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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29-01)

 


여호와의 권능의 소리

시편 29편 1-11절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이는 이 세상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인 우리는 날마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창조주이시며, 온 세상의 주관자이심을 선포하며 경배해야 합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어떻게 선포하고 경배할 수 있습니까?

 

  •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능력이 그의 목소리로 천지에 나타나 천지와 이방신의 세력을 굴복시키십니다. 세상의 무질서를 정복하심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창조주와 통치자임이 밝히 드러납니다. 이 하나님께 하늘에서는 그의 천사들이 그리고 땅에서는 그의 백성들이 왕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배합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찬양(1-2)

하나님께서는 자연과 역사, 인간 등 모든 것을 다르시십니다. 여호와의 소리는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하며 전능하신 하나님께 예배를 요구합니다.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셔야 할 유일한 분입니다. 하나님께 최고로 합당한 영광을 돌려야하기에 당신의 모든 것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1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 2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1-2)

 

시인은 하늘에 있는 권능 있는 존재들을 향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외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리는 이 천사들은 하나님께서 계시는 천상에 있어 그분의 모임에 등장하는 자들입니다(욥 1:6, 2:1; 왕상 22:19; 시 89:6 등). 시인은 이들에게 하나님께 영광과 능력을 돌리라고 세 번이나 외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의 찬양을 받기에 마땅하신 분이라는 점이 시인의 찬양 명령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시인은 그 누구보다도 하늘의 천사들이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가장 잘 인지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천사들에게 그들이 인지하고 있는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마땅히 하나님께 돌려드리라고 반복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은 그의 이름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이 시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창조주와 통치자로서의 놀라운 능력에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 돌리는 찬양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예배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는 땅의 성도는 하늘의 천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적절한 옷을 입어야 합니다. 이 거룩하고 구별된 옷을 입고 예배하는 모습은 성전에서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지은 세마포를 입고 제사를 드리는 모습을 떠올립니다. 거룩한 옷이 내포하는 의미는 예배자의 성결과 헌신을 의미합니다. 예배자가 흠 없는 예물을 준비해서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하듯이(레 1:2-3), 자신의 죄를 회개하여 성결한 마음과 행실로 거룩한 하나님 앞에 자신을 헌신할 준비를 갖추는 것이 합당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소리(3-9)

하나님께서는 혼돈을 다스리시는 영광의 왕이시며, 여호와의 소리로 영광을 선포하십니다. 영광은 하나님의 어떠하심이 드러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성품과 사역이 만천하에 알려지는 것입니다. 영광은 인간이 조작하거나 조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 드러날 때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노래하고 있습니다.

 

3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우렛소리를 내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 4여호와의 소리가 힘 있음이여 여호와의 소리가 위엄차도다 5여호와의 소리가 백향목을 꺾으심이여 여호와께서 레바논 백향목을 꺾어 부수시도다 6그 나무를 송아지 같이 뛰게 하심이여 레바논과 시룐으로 들송아지 같이 뛰게 하시도다 7여호와의 소리가 화염을 가르시도다 8여호와의 소리가 광야를 진동하심이여 여호와께서 가데스 광야를 진동시키시도다 9여호와의 소리가 암사슴을 낙태하게 하시고 삼림을 말갛게 벗기시니 그의 성전에서 그의 모든 것들이 말하기를 영광이라 하도다(3-9)

 

하나님의 영광을 피조세계가 증명합니다. 온 피조물을 뒤흔들고 압도하는 하나님의 소리가 그 영광의 증거입니다. 뇌성은 가나안 바알의 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수단일 뿐입니다. 하나님께 돌아갈 영광을 아무도 가로채서는 안 됩니다.

 

(1) 물 위에 계신 하나님의 소리(3-4)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이 온 세상에 강한 폭풍우 속 천둥소리로 임하십니다. 여호와의 소리는 하나님의 등장을 알리는 소리이며, 그의 능력과 위엄이 드러나게 되는 소리입니다. 먼저 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쟁쟁하게 울립니다.

가나안 인들에게 바다는 바다와 혼돈의 신인 얌과 폭풍의 신인 바알이 싸움을 일으키는 전쟁터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들은 천둥소리를 들을 때 바알을 떠올렸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폭풍우 속에서 크고 강하게 울리는 이 천둥소리는 바알의 소리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라고 말합니다. 또한 이 소리의 주인공인 하나님께서 바다를 다스리시는 분이라고 선포합니다. 시인이 힘과 위엄이 있는 소리를 내며 많은 물을 정복하신 하나님을 묘사함으로써 능력과 영광의 하나님 앞에 감히 나설 자가 아무도 없으며, 바다나 혼돈의 어떤 세력도 하나님의 주권 앞에서 힘을 쓸 수 없다는 점을 명백히 알립니다(시 89:9).

 

(2) 백향목을 꺾으시는 하나님의 소리(5-6)

 

천둥소리로 묘사된 하나님의 영광이 바다로부터 이동하여 이제 레바논의 산들에 임합니다. 시인은 여러 지역에서 특별히 가나안의 북쪽 지역에 있는 레바논 산과 시론(헤르몬 산) 그리고 그 산들의 명물인 백향목을 지목하였습니다. 레바논의 백향목은 성경에서도 ‘레바논의 영광’(사 6:13)으로 불릴 만큼 이스라엘과 같이 견고한 집을 짓기 위한 목재가 귀한 가나안 지역에서 가장 좋은 나무로 알려졌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도 레바논에서 백향목을 들여와서 사용했습니다(왕상 5:6; 6:9-10), 시론은 시돈(페니키아)인들이 헤르몬 산을 가리켜 부른 이름으로서(신 3:9) 해발 2800미터가 넘는 높이로 지중해 동해안 쪽에서 가장 높은 산입니다. 신에게 바쳐진 곳이란 뜻을 갖고 있는 이 산은 이방신들의 거주지로 알려졌습니다.

이와 같은 장엄한 산들과 그 산들의 가장 빼어난 나무들이 하나님의 청천벽력과 같은 천둥 번개 소리 앞에 맥을 못 추고, 흔들리고 뒤틀리고 꺾이며 부서집니다. 시인은 이 산들과 나무가 파괴되며 아수라장이 되는 모습을 마치 길들여지지 않은 들송아지가 몸을 뒤틀며 걷잡을 수 없이 이리저리 뛰는 것에 비유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영광이 산과 나무를 정복하신 것입니다.

시인은 폭풍의 바다를 지나 산들에 임하여 그것을 뒤흔들며 제압하는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힘을 보여줌으로써 바다에서와 마찬가지로 산에 깃들어 있는 어떠한 혼돈과 신들의 세력도 하나님의 능력과 주권 앞에서는 일어설 수 없음을 표명합니다. 바다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제압한 이 헤르몬 산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세상의 어떤 신의 이름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이름만을 즐거이 외치게 될 주체입니다(시 89:12).

 

(3) 광야를 진동하는 하나님의 소리(7-9)

 

천지를 진동하는 하나님의 뇌성이 바다와 산맥을 지나 광야에 임합니다. 하나님의 천둥 번개 소리가 광야를 뒤흔들고 화염이 치솟아 삼림을 불태웁니다. 화염을 가르신다는 표현은 불을 내신다는 표현으로 번개와 더불어 일어나는 화염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능력을 불과도 연결 지어 묘사하는 것입니다.

한편, 시인이 지목한 가데스 광야는 바란 광야 가데스(민 13:26)인지 어디인지 확실하지 않으므로, 구체적인 지명보다는 일반적인 사막 지역으로 이해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광활한 지역 어디든지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를 알리는 굉음이 들리지 않는 곳은 없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소리가 들리고 불과 지진이 나는 모습을 통하여 시인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능력과 통치권이 세상에 작동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소리가 산의 나무들에게 영향을 미치듯 광야의 짐승들에게도 임하여 새끼를 밴 암사슴이 예정된 시간보다 앞당겨 새끼를 낳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진동에 삼림이 눈에서 사라져버립니다. 이와 같이 눈을 휘둥그렇게 만드는 이미지들 모두가 하나님의 놀라운 임재와 그의 통치 능력을 드높이는 구실을 합니다.

하나님의 소리를 통해 표현되는 초월적인 힘은 영광스러운 것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그의 모든 피조물들이 영광을 외친다고 합니다. 여기서 성전이 하늘의 하나님 계신 곳인지 땅의 성전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하늘이라면 시인은 우리를 다시 1-2절의 천사들이 외치는 ‘영광’의 소리로 향하게 합니다. 땅의 성전이라면 이제 하나님의 피조물들이 외치는 ‘영광의 소리’가 천사들이 외치는 영광의 소리와 함께 하늘과 땅에서 울리는 것을 보여줍니다. 어느 쪽이든, 여기서 시인이 의도하는 점은 하나님의 영광이 천지에 충만하므로 그의 피조물 모두가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왕이신 하나님을 찬양(10-11)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의 통치자로 자기 백성에게 복을 주십니다. 예나 지금이나 홍수는 인간이 어찌하지 못하는 거대한 힘이고 크나큰 위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정복하고 통제하셔서 백성들에게 힘과 평화를 주십니다. 자연과 인간에게 평화를 주는 하나님과 달리인간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습니까?

 

10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좌정하셨음이여 여호와께서 영원하도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 11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10-11)

 

시인은 이제 하나님의 왕권에 집중합니다. 하나님이 요동하는 바다와 산과 광야를 통제하시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하나님의 왕권이 견고하게 세상에 안착해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의 홍수 때에도 홍수를 정복하시고 세상의 왕으로서 견고히 세상을 통치하셨다. 위에서 본 우주의 무질서와 혼란 속에서도 하나님의 통치와 질서는 영원히 유지될 것입니다.

 

또한 세상의 왕이신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힘과 평강을 복으로 주시고 보호하십니다. 1-2절에서 천사들이 하나님께 영광과 힘을 찬양하고, 3-9절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통하여 영광과 힘이 증명되며, 이제 영광과 힘의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힘과 평강을 선물로 주십니다. 본 시에서 시인은 인간 세계에서뿐 아니라 우주만물 속에서 일어나는 혼돈과 무질서와 도전을 단번에 압도하고 질서를 잡는 하나님의 힘을 찬양합니다. 또한 우주의 질서자이며 통치자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힘과 복을 주신다는 점을 다시 확증하고 있습니다.


찬양을 하나님께 도리는 행위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높이는 일일 뿐 아니라,. 사람이 피조물의 본분을 지키고 기억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왕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평화로운 백성이 되게 하십니다. 그 하나님께 어떤 마음과 행실로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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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28-01)


나의 힘과 목자이신 여호와

시편 28편 1-9절


찬양은 감사의 표현이요, 믿음의 고백입니다. 따라서 찬양은 이미 얻은 승리로 드리기도 하지만,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나옵니다. 그것은 승리할 것에 대한 믿음으로 미리 드리는 고백입니다. 오늘 시인은 믿음의 고백으로 찬양을 드립니다. 시인에게 하나님께서는 어떤 분이기 때문입니까?

 

  • 시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지만,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때에도 시인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신뢰하며 응답을 촉구합니다. 시인에게 괴로움을 주는 악인들의 불의와 부정에 그의 기도 소리를 높이며 하나님의 심판이 그들에게 임하기를 간구합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시인의 간구 소리를 들으셨고, 시인은 이에 기뻐하며 구원의 반석이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 부르짖는 시인(1-2)

 

사람들이 아무리 많이 흔들어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침묵하신 것처럼 느껴질 때 참으로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외적인 시련 못지 않게 하나님께서 자신을 외면하는 듯 보여 더 가슴 아픕니다. 시인은 정신이 하도 없어 보입니다.

 

1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나의 반석이여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 2내가 주의 지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1-2)

 

시인은 ‘당신께’라고 외치며 기도를 시작합니다. 시인의 간구를 들어줄 이는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이 사실을 알아주고 간구에 귀 기울이시길 원합니다. 시인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의 ‘반석’이시기 때문입니다. 산지에 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산에 있는 반석은 요새나 산성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피난처가 되며 견고한 힘과 도움을 줍니다. 그러므로 반석은 구원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구원’이란 단어와 함께 사용됩니다(시 18:2,46; 62:2,6). 여기서 하나님을 반석으로 부른 것도 사무엘하 22:47처럼 ‘구원의 반석’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지성소를 향하여 손을 들고 기도합니다. 지성소는 성소의 내부에 있는 방으로 언약궤와 그룹이 놓여있으며,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곳입니다. 성소가 있는 시온이나 예루살렘, 성소 자체도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지만, 지성소는 그 중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가장 충만하고 밀집된 곳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성소를 향한 시인의 자세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모두 하나님께로 향하려는 의지를 상징합니다. 현재 하나님은 시인에게 침묵하고 계십니다. 그의 간구에 반응하지 않으신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시인은 결코 침묵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귀를 막지 마소서. 내가 지금 부르짖고 있나이다’라고 외치며 하나님의 침묵을 깨뜨리고자 합니다. 손을 들고 지성소를 향하여 자기가 의지하는 분이 하나님뿐임을 상기시키고 하나님의 주위를 돌려 하나님의 응답을 촉구합니다. 덧붙여 하나님이 묵묵부답으로 대하시면 시인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 것이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응답을 재촉합니다. 이사야 14:15에 의하면 구덩이의 맨 밑바닥이 스올(죽은 자가 거하는 곳)인데, 이때 구덩이에 해당하는 단어가 바로 무덤으로 번역된 단어와 같습니다. 무덤이 죽음의 문턱을 의미하므로, 시인은 하나님이 침묵하시면 지금 자기가 살아있으나 죽은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의 간구는 은혜를 구하는 간구이며 구원을 구하는 간구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고 외치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통하여 응답될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기도의 몫은 우리 자신이지만 기도의 응답은 우리의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크신 긍휼과 은혜 덕분입니다.

 

악인의 심판을 촉구(3-5)

하나님께서는 행한 대로 갚으십니다. 악인은 겉과 속이 판이해서 남도 파멸시키고 자신도 망하고 일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을 행하고 손으로 정의를 세우심으로 모두를 살리십니다. 악인은 심지 않은 것에서 거두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악인이 심은 대로 수확하게 합니다.

 

3악인과 악을 행하는 자들과 함께 나를 끌어내지 마옵소서 그들은 그 이웃에게 화평을 말하나 그들의 마음에는 악독이 있나이다 4그들이 하는 일과 그들의 행위가 악한 대로 갚으시며 그들의 손이 지은 대로 그들에게 갚아 그 마땅히 받을 것으로 그들에게 갚으소서 5그들은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과 손으로 지으신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파괴하고 건설하지 아니하시리로다(3-5)

 

시인이 하나님께 부르짖는 원인은 악인들 때문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자기를 악인들과 함께 멸망으로 끌어가지 마시기를 요청합니다. 시인은 그들처럼 거짓말을 하거나 남에게 해를 끼치는 자가 아니므로 악인의 운명에 휘말려갈 수 없습니다. 이 악인들은 이웃에게 화평을 말하지만 속으로는 악을 품는 위선자들입니다. 이처럼 악인들은 인간관계에 있어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탐욕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하나님이 악인들의 잘못을 따져서 공의로 갚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악을 행하는 자는 그에 응당한 심판을 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시인이 하나님께 악

안을 심판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사적인 앙갚음 때문이아니라 그들의 행위가 정의와 공용에 어긋나서 하나님이원하시는 세상의 질서가 어지럽혀지기 때문이다.

5절에서 나타나듯이 악인들의 죄악은 인간관계에서만나타나지 않고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가지 드러난다. 우선 그들의 악한 행위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위해 하신 창조 사역이나 출애급과 같은 구원 사역,하나님의 통치 등을 망각하고 주의를 가울이지 않는 데서 출발한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없으며 하나님이 주인이심을 간과하고 자기 이익과 자기 자산을 하나님보다 우선하는 자들이다. 이처럼 악인들이 하나님이세우신 정의와 질서를 개고 하나님의 관계나 다른 아웃과의 관계를 파괴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허물어뜨리고 다시 세우지 않으실 것이다. 시인은 이 점을 확실히 믿고 있으므로 하나님의 심판이 그들에게 내려 하나님의 정의와 질서가 재정비되는 것을 보고자 기대한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를 찬양(6-7)

하나님께서는 구한 대로 들으십니다. 힘들다고, 아프다고 아무리 말해도 사람들은 듣지 않고, 건성으로 듣고, 두어 번 들으면 지겹다고 귀찮다고 멀리 피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잘 들으시고, 들으신 대로 응답하십니다. 시인은 그 하나님 때문에 기ㅃ 어쩔 줄 모릅니다.

 

6여호와를 찬송함이여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 7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6-7)

 

하나님께서 악인을 심판하실 것을 확신한 시인은 이제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2절의 ‘나의 간구하는 소라를 들으소서’가 이제 6절에서 ‘내 간구하는 소라를 들으심이로다’로 변했고 ‘도움을 얻었도다’(절는 말이 추가된 점을 보면 1~2절에서 기도하던 간구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침묵을 끼고 응답합니다.

 

시인은 찬양의 첫마디로 ‘여호와를 찬송함이여’라고 외치는데, 이는 ‘여호와를 송축함이여’란 뜻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표현입니다. 6-7절에서 ‘송축하라’로 시작한 찬양은 ‘찬양할 것이다’로 고조됩니다. 전체적으로 찬양(6)-찬양의 이유(6)-찬양의 이유(A-TD절의 순서로 전개되어 시적인 아름다움을 드러납니다.

 

시인에게 있어 하나님께서는 ‘힘’이고 ‘방패’입니다. 특히 힘과 방패는 용사에게 있어서 자신을 보호하고 적을 물리치는데 필수적입니다. 용사에게 힘과 방패가 있다면, 그는 전에서 든든할 것입니다. 더구나 그 힘과 방패가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전이라면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시인은 하나님만 의지한 결과 하나님의 도움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마음에는 기쁨이 가득합니다. 시인은 이제 더 이상 죽음의 문턱에 서 있는 자(1)가 아니라 기쁨과 생명으로 충만한 자입니다(7).

그는 기쁨과 감사에 겨워 자신만의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내 노래’라고 지칭하며 다른 사람의 노래와 차별을 두는 것은 자신의 노래에 담긴 내용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구원을 두드러지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을 힘과 방패로 삼은 자는 이러한 개인적인 노래가 그의 삶 동안 계속해서 나올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힘이 되신 여호와를 찬양(8-9)

지도자들은 요새 같은 든든한 힘을 얻기를 바라고, 백성들은 배불리 먹고 경제적인 안정을 누리기를 구합니다. 참된 기도는 자신의 세계에 갇혀있지 않고, 이웃과 모든 사람을 위한 기도로 확장됩니다. 시인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 기도하던 위치에서 이제 왕과 백성들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8여호와는 그들의 힘이시요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 구원의 요새이시로다 9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주의 산업에 복을 주시고 또 그들의 목자가 되시어 영원토록 그들을 인도하소서(8-9)

 

하나님께서는 시인의 ‘힘’과 ‘방패’만이 아니라 그가 선택하신 왕과 그의 모든 백성에게 ‘힘’과 ‘구원의 요새’가 되어주십니다. 하나님을 기름 부음 받은 자의 구원의 요새라고 표현한 데에는 하나님께서 손수 기름 부어 왕으로 세운 자를 통해 그의 백성을 돌보신다는 뜻도 암시되어 있습니다. 이는 다윗과 그의 자손만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메시아가 그의 백성을 통치하시며 친히 구원의 요새가 되어주실 것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자신만을 위해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간구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유업(산업)입니다(신 4:20; 사 19:25; 렘 12:7-9),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왕이며 목자입니다(시 23:1). 시인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고난과 어려움에서 구원하시고 복 주시기를, 그리고 그들의 목자가 되어 영원히 인도하시기를 간구하며 기도를 마칩니다.


흔들리는 세상과 흐느끼는 신인에게 가장 든든한 존재는 반석이신 하나님입니다. 우리 눈에도 보이는 악인의 행실이 하나님의 눈에 괜찮을 리 없습니다. 때가 되면 의인과 악인 사이에서 응답과 심판으로 억울함으로 풀어주시고 힘이 되어주실 날이 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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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27-01)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시편 27편 1-14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히 11:1)이라는 말이 믿음에 관한 얼마나 적실한 정의 인지 모릅니다. 그것은 100% 확률의 모험이기 때문에, 이미 현실이 된 것이나 다름없이 받아들인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1%의 희망도 없는 상황마저 뒤엎을 수 있고, 전혀 가망 없는 상황에서도 희망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의 근거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 시인은 눈앞에 닥친 생명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을 신뢰하여 평안한 마음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계신 성전을 사랑하며 항상 그분의 임재를 구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원수에게서 구원하시고 승리를 주실 것을 확신하며 찬양을 서원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여 두려움이 없는 시인(1-3)

하나님만이 구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안의 어둠을 물리치는 빛이요, 내 갈 길을 밝히는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세상 모든 것을 합쳐도 더 크시고 강하신 하나님께서 나의 구원자이시므로 겁나지 않다고 담대하게 고백합니다. 시인은 엄청난 두려움에 휩싸여 있습니다.

 

1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2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3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1-3)

 

시인은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나의 빛’, ‘나의 구원’, ‘내 생명의 능력’으로 부릅니다. 하나님을 ‘나의’로 부르는 시인의 모습 속에 하나님과 그의 친밀한 관계를 볼 수 있습니다.

시인이 하나님을 빛이라 불렀듯이,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빛’과 ‘불’로(사 10:17; 미 7:8; 요 1:4), ‘영원한 빛’이 되십니다(사 60:19). 시인은 이 빛되신 하나님을 구원과 연결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둠 같은 대적들을 몰아내고 시인에게 승리를 주고 구원하시는 분임을 표현한 것입니다. 또한 ‘빛’과 ‘구원’이신 하나님을 생명과 연결한다. 특히 생명의 능력은 요새나 피난처를 가리키므로, 하나님이 시인의 피난처가 되셔서 그가 하나님께 피하면 생명을 보존하신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개인적인 보호자가 되어주시므로 시인은 두려워할 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시인 주변에는 시인을 노리는 원수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시인을 물어뜯어 해를 입히려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시인에게는 구원자 하나님이 계시므로 그의 원수들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실족하여 넘어졌습니다. 또한 시인에게는 개인적인 원수 외에도 국가적인 원수가 있습니다. 적들이 군대를 결성하여 전쟁을 일으키고 시인을 공격하려고 에워싸도 시인은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여 마음이 든든합니다(시 46편).

 

시인의 기도(4-6)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가는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하는 것입니다. 원수들 앞에서 승리하는 것은 당장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히 최종적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의 소원은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시인은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께 소원을 기도합니다. 그것은 주의 집에 살겠다는 오직 하나의 소원만 있을 뿐입니다.

 

4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5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 6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둘러싼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며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4-6)

 

시인은 하나님의 구원과 긍휼을 구합니다. 묵상 중에 주의 얼굴을 찾으라는 내적인 음성을 듣고 즉각 반응 합니다. 일생 내내 시인의 도움이 되신 주께서 이번에도 버리지 말고 외면하지 말아 달라고 간구합니다.

 

(1) 하나님의 임재(4)

 

하나님을 향한 신뢰로 마음이 담대한 시인은 한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가 평생토록 하나님의 성전에 거하는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임재 안에 거하며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구하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이 단호하고 강렬한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도 단호하고 강렬합니다. 시인이 바라보기 원하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이나, 하나님을 사모하거나 구한다는 말이 정확히 어떤 뜻인지는 원문으로도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모두 시인으로 하여금 은혜와 기쁨이 되는 표현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2) 하나님의 보호(5)

 

시인이 사랑하는 하나님의 성전은 시인이 환난당할 때에 피난처가 됩니다. 시인은 어려움에 처할 때에 하나님이 그를 처소에 숨기시거나 높은 바위 위에 두셔서 어느 누구도 시인을 찾거나 공격하지 못하도록 보호하실 것을 확신합니다. 하나님께서 시인을 숨겨주는 모습은 시편 91편에 하나님의 날개깃으로 시인을 숨겨 보호하시는 모습과 흡사합니다. 높은 바위는 성전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므로 실제로 성전이 있는 시온을 지칭할 수도 있고 하나님의 백성에게 ‘반석’이 되시는 하나님을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참조. 시 46편)

 

(3) 하나님께 찬양(6)

 

하나님께서는 시인을 숨겨 보호하시는 것으로 끝내지 않으시고 원수들 앞에서 시인에게 승리를 안겨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승리에 대한 확신이 있는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호해주신 그 성전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고 감사와 찬양을 드리겠다고 선포합니다.

 

하나님께 간구(7-12)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녀들을 버리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그 자녀를 향해 고개를 돌릴 수 있습니다. 쳐다보지도 않을 수 있습니다. 육신의 부모마저 자신이 정한 척도를 따라 판단에 따라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 한 분, 하나님만이 바라보시며 웃어주시면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습니다. 시인은 부모에게 버림받을 정도로 극도의 고독과 고립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때 그는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7여호와여 내가 소리 내어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고 또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 8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9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마시고 떠나지 마소서 10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11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시고 내 원수를 생각하셔서 평탄한 길로 나를 인도하소서 12내 생명을 내 대적에게 맡기지 마소서 위증자와 악을 토하는 자가 일어나 나를 치려 함이니이다(7-12)

 

시인의 소원은 오직 하나, 여호와의 임재 앞에 나아가 그분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그는 여전히 수세에 몰려 있으면서도 이미 승리를 누리는 사람마냥 하나님께 제사와 찬송하겠다고 다짐합니다. 이는 신뢰하며 기다릴 줄 아는 것이 믿음임을 설명합니다.

 

(1) 응답을 촉구(7-10)

 

1-6절까지 하나님을 향한 시인의 신뢰는 담대한 고백,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끝없는 사랑, 환난에서 승리하여 감사 제사를 드리게 될 확신에서 나타났습니다. 이제 7-14절에는 하나님에 대한 시인의 신뢰가 그의 간구 속에서도 나타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기도를 들어달라고 간청합니다.

7절과 9절에 다양하게 표현되는 ‘들어주소서’, ‘긍휼히 여기소서’, ‘응답하소서’, ‘얼굴을 숨기지 마소서’, ‘버리지 마소서’, ‘떠나지 마소서’는 모두 ‘들어주소서’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시인이 이렇게 단어와 형식(‘…하소서’, ‘…하지 마소서’)을 바꿔가며 같은 내용의 기도를 여러 차례 반복하는 것은 그의 상황이 얼마나 절박한지 그리고 그가 얼마나 절실하게 기도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시인은 기도응답을 받기 위해 그 무엇보다 하나님의 긍휼과 하나님의 얼굴을 간절히 원합니다. 시인은 아직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하나님이 마치 얼굴을 돌려 그를 외면하시는 것처럼 느꼈습니다. 그래서 다시 시인에게 얼굴을 향하시고 기도 소리를 들어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임을 알립니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고 명령하실 때, 시인은 마음으로 주의 얼굴을 찾을 것이라고 결심하였습니다. 이제 환난이 찾아오자 시인은 결심한 대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이 점을 하나님께 상기시키며 자신을 긍휼히 보시고 얼굴을 보여주시기를 구합니다. 덧붙여 자기를 긍휼히 여겨 떠나지 마시길 간청합니다.

시인이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라고 말한 것은 설령 이 땅에 있는 육신의 부모가 그를 버린다 할지라도 하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는 그를 영접하실 것을 확신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는 현재 시인의 친구나 형제, 그의 부모조차도 다 그를 외면하여서 자기 주변에 아무도 없이 홀로 남았으나, 하나님은 자신을 외면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확신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자신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부르면서 자신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이며 하나님의 보호와 공급을 기대하는 자임을 넌지시 드러냅니다. 이 모든 것을 통해 시인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신속한 응답입니다.

 

(2) 하나님께 간구(11-12)

 

하나님의 긍휼과 얼굴을 구하는 시인은 환난 중에라도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하고자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길을 배우고 하나님의 인도로 원수들의 모든 장애를 벗어나 평탄한 곳에 이르기를 원합니다. 자신은 선과 정의가 있는 하나님의 길을 따르고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폭력과 거짓을 일삼는 원수들과 같이 취급하지 마시고 자신을 그들에게 넘겨주지 마시길 간청합니다. 또한 그들에게 마땅한 심판을 내려주시고 자신에게는 평안과 안전을 공급해달라고 간청 드립니다.

 

구원의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다림(13-14)

원수들이 자신의 생명을 노리고 터무니없는 말로 몰아세우는데 우습게도 주변 사람들은 그 말을 믿어줍니다. 이러한 숨이 넘어갈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선하심을 의지하고 우리를 삼키려는 죽음의 땅을 산 자의 땅으로 부꾸며 살아가야 합니다.

 

13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 14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13-14)

 

시인은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 그리고 선과 정의를 확신하므로 그가 살아있는 동안 하나님의 응답을 눈으로 보게 될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습니다. 시인이 말하는 하나님의 선하심은 구체적으로 시인의 원수들을 심판하시고 시인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시인은 이러한 확고한 믿음을 마음에만 품지 않고 공동체에 선포합니다. 시인은 그들에게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강하고 담대하게 그를 기다리라고 조언하며 시를 마칩니다. 현재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거나 하나님의 축복과 구원이 이르지는 않았지만 시인은 믿음의 사람들과 함께 인내하며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과 구원을 기다립니다.


기다림을 택한다는 것은 어쩌면 아무것도 택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기다림의 대상이 하나님이라면 말이 달라집니다. 하나님께서 내 편이라는 사실은 기다림이 가능한 이유요 두렵지 않은 이유입니다. 지금은 강하고 담대하게 주님을 기다릴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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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26-01)

 


나를 실피시고 시험하소서

시편 26편 1-12절


거친 텃밭에서도 보들보들한 새잎이 나듯, 연일 포탄이 떨어지는 전장에서도 꿋꿋하게 살아남아 새잎을 울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개인의 불안을 넘어 사회적 불안이 우리를 자극하고 공격할 때, 어떻게 담당하게 완전함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다행히도 우리에게는 이를 가능하게 하는 도구상자가 있습니다.

 

  • 이 시는 시인이 하나님을 향해 온전함과 진리 중에 행한 것과 주님 의지하는 믿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시인 자신은 모함하는 행악자들과 같지 않고, 하나님께서 계신 집을 사랑하는 자로서 무죄함과 결백을 호소합니다. 무엇보다 시인은 악인들과 동일하게 취급되는 것을 염려하며 구속의 은총을 구하면서 여호와를 찬송합니다.

 

결백을 호소하는 기도(1-3)

 

하나님께서는 재판관이십니다. 억울한 일을 당할 때, 호소할 사람도 호소할 길도 없다면, 하나님께 호소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무죄와 결백을 밝혀줄 것을 기대하시길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공평하게 재판하시고 또한 우리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샅샅이 아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공평하게 재판하실 하나님께 간청하면 선하고 의로운 그분이 응답하실 것을 기대합니다.

 

1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흔들리지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2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 3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1-3)

 

시인은 언약의 이름 여호와를 부르며 그분이 자기 사정을 공정하게 처리해주실 것을 믿고 호소합니다. 시인의 첫마디가 ‘나를 판단하소서, 여호와여’(la)라고 의미심장하게 시작합니다. ‘판단하다’(샤파트)라는 말은 재판관으로서 판결을 내려달라는 뜻입니다. 왜 여호와의 판단이 필요한지 이유를 밝힙니다. 왜냐하면 시인은 자신의 온전함을 따라 걸었기 때문입니다(1b). 이는 진실한 마음과 온전한 행실로 살아왔음을 천명하는 호소입니다(참조, 시 101:2; 잠 2:7; 10:9; 19:1; 20:7; 28:6). 또한 시인이 흔들리지 않고 여호와를 의지했기 때문입니다(1c).

 

시인의 거침없는 호소는 계속됩니다. ‘여호와여 나를 조사해보시고, 내 뜻과 내 양심을 감찰하소서’(2). ‘내 뜻’이라고 했지만, 이것은 몸의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콩팥’(킬야)입니다. 고대인들에게 콩팥은 사람의 가장 비밀스러운 부분입니다. 마찬가지로 ‘양심’은 ‘심장’ 또는 ‘마음’을 뜻하는 ‘레브’입니다. 심장은 고대인들에게 한 사람의 의사 결정 기관이며, 지혜와 의지의 자리입니다. 시인은 남이 들추지 못할 내면 깊숙한 곳과 양심까지 샅샅이 조사해달라고 말할 만큼 깨끗합니다. 시인은 마음의 법정인 양심과 가장 깊은 내면의 깨끗함을 호소합니다. 시인의 뜻과 양심을 포함한 전부를 뜨거운 용광로에 넣어서 불순물이 나오는지 살펴보시길 원합니다.

 

이처럼 시인의 요청은 뒤로 물러섬 없이 당당하고 자신만만합니다. 시인의 절박함에 당당함이 끼어들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시인의 주장과 담대한 태도는 자칫 교만하거나 적절하지 않은 태도로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는 이유를 밝힙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인자하심이 내 앞에 있고, 나는 당신의 진리를 따라 걸었기 때문입니다’(3). ‘인자하심’은 언약적인 사랑이며 실패하지 않는 사랑, ‘헤세드’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시인의 눈앞에 보이는 것처럼 강렬했으니 여호와의 ‘진리’, 곧 진실함과 신실하심을 따라 걷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시인의 온전한 삶의 실천은 여호와의 엄한 명령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단지 ‘당신의 진리(진실하심) 안에서’ 자신의 투철한 의지로 살아왔노라고 고백할 뿐입니다. 이것이 곧 구원의 절박함 속에서도 당당한 이유입니다.

 

악인들과 다름을 호소(4-5)

악한 무리와 어울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은 윤리와 도덕이 없이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악한 무리들과 단절하면 많은 이익관계까지도 단절되는 위험을 수반합니다. 설사 그럴지라도 기꺼이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들과 함께 하면 그들의 운명에 휩쓸리기 때문입니다.

 

4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하지도 아니하리이다 5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하리이다(4-5)

 

하나님께 헌신된 시인의 온전하고 무죄한 삶은 악인들과의 관계나 그들에 대한 시인의 태도에서도 나타납니다. 시인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맛보고, 진리에 부합하게 살았음을 호소했습니다(3). 그런 그가 ‘허망한 사람’, ‘간사한 자’와 동행할 리 없습니다(4). 시인은 헛것을 따르는 자들, 곧 우상숭배자들과 함께 앉지 않을 것입니다(4a). 따라서 마음속에 음흉하게 무언가를 숨기거나 사건을 덮어 은폐하는 ‘간사한 자’, 곧 ‘감추는 자들’과 동행하지 않을 것이라고(4b) 다짐합니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부류는 ‘내 뜻’과 ‘내 양심’을 샅샅이 조사해주시기를 구했던(2) 시인과 정반대의 사람들입니다. 평행관계가 보여주듯 시인은 헛것을 추구하거나 숭배하는 자들과 비밀스럽게 뭔가를 감추는 자들을 동급으로 여깁니다. 그들과 교제하며 친분을 나누는 일이 없을 것이라 다짐합니다. 또한 행악자들의 집회를 미워하고, 여호와를 반역하는 악한 자들과 함께 앉지 않을 것입니다(5). 선행을 위한 ‘집회’(카할)가 아니라 행악자들에 의해 주도되는 패거리 문화나 대중 집회를 시인은 ‘미워했고’, 악한 자들과는 동석하지 않을 것입니다.

 

결백 호소와 여호와를 향한 사랑 고백(6-8)

성도들은 거룩한 성도들과 어울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전에서는 손에 뇌물이나 피를 묻히지 않아도 되고, 불평 대신 감사의 노래를 높이 부르며,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행적을 더불어 찬양하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악한 이들이 끼리끼리 모여 삶을 꾸려나가는 것과 정확하게 대조되는 삶을 노래합니다.

 

6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 주의 제단에 두루 다니며 7감사의 소리를 들려 주고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말하리이다 8여호와여 내가 주께서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하오니(6-8)

 

시인은 다시 여호와를 부르며 결백을 호소합니다. ‘내가 무죄하여 내 손을 씻고, 여호와여 당신의 제단에 두루 다닙니다’(6). 깨끗한 손은 깨끗한 마음의 상징적 표현입니다. 구약에서 손을 씻는 행동은 다양한 정황에서 발견되지만, 무죄와 정결의 필요성을 상징합니다. 예배자의 선행 조건으로서 깨끗한 손(시 24:4)은 성전 입장을 위한 정규적인 의식이기도 했습니다(시 73:13). 또한 제단은 하나님과의 친교와 임재를 알려주는 식탁을 상징합니다. 시인은 그 주변을 돌면서 ‘감사의 소리를 듣게 하고, 당신의 기이한 모든 일들을 말할 것입니다’(7)라고 다짐합니다. 여호와를 향한 시인의 사랑 고백이 독특합니다. ‘여호와여, 나는 당신이 거주하시는 집을 사랑하고 당신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했습니다’(8), 시인은 마치 회상하듯이 완료형 동사로 말합니다. ‘당신이 거주하시는 집’과 ‘당신의 영광이 머무는 곳’은 지성소입니다. 시인이 ‘하나님 임재’를 상징하는 처소를 ‘내가 사랑했다’(아하브티)는 말은 행악자들의 집회를 미워했다(5)는 것과 반대되는 행동입니다. 물론 시인이 사랑하는 것은 건물 자체의 영광이 아닙니다. 시인은 그 처소에 임재하시는 하나님과 그 영광을 사랑합니다. 시편에서 하나님을 ‘사랑했다’는 직접적인 표현은 드물지만(31:23; 97:10; 116:1; 145:20), 이와 비슷하게 하나님의 이름(5:11; 69:36), 여호와의 법과 구원을 사랑합니다(119:47, 48, 97, 113, 119, 127, 159, 163)는 표현들도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악인들과 구별되기를 간구(9-10)

성도들은 악한 사람들과 함께하면 그들의 운명에 따라서 자신도 휩쓸려 갑니다. 그들은 우상숭배하고 뇌물로 사람의 마음을 훔치고 심지어 살인까지 일삼는 자들과 함께 부당한 이권에 기웃거리지 않아야 합니다. 소수일지라도 하나님의 사람들과 사귀는 일을 기뻐해야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서 있기 때문입니다.

 

9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 10그들의 손에 사악함이 있고 그들의 오른손에 뇌물이 가득하오나(9-10)

 

시인은 자신의 결백을 호소하면서 악인들과 함께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들과 한패가 되지 않을 것을 다짐했습니다(4-5). 이제 시인은 자신의 다짐 만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한 것입니까? 여호와께 간구합니다. ‘나의 영혼을 죄인들과 함께 제거하지 마소서/내 생명을 살인자들과 함께 제거하지 마소서’(9). 시인이 악인들과 함께 휩쓸려 제거되지 않기를 바라는 간구는 여호와가 악인들을 박멸하실 것이라는 믿음에 근거합니다. 시인이 죄인들(9)과 동격 관계로 설정한 살인자들(9b)은 주로 피에 굶주려 폭력적인 행위나 잔인한 행동을 서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시인은 그런 자들과 한통속으로 묶여 하나님의 제거 대상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 때문에 시인은 그들의 속성을 더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그들의 손에는 사악함이 있고 그들의 오른손에는 뇌물로 가득합니다’(10). 시인은 악인들의 사악함을 뇌물을 밝히는 손으로 특정합니다. 시인은 앞서 자신의 무죄한 손을 언급했지만(6), 사악한 죄인들의 손은 부정하고 불법한 뇌물로 가득합니다. 뇌물과 관련된 자들은 대체로 권력을 장악한 자들이고, 이들은 자기보다 취약한 계층의 사람으로부터 부당하고 불법적인 이득을 챙깁니다. 시인은 이런 부류의 사람들과 구별되기를 하나님께 간절히 요청합니다.

 

결백 확신과 구속의 은총을 호소(11-12)

완전할 수 없다고 해서 완전하기를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완전하다는 것은 하나님과 같은 완전함이 아니라 세상과 달리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흔들리고 떠나는 무리 가운데서도 그들과 달리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시인도 많이 흔들렸고, 항상 평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11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 나를 속량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12내 발이 평탄한 데에 섰사오니 무리 가운데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11-12)

 

시인이 맨 처음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니’(1a)라고 고백하고 호소한 것처럼 다시 반복합니다. 시작과 끝이 서로 호응하는 구성입니다. 시인은 ‘내가 흠 없는 삶을 살겠습니다’(11a)라고 다짐하고 간청합니다. ‘나를 속량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11b). 그는 하나님 앞에서 무죄함을 맹세했지만(6), 여전히 하나님의 지속적인 은총을 의지하면서 하나님께서 구속해주시기를 간청합니다. 무엇보다 ‘속량하다’ 또는 ‘구속하다’라는 의미의 ‘파다’는 노예를 해방시키는 것처럼, 죽을 운명에 처해졌다가 구원받는 것처럼 여호와가 이스라엘을 구속하여 자기백성 삼으신 것을 표현하는 말입니다(삼하 7:23). 그러니까 시인은 자기 조상들이 맛본 구속의 은총이 여전히 자신에게도 유효한 은총이 되기를 열망합니다.

시인의 언어를 통해 예배자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것에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우러러보며 여호와가 보이신 은총 속에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서고 싶습니다. 시인은 ‘내 발이 평탄한 데 섰으니 내가 회중 가운데서 여호와 당신을 송축할 것이라’(12) 다짐합니다.

시인은 앞서 ‘행악자들의 집회’를 미워한다고 고백했지만(5), 이제 ‘회중’(막헬림)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더군다나 시인이 발을 딛고 있는 평탄한 데는 견고한 장소를 일컫는 것이 아니라 공평함, 정직함, 의로움을 표현한 은유입니다(참조. 사 11:4). 따라서 시인은 신앙과 윤리적인 삶의 일치를 다짐하고 고백한 것입니다. ‘나의 완전함으로’(1,12) 살았다고 고백한 것처럼 앞으로도 자신의 올바른 삶의 방식은 변함없을 것이라 다짐합니다.


하나님께 변호를 의뢰한 사람은 자신의 삶에 대해 더 책임 있는 자세로 완전을 향해 나아갈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오늘을 판단하실 하나님이 그날에도 재판장이 되어 모든 걸 판단하실 것입니다. 은혜 안에서 힘을 얻고 곧게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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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25-01)


기다림과 기대 사이에서

시편 25:1-22


기다림은 시제를 바꾸는 일이라고 했던 한 평론가의 문장이 시편 25편과 맞닿아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현재 속에서 미래를 들춰보게 되고, 없을 지도 모르는 미래가 가까운 미래가 될 것 같은 기대랄까 기다림이랄까. 당신은 어떤 기다림으로 삶을 물들이고 있습니까?

 

  • 시편 25편은 죄와 아픔, 고독, 그리고 마음의 슬픔과 내적인 투쟁뿐만 아니라 원수의 적대감과 싸우면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시인은 안과 밖에서 밀려드는 괴로움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가르침과 신뢰를 저버리지 않고 의로운 길을 걷고 찬양하면서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간구합니다.

 

고통 중에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1-3)

정직하신 하나님께서는 죄를 간과하지 않으시고, 선하고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자, 겸손하고 온유한 자에게 공의와 도를 가르쳐 그 길을 걷는 자들에게 충실히 언약을 지키십니다. 죄는 미워하시되 돌아온 죄인을 받아주시고 갈 길과 행할 도를 알러 주십니다. 다윗은 애초에 고난과 원수의 위협 앞에서 죄에 빠지지 않고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1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2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들이 나를 이겨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3주를 바라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까닭 없이 속이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리이다(1-3)

 

시인은 여호와 이름을 부르며 고백합니다. ‘여호와여, 내 영혼이 당신을 우러러 봅니다.’(1) 이것은 목을 들어 올려 간절하게 위를 바라보는 상태를 표현한 말입니다. 응답의 주도권이 위에 계신 여호와께 있음을 인식한 태도입니다. 가난한 노동자가 하루 품삯을 간절히 기다리는 것처럼(신 24:15), 마음과 손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어 올리듯(애 3:41; 시 86:4; 143:8) 시인은 절실한 마음을 표현합니다.

이후 시인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고백합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당신을 신뢰합니다.’(2a). ‘신뢰하다’(바타흐)라는 말은 어렴풋한 것이 아닌 어떤 의심도 없는 확신으로 충만한 상태를 뜻합니다. 고지식하고 그릇된 자기 확신이나 자기 과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한 역사적 경험 속에서 터득한 신뢰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와 일하심에 대한 인간의 마땅한 반응입니다.

시인의 의심 없는 믿음은 당당한 요청의 근거가 됩니다.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들이 나를 이겨 승리의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2bc) 시인은 치욕을 당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원수들은 까닭 없이 속이는 자들(3d)이기에 상황이 뒤집혀 그들이 어떤 이득이나 성공, 은총도 없기를 간청합니다(3c). 반대로 자신과 하나님을 열망하는 사람들을 동일시하고 그들이 부끄러움 당하지 않기를 간구합니다(3ab).

 

여호와의 가르침과 죄 용서를 구함(4-7)

하나님께서는 항상 자기 백성들을 가르쳐 주십니다. 어려움만 주목하지 말고 고난 중에도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주목해야 합니다. 그래서 고난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기회가 되게 해야 합니다. 위기에서 벗어나는 것 못지않게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처분을 기다립니다. 하나님만 바라고 있습니다.

 

4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5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 6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들을 기억하옵소서 7여호와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주께서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으로 하옵소서(4-7)

 

시인의 기도는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의 지도와 교훈을 구하는 것에 초점을 둡니다(4-5). ‘여호와여, 당신의 길을 내게 보이시고 당신의 행로를 내게 가르치소서’(4). 시인은 삶의 여정, 곧 ‘길’(데렉)에서 방향을 설정해주실 여호와의 가르침이 절실합니다. 삶을 위한 여호와의 ‘방식’(오라흐)을 구합니다. 시인은 삶의 방침과 그 이유와 근거를 여호와로부터 얻고 싶습니다.

시인은 더 구체적으로 요청합니다. ‘당신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이는 당신이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니/내가 온종일 당신을 기다립니다’(5). 기도의 핵심은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참된 배움을 얻고 교화되기를 열망하는 마음에 있습니다. 시인은 가르치고 교훈하시는 하나님을 ‘나의 구원자’라고 고백하면서 ‘구원’을 온종일 열망하며 기다립니다. 그가 갈망하는 구원은 현재 당면한 위기로부터 벗어나는 구출입니다. 시인은 여호와 이름을 부르며 당신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을 기억해 달라고 청합니다(7a). 그 이유는 영원부터 있었기 때문입니다(7b). ‘긍휼하심’(라하밈)과 ‘인자하심’(헤세드)은 하나님의 핵심적인 성품을 가리키는 대표적인 말입니다. 긍휼하심은 어머니가 자식을 향해 품는 사랑의 감정처럼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시인은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과 실패하지 않으시는 ‘언약적인 사랑’(출 34:6)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셔서 자기 삶에서 그 따듯한 영향력을 발휘해주시길 요청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칠 줄 모르는 사랑을 의지하는 시인은 ‘당신의 인자하심을 따라’ 젊은 시절의 죄와 반역을 기억하지 마시길 간청합니다(7ab). 반면에 ‘당신의 선하심을 위해’ 나를 기억해주시길 간구합니다(7cd). 시인은 그 반대의 상황이 발생하면, 하나님 성품에 위배된 것이요 주님이 손해를 볼 것처럼 하나님을 압박하듯 호소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에 대한 정확한 지식에 근거하여 죄의 사면을 청하고, 여호와의 어머니 같은 사랑에 기대어 호소합니다.

 

여호와의 인도하심과 죄 용서를 구함(8-11)

하나님께서는 항상 선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죄인을 심판하시기도 하지만 반대로 회복하시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 잘못되었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교훈하십니다. 죄인은 그 속성상 금방 깨닫지 못하고, 곧바로 바뀌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온유한 마음을 잃지 않으시고 지속적으로 일깨우십니다.

 

8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의 도로 죄인들을 교훈하시리로다 9온유한 자를 정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의 도를 가르치시리로다 10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의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 11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크오니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하소서(8-11)

 

시인은 여호와가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 방식으로’(‘주의 도로’) 죄인을 교훈하실 것이라(8) 선포합니다. 여호와의 ‘선함’과 ‘올곧음’은 죄인을 교훈하는 방법입니다. 또한 여호와는 온유한 자를 정의로 지도하시고, 온유한 자에게 그의 ‘길’(도)을 가르치실 것이라고(9) 선포합니다.

시인은 온유한 자(비천한 자)를 ‘공의’(미슈파트)로 지도하고 가르치는 스승 같은 여호와를 믿습니다. 이 시행은 시인의 의도적인 어휘 선택이 돋보입니다. ‘지도하다’, ‘인도하다’라는 동사 다라크()와 ‘도’(길)를 뜻하는 명사 ‘데레크’를 연결시켜 주님의 길과 인도하심이 분리될 수 없음을 역설합니다.

곧이어 시인은 여호와의 모든 길은 인자와 진리이며, 이는 그분의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들을 위함이라(10) 선포합니다. ‘인자’(헤세드)와 ‘진리’(에메트)는 하나님 성품을 압축한 말입니다. 따라서 인자와 진리는 ‘언약’(베리트)과 ‘증거’(에두트), 곧 경고의 법규를 지키는 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이후 시인은 언약의 이름 여호와를 부르면서 간청합니다.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나의 죄악이 클지라도 용서하소서’(11). 앞서 시인이 ‘당신의 선하심을 위하여’ 기억해주기를 청했다면(7), 이번에는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라는 명목을 내세워 죄 용서를 구합니다.

시인은 언약에 충성을 다할 때에야 여호와의 실패 없는 사랑과 신실하심을 맛볼 것임을 알지만, 동시에 그 언약적인 사랑 때문에 죄 용서를 적극적으로 청할 수 있음을 압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근거해서 시인은 용기 있게 자신의 크고 무거운 죄를 고백하며 용서를 구합니다.

 

여호와의 인도하심과 구원을 확신(12-15)

과오를 저지르는 존재, 인간, 과오는 인간성의 기본적인 조건이자 불가피한 인간 요소입니다.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한계 속에서 과오를 범하게 되고 이는 다양한 생의 비극을 초래합니다.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회개한 자들을 돌아보시고 인도하십니다. 다윗도 예외가 아니어서 잚은 날에 범한 과오로 고통 받고 있습니다.

 

12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냐 그가 택할 길을 그에게 가르치시리로다 13그의 영혼은 평안히 살고 그의 자손은 땅을 상속하리로다 14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15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바라봄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12-15)

 

시인은 질문합니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 누구인가?’(12a) 시인은 여호와를 존경하고 두려워하는 자를 위해 택하신 그 길에서 여호와가 인도하실 것이라(12b) 답합니다. ‘여호와 경외’는 이스라엘 지혜신앙의 핵심이며 가장 중요한 명제입니다(잠 1:7). 다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하나님 신뢰의 표시입니다. 시인은, 그러한 자는 평안히 살고, 그의 자손은 땅을 소유할 뿐만 아니라(13) 여호와가 친밀하게 대우해주시고, 그분의 언약을 이해하고 깨닫게 될 것을 믿습니다(14). 경험과 믿음이 분리되지 않고 반영된 이러한 말들은 기계적으로 수학적으로 주고받는 계약이 아니라 친밀한 관계를 통해 얻는 깨달음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고백합니다.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바라봄은 그분만이 나의 발을 올가미에서 이끌어내시기 때문입니다’(15). 시인은 마치 덫에 걸린 짐승처럼 위기에 봉착했지만, 여전히 여호와만을 앙망한다.

 

환난에서 벗어나기를 구함(16-22)

고난 중에 또 고난을 만나면 크게 고생합니다. 사람들은 고난당하기 전에 고난을 당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잘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깊이 알게 되고 고난에 빠진 이웃을 보게 됩니다. 다윗은 겹치는 고난으로 크게 고생합니다. 안으로는 근심이 있고, 밖으로는 원수들이 호시탐탐 노립니다.

 

16주여 나는 외롭고 괴로우니 내게 돌이키사 나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17내 마음의 근심이 많사오니 나를 고난에서 끌어내소서 18나의 곤고와 환난을 보시고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 19내 원수를 보소서 그들의 수가 많고 나를 심히 미워하나이다 20내 영혼을 지켜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오니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21내가 주를 바라오니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 22하나님이여 이스라엘을 그 모든 환난에서 속량하소서(16-22)

 

시인의 탄식과 하소연은 여호와만을 앙망하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시인은 깊은 외로움과 절망 속에서 은혜를 구합니다(16). 시인은 적극적으로 호소합니다. ‘내 마음의 근심이 많으니 나의 곤경에서 나를 이끌어 내소서’(17) 애타는 간절함은 여호와를 향해 ‘보십시오!’(18, 19)라는 반복적인 외침에서 강화됩니다. 시인은 언약의 하나님을 향해 곤고와 환난, 그리고 원수들이 얼마나 많은지 ‘보십시오’라고 촉구합니다(18a; 19a). 또 시인은 자기 죄가 사함받기를 구하면서(18b), 원수들이 얼마나 심각하게 나를 미워하는지 알아주시기를 청합니다(19b). 시인을 향한 원수들의 미움은 폭력을 동반한 증오와 혐오로 표출됩니다.

 

시인은 절박합니다. 구원의 하나님을 향해 구출을 요청합니다(20). 그러고서 시인은 알파벳 마지막 자음 ‘타브’ 절의 첫 글자인 ‘온전함’과 ‘올바름’, 곧 ‘성실과 정직’이 보호해줄 것을 믿고 청합니다. 시인은 ‘내가 당신을 앙망하기 때문’이라는(21) 고백적인 선포를 끝으로 알파벳에 맞춘 시행을 마무리합니다. 시인은 처음처럼 마지막에도 여호와 하나님만을 우러러보며 의지했습니다(1-2). 그리고 마지막 시행(22)은 알파벳 ‘페’로 시작하는 ‘구속하소서’에 초점을 둡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부르며 이스라엘을 모든 환난에서 구속(속량)해주시기를 구합니다. 22절은 마지막 알파벳 ‘타브’ 시행 이후에 덧붙였기 때문에 후대의 예배 공동체가 개인적인 환난을 넘어 국가적인 어려움에서 벗어나길 바라며 첨가한 것일 수 있습니다.


시인의 기도에는 간구와 탄원, 신뢰와 확신, 회개와 중보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채롭습니다. 옴짝달싹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 지금 그는 어느 때보다도 더 적극적이고 절박합니다. 하지만 어떤 어려운 상황이든 주를 경외하고 가르침 받기를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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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24-01)

 


영광의 왕이 누구신가?

시편 24편 1-10절


한 공동체가 같은 마음과 정신을 공유함에 있어 노래한 요소도 없을 것입니다. 주거니 받거니 서로 화답하며 나지막한 산을 오르는 백성들을 그려 보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이들의 정서를 완벽히 공감하기는 어렵지만, 감격과 기쁨만은 공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시편 24편은 영광의 왕이신 하나님 찬양과 경배에 초점을 둔 시입니다. 물의 혼돈을 정복하시고 땅과 세계질서를 수립하신창조주 하나님의 우주적 왕권을 찬미합니다. 이와 함께 인간 역사에 개입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예배하기에 합당한 자격을 묻는 질문과 응답 형식의 노래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우주적 왕권 찬양(1-2)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지으신 주인이십니다. 이 땅에 존재한 모든 것은 창조하신 분이 계시고, 그분의 소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계에 있는 것들을 호명하시고 다스리시며 하나님께서 주신 분이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신앙은 창조주요, 주권자로, 영광의 왕으로 그분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1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2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1-2)

 

시인은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심을 찬양하며 시를 시작합니다. 시의 첫 시행부터 장엄합니다.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이 여호와의 것이며, 세계와 거기에 거주하는 것들이 여호와께 속했습니다(1). ‘땅’과 ‘세계’가 평행관계 안에서 안전한 거주지로서의 세상, 온갖 생물들이 활기 있게 살아가는 지구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때 시인은 땅에 소속되어 살아가는 피조물들의 주인이 여호와라고 노래합니다. 땅에 소속되어 살아가는 동식물과 사람의 조화는 질서 잡힌 세계의 그림입니다. 땅을 경작하고 돌보는 사람과 땅에 충만한 동식물들이 분리되지 않는 하나로서 여호와의 통치권 안에 공존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땅과 세계에 대한 여호와의 통치권을 구체적으로 소명합니다.

2절은 이유 접속사(키)로 시작합니다. 그가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시고, 강들 위에 세우셨기 때문입니다(2). 여호와를 지혜로운 건축자처럼 묘사하여 주권을 강조합니다. ‘바다’와 ‘강’은 구약에서 주로 한 쌍으로 언급됩니다. ‘바다’는 ‘땅’과 구별되는 모든 물을 지칭합니다(창 1:10). 일반적으로 구약에 묘사된 바다와 강은 고대근동 세계의 우주론적인 또는 신화적인 배경 속에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태초의 세상이 무질서와 혼돈의 상징인 강과 바다로 뒤덮여 있다고 믿었습니다. 시인에게 하나님께서는 혼돈의 세력을 누르시고 땅과 세계를 견고하게 세우신 분입니다(참조, 시 104:5; 욥 38:4-10). 이러한 의미에서 태곳적 홍수는 온갖 동식물과 사람 사는 땅 아래 큰 깊음의 샘들까지 분출한 사건처럼(창 7:11) 혼돈으로의 회귀이며 하나님이 창조 자체를 철회시킨 심판입니다.

 

예배에 합당한 자(3-6)

성도 모든 사람들이 예배하지만 축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누구나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주님의 복과 의를 얻지는 못할 것입니다. 얻지 못한 이유는 삶이 없이 예배만 드린다면 말입니다. 손이 깨끗한 것과 거짓 맹세를 하지 않는 아름다운 이웃 관계 후에 하나님께서는 인도하실 것입니다.

 

3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4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5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6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셀라)(3-6)

 

본문에서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그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이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문지기들에게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고 묻습니다. 성전 문지기들은 강하고 능한 여호와, 전쟁에 능한 여호와라고 대답합니다.

 

(1) 질문: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인가?(3)

 

3절에서 주제와 공간의 변화가 있습니다. 시인은 우주적인 창조 사건을 본 것처럼 상상력을 발휘하여 묘사한 후(1-2), 질문합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인가?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 누구인가?’

여호와의 산, 그의 거룩한 산은 어디입니까? 시편 맥락에서 ‘오르다’라는 말은 예배하려고 성소를 향해 행진하는 것을 일컫는 전문 용어입니다(시 47:5; 참조. 사 2:3; 38:22; 삼상 1:3,22; 삼하 6:12). 따라서 여호와의 산은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진 언덕으로, 시온 산입니다(시 2:6). 문맥을 고려하면 여호와가 혼돈의 물을 장악하시고 질서를 세우시고 왕권을 수립하신 산입니다. 시인은 우주적 질서를 수립하신 여호와를 찬미하고서 예배의 상황, 곧 언약과 관련된 ‘거룩한 곳’으로 관점을 이동시켰습니다. 따라서 거룩한 산은 예언서에서 말하는 마지막 날에 모든 민족들이 찾아올 시온 산을 의미합니다(사 2:3; 미 4:2).

 

(2) 응답: 손과 마음이 깨끗한 자(4-5)

 

거룩한 곳 시온 산에서 경배 받으실 여호와께 누가 올 수 있습니까? 시인은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청결하며, 자기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않고, 거짓 맹세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4). ‘손’은 외적인 신체 기관입니다. 이것을 통해 인간의 행위 문제와 마음에서 발현되는 내면의 순결을 강조한 것입니다. 사람의 겉과 속이 서로 모순되지 않고 깨끗하여 윤리 도덕적으로 책임감 있는 삶을 예배자의 자격으로 제시한 셈입니다.

또한 허무하고, 가치 없고, 텅 빈 것에 자기 뜻을 두지 않는 사람입니다(4b). ‘뜻’으로 번역된 ‘네페쉬’는 욕망과 마음의 상태를 표현합니다. 따라서 깨끗한 자는 ‘속임’, ‘거짓’, ‘우상’으로 자기의 뜻을 치환하지 않습니다. ‘허탄한 데’ 마음이 향하도록 자신을 내버려두지 않는 사람입니다. 또한 거짓 맹세하지 않는 사람입니다(4b). 행동으로 옮길 의지도 없으면서 허위로 맹세하는 일이 없어야 함을 뜻합니다. 따라서 윤리 도덕적인 삶과 우상을 따르는 문제는 별개의 것이 아니고 하나의 문제입니다. 이와 같은 사람이 여호와로부터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으로부터 의를 얻게 됩니다(5).

예배자의 손과 마음의 청결은(4) 결국 복과 의로 결실 맺습니다. ‘복’(베라카)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약속했던 복입니다. 독특하게 복과 의(체다카)가 시적 평행관계 안에서 동의어처럼 사용되었습니다. 구약에서 복과 의가 평행관계로 묶여 동의적 의미로 쓰인 곳은 오직 이곳뿐입니다. 이 때문에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은 것과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게 여기신 것을 서로 연결시키는 인상을 남깁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의롭습니다. 인정받는 사람이 예배자로서 하나님 임재 앞에 설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와 의로운 삶, 그리고 복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3) 확언: 여호와를 찾고 그 얼굴을 구하는 자(6)

 

시인은 예배에 합당한 자들의 성격을 최종적으로 확언합니다. ‘이와 같은 자가 여호와를 찾는 족속(세대)이며, 야곱의 하나님 당신의 얼굴을 구하는 자입니다.’ ‘여호와를 찾는 자’와 ‘하나님 당신의 얼굴을 구하는 자’가 평행하면서 서로의 의미를 보충합니다.

‘찾다’(다라쉬)는 무엇인가를 질문하고, 조언을 구하고, 탐구하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여호와를 찾는다는 것은 성소에서 예배를 드리기 위함이며(시 69:32; 암 5:6),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함입니다(창 25:22; 삼상 9:9). 현재 시행에서 여호와를 찾는다는 것은 평행하는 소절처럼(6b), 여호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 곧 하나님의 임재와 도움을 구하기 위함입니다(시 77:2). ‘구하다’(바카슈)라는 말도 기대하면서 무엇을 얻으려고 애쓰며 찾는 행위와 관련됩니다. 따라서 시인의 ‘찾고 구하는’ 행위는 언약의 하나님, 곧 야곱의 하나님을 향한 올바른 태도의 핵심입니다. 한마디로 시인이 말하는 예배에 합당한 자는 여호와의 뜻이 무엇인지 질문하며, 자기 백성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는 자입니다.

 

만군의 주이며 영광의 왕 찬양(7-10)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스리는 용사이십니다. 세상은 배은망덕하게도 자신을 만든 하나님께 저항하고 반역을 꾀합니다. 그로 인해 혼돈과 파괴가 들끓습니다. 만군의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제압하시고 통치를 회복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승전하시고 성전의 문으로 들어가시자 문들이 소리치며 환호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7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8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9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10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셀라)(7-10)

 

시인은 주제를 바꿔 여호와의 군사적인 능력을 찬양합니다. 이 노래를 부르는 역사적 정황이 시행 자체에서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아 재구성하기 어렵습니다. 다윗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왔을 때인지(삼하 6장), 전쟁이 끝나고 승리한 후 법궤가 성전으로 들어오는 장면인지, 예배 상황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 사람들의 극적인 표현인지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우주적 왕권을 고백하며 찬양한 처음 두 절(1-2)에 상응하는 만군의 주 하나님을 향한 영광송이라는 것입니다.

7-10절의 시행이 질문과 응답을 반복하는 형식미를 갖추었습니다(ABAB). 그 형식은 예술적이고 내용은 장엄합니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어 올려라/영원한 문들아, 들어 올려라/영광의 왕이 들어가신다’(7,9). 이 시행이 두 번 반복되는 데, ‘문들’은 어떤 문입니까? 보통 성문을 떠올리게 되는데, 흥미롭게 성문이 인격화하여 명령을 받습니다. 이 때문에 ‘문들’은 성전의 문지기들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평행하는 ‘영원한 문들’은 무엇입니까? ‘영원’을 뜻하는 ‘올람’은 태고성과 미래성 모두를 포함하는 미지의 시공간적 개념입니다. 옛적 ‘태고의 문들’로 해석될 수도 있고, 아직 도래하지 않은 ‘내세의 문들’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영원은 현재를 사는 인간이 경험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입니다. 이렇게 시인은 영광의 왕이 영원한 문으로 들어가시는 장면을 상상하면서,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8a,10a)고 질문합니다. 이 질문은 강하고 전쟁에 능한 전사로서의 여호와의 영광을(8bc; 참조. 출 15:3) 강조하기 위한 수사학적인 질문입니다. 시인은 군대를 통솔하시는 만군의 여호와, 그가 영광의 왕이심을(10bc) 칭송하고 높입니다. 따라서 여호와는 만군의 주인이며 통치자로서, 태곳적 창조부터 미래에 이르기까지 천상천하의 군대를 거느리는 영광의 왕입니다. 이는 우주론적인 창조 신앙과 언약백성의 역사적 구원 경험을 결합시켜 장엄한 하나님 왕권을 찬미한 것입니다.


온 세상의 혼돈을 정복하고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바로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예배 안에서도, 예배 밖에서도 왕이고 주인이십니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는 물음에 답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닫아둔 문을 열어 그분의 통치가 적용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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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23-01)


 어린양을 위한 목자의 헌신

시편 23편 1-6절


부족함과 넉넉함은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성도가 함께 지녀야 할 삶의 태도입니다. 부족한 모습을 인정할 때, 목자의 보호와 인도를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그 뜻을 순종하는 자세를 견지할 때, 넉넉함과 여유를 가지게 됩니다. 내 삶의 목자이신 주님을 얼마나 잘 따르며 살고 있습니까?

  

  • 23편은 양 떼를 돌보는 목자의 이미지로 주님을 향한 신뢰를 노래한 시입니다. 무엇보다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겠다고 다짐하는 언약 공동체를 대표하는 다윗에게 여호와는 목자뿐만 아니라 위험에서 건져주는 용서와 같습니다.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고 누이시고, 소생시키시고, 의로운 길로 이끄실 ‘나의 목자’ 여호와를 향한 감사로 충만합니다.

 

내 목자이신 여호와(1-4)

양들은 제 길만 고집하고 근시안적이고 혼자 자신을 방어할 능력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겁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양과 같은 우리를 위해 밤낮들에서 지내며 한데서 자야 하는 고된 목자입니다. 그러니 은혜를 아는 사람들은 부족함이 없습니다. 결코 만족할 수 없는 물질문명의 기준에 따라서 생각하니 없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1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1-4)

 

다윗은 부족함이 없다는 고백으로 시작합니다. 왕이 뙤기까지 많은 고통을 겪었고, 와이 되어서도 밧세바 사건, 아들 압살롬과의 달등 등, 그의 삶은 사실 부족함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자가 되시기 때문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1) 부족함 없으신 여호와(1-2)

 

다윗은 하나님께 ‘여호와는 나의 목자’(la)라고 고백합니다. 이곳 말고도 구약에서 주님을 목자의 이미지로 표현하는데(시편 28:9; 77:20; 78:52; 100:3; 이사야 40:11; 49:9-10; 에스겔 34:11-16), 이는 히브리 전통에서 아주 오래된 칭호 중 하나입니다. 야곱이 요셉을 축복할 때, ‘목자이신 하나님’(창세기 48:15)이 출생부터 지금까지 함께하심을 고백했습니다. 고대근동 세계에서도 신들과 왕들을 묘사하면서 목자 이미지로 표현하곤 했습니다. 이는 고대인들의 권위와 통치의 상징으로서 목자 이미지를 활용한 셈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다윗이 여호와를 ‘나의 목자’라고 부를 때, 자신을 그의 돌봄을 받는 양으로 고백한 것이며, 동시에 그분의 통치 아래 있는 존재인 자기 정체성을 표명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시고 목자이며 왕이십니다(참조. 미가 5:5). 목자는 일차적으로 양을 먹이고 보호하는 이미지입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 목자 이미지는 구원 역사라는 더 큰 맥락에서 출애굽과 광야 생활에서 가장 잘 드러납니다(시편 80:1; 95:7).

다윗의 고백은 자기 조상들에게 행하신 구원 행위에 근거합니다. 다윗의 고백적인 선언은 둘째 소절과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다윗은 목자이신 여호와 덕분에 ‘나는 부족함이 없다’(1b)고 노래합니다. 본래 미완료형태인데, 히브리어 구문에서 미완료형은 지속되는 현재 상태를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이것은 동시에 다윗의 조상들에게 여호와가 40년 동안 광야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셨던 기억을 반영합니다. 이스라엘 후손들이 가나안 땅에 입성하기 직전 모압 평지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회고하면서 들었던 절절한 당부, 곧 모세의 고별 설교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신명기 2:7). 그때 모세는 하나님의 선물로 받을 가나안 땅을 먹을 것에 모자람 없고, 아무 부족함 없는 땅이라고(신명기 8:9) 했습니다.

다윗은 조상들의 하나님께서 ‘나의 목자’가 되셔서 현재뿐 아니라 알지 못하는 미래까지 책임져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다윗은 전형적인 히브리 시형의 문체로 노래합니다. 두 개의 소절로 구성된 시행이 매우 음악적이고 아름답습니다. ‘푸른 초장으로 그가 나를 누이시고// 쉴 만한 물가로그가 나를 인도하신다’(2). 겨울철의 건기가 끝나고 봄비를 머금은 상쾌한 계절의 연둣빛을 연상시킵니다. 새싹이 돋는 봄날의 평화로운 풍경입니다. 목자가 인도하는 대로 양들은 편히 누워 쉬는 목가적인 그림입니다. 옛적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인도하여 거룩한 ‘처소’(출애굽기 15:13), 곧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목장’(시편 83:12)에서 평화롭게 쉴 수 있음을 노래합니다. 약속의 땅이 이스라엘 조상들에게 안식이었던 것처럼(신명기 12:9), 여호와의 목장은 다윗의 안식처가 됩니다.

 

(2) 의로운 길로 인도하시는 여호와(3-4)

 

여호와의 푸른 목장과 쉴 만한 물가에서 누가 안식하지 못하겠는가? 때문에 다윗은 고백합니다. ‘그가 나의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해 의의 길로 인도하셨다’(3). 다윗의 ‘생명’(네페쉬)을 회복시킨 목적이 마치 ‘의의 길’로 인도하기 위함인 것처럼 들립니다. ‘의의 길’은 ‘바른 길’입니다. ‘의’는 바름과 ‘곧음’이며, 마땅히 행할 ‘표준’입니다. 또한 ‘길’(마갈)은 밟아서 다져진 길을 뜻하니 오랜 세월 합의된 삶의 방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로운’ 하나님이시니 그의 양도 마땅히 가야 할 그 길, 즉 ‘곧은 길’로 인도함을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는 여호와가 자기 이름을 위함이라고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여호와, 당신의 평판 때문이 아닙니다. ‘의로우신’ 여호와 그의 이름에 어울리게, 합당하게 인도하신다는 뜻입니다.

여호와는 오래전 자기 언약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시면서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셨으나, 악행에 대한 보응도 정확히 말씀하셨습니다(출애굽기 34:5-7). 여호와께서 당신 이름에 합당한 존재로서 그 정체성을 분명히 밝히셨던 것처럼, 그의 백성도 그분의 존재 목적에 걸맞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다윗은 여호와를 ‘그분’(3인칭)으로 불렀지만, 이제 ‘당신’(2인칭 남성 단수)으로 호명합니다. 좀 더 친밀한 관계를 표시하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악을 두려워하지 않음은 당신이 나의 친구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십니다’(4). 다윗은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진 골짜기에서도 ‘악’이 두렵지 않습니다. ‘해로움’이나 불운이 닥쳐도 두렵지 않습니다.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다윗에게 여호와는 언제 덮칠지 모를 위험과 외로움에도 함께할 나의 친구이자 나와 함께 걷는 일행이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함께 계시면서 그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보호해줍니다. ‘지팡이’로 번역된 말은, 목자들이 양을 인도하는 도구입니다(미가 7:14).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의 목자는 들짐승으로부터 양을 보호하는 막대기와 양들을 돌보는 손잡이가 구부러진 지팡이를 지니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지팡이는 고대 사회에서 왕이나 재판장 또는 지도자들의 법적인 권위를 상징하는 ‘통치의 막대기’였습니다(창세기 49:10; 민수기 24:17; 시편 45:7; 에스겔 19:11, ‘규’). 여호와의 지팡이와 막대기는 다윗에게 위로의 도구입니다. 나의 안위가 된다는 말은 나의 위로와 안락함이 된다는 뜻입니다. ‘위로하다’라는 말은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하거나(이사야 66:13) 여호와가 나의 위로라는 다윗들의 언어에서(시편 71:21; 119:82),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를 표현할 때 쓰입니다(이사야 12:13; 40:1).

 

내 잔치의 주인이신 여호와(5-6)

하나님께서는 슬픔과 시름과 두려움으로 죽은 듯 쳐져 있던 양들에게 새 힘을 주는 목자입니다. 그 이름에 어울리도록 내가 의의 길을 걷도록 인도하십니다. 주님이 먼저 밟고 간 땅을 좇아 주님의 관점으로 바라보며 걷는 길이 의의 길입니다.

 

5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5-6)

 

여호와의 보호를 묘사하는 배경이 푸른 초장에서, 죽음의 골짜기로, 즐거움이 넘치는 잔칫집으로 바뀝니다. 다윗은 여호와께 고백합니다. ‘당신이 내 앞에 상을 차리시고 나의 대적들 앞에서 당신이 내 머리에 기름을 부으셨고 나의 잔이 넘칩니다’(5). 갑작스럽게 다윗의 원수가 등장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지금까지의 목가적인 분위기와 사뭇 다릅니다. 이는 아마도 다윗의 역사적인 정황이나 실존적인 상황 같아 보이지만, 원수가 누구인지 규명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다윗을 비방하고 미워하며 적대시했던 자들일 것입니다. 그들이 누구건 간에 여호와가 그들 앞에서 잔칫상을 차려주십니다. 이 ‘상’은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어 진설병을 두는 ‘상’(출애굽기 25:23)이나 희생제사를 위한 상을(에스겔 40:39) 언급할 때 사용되었지만, 왕을 위한 화려하고 풍요로운 상차림(열왕기상 4:27)에도 쓰였습니다. 이러한 문맥들을 고려하면, 이것은 필요한 식사와 잔치를 여호와가 직접 준비해주심을 강조한 표현입니다. 더군다나 머리에 기름을 바르는 것은 생기를 회복시키는 은유입니다(잠언 15:30). 또한 고대사회에서 잔칫집 주인은 손님을 맞이하며 올리브기름을 머리와 얼굴에 바르기도 합니다. 이것은 귀한 손님으로 영접하는 의식으로서 전통적으로 잔치에서는 기름이 빠지지 않았습니다(아모스 6:6; 시편 45:7; 92:10; 104:15).

이러한 의식의 상징적 의미는 하나님의 예비하심과 보호에 대한 찬미입니다. ‘나의 잔이 넘칩니다’라는 고백으로 풍요롭게 채우시는 하나님을 노래합니다. 마지막 시행의 고백은 감격과 확신에 차 있습니다. 다윗은 두 가지를 확신합니다. 첫째,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뒤따를 것인데, 살아있는 내 온 생애 동안(6ab) 이라고 합니다. ‘선하심’은 ‘좋다’라는 의미를 넘어 사람의 삶을 기쁘고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풍요롭게 하는 것과 관련된 말입니다. ‘인자하심’은 하나님의 언약적인 의무와 사랑을 표현한 핵심적인 말로 실패하지 않는 하나님 사랑을 가장 잘 드러낸 말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여호와의 집’에 오래오래 살 것을 다짐합니다(6). 이는 잔치를 베푸신 여호와, 그분의 집에서 그분과 함께 지속적인 교제를 나누는 그림입니다. 23편은 마치 ‘나는 선한 목자라’(요한복음 10:11)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된 숲의 메아리처럼 들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으로 이끄시는 목자이십니다. 돌보시고 인도하시며, 보로하시고 위로하십니다. 신실한 자를 선대하시고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십니다. 그에게만 의와 생명, 쉼과 평안이 있습니다. 위로하시고 긍휼을 베푸십니다. 거짓 목자의 음성에 현혹되지 말고 참 목자이신 주님을 따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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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22-02)


 미리 보는 십자가의 고난(2)

시편 22편 22-31절


복음의 문은 언제나 활짝 열려 있지만, 우리는 점점 복음이 위축되는 현실을 살고 있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우리 스스로 복음을 약하게 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과 생명력을 경험하지 않으면 복음이 아닌 다른 것으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나 자신부터 복음을 깊이 이해하며 능력을 맛보고, 그것을 주위 사람들에게 전하려면 어떤 변화가 필요하겠습니까?

  

  • 22편 후반부는 탄식과 애통의 부르짖음이 아니라 감사와 찬양의 소리로 가득합니다. 홀로 맞이하는 외로운 죽음과 어둠은 사라지고, 다윗은 신앙 공동체의 모든 회중과 함께 찬양하며 구원을 선포합니다. 땅의 모든 끝과 열방의 모든 족속이 온 세상 주인이신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와 예배하는 주님의 우주적 왕권의 성취를 예고합니다.

 

회중 가운데서 드리는 감사의 찬양(22-26)

하나님께서는 내 하나님이시며,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시는 참 좋은 분입니다. 그러니 두려움보다 기대를 품고 내일을 맞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침묵이 그분의 부재를 의미하지 않으며, 여전히 그는 백성과 맺은 언약에 충실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서원한 대로 자신을 죽음의 위협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가운데서 담대하게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고백합니다.

 

22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가운데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23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지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지어다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지어다 24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25큰 회중 가운데에서 나의 찬송은 주께로부터 온 것이니 주를 경외하는 자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 26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22-26)

 

십자가 고난에 초점이 맞추어진 전반부와는 달리, 고난을 넘어선 십자가의 승리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 승리를 맛본 사람들은 먼저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가운데서 찬양할 것입니다. 복음은 사람을 구원하는 능력입니다.

 

(1) 회중 앞에서의 감사와 찬양(22-24)

 

더 이상 다윗의 절망과 좌절의 탄식 소리는 없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응답을 확신했기에 여호와께 당신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속에서 찬양하겠다고 다짐합니다(22). 다윗은 혈연적인 관계를 넘어 함께 예배하는 언약 공동체인 ‘회중’ 가운데서 여호와 이름을 찬양할 것입니다.

그러고서 다윗은 언약 백성인 회중을 다양한 방식으로 부르며 동참할 것을 권합니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 야곱의 후손들,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들에게 그를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고, 두려워하라’(23). 독특한 점은 회중을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23a)라고 호명하면서, 여호와를 ‘두려워하라’(23c)고 권고합니다. 이미 언약 백성이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로서 정체성이 전제되었음에도 주님을 두려워하라는 조언은 그 정체성에 부합하는 삶을 좀 더 강조한 셈입니다.

이어서 다윗이 회중에게 주님께 찬양하고 영광 돌리고, 그를 두려워해야 할 이유를 제시합니다. 그분은 곤고한 자의 고통을 멸시하거나 경멸하는 분이 아니며, 그의 얼굴을 숨기지 아니하시고, 도움을 청하는 부르짖음에 응답하셨기 때문입니다(24). 다윗은 처음에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으로 생각했고, 부르짖어도 듣지 않으신다고 외쳤지만(1-2), 완전히 뒤바뀐 상황을 선포하며 노래합니다.

 

(2) 서원과 다짐(25-26)

 

이제 다윗은 ‘큰 회중’ 가운데서(25a) 여호와께 다짐합니다. ‘나의 찬송의 주제는 당신으로부터 오는 것이니 주를 경외하는 자들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겠습니다’(25). ‘큰 회중’으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축제의 날임을 알 수 있지만, 다윗이 무엇을 서원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고통에서 풀려나면 성전에 예물을 바치겠다고 한 것으로 보입니다(참조, 레위기 7:15-21). 서원과 갚음은 하나님과의 거래가 아닙니다. 다만 서원 갚는 자는 그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은총을 경험한 것을 공동체 앞에서 공적으로 알리고, 공동체는 서원 지킨 자의 구원에 동참합니다.

‘가난한 자들’(‘겸손한 자들’)이 배불리 먹으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양하고, 언약공동체인 회중의 생명이 항상 지속되기를 기원합니다(26). 두 시행의 이미지는 다윗이 하나님께 드린 제물 일부를 이웃들과 함께 나누는 공동체의 식사 자리를 연상시킵니다. 이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집니다. 또한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라고 했는데, ‘마음’을 뜻하는 ‘레바브’는 ‘심장’을 뜻하는 말입니다. 굶주림으로 죽을 위기에 처한 이들에게는 생명의 양식이 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영원히’라는 말은 늘, 항상, 언제나 지속되는 현재성을 표현한 것이지 내세적 가치를 표현한 말은 아닙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을 찾는 자들이 배불리 먹고 찬양하는 장면을 연상시킵니다. 마치 하나님 나라는 가난한 자들의 것이고, 주린 자는 배불리 먹게 된다는 예수님의 산상수훈 일부를 미리 맛보는 듯합니다(참조, 누가복음 6:20-21).

 

모든 열방과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찬양(27-31)

주님의 공의로우심은 산 자뿐만 아니라 죽은 자와 상차 태어날 자에게까지, 즉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까지 찬양의 제목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의 고난을 듣고도 멀리하는 분이 아니라 반드시 우리와 맺은 언약대로 언제까지든지 신실하실 것입니다. 불의한 세상에서 불안해하지 말고 주님의 공의가 우리를 지키실 것을 믿고 살아가야 합니다.

 

27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 28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 29세상의 모든 풍성한 자가 먹고 경배할 것이요 진토 속으로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 다 그 앞에 절하리로다 30후손이 그를 섬길 것이요 대대에 주를 전할 것이며 31와서 그의 공의를 태어날 백성에게 전함이여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 할 것이로다(27-31)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찬양해야할 사람들은 유대인만이 아닌 이방인과 모든 민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나라의 주재이시기에 십자가의 복음은 이 모든 사람에게 승리를 경험하게 합니다.

 

(1) 땅 끝 모든 족속이 여호와를 예배(27-29)

 

개인적인 감사는 회중 속에서 찬양으로 커지고, 예배자인 다윗의 서원 갚음은 공동체의 축제에서 나누는 공동체의 식사로 확장되어 생명의 활기로 충만해졌습니다(24-26). 다윗은 이제 자신의 구원 경험을 더 폭넓게 확장시켜 땅 끝은 민족이 주 앞에서 예배하기를 열망합니다. 개인의 구원 경험은 공동체로 확장되고 좀 더 보편적인 관점으로 전환됩니다. 이를 표현한 시인의 언어는 장엄합니다. 당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모든 나라의 민족이 돌아와 경배할 것입니다(27). 모든 민족이 ‘기억하고 돌아온다’는 것은 1차적으로 모든 열방이 여호와가 자기 백성에게 행한 일을 깊이 생각하고 돌아오는 것이지만, 결국 온 세계의 창조자이신 여호와 하나님께 민족들이 귀환하는 우주적인 사건과 우주적인 왕권의 묘사입니다. 창조를 받은 자들이 창조자에게로 돌아오는 것을 마땅한 귀결로 묘사합니다. 이 때문에 시인은 온 세계에 깃든 하나님의 왕권을 노래합니다. ‘그 왕권은 여호와께 속하였고, 모든 나라들 가운데 계신 통치자시라’(28). 창조자는 온 세상의 통치자이며 왕이요, 그분이 여호와임을 명시적으로 표현합니다.

 

여호와 왕권을 찬송하며 경배하는 것은 풍요를 누리며 사는 자들만의 일이 아니라 죽은 자들도 마찬가지임을 선포합니다(29). 이는 매우 독특합니다. 생명 없는 죽은 자들, 곧 ‘진토 속으로 내려가는 자’, ‘자기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가 어떻게 찬송할 수 있습니까? 이는 구약 다른 본문의 입장과 다릅니다(참조. 시편 30:9;이사야 38:18). 과장된 표현일 수도 있지만, 하늘과 땅 그리고 삶과 죽음이 모두 하나님의 통치 영역에 포함되기에 찬송과 경배가 오로지 살아 있는 자들의 것만이 아님을 강조한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해석자들 중에는 온 열방이 경배하기 위해 돌아오는 것을 예루살렘(또는 시온) 전통을 반영한 것으로 보고 종말론적인 사상과 연결 짓기도 합니다. 그러나 현재의 문맥에서 다윗은 생명과 죽음을 가르는 장벽의 구분이 의미 없을 정도로 여호와의 통치권이 죽음의 영역까지 미치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다윗은 살아 있는 사람은 도무지 경험할 수 없는 영역까지 포함시켜 여호와의 우주적 왕권을 노래합니다.

 

(2) 구원받은 후손들이 여호와 공의를 전파(30-31)

 

이 땅에서 고난당한 자들의 삶은 죽음으로 귀결되지 않고 구원받았으며, 온 열방의 증거가 되었습니다(24-29).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한 세대로 끝나지 않고 죽음을 초월하여 아직 출생하지 않은 세대에까지 미칠 것입니다(30-31). 죽음은 모든 인류가 공평하게 맞이할 순간의 사건입니다. 하지만 구원을 경험한 다윗은 하나님의 역사가 한 세대에서 멈추지 않음을 확신하며 노래합니다. 다윗은 후손이 여호와를 섬길 것이고, 세대를 거듭하며 나의 주가 회자되면서 전해질 것이라고(30) 예고합니다.

다윗은 ‘여호와’를 ‘나의 주’라고 호명하여 자기 삶에 구체적으로 개입하셔서 고통의 소리를 들으시고 구원하신 주님에 대해 개인적이고 친밀한 경험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그 친밀한 경험은 다윗만의 특별한 개별적인 사건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며, 세대들 가운데서 끊임없이 재현될 것입니다.

 

후손들은 와서 그분의 ‘공의’를 장차 출생할 백성에게 전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행하신 것 때문입니다(31). 다윗은 아직 출생하지 않은 미래의 세대들에게까지 주님의 공의, 곧 정의롭고 공평한 행위로 규명되는 ‘구원’이 미칠 것을 예고합니다. 주님의 ‘공의’는 ‘의’(righteousness)와 ‘정의’(justice), ‘구원’(salvation), ‘해방’ (deliverance)의 모든 과정과 관계된 하나님의 핵심적인 품성이며 사역 중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때문에 22편은 고난 받은 한 개인만의 구원 사건이 아니라 온 인류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로서 메시아적인 관점으로 해석됩니다.

22편의 전반부(1-21절)에서 한 사람의 지독한 외로움과 고난이 메시아 예수의 사역과 연결되어 해석된 것처럼, 후반부(22-31절) 역시 세대를 거듭하여 메시아를 통해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차별 없는 ‘의’를 노래합니다(참조. 시편 78:6; 로마서 3:22).


 

하나님의 사랑이 의심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주님은 그 순간에 신뢰와 죽음의 순종으로 시험을 이겨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살려 만왕의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어렵고 힘든 시간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럴 때일수록 고난을 통해 온전케 하시려는 선하신 뜻을 믿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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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22-01)

 

  


미리 보는 십자가의 고난

시편 22편 1-21절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신 분입니다. 그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선조들의 역사와 구원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예언을 통하여, 메시아가 오셔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계획을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명료히 보여 주셨습니다. 신구약에 보여 주신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역사를 찬찬히 생각하며 감사 찬양을 드립시다.

 

  • 21편은 왕을 위한 감사 시입니다. 다윗은 주의 힘과 능력으로 얻은 구원의 기쁨을 노래합니다. 또한 기름 부음 받은 왕을 통해 얻은 승리와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확신합니다. 그리고 왕 주변을 돌러싼 적들과의 싸움에서 얻은 승리는 오직 언약 관계 안에서 존속되며 과거의 승리를 기억하는 것은 현재의 신뢰를 낳고 미래의 성공을 확신하는 근거임을 노래합니다.

 

하나님의 침묵과 의인의 탄식(1-2)

어렵고 힘든 일이 있으면, 하늘을 보면서 탄식입니다. 몸이 아픈 것도, 힘들고 홀로 남겨진 것도 더 견딜 수 있지만, 어려운 상황에 하나님께서 침묵하신 것은 죽음과 다를 바 없습니다. 좀처럼 변하지 않는 환경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시고, 멀리하여 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1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2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1-2)

 

다윗의 첫마디는 자기를 버리신 하나님을 향한 호소입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1a) ‘내 하나님’을 반복해서 부르는 ‘엘리 엘리’라는 말은 구약에서 유일한 표현입니다(참조, 마태복음 27:46; 마가복음 15:34). 그는 하나님께서 아니라 ‘내 하나님’을 부릅니다. 깊은 유대감과 간절함이 배어 있습니다. 항의처럼 들리는 질문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는 친밀한 유대감 없이 불가능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결코 떠나지 않겠다고(신명기 31:6, 8) 말씀하신 것을 마음에 두었습니까? 적극적으로 어찌 나를 멀리하고 돕지 않으시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않으시는지(1bc)따져 묻습니다. ‘신음 소리’는 괴로움과 번민으로 소리치고 신음하는 말들을 표현합니다. 이것은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향해 응답을 촉구하는 반어적인 외침입니다.

다윗은 다시 ‘내 하나님이여’라고 부르며 자신이 밤낮으로 부르짖고 잠잠히 있지 않는데 왜 응답하지 않으시는지(2) 묻습니다. 지금 다윗에게 하나님께서는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입니다. 밤낮없이 소리쳐도 소용없습니다. 다윗은 침묵하고 있을 수만은 없어 묻고 또 물으며 절실함을 피력합니다.

 

조상들에게 응답하신 하나님을 신뢰(3-5)

하나님께서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고 있을 때 두렵기 시작합니다. 진퇴양난으로 앞이 보이지 않아 앞으로 나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뒤로 물러설 수는 상황에서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런 응답이 없을 때 답답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뜻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과거에 선조들에게 응답하셨던 하나님께 이제도 응답해 주실 것이라고 찬양합니다.

 

3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4우리 조상들이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으므로 그들을 건지셨나이다 5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나이다(3-5)

 

고통 중에 부르짖어도 응답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향한 항변의 방향이 달라졌습니다. 다윗은 갑자기 ‘그러나 당신은 거룩하시며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좌정하신 분입니다’(3)라고 말합니다. ‘내 하나님’을 부르며 자신의 고통에 집중하지만, 자신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고백합니다. 마치 그룹 위에 앉으신 하나님(사무엘하 6:2; 시편 80:1; 99:1)을 떠올려 이스라엘의 찬송(또는 영광) 중에 앉으신 하나님으로 대체한 것처럼 보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찬송을 보좌삼아 앉으신 것을 상상하면서 하나님을 언약백성의 찬양의 대상과 본질로 고백합니다.

‘우리 조상들이 당신을 신뢰하고 신뢰해서 당신이 그들을 건지셨습니다’(4), 다윗은 ‘우리 조상들’과 ‘당신이 그들을 건지셨다’는 말로 출애굽과 광야의 삶을 현재로 소환합니다.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 속에서 가장 강력한 하나님의 구원 행위와 은혜를 언급하며, 묵상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이 그때처럼 응답하시기를 촉구합니다. 더군다나 그들은 당신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당신을 신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않았다는 것을(5) 각성시켜 자신이 더 이상 유기되거나 수치 당하는 일이 없기를 열망합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내려는 다윗의 절실한 내적 투쟁은 ‘신뢰했다’(의뢰했다)라는 말을 세 차례나 반복한 데서 드러납니다. 다윗은 믿음의 조상들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과거 사건으로 묻어두지 않고 다시 현재의 경험으로 되살리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의 공개적인 멸시(6-8)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 사람들은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뒤에서 조롱합니다. 환경도 힘든데, 사람들까지 더 힘들게 만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 온전케 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끝까지 신뢰로 가난을 이겨낸다면, 주님 따라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6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 거리니이다 7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8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6-8)

 

또 ‘그러나’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당신’(3)이 ‘그러나 나는’으로 바뀌었습니다. 구원받은 자기 선조들과 다름을 강조하고 싶었습니까? 다윗은 ‘그러나 나는 벌레이고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의 비방거리이며 백성의 조롱거리입니다’(6)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상태이며,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보장받지 못한 처지인지 묘사합니다. 신체적 질병에서 오는 고통 못지않게 타인의 비방은 견딜 수 없는 고통입니다. 더군다나 자기를 보는 사람마다 비웃고 입술을 비죽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합니다(7). 그 말은 더없이 다윗을 초라하게 만듭니다. 다윗은 그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8). 여호와를 신뢰하는 것을 빈정대는 사람들은 원인과 결과에 따른 보상 체계를 앞세워 맹렬하게 공격해옵니다. 사람들이 다윗의 고통을 보응의 체계로 보면 고통은 죄 때문입니다. 이것은 숨통을 조여 오는 고통입니다. 반대로 죄 없이 당하는 고통이라면 하나님께서 위협받습니다. 이는 매우 위험한 조롱입니다.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을 신뢰(9-11)

참 신앙은 하나님을 지식적으로 아는 것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또 지식적인 신앙은 결코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 있어야 하고,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과 자신과의 특별한 관계에 대한 고백을 통하여 구원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9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10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11나를 멀리 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까우나 도울 자 없나이다(9-11)

 

다윗은 또 ‘그러나’로 말문을 엽니다. 그는 구원받지 못하는 자신을 조롱하는 사람들 앞에서도 위축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를 모태에서 끌어내셨고, 당신은 내가 당신을 의지하게 하셨습니다. 내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있을 때조차’(9). 다윗은 숨막혀오는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성에 조금도 의심을 품지 않습니다. 출생의 순간에도 죽지 않고 살게 하신 하나님께서 어머니 품에서 보호받는 유아기에도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셨다는 신앙고백입니다.

다윗은 자기 의지보다 하나님의 의지가 더 크게 작용했음을 강조하지만, 역설적으로 하나님은 지금 너무 멀리 계신다고 느낍니다. 다윗은 몹시 걱정스럽고 속이 끓습니다. 그는 어머니의 자궁에서 나올 때부터 당신은 나의 하나님이 되셨으니(10) 멀리하지 마시기를 간구합니다. 환난 날이 가까이 왔지만 도울 자가 없기 때문에(11) 더 간절합니다. 매우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짐승처럼 달려드는 원수들의 위협(12-18)

들판에서 피폐해 죽어가는 짐승처럼 쓰러져 가고 있을 때 주변인들을 보면, 죽음을 기다리는 독수리처럼 사방에 에워싸고 있습니다. 대답이 없는 하나님을 기다리는 신앙을 조롱하기도 합니다. 자녀들의 곡진한 신뢰의 고백이 때로 영광이 아니라 쓰디쓴 조롱으로 돌아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끝까지 우리가 이 음란한 세대에서 당신을 인정하기를 기대하십니다.

 

12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러쌌으며 13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으며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 14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15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16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17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18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12-18)

 

절망의 상황은 짐승처럼 달려드는 자들 때문에 더 험악해집니다. 다윗이 자신이 겪는 고통을 축소해 말하거나 삭제할 수 없습니다. 다윗은 많은 황소와 바산의 힘센 소들이 입을 벌리고 사자처럼 달려든다고 말합니다(12-13). 공격적이고 잔인하고 위협적인 짐승들은 많고 강합니다. 이 때문에 시인은 두렵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나는 물처럼 쏟아지고, 내 모든 뼈는 어그러지고, 내 마음은 밀랍(초)처럼 녹았고,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는 입천장에 붙었다’(14-15ab)고 합니다.

이렇게 다윗은 슬픔과 고통을 마음껏 표현합니다.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고통이 시인을 짓누릅니다. 다윗은 고통과 두려움 때문에 견디기 힘겨워하며 하나님께 말합니다. ‘당신이 나를 죽음의 흙먼지 속에 두셨나이다’(15c). 그가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죽음에 임박했음을 감지하고 궁지에 처한 사람이 되어 공포와 고통을 호소합니다.

다윗이 죽은 사람처럼 보였습니까? 개들이 에워싸고 악한 무리는 수족을 찌르고(16), 뼈를 셀 수 있을 정도로 앙상한 상태입니다. 사람들은 다윗을 주목해서 쳐다보고, 그들은 아직 살아있는 사람 앞에서 겉옷과 속옷을 나누고 제비 뽑습니다(17-18). 겉옷도 모자라 속옷까지 빼앗기는 치욕스러운 상황에 던져졌습니다. 사람들이 주목하는데 옷 벗김을 당하는 수모와 굴욕을 당하는 비참한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신뢰하며 호소(19-21)

어려움이 닥치면 탈질하고 마음이 녹아 사라지듯이 용기를 잃어버립니다. 목이 말라 혀가 입천장에 붙었으며 뼈들은 그 숫자를 헤아릴 만큼 앙상하게 튀어나왔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환경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은 ‘주여 내게서 말리하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바라고 기댈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19여호와여 멀리 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20내 생명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21나를 사자의 입에서 구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들소의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19-21)

 

그렇다고 가만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시인이 멀리서 돕지 않으셨던(1) 하나님을 향해 호소합니다. ‘여호와 여 멀리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의 도움이 되소서’(19). 처음에 다윗은 ‘내 하나님’이라고(1) 불렀지만, 지금은 언약의 이름, ‘여호와’를 부르고, ‘나의 도움’(‘나의 힘’)이라고 고백합니다. 이미 다윗은 나를 멀리하지 마시기를 요청했지만(11), 여전히 응답 없는 하나님을 향해 절규하듯 ‘나의 도움’이 되시기를 청합니다.

다윗은 더 필사적이고 구체적입니다. 자기 ‘생명’과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것’을 칼과 개의 세력으로부터 낚아채 주시고(20), 사자의 입에서 구원해주시기를 간청합니다. 나를 구원해주는 가장 결정적인 말입니다. 이후 ‘들소의 뿔로부터 당신이 내게 응답하셨습니다’(21b)라는 완료형태 문장으로 급전환합니다. 이와 같은 구문법적인 변화는 들소의 뿔처럼 위협적인 세력에 받히려는 순간 하나님의 신속한 개입과 응답이 실현되는 극적인 장면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의심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주님은 그 순간에 신뢰와 죽음의 순종으로 시험을 이겨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살려 만왕의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어렵고 힘든 시간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럴 때일수록 고난을 통해 온전케 하시려는 선하신 뜻을 믿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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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21-01)

  


왕의 승리를 기뻐하며

시편 21편 1-13절


시편20편이 왕의 출전을 앞두고 그를 축복하여 승리를 기원하였다면, 21편은 승리한 후, 돌아오는 왕과 병사들을 맞아 기쁨을 노래하는 시입니다. 우리의 왕이신 주님께서 죽음과 사탄의 세력을 이기고 승리하셨습니다. 왕의 승리가 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 21편은 왕을 위한 감사 시입니다. 다윗은 주의 힘과 능력으로 얻은 구원의 기쁨을 노래합니다. 또한 기름 부음 받은 왕을 통해 얻은 승리와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확신합니다. 그리고 왕 주변을 돌러싼 적들과의 싸움에서 얻은 승리는 오직 언약 과계 안에서 존속되며 과거의 승리를 기억하는 것은 현재의 신뢰를 낳고 미래의 성공을 확신하는 근거임을 노래합니다.

 

왕의 기쁨과 근거(1)

하나님께서는 병거와 말을 의지하지 않고 싸운 왕과 병사들에게 승리를 주셨습니다. 왕과 백성의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다윗의 승리를 하늘의 승리로 완성하신 아들에게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셨습니다. 탁월한 영광으로 승리를 이루신 주님을 기뻐 찬양하시길 바랍니다.

 

1여호와여 왕이 주의 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크게 즐거워하리이다(1)

 

첫 시행의 핵심은 왕이 승리한 사실보다 그 구원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에 초점을 둡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를 부르며 고백한 시인의 말에 있습니다. ‘여호와여, 왕이 당신의 힘으로 기뻐합니다. 당신의 구원으로 인해그가 즐거워함이 얼마나 큰지요!’(1). 다윗은 왕의 승리가 언약 관계로 묶인 여호와의 힘 때문임을 강조합니다. 시편 20편에서 백성들은 여호와가 왕을 ‘구원하실’ 것을 고대했습니다(20:5). 그 기대가 현실화한 것을 감격하는 감사의 목소리처럼 들립니다. 그러니까 왕이 기뻐하는 것은 여호와의 ‘힘’과 ‘구원’ 때문입니다. 두 단어는 주로 전쟁과 군사적인 맥락에서 발견되며(시편 28:8; 118:14; 140:7; 이사야 12:2; 26:1), 시행의 평행관계 안에서 주님의 힘이 곧 구원(승리) 이라는 뜻입니다.

시편 20편에서 누군가는 군사력을 의지하나 언약 백성의 공동체인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한다는(20:7) 고백의 흐름을 잇습니다.

 

왕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복(2-7)

시시각각 우리를 노리는 사방에 노립니다. 그런 악한 영들을 분별할 하나님의 지혜가 있어서야 합니다. 사방에 도사린 영적인 어두움을 잘 분별하고픈 우리의 갈망과 기도 역시 주께서 외면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제대로 잘 분별된 영성으로 늘 승리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2그의 마음의 소원을 들어 주셨으며 그의 입술의 요구를 거절하지 아니하셨나이다(셀라) 3주의 아름다운 복으로 그를 영접하시고 순금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셨나이다 4그가 생명을 구하매 주께서 그에게 주셨으니 곧 영원한 장수로소이다 5주의 구원이 그의 영광을 크게 하시고 존귀와 위엄을 그에게 입히시나이다 6그가 영원토록 지극한 복을 받게 하시며 주 앞에서 기쁘고 즐겁게 하시나이다 7왕이 여호와를 의지하오니 지존하신 이의 인자함으로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2-7)

 

승리하고 돌아온 왕을 보며 기뻐하며 감사하는 내용입니다. 이 기쁨의 근원은 주의 힘으로 말미암아,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다윗은 이 기쁨을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나열하는데, 기도에 응답해 주신 것에 감사함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1) 마음의 소원과 복을 주시는 하나님(2-3)

 

다윗은 왕의 기쁨과 큰 즐거움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사실을 밝힙니다. 여호와 이름을 이미 부른 상태에서(1) 시인은 고백합니다. ‘당신이 그의 마음의 소원을 주셨습니다. 당신은 그의 입술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2). 여호와는 왕의 ‘마음의 소원’, 곧 마음에서 솟구쳐 오르는 간절한 열망을 주셨고, 왕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왕의 ‘마음의 소원’을 주신 주체가 여호와라는 표현이 독특합니다. 왕의 마음에 타오르는 열망은 사적인 이득을 취하려는 이기적인 소원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뜻과 왕의 소원이 일치합니다. 언약 관계 안에서 인간 왕과 하나님의 마음이 일치하는 것은(참조. 예레미야 32:38-39; 에스겔 11:19-20) 매우 이상적인 상태입니다. 왕은 한마디로 여호와가 지목하신 왕이었습니다(참조, 사무엘상 13:14). 여호와가 왕을 위해 주신 마음의 소원은 왕의 입술의 요청으로 발설되니 거절당할 이유가 없습니다. 다윗은 여호와가 왕을 ‘아름다운 복’으로 기꺼이 맞이해주시고, 순금으로 만든 왕관을 씌우셨다고(3) 여호와를 찬미합니다. ‘복’(베라카)은 옛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셨던 복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창세기 12:2; 28:4; 49:25). 이는 하나님께서는 언약 백성에게 은혜로 주시는 ‘선물’입니다. 더군다나 순금의 왕관을 왕이 스스로 쓰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가 씌워주신 것에 시인은 감격합니다. 여호와가 왕의 적법한 통치권을 수여하심에 대한 감사입니다.

 

(2) 지속적인 복과 여호와의 인애(4-7)

 

왕이 생명을 구하면 여호와가 생명을 주셨고, 왕이 오래오래 영원한 날들을 살게 하셨습니다(4).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주시는 분이지만, 놀랍게도 왕에게 ‘영원한 날들’을 주셨다고 합니다. 왕이 사람인데 ‘영원한 장수’(개역개정)가 가능합니까? 고대근동 세계에서왕의 장수를 구하는 것은 매우 일반적인 기도제목이며(열왕기상 3:11,14; 시편 61:6; 72:17) 문학적인 과장법입니다.

다윗은 생명과 장수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구원’을 통해 왕의 영광을 크게 하셨고, 여호와가 왕에게 존귀와 위엄을 입히셨다(5)고 찬미합니다. 영광과 존귀와 위엄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만, 여호와의 구원으로 인해 왕은 하나님의 영광, 위엄, 존귀를 반영하는 자가 됩니다.

다윗은 참으로 여호와가 왕에게 ‘항상’ 지속되는 ‘복들’을 부으시고, 주님의 임재 앞에서 기쁨으로 즐겁게 하심을(6) 노래합니다. 이는 생명과 다양한 종류의 필요한 복들이 반복되는 현재를 항상 누릴 수 있게 하신 주님을 향한 감사입니다. 다윗은 ‘그 왕’이 여호와를 의지하니(보테아흐), 가장 높으신 이의 인자함 때문에 왕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7) 고백합니다. 언급된 ‘왕’은 다윗입니다. 이때 다윗은 여호와의 ‘인자함’, 곧 실패하지 않는 ‘언약적인 사랑’이 그를 지탱하게 하는 힘이 될 것을 강조합니다. 결국 하나님과 그 백성의 언약 관계 안에서 삶의 안전은 보장됩니다. 무엇보다 언약 관계를 특징짓는 두 단어, ‘인자함’과 의심하지 않고 의지하는 관계는 시 전체를 압축하고 요약하는 말입니다. 이는 언약 백성을 대표하는 왕과 하나님의 관계를 특징짓는 말이며, 언약 관계가 지속되려면 ‘신뢰’가 유지되어야 함을 뜻합니다. 7절은 공동체가 예배 시간에 가장 엄숙하게 낭독하는 언약 신앙의 고백인 셈입니다.

 

왕에게 베푸실 하나님의 복(8-12)

하나님께서 왕을 통해 이루실 완전한 승리를 노래합니다. 왕은 남은 대적들을 섬멸하고 보좌를 굳건하게 할 것입니다. 하늘에 오른 왕이 만국을 미혹한 자를 불과 유황 못에 던질 것입니다. 왕의 승리를 본 교회는 승리를 믿고 기도하며 마지막 싸움에 참여해야 합니다.

 

8왕의 손이 왕의 모든 원수들을 찾아냄이여 왕의 오른손이 왕을 미워하는 자들을 찾아내리로다 9왕이 노하실 때에 그들을 풀무불 같게 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그들을 삼키시리니 불이 그들을 소멸하리로다 10왕이 그들의 후손을 땅에서 멸함이여 그들의 자손을 사람 중에서 끊으리로다 11비록 그들이 왕을 해하려 하여 음모를 꾸몄으나 이루지 못하도다 12왕이 그들로 돌아서게 함이여 그들의 얼굴을 향하여 활시위를 당기리로다(8-12)

 

이 단락에서 문장 형식이 달라집니다. 6절까지 여호와를 ‘당신’(2인칭 남성 단수)으로 언급했고, 7절은 다시 ‘여호와’(1)를 직접 거명했습니다. 다시 인칭대명사 ‘당신’을 언급하는데 ‘당신’이 여호와를 가리키는 것인지, 왕인지 모호합니다. 그러나 ‘언약적 사랑’의 혜택을 누린 왕을 연속적으로 말하므로 8절의 ‘당신’은 왕입니다. 개역개정 본문도 ‘당신’을 ‘왕’으로 표기했습니다. 이어지는 시행은 문맥상 마치 왕을 위한 신탁 말씀이 전달되는 분위기입니다. 왕의 손은 모든 원수를 찾아내고 왕을 미워하는 자들을 찾아낼 것입니다(8). 왕이 노할 때, 원수들은 풀무불처럼 타오르고, 여호와의 분노는 그들을 삼켜 소멸할 것입니다(9). 여호와의 진노 자체가 불이 되어 삼켜버렸고, 왕의 분노는 곧 여호와의 분노와 동일시됩니다. 이는 또한 여호와의 뜻과 왕의 마음이 일치된 것을 표현한 2절과 비슷합니다. 원수의 완전한 소멸은 왕의 원수들의 후손까지 확장됩니다. 왕은 자기 원수의 후손을 땅에서 멸하고 완전히 씨를 말리게 될 것입니다(10). 후손들까지 멸하는 것은 고대 전쟁의 특징이고, 고대근동 세계의 종주권 조약에서도 불충성한 속국 왕의 후손들을 멸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시편 37:28; 호세아 9:11-14). 또한 왕을 해하려고 누군가 음모를 꾸미려 할지라도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11). 왕이 원수들의 등을 돌리게 하여 그들 얼굴에 활시위를 당길 것입니다(12). 겁에 질려 등을 보이며 도망치던 원수들이 얼굴을 돌리게 만들어 치명타를 입히는 장면 묘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목한 왕에게 패한 원수들과 대적들은 세상에서 끊어질 정도의 철저한 패배가 있을 것을 예고합니다. 이처럼 다윗과 하나님의 언약은 왕의 모든 통치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왕은 국가의 존망이 달린 적들과의 전쟁에서 생존할 것이며, 그 생존의 필연적 이유는 군사력이 아니라 여호와의 ‘언약적 사랑’을 신뢰하는 것에 달렸기 때문입니다.

 

백성의 찬양과 근거(13)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날에 심판의 화살이 아닌, 영광과 존귀와 위엄으로 옷 입히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싶지 않습니까? 왕은 전쟁에서 살아남기만을 구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자손손까지 그 생명(왕위)을 이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13여호와여 주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우리가 주의 권능을 노래하고 찬송하게 하소서(13)

 

다윗의 감사 기도의 마무리는 찬양과 다짐입니다. 왕을 위한 이 기도문의 작성자가 예언자인지 제사장인지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가 누구든 21편의 기도문을 작성한 다윗은 최후 승리의 약속 또는 신탁의 말씀을(8-12) 받았기에 주님의 능력을 높이며 찬양합니다. ‘여호와여 당신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우리가 주의 권능을 노래하고 찬송합니다’(13). 여호와의 능력을 찬미하는 시인은 기도를 시작하면서 여호와 ‘당신의 힘으로’(베아즈카) 왕이 기뻐한다고 감사를 드린 것처럼, 기도의 마지막에서도 ’당신의 능력으로‘(베우제카) 높여지기를 찬미합니다.

시인은 승리에 도취되어 여호와의 능력을 망각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능력이 높여지기를 열망합니다. 그리고 언약공동체, 곧 ‘우리’가 하나님의 ‘강력한 힘’, 그의 ‘권능’(개역개정)을 노래로 만들어 부를 것을 다짐합니다. 이것은 여호와가 개입하셔서 그의 혁혁한 능력과 승리가 역사적 현실로 나타나기를 열망하는 반응입니다.


 

인생은 날마다 전쟁 같은 날입니다. 생존을 위해 출정하듯 출근합니다. 슈퍼 갑의 세상과 분투하며 싸워야 합니다. 하지만 주님이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하늘에 오르신 왕이 되셨고, 마침내 심판하실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신 주님을 노래하며 세상의 맞서 그리스도의 남은 싸움을 싸워 승리해 나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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