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시편(103-01)

 


여호와의 은혜를 잊지 말라

시편 103편 1-14절


 

시편은 하나님을 높이는 찬양과 한계 상황에 처한 인간이 드리는 기도로 가득 차 있습니다. 신들의 세상에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만을 찬양하라고 명령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노래하는 이유는 그분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시기 때문입니다.

 

 

  • 시편 103편은 다윗의 시입니다. 시편 4권에는 다윗의 시가 오직 두 개만 등장하는데(101, 103편) 그중 두 번째 시입니다. 103편의 핵심 주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경외하는 자에게 인자하심의 은혜를 베푸셔서 죄를 용서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인 1-14절은 그 전반부로서, 출애굽기 34:6의 인용을 통해서 인자하심의 은혜를 강조하여 설명합니다.

 

여호와를 송축하라는 명령(I)(1)

 

시편 103편은 4권에 나타나는 두 개의 다윗 시(101편. 103편) 중 두 번째 시입니다. 시편 101편은 공동체의 지도자로서 하나님의 통치하심에 반응하는 다윗을 다룬다. 시편 102편은 고난 당한 개인이 하나님의 통치에 반응하는 모습을 다룬다. 이제 시편 103편에서는 작품의 내재적 저자로서 다윗은 하나님의 인자하신 성품을 송축한다. 1-14절은 그 전반부로서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임함을 노래하고 있다.

 

1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1)

 

본 시는 ‘여호와를 송축하라’라는 명령으로 시작합니다. 1절은 이런 명령을 ‘내 영혼’에게 내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영혼’으로 번역된 ‘네페쉬’는 ‘영혼’을 가리킬 수도 있지만, ‘자기 자신’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는 ‘자기 자신’에 명령을 내리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스스로 여호와를 송축하기 원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송축해야 할 이유: 여호와의 성품(2-7)

속담에 “원수는 물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반대로 원수는 돌에 새기고, 은혜는 물에 새깁니다. 그러나 다윗은 바위가 아니라 자기의 마음에 새겼습니다. 은혜를 바위에 새기면 지워지지 않지만, 새긴 바위까지 가야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은혜를 돌에 새겼다 할지라도 새긴 돌이 있는 곳에 오랫동안 찾아가지 않으면 기억 속에서 사라져, 물에 새긴 것이나 다를 바가 없게 됩니다. 그러나 마음에 새기면 늘 기억할 수 있습니다.

 

2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3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4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5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6여호와께서 공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억압 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심판하시는도다

7그의 행위를 모세에게, 그의 행사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리셨도다(2-7)

 

2절은 여호와를 송축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2절 하반절에 나타난 것처럼 그 이유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은택을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은택’이라고 번역된 ‘행하다’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들로 인해 그분을 송축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와께서는 어떤 일을 행하신 것입니까? 2절은 독자들로 하여금 그 여호와의 행하신 일들에 대한 궁금증과 기대함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리고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이 3절 이후부터 계속해서 나타납니다.

3-7절까지의 히브리어 본문은 모두 분사 형태로 시작됩니다. 3-5절은 ‘정관사+분사’ 형태의 동사구문으로 시작되며(특히 3-4절 하반절은 ‘정관사+분사’ 형태로 시작되어 각 절에 분사가 두 번씩이나 등장한다). 6-7절은 정관사가 없는 분사 형태로 시작됩니다. 히브리 시에서 분사가 어떤 존재를 가리킬 때는 흔히 가리키는 대상, 곧 그 존재의 성품을 묘사합니다. 3-7절은 2절이 불러일으킨 ‘여호와 하나님의 행하심’에 대한 대답을 분사 형태로 제공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다’라는 여호와의 성품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3절은 여호와께서 죄악을 용서하시고 병을 고치시는 분이라고 묘사합니다. 이 주제는 103편 전체의 주제로서, 8절 이후에 ‘인자하심’이라는 주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4절은 하나님께서 생명을 멸망에서 구원해주시는 분이라고 제시합니다. 4절 하반절에 중요한 구문이 등장하는데, 바로 ‘인자와 긍휼’이라는 표현입니다. 여기서 ‘헤세드’와 ‘라함’은 출애굽기 34:6에 등장한 중요한 어휘들로서, 백성의 죄악을 용서하시면서 언약을 다시 체결해주신 하나님의 언약적인 성실성을 명확하게 제시합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시고 병을 고치시고 생명을 파멸에서 구원해주시는 이유는 그분께서 ‘인자’와 ‘긍휼’을 지니신, 즉 언약에 성실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5절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총을 묘사하는데, 좋은 것으로 소원을 만족하게 하셔서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신 성품은 6절에서 새로운 어휘들로 재설명되고 있는 바, 그것은 바로 ‘의’와 ‘공의’입니다. 6절 하반절은 ‘여호와께서 억울함을 당한 자들을 공의로 회복 시켜주신다’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여호와는 우리의 생명을 구속하시고 억울한 일을 당한 데서부터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공의를 체험하게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3-6절이 여러 가지 내용으로 여호와의 성품을 묘사한 후, 7절은 이러한 여호와의 성품을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리신 사건으로 연결시킵니다. 7절까지 분사 형태를 사용하여 여호와의 성품을 묘사했기 때문에 3-7절을 한 문단으로 묶어야 합니다. 따라서 내용적인 측면에서 7절은 8절이 언급할 출애굽기의 사건을 도입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7절은 3-6절과 8절 이하를 연결시켜 주는 다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인자하심을 경외하는 자에게 베푸심(I)(8-14)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시고, 400년 동안 애굽에서 노예살이하던 이스라엘을 출애굽해 자유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들은 광야 생활 내내 불평과 불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가나안 땅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긍휼, 은혜, 노하기를 더디하심과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심, 인자하심 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송축하는 것은 마땅한 것입니다.

 

8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9자주 경책하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10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

11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12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13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14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8-14)

 

7절에서 모세를 언급한 후, 8절은 모세가 기록한 출애굽기 34:6을 인용함으로써 여호와의 성품을 더욱 적극적으로 묘사합니다. 여호와는 언약에 성실하신 분입니다. 백성은 여호와를 버리고 반역하지만, 여호와는 언약에 성실하시기에 그의 백성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8절이 이런 여호와의 언약적인 성실성을 정확하게 선포하자, 9절 이하는 그러한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보다 자세히 풀어나가기 시작합니다. 9절 상반절은 여호와는 우리를 영원히 그분의 법정에 세우시지 않는 분이라고 말하며, 하반절은 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10절은 우리의 죄를 따라 갚으시는 분이 아니시라고 표현합니다. 9-10절은 8절에 대한 부가적 설명입니다.

11절은 매우 중요한 한 표현을 도입하여 시편 103편 전체의 흐름에 결정적인 기여합니다. 곧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임하게 된다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경외하는 자’란 ‘야레’의 복수 형태로 독립적 용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경외함’은 지혜 문학적인 표현으로, 그 어떤 사람이라도 여호와를 경외하기만 하면 은총을 받게 된다는 개념입니다. ‘경외하는 자들’에게 ‘인자함’이 임한다는 선언은 매우 특별한데, 지금까지의 시편 흐름에서 ‘헤세드’, 즉 인자하심은 다윗 언약의 당사자인 다윗 및 그의 후손인 유다 왕들을 통해서만 허락되었기 때문입니다. 시편 103편에서 다윗의 목소리를 통해 ‘인자하심’이 다윗 개인만이 아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임한다고 선포하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다시 말해, ‘인자하심’을 받아 누리는 대상의 확장은 예사롭지 않게 느껴집니다. ‘인자하심’이란 모세 시대부터 언약 백성 전체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은총이었습니다.

12절은 이러한 여호와의 인자하심으로 인해 그분께서 우리의 죄과를 옮기셨는데 ‘동에서 서가 먼 것 같이 옮기셨다’라고 말합니다. 11절은 하늘과 땅의 거리를 말했고, 12절은 동쪽과 서쪽이라는 방향에 의한 거리를 말했습니다. 11절의 하늘이 땅에서 높음이 하나님의 인자가 얼마나 크신가를 표현하는 것이라 한다면, 12절의 동이 서에서 멀다는 사실은 우리의 죄과가 우리를 떠나 사라지게 되었음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13절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부자관계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긍휼’은 ‘라함’으로, ‘인자(헤세드)’와 유의어입니다. 즉, 인자하심에 대한 부연 설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녀로 여기시며 아버지가 자녀에게 인자를 베풀듯이 우리에게 인자를 베푸십니다. 13절은 이런 인자하심이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임한다고 말합니다. 그럼으로써 11절에 이어 ‘경외하는 자들’에게 인자하심이 임한다는 주제를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14절은 우리에게 인자하심의 은혜를 베푸시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태’를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형태는 14절 하반절이 지적하고 있듯이 ‘먼지’입니다. 여기서 먼지로 번역된 ‘아파르’는 ‘먼지’ 혹은 ‘흙’이라는 뜻입니다. 창세기 2:7에서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고 기록할 때 사용된 어휘입니다. 인간은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본래적으로 연약하고 죄 많은 존재입니다. 시편기자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연약함을 아신다고 고백합니다(물론 그분께서 우리를 만드셨기에 우리를 아신다는 뜻이 이 구절에 숨어있다고 추측하는 것도 가능하다). 우리의 연약함을 14절이 표현한 후, 15절 이하에서는 이런 주제가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됩니다.


오늘 이만큼 아프고 힘들어도 내일은 또 내일대로 청춘행 열차에 탑승할 것입니다. 주님 은혜로 생애 처음 사랑과 긍휼의 화관도 썼으니, 평생 사랑과 긍휼의 찬가를 노래함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주의 은혜는 나날이 무르익고 주를 향한 찬양은 나날이 새롭습니다.


구독과 아래 [광고베너]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