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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78-04)

 


하나님께서 목자가 되시는 땅

시편 78편 56-72절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편만하게 계십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 임재 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임재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 참 평안과 위로가 없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임재를 사모해야 합니다.

 

  • 시인은 거룩한 영토에 들어와 다시 하나님의 분노를 불러일으킨 조상들의 배신을 고발하며 시온과 다윗을 선택하신 하나님을 노래합니다. 시인은 이스라엘의 불신앙의 뿌리와 지나간 구원 역사의 의미를 더듬으며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만남과 언약이 지속되었음을 회고합니다.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와 하나님의 분노(56-60)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여 약속의 땅을 선물로 주셨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만을 지존자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시험하고 반항하고 말씀을 업신여겼습니다. 광야에서 그의 조상들이 하던 대로 배반하고 속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다른 어떤 소리보다 내 삶을 지배하고 영향을 미치게 하고 있습니까?

 

56그러나 그들은 지존하신 하나님을 시험하고 반항하여 그의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며 57그들의 조상들 같이 배반하고 거짓을 행하여 속이는 활 같이 빗나가서 58자기 산당들로 그의 노여움을 일으키며 그들의 조각한 우상들로 그를 진노하게 하였으매 59하나님이 들으시고 분내어 이스라엘을 크게 미워하사 60사람 가운데 세우신 장막 곧 실로의 성막을 떠나시고(56-60)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다시 ‘지존하신 하나님’(엘로힘 엘론)을 시험하고 반항하며 그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습니다(56). 그들이 돌이켜 거듭 하나님을 시험했다(41a)는 말이 반복된 셈입니다. 그때는 그들이 광야에 있었고, 지금은 ‘거룩한 영토’(54)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반역은 이전보다 심각한 것입니다. 이제 시인이 말하는 조상들은 출애굽 1세대가 아니라 광야에서 태어난 출애굽 2세대 조상으로 언급됩니다. 시인은 “그들은” 그들의 조상들처럼 배반하고 신실하게 행동하지 않았고, 느슨한 활처럼 빗나갔다고 말합니다(57). “속이는 활 같이”는 더 정확히 ‘느슨한 활 같이’입니다. “속이는”(레미야)에 해당하는 단어는 태만함, 느슨함, 부주의를 뜻하는 명사입니다. 시행 사이의 평행관계가 보여주듯 느슨한 활이 과녁을 향해 정확히 쏘지 못하는 것처럼, 조상들은 하나님께서 목표하는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지 못했습니다. 시인은 그 대표적인 항목을 말합니다. 그들이 신당에서 그를 격동시켰고, 그들의 우상이 그를 질투심에 불타게 했습니다(58).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우상숭배 때문에 질투심을 일으켰던 사례들이 있습니다(신 32:16; 겔 8:3). 이것은 언약 백성에게 주신 십계명의 첫 계명을 위반한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들으셨고 그가 분노하셨으며, 이스라엘을 극도로 미워하셨습니다(59). 하나님의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미움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떠나는 것으로 매듭지어집니다. 끝내 하나님께서는 실로의 ‘장막’(미쉬칸)을 떠나셨습니다. 이것은 사람 사이에서 그가 거주하셨던 ‘장막’(오헬)이었습니다(60). 실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정착 초기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처소였지만, 하나님께서 더는 그들과 함께 거주하지 않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참조. 삼상 3-5장).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숭배로 인한 하나님의 질투와 분노는 하나님의 부재로 귀결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61-64)

하나님을 버린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도 미워하여 떠나십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떠나자 성소가 있던 실로는 파괴되고 법궤는 블레셋에게 빼앗깁니다. 이스라엘의 능력은 빼앗기고 영광도 대적의 손에 넘어갑니다. 대적을 향하던 칼과 불이 이스라엘을 유린하도록 내버려 두십니다. 청년들이 전쟁에서 사라지자 혼인의 노래도 들리지 않고, 과부들의 통곡 소리만 들립니다.

 

61그가 그의 능력을 포로에게 넘겨 주시며 그의 영광을 대적의 손에 붙이시고 62그가 그의 소유 때문에 분내사 그의 백성을 칼에 넘기셨으니 63그들의 청년은 불에 살라지고 그들의 처녀들은 혼인 노래를 들을 수 없었으며 64그들의 제사장들은 칼에 엎드러지고 그들의 과부들은 애곡도 하지 못하였도다(61-64)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하나님의 부재였습니다(60). 그러나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을 포로에게 넘겨주시고, 그의 영광을 대적의 손에 붙이셨다고 합니다(61). 그의 능력과 그의 영광은 법궤를 의미합니다(시 132:8). 하나님께서는 실로를 떠나시고, 법궤를 빼앗기게 하셔서 실로를 중심으로 ‘거룩한 영토’에 정착한 첫 세대를 심판하신 것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블레셋이 법궤를 전리품으로 빼앗아 갔으니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대적의 손에 붙이신 셈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칼에 넘기셨고, 그의 소유(기업) 때문에 분노하셨습니다(62). 시의 평행구조가 제시하듯 그의 소유는 곧 그의 백성이며, 그의 분노는 칼입니다. 그의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을 불이 삼켰고, 그의 처녀들은 혼인 노래를 들을 수 없었습니다(63). 전쟁에서 죽은 젊은이들의 수가 얼마나 많았는지 젊은 여성들에게 구애하기 위한 칭송도 들리지 않는 상황입니다. 그의 제사장들도 칼에 맞아 넘어졌고, 그의 과부들은 애곡도 못했습니다(64; 참조. 삼상 4:17-22). 하나님께서 자기능력을 포기하신 것 같은 철저한 파괴와 슬픔과 고통은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심판은 다름 아닌 방치와 유기였습니다. 이것은 법궤를 우상처럼 섬겼던 조상들의 불신앙이 가져온 참담한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시작과 선택(65-72)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심판하셔도 영원히 버리지는 않으셨습니다. 포도주에서 깬 용사처럼 큰소리 외치시며 다윗을 통해 이스라엘의 대적을 물리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수치와 하나님 자신의 수를 갚아주셨습니다. 왕을 세우시고 시온 산에 견고하고 영원히 안전한 성소를 세우셨습니다.

 

65그 때에 주께서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포도주를 마시고 고함치는 용사처럼 일어나사 66그의 대적들을 쳐 물리쳐서 영원히 그들에게 욕되게 하셨도다 67또 요셉의 장막을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68오직 유다 지파와 그가 사랑하시는 시온 산을 택하시며 69그의 성소를 산의 높음 같이, 영원히 두신 땅 같이 지으셨도다 70또 그의 종 다윗을 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취하시며 71젖 양을 지키는 중에서 그들을 이끌어 내사 그의 백성인 야곱, 그의 소유인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셨더니 72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65-72)

 

아삽은 모든 소망이 끊어진 것 같은 그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일어나사 이스라엘을 구언하셨다고 노래합니다. 그리고 열두 지파 중 장자 지파라할 수 있는 에브라임을 버리고 유다를 택하셨으며, 시온산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결정하셨습니다.

 

(1) 강인한 용사처럼(65-66)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회복을 기획하십니다. 시인은 회복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용사에 빗대어 노래합니다. 그때 나의 주님(아도나이)이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그가 술에서 깬 맑은 정신의 용사처럼 깨어나셨습니다(65). 시인은 포도주로 붉게 달아올랐지만, 취하지 않고 침착한 용사로 하나님을 비유합니다. 시편 다른 곳에서도 하나님의 잠을 언급합니다(시 7:6;35:23;44:23;59:4-5). 이 시들은 하나님께서 깨어나셔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이것을 실제로 하나님이 주무신다고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듯, 하나님의 깨어나심을 이스라엘을 위해 다시 활동하시는 것으로 생생하게 표현한 은유입니다. 술을 마셨어도 취하지 않은 용사로 하나님을 표현한 것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강인한 용사의 이미지로 그려진 하나님께서 대적들을 물리치시고 영원히 그들에게 수치가 되게 하셨습니다(66). 이 두 절은 블레셋에게 빼앗겼던 법궤가 이스라엘로 돌아온 이야기를 회고하는 듯합니다(참조. 삼상 6:1-18). 그러니 영원히 그의 대적들을 욕되게 하셨다는 것은(66b), 블레셋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내리셨던 재앙과 그들이 전리품 취급한 법궤를 반환한 사건을 가리킬 것입니다. 이후 법궤는 기럇여아림에 머물고 백성들은 전쟁을 위해 인간 왕을 선택합니다.

 

(2) 유다 지파와 시온 산을 선택(67-69)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장막을 버리시고 에브라임 지파를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67). 에브라임 지파는 가장 수효가 많고 유력한 지파였지만 우상숭배와 교만 때문에 하나님의 선택에서 탈락했습니다(삿 12,17장 참조). 이는 하나님이 북쪽 성소와 에브라임 지파가 속한 곳이 예배처소가 되길 원하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대신에 유다 지파와 그가 사랑하시는 시온 산을 택하셨습니다(68). 하나님께서는 한동안 멀리 계셨습니다. 그가 유다지파와 시온을 선택하시고 에브라임 지파를 거부하셨지만, 그렇다고 북쪽 지파를 버리시겠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시인이 강조하는 것은, 다윗 왕권 수립의 중요성에 있습니다(삼하 7장). 시온, 곧 예루살렘은 다윗 왕이 선택한 수도이며(삼하 6:21; 왕상 8:16),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한 다윗이 처음 한 일은 언약궤를 긴 것입니다(삼하 6:1-19). 그래서 시인은 “그가 사랑하시는 시온”을 선택했다고 해석합니다. 이 때문에 시인은 그의 ‘성소’(미크다쉬)를 높이 세우셨고, 땅처럼 영원히 세우셨다고 노래합니다(69).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신 것과 다윗이 정한 수도는 하나님의 현존을 드러내며, 시인에게 이것은 구속 역사의 핵심이 됩니다.

 

(3) 이스라엘의 목자로 다윗을 선택(70-72)

 

시온과 다윗의 선택을 통해 하나님께서 기획하신 새로운 출발이 시작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그의 종 다윗을 선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선택하셨다고 노래합니다(70). 이는 그가 양을 치는 목동이었다는 사실을 드러내지만, 이스라엘을 돌보는 목자로서의 역할을 강조한 것입니다(삼하 7:8; 겔 37:24). 그리고 시인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신 목적을 밝힙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암양을 돌보는 그를 데려와 그의 백성 야곱과 그의 유산 이스라엘을 돌보게 하기 위함입니다(71). 여기에 암컷 동물이 어린 새끼를 젖먹이고, 키우며, 돌보는 행위를 표현하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다윗 왕권이 제왕적인 통치가 아니라 필요를 공급하며 소박하고 따뜻하게 돌보는 선한 목자의 돌봄을 상상하게 만듭니다. 또한 그의 백성 야곱과 이스라엘은 마치 유산 같은 하나님의 영원한 소유로서 목자의 돌봄을 받습니다. 시인은 그가 온전한 마음으로 돌보았고, 그의 능숙한 손으로 그들을 인도했다고(72) 회고합니다. 이렇게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세우신 선한 목자로서 그 역할을 정직하게 수행한 인물로 기억되었습니다. 시인은 목자 다윗의 돌봄의 통치를 회상하기까지 구원 역사의 드라마에 하나님의 사랑, 좌절, 분노, 심판이 고스란히 배어 있음을 노래했습니다. 이렇게 78편은 인류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과 인류 간의 길고 긴 투쟁의 역사를 보여줍니다. 이 시편이 그려주듯,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온갖 죄악들 사이에서 번뇌하시고 심판하시지만, 항상 다시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으신 분입니다.


지도자들은 작은 일이라고 소홀히 여기지 않는 사람이 좋은 지도자입니다. 어떤 일이든 맡은 일에 전문가가 되는 사람이 나중에 더 큰일에도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스스로 준비하지 않고서 지도자가 되려는 것은 공동체를 망치는 일입니다. 나는 내게 맡겨진 일을 사랑합니까? 그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까? 그 일에 전문가가 되려고 애씁니까? 스스로 점감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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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78-03)

 


애굽에서 가나안 여정까지 인도하신 하나님

시편 78편 34-55절


 

예수님을 영접한 날, 구원받은 날, 또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날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어떤 특정한 날을 지정하기는 어렵더라도 교회의 지체들을 통해서, 또는 여러 활동 가운데 하나님을 느끼고 체험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를 ‘처음 사랑’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그 기억들이 오늘의 삶에서는 어떤 의미를 가집니까?

 

  • 시인은 하나님을 향한 참된 충성심을 저버린 이스라엘을 향해 여전히 자비하셔서 분노를 모조리 쏟아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노래합니다. 시인은 이스라엘의 근원적인 실패를 망각에서 찾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애굽 땅에 재앙을 내리고, 거기서 끌어내 홍해를 건너고 가나안 땅에 입성한 구원 역사를 되새깁니다.

 

조상들의 회개와 기억(34-35)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 쏟아부으셔야 할 진노의 잔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위에 쏟아부으시고,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 긍휼의 절정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불신앙으로 인한 실패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긍휼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실패로 끝나게 놔놓지 않으셨습니다. 진노를 돌이키시고 결국 가나안으로 인도하셨습니다.

 

34하나님이 그들을 죽이실 때에 그들이 그에게 구하며 돌이켜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고 35하나님이 그들의 반석이시며 지존하신 하나님이 그들의 구속자이심을 기억하였도다(34-35)

 

시인은 하나님께서 죽이실 때에 이스라엘이 그를 찾았고, 돌아와 간절히 찾았다고 합니다(34). 이스라엘은 광야 40년 동안의 고된 방랑 생활에서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다가 죽음에 직면했을 때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이스라엘의 행동 패턴을 잘 아십니다. 은혜의 주께는 너무 곤혹스런 일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반석이며 ‘지존자 하나님’(엘 엘론)이 그들의 구속자이심을 기억했다고 말합니다(35). 신성을 표현하는 아주 오래된 용어 ‘엘’은 시편, 욥기, 이사야서, 창세기에서 자주 발견됩니다. 가장 높으신 하나님께서 “그들의 구속자”(고알람)라고 했을 때, ‘구속하다’(가알)의 뜻은 1차적으로 자산과 관련된 것으로서, 팔린 집을 다시 사들이거나(레 25:33) 빚 때문에 노예가 된 사람의 자유를 살 때(레 25:48), 기업 무를 자나(룻 4:4) 죗값을 갚기 위한 것에 대해 사용됩니다(민 5:8). 그들은 히브리 노예의 삶에서 자유 시민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을 기억했습니다.

 

다시 반복되는 불성실함(36-37)

교회 안에 많은 기념일이 있습니다. 매년마다 부활절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이지만, 성도들이 그 의미를 잊는 경우가 많습니다. 매년 성탄절에는 예수님이 아니라 산타클로스가 주인공이 되기도 합니다. 주님의 구원과 은혜가 잊혀진 예배와 절기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과연 그 의미를 되새기는 참된 예배와 절기를 지키고 있습니까?

 

36그러나 그들이 입으로 그에게 아첨하며 자기 혀로 그에게 거짓을 말하였으니 37이는 하나님께 향하는 그들의 마음이 정함이 없으며 그의 언약에 성실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36-37)

 

시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지만, ‘그러나’라는 표현을 통해 그들의 회개는 진실하지 않았다고 설명합니다. 그들이 자기들의 입과 혀로 하나님께 아첨하고 거짓말했다고 합니다(36).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마음은 굳건하지 않았고, 그의 ‘언약’(베리트)을 꾸준히 유지하는데 성실하지 않았습니다(37). 시인은 조상들의 신실하지 못한 행위를 표현할 때, 몸의 기관(입과 혀)을 바르게 사용하지 않고, 흔들리는 마음 상태를 꼬집습니다. 이는 몸과 마음의 성향이 언약을 지키는 신실성과 매우 밀접한 관계임을 역설한 것입니다. 삶은 몸으로 살아내고 뜻을 펼치는 것은 마음이 결정합니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몸의 기관을 위선과 가식을 위한 도구로 사용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기억(38-39)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사람들은 영원한 죽음이 기다릴 뿐입니다. 생명과 죽음의 갈림길에 서 있는 사람이 예수를 선택하면, 그 사람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집니다.

 

38오직 하나님은 긍휼하시므로 죄악을 덮어 주시어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그의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의 모든 분을 다 쏟아 내지 아니하셨으니 39그들은 육체이며 가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라(38-39)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언약 규정대로 행하셨다면, 그들은 광야에서 모두 죽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오직”) 하나님께서는 긍휼하셔서 죄악을 덮어주셨고, 멸망시키지 않으셨으며, 분노를 돌이키기를 거듭하셨습니다. 그는 모든 분노를 다 높이지는 않으셨습니다(38). 자기 백성의 아첨과 거짓말, 꾸준하지 못한 마음, 언약을 견실히 지키지 못한 것(35-36)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죄를 덮고 분노를 누그러뜨리셨습니다. 그는 ‘긍휼하셨다’(라훔). 긍휼은 어머니가 아기를 대하는 것과 같은 깊은 헤아림입니다. 죄를 덮어서 없는 것처럼 감춰주시고, 진노를 돌이키시고 또 돌이키시기를 수도 없이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긍휼이 그들을 살렸습니다. 또한 시인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살덩이요, 가서 돌아오지 못하는 바람으로 기억하셨다고 합니다(39). 시인은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이며, 스쳐 지나가는 바람 같은 존재라는 사실과 그것을 기억하시는 하나님을 어머니 같은 하나님으로 연결시켰습니다.

 

지나간 구원의 역사를 되짚어 봄(40-55)

성경에서 ‘헤세드’는 도무지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부어 주시는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사랑을 뜻하는 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을 입은 우리는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무사히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찬송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찬송할 수밖에 없습니다.

 

40그들이 광야에서 그에게 반항하며 사막에서 그를 슬프시게 함이 몇 번인가 41그들이 돌이켜 하나님을 거듭거듭 시험하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노엽게 하였도다 42그들이 그의 권능의 손을 기억하지 아니하며 대적에게서 그들을 구원하신 날도 기억하지 아니하였도다 43그 때에 하나님이 애굽에서 그의 표적들을, 소안 들에서 그의 징조들을 나타내사 44그들의 강과 시내를 피로 변하여 그들로 마실 수 없게 하시며 45쇠파리 떼를 그들에게 보내어 그들을 물게 하시고 개구리를 보내어 해하게 하셨으며 46그들의 토산물을 황충에게 주셨고 그들이 수고한 것을 메뚜기에게 주셨으며 47그들의 포도나무를 우박으로, 그들의 뽕나무를 서리로 죽이셨으며 48그들의 가축을 우박에, 그들의 양 떼를 번갯불에 넘기셨으며 49그의 맹렬한 노여움과 진노와 분노와 고난 곧 재앙의 천사들을 그들에게 내려보내셨으며 50그는 진노로 길을 닦으사 그들의 목숨이 죽음을 면하지 못하게 하시고 그들의 생명을 전염병에 붙이셨으며 51애굽에서 모든 장자 곧 함의 장막에 있는 그들의 기력의 처음 것을 치셨으나 52그가 자기 백성은 양 같이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에서 양 떼 같이 지도하셨도다 53그들을 안전히 인도하시니 그들은 두려움이 없었으나 그들의 원수는 바다에 빠졌도다 54그들을 그의 성소의 영역 곧 그의 오른손으로 만드신 산으로 인도하시고 55또 나라를 그들의 앞에서 쫓아내시며 줄을 쳐서 그들의 소유를 분배하시고 이스라엘의 지파들이 그들의 장막에 살게 하셨도다(40-55)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단지 애굽의 종살이에서 끌어내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으시고, 다른 나라의 침공을 막아 주셨으며, 결국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셔서 각 지파에게 분배해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1) 하나님의 슬픔(40-42)

 

광야에서의 반역과 시인은 다시 반역의 역사와 하나님의 자비를 돌이켜 묵상하며 노래합니다(참고. 12-16). 그들이 광야에서 얼마나 자주 반역했습니까? 그들이 사막에서 그를 얼마나 많이 슬프게 했습니까(40)? 시인이 광야에서 그들의 지속적인 반역을 언급한 것처럼(17), 거듭된 조상들의 고집스러움과 완고함에 대해 탄식합니다. 그들은 돌이켜 하나님을 시험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상처 입혔습니다(41).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그분에게 상처 입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이 … 하였도다”(히트누)를 정확히 풀이하면 ‘아픔을 주다’, ‘괴롭게 하다’, ‘상처를 입히다’라는 사역형 동사로서 구약에서 오직 여기서만 사용됩니다. 또 그들은 그의 권능의 손을 기억하지 않고 대적으로부터 그들을 구원하신 날도 기억하지 않았습니다(42).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연약함을 기억하셔서 분노를 거두셨지만(38-39), 그들은 ‘그들을 구원하신’(파담) 것을 기억하지 않은 것입니다. 시인은 망각의 문제를 다시 반복합니다(11절 참조). 그리고 ‘그가 구원하신 날’, 곧 그 시간은 출애굽 시점부터 가나안 정복과 정착의 과정을 모두 포함합니다.

 

(2) 애굽에서 일어난 재앙들(43-51)

 

시인은 시간적으로 더 먼 애굽 땅에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징조와 재앙 일곱 가지를 묘사합니다. 재앙에 대한 묘사는 피로 변한 나일강에서 시작하여 장자의 죽음으로 끝났습니다. 시인이 회고하며 묘사한 재앙 목록이 출애굽기의 재앙들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시인은 출애굽 당시의 일을 똑같이 기술하는 것에 목적을 둔 것이 아니라 재앙이 주는 효과에 관심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압제자로부터 구원하고, 창조 세계가 모조리 하나님의 무기라는 것을 보여주고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시인은 12절에서 ‘소안’을 언급했는데 다시 ‘소안’ 지역을 언급하면서 애굽에서의 ‘그의 표적들’과 ‘그의 징조들’을 열거합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강과 시냇물을 피로 변하게 하셔서 마실 수 없게 하셨습니다(44). 나일강은 애굽 사람들이 식수와 먹거리를 얻는 생명의 강이었지만 죽음의 강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쇠파리 떼를 보내셔서 물게 하셨고, 개구리를 보내 큰 피해를 입게 하셨습니다(45). 그들의 땅에서 얻은 농산물을 해충에게 주셨고, 그들이 수고하여 거둔 곡식을 메뚜기에게 주셨습니다(46). 그들의 포도나무를 우박으로, 그들의 “뽕나무”(무화과)를 서리로 죽이셨습니다(47). 그들의 가축을 우박으로, 그들의 양 떼를 번개로 치셨습니다(48). 그의 맹렬한 노여움과 진노와 분노와 적의, 곧 재앙의 천사들을 보내셨습니다(49). 그가 진노의 길을 터놓음으로 그들의 목숨이 죽음으로부터 피할 수 없게 하셨고, 그들의 생명을 전염병에 가두셨습니다(50).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세계와 인간의 조화로운 공존은 하나님의 뜻이지만, 창조 질서의 아름다움은 무참히 깨졌습니다. 재앙은 창조의 역행이었지만, 동시에 창조 세계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드러냈습니다. 마침내 그가 애굽의 모든 장자를 치셨습니다(51). 이것은 재앙의 절정이었고, 이 재앙을 근거로 유월절이 제정되었고(출 12장),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핵심이 되었습니다.

 

(3) 하나님의 인도와 소유의 분배(52-55)

 

시인이 일곱 가지 재앙을 묘사한 목적은 애굽 심판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함입니다. 시인은 그가 자기 백성을 양처럼 인도해내시고, 광야에서 가축 떼처럼 인도하셨다고 노래합니다(52).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목자처럼 보호하시고 안전하게 이끄셔서 그들은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렇게 구원받았지만, 그들의 원수들을 바다가 덮어버렸습니다(53; 출 14:24-31). 그는 그의 거룩한 ‘영토’(게불)로 그들을 인도하였습니다. 곧 그의 오른손으로 획득하신 산입니다(54). 거룩한 영토, 곧 이것과 평행하는 산은 시대산일까요, 시온산일까요? 둘 중 하나라기보다는 거룩한 영토(경계)와 평행하기 때문에 약속의 땅 전체를 일컫습니다(참조, 출 15:17; 사 11:9). 왜냐하면 곧바로 시인이 하나님께서 나라들을 그들 앞에서 쫓아내시고, 그들의 소유를 분배하셔서 이스라엘 지파들이 그들의 장막에서 살게 하셨다고 노래하고 있지 않습니까(55). 이렇게 시인은 오래전 여호수아가 장로들과 함께 정복한 땅을 지파별로 분배했던 때를 회고합니다(수 14-21장).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11절 참조).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들, 하나님의 원수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로 구원을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 사실만으로도 평생 그 은혜를 찬송하며 그분의 뜻대로 살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에 더해 매일의 삶에 은혜를 베푸시며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혹여 우리의 마음이 그 은혜를 잊고 세상 것에 붙들려 있지는 않은지 다시금 점검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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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78-02)

 


은혜와 반역의 역사를 기억하라

시편 78편 12-33절


 

우리 조상들이 조선왕조실록을 꼼꼼히 기록한 이유도, 후대인 우리들에게 왕조의 모든 역사를 기록함으로써 국가가 나아갈 방향과 각 개인의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함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온고이지신”이라는 말처럼, 옛 것을 알고 새것을 알아야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과거의 것이 구시대적이라 생각해서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과거를 거울로 삼아 미래를 계획할 수가 있습니다.

 

  • 시인은 지나간 역사 속에서 반항했던 이스라엘과 그들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구원 활동들을 노래합니다. 하나님께서 충분한 먹거리로 필요를 채우시고, 기적을 행하셨지만 먹고 마시는 문제로 하나님을 불신한 이스라엘의 조상들을 시인은 고발하듯 읊조립니다. 결국 조상들의 탐욕과 불신은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을 부르는 원인이 됩니다.

 

옛적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12-16)

이스라엘 백성의 필요를 채워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버리고 배반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순종하는 자들을 즉시 벌하시지는 않지만, 만족을 모르는 자들에게는 결국 진노가 임할 수밖에 없습니다.

 

12옛적에 하나님이 애굽 땅 소안 들에서 기이한 일을 그들의 조상들의 목전에서 행하셨으되 13그가 바다를 갈라 물을 무더기 같이 서게 하시고 그들을 지나가게 하셨으며 14낮에는 구름으로, 밤에는 불빛으로 인도하셨으며 15광야에서 반석을 쪼개시고 매우 깊은 곳에서 나오는 물처럼 흡족하게 마시게 하셨으며 16또 바위에서 시내를 내사 물이 강 같이 흐르게 하셨으나(12-16)

 

시인은 애굽 땅에서 하나님께서 조상들을 위해 행하신 일들을 상기합니다. 옛적에 하나님께서 조상들 눈앞에서 ‘기이한 일’(펠레), 곧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 일은 애굽 땅에 있는 소안 들판에서 있었다(12)고 합니다. 소안 지역을 칠십인역에서 ‘타니스’로 번역했는데, 이곳은 나일 델타 지역에 위치한 것으로 알려집니다. 이 때문에 시인은 열 재앙(출 7-12장)을 염두에 두고 소안을 언급했는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기이한 일’은 열 재앙을 한 덩어리의 큰 사건으로 취급한 시인의 의도적인 어휘 선택일 것입니다. 출애굽 사건은 자자손손 전해야 할 모범적인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이후 하나님께서 바다를 가르시고 물을 둑처럼 서게 하시고, 그들 곧 조상들이 지나가게 하셨습니다(13; 출 14:16;15:8). 이 사건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성경 저자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언급됩니다(참조, 수 3:13,16;4:23;느 9:11;사 63:12). 하나님께서는 낮에는 구름으로, 밤에는 불빛으로 인도하셨습니다(14). 낮과 밤은 한 쌍이 되어 하루 종일 자기 백성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그려보게 합니다. 마찬가지로 구름과 불빛은 한 쌍으로 묶여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출 13:21; 14:20;민 10:34; 느 9:12; 욥 37:11,15; 시 105:39; 겔 32:7).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자기 언약 백성 이스라엘을 낮의 뜨거운 열기와 밤의 추위로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안전하게 보호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광야에서 반석을 쪼개시고 "매우 깊은 곳"에서 나오는 물처럼 흡족하게 마시게 하셨다(15절). “매우 깊은 곳”(테호모트)은 원시의 깊은 바다(창 1:2; 7:11; 출 15:5)이며 심연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지 강조하려는 시인의 의도가 매우 강하게 드러난 과장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또 바위에서 시냇물이 흐르게 하시고, 강물처럼 물이 흐르게 하셨습니다(16). 물이 부족한 광야에서 바위틈 사이로 솟아난 ‘물’(마임)은 유프라테스 강이나 티그리스 강 또는 나일 강에 붙이는 ‘강물’(나하로트) 같습니다. 범람하는 강물처럼 바위 사이에서 분출하는 물은 출애굽기(17:1-6)와 민수기(20:10-13)에 기록된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것은 오래전 목말라 물을 찾으며 하나님을 원망했던 이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입니다.

 

조상들의 반역과 하나님의 분노(17-22)

욕심은 마음 바닥에 깨진 구멍과 같습니다. 그래서 그 어떤 것으로도 욕심이 가득한 마음을 채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집중하기를 원합니다. 이전에 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앞으로 이끌어 주실 은혜를 기대하며, 오늘 부어 주신 은혜를 붙잡고 주님과 하나 되는 일에 성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17그들은 계속해서 하나님께 범죄하여 메마른 땅에서 지존자를 배반하였도다 18그들이 그들의 탐욕대로 음식을 구하여 그들의 심중에 하나님을 시험하였으며 19그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이 광야에서 식탁을 베푸실 수 있으랴 20보라 그가 반석을 쳐서 물을 내시니 시내가 넘쳤으나 그가 능히 떡도 주시며 자기 백성을 위하여 고기도 예비하시랴 하였도다 21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듣고 노하셨으며 야곱에게 불 같이 노하셨고 또한 이스라엘에게 진노가 불타 올랐으니 22이는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며 그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한 때문이로다(17-22)

 

그러나 그들은 계속 하나님께 범죄하고, 메마른 땅에서 지존자(엘룐)를 배반했습니다(17). 시인은 하나님의 기이한 은총을 맛본 사람들의 반역을 고발합니다. 그렇다면 광야에서 지속적으로 범죄한 사건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평행하는 둘째 소절이 제시하듯, 물 없는 건조한 땅에서 가장 높으신 분을 향해 대항하거나 완고한 태도를 버리지 않은 것입니다. ‘배반했다’는 표현은 반감을 갖거나 고집스럽고 완고하게 구는 것을 뜻합니다. 그들은 자기들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시험했고,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해 먹거리를 요구했습니다(18). 놀랍게도 시인은 부사구 ‘자기들 마음으로’(빌바밤)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과 ‘자기들 욕망을 위해’(레나프샵)를 나란히 평행시켜 동의적인 의미로 배열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가르침에 따라 마음을 조율하지 않고 자기들 ‘입맛’(네페쉬), 즉 ‘욕구’대로만 살았습니다. 먹고자 하는 욕구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제한받지 않고 절제되지 않는 욕구나 식욕은 탐욕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엘로힘)께 대적하며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엘)이 광야에서 식탁을차리실 수 있을까?’(19) 이는 조상들이 보고 경험했던 하나님의 놀라운 행위들을 신속하게 잊었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이후 그들은 ‘보라! 그가 반석을 쳐서 물을 내시니 그 물이 넘쳤지만, 그가 어찌 자기 백성에게 고기도 준비하실까?’(20)라고 말했습니다. 19-20절은 의도적으로 조롱하려는 의도가 내재된 표현입니다. ‘그들이 계속해서 범죄했다’(17)는 시인의 고발은 죄의 성격과 습성, 반역적인 망각의 병을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꼬집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듣고 노하셨습니다. 야곱에게, 곧 이스라엘에게 불같이 노하셨다고 묘사됩니다(21). 시인은 하나님의 분노를 표현하며 “노하셨으며 … 불같이 노하셨고 … 진노가 불타올랐으니”라고 거듭 강조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그의 구원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22). ‘믿는다’(아만)는 것은 꾸준히 신실함을 유지하는 것이며(호 12:1), 착실함이고, 머무르며 지속한다는 뜻입니다(참조. 사 7:9). ‘의지한다’ 또는 ‘신뢰한다’(바타흐)는 것은 확신에 차서(사 12:2), 의심을 품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삿 18:10). 따라서 믿고 신뢰한다는 것은 지적 동의가 아니라 삶의 태도이며 방향성입니다.

 

하늘 양식과 하나님의 심판(23-31)

탐욕은 불신을 낳았고, 불신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오만불손한 악행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주권자의 자리에서 내려와 그들의 욕심을 만족시켜주는 사환으로 전락했습니다. 광야의 망각과 배은망덕이 오늘 우리의 광야에서 재현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23그러나 그가 위의 궁창을 명령하시며 하늘 문을 여시고 24그들에게 만나를 비 같이 내려 먹이시며 하늘 양식을 그들에게 주셨나니 25사람이 힘센 자의 떡을 먹었으며 그가 음식을 그들에게 충족히 주셨도다 26그가 동풍을 하늘에서 일게 하시며 그의 권능으로 남풍을 인도하시고 27먼지처럼 많은 고기를 비 같이 내리시고 나는 새를 바다의 모래 같이 내리셨도다 28그가 그것들을 그들의 진중에 떨어지게 하사 그들의 거처에 두르셨으므로 29그들이 먹고 심히 배불렀나니 하나님이 그들의 원대로 그들에게 주셨도다 30그러나 그들이 그들의 욕심을 버리지 아니하여 그들의 먹을 것이 아직 그들의 입에 있을 때에 31하나님이 그들에게 노염을 나타내사 그들 중 강한 자를 죽이시며 이스라엘의 청년을 쳐 엎드러뜨리셨도다(23-31)

 

하나님의 심판은 먹을 것이 아직 그들의 입에 있을 때 임했습니다. 풍요를 즐기고 있는 그때가 바로 심판이 임하는 때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자들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1) 하나님께서 베푸신 풍족한 음식(23-29)

 

하나님을 향한 조상들의 불신에도 불구하고(22), 하나님께서는 위의 궁창(하늘)에게 명령하시고 하늘의 문을 여셨습니다(23). 그는 그들을 먹이시려고 그들 위에 ‘만나’(만)를 내리시고 하늘의 곡식을 주셨습니다(24; 출 16:4). ‘만나’의 정확한 뜻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사입니다. 이 말은 조상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고 ‘이것이 무엇이냐?’(만 후)라고 했던 말에서 시작됩니다(출 16:15). 즉 ‘만나’는 예상치 못한 놀라움을 표현한 말입니다. 시인은 역사적 사건을 묘사하기 시작합니다. 사람이 “힘센 자”의 빵을 먹었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음식을 보내셨습니다(25). 하나님께서 동풍과 남풍으로 먼지처럼 많은 고기를 비처럼 내리시고, 새를 바다의 모래처럼 내리셨습니다. 이것들이 진중에 떨어지게 하셔서 심히 배부르게 하셨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넉넉히 주셨습니다(26-29). 조상들은 하나님을 시험했지만(18),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분노가 고조되는 가운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요구한 것을 주십니다(참조. 민 11장). 하나님의 역설적인 행동이 혼란스럽습니다.

 

(2) 조상들의 탐욕과 하나님의 심판(30-31)

 

그러나 ‘그들의 욕망대로’(18) 그들에게 가득 차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치셨습니다. 시인은 아직 그들의 입에 먹을 것이 있는데 ‘그들의 욕망으로부터’(믿타아바탐) 돌아서지 않았다(30)고 고발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총과 그의 심판 사이의 밀접한 연결성을 보여줍니다. 끝내 하나님의 분노가 그들을 향해 불타올랐고, 그들 중의 “강한 자”(문자적으로, ‘비대한 자들’)를 죽이셨고, 이스라엘의 혈기 왕성한 젊은 남자들을 거꾸러뜨리셨습니다(31). 이것은 심판의 철저성을 보여주며, 또한 심판은 약한 자보다 강한 자에게 더 가혹하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조상들의 지속적인 불신과 두려움(32-33)

하나님의 약속이 빨리 성취되지 않는 이유는 대부분 하나님께서 성실하지 않으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이해한다면 하나님의 섭리가 늦게 이루어진다고 투덜거릴 수 없습니다.

 

32이러함에도 그들은 여전히 범죄하여 그의 기이한 일들을 믿지 아니하였으므로 33하나님이 그들의 날들을 헛되이 보내게 하시며 그들의 햇수를 두려움으로 보내게 하셨도다(32-33)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죄를 지었고, 하나님의 기이한 일들을 믿지 않았습니다(32; 참조. 4,11,22). 조상들의 삶에 대한 신학적인 요약은 두 마디입니다. ‘죄를 지었고, 믿지 않았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는 필요가 채워지지마자 끝나버렸습니다(30절 참조). 그들은 하나님의 기적에 만족할 줄 몰랐고, 더 센 기적을 원했습니다. 만족할 줄 모르는 순간 신뢰는 사라집니다. 시인은 그들의 날들은 ‘순간’(헤벨)처럼 끝나고, 그들의 생애(“햇수”)는 갑작스러운 공포와 파멸에 잠식된다(33)고 일갈합니다. 그들의 인생은 실체 없는 텅 빈 공허 곧 ‘헤벨’이며, 그들의 생애조차 갑작스럽고 경악스러운 공포와 낙심뿐입니다. 끝내 하나님의 은총은 지속적인 죄와 믿음 없음 때문에 슬픈 결론으로 마무리됩니다.


출애굽과 광야 여정은 놀랍기 그지없는 기적들이 가장많이 일어난 때였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가시적으로 풍성히 나타났기 때문에 하나님을 쉽게 믿을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탐욕에 있었습니다. 탐욕이 그들의 눈을 가리고 마음을 완고하게 만들었습니다. 탐욕이 가득한 심령에 믿음이 뿌리내릴 수 없습니다.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은혜에 집중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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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78-01)

 


다음 세대를 위한 권면

시편 78편 1-11절


 

교회의 침체, 그로 인해 신앙을 이어 갈 다음 세대의 부재에 대해 염려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다음 세대를 키우기 위한 프로그램, 화려한 건물, 과감한 투자 등 여러 방법들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요소들은 부수적인 것입니다. 다음 세대를 위해 정말 준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 이 시편은 이스라엘 구원 역사를 재진술하는 역사적인 서사시이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도록 안내하는 교훈적인 찬양입니다. 이 부분은 시 전체의 도입부로서 다양한 주제의 핵심을 담고 있습니다. 비유와 역사의 신비한 수수께끼를 드러내고, 여호와의 기이한 행적을 잊지 않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도록 당부합니다.

 

여호와의 영광과 능력과 기인한 일을 전하리라(1-4)

말씀이 없는 부흥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믿음도 생겨나기 않습니다. 믿음이 생기려면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고,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백성을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알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아버지가 아들에게, 그 아들이 다시 아들에게 전하는 방법으로 전수했습니다.

 

1내 백성이여, 내 율법을 들으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2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며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려 하니 3이는 우리가 들어서 아는 바요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전한 바라 4우리가 이를 그들의 자손에게 숨기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영예와 그의 능력과 그가 행하신 기이한 사적을 후대에 전하리로다(1-4)

 

본 시는 다윗 시대에 성소에서 제사를 주도했던 아삽이 지은 시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마지막이 다윗에 대한 찬사로 끝나고, 전체 내용 중 성전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입니다. 시인 아삽은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신 하나님을 대변해 백성에게 노래로 말씀을 선포합니다.

 

(1) 내 가르침을 들어라(1-2)

 

“나의 백성이여, 내 가르침을 들어라”(1). 시인의 첫마디는 스승이 제자를 가르치듯 백성에게 말합니다. “내 율법”(토라티)의 우선적인 뜻은 가르침, 교훈, 방향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시내산에서 부여하신 율법이 아니라 자신의 가르침을 지칭합니다. 그러나 모세가 출애굽 2세대에게 교훈했던 것처럼 가르침의 권위를 갖고 말합니다(참조. 신 32:1). 또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이라(16)고 말합니다. ‘내 가르침’과 ‘내 입의 말’은 동의적인 의미로 쓰였습니다. 시인은 입을 열어 비유와 예로부터 감춰진 것들을 말하고 드러내겠다고 합니다(2). 시인이 고대 이스라엘의 지혜자들처럼 자신의 교훈을 “비유”(마샬), 곧 ‘잠언’ 형식으로 말하고, “감추어졌던 것”(히도트), 곧 ‘수수께끼’같은 말로 쏟아내겠다는 뜻입니다(참조. 잠 1:6). 예로부터 감춰진 것들은 이전 세대로부터 전수 받은 삶의 수수께끼 같은 것들, 곧 즉각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들입니다. 이러한 역사의 수수께끼에 대해 말하겠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의 능력과 이스라엘의 죄 사이에서 반복된 신비한 은총의 역사입니다.

 

(2) 여호와의 기이한 일을 전하리라(3-4)

 

시인은 비유와 역사의 수수께끼에 대해 우리가 아는 바이고, 우리 조상들이 우리에게 전수해준 것이라고 합니다(3). 시인은 ‘내 백성’, ‘내 교훈’, ‘내 입의 말’(1), ‘내가 입을 열어 말한다’(2)와 같은 1인칭화법 사용에서 1인칭 복수형태 ‘우리’로 전환합니다. 그리고 비유와 예로부터 감춰진 것들은 시인만 아는 것이거나 획기적인 새로운 무엇이 아니라 ‘우리가 듣고 우리가 아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조상들이 일일이 열거하며 전수한 비유와 수수께끼는 무엇입니까? “여호와의 영예와 그의 능력과 그가 행하신 기이한 사적”입니다(4cd). 비범하고 놀랍다는 뜻의 ‘팔라’ 동사의 분사형태로 표현된 여호와가 행하신 “기이한 사적”, 곧 기이한 일들은 11절에서 다시 반복됩니다. 이것은 107편에서 다섯 번 반복됩니다(107:8,15;21;24,31). 시인은 이것을 ‘우리 자손’(“그들의 자손”)에게 숨기지 않고, 다음 세대에 전할 것이라(4ab)고 말합니다. 흥미롭게 시인은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겠다고 밝힌 것처럼, 여호와의 ‘영광’(테힐로트)과 그의 능력과 기이한 일들을 ‘우리가 숨기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영광과 기이한 일, 곧 기적은 모세가 부른 이른바 바다의 노래와 평행합니다(출 15:11). 시인은 하나님이 지금까지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온갖 이적들 중에서도 애굽으로부터 구원하신 하나님을 자자손손 전수해야 한다는 책임성을 모든 세대에게 부여한 셈입니다. 또한 시인 자신의 교훈은 세대를 거듭하며 전수할 하나님의 기적과 관련된 것임을 밝힌 것입니다.

 

여호와의 언약과 법, 그리고 그의 기이한 일을 망각(5-11)

우스갯소리인지 모르지만, 요즘 아이들의 가장 큰 꿈은 건물주가 되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조물주보다 건물주’라는 말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우스갯소리를 간과할 수 없는 이유는 아이들에게서 소망이, 비전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현실 때문입니다. 요즘 아이들은 그저 편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하나님의 마음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것입니다.

 

5여호와께서 증거를 야곱에게 세우시며 법도를 이스라엘에게 정하시고 우리 조상들에게 명령하사 그들의 자손에게 알리라 하셨으니 6이는 그들로 후대 곧 태어날 자손에게 이를 알게 하고 그들은 일어나 그들의 자손에게 일러서 7그들로 그들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잊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계명을 지켜서 8그들의 조상들 곧 완고하고 패역하여 그들의 마음이 정직하지 못하며 그 심령이 하나님께 충성하지 아니하는 세대와 같이 되지 아니하게 하려 하심이로다 9에브라임 자손은 무기를 갖추며 활을 가졌으나 전쟁의 날에 물러갔도다 10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아니하고 그의 율법 준행을 거절하며 11여호와께서 행하신 것과 그들에게 보이신 그의 기이한 일을 잊었도다(5-11)

 

시인은 하나님의 백성이 후대에 말씀을 전수하고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할 이유와 책임을 명확하게 제시합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가나안을 정복했지만, 이후 세대는 전 세대를 알지 못해 각자 가기의 마음에 옳은 대로 행하기 시작했습니다.

 

(1) 언약과 법을 세우신 목적(5-8)

 

시인은 더 먼 옛적 일을 회고하며 노래합니다.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증거”(에두트), 곧 ‘경계 표지’를 맡기셨고, 율법(토라)을 이스라엘에게 부과하셨습니다(5ab). 이것을 그가 우리 조상들에게 명령하셨고, 그들의 후손들에게 알리라고 하셨습니다(5cd). 시인은 세대를 거듭하면서 전수해야 할 교훈을 야곱에게 소급하면서 거기서 시작되고 지파별로 분화된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을 되새깁니다. 이스라엘에게 시내산에서 부과하신 “법도”, 곧 ‘토라’는 야곱에게 부여하신 ‘경계 표지판’ 같은 삶의 길잡이입니다. 시내산에서 언약식을 거행하기 전에 부여된 삶을 위한 신호 표지판은 자동적으로 전수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은 언약과 가르침(토라)은 교육과 훈련을 통해서만 다음 세대로 전수됩니다. 따라서 여호와는 언약에 따르는 의무와 책임을, 삶을 위한 경계의 표지들을 자손들에게 가르치도록 명령하신 것입니다(출 10:2;13:14; 참조. 신 4:9; 6:7). 하나님의 구원을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것은 모든 세대의 의무입니다. 다음 세대가 알 수 있도록, 태어날 후손들도 그들의 후손을 위해 지속하여 하나하나 일러주어야 한다(6)고 말합니다. 그렇게 할 때 그들은 하나님께 “소망”(키쏠람), 곧 ‘신뢰’를 두며,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잊지 않고 그분의 명령을 준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7). 이것이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맡기신 ‘경계의 표지’와 이스라엘에게 부과하신 ‘법’(토라)을 전달하며 교육하는 목적입니다. 그들의 조상들처럼 되지 말아야 합니다. 즉 완고한 세대요, 고집 센 세대요, 그 마음은 견고하지 않으며, 그의 심령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던 조상들 같이 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8). 이스라엘 조상들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에 대한 생생한 경험을 가졌음에도 현재의 이스라엘이 따라야 할 모범이 되지 못했습니다. 완고하고, 패역했고, 마음은 정직하지 못하며,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시인이 하나님의 기이한 행적을 찬양하는 대신에 이스라엘 조상들의 불신의 역사를 열거합니까? 시인은 전통 전수만을 옹호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릇된 역사의식과 잘못된 전통들이 새 세대에서는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도”, 곧 그분의 ‘가르침’에 순종하지 못한 역사를 언급한 것입니다.

 

(2) 언약과 법을 준행하지 않고, 여호와의 일을 망각(9-11)

 

시인은 좀 더 구체적으로 에브라임의 불순종을 언급합니다. 시인은, 에브라임 자손이 무기를 갖추고 활 쏘는 자들이었으나 전쟁의 날에 물러났다(9절)고 합니다. 에브라임은 야곱의 큰 축복을 받았던 요셉의 두 아들 중 둘째입니다. 에브라임의 후손들은 북이스라엘 중에서 가장 많았을 뿐만 아니라 용맹성으로 유명했습니다(삿 8:1-3; 12:1-6). 그러나 시인은 에브라임 후손들이 전쟁에서 물러서는 비겁함을 전합니다. 시인이 특정한 어떤 사건을 염두에 두고 말한 것입니까? 에브라임 지파가 기업으로 받은 땅을 정복하지 못한 것입니까(삿 1장), 아니면 실로에 있던 법궤를 빼앗기고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것을 말하는가(삼상 4-6장), 아니면 사마리아가 앗시리아 군대에 의해 함락된 일을 말합니까(왕하 17:7-18)? 다양한 의견들이 제시될 수 있지만, 이것은 에브라임 지파만을 특정하기보다는 유명한 조상 이름으로 민족 전체를 언급하는 셈족 시문학의 일반적인 관행입니다.

시인은 에브라임, 곧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패배한 이유를 밝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않았고, 그의 율법에 따라 걷기를 거절했습니다(10). 언약(베리트)과 율법(토라)은 구약에서 여러 차례 평행되는 말입니다(신 29:21; 31:9,26; 스 10:3; 사 24:5; 렘 31:33; 호 8:1; 말 2:8). 율법은 언약보다 하위 개념입니다. 율법은 하나님과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유지하기 위한 “법도”(5), 곧 ‘토라’입니다. 이것은 언약 백성으로서 살아갈 삶의 방향성을 지시하며, 언약 백성으로서 의무와 책임을 명시한 가르침입니다. 에브라임 자손은 이 둘을 버렸을 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행위와 그들에게 보이신 기이한 일을 잊었습니다(11). 여호와의 행하신 일이나 기이한 일은 이스라엘의 구원과 관계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과 구원은 밀착되어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행동하시는 분으로 노래할 뿐만 아니라, 그 행위는 ‘기이한 일’(4, “기이한 사적”), 곧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으로 강화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행동과 기적은 그 수혜자들(언약 백성들)에 의해 잊히지 않고 기억될 때, 아름다운 전통으로 빛납니다.


과연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하려고 노력해 왔습니까? 자녀에게 세상의 지식을 전수하기 위해 쏟는 노력의 몇 퍼센트를 하나님의 말씀을 알게 하는 데 사용하고 있습니까? 만약 우리가 말씀보다 세상의 지식을 전수하는 데에만 관심을 갖고 있었다면 하나님의 경고를 좀 더 진지하게 받아들여야겠습니다. 우리 자녀와 이웃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기꺼이 드릴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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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77-01)

 


하나님을 찾을 때 느끼는 아픔

시편 77편 1-20절


 

누구나 나름대로의 고민과 고통을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사람에 따라 어떤 경우에 고통을 느끼는가는 상당히 다릅니다. 사람들은 주로 욕망이 좌절될 때, 소외감이 둘 때 고통을 느낍니다. 그러나 시편 77편의 시인인 아삽은 전혀 다른 이유로 고통을 호소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찾으며 용서를 구하면서 힘들어합니다.

 

  • 이 시는 절망의 밤을 견디는 이의 탄식과 함께 지난날 행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찬미하는 노래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지연되고 고뇌하는 불면의 밤은 길어져 암흑의 시간 속에서 시인은 앓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현재의 고난 속에서 지나간 시간의 은총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신비로운 발자취를 생각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노래합니다.

 

절망과 불안 속에서 부르는 노래(1-6)

하나님 앞에서는 죄를 인정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는 기도의 자리에 나아가 본 사람만 공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면 큰 고통을 느끼지만 그래도 하나님을 찾습니다. 이는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에게 혼나고 있으면서도 엄마를 찾는 모습과도 같습니다. 엄마 때문에 아프지만 엄마의 도움을 구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1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2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나니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3내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 (셀라) 4주께서 내가 눈을 붙이지 못하게 하시니 내가 괴로워 말할 수 없나이다 5내가 옛날 곧 지나간 세월을 생각하였사오며 6밤에 부른 노래를 내가 기억하여 내 심령으로, 내가 내 마음으로 간구하기를(1-6)

 

시인은 환난 날에 하나님을 찾습니다. 밤이고 낮이고 하나님 앞에 부르짖으며 나아갑니다. 손을 들고 하나님께 간절히 구합니다. 문제는 시인이 이렇게 부르짖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위로를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1) 절망의 밤에 부르는 노래(1-3)

 

고난 속에서 사람들은 부르짖고 하나님을 찾고 밤새워 손을 들고 도움을 구하며 밤을 보냅니다. 이는 고대 이스라엘 시인들에게 친숙한 주제입니다. 시인은, 내목소리를 하나님께 부르짖으니, 그가 내게 귀 기울일 것이라고(1) 합니다. ‘내 목소리’와 ‘하나님께’라는 말을 두 번 반복할 정도로 절실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호소했던 순간을 고백합니다. ‘환난 날에 내가 여호와를 찾았고, 밤에 나의 손을 치켜들고 거두지 않았으며, 내 영혼이 위로받기를 거절했도다’(2). 응답 없는 하나님 때문에 위로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겪는 고난보다 하나님의 침묵이 더 고통스럽습니다. 불안은 고조되었고 근심으로 약해진 마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내가 고함치고, 내가 깊이 생각하며 나의 영혼이 무기력해졌도다’(3). 시인은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불안에 압도되어 불평합니다. 근심이 깊어져 평정이 사라지고 실신할 정도로 무력해졌습니다. 밤마다 여호와를 찾았지만, 거의 절망의 끝에 서 있습니다.

 

(2) 잠들지 못하는 밤의 노래(4-6)

 

시인은 잠들지 못하는 불면의 밤이 괴롭습니다. 이제 하나님을 향해 직접 호소합니다. ‘당신이 내 눈꺼풀을 단단히 쥐고 계시니, 나는 혼란스러워 말할 수 없습니다’(4). 그의 생각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것은 하나님께서 눈꺼풀을 꼭 붙잡으셨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불면의 고통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고통을 일일이 다 표현 못하는 답답함도 호소합니다. 또 내가 지난날들, 오랜 옛 세월을 생각했다고 말합니다(5). 시인이 말하는 옛일들은 무엇입니까? 개인적인 고통의 시간들인가, 조상들이 경험한 역사적인 사건들입니가? 지난날 들(야밈 믹크뎀)과 아주 오래된 ‘옛 세월’(쉐노트 올라밈)을 병행하여 표현한 것을 볼 때 시인은 개인적인 고통만을 반추한 것이 아니라 구원 역사를 되새기며 공동체의 현실적인 고통을 깊이 생각하는 중으로 보입니다. 그 생각 끝에서 시인은 밤에 부른 노래를 떠올리고 독백하듯 말합니다. ‘내가 그 밤에 나의 노래를 기억하고, 내가 내 마음으로 깊이 생각하고 내 영혼이 찾고 찾는다’(6). 시인의 깊은 사색과 내적인 추구를 표현한 말입니다. 시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마음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영혼의 바람이 무엇인지 밝히지 않지만, 지난 옛일을 떠올렸던 것(5)과 관련되었을 것입니다. 여전히 내적인 고통은 멈추지 않고, 고통스러운 질문들이 이어집니다(7-9).

 

지난 시간들을 회고하는 노래(7-9)

하나님께서는 자기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사람을 품으시고 용서하십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이런 말을 너무 많이 들어서 그런지, 하나님의 용서를 쉽게 생각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죄를 용서받는 일을 결코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면서도 자신에게 당연히 용서받을 권리가 있는 것처럼 행하는 것은 뻔뻔하고 가증한 모습입니다.

 

7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8그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끝났는가, 그의 약속하심도 영구히 폐하였는가, 9하나님이 그가 베푸실 은혜를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가 베푸실 긍휼을 그치셨는가 하였나이다(셀라)(7-9)

 

현재 느끼는 하나님의 부재는 시인을 그분의 인애와 보호가 있었던 과거로 향하게 합니다. 시인은 당혹스러운 질문을 이어갑니다. ‘나의 주님이 영원히 버리실까? 그가 다시 은혜를 베풀지 않으실까?’(7) 시인은 하나님께서 영원히 거절하지 않으실까 걱정합니다. 그러면서도 다시 친구처럼 기뻐해주실 하나님을 기대합니다. ‘은혜를 베풀다’는, 호의를 베풀거나 친구가 되거나 기뻐한다는 뜻이 포함되었습니다. 호의를 베풀지 않으실까 하는 염려와 베풀어주시기를 바라는 기대가 섞여 있습니다. 이어지는 질문도 하나님께서 언약적인 사랑을 철회하실까 봐 염려하는 마음을 표현합니다. 그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끝났습니까? “그의 약속하심”도 끝났습니까?(8) “그의 약속하심”은 문자적으로 ‘세대를 거듭하는 말씀’입니다. 한결같고 실패하지 않는 사랑, ‘헤세드’는 세대를 거듭하지만,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약속의 말씀은 폐기되었는지 묻고 있습니다. 아니면 하나님은 베푸실 은혜를 잊으셨습니까? 분노 때문에 그의 긍휼을 닫으셨습니까?(9) 긍휼은 복받치는 사랑의 감정(창 43:30), 곧 깊은 동정심입니다. 시인은 분노 때문에 주께서 ‘언약적 사랑’(헤세드)을 폐기하신 것은 아닌지 알고 싶어 합니다.

 

옛적에 행하신 하나님을 찬양(10-20)

연약함을 인정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시작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면 하나님의 능력을 확신하는 단계로 도약할 수 있습니다. 그다음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리고 자신이 걸어온 인생길을 돌아보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묵상해 가야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문제를 맡기십시오. 하나님의 강한 팔을 의지하는 것이 우리의 연약함을 극복하고 인생의 고비를 넘기는 비결입니다.

 

10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잘못이라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 11곧 여호와의 일들을 기억하며 주께서 옛적에 행하신 기이한 일을 기억하리이다 12또 주의 모든 일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행사를 낮은 소리로 되뇌이리이다 13하나님이여 주의 도는 극히 거룩하시오니 하나님과 같이 위대하신 신이 누구오니이까 14주는 기이한 일을 행하신 하나님이시라 민족들 중에 주의 능력을 알리시고 15주의 팔로 주의 백성 곧 야곱과 요셉의 자손을 속량하셨나이다(셀라) 16하나님이여 물들이 주를 보았나이다 물들이 주를 보고 두려워하며 깊음도 진동하였고 17구름이 물을 쏟고 궁창이 소리를 내며 주의 화살도 날아갔나이다 18회오리바람 중에 주의 우렛소리가 있으며 번개가 세계를 비추며 땅이 흔들리고 움직였나이다 19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곧은 길이 큰 물에 있었으나 주의 발자취를 알 수 없었나이다 20주의 백성을 양 떼 같이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인도하셨나이다(10-20)

 

시인은 환난 가운데서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히는 탄식과 낙담 속에서도 하나님을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가 환난의 상황을 바라보는 새로운 깨달음에 이르렀음을 진술합니다.

 

(1) 여호와의 행하신 일을 기억하리라(10-12)

 

시인은 어두운 밤의 탄식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회상하며 믿음을 고백하는 것으로 전환합니다. 1인칭 화법이 계속됩니다. ‘내가 말하기를’, 그것은 “나의 잘못”이었다(10)고 합니다. “나의 잘못”은 ‘고통을 느끼다’, ‘후회하다’, ‘낙담하다’라는 동사의 부정사입니다. 곧이어 시인이 느꼈던 고통과 낙심과 후회는 ‘지존자의 오른손이 변화시키신 것’(10b)이라고 말합니다. 10절 시행이 모호하여 역본마다 다르지만, 시인의 슬픔과 절망도 다르게 변화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행하심에 기인한다는 뜻으로 풀이됩니다. 이 때문입니까? 시인은 하나님께 고백합니다. ‘내가 여호와의 일들을 기억합니다. 참으로, 내가 옛적 당신의 기이한 일을 기억합니다’(11). 놀라운 일은 경이롭고 경탄할 만한 비범한 일이며, 모세가 홍해를 건넌 후 부르던 노래에서 사용된 말입니다(출 15:11; 시 89:5). 또 시인은 하나님께, 내가 당신의 모든 일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고, 당신의 행위를 묵상하겠다고(12) 말합니다. 이는 고요히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하나하나 깊이 새기겠다는 고백과 다짐입니다.

 

(2) 거룩하고 기이한 일을 행하신 하나님(13-15)

 

시인의 ‘나’ 중심적인 어법에서 하나님을 향하고 ‘당신’으로 전환됩니다. 자신의 감정과 생각의 집착을 벗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선언으로 이동한 것입니다. ‘하나님, 당신의 도는 거룩하며, 당신처럼 위대한 신이 누구입니까?’(13) 어떤 신도 하나님의 거룩함과 위대함에 도달할 수 없음을 수사의문문으로 표현했습니다. 대담하고 단호한 고백이며 선언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당신은 “기이한 일”을 행하신 그 하나님이며(참조. 11절), 당신이 당신의 힘을 민족들 중에 선포하셨다고 말합니다(14). 시인이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와 개방성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백성, 곧 야곱과 요셉의 자손을 팔로 속량하신 것이 대표적인 일입니다(15). 이것은 출애굽 시대를 소환하여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강조한 것입니다.

 

(3) 자기 백성을 인도하시는 하나님(16-20)

 

시인의 ‘내 목소리’(1)는 여호와의 우렛소리(18)로 응답되고, 하나님을 찾는 시인의 ‘내 손’(2)은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으로 응답 됩니다(20). 이것은 ‘나’로부터 시작된 탄식의 언어가 공동체 전체와 함께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기억하고 노래하는 것으로 전환됨을 보여줍니다. 그 사이에서 시인은 노래합니다. 물들이 하나님 당신을 보고 당신을 두려워하고, 깊음조차 전율했고(16), 구름이 물을 쏟아내고, 궁창이 소리를 내고, 당신의 화살도 사방으로 날아다녔으며(17), 당신의 천둥소리가 회오리와 함께 번쩍였고, 번개가 세계를 진동시키고 진동시켰습니다(18). 이러한 묘사들은 모두 하나님의 능력을 입증하는 하나님의 현현입니다. 깊은 사색이 묻어난 질문들(7-9, 13)과 놀라운 하나님의 현현 사이에서 심연의 혼돈과 갈등은 더는 없습니다. 천둥, 번개, 회오리바람을 다스리시고 조종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 혼돈을 질서로 바꾸신 창조와 출애굽 당시 바다에 길을 내셨던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합니다. 시인은 바다에 당신의 길이 있고, 당신의 길이 큰 바다에 있으나 당신의 발자취를 깨닫지 못했다고 고백합니다(19).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능력을 경험하는 순간에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끝으로, 시인은 주께서 양 떼를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는 목자 하나님의 심상과 두 명의 지도자(모세와 아론)를 통해 일하신 것을 노래합니다(20). 시인은 이렇듯 역사의 현장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을 현재화하여 새 믿음을 향해 전진합니다.


우리는 주님이 베풀어 주시는 용서를 아무런 대가 없이 받았지만, 주님은 그것을 위해 십자가라는 큰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죄는 쉽게 짓고 쉽게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주님이 겪으셨던 고통에 공감하지 않는다면, 용서받는 일에 대한 감사와 감격을 진정으로 체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히, 주님의 긍휼을 의지하며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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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76-01)


백성을 위해 싸우시는 하나님

시편 76편 1-12절


 

우리는 종종 인생의 어려움과 문제 앞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우리의 한계는 분명하고, 이러한 순간에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을 의뢰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입니다. 그분의 능력은 무한하며, 땅 끝까지 창조하신 전능자이십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무한한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을 의뢰해야 합니다. 본문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의뢰하는 삶에 대해 나누고자 합니다.

 

  • 이 시편은 시온에서 부르짖는 사자 하나님과 약자를 구원하시는 범세계적인 재판장이요, 거룩한 용사 하나님께 초점을 둔 노래입니다. 시인은 자기 백성들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 전쟁에서 승리하신 하나님, 무서운 심판을 행하시는 하나님, 전쟁 무기를 부수고 세상 왕들에게 두려움이 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시온에서 전쟁을 없애신 평화의 왕(1-3)

 

우리는 이미 승리하신 하나님과 더불어 이 세상을 살아가므로 조금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힘과 능력의 주되신 분을 붙들고 담대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참으로 숨을 곳이 있으면 좋은데 다가오는 폭풍우와 풍랑을 피하고 숨을 수 있는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는 하나님은 바로 우리의 숨을 곳이 되는 것입니다.

 

1하나님은 유다에 알려지셨으며 그의 이름이 이스라엘에 알려지셨도다 2그의 장막은 살렘에 있음이여 그의 처소는 시온에 있도다 3거기에서 그가 화살과 방패와 칼과 전쟁을 없이하셨도다(셀라)(1-3)

 

시인은 하나님의 구원이 유다와 이스라엘에게 나타났음을 선언합니다. 하나님이 유다에 알려지시고 그의 이름이 이스라엘에서 큽니다(1). 이 시행에서 ‘유다’와 ‘이스라엘’을 동시에 언급하는 것은 언약 백성 이스라엘 전체를 표현한 것입니다. 유다에서 알려졌다는 것은, 이스라엘에서 ‘그의 이름’, 곧 그의 명성이 드높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이름’은 명성과 신망을 뜻합니다(전 7:1; 겔 22:5). 시인은 하나님의 장막은 살렘에 있고, 그의 처소는 시온에 있다고 합니다(2). 장막과 처소가 평행관계에 따라 동의적인 의미입니다. 흥미롭게도 “장막”의 사전적 의미는 수풀이나 덤불로서 사자의 ‘굴’ 같은 것입니다(시 10:9; 렘 25:38). 마찬가지로 “처소”(메오나)는 동물들의 숨겨진 굴을 뜻합니다(암 3:4; 욥 37:8). 하나님을 사자로 명명하지 않지만 마치 사자처럼 묘사했습니다. 실제로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주 사자처럼 그려집니다(호 5:14;11:10; 암 1:2;3:8; 사 31:4;38:13; 렘 4:7 등). 살렘과 시온 역시 동의적인 의미가 됩니다. 살렘은 예루살렘의 단축형으로 보이며, 이스라엘이 국가로 수립되기 이전에 멜기세덱 왕의 도읍지였습니다(창14:18). ‘살렘’이 평화를 뜻하기 때문에 그 뜻을 반영하면, ‘그의 굴이 평화롭게 있었다’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시온의 처소에서 모든 것을 평정하고 평화롭게 앉은 사자처럼 앉으신 하나님을 묘사한 셈입니다. 이윽고 시인은, 거기에서 하나님이 불화살을 부수셨고, 방패와 칼과 전쟁을 없애셨다(3)고 노래합니다. 시온의 사자 하나님께서 전쟁터로 진격하셔서 전쟁의 모든 무기를 무력화시킨 장면입니다. 전쟁의 무기들을 부수고 전쟁을 없앤다는 말은 본래 히브리 시행에서 첫 소절에서 한 번만 사용되었지만, 둘째 소절에도 적용됩니다(동사의 이중의무). 깨트리고 쪼개고 부수고 꺾는다는 뜻의 ‘샤바르’ 동사의 강조형태(쉽베르)로 쓰였습니다. 이는 전쟁 무기들이 산산이 부서져 폐기된 평화로운 땅을 상상하게 만듭니다. 사자 이미지로 그려진 하나님의 위엄이 전사 이미지와 결합합니다. 이것은 예언적인 종말의 희망을 암시하는 듯 들립니다(호 2:18; 미 3:3-4;사 2:4; 9:5; 겔 39:9-10; 슥 9:10).

 

용맹스러운 전사 하나님(4-6)

우리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괴롭히던 자들의 비참한 최후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은 당연한 하나님의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참 지혜의 삶입니다.

 

4주는 약탈한 산에서 영화로우시며 존귀하시도다 5마음이 강한 자도 가진 것을 빼앗기고 잠에 빠질 것이며 장사들도 모두 그들에게 도움을 줄 손을 만날 수 없도다 6야곱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꾸짖으시매 병거와 말이 다 깊이 잠들었나이다(4-6)

 

시인은 하나님을 용맹스럽고 영광스러운 전사처럼 빛나는 분으로 고백합니다. ‘당신은 사냥감 있는 산에서 위엄 있게 빛납니다’(4). “약탈한 산에서”라는 말보다 사냥감이나 먹잇감 있는 산으로 읽는 것이 문맥상 더 자연스럽습니다. “약탈한”(타렙)으로 번역된 말은 본래 야생동물의 ‘먹이’를 뜻합니다(민 23:24). 2절에서 하나님 처소를 사자 굴처럼 묘사했듯 같은 이미지가 활용되었습니다. 이는 먹잇감이 풍부한 용맹스러운 사자의 위엄과 여유로움보다 더 빛나는 하나님을 빗대어 표현한 것입니다. 이어서 시인은 장엄하고 번쩍이는 광채를 지닌 하나님의 승리를 말하기 위해 하나님의 권능에 놀라고 잠에 빠진 자들을 언급합니다. 마음이 강한 자들도 빼앗기고, 잠에 빠져들며, 힘센 모든 자들은 힘을 얻지 못합니다(5). 마음이 강한 자들과 힘 센 모든 자들은 동의적인 의미입니다. 용감하고 ‘힘센 전사들’(“장사들”; ‘용감한 군인들’[새번역]), 그들이 잠에 빠진다(나무 쉐나탐)는 말은 힘센 전사들이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무력해진 상태를 말합니다. ‘그들의 잠’이 죽음을 뜻하는 ‘영원한 잠’(새번역)으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5절 시행에서 쓰인 ‘잠’이 구약 다른 곳에서 죽음을 상징하는 영원한 잠이 아니라 일상적인 잠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참조. 창 28:16; 시 127:2). 따라서 뛰어난 전사이신 하나님 앞에서 힘 자랑 못하고 무력해진 전사들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후 시인은 하나님을 부르며 말합니다. ‘야곱의 하나님이여, 당신의 꾸짖음으로 전차와 말이 깊이 잠듭니다’(6). 전사들이 힘을 전혀 쓰지 못하는 것처럼, 전사들의 용맹성과 짝을 이루는 말과 전차도 깊은 잠에 빠진 것으로 묘사되었습니다. 분사형태로 쓰인 ‘깊은 잠’(니르담)은 죽음이 아니라 자각하지 못하는 깊은 숙면 상태를 묘사한 흥미로운 표현입니다(삿 4:21). 시인은 독특한 방식으로 뛰어난 전사로서 혁혁한 공로를 세우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판결자 하나님(7-9)

마지막 심판의 날이 이르면 하나님을 거르려 불순종하던 모든 악인들은 두려움이 떨게 됩니다. 그날에 하나님께서는 앗수르의 산헤립 군대를 진멸시키신 것처럼 악인들을 멸망시킬 것입니다. 우리가 행한 일에 따라 상급을 받을 것입니다.

 

7주께서는 경외 받을 이시니 주께서 한 번 노하실 때에 누가 주의 목전에 서리이까 8주께서 하늘에서 판결을 선포하시매 땅이 두려워 잠잠하였나니 9곧 하나님이 땅의 모든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려고 심판하러 일어나신 때에로다(셀라)(7-9)

 

시인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고백합니다. ‘당신은 두려운 분이니, 당신이 분노하실 때 누가 당신 앞에 서겠습니까?’(7) 하나님의 분노를 누구도 감당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주께서는 경외 받을 이”로 번역된 말은, ‘두려워하다’(야레) 동사의 수동분사형태입니다. 이 두려움은 폭력적인 행위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존경과 위엄에 압도된 상태와 관련됩니다. 시인은 ‘당신’은 두려운 분이라고 반복합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두려운 분임을 강조하려는 의도입니다. 또 두려운 분의 분노 앞에서 숨죽이며 고요해진 땅에 대해 하나님께 말합니다. ‘당신이 하늘에서 판결을 선포하시니 땅은 두려워 잠잠했습니다’(8). 두려우신 분 앞에서 땅은 두려워했고, 두려움은 아무 동요도 없는 고요한 상태가 됩니다. 놀랍게도 두려움 때문에 평화의 시간이 도래한 것입니다(참조. 수 11:23). 이때가 언제입니까? 하나님께서 심판을 위해 일어나실 때, 땅의 모든 가난한 자를 구원하실 때입니다(9). “땅의 모든 온유한 자”는 정확히 ‘땅의 모든 가난한 자’입니다. 낮은 자, 비참한 자입니다. 이 땅이 불의로 가득할 때, 가난한 자들은 위축되고 억압당하며 가진 것까지 빼앗기기 쉽지만, 하늘의 심판자가 일어나셔서 판결하실 때, 낮은 자들, 곧 하나님 앞에서 겸허한 자들이 구원받습니다. 한마디로, ‘심판을 위한’ 시간은 동시에 ‘구원을 위한’ 시간입니다. 이 땅은 고통 속에서 신음하며 정의로운 심판이 있기를 절규합니다. 이에 응답하듯 심판과 구원의 시간은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실현되는 시간입니다.

 

세상을 떨게 하시는 하나님(10-12)

우리 인간들에게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통찰력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신들 앞에 있는 어려움들을 헤쳐 나가지만, 악한 자들은 이것을 빼앗겨 버리므로 환난이나 어려움의 고통 속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떠라서 우리는 여기서 명석하고도 기발한 생각으로 다른 사람들을 억압하려고 하는 자의 눈을 어두워지게 하여 그들의 지식을 빼앗아 버리는 권세가 하나님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10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11너희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 서원하고 갚으라 사방에 있는 모든 사람도 마땅히 경외할 이에게 예물을 드릴지로다 12그가 고관들의 기를 꺾으시리니 그는 세상의 왕들에게 두려움이시로다(10-12)

 

매우 난해한 말이 이어집니다. ‘실로 사람의 노여움(분노)이 당신을 찬양하게 할 것이며, 남은 분노를 당신이 묶어버릴 것입니다’(10). 사람의 분노가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하게 만든다는 것입니까? 이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이 있지만 궁극적으로 인류의 격분을 잠재우시고, 반역의 의지를 제압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판결 앞에서 가난하고 하나님 앞에 겸허한 모든 자가 구원을 받지만,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아우성과 분노가 상상되는 장면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후 시인은 하나님을 향하던 믿음의 고백을 마치고 “너희”로 언급한 사감들을 향해 말합니다. ‘너희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서 원하고 갚으라. 그의 사방에 있는 모든 자는 두려위할 자에게 예물을 드려야 한다’(11). 시인의 명형과 권면이 함께 병행됩니다. 서원하고 갚으라는 것은 직접 명령형이지만, 예물을 드려야 한다는 말은 권면형태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원을 받은 자에게 마땅히 감사하라고 요청한 것이며, 여호와 하나님 사방에 있는 자, 곧 여호와를 아는 자 누구든 그분께 예물을 드리라는 권면입니다. 이러한 명령형의 요청과 권면은 심판과 구원을 이행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마땅히 영광 받으실 분에게 감사의 제사로 응답하라는 뜻입니다. 시인은 마지막으로 낮은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를 천명합니다. 그가 군주들의 호흡을 끊을 것이니, 땅의 왕들에게는 두려움이십니다(12). 시인은 “고관들”, 곧 군주들과 왕들의 목숨과 사기를 끊어버리시는 하나님의 권세를 노래하며 하나님만이 의지할 분이라고 밝힙니다. 하나님만 두려워할 분이며, 하나님 앞에 겸허한 자만이 하나님의 구원과 보호 속에서 안전합니다.


시편 76편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보호자이시며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상기시켜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인정하고, 그분의 능력을 경외하며, 그분의 공의를 신뢰해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을 통해 우리는 더욱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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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75-01)


높이시고 낮추시는 하나님

시편 75편 1-10절


 

세상에서 높은 자리는 흔한 자리가 아닙니다. 가파른 피라미드처럼 맨 아래에는 넓고 많은 사람이 있지만, 맨 꼭대기는 아주 좁고, 한 사람이 설 수 있는 공간밖에 없습니다. 그해서 사람들은 어찌하든지 그 꼭대기에 오르려 합니다. 하지만 스스로를 높이는 일은 위험한 일입니다.

 

  • 시인은 땅을 지탱하고 유지하시는 하나님의 창조 능력을 신뢰하고 노래합니다. 하나님의 신탁의 말씀이 전해지고 악인에 대한 심판 선언은 정의를 실현하는 재판장이신 하나님을 향한 신뢰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시인은 의인들의 위풍당당한 위엄이 높여질 것을 확신합니다.

 

놀라운 일을 행하신 하나님께 감사(1)

하나님께서는 심판주 되신 분입니다. 악한 사람들을 심판하시고 의로운 사람들은 세우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만을 바라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날이 가장 기대되는 날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그 날을 기대하고, 바라는 마음을 갖는 것이 정상입니다.

 

1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사람들이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파하나이다(1)

 

시인은 예배인도자로서 회중과 함께 하나님 이름을 부르며 감사하고 또 감사한 마음을 고백하고 찬양합니다.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더 정확히 ‘하나님, 우리가 당신을 찬양하고 찬양합니다’입니다. ‘찬양하다’(야다)는 감사와 찬양을 목소리로 드릴 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느 11:17 참조). 더군다나 2인칭 복수 형태의 ‘우리가 찬양합니다’를 두 번 반복하여 강조하는 표현 방식은 오직 이곳에서만 발견됩니다. 시인은 찬양의 이유를 밝히듯 목소리를 이어갑니다. ‘당신의 이름이 가깝고, 사람들이 당신의 놀라운 일들을 전파합니다.’(1bc) 시인을 비롯해 예배자들이 경험한 기이하고 놀라운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또 ‘당신의 이름이 가깝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시인이 하나님의 놀라운 행적을 일일이 열거하지 않으니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이름은 하나님의 임재를 반영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택하신 곳에 자기 이름을 두시고, 거기서 백성을 만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신 12:5,11; 참조. 출 3:13-15). 따라서 주의 이름이 가깝다는 것은 예배 받으시는 곳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로 언급한 회중이 예배하며 하나님 이름의 현존을 실제화하는 광경 묘사 같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예배에 참여한 이들이 함께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반복해서 하나하나 자세히 열거합니다.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신탁(2-10)

세상의 판결은 바르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사건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을 때나 불의한 재판관이 잘못된 판결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항상 바르고 공정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속히 임하기를 고대할 수 있습니다.

 

2주의 말씀이 내가 정한 기약이 이르면 내가 바르게 심판하리니 3땅의 기둥은 내가 세웠거니와 땅과 그 모든 주민이 소멸되리라 하시도다 (셀라) 4내가 오만한 자들에게 오만하게 행하지 말라 하며 악인들에게 뿔을 들지 말라 하였노니 5너희 뿔을 높이 들지 말며 교만한 목으로 말하지 말지어다 6무릇 높이는 일이 동쪽에서나 서쪽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쪽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7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 8여호와의 손에 잔이 있어 술 거품이 일어나는도다 속에 섞은 것이 가득한 그 잔을 하나님이 쏟아 내시나니 실로 그 찌꺼기까지도 땅의 모든 악인이 기울여 마시리로다 9나는 야곱의 하나님을 영원히 선포하며 찬양하며 10또 악인들의 뿔을 다 베고 의인의 뿔은 높이 들리로다(2-10)

 

시인은 하나님의 심판 선언을 인용합니다. 정한 때가 이르면 바르게 심판하시겠다는 선언입니다. 여기서 삼판에 대한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심판이 임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심판이 공평하고 공정하다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공정한 판결(2-3)

 

시인은 하나님의 신탁 말씀을 인용하여 선포합니다. ‘내가 때를 정하고, 내가 공정하게 심판할 것이다’(2). 1절과 2절의 인칭 변화(3인칭 복수 1인칭 단수) 사이에 공백이 있습니다. 이는 아마도 성전 예언자를 통해 백성에게 전달된 신탁의 과정이 생략된 것으로 보입니다(참조. 시 46:10; 50:7,16). 정의로운 심판이 하나님께 속했고, 하나님의 목적에 부합하는 때에 실행하신다는 약속이 포함되었습니다. 1인칭 대명사 아니를첨가하여 1인칭 동사 ‘내가 판결(심판)할 것이다’(에쉬포트)라는 말을 강조합니다. 지금은 명확히 언제인지 알 수 없지만, 때가 무르익으면 의인을 옹호하는 정의로운 심판의 시간이 도래합니다(합 2:1-4). 하나님께서는 땅과 거기에 거주하는 모든 것이 소멸될 것이라는 경고와 함께 땅의 기둥을 내가 질서 있게 세웠다고 말씀하십니다(3). “그 모든 주민”(콜-요쉬베하)은 땅에 거주하는 모든 것이기 때문에 사람만이 아니라 땅을 거주지 삼는 모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세계와 거기에 속한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유지하시는 분임을 천명하신 것이며, 창조자 하나님의 주권을 부인하는 모든 행위에 대한 경고입니다. 또한 ‘내가 세웠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결정하고, 측정하고, 질서 있게 배열하신다는 뜻이며, 1인칭 동사 앞에 독립인칭대명사 ‘내가’를 배치하여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위가 강화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땅과 세계의 질서를 굳건히 붙들고 계신 분입니다.

 

(2) 교만한 악인들을 향한 경고(4-5)

 

하나님께서 오만한 자들을 향해 직접 말씀하십니다. ‘내가 오만한 자들에게 오만하지 말라. 악인들에게는 뿔을 들어 올리지 말라고 말했다’(4). ‘내가 말했다’(아마르티)에 포함된 내용은 5절까지 이어집니다. 흥미롭게도 시편에서 ‘내가 말했다’는 표현은 대체로 기도하는 사람이 사용하는 말입니다(시 30:6;31:14; 32:5; 38:16; 40:7,10 등). 그런데 시편에서 유일하게 이곳만 하나님께서 주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 뿔을 높이 들지 말라. 교만한 목으로 말하지 말라’(5) 말씀하셨습니다. 악인들에게 뿔을 들어 올리지 말라(4)는 경고는 ‘높이’ 들지 말라는 경고로 강화되고, 오만한 자들에게 오만하지 말라는 경고는 교만한 목으로 말하지 말라는 경고로 한층 강화됩니다. 시행의 배열은, 하나님께서 오만한 자들과 악인을 평행관계로 설정하여 동급으로 취급하고 계심을 드러냅니다. ‘뿔’은 힘, 능력, 자랑, 권력, 위엄을 상징하는 은유(18:2; 89:17,24; 92:10; 112:9; 132:17;16:15).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에게 힘과 능력을 높이 쳐들지 말라고 말씀하셨다고 엄히 경고하십니다. 오만한 자들과 악인들은 자기를 높이거나 뻣뻣하게 목을 세워 자랑하는 모든 것을 멈춰야 했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3) 높이시고 낮추시는 재판장 하나님(6-8)

 

오만한 자들과 악인들의 행동을 멈춰야 하는 이유가 시인의 언어로 설명됩니다. 6절 시행이 다소 모호하지만, 4-5절과 연결된 것으로 읽을 때 모호함이 해소됩니다. “높이는 일”은 동쪽이나 서쪽에서 말미암지 않고, 남쪽에서도 말미암지 않는다(6)고 합니다. ’높이다‘라는 동사가 오만하고 도도하고 불손함을 표현할 때 사용되곤 합니다. 이것은 4-5절의 악인들과 교만한 자들의 행위를 가리킵니다(참조. 시 131:1). 해가 뜨고 지는 곳이나 광야의 산들로부터, 곧 사방 모든 곳에서 높아짐의 발원지가 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어디로부터 옵니까? 오직 재판장 하나님입니다. 시인은 그가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신다(7)고 말합니다. 시인은 모든 주권을 가지신 창조자 하나님을(3) 재판장으로 고백합니다(시 7:11;9:4;50:6). 높이기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일찍이 한나의 입에서 처음 고백된 이후로(삼상 2:7), 구약 여러 곳에서 발견됩니다(삼하 22:28; 시 18:27; 138:6; 사 2:11,17; 10:33; 겔 21:26). 이처럼 시인은 신앙공동체가 공유했던 고백을 반복하며 스스로 높이는 자를 낮추시는 하나님을 노래합니다. 이어지는 8절도 모호합니다. “주님은 거픔이 이는 잔을 들고 계신다. 잔 가득히 진노의 향료가 섞여 있다. 하나님이 이 잔에서 따라 주시면, 이 땅의 악인은 모두 받아 마시고, 그 찌끼까지도 핥아야 한다”(새번역). 한마디로 여호와 손에 들려진 잔에 가득한 포도주는 파도가 거품을 만들 듯 거품으로 일렁입니다. 예언서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술잔으로 표현한 것처럼(렘 25:15), 악인이 심판을 피할 길이 없음을 표현한 것입니다(시 60:3; 사 51:17; 렘 25:15,28;49:12;51:7). 반대로 잔은 하나님의 은총을 표현합니다(시 23:6; 116:13). 이 때문에 축복의 잔에 악인들이 참여하지 못하는 것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서 피할 수 없는 심판으로 해석하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럽습니다.

 

(4) 야곱의 하나님을 찬양하리라(9-10)

 

시인은 악인과 오만한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을 확신하기에 하나님을 찬양하며 마무리합니다. ‘나는 영원히 선포하며, 야곱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9). 시인은 자신이 경험하고 알고 있는 하나님올 중단 없이 큰소리로 외쳐 말할 것을 다짐합니다.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판결이 아직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시인은 여호와를 ‘야곱의 하나님’(시 20:1;46:7,11; 76:6 등)으로 부르며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노래할 것이라 맹세합니다. 마지막으로 시인은, 악인들의 모든 뿔, 곧 악인들의 능력과 권세를 잃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반면, 의인의 뿔은 높이 들릴 것이라고 노래합니다(10). 그러면 누가 이것을 실행하십니까? 문자적으로 ‘내가 조각낼 것이다’(아갇데아)라는 말이기 때문에 정확히 10절은 2-5절 처럼 시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인용한 셈입니다. 또한 의인(차디크)은 단수형이고, 악인들(레샤임)은 복수형입니다. 이 때문에 의인을 메시아로 해석하긴 하지만, 의인의 소수성과 악인의 다수성을 표현한 것일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의 잔과 산산조각 부서질 악인의 ‘뿔’ 이미지와 위풍당당할 의인이 대조되어, 반전을 기획하시고 공정하게 재판하실 하나님이 찬미 받으십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낮아짐으로 높아지는 예수님의 방법을 배워야합니다. 우리가 가장 낮은 곳에서 섬길 때 우리를 높여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진정한 높아짐의 비결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방법을 따라야 할 교회에서조차 세상의 방법이 횡행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세상의 뿔을 소망하기보다 하나님께서 높여주시는 의인의 뿔(10)을 기대하며 잠잠히 하나님 안에 거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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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74-02)

 


눈여겨보시며 기억하소서

시편 74편 12-23절


 

신앙을 가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입니다. 그분의 능력과 지혜를 믿는 것입니다. ‘믿는다’라는 것은 고백하는 차원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통치권에 자기 삶의 주도권을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의지를 통해서, 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어떻게 하면 주인 노릇을 하실까 고민하면서, 그분 말씀에 순종한다는 뜻입니다. 그분의 뜻이 얼마나 선한지 끝까지 신뢰하는 것입니다.

 

  • 이 시의 전반부에 묘사된 원수의 극악한 성전 훼손과 유린과 도발에도 불구하고, 후반부에서 시인은 그런 하나님께서 백성과 압제당하는 가난한 자들을 잔인한 힘의 희생물이 되지 않도록 구원하시기를 강력히 요청합니다.

 

창조자이며 구원자이신 하나님 찬양(12-17)

 

신앙은 고백으로 나타나지만, 고백만 했다고 해서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교회만 다닌다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자기 삶에 개입하시도록 맡겨드리는 그 삶이 동반될 때만 참 신앙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였습니다. 구체적으로 변화된 삶의 열매가 있을 때 신앙인 것입니다.

 

12하나님은 예로부터 나의 왕이시라 사람에게 구원을 베푸셨나이다 13주께서 주의 능력으로 바다를 나누시고 물 가운데 용들의 머리를 깨뜨리셨으며 14리워야단의 머리를 부수시고 그것을 사막에 사는 자에게 음식물로 주셨으며 15주께서 바위를 쪼개어 큰 물을 내시며 주께서 늘 흐르는 강들을 마르게 하셨나이다 16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마련하셨으며 17주께서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주께서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나이다(12-17)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이 무너졌습니다. 시인은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 바벨론으로 끌려온 상황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인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권능에 대해서 전혀 의심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지난날 어떻게 역사하셨는지 되짚어 보며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1) 왕이신 하나님(12)

 

무엇보다 12절은 하나님을 3인칭으로 묘사합니다. 74편 1편부터 시인은 계속 하나님을 2인칭으로 언급해 왔습니다. 우리 말 성경에서는 주께서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원어를 보면, 1절에서 11절은 계속 하나님을 2인층으로 부르면서 하나님과의 대화를 시도해 온 것입니다. 그런데 12절에서 시인은 갑작스럽게 하나님을 3인칭으로 언급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객관적으로 묘사하여 자신의 기도가 더 설득력 있는 논리가 되게 하려는 시도입니다. 그 내용은 하나님께서 옛적부터 왕이셨다는 것입니다.

‘옛적부터’란 13절 이후에 서술되듯이 창조의 시점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왕권을 가진 통치자이셨고 창조 전부터 구원을 베푸신 분입니다. 히브리 원문에서 구원을 베푸신 분의 베푸시다에 해당하는 원한은 팔 동사의 분사 형태인데 히브리시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묘사할 때 군사용법을 많이 사용합니다. 즉 12절은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이 예로부터 왕이시기에 이제도 구원을 베풀 수 있는 분임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무질서를 제압하시는 하나님(13-15)

 

하나님을 다시금 2인칭으로 13절부터 묘사합니다. 즉, 12절에서 3인칭으로 하나님의 구원 능력을 서술한 내용이 13절부터 17절에서는 2인칭으로 하나님과의 대화로 이어지면서 적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13절에서 17절은 2인칭 남성 단수 인칭대명사인 아타가 거듭 사용되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다시금 기억하시도록 하나님께 요청하는 어법을 사용합니다. 12절과 13절에서 17절은 사용하는 인칭을 변화시켜 가면서 하나님이 어떠신 분인가를 계속해서 묘사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13절에서 14절은 먼저 물의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고대 근동에서 물은 무질서를 상징하는 이미지입니다. 특히 물 가운데 살고 있는 용들과 리어야단은 무질서 가운데 악을 행하는 악의 화신의 이미지입니다. 그런데,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은 이런 물들 위에 하나님 자신의 질서를 부유하신 분입니다. 13절은 하나님께서 바다를 나누시고 물 가운데 있는 용돈의 머리를 깨뜨리셨다라고 말하며 14절 상반절은 니오 야단의 머리를 부수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아까지 통치하는 능력을 지니신 분입니다. 용들과 리오야단은 고대 근동 신화적 동물들인데 성경 기자들이 실제로 이런 동물들의 존재를 믿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다만, 당시의 백성들이 잘 알고 있는 이미지를 활용하여 하나님께서 모든 악을 통제하신다는 사실을 표현한 것입니다. 14절에 하반절은 하나님께서 리어야단에 머리를 깨뜨리신 후에 그것을 사막에 사는 자에게 음식물로 주셨다라고 말합니다. 사막이란 물이 없는 곳인데 그곳에 사는 자들이 모래 사는 리어야단을 음식으로 먹었다는 것은 결국 물을 다스리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의미가 됩니다. 13절에서 14절은 무질서의 이미지를 지닌 물과 악의 화신인 용 리어야단을 하나님이 다스리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5절 역시 하나님께서 샘과 강을 쪼개셨고 늘 흐르는 강들을 마르게 하셨다고 말함으로써 하나님께서 물을 다스리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3) 창조 질서를 수립하신 하나님(16-17)

 

하나님께서는 우주 질서를 수립하셨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낮이 당신 것이고, 밤도 당신 것입니다. 당신이 광명체와 해를 걸어두셨습니다.’(16)라고 노래합니다. 16절부터는 새로운 이미지를 도입하는데 역시 창조 시점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언급하는 내용입니다. 새롭게 도입되는 이미지는 빛과 광명체입니다. 13절에서 15절의 물의 이미지는 창세기 1장의 제 2일과 제 3일에 해당하는 내용인데, 이제 16절에서 언급하는 내용은 제 4일에 하나님께서 해 달 별들의 광명체를 만드신 일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만물을 만드시는 능력의 주님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17절은 하나님께서 땅의 경계를 정하신 일과 여름과 겨울 등의 계절을 만드신 일을 언급합니다. ‘땅의 경계를 정하셨다’라는 것은 제 3일의 바다와 육지를 나누신 이를 다시금 가리키고 있고,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다라는 것은 창세기 1장의 자세히 묘사되진 않으나 이 세상의 모든 일을 하나님이 다스리심을 표현한 내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언약의 하나님을 향한 호소(18-23)

교회가 위기의 시대를 맞이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성도의 수가 줄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것은 결과일 뿐입니다. 참 위기는 교회가 더 이상 하나님의 존재와 예수님께서 살아계심을 믿지 않고, 그분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기보다 세상의 약속을 기대합니다.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두려워하고 세상을 더 기뻐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기보다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영광을 더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18여호와여 이것을 기억하소서 원수가 주를 비방하며 우매한 백성이 주의 이름을 능욕하였나이다 19주의 멧비둘기의 생명을 들짐승에게 주지 마시며 주의 가난한 자의 목숨을 영원히 잊지 마소서 20그 언약을 눈여겨 보소서 무릇 땅의 어두운 곳에 포악한 자의 처소가 가득하나이다 21학대 받은 자가 부끄러이 돌아가게 하지 마시고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가 주의 이름을 찬송하게 하소서 22하나님이여 일어나 주의 원통함을 푸시고 우매한 자가 종일 주를 비방하는 것을 기억하소서 23주의 대적들의 소리를 잊지 마소서 일어나 주께 항거하는 자의 떠드는 소리가 항상 주께 상달되나이다(18-23)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권능을 떠올리며 고통을 이겨 낸 시인은 이제 하나님께 언약을 기억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질서를 정하시고 그 질서를 유지해오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기억합니다. 없어도 될 것과 같은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지혜와 능력으로 질서를 만들어내십니다.

 

(1) 가난한 이들의 생명을 잊지 마소서(18-21)

 

12절과 17절에서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지니신 분으로 묘사했습니다. 이제 18절 이후에는 12절에서 17절의 내용을 근거로 창조의 능력을 지니신 여호와께서 시인의 공동체를 구원해 주셔야 한다고 말합니다. 18절은 그런 탄원의 첫 번째 내용으로 기억하소서라는 명령형 어법을 구사합니다. 여호와께서 기억하셔야 되는 내용이란 원수들이 주를 비방하고 우매한 백성이 주의 이름을 능욕했다라는 것인데 앞서 74편 1절에서 11절에 언급된 내용들의 요약입니다. 19절은 가난한 자를 언급함으로써 새로운 이미지를 도입합니다. 가난한 자란 사회적으로 억압받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 속에 속한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받아 누릴 권리를 가지고 있는데 여러 가지 상황 때문에 자신이 가진 권리를 빼앗기게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가난한 자란 바로 그런 경우를 당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특별히 힘을 가진 권세자들에 의하여 억울하게 땅이나 삶의 권리들을 박탈당한 경우들을 가리킬 때도 많습니다.

19절에서 시작된 가난한 자의 이미지는 21절까지 계속됩니다. 20절은 땅의 어두운 곳에 포악한 자의 처소가 가득하다고 말함으로써 포악한 자들이 언약 공동체의 다른 사람들을 억압하고 그들의 재물을 빼앗아 그들을 가난한 자로 전락시켰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21절은 하나님께서 그런 학대 받는 자 가난한 자 궁핍한 자들을 구원해 주셔야 한다고 기도합니다. 이런 19절에서 21절의 중심에 언약이라는 개념이 나타납니다. 포악한 자가 가난한 자를 핍박하는 사이는 하나님의 언약이 깨뜨려진 사이인 것입니다. 이제 13절에서 17절과 18절에서 21절을 연결해 보면 창조의 능력으로 악을 통제하시는 하나님은 이제 언약 공동체 안에서도 그 능력을 발휘하셔서 악인들을 심판하시고 가난한 자들의 삶의 복을 회복해 주셔야 된다라는 기도가 들여지고 있다는 맥락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난한 자를 핍박하는 포악한 자들이란 시편 74편의 문맥에서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당연히 우리는 이 내용을 1절에서 11절에 탄원과 연결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포악한 자란 예루살렘 성전에 침략하여 그 성전을 해한 원수들을 말하며 가난한 자란 그런 원수들에 의해 고통을 당하는 이스라엘 언약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기에 언약을 기억하사 원수들을 물리쳐 주셔야 된다라는 기도의 흐름이 되는 것입니다.

 

(2) 당신의 대적들의 비방을 기억하소서(22-23)

 

마지막으로 22절에서 23절은 하나님을 향한 그동안의 모든 단원을 정리하여 요약합니다. 22절은 하나님께 자신을 위한 변호를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능력자이심므로 악한 자들을 심판하는 분이심을 보여달라는 강력한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23절은 대적들의 소리가 하나님께 계속해서 올라가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항거하는 원수들이 성전에 들어와서 하나님을 멸시하는 소리를 지금도 듣고 계시고 동시에 구원의 능력을 가지신 창조주이시며 언약을 기억하여 가난한 자들의 고통을 풀어주는 분이시므로 더 이상 이런 상황을 지켜보지 마시고 구원의 손길을 펴셔야 된다는 기도인 것입니다.

74편은 공동체 탄식시로 성전 이미지 창조 이미지 언약사상 등을 포괄적으로 함께 사용하여 공동체를 고난에서 건져주실 것을 강구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 백성으로 74편과 같은 기도를 고난 중에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창조주이시고 언약주이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와 방법을 따라 우리의 기도에 그분의 능력과 지혜와 언약의 사랑을 따라 응답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에게 구원을 베푸실 능력의 왕이십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통치자 구원자 창조자 그리고 심판자로 고백합니다. 그리고 두 가지로 나누어 하나님의 능력을 언급합니다. 첫째는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능력이고 둘째는 자연 만물을 통치하는 능력입니다. 이런 시인의 고백이 더욱더 마음에 와닿는 것은 이 시를 평안할 때 기록한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이 철저하게 파괴되던 때에 기록했다는 점입니다. 평안할 때는 누구나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은 고난 가운데 있을 때 비로소 빛을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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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74-01)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의 신앙

시편 74편 1-11절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죄 때문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 때문에 두렵다고 말합니다. 아무런 이유 없이 하나님을 두려운 분으로 인식하고 있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에게 침묵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어떤 존재입니까?

 

  • 이 시편은 극심한 고난을 겪은 공동체의 탄식 어린 기도입니다. ‘하나님 왜입니까?’라는 외침으로 시작하는 시인의 절규는 공적인 기도와 탄식으로서 이방 침입자들의 잔인한 성전 파괴와 맞물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재와 침묵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능욕당하지 않기를 바라며, 원수들의 멸망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공동체를 위한 탄원Ⅰ(1-3)

인생을 살다 보면 크고 작은 문제들을 겪게 마련입니다. 사람 전체를 뒤흔들 정도로 심각한 문제가 닥치면 대부분 낙심하고 절망하게 됩니다. 심지어는 신앙까지 잃어버리는 삶도 있습니다. 시편의 많은 탄식시들은 그렇게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 처한 시인이 지은 것입니다. 환난 가운데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지 이 탄식의 부르짖음과 간구를 살펴보겠습니다.

 

1하나님이여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버리시나이까 어찌하여 주께서 기르시는 양을 향하여 진노의 연기를 뿜으시나이까 2옛적부터 얻으시고 속량하사 주의 기업의 지파로 삼으신 주의 회중을 기억하시며 주께서 계시던 시온 산도 생각하소서 3영구히 파멸된 곳을 향하여 주의 발을 옮겨 놓으소서 원수가 성소에서 모든 악을 행하였나이다(1-3)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질문하며 탄원하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옛적에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셨음을 기억하면서, 이제는 그 백성이 고통받고 성전이 파괴된 상황에서 다시 돌아와 구원해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1) 하나님께 대한 외침과 질문(1)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어찌하여 하나님, 당신은 우리를 영원히 버리십니까?’(1a) 어떤 상황에서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까? “영원히”는 중단 없는 지속성을 뜻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으로부터 거절당하고 배제된 것처럼 느껴지는 고통이 지속되는 것을 더는 견딜 수 없습니다. 시인의 질문은 더 깊어집니다. ‘어찌하여 당신 목장의 양 떼에게 당신의 분노를 내뿜으십니까?’(1b) ‘분노를 내뿜다’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당신의 코가 연기를 내뿜다’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분노를 표현할 때 사용되는 이미지입니다(신 29:20; 시 18:8 등). 시인은 목자이신 하나님, 곧 목장의 주인이 양 떼를 돌봄이 마땅한데, 돌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분노하시는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고대 근동 문헌에는 신들이 왕으로서 역할을 수행할 때, 목자의 호칭이 사용됩니다. 하나님도 목자로서(시 23:1; 28:9; 80:1; 창 49:24; 사 40:11; 렘 31:10; 겔 34:15), 백성은 양의 이미지로 나타납니다(시 79:13; 95:7; 100:3; 사 5:17; 49:9; 렘 50:19; 겔 34:2-23; 습 3:13).

 

(2) 공동체를 위한 탄원Ⅰ(2-3)

 

시인은 하나님께 단호히 요청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옛적에 당신이 사신 당신의 회중을/당신이 구속하셔서 당신의 소유 삼으신 민족을/당신이 거처 삼으신 시온산을’(2). 시인은 하나님의 분노를 멈추게 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기억에 호소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것은 없다고 생각했습니까? 마치 모세처럼 말입니다(출 32:13). 그러고서 영원한 파멸을 향해 당신의 발걸음을 들어 올리셔서 심판하시기를 구합니다(3). 구약에서 발걸음은 정복과 관련됩니다(시 58:10; 60:12; 미 1:3-4; 사 37:25 등). 이유 절을 위한 언어학적인 표시는 없지만, 이유를 밝히듯 원수가 성소에서 모든 악한 일을 저질렀다고 고발합니다(3b). 이는 시인이 성소(코데쉬), 곧 예루살렘을 짓밟은 자를 심판하시고, 주님이 다시 그곳을 거처 삼으시길 바란다는 요청입니다.

 

원수들에 의해 파괴된 성소(4-8)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질 때 처한 어려움과 고통을 여러 차례 보여줍니다. 특히 성소가 파괴되는 사건은 그들의 신앙생활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성소는 단순한 건물이 아닌, 하나님의 임재와 그분과의 교제를 상징하는 장소였습니다. 따라서 성소의 파괴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됨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4주의 대적이 주의 회중 가운데에서 떠들며 자기들의 깃발을 세워 표적으로 삼았으니 5그들은 마치 도끼를 들어 삼림을 베는 사람 같으니이다 6이제 그들이 도끼와 철퇴로 성소의 모든 조각품을 쳐서 부수고 7주의 성소를 불사르며 주의 이름이 계신 곳을 더럽혀 땅에 엎었나이다 8그들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우리가 그들을 진멸하자 하고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모든 회당을 불살랐나이다(4-8)

 

시인이 더 견디기 힘든 것은 원수가 성소에서 악행을 저지르고, 대적들이 주의 회중을 표적으로 삼은 것입니다. 악한 자들은 거룩한 성소를 더럽히며 짓밟고, 주의 백성을 고통스럽게 했습니다.

 

(1) 원수들의 성전 파괴와 약탈(4-6)

 

시인은 원수들이 성소에서 행한 일들을 구체적으로 열거합니다. 시인은 ‘원수’(3)를 ‘당신의 대적들’이라고 칭하면서, 그들이 당신의 회중 가운데서 으르렁거리며, 깃발들을 세워 표시했다고 말합니다(4). “회중”은 지정된 시간이나 만남의 장소, 곧 집회 장소를 뜻하기도 합니다. 솔로몬 성전이 건축된 이후 회막은 없어졌지만, 이 단어는 축제의 장소를 가리키곤 했습니다(애 2:6; 사 33:20). 이 때문에 회중을 뜻하기보다 성전이 탈취된 상황에서 예배를 위해 회중이 모일 수 없기 때문에 장소적인 의미가 더 적합해 보입니다. 더군다나 대적자들은 탈환을 자랑하듯 깃발들을 꽂고, 사자처럼 으르렁거리면서 세상을 호령하듯 소란하게 떠들어대는 상황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침략자들은 자기들의 신을 상징하는 깃발을 성소에 두었고, 고대인들은 전쟁하며 깃발을 들었습니다(렘 4:6;51:12,27). 점령당한 이스라엘의 성소에 침략자들의 깃발이 펄럭이는 영상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리고 시인은 그들이 도끼로 빽빽한 나무숲을 찍어버리는 사람 같다(5)고 말합니다. 시인은 성소를 파괴한 대적자들을 숲을 파괴하는 무자비한 벌목꾼처럼 생각합니다. 그들은 도끼와 철퇴로 성소의 모든 조각품들을 찍어서 산산조각 냈습니다(6). 대적들이 성전 내부에있는 장식품들을 마구잡이로 ‘모조리’(야하드) 또는 ‘철저하게’ 부수는 폭력성과 야만성을 드러낸 묘사입니다. 그들이 성전을 완전히 폐허로 만든 셈입니다.

 

(2) 성소 방화와 주의 이름 모독(7-8)

 

파괴자들의 고발하는 목소리는 계속됩니. 시인은, 그들이 당신의 ‘성소’를 땅에 불살라버리고, 당신의 이름이 ‘계신 곳’을 더럽혔습니다(7)라고 말합니다. 시인은 ‘당신의 성소’와 ‘당신의 이름을 두신 곳’을 동의적인 의미로 사용하며 강조합니다. 이곳은 이미 언급한 시온(2)이며 성소(3)입니다. 주전 587년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공격하고 주님의 전과 왕궁을 불사르고, 예루살렘 성벽을 헐었던 시점을 가리킵니다(왕하 25:9-10; 렘 52:13). 그러니까 땅 위에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소가 철저하게 더럽혀지고 유린된 그때의 그 사건을 소환한 셈입니다. 시인은 그들이 마음속으로 했던 말을, 광기에 휩싸인 폭력적인 언사를 직접 들은 것처럼 말합니다. ‘우리가 그들을 모조리 제압하자!’(8) 그러고서 다시 파괴자들이 어떤 일을 했는지 묘사합니다. 그들이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모든 회당”(콜-모아데엘), 곧 ‘하나님을 만나는 모든 곳’을 불살랐습니다(8b)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회당”(모에드)은 4절에서 “회중”으로 번역된 단어와 같은 낱말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적인 의미와 회중들 다를 뜻할 수 있지만, 마카비 시대, 구약과 신약 중간기 때 존재했던 회당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회당”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소나 회중을 언급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철저하게 실행된 물리적 파괴와 종교적 오염을 표현합니다. 곧 시인은 성소와 관련된 모든 사람을 제압하고 약탈하고 파괴하자는 노골적인 외침처럼(8a), 대적자들이 종교 지도자들에서 예배자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유린한 상황을 표현한 것입니다.

 

공동체를 위한 탄언Ⅱ(9-11)

우리는 모두 인생의 어려운 시기를 겪어본 적이 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서 매우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지고,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 같을 때도 있습니다. 직장을 잃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거나, 혹은 삶의 여러 문제들로 인해 낙심하게 되는 순간들 말입니다. 이런 순간들에 우리는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왜 저를 도와주지 않으십니까?”라고 묻게 됩니다. 이런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9우리의 표적은 보이지 아니하며 선지자도 더 이상 없으며 이런 일이 얼마나 오랠는지 우리 중에 아는 자도 없나이다 10하나님이여 대적이 언제까지 비방하겠으며 원수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능욕하리이까 11주께서 어찌하여 주의 손 곧 주의 오른손을 거두시나이까 주의 품에서 손을 빼내시어 그들을 멸하소서(9-11)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탄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더 이상 표적이 보이지 않으며, 예언자도 없고, 앞으로 얼마나 더 이 어려움이 지속될지 알 수 없다고 호소합니다. 또한 하나님께 왜 손을 사용하지 않으시는지, 왜 오른손을 품에 감추고 계시는지 묻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개입과 도움을 간절히 바라는 심정을 표현한 것입니다.

 

(1) 표적과 환상 없는 하나님의 침묵(9)

 

시인에게 더 큰 고통은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시인은 이렇게 호소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표적들을 볼 수 없고, 예언자는 더 이상 없으며, 얼마나 오래일는지 우리 곁에 아는 자가 없습니다.’ 표적도 예언자도 아는 자도 없다는 것은 같은 의미입니다. 예언자의 임무 중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로서 그분의 뜻을 알리는 것입니다. 또한 “표적”(오트), 곧 경이로운 징후를 보는 것도 예언자의 일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 임재의 표시였습니다. 이 때문에 이상과 묵시가 그친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할 때(삼상 3:1; 애 2:9; 젤 7:26),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느 때까지입니까?”라고 질문하며 탄식했습니다(시 13:1; 35:17; 80:4).

 

(2) 하나님의 개인을 간구함(10-11)

 

시인은 예배 처소에서 행해진 끔찍한 피해와 하나님 이름을 조롱하는 행위를 더는 견디기 어려워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오, 하나님! 언제까지 원수가 조롱합니까? 언제까지 원수가 당신의 이름을 능욕하게 두시렵니까?’(10) 이스라엘의 원수가 성전 기물을 파괴하고 불태운 것은 하나님의 명예를 더럽힌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조롱과 능욕은 행동과 말을 모두 포함합니다(8). 시인의 감정은 점점 고조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원수를 멸하시도록 촉구합니다. 그 방식은 질문과 명령의 형태입니다. ‘어찌하여 당신의 손과 당신의 오른손을 거두십니까? 당신의 품에서 그들을 소멸하소서!’(11) 시인은 하나님께서 감춰진 손을 사용하셔서 원수를 철저히 파멸해주시길 요청합니다. 시인의 강력한 요청은 출애굽 당시 애굽인들을 치셨던 기억에 근거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후손들과 함께 홍해를 건넌 후 했던 말처럼(출 15:12; 참조. 사 52:10), 하나님께서 거두셨던 손으로, 감추셨던 오른손으로, 품에 숨기셨던 능력의 손으로 원수를 멸망시켜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하나님의 적극적이고 직접적인 개입을 요구한 것입니다. 이 부분은 74편뿐 아니라, 시편 전체의 경첩이 될 만큼 해석자들 사이에서 중요하게 다뤄졌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공격한 것은 거기에 계신 분을 공격한 것이며 시온의 신성불가침을 훼손한 것이기에 사망의 영역으로 던져집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부재 속에 절망하면서도 길을 찾으려는 탄식입니다.


세상에는 끝이 있고 악행에는 심판이 따릅니다. 간밤의 꿈은 깨기 마련이고 악한 자의 번성은 깨지기 마련입니다. 세속적인 번영의 허황된 꿈을 버리고 꿈같이 임할 종말의 영생을 소유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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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73-02)

 


마음의 반석이신 피난처인 하나님

시편 73편 17-28절


 

우리는 때로는 삶의 어려움과 시련 속에서 넘어질 때가 많습니다. 세상의 부조리와 불의함을 보며 낙심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반석이자 피난처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곁에 계시며, 우리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붙들어 주십니다.

 

  • 시인은 악인들의 번성과 영광에 대한 질투의 마음을 폭로한 후 성소에서 깨닫습니다. 성소에서의 경험이 악인들에 대한 새로운 인식으로 안내합니다. 시인은 갱신된 마음과 감각으로 자신의 연약함과 하나님의 강함을 바라보게 되고, 하나님 가까이에서 행복을 노래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확신과 악인의 파멸(17-20)

악한 사람이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으며 호화로운 삶을 살 때, 의심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악인의 형통함은 일시적일 뿐이며, 결국 그들은 파멸에 이를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결국 참된 평안을 얻게 된다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이러한 깨달음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고 의지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17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18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19그들이 어찌하여 그리 갑자기 황폐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전멸하였나이다 20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는 그들의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17-20)

 

시인은 성전에서 비로서 깨닫습니다. 악인이 잘되는 것 같고 빠른 것 같아도 결국 악인의 종말을 하나님께서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한낱 꿈에서 깨어나듯 그 결말은 영원한 파멸입니다. 시인은 깨닫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회복하게 되고 찬양으로 고백하게 됩니다.

 

(1) 딜레마에 대한 마음의 변화(17)

 

악인의 형통이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시인의 마음이 전환됩니다. 17절은 시인의 흔들렸던 마음을 바꾸는 변곡점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 내가 그들의 마지막을 깨닫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시인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 깨닫게 되는 악인들의 마지막 운명이 어떤 것인지 정확히 밝히진 않습니다. 시인이 깨달은 장소는 하나님의 성소입니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 시인의 생각이 전환되었습니다. 성소(미크다쉬)는 거룩한 장소로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데, 흥미롭게 복수형의 연계형태로 쓰였습니다. 이 때문에 여러 성소들을 언급한 것처럼 보이지만, 예루살렘 성전을 고려한다면 거룩함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경험하는 순간 새로운 통찰이 시인을 사로잡은 듯합니다.

 

(2) 악인의 파멸(18-20)

 

시인은 하나님 성소에서 깨달은 악인들의 마지막 운명을 말합니다. 시인은 다시 ‘참으로’(1절 참조)를 반복하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합니다. ‘참으로 당신이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고, 당신이 그들을 파멸에 빠지게 하셨습니다’(18). 하나님께서는 높은 데서 거만했던 악인들이(8) 미끄러져 전복되게 하셨습니다. 지상에 내려오신 하나님의 임재와 거룩함을 상징하는 ‘성소’(17)에서 시인은 새로운 전망을 내다보았습니다. 꿈결 같지만, 시인은 또 다른 현실을 봅니다. 시인도 놀라서 묻습니다. ‘어떻게 그들이 한순간에 끔찍하게 되었는가? 그들이 갑작스러운 공포에 의해 철저하게 멸망했습니다’(19). 시인은 한순간에 (“그리 갑자기”), 갑작스러운 공포에 의해(“놀랄 정도로”) 끔찍하고 철저한 파멸을 맞이하게 된 악인들의 최후가 어리둥절합니다. 신속하고 철저한 멸망과 공포가 악인들이 맞이할 궁극의 운명입니다. 시인은 악인들의 철저한 파멸은 한낱 꿈처럼 자취 없이 사라질 것을 믿고 고백합니다. “꿈”(할롬)에서 깨는 것처럼, 나의 주님! 당신이 일으키실 때, 그들의 “형상”(렘)을 당신이 멸시할 것입니다(20). 본래 히브리 시행 자체에 모호한 측면이 있습니다. 형상과 꿈은 동의적인 의미로 풀이됩니다. “형상”(첼렘)은 ‘그림자’ 비슷하게 조형된 모습이며 실체가 아닌 ‘이미지’입니다. 새번역 성경이 잘 풀어 번역했습니다. “아침이 되어서 일어나면 악몽이 다 사라져 없어지듯이, 주님, 주님께서 깨어나실 때에, 그들은 한낱 꿈처럼, 자취도 없이 사라집니다.” 이처럼 시인의 마음을 뒤흔들었던 악인들의 번성은 단지 꿈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마음의 반석이며 피난처(21-28)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마치 길을 잃은 것처럼 방황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 역시 그런 순간을 겪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을 우리의 반석과 피난처로 삼읍시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우리에게 복임을 잊지 말고, 그분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아가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21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양심이 찔렸나이다 22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23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24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25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26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27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28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21-28)

 

악인의 잘되는 모습이 결코 하나님의 축복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악인이 승승장구하는 모습에 좌절감이 휩싸였던 시인은 이제 성소에서 그 해답을 찾습니다. 자신이 늘 봉사하던 곳이지만, 그곳에는 모든 문제의 해결책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래서 시인은 28절에서 나의 복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아삽에게는 하나님이 정말 그의 피난처였던 것입니다.

 

(1) 내 손을 붙드시는 하나님(21-23)

 

시인의 솔직한 언어는 참회로 이어집니다. 시인은 ‘내 마음은 쓰디쓰고, 내 콩팥이 예리하게 찔렸다’(21)고 말합니다. 내적인 아픔과 고통을 표현하면서 심장과 콩팥이 사용되었습니다. 고대인들에게 심장(또는 마음)은 지혜와 양심과 의지의 자리입니다. 콩팥은 사람의 가장 비밀스러운 기관이면서 가장 깊숙한 부분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콩팥은 “양심”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또 시인은 ‘내가 어리석었고 알지 못했으며, 내가 당신 앞에 짐승 같다’(22)고 고백합니다. 한때 악인의 평안을 보며 분통을 터트렸지만(3-9), 이제 하나님 앞에서 무지를 참회합니다. 그러나 어리석음과 무지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나는 항상 당신과 함께 있으며, 당신이 나의 오른손을 붙드십니다’(23)라고 노래합니다. 자신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인정하는 순간 주님을 향한 믿음은 더 커집니다. 고대 근동 세계에서 ‘오른손을 붙드는 것’이란 표현은 신이 왕을 영광의 자리로 인도할 때 사용되었습니다(참조. 사 45:1). 이것은 또한 주님의 영원한 보호와 인도의 상징입니다(사 42:6).

 

(2) 하나님께서는 내 마음의 힘(24-26)

 

오른손을 붙드시는 주님의 보호와 인도는 어떻게 실행하시겠습니까. 시인은 주님께, 당신의 교훈으로 당신이 인도하실 것이라고(24) 고백합니다. 교훈(에)은 충고, 조언, 권고, 계획을 포괄하는 의미입니다. 주님이 마치 지혜 선생님처럼 조언하며 계획하신 곳으로 안내하신다는 뜻입니다.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이끄실’ 것이라(24b)고 확신합니다. 영광으로 안내하시는 주님을 상상해볼 수 있는 시행입니다. 시인이 말하는 ‘후에’가 언제일지는 모릅니다. 아마 하나님께서 에녹을 취해서 ‘데리고 올라가듯’(창 5:24), 엘리야를 하늘로 올리려고 하실 때처럼(왕하 2:1 이하) 영광스러운 삶의 마무리를 뜻할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시인은 말합니다. ‘하늘에 나를 위해 누가 있습니까. 당신 없이 나는 땅에서 기뻐할 수 없습니다’(25). 이 땅에 사는 동안 시인에게 유일한 기쁨의 원천은 주님입니다. 악인들의 입은 오만하게 하늘과 땅에서 떠들어대지만(9), 시인이 열망하는 이는 오직 주님뿐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한계를 알지만, 동시에 강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내 육체와 내 마음이 쇠약해졌지만,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바위시며, 영원한 나의 분깃입니다’(26). 하늘과 땅이 한 쌍이듯(25), 몸과 마음이 한 쌍입니다. 시인은 몸이 쇠약해지는 것만이 아니라 내면 깊은 자아와 의지마저 쇠약해지는 자신을 그대로 인정합니다. 그러나 시인의 소멸할 듯 위태한 마음에 깃든 하나님은 강인한 바위처럼 든든합니다. 무엇보다 “분깃”은 나눠진 몫입니다. 사전적인 의미는 재산이나 자산의 할당된 몫을 뜻합니다. 이 단어는 구약 여러 곳에서 할당된 ‘기업’(헬렉)으로 사용된 것처럼(민 18:20; 신 10:9; 수 13:7 등), 시인은 하나님을 자기만 독차지하지 않습니다. 악인의 형통을 지켜보며 좌절의 시간을 통과했지만, 든든한 바위이신 하나님께서는 시인뿐만 아니라 그를 신뢰하는 공동체 각 사람의 분깃이라는 의미가 내재 되었습니다. 시인이 하나님을 나의 반석(바위)이라고 고백하지만, 그 하나님은 ‘나의 분깃’이면서 ‘너의 분깃’, 궁극적으로 ‘우리의 분깃’입니다.

 

(3) 악인의 파멸과 의인의 복(27-28)

 

시인은 악인들을 향해 하나님을 멀리하는 자들이라고 고쳐 말합니다. 그 언어는 처음처럼(1) 확신에 차 있습니다. ‘보십시오! 당신을 멀리하는 자들은 망할 것입니다. 음행하는 모든 자는 당신 없이 소멸되었습니다’(27). 시인은 하나님을 멀리하는 자를 매음하는 남자에 빗대어 같은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음녀 같이”로 번역되었지만, 본래 히브리어 본문은 남성단수 분사 ‘매춘하는 자’(조네)입니다.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한 자들을 매음하는 남자에 빗대어 심각성을 강화합니다(호 4:13,15). 하나님 없는 삶은 음행하는 남자처럼 신실하지 못하여 그 끝은 파멸과 제거다. 시인은 하나님을 멀리하는 자들과 반대로 하나님을 가까이했던 자신의 행복과 즐거움을 읊조립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을 가까이했고, 내게 “복”(토브)이라고 고백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선하시다’(토브)라는 말로 시작한 것처럼(1), 똑같은 형용사 ‘토브’로 마무리합니다. 시인은 선함과 즐거움과 행복을 함축하는 말, ‘토브’를 사용해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명시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시인은, 나의 주님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 삼고, 당신의 모든 일을 하나하나 전파하겠다고(28bc) 다짐합니다. ‘나의 주님’(아도나이)과 여호와를 동시에 호명한 것에 시인의 간절함이 배어 있습니다. 시인은 악인들과 오만한 자들의 평안을 보며 질문하며 질투했던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했지만(3), 흔들리는 시간을 통과하며 성장한 믿음은 더 두터워졌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 있을 때 얼마나 연약하고 어리석은 존재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마음이 괴로울 때, 종종 하나님을 잊고 우리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면서 비로소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시편 기자가 고백한 것처럼, 우리의 오른손을 붙들고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우리는 안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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