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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100-01)


찬양 받으시기 합당하신 여호와

시편 100편 1-5절


 

신앙생활을 건강하게 잘하려면,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것이 절대로 필요합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영혼의 거울로 주셨습니다. 말을 묵상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말씀의 거울 앞에서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말씀의 거울 앞에서 자신이 어떻게 믿음 생활하고 있는지 한번 돌아보아야 합니다.

 

  • 이 시는 찬송시 중의 찬송시로 알려졌습니다. 시인은 여호와를 향해 기쁨의 함성으로 여호와 앞으로 가라고 권합니다. 여호와가 하나님이심을 알라는 명령과 함께 그가 우리를 지으신 자이며 우리는 그의 백성이라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성소로 향하는 예배자들을 향해 그의 궁정에 들어가 그의 이름을 송축하라고 외칩니다.

 

기쁨으로 소리치고, 경배하며 그 앞으로 가라(1-2)

칭찬은 피상적이고 두루뭉술하기보다는 구체적인 이해에 기반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지 않는 것만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유로운 관계가 아닌 권력 구조 안에서의 칭찬은 진정성이 사라지고 아첨이나 아부가 됩니다.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주님의 행하신 일과 성품을 알고서 자원하여 칭찬과 경탄을 고백해 드리는 것이 찬양입니다.

 

1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

2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1-2)

 

시인은 온 땅을 향해 ‘여호와께 소리쳐라!’호소합니다(1). 온 땅을 향해 마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외치는 기쁨의 환호성처럼 크게 소리치라는 명령입니다. 온 땅은 시편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들’(33:8), ‘만민’(66:8; 96:3), ‘모든 나라 가운데서'(96:10), ‘땅끝까지 이르는 모든 것’(98:3) 등의 용어들과 평행을 이룹니다. 따라서 ‘온 땅’은 온 세상입니다. 온 땅은 세계상의 모든 청중을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시인은 이스라엘 사람들만 호명하면서 외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시인이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지만, 온 세상의 주인이 여호와라는 인식과 믿음이 밑바탕에 깔려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서 시인은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라고 말합니다(2a). 섬긴다는 것은 존엄과 위엄을 가진 신을 향해 예배하는 것이지만, 종이 주인에게 봉사하듯 일한다는 뜻이 포함된 것입니다. 즉 여호와께 헌신과 예배를 권고하는 말입니다. 언약 백성에게 요구되는 섬김이 온 세상을 향한 권고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위대한 왕을 향해 기쁨의 환호성을 외친 후에는 위대한 왕을 향한 섬김이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보다 ‘여호와를 섬기라!’는 표현은 이곳을 제외하면 시편에서 2:11에서만 발견됩니다. 두 시편 모두 하나님의 신적 통치와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을 향한 반란을 포기하라는 뜻입니다. 섬기라는 명령은 신앙적인 명령이며 동시에 정치적인 측면을 포함합니다. 예배를 요청하면서 동시에 인간 사회의 규범과 정치 영역의 인간 권력 구조를 향해 신적 질서를 수용하라는 명령입니다. 여호수아가 세겜에서 이스라엘 출애굽 2세대를 향해 나와 내 집안은 여호와만 섬기겠다고 맹세한 것에서 의미한 바와 같습니다(수 24:14-15). 그러고서 기쁨의 함성으로 그 앞으로 오라고 권고합니다(2b). 온 세상을 향해 ‘기쁨으로 소리치라-섬기라-기쁨의 함성으로 오라’는 명령어의 흐름에서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이 시작과 끝에서 강조되고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섬기라’는 명령을 중심에 두고 하나님과 기쁨으로 교감하는 즐거운 감정을 전후로 배치하고 있습니다. 주권자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경험하는 최고의 감정은 기쁨인 것입니다.

 

여호와 그가 하나님이심을 알라(3)

찬된 찬양과 기쁨의 섬김은 어디에서 옵니까? 여호와를 아는 데서 옵니다. 지식적인 앎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로운 통치를 경험한 데서 오는 앎입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왕이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다는 복음에 기대어, 종교적 고행이 아닌 자원하는 기쁨을 노리며 살아가야 합니다.

 

3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3)

 

3절 첫마디는 ‘너희는 알라!’입니다. 무엇을 알아야 합니까? 여호와 그가 하나님이심을 알라고 합니다(3). 히브리어 구문 자체가 강조 형식입니다. 단지 지성적인 앎을 뜻하지 않습니다. ‘알라’는 명령은 이 시에서 구조적으로 중심이면서 신학적인 핵심입니다. 언약을 강조하는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를 아는 것은 이스라엘의 선택과 출애굽에 기초합니다. 출애굽은 노예적 삶에서 해방되어 하나님 왕국의 시민이 되는 정체성의 변화가 핵심이고, 그 중심에 하나님의 주권적 부름이 있습니다(창 12장; 출 19장). 따라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서 찬양과 예배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 없이 부르는 노래와 예배는 공허한 외침일 뿐입니다. 즉 참된 예배는 참된 지식에 근거합니다. 호세아 예언자가 말한 것처럼 여호와를 아는 것은 그의 가르침을 따라 그의 뜻을 행하는 것, 인애의 법을 실천하는 것입니다(호 4:1-4). 시인은 더 나아가 그가 우리를 만드시고 우리가 그에게 속한 것과 우리가 그의 백성이며,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양임을 알라고 합니다(3bc). 그가 우리를 만드셨다는 것은 우리가 그의 작품이라는 뜻으로, 우리가 그의 소유라는 실존적 위치를 깨달으라는 의미입니다. 또 우리가 그의 기르시는 양으로서 그가 우리의 목자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는 여호와가 우리의 왕이라는 사실을 선언한 것입니다. 고대 근동의 왕들이 ‘목자’라는 용어로 불렸습니다. 그리고 구약에서 목자와 관련된 주제는 왕들과 지도자들에게 적용되곤 했습니다(나 3:17; 사 44:28; 시 78:70-72; 10:21; 22:22; 23:1-4; 25:34-38; 34:110; 즉 10:3; 11:4-17). 무엇보다 신적인 목자 이미지는 시편 90-99편에 걸쳐서 출애굽 주제와 연결되었습니다(참조. 시 77:20-21; 78:52-53; 사 60:11-14). 그리고 온 세상을 향해 하나님을 알라는 명령에는 여호와가 하나님이라는 사실 외에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창조자이며, 위험한 모든 세력으로부터 보호하시는 목자로서 왕이라는 사실에 초점을 두었습니다. 그러니 여호와에 대한 인식은 왕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인정을 뜻합니다. 특히 목자와 양의 관계를 통해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공적인 관계를 좀 더 친밀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감사함으로 들어가 그를 송축하라(4)

찬송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높이고 만유를 향해 자랑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으시고 다스리시고 공급하시고 인도하시고 돌보시는 분이심을 전하고, 창조주요 왕이요 목자로서 행하신 일과 사건을 선전하는 일입니다. 직접 경험한 생생한 역사를 낱낱이 재현하는 일입니다.

 

4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4)

 

‘들어가라!’는 명령어로 시작하는 4절 시행은 여호와를 향한 감사와 찬양과 송축이 핵심입니다. 세 개의 소절로 구성된 이 시행은 세 개의 동사가 핵심입니다. ‘들어가라-찬양하라-송축하라’입니다. 시인은 먼저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고, ‘찬양의 노래로’ 들어가서 그를 찬양하고, 마지막으로 그의 이름을 송축하라고 합니다. 찬송하라는 요청이 한층 더 강화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감사와 찬송의 목적은 하나님을 높이고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감사는 주로 하나님이 행하신 일과 감사하는 자의 직접적인 경험에 초점을 둡니다. ‘찬양의 노래’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인식하고 묘사하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성전문을 지나 성전 뜰에서 감사와 찬양을 통해 예배가 시작되며, 예배의 중심이 감사와 찬양에 있음을 밝힌 셈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송축하라’는 것은 성공, 번영, 풍요의 기원이신 하나님을 선포하라는 뜻이 기도합니다(창 24:48). 따라서 예배는 하나님의 이름을 드높이고, 자기 백성의 번영에 관여하시는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그를 송축할 이유(5)

경배는 하나님의 성품에 엎드리는 일입니다. 선하신 하나님,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며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한결같이 변하지 않으시는 신실하신 성품을 알면 알수록 더 알고 싶어집니다. 더 따르고 싶고 닮고 싶어집니다. 이것이 경배의 연속입니다.

 

5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5)

 

시인은 감사함으로 성전 문과 뜰에 들어가 찬양하고 송축해야 할 이유를 제시합니다. 다시 말해 5절 시행은 이유 절입니다. 여호와는 선하시고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며,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세 가지로 제시되었습니다. 선하시고, 인자하시고, 성실하십니다. 하나님의 이 세 가지 성품(또는 속성)이 찬양의 이유입니다. 첫째, 여호와가 ‘선하다’는 것은 좋음, 친절함, 기쁨의 의미를 포함합니다(참조․ 시 106:1; 107:1; 136:1). 고대 근동의 신들이 인간을 노예처럼 부리고 괴롭히고 이용했던 것과 완전 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우주를 창조하시고, 보기 ‘좋다’고 말씀하신 것처럼(창 1장) 그의 선하심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아름다움과 기쁨으로 충만하게 스며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실패하지 않는 사랑,곧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이 영원함은 언약적인 충성에 기초합니다(출 34:6-7).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달리 언약을 먼저 파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행동이 일치함을 선언한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과거 언약 백성을 위해 행하신 역사 속에서 증명되었고, 미래에도 변치 않을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끝까지 참는 사랑과 성실하심을 강조하려고 ‘영원히’와 ‘대대로’라는 수식어를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이며, 구약에서 하나님을 향한 찬양의 전형이라고 생각해도 좋습니다(시 131:1; 대상 16:34; 대하 5:13; 7:3,6; 스 3:10-11; 렘 33:1 등). 왜냐하면 여호와는 창조와 구원의 역사 속에서 선하심과 인애와 성실하심을 나타내셨고, 이후로도 영원토록 그의 백성들 가운데 새롭게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 그리고 신실하심은 오고 오는 모든 세대가 찬양해야 할 이유와 근거입니다.


덮어놓고 찬양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생한 하나님의 행하심을 알고 찬양하며, 하나님의 성품을 경배하는 것이 하나님과 언약의 관계 안에 있는 이들에게 허락된 예배의 특권입니다. 언제든지 나아오라고 초청하신 것을 믿고 가까이 나아가 만유의 주인이신 주님께 경배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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