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103-02)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과 찬양
시편 103편 15-22절
우리의 인생은 풀과 같아 일시적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영원한 자비를 베푸시며, 그의 언약을 지키고 법도를 행하는 자들에게 그 사랑은 자손 대대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보좌를 세우시고 만유를 다스리시며, 그의 통치는 완전합니다. 천사들과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며, 우리 각자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 시인은 개인을 향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넘어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그의 언약과 법도를 지키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는 그의 인자하심을 노래합니다. 그리고 시인은 만유를 다스리시는 그의 왕권을 높이며 그의 다스림을 받는 모든 이를 향해 여호와를 송축하자고 권합니다.
들의 풀과 꽃 같은 인생(15-16)
우리의 삶의 모든 성취와 영광은 결국 사라질 것이므로, 세상의 성공이나 명예에 집착하지 말고 영원한 가치를 추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일시성을 인식할 때 겸손해지며, 하나님 앞에서 이를 인정해야 합니다. 세상적인 명예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고, 우리의 덧없음을 깨달을 때 더욱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15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16그것은 바람이 지나가면 없어지나니 그 있던 자리도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15-16)
시인은 인류의 나날을 풀과 들의 꽃에 비유했습니다. 사람의 나날이 풀 같고, 들판에 피는 꽃 같다고 했습니다(15). 바람이 불면 그 방향으로 눕고, 강렬한 태양 아래 시드는 풀처럼, 피었다가 지는 꽃처럼 그렇게 속절없이 스러지는 생의 무상성을 노래한 것입니다. 생의 한가운데 꽃처럼 아름답게 피는 절정의 시간이 있지만, 시드는 순간이 끝내 오는 것처럼 영원하지 않음이 생의 진실입니다. 시인은 또 풀과 꽃은 바람이 지나가면 사라지고, 그 있던 자리를 더 이상 알지 못한다고 노래합니다(16). 이러한 표현은 생의 짧음에 대한 묵상입니다. 이러한 언어는 이스라엘의 지혜 전승에서 흔히 발견되고, 시편 다른 곳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시편 90편에서 모세는 아침에 꽃을 피우고 자라다가 저녁에 시드는 풀에 빗대어 생의 순간을 노래했습니다. 그는 신속하게 지나가 버리는 생의 본질을 말하면서 주의 인자하심으로 우리가 만족할 수 있기를 기도했습니다(시 90:3-10,14; 참조. 37:2). 이것은 짧은 인생과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 삶의 유한성에 대한 시인의 지혜로운 감각이며 지성적인 성찰 능력입니다. 그리고 지혜 문학에서 자주 논의되는 이러한 성찰은 더 광범위한 질문을 여는 기능을 합니다. 그래서 시인은 인류의 순간성과 대비되는 하나님의 ‘영원한 자비(헤세드)’에 대한 찬양을 이어갑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는 여호와의 인자하심(17-19)
삶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경험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언약과 다스림이 우리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설명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통해 위로와 소망을 얻을 수 있습니다.
17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이르리니
18곧 그의 언약을 지키고 그의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
19여호와께서 그의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의 왕권으로 만유를 다스리시도다(17-19)
시인은 이제 여호와의 세계적이고 영원한 통치에서 드러나는 그의 인자하심, 곧 ‘헤세드’를 다시 노래합니다. 먼저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릅니다. 그리고 그의 ‘의’, 곧 ‘체다카’는 자자손손 지속됨을 노래합니다(17). 시행에서 ‘영원부터 영원까지’와 ‘자손으로부터 자손에게까지’라는 표현을 통해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의로움의 지속성과 현재성을 드러냈습니다. 영원성 안에 내포된 불멸의 개념은 인류가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태고성과 미래성만이 아니라 현재성을 포함합니다. 즉 시공간적인 초월성과 현재성을 모두 포함한 것이 영원 개념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모든 이들이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의로움의 혜택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우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서 실행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 곧 여호와를 두려워한다는 뜻은 풀과 꽃처럼 시드는(15) 유한한 인생에 대한 깨달음에서 발현되는 영원한 하나님에 대한 자발적인 공경의 태도입니다.
이어서 시인은 여호와 경외를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합니다. 곧 그의 언약을 지키고, 그의 법도를 기억하며 행하는 것입니다(18). 언약(베리트)은 반복되는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와 분리할 수 없는 중요한 개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친밀성이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강화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출애굽 직전에 모세에게 ‘나는 여호와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지만, 나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그들에게 알리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출 6:2-3; 레 26:12 참고). 따라서 언약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법도를 지키고 행하는 것과 여호와 경외 사상은 언약 백성으로서 수행하는 마땅한 반응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통치는 우주적입니다. 시인은 여호와가 그의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의 왕권으로 만유를 다스리신다고 노래합니다(19). 이는 시인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즉 그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 것이기도 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위엄과 은혜를 “만유”, 즉 ‘모든 것’(콜)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연결하여 표현했습니다. 특히 하늘은 하나님의 왕권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하늘은 곧이어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초자연적인 천상의 존재들을 호명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여호와를 송축하라!(20-22)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믿고, 그의 언약과 법도를 지키며, 그의 통치 아래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인자하심은 우리에게 큰 위로와 소망을 줍니다. 하나님의 왕권은 모든 것을 포괄합니다. 그의 다스림 아래 우리는 안전하며, 그의 통치 속에서 우리는 평안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은 완전하며, 우리는 그의 주권을 신뢰해야 합니다.
20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행하며 그의 말씀의 소리를 듣는 여호와의 천사들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21그에게 수종들며 그의 뜻을 행하는 모든 천군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22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가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20-22)
시인은 마지막으로 ‘송축하라’는 부름을 우주적으로 확장합니다. 시인은 여호와의 천사들을 부르며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말합니다(20). ‘천사들’(말라킴)은 천상의 존재로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전달자입니다(창 16:6; 48:16; 시 104:4 등). 그리고 시인의 말처럼 천사들은 능력이 있고 여호와의 말씀을 행하는 자들이며, 하나님 말씀의 소리를 듣는 자들입니다(20bc). 천사들은 천상의 존재로서 사람처럼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능력을 행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처럼 천상의 존재들도 하나님의 심부름꾼으로서 그의 목소리를 듣고 행동합니다. 이는 둘 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시인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존재가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천사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이후 시인은 같은 말을 반복합니다. 20절과 21절 모두 “여호와를 송축하라!”로 시작합니다. 이 말은 이 시 전체에서 모두 일곱 번 반복되어(1-2절에서 3회, 20-22절에서 4회), 이 시편의 핵심을 반영합니다. 이번에는 모든 여호와의 군대를 호명합니다(20a). “천군”은 곧 여호와 ‘그의 군대’입니다. ‘군대’(체바오트)는 종종 ‘만군’으로도 번역되는데, 하나님께서 거느리시는 천사들입니다(시 24:10; 단 7:10). 시인은 여호와의 군대를 ‘그를 섬기는 자’이며, ‘그의 선한 뜻을 실행하는 자’라고 표현했습니다(21b). 그러니까 천사들과 여호와의 군대는 모두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 그의 선한 뜻을 행한다는 점에서 똑같습니다.
시인은 다시 반복합니다. “여호와를 송축하라!” 이번에는 그의 지으심을 받은 모든 것을 호명합니다(22a). 시인은 인류와 천군 천사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작품을 향해 찬양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여호와의 통치 영역 어디에나 존재하는 작품들입니다(22b).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인이 처음 했던 말,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22c; 1)고 자신을 다시 부르며 여호와 찬양을 강조합니다. 이 장면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벅차오릅니다. 이 땅의 모든 하나님의 작품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땅의 모든 동식물과 물에 사는 생물들, 하늘의 새들, 땅속에 숨어 보이지 않는 아주 작은 벌레와 갖가지 곤충들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만드신 작품을 그려보게 됩니다. 그 모든 하나님의 작품들이 여호와를 송축하는 합창의 순간을 상상한다면, 얼마나 경이로운 것입니까. 시인은 그렇게 여호와를 찬양하는 것만이 하나님의 위엄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 시는 “여호와를 송축하라!”는 반복을 통해 구약 신학의 핵심으로 독자들을 안내합니다. 이 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하나님의 백성,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인자하심’(헤세드)만이 아니라 우주에 미치는 하나님의 통치와 은혜를 생각하도록 이끕니다. 다시 말해 이 시는 하나님 은혜에 대해 좀 더 큰 통찰을 갖고 여호와를 찬양하자는 교훈적인 권고입니다. 시인은 개인적인 삶에서, 신앙 공동체의 기억 속에서 여호와 그의 ‘이름’과 함께 드러나는 ‘인자하심’, 곧 ‘헤세드’를 경험했습니다. 이 시에서 가장 많이 반복하는 단어가 여호와의 ‘인자하심’, ‘모든 것’, ‘여호와를 찬양하라!’입니다. 그렇다면 시인은 이 특정 단어의 반복을 통해 무엇을 강조하고 싶은 것입니까. ‘모든’ 하나님의 작품, 곧 “만유” 가운데 실행되는 하나님의 ‘헤세드’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시인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그의 백성만이 아니라 그의 백성을 넘어서 우주 가운데 넘치는 하나님의 자비가 칭송되기를 소망합니다.
여호와를 송축하라! 모든 그의 작품이여,
그가 통치하시는 곳, 어디든 서 있는 너희여!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덧없고 일시적인지를 상기시킵니다. 그러나 이 깨달음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합니다. 우리의 삶은 풀과 같고 들의 꽃과 같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살아가며, 그의 영원한 사랑을 신뢰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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