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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20-01)

  

 


어려울 때 함께 나누는 기도

시편 20편 1-9절


성도들이 힘들 때 다른 사람들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부탁하기만 하고 정작 자신을 기도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진정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위기를 모면하려는 임시방편일 뿐입니다. 기도를 부탁할 뿐만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도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있습니까?

 

  • 시편 20편은 환난의 날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기를 간구하는 시입니다. 이를 위해 핵심적인 용어, ‘우리 하나님의 이름’과 ‘여호와’를 강조하며 다윗은 누군가를 위해 기원합니다. 고대 이스라엘 세계의 잦은 전쟁 경험을 고려하면, 이 시는 국가의 가장 큰 환난인 전쟁을 앞두고 백성 전체가 하나님께 승리와 구원을 위해 도움을 청하는 간절한 기도입니다.

 

일을 위한 백성들의 기도(1-5)

위기의 순간에 이스라엘의 왕이 불러 도움을 청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셔서 건져내시며 또 높은 곳에 두어 보호하십니다. 서로를 향한 뜨거운 염원을 품는 것입니다. 서로를 향한 진실한 사랑을 가진 공동체가 될 때, 용기 있게 세상에 나설 수 있습니다. 전쟁은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는 전쟁에 나서는 사람들을 위해 주의 도움을 구하고 축복합니다.

 

1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2성소에서 너를 도와 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 3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네 번제를 받아 주시기를 원하노라(셀라) 4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계획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5우리가 너의 승리로 말미암아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깃발을 세우리니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1-5)

 

전쟁은 많은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하고, 승리한다 하여도 많은 손실을 감수해야 합니다. 전쟁은 사람이 하지만, 승패는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전쟁에 나가는 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함께할 것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1) 야곱의 하나님의 응답(1)

 

이 시는 여호와가 환난 날에 응답하시기를 축복하는 것으로(1) 시작하고, 공동체가 부를 때 응답하시기를 간구하는 것으로(9) 끝납니다. 여호와의 응답을 촉구하는 주체는 ‘우리’입니다(5). 1절은 ‘우리’로 언급되는 공동체가 ‘너’(2인칭 남성 단수)로 호칭되는 누군가를 위한 기원문입니다.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1a)에서 ‘너’는 누구입니까? 시 전체 분위기와 ‘기름 부음 받은 자’(6), 왕(9), 그리고 군사적인 용어들에서 ‘너’는 나라의 안보를 책임지는 왕입니다. 이때 왕은 국가의 가장 큰 위기인 전쟁의 위협 앞에서 지도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로 언급된 백성들이 왕을 위해 축복합니다. 왕을 축복하는 백성들은 여호와를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1), ‘우리 하나님의 이름’(5),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7)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이름 중에 ‘야곱의 하나님’은 조상 야곱과 하나님의 씨름을 연상시키기에 특별한 보호를 구할 때 부르는 이름입니다(창세기 35:3;참조. 시편 46:7,11; 76:6; 84:8). 또한 ‘여호와 우리 하나님 이름’이 내포하는 것은 언약 백성에게 주신 친밀한 이름 여호와가 곧 우리 하나님이라는 믿음을 바탕에 둡니다. 그 하나님께서 전쟁의 승리를 위해 도우시기를 바라는 백성들의 간절한 기원이 담긴 소원입니다. 특히 고대 이스라엘의 전쟁은 신앙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었습니다. 이는 용사이신 여호와가 백성과 함께 전쟁에 참여하신 것에 근거합니다(출애굽기 15:3).

 

(2) 시온에서 도우심(2-5)

 

이스라엘 백성은 야곱의 하나님께서 성소에서 왕을 도우시고 시온에서 붙드시기를 빌어줍니다(2). 이는 하나님께서 백성의 군대 앞에서 전쟁을 이끄시는 분임을(사무엘상 4:3-9; 사무엘하 15:24-29; 시편 44:9) 확신하는 믿음에 기초한 축복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소’가 있는 시온에서 공동체가 함께 드리는 예배 의식의 상황을 반영합니다.

백성들은 출전을 앞둔 왕 앞에서 왕을 위해 노래합니다. ‘당신의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당신의 번제를 받아 주시기를 원한다’(3), 고대의 왕들은 전쟁에 나가기 전에 종교적인 예식을 통해 하나님께 특별한 희생 제사를 드리곤 했습니다. 백성들은 전쟁의 승리를 위해 왕의 제사를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왕의 간절한 마음을 보시어 돕기를 간구합니다. 이는 제사 자체의 능력이 아니라 제사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은 왕에게 ‘당신의 마음의 소원을 이루시고, 당신의 모든 계획이 성공하기를 빌어준다’(4). 이것은 백성들이 왕의 내적인 열망, 특히 전쟁 승리를 위해 도모하는 갖가지 계획이 성공하기를 축복하는 장면입니다. 또한 왕의 생각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전쟁의 승패가 하나님께 있음을 표명한 선언입니다. 왕의 승리는 백성의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시행은 이것을 구체화합니다. 백성들은 자신을 위해서라도 왕을 축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왕의 승리는 곧 백성을 위한 구원이기에 외칩니다. ‘당신의 승리로 인해 우리가 기쁨의 환호성을 외칠 것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 깃발을 높이 들리니 여호와가 당신의 모든 기도를 들어주시기를 원합니다’(5). 위험한 전쟁 상황에서의 승리는 곧 하나님의 구원행위입니다. 다윗은 왕이 참여한 전쟁의 혁혁한 승리를 하나님의 ‘구원’으로 선포합니다. 백성들은 왕이 승전가를 부르며 돌아오는 하나님의 구원의 날을 기대합니다. 백성들은 왕과 함께 기뻐하고 소리치며 여호와를 찬양하는 순간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제사장의 축복 선언(6)

하나님의 공동체는 지지와 성원, 격려와 응원 속에 자랍니다. 진심으로 형제의 승리를 함께 기뻐해주는 공동체를 세웁니다. 서로 격려하고 지지하는 것은 공동체 안에 있는 형제들이 항상 승리할 수 있도록 힘을 주는 것입니다. 다윗은 백성들을 염려하고 백성들은 왕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제사장적인 축복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6여호와께서 자기에게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의 오른손의 구원하는 힘으로 그의 거룩한 하늘에서 그에게 응답하시리로다(6)

 

말의 주체는 ‘우리’에서 ‘나’로 바뀝니다. 6절 시행은 ‘이제 나는 압니다’로 시작한다. ‘이제’는 새로운 상황을 강조합니다. 말하는 자가 무엇을 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나’는 누구입니까? 아마도 지금까지 백성이 왕을 축복하는 말을 들은 제사장이 백성의 바람대로 하나님께서 왕에게 승리를 주시고 구원으로 응답하실 것을 확언하는 듯합니다. 그 근거는 여호와가 제사장을 통해 왕에게 승리를 주신다는 신탁 내용입니다.

제사장이 받은 신탁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여호와께서 그의 기름부음 받은 자’, 곧 왕을 구원하신다는 것이고(6), 둘째, 그분의 오른손의 구원하는 능력으로 그분의 거룩한 하늘에서 그에게(왕에게)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6bc). 구원과 응답은 ‘그분의 거룩한 하늘로부터’옵니다. 백성들이 왕에게 야곱의 하나님께서 ‘성소에서’ 왕을 도와주실 것이라고 축복한 것처럼(2), 제사장은 ‘거룩한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것을 신탁을 통해 알게 되어 확신하며 선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기름 부음 받은 왕은 땅의 ‘거룩한 곳’(성소)에서 예배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거룩한 하늘에서 응답하실 것입니다. 아직 전쟁이 시작되지 않았지만, 왕과 백성과 제사장이 함께 제의(예배)를 마치는 순간 이미 승리가 성취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 선언에 근거하여 왕은 출전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승리를 위한 백성들의 기도(7-9)

사람들은 눈으로 보이는 것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보니, 세상의 것에 집착하는 수가 있습니다. 세상의 것은 유한한 것이지만 더 무한한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의지한다는 것은 하나님보다 세상으로부터 자기에게 힘이 될 만한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군사적인 힘이든지, 자본의 능력이든지 어떤 것이든지 절대로 하나님보다 앞서는 안 됩니다.

 

7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8그들은 비틀거리며 엎드러지고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 9여호와여 왕을 구원하소서 우리가 부를 때에 우리에게 응답하소서(7-9)

 

전쟁에서 백성들이 지도자를 신뢰한다는 것은 승패를 좌우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을 신뢰하며 응원하고 있지만, 왕은 무엇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승리의 비결이며 자랑임을 고백합니다. 백성들은 마지막으로 왕의 구원과 승리를 위해 기도합니다.

 

(1) 여호와 하나님 이름을 자랑(7)

 

백성들은 제사장의 선포를 듣고 환호하며 열광했을 것입니다. 이제 말의 주체가 ‘나’에서 다시 ‘우리’로 전환되어 백성들이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병거를,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지만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합니다’(7). 말과 병거의 군사력을 의지하는 사람이 누군지 밝히지 않지만, 그들과 반대편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 하나님 이름을 자랑하는 자로서 그 정체성이 확실합니다. 고대의 왕들은 많은 말들을 비축하여 군사력 증강을 도모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탈출시키신 후 군사력에 의존하는 것을 금지하셨습니다(신명기 17:16). 언약 백성 이스라엘은 오직 하나님만을 믿고 전쟁에 참여하도록 부름 받았기 때문입니다. 전쟁의 승패는 군사력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 달려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우리 하나님’이라고 호명하는 백성들이 그 이름을 자랑합니다. ‘자랑한다’는 말은 신앙공동체가 여호와 이름을 세상에 알려 기억하고 찬양하고 선포한다는 뜻입니다.

 

(2) 여호와여 구원하소서(8-9)

 

백성들이 확신하며 고백하는 말은 계속됩니다. ‘군사력을 의지하는 이들은 비틀거리고 엎드러지지만, 우리는 일어나 똑바로 섭니다’(8). 이스라엘의 전쟁 상대인 대적들은 자기들의 군사력만 믿고 교만했겠지만, 백성들은 그들이 전복되고 함락될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선다’(8b)는 말은 일어나 서로를 도와 일으켜준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구약 본문에서 유일하게 이곳에서만 사용된 강조형 구문입니다. 환난으로 대표되는 전쟁에서 혼자만 살기 위한 비겁하고 이기적인 싸움이 아니라 전투력이 소진되는 상황에서도 서로를 도우며 일으켜주는 상황을 묘사합니다. 이는 말과 병거를 의지하는 자들과 대비됩니다.

마지막으로 백성들은 전쟁에 나서는 왕을 위해 힘찬 목소리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요청합니다. ‘여호와여 왕을 구원하소서 우리가 부를 때에 우리에게 응답하소서’(9). 처음에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왕에게 응답하시기를 기원했습니다(1). 이제 온 이스라엘 공동체가 일치된 마음으로 여호와께 ‘왕을 구원해 주십시오’라고 직접적이며 적극적으로 요청합니다. 왕의 승리는 백성의 승리이며, 왕의 구원은 백성의 구원입니다. 마지막 시행은 한 나라의 기름 부음 받은 왕의 승리와 구원은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 달려 있음을 선포하는 언약공동체의 신앙고백이 담긴 간구입니다.


 당신이 섬기고 있는 공동체는 서로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삶을 책임져주는 공동체가 되고 있습니까? 싸움에서 전사할지라도 남은 이들을 돌봐줄 수 있습니까? 형제가 오룻하게 하나님만 의지하고 전투를 치를 수 있도록 상호책임의 연대를 보여주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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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19-01)


 신기한 하나님의 솜씨

시편 19편 1-14절


우리는 자연과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를 충분히 알아 갈 수 있습니다. 창조하시고, 만물을 보존하시고, 운행하실 뿐 아니라, 성경을 통해 자신을 제시하시고, 은혜를 주시는 크고 놀라우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경배와 찬양을 받기에 지극히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주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세계를 묵상하며 오늘 하나님께 어떤 찬양을 올려 드리겠습니까?

 

19편은 그 어떤 시편보다 히브리 시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아름다움과 장엄하믈 묘사한 노래이며, 청조 세계를 통한 계시와 ‘토라’(율법)를 통한 계시가 분리될 수 없는 한 하나님의 계획이며 은총임을 노래합니다. 온 우주와 태양의 질서는 토라와 양심의 세계로 깊게 침투하여 구속자 앞에서 죄를 고백하게 하며,정직한 삶으로 인도합니다.

 

우주에 가득 찬 하나님의 계시와 영광(1-6)

자연은 하나님의 영광과 그 손으로 하신 일을 알려줍니다. 믿음의 귀가 열린 이는 온 누리에 울려 퍼지는 웅장한 찬양을 들을 수 있습니다. 매우 빠르게 살면 영혼이 메마르기 쉽습니다. 그때 밖으로 나가 창조의 노래를 들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1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2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3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4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5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6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1-6)

 

하나님께서는 자연을 통해서, 더 구체적으로는 성경을 통해서 자신이 어떤 분인지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자연이 조직적으로 질서 있게 은혜 되는 것은 결코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1) 하늘의 계시(1-2)

 

하나님의 계시는 온 우주에 가득합니다. 시의 첫 단락주제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합니다. 궁창은 하나님의 하신 일을 선포합니다(1).

창세기 1장을 떠올리게 하는 1절은 하늘과 창공이 이어져 자기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그 강조는 하늘과 궁창이 ‘선포하고’, ‘나타낸다’는 분사 구문의 동사 활용에서 제시됩니다. 천체의 움직임을 상상하도록 자극하는 표현이 아름답습니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2). 날은 또 다른 날에게 이어지고, 밤은 또 다른 밤으로 이어져 낮과 밤의 질서가 교란되지 않는 상태를 표현했습니다. 우주 질서를 대표하는 날과 밤이 지식의 계시자로 인간 세계에 공표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사람만 언어로 소통한다는 통념을 벗어나 날과 밤에게 인격성을 부여하여 쉼 없이 서로에게 정보와 지식을 전하는 것처럼 묘사했습니다.

 

(2) 말 없는 계시(3-4)

 

다윗은 사람이 들을 수 없는 우주의 속삭임을 역설적으로 표현합니다.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지만(3), 온 땅에서 서로 어울려 그 무늬가 퍼져 나옵니다. 그 말이 세상 끝까지 이릅니다. 하나님께서는 해를 위해 장막을 치셨습니다(4). 다윗의 묘사처럼, 우주 질서는 하나님을 알리는 계시의 수단이며 우주 속에 깃든 하나님의 영광 그 자체입니다.

 

(3) 해를 통한 계시(5-6)

 

하나님께서는 해를 위해 장막을 치신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장막’(오헬)은 거주와 쉼을 위한 공간입니다. 해가 장막에서 휴식을 취하는 영상은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다’(5a)는 소절로 연결됩니다. 해가 마치 밀월의 기쁨을 나누는 신랑처럼 그려졌습니다. 또한 달리기를 기뻐하는 전사의 모습으로 의인화되어(5b) 하늘 길을 달리는 태양의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이것은 고대 수메르 신화처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매일 영광스럽게 솟아오르는 태양의 힘을 노래합니다. 하늘에서 시작하여(1) 하늘 저 끝에 이르는 태양의 힘찬 운동을 통해(6) 우리는 매일 맞이하는 평범한 하루가 우주 질서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영광이며 생명이 약동하는 활력의 세계임을 깨닫습니다.

 

여호와의 가르침(토라)을 통한 계시(7-11)

해는 해맑은 모습으로 떠올라 힘센 용사처럼 하늘을 달립니다. 만물이 해의 온기에서 생기를 얻듯 하나님의 자비의 손길에서 인간은 생명을 얻습니다. 과학만능과 물질 최고의 세상에서, 하나님만이 생명의 원천임을 인정합니다. 그 신비를 경험하는 감수성을 가다어야 합니다.

 

7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8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9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10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11또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7-11)

 

다윗은 시선을 바꾸어 여호와의 율법(토라), 곧 여호와의 가르침을 찬미하며 묵상합니다. 다윗은 토라에 대한 아름다움을 완전하고, 확실한 것으로 규명합니다. 완전함은 영혼을 소생시키고, 그 증거의 확실함은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만듭니다(7). 온 우주에 생명의 활기를 불어넣으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언약 백성들을 위한 가르침으로 생명을 회복시키십니다. ‘토라’는 여호와의 증거입니다. 곧 ‘경고 표시’로서 어수룩한 사람을 지혜롭게 합니다.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즐겁게 합니다(8a). 교훈도 ‘토라’처럼 삶의 방향을 안내하는 훈령으로서 사람의 의지와 정신을 즐겁게 하니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있을까. 여호와의 ‘계명’(미츠바)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합니다(8b).

불순물 없는 밝고 깨끗한 ‘명령’이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을 빛나게 합니다. 이는 전에 없던 새로운 관점과 인식의 체계를 얻은 상태를 말합니까? 이뿐 아니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릅니다(9ab). 여호와의 ‘율법’이 증거, 교훈, 계명으로 분화되어 표현되었지만, 다윗은 ‘토라’를 ‘여호와 경외’와 동의어처럼 제사하여 영원히 가치와 삶의 원리로서 찬미합니다. 그 근거는 정결함 때문입니다. 또한 여호와의 ‘법’(미슈파트)은 진실하여 다 의롭습니다(9bc). 결국 여호와 가르침(토라)의 절정은 진실한 법으로서 의로움(체덱)을 그 속성으로 천명한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은 여호와의 ‘토라’를 비유와 암시로 풍부하게 묘사했습니다. 다윗은 천체 운동에 계시된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면서 여호와의 ‘가르침’, 곧 그의 법의 인간 삶에서의 기능을 밝혀 하나님의 창조와 언약백성에게 베풀어지는 구속의 연속성을 드러냅니다. 그러고서 다윗은 여호와의 ‘토라’에 포함된 속성들이(7-9) 금보다, 순금보다 더 만족스러우며(10ab), 꿀보다 달콤하고 흘러넘치는 송이꿀보다 더 달콤하다고(10cd) 고백합니다. 창조자 하나님이 언약의 주님으로서 주신 포괄적인 ‘가르침’(토라)은 복된 삶, 곧 복음적인 삶의 바탕이 됩니다. 다윗은 ‘당신의 종이 이 가르침으로 경고를 받고 지켜서 받는 상이 크다’(11)고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말은 여호와의 법을 중심에 둔 삶의 기쁨과 그 결과를 확신하는 믿음의 증언입니다.

 

토라에 대한 반응-고백과 헌신(12-14)

말씀은 태양처럼 백성을 살게하는 근원입니다. 시든 영혼을 소성케 하고,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며, 참 되고 순수하여 우리의 눈을 밝혀 의의 길을 가게 합니다. 말씀은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귀하고 유익한 것입니다. 지친 영혼을 위해 말씀을 공급하십니다.

 

12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13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14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12-14)

 

우주에 가득한 하나님 영광 찬미는 다윗의 내적 성찰로 마무리됩니다. 다윗은 낮과 밤의 교차와 태양의 운동을 보며 환희에 찬 하나님 영광을 맛보고, 그 하나님께서는 베푸신 가르침(토라)을 찬미했습니다. 그 영광의 빛에 자신을 비춰 봅니다. ‘허물들을 깨달을 자 누구인가? 나의 숨겨진 허물에서 나를 자유롭게 하소서’(12). ‘잘못’이나 ‘허물’은 ‘정도를 벗어나 곁길로 간다’는 말에서 파생되어 ‘오류’와 ‘무지’를 포함한 말입니다. 또한 수사학적인 질문의 숨은 의도는 죄에 대한 고발입니다. 누구도 숨겨진 죄에서 벗어날 수 없음과 무지의 죄를 깨닫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이는 ‘당신의 종이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소서’(13a)라는 기도로 이어집니다. 이 기도는 구체화되어 ‘그 죄’, 곧 거만한 의지에서 발동한 ‘고의적인 죄들’이 나를 주장하지 말게 해달라는(13b) 간구가 됩니다. 그때 비로소 다윗은 ‘내가 비난받지 않을 것이고, 큰 죄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13cd)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당신의 종’(주의 종)으로 낮추면서 자기 삶이 하나님 앞에 온전하고 결백하기를 구합니다.

마지막 시행에서 다윗은 엄숙하게 구속자 여호와를 고백하고 헌신을 다짐합니다. 14절의 개역개정 배열은 본래 히브리 본문 시행과 다릅니다. 의미상의 차이는 없지만 묵직한 여운을 느끼려면 히브리 시행 순서를 따르는 것이 좋습니다. 다윗은 하늘과 태양, 곧 우주가 하나님 영광을 선포한 것(1)에 이어, 언약의 주님 여호와가 이스라엘에게 주신 특별한 가르침의 아름다움을(7-9) 노래합니다.

이제 다윗은 자기 입으로 직접 말합니다. ‘내 입의 말과 내 마음의 묵상이 당신 앞에서 받아들여지기를 원합니다’(14ab).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는 것처럼(2), 다윗은 자신의 말이 헛되지 않고 여호와가 기쁘게 받으실 제물이 되길 빕니다. 더군다나 ‘묵상’은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포함된 것입니다. 다윗은 앞서 자신의 내밀한 것들까지 하나님 앞에 수렴되기를 바라며, 거짓이 없고 모든 죄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13) 간구합니다.

마지막 그의 간결하고 확실한 고백은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요, 나의 구속자입니다’(14c). 그가 선포한 창조자 하나님은 구속자입니다. 다윗은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하나님이 여호와라는 것을 고백할 뿐 아니라 ‘나’ 한 사람의 피할 반석과 구속자이신 하나님과의 깊은 연대감을 표현합니다. 무엇보다 ‘구속자’(고엘)는 구약에서 법적인 책임과 의무를 동반하는 가장 가까운 친족을 이르는 말입니다. 빚 때문에 노예 신분으로 전락한 사람의 빚을 갚아주고 자유를 얻게 해주는 사람이 ‘고엘’, 곧 구속자입니다. 다윗은 옛 조상들을 애굽의 노역으로부터 빼내어 속량하신 (구속하신, 출애굽기 6:6)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고백한 것입니다. 다윗이 바로의 폭압적인 통치에서 건지신 하나님을 ‘나의 구속자’로 고백하듯, ‘구속자’는 폭력적이고 노예적인 모든 종류의 삶에서 구출해주실 여호와 하나님입니다(참조, 이사야 54:8).


 다윗은 말씀에 비추었음에도 미쳐 깨닫지 못한 허물이 있다면 용서해달라고 간구합니다. 듣고도 돌이키지 않을 만큼 완고한 종이 되지 않기를 간구합니다. 말씀의 사람만이 죄의 무서움을 알고 두려움을 갖습니다. 민감한 분별력을 구하며 말씀이 낳는 경건한 두려움으로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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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18-03)

 


내가 승리 중에

시편 18편 30-50절 


우리는 환난의 시간보다 승리의 시간을 보낼 때 넘어지기 쉽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약해지기 쉽고, 그 승리를 자신의 공로로 내세우기 쉽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늘 점검해야 할 것은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지입니다. 당신은 환난 중에 보호하시고,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얼마나 찬양하고 있습니까?

 

  • 시인 다윗은 자기를 대적하는 자들, 곧 원수들 앞에서 하나님께서 자기편이 되셔서 구원하시고, 열방의 으뜸이 되게 하신 것을 찬송합니다. 이 일로 열방이 자기에게 굴욕감을 느끼지만 복종하게 되는 ‘기름 부음 받은 자’(메시야)의 온 세상 통치라는 제왕시의 중심 사상이 나타납니다. 이와 함께 다윗은 자기 백성을 도우시는 빅 불가능한 ‘그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도와 안전한 구원(30-36)

구원을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하고 순수하여 변치 않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사건이 되고 역사가 되기에 다윗은 약속에 의지하여 신뢰하고 순종합니다. 말씀을 믿는 자만 세상을 이깁니다. 이제껏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왔듯이, 앞으로도 신뢰와 순종으로 살아야 합니다.

 

30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순수하니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 31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냐 32이 하나님이 힘으로 내게 띠 띠우시며 내 길을 완전하게 하시며 33나의 발을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며 34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니 내 팔이 놋 활을 당기도다 35또 주께서 주의 구원하는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들고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 36내 걸음을 넓게 하셨고 나를 실족하지 않게 하셨나이다(30-36)

 

다윗은 환난 중에 매우 어려운 시간을 보냈지만, 계속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어려움을 지나 구원에 이르게 하시고, 원수의 손에서 승리하게 하신 것을 찬양합니다. 

(1) 길과 방패 되신 하나님(30) 

다윗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합니다. 다윗에게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순수하며 그는 방패여서 피하는 모든 자가 안전합니다(30). 다윗은 독특하게 ‘하나님’ (하엘)앞에 정관사를 덧붙여 ‘신들 중에’ 신으로서 가장 탁월하신 하나님, 비교 불가능한 하나님을 표현했습니다(참조. 신명기 33:26). 비교 불가한 ‘하나님의 도’의 완전성과 ‘여호와의 말씀’의 순수성이 평행적인 관계를 형성하며, 뛰어난 신이 제시하는 ‘길’, 곧 ‘도’는 여호와의 정제된 말씀 안에서 구현됨을 선언합니다. 더군다나 군사적인 위협에서 보호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방패’라는 은유로 묘사하여 보호막이 되신 하나님을 증언합니다(30bc). 

(2) 나의 반석, 나의 길 되신 하나님(31-36) 

하나님의 탁월하심에 대한 시인의 고백적인 증언은 수사학적인 질문으로 재차 강조됩니다. ‘참으로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인가,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반석인가?’(31) 이 질문은 여호와 하나님의 유일성에 대한 신앙고백의 핵심입니다(참조, 출애굽기 15:11; 신명기 33:26, 29; 사무엘상 2:2; 이사야 46:9). 또한 다윗은 유일하시고 반석이신(31) ‘그 하나님’이 힘으로 자신을 꽉 묶으시고 자신의 길을 완전하게 하셨다고 합니다(32). 다윗은 하나님의 ‘도(길)’가 완전하다고 고백한 것처럼, 자신의 길을 완전하게 하신 하나님을 병행시켜 하나님과 분리될 수 없는 밀착된 존재로 자신을 묘사합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은 시인을 자유롭게 대지와 언덕을 달리는 암사슴의 발처럼 빠르게 하시고 높은 곳에 서게 하셨습니다(33). 다윗은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훈련시켜 화살을 당기게 하셨고(34), 승리의 방패를 주시고, 주의 오른손으로 붙들어 주시고, 그의 낮추심(온유함)이 자기를 크게 했다(35)고 증언합니다. 이는 마치 하나님께서는 사람처럼 자신의 몸을 굽히시고 낮추셔서 돌보시는 영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발걸음을 넓게 하시고, 실족하지 않게 하셨으니(36) 이는 드넓은 영토를 거침없이 행보하도록 돌보셨다는 뜻입니다.

 

전쟁에서의 승리(37-42)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여, 친히 전쟁을 주도하시고 원수들을 처서 굴복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허리띠를 동여매고 나갔을 때, 다윗이 본 것은 도주하는 적들의 등뿐이었고, 그가 한 일은 적을 추격하여 바람 앞에 티끌 같이, 거리의 진흙 ㄱ같이 부수고 발아래 짓밟는 것뿐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대적의 부르짖음에 결코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37내가 내 원수를 뒤쫓아가리니 그들이 망하기 전에는 돌아서지 아니하리이다 38내가 그들을 쳐서 능히 일어나지 못하게 하리니 그들이 내 발 아래에 엎드러지리이다 39주께서 나를 전쟁하게 하려고 능력으로 내게 띠 띠우사 일어나 나를 치는 자들이 내게 굴복하게 하셨나이다 40또 주께서 내 원수들에게 등을 내게로 향하게 하시고 나를 미워하는 자들을 내가 끊어 버리게 하셨나이다 41그들이 부르짖으나 구원할 자가 없었고 여호와께 부르짖어도 그들에게 대답하지 아니하셨나이다 42내가 그들을 바람 앞에 티끌 같이 부숴뜨리고 거리의 진흙 같이 쏟아 버렸나이다(37-42)

 

다윗은 자신의 대적들 앞에서 승리로 이끄신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합니다. 무엇보다 다윗은 쫓는 자가 되어 도망치는 원수들을 추격하고, 그들의 멸망을 보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굳건한 의지를 고백합니다(37). 마침내 대적들을 그의 발 앞에 쓰러뜨려 일어나지 못하게 했습니다(38). 다윗은 적들을 완전히 패하게 하신 이는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39-40).

‘주께서 … 나를 치는 자들이 내게 굴복하게 하셨나이다’(40)라는 말처럼 다윗은 하나님이 주신 능력으로 영웅적인 승리를 거뒀습니다. 흥미롭게도 다윗을 공격하는 대적들은 나라 밖 사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다윗은 그들이 부르짖어도 구원할 자 없고, 여호와는 그들에게 대답하지 않으셔서(41) 다윗의 능력을 찬양합니다. 무엇보다 다윗은 쫓는 자가 되어 도망치는 원수들을 추격하고, 그들의 멸망을 보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굳건한 의지를 고백합니다(37). 마침내 대적들을 그의 발 앞에 쓰러뜨려 일어나지 못하게 했습니다(38).

다윗은 적들을 완전히 패하게 하신 이는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39-40). ‘주께서…나를 치는 자들이 내게 굴복하게 하셨나이다’(40)라는 말처럼 다윗은 하나님이 주신 능력으로 영웅적인 승리를 거뒀습니다. 흥미롭게도 다윗을 공격하는 대적들은 나라 밖 사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다윗은 그들이 부르짖어도 구원할 자 없고, 여호와는 그들에게 대답하지 않으셔서(41) 다윗의 대적들은 어떤 도움도 받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여호와는 다윗 편이셨습니다. 다윗은 대적들을 바람 앞에 티끌처럼 날려버렸고, 길거리 진흙처럼 쏟아버릴 수 있었습니다(42). 다윗은 자기를 공격하는 대적들을 ‘내 원수’(37, 40), ‘나를 치는 자들’(39), ‘나를 미워하는 자들’(40)로 다양하게 묘사하며 자신의 궁극적 승리의 원동력과 그들의 패배 원인을 하나님께 둡니다.

 

우주적 왕권(43-45)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전진해 나갈 때 흑암의 영들은 두려워 떨며 뒤로 물러납니다. 교회가 담대히 일어나 예수의 이름으로 세상의 영을 꾸짖는다면 악한 영들은 패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악한 영들은 우주적인 왕권을 가진 그리스도인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주적인 왕권을 가지고 자기 백성들을 돌아보고 계십니다.

 

43주께서 나를 백성의 다툼에서 건지시고 여러 민족의 으뜸으로 삼으셨으니 내가 알지 못하는 백성이 나를 섬기리이다 44그들이 내 소문을 들은 즉시로 내게 청종함이여 이방인들이 내게 복종하리로다 45이방 자손들이 쇠잔하여 그 견고한 곳에서 떨며 나오리로다(43-45)

 

다윗은 자신에게 승리를 안겨주신 여호와께 고백합니다. ‘당신이 백성의 다툼에서 나를 구원하시고, 여러 민족의 으뜸으로 삼으셔서, 나를 알지 못하는 배성까지 나를 섬길 것입니다’(43). 이 고백은 사울 집안과 오랜 시간 다투며 내전의 소용돌이 속에서(삼하 3:1), 그리고 이방 민족들과 벌인 전쟁에서 거둔 혁혁한 승리를 감사하는 찬양입니다. 그의 왕권이 하나님에 의해 확장될 것을 믿습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높이셔서 자기 언약 백성뿐 아니라 주변 나라들이 조공을 바치며 섬기게 하셨습니다(사무엘하 8:6; 10:19). 이는 아브라함 언약과 시내산 언약을 계승하는 것이고, 다윗 언약(사무엘하 7장)의 확증이며, 장차 성취될 ‘메시아의 통치’를 내다봅니다. 다윗은 또한 다툼을 벌였던 자들과 열방이 자기 소문을 듣고 복종할 것이라고 믿습니다(44).

또한 이방의 자손들은 쇠잔해져 요새에서 떨며 항복할 것입니다(45). 꽃과 잎이 시드는 것처럼(이사야 1:30; 28:1) 이방인들이 다윗 앞에서 힘과 용기를 잃는 모습을 그립니다. 더군다나 이방의 대적들이 지키던 ‘견고한 산성’에서 항복하는 것은 억압하려 했던 자들이 비굴하게 복종하게 되는 전복적인 상황을 묘사합니다.

 

반석이신 여호와께 감사와 찬양(46-50)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신 분이니 언제까지든지 자기 백성과 맺은 약속을 지켜내실 수 있습니다. 반석이 되어 보호하시고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시고 민족들 위에 세우십니다. 기름 부음 받은 자, 왕에게 언약적 사랑으로 큰 구원을 베푸시며, 믿음으로 그 언약의 후손 된 모든 자에게 그 약속을 지키십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더 큰 구원과 온전한 승리를 위해 태어나신 것입니다.

 

46여호와는 살아 계시니 나의 반석을 찬송하며 내 구원의 하나님을 높일지로다 47이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보복해 주시고 민족들이 내게 복종하게 해 주시도다 48주께서 나를 내 원수들에게서 구조하시니 주께서 나를 대적하는 자들의 위에 나를 높이 드시고 나를 포악한 자에게서 건지시나이다 49여호와여 이러므로 내가 이방 나라들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이다 50여호와께서 그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며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인자를 베푸심이여 영원토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로다(46-50)

 

다윗은 구원과 인자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지금까지 경험한 모든 과정과 흐름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기에 가능하다고 찬양합니다. 

(1)나의 반석이며 살아 계신 여호와(46-49) 

다윗이 곤경에서 구워해 주시고, 자기를 미워하는 원수들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으로 영광을 돌립니다. 시의 마지막은 송영입니다. 그의 첫마디는 우상처럼 허구가 아닌 실재하는 분의 존재를 선포한 말입니다. ‘여호와는 살아 계시다! 나의 반석 되심을 찬양하라’(46a), ‘살아계신 하나님’(‘엘하이’, 42:2; 84:2)이라는 표현이 있지만, ‘여호와는 살아 계시다’라는 어법은 시편에서 이곳이 유일합니다. 다윗은 그가 내 구원의 하나님이니 그를 높이라고 외칩니다(46b). 이는 전쟁에서 승리를 주신 하나님 만세를 외치는 것과 같습니다. 살아 계신 여호와가 ‘내 반석’이라는 고백은 이스라엘 안에서 회자된 말일 것입니다. 다윗은 백성들 앞에서 ‘큰 바위’되신 하나님을 높이며 찬양합니다(참조. 사무엘상 2:2). 다윗은 자기를 위해 보복해주신 여호와가 창조자 하나님이심을 강조합니다. ‘그 하나님’은 자기 길을 완전하게 하신 하나님입니다(47; 18:32), 그 하나님이 공의로운 재판장이 되셔서 완전한 복수를 해주셨습니다. 이는 다윗을 공격하는 원수들의 악을 갚아주신 사건들을 가리킵니다(참조. 사무엘하 4:8). 다윗은 계속해서 그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며 열거합니다. 그분은 원수들에게서 구원해주시고, 대적자들 앞에서 높여주시고, 포악한 자들에게서 건지신 분입니다(48).

승리는 여호와께 속했습니다. 이 때문에 시인은 살아계신 여호와, 그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방 나라들 가운데 여호와께 감사하며, 내가 당신의 이름을 찬양합니다’(49절). ‘이방 나라들’, 곧 열방이 그의 통치 아래 있음을 강조합니다. 이후 사도 바울은 이 구절을 인용하며 오래전부터 이방인들의 구원이 예고되었음을 전합니다(로마서 15:9). 

(2) 메시아의 영원한 통치(50)

마지막으로 시인은 여호와께서 세우신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고,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인자를 베푸시며, 다윗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그렇게 하시기를 기원합니다(50).

마지막 시행은 우주적인 왕의 대리 통치자인 인간 왕 다윗, 곧 ‘기름 부음 받은 자’와 그의 후손에게 영원토록 지속되는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랑, 곧 ‘인자’(헤세드)를 찬미합니다. 이것은 자기 백성과의 언약을 신실하게 이행하시는 여호와의 구원이 어느 특정 시대로 끝나지 않고 지속될 것임을 선포하는 장엄한 선언입니다. 이렇게 마지막 시행은 다윗 언약(사무엘하 7:12-16)에 근거하여 이미 다윗 당시 성취되었고, 장차 그 후손을 통해 완전한 성취로 이어질 것을 내다봅니다.


 승산 없는 싸움이었지만, 하나님께서 편이 되어주셨기에 이룬 값진 승리였습니다. 믿음으로 나가 싸울 때, 하나님께서 도우시고 승리였습니다. 믿음으로 나가 싸울 때, 하나님께서 도우시고 승리로 이끄십니다. 용기를 낼 때 북돋아 주시고, 힘을 낼 때 크고 강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의지해 싸운 자만이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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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18-02)

 

 


나를 도우신 하나님

시편 18편 16-29절


우리는 종교적인 의무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매일 말씀을 묵상합니다. 하나님과 만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그 말씀으로 우리의 신앙이 성숙해질 때 우리는 밖을 향해서 나갈 수 있습니다. 현제에 안주하지 않고 새롭게 믿음으로 도약을 시도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시인 다윗은 약자를 구원하시는 하니님을 선포하기 위해 옛적 애굽으로부터 자기 조상의 출애굽 사건을 상기시켜 자신과 모세의 지도력을 연결시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구원하신 이유가 그의 규례와 율례를 따라 의롭고 깨끗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라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이는 곤고한 백성을 구원하시지만, 사악하고 교만한 자들을 굴복시키시는 하나님을 경험한 것을 기초합니다.

 

악한 자들 구원하시는 하나님(16-19)

하나님께서는 홍해에서 자기 백성을 건지듯 다윗을 강한 원수와 미워하는 자에게서 건져내셨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벗어나 넓고 안전한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끝까지 악을 악으로 갚지 않은 다윗을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처분에 맡기고 하나님의 간섭을 기다리고 하나님의 방법을 좇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태도입니다.

 

16그가 높은 곳에서 손을 펴사 나를 붙잡아 주심이여 많은 물에서 나를 건져내셨도다 17나를 강한 원수와 미워하는 자에게서 건지셨음이여 그들은 나보다 힘이 세기 때문이로다 18그들이 나의 재앙의 날에 내게 이르렀으나 여호와께서 나의 의지가 되셨도다 19나를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시므로 나를 구원하셨도다(16-19)

 

다윗은 하나님의 강림을 묘사한 후(7-15), 그는 여호와가 높은 곳에서 손을 뻗으셔서 자기를 붙잡아주시고, 많은 물에서 건져내셨다(16)고 고백합니다. 여호와의 일하심에 대해 여러 가지 동사로 표현합니다(손을 펴시고, 불잡으시고, 건지셨다).

그런데 다윗은 ‘그가 나를 많은 물에서 건져내셨다’(16b)고 할 때, ‘건져내다’는 ‘마샤’로 ‘모세’의 어근 동사입니다. 이는 ‘건져진 자’라는 뜻의 모세를 상기시킬 뿐 아니라, 나일 강에서 건져진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 모세와(출애굽기 2:10) 자신을 연결합니다. 더군다나 많은 물은 헤어날 수 없는 지하 세계의 물이며, 위험한 물로서 죽음의 물을 상징합니다. 옛적 애굽의 범람하던 강물이 생명의 강이 아니라 영아를 학살하는 죽음의 강이었던 것처럼, 다윗은 많은 물의 위협에서 구원받았다고 노래합니다. 여호와의 구원은 다윗에게 좀 더 사실적이고 구체적입니다. 그는 자기보다 힘이 센 강한 원수와 자기를 미워하는 자들에게서 주님이 구원하셨다(17)고 말합니다. 강자의 편에 계신 것이 아니라 약자를 보호하시는 하나님 묘사입니다. 다윗은 이를 내세워 자기 원수를 힘 센 강자로 표현하고 반면에 자신의 무력함을 대조하여 강조합니다.

또한 원수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몰려온 그 재앙의 날에 하나님이 의지가 되셨다(18)고 회고합니다. 아마도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자 신분으로 거칠고 험악한 삶을 살던 시절에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군대를 동원해 추적했던 때를(사무엘상 23, 24, 26장) 회고한 것처럼 보입니다. 사울 왕의 강한 힘 앞에서 다윗은 무기력한 도망자였습니다. 왕의 군사들의 좁혀오는 추적 앞에서 두려웠을 다윗을 상상해보시길 바랍니다. 때문에 다윗은 여호와가 자기를 위해 일하셨던 은혜를 기억합니다. 과거에 대한 기억은 진실의 문을 열어 현재의 고통에 희망을 건넵니다.

다윗은 고백합니다. ‘그가 나를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셔서 나를 구원하셨다’(19). 좁고 험하고 거친 협곡들과 동굴에 숨어 도망자로 살아야 했던 다윗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가 ‘넓은 곳’으로 인도하셨다는 것은 주님이 더 이상 위험하지 않은 안전한 상태로 인도하셨다는 뜻입니다. 그 구원은 여호와가 자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이라고(19b) 이유를 밝힙니다. 다윗은 스스로 여호와를 기쁘게 하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도를 떠나지 않은 삶과 보상(20-24)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성품을 따라서 우리를 대해주셨습니다. 자비하고 완전하고 깨끗한 성품 그대로, 자비를 베풀 줄 알고 완전하며 깨끗한 마음을 품은 이들에겐 마땅히 받을 대접을 받게 하시되, 사특한 자는 거부하십니다. 종종 세상은 의인의 알 수 없는 고난과 악인의 흥왕함을 목격하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결코 자신과 반하는 일을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20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상 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따라 내게 갚으셨으니 21이는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하게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22그의 모든 규례가 내 앞에 있고 내게서 그의 율례를 버리지 아니였음이로다 23또한 나는 그의 앞에 완전하여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자신을 지켰나니 24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갚으시되 그의 목전에서 내 손이 깨끗한 만큼 내게 갚으셨도다(20-24)

 

다윗은 이제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상 주시고, 내손의 깨끗함에 따라 내게 갚으셨다’(20)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언약을 충실히 지키신 것처럼, 다윗이 그 언약의 규범들을 지키는 일에 충실했다는 선언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의로운 삶을 주저하지 않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특히 ‘내 의’와 ‘내 손의 깨끗함’은 살면서 올바름과 순결을 추구하고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는 도덕적인 완결성을 표하는 말입니다. 더군다나 그는 자기의 의로움과 깨끗함을 보상해주시는 하나님을 노래하는데, 이후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보상해주신 이유들을 더 상세히 나열합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하나님을 떠나는 악을 행하지 않았습니다(21). 다윗에게 하나님의 도는 악을 행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가 나의 하나님 때문에 악행을 저지르지 않는다는 것은 여호와의 정하신 ‘길’, 곧 하나님이 정하신 ‘생활양식’과 방법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고서 우주를 창조하신 보편적인 명칭, ‘하나님’과 언약의 이름 ‘여호와’를 동시에 언급합니다(21). 이는 세계를 지으시고 관리하시는 하나님이 언약백성을 구원하신 여호와라는 동일성을 고백하고 선포한 것입니다.

이뿐 아닙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모든 규례가 자기 앞에 있고, 그의 율례를 버리지 않았다고 합니다(22). ‘규례’는 세부적인 법률적 항목들을 가리키며, ‘율례’는 성문화된 법령을 일컫는 말입니다. 여기서 신명기 신학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열왕기상 2:3) 이 둘의 예리한 구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둘 다 언약 관계 안에서 언약백성이 지켜야 할 세부 항목을 일컫는 용어입니다. 이처럼 다윗은 법적인 책임을 묻는 일들에서도 떳떳한 삶을 살았다고 당당히 말합니다.

또한 여호와 앞에서 완전하고, 죄악에서 자신을 지켰다고 합니다(23). ‘완전하다’라는 말은 흠이 없고, 지탄받을 만한 어떤 일도 행하지 않고 정직했다는 뜻입니다. 동시에 평행적 관계를 고려하면, ‘완전함’은 ‘죄악’에서 스스로를 지켰다는 의미입니다. 다윗은 거리낄 것이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규범을 버리지 않았고 완전하고 깨끗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당당하게 여호와께서 자기의 의를 따라 되갚아주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24). 다윗은 ‘갚아주다’라는 말을 반복할 만큼(참조. 20) 자기 삶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을 확신합니다.

 

곤고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25-29)

하나님께서는 신실한 자에게는 신실함을, 흠 없는 자에게는 완전하심을 보이십니다. 깨끗한 자에게는 깨끗함을 보이기고, 불쌍한 백성은 자비로움으로 구원하십니다. 하지만 약하고 사특한 자는 반드시 심판하여 낮추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완전하신 성품 그대로 우리를 대해 주십니다.

 

25자비로운 자에게는 주의 자비로우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26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악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시리니 27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 28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25-29)

 

지금까지 하나님을 ‘여호와’와 3인칭으로 호명하다가 2인칭 ‘당신’ 으로 바꿉니다. 자기 의를 갚아주신 하나님과 보편적 인류 사이에서 여호와를 '당신’으로 호명하고 그분의 성품을 밝힙니다.

‘경건한 자에게 당신은 진심으로 대해주시고, 완전한 자에게 당신의 완전하심을 보이십니다’(25). 다윗에게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행위와 삶의 태도에 따라 자신을 드러내시는 분입니다. 그러니까 경건한 자들은 하나님의 진심 어린 관심을 받고, 완전한 자는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맛본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여호와는 깨끗한 자에게는 깨끗하심으로, ‘사악한 자’, 곧 비뚤어지고 거짓된 사람은 혹독하게 다루시는 분입니다(26).

요약하면, 여호와는 신실한 자에게 자비로우십니다. 하지만 불법적이고 마음이 깨끗하지 못하고 허위로 가득한 사람에게는 보응하십니다. 하나님의 보응은 기계적이지 않으며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상호적인 관계성에 기초합니다.

 

이 때문에 다윗은 고백합니다. ‘당신은 곤고한 백성을 구원하시고, 교만한 사람의 눈을 굴복시키십니다’(27). 곤고한 백성은 가난, 궁핍, 환난으로 비참해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구원하시지만, 이들과 대조되는 교만한 자는 눈을 낮추시고 굴욕을 당하게 하십니다. ‘교만한 눈’은 말 그대로 하면 높아진 눈입니다. 한마디로 내면의 교만에 대한 외적 표현입니다. 오만하고, 도도하고, 건방지고, 불손한 태도의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오만함을 두고 보지 않으십니다. 이러한 자들을 깎아내리시고, 낮추시고, 창피를 주셔서 더 이상 오만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다윗은 다시 하나님과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 차원에서 삶을 성찰하며 고백합니다. ‘참으로 여호와 당신은 나의 등불입니다. 나의 하나님이 나의 어둠을 밝히십니다’(28). 그는 앞서 자신을 죽음과 스올에 갇힌 사람 같았다고 했지만(4-5), 그 깊은 어둠의 세계에서 등불을 들고 어둠의 세계에 빛을 비추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밝히신 등불 때문에 죽음과 시련의 어둠은 사라집니다. 이처럼 빛과 어둠의 대조는 성경 전체에서 고루 발견되는 일반적인 은유입니다. 어둠은 죽음의 세계와 혼돈의 세력을 상징하는 반면, 빛은 질서와 생명과 번성을 상징합니다. 이것은 다윗이 자기 원수들과 사울의 손에서 여호와가 구원하신 것을 찬미하며 노래할 때(사무엘하 22장) 고백한 말입니다(사무엘하 22:29). 다윗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 때문에라도(사무엘하 7장) 자신의 등불이 꺼지도록 버려두지 않으실 것을 믿었습니다(참조, 열왕기상 11:36; 15:4; 열왕기하 8:19). 이와 같은 믿음 때문에 다윗은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적군을 향해 나가고 하나님과 함께 적의 요새와 성벽을 무너뜨리고 넘을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29). 이는 다윗이 아말렉 군대를 비롯한 적의 군대를 추격할 때, 참 용사이신 하나님만 의지했던 신앙 고백입니다.


 

캄캄한 어둠일지라도 주님께서 등불을 밝히실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함께하시면, 내달려 적군을 쫓고 높은 성벽도 뛰어넘을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오랜 인생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께서 빛이시고 능력이심을 믿게 됩니다. 이 확신을 위해 오늘 당신이 쌓아야 할 경험을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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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18-01)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시편 18편 1-15절


사람들은 힘을 가지는 것이 세상을 잘 사는 비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평생 힘을 기르고 유지하는 데 열심을 냅니다. 하지만 어떤 힘보다 강한 힘은 여호와가 내 힘일 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지키시고, 선한 길로 인도하시고,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내 편으로 삼고, 아뢰며 부르짖으며, 피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18편 전체는 50절로 구성된 긴 시편들 중 하나입니다. 이 시는 다양한 주제들을 반영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만을 찬양합니다. 1-15절 단락은 찬양 받기에 합당하신 하나님 사랑과 위대한 구원자 하나님을 ‘방패’, ‘구원의 뿔’, ‘반석’, ‘요새’, ‘피할 바위’, ‘산성’ 등의 은유로 묘사합니다. 그 하나님께서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셔서 세상을 통치하시고 악을 심판하실 것을 확신하는 찬양입니다.

 

여호와를 향한 사랑 고백(1-2) 

인생의 여정에는 이런 저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싫든 좋은 우리 신앙의 여정에는 어려움과 고난이 있고 박해가 있습니다. 때로는 유혹과 시련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자주 믿음의 시험대에 서게 됩니다. 조급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역사와 인도를 기다리지 못하고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기도 합니다. 믿음으로 행하지 않으면 절대로 다윗과 같은 신앙고백을 할 수 없습니다.

 

1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2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1-2)

 

본 시편의 부제(副題)는 ‘여호와께서 다윗을 그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와 사울의 손에서 건져 주신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로 여호와께 아뢰어 이르되’입니다. 즉 다윗이 그 인생의 모든 어려운 고비를 넘고 넘은 후에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입니다. 사울에게 겪었던 어려움을 포함한 다윗의 인생에 수많은 어려움들을 믿음으로 견뎌낸 후에 그가 믿음으로 견디는 동안에 경험하고 누린 하나님에 대한 깊은 묵상이 묻어나는 귀한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다윗의 첫마디는 사랑의 고백입니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1).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 고백은 생소합니다. ‘사랑하다’로 표현된 ‘라함(רחמ)’은 어머니가 자식을 품은 사랑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베푸시는 애절한 사랑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이 독특하고 일반적이지 않은 사랑의 표현은 하나님과의 친밀성에 근거한 충성을 표현하려는 의도적인 선택입니다.

다윗은 여호와가 ‘나의 힘’이라고 고백하고서 여덟 가지 은유로 하나님의 본성을 묘사하며 노래합니다. 다윗에게 하나님께서는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를 건지시는 이’, ‘나의 하나님’, ‘나의 피할 바위’, ‘나의 방패’, ‘나의 구원의 뿔’, ‘나의 산성’입니다(2). 이 은유들의 특징은 군사적인 상황과 지형을 떠올리게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돌보심의 성격을 표현합니다. 특히 ‘나의 구원의 뿔’이라는 말에서 뿔은 힘과 능력을 상징합니다(참조. 사무엘하 22:3). 이는 다윗이 군사적인 위협과 험준하고 거친 광야의 삶에서 체득한 하나님 묘사입니다.

  

죽음의 위협과 하나님의 구원(3-6)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과 함께 하십니다. 그 백성들이 고난 가운데 있을 때도 떠나지 않으십니다. 쉴 만한 반석으로, 견고한 요새로, 방패와 구원의 뿔로 보호자가 되어 주십니다. 다윗은 어려움 중에 함께 하신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삶 가운데 고비 고비마다 생생하게 역사하셨습니다. 그는 과거에 어려웠던 상황을 전쟁터에서 승리하게 해 주신 하나님을 묘사합니다. 당신이 묘사할 수 있는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3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4사망의 줄이 나를 얽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5스올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6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3-6)

 

다윗은 여호와를 부르며 그분이 찬양 받기에 합당한 분이라고 노래합니다. 다윗이 자기 원수들에게서 구원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3). 다윗은 치명적인 죽음처럼 강렬했던 위험을 회고합니다. ‘사망의 줄’과 ‘불의의 창수’가 자신을 얽어매고 두렵게 했습니다(4). 또한 ‘스올의 줄’과 ‘사망의 올무’가 자신에게 이르렀음을 감지했습니다(5). 4-5절에 죽음을 상징하는 은유들은 다윗을 얽어매고 잡아 묶어 죽음에 휩싸이게 하여 발현되는 두려움입니다.

더군다나 ‘불의의 창수’(4)는 위험한 강물입니다. 곧 ‘벨리알의 강물’은 고대근동 사회의 신화적인 용어를 인용한 말로 파괴적인 홍수이며 태초의 혼돈 세력을 상징하는 물입니다. 그 죽음의 강물이 죽은 자들의 지하 세계, 곧 ‘스올’로 다윗을 묶어서 가혹하게 끌고 가는 영상입니다. 마치 살아 있는 사람들의 손이 닿지 않는 어둠의 세계에 갇힌 상태처럼 묘사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사람이 손쓸 수 없는 죽음의 위협에 사로잡혔지만(5), 무서운 환난 가운데서 여호와를 불렀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부르짖고 도움을 청했습니다(6ab). 하나님께서는 그의 ‘성전’에서 들으셨고, 그의 목소리를 들으셨습니다(6cd). 그의 ‘성전’은 어디입니까? 다윗 통치 기간 중에는 예루살렘 성전이 완공되지 않았으니 하늘의 처소일 것입니다. 우주적 차원에서 사람의 눈에 감춰진 깊은 지하, 곧 어둠의 세계인 ‘스올’(5)과 대비시켜 사람에게 가려진 하늘 성전을 언급한 것으로 보입니다. 비록 깊은 어둠에 사로잡혔을지라도,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소리를 들으시고 응답하러 오시는 것을 확신합니다. 사망에서 구원받는 것은 구약의 세계관에서는 매우 독특한데, 다윗은 죽음을 돌파하시고 구원하실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강림(7-15)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마음대로 주장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때로 우리 필요와 상관없이 아주 길게 침묵하시며 숨어 계신 듯 느껴지기도 합니다. 다윗이 그토록 오랫동안 쫓겨 다닐 동안 가만히 두신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때가 되면 아무도 감당할 수 없고 상상할 수 없는 무서운 진노로 심판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물밑에 있는 땅이 보이도록 바다를 여시고 그 안에 애굽의 군대를 수장시키셨던 하나님께서 이제도 우리에게도 일하실 것입니다

 

7이에 땅이 진동하고 산들의 터도 요동하였으니 그의 진노로 말미암음이로다 8그의 코에서 연기가 오르고 입에서 불이 나와 사름이여 그 불에 숯이 피었도다 9그가 또 하늘을 드리우시고 강림하시니 그의 발 아래는 어두캄캄하도다 10그룹을 타고 다니심이여 바람 날개를 타고 높이 솟아오르셨도다 11그가 흑암을 그의 숨는 곳으로 삼으사 장막 같이 자기를 두르게 하심이여 곧 물의 흑암과 공중의 빽빽한 구름으로 그리하시도다 12그 앞에 광채로 말미암아 빽빽한 구름이 지나며 우박과 숯불이 내리도다 13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우렛소리를 내시고 지존하신 이가 음성을 내시며 우박과 숯불을 내리시도다 14그의 화살을 날려 그들을 흩으심이여 많은 번개로 그들을 깨뜨리셨도다 15이럴 때에 여호와의 꾸지람과 콧김으로 말미암아 물 밑이 드러나고 세상의 터가 나타났도다(7-15)

 

하나님께서는 가장 안전한 피난처가 되십니다. 전쟁에 익숙한 다윗은 하나님을 자신의 삶에 항상 접하는 지형들인 전쟁 중요한 피난처들로 비유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시인의 기도를 들으시고 원수들에게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소개합니다.

 

(1) 화염을 뿜어내시는 하나님의 진노(7-9)

 

마침내 하나님께서 강림하십니다. 땅이 진동하고 요동치며, 산의 기초가 흔들렸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진노 때문이라고 합니다(7). 옛적 이스라엘에게 시내산에서 강림하셨던 하나님을 상기시키는 묘사입니다(출애굽기 19:16-19).

죽음의 세계에 갇힌 다윗을 구원하기 위한 강림입니다. 다윗 생각에 지진과 폭풍우로 산들의 기초가 요동칠 정도의 강력한 흔들림은 하나님의 진노에 근거합니다. 계속되는 시행도 하나님의 진노를 실감나게 묘사합니다. 하나님의 코에서 연기가 오르고 입에서 불이 나와 살라버리고, 그 불에 숯이 피었습니다(8). 연기와 불과 숯불은 마치 화산이 폭발하여 점점 불이 거세지는 영상 같습니다.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도 하나님께서는 연기와 화염으로 강림하셨습니다(출애굽기 19:18; 20:18;신명기 4:11-12). 하나님의 코와 입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와 불의 영상으로 소개되는 신인동형론적(神人同形論的)인 묘사는 히브리인들의 관습적인 문학기법입니다. 화염을 뿜어내시는 하나님의 진노와 위엄을 상상력 넘치게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의 두렵고 위엄찬 강림 후에 하늘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분이 하늘을 가르고 내려오시는데, 그분의 발아래는 어둡고 빽빽한 구름이 펼쳐져 있습니다(9). 이는 이사야 예언자가 백성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묘사하는 단락과 통합니다. ‘원하건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주 앞에서 산들이 진동하기를…불이 물을 끓임 같게 하사 주의 원수들이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로 주 앞에서 떨게 하옵소서’(이사야 64:1-2).

 

(2) 그룹과 바람 날개를 타신 하나님(10-11)

 

빽빽한 구름을 타고 계신 하나님께서는(9b) 그룹을 타고 하늘을 나십니다. 바람 날개를 타고 높이 솟아오르십니다(10). 판타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비현실적인 일이 펼쳐집니다. ‘바람 날개’는 바람이 날개를 달고 나는 새처럼 솟아오르는 영상입니다(호세아 4:19; 시편 104:3). 하나님께서는 타고 솟으시는 ‘바람 날개’와 평행되는 ‘그룹’은 무엇입니까? ‘그룹’, 곧 ‘케루브’는 최초 인류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에덴 동편을 지키는 천상의 존재입니다(창세기 3:24). 날개 달린 짐승으로 천상에서 하나님의 보좌를 지킵니다(에스겔 1:5-14; 10:21; 참조, 출애굽기 25:19).

또한 하나님께서는 흑암을 그의 숨는 장소로 삼으시고, 장막처럼 두르시며 하늘의 어두운 비구름(빽빽한 구름)을 주변에 두르셨습니다(11), 비를 잔뜩 머금은 시커먼 구름에 싸여 계신 장면입니다. 이러한 영상은 당대 가나안 신화에서 익숙한 폭풍의 신 바알을 연상시키지만, 다윗은 강력한 폭풍을 다스리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변증한 셈입니다.

 

(3) 우레와 콧김으로 꾸짖으시는 하나님(12-15)

 

이제 하나님의 광채로부터 캄캄한 구름이 지나가고 우박과 번쩍이는 숯불이 지나갑니다(12). 하늘의 우박과 벼락이 동반되는 광경입니다. 다윗은 하늘의 우렛소리를 여호와의 음성으로 표현합니다. ‘지존하신 자’가 목소리를 발하며 우박과 숯불을 내리시는 것으로 묘사했습니다(13). 여호와가 짙고 어두운 구름 속에서 자신을 감추신 듯하지만, 우레와 같은 그분 목소리가 하늘에 울려 존재감이 울려 퍼집니다. 이것도 옛적 조상들에게 구름, 번개, 뇌성, 우박과 번쩍이는 숯불처럼 시내산에 강림하실 때와 비슷합니다. 그 옛날 시내산 강림의 하늘빛처럼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강림하시는 모습입니다. 두려움을 일으키는 영광과 위엄찬 강림의 목적이 분명해집니다.

여호와가 원수를 직접 공격하십니다. 그분이 화살을 날려 원수를 흩으시고, 번개로 그들을 깨뜨리셨습니다(14). ‘그의 화살’은 둘째 소절에서 평행되는 ‘번개’입니다. 고대 근동 문헌에서 번개는 자주 화살로 묘사되곤 합니다(시편 77:17; 144:6). 무엇보다 ‘날려, 흩으시고, 깨뜨리셨다’로 연속되는 동사에 초점이 모아집니다. 특히 ‘깨뜨리셨도다’라는 말은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소동이 일어나는 장면을 표현합니다(참조. 민수기 10:35; 시편 68:1; 사무엘상 11:11).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께서 천둥과 번개를 대동하시고 악인들을 혼란에 빠뜨리시는 상황 묘사입니다. 이처럼 우주질서를 관장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악행을 묵인하지 않으십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꾸짖으시는 목소리와 장면 묘사는 더욱 인상적입니다. 여호와의 꾸지람과 여호와의 콧김이 폭발하자 바다 끝이 드러나고 세상의 기초가 발가벗겨지듯 드러납니다(15). ‘꾸지람’과 ‘콧김’이 평행관계 안에서 동의어입니다. ‘콧김’은 ‘콧바람의 기운’으로 여호와의 코에서 품어져 나오는 생명의 ‘바람’(루아흐)입니다. 여호와가 호령하시며 발하시는 생명의 기운이 물밑을 드러낼 만큼 강력합니다. 이는 홍해가 갈라지는 장면을 연상시켜(출애굽기 14:21) 다윗의 구원을 암시합니다. 하나님의 강림과 악인은 세상 근원을 통치하시고 통제하시는 하나님의 양보할 수 없는 주권적인 권능의 선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람 날개를 타고 솟구쳐 오르십니다. 구름으로 장막을 치시고 은밀한 중에 감수십니다. 나타나실 때는 광채가 발하고 우박이 쏟아지고 번개가 칩니다. 애굽을 심판하실 때도, 홍해에서 적들을 섬멸하실 때도 두려운 위엄을 보이셨습니다. 그분이 당신을 위해 싸워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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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17-01)


억울한 고난 속에 있을 때

시편 17편 1-15절


예수님을 믿는다고 장밋빛 대로만을 걷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된 기대로 신앙의 길을 간다면 고난이 닥쳤을 때, 낙담하고 흔들리게 될 것입니다. 다윗 또한 억울한 비방과 부당한 고난으로 힘겨워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억울한 고난을 대하는 자세를 보며 배워야 할 점은 무엇입니까?

 

시편 17편은 자기의 결백을 하나님께 호소하면서 하나님의 변호와 구원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다웃은 사방에서 조여드는 압력과 곤경에서 확신을 버리지 않습니다. 악인들 때문에 애통하지만, 하나님의 세심한 보호를 간청합니다. 무엇보다 이 시는 실제적인 위협을 가하는 악인들에게서 여호와의 손으로 구원해주시기를 구하며 주님의 임재를 확신하는 기도입니다.

 

다윗의 무죄 천명과 간청(1-5)

하나님께서는 귀가 없어 듣지 못하는 목석 같은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호소를 세심히 듣고 계시며 처한 상황을 잘 알고 계십니다. 공평하게 살펴 누가 옳은지 판단해주십니다. 듣지 않으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까? 의심하지 말고 하나님께 기탄없이 아뢰어야 합니다. 

1여호와여 의의 호소를 들으소서 나의 울부짖음에 주의하소서 거짓 되지 아니한 입술에서 나오는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 2주께서 나를 판단하시며 주의 눈으로 공평함을 살피소서 3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시고 밤에 내게 오시어서 나를 감찰하셨으나 흠을 찾지 못하셨사오니 내가 결심하고 입으로 범죄하지 아니하리이다 4사람의 행사로 논하면 나는 주의 입술의 말씀을 따라 스스로 삼가서 포악한 자의 길을 가지 아니하였사오며 5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실족하지 아니하였나이다(1-5)

다윗은 어려운 상황에서 자신의 마음을 진솔하게 하나님께 아뢰며 도움을 구하고 있습니다.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공평하게 판단해달라고 청합니다. 자신의 진실을 입증해주시고 깨끗한 양심으로 외식 없이 외치는 부르짖음을 귀담아 들어달라고 요청합니다.

(1) 의의 호소를 들으소서(1-2)

본 시를 쓴 다윗의 상황이 무척 다급해 보입니다. ‘여호와여 옳음을 들으소서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 하소서 나의 기도에 귀 기울이소서’(1a) 여호와를 부르며 외치는 다윗의 연속되는 요청이 눈에 뜁니다. ‘들으소서’, ‘주의하소서’, ‘귀를 기울이소서’ 이러한 일련의 구문이 어떤 상황을 말하는 것인지 정확한 정보는 생략되었습니다. 그러나 ‘의’ 곧 무엇이 옳은 것인지 호소하고 법적으로 잘잘못을 가려야 하는 긴박한 상황 같습니다.

본문에서는 ‘나의 부르짖음’과 ‘나의 기도’는 절박함을 강조합니다. 더군다나 다윗은 자기의 기도가 거짓되지 않은 입술의 말(1b)이라고 합니다. 그는 주님 앞에 한 점 부끄러움 없음을 당당히 밝힙니다. 자기의 부르짖음과 기도가 옳음을 호소하는 것은 자기 의를 뽐내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다윗을 향한 비난과 공격에서 무죄 입증을 호소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판결은 여호와께 있으니, 당신의 눈이 옳은 것을 보실 수 있기를(2) 호소합니다. 여호와의 법적 판결을 적극 요청하는 것은 긴급한 호소와 함께 정당한 판결을 구하는 결백 주장에서 드러날 것입니다. 그의 결백 주장의 언어는 좀 더 구체적인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2) 다윗의 결백 주장과 이유(3-5)

다윗은 당당합니다. 밤에 하나님께서 방문하셔서 자기 마음을 시험해도 흠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라고(3) 말합니다. 밤은 하루 중 가장 고요하고 깊은 사적인 시간입니다. 이 시간 주님이 ‘방문하셔서’ 마음을 시험하셔도 다윗은 부끄럽지 않습니다.

3절 시행에 독특한 점이 있습니다. 사람의 신체 기관에 속한 마음과 입이 시작과 끝에 배치되어 시행을 둘러싼 형태입니다. 마음은 고대인들에게 생각, 지혜, 의지의 자리이며 의사결정기관입니다. 고대인들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결정하는 것의 중요성을 인지했습니다. ‘내가 생각한 것이 나의 입술을 넘지 못할 것입니다’(3)라는 말이 흥미롭습니다. 무죄와 결백이 말과 관계된 것이요, 생각과 말이 일치함을 강조합니다. 이후에도 말과 행위의중요성은 계속 언급된다. 다윗은 주의 입술의 말씀에 따라 스스로 삼가고 포악한 자들의 길을 가지 않았음을 선언합니다(4).

또한 의도적으로 ‘강포한 자의 길’과 ‘당신의 길’을 대비시켜 주의 길을 굳게 지켰음을 강조합니다(5a). 이 때문에 다윗은 나의 발이 미끄러지지 않았다고 합니다(5b). 시편 1편처럼 다윗은 삶을 ‘길’에 빗대어 자신의 올바른 발걸음을 당당하게 선언합니다.

 

악인과 대적의 위협에서 보호 받기를 간구(6-12)

떳떳한 사람이 강합니다. 기도의 힘은 정직에서 나옵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행했음을 호소할 정도로 거룩함을 유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늘 하신 말씀과 발자취만을 따랐으며 벗어난 적이 없다고 탄원할 수 있습니다. 티끌만큼도 죄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언약의 법에 신실했다는 뜻입니다.

6하나님이여 내게 응답하시겠으므로 내가 불렀사오니 내게 귀를 기울여 내 말을 들으소서 7주께 피하는 자들을 그 일어나 치는 자들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사랑을 나타내소서 8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감추사 9내 앞에서 나를 압제하는 악인들과 나의 목숨을 노리는 원수들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 10그들의 마음은 기름에 잠겼으며 그들의 입은 교만하게 말하나이다 11이제 우리가 걸어가는 것을 그들이 에워싸서 노려보고 땅에 넘어뜨리려 하나이다 12그는 그 움킨 것을 찢으려 하는 사자 같으며 은밀한 곳에 엎드린 젊은 사자 같으니이다(6-12)

다윗은 하나님께 떳떳한 자신의 기도에 힘든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도움을 구합니다. 주님께 피하는 자신을 그 능하신 오른손으로 구원해달라고, 주의 기이한 사랑을 보여 달라고 청합니다. 그는 자신이 겪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하나님뿐임을 호소합니다.

(1) 내 말을 들으시고 지키소서(6-9)

이제 다윗은 ‘하나님’(‘엘’)을 부르며(6) 응답하실 것을 믿고 간구합니다(6-8). 다윗은 부르면 응답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전제한 듯 말합니다(6). ‘그 기이한 사랑을 나타내소서’라고 간구합니다(7a). 이 말은 히브리어와 한국어의 어순 차이 때문에 셋째 소절에 위치했지만, 본래 7절의 첫 소절입니다. 다윗이 담대하게 ‘그 기이한 사랑’, 곧 ‘헤세드’를 구합니다. ‘헤세드’는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랑의 핵심으로서 실패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그 기이한 사랑’(‘헤세드’)으로 인해 다윗은 하나님께서는 당신께 피하는 자에게 피난처가 되시는 분임을 믿습니다(7bc).

다윗은 하나님께 적극적으로 요청합니다. 그는 이른바 바다의 노래로 알려진 모세의 노래를(출애굽기 15:1-8) 되풀이하듯 같은 언어를 소환합니다. ‘나를 눈동자처럼 지키시고 당신의 날개 그늘에 숨겨 주소서’(8; 참조, 신명기 32:10-11), ‘눈동자처럼’, ‘당신의 날개 그늘에’라는 말은 가장 소중하고 보호해야 할 존재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옛적 조상들에게 베푸셨던 구원의 은총을 다시 보여주시길 간청하는 호소입니다. 이제 다윗의 기도가 실제적이고 직접적으로 바뀝니다. 다윗은 자기를 압제하는 악인들로부터 지키시고, 보호해주시기를 간구합니다(9).

(2) 짐승처럼 달려드는 대적들(10-12)

다윗은 악인들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그들의 마음이 기름에 잠겼고, 그들의 입은 교만합니다(10). ‘마음이 기름에 잠겼다’(개역개정)는 말이 모호합니다. 직역하면, ‘그들의 살진 마음(또는 심장)이 닫혔다.’ 또는 ‘그들의 살진 마음이 무뎌졌다’라는 말입니다.

이 소절은 악인들의 교만한 입과 평행관계입니다. 한마디로 악인들은 몸의 중요한 기관들이 굳어지고 닫혀 겸손을 잃은 모습입니다. ‘이제’ 악인들은 걸어가는 길을 에워싸고 진로를 방해하고, 눈으로 노려보고 땅에 넘어뜨리기까지 합니다(11). ‘이제’라는 부사를 덧붙여 악인들의 포악성을 드러냅니다. 악인들의 특징은 자기들의 몸을 사용해 타인을 넘어뜨리는 데 있습니다. 다윗을 공격해 오는 악인들의 적대적인 성격묘사는 점점 더 실감나고 강력해집니다. 다윗은 악인들이 포획한 먹이를 갈기갈기 찢는 사자 같고, 은밀한 곳에 숨어 공격의 기회를 살피는 젊은 사자 같습니다(12). 이처럼 다윗은 악인들의 은밀함과 무자비한 공격성을 강조하여 하나님의 도움을 적극 요청합니다.

 

악인 심판 요청과 구원의 확신(13-15)

의의 길을 지켜야 합니다. 세상은 탐욕이 가득하고 입술은 온갖 교만한 말로 가득하며 세속적인 성공을 자녀에게 물려주려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의 의로운 길 외에 어떤 불의의 길도 가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고난과 조롱 속에 배고프고 초췌하고 불안합니다.

13여호와여 일어나 그를 대항하여 넘어뜨리시고 주의 칼로 악인에게서 나의 영혼을 구원하소서 14여호와여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의 분깃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주의 손으로 나를 구하소서 그들은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들의 남은 산업을 그들의 어린 아이들에게 물려 주는 자니이다 15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13-15)

다윗은 더는 미룰 수 없습니다. 언약의 이름 여호와를 부르며 외칩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십시오! 그들을 대항하여 넘어뜨려주십시오. 당신의 칼로 악인들로부터 생명을 구원해주십시오’(13). 동사들은 다윗의 긴급한 마음을 표현합니다. ‘일어나십시오’, ‘대항하십시오’, ‘넘어뜨려주십시오’, ‘구원해주십시오.’ 이 동사들이 나타내는 것은 생존의 위협을 느끼는 다윗의 절박함 자체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노려보며 맹렬하게 사자처럼 달려드는 대적들을 하나님이 직접 처단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무죄 주장으로 호소했다면(3-5), 기도를 마무리하면서는 대적들의 심판과 멸망을, 무죄한 자신의 안전을 요청합니다. 다윗은 기도를 대충 멈출 수 없습니다. 그의 기도는 구체적입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이름을 다시 부르며 이 세상에서 제 몫을 다 받은 사람에게서 구원해주시기를 구합니다(14ab). 이들은 세상에서 누리는 것이 삶의 전부인양 누릴 것을 다 누린 자들이며, 남은 것을 자기 자녀들에게까지 상속하는 자들입니다(14cd). 다윗은 자신이 마치 이생의 것들을 충분히 누리지 못한 사람인 것처럼 모든 것을 충분히 누리는 사람들로부터 안전할 수 있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는 대적들의 형통함을 바라지 않습니다.

다윗의 마지막 말은 아름답고 숭고합니다. ‘내가 의로움 중에 당신의 얼굴을 뵈오니 내가 깰 때에 당신의 형상에 만족하겠습니다’(15). 다윗은 이 땅에서 누리는 풍요로움보다 여호와의 얼굴과 형상, 곧 주님의 임재를 확신하고, 만족할 것이라는 믿음을 고백합니다. 그가 처음에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의로움을 들어주십시오’(1)라고 기도한 것처럼, 마지막까지 ‘의로움’ 중에서 주님의 임재를 확신합니다. 많은 주석가들이 ‘깰 때에’라는 말에 부활이나 종말론적 의미를 부과하지만, 다윗은 현재의 위기와 고통의 문제에서 구원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실제적인 임재를 강조한 것입니다. 다윗의 언어는 기술적으로 더 교묘하고 교활한 악인들로부터 구원받고, 죽음의 잠처럼 위협적인 것을 초월할 만큼 희망을 노래하는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갖가지 억울하고 적대적인 현실과 위기로부터 즉각적인 구원을 과감하게 요청하라는 본보기요, 하나님 임재를 확신하도록 도전하는 희망과 위로의 언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께로 피하는 사람을 오른손으로 구원해주십니다. 눈동자처럼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숨겨주십니다. 홍해를 건너던 위기의 현장처럼, 자비로 구원을 베푸십니다. 곤경에 처하거나 부당한 일로 마음이 상하였습니까? 난관에서 건지실 분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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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16-01)


주님만이 나의 유산

시편 16편 1-11절


살다보면 원치 않지만 때로 큰 시련에 직면할 때가 있습니다. 모든 신앙의 선배들은 특히 하나님께 크게 쓰임을 받았던 분들을 보면 커다란 시련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런 과정 속에 순금같이 나와 쓰임을 받았던 것입니다. 다윗도 피할 곳 없는 고통과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보호를 간구합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을 고백하며 보호와 구원을 확신하는 다윗의 모습을 통해 배워야 할 태도는 무엇이겠습니까?

 

16편은 위기에서 주님의 보호를 확신하며, 하나님의 함께하심으로 흔들리리지 않을 것을 찬양합니다. 이 때문에 신뢰의 시(또는 확신의 시)로 분류됩니다. 다윗은 주님을 섬기는 자와 다른 신을 섬기는 자의 대조적인 운명을 묘사하며 궁극적으로 상급을 주시는 주님의 복을 찬미합니다. 그리고 주가 베푸신 생명의 길에서 다윗은 자신의 기쁨이 영원할 것을 확신합니다.

 

나의 피난처이신 여호와(1-4)

하나님께서는 힘겨운 시련의 한가운데서 자기 백성을 보호하심으로 죽음의 세력이 그 백성들을 삼키지 못하게 하십니다. 경건한 자를 죽음의 세계에 버리지 않으시고 생명의 길을 보여주십니다. 죽음을 걱정할 만큼 큰 고난 가운데 빠져 있습니까? 주님의 모범을 따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1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2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3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4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그들이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1-4)

다윗은 하나님을 부르며 보호를 요청합니다. 다윗의 어려움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자신을 지켜달라는 요청과 당신께 피한다는 고백(1)은 일상에서 반복되는 신뢰의 표시로 보입니다. 다윗은 곧바로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직접 말합니다.

다윗이 여호와께 아뢴 것이 이미 있어 보입니다. ‘당신은 나의 주님이십니다. 당신 말고는 좋은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2). 당신이 ‘나의 주님’이라는 말은 자신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강조하려는 의도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과 자신을 주인과 종의 관계로 설정한 것은, 하나님 말고 누구도 ‘나의 복’(2b)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의 복’은 직역하면 ‘나의 좋은 것’입니다. ‘좋은 것’, 곧 ‘토바(ה󰔧וֹט)’는 누군가의 ‘호의’, ‘행복’ 또는 ‘구원’, ‘성공’과 관계된 말입니다. 다윗은 행복과 성공, 구원의 근원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정확히 압니다. 또 이 땅에 사는 성도들이 영광스러운 자들이며 자기의 모든 기쁨이라고 선언합니다(3). 성도들은 ‘거룩한 자들’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언약 공동체 안에 속한 사람들의 정체성과 사명을 표현한 말입니다(레위기 19:2; 민수기 16:3; 신명기 33:3; 시편 34:9).

하나님의 거룩함을 모방해야 할 사명을 가진 자들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도록 부름 받은 자들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며 종 됨의 위치를 선언하고, 백성들과 자신의 관계를 조명합니다. 그러고 나서 ‘다른 신들에게 달려가서 예물을 바치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고, 나는 그들의 피의 전제를 바치지 않을 것이며, 내 입술은 그 이름도 부르지 않을 것’(4)이라고 고백합니다. 분명하게 선을 긋습니다. 성도들과 다른 신들을 따르는 자들을 엄격히 구분합니다. 이때 이방 신들을 따르는 자들이 피로 빚은 술을 붓는 ‘피의 전제’를 다윗 자신은 하지 않겠다(4ab)는 표현은 주의 깊게 읽어야 합니다. 동물의 피를 부어 바치는 의식을 언급한 것은 우상숭배와 종교혼합주의 양상을 비판하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예를 들어, 아하스 왕과 므낫세 왕 시대에 몰렉에게 자기 자식을 불살라 바친 배교자들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회가 하나님의 백성임을 자처하면서 충격적인 이교 의식을 병행했던 역사를 누구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다윗은 자기 입술로 그 어떤 신들의 이름은 입에도 올리지 않겠다고(4d) 분명한 의지를 표명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주님으로 섬기겠다는 선포입니다.

 

나에게 기업이 되신 여호와(5-8)

사람들은 힘든 상황에 내몰리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다른 신을 찾으려는 유혹을 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다른 신을 의지하는 것의 허망함을 노래하며 하나님만이 주님이시고 주님밖에 행복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세상을 의지한다면 괴로움만 더할 뿐입니다. 하나님 외, 다른 것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5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6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7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 8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5-8)

다윗은 오직 하나님만을 피난처로 삼겠다고 하였고 그분만이 행복의 근원이라고 고백했습니다(1,2). 우상 일상들을 향한 피의 제사와 우상의 이름 부르기를 거부하고 비판한 만큼(4) 여호와가 나의 산업과 나의 잔 자기의 소득이고 분깃이라고 고백합니다(5).

‘나의 산업’은 자신에게 할당된 몫을 지칭합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 이후 가나안 땅을 지파별 인구 비율대로 할당받았습니다(여호수아 13-21장). 그런데 다윗은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가치를 넘어 여호와가 ‘나의 할당 받은 몫’이라고 고백합니다. 또한 다윗은 여호와가 ‘잔의 소득’이라고 합니다. 이 말을 문자적으로 읽으면 ‘나의 잔’입니다. 이 말은 이방 신들에게 부어 바치는 ‘피의 전제’와 비교되어 오직 여호와만이 자신의 생명을 유지해주는 음료라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거기다 다윗에게 여호와는 ‘나의 분깃’을 꼭 붙들어주시는 분입니다(5b). ‘분깃’은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제비뽑기 방식으로 땅을 분배받을 때 ‘분배받은 몫’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 말은 하나님께서는 언약 백성에게 주신 땅의 약속을 빗대어 하나님만이 자기 운명을 보장하시는 분이라는 고백적인 선포입니다. 다윗은 이제 자신의 행복한 삶을 돌아보며 하나님께 찬양합니다(6,7).

다윗은 여전히 옛적 조상들이 분배받았던 땅을 상기시키는 은유를 활용하여 노래합니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도다’(6a),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자기를 위해 주님이 행하신 모든 곳이 아름다운 땅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물로 분배해주신 땅을 받고, 감격한 마음을 표현합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다윗은 훈계하시는 여호와를 찬양합니다. ‘나는 나에게 훈계하시는 여호와를 찬양하니,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7). 다윗은 자신을 교훈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할 뿐 아니라 고요하고 적막한 밤중에 자기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입니다. ‘양심’은 본래 고대인들에 의해 인간의 가장 비밀스럽고 신비로운 기관으로 불리는 ‘콩팥’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신체의 가장 안쪽에 자리 잡았기에 사람의 가장 내밀한 기관입니다. 가장 깊고 내밀한 몸의 기관이 교훈한다는 것은 양심의 소리를 저버리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하루의 치열한 일상을 마무리하는 어두운 밤마다 자기의 가장 깊은 내면의 소리를 듣고 자기 행동을 바로잡습니다. 다윗은 자기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여 자기 행위를 수정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면밀히 듣고, 자기 교정이 가능한 다윗은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신다’(8a)고 고백합니다. 왜입니까? 그가 내 오른편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8bc). 다윗은 자기편이 되셔서 흔들리지 않도록 꼭 붙드시는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자기 노력보다 먼저 자신을 붙들고 계신 하나님을 인식하고 확신합니다.

 

나의 기쁨이신 여호와(9-11)

하나님께서는 값없이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을 기업으로 주셨고 풍성한 소산을 공급하셨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곧 백성에게 주신 기업입니다. 잠시 기업을 잃고 방황할지라도 언젠가 되찾아주실 것입니다. 줄로 재어 주신 기업의 선물은 무엇입니까? 그 유산을 기뻐하며, 빛나는 것으로 고백하시길 바랍니다.

9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10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11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9-11)

다윗은 자신을 요동치 않도록 붙드시는 하나님을 믿기에(8) 노래합니다.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내 겉 사람도 즐거워하니, 내 몸도 안전하리라’(9), 다윗은 주님의 붙드심 때문에 전인격적인 즐거움과 안전을 신뢰하고 확신합니다. ‘겉 사람’(카보드 דוֹבכּ)이 ‘영’(개역개정)으로 번역되었지만, 사전적인 뜻은 ‘무거움’, ‘겉모습’, ‘영광’, ‘영광의 표시’, ‘탁월함’ 등을 포괄하는 말입니다.

또한 자기 몸의 안전까지 확신합니다. 궁극적으로 마음에 새겨진 속사람의 기쁨이 겉사람의 즐거움으로 채워져 안전함으로 확장되는 삶을 꿈꾸고 확신합니다. 이것은 사람의 내면과 외면의 충만함이 오직 하나님 앞에서 가능하다는 표명입니다.

이후 자신의 기쁨과 안전의 이유를 밝힙니다. 다윗은 말합니다. ‘이는 당신이 내 생명을 스올에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10a). ‘스올’은 지하세계이며 죽은 자들의 거처입니다. 다윗에게는 생명의 위협을 감수해야 했던 시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앞으로 죽음의 위기가 닥칠 것을 예상한 것입니까? 그렇지만 다윗은 자기 생명을 하나님이 죽음의 세계로 던져 넣지 않으시리라고 믿고 기쁨과 안전을 확신합니다. 이 또한 여호와가 당신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10a)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거룩한 자’(개역개정)는 ‘경건한 자’이며, 3절의 성도들과 같은 의미입니다. 약속 안에서 신실하며 헌신된 자들입니다. ‘멸망’은 죽은 자들의 거처를 표현하기 위한 ‘구덩이’ 또는 ‘무덤’을 뜻하며, 시행에서 ‘스올’과 같은 의미로 쓰였습니다.

이처럼 여호와가 당신의 경건한 자가 죽음에 이르지 않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신뢰에 칸 마지막 고백으로 남겼습니다. ‘당신이 생명의 길을 내게 알리실 것이고/당신 안에 충만한 기쁨이 있고/당신의 오른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습니다’(11). 영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경건한 자가 목숨이 다할 때까지 한 평생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즐겁게 사는 것에 대한 감격과 감사의 고백입니다. 죽음을 극복한 내세에 대한 희망이 아니라, 지금 여기 ‘그분의 임재 안에서’ 누리는 즐거움을 만끽하는 삶에 대한 믿음의 표현입니다. 이는 것 소절, ‘당신이 내게 일평생 사는 방법(또는 길)을 알게 하셨다’(11a)는 고백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주의 임재 가운데 기쁨과 즐거움 넘치는 삶의 가치를 확신하는 믿음입니다. 지금 여기서의 삶에서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보다 더 큰 믿음은 없습니다.


 시련 속에서도 다윗은 기쁨을 잃지 않고 평안을 경험합니다. 날마다 일깨워주시고 밤마다 교훈해 주시는 주님과 생생한 교제 속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과의 교제가 손상되면, 불안에 시달리게 됩니다. 말씀이 당신을 다스릴 수 있도록 그 안에 거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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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15-01)


진정한 예배

시편 15편 1-5절


 예배란 어떤 의식이나 행위에 앞서, 먼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의식 예배보다 삶의 예배가 강조되는 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삶으로 드리는 예배는 어떠합니까? 내게 부족한 부분을 어떻게 개선하면서 진정한 삶의 예배를 드려야 하겠습니까?

 

이 시는 하나님 임재의 처소에 들어가기 전 예배자의 조건들을 제시합니다. 이 조건들은 지혜로운 삶의 방식으로서 윤리적인 삶의 실천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장막과 성산으로 언급되는 곳에서 예배하기 위한 열 가지 선행 조건들인데, 이것을 온전히 충족할 만한 사람은 없습니다. 이 시는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자기 삶을 성찰하고 반성하여 죄사함의 필요성을 깨닫고 겸허히 예배하도록 교훈합니다.

 

[질문] 누가 당신의 장막에 머물 수 있습니까(1)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지만, 그것이 구속의 이유는 아닙니다.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고 유하면서, 그 백성은 왕이신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드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합당한 복을 내리시는, 살아있는 교제가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그러니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걸맞은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갈 열망이 있을 때 그분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1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1)

다윗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질문합니다. 두 개의 질문은 매우 구체적입니다. ‘여호와여, 당신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입니까? 당신의 거룩한 산에 사는 자 누구입니까?’ 이 질문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주요한 장소가 언급됩니다. ‘장막’과 ‘거룩한 산’입니다. ‘장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난 후 광야생활 중에 하나님의 명령과 하나님께서 주신 도면에 따라 만들었습니다. 장막은 이동이 쉽도록 설계되었으며, 하늘 하나님께서는 땅에 거주하셔서 자기 백성과 함께하심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건축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장막을 만나는 장소로서 회막(사무엘하 7:6)으로도 불렸으며 솔로몬의 성전으로 대체됩니다. 장막과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중요한 건축물이며 예배의 장소로서 이스라엘 신앙의 핵심 장소입니다. 15:1처럼 장막과 거룩한 산이 함께 등장하면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킵니다(2:6; 3:4; 43:3; 48:1).

다윗의 질문은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순례자들이 서로를 향해 반복했던 질문이었을 것입니다. 이 질문은 누구나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항의합니다. ‘머무르고’ ‘사는’ 것은 비슷한 의미입니다. ‘머무르다’는 일시적 ‘거주’(구르)이고, ‘살다’는 ‘정착’ (샤칸)을 뜻합니다. 다윗은 성전과 거룩한 산에서 일시적으로 거주하는 정착하든 누가 거기에 머물며 살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 하나님 임재 앞에서 보호받고 쉴 권리를 가진 자들이 누구인지를 새겨보라는 초대입니다.

 

[대답] 정직, 공의, 진실한 일상(2-5ab)

하나님께서는 책망 받을 것 없는 길을 걷고, 공의롭게 행하며, 맘속에서부터 진실을 말하는 사람의 경배를 받으십니다. 근사하지 않더라도 고백과 마음과 삶이 하나 된 백성의 찬미를 기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받고 싶은 제물은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무고한 사람을 억울하게 하고, 가꾸운 벗과 이웃조차 자기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이들은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 나울 수 없습니다.

2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3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4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5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아니하는 자이니(2-5ab)

여호와의 성전, 곧 그분의 임재 앞에 거할 수 있는 조건이 열 가지로 제시됩니다.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조건들입니다. 적극적으로 수행할 일과 금지 조항들이 각각 다섯 가지로 열거되었습니다. 먼저 적극적으로 행해야 할 것으로, 정직하게 걷고, 공의를 행하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2).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사람을 존귀하게 여기고, 서원을 했다면 해를 입더라도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4). 하나씩 짚어보겠습니다. 첫째 ‘정직하게 걷는 사람’입니다. 히브리어로는 결점이 없고 비난할 것이 없는, 온전한 사람입니다. 둘째, 공의를 행하는 사람입니다. ‘공의’는 보편 타당하게 옳은 일을 행하는 것과 관련된 덕목입니다. 뿐만 아니라 공평하고 법적으로도 결백하고 진실한 사람이 공의를 행하는 사람입니다. 셋째, 마음으로 진실한 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다윗은 굳이 ‘마음으로’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진실한 말은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마음은 지혜와 의지와 의사결정의 자리이기 때문에 속일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진실’(에메트)은 구약성서에서 공의와 거의 항상 짝꿍처럼 함께 어울리는 말로서 믿을 만하고 신실하고 충성스러움을 가리킵니다. 이는 표리부동한 언어의 사람이 아니라 마음의 의지와 말이 일치하는 사람이 예배의 자리에 머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적극적으로 행해야 할 넷째 조건은, ‘망령된 자’를 거부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4a). 이는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사람을 귀히 여길 줄 아는 사람(4b)과 동의적인 평행관계입니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망령된 자’를 거절할 수 있습니다. ‘망령된 자’는 비열하고 야비하고 깔보고 얕보는 사람입니다. 남을 얕보고 깔보는 사람은 당연히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여호와를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은 비열한 태도를 보이거나 남을 얕잡아 보는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다윗이 예배자의 적극적인 행위로 제시한 마지막 요청이 있습니다. 주의 성전에 들어가 예배하는 자는 손해를 보더라도 맹세한 것을 바꾸지 않습니다(4bc). 해석하기 까다로운 부분입니다. ‘서원’은 자기가 믿는 신에게 맹세하고 서약하는 행위를 일컫습니다. 레위기 마지막은(27장) 서원을 되돌리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서원의 엄격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미 서원을 무를 방법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알려주셨습니다. 구약 본문은 서원의 나쁜 예로 사사시대 입다를 지목하곤 합니다. 사사 입다는 무분별한 ‘서원’으로 자기 딸을 번제물로 바치고 죽음에 이르게 한 아버지입니다. 이 사건 이후로 이스라엘의 딸들이 해마다 입다의 딸을 위해 4일 동안 애곡하는 풍습이 생겼습니다(사사기 11:34-40). 전도서는 서원한 것이 있다면 미루지 말고 ‘서원’을 이행하라고 조언합니다. 서원하고 이행하지 않는 것보다 서원을 안하는 것이 낫다고 덧붙입니다(전도서 5:4-5). 이것은 서원의 신중함을 말한 것이지 서원을 장려한 것이 아닙니다. 구약 본문의 전반적인 맥락처럼 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맹세한 것을 지키라는 것은, 예배자의 서원을 장려하는 말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4절 시행에서 하나님께 서원하는 행위에 대한 직접적인 행위보다 ‘맹세하다’(샤바)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직역하면 ‘그는 잘못 행동하지 않도록 맹세하고, 취소하지 않는다’(4bc)라는 말입니다. 그릇된 행동을 안 하기로 맹세한 것을 철회하지 말라는 의미로 해석되며 이는 시행의 전체 맥락에도 어울립니다.

그러면 다윗이 말하는 예배자의 금지 조건은 무엇입니까? 3,5절에 제시되었는데, 이 사항들은 적극적으로 장려하는 사항이 아니라 금해야 할 행동과 관련 있습니다. 첫째, 자기 혀로 남을 험담하고 뒷공론을 즐기며 떠벌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남을 비방함으로 명예를 훼손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둘째, 자기 친구나 동료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셋째, 자기의 가까운 이웃을 경멸하거나 비웃고 모욕하지 않는 사람입니다(3). 이 중에 하나라도 걸리는 것이 있다면 예배자로서 합당하지 않습니다. 이웃과의 일그러진 관계성 회복이 예배 행위보다 먼저라는 뜻입니다. 넷째, 이자를 받기 위해 타인에게 돈을 꾸어주지 않는 사람입니다. 다섯째, 무죄한 사람에게 뇌물을 받지 않는 사람입니다(5ab). 시인은 이자와 뇌물의 문제를 다룹니다. 이스라엘 밖 이방인들과의 사업상 거래는 예외였지만(신명기 23:19-20),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언약백성 사이에서 이자 받는 것을 금지하셨습니다(출애굽기 22:25; 레위기 25:36-37). 하나님께서는 경제적인 궁핍함에 처한 사람을 돕는 것을 마땅히 할 일로 명령하셨기 때문에, 가난한 자들의 어려움을 이용하여 재산을 증식하는 것은 부당한 일입니다. 돈은 오직 도움을줄 목적으로만 빌려줘야 하며, 이자 없이 담보물로 저당 잡는 것만 허용되었습니다(신명기 24:6).

그러나 이 법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잘 지켜지지 않았습니다(에스겔 18:13;22:12; 느헤미야 5:1-13; 사무엘상 22:2). 뇌물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다윗은 단순히 뇌물 받는 수준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치는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 예배에 합당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뇌물 받는 것을 금지하셨습니다. 뇌물이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비틀어 곡해하기 때문입니다(출애굽기 23:8).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경제적인 일상의 삶에서 약자와 무죄한 자에게 피해를 입힘으로 공평과 정의가 짓밟지 않기를 바라셨습니다. 결국 처음 시행으로 되돌아가면,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는 흠이 없고, 공의를 실천하고, 진실을 말하는 사람으로(2) 집약됩니다. 한마디로 정의로운 삶이 예배자의 삶입니다.

 

[약속] 흔들리지 않는 삶(5cd)

하나님께서는 약한 자들을 더 괴롭게 하는 고리대금과 억울한 자를 더 억울하게 하는 뇌물을 싫어하십니다. 뇌물은 말할 것도 없고, 자ㅓ기 백성끼리는 이자를 받지 못하게 하셨습니다(신명기 23:19-20). 지금도 처지가 궁한 성도들을 상대로 이득을 취하거나 뇌물을 받아 억울한 피해자를 만드는 일을 하고도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한들 듣지 않으십니다.

5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5cd)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서 적극적으로 행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이 열거되었지만, 모든 것이 한 문장으로 요약됩니다. 예배자의 합당한 삶은, 공의와 진실한 마음으로 비난 받을 일을 하지 않는 삶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일을 실천하며 사는 이들을 위한 약속이 선포됩니다. 이들은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때로 삶의 다양한 문제들 앞에서 흔들리거나 비틀거리거나 요동칠지라도 하나님 가르침 안에서 의로운 삶을 위해 투쟁하며 사는 자들은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예배하는 자는 돈으로 타인을 괴롭게 허거나 유혹받지 말아야 합니다. 지나친 이자나 뇌물은 궁핍한 형제를 절망으로 내몹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의한 이득을 취하는 이들의 위선적인 예배를 받지 않으시며 도리어 내쫓고 심판하십니다. 나눔과 선행으로 예배자의 모습을 보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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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14-01)


 의인의 피난처이신 하나님

시편 14편 1-7절


 세상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은 채 허탄한 소욕을 따라 살아갑니다. 지혜를 자랑하나 실상 어리석고 부패하여 악한 행실만 가득합니다. 떡 먹듯이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을 삼키면서도 반성할 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만하고 불의한 세계에서 어떻게 일하십니까?

 

시편 14편은 어리석은 자와 죄악을 행하는 자의 성격을 다룹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어리석은 사람으로 정의되고, 그는 의인의 생명을 위협하면서 지혜로운 의인의 탄식을 축발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14편은 어리석음과 의로움의 주제, 그리고 시온에서 시작되는 구원과 찬양의 주제가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신학적이고 사색적인 시각을 제공합니다.

 

어리석은 자의 악행과 착함의 부재(1-3)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내려다보시며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지 살피십니다. 땅은 완고하고 타락한 죄만 가득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조차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합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으시고 믿음으로 사는 자를 찾으십니다. 바로 당신이 하나님께서 찾으신 그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1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2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3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1-3)

다윗이 게속해서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가 연구한 결과, 인간들이 받은 큰 복은 여호와께 피하는 자들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복이 없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성경에서는 그들을 어리석은 자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먼저 그런 어리석은 자가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를 규명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아둔한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 마음속으로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입니다(1a). 그래서 어려운 일을 만나도 피할 곳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어리석다’라는 말이 구약성경에서 주로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습니까? 지성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상식과 판단력이 뒤떨어지는 상황에 사용되었습니다. 이들은 주로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자들입니다. 이는 지혜 있음의 반대적인 의미이며, 우매하고 무지한 상태를 말합니다(신명기 32:6). 분별력이 없고 무감각하거나 몰상식한 사람을 가리킵니다(참조. 이사야 32:6).

다윗이 바라본 어리석은 자는 그 행실이 부패하거나 가증하며, 따라서 선을 행하는 자가 없습니다(1bc).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존재는 결국 ‘선을 행하는 자가 없는’ 현실로 이어집니다. 이것이 함의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것과 ‘좋은’ 행실을 분리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마음속 말은 생각을 반영하며, 생각은 행동을 낳습니다. ‘하나님이 없다’는 생각은 부패하고 가증한 행동을 낳습니다. 그 삶에 ‘좋은’ 행동을 위한 자리는 없습니다.

다윗은 어리석음의 성격을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적인 사고와 악한 삶의 방식으로 규명합니다. 무엇보다 ‘좋음’은 도덕적 기준에 맞는 정당함을 뜻하고 ‘선’(善)을 뜻하지만, 그 이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주를 창조하시고 ‘좋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질서정연한 아름다움의 상태를 벗어난 것이 어리석음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서 어긋난 모든 행위들은 ‘선’, 곧 ‘좋음’과 ‘아름다움’이 없는 삶입니다.

이어지는 다윗의 말이 흥미롭습니다. 다윗은 여호와가 하늘에서 인생들을 내려다보시면서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지 보고 계시다고 말합니다(2). 어리석은 자의 ‘하나님은 없다’는 생각과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 하늘에서 사람들을 내려다보시는 하나님을 상상하게 합니다. 이것은 우주를 기획하고 만드신 ‘하나님’이 그분을 찾는 자가 있는지 세심하게 살피시는 영상을 표현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세상과 자연의 질서를 관찰하면서 세계를 질서 있게 운행하는 이를 발견하려고 애쓰는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람들을 바라볼 때 안타깝습니다. ‘모두 다 치우쳐 있고, 함께 부패했으며,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다’(3). 다윗은 ‘선을 행하는 자가 없다’(1c)고 말했지만, 한 걸음 더 들어가 ‘선’(착함)의 부재를 탄식합니다. 흥미롭게도 시행의 평행관계 안에서 ‘좋음’(선)의 부재가 어떤 것인지 그 성격을 밝히고 있습니다. 모두 치우쳤고, 모두 함께 부패한 상태입니다. 이는 부정한 뇌물이 통하는 방식을 서로 공유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더군다나 모두 올바름을 따지지 않고 자기 이익을 따라 한쪽으로 치우쳐 빗나간 상태입니다. 이때 다윗은 ‘모두’, ‘함께’라는 말을 덧붙여 악으로 치닫는 공동체의 결탁과 타락의 전체성을 꼬집고 있습니다(참조. 로마서 3:10-18). 이처럼 전부가 타락했으니 ‘선’을 실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는 말은 노아 시대 홍수 심판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듭니다(창세기 6:12). 또한 온 인류가 공모하여 하나님보다 높아지기 위해 바벨탑을 쌓던 태곳적 역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창세기 11:19). 한쪽으로 치우쳐 선이 부재한 시대를 바라보며, 쏟아내는 통렬한 탄식의 목소리는 수천 년의 세월을 건너 지금 이 시대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외침입니다.

 

행악자들의 무지(4)

악한 자들은 돈과 권력으로 약한 자들을 삼키려 합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지만, 결국 두려움 가운데 살다 허무하게 생을 마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을 도와시고 평안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니 힘없고 가난하다고 위축되지 말고, 하나님의 보호를 바라며 힘을 내시길 바랍니다.

4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냐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4)

4절은 다윗의 말인지, 하나님의 말씀인지 모호합니다. 직접 인용처럼 보이지 않으므로 다윗의 연이은 탄식의 목소리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쉬운 번역으로 ‘악을 행하는 모든 자들은 알지 못하는가? 그들이 밥 먹듯이 나의 백성을 먹어치우고 여호와를 부르지 않는다.’ 다윗이 왕이라면, ‘나의 백성’이라는 표현이 이상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악을 행하는 자들’은 구체적인 손해를 입히고, 괴로움과 고통을 주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사람을 속이고 불의를 행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끼니를 채우기 위해 먹듯이 백성을 먹어치운다고 하니 악행이 일상화된 상태입니다. 보통 이러한 사람들은 착취하기 쉬운 가난한 자들이나 힘없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악행을 저지릅니다. 그러니 대체로 부패한 종교와 정치 권력자들일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리 없으니 어찌 깨달음을 기대하겠습니까!

 

의인 편에 계신 하나님(5-6)

아무리 고난이 지속되는 상황에서도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반드시 은덕을 베푸실 신실하신 하나님을 바랍니다. 살펴주시는 하나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만 믿고 종 더 인내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들의 편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5그러나 거기서 그들은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6너희가 가난한 자의 계획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의 피난처가 되시도다(5-6)

다윗은 여호와의 이름도 부르지 않고 깨달음도 없는 사람들의 최후를 밝힙니다. ‘거기서 그들은 공포에 떨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세대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5). 이것은 시시때때로 일상의 삶에서 악인들에게 먹거리처럼 착취당하고 괴롭힘을 당하던 의인들과 하나님이 함께하실 것을 믿고 선포한 말입니다. ‘의로운 세대’라는 표현은 적극적으로 의로운 행동을 한 사람을 지칭한 것이 아니라, 악인들의 희생물이 된 사람(4)을 통칭합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의인의 세대와 함께하신다는 말은 악행을 일삼던 무리를 심판한다는 뜻이다. 실제로 이어지는 시행에서 의로운 세대와 평행관계를 위해 선택된 말인 ‘가난한 자’(6)의 피난처 되신 여호와에 대한 고백입니다.

이제 다윗은 악인들이 가난한 자들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고발합니다. ‘그들이 가난한 자들의 계획을 수치스럽게 했다. 여호와가 그의 피난처다’(6), 다윗은 행악자들이 가난한 자들의 삶의 계획을 좌절시킨 자보이고 반합니다. 악인들의 횡포 때문에 가난한 자들이 주인 삼아갈 방법을 모색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악인들은 그 계획이 실행되지 못하도록 방해 공작을 펴며 착취하였는데, 이를 ‘수치스럽게 만들었다’고 표현합니다. 행악자들이 주로 하는 일이 가난한 자들을 비참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행악자들의 행위 때문에 고통당하는 가난한 자들의 편이 되신 여호와가 피난처 되심을 믿고 선포합니다.

 

이스라엘의 구원(7)

시온의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셔서 고난 중에 인내하며 의롭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을 잊지 않으십니다. 반듸 역경에서 건져 감사의 찬양을 부르게 하십니다. 당신이 포로가 된 듯 힘겹지는 않습니까? 때가 되면 억눌림에서 해방되어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낙심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7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포로된 곳에서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7)

지금까지 다윗은 지혜자들처럼 어리석은 자들의 성격을 묘사하여 행악자들과 동일시했습니다. 그들의 무지와 무분별을 고발하며 탄식했습니다. 무엇보다 다윗은 탄식에 멈추지 않고 가난한 자들과 의인을 연결시켜 여호와가 그들의 피난처 되심을 선포했습니다. 그러고서 갑자기 시온에서 시작될 이스라엘의 구원을 바라는 기도로 마무리합니다. 그 마무리는 독특하게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누가 시온으로부터 이스라엘의 구원을 베풀 것인가?’(7a) 곧이어 다윗은 여호와가 회복시키실 것을 말합니다. ‘여호와가 그의 백성을 속박에서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기쁨으로 소리치고, 이스라엘은 즐거워할 것이다’(7bc). 시온은 여호와가 자기 백성과 함께하심을 상징하는 중요한 장소입니다. 시온은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두신 곳이며, 이스라엘의 구원과 생명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다윗이 포로의 땅에서 되돌려 보내실 여호와, 곧 운명을 되돌리실 여호와를 기대하는 기도일 것입니다. 이전의 분위기와 달리 시행의 갑작스러운 내용 변화는 후대의 첨가 가능성을 완전 배제할 수 없으나, 마지막 시행은 새로운 상황에 놓인 세대들에게 재해석과 적용의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하나님을 믿는 모든 믿음의 공동체가 악인들의 횡포가 만연된 시대 속에서도 ‘하나님은 없다’고 하는 어리석은 사람처럼 행동하지 않기를 시인은 바라고 있습니다. 출애굽과 함께 해방을 경험한 세대를 지나 포로기를 경험한 세대에 이르기까지, 이후 모든 믿음의 세대들에 이르기까지, 구원의 기쁨은 오직 옛적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던 하나님에게서 비롯된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지식이 둔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부정하고 자기 정욕 가운데 사는 자입니다. 인생의 모든 판단이 왜곡되어 약자를 짓밟다가 자신도 파멸에 이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약한 자를 돌보고 행실을 의롭게 하는 삶으로 나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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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13-01)


극심한 고난 중에 있을 때

시편 13편 1-6절


고난의 끝이 언제일 모를 때 삶은 얼마나 힘겹습니까? 영원히 끝나지 않고 계속될 것만 같은 두려움이 우리를 짓누릅니다. 다윗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시련 앞에 있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거두지 않겠다고 고백합니다. 고난에서 승리하는 길은 무엇입니까?

 

이 시는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입니까?’라는 질문과 탄식이 중심이지만, 끝내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확신을 고백하는 시입니다. 다윗의 현실 경험에서 비롯된 좌절감과 하나님을 향한 신뢰는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변화됩니다. 죽음의 두려움을 넘어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의지하는 다윗의 절망을 넘어선 희망의 변주가 역동적으로 교차하는 시입니다.

 

탄식 :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입니까(1-2)

 어려운 일이 닥치면 근심하고 눈물로 침대를 적시며 밤을 지세운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날이 반복되면서 불면증에 시달리고 밤이 두려울 때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잠이 들면서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뜨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불안감이 엄습합니다. 힘들 때는 하나님께서 멀리 계시거나 안 계신 것처럼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탄식하거나 하나님께 항의할 수 있습니다.

1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2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1-2)

다윗은 여호와 이름을 부르며 ‘어느 때까지입니까?’를 외치는 말에서 탄식과 절망 그리고 원망, 무기력함, 간청 등에 여러 가지 마음의 아픔이 읽힙니다. 다윗은 원수로 인해 오랫동안 어려움을 당하여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고 응답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하나님에게서 응답이 없자 너무 답답해합니다. 하나님께 언제까지 자기를 잊고 그의 얼굴을 영원히 숨기겠느냐고 질문하는 것으로 보아, 다윗은 하나님께서 왜 자기에서 이렇게 대하시는지 조차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느낌이 들어서 더 큰 절망감과 망망함을 느낌입니다.

이 질문은 1-2절 시행에서 4회 반복됩니다. 다윗은 여호와께 질문합니다. ‘나를 잊으셨습니까?’, ‘어느 때까지 당신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실 것입니까?’(1절) 다윗은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 같은 여호와의 침묵이 너무 길게 느껴집니다. 더군다나 ‘잊는 것’과 ‘숨기는 것’이 서로 평행관계를 이루어 시인의 고통을 증폭시키는 것처럼 보입니다. 구약에서 여호와가 얼굴을 보이신다는 것은 그분의 임재와 은혜를 상징합니다(민수기 6:24-26). 때문에 여호와가 얼굴을 숨기셨다는 말은 오랜 침묵과 관계 단절의 심각성을 한층 강화한 표현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버렸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과 교제가 중단된 것처럼 묘사하면서 비통함을 질문으로 표현했습니다. 여호와가 의도적으로 멀리하신 것 같은 괴로움과 무거운 마음을 질문으로 담아냅니다. 하나님을 향한 원망 같지만, 원망이 아니라 갈망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일부러 멀리하신 것입니까?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어느 때까지 내 목숨을 건 투쟁을 해야 하고, 날마다 내 마음속 비탄에 빠져 있어야 하는지, 내 원수가 내 앞에서 떠벌리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합니까?’(2) 개역개정은 다윗의 목숨을 건 투쟁을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2a)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영혼’, 곧 ‘네페쉬’는 한 인간의 생명, 곧 목숨 그 자체를 뜻하는 말입니다. 다윗은 영혼의 번민보다 훨씬 더 격렬하게 생명을 걸고 내적 씨름을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히브리어 구문을 곧이곧대로 풀면 ‘내가 내 생명 다해 저항한다’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다윗은 종일 근심합니다. 자기 마음속의 번민과 비통함이 언제 끝날지 궁금합니다. 더군다나 자기 앞에서 떠벌리는 원수를 어느 때까지(2bc) 지켜봐야 하는지, 그것도 견딜 수 없습니다. 다윗은 절박한 마음 상태로 죄 고백이나 참회의 언어로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다윗 자신의 극심한 불안과 마음속 불평과 저항감이 더 큽니다.

그러면 다윗을 괴롭히는 ‘내 원수’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자기의 개인적인 원수인가, 집합적인 개념과 민족을 대표하는 국가적인 원수를 말합니까?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문맥상 다음에 나오는 ‘죽음’을 ‘원수’로 표현했을 수 있습니다. 다윗의 극심한 고통이 질병 때문이라면, 임박한 죽음을 인식하며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면 그 원수는 죽음을 인격화한 은유일 수 있습니다.

 

간구 : 내 하나님여, 나를 보시고 응답하소서(3-4)

정의의 하나님께서 세상을 통치하심을 믿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까지나 함께 하시고 계시고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을 알 때,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시면 구원자이시며 우리를 다스리는 분임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3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4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3-4)

다윗이 목숨을 건 내적 번민과 투쟁의 시간을 보내며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이름만 부르지 않습니다. 창조자이며 보편적인 통치자를 강조하는 하나님을 호명하는데, 그 하나님께서는 ‘나의 하나님’(엘로하이)입니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바라보시고, 내게 응답하소서’(3a). 다윗은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바라보지 않고 외면하셨다고 생각했기에 제발 자기를 봐주시기를 간청합니다. 다윗의 언어가 거칠게 들려도 계속되는 기도는 극도의 절망감 속에서 오직 의지할 분이 하나님밖에 없고, 삶과 죽음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고백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응답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윗에게는 세 가지 근심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나의 눈을 밝히소서. 혹시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두렵습니다’(3b).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생명의 활력을 불어넣어주시기를 믿고 간구합니다. 이 말은 단지 신체적인 건강 회복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내 하나님이여’라는 외침 때문에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회복되기를 바라는 열망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합니다’라고 말한 것처럼, 하나님과의 관계가 좁혀지지 않는다면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합니다. 다윗은 생명이 끊어질 정도의 내적 고뇌와 투쟁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는 고통 때문에 죽음 가까이에 이르렀다고 생각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는 활력을 주셔서 밝히 볼 수 있다면, 죽음의 잠에서 깨어날 것을 믿습니다.

다윗이 두 번째 두려운 이유를 자기 원수와 대적들의 말과 생각을 인용합니다. 여전히 두렵습니다. 자기 원수가 ‘내가 그를 이겼다’라고 말할까 봐 두렵습니다. 또 ‘나의 대적들이 내가 넘어질 때 기뻐할까 봐 두렵다’(4). ‘나의 원수’와 ‘나의 대적들’을 구분지어 말합니다. 둘이 다른 것입니까? 앞서 다윗은 ‘내 원수’(2)가 자기를 치고 자랑하는 것을 언제까지 봐야 하는지(2) 하나님께 묻고 따졌습니다. 4절 첫 소절의 ‘나의 원수’는 다윗이 죽음을 인격화한 표현입니다. 그러나 ‘나의 대적들’은 단수 형태의 ‘나의 원수’와 다릅니다. ‘나의 대적들’은 실제적으로 괴롭히는 압박자들로 해석하는 편이 자연스럽습니다.

인간은 누구도 죽음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반영하듯 원수로 의인화한 죽음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를 이겼다’(개역개정). 다시 말해 ‘내가 그를 정복했다’는 말입니다. 땅에 속한 누구도 죽음의 한계를 극복하고 뛰어넘을 수 있는 사람은 없기에 죽음을 인격적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다윗에게도 죽음은 정복할 수 없는 최후의 사건입니다. 때문에 다윗은 살고자 하는 열망의 표시로 ‘여호와, 내 하나님’을 부르며 죽음의 잠에 빠져들까 두려워 호소합니다.

다윗이 세 번째 두려운 것은 직접적으로 솔직하게 두려움을 표현합니다.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 소리칠 것입니다’(4b). 이 시가 다윗에게 속한 시집이라기보다 다윗의 시라면, 그가 왕의 자리에 있는 상황이라면, 왕좌와 왕권이 소용돌이 속에서 흔들리기를 바라는 이들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물론 이를 확실하게 보증할 만한 언어적인 표시가 시행에 분명히 드러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대적들’이라고 복수 형태로 말한 것과 ‘기뻐 소리치다’(4b)라는 동사절의 맥락에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이 단어는 제의적인 문맥에서 무아지경에 빠져 소리치는 행위를 표현하는 것인 만큼, 다윗의 대척점에 있는 위협적인 세력들이 기뻐 날뛰는 모습을 염두에 둔 말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자기를 원수처럼 노려보는 죽음과 자신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기뻐하는 실제적인 대적들 전부가 두렵습니다.

다윗의 거룩한 근심하던 세 가지를 살피면, 자신의 욕망에 대한 근심은 하나도 없습니다. 세속적인 근심이 하나도 없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다윗은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3a)라고 간절히 기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볼 수 있는 영안을 열어달라고 기도합니다.

 

희망 : 나는 주의 사랑을 의지하고 찬송합니다.(5-6)

하나님께서 지금 응답하시지 않는 것은 그 분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너무나도 고집 센 우리를 하나님께서 한 발짝 다가서게 하시는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고통의 짐을 가지고 하나님께 한 발짝 더 가까이 나가면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찬양할 수 있습니다.

5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6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5-6)

그럼에도 다윗은 절망 속에서 희망을 건져 올립니다. ‘어느 때까지입니까?’(2)를 외쳤던 다윗의 기다림이 얼마나 길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오랜 기다림과 마음 한구석에 일렁이는 죽음과 대적들에 대한 두려움을 솔직하게 발설하고서야 시인에게 갑작스러운 마음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탄식과 고발이 믿음의 핵심입니다. 상황이 달라진 것에 대한 구체적인 표명은 없습니다.

다윗은 달라졌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힘이나 동료들을 의지해야하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의 실패하지 않는 사랑을 신뢰합니다. 나의 마음이 당신의 구원으로 인해 기뻐 소리칠 것입니다’(5). 5절은 소절과 소절 사이에서 ‘당신의 실패하지 않는 사랑’과 ‘당신의 구원’이 동의적인 평행관계를 이루어 의미를 확장하고 보충합니다. 하나님의 ‘실패하지 않는 사랑’은 하나님의 ‘구원’으로 인도합니다.

다윗의 대적들은 시인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기뻐 소리쳤지만(4), 이제 하나님의 구원 때문에 다윗이 기뻐 소리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성실한 언약에 근거한 사랑을 끝까지 신뢰합니다. 절망은 탄식과 고발을 거쳐 희망으로 바뀌었습니다. 절망에 몸서리치며 죽음이 두려웠던 다윗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 안에서 기쁨의 함성을 외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절망과 두려움을 딛고 노래합니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6). 다윗이 여호와께 찬양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자기를 다루셨던 일들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베푸셨던 은덕들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116:7; 142:7). 하나님께서 과거에 행하신 일들을 잊지 않고 어두운 현실로 소환하여 감사의 노래를 부르는 것은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귀결이며 절정입니다. 그러므로 현실의 절망적인 고통과 탄식을 통과한 희망은 현실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믿음입니다.


다윗이 믿었던 하나님께서는 결국 다윗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국가적으로 이스라엘에 평강을 주셨습니다. 다윗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 약속을 저버리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잠시 우리를 고난에 두시지만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죽기까지 하나님을 신뢰하셨던 주님을 본받아 흔들림 없이 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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