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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56-01)


하나님을 신뢰하는 기도

시편 56편 1-13절


 

‘외유내강(外柔內剛)’이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겉은 부드러운데, 속은 강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다윗에게도 이런 양면성이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의 모숩과 사람들 앞에서의 모습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의 모습과 우리의 모습을 비교하면서 묵상해 보도록 합시다.

 

  • 원수들이 끊임없이 시인의 생명을 노리는 상황에서 두려움이 엄습할 때마다 시인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면서 ‘사람이 내게 어떻게 하겠는가?’하고 자신에게 되물으며 두려움을 극복하고 믿음을 세우기 위해 몸부림칩니다. 악인의 심판을 구하고 자신의 편이요 자신의 고통과 눈물을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것을 확신하며 감사제 드릴 것을 서원합니다.

 

간구와 원수의 괴롭힘(1-2)

누구나 살다보면 광야를 만납니다. 큭히 하나님을 따르는 성도들에게는 누구나 한 번쯤 광야를 통과하는 시간이 주어집니다. 이 시기는 하나님의 ‘강한 팔’을 구할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구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다 보면 어느새 그분이 원하는 성품이 형성되고 역경에 대한 인내력이 더 강해집니다.

 

1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사람이 나를 삼키려고 종일 치며 압제하나이다 2내 원수가 종일 나를 삼키려 하며 나를 교만하게 치는 자들이 많사오니(1-2)

 

시인은 하나님께 은혜 베풀어주시기를 짧게 간구한 후 곧바로 은혜를 구하는 이유를 말합니다. 원수가 시인을 종일 공격하고 괴롭히며 짓밟듯 해하고 억압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시인을 공격하고 해치는 자들은 그 수가 많으며 또한 교만한 자들입니다. 1절의 “사람”은 단수이나 2절의 “원수”는 복수입니다. 시인의 상황은 많은 원수들이 삼키고 종일 치는 것을 반복하는 것(1,2)에서 잘 나타납니다. 시인을 짓밟는 원수들의 괴롭힘이 끊임없이 반복되어 시인이 편할 날이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시인은 시시때때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두려워합니다.

 

신뢰의 고백(3-4)

당신도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하나님께 수많은 질문을 하게 되고, 그분께 직접 나아가 애원하며 통사정하고 싶은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메마른 심령은 오직 하나님만이 공급하실 수 있는 시원한 생수를 무첮 갈망하기 때문에, 이 시간 동 하나님의 조언과 인도하심을 가장 잘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3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 4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3-4)

 

생명의 위협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시인은 ‘두려울 때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말합니다. 수 많은 원수들에 둘러싸여 반복되는 괴롭힘을 당하면서 두려움이 엄습해올 때마다 시인은 주님을 의지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의지하면서 그분의 말씀을 찬송합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신다는 약속의 말씀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주님을 의지할 때 시인은 두려움을 극복하게 됩니다. 그 가운데 시인은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나를 어떻게 하겠는가?’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며 다시 확신 속에서 담대함을 갖습니다. ‘혈육을 가진 사람’은 썩을 육체를 가진 사람, 즉 죽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인간을 말합니다. 원수들이 아무리 강하고 시인을 종일 괴롭히고 죽이려 할지라도 그들은 죽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자들이요,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자들입니다.

시인은 두려움이 몰려올 때마다 순간순간 주님을 의지하고 구원의 약속의 말씀을 찬송하고 ‘연약한 인간이 나를 어떻게 하라’하고 자신에게 말하며 믿음에서 흔들리지 않고 굳게 서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원수들이 시인을 괴롭게 하는 것도 반복해서 말하고, 시인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도 반복해서 말하는 것을 통해 괴롭고 두려운 상황 속에서 믿음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마음속에서 부단히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밖으로는 원수와 싸움을 하고 안으로는 자신과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안에서의 싸움에서 승리함으로 밖에 있는 싸움의 리를 확신합니다. 이것은 이 시를 읽는 모든 자들이 두려울 때 어떻게 해야 할지 그들의 마음이 올바른 반응을 하도록 돕습니다.

 

원수들의 악행에 대한 탄식(5-6)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시간에 잘못된 태도로 임하거나 어떻게든 ᄈᆞᆯ리 빠져나갈 궁리만 하고 있으면, 더 견디기 어려워지고 더 큰 좌절과 패배를 경험할 것입니다. 그 광야와 같은 과정을 지날 때에는 인생의 마른땅을 걷게 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5그들이 종일 내 말을 곡해하며 나를 치는 그들의 모든 생각은 사악이라 6그들이 내 생명을 엿보았던 것과 같이 또 모여 숨어 내 발자취를 지켜보나이다(5-6)

 

이 단락에서는 원수들의 악한 계획에 대해 좀 더 상세하게 말합니다. 원수들은 종일 시인의 말을 일부러 오해하여 비방합니다. 그들이 시인에 대해 가진 모든 생각은 악한 것뿐입니다. 시인의 원수는 단순히 시인을 개인적으로 반대하는 자가 아니다. 그는 모든 좋은 것을 반대하는 자입니다.

그들은 악한 생각을 가지고 함께 모여 음모를 꾸밉니다. 그리고 숨어서 시인의 발자취를 지켜봅니다. 발자취는 발뒤꿈치를 뜻하며, 발뒤꿈치를 지켜봄은 뒤에서 은밀히 공격하려는 원수들의 비열하고 사악한 모습을 나타냅니다. 시인이 어디로 가는지 미행하며 자신들이 모여 꾸민 음모를 실행할 적절한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시인의 생명을 노리고 있습니다. 마치 야수가 먹이를 낚아채기 위해 주시하고 있는 것처럼 시인의 생명을 취하려고 주시하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심판의 간구(7-8)

하나님의 임재로 나아가는 방법은 성장하고 배우려는 의지가 중요합니다. 앞으로 우리는 광야 같은 삶의 여정에서 여러 가지 특징을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성경을 대할 때마다 하나님의 임재로 더 깊이 나아갈 수 있기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방해하는 어떤 장애물도 우리의 삶에 끼어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7그들이 악을 행하고야 안전하오리이까 하나님이여 분노하사 뭇 백성을 낮추소서 8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7-8)

 

7절 상반절은 해석하기 어렵습니다. “안전하오리이까”의 동사를 명령형으로 보고 ‘악행으로 인해 그들을 쫓아내십시오’라고 번역한다면, 하반절 ‘하나님이여 분노로 인해 뭇 백성을 낮추십시오’와 평행을 이룹니다. 만일 부정사로 본다면 ‘악으로 인해 그들에게 안전함이 있겠습니까?’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동사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번역이 달라질 수 있으나, 내용의 의미는 악행으로 인해 그들에게 구원이 없고 그들이 멸망 당할 것이라는 점을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인은 ‘악을 행하는 민족들에게 진노하심으로 이들을 낮추어주십시오’라고 간구합니다. “낮추소서”는 악인들이 교만하게 시인을 쳤던 것(2)과 대조됩니다. 수많은 교만한 악인들에 둘러싸여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시인이 악에 대해 분노하시고 공의롭게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 악인을 심판하시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방랑을 주께서 주의 깊게 보시고 염두에 두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방랑 생활에서 그가 고통 가운데 흘린 눈물을 주의 병에 담아주시기를 구합니다. “병”은 물, 우유, 술 등을 담아두는 가죽으로 만든 자루입니다. ‘눈물을 주의 병에 담아 달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삶의 모든 상세한 것을 다 보고 계시므로 그가 고통 속에서 흘린 눈물을 잊지 마시고 기억하셔서 그의 고통을 해결해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원수들로 인해 시인이 유리방황하며 눈물 흘린 것이 주의 책에 다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고 강조하면서 하나님이 잊지 않으시고 자신을 구원해주실 것을 다시 확인하고 있습니다.

 

신뢰의 고백(9-11)

때로는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경우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이유를 알게 되면 하나님께 주시는 힘과 기쁨으로 그 과정을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확실히 함으로 믿음이 흐트러지지 않습니다. 구원에 대한 확신은 감사의 예배로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시고 우리 편이 되어 주시기에 우리 삶에 감사와 예배가 충만해야 합니다.

 

9내가 아뢰는 날에 내 원수들이 물러가리니 이것으로 하나님이 내 편이심을 내가 아나이다 10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리이다 11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9-11)

 

시인은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주를 의지하겠다고 하고(3), “내가 아뢰는 날”에는 내 원수들이 물러갈 것이라고 말합니다(9). 두려움 속에서 주를 의기하고 생명의 위협 속에서 주께 부르짖어 간구할 때 주께서 가신의 원수들을 물리쳐주실 것을 확신하며 선언합니다. 시인이 이런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내 편이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신뢰하는 자들의 편이십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들의 사정을 다 헤아려 아시고 그들의 어려움을 해결하시며 그들이 구하는 것을 들어주십니다.

10-11절에서는 3-4절에서 나왔던 신뢰의 고백을 반복합니다. 내용이 똑같지 않지만 많은 부분 비슷해서 마치 후렴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3절과 10절 상반절만 다를 뿐 4절과 10b-11절은 두 단어 외에는 동일합니다. 두 단락의 다른 점은 뒤에 나오는 신뢰 고백에 주의 말씀을 찬송한다는 것이 한 번 더 나와 구원에 대한 확신을 더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시인이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사정을 알고 기억하시며 그의 편이 되셔서 그가 기도할 때 원수들을 물러가게 하실 것이라고 강하게 확신하였기 때문에 구원을 약속하시는 말씀에 대한 찬송이 강조된 것입니다.

 

찬양과 감사의 서원(12-13)

세상의 그 무엇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롬 8:38-39). 어떤 난관에 처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라는 진실을 잊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응답을 확신하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나의 고통과 눈물을 하나님께 쏟으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12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서원함이 있사온즉 내가 감사제를 주께 드리리니 13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12-13)

 

‘주께 서원함이 있다’는 것은 과거에 서원을 드려 그 의무가 있다는 뜻으로, 또는 서원을 드리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루실 때에 감사제를 드리0겠다는 서원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편이 되셔서 그의 생명을 죽음에서 구원하셨고 생명의 빛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하지 않게 하셨음’을 수사의문문으로 물어 하나님의 구원을 강조합니다. 13절은 동사의 완료형을 사용함으로 이미 일어난 일처럼 보이지만, 시인이 구원에 대한 확신을 완료형으로 표현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대표족인 것 두 가지는 탐욕과 공포입니다. 특히 공포야말로 수천 년에 걸쳐 구속의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혀 온 대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세상의 논리를 따르고, 세상의 요구에 응하려 노력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두려워할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음을 다시금 기억하고, 당당하게 세상에 맞설 수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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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55-01)


들으시며 심판하실 신실하신 하나님

시편 55편 1-23절


 

운전자가 눈을 갈리고 운전할 수 없습니다. 순종은 이런 눈가리개를 벗겨내는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공통된 부르심이 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입니다(빌 3:14; 롬 8:29).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정하신 부르심의 길로 들어서지도 못한 채 곁길로 빠지고 맙니다.

 

  • 거짓과 죄악과 폭력을 행하는 악인들로 인해 분쟁과 재난과 억압이 떠나지 않는 성에서 시인은 악인의 압제와 핍박으로 인해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두려워하며 도망가서 피하기를 원합니다. 특히 친구가 배반하여 시인을 대적하므로 괴로움과 분노 속에서 하루 종일 탄식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도움을 위한 기도(1-3)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을 제대로 보면, 우리의 모든 존재는 ‘하나님의 성품’으로 충만해집니다(히 4:12-13; 요일 1:5). 우리 안에 어두움이 조금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에 대해 “눈이 건강하다”라고 표현합니다. 반면 눈이 악한 것에 고정되어 있으면, 온 몸이 어두워집니다.

 

1하나님이여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할 때에 숨지 마소서 2내게 굽히사 응답하소서 내가 근심으로 편하지 못하여 탄식하오니 3이는 원수의 소리와 악인의 압제 때문이라 그들이 죄악을 내게 더하며 노하여 나를 핍박하나이다(1-3)

 

시인은 하나님을 부르며 시를 시작합니다.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간구할 때에 숨지 마소서”라고 간청합니다(1). 자신의 어려운 형편을 외면하지 마시고 굽어 살펴보시고 응답하시며 도와주시기를 구합니다. 시인은 근심과 한탄 속에서 마음이 편치 못하여 방황하며 혼란스럽다고 합니다(2). 3절에서는 고통 속에서 기도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말합니다. 원수의 소리와 악인의 압제 때문입니다. 다음 문장에서 이를 자세히 설명하는데, 원수들이 재앙을 내게 쏟아부으며 분노하고 강한 적개심을 뿜어내고 있습니다. 악인들이 시인을 향하여 분노와 적개심으로 소리를 지르며 압제하고 있는 상황에서 시인은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고통과 두려움으로 인한 탄식(4-8)

우리 안에 있는 등불은 무엇으로 인해 점점 어두워지거나 밝아지게 됩니까? 우리 마음에 샛별이 떠오르면 우리는 어두움에 거하지 않습니다. 이 약속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기 때문에, 어두움이 그를 사로잡을 수 없습니다.

 

4내 마음이 내 속에서 심히 아파하며 사망의 위험이 내게 이르렀도다 5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고 공포가 나를 덮었도다 6나는 말하기를 만일 내게 비둘기 같이 날개가 있다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 7내가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머무르리로다 (셀라) 8내가 나의 피난처로 속히 가서 폭풍과 광풍을 피하리라 하였도다(4-8)

 

시인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묘사한 후, 이 속에서 자신의 심정이 어떠한지를 그립니다(4-8). 마음이 심히 고통스러울 뿐 아니라 생명의 위협을 느껴 두려움과 떨림으로 견딜 수 없는 상황입니다(4-5). 죽음의 공포와 전율 속에서 시인은 비둘기처럼 날개가 있다면 어디론가 날아가서 편히 쉬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멀리 날아가 아무도 없는 광야에라도 머물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합니다(6-7). 광야는 사실 사람이 살 수 없는 죽음의 땅입니다. 그런데 그 광야로 가면 편히 쉴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가 살고 있는 삶의 현장이 얼마나 험악한 상황인가를 암시해줍니다. 시인은 피난할 수 있는 곳으로 속히 가서 폭풍과 광풍을 피하기를 바합니다(8). 폭풍과 광풍은 분노와 적개심으로 가득 찬 원수의 소리와 압제(3)를 상징하는 은유적 표현입니다.

 

성내 악인의 멸망을 위한 간구(9-11)

사람은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성을 쌓고, 고시를 형성하고, 친구를 사귀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고통과 위협을 당하여 차라리 아무것도 없는 광야로 도망하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사람이 만든 것은 궁극적인 안전장치가 될 수 없습니다. 시인이 겪고 있는 고통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9내가 성내에서 강포와 분쟁을 보았사오니 주여 그들을 멸하소서 그들의 혀를 잘라 버리소서 10그들이 주야로 성벽 위에 두루 다니니 성 중에는 죄악과 재난이 있으며 11악독이 그 중에 있고 압박과 속임수가 그 거리를 떠나지 아니하도다(9-11)

 

사람이 살 수 없는 광야를 오히려 피난처라고 생각할 만큼 시인이 사는 곳이 험악한 상황임을 앞에서 암시했는데, 이 단락에서는 시인이 사는 성 안의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개역개정과 달리 히브리 본문에서는 9절이 원수의 심판을 구하는 간구, ‘멸하소서, 주여(아도나이), 혀를 나누소서(잘라 버리소서)’로 시작됩니다. 평행을 이루는 ‘멸하소서’와 ‘혀를 나누소서’는 혼돈과 나눔(분열)이 일어나게 하여 대적들을 심판해달라는 간구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언어의 혼잡과 나눔으로 심판하셨던 창세기 11장 바벨탑 사건을 생각나게 합니다.

명령형으로 심판을 간구한 후, 히브리 본문에서는 9절 하반절이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시작하며 심판을 간구하는 이유가 나옵니다. 시인이 성내에서 악인으로 인한 강포와 분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성내에서 싸움과 분쟁이 일어나는데 이것은 폭력적인 싸움입니다. 10-11절은 성안의 상황을 더 자세하게 묘사합니다. 10절의 “그들”은 강포와 분쟁을 일으키는 자들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성벽 위는 성을 지키는 자들이 성 안팎의 문제들을 빨리 발견하고 해결하기 위해 보초를 서는 곳인데, 폭력과 싸움을 일으키는 악인들이 밤낮으로 성벽 위에 두루 다닌다고 합니다. 악인들이 성안을 휩쓸고 다녀서 성안이 폭력적인 싸움으로 가득 차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 외에도 성안에는 죄악과 재난이 있고 파괴 행위들이 난무하며, 거리에는 압제와 거짓이 떠날 날이 없습니다. 생명의 풍성함과 안식을 보장해 주어야 할 성에 온갖 범죄가 자행되어 성안이 거짓과 불의와 억압으로 가득 차 있는 상황입니다.

 

친구의 배반과 심판 간구(12-15)

눈을 가린 베일이 주님의 형상을 왜곡시키는 것처럼 들보도 동일한 작용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자신 안에 있는 들보를 먼저 제거해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다른 형제자매의 눈에 있는 티도 제거할 수 있게 된다는 하십니다. 일단 내 눈의 들보가 맑고 순수한 동기로 남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12나를 책망하는 자는 원수가 아니라 원수일진대 내가 참았으리라 나를 대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나를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미워하는 자일진대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라 13그는 곧 너로다 나의 동료, 나의 친구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 14우리가 같이 재미있게 의논하며 무리와 함께 하여 하나님의 집 안에서 다녔도다 15사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임하여 산 채로 스올에 내려갈지어다 이는 악독이 그들의 거처에 있고 그들 가운데에 있음이로다(12-15)

 

앞에서 성안에 악이 가득 찬 것을 말하다가 12절 이하에서 갑자기 자신의 원수가 친구라는 내용이 나와 이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9절 상반절에서 원수를 멸해달라고 간청한 후, 하반절에서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심판을 구하는 이유가 나왔는데, 12절도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시작하므로 심판을 구하는 이유가 연장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12-13절 내용을 보면, ‘원수가 나를 대적하여 과격하게 말한다면 참았을 것이고, 나를 미워하는 자가 나를 대항하여 자기를 높인다면 그를 피하여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원수가 나를 대적하면 원수니까 대적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참을 수 있다. 그런데 나를 대적하여 거칠게 말하고 자신을 높이는 자가 원수가 아니라 바로 너다. 나의 동료요, 나의 친구요. 나의 가까운 친우다.’ 더구나 시인은 그 친구와 함께 친밀한 교제를 나누었고 무리 속에서 함께 성전 예배에 참석하곤 했습니다(14). 이들은 단순히 세상적인 우정만 있는 친구가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사귄 믿음의 친구였습니다. 원수의 대적보다 더 괴로운 것은 친구의 배신입니다. 아마도 2b-5절, 9-11절에서 보여주는 시인의 고통과 혼란스러움의 가장 큰 원인이 친구의 배신일 것입니다. 이에 시인은 원수들에게 어떤 시도도 해볼 수 없을 만큼 갑자기 죽음이 임하기를 구합니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거하는 곳마다 죄악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15).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16-19b)

순종하는 사람은 처음에는 희미한 빛으로 시작하지만, 점차 더 밝아져 영광에서 영광으로 이르고, 급기야는 한낮의 태야과 같이 활활 타오를 것입니다. “의인이 길은 돋는 햇살 같아서 크게 빛나 한낮의 광명에 이르거니와”(마 13:43) 이 세상에서 온전케 되던 의인들은 심판의 날에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게 될 것입니다.

 

16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로다 17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 18나를 대적하는 자 많더니 나를 치는 전쟁에서 그가 내 생명을 구원하사 평안하게 하셨도다 19옛부터 계시는 하나님이 들으시고 그들을 낮추시리이다(셀라)(16-19b)

 

배신의 상처로 인해 격렬하게 원수의 심판을 구한 후, 시인이 마음을 진정하고 다시 여호와를 바라보며 주께서 구원하실 것을 신뢰합니다. 하루 종일 근심하고 탄식하며 기도를 멈추지 않을 때 여호와께서 그 소리를 들으실 것을 확신합니다. 대적하는 자가 많고 그들이 공격하기 위해 자신에게 다가오지만,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구원하시고 평안하게 하신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생명을 구원하다’는 완료형이지만 기원을 표현합니다.

19절에서는 하나님을 ‘태초부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 영원부터 영원까지 우주의 통치자이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며, 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으시고 악인들을 낮추실 것이라고 다시 한 번 확신합니다.

 

배신한 친구의 모습(19c-21)

지금 여러분에게 고난이 닥쳤다면 다윗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고난을 이기려 하지 말고 먼저 기도에 매달려야 합니다. 다윗은 하루 세 번의 기도 시간을 정했고, 항상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생명을 구원하시고, 평안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기도에 응답하실 때, 구원과 평안이 주어질 것입니다.

 

19c… 그들은 변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함이니이다 20그는 손을 들어 자기와 화목한 자를 치고 그의 언약을 배반하였도다 21그의 입은 우유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그의 마음은 전쟁이요 그의 말은 기름보다 유하나 실상은 뽑힌 칼이로다(19c-21)

 

시인은 친구의 교활한 모습을 다시 생각합니다. 그들은 악을 행함에 있어서 전혀 변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습니다. 친한 친구를 배반하고 언약을 저버립니다. 그들의 말은 버터와 기름처럼 부드럽지만, 마음은 전쟁터처럼 살벌하고 언제든지 찌를 수 있도록 칼집에서 뽑아놓은 칼과 같습니다. 언제든 손쉽게 악을 행할 준비가 되어있는 자들입니다.

 

구원에 대한 확신 고백(22-23)

우리가 짐을 지고 가면, 안정감을 누리지 못하고 이리 비틀, 저리 비틀합니다. 우리의 삶에 있는 무거운 짐들을 맡겨 놓을 곳이 있다면 참으로 행복할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에게는 기꺼이 우리의 짐을 지기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그동안 붙잡고 있던 우리의 짐을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께서는 그 짐을 지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붙들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22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23하나님이여 주께서 그들로 파멸의 웅덩이에 빠지게 하시리이다 피를 흘리게 하며 속이는 자들은 그들의 날의 반도 살지 못할 것이나 나는 주를 의지하리이다(22-23)

 

22절 말씀은 시인이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또는 자신과 같은 처지의 믿음의 사람들에게 하는 권면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자신을 포함한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하는 권면으로 보입니다. ‘네 짐 곧 너의 염려를 다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지키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이 넘어지거나 쓰러지는 것을 영원히 허락하지 않으신다.’ 힘든 상황에 있는 사람에게 이 말씀만큼 든든한 위로의 말씀이 없을 것입니다. 시인은 완전히 마음의 평정을 회복하고 확신에 차서 이런 권면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부르며 시를 시작했던 시인은 하나님을 부르며 시를 마무리합니다. 악인들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심판을 확신하며 하나님께서 피를 흘리며 속이는 사자들을 파멸시키실 것을 간구합니다. 자신은 변함없이 주를 의지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리 가운데 보재진 양과 같이 세상을 살아갑니다(눅 10:3). 양이 이리 떼를 이길 수 없듯이 우리의 힘으로 세상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승리하시고 반드시 악인들을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다윗이 오직 하나님께 부르짖음으로써 구원의 은혜를 누렸듯이, 우리도 흔들리지 않고 거룩한 백성의 의무를 감당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누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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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54-01)


생명을 붙드시는 하나님

시편 54편 1-7절


 

‘사람을 의지하면 안 된다. 하나님만 의지해야 한다’라는 말을 수없이 듣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던 믿음이 금세 눈에 보이는 사람들에게로 향하는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많은 어려움과 위기를 겪었던 다윗은 어떻게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에게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비결을 배워보겠습니다.

 

  • 악한 자들이 생명을 위협하는 어려움 속에서 시인은 하나님만이 자신을 돕는 분이며 자신의 생명을 붙들어주시는 분임을 고백하고 자신을 구원해주시고 원수에게는 악으로 갚아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합ㄴ지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시고 모든 환난에서 건지실 것을 확신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며 낙헌제로 제사를 드리겠다고 서원합니다.

 

도움을 구하는 기도(1-2)

 

다윗의 탄식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은 다윗의 환난과 위기 앞에서 얼마나 건절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호소했는지를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 유일한 구원이 소망이시기에 있는 힘을 다해 하나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게속 부르짖어야 합니다.

 

1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하소서 2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이소서(1-2)

 

시인은 “하나님이여”라고 부르며 하나님께 나아옵니다. 그리고 네 개의 명령형 동사를 사용해서 자신의 기도를 들으시고 구원해주실 것을 간청합니다. 먼저 ‘주의 이름으로 구원해달라’고 합니다. 사실 주님의 이름으로 구원해달라는 것은 심상치 않은 기도입니다. 시인은 주님과 어떤 관계에 있기에 자신을 주님의 이름으로 구원해달라고 합니까? 주의 이름으로 구원해달라는 것은 주님의 명예와 영광을 위해서 구원해주시는 것도 포함하고, 또한 주님의 이름은 주님 자신을 가리키므로 주님께서 가지신 근본적인 성품(성실하심[5]과 선하심[6])과 권세와 능력으로 구원해주시기를 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주님의 이름으로 구원해달라는 것은 그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 특별한 관계는 4절에서 설명해줍니다.

평행을 이루면서 나오는 간구,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하소서”는 앞의 간구의 의미를 이해하도록 돕습니다. 주님의 힘으로 나를 변호해달라는 것은 시인이 강한 자에게서 어려움을 겪는 것을 암시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대항할 수 없음을 알고 주님의 능력으로 자신을 보호해달라는 것입니다. ‘변호하다’는 옳고 그름을 가려서 공의로운 판단을 구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시인은 강한 자와의 관계에서 자신에게 잘못이나 불의한 일이 없는데도 억울하게 고통을 당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최고의 재판장이시며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자신의 억울한 일을 공롭게 판결해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2절에서 시인은 다시 하나님을 부르며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을 간청합니다. 기도에 응답하셔서 구원해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악한 자들의 횡포(3)

이기적인 행동의 근본적인 원인은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않음’입니다. 하나님을 잊을 때 인간은 자기만 남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Coram Deo)’에 살아가야 합니다. 다윗에게 잘못이 없기 때문에 포악한 자들이 그를 죽이려 하는 명분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다윗을 죽이려 합니다.

 

3낯선 자들이 일어나 나를 치고 포악한 자들이 나의 생명을 수색하며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셀라)(3)

 

3절에서는 시인이 하나님께 간청하는 기도를 드리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히브리 본문에서는 3절 앞에 ‘왜냐하면’이 나와서 간청하는 이유, 즉 시인이 어떤 어려운 상황에 있는지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시인은 “낯선 자”들의 공격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낯선 자”(자림)의 의미에 대해 이방 민족으로 보기도 하지만, 이방 민족이 이 문맥에서 어색하게 여겨져서 탈굼과 몇몇 히브리 사본에서는 ‘오만한 자’로 고쳐 읽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방 민족이나 오만한 자로 보기보다는 3절 하반절의 ‘그들이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않았다’와 연결시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해 보입니다. 낯선 자를 일반적으로 모르는 사람, 또는 시인의 편이 아닌, 시인과 전혀 다른 뜻과 성향을 가진 사람이라고 보았을 때, 하나님을 신뢰하는 시인에게 있어서(4) 낯선 자의 의미는 하나님을 떠나고 언약공동체에 합당하지 않은 자를 칭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낯선 자들”과 “포악한 자들”, 두 표현이 평행을 이루어 낯선 자들이 포악한 자들임을 말해줍니다. 포악한 자들이 시인을 죽이려고 그의 생명을 찾고 있다고 합니다. 포악한 자들은 잔인한 폭력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자들입니다. “낯선 자들”과 “포악한 자들”은 구약에서 다섯 번 평행을 이루며 나타납니다(시 86:14; 사 25:5;29:5; 겔 28:7; 31:12). 아마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서 잔인함과 폭력으로 사람들에게 공포를 일으키는 자들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공동체에 합당하지 않은 자들에 대한 표현으로 보입니다. 이들의 삶의 특징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않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시편 53편의 하나님께서 없다고 하는 어리석은 자들과 같다.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의지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불순종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아예 눈을 감아버리는 자들입니다.

 

심판을 구하는 기도(4-5)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성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의인을 돌보시고 악인을 멸하시는 섭리를 베푸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성실하게 응답하시는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면서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약 1:6) 태도입니다.

 

4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 5주께서는 내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시리니 주의 성실하심으로 그들을 멸하소서(4-5)

 

다윗은 포악한 자들이 그의 생명을 없애려는 상황에서 하나님을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로 고백합니다. ‘나의 생명을 수색하는 포악한 자들’ 앞에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을 내세운 것입니다.

 

(1)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고백(4)

 

시인의 대적에 대해 말하는 3절과 하나님께 대한 시인의 고백을 표현하는 4절은 상반되는 표현을 통해 시인과 대적이 대조되고 있습니다. 히브리 원문에서 4절은 ‘보라’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보라’라는 말은 사람들의 주의를 집중시키며 시인과 대적의 대조를 강조하는 효과를 갖습니다. 사람들의 주의를 집중시키며 시인은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주님(아도나이)으로 불러 자신의 주가 되심을 환기시키며 강조합니다. 참으로 사람들의 주의를 집중시킬 만한 고백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 자요.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맡기고 전적으로 의지하는 자입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주님이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시인의 이런 신앙고백은 1절에서 시인이 주의 이름으로 자신을 구원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었던 근거, 즉 하나님과 시인의 관계를 잘 드러내줍니다.

3절과 4절을 통해 볼 수 있는 시인과 대적의 대조되는 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대적들은 시인의 생명을 빼앗으려는 자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시인의 생명을 붙들어주시는 분입니다. 대적들은 하나님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 자들이지만, 시인은 하나님을 주라고 부르고 자신을 돕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이들은 인생에서 정반대의 길을 걷는 자들입니다.

 

(2) 심판을 구하는 기도(5)

 

시인과 하나님과 대적의 관계를 분명하게 밝힌 후, 5절에서는 악인에 대한 심판을 간구합니다. 포악한 자로부터 억울하게 생명의 위협을 당하고 있지만,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자신을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구원해주시기를 간구했던 시인의 기도는 자연스럽게 악인의 멸망을 위한 간구로 이어집니다. ‘주께서 그의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실 것이다’는 원수가 시인에게 행하려고 했던 악을 원수에게 돌아가게 하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악이 나온 곳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악의 부메랑을 믿었습니다. 악한 자가 자기가 파놓은 함정에 자기가 빠지는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정의를 행하실 것을 믿었다. 악은 반드시 징계를 받을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 가운데 시인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악인들에게 반드시 보응하셔서 그들을 멸망시켜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서원과 확신(6-7)

어려움이 닥쳐오면 주저하지 말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다윗의 생명을 붙드셨던 하나님께서 우리도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선택한 결과가 옳은 일이었다는 것을 아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6내가 낙헌제로 주께 제사하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주의 이름이 선하심이니이다 7참으로 주께서는 모든 환난에서 나를 건지시고 내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내 눈이 똑똑히 보게 하셨나이다(6-7)

 

다윗은 하나님께서 이루실 구원을 확신하며 서원을 다짐합니다. 아직은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포악한 자들이 여전히 그의 생명을 찾아다니는 상황이지만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시고 원수에게 보응하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1) 서원(6)

 

생명의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 구원을 간구하던 시인은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주님이 자신의 피난처가되시고 악인들에게 합당한 징계를 내리실 것을 확신한 후 이제는 구원을 받고 성전에 나아가 하나님께 제사 드릴 것을 바라보고 있다(6절). 자원하여 기쁨으로 드리는 낙헌제로 하나님께 제사하며 하나님의 이름에 감사하겠다고 합니다. 악인을 멸하시고 시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기뻐하고 감사하며 즐거워함으로 낙헌제를 드리겠다는 서원입니다.

 

(2) 확신(7)

 

히브리 본문에서는 7절 앞에 '왜냐하면(키 2)이 나와서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이유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주께서 모든 환난에서 건지시고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똑똑히 보게 하셨다'의 동사들이 완료형으로 되어 있어서 시인이 이미 구원받은 것처럼 보인다. 구원받을 것에 대한 현재의 확신에 대한 근거로 과거에 구원받은 것을 암시하거나, 또는 시인이 구원받을 것에 대해 너무 확신한 나머지 마치 이미 일어난 것처럼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려움과 문제 한가운데에서 주님을 바라보는 시인은 아직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지만 이미 구원을 확신하고 감사의 노래를 부른다. 믿음은 어려움의 한가운데에서 감사의 노래를 부르게 합니다.


시인은 억울하게 당하는 환난 속에서도 하나님이 자신을 지켜 주실 것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아직 그에게는 환난이 더 남아 있었지만, 우리는 그가 이후에 어떤 영광을 얻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환난을 겪지만, 그것은 또한 하나님이 나의 편이시고 나의 도움이심을 경험하는 좋은 계기가 됩니다. 이 사실을 확신하고 승리하시는 성도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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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53-01)


하나님 없이 사는 어리석은 사람

시편 53편 1-6절


 

당신은 하나님을 얼마나 경외하며 그분의 권위에 어떻게 반응합니까?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그분의 말씀과 임재 안에서 떤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에 불순종하거나 적당히 타협하는 것이 내게 더 유익할 때도 하나님께서 기꺼이 순종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 어리석은 자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고 선을 행하지 않고 가증한 악을 행합니다. 그들이 어리석은 이유는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하나님을 찾는 자와 선을 행하는 자를 찾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어서 죄악을 행하며 하나님의 백성을 삼키는 자들은 하나님이 흩어버리시지만, 이스라엘은 구원하셔서 그 포로된 자들이 돌아와 즐거워하며 기뻐하게 하실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의 생각과 행동(1)

세상에서 어리석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계신 줄 알면서도 그를 의지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찾지도, 부르지도 않는 자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을 하면서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합니다. 더러운 자요 선을 행하지 않는 자입니다. 그가 믿는 것은 자기 힘이요, 재물뿐입니다. 말이 아니라 삶으로 하나님을 부인하는 실재적 무신론자입니다.

 

1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그들은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1)

 

시인은 어이없고 기가 막힌 심정으로 시의 첫 구절을 시작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을 찾지 않으며 그의 마음속으로 하나님이 없다고 단정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것은 철학적인 면에서 무신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존재한다 해도 인간 사건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으며 사람들의 행동에 전혀 책임을 묻지 않는다고 보는 것입니다. 시편 10:4에서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있으나마나 한 존재로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있든 없든 무슨 상관인가? 하나님이 있다고 뭐가 달라지나?’ 이런 생각을 가지고 실제 삶의 태도에서 하나님께서 없는 듯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론적 무신론자가 아니라 실제적 무신론자입니다. 어쩌면 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고 싶어서 하나님께서 안 계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기정사실화 해 버리고 하나님에 대해 눈을 감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눈을 감은 다음 그들은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합니다. 즉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없다는 태도로 살아가는 자들은 부패하고 가증한 악을 행하며 선을 행하지 않습니다. ‘부패하다’는 비뚤어지고 망가진 것을 의미합니다. 생각과 행동이 비뚤어지고 망가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없다는 잘못된 전제로 인해 이들의 모든 생각과 판단과 행동이 왜곡된 것입니다. 생각과 행동이 비뚤어진 이들은 선을 행하지 않고 가증한 악을 행할 뿐입니다. 가증한 악이란 혐오스럽고 몹시 불쾌한 악이나 불의함을 말합니다. 이런 면에서 어리석은 자라는 평가는 지적인 능력의 면이 아니라 도덕적인 면에서의 평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없다는 생각에서 악을 행하는 행동이 나옵니다. 신앙과 윤리적인 삶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찾으심과 찾지 못하심(2-3)

지혜로운 사람이란 하나님을 찾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뜻을 삶의 기준으로 삼아 선을 행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여전히 선을 행하는 지혜로운 자들을 찾으십니다. 혹시 당신은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진 않습니까?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없는 것처럼 행동하지 않습니까?

 

2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3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한 사람도 없도다(2-3)

 

하나님께서는 몸소 몸을 굽혀 세상 가운데 지혜로운 사람을 찾으십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란 하나님을 찾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뜻을 삶의 기준으로 삼아 선을 행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1) 하나님을 찾는 자를 찾으심(2)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속으로 하나님께서 없다고 단정하고 하나님에 대해 눈을 감아버립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사람들을 굽어살피시면서 누군가를 찾고 계십니다(2). 지각이 있어서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지 살펴보고 계십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영역, 땅은 인간의 영역으로 구분합니다. 이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인간의 구별됨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지각이 있는 자는 슬기로운 자로 분별력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지혜로운 자를 말합니다.

 

(2) 선을 행하는 자가 없음(3)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지혜로운 자를 찾아보신 후 내린 결론은 모든 자가 바른 길에서 떠나 잘못된 길로 가고 있습니다. 즉 죄악을 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더러운 자가 되고 도덕적으로 부패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며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세상은 선을 행하는 자는 없고 어리석은 자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1절과 3절에 ‘없다’라는 단어가 두 번씩 모두 네 번 나옵니다. 네 번 중 ‘선을 행하는 자가 없다’를 표현하는 것으로 1절에서 한 번, 3절에서 두 번 사용하여 모두 세 번 사용함으로 ‘선을 행하는 자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는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모든 사람이 다 죄 아래에 있다’는 것을 논증할 때 인용했습니다(롬 3:10-12).

 

행악자의 무지와 멸망(4-5)

성도라면 끝까지 하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악인들은 세상을 다스리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힘없는 자들을 압제하며 호의호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심판하셔서 그들로 수치를 당하게 하실 것입니다. 악한 이들의 횡포로 처한 현실이 암담할 때, 자기 백성들의 피난처가 되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4죄악을 행하는 자들은 무지하냐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하나님을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5그들이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 크게 두려워하였으니 너를 대항하여 진 친 그들의 뼈를 하나님이 흩으심이라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셨으므로 네가 그들에게 수치를 당하게 하였도다(4-5)

 

지각이 있어서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지 살피고 찾아보신 결과, 하나님께서는 선을 행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자도 하나님께서 없다고 결론 내렸고, 하나님께서도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고 결론 내리셨습니다. 각각의 결론이 옳았는지, 어떤 결과를 이루는지를 이 단락에서 말해줍니다.

 

(1) 행악자의 무지(4)

 

4절에서는 어리석은 자를 “죄악을 행하는 자”로 부릅니다. ‘죄악을 행하는 자들은 알지 못하는가?’ 이 질문은 ‘어떻게 그렇게 무지한가?’, ‘그렇게도 이해하지 못하는가?’와 같은 어조입니다. 시인이 1절에서 어이없고 기가 막힌 심정으로 말했다면, 여기서는 답답함으로 탄식하는 듯 묻습니다. 무엇을 알지 못한다는 것인지, 그리고 왜 어떤 상황에서 이런 질문을 하는지를 다음 문장에서 말해줍니다. 이들이 행하는 죄악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하나님을 부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하나님께서 없다고 여기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밥을 먹는 것처럼 아주 쉽게 억압하고 착취하고 짓밟고 있는 것입니다. 4절을 다르게 표현하면, ‘행악하는 자들이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지 못해서 내 백성을 떡 먹듯이 집어 삼키는 것이 아니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4절은 1절을 반복하는 질문입니다. ‘죄악을 행하는 자는 정말 어리석은 자가 아니냐?’

 

(2) 행악자의 두려움과 멸망(5)

 

5절은 죄악을 행하는 자들에 대한 심판을 다룹니다.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이방 군대가 이스라엘에 쳐들어와서 진을 쳤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시므로 그들이 패배하여 물러갔던 것으로 보입니다. ‘행악자들이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 크게 두려워했다’고 하는데, 히브리 원문에서는 5절 맨 앞에 ‘그곳’(거기)이라는 단어가 나와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곳은 행악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떡 먹듯이 먹던 장소로, 주저함이나 두려움 없이 마음대로 악을 행하던 곳이며,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고통과 죽음의 장소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무서운 공포가 임했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이방 나라와 싸울 때 하나님께서 적들에게 임하게 하셨던 두려움이 이들에게 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방 군대가 이스라엘을 대항하여 진을 쳤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공포에 떨게 하시고 물리치시므로 적들이 패하여 그들의 시체가 여기저기 흩어졌습니다. 이스라엘에 쳐들어와 이스라엘에게 수치를 주려고 했던 대적들이 이스라엘에게 큰 수치를 당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없다는 어리석은 자들은 그들의 악행에 대한 심판을 받아 두려움과 실패와 수치를 당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보호를 받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소망과 기쁨(6)

순종하는 자는 약한 자가 아니라 진정 강한 자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로 나아가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계시된 진리에 순종해야만 합니다. 편안하고 안전하고 친숙한 곳을 떠나 하나님의 영이 인도하는 대로 무조건 따라가는 데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용기는 순종에서 나옵니다.

 

6시온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줄 자 누구인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며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6)

 

‘누가 시온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이루어줄 것인가?’를 묻는 이 질문은 시온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이 나오기를 바라는 소망을 담고 있습니다. 시온은 생명과 축복의 원천이신 하나님께서 계신 곳입니다. 시온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이 나오기를 소망하는 것은 시온에 계신 여호와로부터 구원이 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백성을 구원하실 때에 그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백성을 지키시고 보호하실 것을 확신하며 시인이 이를 기원합니다.


어리석은 자, 죄악을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부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전혀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보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진정한 자신도 볼 수 없고 다른 사람도 보지 못합니다. 그들의 눈에 다른 사람들은 착취의 대상으로 보일 뿐입니다.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며 자신을 채우는 삶은 다른 사람뿐 아니라 자신의 삶도 파멸로 몰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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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52-01)


영원한 하나님의 인자하심

시편 52편 1-9절


 

성경은 종종 사람을 나무에 비유합니다. 특히 시편 1편은 의인을 시냇가에 심긴 나무로, 악인은 바람에 날리는 겨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시편 1편의 나무와 겨의 이미지처럼, 시편 52편도 의인과 악인의 삶을 선명하게 비교하고 있습니다. 시편 52편을 통해 하나님께 뿌리를 내릴 사람들의 행복을 묵상해 보도록 합시다.

 

  • 선보다 악을 더 사랑하면서 악한 계획과 거짓을 꾀하는 포악한 자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악으로 자기를 강하게 하므로 하나님께서 멸하시되 땅에서 나무의 뿌리를 빼듯 완전히 멸망시키십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의지하는 의인은 하나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처럼 번성하게 하실 것을 확신하며 이를 감사하고 더욱 주님을 사모합니다.

 

파괴적인 악과 거짓을 꾀하는 악인(1-4)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도엑과 같이 자신의 이적인 목적을 위해 권력에 아부하며 다른 사람의 고통에 상관하지 않는 자들이 유명한 자, 힘 있는 자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저들이 언젠가 땅에서 뽑혀 나갈 날이 온다고 말씀하십니다. 비록 악인들이 영웅 대접받는 현실을 살아간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모습 앞에서 결코 낙망해서는 안 됩니다.

 

1포악한 자여 네가 어찌하여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 2네 혀가 심한 악을 꾀하여 날카로운 삭도 같이 간사를 행하는도다 3네가 선보다 악을 사랑하며 의를 말함보다 거짓을 사랑하는도다(셀라) 4간사한 혀여 너는 남을 해치는 모든 말을 좋아하는도다(1-4)

 

시인이 악인을 향하여 고발하는 질문을 하면서 시를 시작합니다. “포악한 자여 네가 어찌하여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가?” “포악한 자”는 히브리어의 ‘용사’ 또는 ‘강한 자’를 의역한 것입니다. 이 사람은 전쟁의 무사로서 힘이든 또는 재물의 풍부함(7)으로든, 어쨌든 권세를 가진 힘 있는 자요 강한 자입니다. 그런데 이 강한 자는 자신의 악행을 자랑하는 자입니다. 말하자면, 자신의 강한 힘뿐만 아니라 그 힘과 능력으로 악을 행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이 강한 자의 악하고 교만한 태도를 보여줍니다. 따라서 개역개정에서는 이 강한 자를 “포악한 자”라고 부릅니다.

 

(1) 악인에 대한 고발 질문(1)

 

악인을 고발하는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 시인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라고 말합니다(1). 강한 자가 힘과 악을 무기로 교만하게 세상에 영향력을 미칠 때 이에 대한 대안은 변치 않고 항상 지속되는 하나님의 사랑(인자하심)이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변함없는 인자하심으로 세상을 통치하시므로 포악한 자가 힘과 악행으로 세상을 좌지우지하지 못하도록 하실 것이라는 확신의 표현입니다. 1절은 악인과 의인이 인생에서 안전이든 성공이든 무엇이든 그들이 추구하는 방법의 차이를 대조합니다. 악인은 악을 행하는 것 속에서 자신의 안전과 성공을 추구하지만, 의인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찾습니다.

 

(2) 악과 거짓을 사랑하는 악인 묘사(2-4)

 

2절은 “포악한 자”가 행하는 악을 좀 더 구체적으로 드러냅니다. 그가 마음속으로 파멸의 계획을 짜고 거짓말을 하여 이를 실행합니다. 거짓말로 파멸을 일으키는 그의 혀는 마치 사람에게 치명적인 해를 입히는 날카로운 칼과 같습니다. 그는 거짓의 일꾼이요. 거짓의 달인입니다. 4절에서 더 구체적으로 말해주는데, 마치 맹수가 짐승을 잡아 삼키듯 그는 사람을 삼키는 말, 즉 남을 해치고 파멸시키는 말들을 좋아합니다. 따라서 “포악한 자”라고 불렀다가 이제는 그를 “간사한 혀”라고 부릅니다. 이는 그의 인격의 특징을 한마디로 표현한 것입니다. 거짓말을 해서 다른 사람을 파멸로 이끄는 자입니다. 그의 됨됨이를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는 선보다 악을 사랑하며 바른 것을 말하는 것보다 거짓말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 자입니다(3).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해 거짓말로 다른 사람을 파괴하고 희생시키면서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갖지 않습니다. 무엇이 어떻게 파괴되든 상관하지 않고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선과 악, 참과 거짓의 기준이 없습니다.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5)

거짓과 악한 말로 악을 행하며 해를 끼치는 포악한 자들은 일시적으로 승리하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멸망 당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포악한 자들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확신했기에 악인의 심판도 확신했습니다.

 

5그런즉 하나님이 영원히 너를 멸하심이여 너를 붙잡아 네 장막에서 뽑아 내며 살아 있는 땅에서 네 뿌리를 빼시리로다(셀라)(5)

 

시인은 이러한 “포악한 자”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합니다. 거짓으로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며 악행으로 이룬 삶을 자랑했던 자에 대한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을 선고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네 개의 단어를 통해 표현됩니다. 멸하고, 붙잡아내고, 장막에서 뽑아내고, 뿌리를 빼실 것입니다. 쌓아놓은 것을 산산조각으로 깨뜨리거나 무너뜨리듯 그를 완전히 멸하겠다고 하십니다. 그가 든든하게 여기는 그의 장막에서 그를 붙잡아내어 마치 맹수가 먹잇감을 갈기갈기 찢듯 그를 찢어버리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마치 나무를 뿌리째 뽑아내듯 산 자들의 땅에서 제거되어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을 말합니다. 심판의 표현들이 모두 무서운 파국을 당하되 완전하게 파멸되어 다시 회복할 수 없도록 영원히 멸망할 것을 말합니다.

 

악인에 대한 의인의 경계(6-7)

악인의 심판은 공의를 실현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에게 교훈을 줍니다. 하나님께서 아니라 다른 것을 의지하면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교훈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재물이나 자기 실력을 의지하는 것은 정말 이해하기 힘든 아이러니입니다. 그렇게 사는 교인들이 많다는 사실은 더 놀라운 아이러니입니다.

 

6의인이 보고 두려워하며 또 그를 비웃어 말하기를 7이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자기의 악으로 스스로 든든하게 하던 자라 하리로다(6-7)

 

6절과 7절에서는 “포악한 자”의 심판에 대해 확신하는 의인의 반응이 나옵니다. 여기서 의인은 시인이 속한 그룹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악인을 완전하게 멸망시키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보고 의인들이 두려워하며 경계로 삼을 것입니다. 또한 악인들의 삶을 돌아보며 인생의 교훈을 삼을 때 그의 삶이 가소로워 그를 비웃을 것입니다. 1절에서는 그를 부를 때 ‘용사’ 또는 ‘강한 자’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이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살아있을 때는 용사요, 스스로를 자랑하는 자신만만한 강한 자였으나 멸망 후에는 평범한 한 사람일 뿐입니다. 같은 어원의 단어를 사용하여 과거의 영광과 현재의 파멸을 강하게 대조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악인의 삶의 특징을 살펴보면, 그는 하나님을 자기의 힘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힘”은 원어에서는 ‘피난처’의 뜻입니다.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여 자신의 전 존재와 미래를 맡긴다는 뜻입니다. 이 악인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의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는 자입니다. 자신이 가진 돈으로 성공이든 안전이든, 무엇이든 가능하고 안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하여 재물을 좋아하고 추구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고, ‘돈이면 다 된다’는 생각에 눈에 보이는 재물만을 추구하고 자신의 삶을 다 쏟아붓는 자입니다. 그리고 그는 다른 사람을 파멸시키는 악행으로 자신을 강하게 하고 든든하게 지킬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재물을 위해 그리고 재물을 무기로 다른 사람을 착취하고 파멸로 몰아가는 일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악한 자에게 악이 임하고 파멸을 불러일으키는 자에게 파멸이 임합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끊이지 않고 영원히 있다는(1) 증거가 됩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의지하는 의인(8-9)

성도들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의지하고 공의로운 심판을 확신함으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포악한 자들이 득세하는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확고하게 의지하는 자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같이 형통할 것입니다. 어찌 보면 세상은 모순투성이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영원합니다. 인자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며 소망하시기 바랍니다

 

8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 9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원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하시므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사모하리이다(8-9)

 

시인은 “포악한 자”와 대조적으로 자신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겠다고 선언합니다. 시인은 절의 의인의 무리에 속합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는 의인은 하나님의 집에 심긴 푸른 감람나무와 같다고 칭송합니다(8), 감람나무는 올리브나무로 열매도 귀하지만 번성함과 긴 수명을 특징으로 합니다. ‘하나님의 집에 심겼다’는 것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연결되어 생명을 공급받는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뿌리가 뽑힌 나무와 같은 “포악한 자”와 달리 시인은 하나님의 사랑에 깊이 뿌리를 박고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아 영원히 번성하며 삶의 풍성한 열매를 맺는 복을 받게 될 것임을 확신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 때문에 영원히 감사하겠다고 서원합니다. 그리고 주의 이름이 선하시므로 주의 성도들, 곧 경건한 자들 앞에서 주의 이름을 사모하겠다고 선포합니다(9). 이름은 존재 자체를 나타내므로 주의 이름이 선하다는 것은 주님의 선하심을 말합니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포악한 자”들에게 심판하실 것이라는 확신은 의인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사모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보호하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그 이름을 지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에는 두 종류의 삶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와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는 자, 선과 의를 사랑하는 자와 악과 거짓을 사랑하는 자, 그 삶이 뿌리째 뽑히는 자와 생명의 근원에 든든히 뿌리를 내리는 자가 있습니다. 삶의 현장에서는 다양하고 복잡한 삶의 형태가 있는 것 같으나 인생은 이렇게 크게 둘로 대변됩니다. 이런 면에서 시편 52편은 인생의 두 가지 길,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이 있으며, 그 각각의 길들의 결과를 직설적으로 보여주는 1편의 교훈을 그대로 반향합니다. 더 나아가 이 시편은 진정한 안전과 부와 힘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세상에는 악한 계획을 세우고 자랑하는 강포한 영웅들이 많습니다. 그들 때문에 의인들은 고통을 당하기도 하고, 낙심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영웅들은 잠시 번영하는 것처럼 보일 뿐, 곧 그 뿌리가 뽐혀 버려진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의뢰하며 그분의 말씀과 은혜에 뿌리를 내리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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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52-02)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심령

시편 52편 10-19절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로 죄인인 인간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만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제사(예배)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를 드릴 때에, 짐승을 죽이거나 곡식을 곱게 갈아서 제물로 드리도록 했습니다. 그 짐승과 곡식은 우리를 대신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제물인 짐승처럼 죽어야 하고, 곡식처럼 갈아지는 존재인 것을 고백하는 것이 제사였습니다.

 

  • 통렬하게 자기 죄를 인정하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용서를 간구했던 시인(1-9)은 이제 다시는 죄의 길로 들어서지 않도록 자신의 마음과 영을 새롭게 창조해달라고 청하며 주의 영을 자신에게서 거두지 말고 예전에 누렸던 구원의 기쁨을 회복해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 사죄의 경험을 선포하며 살겠다고 다짐합니다. 주님이 진정으로 원하는 회개를 하고 있으니 용서해 달라는 간구로 마칩니다.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소서(10-15)

물질이 많아져도 사람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고 형편이 나아진다고 행복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행복은 물질과 큰 상관이 없습니다. 물질이 없어도 정신이 풍요로운 사람도 많습니다. 또한 건강을 잃고 오히려 깊은 행복을 되찾는 사람도 많습니다.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과 사랑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물질이 마음이나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물질보다 정직한 마음과 사랑이 더 중요합니다.

 

10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11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12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13그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14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15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10-15)

 

다윗이 하나님께 범죄하고서 느낀 감정은 하나님께 쫓겨난 기분이었습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외면을 당해도 속이 상하고, 짓눌림을 받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이겠습니까? 또한 구약시대에는 성령은 특정한 사람에게, 특정한 때만 임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섬겼던 사울왕에게서 주의 성령이 떠나고 났을 때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1) 주의 영으로 내 마음을 새롭게 창조하소서(10-12)

 

이제 시인은 용서를 간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관계를 위한 방안을 간구합니다. 그것은 자신을 새롭게 창조해주시는 것입니다.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주의 영이 지배하시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표현합니다. ‘마음’은 지, 정, 의를 다 포함한 한 인격의 본질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그 마음이 정결하게 되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없는 데서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새 마음을 주시도록 간구합니다. 특히 ‘창조하다’라는 하나님만의 창조를 표현하는 단어를 쓴 것 역시 의미심장합니다. 이는 뒤에 나온 “새롭게 하다”와 병행을 이룹니다. 시인은 정결하고 견고한 새 사람으로 만들어지기를 소원합니다. 5절에서 날 때부터 죄의 영향권 아래 놓인 자신을 고백했는데, 새로운 출발은 첫 창조를 하신 하나님께서 새 창조 해주실 때만 가능하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11절에서 시인은 이것을 부정적으로 표현합니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고”라는 것은 내 죄를 인하여 하나님과의 교제를 끊지 말아 달라는 요청입니다. 여기서 ‘나를’은 직역하면 ‘나의 얼굴을’이며 이것은 인격을 가리키는 제유법입니다. 하나님에게서 쫓겨나는 것은 친밀한 교제를 잃고 그분께 가까이 나아갈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을 다시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말라”고 바꿔 표현합니다. 사울에게서 떠난 영이 자신에게서는 떠나지 않게 해달라고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영의 내주만이 범죄의 길로 다시 들어서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12절은 긍정적인 표현으로 돌아섭니다. 시인은 죄를 짓기 전에 하나님과 누렸던 구원의 즐거움이 회복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또 자원하는 심령을 주셔서 자신이 넘어지지 않도록 버팀목이 되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자원하는 영은 이제 하나님 주신 자유의지를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는 영이며, 이것은 죄의 용서를 통해 정결해 진영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은 이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말씀에 매임으로 하나님의 종으로서 자유를 누리는 역설적 존재입니다. 시인은 그 자유를 오용하는 것이 얼마나 노예된 삶이었는지를 경험적으로안 것입니다.

 

(2) 주를 가르치고 찬양하며 선포하리이다(13-15)

 

만약 하나님께서 자신을 용서하시고 회복해주시면 어떻게 살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서원 형태로 아룁니다. 13절에서는 자신과 같은 범죄자들에게 주의 도, 주의 길을 가르쳐서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게 하겠다고 서원합니다. 자신의 체험담을 통해 용서와 회복의 기쁨을 그들이 알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회개하는 사람이 회개의 길잡이가 될 수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도록 시인은 자신이 흘리게 만든 ‘피’가 가져올 처벌에서 구원해 달라고 요청합니다(14a). 그러면 자신의 혀로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겠다고 다짐합니다(14b). 이 의는 언약에 충실한 것을 가리킵니다. 죄인을 용서하시는 헤세드의 사랑으로 깨어져야 마땅한 언약을 이어주신 하나님의 참다운 ‘의’를 노래하겠다는 것입니다. 훗날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보내셔서 마땅히 죽어야 할 우리 죄인들을 살려주신 ‘하나님의 의’를 바울이 찬양했듯이 말입니다. 15절에서는 이것을 다시 입술을 열어 주를 찬송하며 전파하겠다는 서원으로 바꾸어 표현합니다. 이 찬양은 감사의 찬양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찬양입니다. 따라서 모든 찬양은 하나님과 그분이 하신 일에 대한 선포입니다.

 

주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리겠나이다(16-19)

어떤 사람은 몸은 불편하지만 마음은 자유를 만끽하며 삽니다. 몸의 자유보다 마음의 자유가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자원하는 심령이 중요합니다. 좋은 일도 억지로 하면 불행한 일이 됩니다. 강요된 상태에서 일하는 노예는 힘들게 노동하지만 기쁨이 없습니다. 땀은 많이 흘리지만 즐거움이 없습니다. 일은 이루지만 보람과 행복은 없습니다. 자원하는 심령으로 봉사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그때 깊은 만족과 기쁨과 행복이 주어집니다.

 

16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17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18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19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그 때에 그들이 수소를 주의 제단에 드리리이다(16-19)

 

다윗이 밧세바 사건 이후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을 만들라고 하면 만들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고, 인간이 하나님께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있다면, 상한 심령,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1)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16-17)

 

여기서 시인은 다시 한번 하나님께서 자신을 받아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다른 방식으로 고백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자신은 비록 죄로 인한 통증으로 밤잠을 못 이룰 정도로 아파하고 주님 뵈올 면목이 없지만, 그래서 감히 제사의 자리로 나아가봐야 소용없을 만큼 가망 없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주께서 정말 원하시는 제사는 제물로 드리는 제사가 아니라 바로 그 참회하는 마음으로 주를 찾는 것임을 알기에 소망을 갖고 나아간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여기 “주께서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주께서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는 곡언법 수사학으로 ‘크게 진노하신다’는 뜻입니다. 이는 제사제도 자체를 부정하는 발언처럼 들리기에 상당히 충격적입니다. 하지만 시인이 부정하는 것은 제사제도 자체가 아니라 마음의 진심을 담지 않은 형식적 제사를 의미합니다. 죄라는 것이 제물 제사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면 시인이 이미 드렸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으로 자기 마음을 위무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과의 근본적인 관계에 변화를 줄 수 없음을 시인은 부인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제사의 양도 아니고 종류도 아닙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 구절을 암시하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12:1)라고 그 의도를 간파하고 인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번제를 보시는 대신에 사람 자체를 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하는 일을 보기 전에 내 본질을 꿰뚫어 보십니다. 그것을 ‘상한 심령(루아흐)’과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렙)”으로 표현합니다. 용서를 받고 싶은 마음보다 자기 죄로 인하여 깨어지고 부서지고 상한 마음을 먼저 보신다는 뜻입니다. 그러고 나서야 10절에서 시인이 간구했던 “정한 마음(랩)”과 “정직한 영(루아흐)”이 창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상한 (니쉬바르)은 ‘깨다’(샤바르) 동사에서 나온 말로, 우상이나 뭔가 소중한 것을 깨뜨릴 때 쓰입니다. 하나님 대신 소중하게 여긴 것이 남김없이 깨어질 때 찾아온 겸손한 상태가 ‘상한 심령’입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은 예수님의 비유에서 “가슴을 치며 나에게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라고 기도한 세리의 마음입니다. 여기 ‘마음’은 일부로 전체를 대표하는 제유법으로 자아 전체, 시인 자신을 가리킵니다. 그런 마음으로 주 앞에 나아가도 시인은 주께서 업신여기지 않고 받아주시리라 믿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 기뻐하고 수용해주시리라 믿었습니다.

 

(2) 시온을 위한 간구(18-19)

 

시편 51편에서 1-17절은 하나님과 내가 맺는 관계를, 18-19절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맺는 관계를 보여줍니다. 나의 죄악을 씻기시고, 정결한 마음을 내 안에 창조하시는 하나님께서 시온과 예루살렘에도 은총을 베푸십니다. 내가 받은 은총(1)이 증폭되어 믿음의 공동체(18)를 덮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길을 가르치고(13)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외치고(14), 하나님을 찬양한(15) 결과입니다. 시인은 주의 은택, 즉 주의 기쁨, 내키심, 호의 선의로 시온에 선을 행해달라고 간구합니다. 이는 시온을 잘 보살펴달라는 뜻입니다. 또 예루살렘 성을 쌓아달라고 합니다. 이는 무너진 성벽을 다시 견고하게 세워달라는 부탁입니다. 시인은 쇠락한 이스라엘의 한 왕일지 모릅니다. 자신의 죄와 허물어짐과 나라의 죄와 허물어짐을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회복만이 아니라 국가의 회복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께서 기뻐하시는 ‘의로운 제사’와 ‘온전한 제사’를 드리겠다고 서원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본질에 충실한 제사, 마음을 먼저 드리는 제사를 드리겠다는 뜻입니다. 다시 기회를 주시면 올바른 영과 마음으로 드리는 제사를 드리겠다고 약속합니다.


회개는 단순히 내가 지은 죄를 후회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내게 그 죄의 책임이 있음을 철저히 인정하되 내 안에는 어떠한 선한 것도 없으므로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이 유일한 소망임을 고백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또한 회개는 내 마음 속에서만 이뤄지는 것이 회개입니다. 또한 회개는 내 마음속에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내에서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 안에는 어떤 죄가 있는지 돌아보고, 나의 회개를 통해 공동체가 회복되는 역사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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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51-01)

 


상한 심령, 통회하는 마음

시편 51편 1-9절


 

하나님의 사람들은 죄를 멀리해야 합니다. 죄를 짓지 않도록 몸부림쳐야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 속에 내재한 죄의 습성은 우리를 끔찍한 죄로 몰아갈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욕심 때문에 그 죄가 더 쉽게 틈을 탑니다. 만일 우리가 죄를 지었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입니까?

 

  • 시인은 하나님 앞에서 단 한 점도 자신의 죄를 숨길 수 없음을 인정합니다. ‘죄’의 동의어를 4가지나 달리 표현하고 또 모태에서부터, 출생하면서부터 죄가 시작되었다고 고백하며 철저한 죄를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만이 자신을 용서하실 수 있다고 고백하며 그 용서로 말미암아 건강과 영적 활기를 되찾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죄 고백(1-6)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기억하시지만, 한 번 용서하신 죄는 다시는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역시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철저히 회개하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회개는 자신이 용서받을 가치가 없는 죄인임과, 하나님의 용서 외에는 어떤 한 희망도 없음을 고백하며 철저히 뉘우치는 것을 시작합니다.

 

1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2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3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4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5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6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1-6)

 

이 시는 다윗이 밧세바를 빼앗고 우리아를 죽음에 이르게 한 죄에 대해 나단 선지자에게 혹독한 책망을 들은 후 지은 것입니다. 이 시를 읽어 보면, 다윗이 그 죄를 얼마다 철저하게 회개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1) 인자와 긍휼을 따라 죄를 제하소서(1-2)

 

시인은 간절함과 애잔함을 가지고 “은총을 베푸소서 나에게 하나님이여”라고 외치며 시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반역죄(페샤)와 죄악(아온)과 죄(하타트)를 고백하고, 이 모든 더러움을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을 따라 지워주시고 씻어주시고 깨끗이 제하여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시인이 기다리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요 ‘용서’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은총만이 잃어버린 자신, 소외된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을 멸망과 죽음과 잊힘에서 건져낼 수 있다고 믿습니다. 시인은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서기로 합니다. 절망에 머물기를 거부하고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내맡기기로 합니다. ‘은총을 베푼다’는 히브리어 ‘하난’은 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좋으신 하나님께서 그냥 주시는 것으로 강요하거나 주장할 수 없습니다. 시인이 은총을 요구하는 근거는 “하나님의 인자를 따라”입니다. ‘인자’(헤세드)는 변치 않는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의미하기에 은총의 근거가 되기에 적당합니다. 이것은 병행적으로 나오는 하나님의 많은 긍휼과도 연결됩니다. ‘많은’은 질적인 개념으로, 하나님의 한없이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긍휼은 원래 자궁(레헴)을 가리키는 명사의 복수형으로 태 안의 아이를 향한 어머니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반역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다스릴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하나님의 변치 않는 사랑과 한없이 불쌍히 여기는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더군다나 이 ‘죄악’(페샤)은 하나님께서 절대 주권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고의로 저지른 반역으로 희생제물로 제사를 드리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중죄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노력으로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반역죄(1)가 지워지기를 바라며, 자신의 죄악(2)은 말갛게 씻기길 바라고, 또 자신의 죄(2)가 깨끗해지길 바란다고 함으로써 모두 ‘정결’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사죄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뒤에 나오는 ‘우슬초로 정결하게 하고’, ‘눈보다 희게 하고’(7), ‘죄악을 지워달라는 간구’(9)로 이어집니다. 이는 정결 의식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레 14:1-9; 민 19:1–22). 말갛게 씻긴다는 것은 ‘여러 번’ 씻는다는 뜻으로, 앞에 나온 ‘많은’ 긍휼과 연결됩니다.

 

(2) 주 앞에서 범한 죄, 주께서 의롭게 판단하실 죄(3-4)

 

시인은 여기서 앞에서 사용한 반역죄(‘죄과’는 1절의 ‘죄악’과 같은 단어)와 ‘죄’라는 단어를 가져와 철저히 자신의 죄악을 고백합니다. 시인의 죄는 시인도 알고 하나님도 아십니다. 왜냐하면 모든 죄는 결국 하나님을 향한 죄이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죄가 자기 앞에 있다고 하는데, ‘나의 앞’은 ‘나를 거슬러’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는 시인의 깊은 죄의식을 반영합니다. 죄가 시인을 고발하고 있는 것을 시인은 깊은 감수성으로 매순간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시인은 그것이 어쩔 수 없이 무의식중에 지은 실수가 아니라 “내 죄”라고 분명히 책임소재를 밝힙니다. 3절과 4절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자기 자신을 정죄하는 죄가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 앞에서 감춰질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절대 주권자임을 알면서 범한 변명의 여지없는 잘못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용서하지 않으시면 그 죄책에서 벗어날 수 없는 죄입니다. 그러니 주께서 어떤 판결을 내려도 그것은 정당하며 또 완벽한 판결이 될 것입니다. 4절 하반절은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주께서 유죄를 선고하실 때 당신은 의로우시고, 심판하실 때 당신은 완전하십니다.” 우리 성경에서 말씀과 심판이 병행을 이루고, 의로우시다와 순전하시다 역시 병행을 이룹니다. 모두 법정적인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3) 모태로부터의 죄악, 주께서 중심에 가르치실 지혜(5-6)

 

시인의 자기 고백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갑니다. 이제 그 죄의 뿌리가 얼마나 깊고 철저한지를 인정합니다. 어쩌다 한 번 범한 잘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용서해주시면 다시는 안 그러겠다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 스스로는 도저히 이 죄의 감옥에서 나올 수도 없고 앞으로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변치 않는 사랑, 지속적인 사랑 한없이 불쌍히 여기심이 아니고는 가망이 없다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용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죄를 이길 수 있는 지혜,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와 높이와 깊이와 넓이를 알 수 있는 지혜, 죄악의 결과가 가져다주는 참담함을 아는 지혜,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알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그것만이 구원의 길이라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여기서 자신이 ‘죄악 중에 출생’하였고, ‘어머니가 나를 죄중에 잉태하였다’라고 합니다. 이 구절은 성적 열망으로 인한 오염의 전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보편성에 대한 문학적 표현입니다.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죄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에 나올 때부터 죄의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해법은 ‘주께’(당신께) 있습니다(6). 모태의 은밀함과 비밀스러움에서부터 죄의 영향을 받았으니, 시인의 ‘중심’에서 주께서 무언가 일을 하셔야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이 중심은 시인의 양심의 세계를 가리킬 것입니다. 다행히도 주님은 시인의 마음이 진실하기에 기뻐하시고 그래서 남모르게 지혜를 가르쳐주시는 분입니다. 시인이 철저한 자기 절망 가운데 기대하는 것은 바로 그 하나님의 성품이고 기대입니다.

 

죄 용서를 간구(7-9)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상한 심령이 있는지 살피십니다. 상한 심령 없이 기도하고 회개하는 것은 외식이며,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뿐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아무리 큰 죄라도 상한 심령으로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받아 주시고 용서하시지만, 상한 심령 없이는 아무리 작아 보이는 죄라도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7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8내게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들려 주시사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소서 9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7-9)

 

다윗은 자신이 죄악 중에서 출생했고, 어머니가 죄 중에서 그를 잉태했다고 고백합니다. 자신이 죄에 대해 얼마나 나약한지, 죄의 유혹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지를 고백합니다. 평생 경건하게 살아온 그가 한순간에 유혹에 무너진 것이 그것을 잘 말해 줍니다.

 

(1) 우슬초로 정결하게 하소서(7)

 

시인은 이제 하나님의 성품에 기대어 1-2절에서 드렸던 기도를 좀더 구체적으로 반복합니다. 시인은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나의 죄를 씻어주소서”라고 간구합니다. 우슬초는 나병에서 나았을 때(민 19:18), 죽음으로 부정해진 자를 씻을 때(민 19:18) 쓰입니다. ‘정결하게 하다’라는 동사도 마찬가지 경우에 쓰이고 있습니다. ‘씻어주소서’(카바스)란 동사는 2절에 나온 바 있습니다. 이것은 ‘빨래하다’란 의미입니다. 자신을 걸레 같은 존재로 본 것입니다. 더러움과 주홍빛 죄가 덮어도 하나님께서 빨래하시면 ‘눈보다 희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 흰색은 순수, 정결함, 깨끗함, 기쁨을 의미하기에 용서를 상징하는 색입니다.

 

(2)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소서(8)

 

그렇게 자신이 용서받았다는 ‘즐겁고 기쁜 소식’을 들으면 주님께서 징계하심으로 말미암아 꺾인 시인의 뼈들이 즐거워할 것이라고 합니다. ‘뼈’는 힘의 근원입니다. 뼈들에 힘이 넘치면 온몸에 힘이 넘칩니다. 그래서 이사야도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58:11)이라고 축복합니다. 시인은 잃었던 건강이나 혹은 깊은 죄책감에서 해방되어 육적으로, 영적으로 치유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3) 죄악을 지워주소서(9)

 

이를 위해 시인은 다시 한번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죄악을 지워’ 달라고 간구합니다. 아무것도 주님 눈에서 감출 수 없으니 이제 방법은 주께서 얼굴을 돌려서 죄를 보지 않으시는 수밖에 도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1절에서처럼 자신의 죄(값)를 지워달라고 간청합니다. 반역죄뿐만 아니라 그 죄의 실상까지도 흔적 없이 없애달라는 것입니다. 모든 죄가 하나님 앞에 드러나니(시 90:8) 용서와 죄악 지움을 다 함께 주시도록 간구합니다.


진심으로 죄를 뉘우치는 사람이 귀한 시대입니다. 겉으로는 잘못했다고 말하고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지만, 실상은 제스처만 보이는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다윗이 위대한 이유는 그가 철저하게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보다 하나님의 긍휼과 인자하심이 더욱 크다는 것을 믿고, 어떤 죄를 지었든지 다윗처럼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서 용서받는 자유함과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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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50-01)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예배

시편 50편 1-23절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자주 예배를 들립니다. 하지만 자주 드리는 예배이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면서 예배드릴 가능성이 많습니다. 알맹이가 빠져 버린 껍데기와 같은 예배를 드려서는 안 됩니다. 과연 어떤 에배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예배입니까?

 

  • 이 시편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과 관계성에 초점을 둔 노래입니다. 언약은 예배와 삶의 갱신을 위한 이스라엘 신앙의 핵심입니다. 시인은 예언자처럼 온 세상의 재판장이요 빛으로 오시는 하나님을 노래하고 언약 백성의 그릇된 예배를 꾸짖고,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합니다. 따라서 시인은 참 예배의 본질이 하나님을 잊지 않고 감사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에 있음을 반복하여 강조합니다.

 

재판을 위해 오시는 하나님과 부르심(1-6)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면 하나님께서 누구신지를 알고 예배하는 것이 제일 주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무턱대고 예배하는 것을 전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자신을 알리셨습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지도 말씀을 통해 구체적으로 알려주셨습니다.

 

1전능하신 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사 해 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 세상을 부르셨도다 2온전히 아름다운 시온에서 하나님이 빛을 비추셨도다 3우리 하나님이 오사 잠잠하지 아니하시니 그 앞에는 삼키는 불이 있고 그 사방에는 광풍이 불리로다 4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을 판결하시려고 위 하늘과 아래 땅에 선포하여 5이르시되 나의 성도들을 내 앞에 모으라 그들은 제사로 나와 언약한 이들이니라 하시도다 6하늘이 그의 공의를 선포하리니 하나님 그는 심판장이심이로다(셀라)(1-6)

 

시인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기를 예배할 자들을 ‘해 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 곧 모든 세상에서 부르신다고 선언하십니다. 이는 공간적으로 모든 땅에 속한 것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야 한다는 의미이며, 시간적으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즉 모든 시대에 속한 피조물들이 다 부름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1) 빛으로 시온에 오시는 하나님(1-2)

 

전능하신 하나님 여호와(1a)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여호와가 ‘엘 엘로힘’으로는 데부터 지는 데까지 세상(에레츠)을 부르셨습니다(1bc).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14절의 ‘지존하신 이’(엘욘)와 어울려 출애굽의 하나님과 시내산에 강림하셔서 가르침을 주신 하나님을 떠올립니다. 하나님께서 그때처럼 오셔서(출 19장) 시온으로부터 완벽한 아름다움으로 빛나셨습니다(2). 위대하신 하나님의 임재와 함께 시온은 아름다움 그 자체가 됩니다. 빛을 비추시는 것은 일반적으로 구원을 상징하지만, 시인은 심판을 위해 오시는 하나님을 말하려 합니다.

 

(2) 언약백성을 부르시는 하나님(3-6)

 

시인은 하나님께서 오시는 광경을 묘사합니다. 우리의 하나님께서는 오셔서 잠잠하지 않으십니다. 그분 앞에는 삼키는 불이, 그분 사방에는 광풍이 붑니다(3). 하나님께서는 다른 곳에서 맹렬한 불 또는 소멸하는 불로 그려집니다(신 4:24; 9:3; 히 12:28). 하나님의 오심은 옛적 시내산에 강림하실 때와 비슷합니다(출 19:1-6,8,16,18). 그가 위의 하늘을 부르시고 백성을 판결하려고 땅을 부르십니다(4). 자기 백성을 재판하시려고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호출하시는 것입니다(참조. 신 32:1; 사 1:2; 미 6:1-2). 하나님께서 증인을 호출한 후 말씀하십니다. ‘나의 성도들을 내 앞으로 모으라/그들은 제사로 나와 언약을 맺었다’(5). 시편에서 성도들은 주로 ‘헌신된 자’로 언급되지만, 문맥상 이들은 언약 백성의 후예들로서(출 24:1-11), 새롭게 갱신된 언약에 참여하는 백성 모두를 가리킵니다. 이제 성도들을 향해 ‘하늘이 그의 공의를 선포할 것이다/이는 하나님, 그가 재판장이기 때문이다’(6). 하나님의 법정에서 증인으로 호출된 하늘이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하는 주체가 됩니다. 6절 시행은 하늘에 사무치는 하나님의 공의로움을 인격화한 엄숙한 표현입니다.

 

재물보다 하나님 언약 백성의 재물 경고와 참 예배(7-15)

하나님께서는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자기 백성에 의해 세상에 공의가 선포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배의 이유를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그저 매주 예배만 참석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자들을 통해 세상에 하나님의 공의가 선포되어야 합니다.

 

7내 백성아 들을지어다 내가 말하리라 이스라엘아 내가 네게 증언하리라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 8나는 네 제물 때문에 너를 책망하지는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 9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숫염소를 가져가지 아니하리니 10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뭇 산의 가축이 다 내 것이며 11산의 모든 새들도 내가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12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아니할 것은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13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 14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15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7-15)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 백성이 제물을 드리지 않아서 책망하시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드리는 번제가 항상 하나님 앞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형식만 남고 중심이 빠져 버린 데 있습니다.

 

(1) 재물에 대한 왜곡된 생각(7-12)

 

성도들의 잘못을 꾸짖는 하나님 말씀은 계속됩니다. ‘들어라 나의 백성아, 내가 말하겠다/이스라엘아,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겠다/나는 하나님, 너희 하나님이라’(7; 참조. 신 6:4). 이후에 하나님은 ‘내가’를 반복하여 이스라엘의 재물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증거를 제시하듯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희생제물 때문에 책망하시는 것이 아닙니다(8).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었다’(8b)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백성들은 제사에 소홀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는 ‘네 집의 수소나 네 우리의 숫염소가 필요 없다’(9)라고 하십니다. 수소나 숫염소는 값나가는 제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값비싼 제물이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그 이유를 밝히십니다. 산의 모든 새들도 짐승들도 하나님께서 아시고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11). 여기서 멈추지 않으십니다. ‘설령 내가 굶주려도 네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왜냐하면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이기 때문이다’(12). 이는 하나님이 고대 근동 세계의 여러 신들과 다름을 표명한 것입니다. 바벨론 홍수 신화에서 신들은 배고파하며 바쳐진 제사 음식을 먹으려고 파리 떼처럼 몰려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도 다른 신들처럼 물을 먹는다고 생각했다면 오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모든 것을 ‘나의 것’이라고 세 번이나 반복하십니다. 세상의 주인이십니다.

 

(2) 참 예배에 대한 교훈(13-15)

 

풍자성이 강한 하나님 목소리입니다.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고,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13). 하나님께서는 다른 신들처럼 배고파하며 피에 굶주려 인간들로부터 먹거리를 요청하는 신이 아닙니다. 12절처럼 하나님께서는 매우 익살스럽고 해학적이고 풍자적인 질문으로 제사에 대한 오해를 교정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제사는 무엇입니까? ‘감사를 하나님께 바치라/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라’(14). ‘감사’와 ‘서원’ 제사는 예배자의 자발성에 기초한 자원 예물입니다. 감사 제사의 동물 제사 자체를 부정하는 뜻은 아닙니다(참조. 대하 29:31; 렘 17:26-27). 제사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강조한 것입니다. 제사의 본질은 물질적 희생보다 자발적인 마음에 있습니다. 제물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제물을 바치는 사람을 위한 것이 됩니다. 제사와 성전은 예배를 위한 수단이지 본질이 아닙니다. 본질은 다른 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구원할 것이고,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할 것이라’(15) 약속하십니다. 마치 시인의 요청에 응답하시는 것처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환난의 순간에 당신을 부르라고 격려하십니다. 이처럼 언약 관계 안에서 결합된 상호 신뢰는 하나님을 부르는 성도의 부름에서 시작됩니다. 성도의 부름은 구원이며, 구원받은 이후에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감격의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부르는 것, 그것이 성도들에게 요청하신 제사이며 예배의 본질입니다.

 

악인 심판과 올바른 예배(16-23)

성도들이 세상에서 존중을 받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말과 행동이 다르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고, 또 그 말씀을 귀하게 여기는 것 같지만 실제로 살아가는 방식은 세상 사람들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향해 무엇이라 말씀하시는지 귀 기울여 보고, 엄중한 경고롤 삼도록 해야 합니다.

 

16○악인에게는 하나님이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내 율례를 전하며 내 언약을 네 입에 두느냐 17네가 교훈을 미워하고 내 말을 네 뒤로 던지며 18도둑을 본즉 그와 연합하고 간음하는 자들과 동료가 되며 19네 입을 악에게 내어 주고 네 혀로 거짓을 꾸미며 20앉아서 네 형제를 공박하며 네 어머니의 아들을 비방하는도다 21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눈 앞에 낱낱이 드러내리라 하시는도다 22○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23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16-23)

 

앞에서 이스라엘의 제사에 대해 책망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악한 삶에 대해 책망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악인’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악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례를 전하며 하나님의 언약을 죄뇌는 자들입니다.

 

(1) 악인을 향한 경고(16-20)

 

하나님이 ‘악인에게’ 말씀하십니다(16a). 악인은 누구입니까? 16절 시행의 핵심은 악인의 정체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이 시의 주된 흐름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 특히 율법 운운하는 자에게 엄중하고 단호하게 말씀하시는 데 있습니다. 대체 왜 네가 내 율례를 열거하고 네 입에 내 언약을 담느냐?(16bc) 하나님께서 악인이라고 부르는 자들이 ‘율례’를 열거하고 높이는 사람들이라니 아이러니합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전달하는 자들, 곧 제사장이나 율법을 가르치는 교사들을 향한 혹독한 경고입니다. 악인의 내면이 들춰집니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교훈을 미워하고 내 말을 네 뒤로 던진다’(17)고 하십니다. 더군다나 그들은 도둑과 불의한 결탁하고 간음하는 자들과 한 패거리가 됩니다(18). 악에게 입을 내주고 혀로는 거짓을 꾸미며(19) 끝없이 자기 형제를 비방하고 앉아 있습니다(20). 결국 악인은 율법을 떠들어대면서 음흉한 타락의 길에 주저앉은 언약 백성이요 종교 엘리트 집단에 속한 자였습니다.

 

(2) 하나님의 심판과 올바른 예배(21-23)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죄를 열거하셨지만 그동안 참으시며 잠잠하셨습니다. 악인은 그동안 하나님의 침묵과 연기된 심판을 착각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인내는 끝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네 죄를 낱낱이 드러내겠다’고 하십니다(21). 마지막으로 백성 전체에게 호소하십니다. ‘제발 이것을 깊이 생각하라, 하나님을 잊은 자들아’(22a).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찢을 것이고, 건져낼 자가 없을 것’이라 경고하십니다(22b). 옛적 모세가 여러 번 ‘하나님을 잊지 말라’ 반복했지만(신 6:12; 8:11,14,19), 사람들은 입으로만 떠들었을 뿐입니다. 그러면 구원은 불가능합니까? 다행히 길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감사’로 예배하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할 것이라고(23a; 14-15)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언약의 요구 사항들 중에서 하나님께서 가장 중하게 여기신 것은 백성들의 자발적인 감사였습니다. 감사는 일방적으로 하나님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감사를 통해 삶의 기쁨이 충만해집니다. 따라서 감사는 하나님을 향함이면서 자신을 위함입니다.


진정한 감동과 뜨거움이 있는 예배는 예배 장소나 순서, 음악에 의해서가 아니라 세상 가운데 최선을 다해 주님의 길을 따르다가 모인 예배자들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시편 50편은 외적인 형식만을 갖춰 놓고 진정한 감사와 찬송이 없는 제자, 곧 내면적인 준비가 없이 제물만을 준비해서 제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온 세상을 창조하셨고,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께서는 형식이 아니라 우리의 중심을 보신다는 사실을 다시금 기억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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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49-01)


유일한 소망이신 하나님

시편 49편 1-20절


 

물질만능주의에 젖어 있는 세상은 성공과 실패의 기준이 물질이라고 말합니다. 물질이 많아야 힘이 있다고 생각하고, 물질이 많아야 성공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질이 절대적인 신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교회마저 물질에 흔들립니다.

 

 

  • 이 시는 구약의 지혜서처럼 삶의 진실과 진리를 노래한 이른바 지혜시입니다. 무엇보다 보편적 인간의 죽을 운명과 재산 축적과 부를 향한 집착의 허망함, 삶의 오묘함을 악기로 연주하며 노래로 전합니다. 시인은 사람이 존귀하나 수수께끼 같은 삶의 오묘한 진실을 깨닫지 못하면 짐승과 같을 뿐이라고 노래합니다. 마치 낭만을 옷으로 입는 저항시인처럼 말입니다.

 

서문: 들어라, 뭇 백성들아(1-4)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인생의 진리를 깨닫고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지혜의 교훈을 무시하면 어리석은 삶을 살게 됩니다. 지혜의 말씀은 인생에 깊은 통찰력을 줍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인생의 분명한 길을 보여줍니다. 지혜의 말씀을 사랑합시다.

 

1뭇 백성들아 이를 들으라 세상의 거민들아 모두 귀를 기울이라 2귀천 빈부를 막론하고 다 들을지어다 3내 입은 지혜를 말하겠고 내 마음은 명철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로다 4내가 비유에 내 귀를 기울이고 수금으로 나의 오묘한 말을 풀리로다(1-4)

 

‘이것을 들어라, 뭇 백성들아’(1a). 첫마디가 잠언에 등장하는 지혜 교사의 부름 같습니다(잠 1:6,8). 둘째 소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들어라, 세상의 모든 거주민들아’(1b). 시인은 지혜 교사가 학생들을 부르듯 모든 백성과 세상 거주민들에게 듣기를 청합니다. 귀천빈부를 막론하고 다 들으라고 합니다(2). 귀한 사람이건 천한 사람이건 ‘하나 되어’(야하드) 들어야 합니다. 시인은 높고 낮거나 가난하거나 부하거나를 막론하고 일심동체가 되어 평등하게 지혜 교훈을 듣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시인의 언어는 간단하고 함축적입니다. ‘내 입이 지혜를 말하겠고/내 마음의 묵상은 명철이라’(3). ‘입’은 ‘마음의 묵상’을 밖으로 말로 분출시키는 신체 기관입니다. 복수명사 ‘지혜들’(호크모트)과 ‘명철들’(테부노트)이 평행관계로 배열되어 동의어나 마찬가지입니다. 둘 다 총명함과 관계된 말로, 분별력이나 깨달음, 삶의 기술이나 예술적인 능력까지 관련됩니다. 때문에 지혜와 명철은 잠언에서 자주 한 쌍으로 언급됩니다(잠 2:2,6; 3:13,19; 5:1;8:1; 10:23; 21:30; 24:3). 특히 지혜는 삶에서 경험의 총체를 반영하기에 사전적인 의미를 넘어섭니다. 시인은 삶의 깊은 지혜를 말하려고 자기 자신도 ‘비유’(마샬)에 귀를 기울일 것이고, 수금으로 나의 ‘오묘한 말’을 풀겠다(4)고 합니다. ‘비유’(마샬)는 지혜서의 대표인 잠언의 제목과 같습니다. 실제로 잠언은 많은 비유의 말들로 넘쳐납니다. 이때 비유는 해석하기 까다로운 ‘수수께끼’(삿 4:12)와 난제(왕상 10:1)와 비슷합니다. 그런데 시인이 지혜 교사처럼 삶의 난제들을 악기를 연주하며 풀어준다고 하니 삶의 낭만과 난제가 교차하는 흥미로운 광경입니다.

 

사람은 존귀하나 짐승 같은 존재(5-12)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닌 것을 하나님으로 떠받들어 숭배합니다. 하나님보다 돈과 물질을 좇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돈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돈에게 지배를 당하며 살아갑니다. 돈에 의한, 돈을 위한, 돈의 노예로 살아갑니다. 재물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사용하도록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유가 영원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인생 최대의 오산입니다.

 

5죄악이 나를 따라다니며 나를 에워싸는 환난의 날을 내가 어찌 두려워하랴 6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하는 자는 7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할 것은 8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 9그가 영원히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인가 10그러나 그는 지혜 있는 자도 죽고 어리석고 무지한 자도 함께 망하며 그들의 재물은 남에게 남겨 두고 떠나는 것을 보게 되리로다 11그러나 그들의 속 생각에 그들의 집은 영원히 있고 그들의 거처는 대대에 이르리라 하여 그들의 토지를 자기 이름으로 부르도다 12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5-12)

 

시인은 생명을 속량하는 값은 너무나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지구상의 모든 재물을 다 소유했다고 해도 단 하나의 생명도 속량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생명의 속전을 영원히 마련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당에 오신 것입니다.

 

(1) 대체 불가능한 생명(5-8)

 

시인은 노래합니다. ‘어찌 내가 환난의 날들을 두려워할까/악이 내 뒤꿈치를 에워쌀 때’(5). 매우 모호한 시적 표현입니다. 질문 형식이지만, 이는 온갖 악이 발끝 가까이 집요하게 에워싸는 불의한 세상살이에도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시인은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6). 재물의 불필요함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재물’은 단순히 물질적인 풍요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 물질적 풍요가 지닌 힘, 곧 권력을 의지하는 욕망과 자랑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따라서 시인은 힘과 많은 재산을 가졌어도 생명을 구할 수 없는 무능함을 강조합니다(6-8). 사람은 누구 한 사람도 구원할 수 없습니다. 누구든 몸값을 치르는 대가를 지불한다 해도 한 생명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사람을 위한 목숨(생명)값을 하나님께 드리지도 못합니다(7). 목숨 값은 너무 귀중하여 그 값은 영원히 마련될 수 없습니다(8). 이는 돈과 권력의 정점을 찍은 사람조차 자기 생명 값을 치르고 생명을 연장시킬 수 없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시인은 인간의 무능함을 명확히 알고 있습니다.

 

(2)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9-12)

 

시인은 인간의 필연적인 운명을 노래합니다. 사람이 영원히 살면서 죽음을 피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9). 지혜자들도 죽고 어리석고 무지한 자도 똑같이 망하고, 그들의 재물은 다른 사람들에게 남기고 갈 뿐입니다(10). 죽음 앞에서 모든 인간이 똑같이 존재합니다. 죽음은 모든 차이와 불평등을 없애는 수평 장치입니다. 그리고 부자들은 속으로 자기들의 집이 영원할 것이라고, 자기들의 거처는 세대를 거듭하며 영원히 있을 것처럼 자기들 땅에 자기 이름을 붙여 부릅니다(11). 이는 자기 토지 권리를 확보하기 위한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것입니다. 부자들은 세대를 거듭하여 토지에 이름이 새겨지듯 영원히 기억되길 바라는 열망을 가졌지만, 시인은 결정적인 한마디로 소유의 무상성과 허망함을 꼬집어 노래합니다. ‘사람은 존귀하나 오래 머무르지 못할 것이요/짐승들과 똑같이 소멸될 것이라’(12). 인류를 뜻하는 ‘아담’, 곧 사람은 하나님을 가장 많이 닮은 존재입니다(창 1:27). 그러나 사람은 다시 땅의 먼지로 돌아갈 운명을 지닌 채 살아갑니다(창 3:19). 인류는 도축될 짐승처럼 죽음을 맞이할 뿐만 아니라 언제 소멸될지도 모르는 지독히 허무한 존재입니다(참조. 전 3:19).

 

깨달음 없는 사람의 짐승 같은 운명(13-20)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들은 대개 자신들의 소유한 재물을 소망으로 삼고 살아갑니다. 많은 재물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도 역시 부하게 되는 것을 바라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재물은 죽음 앞에서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인생의 유일한 소망이십니다.

 

13○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자들의 길이며 그들의 말을 기뻐하는 자들의 종말이로다(셀라) 14그들은 양 같이 스올에 두기로 작정되었으니 사망이 그들의 목자일 것이라 정직한 자들이 아침에 그들을 다스리리니 그들의 아름다움은 소멸하고 스올이 그들의 거처가 되리라 15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져내시리로다(셀라) 16사람이 치부하여 그의 집의 영광이 더할 때에 너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17그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의 영광이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함이로다 18그가 비록 생시에 자기를 축하하며 스스로 좋게 함으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지라도 19그들은 그들의 역대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하리로다 20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13-20)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을 믿고 사는 사람들과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을 믿고 사는 사람들은 어떤 대상을 우상으로 삼고 살아갑니다. 그 대상은 바로 ‘돈’입니다.

 

(1) 어리석은 자의 운명(13-15)

 

시인에게 보편적인 인류의 운명이나 어리석은 자의 길들이 다를 게 없습니다(13a). ‘어리석음’(케쎌)은 아둔함이지만, 동시에 지나친 자기 확신을 뜻합니다. 어리석음은 곧 지나친 자기 확신입니다. 어리석은 자들을 뒤따르며 그들의 말을 즐기는 것도(13b) 마찬가지입니다. 시인은 어리석은 자의 길들이 마치 스올로 향하는 양 무리처럼(14a), ‘사망이 그들의 목자’라고 합니다(14b). 목자가 양 떼를 돌봄이 마땅한데 죽음이 어리석은 자들을 돌봅니다. 충격적입니다. 더군다나 정직한 자들이 아침에 그들을 다스린다 해도(14c), 그들의 아름다움은 시들어버리고(14d), 스올이 그들의 거처가 됩니다(14e). 그러니까 정직한 자들이 고통의 밤을 지나 희망을 기대할 아침이 찾아와도, 죽은 자들이 거처하는 ‘지하세계’(스올)는 어리석은 자의 마지막 종착지입니다. 그러나 시인의 운명은 악인과 다릅니다. ‘실로 하나님이 나의 생명을 속량할 것이라/스올의 땅으로부터 참으로 그가 나를 건져내실 것이라’(15). ‘영접하시리니’는 ‘속량하다’(파다)라는 말인데 몸값을 치르고 자유롭게 함을 뜻합니다. 시인은 사람이 아무도 생명을 속량할 수 없음을, 생명은 너무 귀중하여 값을 매길 수 없다는 점을 다시 반복합니다(7-8).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들의 세계’(스올)에서 생명을 구해주실 뿐만 아니라 꼭 붙드실 것을 믿습니다.

 

(2) 영광에서 분리되는 죽을 운명(16-20)

 

시인의 첫마디는 ‘두려워하지 말라’입니다. 어떤 사람이 부자가 되어 그 집의 영광이 장엄할지라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16). 일반적으로 우리는 재산가들을 부러워합니다. 부러움이 지나치면 부자에게 이용당하거나 고용되거나 노예가 됩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래야 할 이유가 없는 이유를 말합니다. 부자라도 죽으면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고 그 영광을 무덤까지 가져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17; 참조. 전 5:15). 아무리 갑부라도 사는 동안 자축하며 사람들에게서 칭찬을 받을지언정(18) 영원히 빛을 볼 수 없는 곳에 묻힌 조상들에게 돌아갈 것입니다(19).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부자든 빈자든 누구나 맞이해야 할 운명, 죽음을 누가 거스를 수 있습니까? 따라서 시인은 다시 강조합니다. 12절 시행을 살짝 변형시킨 반복입니다. ‘사람이 존귀하나 깨달음이 없으면/죽게 될 짐승들과 똑같다’(20). 시인은 사람이나 짐승이나 죽게 될 공동운명체라고 말하지만, 분명히 다른 점이 있음을 봅니다. 사람과 짐승이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점은 같지만, 인간에게는 ‘깨달음’이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깊이 생각하고 이해하고 상상하고 질문하고 자각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깨달음 없는 사람은 짐승입니다.


아무리 재물이 많아도 할 수 없는 일이 많습니다. 재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생명입니다. 물질은 세상의 주인이 아닙니다. 물질의 주인이 하나님이십니다. 이 사실을 잊지 않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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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48-01)

 


하나님의 거룩한 성 시온

시편 48편 1-14절


 

찬양은 교회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가장 귀한 제사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찬양의 향기로 늘 가득해야 합니다. 이 시는 하나님의 성, 곧 교회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이유가 하나님께서 위대하시기 때문이라고 선포합니다. 우리가 극진히 찬양해야 할 위대하신 하나님께서는 어떤 분이십니까?

 

 

  • 이 시편은 시온의 영광과 그 주체이신 하나님을 아름답게 찬양합니다. 겉으로는 큰 왕의 성, 곧 시온 성의 견고함과 높음과 아름다움을 노래하지만, 그곳에 임재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합니다. 그 하나님의 영광과 명성은 인자하심과 정의로우심을 밝히는 심판으로 드러납니다. 때문에 시인은 주의 모든 백성이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을 확신하며 노래합니다.

 

시온성에 계신 하나님을 찬양(1-3)

아무리 교회 건물이 웅장하고 아름다워도 그곳에 하나님을 찬양함이 없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높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아름다운 고백이 넘치는 교회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입니다. 온 우주를 바라보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는 위대하십니다. 이 높으신 하나님을 늘 기뻐 찬양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1여호와는 위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양 받으시리로다 2터가 높고 아름다워 온 세계가 즐거워함이여 큰 왕의 성 곧 북방에 있는 시온 산이 그러하도다 3하나님이 그 여러 궁중에서 자기를 요새로 알리셨도다(1-3)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극진히 찬양받으시리라’(la). 시인은 여호와의 크심을 선포하며 최고 수준으로 찬양받으심을 노래합니다. ‘극진히’는 47편 마지막 절, 마지막 소절에서도(9) 가장 높임을 받으시는 하나님을 노래할 때 반복됩니다. 자연스럽게 47편과 48편이 하나님을 높이는 찬양시의 기획적인 연속물처럼 보입니다. 첫 소절은 하나님을 높이는 최고의 찬양입니다. 이때 하나님이 찬양받으시는 곳이 명시됩니다. ‘그의 거룩한 산, 우리 하나님의 성에서’입니다(16). 그의 거룩한 산, 하나님의 성은 어디입니까? 북방의 시온 산에 있습니다(2). 거룩한 산에 있는 하나님의 성이 네 가지로 묘사됩니다. ‘높고 아름다워/온 땅이 즐거워함이여/북방의 시온 산/큰 왕의 성이라’(2). 히브리 본문에 ‘터’라는 말은 본래 없지만, 의미를 완결시킵니다. 하나님의 성은 첫째, 마치 우뚝솟은 봉우리처럼 그 높음 자체로 아름답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성은 ‘온 땅’, 곧 온 세상의 기쁨입니다. 셋째, 북방에 있는 시온 산입니다. ‘북방’은 북쪽 주변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가나안 신화에서 가장 최고의 신 ‘엘’이 머무는 곳이 ‘차폰’ 산이었습니다. 시인은 당대 사람들에게 가장 높고 아름다운 산으로 인식된 장소를 시온산과 연결 시킵니다. 그러니까 ‘시온 산’을 새로운 ‘차폰산’으로 당시 독자들에게 각인시킨 셈입니다. 넷째, 하나님의 성은 큰 왕의 성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는 ‘큰 왕’이며, 그곳의 주인임을 선포합니다. 이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장 높은 곳에 계신 위대한 왕이요, 그분만이 풍성하시고 충분히 넉넉한 왕이심을 선포한 것입니다. 더군다나 하나님께서는 여러 궁전들에 계시고, 높은 요새로 알리셨습니다(3). ‘높은 요새’는 안전한 피난처입니다(46:7,11). 하나님 자신이 시온을 찾는 이들의 은신처가 되셨음을 강조한 말입니다. 하나님 스스로 높고 강하고 견고한 요새가 되셨습니다. 모순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접근하기 어려운 강고한 요새이신 하나님께 피할 수 있는 특권이 하나님을 찾는 이들에게 부여되었습니다.

 

시온성을 견고하게 하신 하나님(4-8)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에서 가장 견고한 요새가 되십니다. 견고하신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교회는 세상 속에서 견고합니다. 세상이 감히 무너뜨릴 수 없는 견고하신 하나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교회는 더욱 든든히 설 것이고, 악한 영들의 유혹이나 공격에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4왕들이 모여서 함께 지나갔음이여 5그들이 보고 놀라고 두려워 빨리 지나갔도다 6거기서 떨림이 그들을 사로잡으니 고통이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 같도다 7주께서 동풍으로 다시스의 배를 깨뜨리시도다 8우리가 들은 대로 만군의 여호와의 성, 우리 하나님의 성에서 보았나니 하나님이 이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시리로다(셀라)(4-8)

 

시온은 끊임없이 열방의 침략을 받았지만, 전혀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요새가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왕들이 연합해서 시온을 차지하려고도 했지만, 결국에는 혼비백산 달아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1) 열국의 침공과 좌절(4-7)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하나님 성에(2) 왕들이 힘을 규합하여 함께 전진했습니다(4). 시인은 이것을 생동감 넘치게 표현하려고 ‘보라!’라고 외칩니다. ‘보라’는 왕들이 함께 공격하기 위해 진군하는 장면을 강조하려는 문학적인 장치입니다. 그때 그들은 성을 보고 놀라 공포에 휩싸여 재빨리 지나갔습니다(5). 하나님께서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보이신 것을(3) 왕들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그분의 현현을 보았기 때문입니다(참조, 시 46:6; 삼상 14:15; 사 17:13; 29:6; 33:3). 큰 왕 곧 하나님의 나타나심 자체가 왕들에게 두려움이었습니다. 왕들의 떨림과 두려움은 마치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과 같았습니다(6). 시인은 하나님의 성을 본 왕들의 두려움을 극적으로 표현하려고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을 빗대어 표현했습니다. 구약 본문들은 극도의 고통을 해산이 임박한 여성의 고통에 빗대어 표현하곤 합니다(예. 사 13:8; 21:3; 렘 4:31; 6:24). 그러고서 시인은 하나님께 말합니다. ‘동풍으로 당신이 다시스의 배들을 깨뜨려 부수십니다'(7). 왜 갑자기 다시스의 배들입니까? 맥락을 벗어난 듯하지만, 왕들의 공포를 현실감 넘치게 말하기 위함입니다. 당시 다시스의 배들은 지중해 무역을 책임지는 크고 견고한 배입니다. ’다시스의 배들‘은 견고함과 화려함의 상징이었습니다(사 2:16). 따라서 이것은 크고 화려하고 웅장한 무역선들을 바람으로 부수시는 공포감만큼이나 왕들이 본 하나님의 성이 두려움 그 자체가 되기를 바라는 시인의 간절한 마음이 발현된 것입니다.

 

(2) 순례자들이 본 견고한 성(8)

 

시인의 선포에 예배 공동체의 회중이 응답합니다. ‘우리가 듣고 본 것처럼/만군의 여호와의 성에서/우리 하나님의 성에서/하나님은 영원토록 이것을 견고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들, 곧 순례자들은 열방의 왕들이 공격하려고 해도 ‘하나님의 성’(1)이요, ‘큰 왕의 성’(2), 곧 시온 산(2)이 건재함을 듣고 보았습니다. 그 성을 보고 공포에 떨며 신속히 달아났던 왕들과 순례자들의 반응이 엇갈립니다. 순례자들이 직접 듣고 본 것은 미래를 여는 확신의 고백이 되었습니다.

 

시온성의 승리와 기쁨(9-11)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지으신 분이십니다. 장래까지 모두 아시는 완전한 인도자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따라갈 때 우리는 살 수 있습니다. 완전히 인도자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따라 가시기 바랍니다. 위대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찬양에 기쁨으로 응답하실 것입니다.

 

9하나님이여 우리가 주의 전 가운데에서 주의 인자하심을 생각하였나이다 10하나님이여 주의 이름과 같이 찬송도 땅 끝까지 미쳤으며 주의 오른손에는 정의가 충만하였나이다 11주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시온 산은 기뻐하고 유다의 딸들은 즐거워할지어다(9-11)

 

이제 예배하기 위해 모여든 순례자들이 직접 하나님께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우리가 당신의 인자하심을 깊이 생각했습니다/당신의 성전 한가운데서’(9) 순례자들은 모두 성전 안에 있습니다. 성전의 가장 중심이 되는 곳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헤세드)을 곰곰이 헤아려봅니다.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랑, 곧 실패하지 않는 사랑을 깊이 묵상합니다. 순례자들은 깊은 헤아림 끝에 자기들이 발견한 것을 직접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당신의 이름처럼/당신의 찬양은 땅 끝까지 미쳤습니다/당신의 오른손은 정의로 충만합니다’(10). ‘이름'(쉘)은 명성이나 평판을 뜻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찬양’, 곧 ‘영광’이 땅 끝까지 미치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는 두 시행에서 분명한 것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깊이 헤아려 묵상할 때 깨닫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명성과 영광, 그리고 하나님의 활동에서 드러나는 정의(체데크)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로움은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시는 손으로 펼쳐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전을 찾는 순례자들에게 하나님의 정의는 곧 그분의 이름이며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심판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순례자들은 노래합니다. ‘시온 산이 기뻐합니다/유다의 딸들이 즐거워합니다/당신의 심판으로 인하여’(11). 시온 산이 마치 사람처럼 인격화되어 기뻐하고, ‘유다의 딸들’이 즐거워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심판 때문입니다. 유다의 딸들은 딸들만 지목한 것이 아니라 유다 여러 성읍에 사는 주민들을 가리키는 대유법적인 표현입니다(시 97:8). 따라서 열방의 왕을 심판하시고, 영광의 상징인 시온과 주의 백성들을 구인한 것 때문에 순례자들 모두 함께 기뻐합니다.

 

시온 성 행진과 하나님의 인도하심(12-14)

사람은 내일을 모르기에 어디로 가야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두려워하고 염려하는 것입니다. 이런 두려움과 염려 때문에 사람들은 우상을 만들고 그 우상에게 빕니다. 그러나 우상은 우리를 인도할 수 없습니다. 여기 세상에서 가장 완전한 인도자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12너희는 시온을 돌면서 그 곳을 둘러보고 그 망대들을 세어 보라 13그의 성벽을 자세히 보고 그의 궁전을 살펴서 후대에 전하라 14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12-14)

 

시인은 예배에 참여한 순례자들을 향해 순례 행진에 참여하라고 권합니다. 시온 주변을 걷고 둘러보며 성의 망루를 세어보라(12) 말하는 것은, 시온 성의 높고 견고한 아름다움을 만끽하라는 뜻입니다. 또 성벽을 자세히 보고, 성의 궁전들을 살펴서 후대에 전하라(13) 말합니다. ‘전하라’는 것은 하나하나 열거하며 자세히 말하는 것입니다. 꼼꼼하게 자세히 보는 것이 전제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전할 수 없습니다. 그만큼 보는 것은 헤아림을 위한 첫 단계입니다. 시온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를 가장 강력하게 보여주는 실체가 됩니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하나님은 영원토록 우리의 하나님이시고/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이라’(14). 시인이 지시대명사를 사용하면서까지 ‘이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순례자들이 듣고, 보고, 깊이 헤아린 시온성의 아름다움이 어디를 향하는지 강조한 것입니다. 또 열방의 공격도 방어할 수 있는 견고함과 능력을 유지하시는 그분이 우리 하나님 되심을 강조한 것입니다. 시온 성의 견고함은 건물 자체의 뛰어난 위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공동체를 끝까지 인도하시는 하나님 그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시온의 영광은 건축물 자체에서 발현되는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가장 높으신 분이십니다. 세상이 이길 수 없는 견고한 능력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 인생을 인도하시는 완전한 인도자이십니다. 그 위대한 하나님을 영원히 찬양하는 성도와 교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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