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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129-01)


억제된 자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시편 129편 1-8절


 

원수들에게는 없고 하나님 백성에게만 있는 것이 있습니다. 작은 한 차이가 큰 차이를 가져온다는 것을 원수들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방패가 되는 순간, 지지 않을 것 같은 악인의 시간도 역사 속에 묻힙니다. 하나님은 적의 낮보다 더 긴 주의 낮을 선물하십니다

 

  • 이스라엘은 오랜 기간 동안 이방인들로 인해 핍박을 받아 왔으나, 하나님께서 그들의 압박을 끝내시고 이스라엘을 건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심판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을 향한 사랑과 공의가 나타납니다.

 

이스라엘이 받은 핍박(1-2)

 

이스라엘은 역사적으로 이방 민족의 압제와 공격에서 벗어날 날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 때문에 이방 민족이 징계의 도구로 사용되는가 하면, 이스라엘의 연단을 위해 이방 민족이 고난의 도구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아직 우리가 건재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1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 그들이 내가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혔도다

2그들이 내가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혔으나 나를 이기지 못하였도다(1-2)

 

원문에서 시편 129편의 첫 마디는 ‘여러 번’(많이)으로 시작하면서 이스라엘이 괴롭힘 당한 이야기를 강조합니다. 누가 이스라엘을 괴롭혔는지는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으나, 그들이 이스라엘을 핍박한 것이 이스라엘의 ‘어릴 때부터’임을 1-2절에 부각합니다. ‘어릴 때’는 127:4의 ‘젊은 자의 자식’에서 ‘젊은 자’로 번역된 단어(네우림)로서, 아동이나 청소년 시절보다는 결혼 전 청년의 때를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이 청년의 때부터 괴롭힘을 당했다는 말은 지금까지 시간이 꽤 흘렀음을 나타냅니다. 이스라엘의 핍박 받은 상황은 2절에서 1절과 같은 문구로 반복되어 박해의 장구함, 빈번함과 더불어 혹독한 고통 또한 짐작케 합니다. 한편, 1절의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말하라)’이란 어구는 118:2에도 나오며,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의 하나인 124:1,2에도 나오는데, 두 군데 모두 129편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에 대한 열방의 공격과 이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을 회고하며 찬양합니다. 이 어구는 이처럼 시인이 자신과 함께한 청중을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동참시키는 기능을 합니다. 12편에서 하나님의 구원은 먼저 2절의 ‘그들이 나를 이기지 못하였노라’라는 문장에서 간접적으로 암시되었습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의 박해자들이 오랜 세월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핍박했지만, 결국 이스라엘보다 우세할 수도 이길 수도 없었다는 의미입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군사적인 힘이 강해졌거나, 전쟁과 정치에 뛰어난 왕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며, 오로지 전쟁의 승패를 손에 쥐고 계신 하나님(삼상 17:47)의 간섭과 은혜 덕분이었습니다. 1-2절은 이런 내용을 언급하지 않으나, 시인과 청중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이 점을 다 알고 있습니다.

 

핍박의 고통과 하나님의 심판(3-4)

이스라엘이 위기를 만날 때마다 하나님은 전쟁의 신이요 구원자로 자처하셨습니다. 전쟁이 하나님께 속한 이상 어떤 나라와 세력도 하나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떠오르면 주의 낮이 적의 낮보다 길 것입니다.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의 공의가 역사하도록 구합니까.

 

3밭 가는 자들이 내 등을 갈아 그 고랑을 길게 지었도다

4여호와께서는 의로우사 악인들의 줄을 끊으셨도다(3-4)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받아 온 핍박은 이스라엘의 등(신체의 일부)이 밭처럼 갈려 고랑이 생길 만큼 고통스럽고 비참했습니다. 사람들은 밭을 갈 때 보통 소를 이용해 땅을 일구어 고랑을 만들고, 소가 게으름을 피우거나 쉬려고 할 때면 채찍으로 때려 일을 재촉했습니다. 시인은 이를 비유로 하여, 이스라엘의 핍박자들이 이스라엘의 등을 밭으로 삼아 갈고, 거기에 고랑을 길게 지었다고 표현합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이 그들로부터 채찍과 몽둥이 따위로 맞아 등에 상처가 나고 여기저기가 움푹 패여 줄이 만들어져, 마치 일궈진 밭에 생긴 고랑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고랑을 길게 지었다’는 말은 고랑의 길이가 충분한데도 억지로 길이를 더 늘려 만들어나갔다는 의미이며, 이스라엘에 대한 핍박이 혹독했음을 암시합니다. 밭의 고랑이 일정하게 만들어지면 씨를 뿌리고 농작물을 심을 때 용이하지만, 소처럼 학대받아 이스라엘의 등에 생긴 피와 상처의 고랑은 고통의 흔적과 슬픔의 기억만을 남길 뿐입니다.

4절에서는 ‘여호와’를 주어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음을 명백하게 선언합니다(‘여호와께서는 의로우사 악인들의 줄을 끊으셨도다’). 2절에서는 원수들과 이스라엘 간의 승부를 언급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간접적으로 암시했는데, 4절에서는 하나님의 의로운 성품과 원수를 향한 심판을 직접적으로 밝힘으로써 구원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박해한 자들은 ‘악인들’로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자들입니다(128:1). 이 악인들이 이스라엘을 오래 잔혹하게 핍박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정의를 통해 악인들의 줄을 끊으셨습니다. ‘줄’은 사람이나 짐승을 옭아매는 밧줄이나 끈(삿 15:13)을 뜻합니다. 위 3절을 고려하면, 여기서 ‘줄’은 악인들이 이스라엘에게 소처럼 채운 멍에를 가리키며 핍박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악인들의 핍박은 하나님의 정의로 인해 중단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제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기원(5-8)

시인은 이스라엘을 괴롭혀온 하나님의 원수들을 향해 저주를 선언합니다. 그들이 수치를 당하고 역사 속으로 완전히 퇴장하게 되길, 지붕 위 풀처럼 추수 전에 시들어버리길 간구합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등진 자는 하나님과 등진 자이므로, 그들의 날도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5무릇 시온을 미워하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여 물러갈지어다

6그들은 지붕의 풀과 같을지어다 그것은 자라기 전에 마르는 것이라

7이런 것은 베는 자의 손과 묶는 자의 품에 차지 아니하나니

8지나가는 자들도 여호와의 복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하거나 우리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축복한다 하지 아니하느니라(5-8)

 

4절에서 선포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은 5-8절에서 이스라엘의 박해자들에 대한 심판을 기원하는 간구를 통해 화대 묘사됩니다. 이스라엘을 학대한 자들의 정체는 1-3절에서는 ‘그들’로서 모호했으나, 4절에서 ‘악인들’로 나타났고, 5절에 와서는 ‘시온을 미워하는 모든 원수’로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시 전체에서 2,4,5-8절에 설명되는데, 2절에서는 원수들을 주로 하여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간접적인 암시를 줌으로 시작했고, 4절에서 여호와를 주어로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선언했으며, 마지막으로 5-8절에서는 다시 원수들을 주어로 사용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구체적으로 증명하는 단계로 전개되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과 원수들의 적대 관계는 두 그룹만의 일로 머물거나 두 그룹 간의 관계 속에서 해결되지 않고, 세 그룹 핍박 받은 이스라엘, 이스라엘을 공격한 원수들,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원수들을 심판한 하나님의 관계로 확대되었고, 이 세 그룹의 관계 속에서 해결되었습니다. 특히 5-8절에 하나님의 대적에 대한 심판이 시에서 가장 길게 나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이 두드러집니다. 또 이 단락은 4절에서 기술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정의를 확증하며 이스라엘을 옭아맨 줄을 끊었다는 말을 구체적으로 증명합니다.

이제 이스라엘의 대적들에 대한 심판으로, 첫째, 그들은 다 수치를 당하고 물러날 것입니다(5). ‘수치를 당하고 물러난다’는 표현은 법정에서 유죄 선고를 받고 퇴장하거나 전쟁에서 패하여 후퇴하는 모습(시 35:4; 40:14; 83:17) 등 완전한 패배와 멸망을 뜻합니다. 역사상 이스라엘을 괴롭힌 열방과 민족은 이집트를 비롯하여 아모리, 아말렉, 바산, 블레셋, 암몬, 모압, 에돔, 두로, 시돈, 아람, 앗수르, 바벨론 등 수없이 많았습니다.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심판은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선지자 등을 통해 예고되었고(사 13-23장; 렘 46-51장: 겔 25-32장), 역사의 각 사건들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이 증명되었습니다. 둘째, 이스라엘의 대적들은 풀처럼 말라 사라질 것입니다(6-7). 이스라엘을 학대당하는 소에 비유했다면, 이스라엘의 원수들은 소 같은 가축에 비교될 수 없고, 붕에 난 풀에나 빗댈 수 있습니다. 풀이 밭에 나면 사람의 손길이 없어도 무성하게 됩니다. 그러나 지붕 위에 풀이 나면 잘 자라는 듯 보이지만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하므로 잘 자랄 수 없고 햇볕에 이내 말라버립니다. 시인은 이스라엘의 원수들이 이 풀처럼 쓸모없게 되고자라기도 전에 말라 죽기를 기원합니다. 7절의 ‘이런 것은 베는 자의 손과 묶는 자의 품에 차지 아니하나니’라는 말은 6절의 지붕에 난 풀들이 추수하는 자들의 손에 몇 뿌리 잡히지도 않고, 단을 묶어 품에 안아 나르는 자에게는 턱없이 모자란다는 뜻입니다. 물론이 말은 원수들이 지붕 위의 풀을 거둔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들이 추수할 밭의 곡식이 지붕에 듬성듬성 자란 풀들처럼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시들어져 베어 단으로 묶어 나르지도 못할 만큼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대적들은 지나가는 자들에게서조차 무시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8) 8절의 ‘지나가는 자들’은 원수와 관련이 없는 제3자들로서, 추수 때에 그곳을 지나간다면 으레 하나님의 복을 빌어주는 것이 마땅한데도(룻 2:4), 아무런 축복의 말을 건네지 않는 것은 6-7절에 설명된 대로 그들의 추수가 볼품없기 때문이거나, 그들의 악행으로 인한 참상을 보고 경악하거나 비웃는 경우(왕상 9:8)이기 때문입니다. 위 5-8절은 이스라엘의 대적에 대한 심판을 기원하는 간구지만, 이 ‘간구’를 문자 그대로 ‘아직 안 이루어진 일을 바라는 기도’ 또는 ‘이루어질지 모르는 일을 바라는 기도’로 봐서는 안 됩니다. 내용은 간구이지만, 2절에서 대적들이 이스라엘을 이기지 못했음을 밝혔고, 4절에서 하나님께서 이들의 줄을 이미 끊으셨다고 말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당시에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하나님 편에서는 이미 성취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역사를 돌이켜 보건대 하나님께서는 심판보다 구원을 즐거워하시고 즐겨하시는 분입니다. 또다시 하나님께 구원을 청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희망적인 일입니까. 이전 싸움에서 패했다면 구원을 간구할 오늘조차 우리에게 없었을 테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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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128-01)


축복받는 가정의 비밀

시편 128편 1-6절


 

어느 단체든지 궁극적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지속성과 확장성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로 이 땅에 지속적으로 존재할 뿐만 아니라 성장함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확장 시켜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가정과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가 세상의 도전을 이기고 부흥하고 번성할 수 있도록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간구해야 합니다.

 

  • 하나님을 경회하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얼마나 행복합니까! 이들은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행복과 형통의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 자신과 그들 가정을 돌보시며 그가 사는 성읍에도 평강을 주실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의 행복(1-4)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모든 복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단순히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그분의 말씀을 따르는 삶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자신의 수고의 열매를 온전히 누리게 됩니다. 우리의 노력과 수고가 헛되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그 열매를 풍성하게 하십니다. 이는 단순히 물질적인 축복을 넘어서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형통함을 의미합니다.

 

1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2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3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식탁에 둘러 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4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1-4)

 

시편 128편은 앞 127편과 주제와 내용상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먼저 주제 면에서, 127편이 하나님의 개입이 배제된 삶이 헛됨에 초점을 맞췄다면, 128편은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자기들의 삶에 개입시키는 자들이 누리는 행복과 축복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두 시는 동전의 양면처럼 같은 주제를 서로 대조적으로, 동시에 보완적으로 묘사합니다. 시인은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라고 노래합니다. ‘복이 있도다’라는 말이 1절맨 뒤에 번역되어 나오지만, 원문에서는 첫 단어(아쉬레)로 나옵니다. 이 단어의 원뜻은 ‘얼마나 행한가!’(how happy!)이며, 상대방에 대한 개인적인 부러움을 표현할 때 사용되거나, 부러움을 넘어 하나님의 축복을 전달할 때 사용됩니다(신33:29; 왕상 10:8; 잠 4:21 등). 신약에서 예수님의 산상수훈(마 5:3-11)에 나오는 ‘~자는 복이 있나니’에서 ‘복이 있나니’가 이 단어에 상응하는 헬라어(마카리오이)의 번역입니다. 앞 127:5에서도 ‘얼마나 행복한가!’의 단어가 나와(‘복되도다’로 번역됨) 하나님의 축복의 일환으로 자녀에 대해 언급하면서, 화살통에 화살을 많이 가진 용사가 전쟁을 대비하거나 전쟁에서 담대할 수 있어 행복하듯, 많은 자녀를 둔 자도 그러한 행복을 누린다고 말했습니다(127:3-5). 127편에서는 하나님이 백성에게 은혜로 주어 누리게 하는 행복을 소개했다면, 128편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할 때 누릴 행복을 소개하여 서로 보완하고 있습니다. 128:1의 행복이 여호와를 경외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있다는 구절은 112:1에도 유사하게 나옵니다. 두 시편 모두 여호와를 경외하는 행복을 순종의 행복에 앞서 기술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경외’라는 뜻은 잠언에 구체적으로 제시되었듯이, 지혜와 지식의 근본(잠 1:7; 9:10)이자 훈계와 책망을 존중하는 것(잠 1:7), 나의 경험이나 생각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3:7), 교만이나 거짓말이나 악행을 버리고 선을 추구하는 것(8:13),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9:10)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면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말씀을 실행해야 합니다. 두 시편에서는 특히 순종의 의미를 ‘하나님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것’(112편)과 ‘하나님의 길을 걷는 것’(128편)으로 정의합니다. 진정한 순종에는 진심으로 말씀을 즐거워하는 마음과 말씀대로 행하려는 자발성 등이 포함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참조. 시 119:1-2).

2-3절에서는 구체적으로 ‘너’라는 주어를 사용하여 여호와를 경외하고 말씀을 순종하는 자들, 가장을 중심으로 한 가정의 구성원 모두가 누리는 행복한 삶을 설명합니다. 2절에서는 가장의 노고와 그 대가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축복, 3절은 아내와 자녀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축복을 그립니다. 2절을 직역하면 ‘네 손의 수고를 네가 먹을 때, 네가 행복하고 네가 선하리라’입니다. 원문에서는 ‘네 손의 수고’가 문장 맨 앞에 강조되었고, 특히 ‘네 손’이라는 말은 직접 일했다는 점을 부각합니다. 또한 ‘네 속의 수고를 먹는다’는 말은 가장이 손수 일했음을 강조하며, 이 일에 손해를 보지 않았으며, 얻은 대가를 잃거나 남에게 빼앗기지 않고 당사자와 가족이 먹을 수 있었음을 드러냅니다(시 111:5).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가장과 그의 가족에게 주시는 행복과 형통의 축복이 증명됩니다. 2절의 이런 내용은 앞 시편 127:2을 상기시킵니다. 거기서는 일찍 일어나 쉬는 것을 미루면서 열심히 일하여 그 수고의 떡을 먹어도, 하나님이 그 모든 활동에 함께하지 않아 부질없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반면에 시편 128:2에서는 가장의 손의 수고와 그 결과를 맛보는 것이 행복하고 선함(또는 형통)을 보여줌으로써,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간섭하심을 넌지시 드러냅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행복은 1절의 ‘복이 있도다’라는 단어가 2절에서도 ‘복되고’로 반복되어 더 강조되었습니다. 이같이 127편에서 강조하는 하나님의 함께하심의 중요성은 128편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3절은 아내와 자식에게 초점을 맞추어 여호와를 경외하는 남편과 더불어 가족 모두가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풍요를 누리는 모습을 묘사하여, 하나님의 축복이 남편에게만 머물지 않고 아내와 자녀들에게까지 뻗어나감을 보여줍니다. 아내와 자식은 집 안에서 그들이 머무는 상징적인 장소를 통해 소개되고, 각각 결실을 맺는 나무들로 비유됩니다. 집의 안쪽 방에 자리 잡은 아내의 모습은 사적인 공간에서 보호와 안정을 제공 받으면서 한 남편의 아내이자 자녀들의 어머니로서의 위상을 보여줍니다. 이 아내는 또한 많은 열매를 맺는 포도나무로 비유되어, 여러 자녀를 낳아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키우고 자신도 성장해가는 자로 암시되었습니다. 식탁에 뺑 둘러앉은 자녀의 모습은 아버지의 노고와 어머니의 수고가 깃들인 음식을 서로 나누고 있는 화목한 가정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들은 어린 감람나무로 비유되어, 나무가 자라 풍성하고 질 좋은 올리브와 기름을 내듯 자녀들도 여호와를 경외하고 말씀에 순종하며 가정과 사회에 유용한 자들로 성장할 가능성을 보여주니다.

1-3절에서 한 가정의 가장을 중심으로 그의 수고와, 아내 및 자녀를 통한 행복을 설명한 후, 4절은 1절의 주제로 돌아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의 축복’으로 단락을 끝냅니다. 시인은 이들에게 ‘자, 이와 같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축복을 받으리라’라고 말하며, 그들도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분이 주시는 복을 누리기를 권면합니다. 4절의 ‘복을 얻으리로다’는 ‘축복을 받으리라’라는 뜻으로, 1, 2절의 행복을 뜻하는 ‘복이 있도다/복되고’보다 하나님의 축복이 강조되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2-3절에 묘사된 행복과 축복이 가득한 가정을 꿈꿀 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성읍의 축복(5-6)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하심은 사망 권세를 꺾으셨고,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확정된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온전한 하나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축복은 개인과 가정을 넘어서 공동체와 나라에도 미칩니다. 시온에서 주시는 복은 하나님의 임재와 평강을 상징하며, 이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와 나라가 하나님의 은혜로 번영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5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며

6네 자식의 자식을 볼지어다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지로다(5-6)

 

1-4절의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과 그의 가정에 임한 ‘하나님의 축복’은 5-6절에서는 시온과 이스라엘에게로 확대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경외하는 그의 배경을 시온에서 축복하신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축복을 기초로 하여, 그들에게 평생 동안 예루살렘이 번영과 자식의 자식을 보라고 명합니다. 여기서 언급된 두 도시 시온과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여 택하신 곳(시 78:68)이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두고 백성과 영원히 함께 기할 것을 약속하신 장소(신 12:5; 왕상 9:7; 렘 7:14)입니다. 하나님께서 시온에서 백성을 축복하신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계속적으로 시온에서 백성과 함께하심을 암시합니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면 하나님께서는 장수와 후손의 축복을 더하실 것입니다. 어디에 살든지 예루살렘의 번영을 볼 것입니다. ‘번영’이란 ‘행복’, ‘안녕’, ‘아름다움’, ‘최상의 것’을 뜻하므로, 예루살렘의 번영을 본다는 말은 이들이 사는 곳에도 예루살렘 도성에 깃든 안전과 평안이 함께할 것을 의미합니다. 한편, 5-6절의 백성을 향한 축복의 기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하기 원하여 제사장에게 가르쳐주신 민수기 6:24-27의 제사장의 축복기도를 연상시킵니다. 하나님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에나 이스라엘을 기꺼이 축복하려 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전체의 평강을 기원하며 끝납니다. ‘평강’으로 번역된 단어 ‘샬롬’은 바로 앞 5절의 ‘평강(화평)의 도시’라는 뜻을 지닌 ‘예루살렘’과 연결됩니다.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의 평강을 기원하는 것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와 그 나라 백성의 평강, 하나님께서 선택한 도시 예루살렘과 그곳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의 평강을 함축하는 기원(시 122편)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6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축복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한 사람을 택하여 복을 주셨을 때, 그 축복이 아브라함에게서 끝나지 않고, 그의 아내와 이삭과 그의 후손에게 확대되고, 후에 이스라엘 백성과 나라 자체에까지 확대된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땅의 모든 족속에게 확대됩니다(창 12:3).


우리가 세상에서 어떤 일을 감당하든지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음을 인정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가정과 일터에서, 학업과 사업에서, 그리고 교회의 부흥을 위한 모든 활동에서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회복하며, 하나님께서 주인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모든 일을 먼저 주님께 의뢰하고 힘차게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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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127-01)

 


하나님께서 지으시는 집

시편 127편 1-5절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노력과 계획으로 성공을 이루기 위해 애씁니다. 열심히 일하고,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양육하며 더 나은 미래를 꿈꿉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 없이는 우리의 모든 수고와 노력은 헛되다는 것입니다. 이 시편은 자녀들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상기시키며, 그들을 통해 주시는 축복과 기쁨을 이야기합니다.

 

  • 하나님께서 함께하지 않으시는 인생의 일이나 활동은 그것이 어떤 일이든지 간에, 또 그것의 수고나 대가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모두 헛됩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임재와 개입 안에서 이루어지는 삶은 하나님 보시기에 가치 있으며, 그런 삶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개입의 축복(1-2)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게 하십니다. 우리는 일에 능숙해지고 연륜이 쌓일수록 자력으로 해냈다는 생각에 모든 공을 자신에게 돌립니다. 하지만 혼자만의 수고와 열심은 언제 무너질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지켜주심이 필요치 않은 순간은 없습니다.

 

1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2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1-2)

 

시편 127편의 첫 두 절은 ‘하나님의 임재와 개입이 없는 인생의 활동은 다 헛되다’라는 교훈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 교훈은 ‘만약 여호와께서 하지 아니하시면’이라는 조건을 알리는 절과 ‘~가 헛되다’라는 결과를 알리는 절을 결합한 문장 구조로 나오며, 세 가지 예를 통해 제시됩니다. 각 예문에서는 ‘헛되며 헛되도다’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는 히브리어로 ‘샤브’로서 ‘가치 없음’, ‘헛됨’, ‘텅 빔’, ‘거짓’, ‘속임’ 등의 뜻을 나타내며, 이런 뜻이 담겨 있기 때문에 ‘우상’을 지칭할 때도 사용되었습니다(시 31:6; 렘 18:15). 이 단어는 전도서에서 나오는 ‘헛되다’와 다릅니다. 세 가지 예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시겠습니다. 첫째, 집을 짓는 데 있어 하나님의 개입이 없으면 허사입니다. ‘집’이란 단어는 개인과 가족의 거주지(신 22:8), 왕의 궁궐(삼하 7:1,2), 동물의 은신처(욥 39:6; 잠 30:6), 이방신의 사당(왕상 16:32), 하나님의 성전(삼하 7:5,13; 슥 1:16)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1절의 ‘집을 세운다’는 표현은 문자적으로는 거주지를 건축하는 일을 뜻하면서도, 상징적으로는 한 가정이나 가문을 세우는 일(암 7:16) 또는 왕의 경우, 왕조를 세우는 일(삼하 7:11,16)을 함축합니다. 가문이나 왕권을 설립하는 중대한 일에 하나님의 개입이 없다면, 그 일에 가담하는 자들의 수고와 노력이 헛되며 미래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둘째, 성을 지키는 데 있어 하나님의 개입이 없으면 허사입니다. 파수꾼은 적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엄중한 임무를 수행하는 자들이나, 성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그들과 도성에 미치지 않는다면, 이들의 수고는 물거품이 될 것입니다. 셋째, 일상생활에 하나님의 개입이 없으면 모든 수고와 그 결과도 허사입니다. 이 셋째 예(2)는 1절의 첫째, 둘째 예와 구조와 내용 면에서 달라 듣는 이의 주의를 끕니다. 먼저 구조면에서, 2절에서는 1절의 ‘여호와께서 하지 아니하시면’이라는 조건절이 생략되었습니다. 대신 ‘그러므로’로 시작하는 문장이 부가적으로 나왔습니다. 내용 면에서는, 1절의 두 에는 건축과 파수라는 제 3자의 특정적이고 중요한 일을 예로 들었습니다. 그러나 2절에서는 ‘너희’ 즉, 청중에게 초점을 맞추어, 대부분 가정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 즉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하는 수고를 예로 들었습니다. 2절의 첫 문장은 직역하면 ‘일어나기를 일찍이 일어나고, 앉기를 미루며, 수고들의 빵을 먹는 것이 너희에게 헛되다’입니다. 여기서 ‘앉기를 미룬다’는 말은 휴식을 미룬다는 말로 쉬지 않고 일하는 모습을 강조합니다. 이 예에서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개입이 없다면, 사람의 일상적인 노동과 노력만이 허사가 아니라, 그로 인해 얻은 결과물(‘수고의 떡’)조차 허사임을 강조합니다.

2절에 부가적으로 나온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의 해석에는 몇 가지 의견이 제시되었습니다. 이 번역은 히브리어 원문의 직역으로 개역개정을 비롯한 대부분의 번역본(KJV, ASV, NIV, ESV 등)에 등장합니다. 반면, 몇몇 번역본(NAU, NAB, TNK)은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잠을 자는 동안에도 복을 주신다’는 의미로 번역하였습니다. 어떤 번역이든, 분명한 것은 ‘잠’이 하나님의 축복을 뜻한다는 점입니다. 다만, ‘잠’ 자체를 하나님의 축복의 잣대로 보는 것, 잠이 많은 자나 잠을 잘 자는 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라는 주장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런 해석은 문맥을 고려하지 않은 데서 나왔다고 봅니다. 2절에서 시인이 갑작스레 잠에 대해 언급하는 듯하지만, 잠에 대한 언급은 오히려 자연스럽습니다. 일찍 일어나 잠자리에 들기까지 앉기를 미루고 일하는 자들에게 현실적으로 가장 필요한 것이 잠이기 때문입니다. 잠은 히브리어 ‘쉐나’로 ‘헛되다’인 ‘샤브’와 같은 자음 소리로 시작하고 끝나므로, 결과적으로 자음 하나만 다른 단어입니다. 시인이 이러한 언어유희를 이용하여 고된 일상을 보내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잠은 하나님의 개입과 축복임을 말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원문 그대로의 의미로 읽어도 전혀 무리가 없습니다.

 

자녀의 축복(3-5)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땀 흘려 수고함으로 생을 이어가도록 하셨지만, 노동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수고해도 잠 못 드는 인생이라면 어디에서 쉼을 얻겠습니까. 노동의 완성은 안식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의지하며 수고하는 백성에게 쉼을 주십니다.

 

3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4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5이것이 그의 화살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그들이 성문에서 그들의 원수와 담판할 때에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3-5)

 

3절은 ‘보라!’로 시작하여 청중의 주목을 끈 후 자녀를 예로 들어 부모와 하나님과의 관계, 부모에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을 5절까지 설명합니다. 1-2절이나 3-5절 모두 하나님의 간섭과 하나님 덕분에 얻게 되는 유익을 담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시 전체에서는 성벽 있는 도성 안에서 사는 사람들과 삶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 증거로 시에 언급된 사람들로는 건축자, 파수꾼, 일반인, 자식, 부모, 원수가 있으며, 관련 장소로 집, 성, 성문이 언급되었고, 이들과 장소에 관련된 일이 설명되었습니다. 127편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의 하나이며, 이 표제가 있는 시 대부분이 ‘시온’과 ‘예루살렘’에 대한 평안을 기원하거나 언급하기 때문에(시 122:6-9; 125:1-2; 126:1; 128:5; 129:5; 132:13-18; 133:3; 134:1-3), 이 시와 나머지 시의 배경이 되는 장소를 시온 성이나 예루살렘 성으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또한 ‘자식’(바님)은 발음상 1절의 ‘세우는 자’(보님)를 상기시킵니다. 집을 짓는 행위는 가문이나 왕조를 세우는 상징적 의미와도 연결되므로, 가문과 왕조를 세우는 데 필수 요소인 ‘자식’에 대한 언급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시인은 자식을 ‘하나님의 기업’으로 소개하는데(3), 기업이란 ‘땅’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에게 땅은 ‘가나안 땅’이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언약(창 12:7; 13:14-17; 15:7)을 통해 받은 산물입니다. 이 기업은 각 지파에 따라 분배되었고(수 12:23;13-19장), 지파의 각 가정은 분배받은 땅을 후손에게 유산으로 물려주어 대대로 삶의 터전으로 삼을 수 있었습니다. 땅이 하나님의 것이듯(레 25:23), 각 가정에 주신 자녀도 하나님의 소유입니다(출 19:5). 땅이 한 가정에게 유업이 되듯, 자식도 대대로 출생하여 가문과 왕조의 대를 세웁니다. 한편, 기업은 기본적인 ‘땅’의 의미 외에도 이스라엘과 하나님에게 적용되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기업’(사 19:25; 렘 12:7-9)으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기업’(민 18:20: 신 10:9; 수 13:14; 시 119:57)으로 불렸습니다. ‘기업’이라는 개념은 언약을 통한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친밀하고 연속적인 관계를 함축합니다. 자녀는 ‘태의 열매’와 ‘하나님의 상급’으로 설명되었습니다(3). ‘태의 열매’는 어머니의 뱃속에 아이가 잉태된 상태를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어구입니다. 각 여인의 태를 열고 닫는 권한이 하나님께 있으므로(창 20:17-18), 태를 열어 아이를 잉태하게 하신 것(창 20:17; 25:21-22)을 하나님의 상급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자녀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자들입니다(창 33:5).

4-5절은 자녀가 잉태되고 태어난 것만이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라, 자녀가 있음으로 인해 따라오는 힘, 유익, 행복도 하나님의 축복임을 묘사합니다. ‘젊은 자의 자식’(4)은 ‘젊을 때 낳은 자식’이라는 뜻이며, 이와 같은 자식은 용사의 손에 있는 화살들로 비유되었습니다. 용사에게 있어 화살이나 창은 용사가 전장에 나갔을 때 그의 생명을 지켜줄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수단입니다. 이처럼 자식도 부모에게 있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줄 것입니다. 더구나 용사의 화살통에 화살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가 적과 더 오래 겨룰 수 있는 원천이 되듯, 자녀도 많으면 부모가 어려움을 당할 때 큰 힘이 되므로 그 부모는 행복한 자입니다(5). 특히 부모가 성문에서 원수와 말할 때(‘담판할 때’로 번역됨), 그들 사이에 오가는 말에 자녀가 나서서 부모를 지지해 주거나 분별력 있게 행동하여 원수에게서 수치를 당하지 않도록 막아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성문’은 마을의 경제 활동이나 작고 큰 소송의 해결을 위한 재판 등이 진행되는 곳입니다. 이같이 자녀의 진가가 부모의 삶에 나타나는 모습은, 하나님과 함께하며 수고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잠으로 평안케 하시듯(2), 자녀와 부모의 삶에 하나님의 개입과 축복이 지속되고 있음을 암시합니다(3).


각자도생도 힘든 시대에 노동 강도는 점점 강해지고 쉼의 자유는 박탈되고 있다. 우리의 모든 수고와 노동의 버거움을 아시는 하나님은 그럴수록 하나님을 의지하고 맡겨야 함을 일깨워주신다.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 세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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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126-01)


기쁨의 회복: 하나님의 큰 일들

시편 126편 1-6절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시고 기적을 이루실 때, 우리는 그분의 은혜에 깊이 감사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의 입술과 마음이 항상 감사로 가득 차야 하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씨앗을 기쁨으로 거두게 하십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인내하며 씨앗을 뿌리고, 하나님의 완벽한 타이밍과 계획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회복시키시고,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새롭게 하십니다. 우리는 그 회복의 축복을 경험하며 감사와 찬양을 드리고, 어려움 속에서도 신뢰를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유다가 바벨론에 멸망한 후에도 그들과의 언약을 잊지 않으시고 그들을 위해 큰일을 행하셨습니다. 그 큰일은 바로 이스라엘을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오게 하신 사건입니다. 귀환한 백성들은 과거의 이 사건을 추억하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여전히 은혜 베푸시기를 고대합니다.

 

포로귀환을 주도하신 하나님께 감사(1-3)

우리 삶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시고 기적을 이루실 때, 그분의 은혜에 깊이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하며 찬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입술과 마음이 항상 하나님께 대한 감사로 가득 차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의 기대를 넘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며, 우리는 그분의 큰 일에 대해 항상 기뻐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1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2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3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1-3)

 

오늘 시인과 그의 공동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포로 생활에서 돌아오게 하신 사건을 회고합니다. 포로로 잡혀간 백성들은 바벨론 강가에서 울며 이방인들의 조롱 가운데 시온을 그리워했습니다(시 137:1-4). 그들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약속하신 대로(렘 25:11,12; 단 9:2) 이스라엘을 포로에서 돌이키시길 고대하며 기도했습니다(단 9:4-19; 시 53:6;102:13). 때가 되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법, 즉 페르시아 왕 고레스를 사용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유다 땅으로 돌려보내심으로써(대하 36:22-23; 스 1:1-4) 그의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셨습니다. 이 포로 귀환 사건으로 하나님은 다윗과 맺온 언약이나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다 회복해주신 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후 이스라엘로 하여금 성전을 재건할 수 있게 하셨고(스 6:15), 예전처럼 시온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거주하셨습니다.

본 시편 126편에서 하나님이 포로귀환을 통해 이스라엘을 지키셨고, 열방의 세력으로부터 이스라엘의 삶의 터전인 땅(기업)을 돌려주셨고, 이스라엘에게 웃음과 찬양을 주셨다는 내용은 바로 앞 125편에서 시인이 선언하고 간구했던 내용과 밀접하게 연결되며, 그 내용이 성취된 것을 증명하는 한 예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포로로 잡혀갔던 자들을 유다 땅으로 돌려보내셨을 때 그들은 너무 기쁘면서도 현실이 믿기지가 않아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고 시인은 설명합니다(1). ‘그때에’ 포로 귀환자들의 입에는 웃음이, 그들의 혀에는 찬양이 가득했습니다(2).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졌고, 포로 귀환의 기쁨을 간구했던 기도(시 53:6)가 응답되었으므로, 당시 귀환자들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격과 기쁨이 있었음은 말할 나위 없습니다. 2절의 ‘우리 혀에는 찬양’에서 ‘찬양’으로 번역된 단어(린나)는 기쁘거나 슬퍼 소리 지르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는 환호를 의미하여,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기쁨의 외침과 노래가 울려 퍼졌음을 표현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기쁨이 벅차오르면 눈물이 나듯, 웃음과 노랫소리 안에는 감격하여 통곡하며 울부짖는 소리도 들렸을 것입니다(스 3:11-1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포로를 회복시킨 사건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열방에게까지 그 소식이 전파되었습니다. 열국의 백성들은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여호와께서 그들(이스라엘)을 위하여 큰일을 행하셨다’며 그들의 놀라움을 표하였습니다(2; 시 40:3; 사 52:10). 실제 이스라엘이나 다른 나라의 역사 가운데 이런 현상은 종종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던 이스라엘을 홍해를 가르고 광야를 지나 가나안으로 인도하셨을 때, 여러 기적을 목격했거나 듣게 된 열방의 백성들은 이 소식에 간담이 녹았고 두려움에 휩싸였으며(출 15:14-16; 수 2:8-9), 어떤 이들은 이스라엘인들을 따라 가나안으로 가는 여정에 동참하기도 했습니다(출 12:38; 민 11:4). 이와 같은 과거의 실제적인 예들은 현재와 장래, 종말에 이르기까지 세계 여러 민족이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을 듣고 놀라 찬양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나와 경배하게 될 것 (사 66:18-19; 시 22;27; 슥 14:16)을 성도로 하여금 고대하게 만듭니다.

열방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도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일을 행하셨다’(2)고 증거하며 기쁨을 표현합니다. 열방은 하나님의 기적과 같은 일을 목격했거나 듣기만 했을 뿐 직접 경험하지 못했지만, 이스라엘은 직접 경험했으며 하나님의 행하신 큰일의 혜택을 본 당사자들이었므로, 이들의 감격과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행하신 일들은 과거 이스라엘 공동체에게만 큰 기쁨을 주고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놀라운 일은 시간이 흐른 현재 그 일을 경험한 자들이나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무리에게도 기쁨을 주며, 미래에도 하나님의 백성에게 큰 기쁨을 주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4)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회복시키시고, 우리의 마음과 영혼까지 새롭게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회복의 축복을 경험하며 감사와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응답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인생의 어려움과 고난에서 회복되기를 기도하며, 하나님께 우리의 상황을 맡기고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 풍요롭고 축복된 회복을 약속하시며, 우리는 그 신뢰를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4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 보내소서(4)

 

하나님께서 베푸신 큰일을 회고하며 기뻐한 시인은 이스라엘의 완전한 회복과 축복을 하나님께 간청합니다. 하나님께 포로를 돌려보내달라는 요청은 초기 귀환자들의 수가 많지 않았기에(약 오만 명:스 2장) 더 많은 사람들을 돌려보내시기를 구하는 구체적인 요청이거나 이스라엘에게 과거와 같은 축복을 내려달라는 일반적인 요청일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것은 너무 기쁜 일이었으나, 본토에 다시 적응하고 현실의 삶을 꾸려나가는 일은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귀환 공동체는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했지만, 포로 귀환 직후에 벌어진 일을 기록한 성경(에스라 1-6장, 학개서 등)을 보면, 그들은 여러 방면에서 현실적인 어려움과 고통(이방인들과의 갈등, 핍박, 경제적 문제 등)을 직면해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이스라엘을 '남방 시내들 같이' 회복시켜달라고 하나님께 요청합니다. ‘남방 시내들’에서 ‘남방’은 예루살렘의 남쪽 사막 지역인 ‘네게브’지역입니다. 이스라엘의 기후는 건기와 우기로 나뉘어 있어, 우기 때가 되어야 비로소 물을 얻을 수 있으므로, 네게브 지역에서 흐르거나 넘치는 물을 보기는 어렵습니다. 메마른 수로에 폭우가 내려 물이 가득 차 흘러내리는 일은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과 은혜가 있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시인은 포로 귀환이라는 기적과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서 지금 시인과 그의 공동체에게도 마른 시내에 물줄기가 흐르게 하는 기적과 은혜를 내려주시길 간청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5-6)

우리가 하나님께 씨앗을 뿌릴 때, 비록 그것이 눈물과 어려움 속에서도 이루어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결과를 기쁨으로 거두게 하십니다. 이 소망을 가지고 어려움 속에서도 인내하며 씨앗을 뿌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열매를 기대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수고와 씨앗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분의 완벽한 타이밍과 계획을 신뢰하며 기다리면, 결국 그분의 축복을 경험할 것입니다.

 

5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6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5-6)

 

5절의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라는 시인의 말은 갑작스럽게 들리나, 4절과 연결해서 보면 이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에 대한 약속 또는 확신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농부의 ‘눈물’과 ‘기쁨’은 위에 언급된 포로 생활의 고통과 포로 귀환의 환호, 메마른 네게브의 시내와 물이 흐르는 네게브의 시내라는 대조적인 관계와 일맥상통합니다. 5,6절에 나오는 ‘기쁨’은 2절에서 ‘찬양’으로 번역된 단어(린나)로 ‘기쁨이나 슬픔의 외침’입니다. 시인은 2절에서 사용했던 단어를 여기서 반복함으로써 과거 포로 귀환 때 환호했던 것처럼 현재 그와 그의 공동체가 기뻐 소리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고대합니다. 6절은 5절의 내용과 같으나 내용을 더 구체적으로 묘사하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시인이나 청중이나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에 대한 기대를 높이고, 확신을 굳히는 역할을 해줍니다. 개역개정은 이 구절을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원문을 직역하면 ‘울면서 씨주머니를 들고 계속 가는 자는 환호로 그의 단들을 들고 반드시 오리로다’입니다. 여기서 농부의 수고와 그 결과는 세 가지 대조를 통해 묘사되고 있습니다. 첫째, 농부의 울음소리와 기쁨의 외침이 대조됩니다. 이 부분은 1-3절의 환호가 떠오르는 대목입니다. 둘째, 농부의 씨가 든 주머니를 나르는 모습과 곡식 단들을 나르는 모습이 대조됩니다. 즉, 농부의 파종과 추수를 가리킵니다. 셋째, 농부의 계속해서 밭에 나가는 행동과 추수 후 돌아오는 행동이 대조됩니다. 특히 이 두 동사, ‘가다’와 ‘오다’는 문법상 동작의 반복이나 강조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즉, ‘가다’는 그냥 걸어 다니는 행동이 아니라 왔다 갔다 부산하게 움직이는 행동 또는 끊임없이 씨를 뿌리러 나가는 행동을 뜻합니다. ‘오다’는 추수 후 곡식 단들을 들고 확실히 돌아오는 모습을 강조합니다. 추수의 기쁨은 눈물의 파종, 즉 희생 없이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큰 은혜와 회복을 경험하며 기뻐하는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이 본문은 우리가 삶의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회복과 기쁨을 기대할 수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기도와 감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큰 일을 경험하고, 그분의 은혜를 기억하며 살아가도록 권면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우리는 기쁨과 감사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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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125-01)


하나님의 보호와 의인의 평안

시편 125편 1-5절


 

하나님께서는 현재와 미래에 걸쳐 그분의 백성을 보호하시며, 그 사랑과 보호는 변함없이 계속됩니다. 우리는 이 보호를 확신하고 의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의인들을 악인의 지배에서 지키시며, 성도들은 정직하고 선한 삶을 유지해야 합니다. 사악한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평화와 축복을 누립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순종함으로써 참된 평화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그를 신뢰하는 그의 백성을 항상 보호하십니다.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는 세상에 사는 악인과 의인을 하나님이 어떻게 다스리시는지를 통해 두드러지게 증명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으로 하여금 죄악에 빠지지 않게 선대하시며, 악인으로 하여금 다른 악인들과 함께 어울리도록 두십니다.

 

그의 백성을 보호하시는 하나님(1-2)

하나님께서는 현재와 미래에 걸쳐 그분의 백성을 보호하시고 지켜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변하지 않으시며, 그분의 보호와 사랑은 영원히 계속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확신하고, 그분의 보호를 의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감싸주시며, 그분의 안전한 손길 아래에서 평안을 누릴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1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2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1-2)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견고한 보호를 받을 것이므로 두려움이 없습니다. 이들이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2). 하나님을 신뢰하는 백성과 이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보호는 1-2절에서 ‘시온’과 ‘예루살렘’, 두 장소를 통해 설명됩니다. 먼저, 시인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들은 ‘흔들리지 않고 영원히 자리를 지키는 시온 산’과 같다고 말합니다(1). 성경에서 ‘시온’은 ‘예루살렘’의 동의어나 대체어로 자주 사용됩니다. 원래 시온(뜻: 성채)은 다윗이 여부스 사람들이 살고 있는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점령한 남서쪽 지역의 산성을 가리킵니다(삼하 5:7). 그 후 다윗이 시온에 거주하였으므로, 시온은 ‘다윗 성’이 되었습니다(삼하 5:7,9). 다윗은 예루살렘(뜻: 평화의 터)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정하고 이곳으로 하나님의 언약궤를 옮겨왔고(삼하 6:17), 솔로몬 때에 하나님의 성전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건축되었습니다(대하 3:1). 하나님께서 그의 처소로 선택하신 장소가 바로 이 예루살렘이었으므로(시 78:68; 132:13), 예루살렘과 시온 산은 ‘하나님의 성’, ‘큰 왕의 성’(시 48:1,2) 또는 ‘하나님의 산’, ‘거룩한 산’으로도 불렸습니다(시 2:6; 사 3:16). 하나님께서 이 시온 산에 계시므로 시온은 요동함 없이 건재할 수 있습니다(참조, 시 46편). 지진과 산사태, 광풍과 파도 등 자연의 혼돈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므로 시온이나 백성은 두려움도 흔들림도 없었습니다(시 46:1-3). 열방이 시끄럽게 소리 지르며 전쟁을 시작하고 이로 인해 왕국들이 흔들려도, 하나님이 목소리를 한 번 내심으로 땅이 휘청대며 녹았고(시 46:6),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전쟁을 아예 멈추셨으므로(시 49:9) 그의 백성은 안전을 누립니다. 둘째, 시인은 예루살렘의 지형학적 형세를 통해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돌보심을 묘사합니다. 예루살렘은 해발 780미터 구릉이며, 이 도성은 감람산, 성전 산(모리아 산), 시온산 등 산으로 둘러싸였습니다. 이처럼 여러 산이 예루살렘을 에워싸 외부의 공격에서 도성을 보호하듯, 하나님도 그의 백성을 둘러싸 대적으로부터 지켜주십니다. 산들도 변함없이 예루살렘을 지켜왔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보호하시는 손길은 영원까지 쉼 없이 지속될 것입니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에 해당하는 시편 중 121편에서도 시인은 하나님을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분’(시 121:4)으로 소개했고, 124편에서도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도움’이라고(시 124:8) 고백하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짐승의 이빨과 사냥꾼의 올무와 같은 위기에서 벗어나게 하셨음을 찬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그의 백성을 돌보시므로, 그의 백성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함으로써 또한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평안함을 누림으로써 이에 화답할 수 있습니다.

 

악인과 의인을 다스리시는 하나님(3-5a)

하나님께서는 의인들이 악인의 지배 아래 고통받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의인들을 보호하시고 죄악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마음과 삶을 정직하고 선하게 유지해야 합니다. 사악한 자들과 죄악으로 치우치는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참된 평화와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3악인의 규가 의인들의 땅에서는 그 권세를 누리지 못하리니 이는 의인들로 하여금 죄악에 손을 대지 아니하게 함이로다

4여호와여 선한 자들과 마음이 정직한 자들에게 선대하소서

5자기의 굽은 길로 치우치는 자들은 여호와께서 죄를 범하는 자들과 함께 다니게 하시리로다(3-5a)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의인과 악인을 살피고 다스리십니다. 시인은 악인이 하나님의 통제 아래 있음을 먼저 언급합니다. ‘악인의 규가 의인들의 땅에서는 그 권세를 누리지 못한다’(3)라는 시인의 선언은 ‘악인의 규가 의인들의 분깃 위에 안착하지 못하리라’는 뜻입니다. 원문에서, 악인의 ‘규’는 왕의 ‘홀’을 가리킵니다. 악인이 높은 지위와 권세를 가졌음을 암시합니다. 의인들의 ‘땅’은 그들이 각각 ‘기업(유산)으로 할당받은 땅’, 즉 그들의 소유를 나타냅니다. ‘그 권세를 누리다’란 말은 ‘정착하다’, ‘쉬다’, ‘안착하다’의 의미입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악인이 그들의 지위와 권세를 이용하여 의인들이 합법적으로 소유한 땅을 빼앗으려 함을 알 수 있습니다(미 2:2). 악인은 의인의 기업을 일시적으로 빼앗을 수는 있으나, 기업에 뿌리내리고 정착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의인을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의 예를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두 가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 불의한 방법으로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은 아합과 이세벨의 경우입니다(왕상 21장). 아합은 왕의 지위를 이용하여 나의 기업인 포도원을 빼앗으려 했습니다. 그가 나봇과 포도원 값을 흥정하려 할 때 나봇이 유업으로 받은 땅을 파는 일은 하나님의 율법(레 25:23)에 금지되었음을 지적하였듯이(왕상 21:3), 땅은 하나님의 소유로서 사고팔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예외적으로 제정하신 ‘기업을 무르는 제도’가 있어 이를 따라야 했습니다(레 25:24-34). 아합은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이와 같은 법을 몰랐을 리 없지만, 자기가 합법적으로 가질 수 없는 땅을 탐낸 것을 보면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가볍게 생각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아합의 아내 이세벨은 한 술 더 떠서 악한 계략으로 나봇을 죽여 그의 포도원을 아합에게 넘기게 합니다(왕상 21:15-16). 그러나 오늘 본문 3절에서 선언하듯, 이들은 나봇의 포도원에 안착하지 못했고, 그 죗값으로 죽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왕상 21:19; 22:37-38; 왕하 9:33-37). 둘째, ‘악인의 규’를 앗수르나 바벨론의 침입으로 보고, ‘의인의 땅’을 이스라엘의 기업인 가나안 땅으로 해석한다면, 열방의 무리가 침략하여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받은 기업을 빼앗은 사건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앗수르와 바벨론 왕들은 잔혹한 전쟁을 벌여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을 포로로 끌고 갔으며, 각 지파가 하나님으로부터 유업으로 받은 땅을 빼앗고 황폐하게 만들었습니다(왕하 18:11; 25:8-12; 렘 52:12-16; 애 1:3-4). 그러나 이때 열방도 아합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기업에 완전히 정주하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그들의 기업으로 돌려보내셨기 때문입니다(스 1:13), 포로 귀환 후에도 가나안 땅에 남은 이방인들은 귀환자들을 핍박하고 그들이 성전을 재건하는 것을 방해하고 옛 터전을 되찾지 못하게 하는 등 횡포를 부렸습니다(스 4:12-16; 5:3; 느 4:1). 그러나 이때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하신 도움으로 성전을 재건했고(스 6:15), 본토 자기 기업에 정착할 수 있었습니다(느 11:3).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행위와 삶만이 아니라 의인의 삶과 행위도 통제하십니다. 사람이 자기 본연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도 인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작용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이 의인에게 권세를 남용하지 못하게 막으시나, 의인에게는 이들이 죄악에 손을 뻗쳐 죄에 빠지지 않게 막으십니다(3b). ‘의인’이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들’(1)로서 ‘하나님의 백성’(2명)이며, ‘선하고 마음이 정직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의인을 선대하여 계속적으로 그들을 선한 길로 이시길 간구합니다(4). 그러나 의인과 반대로 행하는 자인 ‘악인’, 즉 ‘자기들의 구부러진 길로 방향을 튼 자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다른 악의 무리인 ‘죄를 범하는 자들’과 함께 어울리게 하시기를 고대합니다(5;시 37:38).

 

이스라엘에게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5b)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정직하게 살아가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의 기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믿고, 그분의 길을 따름으로써 참된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5b이스라엘에게는 평강이 있을지어다(5b)

 

하나님께서 의인과 악인을 그의 정의와 은혜로 다스리심을 기대하면서, 시인은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시인이 기도의 마지막에 이스라엘의 평강을 언급하는 것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의 다른 시에서도 나타납니다(시 122,128편). 어디서 어떤 상황에 있든 이스라엘의 평강을 구하는 일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특권이며, 이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간접적으로 나타냅니다. 시인은 이스라엘의 평강을 기원하면서 그 주체가 ‘하나님’임을 두드러지게 언급하지는 않습니다. 평강을 주시는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이미 전제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기억해야 할 점은 하나님의 평강을 기원하는 것이 단순히 시인의 열망만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에게 평강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의도적이고 의지적인 열망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기도하라고 제사장에게 가르쳐주신 기도(민 6:24-27)에서 잘 나타나듯,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은혜와 평강의 축복을 아낌없이 베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보호와 의인에 대한 약속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현재와 미래에 걸쳐 우리를 지키시며 악인의 지배에서 보호하십니다. 의롭고 정직한 삶을 지속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순종함으로써 평화와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안전과 평안을 지키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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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124-01)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의 은혜

시편 124편 1-8절


 

우리도 삶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이 함께하신 덕분에 많은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말고, 항상 하나님을 의지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위기 속에서도 언제나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찬양하며, 감사의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한 후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그분의 이름을 높입시다.

 

  • 천지의 창조주인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도움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편에 계셔 그들이 어떠한 위기에 있든지 그들을 안전히 보호하셨습니다. 청중들은 이스라엘의 도움이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지 않으셨더라면(1-5)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여러 차례 경험했으면서도, 그 은혜를 잊고 불평했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기적을 통해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반복적으로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이러한 역사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진심으로 감사하는 성도가 되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해 늘 감사해야 합니다.

 

1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어떻게 하였으랴

2사람들이 우리를 치러 일어날 때에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3그 때에 그들의 노여움이 우리에게 맹렬하여 우리를 산채로 삼켰을 것이며

4그 때에 물이 우리를 휩쓸며 시내가 우리 영혼을 삼켰을 것이며

5그 때에 넘치는 물이 우리 영혼을 삼켰을 것이라 할 것이로다(1-5)

 

오늘 시인과 그의 공동체는 하나님께서 베푸셨던 은혜를 회고하며 감사와 찬양을 드리고 있습니다. 먼저, 시인은 ‘만약에’라는 가정법을 이용하여 과거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하지 않으셨다면 이스라엘은 이미 멸망했을 것임을 천명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에 감사합니다. 1,2절의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은 직역하면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지 않으셨다면’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이나 하나님의 함께하심이 없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라는 가정을 이끌어냅니다. 시인은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라’(1)고 청중에게 명하면서 그와 함께 과거를 회상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고 찬양하자고 권유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도움을 경험한 사건은 사람들(대적들)이 이스라엘을 거슬러 공격했을 때였습니다.

3-5절은 매 절에서 ‘그 때에’라고 시작하면서, 12절의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의 결과로 벌어질 수 있는 가능성, 즉 ‘이스라엘이 원수들에게 멸망했을 것이라’는 내용을 서술합니다. 이때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대적들의 기세는 맹렬한 불과 격렬한 물의 비유로 묘사되었습니다. 이러한 비유는 이스라엘이 대적에게 죽임 당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았음을 시사합니다. 또한 이와 더불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하신 것이 기적이며 은혜임을 간접적으로 부각합니다. 첫째 가능성으로, 이스라엘은 불처럼 거세게 일어난 대적들에게 불타버렸을 수 있었습니다(3). ‘그들의 노여움이 우리에게 맹렬하여’는 직역하면 ‘우리를 거슬러 그들의 화가 불타오를 때’란 의미로서, 대적의 공격 기세가 불같이 일어나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불의 화력이 너무 강력하므로 이 불은 이스라엘을 산채로 통째로 삼켜버렸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대적의 파괴적인 기세는 하나님의 분노의 불이 타올라 음부나 땅의 소산이나 산들을 태워버리는 심판의 모습을 떠오르게 합니다(신 32:22). 둘째 가능성으로, 이스라엘은 창궐하는 물과 같은 대적들에게 휩쓸려 떠내려갔을 것입니다(4-5). 여기 4-5절에는 물과 관련된 말이 세 가지(‘물들’, ‘시내’, ‘넘치는 물’)가 등장하여 3절의 불보다 훨씬 강도가 높은 기세를 보여줍니다, 여기서 물들은 잔잔한 물이 아니라 홍수나 쓰나미처럼 범람하고 파도치고 솟구치는 물입니다. 이 넘실대는 물이나 파도는 쏟아지는 우박이나 파괴하는 광풍과 마찬가지로 앗수르나 바벨론처럼 강력하고 무자비한 힘을 가진 이방 군대의 세력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사 28:2; 렘 51:54).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하지 않으셨다면, 이런 물이 이스라엘을 휩쓸고 갔을 뿐 아니라 그들의 영혼을 삼켜버렸을 것입니다. ‘물이 우리 영혼을 삼켰을 것이라’(4,5)라는 표현은 직역하면 ‘물이 우리 영혼 위로 지나갔을 것이라’로서, 이스라엘이 물에 빠져 완전히 멸망했을 것임을 나타냅니다. 이스라엘이 지금 존재하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움이며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의 도움이신 여호와를 송축하라(6-8)

어리석은 자들은 어려움이 닥치면 자기 힘으로 해결해 보려 동분서주하다가 결국 실패하고 자포자기합니다. 반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는 자들은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고 의지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며 그분의 도움을 구합니다. 이러한 신앙은 그들에게 평안과 지혜를 줍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평안을 찾습니다.

 

6우리를 내주어 그들의 이에 씹히지 아니하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7우리의 영혼이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난 새 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

8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6-8)

 

이제 시인과 그 무리는 ‘만약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지 않으셨더라면’이란 가정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옵니다. 시인은 6절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시작하는데 이는 8절의 찬양과 함께 이 단락의 주제가 ‘찬양’임을 보여줍니다. 시인과 무리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그들의 편에 계신 하나님, 이스라엘을 위기에서 구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찬양을 드립니다. 이때 하나님의 구원의 행적은 두 가지 비유로 설명되었습니다. 첫째, 이스라엘은 짐승의 먹잇감이었으나, 하나님께서 이들을 짐승의 이빨에서 구하셨습니다. 6절에서 ‘우리를 내주어 그들의 이에 씹히지 아니하게 하신 여호와’라는 번역은 직역하면 ‘우리를 그들의 이에 먹잇감으로 내주지 아니하신 여호와’로서 살짝 다르지만, 생생함과 현장감은 직역보다 더 잘 표현되었습니다. 위 2-5절에 언급된 이스라엘의 원수는 사나운 짐승처럼 이스라엘을 잡아 자기 먹이로 입에 넣었습니다. 아모스가 묘사한 이방 군대처럼 이들의 이빨은 사자의 이빨 같고 그 어금니가 암사자의 어금니와도 같았을 것(암 1:6)이므로, 이스라엘은 그들의 이빨에 다 부수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결코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둘째, 이스라엘은 사냥꾼의 사냥감인 새와 같았으나, 하나님께서 이들을 사냥꾼의 올무에서 건지셨습니다. 7절의 ‘사냥꾼’이란 단어는 ‘덫을 이용해 새나 짐승을 잡는 자들’을 뜻하며 ‘올무’는 ‘새 등을 잡는 덫’을 가리킵니다. 사냥꾼은 ‘새나 다른 짐승을 잡겠다’는 분명한 목적의식을 지닌 자들입니다. 대부분 이런 덫이나 올가미는 새가 자주 드나드는 곳에 구덩이를 파서 두거나 가지로 덮는 등 속임수를 이용하여 설치됩니다. 실제 새를 사냥하는 사람들은 끼니를 위하거나 새를 내다 팔아 수입을 얻으려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사냥꾼’은 의인을 잡아 해하려는 악인들을 묘사할 때 때때로 등장하며, ‘올무’ 또한 이 악인들의 간교한 계획이나 악행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습니다(렘 5:27-28). 한편, 올무에 걸린 새는 자기 주변에 그런 올무가 있었는지도 인지하지 못하며, 미끼나 그물에 들어가는 순간에도 자기 생명이 위협받는지조차 모릅니다(잠 7:23). 자기도 모르는 새에 발이나 다른 부위가 올무에 끼어(전 9:12) 몸부림을 치지만 몸에 상처만 입을 뿐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되고, 결국 사냥꾼의 손에 잡혀 생명을 잃게 됩니다(사 28:13). 이스라엘은 이처럼 사냥꾼이 놓은 올무에 걸려들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올무에 걸린 새에 비유된 것을 보면, 이들이 올무에 걸린 것은 전적으로 사냥꾼의 계략 때문으로만 볼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고려할 때, 이스라엘을 우상숭배와 악의 올무로 이끈 것은 하나님을 배반한 그들의 불신앙과 교만이었고(호 4:6), 그들의 욕심과 죄와 어리석음이었으며(호 4:7; 8:12), 그들의 영적 지도자들조차 올무의 역할을 하고 말았습니다(호 5:1). 오늘 본문에서는 이런 부분을 언급하지는 않지만, 이스라엘이 알게 모르게 스스로 죄악의 올무 안으로 들어간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사냥꾼의 올무, 즉 대적의 계략에 빠진 것은 심판의 일환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냥꾼의 올무에 잡힌 이스라엘에게 기적과 같은 일이 발생했습니다. 바로 그들의 올무가 끊어진 것입니다! 올무에 잡힌 새가 자기 힘으로 빠져나올 가능성이 거의 없듯이, 이스라엘도 자력으로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나기가 불가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은 올무에서 벗어났습니다.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난 새’나 ‘우리가 벗어났도다’(7)에서 ‘벗어나다’란 동사는 ‘(~에서 안전한 곳으로) 탈출하다, 빠져나가다’의 뜻으로, 이스라엘이 빠져나오기 불가능한 올무에서 안전함을 누릴 곳으로 옮겨졌음을 뜻합니다. 그들이 올무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직접적인 원인은 그 올무가 끊어졌기 때문입니다(7). 시인은 그 원인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8절에 그 실마리가 나와 있듯, 올무가 끊어져 그들이 자유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었습니다(시 91:3). 그렇기에 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찬양을 받기에 합당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절명의 위기에서 이스라엘을 건져주신 분, 이스라엘의 도움이시며, 그의 이름이 이를 증명해줍니다. 8절의 ‘여호와의 이름’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대체어로 볼 수 있으며, 하나님의 이름들(여호와 이레, 여호와 샬롬 등)에는 하나님의 하신 일이나 성품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오늘 소개된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분입니다(8; 시 121:2; 134:3). 이 창조주 하나님께서 자신이 만든 피조물을 통제하고 다스리십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또한 창조하셨으며, 이들을 보호하십니다. 앞서 123편에서 시인과 무리는 하나님을 하늘 보좌에 좌정하신 왕으로 묘사하면서 하나님께 교만한 자들의 멸시에서 자신들을 건져주시도록 은혜를 구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과 보호하심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경험했던 하나님의 도우심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항상 감사하며 찬양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 있음을 믿고,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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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123-01)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시야

시편 123편 1-4절


 

미세먼지가 우리의 일상을 바꾸어 놓은 동안, 우리는 바람의 방향과 속도에 온 신경을 기울였습니다. 까닭 없는 바람에도 우리의 일상이 흩날리고 휘청거릴 때, 우리는 바람의 근원이신 그분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애타게 보내던 날들은 주께서도 함께 애태우신 날들입니다. 주의 음성이 청아하게 우리의 일상을 밝히는 그 날까지, 우리는 주를 바라보며 기다려야 합니다.

 

  • 시인과 그의 공동체는 교만한 자들의 멸시를 받고 있지만, 그들의 시선을 오로지 하나님께 향하여 고정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하늘의 주인이심을 고백하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이 상황에서 건져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을 향한 눈(1-2)

우리의 삶 속에서 어려움과 고난이 찾아올 때, 우리는 어디를 바라보고 있습니까? 우리의 시선이 세상의 문제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하늘에 계신 주님을 향해 고정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은 우리의 믿음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며, 그의 인도하심을 기다리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기다리는 종들입니다.

 

1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2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1-2)

 

시편 120편부터 134편의 열다섯 편의 시는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공통 제목이 나와 한 단락을 이룹니다. 122편에서는 시인이 예루살렘을 선두로 하여 도성 주민들, 순례자들, 성전의 평안과 형통함을 구했다면(6-9), 123편의 시인은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을 간청하는 기도를 드리고 있어, 서로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점에서 연결점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인 123편에서 시인과 그와 함께한 청중은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있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모습은 그들의 ‘눈들’(eyes)을 통해 묘사됩니다. 먼저 시인은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원문에 따르면 이 문장의 첫 마디는 ‘당신께’(‘주께’로 번역됨)로서, 시인의 눈이 향하는 ‘대상’을 강조합니다. 시인은 이 대상을 향해 그의 두 눈을 들어 올립니다. 눈을 들어 올리는 동작은 고개를 들어 자신의 시선을 한 곳을 향해 고정하는 행동입니다. 이런 행동은 단순히 어떤 대상을 보기 위한 동작(창 13:10; 수 5:13)일 수 있으나, 여기서는 그 대상을 신뢰하여 집중하면서 그에게 보호나 도움을 간청하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 자신의 영혼을 들다’(보통 ‘영혼이 우러러보다’로 번역됨)라는 표현과도 유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시 25:1;86:4;43:88). 시인은 이런 물리적인 동작을 실제로 취했올 수도 있고, 적어도 묘사를 통해 시인이 그 대상을 간절히 바라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시인의 두 눈이 고정된 ‘당신’의 정체는 ‘하늘에 계신 주’입니다. 이 어구를 직역하면 ‘하늘에 앉으신 분’ 또는 ‘하늘에 거주하시는 분’입니다. ‘하늘에 앉으신 분’의 경우는 왕으로서 하늘 보좌에 좌정하신 하나님을 표현합니다. 시편 11:4에서도 하나님의 '왕좌'가 하늘에 있다는 구체적 설명을 제시하며, 시편 9:5에서는 보좌에 앉아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묘사합니다. 미가야나 이사야 선지자 등은 하늘의 왕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보았다고 증언했으며(왕상 22:19; 사 6:1). 특히 다니엘은 그 왕좌가 불꽃이며 그 바퀴가 불이라고 말합니다(단 7:9). 사도 요한은 무지개가 둘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계 4:3), 크고 흰 보좌에 앉으신 심판자 하나님(계 20:11)을 소개했습니다. 이제 ‘하늘에 계신 주’를 ‘하늘에 거주하시는 분’으로 읽는 경우에는 땅을 거주지로 삼은 인간과 대조적인 면이 부각되어 하나님의 신성이 강조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늘에 계신 주’는 하나님의 왕권과 그에 따른 신적 능력을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이 표현은 시편 2:4에도 나와, 세상의 인간 왕들이 꾸미는 계략을 하늘에서 살펴보시는 우주의 왕을 묘사합니다. 한편, 시인이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을 향해 눈을 든 모습은 시편 121편의 시인이 하나님 계신 성전을 향해 산길을 오르내리며 산들을 향해 눈을 들어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는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121편의 시인은 자기를 둘러싼 산들을 둘러보며 간접적으로 하나님을 찾는 반면, 123편의 시인은 현재 어디 있는지는 모르나 하늘에 그의 눈을 향함으로써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이제 두 번째로, 시인의 눈만이 아니라 시인과 함께한 무리의 눈들도 하나님께 고정되었습니다. 원문에서는 2절의 맨 앞에 ‘보소서’란 뜻의 감탄사(힌네)가 나와 시인이 하나님의 이목을 자기와 자기 무리에게 집중시킴을 알 수 있습니다. 시인은 그와 무리의 시선이 오로지 하나님께 향했음을 하나님이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이때 시인은 하나님을 ‘여호와 우리 하나님’으로 칭합니다. 시인과 함께 하나님께 시선을 둔 무리도 하나님께서 하늘의 왕이심을 압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단순히 신적 능력을 가진 온 세계의 왕이심만을 인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자신들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있는 자, 여호와’(출 3:14)이심을 알며,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출 19:4-6)이 그 기초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시인은 자신과 공동체의 하나님을 향한 시선이 마치 남종이나 여종이 그들의 눈을 각기 주인의 손을 향한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시인은 자기 무리를 ‘종들’로 비유하고, 하나님을 그들의 ‘주인’으로 비유합니다. 시인이 ‘백성’이나 다른 신분으로 자신과 무리를 대변하지 않고 ‘종’으로 비유한 것은 하나님의 지극히 높으심에 비해 자신들의 지극히 낮음을 겸허히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는 이후 3-4절에서 설명되듯 멸시를 받고 있는 현재 그들의 비참한 상황 또한 암시적으로 나타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이 비유는 시인과 무리가 하나님께 시선을 둔 구체적인 동기가 그의 ‘손’을 바랐기 때문임을 알려줍니다. 이때 ‘손’은 도움, 긍휼, 은혜, 호의 등을 뜻합니다. 이들은 주인이 종을 긍휼히 여겨 자비를 베풀고 원하는 것을 들어주듯,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기를 고대합니다. 2절의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는 원문을 직역하면 ‘그(하나님)가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실 때까지’로서, 시인과 무리가 하나님이 은혜를 내려주실 때까지 자신들의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지 않을 것임을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고대하는 이 공동체의 단호함, 간절함, 기다림과 인내는 하나님께서 왕이자 전능하신 분이며, 언약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주인임을 인식한 데서 비롯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간청(3-4)

성도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해야 합니다. 멸시와 조소를 당하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놓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도 삶의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세상의 조소와 멸시가 우리를 무너뜨리려 할 때, 더욱 간절히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를 이 어려움에서 구원할 수 있습니다.

 

3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또 은혜를 베푸소서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

4안일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영혼에 넘치나이다(3-4)

 

3절에서 시인과 무리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라고 두 번 더 반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청합니다. 시인과 무리는 그들이 의지하고 은혜를 간구할 대상을 제대로 찾았습니다. 이 능력의 왕이자 주인이신 하나님은 긍휼과 은혜가 풍성한 사랑의 하나님(출 34:6)이시므로 그들에게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또한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하나님(출 19:5-6; 렘 11:4;30:22)이시므로 그의 백성과 함께하여 그들을 돌보실 것입니다. 이제 3절 후반부에서 4절까지 시인과 그의 무리가 왜 하나님의 은혜를 더 간절히 간구하는지 그 이유가 밝혀집니다. 그들은 원수들로부터 극심한 멸시를 받고 있습니다. 3-4절에 ‘멸시’가 두 번, ‘조소’가 한 번, 총 세 번 나와 멸시받고 있는 이들의 상황을 극대화합니다. 특히, 3절과 4절 마지막 부분에 반복되는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우리가 멸시로 심히 배불렀나이다’란 뜻입니다. 음식과 음료로 배를 채워 흡족함을 누려야 하는데, 이 하나님의 백성들은 지금 조롱으로 배가 꽉 차 고통스럽다는 의미입니다. 이 비유는 육체적인 배부름의 고통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4절에서는 ‘그들의 영혼’이 조소와 멸시로 가득 찼다고 묘사함으로써 그들이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지독한 복통 속에 있음을 호소합니다. 이때, 시인과 그 무리를 경멸하고 조롱하는 원수들은 ‘안일한 자들’이며 ‘교만한 자들’로 설명되었습니다(4). 그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들은 걱정 없이 안락한 삶을 살며 그런 삶이 다 자신들이 이룬 성과라고 여기는 교만한 자들입니다(사 32:10-11; 암 6:1; 슥 1:15). 이런 자들은 ‘악인’의 무리에 속하며, ‘의인’의 대적이자 하나님의 대적이 되는 무리입니다. 시인이 독자에게 강조하려고 하는 점은 이들의 정체보다는 이런 자들에게 강도 높은 조롱과 업신여김을 받고 있는 현 공동체의 상황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신뢰와 은혜를 간구하는 기도의 중요성을 가르쳐줍니다. 우리의 시선이 항상 하나님을 향해 고정되어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의 눈을 하나님께 두고, 그의 은혜와 자비를 간절히 구합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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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122-01)


하나님 집의 평화를 위한 기도

시편 122편 1-9절


 

평화는 혼자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과 나누는 것입니다. 개인의 마음에서 시작하여 점점 공동체 전체로 퍼져나갑니다. 우리의 기도가 응답될 때, 그 평화는 우리 가정과 교회, 그리고 우리가 속한 모든 공동체에 흘러넘치게 됩니다. 평화는 단순한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충만한 열매입니다.

 

  • 예루살렘 순례의 길을 권유받은 시인은 기쁨으로 무리와 함께 하나님의 성전으로 향했습니다. 그곳에 도착한 시인은 하나님께 예배하러 온 수많은 순례자를 보고 감격하면서 예루살렘 성을 찬양합니다. 마지막으로, 시인은 그곳 예루살렘의 평안과 안녕을 기원합니다.

 

예루살렘 순례자의 기쁨(1-2)

하나님의 집으로 향하는 우리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처럼 기뻐하고 열정적이어야 합니다. 예배에 임하는 마음가짐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기억합시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하고 사랑하는 공동체로서 교회를 세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금 상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집, 즉 교회는 주님의 뜻과 사랑이 튼튼하게 세워져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1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2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1-2)

 

시인은 여호와의 집에 가자는 다른 이들의 제안에 기쁨이 넘쳤던 일을 회상합니다. 여호와의 집은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을 가리킵니다. 예루살렘에 가는 길 또는 성전에 가는 길을 언급할 때, ‘올라가다’(1,4)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는 예루살렘의 지형적 특성을 문자 그대로 표현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골짜기 사이에 솟은 구릉(해발 780미터)에 위치했기 때문입니다. 성전을 향한 여정이 고되고 힘든 길이란 것을 알지만, 하나님의 임재와 예배에 대한 기대에 부풀어 기쁨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시인은 예루살렘 성문에 도착했습니다. 함께 온무리와 성문 안에 발을 내딛고 서자, 시인은 예루살렘에 왔음을 실감하며 감격합니다. 성문은 예루살렘 주민들만 아니라 시인처럼 하나님께 예배하러 온 순례자 무리와 다른 용무로 성을 찾은 자들로 붐빕니다. 또한 백성들의 경제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며, 분쟁을 호소하며 판결을 구하는 재판이나 다른 중요한 모임들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곳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친히 자기의 이름을 두고 그의 예배의 터로 선택하신 곳이지 않습니까!(출 15:17; 신 12:5,11) 하나님의 임재가 깃들어 있는 평화의 도시가 아닙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그의 백성이 오기를 소망하는 장소가 아닙니까! 시인의 마음은 기쁨과 감동에 차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대한 찬양(3-5)

예루살렘은 정의와 공의가 이루어지는 곳으로 묘사됩니다. 이는 하나님의 집이 정의와 의를 실천하는 곳이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집에서의 정의와 공의를 위해 기도하고, 우리의 삶에서 이를 실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교회와 공동체가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는 장소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3예루살렘아 너는 잘 짜여진 성읍과 같이 건설되었도다

4지파들 곧 여호와의 지파들이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이스라엘의 전례대로 그리로 올라가는도다

5거기에 심판의 보좌를 두셨으니 곧 다윗의 집의 보좌로다(3-5)

 

눈앞에 펼쳐진 예루살렘 성을 둘러보니, 시인의 입에서는 찬양이 절로 나옵니다. 시인은 예루살렘이 오밀조밀하게 짜인 성읍처럼 건설되었다며 감탄합니다. 이 광경은 유다 산맥 언저리에 있는 예루살렘이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성채를 중심으로 여러 건물이 서로 촘촘히 밀집되어 도시를 형성한 모습을 나타낸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다 주민들만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러 올라온 여러 지파 무리가 더해져, 외형적인 조합만이 아니라 내부적으로도 사회적이며 신앙적인 조합의 모습을 함께 보여줍니다. 시인과 마찬가지로 각 지역의 여러 지파 사람도 이스라엘의 전례에 따라 무리 지어 예루살렘에 올라왔습니다. 시인은 이들이 단순히 이스라엘 지파가 아니라 여호와가 세운 지파들임을 강조함으로써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임을 각인시킵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각 지파대로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정착하며 살다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하나님께 예배하려고 예루살렘을 찾은 자들입니다. 이들이 따른 ‘이스라엘의 전례’(4)는 기본적으로 출애굽기 23:17의 ‘네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께 보일지니라’를 기초로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지키도록 명하신 3대 절기는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로서, 출애굽기부터 신명기까지 각 책마다 이 절기들(및 다른 절기들)에 관해 기록하였습니다(출 23:14-19;레 23:1-44; 민 28-29장; 신 16장). 하나님께서 지정한 절기는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이며, 이스라엘은 예루살렘과 각처에서 절기마다 성회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의무와 특권을 가집니다(레 23:14,21,41; 민 28:25). 시인은 자기와 여러 지파 사람이 예루살렘에 온 것은 하나님의 이름에 감사하려는 목적이었다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예배는 이처럼 감사와 찬양이 우선적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감사한다는 말은 먼저, 하나님만이 예배와 감사의 진정한 대상임을 표현합니다. 이 표현은 구체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 또 어떤 놀라운 일을 하셨는지에 대해 감사하고 찬양한다는 뜻이 함축되었습니다.

한편, 하나님이 예배 처소로 삼은 예루살렘은 영적 중심지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가 백성들을 위해 구현되는 사회적 중심지이기도 합니다. 시인은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의 보좌가 놓였음을 언급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예배를 받으시는 분만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왕임을 상기시킵니다. 그는 또한 이 심판의 보좌가 다윗 왕조에게 맡겨진 점을 떠올립니다(5). 하나님께서는 목동이었던 다윗을 데려다 하나님 백성의 주권자로 삼으셨고, 다윗과 언약을 맺어 그와 그 후손에게 영원한 왕국을 약속하셨습니다(삼하 7:8,16). 그러므로 다윗과 그 후손들은 하나님께서 세운 왕의 법도(신 17:14-20)를 따라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말씀을 켜야 했습니다(왕상 9:4). 이처럼 왕은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 안에서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또한 백성과의 관계 안에서는 그들을 의와 공평으로 심판하고 다스려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솔로몬과 같은 지혜의 왕도 그의 기도에서 하나님께 판단력과 지혜를 구하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긴 백성을 공의로 심판하여 억울함을 풀어주고 압박자를 벌함으로써 하나님이 기대하는 이상적인 왕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기를 간구합니다(시 72:2-4).

 

예루살렘의 평안을 구하는 기도(6-9)

우리의 마음 속에 평화는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도 평화는 매우 중요한 가치입니다. 가정, 교회, 사회 모든 곳에서 평화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다윗은 예루살렘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라고 촉구합니다. 이는 평화가 하나님의 축복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6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7네 성 안에는 평안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함이 있을지어다

8내가 내 형제와 친구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에 평안이 있을지어다

9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너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로다(6-9)

 

시인은 이제 예루살렘을 위해 평안을 구하는 기도를 올립니다. 6-9절까지 ‘평안’(샬롬)이란 단어가 세 차례 언급되며, ‘형’이 두 번, ‘복’(또는 ‘선’)이 한 번 나오고, 여기에 ‘평안의 도시’인 ‘예루살렘’이 두 번 나와, 전체적으로 평안의 축복이 가득 담겨 있고 평안이란 단어가 귀에 자주 들려옵니다. 시인이 평안을 비는 대상은 그가 최종 목적지, 성전에 이르는 동안 순서대로 발을 디딘 곳들과 연결됩니다(예루살렘 성, 성벽과 성채, 성안에 있는 사람들, 성전 등의 순서). 그는 먼저, 자기 자신만 아니라 청중에게 예루살렘의 평안을 구하라고 권유합니다. 시인과 시인의 요구에 따라 예루살렘을 위해 기도하는 자는 예루살렘 성을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시인은 이들이 하나님께 예루살렘의 평안을 구하면, 그들도 마찬가지로 안락이나 형통의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시인의 이런 선언은 자신과 함께한 순례자들이나 다른 무리로 하여금 예루살렘의 평안을 기원하도록 고무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두 번째 시인의 기도는 예루살렘 성벽들(7절에서 ‘네 성’으로 번역됨)과 성채들(또는 망루들 7절에서 ‘궁중’으로 번역됨)에 대한 것입니다. 이 간구는 예루살렘 성읍 자체를 지탱하고 방어하는 성벽이나 성체가 견고하기를 구하는 기도이므로, 곧 예루살렘 성의 평화와 안전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나라 전체의 평화와 안전을 기원하는 간구입니다. 이 기도에는 성벽이나 성채가 보호하고 있는 성읍 주민들의 삶에 평안과 안락함이 지속되기를 원하는 시인의 마음도 함축되었습니다.

세 번째 시인의 기도는 예루살렘 주민과 예루살렘에 찾아온 순례자들의 평안을 위한 기도입니다. 시인의 동행만이 아니라 시인과 함께한 자들이 예루살렘에 살든지 순례를 왔든지 간에 모두 시인의 형제이자 친구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주로 섬기는 공동체라는 의미입니다. 또한 그들이 서로 다른 지파의 무리라 하더라도, 모두 하나님이 선택하신 한 나라, 한 백성이란 의미입니다.

마침내, 시인의 기도는 그의 순례길의 목적지인 하나님의 성전을 위한 간구로 마무리됩니다(9). 여호와의 집에 가기를 기뻐했던 시인(1)은 이제 그곳에 도착하여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성전과 예루살렘의 평안을 간구합니다(9). 시인은 성전을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으로 부르는데, 이는 그와 그곳에 함께한 여러 무리가 다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임을 다시금 상기시킵니다. 9절 마지막에 ‘너(예루살렘)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로다’에서 ‘복’은 보통 ‘선’으로 번역되는 단어(토브)로서, ‘형통’, ‘안녕’ 등의 뜻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집을 중심으로 서 있는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선이 평안과 더불어 임하기를 기원합니다.


시편 122편은 하나님 집과 그 평화에 대한 깊은 기도를 담고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 집의 중요성과 평화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우리의 교회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장소가 되도록, 정의와 평화가 넘치는 공동체로 성장해 나가도록 기도합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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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120-121)


끝까지 지키시는 하나님의 손길

시편 120편-121편


 

우리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어려움과 시련을 겪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분의 지혜와 사랑으로 응답해 주십니다. 우리는 진리와 정의를 위해 싸우며, 평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 삶의 모든 순간,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도움을 구합시다. 우리의 인생의 매 순간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도우심을 간구합시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십니다.

 

  • 시편 120편에서 시인은 이방인의 땅에 오래 거주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거짓과 싸움을 일삼는 자들 때문에 환난을 당해, 하나님께 간구했고 응답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삶에서 예루살렘에 대한 그리움이 깊어갑니다. 시편 121편에서 산들을 오르내리며 목적지로 향하는 시인은 산행에서 오는 긴장감과 두려움 속에서 하나님께서 도움이자 지키시는 분임을 상기하고, 하나님의 보호를 다방면에서 깊이 묵상합니다.

 

거짓과 속임수에서의 구원(120:1-7)

거짓말은 삶을 뒤집고, 속임수는 삶을 갉아먹는다. 오랜 시간 성실하고 진실하게 살아온 우리 이야기를 왜곡하고 뒤틀어버린다. 세상은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이후에도 우리를 그렇게 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때에 추수를 보지 못하더라도,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고난에 직면하면서 기쁘게 씨를 뿌리는 법을 배워가야 합니다.

 

1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2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에서 내 생명을 건져 주소서

3너 속이는 혀여 무엇을 네게 주며 무엇을 네게 더할꼬

4장사의 날카로운 화살과 로뎀 나무 숯불이리로다

5메섹에 머물며 게달의 장막 중에 머무는 것이 내게 화로다

6내가 화평을 미워하는 자들과 함께 오래 거주하였도다

7나는 화평을 원할지라도 내가 말할 때에 그들은 싸우려 하는도다(1-7)

 

시편 120편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고, 거짓과 속임수로부터 구원을 구하는 시인의 기도를 담고 있습니다. 시인은 평화를 원하지만, 적대적인 환경 속에서 갈등을 겪고 있으며, 이러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도움을 간청합니다. 이 시편은 하나님께서 고난 중에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응답하신다는 믿음을 강조합니다.

 

(1) 시인의 간구와 하나님의 응답(1-2)

 

시인은 환난을 당해 하나님께 기도했고, 그 결과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을 받았노라고 간증합니다. 시인이 환난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었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깊이 신뢰했고, 하나님께서 곤경에 처한 자신을 긍휼히 여길 분이며 곤경에서 건질 능력자로 확신했음을 암시합니다. 이런 시인의 소망과 기대의 부르짖음에 하나님은 응답하셨습니다. 이로써 하나님의 능력과 긍휼이 암시적으로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선언한 시인(1)은 자신이 기도했던 내용이 거짓말과 속임수를 일삼는 자들로부터의 구원과 보호였음을 밝힙니다(2). 2절에서도 시인이 ‘여호와여’라고 하나님을 먼저 부른 것을 보면, 시인이 하나님을 얼마나 신뢰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시인은 현재 이방인의 땅에 거주하고 있는 듯하고, 고국으로 곧 돌아갈 계획이나 가능성은 암시되지 않았습니다(5-7). 시인이 어느 곳에와 있든지 그곳은 예루살렘과 먼 곳이며, ‘거짓의 입술’과 ‘속이는 혀’를 가진 자들이 가득한 곳입니다. 시인을 속이는 자들은 동족인 이스라엘인일 수도 있겠지만, 5-7절에서 시인이 이방 땅에 사는 처지를 한탄한 것을 고려하면, 그들은 이방인일 가능성이 큽니다. 이들의 악행은 시인의 목숨마저 위태롭게 만들었고, 시인은 이에 하나님께 자기 영혼을 구해달라고 간청했던 것입니다.

 

(2) 질문과 대답(3-4)

 

시인은 자기 생명을 위협했던 원수들의 속이는 혀에게 묻고 답합니다. ‘무엇을 네게 줄까’와 ‘무엇을 네게 더할까’라는 질문 자체는 질문자가 상대에게 상이나 선물 등 호의를 베풀려는 의도에서 나오기 마련입니다. 여기서 이 질문은 시인이 속이는 혀에게 상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적합한 처벌이 무엇인지를 가늠하는 물음입니다. 대답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시인 자신이 직접 대답하려고 하는 질문입니다. 시인은 거짓과 속임수를 내는 혀에게 내릴 형벌이 ‘장사의 날카로운 화살과 로뎀나무 숯불’이라고 말합니다. 원수를 무찌르기 위해 용사가 날카로운 화살들을 날리듯이, 거짓말만 내는 혀에 이 화살을 날려 거짓말을 없애야 합니다. 잘 꺼지지 않는 로뎀 나무 숯들로 그 혀를 태워 속임과 거짓의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 잠언에서 언급하듯, 거짓말하는 교만한 입술은 하나님의 미움을 받으며 매를 자청하기 마련입니다(잠 8:13; 12:22; 14:3). 또한 거짓말과 속임수는 방망이, 칼, 뾰쪽한 화살(잠 25:18), 맹렬한 불(잠 16:27) 등으로 비유되므로, 거짓과 속임수를 쓰는 자들은 자기들이 하던 거짓말과 속임수로 멸망할 것을 암시합니다고 볼 수 있습니다.

 

(3) 화평에 대한 소망(5-7)

 

시인은 거친 이방 땅에서 이방인으로 거주한 지 오래되었음에도 아직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함을 한탄합니다. 시인이 거주지로 언급한 ‘메섹’은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의 소아시아 지역으로 알려졌고, ‘게달의 장막’은 아라비아 광야의 유목민 지역으로 알려져, 서로 지리상 동떨어진 곳입니다. 그런 두 지역을 시인이 자신의 거주지로 언급한 것은 그가 실제로 그곳에 거주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의 거주지가 두 지역과 마찬가지로 예루살렘에서 먼 곳이며, 호전적이고 악의적인 야만인들의 지역임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6,7절에 두 번 언급된 ‘화평’(샬롬)은 이중적 의미가 있습니다. 시인은 이 단어를 써서 말 그대로 ‘평화’나 ‘평안’을 의미함과 동시에 ‘화평의 도시(또는 터)’로 알려진 ‘예루살렘’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시인 주변에 있는 이방인들은 화평을 미워하고 싸움을 일삼는 자들이면서 예루살렘에 대해 적대적인 자들임을 암시합니다. 반면, 시인은 자신을 ‘화평’이라고 표현할(7) 만큼 정직과 공의와 사랑을 추구하는 자입니다. 주변인들은 시인이 평화적으로 말을 하려 해도, 그것을 싸움의 기회로 삼아 시비를 걸어옵니다. 그럴수록 시인은 화평의 도시인 예루살렘이 애타게 그립기만 합니다.

 

항상 함께 하시는 하나님(121:1-8)

자기 백성의 아우성에 아무 응답도 할 수 없는 우상과 달리(왕상 18:27),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앞길을 미리 예비하시고 앞서 인도하시며 곁에서 동행하여 주십니다. 당신의 그늘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언제까지나 지켜주실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떠나 고향에 도착하는 그 순간까지 물론이고 ‘영원까지 지켜주실 것’입니다.

 

1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2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3○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4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5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6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7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8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1-8)

 

시편 121편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도움이 되시고, 끊임없이 우리를 지키시며 보호하신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 시편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확신하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는 신앙의 고백을 강조합니다.

 

(1) 시인의 도움이신 창조주(1-2)

 

여행길에 오른 시인은 산들을 오르내리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합니다. 시 내용에 목적지가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았으므로 시인이 어느 곳으로 가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이 시의 표제가 ‘성전에 올라가는 시’인 점을 고려하면 시인이 하나님께 예배하러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가는 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유다 산지의 골짜기 가운데 솟아 있는 구릉(해발 780미터)이므로, 시인은 여러 산을 지나며 형세가 가파르거나 거친 곳을 통과해야 하는 위험과 강도의 무리나 사나운 야생 동물을 만날 위험 등을 감수해야 합니다. 시인이 눈을 들어 산들을 둘러보며 위험과 두려움을 생각할 때, 그의 도움이 어디로부터 올지 자문합니다. 이 질문에 시인은 그의 도움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여호와로부터 오리라고 스스로 대답합니다. 시인의 자문자답은 그로 하여금 순간순간 들어오는 두려운 마음과 걱정을 떨쳐내고 창조주인 능력의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를 도우실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합니다. 이 담대한 마음으로 목적지를 향해 여정을 지속할 수 있습니다.

 

(2) 시인과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분(3-6)

 

시인의 도움이신 창조주 하나님은 시인의 발이 흔들리거나 비틀거리게 두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사람이 평지를 걷는 경우에도 발이 흔들리면 마음먹은 대로 갈길을 지속하기 어렵게 되는데, 산을 오르내릴 때 비틀거린다면 조금만 헛디뎌도 크게 다치거나 목숨까지 잃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자신의 도움을 갈망하며 산길을 걷는 시인의 한 걸음 한 걸음을 견고하게 붙들고, 위험에 처하지 않게 하실 것입니다. 누군가를 살펴 지킬 때 사람들은 지치기도 하고 졸기도 하겠지만, 능력자 하나님은 졸지도 않으시고 신실히 성도를 지키십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여정의 매 순간 하나님의 보호와 안전 속에 거할 수 있습니다.

한편, 시인을 지키시는 하나님께서는 시인과 같은 개인만을 보호하는 분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를 지켜 보호하시는 분입니다. 시인은 이 사실을 떠올리고 ‘보라!’라고 외치며, 자기 자신에게 ‘너’로 지칭)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하나님께서는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는 분이라고 선포하며 감격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이 아니므로, 지치지도 않고 잠을 청할 필요도 없습니다. 고대 사람들은 신들도 잠을 자며, 자는 동안 그들을 섬기는 자들에게 반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왕상 18:27). 하나님께서는 바알이나 다른 어떤 신과도 결코 비교될 수 없는 우주의 창조주인 전능자시며, 그를 섬기는 자에게 성실한 사랑의 관심을 쏟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밤낮으로 시인 오른쪽의 그늘이 되십니다. 하나님께서 시인의 오른쪽에 있다는 말은 시인에게 호의나 도움을 베푸신다는 의미입니다(시 109:31; 110:1). ‘하나님의 날개 그늘’(시 63:7)로도 표현되는 ‘하나님의 그늘’ 또한 하나님께서 시인에게 보호자와 안식처가 되신다는 말입니다(시 91:1). 시인이 목적지를 향해 밤낮으로 산길을 오르내릴 때, 하나님께서는 내리쬐는 뜨거운 햇볕으로 인해 시인이 탈수되거나 탈진하지 않게 하시고, 일사병에 걸리지 않게 보호하시며, 밤의 추위나 어두움 속에서도 그가 안심하면서 가거나 잠잘 수 있게 보호하십니다.

 

(3) 여호와의 축복(7-8)

 

현재 시인에 대한 하나님의 살피심과 보호는 미래에도 일어날 축복의 약속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시인과 그 영혼을 모든 환난으로부터 지키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호의 영역은 시인의 나가고 들어오는 행동, 즉 이번 여정 동안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 미칠 것이며 그의 일상생활에도 세세히 임할 것입니다.


 

성도들은 자신의 삶의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신뢰를 강화할 수 있습니다. 고난과 역경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돌보심을 의지하며, 매 순간 기도로 나아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순간, 특히 어려운 순간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그분의 응답과 보호를 확신하며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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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119-11)


말씀의 길을 따라가는 삶

시편 119편 161-176절


 

생을 살아가는 터전의 주인은 생을 이어 나가는 자들의 것임을 보여준 영화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은 현실과 공간이 가진 한계와 편견을 깨고 사진을 통해 이를 표현해 화제를 모은 바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환경이 몰락해도 생의 주인도, 말씀을 지킬 자도 우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시인이 사랑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완벽하고 완전합니다. 시인은 말씀에 매료되어 기도의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과 헌신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시인의 일방적인 사랑과 헌신만을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시인에게 평안과 끝없는 가르침과 즐거움을 안겨주며, 도움이 되어줍니다. 시인은 하나님 말씀과의 끊을 수 없는 상호관계 속에서 인생길을 계속 걸어갑니다.

 

쉰/썬스물한 번째 알파벳) 연(161-168)

핍박이 계속되지만, 말씀을 사랑하고 경외하며 기쁨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군사처럼 의기양양했고, 진리를 지켜 거짓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근심은 말씀의 존재로 물러가며, 말씀이 마음을 채우면 고난 중에도 찬양이 흘러나왔고 불안은 평안으로 변했습니다. 말씀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약속을 향해 살아가게 합니다.

 

161○고관들이 거짓으로 나를 핍박하오나 나의 마음은 주의 말씀만 경외하나이다

162사람이 많은 탈취물을 얻은 것처럼 나는 주의 말씀을 즐거워하나이다

163나는 거짓을 미워하며 싫어하고 주의 율법을 사랑하나이다

164주의 의로운 규례들로 말미암아 내가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

165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그들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

166여호와여 내가 주의 구원을 바라며 주의 계명들을 행하였나이다

167내 영혼이 주의 증거들을 지켰사오며 내가 이를 지극히 사랑하나이다

168내가 주의 법도들과 증거들을 지켰사오니 나의 모든 행위가 주 앞에 있음이니이다(161-168)

 

고관들의 핍박 속에서도 나는 주의 말씀을 경외하고 기뻐합니다. 주의 율법을 사랑하며, 주의 구원을 바라며 계명들을 지킵니다. 나의 모든 길이 주의 앞에 있음을 기억합니다.

 

(1) 핍박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함(161-164)

 

시인은 나그네 생활을 하면서(19,54) 고관들을 비롯하여 여러 사람으로부터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23,84,121,134,157,161). 이들은 ‘까닭 없이’, ‘거짓으로’로 번역됨: 161) 시인을 괴롭합니다. 시인에게 불리한 거짓말을 꾸며내어 비방하며(69,78,86), 함정을 놓는 등. 호시탐탐 그를 멸할 기회를 엿봅니다(85,95,110). 악인과 이들이 저지르는 악행은 본 시편 119편의 스물두 단락 중 오직 네 단락(1단락[1-8], 2단락[9-16], 4단락[25-32], 22단락[169-176])을 제외한 모든 단락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핍박도 시인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말씀에 대한 그의 사랑은 마음과 행동의 일치를 통해 표현되었습니다. 시인은 악인들이 자신을 핍박해도 자신의 마음은 하나님 말씀만 경외한다고 선언합니다(161). 여기서 ‘경외하다’라는 말은 ‘두려워 떨다’의 뜻입니다. 시인은 이들의 비방을 염려하기도 했지만(39절), 그들 자체나 그들의 비방과 핍박의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 두렵고 떨림으로 대하고, 이것에만 온 신경을 집중합니다. 말씀을 향한 두려움과 떨림은 공포가 아니라 기쁨이 함께하는 경외심입니다. 마치 전쟁에서 많은 전리품(‘탈취물’로 번역됨; 162)을 얻어 환희하는 자처럼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환회할 수 있습니다. 시인이 이토록 말씀을 즐거워하는 것은 그 말씀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거짓을 미워할 뿐 아니라 혐오합니다. 거짓은 악인이 좋아하고 즐겨하는 도구이며, 악인의 실체를 대표합니다. 그러나 율법에는 거짓이 자리할 데가 없이, 오직 의로 가득 차 있습니다. 시인은 이런 하나님의 의로운 규례에 감사하여 하루에 일곱 번씩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일곱 번의 찬양은 매일 온전한 찬양을 드리기 원하는 시인의 마음을 함축합니다.

 

(2)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과 순종(165-168)

 

거짓을 미워하고 하나님의 의로운 율법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큰 평안과 구원이 약속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들에게는 장애물이 없을 것입니다. 그들의 삶에 난관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의로운 말씀을 통해 못 헤쳐 나갈 일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까지 기대할 수 있습니다(166). 하나님께서 큰 평안과 구원을 약속하셨으니, 어떤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 말씀을 사랑하는 자에게서 즐거움과 찬양이 떠날 수 없습니다(161-164). 시인의 하나님 말씀에 대한 사랑은 그가 말씀을 지킴으로써 확증됩니다. 시인은 166-168절에서 하나님의 법도나 계명들을 지켰다고 피력합니다. 특히, ‘행했다’, ‘지켰다’는 ‘순종’을 나타내는 동사를 과거 시제로 세 번 반복함으로써, 그가 순종했음을 강력히 증명합니다. 모든 행위(길들)가 하나님 앞에 있으니 그는 떳떳하며 숨길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행위들을 점검해보시면 순종했는지 분명히 아실 것입니다. 시인이 하나님의 증거들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는 말씀을 지극히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억지로 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말씀을 배우고 지키려고 힘썼습니다. 밤이나 새벽에도 깨어 하나님께 가르침을 구하고 말씀을 지켰습니다(55, 62, 147, 148). 말씀을 지키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소망했습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보호하고 부르짖음을 듣고 구원하실 것을 믿었고(시 34:15,17; 145:17-20),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보호하여 악인에게서 건지실 것을 믿었으며(시 97:10), 말씀을 구하는 자에게 구원이 가까움(155)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시 145:17-20).

 

타브(스물두 번째 알파벳) 연(169-176)

어려운 환경에서는 누구나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그리고 말씀에 대한 신뢰와 의지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임을 깨닫습니다. 자신의 부르짖음이 하나님께 전달되고, 하나님의 의로운 말씀이 자신에게 다가와 깨닫게 하기를 간구할 것입니다. 시인은 주의 말씀대로 자신을 구해주시길 바라며, 주의 은혜에 감사하며 주와 주의 말씀을 찬송하고 노래하겠다고 다짐합니다.

 

169○여호와여 나의 부르짖음이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고 주의 말씀대로 나를 깨닫게 하소서

170나의 간구가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고 주의 말씀대로 나를 건지소서

171주께서 율례를 내게 가르치시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하리이다

172주의 모든 계명들이 의로우므로 내 혀가 주의 말씀을 노래하리이다

173내가 주의 법도들을 택하였사오니 주의 손이 항상 나의 도움이 되게 하소서

174여호와여 내가 주의 구원을 사모하였사오며 주의 율법을 즐거워하나이다

175내 영혼을 살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를 찬송하리이다 주의 규례들이 나를 돕게 하소서

176잃은 양 같이 내가 방황하오니 주의 종을 찾으소서 내가 주의 계명들을 잊지 아니함이니이다(169-176)

 

시편 기자는 나의 부르짖음이 주께 이르러 구원과 깨달음을 구합니다. 주의 말씀을 찬양하고 주의 계명들을 사랑하며 따르기를 다짐합니다. 그는 자신의 영혼이 주를 찬송하며 주의 규례들이 나를 돕게 하소서 간구합니다.

 

(1) 하나님의 말씀대로 구원하시기를 간구(169-170)

 

시편 119편의 마지막 단락은 시인의 간구로 시작했습니다. 시편에서 가장 긴 시의 마지막 단락에 이르렀기만, 시인은 여전히 고통 속에 있으며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고통스러운 순간들을 피하지 않고 맞닥뜨리며, 하나님께 간구하고, 그분의 말씀대로 살기를 선택합니다. 시인의 부르짖음과 간구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때까지 계속될 것이며, 하나님 앞에 계속 가까이 나갈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구원을 고대하면서도, 그 가르침과 깨달음을 꾸준히 구합니다. 시인은 이때에도 하나님의 구원과 가르침이 그분의 말씀을 따라 이루어지기를 기대합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찬양(171-172)

 

시인의 부르짖는 간구는 찬양하는 소리로 바뀝니다. 시인은 입술과 혀로 하나님과 그 말씀을 찬양합니다. ‘찬양하리이다’(171)는 ‘시냇물이 졸졸 흐르다’,‘거품이 부글부글 솟아나다’의 뜻이며, ‘노래하리이다’(172)는 ‘(들짐승이) 소리 내다’의 뜻입니다. 시인의 입에서 찬양이 끊임없이 쏟아지는 것을 생생하게 표현합니다. 이때 시인은 찬양의 이유로 두 가지를 드는데, 이들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것입니다. 첫째는 말씀의 가르침이며, 둘째는 말씀의 의로운 속성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줄곧 율례들을 가르쳐달라고 간구해왔습니다(12,26,33,64,124,135). 하나님께서는 그 간구에 응하여 말씀을 가르쳐주시며 좋은 스승이 되어주셨습니다(171).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계명과 율례는 모두 의로움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 말씀들은 하나님의 속성인 의를 그대로 드러냈습니다. 시인은 이에 감사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노래를 삼습니다.

 

(3)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173-175)

 

시인의 찬양은 다시 간구로 전환됩니다. 하나님의 손이 시인의 도움이 되게 해달라는 간구는 그가 하나님의 능력과 도움을 신뢰하고 있음을 함축합니다. 그는 말씀의 능력도 의지하므로, 하나님의 규례들이 자신을 돕게 해달라고 간청합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시인이 의지적으로 선택했고 의지적으로 지키려고 한 대상입니다. 그는 말씀을 통하여 깨달은 하나님의 구원을 사모하며 기다립니다. 율법은 늘 그의 기쁨이었습니다(77,92,174). 시인은 사랑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회복되어 하나님을 찬송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 방황하는 당신의 종을 찾으소서(176)

 

시인의 기도는 하나님의 구원을 간구하며 마무리됩니다. 이는 아직 하나님의 응답이 없음을 암시합니다. 시인은 자기가 길 잃은 양처럼 헤매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길 잃은 양은 목자와 양 무리에서 벗어나 홀로 정처없이 방황합니다. 목자가 찾아주지 않으면, 언제든 들짐승의 먹잇감이나 강도의 탈취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또한, 험한 길이나 어둠 속에서 발을 헛디디거나 길을 잘못들어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습니다. 시인이 자신을 양으로 비유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께 속한 양이며, 하나님께서 그의 목자임을 상기시키는 목적에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한 목자이시므로 자기 양이 길을 잃은 것을 아신다면 그냥 위험에 내버려두실 리 없습니다. 그분은 분명 위험을 감수하고 자신의 양을 찾으실 것이며, 찾은 후 양을 사랑으로 돌봐주실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이런 점을 호소하며, ‘주(당신)의 종을 찾으소서’라고 간구합니다. 그 불쌍한 양이 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종, 시인 자신임을 상기시킵니다. 이는 종이 주인의 도움을 원하여 손을 바라보듯이(시 123:2), 시인이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며 은혜와 긍휼을 기다리고 있음을 알아달라는 뜻입니다. 이에 덧붙여, 시인은 하나님의 계명들을 잊지 않았음(61,83,109,141,153,176)을 다시금 고백하며 긴 기도를 마칩니다.


장장 긴 시편 119편을 마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지켜왔다는 말씀은, 어쩌면 시인에게서 수백 번이고 들었을 그 소린, 수많은 사람에게서 하나님께서 듣고 싶은 한마디였지 않았겠습니까! 구원을 열망하며 써 내려간 사랑과 순종의 대서사시는 대역사극을 보는 듯합니다. 항상 이러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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