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101-01)
위기를 만났을 때 가장 안전한 길로
시편 101편 1-8절
위기가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선인도 악인도 위기를 만납니다.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가 동일하게 위기를 경험합니다. 위기의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고 극복하느냐에 따라 위기는 복이 되기도 하고 화가 되기도 합니다. 성도는 두려워하거나 당황하지 말고 지혜와 용기로 위기를 대처할 수 있어야 합니다.
- 이 시는 왕의 시입니다. 이 시는 왕실과 도성, 그리고 땅에 대한 권한과 책임을 지닌 왕이 정의를 수행하겠다는 다짐의 기도이자 노래이며 선언입니다. 악을 처단하는 심판 의지와 관련한 1인칭 직접화법을 통해 왕이 정의로운 하나님 통치의 대행자처럼 제시되고 있습니다.
인자와 정의, 완전한 삶의 길을 서약(A)(1-2)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을 만나면 절실한 기도가 나오게 됩니다. 그, 기도는 진실하고 간절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통해 우리의 소원을 아뢸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고난 중에 부르짖어 구할 때 우리를 건지시고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여기에 소망이 있습니다.
1내가 인자와 정의를 노래하겠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찬양하리이다
2내가 완전한 길을 주목하오리니 주께서 어느 때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 안에서 행하리이다(1-2)
이 시에서 인간 왕은 참 왕이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어떻게 통치할 것인지 다짐합니다. 왕은 가장 먼저 ‘인자’와 ‘정의’를 노래하겠다고 다짐합니다(1a). 인자(헤세드)와 정의(미쉬파트)는 하나님의 대표적인 성품입니다. 인간 왕은 하나님의 성품을 이 땅 가운데 실현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인자’는 자비와 긍휼, 하나님의 실패하지 않는 언약적 사랑의 핵심입니다. ‘정의’(또는 ‘공의’)는 공정한 법적 판결을 통해 실현됐습니다. 지상의 인간 왕이 하늘 하나님의 통치를 재현하는 통로 역할을 다하겠다는 충성 맹세입니다. 왕은 하나님과 자신이 밀접한 언약 관계로 묶였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왕은 여호와를 부르며 내가 당신을 찬양하겠다고 고백합니다(1). 하나님과의 관계 유지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그를 찬양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 때 찬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시 100:2-3). 이어서 왕은 내가 완전한 길에 헌신하겠다고 서약합니다(2a). ‘완전합니다’라는 형용사는 비난받을 만한 것이 없는, 흠이 없고 정직합니다는 뜻입니다. ‘길’은 행동 양식이나 삶의 여정을 빗댄 은유입니다. 그러니까 왕이 하나님 앞에서 흠이 없는 정직한 삶의 길을 걷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입니다. 왕은 “주께서 어느 때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2b) 질문합니다. 문자적으로 ‘언제 당신은 내게 오십니까?’입니다. 이 질문은 하나님의 도움을 갈망하는 애가와 탄식의 문맥에서 자주 발견됐습니다. 아마도 완전한 길에 헌신하는 삶이 어렵다는 것을 알기에 하나님께서 함께해주시기를 구하는 요청일 것입니다. 그리하여 시인은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 안에서 행하겠다고 다짐합니다(2c). 왕은 ‘완전한 길’과 ‘완전한 마음’이 분리될 수 없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길’은 사람이 걷는다는 것과 연결된 행위 영역이고, ‘마음’은 사람의 의지와 지혜와 양심의 자리입니다. 완전함을 추구하는 삶은 의지와 행동이 결합할 때 현실로 드러납니다.
악행 거부를 서약(B)(3-5)
고난 당한 자의 기도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고발하는 것이면 충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당하는 k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성경 속 위대한 인물들도 이런 기도를 올렸습니다. 욥과 다윗, 히스기야, 바울 사도도 고통을 탄원하며 기도했습니다. 무엇보다 십자가를 앞에 둔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고통 중에 부르짖는 기도의 전형이라 할 것입니다.
3나는 비천한 것을 내 눈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이요 배교자들의 행위를 내가 미워하오리니 나는 그 어느 것도 붙들지 아니하리이다
4사악한 마음이 내게서 떠날 것이니 악한 일을 내가 알지 아니하리로다
5자기의 이웃을 은근히 헐뜯는 자를 내가 멸할 것이요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내가 용납하지 아니하리로다(3-5)
그러면 흠 없는 완전한 마음과 완전한 삶의 길은 현실에서 어떻게 드러납니까? 왕은 내가 내 눈앞에서 ‘악한 일’을 행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표현합니다(3ab). “비천한 것”으로 번역된 표현은 ‘악한 일(말)’이나 ‘무가치한 일(말)’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악하거나 무가치한 것은 ‘거짓된 우상’을 가리키는 표현인데, 우상은 인간의 욕망에 불을 지핍니다. 이 맥락에서 “내 눈앞에”라는 표현과 욕망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신체 기관 중 탐심은 눈으로 보는 것에서 촉발되기 때문입니다. 악한 일을 하지 않겠다는 선언은 우상숭배와 욕망의 늪에 빠지지 않겠다는 서약입니다. 권력을 가진 왕이 탐욕과 우상숭배에 빠지면 백성은 약탈의 대상이 됩니다. 탐욕스러운 우상숭배는 왕이 경계해야 할 가장 치명적인 악입니다. 이어서 왕은 내가 “배교자들”이 행하는 것을 미워하여 그것이 내게 들러붙지 않게 할 것이라고 다짐합니다(3cd). ‘배교하다’는 법을 어기고 한계를 넘는 행위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삶의 기준이나 가르침에서 벗어난 일탈을 말합니다. 왕은 하나님께서 정한 경계를 넘은 일탈자들의 행위를 혐오하겠다고 강한 의지를 표명한 것입니다. 그러니 선을 넘은 자들은 왕과 함께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왕은 “사악한 마음”, 즉 ‘거짓된 마음’이 내게서 떠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4a). 하나님의 가르침에서 일탈한 자들을 멀리하니 자연스럽게 진실 없는 가짜 마음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왕은 지혜 교훈을 마음에 깊이 간직한 사람처럼 ‘마음’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고 있습니다(2). 그러고서 왕은 악에 대해서는 알려고도 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집니다(4b). 이는 왜곡된 어떤 악한 일에도 연루되지 않겠다는 의지로서 온전함과 정의 수호에 대한 왕의 책임성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이웃(또는 친구나 동료)을 ‘비밀리에’ 헐뜯는 자는 침묵하게끔 만들겠다고 합니다(5ab). 그것도 ‘은밀히’(“은근히”) 헐뜯는 자까지 적극적으로 응징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합니다. 헐뜯는 것은 중상모략이나 거짓 증언 행위와 관련된 것이니(출 23:7; 레 19:1518)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왕의 이러한 다짐이 실행된다면 공공장소에 드러나는 악행만이 아니라 은밀한 곳에서 행한 악인들의 중상모략은 만천하에 폭로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무게로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뒤따릅니다(5cd). 왕이 완전한 길에 주목하는 것을 자기의 소명으로 여기니(2) 눈과 마음의 교만이 권력자에게 흔한 태도이며 정의 실현을 방해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왕은 하나님 통치의 대리자로서 조심하지 않으면 신적 정의를 가로막을 위험성이 큽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 왕은 하나님 뜻에 따라 하나님 통치의 대리자로서 합법적인 왕의 임무에 대한 깊은 자의식을 드러낸 셈입니다.
충성되고 완전한 삶의 길(A')(6)
인간은 누구나 형통하고 안온하기를 원하지, 견디기 힘든 시련 속에 있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살다 보면, 누구나 뜻 모를 어려움을 당하곤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실한 성도들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가 믿음이 있는 사람인가 아닌가에 따라 고난에 대한 반응은 달라집니다.
6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살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따르리로다(6)
왕은 악한 것과 악인을 멀리하고 악을 끝까지 응징하는 것을 중히 여겼습니다. 이에 걸맞게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들과 함께 있고, 나와 함께 살며, 완전한 길로 걷는 자 그는 나를 도울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땅의 충성된 자들’은 ‘완전한 길로 걷는 자’와 동의어처럼 쓰였지만, ‘이 땅의 모든 악인’(8)과는 대조적입니다. 왕이 ‘완전한 길’을 주목하겠다고 다짐한 것처럼(2), 왕은 완전한 길을 걷는 자, 흠이 없는 삶의 방식을 선택한 자가 자기를 돕고 섬길 것이라 확신합니다. 왕의 역할은 흠 없는 자들과 함께 충성과 완전함으로 통치해야 합니다. 이 시는 왕의 권한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보여줍니다. 집과(1) 땅입니다(6). 집은 왕이 머무는 왕궁 전체, 즉 왕과 함께 주변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입니다. 땅은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왕이 땅에 사는 사람들을 다스리지만, 그곳은 하나님의 법이 실현되는 곳이어야 합니다.
거짓을 행하는 자와 악인 처벌을 서약(B')(7-8)
고난은 고독을 가져옵니다. 고난의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의 하나님께서 해결자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모든 고난의 원인이 자신의 부족함과 허물에 있음을 깨달을 때, 외롭고 고독한 고난의 광야에 놓인 자신을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새롭게 만날 수 있습니다.
7거짓을 행하는 자는 내 집 안에 거주하지 못하며 거짓말하는 자는 내 목전에 서지 못하리로다
8아침마다 내가 이 땅의 모든 악인을 멸하리니 악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에서 다 끊어지리로다(7-8)
악을 멀리하고 가까이하지 않는 것처럼(4), 왕은 거짓을 행하는 자(또는 속이는 자)는 내 집 안에 살지 못할 것이고, 거짓말하는 자는 내 눈앞에 서지 못한다고 말합니다(7). ‘거짓’은 느슨함 또는 태만함이나 게으름을 뜻합니다. 지혜 전통은 게으름이나 어리석음을 매우 부정적으로 여기고 지혜 없는 것으로 간주했습니다(잠 24:30-34). 지혜로운 왕이라면 나태한 사람을 가까이 두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사실이 아닌 것, 속이는 것, 없으면서 있는 척하는 것, 핑계를 대며 거짓말하는 사람을 눈앞에 둘 수 없습니다. 지혜로운 왕은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초래할 위험성을 예측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왕은 아침마다 내가 땅의 모든 악인을 ‘침묵하게 하고’(“멸하리니”), 내가 모든 행악자들을 여호와의 도성에서 끊어버리겠다고 다짐합니다(8). ‘내가 내 눈앞에서’라는 말의 반복과 ‘아침마다’라는 말에서 보듯(3) 악행을 미워하고 심판하겠다는 의지가 강렬합니다. 아침 시간은 왕이 각종 소송을 판결하는 시간입니다. 즉 아침마다 공의와 정의를 실행하겠다는 뜻입니다. 궁극의 심판자는 하나님이시지만, 땅에 속한 인간 왕이 하나님 통치의 대행자로서 악을 심판하는 것은 왕의 책무입니다. 특히 여호와의 법대로 통치되는 도시에서 악행을 행하는 자들을 소멸하겠다고 하는 다짐처럼, 악행에 대한 심판이 아침마다 실행되는 곳에서 악인이 득세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현실에서 정의가 늦게 도착한다고 해도, ‘기름 부음을 받은 자’(메시아) 곧 궁극의 왕을 고대하기에 희망을 놓지 않습니다.
온전한 길을 가는 것이 쉽지 않지만, 성도의 삶은 언제나 진행형이어야 합니다. 인자와 정의의 거울에 자신을 끊임없이 성찰하고 반추하면서, 이웃과 도시에서 하나님의 생명의 통치가 펼쳐지도록 구하고 찾아야 합니다. 어두운 시대일수록 교회에게 맡기신 소명을 더욱 소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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