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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104-01)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

시편 104편 1-18절


 

성경은 과학책이 아닙니다. 세상의 기원을 과학적 언어로 표현하는 일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시도는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격입니다. 언어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표현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표현의 한계가 오히려 신비를 노래하는 길을 열어놓습니다.

 

  • 이 시의 핵심 주제는 창조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광활한 창조 세계를 서술적으로 묘사하며 노래합니다. 하늘과 바다를 시작으로 하나님께서 땅과 바다의 경계를 정하시고, 골짜기의 샘이 솟아나게 하셔서 숨의 모든 생명체와 인류가 함께 먹고 마시며 윤택한 삶을 살게 하신 하나님의 솜씨를 노래합니다.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라(1-4)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왕이십니다. 그분의 위대하심과 권능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며, 이를 찬양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늘 위의 모든 권세가 그 앞에 복종하는 모습을 비유적으로 표현합니다. 이 영광스런 주권자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1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는 심히 위대하시며 존귀와 권위로 옷 입으셨나이다

2주께서 옷을 입음 같이 빛을 입으시며 하늘을 휘장 같이 치시며

3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얹으시며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

4바람을 자기 사신으로 삼으시고 불꽃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1-4)

 

창조 이야기를 시와 노래로 부르고 있습니다. 시에는 법칙과 체제에 기반한 산문의 세상 속에서 모순가 틈을 자아내는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송축하라고 명합니다.

 

(1) 찬양으로 부름(1)

 

이 시의 시작은 103:1과 같습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시인은 창조자 하나님을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라고 호명하면서, 창조자 하나님을 매우 개인적이고 친밀한 관계로 엮어 표현했습니다. 그 하나님을 향해 시인은, ‘당신은 심히 위대하시고 존귀와 권위로 옷 입으셨다’라고 고백합니다. 고대 세계에서 옷은 사람의 신분을 표현하는 수단입니다. 따라서 존귀와 권위의 옷을 입었다는 것은 숭고함과 장엄함을 지닌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왕이라는 뜻으로(시 8:1; 21:5; 45:3 등), 하나님의 비교 불가한 통치자의 위엄과 광채에 대한 찬미입니다. 고대 근동 세계에서 왕의 위엄과 권위에 대한 상징은 통치 행위와 탁월성에 있습니다. 이것은 여호와를 송축하라는 근거가 됩니다. 그러고서 시인은 창조자 하나님의 위대한 통치가 어떻게 드러났는지 이어지는 시행에서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2) 하늘과 물을 창조하신 하나님(2-4)

 

시인은 창조자 하나님의 위대함을 분사형으로 표현합니다. 그는 옷을 입은 것처럼 빛을 ‘입으신 분’이고, 하늘을 휘장처럼 ‘펼치신 분’입니다(2). 이러한 분사형은 개역개정 성경 번역에서 드러나지 않지만, 창조의 목적과 신현을 표현하기 위해 모두 일곱 번 쓰였습니다. 3절에서 누각을 얹으시는 분, 구름을 수레 삼으시는 분, 바람 날개 위를 걸으시는 분, 4절에서 바람을 사신으로 삼으시는 분, 불꽃을 자기 사역자로 삼으시는 분으로 표현되었습니다. 먼저 ‘빛’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지만, 빛이 하나님의 일부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빛을 창조하시고(1:3) 하늘과 땅을 생명의 기운으로 채우셨습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배타적 권위를 표현하는 배경이 됩니다. 동시에 하늘은 하나님 통치의 우주적인 규모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늘과 그 아래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3-4). 시인은 빛, 바람, 구름(하늘에 있는 물), 번개(불꽃)를 통제하시고 조절하시는 하나님을 모두 분사형을 사용하여 묘사했습니다. 고대인들은 물이 창조 세계를 위협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두려워했지만, 시인은 그 통제권이 하나님에게 속한 것임을 선언한 것입니다. 더군다나 바람과 번개를 하나님 일꾼(사역자와 천사)으로 삼으시는 분입니다(4). 이것은 우주적인 모든 활동이 창조자 하나님의 활동에 근거함을 역설한 것이며, 우주 활동의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본질을 드러냅니다.

 

땅과 물의 경계를 나누신 하나님(5-9)

악의 세력이 끝없이 지금도 인간 세상을 어지럽히고 많은 고난과 재난을 만들어내지만, 모든 것을 주관하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혼돈 혹은 고난을 새 창조의 원자재로 삼아 우리를 온전케 하시고, 인간 세상에 샬롬을 만들고 계십니다.

 

5땅에 기초를 놓으사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

6옷으로 덮음 같이 주께서 땅을 깊은 바다로 덮으시매 물이 산들 위로 솟아올랐으나

7주께서 꾸짖으시니 물은 도망하며 주의 우렛소리로 말미암아 빨리 가며

8주께서 그들을 위하여 정하여 주신 곳으로 흘러갔고 산은 오르고 골짜기는 내려갔나이다

9주께서 물의 경계를 정하여 넘치지 못하게 하시며 다시 돌아와 땅을 덮지 못하게 하셨나이다(5-9)

 

하나님께서는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는 땅의 기초를 세우시되 영원히 흔들리지 않게 하셨습니다(5). 시인은 땅(에레츠)이라는 단어를 일곱 번 반복합니다(5, 9, 13, 14, 24, 32, 35). 땅은 하늘과 마주 보는 지면을 뜻하지만, 땅의 깊은 곳과 지하 세계까지(출 15:12; 사 44:23) 아우르는 총체성 표현이며(창 2:1) 우주적인 차원에서의 지구입니다. 따라서 땅은 모든 생명체를 위한 근거로서의 집입니다. 시인은 마치 태곳적 하나님의 창조 사건을 회고하듯 하나님의 업적을 노래합니다. 먼저, 땅은 옷 입은 것처럼 ‘깊음’(테홈)으로 덮였습니다(6). 깊음은 원시의 바다, 곧 태곳적 물입니다(창 1:2). 흥미롭게 물이 산들 위에 서 있습니다(6b). 이때 하나님은 물을 향해 꾸짖고, 그의 우렛소리에 물은 분주히 움직입니다(7). 자연의 물질세계를 향한 명령에서 하나님의 위엄찬 존재감이 드러나고, 우주적인 왕으로서 하나님의 이미지가 구축됩니다. 위협적인 하나님의 꾸짖음에 물들이 도망치고, 산들과 골짜기들이 올라가고 내려가는 장면이 펼쳐집니다(8). 하나님께서는 물의 경계를 나누어 물이 넘치지 못하게 하시고, 다시 땅을 덮지 못하게 하셨습니다(9; 욥 38:8-11 참고). 사람과 하나님께서 소통하듯 우주의 물질까지 하나님 명령에 복종하는 장면입니다. 이는 혼돈을 제압하시고 질서를 수립하신 하나님의 통치 행위에 대한 찬미입니다.

 

숲과 각양 짐승을 창조하신 하나님(10-18)

하나님께서는 숲과 동물들 사이에 놀라운 균형과 조화를 만드셨습니다. 이 생태계의 균형은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와 지혜를 보여줍니다. 또한 다양한 식물과 동물들은 하나님의 창조의 다양성과 섬세함을 드러내며, 그분의 예술적 감각과 지혜를 찬양하게 합니다.

 

10여호와께서 샘을 골짜기에서 솟아나게 하시고 산 사이에 흐르게 하사

11각종 들짐승에게 마시게 하시니 들나귀들도 해갈하며

12공중의 새들도 그 가에서 깃들이며 나뭇가지 사이에서 지저귀는도다

13그가 그의 누각에서부터 산에 물을 부어 주시니 주께서 하시는 일의 결실이 땅을 만족시켜 주는도다

14그가 가축을 위한 풀과 사람을 위한 채소를 자라게 하시며 땅에서 먹을 것이 나게 하셔서

15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와 사람의 얼굴을 윤택하게 하는 기름과 사람의 마음을 힘있게 하는 양식을 주셨도다

16여호와의 나무에는 물이 흡족함이여 곧 그가 심으신 레바논 백향목들이로다

17새들이 그 속에 깃들임이여 학은 잣나무로 집을 삼는도다

18높은 산들은 산양을 위함이여 바위는 너구리의 피난처로다(10-18)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영원히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분이 설계하셨고 여전히 만물을 지탱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 창조 세계는 고통 받고 있고 그 결과 기상이변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피조 세계에 대한 인간의 탐욕이 부른 참사입니다.

 

(1) 골짜기의 샘과 짐승들(10-13)

 

시인은 ‘여호와 내 하나님’을(2) ‘당신’으로 부르다가 3인칭 ‘그’라고 호칭합니다(10-18절까지). 인간과 짐승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활동이 교차대구 형식으로 구성되었습니다(A-B-A'). 곧 산과 물과 들짐승과 새들(10-13)-동물과 사람(14-15)-산과 물과 새들과 들짐승들(16-18)의 순서입니다. 시인의 눈에 닿는 풍경은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의 문명이 일궈낸 복잡한 도시와 다릅니다. 골짜기에서 샘들이 솟아나고, 산들 사이에 흐르며(10), 골짜기의 샘들은 길들여지지 않은 각종 들짐승, 곧 ‘그에게 속한 들판에 살아 있는 모든 것’에게 물을 공급하고, 들나귀들도 샘에서 해갈합니다(11; 참조. 시 50:10; 96:12). 하늘의 새들은 골짜기와 산들 위에 깃들며, 무성한 나뭇잎들 사이에서 지저귑니다(12). 하나님께서는 그의 누각으로부터 산들에게 물을 부어주십니다(13a). 사방이 트인 높은 집에서 부으시는 물, 곧 비를 통해 숲이 흠뻑 적셔지는 풍경입니다. 시인은 감격하며 하나님께 ‘당신의 일들’이 결실하여 땅이 흡족해한다고 고백합니다(13b). 이때 생명의 활기로 넘쳐나는 땅은 인간의 노동이 아니라 하나님 활동의 결실입니다.

 

(2) 동물과 사람을 위한 먹거리(14-15)

 

시인은 동물과 사람이 먹고 즐기도록 베푸시는 은총을 노래합니다. 가축처럼 길들인 동물이나 야생의 동물을 위해 푸른 풀들이 자랍니다. 그리고 ‘사람의 노동으로’ 성장하는 채소는 땅으로부터 나온 먹거리입니다(14). 태초부터 하나님께서는 동물과 사람에게 땅의 식물을 먹거리로 주셨지만, 첫 인류가 불순종한 이후로 땀 흘려 노동하지 않으면 땅으로부터 먹거리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창 1:29; 2:15-16; 3:18-19). 또 시인은, 인간이 땅을 경작하여 얻을 수 있는 포도주로 ‘사람 마음’(레바드-에노쉬)이 즐겁도록 허락하시고, 기름으로 얼굴이 빛나게 하시고, 음식은 ‘사람의 마음’을 기운 넘치게 한다고 노래합니다(15). 포도주, 기름, 빵은 고대 근동 사회에서 이른바 기본적인 먹거리 3종 세트입니다(전 9:7-8; 신 7:13; 8:8). 이처럼 동물과 사람의 일상을 위한 기본적인 돌봄의 체계가 창조자 하나님에 의해 수립되고, 사람과 동물은 땅이 내준 먹거리로 살아갑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동물을 먹거리로 취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인간이 생존 유지를 위해 동물을 향한 어떤 착취와 폭력도 행하지 않습니다.

 

(3) 산과 물, 그리고 짐승들(16-18)

 

시인은 다시 숲과 물과 들짐승에게 시선을 돌려 평화로운 세상을 노래합니다(참고, 10-13). 여호와의 나무들은 마실 물이 충분하고, 그가 심으신 레바논 백항목들(16), 거기에 새들이 둥지를 만들고, 학은 잣나무들을 자기 집으로 삼습니다(17).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가장 아름답기로 유명한 레바논의 백향목(왕상 4:33; 시 92:12), 곧 여호와가 심으신 나무들로 조성된 숲은 새와 짐승들의 안전과 생존을 위한 장소입니다. 백향목은 ‘하나님의 백향목’(시 80:10), 또는 “여호와께서 심으신 침향목과 백향목”(민 24:6)으로 묘사되곤 합니다. 이는 나무가 스스로 나고 자란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소유와 그분의 돌봄에 의한 것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리고 높은 산들은 산양을 위해 있고, 바위는 너구리의 피난처입니다(18). 숲을 가로지르는 갖가지 짐승들과 새들의 풍경 묘사는 하나님께서 욥에게 지혜 교사처럼 차근차근 해설하신 신비로운 창조 세계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욥 38:25-39:40). 인간의 활동을 넘어선 장소,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고 사람의 통제와 관리가 필요 없는 야생의 숲은 오로지 창조자의 보호 아래 활기찬 아름다움과 생명으로 충만합니다.


창조주가 하늘과 땅, 강과 바다의 역할과 경계를 분명하게 설정하셨습니다. 세계는 안정적이고, 그 속에서 기거하는 모든 동물이 물과 양식을 안정적으로 공급받습니다. 동시에 시인은 사람의 마음, 사람의 얼굴을 반복해서 언급함으로써 창조 세계의 중심인 인간의 책임을 강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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