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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47-01)


찬양을 담을 우리의 신앙고백

시편 47편 1-9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찬양을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찬양은 단순히 듣기 좋은 음악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고백입니다. 그 신앙고백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믿음의 고백을 찬양에 담아야 하는지 보여줍니다.

 

  • 이 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며 동시에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지존하신 왕이심을 선포하고 찬양합니다. 시인은 만민이 함께 손뼉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나팔 소리로 왕이신 하나님을 기뻐하고, 왕권을 기념하는 축제를 통해 열방이 하나 되는 것을 상상합니다. 한마디로, 거룩한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왕권과 우주적인 주권을 찬양하는 시입니다.

 

만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 외쳐라(1)

우리는 하나님의 범궤 앞에서 춤추고 찬양한 다윗을 본받아야 합니다. 다윗처럼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전능하심을 온 땅에 선포하며 노래해야 합니다. 우리를 구속하신 큰 사랑과 은혜를 찬양해야 합니다. 그렇게 이 세계의 참된 주인이시요 통치자이신 하나님께 합당한 경의를 표해야 합니다.

 

1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지어다(1)

 

이 시 전체 주제의 통일성은 세 개의 반복되는 단어에서 드러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직접적인 요청을 중심으로 ‘백성’(2,3,9), ‘왕’(2,6,7,8), ‘땅’(2,7,9)이 반복됩니다. 이 어휘들은 ‘만민들’을 호명하며 즐겁게 기쁨의 함성을 외치라는 초청과 연결됩니다. 시행의 첫 단어 ‘모든 백성들’, 곧 ‘만민들’에게 손바닥을 마주치며 즐거움의 함성을 부르라는 초청에서 ‘하나님’께서는 완전하고 보편적이며 우주적인 왕권을 천명하는 이름입니다. 그러면 ‘만민들’은 누구입니까? 3절의 ‘만민’은 정관사를 덧붙인 1절의 ‘하암밈’과 달리 특정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1절의 ‘만민들’은 하나님과 언약 맺은 백성 이스라엘을 특정한 셈입니다. 언약 맺은 그 모든 백성을 향해 시인은 우주적인 왕을 향해 손뼉을 치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향해 함성 소리로 외치라 합니다.

 

지존하신 이, 여호와 하나님은 온 땅의 왕(2-5)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서는 그저 이스라엘만 주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 삶의 자리도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큰 왕이십니다. 우리는 온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렇기에 시인은 찬양합니다.

 

2지존하신 여호와는 두려우시고 온 땅에 큰 왕이 되심이로다 3여호와께서 만민을 우리에게, 나라들을 우리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며 4우리를 위하여 기업을 택하시나니 곧 사랑하신 야곱의 영화로다 (셀라)(2-4)

 

함성을 지르고 즐거운 목소리를 높여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2절의 첫 글자는 ‘왜냐하면’(키)입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가장 높으신 여호와는 두려우시고/온 땅에 큰 왕이시라’(2) ‘지존하신’을 뜻하는 ‘엘욘’은 이스라엘 안에서만이 아닌 국제적인 맥락에서 최고의 신을 묘사할 때 불리는 칭호인데, 시인은 이를 하나님께 적용합니다(참조, 창 14:18-20; 민 24:16; 32:8; 9:2; 21:7; 46:4; 77:10; 78:17,35, 56;82:6 등).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께서는 지존하신 주님이며(2a) 온 땅의 큰 왕이십니다(2b). 이방신들과 비교 불가한 하나님의 통치권이 시의 평행관계 안에서 분명해집니다. 하나님을 큰 함성 소리로 찬양하는 또 다른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호와께서 만민을 우리에게, 나라들을 우리 아래 복종하도록 만드셨기 때문입니다(3). 시인이 말하는 이 승리는 조상들이 가나안 땅 정복 전쟁에서 승리한 때를 회상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때의 전쟁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 뿌리 깊이 내재된 전쟁이며, 약속의 땅 위에 나라의 기초를 수립하는 승리였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을 완벽하게 차지하고, 가나안 땅과 이웃 나라들이 이스라엘에게 완전히 굴복한 것은 다윗 시대에 이르러 가능했습니다. 시인은 지금 ‘만민’과 ‘나라들’이 우리 발아래 복종하도록 하나님께서 완벽한 승리의 근원임을 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한 기업을 택하셨고, 이는 그가 사랑하신 야곱의 영화입니다(4). 하나님의 구속의 과정이 ‘야곱의 영화’입니다. ‘기업’은 하나님께서 상속 재산처럼 이스라엘에게 주신 가나안 땅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또 다른 이름 야곱의 영화는 이스라엘의 ‘높아짐’입니다. 더욱이 온 땅의 왕이신 하나님, ‘그가 사랑하시는 야곱’(4b)으로 특정하여 지목합니다. 그리하여 그분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라(5-6)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찬양을 들으시고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세상의 왕은 시간이 지나면 모두 사라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신 왕이십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언제나 변함없이 왕 중의 왕이십니다. 우리의 삶의 자리도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 이 믿음의 찬양을 언제나 부르며 하나님께 나가시길 바랍니다.

 

5하나님께서 즐거운 함성 중에 올라가심이여 여호와께서 나팔 소리 중에 올라가시도다 6찬송하라 하나님을 찬송하라 찬송하라 우리 왕을 찬송하라(5-6)

 

하나님께서 기쁨의 함성 속에, 여호와께서 나팔 소리 가운데 오르셨습니다(5). 이 부분은 여호와가 언약 백성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일을 높이는 찬양의 절정입니다. 하나님 곧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가 어디로 올라가신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보좌를 두셨지만(시 103:19), 땅으로 내려오셔서 자기 백성 가운데 함께 계신 분입니다. 이는 하나님 임재의 상징인 법궤가 성전을 향해 올라가는 것일 수 있습니다(참조. 시24:3; 132:8; 삼하 6:15). 이때 백성들의 기쁨의 함성과 양의 뿔로 만든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뿔 나팔은 왕의 즉위식이나(왕상 1:34,39) 신년 축제에서(레 23:24; 민 29:1) 사용되는 악기입니다. 그러니까 이 장면은 천상의 왕을 향해 지상에서 기쁨의 함성과 나팔 소리로 환호하며 왕이신 하나님을 높이고 공표하는 의식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왕으로 높이는 절정의 중심에서 시인과 백성들이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왕이신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네 번 반복합니다. ‘찬송하라 하나님께 찬송하라/찬송하라 우리의 왕께 찬송하라’(6). 시인은 하나님께서 곧 우리의 왕이시라는 고백을 담아 찬송합니다. 이 찬송은 목소리만이 아닌 악기들의 연주와 감격에 찬 백성의 목소리로 가득한 장엄한 광경입니다. 다 함께 찬양하지 않을 수 없는 가슴 벅차오르는 찬양의 시간입니다.

 

거룩한 보좌에서 높임을 받으시는 하나님(7-9)

하나님께서는 찬양 가운데 거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들의 찬양을 기뻐하십니다. 사람들이 인정하든 하지 않든, 하나님께서 창조주시라는 사실은 변함 없는 진리입니다. 우리는 지혜의 시로 하나님을 노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분인지, 어떤 일을 행하셨고,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지를 지혜의 말로 고백하며 노래해야 합니다.

 

7하나님은 온 땅의 왕이심이라 지혜의 시로 찬송할지어다 8하나님이 뭇 백성을 다스리시며 하나님이 그의 거룩한 보좌에 앉으셨도다 9뭇 나라의 고관들이 모임이여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다 세상의 모든 방패는 하나님의 것임이여 그는 높임을 받으시리로다(7-9)

 

시인이 기쁨의 함성을 높이며(1) 하나님 찬양의 이유를 밝혔지만(2), 그는 찬양의 이유를 더 강조하고 싶었습니까? 시인은 다시 시행을 강조하는 히브리어 불변화사 ‘키’를 반복합니다(7).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온 땅의 왕이시니 ‘지혜의 시’로 찬송하라(7)고 외칩니다. ‘지혜의 시’는 ‘마스킬’입니다. 이 말은 45편의 제목 고라 자손의 ‘마스길’에서 사용된 말과 같습니다(32,42,44편). 정확한 의미는 알려지지 않지만, 음악 용어이며 제의적인 노래나 교훈이나 배움을 위한 악절로서 ‘지혜의 노래’인 셈입니다. 이 노래는 관조적이고 깊은 생각에 잠기는 명상을 위한 것입니다. 악기가 동원된 웅장한 광경이 아니라 이제 시인은 신앙공동체가 깊은 묵상으로 하나님 찬양하기를 권합니다. 깊음 심호흡처럼 심장에 새기는 조용한 시간도 찬양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무엇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까? 이미 시인은 하나님께서 온 땅의 왕이심을 말한 것처럼(7a), 하나님께서 뭇 백성을 다스리시며 그의 거룩한 보좌에 앉으심을 선포합니다(8). 시인은 언약 백성을 위해 건축된 지상 성전의 중심인 법궤에 임재하신 하나님만이 아니라, 뭇 백성을 다스리시는 그분의 거룩한 보좌를 상상합니다. ‘다스리신다’와 ‘앉으신다’는 평행 관계를 이루는 같은 의미입니다. ‘뭇 백성’, 곧 이방인 취급하는 모든 사람과 민족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는 모두의 하나님이요 모두의 왕이십니다. 온 세계 모든 이들의 왕이 앉으신 ‘거룩한 보좌’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주권을 드러냅니다. 이는 지상의 성막이나 성전의 법궤로부터 발현되는 통치 너머에 있는 하늘 보좌입니다(참조. 시 103:19; 렘 3:16; 사 66:1). 시인의 언어를 통해 이스라엘의 중심이며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던 지상의 성전이 하늘로 확장됩니다. 상상해보시길 보시기 바랍니다. 온 땅의 큰 왕(2,7) 앞에 권력을 가진 모든 이들이 모여들고, 그들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시인은 마지막으로 뭇 나라들의 고관들이 소집되어 아브라함의 하나님께 속한 백성 됨(9ab)을 노래합니다. 세상의 모든 방패, 곧 모든 군사력이 하나님께 속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높임을 받으실 것입니다(9cd). 시인은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의 경계를 넘어 이방인들까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장면을 상상합니다. 이처럼 뭇 나라 고관들과 아브라함에게 속한 백성이 함께 왕좌에 모이는 것은 구약의 세계관에서 매우 대담한 발상입니다. 물론 시인은 이미 ‘온 땅’을 반복하며 민족적 경계를 넘는 하나님의 왕권을 노래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세상’(9, 에레츠)을 반복하여 하나님의 우주적 왕권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로 ‘온 땅의 왕’(2,7)이심을 강조하려고 ‘키’를 반복한 것처럼, 시행 마지막 두 소절도 같은 방식입니다. ‘지존하신 여호와’(2), 곧 하나님께서 가장 높임을 받고, 찬양을 받으실 것입니다(9d). 이는 지상에서의 하나님 왕권과 통치를 반영하기에 장차 메시아 예수의 가르침에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로 확장됩니다. 하나님의 통치 범위가 범세계적이고 보편적인 것처럼 예수의 구원 사역도 인간 중심적인 경계를 벗어난 우주적인 수준으로 성취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하나님 자녀의 사명입니다. 그리고 찬양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선물입니다. 온 세상의 왕이신 하나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권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우리는 하나님 덕분에 이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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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46-01)


완전한 피난처이신 하나님

시편 46편 1-11절


 

현대인들은 늘 분주하고 복잡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도 피할 곳조차 없이 힘겹게 살아갑니다. 환난의 바람이 불고, 고난의 비바람이 몰아칠 때 피할 곳이 없는 많은 사람이 지쳐 쓰러지고 무너집니다. 우리에게는 온전한 피난처가 필요합니다.

 

  • 이 시편의 핵심은 창조 이전의 무질서와 혼돈을 제압하시고 질서와 안전을 수립하신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에 있습니다. 피난처이며 보호자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인은 하나님의 우주적 왕권의 위엄뿐만 아니라 언약 백성을 위한 위대한 용사로서 만군의 여호와가 행하신 일을 노래합니다. 곧 이 시는 전쟁을 멈추고 궁극적인 평화와 안전의 피난처 되신 하나님을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피난처(1-3)

고난이나 어려움 없이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고난과 어려운 일들은 결코 우리를 피해 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환난을 이기는 길을 터득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힘으로는 환난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의 도움을 구하곤 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우리에게 완전한 피난처가 될 수 없습니다.

 

1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2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3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셀라)(1-3)

 

시인은 하나님께서 피난처, 힘, 큰 도움이라고 선언하며 시를 시작합니다. 세 가지 유사한 단어를 반복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정말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분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어떤 위기 상황이 닥친다 해도 하나님게 피하면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1)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피난처 큰 도움이라(1)

 

이 시의 주제는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1,7,11)라는 고백적인 선언 반복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피난처와 힘이시라/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1; 참조. 61:3; 71:7; 62:7). 자연적인 재해든지 인생에 갑자기 불어닥치는 폭풍 같은 위기, 곧 가난이나 불행에 봉착 했을 때에도 시인에게 하나님께서는 몸을 숨길 수 있는 피난처 곧 은신처요 요새이시며, 힘이십니다. ‘힘’은 안전하고 견고한 요새와 동의어처럼 쓰였습니다(참조, 시 59:17). ‘피난처’와 ‘힘’, 두 어휘의 결합을 통해 하나님보다 더 강력한 은신처가 없음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는 환난의 때에 도움이 되십니다. ‘도움’은 돕는 자(helper), 지원하고 지지해주는 조력자로서의 하나님을 담아냅니다. 따라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환난의 때, 그 곁을 지키며 지지해주시는 하나님보다 더 견고한 피난처와 조력자는 없슨비다.

 

(2)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2-3)

 

첫마디가 강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2). 두렵지 않다. 나 홀로가 아니라 우리의 믿음으로 한 목소리를 내는 공동체적인 의지가 표명되었습니다. 개역개정은 히브리어 본문 순서와 달리 2절의 첫 소절을 3절 끝에 배치했습니다. 의미의 차이는 없지만 강조의 차이는 있습니다. 시인은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지를 분명히 하려고 네 가지 잠정적인 상황을 덧붙여 구체화합니다. ‘땅이 흔들리고/산들이 바다의 심장에 빠질지라도(2)/바닷물이 으르렁거리며 격노할지라도/그 맹렬함으로 산들이 흔들릴지라도(3)’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2a). ‘환난’이(1) 혼돈의 바다와 격노한 파도 같습니다. 땅이 흔들릴 정도의 지진이 발생한 상황에 빗댄 환난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산들이 바다 중심으로 무너져 내리고 바다의 격랑과 파도가 산들을 뒤흔듭니다. 땅이 흔들리고 산이 붕괴되는 혼돈의 세력 앞에서도 두려움이 없을 것이라는 고백까지 쩌렁쩌렁 울려 퍼집니다.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실 때 혼돈을 제압하신 것처럼(창 1:1-2), 혼돈의 물을 통제하셨던 것처럼(출 15:5,8) 시인이 위대한 일들을 눈으로 목격한 듯 현재의 환난을 태곳적 혼돈처럼 재현하여 믿음으로 승화시키고 있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성(4-7)

어려울 때 누군가와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위로를 받습니다. 고난의 길을 갈 때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누군가 우리와 함께해 주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은 함께하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 간다는 것입니다.

 

4○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5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6뭇 나라가 떠들며 왕국이 흔들렸더니 그가 소리를 내시매 땅이 녹았도다 7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셀라)(4-7)

 

여기서 시인은 보호받는 직접적인 안전한 장소인 하나님의 성을 찬미합니다. 이곳은 위협적인 혼돈의 바다가 아니라 흐르는 시내가 있습니다. ‘흐르는 시냇물이 있어 하나님의 성을 기쁘게 하며/가장 높으신 이의 거룩한 성막을 기쁘게 하도다’ (4). 숲과 숲에 사는 모든 생물들의 목마름을 해소하는 시냇물의 이미지, 하나님의 성, 거룩한 성막이 한데 어우러집니다. 태곳적 혼돈의 위협을 제거하고 만드신 에덴동산을 연상시킵니다(창 2:10-14). 하나님의 안전한 돌봄을 이보다 더 간결하고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 임재의 상징인 ‘하나님의 성’과 ‘성소’에 계신 ‘지존하신 이’를 기쁘시게 하는 생명의 물은 안전과 평화와 위로와 은총의 표시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성은 예루살렘, 곧 시온을 가리킵니다. 이때 시인은 하나님께서 그 성에 계셔서 그 성은 무너지지 않을 것이요, 하나님께서 새벽에 그 성을 도우실 것이라(5) 믿습니다. 땅과 산이 흔들릴 수 있으나(2), 하나님의 성이 흔들려 무너지지 않는 것은 그 성에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시내산 자체가 거룩한 것이 아니라 그때 그 순간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강림하셨기 때문에 거룩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시인은 갑작스런 군사적 위협이 예측되는 새벽에도 하나님께서 성을 지키시며 보호하실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왕국들을 침략하기 위해 요란스럽게 떠들어대는 나라들로 인해 흔들렸지만, 하나님께서 목소리를 발하시자 땅이 녹았다(6)고 합니다. 하나님의 목소리는 ‘천둥소리’로 묘사되곤 하는데(욥 37:4; 시 18:13; 29:3-9), 그 목소리로 지축이 흔들려 땅도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일 만큼 하나님의 위엄과 능력이 그 백성과 함께하셨습니다. 시인은 만군의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계시고, 야곱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피난처 되심을(8) 다시 반복합니다(참조. 1). 수많은 나라들이 예루살렘을 공격했지만, ‘만군의 여호와’는 조상 야곱의 하나님입니다. 그분이 ‘피난처’, 곧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바위 성벽 같은 든든한 ‘요새’가 되셨습니다. 이는 창조 세계의 혼돈을 제압하신 것처럼 역사 속에서 열방을 굴복시키는 하나님 왕권에 대한 찬양입니다.

 

우리의 피난처이신 하나님(8-11)

세은 영적 전쟁터와 같습니다. 죄의 유혹과 악한 영들의 끊임없는 공격은 그리스도인들을 지치게 합니다. 영적 전쟁터와 같은 세상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피해야 합니다. 세상 권세와 악한 영들의 세력이 아무리 강해도 하나님께서는 넉넉히 이기게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고난 속에서 살아가는 백성을 향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8와서 여호와의 행적을 볼지어다 그가 땅을 황무지로 만드셨도다 9그가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는도다 10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11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9-11)

 

시인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 공동체를 향해 외칩니다. ‘와서 보라, 여호와의 행적을/그가 땅을 황무지로 만드신 것을’(8). 언약의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직접 보라고 합니다. 여호와가 하신 일, 곧 땅을 황무지로 만드신 것을 보라는 것입니다. ‘황무지’(샴모트)는 여호와 심판의 파괴적인 힘을 드러내는 말이며(참조. 왕하 22:19, ‘빈 터’; 렘 25:18, ‘멸망'), 전쟁으로 인한 황폐함을 뜻합니다(시 73:19; 사 5:9; 렘 2:15).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파괴적인 힘이 어디까지 미치는지 보라는 뜻입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는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시고,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는 분입니다(9). 시인에게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위해 파괴적인 힘을 발휘하시지만, 그 반대의 하나님이기도 합니다. 그분은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셔서 전쟁을 그치게도 하십니다. 시인에게 하나님께서는 호전적인 나라와 민족들의 무기를 쓸모없게 하셔서 전쟁을 그치게 하시는 분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무기를 농기구로 만들어 나라들 사이에 전쟁이 그치는 환상을 보기도 했습니다(사 2:4; 참조. 겔 39:9-10).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는 전쟁의 특징은 살상과 땅의 황무함에 있지 않고 궁극적인 평화에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전쟁을 ‘쉬게 하신다’(마슈비트)는 것은 단순한 멈춤이 아니라 땅의 안식처럼(레 26:34) 모든 억압의 굴레에서 풀려나고 해방되어 자유롭게 쉬는 것입니다. 인간의 제국은 스스로의 탐욕 때문에 호전성을 버리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전쟁 무기를 파괴하시는 힘은 영구적인 평화와 안식이 됩니다. ‘와서 보라’는 초대 후에 시인은 하나님의 목소리를 소개합니다. 그 목소리는 한때 전쟁상황에서 언약 백성에게 들려주셨던 말씀입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라/내가 뭇 나라들 가운데 높임을 받으리라/내가 이 땅에서 높임을받으리라’(10). ‘가만히 있으라’(하르푸)는 명령은 홀로 있는 것이요, 하던 일을 멈추는 것이요, 손에 든 것을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긴장을 풀고 편히 마음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옛 이스라엘 후손들은 홍해를 건너기 전 모세가 한 말을 들었다(출 14:14; 참조, 대하 20:17).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을 위해 직접 싸울 것이니 백성들은 마음을 가다듬고 그의 구원하시는 행위를 보기만 하면 됩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시인에게 주신 신탁입니까? 그럴 가능성도 있지만, 모세에게서 시작된 ‘바다의 노래’(출 15:1-18)가 면면히 회자되고 전승되어 공동체 안에 이미 공유된 믿음의 노래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언약 백성을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높임을 받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여러 나라들로부터 높임을 받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시인은 후렴구처럼 이미 했던 말을 다시 반복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우리와 함께하시니/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라’(11,7,1). 이 시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라는 고백적인 선언입니다. 그리고 이 고백은 창조세계 이전의 혼돈을 제압하시고(13), 인간 역사의 폭력적인 모든 상황으로부터(4-7,8-11) 구원하시는 하나님만이 가장 완전한 쉼과 완전한 평화의 주체라는 깨우침에서 나옵니다.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피난처가 되어 주십니다. 세상의 그 어떤 힘과 권세도, 그 어떤 사람도 우리의 완전한 피난처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피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기쁘게 맞아 주시고, 완전한 쉼을 주시며, 새롭게 하십니다. 완전한 피난처이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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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45-01)


왕의 혼인 잔치를 찬양하는 노래

시편 45편 1-17절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는 영원합니다. 만민이 왕이신 예수님을 찬양할 것이고 그 앞에 경배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부인 교회는 그 그날에 기쁨과 감격 속에 신랑이신 예수님을 맞이할 것이고, 그 나라의 영광에 동참할 것입니다. 그날을 소망하며 순결한 신부로 살아가야 합니다.

 

  • 시편 45편은 시편에서 유일하게 결혼하는 왕에게 헌정하는 ‘사랑의 노래’입니다. 특정 왕의 이름을 명시하지 않았지만, 두로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는 왕을 위한 결혼 축가입니다. 시인은 인간 왕의 아름다움과 덕과 위엄을 빼어난 솜씨의 문장으로 칭송하고, 왕조가 끊어지지 않기를 기원하면서 왕의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 것이라고 다짐합니다.

 

시인의 말(1)

본문은 왕의 결혼을 축하하는 시롯거 신약의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신부 된 교회를 보여줍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의 신부와 같습니다. 나아가 성도는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거룩해야 합니다. 거룩하신 주님과 하나된 교회가 되기 위해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신부가 신랑을 바라보는 것처럼, 교회는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1내 마음이 좋은 말로 왕을 위하여 지은 것을 말하리니 내 혀는 글솜씨가 뛰어난 서기관의 붓끝과 같도다(1)

 

먼저 시를 쓴 의도를 밝힙니다. 시인은 내 마음이 흥분되고 흥겨워서 왕을 위해 ‘좋은 말’, 곧 기쁘고 즐겁고 아름답고 멋진 말을 해야겠다고 밝힙니다(lab). 시인은 스스로 나의 말(“내 혀”)이 뛰어난 서기관의 붓 끝과 같다(1c)고 할 만큼 능숙한 말솜씨를 지녔습니다. 시인은 왕의 혼인식에서 왕을 위한 축가를 헌정할 정도로 특정 계층에 속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시인이 뛰어난 말솜씨를 전문 서기관의 붓에 비교한 것은 서기관들이 왕정 시대에 존경받거나 뛰어난 필력을 가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시인은 학자 에스라처럼(스 7:6), 왕실 출입이 가능했던 서기관이나 왕실에 속한 예언자였을지 모릅니다.

 

왕(신랑)을 위한 선언과 영광(2-8)

한 사람의 신부가 된다는 것은 그 사람만 사랑하고 그 사람만 바라보겠다는 약속입니다. 거룩한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신랑이신 거룩한 주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만 경배해야 합니다. 주님보다 더 높일 것은 없습니다. 큰 권력을 가진 사람도, 많은 재물을 가진 사람도 겸손함으로 주님만 자랑하고 높이는 곳이 거룩한 교회입니다.

 

2왕은 사람들보다 아름다워 은혜를 입술에 머금으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왕에게 영원히 복을 주시도다 3용사여 칼을 허리에 차고 왕의 영화와 위엄을 입으소서 4왕은 진리와 온유와 공의를 위하여 왕의 위엄을 세우시고 병거에 오르소서 왕의 오른손이 왕에게 놀라운 일을 가르치리이다 5왕의 화살은 날카로워 왕의 원수의 염통을 뚫으니 만민이 왕의 앞에 엎드러지는도다 6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원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 7왕은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시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왕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왕에게 부어 왕의 동료보다 뛰어나게 하셨나이다 8왕의 모든 옷은 몰약과 침향과 육계의 향기가 있으며 상아궁에서 나오는 현악은 왕을 즐겁게 하도다(2-8)

 

왕의 권력과 위엄은 의로우신 하나님에게서 왔으며, 하나님처럼 악을 미워하고 의를 사랑하여 통치하는 왕에게 하나님께서는 다른 열국의 통차지들보다 그를 더 높이시고 기쁨의 향유를 부어 주셨습니다.

 

(1) 왕을 향한 선언(2-5)

 

시인은 신랑인 왕의 아름다움을 선포합니다. ‘당신은 사람들보다 아름다워/당신의 입술에서 은혜가 흘러넘치도다/그러므로 하나님이 당신에게 영원히 복을 베푸셨도다’(2). 시인은 왕의 아름다움을 칭송하는데, 그 본질은 입술의 ‘은혜’에 있습니다. 왕의 아름다움은 외모가 아니라 은혜로운 말에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지혜자들이 말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처럼(전 10:12; 잠 22:10), 마음에서 우러나온 말은 인격을 반영합니다. 말은 내면의 외적 표현입니다. ‘그러므로’(2c) 시인은 하나님께서 그 왕에게 복주심이 마땅하다고 노래합니다. 이어서 시인은 왕이 용사로서 갖춰야 할 덕목을 권면합니다. ‘당신의 칼을 허리에 차고/용사여, 당신의 영화와 위엄을 매소서’(3). 고대 사회에서 왕은 전쟁에 능하고 용맹성을 지닌 용감한 전사입니다. 칼을 찬 전사의 용맹성은 하나님께 속한 ‘영화와 위엄’과 일치하도록 요구받습니다(참조, 시 21:5; 96:6). 그래서 시인은 왕에게 ‘진리와 온유와 공의’ 위에 번성하고 그 위에 올라타기를 청합니다(4ab). 또한 왕의 오른손이 두려운 일을 당신에게 가르칠 것이라 말합니다(4c). 이는 하나님께서 크고 두려운 일을 행하시고 보이신 것처럼(신 10:21; 삼하 7:23) 용맹스러운 왕답게 원수들을 정복하여 혁혁한 승리를 거두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이어서 왕의 화살은 날카로워 왕의 원수들의 ‘심장’(“염통”)을 찌르고, 원수의 나라들은 왕의 발 앞에 완전히 제압됩니다(5). 이처럼 시인은 왕의 군사적 능력이 정밀하고 정확하게 발휘될 것을 기대합니다.

 

(2) 왕의 영광(6-8)

 

시인은 인간 왕의 능력을 노래하다가 갑자기 하나님 통치의 영원성을 노래합니다. ‘하나님이여, 당신의 보좌는 영원하며/당신 왕국의 홀은 공평한 규입니다’(6). 이는 왕의 아름다움과 영광이 하나님의 주권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혼돈의 세력을 굴복시킨 우주의 왕이시듯, 인간 왕의 보좌를 하나님 보좌에 대한 지상의 그림자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왕의 하나님이시기에 서로를 반영합니다. 시인은 다시 왕에게 그가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니 그의 하나님이 그에게 기쁨의 기름을 부으셨다고(7ab; 참조. 사 61:3) 칭송합니다. 또 하나님이 왕의 덕을 높이며 왕의 동료들, 곧 열국의 왕들보다 뛰어나게 하셨다고(7) 노래합니다. 8절에 결혼하는 신랑에게 기름을 붓고 향기 넘치는 왕복을 입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화려한 혼인식을 상상하게 합니다. 왕의 옷은 값진 향품들(올리브유, 알로에, 계피)의 향기로 가득하고, 상아로 장식한 궁궐에서 현악기 연주는 왕을 즐겁게 합니다.

 

신부(왕후)를 향한 선언과 영광(9-15)

거룩한 교회는 예수님만 높이고 경배하는 곳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쏙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물질이 신앙의 기준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물질이 많으면 하나님께 복을 받았다고 합니다. 물질을 많이 드리면 주님이 귀하게 쓰시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만을 높여야 할 교회가 주님보다 물질을 더 높이고 있습니다.

 

9왕이 가까이 하는 여인들 중에는 왕들의 딸이 있으며 왕후는 오빌의 금으로 꾸미고 왕의 오른쪽에 서도다 10딸이여 듣고 보고 귀를 기울일지어다 네 백성과 네 아버지의 집을 잊어버릴지어다 11그리하면 왕이 네 아름다움을 사모하실지라 그는 네 주인이시니 너는 그를 경배할지어다 12두로의 딸은 예물을 드리고 백성 중 부한 자도 네 얼굴 보기를 원하리로다 13왕의 딸은 궁중에서 모든 영화를 누리니 그의 옷은 금으로 수 놓았도다 14수 놓은 옷을 입은 그는 왕께로 인도함을 받으며 시종하는 친구 처녀들도 왕께로 이끌려 갈 것이라 15그들은 기쁨과 즐거움으로 인도함을 받고 왕궁에 들어가리로다(9-15)

 

왕과 혼인하는 신부는 오빌의 금으로 꾸미고 왕의 오른쪽에 섭니다. 왕의 신부는 이전의 삶을 잊어야 합니다. 그리고 왕께 경배해야 합니다. 왕은 신부를 아름답게 여기고 사랑할 것입니다.

 

(1) 신부를 향한 선언(9-12)

 

결혼식이 시작됩니다. 왕이 아니라 왕후가 될 왕의 신부에게 초점이 맞춰집니다. 왕의 국제적 지위를 높여주려는 듯 여러 왕들의 딸들이 왕 주변에 있고, 왕후가 될 신부는 오빌의 금으로 꾸미고 왕의 오른쪽, 곧 영광의 자리에 서 있습니다(9). 시인은 이제 가장 화려하게 치장한 왕후에게 말합니다. ‘딸이여, 듣고 보고 당신의 귀를 기울이십시오/당신의 백성과 당신의 아버지 집을 잊으십시오’(10). 매우 친밀하게 왕후가 될 신부에게 딸이라고 호명하며 교훈합니다. 애정 어린 호칭입니다. 왕후는 새 나라의 일원으로서 자기 나라의 삶의 방식을 잊어야 합니다. 그러면 왕이 그대의 아름다움을 사모할 것이라(11a)고 조언합니다. 이때 ‘사모한다’는 말은 강렬한 성적 열망이 포함된 말입니다. 시인은 신부에게 권면합니다. ‘참으로 그가 당신의 주인이니 그대는 그를 경배하십시오’(11b). 왕의 아내로서 남편에게 복종과 존경을 표하라는 뜻입니다. 이때 갑자기 등장하는 ‘두로의 딸’(12)은 ‘왕들의 딸’(9)에 속한 공주이고, 시인이 ‘딸’(10)이라고 부른 왕후가 될 신부입니다. 이제 두로의 딸은 왕후가 되면 항상 예물에 둘러싸여 있고, 백성들 중 부자들은 왕후의 얼굴 보기를 원할 것입니다(12). 시인은 왕후의 총애를 얻으려고 귀족들이 속속 방문하게 될 것을 내다보며 노래합니다.

 

(2) 신부의 영광(13-15)

 

시인은 왕후의 영광을 노래합니다. 두로의 딸은 왕궁에서 온갖 영화를 누리고, 옷은 금으로 수놓아졌습니다(13). 왕후의 영광은 금실로 수놓은 화려한 옷으로 집약됩니다. 금빛 찬란한 옷을 입은 공주는 왕에게 인도함을 받고, 결혼하지 않은 그녀의 친구들이 신부의 뒤를 따릅니다(14). 왕후가 될 공주의 친구들이 신부의 결혼식 들러리를 위해 함께 왔습니다. 개역개정에서 “시종하는 친구 처녀들”이라고 번역한 것은 오역입니다. 왕께 이끌린 여인들은 신부의 하녀가 아니라 ‘그녀를 위해 데리고 온 미혼의 친구들’입니다. 그들(여성복수형), 곧 신부의 친구들은 기쁨과 즐거움으로 안내를 받으며 왕궁으로 들어갑니다(15). 왕후가 될 친구의 결혼식 들러리가 되어 즐겁게 신부와 입장하는 장면입니다. 음악이 연주되고 화려하게 치장된 왕실 결혼식 풍경은 즐거움으로 가득합니다.

 

신랑 신부를 위한 축원(16-17)

 

교회는 착한 사람들을 배출하는 곳이 아닙니다. 목사 닮은 사람을 만드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예수님을 닮아가도록 가르치고 훈련하는 곳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예수님을 닮게 돕지는 않고 자기 입맛에 맞는 사람만 찾습니다. 교회는 거룩하신 예수님을 거룩한 성도가 되는 곳입니다. 이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으면 작은 어려움만 생겨도 교회가 흔들리고 무너집니다.

 

16왕의 아들들은 왕의 조상들을 계승할 것이라 왕이 그들로 온 세계의 군왕을 삼으리로다 17내가 왕의 이름을 만세에 기억하게 하리니 그러므로 만민이 왕을 영원히 찬송하리로다(16-17)

 

왕실의 결혼식이 기쁨과 즐거움으로 고조되어 무르익어갈 즈음, 시인의 축원이 뒤따릅니다. 시인은 왕의 왕조가 영원히 지속되길 바라고 왕의 통치가 온 세상에 기억되길 기원합니다. ‘당신의 후손들은 당신의 조상들을 계승하고/당신은 그들을 온 땅의 군왕들로 삼을 것입니다’(16). 시인은 결혼식을 치르는 왕에게 조상으로부터 후손에 이르기까지 단절 없는 왕권의 지속적인 계승을 빌어줍니다. 마지막 말은 축복의 절정입니다. ‘내가 모든 세대 가운데 당신의 이름을 기억하게 할 것입니다/그리하여 만민이 당신을 영원히 찬양할 것입니다’(18). 시인은 처음에(1) ‘내 마음’이 흥겨워 왕의 결혼식을 위해 시 한편을 헌정하겠노라 밝혔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경계를 넘어서는 표현, ‘만민’이 왕을 영원히 찬송할 것이라고 축원합니다. 이런 말은 시편에서 주로 하나님께 드리는 표현입니다(42:5,11; 43:4,5). 그러면 이 말이 신랑 왕을 위한 것입니까, 왕이신 하나님을 향한 찬미입니까? 간헐적으로 이러한 말이 사람에게 사용되곤 했지만(창 49:8; 시 49:18), 이는 왕의 통치가 하나님의 통치를 반영하여, 모든 열방으로부터 왕이 칭송받기를 바라는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인간 왕의 나라는 하나님 왕국의 통치를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세속화되어 가고 있는 오늘의 교회를 향해,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교회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교회를 사랑하시고 복 주십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예수님만 높이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나아가 주님을 닮아가는 주님의 제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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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44-01)

 


영원히 찬양받으실 하나님

시편 44편 1-26절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나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 정착한 과정을 돌아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 시편 44편은 공동체적이고 민족적인 애가입니다. 전쟁에서의 철저한 패배 후에, 이스라엘의 옛 조상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구원을 간청하는 기도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향해 신뢰를 고백하며 수치를 당하지 않고 위축되지 않기를 간구합니다. 신앙 공동체인 왕과 백성이 함께 언약을 어기지 않은 진실을 하나님께 호소하며 일어나 도우시기를 간청하는 기도입니다.

 

구원 역사를 회고(1-3)

신앙은 전수가 잘되어야 합니다. 세대는 계속될 것이고 신앙은 이어져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에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기게 해 주시지 않았다면 그들은 언제든지 패배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의 결과입니다.

 

1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조상들의 날 곧 옛날에 행하신 일을 그들이 우리에게 일러 주매 우리가 우리 귀로 들었나이다 2주께서 주의 손으로 뭇 백성을 내쫓으시고 우리 조상들을 이 땅에 뿌리 박게 하시며 주께서 다른 민족들은 고달프게 하시고 우리 조상들은 번성하게 하셨나이다 3그들이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그들의 팔이 그들을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손과 주의 팔과 주의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 주께서 그들을 기뻐하신 까닭이니이다(1-3)

 

하나님을 부르며 ‘우리’로 표현한 백성들의 목소리로 시작됩니다. ‘하나님, 우리가 우리의 귀로 들었습니다’(1a). 백성이 들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이들은 조상들이 자기들에게 했던 말, 곧 그들 시대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을 오래전에 들었다고 합니다(1bcd). 이와 같은 표현은 어떤 신과도 비교 불가한 하나님을 찬양하는 다윗의 기도에도 등장합니다(삼하 7:22; 대상 17:20). 그러면 긴긴 세월 조상들로부터 받아온 교육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한 목소리로 말합니다. ‘당신이 당신의 손으로 뭇 백성을 내쫓으시고 우리 조상들을 심으셨습니다’(2ab). 가나안 정복과 정착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조상들이 자기들의 칼로 땅을 차지한 것이 아니고, 그들의 힘으로 자기들을 구원한 것도 아님을 압니다(3ab). 그래서 백성들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당신의 손과 당신의 힘으로, 당신의 얼굴빛으로 하신 것이니 이는 당신이 그들을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3bc). 백성들은 하나님의 구원이 자기조상들의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조건 없이 기뻐하셨기 때문이요(참조. 신 4:37-38), 하나님의 능력에 기초한 것임을 압니다.

 

옛 구원이 현재화하기를 바라는 확신과 찬양(4-8)

 

하나님께 승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를 기억할수록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자랑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값없이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찬양하며, 그 사랑에 영원히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를 기억하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분께 영원히 영광을 돌립니다.

 

4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왕이시니 야곱에게 구원을 베푸소서 5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우리 대적을 누르고 우리를 치러 일어나는 자를 주의 이름으로 밟으리이다 6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리이다 7오직 주께서 우리를 우리 원수들에게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로 수치를 당하게 하셨나이다 8우리가 종일 하나님을 자랑하였나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영원히 감사하리이다(셀라)(4-8)

 

발화자가 ‘우리’에서 ‘나’로 바뀝니다. 이러한 구성은 후에 예배 인도자와 회중이 번갈아가며 교독했겠지만, ‘나’는 공동체를 대표하는 ‘왕’일 것입니다. 최고 권력자인 왕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겸허히 낮추어 말합니다. ‘당신은 나의 왕이십니다. 하나님, 야곱의 구원을 명령하소서!’(4)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며, 이스라엘의 또 다른 이름 야곱의 구원을 ‘명령하소서’ 청하는 것은, 인간 왕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신복이라는 겸손한 자기 인식의 표현입니다. 왕은 실제로 전쟁터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하나님 명령을 받는 사람입니다. 발화자가 다시 우리로 바뀝니다. ‘당신을 통해서 우리가 우리의 대적을 밀어내고, 당신의 이름으로 우리가 우리를 치러 일어나는 자를 짓밟겠습니다’(5). 백성들도 동일하게 왕처럼 하나님과 그 이름의 명령을 따라 싸우고 승리할 것이라는 다짐이며 확신입니다. 다시 왕이 말합니다. 왕은 ‘진심으로’ 나의 활을 의지하지 않을 것이며, 나의 칼도 자기를 구원하지 못할 것이라고(6) 선언합니다. 다시 ‘우리’의 목소리로 바꾸비니다. ‘오직’ 당신이 우리의 원수들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셨고, 우리를 증오하는 자들이 수치를 당하게 하셨습니다(7). 백성들이 왕의 말에 화답하듯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을 고백하며 노래합니다. 백성들은 ‘하나님 안에서’ 온종일 우리가 찬양했고, 당신의 이름을 영원히 찬양하겠노라고(8) 선포합니다. 왕과 백성이 서로 화답하며 하나님을 높이는 광경이 아름답습니다. 백성들은 모두 과거의 구원 경험이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동력이 되고, 지금 하나님의 구원이 실현되기를 바랍니다.

 

현재 위기에서 수치와 결백(9-22)

성도는 하나님의 언약을 버림으로 스스로의 가치를 상실합니다. 백성의 수치는 언약을 버린 대가입니다. 형통한 삶을 원한다면 하나님의 언약 안에 거해야 합니다. 언약 안에서 광명의 빛으로 인도받던 이들에게 이제 죽음의 어두움이 임합니다. 언약을 떠나 타락한 이들에게 이제 빛은 사라졌습니다. 언약 안에 사는 삶은 빛 가운데 거하는 삶입니다.

 

9○그러나 이제는 주께서 우리를 버려 욕을 당하게 하시고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 10주께서 우리를 대적들에게서 돌아서게 하시니 우리를 미워하는 자가 자기를 위하여 탈취하였나이다 11주께서 우리를 잡아먹힐 양처럼 그들에게 넘겨 주시고 여러 민족 중에 우리를 흩으셨나이다 12주께서 주의 백성을 헐값으로 파심이여 그들을 판 값으로 이익을 얻지 못하셨나이다 13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웃에게 욕을 당하게 하시니 그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조소하고 조롱하나이다 14주께서 우리를 뭇 백성 중에 이야기 거리가 되게 하시며 민족 중에서 머리 흔듦을 당하게 하셨나이다 15나의 능욕이 종일 내 앞에 있으며 수치가 내 얼굴을 덮었으니 16나를 비방하고 욕하는 소리 때문이요 나의 원수와 나의 복수자 때문이니이다 17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임하였으나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며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였나이다 18우리의 마음은 위축되지 아니하고 우리 걸음도 주의 길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나 19주께서 우리를 승냥이의 처소에 밀어 넣으시고 우리를 사망의 그늘로 덮으셨나이다 20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버렸거나 우리 손을 이방 신에게 향하여 폈더면 21하나님이 이를 알아내지 아니하셨으리이까 무릇 주는 마음의 비밀을 아시나이다 22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9-22)

 

9-16절은 전반부에 나오는 내용과는 대조적입니다. 시인은 민족적 재난 앞에 탄식하고 절망합니다. 원수들의 압제로 수치와 비참함을 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해 주셔서 고통에서 구원해 주실 것을 호소합니다.

 

(1) 선언 백성의 탄식(9-14)

 

‘그러나’로 시작하는 백성의 목소리는 전쟁에서 패한 후에 부르는 애가이며 탄식입니다. 백성들은 하나님께 당신이 우리를 버려 비참하게 되었고, 당신은 더 이상 우리 군대와 함께 출전하지 않으신다고 호소합니다(9). 전쟁터에서 함께 싸우시며 승리를 주셨던 하나님을 찾습니다. 전쟁의 패배만큼 하나님이 자기들을 버렸다는 인식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적들에게 쫓기고 빼앗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10). 백성들은 이 원인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잡아먹힐 양처럼 적들에게 넘겨주시고, 여러 민족들 가운데 흩어버리셨다고 생각합니다(11). 백성들의 언어는 더 거세집니다. ‘당신이 당신의 백성을 헐값에 파셨으나, 그들을 판값으로 이득을 얻지 못했습니다’(12). 하나님께서 백성을 파셨다는 표현은 언약을 파기한 백성을 심판하실 때 사용된 말이었습니다(참조. 삿 2:14; 3:8; 4:2). 이처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이웃들에게 불명예스럽게 하셔서 그들이 조롱하고 비웃는다고 합니다(13). 격렬하게 항의하는 목소리입니다. 이웃의 경계를 넘어 이들의 수치스러움이 확장되었음을 호소합니다. 뭇 백성들 사이에서도 이야깃거리가 되어 사람들이 보고 머리를 흔드는 상황입니다(14절; 참조. 시 22:7; 64:8; 109:25; 렘 18:16; 애 2:15). 영광은 없고 치욕만 남은 현실을 낱낱이 진술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고, 이웃 나라들의 조롱과 멸시 받는 민족으로 전락된 때가 언제였습니까? 주전 586년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던 때와 관련된 것입니까?

 

(2) 왕의 수치를 선포(15-16)

 

백성의 탄식을 이어받아 왕이 애가를 이어갑니다. ‘온 종일 나의 능욕이 내 앞에 있으며, 수치가 내 얼굴을 덮었습니다’(15). 왕은 자기를 비방하고 욕하는 소리, 자기 원수와 보복하려는 자들 때문에(16) 더더욱 수치스럽습니다. 백성의 수치 못지않은 불명예가 왕을 고통스럽게 합니다. 전쟁에서 패배한 왕의 어깨에 놓인 짐의 무게만큼이나 수치심은 더 컸을 것입니다.

 

(3) 백성의 결백 선언(17-22)

 

그렇다면 왕과 백성은 이웃과 뭇 나라들로부터 수치와 모욕을 당해 마땅했습니까? 백성의 결백 선언이 살짝 당혹스러울 정도로 당당합니다(17). 백성들은 자기들의 마음이 정도를 벗어나 다른 길로 가지 않았고, 발걸음도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합니다(18). 백성들은 하나님께 오히려 당신이 우리를 승냥이의 소굴에 밀어 넣으셨고, 죽음의 그늘로 몰아넣으셨다고(19) 항변합니다. 백성들의 항변은 점점 더 거세집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버렸거나/우리의 손을 이방의 신에게 펼쳤다면/하나님이 이것을 알아내지 못하셨겠습니까?’(20ab-21a) ‘손을 편다’는 것은 예배 행위와 관련된 행동입니다(참조. 출9:29, 33; 스 9:5; 시 88:9; 141:2).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겉으로 드러난 행위뿐만 아니라, ‘그분은 마음의 숨겨진 것들을 아시는 분’(21b)이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은 속마음까지 속속들이 아시는 하나님께 항변하고 하소연합니다. 우리가 당신을 위해 온종일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고, 도살당할 양처럼 되었다고(22) 탄식합니다. 마치 자기들이 하나님을 위한 번제단의 희생제물인 양 애타는 심정인 것과, 죽음의 심판만 남은 존재처럼 절박함을 표시합니다. 무엇이 되었든 죽음의 위협 앞에서의 부르짖음은 하나님의 정의에 기댄 인간의 존엄을 확인받는 일입니다.

 

주님, 일어나십시오! 우리의 도움이 되십시오!(23-26)

 

하나님의 이름을 잊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끝까지 믿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에 능력이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 앞에 악한 영들은 물러갑니다. 환난을 이기는 능력이 주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견디기 힘든 고난의 자리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구하고, 찾고, 부르짖으시기를 바랍니다.

 

23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원히 버리지 마소서 24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가리시고 우리의 고난과 압제를 잊으시나이까 25우리 영혼은 진토 속에 파묻히고 우리 몸은 땅에 붙었나이다 26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소서(23-26)

 

모두 다급해져 신속한 하나님의 개입을 원합니다. ‘일어나십시오, 어찌하여 주무시고 계십니까, 나의 주님/깨어나십시오! 우리를 영원히 버리지 마십시오’(23). 응답 없는 주님을 향해 주무시는 하나님인 양 일어나 깨어나시기를 재촉합니다. 주무시는 하나님이라니. 너무 절박하여 격식을 차릴 마음의 겨를이 없습니다. 백성들은 어찌하여 당신의 얼굴을 가리시고, 우리의 고난과 압제를 잊으셨습니까, 질문합니다(24). 하나님께서 외면하신 이유를 묻습니다. 이는 생명이 진토 속에 파묻히고 몸은 땅속에 붙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25). 주무시는 하나님을 다시 흔들어 깨우는 것처럼 다시 외칩니다. ‘일어나십시오! 우리의 도움이 되십시오!’(26). 우리의 ‘도움’이 되라고 호소합니다. 마지막으로 백성들은 실패하지 않는 ‘한결같은 사랑’으로 구원해주시길 기도합니다. 백성의 마지막 희망은 언약에 근거한 사랑이며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사랑, 곧 ‘인자하심’에 있습니다. 영광스러운 과거는 묻혔고, 치욕스러운 현실 앞에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인자하심뿐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백성입니다. 죄로 인해 죽을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우리를 주님은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심으로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원한 왕이 되셔서 우리를 지켜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베푸십니다. 주님의 은혜를 날마다 자랑하며 살아가는 은혜의 증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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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43-01)

 


절망의 골짜기에서 부르는 노래

시편 43편 1-5절


 

환난을 만날 때 우리는 절망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절망은 환난을 극복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절망의 골짜기가 깊어질수록 더욱 슬퍼질 뿐입니다. 절망의 골짜기에서 성도가 해야 할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찬양은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 시편 42편과 하나처럼 이어지는 43편은 억울함을 항변하기 위해 법정적인 용어를 사용하면서 하나님께 불의한 자를 심판하시기를 간청하고 호소하는 시입니다. 생명의 물을 찾는 사슴처럼 간절했고, 혼돈과 죽음의 물로부터 구원받기를 간절히 기도했던 시인은 하나님의 빛과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라 다짐합니다.

 

하나님 나를 변호해주소서(1)

하나님께 자신의 억울함을 맡길 때 불경건한 자들의 핍박과 조롱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경건하지 않은 불의한 자들의 자의적인 판단과 비방에 낙담하지 맙시다. 침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판단에 맡기고 마음의 평안을 회복하시길 바랍니다.

 

1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에 대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1)

 

시인의 첫마디는 간결하지만 강력합니다. ‘나를 판단해주소서, 하나님’(1a). 시인은 자신의 생명을 건 내적 목마름(42:1-2)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42:3,10) 조롱하는 원수들 때문에 매우 고통스러웠습니다. 스스로에게 왜 낙심하는지 집요하게 질문하면서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습니다(42:5,11). 이제 시인은 자신과의 내적 몸부림을 끝내고 결심한 듯 하나님을 향해 판결을 구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으로부터 무슨 문제 때문에 판결 받고 싶은 것입니까? 시인의 이어지는 말에서 분명해집니다. ‘경건하지 않은 나라에 대한 내 송사를 변호해주소서/간사하고 불의한 사람에게서 나를 건지소서’(1bc) 시인의 말을 문자 그대로 읽고 해석하면, 그는 소송에 얽혀 법적 투쟁 중입니다. 거짓되고 사악한 사람과의 개인적인 송사와 경건하지 않은 ‘나라’와 얽힌 국가적인 소송 문제에 연루된 상태입니다. 이러한 법적 투쟁에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공정한 재판관이면서도 자기의 변호를 맡아주시길 간청합니다. 여기서 ‘나라’는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이방 사람들을 언급한 것일 수 있지만(출 34:24; 겔 5:6-8; 시 44:3), 본문의 맥락을 넓혀 시인이 국가 지도자로서 왕이라면 이웃 나라들과 맺은 계약 파기 같은 문제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경건하지 않은 나라? 표현이 다소 어색합니다. 왜냐하면 형용사 ‘경건하다’는 주로 하나님께 신실하게 헌신된 자들, 곧 ‘성도’를 일컫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경건하지 않은 나라’는 시인 주변의 특정한 사람들을 집합적으로 일컫는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겠습니다. 더군다나 셋째 소절, ‘간사하고 불의한 사람’과의 평행관계를 고려하면 ‘경건하지 않은 나라’보다는 ‘경건하지 않은 사람들’이 적절합니다. 따라서 시인은 거짓되고 불의한 자들, 곧 경건하지 않은 이들에게 휘말린 법적 공방에서 하나님의 변호가 절실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자기 편 되어주시는 것, 그것이 불의한 자들로부터 구원받는 길이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2)

빛은 어두움 속에서 길을 안내하는 등불입니다. 아무리 어두운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해 줍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우리가 온전히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약속의 약속이 곧 진리입니다. 빛과 진리의 말씀만이 흑암을 밝혀 구원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2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거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억압으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2)

 

하나님께서 재판관으로서, 시인의 변호인으로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지 않으셔서 기다림의 시간이 길어지고 있습니다. 시인이 하나님을 향해 호소합니다. ‘참으로 당신은 나의 하나님 나의 산성이십니다’(2a). 시인은 언약의 이름 여호와가 아니라, 신들 중의 가장 위대한 신, 완전한 신을 언급하는 명칭, ‘엘로힘’에 1인칭 소유격을 덧붙여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분은 누구도 침략할 수 없는 ‘나의 산성’, 곧 나의 피난처임을 고백합니다. 그러고서 시인은 부르짖으며 호소합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어찌하여 내가 비탄에 빠져 다녀야 합니까?/원수의 압제 때문에요’(2bcd). 시인은 왜 아직도 여전히 상복을 입은 사람의 비통한 심정처럼 슬퍼해야 하는지 하나님의 응답을 듣고 싶습니다. ‘어찌하여’를 반복하며 거절당한 자신을 받아들일 수 없어 하나님을 향해 탄원합니다. 탄식의 본질은 분명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로부터 잊힌 존재 같아 고통스럽습니다. 그렇다고 침묵할 수 없습니다. 자기를 억압하는 원수로부터의 구원은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믿습니다. 따라서 원수를 향한 증오심에서 허우적대며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을 열망하는 목소리를 숨기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거친 부르짖음은 믿음 없이 불가능합니다.

 

빛과 진리의 거룩한 산으로 인도하소서(3-4)

하나님께서 예배하는 자에게 주시는 기쁨은 세상이 알 수 없는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원수들의 핍박과 조롱을 압도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불경한 자들의 공격에 연연하지 않고 예배의 자리를 사모하는 이유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소망입니다. 구원의 하나님을 생각하면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가 없습니다.

 

3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4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3-4)

 

시인은 다시 간구합니다. ‘당신의 빛과 당신의 진리를 보내소서’(3a). 매우 독특한 간청입니다. 히브리 시인들은 보통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랑과 신실하심, 곧 ‘인자와 진리’를 구합니다. 그런데 ‘빛과 진리’가 한 쌍입니다. 슬픔의 어둠을 헤매는 사람처럼 다녔던 시인(2)이 빛을 구하고, 불의한 자들의 거짓으로부터로 악기를 연주하며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진리’(진실)를 구합니다. 시인은 빛과 진리로 자기를 인도해주시길 청한다(3b). 시인은 체계적이고 단계적으로 요청합니다. ‘빛과 진리가 나를 당신의 거룩한 산으로 데려가게 하소서’(3c)라고 말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계신 거룩한 산에 오르기까지 빛과 진리의 안내를 받고 싶습니다. 신실한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빛이고, 빛은 곧 생명입니다(참조, 미 7:8). 시인은 어둠과 죽음의 시간을 통과하면서 빛과 생명의 활력이 넘치는 안전한 공간으로 인도받고 싶습니다. 그곳을 시인이 ‘당신의 거룩한 산’으로, ‘당신의 장막’으로 부릅니다(3). 시편에서 거룩한 산은 시온산이며(시 2:6; 15:1), 주님이 거하시는 곳, ‘장막’도 시온을 가리킵니다(46:4; 84:1; 132:5,7). 시인이 빛과 진리의 안내를 받아 궁극적으로 가고 싶은 곳은 하나님 임재의 처소입니다. 시인은 한때 많은 무리와 동행하며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발하며 ‘하나님의 집’, 곧 성전으로 올라갔을 때를 회상하며 슬픔에 젖기도 했었습니다(42:4). 이곳은 낭만적인 추억의 장소가 아닙니다. 시인은 현실에서 다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자신의 희망을 다짐하듯 말합니다. ‘그때 내가 하나님의 제단으로 나아갈 것입니다/내 기쁨의 극치이신 하나님을 향해’(4ab). 하나님의 ‘제단’은 제물을 드리는 곳입니다. 그런데 어떤 제물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릴 것인지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하나님을 향해 가는가에 초점이 맞춰졌습니다. 시인은 ‘내 기쁨의 극치이신 하나님’, 곧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개역개정)을 향해 갑니다. 그는 기쁨의 극치이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더 이상 슬프지 않습니다. 이전처럼 부재의 하나님께서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환호하는 시인의 모습이 상상이 됩니까? 시인은 기쁨의 노래를 부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수금으로 당신을 찬양합니다,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여’(4cd). 탄식의 언어는 사라지고 기쁨으로 악기를 연주하며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시편 2권을 시작하는 42편과 43편에 유달리 하나님의 완전성을 표시하는 명칭, ‘엘로힘’이 반복되는 것은 주로 언약의 이름 ‘여호와’가 많았던 1권(1-41편)과 비교되는 대목입니다. 왜입니까? 포로의 땅에서 온갖 이방 신들에 둘러싸여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시인은 신들 중의 최고이며 완전한 신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복수 형태 ‘엘로힘’을 자주 사용한 것 아닙니까?

 

나의 구원 나의 하나님을 찬양하리라(5)

고통 중에도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로 나아가기를 갈망합니다. 원수들의 송사를 하나님의 판단에 맡기고 빛과 진리를 간구해야 합니다. 예배의 감격이 그의 절망적인 상황을 압도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어떠한 시련도 이긴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5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5)

 

42편 마지막 절(11) 시행과 똑같습니다. 시인은 이미했던 말을 반복하지만, 이전과 다릅니다. 마음이 용해되어 사라질 정도의 고통스러움을 입으로 쏟아냈지만(42:5,11), 탄식의 목소리를 터트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이제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왜냐하면 시인이 장차 하나님의 산과 하나님의 장막에 이르러 기쁨과 찬양의 제사를 드릴 것이라 확신하며 다짐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42, 43편의 아름다움은 후렴구처럼 반복되는 탄식과 희망의 절묘한 어울림에 있습니다. 유리하고 방황하는 인생을 이보다 생생하게 표현할 수 있습니까? 세 차례 반복하는 말의 절정은 43:5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5ab) 탄식하고 탄원하고 질문하며 답을 찾아가는 집요함 자체는 자신을 발견하는 과정이며, 그 자체로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노래합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라, 진실로 여전히 내가 그를 찬양하리라, 나의 구원 나의 하나님을’(5cde). 절망과 불안이 엄습하는 골짜기에서 스스로 하나님을 기다리며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기다림이 곧 믿음입니다. 절망의 복판에 섰던 시인의 긴긴 기다림은 절망하며 흔들리는 모든 이들에게 가장 큰 위로입니다. 영혼의 깊은 강을 건너며 하나님을 내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다. 43편은 삶의 슬픔과 기쁨의 비밀이 교차하는 가장 아름다운 노래입니다.


인생을 사는 동에는 고난이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환난의 순간마다 우리가 절망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면 절망의 골짜기만 깊어질 뿐입니다. 절망의 골짜기에 빠진 사람은 환난을 극복하지 못합니다. 절망의 골짜기에서도 하나님을 믿음으로 찬양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건지시고, 힘을 주시며, 바른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그러니 환난을 당하는 순간에도 다윗처럼 주님을 찬양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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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42-01)


앞날이 캄캄한 때에

시편 42편 1-11절


 

인생의 길은 광야와 같습니다. 메마른 길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길이 없어 보이는 벼랑을 만나기도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그 벼랑 끝에서 절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벼랑 끝에서도 믿음으로 하나님을 찾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찾을 때,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시고 길을 열어 주십니다.

 

  • ‘영혼의 어두운 밤’을 노래하는 이 시는 인간 내면의 갈증과 고단함 속에서 힘과 위로가 되는 아름다운 시입니다.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시인 내면의 고독은 믿음을 잃지 않으려는 몸부림입니다. 이는 읽는 이의 마음 깊은 곳을 어루만져 어둡고 차가운 현실에서 새 힘을 줍니다.

 

목마른 사슴처럼 하나님을 찾으나(탄식)(1-4)

불신앙의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세상은 신자들에게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의 응답이 즉시 임하면 좋겠지만, 그렇지도 않습니다. 믿음을 잃어버릴 만큼 힘든 상황에 빠졌을 때 우리는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까요?

 

1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2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3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4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1-4)

 

시인은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하나님을 찾습니다. 사슴은 시냇물을 찾지 못하면 죽습니다. 다른 것으로는 갈급함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인생도 하나님을 찾지 못하면 죽습니다. 다른 것으로는 인생의 갈급함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다른 것들로 인생의 갈급함을 해결하려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1) 시냇물을 찾는 사슴처럼(1-2)

 

시인은 하나님과 분리된 실제적 고통을 자연의 이미지와 직유로 표현합니다. 시인의 첫마디는 ‘사슴처럼’입니다. ‘시냇물을 갈망하는 사슴처럼/그렇게 내 영혼이 하나님 당신을 갈망합니다’(1). 히브리어 본문의 소절과 소절 사이에서 생략해도 무방한데 생략하지 않고 반복한 ‘갈망하다’(‘갈급함 같이’, 개역개정)동사 형태는 시편에서 두 번 반복되며, 구약 다른 곳에서는 찾기 어려운 드문 표현입니다(참조. 욜 1:20, ‘헐떡거리오니’). 하나님 만나기를 열망하는 시인의 절박함을 표현한 말입니다. ‘내 영혼’, 곧 내 목숨처럼 절실합니다. 시인은 물을 찾아 헤매는 사슴 같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이의 마음을 이보다 더 간절히 표현할 수 있습니까? 시인은 또 반복합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신 하나님을 찾습니다’(2a). 시인이 찾는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내 생명’은 곧 ‘살아계신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처럼 하나님을 시인의 생명과 연결 짓습니다. 그는 질문합니다. ‘언제 내가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뵙습니까?’(2b) 2절에서 우주를 창조하신 창조자 하나님, 곧 ‘엘로힘’이 두 번 반복됩니다. 구약 시대 모세를 제외하고 누구도 하나님 얼굴을 마주 대하며 볼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 임재의 처소인 성전에서 예배드리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형편과 처지를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2) 사람들의 조롱과 순례의 기억(3-4)

 

시인은 내 눈물이 밤낮으로 나의 음식이 되었다고(3a) 탄식합니다. 사람들은 ‘온종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는가?’(3) 묻습니다. 시인이 밤낮 눈물을 음식처럼 삼키는 이유는 비아냥거리는 질문 때문입니다. 이러한 조롱은 이방인들이 침입하여 이스라엘이 위기에 처했을 때 주로 하던 말입니다(시 79:10; 115:2; 2:17; 미 7:10).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조롱하는 말이어서 포로로 잡혀간 상황이거나 시인이 당면한 위기 속에서 그를 미워하는 원수들일 수도 있지만, 이어지는 시행은 포로기 상황처럼 보입니다. 시인은 옛일을 회상합니다. 그가 기억하는 일들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일 때문에 ‘내 마음이 상한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숨을 토해내듯 절망적인 고통을 표현할 때 쓰는 말입니다. 시인은 지난 시간을 회상합니다. 시인은 많은 무리와 함께 ‘하나님의 집’까지 동행했었습니다. 그때 기쁨과 감사의 소리로 흥분된 축제가 계속되었습니다(4). 시인은 무엇보다 성전이 있는 곳까지 많은 이들과 동행하며, ‘기쁨과 감사의 소리로’ 충만했던 때가 그립습니다. 성전으로 행하는 순례의 발걸음에서 터져 나왔던 환호성과 기쁨에 넘쳤던 축제 현장이 그립습니다.

 

[후렴]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는가?(소망)(5)

하나님께서는 절망 중에 있는 시인은 구원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어떤 고난 가운데서도 구원의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인생의 벼랑 끝에 있다 해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마음이 크게 상한 시인은 믿음이 사그라질 위기에 처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영혼을 단호하게 꾸짖습니다.

 

5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5)

 

시인은 스스로 반문합니다.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는가, 내 영혼아/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5ab) 낙심 가득한 자신을 향해 꾸짖는 말입니다. 이 말은 마치 시 전체의 후렴구처럼 기능을 합니다. 시인은 스스로 답을 제시합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라/내가 잠잠히 그 앞에서 구원을 찬양할 것이라’(5cd). 시인은 당장 죽을 것처럼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지난날 하나님의 집을 향해 가며 기뻐했던 축제를 추억한 것처럼(4), 자신에게 하나님의 임재, 그의 구원을 찬양할 날이 올 것을 믿습니다. 절망 끝에 희망을 주는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보다 더 큰 희망은 없습니다.

 

죽음의 바다와 원수의 압제 속에서(탄식)(6-10)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고난을 당합니다. 인생의 벼랑 끝에서 절망의 유혹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 계시고,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아시는 그분이 구원해 주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벼랑 끝에서도 소망의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6○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심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7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 8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9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 10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6-10)

 

두 번째 연에서 시인은 먼저 낙심한 상태에 하나님을 기억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있는 곳은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요단 땅, 헤르몬 산, 미살 산입니다. 이는 공간적인 거리뿐 아니라 심리적인 거리를 나타내면서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진 시인의 고통을 극대화합니다. 고통이 극심한 때야말로 하나님을 찾아야 할 때입니다.

 

(1) 위협적인 폭포와 깊은 바다(6-7)

 

다시 탄식의 언어로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절망과 희망 사이를 반복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고통의 깊이를 드러낸 구성입니다. 시인의 내적 고통은 점점 깊어집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녹아내립니다/그리하여 내가 당신을 기억합니다’(6a). 생명이 녹아내리듯 고통스러운데도 당신을 기억한다는 매우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이때 시인은 특별한 지명들을 언급합니다. 요단과 헤르몬 땅과 미살 산에서부터 내가 당신을 기억할 것이라고 합니다(6). 이 세 개의 지역이 시인에게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는 특별한 장소입니까? 헤르몬 산과 미살 산은 약속의 땅 밖에 위치했지만, 요단과 공통점이 있다면 물입니다. 요단강의 수원지가 헤르몬 산입니다. 이후 시인은 헤르몬 산에서 발원한 물줄기를 원시의 바다, 곧 깊음(테홈)과 연결시킵니다. ‘당신의 폭포 소리를 따라 깊음이 깊음에게 소리를 발하고, 당신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습니다’(7). 깊음이 깊음을 부르는 것이나, 모든 파도와 물결은 모두 물의 모티프에 근거합니다. 그 근원은 하나님의 폭포 소리에 연결되었습니다. 폭포는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현상입니다. 이것은 동시에 혼돈을 상징하는 원시의 바다, ‘테홈’으로 연결됩니다. 이 혼돈은 급류에 휩쓸리는 시인과 연결되었습니다. 결국 내 영혼이 녹아내려 당신을 기억한다고(6a) 말한 시인의 진짜 의도는 파괴적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시인은 생명의 물을 찾는 사슴처럼 간절했지만(1-5), 이와 대조되는 혼돈과 죽음의 물, 곧 ‘깊음’의 위협에 버려진 것처럼 느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가 아니라 죽음의 물이 자기를 덮쳐오는 것처럼 절박한 상태입니다.

 

(2) 시인의 기도와 대적들의 비아냥거림(8-10)

 

그러나 시인의 두려운 마음이 하나님 사랑을 노래하는 것으로 바뀝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시행입니다. ‘낮에는 여호와가 그의 신실한 사랑을 명령하시고, 밤에는 그의 노래가 나와 함께 있으니, 내 생명의 하나님을 향한 기도라’(8). 하나님을 향한 솔직한 두려움이 하나님 사랑 예찬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은 거짓 없는 마음, 진실한 때문에 가능합니다. 시인은 ‘신실한 사랑’이나 ‘실패하지 않는 사랑’으로 표현되는 하나님의 헤세드가 발휘되는 낮의 질서를 찬미합니다. 시인이 고요한 밤 동안 낮에 행하신 하나님의 일들을 묵상하며 그를 향해 기도하는 장면은 아름답고 숭고합니다. 시인은 1인칭 직설법으로 자기의 고통을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내가 나의 반석이신 하나님께 아룁니다. 어찌하여 당신은 나를 잊으셨습니까? 어찌하여 원수의 억압 때문에 비탄에 빠져 다녀야합니까?’(9) 시인은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흔들리며 불평을 쏟아냅니다. 자신이 왜 이토록 어둠 속을 헤매는지 알고 싶습니다. 시인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것은 또 있습니다. 뼈를 찌르는 칼처럼 온종일 대적이 비방하는 말을 견딜 수 없습니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10) 시인의 대적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시인을 돕지 않는 것처럼 보여 조롱합니다. 시인은 응답 없는 하나님, 멀리 계신 하나님, 숨어 계신 하나님, 침묵하시는 하나님께 절망적인 상황을 탄식하고 탄원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숨어 계심을 부재가 아니라 현존의 다른 방식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후렴]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는가?(소망)(11)

하나님께서 외면하신 것같이 느껴져도 의지할 대상은 하나님뿐입니다. 그래서 시민은 그 하나님께 간절히 호소합니다.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하나님께서 생명과 반석이시고 인자를 베푸시는 분이라는 것이 진리이기에 시인의 호소는 의미 있는 기도가 됩니다.

 

11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11)

 

하나님의 숨어 계심과 침묵이 하나님의 부재는 아닙니다. 침묵은 현존의 또 다른 방식입니다. 따라서 시인은 다시 마음을 추스르며 자신에게 질문하면서 성찰의 시간을 갖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구약성경에서 42편과 43편에서만 나오는 독특한 말,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는가?’(5,11; 43:5)는 자신을 향한 꾸짖음이면서 하나님을 향한 희망의 언어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갈망하는 길고 긴 기다림 끝에서 그분의 임재와 구원을 여전히 잠잠히 찬양할 것이라 고백합니다. 깊은 절망과 내적인 고뇌가 구원의 희망과 교차하여 아름답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물 없는 사슴이 살 수 없듯이 하나님 없는 인생도 죽음을 맞을 뿐입니다. 절망의 바닥에 있을 때, 그 또한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 아래에 있음을 기억합니다. 절망의 나락에서 우리를 건져 주실 분도 역시 하나님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소망이십니다. 우리가 메일 보좌 앞에 엎드려 기도해야 할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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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41-01)


복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삶

시편 41편 1-13절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그 마음에 깊게 담아두시고 자기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보시는 분이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복 받기를 원하지만,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복을 주시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한 번 더 사랑을 증거하려고 살아보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 시는 가난한 자를 돕는 이의 행복을 기원하며 시작됩니다. 악인을 따르지 않는 자의 행복을 노래하는 시편 1편의 자매 시편 같습니다. 41편은 질병으로부터 치료되기를 바라는 기도와 외로움과 원수로 인한 탄식이 어울려 있습니다. 동시에 자신을 괴롭히는 원수의 패배를 믿으먀 하나님 임재의 기뿜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하자고 초청하는 시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 이의 행복(1-3)

현시대에 우리도 다윗처럼 악을 만나는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성도는 이웃을 존중하는 삶을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을 보살피듯이, 하나님처럼 성도들도 가난한 자의 필요를 적극적으로 돌아보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러므로 하나님께서 행동하는 사람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1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를 건지시리로다 2여호와께서 그를 지키사 살게 하시리니 그가 이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주여 그를 그 원수들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3여호와께서 그를 병상에서 붙드시고 그가 누워 있을 때마다 그의 병을 고쳐 주시나이다 4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나를 고치소서 하였나이다(1-4)

 

이 단락은 시편 41편의 핵심적인 선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윗은 지금 고난 중에 있지만,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결국 은헤를 입게 될 것이라는 믿음의 선언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1-3)

 

41편 첫 절의 첫마디는 ‘행복하다’(아쉬레)입니다.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는 사람이 행복한(시 1:1) 것처럼, 가난한 사람을 보살피는 자는 행복합니다(1). 악인들의 꾀와 그들의 길을 따르지 않음은 가난한 사람을 보살피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시인은 ‘가난한 자를 돌보라’고 직접 명령하지 않고 우회합니다. 가난한 자 위에서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입장에서, 그들보다 낮은 데서 이해하고 공감하도록 안내합니다. 구약의 지혜 교훈은 명령보다는 묘사를 통해 독자의 선택을 유도합니다. 재앙의 날에 여호와가 그를 건지실 것입니다(1b). ‘가난한 자’는 경제적으로 궁핍한 자뿐 아니라 무력한 자들입니다. 이들에게 관심을 갖고 헌신하는 사람을 여호와가 모른 척하실 리 없습니다. 시인은 여호와가 그를 보호하시고 지키시며 이 땅에서 복 받게 하시며, 그를 원수들에게 넘기지 않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2). 1절의 ‘행복하다’와 2절의 ‘행복하게 되다’(웃샤르)가 서로 연결됩니다. 이는 물질적인 풍요의 복이나 소유가 아니라 존재로서의 행복입니다. 이와 같은 말은 보통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말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시인은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사람을 여호와가 병상에서 붙드실 것이라(3a) 말한 후 여호와께로 대상을 바꿔 말합니다. ‘당신은 그의 병으로 인한 모든 병상을 뒤집어 엎으셨습니다’(3b).

시인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보살피는 자가 병에 걸렸을 때 그 병상을 ‘뒤짚어 엎으신다’고 말할 만큼 완전한 치료의 경험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의 완벽한 치료뿐 아니라 타인을 보살피는 친절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까지 둘 다를 선포한 것입니다.

 

(2) 내게 자비를 베푸소서(4)

 

가난한 자들을 보살폈던 자가 마치 시인 자신인 듯 경험과 믿음에 근거해서 하나님께 청합니다. 내가 말하기를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 내가 당신께 범죄했으니 내 생명을 치료하소서.’ 지금 당장 하나님께서 베푸시길 바라는 은혜는 병 고침입니다. 시인은 자기 질병의 원인이 범죄 때문이라고 공적으로 고백합니다. ‘범죄했다’는 말은 매우 광범위합니다. 마땅히 할 일을 놓쳤거나 흠 잡힐 만한 무엇이 있거나, 구체적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 말 못한 일에 대한 고백입니다. 사람의 질병과 죄의 인과관계가 결코 기계적이지 않지만, 고대인들은 질병과 죄를 연결시키곤 했습니다. 이것은 시인이 어떤 특정한 죄를 말한 것이 아니라 인간 본성에 내재된 죄의 성향에 대한 철저한 자기 점검의 고백입니다.

 

원수들의 악담과 친구들의 배신(5-10)

성도들은 ‘복수’의 사람이 아니라 ‘용서’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탄의 거짓 고소와 악한 비방대로 하나님의 사람들이 쓰러져 버려서는 안 되기에 우리도 다윗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세상은 온통 거짓이고 악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하기 위해서도 성도들이 쓰러져 버려서는 안 됩니다.

 

5나의 원수가 내게 대하여 악담하기를 그가 어느 때에나 죽고 그의 이름이 언제나 없어질까 하며 6나를 보러 와서는 거짓을 말하고 그의 중심에 악을 쌓았다가 나가서는 이를 널리 선포하오며 7나를 미워하는 자가 다 하나같이 내게 대하여 수군거리고 나를 해하려고 꾀하며 8이르기를 악한 병이 그에게 들었으니 이제 그가 눕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하오며 9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10그러하오나 주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고 나를 일으키사 내가 그들에게 보응하게 하소서 이로써(5-10)

 

다윗이 병들었을 때 어떤 사람들은 그를 위로하고 돌보기보다는 악담하고 저주했습니다. 병과 고통 자체도 물론 견디기 힘든 일이지만, 그것을 바라보며 성처에 소금을 붓는 식으로 조롱하는 자들의 말 한 마디는 화살처럼 다윗의 가슴 깊숙이 박혔을 것입니다.

 

(1) 악한 자들의 행동(5-9)

 

시인은 혹시 범죄한 것이 있을까 염려하고 죄를 고백합니다. 그가 돌연 자기 원수가 ‘나에게 악이 있다’(5a)라고 악담한 것을 인용하며 억울함을 호소합니다. “그가 언제 죽을까, 그의 이름이 언제 사라질까?”(5b) 원수가 내뱉은 악의적인 말에서 강한 적대감이 느껴집니다. ‘그의 이름’이라고 할 때 ‘이름’은 명성과 평판을 가리킵니다. 시인의 명성이 죽음과 함께 끝나길 바랄 만큼 적대적인 원수가 곁에 있습니다. 더군다나 원수가 자기를 보러 와서 거짓말하고, 마음에 거짓된 온갖 정보들을 모아서 거리에 나가 떠들어댈 것이라고 호소합니다(6). 시인의 고통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집니다. 시인의 탄식 어린 호소는 더 거세집니다. 시인은 나를 미워하는 모든 자들이 연합하여 수군거리며 그들이 내게 해를 입히려고 궁리한다고 호소합니다(7). 그들의 비방을 직접 들은 것처럼 인용하기도 합니다. ‘그가 나쁜 병에 걸렸으니 그가 누우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거야’(8). 시인은 더 기막힌 상황을 호소합니다. 자기가 신뢰했고 완벽한 관계를 자부했던 친구들, 그와 함께 음식을 먹었던 자들이 배반한 것입니다(9). ‘가까운 친구’(9)로 번역된 말은 직역하면 ‘나의 평화의 사람’입니다(렘 20:10). 나와 온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샬롬’은 허물없이 아주 가깝게 지내는 친구나 언약관계를 함축한 말이며, 생명을 나눌 정도의 우정을 약속한 동반자처럼 가까운 사이를 가리킵니다(참조. 삼상 18:3). 그런데 그 신성한 연대감이 깨지고 배신만 남은 상태입니다.

 

(2) 내게 자비를 베푸소서(10)

 

시인은 다시 하나님께 자비를 청합니다. ‘그러하니 당신 여호와여, 내게 자비를 베푸소서/나를 일으키시고 내가 그들에게 되갚아주게 하소서.’ 자신을 위해서 은혜롭게 대해주시기를 바라면서 원수들과 배신한 친구의 행위를 그대로 되갚아주시길 간청합니다. 대체로 번역 성서들이 시행 맨 첫 글자 접속사 ‘바브’를 반의 접속사(‘그러하오나’)로 번역합니다. 하지만 이전 시행들에서 시인은 원수들의 음모와 우정을 약속한 친구의 배신을 호소했기에 ‘그러하니’, ‘단연코’ 내가 보복할 수 있게 해달라는 간청의 기도를 강조하려는 의도로 읽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면 이처럼 강력하게 하나님께 보복을 간청해도 괜찮습니까?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과 배치되지 않습니까? 본문의 ‘되갚아주다’에 해당하는 기본형 동사 ‘샬람’의 강조능동형의 뜻은 ‘끝내다’, ‘완결하다’, ‘회복하다’라는 뜻을 포함합니다. 이 때문에 ‘되갚아주다’라는 표현은 긍정과 부정의 의미를 모두 포함한 중의적인 말입니다. 따라서 이는 시인이 악에 대한 보복을 선으로 갚겠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물론 시인이 어떤 방식을 원하는지는 드러내지 않았지만, 자기 억울함을 끝내고 완결시키길 바라는 간절함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찬양 받으시길(11-13)

성도들은 인간의 삶과 긴밀히 함께하시는 하나님꼐서는 영원하시고 광대하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열악한 환경에서 악인들에게 시달리는 왕중에도 믿음의 시야가 좁아지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또렷한 분별력과 뿌리 깊은 신앙으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신뢰를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11내 원수가 나를 이기지 못하오니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12주께서 나를 온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시나이다 13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할지로다 아멘 아멘(11-13)

 

원수 갚음을 탄원했던 시인은 자신감에 차 있습니다. 당당합니다. ‘이것으로 나는 당신이 나를 기뻐하심을 알았습니다/왜냐하면 나를 향해 내 원수가 승리를 외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11). 시인은 하나님 기꺼이 자기를 받아들이셨음을 확신이 합니다. 더군다나 병상의 시인을 비방하고 거짓을 유포했던 원수는 물론 가까웠던 사람에게 배신을 경험한 시인의 고통과 호소를 하나님이 들으셨습니다. 이것이 전제되었기에 시인은 자신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었음을 압니다. 또한 원수 갚음이 어떤 방식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기꺼이 수용하시고 기뻐하셨다면 보복은 선으로 악을 이기는 방식이었을 것입니다. 억울함에 몸서리치면서도 선을 행할 능력이 없으면서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청했기에 가능하지 않았습니까. 시인의 이어지는 말에서 그것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질병의 고통보다 더 처절한 조롱과 배신의 아픔을 뛰어넘고 있습니다. ‘이제 나의 온전함 중에 당신이 나를 붙드셨고/당신 앞에서 내가 영원히 서게 되었습니다’(12). 시인은 당당하게 ‘나의 온전함 중에’라고 말할 만큼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온전함’은 신앙적인 고결함과 마음의 깨끗함을 뜻합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든든한 후원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나의 온전함 중에 당신이 나를 붙드셨습니다.’ 이 말, ‘베툼미타마흐타’에는 비슷한 자음 글자들의 조합이 만들어낸 언어유희가 활용되었습니다. 시인은 ‘항상’ 하나님의 임재 앞에 있습니다. 죽음의 위협을 넘어 온전히 하나님 임재 앞에 사는 현실의 감격을 고백한 것입니다. 시인은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공동체를 향해 선포합니다. 시인의 마지막 외침은 아멘, 곧 ‘틀림없이!’입니다(참조, 시 106:48). 41편이 1권의 마지막이기 때문에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마무리하는 후대의 편집적인 의도가 엿보이는 시행입니다. 이 마지막 외침은 질병과 배신의 고통스러웠던 시간을 믿음으로 견뎌내고 하나님과 회중 앞에서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높이며 찬미하는 모든 신앙인의 외침입니다.


그동안 삶에 있어서 숱한 이기와 적대를 물리치고 주께서 어떠한 환대와 은혜를 베푸셨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환대와 은혜가 필요한 이들에게 다가가 주께서도 흡족하실 마지막 복된 발자취를 남겨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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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40-01)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시편 40편 1-17절


 

밀폐된 공간만큼이나 위험한 것이 밀폐된 시간입니다. 1시간에 30%만 공기를 갈아쥐도 감염위험이 20분의 1로 떨어진다는 세계보건기구의 실험 결과처럼, 우리에게도 숨죽이며 보낸 시간에 새 노래를 불어넣을 환기가 필요합니다. 저마다의 밀폐된 시간 속에서 마침내의 시간을 주실 주를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 40편은 찬양과 탄식이 어울려 새롭게 하나님의 도움과 구원을 갈망하는 기도입니다. 불확실성으로 넘쳐나는 현실 세계에서 주님의 인애와 진리를 회중 가운데서 선포하고 보호해주시기를 간청하며 미래의 기쁨을 내다보는 시입니다. 무엇보다 시 전체는 감사, 예배초청, 말씀, 찬양, 그백과 간청, 확신이 언어들이 어울려 개인과 예배공동체의 구원의 긴박성과 심각성을 알립니다.

 

[찬양] 하나님의 구원 찬양과 예배(1-11)

우리는 때로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을 멀리하곤 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려 할 때마다 지은 죄가 생각나 숨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 시간은 오히려 주님의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인자와 진리로 자신을 항상 보호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1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2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3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4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5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아 누구도 주와 견줄 수가 없나이다 내가 널리 알려 말하고자 하나 너무 많아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6주께서 내 귀를 통하여 내게 들려 주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7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8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 9내가 많은 회중 가운데에서 의의 기쁜 소식을 전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내 입술을 닫지 아니할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10내가 주의 공의를 내 심중에 숨기지 아니하고 주의 성실과 구원을 선포하였으며 내가 주의 인자와 진리를 많은 회중 가운데에서 감추지 아니하였나이다 11여호와여 주의 긍휼을 내게서 거두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1-11)

 

하나님께서는 기다리며 부르짖는 자에게 마침내의 시간을 안겨주십니다.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건지시는 시간, 반석 위에 세우시는 구원의 시간 말입니다. 나아가 우리로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선포할 시간을 허락해 주십니다.

 

(1) 하나님의 응답과 구원 찬양(1-3)

 

시인은 개인적인 구원 경험을 고백하며 노래합니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내게 기울이사 도움을 구하는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1). 길고 긴 기다림은 어두운 현실을 견디는 믿음의 표시입니다. 시인은, 그가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셨다고 합니다(2ab). 그러니까 시인은 ‘황폐한 웅덩이’와 ‘수렁’, 곧 생명을 위협하는 늪이나 진흙탕에서(렘 38:6) 하나님께서 건지셔서 죽다 살아났습니다. 고대 근동 세계에서 깊은 구덩이와 온통 진흙탕이어서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은 죽음의 땅, 죽은 자들의 세계에 대한 비유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시인은 그가 나의 발을 반석 위에 세우시고 나의 발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다(2cd)고 말합니다. 수렁과 반석이 서로 대비되고, ‘일으켜 세우셨고’와 ‘견고하게 하셨다’라는 두 개의 동사가 서로 어울려 더 이상 생명을 위협하는 늪에 빠지지 않도록 완벽하게 구원하신 하나님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시인은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가 새노래를 내 입에 두셨으니/곧 우리 하나님을 향한 찬송이라/많은 이들이 보고 두려워할 것이요/여호와를 의지할 것이라’(3). 흥미롭게 ‘새 노래’(시 33:3: 96:1; 98:1; 144:9; 149:1; 42:10; 5:9; 14:3)와 찬송을 부르는 주체는 시인이지만, 새 노래를 주신 분은 여호와입니다. 새 노래와 찬송은 구원의 감격을 고백하고 선포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감이며 선물인 셈입니다.

 

(2) 하나님을 의지하는 행복과 하나님의 위대하심(4-5)

 

시인은 자신의 구원 경험에서 지혜와 교훈을 얻었습니다. 그의 언어가 지혜 가르침을 닮았습니다. 첫 마디가 시편 1편의 첫 절로 안내합니다. ‘행복하여라 여호와를 간직한 사람은’(4ab). 행복한 사람은 여호와를 ‘의지하고’(개역개정) 삽니다. 이는 여호와를 향한 그의 확신을 마음에 보물처럼 ‘간직한’ 사람을 뜻합니다. ‘행복한’(시 1:1; 32:1; 33:12; 렘 17:7) 사람에 대한 묘사는 계속됩니다. 교만한 사람들에게 눈을 돌리지 않고, 거짓에 휩쓸리지 않는 사람입니다(4cd). 오만하고 교만한 자들, 허위와 거짓과 기만에 치우친 자들은 거짓된 힘에 휘둘림을 당하게 됩니다. 행복할 수 없습니다. 반면에 여호와를 간직한 사람은, 곧 행복을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의 행적을 찬미합니다. ‘행복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두고 ‘많다’고 말합니다. 시인은 많음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많습니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 당신이 행하신 비범한 일들이’(5ab). 시인은 끊임없이 하나님께서 행하신 많은 일을 열거합니다. ‘우리를 향하신 당신의 생각이 많아, 내가 하나하나 열거하여, 자세히 말하려 해도 못한다. 그 일들을 내가 자세히 말하기에는 너무 많다’ (5cdef). 이처럼 시인은 하나님의 위대하신 행적과 업적을 말로 다 할 수 없음을 ‘많다’라는 형용사를 반복하면서 강조합니다.

 

(3)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와 성실과 구원 선포(6-11)

 

이제 시인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 곧 예배가 무엇인지 말합니다. 모순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에게 모세를 통해 주셨던 희생 제사를 기뻐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은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않으셨고,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않으셨음을 내 귀에 들려 주셨습니다(6). 짐승을 죽여 바치는 희생제물의 제사를 전면 거부하셨다는 뜻입니다. 이는 오용된 예배에 대한 비판이며, 형식적인 제사보다 순종의 가치를 강조한 것입니다(참조, 출 15:26; 삼상 15:22; 시 50:8-14; 암 5:21-22; 미 6:6-8). 이후 시인의 말은 해석하기 까다롭습니다. ‘내가 여기 왔다. 나에 대해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다’(7). 두루마리 책은 아마도 신명기 17:24-30에 기록된 왕의 자격과 임무를 기록한 이른바 ‘왕의 규례’일 가능성이 큽니다. 곧이어 시인이 ‘법’에 대해 말하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나의 하나님’을 부르며, 당신이 기뻐하시는 것 행하기를 내가 기뻐하고 당신의 법이 내 마음 가운데 있다고 합니다(8). 이는 하나님의 법, 곧 ‘토라’의 중요성뿐만 아니라 마음 판에 새겨진 ‘새 언약’(렘 31:33)과 오래전 모세가 언약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판에 새기라고(신 6:6) 했던 고별설교를 떠올리게 합니다. 또한 시인은 많은 회중 가운데서 ‘의’를 알렸고, 내 입을 다물지 않겠다고 다짐할 뿐만 아니라 누구보다 여호와 당신이 알고 계신다며 호소합니다(9). 이뿐만 아니라 시인은 하나님의 ‘공의’, ‘성실’, ‘구원’을, 그리고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를 많은 회중 가운데서 숨기지 않고 모조리 다 말했습니다(10). 여기 열거된 다섯 단어들은 시인 개인의 경험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에게 행동으로 보이시는 은총입니다. 시인은 여호와를 부르면서 당신의 긍휼을 거두지 마시고 당신의 인자와 진리로 항상 지켜주시기를 간청합니다(11). 시인은 하나님의 은총과 관련된 단어들을 나열함으로써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의 성품이 철회되지 않고 발휘되어야 함을 강하게 촉구합니다.

 

[탄식] 재앙에서 나를 구하소서(12-17)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 속에 어떤 바람이 있는지 이미 다 아십니다. 하나님을 어려워하며 예의를 갖춘 모습을 보이기보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 앞에 마음을 토하십니다. 본문을 통해 다윗이 대적들의 수치와 낭패를 당하게 해 달라는 기도문을 읽을 수 있습니다.

 

12수많은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 나의 죄악이 나를 덮치므로 우러러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가 낙심하였음이니이다 13여호와여 은총을 베푸사 나를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14내 생명을 찾아 멸하려 하는 자는 다 수치와 낭패를 당하게 하시며 나의 해를 기뻐하는 자는 다 물러가 욕을 당하게 하소서 15나를 향하여 하하 하하 하며 조소하는 자들이 자기 수치로 말미암아 놀라게 하소서 16주를 찾는 자는 다 주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는 항상 말하기를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17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라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12-17)

 

시인은 시련과 죄책에 사로잡힌 시간을 용서와 구원의 시간으로 바뀌 주시길 기도합니다. 자신의 죄에 지치고 타인의 조롱에 상처 입은 시간 속으로 찾아와주시길 간구합니다.

 

(1) 죄의 고백과 은총을 간구(12-13)

 

시인은 갑자기 다가올 위기를 예측한 것처럼 말합니다. 시인은 많은 재앙과 머리털처럼 많은 죄악들이 자기를 둘러싸고 덮쳐 낙심한 상태입니다(12). 11절에서 하나님의 긍휼과 인자와 진리가 떠나지 않기를 촉구했던 이유입니다. 시인은 다시 하나님의 도움을 청하는데, 이때 첫마디는 독특합니다. ‘나를 기뻐해 주소서’(‘은총을 베푸사’, 개역개정). 이 말은 자기를 친구처럼 기쁘게 맞이해주시기를, 호의적으로 다뤄주시기를 간청하는 말입니다. 더군다나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13b)라는 말에서 절박한 상황이 짐작됩니다.

 

(2) 생명을 해하려는 자들로 인한 탄식(14-15)

 

하나님께 ‘속히 나를 도우소서’(13b)라고 호소했던 이유가 있습니다. 시인은, 나의 목숨을 찾아서 공모하여 해하려는 자들, 나의 비참함을 기뻐하는 자들이 있음을 밝힙니다. 그러니 이들이 모두 수치와 낭패를 당하고 물러가게 해주시기를 호소합니다(14). 시인은 이들의 악의와 조롱의 심각성을 전달하려고 그들의 웃음을 표현하는 의성어(‘하하 하하’)까지 흉내 내며 고통의 생생함을 표현합니다. 이들이 자기들의 수치로 공포에 떨게 해주시기를(15) 청합니다.

 

(3) 여호와를 찾는 자들의 구원(16-17)

 

시인은 방향을 바꿔 자기를 해하려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는 자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당신을 찾는 모든 이들은 당신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소서’(16). 또한 시인이 하나님의 행하신 일이 많음을 선포한 것처럼(5), 하나님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여호와는 위대하시다’라고 지속적으로 말할 수 있기를 간구합니다(16b). 소절 사이의 평행관계에서, 기쁨과 즐거움은 여호와의 위대하심을 드러내는 삶의 태도이며 방식입니다. 1인칭 발화자 ‘나’를 반복하는 절실함은 애잔하면서도 아름답습니다.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니/나의 주님(아도나이)은 나를 생각하시는/나의 ’도움‘이시며 나를 건지시는 분입니다/나의 하나님, 지체하지 마소서!’(17) 구약에서 가난과 궁핍은 비천함과 비참함을 대표하는 말입니다. 극도로 비참한 상태를 호소하는 시인은 하나님께서 지체하지 않기를 간청했고(13), 여전히 즉각적인 하나님의 개입을 바라며 구원의 긴박성을 아룁니다. 이는 오직 하나님만이 비참함에서 건져주실 구원자라는 사실과 사태의 심각성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무수한 죄라도 용서해주실 하나님의 너그러움이 간절한 때가 있습니다. 억압된 시간에 쉴 만한 자유를 주실 주님의 손길이 간절한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시간이 하나님의 구원과 연결되어 있음을 의심하지 말고 새 노래로 마침내 주실 시간을 기다리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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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39-01)


가식 없는 진솔한 기도

시편 39편 1-13절


 

우리는 기도가 무조건 거룩해야 한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갖고 있습니다. 물론 기도는 거룩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거룩함은 우리의 솔직한 마음을 담은 것이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진솔한 대화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이미 다 아시는 주님이 우리의 필요까지도 다 아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입술의 고백을 통해 응답하시고 역사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진솔한 마음의 고백을 원하십니다.이 시편에 기록된 다윗의 진솔한 고백에서 인생의 나약함을주님 앞에 내려놓는 기도를 볼수 있습니다.

 

 

  • 하나님 앞에서 아예 그 존재조차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짧고 유한한 삶을 사는 인간에게 하나님만이 소망이 되십니다. 시인은 죄악과 근심으로 인해 다른 사람과의 소통을 끊고 침묵하려 애썼지만 울분을 삭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유일한 소망이신 하나님을 향하여 입을 열고 하소연하며 그분의 조언과 응답을 구합니다.

 

시인의 침묵과 근심(1-3)

우리가 걸어야 할 길, 주님이 원하시는 길이 좁은 길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참아야 하고, 섬겨야 하고, 말도 조심해야 하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까지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심지어 가진 것을 남들과 나누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의 복음을 열심히 전해야 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일들을 충성스럽게 이루었다 해도 칭찬받는 것을 멀리해야 합니다. 그러다보면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 것에 회의가 들기도 합니다.

 

1내가 말하기를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하지 아니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내가 내 입에 재갈을 먹이리라 하였도다 2내가 잠잠하여 선한 말도 하지 아니하니 나의 근심이 더 심하도다 3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불이 붙으니 나의 혀로 말하기를(1-3)

 

시인은 혀를 잘못 놀려 죄를 짓지 않기로 다짐하고 자신의 행위에 주의하고 있습니다. 그는 원수가 그의 앞에 있더라도 자기의 입에 재갈을 물려 자신의 말을 통제하겠다고 진술합니다. ‘원수가 그 앞에 있다’는 말은 원수와의 대립적인 관계를 의미합니다. 사람들이 짐승을 부리기 위해서 입에 망이나 재갈을 씌우거나 코를 뚫는 것처럼 시인은 자신의 입을 통제하여 필요 없는 일에 휘말리지 않겠다고 마음먹습니다. 그러나 선한 말조차도 아끼고 잠잠히 있었지만, 시인의 마음에서는 시간이 지날수록 울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 울화의 정확한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가 1절에서 악인을 언급한 것으로 보아 적어도 악인과의 관계와 상관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 할 말이 가득하지만, 그것을 누르고 침묵하므로 시인의 내면에서 고통의 열기가 점점 뜨거워졌고,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릅니다.

 

인생의 허무함을 한탄(4-6)

우리의 연약함도 솔직하게 주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면서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고 기뻐하지 못하는 이유가 우리의 연약함 때문이라는 진솔한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거룩함을 향한 우리의 노력이 어떤 때는 교만, 어떤 때는 외식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습니다. 또 어떤 때는 자포자기 넘어짐, 쓰러짐의 결과를 맞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인생무상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연약함을 주님께 그대로 고백하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무능력. 연약함을 인정하고 고백할 때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4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5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셀라) 6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4-6)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침묵을 깬 시인은 사람을 향해 쓸데없는 말을 내뱉거나 화를 표출하지 않고 지혜롭게 하나님을 향하여 입을 엽니다. 그는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인식하고 하나님께 조언을 구합니다. 침묵을 깨고 시인이 하나님께 아뢰는 첫마디는 자기 인생의 끝이 언제인지를 묻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문자적으로 시인의 죽을 때가 얼마나 남았느냐는 물음이 아니라 이 짧은 삶을 살아가는 목적에 대한 물음입니다. 시인은 이 물음에 덧붙여 인생의 덧없음에 대해 계속 언급합니다. 사람이 일백 년을 산다 한들 하나님 앞에서는 그 세월이 한뼘 길이밖에 안 되고, 아예 그 존재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어떤 이의 삶이 평 성공적이라 하더라도 인간의 날은 한낱 입김과 같아 허무할 뿐입니다. 사람이 소란을 떨고 야단법석을 피우며 자기가 원하는 것을 추구하고 쌓아가지만, 그 모든 일이 그림자 같이 지나가고, 게다가 그 결과를 누가 가져갈지도 모르니 이 모든 것이 다 헛될 뿐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아 이 헛된 삶 속에서 사는 의미를 찾고자 합니다.

 

죄 용서 간구(7-11)

인간의 어리석음과 죄성, 연약함과 한우리는 모두가 빠져 있는 착각 중 하나가 ‘인생이 아직 많이 남았다’는 것입니다. 몇 년 후, 몇십 년 후에도 살아 있을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당연히 여기는 우리는 얼마나 우매합니까? 로마의 개선장군 환영 행사 때에는 개선장군 옆에서 노예 한 사람이 ‘죽음을 잊지 말라’고 속삭였다 합니다. 우리는 유한하고 연약한 인생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서 우리 자신의 참 모습을 깨달아야 합니다.

 

7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8나를 모든 죄에서 건지시며 우매한 자에게서 욕을 당하지 아니하게 하소서 9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함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까닭이니이다 10주의 징벌을 나에게서 옮기소서 주의 손이 치심으로 내가 쇠망하였나이다 11주께서 죄악을 책망하사 사람을 징계하실 때에 그 영화를 좀먹음 같이 소멸하게 하시니 참으로 인생이란 모두 헛될 뿐이니이다 (셀라)(7-11)

 

“그러나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시인은 화살처럼 빨리 흘러가 덧없고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인생의 운명에 대해 숙고하다가 갑자기 이렇게 외칩니다. 시인의 물음은 절망에서 희망으로의 전환의 신호입니다. ‘바란다’라는 단어에는 열망과 간절함으로 기다린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기대 속의 기다림에는 긴장감도 함께 들어있습니다. “나의 소망, 그것은 바로 당신께 있나이다!” 시인이 헛된 인생 속에서 간절히 바라고 소망하는 대상은 그 어느 것도 누구도 아닌 하나님입니다. 인생의 허망함을 한탄하며 좌절하는 것으로 삶을 끝낸다면 얼마나 더 삶이 무의미하게 될 것입니까? 시인은 유한하고 제한된 인간의 존재를 인식하고 인정하면서 이런 현실에 절망하여 주저앉지 않습니다. 대신, 자신이 이 덧없는 세상에서 소망을 둘 대상이 있음을 고백하며 그의 소망이 되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의 목적이며 의미가 아닙니까!

시인이 여기서 말하는 인생의 허무함은 단순히 삶의 짧음과 삶의 예측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한 슬픔과 고통으로 인한 것만이 아니라 인간의 죄악과 그로 인한 결과로 모든 것을 잃고 가중되는 고통과 함께 지내야 하는 처지를 한탄한 데서도 비롯되었습니다(4-6,9–11).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시인은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의 죄를 사하시고 우매자로부터 수치를 당치 않게 해달라고 간청합니다. 시인은 자신의 소망이 되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죄에서부터 건질 수 있는 분이며 자신이 처한 현재의 고난에서 완전히 구원하실 능력의 신이심을 압니다. 그러므로 먼저 죄의 용서를 간청하고, 자신의 죄와 실수가 우매하고 악한 자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지 않기를 간청합니다. 덧붙여, 시인은 자신이 악인 앞에서 말을 꾹 참고 침묵한(1-2) 이유가 자기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징벌하셨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하나님께서는 정의로운 재판장과 같아 죄인을 징계하십니다. 이로 인해 죄인이 즐기고 누린 모든 영화는 좀이 옷을 갉아 구멍을 내고 옷 자체를 망가뜨리듯 소멸하고야 맙니다. 이처럼 시인은 5,6절에서와 마찬가지로 11절에서도 인생의 무상함과 헛됨을 줄곧 반복하는데, 그 의도는 하나님께 인생의 연약함과 덧없음을 상기시킴으로써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신속한 응답과 구원을 내리시기를 촉구하는 데 있습니다.

 

응답과 회복을 소망(12-13)

인생은 짧고 허무합니다.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은 떠도는 나그네의 삶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의 안식처도 아니고 종착지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소망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소망이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썩어질 것이 아닌 영원한 것에 가치를 주고 살아가는 것이 지혜로운 인생입니다.

 

12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나는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이며 나의 모든 조상들처럼 떠도나이다 13주는 나를 용서하사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12-13)

 

인간은 죄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헛된 존재임을 생각하며 슬픔에 잠긴 시인은 그래도 다시 자신의 소망이 되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그분의 응답을 간청합니다. 그는 사람들에게는 침묵하였지만, 하나님께는 부르짖으며 눈물로 하소연합니다. 울분이 쌓여 사람들에게 실언을 하거나 화를 쏟아 죄를 짓기보다는 하나님께 자신을 내어놓고 울부짖는 편이 지혜롭습니다. 시인은 자신이 하나님께 울부짖는 것처럼 하나님도 자기에게 잠잠하지 말고 응답하시기를 간구합니다.

시인은 자신을 ‘나그네’와 ‘거류민’으로 소개하며 하나님의 긍휼에 호소합니다. ‘나그네’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고아와 과부와 함께 관심을 갖고 돌보라고 명령한 대상입니다(출 23:9; 신 10:17-19) 나그네는 자국인이든 타국인이든 고아나 과부처럼 의지할 곳이 없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특히 자신을 ‘당신과 함께 있는 나그네’라고 칭하며 자신을 보호하고 긍휼히 여겨줄 분이 하나님께서 심을 강조합니다. 반면, ‘거류민’은 타국인으로서 ‘떠도는 지’를 지칭합니다. 시인은 자신을 특별히 ‘나의 모든 조상과 같은 거류민’으로 소개합니다. 아브라함을 시작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가나안 땅을 약속으로 받아 그곳에 와서 정착했지만, 땅은 여전히 하나님의 소유이므로 이들은 이 땅에서 영원히 거류민으로 사는 셈입니다. 시인은 세상에 사는 삶이 나그네와 거류민의 삶과 같이 일시적이며, 하나님의 보호와 공급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을 하나님께 상기시킵니다. 그리하여 그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던 언약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그의 자손인 자기를 긍휼히 여기고 돌봐주시며 축복하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헛되고 짧은 인생을 사는 자신을 하나님 앞에 되뇌며, 시인은 그의 기도를 마치기 전 하나님의 용서와 회복을 다시 한번 간구합니다. “주는 나를 용서하소서”는 문자적으로 “눈길을 저에게서 돌리소서”로 번역됩니다. 다른 시에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외면하여 얼굴을 가렸다고 느낄 때 하나님의 눈이 자기를 향하기를 구하였습니다(17:2). 그러나 여기에서 시인은 욥처럼 하나님의 응시를 감시와 징벌로 느껴 하나님께서 그 눈길을 거두시기를 구합니다(욥 7:17-21). 시인은 자신이 이 세상에서 생명을 부지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아 곧 세상에서 없어질 존재임을 하나님께 상기시키며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다시금 웃고 즐거워해달라고 간구하며 기도를 마칩니다.


진솔한 기도는 마치 절망에 빠진 사람의 마지막 탄식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우울하기 짝이 없는 진정한 회개가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예배이듯, 진솔한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기도입니다. 그리고 주님만이 소망임을 깨닫고 더 간절히 주님을 의지하게 하는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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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38-01)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사람

시편 38편 1-22절


 

주님을 믿는 성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 대답이 있겠지만, 아마도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이라는 확실한 정체성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것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존재와 섭리를 의식하는 것을 말합니다. 악인들에 의해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악인을 멸하시고 의인을 구원하시는 분임을 끝가지 믿는다는 의미입니다. 그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그분이 베푸시는 구원을 맛볼 것입니다.

 

  • 다윗이 죄로 인해 질병에 걸렸습니다. 그는 한편으로는 자신의 죄의 심각성을 받아들여 하나님께 회개하며 자비를 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몸과 마음에 중한 고통을 느끼고 있습니다.그와 가까이 지냈던 사람들도 그를 외면하고 그의 원수 된 자들은 그의 목숨을 노려 거짓을 꾸민다. 진퇴양난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향해 도움과 구원을 간절히 구합니다.

 

하나님께 간구(1)

사람은 죄 가운데 태어나서, 죄 가운데 살다가, 죄 가운데 죽어 갑니다. 성도들도 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잠깐 하나님께 돌아설 때도 있지만, 금방 다시 죄로 되돌아가는 연약한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다람쥐 쳇바퀴 같은 신세가 우리으 일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뒤 재지 않고 죄를 향해 달라가는 우리는 마치 분별력도 없고 이상도 없는 짐승과도 같습니다.

 

1여호와여 주의 노하심으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고 주의 분노하심으로 나를 징계하지 마소서(1)

 

다윗은 병으로 고통스러워하며 하나님께 징계를 그쳐달라고 간구합니다. 모든 질병이 개인의 죄 때문에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다윗은 현재 자신의 질병이 자신의 죄와 상관있으며, 그 결과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다윗이 어떤 죄로 고통당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죄의 심각성과 죄로 인한 결과를 인지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그는 자신의 죄나 하나님으로부터의 징벌을 부인하거나 숨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죄에 대한 죄책감을 솔직하게 드러내며 하나님께 직접 얼굴을 향하여 적극적으로 용서를 간청합니다.

 

다윗의 몸과 마음의 고통(2-10)

죄는 우리의 눈을 가리고 우리를 은밀한 쾌락과 더러운 욕심에 빠지게 해서 결국은 죽음으로 이끕니다. 죄의 결국은 패망이요 죽음일 뿐입니다(롬 6:23). 죄를 짓는 것은 자기 무덤을 파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죽음’은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을 의미합니다. 죽은 자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습니다. 살았다고 해도 실상은 죽은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죄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저절로 해결되는 죄는 없습니다. 죄를 언제까지 숨겨 놓을 수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 눈을 잠시 속일 수 있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알고 계십니다.

 

2주의 화살이 나를 찌르고 주의 손이 나를 심히 누르시나이다 3주의 진노로 말미암아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사오며 나의 죄로 말미암아 내 뼈에 평안함이 없나이다 4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내가 감당할 수 없나이다 5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내가 우매한 까닭이로소이다 6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픔 중에 다니나이다 7내 허리에 열기가 가득하고 내 살에 성한 곳이 없나이다 8내가 피곤하고 심히 상하였으매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하나이다 9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 앞에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 10내 심장이 뛰고 내 기력이 쇠하여 내 눈의 빛도 나를 떠났나이다(2-10)

 

이 시는 다윗이 밧세바를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저지른 죄 때문에 겪어야 하는 심신의 고통으로 인해 탄식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고 일생 동안 하나님을 찬양하는 복된 삶을 살았으나, 일순간의 욕망을 주체하지 못해서 일생일대의 오점을 남기고 맙니다. 한 번의 쾌락, 한 번의 죄악이 그를 얼마나 비참하게 만들었는지, 그는 육신과 영혼 모두 하나님의 화살에 찔리고, 하나님의 손에 눌리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2절) 많은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1) 죄와 질병의 고통(2-4)

 

다윗은 죄의 결과로서 무엇보다 먼저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그러졌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도움과 구원의 손길이 되셨던 하나님께서는 그의 죄에 분노하셔서 이제 그를 과녁 삼아 화살을 날리며 그를 공격하고 계십니다. 다윗은 1-3절 사이에 자신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분노’를 지칭하는 표현을 다섯 차례나 언급하며 자기 죄에 대한 하나님의 거센 반응을 강조합니다. 또한 2절에서 시작하여 10절에 이르도록 하나님의 진노가 자신의 육체와 마음에 얼마나 강력한 영향력을 미쳤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질병으로 육체적 고통이 몰려와 피부가 성한 곳이 없고 뼈에 평안함이 사라졌으며 그 빈자리에 상처와 고통이 가득 채워졌습니다. 몸을 지탱하는 허리에 열이 나고 심장이 벌렁거리며 기력이 점점 빠져 눈에서는 생기가 사라집니다. 그의 몸에서 하나님의 진노로 인한 고통을 느끼지 않는 부분은 없습니다.

 

(2) 몸과 마음의 고통(5-10)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죄를 묵인하지 않고 그를 징계하고 책망하시는데, 이는 먼저 하나님께서 죄를 얼마나 싫어하시는지를 잘 나타내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죄가 없으신 거룩하신 분이므로 사람이 그와 교제하고 그의 임재를 누리기 위해서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성결을 유지해야 합니다(레 19:2). 하나님의 징계는 또한 하나님께서 다윗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가 죄를 지어 거룩한 삶에서 떠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다윗의 죄는 다윗과 하나님의 관계를 깨뜨렸을 뿐 아니라, 다윗을 의인에서 죄인의 처지로 전락하게 만듦으로써 다윗과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다윗은 스스로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의 내면에서 그의 죄악이 넘치며 죄책감의 무게가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과 같습니다. 그에게서 끊임없이 번민과 탄식이 솟아 나오고 그의 마음에 불안과 신음과 탄식이 충만하므로 심리적으로도 큰 고통 속에 처했습니다.

죄로 인한 죄책감을 떨칠 길이 없으므로 더 이상 죄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다윗은 이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향하여 긍휼과 용서와 구원을 간절히 요청합니다. 하나님의 용서야말로 다윗과 하나님 사이의 깨어진 관계, 또한 다윗과 자기 자신과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길입니다.

 

외면과 박해의 고통(11-14)

유혹을 참지 못해서 행했던 죄들이 이제는 올무가 되어 다뒷의 앞길을 가로막습니다. 건강할 때에는 잠복해 있다가 면역력이 떨어지는 순간을 노려 육신을 파고드는 병균처럼, 대적들은 영적 균형이 깨진 다윗 앞에 울무를 놓고 종일토록 음모를 꾸미며 그의 생명을 위협합니다. 모든 것이 도미노처럼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버렸습니다.

 

11내가 사랑하는 자와 내 친구들이 내 상처를 멀리하고 내 친척들도 멀리 섰나이다 12내 생명을 찾는 자가 올무를 놓고 나를 해하려는 자가 괴악한 일을 말하여 종일토록 음모를 꾸미오나 13나는 못 듣는 자 같이 듣지 아니하고 말 못하는 자 같이 입을 열지 아니하오니 14나는 듣지 못하는 자 같아서 내 입에는 반박할 말이 없나이다(11-14)

 

다윗은 죄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들, 천구들과의 관계마저 틀어지는 일을 겪었습니다. 끝까지 곁에 있을 줄 알았던 사람들이 떠나 버릴 때 느끼는 소외감과 고독감은 견디기 힘들 정도로 극심합니다.

 

(1) 사랑하는 자들의 외면(11)

 

다윗의 죄와 질병으로 인한 괴롭고 고통스러운 상황은 하나님과의 관계와 자신과의 관계 안에서뿐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도 나타났습니다. 먼저, 다윗은 그의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소외되고 외면당했습니다. 그와 가깝고 좋은 관계를 유지해오던 친구들과 친척들도 그가 병들고 원수들의 공격 대상이 되자 그를 외면하고 그로부터 멀리 떠났습니다. 다윗의 곁에는 이제 그를 지지할 사람은 아무도남아있지 않습니다. 가까운 사람들의 외면으로 인한 외로움과 배반감은 다윗의 고통을 가중시킵니다.

 

(2) 원수들의 박해(12)

 

대신 설상가상으로 다윗의 주변 빈자리에는 그의 목숨을 해치려하는 자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은 다윗을 해하려고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다윗에 대해 거짓말을 하며 음모를 꾸미고 덫을 놓아 그를 위기에 빠뜨리는데 시간 가는 줄을 모릅니다. 또한 이에 동참하는 자가 많아집니다. 이와 같이 가까운 사람들의 외면과 원수들의 행악은 다윗의 고통과 괴로움을 더더욱 가중시킵니다.

 

(3) 원수에 대한 다윗의 반응(13-14)

 

까닭 없이 남의 생명을 노리며 거짓을 꾸며대는 악인과는 대조적으로 다윗은 마치 귀머거리와 벙어리가 된 것처럼 누구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으며 그 누구에게도 대꾸하지 않습니다. 다윗이 가까운 자들의 외면과 원수들의 공격에 따지거나 변명하는 등 어떠한 응대도 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하는 이유는 그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들였으므로 누구에게도 그의 무죄를 주장하거나 변명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덧붙여, 그가 그의 원수들의 까닭 없는 중상모략에 대해서도 어떤 반격을 가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의 불의를 모른체하거나 없던 일처럼 덮으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만 사정을 아뢰고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셔서 불의에 대한 심판을 내려주시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림(15-20)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의 유혹에 종종 넘어지는 우리도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어려움을 겪곤 합니다. 그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이런 저런 노력을 해보기도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결국 죄이므로 먼저 죄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회복될 수 있습니다. 팔이 부러졌는데 반창고 하나 붙이는 것으로 치료가 되겠습니까? 먼저 영혼이 잘되어야 범사가 형통하고 강건해지는 법입니다(요삼 1:2).

 

15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답하시리이다 16내가 말하기를 두렵건대 그들이 나 때문에 기뻐하며 내가 실족할 때에 나를 향하여 스스로 교만할까 하였나이다 17내가 넘어지게 되었고 나의 근심이 항상 내 앞에 있사오니 18내 죄악을 아뢰고 내 죄를 슬퍼함이니이다 19내 원수가 활발하며 강하고 부당하게 나를 미워하는 자가 많으며 20또 악으로 선을 대신하는 자들이 내가 선을 따른다는 것 때문에 나를 대적하나이다(15-20)

 

다윗은 하나님께 집중하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가 환난에 ᄈᆞ진 것을 보고 원수들이 기뻐하는 일이 없도록 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고통으로 탈진한 다윗이 죄 때문에 괴로워하는 상황에서 대적들은 다윗이 넘어지는 것을 보면서 기뻐하며 점점 세력을 키워 갑니다.

 

(1)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림(15)

 

다윗은 친구들이나 원수들에게 침묵했지만 하나님께는 결코 침묵하지 않습니다. “당신을 내가 기다리나이다 당신만이 내게 응답하실 것이니이다”라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응답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다윗은 원수들을 응대하지 않는 이유를 하나님께 말씀드립니다. 그는 원수들이 자신의 죄와 재난으로 인해 기뻐하고 의기양양해할 여기를 주고 싶지 않습니다. 다윗은 불의와 불의를 행하는 자들에게 적당히 맞서는 길은 그들이 다윗에게 하듯이 그들을 웃지나 업신여기며 그들의 목숨을 노리는 것이 아님을 잘 압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악인에게 시간을 쏟는 대신 자신의 죄를 곰곰이 생각하며 하나님께 회개하였고 죄 지은 일에 대해 후회하며 진정으로 마음 아파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일말의 죄악도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심을 알기에 오직 하나님께서 자신의 죄를 사하시고 자기를 향한 재앙을 거두시며 다시금 전과 같이 하나님과 가깝고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기를 소망합니다.

 

(2) 원수와 죄책감의 고통(16-20)

 

다윗은 자신의 죄를 돌아보며 근신하지만, 그를 까닭없이 미워하는 자들은 생기가 있고 기세가 등등하며 그 수도 많습니다. 다윗의 원수들은 선을 악으로 갚는 자들이므로 근본적으로 마음에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경외심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다윗을 대적하는 이유는 다윗이 그들이 추구하는 악이 아닌 선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근본적인 태도와 행동양식은 하나님의 정의와 선에서 멀습니다.

 

하나님께 간구(21-22)

소망이 주께 있음을 깨달음 때, 죄악에서 우리를 건져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습니다. 범죄로 인해 하나님께 징계를 당하고 있다 하더라도, 소망은 오직 주께 있기에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어떤 이유로든 어려움 가운데 바질 때, 시와 때를 상관하지 않고 무시로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21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22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21-22)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책망하지 않기를 간구하며 기도를 시작하였고, 이제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지 않고 속히 구원하시기를 간구하며 기도를 마칩니다. 다윗은 여전히 죄책감과 질병의 고통 속에 있고 수많은 원수가 이유 없이 괴롭히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외면한 것처럼 느껴져 외롭고 힘듭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당면한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그는 분명히 압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속히 자기에게 다시 찾아와 자기를 구원하여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 자기와 친구들이나 원수와의 관계, 자기와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모두 회복시켜주시기를 갈망합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질병을 뛰어넘는 믿음, 문제를 넘어서는 믿음을 가져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오래되고 극심한 질병으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마저 떠났을 때,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로 인해 눈물마저 말라버렸을 때, 고난이 사방에서 조여 오며 우리를 압박할 때, 우리를 도우시는 주님,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만 바라봅시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애 3:26)라는 말씀처럼 간절히 기도하며 잠잠히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립시다. 자녀들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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