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125-01)
하나님의 보호와 의인의 평안
시편 125편 1-5절
하나님께서는 현재와 미래에 걸쳐 그분의 백성을 보호하시며, 그 사랑과 보호는 변함없이 계속됩니다. 우리는 이 보호를 확신하고 의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의인들을 악인의 지배에서 지키시며, 성도들은 정직하고 선한 삶을 유지해야 합니다. 사악한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평화와 축복을 누립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순종함으로써 참된 평화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그를 신뢰하는 그의 백성을 항상 보호하십니다.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는 세상에 사는 악인과 의인을 하나님이 어떻게 다스리시는지를 통해 두드러지게 증명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으로 하여금 죄악에 빠지지 않게 선대하시며, 악인으로 하여금 다른 악인들과 함께 어울리도록 두십니다.
그의 백성을 보호하시는 하나님(1-2)
하나님께서는 현재와 미래에 걸쳐 그분의 백성을 보호하시고 지켜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변하지 않으시며, 그분의 보호와 사랑은 영원히 계속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확신하고, 그분의 보호를 의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감싸주시며, 그분의 안전한 손길 아래에서 평안을 누릴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1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2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1-2)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견고한 보호를 받을 것이므로 두려움이 없습니다. 이들이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2). 하나님을 신뢰하는 백성과 이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보호는 1-2절에서 ‘시온’과 ‘예루살렘’, 두 장소를 통해 설명됩니다. 먼저, 시인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들은 ‘흔들리지 않고 영원히 자리를 지키는 시온 산’과 같다고 말합니다(1). 성경에서 ‘시온’은 ‘예루살렘’의 동의어나 대체어로 자주 사용됩니다. 원래 시온(뜻: 성채)은 다윗이 여부스 사람들이 살고 있는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점령한 남서쪽 지역의 산성을 가리킵니다(삼하 5:7). 그 후 다윗이 시온에 거주하였으므로, 시온은 ‘다윗 성’이 되었습니다(삼하 5:7,9). 다윗은 예루살렘(뜻: 평화의 터)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정하고 이곳으로 하나님의 언약궤를 옮겨왔고(삼하 6:17), 솔로몬 때에 하나님의 성전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건축되었습니다(대하 3:1). 하나님께서 그의 처소로 선택하신 장소가 바로 이 예루살렘이었으므로(시 78:68; 132:13), 예루살렘과 시온 산은 ‘하나님의 성’, ‘큰 왕의 성’(시 48:1,2) 또는 ‘하나님의 산’, ‘거룩한 산’으로도 불렸습니다(시 2:6; 사 3:16). 하나님께서 이 시온 산에 계시므로 시온은 요동함 없이 건재할 수 있습니다(참조, 시 46편). 지진과 산사태, 광풍과 파도 등 자연의 혼돈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므로 시온이나 백성은 두려움도 흔들림도 없었습니다(시 46:1-3). 열방이 시끄럽게 소리 지르며 전쟁을 시작하고 이로 인해 왕국들이 흔들려도, 하나님이 목소리를 한 번 내심으로 땅이 휘청대며 녹았고(시 46:6),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전쟁을 아예 멈추셨으므로(시 49:9) 그의 백성은 안전을 누립니다. 둘째, 시인은 예루살렘의 지형학적 형세를 통해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돌보심을 묘사합니다. 예루살렘은 해발 780미터 구릉이며, 이 도성은 감람산, 성전 산(모리아 산), 시온산 등 산으로 둘러싸였습니다. 이처럼 여러 산이 예루살렘을 에워싸 외부의 공격에서 도성을 보호하듯, 하나님도 그의 백성을 둘러싸 대적으로부터 지켜주십니다. 산들도 변함없이 예루살렘을 지켜왔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보호하시는 손길은 영원까지 쉼 없이 지속될 것입니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에 해당하는 시편 중 121편에서도 시인은 하나님을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분’(시 121:4)으로 소개했고, 124편에서도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도움’이라고(시 124:8) 고백하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짐승의 이빨과 사냥꾼의 올무와 같은 위기에서 벗어나게 하셨음을 찬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그의 백성을 돌보시므로, 그의 백성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함으로써 또한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평안함을 누림으로써 이에 화답할 수 있습니다.
악인과 의인을 다스리시는 하나님(3-5a)
하나님께서는 의인들이 악인의 지배 아래 고통받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의인들을 보호하시고 죄악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마음과 삶을 정직하고 선하게 유지해야 합니다. 사악한 자들과 죄악으로 치우치는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참된 평화와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3악인의 규가 의인들의 땅에서는 그 권세를 누리지 못하리니 이는 의인들로 하여금 죄악에 손을 대지 아니하게 함이로다
4여호와여 선한 자들과 마음이 정직한 자들에게 선대하소서
5자기의 굽은 길로 치우치는 자들은 여호와께서 죄를 범하는 자들과 함께 다니게 하시리로다(3-5a)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의인과 악인을 살피고 다스리십니다. 시인은 악인이 하나님의 통제 아래 있음을 먼저 언급합니다. ‘악인의 규가 의인들의 땅에서는 그 권세를 누리지 못한다’(3)라는 시인의 선언은 ‘악인의 규가 의인들의 분깃 위에 안착하지 못하리라’는 뜻입니다. 원문에서, 악인의 ‘규’는 왕의 ‘홀’을 가리킵니다. 악인이 높은 지위와 권세를 가졌음을 암시합니다. 의인들의 ‘땅’은 그들이 각각 ‘기업(유산)으로 할당받은 땅’, 즉 그들의 소유를 나타냅니다. ‘그 권세를 누리다’란 말은 ‘정착하다’, ‘쉬다’, ‘안착하다’의 의미입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악인이 그들의 지위와 권세를 이용하여 의인들이 합법적으로 소유한 땅을 빼앗으려 함을 알 수 있습니다(미 2:2). 악인은 의인의 기업을 일시적으로 빼앗을 수는 있으나, 기업에 뿌리내리고 정착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의인을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의 예를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두 가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 불의한 방법으로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은 아합과 이세벨의 경우입니다(왕상 21장). 아합은 왕의 지위를 이용하여 나의 기업인 포도원을 빼앗으려 했습니다. 그가 나봇과 포도원 값을 흥정하려 할 때 나봇이 유업으로 받은 땅을 파는 일은 하나님의 율법(레 25:23)에 금지되었음을 지적하였듯이(왕상 21:3), 땅은 하나님의 소유로서 사고팔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예외적으로 제정하신 ‘기업을 무르는 제도’가 있어 이를 따라야 했습니다(레 25:24-34). 아합은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이와 같은 법을 몰랐을 리 없지만, 자기가 합법적으로 가질 수 없는 땅을 탐낸 것을 보면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가볍게 생각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아합의 아내 이세벨은 한 술 더 떠서 악한 계략으로 나봇을 죽여 그의 포도원을 아합에게 넘기게 합니다(왕상 21:15-16). 그러나 오늘 본문 3절에서 선언하듯, 이들은 나봇의 포도원에 안착하지 못했고, 그 죗값으로 죽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왕상 21:19; 22:37-38; 왕하 9:33-37). 둘째, ‘악인의 규’를 앗수르나 바벨론의 침입으로 보고, ‘의인의 땅’을 이스라엘의 기업인 가나안 땅으로 해석한다면, 열방의 무리가 침략하여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받은 기업을 빼앗은 사건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앗수르와 바벨론 왕들은 잔혹한 전쟁을 벌여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을 포로로 끌고 갔으며, 각 지파가 하나님으로부터 유업으로 받은 땅을 빼앗고 황폐하게 만들었습니다(왕하 18:11; 25:8-12; 렘 52:12-16; 애 1:3-4). 그러나 이때 열방도 아합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기업에 완전히 정주하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그들의 기업으로 돌려보내셨기 때문입니다(스 1:13), 포로 귀환 후에도 가나안 땅에 남은 이방인들은 귀환자들을 핍박하고 그들이 성전을 재건하는 것을 방해하고 옛 터전을 되찾지 못하게 하는 등 횡포를 부렸습니다(스 4:12-16; 5:3; 느 4:1). 그러나 이때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하신 도움으로 성전을 재건했고(스 6:15), 본토 자기 기업에 정착할 수 있었습니다(느 11:3).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행위와 삶만이 아니라 의인의 삶과 행위도 통제하십니다. 사람이 자기 본연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도 인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작용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이 의인에게 권세를 남용하지 못하게 막으시나, 의인에게는 이들이 죄악에 손을 뻗쳐 죄에 빠지지 않게 막으십니다(3b). ‘의인’이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들’(1)로서 ‘하나님의 백성’(2명)이며, ‘선하고 마음이 정직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의인을 선대하여 계속적으로 그들을 선한 길로 이시길 간구합니다(4). 그러나 의인과 반대로 행하는 자인 ‘악인’, 즉 ‘자기들의 구부러진 길로 방향을 튼 자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다른 악의 무리인 ‘죄를 범하는 자들’과 함께 어울리게 하시기를 고대합니다(5;시 37:38).
이스라엘에게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5b)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정직하게 살아가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의 기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믿고, 그분의 길을 따름으로써 참된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5b이스라엘에게는 평강이 있을지어다(5b)
하나님께서 의인과 악인을 그의 정의와 은혜로 다스리심을 기대하면서, 시인은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시인이 기도의 마지막에 이스라엘의 평강을 언급하는 것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의 다른 시에서도 나타납니다(시 122,128편). 어디서 어떤 상황에 있든 이스라엘의 평강을 구하는 일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특권이며, 이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간접적으로 나타냅니다. 시인은 이스라엘의 평강을 기원하면서 그 주체가 ‘하나님’임을 두드러지게 언급하지는 않습니다. 평강을 주시는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이미 전제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기억해야 할 점은 하나님의 평강을 기원하는 것이 단순히 시인의 열망만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에게 평강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의도적이고 의지적인 열망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기도하라고 제사장에게 가르쳐주신 기도(민 6:24-27)에서 잘 나타나듯,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은혜와 평강의 축복을 아낌없이 베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보호와 의인에 대한 약속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현재와 미래에 걸쳐 우리를 지키시며 악인의 지배에서 보호하십니다. 의롭고 정직한 삶을 지속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순종함으로써 평화와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안전과 평안을 지키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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