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102-01)
환난 중에 만나는 하나님의 은혜
시편 102편 1-11편
봄마다 꽃이 핀다는 장구밤나무에 세 번의 봄이 지나도 꽃이 피지 않기에 알아보니 겨울에 차디찬 바람을 맞아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실내에서 영상의 온도를 유지했기에 봄에도 꽃을 피우지 못한 것입니다. 진정한 겨울을 지나지 않은 나무에서는 꽃이 피지 않았습니다.
- 이 시는 곤경에 처한 사람이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상한 자가 여호와를 부르며 얼굴을 숨기지 마시고 부르짖음에 응답하시기를 간구합니다. 시인은 황폐한 마음을 날짐승에 빗대고, 시드는 풀에 빗대어 근심을 토로하면서 하나님께 바짝 다가갑니다.
나의 기도와 부르짖음에 응답하소서(1-2)
하나님의 부재는 의도적입니다. 무소부재하신 하나님께서 부재의 공간을 만드셔야 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목적을 가집니다. 고난 중에 하나님께서 임재가 아닌 부재라는 방식을 사용하신다면 그것 또한 우리를 위한 선한 의도라는 것을 믿어 드릴 수 있지 않을까?
1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을 주께 상달하게 하소서
2나의 괴로운 날에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내가 부르짖는 날에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1-2)
시인은 고통 속에서 부르짖습니다.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십시오! 도움을 청하는 나의 부르짖음이 당신께 상달되게 하소서!’(1) 기도가 하나님께 도착하지 않을까 염려하는 마음이 엿보입니다. 그만큼 괴로움의 정점을 지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괴로움이 깊어질수록 시인의 언어도 치열해집니다. 나의 괴로운 날에 당신의 얼굴을 내게서 숨지 말라고 간청합니다(2ab). 고통의 나날을 견디면서 시인들이 ‘당신은 어디 계십니까?’(시 89:49: 22:1)라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환난의 시간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니 나타나 도우시기를 열망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구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얼굴을 보여주신다’는 것은 구원과 은혜를 베푸신다는 뜻입니다(민 6:25). 시인은 자기가 처지가 괴롭지만, 고통의 정점에서 하나님께서 여전히 곁에 계심을 확인하고 싶은 것입니다. 시인은 좀 더 직접적으로 당신의 귀를 내게 기울이시고 내가 부르짖는 날에 속히 내게 응답하시기를 간구합니다(2cd). ‘나의 괴로운 날에’, ‘내가 부르짖는 날에’가 평행을 이루면서 괴로움의 크기와 깊이가 증폭되는 심상이 사용됩니다. 이때 숨지 말아 달라는 간구가 귀를 기울여 속히 응답하라는 간청으로 바뀝니다. 무기력과 두려움이 엄습하는 날에 부르짖는 소리를 외면하지 말라는 절절한 호소입니다. 가장 절박한 시간, 하나님의 함께하심만이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기도와 부르짖음의 내용(3-11)
광야의 올빼미, 부엉이, 지붕 위 참새 신세 같습니다. 키르케고르는 신 앞에 선 단독자로 인간을 정의합니다. 산산이 부서진 실존 속에서 우리는 쉽게 도움을 줄 다른 누군가를 찾아 헤매지 않고 오롯이 버티며 선하신 하나님만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정직하게 토로할 수 있겠습니까?
3내 날이 연기 같이 소멸하며 내 뼈가 숯 같이 탔음이니이다
4내가 음식 먹기도 잊었으므로 내 마음이 풀 같이 시들고 말라 버렸사오며
5나의 탄식 소리로 말미암아 나의 살이 뼈에 붙었나이다
6나는 광야의 올빼미 같고 황폐한 곳의 부엉이 같이 되었사오며
7내가 밤을 새우니 지붕 위의 외로운 참새 같으니이다
8내 원수들이 종일 나를 비방하며 내게 대항하여 미칠 듯이 날뛰는 자들이 나를 가리켜 맹세하나이다
9나는 재를 양식 같이 먹으며 나는 눈물 섞인 물을 마셨나이다
10주의 분노와 진노로 말미암음이라 주께서 나를 들어서 던지셨나이다
11내 날이 기울어지는 그림자 같고 내가 풀의 시들어짐 같으니이다(3-11)
시인의 고통에 악인들은 하나님께서 신인을 버린 것이라고 조롱하는 것 같습니다. 뒷배가 사라진 시인을 마음껏 조리돌립니다. 신인이 할 것이라고는 오직 슬픔을 삭이는 일뿐입니다. 슬픔을 양식 삼아 하루하루 버팁니다.
(1) 연기처럼 소멸하고 풀처럼 시드는 인생(3-4)
시인은 자기 고통을 토로합니다. 그러고서 하나님이 귀를 기울이시고 응답해 주셔야 할 이유를 분명히 제시합니다. 3절 첫 소절 첫 글자가 이유 접속사입니다. 시인은 내 날이 연기처럼 소멸하고, 내 뼈들은 화덕처럼 타오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3). “숯”은 정확히 ‘화덕’을 뜻합니다. 말하자면 온몸이 불에 타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상태를 표현한 것입니다. 그 타는 듯한 통증이 연기가 사라지듯 자신의 수명을 단축할 것처럼 느껴집니다. 덧없이 순식간에 사라질 생의 시간을 연기에 빗대어 묘사했습니다(3; 참조 시 37:20;호 13:3). 뼈들이 불타는 듯한 고통 때문에 음식조차 제대로 먹을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시인은, 내가 음식 먹는 것도 잊고, 내 마음은 풀처럼 시들어버렸다고 탄식합니다(4). 시인이 음식조차 입에 댈 수 없어 시든 풀처럼 생기 없이 말라가며 수척해진 자기 모습을 표현했습니다. 타는 듯한 몸의 열기와 통증이 식욕을 앗아가고, 마음은 말라비틀어진 상태입니다. 마음(레브)은 감정의 자리일 뿐만 아니라 ‘심장’을 뜻하는 몸의 기관이며, 활력의 자리입니다. 정신과 의지의 자리입니다. 시인의 의지, 감정, 정신이 모두 바짝 발라버린 상태입니다.
(2) 황폐하고 어두운 밤의 새처럼 외로운 인생(5-7)
시인은 나의 탄식 소리로 인해 나의 살이 뼈에 붙었다고 탄식합니다(5). 시인의 신음하는 탄식 소리, 곧 그의 고통에 찬 부르짖음이 고통의 깊이를 드러냅니다. 이는 마치 욥이 친구들 앞에서 내 피부와 살이 뼈에 붙어 남은 것이라곤 겨우 잇몸뿐이라고 호소하며 자기를 불쌍히 여겨주기를 바라는 마음만큼이나 처절합니다(욥 19:20-21). 시인이 남은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을 향한 탄식뿐입니다. 그가 어떤 상태인지 자신을 광야의 올빼미, 황폐한 곳의 부엉이 같다고 말합니다(6). 올빼미와 부엉이는 눈이 크고 밤에 활동하는 야행성 맹금류입니다. 밤의 날짐승이 활동하는 시간에 사람은 깊이 잠들어 휴식을 취하며 몸을 회복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뼈가 타는 듯한 고통에(3) 잠을 청할 수 없어 눈을 부릅뜬 밤의 날짐승에 빗대어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 괴로움을 표현합니다. 더군다나 괴로움에 외로움까지 더해집니다. 시인은, 내가 밤을 새우니 마치 지붕 위의 홀로 있는 새 같다고 호소합니다(7). 날카로운 시선으로 깨어 있는 밤의 날짐승에 자신을 빗대어 표현한 것처럼(6), 시인은 밤에도 깨어 있습니다. 모두가 잠든 시간 홀로 깨어 있는 것, 그자체로 고통입니다. 그런데 가족이나 친구들과도 분리된 채 홀로 외롭게 앉아 있는 새에 빗대어 처량한 자기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은 시인이 당장 겪고 있는 사회적 차원의 고통입니다. 공동체에서 분리된 채 홀로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고립된 상태의 외로움입니다. ‘분리된’(“외로운”) 상태의 홀로 외로운 한 마리 새처럼, 사람이 모두 잠든 밤 ‘광야’와 ‘황폐한 곳’의 날짐승처럼 깨어 있는 고통이 합세하여 괴로움이 가중되는 상황입니다.
(3) 원수들의 비방과 나의 눈물(8-9)
시인의 고통을 강화하는 더 큰 괴로움이 또 있습니다. 시인은 내 원수들이 종일 나를 비방하고, 나를 조롱하는 자들이 나를 가리키며 맹세한다고 호소합니다(8). 시행의 평행관계를 고려하면 원수들은 분별없고 몰상식한 자들입니다. 이러한 말은 하나님께서 마치 냉담하게 자신을 돌보지 않으신다는 불평과 호소라는 두 가지 측면을 드러냅니다. 대체 시인이 원수라고 지목하는 자들이 무슨 맹세를 한 것입니까? 맹세의 내용은 시인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지 않지만, 그들이 비방하고 맹세한다는 말에서 유추할 수 있습니다. 고대인들은 질병이나 재앙을 신의 저주로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시인을 치셨다는 비방이나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시 22:7-8; 42:3,10)라는 말로 조롱했을 것입니다. 분별력을 잃은 대적자들 때문에 시인의 고통은 깊어집니다. 그래서 시인이 나는 재를 양식처럼 먹고, 눈물 섞인 물을 마셨다고 탄식합니다(9). 시인이 먹고 마시는 것은 몸의 기운을 북돋우는 음식이 아니라 괴로움과 슬픔의 재료입니다. 재(티끌)와 눈물은 지독한 슬픔을 상징합니다. 이것은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시인의 괴로움을 오롯이 드러냅니다.
(4) 내 생이 연기처럼 풀처럼 시드는 이유(10-11)
시인은 독한 괴로움의 원인이 하나님께 있다고 여깁니다. 그는 자신의 고통이 하나님의 분노와 진노로 인한 것이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들어서 던지셨다고 불평합니다(10). 하나님께서 분노하시는 이유는 백성의 죄 때문입니다. 그가 이것을 모를 리 없습니다. 따라서 시인이 자기의 죄를 떠올리며 회개하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고통에 대한 탄식과 함께 불평하는 시인의 태도가 서로 어울리지 않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희생자처럼 말합니다. 자신의 고통이 개인적인 죄나 부도덕한 어떤 행위 때문이 아니라고 호소합니다. 더군다나 ‘당신이 나를 던져 버리셨다’ (10b)라고 하는 말에는 ‘들어 올리다’와 ‘던지다’ 동사가 쓰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혐오스러운 것을 내팽개치듯 자신을 상대했다고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 시인을 버리셨다면, 시인에겐 희망이 없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내 날이 기울어지는 그림자 같고 시들어지는 풀 같다고 말합니다(11). 시인이 앞서 ‘연기처럼 소멸한다’(3)고 말한 것처럼 자기의 나날을 하루가 기울어 가는 그림자에 빗댄 것입니다. 빛이 소멸하며 길어지는 그림자가 어둠을 재촉하듯, 시인은 시들어 생기 잃은 풀에 자기 모습을 비추며 한탄하고 있습니다. 아무 소망도 없이 절망하는 시인의 모습이 역력합니다. 고통스러운 현실을 직면하는 시인의 언어에는 유일한 소망이 하나님께 있음을 역설적으로 드러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거침없이 고통과 불평을 토로하는 시인의 언어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마저 삶의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음을 다시 깨닫습니다.
“고난 중에서만 영원에 새겨드릴 수 있는 기도가 있습니다. 고난 중에서만 마주할 수 있는 하나님의 얼굴이 있습니다. 우리를 주의 온전한 형상으로 빚으시기 위해 일하고 계신 것을 믿고 정직하게 나아갈 수만 있다면, 고통 중에 시들어가는 듯 보일지라도 영원한 샘에 잇닿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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