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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104-02)


규칙과 조화의 창조 세계

시편 104편 19-35절


 

일상은 습관대로 움직이는 삶입니다. 일정한 규칙이 반복되기 때문에 우리는 미래를 예측하고 대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상의 반복은 때로 권태나 불신앙의 함정에 빠질 위험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일상 속에서 권태와 불신앙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 방법이 있겠습니까?

 

 

  • 시인은 지구와 해와 달의 운동으로 수립한 우주 질서를 노래합니다. 달이 계절의 흐름을 바꾸고 해가 낮과 밤의 변화를 주관하게 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솜씨에 감격합니다. 그 솜씨는 숲과 바다의 생명체들과 적정한 경계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인류와 생물다양성으로 충만한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깃들었습니다.

 

해와 달의 절기와 세상의 질서(19-23)

우리의 삶에는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가 있으며, 이를 따를 때 참된 평안과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밤과 같은 어둠의 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시고 지키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며, 모든 상황 속에서 인도하십니다. 우리의 시간과 삶을 하나님께 의탁하고, 그분의 계획을 신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19여호와께서 달로 절기를 정하심이여 해는 그 지는 때를 알도다

20주께서 흑암을 지어 밤이 되게 하시니 삼림의 모든 짐승이 기어나오나이다

21젊은 사자들은 그들의 먹이를 쫓아 부르짖으며 그들의 먹이를 하나님께 구하다가

22해가 돋으면 물러가서 그들의 굴 속에 눕고

23사람은 나와서 일하며 저녁까지 수고하는도다(19-23)

 

지구와 해와 달의 운동은 하나님께서 수립하신 우주 질서의 핵심입니다. 천체는 날들과 계절에 따라 생명의 주기를 제어합니다. 태양과 달은 생명체를 위한 시계이자 달력으로서 하나님의 계획과 방식대로 움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달이 계절들을, 해가 낮과 밤의 변화를 주관하게 하셨습니다(창 1:14). 시인은 여호와가 달의 운동으로 계절을 만들고, 태양은 자기의 들어감을 안다고 노래합니다(19). 해가 오고 가는 운동을 반복하듯(전 1:5) 시인은 해와 달에게 인격성을 부여하고, 그들 배후의 주인 하나님을 노래합니다. 또 흑암을 밤이 되게 하시고, 어두운 밤 숲의 짐승이 기어 나온다고 합니다(20). 즉 밤은 숲의 짐승들이 활동하는 시간이라는 뜻입니다. 어두운 밤 젊은 사자들이 먹이를 위해 으르렁거리며 활동하고, 그들의 먹이를 하나님께 구합니다(21; 욥 38:39). 해가 떠오르면 사자들은 물러가고 자기들 동굴 속에 눕습니다(22). 즉 인간이 잠든 어두운 밤, 숲은 역동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온갖 생물들로 활기찹니다. 강한 사자들의 으르렁거림도 하나님으로부터 먹잇감을 얻기 위함이니 하나님 없이 어떤 생명체도 생존할 수 없습니다. 시인은 숲의 생명체들이 활동하는 것을 묘사하며 하나님의 하신 일을 찬양하고 있습니다(참조 시 74:16-17; 창 1:14-18). 인류는 숲의 짐승들과 반대입니다. 인류는 해가 뜨면 일하러 가고 해가 지면 쉽니다(23; 참조. 창 2:15; 3:19). 밤과 낮의 질서 안에서 사람과 들짐승이 활동하는 시간의 경계가 정해졌고,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 시간을 나눠 갖습니다. 숲의 동물을 위한 밥과 사람을 위한 낮의 경계는 서로의 안전과 평화 유지를 위한 질서입니다. 밤은 인류의 쉼과 회복을 위한 선물입니다. 동시에 인간과 숲의 짐승 사이에 설정된 시간의 경계는 공존을 위한 장치입니다. 시인은 인류의 우월성을 강조하지 않고 모든 생명체의 조화로운 공존의 질서를 노래했습니다.

 

 

땅과 바다에 거주하는 짐승들(24-26)

우리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과 생명들을 보며 그분의 지혜와 능력을 찬양해야 합니다. 창조 세계에 대한 감사와 경외심을 가지고, 맡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야 합니다. 바다의 경이로움 속에서 하나님의 위대함과 섬세한 돌보심을 깨닫고, 우리의 삶에도 그 돌보심이 함께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신뢰하며, 삶의 필요와 어려움 속에서 그분을 의지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24여호와여 주께서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그들을 다 지으셨으니 주께서 지으신 것들이 땅에 가득하니이다

25거기에는 크고 넓은 바다가 있고 그 속에는 생물 곧 크고 작은 동물들이 무수하니이다

26그 곳에는 배들이 다니며 주께서 지으신 리워야단이 그 속에서 노나이다(24-26)

 

시인은 여호와가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 그의 능력을 찬미합니다(24a). 그리고 지혜로 당신이 모든 것을 만드셨고, 당신이 지으신 것들이 땅에 가득하다고 합니다(24bc). 피조 세계의 총체성을 표현하는 ‘모든 것’(쿨람)은 하나님의 소유이고, 모든 것이라는 표현을 통해 생물다양성으로 활기찬 하나님 창조의 완결성을 상상하게 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지혜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모든 창조는 하나님 지혜에 대한 증언입니다(잠 8:22-31). 이제 시인의 시선은 바다로 향합니다. 크고 넓은 바다가 있고, 거기에는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크고 작은 생물들이 있습니다(25). 바다에는 다양한 생명체들의 활기로 가득합니다(시 69:34; 창 1:21). 바다에는 배들이 다니고, 그 속에서 리워야단이 뛰놉니다(26). 리워야단은 문맥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지만, 현재 문맥에서 리워야단은 거대한 바다 생명체이며 자연적인 존재입니다. 거대한 생명체가 하나님의 보호 아래 즐겁게 노니는 장면 묘사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바다를 배로 이동하지만, 육중한 바다 생물은 사람을 공격하는 위협적인 짐승이 아닙니다. 서로의 경계를 지키며 공격하지 않는 평화로운 풍경입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심해 생물들의 생명력 넘치는 자유와 충만함이 그려졌습니다.

 

 

창조자에게 의존하는 모든 생명체(27-30)

우리의 모든 필요와 자원은 하나님의 손길에서 나오며, 우리는 그분의 공급하심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그분의 은혜로 인해 삶에서 만족과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좋은 것이 있을 때,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깨닫고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모든 은혜에 감사하며, 그분의 선하심을 찬양해야 합니다.

 

27이것들은 다 주께서 때를 따라 먹을 것을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28주께서 주신즉 그들이 받으며 주께서 손을 펴신즉 그들이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

29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그들이 떨고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

30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27-30)

 

지구의 모든 생명체는 창조자의 명령에 복종하고 의존하며 생명을 유지합니다. 시인은 ‘당신에게 속한 모든 것들’(쿨람 엘레카)이 때를 따라 주시는 먹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합니다(27). ‘모든 것’은 사람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를 가리킵니다. 모든 생명체가 예외 없이 주시는 분에게 의존하며, 사람과 모든 동식물이 하나님의 돌봄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시 145:15-16). 이것은 여호와가 이 세상 유일의 창조주이며 보존자라는 선포입니다. 그러고서 시인은 무엇이든 '주시는 하나님과 받는 피조물 사이의 관계를 노래합니다. ‘당신이 그들에게 주시면 그들은 모으고/당신이 당신의 손을 펴시면/그들은 즐거움으로 만족합니다’(28). 시행의 문법적인 평행이 하나님의 완벽한 질서를 반영하는 듯 보입니다. 이 완벽한 질서 속에서 생명체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먹으며 편히 지냅니다. 그러나 시인은 돌연 하나님께서 얼굴을 숨기셔서 모든 피조물이 두려워하는 상태를 묘사합니다. 시인은 ‘당신이 당신의 얼굴을 숨기시고/그들은 떨고/당신이 그들의 호흡을 거두시고/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간다’(29)고 말합니다. 모든 생명체를 먹이시는 분이 왜 얼굴을 숨기시고 보살핌을 철회하십니까? 그들, 곧 모든 피조물이 ‘떤다’는 것은 ‘정상적인 감각을 잃는다’는 뜻이거나 ‘교란된다’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얼굴을 숨기시면 모든 피조 세계, 곧 생태계 교란이 발생하고, 죽음에 이른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모든 생명체가 가야하는 자연스러운 쇠퇴의 과정이 아니라 창조 질서의 혼돈입니다. 그러나 교란과 죽음 반대편에 생명이 약동합니다. 여호와가 ‘숨’(루아흐)을 보내시고, 모든 피조물이 창조되며, 땅의 표면은 새롭게 됩니다(30). 여호와의 호흡은 물질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명체가 됩니다(창 2:7). 여호와는 숨을 거두기도 하시고(29) 보내기도 하십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숨이 없는 곳에는 생명도 없습니다. 이 문맥에서 여호와가 지면을 새롭게 하시는 것은(30c) 얼굴을 숨기신 여호와가(29) 다시 얼굴을 보이신 것과 같습니다. 시인은 여호와의 극적인 개입으로 새로운 생명의 신비가 움트는 것을 상상합니다. 그러면 피조물이 창조되고, 지면이 새롭게 됨은 무슨 뜻입니까? 해마다 도래하는 봄의 계절입니까, 환경적인 재앙 뒤에 하나님에 의해 유지되는 모든 동식물계의 회복입니까, 아니면 만물의 고통 후에 도래하는 종말론적인 새로운 창조입니까? 시인의 한마디가 신학적인 질문과 성찰의 과제를 남겼습니다.

 

여호와의 영광과 그의 기쁨(31-32)

우리는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를 기도하고, 말과 행동으로 그분을 나타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경외하며,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인정하고, 그분의 기쁨에 동참하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31여호와의 영광이 영원히 계속할지며 여호와는 자신께서 행하시는 일들로 말미암아 즐거워하시리로다

32그가 땅을 보신즉 땅이 진동하며 산들을 만지신즉 연기가 나는도다(31-32)

 

시인은 생명의 활기로 충만한 땅에 여호와의 영광이 지속되기를, 그가 행하신 일로 기뻐하시기를 기원합니다(31). 그러나 여호와가 힐끗 땅을 바라보시니 땅이 진동하고, 그가 산들을 만지시면 산들이 연기로 둘러싸입니다(32). 이것은 마치 잠재적인 자연재해를 암시하는 것처럼, 여호와가 단 한 번의 만지심으로 화산이 폭발하는 광경처럼 보입니다. 이것은 시인이 노래한 생명의 활기와 기쁨으로 충만한 세계의 아름다움올(10-18) 상쇄시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든 창조하신 세계에 직접 개입하셔서 복을 주기도 하고, 심판하기도 하십니다. 이것은 모든 창조 세계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는 것을 밝히는 고백적인 선언입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33-35)

우리는 삶의 모든 순간을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로 채워야 합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좋은 일이나 어려운 일이 있을 때나 언제나 하나님을 찬양하는 태도를 유지해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 자체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가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묵상하고 그분을 찬양하는 가운데 진정한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세상에서 얻는 일시적인 기쁨이 아닌, 하나님 안에서의 영원한 기쁨을 추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와 찬양이 하나님께 상달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한 기쁨을 마음에 간직해야 합니다.

 

33내가 평생토록 여호와께 노래하며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

34나의 기도를 기쁘게 여기시기를 바라나니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로다 35죄인들을 땅에서 소멸하시며 악인들을 다시 있지 못하게 하시리로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할렐루야(33-35)

 

시인은 내가 평생 여호와께 노래하며 내가 살아있는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하겠다고 다짐합니다(33). 이는 시인이 여호와가 자기의 행하신 일로 즐거워하시기를 기원한 것처럼(31), ‘나의 관심’이나 ‘생각’(“나의 기도”)이 여호와께 기쁨이 되기를 바라면서, 여호와로 인해 즐거워할 것이라(34) 다짐합니다. 마지막으로 시인은 죄인들이 땅에서 소멸하고, 다시는 악인들이 없기를 기원합니다(35). 갑자기 등장한 죄인들과 악인들의 소멸에 대한 주제가 시 전체 흐름에서 어색합니다. 이 시는 죄와 악으로 규정되는 우상숭배나 사람 사이에 발생하는 억압, 폭력, 착취 같은 문제를 다루지 않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시인은 창조물의 조화로운 공존을 폐기하는 행위를 죄와 악으로 간주한 셈입니다. 모든 피조물의 조화가 깨지고 질서에 균열을 일으키는 생태계 ‘교란’은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29; 창 3:19). 이는 인류에게 자연 생태계를 멋대로 착취하지 말고 모든 피조물과 동반자 관계를 유지하라는 권고입니다. 따라서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할렐루야!”(35; 1)에 함축된 의미는 모든 생명체를 온전히 돌보시는 하나님과 그의 우주적 왕권을 높이는 외침입니다.


조화로움은 선인과 악인이 공존하는 세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인이 선인을 괴롭힌다면 조화라고 할 수 없고, 악인이 선인을 괴롭히지 않는다면 악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조화는 악인에 대한 심판을 전체로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기대하고 기다리고 찬양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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