 인생 속에 자신이나 주변 사람들이 계속적으로 절망 속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봅니다. 이런 사람들을 아무리 도우려고 해도, 어려운 상황들이 있음을 보게 되고 그 상황 속에서 헤어 나오려고 하지만, 계속 그 절망 속에서 헤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하고 계심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1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야로 주 앞에서 부르짖었사오니 2나의 기도가 주 앞에 이르게 하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기울여 주소서(1-2)

 

시인은 고난을 당하여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내 구원의 하나님”이라 부르며 하나님만 그를 고난에서 건져줄 수 있는 분임을 고백합니다. 매우 절박하게 오직 하나님 앞에서 밤낮으로 울부짖습니다. 그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이르고 하나님께서 그의 부르짖음에 귀 기울이시기를 간청합니다(시 39:12; 102:1). 40편의 시인처럼 시인도 구원의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듣고 고난에서 구해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고난 중에 있는 시인(3-5)

어려운 일을 당할 때는 하나님에게서도 버림받고 도움이 끊어져 버린 것 같은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마치 소생할 힘이 없을 만큼 무기력하고, 죽은 채 방치된 자처럼 여겨집니다. 그의 침상은 무덤처럼 여겨집니다. 얼마나 극심한 고통이고 끊어지지 않는 아픔이든지 하나님을 부르짖는 힘조차 없을 때가 있습니다.

 

3무릇 나의 영혼에는 재난이 가득하며 나의 생명은 스올에 가까웠사오니 4나는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이 인정되고 힘없는 용사와 같으며 5죽은 자 중에 던져진 바 되었으며 죽임을 당하여 무덤에 누운 자 같으니이다 주께서 그들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시니 그들은 주의 손에서 끊어진 자니이다(3-5)

 

지난 이 극심하므로 시인은 죽음의 문턱에 이른 것(“나의 생명은 스올에 가까웠사오니”, 3)처럼 느낍니다. ‘재난’은 재앙, 화, 악, 병 등 괴로움과 고통을 가져다주는 일이나 사진을 가리킵니다. 시인은 그가 당한 재난이 어떤 것인지 언급하지는 않으나, 자기에게 재난이 가득하다고 한탄합니다. “재난이 가득하다”는 말은 배가 꽉차서 더 이상 음식을 먹을 수 없듯, 시인에게 괴로운 일이 충만하고 극심해서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3-5절까지 거듭거듭 자신이 죽은 자와 마찬가지라고 토로합니다. 그런데 시인의 이런 상황은 시인만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다 알려진 일이었습니다. 다른 사들조차 시인을 ‘무덤 구멍으로 내려가는 자’로 간주만큼 그의 고난과 고통스러운 처지는 외부적으로도 다 공개되었습니다. 그는 힘없는 용사같이 되어 자기 자신에게나 타인에게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 마치 죽어서 다 시체들 가운데 던져진 것처럼 되었습니다. 더구나 이 죽은 자들은 노쇠하거나 병약해서 죽은 자들이 아니라 칼이나 창에 찔리거나 구타당해 죽임을 당한 자들입니다. 4절의 “힘없는 용사”와 연결해서 보면, 시인이 힘도 못 쓰는 군인 같으므로 그는 자기에게 닥친 재난과 싸우지도 못한 채 무참히 공격당하고 죽임 당했음을 암시합니다. 그의 시체는 제대로 매장되지도 못하고 한곳에 쌓여 방치된 다른 병사의 시체 더미에 더해질 뿐입니다. 사람들도 이렇게 허망하고 비참하게 죽은 자들을 기억하지 않고 지나갈 터인데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그들에게 관심을 두시겠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기억에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서 끊어진 자, 즉 하나님의 도움과 능력의 손길을 제대로 받지도 못한 자들이 아닙니까? 시인도 그들 중 하나처럼 되었습니다.

 

시인을 향한 하나님의 화(6-8)

고통을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생각하는 것과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중 무엇이 더 위로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누군가는 어떻게든 하나님을 ‘고통을 주시는 분’으로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나쁜 일’에서 하나님을 보호하고 싶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분명 ‘모든 일’의 주관자가 되신다는 사실이고 그 모든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신다는 사실입니다.

 

6주께서 나를 깊은 웅덩이와 어둡고 음침한 곳에 두셨사오며 7주의 노가 나를 심히 누르시고 주의 모든 파도가 나를 괴롭게 하셨나이다 (셀라) 8주께서 내가 아는 자를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고 나를 그들에게 가증한 것이 되게 하셨사오니 나는 갇혀서 나갈 수 없게 되었나이다(6-8)

 

시인은 죽을 지경이 된 자신의 상황을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로 받아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웅덩이 맨 밑바닥, 어둡고 깊은 곳에 두셨으므로 시인은 한 치 앞도볼 수 없고 스스로 빠져나올 수도 없습니다. “웅덩이”, “어둡고 음침한 곳”(6)은 3-5절의 “재난”, “스올”, “무덤”과 같은 의미입니다. 죽음이 도사린 이런 곳에서 시인은 두려움과 절망을 느낍니다. 또한 하나님의 분노가 시인을 지탱하듯 누르고 하나님께서 많은 고통의 물결로 시인을 괴롭히시니, 시인은 숨 쉴 수도 없이 고통스럽습니다. 시인은 하나님한테서만이 아니라 사람들에게서도 배척당했습니다. 시인의 가까운 지인들은 그를 멀리 떠났고, 그뿐 아니라 그를 가증한 자로 여겼습니다. 시인은 8절 맨 마지막 문장을 제외한 6-8절의 모든 문장의 주어로 하나님을 칭하는 “주(당신)께서” 또는 “주(당신)의 노”를 사용하여 자신을 큰 시련 속에 몰아넣은 주체가 하나님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가장 깊고 어두운 곳에 갇혔고 나갈 수도 없습니다. 사람이 시인을 웅덩이에 빠뜨렸다면 하나님께 끌어내주시길 간청할 수 있고, 또 하나님께서 그를 능히 구조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께서 그를 웅덩이에 집어넣으셨으니 하나님의 긍휼과 도움이 얼마나 더 필요합니까? 시인은 하나님 신뢰하기를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일을 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는 시인(9-12)

인간이 갖는 가장 큰 두려움은 죽음에 대한 것인데, 사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도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더 큽니다. 죽음과 고난 등에 대해서 두려움을 아주 크게 키워놓고, 그것을 두려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두려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최상의 방법은 직면하는 것입니다. 직면하면 하나님께서 나아갈 길을 보여주십니다.

 

9곤란으로 말미암아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매일 주를 부르며 주를 향하여 나의 두 손을 들었나이다 10주께서 죽은 자에게 기이한 일을 보이시겠나이까 유령들이 일어나 주를 찬송하리이까(셀라) 11주의 인자하심을 무덤에서, 주의 성실하심을 멸망 중에서 선포할 수 있으리이까 12흑암 중에서 주의 기적과 잊음의 땅에서 주의 공의를 알 수 있으리이까(9-12)

 

하나님의 노하심으로 인해 시인은 고통 속에서 점점 쇠약해져 갑니다. 기자는 네 가지 수사적 질문들, 곧 전형적인 쟁점들을 동원하여 자신이 죽기 전에 도와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합니다.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9)란 표현은 그가 하나님께 매일 울부짖느라 눈이 침침해졌다는 뜻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심신이 약해졌다는 의미로볼 수 있습니다. 시편 6편에서도 시인은 밤마다 하나님께 탄식하고 통곡하여 근심하므로 눈이 쇠하고 침침해졌고, 여기에 뼈와 영혼이 떨리고 수척해졌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시 6:2-3, 6-7). 시인은 기력이 쇠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부르고 하나님을 향해 두 손을 듭니다. 이런 행동은 시인의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겸비함을 보여줍니다.

시인은 살아있는 자만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음을 호소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바랍니다. 죽은 자들(“죽은자”, “유령들”)이나 그들이 있는 곳(“무덤”, “멸망”, “흑암”, “잊음의 땅”)은 하나님의 놀라운 행사(“기이한 일”, “기적”, “공의”)나 성품(“인자하심”, “성실하심”)을 찬양할 수도 선포할 수도 없습니다(10-12; 시 6:5).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과 경배는 오로지 생명을 가진 자들의 몫이자 특권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그를 죽음의 위협에서 구하여 하나님을 계속 찬양할 수 있게 해주시길 간청합니다.

 

고난 중에도 끊임없는 기도(13-18)

자신의 삶에서 주님의 빛되심을 경험하고, 그 후에 크고 작은 일들로 인해서 깊은 어둠을 절감하는 사람은 참 빛이신 주님을 갈구하게 됩니다. 자신이 어둠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참 빛을 구해야 하는 것도 알지 못합니다. 자신이 어둠 속에 헤매고 있다는 것을 직시하는 순간에 빛으로 오신 주님을 수용하게 됩니다. 또한 자신이 죽음에 직면해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소망할 수 있습니다.

 

13여호와여 오직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 14여호와여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시나이까 15내가 어릴 적부터 고난을 당하여 죽게 되었사오며 주께서 두렵게 하실 때에 당황하였나이다 16주의 진노가 내게 넘치고 주의 두려움이 나를 끊었나이다 17이런 일이 물 같이 종일 나를 에우며 함께 나를 둘러쌌나이다 18주는 내게서 사랑하는 자와 친구를 멀리 떠나게 하시며 내가 아는 자를 흑암에 두셨나이다(13-18)

 

시편 기자가 드린 기도의 일부를 되풀이하지만 부르짖는 시점이 아침으로 바뀝니다. 본문에서는 1-9절의 주제와 유사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징계 중에서 가장 괴로운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느낌이 닥친 것을 탄식합니다(7,14).

시인은 ‘그러나 나는 당신께 부르짖었나이다’(13, “오직 내가”로 번역됨)라고 외치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밝힙니다. 죽으면 하나님께 찬양도 기도도 할 수 없지만, 그전까지는 기도를 그만둘 수 없고 또 그만두지 않겠다는 시인의 의지를 관찰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주야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1,9,13). 아침에도 그가 계속 기도할 것이므로 기도는 하나님 앞에 전달될 것입니다(13). 그러나 시인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아직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기를 거절하고 얼굴을 숨기신다고 느낍니다. 하나님께서 누군가에게서 얼굴을 숨기시는 행동은 하나님의 얼굴을 향하거나 비추는 행동(민 6:25-26)의 반대로서 그 사람의 상황에 개입하지 않고 침묵과 무반응으로 일관하시며(시 13:1; 102:2) 대적처럼 여기심(사 64:7;욥 13:14)을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응답과 무관심으로 시인을 고립시키셨으나, 시인을 향한 진노는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시인의 고난의 역사는 오해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고통을 당해 지금 죽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께서 시인을 두려움으로 괴롭히시므로 그는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쇠약해져 갔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바다 물결처럼 그를 누르고 괴롭혔습니다(7). 지금도 물이 시인 위로 넘실대며 지나가듯 하나님의 진노가 그에게 넘실대며 흘러갑니다. 하나님의 두려움으로 시인은 말문이 막히고 소진되었습니다. 하루 종일 이런 일들이 물처럼 시인을 둘러싸 죽음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로 시인이 재난을 당하고 고통에 처하자 시인의 지인, 사랑하는 자, 친구들은 다 멀리 떠났습니다. 시의 맨 마지막 문장, “내가 아는 자를 흑암에 두셨나이다”란 문장은 하나님께서 시인의 지인들을 어두운 곳으로 떠나보내어 그로부터 멀어지게 하셨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문장은 ‘내가 아는 자는 흑암이니이다’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 번역을 따르면 친구들이다 떠났으므로 이제 시인에게 있어서는 죽음을 상징하는 흑암만이 그의 지인이 되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흑암”은 위 6절에서 “어두운 곳”으로 번역되어 ‘죽음’을 암시하고, 앞의 친구들이 떠난 곳을 ‘죽음’으로 보기는 적당치 않으므로 후자의 번역을 지지해줍니다. 시인의 계속되는 탄식의 표현들은 허무하게 내뱉는 절망의 하소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바라는 간접적인 요청, 하나님께 직접 상달되는 간구입니다.


우리의 인생길에서도 오늘 본문의 시인이 겪었던 것처럼, 크고 작은 일들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또 우리를 짓누르는 여러 상황들로 인해서 마치 죽은 사람처럼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또한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아스라이 계신 것 같이 여겨지고, 가족들도, 친구들도, 지인들도 나를 멀리하는 것처럼 여겨지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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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87-01)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시온

시편 87편 1-7절


 

교회를 비판해야 교회가 바로 선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올바른 교회론을 가졌다고 자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교회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사람이 보는 시각이 아닌 하나님께서 보는 시간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눈으로는 사랑스럽고 영광스러운 곳이 교회입니다.

 

  • 하나님께서 시온의 문들을 더 사랑하셔서 성산에 터를 세우셨습니다. 지존자가 친히 시온을 세우시리니 이방 민족은 물론 하나님을 아는 모든사람이 ‘거기서났다’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민족들을 등록하실 때 ‘이 사람이 거기서났다’ 하실 것이며, 노래하는 자들은 모든 근원이 시온에 있다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시온(1-2)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만 계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통치하시고, 각 나라와 각 지역을 소유하시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의 주인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중에서도 특별히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영광스럽게 하셔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본부 기지로 삼으셨습니다.

 

1그의 터전이 성산에 있음이여 2여호와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보다 시온의 문들을 사랑하시는도다(1-2)

 

시온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하나님의 도성입니다. 시의 첫 문장 “그(하나님)의 터전이 성산에 있음이여”에서 “터전”은 뭔가를 세울 때의 ‘기초’나 ‘토대’를 뜻하므로 그의 터전은 하나님께서 설립자임을 나타냅니다. “성산”은 ‘거룩한 산’이란 뜻으로서 시온산을 가리킵니다. 첫 문장은 하나님께서 시온을 세우셨다는 선포인 것입니다. “성산”은 두 해석이 가능합니다. 첫째, ‘성산들’은 시온산을 지칭하며, 복수형을 사용하여 시온산의 장엄함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둘째, ‘성산들’을 예루살렘 주위를 두르고 있는 시온산을 비롯한 여러 산들 또는 산등성이(시 125:2; 133:3)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산들 중에는 시온산을 비롯하여 감람산, 모리아 산 등이 있으나, 시 전체가 시온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므로 ‘성산들’은 결국 시온산을 염두에 둔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시온은 또한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시는 곳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보다 시온의 문들을 사랑하신다고 선언합니다(2). 여기서 “시온의 문들”은 예루살렘 성의 입구(성문)를 가리킵니다. 원래 시온은 다윗 왕이 여부스 족에게서 빼앗은 요새로서 ‘다윗의 성’(삼하 5:7,9; 대상 11:5)으로 불렸고, 예루살렘 성에 속해 있어 ‘예루살렘’의 별칭 또는 대체어로 사용되었습니다(사 39:9). “야곱의 모든 거처”는 말 그대로 이스라엘의 다른 거주지들(성, 마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거나 1절의 ‘성산들’을 암시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어느 것으로 이해하든, 2절은 시온이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과 사랑을 받는 곳임을 부각하려는 선포입니다. 하나님께서 시온을 사랑하는 이유는 시온이 다른 데에 비해 비옥하거나 수려해서가 아니며, 거기 사는 백성이 의로워서가 아닙니다. 바산의 산들이 시온산보다 훨씬 높고 보기에 더 빼어나지만, 하나님께서는 시온을 사랑하셨고 시온을 그의 거처로 삼으셨습니다(시 68:15-16; 78:68). 다른 민족이 더 수가 많고 강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사랑하고 기뻐하셨습니다(신 7:7). 시온과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시온의 성소에서 그의 백성 이스라엘과 함께 거하시므로 시온은 거룩한 산 여호와의 산이 되었습니다(시 2:6;24:3; 48:1). 하나님께서 이 성에 계시므로 시온은 요동치 않으며 영원히 있습니다(시 46:5; 48:8; 125:1). 하나님의 축복이 시온에 대대로 머뭅니다(시 128:5).

 

시온에 대한 영광스러운 일들(3-6)

인간의 눈으로 볼 때에는 어떠하든지,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사용하셔서 온 땅을 다스리십니다. 시온을 통해 열방을 통치하셨던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교회를 사용하셔서 세상을 다스리시고, 영광을 받기 원하십니다.

 

3하나님의 성이여 너를 가리켜 영광스럽다 말하는도다(셀라) 4나는 라합과 바벨론이 나를 아는 자 중에 있다 말하리라 보라 블레셋과 두로와 구스여 이것들도 거기서 났다 하리로다 5시온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 저 사람이 거기서 났다고 말하리니 지존자가 친히 시온을 세우리라 하는도다 6여호와께서 민족들을 등록하실 때에는 그 수를 세시며 이 사람이 거기서 났다 하시리로다(셀라)(3-6)

 

하나님의 도성 시온은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온 세계의 칭찬을 들을 것입니다. “너(시온)를 가리켜 영광스럽다 말하는도다”(3)는 직역하면 ‘영광스러운 일들이 너에 대해 말해지는도다’입니다. 원문에서 ‘영광스러운 일들’이 첫 단어로 나와 강조되었고, 동사가 ‘말하다’의 수동형으로 나와 말하는 주체보다는 목적어인 영광스러운 일을 강조합니다. 1-2절의 하나님께서 성을 세우시고 사랑하신 것을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는 시온의 영광스러운 일들로 본다면, 이제 시인이 말하려는 4-6절의 내용은 종말에 일어날 영광스러운 일들입니다. 시온에 대한 영광스러움이 언급된다는 것은 시온에 대한 찬양을 암시합니다. 1-2절이 이스라엘에 초점을 맞추어 시온을 찬양한다면, 4-6절은 범우주적으로 시온의 영광스러움을 찬양합니다.

본 시에서 선포하는 시온의 영광스러운 일은 시온이 열국의 모태가 된다는 점입니다. 먼저, 4절은 ‘내가 라합과 바벨론을 나를 아는 자들로 언급하리라’, ‘보라 블레셋과 두로와 구스여 이것들도 거기(시온)에서 태어났다’고 기록합니다. 이때 4절에서 말하는 주체는 누구인지 언급되지 않았으나, 내용상 하나님의 말씀을 선지자가 대언하는 것으로 유추할 수 있습니다. ‘라합’은 원래 바다 괴물(욥 26:12; 사 51:9)을 지칭하지만 여기서는 ‘애굽’을 가리킵니다. ‘라합’이 바벨론과 병행되었고 블레셋 등 열국 목록의 같은 문맥에서 나왔으므로, 이사야 30:7에서처럼 지명인 ‘애굽’을 상징하는 비유적 표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애굽과 바벨론 두 나라는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을 핍박하고 침략했던 강대국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들은 수많은 우상 신을 섬겼으며, 애굽은 ‘라합’이라는 바다 괴물로 불리는 데서도 추측할 수 있듯 강포함과 교만함으로 세상에 알려진 열국입니다(사 14:4;겔 29:3;30:10-11). 이스라엘은 이런 열국들한테서 도움을 구하며 우상들을 섬겼습니다(사 30:1-2; 겔 23장).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애굽과 바벨론이 ‘하나님을 아는 자’, 즉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자들 중에 속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들뿐 아니라 이들에 버금가는 블레셋, 두로, 구스도 시온에서 태어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포될 것입니다. 블레셋은 이스라엘 남서부의 해양 민족으로 이스라엘을 시시때때로 괴롭혔던 원수며, 두로는 시돈과 더불어 해상무역으로 이름을 떨친 나라이고, 구스는 다시스와 같이 애굽에서 멀리 떨어진 무역국 에티오피아를 지칭합니다. 모두 하나님께 대항하고 자신들의 힘을 자랑하던 나라들입니다(사 45:14). 그러나 장래에 이들은 시온의 하나님 백성이 되며 그를 경배하게 될 것입니다(사 19:23-25). 5절에서도 “이 사람 저 사람이 거기(시온)서 태어났다”고 말할 것이라고 하며, 세계의 온 나라와 백성이 시온의 백성이 될 것을 예고합니다. 이와 같은 장면은 다른 시편에서, 또는 이사야나 스바냐 선지자 등을 통해 예견된 바와 일치합니다(시 22:27-28;72:10-11;사 19:21-25;60:3-9;습 3:10).

세상의 열국을 다 품은 시온은 지존자 하나님께서 세우신 도성으로 확실히 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민족들을 명부에 기록하며 그 수를 헤아리실 때, 이들이 다 시온에서 나온 하나님의 백성임을 다시금 확증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이름을 기록하시는 모습은 다른 성경에서도 볼 수 있고, 그 명부는 기념책이나 생명책 등으로 언급되었습니다(시 68:28; 말 3:16; 단 12:1). 특히 이 책에 기록된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들, 즉 하나님께 의인으로 칭함 받은 자들입니다(시 68:28; 말 3:16).

 

온 백성의 근원인 시온을 찬양(7)

교회는 예배를 위해 존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반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들은 예배 드리는 것을 즐거워하며, 날마다 말씀을 배우고 전파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성도들이 교회의 본질인 예배를 귀하게 여기며, 말씀 위에 서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더욱 영광스럽게 여기실 것입니다.

 

7노래하는 자와 뛰어 노는 자들이 말하기를 나의 모든 근원이 네게 있다 하리로다(7)

 

이제 열국이 나와 노래하며 춤추며 온 백성의 근원이 된 시온의 영광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 계신 곳은 언제나 기뻐 외치는 자, 노래하는 자, 악기 연주자, 춤추는 자 등이 넘치며 기쁨과 즐거움의 소리가 끊이지 않습니다(삼상 18:6-7; 계 7:9). 그들 모두가 “나의 모든 근원이 네(시온)게 있다”고 외치며, 시온의 백성임을 축하하고, 하나님을 찬송할 것입니다. “근원”은 ‘샘’이란 뜻도 있습니다. 시온에는 시내가 있고, 그 줄기가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인 시온성과 하나님의 처소를 기쁘게 한다고 시인은 노래하였습니다(시 46:4). 시온에 사는 백성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살진 것으로 맘껏 배불리고 하나님께서 제공하시는 기쁨의 강물을 마실 것입니다(시 36:8). 이때 시온에 흐르는 물의 원천지는 하나님께서 계시는 성전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이 물이 성소를 통해 흘러나옴을 목격했고 성전 문지방에서 흘러내린 물이 점점 차올라 사람이 건널 수 없는 충만한 강이 되있음을 묘사했습니다(겔 47:1-5). 사도 요한은 이 강을 ‘생명수의 강’으로 부르며, 이 강물이 하나님과 그의 어린 양 그리스도의 보좌로부터 나온다고 진술함으로 써 강물의 시작이 하나님이심을 밝혔습니다(계 22:1). 이 강의 좌우에 수많은 과일나무가 있는데, 이 나무들은 성소에서 흐르는 물 덕분에 잎도 시들지 않고 매달 치로제가 되는 새 열매를 맺습니다(겔 47:7,12; 계 22:2). 이 나무들은 ‘생명나무’라 불리며 열매들은 만국을 치유합니다(계 22:2). 또한 물줄기를 따라 물이 흘러가는 곳마다 모든 생물이 살아나고 번성하며 치유됩니다(겔 47:9-10). 하나님께서는 이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나 원하는 자에게 값없이 제공하십니다(계 21:6; 22:17). 이와같이 시온이 모든 것과 모든 이의 근원이 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그곳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영광스러운 곳입니다. 세상이 교회를 비판해도 이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기 원하시므로 교회가 구원의 방주 역할을 잘 감당하려면, 항상 하나님의 말씀 위에 견고히 서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가장 중요한 사명인 예배를 잘 감당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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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86-01)


하나님을 향한 간구와 믿음

시편 86편 1-17절


 

기도에 등급을 매길 수는 없지만, 기도는 기도자에 대해 상당히 많은 정보를 제공합니다. 고난 중에도 틀에 박힌 일방적인 기도가 아닌, 하나님과 함께 호흡하고 함께 헤져 나가는 기도를 선택해야 합니다. 자신의 손만이 아니라 주님의 손을 함께 포개고 말씀 가운데 기도를 나눠보시길 바랍니다.

 

  • 원수들로 인해 중한 고난을 당한 시인은 하나님만을 신뢰하며 구원을 간청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시인을 구원하실 것이며, 이런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은 시인의 찬양만이 아니라 열방의 경배까지도 고대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간구(1-7)

성도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헌신되어 있어야 합니다. 상황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을 향한 신뢰만은 끝까지 부여잡고 있어야 합니다. 목숨을 지켜달라고 간구합니다. 쉼 없이 부르짖어야 할 만큼 절박하여질 것입니다. 그래서 순간마다 그의 영혼은 환난을 가져다준 원수를 보지 않고 환난에서 구원하실 주를 우러러 보았습니다(눅 23:46).

 

1여호아여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주의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하소서 2나는 경건하오니 내 영혼을 보존하소서 내 주 하나님이여 주를 의지하는 종을 구원하소서 3주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종일 주께 부르짖나이다 4주여 내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오니 주여 내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 5주는 선하사 사죄하기를 즐거워하시며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함이 후하심이니이다 6여호와여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7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께 부르짖으리니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리이다(1-7)

 

시인은 “주(당신)의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하소서”라고 외치며 하나님께 간구하기 시작합니다. ‘가난하고 궁핍한 자’이므로 하나님께서 자기 기도에 응답해주셔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가난하고 궁핍한 자’는 무언가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이 어구는 ‘악인에게 착취당하여 가난해진 자’라든지 ‘무고하게 핍박을 받는 자’ 등 ‘정의를 되찾아야 하는 자’를 가리킵니다(렘 22:16: 겔 16:49;욥 24:14). 이들의 정의 구현을 위해 힘써야 하는 것이 인간 왕의 의무 중 하나(잠 31:9)로 소개될 만큼 이 점이 강조되었습니다. 특히, 시편에서 “가난하고 궁핍한 자”는 ‘의인’이나 ‘경건한 자’와 동일시되어 사용되었습니다(시 40:17; 70:5). 본 시편에서도 시인은 가난하고 궁핍한 자신을 ‘경건한 자’,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로 동일시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2). 시인은 하나님이 책임감을 갖고 시인이 뺏긴 정의를 되찾아주시길 바라고 있습니다. 시인이 고대하는 응답은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시인은 지금 목숨의 위협을 받는 위중한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경건한 자나 그를 의지하는 자의 생명을 보존하고 구하시는 분임을 잘 알고 있다(시 145:18-20). 그러므로 자신을 "경건한 자", "주(당신)를 의지하는 종"(2절)으로 소개하며, 하나님의 도움과 구조를 받기에 합당한 자임을 밝힌다. 자신을 하나님의 "종"이라 부르며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자임을 강조한다. 한편, 시인은 하나님의 구조를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필수적임을 인지하고 있다. 그는 종일 하나님께 부르짖는 자신에게 은혜 베푸시기를 간구합니다. 또한 “내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라고 요청합니다. 이때 “내 영혼”은 원문에서 ‘당신의 종의 영혼’으로 나옵니다. 시인은 반복해서 자신을 하나님의 “종”(2,4)으로 부르며, 자기가 하나님께 속한 자, 주인의 보호가 필요한 자임을 상기시킵니다. 5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여러 성품(하나님의 선하심, 용서를 즐겨하심,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하심)을 나열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셔야 하는 이유를 덧붙입니다.

6절에서 시인은 다시금 하나님의 관심을 집중시키며 기도에 응답해주시길 요청합니다. 이 구절은 1절과 유사한 내용인데, 다른 것은 1절 이후 2-5절까지는 시인의 간구와 하나님께서 그에게 응답하셔야 할 이유가 나열된 반면, 6절 후 7절에서는 하나님의 응답에 대한 확신을 선언한다는 점입니다. 시인은 그의 환난 날에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것을 확신합니다. 이런 확신의 고백은 하나님에 대한 시인의 신뢰와 하나님과 시인의 돈독한 관계를 더 부각합니다.

 

열방의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8-10)

포악한 대적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교만하고 포악한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시인이 두려워한(경외한) 것은 그들이 아니라 긍휼과 은혜,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여 노하기를 더디 하신 하나님이었습니다. 오로지 한 분 참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세상을 절대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8주여 신들 중에 주와 같은 자 없사오며 주의 행하심과 같은 일도 없나이다 9주여 주께서 지으신 모든 민족이 와서 주의 앞에 경배하며 주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리이다 10무릇 주는 위대하사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오니 주만이 하나님이시니이다(8-10)

 

시인 한 사람의 기도에도 응답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개인이나 한 나라의 왕을 넘어 세상의 왕, 세상의 창조주십니다. 하나님만이 세상의 유일한 참 신이며 창조주이므로 그에게 견줄 만한 다른 신은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전능자이므로 그가 하시는 일에 견줄 만한 뛰어난 일 또한 없습니다. 그러므로 훗날 하나님의 피조물인 온 열방이 그 앞에 나아와 절하고 그의 이름을 영화롭게 할 것입니다. 열방의 하나님 경배를 고대하는 시인의 고백은 하나님께서 그의 선택한 이스라엘에게서만이 아니라 온민족에게서 찬양을 받으심이 마땅함을 드러냅니다. 이들은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언어로부터 모여든 셀 수 없는 무리로서 그들의 하나님 찬양은 영원히 계속될 것입니다(계 7:9-12). 하나님에게 대항하던 왕이나 민족들조차 하나님께 굴복하고 그 앞에 나와 귀중한 예물을 바치며 복종하게 될 것입니다(시 72:8-11).

 

시인의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11-13)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길 간구하고, 그분의 길이 참되다는 믿음을 가지고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시고 보호하신다는 확신 속에서,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며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의 길을 걷는 것이야말로 참된 신앙의 길임을 기억합시다.

 

11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12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찬송하고 영원토록 주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오리니 13이는 내게 향하신 주의 인자하심이 크사 내 영혼을 깊은 스올에서 건지셨음이니이다(11-13)

 

시인은 이제 하나님께 그의 도를 가르쳐달라고 요청합니다. 가르침을 청하는 시인의 행동은 1-6절의 간구가 하나님의 은혜만을 얻어내려고 떼쓰는 행동이 아니었음을 밝혀줍니다. 그가 1-6절에서 하나님께 은혜를 구한 것은 긍휼과 은혜를 베풀 수 있는 권한이 자기에게 없고 하나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의 의무는 하나님의 진리의 도를 배워 행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이를 제대로 실행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가르침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스라엘에게 그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 기억하라고 하셨습니다(신 6:6).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시인은 이를 분명히 인지하여 하나님께 “일심으로 당신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11)라고 부탁드립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함과 더불어 시인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 찬양입니다. 시인은 온 마음으로 영원히 하나님과 그의 이름을 찬송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에는 그의 성품과 하신 일이 드러나므로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찬양할 수 있습니다. 시인의 찬양 이유는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는(2) 자신을 하나님께서 구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가장 깊은 곳, 스올에 빠져 있다며 자신의 상황을 비유적으로 설명합니다. 스올은 죽은 자들이 가는 장소로서 강이나 바다 맨 밑바닥의 구덩이를 가리키며, 여기서는 ‘죽음’과 ‘고난’을 상징합니다. 시인은 스올, 그것도 가장 깊은 바닥에 있으므로 도저히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시인을 거기서 끌어내어 구조하실 것입니다. 시인의 “스올에서 건지셨다”(13)는 완료형 표현은 앞으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건지심에 대한 시인의 확신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이 놀라운 구원은 그의 크신 인자하심과 깊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성품(인자하심)과 하신 일(구원)은 시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끝없이 찬양하게 하는 이유를 제공해줍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간구(14-17)

성도는 하나님께 모든 민족들보다 앞서 주의 도를 듣고 행하겠다고 서원해야 합니다. 마음을 모아 경외하고 마음을 다하여 찬송하고 영광을 돌리겠다고 해야 합니다. 죽음과 망각의 땅인 깊은 스올에 있었지만, 향한 주의 인자하심(헤세드)이 거기까지 미쳐 넉넉히 구원받으리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참 믿음은 미리 찬양하고 미리 감사하고 미리 맡기는 일입니다.

 

14하나님이여 교만한 자들이 일어나 나를 치고 포악한 자의 무리가 내 영혼을 찾았사오며 자기 앞에 주를 두지 아니하였나이다 15그러나 주여 주는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오니 16내게로 돌이키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주의 종에게 힘을 주시고 주의 여종의 아들을 구원하소서 17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14-17)

 

이제 시인은 자신을 스올로 몰아넣은 이들이 원수들임을 직접적으로 밝히며 구원의 은혜를 간청합니다. 시인은 그의 원수들을 “교만한 자들”, “포악한 자의 무리”, “시인을 미워하는 자들”(14,17)로 규명하며, 이들의 행동 기반이 불의와 악임을 부각합니다. 이들은 근본적으로 자기 앞에 하나님을 두지 않는 자들, 즉 정의와 긍휼의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지 않고 자기들의 이기심과 탐욕을 앞세우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주인 삼고 그의 말씀대로 의를 행하려고 하는 시인과는 반대의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무리를 지어 시인을 대항하여 일어나서 서슴없이 그의 목숨을 해하려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시인의 신뢰는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근거는 그의 긍휼, 은혜, 노를 참으심, 인자, 진실 등의 성품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 반역하는 이스라엘에게 조차 긍휼과 용서를 베푸신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을 신뢰하며 포악한 원수들로부터 고통 받는 시인을 하나님께서는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시인은 이 점을 확신하므로 하나님께 자기에게 주목하고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시길 간구합니다. 시인은 2,4절에서처럼 자신을 “당신의 종”(16)으로 부르고 “당신의 여종의 아들”도 덧붙입니다. “당신의 여종의 아들”은 “당신의 종”보다 자신을 더 낮추는 표현(시 116:16)으로서 시인의 겸손한 태도를 보여줍니다. 이 태도는 원수들의 교만함과 포악함과 대조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구원을 표적으로 보여주시길 간청합니다. 시인이 요청하는 표적은 특히 ‘선’(“은총”으로 번역됨)의 표적으로서 하나님께서 정의로 시인을 신원하고 원수를 심판하시기를 바랍니다. 시인을 미워하는 원수들은 도움과 위로가 하나님으로부터 시인에게 임하는 것을 보고 수치를 느낄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깊은 신뢰와 의지로 마무리됩니다. 이 시편은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이자 구원자라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우리의 기도와 간구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며, 그분의 긍휼과 인자하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우리가 진심으로 의지할 때 응답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의 인도하심과 구원을 기다리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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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85-01)


하나님의 긍휼과 회복의 약속

시편 85편 1-13절


 

성경은 종종 어리석은 사람을 개나 돼지에 비유하곤 합니다. 개는 토한 것을 다시 먹고, 돼지는 더러운 곳에 다시눕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어리석은 사람들은 같은 죄를 반복합니다. 회개했다고 하면서도 다시 죄에 빠집니다. 하나님은 이런 삶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진정한 회개는 다시 죄로 돌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죄를 덮으시고 이스라엘을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신 은혜를 고백한 후, 다시 진노를 거두시고 구원하시길 간구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화평의 말씀으 전합니다. 구원은 주를 경외하는 이에게 가깝고, 인애와 진리가 만나며, 의와 화평이 입맞추고, 땅은 산물을 낼 것입니다.

 

포로 귀환에 대한 감사(1-3)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는 죄의 속박에서 해방되고 참된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 해방은 단순히 죄책감에서 벗어나는 것을 넘어서, 삶 전체를 변화시키는 놀라운 기쁨을 선사합니다. 죄에서 해방된 기쁨은 우리의 삶을 새로운 차원으로 이끌어주며,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회복시키고, 참된 평안과 소망을 주는 기쁨입니다.

 

1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땅에 은혜를 베푸사 야곱의 포로 된 자들이 돌아오게 하셨으며 2주의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고 그들의 모든 죄를 덮으셨나이다 (셀라) 3주의 모든 분노를 거두시며 주의 진노를 돌이키셨나이다(1-3)

 

시인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포로 생활에서 돌아오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여기서 시인이 언급하는 포로 귀환이 언제 일어난 사건인지는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시신은 포로 귀환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하며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땅’에 호의를 베풀어 주고 기쁘게 봐주셨습니다. 시인은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돌아온 가나안 땅을 ‘하나님의 땅’이라 부름으로써 이곳이 하나님께 속한 땅(레 25:23)임을 강조합니다. 또한 이 땅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여 유업으로 주신 땅임을 상기시킵니다. 잃었던 땅을 되찾게 하신 것은 백성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시인은 포로 귀환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야곱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이방의 포로 잡힌 백성을 해방하시고 하나님 땅으로 돌아오게 하신 분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당신의 백성”으로 칭함으로써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속한 언약의 백성임을 강조합니다. 이 언약 백성이 ‘포로가 된 것’은 단지 전쟁에 패하여 이방 나라에 끌려갔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죄 지었음과 하나님의 심판과 징벌이 임했음을 뜻합니다. 이것은 역대기에서 유다가 바벨론 포로가 된 원인을 그들의 ‘범죄함’ 때문이라고 설명한 데서도 자명하게 나타납니다(대상 5:25-26;9:1).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언약을 깨고 불순종하면 대적을 보내 이스라엘을 치고, 땅을 황무케하고, 백성을 열방 중에 흠을 것임을 이미 경고하셨습니다(레 26:31-39; 신 4:25-27).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시시때때로 죄를 지었고, 결국 포로로 잡혀가곤 했습니다. 이런 자들을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게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이미 용서하셨음을 보여줍니다(대하 33:11-13). 본 시에서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포로에서 돌이키신 것은 그들의 죄악을 용서하고 모든 죄를 덮으신 결과입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진노를 돌이키셨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분노’와 ‘맹렬한 화’는 이스라엘에게 임한 심판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진노를 돌이키신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신다는 뜻이며, 심판 기간을 종결시키겠다는 암시입니다(슥 1:12). 하나님께서 진노를 돌이키셨음(슈브, 3절)은 포로들을 돌아오게 하심(슈브, 1절)으로 증명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간구(4-7)

유다 백성이 귀환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돌아와야 교만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랑이 없어집니다. 우리 역시 그렇습니다. 우리가 속량된 것은 우리의 공로가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의 보혈로 속량 되었습니다. 죄에서 거저 해방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구원을 기대할 수도 없습니다.

 

4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우리에게 향하신 주의 분노를 거두소서 5주께서 우리에게 영원히 노하시며 대대에 진노하시겠나이까 6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사 주의 백성이 주를 기뻐하도록 하지 아니하시겠나이까 7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보이시며 주의 구원을 우리에게 주소서(4-7)

 

시인의 감사 기도는 4절의 “우리를 돌이키소서”라는 외침을 시작으로 애통과 간구로 전환됩니다. 1절에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포로에서 ‘돌이키셨다’(“돌아오게 하셨으며”로 번역됨)고 말하며, 3절까지 과거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에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4절에서는 “우리를 돌이키소서”라고 간청합니다. 3절에서 “주의 모든 분노를 거두셨나이다”라고 감사했으나, 4절에서는 “우리에게 향하신 당신의 분노를거두소서”라고 간구합니다. 이처럼 1-3절의 감사 내용 대부분이 4-7절에는 간구 내용으로 전환되는데, 이는 이스라엘이 과거에 하나님의 은혜로 포로에서 귀환 했으나 현재 또 다른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은혜를 베푸신 것처럼 이번에도 은혜를 베푸시길 소망하고 있습니다.

시인의 간구는 하나님의 구원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단락(4-7)의 시작과 끝에 “우리 구원의 하나님”과 “주의 구원을 우리에게 주소서”가 ‘하나님의 구원’에 핵심을 두며 서로 연결되는 점도 이를 뒷받침합니다. 시인이 하나님을 “우리 구원의 하나님”으로 부르는 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언약을 통해 친밀한 관계를 갖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전능자임을 암시하면서 구원을 촉구합니다. 시인은 먼저 하나님의 회복을 간구합니다. “우리를 돌이키소서”(4)라는 요청은 문자적으로는 ‘우리를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소서’라는 구체적인 뜻 또는 ‘우리를 회복하소서’라는 일반적인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후자로 읽는 것이 적절한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4-13절의 내용에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게 해달라는 직접적인 간구나 암시가 없는 대신 하나님의 영광이 땅에 머물고 땅이 산물을 내기를 고대하는 내용(9,12)이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시인은 하나님께서 노를 거두시기를 구합니다. 4-5절에 하나님의 분노는 세 문장에 반복되어 강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이스라엘임은 “우리에게 향하신 주의 분노”라는 어구나 “우리에게 영원히 노하시겠나이까”에서 분명히 나타납니다. 다만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진노한 이유는 이 단락과 나머지 시 내용에서 언급되지 않아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분노가 계속되므로 시인은 하나님께서 그의 진노를 영원히 계속하시겠느냐고 부르짖으며 분노를 그치시길 간청합니다. 셋째, 이스라엘의 소생을 위해 기도합니다. 이스라엘의 현재 상황은 죽음을 맞이한 것과 같으므로 이스라엘을 다시 살려 하나님을 기뻐하게 해달라고 시인은 간청합니다. 시인은 이때도 이스라엘을 ‘당신의 백성’(2,6)으로 칭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그의 선택하신 언약 백성임을 기억하고 긍휼을 베푸시길 바랍니다. 넷째, 시인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통한 구원을 간청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구원이 이스라엘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인자하심에서 비롯됨을 제대로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응답(8-9)

구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가장 큰 은혜이며, 우리의 삶을 완전히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 다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이 구원은 우리의 공로나 행위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8내가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실 말씀을 들으리니 무릇 그의 백성, 그의 성도들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라 그들은 다시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말지로다 9진실로 그의 구원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가까우니 영광이 우리 땅에 머무르리이다(8-9)

 

하나님의 응답이 시인을 통해 전달됩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모든 이에게 저절로 임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백성, 즉 하나님께 신실하고 헌신된 자들(“성도들”)에게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그의 백성에게 두려움이 아닌 화평을 전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어리석음으로 돌아가지(슈브, 8절) 않도록 경고합니다. 어리석음이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데서 출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경외하는 백성에게 구원으로 곧 응답하실 것입니다. 시인은 이 결과로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 땅에 머무를 것임을 확신합니다. 시인이 이 땅을 ‘하나님의 땅’으로 불렀다가(2) 이제 “우리의 중”(9)으로 부르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땅을 이스라엘에게 유산으로 주신 약속을 상기시킵니다.

 

땅에 임할 하나님의 통치와 축복(10-13)

옛 생활로 돌아가는 것은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고, 회개를 무력화시키는 일입니다. 회개한 사람이 옛 생활로 돌아가더라도 다시 돌아오면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돌아오는 것은 이전보다 더욱 어려워집니다. 그러므로 옛 생활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성도들에게 응답을 주십니다.

 

10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11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도다 12여호와께서 좋은 것을 주시리니 우리 땅이 그 산물을 내리로다 13의가 주의 앞에 앞서 가며 주의 길을 닦으리로다(10-13)

 

하나님의 구원과 영광이 머무르는 땅에는 그의 의로운 통치와 축복이 뒤따를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의 통치는 단순히 공의뿐 아니라 인애, 진리, 의, 화평 등 하나님의 속성이 땅과 하늘에서 조화를 이루며 실행되는 통치입니다. 이와 더불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좋은 것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 땅이 그 산물을 내리로다”(12)라는 시인의 선언은 하나님께서 땅과 그곳에 사는 백성에게 축복을 내리시길 바라는 간접적인 간구입니다. 학개서에는 ‘땅이 산물을 내는 것’과 반대 상황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 귀환자들이 성전 재건을 중단한 후 자기들만 위해 살 때 하늘의 이슬이 그치고 땅의 산물이 그쳤습니다(학 1:1-10). 하나님이 보내신 가뭄이 땅만이 아니라 산, 곡물, 새 포도주, 올리브 기름, 땅의 모든 소산, 사람, 육축, 손으로 수고하는 모든 일에 임했고, 폭풍과 곰팡이와 우박이 내렸고, 곡식과 나무에 열매가 맺지 못함으로써 땅의 산물이 그쳤습니다(학 1:11; 2:17-19). 본 시편의 ‘땅이 산물을 내는 것’의 의미 또한 하나님께서 땅을 포함하여 백성과 백성이 소유한 모든 것에 좋은 것을 공급하심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축복 안에서 그의 공의로운 통치가 지속될 것을 고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다시 죄로 돌아가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더러운 죄의 옷을 벗어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고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예전의 끔찍하고 더러운 삶에서 멀리 떠나, 아침마다 새로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매일매일 기쁨을 누리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이 갈망에 보답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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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84-01)


하나님을 향한 갈망과 기쁨

시편 84편 1-12절


 

사람마다 자신이 좋아하는 공간이 있습니다. 도서관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카페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아무도 없는 혼자만의 공간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공간에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고 힘이 납니다. 성도들은 어떤 장소를 가장 좋아하고 즐겨 찾아야 합니까?

 

  • 본 시는 하나님의 집을 사모하는 시인의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시인은 성전에서의 하루가 세상의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더 낫다고 고백하며, 하나님과 함께하는 곳에서 진정한 행복과 평안을 찾습니다. 하나님은 주의 집에 거하는 자에게 은혜와 영광을 주시며, 그들을 축복하십니다. 이 시편은 하나님을 향한 깊은 갈망과 그분의 집에서 누리는 축복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집에 사는 자의 행복(1-4)

사람들은 세속적인 것들이 득세할 때 여호와 하나님이 패했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만군의 주, 천지 만물을 주관하시는 분이시며,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신 분이십니다. 세상의 화려하고 웅장한 곳으로 임재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들에게 임하신 것입니다. 그곳을 통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자리입니다.

 

1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2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3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4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셀라)(1-4)

 

시편 84편은 하나님의 성전에 대한 시인의 사모함이 가득 묻어납니다. “당신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1)라고 감탄하며, 시인은 하나님 ‘처소’(“장막”으로 번역됨)의 사랑스러움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처소인 성전은 시온에 있으며, 하나님께서 이곳을 이스라엘과 함께 거주할 자신의 거처로 손수 택하셨습니다(시 24:3). 이 성전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고(신 12:5; 렘 7:14) 그의 백성 이스라엘과 후손과 영원히 함께 거주하겠다고 약속하신 곳입니다(시 78:68-69). 하나님의 처소에 대한 시인의 갈망이 얼마나 컸는지, 시인은 몸이 쇠약해질 정도로 하나님의 궁정을 고대한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궁정”은 성전의 ‘뜰’이라는 구체적인 장소를 가리킵니다. 이곳은 성전을 찾는 자들이 모이고 머물러 있는 장소로서, 하나님의 임재에 가까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이 점은 시편 65:4에서 ‘성전 뜰에 머무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택하여 가까이 오게 하신 자들’로 동일시한 데서도 잘 나타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처소나 그가 계신 곳의 뜰이 시인에게 사랑스럽고 소중한 이유는 그 건물이나 장소 자체 때문이 아니라 시인이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그곳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전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허상이 아니라 실제로 살아계신 분이며, 지금도 시인과 사랑의 교제를 지속하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마음과 육체를 다 쏟아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여기서 “부르짖다”는 원래 ‘기뻐 외치다’의 뜻으로 시인이 하나님께 즐거이 사랑의 말을 외치거나 기쁨의 찬양을 부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시 81:1). 이처럼 하나님의 임재에 가까이 가고픈 시인은 성전 제단에 제 집을 지은 참새나 새끼를 위해 둥지를 튼 제비를 떠올리며 부러운 마음을 표현합니다. 새들처럼 자유롭게 하나님 거처로 날아가 거기서 자기와 자녀의 거처를 마련하여 하나님 가까이 살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집에 사는 자들이 얼마나 행복한가!(‘복이 있나니’로 번역됨)”라고 외칩니다. 하나님 곁에 살며 늘 찬송하며 예배하기를 고대합니다(시 27:6).

한편, 시인은 1절에서 하나님을 “만군의 여호와”로 불렀고, 3절에서는 “만군의 여호와”, “나의 왕”, “나의 하나님”으로 부릅니다. ‘만군의 여호와’는 모든 군대의 하나님이란 뜻으로 천군천사를 거느리고 그 능력을 나타내는 군대 지휘관이자 용사를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의 능력을 함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왕’이란 표현은 시인이 하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모셨다는 점과 하나님의 택한 백성임을 암시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칭호에 “나의~”를 반복하는데 시인과 하나님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나타냅니다.

 

하나님께 힘을 얻는 자의 행복(5-7)

세상의 나라들은 흥망성쇠를 거듭하며 부흥하다 사라지기도 합니다. 세상이 점점 강성해지고 이스라엘이 약해져 성전이 무너질 때, 세상은 승리의 잔을 들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만군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성전으로 돌아가 예배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의 참된 모습입니다.

 

5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6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7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5-7)

 

하나님의 성전을 향한 사랑은 성전이 있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순례자들에게 나타납니다. 시인은 이들처럼 오직 하나님 안에서 힘을 얻고 마음에 하나님의 성전으로 향하는 대로를 품고 있는 자들에게 행복이 있다고 선언합니다. 이들은 4절의 성전에 사는 자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성전으로 가는 여정은 순탄치 않습니다. 하나님의 집 성전이 있는 시온이 예루살렘 동편의 산등성이로서, 그곳으로 가는 길에 험난한 산들과 짐승이나 강도 등 여러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그들의 길을 지키실 것이므로(시 121:1-8) 하나님만 의지하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눈물 골짜기를 지나갈 때라도 샘에서 물줄기를 내어줄 것이며 그들에게 이른 비를 복으로 덮어주실 것입니다(12). 이와 같은 축복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날 때 반석에서 물을 내주시고 그들의 40년 생활 동안 의식주를 해결해주신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기억나게 합니다. 한 걸음 한 걸음 하나님으로부터 얻은 힘을 의지하여 순례의 길을 걷는 자들은 곧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신들을 발견할 것입니다. 얼마나 행복합니까!

 

하나님의 기름 부은 자를 위한 간구(8-9)

세상의 일을 귀하게 여기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예배에 소홀한 성도들을 볼 때 참으로 답답합니다. 예배를 중요시하지 않는 자세는 곧 은혜의 통로를 스스로 막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을 간절히 사모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부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예배를 정검하고 사모하시길 바랍니다.

 

8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셀라) 9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께서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 보옵소서(8-9)

 

이제 시인은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자, 즉 왕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문맥상 이 간구가 느닷없이 들리긴 하지만, 왕에 대한 시인의 관심과 사랑을 보여 줌에는 틀림없습니다. 9절에 왕을 위한 시인의 기도로 나오는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는 원문에서 ‘우리의 방패’, ‘보소서’, ‘하나님’이란 단어들과 순서로 나옵니다. 이 단어들은 ‘우리의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보소서’ 또는 ‘하나님, 우리의 방패를 보소서’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방패로 비유하는 예가 종종 있고(삼하 22:3;시 7:10; 59:11), 11절에서도 방패로 부르므로 전자의 번역을 따라도 문제가 없습니다. 후자의 번역을 따른다면 방패는 뒤에 나오는 “주께서 기름 부으신 자”인 왕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편 89:19에서도 인간 왕을 방패로 호칭하고 있습니다. 한편, 왕의 얼굴을 살펴달라는 간구는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이 왕에게 임하기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의 행복(10-12)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들은 아무것도 부럽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마다 자신들이 하나님의 전이기에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릴 때만 성전 중심의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니라, 예배당을 나가서도 범사에 성전 중심,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사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10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11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12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10-12)

 

시인이 성전에 대한 그의 사랑을 반복하여 말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그의 사랑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는 ‘A가 B보다 낫다’는 형식을 두 번 이용하여 이 사랑을 표현합니다. 첫 번째로 시인은 하나님의 궁정에 있는 하루가 다른 곳에서 보내는 천 날보다 더 낫다고 고백합니다. 시편 27편에서도 유사하게 시인이 평생 하나님의 집에 살기를 갈망함을 밝히며, 이것이 자신의 유일한 기도 제목이라고 말합니다. 본 시편과 마찬가지로 27편에서도 시인이 성전에 거하기를 원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앙망하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사모하기 위함입니다. 두 번째 표현으로, 시인은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다고 말합니다. 이 설명은 첫째, 하나님의 성전을 악인의 장막과 대조함으로써 하나님께서 계신 곳에 악이나 죄가 있을 수 없음을 암시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성전에 오는 자는 깨끗하고 마음이 청결한 자여야 함(시 24:4)을 상기시킵니다. 둘째, 이 설명은 악인과 연루된 곳에서 안락을 추구하기보다는 고달프더라도 하나님의 성전에서 문지기로 있는 게 낫다는 말로 들립니다. 다만, 이때 ‘문지기’를 성전에서 일하는 공적 직책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문지기’는 하나님께 특별하게 선택받은 레위인들에게 맡겨진 직책 중 사무 보는 자, 관리, 재판관, 찬양단과 같은 직급의 하나로 소개되었기 때문입니다(대상 23:3-5). 한편 ‘문지기로 있는 것’은 ‘문지방에 누워있는 것’ 또는 ‘문지방에 서 있는 것’으로도 번역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의 의미를 문지기 직책을 감당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성전 출입의 허가를 얻기 위해 성전 입구에서 있거나 성전 문지방에 초라하게 자리하고 있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좋사오니”(10)의 ‘좋다’란 동사는 ‘선택하다’, ‘선호하다’라는 뜻으로 시인의 감정만이 아니라 결단과 의지도 함께 나타냅니다.

시인에게 있어 하나님께서는 “해”와 “방패”와 같습니다. 해는 하나님의 변치 않으심. 은혜, 구원, 호의 등을 의미합니다. 방패는 하나님의 보호, 도움, 힘 등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흠 없이 사는 자들에게나 흠 없이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에게 은혜와 영화 등 좋은 것을 망설임 없이 아낌없이 주실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가 얼마나 행복합니까! 시인은 그와 함께한 공동체가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격려하며 기도를 마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며, 하나님의 전을 가까이하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시인이 고백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않으실 것입니다. 성전에 올라와 예배드리면서 하나님을 만나고, 세상으로 나가서도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과 교제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중심, 성전 중심으로 살아가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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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83-01)

 


악한 자들의 어리석은 계획

시편 83편 1-18절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여러 비난과 조롱을 경험하게 됩니다. 시대와 지역에 따라 그 분위기와강도는 조금씩 다르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언제나 세상에 속한 자들로부터 핍박을 받으며 살아왔습니다. 시편 중에는 세상에서당하는 조롱과 고통에 대한 탄식 시가 많은데, 오늘 다룰 83편 역시 그중 하나입니다.

 

  • 본문은 이스라엘의 적들이 연합하여 그들을 멸망시키려는 음모를 꾸미는 상황에서, 시편 기자가 하나님께 침묵하지 말고 개입해 달라고 간구하는 내용입니다. 그는 과거 하나님이 미디안과 다른 적들을 물리친 승리를 상기시키며, 현재의 적들 또한 멸망시켜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 시는 하나님의 보호와 정의를 구하는 강력한 호소입니다.

 

하나님의 개입을 간구(1)

성도들은 항상 영적인 공격을 당하며 살아갑니다. 오히려 대적들이 없다면 우리는 치열하게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현실에 안주하거나 나태해졌을 것입니다. 나의 신앙을 공격하는 자들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하나님의 편에 서 있다는 사실을 확증해 줍니다. 그리스도인과 교회를 공격하는 자들은 곧 하나님의 원수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하나님께 부르짖되 결코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1하나님이여 침묵하지 마소서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시고 조용하지 마소서(1)

 

오늘 시인의 간구는 국가적 위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시의 내용(2-4절의 대적에 대한 설명, 6-8절의 대적의 목록)만으로 이 위기가 발생한 역사적 시점이나 구체적 상황을 추측하기는 어렵지만, 확실한 것은 이스라엘이 다수 이방 세력의 공격을 받을 위기에 처했다는 점입니다. 시인은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려는 때에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시므로 하나님께 관망하지 말고 적극 개입해주시기를 구합니다. “침묵하지 마소서”는 직역하면 ‘당신께 쉽이 없게 하소서’ 또는 ‘쉬지 마소서’로서 독특한 표현입니다. ‘심’이라는 단어는 1절 외에 오직 이사야 62장에서 파수꾼에게 쉬지말고 성을 지키라는 명령(사 62:6)과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세상에서 칭찬 받게 할 때까지 하나님께서 쉬지 못하시게 하라는 명령(사 62:7)에 유사한 상황으로 나옵니다. 이 모두를 고려해보면 1절의 ‘쉬지 마소서’라는 요청은 하나님의 빈틈없는 경계 태세 그리고 쉼 없는 개입을 통한 지속적이고 적극적인 보호를 바라는 요구임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잠잠하지 마시고 조용하지 마소서”란 요청은 하나님께서 더 이상 시인의 기도를 못 들은 척 무시하지 마시고, 그동안의 침묵을 깨고 이제는 행동을 개시하시라는 요구입니다.

 

원수들의 공모(2-4)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의 신앙을 공격하고 핍박하는 자들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 상황 속에서 다급하고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응답하시고 합당한 조치를 취하실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 더 가까이 설 때 하나님께서 우리 원수들을 상태해 주실 것입니다.

 

2무릇 주의 원수들이 떠들며 주를 미워하는 자들이 머리를 들었나이다 3그들이 주의 백성을 치려 하여 간계를 꾀하며 주께서 숨기신 자를 치려고 서로 의논하여 4말하기를 가서 그들을 멸하여 다시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여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다시는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하나이다(2-4)

 

시인은 하나님께서 잠잠하지 마셔야 하는 이유로서 이스라엘을 공격하려는 자들의 간계를 고발합니다. 시인은 2절 시작에서 “왜냐하면 보소서!”라고 외치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에 집중하시도록 주의를 끕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공격하려는 자들을 ‘하나님의 원수들’,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들’, ‘하나님의 백성을 대항하여 음모를 꾸미는 자들’로 정의함으로써 이들이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을 대항하는 무리일 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항하는 무리임을 밝힙니다. 동시에 이들이 지금 소란을 피우고 반역을 꾀하고 있음을 고발합니다. 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의 숨기신 자들’(또는 ‘하나님의 보배로운 자들’)로 칭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을 “나의 백성”(출 3:5)으로,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으며 “나의 보배로운 소유”(출 19:5)로 부르셨음을 상기시킵니다. 대적들은 하나님의 선민이자 언약의 백성을 진멸하려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사라지게 만들고 이스라엘이란 이름이 기억되지 못하게 하려는 간계를 공모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이름이 기억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이름도 기억되지 않을 것입니다. 시인이 대적들의 음모를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고발하는 주목적은 하나님께서 침묵을 깨고 행동을 개시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동맹 맺은 원수들(5-8)

선을 행하고 의를 이루는 데 마음을 합하고 하나 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반면 악을 행하고 죄를 짓는 데는 쉽게 연합합니다. 인간의 오만함은 불가능한 일을 이루어 내겠다고 큰소리를 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이런 오만함에 빠지게 마련입니다. 성도들은 세상 속에서 선한 영향을 끼치고 의의 길로 사람들을 이끌어야 합니다.

 

5그들이 한마음으로 의논하고 주를 대적하여 서로 동맹하니 6곧 에돔의 장막과 이스마엘인과 모압과 하갈인이며 7그발과 암몬과 아말렉이며 블레셋과 두로 사람이요 8앗수르도 그들과 연합하여 롯 자손의 도움이 되었나이다(셀라)(5-8)

 

시인은 ‘하나님을 대항하여’ 동맹을 맺고 의기투합한 대적들의 명단을 내놓습니다. 이 명단은 대적이 사는 지역 또는 족속의 이름을 열거한 것으로, 에돔을 시작으로 열 족속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사방에 자리 잡은 이방 민족들로서 이스라엘 역사에 자주 원수로 등장합니다. 그들 중에는 아브라함과 관련된 ‘이스마엘인’과 ‘하갈인’, 이삭의 아들 에서의 속인 ‘에돔’에서의 자손으로 추정되는 ‘아말렉’(창 36:12,16), 롯의 자손인 ‘모압’과 ‘암몬’과 같이 이스라엘의 형제로서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족속이 있습니다. 지역적으로 에돔, 모압, 암몬은 요단 동쪽에 위치했으며, 이스마엘인은 이스라엘 남부에 사는 대상 미디안인(창 37:27,36; 삿 8:22-24)으로, 하갈인은 요단의 북동쪽에 사는 유목민(대상 5:10,18이하)으로, 아말렉은 이스라엘 남부의 유목민으로 추정됩니다. 나머지 지역 및 족속 중 ‘그발’은 에돔 근처 또는 두로 근처 도시로 추정되며, 블레셋인은 이스라엘 남서부의 해양 민족, 두로는 이스라엘 북쪽 지중해 해안의 페니키아 도시이며, 앗수르는 티그리스 상류에 있는 도시나 앗수르 왕국으로 추측됩니다. 특히 8절에서 시인은 앗수르가 연합군이 되어 롯 자손인 모압과 암몬의 군사력에 힘을 더했다고 설명을 덧붙여 5절의 동맹을 뒷받침합니다.

이와 같이 대적들의 음모를 고발(2-4)한 데 이어 대적들의 정체를 밝힘(5-8)으로써 시인은 첫째, 이 나라들이 하나님을 대항하여 한마음으로 단호하게 뭉쳤음을 강조합니다. 둘째, 하나님과 그의 백성을 대적하여 일어난 나라들이 숫자나 군사력에서 이스라엘을 압도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셋째, 이스라엘 백성의 안위만이 아니라 국가의 존속성이 위협받는 위태로운 상황임을 암시합니다. 넷째, 이런 시점에서 이스라엘과 연합하여 도움을 줄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심을 시사합니다. 다섯째, 하나님께서 속히 결단하시고 이스라엘을 위해 나서주시길 바랍니다.

 

원수들을 심판하셨던 하나님(9-12)

사람들은 과거에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한 사람은 그 경험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또 다른 역사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유한함과 뿌리 깊은 죄성이 빚어 내는 고통에 직면할 때마다, 아주 중요한 선택의 고비에 성 때마다 믿는 이들은 하나님께서 기도합니다. 신원하신 하나님을 의지할 때 우리는 원수들 앞에서도 절망하지 않을 그러므로 수 있습니다.

 

9주는 미디안인에게 행하신 것 같이, 기손 시내에서 시스라와 야빈에게 행하신 것 같이 그들에게도 행하소서 10그들은 엔돌에서 패망하여 땅에 거름이 되었나이다 11그들의 귀인들이 오렙과 스엡 같게 하시며 그들의 모든 고관들은 세바와 살문나와 같게 하소서 12그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의 목장을 우리의 소유로 취하자 하였나이다(9-12)

 

하나님의 개입을 촉구하기 위해 이제 시인은 “그들에게 행하소서”라고 간청하며 과거 사사 시대에 하나님이 물리쳐주셨던 이스라엘의 여러 대적과 사건들을 언급합니다. 한 예는 미디안과 전쟁을 벌인 기드온 때 일어난 일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에게 천사와 꿈을 통해 여러 번 나타나 용기와 승리의 확신을 주시고, 전략을 일러주시고 기적을 베푸셨으며, 전쟁의 승리가 오로지 하나님의 덕분임을 이스라엘로 깨닫게 하기 위해 기드온과 단지 삼백 용사만을 통해 미디안 군대를 물리치셨습니다(삿 6-8장). 이때 미디안의 방백 오렙과 스엡, 미디안 왕 세바와 살문나는 도망가다 사로잡혀 죽임을 당했습니다(삿 7:25; 8:21). 시인은 이들이 감히 ‘하나님의 목장’인 이스라엘 땅을 자기들의 소유로 취하려 했다고 설명합니다(12). ‘소유로 취하자’는 계획은 땅을 빼앗아 후손에게까지 유산으로 물려주려는 의도가 함축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계획을 무산시키고 미디안의 손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건져내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삿 7:9; 8:34). 또 다른 예는 드보라와 바락의 시대에 가나안의 학대를 받고 있던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구하신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드보라에게 이미 승리의 확신과 전략을 주셨고, 기손 강에서 드보라와 바락의 군대로 시스라 군대를 쳐서 패하게 하셨고, 가나안 장군 시스라를 여인 야엘의 손에 죽게 하셨으며, 가나안 왕 야빈도 결국 진멸하게 하셨습니다(삿 4-5장). 이에 드보라와 바락은 하나님께서 직접 나서서 전쟁에 승리를 주셨다고 찬양했습니다(삿 5:4-5). 시인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이스라엘의 수많은 대적을 물리치시고 심판하셨듯이 이스라엘 사방에 있는 수많은 대적을 무찔러 심판하시기를 거듭 간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간구(13-18)

대적들에 대한 심판의 궁극적인 목적을 바르게 설정합니다. 그것은 만민이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 대적들이 주의 이름을 찾고 여호와 하나님만이 온 세계의 지존자임을 선포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기 위해서는 기도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기도의 응답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13나의 하나님이여 그들이 굴러가는 검불 같게 하시며 바람에 날리는 지푸라기 같게 하소서 14삼림을 사르는 불과 산에 붙는 불길 같이 15주의 광풍으로 그들을 쫓으시며 주의 폭풍으로 그들을 두렵게 하소서 16여호와여 그들의 얼굴에 수치가 가득하게 하사 그들이 주의 이름을 찾게 하소서 17그들로 수치를 당하여 영원히 놀라게 하시며 낭패와 멸망을 당하게 하사 18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13-18)

 

시인은 더 적극적으로 대적들을 향한 심판을 간구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과거에 보여주신 놀라운 능력으로 현재 대적들을 바람 앞에 흩날리는 잡초같이 되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불길이 산을 사르듯이 광풍으로 그들을 뒤쫓고 폭풍으로 두렵게 하시길 간구합니다. 여기서 불, 광풍, 폭풍 등은 하나님의 강림과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상징합니다. 덧붙여, 시인은 대적들이 공모한 계략(2-5)이 다 실패하여 승리와 기름 대신 수치와 놀람과 낭패와 멸망을 맛보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또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보고 대적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이름을 찾게 해달라고 간청합니다. 시인의 마지막 간구는 이런 심판을 통하여 그들이 제대로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방의 대적들은 이스라엘을 멸하여 그 이름이 소멸되기를 바랐지만(4),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을 멸하고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실 때,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뿐 아니라 온 세상의 지존자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가운데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지키며 분투하는 이유는 온 세상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인정하게 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전하다가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당신의 영광을 온 땅에 드러내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늘 세상과 갈등을 빚으며 살아가게 마련이지만, 주님을 붙잡으면 두려움을 극복하고 승리할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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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82-01)

 


정의롭게 재판장이신 하나님

시편 82편 1-8절


 

누구나 공의로운 세상을 꿈꿉니다. 하지만 세상은 공의롭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가난하고 힘이 없는 사람들은 도움을 받지 못하는 반면,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은 인맥과 뇌물을 이용해 법망을 빠져나갑니다. 공의는 인류가 풀어야 할 중요한 과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공의로운 세상이 속히 오기를 바라며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 온 세상의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신들을 소집하여 천상의 재판을 주재하시고, 그들의 불의를 심판하십니다. 하나님만이 진정한 신이며 온 나라를 심판할 우주적 재판장이십니다.

 

재판장이신 하나님(1)

재판이 무너진 것은 공의가 무너진 것입니다.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뇌물과 지위를 따라 재판하게 됨에 따라 나라를 엉망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재판의 권세를 사람의 뜻에 따라 행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일입니다. 이런 일을 행하는 삶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1하나님은 신들의 모임 가운데에 서시며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에서 재판하시느니라(1)

 

시편 82편은 천상에서 벌어지는 재판 과정을 묘사하고 있는 독특한 시편입니다. 마치 열왕기상 22:19-22에서 미가야가 설명하듯 하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서 천사들과 회의하는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시입니다. 이런 천상의 회의가 독자의 궁금증을 끌지만, 시 전체에서 중점을 두고 확실하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온 우주의 유일한 신이며 심판자라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심판자/재판장이라는 점은 1절에 명시되었으며 시편 전체에서 암시되었습니다. 1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신의 모임에 ‘서신’ 분으로 언급되었습니다. 이 장면은 하늘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시 2:4: 왕상 22:19)과 대조적인 장면으로 보이지만, 보좌에 앉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왕임을 나타내는 것처럼 하늘 법정에 서신 하나님께서는 지금 벌어질 재판을 최종 판결하는 대재판장 지위에 있으며, 판결을 위해 자리하였음을 나타냅니다. 1절 하반절의 ‘하나님이 신들 가운데서 재판하신다’는 설명도 같은 맥락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재한 이 모임은 ‘신들’의 법정 회합으로 소개되었습니다. 여기서 ‘신들’이란 명칭은 천사, 인간 왕이나 재판관, 우상신 무리를 지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특히 1절과 6-8절을 고려해 볼 때 ‘신들’을 ‘우상신들’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절해 보입니다. 이 모임이 천상에서 이루어졌으므로(1) 인간 왕이나 재판관을 제외시키며, 신들은 ‘지존자의 아들 같아 보이나 결국 인간과 마찬가지’라는 설명(6-7)과 하나님만이 온 세상의 왕이자 심판자라는 선언(8) 또한 이 점을 뒷받침합니다.

 

신들의 불의를 고발(2-7)

악인의 낯을 보아주고 그들에게 죄가 없다고 판결하기 시작했고, 의인들은 오히려 형벌과 핍박을 받았습니다. 재판이 무너진 것은 곧 공의가 무너진 것입니다.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뇌물과 지위를 따래 재판하게 됨에 따라 나라는 엉망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게서 부여하신 재판의 권세를 사람의 뜻에 따라 행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마워하시는 일입니다.

 

2너희가 불공평한 판단을 하며 악인의 낯 보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셀라) 3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지며 4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여 악인들의 손에서 건질지니라 하시는도다 5그들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여 흑암 중에 왕래하니 땅의 모든 터가 흔들리도다 6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7그러나 너희는 사람처럼 죽으며 고관의 하나 같이 넘어지리로다(2-7)

 

앞에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신들을 소집해 그들을 꾸짖으시는 모습을 그렸지만, 실제로 다른 신들이 존재한다고 믿지는 않았음이 바로 5절 이후에서 드러납니다. 그들은 알지도, 깨닫지도 못하는 존재입니다.

 

(1) 신들에 대한 심문(2)

 

신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문이 공개되었습니다: “언제까지 불의하게 재판하고 악인들의 낯들을 봐줄 것인가?”이 질문은 “언제까지 불의한 자를 변호하고 악인들의 낯들을 봐줄 것인가?”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판단하다”에 해당하는 동사(샤파트)가 ‘변호하다’의 뜻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동사는 본 시편에 네 번(1,2,3,8) 각기 다르게 번역되었으므로 문맥에 따라 가능하고 적절한 의미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여기서 어떤 번역을 택하든 하나님의 질문은 다 신들의 불의한 재판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불의한 재판이란 ‘악인들의 낯을 올려주는 행위’(2)이며, 그들의 죄를 봐주는 등 악인들에게 유리한 재판을 하는 행태로 설명되었습니다.

 

(2) 하나님이 원하시는 정의의 통치(3-4)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다스림의 근본은 ‘정의’에 있습니다. 성경에서 제시하는 정의와 불의의 개념은 사전이나 세상에서 설명하는 개념과 달리 여호와 경외의 여부로 판단합니다(잠 8:13). 또한 여호와 경외는 말씀에 대한 순종과 연결됩니다. 이는 ‘의’를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는 것’이라고 정의한 신명기 6:25에서 잘 나타납니다.

이런 하나님의 정의(正義)는 특히 사회의 약자들 사이에 가장 필요합니다. 성경에서 약자로 소개되는 자들은 ‘고아’, ‘과부’, ‘나그네’ 무리입니다(신 10:17-19). 본 시에서는 소외된 무리를 여섯 번 언급하였습니다(‘가난한 자’, ‘고아’, ‘곤란한 자’, ‘빈궁한 자’, ‘가난한 자’, ‘궁핍한자’). 여기서 ‘가난한 자’가 대부분 이어서 마치 사회의 약자를 ‘물질적으로 어려움을 당하는 자’로 지칭하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란 경제적인 것을 포함하여 사회적, 지식적, 정신적, 육체적 도움이 필요한 자를 일컫습니다. 또한 이들 중에서도 하나님의 정의로 돌봐야 할 대상은 ‘불의로 피해를 입은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변호하고, 공의를 베풀고, 구하고, 건지라고 명하십니다(3-4). 악인들에게 유리한 재판은 결국 약자들에게 불리한 재판이므로 약자들을 공평하게 변호해야 합니다. 악인들의 악행으로 곤란을 당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정의를 획득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세상의 신들이 존재한다면 그들은 바로 이런 부분에 관심과 책임을 갖고 정의를 실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신들은 이와 같은 정의로운 다스림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않았고, 부당하게 억압받는 약자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2). 신들은 세상을 통치할 자격이 없습니다.

 

(3) 불의의 통치의 결과(5)

 

세상의 신들의 불의와 무책임한 통치는 세상의 모든 기본 질서를 흔들리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는 신들의 불의와 무책임이 그들의 무지에서 비롯되었고, 이것이 그들을 흑암으로 몰아넣었다고 밝히십니다. 여기서 “알지 못하다”나 “흑암 중에 다니다”라는 표현은 특히 잠언에서 여호와와 아무 관계도 없는 미련한 자들, 악한 자들을 설명할 때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미련하고 악한 자들은 하나님 말씀을 맘에 두지 않고 악을 행하는 데만 집중하므로(잠 4:16) 공의를 알지 못하고(잠 28:5). 마음이 어두워져 그들이 도덕적, 영적 암흑 속에 빠졌음을 깨닫지 못하여(사 44:18), 결국 자기 죄에 실족하고 맙니다(잠 4:19). 하나님께서는 물질적인 땅의 기초를 정하셨을 뿐 아니라(잠 8:29), 그의 정의로 사회적, 도덕적, 영적 통치 질서의 기초를 세우셨지만, 신들은 이 질서를 무너뜨리고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시 11:3).

 

(4) 신들에 대한 판결(6-7)

 

이제 신들이 저지른 불의의 통치와 통치 질서를 무너뜨린 죄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이 내려집니다(6-7). 이때 6절에 인칭대명사 “내(하나님)가”가 문장 맨 앞에 나와 강조되었는데, 이것은 이 판결을 내리는 주체가 인간 재판장이나 하찮은 신들이 아니라, 온 세상의 대재판장이신 ‘하나님’임을 강조해줍니다. 정의롭고 엄격한 재판을 통해 피고들에게 형을 내릴 하나님의 재판장 지위와 권위가 부각 되었고, 그의 판결의 정확함과 엄중함이 암시되었습니다. 신들을 향한 판결로 하나님께서는 신들의 실체를 밝히고 죽음을 선고하십니다. 신들은 신적 존재이며 가나안 신화에 나오는 지존자 엘룐의 아들들, 즉 신적 권위를 지니고 있는 불멸의 존재로 사람들에게 알려졌고 추앙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실체가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인간과 같은 존재임을 천명하십니다. 사람이라면 평범한 자나 고위 관직에 있는 자나 다 죽을 운명에 놓이듯 신들도 똑같은 처지라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의 잘못된 인식이나 잘못된 믿음과 상관없이 그들이 섬기는 신들은 거짓이며 허상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이 신들을 “허무한 것”(렘 18:15), “허탄한 거짓”(시 31:6), “거짓된 것”(욘 2:8)으로 부른 것은 아주 적절합니다.

 

세상의 재판장이신 하나님(8)

우리는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돈이나 권력, 명예 등은 결국 모두 무너질 것이며, 오직 하나님만이 이 세상을 소유하시고, 다스리고 계심을 선포해야 합니다. 지금 이 세상은 돈이나 정치권력이 아니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십니다.

 

8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세상을 심판하소서 모든 나라가 주의 소유이기 때문이니이다(8)

 

허탄한 신들이 세상을 어지럽힌다 해도 세상을 정의롭게 심판할 자격이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신들의 실체가 거짓과 허망한 것으로 밝혀졌고 하나님만이 우주의 참 신이시며 참된 재판장임이 재확증 되었으므로, 시인은 하나님께서 심판을 개시하실 것을 고대하며 간구합니다. 각 나라들은 헛된 신들을 참 신으로 여겼으나, 실상은 하나님께서 이미 세상 모든 나라의 주인이며 자신의 기업으로 소유하셨습니다. 종말에도 하나님께서는 세계 온 나라를 자신의 기업으로 소유하실 것이므로 하나님의 정의로운 통치와 심판은 우주적 통치와 심판이 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과 통치로 하나님 나라의 근간이 확고히 설 것입니다.


사람들은 돈과 명예와 권력을 위해 그들 나름의 신전에서 우상을 섬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이 주님의 뜻에 의해 통치되고 있음을 그들에게 알려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온 땅을 다스리신다는 진리를 확신하며,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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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81-01)


내 백성아 내 말을 들으라

시편 81편 1-16절


 

우리가 후회가 남지 않는 삶을 사는 비결이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귀를 기울이고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은 우리의 미래를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것을 너무 늦게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후회할 일이 생기고 난 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껄하면서 후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절기에 시인과 공동체는 함께 모여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과거의 돌보심에 감사하며 순종에 대한 명령을 확고히 합니다.

 

절기를 맞아 하나님을 찬양(1-5)

신앙은 오직 하나님이 나의 힘이요 능력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나의 힘인 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으로 당연히 우리의 심령에서 일어나는 영적 반응은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가능성을 두면 둘수록 그는 그 가능성을 자신에게 두는 것만큼 하나님에게 집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듣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1우리의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기쁘게 노래하며 야곱의 하나님을 향하여 즐거이 소리칠지어다 2시를 읊으며 소고를 치고 아름다운 수금에 비파를 아우를지어다 3초하루와 보름과 우리의 명절에 나팔을 불지어다 4이는 이스라엘의 율례요 야곱의 하나님의 규례로다 5하나님이 애굽 땅을 치러 나아가시던 때에 요셉의 족속 중에 이를 증거로 세우셨도다 거기서 내가 알지 못하던 말씀을 들었나니(1-5)

 

시인은 백성들을 찬양으로 초대합니다. 시를 읊고, 소고와 수금과 비파로 찬양하자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애굽 땅을 치고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실 때에 규례로 정해주신 날에 모여 찬양하자고 합니다. 찬양은 감사고 기억입니다. 자기 정체성에 대한 확인이요 그 근원에 대한 고백입니다.

 

(1) 절기에 하나님 찬양(1-3)

 

시인은 공동체와 함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능력’이 되신 분, 즉 이스라엘에게 그의 능력을 보여주신 분입니다. 그분은 “야곱의 하나님”(1), 즉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께 그의 백성이 즐겁게, 다양한 방법으로 찬양을 드림이 마땅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방법으로는 목소리로 곡조 있는 노래를 부르거나, 즐거이 소리를 외치기도 하고, 소고와 같은 타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같은 현악기 등을 연주할 수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는 특히 하나님께서 정하신 절기를 맞아 축하하고 감사하기 위함입니다. 3절의 “초하루”와 “보름”은 각각 새 달, 보름에 해당하는 이스라엘의 ‘절기’를 가리킵니다. 특히 나팔을 부는 절기는 ‘나팔절’로 불리는(레 23:24; 민 29:1), 새 해를 알리는 날(티쉬리[7월; 양력 9-10월] 1일)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7월 10일의 속죄일과 7월 15일의 장막절이 그 뒤를 따릅니다(민 29장). 3절의 절기들은 새해를 맞이하고(나팔절), 하나님의 성소와 이스라엘 전체의 죄를 속죄하고(속죄일), 광야 시절에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감사하는(장막절) 데 의미를 둡니다.

 

(2) 절기를 정하신 하나님(4-5a)

 

절기를 지키는 이유는 절기가 “이스라엘의 율례”이자 “야곱의 하나님의 규례”이기 때문입니다(4). 여기에는 절기를 명령하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점, 절기는 백성의 의무라는 점, 절기를 지킴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임이 선포된다는 점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세 명절은 3절에 소개된 ‘장막절’ 외에 ‘유월절’과 ‘오순절’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23:14-17에 소개된 이 세 절기는 나머지 모세의 율법(레위기 23장:민수기 28-29장:신명기 16장)에 반복될 만큼 중요합니다. 절기는 근본적으로 안식일에서 유래하였습니다(레 23:2-3). 안식일은 다른 날과 구별된 날로서 일을 금하고 각처에서 성회로 모이는 등 거룩하게 보내야 했습니다(창 2:3). 이날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기로 약속하신 날입니다(창 2:3). 각절기에 백성은 다른 일을 삼가고, 거룩한 모임으로 모여.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예배 장소에서 하나님께 예물을 드려야 했습니다. 각 절기는 추수 때와 맞물리므로 하나님께 바칠 예물이 충분히 준비되었습니다. 절기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와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요셉의 때에 애굽을 치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일의 증거로 삼기 위해 제정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애굽과 광야에서의 돌보심(5b-7)

 

신앙의 싸움은 ‘누가 나의 힘인가’의 싸움입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이 일을 주지시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 군대의 추적과 홍해 앞에서 절대 절명의 위기에 놓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만히 서서 보기만 하라고 하십니다(출 14:13). 무엇이라도 해야만 하는 그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이스라엘의 능력임을 가르치십니다.

 

6이르시되 내가 그의 어깨에서 짐을 벗기고 그의 손에서 광주리를 놓게 하였도다 7네가 고난 중에 부르짖으매 내가 너를 건졌고 우렛소리의 은밀한 곳에서 네게 응답하며 므리바 물 가에서 너를 시험하였도다(셀라) 8내 백성이여 들으라 내가 네게 증언하리라 이스라엘이여 내게 듣기를 원하노라 9너희 중에 다른 신을 두지 말며 이방 신에게 절하지 말지어다 10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였으나 11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12그러므로 내가 그의 마음을 완악한 대로 버려 두어 그의 임의대로 행하게 하였도다 13내 백성아 내 말을 들으라 이스라엘아 내 도를 따르라 14그리하면 내가 속히 그들의 원수를 누르고 내 손을 돌려 그들의 대적들을 치리니 15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는 그에게 복종하는 체할지라도 그들의 시대는 영원히 계속되리라 16또 내가 기름진 밀을 그들에게 먹이며 반석에서 나오는 꿀로 너를 만족하게 하리라 하셨도다(5b-16)

 

구원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습니다. 고난 중에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바로의 고역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셨습니다. 어깨의 짐을 손에 있는 광주리를 놓게 하셨습니다. 그들의 믿음을 확인하시고 또 믿음을 심으시려고 결핍과 위험이 도사리는 불임의 땅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광야 같은 인생길에서 주의 음성을 청종하는 이들을 지금도 창조하고 계십니다.

 

(1) 애굽와 광야에서의 돌보심(5b-7)

 

절기에 백성의 찬송에 덧붙여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됩니다. “내가 알지 못하던 말씀”은 6-16절의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내용을 가리킬 것입니다. 첫 말씀은 하나님께서 과거 애굽과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돌보심에 대한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어깨에 놓인 짐과 손의 광주리를 놓게 하셨다(6)는 말은 애굽에서 강제 노역을 하며 고난 받던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해방시키셨다는 뜻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탄식과 부르짖음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기도를 듣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세운 언약을 기억하셨습니다(출 2:24). 우렛소리의 은밀한 곳에서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7)는 말은 아마도 시내산에서 나타나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은 사건을 상기시킵니다. 므리바 물가(7)는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후 물이 없자 하나님을 원망했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반석에서 물을 얻게 하신 곳입니다(출 17:1-7). 이스라엘은 이 일로 서로 다투고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하시는지에 대해 하나님을 시험했습니다(출 17:7). 그러나 본 시편에서는 이 사건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시험하신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이 뜻은 신명기 8:2에서 설명하듯, 하나님께서는 광야 길에서 이스라엘을 낮추고 그들의 진정한 마음을 살피고 하나님 명령에 순종하는지의 여부를 시험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종살이에서 이스라엘을 구하고 광야로 이끄시는 내내 자기 백성 이스라엘의 요구를 들어주시며 그들을 아들처럼 돌봐주셨습니다(신 8:5-6).

 

(2) 하나님의 말씀: 순종의 명령(8-10)

 

둘째로 소개된 하나님의 말씀은 이스라엘을 향한 순종의 명령입니다. 앞의 므리바 사건이 하나님의 돌보심을 표명하면서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에, 순종의 명령이 적절하게 연결됩니다. 이 명령은 하나님의 증언이자 경고입니다. “들으라 내 백성이여”(8)는 신명기 6:4 이하 내용입니다. 신명기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하나님께서 오직 한 분이심을 확실히 알고, 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순종해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이와 유사하게, 본 시에서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십계명의 첫 계명인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와 둘째 계명인 ‘우상에게 절하지 말라’를 예로 언급하십니다. 이는 하나님 순종에 있어 무엇보다 하나님에 대한 명확한 인지와 하나님께 온전한 섬김과 헌신이 요구됨을 명시합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다”(10)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에 암시되었습니다(출 19:4). 또한 이는 십계명 선포 직전에 선언된 말(출 20:2)이며, 이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에 덧붙여 자주 나타난 문장(레 11:45;22:33; 민 15:41)입니다. 이 문장은 이스라엘이 언약을 맺는 대상이 애굽에서 그들을 구원한 능력의 하나님이심을 확인시킵니다. 이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그의 백성이 요구할 때 그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입니다.

 

(3) 하나님의 말씀: 이스라엘의 불순종(11-12)

 

셋째로 소개된 말씀은 하나님께서 돌보셨는데도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불순종했다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은 이미 7절의 므리바 사건에 암시되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런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반역이 강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인 행동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목소리를 무시했으며 하나님을 기꺼이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완악하고 고집스러웠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살지 않고 자기들 계획대로 행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의 마음을 그대로 두었다는 말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하나님 탓으로 돌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마치 애굽의 왕 바로의 완고한 마음을 하나님께서 간섭하지 않고 내버려두어 그 결과로 바로가 마땅한 심판을 받게 되었듯이(출 10:2), 이스라엘의 제멋대로 하려는 의지를 꺾지 않고 두심으로써 그들이 마땅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을 암시합니다(겔 18, 33장: 렘 31:29-30)

 

(4) 하나님의 말씀: 순종의 명령과 축복의 약속(13-16)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다시금 이스라엘의 순종을 요구하시며 이에 따른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내 백성”이란 칭호가 반복되면서(8,11,13)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직접 선택하신 언약 백성임이 강조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이 그의 말을 듣고 행하기만 하면 그들을 괴롭히는 대적들을 속히 제압하실 준비를 이미 갖추셨습니다. 설령 하나님을 미워하는 이 대적들이 순종을 가장합니다 하더라도 그들이 받을 심판의 시간은 영원할 것입니다. 반면,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기름진 밀과 반석의 꿀로 그들을 만족하게 하실 것입니다(16). 이 증언은 과거 이스라엘을 돌보셨던 하나님(6-7)을 다시금 상기시킵니다. 순종하는 백성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축복은 그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한없는 은혜와 사랑을 나타내줍니다.


우리 삶에 참 다양하고, 복잡한 문제가 많이 있을 줄 압니다. 예배가 전부는 아니지만, 예배부터 회복되어야 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예배를 통해 우리의 시선을 하늘로 향할 때 우리 어깨의 짐과 손에 든 광주리를 놓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금 구원의 은혜와 체험의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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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80-01)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간구

시편 80편 1-19절


 

어늘해진 기억을 더듬어 방치된 기억 상자를 열었습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는 백성일지라도, 오래된 하나님에 대한 기억이 참츰 채색되더니 곧추세워졌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기억의 반대편에 있어서 아픕니다. 기억 속 주님만이 회복의 열쇠입니다.

 

 

  • 하나님께서 직접 돌보신 포도나무 같은 이스라엘이 멸망하였습니다. 시인은 전사이신 만군의 하나님께서 선두에 나서서 이스라엘의 원수를 물리치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를 간구합니다.

 

하나님의 호의와 구원을 간구(1-3)

역사적으로 왕의 상징은 주로 칼이었으며, 왕의 주된 의무는 전쟁에서의 승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 왕의 역할은 목자로서 어리석은 백성이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지도하며, 강한 자들 사이에서 약한 다들을 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얼굴빝, 임재가 사라진다는 것은 죽음보다 더 깊은 절망입니다.

 

1요셉을 양 떼 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귀를 기울이소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여 빛을 비추소서 2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앞에서 주의 능력을 나타내사 우리를 구원하러 오소서 3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빛을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1-3)

 

시인은 “이스라엘의 목자”이신 하나님께 이스라엘의 구원을 간청합니다. 이 목자는 ‘양 떼를 모는 목자’, 즉 시편 23편에 묘사된 선한 목자의 모습입니다. 목자는 양을 초장과 물가로 몰고 가 그들을 배불리고 편히 쉬게 해주며, 짐승과 위험한 곳의 위협으로부터 양을 보호하여 안전을 누리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선한 목자로서 이스라엘을 몰아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시기를 시인은 소망합니다. 또한 이 목자는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입니다. 그룹은 성막의 지성소에 놓인 법궤 위의 천사들(출 25:17-21)이며, 이 천사들이 있는 곳에 “좌정하신”이란 표현은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을 상징합니다. 출애굽 후 광야를 지나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하나님의 법궤가 선두에서 행진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앞서 행하며 장막 칠 곳을 찾고, 불과 구름 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셨습니다(민 10:33; 신 1:33).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신 31:8)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나 요단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갈 때도 하나님의 법궤가 이스라엘 앞에서 행진하며 백성을 인도하였습니다(수 3:6,11-17). 시인은 이같이 목자의 비유와 법궤의 상징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동행과 인도가 시인과 공동체에게도 여전하기를 호소합니다.

시인은 구원의 대상으로서 ‘이스라엘’을 언급하는데, 특히 “요셉”(1)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양으로 지목함으로써 북이스라엘에 초점을 둡니다. 2절에서 요셉의 아들들이자 북이스라엘의 대표 지파인 “에브라임과 므낫세”와 남북 분열 후 북이스라엘 영토의 일부가 된 “베냐민”을 예로 든 점 또한 이를 뒷받침합니다. 이 세 지파는 모두 야곱과 라헬의 자손이며, 출애굽 후 광야에서 같은 서쪽 진영에 머문 지파입니다(민 2:18-24).

하나님께 드리는 구원의 기도는 첫째, 그의 관심과 호의를 가져달라는 비유적인 표현(“귀를 기울이소서”, “빛을 비추소서”)으로 시작됩니다(1). 하나님께 간구하는 백성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집중해주시고, 이스라엘에게 얼굴빛을 비추는 호의를 약속하셨던 그 약속(민 6:25)을 지금 그의 백성에게 이루어주시기를 바라는 요구입니다. 둘째,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통한 구원을 구합니다(2). 특히, “주의 능력을 나타내소서”라는 외침에서 ‘나타내다’(2)에 해당하는 동사는 ‘휘저어 일으키다’, ‘깨우다’, ‘선동하다’의 뜻이므로, 이 간구는 소용돌이가 솟구쳐 오르듯 하나님께서 그의 힘을 휘저어 일으켜 이스라엘을 위해 행동을 개시해주시라는 강렬하고 적극적인 요구입니다. 이에 덧붙여, “우리를 구원하러 오소서”(2)라는 외침은 하나님께서 전쟁의 용사로 나서서 이스라엘의 선두에서 전투를 이끌어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가져다주시라는 구체적인 요청입니다. 3절의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당신의 얼굴을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라는 간구는 7철과 19절에도 나와 후렴구를 이룹니다. 첫째 간구에서 시인이 언급한 ‘회복’ 또는 ‘돌이키심’은 구체적으로 포로로부터의 회복인지, 땅의 회복인지, 언약의 회복인지 알기 어렵지만, 문맥상 ‘구원’과 밀접한 내용임에 틀림없습니다. 둘째 간구인 ‘당신의 얼굴을 비추소서’에서 하나님꼐서 얼굴을 어떤 대상에게 비추는 행동(시 4:6; 31:17; 67:1; 민 6:25)은 그 대상에게 관심과 호의를 품으심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관심과 호의는 구체적으로 이스라엘을 원수한테서 구원하는 것을 뜻합니다. 셋째,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는 앞의 두 간구의 궁극적 목적지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있음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간구(4-7)

죄인된 모습을 보신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장 떠나가셔도 할 말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의지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하나님과 함께 있고 싶어 하는 마음, 그것이 바로 성도가 가져야 할 합당한 마음입니다.

 

4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백성의 기도에 대하여 어느 때까지 노하시리이까 5주께서 그들에게 눈물의 양식을 먹이시며 많은 눈물을 마시게 하셨나이다 6우리를 우리 이웃에게 다툼 거리가 되게 하시니 우리 원수들이 서로 비웃나이다 7만군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회복하여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4-7)

 

시인은 이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쏟으신 분노에 애통하며 용서를 구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로 호칭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할 능력자임을 드러내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할 전쟁의 용사로 나서서 싸워주시기를 원하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현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죄에 대해 분노하셨고, 그의 정의로 이스라엘을 심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의 기도에 대해 노하신다(4)는 표현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아직 그치지 않았음을 뜻합니다. “어느 때까지 노하시리이까”(4)라는 물음은 하나님의 진노 대신 긍휼로 백성의 기도에 응답하시기를 재촉하는 시인의 절규입니다. 그의 양 떼에게 분노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눈물의 빵을 먹고 많은 눈물을 마시게 하셨습니다. 이런 현실은 과거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이끄셨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하늘로부터 빵을 내려 먹이시고 굳은 반석에서 물을 내어 마시게 하신 것과 대조적입니다. 이때 이스라엘이 놀라움과 감사의 양식과 물을 먹을 수 있었던 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였고, 계속 하나님만 의지하는 법을 익히게 하시려는 배려였습니다(신 8:15-16).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런 하나님의 은혜와 가르침을 잊고 말씀을 거역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섰으며, 그에 마땅한 심판으로서 고통과 눈물의 양식을 먹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이런 상황은 이방 원수들로부터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시 79:4,10). 시인이 이스라엘이 겪는 내, 외부적 고통을 언급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원망이나 하소연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받는 심판은 마땅하지만 이스라엘을 용서하시고 긍휼을 베풀어주시기를 간청하려는 의도입니다.

 

하나님이 심고 가꾸신 포도나무(8-13)

하나님의 교회가 불미스러운 일로 세상 사람들에게 비난을 듣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가 이 지경에 이르렀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에 이런 일을 자주 있었습니다. 전반적인 이유는 그 공동체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보호에서 떠났기 때문에, 세상의 무차별적인 공격을 받은 것입니다.

 

8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나이다 9주께서 그 앞서 가꾸셨으므로 그 뿌리가 깊이 박혀서 땅에 가득하며 10그 그늘이 산들을 가리고 그 가지는 하나님의 백향목 같으며 11그 가지가 바다까지 뻗고 넝쿨이 강까지 미쳤거늘 12주께서 어찌하여 그 담을 허시사 길을 지나가는 모든 이들이 그것을 따게 하셨나이까 13숲 속의 멧돼지들이 상해하며 들짐승들이 먹나이다(8-13)

 

시인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여 친히 돌보셨음을 회고하며 구원을 재촉합니다. 이 단락에서 언급한 역사적 시기는 출애굽 사건(8)으로부터 시작하여 가나안 정복(8b-9), 왕정시대와 황금기(10-11)를 거쳐 이스라엘의 멸망(12-13)까지 이릅니다. 또한 이 단락에서 이스라엘은 ‘포도나무’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8절의 첫마디가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한 포도나무”로 시작됩니다. 시인은 ‘한 포도나무를 이집트에서 당신이 뽑아오셨나이다’라고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종살이에서 직접 구한 대상이 ‘이스라엘’임을 부각합니다. 출애굽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에는 이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루시겠다는 언약(창 12:2; 17:4-7)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창 13:15-17)에 대한 기대가 고조됩니다.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돌보심과 가꾸심으로 인해 풍요로워지고, 그 영향력이 바다(지중해)와 강(유브라데)까지 뻗쳐 갔습니다(11). 그러나 이제 이방인들이 멧돼지와 들짐승들처럼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하나님께서 가꾸신 포도원 이스라엘을 뒤엎어버렸습니다.

 

포도나무의 회복을 간구(14-19)

아무리 역사가 오래되고, 많은 사람이 모이며, 재정이 넉넉한 교회일지라도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손길이 함께하지 않는다면, 그 교회는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혹시 이 당연한 사실을 잊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과연 하나님의 돌보심을 갈망하고 있는지, 지도자가 하나님의 손에 불들려 사역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14만군의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돌아오소서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이 포도나무를 돌보소서 15주의 오른손으로 심으신 줄기요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가지니이다 16그것이 불타고 베임을 당하며 주의 면책으로 말미암아 멸망하오니 17주의 오른쪽에 있는 자 곧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인자에게 주의 손을 얹으소서 18그리하시면 우리가 주에게서 물러가지 아니하오리니 우리를 소생하게 하소서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19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켜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14-19)

 

하나님께서 심고 가꾸신 포도나무인 이스라엘이 이방인들에게 처참히 짓밟혔으므로, 하나님께서 이를 긍휼히 보시고 구원하시기를 시인은 간청합니다. ‘당신의 오른손으로 심으신 줄기’, ‘당신을 위하여 힘 있게 하신 아들’, ‘당신의 오른쪽에 있는 사람’, ‘당신을 위하여 힘있게 하신 사람의 아들’이란 표현(15,17)을 반복함으로써, 시인은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 다윗과 맺은 언약(삼하 7:14)을 기억해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돌보심과 적극적인 개입이 있을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고, 생명을 회복할 수 있으며, 하나님을 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18). 19절에서 시인은 7절에서처럼 3절의 간구를 후렴같이 반복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재차 간청하고 기도를 끝냅니다. 이때 하나님에 대한 호칭인 ‘여호와, 만군의 하나님이여’는 3절의 “하나님이여”와 7절의 “만군의 하나님이여”에 이어 가장 긴 형태로 나와 시인의 간구의 간절함을 강조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는 시인의 호소는 여전히 오로지 하나님의 긍휼과 언약에 기초하고 있는 것입니다.


망각의 백성에게 재차 기억하라고 주께서 당부한 말씀은 애굽에서의 종 됨과 하나님의 속량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백성이 하나님께 그때를 기억해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수많은 기억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근거요 기도 제목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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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79-01)

 


전쟁의 폐허 속에서 부르짖는 기도

시편 79편 1-13절


 

아무리 절망적이고 고통스러운 현실일지라도 함께 기도할 수 있는 공동체가 있다면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국가적으로 여러 가지 많은 문제들이 산재되어 있지만, 그러나 교회가 한마음으로 전심으로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돌파할 수 있는 분별력과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개인과 민족의 위기 앞에서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 본 시는 ‘아삽의 시’라고 개합니다. 시대적 배경은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이 완전히 파괴 되는 때의 내용입니다. 이방 나라들이 유다를 침공하여 하나님의 성전과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하나님과 그의 백성을 조롱하는 것을 탄식합니다. 하나님께 이방 나라들을 향한 보복과 유다의 회복을 간청합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이스라엘이 극심한 곤경에 처하였을 때 어떤 기도와 소망이 나오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폐허가 된 예루살렘과 성전(1-4)

민족적 정체성의 기반이었던 나라가 망하고, 신앙의 정체성을 규정해 주던 성전이 무너졌지만, 이들은 하나님 앞에 모여 함께 탄식하며 고발함으로 그 고통을 극복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도가 함께 부르는 노래의 힘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함께 하나님께 부르짖고 찬송할 때 어떠한 고통이라도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1하나님이여 이방 나라들이 주의 기업의 땅에 들어와서 주의 성전을 더럽히고 예루살렘이 돌무더기가 되게 하였나이다 2그들이 주의 종들의 시체를 공중의 새에게 밥으로, 주의 성도들의 육체를 땅의 짐승에게 주며 3그들의 피를 예루살렘 사방에 물 같이 흘렸으나 그들을 매장하는 자가 없었나이다 4우리는 우리 이웃에게 비방 거리가 되며 우리를 에워싼 자에게 조소와 조롱 거리가 되었나이다(1-4)

 

시편 79편은 남유다의 멸망(주전 586년)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기록한 시입니다. 북이스라엘이 이미 멸망했고(주전 722년) 136년이 지난 후 남유다까지 멸망함으로써 이스라엘이란 국가는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시인은 시의 첫머리에서 유다의 멸망과 이로 인한 이스라엘의 처참함을 애통해하며 하나님께 토로합니다. 유다의 멸망은 표면적으로는 강한 군대를 가진 바벨론을 위시한 이방(시 137:7-8: 애 4:21)이 유다 땅을 침략하여 승리를 거둔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이 상황을 하나님과 유다와 이방 나라들 간의 관계 속에서만 관찰하고 설명합니다. 먼저 시인은 유다 땅을 가리켜 ‘당신의 기업’, 즉 ‘하나님의 기업’으로 부릅니다. 이 표현은 이방인들이 짓밟은 유다의 땅이 단순히 물리적인 땅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직접 이스라엘과 그의 후손에게 마련해준 언약의 유산임(창 17:8)을 강조합니다. 여기에 덧붙여 시인은 이 기업의 상징적 장소로 성전과 예루살렘을 언급합니다. 시인은 성전을 ‘당신의 성전’으로 칭하며 성전과 예루살렘 또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거주하기 위해 직접 선택하신 곳(왕상 9:7; 시 78:68-69)임을 부각합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거룩하심을 상징하는 성전과 하나님의 도시 예루살렘은 상상할 수 없는 치욕에 휩싸였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이방인들의 침입으로 성전은 더럽혀졌고 파괴되었습니다. 성전에서 일하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 그리고 예배하는 백성들이 죽임을 당하여 성전은 희생 제물의 피가 아닌 사람들의 시체와 피로 얼룩지고 부정해졌습니다. 예루살렘 도성도 마찬가지로 백성들의 시체와 피가 넘쳤고, 시신이 제대로 매장되지도 못한 채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의 먹잇감이 되었습니다. 이때도 시인은 유다 백성들을 ‘당신의 종들’과 ‘당신의 성도들’로 칭하며 성전이나 도성에서 처절하게 죽임을 당한 자들이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한 언약 백성이며(출 19:6), 하나님을 섬기던 자들임을 하나님께 상기시켜드리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매장되지도 못하여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받은 자처럼 간주되었음(왕상 16:4; 왕하 9:33-37; 전 6:3)을 시인은 애곡합니다. 물론 유다가 멸망한 것은 유다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이지만, 이것이 지금 시인이 강조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시인의 요지는 시신을 매장할 자가 없을 정도로 하나님 백성이 이방인들에게 잔혹하게 도륙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를 헤아리시고 이 백성을 겁 없이 살육한 무리들에게 분노를 쏟으시고, 자기 백성들에게는 긍휼을 베풀어주시길 바라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의 침략으로 하나님의 처소와 백성들의 처소는 돌무더기가 되었습니다. 성전에서 회개와 용서의 제사나 기쁨과 즐거움의 찬양과 감사로 가득 찬 예배가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다스림을 통해 평안과 즐거움을 누렸던 도성엔 이제 애곡과 비참함만 남았습니다. 이방인들의 두려움과 부러움의 대상이던 하나님의 백성(수 2:9-11; 왕상 10:1-9)은 현재 이방인들의 조롱과 비방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시인의 간구(5-12)

하나님의 백성이 징계를 받는 데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징계를 받는 이유를 살펴보고 그 징계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를 당하고 있다 하더라도 교회는 하나님 앞에 하나가 되어 구원을 요청하고 용서를 비는 공동체로 서야 합니다.

 

5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영원히 노하시리이까 주의 질투가 불붙듯 하시리이까 6주를 알지 아니하는 민족들과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는 나라들에게 주의 노를 쏟으소서 7그들이 야곱을 삼키고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함이니이다 8우리 조상들의 죄악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긍휼로 우리를 속히 영접하소서 우리가 매우 가련하게 되었나이다 9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 10이방 나라들이 어찌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말하나이까 주의 종들이 피 흘림에 대한 복수를 우리의 목전에서 이방 나라에게 보여 주소서 11갇힌 자의 탄식을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며 죽이기로 정해진 자도 주의 크신 능력을 따라 보존하소서 12주여 우리 이웃이 주를 비방한 그 비방을 그들의 품에 칠 배나 갚으소서(5-12)

 

시인은 이방 군대의 만행을 고발합니다. 그들은 주의 기업(땅)에 들어와 주의 성전을 더럽히고 주의 성 예루살렘을 멸하며 주의 백성과 성도들을 살육하였습니다. 그러나 시신을 매장하지 않고 방치하여 새와 들짐승의 먹이가 되게 하였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과 하나님을 열방 앞에 조롱과 치욕거리가 되게 한 일이었습니다. 비록 이스라엘의 죄악 때문에 내리신 형벌이라도,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기억해달라는 것입니다.

 

(1) 이방인의 심판을 간구(5-7)

 

“어느 때까지니이까”라고 절규하는 시인은 하나님께서 진노를 유다 백성이 아닌 이방인들에게 쏟기를 간청합니다. 시인은 유다 백성이 당면한 이 상황이 하나님 백성을 향한 진노라는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크고 계속되므로 시인은 하나님께서 진노를 영원히 품으시고 질투가 영원히 불타게 두실 것이냐고 묻습니다. 여기서 ‘질투’는 ‘진노’와 같은 뜻입니다. 이 물음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긍휼을 베풀며 노를 한없이 품지 않고 그들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할 것이라 약속하셨고, 그동안 그렇게 실행하셨던 분(출 34:6; 렘 3:12: 시 109:8-10)이 아니시냐는 반문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긍휼과 약속대로 그의 백성에 대한 진노를 거두시기를 간청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그 진노를 하나님의 언약의 기업에 쳐들어와 하나님의 처소를 더럽히고 백성을 살육한 이방인들에게 돌리시기를 간구합니다. 이들은 유다의 원수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이며,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이름조차 부르지 않는 자들입니다. 반면, 유다는 “야곱”의 족속입니다(7). 시인이 야곱을 언급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은 후 그 언약이 이삭과 야곱을 통해 계속되었고 시내산에서 야곱의 열두 족속과 그 언약을 확정하셨으므로 그 언약이 지금도 유효함을 지적하기 위함입니다. 동시에 이 언약 백성이 이방인들과 달리 오랫동안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섬겨온 자들임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백성을 이방인들이 무자비하게 삼키고 그 거처를 황폐하게 했으니 하나님께서 진노를 그들에게 쏟으심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2) 이스라엘의 용서와 구원을 간구(8-9)

 

이방인의 심판을 간청한 시인은 이제 이스라엘의 구원을 간구합니다. 먼저 이스라엘의 과거 죄에 대해 용서를 구합니다. 8절의 “우리 조상들의 죄악을 기억하지 마시고”는 ‘우리 이전의 죄악들을 기억하지 마시고’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 두 번역을 고려하면 시인은 단지 조상들의 죄뿐 아니라 현재 그가 속한 공동체가 지은 죄악들도 하나님이 용서하시기를 간청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간청은 이스라엘과 조상의 죄를 축소하거나 은폐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그대로 인정하는 모습입니다. 시인은 5절에서처럼 하나님의 긍휼하신 성품에 호소하며 용서를 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시며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출 34:6-7a). 또한 이스라엘의 허물과 반역을 보지 않겠다고(민 23:21) 말씀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을 향한 호의와 용서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하나님의 긍휼들이 이스라엘 공동체를 속히 만나게 해달라고(8, “영접하소서”) 기도합니다. 또한 이스라엘이 아주 낮아지고 대수롭지 않게 되었음을 고백하여 하나님께서 긍홀로 자신들을 용서하시기를 간구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구한 시인은 또한 하나님을 “우리 구원의 하나님”(9)이라고 부르며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하시고 건져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이 간청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이 하나님의 긍휼의 결과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부각시켜 신속한 도움을 이끌어 내려는 의도를 보여줍니다.

 

(3) 이방인의 심판을 간구(10-12)

 

시인은 다시 1-4절의 이방 나라들의 악행에 초점을 맞추어 그들을 심판하시기를 강하게 요청합니다. 이방인들은 이스라엘의 패배와 처참한 상황을 비웃었을(4) 뿐 아니라 하나님의 실존을 들먹이며 그의 구원의 능력을 비웃었다고(10) 하나님께 고발합니다. 하나님을 섬겼던 백성들은 포로가 되었고 죽을 운명에 처해졌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하나님의 긍휼과 영광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탄식하고 간구하므로 이제 하나님께서 원수들에게 보복하시고 이스라엘을 보존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구원의 능력을 보여주시라고 간구합니다. 하나님을 비방한 그들에게 칠 배나 비방을 돌려주시도록 간청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13)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긍휼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백성과 맺으신 언약을 반드시 이루어 주십니다. 백성의 죄가 아무리 크다 한들 하나님의 긍휼과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맺은 언약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자신의 죄는 절대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스스로 지레짐작하여 하나님을 떠나는 일을 피해야 합니다.

 

13우리는 주의 백성이요 주의 목장의 양이니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에 전하리이다(13)

 

이방 나라에 대한 심판과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도한 시인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고백하고 찬양 의지를 밝히며 기도를 끝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가 멸망한 때에도 여전히 이스라엘의 왕이시며 목자시므로 그의 백성, 그의 양인 이스라엘을 구하시고 원수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그의 공동체와 함께 하나님께 영원히 감사하며 하나님 찬양을 계속할 것이라고 선포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옛 이스라엘의 영광이 회보되기를 바라며 이 시를 금요일 오후에 통곡의 벽에서 낭송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교회를 비방할지라도 언젠가 하나님께서 그들 앞에서 영광을 드러내시고 그들이 행한대로 보응하시며 영광스러운 교회를 다시 일으키시리라는 기대를 하고 이 시를 묵상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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