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110-01)
다윗에게 주신 여호와의 말씀
시편 110편 1-7절
예측불허의 미래를 사는 일과 미래를 사는 일, 이 둘 중 어느 게 더 힘들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미 많은 부분이 정해진 상황 속으로 오셨습니다. 직임도, 본분도, 자기 죽음마저 기록된 시나리오를 든 채, 사람들의 기대와 기댐, 정제되지 않은 열망과 욕망을 가로질러 주어진 명제 이상의 삶을 살아내신 예수님을 보시길 바랍니다.
- 시편 110편은 150개의 시편 중에서 신약성경과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복음서가 1절을 인용하고 있고(마 22:44;막 12:36;눅 20:43), 4절 역시 히브리서 5:6에서 인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10편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신 주께서 다윗의 주가 되시며 하나님의 통치권을 실현하신다는 내용으로서, 장차 이 땅에 임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보여주고 있고, 시편 자체의 맥락에서는 다윗 언약의 회복이라는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보좌 우편의 주님에 대한 여호와의 신탁(Ⅰ)(1)
주님께서는 십자가와 부활로 악의 세력을 이기시고, 최후의 원수인 사탄을 완전히 이기고 그 왕권을 하늘 아버지께 돌려드릴 때까지(고전 15:24-26) 하나님의 왕권을 위임받아 이 땅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분이 이 세대의 정사와 권세,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까지 이기고 주장하시니, 오늘 주 안에 있는 우리는 담대할 수 있습니다.
1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1)
1절은 여호와께서 시인이 ‘내 주’라고 부르는 어떤 존재를 향해 신탁을 주시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시편 110편의 해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이슈가 발생합니다. 다시 말해, 시편 110편의 화자가 누구이며 동시에 보좌 우편의 존재는 누구인가 하는 문제가 110편 해석의 핵심입니다.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 방법은 시편의 화자를 제의적 제사장으로 보고 보좌 우편에 계신 존재는 다윗으로 이해하는 방법입니다. 다윗은 다윗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구현하는 왕적인 존재로 이해되기 때문에 이 방법은 큰 맥락에서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러나 시편 제3권 (73-89편)에서 다윗 왕권이 무너진 것으로 보았고 제4권(90-106편)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영원한 왕권을 다윗 왕권의 실패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했기에, 5권에 속하는 110편에서 다윗을 다시 왕적인 존재로 묘사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둘째 방법은 화자를 다윗으로 보고 보좌 우편의 존재를 하나님과 구별되는 어떠한 신적 존재로 이해하는 방법입니다. 이는 ‘다윗의 시’로 되어 있는 시편의 표제가 저자 문제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전통적 방식과 잘 어울리며, 복음서에서 시편 110:1을 예수께서 인용하시면서 화자를 다윗으로 이해하신 것과도 상충하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왕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편 4-5권의 흐름과도 적절하게 맞아 들어갑니다. 우리는 110편의 화자는 다윗이며, 1절에 묘사된 ‘보좌 우편의 주님’은 다윗보다 뛰어나시고 여호와로부터 왕권을 부여받는 신비한 존재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이는 물론 이 보좌 우편의 주님께서 신약에서 제2위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미리 보여준다는 예표적 이해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이러한 ‘보좌 우편의 주님’을 향해서 자신의 오른쪽에 앉으라고 하십니다. 여호와의 오른쪽에 앉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같은 신적인 존재로서의 통치권을 가진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여호와께서는 보좌 우편의 주님에게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원수들을 발판이 되게 한다는 것은 전쟁에 대한 승리를 가리킵니다. 원수들과 전쟁을 한 후, 그들을 포로로 잡아와서, 그들을 자신의 발 앞에 무릎 꿇리고 그들의 등을 자신의 발판으로 삼는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보좌 우편의 주님에게 여호와 급의 통치권을 약속하셨고, 그 통치권으로 열방의 왕들까지 모두 다스리게 될 것 또한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런 존재를 향해 다윗은 ‘나의 주님’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존재는 누구입니까? 정경적 맥락으로 보자면 당연히 신약에서 성육신하셔서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인데, 시편 내에서의 맥락에서 보자면 이 존재는 시편 흐름에서는 처음 등장하는 존재입니다. 그동안은 다윗이 왕권을 지녔고(1-3권), 그 다윗의 왕권이 무너진 것 같은 상황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본질적인 왕권을 강조했는데(4권), 이제는 그 여호와 하나님의 통치권을 위임받아 다스리는 새로운 왕의 모습이 묘사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보좌 우편의 주님에 대한 시인의 묘사(Ⅰ)(2-3)
하나님께서는 원수들을 완전히 정복할 때까지 다윗의 주, 곧 그리스도에게 자신의 권능과 지위를 부여하십니다. 이는 메시아를 통해 왕권을 행사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겠다는 말입니다. 거룩한 주의 백성도 하나님의 권세로 무장한 예수님과 함께 전장에서 승리의 기쁨을 맛볼 것입니다.
2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규를 내보내시리니 주는 원수들 중에서 다스리소서
3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2-3)
2-3절은 계속해서 보좌 우편의 주님을 향해 ‘당신’이라는 이인칭을 사용하여 말합니다. 이 부분은 여호와께서 보좌 우편의 주님에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보아 1절의 신탁이 계속 이어지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사실은 시인인 다윗이 보좌 우편을 향해서 기도하면서 이야기하는 내용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왜냐하면 두 번째 신탁(4)에 이은 5-7절도 다윗이 보좌 우편의 주님에게 말씀드리는 것으로 보이기에, 1-3절과 4-7절이 ‘여호와의 신탁+시인의 고백’이라는 공통의 구조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시를 명확하게 이해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2절은 여호와께서 보좌 우편의 주님에게 권능의 규를 주시기에 그 주님께서 원수들 중에서 다스리시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보좌 우편의 주님은 열방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집니다. 3절은 그 보좌 우편에 계신 주님의 권능의 날에 그분의 백성들이 자원함으로 그분께 나아가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 부분의 해석에 있어서 ‘청년들의 새벽이슬 같은 순수함과 신선함’을 중요하게 말하곤 하는데, 사실 이 구절의 핵심은 새벽이슬 같은 청년들의 자원하는 헌신이 ‘보좌 우편의 주님’께 드려지게 된다는 점에 있습니다. 2절은 보좌 우편의 주님께서 열방의 왕들을 다스리심을 말하고, 4절은 그 주님께서 백성들의 헌신을 받게 되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보좌 우편의 주님의 통치권은 우주적인 범주에 미치며, 따라서 그분의 통치하심은 마치 여호와 하나님의 통치하심과 같은 수준으로 여겨집니다.
보좌 우편의 주님에 대한 여호와의 신탁(Ⅱ)(4)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도는 우리의 믿음과 신탁의 표현입니다. 그는 우리의 구원자이며, 그분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요 14:6). 그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분의 인도와 지도를 받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그는 우리의 약점과 필요를 알고 계시며, 우리가 그분에게 모든 것을 신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4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4)
4절은 보좌 우편의 주님에게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두 번째 신탁입니다. 그 내용은 보좌 우편의 주님이 왕권뿐 아니라 ‘제사장권’까지 지니게 되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국가로 제도화한 이후로 왕권과 제사장권은 명확하게 분리됐습니다. 그런데 이 보좌 우편의 주님은 1-3절에서 본 바와 같이 왕권을 지닌 동시에 이제 4절의 내용에 의하면 제사장권까지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보좌 우편의 존재는 왕권만 있는 다윗보다 당연히 더 뛰어난 존재임이 다시 한번 밝히 증명됩니다. 특별히 4절의 제사장권은 아론의 계열이 아닌 ‘멜기세덱’의 계열을 따른 제사장입니다. 멜기세덱이란 ‘나의 왕은 의롭다’라는 뜻으로, 그 이름 자체에 왕권의 의미가 들어 있으며, 창세기 14장의 멜기세덱 역시 왕권과 제사장권을 함께 지닌 존재였기에, 보좌 우편의 주님에게 수여되는 제사장권은 다윗 왕권 즉 다윗 언약의 수준을 뛰어넘어 역사하는 하나님의 통치권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비롯되는 것임을 밝히 알 수 있습니다.
보좌 우편의 주님에 대한 시인의 묘사(Ⅱ)(5-7)
주의 권능의 날에 그리스도께서는 진노하사 열왕을 쳐서 깨뜨리실 것입니다. 대적들이 포악하고 맹렬하게 계신 것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있지만, 진노의 날이 되면 그리스도께서 그 모든 것에 대해 보응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보응하시며 승리케 하실 것을 믿고 감사하시길 축언합니다.
5주의 오른쪽에 계신 주께서 그의 노하시는 날에 왕들을 쳐서 깨뜨리실 것이라
6뭇 나라를 심판하여 시체로 가득하게 하시고 여러 나라의 머리를 쳐서 깨뜨리시며
7길 가의 시냇물을 마시므로 그의 머리를 드시리로다(5-7)
5-7절은 보좌 우편의 주님에 대한 시인의 두 번째 묘사입니다. 그런데 5절은 110편의 흐름에서 상당한 변화를 보여줍니다. 5절은 ‘아도나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 말은 구약성경에서 주로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 1절에 사용된 아도니라는 말은 사람에게 쓸 수 있는 말로, 보좌 우편에 계신 주님을 향한 말입니다. 그런데 5절은 보좌 우편의 주님을 향해서 아도나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5절 첫 부분을 직역하면 ‘당신의 오른쪽에 계신 아도나이’가 됩니다. 여기서 ‘당신’은 여호와를, ‘아도나이’는 보좌 우편에 계신 분을 말합니다. 이는 1절에서 여호와께서 보좌 우편에 계신 이에게 ‘내 오른쪽에 앉으라’ 하신 점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즉, 시인인 다윗은 이제 보좌 우편에 계신 주님을 ‘아도나이’라고 부릅니다(이때 ‘아도나이’는 물론 언약신명인 ‘여호와’와는 구별되는 철자다). 다시 말해 왕이시고 제사장 되신 이 분의 존재를 온전히 인식하게 되었기 때문에 참된 고백을 드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분은 진노하시는 날에 왕들을 멸하실 것이며, 많은 땅의 지도자들을 멸하신 후에, 시냇물을 마시고 머리를 드실 것입니다. 6절에서 열방의 ‘머리’로 번역된 단어와 7절에서 보좌 우편의 주님이 드실 그분의 ‘머리’는 히브리 원어로 같은 단어입니다. 즉 열방의 머리는 멸함을 당하지만 보좌 우편에 계신 분의 머리는 들릴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분께서 열방의 주인으로서 통치자로 세워지실 것을 시인인 다윗이 노래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10편 메시지의 핵심은 여호와의 통치권이 보좌 우편의 주님에게 임하여, 언약의 중보로서 열방을 다스려야 하는 다윗 왕권이 온전히 감당하지 못한 사명을 이 보좌 우편의 주님이 대신 성취해주신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영광스러운 그림을 다윗 자신이 인식하고 있다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다윗은 성부 하나님께서 이루실 위대한 구원의 계획을 맛보았고 그 은혜 가운데 믿음의 고백을 드렸습니다.
그리스도의 왕 되심과 영원한 통치는 장차 완성될 일이면서도 이미 성도들의 삶 속에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성도는 이미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가운데 현재의 삶에서 죄의 세력과 싸우며 그리스도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성도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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