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109-02)
정의와 인내를 통한 구원의 소망
시편 109편 16-31절
무언(無言)이 면무식(免無)이라는 말은 말을 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을 때가 있음을 의미합니다. 말은 의사 전달의 도구일 뿐만 아니라, 사람을 해치는 무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언쟁이나 갈등 속에서는 독한 말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대신, 선한 말을 선택하고 사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의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해로운 말을 피하고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언어를 실천해야 합니다.
- 본문은 시편 109편의 후반부인데, 앞서 나온 악인에 대한 저주에 대한 요청을 계속해 나갑니다. 특별히 악인이 저주받아야 하는 이유를 상세하게 서술합니다. 그 후 시인 자신이 하나님 앞에 연약한 존재임을 고백하며 하나님을 겸손히 의지합니다. 108편에서 노래한 하나님의 궁극적 승리는 109편에서는 악인에 대한 의로운 통치로 연결되며, 이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시인은 하나님만이 도움의 근원이 되심을 겸손히 고백합니다.
악인이 저주를 받아야 하는 이유(16-20)
악인은 자비를 베풀지 않고, 저주를 좋아하며, 그 행위에 대한 결과를 겪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악행에 대해 공의롭게 응답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공의를 신뢰하고, 악인의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분의 공의와 정의를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16그가 인자를 베풀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와 마음이 상한 자를 핍박하여 죽이려 하였기 때문이니이다
17그가 저주하기를 좋아하더니 그것이 자기에게 임하고 축복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더니 복이 그를 멀리 떠났으며
18또 저주하기를 옷 입듯 하더니 저주가 물 같이 그의 몸 속으로 들어가며 기름 같이 그의 뼈 속으로 들어갔나이다
19저주가 그에게는 입는 옷 같고 항상 띠는 띠와 같게 하소서
20이는 나의 대적들이 곧 내 영혼을 대적하여 악담하는 자들이 여호와께 받는 보응이니이다(16-20)
16절부터는 악인이 왜 저주를 받아야 하는지가 서술되어 있습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109편의 저주시 내용은 단순한 보복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가 법정에서 이루어짐을 묘사합니다. 악인의 죄는 이미 2-5절에서 간단히 서술되었으나, 좀 더 구체적인 근거가 필요하기에 16-20절이 그 잘못을 기록하며 그에 따른 저주가 임하게 되는 것을 상술하는 것입니다. 16절이 악인의 행동에 대한 핵심적 표현인데, 바로 악인이 ‘인자’ 즉 ‘헤세드’ 베풀기를 기억하지 않았음을 지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에게 인자를 베푸시는 분이기에, 그 인자의 은총을 받은 사람들이 서로 인자를 베풀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악인은 시인을 향해서 거짓을 말하며 선을 악으로 갚았습니다(2-5). 이는 ‘인자’ 베풀기를 잊은 것입니다. 13-15절에서 ‘기억하다’라는 동사가 계속 나오는데, 하나님께서 악인의 조상들의 죄를 기억하시고 그들의 기억은 끊으셔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는 바로 16절에서 말하듯이 악인이 인자 행하기를 기억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6절은 악인의 죄악의 핵심은 ‘인자가 없음’임을 지적하면서 이는 하나님을 전혀 닮지 않은 행동이며 따라서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수 밖에 없음을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17-19절은 이러한 인자를 기억하지 않은 결과로 악인에게 저주가 임하게 되었음을 생생한 문예적 장치를 동원하여 묘사합니다. 17절은 악인이 다른 이들을 저주하기 좋아하더니 그 저주가 자신에게 임하였고, 축복하기는 싫어하더니 그 복이 악인을 떠났다고 말합니다. 17절의 내용이 바로 ‘인자함 없음’의 구체적인 사례이며, 또한 그 결과입니다. 이러한 저주와 축복의 대조는 나중에 28절에서 다시 등장하게 됩니다. 18절은 악인이 저주하기를 옷 입듯했는데, 그 저주가 그의 몸과 뼈로 들어갔다고 말함으로써 저주가 그 자신에게 임했다는 17절 상반절을 풀어 설명합니다. 19절 역시 저주가 악인에게 옷과 띠와 같다고 말합니다. 18-19절의 ‘옷 입음’의 이미지는 29절에 다시 등장합니다. 옷 입음은 그 사람의 성품과 삶의 형태를 나타내는 이미지로 구약성경에서 많이 활용되며, 신약에서도 종종 사용됩니다(엡 4:22-24). 20절은 16-20절을 마무리하는데, 저주가 악인 자신에게 임하는 이 현상이 바로 그들이 여호와께로부터 받는 보응임을 제시합니다. 악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를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임하지 않게 되며, 복은 떠나고 저주가 임하게 됩니다. 그들은 여호와와 관계없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구원을 요청함(21-31)
우리는 고난 속에서 자신의 취약함을 하나님께 솔직히 드러내고, 그분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약함이 드러날 때 하나님께서 구원하셔서 대적들에게 신뢰를 보이시기를 간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는 고난과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구원을 기다리는 신앙을 상기시킵니다.
21그러나 주 여호와여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를 선대하소서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니 나를 건지소서
22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여 나의 중심이 상함이니이다
23나는 석양 그림자 같이 지나가고 또 메뚜기 같이 불려 가오며
24금식하므로 내 무릎이 흔들리고 내 육체는 수척하오며
25나는 또 그들의 비방거리라 그들이 나를 보면 머리를 흔드나이다
26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구원하소서
27이것이 주의 손이 하신 일인 줄을 그들이 알게 하소서 주 여호와께서 이를 행하셨나이다
28그들은 내게 저주하여도 주는 내게 복을 주소서 그들은 일어날 때에 수치를 당할지라도 주의 종은 즐거워하리이다
29나의 대적들이 욕을 옷 입듯 하게 하시며 자기 수치를 겉옷 같이 입게 하소서
30내가 입으로 여호와께 크게 감사하며 많은 사람 중에서 찬송하리니
31그가 궁핍한 자의 오른쪽에 서사 그의 영혼을 심판하려 하는 자들에게서 구원하실 것임이로다(21-31)
21-31절은 앞선 맥락의 악인에 대한 저주라는 주제를 잠시 접어두고 시인 자신의 상황에 대하여 묘사하기 시작합니다. 시인은 하나님 앞에 매우 ‘겸손한’ 신앙적 태도를 보이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온전히 의지하는 믿음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중에 가장 중요한 핵심은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간절히 바라며 그 인자하심을 근거로 구원을 요청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1) 인자하심에 근거한 구원요청(1)(21)
21절은 시인이 하나님께 올려드린 구원 요청입니다. 상반절은 여호와의 ‘이름’에 따라 자신을 대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출애굽기 3장에 잘 서술되어 있듯이 ‘신명’입니다. 아브라함 언약을 성취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을 건져내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적 의지가 ‘여호와’라는 이름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이름’에 따라 자신을 대해달라는 요청은 하나님의 언약적 성실성에 근거한 구원 요청임이 분명합니다. 21절 하반절은 이러한 사실을 더 확실하게 보여주는데, 하나님의 ‘헤세드’를 직접적으로 언급하기 때문입니다. ‘주의 인자하심으로 나를 건지소서’라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언약적 성실성에 대한 기대를 명시합니다. 악인은 하나님의 인자를 기억하지 않았기에 저주받았으나, 시인은 하나님의 인자를 기억하고 있으므로 구원을 요청하여 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2) 고난에 대한 묘사(22-25)
22절부터는 시인의 고난에 대한 묘사가 25절까지 이어집니다. 22절에서 시인은 자신을 ‘가난하고 궁핍하다’라고 표현합니다. 이 표현은 물론 시인이 실제 삶에서 가난하고 궁핍한 것을 나타낼 수도 있으나, 비유적인 의미에서 하나님 없이는 가난하고 궁핍한 자일 수밖에 없음을 표현하는 문예적 장치일 수도 있다. 문맥상 후자의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됩니다. 23절에서 시인은 자신을 석양의 지는 그림자, 바람에 불려가는 메뚜기로 표현하고, 24절은 금식으로 인하여 무릎과 육체가 수척함을 말하며, 25절에서는 악인들이 자신을 계속해서 비방하여 수치거리가 되고 있음을 표현합니다. 이러한 고난 묘사는 단순히 시인의 상황을 제시하는 정도의 의도를 넘어,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기억하고 요청하기 위한 서술로 이해해야 합니다.
(3) 인자하심에 근거한 구원 요청(2) (26-27)
26-27절은 21절에 이어 다시 한 번 인자하심에 근거한 구원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26절은 명시적으로 하나님의 ‘헤세드’를 다시금 명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자하시기 때문에 자신을 구원하셔야 한다고 주장하며 간구합니다. 그 이유가 27절에 설명되어 있는데, 이러한 구원이 악인들에게 보여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악인들은 시인을 저주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그 저주를 악인들에게 돌리시고, 시인에게는 구원을 베푸셨음을 보이셔야 하며, 그럴 때 하나님의 공의가 명확히 이루어질 수 있다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4) 악인에게 임할 복과 시인이 받게 될 구원의 대조(28-31)
28-31절은 109편의 내용을 전반적으로 마무리하는 부분입니다. 먼저 28절은 저주와 복의 위치가 달라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악인들이 시인을 저주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시인에게 복을 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20절과 26절이 말했듯이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적 성실성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29절은 대적들이 욕을 옷 입듯 하게 해달라고 요청하는데, 옷 입음의 이미지는 18-19절에 이미 나타난 바 있습니다. 30절은 시인의 찬양의 고백입니다. 시인은 여호와께 입으로 크게 감사하며 많은 사람 중에서 찬송할 것을 약속합니다. 이는 시편의 탄식시에 나오는 전형적인 마무리 형식으로 시편 학자들이 ‘신뢰의 고백’이라고 유형화하는 내용입니다. 저주를 복으로 바꾸시고 오히려 악인에게 저주를 내리신 하나님을 높이 찬양한다는 것으로, 30절을 읽으면 시편이 마무리되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109편은 매우 독특하게도 31절을 추가하고 있습니다. 31절은 여호와께서 궁핍한 자의 오른편에 서서 구원하신다는 이미지를 제공합니다. 물론 여기서 궁핍한 자란 시인 자신을 가리키는 표현일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인자하심을 통해 구원하실 때 시인의 오른편에 서신다는 것은 여호와의 적극적이고 주권적인 도우심에 대한 표현입니다. 6절에서 시인은 ‘'악인의 우편에 그를 대적하는 자가 서게 하소서’라고 기도한 바 있는데, 이러한 모습과 31절에서 여호와께서 시인의 오른편에 서신 모습이 선명하게 대조됩니다. 여호와는 왕으로서 좌정해 계신 분이지만, 때로는 일어나셔서 시인을 위해 의의 구원을 행하십니다. 정리하면, 이러한 여호와의 주권적인 구원의 모습은 108편에서는 열방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해주시는 것으로 나타났고, 109편에서는 악인으로부터 구원하셔서 의를 이루시는 모습으로 나타나며, 110편에서는 보좌 우편의 주님께 통치권을 위임하심으로 언약의 나라를 이루시는 것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악인의 악행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와 응답, 그리고 고난 중의 신뢰를 보여줍니다. 악인은 자비를 베풀지 않고, 저주를 즐기며 그 결과를 자신의 몸에 입게 됩니다. 다윗은 자신의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구속과 응답을 간구하며, 하나님께서 그 정의를 실현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이 본문은 우리가 고난 중에 하나님의 공의를 신뢰하고, 응답받을 때 하나님을 찬양해야 함을 상기시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우리의 고난을 통해 그분의 공의와 정의를 드러내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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