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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97-01)

 


하나님께 영원한 경배와 찬양을

시편 97편 1-12절


 

건강한 성도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또 그 사랑을 항상 감사하며 찬송하며 살아갑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섬기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랑을 주고 받으며 사는 것이 건강한 성도의 삶입니다. 만약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덧입었다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본문에서 우리에게 제안해 주는 그 삶의 방법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이 시는 온 땅 위에 지존하시고, 모든 신들보다 높이 계신 여호와를 경배하라 초청합니다. 하늘은 여호와의 영광을 선포하고 모든 백성은 그의 영광을 보기 때문에 땅과 의인들이 여호와로 인해 기뻐하고 그의 거룩한 이름에 감사하라고 요청합니다.

 

땅과 허다한 섬은 즐거워하라(1-2)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찬양받으시기에 합당합니다.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받는 복은 즐거움과 기쁨입니다. 하나님께 다스림을 받는 자의 기쁨은 환난 중에서 더욱 빛이 납니다. 우리 역시 매일매일 삶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이러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1여호와께서 다스리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

2구름과 흑암이 그를 둘렀고 의와 공평이 그의 보좌의 기초로다(1-2)

 

시인의 첫마디가 이 시의 성격을 규정합니다. 시인의 첫마디, ‘여호와가 통치하신다’라는 선언과 함께 땅은 즐거워하고, 많은 섬은 기뻐하라고 요청합니다(1;참조, 시 93:1). 땅과 땅으로부터 떨어진 수많은 섬은 땅 끝 해안들을 일컫는 것으로, 먼 지역들과 열방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통치가 이스라엘 땅이라는 지리적인 한계를 넘어 범우주적인 통치자라는 것을 선언한 것입니다. 즉, 온 세상이 여호와의 왕권을 찬양하고 동참하라는 요청입니다. 시인은 구름과 흑암이 여호와를 둘러쌌고 의와 공평이 그의 보좌의 기초라고 노래합니다(2). 하나님께서 자연 질서의 위엄에 둘러싸였습니다. 특히 흑암과 구름은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구약 본문 여러 곳에서 이 시행과 같은 시적 이미지를 보여줍니다(출 19:18;24:17; 신 4:11; 시 18:9-11; 욜 2:2; 습 1:15 등). 자연 질서의 장엄함으로 둘러싸인 하나님께서 인류와 어떻게 관계 맺으시는지를 제시합니다. 의와 공평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통치의 가장 중요한 원리이자 통치 행위에 반영되어 있습니다(89:14; 96:13; 98:9; 99:4). 한마디로 하나님의 현현과 참된 왕권은 정당한 질서와 공의에 근거합니다.

 

여호와의 현현과 그의 영광(3-6)

하나님 앞에 감추어질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두려워 떨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세력도 하나님의 심판에 맞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은 온 세상을 새롭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번개로 세상을 밝히시어 세앙의 모든 어두움과 죄악들을 밝히시고 들어내십니다.

 

3불이 그의 앞에서 나와 사방의 대적들을 불사르시는도다

4그의 번개가 세계를 비추니 땅이 보고 떨었도다

5산들이 여호와의 앞 곧 온 땅의 주 앞에서 밀랍 같이 녹았도다

6하늘이 그의 의를 선포하니 모든 백성이 그의 영광을 보았도다(3-6)

 

시인은 여호와, 그의 앞에서 불이 나와 사방에 있는 대적을 집어삼켜 소멸한다고 노래합니다(3). 여호와 앞에 있는 불이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듯 소멸하는 그의 대적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공평과 의를 위협하거나 무시하는 자들입니다(참조. 시 68:2; 106:18). 시인은 그의 번개가 세계를 비추니 땅이 떨었다고 합니다(4). 계속해서 시적인 비유적 언어를 통해 여호와가 세상에 개입하시는 것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의 번개가 온누리를 번쩍 비출 때, 땅이 오들오들 떨며 어찌할 줄 모르는 광경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더군다나 산들이 여호와 앞에서 온 땅의 주인 앞에서 밀랍처럼 녹았다고 합니다(5).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신현의 순간들은 다양한 제의 절차에서 제사장이나 예언자에 의해 여호와의 이름과 메시지가 선포되면서 신적인 현존의 실체를 경험할 수 있지만(출 24장 참조), 구름과 천둥, 번개 같은 기상 현상들에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시 18:7-15; 97:1-5; 144:5-6;사 19:1;미 1:3-4; 나 1:3-5 등). 그러나 현재 시행처럼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 초처럼 녹아내린 산들의 풍경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시인은 고도의 비유적 언어를 통해 독자들에게 언어로 형용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현현과 위엄을 노래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시인은, 하늘이 여호와의 의를 선포하니 모든 백성이 그의 영광을 보았다고 말합니다(6). 여호와의 나타나심에 대해 하늘이 큰 소리로 말하며 반응합니다. 하늘과 땅은 우주 전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창 1:1). 그러므로 온 우주가 하나님의 통치에 응답하는 것을 묘사한 것입니다(5-6). 특히 하늘이 하나님의 ‘의’를 선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인류와 관계 맺을 때 사용되는 용어입니다(시 50:6; 참조 19:1). 2절처럼 시인은 하나님의 통치를 인류의 올바른 질서와 연결 짓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듯이, 우리 역시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고 하나님의 주권을 알도록 초대받습니다(24:7-10; 29:1-3; 96:3,7-8).

 

모든 신들보다 뛰어난 여호와(7-9)

우상들은 인간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일 뿐입니다. 생명도 가치도 없는 헛된 우상들을 만들어 숭배하는 자들은 진실로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모든 사람은 오직 창조주 하나님께 경배해야 합니다. 그분만이 세상의 주권자로서 경배받으시기에 합당합니다.

 

7조각한 신상을 섬기며 허무한 것으로 자랑하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너희 신들아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8여호와여 시온이 주의 심판을 듣고 기뻐하며 유다의 딸들이 즐거워하였나이다

9여호와여 주는 온 땅 위에 지존하시고 모든 신들보다 위에 계시니이다(7-9)

 

7절은 이 시의 핵심입니다. 시인은 이제 하나님의 주권을 알지 못하는 모든 자가 수치를 당하는 것을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모르는 자를(5-6, 참조) 조각한 신상을 섬기는 모든 자와 ‘허무한 것들’을 자랑하는 자라고 서술하고, 이런 자들은 수치를 당할 것이라 말합니다(7ab). 우상들의 본질이 허무한 것으로 폭로되고, 그것들을 자랑했던 자들은 불명예스럽게 망신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모든 신들’을 부르고 여호와께 ‘경배하라’ 명령합니다(7c). 인간이 신으로 숭배했던 허무한 것들도 이제 여호와 앞에 엎드려 예배자들의 행렬에 참여해야 합니다. 시인은 여호와를 부르며, 시온이 당신의 심판을 듣고 기뻐하고, 유다의 딸들이 기쁨에 겨워 소리쳤다고 합니다(8). 여호와가 의로운 심판으로 개입하시는 것을 하늘이 선포한 것처럼(6), 여호와를 예배하는 자들에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시온과 유다의 딸들, 곧 유다의 마을이 여호와의 심판으로 인해 격정적으로 환호하며 즐거워하는 장면입니다. 여호와의 심판은 적대적인 힘들을 전복시킨 것이기에 그의 백성은 구원받고 안전하게 보호받습니다. 따라서 시인은 노래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시인은 여호와를 또 부르며 이유를 밝힙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온 땅 위에 지존자이고, 모든 신들보다 높이 계십니다.’(9)라고 직접 말합니다. 히브리 시에서 대명사 ‘당신’을 굳이 사용할 때는 한층 더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지존자’와 ‘당신이 놈이 있다’는 말은 둘 다 ‘알라’(올라가다) 동사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같은 어근 동사를 사용한 것은 하나님께서 땅과 하늘 영역 모두를 통치하심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의인은 기뻐하라(10-12)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자는 보이는 것에 현혹되지 않습니다. 죄의 유혹에 빠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배하신 영광스러운 장래의 결과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의롭지 못한 악한 행위는 당장은 유익을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쓰디쓴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10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그가 그의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사 악인의 손에서 건지시느니라

11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리시는도다

12의인이여 너희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그의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10-12)

 

시인은 이제 여호와를 사랑하는 자들을 호명하며 악을 미워하라고 요청합니다(10a). 잠언의 지혜 교훈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악을 미워한다고 말한다(8:13). 고대 이스라엘의 지혜자들만이 아니라 정의를 고집스럽게 외치는 예언자들도 똑같은 호소를 합니다.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라고 외칩니다(암 5:15;미 3:2). 어떤 세대든지 악을 미워하는 자들은 하나님께 충절을 지키는 자로서 여호와가 그의 성도의 영혼을 지키시고 악인들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내실 것입니다(10bc). 성도(하시드)는 말 그대로 신실하고 헌신한 자입니다. 그리고 96편의 문맥에서 성도는 의인이며, 마음이 정직한 자입니다(11). 시인은 여호와께 헌신한 자들을 이렇게 격려합니다. 여호와가 의인에게 빛을 뿌리며, 마음이 정직한 자들을 위해 기쁨을 뿌리십니다(11). 빛(오르)은 하나님의 임재와 보호를 상징하는 또 다른 우주적인 요소이면서(시 4:6; 27:1; 43:3; 미 7:8), 생명을 표현하는 은유입니다. 더군다나 빛과 기쁨을 씨앗처럼 뿌리신다는 표현은 시적인 상상력을 고조시켜 의인과 마음이 바른 이들에게 생명과 기쁨이 식물처럼 왕성하게 자라는 장면을 그려보게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의인과 마음이 곧은 자들의 삶을 빛과 기쁨으로 가득 채우십니다. 물론 악한 현실과 악인들의 세력은 하나님의 통치에 반대하며 여전히 힘을 발휘합니다. 그러나 의인은 악의 실체를 인식하면서도 기뻐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들은 여호와를 사랑하는 자, 곧 성도를 하나님이 악인의 손에서 건지실 것이라 믿습니다(1-2; 참조. 마 5:12). 그러므로 시인은 마지막으로 의인들을 호명하며 요청합니다. ‘여호와로 인해 기뻐하라. 그의 거룩하신 이름에 감사하라’(12). 이 시편의 마지막 명령어, ‘기뻐하라’와 ‘감사하라’는 하나님의 주권을 알고, 그의 통치 아래 살아감을 수용하는 자들을 향한 부름이며 초대입니다. 97편은 여호와의 다스림을 선포하면서 온 세계가 즐거워하고 기뻐해야 한다는 간접 명령문으로 시작하여 기뻐하고 감사하라는 직접 명령문으로 끝맺습니다. 이 시편은 소리쳐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하라는 요청뿐만 아니라, 의인의 기쁨까지 유달리 기쁨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8). 이는 어두운 현실에서도 하나님은 빛을 뿌리셔서 모든 것을 밝게 비추시고, 그빛에 의지하여 성도들이 생명을 불어넣는 일에 참여하고 솟구치는 기쁨을 맛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의 거룩한 이름에 대한 감사는(12b) ‘하나님 이름’(제케르)을 좀 더 엄숙하게 언급함으로써(출 3:15 참조), 그가 행하신 행적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에 초점을 둡니다. 여호와가 행하시는 일들이 크고 존귀하고 위엄으로 가득한데 사람이 어찌 그것을 기억하고 감사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이 세상을 통치하는 분은 만유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헛된 우상이나 인간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돌려서는 안 됩니다. 온 세상의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은 오직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영원토록 하나님의 영광만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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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96-01)


여호와께 합당한 온 땅의 예배

시편 96편 1-13절


 

세상의 시각으로 볼 때 ‘기독교’ 혹은 교회의 두드러진 특징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포교 활동일 것입니다. ‘포교’라는 말은 어떤 가르침을 널리 퍼뜨린다는 뜻이기 때문에 어떤 종교든 포교 활동한다고 할 수 있지만, 기독교는 특히나 더 적극적인 포교 활동을 합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서 ‘전도지’를 나눠주기도 하고 집집마다 찾아다니기도 합니다. 지하철에서 전도하는 사람들도 과거에는 많이 있었다.

 

  • 세상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권면이 담긴 시입니다. 그는 온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며, 다스리시는 왕이며,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이 시는 온 땅과 열방이 여호와 앞에서 숭고하고 거룩한 예배를 드리자고 요청합니다.

 

여호와를 송축하며 기이한 행적을 노래(1-3)

 

예배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하시는 일을 선포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지, 그것을 목적으로 예배가 드려진다는 말은 아닙니다. 즉, 참된 예배는 그 자체로 전도의 역할을 하는 것이지, 전도를 위해 예배를 드리라는 말은 아닙니다.

 

1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

2여호와께 노래하여 그의 이름을 송축하며 그의 구원을 날마다 전파할지어다

3그의 영광을 백성들 가운데에, 그의 기이한 행적을 만민 가운데에 선포할지어다(1-3)

 

시인의 첫마디는 단순하고 명쾌합니다.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1a) 여섯 개의 명령어가 연속됩니다. 노래하라-노래하라-노래하라-송축하라-전파하라-선포하라. 1-2절에 걸쳐 ‘노래하라’를 세 번 반복합니다. 시인은 ‘온 땅’을 호명하며 여호와께 노래하라고 요청합니다(1b). 온 땅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세계와 백성을 포함합니다. 그러면 불러야 할 ‘새 노래’는 어떤 내용입니까? 첫째, 그의 이름을 송축하고, 그의 구원을 날마다 전파해야 합니다(2). ‘송축하라’(바라쿠)는 기본형 ‘축복하다’(바라크) 동사의 강조 명령형이며 하나님께서 목적어일 때, 찬양과 격찬의 뜻을 갖습니다. 그리고 ‘전파하라’는 기쁜 소식을 가져온다는 뜻으로 구약에서 여호와의 구원 행위에 대한 기쁜 소식들을 전달할 때 사용됩니다(사 40:9; 41:27; 52:7; 60:6; 61:1; 나 1:15). 둘째, 그의 영광을 백성들 가운데, 그의 기이한 행적을 만민 가운데 선포해야 합니다(3). ‘선포하라’는 자세하게 열거하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구원 행위뿐만 아니라 그의 영광을 섬세하게 일일이 말하라는 의미입니다. ‘새 노래’는 새로운 방향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미래적인 일들에 대한 기대와 감격과 신뢰가 동반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영광’은 그의 현존이 눈으로 보이는 현시의 개념입니다. ‘영광’은 문자적으로 ‘무거움’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창조 세계 전체가 여호와의 영광, 곧 그의 무게로 가득 차 있으며(사 6:3), 구원의 역사 속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출 14:4, 17-18; 겔 28:22 참조). 따라서 여호와의 영광은 정적이지 않고 동적이며 그의 임재와 행위와 능력에서 나타납니다.

 

지극히 위대하신 여호와를 찬양(4-6)

우리에게 날마다 새로운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께서는 새 노래로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는 변하지 않는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 위대하신 하나님께는 위대한 예배가 합당합니다. 그런 예배가 드려져야 합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우리는 무엇이 여호와께 드려지는 예배에 합당한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4여호와는 위대하시니 지극히 찬양할 것이요 모든 신들보다 경외할 것임이여

5만국의 모든 신들은 우상들이지만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

6존귀와 위엄이 그의 앞에 있으며 능력과 아름다움이 그의 성소에 있도다(4-6)

 

시인은 여호와만의 차별성을 서술하며 찬양합니다. 즉, 여호와의 탁월한 타자성과 거룩성입니다.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모든 신들보다 두려워할 것이라 노래합니다(4). 여호와의 탁월한 다름, 곧 타자성을 다른 신들보다 ‘크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강조합니다. 그 압도적인 위엄 때문에 여호와는 경외, 곧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모든 신들은 돌이나 나무로 조각된 ‘우상들’, 즉 ‘무가치한 것’에 불과하지만 그는 하늘을 지으셨습니다(5). 하늘을 지으신 창조자는 들을 수도 볼 수도, 말할 수도 없는 우상들과 다릅니다. 여호와는 듣고 보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시인은 여호와의 이중적인 고매한 지위를 창조와 연결 짓습니다. 이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으로부터 모든 생명과 새로움이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존귀와 위엄이 그의 앞에 있고, 능력과 아름다움이 그의 성소에 있습니다(6). 존귀와 위엄은 왕의 품격에 어울리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그 왕권은 능력과 아름다움(또는 찬란함)이며, 그것은 성소로부터 흘러나옵니다. ‘성소’는 하나님의 임재가 드러나는 거룩한 장소입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위대한 왕권을 성전에 계신다는 인격화한 이미지로 드러낸 것입니다.

 

만국의 족속들아,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라(7-9)

하나님께 예물을 드려야 합니다. 꼭 헌금을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무엇이든 하나님께 드릴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와야 한다는 말입니다. 당연히 그것은 ‘준비’되어야 합니다. 귀한 사람에게 주는 선물은 오래 고민하면서 고르고 또 고르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예물도 그런 것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기도하든, 찬양하든, 성경을 읽든, 그냥 되는 대로가 아니라 잘 준비하여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새 것으로 드려야 합니다.

 

7만국의 족속들아 영광과 권능을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8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예물을 들고 그의 궁정에 들어갈지어다

9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7-9)

 

시인은 여호와의 찬란함을 서술한 후에(6), 만국의 ‘족속들’을 호명하면서 영광과 권능을 여호와께 돌리라고 반복합니다(7). 여호와를 찬양하는 것은,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이는 여호와가 온 세계를 만드신 창조자이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하나의 혈연관계처럼 묶인 거대한 ‘가족’이 되어 여호와를 찬양하도록 부름을 받습니다. 모두가 한 가족이 되어 창조된 세계의 왕이신 통치자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어울리는 영광을 돌리고, 예물을 바치고 그의 궁정에 들어가도록 요청받습니다(8).

시인은 ‘드려라-바쳐라-들어가라’ 세 개의 명령형을 사용하여 여호와 앞에 경의를 표하는 일에 가담하도록 격려합니다. 시인은 ‘온 땅’을 호명하면서 숭고함과거룩함으로 여호와께 예배하고, 그분 앞에서 떨라고 요청합니다(9). 시인의 문장을 엄밀하게 표현하면, ‘숭고한 거룩함 안에서’ 여호와께 예배하라, ‘그의 앞에서’, 그의 임재 앞에서(문자적으로, ‘그의 얼굴 앞에 있으니’) 전율하라는 명령형입니다. ‘예배하라’는 몸을 깊이 구부리는 행위와 관련된 것이며, 히브리 시행의 평행 관계가 잘 보여주듯 ‘예배하라’는 몸을 떠는 행위와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폭력 앞에 노출된 존재의 공포가 아니라 숭고함과 거룩함으로 인해 온몸에 전율을 느끼는 몸의 진동입니다.

 

만민을 공평하게 심판하시는 여호와(10-13)

당연히 우리가 이런 예배를 드려야 함을 요구합니다. 서두에 말했듯, 시편 96편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온 땅을 대상으로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을 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당연히 이런 예배를 드려서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날마다 선포해야 합니다.

 

10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세계가 굳게 서고 흔들리지 않으리라 그가 만민을 공평하게 심판하시리라 할지로다

11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며 바다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외치고

12밭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즐거워할지로다 그 때 숲의 모든 나무들이 여호와 앞에서 즐거이 노래하리니

13그가 임하시되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라 그가 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10-13)

 

10절은 이 시편의 핵심 문장입니다. 특히 10절에는 세 가지 분명한 확신이 표현되었습니다. 첫째, 시인은 “민족들 가운데서 ‘여호와가 통치하신다’고 말하라!” 요청합니다(10a). 시인이 앞서 3절에서 여호와의 기이한 행적을 일일이 열거하라고 요청한 것처럼, 우리가 말하자고 다시 호소합니다. 이는 여호와가 이스라엘만이아니라 세상을 다스리는 왕의 권세를 가졌음을 선포하자는 부름입니다. 둘째, 시인은 세계가 굳게 서 있고 흔들리지 않으리라(10b) 말합니다. 이는 창조된 세계가 처음 만드신 그대로 요동 없이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태양을 비롯한 온 우주의 질서가 흔들림 없이 하나님 창조의 의지대로 운행될 것을 확신하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셋째, 그가 만민을 공평하게 심판하실 것입니다(10c). 여호와가 공평하게 악인들을 처벌하고 의인들을 보호하시고 도와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표명한 것입니다. ‘심판하다’ 동사는 법적으로 선고를 내리는 법정 용어입니다. 법정 선고를 통해 정의가 실현됩니다. 따라서 여호와는 정의를 실행하는 판결자로서 여호와가 판결의 고유한 권한을 가지셨음을 선포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통치와 흔들림 없는 세계, 그의 심판을 기뻐하는 존재들이 있습니다. 시인은 하늘, 땅, 바다, 거기에 충만한 것, 밭, 밭에 있는 모든 것, 숲의 모든 나무가 즐거워하고, 기뻐 소리치고, 즐거워하고, 즐겁게 노래한다(11-12)고 말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의 완벽함을 말하려는 것처럼 일곱 가지만 언급했습니다. 인간을 제외한 자연 세계 모두가 여호와의 심판을 기뻐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인간의 생존이 가능하도록 안전한 집으로서 존재하는 지구 곳곳의 동식물들은 인류의 착취와 죄 때문에 파괴되었습니다(참조. 만물의 탄식, 롬 8:18-22). 따라서 여호와의 심판은 자연 세계가 온전하게 회복하는 시간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하늘과 땅, 바다와 바다 생물들, 밭과 그 식물들, 숲의 나무 모두가 기뻐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시인은 자연 세계의 회복과 기쁨이 도래할 것을 노래합니다. 시인은 끝으로 다시 한 번 여호와의 심판을 강조하며 그의 왕권을 확언합니다. 시인은 그들이 여호와 앞에 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오시기 때문이다. 그가 땅을 심판하기 위해 오시기 때문이다’(13ab). 시인은 ‘왜냐하면 그가 오시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가 오시기 때문이다’를 연속적으로 반복하여 여호와의 오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그가 오시는 이유는 심판을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시인의 마지막 말은 더 의미심장합니다. 그가 의로 세계를 심판하실 것이고,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들을 심판하실 것이라(13cd) 말합니다. 시인은 법정의 판사처럼 ‘의’로, 그의 ‘진실하심’으로 판결하시는 하나님을 서술합니다. 여호와의 판결(심판) 근거는 정의와 신실함, 곧 진실함에 입각한 것입니다. 여호와가 오시는 그날을 누구도 알 수 없지만, 그가 오시는 이유는 땅과 백성을 심판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모두 우주 만물의 통치자이며 판결자의 심판을 말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시인은 강력히 호소합니다. ‘모든 나라 가운데 말하라!’(10; 3 참조)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가 그냥 우리끼리 좋아서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하나님을 선포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가 전도이고 선교입니다.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로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을 온 땅에 선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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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95-01)


함께 드리는 예배의 능력

시편 95편 1-11절


 

예수님께서는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우리가 찬양하고 경배할 수 있는 길을 여셨습니다. 그래서 찬양과 경배에는 불순종의 역사를 끊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교회는 세상에서 가장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함께 예수님을 믿고,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기 때문입니다.

 

  • 이 시편은 위대하신 왕 하나님의 창조와 통치를 찬양하는 예배로 부름과 동시에 출애굽 당시 광야에서 하나님께 반역한 일을 근거로 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도록 권면합니다. 예언자적인 신탁은 완악한 마음을 향한 온 세계의 창조자 하나님의 경고로 끝맺습니다.

 

예배로의 부름(1-6)

개인이 드리는 삶의 예배도 중요하지만, 공동체가 함께 모여 드리는 찬양과 예배는 더욱 중요합니다. 이것은 구약시대로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영적 진리입니다. 믿음의 형제자매가 함께 모여 드리는 예배가 얼마나 영광스럽고 소중한 것인지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1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2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

3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들보다 크신 왕이시기 때문이로다

4땅의 깊은 곳이 그의 손 안에 있으며 산들의 높은 곳도 그의 것이로다

5바다도 그의 것이라 그가 만드셨고 육지도 그의 손이 지으셨도다

6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1-6)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키우고 돌보시는 양육자이기도 하십니다.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입니다. ㅜ모가 자녀를 돌보며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과 육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십니다.

 

(1) 감사함으로 여호와를 노래하자(1-2)

 

예배의 부름은 가장 먼저 성소 안으로 들어가는 행렬을 그려보게 합니다. 첫 마디가 ‘오라! 여호와께 기쁨으로 소리치자’입니다. 주체할 수 없는 감격을 기쁨과 환호성으로 노래하자는 호소입니다. 그러고서 더 구체적으로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해 외치자’(1b) 요청합니다. 구원의 반석은 하나님을 신적 용사로 묘사할 때 사용하고(신 32:4,15,18; 시 18:2,31; 98:2), ‘외치다’(루아)라는 동사는 전쟁 신호를 알리며 함성을 지르거나 승리를 외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민 10:7; 삼상 4:5; 17:20; 수 6:5 등). 온갖 위험과 위협들에서 구원하시는 전사 여호와를 향해 기쁨의 함성을 외치자는 뜻입니다. 고요한 예배의 상황이 아니라 목소리를 아끼지 말고 여호와를 찬양하자는 요청입니다.

이어서 시인은 ‘감사로’ 그의 앞에 나아가자고 합니다(2). 직역하면, 그의 얼굴 앞에서 만나자는 말입니다.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현존에서 머물자는 뜻으로, 회중이 축제 예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기뻐하도록 초청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시인은 ‘노래로’ 그를 향해 크게 외치자고 합니다(2b). ‘외치다’라는 말을 반복하면서 ‘감사로’(베토다) 하나님 얼굴 앞에 머물며 ‘노래로’(비즈미로트) 쩌렁쩌렁 울리게 소리치자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하기 위해 벅찬 감격의 ‘감사’와 ‘노래들’은 빼놓을 수 없는 요소입니다.

 

(2) 위대하신 왕 여호와께 경배하자(3-6)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목청껏 외치는 찬양을 받으시기 합당한 이유가 제시됩니다. 여호와는 위대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이고, 모든 신들 위에 위대한 왕이기 때문입니다(3). ‘크다’라는 형용사를 두 번 반복하여 강조합니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신들 위에 왕으로 존재하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시인은 땅의 깊은 곳이 그의 손안에 있고, 산들의 높은 곳이 그의 것이라고 노래합니다(4). 사람의 눈에 발견되지 않는 깊은 곳과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가장 높은 곳 모두 하나님의 통제 아래 있다는 뜻입니다. 온 세상이 그의 손안에 있음을 강조합니다. 만물의 통치자 하나님을 향한 시인의 찬미는 계속됩니다. 바다도 그의 것이고, 그가 만드셨고, 그의 손이 마른 땅도 지으셨다고 합니다(5). 시인은 통치자 하나님께서 고대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바다와 삶의 터전인 육지를 조성하신 것을 밝히면서 하나님의 왕권과 소유권을 선포합니다. 이때 하나님의 왕권은 창조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1절에서 ‘오라!’는 초청은 6절에서 회중을 향해 ‘들어가라!’는 동사와 함께 성소 안으로 더 가까이 나아가 하나님께 엎드려 무릎을 꿇도록 격려하는 분위기로 이어집니다. 거기서 허리를 굽혀 경배하는 것은 왕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자세입니다. 시인은 이보다 더 자세를 낮추도록 요청합니다. ‘우리의 창조자’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6)고 합니다. 이 말을 다른 형태지만 두 번 연속해서 반복합니다. ‘우리가 무릎을 꿇자, 우리가 무릎을 꿇자’(6b) 이것은 몸을 최대한 낮추어 완전한 복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전복시키는 행위이며 마땅히 취할 자세입니다.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을 찬양(7a-c)

 

하나님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셔서 친히 그 백성을 양 떼처럼 돌보시며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에게 원하시는 것은 온전한 순종입니다. 양들의 의무는 목자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목자로 삼은 백성은 마땅히 그분의 음성에 집중하며 온전히 복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7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7a-c)

 

우리가 낙타 무릎으로 하나님 앞에 복종시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두 가지로 그 이유를 압축합니다. 첫째, 여호와 그는 우리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7). 둘째, 우리는 그의 목초지에 있는 백성이며, 그의 손에 있는 양이기 때문입니다(7bc). 하나님을 목자라고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우리를 하나님의 돌봄을 받는 양으로, 목초지의 백성으로 묘사했습니다. 구약에서 왕은 주로 목자 이미지로, 백성은 양으로 표현되곤 했습니다(렘 23:1-4; 겔 34:1-10). 목자가 양을 돌보고 양육하는 이미지를 통해 하나님과 언약 백성 사이의 친밀한 관계가 묘사합니다(시 23편; 79:13;100:3; 사 40:1 등). ‘우리의 창조자’이자 모든 신들 위에 군림하는 왕(3) 하나님을 위압적인 왕의 이미지가 아니라 목자의 이미지 통해 갈등과 분쟁 없이 평화롭고 자유롭게 방목하시는 분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언자적인 신탁(7d-11)

하나님의 음성에 주의하는 자가 생명의 길을 잃지 않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 자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전적으로 믿고 신뢰하는 자에게 참된 안식의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전인격적으로 보호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7…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8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의 맛사에서 지냈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

9그 때에 너희 조상들이 내가 행한 일을 보고서도 나를 시험하고 조사하였도다

10내가 사십 년 동안 그 세대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이르기를 그들은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길을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

11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7d-11)

 

하나님께서는 예배 가운데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말씀을 통해 인간의 연약함과 한계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을 떠나 깨어진 세상의 본질과 실상이 말씀을 통해 드러나는 그 순간, 하나님의 큰 일이 새롭게 시작됩니다.

 

(1) 신탁 도입부(7d)

 

예언자적인 신탁과 선포가 이어집니다. 신탁의 도입부가 ‘오늘, 만일 여러분이 그의 목소리를 듣는다면’(7d)이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오늘’이라는 첫 글자는 현장성을 강하게 전달할 뿐만 아니라 지금이라는 현재의 시간과 순종의 중요성이 강조됩니다. 이 시편의 정황이 예배 상황이라면, 이 말은 제사장이나 예언자 집단에 속한 자가 회중에게 하는 말일 것입니다. 드디어 8절에서 신탁 말씀이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난날 이스라엘이 출애굽 이후 광야 여정 중에 있었던 사건을 언급하십니다. 너희는 므리바에서 처럼, 맛사 광야에 있을 때처럼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8). ‘므리바’는 ‘다툼’ 또는 ‘논쟁’을 뜻하고, ‘맛사’는 유혹하는 것에서 파생된 ‘시험’을 뜻합니다(출 17장; 민 20장; 신 6:16;9:22;33:8). 이 두 장소는 당시 이스라엘 후손들이 불평하며 하나님께 반역했던 대표적인 장소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당시 여호와가 우리와 함께 계신가를 물으며 의심했기 때문에 이름 붙여진 장소입니다. 즉, 여호와의 현존을 의심했습니다. 그것은 완악한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본래 히브리시 행 8절 첫마디는,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라’로 시작합니다. 완악함은 마음의 냉혹함이나 완고함, 무감각한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단단한 쇠처럼 마음이 경화된 상태를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시 상황을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그때 너희 조상들이 내가 한 일을 보고도 나를 시험하고 조사했다고 말씀하십니다(9). 당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이집트 땅에 내렸던 열 가지 재앙을 시작으로 홍해가 갈라져 바다를 마른 땅처럼 걸었고, 이집트 군사들의 죽음을 목격했고 광야에서 신선한 먹거리를 주셨던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시험하고 비난할 목적으로 주도면밀하게 바라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40년 동안 그 세대 때문에 몹시 불쾌하셨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빗나간 백성이고, 나의 길을 알지 못하는구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10). 개역개정 본문은 “근심하여”라고 완곡하게 표현했지만, ‘역겹다’는 뜻입니다. 더군다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안내하시는 길로 똑바로 걷지 않고 이리저리 주변을 헤매며 방랑했습니다. 그 방랑의 시간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빗나간 길에 있는 것 자체가 그의 길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그들의 완악하고 고집스러운 마음은(8) 결국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여정에서 배움을 거부하는 방향으로 자기들의 뜻(마음)을 결정했습니다. 고대인들에게 마음은 의지의 자리이고 의사결정 기관입니다. 위대한 하나님을 향한 감격과 환호성 속에서도(1-2), 하나님께서는 오래전 일들을 기억하시며 자기 백성의 완악한 의지가 다시 반복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신탁의 말씀을 듣고 있는 신앙 공동체를 향해 광야 세대의 실패에 초점을 맞추어 말씀하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내가 분노하여 그들이 나의 안식에 결코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 맹세하십니다(11). 하나님께서는 1인칭 동사와 1인칭 소유격을 반복하면서 언약 백성의 완악함을 용서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밝히며 경고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 심판을 통해 포로기든, 포로 후기든, 아니면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교회 공동체를 향한 것이든 직접적으로 엄격하게 하나님의 길에서 이탈한 완고한 마음을 향해 경고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만유의 창조주이심을 진심으로 믿는다면 우리는 그분의 음성과 인도하심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분께 복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와 순종은 참되 안식으로 가는 길이며, 그 음성을 듣고도 거역하는 것은 파멸로 가는 길입니다. 순종함으로 참된 안식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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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94-01)


하나님의 공의와 우리의 신뢰

시편 94편 1-23절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악이 만연하고 불의가 만연한 세상 속에서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바로잡아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고난과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기다려야 합니다. 의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정의롭고 올바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 시편 94편은 복수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시편입니다. 하나님께서 악인들에게 심판을 베푸시기에, 그들은 결국 멸망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94편은 시편 제4권의 주제인 여호와의 통치하심이라는 주제를 ‘여호와께서 악인을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명제로 풀어냅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고난 가운데서 믿음으로 승리할 것을 격려합니다.

 

복수하시는 여호와 하나님(1-2)

우리는 하나님의 정의를 간구하는 기도가 매우 중요합니다. 악이 만연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며, 그의 공의를 통해 세상의 부조리를 바로잡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의 정의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1여호와여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빛을 비추어 주소서

2세계를 심판하시는 주여 일어나사 교만한 자들에게 마땅한 벌을 주소서(1-2)

 

시편 94편의 첫 구절인 1-2절은 94편 전체의 주제를 독자들에게 소개해줍니다. 1절에 의하면, 여호와 하나님은 ‘복수’하시고 ‘보복’하시는 분입니다. 이러한 복수의 주제는 단순한 감정적 차원을 넘어선 하나님의 의로우신 통치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주님은 궁극적인 심판을 행하셔서, 그들이 행한 대로 갚으실 것입니다. 2절은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은 세계 전체를 향할 것임과 여호와께서 그 보좌에서 일어나사 교만한 자들을 벌하실 것임을 이야기합니다. 1-2절은 하나님의 복수를 94편 전체의 주제로 선명하게 도입하고 있습니다.

 

악인들의 행동에 대한 묘사(3-7)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향한 시편 기자의 간구를 통해 중요합니다. 악이 판치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정의가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며, 그의 공의를 실현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확신하며, 그분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3여호와여 악인이 언제까지, 악인이 언제까지 개가를 부르리이까

4그들이 마구 지껄이며 오만하게 떠들며 죄악을 행하는 자들이 다 자만하나이다

5여호와여 그들이 주의 백성을 짓밟으며 주의 소유를 곤고하게 하며

6과부와 나그네를 죽이며 고아들을 살해하며

7말하기를 여호와가 보지 못하며 야곱의 하나님이 알아차리지 못하리라 하나이다(3-7)

 

악인들에 대한 묘사가 3-7절에 계속해서 언급됩니다. 3절은 악인들이 계속해서 기뻐하도록 여호와께서 허락하지 마실 것을 수사의문문의 형태를 통해서 강조합니다. 4-6절은 그 악인들이 하나님 앞에 교만하여 하나님 백성과 기업을 짓밟았음을 그 이유로 제시합니다. 특별히 중요한 것은 7절이 말하는 것처럼, 악인들이 참 지혜를 스스로 소유했다고 착각한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여호와는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다고 생각하는데, 이러한 그들의 지혜는 사실 거짓된 지혜일 뿐입니다.

 

악인들을 심판하시는 여호와(8-14)

악인들이 일시적으로 성공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동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시며 궁극적으로 그들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확신해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 진리를 기억하고 악이 만연한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공의를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과 시련을 통해 우리를 보호하시며 그분의 공의는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8백성 중의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는 생각하라 무지한 자들아 너희가 언제나 지혜로울까

9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

10뭇 백성을 징벌하시는 이 곧 지식으로 사람을 교훈하시는 이가 징벌하지 아니하시랴

11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

12여호와여 주로부터 징벌을 받으며 주의 법으로 교훈하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

13이런 사람에게는 환난의 날을 피하게 하사 악인을 위하여 구덩이를 팔 때까지 평안을 주시리이다

14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며 자기의 소유를 외면하지 아니하시리로다(8-14)

 

8절에서 시편 기자는 악인들이 가진 잘못된 사고를 통렬하게 비판하며 바로잡습니다. 악인들은 ‘어리석은 자들’이며 ‘미련한 자들’입니다. 이 두 어휘는 지혜 문헌에 자주 등장하는 표현으로, 지혜를 소유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들을 일컫습니다. 이런 악인들은 자신이 참된 지혜를 가졌다 생각하지만, 사실 그들의 인간적인 지혜는 멸망에 이르게 될 뿐입니다. 9절은 여호와 하나님을 ‘창조주’로 소개하고 있고, 10절은 이 하나님이 참된 지혜의 가르침을 선포하시는 참 지혜이심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여호와께서 사람들에게 이런 지혜를 베풀어주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11절이 언급하는 대로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일생이 매우 짧음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스스로 지혜 있다 생각하지만, 그 지혜는 아주 짧은 인생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영원하신 하나님의 지혜와는 비교할 수 없는 한계를 지녔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생의 허무함이며 헛됨입니다.

궁극적인 지혜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시작될 수 있습니다. 12절은 이러한 믿음의 삶을 ‘참된 복’이라고 소개합니다. 시편과 지혜서에 자주 등장하는 ‘아쉬레이’를 사용하여 여호와께로부터 꾸지람/교훈을 받게 되는 자가 참된 복을 누리는 사람임을 선언합니다. 참된 복이란 인생에서 어려운 일을 당하지 않는 물질적. 인간적 형통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고난도 주시며, 그 고난과 역경 가운데 자신의 인생이 헛될 뿐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런 인생의 파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만이 영원한 통치자이시며 지혜의 소유자이심을 배워야 합니다. 이런 신앙을 배워 자신의 인생을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앙으로 돌아볼 줄 알아야 합니다.

13절은 이렇게 신앙적 관점을 가지게 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환란을 면하게 해주신다고 약속합니다. 특별히 중요한 부분은 13절 하반절의 ‘악인을 위해 구덩이를 팔 때까지 평안을 주신다’는 구절입니다. 구약에서 구덩이는 대개 죽음을 상징합니다. 악인을 위해 구덩이를 판다는 것은 악인이 심판받아 죽는다는 의미가 됩니다. 따라서 13절은 여호와를 의뢰하는 사람은 상을 얻게 되는데, 악인들에게 궁극적인 심판이 임할 때까지 믿음으로 버티면서 견고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될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8-14절은 여호와께서 악인들을 심판하실 것이며, 그 가운데 여호와 하나님의 통치 원리를 배운 사람들이 지혜로운 자가 되어 하나님의 축복을 얻을 것임을 보여줍니다.

 

의인을 건져주시는 여호와(15-19)

우리는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정의를 실현하실 것이며, 이를 통해 모든 정직한 자들이 공의를 따를 것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요새와 피난처로 삼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주신다고 믿어야 합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그를 붙잡아 주었고, 많은 걱정과 불안 속에서도 하나님의 위로가 그의 영혼을 기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인내를 가지고 그분의 위로와 평안을 경험할 수 있음을 알려줍니다.

 

15심판이 의로 돌아가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가 다 따르리로다

16누가 나를 위하여 일어나서 행악자들을 치며 누가 나를 위하여 일어나서 악행하는 자들을 칠까

17여호와께서 내게 도움이 되지 아니하셨더면 내 영혼이 벌써 침묵 속에 잠겼으리로다

18여호와여 나의 발이 미끄러진다고 말할 때에 주의 인자하심이 나를 붙드셨사오며

19내 속에 근심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15-19)

 

악인에 대한 심판을 노래한 후, 시편 기자는 15절 이하에서 의인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교훈을 성실하게 배우기로 한 자들에게 임할 축복입니다. 15절은 심판이 의로 돌아갈 것임을 분명히 선언합니다. 15절에서 언급되는 의와 정직은 여호와 하나님의 성품이며, 하나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이 갖게 되는 신앙의 특성입니다. 시편 94편의 문맥상 지혜로운 자들은 여호와의 통치를 인정하며, 그분의 교훈을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16절은 누가 시편 기자를 돕겠는가, 라고 질문하는데, 17절은 이 질문에 대해 여호와께서 이미 자신에게 도움이 되셨음을 선언합니다. 여호와께서 그분의 인자하심으로 시편 기자를 붙들어주셨고(18), 주님의 위로하심이 그를 즐겁게 하셨습니다(19). 15-19절은 여호와의 도우심과 구원하심을 노래합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통치 원리인 정의, 정직, 인자 등의 중요한 신학적 단어들을 사용하면서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않으심을 확언합니다. 이런 구절들을 읽는 독자들은 자신들의 삶 가운데 영원한 통치자요, 지혜이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을 사모해야 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악인들을 심판하시는 여호와(20-23)

하나님께서는 모든 악과 불의에 대해 심판하시는 공의로운 심판자이십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인식하고, 우리의 삶에서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며 악에 맞서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악을 심판하시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분의 백성을 구속하시고 보호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낮은 곳, 즉 억압과 고통 속에서 벗어나고, 원수들로부터 구속받은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의 결과입니다.

 

20율례를 빙자하고 재난을 꾸미는 악한 재판장이 어찌 주와 어울리리이까

21그들이 모여 의인의 영혼을 치려 하며 무죄한 자를 정죄하여 피를 흘리려 하나

22여호와는 나의 요새이시요 나의 하나님은 내가 피할 반석이시라

23그들의 죄악을 그들에게로 되돌리시며 그들의 악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끊으시리니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 그들을 끊으시리로다(20-23)

 

20절 이하에는 다시 한 번 악인들에 대한 모습이 나타납니다. 시편 94편의 맥락상 악인들이란 단순히 악을 행하는 자를 뜻하지 않습니다. 악인이란 여호와의 꾸짖으심을 무시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 다시 말해 스스로의 지혜로 살아보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20절은 그런 자들을 율례를 빙자하고 재난을 꾸미는 ‘악한 재판장’이라고 부릅니다. ‘악한 재판장’은 ‘욕망의 보좌’로도 번역이 가능합니다. 후자의 번역을 고려한다면, 20절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합니다. 즉, 악한 재판장이란 악인들의 보좌를 가리키며, 궁극적으로는 여호와의 왕권에 반대하여 사람의 왕국을 세우려는 세속적 지혜를 지닌 자의 통치 방식을 뜻합니다. 그런 악인들은 스스로의 지혜를 동원하며 의인의 영혼을 치면서 무죄한 자를 정죄하고 목숨을 해치려 합니다. 그러나 22절이 말하듯이 우리의 구원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여호와만이 요새시고 피할 바위가 되십니다.

94편의 마지막 구절인 23절에는 여호와께서 악인들을 궁극적으로 심판하시는 묘사가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의 죄악을 악인들의 인생 가운데로 되돌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곧 자신의 잘못된 선택과 결정이 자신의 삶의 악한 열매로 드러나는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끊으신다’는 표현이 23절 안에서 두 번이나 반복됩니다.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여호와께서는 참 지혜를 소유하지 못한 악인들을 그분의 나라와 통치로부터 끊어내실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논의들을 포괄하여 생각한다면, 시편 94편은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혜로운 자가 되어 세상의 잘못된 지혜의 셈법을 버리고, 하나님의 교훈과 그분의 왕 되심을 인정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여호와의 보좌는 견고하지만, 사람의 보좌는 흔들리고 넘어질 뿐만 아니라 궁극적인 의미를 갖고 있지 못합니다. 시편 94편은 여호와 왕권의 주제와 지혜의 주제를 적절히 사용하여, 우리가 왕이신 여호와를 섬기는 참된 지혜의 길로 걸어갈 것을 요청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에 대한 확신과, 그 안에서 우리가 신뢰해야 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악이 판치고 정의가 무시되는 세상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간구하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그분의 심판을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요새와 피난처가 되시며, 그의 공의를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의 공의와 정의를 믿고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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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93-01)

 


평범한 삶을 향한 간구

시편 93편 1-5절


 

뉴욕타이스는 한국에 대해 ‘전 국민이 신경쇠약에 걸리기 직전의 상태인 것 같다’고 묘사한 바 있습니다. 낯선이들의 낯익은 평가에 우리의 고된 삶이 들킨 것 같아 멈칫했습니다. 특정 악인이 아니어도 우리를 둘러싼 구조 악은 우리가 평범한 삶을 열망할 수 없게 합니다.

 

  • 시편 93편은 제4권(90-106편)의 전체 주제인 ‘여호와의 통치하심’을 잘 나타냅니다. 사실 93편은 95-99편과 함께 ‘여호와 통치 시편’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여호와께서 다스리신다’라는 표현이 공통적으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93편은 이러한 여호와 통치 시편의 첫 번째 시편으로, 그중 가장 간결하고도 명확한 메시지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왕권의 견고함(1)

고대의 사람들은 대부분 많은 신들이 있다고 믿었고 그 신들이 다스린다고 생각했습니다. 최고 신이나 신들의 왕 같은 개념이 있기는 했지만, 그들이 살아있는 신이 아니기 때문에 절대적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만들어낸 신이 아니라 사람을 만드신 여호와께서 천지만물을 다스리십니다.

 

1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능력의 옷을 입으시며 띠를 띠셨으므로 세계도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아니하는도다(1)

 

시편 93편은 여호와 통치 시편의 막을 열어주는 첫 시편으로서, 그 내용은 매우 간결하고 명확합니다. 여호와께서 온 세상을 주관하시는 왕이시며 만물이 그에게 복종하는 통치권을 지니셨음을 반복적 어조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93편의 첫 마디는 ‘여호와께서 통치하신다’(개역개정 ‘여호와께서 다스리신다’)입니다. 이 말은 ‘여호와께서 왕이시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다윗 언약을 중심으로 왕권이 다윗에게 있음을 주로 노래한 시편 1-3편과는 사뭇 다른 어조로 하나님께서만 왕이시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런 ‘여호와 왕권’의 주제는 시편 4권의 강조점으로서 다윗 언약, 즉 다윗 왕권이 실패한 것인지를 묻는 시편 3권의 질문에 대한 시편 4권의 대답입니다. 다윗 왕권에 대한 회복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시편 4권의 첫머리인 시편 90편은 모세의 기도인데, 인간의 일생이 매우 짧고 허무하며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인생의 주인이심을 노래한 바 있습니다. 이러한 4권의 맥락에서 시편 93:1은 여호와의 왕권을 선포하는 첫 구절이며,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인생의 의미가 무너지고 하나님의 약속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일 때, 그 인생을 허락하시고 그 약속을 주장하시고 성취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결코 흔들리지 않으십니다. 특별히 1절은 이러한 여호와의 통치하심을 드러내기 위하여 ‘옷 입음’의 비유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옷 입음의 비유는 소유의 의미를 드러내는 시적 장치다. 여호와께서는 권위와 능력을 갖고 계십니다. 권위와 능력이란 통치자가 소유하며 사용하는 특질입니다.

여호와는 왕으로서 통치하시면서 권위와 능력이 있으십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바로 1절 후반부가 말하는 것처럼, 세계가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견고히 서다’라고 번역된 ‘쿤’ 동사의 니팔 형태는 ‘확립되다’, ‘견고해지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통치의 결과는 세계가 견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가 왕이시므로 그 견고한 세계는 결코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여호와 왕권의 견고하심으로 인해 세상 가운데 안정과 평안이 임하게 된다는 상관관계에 주목해야 합니다.

 

여호와 왕권의 영원함(2)

거대한 제국을 다스리는 인간 왕들은 어떨까요? 유대인들은 어쩌면 그들이 다스린다는 느낌을 더 받았을 수 있습니다. 애굽에서의 경험이 그랬을 수 있고, 솔로몬 이후 분열 왕국을 거치고, 포로기를 경험하면서 그랬을 수 있습니다. 거대한 제국의 왕들은 스스로를 신 혹은 신의 아들로 칭하기도 하면서 주변의 나라들을 굴복시켰는데, 그런 모습을 보고 경험하면서 그 왕들이 다스린다는 생각을 했을지 모릅니다.

 

2주의 보좌는 예로부터 견고히 섰으며 주는 영원부터 계셨나이다(2)

 

2절은 1절에 이어 여호와의 왕권에 대해 계속해서 설명합니다. 특별히 ‘여호와의 보좌’에 대해 말합니다. 상반절에서는 여호와의 보좌가 ‘예로부터’ 견고히 섰다고 말하며, 하반절에서는 ‘주님이 영원부터 계셨다’고 말합니다. 상반절과 하반절은 히브리 시적 기법의 가장 기초가 되는 평행법적 사고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먼저, 상반절은 ‘예로부터’이고 하반절은 ‘영원부터’입니다. ‘예로부터’라는 표현은 ‘그때로부터’라는 말인데, 사실상 구약성경에서는 하반절에 나오는 ‘영원부터’라는 말과 더불어 쓰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반절의 ‘영원부터’라는 말은 ‘매우 오랜 기간으로부터’라는 뜻으로 사실상 태초 이전부터, 즉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시간 이상의 세계로부터라는 의미입니다. 영원성은 상반절의 ‘주님의 보좌’ 및 하반절의 ‘주님’을 수식하는 말입니다. 상반절의 ‘주님의 보좌’란 1절이 말한 여호와의 왕권을 나타내는 말로서,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보좌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영원성은 결국 하반절의 ‘주님’에게서 결정적으로 마무리되는데, 원문에서는 ‘아타’, 즉 ‘당신’이라는 의미입니다. 영원부터 견고하여 흔들리지 않는 통치권을 가지신 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신 것을 2절은 명확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1-2절은 여호와의 왕권이 얼마나 견고하고 확실한지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큰 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3-4)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고대의 바다는 사람들에게 있어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바다를 통해 유익함을 얻을 수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위험을 감수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큰 풍랑과 파도는 그저 만나지 않기를 바랄 뿐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바다와 관련된 미신들이 많은 것도 다 이런 이유가 있습니다.

 

3여호와여 큰 물이 소리를 높였고 큰 물이 그 소리를 높였으니 큰 물이 그 물결을 높이나이다

4높이 계신 여호와의 능력은 많은 물 소리와 바다의 큰 파도보다 크니이다(3-4)

 

3-4절은 1-2절이 표현한 여호와의 견고한 통치에 도전하는 세상의 세력들을 묘사합니다. 여호와의 통치하심을 흔들어놓을 수 있다는 세속적 세계관을 비유로 표현합니다. 3절은 ‘강물’로 4절은 ‘바다’로 표현합니다. 개역개정이 ‘큰물’로 번역한 원어는 ‘강물들’을 가리킵니다. 강물들이 높였다는 것은 바로 ‘소리’를 높였다는 뜻입니다.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단순히 물이 높아졌다는 사실에 있지 않습니다. 고대 근동에서 ‘물’은 무질서와 혼돈이라는 함의를 지니고 있습니다(참조, 창 1:2). 물은 왕 되신 하나님에 의해 통치되어야 하며, 그럴 때에 피조 세계의 질서가 유지된다는 것이 물에 대한 성경의 전반적인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물이 소리를 높였다’는 것은 결국 물들이 하나님의 통치에 대항하여 반역을 꾀했음을 뜻합니다.

1-2절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영원히 견고하다 했는데, 이러한 하나님의 통치는 과연 물들의 저항에 대해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4절에 나타납니다. 높이 계신 여호와의 능력은 많은 물소리보다 크고 바다의 큰 파도보다 큽니다. 4절의 핵심 구절은 ‘높이 계신 여호와’입니다. 원문을 직역하면 ‘많은 물소리보다 강하시고, 바다의 파도보다 강하신 이가 높은 곳에 계신 여호와시다’입니다. 여기서 마지막 표현이 바로 ‘높이 계신 여호와’입니다. 여호와는 가장 높으신 분이셔서, 그 어떤 물이 소리와 물결을 높일지라도, 그분의 크고 높으심에는 결코 미치지 못합니다.

여기서 여호와께 대항하는 물결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많은 물’입니다. 이때 물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3절의 ‘강물들’과 연결될 수도 있지만, 4절 뒷부분에 나오는 ‘바다’와도 연결될 수 있습니다. 4절 후반부의 ‘바다’라는 이미지는 매우 강력합니다. 3절의 ‘강물들’에 비해 4절의 ‘바다’는 훨씬 강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강물들이 그 물결을 높여도 바다의 물결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즉, 3절에서 4절로 넘어가면서 하나님께 대항하는 세상의 반역은 ‘강화’되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상의 반역적 물결이 제아무리 그 높이를 높인다 하여도, ‘높이 계신 여호와’는 미치지 못합니다. 이것이 3절에 대한 4절의 대답입니다. 하나님의 보좌는 영원히 견고하기에 세상 그 어떤 반역적인 시도도 그분의 왕권을 흔들어놓지 못합니다.

 

영원하신 여호와 하나님(5)

문제는 우리가 정말 그렇게 세상을 보며 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큰 그림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 삶의 가장 작은 부분에 대한 질문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내 삶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은 듯이 말하고 행동할 때가 많습니다. 아무 일이 없을 때도 그렇고, 삶에 큰 파도가 계속해서 밀려올 때도 그렇습니다. 우린 너무 왕이신 하나님과 관계 없는 사람들처럼 삽니다.

 

5여호와여 주의 증거들이 매우 확실하고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니 여호와는 영원무궁하시리이다(5)

 

93편의 마지막 구절인 5절은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하면서 결론을 도출합니다. 주님에 대한 ‘증거들’은 신뢰할 이유가 충분합니다. 그 근거는 1-4절이 말한 것처럼 그의 보좌가 영원히 높고 세상의 반역을 물리칠 능력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온 우주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왕 되신 증거들이 충분히 넘쳐납니다. 따라서 그분의 거룩하심은 그분의 집에 합당합니다. 여기서 ‘그분의 집’은 그분을 경배하는 성소인 온 피조 세계를 가리킬 수도 있고, 동시에 그 여호와를 예배하는 성전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또한 신약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 나라’ 혹은 ‘교회’로도 해석할 수 있고, 종말론적 관점에서 장차 완성되고 회복될 새 예루살렘으로서의 피조 세계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5절은 선언합니다. ‘여호와는 영원무궁하시다!’ 여호와께서는 항상 다스리시며, 그러한 그분의 통치를 경험하는 하루하루가 쌓여 영원이라는 시간이 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그분의 통치하심을 기억하고, 삶의 쓰디쓴 질문과 기다림의 순간에서도, 하나님의 왕되심을 붙잡고 살려 애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없는 세상을 상상하기 힘들 듯 악인이 없는 세상도 상상하기 힘듭니다. 삐뚤어진 세상 속에서 여전한 현기증을 느끼며 쓰러지지 않기 위해 하나님을 붙드는 백성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께 사각지대란 없기에 우리의 간구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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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91-01)

 


전능자의 그늘 아래

시편 91편 1-16절


 

그리스도인을 단순하게 표현한다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시공간에 존재하면서 그 사람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행복해지고, 주변 환경이 아름다워지는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 어느 곳에 존재하는데, 주변 사람들이 힘들고 망가지고 독을 품는 것은 그리스도인답지 않은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성경적으로 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피난처 삼아 신뢰하는 성도를 지켜주시고 구원하십니다. 때로는 놀라운 방법으로 그들을 보호하시고 때로는 그들에게 힘과 지혜를 주어 고난을 이겨내게 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적극적인 보호와 승리와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덕분입니다

 

하나님 신뢰와 보호의 약속(1-8)

당신은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을 얼마나 축복하십니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을 축복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권세는 자꾸 훈련하고 연습하고 사용해야 합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격려하시고 칭찬하시고 축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렵고 힘든 상황에 있는 사람을 위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리스도인들을 각별히 좋아하시고 그런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많은 복을 부어주십니다.

 

1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2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3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4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시나니 5너는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6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7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 8오직 너는 똑똑히 보리니 악인들의 보응을 네가 보리로다(1-8)

 

성도는 지존이신 하나님만 아시는 안전한 곳에서 보호받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그늘 아래서 지킴을 받을 것입니다. 그분을 신뢰하여 피난처와 요새와 거처로 삼는 이를 넘볼 수 있는 세력을 없습니다. 화와 재앙이 미치지 못하고 가까이 오지도 못할 것입니다.

 

(1) 피난처이신 하나님(1-2)

 

시편 91편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호 아래에 있다’는 선언과 함께 시작합니다. 1절은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한 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로 번역되었으나, 원문을 직역하면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는 자는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머무를 것이니이다’가 됩니다. 여기서 ‘지존자’와 ‘전능자’는 하나님을 지칭하는 이름들로서, 그의 높으심과 전능하심을 강조합니다. 누군가 하나님께서 계신 곳에 머문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함을 암시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은밀한 곳’과 ‘그늘’은 하나님의 임재, 보살핌, 보호를 상징합니다. 나무나 바위 같은 물체나 사람이 만들어주는 은신처나 그늘은 일시적이고 부분적이며 제한적인 안전을 마련해주지만, 하나님께서 제공하시는 장소와 그늘은 어느 누구도 찾을 수 없고 침범할 수 없고 시간이나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므로 그곳에 머무르는 자는 최상의 안전과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보호 아래에 사는 시인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마음을 고백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가장 높고 능력이 있는 분임을 잘 알고 있으므로 그를 피난처 삼아 의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시인의 마음은 ‘나의 피난처’, ‘나의 요새’,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란 호칭에서 잘 나타납니다. ‘나의’라는 표현은 하나님과 시인 사이의 가까움을 함축합니다. ‘피난처’와 ‘요새’는 사람이 어려움을 당할 때나 목숨의 위협을 받을 때 그를 숨겨주고 안전하게 지켜주는 곳입니다. 시인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피난처이자 요새와 같습니다. 인간이 만든 피난처나 요새는 불완전하여 그곳에 있다해도 완전한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피난처와 요새가 되어주시면 두려움이든 위험이든 하나님이 다 물리쳐주시므로 그곳에 있는 자는 완벽한 안전을 보장받습니다.

 

(2)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의 약속(3-8)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어떠한 어려움에서라도 건지시는 분입니다. 3절의 주어인 ‘그’(하나님)는 여기서 강조의 기능으로 나와, 하나님이야말로 건질 능력도 있고 건지려는 강한 의지를 갖고 계신 분임을 부각합니다. ‘새 사냥꾼의 올무’와 ‘심한 전염병’(3)은 뜻하지 않게 발생하여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어려움, 위험, 고난 등을 의미합니다. 새 사냥꾼이 고의적으로 준비해놓은 올무에 새가 걸리듯 사람이 계획한 함정에 빠져 고난에 빠지는 경우도 있고, 전염병처럼 인간으로서 피할 수 없고 회복이 거의 불가능한 고난도 있습니다. 어떤 고난이든 하나님께서는 그를 거기서 잡아채어 건져내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미 새가 부드러운 깃털로 새끼를 평안하게 감싸고 날개 아래에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처럼 그의 사랑하는 성도(14)를 그렇게 아끼고 보호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실하시므로 그의 성도를 보호하려는 마음과 의지도 변함없고 진실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진실함을 방패와 손 방패로 비유합니다. 여기서 ‘손방패’(4)로 번역된 단어는 ‘보루’, ‘성벽’, ‘담’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진실함은 적군의 공격에 맞서는 용사의 생명을 지켜주는 든든한 방패와 담처럼 견고합니다. 인간의 방패나 담은 뚫리기도 하고 허물어지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 성도의 방패와 담이 되시면 어떤 것이 공격해도 끄떡없고 어떤 환경에 있어도 변함없이 든든합니다.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이 이토록 강력합니다. 그러므로 공포나 화살이나 전염병이나 재앙이 밤과 낮, 어두울 때나 밝을 때를 가리지 않고 찾아올 때에도 성도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밤과 낮’, ‘어둡고 밝을 때’라는 것은 문자적으로 고난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찾아 음을 의미합니다. ‘공포나 화살’, ‘전염병과 재앙’은 새 사냥꾼의 올무와 심한 전염병이 나타내듯 사람을 통한 고난 그리고 질병이나 자연재해 등을 통한 고난을 가리킵니다. 원수가 천명, 만 명 떼 지어 성도를 공격하거나 고난이 이처럼 많은 군사처럼 몰려와도 이들은 하나님의 전능하고 적극적인 개입으로 다 쓰러져 망하여 하나님의 성도에게 다가올 수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3절에 이어 5-7절에서 온갖 예상할 수 없고 피할 수 없는 가장 치명적인 고난과 위험의 종류를 나열하는 이유는 이 같은 극도의 어려운 상황에도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이 확실함을 강조하기 위함이며 그렇기 때문에 성도는 두려움을 느낄 필요가 없음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사람은 이보다 훨씬 더 강도가 약한 고난이 닥쳐오는 때도 두려워 떨고 좌절하지만, 하나님께서 구하지 못하는 상황이 없으므로 어떤 어려움이 다가와도 성도는 하나님의 확실한 보호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특히, 8절에서 ‘너의 눈으로’가 문장 맨 앞에 나와 강조되어,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는 그를 위한 하나님의 보호와 악인들에 대한 심판을 직접 눈으로 관찰하게 될 것을 재확증합니다.

 

하나님 신뢰와 구원의 약속(9-13)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그 이름을 찬양하는 자,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여 간구하는 자를 건지시고 높이시고 영화롭게 하십니다. 영원히 그가 사랑하고 신뢰하는 하나님 안에서 생명을 누리게 하십니다. 참된 안전은 하나님과의 신뢰 관계에서만 나옵니다.

 

9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를 너의 거처로 삼았으므로 10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11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12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13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을 발로 누르리로다(9-13)

 

시인은 1-2절에서처럼 다시금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고백합니다. 그에게 있어 하나님께서는 피난처가 되십니다(9). 그는 하나님께서 지존자(1,9)임을 확실히 알고 있으므로 하나님을 자신의 거할 처소로 삼았습니다. 시인이 자기 자신이나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거처로 삼았으므로, 재난이나 염병이 그와 그가 사는 곳(장막)에 미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놀라운 방법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성도를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위하여 천사들을 보내어 그가 가는 모든 길에서 그를 지키실 것입니다(12). 여기서 ‘모든 길’이란 삶의 매 순간과 상황이나 그 여정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천사들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를 그들의 손으로 받쳐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도록 세심하고 안전하게 보호합니다. 여기서 ‘돌’은 삶에서 방해가 되는 요소를 지칭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그의 주권적인 힘으로 그의 성도를 보호하십니다. 이뿐만 아니라 때로 하나님께서는 성도에게 직접 힘과 지혜를 주어 승리케 하십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로 하여금 사자와 독사를 밟아 눌러 승리케 하신다고 선포합니다(13). ‘사자’, ‘독사’, ‘젊은 사자’, ‘뱀’은 모두 두려움을 주고 생명을 위협하는 원인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이들을 밟는다는 것은 고난과 위험을 극복할 수 있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해서 우리 앞길에 장애물이나 위험 요소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장애물과 위험이 있든지 간에 성도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방법으로 그를 적극적으로 보호하시고 또한 그에게 힘과 지혜를 주어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확실한 구원 선포(14-16)

그리스도인이 다른 사람을 축복하고, 주변 모든 것을 축복하는 근본 원리는 자신의 것을 가지고 나누어준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주변에 복을 끼치는 근본 원리는 자신의 것을 가지고 나누어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것을 가지고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축복의 가장 근본적인 원리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사랑을 전달해 주는 것입니다.

 

14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15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16내가 그를 장수하게 함으로 그를 만족하게 하며 나의 구원을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도다(14-16)

 

시인의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고백이 2.9절에 반복되었고, 이 고백은 이제 14-16절의 하나님의 시인을 향한 구원의 확증 선언으로 화답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는 그를 사랑하고 그의 이름을 아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지속하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성도를 구출하여 안전한 곳으로 이끌어주시며, 그를 보호하시며 높이십니다. 그가 기도할 때 응답하시고, 환난 당할 때에 그와 동행하시고 그를 환난에서 끌어내 주십니다.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신뢰하는 자를 영화롭게 하시고, 장수로 만족하게 하시며, 하나님께서 직접 행하신 구원을 보여주십니다. 이 단락에서는 ‘구원’과 관련된 단어가 세 번(14절의 ‘건지리라’, 15절의 ‘지고’, 16절의 ‘나의 구원’) 반복되어 나와 하나님의 구원의 확실성을 부각합니다. 또 구원의 확증과 함께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의 약속이 네 번(14절의 ‘높이리라’. 15절의 ‘함께하여’, ‘영화롭게 하리라’, 16절의 ‘장수로 만족하게 하며’) 반복되어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를 향한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이 적극적이고 확실함을 강조합니다.


시편 73편 28절에서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이지만,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왜 우리가 그처럼 하나님의 품을 좋아하고 주님의 교회에 목숨을 거는지 전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알기 때문에 세상이 우리를 조롱하고, 비난해도, 우리는 지존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품이 좋아서 지금의 고난과 역경 어떠한 상황에서도 신앙생활이 전혀 어렵지 않고, 너무 행복하고 즐겁고 사랑스러운 것으로 만족하기에 말씀과 기도로 주 품에 있음을 늘 찬양하는 저와 주님의 사랑하는 형제와 자매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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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90-01)

 


짧은 인생과 영원하신 하나님

시편 90편 1-17절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시작과 끝을 주관하시며 우리의 모든 날을 아십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면 우리의 삶이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인간의 생애는 짧고 고난이 많으며, 이러한 제한된 시간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여정을 계획하고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셔서 우리의 한계를 넘어서는 인도와 평안을 주십니다. 하나님께 의존하며 그분의 지혜를 구할 때, 우리는 참된 평안과 만족을 찾을 수 있습니다.

 

  • 본 시는 인생의 덧없음을 회고하며 하나님의 긍휼과 은총을 간구하는 시입니다. 시인은 죄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를 사 죽을 운명이 된 인간의 현실을 직시하고, 하나님께 짧고 어무한 인생을 살 지혜와 즐거움을 주시길 간청합니다.

 

우리의 거쳐이신 주 하나님(1-2)

우리가 인생의 어려움과 불확실함 속에서 의지할 유일한 존재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안전과 평안의 근원이시며, 우리의 삶과 미래를 다스리십니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진정한 안정과 쉼을 찾을 수 있으며, 그분의 사랑과 인도를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삶의 중심에 두고 그분의 뜻을 따를 때, 우리는 참된 평안과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1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2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1-2)

 

하나님을 향해 ‘주여’(아도나이)라고 외치며, 시인은 하나님께서 대대에 걸쳐 그와 이스라엘 공동체의 거처가 되셨다고 선포합니다. ‘거처’는 사자나 승냥이 등 짐승의 ‘은신처’(나 2:12: 렘 9:11). 하나님의 ‘거주지’(신 26:15) 등을 가리킬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시인과 공동체에게 거주지가 되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안전히 보호하고 지켜주셨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세대뿐 아니라 후손 세대 내내 그들의 안식처가 되어주셨습니다.

이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분입니까? 그는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이미 계신 분이며, 앞으로도 영원토록 살아계실 분입니다. 그는 산과 땅과 세계 모두를 창조하신 창조주시며,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주권자십니다. 이 하나님께서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변치 않으신 하나님이십니다.

 

덧없고 짧은 인생에 대한 탄식(3-10)

인간의 삶은 빠르게 지나가며, 우리는 그 안에서 의미와 가치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이 짧은 생에서 참된 의미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인도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분의 인도를 구할 때, 우리의 삶은 의미 있고 만족스러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과 미래를 하나님께 맡기며 그분의 축복을 간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3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4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5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6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 7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8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9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10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3-10)

 

인생의 허무함과 짧음을 강조하며, 하나님께서 인간의 삶을 제한하시고 흙으로 돌아가게 하신다는 것을 묘사합니다. 인간의 세월은 70년 혹은 80년으로 짧고, 그 동안의 삶은 고난과 슬픔이 가득할 수 있음을 설명합니다. 이 구절들은 인간의 삶이 얼마나 덧없고 일시적인지를 상기시키며, 하나님의 도움과 지혜를 구하는 기도를 담고 있습니다.

 

(1) 덧없고 짧은 인생(3-6)

 

이스라엘의 거처가 되신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시나. 인간의 삶은 유한하고 덧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땅의 흙으로 그를 지으셨고 생명을 축복으로 주셨습니다(창 2:7).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고, 그 대가로 생명을 잃고 다시 흙으로 돌아갈 운명에 놓였습니다(창 3:19). 시인은 여기서 ‘흙’대신 ‘티끌’(가루가 된 것)이란 단어를 사용하여 죄 지은 인간의 상태를 흙보다 더 보잘것없는 것으로 낮춥니다. 또한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창 3:19)을 인용함으로써 생명과 죽음을 결정하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암시하고, 인간의 죽음이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며 하나님으로부터 확정된 결정임을 부각합니다. 덧붙여 시인은 하나님과 인간의 편에서 바라보는 ‘시간’에 대해 언급합니다. 인간에게 있어 ‘천년’은 엄청나게 긴 기간이지만, 하나님께는 어제의 한 날이나 밤의 한 순간처럼 짧은 시간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천 년을 산다해도 그 기간이 하나님 앞에서는 밤의 한 자락밖에 되지 않으니, 현실에서 그보다 훨씬 짧은 삶을 사는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은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더 짧고 하찮습니까! 홍수가 몰려와 짧은 시간에 모든 것을 휩쓸고 지나가듯, 하나님 앞에서의 인생은 그렇게 힘없이 사라지고 마는 존재입니다. 잠깐 자는 것처럼 경각의 삶을 살다 죽게 되는 존재입니다. 풀이 아침에 돋아서 꽃을 피우고 자라나 저녁이 되면 시들어 말라버리듯, 인간도 성장하여 꽃을 피우는 시기가 있지만 곧 노쇠하여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2) 하나님의 진노와 인간의 죄(7-10)

 

이제 시인은 하나님의 분노로 주제를 바꾸며, 인간의 유한하고 덧없는 삶이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분노의 결과임을 부각하며 이 둘 사이의 상관관계에 집중합니다. 7절의 번역에는 나오지 않으나 이 절은 ‘참으로’, ‘진실로’라는 강조어로 시작하며, 인간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로 인해 인간이 쉽게 소멸하고 두려움에 떠는 존재임을 설명합니다. 죄를 미워하고 죄가 없으신 하나님 앞에서는 각 사람의 죄와 은밀한 죄가 낱낱이 밝혀집니다. ‘우리의 모든 날이 당신(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9)란 말은 우리가 짓는 죄가 사는 모든 날 동안 계속되므로, 일평생 하나님의 분노를 벗어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에서 ‘순식간’은 ‘신음’, ‘한숨’의 뜻이므로, 이 문장의 의미는 사람의 일생이 죄와 하나님의 분노의 결과로 인해 한숨을 내쉬듯 한순간에 지난다는 뜻입니다.

10-11절에서도 시인은 인생의 짧은 유한성과 무상함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계속 설명합니다. 창조 직후 사람들은 천 년 가까이 살다 죽었지만(창 5장), 홍수 이후 인간의 수명은 점점 줄어 매년 안팎까지 이르렀습니다(창 6:3; 11:10-26). 시인은 인간의 연수가 70이며 건강하게 살아도 80이라고 말하며 인생의 유한하고 짧음에 대해 한탄합니다. 더구나 그는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10)라고 말합니다. ‘수고’는 ‘노동’, ‘일’, ‘노고’의 뜻이며, ‘슬픔’은 ‘속임’, ‘해로움’, ‘거짓’, ‘불의’ 등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수고와 슬픔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지만, 지금 시인은 죄를 저지르는 인생과 노고와 고뇌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기쁨과 즐거움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이렇게 고난으로 차 있는 인생은 새가 날아가듯 신속하게 지나가니 허무하기 짝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간구(11-17)

우리의 삶은 짧고 덧없는 여정으로, 세상의 것들에 집착하거나 영원히 살 것처럼 행동할 때 진실을 잊을 수 있습니다. 참된 만족과 성취는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인도 속에서 발견됩니다. 제한된 시간 안에서 의미를 찾으려면 하나님께 지혜와 방향을 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하나님께 의존하며 그분의 인도를 간구해야 합니다.

 

11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12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13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니이까 주의 종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14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15우리를 괴롭게 하신 날수대로와 우리가 화를 당한 연수대로 우리를 기쁘게 하소서 16주께서 행하신 일을 주의 종들에게 나타내시며 주의 영광을 그들의 자손에게 나타내소서 17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11-17)

 

인간의 짧은 생애와 하나님의 영원한 존재를 대조하며, 우리의 삶의 의미와 가치를 이해하도록 기도합니다. 구절들은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을 요청하고, 우리의 노력과 작업이 의미를 가지도록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기를 바라는 내용입니다. 이 기도는 삶의 한계를 인식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상에 축복과 만족을 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지혜를 간구(11-12)

 

시인은 덧없는 인생과 하나님의 노여움 앞에 주저앉지 않고, 이를 직시하며 하나님께 지혜를 구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분노의 능력과 두려움, 즉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가 미치는 영향력을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 우리의 남은 날을 계수하도록 가르쳐달라는 시인의 간구는 몇 살에 죽는지 알려달라는 말이 아니라 인간의 삶이 유한하며 덧없고 빠름을 제대로 인지하게 해달라는 간청입니다. 인생에게 주어진 현실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 지혜로운 마음의 첫걸음입니다. 전도서에서 전도자는 해 아래 사람의 수고는 헛되고 바람을 잡는 것과 같다고 누누이 강조합니다(전 1:14). 그러나 그는 그런 현실을 파악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이런 삶을 받아들이는 실용적인 방법으로서 “먹고 마시며 낙을 누리라”고 권면합니다(전 2:24). 이 권면은 자포자기하고 허랑방탕하게 살라는 뜻이 아니라, 일하고 얻은 것을 만족과 감사함으로 또한 적정선에서 즐기라는 조언입니다(전 11:9).

 

(2) 하나님의 긍휼을 간구(13-16)

 

이제 시인은 하나님의 긍휼을 회복시켜주시길 간구합니다. ‘돌아오소서’(13)라는 기도는 분노로 멀어진 하나님께서 시인과 공동체에게 돌아와 긍휼을 베푸시기를 요청하는 기도입니다. “언제까지니이까?”(13)라는 질문에서는 하나님의 분노가 크고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은 그의 공동체가 여전히 하나님을 섬기는 종, 하나님의 성도임을 상기시킵니다(13,16). 수고로운 삶 속에서도 성도가 여전히 소망을 품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인자를 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만족과 기쁨을 자기 자신이나 다른 것에서 찾지 않습니다. 오직 아침마다 하나님의 인자가 함께하여 평생 만족하고 즐거워 외치며 기뻐하기를 바랍니다. 시인은 참된 기쁨과 행복의 원천이 하나님이심을 잘 알고 있으므로, 고통과 재앙의 나날들을 구원의 기쁨으로 바꿔주시길 하나님께 구합니다. 덧붙여, 하나님께서 베푸신 기쁨이 그들 세대만이 아니라 대대에 나타나기를 고대합니다.

 

(3) 주 하나님의 은총을 간구(17)

 

‘나의 주’를 뜻하는 호칭인 ‘아도나이’로 기도를 시작한 시인은 다시 같은 호칭(‘주’ 우리 하나님)을 부르며 기도를 맺습니다. 그와 이스라엘 공동체가 행한 일을 하나님께서 견고하게 해주심으로써 은총을 나타내시길 시인은 기대합니다. 그는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두 번 반복하여 일의 직접적인 주체가 자신들임을 강조하면서도, 그 일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인생이 행하는 일을 하나님께서 간섭하여 견고하게 해주시지 않으면 제대로 결과물을 얻을 수 없고 헛되이 끝나게 된다는 점입니다. 인간이 덧없는 세월 속에 행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긍휼과 친절이 필수적이라는 점입니다. 한편, 17절의 간구는 1절의 선포와도 연결됩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하나님께서 시인과 이스라엘 공동체의 영원한 거처가 되어주셨듯이(1), 앞으로도 계속해서 영원한 거처로 남아주시길 바라는 염원이 함축되었습니다(17).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원한 피난처이시며, 우리의 짧은 생애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미와 인도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삶이 한계가 있지만,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참된 안정과 평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을 구하며 그분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참된 의미와 기쁨을 더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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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89-03)


하나님의 신실함과 언약의 확신

시편 89편 38-52절


 

하나님의 약속은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우리의 상황이 약속과 어긋나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하나님의 신실함을 믿고 기다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도는 단순히 고난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완전히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시며 약속을 지키십니다. 우리는 신뢰와 인내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신실함을 찬양하고, 그분의 이름을 높이며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다윗과 맹세한 언약을 저버리셨고, 그가 기름부어 세운 왕의 왕좌를 박탈해 원수들의 비방거리가 되게 하셨음에 애통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그동안 오래 품으셨던 노를 이제 그치시고 다윗과의 언약에서 약속하신 인자와 성실을 다시금 베풀어주시길 간청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애통과 간구(38-51)

하나님께서 때때로 성도들의 대적들에게 힘을 주시고 그들을 무방비 상태로 실패하게 만드실 때가 있습니다. 이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약속이 저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순간에는 자신의 나약함과 짧은 인생을 하나님께 상기시키며, 하나님의 긍휼을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와 성실하심이 회복되기를 소망하며, 대적들로부터 우리의 가정과 가족을 보호하시고 구원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38그러나 주께서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노하사 물리치셔서 버리셨으며 39주의 종의 언약을 미워하사 그의 관을 땅에 던져 욕되게 하셨으며 40그의 모든 울타리를 파괴하시며 그 요새를 무너뜨리셨으므로 41길로 지나가는 자들에게 다 탈취를 당하며 그의 이웃에게 욕을 당하나이다 42주께서 그의 대적들의 오른손을 높이시고 그들의 모든 원수들은 기쁘게 하셨으나 43그의 칼날은 둔하게 하사 그가 전장에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게 하셨으며 44그의 영광을 그치게 하시고 그의 왕위를 땅에 엎으셨으며 45그의 젊은 날들을 짧게 하시고 그를 수치로 덮으셨나이다(셀라) 46여호와여 언제까지니이까 스스로 영원히 숨기시리이까 주의 노가 언제까지 불붙듯 하시겠나이까 47나의 때가 얼마나 짧은지 기억하소서 주께서 모든 사람을 어찌 그리 허무하게 창조하셨는지요 48누가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자기의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지리이까(셀라) 49주여 주의 성실하심으로 다윗에게 맹세하신 그 전의 인자하심이 어디 있나이까 50주는 주의 종들이 받은 비방을 기억하소서 많은 민족의 비방이 내 품에 있사오니 51여호와여 이 비방은 주의 원수들이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 행동을 비방한 것이로소이다(38-51)

 

다윗과 그의 후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현재의 고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효하다는 믿음을 표현합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약속의 회복과 원수들에 대한 심판을 간구하며, 현재의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을 신뢰합니다. 이 구절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확고함과 회복의 소망을 담고 있습니다.

 

(1) 하나님께서 왕을 버리심에 애통(38-45)

 

‘그러나 당신(주)께서’로 시작하는 38-45절 단락은 앞 19-37절의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은 언약이란 주제에서 하나님의 언약 파기의 주제로 전환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다윗 왕조를 내치고 거절하셨으며 노여움의 대상으로 삼으셨음에 한탄합니다. 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다윗을 선택하여 그의 거룩한 기름을 부어 왕으로 높여주셨던 분입니다(19-20: 삼상 16:12;삼하 5:3).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그 후손을 장자로 삼으셨고(26; 시 2:6; 삼하 7:14), 그들은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 ‘나의 구원의 바위’로 고백하였습니다(26절 참조. 시 18:1-2).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영원하고 견고한 왕조를 주겠다는 언약을 굳게 세우셨고, 깨뜨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28,34, 삼하 7:16).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 다윗과 세운 언약을 경멸하셨고, 그의 왕관을 땅에 내동댕이치셨습니다(39). 왕관은 왕의 위엄과 통치를 상징하는 것이므로, 그 왕관이 땅에 던져졌다는 의미는 왕의 자리를 빼앗겨 수치와 모욕을 당했음을 뜻합니다. 이런 상황은 하나님께서 결국 다윗과의 언약을 파하셨고, 다윗에게 약속하신 인자와 성실을 거두신 것으로 해석되었습니다. 이전에 다윗과 그의 후손은 하나님의 임재를 누렸고, 하나님으로부터 힘과 견고함을 얻었습니다(21; 삼하 8:6). 그러므로 왕의 대적들이 그의 소유를 강제로 빼앗지 못했고, 그와 그 나라를 곤경에 빠뜨릴 수도 없었습니다(22).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왕을 에워싸 지키던 모든 울타리를 부수셨고 그의 요새를 파괴하셨습니다(40; 왕하 24-25장). “울타리”와 “요새”는 왕과 나라의 안위를 보장해주는 군사적 보호막과 경계 체제를 의미하므로, 이를 모두 파괴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방인의 침략 등을 통해 왕위와 나라의 생명을 위협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왕에게 힘을 실어주려고 뻗었던 그의 손과 팔(21)을 거두셨습니다. 그 결과 왕과 그의 나라는 하나님으로부터 더 이상 도움을 받지 못하므로 무방비 상태가 되었습니다.

세상의 지존자가 되어 자기 백성뿐 아니라 세상 왕들로부터 높임을 받도록 약속받은 왕(27; 시18:43-49)은 길로 지나가는 자들과 이웃들에게 약탈당하고 조롱거리가 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41; 애 1:7). 여기서 ‘길로 지나가는 자’는 멸망을 목격하고 조롱하는 자들(렘 18:16; 습 2:15; 애 2:15)을 가리키며, ‘이웃’은 거주민(사 33:24)이나 이웃 도시(렙 49:18)나 이방 나라(신 1:7)를 지칭합니다. 다윗과 함께하여 힘을 주셨던 하나님(21)께서는 다윗의 대적 편에 서셨고, 그의 오른손이 아닌 대적들의 오른손을 붙잡아 높여주셨습니다(42). 다윗의 손을 먼 이방 나라까지 뻗치게 하여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실 것이라 약속하셨던 하나님(25)은 이제 전쟁에서 그의 칼날이 제대로 힘을 발하지 못하게 하셨고 패하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의 공의와 은총 덕분에 힘을 얻고 높아지며, 종일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고 즐거운 소리를 외칠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15-17).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가 선택한 왕과 그의 백성에게 주셨던 승리와 기쁨을 도리어 대적들에게 안겨주셨습니다(42). 영원한 왕국을 약속하셨던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왕위를 땅에 던져버리시고 왕국을 몰락시키셨습니다(44). 다윗 왕조는 끝났으며 이들은 패배와 수치와 모욕을 견뎌야 했습니다(45). 특히 하나님이 “그(다윗)의 젊은 날을 짧게 하셨다”(45)는 표현은 다윗 왕조가 강력한 통치를 더 이어 나갈 수 있었음에도 하나님이 이를 좌절시켜 왕조의 통치 기간을 단축하셨음을 강조합니다. 이렇듯 ‘단명한 다윗 왕조’는 하나님께서 약속한 ‘영원한 왕국’과 대조를 이룸과 동시에 하나님의 언약 파기로 인한 시인의 당혹과 배반감을 드러냅니다.

 

(2) 하나님의 진노가 끝나기를 촉구(46-48)

 

위 38-45절에 하나님께서 다윗과의 언약을 파기하셨음을 누누이 밝힌 시인은 “언제까지니이까?”라고 외치며 하나님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다시 베풀어주시길 간청합니다. “스스로 영원히 숨기시리이까?”(46)라는 질문은 시편 13:1의 “당신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와 같은 질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자발적인 무관심과 무응답을 암시하며, 그 기간이 계속되고 있어서 앞으로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는 긴장감을 조성합니다. 연이어 나오는 “당신(주)의 노가 언제까지 불붙듯 하시겠나이까?”(46)라는 질문은 하나님께서 다윗과의 언약을 파기한 데에 있어 그의 진노가 컸기 때문임(38)을 다시금 강조합니다.

시인은 언약 파기의 책임을 하나님께 묻고 이것에 대해 불만을 표현해왔으나, 사실상 하나님이 언약을 파기한 직접적인 원인은 그를 노엽게 한 왕과 백성들에게 있었습니다. 다윗과 후손은 하나님의 경고(30-32)에도 불구하고 자주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으며 이 죄로 인해 하나님의 채찍을 맞으면서도 계속해서 불순종의 죄를 떠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영원함과 견고함을 약속받은 다윗 왕조와 그 왕국이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이 같은 사실을 이미 인지했으면서도 시인이 하나님께 항변하는 데에만 초점을 맞춘 이유는 그들의 죄를 덮으려는 시도나 시인의 뻔뻔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이 상황을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하셨던 인자를 돌이키실 때만이 다시 왕이나 나라에 소망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하나님이 무관심과 노를 속히 그치고 긍휼을 베풀어주시도록 자기 자신이 나약하고 짧은 인생임을 하나님이 기억하시길 호소합니다(47-48).

 

(3) 하나님의 인자와 성실을 촉구(49-51)

 

“주여, 당신의 성실하심으로 다윗에게 맹세하신 그 전의 인자하심이 어디 있나이까?”(49)라고 외치며, 시인은 다윗에게 약속한 하나님의 인자가 사라져버렸음을 하나님께 상기시키고 이에 대해 항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 33-35절에서 그의 다윗에 대하여 인자와 성실을 무효화하지 않을 것이며 그의 거룩함으로 다윗에게 맹세한 언약을 깨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 모든 것이 뒤엎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인자는 더 이상 진행형이 아닌 과거형(그 전의 인자: 49)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디 있나이까?”(49)라는 항변을 통해 시인은 하나님께서 파기한 언약과 인자하심을 다시 복구해 주시기만을 간청하는 것입니다. 특히, 시인은 왕들이 받고 있는 ‘비방’에 초점을 맞춰 하나님께서 그 전에 약속하신 인자를 다시 다윗과 이스라엘에게 베풀어주시도록 호소합니다.

50절의 ‘당신(주)의 종들’은 51절의 ‘당신(주)의 기름부음 받은 자’와 동일하며, 20절의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거룩한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인 다윗과 후손을 지칭합니다. 시인은 다윗 왕조를 대적한 무리를 ‘하나님의 원수들’(51)로 동일시하면서, 대적들이 다윗 왕조의 발자취(“행동”으로 번역됨)를 비방한 것은 결국 하나님에 대한 비방과도 같음을 설명합니다.

 

송영(52)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이유는 그분이 창조주로서, 역사 속에서 신실하게 행하셨으며, 현재와 미래를 아우르는 무한한 사랑과 공의로 인해 찬양받으실 합당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우리의 찬양과 경배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모든 것을 이루실 것이며, 그분의 영원한 성품에 대한 찬양은 우리가 삶의 모든 상황 속에서 변함없이 신뢰하는 표현입니다.

 

52여호와를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아멘 아멘(52)

 

시편 89편은 하나님 송영, “여호와를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아멘 아멘”으로 끝나는데, 이 마지막 구절은 원래 이 시에 속한 것이라기보다는 시편 제3권의 끝을 알리는 역할로 이해됩니다. 시편 제1-4권까지 각 권의 맨 마지막 시편의 마지막 절에 이와 유사한 하나님 송영이 나와 각 권의 마지막임을 알려줍니다(시 41:13;72:18-19;89:52; 106:48). 제5권의 마지막은 할렐루야로 시작하고 끝나는 다섯 편의 시(146-150편)로 구성되었습니다. 여기 89편의 송영 내용은 하나님을 영원히 찬양하라는 권유입니다. “찬송할지어다”에 해당하는 ‘바루크’는 원래 ‘축복 받을지어다’의 뜻이며 하나님께 사용될 때는 ‘송축하다’로 종종 번역됩니다. 잇따라 나오는 “아멘 아멘”은 청중의 동의와 확신과 기대를 함축한 외침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함과 우리의 신뢰를 새롭게 다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듣고 응답하시며, 그분의 약속은 결코 저버려지지 않습니다.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다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회복하시고 약속하신 축복을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와 인내를 가지고 기도하며, 그분의 신실함을 찬양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신실함은 모든 상황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진리이며, 그분의 이름을 높이며 감사하는 것이 우리의 응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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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89-02)


다윗에게 주어진 영원한 언약

시편 89편 19-37절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우리와 언약을 맺어주셨습니다. 언약이란 단순한 약속이 아닙니다. 언약을 맺는 당사자 사이에 특별하고도 배타적인 관계성이 설정됨을 의미합니다. 사람들 사이에 맺어지는 언약의 경우, 언약 당사자가 죽으면 그 언약은 없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맺으시면 그 당사자의 후손들까지 언약의 혜택을 보게 해주십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영원합니다.

 

  •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택하여 왕으로 세우셨고, 친히 그의 아버지와 하나님께서 되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영원한 왕국을 약속하셨고 그의 인자를 영원히 베푸실 것을 선언하셨습니다. 다윗과 그 후손이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면 징벌을 받겠지만 하나님의 인자와 영원한 왕국의 약속은 변치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윗과 맺은 언약(19-37)

우리는 다윗 언약보다 훨씬 더 확고하고도 영원한 십자가의 언약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수시로 이 사실을 망각하곤 합니다. 그 어떤 권세자보다 위대하신하나님의 자녀임을 잊지 않는 것이 신앙의 기본입니다.

 

19그 때에 주께서 환상 중에 주의 성도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능력 있는 용사에게는 돕는 힘을 더하며 백성 중에서 택함 받은 자를 높였으되 20내가 내 종 다윗을 찾아내어 나의 거룩한 기름을 그에게 부었도다 21내 손이 그와 함께 하여 견고하게 하고 내 팔이 그를 힘이 있게 하리로다 22원수가 그에게서 강탈하지 못하며 악한 자가 그를 곤고하게 못하리로다 23내가 그의 앞에서 그 대적들을 박멸하며 그를 미워하는 자들을 치려니와 24나의 성실함과 인자함이 그와 함께 하리니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그의 뿔이 높아지리로다 25내가 또 그의 손을 바다 위에 놓으며 오른손을 강들 위에 놓으리니 26그가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 27내가 또 그를 장자로 삼고 세상 왕들에게 지존자가 되게 하며 28그를 위하여 나의 인자함을 영원히 지키고 그와 맺은 나의 언약을 굳게 세우며 29또 그의 후손을 영구하게 하여 그의 왕위를 하늘의 날과 같게 하리로다 30만일 그의 자손이 내 법을 버리며 내 규례대로 행하지 아니하며 31내 율례를 깨뜨리며 내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32내가 회초리로 그들의 죄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그들의 죄악을 벌하리로다 33그러나 나의 인자함을 그에게서 다 거두지는 아니하며 나의 성실함도 폐하지 아니하며 34내 언약을 깨뜨리지 아니하고 내 입술에서 낸 것은 변하지 아니하리로다 35내가 나의 거룩함으로 한 번 맹세하였은즉 다윗에게 거짓말을 하지 아니할 것이라 36그의 후손이 장구하고 그의 왕위는 해 같이 내 앞에 항상 있으며 37또 궁창의 확실한 증인인 달 같이 영원히 견고하게 되리라 하셨도다(셀라)(19-37)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 나라의 왕을 선택하여 세우셨습니다. 용사인 다윗을 택하여 힘을 더하시고 그를 높여주시고 거룩한 기름을 부어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 삼으셨습니다. 세상의 왕은 힘으로 등극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왕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등극합니다. 세상 어떤 권력도 하나님 앞에서는 한낱 피조물일 뿐입니다.

 

(1) 다윗을 선택하고 기름 부으심(19-20)

 

하나님께서 온 우주의 왕이심을 찬양(5-18)한 시인은 3-4절에서 언급한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은 언약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이번에는 19절에서 시작하여 37절까지 무려 열아홉 절에 걸쳐 언약을 세세하게 되짚습니다. 시인이 하나님께 다윗과 맺은 언약을 상기시키는 것은 하나님께서 언약을 파기하셨음(38-45)에 대한 항변이며, 다윗에게 약속한 언약을 회복해주시길 바라는 간구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그의 성도들에게 환상을 통해 계시를 주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용’였다고 소개하며, 그를 3절에서처럼 ‘택함 받은 자’와 ‘내 종’으로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용사에게 힘을 더하고, 백성 중에서 그를 택하여 높여주고, 그를 찾아내고, 기름을 부어 왕을 세웠다는 설명(19-20)은 이 일련의 행동이 하나님이 직접 행하신 일임을 부각합니다.

 

(2) 다윗과 함께하여 세상을 다스리게 하심(21-27)

 

다윗을 왕으로 삼으신 하나님께서는 그와 함께하여 그를 세상의 지존자로 등극하게 하실 것입니다. 21-25절의 모든 문장의 주어가 하나님(‘내가’, ‘나의’)인 데서 잘 나타나듯이, 용사이자 왕인 다윗에게 힘과 견고함을 주시고 그의 대적을 완전히 파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는 모두가 하나님의 성실과 인자 덕분이며, 하나님의 이름 덕분에 다윗의 뿔(힘 또는 영광)이 높아질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다윗을 일일이 가르치고 도와 전쟁에서 승리하고 원수를 굴복시킨 내용은 시편 18:32-48 등에서 다윗의 직접적인 경험담을 통하여 증명됩니다. 다시 시편 89편으로 돌아와 25절의 ‘하나님이 다윗의 손을 바다와 강 위에 놓는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다윗과 그 후손의 통치와 영향력이 온세상에 임하도록 허락하셨음을 의미합니다. 보통 지리적으로 바다는 지중해를, 강들은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를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문맥상 온 세상을 지칭합니다. 하나님의 이런 약속은 왕의 통치 영역의 확장만을 뜻하지 않고 시편 2:8에 나타난 것처럼 왕에게 온 세상을 유업으로 주어 대대손손 누리는 약속의 의미까지 담고 있습니다. 시편 72:8에서도 왕의 통치가 ‘바다에서부터 바다까지와 강에서부터 땅 끝까지’ 이르게 될 것을 기원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으로부터 시작하여 그의 임재, 보호, 공급을 통해 하나님과 다윗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집니다. 다윗은 자신을 선택하여 왕으로 삼으신 하나님, 원수들을 무찌르게 해주시고 온 세계에 힘을 떨칠 수 있는 자로 만들어주신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 ‘나의 구원의 바위’(시 18:2)로 부를 것입니다. 그런 다윗을 하나님께서는 친히 아들 특히, 장자로 삼으실 뿐 아니라 땅의 왕들에게 지존자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 덕분에 세상의 승리자가 될 다윗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가장 높임을 받으실 것입니다.

 

(3) 다윗과 후손에 대한 영원한 언약(28-29)

 

28-29절은 3-4절과 매우 흡사한 내용으로서 다시 한번 하나님의 언약과 하나님의 속성의 연결성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통해 다윗과 그 후손 그리고 그들의 왕위를 영원히 보존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단락의 네 문장은 모두 하나님을 가리키는 “내가”가 주어로 나와 다윗 왕조의 영원성을 지켜주실 주체가 바로 하나님이심을 강조합니다. 또한 ‘나의 언약’, ‘그의 후손’, ‘그의 왕위’와 더불어 ‘나의 인자함’을 연결시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한 모든 것이 결국은 하나님의 인자 덕택임을 나타내줍니다. 또한 다윗 왕권의 영원성과 견고성은 ‘하늘의 날과 같게 하리로다’라는 표현을 통해 더 부각됩니다.

 

(4) 언약에 대한 경고(30-32)

 

다윗과 후손에게 영원한 왕국을 약속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언약에 따른 의무와 이에 대한 경고를 덧붙이십니다. 이는 다윗이 약속받은 영원한 왕국이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윗과 그 후손이 언약의 의무를 이행할 때에 가능한 점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다윗 사이의 언약은 쌍방 간에 책임과 의무가 따르므로, 한쪽이 그 의무를 다하지 못하면 언약은 깨집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져야 할 부분은 다윗과 후손의 왕국을 영구히 지켜주시는 일입니다. 이에 다윗과 그 후손에게 주어진 의무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30-31절에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에 순종하라는 뜻의 경고를 네 번 반복하십니다. ‘내 법’, ‘내 규례’, ‘내 율례’, ‘내 계명’의 반복은 모두 왕인 다윗과 그의 후손이 하나님의 말씀만 따라야 함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고 행하지 않는 행위는 “깨뜨리다”(31)의 원래 의미가 알려주듯 하나님의 말씀을 모독하고 더럽히는 행위이며, 32절에서 언급하듯 하나님께 죄를 저지르는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그냥 두지 않으시므로, 회초리와 채찍으로 왕들을 징계할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회초리와 채찍은 사무엘하 7장에서 구체적으로 ‘사람들의 막대기’와 ‘인생의 채찍’으로 설명되었습니다(삼하 7:14).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이 언약의 의무는 신명기 17:15-20에서 하나님께서 밝히신 왕들에 대한 지침 내용과 일맥상통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중 하나님이 택한 사람을 왕으로 세우라고 명령하셨고, 왕이 된 자는 말과 아내와 은금을 많이 두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닌 다른 실체나 물질 등을 의지하거나 하나님을 배반하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하나님만 신뢰하면 왕의 개인적 필요나 국가의 필요를 하나님께서 다 채워주실 것임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경고 외에 딱 한 가지를 왕에게 요구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늘 옆에 두고 그 말씀대로 행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요구였습니다. 이 요구는 왕과 그 후손과 나라가 안전히 보존되는 것이 말이나 병거 혹은 인간의 지략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린 일임을 확실히 표명합니다. 여기에 덧붙여 한 가지 더 명심해야 하는 점은 다윗 언약의 의무나 왕에 대한 요구 사항인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은 왕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는 이미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을 때 각 백성에게 맡겨진 의무 사항이었습니다(출 19:5). 결국 하나님께서 택한 왕은 하나님만 신뢰하고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신 백성의 영적 지도자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 자입니다.

 

(5) 다윗과 후손에 대한 언약의 재 확증(33-37)

 

33절의 첫 단어인 ‘그러나’는 앞의 언약에 대한 경고(30-32)에서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인자와 성실로의 전환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에 불순종하는 왕의 죄를 심판하시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윗에게 약속한 언약을 깨뜨리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왕에게 네 번 경고하셨듯이(30-31), 왕에게 네 번의 약속(33-34)으로 대답하십니다. ‘나의 인자함’, ‘나의 성실함’, ‘내 언약’, “내 입술에서 낸 것”은 모두 의미상 연결되어 왕에게 한 언약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음을 확실히 밝혀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한 인자를 무효화하거나, 그의 성실로 속이지 않을 것이며, 언약을 깨뜨리거나, 말한 것을 바꾸지 않으실 것입니다. 여기서 특히 ‘깨뜨리다’(31,34)라는 단어를 반복하여, 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모독하거나 더럽히지 않는다면 하나님도 왕에게 준 약속을 더럽히지 않고 지키겠다는 의지를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의 맹세는 그의 거룩함과 진실로 이루어지므로 한 번으로 유효하고 변치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 번 다윗 후손의 장구함과 변치 않을 왕권을 확증하십니다. 하늘의 해와 달처럼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피조물이 이 언약의 확실한 증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 어떤 언약을 맺어주셨는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피와 부활의 영광으로 맺어진 이 언약을 망각하거나, 나만의 것으로 삼고 전수하지 않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와 약속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는 하루를 보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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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89-01)


언약을 성취하신 위대한 하나님

시편 89편 1-18절


지금까지 살아왔던 인생 속에서 혹시 어떤 약속 때문에 고민하고 기다리다가 잠 못 이룬 밤이 있었는데, 그 약속이 성취된 것에 대해 너무 기뻐서 소리친 적이 있습니까? 그런 경험이 있었다면 그 순간이 당신에게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약속해주시는 분이시고 그것을 이루어주시는 분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통해서 바로 주어진 것임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 시인은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은 언약을 떠올리며 하나님께서 언약을 통해 약속하신 인자와 성실을 찬양합니다. 다윗과 연약을 맺으신 하나님께서는 우주의 왕이시며 그가 만든 모든 세계를 공의와 인자로 통치하시므로, 하늘의 천군 천사나 바다와 신 등의 자연 또는 땅의 백성들로부터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합니다.

 

다윗 언약에 드러난 하나님의 인자와 성실(1-4)

인자와 성실은 시편에서 자주 언급되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에게 인자를 한없이 베푸시는 분입니다.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지키고 이루시는 성실한 분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으로 인해 언약 백성이 된 성도는 하나님의 그 성품을 영원히 찬송하고 대대로 전해야 합니다.

 

1내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노래하며 주의 성실하심을 내 입으로 대대에 알게 하리이다 2내가 말하기를 인자하심을 영원히 세우시며 주의 성실하심을 하늘에서 견고히 하시리라 하였나이다 3○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내가 택한 자와 언약을 맺으며 내 종 다윗에게 맹세하기를 4내가 네 자손을 영원히 견고히 하며 네 왕위를 대대에 세우리라 하셨나이다(셀라)(1-4)

 

시편 89편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영원히 찬양하고 대대에 전하겠다는 시인의 선포로 시작합니다. ‘확실히 내가 말하였다’(2)라고 선언하는 시인은 하나님 찬양에 대한 자신의 진정성과 확고한 의지를 나타냅니다. 그는 찬양의 초점을 먼저 하나님의 인자와 성실의 영원함과 견고함에 맞춥니다. ‘인자하심을 영원히 세우시며’(2)의 문장은 직역하면 ‘영원히 인자하심이 건축되리이다’로 번역되는데, 이처럼 ‘영원히’가 문장 맨 앞에 나와 하나님의 인자의 영원성과 불변성을 강조합니다.

연이어 나오는 “당신의 성실하심을 하늘에서 견고히 하시리라”(2)는 문장에서는 ‘하늘’이 맨 앞에 나와 강조되었습니다. 하늘을 강조한 의도는 하나님께서 그의 성실을 견고하게 한 곳이 하늘임을 알림과 동시에 그의 지위가 천지를 포함한 우주의 왕이자 주권자임을 암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이 문장은 ‘당신의 성실하심이 하늘처럼 견고하시리라’로도 번역이 가능한데, 이 경우는 앞에서 하나님의 인자가 영원히 세워졌듯이 그의 성실도 하늘과 같이 변치 않으면서도 견고하고 영원함을 재차 강조하는 의미로 볼 수 있다. 1-4절에 ‘영원’과 관련된 단어(영원히, 하늘에서, 영원히, 대대에)가 반복해서 나온 것을 고려하면, ‘하늘에서’라는 표현도 하나님의 지위와 더불어 영원성을 함께 함축한다고 보는 것이 적절합니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시인이 1절부터 찬양하는 하나님의 인자와 성실이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에게 베푸는 인자와 성실보다는 3-4절과 이후 19-37절 구체적으로 언급된 ‘하나님이 다윗과 맺은 언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인자와 성실과 긴밀하게 연결된 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왕이 된 후(통치 기간: 기원전 1010-970년) 그와 언약을 맺으셨고, 그 내용은 사무엘하 7장에 기록되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가리켜 ‘내 종’(삼하 7:5)이라 언급하셨는데, 본 시편에서도 다윗은 ‘종’과 ‘내가 택한 자’(3)로 언급되었습니다. 이 호칭들은 하나님과 다윗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암시하면서도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은 하나님의 선택이며 다윗이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 백성들을 지도할 자임을 분명히 해줍니다. 그렇다면 언약의 주요 내용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다윗에게 영원한 왕권을 허락하셨다’는 문장으로 요약됩니다(4). 다윗의 왕권은 ‘네(다윗) 자손’과 ‘네 왕위’라는 문구로 구체적으로 표현되었고, 그 왕국의 견고함과 영원함은 ‘영원히 견고히 하며’와 ‘대대에 세우리라’는 표현(4)에 나타납니다.

또한 여기서 시인은 4절의 다윗 왕권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과 1-2절의 하나님의 인자와 성실에 대한 찬양 내용(영원성, 견고함)을 동일시합니다. 2절의 ‘하나님의 인자와 성실’은 4절에서 ‘다윗의 왕위와 자손’으로 대체되었을 뿐, 2절과 4절은 같은 동사(세우다, 견고하게 하다)와 같거나 유사한 뜻의 부사(영원히, 대대에, 하늘에서, 영원히)가 반복되어 두 절의 연결고리가 강화되었습니다. 이리하여, 하나님의 인자와 성실은 하나님의 속성을 뛰어넘어 ‘하나님이 다윗과 맺은 언약’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연결성은 다윗에게 영원한 왕권을 약속한 하나님의 언약 자체에 그의 인자와 성실이 내포되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여기서 시인의 의도는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을 때 약속하신 그 인자와 성실을 지금 다윗의 왕권에 지속해서 나타내시길 호소하는 것입니다. 현재 시인이 처한 상황은 38절 이하의 내용(다윗 왕조의 종말과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은 언약을 파기하심)을 고려할 때, 포로기(기원전 586-538년)로 추정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1-2절의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찬양과 선포는 실제적으로는 하나님께서 그의 성품을 다윗의 언약에 계속 나타내야 함을 상기시킴과 동시에 그렇게 해주시길 촉구하는 행위로 볼 수 있습니다.

 

온 우주에 드러난 하나님의 성실을 찬양(5-18)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이한 일들은 하늘도 찬양할 만큼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그 어떠한 신도 그분 앞에서도 두려워 떨 정도로 전하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실 뿐 아니라 성실하십니다. 그 큰 능력으로 언약을 성실하게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약속은 아무리 불가능해 보여도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5여호와여 주의 기이한 일을 하늘이 찬양할 것이요 주의 성실도 거룩한 자들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하리이다 6무릇 구름 위에서 능히 여호와와 비교할 자 누구며 신들 중에서 여호와와 같은 자 누구리이까 7하나님은 거룩한 자의 모임 가운데에서 매우 무서워할 이시오며 둘러 있는 모든 자 위에 더욱 두려워할 이시니이다 8여호와 만군의 하나님이여 주와 같이 능력 있는 이가 누구리이까 여호와여 주의 성실하심이 주를 둘렀나이다 9주께서 바다의 파도를 다스리시며 그 파도가 일어날 때에 잔잔하게 하시나이다 10주께서 라합을 죽임 당한 자 같이 깨뜨리시고 주의 원수를 주의 능력의 팔로 흩으셨나이다 11하늘이 주의 것이요 땅도 주의 것이라 세계와 그 중에 충만한 것을 주께서 건설하셨나이다 12남북을 주께서 창조하셨으니 다볼과 헤르몬이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나이다 13주의 팔에 능력이 있사오며 주의 손은 강하고 주의 오른손은 높이 들리우셨나이다 14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 앞에 있나이다 15즐겁게 소리칠 줄 아는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여 그들이 주의 얼굴 빛 안에서 다니리로다 16그들은 종일 주의 이름 때문에 기뻐하며 주의 공의로 말미암아 높아지오니 17주는 그들의 힘의 영광이심이라 우리의 뿔이 주의 은총으로 높아지오리니 18우리의 방패는 여호와께 속하였고 우리의 왕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에게 속하였기 때문이니이다(5-18)

 

이 부분은 주님의 기이한 일들과 그분의 성실을 찬양하고, 주님이 모든 자 위에 더욱 두려워할 이로서 바다를 다스리시고, 주의 원수를 흩으신 것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개관하며 시작합니다.

 

(1) 천상에서 전능자 하나님의 성실을 찬양(5-8)

 

시인이 땅에서 하나님의 인자와 성실을 찬양하듯, 하늘에서는 천군천사가 하나님의 주권과 그의 능력과 성실을 찬양할 것입니다. 이들은 5절에서 ‘하늘’과 ‘거룩한 자들의 모임’으로, 7절에서는 ‘거룩한 자의 모임’과 ‘둘러 있는 모든 자’로 소개되었습니다. 이 천상의 실체들은 함께 모여 하나님을 에워싸고 그를 보좌하고 그의 기이한 일과 성실하심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기에 천상의 존재들까지 그를 찬양합니까? 시인은 하나님께서 인간 나라의 한 왕으로서 다윗을 선택하여 언약을 맺은 분임을 밝혔고, 이제 그분이 온 우주의 왕이자 주권자임을 선포합니다(6-8). 6,8절의 ‘누구리이까?’로 끝나는 세 가지 수사의문문이 ‘하나님과 같은 분이 없다’는 대답하면서 하나님께서 우주의 전능한 왕임을 부각합니다. 첫째, 구름 위 천상에서도 하나님과 비교할 자가 없습니다. 6절의 ‘비교할 자’에서 ‘비교하다’는 원래 ‘순서대로 세우다’, ‘전쟁터에서 군사를 정렬하다’의 뜻이므로, 비교할 자가 없다는 것은 하나님보다 앞설 자가 없음을 의미합니다. 둘째, 신들, 즉 천군 천사나 신적 존재들 중에서도 하나님과 같은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천군천사들마저 하나님을 경외하고 복종합니다. 셋째, 하나님과 같이 강한 자가 없습니다. ‘여호와 만군의 하나님’이란 칭호가 암시하듯 하나님께서는 모든 천군천사 군대의 우두머리십니다.

 

(2) 능력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찬양(9-14)

 

우주의 왕으로서 천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은 하늘 아래 바다와 땅과 산에서도 여실히 나타납니다. 9,10절에 묘사된 ‘바다’, ‘파도’, ‘라합’, ‘원수들’은 모두 바다의 질서를 깨뜨리고 혼란을 일으키는 세력을 상징하는데, 이런 세력도 하나님 앞에서는 제 힘을 쓸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만한 바다(‘바다의 파도’로 번역됨)를 다스리시고, 거세게 일어나는 파도를 단번에 잠잠케 하십니다. 라합 같은 위협적인 바다 생물도 이미 죽은 자처럼 짓밟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대적의 정체가 무엇이든지간에 그들을 제압하여 홀을 수 있는 강한 능력의 용사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혼란과 파괴를 가져오는 세력을 통제하고 질서로 다스릴 수 있는 근원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는 하나님께서 바로 이 세상의 기초를 놓은 창조주시기 때문입니다. 천지와 세계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작품이며 그의 소유물입니다(11). 사람들은 갈릴리 남서쪽의 다볼산이나 북동쪽의 헤르몬 산을 신들의 거주지로 여기지만, 이들을 포함한 사방의 산들은 다 하나님의 소유이며 하나님의 이름을 듣고 즐거움의 반응을 보이는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같이 능력을 가진 창조주이자 왕이시나 그의 모든 다스림의 기초는 공의와 정의 그리고 인자함과 진실함에 있습니다. 시인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찬양하고 그의 속성을 언급하는 데에는 전능자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한 언약을 회복하고 그의 인자를 계속해서 보여주시길 바라는 마음이 암시되었습니다.

 

(3) 왕이신 하나님을 기뻐하는 백성의 행복(15-18)

 

시인은 하나님의 인자와 성실을 찬양하면서 청중에게 천상에서의 하나님과 바다와 산에서의 하나님을 기억하게 했고, 이제 땅으로 와 백성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합니다. 산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알아보고 즐거워하듯(12), 왕이신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 탄성을 지르는 백성들은 얼마나 행복합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호의와 은혜(‘얼굴빛’) 안에서 살며 그의 공의를 지킴으로써 높아집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힘과 방패로 삼고 그의 은총 덕분에 힘과 승리를 얻는 자들입니다. 이 백성을 통치하는 인간 왕도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 백성과 함께 하나님을 기뻐하고 그분의 공의와 힘을 의지하기에,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으로 말미암아 높아지고 승리할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선택한 다윗 왕국이 하나님의 은총으로 회복되길 계속 암시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경우든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힘과 보호가 되는 진정한 왕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창조주이시고, 우리의 구원자, 왕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위해 기이한 일들을 능히 행하십니다. 의와 공의와 인자함과 진실함으로 세상을 다스리시고, 언약을 성실하게 지키십니다. 하나님의 성품이나 역사를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이유들이 넘쳐납니다. 온 땅과 하늘도 쉬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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