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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109-01)


원수의 악행에 대한 신뢰와 기도

시편 109편 1-15절


 

우리의 삶에서도 우리는 종종 이유 없이 비난받고 공격받을 수 있으며, 이때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억울함을 호소해야 합니다. 우리가 고통과 억울함 속에서도 어떻게 하나님께 우리의 상황을 아뢰고, 하나님의 정의를 신뢰하며 기도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줍니다. 우리는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송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고통을 아시고 응답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 시편 109편의 해석에 있어서 두 가지가 고려되어야 합니다. 첫째, 이 시편은 저주시로서 악인에 대한 강력한 저주를 요청합니다. 둘째, 109편은 4권의 첫 번째 다윗 시편 모음(108-110편)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데, 108편과 110편이 모두 하나님의 전쟁 승리를 표현하는 데 반하여 109편은 악인이라는 색다른 주제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부름(1)

우리의 인생에서도 하나님의 응답이 지체될 때가 있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침묵하지 않으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우리의 인내와 신뢰를 시험하시지만, 결국에는 우리를 위해 일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응답하실 것을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1내가 찬양하는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옵소서(1)

 

본 109편은 하나님을 부르면서 시작합니다. 탄식시에 전형적으로 등장하는 도입구입니다. 그런데 1절은 특별히 ‘내 찬양의 하나님이여’라는 문구를 사용합니다. 즉,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기에 자신이 지금부터 시작하는 간구를 들어주셔야 한다는 간청입니다. 하반절은 ‘잠잠하지 마옵소서’라고 말하여 간구를 꼭 들어달라는 간절함을 표명합니다.

 

 

악인들의 행동에 대한 묘사(2-5)

 

우리는 때때로 이유 없이 비난받고, 거짓된 말로 인해 상처받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억울함을 호소해야 합니다. 우리가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분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이를 알리고 그분의 도움을 구할 수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2그들이 악한 입과 거짓된 입을 열어 나를 치며 속이는 혀로 내게 말하며

3또 미워하는 말로 나를 두르고 까닭 없이 나를 공격하였음이니이다

4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5그들이 악으로 나의 선을 갚으며 미워함으로 나의 사랑을 갚았사오니(2-5)

 

2절부터 시인은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법정에서 악인을 고발하기 시작합니다. 2-5절은 악인들의 행동에 대한 묘사로 구성되어 있다. 그 고발 내용은 두 가지다. 첫째, 2-3절은 악인들이 언어의 죄를 범했음을 지적한다. 2절은 악인들이 거짓말로 시인에게 말했다고 하며, 3절은 그들이 미워하는 말을 했음을 지적하는데, 그들의 공격은 특별한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악인들은 시인을 아무런 이유 없이 억압하고 괴롭혔다. 둘째, 4-5절은 악인들이 시인의 선을 악으로 갚았음을 말한다. 4절은 그들이 시인의 사랑을 대적함으로 갚았음을 보여주며, 5절은 악인들이 시인의 선과 사랑을 악함과 미워함으로 갚았다고 표현한다. 4절에 '대적하다'로 번역된 사탄() 동사는 법정 용어로 해석할 수 있기에, 시인이 지금 하나님의 법정에서 자신의 의로움에 대하여 호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시인이 대적자에 의하여 어떤 억울한 고발을 당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악인을 심판해달라는 요청(1)(6-15)

우리는 불의한 상황에 직면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대적과 싸워주시기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억울함을 아시고 정의를 이루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악인의 권세와 세력을 제한하시고, 그들이 더 이상 악행을 저지르지 못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6악인이 그를 다스리게 하시며 사탄이 그의 오른쪽에 서게 하소서

7그가 심판을 받을 때에 죄인이 되어 나오게 하시며 그의 기도가 죄로 변하게 하시며

8그의 연수를 짧게 하시며 그의 직분을 타인이 빼앗게 하시며

9그의 자녀는 고아가 되고 그의 아내는 과부가 되며

10그의 자녀들은 유리하며 구걸하고 그들의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먹게 하소서

11고리대금하는 자가 그의 소유를 다 빼앗게 하시며 그가 수고한 것을 낯선 사람이 탈취하게 하시며

12그에게 인애를 베풀 자가 없게 하시며 그의 고아에게 은혜를 베풀 자도 없게 하시며

13그의 자손이 끊어지게 하시며 후대에 그들의 이름이 지워지게 하소서

14여호와는 그의 조상들의 죄악을 기억하시며 그의 어머니의 죄를 지워 버리지 마시고

15그 죄악을 항상 여호와 앞에 있게 하사 그들의 기억을 땅에서 끊으소서(6-15)

 

6절부터는 악인에 대한 심판 요청이 본격적으로 등장합니다. 6절을 직역하면 ‘그를 대적할 악인을 지명해주시고, 대적자가 그의 오른쪽에 서게 하소서’가 됩니다.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법정을 묘사하는 내용입니다. 상반절의 ‘악인’과 하반절의 ‘대적자’는 동일인을 가리킵니다. 시인 자신을 억압했던 악인에 대하여, 그 악인과 같이 무자비하고 철저한 사람을 그의 죄를 고발하는 자로 세워달라는 요청입니다. 이것은 법정적 그림으로, 시인을 억압한 악인의 죄를 철저하게 찾아내달라는 간구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7절은 악인에 대한 심판 결과가 나올 때에 그 결과가 ‘그 악인이 악한 자라는 것을 밝히는’ 결과가 되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하반절의 ‘그의 기도’는 악인이 하나님의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하려는 궤변을 뜻하는 말인데, 그의 잘못된 자기변호가 결국 죄일 뿐임이 드러나게 해달라는 간구입니다. 8절부터는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재판 결과가 나오게 되면 그에 따라 악인에게 내려져야 하는 저주를 다양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여기 나타나는 저주들은 단순한 심정적인 보복을 표현하는 내용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의로움에 기초한 언약적 저주의 표현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이 맥락에서 중요한 것이 신명기 28장의 해석인데. 신명기 28장은 시내산 언약의 결론으로서, 언약의 율법에 순종했을 때 얻게 될 복과 불순종했을 때 직면하게 될 저주들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저주 목록에는 다양한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8-15절에 묘사하는 저주들의 대부분이 신명기 28장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것을 다른 자들에게 빼앗기게 되는 경우들. 먹을 것이 없게 되는 내용들이 신명기 언약의 저주에 기초하고 있음을 기억해야만 109편의 저주가 단순한 복수의 감정이 아닌 하나님의 공의에 기초한 요청이라는 것을 잊지 않게 됩니다.

8절은 악인의 인생이 짧게 해달라고 요청하며 그의 직분을 다른 사람이 취하게 해달라고 말합니다. 악인 자신의 생명 및 직분의 문제를 다룬 것입니다. 9절과 10절은 악인 자신에 대한 저주를 넘어 그의 자손들에 대한 저주를 언급합니다. 9절에서 자녀가 고아가 되고 아내가 과부가 된다는 것은 악인의 인생이 짧게 끝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10절은 그 자손들의 삶이 안정감 없이 흔들리게 되고, 악인이 일찍 죽었기 때문에 집이 황폐해져서 자녀들이 먹을 것을 위해 구걸하게 됨을 보여줍니다. 11절은 고리대금하는 업자들이 악인의 소유를 빼앗아가게 해달라고 구합니다. 2-3절에서 이미 밝혔듯이, 악인은 그 자신이 거짓말로 다른 사람들을 억압했기에, 그가 행한 그 일이 바로 자신과 그 자손들에 게임하게 되는 것으로 11절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11절 하반절의 ‘그의 수고한 것을 다른 자가 탈취한다’는 내용은 신명기 28:30-34의 내용을 요약한 서술로 판단됩니다. 12절은 8-15절의 맥락에서 핵심적 사항을 기술하는데, 바로 그 악인에게 ‘인자’를 베풀 자가 없게 해달라고 요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개역개정에서 ‘인애’로 번역된 단어는 ‘헤세드’로서, 105-108편에서 계속 ‘인자하심’으로 번역한 단어입니다. 여기서 ‘인자를 베풀 자가 없게 하소서’라는 말은 사람들 중에 그에게 인자를 베풀 자가 없게 해달라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인자를 베푸시면 안 된다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는데, 전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12절 하반절은 그의 후손에게, 즉 유리하고 구걸하고 있는 자손에게도 은혜 베풀 자가 없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13절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의 자손들이 고생하는 정도를 넘어 궁극적으로 그의 자손들이 끊어지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이름이 후대에는 지워지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악인의 후손에 대한 내용으로 기도하였다면, 14-15절은 악인의 조상들에 대한 내용으로 전개됩니다. 14절은 여호와께 악인의 조상들의 죄악이 기억되게 해달라고 요청하며, 15절은 그 죄악이 하나님 앞에 항상 있어서 여호와께서 그들에 대한 기억을 땅에서 끊어주실 것을 간구합니다. 정리하면, 8-15절의 내용은 악인에 대한 저주, 그의 자녀들에 대한 저주를 다양하게 표현하면서, 반드시 여호와께서 그들을 저주하셔야 한다는 요청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악인들이 저주 받아야 하는 구체적인 이유와 근거는 무엇입니까? 물론 2-5절에서 악인이 거짓으로 시인을 억압했고 선을 악으로 갚았다는 내용이 근거가 될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인 근거와 이유는 16-20절에 상세하게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6-15절에 나오는 저주를 읽어나갈 때, 사뭇 당황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해결책이 있습니다. 첫째, 이러한 저주는 악인 자체에 대한 감정적 보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스스로 악인에게 보복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법정에 호소하면서, 그 법정의 재판 결과를 소망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저주는 보복이 아니고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의 회복에 대한 갈망입니다. 둘째, 이러한 저주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서 결정적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성경의 율법의 저주, 즉 신명기에 예고된 율법 불순종에 대한 대가로서의 저주를 자신의 몸에 받아 모두 감당하시고 성취하셨습니다. 따라서 그 예수의 이름을 믿는 성도들에게 시편 저주시의 저주들, 나아가 구약 율법의 저주들은 이제 더 이상 해당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저주들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사건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셨기에,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 하나님 법정의 의로운 통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 있지 않는 자들에게 시편 저주시의 내용 및 구약 율법의 저주들은 궁극적인 심판의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109편의 저주의 내용들을 읽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을 기억하며 감사하고 기뻐하며 하나님의 의로우신 통치를 계속해서 소망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억울함과 불의에 직면했을 때, 하나님의 정의를 신뢰하고 그분께 기도하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다윗처럼 하나님께 우리의 상황을 아뢰고, 그분의 공의가 이루어지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의 상황 속에서 정의와 공의를 이루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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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108-01)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한 다윗

시편 108편 1-13절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의 선하심을 믿고,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하심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는 곧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믿고 의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 본문에서 가장 특별한 점은 57편과 60편의 본문이 108편에 함께 배합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찬양하겠다는 결단과 이스라엘을 도우실 여호와를 바라보는 소망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공동체 탄식시의 절정을 형성하게 됩니다. 핵심 메시지는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이 만물 가운데 있으므로 열방을 향한 승리를 거두게 된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함(1-5)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고통을 바꾸어 기쁨이 되게 하십니다. 성도는 고통 가운데도 오로지 하나님만을 높여 주려야 합니다. 고난은 오히려 위대하신 하나님을 높이는 노래로 변화되었습니다. 고난 중에 계십니까? 걱정할 일이 인생에 가득합니까? 같은 시간에 근심이 아니라 기도로 새우시길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1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나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리로다

2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3여호와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양하오리니

4주의 인자하심이 하늘보다 높으시며 주의 진실은 궁창에까지 이르나이다

5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땅에서 높임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1-5)

 

다윗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선포하고 자신의 상황에서 하나님만 바라볼 것을 결정합니다. 그는 마음을 바꾸지 않겠다고 하며 입술을 감사와 찬송으로 채우는 귀한 시간 되길 소망합니다.

 

(1) 하나님께 정해진 마음(1-2)

 

108편은 시편 57편과 60편의 내용으로 구성된 시입니다. 그중 1-5절은 57:6-11에서 왔는데,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굴에 있던 상황을 배경으로 작성된 개인 탄식시입니다. 이 내용이 108편의 전반부가 되었습니다. 57편의 경우에는 다윗의 상황이 구체적으로 상정되어 있으므로 이 구절들의 의미가 ‘고난 중에서 구원해달라는 요청’에 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108편의 경우에는 개인의 상황이 전혀 상정되지 않은 채, 하나님을 향한 고백과 결단으로 바로 시가 시작됩니다. 다시 말해, 108편은 시편 기자 개인의 상황에는 관심이 없으며, 초점은 하나님을 향한 결단과 찬양에 있음이 분명합니다. 1절에서 다윗은 먼저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정해졌음을 선언하면서 시작합니다. 2절은 다윗이 찬양의 노래를 시작하는 것은 새벽을 깨우기 위함임을 밝힙니다. 새벽을 깨운다는 것은 새벽이 오도록 만든다는 것인데, 새벽은 빛이 비치기 시작하여 밤이 낮으로 전환되는 시점입니다. 따라서 새벽을 깨운다는 것 온 하나님의 구원의 새날이 시작될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겠다는 의미가 됩니다.

 

(2)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영광에 대한 찬양(3-5)

 

다윗은 하나님을 향한 찬양을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3절은 다윗 자신이 찬양하려는 내용, 즉 새벽을 깨우는 노래가 단순히 이스라엘 중에서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열방 가운데서 드려지는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과 그들이 거주하는 가나안 땅을 넘어서서, 열방과 피조세계 전체를 조망하고 있습니다. 4절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언급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적 성실성을 뜻하는 ‘헤세드’는 우리가 계속 살펴온 바와 같이 105-107편의 핵심 어휘였는데, 이제 108편으로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다윗은 이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하늘 위에서 크고 그의 진실하심은 궁창에까지 이른다고 말합니다. 하반절의 ‘진실하심’은 ‘에메트’인데. ‘헤세드’와 ‘에메트’는 출애굽기 34:6에서 함께 등장하는 일종의 단어쌍입니다. 즉, 인자와 진실은 서로 다른 두 단어임에도 불구하고 관용적으로 함께 쓰여서 ‘여호와의 언약적 성실성’을 뜻합니다. 4절 상반절과 하반절의 인자 및 진실은 사실상 같은 뜻인 것입니다. 따라서 4절의 의미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하늘 위와 그 가운데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3절은 해석의 지평을 열방으로 확장했고. 4절은 피조세계 전체로 확장하고 있습니다. 5절 역시 비슷한 맥락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고 주의 영광이 온 땅에 높임 받으시기를 원한다고 고백하는 것은, 3-4절의 내용을 연결시켜서 확장하는 역할을 합니다. 3-5절은 하나님께서 온 땅의 주인이 되시는 왕이시기에, 열방을 다스리시고 이방 민족들까지 그 뜻대로 주장하심을 선포하며,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들을 향한 언약을 이방 민족들 가운데서도 능히 지키실 수 있음을 단언하고 있습니다. 아직 이스라엘을 도와달라는 요청은 나오지 않았지만, 3-5절의 내용이야말로 이스라엘을 열방 중에서 구원해주셔야 한다고 말하기 위한 매우 적절한 도입과 근거가 됩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간구함(6-12)

살아갈수록 점점 느끼는 것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처한 상황을 스스로 해결할 수 없고, 자신이 삶의 문제에 대해 응답하지 못합니다. 그 결과 낙심하고, 걱정하고, 때론 원망하고 분노하고 미움과 슬픔에 빠지기도 합니다. 삶의 문제나 질문과 상황에 대해 응답하지 못합니다. 우리에게는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 삶의 응답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6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을 건지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응답하사 오른손으로 구원하소서

7하나님이 그의 성소에서 말씀하시되 내가 기뻐하리라 내가 세겜을 나누며 숙곳 골짜기를 측량하리라

8길르앗이 내 것이요 므낫세도 내 것이며 에브라임은 내 머리의 투구요 유다는 나의 규이며

9모압은 내 목욕통이라 에돔에는 내 신발을 벗어 던질지며 블레셋 위에서 내가 외치리라 하셨도다

10누가 나를 이끌어 견고한 성읍으로 인도해 들이며 누가 나를 에돔으로 인도할꼬

11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셨나이까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의 군대들과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

12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13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들을 밟으실 자이심이로다(6-13)

 

우리는 말씀을 통해 깨닫습니다. 막막한 현실 속에서 탄식하고 있을지, 찬송할지는 결단의 영역입니다. 현재 상황은 탄식할 형편입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다윗은 찬양하기로 결단합니다.

 

(1) 구원요청Ⅰ(6)

 

6-13절은 시편 60:5-12에서 왔습니다. 6절에서 구원 요청을 드린 후, 7-10절에서는 그 요청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의 말씀이 주어지며, 11-13절에서는 그 말씀을 들은 후 이스라엘이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구원 요청을 드리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6절은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는 자들을 건지실 것과 그 오른손을 구원하실 것을 기대하며 요청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응답하소서’라는 요청을 주목해야 하는데, ‘우리’라는 1인칭 복수형을 사용함으로 시의 범주를 공동체로 설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08편은 이제 언약공동체 전체를 위한 구원 요청의 기도임이 밝혀졌습니다.

 

(2) 하나님의 말씀(7-10)

 

7절부터는 6절의 구원 요청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특별히 열방을 제어하시고 승리를 거두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7절은 하나님께서 성소에서 말씀하심을 보여줍니다. 성소를 언급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계심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기뻐하실 것을 선언하시는데, 이것은 전쟁의 승리에 대한 하나님의 확신을 드러냅니다. 7절 하반절에서 세겜과 숙곳이 언급되고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겜은 여호수아서에서 이스라엘이 가나안 정복전쟁을 할 때 중심이 되는 거처였고, 또한 지파들에게 땅을 나누어 준 중심지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나눈다’는 것은 세겜을 여러 부분으로 나누는 것이 아니고, 세겜을 기업으로 할당한다는 의미입니다. 숙곳 골짜기를 측량한다는 것도 기업분배의 의미입니다. 8절은 길르앗과 므낫세가 여호와의 것임을 선언한 후, 에브라임과 유다를 여호와의 투구와 규로 묘사하는데, 에브라임과 유다를 중심 지파로 해서 통치하시는 여호와를 묘사합니다. 이런 흐름은 9절에서 절정에 이르게 되는데, 모압, 에돔, 블레셋이라는 세 이방 민족을 언급합니다. 9절의 이미지는 전쟁의 승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과 전쟁을 하신 후, 목욕을 하십니다. 모압을 목욕통 삼아 전쟁의 피를 씻어내시며, 에돔에는 신발을 놓으실 것이고, 블레셋을 향해서 승리의 함성을 외치십니다. 이 세 민족에 대해 승리하신 여호와를 묘사하는 문예적 표현들입니다. 10절의 해석은 다양한데, 여기서는 10절의 화자가 여호와라고 이해해보려 합니다. 상반절의 견고한 성읍과 하반절의 에돔은 같은 것을 가리킵니다. 즉 ‘견고하다’라고 알려진 에돔으로 누가 여호와를 이끌고 갈 것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이것은 수사적 질문으로, 실제로 인도자를 구하는 내용은 아닙니다. 그 누구도 여호와를 인도할 자는 없으며, 오직 여호와 홀로 에돔을 치시고 승리하심에 대한 강조적 표현입니다.

정리하면, 7-10절은 6절의 구원 요청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응답하시되, 여호와께서는 스스로를 표현하시기를, 이스라엘에게 기업을 분배하시는 분이고, 그 지파들을 소유하신 분이며, 열방과 전쟁하여 승리하시되 스스로의 능력과 주권으로 모든 것을 이루시는 분임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3) 구원요청(2)(11-13)

 

본문은 여호와의 신탁을 들은 언약 공동체 이스라엘이 다시 한 번 하나님께 요청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리’라는 말이 반복적으로 등장하여 이 표현의 공동체성을 집중적으로 부각하고 있습니다. 11절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나아가지 않고 계십니다’로 요약됩니다. 이것은 절망을 담은 표현이라기보다는, 구원에 대한 강력한 요청으로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12-13절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내용이 거듭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12절은 ‘우리를 도우소서’라고 말한 후 ‘사람의 도움은 헛됩니다’라고 고백합니다. 7-10절이 여호와의 주권적 구원을 선언했다면, 12절은 그 신탁의 내용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여호와만이 구원할 능력이 있으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13절은 그 하나님과 함께 그분의 능력으로 싸울 것이며, 그 하나님께서 대적을 밟으실 것을 신뢰하면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정리하면, 11-13절은 7-10절의 신탁에 대한 매우 명확한 공동체 신앙적 응답입니다. 구원 요청이지만, 동시에 신앙 고백입니다. 108편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열방으로부터 구원하시는 여호와의 성실하심’으로 이해면서, 그 하나님에 대하여 마음이 정해졌으므로 찬양하겠다고 선포하는 공동체의 신앙 선언인 것입니다.


다윗이 자신을 공격하는 원수들에 대한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하며, 그들에 대한 저주를 읊는 내용입니다. 다윗은 자신에게 불의하게 대하는 자들로부터 보호해주시기를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원수들이 받게 될 심판과 저주를 상세히 묘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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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107-02)


환난 중의 구원과 감사

시편 107편 23-43절


 

흔들리는 배 위에서 누군가 사정없이 하나님을 깨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잠들지 않으셨습니다. 뱃머리를 돌려 항구에 안착시킨 후 우리로 잠들지 말라고, 풍랑을 보내신 이유를 깨우치라고 말씀하십니다. 몇 번의 훈련 덕에 우리는 잠들지 않았다고 어깨를 들썩이며 말할 수 있었습니다.

 

  • 본문은 시편 107편의 후반부입니다. 앞서 나타난 세 개의 사이클에 이어서, 하나님의 구원하심 및 인자하심과 기적에 대한 찬양을 이어 나갑니다. 앞선 사이클보다 분량이 더 많으며, 그 이후는 사이클이 아닌 별개의 문단이 등장하면서 새로운 구조를 형성합니다. 여호와의 행하심을 기억하는 지혜가 있어야 그분의 언약적 성실성을 이해할 수 있음을 제시하고, 인자하심의 주제와 지혜의 주제를 하나로 통합하면서 여호와 중심성의 메시지를 제공합니다.

 

풍랑에 빠진 자들을 구원하신 여호와(23-32)

우리의 인생에서도 우리는 때로 잘 나갈 때는 자신감에 차서 나아가지만, 예기치 못한 폭풍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건강의 문제, 재정적 어려움, 관계의 갈등 등 인생의 폭풍은 우리를 찾아옵니다. 이때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깨닫고 절망에 빠질 수 있습니다. 우리도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23배들을 바다에 띄우며 큰 물에서 일을 하는 자는

24여호와께서 행하신 일들과 그의 기이한 일들을 깊은 바다에서 보나니

25여호와께서 명령하신즉 광풍이 일어나 바다 물결을 일으키는도다

26그들이 하늘로 솟구쳤다가 깊은 곳으로 내려가나니 그 위험 때문에 그들의 영혼이 녹는도다

27그들이 이리저리 구르며 취한 자 같이 비틀거리니 그들의 모든 지각이 혼돈 속에 빠지는도다

28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시고

29광풍을 고요하게 하사 물결도 잔잔하게 하시는도다

30그들이 평온함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그들이 바라는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

31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32백성의 모임에서 그를 높이며 장로들의 자리에서 그를 찬송할지로다(23-32)

 

23절은 앞서 살펴본 세 개의 사이클에 이어 네 번째 사이클을 시작합니다. 네 번째 사이클은 여러 면에서 앞선 경우들과 사뭇 달라서, 형식과 주제의 측면에서 명확한 발전의 양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먼저 주제적 측면을 생각해봅시다. 묘사하려는 대상이 자연물에 의해 고통을 당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두 번째 사이클의 경우(11), 미련한 자라는 세 번째 사이클(17)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23절에 의하면 그들은 배를 바다에 띄우고 일하는 자들일 뿐이지, 어떤 죄악을 범한 자들은 아닙니다. 24절은 그들이 경험한 것이 여호와의 행하신 기이한 일들이라고 명확하게 말합니다. 즉, 네 번째 사이클은 사람의 연약함이나 죄악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여호와 하나님 그분의 일하심에 확실하게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여호와께서 그들을 바다 물결을 통해서 위로 올리기도 하시고 밑으로 내리기도 하십니다(26). 하나님께서 그 뜻대로 올리기도 하시고 내리기도 하신다는 사실은 33-45절에 이르러 매우 구체적인 신학적 주제로 연결될 것이기 때문에 기억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 25-27절은 사람의 인생이 여호와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바다 물결의 주제를 통해서 이야기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27절은 광풍에 흔들리는 인생을 취한 자 같다고 표현하면서, ‘그들의 지혜가 혼돈스럽게 된다’고 말하는데, 여기에 지혜의 주제가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살펴야 합니다. 세 번째 사이클에서는 미련한 자의 주제를 등장시켰는데, 네 번째 사이클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일하심 앞에서 사람의 지혜는 아무런 소용도 없고 혼돈스러움으로 그 종말을 맞게 될 뿐임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23-32절은 자연물의 경우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일하심에 보다 집중하고 있다는 주제적 특징을 보입니다.

이제 구조적인 특징은 어떤지도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전의 사이클들은 후렴구1과 후렴구2가 모두 각각 두 절 정도의 분량이었는데, 네 번째 사이클에서는 그 후렴구들이 더 길어지는 확장 현상을 보입니다. 후렴구 1은 28-30절인데, 총 세 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28절에서 ‘부르짖음’과 ‘구원하심’의 주제를 설명한 후, 29-30절에서는 광풍을 잠잠하게 하시고 원하는 항구로 돌아가서 평안을 누리게 하신다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분량이 약간 길어진 것 정도 외에 큰 특징은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후렴구2는 31-32절인데, 일단 두 절 분량으로 생각됩니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그분을 찬양하라는 후렴구의 기본적인 메시지를 전달한 후, 백성의 모임과 장로의 자리에서 여호와를 찬송하라고 권고합니다. 만약 우리가 후렴구가 여기서 마쳐지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후렴구는 이전 사이클들의 경우와 크게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33-43절의 내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33-43절은 놀랍게도, 더 이상 지금까지 우리가 읽어온 107편의 사이클 형태를 전혀 취하지 않습니다. 고난에 대한 묘사가 등장하지도 않으며, 후렴구 1이나 후렴구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33절 이하의 여러 가지 경우에 네 번째 사이클의 중심 이미지였던 ‘물’과 관련된 표현들이 계속해서 등장합니다. 학자들마다 견해가 다르겠으나, 우리는 33-43절을 네 번째 사이클에서의 후렴구2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입니다. 즉,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부연 구절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편의상 이 부분을 따로 구분하여 설명해보도록 합니다.

 

인자하심을 지혜로 이해하라는 명령(33-43)

우리의 삶에서도 하나님의 심판과 회복의 손길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교만을 꺾으시고 겸손하게 만드실 때가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회개하고 돌이킬 때, 하나님의 회복과 축복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역사 속에서 그분의 성품을 배우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신뢰해야 합니다.

 

33여호와께서는 강이 변하여 광야가 되게 하시며 샘이 변하여 마른 땅이 되게 하시며

34그 주민의 악으로 말미암아 옥토가 변하여 염전이 되게 하시며

35또 광야가 변하여 못이 되게 하시며 마른 땅이 변하여 샘물이 되게 하시고

36주린 자들로 거기에 살게 하사 그들이 거주할 성읍을 준비하게 하시고

37밭에 파종하며 포도원을 재배하여 풍성한 소출을 거두게 하시며

38또 복을 주사 그들이 크게 번성하게 하시고 그의 가축이 감소하지 아니하게 하실지라도

39다시 압박과 재난과 우환을 통하여 그들의 수를 줄이시며 낮추시는도다

40여호와께서 고관들에게는 능욕을 쏟아 부으시고 길 없는 황야에서 유리하게 하시나

41궁핍한 자는 그의 고통으로부터 건져 주시고 그의 가족을 양 떼 같이 지켜 주시나니

42정직한 자는 보고 기뻐하며 모든 사악한 자는 자기 입을 봉하리로다

43지혜 있는 자들은 이러한 일들을 지켜 보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33-43)

 

33-43절은 네 번째 사이클의 후렴구2의 연장선상에 있는 부연 설명입니다. 그런데 그 문예적 형식은 지금까지 107편에서 나오지 않은 형태로, 한 가지 주제를 집중적으로 다루어 나갑니다. 그 주제는 ‘여호와의 주권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을 주관하는 능력을 가지고 계셔서 그 뜻대로 모든 일들을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들에서는 주로 ‘대조’의 기법을 활용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묘사합니다. 33-35절은 먼저 자연물에 대한 하나님의 능력을 말하는데, 사실 이 내용들은 상징적 의미를 지녔습니다. 33-34절은 여호와께서 강이 변하여 광야가 되게 하시며 옥토가 변하여 염전이 되게 하신다 하여 심판적 의미의 신적 능력을 묘사했고, 35절은 광야가 변하여 연못이 되게 하신다 하여 구원적 의미의 신적 능력을 묘사했습니다. 심판과 구원을 뜻대로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36-39절은 33-35절의 내용을 인간의 삶과 연결시킵니다. 광야가 변하여 연못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주린 자들로 하여금 그 연못 곁에 살면서 성읍을 건설하게 하시고(35), 밭을 경작하고 풍성한 소출을 거두게 하십니다(36). 37-38절은 하나님의 능력을 인간의 번성과 감소라는 주제로 표현해냅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면 번성하게 되지만(38), 하나님께서 뜻을 달리하시면 그 수가 감소하게 됨을 말합니다(39). 모든 내용들의 초점은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행위에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40-41절은 이런 모든 내용을 인간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로보다 구체적으로 표현합니다. 40절은 여호와께서 고관들에게서 풍성한 삶을 빼앗아 가신다고 말하며, 41절은 여호와께서 궁핍한 자들을 높이신다고 말합니다. 40-41절의 의미는 단순히 사람의 높고 낮음에 있지 않습니다. 초점은 높이고 낮추시는 권세가 오직 여호와께 있다는 데 있습니다. 42-43절은 이러한 모든 내용을 요약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제까지 사람들에 대해 평가하는 표현이 없었던 것과는 달리, 42-43절은 사람의 중심과 행위에 대한 평가적 표현들이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42절을 보면, 인간을 정직한 자와 사악한 자로 구분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사람을 두 종류로 나눠 표현하는 것은 주로 잠언에 등장하는 방식으로, 전형적인 지혜문학의 문예 형태입니다. 107편이 지혜적 요소를 지니고 있음이 더 분명해집니다. 정직한 자 즉 곧은 길을 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행위를 보며 기뻐할 것이나, 사악한 자는 하나님의 통치로 인해 낮아지고 심판받게 될 것이기에 그 입을 결국 봉하게 될 것입니다. 43절은 107편 전체를 결론지어 주는 구절이며, 동시에 시편 제5권을 열어주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43절은 인간을 두 범주로 나누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반드시 되어야 하는 한 범주를 소개합니다. 바로 ‘지혜 있는 자’ 즉 ‘지혜자’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지혜자입니까? 43절 후반절이 밝히 보여주는데, 바로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은 자들’입니다. 지혜라는 주제와 언약적 성실성이라는 주제는 좀처럼 함께 등장하지 않는데, 43절에서 함께 연결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인자하심 즉 언약적 성실성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인데, ‘깨닫다’라는 말은 지혜 어휘입니다. 즉 인자하심이 무엇인지 지혜의 관점에서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동안 시편 1-4권을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적 성실성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특별히 105편과 106편에서는 아브라함 언약이 주어진 이후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언약을 성실하게 지키시고 성취해 오셨는지를 세밀하게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하나님의 언약적 성실하심을 더 자세하게 살펴야 하며, 그것도 지혜의 관점에서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지혜는 단순히 삶을 살아내는 기술 정도를 넘어서서, 구속역사를 삶의 구체적인 현장에 적용한 개념으로 이해됩니다. 시편 107편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인생들의 여러 가지 경우를 네 개의 사이클로 보여주는데, 후반부로 갈수록 여호와 하나님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하심을 깨닫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는 것과, 언약에 대한 성실하심에 대한 문제, 즉 시편 4-5권의 주제인 포로공동체의 회복과 다윗 언약의 회복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역시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라는 주제가 중요함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난 속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자비를 보았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떠한 폭풍이나 광야를 만나더라도, 하나님께 부르짖고 그분의 구원을 경험할 수 있음을 기억합시다. 그리고 그분의 은혜에 감사하며 찬양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선하신 목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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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107-01)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고난 속의 구원

시편 107편 1-22절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선하시며, 고난 중에도 그 선하심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영적 어둠과 고난에 빠지지만,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우리를 찾아내어 구원하십니다. 이러한 고난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겸손하게 하시고, 그의 계획을 이루십니다. 우리의 고난 속에서도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하십니다.

 

  • 시편 107편은 시편 제5권을 열어주는 첫 시편입니다. 핵심 내용은 하나님께서 그 인자하심을 따라 부르짖는 자들을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107편은 찬양시의 성격과 지혜시의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전체 구조를 보면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를 두 후렴구의 반복을 통해 제시하고 있습니다. 1-22절은 그 전반부로서 광야에서 거주하던 자들 및 사망의 그늘에 매인 자들을 구원하신 내용을 제시합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는 명령(1)

하나님께서는 항상 선하시며, 그분의 선하심은 변치 않습니다. 우리의 삶에 좋은 일만 있을 때가 아니라,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우리가 고난 중에 있을 때에도, 그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1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1)

 

1절은 ‘여호와께 감사하라’는 명령형으로 시작하면서 107편 전체의 내용을 규정짓습니다. 107편은 하나님께 감사의 찬양을 올리는 찬송시입니다. 그런데 그 찬양의 이유는 바로 여호와께서 선하시다는 것, 그리고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1절은 이미 살펴본 106편 1절의 내용과 같습니다. 106편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규명해냈습니다. 언약공동체의 맥락에서 인자하심을 풀어낸 것입니다.

그런데 107편은 106편보다 훨씬 더 넓은 범주로 인자하심의 주제에 접근합니다. 광야에서 구원받은 자들(3-9), 흑암으로부터 구원받은 자들(10-16), 미련함에서 구원받은 자들(17-22), 바다에서 풍랑으로 고통 받던 자들(23-32) 등 여러 범주의 사람들을 예로 들면서, 일반적 의미의 인간 인생 전체를 다루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방황하던 자들을 구원하신 여호와(2-9)

우리는 때때로 인생의 광야에서 방황하며 길을 잃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찾아내어 구원하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고난과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깊은 통찰을 제공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시는지를 인지해야 합니다.

 

2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들은 이같이 말할지어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그들을 속량하사

3동서 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도다

4그들이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주할 성읍을 찾지 못하고

5주리고 목이 말라 그들의 영혼이 그들 안에서 피곤하였도다

6이에 그들이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건지시고

7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주할 성읍에 이르게 하셨도다

8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9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2-9)

 

107편에서 가장 주목해서 살펴야 할 부분은 ‘후렴구’를 사용하는 방식입니다. 후렴구를 사용하는 대개의 시편들은 한 개의 후렴구를 사용하는 데 비해, 107편은독특하게도 두 개의 후렴구를 사용하는 구조를 보입니다. 먼저는 인생이 당하는 고통을 묘사한 후, 후렴구 1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표현하고, 그 이후 후렴구를 통하여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기적을 찬송합니다. 이 세 가지 요소(고통 묘사-후렴구1-후렴구2)가 하나의 패턴(사이클)을 형성하게 되고, 이런 사이클이 반복됨으로 시의 흐름이 전개되어 나갑니다. 후렴구은 “그들이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건지셨다”(6,13,19,28)로 시작하고, 후렴구 2는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8,15,21,31)로 시작합니다.

그 첫 번째 사이클이 2-9절에 나타납니다. 먼저 2절은 ‘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들’을 언급합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의 영원함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받은 속량이란 과연 무엇입니까? 2b-3절은 그 속량을 ‘동서남북 각 지방에서 모으신 것’으로 표현해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어려움들로부터, 여러 고난으로부터, 그 백성들을 구원하셨다는 비유적 표현일 것입니다. 4절부터 그 속량하심을 더 구체적으로 서술합니다. 이 문단이 묘사하는 대상이 4-5절에 나타납니다. 바로 ‘광야 사막길에서 방황하며 거주할 성읍을 찾지 못하던 자들’입니다. 그들은 주리고 목이 말라 영혼이 곤한 자들이었습니다. 이러한 묘사에 이어, 후렴구1이 6-7절에, 후렴구2가 8-9절에 연속하여 나타납니다. 후렴구1은 앞서 말한 것처럼 ‘근심 중에 부르짖으매 고통에서 건지셨다’라는 문구로 시작하는데, 그 결과 그들이 거주할 성읍에 이르렀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문제는 거주할 성읍이 없는 것이었는데(4), 이제 거주할 성읍이 생겼으므로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후렴구2는 이러한 여호와의 구원 역사를 근거로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인하여 그를 찬송하라’라고 명령합니다. 이 표현에서 우리는 두 가지에 주목해야 합니다. 첫째는 ‘인자하심’이라는 주제가 언급되는데, 이는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언약적 성실성을 가리키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구체적인 역사적 정황에 대한 언급 없이 서술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106편에서는 구체적인 역사 정황을 제시하였지만, 107편은 그러한 정황 제기 없이 단순히 ‘거주할 성읍이 없었다가 속량 받아 성읍을 얻었다’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둘째는 ‘인생’이라는 표현입니다. 이 말은 인류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서, 좀 더 보편적인 인생을 가리키고 있는 듯합니다. 9절은 이러한 속량 받은 은총을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고 주린 영혼을 좋은 것으로 채우신다’라고 말하면서 보편적인 뉘앙스로 마무리합니다.

 

흑암에 앉은 자들을 구원하신 여호와(10-16)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자신의 길을 갈 때, 깊은 영적 어둠과 고난에 빠지게 됩니다. 이런 순간에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겸손하게 만드시고, 우리의 힘만으로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십니다. 우리가 영적, 정서적, 육체적으로 깊은 고난과 절망 속에서 방황할 때,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우리를 구원해 내시는 놀라운 은혜를 강력하게 경험하게 됩니다.

 

10○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11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12그러므로 그가 고통을 주어 그들의 마음을 겸손하게 하셨으니 그들이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었도다

13이에 그들이 그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14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들의 얽어 맨 줄을 끊으셨도다

15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16그가 놋문을 깨뜨리시며 쇠빗장을 꺾으셨음이로다(10-16)

 

이제 두 번째 사이클을 살펴봅시다. 이 사이클도 첫 번째 사이클과 유사한 방식으로 전개됩니다. 이 사이클이 묘사하는 대상은 10절이 표현하고 있는 대로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아 곤고와 쇠사슬에 매인 자들’입니다. ‘흑암과 사망’은 죽음의 이미지를 제공하는데, 실제로 이들이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기보다는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매우 심한 환란 가운데 빠져 죽은 자들처럼 되었거나 혹은 죽음 직전까지 내려갔다는 뜻입니다. 이들이 이런 고통을 당하게 된 이유는 11절에 주어지고 있는데,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낮추시고 돕는 손길을 거두어가셨습니다(12). 10-12절에서 이렇게 고난에 대한 묘사가 주어진 후, 후렴구이 13-14절에, 후렴구2가 15-16절에 나타납니다. 후렴구1은 이전과 동일하게 부르짖음과 구원의 역사를 언급하며 시작하여(13), 흑암과 사망의 고통에서 건져주셨다고 말하여(14),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서술합니다. 후렴구2 역시 이전과 동일하게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인하여 여호와를 찬송할 것을 요구합니다(15). 이유는 그가 놋문과 쇠빗장을 꺾으사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16). 전반적로 볼 때, 두번째 사이클인 10-16절은 첫 번째 사이클과 거의 동일합니다. 주제만 ‘흑암에 앉은 자’로 바뀌었을 뿐,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노래한다는 점에서 동일하고, 또한 후렴구1과 후렴구2의 분량이 각각 2절로 되어 있는 점 역시 동일합니다. ‘반복’을 통해 강조에 이르려고 함을 알 수 있습니다.

 

미련한 자들을 구원하신 여호와(17-22)

우리의 절망과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그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죄악으로 인한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은 구원의 손길을 내미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치유하고 소망을 주며, 성경의 약속과 진리는 우리를 회복시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자로서 그의 인자하심을 찬양하고 감사하며, 선하심을 선포해야 합니다.

 

17미련한 자들은 그들의 죄악의 길을 따르고 그들의 악을 범하기 때문에 고난을 받아

18그들은 그들의 모든 음식물을 싫어하게 되어 사망의 문에 이르렀도다

19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구원하시되

20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

21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22감사제를 드리며 노래하여 그가 행하신 일을 선포할지로다(17-22)

 

세 번째 사이클 역시 첫 번째와 두 번째 사이클과 유사합니다. 다만 묘사하는 대상이 조금 특별해 보이는데 바로 ‘미련한 자’입니다. 미련한 자란 구약성경 안에서 ‘지혜문학’에 나오는 주제로, 언약을 강조하는 구속사 영역보다는, 그 구속사를 경험한 백성들의 삶을 다루는 지혜의 영역에 속합니다. 107편이 ‘지혜’의 주제를 강조하기 원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발견하게 되는 부분입니다. 17-18절은 상황 묘사를 제공하는데, 미련한 자들이 죄악의 길을 따라 악을 범하였기에, 음식이 그들을 혐오하는 데까지 이르렀고, 결국 사망의 문에 이르렀다고 말합니다. 이어서 후렴구1인 19-20절과 후렴구2인 21-22절이 차례로 등장합니다. 후렴구1은 이전과같이 ‘부르짖음’과 ‘구원하심’을 말한 후, 구원의 방법으로 말씀을 보내셨다는 것을 서술합니다. 후렴구2는 이전과 같이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을 찬양하라고 권고한 후에, 감사제를 드리자고 말합니다. 여기서 ‘감사제’로 번역된 단어는 ‘토다’인데, 1절의 ‘감사하라’ 및 21절의 ‘찬송할지로다’에서 공통적으로 사용된 ‘야다’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입니다. 세 번째 사이클은 ‘미련함’의 주제를 등장시킨 후 ‘감사제’의 주제까지 연결되었습니다. 이러한 주제적인 발전이 눈에 띄지만, 전체적인 분량이나 흐름은 첫 번째와 두 번째 사이클과 거의 동일합니다.

요약하면 1-22절은 여호와께 감사하라는 명령으로 시작하여 세 번의 사이클을 통해 여호와의 구원을 노래하며, 그분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한 기적을 찬양할 것을 명령하고 있고, 형태적으로 큰 변화는 없습니다. 지혜의 주제가 점점 더 발전적으로 등장하고 있음을 기억하면 됩니다. 후반부인 23절부터는 상당히 다양한 형태적, 주제적 발전 양상을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인자하심으로 우리의 고난을 돌보시며 구원의 손길을 내미십니다. 우리의 삶이 어떠한 고난에 처하든, 하나님께서는 그 속에서도 여전히 선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의 마음으로 찬양해야 합니다.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을 믿고 그의 구원을 경험하며, 그의 인자하심을 세상에 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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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106-03)

 


지도자를 넘어뜨린 불신앙

시편 106편 32-48절


 

철의 녹은 겉면에만 얇게 슬면 사포로 닦아내면 되지만, 속까지 깊이 녹이 슬면 사포로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그 때는 도가니에 넣고 녹여야 합니다. 또한 다리가 긁혀서 피가 나면 약을 바르면 되고, 뼈에 금이 가면 깁스를 하면 되지만, 다리뼈 전체에 암세포가 가득하거나 썩어가고 있으면 자르는 수밖에 없습니다. 홍수 심판은 도가니에 깊이 녹슨 철을 넣는 것과 같고, 다리를 자르는 수술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 본문은 시편 106편의 마지막 시로서 결론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의 성실성, 즉 인자하심에 대한 최종적인 메시지를 제공합니다. 과거에 조상들에게 인자하심을 베푸신 여호와이시니, 현재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인자하심을 베풀어주셔야 한다는 것이 그 핵심입니다. 시편 4권을 마무리하면서 106편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한 간절한 기대와 신뢰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므리바에서의 반역(32-33)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곧 죄의 다스림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매 순간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을 것인지, 죄의 다스림을 받을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마음대로, 원하는대로 하는 것이 자유이고 행복인 것 같지만, 그것은 바로 죄의 다스림을 받는 것임을 기억해야겠습니다.

 

32그들이 또 므리바 물에서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으므로 그들 때문에 재난이 모세에게 이르렀나니 33이는 그들이 그의 뜻을 거역함으로 말미암아 모세가 그의 입술로 망령되이 말하였음이로다(32-33)

 

앞선 금송아지 숭배 사건, 브올의 바알 사건에 이어서 32-33절은 이스라엘이 므리바에서 하나님께 반역한 사건을 서술합니다. 므리바 사건은 출애굽기 17장 및 민수기 20장에 두 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중 본문이 언급하는 것은 민수기 20장으로, 모세가 반석을 두 번 내려침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지 못하여 여호와께서 모세를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신 사건입니다.

32-33절에 따르면, 백성들이 여호와를 노하시게 했는데, 그로 인해서 재난이 모세에게까지 임하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이 모세의 영혼을 분노하게 만들어, 모세가 민수기 20:10에서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라’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핵심은 백성들뿐 아니라 모세까지도 잘못을 범하게 되었다는 점을 지적하는 데 있습니다. 모세는 19-23절에 언급한 금송아지 사건에서는 하나님께 기도하여 언약을 다시 체결하게 하는 중심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세조차도 부족하여 죄를 범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전체는 지도자와 백성들을 막론하고 하나님 앞에 범죄한 자들이었습니다. 시편 4권의 맥락에서 볼 때, 모세의 범죄를 언급하는 이 구절은 의미심장합니다. 시편 4권을 시작하는 90편은 모세의 기도이고, 사람의 인생은 창조주이신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님을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시편 4권을 끝내는 106편에서는 그 모세조차도 하나님께 범죄한 인생이었음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4권 전체의 흐름에 있어서 사람의 자리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역사와 구원의 주인공이실 뿐입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포함한 이스라엘 민족의 반역에 과연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사사 시대의 우상숭배와 이방 압제의 역사(34-4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나안 땅 사람들을 진멸하라고 했던 것은 그들이 이방인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에게 죄가 가득 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죄를 심판하는 도구가 이스라엘 자손들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이스라엘 자손들의 죄가 가득 찼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앗수르 제국과 바빌론 제국을 도구로 삼아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를 치셨습니다.

 

34그들은 여호와께서 멸하라고 말씀하신 그 이방 민족들을 멸하지 아니하고 35그 이방 나라들과 섞여서 그들의 행위를 배우며 36그들의 우상들을 섬기므로 그것들이 그들에게 올무가 되었도다 37그들이 그들의 자녀를 악귀들에게 희생제물로 바쳤도다 38무죄한 피 곧 그들의 자녀의 피를 흘려 가나안의 우상들에게 제사하므로 그 땅이 피로 더러워졌도다 39그들은 그들의 행위로 더러워지니 그들의 행동이 음탕하도다 40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맹렬히 노하시며 자기의 유업을 미워하사 41그들을 이방 나라의 손에 넘기시매 그들을 미워하는 자들이 그들을 다스렸도다 42그들이 원수들의 압박을 받고 그들의 수하에 복종하게 되었도다 43여호와께서 여러 번 그들을 건지시나 그들은 교묘하게 거역하며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낮아짐을 당하였도다(34-43)

 

본문은 이스라엘이 우상을 숭배한 역사를 상세하게 기술해 내려갑니다. 먼저 34-39절은 우상숭배 사건을 설명합니다. 34-36절은 사사기 1-2장의 내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방 백성의 영향으로 이스라엘은 결국 이방의 우상까지 섬기게 되었습니다. 37-39절은 이방 제사 방식을 받아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녀를 죽여 제물로 바친 죄악상을 기술합니다. 여기서 38절은 매우 중요한데, 자녀들의 피를 흘려 제물로 바친 것은 우상숭배의 죄일 뿐 아니라, 동시에 살인죄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38절은 도피성 규정을 설명하는 민수기 35:33과 연결됩니다. 도피성은 하나님 나라의 안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제도로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가나안 땅이 하나님의 안식을 실현시키기 위한 영역임을 보여줍니다. 살인 행위에 대한 보복 때문에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는 일을 방지하는 것이 도피성 규정임을 생각할 때, 38절의 ‘피가 땅을 더럽혔다’는 언급처럼 하나님 나라의 기업인 가나안 땅에서 우상을 숭배하고 자녀를 제물로 바치는 살인죄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39절은 이러한 이스라엘의 행위를 ‘음탕하다’고 규정합니다. 여기서 ‘음탕하다’라고 번역된 단어는 ‘자나’로, ‘음란한 행위를 하다’ 혹은 ‘간음하다’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우상숭배를 함으로써 남편이자 주인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에게로 떠나갔다는 죄악상을 명확하게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40-43절은 사사기에 나타나는 이스라엘의 배역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을 서술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배역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고 돌이키시기 위해 이방 나라를 사용하여 이스라엘을 압제하게 하셨습니다. 이를 40-41절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업을 미워하셔서 이방 나라의 손에 넘기셨다고 표현합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 밖으로 포로로 잡혀갔다기보다는 이방 나라들이 이스라엘 땅에 들어와서 그들을 사로잡아 사실상의 포로 상태로 만들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42절이 말하듯이,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주신 가나안 땅에서 원수들에게 복종하게 되는 수치를 경험하였습니다. 43절은 이러한 우상숭배와 열방 압제가 많이 일어났음을 지적합니다. 사사기에서 말하듯이, 이스라엘의 배도는 계속 반복되었고, 그 배역의 수준은 점점 더 심해져만 갔습니다.

 

인자하심을 베푸신 여호와(44-46)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받은 유업을 멸시하니 하나님도 미워하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미워하고 도움의 손을 뿌리치니 하나님도 도움의 손길을 거두시고 그들을 미워하는 이방의 손에 자기 백성을 넘기셨습니다. 여러 번 용서하고 구원하셨지만, 교묘하게 거역하여 스스로 원수의 압제와 굴종을 자초한 결과였습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의 사랑은 죄악을 묵인하는 맹목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44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실 때에 그들의 고통을 돌보시며 45그들을 위하여 그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 크신 인자하심을 따라 뜻을 돌이키사 46그들을 사로잡은 모든 자에게서 긍휼히 여김을 받게 하셨도다(44-46)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방의 손에 넘긴 것으로 끝내지 않으셨고, 구원의 손길을 베푸셨습니다. 사사기에서는 백성들이 부르짖을 때 사사를 보내서 구원하신 패턴을 볼 수 있는데, 44-46절은 사사기의 패턴 자체를 기술하기보다, 그렇게 구원하신 하나님의 언약적 성품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44절은 ‘백성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실 때에 그들의 고통을 돌보셨다’라고 말하는데, 이 구절은 107편에 나타나는 후렴구와 유사하므로 주목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45절은 여호와께서 백성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실 때, 그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인자하심을 베푸셨다는 사실을 선언합니다. ‘인자하심’이란 하나님께서 언약을 반드시 성취하시고야 만다는 언약적 성실성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을 한 번 언약 백성으로 삼으셨기에,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며, 결국 구원하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백성들의 범죄와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실패하지 않으며, 하나님 자신의 성실하심으로 인해서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구원에 대한 요청(47)

악인들을 향한 심판이 하나님 나라 계획과 언약의 포기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르짖는 소리에 다시 언약을 기억하시고 긍휼을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끝이 어딘지 모릅니다. 항상 근신해야 하지만, 동시에 아무도 쉽게 포기해서도 안 됩니다.

 

47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하사 여러 나라로부터 모으시고 우리가 주의 거룩하신 이름을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찬양하게 하소서(47)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106편 전체의 내용은 이스라엘의 반역과 배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인내하시면서 그들에게 인자하심을 베푸셨다는 데 핵심이 있습니다. 이 모든 서술들은 ‘과거에 행하신 인자하심의 역사’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과거 역사의 서술은 그 목적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과거 역사의 기술은 항상 현재를 향한 투영이 목적입니다. 과거를 배움으로써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건설하는 것이 역사 서술의 목적인 것입니다. 과거에 행하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말하는 것은, 현재의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인자하심을 행하실 것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점이 47절에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47절은 여호와를 ‘우리 하나님’으로 부르면서 시작합니다. 이 표현은 출애굽기 6:7의 언약 공식의 일부로서, 자신들이 하나님과 언약 관계를 맺고 있음을 상기시키는 효과가 있습니다. 시편 4권의 맥락에서 보자면, 포로기 상황에 처해 있는 이스라엘은 과거에 행하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근거로, 자신들을 구원하여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47절은 ‘우리를 구원하사 여러 나라로부터 모으소서’라고 말합니다. 과거에도 이스라엘은 범죄하였고 언약 관계가 깨졌었지만,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인해 회복되었었으니, 그 인자하심의 은혜를 지금 다시 주셔서 깨어진 언약 관계가 회복될 수 있도록 동일한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송영(48)

아직 고향 땅 예루살렘에 이르지는 못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그들을 구원하시고, 열방 중에 흩어진 그의 백성을 다시 한번 모아주셔서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감사하며 찬양하게 해 줄 것을 간구합니다. 그리고 모인 청중들을 향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토록 찬양하라고 외친 후 할렐루야로 기도를 마칩니다.

 

48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양할지어다 모든 백성들아 아멘 할지어다 할렐루야(48)

 

본문은 106편을 마무리하는 구절인 동시에 시편 4권 전체에 대한 송영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영원할 것을 노래합니다. 인자하심을 베푸시는 여호와는 영원하시고, 온 피조물 가운데 항상 계시는 왕이시며, 그 인자하심은 영원합니다. 따라서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도, 스스로는 연약하고 허물이 많지만,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와 그분의 인자하심을 기억하고 의뢰할 때 다시금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106편 및 제4권이 노래하는 여호와의 왕 되심에 대한 마지막 메시지입니다.


하나님보다 우리를 크게 생각하는 오만함을 버리고, 내 인생을 하나님보다 더 잘 꾸려갈 수 있다는 착각도 버리고, 우리를 찾아와 주시는 영원한 사마리아사람, 영원한 이웃인 주님의 은총을 덧입어, 우리가 서 있는 곳을 은혜와 찬양의 터전으로 가꾸어가는 한 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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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106-02)


불신앙의 증거인 원망과 불평

시편 106편 13-31절


 

감사는 우리의 믿음 생화을 굉장히 중요한 요소입 니다. 사도 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나라”(살전 5:18)라고 하였습니다. 감사하지 못하는 상황 가운데 있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지 않게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감사의 여부는 우리의 믿음의 척도라도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 감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특권입니다.

 

  • 본문은 시편 106편의 중반부로서, 언약 관계에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인자를 베푸신 이야기들을 이어 나갑니다. 고라 도당이 제사장이 되려 했던 사건, 금송아지 숭배 사건, 바알브올 사건 등이 주요한 스토리 라인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모든 기술의 초점은 이스라엘을 향해 끝까지 인내하시며 주도적으로 언약을 성취해나가신 하나님께 있습니다.

 

광야에서 반역한 이스라엘(1)(13-15)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잊지 않고 항상 그분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쉽게 욕망에 휘둘릴 수 있음을 보여주며, 우리의 욕망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최선의 것을 주시는 분이시며, 우리의 욕망보다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고 기다릴 때, 그분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고 영혼을 강건하게 하십니다.

 

13그러나 그들은 그가 행하신 일을 곧 잊어버리며 그의 가르침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14광야에서 욕심을 크게 내며 사막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였도다

15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요구한 것을 그들에게 주셨을지라도 그들의 영혼은 쇠약하게 하셨도다(13-15)

 

이스라엘의 반역은 망각과 조급함에서 왔습니다. 스스로 넘지 못할 장애물을 만나면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그 어려움 주신 뜻을 상고하기보다 속히 불평과 원망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불평과 시험에 어울리는 재앙도 같이 주셨습니다. 주의 뜻을 구하고 주의 때를 기다리지 않은채 내 욕심이 채워지는 것은 결코 축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꺾고서라도 꼭 이뤄야 할 만큼 중요하고 절박한 일은 세상에 없습니다.

13절부터는 1-12절에 이어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반역한 일들을 설명해나갑니다. 먼저 13-15절은 이스라엘의 반역의 패턴을 제시합니다. 13절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잊었음을 지적하고, 광야에서 욕심을 내어 하나님을 시험했다고 평가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하신 일’을 ‘잊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하신 일을 잊게 될 때, 그들은 욕심에 떨어지게 되며, 결국 하나님을 시험하게 됩니다. 이때 벌어진 결과를 15절이 서술하는데, 바로 그들이 요구한 것을 주시기는 했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그들이 풍성하게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쇠약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은 핵심이 아니고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그 결과 오히려 더 쇠약해질 뿐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기억할 때,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게 되며, 쇠약해지지 않는 건강한 신앙의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습니다.

 

고라 도당의 반역(16-18)

우리는 교회와 공동체 안에서 시기와 반역의 죄를 경계하며,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들을 존중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두려워하고, 그분의 뜻에 벗어난 삶을 살지 않도록 항상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시기와 반역은 신앙과 공동체를 파괴하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겸손히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16그들이 진영에서 모세와 여호와의 거룩한 자 아론을 질투하매

17땅이 갈라져 다단을 삼키며 아비람의 당을 덮었고

18불이 그들의 당에 붙음이여 화염이 악인들을 살랐도다(16-18)

 

16절부터는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행한 반역의 일들을 차례로 언급합니다. 먼저 16-18절에서는 민수기 16장에 나오는 고라 일당의 반역 사건을 언급합니다. 그들은 모세와 아론을 질투했습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통치 질서와 구속 사역의 구조를 뒤흔들려 한 사건으로, 사회 조직적인 의미에서 해석하기보다 구속사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반역으로 해석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 반역한 고라의 무리에게 지진과 불이 벌로 주어졌습니다. 17-18절은 땅이 갈라져 그들을 덮었고 불이 그들을 살랐음을 설명합니다.

 

금송아지 숭배의 반역(19-23)

은혜에 대한 망각은 우상숭배를 낳습니다. 이스라엘은 모세가 없는 사이에 아론을 부추겨 황금 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했습니다. 출애굽의 구원자를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홍해에서 보여주신 이적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받은 구원의 은총을 멸시하고, 스스로 구원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19그들이 호렙에서 송아지를 만들고 부어 만든 우상을 경배하여

20자기 영광을 풀 먹는 소의 형상으로 바꾸었도다

21애굽에서 큰 일을 행하신 그의 구원자 하나님을 그들이 잊었나니

22그는 함의 땅에서 기사와 홍해에서 놀랄 만한 일을 행하신 이시로다

23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멸하리라 하셨으나 그가 택하신 모세가 그 어려움 가운데에서 그의 앞에 서서 그의 노를 돌이켜 멸하시지 아니하게 하였도다(19-23)

 

19절부터는 또 하나의 사건을 해설합니다. 바로 출애굽기 32-34장의 금송아지 숭배 사건입니다. 이 금송아지 숭배 사건은 고라 도당의 반역보다 먼저 일어난 일인데. 106편에서는 고라 사건 뒤에 배열되어 있습니다. 106편의 서술이 연대기적인 순서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16-18절의 고라 사건은 한 가족과 무리의 반역이었던 데 반해, 19-23절의 금송아지 숭배 사건은 언약 백성 전체의 반역이었습니다. 더 중요한 사건을 뒤쪽에서 취급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금송아지 사건은 가장 근원적인 의미에서의 반역 사건입니다.

19절이 말하는 바와 같이. 이스라엘은 언약을 체결했던 호렙산에서 모세가 그 산 위에서 하나님과 만나 성막 건설에 대해 듣고 있던 그 순간에,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하였습니다. 송아지를 만들고 경배했는데, 20절이 서술하는 바와 같이 그 사건은 그들의 영광을 소의 형상으로 바꾼 행위였습니다. 개역개정에는 ‘자기 영광’으로 번역되어 있지만, 원문을 직역하면 ‘그들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심 받은 영광을 우상으로 대체하고 말았던 반역의 행위입니다. 이 사건의 의미는 21-22절에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그들을 위해서 행하신 일과 그 구원자 하나님을 그들이 ‘잊었다’는 것입니다. 22절이 말하는 애굽 땅에서의 재앙은 105편에서 서술되었고, 홍해에서 행하신 일은 106:1-11에서 서술되었습니다.

105편과 106편 초두에서는 ‘기억함’의 증요성이 선포된 바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고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점은 13-15절에서도 반복적으로 제시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또다시 하나님께서 형하신 일을 잊은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인간적인 생각에 빠져 금송아지를 숭배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에 대하여 진노하시고 심판하셔야 마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3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또다시 용서하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며, 동시에 하나님께서 구속사 가운데 거듭 행하신 패턴이기도 합니다. 23절의 내용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럼으로써 백성들과 하나님 사이의 갈라짐이 메꾸어지고, 진노함이 돌이켜졌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반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또다시 언약의 성실함을 베푸셨습니다.

 

광야에서 반역한 이스라엘(2)(24-27)

약속에 대한 불신은 멸망을 낳습니다. 가나안 땅을 정탐한 사람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모두 가나안 사람들의 위용에 놀라 기쁨의 땅을 선물로 받기를 거절하였습니다. 도리어 원망의 소리는 키우고 하나님의 음성에는 귀를 막았습니다. 그 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현실의 난관 앞에서 허튼 소리로 전락한 것입니다.

 

24그들이 그 기쁨의 땅을 멸시하며 그 말씀을 믿지 아니하고

25그들의 장막에서 원망하며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아니하였도다

26이러므로 그가 그의 손을 들어 그들에게 맹세하기를 그들이 광야에 엎드러지게 하고

27또 그들의 후손을 뭇 백성 중에 엎드러뜨리며 여러 나라로 흩어지게 하리라 하셨도다(24-27)

 

24-27절은 이스라엘이 다시금 광야에서 하나님께는 역한 사실을 기술합니다. 24-25절이 먼저 백성들의 죄악의 내용을 고발하는데, 그들이 기름의 땅을 멸시하고 말씀을 믿지 않았고, 장막에서 원망하고 주님께 물 순종했다는 사실입니다. 26절은 그 결과를 명시합니다. 하나님께서 손을 들어 백성들을 광야에 엎드러지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손’은 신인동형론적 표현으로, 실제로 하나님께 손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을 인간의 육신적 형태로 비유하여 표현한 것으로,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손’은 심판과 구원을 동시에 상징합니다. 궁극적인 하나님의 신현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26절에서 하나님의 손은 불순종하고 언약을 저버린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27절은 그들을 열방 증에서 무너지게 하시고 이방 중에 흩으실 것을 선언합니다. 아브라함 언약을 따라 열방을 향한 축복의 통로로 서야 하는 이스라엘이(창 12:3). 시내산 언약을 따라 열방을 회복케 하는 제사장 나라로 쓰임 받아야 하는 민족임에도(출 19:6). 그들은 불순종함으로 이방 앞에 패배하고 이방 가운데 흩어질 운명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행하실지가 해석의 초점이 됩니다. 그 예로 우리는 바알브올 사건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알브올의 반역(28-31)

우리는 일상에서 다양한 유혹에 직면할 때, 하나님을 떠나 죄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죄는 항상 결과를 낳고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올 수 있으므로, 회개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우리의 의로운 행동과 회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고 진노를 멈추게 할 수 있습니다.

 

28그들이 또 브올의 바알과 연합하여 죽은 자에게 제사한 음식을 먹어서

29그 행위로 주를 격노하게 함으로써 재앙이 그들 중에 크게 유행하였도다

30그 때에 비느하스가 일어서서 중재하니 이에 재앙이 그쳤도다

31이 일이 그의 의로 인정되었으니 대대로 영원까지로다(28-31)

 

바알브올은 ‘브올의 바알’이라는 뜻인데, ‘바알’은 ‘주인’이라는 의미와 ‘바알 신’이라는 의미 모두로 사용됩니다. 따라서 바알브올은 브올 지역에서 섬겼던 우상 바알을 뜻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 제단의 제물을 먹고 그 제사 행위에 동참함으로써 하나님을 진노하시게 했고, 그로 인해서 이스라엘에게 큰 전염병이 돌게 되었습니다(민수기 25장 참조). 마땅히 심판받아야 할 범죄행위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바로 이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셨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앞선 금송아지 숭배 사건에서는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스라엘을 다시금 언약 백성으로 회복시키신 하나님께서 이제 여기서는 어떻게 행하실 것입니까? 앞선 사건에서 모세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비느하스의 중재를 사용하셨습니다. 아론의 자손인 제사장 비느하스가 일어나 죄인들을 심판했고, 이를 지켜보신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을 용서하시고 재앙을 그치셨습니다. 31절은 이러한 비느하스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그의 ‘의’가 되었다고 서술합니다. 여기서 ‘의’로 번역된 원어는 ‘쩨다카’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세워졌음을 의미합니다. 비느하스가 한 행위로 인해 이스라엘이 보존되었고, 그 자신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가운데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금송아지 사건에서는 모세 때문에, 바알 브올 사건에서는 비느하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진노를 돌이키시고 언약 백성을 지켜내셨습니다. 106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끊임없이 하나님께 반역했음을 말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백성들과의 언약 관계를 지켜내셨음을 서술합니다. 진노하시는 것이 합당함에도, 백성들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언약적 성실성이 계속 시 전체의 주제로 발전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진심으로 회개하고, 의로운 삶을 실천해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죄의 유혹을 경계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그분의 공의와 사랑을 증거하는 모든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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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106-01)


신실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

시편 106편 1-12절


 

하나님께 감사하는 이유는 그분의 본질적인 선하심과 영원한 인자하심에 있습니다. 우리의 감사는 하나님의 본질적인 선함과 끝없는 사랑을 기반으로 하며, 좋은 일이 일어났을 때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권능은 크고 놀라우며, 정의와 의를 지키는 자들에게 복이 주어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그분의 구원을 간구하며,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에게 주시는 복을 보고 기뻐해야 합니다.

 

 

  • 시편 106편은 시편 제4권을 종결하는 마지막 시편입니다. 여호와의 왕 되심과 그분의 통치의 주권성을 핵심 주제로 다루어온 4권은 105편에 이어지는 106편에서 아브라함 언약을 신실하게 지켜내시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자세하게 다룹니다. 백성들은 불순종하여 언약관계를 깨뜨렸으나 여호와는 성실하셔서 그 언약관계를 끝까지 지켜내셨다는 것이 핵심 메시지이며 홍해 사건을 그 첫 번째 예로 다루고 있습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는 명령(1)

모든 만물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본질적으로 선하시며, 그의 모든 행동과 결정은 선한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우리에게 안정과 평화를 주며, 그분이 우리에게 최선의 것을 주시기를 원하신다는 확신을 심어줍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그의 창조와 섭리, 그리고 우리의 삶 속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이 선하심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1할렐루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1)

 

시편 106편은 시편 4권을 종결하는 마지막 시편이며, 그 핵심 주제를 1절에서 명확하게 제시합니다. 여호와께 감사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호와께서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구절이 사실상 시편 4권의 종결 메시지이며, 다윗 언약이 무너진 것과 같은 포로기 상황에 처한 언약 백성들을 향한 구속사적 대답입니다.

이 표현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첫째는 ‘여호와께서 선하시다’라는 진술입니다. ‘선하다’의 원어는 ‘토브’인데, 이 단어는 ‘좋다’, ‘선하다’라는 의미를 지녔고, 단순한 감정적인 ‘좋음’이나 성격상의 ‘선한 성품’ 정도를 넘어서서, 구약성경에서는 상당한 종말론적 함의를 지니고 사용됩니다. 이 단어가 처음 쓰인 곳은 바로 창세기 1장인데,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는 과정에서 둘째 날을 제외하고 모든 날에 ‘보시기에 좋았다’라고 하여 대부분의 경우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다는 말은, 그냥 감정적 기쁨 정도를 넘어서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이 완성되었기에 기쁨을 누리셨다’는 의미를 함축합니다.

둘째로,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라는 진술입니다. 이 구절은 사무엘하 7장 다윗 언약의 내용을 사실상 요약한 것입니다. 다윗에게 약속하신 바, 그의 나라가 영원하며, 결코 멸망하지 않고, 다윗의 후손을 통해서 하나님의 집이 완성될 것입니다. 그런데 시편 제4권이 수집된 역사적 배경은 다윗 언약이 무너진 것처럼 보이는 포로기로 여겨집니다. 그렇다면 다윗 언약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이것이 4권이 추구하는 신학적 질문인데, 이에 대한 대답이 106편에서 직설적으로 다시 등장하는 것입니다. 다윗 언약은 영원하며, 결코 멸망하지 않음은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께 감사해야 하는 자들에 대한 서술(2-5)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며, 완전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놀라운 일들을 기억하며 찬양해야 합니다. 정의와 의를 행하는 삶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으로, 특별한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자격 없는 선물임으로, 그분의 구원을 바라보며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억하시고 구원으로 돌보아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2누가 능히 여호와의 권능을 다 말하며 주께서 받으실 찬양을 다 선포하랴

3정의를 지키는 자들과 항상 공의를 행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4여호와여 주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로 나를 기억하시며 주의 구원으로 나를 돌보사

5내가 주의 택하신 자가 형통함을 보고 주의 나라의 기쁨을 나누어 가지게 하사 주의 유산을 자랑하게 하소서(2-5)

 

2절은 수사의문문을 활용하여 여호와의 권능이 매우 크다고 선포합니다. 그를 찬양하는 것은 아무리 많이 해도 충분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여호와의 능력을 선포하려는 자들의 자격 조건은 무엇입니까? 찬양하는 자들에게 어떤 신앙의 사람이 되라고 106편은 권면하고 있습니까?

3절은 ‘정의와 공의’를 지키며 행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정의’와 ‘공의’ 즉, ‘쩨다카’와 ‘미쉬파트’는 사무엘하 8:15에서 사용된 어휘 조합으로, 다윗 언약을 받은 다윗이 언약의 당사자로서 행했을 때 맺은 열매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즉, ‘정의’와 ‘공의’란 하나님의 언약적 통치가 이루어졌을 때 나타나게 되는 언약의 열매요 언약적 통치의 원리입니다. 3절은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성실성이 영원하므로, 그 다스림을 받는 백성들은 항상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1절과 3절은 사실상 다윗 언약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과 그 은혜의 약속을 받은 자들의 삶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4절은 여호와께 드리는 간구의 기도인데, 여호와께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기억하다’라는 단어가 매우 중요합니다. ‘기억하다’는 이미 105편에서도 등장한 어휘였는데, 하나님께서 언약을 기억하시므로 우리가 그분의 언약적 행하심을 기억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105편의 흐름을 반추할 때, 106:4에서 여호와를 향하여 ‘기억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언약적 관계에 근거한 기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5절에는 ‘주의 택하신 자가 형통함을 보게 하소서’라는 간구가 등장합니다. 여기서 ‘형통함’은 ‘토바’라는 단어로, 1절의 ‘토브’와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그 택하신 자가 누리게 해달라는 것으로, 하나님의 언약적 성실성을 경험하게 해달라는 요청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누리면 어떤 결과가 오게 됩니까? 5절의 나머지 부분이 이를 설명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나누게 가지게 되며, 주님의 유산을 자랑하게 될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여기서 ‘유산’의 원어 ‘나할라’는 ‘기업’으로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기본적으로 ‘나할라’는 기업으로 나누어 주는 땅을 뜻하며, 더 깊이 들어가면 기업으로 누리게 되는 하나님 나라의 분깃을 의미하게 됩니다. 즉, 4-5절은 하나님의 언약적 성실성에 기초하여 자신들을 회복시켜주실 것을 요청하며, 그 결과로 누리게 될 은총에 대해서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정의와 공의를 지켜 언약적 백성의 삶을 살아야 함도 함께 서술합니다.

 

언약 백성의 범죄에 대한 서술(6)

우리의 조상들이 죄를 지었듯이, 우리도 동일하게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죄의 고백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의 첫걸음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숨기지 말고,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의 조상들이 반복적으로 죄를 범했듯이, 우리도 끊임없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연약함을 깨닫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를 구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입니다.

 

6우리가 우리의 조상들처럼 범죄하여 사악을 행하며 악을 지었나이다(6)

 

1-5절은 106편의 도입부에 해당하며 다윗 언약 본문에 근거하여 이상적인 언약 백성의 삶을 묘사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이 실제로 역사 속에서 경험한 것은 1-5절의 내용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6절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 앞에 범죄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범죄하여 악을 지었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의와 공의를 행하지 않았고, 그리하여 하나님의 언약 백성다운 삶을 살아내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사실상 “우리가 잘못 행하였기에 다윗 언약이 끝난 것입니까? 하나님의 도우심은 더 이상 없는 것입니까?”라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6절은 매우 독특하게도, 이러한 자신들의 범죄 사실을 조상들의 범죄와 연관시키고 있습니다. 자기들처럼 조상들도 범죄하였다는 것입니다. 106편은 왜 조상들의 범죄 사실을 언급하기 시작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과거를 돌아보면서, 그 과거의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을 통해 현재의 상황에 대한 대답을 찾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홍해에서의 범죄와 하나님의 인자하심(7-12)

성경을 통해 우리의 연약함과 불순종을 되새기게 합니다. 우리는 자주 하나님의 기적과 은혜를 잊고 불신과 두려움에 빠지곤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시고, 적군을 물로 덮어 없애심으로 그분의 신실하심과 강력한 능력을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경험하게 하시고, 그분의 신실하심을 깊이 인식할 때, 비로소 진정한 찬양을 드릴 수 있습니다.

 

7우리의 조상들이 애굽에 있을 때 주의 기이한 일들을 깨닫지 못하며 주의 크신 인자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바다 곧 홍해에서 거역하였나이다

8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그들을 구원하셨으니 그의 큰 권능을 만인이 알게 하려 하심이로다

9이에 홍해를 꾸짖으시니 곧 마르니 그들을 인도하여 바다 건너가기를 마치 광야를 지나감 같게 하사

10그들을 그 미워하는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며 그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셨고

11그들의 대적들은 물로 덮으시매 그들 중에서 하나도 살아 남지 못하였도다

12이에 그들이 그의 말씀을 믿고 그를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도다(7-12)

 

7절부터는 홍해 사건을 묘사해나갑니다. 홍해 사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을 거역하였음을 지적합니다. 7절은 조상들이 애굽에 있을 때 주님의 ‘인자하심’을 기억하지 않았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두 단어가 함께 등장하는데 바로 ‘기억하다’와 ‘인자하심’입니다. 인자하심을 기억해야 하는데, 조상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리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런 백성들을 향해서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그에 대한 대답이 8-11절에 길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8절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그들을 구원하셨다고 대답합니다. 9절은 홍해를 꾸짖으셔서 그 바다를 마른 광야를 지나가듯 건너가게 하셨다고 선언합니다. “바다”로 번역된 ‘트홈’은 창세기 1:2에 사용된 단어로, 홍해 사건은 사실상 ‘재창조’의 사건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무질서를 그의 창조의 권능으로 다스리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해내신 것입니다. 10절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원수의 손에서 건지셨음을 말하고, 11절은 그 대적들을 물로 덮으셔서 하나도 살아남지 못했음을 말합니다. 12절은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찬양하는 데까지 이르렀다고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믿지 않음으로 그 신앙이 넘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고, 오히려 창조의 권능으로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자신의 이름, 즉 언약의 이름인 ‘여호와 되심’을 드러내려 하셨기 때문입니다. 1절에서 선 또한 다윗 언약에 나타난 ‘헤세드’는 다윗 언약 때 처음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 이전부터 하나님은 이미 ‘헤세드’의 하나님이셨고, 한 번 계획하시고 약속하신 것은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이루시는 분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위대한 행적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삶의 중요성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찬양하고, 그분이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을 기억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날마다 기억하며, 그분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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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105-03)


구원의 하나님: 출애굽의 이야기

시편 105편 24-45절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끄시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모든 사람을 똑같은 방법으로 인도하시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손을 잡고 끌어 주시기도 하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지도 한 장을 던져 주시기도 하기고, 어떤 사람에게는 풍랑을 만나게 하셔서 그 풍랑에 떠밀려 목적지까지 가게 하십니다.

 

  • 시인은 이스라엘 후손이 애굽 땅에서 번성하게 하신 것과 애굽의 대적이 되게 하셔서 미움 받게 된 때를 회고하며 노래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받은 고통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을 내세워 재앙을 내리신 후 그 땅을 떠나와 광야를 통과하게 하시고 가나안 땅을 주신 길고 긴 역사를 압축해서 간결하게 표현했습니다. 즉 언약을 기억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근거로서 하나님과 언약 백성의 관계가 파기될 수 없음을 노래합니다.

 

자기 백성을 번성하게 하신 하나님(24-25)

우리는 이 땅에서 나그네일 뿐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나그네로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누린다는 사실입니다. 보다 안락하고 평안한 곳에 머물고 싶지만, 우리가 일어나서 또다시 나그네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다만 그 시기를 사람이 알 수도 없고, 정할 수도 없습니다.

 

24여호와께서 자기의 백성을 크게 번성하게 하사 그의 대적들보다 강하게 하셨으며

25또 그 대적들의 마음이 변하게 하여 그의 백성을 미워하게 하시며 그의 종들에게 교활하게 행하게 하셨도다(24-25)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그네로 살 때였습니다(23). 여호와가 그들을 크게 번성하게 하셨고, 그의 대적들보다 강하게 하셨습니다(24). 여전히 나그네 삶이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선조 아브라함에게 너의 후손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게 될 것이라는(창 12:1-3) 약속이 신실하게 실현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의 대적들보다 강한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강함은 두려움의 직접적 원인이 되기 때문입니다(출1:9-10). 이스라엘 후손이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음을 대적들이 인식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문맥상 대적들은 애굽 사람들입니다. 다른 맥락에서 대적은 애굽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게 적대적인 원수로서 이스라엘을 억압했던 바벨론을 비롯한 크고 작은 민족들입니다. 이 때문에 시인은 ‘그의 대적’이라고 말하지 않고, ‘그의 대적들’(24)이라고 말한. 더군다나 하나님께서는 그 대적들의 마음을 바꾸셔서 자기 백성을 미워하게 하시고, 그의 종들을 교활하게 다루도록 하셨습니다(25). 매우 당황스러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자기 백성, 즉 자기 종들이 대적자들로부터 미움받고 속임의 대상이 되게 했습니까? 26절이 당황스러운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이해의 실마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을 둘러싼 이방인들의 적의와 사악한 음모들을 경험했고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이 선택받은 민족으로서 하나님 약속이 성취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고난에 대한 완전한 이해가 불가함을, 하나님의 뜻과 행위가 신비에 감춰져 있음을 자각시키는 표현인 셈입니다.

 

애굽에 내려진 재앙(26-36)

우리를 강하게 하심도, 고난 가운데서 부르짖게 하심도 오직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만하지 말아야 하고, 절망 가운데서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의 고난 가운데서 부르짖게 됩니다.

 

26그리하여 그는 그의 종 모세와 그의 택하신 아론을 보내시니

27그들이 그들의 백성 중에서 여호와의 표적을 보이고 함의 땅에서 징조들을 행하였도다

28여호와께서 흑암을 보내사 그곳을 어둡게 하셨으나 그들은 그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29그들의 물도 변하여 피가 되게 하사 그들의 물고기를 죽이셨도다

30그 땅에 개구리가 많아져서 왕의 궁실에도 있었도다

31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파리 떼가 오며 그들의 온 영토에 이가 생겼도다

32비 대신 우박을 내리시며 그들의 땅에 화염을 내리셨도다

33그들의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치시며 그들의 지경에 있는 나무를 찍으셨도다

34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황충과 수많은 메뚜기가 몰려와

35그들의 땅에 있는 모든 채소를 먹으며 그들의 밭에 있는 열매를 먹었도다

36또 여호와께서 그들의 기력의 시작인 그 땅의 모든 장자를 치셨도다(26-36)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을 보내어 애굽에 재앙을 내리신 사건을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애굽에 여러 가지 재앙을 일으켰습니다. 이로 인해 애굽 땅에 어둠이 임하고, 물이 피로 변하며, 개구리, 파리, 이, 우박, 메뚜기 등의 재앙이 덮쳤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모든 애굽의 장자와 첫 열매를 치셨습니다. 이 재앙들은 하나님의 권능과 심판을 보여줍니다.

 

(1) 여호와의 종 모세와 아론(26-27)

 

대적들로 인한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신적 대행자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종 모세와 아론을 보내셨습니다(26).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 약속을 성취하는 과정에서 쓰임 받은 신적 대행자들입니다. 두 사람은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기이한 일들’을 드러내고, 함의 땅에서 곧 애굽 땅에서(23절 참고) 하나님의 ‘정조’를 드러냈습니다(27; 5절 참고). 인간은 이해 불가한 고난도 경험이지만(25), 동시에 인간 이해 밖에 있는 초월적인 사건들을 경험하며 신에 대한 경외심을 갖습니다. 그 대표적 예가 출애굽 직전 애굽 땅에서 벌어졌던 재앙입니다.

 

(2) 애굽에 내려진 재앙들(28-36)

 

애굽을 나오기 직전 열 가지 재앙은 출애굽기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습니다(출 5-11장). 시인은 그 재앙 중 여덟 가지만 언급하고, 그 순서도 자유롭게 배열하여 일치하지 않습니다. 이는 당시 행한 기이한 사건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가며 노래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당시 일어났던 사건에 대한 정확한 기록보다 더 중요한 목적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 백성은 물론 애굽인에게 온 우주 만물이 하나님의 소유이며, 만물의 질서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운행됨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둘째, 이 모든 재앙이 노예적인 삶을 살았던 이스라엘의 해방을 열어젖히는 시작점이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시인이 가장 먼저 언급한 재앙은 흑암을 보내셔서 그곳을 어둡게 하신 일입니다(28a). ‘흑암’(호쉐흐)은 하나님께서 빛을 창조하시기 전 상태를 표현할 때 쓰였습니다(창 1:2). 우주적인 어둠에서 하나님께서는 빛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따라서 암흑은 애굽 왕들이 자칭 태양신의 아들이라고 여긴 것을 무력화합니다. 이어서 물이 변해서 피가 되고 물고기는 죽고, 득실거리는 개구리와 파리 떼, 이가 온 땅을 덮었습니다(29-31). 하나님께서는 농작물을 위해 필요한 물 대신 우박을 내리셨고, 땅에 타오르는 불꽃을 꽂으셨고,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치셨고, 그들 지경에서 함께 살아가는 나무도 찍으셨습니다(32-33). 또 그가 말씀하시자 메뚜기 떼가 몰려와 온갖 풀을 갉아 먹고 땅에 있는 모든 열매까지 먹어치웠습니다(34-35). 마지막으로 그들이 기력의 원천이라고 믿었던 장자들까지 치셨습니다(36). 이 모든 재앙은 노예적인 삶의 잔혹함을 견디는 이스라엘 후손을 위해 하나님이 행하신 본보기였습니다.

 

출애굽과 광야 여정(37-42)

과거는 기억하지 않으면 사라집니다. 기억하는 방법은 기록입니다. 기록하지 않으면 좋은 유산을 살리지 못하고, 잘못된 일을 반복하게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일을 기억하고 기록한 책입니다. 이방 땅에서 수치를 당한 이유와 이스라엘이 강해질 수 있었던 일을 기억해야 합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37마침내 그들을 인도하여 은 금을 가지고 나오게 하시니 그의 지파 중에 비틀거리는 자가 하나도 없었도다

38그들이 떠날 때에 애굽이 기뻐하였으니 그들이 그들을 두려워함이로다

39여호와께서 낮에는 구름을 펴사 덮개를 삼으시고 밤에는 불로 밝히셨으며

40그들이 구한즉 메추라기를 가져 오시고 또 하늘의 양식으로 그들을 만족하게 하셨도다

41반석을 여신즉 물이 흘러나와 마른 땅에 강 같이 흘렀으니

42이는 그의 거룩한 말씀과 그의 종 아브라함을 기억하셨음이로다(37-4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해방시키시고 광야에서 그들을 인도하신 이야기를 다룹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은과 금을 주시며, 지친 자가 없도록 하셨습니다. 또한 그들이 광야에서 먹을 음식과 마실 물을 주시며, 그들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과 약속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1) 애굽의 탈출(37-38)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나는 날, 하나님께서는 은금을 가지고 나오게 하셨고, 그 지파 중에 비틀거리는 자 하나 없었습니다(37). 애굽 사람은 두려움에 떨었고, 이스라엘이 떠나자 기뻐했습니다(38). 공포에 휩싸여 제몸 하나 지탱하기 어려운 애굽인과 달리 이스라엘이 얼마나 건강했는지 대비되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재앙의 국면마다 마음을 고쳐먹지 않고 끝까지 고집 피우며 히브리인들을 내보내지 않은 애굽 왕의 반역 행위는 생략되고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행하신 일의 핵심만을 전달하려는 것 같습니다. 애굽인들은 은금을 약탈당했음에도(출 12:35-36) 이스라엘이 떠나는 것을 기뻐했다고 말할 만큼 재앙으로 인한 괴로움이 강력했습니다.

 

(2) 광야의 여정(39-42)

 

시인은 홍해를 건넌 사건 역시 생략했지만, 여호와가 낮에는 구름을 펼치셔서 덮개를 삼으시고, 밤에는 불로 광야의 어둠을 밝히신 것을 회고하며 노래합니다(39; 출 13:17-22). 하나님께서는 광야의 뜨거운 태양의 열기와 밤의 추위로부터 자기 백성을 보호하셨습니다. 또 먹거리를 구할 때 메추라기를 몰아주셨고, 하늘 양식으로 그들을 만족하게 하셨습니다(40). 반석에서 물이 나오게 하셔서 마른 땅이 강같이 흐르게 하셨습니다(41; 참조. 출 17:1-7). 이 일은 애굽을 떠나온 때부터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까지 40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출 16:1-36; 수 5:12).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과 그의 종 아브라함을 기억하셨기 때문입니다(42). 400여 년의 세월 속에서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지 않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입니다. 하나님의 기억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은혜를 드러내는 중요한 말입니다(창 8:1; 삼상 1:19 등). 그래서 시인은 몇 번이고 강조한 것입니다(8-11; 42). 무엇보다 땅에 대한 약속과 하나님의 핵심적인 말씀은 ‘토라’에 기록된 ‘열 마디 말씀’ 곧 십계명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함의 역사입니다.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권한은 절대적이지만 관계적입니다. 이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언약이며, 언약을 유지할 수 있도록 백성에게 선물로 주신 것이 ‘율법’(가르침)입니다.

 

가나안 땅을 주신 하나님(43-45)

찬양과 예배는 구원받은 자의 자연스런 반응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새로운 세상의 백성이 되게 하시고, 그 나라에서 함께 다스리는 자로 초대받았으니 어찌 기쁘고 즐겁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기에, 애굽과 구별되는 통치를 구현해야 하며, 그것이 거룩입니다.

 

43그의 백성이 즐겁게 나오게 하시며 그의 택한 자는 노래하며 나오게 하시고

44여러 나라의 땅을 그들에게 주시며 민족들이 수고한 것을 소유로 가지게 하셨으니

45이는 그들이 그의 율례를 지키고 그의 율법을 따르게 하려 하심이로다 할렐루야(43-45)

 

시인은 하나님의 백성이 즐겁게 나오게 하셨고, 그의 택한 자는 노래하며 나오게 하셨다고 합니다(43).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겪었던 40년의 세월을 건너뛰고 하나님께서 여러 나라의 땅을 주신 것은 물론 다른 민족들이 수고한 것까지 가질 수 있게 하셨습니다(44). 가나안의 여러 나라들은 주로 작은 도시 국가들을 의미합니다(수 10:16-11:15).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나면서 그 사람들의 은금을 획득할 수 있었듯이 정착하는 과정에서 가나안 여러 나라들의 소유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시인은 이에 대해 그들이 하나님의 율례를 지키고, 그의 율법을 따르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말하며(신 6:1;11-13 참고), ‘할렐루야’(여호와를 찬양하라!)로 마무리합니다. 이 모든 선물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가 그 사명을 다할 수 있기를 바라는 이유에서 부여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 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한 대로 가나안 땅의 악이 임계점을 넘어 심판받아 마땅한 시간이 도래했고(창 15:13-16), 이스라엘은 애굽의 노예적 삶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의 삶을 보여주어야 할 때가 도래한 때를(출 19:6) 묵상하도록 안내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의 여정에서 하나님의 권능과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필요를 채우시고, 그들이 약속의 땅에 이르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하나님은 동일하게 역사하시며,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고, 우리를 영원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끝까지 인도하실 것을 믿으며,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올려드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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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105-02)


믿음의 여정: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

시편 105편 12-23절


 

우리에게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와 그분의 세밀한 계획을 믿고 의지하라는 도전을 줍니다. 우리의 삶에도 예상치 못한 어려움과 고난이 닥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위해 일하시고 인도하시며, 우리의 미래를 위해 미리 준비하신다는 사실을 이 본문을 통해 확신할 수 있습니다.

 

  • 이 시편의 둘째 연은 창조의 주님이 역사의 주관자라는 사실을 노래합니다. 찬송시의 형태지만 이스라엘이 하나의 국가로 수립되기 이전 나그네처럼 이 민족 저 민족으로 떠돌던 나그네의 삶을 회고하는 내용입니다. 특히 땅의 기근과 요셉이 노예로 팔린 사건을 되돌아보는 것은 역사의 때를 정하시는 하나님 섭리가 어떻게 진행되고 그의 약속이 어떻게 성취되는가를 보여주는 교훈의 목적이 큽니다.

 

이스라엘 선조의 가나안을 향한 여정(12-15)

우리의 삶에 어려운 상황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려움과 도전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힘이 부족하다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어떻게 무력해 보이는 이스라엘을 지키셨는지, 그리고 그분의 신실한 보호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사실을 새롭게 발견하며, 하나님의 신뢰를 더욱 확고히 할 수 있습니다.

 

12그 때에 저희 사람 수가 적어 매우 영세하며 그 땅에 객이 되어

13이 족속에게서 저 족속에게로, 이 나라에서 다른 민족에게로 유리하였도다

14사람이 그들을 해하기를 용납지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왕들을 꾸짖어

15이르시기를 나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건드리지 말며 나의 선지자들을 해하지 말라 하셨도다(12-15)

 

이스라엘 백성이 아직 소수에 불과하고 나그네로 이 땅 저 땅을 떠돌아다닐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하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적은 수였을 때에도 강한 왕들과 민족들로부터 그들을 지키셨습니다. 그들을 해하려는 자들에게 경고하시며, 기름부음 받은 자들과 선지자들을 건드리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이로써 하나님께서는 작은 시작을 가진 이스라엘을 향한 자신의 신실한 보호와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1) 떠도는 나그네와 같은 이스라엘(12-13)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가나안 땅을 차지할 것이라 약속하셨지만(105:11), 시인은 즉시 차지할 수 없었던 이유를 밝힙니다. 사람들의 수가 적었고 나그네로 살았습니다(12). 아브라함과 후손들이 가나안 땅의 이곳저곳을 떠돌고 배회하면서 살았습니다(창 12-35장). 아브라함이 거주할 땅을 약속받았지만(창 15:7), 실현되기까지는 수백 년이 걸렸습니다. 이스라엘은 이 족속에서 저 족속으로, 이 나라에서 또 다른 나라로 떠돌아다녔습니다(13). 이스라엘의 선조가 매우 취약하고 무기력한 소수의 나그네로 살았다는 점을 분명히 드러낸 것입니다. 그들은 거주할 집도 없이 정착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이동하며 살았습니다. 두 시행을 통해 시인은 이스라엘의 선조가 별로 주목받지 못했던 소수자들의 위태로움과 불안정한 상황이었으며,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특별한 보호가 필요함을 제시합니다.

 

(2) 억압을 용납하지 않으시는 하나님(14-15)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던 이스라엘 선조들은 위태로웠습니다(12-13). 그러나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이든 그들을 억압하지 못하게 하셨고, 그들 향해 대항하는 왕들을 꾸짖으셨습니다(14). 어느 시대든 나그네로 떠돌며 안주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삶은 취약하고 불안정합니다. 소수자들은 힘을 가진 자들에 의해 착취당할 위험성이 훨씬 더 큽니다. 아브라함이 이집트 왕과 아비멜렉에게 아내 사라를 빼앗길 뻔했고(창 12:7;창 20:3), 아들 이삭도 그랄 땅에 거주하는 동안 아버지와 비슷하게 생존의 위협을 느끼고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야 했습니다(창 26:6-11). 이때마다 하나님의 적극적인 도우심이 있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하나님의 직접화법을 인용하는 방식으로 전합니다. “손대지 말라, ‘나의 기름 부음 받은 자들’(메쉬하이) ‘선지자들’(네비아이)을 해하지 말라.”(15) 시인은 ‘기름 부음 받은 자’(마쉬아흐 ‘선지자’(나비)의 복수형을 교차 병행시켜 동의어처럼 표현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애굽 왕과 아비멜렉에게 나타나서 경고하신 것에서 드러납니다(창 20:7). 구약에서 ‘기름 부음 받는 자’(마쉬아흐)는 왕, 선지자, 제사장 직분을 가진 자들을 가리킬 때 사용합니다. 그런데 흥미롭게 시인은 백성 전체를 복수형의 메시아와 선지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왕, 선지자, 제사장이라는 특별한 지위를 백성 전체에게 확장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언약을 지키면 모든 민족 중에서 내 보물로 삼고, 제사장 나라가 되고,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과 맞닿습니다(출 19:5-6).

 

가나안 땅의 기근과 요셉(16-23)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의 모든 순간을 주관하시며, 때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일하십니다. 우리는 믿음의 선배들의 이야기를 통해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지금 우리 앞에 놓인 도전과 어려움도 하나님의 큰 계획의 일부임을 믿으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을 확신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6그가 또 그 땅에 기근이 들게 하사 그들이 의지하고 있는 양식을 다 끊으셨도다

17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18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19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20왕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석방함이여 뭇 백성의 통치자가 그를 자유롭게 하였도다

21그를 그의 집의 주관자로 삼아 그의 모든 소유를 관리하게 하고

22그의 뜻대로 모든 신하를 다스리며 그의 지혜로 장로들을 교훈하게 하였도다

23이에 이스라엘이 애굽에 들어감이여 야곱이 함의 땅에 나그네가 되었도다(16-2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행하신 일들을 서술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근을 보내어 땅을 시험하시고, 요셉을 먼저 애굽으로 보내셨습니다. 요셉은 종으로 팔렸으나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결국 애굽의 총리가 되어 가족을 구원하게 됩니다. 요셉의 지혜와 하나님의 인도로 인해 야곱과 그의 자손들이 애굽으로 내려가 번성하게 됩니다. 이 구절들은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이 요셉의 삶을 통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보여줍니다.

 

(1) 땅의 기근과 노예로 팔린 요셉(16-19)

 

시인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가나안 땅에 거주할 때를 회고합니다. 그(하나님)가 그 땅에 기근을 불러들이셨고 온갖 양식을 끊어버리셨습니다(16; 참조. 창 12장;41-45장).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이 여기저기 떠돌던 생활이 이미 언급되었으니(12-15), 이것은 야곱과 그의 가족들이 기근으로 인해 이집트로 가게 된 때를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으니, 그는 노예로 팔린 요셉입니다(17). 그런데 요셉이 ‘종’으로 팔린 사건은 그 형제들의 시기와 질투에 의한 것이었습니다(창 36장). 그러나 이 사건은 하나님의 ‘종’(에벧) 아브라함에 대한 언급으로 되돌리는 효과가 있습니다(6). 이 지점에서 시인은 기근이 하나님의 뜻이었고, 앞서 보낸 ‘한 사람’(이쉬)이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종’의 역할을 한 것이라고 불편했던 가족사를 신학적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종이라는 단어에 역설이 숨어 있습니다. 종을 뜻하는 히브리어 ‘에벤’은 ‘섬기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문자적으로 다른 누군가에게 귀속된 사람이고, 누군가에 의해 부당한 취급을 받기 쉬운 존재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하나님의 뜻이 연약한 선조 중 ‘한 사람’ 요셉의 고통을 통해 실현된 것입니다. 시인은 요셉의 고통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들이 그의 발을 차꼬에 채우고, 그의 목은 쇠사슬에 매였다’(18). 이 두 형틀, 차꼬와 쇠사슬은 죄인을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하는 도구인 만큼 요셉의 비참함을 상상하게 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요셉의 고된 삶을 간결하게 절제된 문장으로 표현했습니다. 말하자면 요셉의 비참함은 ‘그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19)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를 단련시켰다(19b)고 덧붙입니다. 즉 여호와의 말씀이 성취될 때까지 노예 신분으로 옥중에서 혹독한 고생을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그가(하나님이) 그를(요셉을) 단련하셨다(19b)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단련한다’(차라프)는 것은 용광로에서 광물을 불순물없이 단단하게 할 목적으로 정련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순수하고 깨끗하게 다듬어 품위 있는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 그가 진실했음을 증명할 때까지’(till the word of the LORD proved him true, NIV)라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즉 시인이 요셉 이야기로 전환하면서 요셉을 통해 성취된 하나님 말씀의 결과를 표현한 것입니다.

 

(2) 노예 신분에서 주인 신분으로(20-23)

 

고통의 시간은 정해져 있습니다. 왕이 사람을 보내 그를 석방했고, 뭇 백성의 통치자가 그를 풀어주었습니다(20).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석방을 인간 왕을 통해 실행하셨습니다. 당시 왕을 애굽 왕이라고 언급하지 않지만, 당시 요셉을 자유롭게 풀어준 왕은 애굽 왕이다. 애굽의 바로는 그때 하나님 뜻을 실행하는 도구였던 셈입니다. 시인은 왕이 요셉을 가장 신뢰하는 관리자로 삼은 것을 통치자를 세운 것처럼 표현했습니다. 즉 왕이 자기 집의 “주관자”, 정확히 ‘주인’으로, 모든 재산을 관리하는 자로 삼았습니다(21). 이는 하나님께서 요셉을 바로 대신 ‘주인’(아돈)과 ‘통치자’(모쉘)로 삼았다는 뜻입니다. 바로는 명목상일 뿐 요셉이 실질적인 애굽의 통치자였다는 말로 들립니다. 곧이어 요셉은 자기 뜻대로 관료들을 다스리고 장로들을 지혜롭게 가르쳤습니다(22). 노예(종)로 팔려 왔던 요십이 ‘주인’이 되고, 왕 대신 왕실의 관료들을 자기 ‘뜻’(네페쉬)대로, ‘의지’대로 다스리며, 국가의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장로 집단을 지혜롭게 교육하는 자로 탈바꿈한 것입니다. 요셉은 바로의 법정에서 중요한 일을 하는 자들의 지혜 교사였습니다. 이러한 지위는 요섭이 7년의 풍년과 7년의 기근에 대한 꿈을 꾸고 해석한 일(창 41장) 이후의 변화입니다. 이 모든 일을 통해 하나님의 신실함에 의해 보호받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게 합니다. 그러고서 이 연의 마지막 시행에서 이스라엘이 애굽으로 들어갔고, 야곱이 함의 땅 곧 애굽에서 나그네로 살았습니다(23). 시행 사이에 생략된 사건들 속에서 시인이 강조하는 것은 ‘나그네’입니다. 둘째 연의 시작이 ‘나그네들’인 것처럼(12) 야곱이 ‘나그네로 살았다’는 말이 서로 호응합니다. 시의 핵심은 사실상 애굽의 살림과 국정의 책임자인 요셉에 의해 아버지 야곱과 그의 형제들과 후손들이 가나안의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왔던 역사에 대한 간결한 회고입니다. 회고의 목적은 하나님 은혜의 중요성과 역사의 교훈을 통해 삶의 지혜를 얻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그네와 같은 약자들을 통해 말씀하시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신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탄식,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구원하셨다는 말은 그들의 탄식과 신음 소리가 곧 하나님의 뜻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애굽의 종으로 팔려갔던 요셉을 통해 애굽 전역과 야곱의 집안 전체를 구원하신 것처럼, 나그네요 종이 세상을 구원할 자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 땅의 나그네를 억압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이 안전할 때 우리 사회 전체가 안전해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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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105-01)


약속의 하나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시편 105편 1-11절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를 반복적으로 찬양하는 이유가 하나님의 행하심을 기억하고,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기억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은 우리가 흔들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확신의 근원이자, 삶 속의 문제에 대해 하나님을 의지하는 기도의 초석이 됩니다.

 

  • 본문은 시편 105편의 전반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창조주 및 섭리주로 묘사한 104편에 이어, 105편은 그 하나님을 언약을 허락하시고 이루어나가시는 분으로 묘사하며 그분을 송축할 것을 명령합니다. 즉, 105편의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성취하시는 구속주이십니다. 105편의 전반부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의 이야기를 묘사하고 있는데, 오늘 본문 1-11절은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신 사실을 주로 설명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명령(1-4)

이스라엘에게 성전은 하나님 임재의 상징입니다. 성전이 무너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부재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지도층은 이방 바벨론으로 끌려가고 남은 자들은 이방인의 통치를 받고 살아갔습니다. 성전이 무너진 시대에 하나님을 만날 곳은 어디며, 하나님이 없는 세상에서 신앙을 지키는 길을 모색할 수 있껬습니까?

 

1여호와께 감사하고 그의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가 하는 일을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

2그에게 노래하며 그를 찬양하며 그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말할지어다

3그의 거룩한 이름을 자랑하라 여호와를 구하는 자들은 마음이 즐거울지로다

4여호와와 그의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의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1-4)

 

105편은 103편과 104편에 이어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께 감사할 것을 명령합니다. 이러한 흐름은 시편 4권의 전체 주제인 ‘여호와 하나님의 통치하심’과 잘 어울립니다. 모든 피조 세계를 다스리시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하여 103편은 ‘그를 경외하는 자들을 용서하시는 분’으로 설명했고, 104편은 ‘창조주요 섭리주’로 묘사했습니다. 바로 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105편은 또 하나의 설명을 제공하는데, 그 주제는 바로 ‘언약’입니다. 105편은 그중에서 ‘아브라함 언약’을 선택하여 설명하고 있으며, 그 흐름은 106편까지 이어져 나갑니다.

1-6절은 아브라함 언약에 대한 설명을 시작하기 위한 첫 부분입니다. 여기서 문법적, 구문적으로 중요한 사실은 1-5절의 동사들이 모두 2인칭 복수 명령형으로 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명령이 ‘너희들’이라고 지칭된 청중에게 주어지는데, 그 청중이 누구인지 그 정체는 6절에 이르기까지 밝혀지지 않습니다. 다섯 절에 걸친 수 많은 명령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어떻게 찬양하고 높일 것인지를 자세히 소개하고 있으며, 그런 긴 소개가 끝난 후에야 청중의 정체가 밝히 드러나게 됩니다. 먼저 1-5절의 명령형들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합니다.

 

(1) 여호와를 노래하고 그의 모든 일을 말하라(1-2)

 

1절은 여호와께 감사하고, 그 이름을 부르고, 그의 행하신 일들을 만민 중에 알게 하라고 명령합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는 명령은 105편을 열어주는 첫 명령형으로, 하나님을 높이고 그분을 기려야 한다는 가장 일반적인 의미의 동사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 그분의 행하심을 만민 중에 알게 하는 일이란 과연 무엇입니까? 그 내용이 2절 이하에 계속 설명되고 있습니다. 2절은 하나님께 노래하고 찬양하고, 그분의 기이한 일들을 말하라고 권합니다. 1절에서 하나님의 행하신 일로 지칭되었던 내용이 2절에서는 ‘기이한 일들’로 표현됩니다. 하나님의 하신 일이 놀랍고 기이하다는 것으로, 주제가 점차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절은 그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라’고 명령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고, 그분이 하신 기이한 일들을 말하면, 결국 그분의 이름을 ‘자랑하게’ 되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는 점층법입니다.

 

(2) 여호와를 찾고 그를 즐러워하라(3-4)

 

3-4절에서는 청중들을 독특한 하나의 표현으로 규정하는데 바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들’입니다. 여기서 ‘구하다’라고 번역된 원어는 ‘다라쉬’ 동사인데, ‘찾고 구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1-3절의 명령형 동사들과 연결해서 생각해보면,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고 그분의 기이한 일들을 말하는 자들은 결국 ‘여호와를 구하는 자들’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렇다면, 여호와를 구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3절은 ‘여호와를 구하는 자들’이라는 표현을 간단히 언급하는 정도에 그치는데, 4절은 이러한 ‘여호와를 구함’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바로 여호와의 능력과 그분의 얼굴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분의 능력과 얼굴을 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5-6절을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브라함 언약에 대한 소개(5-11)

하나님이 없는 세상은 ‘驚異(경이)’의 실종 시대입니다. 아무도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을 노래하지 않습니다. 현 상태가 영원토록 지속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일은 세상을 향한 ‘저항’입니다. 우상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성전을 떠난 여호와 하나님을 노래하는 일은 신앙고백입니다.

 

5그의 종 아브라함의 후손 곧 택하신 야곱의 자손 너희는

6그가 행하신 기적과 그의 이적과 그의 입의 판단을 기억할지어다

7그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라 그의 판단이 온 땅에 있도다

8그는 그의 언약 곧 천 대에 걸쳐 명령하신 말씀을 영원히 기억하셨으니

9이것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고 이삭에게 하신 맹세이며

10야곱에게 세우신 율례 곧 이스라엘에게 하신 영원한 언약이라

11이르시기를 내가 가나안 땅을 네게 주어 너희에게 할당된 소유가 되게 하리라 하셨도다(5-11)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적과 그분의 심판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호와는 우리 하나님이시며, 그분의 약속은 영원히 변치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습니다. 가나안 땅을 그들의 영원한 기업으로 주신다는 약속을 확고히 하셨습니다.

 

(1)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기적을 기억하라(5-6)

 

개역개정의 5-6절은 히브리 원문의 문장 순서를 뒤바꾸어 번역했습니다. 본문을 잘 이해하려면 원문의 순서대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5절은 ‘너희는 그가 행하신 기적과 그의 이적과 그의 입의 판단을 기억할지어다’이고, 6절은 ‘그의 종 아브라함의 후손 곧 택하신 야곱의 자손들아’입니다. 먼저 5절은 1-4절에 계속 이어진 명령형 동사 시리즈를 이어받고 있습니다. 마지막 명령형은 ‘기억하라’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을 구하는 것의 결과는 ‘기억함’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까? 바로 그분이 행하신 기적, 이적, 그리고 그 입의 ‘판단’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기서 ‘판단’은 하나님의 통치가 구현된 상태가 그 구현의 도구가 되는 원리를 뜻하는 ‘미쉬파트’입니다. 하나님의 ‘미쉬파트’를 기억하는 것이 청중이 해야 하는 바로 그 일이라는 것이 1-5절의 명령형 동사들의 결론인 것입니다. 이러한 ‘기억함’은 물론 7-11절에 가서 그 내용이 자세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6절은 1-5절의 명령의 대상이 되었던 청중의 정체성을 밝혀줍니다. 2인칭 복수인 ‘너희들’로 불렸던 그들은 바로 여호와의 종, 아브라함의 후손, 택하신 야곱의 자손입니다. 곧 이스라엘 자손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 자손들을 6절은 굳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자손’이라는 말로 충분한데도 굳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말을 함께 덧붙입니다. 이것은 7절 이후에 등장하게 되는 아브라함 언약을 언급하기 위한 문예적 장치라고 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105편의 청중이 기억해야 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하나님께서 행하신 ‘미쉬파트’인 것입니다.

 

(2) 이스라엘과 맺으신 영원한 언약(7-11)

 

7절부터는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여호와께서 어떻게 행하셨는지를 자세히 설명해 나갑니다. 먼저 7절은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다’라는 표현을 통해 언약 공식을 제시합니다. 출애굽기 6:7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을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로 계시하셨는데, 이 표현을 7절은 ‘그분은 우리의 하나님이시다’라고 변화시켜 사용한 것입니다. 특별히 7절은 ‘미쉬파트’라는 단어를 5절에 이어 한번 더 사용합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온 땅에 있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하나님 통치의 공의는 어떻게 이루어졌다는 것입니까? 그 구체적인 내용이 8절부터 나타납니다. 8절은 ‘언약’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리고 그 언약의 말씀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셨다’고 선언합니다. ‘기억하다’라는 단어는 이미 살펴본 것처럼 1-5절의 명령형 시리즈를 완결시키는 마지막 명령형으로 5절에서 사용된 바 있습니다. 즉, 언약의 자손들이 하나님의 ‘미쉬파트’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언약을 ‘기억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기에, 백성들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기억하시는 언약은 무엇입니까? 9-10절은 이 언약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져서 그의 후손들에게 이어졌음을 설명합니다. 9절에서는 아브라함과 이삭을 언급하고, 10절은 야곱/이스라엘을 언급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족보 리스트 정도의 의미를 넘어서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이 이삭에게 이어지고 그후 야곱에게 이어져서 그 열두 아들들에게 전달되고 결국 이스라엘 민족 열두 지파에게로 연결되었음을 차근히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10절은 이 언약이 ‘영원하다’는 사실까지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언약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입니까? 그 내용이 11절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창세기 12:1-3의 아브라함 언약 본문을 읽어보면, 가장 중요한 언약의 두 가지 내용은 바로 ‘후손이 큰 민족을 이루는 것’과 그 후손이 ‘하나님이 주신 땅을 얻게 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11절은 이러한 언약의 내용 중에서 ‘땅을 주신다는 약속’을 언급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셔서 할당된 소유가 되게 해주신다고 약속해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소유’라고 번역된 원어는 ‘나할라’인데,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대개 ‘기업’(inheritance)으로 번역됩니다. ‘나라’ 곧 기업이란 하나님께서 그의 통치 가운데 들어온 자들에게 그 나라의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나눠주시는 삶의 터전을 뜻합니다. 열방 중에 이스라엘을 언약 백성으로 불러내셨기에, 온 땅 중에서 그들에게 언약의 땅의 분깃을 나눠주시고, 그 땅을 여호와 하나님의 안식이 충만한 땅으로 만들어나가서, 결국 열방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복의 통로로 사용하기 원하셨습니다. 이를 위해서 주신 땅이 곧 기업입니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 각각에게도 역시 기업을 나눠주셨고, 각 가족에게도 기업을 나눠주셨습니다. 기업은 하나님께서 나눠주셔서 가족, 지파, 민족이 얻은 분깃이므로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신실하셔서 그분의 약속을 반드시 지키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기억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신실하심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갑시다. 그분의 약속은 변함없으며, 우리의 삶 속에서 반드시 성취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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