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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140-01)


악한 자들로부터의 구원을 간구하는 기도

시편 140편 1-13절


 

우리는 살아가면서 악한 사람에게 공격받기도 합니다. 그들로부터 구원을 받기 위해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악의 공격과 음모 속에서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할 때, 그분의 보호와 구원을 간구하는 기도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의 모든 위협과 어려움을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의지할 때, 하나님의 구원과 보호가 있을 것입니다.

 

  • 악인은 마음으로, 말로 행동으로 악과 폭력을 행사합니다. 아들의 공격을 받고 있는 시인은 하나님께 보호와 구원을 간청합니다. 하나님만이 정의로운 구원과 심판을 이 땅에 베푸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시인과 그의 원수에게 공의로운 심판을 내리실 때, 그의 의로운 백성이 그의 이름에 감사할 것입니다.

악인에게서 건지시기를 간구(1-5)

우리가 삶의 위협과 악한 음모에 직면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보호를 위해 시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악한 자들의 계획과 행동은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으며,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그들의 음모와 공격이 우리에게 닥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위협을 아시고 그분의 능력으로 우리를 지키실 것입니다.

 

1여호와여 악인에게서 나를 건지시며 포악한 자에게서 나를 보전하소서

2그들이 마음속으로 악을 꾀하고 싸우기 위하여 매일 모이오며

3뱀 같이 그 혀를 날카롭게 하니 그 입술 아래에는 독사의 독이 있나이다 (셀라)

4여호와여 나를 지키사 악인의 손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나를 보전하사 포악한 자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 그들은 나의 걸음을 밀치려 하나이다

5교만한 자가 나를 해하려고 올무와 줄을 놓으며 길 곁에 그물을 치며 함정을 두었나이다 (셀라)(1-5)

 

악인들로 인해 비탄에 빠진 시인은 구원자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1-5절의 시인의 간구는 내용과 문법상 1-3절과 4-5절로 나뉩니다. 먼저, 간청의 명령문을 사용하여 하나님께 구조를 요청하고(1,4),하나님께서 자신을 구해주셔야 할 이유로 원수들의 악행을 제시합니다(2-3, 4c-5).시인을 괴롭히는 자들은 ‘악의 사람’(‘악인’으로 번역됨)이며 ‘폭력들의 남자’(‘포악한 자’로 번역됨)입니다(1).시인의 원수들이 1절에서 단수형으로 나온 것은 대표격으로 표현된 것이며, 실제로는 2-3절의 ‘그들’이나 9절의 ‘나를 에워싸는 자들’에서 암시되듯, 그들의 수는 여럿입니다. 이들은 ‘악’과 ‘폭력’의 공통 요소를 가진 자들이며 이것으로 연합된 자들입니다. 이들은 마음 속으로부터 악을 꾀합니다(2).그들의 악한 계획은 결코 우연이 아니고 의도적이며 고의적입니다. 악을 계획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아예 없거나(시 14:1), 잊었거나(시 50:2; 렘 3:21), 경외함이 없기 때문입니다(렘 2:19).놀랍게도 계획한 악을 미리미리 준비하고 철저히 실행에 옮깁니다. 악한 계획인 ‘싸움’을 위해 ‘매일’ 모이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은 단결하여 오랫동안 악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원수들의 또 하나 두드러지는 특징은 그들의 언어와 말에 있습니다. 뱀처럼 혀를 날카롭게 하고, 입술 아래는 독사의 독을 머금었습니다(롬 3:13). 뱀의 혀의 날카로움은 신랄하고, 비판적이고, 공격적인 말을 뜻합니다. 독사의 독을 머금은 말은 폭력적이며, 쓰고, 위협적이고, 치명적인 말로, 상처를 주고 죽음까지 몰아가기도 합니다. 이처럼 마음과 언행의 일치를 이룬 자들이 단합하여 시인을 핍박하므로, 시인은 여호와께 자기를 건지고 보전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건지다’(나짤)란 단어는 ‘잡아채다’, ‘끌어내다’, ‘구조하다’의 뜻이며, ‘보전하다’(나짜르)는 ‘관찰하다’, ‘보호하다’, ‘살피다’, ‘지키다’의 뜻입니다. 시인에게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과 보호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두 번째 간청으로, 4절에서 시인은 ‘여호와여’라고 다시 외치며 계속해서 구원을 재촉합니다. 시인이 줄곧 ‘여호와’를 부르는 것(1,4,6,7,8) 자체가 하나님을 견고히 신뢰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위기에 처했을 때 생각나는 사람, 도움을 청하게 되는 대상이 바로 내가 신뢰하는 존재입니다. 시인은 1절의 ‘악인’과 ‘포악한 자’를 다시 언급하며, 하나님께 ‘나를 악인의 손으로부터 지키소서. 폭력들의 사람에게서 나를 보호하소서’ 직역; 4)라며 간구합니다. 시인에게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이 시급합니다. 악인들이 시인의 발걸음을 밀치려 하기 때문입니다. ‘밀치려 한다’는 ‘밀치려고 시도한다’는 뜻이 아니라 ‘밀치려고 계획했다’는 뜻입니다. 이 동사는 2절에서 ‘(악을) 꾀하고’로 번역되었습니다. 이처럼 시인을 거스른 악인들의 악한 계획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원수들이 시인을 향해 악한 계획을 세우는 행동은 ‘올무’, ‘줄’, ‘그물’, ‘함정’(또는 새 잡는 올무)을 숨기거나 장착하는 행위로 비유 되었습니다(5).새나 짐승을 사냥하는 사냥꾼은 포획하고자 하는 대상이 잘 오가는 장소에 올무나 덫을 놓습니다. 또 그것들을 유인할 만한 미끼를 울무에 넣어 두고, 그 올무는 눈에 띄지 않게 숨깁니다. 시인에게 있어서 올무나 그물 등은 위험과 고난을 의미합니다. 올무는 계획적으로 숨겨졌으나, 당하는 자는 예기치 않게 올무에 걸려 목숨의 위협을 받습니다.

 

구원의 하나님을 확신(6-7)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는 것은 신뢰의 표현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들의 음모를 좌절시키시고 정의를 세우실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를 의지하며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문제를 맡기며 보호와 구원을 간구해야 하며, 그분은 우리의 안전을 지키시고 구원하실 것입니다.

 

6내가 여호와께 말하기를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여호와여 나의 간구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하였나이다

7내 구원의 능력이신 주 여호와여 전쟁의 날에 주께서 내 머리를 가려 주셨나이다(6-7)

 

시인이 위기의 상황에서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는 근간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에 있습니다. 6,7절은 각각 유사한 형식으로 같은 내용을 진술합니다. 각 절에서 시인은 먼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고백하고(6a,7a), 이 고백을 바탕으로 하나님께서 시인을 건지실 수밖에 없도록 간구(6b)와 간증(7b)을 통해 응답을 재촉합니다. 6절에서 그는 여호와께 ‘주(당신)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6)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시편 31:14의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에 표현되었듯이,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신뢰를 보여줍니다. 이 고백은 시인에게 하나님만 참된 주인임을 드러냅니다. 시인이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께서라 부름으로써, 시인이 하나님께 속한 자임을 선포하고, 시인과 하나님께서 언약 관계 안에서 친밀함을 보여줍니다. 신뢰를 고백한 시인은 하나님께 자기의 간구 소리에 귀 기울여달라고 간청합니다. 이제 7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을 ‘내 구원의 능력이신 주(주인) 여호와’로 부릅니다. 이 호칭으로 하나님만 아니라 그의 능력까지도 신뢰하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주인이자 언약의 하나님임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덧붙여, 시인은 과거에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 해주신 일을 진술합니다. ‘하나님께서 전쟁터에서 나의 머리를 덮어주셨다’는 말은 전쟁에서 그의 생명올 보호하고 건지셨음을 뜻합니다.

 

악인의 심판을 간구(8-11)

우리는 삶의 어려움 속에서 악한 계획의 실패를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믿고 악한 자들의 공격으로부터 지켜주시기, 또한, 하나님께서 교만과 악을 물리치시고 정의를 세우시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정의로우시며,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공의를 이루실 것입니다.

 

8여호와여 악인의 소원을 허락하지 마시며 그의 악한 꾀를 이루지 못하게 하소서 그들이 스스로 높일까 하나이다 (셀라)

9나를 에워싸는 자들이 그들의 머리를 들 때에 그들의 입술의 재난이 그들을 덮게 하소서

10뜨거운 숯불이 그들 위에 떨어지게 하시며 불 가운데와 깊은 웅덩이에 그들로 하여금 빠져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소서

11악담하는 자는 세상에서 굳게 서지 못하며 포악한 자는 재앙이 따라서 패망하게 하리이다(8-11)

 

지금까지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건져주시기를 간구했는데(1,4,6), 이제 8-11절에서는 악인에게 심판을 내리시기를 간구합니다. 시인은 악인의 소원과 악한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도록 기도합니다. 위 2-5절에서 보았듯이, 그들의 악한 계획이 철저히 실행되고 있으므로, 악의 싹부터 잘려 나가 수확할 것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들의 악이 계획대로 이루어진다면, 교만한 그들(5)은 더 교만해질 것입니다. 악인들이 독설과 험담과 거짓말을 퍼부었으므로(3),현재 시인을 둘러싼 그들의 머리 위에 매섭고 독한 말들이 재난같이 덮일 것을 고대합니다(9).숯불이 그들 위로 떨어지고 그들이 불과 깊은 웅덩이에 빠져 일어나지 못하도록 구합니다(10). ‘입술의 재난’, ‘뜨거운 숯불’, ‘불’, ‘깊은 웅덩이’는 다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합니다(시 11:6). 특히, ‘불 가운데’와 ‘깊은 웅덩이’는 ‘죽음’을 함축하여, 악인이 갈 곳은 스올뿐 임을 암시합니다(욥 24:19). 마지막으로, 시인은 다시 한 번 ‘악인’(여기서는 ‘악담하는 자’로 표현)과 ‘포악한 자’를 언급하며(1,4),이들의 악행을 하나님께 상기시킵니다. 하나님 앞에는 의인과 정직한 자만 설 수 있으므로(13), 악담과 악행을 일삼는 자들은 땅에서 세워질 수 없습니다. 그들이 계획하고 행하는 악행은 그들에게 재앙의 타격이 되어 몰려올 것입니다(11).

 

정의의 하나님을 확신(12-13)

우리는 인생의 위험과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보호를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 없이는 우리의 발이 미끄러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안전과 인도를 맡기며, 그분의 자비와 구원을 신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12내가 알거니와 여호와는 고난 당하는 자를 변호해 주시며 궁핍한 자에게 정의를 베푸시리이다

13진실로 의인들이 주의 이름에 감사하며 정직한 자들이 주의 앞에서 살리이다(12-13)

 

하나님께서는 정의의 변호인이자 심판자이십니다. 시인은 법정 용어를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고난 당하고 궁핍한 자를 변호해주고 정의의 판단을 내리실 것을 안다고 고백합니다(12).시인의 ‘안다’라는 표현은 시인이 하나님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이런 관계를 바탕으로, 하나님께서 시인과 원수들 사이의 죄 여부와 진실 여부를 확실히 가려, 시인의 무고함을 증명하고 억울함을 신원하시고, 원수들에게 정의의 판결을 내려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시인의 고백은 또한 이런 결과를 재촉하는 간접적인 간구입니다. 여기서 ‘고난 당하는 자’나 ‘궁핍한 자’는 시인 자신을 암시적으로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들은 말 그대로 고난을 겪고 있는 자들,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들 모두를 지칭하지는 않습니다. 13절이 설명하듯, 이들은 고난과 궁핍의 상황 이전에 의롭고 정직한 자들입니다. 불의하고 거짓을 말하는 자는 궁핍하고 고난을 당한다 해도, 하나님의 변호와 신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정의의 하나님께서며, 악을 결단코 지나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출 34:7). 시인이 하나님으로부터 무죄 판결을 구하고 이룰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의의 심판자임을 알기 때문이며,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의 말씀대로 정직하고 의롭게 살기 때문입니다. 시인의 위기와 고난은 여전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신원을 확신하며 감사하는 태도와 하나님께 신의를 다 하겠다는 결단은 하나님의 정의로운 판단에 대한 응당하고 지혜로운 반응입니다.


시편 140편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악한 자들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하나님께 의지하며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심판하시고, 정의를 세우시며, 우리의 구원을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의 악을 물리치시며, 우리를 보호하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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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139-02)


진정한 자기 인식과 회개의 길

시편 139편 13-24절


 

팀 켈러는 고통에 대해 다루면서 “하나님을 그분 자체로 보고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를 지혜롭게 합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바라보게 될 때에야 우리는 현실과 맞닿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라고 전했습니다. 고난에 다가가는 그의 자세는 시인과 닮은 구석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 하나님께서 세상의 각 사람을 창조하신 일은 십히 놀랍습니다. 창조를 통해 나타나는 그의 지혜와 능력이 지대하므로, 그 일부조차 간파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지으신 각 사람에 대한 수많은 계획을 갖고 계시며, 이 모든 것을 주관하십니다. 그중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와 미워하는 자에 대한 합당한 구원과 심판도 예고되어 있습니다.

 

나를 지으신 하나님(13-18)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형체가 형성되기 전부터 우리를 보시고 계획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섬세한 창조의 손길을 감사히 여기며, 그분의 계획 속에서 우리의 존재가 얼마나 귀한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바다의 모래보다 많으며, 그 계획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와 항상 함께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위해 세우신 계획의 깊이를 인식하고, 그분의 지혜를 신뢰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13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14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15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겨지지 못하였나이다

16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17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18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13-18)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내장을 창조하시고 모태에서부터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존재를 경이롭게 창조하셨으며, 그 계획과 생각은 바다의 모래보다 많고 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한 생각과 계획 속에서 항상 그분과 함께하며, 그분의 지혜와 인도하심을 신뢰해야 합니다.

 

(1) 나를 지으신 하나님(13-16)

 

사람의 모든 것을 아시고(1-6) 어디서나 계신(7-12)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이 잉태되고, 태어나, 살아가는 생에 전체에, 그의 세밀한 섭리하심을 나타내십니다(13-18). 13절에서 시인은 그를 창조하신 이가 하나님께서심을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내장을 지으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시인의 몸 안의 모든 장기와 필요한 것들을 제조하셨음을 표현합니다. 시인의 어머니 태에서 그를 만드셨다는 고백은 하나님께서 그를 모태에서 수놓듯, 실로 짜듯, 정교하고 아름답게 만드셨음을 표현합니다. 시인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14)로 말하는데, 이 번역을 따르면 하나님께서 자기를 창조하신 행위가 놀랍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러나 이 문장을 직역하면 ‘내가 기묘함으로 다르게 대우받았기 때문이니이다’입니다. 시인이 하나님의 경이로운 창조물인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들’또는 ‘만드신 것들’)의 놀라움을 잘 알고 있습니다.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에 감탄하여 시인은 감사의 마음을 표현합니다(14).하나님의 창조는 그와 그의 피조물의 관계가 첫출발하는 지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인이 모태에서 형체(뼈들)와 형질(태아)을 이루어 갈 때에도 이미 그를 보셨습니다(15,16).시인이 지움을 받은 곳으로 ‘은밀한 곳’과 ‘땅의 깊은 곳’이 언급되는데(15), 둘 다 어머니의 ‘태’의 비유적, 시적인 표현입니다. ‘땅의 깊은 곳’이란 표현은 인간이 ‘흙’으로 지음 받았음(창 2:7)을 암시하며, ‘깊은 곳’은 ‘은밀한 곳’과 마찬가지로 아무도 모르게 신비롭게 지음 받았음을 뜻합니다. ‘기이하게 지음을 받았다’(15)는 ‘~을 직조하여 만들어지다’, ‘수놓아 만들어지다’의 뜻이며, 장인이 형형색색의 실로 짜서 옷감을 만들 듯, 옷에 장식을 수놓듯,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통해 아름답고 정교하고 창조적으로 만들어졌음을 시적으로 표현한다. ‘하나님께서 이 모두를 보셨다’(15)는 말은 단순히 그가 과정을 다 지켜보셨다거나 그 과정을 아신다는 의미를 넘어섭니다. 한 생명이 잉태되어 태어나는 전 과정이 하나님의 보살핌, 계획, 개입, 주관 안에 있음을 함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의 출생 전 과정을 아실 뿐 아니라 그 사람의 일생을 미리 다 아십니다. 시인은 자기가 사는 날이 정해졌고, 그가 하루도 살지 않은 때에도 그에 대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책’에 기록되었다고 진술합니다(16). 이는 사람의 운명이나 한계를 한탄하거나, 이 점을 지적하는 의도가 아닙니다. 이 진술은 첫째, 각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깊은 관심과 애정을 근본적으로 나타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 대한 나름의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셨음을 함축합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각 인생의 모든 것을 아시므로 생에 전체를 돌보실 것을 암시합니다.

 

(2) 계획을 가지신 하나님(17-18)

 

시인은 자기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이미 갖고 계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 감격하고 그 능력에 놀랍니다. 각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쟁각'은 보배롭습니다(17). ‘생각’은 ‘의도’, ‘목적’의 뜻도 있습니다. 또한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보배로운 생각이나 계획이나 목적은 모래보다 많고,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알고 그의 ‘생각’까지도 밝히 아시냐(2), 인생은 하나님께서 가진 ‘생각’의 일부도 가늠할 수 없습니다(17-18; 시 40:5; 잠 3:11; 롬 11:33-34). 하나님께서는 각 인생에게 이토록 세밀한 관심을 보이며, 그들과 친밀한 관계 맺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을 제대로 깨닫는다면,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시인은 잠에서 깨어난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있음을 인지하며, 그의 임재 안에서 평안을 누립니다.

 

심판과 신원의 하나님(19-24)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내면을 드러내고 그분의 시선 아래에서 진정한 자기 인식을 갖는 태도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을 정직하게 바라보고 하나님께 고백하며 회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영원한 길은 단순히 천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19하나님이여 주께서 반드시 악인을 죽이시리이다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들아 나를 떠날지어다

20그들이 주를 대하여 악하게 말하며 주의 원수들이 주의 이름으로 헛되이 맹세하나이다

21여호와여 내가 주를 미워하는 자들을 미워하지 아니하오며 주를 치러 일어나는 자들을 미워하지 아니하나이까

22내가 그들을 심히 미워하니 그들은 나의 원수들이니이다

23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24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19-24)

 

시편 기자는 악을 행하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간구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원수와 대적을 미워하며, 그들과 멀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다고 믿습니다. 이러한 기도를 통해 우리는 악과 죄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가지고 하나님께 정의를 구해야 함을 배웁니다.

 

(1)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19-22)

 

19절부터는 내용과 분위기가 ‘감탄에서 탄식으로’ 전환됩니다. 앞 1-18절 단락에서는 인생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의 신비로움에 매료된 시인의 감탄이 가득 차 있으나, 19절에 와서는 갑작스럽게 들리지만, 악인을 향한 시인의 응징의 기도로 시작하여, 그들에 대한 고소와 탄식이 빗발치고(19-22),뒤를 이어 하나님의 신원과 인도를 바라는 시인의 간구로 마무리됩니다(23-24).하나님의 임재와 사랑 속에 있는 시인은 그와 반대 무리인 악인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을 확신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각사람에 대한 수 많은 계획을 고의 섭리로 주관하심을 인지했습니다. 또한 그의 다스림 속에는 그를 사랑하는 자와 그를 미워하는 자를 향한 구원과 심판의 계획이 있을 것임도 확신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이여 주(당신)께서 반드시 악인을 죽이시리이다’(19)라는 시인의 말은 섬뜩하게 들리지만, 이는 하나님의 확고한 심판이 악인에게 있기를 기원하는 진술입니다. 악인들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나 두려움이 없는 자들로,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부패한 자들입니다(시 14:1; 36:1-4). 악인들은 ‘피흘리기를 즐기는 자들’(직역하면‘피들의 사람들’, 19)로 불리는데, 이는 그들이 폭력적이며 남의 생명을 빼앗는 일도 서슴지 않는 무리임(시 37:32; 38:12)을 시사합니다. 그들은 또한 하나님에 대해서도 악의로 말하며, 그의 이름으로 헛되이 맹세하는 자들로서, ‘하나님의 원수들’입니다(20). 그러므로 시인이 그들에게 ‘나를 떠날지어다’라고 명합니다(19).이 명령은 그들이 시인에게 저질러 온 악행을 그만두라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또한 악인의 무리가 자신에게 가까이 오는 것을 시인이 용납할 수 없음과 그들이 결코 시인과 그의 공동체에 낄 수 없음을 함축합니다(시 1:5). 이어서, 21-22절에서는 ‘미워하다’라는 동사가 반복되어 ‘하나님에 대한 악인의 미움’과 ‘악인에 대한 시인의 미움’의 관계를 기술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하나님을 미워하고 그에 대항하여 ‘치러로 번역됨, 21) 일어나는 자들을 미워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원수’(20)인 악인들은 곧 ‘시인의 원수’(22)가 됩니다. 악인에 대한 시인의 미움은 큰 적대감이므로, 시인은 그들 무리와 완전히 분리됩니다(22).악인들이 시인의 무리에 낄 수 없듯이(19), 시인도 그들의 무리와 함께할 수 없습니다(시 1:1-2,5). 한편, 다른 시편에서는 의인을 억압하고 해를 끼치는 악인을 단순히 ‘의인의 원수’라 부르지 않고 ‘여호와의 원수’라 불렀습니다(시 37:20). 의인을 핍박하고 불의를 저지르는 그 자체가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며 그의 말씀에 반역하는 행위이므로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과 마찬가지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의 신원을 간구(23-24)

 

시인은 하나님께서 그를 살피셨고 아셨음을 고백하며 기도를 시작했습니다(1).이제 그는 하나님께 자신을 살피고, 마음을 아시며, 조사해보고(‘시험하사’, 23),자신의 생각을 파악하시길 구합니다. 이 간구는 액면 그대로 간구가 아닙니다. 이는 앞서 악안에 대한 진술(19-22)이 시인의 개인적 원한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증명하고, 자신이 불의에서 떠난 자이며 하나님께 헌신된 자임을 증명하려는 방책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그를 점검하셨고 아셨습니다(1).그의 모든 생각과 언행을 아시므로, 시인은 그 앞에 떳떳합니다. 시인은 자기 안에 ‘고통/곤경의 길’(‘악한 행위’로 번역됨)이 있는지 하나님께서 보시고, ‘영원의 길’(‘영원한 길’로 번역됨)로 인도하시길 간구합니다(24). ‘고통의 길’은 ‘영원의 길’의 대조 어구이므로, 하나님과 반대되는 길, 고통을 주거나 고통에 이르는 길, 악의 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 인생 여정의 길을 맡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내면을 살펴보시고, 우리의 모든 생각과 감정을 이해하신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깊은 위로와 도전을 줍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와 허물을 정직하게 하나님께 고백하고, 그분의 용서와 치유를 받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정직하게 나아갈 때,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새로운 길로 인도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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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139-01)


하나님의 전능하신 지식과 인도하심

시편 139편 1-12절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고 우리의 삶을 깊이 이해하신다는 중요한 진리를 함께 묵상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과 생각을 완벽하게 아시며, 우리의 길과 행위를 세심하게 살피십니다. 이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맡기며 그분의 인도하심과 보호를 의지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깊이 이해하시고, 그 전능하신 지식과 사랑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지를 마음에 새기고, 믿음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 대한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의 지혜와 사랑으로 각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맺기 원하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어디에나 계십니다. 세상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 가려질 수 없으며, 모두 그의 보살핌과 인도를 받을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1-6)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행동을 주의 깊게 살펴보시고, 우리의 내면을 꿰뚫어 보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진솔하게 살아가야 함을 상기시킵니다. 우리의 외적인 행동뿐만 아니라, 우리의 내면 깊은 곳까지도 아시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이 진리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신뢰와 겸손을 갖추어야 하며, 그분의 지혜와 인도하심에 의지해야 합니다.

 

1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2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3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5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6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1-6)

 

시편 139:1-18은 한 단락을 이루어, 하나님의 지식(1-6), 편재성(7-12), 사람의 창조와 그를 향한 계획(13-18)에 대한 시인의 깊은 묵상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경이로움을 찬양합니다. 첫 단락, 1-6절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에 대한 묵상입니다. 138편의 시인은 하나님께서 하늘에서도 땅의 겸손한 자와 교만한 자들 살피고 아시며, 그들을 마땅히 다스리심을 기술했습니다(시 138:6). 본 시에서는 시인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하나님이 다 아심에 주목하며, 이에 탄복하고 감사합니다. 먼저,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살펴보셨고, 자기를 아셨다고 진술합니다(1). 1절의 ‘살피다’는 ‘조사하다’, ‘정탐하다’, ‘맛을 감별하다’ 등의 뜻이며, 3절의 ‘살피다’는 ‘자로 재다’의 뜻으로, 둘 다 하나님께서 시인을 자세히 점검했음을 부각합니다. ‘알다’는 지식적인 습득이 아닌 하나님과 시인의 유기적인 관계를 함축합니다. 시인에 대한 하나님의 점검 영역과 아시는 내용은 첫째, 시인의 일상의 활동을 비롯한 모든 행동입니다. 여기에는 시인의 앉고 일어섬, 나가고 누움이 포함되었습니다(2-3). 또한 그는 시인의 모든 행위를 익숙히 다 아십니다(3). 둘째, 하나님께서는 멀리 하늘에 계셔도 시인의 생각을 인지하십니다(2). 셋째, 하나님께서는 시인이 한마디를 발설하기도 전에 무엇을 말할지 다 아십니다(4). 이와 같이, 2-4절은 하나님께서 시인을 정밀하게 조사하여 아셨다는 점을 부각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흠을 찾으려고 각 사람을 살살이 조사한다거나 알기 위해서 하나님도 자세한 조사를 하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살피지 않고도 각 사람의 모든 생각과 언행을 아시는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16-17). 여기서 점검이 강조된 이유는 하나님께서 아시는 내용에 빠진 것이 없고 정확함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또한 현재 악안과 껄끄러운 관계 속에 있는 시인의 상황(19-24)을 고려한다면, 하나님께서 자기를 면밀하게 살펴 진의를 아시므로, 그가 하나님 앞에 숨길 것이 없고 떳떳함을 진술하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시인의 모든 것을 파악하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앞과 뒤(전체)를 안수하심으로써(5),그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표현하십니다. 하나님의 안수는 시인의 떳떳함을 확증해줍니다. 이에, 시인은 자신을 보살피시는 하나님의 지식이 너무 기이하고, 너무 높아서 움켜잡을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6).이 말은 그가 하나님의 지식을 얻고 싶다거나 얻으려고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전지하심, 이를 통해 시인과 각 사람을 세심히 돌보시는 점이 너무 놀랍고, 이해할 수도 없을 만큼 고귀함을 나타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지식의 풍요, 무한함, 깊이에 탄복하여 감탄과 감사를 금치 못합니다.

 

어디에나 계시는 하나님(7-12)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어디서든지 찾아오시며, 어떤 곳에 있든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을 믿고, 모든 상황 속에서도 그 임재를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어두운 순간에도 빛이 되시며, 우리의 길을 비추십니다. 우리는 이 진리를 믿고, 어두운 시간에도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빛을 의지해야 합니다.

 

7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9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10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11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12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7-12)

 

사람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어디에나 계시는 분입니다. 공간의 제약 속에 사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편재성의 경이로움은 미루어 짐작하기조차 어렵습니다. 시인은 ‘사람이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7)라고 외칩니다. 이 문장은 직역하면 ‘사람이 당신의 영으로부터 어디로 가며, 당신의 얼굴로부터 어디로 피하리이까’입니다. ‘하나님의 영’과 ‘하나님의 얼굴’은 문맥상 같은 의미로 ‘하냐님’ 자체를 지칭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얼굴을 누군가에게 향하거나 얼굴빛을 비추는 행동은 종종 그의 은혜나 호의, 축복을 베푼다는 의미로 사용됩니다(민 6:26; 시 4:6; 80:19).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의 얼굴은 그의 실제적 ‘존재’를 가리킵니다. 이 질문은 인간이 하나님 앞을 떠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가 닿지 않는 곳이 없음을 부각합니다. 하나님의 편만함은 시공간의 영역만이 아니라, 어떤 대상이나 그들과의 관계의 영역 속에서도 긴밀히 나타납니다.

시인은 먼저, 수직적 공간에서의 ‘하늘’과 ‘스올’을 대조하며, 하나님의 편재성을 묵상합니다(8). 그가 하늘에 올라가도 하나님께서 그곳에 계시며, 스올에 침상을 펴더라도 거기에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이 두 장소는 물리적인 공간에서 극과 극을 나타내며, 영적으로도 극과 극을 암시합니다. 이 둘을 비교해보면, 첫째, 하늘은 우주 공간에서 가장 높은 곳을 지칭하며, 스올(음부)은 하늘에서 가장 먼 곳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인들은 물이나 바다 밑바닥에 구덩이가 있고, 이 구덩이의 맨 밑에 스을이 있다고 여겼습니다(사 14:11-15; 시 88:6; 욥 38:16-17). 둘째, 하늘은 하나님과 그의 천군 천사가 거하시는 곳이며, 스올은 죽은 자들이 가는 곳(창 37:35; 시 88:3-7)으로 구더기와 지렁이가 덮인 곳입니다(사 14:11; 욥 24:20). 그러므로 스올의 대체어로 ‘죽음’(시 116:3; 잠 5:5), ‘무덤’이나 ‘구덩이’(시 30:3), 아바돈(잠 15:11) 등이 사용됩니다. 셋째, 하늘에서는 하나님과 천사들이 의인을, 스올은 궁극적으로 죄인을 기다립니다(욥 24:19; 계 21:8). 넷째, 하늘은 광명이 있으나, 스을은 혹암으로 덮였습니다(욥 17:13). 다섯째, 스올로 내려간 죄인은 건져줄 자가 없지만, 스을로 내려가 하나님께 부르짖는 자는 하나님께서 소리를 들으시며(욥 2:2), 그 권세에서 속량하십니다(시 49:15; 호 13:14). 이처럼 상극의 장소인 하늘과 스올에도 하나님께서 실재하십니다. 그의 능력과 다스림이 미치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9-10절에서는 ‘새벽’과 ‘바다 끝’을 대조하며 수평적 공간과 방향 속에 하나님의 편재하심을 묵상합니다. 핵심은 하나님께서 어디에나 편재하여 성도를 보살피시며, 그들과 친밀한 관계를 지속하기 원하신다는 점입니다. ‘새벽 날개’는 ‘바다 끝’의 대조적 표현으로 사용되어 장소와 방향을 제시합니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를 직역하면 ‘내가 새벽의 날개를 들어올리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해가 떠서 그 빛이 날개처럼 퍼진 것을 묘사하면서 동녘의 끝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다’란 단어는 ‘지중해’를 가리키므로 ‘바다 끝’은 ‘서쪽 끝’을 지칭합니다. 종합하면, 시인이 동쪽 끝으로 가든, 서쪽 끝으로 가서 살든, 하나님의 손이 그를 인도하며, 하나님의 오른손이 그를 꽉 붙들어주실 것을 의미합니다(10).

마지막으로, 시인은 ‘흑암’과 ‘빛’을 대조하며 하나님의 편재성과 그의 다스림을 묵상합니다(11-12). 빛과 흑암의 대조는 8-10설과 상징적으로 연결됩니다. ‘하나님 계신 하늘과 동트는 곳’은 ‘빛’과 연결되며, ‘죽은 자가 있는 스올과 해가 지는 곳’은 ‘어둠’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빛과 흑암은 물리적인 밝음과 어둠올 나타내므로, 일차적으로는 문자적 해석이 적절합니다. 이것들은 또한 선과 악, 은혜와 곤경, 구원과 심판, 질서와 무질서 등의 영적, 도덕적 암시도 나타내므로 상징적으로 적용할 수는 있으나, 모든 면에서 적용되지는 않으므로 해석에 주의가 필요합니다. 11절에서 시인은 빛에 있으나 흑암이 그를 짓눌러(‘덮고’로 번역됨), 그의 주변에 있는 빛이 밤으로 변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시인을 짓누르는 그 흑암은 하나님에게는 결코 어둡지가 않습니다(‘숨기지 못하며’로 번역됨, 12). 하나님에게는 밤이라도 낮처럼 빛날 것이며, 흑암과 빛이 같습니다. 이 비유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첫째, 하나님께서 빛이시라는 점입니다. 그에게는 어둠과 악이 조금도 존재하지 않습니다(요일 1:5). 빛이 온 세상을 비추듯, 빛이신 하나님께서 세상에 편만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빛은 흑암을 몰아냅니다. 빛이 흑암을 비추어 물러가게 하듯, 하나님의 빛이 온 세상을 비춰 악한 자들을 다 색출하고 떨쳐버릴 것입니다(욥 38:12-13). 셋째, 하나님께서 함께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빛이 비춰집니다(욥 29:3). ‘빛’은 은혜, 보호, 구원, 생명 등을 상징합니다(시 4:6; 80:19). 그러나 악인에게는 그 빛이 차단됩니다(욥38:15). 넷째, 하나님께서 함께하는 자에게는 흑암도 빛이 됩니다. 이 말은 악이 선이 되고, 심판이 구원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려움과 고통 속에 있더라도, 그렇지 않은 때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평안과 보호가 함께한다는 뜻입니다. 그리므로 이 말한 대로,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흑암 속에서도 그의 광명을 힘입어 다닐 수 있습니다(욥 29:3;시 23:4).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지식과 그분의 모든 곳에 함께하심을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고,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우리는 이 진리를 믿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며, 그분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하나님이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을 인도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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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138-01)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

시편 138편 1-8절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개입하시고 인도하십니다. 그 인도하심에 하나님께 깊은 감사와 신뢰를 담아 전심으로 감사하고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뜻을 따르는 삶이 중요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관계를 더욱 깊이 이해하며 그분의 신실하신 보호와 인도를 경험하고, 신뢰와 감사로 응답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 하나님은 찬양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그 앞에 어떤 신이든 권세자든 용납되거나 하나님의 찬양을 가로챌 수 없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기도하여 응답을받아, 그에게 감사 찬양을 드립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단순히 시인에게만이 아니라세상의 왕들에게까지 그 영향을 미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모두를 살피고 아시고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시인의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1-3)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며, 그분의 응답을 기다리는 것은 신뢰와 인내의 과정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응답을 의심하지 않고, 그분의 약속을 믿으며 찬양하는 것은 중요한 신앙의 실천입니다.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든지 하나님께 의지하고 그분의 구원을 신뢰하는 것은 신앙의 깊이를 나타냅니다.

 

1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신들 앞에서 주께 찬송하리이다

2내가 주의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며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아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보다 높게 하셨음이라

3내가 간구하는 날에 주께서 응답하시고 내 영혼에 힘을 주어 나를 강하게 하셨나이다(1-3)

 

시인은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감사의 표현은 네 개의 유사한 동사(‘감사하다’[2번], ‘찬송하다’, ‘예배하다’가 부가 어구와 함께 반복되어 나타나, 하나님을 향한 시인의 깊은 감사의 마음과 감사 표현의 의지를 보여줍니다. 시인의 감사는 먼저 ‘온 마음으로’ 드리는 감사합니다. 이 고백은 신명기 6:5의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직역하면 ‘온 마음으로, 온 뜻으로, 온 힘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명령의 앞부분과 마찬가지로, 진정한 마음과 할 수 있는 최선으로 감사하겠다는 태도를 보여줍니다. 둘째, 감사와 찬양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신들 앞에서’(1)의 ‘신들’은 우상, 천사, 인간 왕을 지칭하는 단어이며, 문맥상 우상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신들이 누구든지 간에 시인의 찬양과 기도를 받을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신들 앞에서 주(당신)께 찬송하리이다’라는 말에서는 그의 시선이 하나님께만 집중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셋째, 시인의 감사는 하나님을 향한 예배로 연결됩니다. 성전을 향하여 예배한다고 말하는데(2), ‘예배하다’는 원래 ‘절하다’의 뜻으로 ‘경배하다’의 의미입니다. ‘성전’(헤칼)이란 단어는 왕이 사는 궁전과 신이 사는 궁전 둘 다에 사용됩니다. 하나님의 궁전은 성막(삼상 1:9)이나 예루살렘 성전 둘 다 지칭할 수 있습니다(왕하 18:16; 렘 7:4). 그러므로 ‘성’이란 단어를 통해 시대 배경을 추정할 수는 없습니다. 시인이 이 ‘성전을 향했다’(2)는 표현은 지성소를 향했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시 28:2;134:2), 성전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갈 수 없는 상황이라 그 방향을 향했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욘 2:4; 단 6:10). 1절의 ‘전심으로 당신께’, ‘신들 앞에서 당신께’의 표현과 마찬가지로 2집의 ‘당신의 성전을 향하여’도 시인이 어디 있든지 그의 경배의 대상이 하나님뿐이며, 그가 하나님께만 주목하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넷째, 감사의 근본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에 있습니다. ‘인자하심’(헤세드)은 언약을 기초로 한 하나님의 인애와 신실함을 나타냅니다. ‘성실하심’(에메트)은 ‘꾸준함’, ‘성실함’, ‘진실’, ‘진리’ 등을 뜻하여, 하나님의 변함없음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응답의 방법, 과정, 결과에는 이와 같은 속성이 고스란히 담겼습니다. 결과적으로, 그의 이름에는 그가 하신 일과 그의 성품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시인은 그가 경험한 하나님의 이름을 상기하며 그에게 감사합니다.

이제 2절 하반부에서 3절에는 시인이 왜 하나님께 감사하는지 그 이유를 제시합니다. 첫째 이유는 하나님과 관련하여 제시됩니다. ‘주(당신)께서 주(당신)의 말씀을 주(당신)의 모든 이름보다 높게 하셨다’(2)는 하나님의 말씀과 이름의 우열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크고 위대하심이 그의 이름 자체에 나타나는 것보다 그의 ‘말씀’(또는 ‘약속’)에 더 드러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문장은 ‘당신은 당신의 이름과 당신의 말씀을 모든 것보다 높게 하셨다’(NAB, NIV, NRS, ESV, TNK)로도 번역이 가능한데, 이 번역을 따르면 하나님의 이름과 말씀의 위대함을 강조하는 의도로 볼 수 있습니다. 감사하는 둘째 이유는 시인이 간구한 날에 그의 기도에 응답하셨으며, 구체적으로는 시인의 영혼을 강하게 해주셨기 때문입니다(3). ‘강하게 하셨다’는 말은 그를 북돋아 주고 살아나게 하셨음(7)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부르는 자의 소리를 듣고 그에 마땅한 응답해줄 의지와 능력을 지니셨습니다. 시인처럼 하나님께 간구하여 응답을 받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총 150개의 시편 중에는 본 시와 같은 감사의 기도(시 18, 32, 34, 92, 118, 138편 등)보다는 탄식과 탄원의 시(시 3-7, 12-13, 56-57, 74, 78-80, 102편 등)가 더 많이 등장합니다(시편의 1/3 이상). 기쁨보다는 고난과 어려움이 자주 찾아오는 인생의 실제를 보여줍니다. 시인은 여러 위기와 난관을 만나며, 그때마다 오로지 하나님만을 찾고 그를 전적으로 신뢰합니다. 그의 기도는 당시의 위기로 인한 탄식과 괴로움을 쏟아내는 간구의 내용으로 구성되지만, 기도의 마지막은 대부분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것을 확신하는 고백, 찬양, 감사 등으로 전환되며 마무리됩니다(시 3, 13, 55, 79편 등).

 

세상의 왕들이 전해 들은 하나님의 영광(4-6)

하나님께 나아가 그의 뜻을 따를 때, 우리의 삶과 주변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그 길을 따르는 것은 우리에게 당연한 일입니다. 그에 따라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찬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겸손한 마음과 사회의 소외된 자들을 돌보는 행동을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스스로 높아지기보다는 낮아져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기뻐하십니다.

 

4여호와여 세상의 모든 왕들이 주께 감사할 것은 그들이 주의 입의 말씀을 들음이오며

5그들이 여호와의 도를 노래할 것은 여호와의 영광이 크심이니이다

6여호와께서는 높이 계셔도 낮은 자를 굽어살피시며 멀리서도 교만한 자를 아심이니이다(4-6)

 

하나님을 향한 감사는 시인에게 국한된 일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왕들과 ‘신들’을 포함하여 온 세상 사람이 마땅히 할 일입니다(시 22:27-29). 시인이 하나님께 감사할 주체로 ‘모든 왕들’(4)을 언급하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 나라의 우두머리로서 백성을 다스리며, 자기가 섬기는 신을 최고의 신으로 생각한 점이 잘못되었음을 암시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참된 왕이며 그들의 경배를 받아야 할 대상임을 알아야 합니다. 왕이든 신이든 어느 것도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1). 그들이 핑계를 댈 수 없는 이유는 그의 말씀 자체나, 약속, 더 나아가 행하신 일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4절의 ‘주(당신의 입)의 말씀’은 그들이 들은 말씀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말씀임을 확증합니다. 이 말씀은 시인이 경험한 2절의 ‘주의 말씀’과 연결되며, 5절에 나오는 ‘여호와의 도(길)’와 ‘여호와의 영광’과도 연결됩니다. 세상의 왕들도 하나님으로부터 기도의 응답과 붙드심(3)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2)이 어떻게 그의 하시는 일에 드러나는지 실제 자신들이 겪어보고 알게 될 것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의 위대함이 나타나므로, 이들의 감사와 노래는 시인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만 집중될 것입니다. 이 하나님께서는 높이 하늘에 계시지만 낮은 자들을 살피십니다. 시편 113:4-9은 이와 관련한 구체적인 설명을 제공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땅보다 하늘보다 높으신 분이나, 스스로 자기 몸을 굽혀 세상의 낮은 자들(가난한 자, 궁핍한 자, 임신하지 못한 여자), 즉 무엇엔가 결핍되고 남의 도움이 필요한 자를 살피십니다. 그의 살피시는 이유는 그들의 결핍과 부족을 알아내 그들이 바라는 것 이상으로 채워주시기 위함입니다. 세상의 왕이신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백성을 이토록 아끼고 사랑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살피심은 낮은 자들에게만 주목되어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본 시 6절에 하나님께서는 멀리 하늘에서도 교만한 자를 아신다고 설명합니다. 이 말은 낮은 자의 모든 상황을 아시듯, 교만한 자의 마음과 악한 말과 행동을 속속들이 인지하고 계심을 뜻합니다. 7절에서 설명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악행을 심판하십니다.

 

시인과 함께하여 보호하시는 하나님(7-8)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고난 중에도 보호하시고 구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수들의 손에서 구해 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일과 삶을 완성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것을 완벽하게 이루시고, 그의 삶을 끝까지 지키시며,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성취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7내가 환난 중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를 살아나게 하시고 주의 손을 펴사 내 원수들의 분노를 막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구원하시리이다

8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보상해 주시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오니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7-8)

 

시인은 현재와 미래에도 하나님이 돌보실 것을 확신합니다. 하늘의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겸손하거나 교만한 자 모두를 살피시므로 원수들로 인해 곤경에 처했더라도 하나님만 신뢰하여 구원을 다시 경험할 것을 확신합니다. 시인의 영혼을 북돋아 주신 하나님(3)께서는 그를 소생시키고, 친히 오른손으로 시인을 구원하실 것입니다(7). 그러나 교만한 원수들에게는 그의 손을 뻗어 분노를 막으실 것입니다. ‘주의 손을 펴서 내 원수들의 분노를 막으시며’(7)는 직역하면 ‘내 원수들의 분노 위에 당신은 당신의 손을 뻗을 것이며’로서, 하나님께서 원수들의 분노가 표출되는 악행을 친히 심판하실 것을 나타냅니다. 이 손은 그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구원과 보호가 되지만, 그를 신뢰하지 않고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심판의 도구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간구하는 시인을 위해 보상해줄 것입니다(8), ‘보상하다’는 ‘끝내다’, ‘종결짓다’, ‘보복하다’, ‘보답하다’의 뜻으로서, 하나님께서 시인을 위해 원수들에게 보복해주실 것을 의미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인자하심(2,8)을 떠올리며, 인자하심의 영원함을 찬양합니다(시 136:1). 하나님께서는 그의 손으로 만든 피조물을 버리지 않고 인자와 성실로 돌보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인자와 성실로(2) 시인에게 응답하셨듯이, 앞으로도 누구든 하나님께 간구할 때, 그에게 응답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에는 하나님께 드리는 새로운 이유가 담긴 감사의 노래가 끊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전심으로 감사하고 그의 응답을 찬양하며, 그의 뜻을 따르는 삶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높으신 분이시지만 낮은 자를 돌보시며 교만한 자를 멀리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며 그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이 구절들은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보호하시고 완성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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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137-01)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기쁨의 본질

시편 137편 1-9절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열정을 잃어버릴 때, 우리는 진정한 기쁨과 목적을 잃게 됩니다. 신앙의 핵심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없으면, 신앙의 본질이 약해지고 그에 따른 삶의 기쁨과 목적도 희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본성상 외적인 성취나 물질적인 부유함이 일시적인 기쁨을 줄 수 있지만,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갈망하고 그분을 찾는 것이 우리의 삶의 기쁨과 목적을 회복하는 길임을 보여줍니다.

 

  • 유다 멸망 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이 시온을 기억하며 통곡합니다. 유다의 불순종으로 인해 포로 신세가 되었으나, 그들은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을 잊지 않습니다. 또한 멸망의 날도 잊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유다를 침공한 바벨론과 에돔을 하나님이 그대로 갚아주시기를 고대하며 이스라엘의 회복을 꿈꿉니다.

 

바벨론 포로들의 애곡(1-4)

우리가 인생의 어려운 순간에 직면했을 때, 상실감과 슬픔,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위기 상황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 슬픔을 하나님 앞에 솔직히 드러내야 합니다. 어떻게 회복의 시작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들의 애곡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을 넘어서서 우리 신앙의 중요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1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2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3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4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1-4)

 

유다 백성이 바벨론 강변에 앉아 시온을 기억하며 애통합니다.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한(주전 722년) 지 약 140년 후, 남유다도 바벨론에게 무너졌습니다(주전 586년), 유다의 멸망 3년 전인 시드기야 9년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은 먼저 예루살렘을 포위했습니다(왕하 25:1-2). 시드기야 11년에 예루살렘 성전과 궁전 및 모든 집을 불사르고 성벽을 헐어, 유다를 완전히 망하게 했습니다(왕하 25:9-12). 멸망 전후에 유다 백성은 세 차례에 걸쳐 바벨론으로 끌려감으로써 포로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시인과 이스라엘 백성의 한 무리는 바벨론 강변에 앉아 시온을 기억하며 울고 있습니다. 바벨론은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 있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제국 바빌로니아의 수도입니다. ‘메소포타미아’는 ‘두 강 사이’란 뜻으로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을 뜻하며, 바벨론은 이 두 강 중 유프라테스 강 남동쪽에 자리 잡았습니다. ‘여러 강변’은 유프라테스의 강변들을 가리킵니다. 이 강은 2,850킬로미터로 서아시아에서 가장 큰 강이며, 에덴동산(창 2:14)과 아르메니아 산악 지대에서 발원하여 여러 지역을 관통해, 남쪽에서 티그리스강과 합류하여 페르시아 만으로 흘러 들어갑니다. 시인과 무리의 몸은 바벨론에 있으나 마음은 시온에 있습니다. 이 땅 바벨론에서 그들은 이방인일 뿐입니다. 시온을 생각하니 애통의 눈물이 흐릅니다. ‘시온’은 예루살렘(해발 780미터의 구릉) 남서쪽 산등성이를 가리키나, 일반적으로 ‘예루살렘’을 지칭하거나 대체하는 단어로 사용됩니다. 시온은 다윗이 점령해서 거주했던 곳이므로, ‘다윗 성’으로도 알려졌습니다(삼하 5:7,9). 이후 솔로몬 때 하나님의 성전이 예루살렘에 건축되자(대하 3:1), 예루살렘과 시온은 ‘하나님의 산’, ‘거룩한 산’(시 2:6)으로 불렸습니다. 이처럼 시온은 다윗 왕의 영화나 하나님의 임재가 깃든 곳이었지만, 이제는 바벨론과 이방 나라에게 무너지고 폐허가 되었습니다. 열방 중에 큰 나라요 공주 같았던 시온이 열방의 노예가 되었습니다(애 1:1). 무리가 함께 하나님의 성전으로 가는 순례길에서 기대에 차 바라보던 시온산(시 122:2; 125:2)이 기억만 해도 눈물이 쏟아지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이방인들은 시인과 무리에게 수금을 타며 노래 한 곡조를 부르라고 시켰습니다(3). 그들은 시온에서 동포들을 포로로 사로잡아 온 자들이요, 포로들의 조국과 고향을 폭력으로 황폐케 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포로의 주인이 되었고, 자기만족을 위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노래, 그것도 시온에서 부르던 노래를 부르라고 요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언제 수금을 연주하였으며, 언제 노래를 불렀습니까? 물론 잔치를 열 때 노래와 연주가 있었겠지만, 하나님을 예배하며 찬양할 때 수금과 비파를 타고 나팔과 피리를 불었습니다. 바벨론인들의 ‘시온의 노래’ 요구에 무리의 머릿속에 떠오른 노래는 다름 아닌 ‘여호와의 노래’였습니다(4).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인의 땅에서 어떻게 그들을 위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할 수 있습니까?(4) 4절의 ‘이방 땅’은 직역하면 ‘이방의 흙’으로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부정한 지역임을 암시합니다. 노래를 거절한 그들은 수금을 강변 버드나무에 걸어두었습니다(2).

 

예루살렘을 향한 마음(5-6)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열정을 잃어버릴 때, 우리는 진정한 기쁨과 목적을 잃게 됩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의 예루살렘을 향한 사랑을 통해,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헌신을 어떻게 지켜 나갈 수 있을지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5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6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5-6)

 

이스라엘 백성의 예루살렘을 향한 충성과 헌신의 마음이 ‘만약에’라는 문장 형식 셋을 통해 나타납니다. 첫째, 시인은 혹시라도 예루살렘을 잊게 된다면, 수금을 연주하는 그의 오른손도 이미 수금 타는 법을 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5). 하반부의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에서 ‘그의 재주를’은 원문에 나오지 않으나, 의미를 자연스럽게 연결하기 위해 첨가되었습니다. 이 5절의 말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먼저, 수금 연주에 오랜 시간을 보내면 손이 연주하는데 익숙해져서, 수금에 손이 닿기만 해도 자동적으로 곡이 흘러나옵니다. 그러므로 죽기 전이나 병이 들어 수금 연주를 잊을지는 몰라도,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결코 예루살렘을 잊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다른 해석으로, 예루살렘을 잊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잊는 것이며 예배를 잊는 것이므로, 수금 타는 일이 쓸모없어져 잊힐 것임을 뜻할 수 있습니다. 둘째와 셋째 가정법은 연결되어 하나로 나옵니다. 만약 시인이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않거나, 예루살렘을 자신의 최상의 즐거움으로 삼지 않는다면, 그의 혀가 입천장에 붙어버리라고 저주합니다. 이 문장들에서 나타나듯, 예루살렘에 대한 기억은 단순히 ‘잊지 않는 행위’가 아니라 예루살렘을 ‘사랑하고 즐거워하는 적극적인 행동’입니다. 혀가 입천장에 붙는다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습니다. 말씀을 선포할 수 없습니다. 비록 포로 신세이지만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언약 백성임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쪽을 택했습니다(1). 어떤 상황이든 예루살렘의 회복을 인내하며 기다리기를 결정했습니다.

 

원수에 대한 하나님의 보복을 기원(7-9)

고통 속에서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하나님께 은혜와 정의를 간구해야합니다. 이 모습은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고통과 불의 앞에서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시편 기자의 이 기도가 우리에게 어떤 신앙적 의미를 전달하는지 함께 고민해보고자 합니다.

 

7여호와여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그들의 말이 헐어 버리라 헐어 버리라 그 기초까지 헐어 버리라 하였나이다

8멸망할 딸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복이 있으리로다

9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7-9)

 

이방 땅에서 예루살렘을 추억하는 백성은 예루살렘이 함락되던 날을 잊을 수 없습니다. 유다를 침공한 바벨론과 에돔 족속에 대해 울분을 터뜨립니다. 먼저 에돔 족속에 대해 보복의 기원을 합니다. 7절은 ‘에돔 자손들을 대항하여 예루살렘의 날을 기억하소서’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습니다. 에돔은 이삭의 쌍둥이 아들(에서와 야곱) 중 장자인 에서의 별명이며(창 25:30), 후에는 에서의 족속을 지칭합니다(창 36:9). 에서와 에돔 족속은 형제지간이면서도 야곱과 그의 자손 이스라엘에 적대감을 갖고 이스라엘 역사 내내 시시때때로 못살게 굴었습니다(창 27:41; 32:1-12; 민 20:14-21; 왕하 8:20-22; 대하 25:11-14; 암 1:11-15; 겔 35:5). 특히 유다 왕 시드기야 11년(주전 586년)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고 유다를 함락시켰을 때(왕하 25:1-21; 렘 39:1), 에돔도 가담했습니다(겔 35:1-36:15; 암 1:1; 옵 1:11-14; 애 4:21-22). 유다 포로들은 당시에 에돔이 ‘헐어 버리라, 헐러버리라, 예루살렘의 기초까지’라고 외치며 유다를 공략한 일을 떠올립니다. 에스겔 35:12에서도 에돔은 ‘이스라엘 산들이 황폐하였고 우리에게 먹이로 주어졌다’며 모욕적인 말을 서슴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말을 단순히 유다에게 행한 폭력으로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이들의 자랑과 욕은 하나님을 거슬러 우쭐대고, 하나님을 거슬러 교만한 말을 퍼부은 것으로 여기셨습니다(겔 35:13). 그러므로 에돔이 이스라엘의 유업이 황폐된 것을 기뻐한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에돔의 세일 산과 그 전부를 황폐하게 함으로써 분명히 심판하실 것임을 예고하십니다(겔 35:3-9, 14-15).

에돔을 향한 응징의 기도는 8-9절에서 바벨론을 향한 보복의 기원으로 넘어갑니다. 시인과 그의 무리는 바벨론을 ‘멸망할 딸’로 부릅니다(8). ‘딸’은 바벨론을 의인화한 표현입니다(애 4:21-22). 이들은 바벨론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대로 바벨론에게 갚는 자가 행복한 자이며, 그들의 아이들을 잡아 바위에 메어치는 자가 행복한 자임을 선언합니다(8-9). 이런 저주의 기도는 잔인하게 들리나, 이는 바벨론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잔인한 학살과 악행을 함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기도를 통해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출 21:23-25)처럼 하나님께 동등한 보복을 요청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9절의 기도는 8절의 기원에 대한 은유적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7절의 에돔에 대한 기도와 8-9절의 바벨론의 멸망과 심판을 구하는 기도는 본질적으로 하나님께서 정의의 심판을 내리실 것을 기원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에 대해서도 이미 예레미야 선지자들을 통해 그들의 손이 행한 대로 보응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렘 25:14-17). 시간이 흘러 바벨론이 페르시아에게 망하고, 이스라엘이 유다로 돌아오게 됨으로써(주전 538년) 하나님의 약속은 성취되었습니다(대하36:20-23; 스 1장).


우리의 고통과 눈물 속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가 그분을 부를 때 응답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시편 기자와 같이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의 은혜와 사랑을 간절히 구하며,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는 믿음의 길을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그분의 평안과 위로로 가득 채워주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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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136-02)

 


신뢰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인자하심

시편 136편 16-26절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어려운 시기에도 여전히 함께 하시고, 그분의 인자하심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권능으로 우리의 적을 물리치시고, 우리를 구속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에 감사하며, 우리는 그분의 인자하심과 신실하심을 확신해야 합니다.

 

 

  •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셨고 그들을 인도하여 광야를 통과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을 공격하는 열왕들을 죽여 이스라엘을 보호하셨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끊이지 않습니다.

 

광야에서 열왕을 이기신 하나님께 감사하라(16-20)

고난 중에도 하나님께서 같이하시는 삶이 형통하고 부족함이 없는 삶입니다. 광야는 약하디 약한 우리 자신과 직면하는 공간이며, 구체적인 간섭과 공급을 통해 당신의 살아계심을 드러내시는 하나님과 만나는 자리입니다. 그 광야를 통과하지 않고는 약속의 땅에 이를 수 없습니다. 내 가능성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가능성에 나를 맡기는 법을 배우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오늘 우리를 창조하십니다.

 

16그의 백성을 인도하여 광야를 통과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7큰 왕들을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8유명한 왕들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9아모리인의 왕 시혼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0바산 왕 옥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16-20)

 

앞서 시인과 회중은 하나님의 창조사역(5-9)에 이어 애굽에서의 열 재앙과 홍해를 건너게 하신 하나님의 기적적인 사건을 회고하며 그의 인자하심을 선포했는데(10-15), 이제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인도하신 것을 회상합니다. 16절의 ‘그의 백성을 인도하여 광야를 통과하게 하신 이’라는 표현에는 광야 40년 동안에 일어난 수많은 사건들을 뇌리에 스쳐 지나가게 합니다. 홍해를 건넌 후 광야로 들어선 이스라엘은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습니다(출 19장). 온 세계의 주인인 하나님께서는 열방 중에서 이스라엘을 택하여 그들의 왕이 되어주셨고, 이스라엘은 그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보배로운 소유, 거룩한 백성이 될 것임이 선포되었습니다(출 19:5-6).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거룩한 언약 백성이 되도록 십계명과 규례를 주셨습니다(출 20-24장). 또한 성막을 짓도록 명하심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며 그의 임재를 누릴 수 있는 방법과 기회를 주셨습니다(출 25-40장: 레 1-7장). 또한 불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출 13:21-22; 민 9:15-23). 그러나 이스라엘은 광야 여정 내내 하나님을 의심하고 불순종함으로써, 언약의 백성이 아닌 반역의 백성으로 살았습니다(출 15:22-26;32-34장; 민 11:1-12:15). 약속의 땅을 정탐한 후에도 약속을 신뢰하지 못했고, 사사건건 하나님을 거역했으며, 모세와 아론에게 반기를 들었습니다(민 13-14, 16-17장;20:1-13;25장). 광야 40년은 수많은 사건을 증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과 홍해(출 5:20-21;14:11-12)와 광야를 지나온 때나 가나안에 들어와 정착한 때(출 15:22-26; 16:1-8)를 회고할 때마다 조상들의 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시 106:7-39).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40년 동안 먹을 것과 마실 물을 주시고, 옷이 해어지거나 발이 부르트지 않게 하셨고, 죄를 지었을 때 자식을 징계하듯 대하셨습니다(신 8:3-5).

오늘 시인은 광야 여정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놀라운 일들 중에서 왕들을 치고 그들의 땅을 주신 사건에 특별한 관심을 둡니다. 135:10-12에서도 이 두 주제에 초점을 맞춘 바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가는 길에 가장 큰 장애 중 하나가 바로 이방 세력의 위협과 적대 행위였습니다. 에돔이나 아모리왕은 이스라엘이 평화롭게 그들 땅을 통과하게 해달라는 요청을 거부했습니다(민 20:14-24; 신 26-30장). 모압의 발락 왕은 발람 선지자를 사들여 이스라엘에게 저주가 임하길 바랐다(민 22-24장). 19-20절은 아모리인의 왕 시혼과 바산 왕옥(신 2:24)만을 예로 들었으나, 이외에도 네게브의 아랏 왕(민 21:1-3), 미디안의 다섯 왕(민 33:8) 등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진멸한 왕들은 다수였습니다. 이 왕들은 크고(17) 유명한(18) 자들이었습니다. ‘크다’는 말은 ‘위대하다’는 뜻이며, ‘유명하다’는 말은 ‘강력하고 훌륭하다’는 뜻입니다. 135:10에서는 ‘강한’ 왕들로 소개되었습니다. 이 왕들을 물리치신 사건은 하나님께서 전쟁에 능한 용사이자 견줄 자 없는 우두머리임을 부각시킵니다. 열왕을 이김으로써 왕이신 하나님의 권세를 드러냅니다. 애굽에서도 왕과 군대를 치신 것과 광야를 지나며 열왕을 치신 일은 하나님의 왕권과 왕국을 건드릴 세력이 없음을 암시합니다. 광야에서 이방 민족들을 정복하고 땅을 얻게 하심으로써 가나안에서도 약속대로 승리를 얻고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을 확신하게 해줍니다.

 

가나안을 기업으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라(21-25)

죄에서 건짐을 받아 광야를 지나는 우리에게도 언젠가 영원히 주의 품에 안식할 하나님 나라를 약속하셨습니다. 광야에서 갖가지 은혜를 경험했지만 결국 그곳은 광야일 뿐 가나안 땅이 없이는 소망도 없습니다. 오늘 우리도 광야를 걷지만, 오늘 여기서 하나님 나라를 누릴 뿐 아니라 영원히 거할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소망으로 갖고 있기에, 주님 의지하며 살 수 있습니다.

 

21그들의 땅을 기업으로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2곧 그 종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3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기억해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4우리를 우리의 대적에게서 건지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5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21-25)

 

광야에서부터 열왕을 치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땅을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아모리인의 왕에게서 헤스본 및 아르논 골짜기에서 얍복강에 이르는 성읍들을 빼앗고(민 21:25-32,35; 신 2:31-36), 바산 왕에게서 60성읍을 빼앗아(신 3:4-5), 결과적으로 요단 동편에서 남북으로 아르논 시내에서 헤르몬 산까지를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신 3:8,10).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이 땅들을 르우벤 지파, 갓 지파, 므낫세 지파 중 반절에게 기업으로 주셨습니다(민 32:32-38; 신 3:12-17).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광야 여정 동안에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가서 할 일을 미리 다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가나안에서 일곱 족속을 진멸하고 땅을 취하기도 전에, 광야에서 열방을 진멸하고 땅을 얻게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요단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가 여리고와 아이 성을 비롯해 가나안 족속을 진멸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말씀에 순종할 때 승리하게 하셨고, 불순종할 때에는 심판을 내리셨습니다(수 5-12장). 이런 과정을 통해 하나님만이 전쟁의 승리와 기업의 축복을 주실 수 있는 분임을 일깨우셨습니다. 시인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종’(시 135:14)임을 상기시킵니다(22). 하나님께서 그의 종이라 부른 자들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출 32:13), 모세(출 14:31; 수 1:1), 여호수아(수 24:29), 다윗(삼하 7:5), 이사야(사 20:3), 욥(욥 1:8), 메시아(슥 3:8) 등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종이란 그를 섬기고 헌신하는 자이며, 특정한 사명을 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상호 관계 안에 있는 자들로서 하나님께서 인정한 자입니다. 시편에서 하나님의 종은 성전에서 봉사하는 레위인과 제사장들을 가리킬 때도 있으나(시 134:1), 넓게는 이스라엘 백성(시 135:14), 특히 그를 경외하며 말씀에 순종하는 자입니다(시 69:36; 참조. 사 65:9; 단 9:10). 선하고 인애가 많으신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백성에게 기업의 축복을 약속하셨고(창 15:7-21), 그 약속을 이행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가나안 땅의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를 경외하고 섬기며, 그가 주신 기업을 감사함으로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23-25절에서 시인은 창조 사건부터 가나안에 오기까지, 또 현 시점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하신 크신 일을 요약합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역사 속에서 비천한 상황에 처할 때마다 그들을 기억하셨습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 자신이 택한 언약의 백성임을 기억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인가를 기억하신다는 것은 그가 그 대상이나 일에 주목하셨다는 뜻이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직접 그 대상과 일에 개입하여 심판과 구원, 정의와 은혜를 내리실 것을 예고합니다(호 7:2; 겔 28:22,24). 시편 105:42에서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메추라기로 먹이시고 반석에서 물을 공급하신 일이 그가 아브라함에게 한 거룩한 약속(창 15:14)을 기억하셨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스라엘을 기억하여 은혜와 호의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시니, 그의 선함과 인자하심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 때만이 아니라 사사 시대와 왕정 시대를 비롯한 이스라엘 역사 내내 수많은 대적에게서 건지셨습니다. ‘건지다’(파라크)는 ‘구원하다’나 ‘구조하다’와 같은 직접적인 의미가 아니라, ‘떼어내다’, ‘묶은 것을 풀다’, ‘잡아떼다’, ‘뜯어내다’의 뜻으로 비유적이고 시적인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광야로,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대적을 물리쳐주고, 가나안 땅을 소유로 주신 것은 그들로 그의 율례를 지켜 하나님의 거룩한 언약 백성으로 살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시 105:45). 셋째,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여, 그곳에서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할 때 그 땅의 소산물로 배불릴 수 있게 하셨습니다(신 8:7-10). 하나님께서는 단지 그들의 백성만 먹이는 분이 아니라, 그가 창조한 짐승이나 식물도 다 먹이고 돌보시는 분입니다(욥 38:39-41).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26)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비천할 때 기억하시고 대적에게서 건지셨습니다. 사랑 받을 구석이 전혀 없는 우리가 제 맘껏 죄에 취하여 살 때 먼저 손 내밀어주시고 시시때때로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오늘을 살고 있습니다. 생명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 생명을 유지하도록 도우셨습니다. 우리의 쓸 것을 공급하셨습니다. 신앙은 우리가 그렇게 주님의 돌보심과 공급하심의 은총으로 산다는 것을 인정하는 삶입니다.

 

26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26)

 

이 모든 기적과 구원을 베푸신 분은 하늘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께 감사를 외치며, 그의 영원한 인자하심을 마지막으로 고백함으로써, 하나님을 향한 시인과 청중의 찬양이 마무리됩니다. 이 마무리는 1-3절과 같이 ‘호두’(감사하라)로 끝나고,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하늘의 하나님’으로 부르며 그의 존재 자체와 지위를 부각합니다. 하늘에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선함과 인자하심은 앞으로도 그의 백성의 삶에 계속될 것입니다.


시편 136편을 통해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해 더 깊이 알아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우리의 삶을 통해 확실히 경험할 수 있는 현실입니다. 이 인자하심은 우리를 지속적으로 이끄시며, 우리의 영원한 희망과 기쁨의 근간이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한 신뢰를 강화하고, 그분의 사랑을 더욱 깊이 체험하며, 영광과 찬양을 돌리는 것을 마음으로 다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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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135-01)


모든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

시편 135편 1-21절


 

지문은 사람을 식별하는 생물학적 코드로 태아가 3개월일 때 만들어져 그 모양이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에게도 지워지지 않는 고유지문이 있습니다. 복제 불가능한 워터마크가 온 땅과 하늘에 선명한데 찬양 외에 무엇을 입에 담겠습니까! 찬양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식별하는 지문입니다.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특별한 소유로 택하셨으므로, 이스라엘 공동체는 함께 모여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천지 창조 사역부터 애굽에서의 기적, 광야를 통과하여 가나안 땅에 이르는 동안 베푸신 인도와 보호,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신 일을 회상합니다.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시온에서 끊임없이 송축을 받으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택하신 하나님을 찬송(1-4)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아름다움을 인정하고 그분의 이름을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들로서, 그리고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로서 우리는 그분을 높이고 경배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통해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분과의 깊은 관계를 누릴 수 있습니다.

 

1할렐루야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라 여호와의 종들아 찬송하라

2여호와의 집 우리 여호와의 성전 곧 우리 하나님의 성전 뜰에 서 있는 너희여

3여호와를 찬송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며 그의 이름이 아름다우니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

4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야곱 곧 이스라엘을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셨음이로다(1-4)

 

열다섯 편의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시편 120-134편)가 끝난 후 시편 135편과 136편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135편은 ‘할렐루야’로 시작하고 끝나면서, 창조 때부터 가나안 정복 때까지, 그 이후 현시점까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놀라운 기적들을 찬양합니다. 1-4절에서는 무리에게(2, 19-20) 누가 여호와를 찬양하고, 왜 찬양해야 하는지를 기술하며, 그들을 하나님 찬양에 초대합니다. 먼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자는 여호와를 섬기는 ‘종들’(1)이며, 이들은 예루살렘 하나님의 성전 뜰에 서 있습니다(시 116:19). 19-20절을 보면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을 비롯한 레위인들입니다. 이 무리는 시편 134:1-2의 무리와 같습니다. 이들이 모인 시각이나 모인 이유는 다를 수 있으나,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본 시는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의 여러 이름(구원자, 목자, 치료자 등)에는 그가 하신 일과 성품이 드러나 있습니다. 특정한 이름을 찬양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해주신 일에 감사하며, 그가 어떤 분인지를 잊지 않으려는 의지를 나타냅니다.

무리가 찬양해야 할 첫 이름은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출애굽 사건과 구원을 떠올리게 하는 이름입니다(출 3:14-15;6:2-8). 이 이름은 이스라엘을 그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신 언약의 하나님을 상기시킵니다. 출애굽 후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자신의 말과 언약을 지키면 모든 민족 중 ‘하나님의 소유’가 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출 19:5-6). ‘소유’(세굴라)는 왕들의 재산인 보배들을 가리킵니다(대상 29:3; 전 2:8). 하나님께서 야곱의 자손을 보배로운 소유의 백성(신 7:6)으로 삼은 것은 자기를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사랑하고 기뻐하셨습니다(신 7:7).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함(5-7)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주로서의 위대함을 찬양하며 그분의 주권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자연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바라보며,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것이 우리의 본분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분의 위대하심을 높이는 삶을 살아가길 소망합니다.

 

5내가 알거니와 여호와께서는 위대하시며 우리 주는 모든 신들보다 위대하시도다

6여호와께서 그가 기뻐하시는 모든 일을 천지와 바다와 모든 깊은 데서 다 행하셨도다

7안개를 땅 끝에서 일으키시며 비를 위하여 번개를 만드시며 바람을 그 곳간에서 내시는도다(5-7)

 

시인은 이스라엘을 택하신 여호와의 위대하심을 인지했고(5), 이를 하나씩 열거하여 무리와 함께 찬양하려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신들보다 위대하시므로 비교 대상이 없습니다. 그의 위대하심은 무엇보다 먼저 창조사역을 통해 명백히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 이스라엘을 선택했듯이, 창조의 모든 것도 그의 기쁨으로 시작되고 이루어졌습니다(6). 말씀을 통해 지으신 하늘, 땅, 바다, 모든 깊음(물, 바다)은 하나님의 지혜, 능력, 주권, 다스림이 온 세상 만물에 깃들었음을 말해줍니다. 그의 지혜와 능력은 천지에 안개와 번개와 비와 바람을 만들고 질서를 세우신 데서도 드러납니다(렘 10:12-13; 욥 38:16-35). 바알이 바다와 자연의 세력을 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만물은 다 하나님의 작품이자 그의 통제 아래에 있습니다.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기사(8-14)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기억하며 그분께 감사하고, 그분의 능력과 권세를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의 적들로부터 승리를 주시며,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영원히 기억하고, 그분의 신실하심을 찬양하며, 그분의 공의와 위로를 신뢰해야 합니다.

 

8그가 애굽의 처음 난 자를 사람부터 짐승까지 치셨도다

9애굽이여 여호와께서 네게 행한 표적들과 징조들을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들에게 보내셨도다

10그가 많은 나라를 치시고 강한 왕들을 죽이셨나니

11곧 아모리인의 왕 시혼과 바산 왕 옥과 가나안의 모든 국왕이로다

12그들의 땅을 기업으로 주시되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셨도다

13여호와여 주의 이름이 영원하시니이다 여호와여 주를 기념함이 대대에 이르리이다

14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판단하시며 그의 종들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으시리로다(8-14)

 

역사 속에서도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나타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 이스라엘을 위해 애굽과 광야에서, 가나안 땅에서 행하신 일들을 회상하며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기적은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가장 큰 놀라움과 경외심을 야기하는 사건들에만 주목합니다. 각 사건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과 이스라엘을 위한 구원, 보호, 공급하심 등이 강조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온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신(5)이심이 확인됩니다. 또한 아브라함이나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이 지켜짐으로써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선하심이 확인됩니다. 출애굽 때의 열 재앙을 맨 먼저 언급합니다. 그중 장자 재앙만 언급되는데, 이 재앙 하나를 보면 나머지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재앙은 가장 강력한 심판과 구원을 보여주었습니다. 애굽인의 장자는 사람부터 짐승까지 다 죽음으로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을 맛보나 이스라엘 장자는 유월절의 밤을 보내고 대속의 구원을 경험했습니다(출 12:1-13). 이 표적과 징조는 바로 왕과 신하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각인하는 경험이었습니다. 둘째, 광야를 지나 가나안에 이르는 동안 이방 왕들을 치고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신 사건입니다(10-12). 이스라엘을 위해 하나님께서 물리쳐주신 왕들 중 아모리인의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이 대표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땅인 헤스본 지역과 바산 지역(아르논 골짜기에서 헤르몬까지[신 3:8])을 이스라엘에게 넘겨주셨습니다(민 21:21-35; 신 2:24-3:3). 광야를 지나 가나안에 들어와 여리고를 시작으로 여러 성읍과 그들의 왕을 치신 일은 여호수아 6-11장에 걸쳐 나오며, 12장에는 이때 멸망한 서른한 명의 왕 목록도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본 시에서는 ‘하나님이 가나안의 모든 국왕을 치신 일’(11)로 간단히 요약되었습니다. 모든 사건에는 하나님의 직접적이고 주도적인 개입과 활약이 부각됩니다. 가나안 정복 후 땅을 분배한 경우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땅을 기업으로 주심에 초점이 맞춰졌습니다(12). 여기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언급되어 4절의 ‘특별한 소유’를 떠오르게 합니다. 이 언약의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을 주시기로 한 약속(창 13:14-15; 17:8)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과 그를 기억함은 대대에 영원할 것입니다. 역사 속의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과 더불어 그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과 그를 섬기는 자들을 신원하고(‘판단하시고’로 번역됨, 14) 긍휼히 여기셨고(‘위로를 받으시리로다’로 번역됨),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13-14). 이스라엘과 그의 종들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과 구원은 애굽의 왕 바로와 그의 종들(‘신하들’로 번역됨, 9)에게 행하신 재앙과 심판과 대조됨으로써 부각됩니다.

 

우상의 헛됨(15-18)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며,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그분의 능력과 은혜를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찬양과 경배를 드리며, 그분을 높이며 살아가길 소망합니다.

 

15○열국의 우상은 은금이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라

16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17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그들의 입에는 아무 호흡도 없나니

18그것을 만든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것과 같으리로다(15-18)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고 자기 백성을 보살피시는 전지전능하고 참된 신이지만, 열방이 섬기는 우상 신들의 실체는 은과 금을 사용하여 사람이 만든 작품일 뿐입니다(시 115:4-8). 우상들의 겉은 은과 금으로 치장되어 번쩍이며 진귀하게 보이고, 사람이 손재주로 모양을 새겨 신비롭게 보입니다. 그러나 입은 말하지 못하고, 눈은 볼 수 없고, 귀는 들을 수 없고, 코와 입으로는 호흡할 수 없습니다. 겉만 번지르르하나 그 안에는 생명이 없으니 세월이 지나면 닳고 썩어 흔적이 남지 않습니다. 이 같은 특징과 최후는 우상에게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이 우상을 만드는 자나 그것을 신뢰하는 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똑같은 최후를 맞게 됩니다. 우상과 달리 눈과 입과 귀와 코가 있지만 보고 말하고 듣고 숨 쉬는 기능은 육체적 기능으로 끝날 뿐입니다. 영적, 신앙적, 도덕적인 면에서 감각은 무뎌지고 죽어 그 기능이 망가졌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생명력과 성장력이 없어 퇴화하여 심판만을 재촉할 뿐입니다.

 

예루살렘에 계시는 하나님을 찬송(19-21)

우리는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일들에 감사하며, 그분의 위대하심과 선하심을 인정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는 단지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포함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며, 그분의 임재를 어디서나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삶을 살아가며,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19이스라엘 족속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아론의 족속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20레위 족속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21예루살렘에 계시는 여호와는 시온에서 찬송을 받으실지어다 할렐루야(19-21)

 

이스라엘 공동체가 위대하고 참된 하나님을 송축하는 것은 합당한 일입니다. 시인과 함께 하나님을 송축해야 하는 대상으로 ‘이스라엘 족속’, ‘아론의 족속’, ‘레위의 족속’, ‘여호와를 경외하는 너희들’이 언급되었습니다(시 115:8-11; 134:1-2). 여기서 ‘족’은 ‘집’의 번역이며, ‘집’은 사람의 거주지만이 아니라 가족, 지파, 족속, 왕조 등의 의미를 가집니다. 언급된 네 무리는 모두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로 택함 받은 자들(4)입니다. ‘이스라엘 족속’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너희들’은 이스라엘 전체를 지칭하며,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임무를 수여받은 자임을 암시합니다. ‘아론의 족속’과 ‘레위의 족속’은 거룩함의 대표격이자 하나님께 예배하는 특권과 책임을 맡은 제사장 족속인 아론의 자손들, 그리고 레위인과 그의 자손을 가리킵니다(민 8:18-19). 하나님께서는 그가 택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그가 선택한 도시 예루살렘의 시온성에 거주하십니다. 시온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끊이지 않습니다.


찬양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목적입니다. 구속받은 모든 성도는 이 땅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다가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그곳에서도 영원히 찬송과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리게 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 속에서 천국의 기쁨과 은혜를 누리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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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133-134)


복되고 아름다운 성령의 공동체

시편 133-134편


 

교회가 회복되고 개혁되려면 먼저 예배를 회복하고 개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배의 자리에 계시고, 성도들이 하나가 되어 주님을 섬긴다는 의식이 살아나지 않는다면 교회는 생명력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먼저 우리가 모이기를 기뻐하고 서로를 축복하는 공동체가 되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배할 때마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믿음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예배를 드린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 시편 133편은 형제들이 하나가 되어 거주하는 모습이 얼마나 선하고,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를 노래합니다. 가족과 사회 공동체 간의 관계, 개인과 하나님 간의 관계에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합니다. 또한 134편은 밤에 예루살렘 성전에 모인 제사장과 무리가 하나님을 송축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마땅히 그를 송축하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에게 축복으로 응답하실 것입니다.

 

함께하는 아름다움(시 133:1-3)

예배는 단순히 하나님께 기도하고 말씀을 듣고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성도가 서로 교제하고 연합하는 장이 되어야 합니다. 특히 현대에는 세상의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의 영향력이 교회에도 침투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연합을 방해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는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 되어 나아가는 시간이 되기 바랍니다.

 

1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2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3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1-3)

 

시편 133편은 형제간의 화목과 연합의 아름다움에 대해 노래하는 시입니다. 이 시는 세 절로 이루어져 있으며, 다윗이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내용은 짧지만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1) 형제가 연합함에 대한 칭송(1)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의 열세 번째인 133편은 공동체의 연합에 대한 칭찬과 이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을 노래합니다. 첫마디인 ‘보라!’라는 외침은 시인과 함께한 무리의 주목을 끌며, 그 다음에 어떤 말이 나올지 기대하게 합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형제’는 육체적 가족의 테두리를 넘어 사회적, 영적 가족으로 확대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강조점은 공동체의 ‘연합’과 ‘함께 거주하는 것’의 유익에 있습니다. ‘연합’이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같이 있든지 떨어져 있든지 이들을 하나로 묶는 이유가 존재하기에 연합합니다. ‘함께 거주하는 것’은 장소와 환경을 공유하는 조화로운 모습입니다. 바벨탑을 쌓았던 자들도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려고 함께 성을 쌓았습니다(창 11:1-9). 아브람과 조카 롯도 함께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으로 왔으나(창 12:31; 13:1) 소유가 많아지자 연합과 동거가 깨지고 갈라서야 했습니다(창 13:5-12). 야곱과 에서도 헤어졌습니다(창 36:7). 그러나 에스더와 모르드개는 다른 환경에서 거주하면서도 유다인 구원을 위해 함께 힘썼습니다(에 6:31-17; 9장). 에스라와 느헤미야도 유사합니다(느 8:9).

본 시의 공동체가 연합하여 함께하게 된 근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 예배하려는 공통 목표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각 가정과 친척과 지파에서 온 사람들이 함께 예루살렘 여정에 오르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각자의 터전으로 돌아오게 됩니다(시 122:4). 이처럼 순례길의 연합과 동거는 즐거움을 주고 큰 격려가 됩니다(시 122:1). 시인은 이런 모습이 선하고 아름답다고 설명합니다. ‘연합과 동거’에 항상 ‘선’이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악’과 ‘위험’이 소리 없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아름답다’(나임)란 단어는 ‘기분 좋은’, ‘즐거운’, ‘사랑스러운’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이름(135:3)이나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147:1)도 아름답고 즐거운 대상으로 기술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시인은 하나님 공동체의 연합의 동거함에 나타나는 선과 아름다움을 찬양하며, 동시에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고 아름다운 연합과 동거를 이끌어가도록 공동체를 독려합니다.

 

(2) 형제가 연합함에 대한 비유(2-3)

 

시인은 형제의 연합은 두 가지 직접 비유로 설명됩니다. 첫째는 영적 환경의 예로, 아론의 머리에 내린 보배로운 기름과 같습니다. 여기서 ‘보배로운’ 기름을 직역하면 ‘선한(최상의) 기름’을 의미합니다. 기름의 질과 가치가 높다는 뜻입니다. 기름은 식용이나 약용으로 쓰이고, 성막/성전의 예배나 의식의 성별된 재료(출 30:22-33; 민 7:1)로 쓰이고, 손님에 대한 환대의 표시 등으로 쓰였습니다. 하나님의 축복(호 2:22)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2절에서는 이 기름을 아론과 연결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러 가는 공동체의 영적 차원을 염두에 둡니다. 이스라엘의 첫 제사장 아론은 제사장의 대표이자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의 대표로 여기 등장합니다.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기름을 발라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했으므로, 보배로운 이 감람 기름은 머리에 붓는 거룩한 기름(관유)이 됩니다(출 30:25). 기름이 수염에 흘러 겉옷의 옷깃까지 흘러 내려가는 모습은 공동체의 연합의 부단한 지속성, 향기로운 영향력, 한계 없는 확대 등을 기대하게 합니다.

둘째 비유는 물리적 환경의 예입니다. 형제의 연합과 동거는 시온의 산들 위에 내린 헐몬의 이슬 같습니다. 아론의 기름처럼 이슬도 그 가치와 흘러내림과 풍요로움이 암시되었습니다. 헐몬 산은 갈릴리 동북쪽에 자리 잡고 있는 이스라엘의 북쪽 경계로 해발 2,850미터입니다. 이 산의 세 봉우리에 늘 눈이 쌓여 있고, 여기서 물이 흘러 남쪽 지역의 식수원 역할을 합니다. 이런 지형학적 특색으로 밤에 많은 이슬을 내려 동식물만 아니라 경작에도 큰 도움을 줍니다. 강수량이 적은 이스라엘 지역에 이슬이나 비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깁니다(창 27:28; 슥 8:12). 하나님의 축복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려 생명과 풍요를 공급하듯 형제의 연합도 마찬가지입니다.

 

(3) 하나님의 축복(3b)

 

하나님께서 연합하는 공동체에게 영생의 축복을 명하십니다. 이 생명의 축복은 바로 앞에서 이슬이 시온에 내려 생명을 공급하는 것과 의미상 연결됩니다. 좋은 기름과 이슬의 근원지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론을 대표로 하는 거룩한 성도와 하나님이 택한 시온에 거주하는 그의 언약 백성(시 132:13-18), 즉 하나님으로 연합된 공동체에게 생명을 공급하여 그들을 성장, 풍요로움, 선, 아름다움의 공동체로 인도하십니다.

 

성전을 지키는 자들의 축복(시 134:1-3)

예배에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누리는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그저 예배 자리에 와서 앉아 있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설교를 듣는 것으로 예배를 다 드렸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계신 곳을 향해 두 손을 들고 송축하는, 즉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예배자가 하나님께서 예배 가운데 내리시는 복을 받기에 합당한 자입니다.

 

1보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2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

3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1-3)

 

시편 134편은 성전에서 주님을 섬기는 자들을 격려하며 축복하는 찬양 시입니다. 이 시편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중 하나로, 짧지만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1) 여호와를 송축하라(1-2)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 모인 자들이 하나님을 송축합니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의 배경에서 보면, 133편에서 예루살렘 순례길에 동행하는 무리가 연합하여 함께하는 것을 경축하고, 134편에서 그들이 연합한 목적을 따라 그들이 성전에 올라와 하나님을 같이 송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연합의 선함과 아름다움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선함과 아름다움으로 연결됩니다. 본 시 1절의 ‘보라!’라는 시인의 외침은 그 앞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을 주목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종은 성전에 예배하러 온 순례자들이나 예루살렘 거주민일 수 있으며, 2절을 고려하면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집중적으로 가리킵니다. 이들은 밤에 하나님의 성전에 모여 있습니다. 레위 지파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장자 대신 하나님을 섬기는 데 헌신하도록 선택된 자들입니다(민 8:18-19). 조석으로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고(대상 23:30), 제사를 드리며(민 28:4), 성전 이곳저곳에서 맡은 일을 분담하여 수행하는 책임이 있었습니다(대상 23:24-32).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중심으로 함께 모인 자들은 하나님의 성소를 향해 그를 송축합니다. 2절의 ‘성소를 향하여’는 원문에서 ‘성소’만 나왔으므로, ‘성소에서’로도 번역이 가능합니다. 어떤 번역이든지 하나님 앞에서 그를 송축하라는 의미로서, 함께 모인 무리의 예배와 송축의 대상이 오로지 하나님임을 암시합니다. 성소를 향한 모습과 함께 하나님 앞에 손을 들고 있는 모습은 기도하거나 찬양하는 모습을 나타냅니다(시 28:2; 애 3:41; 딤전 2:8).

 

(2) 여호와께서 축복하시리라(3)

 

여호와 하나님을 송축하는 무리에게 제사장의 축도가 따릅니다: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3). 1-3절에서 사람들의 ‘송축하다’와 하나님의 ‘복 주다’는 각각 다른 단어로 나오지만, 히브리어에서는 둘 다 ‘축복하다’의 뜻인 바라크 동사가 사용되었습니다. 여호와를 송축하는(바라크) 자에게 하나님의 복 주심(바라크)으로 화답합니다. 이 화답은 제사장을 매개로 이루어집니다. 백성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원하는 것은 제사장의 임무 중 하나입니다(민 6:23-26).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축복을 주시려는 적극적인 의도가 나타납니다. 이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을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시 115:15;121:2; 124:8; 134:4), ‘시온에 계시는 하나님’으로 소개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피조물이자 언약 백성이 된 점을 함축합니다. 창조주와 왕이신 하나님을 송축하며 기도하는 것은 여호와의 종으로서 마땅한 자세입니다. 성전에 올라온 발걸음은 마지막엔 온 세상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의 발걸음이 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시온에서(시 132:13-14) 주시는 풍성한 축복은 시온의 거주지를 넘어 이스라엘과 온 땅 구석구석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에게 임할 것입니다(슥 14:9-11, 16; 미 4:6-8).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뭉칠 확률보다 반목할 확률이 높은 것이 바로 공동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예배자이자 순례자인 우리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 하나 되는 신비를 경험하게 됩니다. 공동체를 통한 주신 복을 헤아려 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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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132-01)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하는 마음

시편 132편 1-18절


 

‘다윗의 후손’이라는 그리스도의 별명은 다윗 언약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 약속 안에는 메시야, 성전, 하나님 나라 백성인 성도도 포함되었습니다. 성도는 성령의 강림으로 모든 성도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거룩함과 평화를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과 성취 속에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가 다윗의 끈질긴 수고 끝에 마침내 예루살렘에 안착합니다. 이에 왕과 제사장과 백성이 다 감격하며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언약을 맺고, 그와 그 후손이 하나님께 순종하면 그들에게 영원한 왕권을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다윗의 성 시온을 하나님의 거주지로 삼고 그곳에서 다윗과 백성을 다스릴 것을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하는 다윗(1-9)

사람들은 누구나 인정과 사랑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사람들의 인기를 쫓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도록 힘써야 합니다. 겸손하게 하나님의 약속을 따르며 살아가면, 하나님께서 그를 그의 후손들 앞에서까지도 영원히 높이실 것입니다. 다윗이 존경받을 수 있는 비결이었습니다.

 

1여호와여 다윗을 위하여 그의 모든 겸손을 기억하소서

2그가 여호와께 맹세하며 야곱의 전능자에게 서원하기를

3내가 내 장막 집에 들어가지 아니하며 내 침상에 오르지 아니하고

4내 눈으로 잠들게 하지 아니하며 내 눈꺼풀로 졸게 하지 아니하기를

5여호와의 처소 곧 야곱의 전능자의 성막을 발견하기까지 하리라 하였나이다

6우리가 그것이 에브라다에 있다 함을 들었더니 나무 밭에서 찾았도다

7우리가 그의 계신 곳으로 들어가서 그의 발등상 앞에서 엎드려 예배하리로다

8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권능의 궤와 함께 평안한 곳으로 들어가소서

9주의 제사장들은 의를 옷 입고 주의 성도들은 즐거이 외칠지어다(1-9)

 

다윗이 하나님을 위해 쉼 없이 성전을 찾고 준비했던 열정을 회상합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거처를 마련하려는 서원을 언급하며, 그 성전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초대합니다. 제사장들이 의로 옷 입고, 성도들이 기쁨으로 외치며 예배할 것을 기원합니다.

 

(1) 다윗을 기억하소서(1)

 

시편 132편은 다윗을 위한 기도, ‘여호와여 다윗을 위하여 그의 모든 겸손을 기억하소서’로 시작합니다. ‘겸손’이란 ‘고난’, ‘낮아짐’을 뜻합니다. 2-9절을 보면 이 고난은 다윗이 왕이 된 후 하나님의 성전을 지으려는 열망과 법궤를 예루살렘에 옮기기를 갈망하며 겪은 낮아짐을 가리킵니다. 다윗의 헌신과 고난을 기억해달라는 요청은 결국 하나님의 지속적인 관심과 은혜, 다윗 왕조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을 촉구하는 간구입니다.

 

(2)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다윗의 갈망(2-5)

 

다윗의 고난(‘겸손’)의 증거(1)로, 2-9절에서는 다윗이 하나님의 처소를 마련하는 데 힘쓴 것을 기록합니다. 처소 준비는 넓은 의미에서 성전 건축이며, 좁은 의미에서는 법궤를 예루살렘에 옮겨오는 일입니다. 다윗은 야곱의 전능자 하나님의 처소 준비 전에는 장막이나 침상에 눕지 않고, 잠과 졸음을 내쫓겠다고 맹세합니다(3-5). 물론 과장이지만 다윗이 얼마나 헌신했으며 하나님의 임재를 얼마나 사모했는지를 보여줍니다. 다윗의 맹세의 말은 성경에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지만, 성전에 대한 깊은 열망과 이에 대한 언급(삼하 7:2; 대상 17:1-4), 법궤를 둘 장막을 준비한 일(대상 15:1), 법궤를 옮겨오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은 적극적인 행동(삼하 6장: 대상 13, 15-16장)이이를 증명하고도 남습니다.

 

(3) 하나님의 법궤와 함께한 즐거운 예배(6-9)

 

다윗과 신하들은 법궤가 에브라다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고, 야알의 들(‘나무 밭’으로 번역됨; 6)에서 그것을 찾았습니다. 6-9절의 ‘우리’나 ‘제사장들’이나 ‘성도들’은 왕 다윗만이 아니라 백성들도 이 소식에 기뻔했고 하나님의 궤를 찾고 옮기는 데 동참했음을 보여줍니다. 에브라다나 야알의 들은 법궤가 머물렀던 ‘기럇여아림’을 가리킬 것입니다(대상 2:50; 13:5-6). 다윗과 백성들은 궤를 오벧에돔의 집에서 예루살렘 장막까지 옮겨왔습니다(삼하 6:17; 대상 15:25-28).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가 깃든 그곳, 그의 발등상 앞에서 예배하기를 갈망합니다(7). 8-9절은 하나님의 궤를 장막으로 옮기는 행진을 그립니다. 사무엘 때는 법궤가 블레셋 손에 넘어가기도 했고(삼상 4장-7:2), 사울 시대에는 궤에 대한 헌신이 없었으나(삼상 14:18; 대상 13:3), 다윗 때 궤는 평안한 곳에 안착될 수 있었습니다(8). 이날에 다윗, 제사장,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백성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배했습니다(9). 여기서 제사장들로 의를 옷 입게 하시길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준비된 처소 앞에서 말씀대로 본분을 수행할 것을 암시합니다. 이처럼 다윗이 찾으려 했던 ‘여호와의 처소’, ‘야곱의 전능자의 성막’(5)은 발견되었고(6), 하나님께서는 그의 ‘계신 곳’, ‘발등상’, ‘평안한 곳’에 거하시면서 예배를 받으십니다(7-9).

 

시온에 임재하신 하나님(10-18)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성도는 하나님 앞에 직접 예배하는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외에는 다른 중보가 필요 없으며, 성도의 삶은 하나님께 드리는 산 제사요 영적 예배입니다. 성도는 세상의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구별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제사장의 직분을 충성스럽게 감당해야 합니다.

 

10주의 종 다윗을 위하여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 얼굴을 외면하지 마옵소서

11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성실히 맹세하셨으니 변하지 아니하실지라 이르시기를 네 몸의 소생을 네 왕위에 둘지라

12네 자손이 내 언약과 그들에게 교훈하는 내 증거를 지킬진대 그들의 후손도 영원히 네 왕위에 앉으리라 하셨도다

13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14이는 내가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주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

15내가 이 성의 식료품에 풍족히 복을 주고 떡으로 그 빈민을 만족하게 하리로다

16내가 그 제사장들에게 구원을 옷 입히리니 그 성도들은 즐거이 외치리로다

17내가 거기서 다윗에게 뿔이 나게 할 것이라 내가 내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위하여 등을 준비하였도다

18내가 그의 원수에게는 수치를 옷 입히고 그에게는 왕관이 빛나게 하리라 하셨도다(10-18)

 

다윗을 위한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를 상기시키며, 그의 후손이 왕좌에 앉을 것임을 약속합니다. 하나님께서 시온을 선택하셔서 그곳에 영원히 거하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시온이 번성하고 하나님께서 기름부음 받은 자에게 승리를 주실 것을 약속합니다.

 

(1)다윗을 외면하지 마소서(10)

 

1절처럼 ‘다윗을 위한’ 기도를 드립니다(10). 하나님께 헌신하고 그를 예배하는 다윗은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삼상 16:13)임을 하나님께 상기시킵니다. ‘외면하지 마옵소서’는 1절의 ‘기억하소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지속적인 은혜와 관심과 개입을 촉구하는 기도입니다.

 

(2) 하나님이 다윗에게 주신 언약(11-12)

 

하나님과 다윗 간의 헌신과 성실함은 다윗 언약(삼하 7장; 대상 17장)을 기초로 요구됩니다. 하나님의 성실하심은 다윗의 후손을 통해 계속적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11절은 하나님께서 솔로몬(‘네 몸의 소생’)을 통해 성전을 짓도록 허락하심이 암시되었습니다(삼하 7:12-13). 12절은 다윗의 후손들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언약과 교훈에 순종해야 함(신 17:18-20)과 하나님이 다윗 왕조에 영원한 왕권을 허락하심을 부각합니다(삼하 7:14-16).

 

(3) 시온에서 백성과 왕을 다스리시는 하나님(13-18)

 

다윗과 언약을 맺은 하나님은 시온을 그의 거처로 삼아 그의 백성과 함께하실 것을 선포하십니다(13-14). ‘거처’(모샤브)는 원래 ‘의자’의 뜻이므로, 하나님께서 정주하신 장소만이 아닌 하나님께서 왕좌에 앉아 통치하시는 의미도 함께 암시되었습니다. ‘거처로 삼아’에서 ‘삼다’는 ‘간절히 원하다’, ‘갈망하다’의 뜻이므로, 시온을 거처로 택하신 것이 하나님의 자발적이고 의지적인 일임을 함축합니다. 이 일은 위 1-9절 단락과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시온 선택은 다윗이 하나님께서 거하실 처소를 갈망하고 찾은 것(5-8)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또한 다윗이 하나님께 법궤와 함께 ‘쉴 곳’(‘평안한 곳’으로 번역됨, 8)으로 들어가기를 요청했는데(8), 하나님께서는 시온이 그가 잠시 거하는 곳이 아닌, ‘영원히 쉴 곳’이라고 응수해주십니다(14). 하나님께서 시온에 거주하기로 작정하신 이유는 다윗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함이 아니라, 그가 친히 시온을 간절히 원하셨고(14)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시 78:68). 시온은 11-12절의 다윗의 언약과도 관련 있습니다. 언약을 통해 하나님의 성전이 시온이 위치해 있는 예루살렘에 건축되었기 때문입니다(대하 3:1). 시온에서 하나님과 함께하므로 그의 축복이 백성(15-16)과 왕(17-18)에게 약속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에게 물질적으로나(15) 영적으로(16) 넘치게 축복하실 것입니다. 시온에 풍족한 식량과 물질을 공급하여, 가난한 자들을 만족하게 하실 것입니다(15). 16절은 9절에 대한 회답입니다. 9절에서 다윗과 무리는 하나님의 제사상들이 의로 옷 입고, 그의 성도들이 환호하기를 기원했습니다. 이제 16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시온의 제사장들에게 구원으로 옷을 입힐 것이며, 시온의 성도들이 크게 환호할 것임을 선포하십니다. 이로써 9절의 이스라엘 공동체의 기원은 16절에서 하나님의 응답을 약속받습니다.

내용 면에서, 9절의 기원과 16절의 응답의 내용에는 몇 가지 다른 점이 나타나 의미를 극대화합니다. 첫째, 9절에서 이스라엘 무리는 제사장들과 성도들이 하나님께 속한 자들임을 강조했습니다. 16절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그가 택한 시온에 속한 자들임을 언급하심으로써 그들이 하나님께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거주하며 그의 임재를 누리는 자들임을 부각합니다. 둘째, 9절에서는 제사장들이 공의를 행하도록 기원하는데, 16절에서는 하나님이 그런 제사장들에게 구원으로 화답하실 것을 보여줍니다. 셋째, 9절에서는 성도들이 즐겁게 외치기(환호하기)를 기원하며, 16절에서 하나님은 그들이 ‘아주’ 즐겁게 외칠 것이라고 선언하심으로써 그들의 기쁨이 한층 더할 것을 예고하십니다. 백성에 대한 축복은 다윗 왕과 후손을 향한 축복으로 이어집니다(17-18).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뿔이 돋게 하실 것입니다. 다윗에게 뿔이 돋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능력이 다윗 왕과 그의 왕권에 나타날 것을 암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10절의 무리의 기도에 응수하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해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을 외면하지 마시기를 간구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위해 등을 준비했다고 답하십니다. 등(불)은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 생명 등을 뜻합니다(욥 21:17; 29:3; 시 119:105).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은 언약을 신실히 지키실 터이므로 다윗 왕조와 그의 왕국은 언제나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누릴 것입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는 성도는 거룩한 말씀을 따라 거룩한 산 제사의 삶을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또한 주님의 재림으로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기까지 하나님 나라의 군사로 악한 영적 세력과 싸워 승리하여야 합니다. 왕같은 제사장으로서 그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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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130-131)


겸손한 회개와 신뢰의 길

시편 130-131편


죄를 짓는 것도 죄에 빠지는 것도 인간이고, 회개를 시작하는 것도 서둘러 회개를 마무리 짓는 것도 인간입니다. 용서의 때, 소망의 때는 하나님이 정하시고 주관하십니다. 죄의 잠을 지나 인자한 아침을 주실 때까지 자비를 구하고 하나님 뒷전에 겸손히 물러나 있어야 합니다

 

 

  •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들으시며, 죄를 회개하는 자에게 용서를 베푸는 분이십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포함하여 이스라엘 공동체의 모든 죄를 속량함으로써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기를 간구합니다(130편). 시인은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신뢰하여 평안하다고 고백합니다. 시인과 마찬가지로, 각 성도의 하나님을 향한 신뢰는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속되어야 합니다(131편).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과 소망(130:1-8)

이스라엘 백성들 전제가 하나님을 바라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신 분이시기에 하나님의 언약의 사랑은 영원하고,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기에 실수와 실패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우리를 세우시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하기에 하나님의 속량하심(대가를 주고 사다)도 풍성합니다. 풍성한 속량의 극치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1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2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3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4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5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6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7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

8그가 이스라엘을 그의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시리로다(1-8)

 

시편 130편은 죄에 대한 회개와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내용입니다. 시인은 깊은 절망 속에서 하나님께 자비를 구하며, 용서받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심으로 인간은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시인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을 신뢰하고, 풍성한 구원을 기다리라고 권면합니다.

 

(1) 깊은 곳에서 부르짖는 시인(1-2)

 

시편 130편은 시인의 깊은 탄식과 탄원으로 시작합니다. 그는 ‘깊은 곳에서부터’ 하나님께 부르짖었다고 말합니다. ‘깊은 곳’이란 단어는 바다의 깊은 곳이나 맨 밑바닥을 가리키므로, 하나님께서 계신 하늘에서 가장 먼 곳입니다. 이 단어는 구약에서 본 시의 예를 포함하여 다섯 번 나옵니다. 시편 69편에서도 시안은 자기가 설 수도 없는 깊은 수렁과 깊은 물(문자적으로 ‘깊음’의 물)에 들어갔다고 탄식합니다(시 69:1-2). 이와 같이 ‘깊은 곳’은 문자적으로 수렁이나 바다 깊은 속이나 바닥을 가리키고, 비유적으로는 빠져서 헤쳐 나올 수 없는 상황을 가리킵니다. 130:1의 시인이 깊은 곳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다는 말은 그가 죽음의 위기에 처하고 고통과 절망 속에 있어 하나님의 도움 외에는 누구의 도움도 바랄 수 없는 상황임을 함축하며,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만 신뢰하고 그의 구조만을 바랐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2절의 내용은 시인이 아직 하나님에게서 어떤 응답도, 도움도 받지 못했음을 보여줍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를 듣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소리에 귀를 주의 깊게 기울여 기도에 응답하시기를 간절히 구합니다. 여기서 ‘부르짖는 소리’는 ‘은혜나 자비를 구하는 간청’이란 뜻입니다.

 

(2)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3-4)

 

시인이 현재 하나님께 간구하는 이유는 ‘죄’와 관련이 있으며, 이에 그가 하나님께 바라는 것은 죄의 용서입니다. 130편에서는 죄와 관련하여 ‘죄악들’(3)이 언급되나 ‘나의’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인이 1절에서 그가 절망(깊은 곳에서)에 빠졌음을 표현했고, 2절에서 은혜와 자비를 구하는 간청(나의 부르짖는 소리)을 언급했으며, 7-8절에서 이스라엘 공동체의 죄악에서 하나님께서 속량하시기를 바라는 점을 고려할 때, 3-4절의 ‘죄악’은 시인의 죄를 가리키며, 동시에 공동체의 죄를 암시합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여호와’와 ‘주’(아도나이)로 부르며 죄와 하나님의 용서에 대해 세 가지를 언급합니다. 첫째, 사람의 죄악은 하나님의 살피심 앞에 가려질 수 없습니다. 사람은 때로 ‘내가 죄를 지어도 하나님께서 침묵하신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 죄를 모르지 않으시며 그 죄를 낱낱이 드러내실 것입니다(시 50:21). 둘째, 죄인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사람의 죄는 어떤 죄든지 근본적으로 모두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업신여긴 행동입니다(삼하 12:9-10).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으로서 그의 말씀을 지켜 거룩한 백성이 될 의무를 갖고 있으므로(출 19:6), 이를 어겼을 때는 심판을 비껴갈 수 없습니다(출 28:15-68; 욥 10:14). 셋째, 죄를 사유하는 권한은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단 9:9). 하나님의 죄 사함에는 그의 긍휼과 은혜와 풍부한 인자하심이 함축되었습니다(출 34:6; 사 55:7).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자를 기꺼이 용서하십니다(시 86:5). 시인은 죄인들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그를 다시 경외하기를 원하신다고 말하는데(4), 여기서 하나님 경외는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암시합니다.

 

(3) 하나님을 기다리는 시인(5-6)

 

죄 용서를 빈 시인은 하나님과 말씀만을 기다리며 바랍니다(5). ‘기다리다’와 ‘바라다’라는 동사의 의미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응답을 열망한다는 뜻입니다. 시인이 기다리는 ‘하나님과 그의 말씀’은 그의 자비와 용서, 인자하심(2,8)을 암시하며, 시인의 하나님 경외(4)와도 연결됩니다. 시인은 자신이 하나님을 기다리는 심정을 파수꾼에 비교합니다. 잠을 쫓아내며 밤을 지새워 보초를 서는 파수꾼이 속히 아침이 되어 평안히 귀가하기만을 바라는 것보다, 시인이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고대하는 마음이 더 간절합니다(6). 시인의 간절함에는 하나님의 용서의 응답에 대한 확신이 함축되었습니다.

 

(4) 이스라엘을 모든 죄에서 속량하시는 여호와(7-8)

 

시인은 이제 이스라엘 공동체를 초청하여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외칩니다. 시인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도 함께 여호와의 자비와 용서를 바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기 때문입니다(7). ‘속량하다’라는 동사는 ‘대속하다’, ‘구속하다’의 뜻으로, 값이나 대가를 지불하고 목숨을 구해주는 것을 뜻합니다(출 13:13; 레 19:20; 삼하 7:23;시 71:23). 오늘 시인과 이스라엘 공동체는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구속의 능력으로 그들을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실 것을 확신하고 고대합니다(8).

 

하나님 안에서의 참된 만족(131:1-3)

마음이 교만하지 않는 것, 눈이 오만하지 않는 것, 감당하지 못할 일과 놀라운 일을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곧 자신이 자신의 인생의 주관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인생의 통치자가 되심을 인정하고 믿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그의 인생이 하나님의 품 안에 있는 것과 같아서 어디에 있든지 그 곳이 하나님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1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2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3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1-3)

 

시편 131편은 다윗의 겸손과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노래합니다. 그는 교만하거나 거만하지 않으며, 이해할 수 없는 큰 일에 대해서도 마음을 높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린아이처럼 하나님께 안식을 찾고, 평온함을 유지합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이 영원히 하나님을 신뢰할 것을 권면합니다.

 

(1)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려는 시인(1)

 

시인은 하나님께 자신이 교만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겸손하게 살 것을 고백합니다. 구체적으로, 교만한 마음, 높은 눈, 큰 일, 놀라운 일을 언급하며, 자신은 이것들과 연관이 없고 이런 일에 힘쓰거나 끼어들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설명은 시인의 내적 태도와 외적 행동을 통한 겸손함을 보여줍니다. 한편, ‘큰일’이나 ‘놀라운 일’은 하나님의 기적과 이사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표현들이므로(수 3:5; 욥 37:14; 시 72:18), 이런 일을 시인이 넘보지 않는다는 말은 그가 자신의 한계와 약함을 알고 인정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1절의 고백 모두는 그가 앞으로도 이런 태도와 삶의 양식을 지속할 것을 다짐하는 의지를 나타냅니다.

 

(2) 젖 뗀 아이와 같이 평온한 시인(2)

 

시인은 이제 자신이 마치 젖 뗀 아이가 어머니 품 안에 있듯 고요하고 평안하다고 말합니다. 젖을 떼기 전의 아이가 젖을 더 달라고 떼를 쓰는 상태의 아이를 가리킨다면, 젖을 뗀 아이는 만족하여 기쁨을 찾은 상태의 아이를 뜻합니다. 이 젖 뗀 아이가 엄마의 품에 있을 때 안전함과 사랑을 차분히 즐길 수 있듯이, 시인의 영혼도 이 아이처럼 내면과 외면의 깊은 평안과 안정을 누립니다. 젖 뗀 아이의 평안함은 육체적이고 정서적인 부분을 강조하는 반면, 시인의 평안함은 영적, 질적인 부분을 강조합니다고 볼 수 있습니다.

 

(3)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라라(3)

 

하나님 앞에서 평안을 누리고 있는 시인은 이스라엘 공동체를 향하여 그들에게 여호와를 지금부터 영원까지 신뢰하라고 권면합니다. 이로써 1-2절의 시인의 고백은 하나님을 바라며 신뢰함을 바탕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3절의 ‘여호와를 바랄지어다’라는 권면은 바로 앞 130:7에서도 나왔습니다. 시편 130편에서는 하나님의 인자와 그가 베푼 수없는 속량을 바탕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모든 죄악에서 건지시기를 기원하면서 이스라엘에게 이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권면합니다. 본 시편 131편에서는 하나님 백성의 거룩한 삶을 바탕으로, 교만하지 말 것을 당부하며, 젖을 떼고 만족하고 평안한 아이처럼 하나님을 바랄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영원까지’라는 어구는 앞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보호를 찬양하는 시편 121편과 125편과도 연결됩니다. 두 시편에서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지키시는 일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변함없이 계속하실 것임을 선포했습니다. 오늘 131편은 이스라엘도 이 하나님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신뢰함으로써 그의 영원한 보호하심에 응수하기를 권면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깨닫는 자는 기도하지 않을 수 없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떤 분인지 아는 자는 겸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야 용서도 응답도 소망도 찾아옵니다. 어설픈 회개로 때우지 말고 진정성 있는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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