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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95-01)


함께 드리는 예배의 능력

시편 95편 1-11절


 

예수님께서는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우리가 찬양하고 경배할 수 있는 길을 여셨습니다. 그래서 찬양과 경배에는 불순종의 역사를 끊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교회는 세상에서 가장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함께 예수님을 믿고,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기 때문입니다.

 

  • 이 시편은 위대하신 왕 하나님의 창조와 통치를 찬양하는 예배로 부름과 동시에 출애굽 당시 광야에서 하나님께 반역한 일을 근거로 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도록 권면합니다. 예언자적인 신탁은 완악한 마음을 향한 온 세계의 창조자 하나님의 경고로 끝맺습니다.

 

예배로의 부름(1-6)

개인이 드리는 삶의 예배도 중요하지만, 공동체가 함께 모여 드리는 찬양과 예배는 더욱 중요합니다. 이것은 구약시대로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영적 진리입니다. 믿음의 형제자매가 함께 모여 드리는 예배가 얼마나 영광스럽고 소중한 것인지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1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2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

3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들보다 크신 왕이시기 때문이로다

4땅의 깊은 곳이 그의 손 안에 있으며 산들의 높은 곳도 그의 것이로다

5바다도 그의 것이라 그가 만드셨고 육지도 그의 손이 지으셨도다

6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1-6)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키우고 돌보시는 양육자이기도 하십니다.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입니다. ㅜ모가 자녀를 돌보며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과 육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십니다.

 

(1) 감사함으로 여호와를 노래하자(1-2)

 

예배의 부름은 가장 먼저 성소 안으로 들어가는 행렬을 그려보게 합니다. 첫 마디가 ‘오라! 여호와께 기쁨으로 소리치자’입니다. 주체할 수 없는 감격을 기쁨과 환호성으로 노래하자는 호소입니다. 그러고서 더 구체적으로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해 외치자’(1b) 요청합니다. 구원의 반석은 하나님을 신적 용사로 묘사할 때 사용하고(신 32:4,15,18; 시 18:2,31; 98:2), ‘외치다’(루아)라는 동사는 전쟁 신호를 알리며 함성을 지르거나 승리를 외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민 10:7; 삼상 4:5; 17:20; 수 6:5 등). 온갖 위험과 위협들에서 구원하시는 전사 여호와를 향해 기쁨의 함성을 외치자는 뜻입니다. 고요한 예배의 상황이 아니라 목소리를 아끼지 말고 여호와를 찬양하자는 요청입니다.

이어서 시인은 ‘감사로’ 그의 앞에 나아가자고 합니다(2). 직역하면, 그의 얼굴 앞에서 만나자는 말입니다.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현존에서 머물자는 뜻으로, 회중이 축제 예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기뻐하도록 초청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시인은 ‘노래로’ 그를 향해 크게 외치자고 합니다(2b). ‘외치다’라는 말을 반복하면서 ‘감사로’(베토다) 하나님 얼굴 앞에 머물며 ‘노래로’(비즈미로트) 쩌렁쩌렁 울리게 소리치자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하기 위해 벅찬 감격의 ‘감사’와 ‘노래들’은 빼놓을 수 없는 요소입니다.

 

(2) 위대하신 왕 여호와께 경배하자(3-6)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목청껏 외치는 찬양을 받으시기 합당한 이유가 제시됩니다. 여호와는 위대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이고, 모든 신들 위에 위대한 왕이기 때문입니다(3). ‘크다’라는 형용사를 두 번 반복하여 강조합니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신들 위에 왕으로 존재하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시인은 땅의 깊은 곳이 그의 손안에 있고, 산들의 높은 곳이 그의 것이라고 노래합니다(4). 사람의 눈에 발견되지 않는 깊은 곳과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가장 높은 곳 모두 하나님의 통제 아래 있다는 뜻입니다. 온 세상이 그의 손안에 있음을 강조합니다. 만물의 통치자 하나님을 향한 시인의 찬미는 계속됩니다. 바다도 그의 것이고, 그가 만드셨고, 그의 손이 마른 땅도 지으셨다고 합니다(5). 시인은 통치자 하나님께서 고대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바다와 삶의 터전인 육지를 조성하신 것을 밝히면서 하나님의 왕권과 소유권을 선포합니다. 이때 하나님의 왕권은 창조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1절에서 ‘오라!’는 초청은 6절에서 회중을 향해 ‘들어가라!’는 동사와 함께 성소 안으로 더 가까이 나아가 하나님께 엎드려 무릎을 꿇도록 격려하는 분위기로 이어집니다. 거기서 허리를 굽혀 경배하는 것은 왕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자세입니다. 시인은 이보다 더 자세를 낮추도록 요청합니다. ‘우리의 창조자’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6)고 합니다. 이 말을 다른 형태지만 두 번 연속해서 반복합니다. ‘우리가 무릎을 꿇자, 우리가 무릎을 꿇자’(6b) 이것은 몸을 최대한 낮추어 완전한 복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전복시키는 행위이며 마땅히 취할 자세입니다.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을 찬양(7a-c)

 

하나님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셔서 친히 그 백성을 양 떼처럼 돌보시며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에게 원하시는 것은 온전한 순종입니다. 양들의 의무는 목자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목자로 삼은 백성은 마땅히 그분의 음성에 집중하며 온전히 복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7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7a-c)

 

우리가 낙타 무릎으로 하나님 앞에 복종시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두 가지로 그 이유를 압축합니다. 첫째, 여호와 그는 우리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7). 둘째, 우리는 그의 목초지에 있는 백성이며, 그의 손에 있는 양이기 때문입니다(7bc). 하나님을 목자라고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우리를 하나님의 돌봄을 받는 양으로, 목초지의 백성으로 묘사했습니다. 구약에서 왕은 주로 목자 이미지로, 백성은 양으로 표현되곤 했습니다(렘 23:1-4; 겔 34:1-10). 목자가 양을 돌보고 양육하는 이미지를 통해 하나님과 언약 백성 사이의 친밀한 관계가 묘사합니다(시 23편; 79:13;100:3; 사 40:1 등). ‘우리의 창조자’이자 모든 신들 위에 군림하는 왕(3) 하나님을 위압적인 왕의 이미지가 아니라 목자의 이미지 통해 갈등과 분쟁 없이 평화롭고 자유롭게 방목하시는 분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언자적인 신탁(7d-11)

하나님의 음성에 주의하는 자가 생명의 길을 잃지 않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 자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전적으로 믿고 신뢰하는 자에게 참된 안식의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전인격적으로 보호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7…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8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의 맛사에서 지냈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

9그 때에 너희 조상들이 내가 행한 일을 보고서도 나를 시험하고 조사하였도다

10내가 사십 년 동안 그 세대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이르기를 그들은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길을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

11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7d-11)

 

하나님께서는 예배 가운데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말씀을 통해 인간의 연약함과 한계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을 떠나 깨어진 세상의 본질과 실상이 말씀을 통해 드러나는 그 순간, 하나님의 큰 일이 새롭게 시작됩니다.

 

(1) 신탁 도입부(7d)

 

예언자적인 신탁과 선포가 이어집니다. 신탁의 도입부가 ‘오늘, 만일 여러분이 그의 목소리를 듣는다면’(7d)이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오늘’이라는 첫 글자는 현장성을 강하게 전달할 뿐만 아니라 지금이라는 현재의 시간과 순종의 중요성이 강조됩니다. 이 시편의 정황이 예배 상황이라면, 이 말은 제사장이나 예언자 집단에 속한 자가 회중에게 하는 말일 것입니다. 드디어 8절에서 신탁 말씀이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난날 이스라엘이 출애굽 이후 광야 여정 중에 있었던 사건을 언급하십니다. 너희는 므리바에서 처럼, 맛사 광야에 있을 때처럼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8). ‘므리바’는 ‘다툼’ 또는 ‘논쟁’을 뜻하고, ‘맛사’는 유혹하는 것에서 파생된 ‘시험’을 뜻합니다(출 17장; 민 20장; 신 6:16;9:22;33:8). 이 두 장소는 당시 이스라엘 후손들이 불평하며 하나님께 반역했던 대표적인 장소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당시 여호와가 우리와 함께 계신가를 물으며 의심했기 때문에 이름 붙여진 장소입니다. 즉, 여호와의 현존을 의심했습니다. 그것은 완악한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본래 히브리시 행 8절 첫마디는,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라’로 시작합니다. 완악함은 마음의 냉혹함이나 완고함, 무감각한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단단한 쇠처럼 마음이 경화된 상태를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시 상황을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그때 너희 조상들이 내가 한 일을 보고도 나를 시험하고 조사했다고 말씀하십니다(9). 당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이집트 땅에 내렸던 열 가지 재앙을 시작으로 홍해가 갈라져 바다를 마른 땅처럼 걸었고, 이집트 군사들의 죽음을 목격했고 광야에서 신선한 먹거리를 주셨던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시험하고 비난할 목적으로 주도면밀하게 바라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40년 동안 그 세대 때문에 몹시 불쾌하셨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빗나간 백성이고, 나의 길을 알지 못하는구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10). 개역개정 본문은 “근심하여”라고 완곡하게 표현했지만, ‘역겹다’는 뜻입니다. 더군다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안내하시는 길로 똑바로 걷지 않고 이리저리 주변을 헤매며 방랑했습니다. 그 방랑의 시간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빗나간 길에 있는 것 자체가 그의 길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그들의 완악하고 고집스러운 마음은(8) 결국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여정에서 배움을 거부하는 방향으로 자기들의 뜻(마음)을 결정했습니다. 고대인들에게 마음은 의지의 자리이고 의사결정 기관입니다. 위대한 하나님을 향한 감격과 환호성 속에서도(1-2), 하나님께서는 오래전 일들을 기억하시며 자기 백성의 완악한 의지가 다시 반복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신탁의 말씀을 듣고 있는 신앙 공동체를 향해 광야 세대의 실패에 초점을 맞추어 말씀하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내가 분노하여 그들이 나의 안식에 결코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 맹세하십니다(11). 하나님께서는 1인칭 동사와 1인칭 소유격을 반복하면서 언약 백성의 완악함을 용서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밝히며 경고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 심판을 통해 포로기든, 포로 후기든, 아니면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교회 공동체를 향한 것이든 직접적으로 엄격하게 하나님의 길에서 이탈한 완고한 마음을 향해 경고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만유의 창조주이심을 진심으로 믿는다면 우리는 그분의 음성과 인도하심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분께 복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와 순종은 참되 안식으로 가는 길이며, 그 음성을 듣고도 거역하는 것은 파멸로 가는 길입니다. 순종함으로 참된 안식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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