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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02-01)


복 있는 사람의 신앙관

시편 2편 1-12절


세상은 전쟁, 분노, 무질서 등으로 소망이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시선이 세상이 아닌 하나님을 향하면 또 다른 세상이 보일 것입니다. 절망스러운 세상에서 눈을 돌려 하나님께 집중하면,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인도해 가시는 또 다른 소망이 보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휘둘리거나 영향을 받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해야 합니다.

 

시편 2편은 ‘기름부음 받은 자’, 곧 ‘메시아’의 왕권을 통해 인간 왕권과 하나님 나라의 통치 관계를 묘사합니다. 이것은 지상의 열방과 통치자들의 행복이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 통치를 즐거워하는 것에 근거함을 역설합니다. 또한 ‘나의 왕’과 ‘나의 아들’의 호칭은 예수 그리스도로 이어지는 종말론적 메시아 개념으로 확장합니다.

 

열방의 왕들, 메시아 왕권에 대적(1-9)

하나님의 백성은 주의 말씀을 묵상하지만(시편 1:2), 세상 사람들은 헛된 일을 꾸밉니다. 그들은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아서 하나님 앞에서 감히 허세 부리는 죄인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꾸미는 헛된 일, 악인의 꾀를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의 거만함과 흡사하지 않습니까?(창세기 11:3-4) 그들은 복이 없는 죽음의 삶인 것을 모르는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1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2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3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 4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5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그들을 놀라게 하여 이르시기를 6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7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8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9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1-9)

시편을 읽을 때는 다윗의 마음으로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해석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시편을 지금 우리 상황에 비추어 읽는 것이 잘 읽는 것입니다. 시편 1편과 2편 사이에는 표제어(標題語)가 없습니다. 표제어가 없다는 것은 이 시편에 대해 누가 기록한 사실이 없다는 것입니다. 1편과 2편이 연결된 시라고 보기도 합니다. 이 시는 ‘제왕시’, ‘즉위시’라고 하기도 합니다.

(1) 여호와와 왕을 대적하는 열방들(1-3)

먼저 시편 2편은 의문사 ‘어찌하여’로 묶이는 시행들의 집합입니다. 시인은 걱정에 찬 질문으로 말문을 열면서 의분을 표합니다. ‘어찌하여’로 시작한 질문은 뭇 민족들의 어리석음과 무모함을 강렬하게 개탄하기 위해 의 도적으로 선택한 수사학적인 기법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시고 주관하신 절대 주권의 왕이십니다. 그런데 그 절대 주권의 왕을 대적하며 반역을 꾀하는 나라들이 있다는 것을, 시인은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하나님께 대적하는 자들이 전쟁을 위해 요란하게 움직이고, 전쟁의 승리를 위해 작전과 음모 꾸미는 것을 질타하기 위한 방식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항상 세상으로부터 공격을 당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국가 단위 전쟁을 치렀지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사단의 공격으로 치열한 영적인 전쟁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강하신 분이기 때문에 이상한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주관하신 나라가 강한 나라가 되게 하면, 주변 나라와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권능 앞에서 벌벌 떨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을 인정하게 될 것인데, 왜 이렇게 약하고 보잘것없는 나라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먼저 시인은 이방 나라들이 소동을 피우고 법석 떨고, 민족들이 내용 없고 가치 없는 것들을 퍼뜨리고 꾸며 소동을 일으키는 행위를 비난합니다(1). 또한, 시인은 외칩니다. 어찌하여 세상의 군왕들과 관원들, 곧 통치자들이 일어나 함께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 곧 메시아를 향해 대적합니까(2)? 시인은 하나님의 왕권과 그가 세우신 왕에 대항하여 반기를 든 열방과 폭력과 위협과 음모로 가득한 세상을 고발하듯이 말을 잇습니다.

시인은 열방의 왕들이 내거는 구호를 반박하려는 듯 그대로 인용하여 옮깁니다.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3), ‘맨 것’과 ‘결박’은 일종의 은유입니다. 이는 통치와 통제를 뜻합니다. 곧 열국의 왕들이 하나님께서 ‘기름 부음 받은 자’(메시아)를 통해 실행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의도가 없음을 드러낸 말입니다.

(2) 하나님, 시온에 메시아 왕을 세우심(4-6)

시인은 뭇 민족들과 열방 통치자들의 음모와 반역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을 전합니다. 하늘에 앉으신 자, 곧 주님이 그들을 비웃고 계십니다(4).

시인은 지상의 통치자들이 볼 수 없는 하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서 땅 통치자들의 반역과 오만을 조롱하시는 모습을 묘사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분노하시며 그들을 향해 말씀하시고, 불타오르는 진노로 호령하십니다(5). 시인의 상상력이 가미된 극적인 표현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통치의 중요성을 각성시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무엇으로 지상의 통치자들을 두렵게 하십니까? 시인은 하나님의 목소리를 전합니다.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6). ‘나의 왕’은 누구입니까? 하나님께서 다윗 왕의 후손에게 영원한 왕권을 약속하신 후(사무엘하 7:16) 예언자들은 다윗의 후손을 통해 세워지는 새로운 왕을 예언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의 거처, 시온은 어디입니까? 본래 시온산은 다윗성을 일컫습니다(사무엘하 5:7). 그러나 이 의미가 확대되어 이후에 예루살렘과 솔로몬 성전이 서 있는 언덕이 됩니다. 사실상 시온과 예루살렘은 동의어입니다. 그러니까 시온산은 하나님이 구별하신 산으로서 주님이 배타적 소유권을 주장하는 장소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세우신 나의 왕’(6), ‘기름부음 받은 자’(메시아)는 포로기 이후에 새로운 왕권을 암시하는 새로운 계약으로 발전됩니다(예레미야 31:31-34). 이후 지상의 왕에게만 적용된 ‘메시아’(2:2)는 종말론적인 메시아의 의미를 갖게 됩니다. 때문에 초기 기독교 상황에서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인식된 예수님은 히브리어 ‘메시아’에 상응하는 헬라어(그리스어) ‘그리스도’라는 호칭을 받으신 것입니다.

(3) 하나님, 메시아 왕의 우주적인 왕권을 약속하심(7-9)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로 시작하는 7절 시행은 왕의 선언과 왕이 인용한 하나님 말씀입니다. 새롭게 왕이 된 사람이 기름 부음을 받고 왕좌에 앉은 후 하나님께서는 공식적으로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이 말은 왕의 합법성과 정통성을 부여하는 하나님 말씀입니다. 그러면 구약에서 누가 하나님의 아들입니까? 다윗의 왕권을 잇는 후손들입니다(삼하 7:14). 따라서 이것은 다윗 가문의 영원한 왕권에 대한 약속이 재천명 되고 갱신된 선포로서 기능합니다. ‘오늘 내가 낳았다.’라는 비유적인 표현은 즉위식으로 세우지는 왕의 신성함과 새로운 출생을 나타냅니다.

또한, ‘낳았다’라는 표현은 출생만이 아니라 부활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시온에서 왕으로 세워졌다가 십자가에 죽으셨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바울은 예수님에 대해 설교를 합니다. 사도행전 13장 33절에서는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것, 부활을 의미합니다.

그리고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왕이 된 자에게 하나님께서 ‘내게 구하라’(8)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세우신 왕에게 이방 나라를 유업으로 구조, 왕의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를 것을 약속하십니다(8). 고대 근동 나라들의 왕은 신적인 권력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우신 왕은 신적인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 간구해야 하는 인간적인 존재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은 열방을 ‘쇠 지팡이로 깨뜨리고 질그릇처럼 부수는’ 힘과 권세를 부여받습니다(9). 매우 강하고 견고한 통치권의 상징인 ‘쇠 지팡이’와 그 반대 묘사인 ‘질그릇’이 대비되어 철저하고 완전한 파괴의 실행을 상상하게 합니다. 곧, 다윗 혈통의 왕이 실행하는 강력한 통치권이 ‘질그릇’ 같은 땅의 군주들을 철저하게 파괴하여 범세계적인 통치가 실현됨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물론 이 권세는 반역적이고 오만한 나라들을(2:1-3) 향해 행사하는 힘과 권세입니다. 그 권세는 왕의 인간적인 힘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말씀을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권세에 기초한 것입니다.

 

열방의 왕들에게 메시아 왕권을 받들도록 권면(10-12)

하나님께서 통치하시고, 그분이 왕으로 다스리시니, 그의 백성은 세상을 향해 당당하게 인간의 참된 지혜와 계획을 포기하고 하늘의 지혜와 교훈을 얻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두려워하고 아들에게 항복하고 섬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살길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만 세상에게 살길, 복의 길을 알려줄 수 있습니다.

10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재판관들아 너희는 교훈을 받을지어다 11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12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10-12)

시온, 곧 예루살렘 왕이 등극하는 장면입니다. 시인은 오만한 지상의 왕들과 권력자들을(2:1-3) 향해 경고하고 권면합니다. 여기서 시인의 의도가 정확히 드러납니다. 시인은 군왕들에게는 지혜를 얻고, 재판관들에게는 교훈을 받으라고(10) 경고합니다. ‘지혜를 얻으라’는 말은 사물의 이치를 깨닫고 통찰력을 얻으라는 권면이지만, ‘교훈을 받으라’는 말은 좀 더 엄격한 표현으로 징계를 받고 이치에 맞게 자기를 수정할 줄 알라는 말입니다.

세상의 왕들과 재판관들을 향한 조언은 계속되는데, ‘여호와를 두려워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하라’(11)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지혜 신앙 전통에서 여호와 경외는 모든 지식과 지혜의 근본입니다(잠언 1:7; 9:10). 그러면 어떻게 떨면서 즐거워할 수 있단 말입니까? 개념적인 모순입니다. 그런데 11절은 시편의 평행 관계 속에서 두려워함과 떠는 것이 동의적인 의미인 것처럼, ‘섬기라’와 ‘즐거워하라’는 명령도 한데, 묶여 여호와 섬기는 것을 즐거워하라는 뜻으로 풀이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왕들은 ‘하늘에 앉으신 이’(4)에게 복종하라는 시인의 강력한 요청인 셈입니다.

마지막으로 시인은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12a)고 합니다. 여호와가 분노하여 길에서 멸망하지 않도록, 그분의 진노가 일순간 확 불타오르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12bc). 입맞춤은 경의와 자신을 맞추는 겸손과 복종의 표시입니다(참조, 삼상 10:1). 매우 엄중한 경고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기치 않은 죽음을 맞이할지도 모른다는 경고입니다. 여호와를 기쁨으로 섬기든지, 망하든지 선택은 각자의 몫입니다. 하나님과 그의 아들을 향한 섬김은 반역적이고 오만한 자들에게는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그들이 여호와를 섬긴다면 파멸에서 벗어날 뿐 아니라 주님이 기쁘게 받아주실 것입니다.

시인의 마지막 말은 의미심장합니다.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자는 행복하다’(12d). 경고 후에 제시된 초대입니다. 이는 시편 1:1의 ‘행복한 사람’과 서로 어울려 ‘행복’이 1, 2편 전체를 감싸는 구조를 제시합니다. 시인은 시온에 세우신 하나님의 아들인 왕의 통치를 받들도록 경고했고, 이제 언약의 하나님이신 여호와께 피하여 행복을 누리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면 어떠한 목적 때문에 시편 입구에 자리 잡은 두 편의 시가 이러한 구성으로 배열되었습니까? 사람이든지 민족과 나라든지 삶의 ‘행복’이 무엇에 기초를 두는지, 시편 신학의 일면을 시의 언어로 역설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통치자들의 ‘행복’은 어디로부터 시작되는지를 제시하기 위함입니다.

‘행복한 사람’ 또는 ‘복 있는 사람’이 여호와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읊조리며 깊은 묵상으로 즐거워하는 사람인 것처럼(1:1-2), 나라와 민족의 운명에 무거운 책임감을 가질 왕들과 통치자들의 ‘행복’의 기초와 근원이 무엇인가를 경고하며 권고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1-2편은 각 사람에서부터 나라의 권력자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가르침과 통치권을 겸손히 받들고, 그 보호 아래 있는 것이 행복임을 역설합니다.


우리 시대는 실로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를 맞고 있습니다. 권력은 하나님을 지나치다 못해 활 시위를 겨누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세상은 모든 권력이 무릎 꿇는 세상이요, 하나님께 피신한 자들에게 복 주시는 세상입니다. 우리는 어떤 지휘에 맞춰 살아가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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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01-01)


복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시편 1편 1-6절


사람들은 누구나 복 받기를 원합니다. 누가 복 없는 인생을 꿈꾸겠습니까?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복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사무엘상 2:6-7) 그리고 하나님의 기준은 명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두를 사랑하시지만 아무나 축복하지는 않으십니다.

 

시편 1편은 2편과 함께 시편 전체에 입문하는 서론처럼 놓여 시편의 핵심 주제를 표현합니다. 곧 기도와 감사와 찬양으로 가는 입구입니다. 1편은 이른바 ‘토라 시편’ 또는 ‘지혜 시편’으로 하나님의 법을 깊이 묵상하고 마음에 세기는 의인의 행복과 악인의 멸망을 대비하여 의인의 길을 걷도록 교훈합니다. 의인은 물가에 심긴 나무처럼 생명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지속적인 돌봄을 받습니다.

 

복의 근원이신 여호와(1-6)

하나님께서 이 땅에 살고 있는 두 부류의 사람 즉, 의인과 악인에 대해 어떻게 역사하는 지를 보여줍니다. 특히 시인은 의인의 번영과 악인의 멸망을 선명하게 대비시킵니다. 성도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의 방향을 어떻게 선택해야 할지를 도전하게 합니다. 멸망의 길과 형통의 길이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1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3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4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5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6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1-6)

시편을 처음 읽었던 바벨론 포로로부터 귀환한 유다 백성들은 에스라로부터 모세를 통해 받은 여호와의 율법을 지켜 행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시편 전체의 서론이자 시편의 핵심 주제를 나타내는 시편 1편도 여호와의 율법을 강조합니다. 시편 1편이 말하는 복은 ‘아시와르’의 복입니다. 여기에서 시인은 ‘의인의 번영’과 ‘악인의 멸망’을 선명하게 대비시킵니다. 시편을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의 방향을 어떻게 선택해야 할지 도전하게 합니다. 멸망의 길과 형통의 길이 우리 앞에 놓여 있음을 알려 줍니다.

(1) 행복한 사람의 길(1)

시편 전체와 1편을 시작하는 첫마디는 ‘복 있는 사람’, 곧 ‘행복한 사람’입니다. ‘복’의 개념은 주로 물질적인 소유와 번영의 뉘앙스를 전달합니다. 하지만 ‘복 있는’으로 번역된 형용사 ‘아슈레’는 ‘행복하다’라는 말에 더 가깝습니다. 행복은 물질적인 소유의 넘침이나 세속적인 성공의 여부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와 관련 있습니다. 시인은 대중적으로 통용되는 복의 개념이 아니라 행복한 사람의 어떠함을 묘사합니다. 행복한 사람은 악인의 꾀(음모), 죄인의 길, 오만한 자의 자리를 피하는 사람입니다.

의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집에 앉았을 때나 길을 갈 때나 누워 있을 때나 일어날 때 말씀을 자녀들에게 가르칩니다(신명기 6:4-9). 그렇기에 악인들의 꾀를 따르거나 죄인들의 길에 서거나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1). 악한 자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거나 그들의 행위를 본받지 않습니다.

1절은 중요한 단어들이 점층적으로 나열되고 그 의미가 확장됩니다. 악인 죄인 오만한 자 모두 동의적인 차원에서 연결되고, 이들의 행위와 존재를 특정 짓는 꾀-길-자리가 순차적으로 나열됩니다. 행복한 사람은 악인과 어울려 걷지 않고 서지 않고 앉지 않는 사람입니다. 곧 악인-죄인 오만한 자와 반대되는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 행복입니다. 악인들의 음습한 음모, 죄인들이 매우 그럴듯하고 매끄럽게 다져놓은 길, 경건을 비웃는 거만한 자의 자리를 기웃거리지 않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2) 여호와의 법과 즐거움(2)

악하고 반역적이며 오만한 행위를 피하는 것이 행복의 시작이라면(1), 시인은 좀 더 적극적으로 행복을 만끽할 수 있는 길을 노래합니다. 행복은 악한 무엇을 피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다른 무엇을 받아들일 때 충만해집니다. 행복한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 곧 ‘여호와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읊조리며 깊이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율법에 상응하는 히브리어 ‘토라’는 본래 ‘가르침’, ‘교훈’을 뜻합니다. 삶의 방침이며 지침입니다.

의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기에 오직 여호와의 가르침을 즐거워하고 주야로 묵상합니다(시편 1:2; 예레미야 17:7-8). 여호와의 율법을 버거운 짐과 의무로만 한정할 수 없습니다. ‘토라’의 본래적 의미는,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을 위해 바람직한 삶의 길을 안내하는 하나님의 애정 어린 가르침입니다. 길 없는 광야에서 살아갈 방향을 설정하도록 주신 지침입니다. 온종일 낮은 목소리로 여호와의 가르침을 읊조리며 건져 올린 깊은 성찰이 행복입니다. 하나님의 교훈을 즐거워함이 악인과 오만한 자들로부터 피할 수 있는 길입니다.

(3) 시냇가의 나무와 같은 의인(3)

‘악인 죄인 오만한 자’의 길을 피하고, 여호와의 가르침을 온종일 읊조리며 깊이 새기는 사람의 행복은(1,2) 삶의 충만으로 귀결됩니다. 그는 비가 오지 않는 계절에도 물줄기가 끊이지 않는 강가에 심긴 나무가 됩니다. 철을 따라 열매를 맺고,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 나무처럼 그가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합니다(3).

악을 떠난 ‘행복한 사람’(1)은 생명의 활기로 충만하여 열매 맺고 번성하는 나무처럼 안전합니다(참조. 에스겔 47:12). 나무가 계절에 맞게 정해진 때에 열매 맺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자연 질서와 시간표에 따라 사는 삶입니다. 순리에 맞는 삶입니다. 그러니 서두르거나조급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질서와 때에 따라 안전한 삶을 누리는 행복한 사람이 의인인 셈입니다. 물론 행복한 사람은 의인이라는 직접적인 명시는 없으나 4절에서 바람에 흩어지는 겨와 같은 악인과 6절의 의인과 악인 대비는 자연스럽게 ‘행복한 사람-시냇가에 심긴 나무-의인’을 질적으로 하나처럼 연결합니다.

(4)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악인(4)

그러나 악인들은 ‘그렇지 않다’. 시인은 3절과 대조하여 강조합니다. 2절에서 ‘오직’이라는 한정 부사로 시행을 강조한 것과 같은 방식입니다. 악인의 삶은 바람에 날려 흩어지는 ‘겨’와 같습니다. 이 직유법은 악인을 가볍고 무익하고 텅 빈 껍데기 같은 존재로 그려냅니다.

더군다나 ‘겨’(모츠)와 3절의 ‘나무’(에츠) 비교는 의도적으로 비슷한 음가를 활용한 언어유희처럼 보여 악인의 운명을 암묵적으로 비유입니다. 눈여겨볼 것은 ‘겨’에 대한 비유입니다. 이것은 예언서의 종말론적인 심판 문맥에서 주로 발견됩니다(이사야 17:13; 41:15; 호세야 13:3; 스바냐 2:2 등). 반면에 겨와 대조되는 ‘나무’(3)는 태초의 에덴동산을 적시는 강가에 심겨 생명이 약동하는 ‘생명나무’(창세기 2:9)를 상상하게 만듭니다.

(5) 악인의 심판과 고통(5)

시인은 악인들의 최후를 묘사합니다. 악인들이 끝내 심판을 견디지 못하고 죄인들은 의인들의 모임에 함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마침내 행동하십니다. 4절에서 악인들이 ‘겨’와 같다는 종말론적인 심판 문맥과 연결된 것처럼, 악인의 최후 심판 장면이 묘사됩니다.

‘심판’은 하나님이 최종적으로 공평과 정의로 악을 판결하시는 법정 소송에 불려나온 악인들을 연상시킵니다. 악인들은 하나님의 법정에서 어떤 중재나 변호도 받을 수 없기에 자기의 권리 주장을 위해 일어설 수 없습니다. 이것은 공평한 판결을 통해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의인들의 모임에 끼어들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첫 소절,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한다’(a)는 것과 둘째 소절,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한다’(b)는 말은 같은 뜻 다른 표현입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법정에서 의인들과 악인들의 분리를 기정사실화합니다. 그러니 의인들이 누리는 행복을 악인들은 결코 맛볼 수 없습니다. 분리 자체가 심판입니다.

(6) 멸망하는 악인의 길(6)

마지막 시행에서 의인들의 길과 좀 더 악이 분명하게 대조됩니다. 시인은 의인들의 길을 여호와가 ‘인정하시지만’ 악인들의 길은 멸망하한다는 확신에 차 있습니다. 여호와가 ‘인정한다’는 말은 본래 ‘알다’라는 뜻으로 앞(지식)에 관한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정보원의 지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의인의 삶에 개입하셔서 꼼꼼히 보고 경험하시는 구체적인 앎을 통한 돌보심과 인도하심을 뜻합니다. 이렇게 1편의 마지막 시행은 시편 전체 문을 열면서 삶의 두 갈래 길을 제시합니다.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입니다. 이것은 어느 길을 선택할 것인가, 어느 길에 설 것인가를 선택하도록 설득합니다. 이후 시편들도 의인의 평탄한 길(26:12)과 악인의 미끄러운 길(35:6)을 묘사하며 양 갈래 길에서 더 나은 선택을 하도록 안내합니다. 이렇게 시인은 명령과 설명이 아니라 시적인 묘사를 통해 삶의 진리와 진실을 밝힙니다.

‘행복한 사람’은 악인-죄인 오만한 자와 어울려 한길 걷지 않고 서지 않는 사람입니다(1). 그는 여호와의 ‘가르침’을 즐거움으로 삼고 온종일 읊조리며 삶을 반성합니다(2). 이것이 매일의 습관으로 내면화할 때 의인의 삶이 됩니다. 끝내 여호와가 ‘의인들의 길’을 아십니다(6). 눈여겨볼 것은, 악인들이 사악한 중범죄자로 한정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시인은 여호와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소홀히 여기는 사람들과 악인들을 같은 범주의 사람으로 묶고, 이들이 길을 잃어 멸망하는 것이 자명한 이치인 것처럼 노래합니다.

정리하면, 1편은 ‘행복한 사람’과 ‘의인’의 삶의 존재 방식을 하나로 노래했습니다. ‘여호와의 율법’, 곧 ‘여호와의 가르침’에 뿌리내린 삶입니다. 이와 함께 시인이 말하는 ‘의인들의 길’과 ‘악인들의 길’로 대조되는 두 갈래길은 구약 잠언에서 말하는 지혜 전통의 흐름과 조화를 이룹니다(잠언 4:18,19; 15:9). 잠언의 지혜도 의인의 길은 생명의 길(12:8), 악인의 길은 파멸과 죽음의 길이라고 교훈합니다(14:12). 이후 예수님도 고대 이스라엘의 시인과 지혜자처럼 두 갈래 길을 말씀하십니다. ‘파멸에 이르는 넓은 길’과 ‘생명에 이르는 좁은 길’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는 각자의 선택에 달렸습니다(마태복음 7:13-14). 시냇가에 심긴 나무처럼 촉촉하게 생명력을 유지하며 제 삶을 사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고 의인입니다. 그런 사람은 주 하나님이 정하신 ‘방향’을 따라 ‘걷고’, ‘서고’, ‘앉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 매 순간 갈림길에 섭니다. 하나님과 세상 중 어느 리듬에 따라 살아야 할지 우리에게 선택을 요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진정한 행복은 오직 말씀을 따라 살 때뿐입니다. 말씀의 리듬을 따른 의인의 리듬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하나님에 의해 가치 없는 인생으로 판명됩니다. 심판 견디지 못하며, 의인 회중에 들지 못합니다. 그러나 의로운 길을 걷는 자는 하나님이 보호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그 인생을 인정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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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서론


노래는 인생의 희로애락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도 자신의 애한이 담긴 많은 노래를 창작하고 대중들의 입에 불리고 있습니다. 많은 노래들이 불리지만, 노래 중에 노래, 제일 가치 있는 노래는 ‘사랑가’일 것입니다. 연인이 상대방을 향한 사랑의 노래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멜로디입니다. 하지만 그 사랑가보다 더 아름다운 노래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송가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 인간으로서 드리는 최고의 선물이 바로 찬송가입니다. 이 노래들은 수천 년이 지난 지금에도 동일하게 마음의 호수에 잔잔한 물결을 일으키며, 때로는 성난 파도처럼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우리 같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리로 나갑시다.

 

시편의 명칭

히브리 성경의 세 번째 부분인 성문서의 첫 번째 책으로서 기도문, 신앙시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히브리 성경의 제목은 ‘테힐림’인데, 이것은 ‘찬송’ 혹은 ‘찬양의 노래’를 의미합니다. 영어 제목인 ‘Psalm’은 ‘노래’를 의미하는 헬라어 제목(70인역) ‘Psalmoi’에서 파생 된 것입니다.

 

시편의 저자들

시편의 저자는 다윗, 아삽, 고라의 자손들, 솔로몬, 모세 등 있습니다. 다윗의 시는 73편으로 가장 많고 아삽은 12편 고라의 자손들 11편 솔로몬 2편 모세1편 등이 있습니다. 있으며 작장 미상이 여러 편이 있습니다.

시편은 수많은 작가들에 의하여 영감적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아마 최종적으로 집대성 된 것은 에스라, 느헤미야의 손에 의해서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들 직후의 시대에 몇몇 서기관들에 의해 집대성되었을 것입니다. 시편의 삼분의 이에 해당하는 시에 그 표제(제목)들이 나타나는데, 이것들이야 말로 시편의 기원을 지적하는 것으로 가장 오래된 것입니다. 시편의 표제들 가운데 8명의 개인 이름이 나오는데 이들은 저자, 기고자, 편집자, 음악가들이거나 작곡, 편집, 거룩한 서정시의 사용과 관련된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이름은 다윗, 아삽, 고라, 모세, 헤만, 에단, 솔로몬, 여두둔입니다. 이들 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은 다윗입니다.

 

시편의 역사적 배경

19세기 중엽부터 표제 속에 언급된 사항들을 연구하므로 시편의 저작권과 시기를 밝히려는 근대적인 시도가 행해졌습니다. 시편의 연대를 여호수아로부터 헬라 시대까지 잡았으며, B.C. 312년 이후에는 어떤 시도 해당되지 않는 것으로 봅니다.

보수적인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시편이 일천 년 간의 역사적 배경을 무대로 지어졌다고 봅니다. 많은 각각의 시들이 모세와 다윗으로부터 곧 이어지는 포로기까지의 히브리인들의 역사 중 어느 시기에 정확히 기록되었는지 확정될 수 없지만, 이들이 기록된 시기는 이러한 범주에 해당한다고 결론짓는 것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수많은 시의 저자와 그 역사적 배경이 비록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렇다고 해서 시편 전체가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베드로후서 1:21)을 우리가 믿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시편의 기본적인 특징

시편은 모두 5권으로 되어있습니다. 1-41편이 한권이고, 42-72편이 제2권이고, 73-89편이 제 3권이고, 90-106편이 제4권이며, 107-150편이 제5권입니다.

시편은 모두 다섯 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권의 끝은 모두 찬양으로 마무리 짓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1권에서 3권은 애가가 압도적이라고 한다면 , 찬양은 제4,5권이 압도적입니다.

 

시편의 문학적 형식과 배경

시편의 구성을 애통의 시, 감사의 시, 찬송시, 즉위시, 왕에 관한 시, 예배에 관한 시, 지혜와 율법의 시 등으로 구성됩니다.

(1) 애통시 : 약 58편의 시는 애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이들 중에서 42편은 개인적인 애가이며, 나머지는 공동체적인 애가입니다. 이러한 시들은 개인적, 혹은 집단 적인 방황의 경험으로부터 우러나 인간의 가장 깊은 고통과 소망에 과한 표현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공동체적 애가(시편 12,44,58,60,74,80,83,85,90편)는 패전 ,외부의 침입, 재앙, 기근과 같은 국가적인 재난시에 사용되었습니다.

▶개인적인 애가(3-4, 13,22,31,39,57,69, 88,139편)는 병, 불공평, 압제, 개인적인 죄의 결과로 말미암는 고통의 경험에서 나왔습니다.

참회의 시(6,38,51,102,130,143편)가 이러한 부류에 속합니다.

공동체적인 애가와 개인적인 애가에는 많은 차이가 있지만,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유사점이 있다.

① 하나님의 도우심을 위한 간구

② 압제의 본질을 보여주는 불평과 순결, 죄악에 대한 언급

③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에 대한 믿음의 고백

④ 하나님의 임하심을 위한 간구와, 그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

⑤ 하나님께서 들으셨음에 대한 확신

⑥ 구원이 이루어질 때에 온 백성이 여호와를 찬양할 것에 대한 맹세

모든 애가는 오직 하나님만 상황을 변화시킬수 있다는 깨달음을 포함하고 있으며, 나님의 중재에 대한 찬양을 고대하고 있다.

(2) 감사의 시 : 애가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됩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중재로 말미암아 방황의 경험을 넘어선 후에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찬송과 희생을 드립니다. 감사의 시도 역시 두 종류로 나누어지는데, 첫 번째는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찬양이요(묘사적), 두 번째는 특정한 상황에서의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찬양입니다. 이러한 상황에는 풍성한 추수, 혹은 원수로부터의 구원등이 포함될 수 있습니다.

감사의 시의 일반적인 구조는

① 하나님께 대한 찬양의 선포(서론)

②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간구의 반복과 하나님의 임하심(본론)

③ 대한 찬양과 미래의 도우심을 위한 간구(결론)

(3) 찬송시 : 묘사적인 찬양시는 공중 예배의 배경을 가지며, 어느 특정한 사건과 관련되지 않습니다. 찬송시는 우주, 세상의 왕국들, 특별히 이스라엘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러한 찬송시의 본질은 ‘창조주와 주님으로서의 하나님의 위엄’, ‘겸손하고 약한 자에 대한 은혜’라는 두 가지 주제로 묘사 될 수 있습니다.

찬송시의 구조는 다음과 같이 비교적 간단합니다.

① 하나님께 대한 찬송의 명령 (서론)

② 하나님의 위엄과 자비에 대한 찬양(본론)

③ 찬송에 대한 명령의 반복(결론)

찬송시는 그 강조점에 따라서 다음과 같이 분류 할 수 있습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창조자로서(66:1-12, 100:, 111, 149편), 세상의 창조자로서(8편, 19:1-6,104,148편), 역사의 주관자로서(33,113, 145-147편) 찬양받으시기에 합당합니다.

(4) 즉위시 : 시편은 애가, 감사의 시, 그리고 찬송의 시로 나누는 기본적인 분류외애도 몇 가지 분류가 가능합니다. 각기 다른 다양한 형식을 가지고 있는 시도 그 주제와 예배에서의 사용에 따라서 나누어집니다. 이스라엘의 초창기 시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 여호와께서 용서로 묘사되는 승리의 노래로써 설명적입니다. ‘용사로서의 하나님’이라는 주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모든 나라를 다스리신다는 확신입니다. 따라서 히브리어 ‘여호와 말아크’(뜻: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47,93,96,99편)는 즉위시로 분류됩니다.

(5) 왕에 관한 시 : 여호와의 왕권에 대한 고백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으로 다윗 왕조에 관한 시가 있습니다. 이 시들은 그 내용과 사용된 경우가 다양하지만, 모두 왕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2,72,101,110편은 대관식 때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20,89,144편에서는 하나님께 왕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간구하고 있으며, 18,21편에서 왕은 승리를 허락하신 여호와께 감사를 드립니다. 45편은 왕의 혼인식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이를 위하여 지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시들은 다윗 계통의 왕을 ‘하나님의 아들’(2:7), ‘하나님의 우편에 앉은 주’(110:1), ‘기름 부음 받은 자’(18,50,20:6)로 묘사함으로써 ‘하늘의 왕’과의 밀접한 관계를 강조하였습니다.

(6) 예배 의식적 시 : 어떤 시들은 대화적인 노래로 볼때 예배 의식과 관련되어 있음을 암시해 줍니다. 15:24은 성전에 들어가는 의식이며, 24편은 언약궤와 함께 진행하는 것을 암시합니다. 115편도 역시 질문과 응답의 형식으로 볼 때 예배 의식적인 시입니다. 성전으로 올라가는 시(120-134편) 중에서 오직 122편만이 예루살렘 순례를 위하여 지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반면에 134편은 찬양과 제사장의 축도를 요구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성전 예배의 절정의 순간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시온의 노래’(46,48,76,84,87,122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처로 선택하신 예루살렘과 시온산의 영광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7) 지혜와 율법의 시 : 어떤 시들은 노래나 기도로서는 분류될 수 없다. 이것들은 문학적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지혜서의 형식을 띤 교훈이라는 점에서 구별됩니다. 물론 이러한 구별에 관한 견해에 있어서 학자들 사이에 의견은 다르지만, 36,37, 49,73,112,127,128,133편은 잠언적인 성격을 띄는 것으로 보입니다. 3편의 율법시(1, 19:7-14, 119편)는 주제에 있어서 이 시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며, 독자로 하여금 그 율법에 올바르게 순종하도록 강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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