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093-01)
평범한 삶을 향한 간구
시편 93편 1-5절
뉴욕타이스는 한국에 대해 ‘전 국민이 신경쇠약에 걸리기 직전의 상태인 것 같다’고 묘사한 바 있습니다. 낯선이들의 낯익은 평가에 우리의 고된 삶이 들킨 것 같아 멈칫했습니다. 특정 악인이 아니어도 우리를 둘러싼 구조 악은 우리가 평범한 삶을 열망할 수 없게 합니다.
- 시편 93편은 제4권(90-106편)의 전체 주제인 ‘여호와의 통치하심’을 잘 나타냅니다. 사실 93편은 95-99편과 함께 ‘여호와 통치 시편’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여호와께서 다스리신다’라는 표현이 공통적으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93편은 이러한 여호와 통치 시편의 첫 번째 시편으로, 그중 가장 간결하고도 명확한 메시지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왕권의 견고함(1)
고대의 사람들은 대부분 많은 신들이 있다고 믿었고 그 신들이 다스린다고 생각했습니다. 최고 신이나 신들의 왕 같은 개념이 있기는 했지만, 그들이 살아있는 신이 아니기 때문에 절대적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만들어낸 신이 아니라 사람을 만드신 여호와께서 천지만물을 다스리십니다.
1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능력의 옷을 입으시며 띠를 띠셨으므로 세계도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아니하는도다(1)
시편 93편은 여호와 통치 시편의 막을 열어주는 첫 시편으로서, 그 내용은 매우 간결하고 명확합니다. 여호와께서 온 세상을 주관하시는 왕이시며 만물이 그에게 복종하는 통치권을 지니셨음을 반복적 어조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93편의 첫 마디는 ‘여호와께서 통치하신다’(개역개정 ‘여호와께서 다스리신다’)입니다. 이 말은 ‘여호와께서 왕이시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다윗 언약을 중심으로 왕권이 다윗에게 있음을 주로 노래한 시편 1-3편과는 사뭇 다른 어조로 하나님께서만 왕이시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런 ‘여호와 왕권’의 주제는 시편 4권의 강조점으로서 다윗 언약, 즉 다윗 왕권이 실패한 것인지를 묻는 시편 3권의 질문에 대한 시편 4권의 대답입니다. 다윗 왕권에 대한 회복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시편 4권의 첫머리인 시편 90편은 모세의 기도인데, 인간의 일생이 매우 짧고 허무하며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인생의 주인이심을 노래한 바 있습니다. 이러한 4권의 맥락에서 시편 93:1은 여호와의 왕권을 선포하는 첫 구절이며,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인생의 의미가 무너지고 하나님의 약속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일 때, 그 인생을 허락하시고 그 약속을 주장하시고 성취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결코 흔들리지 않으십니다. 특별히 1절은 이러한 여호와의 통치하심을 드러내기 위하여 ‘옷 입음’의 비유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옷 입음의 비유는 소유의 의미를 드러내는 시적 장치다. 여호와께서는 권위와 능력을 갖고 계십니다. 권위와 능력이란 통치자가 소유하며 사용하는 특질입니다.
여호와는 왕으로서 통치하시면서 권위와 능력이 있으십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바로 1절 후반부가 말하는 것처럼, 세계가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견고히 서다’라고 번역된 ‘쿤’ 동사의 니팔 형태는 ‘확립되다’, ‘견고해지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통치의 결과는 세계가 견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가 왕이시므로 그 견고한 세계는 결코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여호와 왕권의 견고하심으로 인해 세상 가운데 안정과 평안이 임하게 된다는 상관관계에 주목해야 합니다.
여호와 왕권의 영원함(2)
거대한 제국을 다스리는 인간 왕들은 어떨까요? 유대인들은 어쩌면 그들이 다스린다는 느낌을 더 받았을 수 있습니다. 애굽에서의 경험이 그랬을 수 있고, 솔로몬 이후 분열 왕국을 거치고, 포로기를 경험하면서 그랬을 수 있습니다. 거대한 제국의 왕들은 스스로를 신 혹은 신의 아들로 칭하기도 하면서 주변의 나라들을 굴복시켰는데, 그런 모습을 보고 경험하면서 그 왕들이 다스린다는 생각을 했을지 모릅니다.
2주의 보좌는 예로부터 견고히 섰으며 주는 영원부터 계셨나이다(2)
2절은 1절에 이어 여호와의 왕권에 대해 계속해서 설명합니다. 특별히 ‘여호와의 보좌’에 대해 말합니다. 상반절에서는 여호와의 보좌가 ‘예로부터’ 견고히 섰다고 말하며, 하반절에서는 ‘주님이 영원부터 계셨다’고 말합니다. 상반절과 하반절은 히브리 시적 기법의 가장 기초가 되는 평행법적 사고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먼저, 상반절은 ‘예로부터’이고 하반절은 ‘영원부터’입니다. ‘예로부터’라는 표현은 ‘그때로부터’라는 말인데, 사실상 구약성경에서는 하반절에 나오는 ‘영원부터’라는 말과 더불어 쓰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반절의 ‘영원부터’라는 말은 ‘매우 오랜 기간으로부터’라는 뜻으로 사실상 태초 이전부터, 즉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시간 이상의 세계로부터라는 의미입니다. 영원성은 상반절의 ‘주님의 보좌’ 및 하반절의 ‘주님’을 수식하는 말입니다. 상반절의 ‘주님의 보좌’란 1절이 말한 여호와의 왕권을 나타내는 말로서,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보좌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영원성은 결국 하반절의 ‘주님’에게서 결정적으로 마무리되는데, 원문에서는 ‘아타’, 즉 ‘당신’이라는 의미입니다. 영원부터 견고하여 흔들리지 않는 통치권을 가지신 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신 것을 2절은 명확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1-2절은 여호와의 왕권이 얼마나 견고하고 확실한지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큰 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3-4)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고대의 바다는 사람들에게 있어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바다를 통해 유익함을 얻을 수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위험을 감수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큰 풍랑과 파도는 그저 만나지 않기를 바랄 뿐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바다와 관련된 미신들이 많은 것도 다 이런 이유가 있습니다.
3여호와여 큰 물이 소리를 높였고 큰 물이 그 소리를 높였으니 큰 물이 그 물결을 높이나이다
4높이 계신 여호와의 능력은 많은 물 소리와 바다의 큰 파도보다 크니이다(3-4)
3-4절은 1-2절이 표현한 여호와의 견고한 통치에 도전하는 세상의 세력들을 묘사합니다. 여호와의 통치하심을 흔들어놓을 수 있다는 세속적 세계관을 비유로 표현합니다. 3절은 ‘강물’로 4절은 ‘바다’로 표현합니다. 개역개정이 ‘큰물’로 번역한 원어는 ‘강물들’을 가리킵니다. 강물들이 높였다는 것은 바로 ‘소리’를 높였다는 뜻입니다.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단순히 물이 높아졌다는 사실에 있지 않습니다. 고대 근동에서 ‘물’은 무질서와 혼돈이라는 함의를 지니고 있습니다(참조, 창 1:2). 물은 왕 되신 하나님에 의해 통치되어야 하며, 그럴 때에 피조 세계의 질서가 유지된다는 것이 물에 대한 성경의 전반적인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물이 소리를 높였다’는 것은 결국 물들이 하나님의 통치에 대항하여 반역을 꾀했음을 뜻합니다.
1-2절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영원히 견고하다 했는데, 이러한 하나님의 통치는 과연 물들의 저항에 대해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4절에 나타납니다. 높이 계신 여호와의 능력은 많은 물소리보다 크고 바다의 큰 파도보다 큽니다. 4절의 핵심 구절은 ‘높이 계신 여호와’입니다. 원문을 직역하면 ‘많은 물소리보다 강하시고, 바다의 파도보다 강하신 이가 높은 곳에 계신 여호와시다’입니다. 여기서 마지막 표현이 바로 ‘높이 계신 여호와’입니다. 여호와는 가장 높으신 분이셔서, 그 어떤 물이 소리와 물결을 높일지라도, 그분의 크고 높으심에는 결코 미치지 못합니다.
여기서 여호와께 대항하는 물결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많은 물’입니다. 이때 물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3절의 ‘강물들’과 연결될 수도 있지만, 4절 뒷부분에 나오는 ‘바다’와도 연결될 수 있습니다. 4절 후반부의 ‘바다’라는 이미지는 매우 강력합니다. 3절의 ‘강물들’에 비해 4절의 ‘바다’는 훨씬 강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강물들이 그 물결을 높여도 바다의 물결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즉, 3절에서 4절로 넘어가면서 하나님께 대항하는 세상의 반역은 ‘강화’되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상의 반역적 물결이 제아무리 그 높이를 높인다 하여도, ‘높이 계신 여호와’는 미치지 못합니다. 이것이 3절에 대한 4절의 대답입니다. 하나님의 보좌는 영원히 견고하기에 세상 그 어떤 반역적인 시도도 그분의 왕권을 흔들어놓지 못합니다.
영원하신 여호와 하나님(5)
문제는 우리가 정말 그렇게 세상을 보며 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큰 그림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 삶의 가장 작은 부분에 대한 질문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내 삶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은 듯이 말하고 행동할 때가 많습니다. 아무 일이 없을 때도 그렇고, 삶에 큰 파도가 계속해서 밀려올 때도 그렇습니다. 우린 너무 왕이신 하나님과 관계 없는 사람들처럼 삽니다.
5여호와여 주의 증거들이 매우 확실하고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니 여호와는 영원무궁하시리이다(5)
93편의 마지막 구절인 5절은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하면서 결론을 도출합니다. 주님에 대한 ‘증거들’은 신뢰할 이유가 충분합니다. 그 근거는 1-4절이 말한 것처럼 그의 보좌가 영원히 높고 세상의 반역을 물리칠 능력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온 우주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왕 되신 증거들이 충분히 넘쳐납니다. 따라서 그분의 거룩하심은 그분의 집에 합당합니다. 여기서 ‘그분의 집’은 그분을 경배하는 성소인 온 피조 세계를 가리킬 수도 있고, 동시에 그 여호와를 예배하는 성전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또한 신약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 나라’ 혹은 ‘교회’로도 해석할 수 있고, 종말론적 관점에서 장차 완성되고 회복될 새 예루살렘으로서의 피조 세계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5절은 선언합니다. ‘여호와는 영원무궁하시다!’ 여호와께서는 항상 다스리시며, 그러한 그분의 통치를 경험하는 하루하루가 쌓여 영원이라는 시간이 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그분의 통치하심을 기억하고, 삶의 쓰디쓴 질문과 기다림의 순간에서도, 하나님의 왕되심을 붙잡고 살려 애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없는 세상을 상상하기 힘들 듯 악인이 없는 세상도 상상하기 힘듭니다. 삐뚤어진 세상 속에서 여전한 현기증을 느끼며 쓰러지지 않기 위해 하나님을 붙드는 백성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께 사각지대란 없기에 우리의 간구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구독과 아래 [광고베너]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19 시편(완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편(115) - 시편 95편 1-11절 - 함께 드리는 예배의 능력 (0) | 2024.08.26 |
---|---|
시편(114) - 시편 94편 1-23절 - 하나님의 공의와 우리의 신뢰 (0) | 2024.08.26 |
시편(111) - 시편 91편 1-16절 - 전능자의 그늘 아래 (0) | 2024.08.26 |
시편(110) - 시편 90편 1-17절 - 짧은 인생과 영원하신 하나님 (0) | 2024.08.22 |
시편(109) - 시편 89편 38-52절 - 하나님의 신실함과 언약의 확신 (0) | 2024.08.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